열한 살, 서울에서 춘천으로 전학 가고 얼마 후 얼떨결에 반장이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나를 ‘서울에서 온 애’라고 부르며 특별하게 보았다. 내향적이었던 나는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집에서 큰 소리로 “차렷, 경례!”를 연습했다.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에는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반장이 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나는 반장 말고 평범한 ‘37번 학생’이 되고 싶었다.
부반장 승훈이의 어머니는 자주 학교로 아이스크림이나 피자 같은 간식을 보냈다. 체육대회나 학부모회에도 적극적이었다. 선생님은 간식을 앞에 두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부반장 어머니가 보내주신 거야. 승훈이에게 고맙다고 하고 먹어.” 친구들은 “우와 부반장 최고!”라며 신나게 간식을 먹었다. 나도 앞에 놓인 음식을 맛있게 먹었지만 그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내 학교생활에 관심 가질 여력이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의 권력이 부모의 ‘관심력’과 ‘간식력’으로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은 열한 살의 나도 알 수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보며 말했다. “휴, 승은아. 넌 어쩌다 반장이 되어서.”
열다섯 살, 내 친구의 옷을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 옆 반 아이에게 “그거 얼른 돌려주면 좋겠어. 그 옷 친구 언니 건데, 네가 안 돌려줘서 친구가 곤란해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날 오후 그 아이는 나를 화장실로 불러서 앞으로 조심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때 한 친구가 알려줬다. “야, 너 큰일날 뻔했어. 쟤 유명한 일진이잖아. 쟤가 너 모범생처럼 보여서 건드리면 너희 엄마가 난리 칠까 봐 안 건드렸대. 앞으로 진짜 조심해. 알았지?”
그때 나는 안심했고, 내 뒤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나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줬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부모님은 이혼한 상태였고 우리 집에는 엄마가 없었는데, 부모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 부모가 보호하는 자식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나를 보호한 거였다. 열한 살 때 반장을 맡았을 때의 경험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살면서 나를 둘러싼 배경을 떠올린다. 학교에서는 외모와 성적, 학부모의 입김이 큰 작용을 했고, 학교 밖에서는 학력과 다닌 학교의 이름이 나를 감싼다. 그 배경에는 지금의 직업과 그에 가늠되는 연봉이 추가되고, 성별과 성적 지향, 인종, 지역, 나이, 장애 유무와 건강상태도 겹겹이 연결되어 나를 설명한다. 부모의 계급이나 ‘정상성’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껌처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된 배경들
그래서 글을 쓰거나 말할 때, 부모의 이혼 사실을 굳이 밝히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나 보다. 정신과에 다니며 꼬박꼬박 우울증 약을 먹는 사실을, 월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전문대를 나온 학력을 숨기라고 들었나 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여성스럽게’ 말하지 말고, 덜 웃으라는 조언을 들었나 보다. 한 유명한 여성 작가가 말했다. “당신의 말에 신뢰를 받고 싶나요? 그럼 여성스럽게 보이지 마세요.”
언젠가 직장에 다니는 동료가 말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 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제가 20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곤 해요. 회의 때도 제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게 티가 나요. 그러면 저는 회사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 일부러 유창하게 영어 원서를 읽거나 제가 나온 대학 정보를 슬쩍 흘리곤 해요. 그걸 들으면 사람들이 무시를 안 해요. 씁쓸한데, 그렇게라도 해야 제 발언에 힘이 실리는 거예요. 근데 결국 이것도 제가 차별받지 않으려고, 다른 위계를 이용하는 거잖아요. 원어민 같은 발음, 학벌 같은 거로요. 그래서 자주 혼란스러워요. 참 웃기죠?”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 입힌 ‘저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입니다’라는 티셔츠를 볼 때, 가정의 달에는 부모에게 안마의자나 보일러를 꼭 선물하라며 화목한 중산층 가정을 ‘연출’하는 모습을 볼 때. 이런 일상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쓴웃음이 났다.
나와 한 몸이 된 배경들. 선택하거나 선택할 수 없던 배경들을 떠올린다. 껌처럼 뗄 수 없는 그것들을 안고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신뢰하고 신뢰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촘촘하게 엮인 차별을 피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익숙해진 회의감이 올라올 때면, 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자영을 떠올린다. 입사 8년 차 자영과 동료들은 회사에서 신분제의 상징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고졸 여사원에게만 입히는 낙인이다. 유니폼을 입으면 아무리 오래 일해도 커피 타는 기술 외에 다른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우연히 기업의 비리를 알게 된 자영과 동료들은 망설인다. 내가,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익숙하게 몸을 낮추던 자영의 마음을 바꾼 건, 자신이 몸담은 회사 때문에 생명까지 위태로워진 시골 마을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우연히 들른 대학에서 본 대자보 때문이었다. ‘저항하자’는 목소리가 담긴 글 앞에서 자영은 주먹을 꽉 쥔다. 자기가 경험한 차별과 다른 이가 경험하는 차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기억하며 끝까지 저항한다. 자영은 자기처럼 작은 존재들, 소외된 ‘개미’들과 힘을 모은다. 그들과 거미줄처럼 연대해서 부정한 권력을 내려 앉히고, 변화를 만든다. 자영의 이야기를 보며 거대한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법에 대해 생각했다.
오랫동안 차별에 노출되면 우는 법을 잊어버린다.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기보다 자책에 익숙해진다. 그럴 만하다고, 세상은 원래 이 모양이라고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기 경험을 차별이라고 표현하는 누군가의 울먹임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목소리로 들린다. 고용 성차별을 고발하고,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하고, 퀴어문화축제에서 함께 춤추고, 혈연과 혼인 중심의 가족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 일상에서 마주하는 긴장감과 부대낌이 단지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들. 익숙하게 몸을 웅크리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고 주먹을 꽉 쥐는 이들. 각종 잣대로 존엄의 기준을 구분하는 이 사회에서 누구도 차별을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차별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알고 연대하는 이들.
그들 곁에 개미처럼 서기 위해 핸드폰 화면 속 작은 창에서 청원 동의를 클릭했다. 5월24일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회 국민동의청원(bit.ly/equality100000)이다. 하루 만에 2만명이, 닷새 만에 5만여 명이 참여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차별의 연쇄를 직면하고, 평등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다. 청원 참여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나는 상상했다. 나중으로 밀리거나 환상으로 여겨진 세계를 지금 당장 살아갈 우리의 모습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웅크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살아갈 지금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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