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사라진 서울을 걷다〉(페이퍼로드, 2021)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건축은 한 사회의 요구와 경제적 가치를 실현하는 공간을 만들지만 거꾸로 건축은 인간의 행위를 만들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도시의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과 농촌의 풍경 속에서 자란 사람의 기질이 다른 것처럼, 한옥에 사는 사람과 아파트에서 자란 사람의 정서는 같은 도시 안에서도 다를 수 있다. 모든 공간은 그 공간에 걸맞은 꿈을 꾸게 만든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어떤 건축을 누리고,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왔을까.

조현정이 쓴 〈전후 일본 건축〉(마티, 2021)의 부제는 ‘패전과 고도성장, 버블과 재난에 일본 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다. 이 부제는 건축이 사회와 경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물체 또는 유기체라고 가르쳐준다. 일제가 패망한 1945년 이후, 일본의 건축은 전전과 차별된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드러내는 국가적 과업의 일부를 떠맡았다. 전후 건축은 배타적 민족주의·국수주의·패권주의와 차별화된 보편적인 휴머니즘, 민주주의, 평화에 대한 전후 사회의 열망을 보여주어야 했다.

뭇 전문 분야가 그러하듯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 역시 항복 선언과 같은 급작스러운 국가적 변란에 타격을 입지 않는다. 훗날 ‘일본 건축계의 덴노(天皇)’라고 불리게 된 단게 겐조(1913~2005)가 그랬다. 1941년부터 군국주의 정부가 공모한 각종 공모전에 잇달아 입선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했던 그는 모더니즘 공법과 재료로 지어진 건물에 일본 신사(神社)의 지붕 장식을 올리는 방식의 제관양식(帝冠樣式)을 완성했다. 그가 건축계에 입성하던 때는 일본이 영미와 본격적인 전쟁 국면에 접어들면서 서구 모더니즘 양식은 비일본적이고 반애국적이라고 저평가되던 시기다. “건축가는 대동아 공영권의 주춧돌이 될 위대하고 숙명적인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는 일본의 새로운 건축양식을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국수주의적 사고가 팽배할 때, 제관양식은 건축 분야에서 이룩된 근대 초극의 성과였다.

단게 겐조가 군국주의 정권에 협력했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씻어낼 계기는 히로시마로부터 왔다. 그는 1949년 미군정이 실시한 히로시마 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설계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국가 건축가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히로시마를 평화의 성지로 재건축하려는 계획은 미·일 양국의 이해관계에 절묘하게 부합했다. 미국은 이 계획을 통해 원폭을 투하한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가해자에서 원폭의 피해자로 탈바꿈함으로써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효과를 얻고자 했다.

평화공원 설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전쟁 시기에 억압되었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의 전격적인 귀환이다. 평화공원을 대표하는 얼굴에 해당하는 평화기념관·전시관·국제회의장은 평평한 지붕에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배제했다. 이는 고교 시절부터 르코르뷔지에를 동경했던 데다가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인 마에카와 구니오의 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던 단게 겐조로서는 전혀 낯선 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찍부터 르코르뷔지에 건축에 심취해 있었던 그가 일본적인 것을 내세워 제관양식을 추구했던 짧은 시기가 그의 이력 전반에서 예외적인 시기였다. 이런 사실은 건축이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한계 짓는다.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 국가는 여전히 건축을 지도하는 대타자였다.

박정현의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워크룸프레스, 2020) 또한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이라는 부제에 이 책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 연표는 1945년 8월15일부터 시작되지만, 지은이는 한국 현대 건축의 기점을 1960년대 초로 본다. 건축(architecture)과 토목(civil engineering)에 대한 정의는 이미 확정되어 있지만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 ‘작가라는 자의식’이 보증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건축을 해봐야 토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건축가는 작가’라는 추인은 한국 현대 건축의 외부와 내부에서 마련되어야 했다.

권력·자본과 건축의 내밀한 관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년이 지난 1949년, 문교부가 주관하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가 신설되었다. 5개 분야(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서예)로 나뉘어 공모와 전시가 이루어진 제1회부터 제3회까지 건축은 국전에 초대받지 못했다. 제4회부터인 1955년부터 건축과 사진이 국전에 포함되었으나, 건축부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처음으로 수상하게 된 것은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6개월 뒤에 개최된 1961년 제10회 국전에서였다. 건축부는 그해에 이어 1962년과 1963년에도 연거푸 대상을 차지했다.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실질적인 국가 통치기관이던 시절,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와 군부 정권은 이를 통해 ‘재건’의 적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건축계는 예술가라는 제도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국전에서 건축부가 다시 대통령상을 수상한 때는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과 1973년이다. 국가 재건설이라는 상징 정치에 또다시 건축이 불려나온 것이다.

국전이 건축에 타 예술 장르와 동등한 위상을 부여한 외적 추인이었다면, 건축 내부에서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언어로 된 지식을 축적하고 비평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1966년 11월에 창간된 건축 전문지 〈공간〉이 그 역할을 했다. 〈공간〉은 일본 유학파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창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창간호 판권에 나온 발행자는 퇴역 육군 중령 석정선이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시에는 박정희 소장의 상황장교를 지냈던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 창설에 관여하여 제2차장을 지냈다. 〈공간〉과 석정선의 관계, 〈공간〉과 국가 기획의 전모는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할 사항이다.

국전과 〈공간〉지의 내력은 박정희 정권 18년과 일치하는 한국의 개발주의 시기에 국가와 건축가가 서로 필요해 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밀월 관계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고대의 피라미드에서부터 히틀러가 꿈꾸었던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베를린)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건축은 한 번도 사이가 틀어진 적이 없다. 한국의 경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정점으로 국가 권력과 건축의 내밀한 관계에 금이 가고 국가의 자리에 자본이 대신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더욱 밀착된 것은 국가와 자본이고, 그 사이에 건축이라는 유토피아는 아무것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부유하는 기표가 되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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