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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희미해지는 이 얼굴을 꼭 기억해주세요

김유태 기자
입력 : 
2021-02-26 16:53:57
수정 : 
2021-02-27 11: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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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세계 곳곳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후손 찾아 떠나는
김동우 다큐 사진작가


폐허만 남은
해외 독립운동 현장

오늘도 기억하고
기록하고 사진찍죠
사진설명
김동우 작가가 쿠바 카르데나스에서 찍은 독립운동가 이윤상 선생의 딸 레오나르 이 박의 사진. 김 작가는 희미해져가는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기리려 피사체를 흐릿하게 찍었다. 이윤상 선생은 1910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사진 제공 = 김동우 작가]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로 나와 150m쯤 걸으면 성인 키만 한 머릿돌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독립선언서 배부(配付)터.' 기미독립선언서 배부는 이 표지석 뒤로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 덕분에 가능했다. 1921년 완공돼 올해 100주년을 맞은 천도교 총본산 중앙대교당 건물이다. 당시 인근 보성사에서 찍어낸 독립선언서를 몰래 보관했다가 종교계와 학생 대표들에게 뿌려 뜨거운 만세운동을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김동우 사진작가(43)는 '독립운동사의 랜드마크'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두고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독립운동 사적지는 거의 없다. 정말 독립운동사의 보물 같은 장소"라고 소개한다.

김 작가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와 후손들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유일무이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러시아 스보보드니 독립군 매장 터,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소,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훈련지, 멕시코 메리다 초촐라 애니깽 농장 등 망국의 현장만을 골라 다녔고 발로 뛴 독립운동 사적지 수는 10개국, 250곳을 넘는다. "살던 집까지 팔아 경비로 쏟아부어도 후회는 없었다"며 웃는 김 작가를 3·1절을 며칠 앞두고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에서 만났다.

사진설명
―직장까지 관두고 사적지를 찾으셨다죠. ▷독립운동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어요. 그간 세계 일주를 다녀왔고 다녀온 국가는 60개국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 결정적 계기가 있었어요. 2017년이었습니다. 그 즉시 '이 프로젝트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우린 일제강점기를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하잖아요. 스스로를 너무 낮춰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어요.

―'결정적 계기'의 장소가 인도 유적지 '레드 포트(Red Fort)'라고 들었습니다. ▷네. 인도 마날리란 지역을 여행 중이었습니다. 불현듯 친분이 두터운 PD님이 "홍범도 장군 묘역이 카자흐스탄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났어요. 마날리에서 정말 갑자기 말이죠. '잠깐, 그럼 인도엔 뭐가 있지' 싶어 찾아봤더니 레드 포트가 광복군 훈련지로 나오는 거예요. 레드 포트는 인도 무굴제국의 왕도 건축물입니다. 흔히 독립운동의 사적지라고 하면 상하이나 만주, 미주만 생각하는데 광복군이 인도까지 왔었다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마날리에서 라다크로, 다시 델리로 진입해 레드 포트에 갔고 현장을 카메라로 담았습니다. 세계 일주 사진과 달리 느낌이 전혀 달랐어요. 여정 중에 계속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국외 독립운동사의 지역을 담아낸 분은 많은데, 하나의 궤로 엮어 본 사진작가는 없었어요. 과연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결론은 이랬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적지에 가서 그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이를 기록하는 건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터닝 포인트였군요. ▷쥐고 있는 걸 내려놓고 저지른다고 해도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분명했어요.

―가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전 세계에 보석처럼 박혀 등불이 된 현장이요. 독립의 정신이 흐르지만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현장이기도 하고요.

―어느 장소가 특히 먹먹하셨나요. ▷하바롭스크에서 열차를 타고 가면 스보보드니가 나옵니다. 우리말로 자유시(市)로 번역돼죠. 올해는 '자유시 참변' 100주년입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있었고 독립군은 자유시로 집결합니다. 그런데 군권 경쟁으로 와해돼요. 볼셰비키를 등에 업은 파가 무장해제를 시도하다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참변 장소는 급수탑 근처인데 그 뒤가 제야강(江)이에요. 같은 독립군이니 차마 총질을 못하고 제야강에 몸을 던져 익사한 분들의 최후 장소입니다. 물탑 옆에서 너무 먹먹했어요. 뛰어내릴 때 심정은 어땠을까 싶어서요.

―폐허이거나 추모비조차 없는 곳이 많겠지요. ▷한인 비행사 양성소였던 미국 윌로스 비행장이 특히 그래요. 당시 쌀농사로 미국에서 거상이 된 김종림 선생이 공군 양성을 위해 거액의 지원금을 냈습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비행기가 5대, 최신 기종은 1대 보유했다고 해요. 독립군 비행사라는 건 사실 산화돼 이름만 남기게 될 운명인 거잖아요. 그분들의 땀과 열정이 서린 곳인데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아니고 미국인데 여태까지 정부가 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답답했어요. 저의 여정은 이름 잃은 분들을 향한 추모이기도 해요.

―한 세기가 지난 현장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엉덩이가 아니라 발로 써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제가 있어야 할 곳은 현장이죠. 기억하게 하고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제 역할인데 사진은 그 촉매제예요. 또 100년 뒤인 지금의 모습을 담아야 200년이 흐른 뒤에도 기억할 수 있다고 믿어요.

사진설명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250곳을 카메라로 기록한 김동우 사진작가를 만났다. 1921년 완공돼 올해 100주년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일제강점기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서울시내 3대 건축물로 꼽혔다. 대교당 건축을 명분으로 기금을 모아 일제 몰래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한 독립운동사 성지이기도 하다. [한주형 기자]
―사진 작업은 힘드신 부분이 많겠지요. ▷집요한 시선으로 100년 전의 감정을 잡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출발 전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공부하고 지도를 펴 샅샅이 살피지만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글로 쓴다면 스토리를 담아내겠는데 저는 사진 한 장으로 얘기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현장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게 맞아' 하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육체 아닌 정신의 고통이군요. ▷사적지와 후손 분들 모습을 남기러 가는데 가보면 기쁜 내용이란 게 없으니까요. 편찮으신데 봐줄 분도 없거나 이미 삶을 스스로 등지셨거나 행방불명된 분들이니까요. 여정 자체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마음이 힘들어 중간에 그만두려고 했어요. '안 되겠다. 이제 여기까지만 하자.' 그런데 다음날 다음 장소로 가고 있어요. 전날 여정이 이상하게 힘을 줬거든요.

―작가님의 대표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가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책을 보니 특이하게도 후손 분들 사진을 흐릿하게 찍으셨어요. 배경은 또렷한데 피사체인 사람은 반투명이었습니다. 이유가 궁금해요. ▷배낭 하나 메고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까 렌즈도 몇 개 못 가져가잖아요. 최소한의 장비로 그곳을, 그분을 표현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어요. 처음 만난 후손 분은 멕시코시티에 거주하시는 김익주 선생의 손자 다빗 킴 님이었는데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이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했어요. 카메라 하나 덜렁 들고 가 사진을 찍는 건 다큐멘터리로선 무의미하다고 봤어요. 고심 끝에 고국의 한국인들 머릿속에서 흐릿해지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려 했어요. 동시에 더는 흐릿해지면 안 된다는 메시지도 담으려 했고요.

―사진이 합성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12초 이상 장노출하면서 피사체를 촬영 중간에 화면 밖으로 나오도록 하면 투명도가 달라져요. 진한 상과 흐릿한 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저의 방식이었어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증손녀 타트리야나 박,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 쿠바 아바나에서 임천택 선생의 아들 세르히오 임 김 등 후손 분을 같은 방식으로 담았어요. 합성으로 하면 쉽죠. 그러나 실제로 찍은 사진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봤어요.

―후손분들이 고령이어서 어려움이 있었겠어요. ▷많은 촬영 횟수를 요청드리는 건 안 될 일이잖아요. 반드시 세 컷 안에 끝낸다는 각오로 혼자 숙소에서 연습을 엄청 했죠(웃음).

―긴 여정은 어떤 부채감 때문이었을까요. ▷국외에 잠들어 기억도 못하는 애국지사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해외에 가면 관광지만 다녀오지, 바로 숙소 옆에 독립운동가 선생들 묘역이 있다는 걸 찾아보기나 하나요. 부채감도 사람들이 알아야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로선 갈 때마다 늦게 가서 죄송한 마음이에요. 코로나19가 사라져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관광지뿐만 아니라 인근 사적지를 찾아보길 권해요.

―코로나19로 작년과 올해 일정을 연기하셨죠. ▷만주와 쿠바를 갈 예정이었어요. 코로나19로 미뤄졌는데 아마 내년 초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올해는 특히 쿠바 이민 100주년이어서 후손 분들을 기록하려 했습니다.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요. 장기적으로는 남태평양에 징용으로 끌려가신 분들까지도 찾아뵐 겁니다.

―인생을 건 긴 여정입니다. ▷네. 긴 여정이죠. 하지만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가보면 그곳엔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가야 한다는 걸 알아요. 지금까지 독립운동 자금 대주듯 십시일반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후원해주셔서 수십 명 분들께 비행기값 정도 모았어요.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는 저밖에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도움을 주는 분들 덕분에 용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책도 탈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집에서는 사진 위주였는데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를 글로 써보려 했어요. 사진작가로서의 고민, 현장에서의 고민, 역사적 팩트, 여정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했습니다. 일단 인도·멕시코·쿠바·미국을 한 권으로 엮을 예정이에요. 6월께 출간되는데 많이 읽어주세요.

―에피소드 하나만 귀띔해주세요. ▷멕시코 살리나크루스 해변은 1905년 한인 1033명이 태평양을 건너 발을 처음 디딘 해변이에요.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점인데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죠. 그런데 우연하게도 태권도장이 있어요. 한인과 무관한 멕시코인 사범이 운영하고요. 한인이 그곳에 흔적을 남긴 거죠. 사진집에는 남기지 못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글에 담길 거예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기억과 기록이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원하시나요. ▷멕시코의 경우 이제 '이민 7세대'까지 갔어요.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 겉모습에서 한인 모습을 찾아내긴 힘듭니다. 그런데 제가 가보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을 추억하는 방식은 똑같았습니다. 바로 '맛'이었어요. 후손 분들이 하나같이 제게 물어본 공통 질문이 있어요. '자네, 오래 여행을 다녔는데 김치 먹고 싶지 않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후손 분들 전부 김치를 담가드세요. 한 번은 인터뷰 중에 김치를 입에 넣어주시기에 우물우물 씹는데, 울컥하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언어보다 질기고, 기억보다 또렷하다.' 기억과 기록이란 게 그런 거 같아요. 대물림돼야만 하는 것.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요.

▶▶He is…

다큐멘터리 사진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여행에 마음을 빼앗겨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60개국을 떠돌았다.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0개국 소재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 250곳을 직접 발로 걷고 뛰며 카메라로 기록해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독립운동 사적지와 그곳에 사는 후손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EBS '세계테마기행'에 2회 출연한 이름 있는 세계여행가이기도 하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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