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쓴 지가 1년이나 된 것을 지금 다시 펴놓고 읽어 보니 참 괴한 곳이 적지 않고 많습니다. 터 잡히지 못한 어린 도향(稻香)의 내면적 변화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미숙한 실과와 같이 나날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내놓기가 부끄러울 만치 푸른 기운이 돌고 풋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완숙한 것으로 만 족한 웃음을 웃는 것이 아니라 미숙한 작품인 것을 안다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려 합니다. 푸른 기운이 돌고 싱긋한 풋냄새가 도는 곳으로 도리어 성과의 예감을 깨달을 뿐입니다. 장래에 닥쳐올 희망의 유열(愉悅)로 나의 심정을 독려시키려 하나이다.

이 글을 쓸 때 전적 자애를 부어 주시던 우리 외조모님의 세상에 계시지 않는 그리운 면영(面影)을 외로운 도향의 심상(心床) 위에 그리면서 안타까운 옛추억으로 떨어져 식어버리는 추억의 눈물을 흘리나이다.

🙝 🙟

「어머니.」

하고 금방울을 울리는 듯한 혜숙(惠淑)의 귀여운 목소리가 저녁 연기 자욱하게 오르는 동대문 밖 창신동 어떠한 조그 맣게 지은 초가집에서 난다.

「왜!」하고 대답하는 그의 어머니는 매운 연기로 인하여 눈을 반쯤 감으며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을 짚고 고개를 기웃 하며 바깥 문을 향하여 내다보면서 「오늘은 다른 날보다 어째 좀 이르구나」 한다.

「네. 오늘은 선생님 한 분이 오시지를 않아서 한 시간 일 찍 하학하였지요」하고 혜숙은 방으로 들어가 치마를 벗어 횃대에 걸고 때가 묻은 다른 치마를 갈아입고 부엌 앞으로 나오며 다시 자기 어머니에게 향하여, 「오라비는 어데 가 셨어요?」하고 묻는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

「글쎄, 알 수 없다. 어데를 갔는지, 날마다 나갔다가는 늦 게야 돌아오니까」하며 무슨 미안하고도 걱정되는 생각이 나는지 타는 아궁이의 불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어머니라는 분은 사십 오륙 세가 될락말락한 여자로 아직까지도 그의 반지르르하게 가꿔 온 머리털이라든지, 그 의 두 뺨이 문지르고 또 문지른 연감이 조금 시들은 것과 같이 윤이 나고도 잠시 혈색이 퇴한 것을 보아서든지, 또 그 두 눈 가장자리로 도는 아지랑이같이 미소하는 듯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또는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무 엇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서든지, 그리 탐스럽게 잘생기었 거나 그리 아기자기하게 어여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떻든 젊어서는 말할 수 없는 무슨 매력을 가지고 젊은이의 따뜻 한 사랑을 다투었을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 흔적이 여 태껏 남아 있다.

혜숙은 어린 얼굴에도 근심하는 빛을 띠고 「어데를 가셨 을까요!」하고, 혼잣말을 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문간을 바라보며 쫑구리고 섰다.

「글쎄, 낸들 알 수 있니, 어데를 갔는지……」하고, 그의 어머니가 대답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까지 젊었을 때의 습관이 남아 있는지 뽀얗게 분세수를 한 얼굴을 잠깐 찌푸리고 한편 입술을 반 쯤 열며 말을 할 때마다 번쩍하고 번쩍거리는 금니가 나타 나 보인다. 그의 얇은 쇠퇴하기는 쇠퇴하였으나 아직까지 연붉은 빛이 남아 있는 입술을 애교있게 벌릴 때마다 어린 혜숙의 가슴에도 아지 못하게 무슨 성욕에 대한 감정이 그 의 혈관 속으로 흘렀다.

「오늘은 또 큰집 가서 무슨 짓을 하셨을까요? 참 생각하 면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하여서 못 견디겠어요. 아버지께서 그러시는 것을 그대로 듣고만 있으면 그만일 걸 그렇게 날 마다 약주만 잡숫고 야단을 치시면 도리어 아버지의 성품만 거슬리는 것이 되지요.

암만 그러지 말래도 자꾸 그러시는 것을 어찌할 수도 없 고, 참 딱해……」

하고 채 뒷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바깥문에서 무슨 소리 가 나는 듯하니까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는 아무 도 있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솥뚜겅을 열어 거품이 푸 하게 일어나는 짓 던 밥을 들여다보고 다시 뚜껑을 덮으며,

「글쎄말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날마다 하구한 날 술만 먹고 저러니 아버지의 역정도 더하실 뿐 아니라 우 리가 송구해서 있을 수가 있어야지……」

하고 부엌바닥을 쓸고 행주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난다.

어느덧 해는 넘어가고 황혼의 푸른 장막에 비치었던 저쪽 산의 회색 윤곽도 다 사라지고 다만 남은 것은 캄캄한 어둠 뿐이다.

바람은 쓸쓸스럽게 분다. 초가을에 떨어져 나부끼는 누른 갈잎들은 뒷동산 숲 사이에서 부수수.

때때로 청량리로 나가고 들어오는 전차 바퀴의 바탕에 스 르릉하고 갈리는 소리가 처량하게도 동대문 밖 고요한 공기 를 울린다. 저녁에 남대문을 떠나오는 원산차의 철로 다리 를 건너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넓은 벌판을 건너 온다.

혜숙의 집 안방과 건넌방에는 전기불이 켜졌다. 안방에서 는 혜숙이와 그의 어머니가 겸상하여 마주앉아 밥 먹는 숟 가락이 밥 그릇과 반찬 그릇에 닿는 소리가 달그락달그락난다.

혜숙의 어머니는 물에다 밥을 말며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한참 혜숙의 눈썹 까맣고 눈의 광채가 반짝반짝하며 밥을 씹을 때마다 불그레한 두 뺨이 우물같이 쏙쏙 들어가는 것 을 바라보고 또 하얀 목이 우유의 시내같이 꽃다운 향내를 내며 흐르는 듯한 것이나, 그의 등과 고개와 어깨와 젖가슴 이 점점 부끄럽고도 눈물 나는 즐거움을 타는 가슴에 맛볼 수 있는 유년 시기를 벗어나 새로이 벌어지는 아침 월계꽃 같이 단 이슬에 취하여 정신없이 해롱대일 처녀기에 이르는 자기 딸을 바라보며 속마음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또 걱정하는 생각도 났다. 그리고 얌전한 사위를 얻어 재미있게 사는 것을 보겠다는 욕망과 한옆으로 자기가 젊었 을 때에 맛보던 타는 듯하고 정신이 공중으로 뛰는 듯한 정 욕의 타는 술에 취한 듯한 과거의 기억이 온몸으로 바짝 흐 르기까지 하였다.

시집갈 시기에 달한 처녀를 가진 어머니가 누구든지 생각 하는 것과 같이 모든 즐겁고 재미있는 욕망, 모든 걱정되고 염려되는 불안, 자기의 딸을 여태껏 정들여 길러 같은 집 같은 방에서 같이 살다가 섭섭히 아지 못하는 남의 집에 보 낼 섭섭한 생각, 으레 하는 일이니까 하는 수 없이 보내기 는 하나 다행히 시집을 가서 일평생 재미있게 딸 낳고 아들 낳고 잘 지내었으면 좋겠지만 아지도 못하는 팔자에 만일 소박데기나 되어 도로 쫓겨오지나 않을까, 그래서 날마다 밤마다 먼 산만 바라보고 잠도 자지 않고 한숨이나 쉬고 눈 물이나 쪽쪽 짜내면 그 원수스러운 꼴을 어떻게 보나 하는 불안과 같은 생각을 혜숙의 어머니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자기 딸이 혼인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을 속으로 혼자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의 딸은 지금 학교에를 다니니까 학교만 졸업하면 어 떠한 양복 입고 모자 쓰고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얌전하 고 재조 있고 돈 많고 명망 있는 젊은 사람하고 혼인을 하 게 될 터이지, 혜숙은 그렇게 되면 혼인하기 전에 그 젊은 사람과 한번 만나 보아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서로 선을 볼 터이지, 그리고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예배당에 가서 목 사님 앞에 나란히 서서 반지를 끼워 주고 신식으로 혼인을 할 터이지, 그리고 어떠한 요리집에 가서 잔치를 할 터이지, 그런 뒤에는 내외가 손목을 마주잡고 신혼여행인지 무엇인 지를 갈 터이지, 그리고 딸 낳고 아들 낳아서 잘 살게 되면 그 자식들이 나더러 「할머니」하고 따라다니겠지, 그렇다!

저희들끼리 좋아서 혼인을 한 것이니까 일평생 무엇이라 말 을 하지 못할 터이다. 부모 원망도 못할 것이다. 혜숙의 어 머니는 혜숙이와 그의 오라버니가 서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또 들어 신식 혼인이란 으레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예 배당에 가서 목사 앞에 나란히 서서 반지를 끼워 주고 요리 집에서 잔치를 하고 또 혼인한 뒤에 신혼 여행 가는 것인 줄로만 안다.

그는 또 생각하였다. 그렇게 하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지. 구식 같으면 집에서 음식도 차리고 손님 대접도 하고 신랑도 맞고 색시도 보내고 야단법석을 하여 집안으로 아주머니 할머니 형님 조카며느리 사돈마누라 친한 사람, 친치 않은 사람, 청한 사람, 청치 않은 사람이 가뜩 들어서 서 신랑이 온다 하면 야단법석을 하고 구경을 나올 터이지, 늙은이는 안마당에 젊은이는 안방 미닫이 틈으로 신랑 구경 을 하느라고 야단들일 터이지, 그리고 코가 뾰족하니 눈이 작으니 잘생기었으니 못생기었느니 키가 작으니 크니 하고 수군수군할 터이지, 그러다가 만일 칭찬이나 들으면 나의 마음이 좋겠지만 조금이라도 못생기었다 하는 소리가 들리 면 나의 얼굴이 홧홧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할 터이지, 당장 에 물리지도 못하는 혼인을 어찌하지 못하고 나는 그만 사 지의 맥이 홱 풀어질 터이지.

그렇다! 신식으로 한다. 그러면 아무 걱정도 없이 잘 하게 될 터이다. 손님 대접을 요리집에서 한다니 집에서 음식도 만들지 않게 될 터이지, 집에서 음식도 만들지 않게 되면 며칠씩 단잠을 자지 못하고 사람을 얻어 가지고 야단을 하 여도 그날 무슨 말이 많은데, 그리고 아까운 국수가 한옆에 서 썩지를 않을 터이니까 좋다.

혜숙의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순서없이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때때로 혜숙을 바라보았다.

그는 또다시 생각하기를 혜숙이 시집갈 때에는 옷이나 많 이 하여 주어야겠다 하였다. 그리고 세간도 잘 해주고 금으 로 밥그릇까지 하여 주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 시집 가 서라도 업수이 여김을 받지 않게 하여야겠다 하였다. 그리 고 신식으로 혼인을 하면 눈감고 낭자하고 장님같이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겠지 하였다.

그리고 첫날 저녁에는 어찌하나? 아마 신식 혼인이니까 신 랑이 옷을 벗기지는 않을 터이지, 저희들이 옷을 훌훌 벗고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가나? 하였다.

혜숙의 어머니는 신식 혼인이란 아주 이상하고도 진기한 사람들이 하지 않는 무슨 신선이나 선녀의 노름같이 생각하 였다. 그러하다가도 신방에서 새색시가 어떻게 옷을 제손으 로 훌훌 벗고 신랑이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노? 하 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아무 맛대가리가 없고 신랑일지라도 무슨 타는 듯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손끝이 발발 떨리는 그러한 사랑의 묘한 맛을 모르렸다 하였다.

그리고 은은하게 타는 촛불 앞에 눈을 감고 가만히 신랑에 게

「나는 당신이 하시는 대로 맡깁니다」

하는 것과 같이 침을 삼키면서 신랑의 손이 자기 몸에 닿 기만 기다리다가 신랑의 손이 그의 젖가슴 밑 겨드랑이에 닿을 때 얼굴이 확확 달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아지 못 하는 꿈 같은 맛을 보는 것이 신랑 신부의 정말 초례같이 생각되었다.

그리고 다시 밥숟가락을 때는 혜숙을 바라보았다. 그때 혜 숙의 어머니의 눈에는 혜숙이가 눈 감고 머리에 낭자를 하 고 기다란 비녀를 꽂고 눈을 감고 돌아앉은 신랑의 하는 것 만 객귀로 듣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그의 틀어얹은 머 리를 볼 때에는 어쩐지 심심하고도 양녀 같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너 길에 다닐 때라도 조심하여 다녀라, 그리고 하학하거 든 즉시즉시 집으로 오너라」

하며 유심한 눈으로 혜숙을 바라보았다.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의 가슴은 아지 못하게 선뜻하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이 전신으로 흘렀다. 자기는 어머니가 여태껏 이러한 소리를 하는 일이 없더니 오늘 처음으로 이러한 말을 하며 또 이상한 눈으로 자기를 들어다보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부끄러운 생각도 나고 또한 성욕의 타는 듯한 불길이 아지 못하게 자기 눈앞 공중에서 번쩍번쩍한다.

그는 부끄러워 자기 어머니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젓가 락으로 장아찌 하나를 집으며

「네……」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의 대답하는 소리는 떨리는 듯하고 그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 입에서 그와 같 이 부끄럽고도 가슴이 달랑달랑하여 대답하기에 얼굴이 확 확하여지는 말이 또다시 나오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아찌를 씹으며

「어머니 이 장아찌는 아주 짜요.」

하였다. 그리고 곁눈으로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고 다시 눈 을 내려깔고 밥 한 숟가락을 떴다.

「길에 다닐 때라도 조심하여라.」

하는 자기 어머니의 말을 듣는 혜숙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러한 부끄러움이 그의 처음 맛보는 부끄러움이었다. 이 세상에 난 지 열 일곱 살에 비로소.

「길에 다닐 때 조심하여라」

하는 말 속에 있는 무슨 의미를 깨달아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어머니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과연 그는 길을 다닐 때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었다.

그 전에 소학교에 다닐 때에는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구나 젊은 학생들이 활동사진 속의 사람들과 같이 볼 때 뿐 이요, 지나가면 그만이었었으나 지금 와서는 자기와 날마다 만나는 젊은 청년들이 모두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자기를 곁눈으로 한번 다시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는 것과 같고 날마다 아침이 면 학교 들어가는 어구에서 만나 보는 같은 젊은 학생을 하 루 아침만 만나지 못하면 어째 자기에게서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였다. 그는 남학생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날마다 만났다 가 하루만 만나지 못하면 자기에게 무슨 결점이 있어 그 학 생이 자기를 피해 간 듯하였다. 그래 그날 하루 종일은 어 째 울고도 싶고 온 세상이 쓸쓸하고 재미없는 듯하였다. 그 러다가 그 이튿날 다시 만나면 그는 잃었던 무엇을 다시 찾 은 듯하였고 또 다른 여학생보다 더 아름답고 귀여워 보이 는 듯하여 마음이 아주 즐거웠었다. 그래 그는 그때부터 구 두도 반지르하게 닦아 신고 다니고 둥그스름하게 아무렇게 나 틀어얹었던 서양머리를 지금은 한옆으로 가리마를 타고 기름을 발라 한편 눈썹 위로 비스듬하게 어러덥히게 하였 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좀 경쾌하게 하고 치마도 짤똑하게 하여 입었다.

고운 양복이나 입고 모자 쓴 청년이나 조선옷이라도 해정 하게 입고 깃도 구두나 잘 닦아 신고 대모테 안경이나 보기 좋게 쓴 청년은 모두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학식도 많고 재주도 있고 돈들도 많은 귀여운 집 서방님이나 도련님들이려니 하였다. 그리하 고 일본 다녀온 청년이라면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 사람 은 공부도 많이 하고 학식도 많이 있으려니 하였다. 그러다 가 그 사람이 자기를 혹 쳐다보면 어째 마음이 퍽 기뻤다.

세상 물결에 시달림을 받지 못한 단순하고 정한 혜숙의 마 음은 겉모양을 보아 그 속을 판단하였다. 대모테 안경과 흔 한 양복과 은장식한 단장이 군인의 링크 모양으로 그의 머 릿속에 있는 학식과 재주의 표현물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 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같이 여학교 2년쯤 다니는 여학생으 로 아주 까맣게 쳐다보는 사람이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오라버니였다.

그의 오라버니는 다 해진 양복을 입고 다 낡은 모자를 쓰 고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다닌다. 그러나 자기 오라버니는 어떤 중학을 졸업하고 여태껏 사오 년 동안을 아무것도 아 니하고 집에서 소설책이나 보고 잡지나 보고 지내는 것을 볼 뿐인데 어떤 때는 영어로 쓴 무슨 책도 읽고 또 자기는 당초에 무엇이 무엇인지 아지도 못하는 언문 글자 많이 섞 인 책을 보다가도 이것을 글이라고 지었나 하고 홱 내던지 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는 혜숙은 자기 오라버지도 상당 히 학식이란 것이 있기는 있으나 아직 대모테 안경 쓰고 양 복 입은 사람만은 못한가 보다 하였다. 그러나 자기보다는 아주 말할 수 없이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다 하였다. 그 래 자기 오라버니의 말이라면 으레 옳으려니 하고 자기 오 라버니가 하여도 좋다고만 하면 꼭 믿고 행하였다.

그와 같은 혜숙은 대모테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고 은장식 한 단장을 짚은 청년을 바라볼 때 그 청년에게서 보는 빛과 자기 오라버니에게서 보는 빛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 수염이 꺼뭇꺼뭇하게 나고 이마의 주름살이 펴지지 못 한 자기 오라버니 얼굴에서는 이러한 빛을 보았다. 그는 자 기 오라버니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어리광부려 말을 하면 서도 그를 바로 쳐다보지는 못하였다. 그 얼굴에서—더구나 두 눈에서—번득거리는 빛은 아침의 햇빛 같은 붉고도 금빛 나는 따뜻한 빛이었으나 바로 쳐다볼 수 없는 엄연한 빛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모테 안경 쓰고 양복 입고 은장식한 단장을 짚은 청년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는 부끄러운 듯도 하고 한편 눈을 찡긋하는 듯하여 차디찬 날에 눈 쌓인 광야 에서 쌀쌀스러운 바람을 쏘이면서 쳐다보는 듯한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는 차디찬 초생달 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빛 은 자기 가슴속에 알 수 없게 짤끔 나는 눈물을 나게 하고 또 기꺼움을 주는 빛이었다.

혜숙과 그의 어머니는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여태껏 안 오시네……」

하고 혜숙은 상 옆에서 물러나며 매우 기다리는 것같이 말 을 하였다.

「글쎄 말이다.」

하고 그의 어머니는 걸레로 밥상 앞을 훔치며,

「오늘도 또 아버지께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지 ……」

하였다.

시계는 10시를 쳤다. 쓸쓸스러운 바람은 앞 창을 스치고 지나간다. 누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히 난다. 혜숙과 그 의 어머니는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혜숙이가 있나?」

하고 다 낡은 양복에 모자를 바스듬하게 쓰고 고개를 반쯤 숙이고 문을 닫아 거는 스물 서넛이 되어 보이는 청년은 술 이 취하여 술내를 홱홱 끼치면서 안을 향하여 혜숙을 부른다.

「혜숙아, 혜숙이 있니? 응응.」

하며 아주 감흥적으로 말을 한다.

「네, 여기 있어요.」

하고 문간까지 나아가 자기 오라버니의 손을 쥐며,

「왜 인제 오세요? 네? 에구 술내! 또 약주 잡수셨읍니다 그려!」

「왜 술 냄새가 나빠? 흥 물론 싫을 터이지, 하…… 나는 술 안 먹고는 못 사는 사람이란다. 너는 모른다. 너는 몰라.

우리 혜숙이는 모르지. 어서 들어가자.」

하고 허허 웃어가며 혜숙의 손을 잡은 채 마루 앞까지 왔다.

그리고는,

「어머니 오늘 또 술 먹었어요. 하…… 어머니도 걱정을 하실 줄 알지만 어떻게 합니까 먹어야 하는걸요.」

하고 히히히히 웃으면서 마루 끝에서 구두끈을 푼다.

혜숙은 옹송그리고 마루 툇돌 앞에 가 섰고 그의 어머니는 마루 끝에 가 서서 혜숙의 오라버지를 내려다보며

「어데서 또 저렇게 먹었노? 어서 방에 좀 들어가서 눕 지……」

그의 어머니의 말하는 것은 자기 친아들에게 하는 소리와 같지는 않다. 혜숙의 오라버니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리 고 혜숙이와 그의 어머니도 따라 들어갔다. 혜숙은 요를 내 깔며,

「여기 좀 드러누세요. 그리고 좀주무세요.」

한다.

「아니 아니, 자기는 잠이 와야 자지, 잠이 오지도 않는데 자?」

하고 한 손을 내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후 하고 한숨을 한 번 쉰다. 혜숙은 조금 있다가 다시 자기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그런데 어데서 그렇게 약주를 잡수셨어요? 네네, 오늘 또 아버지께 갔다오셨어요?」

하고 혜숙은 무죄한 죄수가 재판장의 선고를 기다리듯이 그의 오라버니의 말소리만 기다린다.

「아버지 댁에? 아니 오늘은 안 갔어. 오늘 같은 날 아버 지 집에 가서 술주정을 할 수가 있나!」

혜숙은 날마다 가는 자기 아버지 집에 가지 않았다는 것과 오늘 같은 날에 주정을 할 수가 있나? 하는 말이 괴상하기 도 하고 무슨 뜻있는 일이나 있나 하여,

「왜 오늘은 무슨 별다른 날인가요?」

하고 문 앞에서 자기 오라버지만 바라보고 섰는 자기 어머 니를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

「응 별다른 날이지, 별다른 날이야. 나에게는 아주 별다른 날이지.」

「무엇이 그리 별다른고?」하고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가 미소를 띠고 묻는다. 혜숙의 오라버니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네, 오래간만에 정다운 친구 하나를 만났어요.」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대답을 한다.

혜숙과 그의 어머니는 무슨 굉장한 일이나 난 줄 알았더니 정다운 친구 하나 만났다는 말을 듣고 시물스러운 듯이 아 무 소리 없이 멍하고 있다. 혜숙의 오라버니는 자리에 벌떡 드러누우며,

「참 좋은 사람이지요. 재주 있고 근실하고 마음 곱고 참 좋은 사람이에요.」

한다.

혜숙의 어머니 머리속에는 언제든지 이렇게 칭찬하는 청년 의 말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혜숙의 생각이 나며 혜숙의 결 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대로 지나가지를 못하고 더 한 번 자세히 물어본다.

「어데 사는 사람인데?」

「네, 서울 사람이에요. 에…… 후…… 술이 취한다. 얼마 전에 일본 유학을 갔다가 어제 왔다고 오늘 종로 네거리에 서 만났어요.」

혜숙의 가슴속에는 아지 못하게 무엇이 부딪치는 듯하였 다. 그리고 한 번 보지도 못한 그 사람을 자기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와 자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 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오라버니가 그렇게 칭찬을 하니까 으레 퍽 좋은 사람이려니 하고 또 일본까지 다녀왔 으니 공부도 많이 하였으려니 하였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 가 다시 잼처 묻는 것이 무슨 부끄럽고 얼굴이 빨개질 의미 가 있는 듯이 들리었다. 그리고 또 다시 어서 자기 오라버 니의 입에서 그 청년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혜숙의 어머니는 또,

「나이는 얼마나 되는 사람인데 벌써 일본까지 다녀왔 어……」

혜숙의 오라버니는,

「하하하.」

하고 한번 웃더니,

「일본 갔다 온 것이 그리 굉장한가요. 지금 스물 둘이랍 니다.」

혜숙의 어머니는 또 다시 하나 물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 다. 그러나 조금 주저하다가

「장가는 갔을 터이지?」

하였다.

혜숙의 목은 으쓱하였다. 그리고 얼굴도 뜨거운 피가 몰려 올라왔다.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의 오라버니는 무슨 의미가 있는 듯이 <허허허> 웃으며 다시 혜숙의 불그레한 얼굴을 바라보며

「안갔어요. 왜요?」

하였다.

혜숙의 어머니는 다만 미소를 띠며

「글쎄말이야.」

하였다. 그러나 장가는 안 갔나? 하고 물으려다가 혹 혜숙 이나 그의 오라비가 자기 마음을 알아챌까 하여 「장가는 갔을 터이지」한 것이 벌써 혜숙의 오라비가 알아차리고 허 허 웃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얼마간 미안하고도 싱거웠으나 어떻든 장가를 가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희망을 일으켜 주 는 듯하였다. 또 혜숙도 공연히 마음속으로 다행하였다.

혜숙의 오라버니는 두 팔을 베고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 리고 한숨을 후 쉬었다. 혜숙은 자기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붙잡아 흔들며 어리광처럼,

「인제는 약주 잡숫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 댁에 가셔서 너무 야단도 좀 치시지 마시고요.」

하였다. 그의 오라버니는 고개를 천장을 바라보벼 홰홰 두 르면서,

「괜찮아 괜찮아. 술 안 먹으면 살지를 못해. 응 너는 모른 다. 너는 몰라. 술 먹는 사람이 공연히 술은 먹는다더냐. 너 는 모른다. 또 아버지 집에 가서 야단 좀 치기로 어때, 아버 지 집이니까 야단을 치지. 그렇지 않으면 야단칠 수 있다더 냐. 응, 하…… 너의 말도 옳은 말이지, 그렇지 술 먹는 놈 들은 다 미친놈이야. 그러나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 을 어찌하나.」

혜숙의 오라버니는 과연 술에 맛을 취하여 먹거나 거기서 무슨 취미를 얻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술이 들어가면 자연히 모든 비관되는 생각이 사라지고 또는 가슴 속에 울적하게 쌓인 모든 불평을 술을 마시고는 조금 분풀 이를 할 수 있음이었다. 그렇다고 술을 마실 때에 이 세상 모든 불평과 걱정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친구와 자리를 같이하여 정답게 이야기를 하며 또는 아름 다운 여자와 같이 앉아 흥취 있게 술을 마실 때라도 그의 가슴속으로 선뜻선뜻 지나가는 불평과 비관의 번갯불은 아 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떠들고 즐겁게 노는 사 이에 조그마한 침묵이라도 있을 때에는 그는 눈물날 듯한 쓰라린 감정을 맛보았다.

혜숙은 다시 생긋생긋 웃으면서,

「술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잘만 살던데요. 먹지 않고는 못 살 것이 무엇이에요? 네?」

하였다.

그의 오라버니는 다만 <허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의 어 머니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혜숙은 웅크리고 또렷한 눈으로 전기불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담배 연기만 푸 하고 내뿜는다.

이 혜숙의 오라버니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영철(李英哲) 이라는 청년으로, 유명한 재산가 이 상국(李相國)의 둘도 없 는 외아들이다. 그리고 혜숙이라는 처녀는 그의 어머니가 이 상국의 젊었을 때에 그의 첩이 되어 낳은 처녀이니 이 영철이와는 남매는 남매이나 배다른 남매이요, 또 이 영철 은 이 상국의 정실의 몸에서 난 정통의 귀하고 고귀한 아들 이요, 혜숙이란, 첩의 몸에서 난 천하고 천하게 생각하는 사 생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영철이라는 청년이 자기 아버지의 첩 의 집에 와서 어머니 어머니하며 또는 그의 누이동생과 그 렇게 자별히 지내는가?

그의 아버지 이 상국이란 이는 지금 나이 예순 여섯의 다 늙은 노인이다. 젊어서는 자기 아버지의 덕택으로 돈 잘 쓰 고 술 잘 먹고 계집 잘 다루고 기운 좋고 말 잘하는 무엇하 나 내버릴 수 없는 호협객이요, 팔난봉이었다. 그렇다고 그 의 젊었을 때의 생활이 결코 푸른 맛자락에 매달려 무정한 세월의 흐르는 것을 탄식하거나 애석한 님 이별을 참지 못 하여 뜨꺼운 눈물을 흘리는 다정하고 다한한 어여쁜 유야랑 의 생활이 아니라 세월이란 흐르는 것이요, 여자란 어디든 지 있는 것이요, 사람이란 죽어지면 적막한 청산의 한 덩이 흙이 될 뿐이라 생각하는 눈물 없고 한숨 없는 흘러가는 듯 한 향락의 생활이었다. 물론 그는 인생의 참비애라는 것은 맛보지 못하였다. 자기 아버지가 돈이나 주지 않으면 나는 죽어 죽어 하고 사랑문을 굳게 닫고 꽝꽝 부딪쳐 가며 방성 대곡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진정으로 눈물도 나지 않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쓰린 슬픔과 한숨은 아지 못하 였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고 형도 없는 동생도 없고 일 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기 혼자몸이 젊어서는 으레 가 졌으려니 하던 처자를 다스려 가게 된 그때부터 비로소 인 생? 이라함보다 처세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 가진 때부터 의식의 걱정커녕 부유로 움을 깨닫는 그는 가슴속에 언재든지 지나간 추억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젊었을 때에는 인생이란 으레 이러하려니 하던 것도 지그 와서 돌아보면 다만 의미없고 가치없는 무 엇보다도 큰 죄악과 같이 생각을 하였다. 다만 자기의 쾌락 을 위하여 희생을 당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부녀의 정조, 그때에는 그 여자들도 호의로써 자기의 희생물이 된 줄을 알았더니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덤 빈 것같이 생각되었다. 자기의 딸의 정결하고 성(聖)된 정조 의 미(美)를 아끼는 그는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사지가 떨리었다. 그리고 다만 자기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과거의 환영이 다만 음란하고 간특하고 더럽고 말할 수도 없는 모 든 죄악 메모리의 메모리뿐이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들어서라도 그의 머릿속에 굳고 단단하게 박힌 것은 동양 윤리의 사상이었다. 자기가 또한 자기의 젊었을 적 쾌락으 로 인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불효하였다는 것이 자기 양심에 또 한 가지 죄악의 기억이었다. 육체의 안락한 생활을 하는 그는 정신적으로 한없는 고통과 번뇌를 당하게 되었다. 지 금 60세를 넘은 그는 베개를 베고 천장을 쳐다보고 누웠을 때마다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두려운 생각은 <죽음>이 라는 가장 무서운 생각이었다.

젊었을 때 보통 사람의 걱정은 어떻게 일평생을 살아갈까 하는 것이요, 나이 많아 늙은이의 생각은 어떻게 죽고 죽어 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60여 년을 돌아보 아 조금도 신앙 있는 일을 하여 오지 못한 그의 가슴속에도 또한 어떻게 죽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어렵고도 어려 운 큰문제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이 편치 못하였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죽어서 영혼이 으 레 어디로든지 갈 줄만 아는 그는 자기의 영혼이 죽어서 좋 은 곳으로 갈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자기의 혼이 돌아갈 곳에 대한 안심은 그 만두고 두려움을 참지 못하였다.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 다 가슴이 답답하고 온몸이 떨리는 듯하였다. 자기는 죽어 서 지옥가서 끝없는 형벌을 받을 것인가? 자기가 일평생 동 안 자기의 쾌락의 희생이 된 여자들이 앙상한 이빨로 머리 를 풀어헤치고 뜯어먹으며 덤빌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감 고 누웠을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 위에 새빨갛게 단 쇠로 만든 창을 든 푸른 옷을 입은 요 마뿐이었다.

3년 전 어떤 봄날이었다. 봄비는 부슬부슬 온다. 계동 이 상국의 집 사랑방까지 어두컴컴하게 되었다. 쉬지 않고 떨 어지는 처마끝의 낙수 소리는 음울한 음악의 박자를 맞추는 듯이 살살스럽게 들려 온다. 습기찬 공기는 바람이 불 때마 다 방안으로 스쳐들어온다. 이 상국은 아랫목 보료 위에 담 뱃대를 물고 앉아 멀뚱멀뚱 눈만 껌벅거리고 앉았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못하였다. 벽에 걸린 시계가 때깍때깍 하나씩 둘씩 자기의 죽음으로 향하여 가는 경로의 한 마디 씩을 셀 때마다 그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좁아지는 듯하고 답답하여 캄캄하였다.

그는 답뱃대를 재떨이에 털고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 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는 모든 과거가 번개와 같이 지나간 다. 그리고 지금 자기 집 뒷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자 기 첩의 모양이 분명히 나타나 보인다. 그 아지랑이가 팔팔 날리는 듯한 눈초리와 불그레한 혈색 좋던 두 뺨이 조금 여 위어 가는 것이나, 얇고도 어여쁜 입술을 애교있게 한옆으 로 살짝 벌리며 말하는 것이나, 나중에는 그의 전신이 아찔 할 만한 아름다운 윤곽이 그의 눈앞에 비치일 때는 그는 얼 핏 눈을 떴다.

「아! 내가 잘못이다. 내가 잘못이다.」

하고 혼자 부르짖었다. 그러나 혼자 부르짖는 자기도 어찌 하여 잘못이며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아지를 못하였다. 그 의 전신의 피가 오싹하고 식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마 음을 굳게 하여 냉소하듯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을 그렇지 않다 하고 부인하려 하였으나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만한 힘을 주는 것을 갖지 못하였다. 조금도 인생 문제에 관한 어떻다 하는 굳센 관념을 갖지 못한 그는 다만 두려운 것은 죽은 뒤에 자기의 안락과 고통의 기분뿐이었다.

「아, 이 괴로움을 어찌할까?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죽어서 저승에 가서 끊기지 않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인가?

다만 눈물과 괴로움으로 한없이 지낼 것인가?」

그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에 자기의 딸 혜숙이가 학교에서 왔다.

「아버지 학교에 다녀왔어요.」

하고 안으로부터 사랑 중문을 향하여 나오는 혜숙의 너무 나 똑똑한 목소리는 드러누워 마음의 괴로움을 당하는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선뜻하게 하였다. 죄악의 종자처럼 생각하 는 자기 딸의 목소리는 염라대왕의 차사의 허리에 달린 푸 른 방울 소리같이 들리었다. 그러나 겨우,

「오…… 잘 다녀왔니?」

하고 창문을 여는 머리가 하얗게 센 그의 얼굴에는 창백한 가운데에도 반갑고 사랑스러운 빛이 섞이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인지 마주보기를 싫어하는 듯한 빛이 보였다.

혜숙은 자기 사랑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앞에 앉았다. 이 이 야기 저 이야기 학교에서 지내 던 이야기를 하던 그는 아주 상냥한 태도로 무슨 이상한 것 이나 생각한 듯이 두 손을 마주치며

「아버지……」

하였다.

「왜 그러니?」

「저…… 요.」

그리고 <저>자를 길게 뺀다.

「그래.」

「저는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선생님께 들었어요.」

「무슨 소리를?」

「사람은 날 때부터 죄를 지고 나온대요.」

「무슨 죄가 나서부터 있어?」

하고 그의 아버지는 아지 못하는 호기심이 나며 한옆으로 는 죄라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우리의 몇 만만…… 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고개 를 내흔든다—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담과 이브라는 사람으 로 <에덴>이라는 언제든지 봄이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조금 도 걱정하지 않는 그러한 동산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녔대요.」

「그래.」하고 대답은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이상하고도 우스운 생각이 아니 나지 못하였다. <아담>, <이브>, <에 덴>, 이 모든 말은 양국의 사람의 말이라 천황씨, 지황씨만 알던 그는 짐승의 지껄이는 소리처럼 들리었다. 혜숙은 다 시 말을 이어,

「그래서 하느님이, 무소부지하신 하느님이 그 동산에 있 는 모든 것을 먹고 마시되 다만 선악과 지식의 열매라는 것 을 따먹지 못한다고 명령하신 것을 뱀이 꼬여 <이브>에게 따먹으라 하여 <이브>가 먼저 따먹고 또 <아담>을 주어 먹 게 한 까닭에 하느님이 노하시어 그 낙원에서 그 두 사람을 쫓아내시었다나요. 그래서 우리가 그 <아담> <이브> 때문 에 이렇게 괴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었대요. 그것이 우리의 원죄라는 것으로 우리가 날 때부터 타고 나오는 죄래요.」

그의 아버지는 다만 빙그레 웃으셨다. 그 웃는 것은 결코 그 말 가운데서 무슨 의미 있고 진리 있는 것을 찾아내어 웃는 것이 아니라, 자기 딸의 이야기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 고 한옆으로는 너무 허황되어 웃는 것이었다. 그 동안에 잠 깐 그의 가슴의 괴로움은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의 그와 같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 1천 9백 22년 전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대요. 그래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모든 죄 를 사하고 천당에 가 영원토록 우리의 시조가 누리던 <에 덴> 동산 같은 곳에서 영광을 누린대요.」

이와 같이 순서 없고 애매한 혜숙의 이야기가 지나가고 날 은 저물어 전기불이 켜졌다. 혜숙의 아버지는 별로이 뜻을 품고 생각지를 아니하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아까 들은 혜 숙의 이야기한 것이 머릿속으로 왔다갔다 한다. 천당과 낙 원이 그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세상에 임금님이 계신 대궐보 다 더 크고 우리가 알 수 없이 좋은 것이나 선녀와 신선이 놀이하고 노는 이상 낙토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불이 활활 붙는 지옥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 보인다.

그는 성화를 보지 못하였다. 그래 그는 유명한 환장이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려 놓은 천당이나 <에덴>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다만 천당이라 하면 하늘 위에 있는 물이 맑게 흐르고 나무가 성하고, 햇볕이 따뜻하고, 선녀가 구름 옷을 입고 시냇가에서 노래하고 다니며 두루미가 춤을 추 고, 옥황상제가 계신 무슨 전설적 이상경인가보다 할 뿐이 었다. 그러나 있기는 있는 것인데 어렇게 생겼는지 가보아 야 아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갈 수 없는 곳같이 생각되었다. 지나의 전 설로 내려오는 사람들의 일화와 같이 이 태백이나 태상노군 이나, 삼천갑자 동방삭이 같은 신선들이나, 요임금이나 순임 금이나 또는 아황 여영이나 공자나 맹자는 그러한 곳으로 갔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와 같은 범용된 사람은 가지 못할 터이라 하였다. 그러나 자기도 죽은 후에 그러한 곳으 로 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은 있었다.

「예수만 믿으면 누구든지 죄를 사하고 천당에 갈 수 있다.」

그의 마음에는 한편으로 눈이 떠지는 듯하고도 의심을 품 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대신이나 양반이나 상놈이나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 면 천당에 가서 영원히 살 수가 있다?」

그러나 계급적 사상이 굳게 박힌 그는 천당에 가서라도 옥 황상제 이하로 차례차례 계급이 있으렷다 하였다. 무슨 나 라의 관제처럼 생각하였다.

그는 그러며 예수를 믿으면 자기도 천당에 갈 수 있을까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예수를 믿어 생전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천 당에나 가볼까 하였다. 처음에는 가볼까 하던 것이 다음 번 에는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 하였다. 그리고 맨 나중에 는 가야 하겠다 하였다. 자기의 몸이 공중으로 구름을 타고 둥실둥실 올라가는 듯하였다. 그리고 마음은 아주 안락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정신을 차려 생각을 할 때에는 다시 자기 는 괴로운 보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 천 당에를 가려면, 여태껏 몇십 년을 데리고 살고 딸까지 낳은 자기의 첩을 내버려야지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가슴이 답 답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죄가 아닌가? 하였다.

그는 자기 혼자로서는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할 줄 알았다.

그리고 예수교당의 목사나 전도사는 잘 알렷다 하였다.

그는 일어나서 모자를 썼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멈칫 하고 섰다. 그리고 얼굴이 아지 못하게 화끈화끈 하여지고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만두어라, 내가 미쳤지. 천당은 무엇이고 지옥은 무엇 이야. 죽어지면 누가 알더냐?」하고 다시 모자를 걸고 앉았 다. 한참은 조용하였다.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창문을 열고 아래 사랑을 향하여,

「얘 영철아.」

하고 불렀다.

「네……」

하고 영철은 자기 아버지 사랑으로 올라왔다. 그의 아버지 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너 조금만 있다가 10시쯤 되어서 김 선생님 좀 청해 오 너라.」

「왜 그렇게 늦게요?」

「글쎄, 왜든지. 가서 청해 와. 그때쯤은 아마 자기 집에 들어올 듯하니.」

「네」

하고 영철은 자기 사랑으로 다시 나갔다.

10시가 넘어 영철이가 청하여 온 김 선생이 사랑 마루 앞 을 들어서며,

「주인장 계시오니까?」

하였다.

주인은 문을 열고,

「어서 오시오. 이렇게 어둡게 오시라고 어쭈워서 대단히 미안하외다.」

「천만에 말씀, 그래 댁내가 다 무고하십니까?」

「네, 아무 탈없이 잘들 있읍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이 이상국의 귀에는 매우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가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그것은 예수장이의 사투리같이 들린다.

김 선생은 나이가 50이 넘을락말락하고 눈은 조금 들어간 데다가 검정 혹각테 안경을 쓰고 격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 고 말총으로 엮은 모자를 썼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는 무 엇을 동경하는 빛이 또릿또릿하고 입 가장자리는 언제든지 미소가 떠돌고 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은 방석을 권하며

「이리로 내려앉으시오.」

하였다. 김 선생은 허리를 잠깐 굽히더니 손을 내어밀어 사양하는 빛을 보이며,

「네, 감사합니다.」

하고 거기 앉았다. 그리고 팽팽하게 캥긴 양복 바지를 손 바닥으로 조금 문지르는 듯하더니 다시 두 손을 싹싹 비비 었다.

그리고는,

「참 여러 날 주인장을 찾아뵈옵지 못하여서 매우 죄송합 니다.」

하고 다시 노인을 한 번 바라보고 미소를 띠며,

「자연히 바빠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허리를 잠깐 굽히고 방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노인은,

「천만에 말씀을 다 하시는구료, 그러실 터이지요. 자연 교 무에 다사하실 터이니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오시라고 한 것은……」

하고 주저주저하다가,

「하도 심심하기에 이야기나 좀 할까 하고 청한 것입니다.」

담뱃대를 탁탁 털어 재떨이 위에 엎어놓고,

「그런데 요사이 말을 들으니까 새로이 교인이 많이 생긴 다지요?」

「네, 날마다 날마다 늘어갑니다. 제가 맡아 보는 교회에도 벌써 두어 달지간에 오륙십명이나 늘었습니다.」

「네(아주 감탄한 듯이), 매우 감사합니다.」

목사의 흉내를 한번 내어 부지중에 매우 감사합니다 소리 를 한번 하고는 속마음으로 우습고도 서툴러서 억지로 웃음 을 참느라고 코가 벌룩벌룩하였다.

그리고는 얼굴이 붉어지며 김 선생을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그런데 <아담>인지 <이부>인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오늘 내 딸자식이 저희 선생님에게 들었다고 하는데 어린 것이 무엇이라 떠드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네, 참 따님 학교에 잘 다닙니까? 허허허 처음 들으시면 이상도 하시겠지요.」

「그러면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린가요? 우리의 시조가 무엇 무엇이라니 그것 참 처음 드는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네, 옛적에……」

하고 예수교의 성경 『창세기』에 씌어 있는 것을 모조리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이 상국은 <딴은> 하면서도 의심하는 듯이 멀거니 그의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이나 양국 사람이나 다 <아담>

<이브>의 자손이요?」

김선생은 또 다시 허허 웃으면서,

「그렇지요, 서양 사람의 시조도 <아담> <이브>이고 그리 고 일본사람이나 청국사람이나 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아들 이지요.」

이 상국은 의심을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였다.

「그렇다고 우리 시조의 지은 죄를 우리가 벌받을 것이 무 엇인가요? 그러면 그 죄를 어떻게 해야 사할 수가 있을까 요?」

「네, 그러한 까닭에.」

하고 허리를 조금 뒤로 젖히는 듯하더니 양복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가죽 껍질을 한 책을 꺼내면서,

「보십시오.」

하고 펴 읽기를 시작한다. 이 상국은 예수장이의 축문이나 주문을 쓴 책을 읽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바리새 교인 중에 <이고대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 태관원이라, 이 사람이 밤에 와서 예수를 보고 가라대 랍비 여…… 예수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느니라……」

하고 『요한복음』3장을 읽었다. 김 선생이 이 『요한복 음』3장을 택한 것은 언뜻 자기 머릿속에 이 상국이가 자기 를 청해 온 것이 밤이요, 또 이 사람이 돈있고 문벌 좋은 사람이라 <바리새>교인 중에 <이고대모>라 하는 사람이 예 수를 찾아온 것과 같이 자기를 밤에 청한 것이 옛적의 <이 고대모>와 예수와의 관계와 무슨 인연있는 것같이 생각됨이 었다.

그는 다시 읽기를 시작하였다. 이 상국은 문 열어 바깥을 내다보고 다시 바로 앉았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 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읽기를 다 하고 그는 아주 신의 묵시나 받은 것같이 점잖 게 앉아 노인을 향하고,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 생을 얻을 것이외다. 그리고도 쉬지 않고 기도하라 하셨으 니 우리 모든 죄를 회개하고 기도만 하면 천당에 들어갈 것 이외다.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 다니던 젊은 청년 하나 참으 로 진실히 예수를 믿었읍니다. 그는 날마다 새벽이면 교당 에 가서 기도하기를 언제든지 미국 가서 공부하게 화여 주 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결과 그 말을 하느님이 들으시 고 교회 감독이 이 말을 들어 지금 그는 미국 가서 공부를 잘 하고 있읍니다. 그와 같이 누구든지 기도만 하면 못 될 것이 없읍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곧 천당에 갈 것입니다.」

하고 손을 들었다놓았다 하며 열심있게 말을한다.

이 상국은 다만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였다.

김 선생이 가고 밤이 새도록 그는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그의 마음은 아주 헤매었다. 천당과 지옥과 죽음과 <아담>

<이브> 기도…… 이러한 모든 것이 선뜻 그의 눈앞으로 지 나간다.

그 이튿날 아침이다.

어제 저녁까지 부스스 오던 봄비가 개고 아침 안개를 조금 도 볼 수 없는 씻은 듯한 아침이었다. 금빛 같은 아침 해가 동쪽 하늘에 솟으며 천지 만물을 밝게 비친다. 하늘은 금강 석 같이 푸르고 맑다.

나무와 나무 끝에는 따뜻한 봄빛이 가득찼다. 지붕이나 처 마끝이나 풀 끝이나 구슬 같은 방울이 반짝반짝 해롱댄다.

참새들은 기와집 울 위에서 재미있게 재적거린다.

혜숙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뒷동산으로 왔다갔다한다.

멀리 남산 밑에 우뚝 서있는 천주교당이 그의 눈에는아주 신성한 땅 위에 천당이나같이 보인다. 그리고 새파란 공중 으로 둥실둥실 떠나가는 흰 구름장이 저 천애 저쪽 하늘나 라로 흘러가는 듯하였다. 그가 하늘을 쳐다볼 때에는 모든 어지러운 생각이 다 사라지고 다만 정하고 상쾌하고 무슨, 신하고 서로 바라보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도 그와 같 은 빛나고 흰 구름을 타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 흘러갔 으면 하였다.

그리고 외롭고 가슴이 답답하던 그는 무엇에 의지한 듯하 였다.

그는 뒷동산 나무 사이 좁은 길로 천천히 걸어갔다. 맑고 신성한 봄바람은 천당의 처녀의 날개를 스쳐오는 듯 멀고 먼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물을 넘고 산을 넘어 이 상국 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사면에 둘린 산들의 흐르는 듯 한 산골짜기는 시인의 써놓은 목가 그것과 같이 부드럽고 연하고 그윽한 무엇이 숨기어 있는 듯하였다. 그의 가슴은 알 수 없게 무슨 기꺼움을 깨달은 듯하였다. 나무 끝이나 푸른 풀이나 푸른 하늘 위로 가만히 떠나가는 흰 구름장 속 에는 무슨 신령이나 정기나 숨어 있는 듯하였다.

또다시 고요한 봄바람은 분다. 붉게 금빛 나는 해는 더욱 붉게 온 천지를 비추인다. 예수교당의 아침 종소리는 바람 을 타고 멀리멀리 들려와 천애 저쪽 보이지 않는 나라로 스 며들어가는 듯하였다. 이 상국은 자기도 모르게

「아, 아 하느님.」

하였다. 그러나 그 하느님을 한번 부른 뒤로 어린아이가 자기의 잘못을 자기 부모에게 고한 것같이 눈물이 날 듯이 마음이 즐겁고 편하였다.

그후부터 이 상국은 열심 있는 신자라 되었다. 세례를 받 았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아주 단단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자기 첩 을 어찌 하나 하였다. 딸까지 낳은 자기의 첩을 내버리자니 인정에 그리할 수 없고, 또 그러나 날마다 날마다 그를 대 할 때마다 자기의 마음은 편치 못하였다. 그래 나중에는 그 와 같이 있는 것이 아주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동대문 밖에 집을 하나 사고 자기 첩과 혜숙은 거기 나가 있으라 하였 다. 그리고 자기가 고생하여 벌지 않은 재산이라 그리 귀한 것을 아지 못하는 그는 또한 물질로써 자선한 일을 많이 하 면 천당에 가서 상 받을 것이 올 줄 아는 그는 자기 첩의 모녀가 먹고 살고도 남을 만치 뒤를 보아 주었다. 그러나 아주 잊지는 못하였다. 어떤 때는 무엇인지 모르게 섭섭도 하고 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혼자 어 두운 방에서 눈물까지 흘리었다. 그렇다고 다시 불러올 용 기는 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영철은 그렇게 자기 아버지와 같이 단순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은 인생에 대한 크고도 큰 의혹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기 아버지는 죽어 천당 갈 것을 다만 단순한 동기로 믿게 되었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천당 과 지옥을 쉽게 믿지는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담>

<이브>를 자기의 또한 온 인류의 시조로 믿었지만 우리의 몇만 년 전에는 사람이 모두 원숭이와 같았으리라는 <다윈>

의 진화론을 배운 그는 그렇게 모순되는 전설을 믿지 못하 였다. 천문학에서 성무설을 배운 그는 하느님의 말씀 한 마 디로 이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 고 어떻게 가서 죽어지면 어떻게 되나 하는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의심을 품기는 품었으나 영혼이란 참으로 사람이 죽 어서 단독으로 어디로 가버리는건가? 의심하는 그는 그렇게 쉽게 천당과 지옥을 믿지 못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이란 무 엇인가를 참으로 철저하게 알고 싶었다.

이러한 줄을 아지 못하는 자기 아버지는 그애게까지 예수 를 믿으라 권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젊었을 때를 생각하는 그는 자기 아들이 젊 었을 때에 자기와 같이 죄악이나 짓지 아니할까, 그리고 자 기와 같이 늙어져서 괴로움을 당하지 아니할까, 그리고 죽 어서 지옥에나 가지 아니할까, 가슴이 타도록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자기가 참으로 인정하는 종교 속에 자기 아들의 마음과 몸을 집어넣으려 하였다.

그러나 멀고 그윽하고 허황하고도 깊은 의심을 품는 그의 아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않기커녕 어떤 때는 반대까 지 하였다.

자기 아들을 자기 이상의 공부를 시켜 놓고도 그의 사상과 모든 것이 자기보다는 못하다는 그는, 더구나 친권(親權)을 절대로 내세울 줄만 아는 그는 언제든지 자기 아들을 어린 아이라 하여 자기 명령아래 절대로 복종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법률로까지 인정하는 종교의 자유까지 자 기 아들에게는 강제하려 하였다. 강제하여 자기 아들이 자 기가 믿는 종교를 믿는 시늉만 보이더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떤 날 또 그의 아버지에게 종교에 대한 질책을 받은 영 철은 답답하고 속에서 너무나 흥분된 감정으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대하여,

「저는 죽어간 예수에게 고개를 숙일 수가 없어요, 그의 말한 바 진리는 얼마간 옳다고 인정하지만……」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자기 아버지는 아주 노하였다.

「그리고 네가 무엇을 안다고 예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 다고 그러느냐?」

하였다. 영철은 다시 조금 흥분된 어조로,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여, 죽어 천당으 로 가려 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저는 못 듣겠습니다.」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사랑> <여자> 이와 같은 말만 하여도 창피하고 해괴망측하게 생각하는 그는 자 기 아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을 듣고는 견디지 못하였 다. 무슨 음담을 듣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무엇?」

하고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 망할 자식, 아비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무엇이 어쩌고 어째? 네 당초 이제부터는 내 눈앞에서 보이지 말아라. 에,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꼴을 다 보겠군.」

하고 마루에 섰다 방으로 들어가 재떨이에다가 담뱃대만 탁탁 턴다.

영철은 그리 고분고분한 겁장이 청년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집 있고 심술궂은 편이 많이 있었다. 그는 그 당장에 자 기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리하고 일평생을 독립으로 지내가 려 하였다. 그는 우선 하는 수없이 동대문 밖 자기 누이동 생의 집에 와 있었다.

영철은 눈물 있고 한 있는 청년이었다. 아지 못하는 운명 의 희롱을 받아 자기의 아버지에게 뜻 아닌 정조 빼앗기고 일평생 동안을 다만 천하고 천한 생활을 하는 중에도 또한 사람의 만족을 얻지 못하는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는 알 수 없게 가련하고 애처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랑스 럽고 상냥하고 천진난만한 자기 누이동생을 볼 때마다 그는 귀여운 생각이 나는 중에도 너의 운명은 어떻게 기구하게 되겠니? 하고 누이동생을 위하여 걱정을 마지아니하였다.

자기 아들이 집에서 나간 후 이 상국은 그리하여도 아주 귀하고 귀한 아들을 내버릴 수는 없었다. 한때 감정으로 의 외에도 그리된 것을 잘못으로 생각하나 또다시 자기가 머리 를 굽히어 자기 아들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다만 자기 아들이 동대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전보다 더 금전과 모든 것을 많이 보내줄 뿐이었다. 영철은 이러한 사람이다.

혜숙은 전기불만 바라보면 자기 오라버니가 이야기하던 그 일본 갔다 왔다는 말 잘하고 글 잘하고 사람 좋다는 청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자기가 항상 보는 대모테 안경 쓰고 양복 입고 은장식한 단장을 짚은 사람과 같으려니 하였다.

그리고 인물도 잘났으려니 하였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사면은 아주 조용하다. 혜숙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갑자기 <오라버니>를 불렀다. 영철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오라버니 주무세요? 이렇게 좀 일어나세요.」

하고 영철의 고개 밑에 두 손을 넣어 번쩍 쳐든다.

「왜 이러니 남 잠도 못 자게.」

혜숙은 생글생글 웃으며

「잠은 무슨 잠을 주무세요. 이불도 안 덮고…… 그런데요 내일 저녁에 청년회 음악구경 안 가세요? 저 입장권 두 장 사가지고 왔어요. 오라버니 한 장 드리려고……」

「음악회? 가지.」

「가세요. 네? 꼭요. 무얼 지난번처럼 가신다하고 안 가시게.」

「꼭 갈 터이야. 그리고 선용(善鎔)이도 같이 가지.」

이 소리 한 마디가 혜숙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하였다.

그 말 잘하고 글 잘한다는 자기 오라버니가 그렇게 칭찬하 는 청년과 만나리라고 생각을 하니 참으로 좋았다. 「그 어 른도 오세요?」

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물어 보았다.

「그래 같이 가자고 할 터이야. 너 내일 그와 만나거든 인 사나 하여라. 내 소개하여 줄게. 아주 좋은 사람이다. 영원 히 사귈 만한 사람이란다.」

하고 영철은 술내 나는 한숨을 휘 내쉰다.

영원히 사귈 만하다는 소리가 이상하게 혜숙을 즐겁게 하 였다. 다른 때에는 자기의 친구일지라도 혜숙에게 인사를 시켜 주지 않는 자기 오라버니가 그를 자기에게 소개까지 하여 주마 하고 또 영원히 사귈만한 청년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게 들리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한 기꺼움을 맛 보았다. 그의 귀에는 자기 오라버니의 한 마디 말일지라도 의미없이 들리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인사를 하노 하였다. 생각하면 얼굴이 홧홧 하여졌다.

그는 자기 오라버니가 다른 남자들 하는 것같이 할까 하였 다. 그러다가는

「어떻게 인사를 해요?」

하고 자기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고개를 자기 오라버니의 가슴에 대고 허리를 틀었다.

「무얼 어떻게 해? 못난이 하하. 다른 사람과 같이 하지.」

「그럼 사내들처럼 처음 뵙습니다. 해요?」

「그래.」 혜숙은 조금 안심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깨달은 것같이,

「네」

하고 고개를 까붓까붓하였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에그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요. 저는 아직 그렇게 해보지 를 못했는데.」

영철은 아직 어린아이로구나 하였다. 그리고 너도 부끄러 움을 알게 되었구나 하였다. 그리고는 혜숙의 머릿속에 있 는 생각을 알아차린 그는 자기가 선용과 자기 누이동생을 가까이 하게 하여 주려 한 것이 얼마간 성공한 듯하였다.

그 이튿날 해는 넘어가고 서쪽 하늘에는 파라다이스를 그 리어 놓은 듯한 붉고 누런 저녁놀이 가득하게 퍼지었다. 저 녁에 집을 찾는 까마귀 새끼들은 저쪽 나무 수풀 사이에서 떼를 지어 오락가락한다. 동대문 밖 넓은 길에는 마차의 달 아나는 소리와 저녁 소물잇군의 누르스름한 소리가 섞여 들 린다. 바로 동대문 옆 넓은 길에서는 여러 아이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코를 꾀죄죄 흘리고 나막신을 신은 구차한 집 자식, 다 찢 어진 모자를 쓰고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흩뜨린 보통 학교 생도, 통감 초권을 옆에 끼고 입과 얼굴에 먹칠을 하고 새 까맣게 더러운 바지를 엉덩이에다 건 글방 도령, 흰 바지 붉은 저고리에 태사신을 신은 안고한 작은 집 서방님.

「얘들아, 고양이 새끼 보아라!」

하고 코를 흘리고 나막신짝을 짹짹 끄는 구차한 집 자식이 새끼로 어린 고양이 새끼 하나를 목을 매어 끌고 나오며 부 르짖는다. 빼빼마르고 까만 털이 으스스하게 일어선 고양이 새끼는 앞발로 땅을 버티면서 앙상한 이빨을 내어보이는 작 은 입으로 아주 시진한 듯이 야옹야옹하며 가지를 않으려 한다. 그러나 사정없이 끄는 새끼에 끌려 질질 끌려간다. 땅 에 먼지는 푸 하게 일어나며 그의 전신을 덮는다.

바지춤을 엉덩이에 건 글방 도령이 이것을 보더니 다짜고 짜로,

「이놈자식 왠 것이냐?」

하고 달려든다. 구차한 집 자식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왜 이래!」

하고 당장에 울 듯하다. 글방 도령은 주먹으로 한번 보기 좋게 구차한 집 자식을 질러 넘어뜨리고,

「이놈자식 이리 내놔, 안낼 테냐? 죽는다. 죽어.」

하고 자빠져서 울고 있는 구차한 집 자식을 바라보며 단단 히 벼른다. 구차한 집 자식은 엉엉 울며 일어선다. 이 꼴을 보고 섰던 보통 학교 학생이 구차한집 자식을 보고,

「못난이, 울기는 왜 울어.」

하고 또 주먹으로 등을 한번 보기좋게 울린다.

그리고,

「에그 그저 그것을 한번만 더 치면 그대로 당장에 뒈질 테니까……」

하고 벼른다. 구차한 집 자식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운다.

「복남아, 이것 보아라.」

하고 글방 도령은 그 학생을 부른다.

「요놈의 고양이 새끼가 자꾸 야옹야옹한다.」

복남이란 생도는 아주 무슨 좋은 것이나 만난 것 같이,

「가만 있거라. 우리 그놈의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양이를 못 견디게 하여 자기 장난을 더 재미있게 할 무슨 방침을 생각한다. 그리고 고양이를 발로 툭 찼다.

고양이는 발길에 맞아 <야옹>하고 네 발을 번쩍 들고 먼지 틈에 가 나뒹군다. 그리고 글방 도령이 새끼를 툭 잡아다니 니까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오며 발버둥질을 친다. 그것을 글방 도령이 홱 추켜 그 옆에 서서 구경하는 완고한 집 작 은 서방님 얼굴에다 홱 지지며,

「어비!」

하고 깔깔 웃는다.

「에그머니!」

하고 대경 실색을 하여 그 작은 서방님이 도망을 하며,

「저런 망할놈의 집 자식 같으니라고, 네 우리집에 와 보 아라.」

하고 저리로 가버린다.

삶을 구한다 함보다도 죽음을 벗어나려 하는 고양이는 지 나가는 장난꾼의 손끝에 매달리어 자기에게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죽움의 고개를 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보통 학교 생도가,

「요놈의 것을 우리 저기다가 매달아 놓고 죽으랴고 애쓰 는 꼴을 보자 응?」

「그래 그래.」

동대문 성 틈에다 나무때기를 박고 고양이를 거기에 대롱 대롱 매달아 놓았다.

고양이 새끼가 <아옹 아옹>하며 발로 성을 버티고 애를 쓸 때마다 아이들은 회초리로 때려 넘어뜨린다. 고양이는 죽었 는지 살았는지 혹독한 매를 여러 번 맞더니 아무 소리 없이 매달리었다.

「요놈의 것이 죽었다.」

「아니다 아냐. 고놈의 것이 어떻게 약은데, 그러니 고양이 꾀라니, 요런 것은 한 번만 때리면 정신이 나서 꼼짝거리지.」

하고 한 번 홱 하고 갈기니 고양이는 <아옹>하고 다시 꿈 질하다가 아무 소리가없다.

「하하하 보아라. 요놈이 요렇게 약단 말이야.」

이것을 지나가던 영철이가 보았다. 아! 불쌍하고 가련하고 잔인하게 생각되는 마음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저것도 생 명을 가진 생물이 아닌가. 우리가 생을 구하는 것과 같이 그것도 생을 구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 과 같이 저것도 죽음을 싫어할 것이 아닌가. 혈관 속으로 흐르는 새빨간 생명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반이 아닌가.

사람을 달고 치면 그것을 죄악이라 하면서, 고양이를 달고 치는 것은 죄악이 어째 아닐까. 생명을 가진 짐승을 살해할 권리가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모르는 체 하는 것을 죄악이라 하면, 짐승을 죽이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하였다.

영철은 그대로 뛰어갔다.

「이놈들!」

하고 호령을 한 번 하였다. 아이들은 깜짝 놀래어 뒤로 물 러서며,

「왜 이러세요?」

「이게 무슨 짓들이야. 고양이 풀어 주어라. 응, 놓아주어.」

「싫어요. 싫어요. 공연히 그러시네.」

영철은 달려들어 고양이를 끌러 놓았다. 고양이는 그대로 느른히 자빠져 있다. 아이들은 고양이를 끌고 달아나려 한다.

「요놈, 이리 와.」

하고 영철이는 소리를 지르고 붙잡으니 달아나던 아이는 움찔하고 섰다.

「그러면 내 돈 주께 그 고양이를 나를 다고, 자……」

하고 주머니에서 20전 은전 한 푼을 꺼내어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들은 의외의 돈이라 정말 같지가 않아서 이상하게 그를 바라보며,

「정말요?」

한다.

「그럼 정말이지 거짓말할까.」하고 돈을 툭 땅 위에 던졌 다. 다른 아이가 그 돈을 집었다. 그러니까 그 돈을 받으려 하던 아이가.

「이놈 자식 내 돈이다, 인내라 오연히 죽기 전에 어서내.」

「너 그러면 무엇 사서 나 좀 주어야 한다.」

「그래, 어서 내기만 해.」

저희들끼리 저리로 가며 떠든다. 영철은 고요히 두 눈을 감고 다리를 편안히 뻗고 옆으로 누워 있는 고양이를 내려 다보았다. 생명이 붙어 있을 때까지는 괴로움을 깨닫고 그 는 지금 생명이 끊어진 뒤에는 조금도 괴로움을 아지 못하 고 영원히 잔다. 영철의 가슴속에는 모든 비애가 저녁 그늘 같이 그의 가슴을 덮었다. 주검을 장사하는 묘지와 같이 고 요하고 쓸쓸하고 영원히 흐르는 비애가 그를 못 견디게 하 였다. 그는 눈물이 새어나옴을 금치 못하였다. 고요하고 쓸 쓸한 저녁날에 한가하고 외로이 산고개를 넘어가는 상여를 바라봄같이 생(生)의 모든 비애를 그는 맛보았다. 그는 다만 한참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양이의 털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고양이의 차 디찬 몸의 부드러운 털이 더욱 그에게 측은한 생각을 주었 다. 애자의 주검을 어루만지는 것같이 그는 어루만지었다.

그는 고양이를 두 손으로 들어다가 개천가 물렁물렁한 땅 을 파고 묻어 주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은 어찌하여 <모세>에게 십계명을 줄 때 살생하지 말라 하지 않고 살인하지 말라 하셨다 하노?」하였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며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였다.

그의 머릿속을 괴롭게 하는 것은 사람이 죽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짐승의 죽은 것을 보고 는 별로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지마는, 사람이 죽은 송장을 보면 허무하고 맹랑한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하여 도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생명있는 짐승의 고기 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사람의 피 흘린 육체를 먹는다 하면 다시 없는 죄악이라 하지 않는가?

짐승도 생물이요, 사람도 생물이라. 짐승의 육체가 우리의 뱃속을 지나 우리의 육체를 기르고 나머지는 똥이 되어 사 라지는 것과 같이 사람의 몸도 죽어지면 청산에 파릇하게 나는 푸른 풀을 기르고 다른 것의 성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이 육체의 원소는 다른 원소와 합하여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없어져 버리면 영혼이란 것도 육체가 없어 지는 동시에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코 있고 눈 있고 다리 있고 팔 있고 모든 것을 구비한 사람의 육체의 윤곽이 사라져 없어져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 이, 영혼이란 그것도 아주 그 육체를 떠나는 동시에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육체가 영혼과 떠나면 모든 관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또한 영혼도 독립하는 능력을 잃어버 리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란 시계와 같지나 않은가? 하였다. 시계는 쇠로 만든 것이다. 그 시계가 아무리 잘 만든 것이라도 그 대로 두었을 때에는 그 시계 된 본분을 지키지 못하나, 그 시계의 태엽을 틀어놓고 시간을 맞춘 뒤에야 비로소 그 시 계의 효능이란 것을 발휘하나니 태엽을 틀어놓은 때부터 누 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간단없이 돌아가 <때>라는 오묘 한 것을 세우는 것과 같이 사람의 육체가 어머니 뱃속에 있 을 때에 어머니의 육체를 돌아가는 피의 고동이 뱃속에 있 는 어린아이의 심장을 간단없이 움직이게 하여 비로소 생이 란 것이 생기어 영혼의 활력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이 살다 죽어지면 육체는 썩어서 다른 원소와 합하여 흙도 되고 나무도 되고 풀도 되고—여러 가지로 화하여 버리 는 동시에 영혼이라는 것은 사라질 것이 아닌가? 시계가 그 의 운동을 정지하면 그의 능력을 붙잡을 수 없고 찾아낼 수 없이 사라지는 것같이, 그리하여 <나>라 하는 한 개인은 사 라질 것이 아닌가? 그러하나 인생이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 을 것이 아닌가? 하였다.

우리는 몇만 대 전 무궁한 과거 때의 우리 할아버지 때부 터 지금 우리까지 이어오고 또 이어온 것은 생이라는 그것 이 아닌가? 우리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나와 나의 동생들 에게 그의 생이라는 것을 나누어 주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 과 같이 우리 시조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생이란 것을 부어 준 것이라 하면 또한 우리는 죽어 사라지나 우리의 생 은 우리 자손으로 인하여 계승될 것이요, 우리의 자손의 생 은 또 그들의 자손으로 인하여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우리 는 죽으나 우리의 생은 천추만만대 영겁으로 살아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인생이란 전기선줄 같고 대양의 물과 같아 전기선 줄의 한 분자로는 그것이 전기선줄인지를 모를 것이요, 대 양의 물 한 방울로는 그것이 대양됨을 아지 못하는 것과 같 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흐르는 우리 인생도 자아(自我) 하나 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자 아(自我)가 없이도 인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 가? 하였다.

이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휘적휘적 걸어간다. 해는 아주 넘어가고 전기불은 켜졌다. 바람은 우수수하게 분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죽으면 천당으로 갈 줄로 꼭 믿는다. 대리 석과 금강석으로 지은 궁궐에 가서 살 줄 안다. 그는 죽는 날 육체로부터 영혼을 떠나, 파란 무슨 정기처럼 하늘로 올 라갈 줄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의 장님처럼 믿는 천 당은 그의 마음을 한없이 기껍게 하여 주었다. 그는 합리(合 理)이든지 불합리이든지 자기가 그것을 믿음으로써 않는 안 락을 그는 벌써부터 깨달았다.

그러면 한번 사라지면 없어질 사람들이 무엇이 무엇이니 공연한 것을 알려하며 쓸데없는 근심을 하며 공연히 가슴을 답답하게 하여서는 무엇할까? 자기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회개하였다고 눈물 흘리며 바로 천당갈 줄 알게 마음이 편 안하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천당이란 안락의 이상향이 라,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가슴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천 당이 아닌가?

그러나 인생이란 영원부터 영원까지 새것을 구하고 참된 것을 구하고 아름다운 것을 구하고 선한 것을 구하여 마지 아니하였나니 우리가 지금 이상 낙토를 구하여 마지않는 것 과 같이 우리 몇만 대 전 사람들도 그것을 동경하였으며 또 한 우리 자손들도 그리 할지라.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얻지 못하고 또한 우리 선조가 얻지 못했으니 우리 자손이 또한 얻을는지 의문이라. 그러나 오늘의 문명이 예전 사람 의 한 공상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오늘의 우리는 예전 사람 에 비하여 정신으로나 물질로나 그 사람들의 공상도 못하던 처지에 있는지라. 지금 우리가 공상도 못하고 동경도 못하 는 것이 몇만만대 우리 자손대에 이 지구 위에 이루어질지 알 수 없나니, 어떠한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우리의 공상하고 동경하는 이상 낙토(理想樂土)가 또한 이 우리가 선 이 지구 위에 몇만만년 후에 이루어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면 지금 같은 문명이 일조일석에 된 것 이 아니요, 몇만만 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의 공로가 쌓이 고 쌓여서 된 것이라. 또한 우리의 공로가 한 층을 쌓음으 로 인하여 얼마간의 우리 자손의 행복이 가까워질 것이 아 닌가? 그러면 인생이란 자손을 위하여 즉 무한한 인생의 생 명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또다시 나 한 사람은 전선줄의 한 분자보다도 작고 대양의 한 방울 물보 다도 작다 하였다. 그러나 무지개의 한 방울의 물방울만 없 어도 그렇게 아름다운 빛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시간 에 살아 있는 이 인생이 없을 수가 없지 아니한가?

영철은 그와 같은 의혹에 쌓여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종현 뾰족집 일곱 점 반 종이 울고 거의 8시나 되었다. 청 년회관 대강당은 거의 다차도록 사람이 많다. 웃는 소리, 이 야기 소리, 사람의 발자취 소리, 이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뭉키어 응얼응얼하는 소리만 온 방안에 가득 찼다. 새로 들 어온 손님 하나가 교의를 덜컥 내려놓고 앉는다. 트레머리 한 어떤 학교 여학생들이 한떼 몰려들어와 여자석 맨 앞 교 의에 가 앉는다.

전기불은 때때 밝았다 컴컴하였다 한다. 양복 입고 안경 쓴 젊은 청년 하나가 문 앞에 섰다가 저쪽 강단으로 깝죽깝 죽하고 간다. 어떤 청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여자석을 바라 보고 있다. 어서 시작하라는 박수 소리가 요란히 난다.

이 혜숙도 입장권을 내고 프로그램을 받아들고 여자석 한 귀퉁이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가 다시 사면을 둘러보는 체하고 남자석을 보았다.

저쪽에 자기 오라버니와 앉은 청년을 보고 「저 청년이 김 선용이라는 청년인가」하였다.나는 그 청년의 전신을 다 보 지 못하고 자기를 한번 보지 않나 하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 지고도 자기를 볼까 겁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었다. 앞 강단 을 바라보는 혜숙의 눈앞에는 김 선용이가 아닌가 하는 청 년의 얼굴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청년은 대모 테 안경과 고운 양복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은 검고 잘생기지 못하였으며 그의 머리털은 그의 귀를 거의 덮었 다. 그리고 거치러운 수염이 그의 윗입술 위에 조금 까뭇까 뭇하게 났다.

자기가 어제 저녁에 자기 오라버니의 말을 듣고 그려 오던 청년과도 아주 같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어쩐지 실망하는 생각이 났다. 학식 많고 재주 있고 일본까지 다녀온 사람과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자기가 얼른 보느라고 잘못 보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다시 한 번 곁눈으로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 마음은 만족치 못하였다. 그리 고는 다시 그 청년의 얼굴을 아름답게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검은 얼굴은 사나이의 표상이요, 그의 텁수룩하고 귀 밑까지 덮은 새까만 머리는 문학자의 태도요, 그의 얇은 입 술은 말 잘하는 표징이요, 그의 또렷한 눈은 총명한 두뇌의 상징이라 하였다. 그리하나 그의 가슴을 못 견디게 하는, 말 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면서 그의 마음 을 끄는 무엇을 그에게서 찾아올 수가 없었다.

그는 공연히 음악회에서 그를 만났다 하였다. 도리어 서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만날 기회를 고대하면서 마음을 태웠더 라면 좋을 뻔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자기 오라버니는 무엇 을 보고 그 사람과 영원히 교제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였는 가? 어제 내가 너무 무슨 의미있게 들은 것은 너무 지나쳐 생각함이 아닌가? 하였다.

혜숙은 그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생각이 나거나 사랑하였으 면 하는 생각이 나지는 않으면서도 그와 말이나 한번 하여 보았으면 하였다. 그리고 자기 오라버니가 좋은 사람이라 한 사람이니까 어디든지 좋은 점이 있으려니 하였다. 그리 고 거죽을 보아서 아무것도 만족한 것을 찾아 내지 못한 그 는 어떻든 무슨 만족한 것을 그에게서 찾아내어 그를 그리 워하여 보기도 하고 사랑도 하여 보았으면 하기까지 하였 다. 그와 아주 안면도 없지마는 인연 있게 생각하는 것은 그때 혜숙의 가슴속에 조수가 치밀리는 청춘의 끊이지 않고 타는 열정의 불길이었다.

그는 음악회가 어서어서 끝이 났으면 하였다. 그의 가슴은 조리는 듯하였다. 음악회의 순서가 하나씩 하나씩 끝날 때 마다 그는 그 김 선용을 바라보며 자기 애인될 만한 자격이 있게 억지로 만들어 생각을 하여 보았다.

제일부가 끝이 나고 제이부가 거의 시작하려 할 때에 어떤 고운 양복 입고 하양 칼라에 자주 넥타이를 한 얼굴도 어여 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자기 오라버니에게 와서 아주 반가 이 인사를 한다. 자기 오라버니도 반갑게 악수를 하고 그 청년을 자기 옆에 앉히고 무엇이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 을 보았다.

혜숙은 가슴속으로 (옳지) 하였다.

「내가 여태껏 잘못 알았었구나.」

하였다.

「아까 그 사람은 김 선용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온 이 청년이 김 선용인가보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 오라버니가 아까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금 이 청년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을 보 고 (참으로 이 사람이지) 하였다. 그 청년의 하얀 얼굴에 까 만 눈썹이라든지 모양있게 깎은 머리라든지 전기불에 반짝 반짝하는 하얀 안경이라든지 그의 흐르는 듯한 두 어깨라든 지 때때로 경쾌하게 웃을 때마다 나타나는 상아 같은 이라 든지 이 모든 것은 혜숙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할 무슨 세 력을 가지고 있었다.

혜숙의 낙망되었던 것은 다시 소생하여지는 듯하였다. 그 리고 어서 음악회가 끝이 나서 자기 오라버니의 소개로써 그이와 인사를 하였으면 하였다. 그리고는 으레 아무 조건 도 없이 이의도 없이 그가 나를 사모하렷다 하였다. 어린 혜숙은 자기의 용모의 거만스러운 자신을 갖고 있었다.

음악회는 파하였다. 세 청년은 일어섰다. 혜숙도 자기 오라 버니를 쫓아나갔다. 그는 다시 가슴이 덜렁하고 내려앉았다.

이제는 그와 인사를 할 때가 왔구나 할 때에는 그리 속하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1분 동안이라도 천천히 나가려 하였다.

그리고는 입속으로 「처음 뵙습니다. 지는 이 혜숙입니다.

네, 안녕하십니까?」하다가는 누가 듣지나 않았나 하고 옆 의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옆의 사람은 자기의 얼굴 을 혜숙이가 너무 유심히 보니까 빙그레 웃는다. 혜숙은 자 기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듣지나 않았나 하고 얼굴이 빨개지 며 홧홧하였다.

정문을 나왔다. 거기에는 자기 오라버니와 머리털이 귀밑 까지 덮인 청년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어여쁜 청년은 있 지 않았다. 그는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있지 않았다.

(그러면 이 청년이 김 선용인가?)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수줍기도 하여 아무 소리도 없이 대 여섯 걸음 저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다가는 다시 서서 자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혜숙은 길 한옆으로, 영철과 그 청년은 길 가운데로 걸어 간다. 혜숙의 귀에는 자기 오라버니와 그 청년의 이야기하 는 소리가 들린다. 전차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달아난다.

「저것이 나의 누이동생일세.」하는 소리를 듣고 혜숙은 아주 달아나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그 청년의 대답하는 소 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전차 정류장을 채 가지 못하여 그 의 오라버니는 그에게 가까이 왔다.

「너 저이와 인사하련?」

하였다.

혜숙은 지나친 흥분으로 인하여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사람들이 보는데 어떻게 행길에서 인사를 해요? 남 부끄 럽게.」

이 소리를 들은 영철은 무엇을 깨달은 듯이,

「그래라 요 다음에 해라.」

하고 저쪽으로 혼자 가버리었다. 그리고 무엇이라 무엇이 라 하더니.

「하……」

「하……」

하고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 혜숙은 무슨 무거운 짐이나 풀어 놓은 것같이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영철과 혜숙은 전차를 탔다. 선용은 두 사람만 바라보고 서 있다. 영철은 모자를 벗어 들며

「내일 꼭 우리집에 오게. 동대문 밖, 알았지. 아까 번지를 적어 주었으니까.」

하였다. 선용은,

「응 알아, 꼭 기다리게.」하고 대답을 한다.

차는 떠났다. 선용은 저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선용은 자기 집에 돌아왔다. 납작한 초가집에 쓸쓸스럽게 닫혀 있는 대문을 들어설 때 집안에서는 답답하고도 음습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여태껏 길거리로 오며 머릿속에 그리 던 기껍고 희망있던 모든 공상의 즐거움은 당장에 사라졌 다. 그리고 자기 방에 들어가 램프를 켜놓고 파리똥이 까맣 게 묻은 천장을 쳐다보고 드러누웠을 때에는 아지 못하게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날듯날듯하였다.

나 같은 놈이 사랑이 다 무엇이냐? 하고 혼자 손을 단단히 쥐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억울한 감정이 자꾸자꾸 가슴을 메는 듯이 올라왔다. 그리고 한참 엉엉 울고 싶었다.

그는 오늘 혜숙과 만나던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혜숙이가 어찌하여 자기 오라버니가 인사하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보 는데 어떻게 해요 하더란 것이 선용은 아주 반가운 무슨 의 미있는 것같이 들리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초인사를 하는데 여러 다른 사람이 있다고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 다. 그리고는 그 속에는 무슨 아지 못할 의미가 감추어 있 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얼마쯤 마음이 기뻤었다. 그러 나 다시 자기의 처지를 생각할 때에는 그만 낙망을 하게 되 었다.

자기는 남과 같이 넉넉한 재산도 없다. 시체 여학생의 머 릿속에 그리는 모든 허영의 만족을 줄 만한 보배를 갖지 못 하였다. 만일 어떠한 여자가 지금 자기가 드러누운 방에를 들어와 보았다가는 고개를 돌이키고 달아날 만큼 지저분하 고 습기찬 방에 누워 있다. 그는 어찌하여 돈 많고 권세 있 는 집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어떠한 때는 원망스럽기도 하 고 분하기도 하였다.

그래 돈 없는 그는 따라서 구하고 싶은 학식도 구할 수가 없다. 남이 우러러볼 만한 학식을 구하기에도 남과 같은 자 유를 갖지 못한 그는 또한 여자의 따뜻한 사랑을 잡아당길 만한 학식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와 같은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 고, 더 가지지 못하는 동시에 또 한 가지 절대로 알 수도 없고 가지지도 못할 것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는 여자의 마 음을 취케 할 만한 아름다운 용모를 갖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를 아주 박명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박명을 하소연할 곳은 한 곳도 없다 하였다.

부모나 친척이나 형제나 친구나 누구에게든지 자기의 불행 을 하소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이 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용없는 것이라 하였다. 다 만 남에게 동정하여 주시오 하고 눈물을 흘리나 아무도 거 기에 참으로 동정하기는 고사하고 비웃음을 받는 것이라 하 였다. 그는 이 세상의 운명을 자기의 두 손으로 개척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다. 그리고 설고 야속하고 무정스러운 생 각이 나거든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꺼울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청춘의 타오르는 열정의 불길은 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껍고 즐겁게 청춘 시대를 꿈속같 이 지내나 자기는 그것을 얻기가 어려울 것같이 생각되었 다. 돈 없고 학식 없고 인물 곱지 못한 자기에게 어떠한 어 리석은 여자가 참사랑을 구하여 따라오리요 하였다. 그리고 옛적 소설이나 또는 전설에 불행하고 또 불행하던 청년이 어떠한 왕녀나 또는 천사같이 어여쁘고 어진 여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자기도 그러한 몸이 되었으면 하 면서도 그것은 이 시대에서는 될 수 없는 한 공상이라고 단 념하였다.

그는 자기 집이 구차한 것을 생각하고 또는 한옆으로는 자 기의 병든 어머니가 단잠을 자지 못하고 고생에 얽히어 지 내가며 온 집안 살림살이를 하여 가는 것을 볼 때에는 가엾 기도 하고 또는 불쌍한 생각도 났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 선용이나 장가를 갔으면 내가 얼마간 이 고생을 하 지 않을걸.」

하는 소리를 생각할 때마다,

「에라 이상적 아내라는 것은 다 무엇이며 신성한 연애라 는 것은 다 무엇이냐?」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골 처녀라도 데려다가 아내를 삼 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여자의 사랑이 참사랑인가.」

하였다. 세상의 학문을 많이 배우고 세상의 경험을 많이 한 여자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이상적 사랑인가 하였다. 경 박하고 뜬세상의 처세술을 잘 배운 여자가 이상적 애인이 될 자격이 있는 여자인가? 하였다. 산 곱고 물 맑은 자연 세계에서 힘없고 순결하고 단조하게 자라난 처녀의 사랑이 참사랑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하고 우리의 아버지나 어머 니나 아우나 형이나 누이나 내가 선택하여 아버지나 어머니 나 아우나 형이나 누이를 만들지 않았을지라도 끊기 어려운 정이 있는 것과 같이 아내라도 보지도 못하고 택하지도 않 고라도 정이 있으려면 끊지 못할 정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란 결코 저 사람의 인물과 학식과 성질을 다 알아 가 지고 반드시 생긴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저 사람의 소문만 듣고도 끊기 어려운 사랑의 불길이 그의 가슴을 태우며, 그 사람의 글 한 줄기를 보고도 그를 사모하는 정이 생기는 것 이라, 어찌 반드시 저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아 가지고 애 인을 만들리요 하였다. 한순간의 사랑이 참 진정한 사랑이 라도 순간을 지나면 세상의 사념이 그 사랑을 침노하는 것 이 아닌가? 하였다.

선용은 다시 영철이라는 자기의 친구하고 친한 동지의 누 이동생도 또한 자기의 오라버니 영철과 같이 이 세상의 모 든 허위와 떠나 다만 참된 것만 구하는 여자이겠지? 하였 다. 그리고 자기가 그에게 사랑을 구하면 그것을 허락하여 주겠지? 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어떻게든지 공부를 하고 책도 많이 읽어 훌륭한 책을 지어 놓으면 책장사 하는 사람들이 허리를 굽실굽실하고 와서 몇만 원의 원고료를 주 고 사갈 터이지? 그리하면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나의 애인 혜숙을 데리고 세계 일주의 대여행을 떠날 터이다.

세계 각처에서 대환영을 받아 가며 우리 두 사람은 또 다 시 없는 행복을 맛볼 터이지? 하였다.

그러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파리가 가만히 한가하게 붙 어 있는 천장을 바라볼 때에는 모든 것이 다 공상이었다.

자기 손은 빈털터리였다. 그리고 아무리 자기가 글을 잘 짓 더라도 지금 조선 사회의 정도로서 어떠한 책장사가 선뜻선 뜻 몇 만 원의 원고료를 주리요 하였다.

그러하다가는 또다시 낙망하는 생각이 났다. 혜숙도 시체 여학생이다. 아니 시체 여학생이 아닐지라도 여자는 여자이 다. 자기의 그만큼 아름다움을 갖고서 나와 같이 인물이 아 름답지 못하고 학식 없고 돈 없는 한 개 무명 소년에게 자 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랑을 줄 리가 없다. 비록 그와 같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약한 여자인 그는 세상 의 모든 것과 싸워 이길 수가 없다. 그의 사랑은 연하고 박 약한 것일 것이라 하였다.

구차한 곳에서 자라나고 부자유한 곳에서 자라난 선용의 가슴은 언제든지 지나쳐 가는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찼었 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목숨을 위하고 자기의 가 정을 위하여서는 자기의 두 팔과 두 다리가 아니면 아무도 도와 줄 자가 없는 줄 아는 그는 그리고 또 이 세상이 다만 무정한 줄만 알고 자기에게 일평생 행복을 줄 때가 없으리 라고까지 낙망을 한 선용은 아무리 청춘 시대의 타오르는 열정의 불길로 때없는 가슴을 태웠지만 자기가 선뜻 나아가 여성의 사랑을 구할 용기는 없었다. 그는 감정의 지배를 받 는 것보다 이지의 힘이 더하였다. 본래 총명하고 재주있는 그는 모든 세상의 냉정함과 무정함과 쓸쓸스러움을 맛보면 서도, 하면 되리라 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을 뿐이었다. 그 리고 젊었을 때에 눈물짓고 한숨쉬고 가슴 쓰린듯한 비애를 맛보아, 다른 철 모르고 날뛰는 사람보다 이 세상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된 것을 한옆으로 행복 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랑으로 생각하였다. 때없이 공상에 취하였다가는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었다가는 공상을 하고 하였다.

그는 내일 영철의 집에를 가면 혜숙을 보렷다 하였다. 그 리고는 다시 만나서는 어떻게 할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 러다가는 다시, 물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였다. 내가 자기 집에 갈 줄 아는 그는 가슴을 졸 이면서 고대고대하다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가슴이 덜 렁 내려앉으렷다 하였다.

그 이튿날이었다. 영철의 집에 어떤 새로운 손이 하나 찾 아왔다.

「이리 오너라.」

하는 목소리는 얄상궂고도 어여뻣었다. 영철은 대문을 열며,

「야, 이게 누구인가? 웬일인가? 이리 들어오게.」

하고 그 양복 입고 얌전하게 생긴 청년의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참 뜻밖인걸.」

하고 영철이가 방석을 내어놓는다.

「그런게아니라 우리가 어데 이렇게 만나서 재미있게 놀아 보았나? 요 몇 달 동안은 아주 서운하게 지내었으니까.」

「그것이야 무엇, 자연 바쁘니까 어데 한가하게 만날 수들 은 없었지. 자, 담배나 태게.」

하고 영철은 담뱃갑을 내어놓는다. 그 청년은 담배 하나를 피워 물고, 「그런데, 요사이는 너무 심심하겠네. 언제든지 집에만 들어앉았나?」

영철은 한 손을 고개 위에다 얹고,

「하지만 어떻게 하나, 무엇할게 있어야지. 내 언제든 하는 말이지만 중학교 졸업하고는 할 것이 있어야지. 그 머리 아 픈 소학교 교원 노릇이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돈이나 많았 으면 외국 유학이나 가야 할 터인데 나 같은 사람이야 무 엇?」

「왜? 자네쯤이야 넉넉하지? 너무 그 우는 소리 좀 말게.」

「그야 그렇지, 우리집에 우리 아버지 돈은 넉넉하지. 그러 나 그것이 내 돈인가? 나는 지금 우리 아버지의 밥 얻어먹 는 거지 비렁뱅이야.」

하고 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흔든다. 그 청년은 아주 미 안한 듯이,

「그러면 어떻게 하나 놀아서는 안될걸?」

「어떻거나 할 수 없지.」

그 청년은 무엇을 생각하듯이,

「그래서는 안되네. 가만히 있게. 내 어떻게 해봄새. 우리 아버지께 여쭈어서라도 어떻게 은행에 한자리 구해 보지.」

영철은 그렇게 시원스럽지도 않은 듯이,

「그렇게 어쭈어 보게.」

하였다.

이 청년은 백 우영(白友英)이라하는 중앙은행 사장의 아들 이다. 본래 귀엽게 길리운 사람이라 조금도 구차한 것과 부 자유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이게는 자기의 행복 을 얻기 위하여 적절히 깨닫는 요구를 알지 못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으레 젊어서 하는 것으로만 알고 또 사 회의 중요하고 제일가는 인물은 그 나라의 총리대신을 빼어 놓고는 경제계의 권세를 잡은 자기 아버지 같은 은행가밖에 는 없는 줄 알았다.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또한 예술 이 여러 가지가 다 발달되는 동시에 그 나라 민족이 문명하고 발달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 하나만 잘 발달이 되면 또한 다른 것은 자연히 거기에 좇아 오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본래 방종(放縱)한 생활을 좋아 하는 그는 경제에 대한 방면에만 전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때의 호기심에 띄어 음악도 하여 보고 테니스도 쳐봤다. 바 이올린을 손에 잡을 때에는 예술 중의 극치(極致)라 하는 참 음악을 알아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춘풍추월을 좇아 아름 다운 여자의 사랑을 맛보면서 재미있고 꿀 같은 활동사진에 서 보는 듯한 생활을 하여갈 때 여자는 피아노를 하고 자기 는 바이올린을 하며 몽롱한 세상을 지내리라는 호기의 생각 이 그의 가슴을 찌르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곳에서 여러 청춘 남녀의 친구를 모 아 놓고 뛰어다니며 테니스 장난할 것만 꿈꾸었다.

그는 며칠 전에 영철의 누이동생 혜숙을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보았다. 그리고 어제 저녁 음악회에서 영철을 만났을 때에도 또 혜숙을 본 일이 있었다.

아름답고 얌전하다는 여자란 여자는 빼어놓지 않고 쫓아다 니는 백우영은 또한번 혜숙을 보고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는 못하였다. 자기는 인물 잘나고 돈 많고 학교도 상당히 다닌 또한 풍류 남아로 어디를 내세우든지 빠질 것이 없겠 다 생각하는 그는 또한 어떤 여자든지 자기 수중에 넣을 수 가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 오늘도 자기가 영철과 같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은 동창생인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어떻게 해서든지 영철의 환심을 사서 혜숙을 좀 가까 이 해보려고 당초에 찾아오지도 않던 더구나 자기보다는 아 주 저 아래로 인정하던 영철을 찾아왔다.

그는 조금 가만 있다가 조롱 같기도 하고 웃음의 말과 같이,

「요사이 자네 매씨도 안녕하신가?」

하고 이상하게 웃음을 웃으면서 영철를 바라본다. 영철도 조금 미소를 띠면서,

「잘 있지.」

하였다.

「오늘은 집에 계시겠군?」

「그렇지 일요일이니까!」

백 우영은 한참 있다가,

「자네 누이 좀 소개하게 그려.」

영철은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조금 주저하였다. 속마 음으로 백 우영의 좋지 못한 평판 있는 것을 꺼리면서도 그 러나 어떡하랴 하고,

「그럴까?」하고 시원치 못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다가는,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좀…… 어떻게……」

「응, 알았네. 알았어. 그러실 터이지.」

하고 담뱃재를 털더니 시계를 꺼내보고,

「아 벌써 10시일세. 우리 어디로 산보나 가세그려.」

「어디로? 갈 곳이 있어야지.」

「나는 영도사(永道寺)나 가볼까 하는데.」

「영도사, 지금 아주 쓸쓸할걸. 볼 것이 있어야지.」

「그러나 갈 곳이 또 어디 있나? 일어나게. 그리고 자네 매씨께도……」

「지금은 갈 수가 없는걸뿐 누구하고 만나자고 약조한 일 이 있어서.」

「약조는 또 무슨 약조인가? 공연히 핑계를 대느라고.」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이면 누구란 말인가? 이름이 무엇이란 사람이?」

「왜 자네도 알겠네. 김 선용이라고……」

「응 김 선용이, 어저께 음악회에서 보든 그 사람 말이군 그려. 그 문학가라는 사람 말이야.」

하고 아주 냉소하는 듯 말을 한다.

「그래, 오늘 꼭 만나기로 하였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 그려」 「언제 그 사람이 올 줄 알고 기다리나? 그 사람은 내일 만나보게 그려. 무슨 급하게 할 말 있나?」

「별로이 급하게 할 말은 없어도……」

「그러면 고만이지, 내일이라도 만나서 그런 말만하면 고 만이지 무얼.」

「그래도 왔다가 헛발을 치고 가면 되겠나?」

영철은 아주 난처하였다. 백 우영이는 자꾸자꾸 그렇게까 지 재촉을 하는데 아무리 약조를 하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공연히 멀거니 기다리는 것도 무엇하고 또 백 우영이는 김 선용이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은 백 우영이가 자기를 조금 덜 친절하게 생각을 하 는가 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나자고 신신당부를 하 여 놓고 어디를 놀러갔다는 것은 친구를 너무 경시하는 것 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김 선용이는 자기를 믿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요, 백 우영이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 김 선용에게 잠시 신용 을 잃는 것은 다시 회복할 수가 있으나 백 우영이에게는 그 럴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고 모처럼 찾아온 백 우영이의 청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는 것도 안된 일이라 생각하고

「그러면 그러세. 그러나 좀 안됐는걸.」

「에, 사람도 어째 그렇게 고집불통이야. 사람이 조금 그런 수도 있지 없나?」

영철은 안방으로 건너갔다. 혜숙은 무엇인지 책을 읽고 앉 았다.

「어디 가세요?」하고 혜숙이가 영철을 바라보며 묻는다.

영도사에 놀러가자고 하니까 혜숙은 얼굴이 조금 불그레하 여지며,

「어저께 그 어른이 오신다고 하였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그러나 자꾸 가자니까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자꾸 재촉을 하는걸.」

혜숙은 다시.

「저도 갈까요?」

하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가 보련?」

「글쎄요.」

그 옆에서 바느질하던 그의 어머니가,

「가긴 어디를 가. 계집애가 미친 애.」

하며 책망을 하니까 혜숙은 어리광처럼 또는 비웃는 듯이,

「어머니는 괜히 그러시네.」

한다. 영철은 재촉하듯이,

「어서 옷 입고 나오너라 가려거든.」

12시나 거의 되어 선용은 동대문 안에서 전차에 내렸다.

그리하고 여러 가지 호기심을 가지고 영철의 집을 향하여 온다. 그는 다른 것보다 자기의 의복이 너무 더러워 보이지 않나 하고 아래위를 훑어 보았다. 그리고 구두에 먼지와 흙 이 너무 많이 붙은 것을 답보로 하듯이 탁탁 털었다. 옷고 름을 다시 고쳐 매었다. 그리고 오늘은 꼭 혜숙이도 자기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혜숙이가 나를 보면 반가와 맞으려다가 주춤 하고 물러서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선 뜻 나와 맞아주는 것보다 부끄러워 숨는 것이 더 귀엽고 말 할 수 없는 그리웁고 사랑스러운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는 다시 자기 얼굴과 체격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사 람이 어여쁘고 남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얼굴과 체 격이 잘생긴 데도 물론 있지마는 그중에 어떠한 아름다운 점이 있어서 남의 사랑을 끄는 것이라 하였다. 온 세상 사 람이 다 어여쁘고 다 잘생긴 것이 아니지만 서로 애정이라 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미인 일지라도 파경의 눈물을 자아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얼 굴도 그리 잘 못생기고 학식도 그리 없는 우스운 남자일지 라도 그를 위하여 자살까지 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하고 그 미점이라는 것은 자기도 아지 못하는 것이요, 다만 어떠한 사람이라야 그 미점을 찾아내는 것이 다. 자기의 얼굴이 비록 자기가 석경을 놓고 들여다보아도 자기에게는 불만을 줄지라도 남을 못 견디게 할 만한 무슨 매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아무리 치장을 하고 모양을 낼 지라도 남을 잡아다니는 그러한 힘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이라. 나도 또한 혜숙의 마음을 잡아다닐 만한 무슨 매력을 가졌는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모든 미점을 찾아보았다. 그 리하나 그리 신통할 것은 없었다. 다만 머리가 까맣고 입술 이 얇고 눈썹이 수타할 뿐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명함에 쓴 김영철의 집 번지를 꺼내 들었 다. 그리하고 차례차례 번지수를 찾아보았다. 이 골목 저 골 목으로 돌아다니다가 다시 큰 행길로 나왔다. 똑 영철의 집 번지만 없다. 그는 아마 집도 못 찾나 보다 하였다. 그러다 가는 <될 말이냐 찾아야지> 하였다. 그는 다시 행길 모퉁이 에 있는 반찬가기에 와서 물었다.

「말씀 좀 여쭈어 보겠읍니다.」

가게 주인은 쇠고기를 달다가 자기는 보지도 않고

「네 무슨 말씀이오?」

하고는 다시 하나 둘 하고 저울을 센다. 선용은

「여기 이 영철이라는 사람의 집이 어데인지 아십니까? 이 근처라는 데 암만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어요.」

가게 주인은 자기 할 것을 다 하고 나서,

「이 영철이, 이 영철이, 많이 들은 듯한데 알 수 없는걸요.」

한다. 선용은 속에서 화가 나며 속마음으로, (제기 얼핏 대답이나 하지 남이 답답이나 아니하게.) 하고는 그래도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하고,

「조금도 모르시겠어요?」

「네 알 수 없는걸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지금 하는 것 없지요. 제 집에서 그냥 놀지요.」

「네……」

한참 생각하다가,

「젊은 사람이지요?」

한다. 선용은 얼른 반가운 듯이,

「네, 네, 지금 스물 서넛밖에 안된……」

「네, 그리고 누이동생이 있고요, 학교에 다니는.」

「네, 바로 맞췄읍니다.」

그 옆에 있던 어떤 노인 하나가 한참 두 사람이 수작하는 것을 듣더니 가게 주인에게 향하여

「누구 집? 계동집 말인가?」

한다.

인은 조금 멸시하는 듯한 웃음을 띠고,

「네…… 저기 저 집요.」

하고 바로 바라보이는 초가집을 가리킨다. 선용은,

「네, 고맙습니다.」

하고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 그 집으로 향하여갔다.

선용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하였다. 이리 오너라 하자 니 친한 친구의 집에 너무 저어한 듯하고 영철이라고 부르 자니 한 번 와 보지도 못한 집에 서투른 듯하기도 하다. 그 러나 어떻든 대문간에 가 서서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였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다. 선용은 얼핏 뛰어나왔 다. 그리고 잘못 들어오지 않았나 하고 문패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영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는 다시 안심을 하고 문으로 들어서서,

「이리 오너라.」하였다. 또 아무 소리도 없다. 그래 그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러한가 하고 기침을 한번 하 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리 오너라.」하였다.

그때야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혜숙의 어머니가 나오며,

「누구를 찾으세요?」

한다. 선용은 모자를 벗어들고,

「네, 여기가 영철의 집인가요?」

「그렇소. 그러나 지금은 없는걸요.」

선용은 깜짝 놀란 듯이,

「네? 없어요? 오늘 꼭 만나자고 하였는데……」하였다.

혜숙의 어머니는

「당신이 김 선용이라는……」

하고 묻는다.

「네. 제가 김 선용이올시다.」

「그럴데 영철이가 나갈 때에 이것을 오시거든 드려 달라 고 합디다.」

하고 종이에 무엇 쓴 것을 내어 준다. 선용은 무엇인가 하 고 얼른 받아 보았다. 그리고는,

「네, 알았습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그 집을 나섰다. 그는 히적히적 걸어오며 낙망하고 실망하는 생각이 그의 가슴에 꽉 들어찼다.

「이런 제기.」

하며 혼자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는,

「나 같은 놈이 바라고 믿은 것이 잘못이지.」

하였다.

여태껏 애를 쓰고 애를 써 찾아오니까 허탕이라. 그리고 혜숙이가 정말 나를 보고 사랑할 마음이 났더라면 오늘 자 기 오라버니를 좇아 영도사에 가지 않고 나를 기다렸을 것 이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자기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이지 하였다. 그리고는 또 다 시 억울하고 분한 정이 가슴을 메어 마음껏 시원하게 울고 싶었다. 그가 아까 그 집 가리켜 주던 가게 앞을 지날 때에 는 그 가게 주인이 유심히 자기를 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너는 쓸데없다. 벌써 백 우영이라는 청년에게 빼앗겼다.」

하는 듯하였다. 그는,

「다 고만두어라. 우리 집에 가서 책이나 보겠다.」

하였다. 그리고 달음박질하여 다시 동대문 전차 정류장에 와 서서 전차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청량리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디 그래도 영도사까지 가볼까?」

하였다. 가면 꼭 만나렷다 하였다. 그러다가는 고만두어라.

만나면 무엇하랴 하였다. 그래도 어쩐지 그리로 가보았으면 하는 정은 그치지 않았다. 가보리라 하였다. 그러다가는 가 서 만일 혜숙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면 어찌하나 하였다. 고 만두어라.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 내가 스스로 여자의 사 랑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전차 오는 것 을 바라보았다. 전차 하나는 가득 차도록 만원이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요 다음 차를 타리라 하 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영도사편을 바라볼 때에는 말할 수 없이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에라 어떻든지 가보리라. 혜숙 은 어찌되었든 영철이를 붙잡고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느냐 싸움이라도 한번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청량리 차가 오나 안 오나 보았다. 5분 안에 전차가 오면 그 전차를 타고 영 도사로 가고 그렇지 않고 5분이 넘어도 전차가 오지 않거든 바로 집으로 가리라 하였다. 그러나 어서 어서 전차가 왔으 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에라, 전차도 오지 않는구나.」

하고 종로로 향하는 전차를 타려 할 때에 땡땡땡 하고 아 주 기껍게 땡땡대는 조그마한 전차가 저쪽 청량리편에서 온 다. 선용은 어떻게 기쁜지 몰랐다. 다만 그 전차가 정거하기 를 기다려 타면서,

「아마 나에게 이제부터는 분명히 개척되나보다.」

하였다.

선용은 영도사 들어가는 어귀에서 내렸다. 쓸쓸스러운 이 가을에 영도사들은 무엇하러 왔소? 하였다. 그리고는 백 우 영이라는 청년은 은행가의 아들이니까 나와 만나자고 그렇 게까지 신신당부를 하더니 그것도 불구하고 돈 많은 놈을 좇아서 더구나 자기의 누이동생까지 데리고 쫓아 나왔구나?

하였다. 그러다가는,

「에, 영철이까지 그럴줄은 몰랐는데……」

하였다. 그리고 내가 구차하고 비렁뱅이처럼 그놈하고 재 미있게 노는데 갈 것이 무엇인가, 도리어 냉담하고 경멸히 여김이나 당하지 아니할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에라 도로 돌아가겠다.」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도,

「아니 아니 내가 오해인지 모른다. 영철은 그와 같은 사 람이 아니다. 영철의 말을 듣지 않고는 이번 일의 시비를 알 수 없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귀퉁이에서는 시 기와 불안이 자꾸자꾸 일어났다.

남녀 대장군이 눈깔을 부릅뜨고 섰던 곳을 지나 정전 앞다 리를 건너섰다. 그리고 사면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 느 곳에 영철의 일행이 있는지를 아지 못하였다. 그는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었다. 그러다가 아마 다녀갔나보다 하고 이왕 왔으니 오래간만에 절 구경이나 하고 가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혼자 대웅보전 앞에 가서 모자를 벗고 서서 들여 다보았다. 그 모자를 벗는 것은 결코 선용이가 불전에 와서 만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회당?사당?신사 같은 옛적 의 위대한 공로를 이 세상에 끼친 사람의 기억을 있으키는 곳에 가서는 반드시 모자를 벗어 들었다.

그것은 다만 썩어져 벗어져 몇천 년 몇백 년의 길고 긴 세 월을 지내었을지라도 변치 않고 이어오는 그의 정신을 존경 히 여김이었다. 그가 높다란 돌층계를 내려오려다 선뜻 저 쪽을 바라보니까 거기 영철이가 백 우영이와 자기 누이동생 과 서 있었다. 선용의 가슴은 부질없이 뛰며 그쪽으로 달음 질하였다.

「이 영철군.」

하고 반가이 손을 내밀었다. 영철은 어찌나 의외요 또 반 가운지 한참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니, 이게 누구인가. 하하하, 어떻든 잘 왔네.」

하며 유쾌하게 웃는다. 그 옆에 섰던 혜숙은 악 하고 반가 운 듯이 한 걸음뒤로 물러서다가 다시 멈칫하고 섰다. 두 눈동자가 반갑게 반짝거리며 선용을 바라본다. 「그러나저 러나 사람이 그렇단 말인가?」

하고 원망하듯이 영철을 바라보는 선용은 지금까지 영철을 만나기만 하면 주먹이라도 들고 한번 실컷 때려서 속이나 시원하게 하리라 하던 감정은 사라지고, 몇 해 동안 이어오 던 그리운 우정이 갑자기 치밀어올라오며 또한 영철의 유쾌 하고 반갑게 웃는 것과 영철의 누이동생 혜숙이 또렷하고 영롱한 두 눈으로 즐겁게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모 든 불평이 일시에 사라졌다.

「용서하게, 하하하. 어찌하나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을.」

하고 항복하는 듯하고도 우정이 뚝뚝 떨어지게 자기에게 청하는 그것을 본 선용은 더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그런데 갑자기 영도사는 웬일이야?」

하고 아주 침착한 듯이 말을 한 선용은 곁눈으로 혜숙의 서 있는 아름다운 몸맵시를 바라보았다. 혜숙은 이 소리를 듣고 그 옆에 서 있는 백 우영을 한번 쳐다보고 <이 사람이 오자고 하여서 하는 수 없이 왔다>는 듯이 변명을 하려는 눈치를 보이려 하며 한옆으로는 약속까지 한 당신을 기다리 지도 않고 온 것은 다 이 사람의 탓이라는 듯이 미안해하는 점이 그의 또렷한 두 눈을 싸고 돈다. 그리고는 다시 <어서 대답을 하여 주시오>하는 듯이 영철을 바라본다. 영철은,

「그런게 아니라……」

하고 쓸데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아니할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웃으면서 백 우영을 탁 치며,

「이이는 나하고 친한 친구인데 오래간만에 만나서 바람을 쐴 겸 안될 줄 알면서 먼저 오게 되었네.」

하다가 깜짝 놀란 듯이,

「아! 참, 두 사람이 인사나 하고 지내지.」

하고 선용을 백 우영에게 소개를 하며,

「이 사람은 나의 친구인데 일전에 일본서 돌아와서……」

채 영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용은 모자를 벗으며,

「참 뵈옵기는 일전에 한번 뵈었어도 인사는 못 여쭈어 서…… 저는 김 선용이올시다.」

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백 우영의 눈에는 말할 수 없이 오만한 빛이 보였다. 그는 김 선용이를 자기보다 학식이 많은 사람으로 보기는 하면서 도 그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었다.

그리고 자기가 학식상으로 김 선용이만 못한 것을 깨달을 때에, 자기의 품위를 높이기 위하여 자기의 어깨와 고개를 높이 들고 자기 집 재산 많은 것을 빙자하여 사정없이 김 선용이를 깔볼 수밖에 없었다.

「네, 나는 백 우영이오. 안녕하시오?」

하고 허리를 구부리는 체 만 체하였다. 그리고는 혜숙을 향하여

「시장하시지요?」하였다. 혜숙은,

「관계치 않아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혜숙의 숙인 머리는 귀밑 하얀 살이 불그레하게 타오른다.

선용은 그 타는 듯한 살빛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부드러 운 정을 깨달으면서도 백 우영의 거만한 행동과 또한 자기 와 같이 혜숙과 수작할 수 있는 행복자이다 하는 것을 보이 려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 되지 않고도 질투스러웠다.

선용은 혜숙이라는 여성 앞에 서 있는 공연한 불안으로 인 하여 나는 부질없이 수줍은 생각을 억지로 참으면서 영철을 향하여,

「영철군, 나는 다시 일본으로 가려 하네.」

하며 감개 무량한 두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영철은 고개를 번쩍 들어 선용의 신산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언제?」

하였다.

「모레쯤 갈 테야.」

「왜 그렇게 속히 가나?」

「그런 사정이 있어서.」

하고 선용은 발끝으로 땅을 판다. 그리고는 다시, 「암만 하여도 가보아야 하겠어. 여기 와보니까 조금도 있을 재미 가 없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잠깐 다녀가려 한 것이니까.」

선용의 말소리에는 모든 실망과 비애의 그늘이 엉키어 있 었다.

「그러면 며칠날쯤 떠나나?」

「내일은 조금 준비할 것도 있고 하니까 모레 아침쯤 떠나 게 되겠지.」

「무어야? 왜 그렇게 속하게 떠나. 더 좀 놀다 가지. 나하 고도 오래간만에 만나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보지 못하 고…… 그것 안되었네…… 며칠 더 있다 가게 그려.」

「아냐, 조금 더 있으려 하여도 있어서 쓸데가 없어. 얼핏 가서 아침마다 뛰어다니는 것이 상책이야.」

하고 뛰어다닌다는 말이 혜숙에게 좋지 못하게 들리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혜숙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학자가 없어 일본서 아침이면 신문을 돌려 몇 푼 되지 않 는 삯전을 받아 공부를 하는 그는 그와 같은 말을 남에게 하는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니나 혜숙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웬일인지 부끄러웠다.

한옆에 서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백 우영은 아주 심 심하고 무취미하여 두 사람의 말을 가로막으며,

「여보게 시장하지 않은가? 밥 먹으러 가세 그려.」

하며 헉대를 졸라맨다. 선용의 말만 유의하여 듣던 영철은,

「그렇지만 간들 고생밖에 더 되나?」

하고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있다가

「어떻든 내일이라도 또 만나서 이야기하세.」

하고 백 우영의 말에는 대답도 없이 선용이와 이야기만 한 다. 백 우영은 자기의 말을 영철이가 시원하게 듣지도 않고 선용이하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한옆으로 화가 나지만 억지 로 치밀어오는 감정을 참고 혼잣말 같이,

「아이구 나는 퍽 시장한데.」

하고 좌우를 둘러본다. 영철은 이 소리를 듣고야 겨우,

「시장해? 그러면 무엇을 좀 먹어야지.」

하였다.

「그러면 내려가 보세.」

「글쎄, 가볼까?」

이 소리를 들은 선용은 영철의 손을 잡으며,

「인제 나는 그만 가겠네.」

하였다.

선용의 마음에는 어쩐지 여기 있는 것이 마음에 좋지 못하 였다.

세 사람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훼방하러 온 것 같기도 하 고, 노력을 먹겠다는데 주저주저하고 섰는 것은 무엇을 얻 어 먹으려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있기가 싫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이 자리를 떠나야 할것이라 하였다. 자기가 없어야 백 우영의 마음도 편하고 좋겠지마는 자기의 마음이 더 편 하겠다 하였다. 여기 있어 마음을 태우는 것보다 집에 가서 드러누워서 혜숙이나 백 우영을 눈 딱감고 보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그렇게 속하게 돌아 섰을까? 그는 다만 자기의 간다는 말을 듣고 섭섭해하는 듯 이 바라보고 서 있는 혜숙만 쳐다보았다. 영철은,

「무엇이야? 가다니 이게 말인가 무엇인가? 여기까지 왔다 가 그대로 가?」

하며 조롱하듯이 싱그레 웃으며 선용을 바라본다. 선용은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아냐, 가보아야 하겠어. 무슨 준비할 것도 좀 있고……」

하며 붙잡으려는 손을 뿌리치려 한다. 영철은,

「무슨 준비가 그리 많아서, 자! 오늘 이렇게 만나 놀면 또 언제 만나 놀 기회가 있을는지 알 수 없으니 놀다가 같이 들어가세 그려.」

하고 붙잡고 놓지를 않는다. 옆에 섰던 백 우영도 선용이 가 갔으면 해주겠다 하면서도

「왜 가세요? 같이 놀다 가시지요」

하였다. 선용은 다만,

「네……」

하였다. 영철은 선용이가 으레 가지 않을 것으로 인정한 듯이 백 우영을 향하여,

「어서 가세.」

하며 밥 시켜 놓은 중의 집으로 향하여 내려가려다가 자기 곁으로 가까이 오는 자기 누이 숙을 보고야,

「아차 내가 잊어버렸구나!」

하며 멈칫하고 선다. 세 사람도 따라서 멈칫 하고 서며 일 제히 시선을 영철이에게 향한다.

「무얼 인사할 것까지도 없지. 그만하면 알 터이니까.」

하고,

「자, 내 누이동생하고 알아나 두게.」

하고 선용에게 혜숙을 가리켜 소개하며 또다시 혜숙에게 향하여,

「이이가 선용씨란다. 요 다음부터라도 인사하고 지내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의 얼굴은 연지빛같이 붉어졌 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어디로든지 뛰어갈 듯 이 몸을 오므려뜨리고 섰다. 선용은 다만 의미있는 웃음을 빙그레 웃으면서 주저주저하고 바른손으로 머리 뒤를 쓰다 듬으며 영철과 혜숙을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백 우영은 아름다운 혜숙, 구슬같은 혜숙을 선용에게 소개 를 하는 것이 질투스럽기도 하고 또한 약한 군사가 강한 대 적을 만한 것 같이 자기의 영유물을 빼앗기지나 아니할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나서 좋지 못한 얼굴로 바람에 흔들리 는 소나무 끝만 바라보고 섰었다. 선용과 혜숙은 감히 서로 바라보지를 못하다가 영철이가,

「어서 가자.」하며 가기를 재촉할 때에 선용에게 길을 사 양하느라고 고개를 들어 선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혜숙은 다만 그 가을 물 같은 두 눈으로 선용의 영롱하게 광채나는 눈을 바라보고서, 그 눈에서 번득거리는 광채가, 자기의 얼 굴 위에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던져 줄 때 그는 얼핏 두 눈을 깔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혜숙은 영철의 앞을 서서 내려간다. 으스스한 초가을에 떨 어져 나부끼는 누런 갈잎이 시들어져 가는 풀잎 위에서 부 스슥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산길을 내려갈 때, 혜숙의 마음 은 웬일인지 그리 기쁘지도 못하고 그리 처량한 기분도 아 니고 다만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그의 온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혜숙은 어제 저녁에 선용을 청년회 음악회에서 만나 본 후 로부터 공연히 마음 한귀퉁이가 빈 듯하여 부질없이 가슴속 이 미안하여 못 견디었다. 자기가 자기 오라버니에게 이야 기를 들으면서, 자기 머릿속에 그리어 본 청년과는 아주 다 른 내용을 보았을 때에 어린 혜숙의 마음도 낙망이 된다 함 보다도, 무슨 요술을 보는 것같이 이상하였다. 그러나 김 용 은 김선용이다. 자기 오라버니가 칭찬하는 김 선용은 얼굴 검고 머리 길고 아무렇게나 지은 조선옷을 입고 시골 냄새 가 도는 보기에 아름답다 할 수 없는 청년이다. 혜숙은 백 우영과 김 선용을 많이 대조하여 보았다. 백 우영의 인물 곱고 맵시있는 것을 바라볼 때 도리어 백 우영이가 김 선용 이었으면 좋을 걸 하는 생각이 자꾸 자꾸 났다.

어제 저녁에 백 우영이를 김 선용으로 보았다가 실망한 혜 숙은 다만 두 사람을 대조해 볼 때마다 마음 가운데 무슨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공연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혜 숙은 아직까지 세상의 쓰린 맛을 많이 못본 갓 피려는 백합 꽃 같은 처녀이다. 길거리에 오고가는 행인을 누구든지 보 고 웃는 순결한 꽃이다. 아름다운 꽃 향내를 누구에게든지 가림없이 전파하여 주는 어여쁜 꽃이다. 그의 작은 가슴을 태우고 넘쳐흐르는 붉은 정열은 어떠한 젊은 청년이든지 보 기 싫게 보지는 않게 하였다.

그의 마음은 바람 부는 대로, 해롱거리는 것같이 핀 꽃과 같이 백 우영의 어여쁜 목소리와 어여쁜 표정이 그의 마음 을 도둑질하려 할 때, 그의 끓는 피는 그를 위하여 흘렀으 며 그의 정서는 거미줄같이 백 우영의 정신에 얽히었었다.

그러다가 다시 김 선용을 바라볼 때에는 백 우영이의 그것 과 같이 아름답고 얇고 가늘고 부드럽고 반쯤 사람의 정신 을 녹이는 그것과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자기의 기억 속에 서 노래부르고 있는 자기 오라버니의 칭찬하는 소리가 선용 의 얼굴에 장래의 행복을 그리어 놓았으며, 미래의 영화를 그리어 놓았으며 또는 모든 결점을 흐르는 구름같이 차차 차차 미화(美化)하고 말 적도 없지 않고 있었다.

영철은 앞장을 서서 내려가며,

「혜숙아, 너 이런 곳에 처음 왔지?」

하고 반쯤 멸시하는 듯한 웃음을 웃으매, 혜숙은,

「왜요? 올 봄에 학교에서 화계사도 갔다왔는데요.」

하고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듯이 비웃는 웃음으로 자기 오 라버니를 바라볼 때 연분홍빛이 엷게 도는 두 뺨 위에 어여 쁜 우물이 쏙 들어간다.

선용은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어여쁨을 깨달 았다. 그 회오리바람 같은 혜숙의 뺨 위에 쏙쏙 들어가는 우물 속으로 자기의 모든 전신을 녹이어들이는 듯이 그의 마음을 간지를 때 그는 다만 짜릿한 혈조(血潮)가 그의 심장 속에서 가늘게 울 뿐이다.

네 사람은 방에 들어앉았다. 삼물장삼의 어두운 냄새가 도 는 승려의 방에서 세속 사람의 발 그림자가 쉴새없이 스쳐 나갈 때마다, 신화(神化)한 종교는 점점 인간화가 되어 세상 티끌, 인간을 멀리한 옛적 사찰에는 손때가 묻은 돈 조각 소리가 부처님의 귀를 듣기 싫게 하며, 난행과 금욕으로 청 정을 일삼는 한문(閑門) 옆 갈대밭 속에서는 인간의 성인 승 려의 굳세지 못한 마음을 꾀어 박약한 신앙을 얼크러 뜨려 버린다.

밥상을 갖다놓았다. 영철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 밥을 권하고 자기는 먼저 술병을 들었다. 술을 좋아하는 영철은 자기가 먼저 한 잔을 따라 백 우영에게 권 하며,

「자, 한잔 들지!」

하였다.

혜숙의 어여쁜 눈살은 술 권하는 자기 오라버니를 바라보 며 얄상궂게 찡그러졌다. 그리고 대리석의 조각 같은 가늘 고 흐르는 듯한 손으로 밥공기를 들고 젓가락을 집어 한 젓 가락 떠서 터질 듯한 연지 입술을 벌리고 가만히 백설 같은 밥을 넣었다. 그리고는 아주 가만히 오물오물 씹었다. 그 밥 을 씹을 때마다 아까 그 웃을 때 들어가던 두 뺨의 우물이 선용의 마음을 스며들도록 잡아당긴다.

「어서 먼첨 하게.」

하고 영철의 권하는 술을 사양하다가 다시 선용을 가리키며,

「선용씨 먼저 드시지요?」

한다.

영철은,

「선용이는 먹을 줄을 몰라.」

하며 우영에게 권하니 선용은,

「저는 먹을 줄을 모릅니다.」

하고 밥 한 젓가락을 뜨다가 백 우영을 바라보며 사양을 한다. 우영은 하는 수 없는 듯이 술 한 잔을 받아들며 혜숙 을 사랑에 취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실례합니다.」

하고 술을 마시려 하니까, 혜숙은 입에 넣으려 하던 젓가 락을 다시 꺼내며,

「관계치 않습니다.」

하고 다시 입을 벌리고 뜨거운 밥을 혀 위에다 올려놓고 바람을 들이불면서 뱅뱅 돌린다. 혜숙은 자기 오라버니의 술 먹는 것이 언제든지 좋지 못한 줄 알았건만 그것을 말리 지 못하다가 선용의 술 안 먹는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순 결하고 얌전해 보였다.

선용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 에게 떠달라지를 못하고 자기가 밥 담은 양푼을 잡아당기었 다. 그러할 즈음에 영리한 혜숙은 얼른 선용의 손에 쥐어있 는 밥공기를 잡으며,

「인주세요.」

하며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선용은 미안한 듯하고도 또는 혜숙의 행동이 무슨 의미있는 듯하기도 하여,

「안녜요, 제가 떠 먹지요.」

하였다. 그러나 혜숙은

「이리 주세요.」

하고 공기를 뺏어다가 주걱을 들어 밥을 푼다. 고개를 숙 이고 눈을 가늘게 떠서 손에 든 그릇을 내려다볼 때 한 가 닥 두 가닥 앞머리가 깜박깜박 하는 속눈썹 위에서 흩날릴 때, 선용은 사랑의 이슬이 그 눈썹 위에서 굴러다니는 듯하 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꽂은 핀이나 그의 가슴을 가볍게 매어논 저고리 끈이나 그 허리를 두른 치마의 주름살이나, 그의 어여쁜 치맛자락을 볼 때 혜숙의 사랑 묻은 손이 그의 까난 머리털을 얽었을 것이며 그의 가슴에 사랑의 매듭을 매었을 것이며, 치마의 주름살의 사이사이마다 사랑의 냄새 가 흐를 것이며 치맛자락이 그의 종아리를 싸고 돌 때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냄새가 청춘의 가슴을 얼마나 취하게 하였 으리요 하는 생각이 났다.

혜숙은 밥을 떠서 선용을 주었다. 선용은 그것을 받을 때 사랑을 담은 무슨 선물을 자기에게 바치어 주는 듯이 즐거 웠다.

영철과 백 우영은 술이 취하였다. 때없이 농담 섞은 담화 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다. 우영은 가끔,

「나는 어떠한 여자든지 나의 이상적 아내가 아니면 사랑 하지 않는다.」

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는 게슴츠레한 눈은 뚫어질 듯이 혜숙을 바라본다.

선용은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었다. 그리고 떠들며 이야 기하는 영철과 백우영을 바라보았다.

혜숙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벌떡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간 다. 영철은 다만 무심히 쳐다보며,

「어데 가니?」

하였다.

「저 손 좀 씻고 올께요.」

하며 허리를 잠깐 숙이고 선용의 앞을 지나간다. 혜숙의 부드러운 치맛자락이 가벼운 공기에 흩날릴 때 향긋한 냄새 가 선용의 감정을 녹이는 듯하였다.

혜숙이 나간 뒤에는 웬일인지 선용의 마음이 쓸쓸하였다.

적적한 산 속에 홀로 앉은 것 같이 적적하였다. 자기 가슴 한 귀퉁이가 빈 것같이 공연히 처량하였다. 선용은 혼자 먼 산만 바라보며 멀거니 앉았었다. 그리고 혜숙의 모든 행동 이 자기에게 무슨 뜻깊은 정을 던져 주는 것 같아서 한옆으 로 마음이 좋기는 하다가도, 또다시 그렇지 않다 하는 회색 의 실망이 그의 따뜻한 정열을 꺼버리려할 때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며 속마음으로 혼자 부르짖었다.

(아! 나는 어찌하여 열정의 핏결이 타오르는 청춘이 못 되 는가?) 하였다.

(나의 가슴은 어찌하여 대담히 그 앞에서 자백하지를 못하 는가?) 하였다.

(아, 나는 어찌하여 청춘을 청춘답게 지내지를 못하나.) 하였다.

(청춘이 되어라. 새빨간 피 있는 열정의 사람이 되어라.) 하고 혼자 자기의 마음을 독려시키었다. 어려서부터 빈곤 에 쪼들리고 실망에 헤매던 선용의 가슴속에도 어찌 뜨거운 사랑이 없었을 것이며 어찌 정의의 눈물이 있지 않았으리요 마는 너무 맵고 쓰린 빈곤과 낙망은 그의 모든 감정을 소금 으로 절이는 것처럼 절이어 버리었다.

그는 혜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나 혜숙은 들어오지를 않 았다. 선용은 문 밖에 나간 혜숙의 환영이 자기를 잡아당기 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혜숙은 보이지 않았다. (혜숙은 어데로 갔는가?) 그는 이리저리 찾았으나 만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혜숙 을 찾아보리라 하였다. 찾아가는 선용의 온몸으로는 무슨 강대한 세력이 그의 피를 식혀 버리도록 쫙 흘렀다.

그가 시냇물이 맑게 흐르는 곳까지 왔을 때였다. 바로 자 기 파에는 혜숙이 손을 씻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결심은 한 꺼번에 풀어지며 공연히 가슴이 떨린다. 혜숙은 자기를 보 았는지 못 보았는지 보고도 못 보는 체하는지 다만 손만 씻 고 있었다. 선용은 그 손 씻는 것을 보고서는 다만 멀거니 서 있다가 기침을 한번 하고,

「무엇을 하세요?」하였다.

「네, 손 좀 씻어요.」

깜짝 놀란 혜숙은 선용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소리가 없다.

사면은 고요하다. 한적하고 따뜻한 침묵 속을 꿰뚫고 지나 가는 시냇물의 종알대는 소리가 두 사람의 붉게 타는 감정 을 구슬같이 꾸미고 지나갈 뿐이요, 아무 소리가 없다. 두 사람의 피부 밑으로 스며흐르는 정의 핏결이 두 사람의 귀 밑에서 속살거리는 듯하였다. 혜숙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선용을 볼 때 웬일인지 미안한 듯하여 그 미안한 침묵을 깨 뜨리고,

「일본을 가세요?」

하였다. 선용은 이 말을 듣고서 자기의 충정이 혜숙의 마 음에 울림같이 기뻤었다.

「네.」 「그러면 언제쯤 떠나세요?」

「모레쯤 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언제쯤 오시나요?」

선용은 아주 비창한 목소리로,

「그것은 가보아야 알겠지요. 아주 못 오게 될는지도 알 수 없지요.」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의 마음은 무슨 처량한 음악을 듣는 듯하였다.

「그러면 또 만나 뵙지 못하게요?」

하며 혜숙은 섭섭한 눈으로 선용을 바라보았다. 선용의 마 음은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만한 신앙을 일으켰을는지 다만 눈물이 스미는 듯한 어조로,

「네, 사람이 살아 있어 만나려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 나겠지요.」

이 말을 한 선용의 가슴은 시원하고도 부끄러웠다. 자기의 마음을 혜숙에게 알릴 방법을 아지 못하다가 의외에 그랬는 지 충동으로 뛰어나와 그랬는지 어떻든 뜻있는 말을 전한 선용의 마음은 혜숙의 귀에까지 뜻있게 들렸을 것이며, 혜 숙의 어린 마음에 그 무슨 반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하 면서도 그 무슨 의문이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혜숙 은 다시 말을 고치어,

「그러면 또다시 이렇게 같이 노시지도 못하시겠지요?」

하며 손수건만 가는 손가락에 홰홰 감는다.

「가는 사람에게 이와 같이 재미있는 기회는 또 있지를 않 을 테지요.」하고 선용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가시지 마시지요.」

하며 혜숙은 선용의 눈물날 듯한 두 눈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가야 해요. 가지 않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저는 가야 할 사람이에요.」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은 처량한 두 눈으로 구슬같이 흐르는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어째 가신다는 말 들으니까 저의 마음은 눈물이 날 듯해요.」

하였다. 선용은 달려들어 끼어안고 실컷 울고 싶도록 혜숙 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선용의 목소리는 떨리고 힘이 있었다.

「저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까지 혜숙씨가 생각하여 주시 니, 저는 영원토록 잊을 수가 없겠지요.」

「저도 어쩐지 오늘 이 자리를 영원히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소리를 들은 선용은 다시 산 듯하였다. 그는 한참 있다 가 주먹을 조금 힘있게 쥐고,

「저와같이 불쌍한 사람도 혜숙씨는 잊어버리지 않으실는 지요?」

혜숙은 그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네.」

하고 고개를 들며 눈을 크게 떠서 선용을 바라본다. 선용 은 다만 혼잣말같이, 「불쌍한 사람의 두 눈이라고 차디찬 눈물이 흐르지는 않겠지요.」

하였다.

혜숙은 말뜻을 몰랐다. 다만 슬픈 소린가보다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간단없이 날뛰는 뜨거운 감정은 어느 사이 에 조화를 얻고, 융화가 되어 그 무슨 부끄러움이나 그 무 슨 수줍음은 다 없어지고, 어쩐지 그립고 다정한 공기가 그 두 사람을 따뜻하게 싸고 돈다. 선용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였다.

혜숙은 모든 행동, 모든 표정, 모든 말이 하나도 자기를 사 랑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하여 보였다.

그리고,

「어째 당신의 말을 들으니까 나의 마음도 눈물이 날 듯해요.」

하던 것과,

「저도 어쩐지 영원히 이 자리를 잊어버릴 수는 없겠지요.」

하던 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심현(心鉉)에 뜻깊은 곡조를 아뢰어 주는 듯하였다.

선용은 주저주저하다가,

「혜숙씨.」

하고 가만히 있었다.

혜숙의 귀에는 선용의 말소리가 너무 가늘고 부드러워서 들리는 듯 마는 듯하였다.

「……」 그래 아무 소리도 없이 두 눈을 반짝반짝하며 선 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용은 또다시,

「혜숙씨.」

하였다. 어쩐지 그 선용의 부르는 말소리는 혜숙의 귀밑에 부끄럼을 속삭이는 듯하여,

「네.」

하고 고개를 숙여 땅 위에 반짝거리는 모래만 하나 둘 세 었다.

「혜숙씨의 고마운 마음을 저는, 또다시 혜숙씨를 못 뵈게 되더라도 저는 잊지 않을 터이예요.」

혜숙은 다만,

「저도 선용씨를 잊지 못하겠어요.」

이러한즈음에 마침 영철이와 백 우영이 술이 반쯤 취하여 나오다가 이것을 보았다.

영철은

「선용이 무엇을 하나, 아무리 기다려도 들어와야지, 하하하.」

이 소리를 듣는 혜숙은 자기 오라버니에게 달려들며,

「오라버니!」

소리를 지르고 반가와 그리하였는지 부끄러워 그리하였는 지 어리광처럼 그의 팔을 붙잡으며 또렷한 두 눈에 눈물 방 울이 그렁그렁하였다.

영철은 무엇을 알아챈 듯이 다만 껄걸 웃으며 선용의 어깨 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나는 한참이나 기다렸네.」

하고 혜숙과 선용의 얼굴만 번갈아 들여다보더니,

「어서 가보세. 그만 가볼까.」

할 뿐이다.

백 우영은 술취한 붉은 얼굴에 타는 듯한 정욕을 두 눈에 어리고, 다만 혜숙만 뚫어지도록 바라볼 뿐이었다.

선용을 태운 기차의 기적 소리가 남대문 정거장을 애처롭 게 울리고, 다정한 어머니함께 다정한 친구, 또한 그리운 혜 숙을 떠난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선용은 일본 동경에 왔다. 본향구 백산(本鄕區白山)에 조그 마한 방 하나를 얻어 자기의 손으로 밥을 지어먹고 있는 선 용은 오늘도 저녁을 지어먹고 외로이 다다미 위에 드러누워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비는 부슬부슬 창 밖에 오는데 아마도 <덧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구슬픈 빗방울 소리와 철벅거리고 달음질하는 인 력거군의 발자취 소리가 질적질적하게 들린다.

선용의 눈앞에는 지나간 일주일 전 반 만 리 고향에서 혜 숙과 이야기하던그 모양이 다시 나타나 보인다. 혜숙과 영 도사에서 헤어진 후 일시 반때라도 혜숙을 잊지 않는 선용 은 오늘 이 자리에 누웠을지라도 혜숙의 그림자가 그의 모 든 기억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가 흐릿한 희망과 확실치 못한 믿음으로 혜숙의 사랑을 얻으려 하였으나 지나간 그날 그 짧은 시간의 한 마디를 꾸미고 사라진 두 사람의 이야기 가 과연 자기와 혜숙 사이를 굳고 굳게 사랑의 가닥으로 얽 어 놓았을는지 의문이었다. 영도사 물 흐르는 그 자리에 서 서 혜숙의 모든 아리땁고 다정한 말소리를 들었을 때는 얼 마간일지라도 혜숙의 사랑을 얻은 듯하여 광명하고 힘있는 신앙이 자기의 모든 실망 비관을 살라뜨려 버리고 끝없는 앞길로 인도하는 듯하더니, 오늘에 혜숙을 고향에 남겨 두 고 외로이 와서 앉았으매 모든 것이 꿈같고 거짓말 같기만 하다. 그리고 혜숙의 귀여운 소리의 여운이 자기의 귀밑에 까지 남아 있는 듯할 때, 그는 또다시 생각하기를 그것은 귀여운 여성의 순결하고 흠 없는 동정의 자백이요 결코 나 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노래는 아니라 하였다.

그는 귀여운 혜숙을 다정한 여자로서 자기의 비장한 어조 와 불쌍한 겉모양에 못 견딜 연민의 정을 깨달았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사랑하려는 여자는 아니라 하였다. 그리 고 이렇게 인정을 하여 공연히 속 타는 가슴을 진정하여 보 리라 하였으나 그러한 생각을 할수록 그의 가슴을 쓰리고 아프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고 세상이 캄캄하게 어두 워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혜숙에게 왜 그때에 달려들 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여 보지를 못하였노 하였다. 그는 당장에 또다시 고향에 돌아가 혜숙의 부드러운 손을 굳세게 붙잡고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간원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희망과 신앙의 불길을 나에게 부어 주시오.」

하고 싶었다.

그는 무엇을 결심하였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너무 한 적하고 고요한 침묵이 무엇으로 자기를 때리는 것같이 똑똑 하게 조용함을 깨달을 때 그는 또다시 멈칫하고 앉아서,

「그만두어라. 그랬다가 만일 거절을 당하면?」

하고는 멀거니 켜 있는 전등만 바라보다가 또다시,

「그러나 해보기나 해야지.」

하며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는 종이와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 한 붓에 20페이지 원 고지를 채웠다. 그래 피봉에 어여쁜 글씨로 <혜숙씨>라 써 서 책상머리에 놓았다가 또다시 집어 들고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때였다. 그 집 노파가,

「선용씨.」

하며 올라온다. 선용은 고개를 돌려 노파의 주름살 잡힌 얼굴을 쳐다보며,

「네, 왜 그러세요.」

하였다.

「아까 편지가 온 것을 잊어버리고 여태까지 안 드렸어 요.」 선용은,

「어디 봐요.」하고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영철에게서 왔다. 천리 타향의 외로운 손을 위로하는 것은 다만 고인의 정이 엉킨 몇 자 안되는 글발이다. 그는 반가이 피봉을 뜯 었다. 그 편지를 뜯을 때 또 다른 봉투 하나가 떨어져 나왔 다. 선용은 이상하여 둥그런 눈으로 그 편지를 집다가 그의 가슴은 너무나 기꺼움으로 차디차게 식는 듯하였다. 거기에 는 과히 서두르지 않은 글씨로 이 혜숙이라 씌어 있다.

선용은 영철의 편지는 제쳐놓고 혜숙의 편지를 펴들었다.

거기에는 다만, 떠나 가신 선용씨, 저는 선용씨가 가신 후로 웬일인지 섭섭한 생각이 나서 울 기만 하였읍니다. 오라버니께서도 자꾸 섭섭하시다고만 하 시지요. 저의 섭섭한 마음은 선용씨를 또다시 만나 뵈올 때 에 없어지겠지요. 저는 다만 선용씨의 성공만을 빌 뿐입니 다. 혜숙 선용은 손에다 그 편지를 힘있게 쥐었다. 그러다가는 감격 한 두 눈으로 그 향내 나는 편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 는 너무 반갑고 환희가 그의 가슴을 넘쳐흘러 뜨거운 눈물 이 나는 줄 모르게 그의 눈에서 쏟아져 흘렀다. 「아, 나는 참으로 산 사람이냐?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청춘의 뜨거운 뇌를 사랑의 말은 물론 청정케 함을 얻은 자이냐? 나에게도 빛난 장래와 굳센 세력을 하느님이 주셨는가? 부드러운 여 성의 따뜻한 사랑이 나의 시드는 심령을 다시 살게 하느 냐?」

하였다. 그러하다가도,

「울기는 왜 울었노?」

하였다.

「설령 섭섭하여 울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여자가 과연 담대하게 편지에 그 말을 쓸 수가 있었을까?」

하였다.

「그렇다. 그의 뜨거운 피는 나를 위하여 끓었다. 사랑의 큰 힘은 어린 혜숙에게 그 말을 쓸 만한 용기를 주었다. 그 러면 나도 용기를 낼 터이다. 혜숙의 사랑을 위하여 나의 일생을 아름답게 꾸밀 터이다.」

그는 또다시 영철의 편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세상에 가장 불쌍한 친우여!

세상이 과연 그대를 동정하든가? 그대를 불쌍히 여기든가?

그대의 두 팔과 두 다리는 그대의 나아가려는 거치러운 벌 판을 헤쳐야 할 것이다. 그대의 성공은 그대의 육체가 때없 이 떨리는 비분과 낙망에 쌓이고 또 쌓인 곳에 있을 것이로 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도와 줌을 주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최대의 세력을 소개하려 한다. 그 최 대의 세력이라 하는 것은 즉 나의 편지와 함께 그대의 손에 떨어지는 다른 사람의 글발일 것이다……

선용은 그 편지를 끼어안으며,

「아, 영철군!」

하고 부르짖었다.

「아…… 나의 가장 굳센 원조자여! 나는 그대의 누이를 믿음보다 그대를 믿을 것이다.」

하고는 다만 기꺼움과 즐거움이 그의 가슴을 채워버리고 아무 의식과 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는 다만 방울방울 흐르 는 눈물 고인 눈으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 었다.

때는 언제나 되었는지 길 가운데를 달아나는 전차 소리가 멀리서 한번 소란히 들리더니 옆의 집 시계가 하나를 센다.

선용이가 일본에 와서 영철과 혜숙의 편지를 받아본 지 일 주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백 우영은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으려다가 무엇을 생각하 였는지 그대로 문 밖을 나갔다. 아직 날이 어둡지 않은 황 혼에 단장을 질질 끌며 담배를 붙여 물고 청진동으로 들어 섰다. 그는 어떤 집 문 앞에 와 섰다. 그리고 문간을 기웃하 고 들여다보며 무엇인지 엿듣더니 서슴지 않고 소리 없이 마당으로 들어서며 안방을 향하여,

「있나?」

하고 기침을 한번 크게 하였다. 방문 미닫이를 열고 나오 는 사람은 나이가 열 여덟이 될락말락한 미인이었다.

저녁 화장을 마침 하였는지 꽃수놓는 수건으로 손을 씻으 면서,

「어서 오세요.」

하며 백 우영을 보고 생긋 웃을 제 희다 못하여 푸른 기운 이 도는 어여쁜 이가 주순 사이에서 우영을 맞아준다.

「들어오세요.」

「아냐 괜찮아. 어제 저녁에 고단하였지?」

「아뇨, 별로이 고단하지 않아요. 그러나 잠깐 들어오시지요.」

「글쎄, 잠깐 앉았다 갈까?」

하고 우영은 못 이기는 체하고 방안으로 들어셨다. 방안에 는 기름 향내가 자개의거리 화류반닫이를 싸고 돈다. 머리 맡에는 일본제의 석경이 놓여 있고 그 아래는 얼굴 치장하 는 화장품이 늘어놓여 있다. 아랫목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 있으며 윗목에도 오색으로 조각보를 놓은 두꺼운 방석이 두 어 개 놓여 있다. 창틀 위에는 풍경화를 끼운 현액이 몇 개 걸리어 있고 전기등은 푸른 싸개로 싸놓았다.

그 미인은 아랫목으로 내려앉으며 석경을 잠깐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백 우영을 바라보고 옷고름을 다시 매는 체하며

「담배 태시지요.」

하고 담배를 권하며 성냥갑을 들어 붙여 주려 한다.

「아냐, 나에게도 있는데.」

하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놓고는 마지못하는 체하고 담배를 받아 물었다.

청춘 남녀가 만나기만 하면 할 말이 많으련마는 무슨 뜻을 품고서 서로 만나면, 하리라 한 말도 나오지를 않는 모양이 다. 두 사람은 다만 한참이나 말없이 앉았다. 우영의 가슴은 이 미인으로 인하여 타는 터이라 공연히 수줍고 주저하는 생각이 나서 한참이나 그 미인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 미인도 우영의 시선이 자기 얼굴 위로 살금살금 지나갈 때마다 공연히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것저 것 바라보고만 있다.

우영은 기침을 한번 컥 하더니,

「설화.」

하며 담뱃재를 털었다.

「네.」

하는 설화는 다만 버선 뒤축만 다시 잡아당겼다.

「설화하고 나하고 사귄 지는 얼마 안되지만 나의 마음을 그만하면 설화도 알아 주겠지?」

「제가 어떻게 우영씨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읍니까?」

「글쎄. 그것도 그럴는지 모르겠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람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 수가 있겠나마 는…… 그러면 나의 청하는 것을 하나 들어 줄 테야?」

「무슨 말씀인지 들을 만하면 들어 드리고 못 들을 만 하 면 못 들어 드리지요.」

하고 설화는 냉정한 얼굴에 억지로 반웃음을 지었다.

「나는 설화를 사랑하는데……」

하며 우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설화의 얼굴을 쳐다본다. 설 화는 기막힌 듯이 웃으며 손가락만 쥐었다폈다하면서,

「고맙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사랑을 하여 주신다 하니, 그러나 저는 우영씨를 사랑해 드릴 자격이 없겠지요.」

「자격이라니? 사랑만 하면 그만이지, 사랑이라는 것은 자 격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결코 그렇지 않어요. 마치 만씀하면 밀가 루 반죽을 하려 할 때에 적당한 밀가루에 적당한 물을 타야 그 반죽이 잘 되는 것과 같이 사랑도 적당한 자격과 적당한 자격이 서로 합해야 원만한 사랑이 되겠지요. 저는 다만 한 개의 천한 계집이니까 우영씨 같은 어른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자격이 없어요.」

「그것은 너무 겸사의 말이지만, 나의 충정에서 끓어나오 는 열정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또한 헤아리지 않고 설화를 사랑하여 줄 테니까.」

「글쎄요. 그것이 진정한 말씀일지라도 저는 제가 부끄러 워서 그 대답을 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면 나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

「아뇨,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할 만큼 자신이 없다는 말씀예요.」

「그러면 어떻든 나의 말에 대답을 못하겠다는 말인가?」

설화의 마음에는 우영의 사랑이 없었다. 또한 우영의 가슴 에도 설화를 영원히 사랑하여 주리라 하는 뜨거운 열정은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라요……」

하며 설화는 방그레 웃더니,

「차차 말씀하지요. 오늘만 날이 아닌데요.」

「그러면 언제?」

「언제든지요.」

우영은 그 말을 듣고서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빙그레 웃으 며 천장을 쳐다보고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어뿜을 뿐이었 다. 그러다가는,

「글쎄, 그것도 그럴 터이지만 내일이나 모레나 요 다음 날 대답할 것은 없을 것 같은데.」

하고 서투른 웃음을 또다시 웃었다. 설화는 먹을 줄을 모 르는 담배를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다 넣고서 배배 틀면서,

「그렇지 않지요. 모든 것이 때가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 대답할 것을 내일 대답 못하는 수도 있고 오늘 대답 못할 것을 내일 대답하는 수도 있으니까요.」

하며 두 다리를 쭈그리고 앉는다.

우영은 바로 점잔을 빼며,

「그러면 요 다음에 좋은 대답을 하여 줄 터인가?」

하며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바짝 가까이 설화의 얼굴에다 가까이 한다. 설화는 그것을 피하려고 고개를 비 키며,

「글쎄요. 그것은 그때가 되어 보아야 알겠지요」

하였다.

이러할 즈음에 설화 어머니가 마루에서,

「저녁 먹어라.」하는 소리가 나니까 설화는

「천천히 먹지요.」

하며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우영은 무엇을 생각이 나 한 것처럼 벌떡 일어서더니,

「그럼 어서 저녁이나 먹지.」

하며 방문을 여니까 앉았던 설화가 일어서며, 「왜, 가세 요?」

하고 치마 앞을 탁탁 턴다.

「아무 데도 가지 마라. 내 지금 곧 부를 터이니.」

「네」

우영은 설화의 게슴스레한 눈을 바라보고 의미있게 싱긋 웃었다. 그러나 설화는 그 웃음을 본 채 못 본 체하고 다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날 저녁 8시가 되어 이 영철은 동구 안 전차 정류장에서 내렸다. 7시 반에 만나기로 약속한 이 영철이가 10분이나 늦어서 오게 된 것은 자기에게 큰 수치나 돌아오는 듯이 걸 음을 급히 하여 명월관을 향하여 들어간다.

인력거 종소리가 이 영철의 귀를 울리더나 부드러운 냄새 가 나는 미인 하나이 명월관 현관에 가 내렸다.

영철도 현관 앞에 가서 구두를 벗고 보이에게,

「백 우영씨가 어느 방에 계신가?」

하였다. 보이는 아주 은근하고도 공경하는 어조로,

「네, 이리 오십시오.」

하며 영철을 인도하여 회랑을 돌아간다. 동편구석 어떤 조 그마한 방 미닫이를 두 손으로 벌리어 스르륵 밀어젖뜨리며,

「이 방이올시다.」. 그 방안에 앉아 있던 대여섯 젊은 청 년들은 일제시 영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꺼번에

「야! 인제 오는가?」

하며 손을 내밀어 영철에게 악수를 청하는 자도 있고 영철 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곁으로 끄는 사람도 있다. 백 우영 은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고,

「왜 이렇게 늦었나?」

하며 영철을 바라본다.

「어데를 잠깐 다녀오느라고 자연 늦었어. 어떻게 급하게 왔는지 땀이 다 났네. 가만히 있게. 대관절 담배나 하나 태 워 보세.」

하며 영철은 웃옷을 벗어 걸고 담배를 붙어 물었다.

옆의 방에서 장구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는 기생의 소리 가 안개처럼 그윽하게 들린다.

「여보게.」

하는 사람은 백 우영이다.

「왜 그러나.」

영철은 대답하였다.

「요새 자네 누이 잘 있나?」

「잘 있지.」 「그런데 자네 나 매부삼지 않으려나?」

「그것을 왜 날더러 물어 보나?」

「그럼 누구더러 물어 보래나?」

「그애더러 물어보래그려.」

「옳지. 그것도 그래. 사랑은 자유니까.」

하며 백 우영이가 농담을 시작하였다. 그 농담을 보통 듣 는 사람은 지나가는 농담으로 알 것이나 백우영의 그 농담 은 그 가운데에 깊은 의미를 품고서 말한 농담이다.

상고머리를 깎고 나이가 스물 다섯이 될락말락한 청년과 금니를 해박고 옥으로 만든 물뿌리를 든 청년은 저희들끼리 무슨 이야기인지 저쪽 귀퉁이에서 분주하게 한다. 또 한귀 퉁이에서는 바둑판을 갖다놓고 물르느니 안 물르느니 하고 저희들끼리 떠들어 댄다. 영철도 우영이하고 이야기만 하는 것이 심심한 듯이,

「어디 나도 한몫 끼어보세.」

하고 바둑판 옆에 옆으로 달려들려 할 때 보료 위에 목침 을 베고 드러누웠던 조선옷 입은 청년이 이 꼴을 보더니,

「이 사람들아, 젊은 사람들이 곰상스럽게 바둑들이 무엇 인가.」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바둑판위로 넓적한 손을 벌리어 쓱 한번 훑으니까 바둑은 모두 허물어졌다.

「에에, 심사도 고약하다.」하고 바둑 두던 청년은 눈을 흘 겨 쳐다보며 들었덛 바둑알을 바둑 통에다 탁 던지며 옆으 로 물러앉는다. 영철도 한몫 보려다가 그 꼴을 당하고 기막 히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물러앉았다.

이러할 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어여쁜 미인 두 사람이었다. 문지방을 넘어선 두 미인은 날아갈 듯이 그 자리에 앉는 듯 마는 듯하게 방안을 둘러보고,

「안녕하십니까?」

하며 인사를 한다.

그 두 미인이 들어오자 온 방안은 무슨 빛이 나고 향내가 나는 뜻하였다. 답답하던 공기는 붉고 따뜻한 정조(情調)로 물드는 듯하고, 아무 냄새도 있지 않던 그 방에서는 여성의 붉은 피냄새가 어리는 듯하였다.

앉았던 청년이나 누웠던 청년의 크지 못한 가슴속에는 물 결 같은 정조(情調)가 밀려오고 혼몽한 감정은 그들의 눈들 을 게슴츠레하게 하여 놓는 듯하였다. 그 미인들의 기름 바 른 머리털은 전기불에 비치어 무지개처럼 반사된다. 그리고 앉고 설 때마다 비단더욱마의 바삭거리는 소리가 사랑의 가 루를 뿌리는 듯하였다.

영철은 그 두 미인을 보았다. 하나는 처음 보는 기생이요, 김 설화는 꼭 한 번밖에 보지 않는 기생이었다. 그래서 그 김 설화가 자기를 알아볼는지 못 알아볼는지 아지 못하여 아무 소리 없이 그를 쳐다볼 때 옆에서 부르는 백 우영의 말에는 대답지 않고 가을 물같은 두 눈으로 자기를 보고 아 미를 푸르게 찡기고 입을 반쯤 열어 붉게 웃을 때 그때야 영철은 김설화가 자기를 아나 보다 하고,

「오래간만이로군.」

하였다. 다른 청년들은 들어온 기생을 향하여 여러 가지 농담을 시작하였다.

그 금니 박은 청년은 다른 한 기생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요새 재미가 어때?」

하니까, 그 기생은 태연한 얼굴에 지나가는 말처럼

「그저 그렇지요.」

하고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아무 소리 없이 앉아 있다. 백 우영은 설화를 자기 옆에다 앉히고 공연히 할 말 아니할 말 만 시키고 앉아 있다.

요리상이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영철의 전신을 도 는 붉은 피는 파란 기운이 도는 술에 물들어서 아지 못하게 끓는다. 설화는 어느 틈엔지 영철의 무릎 위에 어여쁜 손을 놓고 앉아 있다. 영철이는 비로소 자기의 무릎 위에서 설화 의 매끄러운 손가락이 무엇을 소곤대는 듯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깨달았을 때 푸른 정기가 어리고 또 어리어 자기의 모 든 관능을 마비시키는 듯한 설화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초 생달 같은 눈썹 밑으로는 영롱하게 구르는 설화의 눈동자가 자기 가슴 위에서 대르륵 대르륵 구르는 듯하여 순결함을 말하는 듯한 새빨간 연지 입술이 맞추지도 않은 자기의 입 술을 근지럽게 하는 듯하였다. 또다시 그의 까만 머리를 자 주 댕기로 홱홱 감아 자그마한 금비녀로 개웃드름하게 쪽지 인 머리쪽을 볼 때 정(情) 묻은 머리 향내가 영철의 코를 지 나 모든 신경을 취하게하는 듯하였다. 영철은 설화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 손은 따끈따끄한 피가 도는 중에도 대리 석같이 찬 듯하였다. 설화는 영철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어 부끄러움을 지었다.

「술 먹게.」

하는 소리가 영철과 설화 사이에 잡은 손을 놓게 하였다.

영철의 손은 무엇을 잃어버린 것같이 서운하였다. 영철은

「먹지.」

하고 그 술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술을 마시려 하면서 술이 취하여 건들대는 상고머리 깎은 청년을 곁눈으로 바라 보며 속으로, (내 이번에는 저놈을 한잔 먹이리라.) 하였다. 그리고 술을 한모금에 다 마시고 곧 그 술잔을 그 청년에게내밀며,

「이번에는 내 술 한잔 먹어라.」

하였다. 그 청년은 얼굴이 설익은 고기빛같이 되어서 게슴 츠레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며,

「먹지 먹어, 이 영철이가 주는 술인데 안 먹을 수가 있 나.」

하며 술잔을 받아든다. 설화는 영철을 대신하여 술을 부었 다. 영철은 무의식중에,

「설화」

하였다. 「네」

하고 설화는 공연히 가슴속이 이상하여 대답을 하였다.

「설화 집이 어데야?」

「청진동요.」

「한번 놀러갈까?」

「오세요.」

이러할 즈음에 백 우영이가 설화를 부른다. 설화는 가기가 싫어서,

「왜 그러세요?」

하며 앙탈하듯이 가지를 않고 멈칫거린다.

「글쎄 이리 오라니까. 오지 않을 테야?」

하며 얄밉게 흘겨 댄다. 설화는 무슨 동정을 구하는 듯이 영철을 바라보더니 영철이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하는 수 없는 듯이,

「왜 그러세요?」

하고 그 옆에 가 앉는다.

이때였다. 보이가 들어와,

「이 영철씨 밖에서 누가 찾으십니다.」

한다. 영철은,

「누가?」하고 의아하여 쳐다보았다. 보이는 다만,

「성함은 알 수가 없어요. 잠깐만 만나 보실 일이 있다세요.」

하며 저쪽을 돌아볼 뿐이다.

영철은 벌떡 일어섰다.

영철이 문 밖을 나설 때였다.

「오래간만입니다.」

하며 자기를 쳐다보는 기생 하나이 있었다.

「이게 누구야. 오래간만이로구먼.」

하고 그대로 지나쳐가려 하니까.

「어데를 가세요?」

하며 그 기생이 손을 탁 잡는다. 영철은,

「응, 누가 좀 보자고 해서.」

하며 손을 뿌리치려 하니까 그 기생은,

「누가요」

하며 얄밉게 쳐다보며 생그레 웃었다.

「글쎄 누군지 나도 몰라. 가 보아야지.」

「이리 좀 오세요. 가보시기는 누구를 가보세요. 영철씨를 청한 사람은 여기 서 있는 이 연옥(李連玉)이에요.」 영철은 술 취한 마음에도 가중한 생각이 나서

「무어야? 그래 왜 불렀어.」

하며 무례함을 책망하는 듯이 흘겨보았다.

「조금 말씀할 것이 있어서요.」

「무슨 말을?」

연옥은 아무 소리가 없다. 영철은 화가 나는 듯이 한참이 나 있다가,

「말할 것 없어? 없으면 나는 들어갈 테야.」

하고 발길을 돌이키려 하니까 연옥은 영철의 옷자락을 붙 잡으며,

「가기는 어데를 가세요. 연옥이는 사람값에 못 가나요?」

「누가 사람값에 못간대?」

「흥, 고만두십시오.설화를 못 잊어 그러시어요.」

영철이가 이 소리를 듣고는 그의 가슴속이 태연하지는 못 하였다. 웬일인지 피 묻은 화살로 염통을 꿰뚫는 듯이 저리 저리하게 아픈 듯하였다.

「무어야? 설화라니?」

「설화를 모르세요? 영철씨를 떨어지지 않는 설화를요? 다 고만두세요.」

하고 얄상스럽게 영철을 바라본다.

영철의 귀에는 설화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따뜻하게 들린 다. 얄밉고 가중한 연옥의 시들시들한 입술 사이를 통하여 새어나온 그 설화란 소리가 영철의 심장 위로 춤을 추고 지 나간다.

영철은 기막힌 듯이 웃었다. 그리고 연옥의 손을 쥐려 하 였다. 연옥이는 쥐려는 영철의 손을 벌레나 기어가는 것같 이 홱 뿌리치며,

「누구 손을 쥐세요? 이 손은 연옥이란 천한 여자의 더러 운 손예요. 설화의 손과는 아주 다릅니다.」

영철이는 뿌리침을 당한 손을 다시 연옥의 등 뒤에 얹으려 할 때,

「그러나, 설화나 저나 기생은 일반이겠지요.」

하고 손에 들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흠뻑 한 모금 빨아 후 내뿜었다. 그리고 까만 눈썹을 아래로 깔고 입을 쫑긋쫑 긋하며 다리만 달달 까불고 있었다.

영철은 연옥의 손을 다시 쥐었다. 연옥은 아무 소리가 없다.

「연옥이, 왜 사람이 그렇게도 경망한가? 자! 이리와.」

하고 연옥의 팔을 잡아끌어 사람 없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 갔다.

「왜 이러세요. 저리 가세요.」

하며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가만히 영철을 밀치 려 한다.

「내가 꼭 연옥의 집에를 가야지……」

하고 영철은 연옥의 손을 가만히 흔들었다.

「그것은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러나 웬걸요 설화집에 가 실 사이는 있어도 저의 집에 오실 사이는 없을 터이니까요.

저의 집에는 무엇을 찾아먹자고……」하다가 말이 너무 함 부로 나온 것이 실례스러워서 생그레 웃었다.

이때에 누구인지 영철과 연옥이가 있는 방 안으로 뛰어들 어오며

「이것들이 무슨 짓야. 야! 연옥이 오래간만이로구나.」

하는 사람은 백 우영이었다.

「이 사람아 술 먹다 말고 이게 무슨 짓인가 가세 가.」

하고 영철을 사정없이 끌고 간다. 영철도 속마음으로는 에 에 시원하다 하면서도

「이 사람아, 하던 말이나 마쳐야지.」

하며 두 발을 뻗대인다.

「말이 무슨 말야. 할 말은 두었다 하게. 언제든지 그 말이 그 말이지.」

영철은 못 이기는 체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것을 보는 설화의 두 눈에는 반기는 광채가 꺼져 있는 영철 의 가슴속에 새로운 불을 켜대는 듯이 빨개지는 듯하였다.

영철은 또다시 설화를 보았다. 설화는 다만 두 손을 모으 고서 옆의 사람의 이야기 소리만 듣고 있었다.

설화는 그리 어여쁜 기생이 아니었다. 또한 탐스럽게 생기 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온몸을 두른 옷 맵시라든지 그의 머 리 단장이라든지 모든 것이 단조롭고 조화가 있어 보인다.

영철은 설화의 손을 쥐어 자기 앞으로 끌어잡아당겨 앉히 고 싶었다. 그리고 녹신한 팔목을 끌 때에 연한 살과 부드 러운 피부에 싸인 가는 골격이 오드득 하는 소리를 듣는 듯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연옥이란 기생이 질투 끝에 설화 란 이름을 불러 자기와 설화 사이의 사랑이 있는 듯이 말한 것을 듣고 보니 설화를 보기에도 수줍은 생각이 나고 아까 없던 생각이 자꾸자꾸 난다. 그러나 설화의 눈치가 보이고 설화의 눈 한번 굴리는 것일지라도 자기에게 그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그림자를 자기 얼굴 위에 던져 주는 듯하 였다.

아까까지 설화와 담화를 거침없이 하던 이 영철은 웬일인 지 말이 없이 멀거니 앉아 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이 달음질하는 듯이 전기불에 비친 두 눈동자만 반짝반 짝한다.

설화는 일을 보러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온 설화의 가슴은 웬일인지 가늘게 떨릴 뿐이다. 여태껏 몇 해를 두고 여러 백 명의 남자와 교제를 하여 온 설화의 가슴은 이상하 게도 동요가 된다. 어떤 때는 울고도 싶고 몸부림을 하고 싶도록 마음이 처량하여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전신으로 차디찬 핏결이 흐르는 듯도 하였다. 그는 무슨 소리가 자기 뒤에서 부스럭만 하여도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찰나(刹 那) 사일지라도 영철의 그림자가 자기 머리속으로 왔다갔다 한다.

그는 요리집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는 사무원이 전화 앞에서 무엇을 쓰고 있다가 설화가 들어오는 것을 보 더니,

「얼굴이 왜 저렇게 파래? 추워서 그런가? 떨기는 왜 떨 어?」한다.

설화는 다만,

「추워요.」

하고 옹송그리고 그 옆에 가 앉았다. 그리고 옆에서 지껄 이던 다른 기생들을 보고서는

「언제 왔니?」

한마디를 하고 가만히 앉아서 있었다.

「응, 설화 오래간만이로구나.」

하는 사람은 연옥이다.

「언니요, 언제 왔소?」

하는 설화는 움츠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키면서 연옥의 손 을 붙잡으려 하니까,

「너의 손이 왜 이렇게 차니?」

하며 싫은 듯이 설화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다.

「글쎄, 모르겠어. 나는 아마 일찍 가야 할까봐.」

「왜 어데가 아프냐?」

「아프지는 않아도 공연히 몸이 으슬으슬 추워.」

설화는 다시 백 우영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백 우영에게 향하여

「저는 일찍이 가야 하겠어요.」

하였다. 술 취한 우영은,

「왜?」

하며 설화를 놀래는 눈으로 바라본다.

「몸이 거북해서요.」

「몸이 거북해?」

「네,」

「어데가?」

「공연히 으슬으슬 추워요.」

「추워?」

이 소리를 들은 다른 청년들은

「무어야? 추워?」

「그럼 가겠다는 말이지?」

「안 된다. 안돼.」

「가기는 어데를 가.」

「예끼.」

하며 저희들끼리 떠든다. 설화는 다만 아무 소리가 없이 앉아 있었다. 우영은,

「가지 못하지. 가지 못해.」

하고 고개를 좌우로 내흔들며 술잔을 마셨다 놓았다 할 뿐 이었다. 같이 왔던 난향이라는 기생은

「어데가 아파서 그러니? 정 아프지 않거든 나하고 같이 가자꾸나.」

하며 가려는 설화를 붙잡으려 할 뿐이다.

이 꼴을 본 영철은,

「어데가 아파서 그러나?」

하며 다정하게 설화의 손을 쥐며 물었다.

「별로이 아픈 곳은 없어도 몸이 떨리고 으슬으슬 추워요.」

「추워?」

「네.」

「그러면 꼭 가고 싶다는 말이지?」

「가야 할까 보아요.」

영철은 동정하는 듯한 두 눈으로 설화의 두 눈을 아래로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이젊고 어여쁜 설화 의 어데인지 모르게 불쌍하여 보이는 것을 찾아냈을 때 그 는 더욱 설화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놓기는 섭섭하 였지마는 몸 아파 괴로워하는 설화를 돌려보내는 것이 온당 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영철이가 만일 범연한 귀로 설화 의 말을 들었던들 그 당장에서 돌려보냈을는지도 알 수 없 겠지만, 아지 못하는 미력에 끌림을 당하는 영철은 설화에 게 감히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영철과 설화 두 사람만 있었던들 다정한 영철이가 과연 그대로 있지는 못하 였겠지마는 주위의 눈이 있고 환경의 감시가 있다. 또한 떨 어지기 싫은 욕망이 영철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 것도 아 니었다. 영철은

「과히 아프지 않거든 우리도 곧 갈 테니 조금만 참지?」

하며 부드러운 소리로 설화에게 간원하였다. 설화의 몸은 웬일인지 아까보다 더 떨린다. 가슴이 울렁울렁하여 목구멍 에 무엇을 틀어막은 듯이 답답하다. 설화는 기침을 한번 가 볍게 하고서,

「글쎄요.」

하였다. 그 <글쎄요>하는 말 속에는 가고 싶은 의사와 가 기 싫은 의사가 반씩 포함되어 있었다. 영철은,

「자, 몸이 그렇게 아프거든 잠깐 여기 누워 있다가 우리 하고 모두 같이 가지. 이렇게 왔다가 먼저 가면 가는 사람 도 미안하지마는 보내는 사람도 섭섭하니까.」

「글쎄요.」

하는 설화의 마음은 칠분 이상의 승낙이 있었다.

설화는 보료 위에 쪼그리고 엎드렸었다.

영철의 부드러운 손이 때없이 그 몸 위로 지나갈 때마다 설화의 마음에는 그 무슨 위로가 있었고 그 무슨 부드러움 이 있었다. 엎드린 설화의 마음속에는 영철의 다정한 목소 리 뜻깊은 눈초리 그 무슨 의미를 감춘 듯한 입 가장자리에 들리고 보이는 듯할 때마다 웬일인지 눈물이 날 듯이 그리 운 생각이 자꾸 났다. 그의 가슴은 무엇이 치밀어오는 것같 이 뭉클하고 그의 전신을 붉게 물들인 뜨거운 피는 영철의 그 말소리와 눈초리와 입 가장자리로 보이지 않게 되는 그 무슨 그림자가 애끊는 불길을 붙여주는 듯하고 혼몽한 꿈속 으로 집어던지는 듯하였다.

다감한 설화는 울고 싶어 못 견디었다. 그러니 치밀리는 감정을 억지로 참고서 다시 일어났다. 머리털은 한 가닥 두 가닥 이마 위로 떨어져 나부끼고 분칠한 두 뺨은 불그레하 게 탄다. 그리고 풀어지려는 옷고름 사이로는 우유빛 젖가 슴이 살며시 바깥을 엿본다.

영철은,

「왜 이러나?」

하였다.

「누워 있기가 싫어요.」

「조금도 어떻게 생각 말고 누워 있어.」

「아녜요. 그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으면 머리가 더 아픈 것 같고 어째 싫어요.」

하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뒤로 젖혔다.

영철과 설화 두 사람은 다만 이러한 시간 이러한 자리에서 이렇게 만났다가 새벽 3시나 되었을 때 각각 자기 집을 향 하여 돌아갔을 뿐이다.

영철은 인력거를 타고 동대문을 향하여 간다. 새벽 기운이 차디차게 도는 고요한 공기를 울리며 멀리서 닭 우는 소리 가 가늘게 들린다. 반 취한 술은영철의 얼굴을 타게 하며 있지 아니한 설화의 환영(幻影)은 때없이 영철의 가슴을 태 운다.

강한 술기운이 영철의 모든 관능을 취하게 하고 반쯤 탕 (湯)하게 할 때의 설화의 모양과 말소리가 남아 있는 기력은 요염하게도 영철의 정신을 취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아까 설화가 자기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있었던 것이며 의미 있 게 쳐다보던 것이며 또 다른 말소리와 행동이 모두 자기 가 슴에 그 무슨 달콤한 의식을 일으킬 때마다 영철의 마음은 기꺼운 중에도 그 기꺼움을 깨닫는 자기를 어리석은 놈이라 고 조소하였다.

그는 설화를 불쌍한 여자라 하였다. 많고 많은 불쌍한 사 람을 모두 다 동정하는 영철은 설화를 그 중에 더욱 불쌍하 다 하였다. 그러나 어째 더 불쌍하며 무엇이 더 불쌍하냐 하면 그것의 대답을 할 조건을 갖지 못하였으나 어떻든 가 련한 여성이라 하였다.

설화는 불쌍한 여자이다. 기생인 설화, 세상 사람에게 천대 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는 설화는 피 흘리고 제단 위에 누운 어린 양과 같이 불쌍하다. 기생도 감정이 있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한없는 영화를 가진 한 나라의 황제나 길거리로 추워 떨며 방황하는 빌어먹는 거지나 품을 파는 노동자나 정조를 파는 매음녀나 철창 아래 신음하는 죄수나 꽃같은 처녀나 생각을 갖고 감정을 갖고 육체를 갖고 혈관으로 돌 아가는 뜨거운 피를 갖기는 누구든지 마찬가지다. 얼굴이 같지 않고 마음이 같지 않은 사람이란 사람이 16억이나 이 지구상에 있으니 얼굴빛이 누르다고 사람이요, 얼굴빛이 검 다고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얼굴이 어여쁘다고 사람 이요 얼굴이 밉다고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잘난 사람 이나 못난 사람이나 웃는 이나 우는 이나 얼굴빛이 흰사람 이나 누런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모진 사람이나 이 모든 것이 합하고 덩지가 되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이룬 것이 아닌가?

사람은 물과 같다는 옛사람의 말과 같이 물은 그 담은 그 릇과 그 흐르는 곳을 따라서 다른지라, 어떤물은 수은을 내 려붓는 듯한 폭포가 되고 어떤 물은 흰 구름강을 비친 잔잔 한 호수가 되고 어떤 물은 산골짜기를 어여쁘게 흐르고 어 떤 물은 강이 되고 어떤 물은 똥덩이를 띄워 가는 개천물이 되고 어떤 물은 바다에 뛰어노는 파도가 되어 천 가지 만 가지 이루 셀 수 없는 형상을 이루지마는 물은 언제든지 물 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총리대신이 되고 거지가 되고 학 자가 되고 도둑놈이 되고 열녀가 되고 매춘부가 되고 이루 셀 수 없는 무엇무엇이 되지마는 생각을 갖고 감정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이 그릇과 흐르는 곳을 따라 다름과 같이 사람도 다만 그 인습과 환경에 따라 서 달라질 뿐이다.

설화는 기생이다. 비록 기생이라 하지마는 그의 가슴에도 사랑이 있으며 끓는 피가 있으며 애타는 눈물이 있으리라 하였다. 어여쁜 처녀의 붉고 달콤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가 슴 쓰리고 마음 아픈 푸른 사랑일 것이라 하였다. 설화는 참으로 맵고 쓴 세상을 알 터이며 때 없는 눈물과 한없는 한숨으로 비운에 부르짖고 불행에 울기도 여러번 하였으렷 다 하였다. 그리고 설화 같은 여자가 참말 눈물을 알고 참 한숨을 알아 줄 여자일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영철의 가슴속에서는 갑자기 불 같은 애련의 정이 타오른 다. 인력거를 돌리어 설화의 집으로 쫓아가고 싶었다. 그리 고 설화의 따뜻한 가슴에 엎디어 끝없이 울고 싶었다. 그러 다가도 너도 평범한 기생이겠지? 돈만 아는 아귀 같은 더러 운 계집이겠지? 돈 없는 나를 보지도 않으려는 허영의 꿈을 깨지 못한 계집이겠지? 너는 참사랑을 바치려는 것을 거짓 사랑으로 알 테지? 타는 영철의 가슴은 답답하였다. 그러다 가는 그만두어라. 순결하다는 처녀의 사랑을 구하기도 어려 운데 더구나 기생이겠느냐? 하고 단념까지 하여 보았다.

그 이튿날 11시나 되어 일어난 설화는 아침도 먹지 못하고 조합에를 왔다. 조합문을 들어서려 할 때 마침 만난 사람은 연옥이었다.

「잘 잤니?」

하며 곁눈으로 연옥은 설화를 쳐다보더니,

「어제 저녁에 몇 시에나 집으로 갔는?」

하고 평안도 사투리를 써서 물어 본다.

설화는 다만 침착하고 조용하게

「3시에.」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연옥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누구를 놀려먹 는 듯이,

「얘 이 영철이라는 손님이 너를 사랑한다더구나?」

하며 게슴츠레하게 웃는다.

설화는 「무어야? 듣기 싫소.」

하기는 하였으나 웬일인지 마음이 기쁘고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연옥에게 「듣기 싫소」하며 톡 쏘기는 하였으나 그 것이 과연인지 거짓말인지 알고 싶어서

「누가 그럽디까?」

하고 잼처 물었다. 연옥은 조합 사무실 위로 올라서며,

「몰라. 누구한테 들었어.」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 달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영철은 여러 친구들과 <은 파경>이라는 서양 요리집에 왔다가 마침 자기 집으로 돌아 가려 할 즈음에 보이 하나가 이 영철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영철은 누구인가 의심하면서도 물론 어떤 친 구나 아는 사람이 부르는 것인가 보다 하고 그 방으로 들어 가 본즉 거기에는 설화가 있었다. 설화는 반가운 가운데에 도 부끄러움을 머금고,

「이렇게 바쁘신데 청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며 의자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한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이상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일어나므로 다만

「아니 별로이 바쁘지는 않지마는 참 오래간만이로군.」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영철의 마음속을 조금 미안하게 하는 것은 하 루 저녁 놀러 가마 하고서 여태껏 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설화의 집이 아니고는 다른 기생의 집일 것 같으면 혹시 갔을는지도 알 수 없지마는 자기의 마음을 부 질없이 잡아당기는 설화의 집에는 가고 싶어도 그렇게 속하 게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한번 가주지 못한 것을 말하려 할 때 설화는

「저는 퍽 기다렸어요.」

하며 너도 보통 풍류남아로구나 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영철의 마음은 미안한 중에도 부끄럽고 부끄러운 가운데에 도 그 말 한마디가 반가왔다.

「대단히 안 되었소. 자연히 바빠서 그렇게 되었어……」

하며 사죄하는 듯이 설화의 손을 잡고 환심이나 사려는 듯 이 빙그레 웃으며 설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화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있고 인자함이 있었다. 그리고 영철의 두 눈에는 그의 입이나 코나 눈이나 눈썹이나 그 모 든 것이 자기의 마음 비친 그림자를 조각을 하는 듯이 또렷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옮기어 그 옆 교의에 가만히 앉을 때 몸에 두른 가벼운 옷이 구름같이 날리며 부 드러운 소리를 낼 때 영철은 무슨 달콤한 것을 입에다 놓고 슬슬 녹이는 듯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얼마간 아무 말 없이 가 만히 있었다. 사면은 고요하다. 온 우주에 가득한 <에텔>의 분자가 쉴 사이 없이 운동할 때 영철과 설화 사이에 있는

<에텔>의 분자도 그의 동요를 받아 영철에게서 설화에게 설 화에게서 영철에게 와 부딪치고, 가서 부딪치는 것이 보이 고 들리는 듯하였다.

설화는 무엇이나 깨달은 듯이 옆에 있는 종을 눌러 보이를 부르더니 무엇이라 무엇이라 이르고 다시 영철의 앉아 있는 교의 가까이 와서 뜻있는 눈으로 들여다보며,

「오늘 바쁘신 일 없으세요」

하였다.

영철은 설화가 자기 등뒤 가까이 와 섰을 때 붉은 육체에 따뜻한 향내를 맡으면서 입김이 맡아질 듯이 가까이 온 설 화의 희고도 선의 조화가 흐르는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별로이 바쁠 것은 없어……」

하였다. 설화는 이 말을 듣고 아주 성공이나 한 듯아,

「그러면 오늘 여기서 저하고 조금 놀다 가세요. 네……」

하고 저쪽 교의에 가서 기대서며 이상한 눈초리로 영철을 바라본다.

영철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에 홀 린 것같이 자기 주위가 모두 팔팔 팔팔하는 주정(酒精) 불의 푸른 불꽃같이 푸른 것으로 물들인 듯할 뿐이요, 가지, 어찌 하여 여기에 들어왔으며 설화가 무슨 까닭으로 자기에게 그 와 같이 뜻있고 매력 있게 자기를 가까이 하려는지 아지 못 하였다. 그리고 달빛같이 푸르고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기를 유심히 들여다볼 때 그의 전신으로 돌아가는 붉은 피는 타는 듯한 정욕으로 활활 붙어오르는 듯하였다. 그러 다가 온 방안이 고요함을 깨달았을 때 영철은 가슴이 조이 는 듯하며 목이 타는 듯하여 설화의 희고 부드러운 손을 정 신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설화는 다시 교의에 앉으며,

「여보세요?」

하고 영철을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내려감으며,

「왜 저의 말은 사내 양반들이 말처럼 생각하여 주지 않지요.」

하고 원망스러운 기색을 띠고 가만히 앉아 있다. 이 말을 들은 영철의 마음에는 설화가 불쌍한 듯하기도 하고 한옆으 로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도록 부끄러웠었다. (너 도 사내가 돼서 나같은 계집의 말은 말같이도 여겨 주지 않 는구나)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철은 침착한 냉정으로 얼핏,

「그럴 리가 있나.」

하고 그의 연하게 흐르는 목을 보고 다시 그 밑에는 젖가 슴이 있고 또 몽글몽글한 두 젖이 달려 있겠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설화의 서 있는 것이 요염하고도 깜찍한 여신의 조각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설화는 조금 원망스럽고도 멍청한 어조로,

「여자도 사람이지요? 네? 영철 씨.」

할 때 문이 열리며 보이가 접시에 담은 음식을 영철과 설 화의 앞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또 다시 포도주 한 병을 갖 다 놓았다. 이것을 본 영철의 마음은 미안하고 일종의 호기 심이 나서, 「이것은 왜 시켰어?」

하며 설화를 한번 쳐다보고 보이를 돌아다보았다. 설화는 지금까지의 냉정하고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미소로 바꾸고,

「변변치 못하나마 잡수어 주세요. 영철씨를 모시고 이렇 게 앉아 있는 것은저에게는 또다시 없는 행복이니까요.」

하고 생그레 웃는 가운데 얼굴빛이 연분홍빛이 되었다 사 라진다. 영철은 설화의 그 말 한마디가 자기에게 무슨 뜻깊 은 말을 전하여주는구나 하는 기쁜 희망과 함께, 설화의 나 이프와 포오크를 들고서 접시에 있는 고기를 써는 것을 바 라보고,

「나는 지금 곧 무엇을 많이 먹어서 먹을 수가 없을걸.」

하고 설화의 허리를 지근덕거리는 듯한 미소로 보았다.

「무얼요, 많이 잡수실 것도 없는데, 약주 한 잔 잡숫기 를……」

하고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접시의 음식을 다 썰어서 영철 의 앞에 있는 것과 바꾸어 놓으며,

「잡수세요.」

하고 다시 유리 술잔에 포도주를 부었다. 피같이 붉은 포 도주는 콜콜콜 병을 기울임에 따라 유리잔에 가득 찬다.

영철은 처음에는 사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설화의 주 고 권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웅종하였다. 그러다가는 언제 든지 하는 버릇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손을 들어 설화의 앞 에 놓여 있는 유리잔에 술을 부으려 하였다. 설화는 놀라는 듯이 한 손으로 술병 든 영철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유 리잔을 들면서,

「왜 이러세요? 저는 술을 먹을 줄 몰라요.」

하며 상을 찌푸리면서도 생글생글 웃는다. 영철은 자기 손 에닿은 설화의 따뜻한 손에서 일어나는 간지러운맛을 볼 때, 극도의 정욕에서 일어나는 잔인함이 복바쳐올라왔다.

그는 억지로라도 설화에게 술 한 잔을 먹이지 않고는 만족 치 못하였다. 그래서,

「공연히 그래. 내가 주는 것인데도 그러나?」

하며 일어서서 설화에게로 가까이 가며 억지로 설화가 들 고 있는 술잔에 술을 부었다.

설화는 술잔을 든 채로,

「이것 보세요. 엎질러져요.」

하며 흔들리는 술잔을 바라보면서,

「그러면 저리로 가서 앉으세요. 먹을께요.」

하였다. 영철은 술도 권할 겸 설화에게로 가까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었으나 자기가 먹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는 하는 수 없이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설화는 술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으며,

「꼭 한 잔만 먹습니다.」

하고 다시 영철을 쳐다본다. 영철은

「그래.」하였다. 그러나 설화는

「꼭 한 잔만 먹습니다.」

하고 효력 없는 다짐을 받으려 하는 것인 줄 알기는 알면 서도 영철에게 다만 한 마디 말이라도 더 하는 것이 은연중 기뻤었다.

「그래 한 잔만.」

하고 영철은 반웃음 섞어서 대답하였다. 설화는 술을 반쯤 마시고 다시 놓았다.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고 사람 부르는 종소리가 한번 나고 사라지더니 방안은 고요하다.

설화의 얼굴은 다시 침착하여졌다. 그리고는 또다시 냉정 한 눈으로 영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애소하는 듯한 목 소리로,

「영철씨.」

하고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가는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여자들도 사람이지요?」

하고 아까 하려던 말을 거푸 한다. 설화는 여자인 까닭에 모든 여자들은 다 자기와 같이 남자에게 속아 지내는 줄 안 다. 만일 설화가 다른 여자가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와 같이 대담하게 여자도 사람이지요?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있는 줄 알기는 안다. 그러나 나이가 열 여덟이 될 때까지 사람에게 가장 크고 가장 중한 사랑을 맛보다가 잃어버리고 속임을 당하고 떠남을 당한 설화는 자기가 다정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여자도 사람이지요」하고 대담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영철은 다만 빙그레 웃으면서,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사람이나 그렇지.」

하며 담배를 집어 물었다. 설화는 성냥불을 켜서 영철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면서,

「그러면 영철씨는 그렇지 않으시단 말이지요?」

하며 불 붙은 성냥 까치를 입에다 갖다 대고 훅 불어 꺼뜨 린 성냥 까치만 손가락 사이에다 놓고서 배배 튼다.

영철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로구나 하였다. 경솔 하게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요, 그렇다고 대답 아니할 수도 없는 문제라 하였다.

「그것이야 낸들 알 수 있나. 나의 마음일지라도 내가 아 지 못하니까.」

하고 억지로 책임을 벗어던지려 하였다.

「나도 알 수 없지.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이 말은 들은 설화는 다시 술을 부으며,

「자, 한 잔 더 잡숫지요.」

하고 다시 술을 부어 놓았다. 설화의 얼굴에는 아까 마신 반 잔의 포도주가 취하여 불그레하게 타오른다. 영철은 붉 게 타는 설화의 얼굴을 바라보고서 또다시 못 견디게 설화 에게 술이 권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철은, 「나만 먹어서는 안될걸. 자, 한 잔만 더 먹어.」

하고 다시 권하니까 설화는,

「왜 이러세요. 아까 그래서 꼭 한 잔만 먹겠다고 여쭈었 지요.」

하고 사양을 하면서도 이번에는 아까보다 거절하는 빛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까짓 술 한잔쯤을 무 얼 그래.」

하고 조소하는 듯이 흘기어보며 영철은 술을 부었다. 설화 는 이번에는 흥분된 표정으로 그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영 철에게 다시 따라 놓았다.

시간이 지남을 따라 연한 설화의 가는 핏줄로 타는 마액 (魔液)이 쉬지 않고 들어간다. 설화는 혈관 속에 긴장(緊張) 되는 피가 귀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그의 두 눈에는 회색 아지랑이가 끼인 듯하였다. 그리고 혈액이 높은 고동으로 그의 전신을 돌아갈수록 온 천지를 붉은 심 장빛으로 물들여 놓은 듯하고 모든 정(情)의 불길이 자기의 연한 피부를 사르려고 가는 혀를 날름날름하는 듯하였다.

설화는 공연히 입을 쫑긋쫑긋하고 시름없는 태도로 담배만 암상스럽게 재떨이에 비비었다. 그리다가는 긴 한숨을 쉬었 다. 그리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영철을 바라보며,

「영철씨, 이 세상에는 저를 참사랑으로 사랑하여 줄 다정 한 이가 한 사람도 없을까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철의 가슴에는 그 무슨 무거운 것 으로 때리는 것같이 다만 멍하게 울릴 뿐이요, 아무 예리한 감각은 없었다. 설화는 또다시 극도의 흥분된 어조로,

「얼굴에 분칠하고 입술에 연지 바른 더러운 계집의 가슴 속에도 참사랑이 있는 것을 알아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구슬구슬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옷깃을 적시었다.

영철의 가슴은 무엇이 날카롭게 내리흐르는 듯이 쓰리고 아픈 중에도 설화가 불쌍하였다. 영철의 마음에는 설화를 사랑할 만한 사람이라 함보다도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라 하였다. 그리고는 구하여 주고 싶었다. 영철은 다만 아무 말이 없이,

「왜 그런 말을 해? 응?」

하며 일어나서 설화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지 마라.」

하고 자기도 울듯울듯 하였다.

영철의 이 두어 마디 말이 얼마나 설화의 감정을 돋우었는 지 구슬같이 떨어지던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며 한참이나 느 껴 가며 운다. 그러다가는,

「영철씨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지요? 남에 게 불쌍히 여겨 주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더 불쌍한 사람은 없을 터이지요.」

영철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다만 울고 섰는 설화의 등뒤 에 서서 설화의 손만 단단히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설화가 수건으로 눈물을 씻을 때 영철은 다만 속마음으로 설화가 어찌하여 나를 이 방안으로 불러들였으며 어찌하여 뜻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며 또한 눈물을 흘려 자기의 신세를 애소하는가? 그의 말소리와 눈초리와 모든 행동이 모두 다 나에게 자기의 사랑을 던져 주는 것이 아닐까? 그 리고 그의 두 뺨을 전하여 떨어지는 방울 방울의 눈물이 참 으로 자기의 사랑을 짜내고 결정(結晶)시킨 사랑의 구슬이 아닐까? 그것을 나는 받아야 할 것인가? 안 받아야 할 것인 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설화는 입의 눈물을 씻고 다시 미소를 띠었 다. 그리고는,

「영철씨, 오늘 실례를 많이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하며 목소리를 아주 따뜻하게 하여,

「오늘 저녁에 저의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하며 종을 눌러 보이를 부른다.

영철은 다만,

「그래 가지」

하여 금방 울었다 금방 웃는 설화의 얼굴을 볼 때 어쩐지 얄미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불쌍한 여자는 불쌍한 여자로 구나 하였다.

「몇 시쯤에 오실까요?」

「글쎄 10시 가량해서.」

「10시오?」

「그래.」

「그러면 10시에 꼭 기다릴 터에요.」 설화와 영철은 일어 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2층 층계까지 왔을 때에 누구인지,

「영철군.」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영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층 계 위에는 백 우영이가 서 있었다. 영철은 쾌활하게 웃으며

「아, 우영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하며 웃음으로 인사를 하였다. 백 우영은 올라가던 다리를 멈칫하고 서서,

「웬일인가?」

하며 유심히 본다. 영철은,

「저녁 좀 먹으러 왔네.」

하였다.

「응 저녁? 자네도 요새 괜찮으이 그려, 요리집 저녁을 다 먹고.」

「오늘 생전 처음일세. 하하하.」

백 우영은 그 옆에 서 있는 설화를 보았다. 그리고는 질투 스러운 눈으로 뚫어질 듯이 흘겨보았다. 설화는 다만 백 우 영의 시선을 피하려 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오래간만이십니다.」

하였다. 백 우영은 아주 비웃는 듯이,

「좋구나, 오늘은 두 분이.」

하며 입을 찡그린다. 설화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였다. 영철도 백 우영의 짓이 미워서,

「나는 먼저 가겠네, 천천히 오려나?」

하고 설화를 따라 나가려 하였다.

우영은 엄연하고 힘있는 어조로,

「설화, 잠깐 나를 만나보고 가.」

하고 불렀다. 나가던 설화는

「왜 그러세요?」

하고 그 자리에 서서 돌아보기만 한다.

영철은 바깥으로 나갔다. 우영은 고갯짓으로 설화를 부르며,

「이리 잠깐 올라와. 할 말이 있으니.」

하였다. 설화는 혼자 갈 영철과 자별한 인사도 못하고 귀 찮게 부르는 백 우영이가 보기 싫어서,

「무슨 말씀이에요. 여기서 하세요.」

하고 암상궂게 쳐다본다.

「여기서는 하지 못할 말이야. 저 위로 올라가서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 자 이리 올라와.」

하며 설화를 기다리는 듯이 돌아다본다. 설화는 아니 올라 갈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귀찮은 생각이 치밀어 올라오지 마는 자기는 기생이라는 생각이 그의 발을 백 우영에게로 향하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좇아 올라가기는 싫어서 달아날 듯이 싹 돌 아서며,

「고만두세요. 저도 일이 있어요.」

하고 가는 허리를 배배 틀면서 바깥으로 나가려 하였다.

우영은 나가는 설화를 보고 간교한 사냥개같이 뛰어내려와 손목을 붙잡으며,

「어데를 가?」

하고 여우같이 흘겨본다. 설화는 간특한 독부(毒婦)의 웃음 같이 <희>하고 우영을 깔보는 듯이 바라보더니,

「왜 이러세요.」

하며 잡은 손목을 벌레나 붙은 듯이 홱 뿌리친다.

우영은 독이 엉킨 선웃음을 치며

「올라오지 않을 테야?」

「왜 안 올라가요. 돈만 주어 보세요.」

우영은 이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막혔다.

「흥, 돈?」

하고 혼자 부르짖었다. 우영도 물론 설화의 청구하는 돈이 라는 것을 으레히 줄 것인 줄은 알면서도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인 것을 알았던지 잠깐 이야기하자는 데 돈이라 는 소리를 하는 설화의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아지 못하였 다. 설화는 우영이가 기가 막혀 다만 <돈?> 하고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또한 우영이가 그 무슨 추악한 세계를 비웃는 듯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여,

「네.」

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고운 옷과 매끄러운 단장(丹粧)이 다 낡은 걸레같이 더러워 보일 때, 또다시 (그래서는 무엇하니. 올라오는 데로 올라가 보리라) 하였다 설화는,

「그러면 올라가지요.」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영은 원망스럽게 설화를 바라보며,

「흥, 고만두어라. 영철의 사랑만 사랑이고 나의 사랑은 사 랑이 아니라더냐.」

하였다. 그 말소리 속에는 영철을 비웃는 동시에 설화에게 자기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느냐 하는 애원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기가 막혀서,

「어떤 정신 없는 양반이 그런 말씀을 해요. 조금 잘못 알 았다고 그래 주십시오.」

하였으나 그의 가슴에는 그 무슨 희미한 기쁨이 있었다.

연옥에게 조합 문간에서 영철씨가 너를 사랑하신단다 말을 들을 때보다 더욱 농후(濃厚)한 기꺼움이 그를 즐겁게 하더 니, 오늘 이 소리를 들을 때에 웬일인지 부끄러운 중에도 백 우영의 그 말하는 것이 질투 끝에서 나오는 말인 것을 알기는 알면서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도록 듣기가 싫었으 며 남이 알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설화는 백 우영을 달래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

우영은 설화의 손이 자기의 손에 닿을 때 요악한 계집의 날 카로운 입김이 맛보는 것과 같이 마음이 저린 중에도 모든 관능이 취함을 깨달았다. 우영은,

「놓아.」

하고 그 손을 뿌리치려 하면서도 술에 취한 듯한 눈으로 설화를 바라보며, 또다시 그의 손을 단단히 쥐고 빙그레 웃 었다. 설화는 우영을 영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놓아요? 노라시면 놓지요. 그렇지만……」

하고 우영의 손을 더욱 꼭 눌러 쥐었다.

우영은 무슨 해결이나 얻은 듯이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백 우영은 담배를 피워 물고 한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설 화를 안경 너머로 흘겨보며,

「거기 앉아.」

하고 의자를 가리켰다.

설화는 웬일인지 조용한 방에 으스스한 공기가 좋지 못하 여 무슨 더러운 행위를 장차 실행하려는 준비의 시간에 서 있는 듯 하였다. 그리고 우영의 안경 너머로 자기를 바라보 는 것이 더러운 음욕을 채우려고 덤비려는 것 같아 진저리 가 쳐지도록 싫었다. 그래서 설화도 우영을 곁눈으로 흘겨 보며 입을 쫑긋하고, 「걱정 마세요. 저는 남에게 매어지내 는 사람인 줄 아십니까?」

하고 창 옆에 가 서서 바깥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저쪽까지 끝없이 연한 큰길 위에 혹시 영철이나 가지 않나 하였다.

우영은 사교가의 웃음같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허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설화에게로 가까이 가서,

「이리 앉으십시오.」

하고 설화의 손을 잡아 억지로 앉히면서,

「설화.」

하고 귀밑에서 나지막하게 차디찬 어조로 또다시 부르며,

「영철에게는 훌륭한 애인이 있다나?」

하였다. 설화는 어린아이의 수작이나 듣는 듯이 한참이나 우영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있거나 없거나 그 말을 나에게다 하실 것이 무엇이예요?

영철씨의 애인이거나 나지미 ( ?)이거나 제가 알 것이 무엇 예요. 그는 그고 나는 나지요.」

하고 고개를 돌이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정말 말은 잘 한다.」

「무슨 말이 좋아요. 저는 백 우영씨라는 훌륭한 애인이 있는데요. 그렇지만 백 우영씨가 저의 그 무엇을 꼭 한 가 지 알아 주지 않으시는 것이 걱정예요.」 「무엇을?」

「무엇이 무엇예요.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아는 것이 지요.」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 무엇일까?」

「당신을 나는 똑똑한 줄 알았더니 꽤 미련하시구료.」

「무엇이 미련해?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 무엇이야? 말을 해야 알지.」

「고만두세요. 저는 말하지 않을 테에요. 설화라는 계집년 의 사랑은 언제든지 하나밖에 없지요. 그러나 백 우영씨는 설화 이상가는 여자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가 있으니까요.」

「설화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를 알아 주지 못하는 말 이지.」

「모르기는 무엇을 몰라요? 제가 만일 백 우영씨 한 분만 믿었다가 우영씨가 당신의 마음이 한번만 돌아서시는 때에 는 저는 속절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다 고 만두세요. 저 같은 년이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엄벙 덤벙 지내지요. 그러다가 죽지요.」

그러다가는,

「돈만 있으면 저같은 년의 사랑은 얼마든지 살 수가 있으 니까요. 그렇지요. 지금이라도……」

하고 말을 채 못 마친다. 백 우영은,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왜 전에 하지 않던 말을 해?」하고 먼 산만 수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설화를 유심 히 바라보았다. 설화는 자기가 슬픈 곡조를 노래한 듯이 마 음이 처량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한없이 저주하는 어쩔 줄을 모를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저는 가요. 언제든지 돈만 가지고 우리집으로 오세요. 그 러면 무슨 짓이든지 당신이 하시라는 대로 할 터이니요. 자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허리를 휘청휘청하며 바깥으로 나간다.

그날 저녁이었다. 설화하고 만나자 하던 시간보다 한 시간 이나 늦어서 영철은 종로 네거리로 걸어온다. 그가 종로 정 류장에서 동대문 가는 전차를 기다릴 때에 아까부터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의심이 여태까지 그를 불안케 한다.

그는 아까 그 서양 요리집에서 설화와 만난 것이 꿈속같이 희미할 뿐이요, 누구에게 거짓말을 들은 듯이 미덥지 못한 것과 같을 뿐이다. 설화라는 기생이 자기에게 반하였다 하 는 것은 도리어 자기의 자긍(自矜)같이밖에 생각되지 않는 다. 그러나 설화가 자기를 부른 것과 또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자기에게 「이 세상에 자기를 사랑하여 줄 사람은 하 나도 없을까요?」하던 것과 눈물을 흘려 말을 하다가 또다 시 그 눈물을 고치고 냉정한 눈으로 웃는 것이 어찌나 영철 의 마음을 의혹 속에 헤매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설화가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였을까? 이 세 상에는 한 사람도 자기를 참 사랑으로 사랑하여 줄 사람이 없을까? 하는 것은 나에게 이 세상에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 여 주는 그 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애원이 아니될까? 그 뜨 거운 눈물은 방울방울이 나에게 사랑의 정화(精華)를 던져 주는 것이 아닐까? 냉랭하고 쓸쓸한 이 세상에 다만 나 한 사람이 자기의 애소와 눈물을 받아 줄 한 사람인 것을 찾아 낸 까닭이 아닐까? 그리고 오늘 저녁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은 나를 참으로 만나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서 나온 소 리가 아닐까?

그러나 영철은 또다시 생각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설화 가 그 당장에서 나의 가슴에 안기어 「나는 당신을 사랑합 니다.」하고 사랑을 간절히 구해 보지를 못하였을까? 어찌 하여 흘리던 눈물을 갑자기 씻고서 냉정한 웃음으로 다시 웃었을까? 설화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사랑을 구하고 싶은 간절한 요망이 있었다 하면, 어찌하여 말을 못하였을까?

그렇다. 만일 그 자리에서 설화가 나에게 사랑을 구하였던 들 나도 그것을 주었을걸……그가 만일 나의 가슴에 울었더 라면 나도 따라서 울었을걸…… 그리고 약한여자인 그는 나 에게 사랑을 구하였다가 배척을 당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 이 있었던 게지! 그러면 그때에 나를 못 믿었던 것이지……

이 세상의 모든 남자를 못 믿는다 하는 설화는 또 나까지 믿어 주지를 못하였던 게지……

이것을 생각한 영철은 아까 그 설화의 눈물을 씻고 냉정한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던 것이 똑똑하고 분명하게 보여 그 눈이 박혀 있는 그 머릿속에는 자기까지 다른 남자 모양으 로 못 믿어하고 주저하는 화살을 재어 가지고 쏘려고 노리 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그 설화가 모든 남자를 못 믿는 것 은 여자가 모든 남자를 그의 모든 아귀같이 간특한 짓으로 모든 남자를 속인 까닭이라는 생각이 떠돌면서 아! 과연 누 가 여자의 눈물을 믿는 자냐? 누가 여자의 한숨 속에서 진 실을 찾아 내는 자냐? 하였다.

그러다가 영철은 또다시 (설화가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까?)하는 생각이 날 때에는 그윽한 음악이 설화의 집에서 가늘게 새어나와 골목을 지나고 행길을 돌아 보이지 않는 가는 은 줄이 명주실이 되어 자기의 가슴을 얽어 청진동편 으로 잡아끄는 듯하였다. 그리고,

「가볼까?」

하는 것이 처음으로 영철의 입에서 새어나온 주저의 말소 리였다. 그러나 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설화가 맞아주기나 할까? 보며는 반가와하여 줄까?

아까 나더러 오라고 한 말이 지나가는 말소리가 아니었을 까? 비록 내가 간다고 하여 보자. 그러나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이 설화를 차지하고 앉았을 터이지. 그러면 나는 따돌 세임을 당할 터이지. 아까 그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눈으 로 시침을 딱 떼고 교사한 말로써 나를 문간에서 돌려 보내 지 아니할까? 그러나 기생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할 즈음에 동대문 가는 전차가 와서 섰다. 그 전차 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섰던 영철의 마음은 웬일인지 그 전 차가 와 선 것이 보기 싫도록 미웠다.

「빌어먹을 전차,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더니 이런 때는 정 치게 속히 오네.」하며

「고만두어라. 집으로 가지.」하고 전차를 타려다가,

「그렇지만……」

하고, 타려던 전차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려놓으면서,

「제가 기다리거나 핀잔을 주거나 냉대를 하거나 내가 갈 것은 내가 갈 것이다.」

하고 다시 발길을 돌이켜 청진동으로 향했다. 시계는 벌써 11시 반이나 되었다. 종로 네거리에는 전차 차장이 두어 사 람 서 있고, 빨간 불을 켜놓은 순사 주재소 앞에는 검은 복 장을 입은 순사가 뚜벅뚜벅 왔다갔다 할 뿐이요 아주 조용 하다.

영철은 재판소 앞 대서소 많이 있는 골목을 꿰뚫어 청진동 으로 들어섰다.

설화네 집에 다다라서 문패를 조사한 영철의 마음은잠갔던 열쇠를 얼어 논 듯이덜컥 하고 부러지는 듯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여기로구나!」

하였다.

대문은 눈 감은 듯이 닫히어 있었다. 영철은 가만히 문을 밀어 보았다. 문은 영철의 생각하던 바와는 같지 않게 밀치 는 대로 스르륵 열리었다. 영철은 마음을 대담하게 먹고서 속마음으로, (어떻든 불러나 보리라.) 하다가, 그래도 얼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귀를 기웃하 고 안방에 무슨 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 보았다. 아무 인기 척이 없는 것을 안 영철은 그때야 목소리를 가다듬어, 「설화.」

하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두 번을 부르고 세 번을 불 러도 대답은 없다. 영철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기다리기는 무엇을 기다려! 내가 못난이 짓을 하였지.) 하고 어째 마음이 부끄럽고 설화의 거짓말한 것이 얄밉기 도 하여,

「에, 그대로 가리라.」

하다가도 그렇지만 한 번만 더 불러보지 하고 또다시,

「설화!」

하고 크게 불렀다. 영철은 웬일인지 자기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한데 자기도 모르는 의심이 나서, (목소리는 왜 떨리노?) 하고, 혼자 자기를 비웃는 듯이 웃었다.

「누구요?」

하는 소리가 이제야 미닫이를 여는 소리와 함께 들리었다.

영철은 그 <누구요?>하는 소리가 자기의 다시 돌아가려던 것을,

「네가 잘못이지!」

하고 경성시키는 부르짖음같이 그의 마음을 때리었다.

영철은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그 대답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을 들은 그 대답한 사람은 신짝을 찍찍 끌며 마당으로 나오려고 한다. 설화가 나오나 보다 하고 일부러,

「설화 있소?」

하였다.

「있소, 누구요?」

하는 사람은 설화 어머니였다.

영철은 문간을 들어서서 마루 위로 올라갔다. 창 안에 전 기불은 향내나는 몰약(沒藥)이 녹는 듯이 켜 있었다. 영철은 저 불 밑에는 설화가 앉아 있으려니 하였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다 못해서 비스듬히 기대앉아 졸려니 하였다. 그러면 나는 그의 가는 허리를 바싹 껴안고,

「나 왔소.」

하며 놀래리라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러면 그는 놀란 중에도 원망스러워하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연지 입술을 반쯤 벌리고 앵두빛 같은 웃음을 띠렷다 하였다. 영철은 문 을 열고 들어갔다. 영철이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정경이 영철의 마음을 쪼개는 듯했다.

10시에 오마 한 자기를 자정이 넘도록 기다리다 못해서 영 철을 원망도 하여 보고 모든 세상을 저주도 하여 보고 그 끝에는 자기 신세를 한탄도 하여 보고 모든 것을 단념도 하 여 보다가 그대로 팔을 벤 채로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설화 가 영철의 눈앞에 놓여 있다. 설화의 아래 눈썹에 고여 있 는 작은 눈물 방울이 전기불에 비치어 비애(悲哀)의 정화같 이 푸르게 반짝인다. 그러다가는 떨리는 한숨이 온 방안에 가득한 정조(精調)를 무너뜨려 버리는 듯했다.

영철은,

「설화!」

하고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나 설화는 대답이 없이 누워 있을 뿐이다.

「설화, 나요.」

하고 성화같이 흔드는 영철의 말 끝에 설화는 겨우 잠꼬대 같이,

「무어요? 영철씨가 오셨어요? 그이는 우리집에 오시지 않 으세요. 벌써 날이 밝았는데요.」

하고는 모든 것을 단념한 듯이 고개를 돌이켜 돌아누우려 고 하였다. 영철이가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가 무슨 죄나 지은 듯이 아까 자기가 종로 정류장에 서서 생각하던 것과 설화의 집 문간에서 다시 돌아가려던 것이 뉘우쳐지고 부끄 러울 뿐이다. 영철은 설화를 껴안으며,

「설화, 내요. 영철이요.」

하그러므로 또다시 흔들어 깨우면서,

「용서하시오. 그렇게 꿈속에서까지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하였다. 설화는 꿈에 어린 눈으로 수수께끼를 듣는 듯이 영철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아, 영철씨.」

하고는 그대로 영철의 가슴에 고개를 대고 느껴운다.

「영철씨, 저는 영철씨까지 그러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영철씨를 원망하였어요. 그러다가는 단념까지 하였어요. 그 단념은 참으로 어려워요.」

영철은,

「용서하시오. 모다 나의 잘못이지요! 고만 눈물을 씻으시오.」

하고 수건으로 설화의 눈물을 씻기었다. 설화는 애원하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영철씨.」

하고 영철의 대답을 기다림인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 부 끄러웠던지 말소리를 그치고 가만히 있었다. 영철은 진정이 뭉치인 어조로,

「응」

하고 대답하였다.

「영철씨는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 알아 주세요?」

하며 고개를 더욱 영철의 가슴에 대고 또다시 복받치는 울 음을 운다. 영철은 참으로 불쌍한 여자라 하면서도,

「불쌍하게 여기오.」

라고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얼른 하면 입에 붙 은 말로써 설화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줄 알 것도 같고 그 렇다고 그렇지 않소, 할 수가 없어서 다만 아무 말 없이 설 화의 머리털만 쓰다듬으며,

「왜 설화가 불쌍한 사람인가?」

할 뿐이었다. 설화는,

「네, 저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아주 가련한 인생이에요.

저는 믿을 곳도 없고 바랄 곳도 없는 사람이에요. 영철씨!

영철씨께서는 저를 영원히 불쌍히 여겨 주시지요?」

「설화, 나는 참으로 아지 못하였소. 자! 일어나시오. 나도 이제부터 설화의 가슴에 안기고 싶소. 끝없는 꿈나라로 함 께 흘러갑시다. 견디기 어려움을 맛볼 때마다 흘러서 서로 합하는 따뜻한 눈물의 위로를 받읍시다.」

이 말을 한 영철의 눈에서는 아지 못하는 눈물이 보석반지 반짝반짝하는설화의 흰 손등 위에 떨어졌다. 설화는 겨우 마음을 진정한 듯이 몸을 영철에게 실리며 가늘게 바르르 떨더니,

「영철씨, 어떻게 하면 이 괴로운 세상을 벗어날까요. 저는 끝도없고 한도 없는 세상으로 달아나고 싶어요. 모든 것을 활활 내던지고 한없이 흘러가고 싶어요. 공중으로 흘러가는 구름같이 둥둥 떠나가고 싶어요. 그러다가는 그러다가 영철 씨의 가슴에서 죽고 싶어요. 영철씨, 영철씨의 가슴은 저의 마지막 무덤이 되어 주세요.」

영철은 설화의 흘리는 듯하게 게슴츠레한 눈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자기의 팔을 붙잡은 미끈한 손과 자기의 심장 위로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울음 소리가 차디차고 근질근질 하게 설화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게 하였다. 그 불쌍한 생각이 날 때마다 영철은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자식을 끼어 안 듯이 설화의 등에 깍지낀 손을 힘있게 잡아당기어 자기 의 가슴에 힘있게 끼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그윽한 정욕을 일으키는 설화의 젖가슴이 뭉크러지는 듯이 영철의 가슴을 누를 때 영철은 조금 지지리 탄 듯한 설화의 붉은 입술을 빨아 보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화!」

하였다. 설화는,

「네.」

하고 영철의 얼굴을 치어다볼 때 영철의 두 눈에 으리으리 한 이상한 정체가 설화의 마음을 매혹적으로 근지릴 때에 그는 고개를 다시 수그렸다. 영철은 손으로 설화의 뜨겁게 타는 두 뺨을 곱게 문질렀다. 그러다가는 그 뺨을 쳐들어 자기 얼굴과 마주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는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싱긋 웃었다. 설화 도 영철의 웃음에는 그 무슨 요구(要求)를 알아채인 듯이 생 긋 웃고서는 부끄러움을 짓고 고개를 돌이키려 하였다. 영 철은 그러나 돌리려는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하더니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가늘게 떨리는 소리로,

「설화!」

하였다.

이번에는 설화도 응종하는 듯이 다만 싱그레 웃으면서 가 만히 있다. 영철은 설화의 쪽찐머리 뒤로 한 손을 보내고 또 한 손으로 설화의 등을 감아 설화를 얼싸안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아무 소리가 없었다.

다만 입김과 입김이 코를 지내나와서 강하게 떨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공기를 짜릿한 정욕의 그윽한 맛으로 물들일 뿐 이었다.

영철이 두 팔의 힘을 늦추고 설화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꺄우뚱하고 머리 쪽을 고칠 때에는 두 사람의 입술에는 꿀 물 같은 사랑의 이슬이 번지르하게 윤이 흘렀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아아 과연 나는 행복의 경계선을 넘어 들어온 자인가 할 뿐이었다.

영철과 설화가 설화의 집에서 만난 지 사흘 동안이 지나갔다.

어린 혜숙은 교실에 들어앉아 한문을 배우고 있었다.

수염 많이 난 털보 선생이 무엇이라 힘없는 목소리로 설명 을 할 때마다 여러 학생의 얼굴들은 점점 누래지도록 염증 이 나는 모양이다. 혜숙은 처음에는 책을 펴놓고 선생의 설 명을 들으리라 하였다. 그러다가는 10분이 지나지 못해서 공책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 그리다가는 또다 시 선용의 생각이 났다.

선용씨도 나처럼 공부를 하렷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배우기 싫은 한문을 배우지 않고 영어를 배우렷다 하였다. 그러다 가는 또다시 선용의 그리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는 편지나 한 장 쓰리라 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눈을 한번 치어다보고는 아무 말없이 공책 하나를 뜯었다. 그리고 모든 묘한 문자와 정다운 문자를 될 수 있는 데까지 자기 힘을 다해서 써보리라 하였다.

그는 편지를 써서 필통 속에 있는 봉투를 꺼내서 피봉을 썼다. 그래서 책 틈에다 넣었다. 그리고 선생에게 들키지나 아니하였다 하고 다시 선생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책을 보는 체하였다.

어린 혜숙은 다만 마음 가운데 이러한 것만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선용씨가 일본 공부를 하여가지고 돌아오거든 앞 에는 수정 같은 냇물이 굽실굽실 여울지어 돌아가고 뒷동산 에는 성(聖)된 종려나무 그늘 같은 무르녹은 녹음 가운데 어 여쁘고 얌전하게 양옥집을 짓고 살자!

그리고 선용씨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자기는 전기불이 고 요히 비치고 나부끼는 창장(窓帳)을 가는 바람이 고달프게 할 때 그 옆 교의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선용씨가 머리를 고 달프다고 붓대를 놓거든 나는 피아노의 맑고 가는 멜로디로 그의 머리를 가라앉혀 주리라. 그러다가 달이나 훤하게 밝 거든 뒷동산 이슬 내린 사이로 두 사람이 팔을 마주 겨누고 이리저리 소요하면서 나무 사이로 흐르는 푸른 달빛에서 한 없고 달콤한 정화에 취하여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그렇게 되겠다는 확실한 희망을 혜 숙의 가슴에 부어 준다는 것보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는 욕망이 그의 머릿속에 쉬지 않고 나타나는 공상의 활동 사진을 비치게 하였다.

하학을 한 혜숙은 학교 정문을 나섰다. 그의 책보를 낀 손 에는 선용에게 갈 편지를 책보하고 겹쳐 쥐었다. 그가 마침 우체통 앞으로 가까이 가려 할 때에,

「오래간만이십니다.」

하고 은근히 인사를 하는 백 우영을 만났다. 혜숙은 깜짝 놀래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결에 나오는 목소리로,

「네, 오래간만이십니다.」

하였다. 그랬으면 고만인 걸 무슨 죄나 짓다가 들킨 듯이,

「어데를 가세요?」

하고 서투른 말로써 그에게 무슨 애원이나 하는 듯이 공연 한 말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자기 손에 든 편지를 백 우 영에게 들키지나 아니하였을까? 하고 얼른 보이지 않게 책 보와 자기의 팔 사이에다 넣어 버리었다.

「네에, 어데 좀 갑니다. 벌써 하학을 하셨어요?」

하고 백 우영은 나란히 서서 가기를 청하는 듯이 혜숙의 옆으로 가까이 오더니 아무 말 없이 걸어간다. 혜숙도 하는 수 없이 편지도 부치지 못하고 그대로 우영과 조금 떨어져 서 천천히 걸어간다.

우영의 얼굴은 영도사에서 볼 적보다 더욱 어여뻤다. 그리 고 양복 입은 맵시가 날씬하고 녹신하도록 태도가 있어 보 이었다. 그리고 어여쁜 입이 한번 맞추었으면 좋을 듯이 사 람의 마음을 끈다.

그리고 양복에서 일어나는 구수한 털냄새와 속옷에 뿌린 향수내가 혜숙의 허리를 홰홰칭칭 감아 잡아당기는 듯이 그 윽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은 수놓은 비단 방석같이 편안해 보였다.

우영은 말을 좀 붙여 보려고,

「혜숙씨 오라버니 안녕하세요?」

하고는 곁눈으로 혜숙을 보았다. 혜숙은 땅만 보고 걸어가 면서,

「네, 안녕하세요.」

하였다.

「지금 바로 댁으로 가십니까?」

「네, 바로 가요.」

「저의 집에 가셔서 잠깐 놀다 가시지요?」

이 소리를 들은 혜숙은 깜짝 놀래며,

「네?」

하고 우영을 쳐다보았다. 평생 남자에게 놀러가자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혜숙은 백 우영의 자기 집까지 놀러가자는 것이 그 무슨 놀랄 만한 죄악의 굴로 유인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죄악 중에도 망측한 냄새가 흐르는 방안으로 자기를 데리고 가려 하는 듯하였다.

우영은다만 혜숙의 어린 것을 조소하는 듯이,

「네, 저의 집까지 가셔서 잠깐만 앉아 노시다 가시지요.」

하였다. 혜숙은, 「늦게 가면 집에서 기다리시니까 실례지 만 하는 수 없는걸요.」

하며 공연히 마음이 불안하였다.

「무얼요뿐 잠깐 앉았다 가실걸요. 저의 집은 여기서 가까 우니까…… 바로 저깁니다.」

하며 저쪽에 있는 기와집을 가리킨다. 혜숙도 그 집을 바 라보며,

「네, 그러세요. 그렇지만……」

하고 주저주저한다.

「그러면 언제든지한번 놀러 오실 수 없을까요?」

「글쎄요. 언제든지 오라버니하고 한 번 놀러 가지요.」

「네에!」

하는 백우영의 마음에는 오라버니하고 같이 가겠다는 말이 아주 만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혼자 오라고 할 수가 없어,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하였다.

백 우영과 서로 헤어져 자기 집에 돌아온 혜숙은 책상 앞 에 앉아서 복습을 하기는 하나 그의 머리에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들어가지는 않고 백 우영과 김 선용의 그림자가 왔 다갔다 한다.

혜숙은 백 우영을 오늘 만나기 전까지는 김 선용에게 모든 촉망을 두었으며 모든 공상에 현실을 기대하였으나 백 우영 을 만나 보고 나니까 거미줄 얽듯 공중에 얽어 놓은 공상이 한낮 꿈같이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백 우영에게서 모든 환 희(歡喜)와 열락(悅樂)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을지라도 김 선 용의 보이지 않는 장래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것 같지는 않 았다. 백 우영은 모든 미(美)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지라도 김 선용은 그렇지 못하였다.

혜숙은 어찌하여 영도사에서 김 선용에게 나는 언제든지 당신을 잊지 못하겠어요 하였노? 하였다. 그때 백 우영에게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 도리어 나을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 고 오라버니의 편지와 함께 김 선용씨에게 편지는 무엇하러 하였노? 하였다. 그리고는 오늘 낮에 학교 교실에서 써서 부치려 하던 편지를 다시 뜯어 읽어 보다가는, (이 편지를 부칠까? 말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그래도 부쳐야지, 내가 만일 이 편지를 부치지 않으면 내 가 죄를 짓는 사람이 될터이지! 선용씨는 나로 인하여 불행 한 사람이 될 터이지!) 하다가는, (오라버니가 만일 나의 이와 같이 주저하는 마음을 알며는 책망을 하렷다.) 하였다.

그의 마음은 자기가 하고 싶고,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고 집(固執)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이 없는 어린애다.

자기의 마음이 비록 백 우영의 그의 묘한 힘에 끄을려 갈 지라도 자기의 오라버니를 절대로 신임하는 혜숙은 영철의 말을 일종의 경전(經典)같이 믿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자기의 마음 한 모퉁이에는 웬일인지 김 선용 에게 대한 불만이 있을지라도 그 불만이 있는 김 선용을 당 장에 배척할 만큼 용기는 없었다.

그는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그래도 부쳐 주어야지.) 하였다. 그리고 마음 한옆으로 언제든지 틈만 있거든백 우 영의 집에를 한 번 가보리라 하였다.

지구가 돌매 온 우주까지 바뀐 듯 하고 가을과 겨울이 지 내어 따뜻한 봄이 오니, 죽었던 모든 만물이 생기를 띠어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난다. 티끌에 잠겨 있고 허위에 얽 매어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투는 도회 사람이나, 한적하고 적 막한 시골에서 순후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여 가는 향토 사람이나, 나무에 깃들이는 어여쁜 새들이나 산 위에 뛰어 가는 사나운 짐승이나, 우뚝 솟은 산이나 잔잔한 바다나 함 께 춤추고 같이 노래하는 것은 봄 신(神)의 두터운 은총뿐이 었다.

나릿한 바람이 사람의 젖가슴을 간질이고, 멀고 가까운 산 과 들에는 새로 나는 푸른 풀이 금자리를 깐 듯하고 버들가 지 펄펄 춤추는 어떤 일요일 아침이었다. 구리빛 햇빛이 따 뜻하게 쏘아오는 마루 끝에서 세수를 한 영철이 혼잣말처럼, (오늘은 은행의 일로 인천에 갈 일이 있는데……) 하고서는 귓바퀴에 묻은 비누를 씻으려 할 즈음에 대문간에서,

「편지요.」

우편 배달부가 편지를 한 장 내던지고 달아난다. 영철은 문간에 나아가 물묻은 손으로 편지를 집어 피봉을 살펴보았 다. 거기에는 <이 혜숙양>이라고 한문으로 쓰고 그 뒤에는 사직동 <백 우영>이라 씌어 있다.

영철은 아주 유쾌치 못한 생각이 나서 상을 찌푸렸다. 그 는 편지를 들고 마루 앞으로 가까이 오려 할 즈음에 방문을 열고 혜숙이가 고개를 내어밀며,

「누구에게 온 편지예요?」

한다. 영철은 시원치 못한 어조로,

「네게 온 것이다.」

하고 여전히 편지를 내려다보고 섰다. 이 소리를 들은 혜 숙은 깜짝 놀라는 듯이 반가와 하면서,

「네? 제게요. 어디 이리 주세요.」

하고 마루로 뛰어나오며 영철의 손에 든 편지를 빼앗는다.

그러다가는 편지를 손에 들고 주춤하면서,

「응! 그이에게서 왔군.」

하고는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책상 앞에 돌아앉아 입속으로 소곤소곤 읽는다.

영철은 수건질을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혜숙에게 「무엇 이라고 했니?」

하고 그 편지에 사연이 알고 싶은 듯이 물어 보았다.

혜숙은 안심한 듯이 편지를 내놓으며

「오라버니하고 저하고 이따가 4시에 자기 집으로 놀러 오 라구요.」

하였다. 영철은 그 편지를 들여다보며,

「놀러 오라구? 나는 갈 수가 없는걸, 인천을 좀 갈 일이 있어 밤에나 올 터이니까.」

하며 안 된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한다. 혜숙은 큰 걱 정이나 난 듯이,

「그러면 어떻게 해요?」

하며 영철을 쳐다본다.

「무엇을 어떻게 해?」

「그럼 저 혼자 가요?」

「혼자?」

하고 영철은 힘있게 말을 하고는,

「혼자 가면 무엇하나, 고만두면 고만두지.」

하고는 들었던 수건을 역정이나 난 듯이 탁탁 털어서 횃대 에다 턱 걸친다.

「그러면 기다리면 어떻게 해요?」

「기다리면?」

하고 영철은 조금 주저주저하다가, 「기다리다가 고만두겠 지, 안 가도 관계치 않다.」

혜숙의 마음에는 비로소 자기 오라버니인 영철의 말이 밉 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의 줄을 끊으려 하는 듯한 의심까지 나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속마음으로 김 선용에게 자기의 편지를 보내게 한 것도 자기의 오라버니 까닭이요, 또한 김선용에게 사랑을 주게 한 것도 자기 오라 버니라 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엷어져 가는 것은 만나 지 않는 김 선용의 사랑이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두터 워 가는 것은 백 우영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영철이 한테는 원망스러울 때가 있고, 원망의 도수가 더하여 가면 갈수록 영철을 믿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혜숙의 마음속은 귀찮은 듯이 조마조마하다. 그리 고 자기의 모든 것을 의뢰하던 영철이가 지금 이 당장에는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였그리고 백 우영의 집에는 어떻게 가 보아야 하겠다 하였다.

(그렇지만……) 하고 망설이듯이 방바닥에 놓여 있는 편지를 정성스럽게 접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다른 곳 만 본다. 영철은 웬일인지 오늘 혜숙이 백 우영의 집에 가 고 싶어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유쾌하지 못하여,

「고만 두어라. 요다음에 나하고 같이 가자. 오라는 데 안 가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혼자갈 것은 없다.」

할 즈음에 혜숙의 어머니가 밥상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이고 불만족해 앉아 있는 혜숙을 흘 겨보며,

「커다란 계집애가 다니기도 퍽 좋아하지. 무엇하러 남의 집 사내 있는 데를 혼자 가니! 오라버니하고 같이나 가면 모르지만.」

하고 가뜩이나 속으로 분이 나는 혜숙을 책망을 한다. 혜 숙은 오라버니에게는 차마 분풀이를 못하다가 만만한 어머 니에게는 팩 쏘는 소리로

「어머니는 아지도 못하고 그러셔. 남의 집 사내에게 신용 을 잃어면 더 부끄럽지.」

하니까 어머니는 핀잔이나 주는 듯이,

「얘 고만두어라. 너무 잘 알아서 나는 걱정이더라.」

하고 밥상을 놓는다.

영철의 귀에는 <신용>이라는 말이 의심쩍게 들리었다.

「그러면 언제 만나기로 약조하였던가?」

하면서도 성이 나서 앉은 혜숙에게 또다시 물어 볼 것도 없어서 그대로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고만두어라, 요다음에 나하고 가지, 어서 밥이나 먹 어라.」

한다. 혜숙도 하는 수 없는 듯이 상으로 가까이 와서 밥그 릇을 열었다.

사직동 백 우영의 집 따로 떨어진 뒷사랑에는 11시가 넘어 서 일어나 앉은 백 우영이가 그 옆에 앉은 자기 친구와 이 야기를 하고 앉아 있다.

「오늘이 일요일이지?」하며 백 우영이 그 친구를 건너다 보며 무슨 기대(期待)를 가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 청년은 백 우영을 정신없는 놈이라는 듯이 웃으면서,

「이런, 날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나?」

「그렇다네.」

하였다.

「오늘 영철이가 인천을 가는 날이라지?」

「가겠지?」

「흥, 그런데 지배인인지 무엇인지는 이 영철의 손 속에서 그대로 논다지?」

「그럴 리가 있나, 어떻게 영악한 사람이라고.」

「말 말게, 지난 번에도 이 영철이가 지배인에게 돈 5백원 을 돌려쓰려다가 연말이 되어서 못되었다는걸. 요새 어째 마음이 덜렁덜렁하는 모양이야.」

「덜렁덜렁만 하겠나 죽자 사자 하는 아가씨가 있는데」

「옳지 옳지 알았네. 알았어. 너무 그러다가는 안될걸.」

「그러면 무엇하나. 잘못 덤비다가는 큰코다치지.」

「그렇고말고. 제가 무엇으로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돈도 주지 않고, 제가 무엇이 있어 그래.」

백 우영은 다시 말을 고치어,

「그렇지만 누이동생은 관계치 않던걸. 자네도 보았겠네 그려.」하였다.

「음, 보다뿐인가. 요새는 웬일인지 바짝 차리고 다니네.

어째 좀 다른 게야.」

백 우영은 속마음으로 <내다>하는 자랑과 <너는 아직 모 른다>하는 우스운 생각이 나지마는 태연한 기색으로,

「그럴 것이 아닌가. 요사이 날도 따뜻하여지고, 또 차차 마음이 따뜻하여 질 테니까.」

하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백우영은 말을 그치어,

「그런데 오늘은 가지 못하겠네.」

하고는 팔짱을 끼고 어깨를 한번 좌우로 부라질을 하더니,

「집에 일이 있는걸.」

하고는 핑계를 댄다.

「무슨 볼일이야.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는 그 찾아온 친구가 간원하는 듯이 말을한다.

「정말야. 어제 저녁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놀았더니 몸도 좀 아프고 이따 누가 온다고 하여서 꼭 기다리마고 대 답을 하여 놓았는걸.」

「안 되네. 가야하네. 꼭 만나야 할 사람인가?」

「정말 못 가, 갈수 만 있으면 가지.」

그 청년도 농을 쳐서 웃으며,

「설화도 부른다네, 가세그려.」하며 유인을 하려 한다. 백 우영은 한 번 씽긋 웃으면서,

「설화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영철이가 있어야지.」

하고 가지 않겠다고 뻗대는 듯이 담벼락에 기대앉는다.

그 청년은 낙망하는 듯이 <시……>하고 입김을 들여마시면서,

「안 되었는걸.」

하고 천장만 치어다본다.

백 우영은,

「대단히 미안하이, 그렇지만 사정이 그런 걸 어찌하나.」

하고 고개를 돌이켜 석정을 들여다본다.

그 청년은 시계를 보더니,

「벌써 11시 40분일세. 어서 가보아야 하겠네.」

하고 모자를 집어들고 바깥으로 나아갔다.

백 우영은 옷고름을 아무렇게나 고쳐매고,

「어멈, 어멈.」

하고 하인을 부르더니,

「세숫물 놓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와서 체경 앞에서 머리 에 기름을 발라 반지르하고 야들하게 얄밉게 착 갈라붙이더 니,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뿌리고 넥타이를 골라 매었다. 그 리고 그 옆에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향기 도는 담배를 푸 하고 피운다.

그리고 혼자 빙글빙글 웃는 그의 머릿속으로는 오늘은 혜 숙이가 올 터이지 그리고 영철이가 인천을 갔으니까 제가 혼자 올까? 그렇지만 영철이가 없어서 오지 않으면 어찌하 노? 그렇다고 아니 올 리는 없으렷다. 어떻든 오기만 하여 라. 오기만 하면 되었다 하였다.

그날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혜숙이 오기만 고대하였다.

그러나 거의 거의 해가 넘어가려 할 때 백우영은 시계를 치어다보고, 저물어 가는 저녁 공기가 자기의 고대하는 마 음을 거의거의 낙망으로 끄으는 듯이 그의 심사를 회색으로 물들이는 듯할 때 그는 갑갑한 듯이 창문을 획 열어젖뜨리 고는 바깥만 내다보고 서서 「오는 모양인가, 아니오는 모 양인가.」

하다가는 또다시

「10분, 20분……」

하면서 뒷짐을 지고 방 가운데로 왔다갔다한다.

그리할 때 혜숙은 백 우영의 집 문 앞에 와 섰다. 오기는 온 혜숙은, (들어갈까?) 하고 주저하다가는 어째 마음이 떨리어,

「고만두어라. 집으로 돌아갔다가 요다음에 오라버니하고 오지, 만일 오라버니가 혼자 온 것을 아시면 얼마나 책망을 하시게.」하고는 대문간에 가 한참이나 섰다가 또다시 대여 섯 발자국 돌아서 오다가,

「그렇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앉지는 말고서 왔다는 말이나 하고 갈까?」

하고 한참이나 주저주저하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거듭 문간으로 가까이 들어섰다.

그때 마침 하인 하나가 혜숙의 주저하는 모양을 보더니,

「누구를 찾으세요?」

하며 이상히 여기는 듯이 바라본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가 하인의 <누구를 찾으세요?>하는 소리가 어떻게 반가왔던지 알 수 없었다. 혜숙은,

「여기가 백 우영씨 댁예요?」

하며 하인의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리로 들어오시지요.」

하는 하인을 쫓아들어가는 혜숙은 한옆으로는 주저하던 마 음이 풀리어 적이 마음이 편한 동시에 백 우영을 만나 볼까 하는 반가움도 있고 또 한옆으로는 집에를 언뜻 가야 할 텐 데 하는 불안도 없지 않았었다.

혜숙은 한참이나 좁은 꼬부라진 골목을 지나고 사랑문을 들어설 때 속마음으로, (집도 크기도 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곁눈으로 집 전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백 우영씨의 거처하는 곳은 어떻게 꾸며 놓았나?) 하였다.

백 우영이가 기다리다 못해 화가 나는 듯이,

「에, 고만두어라.」

하고 교외의 덜컥 걸터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필 때,

「서방님 손님 오셨어요.」

하는 하인의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며,

「응? 누구시라구?」

하고 바깥을 내다 보았다.

거기에는 혜숙이가 마당 가운데 들어서서 사랑 마루를 치 어다보고 서 있다. 우영은 반가움이 극도로 달하여 달음박 질하듯이 문 밖으로 뛰어나오며,

「어서 이리 들어오십시오. 오시느라고 매우 수고하셨지요.」

하고 댓돌 위에 올라서는 혜숙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하 얀 이마에 달라붙은 것을 보았다.

혜숙은 숨이 찬 듯이,

「아뇨, 괜찮아요. 너무 늦게 와서 매우 기다리셨지요?」

「별로 기다리지는 않았으나 영철군은 웬일인가요?」

「저 오라버니는 오늘 아침에 인천을 가시면서 못 오신다 고 말씀이나 해달라고 하셔요.」

하는 혜숙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 은 떨리었다. 우영은 시침을 떼고,

「인천요? 어떻게 그렇게 공교하게 오늘 꼭 인천을 가게 되었을까요. 대단히 안되었는걸요.」

혜숙은 우영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만 주춤하고 서 있을 뿐 이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아담하고 정하고 깨끗하게 꾸며 놓은 방에 쉴새없이 코를 찌르는 향내는 웬일인지 그윽한 염정의 붉게 타는 냄새를 맡는 듯하였다.

우영은 방석을 내놓으며,

「앉으시지요.」

그리고 잡지와 두어 가지 그림책을 내놓으며

「잠깐만 앉아 기다려 주십시오. 큰 사랑에 나가서 전화를 좀 하고 올 터이니까요.」

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혜숙은 고요한 방안에서 책장을 뒤적뒤적하다가 다시 한 번 사면을 둘러보았다. 반양식으로 꾸민 이 방 안의 놓여 있는 책장이나 화장대나 벽에 걸어 놓은 그림이나 그 위에 놓은 화병이나 의자나 방바닥에 깔아 놓은 수놓은 방석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귀하고 반가와 보이지 않는 것 이 없었다.

백 우영이가 나간 지 30분이나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혜숙은 갑자기 놀라는 듯이 책장을 덮으면서,

「가야 할 터인데.」하고는 귀를 기울여 우영이가 들어오 나 아니 들어오나 하고 한참 듣다가 갑갑한 듯이 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 여는 소리에 아무도 없는 마당에 내 려앉았던 저녁 참새가 푸르륵 날아갈 뿐이다.

조금 있다가 신발 소리가 나더니 우영이가 다시 사랑으로 나오며,

「매우 안 되었습니다. 너무 기다리게 하여서.」

하고 우영은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저 고만 가겠어요.」

「네? 가세요?」

「집에서 기다리실 터이니까요.」

「무얼요. 조금 노시다 가시지…… 가시기가 어려워서 그 러세요? 이왕 오셨으니 저녁이나 잡숫고 가시지요.」

「저녁요? 가서 먹지요.」

하고는 혜숙은 다시 일어섰다.

「앉으세요.」

하고 우영은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앉힌다.

「놓으세요. 앉을께요.」

하고는 속으로 (무례하기도 하다) 하였으나 그 무례한 것들 책망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때 하인이 「상 내왔습니다.」

하고 상을 들여다놓았다.

전기불이 켜지며 방안에 놓여 있는 세간의 장식한 금속을 비친다.

혜숙은 한옆으로 비켜 앉으며,

「저녁은 가서 먹지요.」

하고 머뭇머뭇한다.

「무엇을 그러세요. 여기서 잡수셔도 마찬가지시지요.

자…… 가까이 오십시오.」

「집에서 기다리세요.」

저녁상을 대한 두 사람은 거진 20분 동안이나 아무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혜숙과 우영은 바로 보지도 못하는 가운 데 오고가는 정사(情思)를 말하는 가운데에도 나련한 침묵이 한옆으로는 두렵고 불안한 생각이 나게 하였다.

혜숙은 자기의 가슴이 높은 고동으로 뛰고 또한 자기의 연 하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에서 분명히 들릴 때 일부러 기침을 하고 무슨 말이든지 하리라 하였으나 할 말 이 없었다. 그리고 백 우영이가 아무 말도 없이 이상한 눈 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거북한 침을 삼킬 때에 혜숙의 뜨거 운 피가 차디차게 식어 버리는 듯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였 다. 그래서,

「저는 가겠어요.」

하고 벌떡 일어나려고 하니까 백 우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혜숙의 가려던 손을 잡으며, 「네?」

하고 아무 소리가 없다. 손을 잡힌 혜숙은 온몸이 금시에 차디찬 냉수를 끼얹는 것같이 떨리며 무서운 생각이 나서,

「왜 이러세요.」

하고 손을 잡아빼려고 애를 썼으나 우영은 무엇을 결심한 듯이 떨리는 중에도 흥분된 목소리로,

「혜숙씨.」

하고 그의 입을 귀밑까지 가까이 대며 쥔 혜숙의 손을 무 엇을 재촉하는 듯이 가늘게 흔들었다.

혜숙의 얼굴은 해쓱하여졌다. 그리고 아까 우영을 만났으 면 하던 때와는 아주 반대로 지금은 다만 얼른 이 방을 벗 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백 우영은 무슨 말인지 하려다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앉아 노시다가 천천히 가시지요.」

하였다. 혜숙은 한숨을 휘 쉬더니,

「가야할걸요.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면 걱정을 들어요.」

하고 다시 얼굴이 타오르는 저녁놀 같아지며 옷고름만 만 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백 우영은 먼저 자리 위에 앉아 혜숙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떨 리는 목소리로, 「혜숙씨」

하였다.

혜숙은 잡아당기는 팔을 끌며,

「왜 이러세요.」

하고 도망이나 갈 듯이 고개를 돌이킨다.

「저는 꼭 한 가지 전할 것이 있어요.」

혜숙의 손은 떨리었다. 몇 분 사이의 아슬아슬하고 간즐간 즐한 침묵이 계속하였다. 우영은 다시 일어났다.

혜숙은 화병에 꽂혀 있는 꽃송이 잎사귀만 하나씩 둘씩 따 면서 돌아서 있다. 백 우영은 다시 혜숙의 등 뒤로 두 손을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혜숙씨.」

하였다. 혜숙은 다만 씩씩하는 콧소리만 내고 서 있더니,

「왜 이러세요.」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우는 듯이 서 있다. 우영은 혜숙 의 머리 뒤로 으스스하게 일어선 머리카락을 하나 둘 셀 듯 이 들여다보면서,

「자……」

하고 혜숙의 몸을 투정하듯이 흔들었다.

황망히 백 우영의 집을 뛰어나오는 혜숙은 자기가 무슨 보 배를 잃어버린 듯하였다. 그리고 힘없던 자기 몸에는 질는 질한 오점(汚點)이 박힌 듯하고 한없이 꽃다운 장래를 한꺼 번에 끊어 놓은 듯하였다.

그리고 백 우영과 교제를 시작한 때와 아까 서로 만나 이 야기를 할 때에는 부끄러운 중에도 불그레한 즐거움이 그의 애를 태우더니 지금 이 으스스한 길거리를 비틀거리며 달아 날 때에는 그 모든 지나간 일과 또는 백 우영에게 안기었던 그 순간이 더럽고 진저리쳐지는 죄의 기록같이 생각될 뿐이 었다.

혜숙은 옹송그리고 길거리로 걸어오며 몸을 자지러뜨려 오 스스 떨면서, (내가 여기를 무엇하러 왔나? 오라버니가 가지 말라고 그 렇게까지 말씀한 것을 굳이 듣지 않고 와서 이런 꼴을 당하 고 가니 오라버니를 무슨 낯으로 대할까. 아아 이제부터는 처녀가 아니지.) 하고는 그의 몸을 둘러보았다.

(나는 이제부터 정말 처녀가 아닌가?) 그는 자기의 몸이 과연 처녀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혜숙 은 종로 네거리까지 왔다. 그리고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어떻게 집에를 들어가나? 집에 들어가서 무엇이라고 하 나?) 하였다.

집으로 들어가자니 부끄러운 중에도 가슴이 떨릴 뿐이요, 집에를 들어가지 않자니 어린 여자가 갈 곳이 없었다. 그러 다가는, (춥거나 굶주리거나 집에 들어가지 말고 넓은 천지 로 방황이라도 하여 볼까?) 하다가도,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 것까지 용서하여 줄 터이지?)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그의 다리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다만 한 시간일지라도 책망을 받을 시간이 늦어가기만 바라 고 길거리에서 해맬 뿐이었다.

혜숙은 하늘을 우러러 울고도 싶고 그대로 죽어버리고도 싶고 가슴이 바짝바짝 졸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왔 다. 그러다가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였다. 그는 길모퉁이에 한참 서 있어 보기도 하고 남의 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울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는, (에라 어떻든 집으로 가보리라.) 하고 넓은 길을 나왔다가는 그렇지만 하고 다시 주춤하고 서서, (밤새도록 싸대다가 내일 집으로 들어가리라.) 하였다.

그러할 즈음에 누구인지 자기 뒤에 와서 기웃이 들여다보 다가,

「혜숙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혜숙은 맥풀리도록 깜짝 놀래어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영철이가 꾸짖는 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혜숙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오라버니……」

하고 영철의 팔에 힘없이 매달려서 느끼어 가며 울었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오라버니…… 용서해 주세요.」

하였다. 영철은, 용서하여 주세요, 하는 혜숙의 말을 들을 때 아까 아침에 자기가 우영의 집을 가지 말라 한 것을 듣 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갔다가 길에서 만나 책망이나 듣지 않을까 하고 그것을 용서해 달라고 우나 보다 하였다. 그리 고는 그 우는 것을 보고서는 속마음으로 벌써 용서하였다 하는 듯이,

「이게 무슨 짓이냐. 행길에서 울기는 왜 우니? 어서 가자.

전차를 기다리니?」

하고는 혜숙을 재촉하는 듯이 흔들어 댄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하는 혜숙은 재촉하는 영철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대로 극도의 애소에서 일어나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아니예요. 저는 죽은 사람이에요.」

하고는 온몸의 버티어 있던 힘을 다한 듯이 그대로 영철의 팔에 매달려 울 뿐이었다.

이 소리를 듣는 영철의 가슴에는 번개같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는 혜숙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 다. 영철의 눈에는 오늘 아침까지 연지같이 붉던 입술이 시 푸르둥둥하게 보이며 기쁘게 반짝이던 맑던 눈동자가 송장 의 눈같이 으스스하게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따뜻한 살 냄새가 그윽하던 그 육체는 시들시들하고도 차디차게 보인다.

그리고 영철은 뜨거운 눈물 방울도 차디차게 자기 옷깃을 적실 때, 불쌍한 마음까지 나면서도 그의 피 속으로 스미어 드는 떨리는 울음소리가 추악한 냄새처럼, 그의 신경을 으 쓱하게 하여, 얼른 그의 몸을 떠밀치려 하려다 또다시 그의 피부 끝에 닿은 신경은 끝과 끝이 재릿재릿한 우애의 바늘 로 찌르는 듯할 때 또다시 혜숙의 몸을 끼어안고,

「어서 가자 응?」

하며 혜숙을 흔들었다. 혜숙은 떨리는 긴 한숨과 함께,

「저는 처녀가 아닙니다.」

하고는 참으려 하던 울음이 또다시 흐른다.

「처녀가 아닌 저를 오라버니는 용서하여 주세요? 부정한 저를 오라버니는 예전과 같이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영철은

「혜숙아.」

하고 그의 손을 힘있게 쥐며,

「혜숙은 언제든지 나의 누이다.」

하고는 소리를 지를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는 그의 손이 떨 리면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두 뺨으로 굴러 떨어졌다. 혜숙 은 영철의 손에 매달리며,

「그러면 오라버니는 저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말씀이지 요?」하며 고마운 눈물이 이제는 또다시 뜨겁게 영철의 손 을 씻어 준다. 영철은,

「인생이란 그런 것이란다.」

하고는 눈물을 씻고,

「어서 가자, 어서 가.」

하며 혜숙을 끌고 차를 태우려고 정류장 가까이 왔다.

영철은 혜숙이가 불쌍하여 그리하였든지 인생의 무상함을 느낌인지 어쩐지 모를 눈물이 자꾸자꾸 쏟아진다. 그리고는,

「정신의 행복의 결과는 육(肉)의 만족이다. 그리고 육의 만족은 정신의 고통일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내가 오늘 인천을 가지 말걸 하는 후회가 일어 나며 또다시 이등차실에서 설화를 만났던 일이며, 설화가 자기를 따라 일부러 인천까지 간다는 말이며 또는 7시차에 올라오기를 약조하였다가 소학교 다닐 때에 특별히 사모하 던 선생님을 찾아 뵈오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영철이가 선생을 찾아뵈올 때에는 그 선생이 반가이 자아 주시면서,

「어! 영철인가. 잘 왔다 잘 왔어. 이렇게까지 찾아주니 참 으로 고맙다.」

하고 주름살이 잠깐 잡힌 흰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띠며,

「이리 들어오너라.」

하고 근지러운 손으로 자기의 손을 붙잡아 당기면서,

「그래 요사이는 무엇을 하노? 오…… 은행에 다닌다지.

그렇지 그래. 놀아서는 안되지.」

하며 영철에게는 인사 한마디할 새 없이 반가와하던 것을 생각한다.

「선용이는 일본서 신문을 돌려 공부를 한다지? 그 아이는 꼭 성공하느니라. 성공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는 아 직까지도 너하고 선용이가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하며 집안 사람들에게,

「저녁을 지어라, 반찬을 장만해라.」

하던 생각을 하고 또 자기가,

「오늘은 잠깐 뵈옵고만 가야겠습니다.」

하니까,

「어…… 안될 말, 안될 말이지. 이렇게 오래간만에 와서 그대로 가다니 저녁차로 못 가면 밤 차에 가지.」

하고 굳이 붙잡으시므로 설화가 기다릴 생각을 하고 마음 이 졸이던 생각과 또 그 선생님이 자기를 붙잡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영철아! 영철아! 나는 참으로 네가 참으로 그럴 줄 몰랐 다. 너의 늙은아버지까지 돌아보지 않고 한낱 경박한 여자 에게 그렇게까지 할 줄은……」

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역력히 보인다.

그리고 정거장으로 나오는 자기를 행길까지 쫓아나오시며,

「부디부디 잘 올라가거라, 그러고 나의 말을 잊지 말아 주 기를 바란다.」

고 신신 당부하던 것이 생각된다. 그리고는, (설화가 나를 못 믿을 놈이라 하겠지? 만나자고 약조까지 하여 놓고 오지 않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무정스러운 생각이 났을까?) 그러다가는, (그 감정질(感情質)인 설화가 자기 집에서 나를 원망하고 눈물을 흘렸을 터이지?) 하였다.

그리고 경성 정거장에서 내려, 바로 설화의 집으로 가서 그런 말이나 하리라 하다가, 뜻밖에 혜숙을 만나 뜻하지 않 은 두려운 말을 듣고서 자기 누이를 데리고 지금 자기의 집 으로 향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는 혜숙을 데려다 두고는 다시 설화의 집으로 가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에 어째 우리 사람에게는 환경(環境)의 모순의, 성격, 당 착(性格撞着)이 이같이도 많을꼬?」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걸음을 바쁘게 하여 사직골 백 우 영의 집으로 가는 영철의 마음에는 백 우영이가 밉고 얄밉 고 괴악하고 더러운 중에도 분한 마음과 그윽한 인생의 비 애가 엉클어져 그대로 때려눕히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종칩다리 예배당 앞을 당도하였을 때, 인 력거 종소리가 따르르 하고 나며 자기의 앞으로 인력거 한 채가 닥쳐오더니 그 위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어데를 이렇게 급히 가나?」

한다. 영철은 얼핏 고개를 들어 치어다보고,

「네, 댁까지 갑니다.」

하는 목소리는 떨리는 중에도 분노가 섞이어 있었다.

영철은 그대로 달려들고 싶었다. 우영의 아버지를 만난 영 철은 우영을 만난 것같이 분함이 났다. 그러나 사장의 은근 하고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는 영철에게 그만 분노를 대담 하게 내놓지 못하게 하였다.

백 사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러면 우영을 보러 가나?」

한다. 영철은 다만,

「네.」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장의 얼굴을 치어다볼 때 웬일 인지 그의 얼굴에는

「네가 나의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러 가지?」

하고 위엄있게 내려다보는 빛이 보이며 또는,

「그러면 너는 나에게까지 반항하는 자이지?」

하는 듯한 무서운 빛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는 웃음을 다시 띠며, 「일어났는지도 모르 겠네. 어서 가보게.」

하고 인력거를 재촉하며 광화문 넓은 길을 향하여 가는 것 을 한참이나 서서 바라보던 영철의 마음에는 그 백사장의 웃음 속에는 무슨 깊은 의미가 박히어 있는 듯하고 또 자기 와 인연을 더 가까이 맺어지게 하는 듯하였다.

영철이 백 우영의 집 큰 대문을 들어서려 할 때에 마침 하 인 하나가 나오는 것과 마주쳤다. 영철은 힘있게 우뚝 서서 위엄있었게 하인을 바라보며,

「서방님 계신가?」

하였다. 그 하인은 심술스럽게 무례한 태도로 눈을 딱 부 릅뜨고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무어요?」

하고 다시 쳐다본다. 영철은 화가 벌컥나고 고이한 생각이 나건만 그대로 꾹 참고 서서,

「서방님 계셔?」

하였다. 그 하인은 다시 심통스런 소리로,

「잠깐만 기다리세요. 들어가 보고 나올께요.」

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간다.

영철은 우습고도 기가 막히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고 바깥 에서 왔다갔다 하며 나오기만 기다렸다.

조믿 있다가 계집 하인 하나가 나오더니 영철을 보고 여성 스러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방님 뵈오러 오셨어요?」한다. 영철은 아무 소리도 없 이 고개만 끄떡끄떡하였다. 계집 하인은 말하기가 부끄러운 듯이 싱긋 웃더니,

「여태 주무세요. 좀 기다리셔야 할걸요.」

하고 영철에게 거기 서서 일어날 때까지 가디리라는 듯이 바라본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흥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는군.) 하며 열이 벌컥 나서,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하고 엄연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계집하인은 조금 얼떨떨하여,

「글쎄요. 일어나실 때까지……」

하고 채 말을 못 마치므로, 영철은 소리를 빽 질러

「무어야, 들어가 일어나시라고도 못해?」

하더니,

「가만 있거라. 내가 들어가 잡아일으킬 터이니.」

하고 앞사랑 중문을 지나 뒷사랑으로 통한 꼬부라진 골목 을 돌아 우영의 누워 있는 사랑마당에 들어섰다.

우영은 어제 저녁에 혜숙을 보낸 뒤에 여태까지 그의 마음 을 채우고 있는 그윽하던 기꺼움이 눈녹듯이 다 풀리어 버 리고 부끄러움과 더러움이 그의 가슴속을 용트림하여 지나 가는 듯하고 또는 공연한 짓이로다 하는 후회가 그를 밤새 도록 귀찮게 하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지금도 일어나 앉아 어제 저녁의 혜숙을 더럽힌 것이 참말 일까 하다가 참말이 아니고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그러다가는 그렇지만 참말이지 할 때 그러면 혜숙을 일평생 데리고 살까? 하였다. 그렇지 함께 살면 혜숙도 부정한 여 자가 아니요, 나도 잘못한 것은 없을 터이지. 그렇다 같이 데리고 살겠다! 하였으나 어쩐지 그의 마음에 꽃게 빛나고 미치게 춤추는 많은 환영이 돌돌 뭉치어져서 그의 가슴 한 복판에 착 달라붙는 듯이 거북하고 귀찮은 듯하였다.

그러다가는 장래에 어떠한 여자든지 자기와 결혼을 하려니 하던 그 이상이 한꺼번에 푹 꺼져 버리고 다만 눈앞에는 나 무로 깎아 세워 놓은 듯이 혜숙의 그림자가 나타나 보일 뿐 이다.

우영은 속으로 그러면 나는 또다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못할 터이지! 많고 많은 여성 중에서는 혜숙이보다 더 어여 쁘고 더 잘생긴 여자가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혜숙이란 여 자 하나를 위하여 그 모든 여성의 사랑을 단념해 버러야 할 터이지!

우영은 혜숙을 <베스트>의 애인으로 보기에는 얼마간 부족 이 있었으며 또한 결함이 있어 보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피는 너무 많았다. 그의 꿇는 피는 너무 그의 이상을 고원 (高遠)하게 하였다. 우영이 이 모든 생각을 하고 자리 속에 누워 담배 연기를 호 뿜을 때에 그 담배 연기는 요염한 자 색을 가진 미인이 되어 미칠 듯이 춤을 추는 듯하였다.

이때 영철은 마루 위에 올라서 문을 홱 얼어젖뜨렸다. 그 리고,

「우영군,」

하고 부르는 소리는 무쇠 소리같이 무겁고 강하였다. 우영 의 마음은 그 무쇠 뭉치로 맞은 듯이 실신을 하도록 아무 감각이 없어졌다. 그러나 겨우 거짓 웃음을 지으며,

「아! 이게 웬일인가?」

하고 겨우 팔꿈치를 대고 일어나려 할 때 영철은 우영의 괴로운 웃음을 바라보면서,

「내가 여기 온 것은 내가 말하기 전에 벌써 자네는 알 터 이지?」

하고 한 걸음 가까이 나선다. 그리고 떨리는 주먹을 억지 로 참으면서 한 걸음 가까이 나선다. 우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여 얼굴빛이 푸르락누르락하여 앉았다.

영철은 다시 명상(冥想)하듯이 가만히 서 있더니 부드럽고 연하고 불그레하고 따뜻한 중에도 힘있는 목소리로,

「우영군!」

하더니 또다시 비장한 중에도 녹는 듯한 어조로,

「내가 온 것은 결코 자네를 징계하려는 것이 아닐세.」

하고 애연한 눈으로 우영을 바라보다가,

「청춘의 역사는 모다 그러한 것일까? 응? 우영군! 자네나 내나 그것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것 은 청춘의 타오르는 연한 불길이니까. 응?」

하고 검은 눈동자에 감추지 못하는 두어 방울 눈물이 모였다.

이 소리를 듣는 백 우영은 그 부드럽고도 강하고 연하고도 단단하고 뜨겁고도 차고 붉고도 푸르고 엄연하고도 애연한 영철 말에 모든 감정이 풀어지는 듯하고 한곳으로 엉키는 듯하여 무엇이 어떻다는 것을 아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다 만 애원하는 듯이 영철의 손을 붙잡고,

「영철군 용서하여 주게.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일세.」

하고 무의식중에 눈물이 나왔다. 영철은 우영의 부드러운 손을 힘있게 쥐며 눈물이 괴어 흐릿한 눈으로 다만 윤곽(輪 廓)만 보이는 우영의 구부린 머리를 내려다보며,

「우영군…… 벌써 짓지 못할 시간은 그 순간을 휩쓸어 가 지고 영원히 과거로 자꾸자꾸 갈 뿐일세.」

하다가,

「청춘인 나는 청춘인 자네를 용서할 자격이 없을 터이지.

나는 다만 자네에게 한 가지 청할 것을 가졌을 따름일세.」

하였다.

우영은 가슴이 괴로운 듯이 얼굴을 영철의 손등에 비비면서,

「나 같은 놈에게 자네가 원할 것이 무엇인가? 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할 터일세. 자네의 청이라면……」영철 은 주저하는 중에도 무엇을 깊은 생각하는 듯이 한참 먼 산 을 바라보고 섰더니,

「나는 나의 누이를 일평생 잊어주지 말기를 바랄 뿐일세.」

하고 힘있게 쥐었던 우영의 손을 힘없이 놓으며,

「나의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네.」

하고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우영의 마음에는 또다 시 아까 생각하던 불안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무한 장래에 헤아리기 어려운 여성의 사랑을 다 잊어버리고 다만 한 알 밖에 안되는 어린 혜숙의 사랑을 생각하니 어쩐지 안타깝게 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듯이,

「자네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

하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었다.

노름에 다녀온 설화가 옷을 벗고 자리에 눕기는 3시 20분 이었다.

그의 피곤한 몸이 이리뒤척 저리뒤척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영철의 그림자가 자기 가슴을 얼싸안고 함께 뒹구는 듯하였다. 그는잠을 이루려고 전깃불을 껐다. 전깃불 을 끄고서 눈을 감으니까 아까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영철의 모양이 저쪽 미닫이 앞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속으 로 혼자,

「영철씨.」

하여 보았다. 그러다가는 그 모양에 안길 듯이, 「영철씨는 참으로 나를 사랑하여 주세요?」

하여 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다만 옆집 닭이 목늘여 울 뿐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하던 말에서 무슨 안타까움을 찾아낸 듯하여 간원하는 어 조로 다시 건넌방에서 들리지 않을 만큼 소곤거리는 소리로,

「영철씨!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세요.」

하였으나 그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참으로 영철씨가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는지? 하는 의심이 그를 못 견딜 만큼 처량하게 한다. 나는 기생이다. 더러운 계집이다. 저주받은 여자이다.

영철씨는 참으로 나의 사랑을 알아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또한 범상한 남자이겠지? 아니 그도 젊은 사람이지. 그도 정에 약한 사람이겠지. 그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려 하더라 도 나보다 더 나은 여자가 있으면 그의 사랑은 그리로 기울 어지겠지. 이 세상의 어떠한 여자가 남자의 참말을 듣는 자 냐? 아마 한 사람일지라도 남자의 참말을 들은 사람은 없을 것이야.

대문간에서 문소리가 잭걱하고 고요하다. 설화는 눈을 번 쩍 뜨고 얼핏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가슴은 웬일인지 놀란 사람처럼 울렁거린다. 그리고,

「영철씨가 오시나 보다.」

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문소리 찍걱하고 가는 바람이 마당 구석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아니지. 밤이 이렇게 늦었 는데 오실 리가 있나.」

하고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긴 한숨을 쉴 때에는 두 눈에 서 눈물이 핑 돌았다.

사흘이 지나갔다.

영철은 설화 오기를 기다리고 청요릿집 한간방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보이가 무엇을 가져오려는 듯이 방안으로 들 어와 선다. 영철은,

「있다 부르거든 들어와.」

하고 귀찮은 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보이는 불만한 듯이 허리를 굽신하고 나가 버렸다.

영철은 혼자 속마음으로, (웬일야. 오늘 만나기로 하고.) 하고서는 답답한 듯이 교의 위에 가 펄썩 주저앉았다. 그 리고는 또다시.

(손님이 왔나? 놀이에를 갔나? 놀이에를 갔으면 전화로 기 별이라도 할 터인데.) 하고 힘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 밖에서 인력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창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인력 거는 지나가고 깜깜한 공중에는 별들만 깜박거린다. 흥분된 얼굴의 더운 피가 올라 서늘한 바람이 시원하기는 하지마는 처녀의 붉은 저고리와 창녀의 남치맛자락이 혼동이 되고 섞 이어 눈앞에 조화 없는 정채(精彩)를 그리어 놓을 때 영철의 마음은 사랑의 따뜻함을 깨달으면서도 한귀퉁이 마음이 괴 로웠다.

내가 처녀를 사랑하였으면 이런 괴로움이 없었을 터이지.

이렇게 못 믿는 마음이 없었을 터이지. 기생인 설화를 내가 믿으나 기생이란 그것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게 하나?

만일 처녀의 순결한 사랑을 내가 받았으면 나는 참으로 흠 없는 사랑을 맛보았을 걸!

기생인 설화는 자기의 먹을 것을 위하여 즉 자기의 육체의 생활을 위하여 그의 정조를 팔 것이지? 다만 한 찰나 사이 라도 남에게 자기의 육체를 허락할 때에 그는 얼마간일지라 도 정신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생각이 나지를 아니할까?

뿐만 아니라 설화의 그때 그 고통이 얼마큼 그를 못 견디게 할까?

그는 정조를 파는 여자이다. 그가 정조를 팔 때마다 나를 생각할 것이다. 그가 나를 생각할 때마다 뼈가 아프고 피가 식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아가는 내가 설화의 정조를 강제할 권 리가 있을까? 내가 그에게 생활의 보장을 하여 주지 못하면 서 그의 정조를 강제할 권리가 있을까?

나는 그를 위하여 나의 정조를 지킨다 하더라도 이 불완전 하고 결함 많은 사회에 있는 나로서는 설화에게 정조를 강 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영철의 마음속에 시기와 불안이 떠날 수는 없었다.

설화가 참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면 모든 물질의 구애를 내 던지고 다만 나를 위하여 자기의 정조를 주어야 할 터이지?

거기에 참으로 지상(至上)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할 즈음에 문이 열리었다. 영철의 마음은 전기를 통하는 것과 같이 자릿하였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고 들어온 설화를 자기 가슴에 안았다.

「아 설화!」하고는 영철은 다만 설화의 분 향내 나는 뺨 에 입을 맞추었다.

「고맙소, 이렇게까지 와주어서.」

그러나 설화는 영철의 가슴에 고개를 대고, 아무 소리가 없다. 반갑다는 말도 없고 안녕하시냐는 인사도 없다. 그리 고는 쳐들려는 영철의 팔을 저리밀치면서 고개를 더욱더욱 영철의 가슴에 파묻을 뿐이다. 영철은 허리를 흔들어 바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앉아요.」

하는 소리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때 영철은 느끼는 소리를 듣고 설화가 우는 것을 알았 다. 영철의 마음은 당장에 얼음으로 주사를 하듯이 저리저 리하고 또다시 가련한 생각이 났다.

「왜 그래?」

하고 나지막하게 묻는 영철의 말소리는 측은과 애정이 섞 이어 있었다.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응. 말을 해요.」

하는 영철도 울 듯이 설화를 끼어안았다.

「왜 울어, 무슨 좋지 못한 일을 당했어? 어머니께 꾸지람 을 들었어?」

설화는 느끼는 목소리로,

「아니예요.」

하고 더욱 느껴운다. 「그럼 내가 무엇을 설화에게 불만족 하게 한 일이 있던가?」

「아뇨.」

「그럼 말을 해야지.」

설화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영철의 마음은 갑갑하였다. 설 화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구멍이 있으면 그대로 깨뜨려부 수고 들여다보고 싶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여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 뜻을 알아보리라 하는 생각이 열나는 생각과 함께 났다.

「설화! 그러면 설화가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 란 말이지? 만일 설화가 나를 참으로 사랑한다 하면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 무엇이지? 응? 만일 나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 하면, 나는 그것을 억지로 들으려 하지 않을 터이오. 그러나 내가 설화를 믿었던 것이 잘못이지.」

하고 안았던 팔을 힘없이 놓으려 하니까 설화는 방안 공기 위로 구슬을 조화 없이 굴리는 듯이 울음소리를 높이었다.

「영철씨, 저는 저의 말을 영철씨가 안 들어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하였다. 영철은,

「왜?」

하고 의심스럽게 설화를 내려보았다.

「그것은 영철씨의 가슴이 쓰릴 말이에요.」

「무슨 말인데. 가슴 쓰려도 괜찮아. 나는 설화를 위하여 나의 몸과 마음을 바쳤으니까 나의 가슴이 쓰릴지라도 ……」

설화는 애원하는 듯이 영철의 가슴을 끼어안으며,

「영철씨!」

하고 말을 하려다가

「고만두어요. 저는 이런 말을 하려 할 때마다 저의 가슴 을 에는 듯이 쓰리고 아파요.」

하고 또다시,

「영철씨! 영철씨는 참으로 길이길이 이같은 더러운 사람 을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저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영철씨가 나를 영원히 사랑하여 주실 것 같지가 않아요. 저는 영철씨 를 의심하는 것보다도 제가 영철씨의 사랑을 받기가 너무 부끄러워쇼.」

하고는 고개를 다시 영철의 가슴에 대며 진저리나는 듯이 비비며 운다. 영철은 설화의 허리를 끼어안으며,

「설화는 우리의 사랑이 참으로 완전한 결합을 하였을 때 까지 천 번이나 만 번이나 입이 닳도록 그런 말을 할 것이 지? 그러나 어째 운다는 이유를 말해 주어, 어서어서.」

하며 설화의 얼굴을 쳐들게 할 때 설화는 한참 있다가.

「그러면 저를 영원히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하고 수정알 같은 눈물이 괸 눈으로 영철의 얼굴을 치어다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영철씨? 저는 돈으로 말미암아 피를 팔고 고기를 팔았어 요.」하고는 그대로 영철의 팔에 힘없이 매달려 운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정조를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정조 없는 더러운 계집입니다. 제가 영철씨를 사랑하기 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 쓰린 줄 몰랐더니 영철씨의 사랑을 받 은 후 오늘에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도 참으로 쓰리고 아파요.」

하다가,

「영철씨는 이렇게 더러운 여자라도 참으로 사랑하십니까?

저같은 사람이 영철씨의 사랑을 바랄 수가 있을까요? 저는 영철씨! 다만 한 가지 원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언제든지 영철씨가 저를 잊어주지 않으신다면 그 외에 더 행복이 없 어요.」

영철의 전신이 맥이 풀리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설화! 설화는 다시 살았다. 설화는 다시 처녀가 되었다!

아아 나는 영원히 설화를 잊지 않을 터이야.」

「고맙습니다. 잊지 말아 주세요. 영원히 잊지 말아 주세 요. 네?」

하는 설화의 얼굴에는 갱생의 빛이 보이었다.

「고만 눈물을 씻어.」

하는 영철의 말과 함께 설화는 교의에 앉으며 눈물을 씻었다.

설화와 영철 사이에는 몇십 번 몇백 번의 다짐이 있었다.

영철은 다시 설화의 손을 쥐었다. 향내 나는 꽃잎 같은 설 화의 손을 쥘 때 화분(花粉)이 묻어 있는 듯이 부드럽고 바 삭거리는 듯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의 코를 보고 그의 눈썹과 두 눈을 볼 때 쌍꺼풀지는 두 눈이 광채 있게 빛나는 것과 오뚝 선 콧날과 초생달 같은 두 눈썹과 도화분 바른 두 뺨이 정화(淨化)하지 못한 성욕 (性慾)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닌게아니지만 그의 섬세한 앞 머리와 보일락말락한 주근깨와 크지 못한 두 귀와 검푸 른 눈 가장자리와 차디차게 도는 슬픈 빛이 그의 마음 한귀 퉁이를 만족치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맵시 없는 두 발까지도 그의 마음을 웬일인지 섭섭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를 끼어안고 입을 맞출 때 근질근질 자리자리한 맛과 함께 자지러져 떠는 몸을 두 팔에 안았다가 손을 늦추 고 그의 얼굴을 다시 치어다볼 때 부끄러워 방긋 웃는 그의 반웃음과 살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백옥 같은 이가 그의 모 든 불만과 섭섭함을 휩싸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철이 또다시 설화를 놓고 저편쪽에 서서 바라볼 때에는 다시, (너는 기생이겠지. 더러운 계집이지. 여러 남자의 더러운 정욕의 재물이 되어 씹다 남은 찌꺼기지.)하는 생각이 나다 가도, (그렇지 않다. 그는 오늘부터 다시 처녀가 되었다.) 하고는 또다시 그의 윤곽이 선명한 가는 허리를 힘있게 끼 어안으며,

「설화, 나는 참으로 설화를 믿어.」

하였다. 설화도, 「저도요.」

하며 영철의 목을 끼어안으며 힘있게 두 팔을 쭉 뻗고 생 긋 웃었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내가 왜, (나는 참으로 설화를 믿는다.) 는 말을 하였노 하였다. 설화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은 설화 에게 나를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설화를 못 믿는단 말이지? 못 믿는 사람을 설화는 믿어줄 리가 있 을까? 아니 내가 참으로 설화를 믿는 만큼이라도 믿지 못하 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내가 남을 믿지 못하고 남더러 나를 믿어 달랄 수는 없는 것이지? 그러나 나는 그저 믿으 련다. 설화가 나를 믿거나 말거나 나는 설화를 믿으련다. 그 러면 설화도 나를 믿어 줄 때가 있을 터이지.

영철은 설화의 두 팔을 잡고,

「이제 고만 무엇을 좀 먹을까?」

하였다.

영철과 설화가 음식을 먹은 뒤에 차를 마실 때 12시를 쳤다.

창 밖을 내다보니 북두칠성이 엉두러져 간다.

설화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영철을 걱정 있는 듯이 바 라보며,

「여보세요. 벌써 12시예요. 너무 늦게 들어가면 집에 가 걱정 들어요. 집에는 동무 집에 잠깐 다녀온다 하고 왔는데 요. 요릿집에서 노름이 왔으면 큰일났지요.」 영철의 마음은 묵철을 녹여 붓는 듯이 괴로웠다. 그리고는 다만 멍멍히 앉 았었다.

「영철씨는 안 가세요?」

「글쎄.」

하는 영철은 담배 연기만 푸 내분다.

설화는 영철의 좋지 못한 가색을 보더니,

「저는 죄 있는 사람예요. 이렇게 보는 것이 자유롭지 못 할까요? 영철씨! 지금 저의 마음이 이렇게도 섭섭하고 괴로 울 때 영철씨의 가슴은……」

하고는 반근심 반괴로움과 또 반웃음을 지어서 영철을 치 어다보았다.

그러나 설화는 가겠다고는 못하였다. 그만 다만 영철의 두 손을 붙잡고

「영철씨! 고만 가라고 하여 주세요.」

하였다. 영철은,

「설화! 그러면 내가 가라고 해야 갈 터인가?」

하고 그의 등을 어루만지었다. 설화는,

「저의 입으로는 가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를 않아요.」

백 우영과 이 혜숙의 화려를 다하고 성대를 극한 결혼식이 거행된 지 며칠이 못되어 일본에 있는 선용에게서 영철은 이와 같은 편지를 받아 보았다.

친애하는 영철군이여! 찰나(刹那)와 철나가 합하고 합하여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다시 못 볼 과거가 나에게는 모든 슬 픔과 모든고통과 모든 번민과 오뇌와 원망이 되어 다시 있 기 어려운 청춘은 그 가운데서 그대로 놓아 버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내가 오늘 그대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쓸 때 몇 번이나 미 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으며 얼마나 샘솟듯 하는 눈물을 붉 은 주먹으로 씻었는지 그대는 아마 아지를 못할 것이지! 나 는 다만 죽음을 받았을 뿐이었다. 청춘의 타오르는 열정의 불길 위에 차디찬 낙망의 푸른자를 뿌림을 당한 나는 그 정 의 불길이 사라지려 할 때 그 불길을 담고 있는 등잔인 그 육체까지라도 한꺼번에 깨뜨려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 하였다. 아니다. 깨뜨리지 않으려 하여도 깨어지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사랑하는 영철군이여!

인생의 역사는 사랑과 밥의 경사이다. 이 생(生)이란 이름 을 등에 멘 자가 누가 사에 노래하고 사랑에 춤추고 사랑에 울고 눈물지고 한숨지고 부르짖지 않는 자가 누구냐? 영원 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우리 인생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나의 일생은 모든 비애와 타는 오뇌와 부 르짖는 원망과 아픈 고통으로 맛보지 않으면 안될 몸이 되 었던가? 푸른 반달이 깜찍하게 웃을 때 넓고 또 넓은 벌판 위에서 하얀 눈으로 걸어갈 때 달빛은 야차(野次)의 홑옷같 이 흐르고……

나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도 푸른데 혼자 소리쳐 원 망의 부르짖음을 기껏 질렀으나 하늘 위에 깜박거리는 작은 별들만 비웃는 듯이 깜박깜박할 뿐이었다. 나는 그대의 누 이가 화촉동방에 몽롱한 꿈이 잦아지던 날 외로이 다다미방 에서 혼자 누워 견디기 어렵고 참기 어려운 비분 낙담으로 나의 이 가는 생(生)을 영원히 없애버리려 하였다.

영철군! 나의 적적함을 위로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나의 어두운 앞길을 밝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뇨? 텅 비인 나의 가슴을 언제든지 채워 주던 것은 무엇이겠느뇨?

모든 몽상(夢想)과 이상의 실현을 바라던 내가 어리석은 자 이다.

오늘에는 나의 모든 것은 없어졌다. 다만 남았다는 것은 나의 가슴속에서 팔딱팔딱 뛰면 뛸수록 나를 못 견디게 하 는 심장의 고동이 있을 뿐이다.

아아 나는 그 심장의 고동까지 끊어 영원한 침묵의 위안을 받고자 나의 이 손으로 푸른빛 나는 칼날을 들어 이 심장을 찔렀었다.

그날 저녁 생각건대 그대의 누이는 영원한 행복의 꽃다운 노래를 불렀겠지마는 이 불쌍한 녀석은 나의 육체의 가장자 리에서는 고요한 침묵이 으스스한 만가(挽歌)를 불러 주었겠 지?

영철군! 아직까지 푸르뎅뎅한 운명은 다하지 않았다고 오 늘에는 살아서 지옥인 병원 한귀퉁이에 나를 갖다 가두어 놓았다. 나는 유리창을 통해서 상 찌푸린 하늘을 쳐다볼 뿐 이다. 의사는 1개월의 선고를 하였다. 아아 1개월!

1개월의 치료가 더욱더욱 나의 괴로움의 역사를 이어놓는 실오라기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영철군! 그대는 언제까지든지 나의 친우이다. 형제 이다. 다만 서로 사랑하고서로 위로하는 자는 그대 하나가 있을 뿐이지.

그 편지의 글자글자와 마디마디마다 피가 엉키고 눈물이 맺힌 듯하다.

실연자의 애곡을 듣는 듯하고 정 있는 사람의 울음을 받는 듯하다.

읽기를 다한 영철은 두 손을 마주치며,

「어떻게 해야 좋을까?」하였다.

선용의 죽으려 함은 나의 누이 까닭이다. 참되고 진실하고 끝없는 애정을 가진 나의 친구 선용을 그대로 두는 것은 나 로서는 차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 만일 선용이가 그날 그 칼로 자기의 가슴을 찔렀을 때,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오늘에 내가 이 편 지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지, 또다시 그의 얼굴이나마 보지 를 못하였을 터이지. 아! 그 고생 많고 설움 많은 선용이가, 그러나 그렇게까지 참고 견디던 선용이가 오죽 괴롭고 오죽 암담하여 자기 모든 것을 휩싸고 뭉쳐 논 목숨까지 끊으려 덤비었을까? 하는 영철의 몸은 한참이나 차디찼었다. 그러 다가는 다시 이 요 시간에 또다시 선용이가 가슴을 부비고 피를 흘리며 괴로워 신음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 서 그대로 날아갈 수만 있으면 선용을 끼어안아 일으키고 싶었다.

영철이 은행문을 들어서 철필을 들고 몇 백 원 몇 천 원의 많은 금전의 숫자를 기록할 때,

「오! 여기에는 선용의 고통을 다……라 할 수 없을지라도 얼마간 덜어 줄 금전이 있고나!」하였다. 그리고 선용의 죽 으려 한 것은 사랑으로 인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으려는 얼마간의 동기는 이 돈에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실패자 인 동시에 돈에 주린 자이다. 사랑의 배척을 당한 선용은 또한 돈까지 차지할 수 없었다. 아니다. 자기의 하려는 것도 하고 자기의 성공을 이루게 하는 그 무슨 세력을 그는 가지 지 못하였다. 그는 혜숙을 무정하고 야속하다고 원망하는 가운데에도 돈 없는 것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단념한 사람 이다. 그의 생(生)까지 단념한 자이다.

「그렇다. 돈이다!」

하고 영철은 고개를 돌이켜 현금 출납계에 태산같이 쌓여 있는 몇백 원 몇천 원의 뭉치뭉치 묶어 논, 보기에도 끔찍 한 돈을 보고,

「저기에는 저렇게 돈이 있지마는! 저것의 몇 백분의 일만 있어도 선용을 얼마간 도와줄 수가 있을 터이지.」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해는 지고 저문 날에 신문 뭉치를 옆에다 끼고 헐떡이며 뛰어가다가,

「에 내가 무엇을 하랴 이것을 하노? 죽는 것이 차라리 낫지.」

하다가,

「그렇지만……」

하고 다시 힘을 내어 뛰어가는 선용의 그림자도 보이고 또 다시 병원 한귀퉁이 병상 위에서, 「내가 무엇하랴 또 살았 누?」

하고 한숨을 쉬고 있는 선용도 보인다.

그가 다시 철필을 잡고 장부에 틀림없는 계산을 할 때에는,

「돈이 있기는 있지만 내것은 아니로구나.」

하였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깥으로 나가 려 할 때 영철은 우영이가 자기 아버지를 찾아보고 돌아나 가는 것을 만났다.

「야! 영철군!」

하고 우영은 손을 내밀었다.

「요새는 어떠한가?」

하고 힘 없고 시들스럽게 묻는 영철의 대답에,

「그러 그렇지.」

하고 우영은 부잣집 자식의 만족하고 복스러운 웃음을 웃 는다.

영철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한참 있다가 얼굴빛에 화기를 억지로 꾸미며,

「오늘 저녁에 집에 있으려나?」

하며 우영의 기색을 살피려는 듯이 치어다보았다.

「있지! 있어! 기다릴까?」

「글쎄. 좀 기다렸으면 좋겠는데.」하고 할까말까 하는 듯 이 말을 한다.

「그럼 기다리지. 무슨 말 할 것이 있나?」

하는 우영은 영철의 기다리라는 의사를 얼핏 알고 싶은 모 양이다.

「아냐,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 있어!」

「응, 그러면 있다 오게 그려.」

「그럼 꼭 기다리게.」

「그럼세. 기다리지.」

하고 우영은 인력거를 불러 타고 바깥으로 나간다.

우영을 보낸 영철은 지배인실 문 앞까지 가서 문틈으로 들 여다보았다. 지배인은 점심을 갓 먹고 굵다란 여송연을 후 후 피우고 있다.

그는 문을 열려 하다가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 철필로 무 엇을 히적히적 써보기도 하고 주판으로 덜그덕덜그덕 하여 보았다. 그러다가는,

「에! 고만두어라.」

하고 맥없이 앉아 있다가,

「그렇지만 제가 내 말이라면 아니 듣지는 못할 테지.」

하고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말이나 한번 해볼까.」

하고 다시 일어서서 지배인실로 들어가며, 「진지 잡수셨 습니까?」

하고 수작을 붙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던 지배인은 안 경을 벗어 들고 눈꼽을 씻다가,

「네, 벌써 먹었어요.」

하고 허리를 뒤로 꼿꼿하게 펴며 대답을 한다. 영철은 잠 깐 사이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지배인은 옆의 교의를 가리키며,

「이리 앉으시구료?」

하였다. 자리에 앉은 영철은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서……」

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비비고,

「조용히 만나 뵈려고요.」

하였다. 지배인은,

「무슨 말씀인데요?」

하고 주저주저하는 영철을 바라보았다. 영철은 공연히 말 시작을 하였다 하고 그만둘까 하다가, 그렇지만 이왕 말을 꺼내었으니 아주 해버리리라 하고 대용단을 내어,

「돈 천 환만 어떻게 써야 할 터인데요.」

하고 얼굴빛이 불그레하여지다가 다시 침착하여졌다.

「천 원요?」하고 지배인은 깜짝 놀라는 듯이 영철을 바라 보며 의심스럽게 묻는다.

「네.」

하고 영철은 대답하였다.

「그것은 무엇 하시려구?」

하고 지배인은 무슨 동정이나 하는 듯이 물었다.

본래 지배인은 이 영철이라면 조금 알랑알랑하는 체하고 동정도 하는 체한다. 그것은 이 영철 그 사람을 두려워하거 나 친해서 그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철의 등뒤에 있는 백 사장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까닭이다.

지배인은 조금 있다가

「그러면 사장께 여쭈어 보시지요.」

하였다.

「아니예요.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예요.」

「네. 그러면 혼자만 아시고 쓰시게 말예요?」

「네.」

「그렇지만 내가 한 일일지라도 사장께서는 자연히 아시게 될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아시기 전에 얼른 도로 갖다드릴 터이니까요.」

지배인은 다시 안경을 쓰며,

「어려운 일인걸요…… 그리고 참 진정으로 말씀인지요?

영철씨 한 분을 보고는 은행에서 그대로 돈을 돌려줄 수 없 지 않아요?」

하고 비웃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영철을 바라본다.

「그것은 염려 마세요.」

하고 영철은 할까말까 하다가,

「우영에게 그 말을 하여 놓았으니까요.」

하고 하지 않던 거짓말을 하였다.

지배인은 <그점은 튼튼하다>는 듯이 껄걸 웃더니,

「그러면 고만이지요. 어떻든 영철씨 남매분의 일이니까 저도 될 수 있는 데까지 보아드리지요. 즉 말하자면 쌈지엣 돈 주머니에 넣는 것이니까요.」

하고 너는 행복스러운 놈이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얼핏 갖다 갚으셔야 합니다. 그 동안에는 모다 제가 비밀히 해드릴 터이니까……」

할 때 부지배인이 무슨 문서를 들고 지배인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말은 중등이 갔다.

영철은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그러면 있다라도 다시 말씀하겠읍니다.」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지배인실 문 앞까지 나와서는 무의감한 중에서,

「인제는 김 선용이가 살았다」하였다. 3년 만에 다시 고 향 나라로 돌아오는 선용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립고 반가울 뿐이다.

시신(詩神)의 은총을 이야기하는 듯한 흐르는 산골짝 위나 처녀의 목욕하는 듯한 구비구비 돌아가는 물줄기가 다른 곳 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게 무슨 애소를 하는 듯하고 장래에 닥쳐올 희망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가볍게 박자극 맞춰 살같이 닫는 기차는 산을 돌고 물을 건너 서울로 서울로 향하여 올 때, 기차가 경성 정거장에 닿기만 하면 무슨 즐겁고 반가움을 줄 무엇이 자기를 기다 리고 있는 듯하였다.

본래 고요함을 좋아하고 번잡함을 싫어하는 선용은 3등실 한귀퉁이에 담요를 깔고 고개를 뒤로 기대앉아 새파랗게 갠 5월 하늘에 양떼 같은 구름이 고물고물 기어가는 듯이 떠나 가는 것을 창 밖으로 내다보며 혼자 속마음으로, (저 구름은 어데로 가노?) 하였다. 그리고 다시, (내가 탄 기차도 저와 같이 끝없는 나라로 나를 끌어다 줄 수 있을까?) 하였다.

그러다가 기차 바퀴가 처참스럽게 바람에 깔리며 덜컹하고 정거장에 설 때, (기차는 구름같이 한없이 가지는 못하는구나.)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 구름을 바라볼 때 아까는 그 구름 이 기차를 끌고 달아나는 듯하더니 기차는 서고 구름 혼자 만 아까보다 더 속하게 달아나는 것을 보고, (너는 언제든지 혼자만 흐르는구나.) 하였다. 그러다가는 나도 저 구름과 함께 조금도 거침없이 한없는 나라로 영원히 흘러 갔으면 좋겠다 하였다.

그리할 즈음에 어떤 트레머리를 한 여학생 하나가 커다란 보퉁이를 들고 자기 앞을 스치고 지나 저쪽 앞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선용을 흘끗 지나가는 바람에 얼굴은 자 세히 보지 못하고 뒤태도만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하고 그 여학생이 창 밖을 내다볼 때 코 그림자가보일 듯 말듯하 고 얼굴이 다 보이지 않을 때, (이쪽을 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선용의 요구대로 그리 쉽게 돌 아다보지는 않았다.

선용은 그 뒤태도를 보고서 속마음으로 또다시 (어쩌면 저렇게도 같은고?) 하다가 (저 여자가 그 여자이었으면……)하였다.

그럴 때 선용의 눈앞에는 자기가 동경 있을 때 보던 여자 그림자가 나타나 보인다.

그리고 지내던 역사가 역력히 생각된다.

하루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이층 창문 밖에 앉아 밥을 짓 느라고 눈물을 흘려 가며 숯불을 호…… 불고 있을 때 심심 도 하고 울적도 하여 휘파람도 불고 콧소리도 하며 고독의 적적함을 혼자 위로하고 있을 때 건너편 집 이층 미닫이가 열리고 어떤 여학생 같은 여자가 유심히 자기를 바라보며 있다가 자기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니까 그때야 여자도 문을 닫고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때 선용은 그것을 그리 유심히 보아 두지는 않았다. 그 러나 방에 들어와 밥을 퍼놓고 혼자 앉아 김치 댓쪽에 간장 한 접시를 가지고 밥을 먹을 때 아래층에서 주인 노파가 올 라오며,

「건너집에 있는 여자를 아세요?」

하고 호물호물하면서 거짓같은 친절함으로 말을 묻는다.

선용은 먹던 젓가락을 그치고

「몰라요.」

하고 주름살 잡힌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노파는 이상한 일이나 당한 듯이,

「모르세요?」

하고 왜 알 터인데 모르느냐는 듯이 이상하게 선용을 바라 본다. 선용은 다만,

「네.」

하고 먹던 밥만 떠먹었다.

「이이도 조선사람이래요.」

하고 그래도 모르느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네 그래요?」

하고 선용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반가운 중에도 아까 문 을 열고 자기를 바라보던 생각이 나서 멀거니 그쪽 창을 바 라보았다.

그 후부터 선용은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콧소리를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할 때마다 그 여자는 조금도 거르지 않고 문을 열고 꾸물꾸물 밥 짓는 선용을 바 라보았다.

선용은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내다볼 때마다 수수께끼 속에 자기가 들어간 듯이 즐겁고 그윽한 기꺼움이 생기었다.

그러다가는,

「왜 저 여자가 꼭 내가 밥을 지을 때면 내다보나?」

하였다.

「내가 밥 짓는 것이 불쌍하고도 가련한 생각이 나서 동정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바라보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다가는 그 불쌍하고 가련히 여기는 동정의 마 음이 은연중에 알 수 없이 변하여 날마다 내다보지 않을 수 없는 무슨 깊은 정(情)의 인상(印象)을 그의 마음속에 박아 주지나 아니하였나? 하여 보았다.

그렇게 끌다가 두 주일이 지난 후 선용은 우연히 그 집 앞 길거리로 지나가며 또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그리고 또다 시 그 2층 미닫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는 얼핏 저쪽 길 모퉁이까지 가서 그 미닫이를 다시 돌아다보았을 때 거기에 는 여전히 그 여자가 창틀에 기대서서 자기가 걸어가는 뒷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용은 춤출 듯이 기뻐하였다.

그러다가는 대담하게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하는고나」하였다. 그러다가는,

「나를 사랑하는 여자가 이 세상에 있고나」하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날마다 홀로 방안에 앉아 외로움과 쓸쓸 한 가운데서 눈 아픈 일본글이나 영자글을 읽다가 머리가 고달프고 몸이 찌뿌드듯하면 반드시 콧소리를 하고 휘파람 을 불었다. 그러할 때마다 그 여자는 미닫이 문을 반쯤 열 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날 저녁때이었다. 선용은 낙망과 비분의 구 름에 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전 같으면 주인 노파에게

<다다이마>하고 기꺼운 낯으로 인사를 하였을 터이지만 아 무 말도 없이 2층으로 올라가 고개를 두 팔로 얼싸안고 엎 드려 몸부림을 할 듯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려 울었다.

노파는 선용을 쫓아올라오며,

「웬일이요, 네?」

하고 연민이 엉킨 눈초리로 선용을 들여다보니까 선용은 긴 한숨을 내쉬며,

「네, 아무것도 아니예요. 나는 공부도 고만두고 멀리멀리 달아나거나 그대로 죽어 버려야 할 사람이에요.」

하며 부끄러움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에?」

하고 노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농담도 분수가 있지 당신이!」하고 네가 고생을 참지 못 하여 그러는고나 하는 듯이 바라본다.

그날이었다. 5천 리 밖 서울에서는 백 우영과 이 혜숙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는 기별을 선용은 비로소 들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내던지리라 하였다. 그래서 먹지 못하는 술을 기껏 먹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함과 원통과 슬픔을 풀 만큼 먹을 술을 살 돈을 갖지 못하였다. 다만 몇 몇 친구에게 억지로 빼앗아 먹은 술이 그를 얼마간 먹은 것 이 더욱 선용의 감정을 불길같이 타게 할 뿐이었다. 그는,

「나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는,

「왜 편지가 없나 하였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비웃는 듯이 웃음을 웃어 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고통과 비애와 원망이 한꺼번에 엉크러져 다만 가슴을 찌를 듯이 치밀 뿐이요, 눈물이 되어 흐를 뿐이다.

노파는 내려가고 창 밖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었다. 불은 정서를 이야기하는 듯한 강호(江戶)성의 찬란히 켜 있는 전 깃불만 아무 소리 없이 창백한 달빛 아래 오뇌(懊惱) 댄스를 하고 있는 듯할 뿐이다.

선용은 벌떡 일어나 미닫이를 열어젖히었다. 서북으로 통 하여 있는 창공 위에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오락가락하는 구름 속에 감추였다 눈 떴다할 뿐이다.

선용은 또 그 건너집에 달빛이 환하게 비친 창만 바라보았 다. 고개를 창틀에 기대고서 있는 선용의 가슴에는 차디찬 낙망과 원통의 차디찬 물결을 퍼붓는 듯할 뿐이다. 건너집 창에 비친 전깃불은 조용히 켜 있다. 아무 흔들림이 없다.

진했다 엷었다 하는 것이 없이 나렷하게 켜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흐르는 꿈의 냄새 같 은 정취가 피곤하게 조는 듯하였다.

선용은 저 방안에 그 여자는 저 창 앞에서 검은 머리를 대 리석 같은 어깨 위에 흩뜨리고 하얀 요 위에 부드러운 입김 을 쉬면서 평화롭게 자겠지 하였다. 그러다가는 곤한 잠을 못 이겨 가늘고 연한 다리로 귀찮게 이불을 차내던지는 소 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그리고 얇은 자리옷의 반쯤 비치는 곱고 부드러운 붉은 육체의 윤곽이 내어비치는 것이 보이는 듯하고 그 위로는 불룩불룩 뛰노는 붉은 심장의 고동이 들 리는 듯하였다.

선용은,

「아 나를 위로하여 주시나요. 나는 사랑을 잃은 자요. 심 장이 깨어진 자요.」

하고 그대로 훌쩍 날아 그 창 안으로 뛰어들어가 몽실몽실 한 젖가슴 위에 그대로 엎드려 한껏 울고 싶었다.

선용은 다시 그 여자가 자는가 안 자는가 하였다. 그러다 가는 몇 간 되지 않는 저곳에 있는 그 여자가 나의 괴로움 을 아는가 모르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어 그를 내다보게 하리라 하였다. 선용은 눈물 괸 눈에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한번 불었다. 그리고 으레 내다보려니 하였다. 그 러다가는 내다보지 않으면 곤히 자는 것이겠지 하였다. 그 러나 달은 밝고 별은 깜박거리는데 그쪽에서 문을 열고 자 기의 눈물 괸 눈을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선용은 원망스 럽고 야속한 마음이 나서,

「에, 고만두어라. 벌써 자는구나.」

하였다. 그리고서 창문을 닫고 돌아서려 할 때 그 집 창에 는 그 여자의 머리 그림자가 휘 비치며 저리로 사라져 버리 었다. 선용은,

「에?」

하고 한참이나 의심하는 듯이 멍멍히 서 있다가,

「그러면 너도 나를 속이었구나.」

하고 그는 방바닥에 그대로 쓰러지며,

「아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나를 속이는구나.」

하고 한참 울었다.

그후 선용이가 병원에 누워,

「내가 무엇하려고 또 살았누.」

한 지 두어 주일이 된 뒤라 간호부 하나가 들어오더니 상 냥한 목소리로 끼어안을 듯이 가까이 와서 두 눈을 반짝반 짝하며,

「여보세요.」

하고 눈감고 누워 있는 선용을 불렀다. 선용은,

「네.」

하고 눈을 뜨고 그 간호부를 바라보았다. 「저요.」

「네.」

간호부는 의미있게 생긋 웃으며,

「당신은 참 행복스런 어른이에요.」

하는 하얀 얼굴에 두 뺨이 불그레하게 타오르는 것이 드러 누운 선용을 몹시 도취하게 한다.

「네? 행복요?」

하고는 선용은 당초에 있지 못할 말을 듣는 듯이 눈을 뚱 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 간호부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네. 행복요.」

하고 부드러운 한숨을 쉬고 가슴을 내려 앉힌다. 선용은 비웃는 듯이 빙긋 웃으며,

「행복스러운 사람이 죽으려고 하였을까요?」

하고 고개를 돌이켜 처참한 기색으로 덮은 이불만 보고 있 었다. 간호부는 한참 가만히 있더니,

「당신을 위하여 근심하는 이가 이 세상에서 몇 사람이나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중에 한 사람을 날마다 날마 다 만나 봐요.」

하고 농담 비슷하게

「그 까닭에 나는 당신을 행복스러운 이라고 생각해요.」

한다. 선용은 장난의 말인 줄 알고 침착하고도 냉담하게,

「나를 위하여 근심하는 이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요」

하고 다시 간호부의 부러워하는 듯이 바라보는 두 눈을 치 어다보았다.

「그렇지만 내가 날마다 그 사람을 만났는걸요.」

「거짓말, 나를 위하여 조심하는 이가 있다면.」

하고 한참 있다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이지요.」

하고 하하하 웃었다.

「무엇요? 자 이것을 보세요.」

하고 손에 쥐었던 편지를 내놓는다.

선용은,

「그것이 무어요?」

하고 그 편지를 받으려 하니까 간호부는 놀려먹는 듯이 생 긋 웃으며,

「편지요. 당신을 위하여 근심하는 이에게서 온 거예요.」

하고,

「자……이래도 거짓말인가요?」

하며 그 편지를 준다. 선용은 의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 피봉을 보았다.

거기에는 다만 <김 선용씨>라고 씌어 있을 뿐이요 보내는 이의 이름은 없었다. 선용은 다시 간호부를 보고,

「이것을 누가 가져왔어요?」

「그 사람이 가지고 왔어요.」

「그 사람이 누구예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물론 여자이지요. 아시면서도 공연히 그러셔.」

「정말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데 있나요?」

「벌써 갔어요.」

「에헤 누군지?」

「누구인지 모르세요? 그 사람이 날마다 날마다 와서 나에 게 당신의 동정을 물어 보고는 그대로 가 버리고 하였는데 요?」

「날마다 왔어요? 이상하다. 누구일까?」

선용의 가슴은 의심이 나는 중에도 여자라는 말이 부질없 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누가 날마다 나의 동정을 묻고 갔을까?

더구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그는 얼른 편지를 뜯어 보 고 싶었다. 그 편지를 뜯었을 때 그 속에는 다만 두어 줄기 연필 글씨로,

<저는 선용씨의 병환이 언뜻 나으시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기회가 용서하면 또다시 한번 만나 뵈옵기를 바랄 뿐이외 다.> 하고 끝에는 <날마다 뵈옵는 사람>이라 썼다.

선용은 입속으로, (날마다 뵈옵는 사람! 날마다 뵈옵는 사람?) 하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오 알았다.」

하고 벌떡 일어나려 하니까 간호부는 선용을 붙잡으며,

「왜 이러세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누우세요.」

하고 베개를 바로놓고 고개를 그 위에 놓아 주었다.

「인제야 알았다. 인제야 알았다.」

하고 한참이나 먼 산을 바라보던 선용은 다시 창연한 낯빛 으로,

「날마다 왔어요?」

하고 다시 간호부에게 무슨 감사함을 말하는 듯이 말을 물 었다.

「네. 날마다 문간에서 물어 보고 갔어요.」

선용의 눈앞에는 문앞에 와서 자기의 동정을 물어 보고 복 도를 돌아 층계를 내려 파릇파릇한 풀이 난 길거리를 걸어 가는 그 여자의 형상이 역력히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원망스럽게 그 간호부를 바라보며,

「그러면 왜 여태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하니까 그 간호부는 자기의 애매함을 변명하려는 듯이,

「그이가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니까 그랬지요.」

하며 반쯤 웃는 가운데에도 원망을 품었다.

날마다 창으로 건너다보덛 그 여자가 두 주일이 넘도록 나 를 찾아 주었다. 나는 참으로 간호부의 말과 같이 행복이 있는 자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찌하여 그를 만나 보지 못 하였노? 두 주일이나 오래도록 날마다 나를 찾아준 그를 무 엇이 지척에 두고 보지를 못하게 하였을까? 그리고 내일 또 올 터인가? 오늘은 어찌하여 편지를 하였을까?

그는 벌떡 일어나 그 여자를 쫓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간 호부더러,

「여보세요. 내일 오거든 꼭 나에게 가르쳐 주세요.」

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 또 그 이튿날 오늘까지 그의 소식을 선 용은 듣지 못하였다.

선용은 차안에 앉아 그것을 생각하여 보고,

「저 여자가 그 여자가 아닌가?」

하고 저쪽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여자를 한번 자세히 보리라 하였다. 그는 일어섰 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로 가까이 가며, (반가와 나를 보고 인사를 하였으면……) 하고 무슨 운명의 판단을 기다리는 듯하여 그의 얼굴을 자 세히 보고도 싶은 중에 또 한 옆으로는, 만일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아니면 어찌하나 하는 불안도 있어 얼핏 가지를 못 하고 주저하였다. 그가 그 여자에게 가까이 갔을 때에는 그 여자가 자기를 바라보았다. 선용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그러 나 그 여자가 그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아 실망한 듯이,

「아니로구나.」

하고 다시 쓸쓸하고 외로움을 깨달았다. 장차 나타나려는 필름이 당장에 탁 끊어지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위하여 근심하는 이는 없고나!」

하였다. 그리고 기차가 다시 자꾸자꾸 가기만 할 때, 그는 또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내가 이 기차를 타고 한없는 나라로 간다고 하면 차창에 매달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누구일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가 동경역을 떠날 때 어떤 청 년 하나가 차창을 의지하여 바깥을 내다보고 떠나는 정이 그의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일 때 이십이 될락말락한 여자가,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하는 듯이 느끼어 우는 것을 본 것이 생각된다. 그러다가 기차가 <나는 간다>는 듯이 기적 소리를 날카롭게 지르고 움죽움죽 떠나기를 시작할 때 그 청년은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하는 듯이 모자를 흔들면서 울 듯한 눈으로 그 여자를 바 라볼 때 그 여자는 가슴이 쓰리고 몸부림을 할 듯이 가기만 하는 기차를 따라가며,

「여보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기차는 더욱더욱 속하게 가고 걸음은 점점 쫓아올 수 없이 되었을 때에 아무렇게나 쪽찐 그 여자의 검은 머리채가 시커먼 구름이 그의 등을 덮는 듯 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선용은 그것을 볼 때 그 청년은 행복스러운 사람이라 하였 다. 그리고 세상의 가장 슬픈 것은 애인이 떠나가는 일이요, 또 가장 행복스러운 것도 그것이라 하였다. 말할 수 없이 쓰리게 아픈 설움 가운데도 무한히 기쁨이 숨겨 있는 것이 라 하였다.

그리고는 나는 그와 같은 행복을 차지하지 못한 자로다.

누가 내가 기차 차창에 앉아 끝없이 떠나려 할 때,

「여보세요. 여보세요.」

떠나기를 아끼는 정이 맺히고 어린 목소리로 불러줄 자냐?

하였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자다. 외로운 자로다. 하다가 만일 나 를 두어 주일 동안이나 병원까지 찾아준 그 여자가 있었다 면 그렇게 하여 주었을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여자도 어디로 가버리었는지 이제는 없다.

그의 말과 같이 만일 기회가 허락하고 그 여자를 만날 때 가 있으련마는 이 불행한 자에게 그렇게 복스런 기회가 돌 아올까? 그 여자는 지금 이 지구 위 어디든지 있으련마는!

그러할 즈음에 기차는 정거장을 거치고 거쳐 어느덧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 기차는 한강 철교를 지나고 용산역을 거쳤다. 힘들고 숨찬 언덕을 기차는 헐떡이며 남대문을 향 하여 들어온다.

「부산 방면 마중갈 이 없소?」

하고 역부의 길게 부르는 소리가 갓뿌린 물이 증발하는 공 기를 울리고 여러 마중나온 사람의 졸이며 기다리는 마음을 부질없이 놀랍게 하였다.

부르짖는 소리, 인사하는 소리, 웃는 소리, 발자국 소리 이 모든 소리가 뒤섞이고 범벅이 되어 다만 응얼응얼하는 소리 가 나는 사이로 땀을 흘리고 한숨을 후 쉬며 기차는 플랫폼 에 닿았다.

마중나온 사람들은 제각기 만날 사람을 찾으려고 다투어 앞만 보고 달아난다. 선용은 담요 가방을 한옆에다 들고 차 에서 내렸다. 그때 누구인지,

「오라버니.」

하고 비단옷을 찢는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여러 사람 틈에 서 나더니 어떤 여자 하나가 선용에게로 달려간다.

혹시 누구나 나왔나 하고 사면을 둘러보던 선용은 이 소리 를 듣더니,

「오! 경희(瓊姬)냐?」

하고 반갑게 그 여자의 손을 잡으며, 「잘 있었니? 그 동 안에 퍽 자랐구나, 어머니도 안녕 하시냐?」

하였다.

「네.」

하고 반가와서 어쩔 줄을 아지 못하며,

「어머니께서 자꾸 나오시겠다는 것을 나오지 못한다고 여 쭈어서 가까스로 못 나오시게 하였어요.」

하고 선용의 웃는 낯을 바라본다.

「그렇지, 어떻게 오시겠니, 연로하신 터에.」

하고,

「어서 나가자.」

하며 경희를 재촉한다.

경희라는 여자는 눈에 돗수 안경을 쓰고 강창강창 걸어갈 때 몸에 입은 비단옷이 전깃불에 비치어 번쩍번쩍한다.

선용이 두어 걸음 나가는 것을 향하여 갔을 때다. 영철이 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휘휘 사면을 둘러보더니 선용을 찾 아 내어,

「야! 선용군.」

하고 선용의 손을 단단히 쥐고 한참 아무 소리가 없다가,

「어떻든 반가우이.」

하고 한참 선용을 바라본다. 선용은,

「나는 무엇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네. 다만 자네 에게 감사할 따름일세.」

할 즈음에 경희가 영철을 바라보며,

「언제 오셨어요?」

하며 생그레하고 치어다본다.

「네 지금 막 오는 길입니다. 그러나 어서 나가세. 참 반가 우이.」

세 사람은 전차를 타고 재동 경희집으로 향하여 갔다.

선용이 일본서 온 지 사흘되는 날이 마침 일요일이었다.

선용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하며 여러 가지로 갈 곳을 생각하였다. 그때 마침 경희가 들어오며,

「오라버니 오늘 예배당에 안 가세요?」

하였다.

이 소리를 듣는 선용의 마음은 무엇을 깨달은 듯이,

「참 거기나 오래간만에 가볼까?」

하였다.

「가세요. 저도 예배당 가는 길예요.」

「어느 예배당에?」 「저! 종교(宗橋) 예배당예요.」

이 소리를 듣는 선용은 깜짝 놀래는 듯이,

「종교?」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네. 왜 그렇게 눈을 크게 뜨세요?」

「여기서 종교가 어데라고 왜 그렇게 먼 곳으로 다니니?」

「그 전부터 그곳으로 다니게 되었어요.」

하고 무슨 부끄러운 생각이나 있는 듯이 고개를 뒤로 돌리 며 생긋 웃는다.

두 사람은 종교 예배당에 왔다. 선용은 예배당 문간으로 들어갈 때마다 깨닫는 우스운 웃음을 또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그는 그 전에 조선 있었을 때에도 자주자주 예배당에를 다 니었다. 그가 무슨 신앙(信仰)이 깊어서 예배당에를 간 것이 아니라, 무미하고 적적한 1주일 동안에 공연한 번민으로 그 날을 보내다가 하루 아침 다만 한 시간일지라도 고요하고 정숙하게 모여 있는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자연히 마음에 성(聖)되고 순결한 맛을 깨닫는 듯하여 가고 싶어 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학생 많은 종교 예배당에 청년 신사가 많은 것 을 생각하고, 또 자기도 어쩐지 그 여학생 없는 예배당에 다니기 싫은 생각이 나던 것을 생각하고 속으로 웃었다. 선 용은 예배당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여러 사람들은 일제 히 자기를 돌아다보았다. 그리하고 저편에 늘어앉은 여학생 들이 자기를 보는 듯하여 마음속으로 기꺼운 듯도 하고 부 끄러운 듯도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리를 찾아 앉으려 하였으나 벌써 양복 입은 젊은 신사와 머리를 길게 기른 예 술가 비슷한 청년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앉아 저희들끼리 앞에 앉은 사람의 머리 틈으로 저쪽 어떤 여학생을 건너다 보며 무엇이라 소곤소곤 히히히히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선용은 자리가 없어 한참 주저주저하였다. 그리고 한 가운 데 서서 쭈뻣쭈뻣거리는 것이 공연히 불쾌하고 부끄러운 듯 하여 그대로 다시 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 이켜 저쪽 앞을 흘낏 보니까 거기 자기의 오랜 친구 하나가 앉아 있다가 자기를 보고 눈짓을 하여 자기 옆에 빈 자리를 한손으로 두드린다.

선용은 얼른 그리로 달려갔다. 그리고 반갑게 악수를 하고 오래 못 본 인사를 마치었다. 그러할 즈음에 회색 두루마기 에 상고머리를 깎은 시골 사람 같은 목사가 강도상 앞으로 가까이 가더니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의 고유한 사투리를 써서,

「인제는 예배 시작하겠읍니다.」

하였다.

선용은 그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퍽 서툴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 청년더러 물으니까 그 청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는 목사인데 이번 연회(年會)에 개성에서 갈려왔 다 한다. 개성 있을 때도 여러 청년들과 뜻이 맞지 않아서 싸움만 하더니 여기 와서도 젊은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 아 큰 걱정이라 한다.

그러나 선용은 사투리를 섞어서라도 예배 시작을 하겠다는 말이 듣기에는 퍽 기뻤으며 반가왔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편에는 남자 저쪽에는 여자 더군다나 서로 눈여겨 추켜보는 청년 남녀들이 목소리를 합하여, 아침에 붉은 햇빛이 성자 (聖者)가 밟고 가는 하늘 길과 같이 유리창으로 통하여 들어 올 때 아름다운 찬송가를 오래 하는 것이 구리빛같이 불그 레한 말할 수 없는 성(聖)된 감정을 자기의 끓는 하아트에 전해 주는 것을 들을 수 있음이었다.

찬송가는 시작되었다. 서로 엉키고 뭉텅이가 된 여러 사람 의 찬송가 소리 가운데로 때때로 들리는 순결한 처녀들의 조금도 상치 않은 고운 목소리에서 우러나는 멜로디가 선용 의 가슴을 몹시 기껍게 하였다.

그리하여 형식 같은 기도나 듣기 싫은 목사의 지나가는 허 튼 주정 같은 요렁을 알 수 없는 강도보다도 언제까지든지 이렇게 찬송가만 부르고 있으면 그 신자들 가운데 무슨 보 이지 않는 감화를 줄 수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아까운 찬송가는 그치었다. 선용은 어서어서 또 한 번 찬송가를 하였으면 좋겠다 하였다.

성경을 보아라. 수전을 하였다. 그리고 기도를 하였다. 선 용은 이러할 동안 여러 번 젊은 청년과 젊은 여자들이 서로 보고 서로 사랑의 동정하는 시선을 주고 받는 것을 많이 찾 아 내었다. 이때 목사는 또다시 찬양대의 노래가 있겠다고 하였다. 안경 쓴 여자가 두서넛 바로 활개를 치고 나오더니 풍금 옆에 가서 여러 사람을 거만스럽게 둘러보더니 저희들 끼리 그 애교를 누구에게 보이려는 듯이 싱긋싱긋 웃는다.

그리고 또 그 뒤를 이어 남자들이 또 이쪽 풍금 곁에 가서 서더니 두루마기를 쓰다듬고 주먹으로 입을 가리우고 목소 리를 가다듬는 듯이 기침을 하였다.

선용은 기꺼운 기대(期待)를 가지었었다. 그 찬양대의 코러 스가 아까 그 아무렇게나 하는 찬송가 합창보다도 더 좋은 감상을 주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 찬양대의 코러스가 시작 할 때에는 기대하던 것보다 그렇게 만족함을 주지 못하였 다. 모든 선율(旋律)은 어그러지고 조화가 되지 않았다.

찬양대가 끝나고 목사의 강도가 끝나려 하려는 때이었다.

선용은 문득 저쪽 부인석 저쪽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아아 거기에는 3년 전 옛날에 영도사 흐르는 물 위에서 자 기에게 뜻깊은 말을 주더니 몇 달이 못 지나고 몇 날을 못 지내어 실연의 불꽃을 자기의 가슴에 던져주어 여기 앉은 자기의 생(生)을 무참히 끊어 버리게까지 하던 혜숙이가 거 기 앉아 있었다.

선용의 온몸으로 돌아가던 성(聖)되고 정하던 피가 당장에 식어 버리는 듯하고 분하고 얄밉고 간악하게 보이는 생각이 그의 가슴으로 치밀어올라온다.

그리하여, 그 아까 자기가 듣고 아주 성(聖)되고 즐거운 감 정을 주는 여러 청년 남녀들이 합하여, 아침에 붉은 햇빛이 성자가 밟고 가는 하늘길과 같이 유리창으로 통하여 들어올 때 아름다운 찬송가를 노래하는 것이 구리빛같이 불그레한 말할 수 없이 성된 감정을 자기의 끓는 심장 위에 부어 주 는 듯하더니, 지금 그 <이브>를 속이던 뱀과 같이 간악하게 생각되는 혜숙의 주정(酒精)의 타는 빛과 같은 파란 목소리 가 섞이었던 것을 생각하여 아주 마음이 좋지 못하였으며 그 혜숙을 당장에 몰아 내쫓고 싶었다.

그러나 선용의 마음 한귀퉁이에서는 옛날의 그윽한 사랑의 기억이 아직 차디차게 식지는 않았었다. 그러하고 다만 한 때라도 자기가 사랑한다고까지 말을 한 그 여자를 지금 다 시 지척에 놓고 바라보니 자기가 그 여자로 인하여 또다시 얻기 어려운 생명까지 끊으려 하였으나 그것을 단념하고 또 그 일본 있는 여학생에게 향하는 희미하고 몽롱한 사랑의 정을 가진 그는 다만 그 혜숙이 불쌍하였을 뿐이다.

선용은 한참이나 혜숙을 바라보다가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고개를 목사의 강도하는 편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자꾸자꾸 그 혜숙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같이 얼 굴이 간질간질하고 또 아까부터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대로 거기 앉아 있지 말고 얼핏 바깥으로 나가 버리고 싶 었다.

그러하나 그 혜숙이가 자기를 보았다면 그의 마음속은 어 떠하였으며 또 그 동안에 그 여자의 성격은 얼마나 변하여 나를 어떻게 생각하였으리요 하였다. 그리고 보지 않으리라 보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자꾸자꾸 곁눈으로 그쪽을 흘겨보 고 있다. 그러다가 그 혜숙이가 힘없이 앉아 있다가 고개를 잠깐 들며 자기편을 향하여 보는 듯할 때 선용은 눈을 얼핏 내려감기도 하고 다른 곳도 보았다.

선용은 거기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고 오 늘 예배당에 공연히 왔다고까지 생각을 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 고 지나갈 때 그의 상기(上氣)되었던 얼굴은 아주 시원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예배당 큰 문으로 나가며 여자석 입구 (女 子席入口)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그 혜숙이가 자기의 나오 는 것을 좇아 나오지나 아니할까? 하였다.

그가 예배당에서 나와 행길로 걸어갈 때에는 웬일인지 울 고 싶도록 슬픈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인왕산 꼭대기라도 올 라가서 실컷 울고 싶었다.

그래 그는 하루 종일토록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혜숙과 자 기의 지나간 사랑의 기억에 마음을 괴롭히다가 밤 10시가 넘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선용은 건넌방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자기 친구 에게 가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러한 즈음에 경희가 뛰어들어오며

「오라버니.」

하고 부른다. 선용은 쓰던 붓을 든 채로,

「왜 그래.」

하며 돌아다보지도 않고 나머지 글자를 마저 채웠다. 「저 요, 오늘 우리 동무들이 놀러와요.」

하며 생그레 웃으며 여자 오는 것을 남자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나 되는 듯이 선용을 바라본다. 선용 은 여성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사 랑 정(情), 눈물, 한숨, 고민, 오뇌 이 모든 것이 한 뭉치가 되어 번개와 같이 나타났다가 번개와 같이 사라진다. 그리 고 그의 가슴으로는 본능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불안을 깨달 았다.

「누구누구.」

하고 선영은 물었다.

「여럿이에요. 모다 오라버니는 다 모르는 아이들이에요.」

「무엇하러 와?」

「놀러 오지요.」

「놀러?」

「네.」

「어떻게 노누.」

「그저 이야기하고 놀지요.」

「그러면 나도 한몫 끼게 되나.」

경희는 웃으면서

「그럼요 오라버니도……」하더니 무엇을 깨달은 듯하더니 갑자기 은근한 듯하고 자별한 듯이 목소리를 바꾸어,

「저요 오늘 정월(晶月)이라는 아이도 오는데요. 어떻게 피 아노를 잘 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학교에 다닐 때에도 음 악에 재주가 있다고 하였더니 지금은 아주 훌륭한 피아니스 트가 되었어요.」

하고 서투른 영어에 피아니스트 한 말을 한 것이 신기한지 부끄러운지 한번 호기(好奇)의 웃음을 웃더니 다시 말을 계 속하여서,

「그러나 시집을 가더니 아조 사람이 변하였어요.」

할 즈음 선용은 껄걸 웃으며,

「그거 어떻게 변하여졌어? 물론 변하였을 터이지.」

하니까 경희는 또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아뇨, 그렇게 변하였다는 것이 아니라요.」

하며 <그렇게>라는 데 힘을 주어 말을 한다. 즉 그렇게란 뜻은 보통 처녀가 시집을 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함 이다.

「그러면?」

하고 선용이 또다시 물었다.

「그애는 아주 이상해요. 때때로 울기만 하고 말을 해도 아주 애처롭고 슬픈 말만 하고요. 언제인가 나에게 시(詩)를 하나 베끼어 보냈었는데요. 이런 시를 베끼어 보냈어요. 저 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꼭 외어 두었지요.」 「무슨 시 인데 어디 외어 보아라.」

「자! 욀께요.」

하더니 얼굴이 조금 불그레하여 지며 부끄러운 듯이 목소 리가 조금 떨린다.

「……‥어느 곳에 고달픈 나그네의 가야 할 곳이 있을는 지?

남쪽나라 종려나무 그늘인가?

라인 언덕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인가?

아지도 못하는 이의 손을 빌어 사막에 묻히일 이 몸일까?

그렇지 않으면 물결치는 바닷가에서 물결에 씻기일 이 몸 일까?

어디로 가든지 변치 않고 푸른 공중은 나를 에워싼다.

밤이 되면 죽음의 촉대(燭臺) 별들은 내 위에 비추인다 ……‥ 라고 써보냈어요.」

선용은 이 소리를 듣고 그 어떤 여자인지 나와 같이 눈물 많은 여자인가보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언제든지 원하는 방랑(放浪)의 노래를 듣고는 그 여자가 얼른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여자와 사귀고 싶었다. 선용은,

「집은 어데이고 성(性)은 무엇인데?」하였다.

경희는 다만 빙그레 웃으면서,

「왜 그러세요?」

가르쳐 주지를 않는다.

「글쎄 말야.」

하고 선용은 경희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알아차린 듯하여 고개를 돌리었다.

「이따 오거든 소개하여 드리지요 네? 오라버니」

경희는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책상에 놓여 있는 시계의 돌아가는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노곤한 침묵이 온 방안에 서 시들어지는 듯하였다. 선용은 멀거니 앞만 보고 앉아 있 다. 그리고 경희에게 들은 여자를 자기 눈앞에 마음대로 그 리어 보았다.

그러다가는 약하고 연한 여자의 몸으로 북쪽 나라 눈구덩 이에 검은 머리를 흩뜨리고 뒹구는 것과 남쪽 지방 야자(椰 子) 그늘 밑으로 흰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헤매는 것이 보인 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곳으로 정처없이 떠다니는 그 여 자가 얼마나 자기의 마음을 끄는지 알 수 없는 듯하다.

그리하다가는 다시 어저께 혜숙을 만나 보던 것이 생각나 며 그 여자는 어찌하여 그러한 성격을 가졌으며 혜숙은 어 찌하여 그러한 성격을 가진 여자로 태어났나 하였다. 그리 하고 그 혜숙을 그 여자와 같은 성격을 가진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앞창 바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아침해는 벌써 공중에 높이 떠 불그레한 빛은 여위어지고 다만 아지랭이 낀 남산이 멀리 그 윤곽만 보이고 있다. 선용은 그 동안에 아주 전신의 노곤함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옛날의 기억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영도 사의 놀이, 동경 객창의 고민, 자살, 병원의 치료, 일본 있는 그 여학생, 그리고 또 오늘에 이 자리의 모든 것이 순서없 이 왔다갔다하며 또다시 자기의 오촌이 돌아가고 자기가 그 집의 양자가 되어 경희의 집에 와 있게 된 것, 또 얼마의 재산을 자기 오촌에게 물려가진 것이 생각나며 그전에는 자 기 오촌도 자기가 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을 반대하여 학자 를 주지 않던 것, 그러나 오늘은 그전보다 다르게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 또는 신체 허약으로 공부를 채 마치 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 생각된다.

그러다가 일본이 생각날 때마다 그 여학생은 어디를 갔을 까? 어디 있을까?

어떤든 이 땅 위에는 있을 터이지.

그러다가 이 쓸쓸하고 의미 없는 폐허(廢墟)같은 세상에서 다만 그 여자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렷다.

하는 생각이 나며 거친 가시덤불 사이나 시들어진 풀 위로 이리저리 헤매며 눈물을 흘리고 자기를 기다리는 그 여자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일본 여학생을 쫓아가는 것보다도 오늘 그 정월이라는 여자를 만나 또다시 알수 없는 사랑의 쾌락을 나와 그 사이에 얽히게 하여 그와 나와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도 좋으렷다.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그렇 게 쉽게 되지 않을 일이렷다 하고 곧 단념하여 버리었다.

선용은 창문을 닫고 자리 위에 벌떡 나둥그라지며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천장만 바라보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 고 공연히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조금 만 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하다. 그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때에 마루 끝에서 경희가,

「언니 어서 오오, 이리 올라와요.」

하며 기껍고 반갑게 누구인지를 맞아들이는 소리가 들린다.

선용은 속마음으로, (에구 왔고나.)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 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공연히 물끄러미 멍멍히 앉아 있었다.

마루에서는 선용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여자의 치맛 자락이 서로 갈리는 부드러운 듯하고 미끄러운 듯한 소리가 들리며 꿈속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피어 가는 백합꽃의 이슬 맞은 향내와 같은 웃음 소리가 한 겹밖에 안되는 미닫이를 통하여 들려 들어온다.

조금 있다가 누가 또 온 듯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뒤섞이고 범벅이 되어 일어난 다. 그때 경희의 무슨 경고(警告)나 하는 듯이 조심스럽게 선용의 방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웃음소리는 뚝 그치고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잠잠한 침묵이 고요히 그 여성들의 까만 머리 위로 떠돌아가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때때로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선용의 가슴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는 듯이 선용을 간질간질 하게 할 뿐이다.

30분밖에 안 지났다. 그러나 선용에게는 몇 시간이 지나간 듯하다. 경희가 문을 가만히 열면서 선용을 치어다보고 눈 짓을 한번 하더니,

「저리로 나오세요.」

하였다. 선용은 다만,

「그래,」

하고 경희의 뒤로 쫓아나갔다. 걸음이 어째 더 점잖아진 듯하고 두 다리가 뻣뻣한 듯하다.

선용이 안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다.

뒤 창문을 열어젖힌 그 앞에는 혜숙이가 앉아 있었다. 분 명한 혜숙이가 자기를 치어다 보았다.

선용은 다만 아무 소리도 없이 그곳에 붙은 것처럼 서 있 을 뿐이었다.

경희는 뒤쫓아 들어오다가 선용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어서 들어가세요.」하고 등을 가만히 밀었다.

선용은 어찌할지 몰랐다. 다만 아무 소리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혜숙을 돌아보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선용은 그 자리에 와 앉는 것이 가시 위에 앉은 듯이 괴로 왔었다. 그리고 얼른 자기 방으로 뛰어나가고 싶었다.

혜숙은 다만 얼굴이 발갛다 푸르다 하며 선용을 바라보기 도 하고 다른 곳을 보기도 하였다. 그의 얼굴은 그전 선용 이가 영도사에서 볼 때와 같이 피어오르는 것같이 불그레하 지도 않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해롱해롱하지도 않았다. 그 의 얼굴은 몹시 창백하여졌다. 화색있고 불그레하던 두 뺨 은 어느덧 여위어 버리고 대리석(代里石)의 그 빛같이 희고 누르고 푸르렀다. 그의 동그스름하고 매낀하던 목은 그 전 과 같지 않고 각이 지고 해쓱하여 졌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빚어넘긴 머리털이 이마 위에서 성기게 휘날리는 것과 가늘고 긴 손가락이 흠없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때 선용의 가슴은 웬일인지 불쌍하고 애처로 울 뿐이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발가벗은 정(精)이 검은 머리를 흩뜨리고 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듯이 반쯤 오만하고 숭고(崇高) 한 듯한 애교(愛校)가 그의 온몸을 흐르는 듯하면서 소복(素 服)한 천녀(天女)가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위에 내려와 넓고 넓은 광야로 헤매며 부르짖는 듯한 비애와 통한(痛恨)의 그 늘이 그를 쫓아다니는 듯한 것이 선용을 몹시 가슴타게 하 였다.

그러나 혜숙은 선용의 가슴에 영원히 사라지지 못한 실연 의 못을 박아준사람이다. 선용의 희망과 행복을 불살라 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그를 보는 때에는 다만 자기의 마음 속에 뭉치고 또 뭉친 원망을 시원하게 분풀이라도 하고 싶 었으나 그 불쌍하고 애처롭게 된 그의 육체를 볼 때에는 그 모든 것이 홱 풀어져 버리었다.

경희는 자기 오라버니를 자기 동무에게 소개하고 또 자기 동무를 자기 오라버니에게 소개를 하였다.

「이 이는 이정월(晶月)이란 이예요.」

하고 혜숙을 가리키며 소개를 한다. 선용은 눈을 갑자기 크게 뜨며 그 정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마음으로 (혜숙이가 이 정월이라니?) 하는 의심이 일어나며 여태껏 자기를 보기 원하고 기대하 고 그로 인하여 부질없이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 사람이 3년 만에 나의 앞에 앉은 혜숙이란 소리를 듣고는 무슨 수수께 끼를 듣는 듯하고 자기가 꿈속에 있지나 아니한가? 하는 생 각이 났다.

그리고 이 정월이가 써보내었다는 자기 누이동생이 읽던 그 게르만의 시인(詩人) 하이네의 시를 생각하고, (참으로 그전 혜숙의 성격이 그렇게까지 변하였을까.) 하였다.

(그리고 만일 그의 성격이 그렇게 변하였다 하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였다.

별로 담화가 없었다. 다만 멀거니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 에 경희와 또 다른 여자와의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정월의 관골 (觀骨) 위의 피부는 꽤 불그레하다. 다른 곳은 다 창백하나 그곳뿐이 불그레할 뿐이다.

이렇게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선용은 바깥으로

<나가야 나가야>하고 일어날까 일어날까 할 때 갑자기 정월 은 기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슴을 문지르며 못 견뎌하 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정월은 두 다리를 모으고 쪼그리고 앉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자 꾸자꾸 기침을 재쳐 한다. 그러다가는 입을 가린 흰 비단 수건에 빨간 핏덩이가 묻어 나왔다.

이것을 보는 선용의 마음은 무엇으로 찌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순결하고 곱던 혜숙이가 오늘 저렇게 괴로워하 는 꼴을 보고 또는 그 빨간피를 토하는 것을 보매 어린 양 이 제단 앞에서 피를 흘리며 바르르 떠는 것보다도 더 불쌍 한 듯하여 그는 금치 못하게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여 얼 른 얼굴을 가리고 아무 소리 없이 안방에서 뛰어나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상에 고개를 대고 한참이나 울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선용은 12시가 되도록 자기 방에 혼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말 할 수 없이 외로움을 깨 달아 알았다.

사면은 아주 조용하다. 늦은 봄에 아직 어린 벌레들의 으 스스하게 우는 소리가 선용의 핏속으로 스미어드는 듯하였 다. 시계는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흐르는 세월의 아주 짧 은 구절을 세고 있다.

선용의 가슴은 공연히 긴장하였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한다.

선용은 일어서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하였다. 그리고 자 기나 정월이나 이 세상에 났다가 사라지는 짧은 생(生)을 생 각할 때 더구나 아주 짧은 청춘(靑春)을 생각하여 볼 때 구 차하고 기구하게 울며불며 한숨쉬며 눈물지며 지내가는 인 생이란 아주 적고 우습게 생각이 된다.

그는 다시 앞 미닫이를 열어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은 빛 같은 달빛은 온 지구를 덮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남산 (南山)은 회색 세계(世界)의 산악과 같이 그의 윤곽만 보이 고 있다. 멀리 저쪽 공중에는 작은 별들이 졸음 오는 듯이 껌벅거리고 있다. 마당에 깔린 모래는 반짝반짝하였다. 이슬 에 젖은 안마당에 놓여 있는 나뭇잎이 번지르하게 빛이 난다.

선용은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감상(感想)과 비애(悲哀) 속에서 이것을 바라보았다.

선용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자기의 운명을 생각할 때에 는 눈을 딱 감고 그대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불쌍하게 된 정월과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그 여학생을 생각할 때에는 공연한 눈물이 알지 못하게 난다.

그리고 그 혜숙이가 자기를 배척하던 혜숙이가 3년 만에 오늘 다시 만나 본 이때에는 그 혜숙이가 아니고 육체도 변 하고 그의 성격까지 변한 정월이라는 시적(詩的)이름 아래의 참 인생이란 것을 느끼고 참으로 참 생(生) 가운데서 살아 보려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은 한없는 기꺼움과 동정의 마음이 생겨나며 지나간 과거가 한때 지나간 농담같 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정월의 육체는 왜 저리 되었는가? 제단 앞에 눈물을 지는 음침하고 두려운 촛불과 같은 죽음의 촛불의 그림자가 그의 몸을 점점 가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할 때에는 선용은 아주 미칠 듯한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는 그 정월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려 보낸 것을 생각하고 왜 내가 정월을 그대로 돌려보내었는가? 그 의 손목이라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라도 지나간 일 을 꾸지람이라도 하고 원망이라도 하고 타이르기라도 하며 또다시 그 전과 같은 사랑을 다시나 이어볼걸!

그러다가도 그러나 그것도 꿈이로다, 지나가는 꿈이로다, 지나가는 꿈이로다, 하다가는,

「에 그만두어라. 내가 또 미친 놈이고 어리석은 놈이지.

그로 인하여 생명까지 끊으려 하던 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 다니.」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혜숙은 연전 혜숙이가 아니요, 나를 죽게 한 혜숙이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그에게 무슨 몽롱한 호기(好奇)를 주며 왜? 나는 정월을 차지하여 볼 운명 아래 나지 않았나? 하였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멀거니 있었다. 어느덧 별 하나가 서 쪽으로 넘어간다. 선용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선용은,

「달과 별은 영원히 우리 인생을 내리비치겠고나.」

하였다. 그리고,

「나나 정월이나, 웃는 사람이나 우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비치어주겠구나.」

그리고 누르고 붉은 아침빛이 새로운 구름을 물들이는 새 벽 아침이나 갈가마귀 어미 찾아가는 쓸쓸한 황혼이나 권위 있는 햇빛과 푸른 달빛과 여름이나 겨울이나 우리가 본 곳 이나 우리가 보지 못한 곳이나 이 모든 것 위에 쉴새없이 움직이는 무슨 세력은 영원한 우주 사이에 잠깐 있다 사라 져 없어지는 나와 정월 사이를 눈물과 원망으로 매어놓고 그대로 쓸어가 버리렷다 하였다.

그리고 허황되고 우스운 세상이라 하였다. 그러다가는 타 는 듯한 마주(魔酒)를 마시어 답답한 가슴을 고치어나 볼까?

요염(妖艶)한 창녀의 젖가슴에 안기어 끝없는 울음이나 울어 볼까 하였다.

선용은 자리도 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 다가 얼마나 되었는지 선선한 기운을 못 이기어 눈을 떴다.

불그레한 아침해가 안마당을 반사하고 미닫이 창을 물들이 고 있었다.

정월은 처녀 시대에 몽상하던 모든 환락을 반드시 실현하 여 맛볼 수 있으리라는 공허(空虛)하고 광막(廣漠)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또 한옆으로는 붉은 피가 타오르는 듯한 견디 기 어렵고 참기 어려운 열정에 타는 불길로 자랑스러운 처 녀의 달콤한 세월을 보내었으나 하루 저녁 백 우영에게 애 석하고도 할 수 없이 다시 얻기 어려운 처녀의 자랑을 잃어 버린 후부터 비로소 가슴쓰린 눈물을 알게 되고 헤아리기 어려운 초민(焦悶)을 맛보게 되었다.

백 우영과 결혼하던 그날까지 모든 열락(悅樂)과 행복을 한 없이 누리고 노래할 줄 알았더니 그후 얼마가 되지 않아 정 월은 아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 생활의 어딘지 한구석이 비 어 있는 것을 찾아 내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비로소 처녀 시대에 몽상하고 동경하던 모 든 것이 한낱 붙잡으려 하나 붙잡을 수 없는 춘몽과 같이 사라짐을 깨닫고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같이 깨어져 사라짐 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였다. 처녀 시대의 그 열렬한 사랑을 영구히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하나 날이 가 고 달이 갈수록 찾아 내는 것은 그 백 우영의 결점뿐이요, 자꾸자꾸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어쩐 일인지 자 기와 자기 남편 사이에 모든 것이 잘 융화되지 않고 잘 이 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반죽이 잘 되지 않은 밀가루 떡같이 언제든지 두 사람 사 이에는 우수수 부서져 떨어지는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정월은 사랑에는 이해(理解)만 있으면 그만이라 하 였다. 그래서 자기 남편과 자기 사이에 사랑의 줄을 단단히 잇게 하여 주는 것은 다만 그 이해가 있을 뿐이라 하고 백 우영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여 영구한 사랑을 그에게 주려 하였으나 백 우영은 그것을 마지못하여 또는 정월을 이해해 줄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정월이 그것을 찾아 내면 찾아 낼수록 마음이 공연히 괴롭 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이 괴로웠다. 그리하여 공연히 눈 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었으나 눈물과 한숨을 흘리고 쉴 때 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맛보면서도 자꾸자꾸 울 었으며 눈물을 지었다.

그는 한귀퉁이 가슴이 빈 것을 채우기 위하여 시(詩)를 외 고 소설을 읽다. 그리고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정월 이가 시를 읽고 소설을 보고 피아노를 칠 때마다 그전보다 더—감상을 맛보고 그전보다 더—울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상과 비애를 맛보는 것이 달콤한 애인에 따가운 피가 스며나오는 붉은 입술을 빠는 것과 같이 전신을 사르는 듯 한 유열(愉悅)을 깨달았다.

그러하다가도 무슨 아지 못하는 힘이 더욱더욱 자기의 몸 을 칭칭 동여맨 것을 깨닫게 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고 애쓰나 몽롱하게 그것을 알아낼 수 없을 때에는 그는 마 음이 아주 괴로왔다.

그는 그리하면서 무미한 생활을 하여 올 동안에 때때로 선 용을 생각하여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백 우영에게 서 모든 행복을 얻지 못하고 무슨 만족함을 찾아 내지 못한 그는 선용을 생각하여 보지 않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선용 이가 참으로 자기를 이해하여 주고 자기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아 줄 사람이 아닐까?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그것 은 벌써 지나가 버린 일이라 어찌하리오. 다만 단념하고 단 념하려 하고 만일 선용의 환영이 그의 눈앞에 보이기만 하 면 눈을 딱 감고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가 눈을 감을 때 에는 반짝반짝 하는 암흑(暗黑) 속에 더—분명히 자기로 인 하여 생명을 끊으려던 선용이가 나타나 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아니하여 사라져 버리었다.

정월이는 작년 겨울에 감기를 앓은 후 아지 못하게 폐병이 발생되어 피를 토하고 기침을 하며 몸이 점점 허약하여짐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더욱 감상과 비애(悲哀)가 그를 못 살게 굴었으며 죽음이라는 장래가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울면 울수록 더욱 울고 싶었고 죽음이 두려운 것을 깨 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그 죽음을 속히 맛보고 싶었다.

그래 그는 그날과 그날을 이곳저곳으로 꽃도 따고 달도 찾 아 의미 없고 쓸쓸스러운 날을 보낼 뿐이었다.

그는 어제 선용을 만나볼 때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이 반갑고 그리운 마음은 그대로 달려들어 선용의 가슴에 고개를 비비면서 소리쳐 울어 가며 3년 전 그때 그날로 자 기를 도로 끌어다 달라고 하소연까지 하여가며 선용에게 자 기의 잘못을 용서하라고까지 하고 싶었으나 아지 못하는 힘 이 언제든지 자기 몸을 붙잡아 매어놈으로 그리하지도 못하 고 다만 가슴을 부질없이 태우면서,

「단념하여야 할 것이다. 단념하여야 할 것이다.」

하면서 자기의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 하였으나 자기가 피 를 토하고 괴로와할 때 선용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 뚝 떨어지며 얼굴을 가리우고 자기 방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정월은 미친 듯이 선용이가 다정스럽고 눈물이 날 듯 한 애련(愛戀)의 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고 일평생 처음 으로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본 그는 이 세상 을 다—돌아다닐지라도 선용 한 사람뿐이 참 자기를 불쌍히 여기어 주는 사람이고나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당장에 죽어 없어져 버려 자기를 매어놓은 보이지 않 는 무슨 세력도 잊어버리고 선용에게 향하는 가슴 쓰린 애 정도 잊어버렸으면 할 만큼 초민을 깨달았다.

그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는 선용에게 지나간 과거의 책망을 들으며 원망을 들으며 애탄하는 말을 듣는 듯하여 가슴이 자꾸자꾸 죄는 듯하고 피가 마르는 듯하였다. 정월은 그날 저녁에 조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3년 전 옛날의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선용을 만났던 일과 또 그 후 선용이 일본으로 떠나가서 말할 수 없이 섭 섭하여 미칠 듯이 날을 보내던 것과 또 선용에게 자기가 날 마다 날마다 울음으로 그날을 지내간다는 것을 써보낸 것과 그 후부터 자기가 날마다 동경하던 모든 허영의 만족을 주 는 백 우영에게 정조를 빼앗기어 그와 결혼을 하게 된 것과 그 후 선용이 죽으려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도 별 로 불안하고 미안함을 깨닫지 못하던 것과 또는 고치기 어 려운 병을 얻어 한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것과, 오늘 선용 을 다시 만나 지나간 과거의 견디기 어려운 기억과 또는 다 정스러운 선용의 따뜻한 눈물을 본 것이 생각되며 또 한옆 으로 자기를 얽어매어 점점 더—괴롭고 답답한 곳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죄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러다가는 이제야 비로소 그 선용이가 죽으려던 것이 눈 앞에 보이며 가슴이 떨리며 몸의 맥이 풀리는 듯하였다. 그 리고 자기 눈앞에서 선용이가 가슴의 피를 흘리고 쩔쩔 헤 매며 두 손을 폈다쥐었다 하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얼굴빛 이 파랗게 질려 올라오며 숨소리를 자주자주하여 괴로운 듯 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고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내가 무정한 사람이었지, 내가 무정한 사람이었지.」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용씨, 용서하여 주세요, 용서하여 주세요.」

하고 자꾸자꾸 울었다.

그리고 다시 방종(放縱)한 생활을 하여 가는 자기 남편과 자기 사이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무 슨 간격이 자기와 자기 남편 사이를 자꾸자꾸 멀리 하게 하 는 생각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그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무슨 힘을 더—강하게 하여 백 우영과 자기 사이를 더욱더욱 멀리하여 영원히 백 우영과 떨어져 버리고 선용과 자기 사이를 못 견디게 잡아당기는 그 보이 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힘에 끌려가는 것이 도리어 운명을 복종하는 것이요 합리(合理)의 일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시작만 하다가도 눈을 감고 몸을 떨며,

「안될 말이다, 안될 말이다.」

하였다. 아무리 선용은 다정한 사람이요, 백 우영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벌써 자기는 일생을 백 우영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선용과 자기 사이를 매어놀 기회(機會)는 벌써 시간을 타고 멀리멀리 가버린 것이다. 이것도 한 운명이 아닐까? 그리하 고 어떻게 백 우영을 무정히 떼어버리고 부정(不貞)한 여자 라는 더러운 이름 아래 조소와 모욕 사이에서 일평생을 지 내간다 하더라도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으리요.

그리고는 또다시 자기가 날마다 읽는 그 유명한 소설 가운 데 불행과 불운에서 헤매는 청춘 남녀의 애끓는 사랑의 역 사를 읽어 보면 읽어 볼수록 자기도 그와 같이 불행과 불운 사이를 헤매고 헤매다가 무참히 이 세상을 떠나지 아니할까 하는 피상적 암시가 그를 몹시 가슴 저리게 하였다. 그리고 피 있고 정 있는 아까운 청춘이 눈물과 한숨 속에서 지나갈 것을 생각하매 살아가는 인생이 말할 수 없이 애달팠다. 그 러다가는 자기 혼자 의견으로,

「청춘의 타오르는 힘없는 정염은 만 가지 불행의 원인은 아닐 텐데.」

하고 자기와 같이 마음 괴로운 생애를 하지 않는 젊은 청 춘 남녀가 이 세상에 과연 있을는지 의심하였다.

그 이튿날 저녁이었다. 문 밖을 나선 선용은 어디를 가는 지 교동 병문 넓은 길을 향하여 내려온다.

저녁 안개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동쪽 하늘에 새로이 올라 온 둥근 달이 회색 안개 속에 빙그레 웃는 듯이 달리었다.

바람은 살살 살살 사람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단장을 두르며 걸어가던 선용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양복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누가 볼까 겁내는 듯이 편 지 한 번 보고 지나가는 사람 한번 본다. 그러다가는 그의 얼굴은 무슨 결단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듯이 멀거니 앞만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편지에는, 선용씨 지나간 과거는 어떻든 갔읍니다. 지나간 과거가 우리를 웃 든지 울리든지 그 과거의 이야기는 말아 주세요. 지나간 과 거는 과거 그대로 덮어 두어 주세요. 저는 선용씨의 따뜻한 눈물을 보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선용씨를 잊지 못하게 되 었읍니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선용씨를 저는 잊어야 할까요. 저는 다만 운명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이외다.

저는 한 가지 말씀하려 하는 것이 있읍니다. 만일 선용씨 가 저를 잊지 않으신다 하시거든 내일 저녁 금화원으로 월 계꽃 구경 나갈까 하오니 선용씨도 와주시기 바랄 뿐이외 다. 저의 오라버니도 오실 터이니……

정월?

선용은 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몽롱한 의심이 자꾸자 꾸 치밀어올라온다. 길거리 이 짐이나, 사람이나, 지나가는 인력거나 마차, 자전거가 조금도 선용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무엇하러 금화원으로 가는지 아지 못 하였다.

그가 교동 병문을 나서려 할 때 달려가는 전차가 덜컥 하 는 소리를 내며 선용의 몽롱한 의식을 무엇으로 때리는 듯 이 분명하게 하여 놓는다.

선용은 멈칫 하고 서서,

「내가 무엇하러 가나?」

하였다. 그러다가는 관성으로 그리하였든지 종로로 향하여 걸어간다.

내가 무엇하러 정월을 만나러 금화원으로 가나? 정월이가 정말 나를 기다릴 것인가? 내가 가서 과연 반기어 맞으며,

「어서 오십시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고 두 손을 잡아 줄 것인가? 정말 나를 잊지 못하는가?

잊지는 못하면서 운명으로 인하여 나와 서로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을 참으로 한탄하는가? 정말 나를 위하여 뜨거운 눈 물을 흘리며 애끓는 한숨을 쉬는가? 만일 나를 정말 생각하 고 나를 위하여 울고 나를 위하여 한숨진다 하면 어찌하여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던져 버리고 나에게 오지를 못하는 가? 하고 가다가 선용은 다시,

「그렇다. 내가 지금 금화원으로 정월을 만나러 가는 것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짓이다.」

하다가 또다시,

「그 과거는 과거대로 덮어 주세요」

한 말을 나의 입에서 자기를 원망하고 꾸짖는 말이 나올까 겁나서 그것을 미리 틀어막으려 하는 것이요, 나를 잊지 못 하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끌어 잡아당겼다가 자기 손 속에 집어넣고 운명이란 말하기 좋은 핑계로 나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난다.

「그렇다. 그래 그 동안에 늘었다는 것은 간특한 수단뿐이 로구나! 운명이란 다 무엇이냐, 운명은 자기가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참으로 나를 잊지 못하면 백 우영과 자기 사이에 얽어놓은 인습과 형식의 줄을 끊어 버 리고 나와 자기 사이에 참으로 끊으려 하나 끊을 수 없는 참사랑의 가락을 얽어 놓으면 고만이 아니냐? 고만 두어라, 가는 내가 어리석은 놈이다. 도리어 친구에게 가서 하룻밤 사이 농담이나 하고 노는 것이 도리어 나을 것이다.」

할 때 그는 어느덧 종로 네거리에 와 섰다. 그때 누구인지 선용의 손을 턱 잡으며,

「야! 오래간만일세그려. 언제 나왔나?」

하는 쾌활한 청년 하나가 있었다. 선용은 깜짝 놀래면서 혹시 그 사람이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지나 아 니하였나 하는 두려운 의심이 엉킨 눈으로 그 청년을 바라 보고 서투른 소리로,

「오래간만일세. 참 여기서 만나기는 뜻밖인걸.」

하였으나 그의 말소리는 서툴렀다. 그 청년은 선용과 전부 터 아는 화가 원치상(元致詳)이었다. 그는 선용의 손을 단단 히 쥐고 아주 반가와 못 견디는 듯이,

「아! 참 오래간만야.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인가?」

하였다. 선용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아까까지 어떤 친구를 찾아 밤새도록 농담이나 하고 놀고 싶던 생각은 어느덧 사 라지고 어서어서 이 사람과 작별하고 금화원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며 반가와서 못 견뎌 하는 그의 손을 얼 핏 좀 놓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그래 그는 친구의 정을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없고 또다시 줄 수도 없어 주저주저하면서,

「저 남대문까지 좀 가네……」

하고 다음 말은 무엇이라 하여야 좋을지 아지 못하였다.

「거기는 왜? 누구에게.」

「누구 좀 볼 사람이 있어서.」

「과히 바쁘지 않거든 우리 저리로 가세, 오래간만에 만났 으니.」

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선용은 아주 대경 실색을 하는 듯이,

「아니, 그렇게 못해. 꼭 7시에 만나자고 하여서.」

하면서 잡은 손을 빼려 하니까 그 청년은,

「에! 고만두게, 나는 그래 친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지 말고 가세그려.」

하고 두 손을 잡아끈다. 선용은 애원하는 듯이,

「정말야. 못해 못해. 그 사람이 꼭 기다린댔으니까.」

하고 어떻든 그 청년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모자를 벗 고 인사를 하려 한다. 그러니까 그 청년은 손을 홱 뿌리치며,

「에 고만두게.」

하고 원망하는 중에도 섭섭한 듯이 선용을 바라본다. 선용 은 그 원망하는 듯하고도 섭섭해하는 그 청년의 표정이 미 안하고도 또 자기가 여자를 찾아가노라고 그렇게 작별한 친 구를 속인 것이 부끄럽기도 하여,

「그러면 내일이라도 또 만날게.」

하고 그를 향하여 용서하라는 듯한 웃음을 띠고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선용은 웬일인지 그 친구를 작별한 것이 시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 월이가 자기 눈앞에 보였다. 그는 다시 정월의 창백하고 해 쓱한 환영이 자기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불쌍한 가운데 말 하기 어려운 애련의 정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자기 누이동생 경희에게 정월이가 하이네 시를 써보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나며 그의 성격은 얼마나 변하였을까 하였 다. 그리고는 그가 얼마나 자기와 공통된 성격을 가졌을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그 피 토하던 것을 생각할 때는 자기의 가슴을 쪼개는 듯이 아픈 듯한 때 그는 앞뒤에 연속 되는 의식이 딱 끊어지는 듯이 다만,

「폐병을 앓거나 자기를 당장에 옥 속으로 집어 던지거나 사랑은 영원히 사랑이요, 사랑 앞에는 죽음도 없고 아무것 도 없고 다만 벌거벗은 사랑이 있을 뿐이지!」

하였다. 선용이 황금정 네거리까지 왔을 때에는 날이 캄캄 하여졌다. 그리고 전차 감독의 호각 소리가 자기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듯이 짜리짜리하는 듯 하였다. 그는 선뜩 그 의 머리로 무슨 생각 하나가 전깃불 켜지듯이 갑자기 지나 갔다 다시 왔다.

「그런지도 모르지.」

하고 혼자 남이 들을 만치 중얼거린 선용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전찻길을 건너섰다.

정월도 정조의 관념을 가졌겠지? 한번 육체를 허락한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또다시 허락치 않는 것을 정조로 인 정하는 여자인지 모르지! 자기가 그 남자를 사랑하든지 사 랑치 않든지 처녀의 사랑을 허락한 그 사람에게는 일평생 육체를 허락치 않는 것을 정조 있는 여자로 생각하는 것인 게지? 자기의 정조가 자기의 일평생의 모든 것인 줄 아는 여자인 게지?

그러면 자기가 참으로 나를 잊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정 월이 모든 인식과 형식에 구애되어 자기의 사랑을 완전히 나에게 줄 수 없다 하면 나나 또는 정월 두 사람의 고통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못하렷다.

그러나 선용은 정월에게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만일 정월 이 지금 내가 생각한 것 같지 않은 여성이라 하면? 그렇다.

어떻든 가보기나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여성이라 하면 내가 가서 무엇하나? 만나면 만나 볼수록 돗수를 더해 가는 사랑의 불길은 도리어 나를 파멸 의 구렁이에 집어던질 것인데 나는 단념해야지. 가지를 말 아야지! 하다가도 그 창백한 정월의 입으로 선지피를 토하 는 것이 보일 때에는 자기가 가지 않으면 정월이가 기다리 다 못하여 자기를 원망하고 원망 끝에 세상을 비관하고 비 관 끝에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생겨 아아 그러다가는 죽음밖 에는 없을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고 자기가 정월의 운명을 잡고 있는 듯할 뿐이었다. 옛날에 자기를 죽음에 빠지게 하 던 한낱 가늘고 작은 여성의 아지 못하는 매력에 끌려 정월 의 운명을 자기 손에 잡은 듯이 생각하는 선용은 또다시 자 기의 운명의 무슨 큰 산모퉁이를 이 시간에 돌아가는 듯하 였다.

선용은 금화원에 왔다. 큰 문을 들어서 입장권을 내고 본 관(本管)—요릿집—뒤를 돌아 층계를 내려섰다.

월계의 그윽한 향내가 연한 바람과 함께 선용의 뺨을 명주 수건으로 문질러 주는 듯이 지나간다. 그는 이곳저곳 희고 붉은 월계꽃이 저녁 이슬을 머금고 해롱대는 사이로 정월과 영철을 찾아 헤매었다. 등나무 덩굴로 덮은 곳을 지나고 포 플라나무 그늘을 꿰뚫어 그늘진 담모퉁이까지 찾아보았으나 영철과 정월은 있지 않았다.

푸른 나무 잎사귀 사이로는 여자들의 비단 치맛자락이 달 빛에 번쩍이고 산뜻하게 몸을 꾸민 얼굴 붉은 젊은 청년들 은 흥취 있게 떠들어 댄다. 저쪽 테이블을 둘러앉은 중년 신사들은 음침한 웃음 속에 오만한 어조로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들을 하고 앉아 차들을 마신다. 저쪽 어두컴컴한 나 무 그늘 밑에서는 나이 젊은 남녀 두 사람이 소곤거려 정화 를 바꾸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 온다.

선용은 또다시 여러 사람들이 떨어져 서서 농담하는 틈을 지나 차르륵 찰싹 하는 분수가 물을 뿜는 연못 앞에 와 섰다.

그는 저쪽 한귀퉁이에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혼자 앉은 여 자를 보았다. 그의 뒷몸맵시가 정월과 아주 다르지만 선용 은 <그래도>하는 마음이 나서 그 앞으로 가서 그 여자의 얼 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는 속으로 욕을 하는 듯 이 선용을 흘겨 치어다보았다.

선용은 마음이 공연히 울분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모두 어 리석은 짓만하는 듯하고 오늘 저녁 이곳에 온 것은 참으로 무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분수 앞에 앉아,

「고만두어라, 오거나 말거나.」

하다가,

「영철이까지 어째 오지를 않았누?」하였다. 달빛의 은실 같이 보이는 물결은 여러 겹의 동그라미를 어룽어룽 사면으 로 펴놓고 싸라기 같은 물방울을 여기저기 휘두르며 무도를 한다.

오케스트라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떠들던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는 기름을 흘리는 듯한 침묵 속에 사라졌다.

선용은 음악에 취한 듯이 나릿한 감정 속에 멀거니 앉았다 가 어떤 여자의 치맛자락의 스치는 소리를 듣고서는 다시 의식이 회복되었다. 그 여자는 선용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여자는 뚱뚱하게 생긴 어저께 자기 집에 놀러왔던 차 숙자 이었다.

「언제 오셨읍니까?」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선용에게 인사를 한다. 선용은 정신 없이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며,

「내!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혼자 오셨어요?」

하니까 차 숙자는 고개를 조금 흔들며,

「아뇨, 저기 누구하고 같이 왔어요.」

반쯤 부끄러움을 억지로 감추려 한다. 선용은 속마음으로 아마 자기 정든이 하고 왔나 보다 하였다. 차 숙자는 다리 를 떼어놓으며 고개를 아무 소리없이 굽혀 예를 하고 저리 로 가려 하였다. 선용은 이 차 숙자에게 정월의 오고 안 온 것을 물으면 알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가려는 숙자를 붙잡을 듯이 몸을 그에게 가까이 꾸부리다가 다시 물러서며,

「저……」

하고 조금 주저하다가 정월을 보았느냐 하면 혹시 의심을 살는지도 몰라서,

「혹시 영철씨 만나셨어요?」

하였다. 차 숙자는 조금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하여 보 더니,

「이 영철씨 말씀이지요?」

하며 한참 있다가,

「네.」

하고 선용은 얼른 대답을 하여 달아날 듯이 대답을 하였 다. 숙자는,

「네. 영철씨는 몰라도 아까 정월이는 보았는데요.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없읍니다.」

하였다.

「네. 정월씨가 오셨어요?」

하는 선용의 가슴은 이상하게 물결쳤다.

「네, 왔어요. 그런데 아마 저기 올라갔는지도 알 수 없읍 니다.」

하고 본관을 가리킨다. 선용은,

「네, 매우 고맙습니다.」

하고 숙자에게 감사를 하였다.

본관에는 유리창마다 전깃불이 화려하게 켜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장이 휘날려 나부낀다. 2층 첫째 유리창을 반 쯤 연 곳에는 어떤 모양낸 청년 하나가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선용은 반갑기도 하고 무엇이 가슴을 치미는 듯도 하다.

그는 한달음에 그 요릿집으로 뛰어올라갔다. 문간에는 흰 옷 입은 보이가 점잖게 서 있다가 선용을 보고 허리를 굽혀 예를 하였다. 뛰어오기는 뛰어온 선용은 여기까지 와서 생 각하니 어떻게 정월을 찾아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 떻든 그는 문간 가까이 방 한 간을 빌어 차 한 잔을 갖다놓 고 바깥만 내다보고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보이를 불러 정 월과 같은 손님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보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알 수 없어요. 손님이 한두 분이 아니니까요.」

하였다.

언제든지 요릿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일어나는 것과 같이 불그레한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반쯤 탕(蕩)한 기분이 선용의 가슴에서 또 일어났다. 선용은 조마조마하여 못 견디었다. 그래서 정월이가 뒷마당으로 내려가지나 아니 하였나 하고 다시 뒤뜰로 내려갔다. 그러나 역시 정월을 찾 아 내지는 못하였다. 선용은 화가 난 듯이,

「에 가버리리라.」

하고 문으로 향하여 나오려다가 주춤하고 서서 포플라 녹 색 그늘 사이로 새어흐르는 달을 치어다보고 한참 섰다가,

「왔다는데 어디로 갔노?」

하였다. 이때이었다. 그 요릿집 정문 층계 위로 정월이가 어떤 남자와 나란히 서서 내려왔다. 창백한 달빛이 창백한 정월의 얼굴을 싸고 돌매 으스스한 유령이 암흑 속에 선 듯 하였으나 선용의 마음은 그를 볼 때 무슨 경경함을 일으키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음걸음이 달빛을 끌며 머리 카락카 락마다 달빛을 흩날리는 듯할 때 선용은 옛날의 사람이던 혜숙이 아니요, 죽어서 처녀가 되었거나 요녀가 되어 다시 자기 눈앞에 나타난 듯하였다.

선용은 내뛰는 걸음을 억지로 걸어 천천히 정월에게로 갔 다. 그리고 모자를 벗고 환심을 얻으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정월은 다만 푸른 눈동자를 잠깐 굴려 고개를 숙이 는 듯 만듯하고,

「언제 오셨어요?」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고개를 돌이켜 자기와 나란 히 서서 걸어가는 그 청년에게,

「그러면 저의 오라버니하고 꼭 한번 놀러 가지요.」

하고는 다시 선용을 냉정한 눈으로 흘겨보며,

「벌써 가세요?」

하였다.

선용은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꿈 속에서 서 있는 듯이 다만 애매하고 몽롱한 의식과 감정 속에서 멀거니 정월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의식과 감정이 무엇으로 자기의 머리를 때리는 듯이 회복될 때,

「에! 간악한 년.」

하고 이를 악물고 그대로 덤벼들어 발길로라도 차내던지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모든 것을 어리석음에 돌려보내듯이,

「네.」

하였다. 정월은,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거만한 걸음을 걸을 때에 휘청거리는 가는 허리가 흐 르는 달빛을 휘휘 감아 나꾸는 듯하였다.

선용은 이 소리를 듣고서는 눈물이 날 만치 원통하고 분하 였다. 그의 뜨거운 피가 올라온 두 뺨은 불같이 탔다. 그리 고 어디로 자기가 밟고 갈 때마다 바지작바지작 하는 모래 위에 자기의 가슴이 비비며 통곡도 하고 싶었다. 그는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두 손에는 차디찬 땀이 물같이 흘 렀다.

그는 또다시 정월을 돌아보았다. 정월은 다시 저쪽 층계로 내려가다가 역시 선용을 바라보았다. 그 정월의 한번 다시 돌아보는 것이 더욱 자기 가슴 위에 모욕과 수치의 화살을 박아 주는 듯하였다.

(아!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속는 줄 알면서도 또 속는구 나!) 하고 선용은 자기가 자기를 어리석은 놈으로 자기 인격을 모욕하였다. 그는 몸을 소스라치면서 정문을 나섰다. 그는 물에 빠져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물에 팅팅 불은 몸뚱이와, 독약에 질리고 썩은 육체를 정 월의 눈앞에 갖다놓아 정월이 바르르 떨면서 이를 악물고,

「내가 잘못하였읍니다. 내가 잘못하였읍니다.」

하면서 자기 몸을 얼싸안고 우는 것이 보고 싶었다.

정월은 그날 어찌하여 선용에게 그리도 냉정하게 하였는 지?

그 전날 하룻밤을 정월은 조금도 자지 못하였다. 아침 10 시나 되어 백 우영은 정월의 방으로 들아와 막 일어나서 머 리를 고치는 정월을 침착한 중에도 친친치 못한 얼굴로,

「어제 저녁에는 좀 어떻게 지내었소」하였다.

「별로이 다른 일은 없어요.」

하며 정월은 안경 쓰고 수염을 어여쁘게 깎고 눈썹이 까무 스름하여 동그란 선(線)이 빙빙 돌아가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하였다.

백 우영은 아무 말 없이 세수수건을 들고 안경을 벗어 놓 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것이 이 부부의 아침 인사였다. 백 우영의 얼굴을 치어 다볼 때 정월은 저이가 나의 남편이지? 하였다. 그러나 자 기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제 마음 한귀퉁이에는 괴롭게 빈 곳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선용씨를 만나러 가는 것이 무슨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왜 내가 편지를 하였노 하고 후회 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어떻든지 김 선용과 자기 사이를 끈기있게 달려 붙일 방법이 없을까 하였다.

그는 그날 하루종일 금화원에를 갈까말까? 하는 마믐으로 속을 태우다가 그래도 왔다.

그는 처음 금화원에 들어서면서부터 선용이가 왔나 아니 왔나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만나 보았으면 하면서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였다. 그리고 만나는 두려운 가운데 만 나지 못하면 어찌하나 하는 졸이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는 만일 그를 만나면 무엇이라 하나 하였다. 저기서 먼저 말을 하거든 내가 대답을 할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또 다시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을 졸이나? 그와 만나는 것이 무 엇이 그리 크게 기쁜 일이며 그와 못 만나는 것이 무슨 그 리 두려운 일인가, 다만 친구를 만난 것같이 친척을 만난 것같이 즐겁게 하루 저녁을 놀다 오면 고만이 아닐까. 그러 나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가라앉지 않고 진정되지 않았다.

그가 돌층계를 내려서려 할 때 차 숙자와 만났었다. 그리 고 자기 오라버니를 찾아보았으나 만나지를 못하였다. 그러 할 때 그는 어떤 양복 입은 청년 하나를 만났다. 정월은 반 가운 듯이,

「언제 오셨어요?」하며 반가와 인사를 하였다. 그 청년은 검은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네, 어제 왔읍니다.」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시골 재미가 어떠세요. 일전에 하신 편지도 보았 읍니다. 그 편지 보고 어찌나 한번 가보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몸이 자유롭지가 못해서……」

하며 정월은 호기심을 일으키는 듯 웃었다. 그 청년은 굽 혔던 허리를 다시 들면서,

「네네, 그러시겠지요. 참 어떻든지 한번 다녀가셨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영철군도 몸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러 나 정월씨 같은 어른에게는 아주 적당한 곳으로 생각해요.

공기는 물론이요, 저의 농장(農場)에는 조금 있으면 과실도 익을 터이요, 참 좋습니다. 꼭 한번 오셨으면 좋겠어요.」

하였다.

「네 그때쯤은 어떻든지 한번 가게 되겠지요.」

「그런데 영철군은 아니 왔읍니까?」

「글쎄올시다, 오신다고 하였는데 아마 아직 아니 오셨나 봐요. 조금 있으면 오시겠지요.」

하고 정월은,

「그러면 저리로 가셔서 차라도 한 잔씩 잡숫지요.」

하였다.

정월은 요릿집으로 들어가려다가 힐끗 곁눈으로 큰 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선용이 단장을 끌며 들어왔다. 정월은 반가운 중에도 무서운 마음이 그의 피를 당장에 식히는 듯 이 그의 다리를 떨리게 하는 중에도 버티었던 것을 퉁겨논 듯이 얼른 깡충 뛰어 본관으로 피해들어갔다.

정월은 방에 들어앉아 창 밖을 쉴새없이 내다보았다. 그는 자기를 찾아다니는 선용의 그림자를 보면서 다만 바라는 것 은 얼핏 오라버니가 오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정월은 자기 몸을 선용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나에게 다 행할는지 알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보고는 도리어 모든 것 을 단념할 터이지. 아니다, 그이는 벌써 나를 단념한 사람이 다. 그가 비록 한때에 호기심으로 지금 나를 따라왔다 할지 라도 그는 벌써 나를 잊은 사람이다.

선용이 다시 본관 앞을 지나 바깥으로 창연한 빛을 띠고 낙망한 듯이 나갈 때 이것을 본 정월은 손에 잡은 미꾸라지 를 놓친 듯이 벌떡 일어나 선용을 가지 못하고 붙잡고 싶은 생각이 복받쳐올랐다.

선용과 자기 사이에 무슨 즐겁고 반가운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를 마지막으로 얻었다가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만나지 않 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히려 그만 기회를 연장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선용이 자기 앉은 방 옆으로 들어올 때 그의 숨을 막는 것 같이 괴로왔다.

그리고 가슴이 떨리었다. 만일 자기가 어떤 다른 청년과 앉은 것을 보고 선용씨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까? 하여 얼른 그 옆에 앉은 청년을 밀쳐던지도록 멀리하고 싶었다. 그러 다가 그렇지만 그이가 도리어 그러한 생각을 그러나 정월은 뛰는 가슴에도 억지로 침착한 어조로 그 청년에게,

「인제 저리로 가세요.」

하며 바깥으로 나오면서 꼭 선용과 만나도록 발걸음을 띠 어 놓아 돌층계를 내려섰다. 그리고 선용과 꼭 마주칠 때에 는 그는 그대로 달려들어 울고도 싶고 그대로 엎드려 애소 도 하고 싶었으나 다만,

「언제 오셨어요?」

하는 서투른 목소리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그의 옆에서 누가 선용과 만나는 것은 죄악이 다 하고 부르짖는 것같이 가슴이 선뜻하고 마음이 떨릴 때, 그는 진저리쳐지는 무엇이 그의 손등을 기어갈 때 그것을 털어 버리려는 것같이 몸을 으쓱하고 선용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 그는 태연하게 자기와 같이 걸어가는 청년에게,

「그러면 저의 오라버니하고 꼭 한번 놀러 가지요.」

하고 곁눈으로 선용의 동정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에는 선용을 떼어 버리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그러나 선용이가 멀거니 자기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무엇 을 잃은 사람처럼 빈 손만 내려다보고 물끄러미 서 있다가 주먹을 결심하는 듯이 내려다보고 나갈 때 정월은 또다시 자기의 행동에 회한을 깨달았다. 그리고 선용이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그는 선용씨가 어디로 가시나? 하고 또다시 나는 참말을 하리라 하였다.

선용은 금화원에서 나왔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떨어질 듯 이 달려 있다. 그는 그 달을 치어다보고 저도 모르게,

「아아 달도 밝기도 하다.」

하고 한참 서서 치어다보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걸음을 옮 기어 대한문 넓은 길 가운데를 지나 광화문을 향한 페이브 먼트(?石) 위로 걸어간다.

그는 가면서 생각하기를 정월에게 대한 모든 것을 단념하 리라 하였다. 그는 자기가 정월에게 끌리는 정으로 인하여 자기의 속 타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단념한다는 것보다 도 자기의 인격을 욕보인 그 간특한 여자를 저주하기 위하 여 그를 단념하리라 하였다.

그는 이후에는 아무리 정월을 만날 기회가 있을지라도 그 를 피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또다시 일본서 두 주일이나 자기를 찾아 주던 그 여학생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그와 같이 고마운 그 여학생을 잊어버리고 그 귀신 같은 정월을 또 찾아온 것을 생각하며 어쩐지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자기의 꿋꿋이 서 있는 인격에 불을 지른 듯이 모욕을 당한 듯하였다.

그는 그전 이 왕직 미술관 앞을 걸어온다. 단단한 길바닥 이 고무신 바닥 밑에서 자기 전신을 공기나 놀리듯이 경쾌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원망 불평이 다 사라지 고 다만 환한 희망이 그의 앞길에 비친 듯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가끔가끔 정월의 환영이 보일 때마다 사랑을 잃 은 부끄러움보다도 자기를 모욕한 분함이 그의 주먹을 때때 로 떨리게 하였다.

그가 아카시아 나무 밑 전등불 환하게 비친 곳을 지나갈 때이었다.

누구인지 애련한 목소리로 「선용씨!」하는 이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선용의 정신을 옛날에 나렷하던 꿈속으로 다시 들게 하는 듯하였다. 선용은 그 목소리를 듣는 찰나에 그 목소리를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는 누구에게 붙잡힌 듯이 발을 딱 멈추고 서서 또다시 부르기를 기다렸다.

「선용씨, 저 잠깐 보세요.」

하는 소리가 또 나자 그는 고개를 돌이켰다. 거기에는 자 동차 차창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정월이 앉았었다.

「왜 그러세요.」

하는 선용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한 중에도 무슨 강한 힘이 있었다. 정월은 애원하는 듯이,

「이리로 올라오세요.」

하였다. 선용은 눈을 부릅떠서 정월을 바라보며,

「네, 저는 두 다리가 있어요. 그리고 나는 옛날 선용이가 아니오.」

하며,

「정월씨는 나를 만나실 필요는 없을 터이지요. 또한 저도 정월씨를 영영 만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 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아무리 사랑으로 뭉치지 못한 이 불 구인 선용일지라도 이제는 옛날같이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다.」

정월은,

「여보세요, 선용씨. 저의 말씀을 꼭 한 번만 들어 주세요.」

하며, 자동차에서 내려온다. 선용은 자동차 속을 들여다보 았다. 축전기의 희미한 전깃불이 푸르게 켜 있는데 한옆에 수놓은 비단 방석이 꾸기꾸기 음독을 일으키는 듯이 놓여 있었다. 정월의 음탕한 부분이 그 위에서 슬근거리던 것을 생각하며 그는 얼른 그곳을 피하여 달아나고 싶었다.

「말씀을요? 저와 정월씨 사이에는 영원히 말이 끊어졌읍 니다. 음파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라도 정월씨와 저 사이에는 아무 의미 없는 파동을 남겨 놓는 것보다 도리 어 저의 몸뚱이를 으스스하게 할 뿐입니다.」

정월은 자동차를 먼저 보내고 선용에게로 가까이 왔다. 그 리고는 무의식중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걸어간다. 정월 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슨 말할 것을 주저하는지 땅만 보 고 걸어가다가 겨우 가슴을 진정하고,

「여보세요.」

하였다. 선용은,

「네.」

하고 심통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정월은 선용의 그러하는 것이 야속한 생각이 난다. 그래서 다 고만두어라 누가 이 세상에서 나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 람이 있느냐? 하다가도 그렇지만 선용씨의 그러한 것도 무 리는 아니렷다 하였다.

그래서 하려든 말을 고만두리라 하다가 모든 부끄러움, 야 속한 감정을 억제하고 선용의 어깨에 매어달리는 듯이 몸을 가까이 하며,

「여보세요. 지나간 모든 것은 다 용서하여 주세요.」

하였다. 선용은,

「네?」

하고 깜짝 놀라는 듯이 정월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 정월 은 눈물을 참으려고 하얀 이로 붉은 입술을 악물고 까만 속 눈썹을 감았다떴다 하고 있었다.

선용은 그 말을 듣고서 또 눈물을 참으려 하는 것을 보고 서 여태까지 보기도 싫던 정월이 또다시 불쌍한 생각이 나서, (그만 두어라.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심하였다.

그리고는 속마음으로 정월이 날더러 무엇하러 나를 좇아왔 으며 무엇을 용서하여 달라나?) 하였다.

정월은 또다시,

「용서하세요. 저는 선용씨에게 사죄하러 여기까지 쫓아왔 어요.」

하고 눈을 한번 깜박 감았다 뜰 때, 진주 같은 눈물이 옷 깃 위에 떨어져 구른다.

그리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바로 앞길을 보지 못하 였다.

선용은 속마음으로 무엇을 정월이 용서하여 달라는가? 오 늘 자기가 금화원에서 그렇게 천연스럽게 한 것을 용서하란 말인가?

선용은 또다시 엄연한 목소리로,

「저는 아무것도 정월씨를 용서해 드릴 것이 없어요.」

하였다. 그러나 정월은,

「여보세요, 왜 사람이 남에게 용서하여 주길 바랄까요?

선용씨! 저는 어저께 선용씨를 속이었어요.」

하고는 느끼어 운다. 선용은,

「네?」

하고 정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선용의 마음 가운데에 서 상긋한 향내가 떠도는 듯이 정월이 또다시 나를 사랑하 려니 하던 희미한 희망이 당장에 끊어지는 듯하였다.

「지나간 과거는 가버리었읍니다. 엎었던 기름을 다시 쓸 어 담지 못하는 것과같이 선용씨와 저 두사람은 또다시 엉 기지는 못할까요?」

하는 정월의 말을 들은 선용은,

「이와 같이 모순과 당착이 엉킨 이 세상에서는 또다시 그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요.」

하는 대답을 받았다. 그러나 선용은 이 말을 들을 때에 비 로소 정월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월이 또다시 옛날을 추 회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선용은 정월을 또다시 자기 애 인이 되어 달라는 요구로써 그를 책망하고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나지는 아니하고 다만 인습에 얽히고 환경에 벗어나 지 못하여 옆에 있는 행복을 아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또 다시 정월이 불쌍하였다. 그리고는 속마음으로 나는 정월을 애인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이세상의 살아 있는 불쌍한 인생의 하나로 동정하리라 하였다.

정월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저는 죽은 사람이외다. 붉은 피는 푸르고 차디차게 식었 읍니다. 저에게는 아무 환락과 아무 희망도 없이 저의 육체 가 시들어질 때 저의 목숨까지 사라져 버리기를 바랄 뿐이 예요.」하고서 또다시,

「선용씨! 선용씨는 나를 책망하시겠지요. 저를 저주하시겠 지요. 그러나 저는 선용씨외에 또다시 이 세상에 참사람이 있을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참사람을 영영히 잃 은 사람예요.」

하다가는,

「선용씨, 저는 다만 영원히 선용씨가 저의 살아 있다 사 라진 것을 잊어버리지 마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선용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정월씨, 우리는 어찌하여 시간을 깨뜨려 부수지 못할까 요. 왜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지를 못할까요. 저는 다만 그것 을 한탄할 뿐입니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정월의 집 문간에 왔다.

정월은 집으로 들어가려하며,

「선용씨, 영영 선용씨를 못 뵈옵지는 않겠지요. 비록 제가 선용씨를 뵈옵지 못한다 할지라도 선용씨의 그림자는 저를 언제든지 싸고 돌아다닐 것이올시다.」

그리고 또다시 선용에게 안길 듯이 바라보며,

「언제나 만나 뵈올까요?」

하였다.

선용은,

「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당착이 사라질 때이겠지요.」

하였다.

정월은 문을 열었다. 불그레한 전등불이 희미하게 비칠 때 흰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문간으로 들어서는 그는 마치 수도 원(修道院)에 금욕의 생활을 하고 있는 신녀(信女)같이 보이 었다. 그러다가는 정월의 그림자가 사라져 없어질 때 선용 은 다만 망연히 그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늘 저녁에 영철은 금화원에 오지를 못하였다.

영철은 저녁을 먹고 교동 누구를 잠깐 보고 금화원으로 약 조한 자기 누이를 만나려고 교동 병문을 막 돌아나설 때이 다. 누구인지,

「야 어디가나?」

하고 뒤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용준(李容俊) 이라는 새롱거리기 좋아하는 은행원 중에 하나이었다. 그는 여전히 새롱대는 어조로,

「어데를 가?」

하고 어깨를 툭 친다. 영철은,

「요것이 누구에다가 손짓을 해!」

하고 주먹을 쥐고 달려들려니까,

「히히 어디 어디.」

하고 어린애 장난하듯한다.

영철은 다시 얼굴을 고치고,

「어디 갔다 오나?」

하니까 용준은,

「남의 말은 대답도 아니하고.」

하며 눈을 흘기어 치어다보더니,

「자네 내일부터 은행에 다 다녔네.」

하고 침착한 중에도 생그레 하며 치어다본다. 영철은 그 말을 농담으로 듣고서,

「자네 오늘 금화원에 아니 가려나?」

하고 다른 말을 꺼내었다.

「금화원?」

하고 용준은 영철을 치어다보더니,

「금화원이고 무엇이고 자네 은행에서 돈 천 원을 쓴 일이 있나?」

하였다. 영철은 다른 사람이 아지 못하는 것을 용준이가 아는 것이 괴이하여 깜짝 놀라면서,

「그것은 어떻게 아나?」

하였다.

「글쎄 말이야.」

「있어. 왜 누가 무엇이라 하던가?」

용준은 한참이나 있다가,

「지배인인지 무엇인지가 오늘 사장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하며 입맛을 다신다.

「그래?」

「자네가, 자네가 품행이 나쁘다고.」

「무슨 품행이?」

「화류계에 빠져서 은행의 돈을 천원이나 쓰고 여태껏 기 일이 지나도 갚지를 않는다고 다른 사람과 달라서 자네이기 때문에 얼마간 비밀을 지켜 주었더니 이렇다저렇다 말이 없 다고 대단히 분개한 모양인데.」

영철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그러니까 사장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던가?」

「무얼, 사장야 언제든지 말이 적으니까 그렇소 그렇소 하 실 뿐이지.」

「응, 그래.」

하고 영철은 주먹을 쥐었다.

용준은 다시,

「여보게 설화가 누구인가? 설화 때문에 자네가 돈 천 원 을 은행에서 썼다 하니 그것이 참말인가? 나는 자네가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반신반의를 하였지만.」

영철은 빙긋 웃으며,

「어느 미친 놈이…… 그렇다던가?」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지배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네를 사장에게 내보 내도록 말을 하데. 그러시니까 사장께서도 만일 과연 그런 일이 있다 하면 자네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하시거든.」

하니까 영철의 얼굴에는 분노에서 밀리는 피가 올라오며,

「어디 보자. 지배인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고 주먹을 마주친다.

용준은 다시,

「그런데 이것을 좀 보아.」

하였다.

「무엇을?」

「왜 지배인의 조카가 있지 않은가?」

「그래 그 얼굴이 빨아논 것같이 허옇게 생긴 것 말이 지?」

「응, 옳지 바로 맞았네. 아마 그것을 자네가 나간 뒤에는 자네 대신 둘 모양인데.」

이 소리를 듣는 영철은 속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호기심이 났다.

그리고는 네가 아무렇게 해도 쓸데 없다 하였다.

영철은 이 용준과 작별하고 파고다 공원을 지나 종로 네거 리에 왔다. 그는 시계를 꺼내들고,

「청진동을 잠깐 다녀갈까, 고만둘까.」

하고 주저하였다. 시계는 6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영철은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설화를 잠깐 보고 가리라 하였다.

영철이 설화의 집에 들어설 때에는 설화가 안방 미닫이를 열어 놓고 저녁 화장을 할 때 이었다.

영철은 마루 가까이 가며,

「설화!」

하니까 설화는 석경을 들여다보며 정성스럽게 얼굴에 분을 바르다가 깜짝 놀라며,

「나는 누구라고. 이리 들어오세요.」

하며 자리를 비켜 앉는다. 영철은 그대로 선 채.

「아냐, 들어갈 수 없어. 그런데 오늘은 웬 모양을 저렇게 내노. 누구를 만나러 가?」

하며 설화의 화장하는 것만 바라보았다. 설화는 두 눈 가 장자리를 문지르다가,

「왜요.」

하고 생긋 웃으며 치어다본다.

영철은,

「글쎄 말야.」

하고 설화 앞에 놓여 있는 담배를 보더니,

「언제부터 담배를 배웠노?」

하며,

「그 담배 하나만 주어.」

하니까,

「아니예요. 손님 대접 하려고 사왔어요.」

하며 담뱃갑을 집어 준다.

그리고는,

「이리로 좀 들어오세요. 들어와 잠깐만 앉았다 가시구료.」

하며 간절히 청한다. 영철은 새로 세수한 설화의 얼굴과 손 속에서 나는 비누 향내를 맡으면서 연하고 부드러운 중 에도 불그레한 얼굴이 매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듯하여,

「글쎄, 너무 늦어서는 안될걸.」

하고 못 이기는 체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보료 위에 앉으면서 담배연기를 뿜어 보내면서 천장 을 치어다보고 싱그레 웃었다.

설화는,

「무엇이 그리 우스워요?」

하고 영철이 치어다보는 천장을 보았다. 영철은 아까 이 용준에게 들은 말이 우스워서 웃는 줄은 모르고 설화가 천 장을 따라 치어다보는 것이 우스워서,

「하하하하.」

하고 설화를 돌아다보며 놀려먹듯이 웃었다. 설화는 아지 도 못하고 따라 웃으며,

「왜 웃으세요?」

하며 자기 몸에 이상한 곳이 있는 듯하여 이리저리 둘러보 더니,

「네, 글쎄 무엇이 우스워요?」

하고 영철의 무릎 위에 어리광을 부리듯이 달려들며 귀찮 게 흔들어 댄다. 영철은,

「왜 이래.」

하고 달려드는 설화를 피하며,

「무슨 우스운 일이 있어.」

여전히 웃으면서 담뱃재를 털었다.

「글쎄 무엇예요?」

「설화가 알 것은 아냐.」

「무엇인데요, 저는 알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가르쳐주면 말하나 마찬가지게.」

하고 얼굴을 조금 침착하게 하더니,

「이리와.」

하고 설화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것은 그리 알아서 무엇해?」

하고 허리를 끼어안으려 하니까 설화는 부끄러워 웃으며,

「왜 이러세요.」

하고 앙탈하듯이 팔을 잡아당기었다. 영철은 설화의 입이 나 맞출 듯이 가까이 잡아당기며,

「우리가 사귄 지도 꽤 오래지?」

하고 의미있는 눈초리로 설화를 바라본다.

설화는,

「왜 그런 말씀하세요. 얼마나 된다구요. 1년도 못 되는데.」

하고 영철을 수상하게 여기는 듯이 바라보았다. 영철은 무 슨 한되는 일이나 있는 듯이,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할 것 같지는 않아.」

하며 무슨 낙망이나 하는 듯이 한숨을 가볍게 내리쉬매 얼 굴빛이 좋지 못하여진다. 설화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다만 두 사람 사이에 끊이지 않 는 사랑만 있으면……」

하고 눈물이 날 듯한 눈을 아래로 깔고 가는 손가락만 꼼 지락꼼지락한다. 영철은,

「그거야 그렇지만.」

하다가,

「설화는 영원히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지?」

하고 갑갑한 듯이 자리에 누웠다. 설화는 영철의 손을 꼭 쥐면서,

「저는 모든 것을 결심했어요. 저는 다만 참으로 사람 노 릇을 한번 하여 보고 죽고 싶어요. 세상에 모든 부귀와 영 화를 다 내던지고라도 다만 그 사랑 하나만 위하여 저의 목 숨까지 바치기를 결심하였읍니다. 이 세상 사람을 다 믿지 못하는 저일지라도 영철씨를 저는 믿어 왔으며 그대로 믿으 려 합니다. 그러나 영철씨, 이 후에 비록 영철씨가 나를 잊 으시는 날이 있다 할지라도 저는 영철씨의 사랑을 위하여 죽기까지 맹세합니다.」

하고는 또다시.

「그러나 영철씨는 나를 잊지 않으실 터이지요?」

하고 영철의 가슴에 엎드린다. 영철은 다만 설화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도 모든 것을 설화에게 바쳤소.」

할 뿐이었다.

엎드린 설화의 마음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갈래로 흐트러 졌다. 그가 영철에게 향하는 사랑이 그의 마음의 전부를 차 지하였다는 것은 19년 동안이라는 세월을 살아 온 설화로는 단정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짓밟힘을 당한 아 프고 쓰린 경험의 기억이 그의 마음 한귀퉁이에 영원히 사 라지지 않게 남아 있다. 그는 영철을 처음에는 사랑하였다.

그리하다가는 그것이 돐이 지나간 후에는 사랑하리라 하였 다. 그리고 또 그것이 지나간 뒤에는 사랑하여야 하겠다 하 였다. 그리고 영철은 나를 사랑한다 하였다. 그러다가는 사 랑할 터이지 하였다. 또 그러다가는 사랑하지 않지는 못하 렷다 하였다.

지금 와서는 다만 저의 남아 있는 반생의 모든 것은 당신 에게 맡기었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맡기었다 하였다. 그 러나 기생 노릇을 한 설화로서는 10분의 9로 영철을 사랑 할는지는 몰라도 10분의 1은 결함으로 남아 있었다.

영철은 언제든지 생각하는 것과 같이 현대의 사람으로는 설화가 전적(全的)으로 영철을 사랑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10분의 1로 남아 있는 결함이 가느다란 불안(不安)이 되 어 설화를 귀찮게 굴 때 10분의 9인 그 정열이 그것을 정 화시키고 순화시킬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설화의 가슴속에 의지(意志)가 없었다면 과연 영철과의 사 랑도 무너질 날이 있겠지마는 설화의 마음속에는 무너지려 는 그것을 버티어나갈 만한 열정을 창조하는 굳센 의지가 넉넉히 있었다.

그때 누구인지 바깥에서 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철 과 설화는 서로 바라보다가 바깥을 내다볼 때는 백 우영이 가 거기 서 있었다. 우영은 설화를 술취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편안한가?」

하고 인사를 붙였다. 그리고,

「들어가도 관계치 않소?」

하고 마루 끝에서 구두 끈을 풀기 시작하였다. 설화는,

「어서 오십시오. 왜 그렇게 뵈옵기가 어려워요.」

하고 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 영철에게 손짓을 하며,

「백. 백.」

하고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주었다. 백 우영은 벌써 방안에 누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영철도 벌떡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려다가 우영의 얼굴과 마 주쳤을 때,

「나는 누구라고.」

하였다. 우영은 영철을 설화의 집에서 만난 것이 질투스럽 기도 하고 또 분하기도 하여,

「응, 자넨가?」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이리로 내려앉게.」

하는 영철의 말에,

「응 염려말게.」

하고 되지 않은 녀석이라는 듯이 비웃는 눈으로 바라보았 다. 그러다가는 붉게 한 얼굴을 밉상스럽게 찡그리며,

「자네는 기생집만 다니나?」

하였다. 그 훈계하는 듯한 우영의 어조를 듣고 기가 막히 고 아니꼬우나,

「내가 무슨 기생집에를 다녀. 오늘은 지내다가 좀 들렀네.」

하고 억지로 웃는 낯을 꾸미고 우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에 놓인 담배를 집어 주며,

「자 담배나 태우게.」

하였다. 우영은 심술사납게 그것을 바라보며,

「염려말게, 나도 담배 가졌네.」

하고 입을 삐죽 내밀고 사면을 훑어보더니 자기 주머니에 서 담배를 꺼냈었다. 설화는 싫지만 하는 수없이 성냥을 그 어 주었다.

영철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그래서 얼핏 일어나 금화원에 나가 보리라 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나는 가겠네.」

하였다. 설화는 영철을 보고 옷깃을 잡을 듯이,

「왜 그렇게 가세요?」

하고 섭섭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우영은 고개 를 돌려서 가려는 영철을 흘겨보며,

「왜 그러나? 내가 왔다구 그러나? 가만 있게, 내가 말할 것이 있으니 잠깐만 거기 앉게.」

하더니 손가락으로 명령하듯이 방바닥을 가리켰다.

영철은 귀찮은 듯이,

「무슨 말인가?」

하고 그대로 서 있다.

「글쎄 거기 앉아. 앉으라는데 왜 그러나, 내가 말을 한다 한다 하고 자연히 말을 못하였네.」

하고는,

「자네, 그것을 어찌 할 셈인가?」

하였다. 영철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무엇을 어떻게 해?」

하였다. 우영은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잊어버렸나? 그 천 원 말일세.」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영철은 설화 앞에서 그 말을 듣는 것이 불쾌 하고 부끄러워서 그대로 그 말을 덮어 버리려고,

「응 그것 말인가? 그거야 염려말게, 나도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까.」

하였다.

「무슨 생각인가? 자네도 정신을 좀 차리게, 자네 때문에 내가 귀찮으이.」

「그것이야 낸들 생각 못하겠나? 나도 자네인 까닭에 믿고 그러는 것이지.」

「여보게 믿는 것도 분수가 있지, 만일 이 일을 아버지가 알아 보시게.」

「글쎄. 그거야 걱정을 들을 터이지…… 그 이야기는 고만 두세. 요 다음에 조용히 만나서 의논하세 그려.」

하고 그 말을 그만두려 하니까,

「여보게 또 언제 만난단 말인가?」

하며 백 우영은 굳이 말을 그치지 않으니까 영철은 분이 갑자기 나서,

「그럼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지금 당장에 그것을 내란 말인가?」

하니까 우영은 조소하는 듯이,

「하하……」

웃더니,

「자네쯤이야 웬 그 돈을 낼 수가 있겠나?」

하고 주머니에서 영철이가 은행에서 써 준 수형을 꺼내 보 이며,

「자네는 염려말게 응? 내가 모두 이렇게 갚았으니까, 히…… 웬걸 자네야 생전 간들 그 돈을 갚을 수가 있겠 나?」

하고 껄걸 웃는다.

영철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자부심을 한칼에 베이듯이 그 모욕을 당함을 깨달을 때 입을 악물고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 그 돈을 갚아 받기를 원치는 않네.」

하고 몸에 불이 나며 목 쉬인 소리로 백 우영에게 때릴 듯 이 가까이 나섰다. 우영은 픽 웃으면서,

「갚아 준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자네가 갚지 못하면 내 가 갚을 의무가 있는 것이니까.」

하며 수형을 척척 접어 넣으며,

「만일 내가 그것을 갚은 것이 재미 없거든 언제든지 관계 치 않으니 갖다 갚게 그려.」

하고 두 사람의 수작을 듣고서 속으로 영철의 분함을 무조 건으로 동정하던 설화를 바라보며 영철의 일은 치지도외하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요사이는 재미가 어떤구?」

하였다. 설화는 백 우영이가 자기를 바라보며 웃는 것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이 으스스하고 싫어서 몸을 움츠려 뜨리며,

「언제든지 마찬가지지요.」

하였다.

비분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영철은 바깥으로 홱 나가면서,

「아무 염려말게. 내일 이맘때 안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갚아 줄 터이니까……」

하고 마루 끝에 내려섰다. 우영은 몸을 비스듬히 틀면서 다만 힝 하고 코웃음을 쳤다.

설화는 영철을 따라나왔다. 그리고 옷깃을 잡으며,

「여보세요.」

하고 옷깃을 잡아당긴다.

「왜그래?」

하고 영철은 고개를 돌리며 설화를 바라보았다. 설화의 손 은 가려는 영철의 옷깃을 단단히 쥐며,

「어떻게 하시려구 그러세요?」

하였다.

두 사람은 문간으로 나왔다. 영철은 비장한 목소리로,

「설화! 설화는 나의 마음을 알아 주지?」

하며 까만 눈을 깜박깜박하는 설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네. 네. 그런 말씀은 하실 것도 없지마는 지금 어데 가서 돈 천 원을 만드십니까?」

영철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하였다. 남아의 의기로 그런 말을 하기는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다른 문제이었다. 그 러나 그는 설화를 위하여 얼른,

「도리가 있어, 도리가 있어.」

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 설화는,

「여보세요.」

하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그것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어떻게 만들어 드릴 터이니요.」

하니 영철은 눈을 크게 뜨고,

「무엇? 설화가? 그러나 안될말 안될말.」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나의 설화의 피 판 돈을 한 푼이라도 쓸 수는 없 다. 나의 몸을 팔더라도 설화의 피묻은 돈을 쓸 수는 없다.

나의 얼굴에 침을 배앝고 똥을 바름을 당할지라도 이 그것 한 가지는 할 수 없다.」

「어서 들어가요. 내일 또 올 것이니 어서 들어가요.」

하고 영철이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볼 때 거기에는 여태껏 설화가 문앞에 서 있었다.

영철은 한 개 독립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모욕을 당하였 다. 그는,

「내 이 모욕을 언제든지 갚고야 말터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남의 애인이 못 된다.」

그리고 백 우영에게 그 말을 들은 것보다 설화의 자기에게 맡겨 달라는 말을 들은 것이 더욱 자기 자부심을 상하였다.

종로 네거리로 가는 그는 혼자 하늘도 쳐다보고 부르짓어 보았으며, 발로 땅을 굴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에 천 원을 만들 묘책은 없었다. 다만 울분하고 답답함 이 무더운 장마날 일기같이 그의 숨을 틀어막을 뿐이었다.

그는 조금 감정을 진정하여 무슨 도리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다가 얼른 자기의 예금 4백 원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천원이라는 돈에 4할 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는,

「6백 원을 어데 가 구처하나?」

하였다. 그러다가 속마음으로 선용은 그만한 돈을 변통할 수 있으련마는 하여 보았으나 그것을 달라기에는 영철이가 너무 용기가 적었다.

그의 맨 나중 결정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에게로 가리라. 나에게 그만한 돈을 판상할 이는 다만 우리 아버지밖에 없을 터이다.」

영철은 자기 아버지 앞에 엎드려 울어 가며 모든 사정을 말하리라 하였다. 나의 심술을 용서하고 몸부림을 받아 줄 이는 우리 아버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에게로 가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복받치는 애정의 감격한 눈 물이 그의 눈에 고였다.

영철은 자기 아버지의 집 사랑문을 들어섰다. 그의 몸은 술취한 사람같이 반쯤 비틀거려지고 푸념하러 온 사람 같았다.

저녁상을 막 물린 이 상국은 자기 아들이 오래간만에 들어 온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나기는 하였으나 엄연한 기색 으로 아무 말 없이 영철을 바라보았다. 영철은 인사를 하였 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의 얼굴을 딱 당해 보니까 지금까지 그의 무릎에 엎드려 몸부림이라도 하고 싶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말할 용기까지 줄어졌다. 그래서, (고만두어라. 이왕 왔으니 잠깐 다녀가기나 하리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 상국은 들어오는 자기 아들을 보더니,

「어서 오너라. 어데서 오니?」

하였다. 영철은 그의 말소리가 뜻하던 바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보고 적이 마음이 풀려,

「네, 집에서 들어옵니다.」

하고 방안 구석에 가서 한다리를 세우고 앉았다. 얼마 동 안은 아무 말 없었다. 영철은 가슴이 울렁울렁하며 기침도 나고 손도 비비었다. 그러다가는 말을 할까말까 하다가 그 만 두어라 하였다. 이 상국은,

「요사이 너의 누이애 만나 보니?」

하였다.

「네. 며칠 새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고서는 말이 나온 끝에 눈 딱 감고 말을 해버리리라 하고,

「아버지.」

하였다. 그의 말소리는 떨리는 중에 조금 컸다.

「왜 그러니?」

하는 아버지는 영철을 바라보았다. 영철은 주저주저 몸을 쓰다듬으며,

「돈 6백원만 주세요.」

하고서는 이제는 말을 해놓았으니 되거나 안 되거나 모두 말을 하리라 하였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영철을 흘겨보더니,

「무엇? 돈?」

하고,

「그것은 무엇 하련?」

하였다. 영철은,

「누구에게 꾸어 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갚아야 하겠어요.」

하였다.

「누구의 돈을 6백원이나 꾸었어? 그 돈을 무엇에 썼니?」

영철은 아무 말 없이 앉았었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말 나 오기를 기다리다가 영철의 말 못하는 것을 보고 무엇을 알 아챈 듯이,

「에, 망할 자식.」

하고 화가 나서 옆으로 기대앉는다. 그러하더니 다시 손가 락을 내저으며,

「글쎄. 이 자식아. 너도 나이가 그만큼 먹었으면 철이 좀 나야지. 늙은 아비는 내버리고 너 혼자 뛰어나가서 계집에 게 미쳐서 날뛰다가는 할 수 없이되면 날더러 돈을 달라구?

그게 염치 있는 사람의 짓이냐? 내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또 어데 있느냐? 내가 살면 며칠이나 살 듯하냐?응.」

한참 아무 소리 없이 앉았다가,

「모른다, 몰라! 나는 그런 돈을 갖지 못했다.」

하고 멀거니 앉았다. 영철은,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버지가 아니 주시면.」

하고 얼굴빛이 누른 중에도 붉게 타올랐다.

「무엇을 어떻게 해? 누가 아니, 네가 생각해 하렴.」

하고 아랫목에 벌떡 드러눕는다.

영철은 세상에는 부모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고나 하였다.

그래 그는 그대로 엎드려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왜 몰라 주십니까 하고 울고 싶었다. 그는 울분한 중에도 야속 한 생각이 나서 아지 못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 고였다. 그 는 눈물을 참으리라 하였으나, 참으리라 하면 참으리라 할 수록 더욱 복받쳐 올라왔다. 그는 눈을 꿈벅하였다. 구슬같 은 눈물이 똑똑 두어 방울 떨어졌다. 영철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다가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 가며,

「저는 갑니다.」

하였다. 아버지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 소리 없었다. 영 철은 문간을 나섰다.

자기 아들을 다 보낸 이 상국은 근 10분 동안이나 멀거니 있다가 미닫이를 열고 하인을 불렀다.

「얘, 거기 누구 있니?」

「네.」

하고 안 중문간을 돌아나오는 사람은 계집 하인이었다.

「너 요 문 밖에 얼른 나가서 서방님 여쭈어 오너라.」

「네 시방 막 나갔읍니까?」

「그래. 얼른 가보아.」

얼마 있다가 하인이 돌아 들어오더니.

「아무리 찾아보아도 안 계세요.」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철의 아버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창연한 얼굴로 천 장만 바라보더니 무엇을 결심하였는지 금고를 열었다.

그는 돈을 든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철의 어머니 를 보고서,

「여보, 동대문 밖에 좀 다녀오오.」

하였다.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덕스러워 보이는 영철의 어머니 는, 하였다.

「갑자기 동대문 밖은 무엇하러 가라우.」

하며 눈을 크게 뜬다. 이 상국은 아랫목에 앉으며,

「지금 영철이가 다녀갔어.」

하고 목소리는 불쌍이 여기는 정이 엉키었다.

「영철이가요? 그애가 왜 왔을고? 그런데 안에도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갔어요?」

「온 것을 내가 좀 책망을 했드니 눈물을 쭉쭉 흘리면서 그대로 가는구료, 그것을 보니까 어찌나 불쌍한지.」

하며 영철의아버지는 울듯울듯하고 코가 벌룽벌룽하다. 그 마누라는

「또 무엇이랍디까?」

하고 태연한 기색으로 영감을 본다.

「돈인지 무엇인지 6백 원만 달랍디다. 자아, 이것 갖다 그 애 주고 오시오.」

하고 돈 뭉치를 툭 내어 던졌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영철은 전차를 타고 은행으로 향하 여 간다. 그는 동대문 정류장으로부터 종로까지 오면서 혼 자 웃고 혼자 분하였다.

그는 오늘 은행에를 가면 물론 백 사장이 나를 부르렷다.

그리고 지배인에게 들은 말을 들은 채로 나에게 책망을 하 렷다. 그러면 지배인이 퍽 고소해하렷다. 그리고 내가 꼭 내 어쫓길 줄만 알렷다. 그러면 자기 조카를 내 대신 은행에다 둘 줄 믿으렷다 하였다. 그리고는 네 아무리 그래도 쓸데 없다 하였다. 그리고 지배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 얄밉고 간 사한 것이 나타나 보인다.

영철은 오늘 지배인을 도리어 창피한 꼴을 보이리라 하였 다. 그리고 사장이 나를 불러들이거든 사장에게 전후 말을 숨김없이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선용에게 돈 부칠 때 받은 우편국 영수증을 꺼내 보이며 사장에게 이 러한 증거서류를 가지고 나의 억울한 것을 변명하면 나를 책망하기커녕 나를 칭찬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나를 내어쫓 기는커녕 경솔히 나를 훼방한 지배인을 책망하렷다. 그러면 그 얼굴이 뻘개서 멍하고 아무 소리를 못하고 서 있는 꼴을 어찌 보나, 그리고 어떻게 은행의 한 자리를 얻어 월급이나 얼마간 먹으려다가 뒤통수를 툭툭 치고 돌아나가는 지배인 의 조카라는 그 사람의 꼴을 어찌 보나 하였다. 그때의 유 쾌한 것을 미리 상상하고 아주 좋았다.

그가 은행에 들어서기는 다른 사람보다 그리 이르지도 않 고 그리 늦지도 않았다. 그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자기 책상으로 가려다가는 어찌 그 책상에 가 앉는 것이 수치와 같이 생각되어 싫었다. 그래 그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둘러 서서 얘기하는 뒤로 왔다갔다 서성서성하였다. 그때 어떤 시렁거리기 좋아하는 행원 한 사람이 영철을 보더니,

「요새도 설화집 잘 가나?」

하고 의미있게 방그레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치어다본 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전과 같이 영철을 대하여 농담도 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서로 눈치들만 바라본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너가 나를 놀려 대는구나.) 하면서도, (그렇지만 너희들도 잘못 알았다.) 하는 생각이 나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오늘 아 침에 설면하게 하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였으 나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띠며,

「암. 잘 가지, 거기를 안 가서야 될 수 있나.」하고 그 말 에 대답을 하였으나 그 말소리와 웃음은 어찌 싱거운 맛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철의 거동만 곁눈으로 살피고 영 철은 아무 소리 없이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였다.

이때 지배인이 들어오다가 영철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거짓 웃음을 나타내며 아주 상업가의 말솜씨로 간사스럽게,

「오늘은 어찌 다른 날보다 퍽 일찍 출근을 하셨구료.」

하며 영철을 곁눈으로 잠깐 바라보고 다시 눈을 내려깔더 니 무슨 말이나 간절히 할 듯이 아주 정다운 체하고 손을 영철의 등에 대었다.

영철은 마음대로 하였으면 그까짓 지배인쯤 당장에 메어붙 이고 싶은 생각이 났으나 억지로 참고 엄연한 얼굴로,

「오늘이 일러요? 내가 아마 매일 늦게 왔나보외다.」

하였다. 지배인은 다시,

「이따가 사장 오시거든 좀 들어가 보시오, 좀 보겠다고 말씀합데다.」

하였다. 영철은,

「저를요? 왜요?」

하며 지배인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지배인은 영철이 그 일을 아지 못하는 줄 알고서,

「모르겠어요. 어떻든.」

하며 주저주저한다. 영철은,

「모르세요?」

하고 무엇을 벼르는 것같이 지배인의 눈을 뚫어지도록 바 라보았다. 지배인은영철의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피 하면서,

「네.」

하였다. 그리고 지배인실로 영철을 피하여 들어가 버렸다.

영철은 새삼스럽게 울분한 생각이 나며 지배인의 하는 것 이 가증스럽고도 불쌍한 생각이 난다. 그리고 몇백 원의 월 급과 얼마간의 사회의 신용을 얻어 보려고 별별 간교한 수 단을 부리는 그의 심정은 어찌 그러할까 하였다.

영철이 자기 책상 앞에 왔을 때에 그는 눈에는 자기가 이 자리에서 쫓겨나간 뒤에 지배인의 조카가 거기에 허리를 꾸 부리고 애를 써 가며 주판과 붓대를 들고 일을 할 것이 보 이는 듯하고 그의 하루종일 일을 하여 겨우 자기의 생의 압 박을 면하려고 발버둥질을 하는 듯한 것이 어떻게 불쌍하게 도 생각 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꼭 차 지할 줄 믿다가 나에게 다시 빼앗기고 멀쑥하여 돌아나가는 지배인의 조카의 낙망하는 가슴은 어떠할까? 하여보았다.

그리고는 어저께까지 자기 손으로 만지고 다루었던 붓이나 책이나 모든 것이 어찌 만지기도 싫은 듯한 생각이나며, 또 다시 그 지배인 아래에서 일을 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 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모든 것이 비루한 듯하고 한 달에 몇십 원 받는 월급을 내어던지기 싫어서 남에게부끄러 움을 주는 것같고 남을 낙망시키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는 사무실 다른 방 저쪽 귀퉁이 문을 나서서 응접실 앞 복도 좁은 길로 천천히 걸어나오며 주머니에서 다시 그 우편국에 서 받은 천원 위체 영수증을 꺼내어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 다. 그리고는 아까 차 속에서 생각하던 것과 같이 사장에게 모든 일을 아뢰리라 하다가, (만일 그렇게 하면.) 하고 그는 혼자 멀거니 서서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하였다.

(지배인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나 지배인의 조카가 낙망 을 하고 돌아가거나 그것은 둘째 문제이다. 그것은 안돼. 나 의 울분한 것을 푸는 데 불과하지마는.) 하고 한참 생각을 하다가 그의 가슴에는 또다시 알 수 없 는 의기의 감정이 치밀어 올라오며,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하고 한참 동안 침묵을 계속하더니, (그렇다.) 하고 주먹을 단단히 쥐고 멀거니 먼 산만 바라보고 서 있 었다.

영철의 가슴속은 갑자기 격렬한 변동이 일어났다. 아까 전 차를 타고 은행까지 돌아올 때까지는 지배인과 지배인의 조 카를 창피하고 부끄러운 꼴을 뵈며 자기의 마음을 기껍게 하리라. 그리고 자기의 위신을 높이리라 하였으나 지금 와 서 또다시 생각을 하니까 그것은 한 어린아이의 한때 감정 을 참지 못하여 쓰는 한 얕은 수단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 고 일본서 고생하던 선용을 도와 주기 위하여 그 천원의 돈 을 쓴 것이라고 변명을 하면 아무 일 없이 나의 억울한 것 은 벗기어지겠지만 자기의 한때의 울분한 감정을 참지 못하 고 자기는 이와 같이 좋은 일을 하였소 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자랑처럼 내세우는 것은 어찌 영철의 마음에도 한 낱 거짓 착한 체하는 것 같아 도리어 양심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몇십 원의 월급을 얻기 위하여 아무리 친척이 된다 하더라도 백 사장 앞에 나서서 나는 이러한 좋은 일을 하였 으니 이 은행에 그대로 있겠소 하는것도 어찌 구차스러운 듯하기도 하고 아첨하는 듯도 하였다.

그리고는 나는 이 은행에를 다니지 않더라도 나에게 경제 의 불편을 깨닫지는 않을 터이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여기 에 내가 오래 계속해 있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언 제든지 지배인과 나 사이에는 좋지 못한 감정을 가슴속에 품고 지내게 될 터이니 도리어 내가 이 자리를 떠나 지배인 과 멀직이하는 것이 점잖은 것이고 옳은 일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다가도 분하고 가증스러운 생각이 날 때마다 이왕 이 자리에서 나가게 되면 지배인을 창피한 꼴이나 보이고 나의 억울한 것을 풀고 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닌가? 하여 보 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철은 다시 생각하였다.

(나의 잘하고 잘못한 것은 하느님일지라도 그것을 죄없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나의 한 일은 한 일대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나의 잘한 것이라고 모든 사람 앞에 애를 써서 발명을 하 면 무엇을 하며 나의 잘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며는 무엇하 리요. 나의 잘한 일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잘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영철은,

「그렇다. 내가 참지, 내가 참지.」

하고 손에 쥐었던 그 우편국 영수증을 가슴에서 복받쳐오 르는 불길 같은 의기심과 울렁울렁하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 로 쭉쭉 찢어 그 옆에 있는 수지 뭉텅이 그릇에 홱 집어던 지고 무엇에 쫓기어 가는 것같이 다시 여러 사람 있는 사무 실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들을 시작하였다. 그러 나 영철은 혼자 담배만 피우면서 왔다갔다하였다. 주인을 기다리는 책상이 혼자 창연히 그 옆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영철의 눈에는 눈꼽이 낄 만큼 더운 피가 돌아서 모든 것 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때없이 가슴은 울렁울렁하기도 하다. 어떠한 때에는,

「내가 그것을 왜 찢었노.」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그 감정은 사라져 없 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영철이 사무를 시작하지 않는 것을 그리 이 상하게 여기는 듯하지 않고 또 자기도 이제부터 영원히 그 자리와 인연이 떨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바깥에서 자동차 머무르는 소리가 났다. 영철의 가슴은 새 삼스럽게 울렁울렁하여지며 가슴을 진정키 위하여 부질없는 기지개와 하품을 하였다. 그리고는 괴로운 미소를 띠며,

「이제는 되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그리 편치는 못하였다.

영철은 사장실 앞 복도로 올라갔다. 층계를 올라서려 할 때 사장은 누구와 그 층계 마루 위에서 이야기를 하고 서 있다가 영철을 보고 엄연한 눈을 번쩍하며 유심히 보았다.

영철은 사장과 또 사장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 을 돌아보고 사장에게 아무 소리 없이 묵례를 하였다. 사장 도 거기 따라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하였으나 그 아무 소리도 없이 구푸리고 끄덕이는 사이에 두 사람은 무슨 공 통되는 의식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가고 사장과 영철은 누가 시키는 것같이 사장실 을 전후하여 들어갔다.

사장실에는 방 한가운데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위 에 전화와 잉크병과 철필과 약간의 종이와 담배 재떨이가 놓여 있고, 이쪽 한 귀퉁이에 따로 떨어진 책상이 놓여 있 으며, 문에 들어서자면 바른손 쪽에 옷과 모자를 거는 못이 몇 개 있고 방안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전등과 교의가 서너 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네 벽은 푸르스름한 양회로 바르고 그림이나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사장은책상 옆으로 가며 뒤따라오는 영철을 조금 돌아보는 듯하더니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씻으면서,

「지배인이 무엇이라고 하던가?」

하고 말을 꺼낸다. 영철은 성이 난 듯하기도 하고 사장을 존경하는 듯하기도 한 일종 초연한 기색을 띠며,

「네, 저를 잠깐 보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였어요.」

하며 조금 가까이 책상 옆으로 간다.

사장은 무슨 낙망이나 한 듯이 책상을 한 손으로 탁 치며 긴 한숨을 후우 쉬고 교의에 가 앉더니,

「자네 작년에 은행에서 돈 얻어쓴 일 있나?」

하고 영철의 거동을 한번 흘겨보았다. 그러나 사장이 생각 한 것과 같이 영철은 조금도 주저함과 두려워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영철은,

「네.」

하고 대담히 대답을 하였다.

「얼마나?」

「천원요.」

「천원!」

하고 사장은 조금 아무 소리 없이 있더니,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쓰려고 하였던가?」

하고 아래 수염을 쓰다듬는다. 영철은 아무 소리 없이 가 만히 서 있었다. 사장은 다만 영철의 대답만 기다리느라고 아무 소리 없이 바깥 유리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영철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여 버릴까? 하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할 입은 떨어지 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장이 다른 말을 할 때까지 아무 소 리를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사장은 영철의 아무 소리 없는 것을 무슨 의미로 알아챈 듯이 영철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주 영철의 속마음을 다 알 고 다시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듯이,

「사람이라는 것이 젊어서는……」

하고 동정과 사랑과 너그러움이 엉킨 훈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말에 가서는,

「그 천 원 돈은 내가 맡을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요 다 음부터는 조금 조심하게.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란 으레히 남에 말하기 좋아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일지라도 좋지 못 한 말을 듣지 않도록 해야지.」

하고 영철의 성격과 경우를 알려 주는 듯이 말을 하였다.

그리고 영철이가 생각하던 것과 같이 엄하고 단호한 처분을 내리지는 않았다. 영철은 속마음으로 눈물이 날 듯이 사장 의 너그러움에 감복을 하는 동시에 지배인의 경망이 자기를 은행에서 내보낼 줄 믿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가증하 였다. 그러나 영철은 자기의 결심한 것을 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벌써 우영이가 그 돈을 갚았는걸요.」

「우영이가, 응 그러면 더욱 좋지 그애가 어느 틈에 그랬 나?」

하고 혼잣말을 한다.

영철은 사장 앞에서 우영의 결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우영이가 갚아 준 천원을 도로 갚기 위하여 지금 당장 주머니 속에 넣고 온 어제 저녁에 자기 아버지가 보낸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영철은 다시 무슨 결심이나 한 듯이 힘있는 어조로,

「저는 오늘부터 은행에서 나가겠습니다.」

하였다. 사장은 눈을 크게 뜨고,

「왜? 무슨 일로?」

하고 영철을 쳐다본다.

「저는 더 오래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사장은 허리를 뒤로 기대고 하얗게 센 머리를 두어 번 쓰 다듬으며 한참 있더니,

「그것이야 낸들 막을 수 있겠나만……」

하고 그 이유를 모른다는 듯이 그 말소리를 높였다.

그날 저녁 해가 아직 기울기 전이었다. 처녀 시대에 백 우 영과 밀회를 하려고 자기 어머니를 속여 보았을는지 알 수 없으나, 한번도 남을 속여 보지 못한 정월은 아무 소리 없 이 남몰래 자기 집을 벗어나왔다. 그리고 누가 볼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력거를 한 채 몰아타고 종교를 지나 광화문 넓은 길로 달려왔다. 그의 가슴속에는 <기생>이라는 그림자 가 때없이 나타나 보인다.

행길에서 조바위 쓰고 남치맛자락에 활개를 치며 지나가는 기생을 보기는 보았으나 가까이서 보지도 못하고 말도 해보 지 못한 정월은, 남치맛자락이 훌훌 날리며 보라회색 단속 곳이 보일 때마다,

「애, 더러워!」하고 코를 옆으로 돌릴 만치 음탕하고 더러 운 인상을 받았을지 모르나 저것도 <사람>이겠지! 하는 의 심까지도 품어 보지를 못하였었다.

그리고 기생이라 하면 무슨 아주 특별한 분위기에서 생활 하는 자기와 같이 정조 깊다는 사람과는 아주 다른 동물인 것같이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생이라면 음탕하고 간사한 일중의 피의 계통을 받아 온 줄만 알았다. 그리고 빤지르하게 가꾼 머리에서 나는 고약한 밀가루 냄새와 얼굴 에 허옇게 바른 분가루와 불그레한 뺨과 가늘게 감은 간사 한 눈초리를 볼 때, 때묻은 여자의 속옷을 보는 것같이 더 럽고 음란한 감정이 치받쳐 오르는 듯하였다. 정월은 속으로, (설화, 설화.) 하여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기생 하나를 그리어 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요염한 계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 고는 자기 오라버지를 휘어잡고 파멸의 구렁텅이로 잡아끄 는 것같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청진동에서 인력거를 내리면서,

「설화 집이 어데인고? 그의 집을 어떻게 찾노?」

하였다. 그리고 별로이 다녀보지도 못한 동리가 되어서 골 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지못하는데다가 누구에게 물어나 보자니 다른 사람과 달라서 기생집을 남에게 물어 보기도 무엇하여 그저 발길이 내키는대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라도 한 집씩 한 집씩 찾기 만 하면 요까진 청진동 안에 있는 설화집 하나쯤 못 찾으랴 하고 차례차례 문패를 조사하였다.

그렇게 얼마 찾아 골목 하나를 돌아설 때 인력거 방울 소 리가 다르르 나며 자기 옆으로 기생 태운 인력거 하나가 휙 지나갔다. 정월은 그 기생을 쳐다보고 저것이 설화나 아닌 가 하였다. 그리고 큰길로 나가는 뒷그림자를 바라보며 저 것이 만일 설화라하면 내가 아무리 집을 찾는다 하더라도 오늘 설화는 만나 보지 못하렷다. 그러면 한 번 나오기 어 려운 길을 허행을 하게 될 터이지. 어데 인력거를 불러서 물어나 볼까?

그러나 그까지 용기를 갖지 못한 정월은 큰길로 나가는 기 생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인력거 그 림자는 사라졌다.

정월은 문패를 찾았으나 기생 문패는 하나 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꼭 하나기생 문패를 찾았다. 그러나 그것이 설화는 아니었다. 정월은 그 집 앞에 딱 서서 한참이나 무엇을 생 각하였다. 정월은 속으로 기생은 서로서로 집들을 알려니 하였다. 그래서 이 집이 기생집이니 들어가서 물어 볼까?

하다가도 기생집 하나를 들어가야 할 것도 무슨 음실에나 들어가는 듯한 생각이 나는데 또 다른 기생집을 들어가기는 참으로 싫어서 다리가 아프더라도 자기 혼자 돌아다니며 찾 아야겠다 할 때, 그 집에서 열 대여섯밖에 안되는 때가 벗 지 못한 미인 하나이 나오더니 정월을 유심히 보더니 공손 한 어조로,

「누구를 찾으세요?」

하였다. 정월은 반갑기도 하였으나 한옆으로 달아날 듯이 싫었다. 그러나 대용단으로,

「여기 설화……」

하고 말이 막혔다. 그 뒤에 붙일 말을 정월은 알지 못하였 다. 이 말을 들은 그 미인은 아주 영리하게,

「네, 설화 언니 집요?」

하더니,

「바로 요 모퉁이 돌아서면 마루에 창살한 집예요.」

하고 고개를 기웃 하고 저쪽 골목 모퉁이를 가리킨다.

정월이는 사례를 하고 그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니까 참으 로 마루에 창살한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보인다. 정월의 가 슴은 부질없이 울렁하였다.

정월은 문에 들어가기를 주저주저하다가 누가 기생집 문간 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나 여기지 아니할까 하 고 누가 뒤에서 떼밀치는 것같이 얼른 문으로 들어갔다. 중 문을 들어가 마당을 기웃이 들여다보며 안방, 건넌방, 마루, 부엌, 장독대 모든 것을 둘러볼 때 그가 여태까지 생각하던 것같이 음탕한 기운이 흐를 줄 알았더니 그렇기는 고사하고 아주 해정하고 모든 세간의 배치해 놓은 것이 얌전하며 정 갈해 보이며 다른 집과 별로이 틀려 보이지 않았다.

정월은 마당 한가운데 들어서서 가볍고 연하게

「에헴.」

하고 기침을 한번 하였다. 그리고 안방을 바라보았다. 건넌 방 미닫이가 열리더니 설화 어머니가 정월을 이상하게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누구를 찾으세요?」

하며 나온다. 정월은,

「설화씨가 누구신가요?」

하기는 하였으나 씨자가 서툴렀다. 설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지금 동무네 집에 갔는데요. 곧 오겠지요. 왜 그러세 요?」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정월이가 설화 동무는 아니요, 어 느 집 귀부인 같은데 알 수 없어하였으나 결국은, 자기 딸 이 학교에 다닐 때 같이 다니던 이가 오래간만에 만나 보러 온 것인가 보다 하는 것이 가장 힘있는 추측이었다.

정월은 설화가 없다는 소리에 낙망하였다. 그러나,

「네, 꼭 볼일이 있어서요.」

하고 꼭자에 힘을 주어 말을 하였다. 그것은 설화어머니가 〈꼭〉이란 소리를 듣고 일부러라도 불러다 줄까 하고 그러 한 것이었다. 설화 어머니는,

「그러면 잠깐 올라와 기다리시죠……」

하고 울라오기를 청하였다. 정월은 온몸에 무슨 더러운 때 나 묻는 듯이 올라가기가 싫었다. 그대로 서서,

「괜찮아요.」

하고 주춤주춤 하였다. 설화 어미는 언제 그리 친절하였던지,

「이리 좀 올라오세요. 설화도 곧 올 터이니까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방석을 바로잡아 깔아놓았다. 하는 수없이 정월도 들어갔다. 그 어미는 담배를 피워 물더니 아 무 말 없이 한귀퉁이에 구푸리고 앉아 있는 정월을 보더니,

「설화를 전부터 아시던가요?」

하였다. 정월은,

「아니예요. 한번도 보지 못하였어요.」

하고 대답하기 성가신 것을 억지로 대답하였다.

어미는 매운 연기를 뻑뻑 빨아 후후 내불며,

「그러면 어떻게 설화를 아셨나요?」

하였다. 정월은 귀찮게 물어 대는 설화 어미의 말보다도 생전 처음으로 맡는 그 담배 연기가 더욱 싫었다. 그래서 폐병을 앓는 그는 갑자기 불 같은 화가 치밀어올라오며 또 기침이 시작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기침을 하였다. 이 꼴을 본 설화 어미는 미안한 듯이 담뱃불을 끄며 공중에 있는 담 배 연기를 한 손으로 활활 부처 흩뜨리며,

「에, 가엾어라. 그저 담배가 원수야.」

하고 민망한 듯이 정월을 보았다.

조금 있다가 설화가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어머니.」

하고 마루 끝에 여자 구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스 럽게 안방을 향하여,

「누가 오셨어요?」

하였다. 설화 어미는 정월의 기침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그래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이 어른이 벌써 오셔서 너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하였다. 설화는 방으로 들어오며 창백하게 되어 앉아 있는 정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랫목 보료 위에 무릎을 모으 고 앉으며,

「누구신가요?」

하였다. 정월은 설화를 보았다. 그 설화는 자기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그 때 흐르는 옷을 입고 더럽게 분을 바르고 기 름내가 지르르 흐르도록 번지르르하게 머리를 빗어넘긴 기 생이 아니었다. 그리고 단조하고 초조하고 두 눈에 그윽한 무엇을 바라보는 듯하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수연한 빛 이 떠도는 여자이었다.

그리고 정월은 자기와 설화를 대조해 볼 수가 있었다. 자 기는 자기를 아지 못하나 자기와 무엇이 다른 것을 알았다.

설화의 전신에 나타나는 것은 조화가 맞고 법열에 들어가 는 신비극에 나타나는 여배우와 같이 자연과 비슷하면서 자 연이 아니요, 인공적이면서도 인공이 아닌 즉 자연과 인공 이 섞여 얼크러진 것이었다.

정월은 처음으로 이와 같은 여자를 보았다. 정월은,

「당신이 설화씨인가요?」

하였다.

「네. 제가 설화입니다.」

하는 설화는 정월이가 교육 있고 분별 있는 여자인 것을 알았다.

정월은 무엇이라고 말을 꺼낼지 알 수 없어서 주저주저하 였다. 설화는,

「어째서…… 저를 찾아오셨나요?……」

하였다.

「네.」

하고 대답을 한 정월은 적지 않게 헤매었다. 사랑의 전상 이 얼마나 아프고 쓰린 것을 맛 본 정월로는 그렇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사람을 눌릴 듯한 표정을 가지고 앉아 있는 설화를 볼 때 한없는 애정의 애끓는 슬픔을 생각하고 또 비단 저고리 남치맛자락에 방울 방울 떨어질 원망의 눈물을 생각할 때 그의 신경은 극도로 흥분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고 애처로와질 미래를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그러나 자기 오라버지의 외적 행복만 관찰하고 내적 행복 을 헤아릴 줄 모르는 정월로는 영철과 설화를 천평 위에 아 니 올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철을 위하여 불쌍하고 애처로우나 설화의 붉은 사랑을 희생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정월은 한참 있다가,

「이 영철씨를 아시지요?」

하고 한번 눈을 거듭떠 설화의 가슴 설렁 하는 얼굴을 쳐 다보았다. 설화는 의아해하는 듯이,

「네, 알지요.」

하고 눈 크게 정월을 보았다. 그리고, (저이가 영철씨의 이름을 묻고, 또 오늘 아지도 못하는데 나를 찾아오고 또 그의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있으니 저 이가 좋은 말을 전하여 주려는가, 나쁜 소식을 전하여 주려 는가.) 그는 얼핏 그의 말을 듣고 싶으면서도 가슴이 거북한 듯하 고 울렁하였다. 설화는,

「이 영철씨를 어떻게 아시는가요?」

하고 네가 어찌하여 왔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핏 가르 쳐 달라는 듯이 물었다. 정월은 한참이나 먼 산을 바라보다 가 그의 말에는 대답지도 않고,

「여보세요.」

하였다.

「네.」

「어떤 사람 하나를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 게 될까요?」

하는 정월의 까만 눈썹이 덮인 눈은 아래로 깔려졌다.

설화의 가슴은 이 말 한마디에 선뜻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어째 이이가 그런 말을 할까? 그러면 영철씨가 또 다른 여자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 여자라는 것은 지금 이 여자가 아닐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의심을 단정할 만큼 설화는 영철을 박약하게 믿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예요. 왜 그런 말씀을 저에게 물어 보십 니까?」

「글쎄 그 말에 대답을 하여 주세요. 그러면 또 말씀을 할 터이니요.」

「그러면 그 사랑은 병신 사랑이겠지요. 그 사랑을 완전케 하려면 두 사람 중 누구든지 희생이 되야지요.」

「네, 그렇지요. 그러면 두 사람 중에 누가 희생이 될까 요?」

「그것은 단정해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희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설화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정월은,

「사랑에 희생이 되는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지요. 그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겠지요.」

「네. 그렇지요.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요.」

정월은 갑자기 그의 핏속으로 차디찬 무엇이 스치고 지나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쌓아 두었던 슬픔과 감정이 다만 그 죽음이라는 말 한마디가 바늘로 찌르는 듯이 탁 터져 올 라오며 설화의 무릎에 고개를 대고,

「설화씨!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구든지 파멸을 당하지 않 으면 안되겠지요?」

자꾸자꾸 울었다.

설화는, 자기를 속여 거짓 우는 것보다도 자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엉켰다 풀어지며, 풀어졌다 엉키는 쓰린 사 랑의 마음 아픈 정사(情史)를 생각하며 느껴우는 줄은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은 여자와 말하여 본 기회도 적었거니와 자 기 무릎에 엎디어 보배스러운 눈물을 줌을 받을 줄 몽상도 못하였다가, 지금 그 경우를 당하고 보니 순결한 감응과 함 께 의외의 사랑이 깨어짐을 깨닫고 자기의 원수인 그 여자 를 앞에 놓고도 그 여자를 원수로 아지 못하였으며 원수로 대접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자기와 똑같은 경우, 똑같은 자리에서 불타는 사랑 의 가슴 쓰림을 하소연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정월을 볼쌍 히 여겼으며 서로 합하여 한몸이 되어 영철씨의 사랑을 똑 같이 받고 싶었다. 그래서 설화는 아무 말 없이 정월을 끼 어안고 한참이나 눈물지어 울었다.

설화는 조금 눈물을 진정하고, (그러면 내가 희생이 될 것인가, 이 여자가 희생이 될 것인 가?) 하고 한참 주저하였다. 정월도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눈물 을 씻었다. 설화 어미는 한 귀퉁이에서 이 괴상스러운 꼴을 보고 다만 입맛만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세요.」

정월은 떨리는 한숨 섞어 설화를 불렀다.

「네.」

하는 설화의 눈에는 아직 눈물이 고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의 참 행 복을 위하여 자기의 몸일지라도 내버리는 것이지요?」

하며 정월은 곁눈으로 설화를 보았다.

「네, 그렇겠지요.」

하는 설화의 말이 끊어지자마자,

「그러면 설화씨는 그것을 좀 생각하여 주세요.」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설화는 다만 아무 말이 없었다.

설화는 정월을 보내고 그대로 방에 엎디어 몸부림하여 울 었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고 미칠 듯이 날뛰었다. 그 옆에 서 이 꼴을 보던 설화 어미는 다만 차디찬 웃음을 웃으면서,

「글쎄, 내가 무엇이라고 하더냐. 네가 너무도 내 말을 안 듣더라.」

하며 책망하는 듯이 비웃는다. 이 소리를 듣는 설화는 갑 자기 악을 쓰며,

「무엇을 무엇이라고 해요. 어머니는 입이 있어도 말할 권 리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까닭이예요.

내가 이렇게 울게 된 것도 부모 덕택예요. 내가 기생 노릇 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괴로움을 맛보지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는 자식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예요. 듣기 싫어요, 어머니 말은 아무리 옳다 해도 나에게는 살점을 에는 칼날 같이 밖에 안 들려요. 나는 우리 부모가 이렇게 만들어 놓 았어요. 나를 이렇게 울리는 이는 우리 부모예요.」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울다가,

「아아, 세상에 모든 남자는 다 귀신이야. 아무리 착하든 선량하든 사랑있다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남자는 다 악마야!

그래 나는 사람의 껍질을 쓴 악마에게 속았었어! 악마의 조 롱거리가 되었었다.」

이 소리를 듣는 어미는,

「힝, 글쎄 내가 무엇이라더냐. 너는 나를 무엇이라 무엇이 라 내 탓만 하지만 그것도 다 팔자를 어떻게 하니, 내가 너 를 기생 노릇 시키고 싶어한다더냐?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 란다. 그러나 어떻게 하니?」

하며 욕먹는 것이 분하기는 하지만 꿀꺽 참았다.

「듣기 싫어요. 팔자가 무슨 팔자야!」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죽는 수밖에 없어. 그래 죽어야 해. 어머니가 다 무 엇이야. 이 세상이 다 무엇이야.」

설화 어머니는 담뱃대를 든 채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옷 을 찾아 입고 문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설화가 야단을 치 려 할 때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어머니가 나가 매 몸부림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가 울음을 조금 그쳤을 때에 또다시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아지 못하였다.

그대로 사라지고도 싶고 죽고도 싶었다.

「이것이 꿈인가?」

하여 보았다. 정신의 모든 정력을 눈에다 모아 모든 것을 힘있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꿈이 아닌 것을 깨달음보다도 으레히 꿈이 아니라고 인식하였을 때,

「그렇지, 나 같은 년에게 이것이 꿈이나 될 리가 있나.」

하고 비관하는 끝에 자기(自棄)하는 생각이 났다.

설화는 그와 같이 울면서 한숨을 지을 때마다 이 영철의 환영이 자기 앞에 보이며 1년이나 넘어 두고 꿈속 같고 달 콤한 사랑의 생활을 하여 보던 기억이 조각조각 이것저것 순서없이 생각되며 꿈 같고 달콤하던 지나간 역사를 송장의 관을 덮는 검은 보자기로 덮어 버리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영철을 한없이 원망하며 한없이 저주하는 생각이 나면서도 원혼의 요귀가 침침한 밤중에 원망스러운 사람을 따라다니 며 눈물을 흘리는 것같이 차마 떨어지기 어려운 애끓는 정 을 깨달았다. 설화는 이 영철을 만나 보기만 하면 당장에 달려들어 그 가슴에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박으려 덤빌 것이 아니라 두 눈에 흘리는 뜨거운 눈물로써 애소하며 그의 목 을 얼싸안고 고개를 그의 가슴에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듯 이 비비면서,

「영철씨, 영철씨 나를 죽여 주세요. 이 타는 듯하고 쓰린 듯한 가슴 위에 영철씨의 손으로 죽음의 화살을 박아 주세요.」

하며 영철의 손으로 자기의 뛰는 붉은 심장을 얼크러뜨려 주기를 원할 것이다.

설화가 눈물을 그치고 이불을 내려덮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을 때에는 그의 흥분 되었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 다. 그의 눈앞에는 아까 그 정월의 자기 치마 앞에 눈물을 흘리던 것이 보이며 또 맨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참으로 생각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참 행복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데 있는 것이지요.」

하는 것과,

「그러면 설화씨, 그것을 좀 생각하여 주세요.」

하던 것이 생각되며 그러면 날더러 희생되라는 말이 아닌 가? 그러면 어찌 날더러 희생이 되라는가. 자기와 나와 똑 같은 지위에 있으면서 왜 자기는 희생이 되지 못하고 날더 러 희생이 되라는가. 그러면 자기도 이 영철을 떠나기 어려 운 고통을 맛보면서 왜 날더러는 이 쓰라리고 아픈 고통을 맛보라는가? 나와 자기 두 사람 사이에 누가 더 이 영철씨 를 행복스럽게 할 수가 있을까?

설화는 행복이라는 말 아래는 조금 주저하였다. 자기는 이 영철에게 이 세상 사람이 말하는 바 행복을 줄 수 있을까 하였다. 그리고 기생인 자기가 기생 아닌 그 여자와 같이 이 영철의 사랑을 완전하고 영구하게 받을 수가 있으며 줄 수가 있는가? 하였다.

설화는 어제 저녁때 이 영철이 자기의 손을 잡아 당기며,

「우리가 사귀인 지도 퍽 오래지?」

하던 것과,

「설화 우리가 암만하여도 오래도록 사랑을 계속할 것 같 지 않아.」

하던 말이 생각되며 그러면 영철씨가 설화 자기는 기생의 몸이니까 너와 같은 여자와는 오래도록 교제를 할 수 없다 는 의미를 나에게 비쳐준 것이 아닌가? 자기는 그와 같은 순결하고 얌전한 애인을 가졌으므로 나와 같은 더럽고 천한 계집년과는 영원한 사랑을 주고받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 던가!

그렇지 않으면 왔던 그 여자가 영철씨의 사랑을 갈망하고 갈구하나 영철씨가 그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으므로 오늘 나에게 그와 같은 거짓 눈물을 보이며 나를 단념시키려는 간교한 수단에서 나온 한 계책이나 아닌가 하였다.

설화는 영철을 의심하며 원망하는 정이 새로이 나오면서 그전보다 더 그립고 사랑하고프고 가슴이 조이고 애끓는 눈 물을 흘리면서도 그 여자의 말을 믿지도 못하고 아니 믿지 도 못하였다. 그리고 다만 그의 머릿속으로 떠돌아다니는 생각과 그의 핏줄로 흐르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슬 픔뿐이었다.

그가 쓸쓸스러운 황혼이 온 집안을 싸돌며 붉은 전기불이 온 방안을 새로이 비칠 때 하얀 손을 신경질적으로 꼼질꼼 질하며 떨리는 한숨을 쉬고 몸을 뒤치어 귀찮게 돌아누울 때 온몸이 녹는 듯한 피로를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새로이 영철이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여태 껏 자기를 속이고 또 속이던 보통 풍류 남아들과 같이 더럽 고 무정한 남자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났다. 그리고 눈 감 고 누워있는 그의 눈앞에는 얇은 면사(面紗)를 통하여 보는 것과 같이 영철의 환영이 보였다. 그 환영은 자기를 보고 차디찬 웃음을 웃으며 서 있었다. 설화는 그 영철의 환영의 손을 잡고 하소연을 하려고 덤벼들었으나 그의 눈앞에는 다 만 전기불에 파동이 움직일 뿐이었다.

「에. 일평생 만나지 않을 터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리고 겨우 고개를 들어,

「어머니, 어머니, 물 좀 주세요. 냉수를 좀.」

하고 자기의 몸을 만져 볼 때에는 진액 같은 땀이 척척하 게 흘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없고 행랑어멈이 물을 떠 왔다.

물을 마신 설화는 어멈에게,

「어멈, 오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영철 씨도.」

하였다.

어멈은 귀찮은데 잘 되었다는 듯이 문을 닫고 행랑으로 들 어갔다.

은행에서 나온 영철은 아무리 백 우영을 찾아다녀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 나중에는 설화집에나 있나 하고 저녁도 먹지 않은 몸으로 8시나 되어서 설화의 집에 찾아왔다. 영 철이가 어두컴컴한 청진동 골목으로 걸어올 때에는 다만 어 제 저녁에 당한 모욕을 시원하게 씻어 버리리라는 생각뿐이 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보내 준 돈을 만져 보았다. 그 리고 만족한 듯이 웃으며 설화집 대문을 아무 의심 없이 안 으로 밀었다. 문은 눈을 부릅뜬 것 같이 힘있게 반항하였다.

영철은 문을 흔들었다.

어멈은 그것이 이 영철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누구요?」

하고 행랑에서 나왔다. 방안에 누워 있는 설화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영철은 또 문을 흔들어 대었다.

어멈은,

「누구요?」

하고 심술궂게 소리를 지르며 문간까지 나와서 가만히 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속으로, (정말 왔구나.) 하였다.

어멈이 문을 열 때에는 영철이가 조금 문을 비켜섰다. 어 멈은 고개를 내밀고 두 손으로 대문을 가로막고 서서 영철 을 보았다. 영철은 웃음을 띠고 그대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 러나 어멈은,

「아가씨 안 기세요.」

하고 수상스럽게 영철을 바라보았다. 영철은,

「어데 가셨나?」

하고 들어오려던 발길을 멈칫하고 서 있었다.

「모르겠어요. 아까 웬 양복한 어른하고 걸어나가셨어요.」

하고 어멈은 그것이 죄악인 줄은 깨닫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죄악을 깨닫기는 고사하고 자기의 솜씨있는 말에 얼마간 만족하였다.

「양복 입은 사람!」

하는 영철의 가슴에는 의심이 생겼다 사라졌다.

「아무 말씀도 없이?」

「별로이 다른 말씀 없어요.」

「날더러 무엇이라고 하시지도 않아?」

「아뇨.」

「어디 가신지도 모르지?」

「몰라요. 그런데 여러 날 되시기 쉽댔어요. 아, 절에나 가 셨나 보아요.」

「절에?」

「네.」

사귀 후에 한 번일지라도 자기와 만나자고 한 시간에 자기 를 기다리지 않은 일이 없던 설화가 오늘에 한하여 자기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사람과 함께 말 한 마디도 없이 어디로 간다는 것은?

영철은 울 듯이 마음이 괴로웠다. 그리고 또다시 의심하였 다. 어제 저녁에 대문까지 쫓아나오며 나의 손을 잡고 놓지 못하던 설화가 오늘에 나를 기다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어 디를 갔으며 무엇하러 갔으며 무슨 동기로 갔을까? 그 양복 입었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랑을 더욱 굳게 하는 것도 의심이요, 사랑을 더욱 엷게 하는 것도 의심이다. 또한 사랑의 도수가 높을수록 가슴에 서 불붙는 것은 질투이니 영철이가 오늘에 의심이 일어나는 동시에 또한 질투의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영철이 설화를 의심하는 생각이 날 때에는 어제 저녁에 백 우영에게 모욕당하던 생각이 났다. 그리고 돈 없는 사람을 내버리고 돈 있는 사람을 따라가지나 아니하였나 하여 보기 도 하고 또 그 양복 입은 사람이란 백 우영이나 아닌가 하 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 부터는 자기를 배반하고 백 우영 의 가슴에 안겨 더러운 쾌락을 탐하지나 않나 하였다. 그러 다가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몇 백 번 다짐을 한 그 마음 약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설화가 그리 하였을 리가 있나.」

하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그의 의심은 아직까지는 설화를 믿는 마음을 이기기에 약 하였으며 아무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고 불안하였다. 영철을 문간에서 따돌려보낸 설화는 갑 자기 벌떡 일어나며,

「아니다, 놓쳐서는 안된다. 만나 보아야 한다. 만나서 물 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손으로 죽여라도 달래야 한다.」

하고,

「그리고 그 여자가 희생이 될지라도 나는 영철씨를 놓을 수는 없어!」

하고 대문을 열어젖뜨리고 미친 것처럼 동리 골목까지 쫓 아나왔으나 영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설화는 차디찬 바람이 가슴으로 기어드는 것도 관계하지 않고 그대로 그 옆담에 기대 서서 넋을 잃고 울었다.

집에 돌아온 설화는 옷을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 동무집에 간다 하고 문 밖으로 나서 명월관으로 인력거를 타고 가려 하였다.

「그렇다. 나는 그대로는 갈 수가 없어. 나는 이 세상에 아 무 데도 쓸데 없는 사람이야. 나는 죽은 사람이야. 에, 화나!

나는 어디 가서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놀아나 볼 테야!

세상은 나를 몰라준다. 더욱 남자들은 나를 모른다. 나를 조 롱한다. 나를 장난감으로 안다.」

「옳지. 어디 보자. 나도 모든 남자를 농락할 터이다. 마음 이 녹아 주게 할 터이다. 그대로 말려 죽일 터이다!」

하고 전화를 빌어서 백 우영의 집으로 명월관으로 놀러오 라고 기별을 하였다. 영철이 술이 반쯤 취하여 종로 네거리 를 지나 청년회 앞까지 왔을 때였다. 청년회에서 이 용준이 가 툭 튀어나오면서,

「여보게, 보았나?」

하였다.

「보기는 무엇을 봐?」

「백 우영이 말일세.」

「못 보았어.」

「나는 지금도 보았는데.」

「어데서.」

「지금 이 길로 웬 아씨하고 자동차 타고 가던걸.」

「아씨?」

「그래.」

술에 흥분된 영철의 두 눈에는 백 우영과 설화가 서로 끼 어안고 자동차를 몰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그렇지 않다 하여 보았다.

그러나 한참 있던 영철은 만일 그 아씨라는 사람이 설화 같으면 어찌하나! 그러다가는 그럴는지 모르지, 그럴는지도 몰라 하는 마음이 또다시 변하여 그렇다 설화다 하였다.

그러다가는 날더러 다홍치마 붉은 저고리에 귀밑머리를 풀 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하더니 그 말을 한 지 몇 달이 못 되어 벌써 나를 떠나갔을까? 설화가 정말 나를 영영히 잊어 버렸나? 그러다가는 만일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이거 던 나는 설화의 손을 잡고 원망도 하여 보고 타일러도 보고 간원도 하여 보리라 하였다.

영철은 이 용준에게 다른 말 없이,

「자네 돈 있나?」

하고 손을 내밀었다.

「돈은 무엇 하나?」

「글쎄, 있느냐 말야. 없거든 고만두고.」

「있기는 있으나 무엇에 쓸 것을 말해야지.」

「있어? 있기만 하면 가세.」

「어디로 가.」

「어디로든지 가서 한잔 먹세.」

영철은 누가 끄는 것같이 이 용준을 데리고 명월관에 갔다.

문간을 들어서니 영철은 보이에게,

「여기 설화 왔나?」

하였다. 보이는 빙긋 웃으며,

「네, 왔어요.」

이 말을 듣는 영철은 낙망하였다. 자기가 설화를 의심하는 것이 죄악으로 알기는 알았지만 지금에 그 의심이 똑바로 들어맞을 때 영철은 몸에서 참 땀이 흐르는 듯하였다.

「어느 방에 있누?」

「저쪽 구석방에 있어요.」

백 우영은 설화와 함께 상을 대하여 앉아 있다.

설화는,

「저 술 한 잔 주세요. 자, 백 우영씨의 손으로 부어 주세요.」

하며 잔을 들어 술을 청하였다. 우영은,

「술? 이게 웬일야?」

「무엇이 웬일예요? 나도 이제는 깨달았어요, 모든 것을 알았어요, 이 세상이란 그저 그런 것예요.」

「무엇이 그저 그런 것이야.」

「먹고 놀고 엄벙덤벙이지요. 나는 사랑을 위하여 눈물 짓 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알아요. 사랑은 한 곳에 있으 나 그것이 잘라지는 때, 밑둥에서 부러진 나무토막같이 어 디로든지 굴러갈 수 있으니까요. 그 나무는 무슨 짓을 하든 지 관계치 않으니까요. 자 부세요. 듬뿍 부세요. 철철 넘겨 부세요. 하하, 술이 나는 무엇인 것을 몰랐더니 이제야 그 술을 알았어요.」

설화는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또,

「자, 나의 손으로 이 설화의 손으로 부어 드리는 술은 넉 넉히 백 우영씨를 한 방울에 취하게 할 수가 있읍니다. 백 우영씨는 그 술 한 방울을 마시시구도 영원히 아니라 저를 사랑하실 수 있읍니다.」

우영도 그 술을 마셨다. 설화는 또 잔을 들으며,

「나는 술에 취하여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또 한 가지 취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야?」

「나는 모든 남자들의 찝찝한 피를 빨아먹어 그것에 취하 고 싶어요.」

하며 잔을 상 위에 내던졌다. 잔은 두 갈래가 났다.

「나의 가슴은 저렇게 깨어졌읍니다. 자, 그 아픈 상처를 고치기 위하여 부어 주세요. 철철 너치도록 잔에 술을 부어 주세요.」

백 우영은,

「그래라, 부어라!」

하고 잔에 술을 부었다.

얼굴이 진홍빛같이 붉어진 설화는,

「자, 우영씨도 마시세요. 우리는 이렇게 지내는 것이 팔자 지요.」

우영은 웬일인지 아지 못하나 설화의 성격이 반쯤 미친 듯 이 날뛸 때 마음이 유쾌치 못하였다.

「여보세요, 우영씨. 나의 머리를 우영씨의 무릎에 좀 베게 하여 주세요!」

하고는 우영의 무릎에 누웠다. 그리고 우영을 독살스럽게 쳐다보며,

「우영씨! 우영씨가 나를 사랑하신다지요? 흥 별 미친 망 할 소리를 다 듣겠네! 사랑이란 무어요? 사랑하고 싶거던 나를 술만 많이 먹여 놓아요. 그러면 당신이 사랑하고 싶다 는 대로 사랑을 받아줄게.」

우영은 다만 설화의 허리를 끼어안고 앉았다가 이 소리를 듣고 설화가 무슨 이유가 있구나? 하였다. 나를 부른 것도 곡절이 있고 또는 술을 먹는 것도 무슨 까닭이 있구나? 하 였다. 그리고 자기의 무릎 위에 술 취한 설화가 누워 있는 것을 술 취한 눈으로 내려다 볼 때 그 설화가 요염하게도 어여뻤다. 그리고 그 진홍빛 입술이 술이 젖어 번지르르하 게 흐를 때 우영은 치밀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수 없었다.

우영은 더욱 단단히 설화의 살이 만져지는 허리를 껴안고 설화의 고개를 자기 입 가까이 대었다.

설화는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지도 않고 싱그레 웃으며,

「흥, 나의 입을 맞추려고?」

하고 손을 들어 우영의 입을 밀치어,

「천 원야! 알겠어! 천 원.」

하였다.

「천 원 내야지 내 입을 맞추어.」

이럴 때 방문을 열어젖뜨리고 영철이가,

「자, 천원은 내가 줄 테다. 받아라!」

하고 천 원을 설화의 입을 향하여 내던졌다.

「아! 영철씨!」

하고 설화는 영철에게 달려들며,

「영철씨, 나를 잊으셨어요? 나를 저바리셨어요?」

「옛날에 영철씨는 그렇지 않으셨지요. 저를 잊으시려거든 저를 그대로 죽여 주세요.」

하고 매달려 운다.

영철은 한참이나 부르르 떨더니 설화의 팔을 단단히 쥐고

「듣기 싫어 설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 나는 마음도 약하고 몸도 약하고 또 금전의 세력도 약한 사람이다.」

하고 한참이나 설화의 우는 것을 내려다보더니,

「누가 여자의 말을 참으로 믿는 자가 있느냐는 옛말과 같 이 내가 너를 믿은 것이 잘못이지?」

「자, 저리가 저리가!」

하고 설화를 때밀치려 하니까,

「영철씨, 참으로 영철씨는 나를 떼밀쳐요? 참으로 나를 내버리세요?」

「듣기 싫어, 네가 나를 버렸지, 내가 너를 버린 것은 아니 다!」

「아아, 참으로 무정하세요, 참으로 박정하세요.」

「너의 입으로 그와 같은 말이 무슨 염치로 나오느냐? 내 가 무정하다지 말고 너의 마음에 다시 한 번 물어 보아라.

나는 영원히 병신이 된 사람이다. 나의 가슴에는 언제든지 뺄 수 없는 굵다란 못을 네가 박아준 자이다.」

「영철씨! 영철씨는 왜 저의 마음을 몰라 주세요? 네? 영 철씨.」

영철은 반쯤 조소와 분노가 엉키인 얼굴로 설화를 한참 내 려다보더니

「설화? 나는 참으로 아지 못하였다. 네가 그렇게까지 간 교한 줄은 참으로 아지 못하였다. 나는 어제 저녁까지 어리 석은 사람이었으나 오늘부터는 그렇게 정신없게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원본 342,343 났다.

설화는 영철에게 뿌리침을 당하고 백 우영의 일으켜 주는 것도 암상스럽게 거절을 하고 억지로 무릎이 아픈 것을 참 고서 일어나 마루 난간에 한참 서서 울다가 옆에서 귀찮은 얼굴로 울지 말라는 우영의 말이 더욱 듣기 싫어서 얼핏 집 으로 가서 실컷 울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거꾸러져 죽어 버 리기나 하겠다 하고 겨우 눈물을 씻고 고개를 숙이고 문 앞 으로 나왔다. 그의 눈알은 붉고 분 바른 두 뺨에는 눈물 방 울의 굴러떨어진 자국이 보인다. 그는 사람 앞으로 지나가 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면서 겨우 대문 까지 나왔다.

영철은 연옥의 몸에 고개를 대고 울면서 가슴이 쪼개지고 에는 듯한 감정을 맛보면서도 자기 방 앞으로 설화가 지나 가지나 않나 하는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지나다가 나의 이 렇게 우는 것을 보고서 불쌍한 마음이 그의 가슴에 복받쳐 오르고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는 끝에 자기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그의 영롱한 두 눈과 어여쁜 입 가장 자리 에 이슬 같은 눈물과 애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들어 나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몸부림을 하면서라도 느껴 가며 울어 주지를 아니하나? 하였다. 그리고 자기 방 앞으로 슬 리퍼 소리가 나며 누가 지나갈 때마다 설화인 듯 설화인 듯 하면서도 부질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지나 가는 소리가 사라질 때마다 아, 설화를 원망하는 생각이 나 며 더욱 애끓는 생각이 났다. 연옥은 갑자기 방문 밖을 내 다보다가,

「설화야.」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영철은 번개같이 가슴이 무엇으로 꽉 찌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고개도 들지 아니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어리광부리듯이 영 철은 설화의 한없는 동정을 속마음으로 빌었다.

설화는 방문 앞으로 지나다가 연옥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래어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영철이 연옥의 무릎 위에 고개를 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설화의 마 음은 영철이 기대하는 그것과 반대로 영철과 연옥을 원망하 는 생각이 갑자기 복받쳐 올라오며 충동적으로 질투의 생각 이 났다. 다만 한순간에 그는 전신을 사르는 듯하고 뱀에게 물리는 듯한 질투의 생각이 났다. 그는 연옥의 부르는데 대 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다. 그러나 영철과 연 옥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에 그는 다시 연 옥이가 불러 주었으면 하였다. 그리고 아까 그 연옥의 불러 주던 순간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다시 뒤로 올라가 버 렸으면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이나 두 걸음만 다시 돌아서면 그만일 것을 또다시 돌아서 연옥이가 불러 줄 수 있는 곳까지 가기에는 자기 다리를 무엇으로 굳혀 놓은 것 같이 움직거리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낙망과 함께 단념을 하였다.

「아, 고만두어라. 나 같은 팔자 사나운 년이.」

하면서 대문을 향하여 나아갔다.

영철은 설화를 부르던 연옥이가 무안하고 노한 듯이,

「망할 계집애, 사람이 부르는데 왜 대답도 없어.」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또한,

「에, 그만두어라 나 같은 놈이.」

하고 자기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앉아 있 지는 못하였다. 배척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무지개 같은 만질 수도 없고 잡아당길 수도 없는 무슨 이상한 힘이 자기를 자꾸자꾸 설화에게로 끌어가는 듯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인지 가버린 설화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다.

영철과 용준과 연옥이가 명월관을 나서기는 11시 반이나 지내인 때였다. 용준은 먼저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가버 리고 영철과 연옥이가 종로편으로 향하여 올라올 때 영철의 마음에는 지나간 과거가 다시 생각된다. 자기가 처음 설화 의 집에를 갈 때 동구 안 정류장에서 갈까말까 하고 주저하 던 생각으로부터 그날 저녁 자기가 설화집에를 12시나 넘어 서 갔을 때 눈물을 흘리며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떨리는 긴 한숨을 쉬며 누웠던 것과 그 후부터 영원히 영원히 다만 사랑을 위해서만 살아가자는 것과 만나자는 날짜 그 집을 찾아가도 만나지 못하던 것과 오늘 백 우영과 명월관에서 만나던 것과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의 머리에 굵다란 줄을 부욱 긋는 것같이 큰 인상을 주는 것은 백 우영이가 설화 앞에서 자기를 모욕하려고 돈 이야기를 하던 것이다.

그는 그날 저녁에 설화 앞에서 그것이 다만 자기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백 우영이 대담하게도 그 러한 짓을 하는 것이 도리어 얼굴이 부끄러웠으나 설화와 자기 사이를 격리시키는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도 못 하였다. 그리고 설화가 문간까지 쫓아나오며 자기의 손을 잡고,

「그 일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하던 그때 그는 더욱더욱 설화와 자기 사이에 친밀의 도수 가 농후하여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돈으로 인하여 자기는 실연자가 되 어 버렸다. 돈이다. 설화는 돈을 따라갔다. 돈 없는 자기를 내버리었다. 돈, 태산 같은 돈뭉치가 과연 사랑이 없이 텅 비인 작은 가슴을 채워 줄 수가 있을까?

그는 설화를 원망하는 동시에 만일 설화의 육체나 정신이 인형과 같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가 있다면 자기의 손으 로라도 가슴을 쪼개고 머리를 깨뜨려부숴 다시 새롭고 좋은 염통과 뇌수를 만들어 집어 넣어주고 싶었다.

영철은 오늘 저녁과 같이 캄캄하고 답답하고 비애로운 밤 은 또다시 없었다. 그는 그 전과 같이 신문도 없고 염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옥의 손 이 따뜻한 것이 자기의 타는 감정을 부드럽게 할 뿐이었다.

영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연옥의 손을 꼭 쥐면서,

「설화는 무정한 사람이지?」

하였다. 연옥은 한옆으로 영철이가 자꾸자꾸 설화를 생각 하는 것이 샘이 나면서도 그 비애스러운 영철의 어조에 스 러지는 듯한 것을 들을 때에 그는 정신이 몽롱하여지는 듯 하며 말할 수 없는 동정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만,

「네? 왜요?」

하고 영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괴로워하는 영 철의 얼굴을 그렇게 오래 쳐다보지는 못하였다. 영철은 하 늘의 별만 바라다보며 혼잣말같이,

「무정해, 무정한 사람이야.」

하였다. 연옥은,

「그럴 리가 있나요. 그렇지 않을 애인데요.」

하였다. 영철은 모든 것을 단념이나 한 듯이,

「고만둡시다. 설화 이야기는 고만둡시다.」

하였다.

밤은 깊은 암흑이란 이불을 덮고 숨소리 없이 잔다. 창 밖 습기 있는 회색 땅바닥에서 이슬 고이는 소리가 게밥 짓는 그 소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전기불은 고요히 켜 있다.

설화는 붉은 등잔 아래 푸른원한을 품고 붉은 피눈물을 흘 리며 외로이 울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내가 잘못했지. 그이를 붙들고 물어나 볼 걸!」

누워 있는 설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한다.

「내가 일을 경솔히 했지? 정말 영철씨가 그 여자를 사랑 하는지 알아나 볼걸! 아냐, 그이는 나를 잊는 사람이야. 벌 써 잊어버린 지는 오래.」

하다가,

「그러나 한 번 만나서 물어나 볼 터이야. 그리고 이야기 를 모조리 해버릴 터이야.」

「내가 눈물을 섞어 간절히 청하면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 이니까 마음을 돌려주겠지! 나를 그전과 같이 생각하여 줄 터이지?」

하다가 또다시,

「아니다! 그는 벌써 나를 생각지 않는 지가 오래다. 그는 벌써 나를 내버린 사람이다. 내가 그를 다시 볼 것도 없거 니와 내가 청을 하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은 짓이지! 도리어 비웃음을 받을걸! 나를 어리석다 할걸! 나를 무안을 주려 할 걸!」

「그렇다. 이제는 보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남자 하고는 또다시 정이란 주지 않을 터이야. 일평생 그대로 혼 자 지낼 터이야.」

그는 이렇게 혼자 누워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계가 3시를 쳤다. 이 3시라는 시계 종소리를 들을 때 설 화의 마음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듯하여 마음이 괴로와 못견디었다.

「옛날에 나는 저 시계가 3시를 칠 때 그를 그리워 잠 못 들었더니! 오늘에는 그를 떠나서 운다. 옛날 시계가 셋을 치 는 것이나 오늘의 시계가 셋을 때리는 것은 다름이 없지만 옛날에는 나의 가슴에 그리운 영철씨의 모양을끼어안고 무 한한 장래의 행복을 꿈꾸더니 오늘에는 실연의 심연에서 헤 매이면서 운다! 아! 아! 어쩌면 나의 팔자는 이러할꼬? 나의 부모가 나를 죄악의 구렁에 빠지게 하더니 오늘에는 영철 씨, 영철씨가 죽음 속으로 나를 떼밀쳤다. 나는 부모를 원망 할 것도 없고 영철씨를 원망할 것도 없지만 나는 죽은 사람 이다. 나의 몸 하나는 영원히 죽은 사람이다.」

하다가 설움이 복받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때 그는 자 기의 머리를 부여뜯으며,

「설화야! 불쌍한 설화야, 너는 죽어야 마땅하니라! 죽어라 죽어! 죽어가는 설화를 불쌍하다고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 려 줄 사람이 없는 설화니라! 아아, 세상이 정없어, 그러나 영철씨! 저의 마음은 모르실 터이지요? 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죽으려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영철씨가 저의 가슴에 박아주신 사랑의 진주는 저의 살이 썩고 또 썩을지라도 영원히 남아 있을 터이지요!」

그는 머리를 베개에 대고 몸부림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새벽에 잠이 겨우 든 설화는 전과 달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앉아서 멀거니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이 꼴을 본 설화 어머니는,

「얘! 눈이 왜 저 모양이냐. 울기는, 미친애! 무엇하러 울 어! 젊어서는 저런 것 이런 것 다 당해 보아야 하느니라!」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려 하니까, 설화는,

「흥」

하고 한 번 웃더니 또다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더니,

「그렇지, 그렇지. 그러나 이 영철씨가 오늘 날더러 오랬는데.」

하며 소리높여서 오스스하게,

「하, 하, 하!」

하고 웃더니 손뼉을 두어 번 툭툭 친다.

「어머니, 나는 지금 이 영철씨가 오라고 해서 그 집으로 갈 터이니 장에 있는 새옷 좀 꺼내 놓아주.」

부엌에서 이 소리를 듣는 어미는,

「무어야? 이애가 미쳤나?」

하며 아무 소리 없이 불만 땐다.

「무어요? 미쳐요? 하하하하. 내가 미쳐요? 이세상 사람들 이 미쳤어. 세상 사람들은 다 미친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는 돈에 미쳤어!」

「무엇이 어쩌고 어째?」

하며 설화 어미는 부지깽이를 그대로 든 채 창 앞으로 와 서 보니까 설화의 두 눈이 흰죽 풀어진 듯하고 열이 올라 미쳤다.

「너 눈이 왜 그러냐? 네가 미쳤니?」

「내가 미쳐! 히히 하하. 어머니가 미쳤어?」

「얘 이애 웃음 소리가 어째 저럴고?」

그러나 설화는 다만 두 손만 비비고 앉아서,

「어서 새옷 주어요, 이 영철씨가 오늘 나하고 만나자 했 어요.」

하니까 설화 어미는 마음이 덜렁 내려앉으며,

「이애가 왜 이러냐?」

하며 가까이 들여다본다.

「어서 옷 내어놓아요. 새옷을 입어야지 영철씨가 나를 더 귀애하지? 하하, 허허.」

설화 어머니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며,

「설화야! 왜 이러니 네가 미쳤니?」

하고 설화를 부여잡고 운다. 설화는 자기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인제 우리 어머니도 실성하지 않았군! 그러나 울지 말어!

어머니가 울면 나도 울어야 해! 나도 눈물이 나! 그러지 말 구 어서 새옷 꺼내요?」

하며 물끄러미 자기 어머니를 들여다보더니,

「새옷 꺼내 주세요. 영철씨에게는 내가 새옷을 입고 가야해.」

「울기는 왜 울어! 못난이! 하하, 못난이야! 이 세상 사람들 이 모다 못난이야! 잘난이 노릇을 하기가 그렇게 쉬운 걸 못해! 자 자. 이렇게 해야 잘난이야. 어머니 보시오.」

하고 주머니 속에 뭉쳐 두었던 아편덩이를 꺼내어 들고서,

「이것만 이렇게……」

하고 집어삼키려 하니까 설화 어미는 앗 소리를 치며 달려 들어 그것을 뺏으면서,

「글쎄 이게 웬일이냐? 응, 정신을 좀 차려라!」

하니까,

「이게 왜 이모양이야? 어머니는 날더러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 나를 이 모양 만든 것도 다 어머니지? 아냐?

아냐? 어디 말해봐! 공연히. 어서 가서 새옷이나 가져와! 왜 울어! 어머니가 울며는 나도 울 터이야!」

설화 어미는 울면서 새옷을 꺼내러 장 앞으로 갔다.

설화는 거울을 벌리어 놓더니,

「진작 그럴 것이지! 누구든지 날더러 무엇이라고 그래만 보아라.」

하더니 기름병을 기울여 머리에다 한 병을 다 부어 질펀하 게 흘리게 하더니,

「이렇게 기름도 많이 발라 뻔지르하게 해야지, 영철씨가 귀애하지. 그래야 나를 사랑해? 무엇을 아나?」

하더니 이번에는 분을 허옇게 처덕처덕 바르면서,

「이렇게 분을 많이 발라야 얼굴이 어여쁘다고 해요, 흥흥, 어디.」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더니,

「그렇지, 가만 있거라, 레드 크림을 바르고 또 크럽 파우 더를 바르자.」

이 꼴을 보는 설화 어미는,

「이거, 참 야단났구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하고 발을 구르고 섰더니, 어멈, 어멈.」

어멈을 부르더니,

「여보게 어서 가서 연옥 아씨 좀 오시라게!」

하며 어멈을 내보내고,

「글쎄, 세수나 하고 분을 발라라!」

하니까,

「듣기 싫어!」

하고서는 또다시 금비녀를 방바닥에다 내던지며,

「이것 다 일이 없어! 트레머리를 해야지 영철씨는 사랑을 한다나, 서양머리 한 사람만 사랑한대. 자, 그 전에 사다 둔 빗하고 삔하고 이리 가져와요.」

하더니,

「어서, 시간 늦어요. 안 가져올 테야!」

하더니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고 제가 꺼내다가 머리를 칠 삼으로 갈라붙이고 맵시있게 틀어얹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거라! 옳지, 옳지, 광대뼈가 불그스름 해야 영 철씨는 사랑해.」

하더니 정월의 얼굴에서 본 것같이 얼굴을 불그레한 도화 분으로 발랐다. 그리고 깜정 통치마에 기름한 저고리를 입 고서는 벌떡 일어나더니,

「구두! 구두!」

하고 안방 마루로 왔다갔다하며 구두를 찾는다.

「내 구두 어데 갔나? 구두를 신어야지 영철씨에게 가지.」

하고 찬장 밑에 넣어 둔 구두를 꺼내어 보다가,

「에그, 어떻게 하나. 이 구두는 그 여학생 신은 것같이 검 정 구두가 아니고 노란 구둘세! 이것을 어찌하나! 응응.」

하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운다.

이때 연옥이가 어멈을 좇아 들어오다가 이것을 보고,

「얘가 웬일야! 저게 무슨 분이냐, 웬 분을 저렇게 발랐 니?」

하며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웬 영문을 몰라하니까,

「무어야? 이년! 네가 영철씨를 뺏어갔지? 어데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네가 나를 죽이거나 내가 너를 죽여야 마음이 시원해.」

하더니,

「이년.」

하고 머리채를 꺼들어 잡아당기면서,

「나를 죽여라, 죽여?」

하고 몸부림을 하며 매달린다. 이 꼴을 보던 설화 어미는,

「글쎄, 설화야, 설화야. 이게 웬일이냐, 네가 정말 미쳤구 나? 이것을 좀 놓아라!」

하고 머리채 붙잡은 손을 펴려 하니까,

「이것들이 왜 이 모양야?」

하고 한번 뿌리치는 바람에 연옥은 그대로 마루에 가 나둥 그러졌다.

「글쎄, 내가 어쨌니!」

하며 연옥은 머리를 다시 쪽지며 혼자 앉아 한탄만 한다.

「얘, 남 부끄럽다. 방으로 들어가자.」

하는 자기 어머니 말은 듣지도 않고,

「에그! 영철씨에게 가야 할 터인데 구두가 검정 구두가 아니고 노랑이야.」

하며 그대로 몸부림하여 가며 운다.

1주일이 지나간 어떤 날 저녁이었다. 선용은 탑동 공원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훗훗한 첫여름 공기가 무겁 게 불어오고 시뻘건 저녁해는 서편으로 기울어 기상만천의 꽃다운 저녁 고름을 서편 하늘에 가득히 그리어 놓는다.

그 붉고 누른 저녁 구름의 반사되는 광선이 온 땅의 모든 것을 붉고 누르게 물들이고 선용의 검은 얼굴까지도 술먹은 것같이 불그레하게 하여 놓았다.

그때의 선용의 머릿속에는 사회도 없고, 가정도 없고, 옆에 나무도 없고, 옆에 사람도 없고, 정월도 없고, 죽는 것도 없 고, 사는 것도 없고, 다만 단순한 서편 하늘이 붉고 누르게 피어있는 구름장같이 가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하늘 위 에나 땅 아래나 어디로든지 끝없이 흘러가 보았으면 하는 방랑욕(放浪欲)에서 일어나는 법설에 뜬 정취(情趣) 뿐이었다.

화원에 뿌리는 척척한 수분이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선용 의 훗훗한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선용은 잠깐 사이에 다시 복잡한 의식을 회복하였다.

그의 머리에는 또다시 정월의 날씬한 그림자가 나타나 보 였다. 그러나 그 정월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선용은 보지 않으리라 보지 않으리라 하고 자꾸자꾸 다른 생각을 하여 그 다른 생각의 그림자가 정월의 그림자를 덮어 버리도록 애를 쓰고 또 썼으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도리어 다른 생각의 그림자로써 정월의 그림자를 덮으리라 할 때에는 더욱 분명히 정월의 그림자가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월의 그림자가 보이면 보일수록 선용은 타오르는 정열 위에 냉담한 이지(理智)의 푸른 재(在)를 뿌려 그 정열 을 식혀 버려 정월을 또다시 생각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아 니 또다시 생각하지 않으리라 함보다도 생각할 수 없는 것 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용은 피를 가진 사람이었다. 청춘에 노곤한 단잠을 다 깨지 못한 사람이었다. 만일 이지의 차디 찬 힘으로 과연 열정의 타는 불길을 꺼버릴 수가 있다 하면 선용은 말할 수 없는 공허(空虛)를 깨달았을 것이다. 만일 선용이가 가슴의 공허를 깨닫는다 하면 또다시 그 낙망(落 望)으로 인하여 공허를 맛볼 때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슬픈 것으로 화하여 버리었을 것이며 나중에는 죽음의 벌을 받을는지도 알 수 없으며 비록 죽음은 바라지 않는다 하더 라도 결국은 살아 있는 송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월의 날씬한 그림자를 대신 채우는 것은 일본 있 는 그 여학생의 그림자였다.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아지 못한다. 또는 무엇을 하는지도 아지 못한다. 그러나 선용 자기를 사랑하며 선용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조 금도 틀림없다고 선용은 믿었다. 분명치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아지 못하는 희망이 도리어 냉담한 이 지 그것보다는 몇천 배 몇만 배 낫게 선용의 그 낙망적 열 정을 대신하여 줄 수 있으며 선용을 다시 희망과 열정의 권 내(圈內)로 집어넣을 만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용은 정월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일본 있는 여학생을 생 각하였다. 그리고 어느 것이 더 자기를 즐겁게 하며 자기를 행복스럽게 하여 줄까 하여 보았다.

몸에 병이 있어 불쌍하고 가련하여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흘려 주어야 할 만치 죽음과 생의 경계선 위에서 헤매이는 정월은 다만 불쌍한 인생을 위해서 동정을 주고받고 할 사 람이다.

정월과 자기 사이에는 다만 눈물이며 한숨인 비애의 애정 이 있을 뿐이며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저녁날에 묘지를 향하 여 가는 상여군의 소리와 같이 쓸쓸하게 가슴쓰린 사랑의 만가(輓歌)뿐이다.

그러나 일본 있는 그 여학생은 어떠한가? 극(劇)의 막(幕) 을 아직 열지 않은 것과 같이 무한한 기대(期待)가 저편에 숨어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정취(情趣)가 저편에서 자기를 부 르고 있다.

그러나 선용은 그 극이 비극일는지 희극일는지 아지 못하 지만 사람인 선용은 또한 다른 사람과 같이 마음이 약하였 다. 그는 아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미래 의 꿈 같은 희망에 속지 아니치 못하였다.

선용은 그 여학생을 생각할수록 그 전보다 더욱더욱 똑똑 하고 분명하게 그의 눈앞에 장차 올 행복과 열락이 보이고 들리는 듯하였다. 그는 어떠한 때에는 기껍고 반갑게 어린 아이가 오래 기다리던 어머니를 맞으려 두 팔을 벌리고 뛰 어나가는 것과 같이 무한한 희망을 동정하는 끝에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두 팔을 훨씬 내밀어 그 장차 오려는 행복과 열락을 당장에 끼어안을 듯이 그리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감상과 비애를 맛보고 또 맛보아 아주 거기에 싫증 이 난 선용은 장래에 또 무슨 불행이 있을는지 아지 못하겠 다는 불안과 함께 그 여학생 사이에 새로운 행복을 간절히 원하기도 하였다. 너무도 차고, 쓸쓸하고, 푸르스름하고, 가 슴이 쓰린 것만 맛본 선용은 달콤하고 꿈속 같고 붉고 즐거 운 몽환적(夢幻的) 새 생명을 간망하였다.

선용은 생각하였다.

(얼른얼른 일본으로 가리라. 몸이 허약하여 고향에 돌아와 정양(靜養)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나의 정신에는 말할 수 없 는 고통을 준다. 얼른얼른 일본으로 그 여학생을 찾아가리 라. 그리고 찾지 못하거든 어디로든지 헤매리라. 찾다가, 찾 으면 나에게 또다시 없는 다행이라 하겠지만, 찾다가 못 찾 으면 넓은 지구 위에 어디든지 헤매이며 끝없는 희망을 품 고 그 여학생을 찾아다니리라. 만일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거든 일평생 그 여학생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다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내다가 죽은 후, 저 알 수 없는 세상까지 그를 쫓아 보리라. 나와 같이 나를 찾아다니다가 한 있는 일평생을 나와 같은 희망 가운데 살다가 나를 이 세상의 차 디찬 껍질을 내버리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겠지……) 하다가 도 선용은 자기의 생각이 너무 공상적인 것을 혼자 웃으면서,

「어떻든 일본으로 가리라.」

하였다. 그리고 당장에 무슨 뜻하지 않은 기꺼운 일이나 들은 것같이 흥분됨을 깨달았다. 그리고 설(新年)을 기다리 는 어린아이같이 당장에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한 주일쯤 있다가 서울을 떠내 일본으로 가기로 정하 여 버렸다.

그 후 사흘이 지나고 선용은 자기 방에서 일본으로 갈 행 장을 차리고 있었다. 경희는 그 짐꾸리는 것이 눈물이 날 만치 섭섭하고 쓸쓸스러움을 주는 듯하였다. 그리고 다른 때에는 웃기도 하고 우스운 소리도 잘하던 선용이가 짐 꾸 리느라고 골몰을 하여 침착한 얼굴에 상기가 되어 아무 소 리 없이 이것저것 저 할 것만 하는 것이 아주 야속한 생각 이 난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응, 응.」

하고 지나가는 소리로 대답만 하고 어떠한 때에는,

「가만히 있어. 이것 잊어버렸군.」

하는 것이 어째 자기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같아 그는 서투르고 원망스러움을 맛보았다.

그는 거기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안방으로 뛰어가서 멀거니 앉아 있었다.

선용은 한없이 유쾌함을 깨달았다. 한없는 기대가 자기 앞 에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면 이번에는 그 전과 같이 몸을 수고로이 하지 않고 잘 안락하고 부드럽게 지내겠다는 생각이 한없이 즐겁게 하였다.

그때 그의 머리에는 정월이가 조금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가 막 고리짝을 얽어매고 있을 때이다. 영철이가 찾아와 서 이 꼴을 보더니 아주 깜짝 놀라며,

「이것이 웬일인가? 짐을 왜 묶나?」

하며 이것저것을 둥그런 눈으로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선용은 묶던 짐을 여전히 묶으면서 아주 심상하게,

「모레 일본으로 갈 터이야.」

하였다.

「일본으로? 왜? 벌써 가을도 안 되었는데.」

「여기 있을 수 없어, 얼핏 가버리는 것이 수야.」

「그렇지만 너무 속하지 않는가?」

「속하지 않아, 나는 여기 있으면 있을수록 고통이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참 의외인걸.」

「의외?」

「그래.」

「의외 될 것 무엇 있나,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이지.」

영철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선용은 또다시 말을 이어,

「자네 은행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하였다.

영철은 입맛을 다시며,

「그것은 또 누구에게 들었나?」

하니까 선용은 허리가 아픈지 허리를 펴고 일어서 두 손으 로 허리를 잡고 영철을 쳐다보더니 다시 허리를 꾸부리며,

「글쎄 왜 나왔나? 누구에게 들었어…… 누구한테 들었던 가?」

하고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하여 보더니,

「잊어버렸는걸, 누구인지.」

하였다.

영철은 웃으면서,

「그것야 말해 무엇하나?」

하고 또 담배를 꺼내 문다. 선용은 마침 무엇을 잊어버린 것이 있어서 영철의 말을 귀담아 듣지를 않고,

「아차, 잊어버렸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넣지 않았구나.」

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고 한참이나 애써 묶던 고리짝을 들 여다보더니 다시 책장으로 가까이 가서 이 책 저 책을 뒤적 뒤적하더니 영자(英字)로 거죽을 쓴 책 한 권을 꺼내어 가지 고 왔다. 영철은,

「그렇게 젊은 사람이 정신이 없어 무엇을 하나.」

하더니,

「저리 가게, 내 묶어 줄 터이니.」

하고 달려들어 묶던 고리를 활활 풀어헤뜨리고 빨랫줄을 두 줄에 합하여 두어 번 끝을 맞춰 죽죽 훑더니 매듭을 저 어놓고 이리저리 고리짝을 굴려 발을 대고 힘을 다해 졸라 맨다.

선용은 이것을 시원스러워하는 듯이 보고 서서,

「그럼, 자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하려나?」

「글쎄, 할 것 무엇 있나.」

「그럼, 우리 둘이 일본으로 가세그려.」

「그랬으면 좋겠지만 모든 것이 허락을 해야지.」

「허락? 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지만.」

「가세. 가. 가서 우리 둘이 있세, 돈이야 걱정할 것 무엇 있나?」

「그러나……」

하고 영철은 주저주저하였다. 그리고 가고 싶은 욕망이 나 지도 않았다.

「가세, 가. 이번에 나하고 같이 가세.」

하며 선용은 재촉하듯이 영철을 본다. 영철은,

「그런데 내 누이동생이 요새 대단히 앓고 나서 이번에 시 골로 좀 데불고 갈까 하는데, 나도 어떻게든지 일본으로 갈 요량이 있었으나 내년 봄쯤이나 가볼까 하는걸.」

하였다.

「글쎄.」

하고 선용은 정월의 말을 듣고는 말에 풀이 없어지며 아무 소리가 없다. 영철은,

「그러면 언제쯤 떠나나?」

하였다.

「모레쯤 가려 하네.」

「모레?」

「그래.」

「오, 참, 아까 모레라고 그러하였지, 그럼 우리 같이 떠나 세그려, 우리는 대전서 차를 바꾸어 탈 터이니까……」

「어딘데, 대전서 차를 갈아 타.」

「응, 부여(扶餘)까지 가려네.」

「부여, 백제 옛도음 말일세그려.」

「그렇지.」

「어째 그리로 가나?」

「거기 아는 사람이 하나이 있어서 자꾸자꾸 한번 놀러오 라고 하니까 또 마침 정월이가 시골 바람이 쐬고 싶다 하고 그래서 그리로 가기로 하였네.」

「참, 부여가 아주 좋다네.」

「그렇다는 걸 나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그 사람이 이야기 를 하는데 꽤 좋은 모양이야.」

「그럼 몇 시에 가려나?」

「아침 9시 차로 가세 그려.」

「그러세 그럼. 우리 정거장으로 만나세.」

「그러세.」

영철은 한참 있다가,

「지금 우리 누이가 제중원에 있는데 병은 다 나았지만 집 으로 가면 다 귀찮다고 거기서 바로 시골로 가겠다고 해서 병원에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보게그려, 물론 옛일은 옛일이지마는 정월을 보아서가 아니고 나를 보아서 한 번만 찾아보게그려.」

하고 농담도 같고 간원도 같고 자기 누이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에서 솟아나오는 것같이 말을 하였다.

선용은 영철에게 정월이의 말을 듣는 것이 그 전과 같이 열렬한 무슨 감동을 주지 못하고 다만 냉소와 함께 희미한 옛기억이 생각되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영철은 선용의 집에서 나와 안동을 넘어 전동 넓은 길로 내려올 때 누구인지 앞에 탁 막아서며,

「이 주사 나리 어디를 가세요?」

하는 아주 영철의 마음을 유쾌치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 다. 영철이는 땅만 내려다보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깜짝 놀 래어 고개를 들어 치어다볼 때 자기 앞에는 우산을 아무렇 게나 묶어 든 설화 어미가 반가운 듯이 웃으면서 서 있다.

영철도 반가왔다. 설화 어미 그 사람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설화를 생각하는 마음이 영철을 반갑게 하였다.

「오래간만이구료.」

하며 영철은 그래도 웃음을 띠지 않고 냉담한 눈으로 설화 어미를 쳐다보았다.

「요새 재미가 어떻소?」

하고 영철은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고 섰다. 설화 어미는 무엇이 걱정이 되는지 긴 한숨을 한번 휘 쉬더니,

「제 재미야 그저 그렇지요마는 설화가 앓아서 큰일났습니 다, 아마 죽을까 보아요.」

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영철도 그 소리를 듣고 뼈가 녹는 듯한 감정을 맛보고 바로 설화 어미의 얼굴을 쳐 다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만,

「앓아요?」

하고 깜짝 놀랄 뿐이었다.

「네, 바로 이 주사께서 다녀가시던 그날 저녁에 어데인지 다녀오더니 밤새도록 울기만 하고 왜 우느냐 해도 대답도 잊고 그저 죽는다는 소리만 하더니 그 이튿날부터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려.」

하다가 인력거가 지나가니까 한 옆길로 들어서며 또다시,

「그래 1주일이나 되도록 몸이 펄펄 끓고 정신을 잃고 저 렇게 헛소리만 하고 있읍니다 그려. 그리고 언제든지 영철 씨만 만났으면 좋겠다고 날마다 날마다 부르짖으니 이 주사 께서는 그 후에 한 번도 오시지를 않고 댁으로 갈 수도 없 고 또 댁 통 홋수도 알 수 없고 회사에서는 나오셨다는 말 을 들어 거기를 갈 수도 없고 어떻게 만나 뵈올 수가 있어 야죠.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만 하고 내 자식도 아닌 남의 자식을 호강을 못 시키나마 저렇게 기르다가 그것이 죽고 보면……」

하더니 입이 떨리고 눈물 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불쌍해 못 견디겠어요.」

하고 수건으로 눈을 씻으며 목이 메어 말을 채 못 마친다.

영철은 본래 설화 어미를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으로는 알지 는 않았으나 지금 그 우는 꼴을 보니까 한층 더, (너도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나며 지나간 즐거운 사랑의 기억이 새삼스럽 게 눈앞에 보이며 마음이 아주 좋지 못하다.

「그것 안되었구료.」

하고 입맛을 다시며 땅만 들여다보고 섰으려니까 설화 어 미는 누가 볼까 하여 눈물을 씻으면서,

「어떻게 오늘 한 번만 꼭 다녀가세요. 철을 모르는 어린 것이 조금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허물로 생각지 마 시고 꼭 한 번만 와주세요.」

하며 어린애 타이르는 듯 간원하는 듯 말을한다.

영철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그러구료, 그거야 못하겠소?」

하고 구두로 땅을 긁다가,

「지금은 어데를 가는 길이오?」

하며 다시 설화 어미를 쳐다보니까,

「네, 저 의원에게로 약 가지러 가요. 벌써 약값이 얼마인 지를 모르겠읍니다.」

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우산을 두 손에다 모아들고 들었다 힘없이 놓으며 고개를 내두른다.

영철은 지금처럼 설화가 불쌍하고 가련한 생각이 난 적이 없었다. 그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인생의 무상함과 비애 를 느꼈다. 그는 주머니에다 손을 넣더니 10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자, 이것이 얼마 되지도 않지마는 약값에나 보태 쓰시우.」

하고 설화 어미에게 내어 주니 설화 어미는 눈이 둥그래지 며 손을 얼핏 내어밀지도 못하고,

「아, 무엇, 이렇게.」

하고 아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싱그레 웃는다.

「자, 받아요.」

하고 영철은 설화 어미 손에다 그 돈을 쥐어 주며,

「있었으면 얼마든지 주었으면 좋겠지만……」

하였다. 설화 어미는,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하고 그 돈을 받아들고, 「그러면 이따가 저녁에 오시렵니 까?」

하였다.

「그러죠, 이따가 저녁에나 틈이 있을 터이니까. 지금이라 도 갔으면 좋겠지만……」

설화 어미는,

「그러면 꼭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당부를 하고 또 당부를 하고 저쪽으로 엉덩이를 만족 한 듯이 내저으며 가다가는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지 생각하 며 종로를 향하여 걸어가는 영철을 두어 번 돌아다본다.

영철은 설화 어미에게 그 소리를 듣고는 참으로 가슴이 괴 로웠고 설화가 불쌍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를 만나자는 소리 가 무엇보다도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리고 어제까지 설화를 원망한 것이 나의 잘못이나 아닌 가 하는 후회의 마음이 반의심과 함께 자꾸자꾸 난다.

그리고 설화가 자기에게 그렇게까지 한 것이 설화 자신의 본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깥의 모든 경우가 설화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고 설화를 동정하는 호 의로써 생각을 할 때 어린 계집아이가 험한 세상에 부대껴 가며 헤매고 고생하는 가슴 쓰린 처지를 생각하며 영철 자 신의 가슴이 쓰린 듯하였다. 그리고 병에 쪼들려 신음하는 자기의 사랑하는 누이동생에게 향하는 애정과 같이 설화에 게도 따뜻한 애정이 향하여 갔다. 그리고는 설화 자신이 나 에게 그렇게 하였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모든 죄악이 설화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하는 생각이 나며 세 상 모든 것이 저주하고 싶도록 원망스러웠다.

설화 어미는 약을 지어 가지고 설화가 당장에 살아나는 듯 이 춤출 듯이 좋아서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마루 위에 섰던 설화를 보러 온 연옥이가 설화 어미를 보 더니,

「아주머니, 어데 갔아 오세요?」

하며 반가와한다.

「의원한테 갔다 온단다. 아이그.」

하고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씻으며 마루 끝에 가 벌떡 주 저앉아 이제는 할 일을 다하였다는 듯이 가슴을 내려앉히며,

「언제 왔니?」

하고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며,

「설화야, 설화야. 영철씨가 오신단다. 인제 정신을 좀 차 려라, 정신을 좀 차려.」

하고 하얗게 여윈 설화가 힘없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곁 으로 가까이 가서 설화의 가는 손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며,

「설화야, 설화야, 정신을 좀 차려.」

하면서 설화 어미가 설화를 깨우려 하니까 곁에 있던 연옥 이가 이 말을 듣더니,

「어데서 만나 보셨어요?」

하니까 설화 어미가 설화를 들여다보고 있더니, 연옥을 돌 아보며,

「오늘 마침 이 주사를 만났어.」

하며 신통한 일이나 한 듯이 신이 나서 말을 한다.

연옥이도 신기한 듯이,

「어데서요?」

하였다.

「마침, 전동 길을 올라가려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 를 숙이고 내려오겠지, 그래 앞에 가서 이주사 어데 가세 요? 하였더니 깜짝 놀래어 나를 보고 재미가 어떠하냐고 그 래 내가 설화가 앓는다고 말을 하였더니 아주 미안해하는 듯하더니 주머니에서 돈 5백 냥을 꺼내 주며 약값에나 보태 어 쓰라고 나를 주기에, 어떻게 하나, 웬 떡요 하고, 받아들 고 오늘 한 번 다녀가라 하였더니 이따가 꼭 오마고 하였어.」

「정말 올까요? 그이가.」

「꼭 온댔어. 아주 단단히 다짐을 받았으니까 오기야 올 터이지.」

연옥은 의아해하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있다. 설화는 고개를 부시시 돌리더니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힘없이 바라보며,

「언제 오셨어요?」

하고 자기 어머니에게 향하여 괴로운 중에도 반가이 말을 한다.

「오, 지금 막 온 길이다. 자 정신을 좀 차려라, 오늘 이 주사가 오신단다.」

「네? 이 주사라뇨?」

하고 설화는 단념한 가운데에도 얼마간의 기대하는 의심을 가지고,

「거짓말, 그이가 무엇하러 와요. 그이는 아니 와요.」

하며 다시 얼굴빛이 그윽한 죽음의 나라를 바라보듯이 처 량하고도 일종의 비애의 빛을 띤다.

「정말야. 이따가 꼭 오시마고 하였어.」

「아녜요.」

하고 곧이듣지 않는 듯이 고개를 담벼락 쪽으로 향한다.

「그애 남의 말은 턱도 듣지 않네.」

하며 설화 어미는 답답해하니까, 옆에 있던 연옥이가,

「참말이란다. 아까 어머니께서 만나 보셨단다. 그리고 그 이가 약값까지 10원을 주고 이따가는 꼭 오마고 하였단다, 정말야.」

하고 설화를 믿도록 타이른다.

「정말?」

하고 그래도 시원치 못하게 설화는 힘없이 말을 한다.

「그래, 정말예요. 이따가 보려무나.」

설화의 마음은 아주 낙망으로 단념하였었다. 그래도 속으 로 이 영철을 만나 보았으면 하는 기대의 마음이 없지 않았 었다. 그러나 지금 이 영철이가 자기를 위하여 돈까지 주고 또 이따가는 자기를 찾아온다는 말을 들을 때에 여러 날 병 으로 인하여 기운이 다하여 모든 것이 모기장을 친 것같이 분명치 못하고 희미하게 보이는 가운데 그 말소리가 연옥이 나 자기 어머니의 말과 같지 않고 꿈속에 무슨 아지 못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자기에게 그것을 알려 주는 듯하여 설 화는 하늘의 도와 주심이나 무슨 신(神)의 예감(豫感)같이 생각하였으나 그것을 단단히 믿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진정 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믿고, 바라고 또는 기꺼움을 바깥으로 표현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다만,

「그이는 오지 않아요. 오지 않아요.」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이 점점 어두워서 갑갑한 어둠이 온 방안으로 가득 찰 때 그는 아주 견디기 어렵도록 가슴이 졸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모든 소리가 다 이 영철 의 발자취 소리같이 들리고, 자기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 올 때마다 눈을 뜨고 쳐다보았으나 반가운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 기대하는 대로 모든 것은 자기에게 낙망과 비 애를 줄 뿐이요 아무것도 없었다. 7시 반이 넘었다. 그때 설 화는 한 시간 동안은 기다려도 쓸데 없다 하고 조금 마음을 진정하였다. 그때에는 영철이가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래 밥을 먹고 전차를 타고 나를 보러 오려 면 한 시간은 걸리리라 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간 8 시 반이 되어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다만 설화 어미가,

「웬일일까. 8시가 넘었는데, 꼭 온댔는데.」

하는 소리가 자기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변호하는 듯 이 때때로 마루 끝과 마당에서 들릴 뿐이었다.

9시, 10시, 11시, 12시가 지났다. 영철은 오지 않았다. 설 화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졸이는 마음이 홱 풀어지며 다른 사람 보지 못하게 눈에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는 당장에 죽고 싶었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루 저녁을 바꾸어 하루 낮으로 만들어 놓았다. 병원 정문으로 아침 10시가 넘어 선용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발을 옮겨 놓았다.

선용이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 병실 문간을 들어가, 층계를 올라갈 때에 어떤 젊은 간호부가 혈색 좋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상냥스럽게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선용이가 모자 를 벗고,

「말씀 좀 여쭈어 보겠읍니다.」

하니까,

「네, 무슨 말씀예요.」

하고 대답을 한다. 선용은 병원에 오기만 하면 자기가 동 경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생각이 나며 또 간호부를 볼 때 마다 자기에게 친절히 하여 주던 그 일본 간호부 생각이 난다.

오늘 이 상냥한 간호부를 처음 볼 때에는 일본 있는 간호 부보다 아주 어여쁘고 부드럽게 생겼구나 하다가 처음으로 그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는 보통 다른 여자보다 사람과 많 이 만나고 익힐 기회를 가졌으므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다른 여자보다 상냥한 점이 있기는 있으나 일본 있는 그 간호부보다는 아주 못하고나 하였다.

「저 이 정월씨가 어느 방에 계신가요?」

「네, 이 정월씨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더니 저쪽 귀퉁이 일등 병실로 들어갔다 나오며,

「이리로 오세요, 지금 머리가 좀 아프시다고 드러누워 계 신데 그대로 들어오시라고요.」

「네. 그러면 이것을 좀 일어나시거든 드려 주세요.」

하고 명함을 꺼내어 간호부를 주며,

「무엇 누워 계신데 들어갈 것은 없지요.」

「그러면 잠깐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하고 간호부는 다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선용은 그대로 가려 하다가 다시 자기의 명함을 보고 들어 오라는 말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은 이상한 호기심이 일어 났다. 그리고 으레히 자기를 들어오라고 하렷다 하는 추측 이 맞은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였다.

선용은 정월의 병실로 들어갔다. 공중색(空中色) 야회를 바 른 고요하고 정결한 병실이 너무 가볍게 쓸쓸하다. 방안에 는 약냄새가 가득 찼다. 선용은 웬일인지 두근거리는 감정 을 진정키는 어려웠다. 방안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이 다 자 기를 원망하고 애소하는 듯하고 모두 죽음으로 향하여 가는 듯하였다.

하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정월은 무엇을 명상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죽은 듯하게 누워 있었다. 선용이가 천천히 걸 어 조심스러운 듯이 방 한가운데까지 들어오도록 정월은 알 았는지 몰랐는지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의 수척한 가슴을 덮은 흰 홑이불 위로 그의 심장이 팔딱팔딱 속하고 높게 뛰 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또는 목이 마른 듯이 때때로 침을 삼켰다.

견디기 어려운 반가움과 원망과 비애와 또는 한 옆에서 타 오르는 피로(疲勞)한 정욕이 그의 가슴속에 있는 염통을 고 조(高調)로 뛰게 하고 또는 초민(焦悶)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뜻 선용을 맞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같이 들어 온 간호부가 가만히 정월에게 선용의 들어옴을 말함에, 그 는 그때야 겨우 눈을 뜨고 고개를 돌이키며 가까이 선 선용 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만히 뜨고 바라보는 힘없는 두 눈이 그윽하고 그리운 빛을 나타내는 것이 선용의 마음을 푸른 헝겊으로 싸는 듯이 불쌍하고 눈물이 날 듯하였다.

선용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의미 있는 듯이 예를 하였 다. 정월은 아무 소리 없이 눈으로 답례를 하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 할 때 그의 풀어진 옷고름 가로는 파리한 가 슴과 조그마한 유방(乳房)이 어여쁘게 내다보이었다. 그리고 풀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쪽진 머리 채는 그의 왼쪽 어깨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선용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어,

「좀 어떠하십니까? 오랫동안 뵈옵지를 못하여서…… 그대 로 누워 계시지요.」

「네, 매우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무정한 저를 찾아 주시니.」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네? 정월씨는 저에게 무정히 하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도리어 제가 오랫동안 찾아뵙지 를 않았습니다. 생각지를 않았어요. 제가 도리어 정월씨에게 무정히 하였습니다.」

「천만에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와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까지 하시는 것은……」

하고 정월은 아무 소리가 없었다.

선용은 그 옆에 놓여 있는 테이블 위를 보았다. 거기에는

<비너스>여신의 조각(彫刻)의 사진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선 용이 이것을 볼 때 어찌함인지 그 여신이 정월과 자기와의 사이를 다시 이어주는 듯하였다.

간호부는 나갔다. 조용한 방 한가운데는 말하기 어려운 사 랑의 향내와 애끊는 비애, 원망의 냄새가 엉켜 가득 찼다.

방안의 모든 것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 두 사람의 이야기 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하였다. 정월은 다시, 선용씨,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영원히 떠나지 않으면 안될 까요?」

하였다. 정월의 가슴은 생시를 꿈이라고 인정하려는 듯이 모든 것을 부인(否認)하려면 부인할수록 더 똑똑하게 모든 것이 부인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였다.

선용이가 이 말을 들으며, 그의 여신의 머리털 같은 부드 러운 머리털과 한없는 정욕을 일으키는 그의 흰 젖가슴이 반쯤 풀어진 옷 사이로 내다보이는 것과, 얇은 홑옷을 통하 여 따뜻한 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그의 전 육체의 윤곽을 볼 때 그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정은 한때에 눈물날 듯 한 정욕으로 화하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월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을 때 에 선용의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것은 3년 젖 옛날에 영도사 시냇가에서 처녀인 혜숙의 손을 잡던 기억이었다. 그때에는 눈물날 듯한 환희(歡喜)와 희망을 깨달았으나 지금 이 정월 의 손을 잡을 때에는 눈물이 철철 흐를 듯한 비애와 낙망 속에서 헤맨다.

「정월씨,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네? 아무것일지라도 우 리 두 사람의 사랑을 정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용은 점점 그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정월의 매 끄럽고 가벼운 몸을 자기 가슴으로 가까이 하였다. 선용은 두려운 가슴과 함께 정월의 육체에 따뜻하고 녹는 듯한 아 름다움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영원히 정월의 몸을 놓지 말았으면 할 뿐이었다. 정월도 얼마간은 아무 소리 없 이 가만히 있었다.

「놓세요. 놓세요.」

정월은 양심의 가책(苛責)을 받는 죄수와 같이 선용의 손에 서 자기가 손을 빼려 하며 눈에서는 쉴새없는 눈물이 흐르 면서,

「놓세요. 네? 놓세요. 저는 선용씨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요. 어서 돌아가세요. 저는 다만 선용씨에게 대한 죄인으로 일평생을 지내갈 따름입니다. 자, 어서 가세요.」

하고 그대로 침상 위에 엎드려 자꾸 운다.

선용은 아무 소리 없이 정월의 우는 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우지 마세요. 자, 저는 가려 합니다. 그러면 내일 정거장 에서 만나시지요.」

선용은 방문을 나섰다. 선용의 몸은 떨리며 한옆으로는 피 가 와짝 식어 버리는 듯이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간호부가 자기를 유심히 보는 것이 아주 얼굴이 홧 홧하여지는 듯하였다. 그가 층계를 내려와 다시 정월의 병 실 유리창을 쳐다볼 때에는 창장(窓帳)에 매달려 눈물을 씻 으며 돌아가는 자기를 바라보는 정월이가 힘없이 서 있었 다. 선용은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 정문을 나섰을 때에 비로소 다시 일본 있는 그 여학생을 생각하였다.

영철이가 설화 집에 가기는 다음 날 오정이 거의 다 되어 서였다. 설화 어미는,

<왜 어저께 오지 않았느냐?>

는 듯이 영철을 바라보며,

「왜 오늘야 오세요?」

하며 무슨 낙망이나 한 듯이 시름없이 말을 한다. 그의 두 뺨에는 눈물 방울이 얼룩져 있었다. 영철은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네, 마침 시골서 친구 하나이 찾아왔어요……」

하고 서투르게 말을 하였다.

영철은 설화의 집까지 오면서 다만 생각한 것은 진정으로 내가 설화의 누워 있는 자리 옆 가까이 가게 되면 설화는 벌떡 일어나 나의 목을 끌어안고 한껏 울어 주었으면! 그러 면 나도 울 터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한곳 에 한꺼번에 섞여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또다시 헤어 졌던 사랑이 다시 만나게 될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는 으레 그렇게 되리라 하였다. 설화는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 다고 자기의 어머니는 나에게 말을 하였다. 그러면 또다시 그 사랑을 잇기가 무엇이 어려우리요 하였다.

영철이 오래간만에 설화의 집에 들어와 보니까 모든 것이 반가운 듯하고 모든 것이 그리운 듯하였다. 그리고 그전 같 으면 자기를 보고 문을 열어젖뜨리고 웃음을 띠고 반갑게 맞아 줄 설화가 다만 고요하고 조용한 미닫이 한 겹 가린 저 방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영철의 가슴은 말 할 수 없이 섭섭하였다. 그리고 설화는 박명한 미인이로구 나 하는 동정하는 마음이 온 전신의 뜨거운 피를 식히는 듯 이 쏴 흘렀다.

그러나 영철이가 설화의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설화가 영철의 고개를 끌어안고 못 견디어 울음을 울어 주 지 않았다. 다만 힘없고 고요하게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 이었다. 영철은 설화의 손을 잡고,

「설화 나요. 설화, 설화.」

하며 그의 여위고 날씬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으나 설화는 아무 소리가 없었다. 영철은 갑갑하고 속이 타는 듯이,

「설화 나요, 설화, 나요.」

설화의 몸을 흔들었으나 설화는 아무 소리 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설화 왜 대답이 없소? 네? 왜 대답이 없어요.」

설화 어미는 눈물을 흘리며 설화의 근심에 쌓인 듯이 푸르 게 찡그린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설화야, 영철씨 오셨다. 네가 날마다 부르던 영철씨가 오 셨다. 왜 말이 없니, 응, 영철씨가 오셨어.」

그러나 설화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머리맡에 놓여 있는 시계가 고요한 침묵의 흐르는 세월을 한가하게 세고 있을 뿐이었다.

설화 어미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설화야, 설화야. 왜 대답이 없느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고 우는 얼굴로 설화를 깨운다.

그러나 설화는 다만 때때로 고개를 돌아누우며 혼몽한 가 운데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영철의 가슴은 공연히 답답하였다. 그리고 웬일인지 모든 것이 귀찮은 듯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자기를 보면 반가이 맞아 줄 줄 알았던 설화가 불러도 대답이 없이 누워 있는 것이 아주 원망스러웠다. 또 설화 어미가 눈물을 흘리고 우 는 것이 아주 보기 싫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을 무엇이 콱 찌르는 듯하더니 갑자기 원망과 싫은 생각이 일어나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어, 나는 가겠소.」

하고 방문 밖으로 나왔다. 설화 어미는 다만,

「왜 그렇게 가세요?」

하고 설화의 파리한 얼굴만 정신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 리고 영철의 돌아간다는 것이 그리 섭섭하거나 그리 큰일이 아닌 듯이 문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가는 인사 처럼 영철에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

「저 설화가 혹시 정신을 차리거든 내가 다녀갔다는 말이 나 하시오. 그리고 내일은 시골로 갈 터이니까 또 만나 보 기는 어렵고 시골 다녀와서 만나 보자고 하더라고 그러시 오. 그리고 오늘 왔다가 말 한 마디도 못한 것을 매우 섭섭 하다고 그래 주시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화의 집을 나왔다.

영철은 오늘 설화의 집에 온 것이 아주 유쾌치 못한 인상 을 받았다 하였다. 도리어 쓰리고, 아프고, 아찔한 슬픔을 맛보고 가는 것보다도 못하게 영철은 오늘 설화의 집에 온 것이 더럽고 원망스럽고 힘없이 누워 있는 푸른 설화의 얼 굴이 아주 얄밉게 보였다. 그리고 죽거나 살거나 당초에 만 나 보지 않으리라 하였다. 또 어저께 설화 어미가 행길에서 자기를 보고 설화가 자기를 만나 보겠다고 헛소리를 하였다 는 것이 얼굴이 간질간질한 거짓말같이 생각된다. 그리고 오늘 설화를 찾아온 것이 자기가 무슨 희망을 품고 요행을 바라고 온 듯하며 다시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영철은

「영원히 만나지 않을 터이다.」

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고 고개를 진저리치듯 내흔들었다.

영철이 설화의 집에서 나온 지 30분이 못 되어 설화는 겨 우 잠깐 눈을 뜨고 사면을 둘러 보았다. 그 옆에는 다만 설 화 어미가 눈물을 흘리고 정신없이 앉았을 뿐이었다.

「어머니.」

하고 설화는 시름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영철씨가 안 오셨지요?」

「오, 설화야 이제 정신을 차렸니! 지금 영철씨가 다녀가셨 단다.」

「네! 정말예요?」

하고 드러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려하며 반가운 듯이 눈망울 을 굴리다가 다시 힘없이 자리에 누우며,

「거짓말이지요. 그이가 왔을 리가 없어요. 왜 왔으면 나를 깨우지 않았어요? 네? 어머니, 거짓말이지요? 네. 거짓말이 지요?」

하고 설화는 자기 어머니에게,

「거짓말이지요?」

소리를 무슨 요행이나 바라는 것같이 자꾸자꾸 한다. 설화 는 영철의 왔다 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그것을 부인하면 서도 자기 어머니의 입에서 정말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싶 었다.

「정말이다. 그가 왔다 간 지가 반 점 가량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면 왜 나를 깨우지 않으셨어요? 네? 정말이에요?」

「정말이란다. 그런데 암만 흔들어도 네가 깨지를 않는 것 을 어떻게 하니?」

설화는 힘없는 손을 벌벌 떨면서 자기 어머니의 팔에 매달 리며,

「정말에요? 정말 그이가 다녀갔어요? 네? 네?」

하며 괴로운 듯이 간절히 물어 본다.

「그래! 정말야. 정말 다녀갔어.」

설화는 아무리 하여도 그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면 왜 제가 보지를 못하였을까요?」

하며 혼잣소리처럼 말을 하고 다시 배게를 베고 드러누우며,

「그이가 왜 그렇게 속히 갔을까요?」

하였다.

설화 어미는 말소리를 조금 담담스러운 듯이,

「글쎄 네가 깨지 않는 것을 어찌하니?」

하며 기막힌 듯이 말을 한다. 설화는 아무 소리 없이 천장 만 바라보고 힘없이 누워 가슴이 쓰린 듯한 감상(感傷)과 함 께 비애(悲哀)를 맛보았다. 설화 어미는 다시,

「그이가 내일 시골로 떠난다나, 그래서 다녀와서 만나 보 자고 그러더라.」

하고 눈물을 씻으며 한옆으로 물러앉는다 이 소리를 듣는 설화는 미쳐 날뛰고 싶었다.

여윈 월계꽃의 사라져 가는 향내와 같은 고요하고 그윽한 침묵(沈?)이 온 방안을 물들이고 있다.

설화는 덮은 이불을 귀찮고 갑갑한 듯이 다리로 툭 차서 허리에 반쯤 걸리게 하고 노곤하게 두 팔을 가슴 위에 올려 놓으며, 고개를 돌이켜 담벼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여 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그의 해쓱한 두 뺨으로 대르륵 굴러함께 흰 요 위에 한 방울 한 방울 똑똑 떨어져 차디차게 흰 요만 적신다. 그리고 까만 두 눈을 깜짝할 때 마다 방울방울 굵다란 눈물이 거꾸러질 듯이 쏟아져 나온 다. 그리고 때때로 온몸을 사르는 듯한 한숨에 떨리는 가벼 운 소리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늘게 떤다.

설화는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공허(空虛)함을 깨달은 일이 없었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쉴 때라도 그는 언제든 지 만일의 요행한 줄기를 믿었으므로 오늘날까지의 가늘고 우습고 불쌍한 생명을 이어 왔었다. 다만 보이지도 않고 들 리지도 않는 미래(未來)라는 컴컴한 시간의 짧은 마디(節)를 꾸밀 자기의 생(生)의 장래에게 속임을 당하며 살아야 하겠 다 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보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고 또는 아무것도 없는 미래에게 속고 또 속아 오늘까지의 생 을 계속하여 왔으나 지금 이 영철이가 자기를 위하여 참으 로 자기 집까지 왔다 갔는지, 왔다 가지를 아니하였는지 그 것을 의심하는 동시에 또 자기 어머니의 영철이가 시골로 떠나갔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모든 것은 텅 비어 버리고 보 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미래(未來)에게 속았던 어리석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은 공허(空虛)이다. 누워 있는 그에게는 온 우주가 적막히 빈 듯하였다. 우연히 태어난 설화, 한 개의 생의 경 로(經路)는 아주 행복스럽지 못하였으며 아주 처량하였다.

다 같은 생을 향수(享受)하여 똑같은 인생의 한 마디를 채우 는 설화의 생(生)에는 꽃도 없고 웃음도 없고 향내도 없고 무르녹는 그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눈물과 한숨 과 비애와 유린(蹂躪)의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고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러하나 다만 그 짧고도 짧은 1년 동안이 넘을락 말락한 영철 사이의 꿀 같은 사랑 속에 살던 그 시간뿐이 설화의 생(生)의 또다시 없는 다만 한 마디 또 짧고 또 짧은 유열(愉悅)과 참 생(生)의 짧은 마디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낱 잠꼬대와 함께 사라져 없어지는 꿈과 같이 어디로 갔는가? 없어지고 말았다. 조물(造物)의 코웃음 치는 한때의 희롱인지는 모르겠으나 설화에게는 자기 생의 모든 것이 다 비었다 한 것보다도 더 큰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영철은 살아 있다. 이 땅 위에 살아 있다. 영철의 생은 그 육체로 세차게 돌아가는 혈액의 순환과 함께 뚜렷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설화의 생은 영철이 설화에게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모든 것을 주었다가 도로 찾아가는 듯이 설화 의 가슴속을 텅 비게 하는 동시에 설화의 싱싱하고 기뻐 뛰 는 뜨거운 생은 풀이 죽으려 하고 힘없이 쓰러지려 하며 미 적지근하게 식으려 한다.

설화는 모든 것을 공허로 생각하고 미래를 캄캄한 어두운 밤보다도 더 까맣게 보고 어둡게 생각하는 동시에 고요한 침묵 속에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을 때에 푸른 입술을 해쓱한 이로 악무는 가운데에도 괴로운 웃음을 웃지 아니치 못하였다.

설화는 다만 이 순간을 두고 지나가고 닥쳐오는 과거와 미 래가 비참하고 캄캄함을 깨달았을 때 우연히 태어났다 우연 히 사라지는 자기의 생을 우연에게 맡기지 못할 만치 마음 이 괴롭고 답답하였다. 절로 나고 절로 살고 절로 죽는 인 생의 지나가는 길을 자기의 가는 손으로 애닯게 끊어 버리 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 무슨 만족을 주는 듯하고 그렇게 아 니할 수 없을 만치 생(生)의 의미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답답하였다. 그리고 목은 자꾸자꾸 타 는 듯하였다. 그리고 미칠 듯이 가슴이 저리고 쓰리며 쉴새 없는 눈물이 쏟아져 흐르며, 박명하고 비참한 자기의 지나 간 반생(半生)의 역사를 돌아다볼 때마다, 모든 것이 그립고 무량한 감개가 자꾸자꾸 쏟아져 올라오며 비록 쓰린 감정을 맛보던 그때라도 도로 한번 그때가 되었으면 하였다.

그러다가 영철과 자기 사이의 꽃다운 사랑의 역사를 생각 할 때면 더욱더욱 영철이가 그립고 어디로인지 간지를 모르 는 영철의 뒷그림자를 그대로 쫓아가 옷깃을 붙잡고 다시 옛적과 같이 되어 달라고 간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애를 극(極)하고 감상이 뭉친, 때없이 부르던 각 종 노래의 간장을 녹이는 듯한 구절구절이 생각될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처량하고 슬펐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을 그대 로 말하여 놓은 듯하여 더욱 비애로왔다.

설화가 한참이나 울다가 고개를 돌이켜 자기 어머니가 멀 거니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때 그 눈물 흘리는 것 이 어째 자기가 또다시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려는 것을 아 까와하여 우는 것같아서 그의 가슴은 미칠 듯이 섭섭하고 온 세상이 좁아드는 듯하였다. 그래 그는 목멘 소리로,

「어머니 왜 우세요?」

하며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여 흘리면서 자 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니다. 어째 눈물이 나오는구나.」

하고 설화 어미는 눈물을 씻어 설화의 마음을 위로하려 하 였으나 참으려 하면 참으려 할수록 더욱더욱 눈물이 복받쳐 쏟아졌다.

설화 어머니와 설화 두 사람은 다만 아무 소리 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하며 참으려고 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아무 소리 없이 바라보는 그 침묵 속에는 보이지 않 고 들리지 않는 무슨 영(靈)이 꼼지락꼼지락 하는 것이 있었다.

10십 분은 지나갔다. 설화의 눈앞에는 또다시 비참한 얼굴 로 쓸쓸히 자기를 돌아다보는 영철이가 보인다.

설화는 전신을 병마(病魔)에게 쪼달림을 당하여가는, 사지 를 버틸 수 없이 피폐(疲弊)함을 깨달으면서 영철의 있는 곳 으로 당장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는 아주 갑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려 하였 으나 전신을 무엇이 잡아당기는 듯이 조금도 일어나 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낙망하듯이 자리에 덜컥 드러누우며,

「어머니, 어머니.」

하고 어머니를 다시 부르며 괴로움을 못 견뎌하는 목소리로,

「영철씨를 또 한번만 오시게 하여 주세요 네? 지금요, 얼 핏요, 네! 어서요, 시골 가시기 전에 꼭 한번만 만나 뵈옵게 요! 꼭 한 번만요.」

하며 간절히 자기 어머니에게 애소하고 어리광부리듯 말을 한다.

설화 어미는 갑갑하여 하는 듯이,

「어데 가서 오시라고 하니? 집을 알아야지.」

하며 주저주저 한다.

「왜 몰라요. 동대문 밖이라는데요. 그리고 계동도 그이 집 이 있다는데요. 네? 어머니, 꼭 한 번만 더 청해 오세요.」

설화는 영철을 만나 모든 지나간 일을 조금도 숨김 없이 다 말을 하고 전과 같은 사랑을 또다시 이을 수가 있을까?

하는 만일의 요행과 영철을 그리워하는 견디기 어려운 정 (情)으로 영철을 또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영철을 만나 지 못하면 당장에 죽을 듯이 마음이 괴로웠다.

이때 누구인지 사내 목소리로 바깥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났다. 설화 어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 면서 설화의 얼굴을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고 귀를 기울여 바깥에서 또 한번 부르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부르는 소리는 또 났다. 설화 어미는 무엇을 알아챈 듯이 벌떡 일 어나 바깥으로 나가더니,

「이리로 들어오세요.」

하며 그 손님을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들어오는 사람은 도수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근 40이나 된 의사였다. 날마다 오후며는 한 번씩 오는 의사는 오늘도 여전히 설화의 병을 보러 왔다.

의사는 설화의 체온(體溫)을 검사하고 맥박을 보았다. 그리 고 어제서부터 오늘까지의 경험을 물어 보았다.

설화는 드러누워서 의사가 하라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의사의 얼굴을 그전보다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화는 오 늘 어찌함인지 다른 날과 같지 않은 의사의 얼굴 기색을 찾 아내게 되었다. 의사의 얼굴은 어제나 그저께보다 너무 냉 연한 듯한 빛이 보이는 듯하고, 너무 침착한 빛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전보다 아주 잠깐 사이 설화를 진찰하 고 바깥 마루로 설화 어미를 따라나갔다. 그리고 돌아나가 다가 다시 한 번 돌아다볼 때 그 의사의 얼굴에는 무슨 낙 망하는 빛이 보이는 듯하였다.

어제까지는 설화가 그래도 자기의 생을 위하여 그 의사를 믿고 그 의사가 오기만 하면 자기의 피곤한 생(生)이 다시 기뻐 뛰는 듯이 반갑더니 오늘은 그 의사의 일동일정을 볼 때에는 웬일인지 시덥지 않은 듯한 생각이 난다.

그때의 설화의 머릿속으로 살같이 지나가는 것은, (그러면 나는 더 살지를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 의사가 비록 입으로는 그러한 말을 하지는 않지마는 너무 냉연하고 너무 침착하고 낙망하는 듯 한 빛이 그의 얼굴에 있는 듯한 것을 볼 때 설화는 모든 것 이 절망이라는 선고(宣告)를 그 의사에게서 들은 듯하였다.

그리고 의사와 설화 어미가 마루끝에 내려서며 무엇이라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자기의 죽음을 설화 어미에게 미리 가 르쳐주는 소리와 같이 들리며 온 전신의 피가 해쓱하게 마 른 듯하고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었다. 그리고는 속마음으 로는, (나는 죽는 사람인가?) 하였다.

두서너 시간은 지나갔다. 그날은 어두워 저녁이 되었다.

설화가 또다시 혼몽한 가운데서 눈을 떴을 때에는 방안이 어둑컴컴한 저녁의 쓸쓸스럽고 침침한 저녁이 회색빛 어둠 이 온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설화는 온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영철이가 와 앉았지나 아니한가 하였다. 그러나 설화가 다만 한낱 요행 을 한 줄기의 희망으로 알고 오다가 영철이가 또다시 자기 방에 들어와 앉지 않은 것을 깨달을 때에 이 세상 모든 것 을 다 모아다가 자기 가슴 위에 지질러놓는 듯한 갑갑하고 잠잠함을 비로소 알았으며 그립고 만나고 싶은 영철을 원망 하는 생각이 점점 더하여졌다.

설화는 다만 한순간에 무엇을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온 정신을 무슨 불길이 확 사르는 듯하였다. 또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듯이 눈만 깜박깜박 하며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시계가 11시를 칠 때이었다. 설화는 온몸을 진저리치듯이 벌벌 떨며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자기 어미가 하루 종일 자기의 병구완을 하다가 이불도 덮지 않고 그대로 콧 소리를 씩씩하며 고단히 자고 있다. 설화는 이것을 볼 때 어째 속마음으로부터 불쌍하고 자기를 위하여 수고 하는 것 이 고마운 듯하고 어려서부터 자기를 길러 주던 것과 다른 기생의 어미와 다르게 자기를 친자식같이 사랑하여 주고 위 하여 준 것을 생각하며 한옆으로 그 주름살이 잡혀 가는 얼 굴에 근심스러운 빛을 띠고 눈물 방울이 두 눈에 그렁그렁 하여 자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히끗히끗한 이마털이 난 머리털을 쓰다듬어 가며 그의 홀부드러운 두 뺨에 자기의 뺨을 비비어 주고라도 싶었으나, 그가 깰까 두려워하는 설 화는 다만 물끄러미 그의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다가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한참이나 느껴 가며 울었다.

그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힘없는 팔로 머리맡에 놓여 있는 벼룻집을 가까이 집어다놓고 종이를 펴며 또다시 자기 어머 니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무엇을 쓰려 하다가 기가 막히는 듯이 그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또다시 느껴울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붓대를 움직거리었다.

사랑하는 영철씨 저는 가나이다.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갈 곳으로 가나이다. 마음과 같이 되지 않는 세상에 이것도 또한 팔자로 돌려보내고 청산에 뜬구름 같은 이 세 상을 하직하고 보이지 않는 저 나라로 돌아가나이다.

《영철씨, 모든 것은 꿈이었지요. 한없는 장래를 꽃답게 꿈 인 줄 알았던 우리 두 사람은 그 가운데 약수 삼천리, 깊고 또 깊고, 길고 또 긴 강물이나 막힌 듯이 서로 만나보지 못 하게 된 것도 모두 다 한세상 났다가 사라지는 우리 사람의 한때 운명이지요.

영철씨, 영철씨, 영철씨, 저는 또다시 영철씨의 가슴에 고 개를 대고 영철씨 하고 부끄러운 듯이 불러보고 싶지마는 그것도 또한 한 개의 공상이 되어 버렸나이다. 영철씨, 저는 또 무엇이라 하지 않으려 하나이다. 다만 시골서 올라오시 어 제가 이 세상에 있지 않는 줄을 아시거든 적막하고 쓸쓸 한 묘지에 새로이 생긴 붉은 흙이 덮인 무덤 위에 영철씨의 따뜻한 눈물일지라도 한 방울 떨어뜨려 주세요.

여기까지 쓰다가 설화는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틀 어박으며 미칠 듯이 울었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썼다.

영철씨, 그리하고 그 무덤 속에 소리 없이 누워 있는 설화 는 세상에 났던 불쌍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아 주세요. 저의 몸은 비록 지금 사라져 없어지지마는 저의 가슴에 맺힌 사랑의 씨는 영원토록 영철씨를 위하여 무궁한 세월과 함께 언제든 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아 주세요.

영철씨 저는 가나이다. 그러면 이후 언제든지 저세상에서 반갑게 만나 뵈올 것만 한자락의 즐거움으로 저는 영원히 가나이다.

아 영철씨 저는 가나이다.

이 영철씨》 김 설화 재배?

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정성스럽게 착착 접어서 자리 밑 에다가 놓고 한참이나 멀거니 담벼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함을 깨닫고 무의미함을 깨달은 설 화는 영철과 자기 사이에 또 다시 옛적과 같은 아름다운 사 랑의 꽃다운 생활을 아무리 하여도 갖지 못할 것을 깨달은 그는, 자기 마음속에 감추고 감추어져 있는 사랑을 죽음으 로써 영철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죽어 묻힌 자기의 쓸쓸한 무덤이 비록 아무 말은 하지 않을 지라도 영원한 침묵 속에 자기가 품고 있던 귀하고 또 귀한 사랑의 애끊던 정을 영철에게 애소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홱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리 밑에 접어넣은 그 유서를 다시 꺼내어 눈물 고인 눈으로 한참 들여다보다가 힘없이 그 옆 에 놓여 있는 성냥을 들어 그 종이 한 귀퉁이에 불을 붙였 다. 얇다란 종이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올라붙는 불꽃 속 에 춤추는 까만 재가 되어 설화의 흘린 눈물 흔적과 함께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아, 설화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으로 돌아 가면서 오히려 공연한 이 세상에 미련(未練)을 남겨 두는 것 이 참으로 어리석음을 그 순간에 깨달았다.

설화는 죽는다. 영원한 우주의 아무 소리 없는 침묵 속에 차디차게 안긴다. 죽음에는 다만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 하고 아무 희망이나 요행이 그 죽음을 더 아름답게 하지 못 하며 꽂답게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니, 아름다움이나 꽃다 움이라는 것이 조금도 그 죽음이라는 것을 간섭할 수 없었다.

시계가 차디찬 새벽 공기를 울리고 2시를 쳤을 때에 목메 인 설화의 죽음을 아랫목 요 위에 하얀 이불을 덮어 놓았는 데 그 옆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넋을 잃고 울고 동리집 홰에 서는 세월이 또 있음을 길게 부르짖는 닭의 소리만 가늘게 들리더라.

날이 밝은 그 이튿날 남대문 정거장 부산으로 향하여 가는 급행열차 이등차에는 영철과 정월과 선용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배웅 나온 사람으로는 선용의 육촌 누이 경희 한 사람이 수건으로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씻고 섰을 뿐 이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정월은 기차가 떠나갈 시간이 되어가면 되어갈수록 가슴속 에 불안함을 깨달았다. 그는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누 구인지 오기를 기대하였다.

기차가 움직거리기를 시작할 때 경희는 수건을 둘러 편안 히 가기를 축수하고 선용은 모자를 둘러 잘 있기를 빌었다.

정월은 그때 섭섭한 기색을 얼굴에 띠고 자기 오라버니를 쳐다보며,

「그이는 어째 안 왔을까요?」

하며 좋지 못한 얼굴을 한다. 정월은 자기 남편인 백 우영 을 만나 보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이 섭섭하였다.

기차가 대전 정거장에 이르기까지 정월과 영철과 선용 사 이에는 별로이 담화가 교환되지 않았다.

이제는 영철과 정월이 선용을 떠날 때가 되었다. 기차가 점점 가만히 정지하기를 시작할 때 선용과 정월과 영철 세 사람은 분주히 일어서면서도 서로서로 얼굴을 유심히 들여 다보았다. 정월의 얼굴에는 거의 울듯울듯한 기색이 보이며 다만 그 기차가 완전히 정지하는 시간이 너무 속한 것을 애 달프게 생각하듯이 머뭇머뭇 주저주저한다.

그러나 기차는 섰다. 영철은 선용과 끓는 피가 돌아가는 손을 단단히 마주잡았다. 그리고 염연하고 비창하고 우정이 스며나오는 듯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자조자조 편지나 하게.」

하고 영철은 선용의 손을 놓고 바깥으로 나아간다. 선용은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영철을 쫓아나가며,

「또 언제나 만나 볼는지 알 수 없겠네그려.」

하고 또다시 정월을 바라보았다. 정월의 두 눈에는 어느덧 반짝반짝하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세 사람을 싸고 있는 공기는 다만 고요한 침묵 속에 바르 르 떨 뿐이었다.

기차는 또 떠나간다. 다만 선용 한 사람이 남아 있는 듯이 쓸쓸한 기차는 또 떠나간다.

창 밖에 서 있는 영철과 정월은,

「잘 가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애끊는 떠남의 인사를 할 때 선용은 다만 모자를 내 어흔들며,

「잘 있게.」

「안녕히 계세요.」

하고 아무 소리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월은 선용의 탄 기차가 점점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뜨 거운 눈물을 더욱더욱 흘리며 쫓아나갈 듯이 선용만 바라보 고 섰다.

선용의 눈에는 눈물이 나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는 인생의 모든 비애를 혼자 차지한 듯이 한없이 울고 싶었다.

죽기보다도 어려운 것은 애인을 이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용과 정월은 사랑의 희망을 다른 망막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언제 만날지도 모르고 영원히 떠나간다.

다른 애인 같으면 장래에 닥쳐올 꽃다운 생활을 한 줄기의 희망으로 오히려 쓰린 가슴을 위로하겠지만 선용과 정월은 어느 것 하나 희망이 없는 이별을 하는 것이다. 병에 구박 (驅迫)을 당하여 산간수변(山澗水邊) 정처없이 헤돌아다니는 정월이며 만날지 못 만날지 아지도 못하는 그 여학생을 쫓 아가는 선용이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목메인 소리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애끊는 인사 를 할 때 선용은 또다시 그 일본 동경 정거장에서 자기를 따라오던 여자를 생각하고 그 여자에게 보내임을 당한 청년 을 한없이 부러워하였으나 지금 자기가 똑같은 정거장에서 같은 애인에게 보내임을 당할 때에 그 떠나임을 당하는 것 이 한없이 쓰리고 미칠 듯이 비애로운 것을 비로소 알게 되 었다.

점점 점점 작아지는 기차 그림자는 사라졌다. 이것을 바라 보고 섰던 정월은 힘없이 영철의 팔목에 고개를 대며,

「오라버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괴로운 가슴을 쥐어짤 듯이 눈물을 흘리며 가까스로 영철에게 끌리어 정거장에 나섰다. 그리고는 다시 푸른 하 늘에 한 줄기 연기가 떠도는 저쪽을 다시 돌아다보았다. 저 쪽 산 모퉁이를 돌아가는 기차 소리만 가늘게 뛰 할 뿐이다.

영철과 정월을 실은 목포(木浦)가는 기차는 줄기차고 세차 게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간다.

기차가 산골짜기를 돌아나가는 컴컴한 굴 속을 지나갈 때 정월은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며 무엇하러 가는지를 아지 못하였다. 다만 몇 시간 동안 자기의 몸을 기차에게 맡겼으 니까 그 기차가 실어다 주는 곳까지 가나 보다 하는 몽롱한 의식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저께까지 1천 년 전 백제(百濟)의 옛도읍이던 부여 (夫餘)를 구경할 것이 무슨 무한하고 기꺼운 희망을 자기 눈 앞에 갖다 놓는 듯하여 부질없이 기꺼운 마음을 진정치 못 하면서 백마강(白馬江) 낙화암(洛花岩)의 아름답고 꽃다운 이름만 입으로 외며 가보지 못한 그곳만 머릿속에 마음대로 그리어 보았더니 남대문 정거장에서 자기 남편인 백우영이 가 불쌍하고 가련한 자기가 다만 며칠 몇 달일지라도 몇 백 리 바깥으로 떠돌아가는 것을 와서 잘 다녀오너라 말 한마 디 하여 주지 않던 것을 생각하고 대전 정거장에서 인제 만 날지 생전 만나 보지도 못할는지도 알 수 없이 떠나가는 선 용을 보낼 때 자기 마음이 미칠 듯이 섭섭함을 깨달은 그때 부터 그는 모든 것이 무미(無味)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왜 이 기차에 몸을 실리어 어디로 무엇 하러 가며 가서는 무엇하며 가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 였다.

그는 백 우영이가 자기를 정거장까지 나와 주지 아니한 것 이 자기를 냉대(冷待)하는 것같이 생각되며 자기가 시골로 떠나가는 것이 시원해하는 것같이 생각되며, 백 우영을 야 속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자기의 파경(破鏡)의 원망을 생각하 여 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월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 는 모든 의심을 힘있고 굳세게 부인(否認)하려 하였으며 내 리 누르려 하였다. 그리고 온 정신에까지 힘을 주어 진저리 치듯 온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일어나는 의심과 누르려 하 는 도덕적 양심이 싸우는 그의 머릿속과 가슴속은 그리 편 치는 못하였다. 그리하고 또 한편으로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선용을 생각하는, 눈물이 날 듯하고 가슴이 쓰린 듯이 애모 (哀慕)의 정이 그의 모든 희망과 호기(好奇)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오늘날에 자기가 한낱 박행(薄倖)한 여 자로구나 하였다. 처녀 때에는 자기가 미인(美人)이라고 스 스로 자랑하던 그는 오늘 와서는 자기의 박행을 생각할 때 그 미인이란 말을 생각해 보기만 하여도 눈물이 날 듯이 마 음이 섭섭한 듯하고 애달픈 듯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처녀 시대로 돌아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났다.

그는 자기 옆에서 자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감고 고 개를 뒤에 기대고 고요히 앉아 있는 자기 오라버니의 얼굴 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정월은 그 자기 오라버니의 얼 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회색(灰色)의 근심스러운 듯한 빛이 가만가만 살금살금 돌아가는 것을 볼 때 그는 언제든지 흐 릿한 의심을 품고 있었으나 오늘 지금 이 기차 안에서 그 얼굴을 들여다볼 때 그는 또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는 듯 그의 머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컴컴하여지는 듯하였다.

그는 몇 십 일 전에 기생 설화를 속이던 것이 생각되며 또 는 자기의 마음과 비추어서 설화와 자기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근심스러운 얼굴을 억지로 펴려고 애쓰는 자기 오라버니의 가슴속의 괴로움을 혼자 마음속으 로 가만히 동정하였다.

그러나 어질고 착하다는 정월은 자기 오라버니를 위하여 사람 중의 하나인 설화를 속인 것이 자기의 양심을 기껍게 함을 깨닫기는 하면서 그것이 또한 죄악인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다.

기차는 어느덧 두계(豆溪) 정거장에 닿았다. 역부의 <뚜계 뚜계>하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의 가만한 공기를 살살하게 울릴 때 영철은 어느덧 감았던 눈을 뜨고 기차 창 밖을 내 다보며,

「벌써 두계인가?」

하였다.

기차는 또 떠나간다. 오른편 저쪽에 있는 시꺼먼 산이 슬 슬슬슬 떠나가는 듯하다. 영철은 정월을 돌아다보며,

「저 산이 계룡산이란다.」

하고 그 검은 산을 가리키었다. 정월은 무슨 수지격이나 듣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네, 그래요?」

하며 다시 그 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거무스름하고 울퉁불퉁한 산이 서울서 보던 회색빛의 삼각산이나 송음이 울울창창한 남산같이 다정스러운 듯하고 품안에 안길 듯이 그립지는 못하고 다만 옛날 장사(壯士)의 시꺼먼 털이 거치 럽게 난 팔뚝과 같이 위엄있고 굳세이고 보기 싫게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계룡산이란 조선의 명산이라는 것은 학교다 닐 때에 지리 시간에 선생에게 배워 들은 정월은 저 산속에 는 절(寺)도 많고 물도 좋으려니 하였다.

그리고는 송낙 쓰고 지팡이 짚고 한가한 걸음으로 산 모퉁 이를 돌아가는 여승(女僧)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였다. 그 래 자기도 이 세상 모든 부질없는 데 얽매인 것을 한꺼번에 끊어 버리고 구름 같은 검은 머리털을 썩뚝썩뚝 깎아 버리 고 죽장망혜로 산속에나 들어가 애달픈 일생을 한가이 지내 보는 것도 좋으려니 하여 보았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부질없는 공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 다. 그렇게 자기가 여승이 되어 어떤 암자(庵子)에서 한적한 세월을 보낸다 하자. 그러다가 몇 해가 지났든지 세월이 지 나간 때의 일본 간 선용이가 유명한 문학자가 되어 조선의 유명한 명산 대찰을 구경하려고 자기가 있는 그 암자를 지 난다 하면 그때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할까? 맑게 흐 르는 샘 옆에서 물을 뜨고 있다고 하자. 그래 선용씨가 나 인 줄을 아지 못하고 목이 말라 물을 조금 청한다 하면? 나 도 오래간만에 그를 보고 그이도 나를 그렇게 되어 있을 줄 은 아지 못함으로 그대로 지나가는 한낱 나그네 모양으로 그대로 지나가 버릴 테지! 그러면 만나고도 서로 아지를 못 할 것이지 하고 다시 안타까운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정월이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때에 자기의 이때껏 생각한 것이 한낱 공상에 지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혼자 생긋 웃었다. 영철은,

「무엇이 그리 우스우냐?」

하고 따라서 웃음을 지으며 물어 보았다. 정월은 다만,

「녜」

할 뿐이었다.

정월은 그동안 잠깐 잠이 들었다 깨었다. 얼마 아니되어 기차가 넓고 넓은 벌판으로 달아난다. 영철은 흥분(興奮)이 되어서,

「여기다 여기다.」

하였다.

「여기가 황산(黃山) 벌판이란다. 옛날에 백제가 망할 때에 당(唐)나라 장수 소 정방(蘇定方)이 신라(新羅) 김 유신(金庾 信)과 힘을 합하여 부여(夫餘) 성을 쳐들어옴에 백제 장수 계백(階伯)이 다만 군사 5천 인을 거느리고 이 황산 벌판에 서 싸울 때에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을 당하게 되니 나라의 존망(存亡)은 알 수 없으 나 나의 처자가 원수의 종이 되거나 또는 그 욕을 당하는 것은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마침내 처자를 제 손으로 찔러 죽이고 이 땅에 진을 치고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를 맞 아 사합(四合)이나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는 곳이란다.」

하고 감구(感舊)의 회포가 그의 얼굴에 가득하여 거치러운 벌판들만 내다본다.

「네…… 그래요.」

하고 정월은 다만 고개를 끄덕거리며 또한 바깥을 내다보 았다.

정월이는 이 소리를 들은 후에는 참으로 의기(義氣)의 마음 이 가슴을 버티는 듯하더니 누엿누엿 넘어가는 저녁 해가 붉게 비친 이 옛 전장에 시석(矢石)이 나는(飛) 소리와 달리 는 말굽 소리가 천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오히려 들 리는 듯하고 보이는 듯하다. 그러다가는 다시 그 쓸쓸하고 거치러운 벌판을 또 자세히 내다볼 때에는 부러진 칼을 옆 에다 끌고 처자의 혼백(魂魄)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는 옛 장 수 계백의 원망을 품은 혼이 푸른 공중에서 힘없이 돌아다 니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또다시 몇인지 그 수를 알 수 없는 뜻 있는 나그 네가 이 거칠고 보잘것없는 벌판을 지날 때마다 애끊는 옛 생각과 안타까운 눈물로써 그 외로운 혼백을 조상하여 주었 으렷다 하였다. 그리고 또 이후 백 몇 천의 길고 긴 세월을 두고 그와 같은 아름다운 조상을 받으렷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만일 그때에 그 계백이 그대로 죽기만 하였더라 도 지금 그와 같은 애끊고 안타까운 눈물의 조상을 받지는 못하려니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처자를 자기의 손으로 찔러 죽여 그 뜨겁고 붉은 피가 흐르는 칼을 그대로 들고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오늘날 그의 죽음이 아름다운 죽 음이라는 것이겠지 하였다.

정월은 비로소 죽음에도 아름다운 죽음이 있음을 알았으며 또는 역사(歷史)라는 것은 죽음의 기록이 아닐까? 하였다.

기차는 논산(論山)에 닿았다. 그날은 그곳에서 지냈다.

이튿날 아침 풀 끝에 맺힌 이슬이 사라지기도 전에 영철과 정월은 자동차로서 부여를 향하여 떠나갔다. 그전 같으면 심신(心身)의 피로함을 많이 깨달았을 터인데 정월도 오늘에 한적한 시골의 회색 안개를 헤치고 떠오르는 붉은 햇발이 즐겁게 모들 것을 내리비치는 것을 볼 때 그의 마음은 부질 없이 흥분이 되어 그리 고단하거나 피로함을 깨닫지를 못하 였다.

자동차는 달려간다. 다만 정월과 영철을 실은 자동차가 물 이 고인 논두렁을 지나고 깎아질린 산비탈을 돌아가고 나무 가 옆으로 늘어진 곧은 길을 달려가고 회색 연기가 자욱하 게 오르는 초가집 동리를 돌아보고 서늘한 바람을 헤치며 힘있게 달려간다.

정월은 붉은 흙이 덮인 먼산을 바라보며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는 벌판을 내다보고 깨어진 질그릇 조각을 덮은 조그 마한 촌가를 볼 때 마치 자기가 몇 천 년 전 옛날에 살아 있는 듯한 생각이 난다. 그리고는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가슴이 뭉클하고 푸르스름한 감구(感舊)와 감상(感傷)의 몽 롱한 감정(感情)이 그의 가슴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그리할 즈음에 어느덧 성평(城平) 광평(光平) 원봉(圓峰) 석 두(石頭)의 여러 다리(橋)를 지내어 증산교(증山較)를 지나 골짜기 하나를 나서니 행로가 잠깐 구부러져 원형(圓形)을 그린 듯 하다. 능산교(陵山橋)를 지나가니 능산리(陵山里)라.

길 옆 산모퉁이에 석곽(石槨)이 많이 노출(露出)되어 있다.

이것은 백제 공후장상(公侯將相)의 무덤이라 한다.

당시의 부귀와 화사(華奢)가 쓸쓸한 산모퉁이의 우둘투둘한 흙덩이 속에 바람에 씻기고 눈비(雪雨)에 갈리어 다만 헐벗 은 비렁뱅이 옷과 같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비죽비죽 내밀 려 있고 귀하고 위엄 있었던 육체가 누워 있던 그 관 속은 앙상한 촉루(??)나마 어디로 갔는지 한 귀퉁이가 깨어지고 부서져 으스스하고 보기 싫게 쾅 뚫려 있을 뿐이다.

정월은 이것을 볼 때 짧고 짧은 인간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그 사이에 때없이 변하고 덧없이 바뀌는 인생의 무상(無常) 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하고 또다시 그 부귀와 영화를 혼자 누리던 공후장상 도 죽어지면 산 한 모퉁이 귀떨어진 바위 옆의 흙덩어리가 되어 이리 굴고 저리 굴러 비에 씻기고 바람에 불려 어디로 갔는지 간 곳도 모르게 사라져 없어진 것을 생각하고 보지 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그 옛날을 생각해 보매 인생이란 그 러하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하고 또다시 지나가는 나 그네의 애끊는 회포를 자아내는 그 옛무덤을 돌아보고 또다 시 역사란 죽음의 기록이 아닌가? 하였다.

또다시 월경(月境) 오산(烏山) 금성(錦城)의 여러 다리를 건 너 백제의 왕릉(王陵)을 지나 사 자성(泗疵城) 동문(東門)터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아침 영철과 정월 두 사람은 그의 친구 이 봉하 (李鳳廈)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부여 옛성의 고적과 경치 를 구경하러 나갔다.

먼저 평제탑(平濟塔)에 왔다. 석조(夕照)가 아니라 오정이 채 못된 뜨거운 아침이었다.

거치러운여름 풀이 터(攄)도 없는 왕흥사(王興寺) 넓은 터 를 채우고 있는데 아침 저녁 들려 오던 땡땡 하는 절 종 (?

鍾) 소리는 구름 밖에 영원히 사라졌는지 한없는 우주에 가 득 찬 <에텔>을 가늘게 울리면서 자꾸자꾸 멀리멀리 가는지 다만 물 끝으로 지나가고 지나오는 가는 바람에 연하게 떨 리는 소리가 정월의 서 있는 구두끝에서 바슬바슬할 뿐이다.

정방(定方)이 백제의 옛 천지(天地)를 한칼에 쑥밭을 만들 어버리고 백강(白江)의 푸른 물을 붉은 피로 물들이더니 정 방이 한번 그의 육각(肉殼)을 땅속에 장사하매 지금 남은 것 은 다만 쓸쓸하고 거치러운 부여 옛터의 서너 조각 돌덩이 가 오고 가는 바람에 씻기어 떨어지는 석양(夕陽)의 술취한 햇빛만 쉬지 않고 비칠 뿐이다.

세 사람은 다시 발을 돌이켜 부소산을 향하여 갔다. 영월 대(迎月臺)와 군창(軍倉)의 옛터를 지나 푸른 소나무 사잇길 로 사자루를 향하여 걸어갔다.

정월은 가만한 시골의 가는 바람과 연하고 부드러운 고도 (古都)의 공기와 일종(一種) 감상 추억(感傷追憶)의 그윽한 회포를 자아내는 동시에 모든 피곤함을 잊어버릴 만한 흥분 을 그의 식어가는 핏속에 다시 불질러 주는 듯하였다.

그는 그저께 대전 정거장에서 선용을 떠나보낼 때에 그의 가슴에 받은 애끊이고 섭섭한 비애가 그날 종일 또 그 이튿 날 종일 그의 마음을 못살게 굴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처녀 가 장래를 공상하는 듯이 즐거운 희열(喜悅)을 깨닫는 듯하 였다. 그리하고 따뜻한 별이 좁은 산길을 내려비치어 반짝 반짝하는 모래 위에 비쳐있는 자기의 틀어얹은 머리 그림자 와 자기 전신의 검은 윤곽이 웬일인지 자기의 마음을 만족 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달음질하고 싶었다. 멀리 쳐다보이는 사자의 높은 누 각(樓閣)이 자기를 부르는 듯하고 그 아래 꽃 같은 궁녀가 귀여운 몸을 그 왕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깊은 사자수(泗 疵水)에 덤벙 던졌다는 그 낙화암(洛花岩)이 얼른 보고 싶었 다. 정월은 만일 자기 옆에 자기 오라버니와 자기 오라버니 의 친구가 있지만 않으면 하나 둘 셋을 부르고 줄달음질하 여 달려가고 싶었다.

정월과 영철과 봉하 세 사람은 상긋한 소나무 냄새와 누르 스름한 흙 냄새를 맡으며 사자루로 향하여 갔다.

조금 있다가 땅에 비친 정월의 그림자가 희미하여지더니 뜨겁게 따뜻하던 햇빛이 금새 거무스름하여진다. 정월은 아 주 유쾌치 못하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시꺼먼 구름 한 덩어리가 눈부신 해를 심술궂게 가 리어 버린다. 여태까지 푸른 수정(水晶)빛 같은 하늘빛이 온 공중을 물들이던 것을 아주 답답한 검은 빛으로 변하여 버 리었다.

정월의 그 즐겁고 경쾌하던 마음은 그 햇빛을 가리는 그 시간에 아주 답답하고 캄캄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다시 모든 것이 싫은 듯하고 공연히 성가신 듯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껏 울고 싶을 만큼 비애로운 생각이 났다.

그는 또 답답하고 컴컴하고 성가신 듯하고 비애로운 생각 이 가슴속에 뭉쳐 있는 동안에 또다시 자기가 지금 어디를 가며 무엇하러 가나? 하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1천년 전 옛날에 아홉 겹(九重) 궁궐 속에서 임금 님의 사랑을 받아 가며 꿀맛 같고 취몽(醉夢)같은 생활을 하 여 가던 여어쁜 궁녀들이 캄캄한 어두운 밤에 연한 발에 신 도 신지 못하고 얇은 홑옷 하나만 몸에다 두르고 원수들의 욕을 면하기 위하여 불붙는 궁궐을 빠져나와 지금 바로 자 기 걸어가는 이 길 위로 발에 피를 흘리면서 거꾸러질 듯이 도망하여 가던 것이 보이는 듯하고 그 모래가 깔린 길바닥 에 연한 발끝이 터지고 얼크러져 뚝뚝 떨어진 핏방울이 여 태껏 남아 있는 듯하였다.

정월은 다시 오던 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자기가 왜 가고 무엇하러 가는지 아지 못하는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불붙는 궁궐에서 애처로운 우는 소리를 내며 원 수에게 쫓기어 임은 어디로나 가신지도 모르고 쫓겨가는 그 궁녀들과 같이 자기도 지금 그 무엇에 쫓기어 지금 이 눈물 깊은 이 길로 쫓겨가는 것이나 아닐까? 하였다.

그는 어느덧 사라루에 왔다. 영철은 모자를 벗어들며 다만,

「어…… 시원하다.」

할 뿐이다.

여태껏 봉하하고 영철하고 여기까지 걸어오며 역사에 대한 이야기와 이 시골 고유한 풍습과 경치를 말한 것이 많지마 는 정월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정월은 사자루 꼭대기 누각으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망망한 넓은 들에는 수채화(水彩畵) 그린 듯한 갓익은 보리밭에 누르스름하고 푸 르스름한 밭고랑의 그은 듯한 줄기가 이리 가고 저리 갔을 뿐인데 지평선(地平線)이 보일 만큼 넓지는 못하나 멀리멀리 허리굽은 산등성 머리 위에는 뭉게뭉게 눈같이 흰구름이 눈 이 부시게 피어올라올 뿐이다.

정월은 동쪽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선용을 생각하였다. 보 이지 않는 선용이 저 구름 밑에는 있으려니 하였다. 그리고 너무 고요하고 한적한 그곳에서 생각을 하니 고함을 질러

<선용씨> 하고 부르짖으면 그 목소리가 그 넓은 벌판을 울 리어 가서 그 흰 구름 밑에 있는 듯한 선용의 귀에 들릴 듯 하였다.

그리고 선용이가,

「네, 나는 여기 있읍니다.」

하고 대답을 하여 줄 듯하다. 그리고 또 아무도 없으면 기 껏 울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되지 않을 일이라는 인식(認識)이 그의 마음 한귀퉁이에서 밉살스러운 듯이 조소(嘲笑)를 할 때 공연히 그는 그 옆에 있는 사람들 에게 트집을 하고 싶었다.

백마강 푸른 물은 사자루 낙화암을 돌아 미끄러지는 듯이 수북정을 거쳐 부여성을 에워싸고 흘러간다.

사면을 돌아보니 칠백 년 창업이 초등 목수의 피리 소리에 부쳐있고 구리기둥 구슬박은 재(?)나마 남겨 놓지 않고 사라 져 없어졌다.

정월은 고란사(皐蘭寺)로 향하여 내려가려 하였다. 길은 꼿 꼿하고 미끄러질 듯이 내리질리었다. 그리고 바위는 험상스 럽게 내밀려 있다. 정월은 발을 구르며 두 팔을 벌리고서서,

「에그 여기를 어떻게 내려가요. 저는 못 가겠어요. 저는 도로 올라가요.」

하며 도로 올라가려 한다.

영철과 봉하는 그대로 웃고 서서 내려오려다가 도로 가려 는 정월만 쳐다보고 섰다.

「내려와, 그대로 가다니? 낙화암은 보지 않고 갈 테야?」

정월은 낙화암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험한 길을 내려 가기는 어려웠다. 정월은 다시 올라가던 발을 멈추고 자기 오라버니만 바라보다가 어리광부리고 원망하듯이 미소를 띠며,

「그렇지만 내려갈 수가 있어야지요. 험한 데를……」

하다가는,

「그러면 저를 좀 붙잡아 주세요. 자요, 자요.」

하며 영철에게 안길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백마강 의 푸른 물은 눈앞에서 얼룽얼룽한다. 영철은 다시 올라와 정월의 손을 잡고 가만가만 끌어내린다.

바윗길은 깎아지른 듯하다. 정월은 냉수나 퍼붓는 듯이 느 끼는 것처럼 <에그어머니 에그머니>를 부를 뿐이다. 낙화암 위로 가는 길은 내어놓고 고란사로 통한 좁은 언덕길을 내 려간다. 정월은 겨우 발이 붙을 만한 곳에 와서는 시원도 하고 그 옆에 있는 봉하가 부끄럽기도 한 듯이 한숨을 내쉬 고 고개를 내려깔며 불그레하여 생긋 웃었다.

고란사에 내려왔다. 조룡대(조龍臺)가 보인다.

옛날 고란사에는 고란(皐蘭)이 전과 같이 맑은 샘물 위에 푸르게 나 있고 조룡대 옛바위는 주인을 볼 수 없다. 절에 서 잠깐 쉬고 맞추어 놓은 배를 기다려 백마강 푸른 물에 둥실둥실 떴다.

낙화암이 눈앞에 보인다. 거치러운 풀이 군데군데 나 있는 바위 아래에는 검푸른 물결이 여울져 흘러간다.

정월은 낙화암을 쳐다보았다. 거치러운 바위에는 아지랑이 같은 궁녀의 홑치맛자락이 여태껏 걸리어 있는 가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듯하고 검은 머리채에서 뚝 떨어져 굴러떨 어지는 옥차(玉차) 소리가 아직까지도 낭랑 정정히 들리는 듯하다.

그리하고 옥 같고 대리석(大理石)같이 고운 살이 얼크러지 고 터지어 빨간 피가 지금도 흐르는 듯하다. 그리하고 그 푸른 물 속에는 아직까지도 그 머리털이 어른어른하고 고운 육체의 부드러운 윤곽이 선명히 보이는 궁녀들의 죽음이 떠 나가지 않고 그대로 떠 있는 듯하다.

아 말없는 낙화암에 두견(杜鵑)의 피가 얼마나 흘러 있고 넘어가는 석양은 몇 번이나 붉었는가? 고란 옛절의 녹슨 풍 경 소리만 오고가는 바람에 한가이 울 뿐이다. 정월은 옛날 에 죽은 궁녀는 여태껏 살았구나 하였다. 그 몸과 그 혼은 사라져 없어졌으나 몇 만 사람 몇 천의 뜻이 있는 손이 그 곳을 지날 때마다 1천여 년 전 옛날에 이곳에서 죽은 그 궁 녀를 각각 그 머릿속에 그려 볼 것이며 그를 위하여 가는 창자를 끊었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오늘날에 그 궁녀를 위하여 애끓는 생각을 하며 몽클한 감상(感傷)을 맛보는구나 하였다. 그리고 이후 몇 해 후에 일본 간 선용씨도 이곳을 구경타가 나와 똑같은 감상을 맛보려니 하였다.

그러다가 선용을 생각하니 어째 다시금 마음이 좋지 못하 며 그립고 원망스러운 생각이 났다.

그러면 이후 몇 해 후에 선용씨가 이곳을 지날 때는 몇 천 년 옛날에 죽어간 궁녀는 생각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에 이 이 자리를 거쳐간 이 정월은 생각하지를 못하렷다 하였다.

배는 천천히 떠나간다. 갑자기 찬바람이 홱 치고 지나간다.

정월은 갑자기 그 바람을 마시어 기침이 시작된다. 자꾸자 꾸 복받친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하였다. 뱃전에 쭈그 리고 앉아 가래침을 토하였다. 각혈(?血)이 자꾸자꾸 된다.

새빨간 피는 물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만히 퍼져간다.

정월은 가슴이 괴롭고 아프면서도 그 피가 물 위에 떨어지 는 것을 보고 선용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붉은 피는 사 라지지도 말고 흐르지도 말았으면 하였다. 언제든지 언제든 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낙화암 아래 떠돌다가 쳐 해 후에든지 이곳으로 선용을 실은 배가 떠나갈 때 이 붉은 피 를 보고 내가 여기 다녀갔던 것을 알리어 주었으면 하였다.

그러다가는 그 피가 실오라기처럼 되어 점점 가라앉아 버 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그 피를 붙잡으러 물속으로 들어가 고 싶었다.

영철은 파랗게 질린 정월의 얼굴과 사라져 없어지는 그 붉 은 피를 번갈아 보며,

「인제는 좀 괜찮으냐?」

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물어 본다.

「네, 괜찮아요.」

하고 정월은 가까스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는 아직까지도 그 선용을 생각하는 마음과 사라져 없어져 가는 붉은 피의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바로잡고 찡그린 얼굴로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 소리가 없었다. 돌아다보니 옛것이 아니언마는 부소산 꼭대기에 외로이 서 있는 사자루의 외로운 그림자가 구름 밖에 떠돌아 공연히 섭섭한 회포를 던져 준다.

이때 측은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봉하가,

「오늘이 음력 며칠인가?」

하였다. 영철은,

「열흘이지.」

하였다.

「그렇지 열흘이지? 그러면 우리 며칠 있다가 달떨어지는 것 구경을 가세.」

「그것 참 좋은걸.」

「좋고말고, 푸른 달이 은싸라기를 홱 뿌린 듯이 번득거리 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은 참 좋아.」

「그러렷다. 참 좋으렷다.」

하는 소리를 정월은 그 옆에서 들었다. 그리하고 그 얼마 나 델리킷 함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흡사히 푸른 스피릿 (精)의 시체(?)가 가라앉는 것 같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그 것이 얼른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그 달 떨어질 때에 그 것을 보는 듯이 자기 머릿속에 추상을 하여 보았다.

온 강물 위는 아주 고요하렷다. 작은 별들은 눈이 부실 듯 이 깜박깜박하렷다. 은하(銀河)는 더욱 맑게 보이렷다 하고 푸른 달빛은 온 세상을 천사의 홑옷 같은 빛으로 물들이렷 다. 먼 산과 가까운 수풀은 회색빛이 싸여 희미하게 보이렷 다. 저편 마을 집 뚫어진 창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만이 붉게 보이렷다. 그리고 잔잔한 물결이 가볍고 가늘게 춤을 출 때 그 속으로 그 푸르고 찬 달이 스스로 들어가렷다. 아 얼마 나 아름다운 경치일까?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렷다 하였다.

배도 자꾸자꾸 술렁술렁 떠나간다. 자온대(自溫臺) 수북정 (水北亭)을 구경하였다.

그날 저녁이었다. 세 사람은 10시가 넘도록 서로 앉아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한다.

정월은 그전보다는 그리 졸음을 깨닫지는 못하였으나 몸이 조금 피로함을 깨달았는지 두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 다가 한 손을 입에다가 대고 가만히 하품을 하였다. 봉하는 하던 이야기를 뚝 그치며,

「졸리신가 봅니다그려!」

여자라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무엇을 결심이나 한 듯이 영철을 보고,

「그러면 나는 안방으로 건너가겠네. 일찍이 쉬게.」

하고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건너가려 하니까 정월은 그래 도 내가 꽤 튼튼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듯이,

「무얼요, 괜찮이러요. 더 앉아서 노시다가 건너가시지요.」

하기는 하였으나 얼핏 드러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나서 참 말로 건너가거라 하는 듯이 봉하를 쳐다본다. 영철도 따라 서 일어선 봉하를 쳐다보며,

「천천히 건너가게그려.」

한다. 그러나 봉하는 다시 앉지 않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영철도 졸음이 오는 모양이다. 두 팔을 펴고 기지개를 하 더니 하품을 크게 하였다. 그리고 폈던 두 손을 턱 무릎 위 에 내려놓으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데 불그레한 눈에 눈 물 방울이 핑 돌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끔적끔적하며 눈물 을 들여보내버리었다.

정월은 꽤 졸린 모양이다. 윗목에 자리를 펴 자기 오라버 니를 누으라 하고 아랫목에는 자기가 자리를 깔았다. 그리 고 베개를 바로 놓고 침 뱉을 타구를 베개머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어서 주무세요.」

하고 자기는 옷을 벗고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영철은 무슨 궁리나 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 옆에 놓여 있던 책을 뒤적뒤적하고 앉아 있으면서,

「어서 자거라, 나는 천천히 잘 터이니.」

하다가 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불 편 위에다 두 다리 를 뻗고 드러누워 두 손을 깍지를 끼어 머리를 베고 천장만 바라보며 눈만 껌벅껌벅한다.

방안은 고요하다. 환하게 켜 있는 램프불만이 때때로 발발 떤다.

영철은 조금 있다가 자기 누이동생을 둘러보았다. 정월은 어느 때에 쉴는지 아지 못하는 가는 숨소리를 고달프게 내 며 힘없이 고개를 저쪽 담벼락으로 향하고 잔다. 그의 힘줄 이 뻐드름한 파리한 목과 때때로 신경적으로 꼼질꼼질하는 뼈만 남은 손이 영철에게 몹시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나 게 하며 그 낙화암 아래서 피 토하던 생각을 다시 하게 한 다. 영철은 한참이나 자고 있는 정월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 갑한 듯이 고개를 홱 돌리며 상을 잠깐 찌푸리고 입맛을 다 신다.

어느 때나 되었는지 정월이 한잠을 자고 나서 눈을 떴다.

아직까지도 램프불이 꺼지지 않았다. 정월은 희미하게 보이 는 눈을 채 똑똑히 뜨지도 못하고 자기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여태껏 안 주무셨어요?」

하고 몸을 뒤쳐 돌아누웠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대답은 있 지 않았다.

정월은 다시 눈을 부비고 자세히 자기 오라버니를 돌아보며,

「오라버니 주무세요」

하였다. 오라버니는 아무 소리도 없이 이불도 덮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저쪽으로 향하고 누워 있을 뿐이다. 정월은 자기 오라버니가 자는 줄 알았다. 그래 가까이 가서 흔들어 깨워 이불을 덮고 자게 하려 하였다. 그래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오라버니에게로 가까이 갔을 때에 자기 오라버 니는 자는 것이 아니었다.

영철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의 뺨을 씻어 흘러 떨어지고 있 었다. 영철은 우느라고 자기 누이의 친절하게 부르는 데도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월은 가슴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쓰린 듯하였다.

그리고 감히 자기 오라버니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왜 우세요?」

하였다. 이 소리를 듣는 영철의 눈에서는 더욱 뜨거운 눈 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대답도 아니하 였다.

정월도 웬일인지 자기 오라버니의 눈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가슴이 무엇을 떠버티는 듯하더니 또한 뜨겁고 잔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진다.

영철은 겨우 고개를 돌려 자기 누이를 바라보더니,

「우지 마라 응, 자…… 어서 자거라.¨ 하며 소맷자락으로 자기 눈의 눈물을 씻는다. 정월도 이 소리를 듣더니 더욱 눈물이 나며,

「오라버니 왜 그렇게 우세요? 네? 저 때문에 그러세요?」

하고 그의 가슴 앞에 엎드러 운다.

「아니다. 아냐. 어째 그런지 이곳에 와서 세상 일을 생각 하니 자연히 슬픈 생각이 나서 울음이 나오는구나. 자,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그러나 영철의 울음은 그렇게 그윽한 감구의 회포나 세상 의 무상(無常)을 탄식하는 뭉클한 심사에서 나오는 울음이 아니었다. 그 무슨 심장을 꿰어뚫는 듯한 참기 어려운 슬픔 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그전 같으면 얼른 눈물을 그치고 자 기 누이를 위로하였으련마는 오늘은 눈물방울을 펑펑 흘리 면서 못 견디는 듯이 몸을 떤다.

「오라버니 정말을 하세요. 왜 오늘은 그전에 볼 수 없던 눈물을 그렇게 흘리세요? 네? 저 때문에 그러세요?」

「아냐.」

「그럼은요?」

영철은 또 요 잠깐 사이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말을 할까 말까 하는 듯이 망설이는 듯 하였다. 영철은 또다시,

「어서 자거라. 응? 어서 자, 내가 공연히 그랬구나.」

하며 자기의 고민과 번뇌를 정월에게 보이지 않으려 하다 가도 마음이 홱 풀어져 모든 것을 다 자백하고 타파하고 싶 은 듯이 힘없는 한숨을 후 내쉰다.

정월은 암만해도 무슨 곡절이 있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 다. 그리고 자기 오라버니가 자기의 불쌍한 것을 생각하고 그리하는 듯하여 자기는 얼핏 죽어서라도 자기 오라버니의 걱정을 없이 하여 주고 싶은 만큼 따뜻한 애정이 그의 가슴 에서 스며나와 온 전신을 한 찰나 사이에 아찔하게 녹여버 리는 듯하기도 하였다.

「말씀을 하세요. 잘 테에요. 네? 말씀을 하세요. 오라버니 가 그렇게 말을 아니하시면 나는 언제든지 가슴이 답답만해 요.」

영철의 전신을 이루고 있는 붉은 근육은 부르르 떨리었다.

그리고 이마를 베개에다 대고 이불 밑에 놓여 있던 신문지 를 꺼내어 정월을 집어 주며,

「이것을 좀 보아라.」

하고 못 견뎌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신문지 삼면이었다. 제목은 미인의 자살이었다.

정월이 이것을 읽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에!」소리를 내 다가 갑자기 뚝 그치었다. 그 기사에는 영철이가 검은 먹줄 을 그리어 놓았었다.

「그것이란다. 그것이란다.」

하며 영철은 무슨 회개를 하는 죄수가 지나간 일을 안타깝 게 생각하는 듯이 거푸 말을 한다.

정월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 는 자기가 설화의 집에 갔을 때 눈물을 흘리던 그 설화가 나타나 보이다가 또 차디찬 주검이 되어 홑이불을 덮고 누 워 있는 그 설화가 보이고 나중에는 그의 혼이 푸른 원망을 품고 둥실둥실 떠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영철의 마음은 아주 단순하였다.

「설화는 죽어갔구나. 설화는 죽어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있지 않았다.

영철은 조금 있다가 눈물을 씻고 한숨을 휘 쉬더니,

「정월아, 인제야 말이지만 나도 그 설화를 무한히 사랑하 였단다. 그러나 그 여자는 돈 있는 사람을 따라가 버리었단다.」

그 돈 있는 사람은 자기 누이의 남편 즉 백 우영이다.

「아…… 그러나 한번 죽어간 그에게 얽힌 지나간 역사는 꾸다가 깨인 꿈과 같이 희미하고 몽롱한 기억을 남겨 버릴 뿐이다.」

하고 단념이나 하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아무 소리가 없 다. 정월은 이 소리를 듣고 어찌 하면 좋을까 하였다.

영철은 설화를 그렇게 생각하나 정월은 설화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자기와 함께 처음 만나보던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던 설화를 정월은 영철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경박한 여자와 같이는 암만하여도 생각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 게 그 여자가 무정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자 기가 자기 오라버니를 위하여 설화를 속인 것이 그 설화를 죽게 한 동기가 되지나 아니하였나 하였다.

그리고 영철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자기를 떠나간 줄 알면서도 그와 같이 마음이 괴로워하는 것은 여태까지 그 설화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또 자살까지 한 설화도 영철을 여태까지 사랑은 하나 정월 자기가 그 설화를 속임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영철을 원망하 고 죽은 것이 아닐까?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 생각할수록 그때 그 설화를 속 인 것이 죄악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난다.

정월은 그러면 그 이야기를 오라버니에게 하여 버릴까? 하 였다. 그러하나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남편에게 멀리함을 당하는 듯하고 선 용이과 영원히 떠나 버리고 또는 몸에 고치지 못할 또는 다 른 사람들이 꺼리어 할 병을 가지고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 지 모든 낙망과 비애 속에서 지나가는 것을 생각하며 자기 가 또한 자기 오라버니와 그 설화 사이의 사랑을 부질없는 걱정으로 끊어 버리게 하고 또는 설화라 하는 그 아름다운 여자를 죽게까지 한 것을 생각하니 자기도 그 설화의 뒤를 쫓아가 설화에게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또는 자기를 위하여 여기저기 자기를 도와 주고 쫓아다니고 애쓰던 오라버니의 마음을 놓게 하고 또 한 가지는 그 이름 곱고 아름다운 역 사를 영원히 전하는 그 백마강 아래에서 언제든지 끊어져 버리고야 말 자기의 생명을 끊어 버리면 이 후에 이곳을 지 나는 선용씨의 애끊는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눈물을 받는 것 이 무슨 아름다운 명예를 자기 몸에 부어줄 것 같았다.

몇 시나 되었는가? 닭은 자꾸자꾸 운다.

영철은 깜박 잠이 들었다 깨었다. 정월의 누워 있던 자리 위에는 이불이 아무렇게나 꾸기꾸기 놓여 있고 정월은 어디 로 갔는지 있지 않았다.

영철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변소에 갔나 보다 하고 얼마 동안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그때 영철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월이가 누웠던 자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연필로 아무렇게나 쓴 정월의 글이 놓여 있었다. 영철은 그 종이를 들고 한참이나 기가 막힌 듯이 멀거니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그는 동리 길거리로 줄달음질하여 걸어갔다. 그러나 정월 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동리집 개는 자꾸자꾸 짖는다.

멀리 저쪽 하늘에 별들만 깜박하였다. 영철은,

「정월아. 정월아.」

를 부르며 정처없이 정월을 찾아 쓸쓸한 옛도읍 거치러운 벌판과 험한 산모퉁이로 이리저리 헤매었으나 어디로 갔는 지 정월은 보이지 않았다.

정월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반짝반짝 춤추는 물결 속으 로 죽은 스피릿(精)이 가라앉는 것같이 정월의 몸은 백마강 물결 속에 들어가 버리었다.

아! 과연 죽어간 정월이 설화의 원혼을 죽음으로 위로할 수가 있고, 이후에 선용이가 이 자리를 거칠 때에 정월의 죽어간 자리를 찾아낼 수가 있을는지?

이 모두 우리 인생이 한낱 환희(幻戱)인 까닭이로다.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