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 팬픽

너와함께..(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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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1. 13:25

이웃추가

“그닥 비싼거 아니야.그러니까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마.”

 

 

 

“비싸지 않아도 상관없어.올해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오빠로 충분한걸?”

 

 

 

내가 혓바닥을 낼름 내밀며 징그럽다는 표정을 짓자 제시카는 그런 나를 보고 웃음을 멈추지 못 했다.

중후한 엔진소리가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난 뒤 나는 액셀레이터를 밞았다.

 

 

 

“각각 원하는 일 2개 중에 이제 너꺼 하나만 남은건가?”

 

 

 

“응.쿠쿠…스티커 사진은 둘 다 너무 망가졌지만 그래도 오빠랑 처음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니 만족하고

오빠 같은 경우에는 두가지 카드를 한꺼번에 써버렸으니…이제 내 차례지!”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날…

제시카에게 크리스마스날 상대방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2가지씩 생각해오기로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인 오늘…제시카는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며

스티커 사진과 함께 핸드폰을 이용해 나와의 흔적을 자신에게 남겼다.

그리고 턴은 나에게 넘어왔고 내가 제시카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저녁식사와 커플링 교환이었다.

제시카와는 한번도 단둘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기억이 없었고 커플링은…증거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 이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래.너가 하고 싶은게 뭔데?”

 

 

 

“그런게 있어.그냥 날 믿고 쭉 따라오라고!!!”

 

 

 

제시카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저어보디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르켰다.제시카의 손짓을 따라 차의 방향을 튼지 30분쯤 됐을 때…어느새 주변의 배경은 아까의 화려한 시내와는 정반대인 어두침침한 골목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참…이거 깜빡했다.크리스마스 선물!”

 

 

 

나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플라스틱 케이스 하나를 꺼내서 제시카에게 건네주었다.

한손에 쥐어지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손에 쥔 제시카는 아까 반지를 봤을때처럼 실눈을 뜨며 신중히 관찰을 했다.

그리고는 케이스를 열고는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그마한 기계의 하단을 꾹 누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리고는 잠시후 혀를 낼름 내밀며 아까 내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우웩!느끼해!이게 뭐야!”

 

 

 

“야!그거 내가 밤새가면서 녹음한건데…어떻게 그렇게 말하냐?”

 

 

 

“그럼 느끼한걸 느끼하다 말하지.와!너무 멋있어!감동이야…이렇게 말해?”

 

 

 

밤새 멘트를 적어 앞으로 5년동안 제시카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녹음해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MP3에 담아놓았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만들어 놓은 것인데…느끼하다고 말하다니…내심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몰라~지우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

 

 

 

그제서야 사태 파악을 한 제시카는…

 

 

 

“에구구구…삐지셨어요?미안해!화풀어!응?응?”

 

 

 

“몰라~근데 넌 나한테 선물 안 줄거야?”

 

 

 

“선물?있지!”

 

 

 

“그럼 어서 줘.”

 

 

 

“집에 있어.”

 

 

 

“집?누구 집?”

 

 

 

“오빠 집!어제 스케줄 끝나고 몰래 산타 할아버지 같이 선물 주고 사라져버렸거든.후후…”

 

 

 

“선물 같은건 본적이 없는데?”

 

 

 

“내가 몰래 숨겨두었지.그리고 오빠의 부끄러워해야 할것도…”

 

 

 

“부끄러워할것?그게 문데?난 너한테 그런 것 없는데?설마 내가 침 흘리고 잤어?뭐지?”

 

 

 

제시카는 말없이 쿠쿡 웃음보만 터뜨리고 있었다.그때 내 뇌리를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으니…어제 녹음작업을 마무리 하면서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들과 메신저를 했다.그리고 그놈들중 한명이 보내온 이상 야릇한 동영상…

 

 

 

“야!그건 내가 받은거 아니야!친구가 일방적으로 보내온거라고!!!”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단순한 경제원리인데…사장이 그것도 모르시나?후후…”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제시카의 촌철살인…오늘 여러모로 제시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나였다.

그렇게 친한 친구 같은 농담을 주고 받으니 어느새 제시카가 선택한 오늘의 마지막 데이트 코스에 도착했다.

제시카는 차가 정차하자마자 뭐가 그렇게 급한지 핸드폰도 두고 내렸다.

나는 제시카의 핸드폰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키를 빼고 차에서 내렸다.

 

 

 

“크리스마스인데 이렇게 어두침침한데를 와야겠어?”

 

 

 

오직 가로등 하나만 거리를 비추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골목길…

제시카가 선택한 마지막 데이트 코스가 이런곳이라니…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제시카는 앞장서서 길을 틀었다.그리고는 어두침침한 골목길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차근차근 걸음을 내디뎠다.

 

 

 

‘신녀의 집?뭐야 이게…’

 

 

 

요란한 붉은 빛 등은 내 눈을 혼란스럽게 하기 그지 없었다.

 

 

 

“이게 뭐냐?”

 

 

 

“점…이제 곧 새해이기도 하고 원래 점 보는거 재밌잖아.”

 

 

 

여자가 점이나 심리테스트 같은걸 좋아한다는건 누나와 엄마를 비롯해 나와 관련된 모든 여자들과의 경험을 통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제시카는 조금 다를까?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제시카 또한 천상 여자였다.

 

 

 

“여기가 그렇게 용하대!”

 

 

 

아까 내가 준 커플링이나 MP3에도 무덤덤했던 제시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것으로 보아

제시카는 꽤나 흥분되고 설레어보였다.드르륵거리는 미닫이 문을 열고는 실내화를 신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제시카는 안에 있는 사람에게 흰 봉투를 건네주고는 의자에 앉았다.

 

 

 

“으…어지간히 비싸네!역시 용한곳이라서 그런가?”

 

 

 

“뭐가 물어보고 싶은건데?”

 

 

 

“흠.,..여러가지 있지.내년에도 일이 잘 풀릴까요?오빠와 저는 궁합이 잘 맞나요?조심해야할건 어떤일이 있죠?등등…”

 

 

 

“흠…그래?”

 

 

 

흔히 말하는 미신 같은걸 전혀 믿지 않는 나로써는 내가 물은 말이지만 그런 성의없는 반응을 보일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한 남녀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 방을 나오는 모습을 보였다.

나와 제시카는 의자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방안으로 들어갔다.

 

음산하기 그지없는 방안…거기에다 사납게 생긴 신녀라고 불리는 중년의 여인까지 음산한 분위기에 한몫 거들었다.

제시카는 이런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더니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뭐 때문에 왔어?”

 

 

 

“네?아…”

 

 

 

제시카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이것저것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하였고 난 묵묵히 제시카의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년 자신의 일과 소녀시대가 어떻게 풀릴지 경청하는 제시카와

열변을 토하며 얘기하는 그 여자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아냐.갑자기 웃긴게 생각나서…그냥 무시하고 계속 얘기 들어.”

 

 

 

내 얼굴에서 웃음끼가 가신 것은 우리둘의 궁합을 알아볼때였다.

사귄지 한달도 안 된 남녀가 무슨 궁합이냐고 제시카에게 질책하였지만

제시카는 오히려 그런 나를 질책하면서 난 즐기기 위한 연애가 아닌 장래까지 생각하는 만남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고

그건 커플링을 준 오빠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론했다.

그리고 그말을 들은 이후 온순히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말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음…”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대는 여자…그리고는 펜을 바닥에 내리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떻게…궁합은 잘 맞나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지 자꾸 입술에 침을 묻히는 제시카였다.

 

 

 

“궁합은 잘 맞지도 않고 잘 안 맞지도 않고 그래.”

 

 

 

“네?”

 

 

 

“너희 궁합은 그냥 평이해.둘 사이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단,조심해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요?”

 

 

 

“바로 여자…그것도 아주 가까운 여자…”

 

 

 

그리고는 나를 한번 쏘아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 사주가 워낙 재물복과 명예복 그리고 여자복이 많은 사주야.

한마디로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사주지.그렇다고 도화살이 낀건 아니지만 주위에 여자가 굉장히 많아.”

 

 

 

제시카는 굉장히 공감한다는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이 남자를 노리고 있는 여자가 많아.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여자 가슴에 멍만 들게 하는 나쁜놈이지.”

 

 

 

“아니…나쁜놈이라니…조금 거친 표현이신 것 같은데…”

 

 

 

나쁜놈이라는 표현에 발끈한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넌 가만히 있고 어쨌든 고생하지 않으려면 빨리 정리하는게 좋아.”

 

 

 

궁합을 보러왔는데 정리하라는 말을 듣다니…꽤나 불쾌했다.하지만 제시카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애써 담담한척을 했다.

 

 

 

“헤어지기는 싫어요.계속 함께 하고 싶어요.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흠…이거 꽤 골치아픈데…남자 사주는 거의 용 같은 사주야.한없이 승천하는 용과 같은 존재지.

하지만 한편으론 여자복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계속 유혹의 손길이 뻗치니까…

그래서 다르게 보면 돈 명예 모든걸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게 존재하지 않는 모순된 사주일지도 모르지.

이 남자를 잡기 위해선 단,하나야.그냥 풀어놔.남자를 전적으로 믿는수밖에 없어.

하지만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얘기지.현실 가능성이 많이 떨어지는 얘기니까 내가 정리하라고 하는거야.”

 

 

 

“그럼 다른 여자랑 바람피는것도 다 눈 감아주라는거에요?”

 

 

 

“아니…그런게 아니지.남자가 다른 여자랑 일을 함께 하거나 같이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줘야해.

단,남자가 바람을 피웠다면 즉시 헤어져.그렇게 한두번 시작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게 이 남자의 사주거든.”

 

 

 

“네…알겠어요…”

 

 

 

아까와는 다르게 급격히 의기소침해진 제시카였다.

 

 

 

“이제 끝났나?”

 

 

 

“아뇨.한가지 더 남았어요.”

 

 

 

그리고 제시카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없네?어떡하지?”

 

 

 

입술 주위가 파르르 떨리며 너무나도 어색한 연기…

그리고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며 그곳에 자신이 물어보고 싶은게 담겨있다고 말하는 제시카였다.

제시카의 눈빛은 마치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으면하는 눈빛이였다.

내 가방속엔 아까 제시카가 차에서 두고 내려온 핸드폰이 있었지만 나는 속아주는 셈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제시카의 비밀을 감싸주기 위해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으로 나가려할때쯤…발을 뗄수가 없었다.

 

 

 

“이게 제 친구 사주에요.오빠랑 궁합 좀 봐주세요.”

 

 

 

1989년 3월 9일생…그것은 분명 태연이의 생년월일이였다.

마치 그동안은 이번건을 위한 전주곡이었던것처럼 고분고분 듣던 아까와는 달리 다소 시끄러운 방안이였다.

천생연분...이보다 더 좋을수 없는 궁합…이런 단어가 방안에서 오고 갔고

제시카의 큰 목소리는 어느새 여자의 목소리에 파묻혀 들어갔다.

’지금은 이 여자를 조심해.’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를 조심해.이 여자는 너의 미래의 연적이야.’라는 말 또한 나에게 들렸다.

 

 

 

‘이건 뭐…친구들간에 불신만 만들겠군.’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한숨을 푹 내쉬고는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건 그 얘기가 제시카 입장에서 썩 유쾌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마치 아무것도 못들은척 하며 제시카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제시카는 핸드폰을 열어보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제시카의 마지막 얘기는 특별한 얘기는 아니였다

.자신의 부모님들과 동생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고 그에 대한 답은 아까와는 상반되는 긍정적인 대답의 연속이였다.

제시카는 기분이 살짝 풀리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당당하게 들어간 것과는 달리 나올때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발끝만 바라보는 제시카였다.

제시카의 우울모드는 차에서도 계속되었다.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라디오를 틀고는 가게에 들어가서 녹차를 사왔다.

제시카는 녹차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 또한 한 모금을 들이키었다.

그렇게 우울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때쯤 내가 한 말은 그런 분위기를 뒤바꿔버렸다.

 

 

 

“오늘은 키스…안 해줄거야?”

 

 

 

“뭐?”

 

 

 

“매일 키스 해준다며…오늘은 안 해준 것 같은데?”

 

 

 

“해줬어.오빠가 잠들었을 때 몰래…”

 

 

 

“아…그래?그럼 말고?”

 

 

 

내가 어렵게 꺼낸 말에 대한 답이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자 민망해진 나는 볼을 긁적이며 차에 키를 꽂았다.

 

 

 

“이제 그만 가…웁…”

 

 

 

차에 시동을 걸고는 핸들을 움켜잡을때쯤 숨이 턱 막히고 스르르 힘이 풀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와 함께 구슬픈 멜로디의 노래가 우리들의 입맞춤의 배경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J양의 사연입니다.오늘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습니다.아니…놔주었다는 표현이 맞겠군요.울지는 않았어요.

정말 나쁜 남자였거든요.싫증이 났다는 핑계로 이별을 고하였다니 슬픈 미소만 지어보이고는 아무말없이 놔주더군요.

이별을 고하기전에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어렵게 말했는데…

이 남자는 잠깐의 생각 끝에 알았다는 짧은 말만하니…참으로 나쁜 남자네요.

그리고 이별을 하고 오는길에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단발로 잘랐네요.왜 이별을 경험한 여자는 머리를 자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후후…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를 보고 기분이 참 오묘했어요.

제가 이별한걸 모르는 친구들한테는 제 새로운 모습이 어떠냐고 자랑했네요.조금은 힘들겠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전 추억만은 부자니까요…그렇게 위로하며 살아야죠.DJ 언니…신청곡은 박정현의 미장원에서에요…라고 보내주셨네요.

서울에 사는 J양 힘내시구요.신청곡이신 박정현의 미장원에서 틀어드릴게요.힘내세요…”

 

 


Episode 68-그녀가 나를 보네

 

"흠...그래서?"

 

 

"응?"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거야?설마 지금 이거 무언의 시위라도 되는거야?"

 

 

카페 안에는 대조적인 두 공간이 존재했다.화사한 햇볕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는 각각 2명의 남녀...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독설만 서로에게 내뱉는 두 남녀...

 

 

"그런게 아니잖아!"

 

 

"아니...내 말을 종합해보자면 그렇잖아.억단위 계약금을 제의 받았고 그것에 신나서

룰루랄라 예전에 입던 교복까지 입고 가서 오디션 본거고...

또 그 제의를 한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보스로 있는 회사이고...

결국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을 완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거 아니야!겨우 돈...그렇게 내가 별 상관없다던 그 돈 때문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해!그래!솔직히 나 그 제의 받고 많이 고민했어.억단위 계약금?그딴건 문제 되지도 않아!

내가 가장 설레였던건 그 작품에 내 롤모델인 여배우가 캐스팅 되었다는거였어!

근데 넌 사람 말도 끝가지 듣지 않고...돈?사람을 비웃음 거리로 만들어?

나 이 사실 우리 아빠한테도 말씀 안 드리고 처음으로 내 독단으로 한 선택이고,

오디션 보고 가장 ㅁ너저 너가 생각나서 문자한건데...넌 어떻게 그렇게 말하니?"

 

 

유하는 맘이 많이 상햇는지 앞치마를 벗고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Baby Bye Bye..."

 

 

"8:45 유하 언니 캐스팅은 하늘 나라로!"

 

 

철딱서니 없는 테이블의 두 고등학생은 그걸 보고 조근조근 속삭였지만

마치 나를 향해 하는 말인듯 선명하게 들려왔기에 그둘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 둘은 나의 그런 모습에 금방 기가 죽었고 그런둘을 보고 20대로 보이는 남자는 재밌다는듯

낄낄 웃었고 제시카는 말없이 커피가 담긴 컵을 스푼으로 휘젓고 있었다.

 

 

"이놈들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사회생활 하겠나?"

 

 

"그러게요.상사한테 찍히면 별로 안 좋은데..."

 

 

제시카는 컵에서 스푼을 빼고는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고

정현이의 삼촌은 내 눈빛에 기죽은 두 고등학생을 보고 또 다시 킬킬 웃고 있었다.

 

 

오늘은 일주일헤 한번 축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멤버가 모이는 날이다.

나야 내 본분인 작사 일을 끝마쳤지만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중 하나이기에

의무적으로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미없는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때 핸드폰에 찍힌 '은유하'라는 이름...

그리고 문자의 내용은 내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나 오늘 오디션 봤어]

 

 

[아...맞다!기획사에서 스카웃 제의도 받았어!화수미디어야...]

 

 

화수미디어...라는 이 다섯 글자는 가뜩이나 불편했던 내 심기에 기폭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너랑 얘기하고 싶어]

 

 

이것이 유하의 마지막 문자였고 나는 기다리라는 짧은 당장 하나를 하고는 축가 연습이 끝나길 기다렸다.

축가 연습이 끝나고 허기나 달리자는 표면적인 이유를 대고는 카페로 향했고

그곳엔 고교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명이 유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분명 내가 아는 은유하는 대학생인데...카페안의 여자는 완벽한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지난 몇개월동안 줄곧 우린 너가 필요하다고 외쳤건만 그것은 다 잊어버렸다는듯

오디션을 본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유하를 보고는 내가 사람을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와 나의 대화...

화가 난 나는 그녀의 자세한 상황은 들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에 상처만 주는 단어만 골라 쓰며

그녀를 돈만 밝히는 여자로 몰아갔고 나는 순전히 피해자라는듯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잘 참았던 그녀이지만,나의 그런 어설픈 감정표현ㅇㄴ 그녀를 결국 폭팔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다.

 

 

초점잃은 눈빛으로 유하가 나간 문만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한 10분쯤 흘렀을까?

저 멀리 유하의 모습이 보였고 가까이에서 본 유하는 눈두덩이가 약간 부어올라있었다.

유하는 나를 애써 무시하면 나를 지나갔지만 나는 지나치는 유하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90도로 공손히 사과를 했다.

 

 

"미안해.이번 일은 진짜 내가 잘못했다.요새 신경쓰이는 일이 많고 그놈이랑 내가 다시 엮이니 그만 화가 나서 그랬어.미안..."

 

 

"뭐...뭐야..."

 

 

유하는 그런 전개는 전혀 예상 못했다는듯 말까지 더듬으며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이놈아!그냥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야!오늘 보아하니 너도 그닥 좋은 사장이 될것 같지는 않으니까..."

 

 

유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표현이라는것은 유하와 나 둘 다 알고 있었다.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처럼 정말 과거의 일은 싹 잊어먹은 단순한 우리였다.

그렇게 유하가 오늘 오디션에 있었던 일과 자신의 롤모델을 만났던 얘기...

그리고 그 여배우에게 받은 사인을 나에게 자랑스럽게 들이미는 유하에게 적당한 호응을 보이고 있을때쯤....

유하는 오디션 얘기를 멈추더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는 내 귀에 귓속말을 속삭였다.

 

 

"재도 참...씩씩한 척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엄청하네."

 

 

"누구?제시카?"

 

 

"응.엄청 신경쓰인다는게 얼굴에 그대로 읽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비스킷 먹는거 봐봐.

저런거보면 아직도 진짜 순진하다니까..."

 

 

"원래 자기 감정에 솔직한 애야.숨기지를 못하는 애지."

 

 

"아니...닥히 그렇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랑 실제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것 같아.

진짜 모습은 방금 보였던 저 모습 같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강하고 씩씩한것?"

 

 

"응."

 

 

"흠...그런가?난 어느 모습이든 둘다 제시카의 모습 같은데..."

 

 

정확히 점을 보러 간 이후...제시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단,그것은 내가 다른 여자와 같이 있을때로 한정되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그전과 똑같던 제시카지만,나와 다른 여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난것처럼 여러 생각에 잠기면서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점을 미신이라고 치부하고 웃어넘기지만 제시카는 분명 그런것에라도 기대 안정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온 결과라고는 태연이와의 천생연분 그리고 태연이를 조심하라는 말...

그리고 너의 가장 친한 칙구가 너의 미래의 연적이 도리수도 있다는 말이라니...

그건 제시카의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말이 아니었고 기대했던 말은 더욱더 아니었을것이다.

 

 

"에휴...무서워라.더 이상 견딜수가 없겠네.그만 가봐라~난 아이돌한테 미움받기 싫어."

 

 

유하가 손사래를 치며 질렸다는 표현을 했고 나는 그런 제시카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보고는 그만 가자는 말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카페에서 나왔다.

정현이의 삼촌은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정현이에게 일찍 들어오라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향했고

정현이와 채원이는 연습실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며 연습실에 가야한다 말했다.

늦은 시간인 지금 그 둘을 보호해야하는게 성인인 내 의무였기에 나 또한 사무실로 향했다.

제시카는 자신도 연말 축제에 보여줄 안무 연습이 남았다며 우리와 동행하였고

마침내 경비원 아저씨께 키를 얻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불이 나간 건물에서 오직 한곳의 연습실에서만 불이 들어온게 보였고 정현이와 채원이는 놓고 온 물건을 찾아갔다.

그리고 제시카는 나의 손을 꼭 잡더니 깍지를 꽉 끼우고 불이 켜진 연습실로 걸음을 옮겼다.

 

 

"흠...반지 안 했네?"

 

 

제시카의 왼손에서 반지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응.난 아이돌이잖아.그렇게 대놓고 나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하면 안 되니깐...

오늘 하루종일 안 꼈는데 지금 알아차린거야?"

 

 

"응.아깐 계속 유하 일이 마음에 걸려서..."

 

 

"아까부터 계속 유하 언니 얘기뿐이구나.오빠는..."

 

 

"...."

 

 

"반지는 고이 모셔두고 있어.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유하 얘기를 할 때 제시카의 얼굴에 약간의 쓴웃음이 돌았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그것이 요즘의 제시카였다.

 

 

유일하게 불이 들어온 연습실에 가까이 다가갈때마다 끈적끈적한 비트의 팝송이 점점 크게 들리었고

점점 더 가까이 가자 소녀들의 깔깔거니는 웃음소리까지 들리었다.

마침내 연습실 문이 열리고 모든이의 시선이 나와 제시카에게 집중되었다.

 

 

"뭐야?여기는 왠일이야?"

 

 

"어?원걸 안녕!"

 

 

유리의 인사를 가볍게 대응해주었다.

 

 

"뭐야...우린 눈에도 안 보인다는거야?"

 

 

"너흰 맨날 보는데 꼭 인사를 해야되는거야?"

 

 

"맨날 보는 개한테도 인사는 하겠다.우리가 개보다도 못한 존재냐?"

 

 

"몰아가기도 정도껏 하자..."

 

 

제시카,태연,선예 이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재밌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OK!마지막 5번째 세트의 제물을 정했다!"

 

 

유리가 나를 찍고는 다짜고짜 연습실 중앙에 놓인 의자에 나를 앉혔다.

 

 

"5번째 세트의 제물이라니?뭔 소리야?"

 

 

"흠...내기야!지금 우리가 원걸 매니저분들 섹시댄스로 보내버려서 2: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바보 같은 우리 매니저 오빠가 원걸한테 완전 헬헬레 맛이 가서 2:2...5번째 세트의 제물은 바로 오빠!"

 

 

"유리야...오빠는 우리랑은 너무 가까워서 섹시 댄스 같은게 전혀 안 통할것같은데..."

 

 

"맞아!맞아!불공정한것 같아!"

 

태연이와 선예가 유리를 뜯어말렸지만 유리의 결심은 단호했고 이번에도 정확히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찬성했다.

태연이와 선예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가득했고 제시카는 지쳤는지 아무말도 않고 쇼파에 몸을 기댔다.

 

 

"잠깐...근데 이런 쓸데없는짓은 왜 하는거야?"

 

 

"쓸데없는 짓이라니...이건 엄연히 연말 축제에 이벤트로 포함되어 있는 퍼포먼스라고...

잘생긴 남자 배우를 가운데에 놓고는 섹시 댄스로 매력 발산?뭐 대충 이런거라고나 할까?"

 

 

"그 배우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애도의 마음을 표해야겠구나...참고로 난 좀 어려울거다.

표정변화도 없고 거의 돌부처급이니까 나는..."

 

 

"훗...맘대로 하셔!부처도 어차피 남자거든?이번에도 규칙은 동일!!

제물이 먼저 웃음을 터뜨리거나 몸을 베베 꼬는듯 쑥쓰러운 행동을 하면 되는거야.

이번에 이긴 팀이 오늘 음료수부터 밥까지 풀코스로 쏘기!!제한시간은 1분이다!알겠지?"

 

 

"OK~우리는 소희!너희는?"

 

 

"It's Me!!"

 

 

그렇게 난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들만의 게임에 제물로 참가하게 되었다.

끈적끈적한 팝송이 흐를고 유리가 아까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는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워낙 허물없는 사이엿기에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며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권유리!!나는 돌부처라니까!그냥 나에게 절하고 돌부처님 한번만 웃어주세요!라고 하는게 빠를걸?"

 

 

"5초 남았습니다!"

 

 

그말이 있은 후 다급한 유리의 막판 스퍼트가 더욱 거세졌고 결국 그건 보고 있떤 태연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야!권유리!게임도 정도껏 해!"

 

 

"왜?재밌잖아!그나저나 진짜 돌부처네.무슨 꿈쩍도 안 해.역시 바람둥이가 분명해!"

 

 

별거아니라는듯한 표정을 유리에게 지었고 유리는 그런 나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는 나를 흘겨봤다.

마침내 원더걸스의 차례가 돌아왔고 낯가림이 심한 소희가 쭈뼛쭈뼛 나에게 다가왔고

소희 또한 5초 남았다는 말에 막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지만

그건 리더 선예한테 한소리만 들을뿐 나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게임 브레이커네.게임 브레이커..."

 

 

"아니야.분위기 브레이커야..분위기 브레이커..."

 

 

유리와 티파니가 수근수근 대는게 들리었고 난 키득키득 웃음을 지었다.

 

 

"재밌네!아가들 재롱잔치 보는 느낌이었어!"

 

 

나는 수고했다는 말을 유리에게 날리고는 제시카가 앉은 쇼파에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있을때도 나는 계속해서 제시카를 관찰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안무의 수위가 높아질때마다 쇼파 시트를 움켜잡으면서 너무나 위태로운 모습의 제시카였다.

나는 그런 위태로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게임을 망쳤잖아!어떻게 할거야?"

 

 

유리는 여전히 나에게 이 사태의 해결책을 갈구하였고 난 즉각 대응해주었다.

 

 

"괜찮아.남자는 또 있으니까..."

 

 

나는 쇼파에 기대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마지막 남자가 어리숙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정현이?"

 

 

"응.그놈이면 너희한테나 원걸한테나 모두 취약할테니...공정하잖아."

 

 

"저기 사장님!"

 

 

정현이가 할말이 있는듯 다급하게 외치었고 나는 여전히 제시카의 손을 꼭 잡고 정현이가 서있는곳을 응시했다.

한국어가 아닌 낯선 언어가 연습실 밖 복도에 울려퍼졌고 그 낯선언어의 목소리는 점점 귀에 익은 목소리로 뒤바뀌어갔다.

그리고는 아담한 채원이와 상대적으로 늘씬한 몸매와 윤기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한 여인의 영어가 내 귀에 감기었다.

 

 

"사장님 이분은 사장님 친구라는데..."

 

 

"Ciao~Christian~"

 

 

순간 당황할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건 이 연습실에서 그녀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인물 제시카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생전 처음 보는 낯선이의 등장에 당황했고 제시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녀의 등장에 마음을 진정하고 있었다.

 

 


Episode 69-찬바람이 불던 어느 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멈추었고 제법 잘 차려입은 라틴계 미녀가 날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제시카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지긋이 눈을 감았고 나를 ‘Christian’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준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차츰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이야~”

 

“흠…이정도 갖고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리버풀에서 밀라노로 다시 돌아왔을 때 넌 풋풋한 소녀에서 어느덧 성숙한 숙녀로 성장해있었지.그리고 지금 서울에서 다시 널 보았을땐…”

 

사라의 눈빛이 내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고 뭔가 초조한듯 손을 계속해서 쥐었다 폈다거리고 있었다.그리고 그런 사라를 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피부가 새까매졌네?무슨 브라질 사람 같아!쿠쿠…”

 

“흠…”

 

“장난이야 장난~태닝 잘 됐다!남자친구가 섹시하다고 좋아하겠어~”

 

사라는 불끈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그리고는 귀엽게 혀를 낼름 내밀고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무서워라."

 

나는 배를 만지작 거리며 사라의 행동에 반응해주었다.

사라는 나의 그런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반갑다며 내 얼굴을 잡고는 양볼을 맞대었다.

원체 스킨쉽을 좋아하는 이탈리아인들의 인사이기에 당사자에게는 평범한 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이에게는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자극적인 스킨쉽이었다.

그리고 그건 위태로워 보이는 제시카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문 앞에 서있던 정현이와 채원이뿐만 아니라 연습을 하고 있던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도 연습실 한켠에 자리를 잡고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들에게는 외계어인 이탈리아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던중 힐끔 모두가 모인곳을 흘겨보았다.모두들 오묘한 표정으로 사라와 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윤기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볼륨 있고 늘씬한 몸매 가끔씩 터지는 조신한 웃음소리와 그녀를 더욱 빛내주는

올블랙 의상은 그녀를 꽤나 시크하고 도시적인 여자로 연상하기 충분했다.

 

한참을 문앞에서 이야기를 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저 반대편의 구경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사라였다.

그녀의 진면목은 차갑고 도도함이 아니라 이런 모습이다.물론 사라를 처음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사랑만을 받고 자랐을것 같은 여자...부족함 없이 자랐을것 같은 여자...

나 또한 처음엔 그녀를 그렇게 생각하였고 그녀의 청순한 매력에 정신차리지 못하던 첫만남에서도

은연중에 굉장히 까탈스럽겠구나...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차츰 가까워지고 그녀를 차차 알아갈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이보다 귀여운 푼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사라의 예상을 깨는 의외의 모습이 남자들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언제나 남자들에게 인기만점이었고 신입생부터 학교를 졸업할때까지

항상 교내 인기 탑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 사라의 이런 모습때문에 제시카에게 더욱 끌렸는지도 모른다.

제시카 또한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사라와 흡사하고 진실된 모습은 귀여운 푼수이니까...

단,차이점은 사라는 모두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만 제시카는 나에게만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사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한번 반대편을 보고 인사를 건네고는 내 손을 잡고는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문을 살며시 닫고는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그러고보니 아까 너가 한 말중 잘못된 말이 있었어."

 

"뭔데?"

 

"태닝말이야...남자친구가 좋아하지 않거든."

 

"정말?왜?남자들은 다 섹시한거 좋아하잖아?특히나 이탈리아 남자들은 더욱..."

 

"그런게 아니야.좋아해줄만한 남자친구가 없거든.헤어졌어."

 

"뭐?왜?왜 헤어졌어?"

 

"그래.크리스티안 너 말대로 이탈리아 남자들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좋아하지.

밋밋하게 새하얀거보다는 태닝한게 훨씬 섹시해보이니까...그리고 입에 발린듯한 달콤한 말도 잘 하고 말이야...

그래서 바람둥이도 많지!"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결론은 이미 그녀의 말끝에 나왔다.바람둥이...아무래도 남자가 바람을 피운듯 했다.

한참을 그 남자를 욕하다 더 이상 욕하기도 지친다며 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라가 그렇게 화난 모습은 나 또한 오랜만이라 얼떨떨했고 그런 사라를 진정시켜주며 사라를 연습실 안으로 데려갔다.

 

웅성웅성거리던 연습실이 사라의 등장으로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사라와 나의 이야기를 한듯 보였는데 그제서야 쭈뼛쭈뼛 사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사라는 나에게 다가오고는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나 좀 호텔까지 데려다줄래?돈이 없어."

 

"돈 아끼려고 수작부리네!"

 

"아냐.정말 없다니까!!!"

 

꿍꿍이가 들켰는지 괜시리 발끈하는 사라였다.

 

"그래.지금 난 이렇게 찬바람 쌩쌩 부는날 바람 난 남자에게 차이며 바람 맞는 불쌍한 여자가 어울려.그렇지?크리스티안!"

 

"후훗..."

 

"웃지마~"

 

"아...알았어."

 

마침 시간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먼저 그녀들에게 연습은 언제 끝나냔고 언뜻 물어보았고 그녀들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잠깐의 회의를 거치더니 오늘 연습 끝을 외치고는 하나둘씩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밖은 사라의 말대로 찬바람이 불었고 모두들 모자와 목도리등으로 바람을 막고 있었다.

원더걸스는 자신들의 밴으로 먼저 향하였고 소녀시대는 정현이와 채원이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소녀시대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계속해서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그 9명의 소녀중 한명만이 유난히 계속해서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사라와 두명의 미성년자와 함께 내 차로 향하던 도중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액정을 보며 차근차근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Don't Worry!My Little Princess!"]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제시카에겐 언제나 '제시카' 혹은 '시카야~'라고 이름만 불러줬을뿐

한번도 애칭으로 불러본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공주님이라는 애칭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녀 또한 알고있을것이다.

나에게 사라 베르니가 얼마나 소중한 여성이고 자신의 마음 또한 불편하게 할 존재라는걸...

그렇기에 서로에게 신뢰를 주기위해서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필요할거라는게...내 생각이였다.

 

사라는 조수석에 정현이와 채원이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앞쪽은 이탈리아어로 뒷쪽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버렸다.

뒷쪽은 음악이야기 및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 앞쪽은 자신이 갔다온 국가의 이야기를 하는 사라때문에

그들의 대화에 모두 반응하는 나만 엄한 고생을 했다.

 

사라의 실수담에 웃음보가 터지고 그걸 알아듣은 나만 웃고 채원이와 정현이는 알아듣지 못할때

채원이는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는게 영 원통했던지 나에게 영어로 대화하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였지만

사라도 나에게도 영어는 그저 외국어였고,불편하기 짝이 없는 언어였기에 채원이에게는 미안해라는 말만 하고는

다시금 이탈리아어로 얘기할수밖에 없었다.

 

차츰 한국어와 이탈리어가 뒤섞여 들리던 차안은 꽤나 발음이 강한 이탈리아어만 울리고 있었다.

미성년 듀오를 집에 차례차례 데려다주고는 차안에는 과거의 연인들만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판국이었다.

 

사라는 스튜어디스 에피소드를 끝내고는 다시금 바람을 피운 남자친구를 포함해 전 이탈리아 남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뒷담화는 정말 무섭다라는 생각은 여러번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할줄은 몰랐다는것에 한번 놀랐고

사라가 실연당한뒤로 펑펑 우는 타입보다는 쿨하게 상대방을 욕하는 타입이라는것에 두번 놀랐다.

 

설마 나랑 헤어졌을때도 이렇게 욕했을까?라고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건 모든게 내 잘못이었고,너를 비난할점은 없었다.너는 내가 상대한 남자중 최고의 남자이다.라고 치켜세워줬다.

겉으로는 립서비스 고맙다며 넉살 좋게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불안감을 지울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까만해도 그저 별뜻없이 그 남자를 욕하던 사라가 날 치켜세웠을때는

진지한 모습으로 완벽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추억에 취해 살면 안돼!사라...'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넘겨짚었을수도 있기에 꾹 참았다.

 

"그런데 한국에는 왜 온거야?"

 

빨리 이런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내가 다른 주제를 던졌다.

 

"아...크리스마스 연휴잖아.연초까지 쭉~"

 

"그렇구나.이탈리아는 크리스마스 연휴지.여기는 크리스마스 달랑 하루 쉬어서~"

 

"응.그런가봐...그래서 좀 놀랐어.사람들이 굉장히 바쁘더라고!

이탈리아 같았으면 나 쉬게 안 해주면 태업할거라고 난리를 쳤을텐데 말이야."

 

"서양국가가 아니잖아.거기에다 국민성 차이도 있고 말이야.

물론 성격이 불같은건 반도국가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야."

 

"후후...그러고 보니 나 부탁이 있어."

 

"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제는 내가 사라의 입술에 시선을 곤두세웠다.

인중을 매만지며 사라는 알수없는 미소를 띄웠고 그럴수록 내 가슴은 뛰어가고 있었다.

 

'제발...사라 그것만은 안 돼.'

 

눈을 질끈 감고는 사라의 말에만 집중했다.그리고 이어진 사라의 말...

 

"너가 가이드를 해줬으면 좋겠어!나 친구도 없이 달랑 혼자 온거거든!"

 

빵빵거리는 클락션 소리가 울렸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엑셀레이터를 밞았다.

 

"왜?너무 심한 부탁이니?왜 식은땀까지 흘리고 그래?"

 

"아...아니야."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이드라니...한국에 와서는 여유가 거의 없었다.

어릴적부터 여유로운 이탈리아인들과 생활해온 나였기에 여유로운 삶을 추구해온 나였지만

어느새 내 생활 패턴은 바쁜 한국인으로 맞쳐줘갔기 때문이다.

 

"서울만?"

 

"응.왜?바쁘니?"

 

"아냐.나도 서울을 잘 몰라서..."

 

"으흠...그렇구나.그래도 괜찮아.그래도 나보다는 잘 알거 아니야!"

 

"그래.뭐 그렇긴 하지.주말에는 쉬니까 그때 구경시켜줄게.그때까지 한국에 남아있어?"

 

"응.장기 휴가를 끊었거든.후후..."

 

"그래?그럼 그때까지 내가 공부해서 가이드 해줄게."

 

가이드 일은 소녀시대 In Italy에서도 해봤기때문에 별무리가 가지 않았다.

그때 느낀게 주구장창 설명해주기보다는 그냥 자유롭게 보고 듣고 즐기면 된다는것이였기 때문에

한국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될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라는 가이드 약속을 받고는 주먹을 불끈 지었고 나는 천진난만한 사라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호텔로 가던 도중 사라는 이탈리아 남자의 입에 발린 닭살멘트를 여럿 알려주며 나보고 한번 써먹어보라고 충고해주었다.

몇몇은 그럭저럭 들어줄만 했지만,그 중 하나는 내 입에는 입에도 못 담을만한 징글징글한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너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야.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강아지.

나는 그 강아지를 옆에서 과묵하게 지켜주고 있는 듬직한 세퍼트 란다.'라는 멘트였다.

 

'내 Princess는 아무것도 아니네...'

 

팔뚝을 매만지며 정말 징그럽다는 제스쳐를 취하자 사라는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쿡쿡 웃으며 여자도 부끄러워 하지만

그런 멘트를 은근히 좋아한다며 나를 부추겼다.

 

사라의 말은 스튜어디스 에피소드-이탈리아 남자 욕하기-이탈리아 연애 강좌로 끝이었다.

호텔에 사라를 데려다주고는 양볼을 부대끼며 작별인사를 했다.

뒷모습을 보이며 호텔로 들어가는 사라를 보고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차에 탔다.

차에 타서는 슬며시 사라와 지나갔던 자리를 보았다.저 멀리 사라와 어느 한 남자와 실랑이를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인기만점이네.사라...'

 

지친몸을 이끌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핸드폰을 열고는 제시카의 답장이 있는지 확인했다.

'받은 문자 2통'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었고 나는 은근히 제시카가 Prince라는 애칭을 써주길 기대했지만

두개의 문자는 나의 그런 기대를 깨뜨려버렸다.

 

[태연이에게 세탁비 전달했어요.빨리 드리려 했는데 아마도 이런 조그만 연결고리라도 잡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나봐요.

거절해주지는 마세요.그렇게 모두에게 친절하면 곤란해요.지금 저에겐 이런 형식적인 관계가 더 어울리는것 같네요.-선예-]

 

[믿을거야...믿을수 있어...믿고 싶어...믿어야만 해...믿을수 있을까?내가 그럴수 있을까? -제시카-]

 

찬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릴만큼 심한 날...한 여인은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접었고 한 여인은 갈대처럼 흔들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에게도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흐암~김비서님!왜요?"

 

"지금 어디세요?"

 

"엘리베이터인데요."

 

"나오지 마세요.절대로...오늘은 그냥 집에 계세요."

 

"안 돼요.연말인데 바쁜데 저만 이렇게 놀수 있나요?곧 나가겠습니다."

 

어젯밤 선예와 제시카의 문자를 받고는 잠을 설쳤기 때문에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는 또 다시 하품을 했는데 찰칵 찰칵 거리는 소리가 들리었고

그 이후로 나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는 하품 따위는 금방 멈추게 하는 특효약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저 멀리서 카메라를 들고 달려오는게 나한테 보였고

오직 한명의 건강한 남자만이 그 많은 행렬을 막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안젤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 남자가 안젤로라는건 그의 큰 덩치와 짧은 머리로 충분히 알아차렸지만

수많은 기자들의 행렬은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다.자동문이 열리고는 고군분투하고 있는 안젤로에게 다가갔다.

 

"안젤로 무슨일이야?소녀시대한테 무슨일 있어?이 기자들은 뭐야?"

 

"그리고 기자분들...무슨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소녀시대에게 일이 있으면 소속사에서 다 해명할테니 이른 시간인데 돌아가시죠.

주민들한테 실례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궁금한건 이요한씨입니다!"

 

"제시카양과의 열애설 사실인가요?"

 

"그 반지는 커플링인겁니까?"

 

그때 칼날 같은 바람이 내 볼을 스치었고 한 기자가 오늘자 스포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1면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스포츠 화수...특종 SM 엔터테인먼트 이요한 사장-소녀시대 제시카 열애 밀착 취재?'

 

신문을 보자마자 음흉한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쌩쌩 바람소리도

나에게 만큼은 그의 비열한 웃음소리로 들리는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이효리씨와 연주씨가 파티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그에게 대항한자는 연예계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살아남지 못 했다고...

확실한건 하나였다.그가 나와 관련된 모든 인물을 연예계에서 매장시켜 버리고 싶어한다는점...

그건 억대의 캐스팅을 받은 유하도 아무 잘못이 없는 소녀시대도 그리고 옳은 일을 행한 나도 피해갈수 없었다.

 

 


Episode 70-아무말도 아무것도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언제 있을지 모르는 쾌청한 아침 날씨를 즐긴다.
그리고 수많은 인파들이 모인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종이 뭉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종이 뭉치에는 누가봐도 자극적인 단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수,모델,배우,정치인,방송인등 수많은 공인들의 스캔들과 그것을 증명하는 사진들...
그리고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입헌군주국이라는 제도와 귀족가문이 존재하는 영국에서만 볼수있는 평범하지 않은 공인...

바로 왕자님이다.


그들은 항상 미혼의 훈남 윌리엄왕자의 행보를 주시하며 고귀하신 왕자님의 짝이 누가 될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며

혹 제2의 다이애나비가 탄생하지는 않을까하는 농담섞인 말을 주고받곤했다.

내리막길을 걷는 흘러간 제국을 추억하는 대영제국의 수많은 국민

그리고 그런 대영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리버풀이라는 도시...


가쉽에 열광하며 흥미있고 자극적인 기사에만 열광하는 그들을 보고 내리막길을 걷는 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또한 수많은 공인들중 영국인들이 가장 열광하고 가장 별난 왕자님이라는 자...
그를 보며 인생살이 꽤나 피곤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후 내가 그와같은 존재가 되었다.


내 집을 둘러싼 수많은 기자들...이리같이 나에게 달려들며 어떻게 사건의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캐내려는 그들의 눈빛...
분명 오늘 내가 겪었떤 그 모습은 수많은 매체에서 보았던 소위 왕자님이라고 불리시는 한 남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단,한가지 다른점은 난 언론의 펜질로 만들어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공의 왕자님이라는 점이지만 말이다.

 

"흠...현대판 신데렐라 탄생?"

 

오랜만에 만난 안젤로는 장기휴가를 받은 사람 치고는 꽤나 초췌해보였다.
그는 어설픈 한국어로 나와 제시카의 모습이 실린 신문의 표제를 읽었다.

 

"신데렐라라니...내가 무슨 왕자님이라도 된단 말인가?"

 

최초의 보도지...스포츠 화수...그의 목적이 대충 어떤건지 감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목...신데렐라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써 마치 제시카가 능력 좋은 남자를 꼬셨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고

그건 안티들에게는 좋은 소스임이 분명했다.


대중은 유명인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그걸 마치 단순한 게임처럼

치부하고 재미있어한다는 김비서님의 말이 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잠깐 줘봐!"

 

연신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졸음을 쫓고 있는 안젤로...
안젤로는 눈에 힘을 주면서까지 신문에 실린 사진을 살펴보았고 난 그런 안젤로가 보고 있는 신문을 낚아챘다.

 

"뭐야!혹시나 조작 가능성 있나 찾아보고 있었는데..."

 

"여기 메이져 신문사야!조작사진 실었다가 그게 가짜라는게 들통이라도 나면 어쩔건데?

조작사진은 아닐거야.분명 파파라치를 고용했겠지."

 

"흐암~파파라치라...너가 뭐라고 그딴걸 고용하는지 모르겠다."

 

"내말이 말이다..."

 

그간 매번 계속되는 겨울 스포츠 소식이나 새해를 3일 앞둔 날이였기에

형식적인 연말 좋합 기사나 쓰던 신문이 판매부수를 높일수있는 최고의 찬스를 잡았다는게 신문 1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신인 연예인의 스캔들치고는 지나치게 많아보이는 3면을 차지하고는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를 마치 한편의 소설같이 쓴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게 소설이야?기사야?진짜 미치겠네..."

 

"왜?"

 

"어느 기사에 대사가 있어?
사진을 실은것은 아주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이건 주위사람들과 같이 찍혔고,

그나마 반지로 꼼수잡을게 뻔한데 이건 뭐 죽어도 아니라고 잡아 떼면 되니까!
내가 뭐 언론에 많이 잡힌것도 아니고 말이야.근데 말이야..."

 

"응?"

 

"어제도 클럽에서 놀았냐?"

 

"아니..."

 

"뭐야...이제 그것도 질린거야?"

 

"클럽도 클럽 나름이지.너무 오래 있으니까 그것도 질려!"

 

"그럼 뭘 했길래 그렇게 하품을 쩍쩍해?여자친구랑 밤새 통화했어?"

 

"아니..."

 

"그럼 뭔데?"

 

"게임 했어.완전 난이도가 극악이어서 패드만 한 6시간 잡고 있었나?
새벽 5시에 드디어 다 깼다!이제 자야지!하고 침대로 들어가려는 순간 미스터 킴에게 전화가 오더라고...

어쨋든 난 잘테니까 깨우지마!"

 

"맘대로 하셔~"

 

어젯밤 밤을 세웠던 안젤로는 숙면을 취하고 있었고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푸른빛 한강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열었다.
너무나 많이 눌러봐 손에 익을대로 익은 제시카라는 이름을 검색하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소녀시대의 소녀시대만이 통화연결음으로 무안하게 울릴뿐이었다.

 

'얘기하고 싶은데 말이야...나도 답답한데 정작 넌 얼마나 답답하겠어...'

 

 

 

 

 

 


사무실 앞에도 기자들은 진을 치고 있었다.몇몇 기자는 낯이 익은것으로 보아 집에 이어 회사까지 쫓아왔나보다.
여전히 그들은 내 왼손 네번째 손가락의 반지의 출처를 알아내기위해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이대었고 난 그저 미소로 화답하며 그들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었다.

 

"아~진짜!아침부터 땀범벅에...왜 자꾸 얼굴을 만져...뭐야 이게..."

 

기자들에게 둘러 쌓여 고군분투하고 있는것은 안젤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머리카락마저 길었다면 정말 제대로 죽을뻔했다며 투덜거렸고

난 이제야 제대로 밥값한다며 받아쳐줬다.

 

"크리스티안~너 걔네들중 한명이랑 사귀는거 맞아?"

 

"응."

 

"그럼 왜 제대로 말 안하는거야?그렇게 침묵할 필요 없잖아?그건 모두에게 축하받아야할 일인데?"

 

"저 인간들 말이야...분명 너와 내가 잠깐 손만 잡아도 삼각 스캔들 퍼뜨릴게 분명한 놈들이야.

그런놈들인데...진실을 말해서 뭐하겠어?"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말아라!"

 

"후훗....그래도 꽤 감동인걸?역시 타향살이가 외롭긴 한가봐?너가 나도 다 걱정해주고 말이야..."

 

"난 널 걱정해주는게 아니야.단지,그 여자가 걱정될뿐....분명 그 여자도 너와 똑같은걸 당하게 될테니까..."

 

"흠...걱정해주는건 고마운데...그래도 그 녀석의 의견을 물어보는게 낫겠어.난 전혀 어떠한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거든."

 

키가 큰 외국인과 함께하는 출근...

가뜩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포커스가 나에게 맞춰준 상태에서

톡톡 개성만점의 외국인과의 출근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선예와의 깜짝 스캔들 이후 연속해서 터지는 아이돌과의 스캔들을 보고

남자직원들은 내심 부러워하는듯 보였고 여자직원들의 표정은 '제시카!땡 잡았다'라는게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직원들의 표정이 부담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침 인사를 건네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사무실에 올라오니 김비서님이 여러 자료를 정리하시며 때때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뭡니까?뭔데 그렇게 한숨만 쉬세요?"

 

"하...제가 그렇게 나오시지 말라고 하셨는데...일이 점점 커지는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걸려온 전화도 대부분 사장님을 욕하는 거였고 거기에다 악플도..."

 

"흠...가끔씩 좋은 악플도 있네요."

 

리플중 괜찮은 리플은 가뭄에 콩나듯 적었다.대부분이 누가 더 아깝네 하면서 싸우는 리플이였고

보는이에게 모욕감을 주는 리플제시카의 과거 사진을 들추면서 지난 행적을 모조리 합쳐 전형적인 물타기를 하는 리플

그리고 내 옷 스타일을 지적하며 명품을 쳐발랐네 뭐네하면서 나를 된장남으로 몰아가는 리플등이었다.

 

"봐봐요~옷 잘입는다는 리플도 있잖아요~나 옷 잘입는단 소리 처음 듣는데...헤헷..."

 

"휴...일단 제가 몇가지 대책을 세워놨습니다."

 

"크리스티안~난 쇼파에서 잔다~모두들 굿나잇~아니 굿모닝~"

 

딱딱한 흐름을 끊은 안젤로의 말이였지만 여전히 김비서님의 말투에는 딱딱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안젤로가 쇼파를 침대 삼아 눈을 붙이러 간뒤 다시 김비서님은 화제를 꺼냈다.

 

"먼저 한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제시카양이랑 진짜 사귀세요?"

 

"네!"

 

너무나도 밝게 대답하는 날 보고 김비서님은 말문이 막힌듯 잠깐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왜 저한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비서는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직책이 아닙니다.꼭 말씀 드려야할 필요가 없을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에헴...어쨋든 그러면 일이 상당히 복잡해지겠군요.사귀는게 아니면 그냥 공식적인 부인만 하면 끝나는건데 말이죠.
그럼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부인하시겠습니까?묵묵부답으로 일관하시겠습니까?아니면 인정하시겠습니까?"

 

"그건 제 권한밖의 일입니다.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요.괜한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전 제시카가 얼마나 여린 여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전 그녀를 상처투성이 여자라 불러요.

온갖 마음의 상처를 갖고 곧 쓰러질것 같으면서도 애써 강한척 도도한척하며 꿋꿋이 버텨나가는게 제시카에요.
이미 기사가 터진 시점에서 또 다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것입니다.

제가 할일은 권위를 내세워 명령을 내리는 일보다는 그녀가 어떻게하면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입을까인것 같네요."

 

"현실은 영화가 아닙니다!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잘했다고 짝짝 박수라도 쳐줄것 같나요?
왜 모두에게 인정받고 비난을 피할수 있는 길을 외면하고 가시밭길을 택하십니까?

그냥 제시카양에게 기사를 부인하자고 하시죠!그게 최선입니다."

 

"......어차피 저는 떠날 사람입니다.굳이 떠날 사람 변호하기 보다는 남아있을 사람을 변호해주는게 좋죠.
어차피 저는 잊혀질 존재니까요...하...만약에 아버지라면 어떡하셨을까요?"


"......아마도 상대방의 의사를 가장 먼저 존중해주셨겠죠.그래도...

회장님께서는 자신의 그런 성격을 별로 달가워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가끔씩 푸념식으로 자식들이 나보다는 조금 더 독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은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인수건도 추진...흡..."

 

김비서님이 멈칫하며 눈이 휘둥그레지셨다.분명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으신것 같았다.

 

"아...아닙니다.방금 그말은 헛소리였으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시죠."

 

뭔가 숨기는게 있는것 같았으나 내가 추궁한다해도 김비서님의 내공을 당해낼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김비서님이 하고 계신 큰 착각이라도 일깨워드리기 위해 지갑을 여러 한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카드를 손에 쥐여드리고는 잠시 사무실을 나왔다.

 

김비서님에게 카드를 쥐여드리고는 계단에 앉았다.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아직 아침시간이라 아무도 기사를 보지 못했는지 어떠한 문자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닫고는 멍하니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을때

솔솔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곳엔 비스듬히 열린 창으로 바람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몸을 틀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쏟아져버릴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과

수많은 기자무리들이 극히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Blue Sky...Blue Sky..."

 

창문을 닫았다.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었고 그곳엔 김비서님과 안젤로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뭐야 너!자는거 아니었어?"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 잠이 오겠어?"

 

"흠...저는 말이죠!지금까지 회장님을 30년 가까이 모셔오면서 회장님의 모든것을 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 어리석은 믿음이 깨져버렸네요."

 

그리고는 김비서님은 내가 건네준 피터팬 카드를 다시 나에게 돌려주셨다.

 

"한방 먹었군요.언제나 아이이실줄 알았는데 말이죠..."

 

"예.어린애였죠.불과 몇달전만해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것만 하고싶어하는 전형적인 어린애였어요.
아까 김비서님이 하시다만 말씀...아무래도 아버지가 저를 어른으로 만드시고 싶으셔서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순수하고 떼묻지 않고 하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할줄 아는 피터팬같은 캐릭터 말이죠."

 

"저에게 연기를 하신걸까요?아니면 마음이 바뀌신걸까요?

분명 전 지금까지 회장님이 자식들이 조금 독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왔고

그것이 회장님의 뜻인줄 사장님을 그렇게 훈련시켜왔습니다만..."

 

"연기 같은걸 하실분이 아니지 않습니까?생각이 바뀌셨을겁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잖아요.인간은 어른이 되고 다시 아이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노인들이 사소한것에 잘 삐지고 그러는것도 그런것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왠지 슬프군요..."

 

"네...그렇네요..."

 

"방금 소녀시대 매니저에게 정상적인 스케줄을 행하고 스캔들에 대한 언급을 일절 금지하라고 시켰습니다.
또한 출근하기전 회장님께 메일로 이번 스캔들에 대해 보냈으니 확인하시면 전화가 올것입니다."

 

"네.알겠습니다."

 

밖에 수많은 기자들이 깔려있었지만 그들은 오직 사냥감이 포착됐을때만 움직이는자들이기 때문에 업무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사건의 장본인인 한 남자는 건물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한 여자는 평소와 같은 정상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뛰는건 오히려 그들이였고

전화기만 불이 날 정도로 연신 울리었다.


나 또한 수많은 지인들에게 전화가 왔고 대부분의 반응은 약간 놀랬다면서 축하한다는 말의 일색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전화를 받았지만 내가 받고 싶은 두통의 전화는 오지 않았고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해는 뉘여뉘엿지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평소와 똑같이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때쯤 핸드폰에 전혀 낯선 번호가 찍혔고

 난 그것이 본능적으로 내가 기다린 두통의 전화중 하나라는것을 알았다.

 

"여보세요~"

 

"아들 축하한다~어쩜 엄마한텐 한마디도 안 할수....어머!당신!잠깐 얘기 좀 하고 줄게요~어머~오늘따라 왜 이런대~"

 

낮은 중저음이 깔릴것으로 예상햇으나 예상외의 하이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중저음과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들리자 오늘 처음으로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나다."

 

"아...예.이탈리아는 지금쯤 아침이겠네요."

 

"그래.방금 일어나서 메일 확인했다."

 

그리고는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징계는 어떻게 되는거죠?이미 3개중 하나는 빨간불이 들어왔고 두번째 빨간불이 들어올 차례인가요?"

 

"그렇다."

 

"차후 징계는 어떻습니까?그것 또한 이번에도 정직입니까?"

 

"아니...이번엔 아니다.아마 한국에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것 같아서 말이다."

 

"흠...계약기간은 5년인데 아직 1년도 제대로 못 채웠으니 1년치 연봉이나 제대로 받고 떠날지 의문이네요.
엄연히 고용주 대 직원으로 계약을 맺은건데 중간에 자르시면 퇴직금은 두둑히 주시나요?"

 

"그럼~퇴직금은 빵빵하게 주어질거다."

 

"그 퇴직금...어느정도 되나요?한 1억유로정도는 되나요?"

 

"뭐?1억 유로?지금 장난치는거냐?"

 

"1억유로면...1800억 가까히 하겠군요.아버지는 저에게 1억유로의 반정도는 이미 주셨어요.
제가 가야할길을 터주셨으니까요.충분히 5000만유로의 가치가 있어요.

나머지 반은 시간을 주세요...5천만유로치의 시간을요...1달이면 충분할것 같군요.전 그것을 퇴직금으로 받고싶습니다."

 

"한 달?너무 긴것 아니냐?"

 

"생각해보니 전 지금까지 한국에서 산게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에 산것 같아요.
아버지가 언젠가 그러셨죠.예술가는 언제나 초기의 영감을 받은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어떠한 영감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또한 그 영감을 받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비록 저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말이죠...그래도 그래주실수 있겠죠?"

 

"......컸다컸다 얘기는 많이 들었다만...확실히 뭔가 달라지긴 했구나."

 

"네.저도 잘 느끼고 있습니다."

 

"하하...김비서에게 추가메일을 받았는데 너한테 이번 인수건을 왜 시도했는지 말할뻔했다는구나.

그리고 넌 그걸 대충 눈치챈것 같고..."

 

"정확한건 몰라요.다만,아버지가 저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기위해 꾸민일이라는것밖에..."

 

"Gianninno같은 큰 브랜드를 운영하면 상당히 많은 유혹에 휩싸일거다.
아무래도 패션이란는것 자체가 자유롭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걸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기본 상식을 깨뜨리는 행동을 하는 자도 많다.
또한 모델계랑 연결되있어 해마다 한두번씩은 브랜드 오너와 모델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하지.
그만큼 더러운곳이 이곳이다.

그래서 난 의류계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고 상당수 비슷한점이 많은 연예계를 선택했고

연상의 여인보다는 너와 동년배가 많은 가요계를 선택했지.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여인은 너가 끝없이 휘둘릴 가능성이 많았기에...그리고 너의 행동은 김비서를 통해 지켜봤다..."

 

"훗...만약 제가 겉멋만 들어 연예인들과 파티나하고 놀러다녀으면 전 아예 후계자자리에 언급도 안 됐겠군요?"

 

"그렇겠지.너 형도 너의 누나도 너에게 경영권을 주라고 했으나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는 넌 19세 철없이 자신이 좋아하는걸 찾기 위해 떠난 소년이었거든.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었다.그리고 너에 대한 내 생각은 아직도 너가 가지고 있겠구나."

 

나는 조심스레 지갑을 열어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카드를 꺼내고는 만지작거렸다.
워낙 오래 지갑에 묵혀놓은지라 처음의 빳빳한 느낌보다는 조금은 부드럽다는 느낌이 강했다.

 

"또래의 여자와 하고싶은 모든걸 하고 오너라.무엇을 하든 그것은 너에겐 큰 재산이 될테니까...
그리고 원래의 자리로 날아오너라.피터팬처럼..."

 

"모든걸 지킬수는 있지만 또래의 여자와 하고싶은것을 다 하고 온다라...
그건 확실하게 장담할수가 없네요.어쨋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아!참...그리고 말이죠.만약 제가 후계자자리 거절했으면 강요하셨을겁니까?"

 

아버지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하게 답변해주었고 그 대답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주었다.

 

"아니...강요하지 않았을거다.넌 내 아들이니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저도 아버지 아들이니까...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마침내 내가 기다린 전화중 한통이 왔지만 나머지 한통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해는 종적을 감추었고 짙은 어둠이 깔릴때쯤...

불을 끄고 좌우에 김비서님과 안젤로를 대동하고는

직원들에게 오늘 하루 전화 받느라 수고하셨다며 농담까지 건네며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제시카양 이번 스캔들 사실입니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하셨습니까?"

 

짙은 어둠을 뚫고 온 흰색 밴에서 내린 9명의 소녀중 유난히 한명에게 플래시가 집중되었다.
제시카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경호원과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인파를 뚫고 겨우 사무실로 들어올수 있었다.

 

"왜 기자를 싫어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구만..."

 

"저렇게 가는길마다 괴롭히니 어느 연예인이 좋아하겠어..."

 

유리와 수영이가 고개를 흔들며 이해할수 없다는듯 이야기를 했고 제시카는 익숙하다는듯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제시카에게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내디었고 나의 구두소리로 인해 소녀시대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눈빛...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전혀 읽을수 없는 제시카의 눈빛까지...수많은 오묘한 눈빛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 시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기자들한테 얼마나 고생한줄 아냐고...거기에다 안티들은 싴데렐라며 조롱이나 하고있고...오빠란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거야!"

 

기자들을 유난히 적극적으로 욕하던 유리와 수영이가 나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시카야...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제시카의 손을 꼭 잡아주었지만 제시카는 슬며시 손을 내뺐다.

 

"지금은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빠!시카가 오늘은 힘드니까 내일 얘기하자..."

 

태연이는 상당히 혼란스러운지 제시카의 부축에만 힘썼다.
나는 그런 제시카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뿐...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래...나중에 얘기하자...늦더라도 돌아가면 되는거니까...그리고 그게 내 방식이니까...'

 

 


Episode 71-부서진 입가에 머물다.

 

"일분만 닥쳐줄래요.말 정말 많군요.대체 그 놈의 주둥인 지치지도 않네요.
일분만 닥쳐줄래요.얘기할 가치도 없다면서 왜 계속 나불나불 대나요.

혹시 할 일이 아주 없을까.

 

아주 작은 내가 그토록 잘난 당신의 시간을 뺏을정도로 커져버린건가요.
아님 혹시 내가 그토록 잘난 너에게 어떤 열등감이라도 안겨줘버렸나요.

 

일분만 닥쳐줄래요.참 시끄럽군요.대체 그 놈의 주둥인 지치지도 않네요.
일분만 닥쳐줄래요.관심 없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까지 써주고 그래요.

혹시 할 일이 아주 없을까.

 

아주 작은 내가 그토록 잘난 당신의 시간을 뺏을 정도로 커져버린건가요.
아님 혹시 내가 그토록 잘난 너에게 어떤 열등감이라도 안겨줘버렸나요.

 

아주 작은 내가 그토록 잘난 당신의 시간을 뺏을 정도로 커져버린건가요.
아님 혹시 내가 그토록 잘난 너에게 어떤 열등감이라도 안겨줘버렸나요"

 

연주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거울을 바라보고는 피끓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무기력한 나를 보고 자조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아니...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여자를 당당하게 밝히지 못 하는 내 자신을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해가 밝았다.

2007년 마지막 3일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자 아이돌의 스캔들은 당사자들의 묵묵부답으로 점점 사그러들어가고 있었다.
연주씨는 연인임을 증명하는 찐한 스킨십이 담긴 사진은 우리들의 반응을 보며 차후에 공개 할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하였지만 아직까지 새로운 사진은 나오지 않았고

제시카의 스캔들은 차츰 웃고 넘어갈 해프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점점 사그러들어가고 있었다.

 

다시금 기타를 잡았다.그리고는 이제 수백벅은 연주해 손에 익을대로 익은 Creep을 울부짖었다.
악이란 악은 다 담겼다...노래라고 할수도 없는것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기타를 내려놓을때쯤 기타 표면에 오돌도돌한 감촉이 느껴졌고 난 기타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Happy Christmas-Jess-]

 

그곳에 그런 문구가 쓰여져 있다는것을 난 그 기타를 선물받은지 몇일이 지났어도 그런 문구가 새겨져 있는지도 몰랐다.
지난 몇일동안 지독히도 경직된 생활을 했다.

그렇기에 처음엔 기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던 나도 점차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할수있는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기와 청승맞게 이 악을 노래로 표출하는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사를 확인하다 우연찮게 넬이라는 밴드를 알게되었고

그 밴드의 1분만 닥쳐줄래요라는 곡의 가사가 맘에 와닿아 악보를 뽑아 계속 연습에만 매달렸다.
거대 언론사에 대항한다는건 어차피 처음부터 무리인일이였다.

그저 청승맞게 내 자신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표출하는것...그것이 내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리고 난 제시카가 선물해준 기타로 Creep을 불렀다.

그리고 그 Creep은 기타를 선물해준 제시카가 아닌 사라를 생각하며 부른 Creep이었다.

 

아무말도...아무것도...하고 싶지 않다던 제시카...난 아침마다 짧은 아침 전화만이라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제시카는 알수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아침마다 그녀에게 아침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오늘도 여전히 지난날의 안부를 물었고 난 조심스레 오늘 사라를 만난다는 말을 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제시카의 조그마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잠시후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과 함께 짦은 아침전화가 끊겼다.

조그마한 질투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귀여운 질투인데 말이다...

 

사라에게 미안한 일이였지만 그녀의 가이드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 했다.

그렇기에 인터넷에서 시티투어 프로그램을 알아봐 가이드를 말한것을 앵무새같이 똑같이 말해주는것 밖에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한병을 들었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며 아직까지 화를 내 얼굴이 붉어졌던 티가 나는지 체크하고는 물병을 들고 집을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는 사라가 이메일로 보내준곳을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로 설정했다.

딱딱한 기계음의 목소리가 들리고는 집에서 가져온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끼고는 엑셀레이터를 밞았다.

 

그렇게 몇일전만 해도 득실거리던 기자들...그 기자들 때문에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선글라스를 쓰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어느새 그 기자들은 종적을 감추고 또 다시 평온한 하루가 지속되었지만 그전만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고 또 어디서 다른 파파라치가 나를 찍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차를 호텔 지하주차장에 주차시켰다.그리고는 사라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저 멀리 알이 큰 선글라스를 쓴 미녀가 보였다.

선글라스가 얼굴의 절반을 가렸지만 멀리서도 난 그녀가 사라라는것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녀에겐 말로 설명할수 없는 아우라가 풍겨나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나 한국에서나 사라는 수많은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호텔 직원이나 사업가로 보이는 수많은 남자들의 눈초리가 모두 사라에게 향했고

그런 그녀가 어느 한 남자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짓하자 그 눈초리는 순식간에 나에게 쏠리게 되었다.

 

"어?선글라스 썼네?예전엔 내가 그렇게 쓰라고 해도 안 쓰더만..."

 

"벗을까?안 어울려?"

 

사라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선글라스를 벗으려는 나에게 다시 선글라스를 씌어주었다.

 

"흠...제대로 된 준비는 해왔니?"

 

"....그게...."

 

내가 머뭇거리기만 하자 사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돌돌 말린 신문을 꺼내어 빳빳하게 펴고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고초를 겪었어도 준비를 해왔다면 0점...준비해오지 않았다면 100점..."

 

"그게 무슨말이야?오히려 반대가 되야 정상아니야?"

 

"이렇게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는데도 여자친구 보살피지 않고 준비해왔다면 그건 0점 짜리지.그 나쁜 놈이랑 전혀 다를게 없어."

 

아마도 그 나쁜놈이란건 바람을 핀 자신의 전 남자친구를 지칭하는것 같았다.

난 사라에게 솔직히 조금밖에 준비해오지 못 했다고 털어놓았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원했던건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못한 나였다며 농담을 건넸다.

나는 그런 사라를 보고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자조의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은 요근래 정말 오랜만에 짓는것이었다.

 

"그래서...지금 시간은 2시인데 어떻게 남은 10시간을 만족시켜줄거야?"

 

"흠..대충 스케줄은 짜놨어.일단 시티투어로 시내를 전체적으로 구경한다음 고궁 투어에 참가해.

그런다음 인사동이라는곳이 있는데 그곳이 전통이 느껴지는 거리라니까

잠깐 그곳을 돌면서 쇼핑도하고 저녁식사는 한식당에서 하자."

 

"와~조금 준비한게 아닌데?그렇게 열심히 준비했으면 점수가 점점 낮아지는데..."

 

"훗...이미 난 0점짜리 남자야!더 이상 낮아질데가 없다고..."

 

"그게 무슨..."

 

"아...아냐.농담이야.농담.그럼 주차장으로 갈까?"

 

"차 갖고 왔어?"

 

"응."

 

"오늘은 걸으면 안 될까?오늘은 좀 많이 걸었으면 좋겠어."

 

"각선미는 죽일셈이야?무다리가 된다고..."

 

"누가 계속 걷재?당연히 이동할땐 대중교통이지.옛날 기분도 내고 좋잖아.

사실...옛날 기분을 제대로 내려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까짓것 이 누나가 얼굴 팔린 너 봐줄게."

 

그리고는 사라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싱긋 웃으며 호텔 정문을 나섰다.

마침 여러대의 택시가 정차중이었고 사라와 나는 그 중 하나를 타고 첫 목적지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쌀쌀한 바람과 함께 한산한 매표소가 우리를 맞이했다.

역시나 새해초부터 시티 투어를 즐길만큼 한가한 이는 많지 않은듯 했다.

몇몇 노부부와 외국인 관관객...그리고 우리들이 전부였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하고는 런던이 연상되는 2층 버스에 몸을 싣었다.

사람이 워낙 없는지라 1층에도 자리가 널널했지만 사라는 꼭대기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어린애처럼 기여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흠...뭐 나쁘지는 않네."

 

"저기...괜찮다면 창가쪽엔 내가 앉아도 될까?"

 

사라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나에게 창가쪽 자리를 내주었다.

시동소리가 들리고는 뚜벅뚜벅 힐소리와 함께 가이드가 올라왔다.

가이드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난 창가를 바라보며 안내원이 말해주는것을 사라에게 통역해주고 있었다.

사라는 나의 말에 대꾸해주며 창가를 바라보았고 이것저것 궁금한점을 나에게 질문을 보탰다.

나는 사라의 질문을 고스란히 통역해 가이드에게 질문하는 역할을 맡으며

창밖의 풍경까지 바라보느라 한동안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가이드도 난생 처음 겪는다는 3자 통역을 할때쯤 사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자 사라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리스티안...오늘 정말 괜찮은거야?"

 

"어?아...괜찮아.그럼 괜찮지."

 

내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라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영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을 했다.

마침내 시티투어가 끝났고 센스 넘치게 시티투어 버스의 종점은 고궁앞이었다.

 

"가자..."

 

내가 사라의 팔목을 잡아 끌었지만 사라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얼굴에 지우지 못했다.

그녀는 가로수가 서있는 벤치를 가르키며 나보고 그곳에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하더니 잠시후 따뜻하게 데워진 캔커피를 나에게 내밀었다.

 

가뜩이나 고궁투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때문에 마음이 조급했지만

사라는 너무나 태연하게 커피까지 음미하는 여유를 보여주며 내 마음을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이렇게 여유부리면 투어 시간 놓쳐.이것 놓치면 2시간을 더 기다려야한다고..."

 

"투어는 안 봐도 돼.지금 이 상태에서 궁궐을 바라보면 반은 너의 눈치를 살피며 볼걸?"

 

"응?무슨소리야?"

 

"왜 이렇게 미소가 슬퍼?그 애랑 이번 스캔들로 사이가 멀어졌니?아까 너 버스에서 멍하니 바라볼때 연인들을 바라보더라.

그런 너의 미소는 두번째야.첫번째는 내가 너에게 이별을 고했을때였고 지금이 두번째..."

 

나름 밝게 보이겠다고 웃어보았는데...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나보다.

 

"그렇게 슬퍼보였어?"

 

사라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로 기억되었던

2007년 크리스마스 얘기를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그녀의 궁합...그리고 오히려 최상으로 나왔던 태연이와의 궁합...

또한 뒤이어 등장한 사라로 인해 불안해했던 제시카와 이번 스캔들로 안티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던 제시카의 이야기까지...

물론 왜 제시카가 안티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지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라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다는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게 왜 욕먹어야 할 일이지?"

 

"글쎄...나도 모르겠어."

 

"네 여자친구도 조금 그래.지금 몇살이라 그랬지?"

 

"올해 20살...이탈리아 나이로는 19살이지."

 

"역시...10대는 10대야.그런것 하나에 왜 이렇게 연연할까?

크리스티안 너 옆에 있는건 바로 자기 자신인데...그리고 내가 널 유혹하는것도 아니고..."

 

"사라...넌 모르겠지만 넌 은근히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게 있어.

물론 실제 겪어보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겠지만 겉으로만 보면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거든."

 

"음....그래?그래서 남자들이 나한테 다 주눅이 드나?나한테 당당한 남자를 거의 못 봤거든."

 

"그건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거고....그리고 그 애 보다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뭐라고 해야 할까?현실을 알았다고나 할까?

어렸을땐 정치인들을 보며 왜 바른말을 하지 못할까?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

그런데 막상 내가 이런 일을 겪어보니 내 자아에서도 갈등을 하더라고...

분명 난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왔다 자부했고 이런 일이 있어도 바른 소리를 할줄 알았는데...갈등하는걸 보니 말이야.

자존심이 짖밞힌것 같은 느낌이 들어.내 입은 부서졌어.묵묵부답이거나 변명밖에 못하는 부서진 입이지."

 

"많은 이탈리아 남자들이 여전히 마마 컴플렉스에 휩싸여있는데 그정도면 휼륭한거지!

맨날 마마!마마!거리며 변명이나 하고 거짓말이나 하는 놈들이 태반인데...그럼 그들은 입이 없는거야?

이거 원...여행하려다 위로해주게 생겼네.오늘은 놀자!

어차피 너의 그 슬픈 미소 내가 처음으로 보게 해준 죄 오늘 내가 싹 갚을테니까 오늘은 실컷 놀고 싹 잊어버려!

다시한번 그렇게 침울한 표정 지으면 나 너 더이상 안보고 그냥 들어갈거야!웃어!"

 

"이...이렇게?"

 

"더 스마일~"

 

"알았어...알았으니까...이젠 됐지?"

 

"그래...그렇게 하라고!이제야 크리스티안 답네."

 

사라는 터프하게 내 손목을 잡으며 날 일으키고는 내 등을 떠밀며 내 기분을 업해주기에 애썼다.

이미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는건 벤치에서 시간을 지체해 불가능했기 때문에

두사람 다 영문 안내문에 의존하며 궁궐을 관람하였다.

 

사라는 알록달록 아름다운 문양과 함께 고풍스러운 멋을 내는 기와를 보며 아름답다며 감탄을 했고

나 또한 이런 문화제에선 사라와 똑같은 외국인이였기때문에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궁궐을 구경해나갔다.

 

사라에게 고마웠다.그녀 때문에 기분이 많이 업되긴 했기 때문이다.

그중 압권이었던건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종묘에서 있었던 사건이였고 하나는 궁궐 마지막에 있었던 투호놀이였다.

 

먼저 종묘에서는 내가 안내문을 읽으며 경기장같은 요상한 돌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내문을 읽던중 어디선가 'Stop!Stop!'이라는 중년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었고 난 그제서야 사라를 바라보았다.

호기심 많은 사라는 그 넒은 돌판같은곳에 점점 깊숙히 들어가려했던것이다.

 

나는 즉시 외국인이라 아무것도 몰랐다며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에게 사과를 했고

사라 또한 어설픈 한국어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나중에 안내판으로 안 사실이지만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실린 귀중한 문화재였고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신성한 곳이였다.

 

하지만 그걸 알턱이 없는 사라였다.사라는 마치 네모난 판이 격투기장 같았다며

볼멘소리로 나에게 말했고 한참동안 낄낄대며 웃었다.

 

두번째는 투호였다.궁궐 관람이 거의 끝나던중 사라와 나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신 화살같은것을 던지는것을 보았다.

역시나 호기심 많은 사라는 나에게 음료수 내기를 하자며 대결을 신청하였고

사라와 나는 상대방의 한발 한발이 들어갈때마다 희비가 교차하며

그 주변에 있던 어떤 어린 아이들보다 승부에 집중하는 순수함을 보여주었다.

결국 투호의 승자는 한점차로 사라의 승이였고 난 음료수를 사들고는 그녀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그리고는 궁궐을 나와 사라와 함께 돌담길을 걸으며 아까 있었던 투호에 대해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이 돌감길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사라와의 내기에서 져 음료수를 사러 매점에 들어갔다.

음료수를 사들고는 계산을 할때쯤 주인아주머니가 연인이냐고 물어보면서 연인이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보라고 권해주셨다.

 

예전엔 단골 데이트코스였는데 지금 젊은 친구들한테

그닥 사랑받지 못 한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면서 반강제적인 권유를 하시는데 무시하고 넘어갈수가 없었다.

 

제법 운치있는 거리에 돌담까지...꽤나 멋있는 산책로이고 낭만적인 장소라 생각했지만

왜 이런 운치있고 전통있는곳이 외면당하는지 알수없었다.

그리고는 제시카와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조심스럽게 했다.

 

"이 거리는 가을에 오면 더 멋있을것 같아.낙엽과 단풍이 우수수 떨어지고...진짜 낭만적일텐대...그치?"

 

"응.그러게 말이야.지금은 가시만 앙상한 나무만 남아서 휑하네."

 

거리는 점차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다음 코스인 인사동에 가기위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요!저기요...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 멀리 반대편 횡단보도에서 세 소녀와 함께 수많은 카메라와 스태프로 추정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것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고는 그들은 우르르 뛰어오고는 차츰 거리가 가까워지자 세 소녀중 두명의 소녀는 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머지 한명은 내 옆에 있는 사라를 보더니 나에게 다가오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어?뭐야 이건?"

 

유리와 써니는 어이가 없다는듯 코웃음을 치었고 나는 이런 운명의 장난을 치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스태프 또한 나의 존재를 파악하며 어이없다는듯 웃고 있었다.

모두들 약간 어이없다는듯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포커스는 내가 아닌 사라에게 맞춰졌다.

 

사라는 쓰던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리고는 제시카를 바라보며 눈인사를 했다.

제시카 또한 눈인사를 했지만 사라에게 기가 눌린게 느껴졌다.

 

유리,써니,제시카가 진행하고 있던 프로그램은 여성들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리 앙케이트 조사를 하는것이었다.

제시카는 능숙한 영어실력으로 사라에게 질문하였고 사라는 이탈리안답게 조금은 딱딱하지만 절제된 발음으로

제시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성실히 해주고 있었다.

 

"Love is trust and believe..."

 

사라는 제시카를 지긋이 바라보며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뭔가 엄청난 뜻이 함축되있다는건 제시카 또한 알고있을것이다.

그말이 있은후 제시카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내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뭔가 가슴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았는지 계속해서 나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시카가 제 여자친구에요!' '여러분 축하해주세요!'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 앞으로 좋게 지켜봐 주세요!'

적어도 용기있게 내 주변을 둘러싼 시민들과 스태프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가 없었다.내 입가는 부서져버렸다.그런 말은 부서진 입가에서 머물뿐이었다.

 

 


Episode 72-부서진 입가를 맞추다.

 

"뭐 이렇게 긴장하고 그래?"

 

"지금 나...오디션 볼때보다 더 떨리는것 알아?"

 

소녀시대중 가장 기가 세고 왠만한 사람에겐 밀리지도 않는 제시카가

 마치 잘못을 범한 어린애가 처벌을 기다리는듯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하고 와.혹시 사라가 뭐라 심하게 그러면 내가 보호해줄테니까 믿으라고..."

 

제시카의 가녀린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문이 열리고 그곳엔 제시카의 기를 잔뜩 누른 한 여인이 고귀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인사를 건넸다.제시카 또한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눈인사에 답해주었다.
마침내 문이 닫히고 그 안에서의 일은 그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벽에 몸을 맡기고는 서로의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그것이 내가 할수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는 잠시 침묵에 쌓였다.

잔뜩 기가 눌린 제시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을 하며 당당히 어깨를 폈지만 시선은 어디에 두지 못할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제 악센트가 조금 특이하죠?저도 어쩔수없는 이탈리안이라 조금 이해해주세요.후후..."

 

의외로 차갑게 보였던 사라가 웃음섞인 가벼운 말을 던지며 살갑게 대하자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제시카였다.

 

"아...아니에요..."

 

사라는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눈을 감았다.

뭔가 긴 회상에 잠긴듯 한참을 눈을 감은 사라의 큰 눈망울이 떠졌을때쯤엔 눈가가 약간 촉촉한 젖어있었다.

 

"혹시 크리스티안이 Creep을 불러준적 있어요?"

 

사라의 그런 모습은 예상못한 제시카...거기에다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는 더욱 당황스러워하는듯 했다.

 

"아...아뇨...저에게 불러준적은 없지만 부르는 모습은 본적 있어요."

 

"언젠가 그가 나에게 그 노래를 불러준적이 있었죠.난 궁금했어요.
왜 수많은 러브송중 저 노래를 불러주는걸까?Creep의 가사는 당신도 알거에요.
한 평범한 남자가 모두의 관심을 받은 한 여성을 좋아하며 그런 자신을 비웃는 내용이죠.그래서 그에게 물어봤죠.
하필이면 왜 자신을 낮춰가면서까지 그런 노래를 부르냐고...그랬더니 그가 그렇게 답하더군요.
그 노래를 부르면 마치 가사속의 남자가 내가 된것 같아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모든걸 받칠수있을것같으니까...라고요."

 

"...."

 

"제가 다니던 학교엔 동양인이 두명이었어요.한명은 중국인이였고 다른 하나는 그였죠.
완벽한 소수였죠.뭐 대부분이 그렇듯이 소수와의 문제는 언제나 소수가 일으키죠.
그 소수가 그 둘에게 서서히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중국인은 결국 전학을 갔어요.그리고 사건의 가해자인 소수는 징계처리 됐구요.
사건의 징계수위가 결정될때 유달리 똑부러지게 자신의 의견을 제창하는 한 동양인이 있었죠.

사실 제가 생각했던 동양인의 이미지도 그 중국인이었어요.
작고 약하고 제대롬 말도 못 하는 그런 이미지요.크리스티안은 뭐랄까?
저에겐 좀 색다른 충격을 준 동양인이었어요.그렇게 그를 기억하게 됐죠."

 

처음엔 잔뜩 긴장하던 제시카도 긴장을 누그러뜨리고는 어느새 사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라는 그런 제시카를 보고 흐릿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를 기억하게 됐지만 졸업반인지라 차츰 그에 대한 기억은 잊혀져갔죠.

그렇게 입시에 몰두하고 있던중 축제 시즌이 다가왔고 학교의 임원이었던 전 학교의 가장 큰 자랑거리 밴드부를 점검하러 갔죠.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큰소리 뻥뻥치는 동양인을 만나게 됐어요.

사건은 즉,크리스티안이 막무가내로 밴드부 가입을 신청한거였죠.
하지만 그가 지원하던 기타는 이미 노련한 3학년의 차지였고,그렇다면 서브기타로라도 껴달라는거였어요.

밴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무리한 부탁이였죠.밴드는 호흡이 생명인데 새로운 멤버가 들어와서 호흡을 깨니 말이죠.

그때 그 사건이 생각나더군요.그리고는 그가 그때의 그 당당한 동양인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결국 제가 제 친구인 밴드리더를 설득시켜 그를 서브 기타리스트에 꽂아 넣어줬죠.
밴드부의 기타리스트도 수재라 그 또한 입시준비에 바빳거든요.그래서 그가 연습에 불참할때마다 대신 쳐주는 대타역할이었죠.
참으로 해맑게 좋아하더군요.그때의 그 당당한 동양인 맞나 싶을정도로요...
그리고 그 이후 밴드부실에 점검이라는 핑계로 매일 갔어요.연습이 없는 날도요.왜냐하면 그곳엔 항상 그가 있었거든요."

 

사라는 뭐가 그렇게도 우스운지 홀로 쿡쿡대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물어봤죠.왜 기타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왜 밴드부에 들고싶은지요...
그런데 뭔가 철학적인 얘기가 나올줄 알았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기타는 그냥 좋아서 밴드부는 여자를 꼬시고 싶어서...라고 답하더군요.
그래서 그에게 말했죠.그 기타로 한번 날 꼬셔보라고...
처음엔 부끄러움을 타더니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연주에만 몰입하더군요.후후...내 눈은 쳐다도 보지 못하구요...
그런 전개는 조금 의외였어요.또 큰소리 뻥뻥치며 넘어오면 곤란해요...라고 능글맞게 말할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마 그때쯤이였을거에요.왜 Creep을 불러주냐고 물어본것도...
시간은 흘러흘러 축제가 시작되었고 2,3학년이 섞여있는 4인조 밴드에 유일한 1학년생이 있었고,

그게 그였죠.불과 3개월만에 밴드부 생활 3년한 멤버를 넘어선거죠.
그 또한 나와 친했던지라 멀리서 밴드부 공연을 같이 지켜봤죠.그리고 그에게 물었어요.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해도 되냐고...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며 가더군요.
네...그래서 고백했어요.천하의 사라 베르니가 존경하는 그에게..."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마치 한편의 로맨스 영화 같네요..."

 

"로맨스 영화라...네...영화로서는 해피엔딩이었죠,하지만 현실은 달라요.
지금 나에게 남은건 술자리에서의 안주거리가 될 추억과 그때의 아련한 그리움...그리고 후회뿐이죠.
내가 대학생이 되고 그는 여전히 고등학생이었죠.친구들은 그랬죠.
그 주목받지 않았던 동양인이 이제는 인기만점이 되었다고...믿을수 없었죠.하지만 사실이었어요.
고등학교때 여자에게 잘 먹히는 무기가 있죠.운동...거기에다 그는 밴드부였죠.
한국은 잘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에서의 락밴드는 섹시한 그 자체에요.잘 몰랐는데 운동을 참 잘하더군요.
특히 농구와 축구를요.작은 체구로 볼을 잡고는 덩치 큰 포워드를 조율하더군요.

처음에 크리스티안이 CEO를 맡았다고 했을때 참 잘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그의 그런 모습을 난 아니깐요.
그때부터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을거에요.어쩌면 그게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시점일지도 모르겠군요.
크리스티안한테 내색은 하지 않았어요.명색이 내가 교내 탑이였는데 질투라니...나한테도 자존심은 있으니깐요.
그런데 말이죠...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니 그 자존심은 없는게 나은것 같네요.제가 느끼긴요.
저는 자존심을 지켰어요.거기에다 주변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등학생인 크리스티안을 보며 이별을 권고했죠.
저렇게 철없는 놈을 만나면 네가 나중에 고생한다구요.

1년을 넘게 그런 말에 시달렸고 결국은 아주 사소한 일때문에 이별을 선언하는 내 모습을 보게되더군요.

끝은 언제나 사소한 걸로 끝이 나더군요...네..결국 이별을 고하고 끝이 났죠.아직도 그의 그때의 모습을 기억해요.
우수에 찬 눈빛을 창가를 바라보던 모습을요.그리고 먼저 가보라고 했어요.저는 먼저 자리를 떳죠.
며칠전 당신과 마주쳤을때 그와 저녁 식사를 하며 그때 왜 내 얼굴을 왜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냐고 물었죠.
솔직히 전 이별을 고할때 크리스티안이 과격한 행동을 보일줄 알았거든요.그러자 그가 답하더군요.

네 얼굴을 보면 울어버릴것 같아서라고요...강할줄 알았어요...하지만 너무나 여린 남자에요."

 

사라는 잠시간의 침묵에 쌓였다.그리고는 쉼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침대에서 한참을 생각했죠.그랬더니 눈물이 흐르더군요.생각해보니 크리스티안...언제나 혼자거나 소수였어요.

이탈리아에서도 잉글랜드에서도 그리고 자신과 외모가 비슷한 한국에서도 당신이 그렇게 나가면 그는 혼자이고 이방인일뿐이에요.
사람들이 단순한 열등감인지는 몰라도 여기에서도 그를 혼자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그는 더욱 더 안 좋은 악조건이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두와 소통하는데 성공했지만,이번엔 좀 다르다고 하더군요.
책임감이 있어서...어깨에 잔뜩 짐을 지고 있어서 예전과 같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기가 힘들다고 말하더군요.
난 한때 그에게 불안감을 느꼈죠.그리고 그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고 지금 나에게 남은건 그와의 추억...그리움...후회뿐이죠.
당신은 어떻게 할건가요?나와 똑같은 선택을 할건가요?내가 해준말 기억해요?
난 물론 바람맞은적도 많아요.하지만 여전히 난 사랑은 신뢰라고 생각해요.

그가 나에게 준 소중한 가르침은 여전히 여기서 살아숨쉬니깐요."

 

사라는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난 사실 아직 크리스티안 많이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그와의 추억까지 꺼내가며 당신에게 도움을 줄까요?
그와의 저녁식사가 있던밤 다시 한번 장난식으로 그에게 물었죠,내가 돌아가면 받아주겠냐고...
그랬더니 자신은 한번 이별한 여자는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며 어떠한 여자와도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거기에다 자신은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으니 내가 들어올곳은 없다면서 미안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데...완강하더군요.
그래도 만약 당신이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난 계속 그에게 도전할거에요.난 사라 베르니이니깐요."

 

"....난...제시카에요."

 

"그 짧은 말이 나에 대한 답인건가요?이제 곧 선택의 시간이 오겠군요.
몇가지만 더 말할게요.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자신의 입가는 부서져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도 밝히지 못한다고...
그의 부서진 입을 고쳐주세요.또...훗...이 얘기까지 하면 당신은 날 완전히 천사로 모셔야겠네요.
뜬금없지만 그는 단발머리를 좋아해요.그에게 잘보이고 싶으면 그 답답한 머리를 한번 잘라보는것도 좋을거에요."

 

"그 말은 모순이 아닐까요?분명 당신의 말에 나온 오빠는 최고의 남자였어요.
내가 어떠한 머리스타일을 하든 날 사랑해줄 남자죠...그래서 당신을 천사로 모시고 싶은 생각은 없네요."

 

"....한방 먹었군요.네...그는 내가 겪어본 남자중 최고의 남자에요.
여성이 어떠한 머리스타일을 하든 사랑해줄 남자죠.그래도 단발머리를 참 좋아하더군요.
적어도...내가 머리를 짧게 잘랐을때 어떠한 선물을 받았을때보다 좋아했어요."

 

줄곧 사라의 기에 눌린 제시카였지만 아까 사라의 경고 때문인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고있었다.
두사람은 일어섰다.사라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뭔가 쓸쓸함을 감출수 없었다.
제시카는 조용히 문을 열고는 그를 찾았다.고개를 숙이며 벽에 기대어 있는 그를 보고는 제시카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제시카를 알아보고는 말을 건네려했지만 발음이 새고 있었다.
제시카각 양볼을 꼬집으며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바보야...그렇게 약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난 그런 나약한 남자 싫어한다고..."

 

그리고는 조심스레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외진 벽에 다다랐다.
제시카는 그의 귓볼을 어루만지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입가가 부서졌다고?부서지면 다시 맟추면 되는거야.그러면 되는거야...언제든지 내가 맞춰주는 천사가 되어줄게...오빠의 천사가..."

 

부서진 입가를 맞추다...입가를 맞추다...

 


Episode 73-청소하는 날

 

"콜록콜록..."

 

펄럭펄럭 날리는 먼지 때문인지 연신 기침이 난다.

이곳에서 산지 근 6개월이 다 되건만 아직 제대로된 대청소 한번 해본적이 없어 수북히 먼지가 쌓였다.
이렇게 수북히 쌓인 먼지처럼 내 마음의 먼지도 수북히 쌓였기에 모든걸 털어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평소에 그닥 눈길이 가지 않던 먼지털이개를 잡고 있는 내가 보이는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모든것을 모두 털어버리고 난 번지르르한 직함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남자가 아닌

한 여자의 연인 그리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기다리며 내 마지막 임무를 조용히 끝맺길 기다리고 있다.

그 결말이 해피 엔딩일지 새드 엔딩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시카의 갑작스런 키스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사라...

공항으로 바래다주던 도중 이번해 발렌타인 초콜릿은 씁쓸할것 같다며 농담을 건넸고 난 초콜릿은 남자만 받는거 아니냐며 응수했다.

그러자 사라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 상자를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달콤 씁쓸한 초콜릿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물론 그때는 발렌타인 데이를 한달 가까이 남긴 날이였지만 난 그 초콜릿을 감사히 받았고

여전히 그 초콜릿은 냉동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음...달콤하기만 한대.뭐가 씁쓸하다고..."

 

초콜릿 하나를 냉큼 집어먹은 나는 그동안 온 문자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했다.

'설 연휴 잘 보내세요~'라는 메세지가 쏟아졌다.그러고보니 며칠만 있으면 설이다...

아무리 부지런한 한국인이 소유주라 해도 기본 틀 자체가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리고있기 때문에

그런 라틴 특유의 인생을 즐기자는 마인드는 전형적인 한국 회사인 SM에게도 똑같이 녹아들고 있었다.

 

연예인과 스태프들이 최대한 피로하지 않게 해주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때는 두둑한 포상이나 휴가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연휴에도 다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빅뱅과 원더걸스를 영입한 IS기획은 설에도 휴가가 없다고 들었는데 반면 SM은 설연휴 3일 내내 쭉 쉬니...

소녀시대는 1200억과 휴가를 바꾼 꼴이 되어버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집으로 내려가기 며칠전부터 바리바리 짐을 싸는걸보니 역시 집이 좋긴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3일간의 연휴도 짧은이가 있었으니 바로 티파니였다.나 역시도 집은 저 머나먼 밀라노였기에 방콕행이 확정이었다.

그렇기에 동병상련의 입장으로 게임이나 DVD를 보면서 시간이나 죽이자고 했지만

누나에게 급한 연락이 왔고,그 연락은 이번 설은 큰집에서 보내자는거였다.

 

사실 이번이 첫 한국방문인 내가 큰집을 가보았을리가 만무했고 사실 아버지가 어떤 집에서 자랐을지도 내심 궁금했다.

그렇기에 티파니와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은채 넙죽 대답하였고

결국 티파니에겐 키를 맡기면서 하고싶은것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

차츰 문자를 확인하던중 흔해 빠진 설날 인사 메세지중 유독 눈에 띄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신비서의 문자였다.

 

[사장님~언제나 부족한 절 따뜻한 격려로 감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신비서-]

 

제 3자가 보면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문자 메세지지만 적어도 신비서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사람에겐 이상하게 느껴질거다.

내가 아는 신비서는 단정함과 무미건조함 그 자체의 여인이었건만 이 문자의 여인은 애교 많고 활달한 여성처럼 느껴졌다.

사실 신비서가 요즘 기가 막힌 변화를 보이기는 했다.

마치 순정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답답했던 머리를 자르고는 멍해보였던 안경까지 벗었다.

또한 촌스럽고 헐렁하기 그지 없던 정장은 세련되고 몸에 딱 달라붙게 입고와 많은 남성들의 눈길이 절로 가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 수줍은 성격은 그대로지만 말이다...

칭찬 한번 해주었더니 몸을 베베 꼬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신비서의 모습은

여전히 신비서가 성격만은 그대로구나 생각했건만...오늘의 이 문자는 신비서라는 인물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기 그지 없었다.

 

[어때?지금 미용실인데 단발해볼까? -제시카-]

 

사라가 떠난후 제시카는 매일 단발머리 타령이다.사라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신비서의 단발 머리를 보고

내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 해주자 그 모습을 본 제시카의 미묘한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계속해서 단발머리 타령을 하길래 사라에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냐며 메일을 보냈지만 돌아오는건 묵묵부답과 이모티콘뿐이었다.

어쨋든 난 오늘도 하지말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물론 내가 단발머리를 좋아하는건 사실이다.하지만 내 여자가 단발머리를 하는것 만큼은 극구 사양이다.

언제나 이별을 경험하였을때 나는 먼저 그녀들을 보냈다.그리고는 떠나가는 그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언제나 짧게 찰랑이는 단발머리였다.고작 그런 징크스 때문에라고 나를 비웃을수도 있겠지만 난 싫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을 하는 내 여자의 모습을 볼수없는것에 때로는 야속한 장난을 친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를 좋아했던 여자중 나쁜 여자는 없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핸드폰을 닫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리고는 또 다시 청소를 하며 혼자만의 시간에 잠긴다.

톡톡 총채로 먼지를 터록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며 이곳저곳 묵은 때들과 수북히 쌓인 먼지를 제거할때쯤

거울에 더덕더덕 달라붙은 사진이 보였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사진...고등학교 밴드부시절을 기억나게 해주는 사진...

홀로 잉글랜드로 가 그곳에서 일하며 자유를 만끽하던 사진...소녀시대와의 이탈리아에서의 사진...

SM 식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그리고 중간중간 애정 섞인 스킨쉽을 하고 있는 남녀의 사진까지...

물론 제시카는 사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정할수 없다며 은글슬쩍 사진을 떼어 몰래 다른곳에 숨겨놓았지만

차마 찢거나 자신이 가져가지는 못한다.뭐 그런 순수함이 제시카의 의외의 매력이긴 하지만...

결국 뒤지다보면 언젠가 사진은 나온다.난 그걸 애써 숨기거나 감추지 않는다.

왜나하면 그것이 내가 살아온 흔적이기에 그걸 애써 부정하면 그건 내가 아니다.

허리를 구부려 차근차근 사진을 다시 살펴보았다.

 

"흠...가장 중요한 사진이 없네."

 

그러고보니 제시카의 사진이 없었다.그도 그렇듯이 그녀는 인기 아이돌이기에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오직 문자나 통화만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제대로 된 데이트도 크리스마스때 단 1번이였고

그 스릴이 어느것인지 체험해봤기 때문에 더 이상 모험을 하기는 두려운게 사실이다.

물론 중간중간 형의 결혼 축가 프로젝트때문에 모이긴 했지만

그것 또한 차츰 마무리 되가기 때문에 모이는 주기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주섬주섬 주변을 뒤적거리며 제시카와 찍은 사진이 있나 살펴보니 지갑에서 크리스마스때 제시카와 찍은 스티커 사진이 나온다.

진짜 사진이 아니였기에 기분이 업되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는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손톱을 이용해 사진을 뜯어내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 사진을 붙였다.

그리고는 테이프를 이용해 떨어지기 않게 봉합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소녀시대 9명이 사는 집을 나는 혼자서 산다.그렇기에 청소할 공간도 엄청 넓기 때문에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흰색 밴드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기위해 고정시키고는 맥주와 함께 사라가 준 초콜릿을 들고는 TV앞에 앉았다.

 

 

 

 

 

 

딩동~!딩동~!

 

 

 

 

 

 

초인종이 울리고는 그제서야 무의식적으로 집어먹던 나를 보게 되었다.몸을 일으켜서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태연이가 방금 스케줄을 맞췄는지 피곤한 기색의 얼굴로 서 있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어?아...그래..."

 

"뉴스보고 있었어?"

 

"아...응..."

 

제시카를 선택한 이후로 태연이에겐 미안한 감정이 많다.그렇기에 최대한 접촉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기에 최대한 태연이와는 단둘의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태연이 또한 그것이 편한지 나에게는 먼저 말을 걸지도 전화를 하지도 않기에 태연이도 그것이 편하구나...라는

내멋대로 해석을하며 내 행동을 합리화한다.

 

"뭐야...테니스 한판 뛴 사람이네?"

 

"어?"

 

뉴스가 끝나고 스포츠 뉴스에서 흰색 밴드를 한 페더러가 지금의 나와 비슷했기에 태연이가 그런 소리를 한것 같다.

내가 재빠르게 총채를 들고는 방금 대청소를 했는데 테니스 한판 한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맞받아치자

그런 나의 모습이 우스운지 피식 웃음을 떠뜨리는 태연이였다.

 

"할 얘기가 뭐야?무슨 얘기인데 이 시간에..."

 

"아...이번 설날 말이야..."

 

"응."

 

내심 심각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별 심각한 얘기가 아닌듯 보였다.

 

"원래 부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오려 하셨는데 갑자기 차가 고장났다네.

그래서 밴이라도 타고 가려고 했는데 이미 매니저 오빠들도 떠난 상태이고....거기에다 기차나 버스는 일찌감치 예약 끝났고..."

 

"비행기로 가면 되지 않을까?"

 

"일기예보 못 봤어?"

 

"일기예보?왜?"

 

그때 마침 스포츠뉴스가 끝나고 일기예보가 시작되었고 이번 귀성길을 최악의 귀성길이 될것 같다며

전국에 대설주의보와 경보가 내려졌다고 말했다.

 

"특히나 호남지방은 대설 경보로 인해 귀성 시간이 최소 12시간으로 예상되오니 호남으로 귀성하시는분들은 많은 혼란이 예상됩니다."

 

"봤지?비행기 못 떠.파니는 신나서 같이 놀자며 잘됐다고 했지만 나도 집에 가고 싶은건 마찬가지거든...

오빠는 큰집이 광주라며?어차피 내려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안 될까?"

 

"흠..."

 

태연이 또한 나름 어렵게 생각하기에 지금 한말이 얼마나 용감한 말인지는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나 또한 태연이를 어려워하기에 최소 12시간을 단둘이 보내는건 부담스러웠다.

 

"역시...시카때문에 힘드나?"

 

"아...아냐...그녀석 때문에 뭐가 힘들어?내가 사장인데 그녀석은 찍소리도 못 하지."

 

"하하...내가 보기엔 정반대 같아보이는데..."

 

"아냐...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꼭 내려가봐야되나 방금 고민한거야.

눈 온단 얘기는 들었는데 이 조그만 땅에서 그정도 걸릴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그래서...대답은...?"

 

"같이 가자...이날을 얼마나 기다렸겠어..."

 

"응...고마워..."

 

꽤나 좋아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한 반응의 태연이였다.그제서야 태연이는 심각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수줍게 웃어보였다.

태연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티파니만이 홀로 지키고 있는 숙소로 돌아갔고 나는 쇼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내 머리속에는 기상 캐스터의 최소 12시간이라는 말만 계속 맴돌뿐이었다.

 

 

Episode 74-운명의 카드

 

"근데 말이야...너가 왠일이야?난 당연히 거절할줄 알았는데..."

 

"흠...글쎄...아무래도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니까...그래서 그런것 같은데?난 이번이 마지막이잖아."

 

그때 신호음과 함께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리었고,나는 순간적으로 내 입을 가리었다.

통화를 잠시 멈추고 방 밖으로 나가보니 태연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아냐...혹시나 해서..."

 

"뭔데?"

 

"그냥..."

 

"싱겁기는..."

 

통화를 끝맞치고 짐을 들었다.내가 나오자 마치 나쁜짓을 한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벽에 걸려있던 달력에서 자신의 짐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짐이든 가방을 낑낑들며 허겁지겁 문을 열고 나왔다.

태연이가 밖으로 나가고 난 태연이의 시선이 머문 그 달력을 넘겼다.

그리고는 3월 중순에 검은색 펜으로 선명하게 적힌 문구를 홀로 중얼거렸다.

 

"Goodbye...My Lover..."

 

문을 열고는 집을 나왔다.

여전히 태연이는 무거운 짐을 낑낑들며 마치 옆에서 살짝만 밀어도 쓰러질것 같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난 태연이의 손에서 강제로 뺏듯이 가방을 가져왔다.

 

"이러니까 그러지...누가보면 이사가는줄 알겠다."

 

"아...미안..."

 

태연이는 내 얼굴을 흘겨보고는 뭐가 그렇게도 미안한지 기어들어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예전의 태연이 같았더라면 이렇게 툴툴대는 날 보고 반박도 했겠지만 오늘은 온순하기만 하다.

아니...정확히 말하면 요즘의 태연이라고 하는게 맞는것 같다.

요즘의 태연인 나와 말 자체를 섞으려 하지 않으니까...태연이에겐 그게 더 편한건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차에 짐을 싣고는 차에 탔다.그런데 약간 의외인점이 있었다.바로 태연이가 조수석에 앉은것이다.

내 예상이었지만 태연이와의 12시간은 서로가 앞뒤로 분리된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어색한 12시간이 될것으로 예상했는데 말이다.

 

오보 투성이인 일기예보는 오늘따라 신들린듯 잘맞았다.마치 이것이 12시간 정체의 눈이라고 말하는듯 펑펑 눈도 쏟아졌다.

어깨와 머리에 묻은 눈을 털고는 운전석 문을 열어 자리에 앉았다.

 

"춥니?"

 

"조금..."

 

태연이가 하얀 입김을 내며 손을 비비고 있길래 히터를 틀어주었다.

히터를 통해 서로의 체온은 따뜻해졌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얼음장같았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상대가 어떠한 행동만하면 몸을 움츠리기 일쑤였다.

거기에다 어색함을 깨기위해 노래를 트니 첫곡이 7989라니...속으로 아무죄도 없는 MP3를 욕하면서 빨리 7989가 끝나길 기도했다.

 

"이 곡 녹음할때 참 재밌었는데...."

 

태연이는 그때를 회상하는듯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요즘엔 말이야...그런 생각을 해.오빠가 되게 어렵게 느껴진다고..."

 

"흠...그래?"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태연이는 나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뒤에 덧붙인 이유는 내가 예상한 정반대의 말이었다.

 

"응.7989에서 오빠가 노래한 남자는 79년생이잖아.근데 지금의 오빠는 79년생보다 더 나이가 많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예전과는 너무나 조용하고 차가워서 말을 걸기가 힘들어...나도 참...내가 괜한 소리를 했지?"

 

"아냐...괜찮아...무슨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때 파티가 있었던 날인가?오빠가 우리를 구해줬을때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어.그때 오빠가 피터팬을 받았나?

난 팅커벨을 받았어.그때 오빠가 피터팬을 받았다고 들었을때 내심 기뻣어.시카는 엉뚱한 직녀를 받았거든.

그래서 내가 오빠와 조금 더 가깝구나...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아니었어.피터팬의 짝은 웬디였지.

팅커벨은 피터팬 옆에서 지켜주고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일뿐인걸?그래서 처음엔 힘들었지만 난 팅커벨 같은 존재가 되기로 했지...

비록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말이야..."

 

"그날 웬디는 너도 시카도 아닌 유하였어.그것도 카드는 바꾼것이고...웬디의 원주인은 너가 모르는 제 3의 인물이야.

그러니까 그 카드는 아무의미도 없어...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되고..."

 

또 다시 태연이에게 툴툴거리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사실 태연이도 그렇지만 나 또한 그 카드를 지갑속에 귀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 카드를 신경 안 쓰려고 해도 그곳엔 아버지가 해주신 말이 적혀있었고

유하가 한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쓰일수 없는 카드였다.

 

"미안...내가 괜한 짜증을 부려서..."

 

"아니...괜찮아.내가 괜히 예전 얘기를 꺼내서 그렇지..."

 

"....껌 씹을래?"

 

"....응...고마워..."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태연이였다.그렇기에 잠시동안 아무 생각없이 있으라고 껌통을 주었다.

태연이는 껌 하나를 집고는 자신의 입에 넣었다.

 

"아~그래도 말하니까 시원하다!이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

오빠랑 다시 편하게 지내고 싶은데 혹시 이런 얘기 꺼내서 어색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또 오빠가 애 같다며 비웃을것 같기도 해서 그동안 말 못했어..."

 

그러면서도 한손을 튕기며 한손으로는 얼굴을 받치며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태연이였다.

일기예보의 예고대로 하늘에는 엄청난 눈이 내렸고 도로곳곳은 제설 작업을 하기에 바빴다.

거기에 시시각각 들려오는 교통정보는 암울함을 더했고 국도를 이용하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미 길을 고속도로로 틀었기 때문에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집을 떠난지 2시감난에 고속도로 진입에 성공했다.

 

어찌보면 내가 본 도로중 가장 평화로운 도로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앞서나가려 하지 않고 지쳤다는듯 하품을 내뱉으며 벌써 눈을 붙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 역시도 안전벨트를 풀고는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차피 거북이 같은 차였기 때문에 껌을 씹으며 가끔씩 발운동이나 해주면 끝났다.

태연이는 껌을 씹으며 이어폰을 꽂았다.그리고는 한동안 음악감상을 하다 귀가 아픈듯 귀를 매만지며 이어폰을 뺏다.

 

"흠냐...진짜 심심하다.뭐 네비게이션에 영화 같은것 없어?"

 

정말 그말이 하고 싶어서 그동안 그랬는지 한결 편안해보이는 태연이였다.

 

"있어.있긴 한데..."

 

"있긴 한데...뭐?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그게...너가 보기엔 좀 재미없는게 많은데..."

 

나는 네비게이션을 틀어 영화 목록을 보여주었다.

 

"The God Father...The God Father...The God Father...

무슨 대부 시리즈로 도배를 해놨네?어?아니네...러브액츄얼리?노팅힐?트랜스포머도 있네."

 

"원래 내가 대부 팬이라...거기에다 배경이 이탈리아이기도 하고..."

 

나는 얼굴을 글쩍이며 말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이프 온리...라붐...지금 만나러 갑니다...트랜스포머랑 대부 빼고는 죄다 멜로 영화네."

 

"들으면 웃기겠지만 난 원래 제일 좋아하는 장르가 멜로거든?트랜스포머는 그냥 접대용이고 한번도 안 봤어.

내가 저렇게 CG많이 쓰는 영화 제일 싫어하거든."

 

"흠...난 오히려 이렇게 감동 쥐어짜는 영화를 제일 싫어하는데...모름지기 영화는 싸우고 부수는 맛이 제 맛이지."

 

태연이가 예전으로 완벽히 돌아왔다는것을 이 시점에서 느꼈다.

내가 아는 태연이는 순종적인 여자가 아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줄 알고

때론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으면 반박의견도 낼줄 아는 멋진 여자이다.

태연이도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나 또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모름지기 영화는 감동이 있어야 제 맛이지.CG로 떡칠한 영화는 그냥 눈요기거리에 불과하다고...

진정 대사나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야 걸작이라고 말할수 있는거야!"

 

"몰라...어쨋든 난 트랜스포머 볼거야.이거 우리 데뷔할때 개봉해서 남들 다 봤다는데 난 보지도 못했다고...

오빠도 보지도 않고 비난하지 말고 일단 보고 말하라고..."

 

태연이가 재생 버튼을 누르고는 뒷자석에 있는 가방을 뒤적거려 과자 몇봉지를 뜯었다.

처음엔 운전에만 집중하던 나도 본능에 이끌려서인지 차츰 과자에 눈길이가고 나중에는 화면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그만큼 차가 막힌다는것을 증명하기도 했다.운전자는 1분에 한번씩 액셀레이터만 밞아주면 끝나는거니까...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이르자 어느새 태연이와 함께 탄성을 내뱉은 나를 보게 되었고

영화가 끝나고 태연이가 재밌냐고 묻자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부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거 봐~영화는 때리고 부숴야 제맛이라니까~"

 

"뭐...킬링타임용으로는 딱이네.덕분에 2시간 동안 50km나 갔고..."

 

"근데 말이야...영화보면서 계속 생각한게 있는데..."

 

"나도..."

 

그리고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로봇으로 변신해서 가고 싶어!!"

 

그리고는 둘다 폭소를 금치 못했다.

 

"거봐~그렇게 가벼우면 얼마나 좋아...휴...다행이다...난 앞으로 절대 오빠의 그런 모습 못 볼줄 알았는데 말이야..."

 

태연이는 정말 마음을 비웠는지 무척이나 편해보였다.

그나저나 2시간만에 겨우 50km라니...갑자기 현실의 벽이 다가오니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냥 국도로 가는게 어떨까?이러면 한밤 자야 될것 같은데..."

 

"난 상관없어.이미 우린 한 침대에 누운 사이잖아.거기에다 설마 여자친구의 친구한테 해코지 할일도 없을테고...

그리고 원래 고속도로의 별미는 휴게소라고...그러니까 첫 휴게소에 밥먹고 그 다음 국도에서 빠지자!"

 

"밥 먹으려고...?겨우 고작 그 이유야?"

 

"어라?휴게소를 무시하네?난 고속도로 타면 거기엔 무조건 들려야한다고..."

 

"알겠다...알겠어...근데 방금 과자를 그렇게 먹고도 또 들어가냐?"

 

"과자 들어가는 위장 밥 들어가는 위장 따로 있나보지...헤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자신이 좋다는데 말릴이가 누가 있겠는가?

눈은 그칠줄을 몰랐고 갈길은 암담하고 고난의 역경이였지만 세상의 영원한것은 없다듯이...차츰 휴게소 입구가 보였다.

휴게소에 차를 주차하고는 내릴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태연이가 인기 아이돌이라는게 생각났다.

그래서 내 오른쪽에 있는 태연이를 보니 모자를 쓰고는 후드를 눌러쓰고 안경까지 쓰며 치밀한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참 독하네...'

 

태연이는 나에게 안경과 모자가 없냐고 물어보았고 난 모자만 있다 대답했다.

태연이는 자신에게 모자를 달라부탁했고 난 검은색 비니를 꺼내주었다.

그러자 태연이는 내가 준 비니를 나에게 깊숙이 눌러쓰이고는 재차 선글라스는 없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대답하지않고 대체 뭐하는짓이냐 묻자 기여코 선글라스를 찾아 내눈에 씌우는 태연이였다.

 

"뭐...뭐하는짓이야?"

 

"저번처럼 파파라치 찍히면 어떡하려고 그래?난 아이돌이고 오빠도 저번일로 나름 얼굴이 알려졌다고..."

 

"나 참..."

 

결국 태연이와 나는 중무장을 걸치고 차에서 나왔다.

태연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위해 땅바닥을 보며 걷기 바빴고 난 흐린 하늘에 눈 내리는날 선글라스를 썼기에

사람들의 눈길을 한눈에 받았지만 시선을 감출수있는 선글라스가 있었기에 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워낙 짜증스런 날씨에 수많은 사람들이였기 때문에 다들 자기하는 일에만 열중이었다.

마침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불이 들어왔고 태연이와 나는 번호표를 들고는 음식을 받아왔다.

 

"우와~맛있겠다~소고기 덮밥!잘 먹겠습니다!푸핫~"

 

조용히 물한모금을 들이키고는 돈까스를 자르고 있던 나는 좌중을 압도하는 태연이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사레가 들어버렸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이상한 여자 쳐다보듯 태연이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태연이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그렇게 튀게 웃으면 어떡해?"

 

"아니 그게 아니고...오빠가 돈까스 시킨게 너무 웃겨서..."

 

"왜?"

 

"이거 봐봐!밥에 깃발 같은거 꽂혀있고 소세지는 문어모양에...마치 어린이 세트 같잖아.크크..."

 

"그래?난 별로 못 느끼겠는데..."

 

사실 그렇게 말을 했지만 마치 어린이 세트같은 이 돈까스 정식의 내심 신경이 쓰이는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꿋꿋이 웃음을 참고 하나씩 잘라나갔지만 결국은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푸훗..."

 

"푸핫~!푸하하!웃기지?"

 

"7살 꼬마가 된것 같군..."

 

겨우겨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꾸역꾸역 돈까스를 우겨넣기 시작했다.

태연이는 계속해서 식사도중 피식대며 웃어댔고 나는 그런 태연이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주며 꿋꿋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눈에 띄는 복장에 독특한 웃음소리...결국 우리의 식사에 사람들의 눈초리가 이어졌고 슬슬 수근대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저거 태연 아냐?"

 

"태연이 왜 차타고 내려가냐?비행기 타고 갔겠지..."

 

"넌 이 날씨에 비행기가 뜰거라 생각하냐?근데 앞에 저 남자는 누구래?"

 

"혹시 남친...?남친이면 대박인데..."

 

"무슨 남친이야?태연이 결혼했냐?집으로 가는데 남친을 왜 데리고 가?"

 

"그것도 그렇네..."

 

"그냥 직접가서 확인해볼까?그냥 지나가는척 하면서 얼굴만 보면 되잖아."

 

"그러자.그러자."

 

두 남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는척하며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우리야말로 그런것에 도가 튼 사람이다.

하나는 수많은 팬에 극성팬 그리고 사생팬까지 상대하는이고 다른 하나는 기자들중 제일 악질인 연예부 기자들을 상대하는이다.

그들이 오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채고는 기침을 하는척 하며 고개를 숙여 입을 가렸다.

기자들이 고마웠던적은 처음이였다.이런 유용한 스킬을 가르쳐주니 말이다.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와 태연이는 밥을 들이키는 수준으로 후딱 헤치우고는 식기를 반납했다.

그리고는 피신하다시피 휴게소 안을 나왔다.태연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화장실 안 갈거지?"

 

"응.아까 갔다왔어."

 

"역시...우리는 통하는게 있다니까...우리 아까처럼 어색하게 갔으면 어쩔뻔 했냐?"

 

"훗...그러게 말이야...어쨋든 난 그걸 굉장히 말하고 싶었어.계속 말하고 싶은걸 터뜨리니까 시원해진거지."

 

"그럼 이제..."

 

"안 돼~마지막 백미가 남았는데 가자니?원래 후식이 휴게소의 백미라고..."

 

또 다시 표정이 일그러지는 나였지만 그런건 대수롭지않다는듯 내 손목을 이끄는 태연이였다.

태연이는 나에겐 호두과자를 자신은 감자를 사오겠다 말하며 헤어졌다.

결국 눈을 맞으며 청승맞게 줄이나 서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또 다시 고난의 연속...

마침내 호두과자를 손에 얻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차가 주차된곳으로 향했다.

근데 태연이는 언제 왔는지 감자를 손으로 가리며 발을 동동구르고 있었다.

 

"뭐가...이렇게 빨리왔냐?"

 

"오빠가 늦은거야!으악~감자에 눈 다 들어가게 생겼잖아.빨리 문이나 열어!"

 

나는 얼른 차문을 열고는 태연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또한 문을 열고 시동을 켜고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도로는 아까의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상태에서 조금씩 달려가는 상태로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굼뜬 상태였다.

그때 라디오 교통방송에서 국도는 소통원활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나는 국도로 방향을 돌렸다.

 

 

 

 

 

 

'무슨 정체신을 몰고 다니나...'

 

 

 

 

 

 

정확히 30분만 소통원활이었고 이곳도 꽉막히는것은 마찬가지였다.

벌써 8시간째 운전석을 잡고 있었고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것도 모자라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렇게 우물우물 음식을 먹던 태연이도 지겨운듯 하품과 함께 서서히 졸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연이는 뒷자석으로 넘어가 담요를 찾고는

어느새 햄스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자고 있었고 난 네비게이션을 전라북도 전주로 맞춰놓았다.

 

서서히 예정시각이었던 12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몸 이곳저곳이 뻐근하기 시작했고 네비게이션은 몇시간째 여기서 직진입니다를 반복했다.

슬슬 네비게이션의 기계음이 거슬리기 시작한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틀었고 마침내 잘못된 경로입니다가 나오자 폭팔했다.

 

"이년아!닥치지 못할까!"

 

"어?뭐?뭐?왜 그래?"

 

내 호통에 잠이 깬 태연이는 어리둥절한듯 고개를 흔들며 무슨 영문인듯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뭐...뭐야?방금 뭔소리야?내가 환청을 들었나?"

 

"아...요새 내가 개인기를 연습하고 있어서..."

 

"헉?정말?한번 보여줘봐!뭔데?뭔데?"

 

"아냐...아직 10% 완성안된 개인기여서..."

 

계속해서 재촉하는 태연이였지만 바로 튀어나온 애드리브였기에 계속 빼기만 하는 나였다.

결국 계속 재촉하는 태연이도 지쳤고...운전을 하고 있는 나는 더할나위 없었다.

시간은 어느새 12시에 육박하고 있었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 과연 이 길이 맞는지도 알지 못했다.

 

네비게이션을 틀어보라는 태연이의 재촉에 다시 한번 그 짜증나는 네비게이션을 틀었고

곧장 네이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똑바로 주행했지만...나오는건 으슥한 숲속과 주변에 펼쳐지는 논밭뿐이었다...

 

"축 1박 2일~"

 

태연이는 시계를 가르키며 말했다.시계는 12시 1분을 가리켰다.

 

"안 피곤해?"

 

"왜 안 피곤하겠냐...피곤해 죽겠지..."

 

"그럼 마을 들어가서 방 하나라도 얻어보자...설마 방 하나도 못 얻겠어?"

 

"너 그거 농담 아니었어?자고 갈수 있다는거?"

 

"농담 아닌데?오빠가 만약에 이상한짓 하면 시카한테 바로 이르면 되지~"

 

"정말 너 후회 안 하지?"

 

"그럼~"

 

"그래...내가 왠만해선 이런짓 안 하는데 너가 12시간 넘게 운전대 잡아봐라..."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장되지않는 마을 오솔길을 지나 모두 불이 꺼진 깜깜한 집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자 음산한 새 소리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충분했고 멀리서 보이는 집은 폐가를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설마 폐가인가?"

 

"그러면 그냥 차 돌려서 차에서 자자..."

 

"당연하지~누가 폐가에서 자재?"

 

조심스레 한발자국 한발자국을 내딪으며 계세요를 외쳤고 저 멀리 큰 문이 하나 보이자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려고 할때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고 본능적으로 서로를 안아 버렸다.

 

"뭐야?"

 

퉁명스럽게 생긴 키작은 할머니가 방안에서 나왔고 우리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상황을 잘 설명하였다.

그러자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입술을 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름한 빈방 하나를 열어주시고는 내주시었다.

태연이와 나는 차 안에서 짐을 꺼내 그곳으로 옮기었고 난 바깥으로 나가 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문을 닫아주었다.

 

그리고는 시카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총 설명하여 양해를 바랬고

시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쿨하게 승낙했다.역시 사라의 힘이 크긴 컸나보다...

마침내 통화를 끝낸 내가 방안으로 들어왔고 그 조용한 방에 우리 둘만이 남게 되었다.

서로의 짐을 정리하던중 먼저 태연이가 은글슬쩍 말을 걸었다.

 

"내가 오빠 차에 얻어타서 간다는거...시카한테 말했어?"

 

"응."

 

"그러면 지금 이러고 있다는건...?"

 

"아까 밖에서 전화걸어서 말했어."

 

"흠...그러면..."

 

"...."

 

"아까 그렇게 말했지.그 카드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그러면 시카가 받은 카드 직녀...

얼마 안 있어 시카가 직녀처럼 오빠와 떨어져 지낸다는건 시카한테 말했어?"

 

설마 설마 했다...태연이가 설마 내 통화내용을 들었을까?그리고 태연이가 그 달력에 적힌 내용을 보았을까?

그때 태연이의 얼굴에 제시카의 얼굴이 겹쳐보이는건 지금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건 이성으로의 감정이 아닌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김태연의 모습이었으니까...

 

 


Episode 75-Fermata

 

바로 아니라며 부인한 나였지만,나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알아차리고는

좀 더 깊숙이 파고드는 태연이때문에 내가 떠난다는 말만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반신반의했던 태연이였는지 꽤나 깜짝 놀라했다.

 

태연이는 사건의 내막을 알고싶다는듯 집요하게 파고 들었지만,난 개인사정이라는 막연한 이유로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부탁했고,태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내가 떠날것임은 분명하기에 그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할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태연이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정갈한 아침상까지 차려주신 할머니때문에 아침을 해결하고는

따뜻한 아침상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차에 아직 뜯지 않은 빵을 드리었다.

 

태연이는 지난 밤 반신반의했던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조금의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침묵을 지킬뿐이었다.

사실 아침부터 기운이 없길래 아침상에 올라온 청양고추를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태연이에게 권하는 장난을 쳤지만,그 당시에만 웃을뿐 영 기분이 아닌듯 보였다.

결국 태연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는동안 차안은 첫날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고요했다.

 

 

 

 

 

 

큰집으로 내려가니 뭐가 그렇게도 할 얘기가 많은지 3일내내 웅성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곧 새로운 식구가 될 형수때문에 더욱 시끌시끌했고 젊은층에는 먹히는 소재인 소녀시대,원더걸스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나였기때문에 젊은층의 포커스는 나에게 맞춰졌다.

 

전화연결을 시켜달라는 얼토당토한 때를 가장한 부탁을 하거나,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의 진위 여부를 나에게 묻는 녀석...

그리고 내 스캔들의 진위여부까지...기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 하지는 않는 지독한 녀석들이었다.

 

연휴가 끝나갈쯤에 연휴내내 일만한 누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 차에 몸을 싣었다.

사실 연휴 내내 지독한 녀석들과의 술래잡기보다는 일을 하는것이 더 나을것 같아 집안일을 자원한 나였지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와 어른들의 만류로 체력은 여유가 있었던 나였기에 누나에게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누나는 뒷자석에 담요와 함께 자리를 잡고는 피곤한 몸을 뉘었다.

학창시절 언제나 내 카운셀러를 자원한 누나였기에 이번에도 답답한 심정을 표출했지만

누나는 눈을 감아서 그런지 자는지 안 자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누나가 자는듯 보였기에 말을 멈추었다.그러자 누나는 하품을 크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를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치지."

 

 

 

 

 

 

 

일주일후 마지막 축가 연습이 있던 날 그날도 눈이 내렸다.그리고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제시카는 가방에서 4개의 포장된 상자를 꺼내더니 축가 멤버들에게 각각 그 상자를 건네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그 안엔 울퉁불퉁 엉성한 초콜릿이 들어가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이 과연 이게 무엇인가?라고 말해주자

되레 큰소리를 뻥뻥치며 수제 초콜릿이라며 맛은 좋을것이라했다.

 

그나마 내 초콜릿의 상태가 가장 양호했기에,모두의 부러움을 샀고 나는 초콜릿을 한입 베어물었다.

제시카의 말대로 맛만큼은 휼륭했다.

다만,기분이 좋지 않을때에는 어떠한 산해진미도 맛이 없듯이 그날의 제시카가 만들어준 초콜릿은

달콤함보다는 쌉쌀함이 더 느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잠시후 이 축가의 주인공이 스튜디오에 깜짝 방문했다.

사실 나에게는 미리 문자로 통보했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편하게 방심하고 있다 낯선 여성의 출현에 허둥지둥되기 바빳다.

내가 그녀를 소개해주자 그제서야 인사를 주고 받았다.

 

주인공을 앞에 두고 제시카와 정현이는 녹음실안으로 들어갔고 축가의 마지막 리허설을 그렇게 끝맞췄다.

형수님은 박수를 치며 나름 만족한 표정을 지었고 그렇게 우리들은 스튜디오를 나왔다.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형수님과는 양갈래길에서 헤어져야 할때쯤 늦은시각였기에 형수님을 따라나섰다.

제시카에게 차츰 멀어질때쯤...형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눈을 밞으며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나 사실 아까 거짓말 했어요.사실 그 노래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멜로디도 좋았고 가사도 좋았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보컬의 감정이 실리지 않았더군요.달달한 사랑노래지 이별노래가 아니잖아요.

그런 우울한 축가면 곤란해요...아까 인사를 건낼때쯤 도련님 모르게 제시카양의 얼굴을 봤어요.

뭔가 이상하더군요.제시카양의 마지막 미소가...돌아가줘요.그리고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렸다.정현이와 채원이는 정현이 삼촌의 차를 타러갔는지

제시카만 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쳇...혼자 놔 두지마..."

 

 

 

 

 

 

 

 

 

다음날 유하의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던중 유하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제시카 얘기를 꺼내더니 혹시 최근에 서로 다투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난 다툰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유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제 곧 있으면 이탈리아로 돌아가."

 

"뭐?"

 

"이탈리아로 돌아간다고..."

 

"....그러면 그것때문에 그동안 침울해있었나?잘 웃지도 않고 웃더라도 억지로 웃던데...그럼 이제 들키게 생긴거야?"

 

"들키게 생긴게 아니라 이미 들켰어."

 

"뭐?네가 말했어?"

 

"바보야...정신 나갔어?"

 

"그럼 너가 괜히 오버하고 있는지도 몰라!들킬까봐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그렇게 느끼는것뿐이라고..."

 

"아니...짚이는게 한두가지가 아냐..."

 

'쳇...혼자 놔 두지마...' 발렌타인데이날 제시카의 이 발언으로 난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이미 알고 있다면 왜 나한테 말하지 않는걸까?"

 

"훗...그렇게 혼자 멋있는척 잘난척은 다하면서 자기일엔 왜 그모양인거야?

제시카가 눈치를 챘다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기다리는 거야.네 입으로 직접 말해주기를...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말해버리는게 어때.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빨리 말하는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네가 떠나는건 확실한거 아니야..."

 

"바보...겉으로만 차가워보이고 쌀쌀 맞아 보일뿐이지 속은 얼마나 따뜻한 애인데...

남의 고통을 도맡아 자기일처럼 걱정할걸?그런 애한테 그런말을 어떡해 해..."

 

"에휴...나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너 혹시 이거 뭐라고 읽는지 아냐?"

 

나는 가방에서 악보를 하나 꺼내고는 유하에게 보여주었다.내가 가르친곳을 보자 유하는 눈을 찡그리고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흠...늘임표?페르마타라고 하는데?근데 왜?"

 

"이게 그거지!실제보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라는거..."

 

"응..."

 

"갑자기 기억이 안 나더라고...이게 뭔지...그래 페르마타였어..."

 

그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홀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페르마타...그리고...역시 말하는게 좋겠어...'

 

 

 

 

 

 

 

 

 

"신비서 오늘 스케줄 불러줘요."

 

"네...오늘의 스케줄은 문화 그룹 회장님과의 미팅과 형님되시는분의 결혼식..."

 

"알겠습니다..."

 

갑작스레 연주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그리고는 그 자리는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는 자리라고 밝혔다.

그녀가 골든디스크 시상식때 밝혔던 말을 종합하자면 분명 그 만남은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부탁일것이다.

그리고 제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여리디 여린 여자가 될것이고...

 

차가 MBC에 도착했고 연주씨가 정문에서 나를 배웅해주러 나와있었다.

연주씨는 요즘 급격히 세련된 신비서를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그치지 않았고

나는 애써 그녀의 그런 눈초리를 무시하면서 사장실로 들어갔다.

 

중간의 보디가드가 신비서의 출입을 통제했고 온순한 성격의 신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금방 얘기 끝내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 인사에 답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폐쇄적인 방에 들어가자 그 안엔 중년의 남성과 함께 연주씨가 남성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중년의 남성이 아마도 문화그룹의 회장인듯 보였다.

 

"안녕하십니까~SM Entertainment 대표이사 이요한입니다."

 

"반갑습니다~문화 그룹 회장 김승태입니다."

 

쇼파에 앉자 테이블에는 막 탄듯 보이는 따뜻한 커피가 올려져있었고

그 남자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문화그룹과 화수그룹의 관계는 대표이사님도 아실겁니다.그러시죠?"

 

"네...잘 알고 있습니다."

 

"듣자하니...대표이사님도 요새 화수그룹때문에 상당히 괴로우시다고 들었습니다..."

 

"....네...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부탁하온대...우리와 손을 잡읍시다.우리 경제부 기자들이 화수그룹의 불법 승계의 증거를 잡았습니다.

탈세에 차명계좌에...여러가지 의혹으로만 남았던 그 사실의 증거를 확실히 잡았단말이죠...

물론 화수 그룹은 여러 비리 의혹이 짙은 기업으로 지목되었지만 지금까지는 한번도 회장이 구속당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거든요.

거기에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기에

대표이사님처럼 선량한 시민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다시 재기하기는 힘들겁니다..."

 

"....마치 문화 그룹은 선이고 화수 그룹은 악인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화수그룹이 악 그리고 문화그룹은 새로운 이익을 추구하고자하는 신 악으로밖에 보이진 않는데말이죠..."

 

"요한씨!!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그 말을 듣자 연주씨가 발끈했다.

 

"아니...아니...그냥 냅둬라...요한씨가 안 도와줘도 화수그룹은 이번 사건으로 꽤나 큰 타격을 입을겁니다...

다만,요한씨가 도와주신다면 먼저 깊은 상처를 주고 시작할수 있는거죠..."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글쎄요...일단 신비서를 범죄자로 넘겨야겠죠?

제가 그녀와 일하면서 느낀거는 그녀는 정말 순진무구하고 때타지 않은 여린 여성이라는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권력가들의 힘싸움 앞에 놀아나는 무지한 서민일뿐이에요...

물론 우리 회사의 연예인들이 조금 더 편해질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 하나를 중범죄자 취급하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거기에다 전 곧 이탈리아로 돌아가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구요...

고작 떠날 사람 하나 멋지게 살리고자 계속 살 사람을 죽이는건 말도 아니죠."

 

"하지만...이번엔 좀 더 강한 사진이 나올수도 있어요...직접 애정행각을 하는 사진이 찍히거나..."

 

연주씨가 흥분하자 남자가 제제하는듯한 행동을 했다.

 

"그녀와의 스캔들을 겪으면서 말도 못하게 언론에게 시달렸습니다.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죠.

나를 세상에 맞추며 살기 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나에게 맞추면서 사는 게 편하다는것을요...

혹 제가 제시카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진이 다시 언론에 터진다면 그때는 당당하게 밝힐것입니다.

물론 거짓말을 한것은 대중들앞에 사죄를 해야겠죠...

이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거에요...이제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다...라고 밝힐수 있을것 같네요...

그리고 이것이 제 대답입니다..."

 

나는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고는 종이에    를 그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제안을 한 문화그룹 회장에게 종이를 찢어서 건네었다.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는 그 숨이 턱턱 막히는듯한 방을 나왔다.

 

"이게 무엇이냐?연주야?"

 

"흠...페르마타 같은데요?"

 

"흠...페르마타?"

 

"악보에서 실제로 적혀있는 길이보다 늘여서 연주하라는 뜻인데요...

훗...역시 요한씨 답네요...거절의 표시 같아요..."

 

"다시 설명해보거라...나는 암호 같아서 전혀 이해하지 못 하겠구나..."

 

"그러니까...분명 비서를 경찰에 넘기면 일은 더 빨리 끝날거에요...하지만 요한씨는 그걸 선택하지 않았죠.

이 페르마타라는 기호가 연주자의 해석대로 마음대로 늘일수있는것이거든요...

곡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하지만 난 이 곡을 좀 더 길게 연주하고 싶다...

이것을 지금 이 일에 빗대자면 이 일을 끝내고자 하면 난 좀 더 느리고 힘든길을 선택하겠다...라는 뜻 같네요..."

 

"...."

 

"대충 예상은 했어요.요한씨가 그런 선택을 할줄은요...워낙 다른 재벌가와는 다르게 자란 사람이라서 말이죠..."

 

"Giannino가 이탈리아에 있는 기업이냐?"

 

"네..."

 

"저기서 태어난게 다행인것 같구나...적어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저렇게 행동하면 큰일 당하기 쉽상이지..."

 

"네...저도 동의해요."

 

"그래도 꽤나 독특한 녀석이구나...여하튼 이상한 놈이야..."

 

 

 

 

 

 

 

 

 

 

 

 

 

 

 

 

 

 

 

 

 

 

내가 방에서 나오자 신비서는 밝게 웃으며 내 뒤를 종종 따라왔다.

 

"신비서 다음 스케줄이 뭐라고 그랬죠?"

 

"네!결혼식입니다!"

 

"놀러가는거군요?오늘 맛있게 드세요...형이 꽤나 열심히 준비했다니깐요..."

 

"저도...안으로 들어가도 되는건가요?"

 

"그럼요~신비서도 Giannino 직원이고 내 사람인걸요..."

 

 

Episode 76-정해진 운명

 

호텔로 진입하기 위한 차조차도 세심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식장으로 향하던중에도 이곳저곳 경호원이 배치되있는걸 보고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에...국내 연예인은 둘째치고 톰 크루즈가 여기 왜?"

 

신비서는 혀를 내밀며 놀라움을 금치 못 했지만,난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어렸을때의 교육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거 이거...신비서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거에요?"

 

"네?당연히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입사시험으로..."

 

"아니...그런게 아니고요...Giannino의 역사 한번도 보지 않았어요?"

 

"네...외국어 능력과 기타 업무 테스트만 했는데요."

 

"혹시 베라 왕이라는 브랜드 알아요?"

 

"네?아...조금요.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브랜드 아닌가요?"

 

"네.맞아요...근데 뭐 일반드레스로도 유명하죠.

그럼 여기서 퀴즈...흔히 Giannino는 베라 왕과 비교되죠.무엇이 닮았길래 그런걸까요?

 

신비서는 입술을 깨물며 골똘히 생각했지만 영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떨궜다.

 

"빨리 말씀해주세요.생각할수록 모르겠어요."

 

"하하...첫째 동양인이 브랜드 오너이다.베라 왕의 베라 왕은 중국계 미국인이고,우리는 한국인이죠.

둘째 시상식의 깜짝 스타로 급부상했다.이 두가지죠."

 

신비서가 두번째는 영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나는 마치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자랑을 하시던 말투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흔히,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나이키는 조던이 키운 브랜드라고 한다.유명인사를 광고 모델로 내세워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것이다.

그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가 패션 브랜드에선 베라 왕과 Giannino였다.

 

베라왕은 무명시절의 샤론스톤과 친분이 있었다.

그녀 또한 무명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샤론스톤은 나중에 자신들이 성공하면 베라 왕의 드레스를 입고

시상식에 서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국 그 약속은 원초적 본능으로 깜짝 스타가 된 샤론스톤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Giannino는 조금 다른게 아버지 곁에 한남자가 있었다.

브랜드 런칭을 한지 2년이 다 되어갔지만 텃세와 동양인이라는 선입견에 가로막혀 제자리걸음을 거듭하는것이 Giannino였다.

85년 뜨겁던 여름 아버지 곁을 지키던 한남자가 무모한 약속 하나를 한채 미국 L.A.로 떠난다.

그 약속은 3년내에 유망한 슈퍼스타에게 Giannino의 수트를 입히겠다는 약속이였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무모한 약속이였기에 만류했지만 한남자는 그것만이 유일한 반전 카드라며 홀로 미국으로 떠났고

정확히 약속기한 3년을 10개월 남긴 88년 2월 제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영화 탑건으로 뜬 당대의 유망한 슈퍼스타 톰 크루즈에게 Giannino의 수트를 입히는데 성공한다.

 

TV 쇼의 진행자들과 패션 잡지의 에디터들은 당대 떠오르는 스타 톰 크루즈가 입은 수트에 주목할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Giannino라는 무명 브랜드로 밝혀지자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그리고 그 한남자는 3년만에 밀라노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럼 여기서 마지막 퀴즈...여기서 그 한남자는 누구일까요?"

 

"네?"

 

"누군지 모르겠어요?쉬운 퀴즈인데..."

 

"글쎄요..."

 

"왜 까탈스럽고 딱딱하고 고지식스러운 아저씨 있잖아요..."

 

"까탈스럽고 딱딱하고 고지식스러워서 죄송합니다만..."

 

"설마..."

 

신비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이 성공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렇게 가까운 사람일지는 몰랐다는듯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근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셨나요?그때 생각만하면 고생한것밖에 기억이 나지않아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데요...

하루에 한끼는 햄버거 처음 6개월 동안은 기획사 경비원과 노닥노닥 거린거

거기에다 미국을 휘어잡을 남자가 누구일까 연구하며 수많은 극장을 왔다갔다거린것까지...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네요."

 

"김비서님...그래도 그게 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어넘길수있는 추억이잖아요."

 

"네...뭐 그렇죠...아마도 그게 없었다면 Giannino는 오래전에 없어졌을겁니다.

회장님도 애는 또 왜 이렇게 좋아하시는지 없는 형편에 셋이나 낳으셔서...

솔직히 지금와서 밝히지만 그때 도련님을 미워했던게 사실이에요.아기가 뭐 이리도 잘먹는지 얄밉더라구요."

 

"하하...그때 그 미워하던 아기가 경영권 승계라니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그러게요...Roberto씨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회장님이 도련님을 보시며 한숨을 쉬시자 껄껄 웃으시며 저놈은 잘만 다듬으면 꽤 써먹을만한 놈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그 할아버지는 친손자도 아니면서...나에 대한 얘기는 엄청했네요."

 

소중한것은 꼭 잃은뒤에 그 가치를 안다고 할까나?

여하튼 살아 생전에는 너무나 차가워서 다가가기 쉽지않은 할아버지였는데 그 이후로 괜시리 마음이 가는 할아버지였다.

 

"저...말씀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사장님은 몇몇 만나실분이..."

 

"잠시만요...신비서...먼저 가서 말씀드리고 오세요.갑작스레 찾아가면 당황할수도 있으니 말이죠."

 

"네..."

 

신비서가 자리를 뜨자 김비서님은 달라진 신비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뭘 어떡하신겁니까?솔직히 도련님의 결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아군을 내치고 적군을 품는다...

이건 세계 어느 병법서에도 나오지 않는 전략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한국을 떠나실 뒷정리같은 사소한 업무를 맡았지만요."

 

"그럼 앞으로 그 전략 이름을 이렇게 부르죠.크리스티안 전략 혹은 이요한 전략이요.

사실 저도 신비서가 괘씸해서 경찰에 넘길까도 많이 생각했죠.

증거는 모두 포착했고 도청기가 설치되어있는곳은 모두 파악했으니깐요.그렇지만 저 여자...너무 어설퍼서 감싸주고싶더군요.

저 눈빛은 프로가 아니에요.거기에다 신상정보도 너무나 명확하지않습니까?

제가 저 여자를 내치면 저 여자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요."

 

"하지만 도련님이 저 여자를 감싸면 도련님을 상처를 입을겁니다.거기에다 잘하면 제시카양까지..."

 

"그 앤 제가 책임질수있잖아요.

그럴일은 없겠지만 혹 제시카가 평판이 더 안 좋아져서 모두가 제시카와의 결혼을 꺼리면뭐 제가 평생 데리고 살죠.

근데 신비서는 그럴수 없잖아요.제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죄를 면제해줄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아...그리고 자세히 생각해보니 은퇴를 앞둔 노장앞엔 이렇게 사소한 업무가 더 어울리는것 같군요."

 

"네?"

 

"이번일을 끝으로 은퇴합니다.

회장님껜 예전부터 뜻을 내비쳐왔고 정식으로 말씀드린건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여된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였구요."

 

"프로젝트라면...역시 계획된일이였군요.물론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있었지만요."

 

"네...이제와서 밝히지만 엄연히 계획된 프로젝트였습니다."

 

"나만 빼놓고 모두들 다 알았구요...맞죠?"

 

"네..."

 

"역시 그랬군요.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어요.아버진 평소에 비틀즈를 좋아하셨긴 했지만 요즘 대중가요는 거의 듣지않으시는분인데

그런분이 연예기획사를 사들인다는게 뭔가 아이러니했죠.차라리 좋아하시는 오페라를 위해 성악학교를 세우신다면 모를까...

거기에다 계속되는 누나의 푸쉬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형의 승계포기선언...뭔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마 첫째 도련님은 계획된게 아닐겁니다.아마도 아가씨의 뜻이 완강해서 포기하신걸로 압니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형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순진한 양이라니...

남자란 동물은 알수가 없네요...그래서 은퇴 이후 계획은 세우셨어요?"

 

"결혼...합니다."

 

"네?아니 이거 무슨 몰카에요?오늘 사람 여러번 놀래키시네요."

 

"그냥 조촐하게 가족들끼리 식사하면서 간단히 할 생각입니다.

회장님께선 성대하게 해주시겠다 말하셨지만 제가 불편해서 사양했습니다.

그런 다음 모아둔 돈으로 세계일주를 할 생각이에요.제 꿈중 하나거든요."

 

"신혼여행을 세계일주라...차라리 그게 더 특별한데요?신부되시는분은요?한번 뵙고 싶은데요."

 

"아마 한번은 인사드릴겁니다.신부는...저랑 띠동갑이에요."

 

김비서님은 띠동갑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민망하신지 내 시선을 회피하고 계셨다.

 

"에...인생의 승리자이시군요.요즘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남자는 결혼 일찍하면 손해인것 같아요."

 

"딱히 뭐 그런것도 아닙니다."

 

"사장님!준비완료 했습니다."

 

마침 신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김비서님과 악수를 주고받고는 식장에서 보자는 말을 했다.

신비서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를 신랑,신부 대기실로 안내했다.

좌측에 있는 신랑대기실로 나를 안내하고는 자신은 대기실 밖에서 대기하는 신비서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형은 거울을 보며 싱글벙글 웃으며 오늘의 기분을 잔뜩 만끽하고 있었다.

 

"입 찢어지겠다..."

 

"어?왔냐?어때?나 오늘 멋있냐?"

 

"형이 아무리 꾸며봐라.오늘 하객 장난 아니야.샤이니에 슈퍼주니어,동방신기...

거기에다 누나랑 친한 몇몇 남자모델과 배우들도 왔고 거기에다 끝판왕 톰 크루즈도 있다고..."

 

"케이티 홈즈는?수리는?"

 

"없던데?"

 

"아쉽네..."

 

"그래.나도 그게 좀 아쉬워...근데 뭐야?이제 몇시간이면 유부남 될 사람이 그렇게 한눈팔아도 되는거야?"

 

"민아 봤어?오늘 눈 호강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야.그정도면 난 약과지."

 

"아...그러셔?아!그리고 오늘 입술에 침 잔뜩 발라둬!"

 

"왜?"

 

"그럴일이 있어.좀 있으면 알게 될거야.그럼 난 가본다!"

 

내가 문고리를 돌리고 방을 나갈때쯤 형의 부름에 난 멈칫했다.

 

"야!오늘은 나한테도 중요한 날이지만 너한테도 중요한날이야.오늘 결혼식이 끝나면 넌 공식적인 후계자로 낙점받는거야.알아?"

 

"....알아.후계자 수업을 받아도 바로 높은 자리에 취임하진 않겠지.일단 경영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 하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내가 정직 먹었던것처럼 형에게는 그런 징계를 내릴수도 있으니까..."

 

"어휴...무서워라.충실히 모시겠습니다."

 

"훗...결혼 축하해.열심히 잘 살고 수리 닮은 귀여운 조카도 꼭 보여주고...

아...참,,,경호가 삼엄하던데 왜 그런지 알아?"

 

"무슨 대기업 행사도 다른 홀에서 한다는데?어쨋든 고맙다."

 

문을 닫고는 이번엔 바로 옆에 위치한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는걸보니 역시나 수다쟁이 여자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을 여니 누나가 형수님의 웨딩드레스를 이곳저곳 만지며 다듬어주고 있었고

제시카는 형수님 옆에 앉아 손을 꼭 붙잡으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어머!어머!동방신기 너무 멋있는것 같아요.안 그래요?제시카양?"

 

"하하...전 어렸을때부터 봐왔던 오빠들이라 그냥 무덤덤해요."

 

"살다살다 내가 톰 크루즈를 보게 되다니...이탈리아에서 잘생겼다고 한 남자 여럿 보았지만 톰 크루즈는 차원이 틀린것 같아요."

 

누나가 화제를 톰 크루즈로 돌리자 형수님은 또 다시 호들갑을 떨며 호응해주었지만

제시카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호응해주는게 노골적으로 눈에 보였다.

나는 벽을 치며 수다에 빠진 여자들에게 내 존재를 알렸다.그러자 제시카를 제외하고는 별 관심없다는듯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뭐야...이젠 보는채도 안 하는거야?"

 

"너야 뭐 앞으로도 지겹게 볼 사람인데...뭘..."

 

누나의 말에 제시카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하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형수에게 다가와서는 이번 축가에 대한 사항을 말하고 난뒤 제시카의 뒷편에 섰다.

그리고는 제시카의 어깨를 잡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너에게 할말이 있어.혹시 지금 시간 되니?"

 

"아...응..."

 

제시카는 내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시카의 손을 잡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갈때쯤 형수님이 주먹을 불끈쥐며 화이팅 자세를 취해주셨고

누나는 드레스가 망가진다며 호들갑을 떨었다.피식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내가 제시카를 데리고 나오자 신비서는 전혀 예상못했다는듯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제시카를 데리고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눈치없는 신비서는 바로 옆 벤치에 붙어앉았고

난 신비서에게 양해를 구해 신비서를 마치 경호원처럼 멀리 떨어진곳에 세워놓았다.

 

"고마워..조금 신경쓰였거든.신비서 언니가..."

 

"...."

 

제시카의 표정을 살펴보니 마치 어떠한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듯한 표정이었다.

 

"할말이 뭐야?"

 

"...."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사실 제시카의 그런 반응에 새심 놀라고 있었다.예전의 제시카였다면 이렇게 기다려주지 않았을것 같기 때문이였다.

 

"....나 돌아가.이탈리아로..."

 

"기다리고 있었어.2주일 내내 그말을...할말은 그게 끝이야?"

 

"응..."

 

"그래도 다행이네.난 헤어지잔말 할까봐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그런말 할 정도로 매몰찬 남자 아니야."

 

"그래.친절하면 친절했지 매몰찬 남자는 아니지.그건 내가 더 잘 아는걸?하지만 너무 친절해서는 안 돼.

오히려 너무 친절하면 다른 사람이 더 가슴 아프고 상처 받을수 있거든."

 

제시카는 신비서를 보며 말했다.

 

"신비서?"

 

"응...신비서언니 요즘 예뻐졌더라.여자가 그렇게 변하면 이유는 하나야.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것...

그렇다고 오빠를 의심하는건 아니야.오빠가 사라 언니에게 가르쳐줬듯이 나 역시도 그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까..."

 

"신비서는 아니야.그건 내가 장담할수 있어."

 

"아닐걸...?그런데 말이야...왜 기다려달라고 말 안해?미안해서...부담주기 싫어서...그런거야...?"

 

"흠...사랑은...?"

 

"....신뢰...."

 

"답 나왔지?"

 

"응."

 

제시카는 한방먹었다는듯 베시시 웃어버렸다.나는 그런 제시카가 사랑스러워 와락 껴안았다.

제시카는 깜짝 놀라며 입에서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제시카가 내 품에 안겨 있던중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신비서를 슬쩍 쳐다보았다.그리고는 확신할수 있었다.

 

'걱정하지마...아무것도 아니야...'

 

제시카와의 포옹을 끝내고 난뒤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는 긴장을 풀어주기위해 재밌는 얘기를 해주자 꺄르르 웃음을 머금었다.

마침내 식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행요원의 말이 떨어졌고 하객들은 하나둘씩 식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이 배정된것으로 보아 아마도 일반인과 회사식구를 구분한것처럼 보였다.

원형의 테이블에는 Giannino,Giannino Restaurant,SM Entertainment,Guest 이 네가지 명패가 붙어있었고

나는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그런데 이상한점이 있었다.바로 유하가 내 옆에 앉아있느것이었다.

 

"너는 게스트로 가는게 맞지 않냐?"

 

"어?싫은가보네?그래.그럼 게스트로..."

 

"자..잠깐...그럼 이건 스카웃 성공의 의미로 해석해도 되는거냐?"

 

"그래.그렇게 해석해도 돼."

 

"왜 갑자기 마음이 쏠린거야?"

 

"너가 이제 없어지니까..."

 

"...."

 

"는 농담이고 이젠 남한테 보여줘도 내 자신이 창피하지 않을정도는 된것 같고

화수 미디어...자꾸 캐스팅 낙하산으로 꽂아준다면서 스카웃 제의 해오는데 성가셔서..."

 

"참...너다운 이유다."

 

"후훗...언제쯤 돌아올거야?5년정도면 될라나?"

 

"왜?내가 들어올때쯤 회사 뜰려고?"

 

"헤헤...응..."

 

"아마도 안 돌아올것 같은데?본사를 한국으로 옮기거나 회사를 팔지 않는 이상 힘든 이야기인데...

전자는 0%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후자는 조금 가능성이 있네.내가 말아먹을 가능성도 있으니까...후후..."

 

"근데...그렇게 되면 너의 피앙세가 불쌍해지잖아."

 

"어쩔수 없는걸.그게 내 운명인데...그래도 이해해줄거라 믿어."

 

"5년뒤에 보자.지금은 이렇게 수직적인 관계지만 5년후엔 똑바로 눈 마주칠수있게 대스타가 되어있을테니까..."

 

"지금 그게 수직적인 관계인 사람한테 하는 말이냐?"

 

"헤헤...아!그나저나 우리 이모 어떡하냐?너 없어지면 매상 마이너스가 심할텐데..."

 

"저기 저 애들 데리고 가서 먹여.쟤네들이 너 잘 따르잖아.장기적인 단골을 만드는거야."

 

저 멀리 정현이와 채원이가 티격태격되며 걸어오는게 보였다.

정현이는 처음 입어보는 수트여서 그런지 굉장히 불편해 보였고 반면 채원이는 화사한 원피스형 드레스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삼촌은?"

 

"강의때문에 못 오셨어요."

 

"흠...그렇구나."

 

"그대신 축의금은 보내오셨어요."

 

"아...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는 채원이와 정현이를 불렀다.그리고는 아까 제시카한테 한말을 그대로 그들에게 반복했다.

그러자 그 둘 역시 제시카의 반응처럼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있는 조명이 켜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지만 하객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결혼식을 즐기고 있었다.

역시나 소녀시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조명으로 어두워진 테이블에도 기여코 톰 크루즈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온신경을 곤두세웠고 남자들은 결혼식을 지켜보거나 내 옆에 있는 유하 혹은 몇몇 여배우들을 지켜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자~다음순서는 축가가 있겠습니다."

 

제시카와 채원이 정현이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고

SM 소속 가수들은 제시카와 자신들의 후배인 연습생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사장!저기 저 애는 처음 보는것 같은데...채원이는 어렸을적부터 본 애이고..."

 

나와 등을 맞대고 있던 유노윤호가 말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회사와 공식석상을 제외한 공간에선 이름을 부르거나

이렇게 친근하게 사장이란 호칭으로 부르곤 한다.

 

"저 애는 연습생된지 1년도 안됐을거에요."

 

"흠...그렇구나!근데 키는 엄청 크네!185는 족히 되는것 같은데?"

 

"하하...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에요."

 

"그나저나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야?"

 

그가 나에게 귓속말로 말하자 보아가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결혼식에 와서 왠 연애질이야!"

 

다행히도 유하는 결혼식에 푹 빠져서 그런지 못 들은듯 보였다.

 

"아...제 친구이자 배우에요."

 

"우리 소속이고?"

 

"네.오늘부터요..."

 

"흠...그렇구나."

 

"사장친구는 내가 지켜줄게.이놈은 결혼식날 작업이나 하고 있고...그냥 축가나 경청해!"

 

동갑내기 두 사람의 티격태격대는 모습이 마치 유하와 나의 관계인듯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채원이는 그랜드 피아노에 악보를 올려놓았고

제시카와 정현이는 신랑 신부와 마주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이 노래를 하기전에 한가지 알려드릴게 있어요.이 곡의 가사를 쓴 작사가 이요한씨의 특별요청인데요.

노래에서 그대라는 가사가 나오면 신랑분께서 신부분에게 키스를 사랑이라는 가사가 나오면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해주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끼 섞인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자

형은 아까 했던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는듯 분노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결혼식날이였기 때문에 그 분노어린 눈은 오래가지 못했고

제시카는 능숙한 진행스킬을 선보이며 당황한 신랑,신부를 조련하고 있었다.

 

"하시겠어요?마시겠어요?키스 안 하시면 축가는 자작곡이 아닌 다른곡으로 해드릴거에요."

 

테이블에서 속속 해라!해라!가 연발되었고 형수님의 요청인 자작곡을 안 해준다는 얘기를 하자 형수님은 형을 보챘고

형은 어쩔수없이 장난이 듬뿍 섞인 내 장난을 승낙했다.

이제와서 밝히지만 그곡의 가사중 그대라는 말은 12번 사랑이라는 말은 10번이 들어갔다.

창작자로써 최소 20번은 두사람의 키스를 봐야 속이 시원할것같다는

취지하에 가사에 있는대로 그대와 사랑이라는 말을 넣어버렸다.

 

채원이의 반주가 시작되고 제시카가 먼저 한소절을 불렀다.

그리고는 정현이가 이어받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정현이의 실력에 적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뭐야...쟤는..."

 

"춤 안추는걸 감안해도 저건 너무 심한데...제시카를 압도해버리네."

 

하지만 정현이에게 감탄하는것도 잠시...첫소절부터 그대가 나와버렸고 그렇기에 형이 형수님에게 키스를 했다.

형수님은 행복한 표정으로 축가를 즐기고 있었지만 '사랑해.사랑해.그대를 사랑해요.'라는 사랑 3콤보가 나오자

형에게 3번의 키스 세례를 퍼부었고 테이블에선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물론 갑작스런 키스에 서로의 코가 부딪치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채원이는 재밌다는듯 반주내내 웃음을 머금었고

마침내 22번의 키스세례식이 끝나고 형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듯 계속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러게 내가 입술에 잔뜩 바르라고 했잖아.괜히 내 말 안 듣고는...'

 

그 이후의 식은 장난스러운 분위기보다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단체 사진을 찍고는 부케를 던질때 누나는 부모님의 떠밀림에 밀려 강제로 부케를 받았다.

아마도 너도 빨리 시집이나 가라...라는 무언의 압박인듯 보였다.

 

식이 끝나고 형은 여전히 날 한방먹었다는 분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난 그런 형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가족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겠다는 핑계로 소속사 식구들을 인솔해 자리를 피했다.

거의 50여명이 다되가는 SM식구가 무리를 지어 내려가니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게 당연했다.

 

소녀시대는 아까 장난을 쳤던 나를 보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당할거라면서 장난을 쳤고

슈퍼주니어는 반주를 맡은 채원이에게 동방신기와 보아는 제시카를 압도해버린 정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왜 그랬어?그게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몰라서 그래?내가 몇번을 말했는데...거기서 실수하면 어떡하라는거야?"

 

"죄...죄송합니다."

 

그때 내 귀를 거스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곳엔 우리와는 정반대인 딱딱한 분위기에 무리들이 서있었다.

빅뱅과 원더걸스는 굳은 표정으로 훈계를 듣고 있었고 우리 또한 경쟁의식이 느껴졌는지 장난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아...이게 누구신지...안녕들하신가요..."

 

"대기업의 행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화수그룹의 행사였나보군요."

 

"네...거대한 행사였죠."

 

소녀시대와 유하는 저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보고 치가 떨린다는듯 화를 내고 있었고

그에 반해 신비서는 그런 그녀들의 행동을 이해할수 없다는듯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혼란시키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네.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서로 웃는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군요."

 

"크흐흐...저도요..."

 

'과연 다음에 만날때 서로가 웃으면서 만날수 있을까?'

 

그렇게 나 자신에게 되물으며 그는 지하로 나는 윗층으로...방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Episode 77-오늘 서울 하늘은 하루종일 맑음

 

한남자의 계획을 망가뜨렸다.그리고 그 남자의 위신을 깎아버렸다.
그 한남자는 그 사소한 이유 하나에 분노를 느끼고 24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두 그룹을 샀다.

 

제 3자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는 얘기라며 코웃음을 친다.업계의 종사자도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친 오버페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물론 처음엔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결혼식날 식사를 끝맞치고 집으로 돌아가던중 걸려온 연주씨와의 통화에서 들었던 얘기는

마치 음모론같이 흥미진진하고 놀라움 그 자체였다.

 

본래 화수그룹은 강력한 신문사를 소유함으로써 강력한 언론플레이를 할수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문사를 필두로 영화 산업,케이블 방송 산업등을 차례로 장악해나갔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건 음반산업뿐이었다.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문화산업이 한 기업에 장악되겠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강력한 언론 재벌을 상대로는 씨도 먹히지 않는 얘기였다.


모두들 가요계가 화수미디어의 식민지가 되는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한 기업이 거대 기획사를 인수하였고,그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이야말로

음반을 발표할때마다 연 음반판매량 1,2위를 다투는 가수들이였다.

 

하지만 그 기획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획사가 대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므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음반유통권을 넘겼고 결국 인디밴드같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과

그 기획사들의 가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유명가수음반엔 유통처:화수미디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더욱이 그 기획사 산하의 영화 제작사가 자신들이 노리던 일본 원작의 판권을 가져감으로써

영화제작 사업까지 병행하고 있는 화수그룹의 반감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그 반감은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친 2400억 오버페이라는 결과물을 낳는다.

 

본래 가요계의 모든 기획사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는 한 기업의 등장에 물거품이 되었고,결국 방법은 한가지였다.
Giannino가 SM을 매각하게 한다...결국 기를 쓰고 소녀시대를 사려고 한것도 그 때문이였다.
다행히도 인수의도를 미리 파악하여 주주들의 주식을 비싸게 재매입하여 겨우 경영권 사수를 하게 되었지만

회사는 자신들의 자본만으로 운영되는 비정상적인 구조로 변화되어있었고 큰 적자를 메꾸기는 힘들어보이는 체제가 되었다.

 

큰 적자가 계속되는 기업은 난색을 표한다...그렇게 되면 매각의사를 보일것이다.
그리고 그 기획사를 인수하면 가요계까지 완벽하게 장악을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떨어지는 음반및음원수입을 자신들이 상당수 챙겨가면 2400억+회사인수금 ∂를 뛰어넘는 가치가 나온다.
그것이 화수그룹이 원하는 문화계 장악 프로젝트의 마지막 파트였고,그에 대응하는 자가 문화그룹이었다.

 

기존부터 화수그룹과 경쟁의식이 심했던 문화그룹은 자신들의 컨텐츠인 방송의 힘으로 한방 역전카드를 준비하고 있었을때

때마침 Giannino가 SM Entertainment를 인수하였고,자신들의 힘이 될수있을것같은 Giannino의 지원을 얻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Giannino는 그것을 거절한다.

이것이 연주씨가 나에게 밝힌 자신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이자 화수그룹을 견제하는 이유였다.

 

대중을 지배하는자가 자본을 지배하는건 어쩜 당연한일이였기에 연주씨가 그토록 나에게 부탁한것도 이해가 갔지만

나는 이미 그 제안을 거절하였고 난 지금 연주씨 프로젝트에 시발점이 될수도 있었던 여자와 끝을 맺으러 간다.

 

다행히도 연주씨가 그녀없이도 화수그룹을 중상수준의 타격으로 몰고갈정도로 큰 카드를 갖고 있다며

도와주지못해 유감이다라는 나를 위로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있었다면 사망선고를 내릴수도 있었다며 말끝을 흐리는데...

말을 끝맺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실인지 알수있었다.


강력한 언론을 소유했기에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엔 수월했을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도청을 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도덕적으로 선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지며

차례차례 터지는 스캔들은 기업에게 사망선고까지 내리게 할수있다는소리였다.

 

차가 도착하였고,드디어 내 마지막 출근도 시작되었다.

경비원 아저씨 및 회사직원들에겐 전날 미리 말했기에 그들은 나를 만날때마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전날 회사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조그만 케이크와 함께 깜짝 파티를 준비해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모두 꺼내놓으며 작별인사를 고했지만 오늘도 이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하다.

 

그 전보다 쉬는날이 많아졌어요...중간중간 자투리 시간이 많아졌어요...야근이 없어져서 정말 좋아요...등

대부분 자신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얘기들이 많았고

후임 경영인의 스타일을 전혀 모르니 그전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일말의 불안감때문인지 더욱 더 그런듯보였다.

 

소녀시대를 비롯한 소속 연예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제시카와 태연이 또한 내가 떠난다는 사실만 알뿐 언제 떠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괜한 신경을 쓰게하여 일에 방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단,오늘을 끝으로 제시카에게 이 사실을 알릴것이다.
그녀와 나는 단순한 소속 연예인과 대표이사 이상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비서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어?오셨어요?"

 

"네...그나저나 그 화초 굉장히 아끼나봐요.오늘이면 마지막인데..."

 

"아...그냥요.마지막이라도 성실하게 돌봐주면 좋잖아요.헤헤..."

 

나의 말에 베시시 웃음을 지어보이는 신비서였다.그동안 급속도로 변한 신비서...
초기에는 멍해보이는 뿔테안경에 화장도 간단한 기초화장만 하고 왔다.

거기에다 의상은 언제나 칙칙하고 헐렁한 감색 정장에 머리는 단조로운 질끈 묶은 머리...


하지만 그런 그녀가 안경을 벗어던지고 세련되게 화장법을 바꾸고 다양한 악세서리의 착용과 타이트한 정장...

그리고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조화시키면서 처음 그녀를 보는 사람은 그녀를 화려한 커리어 우먼으로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변화할것도 없이 세련되진 그녀였기에 이제 더 이상 달라질것은 없을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를 충실히 소화하고 있었다.


치마는 점점 짧아져갔고 자켓은 점점 타이트해져 이젠 아예 단추를 풀르고 다닐정도였다.
그렇다고 천박하게 느낄수없는게 그녀가 착용한 브랜드를 보면

패션에 조금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꽤나 잘나가는 부잣집아가씨같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점점 짧아져가는 의상때문에 종종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지만,난 그것을 애써 무시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신비서는 무시할수없을정도로 너무나도 적극적이었다.

셔츠의 단추를 3개 풀어헤치고는 보고를 할때도 바짝 달라붙어 스킨쉽을 유도하고

눈을 마주칠때마다 야릇한 눈웃음을 날리며 누가봐도 유혹하고자하는 여자처럼 보였다.

 

일을 하는 중간중간 그런일이 계속되었기에 냉커피와 물을 몇잔을 마신지 모를정도로 들이켰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시계는 퇴근시간인 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서류를 정리하고는 내 앞에 놓인 대표이사 명패를 챙겼다.이젠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명패였기 때문이였다.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갈때쯤 신비서도 퇴근 준비를 맞췄는지 나를 졸졸 따라오며 내 팔짱을 꼈다.
나는 신비서를 향해 돌아서고는 그녀를 벽으로 밀어부쳤다.

더 이상 그녀의 농락에 놀아나서는 안 됐고,그녀의 마지막 임무도 끝을 맺어줘야했다.

내가 의외로 터프한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전혀 예상못했다는듯 벽에 기대 눈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당신...나 좋아해?아니...좋아하지?안 그러면 이럴리가 없지."

 

평소에 온순하던 내 말투도 터프하게 바뀌자 적지않게 당황하는 그녀였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또박또박 내 말에 대답했다,

 

"네...좋아해요.처음부터 쭉 좋아했어요."

 

"그래?그러면 원하는대로 해주지.좋아하는 남자한테 사랑받는 일이야말로 여자한텐 가장 행복한 일이니깐..."

 

가방과 함께 자켓을 쇼파로 던져버리고는 신비서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고 점점 신비서의 입술에 다가갔고 그녀는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그녀의 입술에 근접하여 그녀의 숨소리까지 들릴만한곳까지 그녀에게 접근했던 나는 더 이상의 접근을 멈추었다.
그녀는 떨고 있었고 그녀의 손바닥과 내 가슴부분이 맞닿앗는데 그건 분명한 여성의 본능적인 방어자세였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임무였기에 그녀의 이성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몸은 본능적으로 거부를 하고 있었다.

 

"왜 나를 속인거에요?당신 나 안 좋아하잖아."

 

"아...아니에요.좋아해요.진심이에요."

 

"세상 어느여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포옹하고 있을때 웃고 있죠?대답해봐요!"

 

형의 결혼식이 있었던 그날...제시카에게 이탈리아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한뒤 나를 이해해주는 제시카가 고마워 포옹을 했다.
그리고 포옹을 할때 슬쩍 신비서를 보았다.분명 신비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질투하는 사람을 보고 구속한다...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다...라며 좋아하지 않죠.
내 여자친구도 질투가 많은 타입이죠.내 친구는 그런 그녀를 보고 피곤하겠다라고 하지만 난 좋아요.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날 좋아하는 증거니까...당신이 날 좋아했다면 그때 슬픈표정을 지었어야 했죠.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어쩌면 당연해요.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그리고 지금 당신의 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죠.
마치 내가 강제로 겁탈한듯한 반응을 당신의 몸이 보이고 있군요."

 

"...."

 

"며칠후 잡지에 실릴 인터뷰를 예상해볼까요?

전 SM Entertainment 대표이사 이요한의 비서 '그는 환상적인 남자였다...' 대충 이런게 뜨지 않을까요?
익명의 인터뷰로 당신이 나오겠죠.

그러면서 언론은 나와 썸씽이 있었던 선예와 제시카를 나열하면서 나를 희대의 카사노바로 깎아내리겠죠.
아니면 이런 전개도 가능하겠군요.그는 내 애인이다...라고 밝히지만 뒤이어 터지는 제시카와 나의 파파라치 사진을 보도하고는...

당사자들을 웃음거리와 바보로 만들고 나는 양다리 걸친 놈이라고 매도할수도 있어요.어디...내 말이 틀렸나요?"

 

"...."

 

나는 반대편 창문을 닫아버리고는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책상다리에 부착된 조그마한 기계장치를 뜯어냈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자 그녀는 극도로 불안해졌는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청기가 어디에 설치되어있는지...카메라가 어디에 설치되어있는지...난 다 파악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도 드는군요.여기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면 비디오를 유포시킬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요.

하지만 이미 카메라는 모형으로 변한지 오래에요."

 

"...."

 

그녀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새어나왔다.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고는 펑펑 울음을 떠뜨렸다.
저렇게 서럽게 울어대는것은 생각 못 했기에 나는 어쩔수없이 그녀가 울음을 그칠때까지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잠시후 그녀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 좀 들어봐요..."

 

"어떻게 들어요...마스카라가 다 번졌는데...혹시 폼클렌징 있으세요?"

 

"네?아...네..."

 

너무나도 엉뚱한 타이밍에 터져나온 폼클렌징이라는 단어에 엉겁결에 대답해버렸다.

그녀는 내 폼클렌징을 받아들더니 절대 도망가지 않으니 안심하라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후 그동안 나에겐 거짓의 가면 같았던 그 화장을 지우고는 맨 얼굴의 신비서가 등장했다.

 

"와~쌩얼 예쁘네요!기초 메이크업이라도 한거 아니에요?"

 

"칫...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요?남자친구한테도 안 보여준 쌩얼을 보여주다니...나도 참..."

 

그녀는 렌즈까지 뺐는지 가방을 뒤적거리고는 예전의 그 검은뿔테안경을 썼다.

 

"와...그 안경 쓴거 오래간만에 보네요."

 

"휴...언제부터 아셨어요?"

 

"처음부터 쭈욱요..."

 

"허...나 참...처음부터요?"

 

"네.너무 어설펐거든요.스파이 짓이...그래도 그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본성은 숨길수 없더군요.
오늘 아침에 당신이 정성스럽게 화초를 관리하는걸 보고 그렇게 느꼈어요.후후...이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된거에요?"

 

"인터넷에 솔깃한 구인광고가 들어왔어요.얼굴 A급에 이탈리아어가 가능한 여자구함이라구요.
보니까 그냥 평범한 사무직인가해서 갔더니 이상한 기계를 보여주며 사용법을 알려주더군요.
참고로 사장님 비서에 지원서를 썼던 모든이가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에요.생소한 지원자는 사람을 써 앞에서 막았죠."

 

"치밀했군요."

 

"네...사실 사람의 정보를 빼내 돈을 버는건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수 없었어요.

만약 사장님이 말씀하신대로 사장님을 폄하하는 기사의 주인공이 되면 1억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거든요.
물론 사장님에게 1억이란 돈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요..."

 

"나에게도 1억은 큰 돈이에요.내가 이 위험한 스파이와의 동거를 2년해야 벌수있는돈인걸요?"

 

"풋..."

 

내 말에 신비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일을 시작한건 역시 동생때문인가요?"

 

"네...동생의 수술비를 마련해야했어요.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친척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기도 뭐했죠.
친척들 사정도 제가 뻔히 알고있거든요.그래서 이번 한번만 눈 딱감고 해보자...라고 생각했죠.
평생 양심하나로만 살아왔던 저도 돈앞에선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더군요."

 

"...눈물은 왜 흘렸어요?그렇게 대담한 일을 벌인 사람인데...처벌을 받는게 두려웠나요?"

 

"...그런것도 있었죠.동생은 사람의 간호없인 하루도 못 지내니깐요.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곳에 있었어요."

 

그리고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저번에 사장님께서 저보고 내사람이라고 그러셨죠?그 이후부터 여기가 너무 아프더라구요.
처음엔 괜찮아...괜찮아...재력가니까 저정도는 당해도 괜찮을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스캔들이 터지고 당사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니 내가 정말 꼭 이일을 해야되나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동생을 보고 다시 굳게 마음을 먹었어요.그것을 매일 반복했죠.

모든걸 들켰을때 뭔가 그동안 살면서 굳게 믿었던 양심이라는걸 내 자신이 망쳐버린꼴이었으니 온갖 옛 생각이 다 들더군요.
사장님...이런말 참 염치없는말인거 알지만 한번만 선처를 부탁해요.동생...사람들 간호 없이는 하루도 못 지내요."

 

"난 당신 용서 안 할거에요.그리고 당신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는게 편할까요?
신비서...신비서 당신의 가치관이 양심인데..그 양심을 그렇게 쉽게 팔 생각이에요?"

 

"하지만 전 이미 1억에..."

 

"그 돈 받았어요?"

 

"아...아뇨..."

 

"요즘 연락이 있던가요?"

 

"...아뇨..."

 

"카메라는 해체됐고 그 사람들도 당신이 들켰다는걸 알았을거에요.당신은 철저히 이용당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잠깐의 생각에 빠지더니 곧이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그랬군요.생각해보니 그 이후로는 전달사항없이 오직 교육받은대로만 행동했어요."

 

신비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심지어 형의 결혼식날 그를 만났을때도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그가 다른사람을 시켜 이 작업을 시켰다는 말이기에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암투같은 얘기는 신비서에게 말하지 않았다.

 

"죄를 달게 받아요.신비서..."

 

"하...하지만 제 동생은...제 동생은...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단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죄를 받으면 전 어느곳도 취직이 되지 않을거에요.제 사정은 사장님이 잘 아시잖아요..."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 울먹울먹거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김비서님은 항상 불평하더군요.비록 은퇴를 앞두시고는 있지만 내가 왜 이런 잡일을 해야하냐구요...
오늘도 그렇게 불평하셨어요.아마 오늘 접수를 마쳤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네?그게 무슨...안 돼요!접수하시면..."

 

신비서는 고발장 접수를 완료했다는건줄 알며 경악하고 있었다.그런 신비서가 귀여워 쿡쿡 웃음이 터져나왔다.

 

"푸..푸훗..."

 

"왜...왜 웃으세요?"

 

"내가 신비서 동생을 만났던 그 병원에 수술 접수를 맞쳤다구요."

 

"...."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또 다시 고개를 떨구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내 손을 꼭 잡고 흘리는 눈물이였기에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얼굴뿐만 아니라 내 손등도 적시고 있었다.

 

"나...자원봉사자 아니에요."

 

"...."

 

"그 수술비는 무임노동으로 다 갚어야할테니말이죠."

 

"네?그러면 그말은..."

 

"해외취업 관심있어요?비록 내 옆자리는 비어있지만 나를 보좌하는 뒷자리는 공석이거든요.
동생 수술 끝맞치고 건강해지면 같이 이탈리아로 와요.

비록 객지 생활이라 힘들긴하겠지만 버틸자신있으면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으니깐요.
경찰한텐 신비서가 내 스토커였다고 둘러대세요.내가 김비서님 불러서 선처를 요구할테니 길어야 6개월도 안 살거에요.
동생한텐 어학연수 갔다온다고 말하시구요.그때까진 동생한테 전문간병인 붙어줄게요.그럼 이제 됐죠?"

 

그녀는 계속 아무말도 못하고 내 손을 꼭 붙잡고 펑펑 울음을 떠뜨렸다.

 

"어...계속 울면 곤란해요.사실 나도 신비서...차가운곳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도청자체가 굉장히 큰 범죄인가봐요.
그래서 어쩔수가 없다네요.

신비서에게 이 일을 시킨자들은 이미 신비서에게 관심을 끊었으니 제가 시킨대로만 말해도 괜찮을거에요.자~일어나요.
나 마지막 퇴근은 일찍 가고 싶었는데 신비서때문에 또 1시간 늦게 가네요."

 

"아...죄송합니다.마지막까지 이런 꼴 보여서..."

 

신비서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주고는 신비서와 나는 그렇게 마지막 출근을 끝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연주씨의 문자가 왔다.연주씨의 문자를 확인하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었은것을 보자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신비서...오늘 날씨 정말 좋지 않았나요?"

 

"네?네...오늘 날씨가 특별하게 좋긴 좋았죠..."

 

"네...정말 좋았어요.피터팬이 날기 딱 좋은 쾌청한 날씨였죠..."

 

 


Episode 78-너와 함께 했던 날들

 

사건은 종결되고 모두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신비서는 내가 시킨대로 자수를 하였고 6개월 이하의 형을 받을것으로 예상되었다.

물론 보석이라는 제도가 있긴 했지만,그녀가 거부하였고

나 또한 그건 장기적으로 신비서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것 같아 조금은 독해보이는 결정을 내렸다.

 

2월의 달력을 뜯고 창문을 여니 봄내음과 함께 따스한 바람이 내 귓가를 스치어갔다.

봄의 여신이 손길이 닿은듯 나뭇가지에는 꽃봉오리가 여물어 있었고 땅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있음에

비로소 봄이 왔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봄의 여신이 만들어놓은 이런 장관에 어찌 인간이 거부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얇은 가디건 하나만을 걸친해 집을 나왔다.소녀시대 팬도 기자들도 스파이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

아무도 나를 지켜보지 않고 건들지도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관스레 길거리를 걷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신 가게 아줌마를 보면 인사를 나누고 싶고

평소에 보이지도 않던 사소한 전단지나 조그마한 간판을 보며 이렇게 소소한걸 그동안 놓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공원에 들려 벤치에 앉았다.

한가로이 훌쩍 다가온 봄을 즐기는 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곳곳에 노인들과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뒷짐을 지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신비서와의 마지막 출근날에도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흠...좋아.떠나기 딱 좋은 날씨네."

 

손을 털고 자리에 일어나 발걸음을 집으로 돌릴때 어디선가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묵직한것이 내 뺨을 강타했다.

 

"아~뭐야?"

 

툭툭거리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쭈뼛쭈뼛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죄...죄송합니다.실수였어요.어디 다치신 데라도..."

 

나느 공이 정면으로 강타한 내 뺨을 어루만져보았다.조금의 얼얼함과 따끈거림이 있었지만 큰 이상은 없는듯 하였다.

 

"너...소녀시대 좋아하냐?"

 

"네?네...좋아하기는 하는데...남자치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그래?그러면 그냥 팬들의 응징이라고 생각하지 뭐..."

 

화를 내거나 아니면 그냥 무난하게 넘어갈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은 내 말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가라는 손짓과 함께 축구공을 차주자 그제서야 꾸벅 인사를 하며 다시 무리로 뛰어가고 있었다.

 

'꼭 나를 보는것 같네...'

 

왠지 모르게 정이 가 그자리에서 그 소년을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물론 그 소년은 내가 바라보는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다시 무리에 어울렸지만 말이다.

 

왔던 자리를 고스란히 답습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이 눈에 익은 환경으로 변화하였고 저 멀리 낯이 익은 중년의 남성과 흰색 밴이 보였다.

김비서님은 나를 알아보시고는 반갑게 손짓을 보내셨고 나는 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혼자세요?"

 

"네?네...저 그게..."

 

"예비와이프 되시는분 뵙기 참 힘드네요.오늘이 마지막날 아닌가요?"

 

"네.그래서 저기..."

 

김비서님은 저 멀리 회색 차를 가르켰고,짙게 선팅이 된 차에는 사람의 형상만 비출뿐 제대로 된 얼굴도 확인할수 없었다.

나는 김비서님의 의향을 물었고 김비서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혹시 속도위반하셨어요?"

 

"네?그건 아직..."

 

"하셨어야죠.김비서님과 띠동갑이라해도 38살이신데...제가 회사 그만두고 하는것없이 이것저것 잡다한거만 많이봐서 잘 아는데요.

노산은 정말 위험하대요.거기에 초산이면 더욱 더...

솔직히 형보다 김비선미이 먼저 아기아빠가 되어야하는데 이거 원 뒤죽박죽이 되가지고..."

 

"아하하...그나저나 싸우셨어요?얼굴이 조금 부으셨네요."

 

"아...그거요?소녀시대 팬들한테 떠나기전 작별빵 제대로 맞았죠."


김비서님은 전혀 이해하시지 못하는듯 고개를 갸우뚱하셨고,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차에 근접하자 차의 창문이 내려지며 한 여인이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차문이 열리더니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인사드려 수연아~막내 도련님..."

 

"아...안녕하세요!이수연이라고 합니다."

 

수연이라는 이름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같은 이름인 수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려한 커리어우먼과 같은 인생의 정수연과

전형적인 현모양처타입으로 보이는 이수연은 정반대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SM...아니...그냥 이요한입니다.이제 직함이 아무것도 없는 백수신세군요...하하...만나서 반갑습니다."

 

"호호...TV에서 많이 뵌 기억이 나네요."

 

"네...일단 결혼 축하드려요!이런 미인에 12살 연하라는 타이틀...김비서님은 모든걸 가지신 행운의 남자시네요."

 

"호호...역시 이탈리아에서 태어나니 다르긴 다르군요.이탈리아 남자는 낯간지러운 멘트를 잘 한다더니말이죠..."

 

"낯간지럽다뇨...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입니다."

 

"호호호...부러우시면 나중에 12살 이상 차이나는 여성분과 결혼하시면 되겠네요.그정도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흠...저랑 12살 이상 차이나면 손가락으로 나이를 셀수있고 심지어 지금 수정란인 친구도 있는데요?"

 

내 말이 우스운듯 두분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12살은 오버구요.지금은 오히려 연상쪽이 좋긴한데...뭐 모르죠.나이먹으면 어린애들이 눈에 들어올수도요.

하지만 지금은 2살 연하인 제 여자친구가 제일 좋아요.아...그리고 제 여자친구도 이름이 수연이에요.우연이죠?"

 

'네?네...그러네요...쿠쿠..."

 

"그게 재밌는 농담이었나?계속 웃으시네요."

 

"수정란이라는게 웃기잖아요.크크..."

 

외모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타입인데 웃으시는걸 보면 은근히 장난을 좋아하시는듯 보였다.

나는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얘기와 함께 아기 사진을 보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형의 아기도 궁금했지만 김비서님의 아기도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아파트로 들어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밖에서도 쩌렁쩌렁 수영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이제 헤드폰을 써?이탈리아에서는 그게 매너에요!"

 

"오빠는 벌써간거에요?왜 가방만 덩그러니 있고 없는거에요?"

 

"그나저나 뭐 이딴놈이 다 있지...왜 이렇게 매정해...작별인사도 안 하고 무작정 가버리는게 어딨어."

 

"아무리 내가 사장을 그만뒀어도 놈은 너무 심하지 않아?"

 

내가 써니의 말에 대응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고 곧 원성이 빗발쳤다.

써니는 정말 그냥 가버리는줄 알았다며...울먹거렸고 수영이는 그동안 숨긴 사실에 대해 추궁했다.

 

"그나저나 너희 안젤로한텐 왜 그랬냐?제가 너희 여자라서 참았지...계속 건들였으면 넌 끝나!"

 

수여이에게 충고해주며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잔에 따랐다.

 

"어?얼굴은 왜 그래?싸웠어?"

 

태연이가 내 얼굴을 지적했고 난 얼굴을 매만지며 답했다.

 

"너희 팬들한테 마지막 작별빵이라고나 할까?"

 

모두들 정말 싸웠는지 알고 웅성웅성 되었고 모두들 그걸 맞고도 참았냐고 화를 내자 나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소녀시대는 그렇게 돌려서 말하면 누가 알겠냐며 오히려 더 화를 냈다.그리고는 자신들의 말만 거듭하고 있었다.

 

"왜 이탈리아로 돌아가는거야?3 OUT 됐어?"

 

뭔놈의 기밀이 이렇게 허술한지 내 계약서에만 명시된 3 OUT도 아는 유리였다.

 

"아니...아직 2 OUT인데..."

 

"그럼 왜?여자친구도 버려두고 굳이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이유는 뭐야?"

 

"어이...어이...버려두는건 아닌데..."

 

티파니의 말에 제시카가 태클을 걸었다.

 

"가업을 이어받으러 간다."

 

"가업을 이어받어...?디자이너 해?"

 

"사장이랑 디자이너랑은 연관성이 없지 않나요?"

 

헛다리를 짚는 효연이와 효연이의 말에 의구심을 갖는 윤아였다.

 

"아니...다른 가업있잖아."

 

"회사를 이어받는군요!"

 

"헉...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윤아와 서현이가 손뼉을 치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이어받으려고 난리인데 우리집안은 왜 그런지는 몰라도 형이 포기했고

누나는 디자이너니까 자연스럽게 턴이 나에게 넘어온거지."

 

"이제 시카...사모님 소리 듣겠네.앞으로 정여사님이라고 모셔야겠어."

 

태연이가 제시카를 슬쩍보며 그렇게 말했고 모두들 여사님이 마음이 드는지 여사님을 외쳤다.

 

"그만하지.무슨 여사님이야..."

 

쑥스러운지 괜히 툴툴대는 제시카였다.

 

"그 저택의 주인이 된다니...생각만해도 짜릿하네.부럽다 제시카~"

 

"아하하..."

 

유리가 콧소리를 내며 제시카의 팔뚝을 치자 제시카는 황당한듯 어이없는 웃음만 지었다.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짐가방을 챙겨나왔다.

모두들 가방을 챙겨나오는 나를 보고 마지막임을 직감하고는 집안엔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소녀시대 한명한명이 마치 마지막인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건넸고

서현이나 윤아는 가슴에서 울컥했는지 울먹거리며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잘 가~오빠때문에 정말 즐거웠어."

 

"응.그래...리더로써 팀 잘 챙기고..."

 

수영이와 효연이는 우는 윤아와 서현이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잠깐~오빠는 우리한테 뭐 할말 없어?"

 

유리가 뭔가 아쉽다는듯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나를 막아섰다.

모두들 마지막 잔소리라도 듣고 싶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바란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난 오래된 향수보다 오래된 와인이 좋아.너희도 오래된 와인같은 그룹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은 소녀시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나는 피식 웃음을 지어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야...그나저나 제시카...넌 왜 이렇게 안 슬퍼해?가장 슬퍼해야하는건 너 아니야?"

 

"마지막 아니야...지금 이탈리아 가는거 아니고 여행가는건데?"

 

"그럼 그 소리는...또 우릴 속인거야?"

 

"아!이 낚시꾼!분위기는 잔뜩 잡아놓고...또!"

 

 

 

 

 

 

 

 

 

잠시후 고함소리가 들렸고 수영이와 유리의 이끌림에 제시카가 끌려나왔다.

위에서는 윤아와 티파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아래에는 안에 있어야할 제시카가 내 앞에 있으니 적지않게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오래된 향수는 뭐고 오래된 와인은 뭐야!!!"

 

"또 속였어요!도대체 왜 맨날~그러는거에요!"

 

여전히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티파니와 나에게 속은 윤아는 베란다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

유리와 수영이는 티파니와 윤아에게 손짓을 해 조용하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그들의 카리스마에 밀려 다시 잠잠해진 창가였다.

내 앞에 가던 안젤로는 분위기를 읽고는 내 손에 들린 가방을 자신이 챙기고는 차로 향했고 그곳에는 오직 우리둘만이 남아 있었다.

 

"....할말 없지?쟤네들 괜히 난리야..."

 

제시카는 볼을 긁적이며 민망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니 할말 많아..."

 

"뭐...뭔데...특별히 들어주지."

 

"어우...여사님이 들어주시다니...영광입니다."

 

"그 여사님 소리 민망한데 그만 좀 하지..."

 

제시카는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고개를 돌렸다.

 

"수연아~"

 

"응?응...에?"

 

"나 앞으로 수연이라고 불러도 돼?"

 

"아...응..."

 

"생각해보니 수연이라고 불러본적이 한번도 없더라고...그냥 왠지 그렇게 부르고 싶어."

 

"마...맘대로 해.나도 오빠 한국이름 부르지 이탈리아 이름 부르지 않으니까..."

 

"아...나 어떡하냐.아까 동네 한 바퀴 돌때도 너 보고 싶어서 혼났어.

그런데 이번 여행 한달은 되서 돌아올건데 보고 싶어서 어쩌지?이탈리아 가서는...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천하의 Giannino 후계자께서 어리광부리는거야?"

 

제시카는 내가 귀엽다는듯 웃음을 머금었다.하지만 나의 대답에 금세 불그스름한 하늘같이 새빨갛게 물드는 제시카였다.

 

"응.어리광부리는거야.이왕 어리광부리는거 제대로 부려보자."

 

나는 두팔을 벌렸다.제시카는 눈치를 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오라는 손짓을 했다.

쭈뼛쭈뼛 한걸음씩 내딪는 제시카는 결국엔 내 품안에 쏙 들어오고 말았다.

 

"진짜하고싶은말은 이거야.언젠가 네가 그랬지.네가 나의 천사가 되어주겠다고...그래...넌 명실상부한 나의 천사였어.

날지 못하는 피터팬은 더 이상이 피터팬이 아니지.

무기력하고 자신감 없던 내게 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고,넌 날 이탈리아로 보내주었어.

네가 없었으면 난 그저 주저앉아버렸을거야.고마워...행복해...사랑해...나중에 보자..4월 18일...

이번엔 내가 너의 천사가 되어줄게.너와 함께 했던 날들을 정말 잊지 못 할거야..."

 

 

Prologue-바라보기

 

작열하는 태양...반짝반짝 빛나는 아스팔트의 도로...그안에 엄청난 엔진 굉음을 내며 질주를 준비하는 작지만 강한 차...

F1의 머신들이 있다.나는 하품을 하며 레이스를 준비하는 서킷을 바라보았다.

 

"왜 아버지께서는 F1에 스폰서를 하셔서 이런 귀찮은 자리에 절 강제로 참석시켰을까요?

레이서들이 정장을 입는것도 아니고 말이죠..."

 

"흠...글쎄요?아마도 좋아하셔서 그런것 아닐까요?매번 그랑프리때마다 직접 보시러 현장으로 가시던데말이죠."

 

"그렇다고 메인 스폰서를 해요?F1이 어떤 대회인데요...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인데 스폰서 가격을 생각하자면...

윽...끔찍하네요.그나마 SM이 예전과 다르게 엄청나게 커져서 아시아의 디즈니가 되서 망정이지.

그거 안 됐으면 지금 엄청난 자금난에 시달렸을거라구요."

 

"후임 사장의 능력이 엄청나단 소리가 있더군요."

 

"네...일본을 제외하고는 전 아시아를 통합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단,냉정할땐 너무 냉정해서 가끔씩 인간 같지않게 느껴진단 말도 있구요.어쨋든 다 잘된일 아니겠어요?"

 

"네.그렇죠..."

 

그때 TV를 통해 장내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여왔다.

 

"2012년 F1 모나코 GP 곧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광고가 나갔다.주변을 둘러보니 한껏 빼입은 남녀가

대낮부터 샹디를 마시며 축제를 즐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F1에 스폰서를 한 기업의 관계자 이름으로 초청되었고 F1의 메인 스폰서중 하나인 우리들도 그 자격으로 초청되었다.

신비서가 나에게 귓속말을 하며 긴급 소식인듯 다급하게 알렸다.

 

※샹디:사이다에 맥주를 넣어 만든 칵테일

 

"곧 이곳에 샬롯 공주가 도착한답니다."

 

"아...그 공주요?근데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귓속말까지..."

 

"모나코 공주면 영향력이 대단합니다.좋게 보여서 나쁠건 없죠."

 

"아...그냥 인사만 할게요.가식적인 웃음이나 그런건 저한텐 별로 안 맞아서요."

 

그때 귀에 익은 청량한 목소리가 TV에서 들렸고,이쁘장한 여자들이 나오자 대부분의 남성들의 눈이 브라운관으로 향했다.

수연이와 티파니를 비롯한 소녀시대가 다음 그랑프리의 장소인 한국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마도 Giannino가 메인 스폰서이기때문에 영어가 가능한 수연이와 티파니가 소개를 맡고

소녀시대는 화면의 빈자리를 채우는듯 보였다.

 

"와~이건 누구야?한국의 레이싱걸인가?"

 

"꽤 예쁘네...잘 뽑은것 같네."

 

전혀 레이싱걸 답지 않은 의상이였지만 F1과 관련된 여성은 레이싱걸을 제외하고는 전무했기에

맘대로 추측하는 두 중년의 남성이였다.

처음엔 무시하고 있었으나 서서히 농담의 수위가 높아지더니

여성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농담이 오고가자 신비서는 불편한듯 헛기침을 하였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재밌는 농담을 주고받으시네요!"

 

농담을 주고받은 두 남자는 깜짝 놀랐다.

방금 그 말을 한 사람은 모나코에서 손에 꼽힐정도로 높은 여성이자 모나코 국민들의 사람을 듬뿍 받는 샬롯공주였기 때문이였다.

 

"아무리 여기에 저들과 관련이 없는 인물들끼리 있어도 그런 농담은 같은 여자로서 불편한데요?"

 

"아뇨.관련있는 인물 여기 있습니다."

 

내가 샬롯공주의 말을 끊자 신비서가 나를 뜯어말렸다.

그녀는 다름없는 고귀한 공주의 신분이었기에 그녀를 건드리면 좋을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한국의 걸 그룹이구요.레이싱걸이 아닙니다.제 옛 여자친구가 있어서 잘 알죠..."

 

"후후...그렇군요.우리 저번에 한번 본적 있죠?Christian Lee씨...?"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 프로그램이 시작되길 바라고 있었다.

 

"서현아!여기에 오빠가 나온다고?"

 

"네.제가 채널 돌리다 예고편 봤어요."

 

"흠...MBC 창사 51주년 스페셜 세계를 걷는 한국인 3편 Giannino...?"

 

써니가 브라운관 오른쪽 상단에 쓰인 자막을 읽었다.

 

"여전히 문화그룹과 Giannino는 사이가 좋네."

 

"그러게.우리도 그 덕 많이 봤잖아.우리 멤버들 고정이 대부분 MBC이고,라디오,드라마도 그렇고..."

 

티파니와 태연이는 문화그룹과 Giannino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광고가 끝나고 성우의 나레이션과함께 패션쇼 장면이 나오며 뒤이어 화면에 화려한 밀라노의 정경이 브라운관에 내비쳤다.

그러자 모두들 멍하니 브라운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언니다!"

 

유리가 드디어 한사람 알아봤다는듯 박수를 쳤다.

화면안엔 Giannino 수석 디자이너 이민주가 나와 자신들의 생산라인을 소개시켜주며

현지 디자이너들과 PD가 차례차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잠시후 모두가 박수를 치며 기다린 사람이 나와서는 사무실로 보이는곳에서 PD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저 자신만만함은 그대로구나..."

 

"고생 정말 많이 했나보네.예전엔 완전 꽃돌이였는데 지금은 외모가 팍 죽었어."

 

"야!남자는 꽃미남보다 잘생겨야 멋있는거야!예쁘게 생기기만하면 매력이 없다고!"

 

갑자기 예쁜남자vs남자답게 생긴 남자의 논쟁이 붙은 소녀시대였다.

 

"그런데 시카 오면 어쩌지?"

 

"라디오 스케줄 끝나고 이제 올때쯤 되지 않았나?"

 

효연이와 태연이가 걱정스러운듯 말했다.

 

"그러게.둘 사이 깨진지 2년정도 됐잖아."

 

"근데...오빠 진짜 더 괜찮아지긴 했다.난 솔직히 예전 오빠는 별로였는데..."

 

그때 철컥하는 문소리와 함께 마지막 소녀시대의 멤버 제시카가 모습을 드러냈고

소녀시대는 허겁지겁 리모컨으로 TV를 끄며 어색한 미소만 주고받았다.

 

"뭐야...권율...어떤 연예인이 나왔길래 그렇게 푹 빠지셨어?"

 

제시카는 유리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며 다가가더니 리모컨을 뺏으려 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모컨을 뺏기지않기위해 애를 썼다.

제시카는 완고한 유리를 내버려두고 한숨을 내쉬며 TV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리고는 직접 전원 버튼을 눌렀다.그러자 한남자의 자신만만한 얼굴과 함께 제시카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하...이 인간보고 그런거였어?권유리...개인적으로 추천할게.

착하고 자상하고 자신감 넘치고 능력만점에 완벽한 남자같이 보이지만...도저히 만나려 해도 만날수 없는 남자..."

 

유리는 그런게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제시카에게 조금 삐졌는지 입술이 삐죽 나왔다.

 

"하하..,장난이고...만나고 싶으면 만나.근데 너무 바빠서 만날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는 제시카는 터벅터벅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야!너 안 볼거야?"

 

"응.안 봐.관심없어."

 

제시카는 손을 흔들며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잠시후 침대꺼지는 소리가 들린후 수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영이는 뭔가 재미난 생각이 있는지 방금전 제시카가 들어간 방에 들어간후 얼마 안 있어 목걸이 하나를 가져나왔다.

 

"어...그건 제 목걸이인데..."

 

서현이가 소중한 목걸이인듯 발을 동동구르고 있었다.수영이는 계속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서현이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아...우리 여사님...이불 뒤집어쓰고 몰래 DMB로 보신다.여사님의 체면을 망칠수는 없으니...우리 그냥 모른척 해주자."

 

"제시카...귀엽네."

 

모두들 제시카에겐 들리지않게 조그맣게 제시카가 귀엽다며 한마디씩 했지만

유리는 제시카에 대한 미안함과 알수없는 두근거림에 이끌려 멍하니 창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Episode 01-마주보기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고는 메마른 비석에 조금씩 물기를 묻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비석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없이 이렇게 오는것도 올해로 5년째군요...

작년까진 누나와 함께 왔는데 누나는 요근래 피티우모 준비로 바빠서 오늘은 저혼자 왔어요.

아마도 저도 곧 가봐야될것 같은데 말이죠...요근래 굉장히 독특한 디자인이 많이 나왔어요.

남성복이 이만큼 발전할수있어?모두들...심지어 관계자들도 놀라는 눈치죠...

이럴때 아버지나 할아버지같은 어른들이 있어주면 더 좋을텐데 말이죠...

그 빈자리는 참 어쩔수가 없네요.물론 아버지는 올해도 피티우모 시즌에 맞춰 이탈리아로 오실 예정이지만 말이죠.

여긴 살기가 좋을것 같아요.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마을 같네요.밀라노는 워낙 복잡해서요.

그만 가볼게요.꽃다발은 여기에 놓고 갈게요,마음에 드실런지 모르겠네요...

휴...오래있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나는걸 보면 어느새 훌쩍 여름이 온것 같아요.다음 여름에 다시 찾아올게요.편히 쉬세요..."

 

※피티 우모(Pitti Uomo):전세계 남성들의 패션축제인 남성복 박람회.매년 여름과 겨울 피렌체에서 열린다.

 

그렇게 이번해에도 그가 잠든 동화같은 마을을 뒤로하고 화려한 도시 밀라노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밀라노 역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한 광장과 함께 붉은 노을이 눈에 들어왔다.

 

"꼭 성묘같은걸 이런 휴일날 해야겠어?이런날엔 여자랑 피크닉을 가야된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간건데...나한텐 여자랑 피크닉간거보다 더 값진건데?

그리고 내가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넌 꼭 하지말라는건 하더라."

 

"내가 하고싶어서 해?회장님의 명령에 따르는것뿐이라고..."

 

"아...그래.알았어.나중에 총책임자가 누가 되는지 두고보자고..."

 

"후훗....아!근데 말이야!저기 저 여자 끝내주지 않아?"

 

안젤로는 저 멀리 벤치에 앉아 한쪽엔 캐리어 가방 한쪽엔 지도를 펼쳐놓은 여자를 가르켰다.

 

"괜찮네.그나저나 한국인인가?"

 

"한국인?네가 어떻게 알아?"

 

"흠...양키스...한국인일 확률이 높네."

 

"어째서?"

 

"예전에 똑같은 경험이 있거든.누나가 지나가는 동양인보고 무심하게 한국인이네...라고 툭 던졌는데 진짜 한국인이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해외에서 MLB모자 쓴 여자들은 99% 한국여자다...뭐 이런 뉘앙스로 말하던데?"

 

"그렇군...아...저 여자 끝났구만."

 

안젤로가 혀를 끌끌차며 안타깝다는듯이 말했다.

안젤로의 시선이 머문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벤치에 홀로 앉은 여자 옆에

빼빼마른 두 백인이 근접했고 마치 추근덕거리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혼자하는 여행은 언제나 골치아픈편이지.물론 좋은점도 있지만 말이야."

 

"동감!!나도 처음에 잉글랜드 갔을때 꽤나 골치아팠거든...어쨋든 그만 가자!여기서 시간 끌 이유는 없잖아."

 

그 여자에게 관심을 끄고 눈길을 돌릴때쯤 왠지모를 기분나쁜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치었다.

 

"잠깐...저거 소매치기 아니야?"

 

"뭐?"

 

내 말에 발걸음을 돌렸던 안젤로도 다시금 그 벤치를 돌아보았다.

 

"저거 내가 초등학교때 두번이나 당해봐서 아는데 길 물어보거나 사진찍어달라면서 지갑 슬쩍하는건데..."

 

"설마..."

 

"아니...너는 안 당해봐서 몰라!저거 순진한 관광객이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당해.

저기 봐봐!계속 여자 옆에 있는 지갑 쳐다보잖아."

 

"소매치기가 아직도 있었나?야!너 어디가..."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가는 나를 보고 안젤로가 어이없다는듯이 쳐다보았다.

 

"너 설마 도와주러가는건 아니지?"

 

"맞는데?저 여자 타국에서 돈 없어져봐.지도보는거 보아하니 관광객인게 뻔하고..."

 

"폭력까진가지마라.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30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걸 잊지말라고!"

 

"내가 어린애가 아니라는건 나도 알아..."

 

점점 가증스러운 범죄현장에 다가갈수록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항상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지갑은 외투안주머니나 가방 깊숙이 넣고 다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린시절 나는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살포시 무시하고는 꿋꿋이 들고 다녔다.

그리고 결말은...미아가 되었다...라는건데...

정말 어린시절의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여 나에게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가르쳐준 경험이었다.

 

'어떻게 너희들은 10년이 넘어도 패턴이 변하질않니...'

 

다행히도 여자가 지갑을 꼭 붙잡으며 틈을 주지않고 앉아있어 소매치기 듀오는 여간 고생하는듯했다.

연신 Sorry를 되풀이하며 거절의 의사를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카메라를 쥐여주는꼴은 제3자가 보기에 충분히 노골적이었다.

 

"지갑 꼭 붙잡고 그대로 앉아있으세요.소매치기니깐요..."

 

역시나 그 여자는 한국인이었다.타국에서 낯익은 한국말이 들려오자 여자는 깜짝 놀라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깜짝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곧이어 비명소리와 함께 여자가 쓰러지더니 소매치기 듀오는 탈출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야!안젤로 퇴로 차단해!막아!"

 

내가 다급하게 안젤로를 부르자 안젤로는 허겁지겁 만지고 있던 핸드폰을 닫았다.

하지만 그 드넓은 광장에서 둘로 갈라지자 더 이상 손쓸방도가 없었고,저 멀리서 휘파람 소리만이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너...도대체 왜 여기있냐?"

 

그도 그렇듯이 그저 타국에서 불쌍한 같은 민족하나 구하자고 시작한일이지만

얼굴이 너무나도 낯익은 여자가 내 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내가 어이가 없다는듯 바라보자 그 여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나는 이탈리아오면 안돼?아야...그나저나 저놈들이 밀어서 벤치 모서리에 찌었잖아."

 

여자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무릎을 만졌다 땟다하면서 고통스럽다는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권유리...설마 너 그 지갑에 돈 다들어가있는건 아니겠지?"

 

유리는 한참동안 말이없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가 어느 여행객이 여비를 지갑에 다 넣고 다니냐 다그치자 유리는 입술이 툭 튀어나오며 잔뜩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벤치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보며 아픈 시늉을 하며 내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었다.

 

"숙소는 어디야?혼자 왔어?"

 

"숙소는 몰라서 지도로 찾아보고 있었고...혼자 왔어."

 

"나 참...SM 이제 연예인관리도 안 하나?여자 연예인 혼자 짐싸들고 여행오는걸 허락하는곳이 어딨어?"

 

"....그나저나 나 이거 아픈데..."

 

유리는 자신의 상처부위를 콕콕 건드렸다.

상처를 건드릴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표정이 일그러지는데도 계속 만지는게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리며 상처부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냥 까진것 같은데..."

 

"아냐!엄청 아프다고!찢어진게 분명해."

 

"엄살부리지마!"

 

"지갑을 강탈당한 아픔이 무릎으로 전이되는것 같아."

 

"그래.잘 아네.기분 탓이야."

 

"그래도...혹시 모르잖아.만약에 찢어졌으면 책임질거야?"

 

"아니..."

 

"그러면 병원에 좀 데려다줘...진짜 아프다고..."

 

"1년만에 만나서 하는말이 병원데려다 달라는거라니...나 참..."

 

유리는 정말 아픈듯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안젤로와 함께 유리의 짐을 차에 싣었다.

어찌나 짐이 많은지 장정 둘이 힘을 합쳐야 겨우 들수있는정도였다.

안젤로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기사에게 종합병원으로 가자 말했다.

 

기사는 처음보는 여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내옆에 앉아있는 유리를 보며 새로 생긴 애인으로 생각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때부터 기사일을 맡으셨던분이신데 마치 나와는 부자관계같이

친밀한 관계여서 흡사 다 큰 아들이 기특하다는듯한 눈빛을 보내고 계셨다.

나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 부인하며 구급상자를 찾았고 기사는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구급상자를 찾아주었다.

나는 소독약과 함께 솜과 연고 그리고 밴드를 꺼내었다.

솜에 소독약을 묻이고는 상처부위에 천천히 바르자 유리는 고통스러운듯 몸을 부르르 떨며 격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있어봐...그나저나 숙소는 어디야?데려다줄게."

 

"숙소 가봤자 소용없어.돈이 없는데 뭘해...아야...살살 좀 해!"

 

"너...내가 보기엔 100% 까진거다.찢어진거면 완전 뒤집어졌을걸."

 

"....그럴지도...."

 

유리가 민망한듯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돈도 없는데 어디서 자려고 그래?"

 

"뭐...보아하니 내가 예약한곳은 삼류호텔임이 분명할거야.그대신 7등성급 호텔에서 자지 뭐..."

 

"돈도 없는데 무슨 7등성급 호텔이야...아직도 충격에서 못 벗어났니?"

 

그때 유리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 신세 좀 질게..."

 

"뭐?"

 

"신세 좀 진다고..."

 

유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상처때문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안 돼라는 말한마디면

곧장 울어버릴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니,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연기전공한건 이럴때 써먹으라고 한거 아니잖아?안 그래?"

 

그러자 유리는 흑흑 소리를 내었고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기사나 나도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유리는 예전의 살가운 내가 아니라며 예전같았으면 바로 허락했을거라고 말했지만,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옛날의 유리같은 경우에는 남의집에서 자는것에 수줍어함이 분명했을텐데 그렇지 않을것을 보면말이다.

물론 깝율이라는 별명을 갖고있었지만,내 기억속의 평상시의 유리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여자를 울리면 그 고통은 배로 돌아온다죠?"

 

기사가 재밌다는듯 앞좌석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 큰 여자가 남자 혼자있는집에 들어오는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딸은 24살에 동거를 시작했고 지금도 잘 사는걸요?"

 

"아...지금 그런말이 아닌데..."

 

"남녀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하느님만 아시는거죠."

 

"하하...하느님 얘기를 꺼내시면 저같은 신도는 그냥 무너진다고요.좀 더 괜찮은 이유를 대시면 제가 이 여자의 제안 받아들이죠."

 

"지금 이 노인의 지혜를 시험하시는겁니까?"

 

"후후...글쎄요...그건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내 대답에 기사는 껄껄 웃기 시작하며 괜찮은 이유를 생각해본다 말했다.

나는 유리에게 소독약과 함께 연고를 발라주고는 밴드를 붙여주었다.

마침내 약 5년전에 태연이와 방문했던 그 종합병원에 또 다시 발을 들인 나는 30분만에 의사와 대면할수 있었다.

 

의사는 유리의 상처를 보고는 잠시 꿀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있고는 떼어놓은 밴드를 다시금 붙여주었다.

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치료가 끝났다고 의사가 말하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떨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유리는 민망한듯 볼을 긁적대었고 결국 한끼식사비정도되는 치료비와 연고비만이 나에게 청구되었다.

 

"이거 이거...상황만 달랐지.1년전이랑 똑같잖아.그때도 너 덜렁덜렁된것같은데 말이지..."

 

"아...그렇네.매번 신세만 지네.헤헤..."

 

유리는 민망한듯 계속 웃고만 있었다.

 

"1년전에 수연이가 여자 소개시켜준다길래 누군가 궁금해서 나갔는데 그게 너였고...

이번에는 밀라노 한복판에서 만나니 여간 끈질긴 연이긴 하구나..."

 

"헤헤...근데말이야...왜...아무것도 안 물어?"

 

"어?"

 

"궁금하지 않어?시카와 나 빼고는 모두들 5년전이 마지막이었잖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하고 있겠지...안 그래?"

 

"어?아...응...그래...하하...모두들 잘하고 있지."

 

"개인적으로 지난 5년간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것같아 다른 사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수연이 같은 경우에도 2년반동안 사귀면서 데이트한건 손에 꼽을정도였고...뭐 매번 휴가는 함께가기는 했지만말이야...

여자로서 힘들었을거야.비록 표현은 안 했지만 불만이 컸을거라 생각해.그래서 자유롭게 놔주었는지도 모르지."

 

"...."

 

"그나저나 그런 얘기 꺼내서 내 감수성을 자극하고는 우리집에 눌러앉을 생각하지마.

난 당장 돈 쥐어지고 한국으로 돌려보낼수도 있으니깐 말이야..."

 

"어휴...정말 못 됐어.명색이 소녀시대가 집에서 자고 간다는데 거부할 남자는 오빠뿐일거야."

 

"흠...그럴지도 모르지.그나저나 너 왜 온거야?아까부터 묻고싶었어.진짜 단순한 관광차원이야?

수상한데...무슨 여자가 혼자 관광을 와?남자 혼자서도 얼마나 위험한짓인데..."

 

유리는 나의 물음에 우물쭈물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계속되는 내 물음에 관광이라고 얘기를 하고는 어딜갈꺼냐고 묻자 밀라노,피렌체를 허겁지겁대는 유리였다.

마침내 병원주차장에 주차된 차에 도착하였고 문을 열고는 뒷자석에 앉았다.

내가 괜찮은 이유를 생각했냐고 기사에게 묻자 기사는 찰랑찰랑 윤이 나는 백발을 쓸어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냥 제 감정에 충실한게 좋을것같네요....저같은 노인네는 도련님이 부럽습니다.

차도,채여도 몇번이고 여름은 옵니다...이 뜨거운 계절이 말입니다...여름이 왔는데 딱히 거부할필요는 없지않습니까?"

 

"....휼륭한 답변이었습니다만 옆에 있는 이 여자는 글쎄요...로맨틱한 감정이 생길런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지내다 연인사이가 되는거지요...연인사이라는게 별거 있습니까?서로의 친구가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게 연인사이죠."

 

"...그러고보니 어느 콧대 높은 아가씨와도 그렇게 연인사이가 됐죠.

근데 따지고보니 정말 로맨틱한 감정을 느낀지 꽤나 오래된것 같군요...어느새 여름도 절정이구요..."

 

"청춘의 계절...여름이 돌아왔군요."

 

나는 유리를 뻔히 쳐다보았다.

 

"권유리...너 요리 잘해?"

 

유리는 무슨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갑작스런 나의 물음에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어?아...응...내가 요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지~"

 

"그럼 잘됐네.마침 누나가 일때문에 집을 일주일이나 비웠는데 요리사로 기용하지 뭐...

내가 병원비에다가 교통비 숙박비...다 받아낼거야.각오는 단단히하는게 좋을거야."

 

"에...정말 너무해."

 


Episode 02-그들이 사는 세상

 

어둡고 음산하기만한 거리...

자신이 말했던 7성급 호텔의 저택은 커녕 사방은 어두컴컴하였고

가끔씩 서있는 가로등만이 이곳이 사람이 다니는 거리임을 증명해주자 유리는 당황을 금치못했다.

 

"설마...이사갔어?"

 

"아니..."

 

나는 가방을 뒤적이며 직사각형의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케이스에서 리모컨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꺼내고는 첫번째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끼익하는 쇳소리와 함께 저택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었다.

내가 시야에서 사라져 낯선 길로 들어가자 유리는 허겁지겁 내 뒤를 쫓으면서도 여전히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정말 이사간거 아니야?"

 

"응..."

 

"뭔가 달라진것 같은데..."

 

"아...나무가 더 많아지긴 했다.예전엔 미니 식물원정도였는데 지금은 미니숲 정도는 되니까..."

 

손에 쥐여진 리모컨의 2번째 스위치를 누르니 주변의 어둠이 차츰 불빛으로 대체되었다.

마치 조그만 오솔길을 걷는듯한 풀내음과 이곳저곳 조금씩 들려오는 새소리와 벌레소리는

낯선이에게는 자신이 엉뚱한 길에 빠져들었다는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윽...그러고보니 불을 다 켰네.밤에 이렇게 키면 새들이 다 잠이 깬다는데..."

 

내가 터치패드로 손가락을 움직여 가로등수와 불빛을 조절하자 유리는 난생 처음보는 광경인듯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걸로 조절하는거야?"

 

"응.정보화 사회의 힘을 좀 빌렸지.

이 집의 사용자가 부모님에서 누나와 내가 된 이후로 느낀건데 밖에서 보면 뭔가 삭막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거든.

그래서 나무를 심어 새소리도 들리게 하고 좀 더 활기차게 보이려고 했는데 문제는 저 가로등이었어.

동물들한테는 저런 빛이 해가 된다는데 가로등은 계속 켜놔야하거든.그래서 리모컨이 필요했고 결국 만든게 이거..."

 

"근데 이렇게 숲을 만들어 놓으면 벌레같은건?"

 

"벌레?자세히 봐."

 

내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르키자 유리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숲이 그렇게 길지가 않거든.한 30m밖에 안 되니까 대부분은 여기서 맴돌고 와봤자 상대할수있는 수준이라서...

여기부턴 낯익은곳이지?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니까..."

 

"...응."

 

유리는 회상에 잠겼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에 엄지손가락을 들이밀자 인식됐다는 음성과 함께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문을 열자 계절을 잊은듯 스산한 내부와 끼익거리는 기분나쁜 문 긁는 소리만이 들리었다.

유리는 문을 긁는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자 더욱 더 공포심이 증폭되었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안심해...아무것도 아니니깐..."

 

점점 끼익거리는 문긁는소리의 가까워짐의 느껴지자 유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소리의 근원지인 2층으로 다가가자 유리는 더 이상은 다가서지 못하겠다는듯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문에서 회색빛 재빠른 물체가 내품에 안기자 유리는 허탈한듯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 품에 안긴 회색의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자신을 쳐다보자 유리는 그제야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갖다대었지만

곧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뜨거운 주전자를 만진듯 몸을 재빨리 움츠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그렇게 다루면 안 돼.자신이 인간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놈이라서 그렇게 주인처럼 다루면 날카로워지니까..."

 

"....가뜩이나 정이 안갔는데 더 안가게 만드네."

 

"하하...어쩔수 없거든.이래뵈도 왕족 출신이라서...

이름은 샬롯이고 이번 일주일동안 한번 친하게 지내보라고...참고로 난 한달 걸렸다."

 

내가 자세를 낮춰 샬롯을 놔주자 샬롯은 차분히 한걸음씩 내디며 유리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윽...아무리 생각해도 정이 안 가."

 

"지금은 탐색기간이라 그런걸꺼야.얘는 우리 가족외에는 다 경계의 눈초리라서..."

 

"...그나저나 아까 말한거 말이야..."

 

"응?"

 

"얘가 왕족출신이란거..."

 

내가 손가락으로 문을 열자 삑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들은 샬롯은 곧바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이녀석이 모나코 순수혈통이래나 뭐래나...모나코 왕족들이 직접 키운다는데 내가 모나코 왕궁에 가봤어야 알지.

어쨋든 얘는 그 잘나가시는 모나코의 샬롯공주에게 선물 받은거고 이름을 그대로 따아 지은거는 그것이 전통이래.

그래서 이녀석 이름은 샬롯이야."

 

"....정말 뛰질 않네.더 정이 안가."

 

유리는 소리가 나는곳으로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는 샬롯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봤자 고양이지.너 관찰하다 소리 들리니까 금방 잊어먹고는 그곳으로 가니까..."

 

나는 문이 열린 방으로 들어가 침대시트가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점검하며

어디 먼지가 쌓였는지 구석구석 손가락을 이용해 살펴보고 있었다.

 

"오빠방은 어디야?"

 

유리는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 방?내방은 저기~"

 

내가 저 멀리 끝을 가르키자 유리는 알수없는 표정을 지었다.

 

"난 오빠방 반대편 쓸래!"

 

"뭐?왜?"

 

내가 이유를 묻자 유리는 쭈뼛쭈뼛대며 정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난 이곳이 가장 좋은 시설의 방이라며 이곳에 머물라고 말하였고

그러자 다급한 유리는 말문을 열었고 그 말은 나를 어이없게 하기 충분했다.

 

"무섭단 말이야...분위기도 음산하고...꼭 귀신이 튀어나올것 같아."

 

"그렇게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애가 낯선 이탈리아로 혼자 오는게 말이 돼?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귀신 봤다는 사람 한명도 없었거든?거기에다 내 반대편은 안 돼."

 

"왜?"

 

"그곳은 우리 누나방이거든.누나는 다른곳엔 다 관대한데 자신의 프라이버시만은 엄격하거든.

거기에다 그방은 누나의 지문으로만 열수있으니까 여는것도 불가능하고..."

 

"윽...안 되는데..."

 

"그냥 여기서 자...겁은 많아가지고~"

 

"그럼...무섭거나...그러면 찾아가도 되지?"

 

"그래.물론 노크는 필수고...나같은 경우엔 문을 잠가놓진 않지만,그래도 예의란건 있어야되니까..."

 

"응...아마 자주 찾아갈지도 몰라."

 

"잠잘때만 안 찾아오면 돼.물론 내일 약속은 오후에 있고 밀린일도 조금 남아서 내가 잘때 네가 찾아올일은 거의 없지만 말이야."

 

그때 또 다시 무언가 긁는듯한 소리가 들리었고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도 샬롯이 무언가를 긁고 있었다.

유리의 캐리어 가방을 긁던 샬롯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다시금 도도히 걸으며 내 품에 안기었다.

 

"잘 자고 물은 1층에 있으니까 알아서 해결~"

 

"아...응..."

 

"그럼 이만..."

 

"자...잠깐!"

 

"응?"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

 

"...고마워...그리고 반가워..."

 

"....뭐가 고맙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운건 나도 마찬가지야.

누나가 일때문에 피렌체로 간지 한달 가까이 되어서 한국어 말동무가 필요했거든.어쨋든 푹 쉬어라~"

 

그리고는 유리의 방문을 닫고 원래의 내자리로 향했다.샬롯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하루의 묵은 피로를 씻어내었다.

샤워를 끝맞치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샬롯을 바라보니

어느새 이녀석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눈꺼풀이 무거운지 두발을 공손히 모으고는 눈꺼풀만 깜빡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런 샬롯의 귀여움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는 인터넷에 접속해 신비서에게 온 메일 및 다른 메일이 오지 않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예정되었던 프로젝트의 미팅이 차차 진행된결과 최종합의만이 남았다는 소식과 함께

합의를 하기위한 미팅의 날짜가 다음주 토요일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하기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 앉아 꺼낸 수첩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있었을때

꺄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고는 곧 이어 내 방문이 덜컥 열리었다.

무언가 바리바리 싸온 유리와 눈이 마주친 나 사이에는 잠시간의 어색한 적막이 흘렀지만

그 적막도 잠시...곧 고양이 특유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버렸다.

 

"아하하...뭐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음산해~잠시 밖으로 나와보니 창문은 열려있고 바람소리는 나고...커튼을 팔락거리고..."

 

"...그나저나 그건 뭐야?"

 

난 유리의 양손에 잔뜩 들린 쇼핑백을 지목하였다.

그러자 유리는 얼른 문을 닫아버리고는 내 앞에 자신이 가져온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안을 살펴보니 음반과 DVD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내가 이탈리아로 간다니까 유하 언니나 정현이와 채원이가 이것저것 주더라고...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우리 앨범이랑 DVD영상..."

 

"아...그래..."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중 정현이와 채원이의 팀인 리트 매치의 앨범 커버가 특이해서 포장을 뜯어 살펴보니

오른쪽 하단에 조그맣게 [ILLUSTRATION:은유하]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이 은유하는 내가 아는 은유하냐?"

 

"응...몰랐어?유하 언니 미술전공이랑 연기전공중에서 연기 선택한건데?"

 

"아니...알긴 알았는데...그래도 이정도로 잘그리나 해서...여하튼 노래만 잘하면 예술적능력은 완벽하네."

 

"노래도 꽤 하던데?음반까진 안 냈지만 피쳐링이나 O.S.T에도 몇번 참여했을걸?"

 

"그래?그나저나 얘 연기한건 내가 민망해서 못보겠던데...

예전에 리트 매치 데뷔곡 뮤비 촬영차 이탈리아로 와서 그때 자기가 출연한 작품 DVD를 줬는데

기껏해야 조금 비중높은 조연수준인데도 다 못봤는데 주연은 볼수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얘네는 잘하고 있냐?둘이 워낙 상극이라서 많이 걱정되던데..."

 

"1,2집이 20만장 넘겼고 3집은 20만장에 육박한 판매고...

요즘 인기 아이돌도 10만장 넘기면 대박이다라고 하는데 이정도면 말 안해도 알겠지?"

 

"흠...대단하긴 하나보구나."

 

"1집이 대박이었지.10주연속 1위를 하고 신인상에 올해의 음반상까지 싹쓸어버렸으니까..."

 

"잠깐...10주연속 1위면 너희 기록을 얘네가 깨드린거냐?

수연이가 매주 전화해서 신기록 행진중이라며 알려주던데?아마 그게 9주 연속으로 알고 있었는데..."

 

"흠...말하기가 좀 애매한데...우리는 Gee한곡으로 9주고 리트매치는 타이틀곡으로 6주 후속곡으로 4주 받은거여서...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몰랐나보네.좀 서운한데..."

 

유리가 말끝을 흐리며 내 시선을 외면하고는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은 침대위에 오르고 싶은지 유리의 발밑에 서성대었고 유리는 그런 샬롯을 발로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놈이 안 하던짓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거지.

그나마 책같은건 많이 읽어서 입학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지만 그이후가 더 문제였지.

일반기업경영을 배우면 모르겠지만 우리회사는 좀 특이해서 시간이 날때마다 패션공부도 꾸준히 해야했거든.

물론 공부라는게 거창한건 아니고 매장에 나가 유통과정이 어떻게 되는가...뭐 이런 실용적인거지만 말이야."

 

내 말을 차분히 듣던 유리는 알수없는 미소와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DVD로 돌렸다.

그곳엔 두남녀가 해질녘 다리 양끝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구도의 사진이 포스터인 영화 DVD가 있었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

 

"응.유하 언니의 대표작이자 유하 언니를 한순간에 멜로퀸으로 만들어준 그 작품..."

 

"음...이걸 추천하는거야?"

 

"응."

 

"왜?"

 

잠시동안이었지만 밝았던 유리의 얼굴에 슬픔의 빛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곧이어 밝게 웃으며 명작에 추천이유가 어딨냐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불이 들어온 모니터에 다가가고 있었다.

 

"윽...보기만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유리가 자신의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르키며 괴롭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변을 졸졸 따라다니는 샬롯이 부담스러운지 허리를 구부리며 샬롯의 몸을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처음봤어.샬롯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거는..."

 

"하하...소녀시대의 힘은 동물에게도 통하는법이야.

그나저나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봐도 될까?여기 수많은 이탈리아어중에서 낯익은 글자가 하나 보이는데..."

 

"설마 모토로라 말하는거야?"

 

"응."

 

"아...그거?그건 모토로라가 우리랑 손을 잡고 핸드폰을 내겠다고 제의해와서 긍정적으로 검토중이야."

 

"아르마니 폰,프라다 폰 같은건가?"

 

"뭐 비슷한거지.삼성은 아르마니 LG는 프라다...거기에다 소니 에릭슨이 돌체 앤 가바나와 제휴를 해서 서로 윈윈을 했거든.

남은 핸드폰 브랜드는 노키아나 모토로라정도인데 노키아는 워낙 저가로 대량판매하는 회사라

프리미엄 폰같은거 전혀 만들 필요가 없었고 모토로라만이 제휴할 회사를 찾다 우리와 뜻이 맞은거지."

 

"와~대단한데?"

 

"대단하긴...우리가 첫번째 옵션도 아니었어.

접촉은 2010년부터 다른브랜드부터 시작했는데 금액차이도 있고해서 돌고돌다 우리한테 넘어온거라서..."

 

"그래도..."

 

"아!참...그러고보니 이번건은 저녀석이 많은 도움을 줬어."

 

"고양이...?"

 

"응.우리 제품이 모나코 왕실로 들어가거든.그래서 이점때문에 플러스가 되서 우리한테 제의를 했대나 뭐래나...

흠...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모나코의 샬롯공주는 정말 아름다운 공주거든."

 

그러자 유리는 새로운 인터넷 창을 키고는 검색창에 Charlotte Princess라고 검색을 하고는

정말 천상 공주같이 생겼다며...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연하지.할머니가 그레이스 켈리인데..."

 

"꽤나 좋아하네...."

 

"....글쎄...몇번보긴했는데 내 인생에 콧대높은 여자는 한명이면 족해서..."

 

"훗...그말은 무슨말인줄 대충 알겠어."

 

"후후...그나저나 안 피곤해?벌써 2시가 다되가는데 말이야.역시 젊음은 다른건가?"

 

"누가보면 아저씨인줄 알겠다."

 

"3살만 더 먹으면 30줄인데 딱히 부인할수는 없지.

그나저나 난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어 아침부터 치장을 해야하거든.이제 그만 돌아가줄래?"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내 요구에 응해주었다.

샬롯은 여전히 유리의 주변을 졸졸 따라다니며 유리를 관찰하는듯한 행동을 보였다.

 

"이녀석이 널 좋아하나봐."

 

"나도 처음엔 별로였는데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것 같아."

 

"그래.이게 이녀석 매력이지.도도하지만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는것..."

 

"...아!그나저나 실례가 안된다면 내일 어떤 약속인지 알수있을까?계속 그게 궁금하거든..."

 

"흠...아듀~내 사랑!...이정도로 표현하면 될까?그래...아듀...내 사랑...아듀 옛 사랑...아마 그렇게 표현하면 될거야."

 


Episode 03-위장 커플

 

드르륵 드르륵 거리는 살벌한 소리를 들으면서 1층으로 내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가니 유리가 믹서기를 이용해 무언가를 가는듯보였다.

 

"아침부터 뭐하는거지?"

넥타이를 매며 유리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곳으로 가니 유리는 흰색의 뿌연액체를 컵에 담아 나에게 주었다.
뭔가 급조해서 만든듯 이물질 같은것도 둥둥 떠다니는게 기분 나쁜 액체였다.

 

'밥을 만들랬지.이건 또 뭐야?'

 

냄새도 그닥 좋진 않았지만 유리의 성의와 쭉들으키길 원하는듯한 유리의 표정에 마지못해

한모금 들이켰지만 돌아온건 기분 나쁜 전율과 듣기싫은 잔소리뿐이였다.
한모금을 꾹 들이키고는 기분 나쁜 표정과 함께 컵을 내려놓자 유리는 몸에 좋은것이라며 재차 마시기를 권했다.

 

"우웩~이거 뭐야?내가 요리를 만들랬지.이런걸 만들랬어?"

 

"흠...왜?맛있기만 한데..."

 

그리고는 자신의것을 원샷하고는 내것까지 모두 들이켜버리는 유리였다.

 

"이 좋은 마를 다들 왜 싫어하지?"

 

유리는 많이 겪은 상황인듯 능숙하게 내것까지 처리해버리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노릇노릇 익어가는 스테이크와 고소한 향기의 파스타로 인해 충격이 덜해지긴 했지만

역시나 가끔씩 올라오는 기분 나쁜 전율은 가시지 않았다.

 

"흠...이건 어디다 놓으면 될까?"

 

유리의 요리를 보고 속으로 꽤나 감탄했다.

그도 그렇듯이 주인조차 한숨을 쉬며 재료부족을 탓했던 냉장고인데 그런 재료를 이용해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어냈다.

 

"스테이크는 어디서 났지?"

 

"아...그거?저기 구석에 뒤져보니까 나오던데?재료가 없어서 혼났어."

 

"장본지가 한참 되어서...누나가 피렌체로 출장간 이후로 아침은 인스터트나 밖에서 떼웠지..."

 

"흠...그렇구나.왠지 상상밖인데?항상 생각했거든."

 

"항상...생각해?"

 

내가 되묻자 유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곧이어 쾌활하게 웃어버렸다.

 

"아니...그런게 아니고...오빠는 항상 아침도 정갈하게 차려먹을것 같다...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래?그런데 내가 그런 이미지인가?

이젠 난 추억속의 인물이 되어버렸을텐데?거기에다 남은 이미지라곤 여성편력 잔뜩의 플레이보이 이미지일테고..."

 

"....아마 그럴지도 몰라.그래도 시카랑 5년을 같이 살아온 우리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흠...그래...거기까지..."

 

내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하자 유리는 당황한듯 보였다.

 

"응?"

 

"수연이 얘기를 싫어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오늘 옛사랑을 배웅하러가는 나로써는 오늘만큼은 수연이 얘기를 하고싶지않거든.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 묘해질것같아..."

 

"아...미안..."

 

유리는 미안한듯 살짝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요리를 다 마친듯 스테이크 두점을 두개의 접시에 담고는 완성한 파스타도 접시 한쪽에 담아두었다.

마침내 요리를 다 완성한 유리는 접시를 들고는 사각형의 테이블로 가려했지만,곧 내 손짓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쪽으로 가지말고 그냥 여기서 먹으면 안 될까?난 항상 여기서 먹어서 이곳이 편하거든..."

 

우리집엔 총 3곳의 식사공간이 존재한다.혼자나 단둘이 식사할때는 바형식의 긴 테이블이 조리실과 맞닿아있고

그곳이 방금 요리를 하던 유리와 내가 대화를 주고받던 공간이다.

두번째로는 유리가 가려던 약 10인정도를 소화할수있는 테이블로써

가족식사나 친구들을 초대할때 사용하지만 최근엔 거의 사용한적이 없었다.

마지막 장소는 소녀시대가 이탈리아로 온 첫날...

그녀들을 환영하듯 정성스럽게 만찬이 차려진곳으로 부엌옆에 바로 붙어있는방이다.

 

어차피 단둘이서 먹는 식사이기에 굳이 테이블에 앉아 먹을 필요가 없다 생각한 나였지만

그런 나의 의견을 무시하는듯 묵묵히 음식이 담긴 접시며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유리잔등을 갖다놓는 유리였다.

 

"야!내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는거야?"

 

"....그런게 아니야.다만,식사는 마주보고해야 식사다운 느낌이 드는걸?"

 

.......뭔가 크게 한방 얻어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리를 멍하니 바라보자 유리는 고민하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접시를 테이블에서 띄웠다 내려놓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역시...주인의 말을 듣는게 좋겠지?"

 

"아...아냐.그것도 나쁘지 않겠다.요즘 아침에 누구랑 마주보고 식사한적이 거의 없어서..."

 

유리는 그제야 흐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내가 불쌍하다며 안타깝다는 표정까지 지으며 장난투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약간의 미소만 지은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그건 분명한 사실이였으니까...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신후 우리 가족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었다.

예술가는 언제나 처음 영감을 받은곳으로 돌아간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은퇴를 선언하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물론 비서진의 극구 반대로 고향인 전라도 광주로 돌아가시지는 못하셨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신후 마침 육아와 일 사이에서 방황하던 형수님과 적적하신 부모님의 의견이 맞아

두가정이 한지붕살림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과거의 화려한 생활을 한 부부라고는 생각할수없듯

그저 5살 손자의 재롱을 즐기는 평범한 노부부의 삶을 즐기고 계셨다.

 

굉장히 평화로운 5년을 보낸 한국과는 달리 한순간에 보스를 잃어버린 Giannino의 5년은 혼돈 그 자체였다.

평소에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수차례나 밝힌 전도유망한 디자이너 루카 리발타를 거액의 금액으로 스카웃해오고

누나를 수석 디자이너로 승격시켰지만 현지 언론에게 돌아온 평가는 혹평이었다.

 

언론들은 Giannino 특유의 색깔이 사라졌다면서 혹평을 가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였다.

그 시즌에 발표한 신작은 아버지가 이미 절반가량 디자인하신 상태였고

나머지를 새로 스카웃한 루카씨를 비롯한 신입디자이너...그리고 누나가 디자인을 하였기에 아버지의 느낌이 사라졌을리 없었다.

 

요즘에도 언론들은 30년 밀라노 빅3 아성이 무너지나?등의 자극적인 제목의 칼럼을 잡지에 싣으며

확실한 보스가 사라진 Giannino 흔들기에 열중하며

여전히 예전 특유의 스타일이 사라졌다며 비판하지만 그에 반박하는 이도 적지않다.

일단 누나가 총대를 메듯 카피캣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어가며 아버지의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피캣은...웃을때 고양이같이 눈이 반달이 되는 누나의 얼굴과 카피한다는것이 합쳐진 별명인데

범죄용어에 모방범이라는 뜻도 함께 있어 도둑고양이 같이

야비하게 스타일만 카피해대는 여자의 느낌이 강력하기에 결코 좋은뜻의 별명은 아니다.

 

물론 누나는 그런 비판까지 감수하고 아버지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버지 은퇴의 숨은 뜻이 고정된 스타일의 탈피가 아니였을까?라고 생각되는 나로써는

누나의 그런 결정에 한편으론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디자이너에 경영인까지 맡고 계셨던 아버지였기에 은퇴후 경영진에도 개혁의 칼바람이 부는건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CEO에는 별명이 Reviver...즉 부활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갖고있는 미국인 리차드 벤슨이 임명되었다.

처음에 아버지가 리차드씨를 소개시켜주며 너에겐 큰 도움이 될 사람이 될거라 하였지만 의구심이 드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도 그렇듯이 Reviver라는 닉네임이면 재정파탄 상태의 기업 되살리기에 특출난 능력을 갖고있음에 분명한데

Giannino의 재정상태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주가도 계속 상승세였기에 딱히 그의 특출난 능력을 선보일 기회가 없을듯이 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터진 대규모 금융위기 후폭풍은 우리에게도 닥쳐왔고

그의 뛰어난 대처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최소한의 피해만 입을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후 그가 위대해보인것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데에는 그의 외모 또한 한몫했다.

 

주말이 되면 가끔씩 학교에서 밀라노로 돌아왔던 나는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며 곁눈질로 그가 일하는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가끔씩 질문을 하면 돌아온 대답이라곤 시니컬한 'Shup Up!Kid!'라는 말뿐이였지만말이다.

 

그때도 어김없이 본사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 들렀고 문을 열자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여전히 그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을 지으며 농구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카메라가 벤치쪽으로 돌아갔고 순간 실소를 금치 못했다.

 

큰키에 다부진 몸...새하얀 백발에 안경...그리고 인상적인 턱수염과 콧수염...

그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NBA의 명장 필 잭슨과 취하는 포즈는 물론 외형까지 똑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은글슬쩍 당신 필 잭슨과 쌍둥이아니냐는 농담을 건넸고

그는 특유의 말버릇 'Shup Up!Kid!'로 말을 받고는 그런 말은 수백번도 더 들어서 지겹다고 답했다.

그러자 나는 뭔가 동질감이 느껴져서 응원하는게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 특유의 말버릇과 함께

자신은 어렸을때부터 레이커스 팬이였다는 대답이었다.

 

결국 그 경기로 인해 약간의 어색함이 있던 우리들의 사이는 리드를 잡히고 있던 레이커스의 대역전극과 함께

꽤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맞이했다.물론 여전히 그는 그 특유의 말버릇만은 나에게 그대로 사용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보스를 잃은후 5년간의 Giannino의 혼돈이였고 그 생각을 하자 식사는 잊은듯 멍하니 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상하자 유리는 내 어깨를 흔들었고 그제서야 난 정신을 차릴수 있었다.

 

"뭔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응?아니 뭐...이런저런 생각..."

 

"내가 한번 맞춰볼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유리는 스테이크를 썰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시카 생각한거 아니야?"

 

그 말에 스테이크를 쓸던 두손이 잠깐 멈칫하였고

유리의 표정을 읽어보니 약간의 슬픈 그늘이 드리워짐과 함께 역시 그랬구나...라고 되려 짐작하는듯한 표정이었다.

 

"아니...아니었는데?근데 뭐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유리는 표정을 감추듯 다시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자신이 구운 스테이크 한조각을 입에 담았다.

나 또한 유리가 만든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맛을 음미하고 있을때쯤 유리가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역시나 어제도 오빠답게 아리송한 말만 늘어놓고 끝났잖아...아듀...내사랑...아듀..옛사랑...두가지를 생각해봤거든.

첫째 오빠의 전 여자친구의 장례식에 참여하는것...둘째 오빠의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는것...

근데 오빠의 오늘 정장을 보니 전자는 아닌것 같아.

장례식장에 네이비색 정장은 영 아니잖아?거기에다 포켓치프는 말할필요도 없고..."

 

"후자~!딩동댕!"

 

"역시..."

 

"혹시 그때 기억나?연습실에 찾아온 내 친구..."

 

유리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턱을 괴며 그때의 상황을 되살리는듯 했다.

 

"기억은 나는데 얼굴은 기억 안 나.느낌은 꽤나 우아하고 세련된 여자라는거?"

 

"사라 베르니...내 첫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이지.처음이라는 단어때문인지 괜스레 정이 가는 친구거든.

사람이라는게 참 희안한게 몇번이나 이런 장면을 생각했거든.

사라의 남자친구도 몇번이나 만나봤고 심지어 두사람의 아이도 몇번이나 봤거든.

그렇게 몇번이나 현실을 바라보고 여러번 상상을 해보고

언젠가는 이런날이 올줄 알았으면서도 기분이 묘해지는건 어쩔수 없나봐."

 

"아이가...있다고?"

 

유리는 식사를 하는도중 깜짝 놀란듯 되물었다.

 

"응.남자아이고 지금 2살쯤 됐나?문화적 차이겠지?

사라는 동거로 시작하고 애까지 낳은 상태에서 결혼하는거니까...그나저나 넌 잘먹는구나..."

 

어느새 유리는 접시를 반을 비워가고 있었다.반면 말하는데에만 집중한 나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욕이야?아니면 칭찬이야?"

 

"칭찬이지.Gee 컴백직전이었나?오랜만에 수연이를 봤는데 그전에 봤을때랑 너무 다르더라고...살을 너무 빼서 좀 안쓰러웠어.
자기말로는 스키니가 컨셉이라 뺄수밖에 없었다는데 마른 체형을 싫어하는 나로써는 내색은 안 했지만 좋지는 않았거든."

 

사실 Gee 컴백 직전에 만난이후로 서로 다투는일이 잦아졌다.

살을 급격히 뺀건 컨셉이라 어느정도 이해가 갔지만 가장 이해가 안 되는건 수연이의 짧은 단발머리였다.

내가 몇번이고 만류했지만 기여코 일을 저질러버린 수연이...그리고 그걸 꼬투리로 잡은 나...

수연이는 짜증을 내는 내가 이해가 안되는듯 단발머리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느냐며 물었지만

나는 그런 수연이를 외면하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대판 싸우고 난뒤 스캔들 이후 두번째로 이별의 위기를 맞이했다.

역시나 단발머리의 끝은 이별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때쯤 이번만큼은 징크스를 깨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런 바보같은 징크스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모두 염두하고 일주일만에 수연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참으로 바보같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내말을 들은 수연이는 의외로 차분한 말투로 나를 이해해주었고 자신도 사과를 하며 최초의 이별 위기는 무사히 넘어갈수 있었다.

물론 그이후 이별을 맞이하긴 했지만 수연이는 내 연애시대상 유일무이하게 징크스를 깨주는 여자가 되었다.

 

"훗...나 참...수연이 얘기 안 꺼낸다고 했는데 또 꺼내버렸구나."

 

내가 허탈한 웃음을 짓자 유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면 되지 않을까?그렇게 애써서 막을려고 안 해도 될것 같은데...거기에다 두사람 좋게 헤어진걸로 알고있고..."

 

"....아무리 좋은 이별이라도 이별이란것 자체가 구슬픈 단어거든.

좋은 이별이란 없어...좋은이란 단어는 슬픔을 보기좋게 포장해줄뿐이지."

 

"흠...그래도 난 그런게 참 부럽더라.가끔씩 친구같이 만나잖아.

난 나쁜놈들이랑만 사귀어서 헤어지고나면 죄다 안면몰수거든.헤헤..."

 

"근데 그것도 요즘엔 바빠서 거의 없었어.그때 너와의 소개팅이 마지막이였으니까..."

 

유리는 약간 놀란듯 보였다.자기딴에는 여전히 자주 만나는줄 알았나보다.

하지만 수연이는 1년내내 쉬는날이 없는 최정상 아이돌이였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나였지만 그런 시간도 자기개발에 투자한 나...

거기에다 공간의 제약까지 더해져 서로가 만난지는 1년이 다되가고 있었다.그때 테이블에서 꽤나 큰 진동음이 울리었다.

 

"소울메이트 투?"

 

액정에 뜬 'Soul Mate II'라는 글자를 그대로 읽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유리였다.

 

"신비서!왜요?"

 

내가 전화를 받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였다.

 

"네?안 된다구요?아니 갑자기 그러면..."

 

꽉 맨 넥타이가 답답해서 그런지 넥타이를 풀려했지만 자꾸 헛돌기만하고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하며 넥타이와 씨름을 하고 있을때 반대편에 앉아있던 유리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곧 스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한결 편해졌다.

 

"아...우현이가 아프다고요?아...그러면 어쩔수 없죠.궁상맞게 혼자가서 사라를 상대해야겠군요.

사라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또 뒤집어지면서 깔깔거리며 비웃을것 같은데...어쨋든 월요일날 봐요~"

 

전화를 끊고는 팔짱을 끼었다.상황이 정말 베베 꼬이고 있었다.

지난 몇년동안 자신의 짝을 찾은 사라는 계속해서 나에게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며 소개팅을 권했다.

연애를 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계속해서 여자친구가 있다며 거절하였고

사라는 결국 자신의 결혼식에 그녀를 데리고 와서 확실한 입증을 받으면 더 이상 소개팅 얘기는 꺼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미 사라와의 대화를 통해 아시아계 여자라고 밝힌 나는

내 비서인 신비서를 내 여자친구로 위장할 생각이었지만 오늘 갑자기 상황이 베베 꼬여버린것이다.

 

"아...고마워.답답해서 혼났네."

 

일단 내 답답함을 해소해준 유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잠깐만...아시아계 여자?'

 

그러고보니 자신앞에 떡하니 아시아계 여자가 앉아있었다.물론 관광객의 신분이지만 말이다.

 

"저기...정말 미안한데..."

 

"응?"

 

"혹시 잠깐 시간되?"

 

"왜?"

 

나는 유리에게 지금 현재 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유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그러게 거짓말을 왜 하냐며 나에게 장난어린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는 정말 특별한 장소를 가이드로 알려주면 그 제안을 승낙한다고 말했다.

생각할틈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어차피 전국토가 관광지인 이탈리아이기에 어디를 데려가도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휴...다행이다.적어도 사라에게 추하지는 않게 되었어."

 

"친구라며...그런데 왜 그렇게 잘보이려고 애쓰는거야?"

 

"글쎄...나도 모르겠는데...그냥 사라에겐 잘난모습만 보여주고 싶거든.물론 우는모습 같은 추한모습도 많이 보여줬지만...

어쨋든 소중한 관광객의 하루를 뺏어서 미안해.정말 멋진 장소로 보답할게."

 

"소녀시대 In Italy에서 들른 장소는 안 돼!"

 

"당연하지~피렌체나 밀라노는 지겹도록 가봤고 베네치아는 1년에 한번씩 영화제때문에 놀러가느라 나도 별로라고...

나폴리는 도시 자체가 여전히 쓰레기때문에 골치라 열외로 치고 말이야...국경을 넘어보는건 어때?

좀만 가면 스위스,프랑스와 바로 맞닿아있거든.짜여진 일정이 어떻게 돼?"

 

"그...글쎄...일단 피렌체는 꼭 가봐야 돼!"

 

"가봐야 돼...?할 일이 있나봐?"

 

"응..."

 

"그래?설마 그래서 온거야?단순한 관광차원이 아닌...잠깐!그러면 어제 나한테는 거짓말 한거잖아!"

 

"아니 뭐...이것저것...관광도하고...할일도 있고...쉬기도 하고..."

 

"목적이 그런거였다면 국경 넘는건 안 되겠다.몇시간이면 가지만 엄연히 할일이 있다하니 무리하면 안되지.

그러면 코모나 볼로냐가 좋겠다.코모는 밀라노랑 가깝기도 하고 거기가 조지 클루니가 홀딱반할만큼 멋있는곳이거든.

볼로냐에선 나도 할일이 있기도 하고...내가 4년동안 살았던곳이기도하니 지리도 빠삭하고...

아...그러고 보니 피렌체에서도 할일이 있네!잘 됐네!정말..."

 

"근데 질문...4년동안 살았다는건 뭐야?설마 대학?"

 

나는 지갑에서 자랑스럽게 카드한장을 꺼내 유리에게 보여주었다.

 

"응.볼로냐 대학...세계 최고의 대학이지.물론 고는 오래될 고이지만 말이야.아!그나저나 이거 다 식겠다..."

 

대화를 하는건지...식사를 하는건지...도무지 목적을 알수없는 식사 앞에 유리가 준비한 음식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대화와 식사 병행을 잘하던 유리도 하도 내 말에 귀를 경청한듯 아까와 음식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얼른 유리에게 빨리 먹을것을 재촉하였다.물론 더 빨리 먹어야할쪽은 나였지만 말이다.

 

"끝~!"

 

유리가 먼저 식사를 끝맞쳤는지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갔다.흡사 설거지를 하려는 시늉을 하자 내가 손을 내저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까 지금 가서 바로 준비해!"

 

"뭐?아니...괜찮아.공짜 투숙인데 이런건 내가 해야지.거기에다 아직 시간 여유있다하지 않았나?"

 

"아...그건 신비서와 내가 갔을때 얘기이고...여자는 외출준비가 좀 길잖아."

 

"배려해주는거야?"

 

"후후...아니...다만,열심히 준비해서 정말 사라가 인정할만한 여자가 되어야 해.안 그러면 내가 정말 곤란해지거든."

 

내 말을 듣은 유리는 서서히 자신이 씻으려던 접시에 손을 떼더니 발걸음을 문으로 향했다.

황급히 2층으로 향하려는 유리를 향해 입을만한 옷이 있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관광객의 신분이라 캐쥬얼한 옷만 갖고왔을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유리는 오른손으로 O를 만들어보이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그거 흰색이야?"

 

"아니...보라색 미니드레스야.피렌체 갈때 입으려고 산 옷이거든...근데 왜?"

 

"아니...결혼식에서 흰색은 신부에게만 허락된 색이잖아.그래서 혹시나해서 물어봤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나...약간의 의문점을 지울수 없었다.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온 유리...

그리고 그런 유리의 말에서 가끔씩 튀어 나오는 모순과 피렌체에서 할일이 있다는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종종 드러나는 슬픈 표정과 그것을 애써 지우려는듯한 쾌활한 표정...

아무리 이해할려해봐도 마지막으로 봤던 1년전...

그리고 5년전 함께했던 유리의 모습만을 기억하던 나로써는 그런 유리의 모습을 100% 이해할수는 없었다.

 


Episode 04-To Ex-Girlfriends

 

아무리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모르겠다라는거였다.

그렇기에 얼른 생각을 접고는 설거지를 끝맞치고 발걸음을 내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샬롯이 특유의 조신한 걸음으로 방안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침대에 기대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내 발목부분에 따스한 기운이 드리우졌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하자 샬롯이 내 다리에 유일한 애교스킬인 부비부비를 시전하고 있었다.

 

"이 녀석아...평소엔 그렇게 애교가 없더만...오늘은 왜 그러냐?"

 

내가 몸을 낮춰 샬롯을 쓰다듬으려하자 샬롯은 몸을 웅크리더니 잔뜩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샬롯을 안으려하자 샬롯은 어느새 내 손이 자신의 자리인듯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 말이야...널 보면 항상 어떤 여자가 생각나거든.

너처럼 평소에는 애교하나 없는 무뚝뚝쟁이인데 내 기분이 심상치않다는건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고 잘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지.

생각해보니 그녀와 헤어지고 난뒤 너를 처음으로 만난것 같은데...넌 도대체..."

 

"도대체 뭐?"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들킨듯 내가 깜짝 놀라자 오히려 샬롯과 유리가 더욱 깜짝 놀란듯 보였다.

샬롯은 내 품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착지를 하였고 유리는 나에게 다가오며 털이 날린듯 손을 가로저으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괜찮아.기껏해야 고양이랑 논것뿐인데...그나저나 엄청나게 빠르게 준비했네?"

 

그도 그렇듯이 부엌에서의 유리의 모습은 메이크업은 하였지만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였기에 어림잡아 2시간은 걸릴듯 보였다.

물론 기준은 우리 누나의 준비시간이였지만 말이다.

 

"응?꽤나 오래걸린건데?가져온것 치고는..."

 

"그래도 한 2시간은 걸릴줄 알았거든."

 

"그건 집에서나 그렇고 아무것도 매치할 아이템이 없더라고...심지어 힐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태연이 생각나네.그녀석 힐때문에 고생 많았지.갑자기 그때 생각하니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싶네."

 

"그러면 한국에 놀러와~간단한건데 왜 그렇게 고민하는거야?"

 

"아...내가 좀 바빠서...유럽만 왔다갔다하는것도 벅차거든.물론 너희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만 말이야."

 

"흠...얼마나 바쁜지 궁금하네."

 

"지금 비꼬는거야?"

 

"아니...정말로 궁금해.개인적으로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적인 탑클래스 브랜드는 어떻게 일할까 궁금했거든.

그나저나 아까 뭘 그렇게 샬롯이랑 이야기 한거야?"

 

"아...그냥 집 잘 지키고 심심해도 잘 놀고 있으라고...뭐...개도 아니고 고양이니까 혼자서 잘 놀겠지만 말이야..."

 

사실대로 말할수 없었다.그말은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말이었다...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수연이랑 닮은거지?

그리고...어째서...그렇게 낯을 가리는 네가 유리를 그토록 반기는거야?마치 1년전 유리를 소개시켜주던 수연이처럼 말이야...'

 

 

 

 

 

 

 

 

 

샬롯의 점심밥을 챙겨주고는 집을 나왔다.

일요일이였기에 기사님의 달콤한 휴식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집에서 차키를 하나 챙기고는 나는 운전석에 유리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는 집을 빠져나와 밀라노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사라의 새출발을 축하해주듯 날씨는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을정도로 최고였고

평소의 이탈리아 날씨답지않게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오고 있었다.

 

"와~날씨 정말 좋다!이런날 결혼하면 정말 좋겠어!"

 

유리는 한손을 창밖으로 내밀며 바람을 만끽하는듯 보였으나 금새 다시금 정숙한 자세를 잡았다.

그도 그렇듯이 짧은 미니드레스형의 의상이였기에 노출이 신경쓰이는듯

허벅지 부분을 핸드백으로 계속해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말이야...생각해보니 오늘 NG네."

 

"뭐...뭐가?이옷이 얼마나 예쁜데..."

 

"무릎에 밴드...왠지 머릿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거든.칠칠맞고 덤벙거리는 여자랑 사귄다고 질책하는 사라가..."

 

"칠칠맞고 덤벙거려서 미안하네!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것도 아니잖아!

거기에다 신비서 언니도 그렇게 차분한 성격도 아니고!"

 

"그래도 유치원생처럼 무릎에 밴드를 붙이고 다니진 않지."

 

"웅....유치원생같아서 미안하네."

 

유리는 잔뜩 토라진듯 팔짱을 끼며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래도...그것만 빼면 나쁘지는 않아."

 

"...."

 

 

 

 

 

 

 

 

 

정확히 나쁘지 않아...라는 말 이후로 별 대화없이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까지 향했다.

도저히 읽을수없는 유리의 표정이였기에 유리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나는

차에서 내리라는 형식적인 말만할뿐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성당 주변을 보니 곳곳에 학창시절 낯이 익엇던 선배들이 보였다.

한껏 긴장이 되어 크게 쉼호흡을 하였으나 곧 내 손에 전달되는 따뜻한 손길에 더욱 더 긴장이 되었다.

 

"너...화난것 아니야?"

 

"조금...화나긴 했지만...이건 약속이니까..."

 

"흠...그래?어쨋거나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내 여자친구..."

 

"...."

 

"...역할을 맡으신 권유리양...그나저나 너 되게 긴장한다?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하면 되."

 

"아하하...이렇게 모든 사람을 속이는 연기는 해본적이 없어서..."

 

의외로 나보다 더 많은 긴장을 하는 유리를 보고 내가 아닌 유리가 더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한껏 위장 커플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성당앞으로 들어가는도중 마치 시간을 10년전으로 되돌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떼를 가장한 말도 안되는 가입 테스트라는 요구를 받아들여주신

밴드부의 베이시스트,드러머,기타리스트,보컬 형들을 차례로 만나볼수 있었다.

그중 가장 반가운건 결국 자신의 자리까지 나에게 내어주었던 사라의 가장 친한 친구 기타리스트 형이었다.

아마 상당히 애증이 섞인 사이였기 때문이였을것이다.

 

거기에다 사라의 단짝친구의 동생이자 사라를 남몰래 흠모하고...

내가 사라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자 가장 광분한 녀석까지 만나볼수있엇다.

 

물론 그놈은 사라와 내가 문신을 지울때 서로의 연락처를 몰랐던 우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되는등

완벽한 방해꾼은 커녕 휼륭한 조력자인 멋진놈이였다.

마치 총동창회에 온 느낌이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찌릿찌릿하고 묘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오셨네요."

 

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난 곧 유리와 잡았던 손을 잡시 떼고는 그의 악수에 화답했다.

 

"와~사라의 예감이 틀릴때도 있군요.정말 사이가 좋은 커플이네요."

 

이 식의 주인공중 한명...비첸조 카밀레리가 한껏 멋을 내고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죠?"

 

"사라가 그랬거든요.크리스티안?아마 여자친구는 절대 없을걸~이라고 말이에요."

 

"아하하...제가 거짓말을 할리가요..."

 

순간 움찔했다.좀 더 다정한 컨셉으로 가기위해 손을 뗀지 얼마 안되었지만 금새 유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나의 그런 행동에 유리는 흠칫 놀란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곧이어 오늘의 컨셉은 깨가 쏟아지는 커플이라며 귀띔을 해주었다.

 

"사라가 한방 먹었는걸요?사라...만나보실거죠?"

 

"네..."

 

언제나 깔끔한 매너를 선보이는 그...

마치 헐리우드의 로맨스 영화같이 기내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 이 커플은 내가 봐도 참으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밀라노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는 그와 나는 상당한 공통분모가 있어 가끔씩 만나 술을 기울이고 할정도로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지만

이탈리아에서 이런 관계는 그렇게까지 제3자의 이상한 눈초리까지 받을만한 관계는 아니다.

 

심지어 할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기위해 피렌체로 간 리카르도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는데

어머니의 애인이 집에 있어도 아버지께서 가끔씩 집에서 자고 가신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에게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세분의 사이는 무척이나 돈독하다.그와 사라 그리고 나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덧 낡아보이는 나무문 앞에 섰다.그가 잠시 문을 열어 고개를 안으로 내밀고는 내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후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사라로 추정되는 목소리의 여인과 낯선 목소리의 여인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곧이어 방안에서 사라의 아들 마티아를 안으며 섹시한 느낌이 절로 풍기는 한 여인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유리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적당히 좀 보라는 반협박성 충고를 나에게 건넸다.

 

"너는 그냥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돼.이탈리아어 못한다고 내가 말했으니까...알았지?"

 

"아...응..."

 

문이 열리고 마침내 흰색의 벽지로 치장된 방에서 유난히도 빛이 나는 순백의 신부...사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리스티안~왔구나!일어나지 못하는건 미안해.드레스가 망가질것 같아서..."

 

"아냐...괜찮아.그나저나 마티아 정말 많이 컸구나."

 

"응...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서 나도 놀랄지경이야.그나저나 옆에 있는 여자가 애인이니?"

 

"응..."

 

"흠...덤벙댈것 같아."

 

역시나...10년간 사라를 알아온 나로써는 그녀의 패턴이 눈에 훤했다.

유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사라 또한 말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그나저나...방금 나간 내 동생봤니?"

 

"응..."

 

"어때?너의 이상형 모니카 벨루치와 꽤 닮지 않았어?"

 

"뭐?"

 

내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라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사실 이번에 너한테 소개시켜줄 여자가 내 동생 일라리였거든.외모는 팜므파탈인데 성격은 얼마나 여성적인데...

이런게 모든 남성의 이상형 아니겠니?한 기업의 CEO의 와이프라면 내조는 필수라고 생각하거든."

 

"무슨말인지는 알겠는데 난 그녀가 정말 좋거든?"

 

내가 유리의 어깨를 잡고 유리가 내 여자라는것을 사라에게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사라는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타깝다는 감정을 얼굴에서 지울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야...이제 내 이상형은 모니카 벨루치가 아니야..."

 

"응?그럼 누군데?"

 

"....내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여자는 나와 함께 울어줄수 있는 여자...

나이를 한살씩 먹어갈수록 화려한 여자보다 그냥 내곁에서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그런 편안한 여자가 좋아지더라고..."

 

"흠...그래서 더 아쉽다고...일라리야말로 딱 그런 여자거든.내가 좀 더 빨리 손을 썼어야했는데..."

 

사실 이렇게 진지한 얘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역할극에 빠져들었는지 꽤나 진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꽤나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갈때쯤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려왔고 사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방을 가리켰다.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가방이였기에 사라는 나에게 가방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하였고

난 그때 또한 완벽한 역할극에 충실하며 유리의 손을 꼭 잡고는 사라의 가방을 건네주었다.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사라는 뭔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잠시후 핸드폰이 떨어지더니 사라 특유의 실수했다는 표정인 혀를 낼름 내밀며

사라의 핸드폰은 유리 앞에 떨어지고 말았다.

유리가 맞잡은 손을 떼고는 사라의 핸드폰을 주을때쯤 사라는 뭔가 긴박하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크리스티안~크리스티안~오늘 말야...부케는 누구한테 주는게 좋을까?난 일라리한테 주고 싶은데 일라리는 받길 싫어해."

 

"글쎄...나는 가장 친한친구한테 주는게 좋을것 같은데?"

 

"후후...그래?그렇구나...역시 대학생보단 나이 꽉찬 친구들한테 주는게 좋으려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라는 흐뭇한 미소만 입에 머금고 있었다.

잠시후 바깥에 나갔던 사라의 동생...

일라리라는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고 곧 식이 시작될 예정이니 손님은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있으라고 우리에게 명령조로 말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리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마지막까지 역할극에 충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나즈막히 들리는 사라의 목소리는 그동안 묻어놓았던 나의 물음을 다시 들추기 시작하였다.

 

"휼륭한 연기였어.크리스티안...아마 내가 마지막 그장면을 이것으로 만들지않았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걸?"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넌 말이야...정말 지나치게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남자거든?

예를 들어 애인이 짧은 치마를 입었을때 땅에 물건이 떨어지면 살며시 애인 뒤에 서있지.

다른 사람에게 민망한 장면이 보이지 않기위해서 말이야...근데 방금 너의 모습은 그저 자기 얘기하기에 바쁜 모양새였어.

마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처럼 말이야..."

 

"...."

 

"혹시 그거 아니?

남자는 항상 여자의 첫사랑이 되길 원하지만 여자는 좀 더 미묘한 본능이 있어 자신이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길 원한다는거...

비록 넌 여자친구가 없는것 같지만 여자는 소개시켜주지 않을게.

자신이 너의 마지막 사랑이 되길 바라는 여자가 네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것 같으니까....

사실...너의 그 행동으로 확신한건 아니야.그녀의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운 표정이 내 눈에는 그대로 보여서 확신할수 있었지.

남자는 모르는 아주 미묘한 여자의 행동이 말이야...그대들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양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올리며 사라는 그대들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사라의 결혼식이 시작되었고 2살짜리 마티아가 사라의 동생 일라리의 품에 안겨 엄마에게 부케를 전달해주는등

관객들의 이목을 끌 장면이 많았지만 난 제대로 집중할수없었다.

 

'남자는 항상 여자의 첫사랑이 되길 원한다.하지만 여자는 좀 더 미묘한 본능이 있어 자신들이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길 원한다?'

 

계속 사라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나에게 되묻고 있었다.사라의 말이 절반은 맞는것 같았다.

난 처음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여전히 사라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으니까....

물론 그 애틋한 감정이 단순한 남녀간의 애정이 아닌

뭔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나 또한 정확히 어떤거다...라고 정의하지 못하는 감정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후자는 과연...맞는말일까?

수연이와의 스캔들 기사가 난이후 사라의 등장으로 한동안 관계가 냉랭하였을때 그것을 따뜻하게 녹여준건 사라였다.

그리고 좋은 여자소개시켜줄게...라며 유리를 소개시켜준 수연이...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지만 오히려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해줄 기회를 만들어준 이들의 행동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을까?

 

 

 

 

 

 

 

 

 

"흠...오늘 저녁밥은 뭘 먹을까?"

 

그렇게 사라의 결혼식이 끝나고 성당을 나오는 길이었다.

 

"글쎄...그냥 밖에서 해결하고 갈래?"

 

"샬롯은?"

 

"아...그녀석이 있구나."

 

"지금 오빠에겐 같이 사는 유일한 가족인데...샬롯이 슬퍼하겠다."

 

"...."

 

"마트에 가서 장본다음에 들어가자~정말 맛있는거 해줄게."

 

"....아침에 해줬던 그 이상한 액체만 안 해주면..."

 

"됐네요~마는 내가 두고두고 아껴먹을거야!기껏 건강생각해서 줬더니..."

 

"그래..."

 

"아!팝콘도 사고 콜라도 사서 내가 가져온 DVD 같이 보자!"

 

사실 예전부터 전 여자친구들에게 묻고싶은것이 있었다.

 

왜 그때...냉랭했던 우리 사이를 선뜻 나서서 녹여주었니...?

왜 그때...나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니...?

 

묻고 싶었지만...결국 가슴에 묻은 말...

 

 

 

그리고 내 곁엔 방문목적 불명에 가끔씩 슬픈표정을 지으며 애써 쾌활한척하는 여자가 서 있었다.

핸드폰을 열고 답답한 마음을 메시지로 작성하였지만 곧이어 핸드폰을 닫고말았다.

전해질리가 없었다...그것이...우리둘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Episode 05-한번 더 이별

 

"정말...정말...죄송해요."

 

연신 고개를 숙이는 신비서...잠시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는 문이 열리었다.

 

"아뇨...저야 감사하죠.어차피 집에 가면 고양이와 단둘이 만찬을 즐길텐데요..."

 

"네?집에 누구 있지 않아요?분명 전화드렸을때..."

 

"아...유리 말하는거에요?"

 

"유리...?설마 소녀시대 유리 말씀하시는거에요?"

 

신비서는 비밀번호를 누르다 깜짝 놀랐는듯 번호판에서 손을 떼었다.

잠시후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신비서가 지저분하고 누추한곳에 모셔서 죄송하다면 연신 고개를 숙이었다.

 

"흠...왜요?난 이 집이 더 좋은것같은데말이죠.야!신우현!너 아파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며?

그래서 내가 피자 사왔으니까 얼른 나와~"

 

"아...저기...아까..."

 

"네?"

 

"소녀시대..."

 

"아...맞아요.소녀시대 유리...놀러왔는데 지갑을 도난당해서 제가 이탈리아에 머물동안 요리사로 고용했어요.

아마...지금은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걸요?"

 

전화를 받은 여자가 소녀시대 유리였다는것에 놀라고 그 소녀시대 유리를 요리사로 고용했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금치못하겠다는 신비서의 표정이 리얼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과연 저 얼굴이 올해 31살을 맞이한 얼굴일지 의심될정도로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에는 허술한 신비서였다.

 

"그렇군요...뭔가 이상하다 생각은 했어요.

디자이너팀은 모두 피렌체로 출장간 상태였으니 집안에 홀로 계셔야될텐데 갑자기 한국어라니...

거기에다 젊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라...아...드디어 일을 저지르시는구나..."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신비서는 슬며시 말꼬리를 내리며...

 

"아...무슨일이 있으시구나...라고 생각했거든요.서로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기로..."

 

하지만 표현을 달리했을뿐 끝까지 자신의 생각은 굽히지 않았다...

 

"난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이지 않아요.그건 내가 지키는 철칙중 하나죠.물론 손님은 예외지만요.캐묻지 않아준건 고마워요."

 

"네..."

 

"그나저나 이녀석은 왜 안 나오죠?이제 나 성인이라 이건가요?"

 

"요즘 참 걱정이에요.밥도 잘 안 먹고...주말에 감기기운이 있긴 있었는데...그것도 금방 나았거든요?

근데 이제는 실어증 환자같이 말도 없고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도통 나오질 않으니 말이죠.사장님께서 좀 도와주세요!"

 

"제가 심리학자도 아니고...그리고 저 사장딱지 뗀지 5년이 넘어가요!

대학생때도 사장님!사장님!거려서 얼마나 민망했는데...이제 이름 부를때도 되지 않았어요?"

 

"전...직함이 더 편해요.그리고 언젠가는 사장님이 되실거잖아요!그럼 전 그냥 그렇게 부를래요!

그리고 꼭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남자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잖아요.여자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듯이..."

 

사실 오늘 유난히 신비서가 시무룩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쾌활하거나 명랑한 모습은 아니였지만 가끔씩 보이는 선한 웃음과 언제나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신비서...

하지만 오늘의 신비서는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진듯 우중충한 얼굴이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점심을 먹을때쯤 오늘 어디가 불편하냐고 넌즈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뭔가 사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궁금하였지만 더이상의 추궁은 하지 않았다.

 

서로 같이 일을 할때 서로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기로 합의한 상태였고

그걸 제의한쪽은 나였기에 그 약속을 깨버리면 내가 참으로 한심한 남자가 될게 뻔하였다.

 

그렇게 평상시대로 조용히 점심식사를 끝맞치고 소화도 시킬겸

천천히 회사로 걸어오고 있을때 신비서가 내 자켓 소매부분을 잡고 내 팔을 조용히 흔들었다.

그리고는 할말이 있다며 나를 근처의 공원으로 데려가더니 한적한 벤치로 안내했다.

 

장시간의 침묵이 이어진후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신비서의 말문이 터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듣기에도 꽤 심각한 얘기였다.

 

횡설수설 떠오르는대로 즉각즉각 내뱉는듯 두서없는 신비서의 이야기에

그동안 꾹 참아놓았던 감정의 응어리가 내눈에도 보이는듯 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우현이가 이상해졌다는것이다.

어린시절부터 근무력증이라는 근육병을 앓고있던 우현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호전되어서 정상인과 똑같은 생활을 할수있었다.

 

혹시나 병이 또 다시 도진것이아닐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되물었지만 신비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신비서는 요즘 우현이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방안에만 틀어박혀있고 아무말도 하지않는다는것이었다.

그리고 신비서는 우현이가 나를 많이 따르니 요새 그렇게 울적한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알수있을것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우현이도 자신의 감정 표현에 서툰편이었고

나 또한 남자에겐 자주 통화를 하는등 살가운편이 아니었기에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물론 처음 이탈리아로 왔을때 문화권이 달랐기에 내가 이곳저곳을 끌고다니며 적응을 시켜주긴했지만 말이다.

 

"야!신우현!너 손님이 오셨으면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계속되는 묵묵부답에 신비서는 화가 잔뜩 났는지 문을 쿵쿵 내리치고 있었다.

 

"놔두세요~"

 

"그...그래도..."

 

"전 괜찮아요.저놈이 예의라는 단어의 뜻을 조금이라도 알면 알아서 나오겠죠."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인종차별이었다.

어린시절...아버지는 우리 3남매를 강하게 키우고 싶으셨는지 외국인 학교가 아닌 평범한 이탈리아 공립학교에 보내셨다.

뭐가 옳은건지 뭐가 옳지 않은건지 제대로 구분할줄도 모르는 초등학생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자신들과 피부색이 다르기에 선을 긋고 자신들의 영역에 진입하는 문을 닫아버렸다.

 

동양인 특유의 작은 눈을 비하하기위해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찢는다거나 원숭이 흉내를 내는등

수많은 인종차별을 겪고 자랐기에 그것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일인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았다.

잠시후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는 무표정의 우현이가 나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야!신우현!너 정말...."

 

얼굴만 빼꼼 내밀고는 다시금 방으로 들어가려하는 우현이였기에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신비서도 우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우현이는 신비서의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쳐버렸다.그리고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문이 닫히었다.

 

"하...요새 계속 이런 패턴이에요."

 

신비서는 익숙하다는듯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혹시...제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그래주시면 감사하죠!저한텐 도통 아무말도 안 하고 신경질적인 반응만 보이니깐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우현이의 방문앞에 섰다.우현이의 현재감정때문인지 노크조차도 겁이 났다.

마음을 추스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저기...난데...잠깐 들어가도 될까?"

 

그러자 뭔가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허락한거라 알고 들어간다!"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자 우현이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듯 허겁지겁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의구심이 생긴 나는 얼른 문을 닫고는 잽싸게 TV를 키었다.

 

"어?"

 

화면을 봄과 동시에 우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자 우현이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타닉...?"

 

"왜...왜요?전 멜로 영화보면 안 되요?"

 

"아니...뭐 그런건 아닌데...이건 누가봐도 이상야릇한 화면이 나와야되는 상황인데 로맨틱한 상황이 나와서..."

 

"뭐...아예 안 나오는건 아니죠."

 

"어?아!후후...그렇지."

 

"그나저나 갑자기 왜 오신거에요?"

 

"왜 왔냐니...이제 다 컸다는거야?내가 이곳저곳 끌고다닌게 엊그제같은데..."

 

"....그것때문에 이탈리아에 적응하는건 많은 도움이 됐어요.

형은 밀라노 토박이답게 숨겨진 좋은 장소도 많이 가르쳐줬으니깐요.그것땜에 애들한테 점수 좀 땃죠."

 

그 말에서 인종차별로 인한 교우문제는 아닐것이라고 확신할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없이 타이타닉을 응시하고 있었다.

절대로 이뤄질수없는 두남녀가 배안에서 만나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지만

결국엔 빙하로 인해 배가 침몰해버리고 그들의 사랑도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영화 타이타닉...

 

"만약에...네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면 어떻게 했을거야?"

 

"네?그건 갑자기 왜?"

 

"나도 이 영화 굉장히 많이 봤거든.가장 최근에 본게 아마 너 나이때였을거야.

5년이 넘어가네...그때 든 생각은 내가 디카프리오였어도 똑같이 했을거라는거였어.

확신이 있었지.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확신이 잘 서질않네."

 

"아마...제가 디카프리오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거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거니?상대는 감히 바라볼수없을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이고..."

 

평온하게 오고갔던 대화에 내 의미심장한 말이 덧붙여지자 우현이는 당황한 기색을 금치 못했다.

 

"역시...맞구나?"

 

"어...어떻게 아셨어요?"

 

"평소에 액션영화만 보는놈이 멜로영화라니...뭔가 이상하지 않아?거기에다 지금은 여름이니 가을을 탈시기도 아니고...

그리고 똑같은 경험이 나에게도 있거든.나도 한때 너처럼 타이타닉을 보면서 가슴앓이를 한적이 있었으니까...

아!이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거다!비밀 지켜줘야 해!"

 

"...."

 

"그리고 이 장면 어디서 본것같지 않아?"

 

"네?"

 

"러브 액츄얼리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아...설마 지금까지 절 속이신거에요?"

 

"아니...실제로 가슴앓이 했어.물론 너처럼 방안에만 틀어박히진 않았지."

 

"그래서...결말은요?"

 

"해피...완벽한 해피엔딩이었지."

 

나는 확신을 가지며 말했지만 우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우현이가 덧붙인말은 나를 완벽히 당황시키면서 역공으로 충분한 효과를 보였다.

 

"형에겐 제시카 누나뿐이잖아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케이트 윈슬렛뿐이듯이..."

 

"...거기서 그녀석 얘기가 왜 나와!"

 

하지만 우현이는 나의 말을 무시하는듯 자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였다.

그리고 평소의 우현이라고는 생각될수없을정도로 낯간지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형도 그렇듯이 저에겐 그녀뿐이에요.물론 그녀는 절 봐주지도 않겠지만요."

 

"...."

 

"그나저나 해피엔딩이였다니...끝까지 함께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수있죠?결국...헤어졌잖아요."

 

"한남자가 한여자를 만나 인연이 되고 사랑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해피엔딩이야.끝이 어떻게 되었든지 말이야."

 

"동의할수 없어요.최종목적지까지 함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피엔딩이죠?"

 

"내가 백날 설명해봐야 알수없지.그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그땐 참 행복했구나...라고 회상하며 정의하는 행복감이니까...

어쩌면 영원히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지.사람마다 생각하고 느끼는건 모두 다른거니까...그나저나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데?

누나에겐 말하지 않을테니 나한테만 좀 알려줘봐."


나의 계속된 추궁속에 처음엔 밍기적밍기적거렸던 우현이였지만 결국엔 쭈뼛쭈뼛 자신의 지갑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수십명이 모인 단체사진속 인물중 한명을 콕 집었고 내눈은 금세 휘둥그레질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설마...일라리 베르니?'

 

우현이는 사진속 인물을 지목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빨개지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마치 사춘기 소년같이 말이다.

어째서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는지...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쿡쿡 웃음을 터뜨리자 우현이는 마치 일라리를 비웃는줄 아는지 표정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너 말이야...정말 힘든길을 걷는구나."

 

그도 그렇듯이 학교의 아이돌격 존재인 사라와 진짜 아이돌인 제시카를 사귄 경험이 있었던

나로서는 아이돌로 찬양받는 여자를 사귀는데에 대한 고충은 너무나도 잘알고 있었다.

일라리 베르니에 대한 사라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일라리 베르니 역시 적어도 학과에서의 아이돌격인 존재는 맡고있는듯 보였다.

거기에다 섹시함을 으뜸으로 치는 이탈리아 남자들이기에 청순과 타입인 사라와는 상반되는 일라리 베르니는

사라보다 더욱 큰 경쟁을 뚫어야 차지할수있을듯이 보였다.

 

"뭔가...조언을 해주실수 있으세요?"

 

이 녀석이 나에 대한 가장 큰 착각...내가 연애의 고수라고 또 다시 되레 짐작하고 있었다.

 

"한가지밖에 없어.최선을 다하고 힘껏 부딪쳐라...

러브 액츄얼리의 그 꼬마 아이같이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면 콧대 높은 미녀라도 끌릴지도 모르지."

 

"정말...그러면 될까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하지만 도전하지 않는것보다는 낫지.

이렇게 바보같이 있는것보다는 적어도 그나이대에는 힘껏 부딪쳐봐야 되지 않겠어?난 그렇게 생각해.그럼 지금 중요한건..."

 

서로의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일단 식사를 해결하는거 아니겠어?빨리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도전같은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우현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조언할 말은 많았다.

이탈리아 여자가 어떤 남자의 스타일을 좋아하는지...그리고 일라리 베르니에 대한 정보도 사라를 통해 훤히 알수있었으니까...

하지만 기본 자세부터 패배자인 그녀석에게 그런말은 통하지 않을듯 보였다.그래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사랑에 서툴었지만 그 녀석은 거의 초보에 가깝기에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대 남자는 다 그렇게 커나간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20대를 시작하며 맞이했던 이별과 20대의 중반을 시작하며 맞았던 이별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다는것을 나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아하하...이야기는...뭐 어떻게...잘 됐나요?"

 

"네.잘 됐어요."

 

"뭐래요?우현이가?"

 

아무래도 신비서는 단지 내가 우현이와 오래 있자 뒤늦게 엿듣기를 시도했는지 정확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듯 보였다.

 

"아무 이상도 없어요.그저 일생에 한번씩 찾아오는 애절한 가슴앓이를 하고있을뿐이죠.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는 않아도 되요."

 

"가슴앓이요...?설마 사랑을 하고 있다는건가요?"

 

"네.그것도 아주 지독한 짝사랑이죠."

 

"세상에나..."

 

"세상에나라니...우현이 나이도 이제 21살인데..."

 

"그랬었군요.그런거일줄은 정말 몰랐어요.전 무슨 따돌림이라도 당하는줄 알았거든요."

 

"그냥 덮어주자구요...괜히 관심 가지면 오히려 더 삐뚤어질지도 몰라요.

그나저나 이탈리아 사람이 다 된건지...사랑의 힘인지 닭살돋는멘트도 잘하더군요."

 

"누가요?"

 

내가 우현이의 말을 녹음기처럼 그대로 답습하자 신비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베베 꼬았다.

그런 신비서의 모습을 보고 호탕하게 웃고는 나는 다시금 의자에 자리를 잡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TV에선 남녀의 미묘한 심리차이를 여과없이 드러내주어 최근에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한 쇼프로가 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첫사랑에 대한거였는데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일반인 남녀가 성별로 무리를 지어 첫사랑이라는 주제를 두고 열렬히 토론하고 있었다.

곧이어 쇼의 진행자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가 스튜디오로 화면을 바통터치 받고는

게스트들과 오늘의 주제 첫사랑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남녀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이랬다.남자는 대부분 첫사랑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며 자신의 상상력까지 더해가며

영화같은 스토리를 만드는듯 대부분이 너무나도 로맨틱한 이야기였고

여자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처음이란 단어에 덜 집착하는듯 그저 추억...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라며 현실에 더 충실하는듯 보였다.

 

잠시후 시각이 정각으로 향해가고 쇼가 마무리될때쯤 사회자의 클로징멘트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그 클로징멘트는 또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던져주었다.

 

"영화 트루로맨스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남자는 항상 여자의 첫사랑이 되기를 원한다.

반면 여자는 좀 더 미묘한 본능이 있어 그들이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길 원한다...

오늘 과연 이 대사가 자신에게는 얼마나 적용되는지 침대에 누워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모두들 첫사랑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행복하게 잠이 듭시다.이상이었습니다.그럼 전 다음주에 뵙죠~"

 

그리고 쇼는 여배우 소피 마르소를 일약 청춘스타로 만들어준 10대들의 청춘영화...라붐의 삽입곡 Reality가 흘러나오며 끝을 맞이했다.

 

"와~저 노래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피자와 함께 겻들일 샐러드를 만들고있던 신비서는 TV쪽을 힐끔 보고는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저기요...신비서..."

 

"네?"

 

"궁금한게 있는데요..."

 

"네..."

 

"방금...클로징 멘트 들었어요?"

 

딱딱거리는 칼소리가 잠잠해진걸보니 신비서가 샐러드 만드는것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듯 보였다.

잠시후 신비서는 다시금 그 클로징멘트를 말하고는 나에게 재차 확인했다.

 

"절반은 맞는것 같은데요?남자의 심리는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남자보단 여자가 처음에 덜 집착하긴하는것 같아요.

제 친구들중에서도 첫사랑이 그리워...라고 말하는 친구는 거의 없으니깐요."

 

"그래요?"

 

"네...아!그러고보니 정말 그 말이 맞는것 같네요!첫사랑을 중요시하는 남자들이 이곳에 둘이나 있으니 말이죠.

이번에 결혼하신 친구분요...첫사랑이시죠?"


마치 독심술이라도 있는듯 모든것을 꿰뚫고있는 신비서였다.

특유의 선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 대한 모든것을 꿰뚫고있다는 표정이 처음으로 신비서를 섬뜩한 여인으로 느끼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비서는 내가 술자리에서 자신에게 순순히 털어놓았다고 곧장 말하며 신비서에 대한 섬뜩한 느낌은 조금씩 지울수 있었다.

 

"전 사장님에 대한 모든걸 알고있어요.그도 그렇듯이 술이 과도하게 들어갔다싶으시면 그냥 다 내뱉으시거든요."

 

"아하하..."

 

"그나저나...그 얘기를 갑자기 왜 하시는거에요?"

 

"아니에요...그냥 정말 그런가 싶어서요..."

 

"흠...그래요?"

 

"...."

 

 

 

 

 

 

"3년전이었나요?전 아직도 사장님의 그 표정과 그 말을 기억해요.

나 자신을 책임질수 있을때까지 여자를 사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셨죠.

그 선언이 있은후 수많은 여성들이 사장님곁을 스쳐지나갔고 심지어 한국재벌가와의 혼담도 오고간걸로 알고있는데 모두 거절하셨죠.

그런데 몇주전에 마치 선언을 철회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그게 바로 결혼식때의 일이었고 오늘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아마 결심이 확고하셨다면 창피함을 무릎쓰고도 혼자가셨겠죠."

 

"...."

 

"주제넘는 말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다시 시작하신다면 다른 여성을 추천해요.

그녀에게 있어 사장님의 존재는 소중한 마지막 사랑보다 흘러간 소중한 추억의 한페이지가 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깐요."

 

소울 메이트...자신의 감정을 교감할수있는 남녀를 가르키는 말이다.

내 핸드폰엔 두명의 소울메이트가 'Soul Mate I' 'Soul Mate II'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있다.전자는 사라였고 후자는 신비서였다.

 

어쩌면 나에겐 따금한 충고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길 바란다는 말...

그 말에 기대 혹시나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지만,사실 그에 대한 답은 1년전 수연이의 행동에서 벌써 나왔는지도 모른다.

유리의 소개팅을 주선해준 수연이...이미 답은 명백했건만 그저 한줄기 말에 기대어 혹시나하는 희망을 품은것이다.

 

결국 사라도 나와 수연이 사이를 녹여주며 나를 떠나지 않았는가?마치 똑같은 유형의 수학문제를 틀려놓고 고민하는 초등학생 같았다.

그녀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치않았다.이미 그녀들의 행동이 그에 대한 답을 내려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걸 알수있었다.한번 사귄여자와는 다시는 사귀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

그 굳은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는것은 여전히 수연이를 생각하는 나 자신의 마음으로 느낄수있었다.

 

3년전 이별을 좋은 이별이라고 표현하던 유리...서로의 성공을 빌어주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따뜻한 포옹으로 끝을 맺었던 이별...

하지만 완벽한 결말을 매듭짓는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말이야말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듯 가슴아픈말이였으니까...

 

'안녕...그대...'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전하는말 안녕...침착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비록 그대의 마음에 전해지지않는 한줄기 메아리겠지만...그렇게 한번 더 이별을 맞이했다.

 

 


Episode 06-그곳에서

 

고요한 적막속에 가끔씩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리었다.유리가 내 앞 좌석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렸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어제 나와 보았던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따스한 햇볕때문인지 아니면 방금전에 먹은 점심식사때문인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수가 없는듯보였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어제 내가 유리와 같이본 영화의 제목이었다.영화 자체는 흥미로웠다.

그도 그렇듯이 DVD의 커버에는 선댄스 영화제 작품상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굉장히 낭만적인 포스터가 유혹을 하였고

주연 배우 다니엘 헤니,은유하라는 타이틀은 그 유혹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선댄스 영화제:세계최고의 독립영화제이다.매년 1월 20일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Park City)에서 열린다.

 

영화는 세기말...1999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한쌍의 남녀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새천년을 함께 맞이한다.

남자의 닉네임은 Faith였고 여자의 닉네임은 Hope였다.

시간이 흘러 2010년이 되었고 남자는 31살 잘나가는 건축가가 되었고 여자는 27살 잘나가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10년간 서로에게 메일을 주고받은 남녀는 서로의 인생관,연애관을 훤히 알게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닉네임 Hope...서희망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여주인공이 닉네임 Faith...크리스 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주인공이 사는

런던에 가게되고 두 사람은 메일을 주고 받은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게 된다.

 

영화는 주제는 어렵지 않았다.독립영화 영화제중 가장 권위있는 선댄스 영화제의 작품상을 받았다길래

굉장히 심오한 주제를 다룰줄 알았으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누구나 한번씩은 공감할수있는 자신의 신념에 관한 문제였다.

크리스는 희망에게 자신은 언제나 자유롭고 결혼따위는 하고싶지않다고 말하는 자유연애주의자이다.

희망은 한술더떠 자신을 보헤미안이라 지칭하며 소설을 쓰거나 칼럼을 쓸때도 뭔가 풀리지 않는다면

쪽지 한장만 달랑 남겨두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일을 밥먹듯이 하는 여자다.

 

메일을 주고 받은지 10년만에 만난 그들...

크리스는 한국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고

은퇴를 한 이들 부부는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박을 소일거리로 하며 노후를 즐기고 있었다.

희망이 작품이 안 풀려 런던으로 여행을 가장한 잠수를 시도한다는 메일을 받은 크리스는

자신의 부모님이 하시는 민박을 소개시켜주며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런던에서 그렇게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31살이 된 크리스...10년전부터 희망과 함께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공유했던 그지만 사실 최근엔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쑬불쑥 들게된다.

희망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싶어 희망에게 가이드를 가장해 접근하지만

희망은 자신을 여전히 보헤미안이라 지칭하며 가이드를 자청해주는 크리스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다.

 

크리스는 말하고 싶어한다.하지만 결국 망설이는 자신을 보게된다.

왜냐하면 희망이 보헤미안이라 지칭하던 친구가 결혼을 하자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친구를

배신자라고 말하며 한창 열을 냈던 메일을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Faith라는 닉네임으로 Hope와 대화할수없다는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굳게 먹은 신념과는 다르게 연애만을 추구하던 크리스의 마음은 희망을 바라보며 더욱 더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는 영화 중반에서 결국 자신이 희망을 좋아한다는것을 깨닫게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보헤미안이라고 지칭하던 희망...언젠가는 희망이 떠날것을 알고 있기에 크리스는 더욱 더 괴로워한다.

 

영화는 많은 물음을 던져준다.과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희망과 계속 맞장구 쳐주며 그녀와 계속 친구관계를 지속할것인가?

아니면 그녀와 관련된 모든걸 잃을걸 각오하더라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하는것이 옳은것일까?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자의 신념도 깨뜨리게 되는것이 된다.

크리스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어하고 희망은 결혼이라는 제도는 자신을 속박하는 제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Hope!I don't have any hope without you"

 

어찌보면 유치하게 들릴수도 있는 말장난같은 고백...

하지만 그 상황에 너무나도 딱 떨어지는 명대사를 말하며 크리스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희망의 출국을 하루 앞두고 말이다.

 

"네가 배신감을 느끼는건 알아.하지만 한번만 생각해줄래?답은 1년뒤에 이곳에서 알려줘.

그때까는 메일...하지않을게.이미 Faith란 닉네임을 쓰는 자유연애주의자 크리스 던은 사라졌으니까..."

 

당황한 희망과 붉게 상기된 크리스...

결국 두 사람의 결말은 1년후로 미뤄지게되고 영화는 붉게 타는 노을과 런던의 명물인 런던 아이와 함께 잠시간의 휴식을 맞이한다.

 

1 Year Later...라는 자막이 뜨고 또 다시 붉게 타는 노을과 함께

런던아이의 모습이 풀샷으로 잡히고 다시금 크리스가 클로즈업되었다.

잠시후 구두소리가 들리고는 정갈한 정장차림의 희망이 등장한다.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주인공들간에 어떠한 대사도 오고가지않았지만 그것이 희망이 크리스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는것을 알수있었다.

희망은 영화내내 자신을 보헤미안이라 주장하며 보헤미안은 한번 거쳐간곳은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보헤미안하면 연상되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치마를 영화 내내 입으며 자신을 보헤미안이라 지칭하던 희망이였다.

하지만 1년후의 희망은 다시금 런던에 돌아왔고 자유로운 보헤미안룩을 버리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있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큰 신념을 거두었으니 나 또한 내 신념을 양보해 주겠다라는 뜻이였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

 

희망의 나레이션이 울려퍼지며 영화는 석양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두사람을 풀샷으로 잡아주며 끝이 난다.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질문을 던져준 영화였다.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나도 조금씩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가 되었고 그것에 큰 공감을 하였지만

가장 큰 질문은 역시나 신념에 관한것이었다.

불과 며칠전만 해도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헤어진 연인과는 다시는 사귀지 않겠다는 신념을 다시금 붙잡았기에 말이다.

 

영화는 말한다.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선 고집같은 신념은 잠시 누그러뜨려도 된다고...그로인해 다시금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그렇기에 어제 영화를 함께 본 유리와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으나 현재의 유리는 묵묵부답 상태였다.

 

열차의 목적지까지 남은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목적지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열차가 정차하고 그것을 몸으로 감지한 유리가 그제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있었다.

 

"흠냐~다 온거야?"

 

"응.얼른 내릴 준비해."

 

유리는 몸을 푸는듯 이리저리 움직여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는 나보다 먼저 열차에서 내리고는 역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듯 했다.

 

"선글라스는 쓰는게 좋을걸?"

 

사실 떠나기전 유리에게 선글라스를 쓰는게 좋을것같다는 충고를 하였지만

잊어먹은건지 아니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지 맨 얼굴을 고집하고 있었다.

 

"왜?볼로냐에도 한국사람 많아?"

 

"뭐 없다고 볼수는 없지.학기중과 방학시즌의 인구가 수만명이 차이날정도로 학생이 많은 도시니까...

수연이는 동양인 금발이었기에 조금 더 튀어서 그런지 몇몇 사람들은 눈초리를 주더라.쓰는게 좋을거야.

난 아이돌의 비밀여행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싶지는 않으니까..."

 

잠시후 곰곰이 생각하던 유리는 케이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더니 결국 선글라스를 쓰고 말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요즘엔 워낙 한국인들이 유럽에 베낭여행을 비롯한 여행을 많이 오기에

볼로냐라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도시도 이제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역주변에서 택시를 잡고 목적지인 볼로냐 대학교로 향했다.

택시가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주변의 환경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듯했다.

 

"아까...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내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있자 유리가 심심한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마...그 장면이었지?자신의 마음을 알았지만 희망에게 전할수없는 현실에 크리스가 괴로워하는 장면..."

 

"아...맞다."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그 장면이었지?내가 잠에 빠진 장면이..."

 

내 말투를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었다.

 

"오빠는 마치 영화의 크리스처럼 심각한 표정이었어.10분 넘게 아무말도 하지않고 창밖만 응시했지."

 

"내가 그랬나?"

 

"응.그랬어."

 

"그랬구나..."

 

"재밌는 영화였지?"

 

"글쎄....내가 표현하자면 재밌는 영화라기보다는 좋은 영화였어.지금 내 나이 또래의 남성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져줄테니까..."

 

"설마...자유연애주의자야?"

 

내가 자유연애주의자일리가 없었다.

수연이와의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지금 내 왼쪽 네번째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내 옆엔 수연이가 있었어야하니깐...

양가는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기에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당사자들에게 있었을뿐...

 

"아니..."

 

"흠...그래?"

 

그리고 유리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다시금 택시는 고요해졌다.택시가 시내 한복판에 도착하자 차가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유리는 당황한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분명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있긴했지만 아직 캠퍼스로는 진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 내려?"

 

"여기가...대학이야?"

 

"응.그런데..."

 

"여기는 그냥...시내 아니야?캠퍼스가 아닌데?"

 

빼빼 마르고 짙은 쌍커풀의 택시 기사가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자 유리는 그제서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리가 내림에 따라 택시기사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우리들의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내가 약간의 팁과 함께 택시비를 건네주었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택시는 우리 곁을 떠났다.

 

유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듯 했다.

피어싱을 하거나 콘로우를 하거나 문신을 하는등 개성 만점의 대학생들의 자신옆을 지나가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 안 했나?볼로냐 대학이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했어.그리고 고는 오래될 고라고..."

 

"그래.그래서 그런거야.너무 오래되서 캠퍼스를 만들수가 없었거든.그래서 도시곳곳에 대학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지."

 

"몇년인데?"

 

"아마...900년이 조금 넘었을걸?"

 

내 대답을 듣고 유리는 이해가 가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여긴 왜 온거야?"

 

"만날 사람이 있어서...볼로냐에 머물동안에는 그사람 집에서 잘거야.우리집보다 더 포근하고 좋을걸?밥도 훨씬 맛있을테고..."

 

하지만 유리는 영 내키지않은듯보였다.

 

"숙소는 그냥 호텔로 잡으면 안 될까?"

 

내가 캐리어 가방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가 나의 뒤를 헐레벌떡 따라오며 말했다.

 

"낯선 사람이라 그래?"

 

"응."

 

"그럼 만나보고 그래도 네가 싫다면 그렇게 하자.그런데 호텔방이 있는지 모르겠네.지금이 성수기라..."

 

학교는 마지막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도서관은 만원이었고 열정적인 교수들의 수업과 하나라도 더 알려하는 학생들의 학구열이 내 눈에 띄었다.

나는 안경을 콧잔등에 걸치고있는 백발의 교수가 강의를 하는 강의실 앞에 섰다.

유리 또한 낯선 장소가 두려워서인지 내 옆에 바싹 달라붙고는 주위의 경계를 늦추지않았다.

 

"너무 신경쓰는것 아니야?알아볼수도 있다고 했지 알아본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니 그게...소매치기를 한번 당하니까...아하하..."

 

"볼로냐 대학엔 그런놈 전혀 없으니까 긴장 풀어.

아까 들어왔을때 자유분방한 학생들때문에 더 그런것같은데 그놈들 대부분이 착한놈들이니까...

볼로냐 대학 천년의 역사를 걸고 장담할수있으니까 긴장 좀 풀어."

 

그제서야 단단히 힘이 들어간 어깨에 스르르 힘이 풀리는 유리였다.

노교수가 힐끔힐끔 옆을 훑어보며 내가 왔다는것을 알아차리자 눈빛을 보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보내는 눈빛이었기에 초창기엔 잔뜩 겁을 먹었던 눈빛...하지만 지금은 태연하게 대응할수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가벼운 목례를 하자 기가 차는듯 노교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미켈란젤로 알베르타찌...TV에도 가끔씩 나오시는 이탈리아에서는 나름 유명한 교수님이야.

아마도 움베르토 에코랑 더불어 볼로냐 대학 교수중엔 가장 유명한 교수님일거야."

 

"이름부터 뭔가 있어보이긴 한다."

 

"아...그런가?아!그런데 혹시 움베르토 에코 알아?"

 

"아니..."

 

"내가 이 대학에 온 이유지.그의 소설을 좋아하기에 그의 강의를 듣고싶어서 이곳을 목표로 삼은거거든.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소설가야."

 

"비틀즈...리버풀...움베르토 에코...볼로냐..."

 

"어?"

 

"아니...생각해보니 오빠는 은근히 단순하게 사는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생각해봐.

고등학교 졸업이후 아무런 보장없이 단순히 비틀즈가 좋아서 리버풀로 갔고

단지 좋아하는 소설가가 교수로 있다고 그 대학을 목표로 하니..."

 

"그건 가수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습생들 대부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있는 기획사로 가고 싶어하니까...너도 그런 케이스 아니야?"

 

"글쎄...난 단지 SM이 제일 유명해서 간거인데..."

 

"그래?난 원래 한가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편이라서...그나저나 너 꽤 잘 안다?

내가 비틀즈때문에 리버풀로 갔다는 얘기는 한 기억이 없는데..."

 

"아하하...시카가 오빠얘기를 자주했거든."

 

"그래?그녀석 입단속 좀 시켜야겠네."

 

"은근히 뒷담화도 잘해~오빠를 비틀즈 덕후라고 부르던데?"

 

유리는 비틀즈 덕후라는 표현이 우스운듯 자신이 꺼내놓은 말이면서도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나 또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수연이가 날 그렇게 표현하는건 나도 알고있었다.

그 녀석은 삐졌을때 종종 '죽어라~이 비틀즈 덕후야!' '그렇게 비틀즈가 좋으면 그냥 비틀즈랑 사귀시지 그래!'라고 말하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지금 떠올려도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스르륵 넘어가는 종이소리가 함께 들리고는 곧이어 강의실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곧이어 학생들이 썰물같이 빠져나오고 강의를 맞친 노교수가 교재를 정리하며 강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난 또 누군가 했네.네 녀석 갑자기 왜 온거냐?아...반가워요."

 

강의실을 나오며 그렇게 시니컬하게 말하던 그가 유리는 따뜻하게 맞이해준다.

갑작스런 인사에 유리는 당황한듯 고개를 꾸벅 숙이었고 교수님도 가벼운 목례로 화답해주셨다.

 

"미리 전화드렸을텐데요.그리고 전 교수님 뵈러 온거 아닌데요?사모님에게 안부 전해드리러 온거에요."

 

"옆에 있는 여자를 바꿔서 결혼한 날 약올리러온건 아니고?

어쨋든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와이프는 오랜만에 온 한국손님이라 또 좋아하겠군."

 

교수님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온 한국인 성악가와 결혼을 하셨다.

그렇기에 유난히도 동양인...특히 한국인에게는 더욱 더 관심을 많이 가져주신다.

동양인 와이프가 겪은 지독한 외로움이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니까...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주시는등 학생들과의 시간도 즐기시는 교수님이시지만 유난히도 나에게는 까칠하시다.

 

언젠가 한번 이유를 물어봤건만 돌아온 대답은 내가 이상한 질문을 많이해서 그런다나 뭐래나...

그렇게 날 차갑게 대하셔도 난 일년에 한번씩은 꼭 직접 교수님 부부를 찾아뵌다.

 

그것은 단순한 차가움이 아닌 차가움 속의 따뜻함이라는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교수님 부인은 말할필요도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나를 자식같이 따뜻하게 대해주신다.

무거워보이는 교수님의 경제학 전공서적이 버거워보여 대신 들어드리려했건만

자신은 아직도 팔팔하다며 교수님은 내 도움을 거절하시며 교수실로 향하고계셨다.

 

"그 여자랑은 헤어진거냐?"

 

복도를 지나가던 도중 무심하게 툭 던지듯 나에게 넌즈시 물어보셨다.

 

"네..."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냐?"

 

교수님의 발걸음 소리가 어느순간 자취를 감추었다.그리고는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는 고개를 위로 치켜드셨다.

도서관에서 커플 한쌍이 소근소근 귓속말을 하더니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걸 의식하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왠지...낯선 장면이 아니야...가자!와이프가 너 온다길래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하던데...꽤 괜찮은 저녁식사가 될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님...교수님의 머리속에 어떤 모습이 떠올랐는지...

그리고 그 표정이 어떤걸 뜻하는지는 내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4년전 여름...볼로냐에서 수연이와 함께한 1달은 내 생애 가장 눈부셨던 여름날이었으니까...

 


Episode 07-Flashback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게 하실거죠?나으리~"

 

영문책을 보고있던 수연이가 책을 내려놓고는 얼굴을 그대로 책에 파묻어버렸다.

그리고는 알수없는 문자로 적힌 내 책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숙녀를 3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다니..."

 

"분명 보름후에 온다고 한다고 해놓고 지금 온건 너야.내 직업은 학생이라는걸 잊지않았으면 좋겠어."

 

수연이는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더니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보통의 남자같다면 오랜만에 본 여자친구가 반가워서라도 기존의 일을 미루고 데이트를 할거라면서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내 시나리오는 이랬어.1번 약속한 날 보름전에 오빠를 깜짝 방문한다.2번 오빠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반겨준다.

3번 신나게 데이트를 한다.4번 그렇게 하루하루 재밌게 한달간의 휴가를 보내며 추억을 만든다.

이렇게 완벽한 4단계로 짜인 멋진 계획이었는데 처음부터 초를 치니..."

 

"보름후에 왔으면 그 계획대로 실현될수있었지만,지금 난 그럴 시간이 없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수연이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어떻게하면 내 공부를 중지시킬지 고민하는 시늉을 보이더니

창밖을 가르키고는 웃어보았고,책을 가르키고는 눈물짓는 시늉을 하였다.

하지만 내가 피식 웃는 반응을 제외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니...평소에 하지도 않는 애교도 부렸는데 그러기야?"

 

목소리의 톤이 올라간것으로 보아 화가 조금씩 치밀어오르는듯 보였다.

내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짓자 더욱 더 인상을 쓰며 자신이 화가 났다는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아...알았어.한시간뒤에 나가자.거의 다 끝났어."

 

"정말?정말 그럴거지?"

 

표정이 급변하더니 얼굴에 급격히 화색이 돌고있었다.

 

"약속하기다~안 그러면 나도 내가 무슨짓을 할지 몰라~"

 

"알았어."

 

"휴~그래도 뮤지컬한 보람이 있네!이런곳에서도 써먹을수있고..."

 

"뭐?방금 그거 연기였어?"

 

"응.이제 나 연기 잘하지?이제 내 연기보고 뭐라 못할걸?"

 

몇달전 크리스마스로 인한 짧은 방학을 통해 한국에 들어갔던 나는 우연찮게 수연이가 뮤지컬 오디션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디션 준비과정을 틈틈이 주변에서 지켜보았는데 전문적으로 뮤지컬을 배워본적이없는 수연이였기에 어색함 그자체였다.

많은 싫은소리는 스트레스가 될것같아 고치면 좋겠는점 조금을 꼬집었는데 그것 또한 신경이 쓰였나보다.

 

"그래서 오디션은 합격했어?"

 

"참...빨리도 물어보네."

 

"아...미안...어쨋든 오디션은?"

 

"합격!연말부터 들어갈것 같은데?"

 

"정말?그 연기로?"

 

"이제 잘하거든!그리고 내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사람이 누구였을까?"

 

나에게 한방을 먹이는 수연이였다.

 

"그런데 말이야..."

 

"응?"

 

"그게...뮤지컬에...그러니까..."

 

아까만해도 당당하던 수연이가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키스..."

 

"뭐?키스?뭔 키스?"

 

"키스신이 있어.뮤지컬에..."

 

"근데?"

 

예상치 못한 내 반응이었는지 당황하는 수연이였다.

 

"질투심 안 들어?"

 

"응."

 

"방해하고 싶은 마음도?전혀?"

 

"너...내가 신비서랑 같이 있으면 질투심 들고 방해하고 싶어져?"

 

"아니..."

 

"키스신은 그저 네 일중에 하나일뿐이잖아.근데 그게 뭐 어때서?별 상관없는데...물론 베드신이라면 결사반대이지만..."

 

"그래도 키스신은...직접적인 접촉인데?"

 

"그렇게 따지면 난 매일 신비서랑 붙어있는걸?오늘은 너가 왔기에 휴식을 줬지만 본래 신비서가 내 옆에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있거든.

아무리 못해도 최소 4시간은 될걸?오히려 이게 더 심한편 아닐까?그리고 뭐야...내가 결사반대하면 안 할거야?아니잖아?안 그래?"

 

"오빠 날 사랑하긴 하는거야?"

 

뜬금없는 수연이의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연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 조목조목 옛일까지 들춰가며 따지고있었다.

 

"여자는 말이야.일부러 질투심을 유발시켜서 사랑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단말이야.저번에도 그래.

내가 친구들을 만났다고 했을때 거기에 나를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다고 하면서

걔를 멋진남자로 부각시키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냥 그렇구나...하고 말았지?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고...그리고 이번에도 그래.내가 키스신을 하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이야기였다.

한때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그것만으로 질투의 대상이 되어야한다니...후자는 말할필요도 없었다.

 

"그래서...질투심을 유발해서 사랑을 확인해보겠다?"

 

"오빠를....직접 만날일이 거의 없으니까..."

 

부끄러운듯 입술을 쭉 내밀며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는듯한 수연이였다.마치 소녀같은 수연이의 행동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랑을 확인시켜줄수 있는데?여기서 키스신 연습이라도 해줄까?"

 

장난으로 던진 말이였건만 주변을 관찰해보고 각도를 재보며 사각지대를 확보하는등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수연이...

그리고는 자신이 보고있던 영문책을 비장한 표정으로 집어들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기서?'라는 말을 입모양으로 뻐끔대자 수연이는 '그럼 어디서?'라고 뻐끔댔다.

'몰라 몰라'라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책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수연이였다.

 

 

 

 

 

 

 

 

 

 

 

 

 

"안본사이에 왜 이렇게 변했어?"

 

가벼운 입맞춤을 마치고 쥐죽은듯 엎드려있는 수연이를 놀리자 수연이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보았다.

 

"주변에서 맨날 남자는 똑같다...내놓으면 큰일이다...주변에 깔린게 모델일텐데 흔들리지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맨날 이런말만 하는데 안 그렇고 싶겠어?누군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나?몰라~다신 키스따위 기대도 하지마~"

 

수연이는 민망한지 자신의 얼굴을 가려주었던 책을 들더니 책꽂이로 향했다.

물론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이건 왜 이렇게 높은곳에 있는거야~'같은 애꿏은 화풀이를 책에게 하면서 말이다.

 

 

 

 

 

 

 

 

 

 

 

 

 

 

 

 

"어이~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만약 날 이길 상상이었다면 일찌감치 그만두는게 좋을거야!그런일은 없을테니까 말이야..."

 

"하하...9연패중인데 그럴리가요..."

 

"이번에도 지면 맥주는 자네돈으로 사오는거야."

 

"네...네...여부가 있겠습니까?그나저나 교수직 그만두시고 프로겜블러를 하시는게 어때요?

이렇게 학생들 상대로 포커치시면서 돈 따먹는것보다 큰물로 나가시는게...."

 

"도박은 취미수준일때가 제일 좋은거다.모든게 적당한게 제일 좋은거거든.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하고싶지는 않거든.

끝이다~어서가서 맥주랑 안주거리를 사갖고 오너라.다행히도 시간이 조금 남았군."

 

결국 포커 맥주 내기는 내 10연패를 끝으로 끝이 났다.

교수님의 서재에서 나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하는데

거실에서 유리와 사모님이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어디가?"

 

"맥주랑 안주거리 사러..."

 

"요한군...결국 져버렸군요."

 

"네...전 1승만 하면 되는거라 덤벼봤는데 역시 교수님은 포커의 신이세요."

 

"그 사람이 원래 그래요.나이가 몇인데 그런 내기나 하고 있고..."

 

"그럼 저 잠깐 나갔다 와볼게요.아!그리고 유리 잘 좀 대해주세요.애가 잔뜩 겁먹어서 아까 오는것도 겁먹더라구요."

 

"어휴~내가 언제!"

 

발끈하는 유리...처음에 잔뜩 겁을 먹은 유리였지만 사모님 특유의 친화 기술로 그 공포감을 스르르 녹이는데 한몫하였다.

물론 사모님 특유의 편안함과 부드러운 외모도 한몫하셨겠지만 말이다.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고 돌아오니 F1 머신 특유의 엔진소리가 아닌 이탈리아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환호성이 들리었다.

좀 더 자세히 다가가니 F1 해설진의 중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테이블에서 신나게 카드게임을 하는 세 남녀가 보였다.

 

'이건 뭐지...'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 그저 그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 낯선사람과 같이 있고싶지않다고했던 유리였거늘...오랜 친구같이 편하게 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생전처음보는 카드게임이기에 그자리에 주저앉아 규칙을 훑어보니 교수님은 한참뒤에서야 내가 온것을 알아차리고 계셨다.

 

"교수님...분명 오늘 이탈리아 GP 최초의 야간경기라면서 좋아하시지 않으셨나요?

거기에다 페라리가 우승해야한다...이탈리아 사람이라면 무조건 페라리다...라면서 엄청 기대하셨잖아요?"

 

그도 그렇듯이 나와 포커 내기를 하실때도 계속해서 F1 얘기를 꺼내시는 교수님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교수님은 카드 게임을 즐기면서 가끔씩 F1 경기를 훑어보시는 정도였다.

 

"이 게임은 이름이 뭔가요?"

 

생전 처음보는 규칙의 카드게임...조커 카드가 남자 유리가 얼어붙고 교수님 부부가 아이같이 환호성을 질르며 좋아하고 계셨다.

 

"유리양...이 게임 이름이 뭐였죠?"

 

"도둑잡기요!"

 

도둑잡기라는 게임...얼마나 재밌는 게임이길래 F1광이신 교수님의 F1 시청을 방해사시는지 궁금해졌다.

결국 나 또한 게임에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끓어오르는 담배연기만 없을뿐

맥주와 안주거리가 흔히 말하는 하우스와 똑같은 환경을 조성하였다.

 

교수님 부부가 F1 시청이라는 이유로 빠지게 되자 유리와 일대일 게임을 하게되었다.

게임에 참여한지 5판째 되었지만 운이 없는건지 내가 게임을 못하는건지 계속해서 내가 도둑이 되었다.

 

"좋았어~"

 

"엥?"

 

유리가 조커카드를 냈고 그것으로 게임은 끝이 났다.

연속해서 지게 되는 게임에 기분이 나빳지만 내 기분을 더 상하게 하는게 있었는데...바로 조커 카드가 2장이라는것이었다.

 

"자,이겼지?"

 

"왜 조커가 두장 다 들어가있는거야?"

 

분명 규칙대로라면 조커카드중 한장은 빼는것이였다.

 

"맨날 도둑만 시켜서 미안해서 그랬는데 아무래도 도둑은 오빠가 좋은가봐."

 

"예...예...알겠습니다."

 

카드를 내팽겨치고 오늘의 카드게임 전적...0승 15패...15연패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흐암~졸립다!"

 

시계는 12시를 가르키고 있었고 유리는 졸리운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한일이라곤 기차 탑승,대학교 탐방,카드 게임밖에 한게 없는 나였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닌탓인지 나도 슬슬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거기서 안쪽을 내주면 어떡해!"

 

열광적으로 시청하시는 교수님과 그에 반해 상황을 바라보시는 사모님이 대조를 이뤘다.

 

"교수님 저희 방은 2층이죠?"

 

"어...그래...그렇다."

 

역시나...경기에 빠지셔서 별 관심이 없으신것같다.

유리와 함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유리는 무언가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뭐 심각한일 있어?"

 

"아니...그냥 이런 생각을 했거든."

 

"무슨 생각인데 그렇게 심각해?"

 

"사람도 이렇게 간단히 짝을 알수있으면 좋을텐데...

8이 10을 좋아하게되고 K랑 2가 커플이 될때도 있고 또 가끔은 같은 스페이드끼리 연인이 될때도 있잖아..."

 

"겨우 카드게임하면서 뭘 그런 골치아픈걸 생각하고 그래?"

 

"아니...그냥...헤헤..."

 

유리는 실없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난 그러면 인생이 재미없을것 같은데?뭔가 운명이 정해진것 같잖아.

5년전 파티에서 피터팬 카드를 받을때도 그랬어.그 카드가 왠지 내 행동을 강제하는것 같았거든.

정말 아무의미없는 카드인데도 말이야...그래서 지금은 지갑에서 빼 고이 모셔놓고 있지."

 

"아...그 카드 기억난다.근데 난 어떤 카드인지도 기억이 안 나네...근데 혹시 파티날 기억나?오빠가 날 업어줬었는데..."

 

"내가 그랬나...?"

 

"뭐야...나만 기억하는거야...좀 서운한데..."

 

"아...아...기억난다."

 

소녀시대의 모습을 보고 발끈한 내가 무대위로 올라갔고

내 발언을 저지하려는 경호원들과 소녀시대의 몸싸움으로 유리의 무릎이 계단 모서리 날카로운곳에 찍혀서 피가 흘렀다.

 

"그나저나 너 그때도 무릎 다치지 않았나?"

 

"어?정말 그렇네."

 

"넌 나랑 있으면 무릎이 다치나 보네."

 

"정말...별 희한한 우연도 다 있네.그나저나...우리 뭘 걸었던거지?게임에 빠지다보니까 잊어버렸어."

 

"아마...아무것도 안 걸었지?"

 

"실수했다...요리면제권이라도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유리는 많이 피곤한듯 입을 가리며 재차 하품을 했다.

 

"집에가면 한번 요리해줄게.이건 뭐 계속 져서 안 해주면 내가 불편할것같네."

 

"정말?그럼 나야 좋고..."

 

"잘 자.엄청 피곤해보인다..."

 

"응.그래야겠어..."

 

맞닿아있는 방문 앞에 우리 둘이 섰다.내가 내 방으로 들어가려하자 유리는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내가...원래 낯선곳을 무서워하고 그래.거기에다 혼자면 잠도 잘 설치고 그렇거든.

혹시나해서 그러는데 밤중에 내가 불르면 와줄수있어?"

 

"그래..."

 

"다행이다...그럼 잘 자~"

 


Episode 08-수목원에서

 

한남자가 한마리 새를 가둔 새장을 수목원에 고스란히 놓아둔다.

그동안 자신만의 비좁은 세상에 가두려고 하는걸 미안하게 생각한 남자는 새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문을 열어준다.

문이 열리고 새는 한걸음 한걸은 발을 내딪으며 마침내 자유로운 몸이 된다.

 

시원섭섭함을 동시에 느낀 남자는 그동안 새를 가둬놓았던 새장을 치우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한다.

새의 모든게 좋았던 그...그렇기에 새와 함께한다는것 자체가 너무나도 행복한 그였다.

하지만 그건 새의 입장에선 고통이였고,그는 그것을 뒤늦게 깨닺고는 굳은 결심을 한다.

 

이제 더 이상 새의 날개짓 새의 지저귐을 볼수도 들을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허탈감은 이루 말할수없었지만

그 허탈감은 곧 망설임과 혼란으로 바뀌어 돌아왔다.너무나도 선명히 들리는 지저귐과 선명히 보이는 어여쁜 날개짓...

꿈을 꿧다.그 꿈은 지독히도 우리 상황을 잘 빗대어줘서 내 가슴을 아프게했다.

 

사랑해서 헤어지는거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그런 말은 모순된 말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하지만 유달리 쓸쓸했던 3년전 가을날...모순이라 믿었던 그 말로 나 자신을 위로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빠른 결혼을 원하셨다.수많은 유혹이 도사리는 패션계...

그리고 그 패션계에서 당당히 우뚝 선 메이져브랜드의 경영자에게는

누구보다도 안정된 생활이 필요하다 판단하셨고,아버지도 그에 대해 동의하셨다.

SM과 소녀시대의 계약은 2012년 12월 31일로 만료를 예고했고.양가는 수연이가 가요계에서 은퇴한다는 조건하에 결혼을 합의했다.

 

양가는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기에 큰 트러블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당사자들간에 트러블이 생기면서 결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수연이는 불안해했다.

 

계속되는 장거리 연애로 서로가 지쳐갔고 남자의 주변환경에 대한 불안감

그동안 누렸던 인기가 꿈처럼 한꺼번에 사라질수도 있다는 불안감등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가장 두려워했던것은 새로운 환경에 덩크러니 놓이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았던 환경과는 거리가 먼 낯선환경에 대한 불안감은 여러나라에서 살아왔던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더욱이 문화권이 다른 한국과 이탈리아였기에 부담감은 더욱 더 컸을것이다.

 

오직 자신의 편의만을 위해 새를 가둬놓았던 남자처럼 나 또한 오직 나만을 위해 수연이를 비좁은 세상에 가두려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녀가 힘들어하지 않기위해 이별을 고했다.새는 새장을 빠져나왔다.하지만 그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여전히 그녀의 잔상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요근래 아침마다 항상 들었던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참기름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잘 잤어?"

 

요리를 준비하고 계시는 사모님과 믹서기에서 낯익어보이는 뿌연액체를 컵에 담고는

사모님에게 그 액체를 건네는 유리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어?응."

 

"어휴...이거 맛이 왜 이래!"

 

처음 마셨을때의 나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시는 사모님...역시 저 액체와 맞는 사람은 유리밖에 없는듯했다.

하지만 유리의 계속되는 마 예찬에 솔깃한 사모님은 결국 꿀꺽꿀꺽 모두 마셔버리고 말았다.

 

"왠지 부를것같아서 2시까지 대기하고있었는데 안 부르더라?"

 

"피곤하면 낯선곳도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고...그냥 눕자마자 골아 떨어졌어.그나저나 기다렸다니...의외인데?"

 

"네가 예전 얘기를 꺼냈잖아.예전 생각을 하니 재밌더라고...그러다보니 어느덧 2시던데?

그나저나 왜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상다리가 휘어질것 같네요."

 

마치 명절에서나 볼수있듯 아침치고는 너무나도 호화스러운 구성이였다.

사모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유리도 한몫 거들었다며 유리를 치켜세워주셨고,유리는 우쭐했다.

그때 하품을 하며 교수님이 테이블로 다가오셨다.

 

"한식인가?"

 

"미안해요.한국인들이라 아침은 한식을 먹이고 싶었어요.1박 2일로 짧게 온거니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아니 뭐 미안할것까지는...다만,동양음식은 젓가락을 써서 짜증나거든.

가뜩이나 젓가락질이 서툴러서 떨어지면 이 나이에 아기같아보여서..."

 

"그럼 포크를 쓰시면..."

 

"그럼 제대로 먹는게 아니잖아~"

 

사모님은 나에게 귓속말로 원래 왕고집이니 나보고 이해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침내 따뜻한 밥과 국 그리고 맛깔나는 반찬 20첩과 함께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교수님은 여전히 서툰 젓가락질로 고생하시며 외로운 사투를 계속하고 계셨다.

 

"저...교수님..."

 

"포크쓰라는 말이면 안 하는게 좋을거다!이것도 많이 나아진거야~"

 

"아니...그게...그런게 아니구요."

 

"그럼 뭔데?"

 

"곧 정직원이 될것같아서요."

 

"오~그러냐?"

 

교수님은 꽤 흥미로운 얘기이신듯 젓가락과의 사투도 정지하시고는 내 말에 귀를 집중하고 계셨다.

 

"네.아무래도 미국인 CEO한테 계속 배워나갈것같아요.아마...10년후면 제가 맡고있지않을까요?"

 

"그건 모르는법이지."

 

"한번쯤 격려해주실때도 되지 않으셨어요?혹시 알아요?제가 이탈리아 경제를 먹여살릴수도 있잖아요."

 

"사람이나 해고하지말아라!가뜩이나 1000유로 세대의 시작이 이탈리아인데 정리해고할려면 마음 굳게먹고 하는게 좋을거다.

내가 언론에 뭐라고 떠들지 모르니까...그나저나 직함은 없는거냐?"

 

"하하하...좀 봐주세요.그리고 직함은 없어요.Giannino는 CEO가 있고 팀별로 팀장이 하나씩 있고 나머지는 다 똑같거든요.

어차피 패션업체라 나이나 직함보다는 능력을 더 중요시해요."

 

"흠...그렇구나.하긴...네가 그때 그 마인드라면 정리해고를 할 이유는 없겠지."

 

"네?"

 

"저번에 말했지?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한다고...그 질문들중 가장 쓸만했던 질문이 이걸로 기억한다.

기업 경영의 궁극적인 목표가 최대의 이익이냐 아니면 직원들의 행복이냐라는 질문이었지.

네가 그 질문을 해서 준비한 강의는 하나도 못하고 학생들이 둘로 갈려 계속 논쟁을 한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 그 입장이 그대로라면 적어도 정리해고는 하지 않겠구나.다시 말하지만 실업자 만들지 말아라!"

 

"격려인지 협박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입장은 그래도에요."

 

"흠...그래."

 

대화를 끝맞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두 여성이 나와 교수님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님은 아침부터 뭘 그렇게 심각한 얘기를 하냐...라는듯한 표정이었고

유리는 아예 어떠한 말도 알아듣지 못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뚱한 표정이었다.

결국 내가 어제 펼쳐진 F1으로 화제를 돌리자 두여자의 표정을 의식했는지 교수님도 어제 경기에 대한 느낀점을 풀어놓으셨다.

 

호화스러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짐을 가지고 나왔다.감사의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역으로 향했다.

역에 설치된 물품보관소를 이용해 가방을 보관하고는 다시금 택시를 잡아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를 들린다거나 그런건 늦지 않았어?"

 

"응.볼로냐에도 볼건 많지만 시간이 별로 없네."

 

"그래서 지금은 어디를 가는거야?"

 

"저번에 너희랑 같이 여행했던것중에 내가 가장 큰걸 하나 놓쳤더라.이탈리아는 지방색이 강한 나라인데 너무 관광지위주로 돌았어.

사실 지방색을 느끼기에는 음식만한게 없거든.그래서 볼로냐에서만 먹을수있는 음식을 먹으러갈거야."

 

"볼로네제 스파게티?"

 

"흠...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건 너무 유명하지않니?

볼로냐 사람들은 라구,토틀리니,라자냐를 안 먹어봤으면 볼로냐에서 도대체 뭘한거냐며 핀잔을 주거든?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이 대개 그래.너희는 이런거 안 먹어봤지?우리 지역엔 이렇게 맛있는게 있는데~라며 서로를 놀리곤 하지.

어찌보면 유치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자기 지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거든."

 

"그래서 메뉴는 방금 말한거 세개?"

 

"응.아마 입에 잘 맞을걸?수연이도 좋아했으니까..."

 

"이제 괜찮나봐?원래 시카 얘기 꺼내기 꺼려했잖아."

 

"그건 사라의 결혼식이라는 특수상황이였으니까...물론 일부러 꺼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꺼리는건 아니니까..."

 

택시가 마침내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택시에 내리자마자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도 그렇듯이 레스토랑이 아닌 푸르른 빛깔을 자랑하는 수목원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기때문이었다.

 

"조금 걷다보면 레스토랑이 나와.수목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거든."

 

유리는 그제야 이해가는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이곳은 수연이와 한번 함께 오고 난뒤로 한번도 들리지 않았다.

수목원에 발을 들이자 유리는 한껏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고 있었다.

 

여전히 지저귀는 새들과 누군가를 애타게 찾듯 울어대는 벌레들...나뭇가지 사이로 적당히 삐져나와 맞기좋은 따스한 햇살...

푸르름이 뿜어내는 아찔한 산뜻함...함께 걷는 이는 달라졌지만 숲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유리가 저멀리 손가락으로 가르켰고 서서히 정원에 가리워진 비밀장소같이 아담한 레스토랑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는 빨간색 벽돌로 이루어진 동화속의 집같은 레스토랑에 눈을 떼지 못했지만 내 시선은 그 앞에 놓인 나무에 고정되었다.

언제나 거울앞에 덕지덕지 붙여놓앗기에 손때가 많이 탄 사진의 장소...그 장소 앞에 홀로 섰다.

관리인 몰래 자라나는 나무에 우리둘의 이니셜을 새겨놓았던 수연이...

하지만 그 나무는 자라 그 이니셜을 보고 싶어도 볼수 없었고

오돌토돌한 느낌의 나무껍질에 새겨진 이니셜도 만지고 싶었지만 만질수없었다.

 

'여기를 다시 찾겠다고 결심하는데만 3년이 걸렸어.

3년전 내가 내린 결정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았을까?너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하는 미안함에

그렇게 3년을 보내서 다시 이곳을 찾으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기분이 놀랄만큼 괜찮은것 같아.

우리 사진속의 그 나무는 많이 자라서 고개를 올려다봐야 볼수있게되었어.

나와 헤어지고 멋진 여자가 되겠다고 하던 너도 많이 자랐는지 궁금하네.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이렇게 희석되나봐.

이젠 정말 좋은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은것 같아.나 정말 편한맘으로 찾아온 수목원에서 너를 위해 빌어줄게.

그대 인생에 언제나 푸른날만 가득하기를...'

 

 

그날의 피렌체는 낯설었다.커튼을 치니 언제나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는 피렌체의 하늘이 어둡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나에게도 너무나 낯선날이 찾아오고 말았다.

 

유리와 신비서와 동행한 2박3일 피렌체 출장...유리는 내가 5년전 신인 소녀시대에게 선물해준 목걸이를 착용했다.

그 목걸이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빛이 많이 바래있었다.기차에서 유리에게 피렌체에 어떤 볼일이 있느냐며 물어보았다.

워낙 의심투성이의 유리였기에 이젠 가르쳐줄때가 됐다고 생각했건만 유리는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유리는 이틀째 되는날 알려준다며 대답을 미루었다.

 

나의 첫날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나에겐 대를 이어온 기나긴 약속이 하나있다.

아버지는 제품을 만드는데 무엇보다 섬유를 중요시했다.

그렇기에 처음 브랜드를 런칭할때부터 피렌체의 가장 유명한 섬유 장인 파비오 피오릴로에게 섬유 공급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섬유로 공장 물건 찍듯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정장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만큼의 양도 충족할수없다는것이었다.

예술가와 장인의 대립은 계속됐다.

그리고는 마침내 파비오씨는 30년간 매년 6월 30일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도장을 받는다면

섬유 공급을 허락하겠다하시며 두사람에게는 기나긴 30년간의 약속이 성립되었다.

 

아버지가 은퇴를 하신후 그 약속은 나에게 양도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도장을 받으러갈때 파비오씨는 자신은 디자이너와 약속을 했지 그의 아들과는 약속한게 아니라며 노발대발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편지를 드리자 곧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순응해버리고 마셨다.

 

장인은 자신을 닮은 장인을 좋아하는지 그는 일라티니 레스토랑을 좋아했다.

일라티니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내 친구 리카르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2013년 6월 30일 또 다시 장인 파비오 피오릴로를 만났다.그리고 그는 마지막 30번째 도장을 찍으면서 아버지의 근황을 물어보셨다.

 

나는 편하게 잘지내신다며 근황을 전해드렸다.

파비오씨는 혀를 끌끌 차시면서 80이 다되가는 자신도 이렇게 팔팔한데 젊은놈이 그렇게 빌빌되서는 되겠냐며 안타까워하셨다.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70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렇기에 처음 아버지가 은퇴를 선언하셨을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아버지는 그때 겨우 55세의 나이였고 은퇴이유는 개인사정이라는 두리뭉실한 이유였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침묵하며 점점 공식적인 활동까지 줄여나가셨다.어느날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껄껄 웃으시며 답하셨다.

 

"보스가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녀석들이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걸 알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될걸?다 내가 발굴한 녀석들이라 말이지..."

 

결국 가족들과 일부 지인들을 제외하고 그 사실은 일급비밀에 부쳐졌다.

파비오씨의 마지막 30번째 도장을 받고 진정한 명품 섬유로 진정한 명품 정장을 만들수있게되었다.

사실 명품 정장이란게 디자이너의 네임밸류의 영향이 강해서 그렇지 결코 질이 명품은 아니기에말이다.

아버지는 질까지 명품을 만들고 싶어하셨다.그리고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식사를 끝맞치고 리카르도를 만났다.여기저기 손에 상처가 난것으로 보아 엄청난 연습을 거듭한듯 보였다.

리카르도는 나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주겠다며 어떠한 얘기를 꺼냈다.

그 얘기는 전혀 재밌지 않았다.오히려 나를 혼란시켜줄뿐이었다.

 

리카르도의 얘기를 종합해보자면 수연이가 일주일전쯤에 레스토랑에 왔다는것이었다.

농담하지말라며 신빙성이 없는 얘기로 취급하였더니 자신의 눈으로 목걸이를 똑똑히 봤다는것이었다.

그 목걸이는 5년전 내가 소녀시대에게 선물해준 목걸이였다.생각해보니 리카르도는 수연이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1년에 한번씩 일라티니 레스토랑에서 리카르도를 만나며 시간이 되면 그녀석 집에서 자기도 하며 별의별 얘기를 다했으니까...

아마도 그때 수연이의 사진을 본것같았다.

 

"그런데 말이야...혼자온게 아니거든?"

 

이건 또 무슨말인지...리카르도는 톡톡 튀는 두 미녀가 함께 식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말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수정이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바로 이 여자라며 흥분하는 리카르도였다.

리카르도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호텔로 돌아오던중 수연이와 나는 여전히 어떤 묘한 끈으로 연결되있다는 생각을 지울수없었다.

 

이튿날이 되었다.피티 우모라는 대형 행사는 커녕 공식적인 행사자체가 처음인 나로서는 긴장을 잔뜩 했다.

그레이톤의 정장에 흰셔츠 그리고 검은색 타이...

내가 회사의 얼굴로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것이기 때문에 젠틀함을 어필하기위해 포켓치프도 잊지않았다.

 

"흠..."

 

호텔방을 나오자 유리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앞머리는 내리지 않았어?"

 

"왜?이상해?"

 

"아니...그냥 낯설어서..."

 

"오늘이 공식적인 데뷔라 마찬가지라 최대한 신경 좀 썼지.왠지 앞머리를 올린게 더 젠틀해보여서..."

 

"흠...그렇긴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호텔로비로 가니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니...오히려 빗방울이 더욱 굵어진듯한 인상을 받았다.

준비된 차에 타니 기사님은 오늘 날씨는 50 평생동안 손꼽을만큼 희귀한 현상이라며 고개를 흔드셨다.

나는 유리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준다며 어제 리카르도가 해준 얘기를 고스란히 해주었다.

그러자 유리는 깜짝 놀라며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그저 닮은 사람일거라며 리카르도의 주장을 일축했다.

 

"하지만 수정이도 있었다는데?"

 

"설마..."

 

"수연이를 쏙 빼닮은 사람과 수정이를 쏙 빼닮은 사람이 서로를 알게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정자매가 맞을거야.도대체 왜 피렌체에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리는 골똘히 생각하며 정자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추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역시 어느것도 짐작이 안 되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수연이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는걸 알려주자 유리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알수없는 표정으로 이해가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차에서 베키오 다리가 보일때쯤 가금씩 보여주는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유리는 어제도 베키오 다리를 보며 향수에 잠긴듯 구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이 된 박람회장에 도착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평소에는 잠깐씩만 울적한 표정을 보여줬던 유리였지만 오늘은 날씨때문인지 계속해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비가 점점 심해지네."

 

유리는 손을 내밀며 비의 강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좋을 날씨네.오늘은 하염없이 비를 맞고 싶었는데..."

 

오늘의 유리는 내가 아는 유리가 아니었다.

그런 울적한 유리는 내가 아는 유리와 거리가 멀어서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하는듯한 기분마저 들게했다.

박람회장에 들어가도 유리의 울적함은 가시지 않았다.

거기에다 원래 오실것으로 예정되었던 아버지가 건강악화로 불참했다는 소식을

누나에게 전해들은뒤 나 또한 감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못할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찾아오는 V.I.P들을 상대로 웃어보야한다니...

더는 못하겠다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엄청난 거물이 우리에게 찾아오며 또 다시 억지 연극을 시작해야했다.

 

"안녕하십니까.공주님...와주셨군요."

 

"아...반가워요.여전히 멋진 정장 공급해주셔서 고마워요."

 

모나코의 샬롯공주가 직접 행차했건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나코 왕실은 국왕의 임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예감한뒤 익명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는

여러 명품브랜드에게 정장 백여벌을 주문할수있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브랜드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그도 그렇듯이 장례식장에 납품을 해야했기에 불결하다는것이었다.

 

프랑스 브랜드는 전부 다 거절의사를 나타냈고 영국 브랜드도 거절의사를 나타냈다.

결국 제안은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되었고 오직 Giannino만이 그 제안을 승낙했다.

이로 인해 서로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모나코 왕실은 Giannino에게 정장을 협찬받고

Giannino는 왕실납품업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서 한단계 더 성장하게되었다.

 

"무슨...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봐요?꼭 오늘 날씨같은 표정을 지으시네요."

 

고상함이 뚝뚝 묻어나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샬롯공주였다.

 

"아닙니다.괜찮습니다."

 

평소에 우아하고 세련된 현대 공주의 표본같은 샬롯공주였기에 굉장히 큰 호감을 갖고있었지만,결국 거짓웃음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누나는 무슨일이 있냐며 나를 걱정해주었고 아버지는 괜찮으실거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결국 나의 첫 데뷔는 불합격 판정을 줄수밖에없었다.

 

누나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뒷정리를 한다며 피티 우모에 좀 더 남게 되었다.

결국 유리와 나만이 피티 우모를 떠났고 차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대단한 날씨네요.이런 날씨를 다시 볼수있을지 모르겠군요."

 

"저도 이런 날씨는 처음이에요."

 

차는 목적지인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거리는 처음겪는 날씨탓인지 적막만 흘렀고 오직 빗방울만이 쓸쓸한 거리를 지켜주고있었다.

유리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문를 매만지며 고독에 심취해있었다.

그때 또 다시 차가 베키오 다리옆을 지나갔고 유리는 뭔가 큰것을 결심한듯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Stop!'을 외쳤다.깜짝 놀란 기사는 급히 브레이크를 밞았고 유리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차문을 열었다.

 

비가 내렸고 차차 유리의 머리부터 발끔까지 빗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아랑곳하지않고 저 멀리 보이는 베키오 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드리고난뒤 나 또한 차에서 내렸다.무언가에 홀린듯이 하염없이 걷는 유리...그런 유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오늘 정말 왜 그러는거야?"

 

"....고마워.붙잡아줘서...만약에 붙잡지 않았다면 수신인이 없는 편지같이 얘기가 전달되지 않았을테니까..."

 

"무슨 소리하는거야...들어가자.감기걸려."

 

"괜찮아.오늘은 비를 흠뻑 맞고 싶었거든.아마 시카도 여기에 왔을때 비를 맞고 싶어했을거야."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만 늘어놓는 유리...자신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을 스르르 풀어버리고는 다시금 베키오 다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난 저 다리까지 가야해.그러니까 말릴 생각은 안 하는게 좋을걸?"

 

말릴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그도 그렇듯이 유리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느껴졌기때문이었다.

빗물이 몸 이곳저곳을 적시며 시야까지 가리게 만들었지만 유리는 힘겨운 한걸음을 내딪고있었다.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걷던 유리...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듯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혹시 기억나?"

 

그리고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빛을 잃은 목걸이를 보여주고있었다.유리가 가르킨곳은 그 목걸이를 만들어준 금세공점이었다.

 

"오빠가 떠나기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이런말을 했지?오래된 향수보다 오래된 와인같은 그룹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향수는 처음엔 굉장히 아름다운 향을 갖지만 결국엔 그 향을 다 소비해버리면 어떠한 향도 나지않지.

반면 와인은 처음의 향기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더욱 더 깊은 향을 내잖아.미안해.우린 오래된 향수같은 그룹이 되어버렸어."

 

유리의 눈에 차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탈리아로 온 이유는...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그랬던거야.미안해.좀 더 일찍 알려주지 못해서...겁이 나서 그랬어.

오빠는 이미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있는데...그런 사람에게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혹시나 거절을 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밀려와서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어..."

 

비의 비...눈의 비...마음의 비...그 날 우리는 무척이나 많은 비를 맞고 말았다.

 

"....소녀시대라는 그룹에 마침표를 찍어줄래?"

 

수많은 비를 맞으며 애절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유리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잇지 못했다.

 


차가 호텔로 향하던중에도 유리는 어떠한 말도 잇지 못했다.하지만 표정만큼은 한결 편안한듯 보였다.

서로의 호텔방으로 들어가기전 몸을 말린후 자세한 얘기를 하기위해

내 호텔방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난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난뒤 옷을 입고는 침대에 앉았다.

TV를 틀어보니 긴급속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중부지방 30년만의 폭우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이상하다 했더니..."

 

유리의 말은 내 예상범위를 넘어가서 100%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소녀시대가 해체한다는 본질적인 말만 알아들었을뿐

왜 내가 소녀시대에게 마침표를 찍어줘야하는지 그리고 왜 한국에 가야하는지 알수없었다.

난 더 이상 SM의 대표이사도 아니었고 SM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이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며 타는 목울 축였다.어떠한 속사정이 있길래 저 먼 한국에서 홀로 이곳으로 날아왔을까...

이미 본론 자체도 내 예상범위를 초월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어떨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긴장이 되었다.

 

잠시후 똑똑거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긴장한듯 경직된 차렷자세로 문앞에 서있었다.

잠시후 두 남녀가 마주보고 앉은 방엔 뉴스를 전하는 TV앵커의 목소리만 웅웅 울릴뿐이었다.

 

"오늘 이런 폭우는 30년만이래."

 

"아...그래?"

 

기존의 유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소녀같은 반응에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유리도 내 표정을 의식한듯보였지만 예전처럼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지 않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뿐이었다.

 

"맥주 마실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권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요조숙녀가 되버린거야?난 조신하고 조용한여자는 재미없던데..."

 

"창피해서..."

 

"창피해서?"

 

내가 되묻자 유리는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안해서..."

 

"미안하다고?뭐가 미안한데?"

 

"볼로냐에 갔을때...사모님과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오빠의 얘기를 들었어.

이제 곧 정직원이 된다고...앞으로 탄탄대로를 달릴 일만 남았다고...

굉장히 성실하고 인성이 바른 학생이었으니 잘 해낼거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지.그때부터 미안한 감정이 들었어.

아...이 사람은 우리와 완전 다른 길을 걸어가는데 오직 과거의 연을 붙잡아 이 사람 앞을 가로막아도 되는걸까?

오빠의 마음엔 소녀시대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이것저것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

아무말도 하지않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했어.하지만 꾹 참았어.우리에게 마침표를 찍기위해선 오빠가 꼭 필요하니까..."

 

마침표를 찍기위해선 나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말...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유리는 또 다시 언급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왜 내가 너희들의 해체에 관련이 있는거지?"

 

"계약이 특이하니까...우리는 SM과 계약이 되어있는게 아니야.우리는 이요한이라는 개인과 계약이 되어있지.

그렇기에 SM은 우리에게 재계약을 제시할수없어.SM은 소녀시대의 소유권이 아닌 활동권만 갖고있으니까....

거기에다 일반 기획사의 계약과는 달리 개인이 개입되었기에 수익 배분도 일반 계약과는 달리 적을수밖에 없지.

오빠가 일정수준을 가져가니깐....

물론 우리가 화수미디어로 이적이 논의되었을때 계약서를 수정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이 우리에게 배분되게했지만 말이야.

나도 좀 놀랐어.현 회사의 대표이사 되는 사람이 말해줘서 알았거든."

 

화수미디어의 제의를 거절하기위해 주주들을 설득했던 카드...개인 대 개인의 계약...

그것이 유리의 속사정이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그 문제를 극복하고 난뒤 김비서님에게 개인 대 개인의 계약을 SM과의 계약으로 전환시키기를 요청한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유리의 얘기를 종합해보자면 내가 소녀시대의 에이전트가 되보였다.마치 스포츠스타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의 말에 의문점은 존재했다.

수연이와의 혼담이 오고갔을때 소녀시대의 계약만료는 2012년 12월 31일인것을 알수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2013년이었고 계약기간이 만료된지 이미 6개월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점에 대해 유리에게 물어보니 금방 해답을 찾을수있었다.

 

"소녀시대가 성공하면 1년 연장 옵션이 있었어.SM에서는 그 옵션을 사용했고 우리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지.

우리도 잘 알고 있었거든.소녀시대의 타이틀을 뗀 우리는 더이상 톱스타가 아닌 그저 인지도 있는 연예인이라는걸 말이야."

 

"그럼 내가 현 대표이사를 만나 소녀시대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면 사건을 깨끗이 해결되는거니?"

 

"아니...전원 재계약은 없을거야.이미 SM은 재계약파와 비재계약파로 우리를 나눈것 같아.

아마 재계약파는 태연이 윤아 시카 비재계약파는 나머지 6명이 되겠지."

 

"결국 3명만 재계약을 하니 해체라는 소리구나?"

 

"응.그렇지.아마 다시 소녀시대를 재결합 할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걸?

이미 숙소생활은 작년으로 끝을 냈고 모무들 지난 6개월동안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많은 고민을 했으니까..."

 

"흠...난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되는게...BSB나 스파이스 걸즈를 보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함께해.

적어도 그 타이틀만은 유지해놓고 개인활동을 하지.물론 스파이스 걸즈는 한번 해체를 경험하고난뒤 재결합한거지만 말이야.

너희도 개인활동을 하더라도 처음엔 이렇게 시작하는게 좋지않을까?분명 소녀시대라는 타이틀은 아직도 메리트가 있을거아니야."

 

"....SM은 인재가 넘치는곳이야.러프라는 7인조 여성그룹이 우리 소속사에 있어.

현재 최고의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서 평균 연령이 20세도 안 되는 파릇파릇한 아이들이지.

반면 우리는 평균연령이 25세에 육박해.과연 대중들이 어떤 그룹을 더 좋아할까?여자 연예인에게 먹어가는 나이는 치명타야.

이렇게 파릇파릇한 아이들이 넘쳐나는 가요계인데 우리가 버틸수있을까?"

 

"응.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면..."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수 있었다.분명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발생되는 손실도 있지만 분명이 경험이라는 장점은 무시할수 없었다.

아이돌을 하기엔 분명히 한계점에 부딪칠수있는 나이지만

아이돌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면 적어도 3년은 더 그룹생활을 지속할수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거 알아?새들이 왜 V자로 무리지어 날아가는지..."

 

"응?아니..."

 

"그렇게 무리지어 날아가면 무려 72km를 더 날아갈수있대.

난 너희들이 활동하는 연예계에 문외한인 사람이지만 너희보다 조금 더 산 사람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해체는 너무 이른것 같다.

너희들 모두가 25살 내외로 젊은 나이지만 새로운 직업을 갖는다는것은 정말 힘들거든.그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있고...

분명 너희들중 은퇴를 고려하는애가 있을거라 생각해."

 

"응.맞아.서현이..."

 

"역시...서현이구나.그녀석은 연예인을 하기에는 숫기가 워낙 없어서 그럴것 같았어."

 

계속해서 얘기를 하니 목이 말랐다.그렇기에 반이 남은 맥주를 들어 잠깐 들이켰으나

곧이어 켁켁거리며사레에 들려버린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역시 그런 반응을 보일줄 알았어."

 

"당연하지!결혼이라니?"

 

"결혼한대.그리고 대학에서 좀 더 공부하고 싶어하던데?"

 

결혼이라니...너무나도 내 예상범위를 넘어가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유리였기에 과연 유리가 하는말이 진실인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상대는?일반인이야?"

 

"정현이야.소꿉놀이하는것처럼 연애하더니 결국 살림을 차릴려고..."

 

"둘 다 너무 이른것아니야?"

 

"이르지.많이 이르지.그래서 우리가 그건만큼은 뜯어말려도 듣지도 않아.

걔가 말을 잘 들으면서도 은근히 자기주장은 안 굽히는 녀석이거든.

아마도 그 녀석의 결혼을 막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녀시대의 활동을 지속하는것밖에 없을거야.하지만 그럴일은 없을테니..."

 

내 기억속의 정현이와 서현이는 서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는 어리숙한 꼬맹이들이었는데...

그런 녀석들이 결혼이라니...세상 참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걔들이 애를 낳으면 애가 애를 낳은거네?"

 

"그렇게 되는 셈이지."

 

"그나저나 정현이는 계속 가수 할거아니야.이른 나이에 결혼하면 인기가 떨어질텐데..."

 

"그녀석은 노래랑 서현이 이 둘밖에 모르는 바보거든.인기같은건 신경 안 써.채원이도 마찬가지야.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에만 관심있을뿐...인기같은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

 

"...5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구나."

 

"응.파란만장한 5년이었지."

 

유리는 감회에 젖은듯 어둑어둑해진 피렌체 시내를 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5년이 지났을뿐인데...이곳에서 시작한게 엊그제같은데..."

 

창에 손가락을 갔다대며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짓는 유리...결국 손바닥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하하...애들이랑 이 일에 대해 얘기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눈물이 안 날줄 알았어.근데 이곳에 오니 여전히 흐르는구나."

 

"언제 한국으로 떠나?"

 

"3일후에..."

 

"흠...그렇구나."

 

"미안해.바쁜 사람한테 이런 부탁을 해서...샬롯공주라고 했나?

모나코의 공주가 오빠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때 이 사람은 정말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어.

베키오 다리에서의 울음은 단순함 슬픔은 아니었을거야.

우리가 아는 이요한은 이제 사라졌구나...내가 어째서 이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있는거지?

오빠에 대한 미안함...거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오빠란 사람에 대한 낯섬...

이 세가지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흘린 눈물이었을거야."

 

"왜 여기서 그 말을 하는거지?"

 

"해명을 하는거야.보통 눈물을 잘 흘리는 여자면 조신하고 조용한 여자같잖아.난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외.워.둬.알겠지?"

 

"응...근데 여전히 아리송하다."

 

"후후...잘 생각해봐.그리고 너무 부담갖지마.현 대표이사와 통화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말만 해도 되니까...꼭 한국에 올 필요는 없어.

우리도 우리때문에 오빠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것을 원하지는 않으니까....잠깐 핸드폰 좀 줄래?"

 

유리는 내 핸드폰을 받아들더니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였다.

 

"내 전화번호야.혹시 한국에 오거나 이번일에 대해 더 궁금한게 있으면 연락해줘.대표이사랑 연락하고싶을때 연락해도 괜찮고...

그럼 난 가볼게.오늘 신세 많이 졌어.우울한 애 상대하기 힘들었을텐데...잘 받아줘서 고마워.그럼 내일 봐."

 

잠시후 문이 닫히고는 또 다시 나만이 홀로 방안에 남았다.피렌체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다시 밀라노로 복귀했다.

밀라노로 돌아온 유리는 다시금 내가 아는 활발한 유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디서 우리 회사주소를 알아냈는지 회사까지 찾아와 점심도시락을 챙겨주며 신비서와 나를 당황시켰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유리가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네.신비서...모토로라와의 미팅은 한국으로 잡아요.그리고 인사과에는 보고하구요."

 

1층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정반대에 위치한 유리의 방앞에 섰다.

 

"흠...긴 휴가였다."

 

그리고 비틀즈와 움베르토 에코가 가르쳐준 답이 적힌 짧은 편지를 유리의 방문앞에 붙히었다.

 

【To.소녀시대의 유리

 

   볼로냐에서 네가 나한테 이런말을 한적이 있지.어떻게 보면 내가 굉장히 단순한게 사는것 같다고...

   난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으로 갔어.어찌보면 굉장한 모험이었지.

   난 변하지 않았어.그리고 내 인생의 세번째 모험을 감행한다.

   리버풀...비틀즈...볼로냐...움베르토 에코...그리고 서울...소녀시대...

   자,소녀시대를 구하러 가자!

 

                                                                                    From.SM Entertainment 전 대표이사 이요한

 

   P.S)아...이 말 해주고 싶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도시락 맛있었어.고마워.     ]

 

 

 

 


빗방울이 창가를 적셔주고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있었다.

'이 가사 누가 쓴거지?'
 
정현이와 채원이의 팀 리트 매치 2집을 감상해주고 있었다.그중 채원이의 솔로곡 발걸음을 듣고있었다.
모처럼 나온 거리에 지난 연인과의 추억이 깃든 카페에 들른 한 여자...여전히 똑같은 향기를 간직하며 똑같은 잔에 담겨나온 커피...
똑같은 의자에 자신을 알아보는 주인까지...여자는 시간이 멈춘것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커피를 마시며 여자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되고 이젠 초라하게 변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때 마침 카페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여자는 노래를 따라하지만,들려오는건 무안한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를 보며 더 이상 할말이 없다고 느낀 여자는 모처럼 나온 발걸음을 돌리며 곡은 끝이난다.

화려한 표현이 깃들지는 않았지만 작사가의 진솔한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앨범을 살펴보니 [Track 10 발걸음 Composed By 채원 Lyrics By Vega Arranged By 채원]이라고 쓰여있었다.
 
'Vega?직녀?'
 
작사에 직녀성을 뜻하는 Vega가 쓰여있었다.

'Vega가 누구지?이런 이름을 쓰는 사람도 다있네.'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었기에 관심이 가지 않을수없었다.
그렇기에 인터넷으로 '리트 매치 Vega'라고 검색해보았지만 Vega가 누구인지 힌트조차 알아낼수없었다.

"삼촌!식사 다 됐어요!"

"어...그래."

올해 6살을 맞이한 동이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가니 소박한 점심식사가 차려져있었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던중 동이가 나에게 눈빛을 보내더니 무언가를 던지는 시늉을 하였다.

"삼촌!밥먹고캐치볼 해주시면 안 되요?"

"캐치볼?야구?"

"네!"

"글러브 껴본적도 없는데?"

"힝...그냥 받아주시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자기 감정을 감추는것보다는 드러내는것에 익숙한 동이였기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왠만하면 같이 놀아주지 그러냐...영준이는 출장때문에 바쁘고 민아는 둘째를 임신해서 동이랑 놀아주기가 버겁잖니..."

잠자코 얘기를 듣던 어머니가 나에게 조용히 얘기하셨다.

"동아~오늘 삼촌이 캐치볼도 해주고 맛있는것도 사준댄다."

"정말요?와~"

아버지의 막무가내 발언으로 신이 난 동이는 먹던 밥도 남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비오는데요?"

"캐치볼은 안에서도 할수있어."

"맛있는걸 사주는건...안에서도 할수있나요?"

"너도 곧 결혼적령기 아니냐?애들과 친해지는건 무엇보다 중요한것이다.더욱이 이탈리아에서 태어날 네 자식은 더 그럴테고...
그 나이대 애들은 대개 자신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을 따르거든.그래서 아무래도 친구보다는 부모나 형제를 더 따르겠지."

"흠..."

그것이 100% 맞지는 않는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떠한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꾹 참았다.분명 아버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처음 유치원을 갔을때 나와는 다른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들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을때도 있었으니까...
그때 나에게 친구라고는 형과 누나밖에 없었다.하지만 서서히 유치원 생각에 적응해나갔고 그에 따라 새로운 친구도 만들어갈수 있었다.

잠시후 동이가 자신의 야구모자와 글러브 2개를 방에서 가져오더니 식탁위에 털썩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순수한 웃음을 한껏 머금고는 다시금 남긴 밥을 꼭꼭 씹어먹고있었다.
식사를 끝맞치고 잔뜩 캐치볼을 기대하는 동이는 내 발에 매달려있었다.그건 과일을 먹기위해 거실에 앉아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캐치볼은 과일 먹고!알겠지?"

"네..."

내가 중저음의 톤으로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금세 잠잠해지는 동이였다.주말의 TV는 역시나였다.
평일에 방영한 드라마를 재방송해주기 바빳고 브라운관 오른쪽 상단에는 XXX라는 세련된 자막이 올라와있었다.

"어?러프다!"

조그마한 입으로 사과를 오물오물 물고있던 동이가 교복 CF에 나오는 여자들을 보고 소리쳤다.

'잠깐...러프?저게 유리가 말한 그 그룹인가?'

유리가 말한 요즘 한창 대세라는 러프라는 그룹이 저들인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보니...수연이와는 이제 안 만나는것이냐?"

아버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아무렇지않다는듯 물어보셨다.

"3년전에 헤어진 여자에요.오히려 만나는게 이상한것아닌가요?"

"....그래."

XXX라는 드라마가 시작되었고 아름다운 영상미에 저절로 눈이 갔다.
한남자가 늦은 시각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것으로 드라마는 시작한다.
그때 핸드폰에 문자 한통이 오게되고 그 문자의 내용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로하며 격려해주는 문자였다.

남자는 코웃음을 칠수밖에 없었다.문자의 보낸이는 톱스타 여배우였고 어디서 사칭을 하는건지 괜히 기분만 나빠지는 문자였다.
하지만 곧이어 포토메일이 도착했고 남자는 그대로 얼어붙고만다.문자의 보낸이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 남자에게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삼촌!캐치볼하러 안 가요?비도 그쳤는데..."

"아...그래."

그새 비가 그쳐있었다.결국 동이의 매달림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날때쯤...
너무나도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자리에서 발걸음이 멈출수밖에 없었다.

"안 돼~다음에 보여줄게!아직 보여주기 창피하단 말이야~"

주인공의 얼굴에 슬픈 표정이 드리우지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고 계셨고,엄마는 내 눈치를 살피기 바쁘셨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 적막이 흐른 집안분위기에 어린 동이도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계속 매달리지않고있었다.

주인공이 슬픈 이유를 짓는 이유는 전 여자친구의 제삿날이 오늘이었기 때문이었고,둘은 같은곳을 지향하는 꿈 많은 미대 C.C였다.
여행이후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겠다던 여자친구는 결국 주인공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지못했다.

그저 흔하디 흔한 멜로물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지키지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톱스타 여배우인 여주인공이 그의 닫힌 마음을 열기위해 노력한다...

엔딩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알수는 없지만 어떠한 결말을 맺듯
대강의 스토리가 보이는 드라마였기에 무시하였지만...무시할수없었다.

"이제 정극인거야?뮤지컬때는 별로던데..."

"괜찮니?"

수연이는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였다.엄마는 불편하신지 채널을 다른곳으로 돌리고마셨다.

"엄마도 참...옛날인인데 왜 그렇게 눈치를 보세요~정수연 출세했네~드라마에도 나오고~동아!삼촌이랑 캐치볼하러 가자!"

동이와 함께 캐치볼을 할때 필요한 글러브 2개와 모자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나오니 땅은 여전히 질퍽질퍽했지만 동이는 크게 개의치않는듯 싱글벙글한 얼굴로 모자까지 만발의 준비를 다하고있었다.

"햇빛이 안 비치는데?꼭 모자까지 써야해?"

"네!그래야 야구선수같잖아요!"

"아...그래."

결국 이상한 사인까지 만들어가며 캐치볼을 하기시작했다.

"아빠랑도 이렇게 했니?"

6살이 하는 캐치볼치고는 장비하며 사인까지 만들어가며 하는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동이에게 돌아온 대답은 아빠가 이렇게 가르쳐주셨다는 대답이었다.

'하긴 형은 완벽주의자니까...'

단순히 애들이랑 놀아주는데도 사인같은 복잡한것을 만드는 형을 이해할수없었지만 형의 아들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똑같이 해줄수밖에 없는 노릇이였다.

"아빠랑은 항상 이러고 놀아?"

"네.하지만 요즘은 바쁘셔서...그래도 괜찮아요!"

"엄마랑도 못 놀아서 심심하겠다."

"그래도 조금있으면 동생이 태어나잖아요.여자동생이었으면 좋겠어요.그러면 진짜 예뻐해줄거에요!"

"그래...엄마 아빠가 동생만 이뻐한다고 미워하면 안 돼!알겠지?"

"안 미워해요!내 동생이니깐요!백밤만 자면 동생을 볼수있을까요?"

"흠...그정도면 되지않을까?"

"정말요?와~근데 삼촌은 이제 계속 한국에서 살거에요?고모는 안 와요?"

"난 할일이 있어서...잠깐 온거야.아마 금방 돌아갈지도 몰라."

"삼촌이랑 노는거 재밌는데..."

"아빠 곧 돌아오실텐데...그래도 아빠랑 노는게 더 재밌지않아?"

"네!그렇긴한데...삼촌도 재밌어요!"

"그럴땐 삼촌이 더 좋아요~라고하는게 예의야!알겠지?"

"네!삼촌이 더 좋아요~"

"이제와서 그러면 뭐해~됐다 됐어~엎드려 절받기네!"

"헤헤...사실 아빠가 더 좋아요~"

한참 무더위에 진입하기위한 7월이었기에 간단한 캐치볼을 하는데도 땀이 흘렀다.
형수님은 만삭의 몸으로 동이를 씻겨주는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동이를 욕실로 데려가서는 머리를 헹굴때 계속 샴푸를 뿌리는 장난을 치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엄마께 하나밖에 없는 손주 함부로 다룬다고 엄청나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말이다.

샤워를 끝맞치고 동이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 또한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출준비를 끝맞치고 밖으로 나갈때쯤 CD 케이스 하나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작사가의 애절한 이별경험이 그대로 곡에 녹아있는 Track 10 발걸음이 수록된 리트 매치 2집...
결국 오디오에서 CD를 빼 CD 케이스에 담아 나왔다.

"동아!오늘 뭐하고싶어?"

"야구!영화!장난감!아...야구는 안 되요!"

"왜?"

"주말은 낮에 하거든요!"

결국 백화점에 가 장난감을 사주고 식사를 한다음 영화를 보는것으로 합의를 하고 첫번째 목적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CD 케이스에 담아온 리트 매치 2집을 넣자 감미로운 선율의 인트로가 내 귀를 덮었다.

'노래가 이렇게 좋은데...인기가 있을만하네.'

"삼촌!러프 노래 없어요?"

 

 

"러프?"

 

 

"네!"

 

 

"러프말고 소녀시대는 몰라?"

 

 

"모르는데..."

 

 

동이에겐 템포가 느린 R&B가 지루한 노래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듯 보였다.러프의 CD는 없었다.


다만,유리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때 선물해준 소녀시대의 CD가 있었기에 틀어주었더니 아까보다는 덜 지루해하는듯 보였다.

 

 

마침내 사람이 북적북적거리는 백화점에 들어섰다.


동이를 잃어버리지 않기위해 동이의 손을 꼭 붙잡고는 계속해서 장난감 매장을 돌아다녔다.


장난감의 종류가 뭐 이리도 많은지 또 이녀석 취향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결국 로봇과 자동차사이의 3시간의 고민을 끝맞치고 자동차를 선택한 동이를 데리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동아~안 힘들어?"

 

 

"네!이제 밥 먹으러 가는건가요?제가 먹고싶은것 먹어도 되요?"

 

 

"아...차례는 그렇긴한데...잠깐 쉬어가면 안 될까?음료수 사줄게."

 

 

"네~알겠어요!"

 

 

결국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나와 주변을 관찰하고있었다.


아까 들른 백화점은 동이가 태어나기전 태연이와 함께 동이의 신발을 사기위해 들른 백화점이었기에 주변의 지리는 빠삭했다.

 

 

'분명 이쪽으로가면 카페가 있을텐데...'

 

 

30분의 방황끝에 저 멀리 흰색간판의 카페를 발견할수있었다.괜스레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저 카페문을 열면 유하가 나를 반겨줄까?그곳은 그대로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하를 처음 만났던 그곳...수연이를 위해 가사를 썼던 그곳...수연이가 가장 좋아했던 그곳...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문을 여니 낯선 여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있었고 인테리어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약간 달라져있었다.


한적한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동이를 내 맞은편에 앉혔다.


호기심이 많은 동이는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주문을 받기위한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는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꼬마야~귀엽네!"

 

 

그런 동이의 모습을 보고 아르바이트생이 귀여운듯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사장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보자 여직원은 내 질문표정으로 답했다.

 

 

"사장님이요?그렇게 바쁘신분이 왜 이곳에 와요?1달에 한두번도 많이 오는걸껄요?"

 

 

"아...네..."

 

 

유하의 이모님께서 다른 사업에 성공하셨는지 굉장히 바쁘신듯 보였다.


그렇게 얌전히 주문한 생과일주스를 마시고 있을때쯤 너무나도 씩씩한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안녕~언니~"

 

 

"어?사장님..."

 

 

"사장님이라니....낯간지럽게 왜 그래요?"

 

 

"아니...그래도...아!참...아까 어떤분이 사장님을 찾던데..."

 

 

"절 찾아요?누가요?"

 

 

"저기..."

 

 

여직원이 내 테이블을 가르키고는 사장님이라 불리는 한여자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이라 불리는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헐렁하게 걸쳐있던검은색 뿔테안경을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점차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결국 내가 앉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하고 내리쳤다.

 

 

"이게 누구야~사장님?어?근데 이 애는 누구에요?꼬마야!이름이 뭐니?"

 

 

"이...이동입니다."

 

 

"그래?동이...예쁜 이름이네...그나저나 뭐야?어떻게 된거야?이탈리아에 있어야할 사람이 왜 여기있어?"

 

 

그리고는 내 맞은편에 앉은 동이를 창가쪽으로 밀어붙이더니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장채원...좀 천천히 말하지?여전히 그 급한 성질은 못 버렸구나!"

 

 

"하하...그래도 이거 많이 나아진건데?근데 빨리 말해봐!왜 여기 있어?설마...소녀시대 언니들 때문에?"

 

 

"응..."

 

 

"아...그랬구나.유리 언니가 만나러간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진짜 올줄이야...


이요한이 누구인데...엄청나게 바쁘셔서 5년동안 한국에 코빼기도 안 비친 사람인데..."

 

 

"비꼬지마...그리고 장채원이 누구인데...한국에 와도 빡빡한 스케줄에 코빼기도 안 보인 사람인데..."

 

 

"흐흐...그땐 바빳지.근데 지금은 백수가 따로 없어.매일 노래만 만들다 하루가 끝이 나니까..."

 

 

"노래는 잘 들었다!20만장 팔았다길래 못 믿었는데..."

 

 

"SM 아니었으면 안 됐어.SM 가수라니까 좋아해주는 팬도 있거든.거기에다 대중선이 워낙 뛰어나고 노래도 죽이니까..."

 

 

"아...위험하다 위험해!정현이 삼촌한테 또 한소리 들을것 같다?"

 

 

"맨날 듣는 소리인데 뭘...그나저나 깜짝 놀랬지?나 사장이라는거..."

 

 

"아...응.이 카페 분명..."

 

 

"응.유하 언니 이모님 되시는분께서 운영하시던 카페였지.근데 이모님이 서울을 떠나셔서 인수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그래서 유하언니랑 리트 매치가 반반씩 투자해서 인수했지."

 

 

그동안 쌓인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소녀시대의 얘기...성공한 리트 매치의 성공담...유하의 영화 이야기까지...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동이는 지루해했고 서서히 졸기 시작했다.


새근새근 잘도 잘 자는 동이를 보며 채원이는 귀여운지 베시시 웃어버렸다.

 

 

"조카야?"

 

 

"응."

 

 

"난 아까 혹시 입양을 했나?라는 생각까지 했어."

 

 

"그런상상력은 가사 쓰는데 사용해.아!참...너희곡중에서 발걸음이라는 곡..."

 

 

"어?응...근데?뭐?"

 

 

"이곡...가사 누가 쓴거야?애절한 이별경험이 사람 마음을 녹이더라...Vega가 누구야?인터넷봐도 아무것도 안 나온던데..."

 

 

내 질문에 그토록 능글맞은 채원이도 너무나도 평범한 내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Vega는..."

 

 

"누군데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래?"

 

 

"Vega는 말이지...아...이거 가르쳐주면 안 되는데...아!몰라.Vega는 시카언니야."

 

 

"수연이?"

 

 

Vega가 수연이라고?작사가가 애절한 이별경험을 했다는건 가사를 읽어봐도 절실히 알수있었다.


하지만 작사가가 수연이일줄은...생각하지 못했다.혹시 가사속의 헤어진 연인은 나를 의마하는것일까?

 

 

"2010년이었나?장난삼아 소속사 선배님들한테 MR을 돌려봤어.그리고 작사가로 참여해줄 사람을 한명 모집했지.안 될거라 생각했어.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당연히 거절할줄 알았지.하지만 한명이 진지하게 가사를 쓰고 싶다고 했어.


작사는 처음이었기에 퀄리티는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예상외로 너무 잘 나왔어.근데 더 놀라운건 그 가사 어디서 썼는지 알아?"

 

 

가사속의 여자는 연인과의 추억이 깃든 카페를 모처럼 방문하였다.


언제나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을것같았던 연인이었지만 자신의 맞은편은 비워져있었다.


쓸쓸함을 느낀 여자는 창가를 바라본다.이별후의 자신의 초라한 얼굴이 비친 창가...결국 여자는 모처럼 나온 카페에서 자리를 뜨고만다.

 

 

"이곳에서 썼어.스케줄이 끝나고 카페도 문을 닫았을때...부족한 잠을 쪼개가며 이곳에서 썼어.


생각해보니 그런 애절한 가사가 나올수밖에 없었지.이별후의 감정이 작사가에겐 남아있었으니까..."

 

 

2-6년째 연애중

 

동이와의 짧은 나들이동안 계속해서 들었던 생각...나는 왜 그토록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을까...

전체관람가인 만화영화를 앞에 두고 그런 질문을 나에게 던지니 만화영화가 100% 이해가 가지않는것은 어쩜 당연했다.

그렇게 동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때 이탈리아에서 언제나 들려왔던 앙칼진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동이가 선택한 자동차 장난감은 집구석 한복판에 초라하게 자리했다.

 

"할머니~왠 고양이에요?"

 

1층에서 도도한 자태를 자랑하며 유유히 거실을 횡단하는 샬롯을 보고 동이는 성큼성큼 다가갔지만

금새 샬롯의 울음소리에 한껏 움츠려들었다.

 

"빨리 고양이 2층으로 데리고 가렴~"

 

고양이를 원체 싫어하시는 어머니는 손사레를 치셨고,결국 샬롯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올수밖에 없었다.

신이 난 동이는 샬롯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다시금 조심스레 샬롯에게 다가갔지만

샬롯은 도도한 자태를 나타내며 관심없다는듯 동이를 외면했다.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는 메일함을 확인했다.광고 메일을 하나둘씩 삭제하니 꼭 읽어봐야하는 메일은 2통...

메일주소를 보니 하나는 신비서였고 다른 하나는 교수님이었다.

먼저,신비서의 메일을 읽어보니 모토로라와의 제휴건이 거의 합의점에 다다랐으며

광고모델엔 유명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아시아 지역 모델인 은유하를 원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두번째 메일인 교수님의 메일은 사람을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볼로냐 대학 법학과에서 교수를 하고있는 자신의 친구가 가르친 한국인 제자가 있는데 졸업후 감감무소식이기에 그를 찾아달라는 메일...

이름 유영빈 나이 20대 후반 볼로냐에서 유학경험있음...단,이 3가지의 단서만으로 사람을 찾는다는건

꽤나 힘들어보였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글을 답장으로 보냈다.

 

교수님이 보내주신 단서 3개를 메일로 적어 신비서에게 보내고는 노트북을 옆으로 미뤘다.

그리고는 책상유리에 볼을 맞대었다.책상유리에 볼을 맞대니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토록 그 가사가 맘에 와닿았을까...채원이의 얘기를 듣고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니 불현듯 스치는 단어 공감...

 

그녀석은 내 주변에 숨쉬었다.휴가를 받아 1달간 볼로냐로 놀러왔을때도

내가 사는 조그만 빌라에 같이 살았고 가끔씩은 대학교에 놀러오곤했다.

수연이와 헤어지고 난뒤 몇달간은 나 또한 뭔가 텅 빈 공허함을 지울수없었다.

 

도서관에 가면 지루한 책은 그만 보자며 밖으로 나가자는 수연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집에 가면 엉터리 음식으로 맛있다라는 말을 강요하던 수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사속의 여자는 자신을 초라한 여자라고 격하시켰다.

한창 예쁜 나이이고 예쁜 사랑만 해도 모자랄나이에 아픈 사랑을 하고 자신을 초라한 여자라고 칭하는 꼴이라니...

 

'너를 만나고 싶어.'

 

그때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었다.

정적인 움직임에 샬롯과 동이의 신경전 아닌 신경전만이 동적인 움직임의 전부였던 방에 벨소리가 울리었고

잽싸게 전화를 받자 샬롯과 동이도 모두 나를 주시하고 말았다.

 

[권유리]

 

핸드폰 액정에 찍힌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바람처럼 오고 바람처럼 사라지다.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전화를 걸어놓고 난데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유리였기에 말을 끊었더니 금새 잔뜩 심통이 난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전화 안 한거야?채원이한테 들었는데 한국에 온지 벌써 일주일이 다되간다며~"

 

뒤이어 이어지는 유리의 잔소리 연타...

 

"네가 걸줄 알았으니까..."

 

"뭐...뭐?"

 

"라고 말하면 말도 안 되는 말인가?"

 

"나 참...웃겨~누가 들으면 하루종일 핸드폰만 쳐다본줄 알겠네~"

 

"하하...농담인데 왜 그렇게 과민반응하고 그래?그나저나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거야?"

 

"뻔하잖아.채원이가 오빠를 만났다며 문자를 돌리며 호들갑을 떨더라고..."

 

"아...근데 갑자기 왜..."

 

"내가 이럴줄 알았다니까...설마 까마득히 잊어먹은거야?"

 

저 멀리 한탄이 섞인 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오며 통한의 표정을 짓는 유리의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터져나왔다.

 

"웃지마!뭐가 우스운데 그렇게 웃는거야?"

 

"아니야.갑자기 누나가 한 웃긴 얘기가 생각나서..."

 

그렇게 얼렁뚱땅 한고비를 넘기고,두사람 모두 평온한 목소리톤을 되찾았다.

유리는 직접적으로 소녀시대를 한번쯤은 만나봐야되지 않겠나며 만남을 제안하였고.유리의 생각에 나 또한 일정부분 동의했다.

 

일단,각자의 길을 걷게될 소녀시대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결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것처럼 보이는 서현이를 다시 한번 말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그녀석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해 조만간 한번 만나자는 본질적인 사항만을 결정하고난뒤,전화를 끊으려할때쯤...

오늘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작사가 Vega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오늘...Vega라는 작사가의 이야기를 채원이에게 들었어.영화를 보는데 자꾸 가사가 맴돌아서 집중이 안 되었어."

 

"...Vega...오빠...Vega가 누군지 알잖아?"

 

"그래.알아."

 

"시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얼굴에 모든게 다 드러나.요즘 시카는 웃고 있어.

불과 2년전만해도 상처를 완치하지 못하고 억지로 웃음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행복해서 웃고 있어.분명 그때의 Vega는 상처를 부여잡고 아파하고있었지만,그건 과거일뿐이야."

 

"사과하고 싶어.너무 갑작스럽게 통보해서 더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누구를 위한 사과인거야?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싶은 사과?아니면 시카를 배려하는 다정함때문에 나온 사과?

후자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돼.이미 씩씩하게 견뎌냈으니까...전자라면...번호를 알려줄게."

 

유리의 말을 곱씹어보았다.정말로 무엇을 위한 사과였을까?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창가를 바라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카페안의 수연이가 생각났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보여서 그땐 미안했어라는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로 수연이에 대해 사과하였다면,수연이는 다시금 그때의 기분을 느껴야만했다.

 

"고마워.후회할짓을 할뻔했어."

 

"너무 다정하지마.시카가 더 아파했던건 오빠의 다정함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었으니깐...그나저나 나 참...

난 이런 전개 예상치도 못했는데...어쨋든 애들이랑 스케줄 조정해서 가능한 날 문자로 보낼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을때쯤 비스듬히 열린 문 사이에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는 D자 실루엣...

 

"언제부터 엿들으신거에요?"

 

배가 두둑히 불러온 형수님이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비스킥 몇조각을 담아오셨다.

얼른 일어나 쟁반을 대신 받아주자 형수님은 힘이 부치신듯 허리를 두드리며 침대에 앉으셨다.

나와 할말이 있다며 동이를 자신의 방으로 가게한 형수님은 비스킷을 한입 베어무시고는 입을 떼셨다.

 

"흠~맛있네요!역시 수제는 다른건가?차 한번 마셔보세요!진짜 향 좋더라구요~"

 

"하하...제 질문에 대한 답은 안 해주실건가요?"

 

"아...언제부터 엿들었냐구요?처음부터 쭉이요.원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죠."

 

"형수님이 옳았어요."

 

"네?"

 

2층에 위치한 내 방 창가 사이사이에 자리잡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이와 헤어지고 난뒤 잠깐의 슬럼프때 형수님이 해주셨던 말...

형수님은 가지치기로 예를 들며 부러진 부분은 잘라내는수밖에 없다고...

거기서 깨끗이 마무리를 짓고 새롭게 줄기를 뻗치는것이 최선이라고...

수연이와는 친구로 남았다고한 나에게 형수님이 해주셨던 조언이었다.

 

"헤어진 남녀사이에 친구란건 없군요.이제야 깨달았어요.

시간이 3년이 지났고 그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느꼈던 미안하단 감정이 갑자기 증폭되다니...이렇게 쉬운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차라리 남남이 되는게 더 나은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과를 하고 싶어하는 대상이 수연양이군요."

 

"네.그래요.지금은 굉장히 어중간한 사이가 되버린 그녀죠."

 

"어중간하다니요.여전히 연애중 아닌가요?수연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도련님은 말이죠.마음의 균형을 유지할수없는게 연애죠.

아까 도련님의 말투,행동,표정 모두 한곳으로 실려있었어요.그녀를 만나고 싶어...그때의 일을 사과하고 싶어...라는 말이 들려오더군요.

멋부리고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건 진짜가 아니에요.그건 아직 상대보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거죠.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정도의 사람을 만났다...그래서 마음을 빼앗긴다라고 하는거죠.축하해요.6년째 연애중이군요."

 

 

Episode 13-익숙한 낯선 향기

 

유리의 전화에 이어 소녀시대 써니,티파니의 전화가 이어졌다.계속해서 이어진 전화세례에 뜨겁게 달아오른 전화기가 식어갈때쯤...

특유의 시니컬함이 묻어나는 말투가 들려왔다.

 

"어이~도대체 무슨 심보지?5년전엔 소속사 대표 그리고 이번엔 광고주라니..."

 

"흠...광고주는 내가 아닌데?"

 

"뭔소리야...Giannino랑 모토로라랑 제휴하는 핸드폰 모델 제의가 왔는데..."

 

"우린 브랜드 네임만 빌려준거니까..."

 

"아...그래서 광고주는 너가 아니라 모토로라쪽이라고?"

 

"그렇지 뭐..."

 

"용케도 태클 걸지 않았네?내가 아는 이요한은 절대로 날 이런 고급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텐데말이야."

 

"물론...내 기억속의 너는 와인이나 위스키보다는 소주나 맥주가 어울리는 여자고 값비싼 밴보다는 지하철이 더 어울리는 여자였으니까...

근데 바뀌었더라고...5년동안 모든것이...이곳저곳에 네 얼굴이 담긴 광고판이 붙어있으니 말이야.안 그래?은.유.하...?"

 

그리고 유하의 전화 이후로는 어떠한 전화도 나에게 오지 않았다.그후 한동안은 모든것이 잠잠했다.

가끔씩 소녀시대 멤버와 나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유리나 유하에게 오는

시덥잖은 문자에 답장을 보내주는것이 핸드폰 활용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무료하던 주말...유리의 문자가 도착했고 또 다시 별 내용이 없는 문자라고 생각한 나는 핸드폰을 통해 문자를 확인했다.

보통의 문자같았다면 쑥 훑어내리고 닫았을테지만 그럴수 없었다.

 

[시간이 정해졌어.다음주 토요일 잠실 주경기장 SM 콘서트...끝나고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

 

약속은 잡혔고 드디어 모두를 만날날이 다가오고 있었다.유하에게 이 얘기를 하였더니 자신도 그곳에 빠질수없다며 억지를 부렸다.

유하의 주장은 이랬다.

내가 떠나고 SM에는 자신과 소녀시대 그리고 리트 매치를 하나로 묶어 이요한's Generation이라는 암묵적인 호칭이 있었다고 한다.

1년간의 짧은 재임기간동안 내가 발굴하거나 데뷔시킨 아이들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이들은 내 뒤를 이은 후임 소속사 대표의 터치를 전혀 받지않으며 성장해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이요한's Generation의 모임에 자신이 빠져서는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딱봐도 백수와 전혀 다름없는 휴식기 배우의 억지주장같아보였지만

유하를 언젠가는 CF건때문에 만나보아야할 필요가 있었기때문에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작열하는 태양에 후덥지근한 끈적끈적한 날씨...

마침내 8월의 마지막주 주말이 다가왔고 다가오는 가을을 시샘하듯 엄청난 폭염의 무더운 여름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온다고 집에 얘기를 하고난뒤 현관문을 열자

왠 여자 한명과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보디가드 한명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차 빼시지요."

 

"아니...전 단지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고있을뿐이에요.그게 뭐가 문제라는거죠?"

 

"대사님이 안에 계십니다."

 

"저기요...뭣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몰라도 저 공인이거든요?"

 

남녀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특히 여자는 얼굴이 반이 가려지는 빅 선글라스를 쓰고있었기에 제대로된 얼굴 식별이 불가능하였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여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얼굴을 덮은 선글라스를 벗으려 할때쯤

 자신을 지목하는듯한 소리에 잠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당신친구 왔으니까 여기와서 문이나 여시지?"

 

"어?뭐야 너?언제 왔어?"

 

"방금전에..."

 

보디가드에게 대신 그녀의 무례함을 사과하고는 그녀의 차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차는 현재 그녀의 상태같이 잔뜩 열을 받은것처럼 뜨거워져있었고,그녀는 손부채질을 하며 에어컨을 켰다.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여자는 과민반응으로 보이는 보디가드의 경호에 이해가 가지 않는듯 보였다.

나는 검은 정장으로 차려입은 험상궃은 남성들이 왜 우리집 앞에 서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알카에다가 협박을 가해왔어.전세계에 퍼져있는 이탈리아 대사들에게 테러를 가하겠다고...

특히 미국의 동맹국에 있는 대사관들은 더 조심하라고 말이야.아마도 이번 전쟁에 파병을 한 이탈리아때문인것 같은데..."

 

"오호라~이탈리아 대사?근데 그 사람이 왜 너희집에..."

 

"총리가 이탈리아 패션 산업을 이끄는 20인을 초대하고 싶다는데 그 20인중 아버지가 포함되셨거든.

하지만 거절하실걸?몸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장거리 비행은 힘드시거든."

 

"흠...그런 루머가 있었던것 같기는 하다.예순도 안 되어서 은퇴하셨지?"

 

"응.주치의가 더 이상 무리한 활동은 하지 않는게 좋다고...

계속 무리하면 생명에 지장이 갈수도 있다고 해서 은퇴를 하긴 하셨는데 여전히 활동은 하고 계시지.

컬렉션 디자인은 항상 최종 검토하시니까..."

 

여자는 나를 위해서인지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 깊숙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엔진소리가 들리고는 여자는 목적지를 향해 엑셀레이터를 밞았다.조용한 차안 내부에 토크쇼 MC의 시끄러운 목소리만 울리었다.

 

"이건 아직도 하나?"

 

지독히도 숨겨진 진실을 파내고 싶어하는 토크쇼...5년전에 했던 토크쇼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조용히 토크쇼를 보다가 흠칫 놀랄수밖에 없었다.

게스트 은유하...종종 튀어나오는 내 이름...그리고 두 남녀 사이의 진실을 캐내려는 세남자...

 

"너 이제 여기에도 나올정도냐?"

 

하지만 곧 그녀가 이곳에 나올만한 충분한 자격이 되는 대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수있었다.

대종상 여우주연상 최연소 타이틀...그정도면 충분했다.

 

"어휴..얼마나 너랑 나 사이를 뜯어내려하는지..."

 

유하는 질렸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단지,유하를 스카웃하기위해 유하와 친분을 쌓은것 같고 내가 유하를 쫓아다녀서 서로가 사귀었다같은

언론 특유의 부풀리기와 인터넷의 허무맹랑한 루머가 만든 스캔들이라고 화면속의 유하는 해명했다.

그리고는 지난날 골든디스크에서 있었던 이요한의 그대는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어때?진짜 그대를 만나러가는 기분은?"

 

"형수님이 그러더라고...6년째 연애중이라고...놀랄만큼 무덤덤해.굉장히 설레고 떨릴줄 알았는데 말이야.

6년째 연애중...연애는 끝났어.친구도 될수는 없을테고...수연이와 다시 시작하는 일은 없을거야.다시 시작하면 다시 시작되니까..."

 

"뭐가?시카에게 피해가 되는일이?"

 

"그래.또 괴로워할거야."

 

"흠...다시 시작할수도 없을걸?그녀석 나를 잘 따라서 고민같은걸 잘 상담하거든.얼마전 너와 헤어진후 처음으로 연애 상담을 해왔어.

아마...지금 오빠-동생사이와 연인 사이의 딱 중간인 애매한 사이일걸?"

 

"그래?설마 그 남자가 나와 헤어진 이후 첫 남자는 아니겠지?"

 

"...맞는데?"

 

"바보같은 여자구만."

 

"바보라고하면 어느 도련님도 뒤지지 않으시지.3년 연애 3년 짝사랑인가?"

 

"난 여자는 만나봤어.다만,마음이 맞지 않아 사귀지 않았을뿐이지.

어쨋거나 그립군.그때 내 인생의 최고의 시기였지.지금은 인기도 없지만..."

 

"너가 그런말 하니까 굉장히 공감이 안 되는거 알지?"

 

"아니야.정말 없거든?연애를 하고 싶은데 집안에선 결혼을 원하지.

더욱이 가벼운 소개팅자리가 아닌 맞선자리만 들어오고...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니까..."

 

잠자코 내 푸념을 듣고있던 유하가 신호에 걸리더니 까딱까딱 핸등을 잡고있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인기 있으면 바람피울거야?"

 

"뜬금없이 뭔소리야...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거 알잖아.난 원래 한곳에 꽂히며 다른건 생각할수없는 성격이라고..."

 

"바보같은 질문이라는건 알아.하지만 최후의 결말을 안다는 가정하에 그때로 돌아간다면 바람 피울거야?"

 

"흠...아니..."

 

"왜?시카가 무서워서?"

 

언제나 수연이한테는 다 져주었던 나를 주변에서 바라본 유하였기에 그렇게 생각하는듯 보였다.

 

"그러면 이렇게 바라보는것도 못하잖아.난 그녀석에게 상처를 줬기에 다가가는데 한계가 있어.

그녀석은 나와 헤어진이후 멋있는 여자가 되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겠다고 했어.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고...

아직도 그때 그 기억은 생생해.조금만 건드리면 툭 터질것같은데 꾹꾹 참아냈지."

 

"바보같구만.하긴...바보와 바보들이 만나서 이 이야기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아니...현재 진행형은 아니야.그녀석도 다시 시작하려는것 같고 나도 행복해질거니까...충분히 외로웠어.그동안..."

 

 

 

 

 

 

 

 

 

 

 

콘서트가 진행되는 잠실주경기장에 도착하니 각 그룹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팬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풍선색깔로 구분한다는 팬클럽...소녀시대의 풍선색깔이 어느색인지는 몰랐지만,그런것을 몰라도 알아차릴수있었다.

상대적으로 평균 연령층이 더 높아보이는 팬들...그리고 공연장 안에 걸리는듯한 현수막을 점검하며 흐릿흐릿 보이는 문구...

 

[소녀시대,우리와 함께 늙어가자.]

 

[마음에는 가격이 없다.너를 사랑하는 팬들과 함께 있어.]

 

이미 인터넷으로 해체루머가 퍼진듯 루머를 반영하는 문구였다.물론 소속사는 극구 부인했지만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준비에 여념없는 스태프들이 보였다.내 생애 가장 용감했던 일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형편없는 고백멘트에도 울어주고 웃어주었던 그날...언제나 이런 공연장같은곳에 오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된다.

그도 그렇듯이 항상 내옆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톱스타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소녀시대의 대기실로 향하던중 수많은 여성 그룹과 마주쳤다.

여자 후배들이 유하를 잘 따르는지 얼굴을 절반이나 가린 선글라스를 꼈어도 먼저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특히 F(x)의 수정이는 나까지 알아보며 언제 왔냐며...어떻게 나에게도 알려주지도 않나며 애교 어린 투정을 부렸다.

물론 수정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게 노골적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중 예외는 있었다.유리가 말한 요즘 한창 뜨고 있다는 러프라는 그룹...

자신을 리더라고 소개하는 당찬 여자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들의 이름을 지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일이 있기는 있었다.

수연이가 걸그룹 이름으로 쓸만한 이름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하였고.나는 러프라는 단어를 무심코 내뱉었다.

 

이유는 없었다.단지,형이 옆에서 자신이 골프를 쳤던 얘기를 하며,러프가 어쩌구 저쩌구라고 했기에 어감이 좋아 내뱉었을뿐...

러프가 뭐냐며 수연이가 되묻자 나는 그저 내 머릿속에 입력된 사전적인 뜻을 내뱉었다.

거친,울퉁불퉁한,세련되지 않은...참으로 걸그룹과는 거리가 먼 이름이었지만

억지로 포장을하여 지금은 거칠고 울퉁불퉁하고 세련되지않지만

차츰 노력하여 부드럽고 세련된 가수들로 나아가자라는 말도 안 되는 포장을 가했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포장에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 괜찮네~라고 말하였다.

 

그 이후의 일은 알수없었다.나에겐 그저 흔하디 흔한 수연이와의 대화였기에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때 그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되었다.

러프라는 그룹의 리더와 유하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SM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회사 식구들에게 공모하였고

우연찮게 그 글을 본 수연이가 상금을 따내기위해 공모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포상금 100만원을 받아 멤버들과 거하게 회식을 했다는것이었다.

물론 나에게 돌아온건 한푼도 없었다.이 사실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으니까...

 

"뭐야...정말 몰랐다는거야?"

 

"그래."

 

"그래서 방금 F(x)랑 러프를 만나서 느낀점은 뭐야?"

 

"흠...한 3가지 정도?첫째 F(x)의 리더 빅토리아라고 했나?그 나이에 춤을 추려니 참 힘들겠다."

 

내 말에 유하가 풋 웃음을 떠뜨렸다.

고작 27살밖에 안 되었는데 그건 오버가 아니냐며 웃었지만

난 요즘 과음을 하면 예전과 같이 벌떡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좀비같이 억지로 일어난다 말했다.

그리고 유하는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두번째는 수정이가 벌써 20살...성인이라는점...좀 놀랬다고나 할까?중학교때부터 봐서 말이야.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은?"

 

"정수연...참 치사하고 소심한 여자였네.그 100만원 누가 뺏어간다고 얘기도 안 하나?"

 

내 말에 유하는 우습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그렇게 의미없는 얘기를 주고받으니 어느새 소녀시대의 대기실앞에 섰다.

웅성웅성 안이 시끄러운걸보니 모든 멤버들이 있는듯보였다.유하가 나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며 다시금 물어보았다.

나는 다시금 대답했다.아주 편안하다고...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시선이 문에 쏠리는게 느껴졌다.

잠시간의 정적...그리고 이어지는 환호성...유하는 광란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며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수연이가 없는걸 눈치채며 제시카가 어디갔나며 멤버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힘이 쭉 빠지는 대답...늦잠으로 인한 지각...

 

"여전하구만."

 

내가 툭 던진 한마디에 우스운듯 멤버들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만난 잠깐의 어색함을 뒤로하고 다시금 5년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허물없이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해체 위기인 그룹답지않게 여전히 유쾌한 소녀시대였다.

그렇게 얼마쯤에 시간이 흘렀을까?유리의 핸드폰이 울리고 얼마 안 있어 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리고 말했다.

 

"시카...이제 곧 있으면 도착이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건 어쩜 당연했다.

당사자는 덤덤했지만 제3자인 멤버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나를 커튼이 쳐진 구석으로 밀어넣는 멤버들이었다.

이유인즉슨.나에 대한 얘기를 꺼내서 현재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떠본다는 내용이었다.

당사자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얘기였지만 여자들 특유의 호들갑에 커튼이 쳐져 어둑어둑한곳에 자리를 잡은 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자나 목걸이 반지와 함께 의상이 걸려져있는걸보니 이곳에서 의상을 갈아입는듯보였다.

 

"야!권유리~너 무슨 일 있어?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수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유리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말했다.그러고보니 아까 유리만이 냉정할정도로 침착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제시카 특유의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자코 있으라는 소녀시대와 유하의 명령에 그저 이 어이없는 상황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저녁에 오빠가 올거야."

 

"오빠?무슨 오빠?"

 

"요한 오빠..."

 

"아...그 비덕?"

 

비덕은 비틀즈 덕후의 줄임말로서 나를 지칭할때 제시카만 쓰는 유일한 호칭이었다.

 

"어때?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아예 대놓고 물어보는 효연이...그리고 이어지는 수연이의 잠시동안의 침묵...

 

"....그만 좀 하지?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응?"

 

"알고 있어.문을 들어오면서 굉장히 오묘한 향수 냄새가 났거든.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

그 향수는 조향사인 오빠 친구가 오빠에게 선물해주었기에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지.

흠...숨을곳은 한곳밖에 없네.저 뒤에 커튼...맞지?장난은 이만하자고..."

 

스르륵 커튼이 젖혀지고 드디어 마주하고 말았다.

당근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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