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Romance #1. 오후 6시. 오늘은 야자가 없는 날이니까 진짜 신나는 날이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애들의 마음은 이미 각자 급식소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뭐 물론 나도 그렇지만. "..새끼들. 알았어. 반장. 다음시간에 여기까지 했다고 좀 알려줘. 인사."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드르르륵- 인사가 끝나자마자 배고픔에 굶주린 하이에나같은 놈들은 이미 급식소를 향해 백미터 질주를 했고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책가방을 챙겼다. 난 담임한테 다니지도 않는 학원 핑계를 대서 야자를 월 수 금을 뺐는데, 오늘은 바로 야자를 하지 않는 황금같은 수요일이었다. 오예. "야. 너 할일없지?" 교복도 제대로 입지도 않고 와이셔츠에 나이키 패딩만 걸쳐입고 껄렁하게 와서 나한테 말을 거는 이 새낀 중학교 1학년 입학할때부터 친해져서 지금까지 친한 기광이었다. 이새낀 이 지역에선 꽤 유명인사다. 생긴것도 곱상하니 잘생긴데다 아버지는 검찰청 부장검사에 어머닌 일류대학 미대 교수님이니까 가정배경이 빵빵한것과 더불어 자기 꾸미는건 또 얼마나 대단한지, 집이 좀 사니까 망정이지 그냥 평범한 가정이었음 이새낀 자기 치장하는데 가세를 기울게했을 놈이 뻔했다. 매일매일 인터넷으로 뭘 그렇게 지르는지, 기광이가 걸쳤다하면 소리 소문없이 주변사람들은 그 옷의 출처를 알기위해 인터넷을 밤새워가며 뒤져보기도 했다. 그럴정도로 기광이가 갖고 있는 물건들 중에선 진짜 입이 떡벌어지게 비싼것부터 입이 떡 벌어져 눈까지 벌어질정도로 멋있는 아이템들도 많았는데 내가 좀만 맘에드는척만해도 이새낀 나한테 선뜻 아낌없이 내주곤 했었다. 맨처음엔 부담스러워서 받지도 못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게 일상이라 그냥 나도 받는다는 생각보단 한번 빌려쓴단 생각으로 받아서 쓰고 돌려주곤 했다. 뭐 그게 서로한테 편하니까. "몰라. 왜?" "박수경 알지. 걔 보러가자." "걘 또 뭐하는애야. 아 관심없어." 기광이는 그런거 말고도 또 다른쪽으로도 유명했다. 여자킬러. 뭐 기광이가 굳이 꼬시려고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여자들이 이새낄 가만히 냅두질 않았다. 뭐 세상 남자들 다 똑같지않은가. 오는 여자 마다않고 가는여자 안잡는 모토. 그게 딱 이기광 인생모토였다.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 갈아치운 여자들만 진짜 손가락 발가락 수십개는 있어도 모자랄거 같았다. 그정도로 기광이의 여자밝힘증은 친구인 나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그 자리에 또 나를 부르는 중이다. 이새낀 날 뭘로 아는건지. "아 양요섭!!!!!같이 가자!!!할일도없는게 존나 바쁜척..즐." "꺼져. 관심없거든. 박수경인지 잠수경인지 니혼자 만나." 사실 나는 여자에 관심없다. 또한 게이냐,라는 물음에 나는 가타부타 대답할 순 없었다. 그냥 여태까지 맘에드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달까. 살긴 얼마나 살았다고 이런말 하는게 웃기긴하지만 뭐 어쨌든, 같은반 새끼들은 벌써 누구랑 해봤네 저쨌네, 이번에 만나는 기집애는 일주일만에 따먹는다 뭐 등등 이따위 말같지도 않은 말을 교실에서 농담따먹기로 해대지만-여기엔 이기광이 주축이다-나는 그런새끼들이 놀리는 말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내 이런 점을 기광인 제일 맘에 안들어하고 제일 싫어하기도 하지만. "박수경 몰라!? 아 진짜 여자한테 관심없는거 티내냐? 난 세상에서 니가 존나 이해가 안가. 남자가 어떻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을수가 있어? ...너 솔직히 말해봐." 기광인 쫙 줄인 교복바지에 루이비통에서 새로 나온 라인이라며 자랑한 하이-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화-를 신고선 책가방을 묵묵히 챙기고 있는 나한테 얼굴을 들이밀었고 이새끼가 말할게 뭔지 뻔히 아는 나는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뭉개면서 밀어버렸다. 그러자 주위는 찬물에 쥐가 얼어죽은듯이 싹 얼어붙었다. 하긴 기광이는 이런말 좀 유치하긴 해도 학교에서 좀 한다하는 애였으니까.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남학교는 여학교와는 다르게 서열이 있다. 마치 정글에서 동물들 서열처럼. 1위는 사자 2위는 호랑이 뭐 이런식으로 남자들은 힘으로 계급을 만들고 충성을 한다. 군대처럼. 그게 남자들의 습성이다. 그런 습성을 철저히 따르는 남고에선 뭣모르는 애송이가 함부로 덤볐다간 뼈도 못추리고 병원에 나죽었소하고 입원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뭐어쨌든 이런곳에서 기광이는 이름좀 알리고있는 애였고 나도 이새끼한테 뒤질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둘다 성격이 좆같으니 둘이 맞붙은줄 알고 주변 애들은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기대하며 침을 꼴딱삼켰다. "..어쭈 감히 이기광님의 얼굴을 함부로 밀어? 양요섭..너 많이 컸다?" 그렇지만 기광이는 헤벌쭉 웃으며 내 목에 팔을 감고 장난치듯 헤드락을 걸었고 죽여버린다는 씨알도 안먹히는 말을 하며 나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기광인 이미 헤헤거리면서 목을 좀 더 세게 졸랐다. "아 꺼져! 나 집에 갈거거든?" 피가 얼굴에 다 쏠렸는지 얼굴이 빨개지는걸 느낀 나는 이기광 이개새끼의 어깨를 팍 밀치면서 마저 싸던 짐을 쌌고 기광이는 한쪽 어깨에 매고있던 무슨 운동선수들이나 매고 다닐거 같은 남색의 나이키 큰 크로스백을 내 짝꿍 책상에 올려놓더니 내 책상위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채로. "야..가자..어? 맨날 찌질하게 공부만 할거냐고!!박수경이 누구냐면 여기 옆에 해원여고애거든? 걔 존나 이쁘다고 진짜. 존나 빵빵하고 얼굴은 졸라 하얘서..아우 어쨌든 걔 친구들도 존나 죽인대. 내가 제일 괜찮은애로 소개해준다고. 어? 가자. 니도 솔직히 안꿀려. 존나 공부만 하는 찌질이인척하면서 머리는 금발로 염색해갖고는..야. 가자.어?" 학교에선 나도 이새끼에 버금가는 속썩이는 애들 중 하나였다. 다만 여자한테만 관심이 없을뿐. 스타일에 관해선 기광이만큼이나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앞뒤 생각안하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을 해버렸고 당연히 학교는 발칵뒤집어졌었다. 담임은 물론이고 학년부장, 학생부장까지 총출동해서는 하루종일 무릎꿇고 앉아서 반성문 쓰고 엎드려뻗쳐도 하고 머리 다시 원상복귀 시키라는 명령도 받았지만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검은색은 별로 매력도 없고 이쁘지도 않았으니까. 아 무엇보다 다른 애들이랑 똑같은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말들을 개무시하고 집에가서 아버지한테 몇마디만 했다. 사실 솔직히 우리집도 기광이만큼이나 잘사는축이었다. 나랑은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세상 살아갈땐 백이라는거, 권력이라는건 무지하게 작용하는 법. 현직 국회의원인 아버지에 대학병원 교수인 어머니, 그리고 현대무용을 전공한 누나까지. 나만빼고 이 세사람은 신문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아버진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국회의원이었고 울엄마도 tv에 자주 출연하면서 명예를 쌓은 가정의학과 교수고, 누나는 뭐..외국에서 공부중인데 나름 촉망받는 무용가인것 같았다. 사실 그런데 잘 관심이 없어서 내가 잘나가는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잘나가는건데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만 그런건 무의식적으로 내 몸에 배어있었다. 나도모르게 남들을 깔보게 되는 시선들과 그런 자신감들. 그런 곳에서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싸가지없는 말투에 나조차도 깜짝깜짝 놀라지만, 그래서 상대의 감정이 상했으면 어쩌나 하고 망설인적도 많았지만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모든 상황이 나를 안하무인 존나싸가지로 만들어 놓은것 같았다. 뭐 솔직히 나만편하면됐지. 상관없다. 아 다시. 아까 하던 말을 계속 하자면 난 아버지한테 난 이머리가 좋다. 근데 학교에선 뭐라고 한다. 어떡하냐. 딱 이 세마디를 했더니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선 나를 터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와 기광인-기광이도 아버지가 힘썼다고했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3센치 이하로 머리를 깎지 않아도 되었고 염색도, 복장도 자유로웠다. 아, 딴애들이 별말 안하냐고? 아까 말했지않은가. 계급이 있다고. 딴놈들은 그런 계급에 철저히 충성하는 찌질이들이었으니까 감히 나와 이기광이 아무렇게나 하고 다닌다고 토를 다는 놈들은 없었다. 뭐 그게 남고의 장점이랄까. 물론 가진자들에게만 허락된 여유였지만. "안.간.다.고." 나는 11월 초순이라는 날짜에 맞게 갑자기 쌀쌀해진 바깥 날씨때문에 의자에 걸어두었던 아디다스 패딩을 걸쳐입은 뒤 가방을 매고 운동화로 갈아신는데 이기광 이새끼가 존나 끈질기다. 아우 껌같은새끼. "아 싫다고. 집에 갈거야. 니 혼자가. 박수경이고 뭐고 여자한테 관심없댔지. 한번만 더 말하게하지마. 존나 짜증나니까." 나는 짜증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건 친구건 가족이건 상관없었는데 싫다는데도 끈질기게 붙는 이기광때문에 난 화가났고 결국 무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나보다는 성격이 훨배 좋은 기광인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알았어. 그러면 그냥 거기까지만 같이가. 그냥 내가 만나는 애가 누군지 소개해줄라고 그러니까 그냥 같이 가자고 좀!!!" 기광인 왁싱을해서 힘준 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말했고 이새끼가 이렇게까지하는데 끝까지 거절할 순 없어 두손두발 다 들었다. "어디서 볼건데." "걔 학원다니는데 바로 수업있대서 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아싸. 아 양요섭 개새끼 존나 튕겨. 어차피 갈꺼면서." "그럼 가주는대신에 커피하나 사내. 밖에 존나 춥던데." "기집애도 아니고 커피는..아 알았어 요섭아..가자." 커피를 먹는다고 구박하는 기광일 내가 째려보자 이새낀 금방 헤벌쭉거리면서 나를 잡아이끌었고 나는 교실밖으로 나가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잠바 지퍼를 잠갔다. ** "야. 언제오는데. 5분만 더 있다가 안오면 나 간다." 벌써 박수경인지 잠수경인지를 만나러 온지도 10분이 넘었다. 원체 기다리는걸 싫어하는 나는 내 일도 아니고 남일에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게 짜증났고 그래도 이미 온거 짜증나는 티를 팍팍 낼순 없어서 아이팟터치를 꺼내들어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듣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수록 더욱더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 뭐하자는거야 씨발. "아 알았다고. 얘 곧 올거야. 수업이 6시 반이랬으니까 이제 곧 올거라고. 좀만." 기광인 나한테 미안했는지 박수경이한테 전화를 계속해서 했지만 받질 않는지 결국 이기광 입에서도 험한 말이 튀어나왔고 나는 에이씨.하면서 학원 문앞 옆에 쪼그리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얼마전부터 피기 시작한 담배를 점퍼 안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는데 오늘 아침에 급하게 점퍼를 바꿔입고 온 탓에 라이터를 챙기지 않았는지 라이터가 없었다. 그래서 옆에 서서 기집애를 기다리는 기광이의 다리를 툭툭 치려는데 누가 내 앞에 라이터를 떨어뜨린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보이는 철제라이터. 나는 라이터가 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들어올렸고 그 곳엔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가 서있었다. 까만색 머리에 앞머리는 눈썹을 살짝 덮을랑말랑 할 정도의 길이에 아무런 왁싱도 하지 않아 수수해보이는 스타일. 거기에 몸에 피트되는 검은색 세미정장을 입고 얇은 검은색 넥타이를 맨 남자는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터 찾는거 같길래." 먼지하나 없이 깔끔하게 닦인 남자의 구두코를 보다가 라이터를 들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쿵-하는 느낌.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음악을 듣고 있었으니까 분명 음악소리가 들려야되는데 귀에선 아무 소리도 안들렸다. 거기다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거 같은데도 그 말이 안들리고 그 날카로운 눈매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왼쪽 귀에만 검은색의 원석 귀걸이를 한 남자의 모습만 눈에 보이고 아무것도 안들렸다. 왜그러지 갑자기 귀가 병신됐나.. "야. 야. 양요섭. 얘 왜이래. 야!" 멍하니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기광이가 나를 툭툭 쳤고 그제야 정신이 들어오는지 그제서야 음악소리가 들리고 내가 돌아온거 같았다. 이에 바로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얘 왜이렇게 얼굴이 빨개. 야. 미쳤냐?" 기광이는 나를 계속해서 쳐다봤고 나는 기광일 옆으로 밀며 내 앞에 서 있는 수트의 남자를 바라봤다. "당당하네. 고등학생인거 같은데 머리는 금발에..교복에..담배? 그것도 학원 앞에서..? 요즘 애들은 미친건지 병신같은건지..이해가 안가네. 라이터 안쓸거면 내놓지?" 남자의 싸가지없는 말에도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자꾸만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이 소리가 남들도 들을까봐 너무 어색해서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좆같은 기분이 영 이상해서 나는 멍하니 그 남자만 바라봤다. 이에 그 남자도 뭐라고 쌍욕을 씨부릴것 같이 생겨서는 내가 암말도 안하고 있자 당황했는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놓고 날 바라봤고 이 상황에서 나선건 한성깔하는 이기광이었다. "..이미친새끼가. 우리 알아요? 어따대고 미쳤냐느니 병신같다느니..너 뭐하는 새낀데? 아 존나어이없네. 내가 댁한테 피해줬어요? 갑자기 와서는.." "야. 닥쳐." 기광이가 한발 앞으로 나서 내 앞을 가로막자 순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새까만 이기광 뒷통수만 보였다. 이에 짜증이 난 나는 기광일 옆으로 밀면서 말렸고 무슨 병이 도졌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철제 라이터를 그 남자한테 내밀었다. 나 존나 미쳤나 왜이러지. "담부턴 상황 봐가면서 펴라. 니가 담배피는거 나랑 상관없는일인데. 이 학원선생으로서 보기는 안좋으니까. 그리고 여긴 니네같은 꼴통같은 새끼들이 올만한 곳이 아니야. 보아하니 우리학원 다니는 여자애들 꼬시러 온거 같은데 니네랑 레벨이 안맞는단 생각은 안하냐? 상대 봐가면서 꼬셔. 머리에 똥밖에 안찬것들이 순진한 애들 꼬시려고 하지 말고." 꽤 큰 눈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는 내가 건네는 라이터를 넘겨받으며 한쪽 어깨에 걸쳐져 있는 검은색 프라다 가죽 크로스백을 다시한번 고쳐매더니 내 머리를 꾹-하고 손바닥으로 누른 뒤 학원 안으로 들어갔고 이에 기광이가 아 저 개새끼 죽여버리겠다며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는걸 겨우 말렸다. 뭐 굳이 말리지 않아도 박수경인지 무슨 수경인지가 와서 상황은 자동 종료 됐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살기를 띄던 눈빛이 어느새 하트로 바뀌어 있었다. 새삼 말하는 거지만 단순한 이기광은 금방금방 까먹는 체질이었다. 인생 참 편하게 사는 새끼다. 뭐 어쨌든 나는 박수경을 소개해주는 이기광의 말도 들리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누가 망치로 내 머리를 때리고 도망간것처럼 멍하고 자꾸 아까 그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데다가 라이터를 건네줄때 스쳤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맴도는거 같아서 저절로 몸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소름이 끼치는거 같으면서도 아랫배는 약간 간질거리는거 같기도 하고 아무 소리도 안들리고 자꾸 그 남자만 눈앞에서 아른아른 거리는게...드디어 미친거 같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는 이럴수가 없지.암. "어. 잘가. 수업 잘듣고. 이따 수업끝나면 문자해." 둘의 대화가 끝났는지 기광인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학원 안으로 들어가는 수경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갑자기 걔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게 생겨서 무작정 그 안으로 따라들어가 박수경을 잡아세웠고 당황한건 박수경보다도 이기광이었는지 너 왜그러냐며 내 팔을 붙잡았지만 나는 박수경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워버렸다. "야. 너 아까 나랑 말하던 그 남자 누군지 봤지." "...어? 아까? 아 두준이선생님?" "..뭐? 무슨 선생님?" 존나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앙앙거리는거 같기도 하고 귀여운척하는거 같기도 하고. 빨간색 얇은 머리띠를 하고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짧은 길이에 원래 머리색이 밝은 갈색인지 얼굴도 하얘서 유독 눈에 띄는 애긴했다. 마른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딱 이기광 스타일이었다. 순종적일것 같은 여자. 그러니까 이기광 말로 표현하면 일주일안으로 드러눕기 딱 좋은 여자애. 안타깝게도 앙앙거리는게 굳이 일주일까지도 안걸릴거 같았다. "두준이선생님. 윤두준. 그 선생님 말하는거 아니야? 까만색 정장입고 프라다 백 매고.." "어. 이름이 윤두준이야? 여기 선생?" "응. 엄청 유명하신 분인데..담당이 국언데 진짜 잘생겨서 인기도 되게 많고 잘가르쳐서 돈도 많이 받고 그렇대..근데 왜?" "아 그건 니가 알필요없고. 고맙다. 아, 이건 고마워서 해주는 말인데 이기광 너무 믿진 마라. 함부로 나자빠지지도말고." 내 말에 입을 떡-하니 벌린 박수경과 그 친구들 몇명. 이에 기광이도 놀라서 아니라며 헤벌쭉 웃은 뒤 내 입을 막고 학원 바깥으로 끌고나갔고 내가 학원 바깥으로 끌려나갈때까지도 박수경과 그 아이들은 여전히 나와 기광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짐승보는 눈빛인거 같기도하고..뭐 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사실인데 뭐. 내가 없는말한것도 아니고. "야! 개새끼. 존나 미쳤어. 왜그래 너!!!!" "뭐. 내가 없는말했냐?" 나는 이기광땜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기광이는 연신 학원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박수경이 있지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딴말은 왜해! 안그래도 일주일안으로 넘어올거 같았는데 너때문에 존나 구슬려야되잖아!" "기집애들 구슬리는건 니 전문이잖아. 그래봤자 어차피 일주일 안으로 오케이 아냐?" "..뭐..그건 그렇지만..아 진짜 하여튼 양요 이 개새끼. 아 너 근데 그 새끼 이름은 뭐하러 물어봤냐?" 하여튼 이 단순한새끼. 나도모르게 살짝 잊고있었던 그 남자를 생각하자마자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이상한기운을 느꼈는지 기광이 이새끼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혹시.." "뭐." "그새끼 찾아가서 줘팰라고그러지?" 그럼그렇지 이기광이 뭘 생각하겠냐. 나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말이 나올까봐 쫄았는데 생각외의 말을 내뱉자 나도 김이 빠져서 그렇다고 그새끼 가서 죽도록 패버릴거라고 둘러댄 뒤 마침 오는 버스를 잡아탔고 기광이는 내가 올라탈때까지 줘팰때 나도 끼워달라며 말하는거 죽이고싶다고 선생이면 다냐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나는 맨 뒷자리에 앉자마자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다 꽂았다. 아직까지도 벌렁벌렁거리는 심장.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뭐지 이느낌은... 이상한데.... *** "야. 미쳤냐? 아까부터 왜이래. 밥 안먹어?" 나는 어젯밤 내내 잠을 설쳤다. 어제 그 남자때문에 그러니까 자꾸만 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눈을 감아도 있고 눈을 떠도 있어서 잠을 뒤척이다가 새벽 4시쯤에야 겨우 잠들어서 6시에 일어나 학교에 오는 바람에 내 정신도 내 정신이 아니었을뿐더러 하루종일 그 남자의 눈매랑 얼굴밖에 생각이 안나서 죽을것 같았다. 수업도 한귀로 들어와서 다른귀로 빠져나가고 밥생각도 없어서 식판에다가 밥을 받아오긴 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나도 이해가 안가는 이따위 감정이 뭐지? "야. 양요섭. 이새끼가 단단히 미쳤네. 돌았냐? 밥 안먹어? 내가 다 먹는다 그럼." 기광인 오늘 반찬으로 나온 불고기를 몽땅 자기식판으로 쓸어갔고 나는 여전히 기계처럼 젓가락만 입에서 식판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먹는둥 마는둥 하다가 이건 도저히 나혼자 끌어안고 있을 일은 아닌거 같아 기광이한테 내 증상을 말하고 상담을 해볼까 했다가도 이새끼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말도 못하겠고 그런 두가지 마음이 갈등때리는 그 순간에도 내 표정은 엿같았는지 이기광이 내 눈앞에 손바닥을 어른거리면서 머리에 수박 두드리듯 콩콩콩-하고 쥐어박으며 말했다. 안에 누구 계시냐고. 이 개새끼. "야. 이건..그냥 내 친구 얘긴데. 그러니까 니가 아는 애는 아니야. 얘가 나한테 어제 문자했는데.. 나는 이게 뭔지 몰라서..넌 좀 알거 같기도 하고.." "아 그래서 뭐. 하고싶은말이 뭔데." "얘가 어떤 사람을 길에서 봤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 순간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내내 아무소리도 안들리고 자꾸 심장소리가 쿵쿵-거리면서 크게 들리고 주변이 웅웅 거리더래. 목욕탕 들어가서 있는것처럼.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안들리고 그냥 모든게 슬로우모션처럼 느릿하고 그냥 그 사람밖에 안보이더래. 존나 좆같은 상황인데..이게 말이 되나..어쨌든 그렇게 그 사람 보고 집에 왔는데도 내내 그 사람밖에 생각이 안나서 잠도 못자고 뭐 그랬다는데..이게 뭐냐?" "..니 윤두준인가 그 싸가지없는 학원 선생새끼 좋아하냐?" 이기광 입에서 윤두준이라는 세글자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먹은것도 없는데 사래가 들어 켁켁 댔고 오히려 당황한 기광이는 밥먹기 전에 물 먹는 습관을 들인덕에 옆에 있던 물컵을 나한테 건냈고 난 그 물을 먹으며 계속해서 올라오는 기침을 가라앉히기위해 노력했다. 어느순간 얼굴도 빨개지고, 고이는 눈물에 콧물도 나고 킁킁대면서 눈물도 닦고 시간이 지나자 차츰 가라앉기에 앞에 있는 기광일 바라보자 이새낀 무슨 조각상 관람하듯이 손으로 턱을 턱-하니 괴고서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입을 열어서 한다는 말이, "..니 취향 그런쪽일줄 알았다. 하긴..어떻게 사내새끼가 기집애한테 관심이 없을수가 있냐. 너 어제 그싸가지없는 새끼 좋아하지? 뭐냐. 첫눈에 반한거냐? 아 존나 간지럽게.." "...야. 내얘기 아니라고." "너는..니가 구라를 존나 잘깐다고 생각하지. 어? 니 거짓말하면 얼굴에 티 다 나거든? 어디가선 웬만하면 구라는 까지마라. 내가 다 쪽팔린다." "..야!!!나아니라고!병신아." "아이고 그러셔요 양요섭씨? 그래서 오늘은 어떡하시려구요? 오늘 당장 그 학원 가서 등록 하시겠네요? 뭐 어차피 잘됐네. 안그래도 공부만 하는 찌질이랑 학원 선생의 만남이라. 찰떡궁합이네." "이기광 개새끼!!!" 기광인 내가 그 사람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보면 가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그냥 영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생각해보면 나도 그런것 같았다. 이기광 말대로 하도 여자한텐 관심이 안생겨서 억지로 기광이가 소개해준 여자애들 몇명을 만나본적 있었지만 번번이 그 여자애들과 키스를 하려고만하면 영 느낌이 이상했다. 그냥 징그럽고 더럽고..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차버렸고 그런 내 모습에 너 어떡할거냐며 이제 걔네들이랑 연락끊기게생겼다며 그 이후부턴 이기광도 억지로 여자를 소개해준다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그럴때마다 나도 이상한 생각이 들긴했었다. 혹시나 게이는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남잔데. 게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싫고 쪽팔려서 여태껏 부정했는데..왠지..어제부터는 그 말이 맞는것도 같았다. 이순간에도 그 남자가 생각나는거보면. "첫눈에 반하기는 힘들어 널 보기전엔 믿었었지. 생각이 바뀌는건 참쉬운걸. 넌 어리석게 혼자였지.." 아 이개새끼..진짜.. "애쓴다고 될일은 아닌걸. 자연스레 가고싶어. 오예." 급식실에서 나와 매점에서 빵하나를 사갖고선 교실로 가는길에 우적우적 빵을 먹던 기광이가 옆에서 이따위 지랄같은 노래를 쳐불렀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이새낄 쳐다봤지만 이기광이란 놈은 개의치않고 노래에 심취해서 온갖 바이브레이션을 담아 불러대고 있었다. "하지마라 진짜." "올..목소리 촥 깐다고 내가 쫄줄알았냐? 아 그새끼가 어디가 좋지? 그냥 싸가지만 없더만..어디가좋지? 대체 어디가 니스타일이냐 어?" "..눈.." 헐. 내가 뭐라고 지껄인거지. 이기광앞에서 내가..뭐라고..한거지? "..헐..대박..야. 너 존나..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기광인 먹던 빵을 손에 들고는 가만히 멈춰서서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는 진짜 내가 생각해도 미친거 같아서 아 개새끼 내앞에서 얘기꺼내지마.라고 소리지른다음에 교실로 먼저 뛰어와버렸다. 지금 이순간엔 이기광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무 쪽팔리잖아 씨발..... 지이이이이잉- 그때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나는 쪽팔린나머지 책상에 엎드려서 으아아아악-하고 절규를 하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는데... 「니가 드디어 이 엉아처럼 컸구나ㅋㅋㅋ뭐어떠냐 남자건여자건 다 사람인데. 쪽팔린일아니니까 걱정말고 난 니편인거알지?^.^」 -병신새끼 병신새끼라함은 이기광이었다. 역시 이새낀 문자도 병신새끼처럼 보낸다. 나는 이 문자에 어이가 없고 오그라들어서 소름까지 끼쳤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사실 내 마음속 안에선 게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여가고 있었고, 이런 사실을 나도 인정못하겠는데 하물며 친구인 이기광이 이해를 해줄수 있을까. 사실 이런 마음이 있어서 두렵기도 헀는데 이런식으로 오그라들게만 문자를 안했으면 참 이새끼한테 고마워했을텐데.. 나는 그래도 고마운 마음에 답장을 할까하다가 병신은 약도 없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뒤집어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윤두준...윤두준... 아 씨발 모르겠다. #2. "..야..어? 진짜 부탁이다.진짜..같이가자. 어? 너도 대학 가야될거아냐. 어?" "아 병신새끼. 다닐꺼면 혼자 다니라고! 난 공부에 좆만큼도 관심 없거든?!" 나 지금 뭐하냐고? "야 그러지말고. 아 이기광!!!너한테 도움되는거 아니냐? 너 대학 안갈거냐고!!" "난 귀찮게 학원같은거 안다니거든? 과외를 하면 했지." 이기광 꼬시는 중이다. 벌써 3일 넘게 고민하고 생각을 해봐도 윤두준의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리는게 그 학원엘 다니고 싶은데 혼자는 도저히 쪽팔려서 못다니겠고 그나마 있는 친구는 이기광 하나뿐이고.. 이기광이가 공부엔 워낙 관심없다는건 중학교때부터도 알았지만..- 인문계고등학교도 중3때 쪽집게 과외해서 성적 확 올려서 겨우겨우 커트라인에 맞춰서 온거였다- 그래도..어쩔수없었다.혼자다니는건 너무 쪽팔리니까.. "야. 부모님 돈버는게 쉬운일인줄아냐? 이새끼가..부모님 돈 잘버신다고 그게 거저 들어오는게 아니야 과외가 얼만데 새끼야. 고등학교 쪽집게 과외는 백만원도 넘어 병신아. 그걸 받겠다고? 양심이 있냐?!" "..이보세요 양요섭씨. 내가 쓰는 돈만 한달에 백만원이 넘거든요? 그 돈 안쓰고 과외하면 되지. 귀찮게하지말고 꺼져. 니새끼가 좋아하는 사람 찾아가는건데 왜 나까지 끼어들게하냐고. 나는 윤두준이고 뭐고 개뿔 하나도 안궁금하거든? 그러니깐 너나 학원 열심히 다니세요!" 기광이는 싱긋-웃으며 내 머리를 꾹-누르고는 교실밖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포기할수가 없어서 어디 둘러댈거 없나 생각해봤지만 저 똥고집 이기광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어 미칠거 같았다. 아 어쩌면 좋지. 아 씨발 저새낀 그냥 친구가 부탁하는데 몇달만 같이 다녀주면 안되냐고..아우씨.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게 하나도 없어 저새낀 진짜. "아 이기광!!!! 너 진짜 이럴거냐!? 내가 너 박수경한테 가서 이기광이 너랑 사귀는 이유는 다 한번 자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꼬지른다!!!!!." "...헐..아씨발..양요섭 존나 야비한새끼!!!!" 요즘 기광이는 박수경이랑 노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역시 말안듣는 애새끼한텐 협박이 최고. "오늘 바로 등록하러 가는거다. 넌 무조건 나랑 실력 똑같다고 우겨. 알았지?" "야. 말이되냐? 너는 반에서 1등이잖아 병신아. 난 뒤에서 1등이다." "아 그냥 우기라고. 니네 아버지 검사라는걸로 밀고들어가. 어쩔수있냐. 알았지?" "..아우 내가 수경이만 아니었어도 진짜..아 존나 짜증나 너. 내가 걔랑 성공하고 오면 넌 바로 뒤지는거야." "어." "아우 이것도 친구라고.." 기광이는 내 앞에서 주먹을 흔들더니 아우 하고선 주먹을 내려 내 뒷통수를 살짝 때렸고 내가 째려보자 쫄았는지 내 눈을 피하더니 앞서 도망가버렸다. 사실 공부에 ㄱ자도 관심 없는 친구를 공부에 끌어들인게..좀 양심에 가책(?)을 느꼈지만 그래도 나 혼자선..도저히 못하겠단말이다!!!!! *** "..실력이..둘이 비슷하네요. 태산고라고 했죠? 머리색이....조금..튀어서..불안했는데.. 놀기도 잘 놀고..공부도 되게 잘하는 학생들인가봐요." 학원에서 반을 나누는 시험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히 보라는 말과 함께 수학 시험지를 두고 나간 선생님 덕분에 이기광은 내 시험지에서 식까지 완전히 배껴써서, 아 물론 너무 티가 나지 않게 적당히 어려워보이는건 의도적으로 틀려주는 센스를 발휘해주면서 실력이 얼추 비슷하게 90점, 80점이 나왔고 딱 보기엔 껄렁한애들이 들어온거 같아서 불안했는데 생각보다 다들 공부를 잘하자 다행스러웠는지 그 남자선생님은 그럼 오늘부터 다니는걸로 하는거냐며, 반을 설명해주었다. 이기광의 센스 덕분에 학원 다니는 내내 편할 것 같았다. 고마운새끼. "여기는 심화반인데 처음부터 여길 들어가려면 시험을 한번 더 봐야되는데..어떡할래요. 볼래요? 내가볼땐 충분한 실력인거 같은데..이거 수학시험지..꽤 어려운 시험진데도 90점씩 받을 정도면... 실력이 뛰어나다는건데.." "..아 근데.. 여기 혹시 윤두준..선생님이 담당하는 반..있나요?" "아 소문듣고 왔구나. 우리 윤선생님이 진짜 잘가르치시기로 유명한분이죠. 아 마침 그분 요즘 2학년 담임하고 계신데, 그 반으로 배정 받을려구요? 근데 자리가...없는데...어떡하나.." "..아 아예 없어요?" 내 표정이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웠는지 옆에서 내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던 기광이 고개를 숙이고 킥킥대면서 어깨를 흔들어가면서까지 웃어댔고 나는 그만 닥치라며 이기광의 발을 꾹 밟자 잠시 조용하는가 싶더니 큼큼-거리면서 헛기침을 함과 동시에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봐도 웃음을 참는게 눈에 보이는 표정. "네. 윤선생님이 진짜 유명해서 부모님들이 다 그분을 선호하시거든요. 대신 윤선생님과 실력을 겨루는 다른 선생님도 있는데.. 그분도 엄청 유명하시고 되게 잘가르치시는 분이에요. 담당과목은 수학과목이고 이름은 용준형선생님." 뭐 어차피 윤두준네반 아니면 이사람이건 그사람이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네. 그냥 거기로 들어갈게요." "기광이학생도?" "..풉..아. 네? 저요? 네 저도 같은반으..로...킥킥.." "무슨 웃긴 생각 했나봐요? 계속 웃네.." 등록서를 작성하라며 종이 두장과 펜 두개를 건네는 남자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는 기광이를 보면서 말했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대신 대답했다. "아..얘한테 아까 좀 웃긴 일이 있었는데 그게 아직도 생각나나봐요. 신경쓰지 마세요. 여기 체크한데만 작성하면 돼요?" "아.네. 코코아 한잔씩 줄까요?" "아 전 코코아는 됐고 물한잔만..풉.." 기광이는 펜을 들고 이름 석자를 쓰다가 내가 복화술로 닥치라고 했더니 그게 또 웃겼는지 결국 얼굴을 감싸쥐고 웃어대기 시작했고 남자선생님은 별 이상한 애를 다 보겠다며 종이컵에 냉수 한잔을 갖다주었다. 이에 이기광 이 개새끼는 그 물을 원샷하더니 겨우 진정했는지 나보고 자기꺼까지 다 쓰라면서 자긴 좀 나가있겠다고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씨발새끼. 윤두준 앞에서도 저 지랄떨면 진짜 거길 잘라버릴거다. 미친놈. 내껀 다 쓰고 이새끼꺼까지 다 쓰는데 순간 이기광 아버지 성함이 생각이 안나 이기광을 부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쿵쿵쿵- 이 망할놈의 심장이 또 지랄거린다. 아 절대 티를 내면 안되는데... "선생님. 여기 제 택배 왔다면서요." 오늘의 윤두준은 검은색 셔츠 하나에 검은색 정장바지에 던힐 벨트를 찬 댄디한 스타일이었다. 수업을 하고 내려왔는지 셔츠 꽁무니엔 분필가루가 묻어있었고 더웠는지 셔츠의 팔부분을 끌어올려 팔꿈치부분에서 접어올렸고 왼쪽손목에는 어디 브랜드인진 모르지만 엄청나게 비싸보이는 은색의 메탈시계가 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머리에 왁싱을 했는지 저번에 봤던 그런 차분한 머리가 아니었다. 왁스로 앞머리를 살짝 올렸는지 훨씬 강해보이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그려져있었다. 훤칠한 키에 딱 맞는 셔츠 덕분에 몸매가 드러났는데 굳이 그 셔츠를 들춰보지 않아도 몸매가 다부질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손으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에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피해야겠단 생각으로 고개를 내렸는데. "..어? 너..그때 요 앞에서 담배필라고 했던 애 맞지? 야." 씨발. "..아닌데요." "아니기는 무슨. 너같은 금발이 흔하냐. 너 이학원 등록할라고 왔냐? 왜. 이제는 학원 다니면서 애들 상태 봐가면서 꼬실라고? 새끼야 작작 좀 해라. 선생님. 얘 몇점 나왔어요? 딱 봐도 꼴통.." "에유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윤선생. 요섭이 학생 90점 받았어요. 얼른 사과해요 얼른.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했건만.." 윤두준보다 족히 열살은 더 많을 것 같은 인상의 그 남자선생님이 말하자 윤두준은 예상치 못한 말에 좀 당황했는지 그 남자선생님이 넘겨주는 택배박스를 엉거주춤 넘겨받으며 내 옆에 다가섰다. 아 미안하단말은 됐으니까 그냥 좀 가라 제발..아 이기광 이새낀 어딜 가서 이렇게 안와. 아 미치겠네 진짜. "야. 너 이름 뭐냐?" "..양요섭인데요." "..양요섭..야 얼굴 좀 들어봐. 아 미안하다. 니가 선생이라도 머리는 금발에 귀는 뚫고 담배 필라고 폼 잡는 애보면 어떤 생각 하겠냐. 나같이 생각했을걸. 어쨌든. 미안하다." "..됐으니까 그냥 가세요." "..야 화났냐? 뭐야. 너 얼굴이 왜이렇게 빨개?" "아 괜찮으니까 그냥 가시라구요." 씨발. 얼굴이 또 그새 빨개져있었나보다. 살짝 고개를 들었더니 내 얼굴이 남들과는 다르게 확실히 빨갰는지 윤두준이 내 얼굴을 손으로 잡았고 그러자마자 진짜 귀에서 멍-한 소리밖엔 안들리고 어찌할바를 몰랐다. 등에선 이미 식은땀이 흘렀고 윤두준의 손이 얼굴에 닿았다고 생각하니까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딱-뿌리쳐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예의없었던 행동. 순간 미안해져서 윤두준의 얼굴을 눈만 들어올려 쳐다봤다. "..머리가 금발이니까 얼굴 빨간게 확 티가 나네. 어쨌든 너도 이학원 다니면 나 종종 보겠네. 오해한거 미안. 선생님! 저 수업 올라가요!!" 윤두준은 그냥 올라가면 올라가면 되지, 남의머리는 왜 쓰다듬고 가냐고.. 사람 미치게.. 나는 윤두준이 가고 나서도 몇분동안을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죽을뻔했다. 이기광은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안보이고 좀처럼 빨간 얼굴이 가라앉혀지질 않아 계속 손으로 부채질도 해보고 금수강산 자연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을 가지려 애썼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건 아까 윤두준의 그 쫙 뻗은 뒷모습과, 내 볼을 부여잡았던 그 손의 온기. 진짜 이러다 심장이 뻥-터져서 죽을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백미터 달리기를 열번을 해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빠르게 뛸 것 같진 않았다. "부모님 연락처 여기다 적어주고, 기광이학생이랑 요섭이 학생 반은 A반이에요. 4층에 올라가면 2-A라고 써있는 교실이 있을거에요. 거기 들어가서 아무데나 앉고 기다리면 돼요. 부모님과 연락 되고 학원비 납입 확인되면 용준형선생님께서 교재 들고 오실거에요." "..네. 안녕히계세요." 나는 방금 전에 들어온 이기광한테 뭐라고 하려다가 그럴 힘도 없어서 등록상담실에서 나와 4층으로 향했고 그래도 복도에서 찬바람을 맞으니까 내 정신이 돌아오는지 그제야 진정이 됐다. 그제야 보이는 망할놈의 인간 이기광. "야. 너 어디갔다....뭐야? 너 왜그래?" 귀신한테 혼이라도 뺏겼는지 멍때리고 있는 이기광 이새끼의 어깨를 툭-치니까 기광이는 어..?라면서 나를 쳐다봤다. 뭐야 이새낀 또. "뭐야. 무슨 일 있어? 돈 뺏겼냐?" "..내가 그럴새끼냐. 야..나 존나 이상하다." "왜 어디 아프냐?" "...심장이 꿍꿍꿍 거리고..자꾸 아무생각 안나고..눈앞에서 아른아른 거리는게...야..이거 뭐지." 이새낀 또 뭐야. "박수경인지 뭔지 보고 왔냐?" "..아니..나 방금..박수경보다 존나 이쁜애 봤어. 진짜..엄청 이뻐..눈도 엄청 크고 똘망한게... 키는 나보다 작고...웃는게...환상이야 씨발. 아 존나 미치겠네. 이름이 뭐지..아 물어보고 올걸." 그럼 그렇지. 이기광 사전에 이주일 넘기는 애가 없는데 어쩐지 박수경이랑은 오래간다싶더니 이렇게 쫑날줄 알았다. 정확히 오늘로써 6일째였다. 박수경과 만난지. 근데 이번엔 또 어떤앤지 얼마나 이쁘길래, 아무리 이뻐도 이기광이 이렇게 넋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그 애가 많이 이쁜지 이기광은 계단에 그대로 서서 입을 헤-하고 벌리고 있었고 내가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툭-하고 밀자 이기광은 그대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래도 표정변화 하나 없이 마약한 애 마냥 표정이 마냥 풀려있었다. "야. 어떤 기집앤데 그래?" "얼굴이 존나 하얗고..동그랗고..검은색 바가지머린데...통통통..하고 걸어다녀. 어떡하냐..존나 심장뛴다. 나 이런거 처음이야. 아 걔도 여기 다니는거 같은데..이름도 못봤고.. 어떡하지. 걔 어떻게하면 찾을 수 있지..어 야 양요섭. 말 좀 해봐..아 씨발..나 죽을거 같애." "미쳤구나 니가 드디어. 박수경한테 물어봐. 아..그건 좀 실롄가..그럼 내가 물어봐다줄까? 아니 얼마나 이쁘길래 니가 이러냐..너 한번도 이런적 없었잖아. 어떤 여자애를 들이밀어도 그냥 이쁘네.한마디 하던게..갑자기..니가 이러니까 나까지 당황스럽잖아 새꺄." 이기광이 학원 계단 바닥에 주저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있자 나는 그제서야 지나다니는 애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부랴부랴 이새낄 일으켜서 4층 2-A반으로 겨우 데리고 들어갔다. 교실엔 열댓명 정도 있는것 같았고 다들 하나같이 나 범생이 찌질이요.라고 이마에 써붙여놓은 것 마냥 다들 안경잡이에 여드름 브레이커에 뚱뚱하고 하여튼 찌질했다. 나는 그 교실 꼴을 보니까 속이 답답해서 윤두준만 아니었음 이따위 학원은 발길도 안했을건데..라고 생각했고 그때에도 이기광은 이미 맛간 생선마냥 눈이 풀려있었다. "니네가 새로온 애들이야? 니네 용준형선생님이 오래." 커다란 동글뱅이 안경을 쓴 여자애가 여드름 투성이의 얼굴을 하고선 나한테 말했고 내가 알았다며 슬쩍 걔를 쳐다보자 그 여자애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여튼 여긴 이상한애들이 넘 많았따. 어쨌든 이 상황에서 이기광을 데리고 가는건 무리였고 아무래도 나 혼자 갔다와야될것 같은 느낌에 교무실이 어딘지도 모르는채 무작정 교실을 나왔다. 학원 구조가 ㄷ자인지 애초에 방향을 잘못틀어서 건물 끝까지 와버렸고 괜한 걸음 했다 싶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 교무실을 찾는데, 교무실은 아까 올라왔던 계단 바로 앞에 있었다. 역시 등잔밑은 어둡다했나. 나는 괜히 떨리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는 머리를 다듬으면서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다행히도 쉬는시간이라 애들로 북적북적거렸다. 아니 대체 용준형이 누군질 알고 찾아가냐고. 다들 하나같이 선생님들마다 애들로 둘러싸여있어서 선생님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누구한테 물어보려고도했지만 다들 둥그렇게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어서 끼어들기도 그렇고 그래서 뻘쭘하게 교무실 한가운데 서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잡아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우 씨발. "여기서 뭐하나?" 왜하필... 나는 최대한 얼굴이 빨개지지 않으려고 애국가를 불렀지만 그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난 녹다운.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왜이렇게 자꾸 얼굴이 빨개지냐.." 윤두준은 내 얼굴을 살짝 잡아서는 왼쪽 오른쪽으로 휙휙 돌렸고 내가 괜찮다고 손을 뿌리치자 뿌리쳐진 손이 민망했는지 그 사람은 날카로운 눈매로 서글서글하게 웃더니 내 머리통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에이씨 이 사람보다 키가 한 칠센치? 오센치? 정도 작은거 같은데..자존심이 상했다. 괜히 애취급 당하는거 같아서. "너 근데 여기 뭐하러 왔냐." "...용준형..선생님이..누군질 몰라서.." "아. 야! 용준형!! 얘가 너 찾아왔단다." 둘이 친한사이였는지 윤두준의 입에서 용준형 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자 나는 빈정이 상했다. 왜 빈정이 상하는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짜증났다. 많이 친해보여서 그런가.. 어쨌든 용준형이라는 사람은 아 니가 이번에 새로온 애냐며, 일로 오라고 손짓했고 나는 윤두준의 옆에 있다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윤두준은 마침 용준형의 옆자리였는지 의자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물기가 아직 남아있는 손을 닦더니 가만히 앉아서 용준형의 옆에 서있는 나를 위아래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씨발..뭐야. 부끄럽게.. "생각보다 의외네. 시험지 90점 받았다길래 엄청 공부 잘하게 생길줄 알았는데.. 은근히 날라리..아이런말은 니가 기분 상하려나? 미안. 그러니까 금발은 시내 나가도 흔히 볼 수 있는 머리 색이 아니라 내가 당황스러워서..." "그치. 얘 내가 며칠전에 학원 앞에서 봤는데 담배까지 피는거같드라. 필히 주의해야될 앤거 같다. 용선생." 윤두준은 나를 보며 피식-하고 웃더니 용준형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더니 노트북을 열어 자기 일을 하기 시작헀고 괜히 심통이 난 나는 윤두준을 째려봤다. 나는 누구때문에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내 성정체성까지 고민하고 뒤척였건만 누구는 저렇게 편하게 얘기를 한다니..자존심이 상했다. 정말로. "근데 다른 친구는? 둘이서 같이 왔다면서?" "..아..걔 좀 상태가 좆같..아니..상태가 안좋아서..그냥 저 혼자 내려왔어요." "입도 험하네." "..에?" 뭐야 이건또.. 윤두준은 지가 할일만 하면 되지, 대체 왜 남의 말에 관심을 갖는건지. 입이 험한건 사실이었지만 저런식으로 노트북 자판을 툭툭 치다가 갑자기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는 아래위로 훑으면서 얘기할건 또 뭐야. 사람 얼굴 또 빨개지게..... "친구 상태가 어떻다고? 뭐?" "...." "입도 험해. 머리는 노래. 담배도 피고. 귀걸이도 해. 근데 공부는 잘한다? 너도 어지간한애구나...욕심이 많은건지 자기관리에 투철한건지...." "아 넌 좀 조용히 있지 윤두준? 됐고. 어 이거 교재. 일단 오늘 든 과목 교재만 줬는데..다 줄까? 들고 가는거 무거울거 같아서. 아 이건 시간표고!" 무슨 오늘 시간표만 있다는데..총 6권이었다. 내가 이기광 이새끼거까지도 받았으니까 각각 3권. 국어, 수학, 영어...하나같이 무겁다고 소문난 완벽한자율학습의 문제집이었다. 무슨 CF에도 나오는거 같던데..내옆의 선생님...무슨..어쩌고.. 아어쨌든. 순간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에 나도모르게 허리를 휘청했다. 되게 무겁....어?" "사내새끼가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문제집 6권도 못드냐?" 옆에서 내가 휘청하자마자 윤두준이 의자에서 벌떡일어나 내 팔에 얹혀져있던 문제집 6권을 싹 빼서 가져갔고 당황스러운마음에 윤두준을 쳐다보니 윤두준은 눈썹 한쪽을 찡긋 거렸다. 에이씨발..너무 잘생겼잖아!!!!!!!!!! "이따가 수업 다 끝나고 니 친구좀 나한테 내려보내줘. 얘기 좀 몇마디 해보게. 어차피 오늘 수업이 있긴 한데..그래도 내 담당 학생이니까. 알았지?" "..네. 아..저 문제집 주세요. 들고 올라갈 수 있는데.." "그래? 그럼." 윤두준은 한쪽팔에 껴안고있던 문제집을 몽땅 다 나한테 넘겨주었고 난 또다시 한번 더 휘청거려야만했다. 에이씨. "야! 이기광! 이 병신새끼야. 아직도 이러고 있냐? 야 받아가. 니 문제집이래. 좀 정신 차리라고 아 대체 뭐하는 기집앤데!! 내가 알아다줄게. 어떻게 생겼는데!?" 이기광은 아직도 그꼴이었다. 꼴사납게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은 마약한것처럼 잔뜩 풀려가지고는..쯧쯧쯧 반병신 다됐군 "...남자야.." "...뭐?" "남자라고. 씨발..내가 니꼴 났나봐..어떡해..아..씨발..." 기광이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이더니 금방이라도 쏟아져버릴것처럼 꽉 차올랐다. 뭐야..무슨소리야 대체. 이게.. "야. 뭐라고? 다시 말해봐." "니가 윤두준한!!!!!!읍!!!" "야 뒤져. 그 이름 함부로 얘기하지마 학원에서." 이게 미쳤나..어디서 윤두준 이름을 학원에서 막불러.. 나는 급하게 기광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고 순간 입이 막힌 기광이는 내 손을 강제로 떼어내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더럽게. "아 미친새끼!!!니가 그새끼한테 반한것처럼 나도 어떤 새끼한테 꽂혔다고!!근데 그게 기집애가 아니라 새끼라고!!!!!!아씨발..야 요섭아..나어떡하냐..아진짜..이게 뭐야!!!내가 그러니까 여기 안온댔지 이 개씨발놈아!!!!!!!!!" "..얼씨구 얼씨구..잘한다. 아주 친구들끼리 욕이 남발이구만." 뭐야? "뭐야..아우 씨발." "..아우..씨발...? 야. 내가 니 친구로 보이냐? 어따대고 이게.." "뭐 어쩌라구요! 나 지금 기분 안좋으니까 윤.두.준.선생님께선 건드리지 마시죠?" 이기광이 단단히 미쳤다. 어따대고 이게 막나가. 감히 누구앞에서. 나는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가서 막나가는 이기광의 팔을 붙잡고 복화술로 얘기했고 대신 사과했다. 하지만 윤두준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변해있었지만. 어떡해 아 이기광 진짜.. "야. 이기광. 너 미쳤냐? 닥치고 가만있어. 죄송합니다. 얘가 지금 기분이 안좋아서.." "넌 됐고. 야!" 바로 이 시간이 국어시간인지 국어 문제집을 들고 있던 두준이 빈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양 손을 양쪽 허리춤에 대놓고 서있었다. 이미 싸늘하게 굳어버린 표정. 원래 이렇게 버릇없는거 선생들이 싫어한다고는 들었는데..아물론 누가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른한테 버릇없이 대드는걸 좋아하겠냐만은....아 이기광 진짜. "선생님! 수업! 수업 종 쳤는데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윤두준의 양 손목을 잡고 그 앞에 서자 윤두준은 아직까지도 싸늘한 표정으로 날 보고는 그 주변에 있는 수업을 기다리는 애들을 쓱-둘러보다가 휴..하곤 한숨을 쉬면서 아까 던지듯 내려놓았던 문제집을 들고 교실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교탁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윤두준의 눈은 기광이한테 머물러있었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헀듯이 이기광은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아마 지는 모를거다. 윤두준한테 지가 대들었는지 어쨌는지. 아 대체 이기광이 꽂힌 놈이 어떤 새끼라는거야.. 어떻길래 얘가 이지경인지. 한번 알아봐야겠네. 아 이기광...진짜. "그러니까 한용운 시인은 늘 경어체를 사용했고 역설법을 주로 사용한 작가로서..." ...잘생겼다. 수업 내내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엄마 아버지가 알면 화를 내겠지만..어쩔수 없지. 오른손으론 분필을 집고 왼손은 메탈시계를 자랑이라도 하려는듯 허리춤을 집으며 서서 수업을 하는데 그 옆모습이...사람 미치게했다. 날렵한 콧날과 진한 눈썹. 그리고 누누이 말했지만 그 강렬한 눈매에 나는 필기를 하는건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영화배우 보듯이 그저 감상만했다. 이순간 제일 감사한건 내일도 이 사람을 볼 수가 있고 내일도 볼 수 있다는것. 즉 일주일중에 주말만 빼고 늘 볼 수 있다는 것이 제일 감사했다. 그러려고 일부러 평일반을 등록한거지만. 딩-동-댕-동 "자. 오늘은 여기까지할게. 숙제는 78페이지까지 풀어오는거야. 내일은 수업 안들었으니까 숙제 꼼꼼히 해서와. 답지 배껴오지 말고!" 헐..뭐야. 내일 안들었어!? 나는 아까 용준형이가 준 시간표를 확인했다. 국어시간은 5일동안 세번 들어있었다. 근데 그 중에서 내일은 안든날... 아..기분이 지금 굉장히 시궁창같다. 엿같은 이 더러운 느낌.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시간표를 들고 있는데 근처에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 졌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문제집을 한손에 들고 여전히 셔츠 자락에 분필가루를 묻히고 있는 윤두준. "..왜..왜요?" "야 니친구 정신챙겨서 나한테 보내." "아..정말 죄송한데요..지금 얘가 좀 충격받은 일이 있어서... 얘가 아까같이 그렇게 싸가지 없는애가 아니거든요. 대신 사과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니가 뭔데 나한테 사과해. 됐고 얘 당장 나한테 보내라." 기광이를 쳐다볼땐 싸늘하다가도 나를 볼땐 눈빛이 약간 따뜻했다. 그냥 내 느낌이겠지만. 그래도 나를 싸늘하게 봐주지 않았다는것도 난 기뻤다. 아 진짜 쪼다같애. 짜증나. 어쨌든 윤두준은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갔고 왁자지껄한 교실안에서 나는 어떻게든 이기광의 정신을 좀 챙겨보려 애썼다. 하긴..지가 남자를 보고 반했다니..자기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울법도하지. 쯧쯧쯧. 뭐 나야 원체 여자한테 관심없었으니까 남자한테 관심이 있는건 아닐까 하고 옛날부터 생각해왔으니까 그래도 충격이 덜했는데 얜 달랐으니까. 늘 여자를 끼고 다니던 애였는데..어쩌다가.. "야!!!너 윤두준이 오래!!!!야 아 이 미친새끼야!!!안내려갈래!? 누구 말씀인데 이새끼가!!!" "..아..알았다고. 나도 귀 있거든. 아 나 그냥 집에 가야겠다. 나 지금 존나 혼란스러워..." "..야 너 집 갈거야?" "..어.비켜. 일단 윤두준, 그새끼가 나 부른다고? 아 그새낀 뭐야. 짜증나게." 기광이는 짜증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췄다. 뭐야. 앞에 윤두준이라도 있나. 나는 괜히 궁금해서 기광이한테 걸어가는데 갑자기 이새끼가 뒤를 돌더니 내 손을 붙잡고는 확 끌어당겼다. "야!!" "쟤 보여? 지금 정수기 앞에서 물먹는애. 머리 바가지 머리. 회색 교복바지. 보여?" "..키 좀 작은애? 아 지금 뒤돈애? 쟤야?" "...어. 야 씨발..존나귀엽지. 어떡하냐." "뭘 어떡해. 천하의 이기광이 뭘 망설여? 가서 번호따." 내 말에 이기광은 무슨 기겁이라도 한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사이에 그 남자애는 친구들인지 남자애들 몇명이랑 신나게 얘기를 하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그 자리를 뜰 것 같아 나도 불안한데 이새낀 뭐가 그렇게 망설여지는지 가만히 내 손을 꼭 붙들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 "..야..쟤 저렇게 나한테 쉬운애 아니라고." "..아 미친새끼야!! 존나 오글거려!!! 뭐 어떡하라고. 가서 내가 따줘?" "..어? 아..그건 또 아닌데..아씨..아 어떡하냐 요섭아. 나 진짜..내가..내가 게이..게이라니...." 기광이는 혼란스러운듯 문에 기대어서서 손을 이마에 짚었고 뭐 이런애가 다 있나 싶어 내 손을 꼭 붙든 이기광의 손을 잡아 떼어놓고는 그 애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날 말리려는 이기광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게 다 너를 위한거니까 넌 그냥 멀리서 굿이나보고 떡이나 처먹어라 새끼야. 이거 해다주는 대신에 너 윤두준 꼴받게 하면 뒤진다 새끼야. "야." "...저요?" "어. 너. 너 이름 뭐야?" 아 너무 다짜고짜 물어봤나. 내가 귀도 뚫고 머리는 금발에 좀 세어보였는지 아까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이미 뒤로 물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내 앞엔 기가 죽고 겁먹은 어린양 한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내 이미지가 안좋은가.. "저..저요? 왜..왜요?" "아 너 해칠라고 그러는게 아니라..저기..저..아니다. 그냥 이름만 알려주면 안돼? 어디학교 다녀?" "..저 장현승..인데요. 지금 고1이요..태산고 다녀요." "태산고!?아..어쩐지 교복이 낯익다했네..너 무슨반이야?" "저 1-S반이요." "..S는 뭔데?" "아 심..화반 이어서..S반이요.." 짜식이 나름 겸손한지 심화반이라는 말을 꺼낼땐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래도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어 이러니까 니가 이기광 스타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물론, 현승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는 교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뒤돌아 서서 이기광 앞에 섰는데. "누가 걔 머리 만지래." "..병신. 사람 치겠다? 내가 쟤 이름, 학교, 무슨 반인지도 다 알아왔는데..나 입닥친다?" "잘못했어요. 요섭이형. 쟤한테 알아온거 얼른 다 토해내." 이런 금같은 정보를 너한테 쉽게 넘겨줄수야 없지. "대신." "..대신?" "너 윤두준앞에서 욕하고 까불면 뒤진다. 너 아까 윤두준앞에서 존나 싸가지없던거 알아? 알아서 설설 기라고. 선생님이니까." "내가 선생님한테 기는거 봤냐." "그러니까 윤두준한텐 기라고. 그리고 지금 윤두준이 너 내려오라그럤거든? 가서 무조건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 그렇게 해서 올라오면 내가 정보 넘겨줄게." 기광이의 안색이 안좋아졌다. 그래도 미안. 어쩔수 없잖아. 니가 뭔데 까불어. 선생님한테. "...그까짓 정보 가지고 존나 째째하게.." "싫어? 그럼 됐고. 난 아쉬울거 없거든." "..아 알았다고. 가서 싹싹 빌고 오면 되지? 하고 온다고. 아 개새끼 너 존나 싫어 진짜." 이기광은 나한테 가운데손가락을 휙-하고 날리더니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갔고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직도 내 손에 남은 듯한 윤두준의 손목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걸 두고 미쳤다고 하는거지. 진짜 꽃 꽂아도 영 손색이 없을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딩-동-댕-동 종이 쳤는데도 안올라오는거 보면 얘기가 길어지는거 같았다. 크게 혼나기라도 하고 있나. 얘가 또 빡쳐서 대들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고 아예 교무실로 가보려는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표정이 묘한 이기광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게 아닌가. 이건 또 왜이래. 정보 내놓으라고 시위하는건가. "..그새끼 성격 조또 싸가지없어. 아 진짜 좆같네." "욕좀 작작해. 왜 뭐라는데." "몰라 몇마디 안했는데 존나 싸가지없어. 그냥 말투랑 행동 자체가 싸가지가 없어. 넌 그새끼 어디가 좋냐? 나보고 존나 꼴통같이 생긴게 입도 꼴통이래. 니 친구는 그렇게는 보여도 실제론 별로 안그런거 같은데 나보곤 왜이렇게 겉으로 보이는거랑 행동하는게 한결같냐고 그러드라. 아우 개새끼 진짜. 나 니가 말한거 아니었음 그새끼 팼어. 그새끼 몇살인지 물어보고 올걸. 그렇게 차이 안날거 같은데.." "야. 그래도 선생님이야. 열살은 더 차이날걸." "열살이면 그게 그거지 뭐. 아우 좆같은 새끼. 그건 됐고 너 얼른 토해내." 뭐?라고 말하려다가 아..그거 하면서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이건 나름의 선물이었다. 한성깔하는 이기광이 제대로 성격 더러울거 같은 윤두준에 맞서서 참아준 것에 대한 댓가. "태산고 1학년. 이름은 장현승. 지금은 1-S반이란다." "씨발..같은학교였어!?" "어. 어쩐지 교복이 낯익다 했더니만..학교에서 몇반인지까지 물어보면 애가 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건 안물어봤다. 너 어떡하냐. 걔 건드리면 학교에 게이라고 소문 쫙 날텐데.." 이기광은 나를 휙 째려봤다. 내가 뭐. "아...씨발..왜하필..너만 아니었음..그래!!! 씨발 양요섭 너만 아니었으면 난 이 학원에 안왔을거고!! 그럼 현승이를 만날 일도 없었을거야!!!!!그럼 난..내 정체성을 모르고 살았을텐데..다 너때문이야 개새끼야!!!" "욕의 향연이구만." 이건 또 뭐야. 오늘따라 왜이렇게 우리의 언어습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 내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이미 수업 종이 쳤는지 용준형이 들어와서 교탁앞에 서 있었고 어쩐지 어느순간부터 주위가 조용해졌다 싶었더니만..선생이 들어온줄도 모르고 기광이는 또다시 욕을 한꼴이었고 기광이는 또 한소리 듣겠다 싶어 학교에서도 안듣는 잔소리를 왜 여기서 들어야되나 싶은 표정이었다. 딱 봐도. "어차피 윤두..아 윤선생님한테서도 한소리 크게 들은걸로 아니까 너한테 또 뭐라고는 안할게. 근데 욕 같은거 별로 듣기 좋은 소린 아닌거 알지? 그걸 옆에서 듣는 사람도 니 인상이 썩 좋게 보이진 않아. 그러니깐 욕은 웬만하면 하지 말지?" "...주.의.하..겠습니다." 주의 라는 말을 또박또박 말하고는 고개를 내리깔아 수학 문제집을 펼쳐들었고 또 멍때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맞다. 얘 이번시간에 간다고 그랬는데...그래도 이번 시간까진 듣고 갈건지 가만히 앉아있었고 나는 용준형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윤두준이 그려져서 수업을 듣는 50분 내내 내 볼을 때려야만 했다. 자꾸만 윤두준의 그 환상뒷태가 용준형한테 겹쳐 보여서...난 분명...미친게 틀림없었다.암.그렇고말고. #3. "...풉!!!" 이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야 이기광. 뭐라고 지금? "야..나 지금 존나 심각해. 내가 며칠동안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을 좀 해봤거든? 어쩔수가없어. 걔 진짜..내스타일이야. 놓칠수가 없다." "..그래서..뭐 어쩌겠다고." 아우 이기광때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커피집에서 파는 화이트초콜릿모카를 먹다가 옷에 다 흘렸다. 이따 화장실 가서 대충 지워야겠네. 미친. 학원을 안나오는 주말내내 생각했다는 답이 저따위 이상한 헛소리였다니. 미친 이기광새끼. "...야. 이기광 사전에..열번 찍어..아니야 솔직히 존나 한번이면 오케인데.. 얘는..남자애니까. 좋다. 다섯번. 다섯번안에 걔 내꺼 만들거야." "..미친 또라이새끼. 야 너는 그렇다치고 걔가 받아들일 수 있겠냐? 대충 보니까 번듯한 부모님 밑에서 고이고이 자란 착한 아들내민거 같더만..애 데리고 장난치지 말고.." "장난아니라고 병신아. 나도 장난이었으면 좋겠거든? 누구는 게이이고 싶어서 게이냐? 아우..계속 머릿속에 아른아른..거리는게..걔가 웃는것만..자꾸 생각나고.. 막 밥먹는데도 밥그릇에 걔 얼굴이 둥둥둥...야 너도 그랬냐? 윤두준 막 생각나고?" 켁- 아 이미친놈이..왜또 그 이름을 자꾸 입에 올리냐고.. 사실 지금 학원 교실에 앉아서 나름의 진지한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내 모든 신경은 다 교무실에 온통 쏠려있었다. 행여나 교실 근처로 지나가진 않을까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뭘 입고 왔나 머리스타일은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안되는 일이지만..난 이미 포기했다. 사람이 사람 좋은거엔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상대방일뿐. 애초에 그사람과 잘될거라는건 기대도 않는다. 그냥 다만..다만... "몰라 새끼야. 너때문에 커피 먹다가 흘렸으니까 내일 똑같은거 그대로 나한테 사내라. 나 화장실 갔다온다. 내꺼 훔쳐먹지말고 니꺼 먹어. 알았냐?" "...장..현..승...." 이기광은 펜 하나를 들어 문제집에다 장현승 이라는 이름 세글자를 빼곡히 적기시작했다. 쯧.완전히 맛이간 이기광의 모습은 꽤 봐줄만 했다. 나사 하나 풀린게 영 미친놈같고.. 그나저나 여기 화장실은 어딨는거야. 그리고 커피가 코로 넘어들어간것 같기도 하고..코가 매캐한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끼익- 솨아아아아- "..으..차거.." 이놈의 학원은 따뜻한물도 안나오나..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도 찬물밖엔 안나온다.망할. 비누는 이거..그거 아닌가..지하철에 가면 있는..파란색..이상한비누.미친. "그렇게 하면 퍽이나 옷이 빨리겠다." 뭐지.이두근거림은. "..뭐..뭐에요?" "뭐가." 후드집업 주머니 쪽에 커피가 와르르 쏟아져서 손바닥으로 대충 물만 적시고는 비누만 손가락으로 몇번 묻혀서 거품도 안나게 문지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굉장히 익숙하고 계속 듣고만 싶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심장 놀래게 하는건 이사람이 일위다 일위. 망할. 오늘의 그는 평소엔 안끼던 얼굴 반..까진 오바고 1/3은 차지할듯한 알이 커다란 갈색 뿔테를 끼고 머리는 수수하게 아무런 왁싱을 하지 않은채로 앞머리가 이마를 거의 다 가린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컨셉은 대학생인지 옅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겉에다가는 다이아몬드체크패턴이 그려진 남색 브이넥 스웨터를 걸쳐 입고 있었다. 아, 스타일의 완성이라는 시계는 그때완 달리 알이 큰 갈색 가죽 시계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괜히 멋쩍고 민망해져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비눗기도 없이 계속 문지르고만 있는데 윤두준은 내가 하는 꼴을 손을 씻으면서 흘끗흘끗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 씻었음 그냥 나가지 자기 옆에 있던 휴지를 몇칸 뽑아서 손을 닦더니 그대로 휴지통에 골인, 그다음엔 세면대에 살짝 기대서 팔짱을 낀채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뭐. 왜 이자식아. "..머리..학교에서 뭐라고 안하냐?" "..별..말안하는데요." "왜? 태산고면 이근방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잖아. 그런데서 그따위 금발머리를..가만히 냅둔다고?" 뭐? 그따위? 이기광한테 어제 무슨말을 어떻게 했을지 눈에 선했다. 그걸 가만히 참고 들어준 기광이가 새삼 기특할뿐.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왜 자꾸 관심보이는척 하냐고. 사람 설레게. 눈빛은 냉랭하면서. "..그냥. 나도 애들 가르치는 선생입장에서 좀 궁금해져서. 그럼 열심히 빨다가라." 냉랭한 분위기를 풍풍 풍기며 그대로 나가려는 윤두준이 나는 못내 섭섭하고 서운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교무실에서는 기집애들로 둘러 싸여있고 교실에선 보는 눈이 많아서 이렇게 지금처럼 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나는 이 시간을 조금만 더 갖고 싶었다. 아니 뭐..별 뜻이 있다는게 아니라..그냥.. "저기.." "..뭐? 왜." 윤두준은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나를 살짝 봤다. 순간 마주친 시선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비누가 묻은거 같지도 않은 후드에 괜히 물만 묻히고 있는데 윤두준이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아 괜히 불렀다. 사실 할말도 없었는데..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하지?" "..어..그게..그러니까..몇살이세요?" 병신아. 그딴질문을 친하지도 않는 사이에서 하면 어떡하냐.. 아우 진짜.. "..뭐?" 윤두준은 내 질문을 듣고도 어이가 없어 나와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반문했고 나는 이 방정인 입을 찢을수도없어 에라 모르겠다 싶어 고개를 들고 윤두준의 눈을 똑똑히 쳐다봤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물어보지뭐. "몇살이시냐구요." "...어이가없네. 알아서 뭐하게." "...구..궁금해서요." 내가 생각해도 예의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연세가 몇이냐고 물어볼수도 없진 않은가. 나는 가만히 눈만 올려 윤두준의 눈치를 살피는데 나를 팔짱끼고 빤히 보다가 살짝 웃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화났나...싸가지 없는거 되게 싫어하는거 같던데.. "스물넷." "..에?" 생각보다 어렸다. 나는 최소한 스물 일곱,여덟은 됐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린나이에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건 왜지? 한살이라도 나이차이가 적게 나는게 좋아서 그러는건가.. 그래 그건가보다. 에이씨 병신양요섭. "맨처음엔 아는 선배 대따 뛰다가 어떻게 하다보니 눌러 앉게 됐고..뭐..그래서 아직 대학생이야." "...아..어디..대학..다니시는데요?" 뭐가 이렇게 소심하냐고! 물어볼거면 그냥 당당히 물어보던가. 에이씨. "연대 경영." "..겨..경영..거기..엄청.." "세. 난 니 나이때 니가 그렇게 담배피고 머리 염색하고 기집애들이나 꼬시러 다닐 시간에 죽도록 공부만했어. 그래서 들어갔어. 아..왜 학원에서 선생질하고 있냐고? 돈도 꽤 잘 벌리고 용돈벌이겸..그래서 하는거야. 여기 원장선생님은 아버지랑 친구분이시고 그러니까. 뭐 어차피 다음달이 마지막인데." 아..생긴것도 잘생긴게 공부도 졸라잘해 미친. 잠깐만 근데...뭐? 마지막? 뭐 이따위 강아지같은 경우가. "..마지막이라면.." "그만둔다고. 내가 언제까지 학원에서 있을순 없잖냐. 돈도 적당히 벌었겠다, 졸업해서 유학가야지. 아..내가 별소릴 다했네. 어쨌든 이얘긴 딴애들한텐 비밀이다. 지우던거 마저 잘 지워라." "..근데 저 담배 골초 아니거든요? 자꾸 담배 얘기 꺼내시는데..저 그렇게 담배 많이 안피워요." 그대로 뒤돌아서서 나가려는 윤두준을 내가 또 붙잡았다.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것 같아서 말이지. 담배를 피는건 사실이나 골초는 아니다. 그냥 짜증나고 답답할때 피는거였는데 그게 왜하필 딱..걸려서는.. "어. 그래. 나랑 별로 상관 없는 일인데." 잠깐 기대했었다. 나를 앞에다 두고 자기 얘기를 해주는 윤두준의 모습에서 아주 잠깐. 정말 잠시동안은 기대했었다. 훨씬 더 가까워 질 수 있지않을까 하는 조금의 기대를 했었는데 저 입에서 나오는 저 말은 그대로 내 귀에 파고들어서 나가질 않았다. 표정은 말투보단 덜 차가웠는데 그 사람의 별 감정없이 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웃고 찡그릴만큼 어느샌가 마음이 커져있는것 같았다. 제기랄. 병신같이 왜 눈물이 나냐고. 윤두준이 뭐 어쨌다고. 씨발. 그 말을 끝으로 쌩-하니 나가버리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참았던 눈물이 후드집업 위로 투둑-하고 떨어졌다. 원래 이렇게 여린 놈은 아니었는데 짜증났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고 예민해진다는게. 그 사람은 원래 그렇게 말투가 싸가지 없는 사람인데, 분명 진심은 아닐건데도 나는 속상했다. 그냥 나한테 관심없는게 눈에 보여서였을까. 아님 그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나도 그 안에 포함되어있다는게 속상해서였을까. 뭐 둘다 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갑자기 서러워졌다. 여태까지 이따위 이상한 몽글한 감정은 모르고 살았는데 그것도 남자를 상대로, 그것도 선생을 상대로 내가 이런다는게..난 정말..미칠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윤두준의 수업이 없는 날이라 다행이었다. 아마 이상태로 그 사람의 얼굴을 또 본다면 나는 수업을 제대로 못들을것 같았다. 코끝이 시큰해지는걸 참아야만 했을테니깐. 씨발 엿같아. *** 결국 나는 후드 얼룩을 다 지우지도 못하고 화장실에서 나와 교실로 들어와 후드를 벗어서 가방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그냥 패딩만 걸쳐 입었고 귀엔 이어폰을 꽂아 내 엠피에 있는 노래들 중 가장 시끄러운걸로 골라 볼륨을 더 높여버렸다. 역시 스트레스 푸는덴 시끄러운 음악이 최고다. 나는 정말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을때마다 시끄러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듣곤했다. 그럴때마다 귀가 병신되는거 같아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노래를 듣고나니까 맘이 좀 풀리는거 같기도 하고. 그 망할놈의 윤두준때문에 내가..에이씨. 나는 그럭저럭 심난한 마음으로 수업을 듣고, 쉬는시간에 이기광의 장현승 꼬시기 대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을 한쪽 귀로 들으면서 한쪽 머리로는 수학 문제를 푸는데 역시..지표와 가수 문제는 너무 어렵다. 아무리 문제 앞에 있는 개념을 뒤져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지표와 가수는 누가 만든거지 미친. 이따가 용준형한테 가서 물어보고 집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그래서 기광이의 말의 반을 못들었다. 하지만 이새낀 매번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깨방정스타일이니까 언젠간 지금 했던 이 얘길 나중에 또 할테고 그건 그때 가서 들음 되겠다 싶어 모르는 문제는 빨간색연필로 별표를 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야..아 나 지금 존나 떨려. 어떡해. 지금 1학년애들 학원 끝나는 시간 맞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1학년이 우리랑 같은시간에 끝난다고?" "아까 어떤 선생 붙잡고 물어봤는데 1학년 심화반은 우리랑 같은 시간에 끝난대. 아 그럼 이제 나오겠지? 아 어떡하지 그냥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지? 첨부터 번호를 따는건 넘 없어보여. 아 존나 미치겠네. 아 어떡하냐 요섭아. 나 원래 이런스탈 아닌거 알지. 나 왜이렇게 하찮아졌지? 아 진짜..아떨려." "야. 좀 닥쳐. 존나 깨방정새끼. 시끄러워죽겠네. 나 이거 모르는 문제 가서 물어보고 올테니까 잘하고있어." 나는 팔에 끼워뒀던 수학 문제집을 펼쳐들면서 교무실로 가려는데 기광이가 날 잡았다. 뭐 어쩌라고. 그따위 슈렉에서 나오는 장화신은고양이가 짓는 표정 하지마. 하나도 안귀여워 병아. "야!! 너 가게? 같이 있어줘야지!!!" "야 내가 걔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내가 니옆에 있음 뭐라고 생각하겠냐. 머리가 있음 좀 생각을 해. 야 온다. 잘해라. 나 교무실 가있을테니까 끝나면 와." "야!!!야 양요..." 나는 계단앞에 서있는 기광이를 버리고 교무실로 들어왔고 내 이름이 끝까지 불리지 않은거 보면 그 사이에 장현승이 나타난것 같았다. 뭐 기집애들도 다 넘어오는데 사내라고 안넘어올까. 행운을 빈다 친구. 그나저나 용준형이랑 윤두준은 얼마나 친한사이길래 저렇게 히히덕 거리면서 떠들고 있는거지. 남 속도 모르고. 아 짜증나. "..저.." 내가 용준형한테 다가가자 두명이 동시에 날 쳐다봤고 내 눈이 용준형에게로 향해있자 윤두준은 헛기침을 하면서 살짝 떨어져 인터넷 가십 기사만 들춰보고 있었다. 망할새끼. "어. 왜!" "저 이해 안가는 문제가 있어서요. 이거.." "아..지표와 가수? 잠깐만. 선생님이 좀 풀어보고.." 용준형에게 문제집을 맡긴뒤 괜히 뻘쭘해진 나는 교무실을 쓰윽-둘러보는데 이 안에 있는 선생들 다 합쳐봐야 10명도 안될것 같았다. 뭐 워낙에 큰 학원이라 학교처럼 학년별로 선생님들을 나눠 가르치고 있고 가끔은 학년 관계 없이 선생님들이 가르치고는 있긴하지만 10명도 안쓰는 교무실이 이렇게 호화로워도 되나.. 각자 칸막이 쳐져있는 책상에다 널찍널찍 한 간격으로 교무실 한켠에는 싱크대도 있고 커피포트도 있고 간단히 라면정도는 끓여먹을만한 버너도 있었다. "아 맞다. 최재경 이번에 제대파티한다는데 너 갈거야?" 가만히 마우스만 심심하게 굴리던 윤두준이 열심히 샤프로 문제를 풀고 있는 용준형에게 말을 걸었고 용준형은 여전히 문제에 집중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걔 벌써 제대야? 몰라 언젠데." "토요일. 가자. 그때 재경이 여자친구도 온대." "그럼 그 여자친구 친구들도 싹 불러서 오나?" "그럴지도. 걔 여자친구 여대 다닌대. 어딘진 모르겠고." "..오..대박. 그럼 가야겠네. 아 씨발 윤두준 좀 닥치고 있어. 안풀리잖아." 지들끼리도 욕하면서 나랑 기광이가 욕하는거 가지고는 뭐라고 하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둘이 대화하는걸 쭉 보자니 그냥 단순히 학원동료선생은 아닌거 같고 뭐랄까 오래전부터 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럼없이 윤두준을 대하는 용준형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짜증도 나고..질투도 나고.. 에이씨. 그냥 학교 선생한테가서 물어볼걸 그랬나.. "아. 풀었다. 요섭아 일로 와봐." 용준형은 자기가 푼 연습장을 북 찢어 새 연습장에다 문제를 간추려서 적고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들으려고 했으나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윤두준 때문에..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매사에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관심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영 아이러니한인물이었다. 윤두준은. "..자. 이해가 가?" "..아..아.네. 감사합니다." "어. 그래 잘가. 내일보자." "안녕히계세요." 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를 뒤로한채 그냥 문제집을 덮어서 책가방에 넣어버렸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 둘의 대화가 내 걸음을 살짝 멈추게했다. "너 소개팅 안할래?" "미쳤냐 새끼야. 내가 그런데 관심두는거 봤냐?" "너 장현우..잊을때도 되지 않았냐?" "..닥쳐.걔..이름 꺼내지말랬지 용준형." 나는 서둘러 교무실에서 나가야된다는걸 알았지만 그 둘의 대화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싸늘해지는,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화를 억지로 참고 있다는게 눈에 선했다. 나는 갑자기 차가워지는 분위기에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는 문제집을 억지로 구겨서 넣은 뒤 도망치듯 교무실에서 나갔고 밖에서 기다리고있는 기광이가 나를 부르는데도 나는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장현우? 분명 남자이름인데, 용준형은 그 이름을 꺼내면서 윤두준한테 잊으라고 얘기를 했다. 근데 거기다가 윤두준은 화를 냈다. 뭐지..뭐지 장현우는 누구고 뭔데 그렇게 화를 내는거지. 나는 궁금한거 투성이였지만 물어볼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무슨 소설같은 스토리에 애써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그제야 옆에 있던 기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인사는 성공한모양인지 입가엔 미소가 싱글벙글이었다. 좋겠다 너는. 니가 구워먹고 삶아먹을 수 있는 어린애 좋아해서. #4. "또 윤두준 생각하냐?" 학교에서도 하루종일 그 생각밖에 없었다. 장현우..장현우.. 장현우는 대체 누굴까. 대체 누군데 그렇게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굳어버렸을까. 대체...누구지.. "야. 장현우라는 이름이..남자이름 같지?" "그럼 여자이름이겠냐?" "..그치? 남자..이름이지...남자..겠지?" "왜이래 또. 아 맞다. 나 방금 현승이랑 인사하고왔지롱~" 어쩐지 기분 좋아보인다했다. 기광이는 브이를 눈가에 그리면서 생글거렸고 어.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나는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씨발.짜증나. 장현우건 뭐건..내가 왜 신경써야되지? 아짜증나진짜. "야. 너 그러지말고.그냥 들이대." "뭐?" "야. 내가 오래살진않았지만 너보단 연애경험이 많잖냐? 다양한 애들이 있어요. 순진한애들부터 시작해서 볼장다본애들까지. 근데..찍으면 넘어온다고. 그러니까 무슨말이냐면. 계속 끈질기게 들러붙으면 진짜 니가 싫지 않은 이상 상대는 넘어온단소리야. 이 엉아의 말씀을 알아듣겠냐? 그러니까 되든 안되든 들이대고 보라고. 언제까지 뒤에서 끙끙 앓을건데. 진짜 쪽팔릴때까지 들이댔는데 안되면 그건 인력으론 어쩔수 없는거야. 최선을 다해보라고. 그래놓고도 안되면 싹 잊어. 그리고 그렇게 했을때 포기해야 잊는것도 제일 빠르고 덜 힘들다?" 새끼. 오랜만에 진지한 고민상담을 해준 이기광이다. 사실 공부쪽에선 내가 이새끼한테 져본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연애쪽으로는 항상 기광이가 내 형 같았다. 요 며칠사이엔 장현승때문에 쩔쩔 매는 이기광을 보면서 너도 어쩔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말도 트고 인사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는걸 보니 나보단 훨씬 나은건 분명했다. 나는..그 사람한테 다가가고 싶어도 자꾸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커다란 벽 같은게 있어서 다가가는게 힘들었다. 그리고 한번도 누군가한테 다가가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되는건지도 나는 모든게 다 서툴렀다. 괜히 들이댔다가 거절당하면 쪽팔리고 무엇보다 그 얼굴을 다시 못볼까봐 무섭고 두려웠다. 아직은 얼굴만 보는것만으로도 좋은데.. "너 지금은 윤두준새끼 얼굴만 봐도 좋지?" "..뭐?" "사람을 좋아해본적도 없고, 누구한테 대쉬한적도 없는 새끼한테 내가 뭘 바라겠냐. 너 지금은 윤두준새끼 얼굴도 제대로 못쳐다보잖아. 행여나 눈 마주칠까 몰래 몰래 훔쳐보고 뒷모습만 빤히 보고..너 윤두준 수업때 내내 얼굴 빨간거 알아? 그래놓고도 윤두준이 눈치 못채는거 보면 그새끼도 어지간한거 같더만. 야. 근데..얼굴만 보고 만족하는 사랑은 없다?" 뭐라는거야.이새낀...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사랑? 지랄하지말라그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사람이라는건 욕심이 끝이 없는 동물이거든. 그러니까 지금은 얼굴만 봐도 좋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손 잡고 싶고 손 잡게되면 뽀뽀하고 싶고 그게 키스가 되고 결국은 같이 자고 싶은거거든. 사랑하는 사람 얼굴만봐도 좋다는거? 너 그거 언제까지 갈거같냐. 지금은 니가 잘 몰라서 그런거 같은데 어쩌다가 그새끼가 니손 잡아줘봐. 너 그다음부턴 계속 손 잡고 싶을걸? 얼굴만 봐선 만족이 안될거라고. 그러니까 니 마음이 어떤지를 똑바로 생각하고 들이대. 니가 확실하면. 끝까지 해봐. 니가 할 수 있는 모든걸." 사실 이기광의 말이 맞다. 지금은 그 사람의 얼굴만 보고 뒷모습만 보는것만으로도 좋지만 아직도 내 손엔 그사람의 손과 살짝 스쳤던 그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사람이랑 손 잡는거, 같이 있는거만 생각해도 온몸이 짜릿짜릿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미 내 마음은 시작된거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커져버려서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거..한번 해보지뭐. 했다가 안되면..학원 끊고 얼굴 안보면 되지. 씨발. 에이씨. **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야. 밑져봤자 본전이니까..그래. 해보자. 아씨..근데 떨려..어떡해.. 오늘 이기광은 현승이랑 저녁 먹고 학원 오기로 약속했다고 먼저 가버렸는데.. 새끼 언제 그렇게까지 발전한건지. 아..어떡하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문제 질문하러 가는거야. 그래 그냥 그거면 되는건데. 어제 용준형한테 물어봤던것처럼 그냥 물어보면 돼. 소심해지지말자. 후... "뭐하냐 여기서." "...에?!" 교무실 문짝 옆에 바짝 기대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놨다를 수십번 반복하고 있는데 귓가에서 엄청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몸이 더 먼저 반응한다. 이게 누군지 알기전에 몸이 먼저 알았다. 얼굴쪽으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랄까. "..아..저 선생님한테 물어볼게 있어서요." "나? 뭐?" "..아..이 문제가 이해가 안가서..." 뭐야. 문제집 어디갔어!? 왜 빈손이지? 헐..씨발 새됐다. "문제집은 어딨지?" "..아..저 그게..두고 온거..같아요. 금방 가서 가져올게요!!!" 아 진짜..또라이새끼. 모르는 문제가 있다면서 문제집을 두고 오면 어떡하냐 병신아. 근데..지금 윤두준 혹시 웃은건가.. 저건 분명 비웃음이 아니었다. 뭔가 진짜 재밌어서 웃는 웃음인거 같은데... 나때문에..웃는건가.. "건물 옥상에 있을테니까 물어보고 싶으면 거기로 오던가." 윤두준은 그대로 뒤를 돌아서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계단 위로 냉큼 올라가버렸다. 나는 그자리 그대로 서서 아직까지도 쿵쿵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옥상 위라고 하면 애들은 별로 없을거였고..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바로 교실로 튀어들어가 국어문제집을 들고 옥상으로 질주했다. 아마 이렇게 달리기 시험을 봤으면 1등 먹었을지도 모른다. 쿵- 옥상문이 잘 안열려서 몸으로 힘껏 밀다가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몸도 같이 옥상 바닥에 처박혔다. 아 무릎...무릎이 딱 두갈래로 쪼개지는거 같다. 존나아프잖아!? 아..찌릿찌릿거려... "..뭐하냐 너는. 문고리도 안돌리고 문 여는애가 어딨냐 진짜." 담배를 피고 왔는지 담배향을 알싸하게 풍기며 다가오는 윤두준은 내가 바닥에 쳐박혀서 무릎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꼴을 쭈그려앉아 가만히 감상하고만 있었다. 일으켜주지도 않고!!!! 망할인간... "뭐가 그렇게 급해서 뛰어서 왔냐? 일어나봐." 윤두준은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이 사람의 손을 가까이서 보니 하얗고 긴게 고생이라곤 해보지 않은 손 같았다. 뭐 고생 안한 손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을테지만 어쨌든..무엇보다 긴 손가락이 너무 예뻤다. 나는 그사람의 손을 살짝 잡고 일어나는데 아!!! 아무래도 무릎이 정통으로 바닥에 내리 꽂힌거 같았다. "어! 야 괜찮냐?" 나는..나도모르게 윤두준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건 절대 아니다. 나는 왼쪽 무릎이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는데 그걸 윤두준이 붙잡아준것 뿐이었다. 근데..난 또 왜 얼굴에 피가 몰리는것 같이 화끈거리는거지? 절대..티를 내면 안된다 절대. "조심성이 그렇게 없냐. 걸을 수 있겠어?" "아. 네." 나는 윤두준이 내 어깨를 감싸고 내 손을 붙잡아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심장이 미친거 같아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치만 왜 이놈의 다리가 말을 안듣느냔말이다. 왜!!!! "..아.." 걸으려고 다리에 힘만줘도 왼쪽 무릎이 찌릿찌릿했다. 아씨..진짜 미치겠네. "야. 봐봐. 엄청 세게 부딪친거 같긴 했는데.." 윤두준은 쪼그리고 앉아 내 바지를 걷어올렸고 나는 뭐하냐며 말리려고했지만 윤두준은 꿋꿋이 내 바지를 무릎까지 들어올려 무릎을 바라보았다. "..피멍들었네 벌써. 야 만져볼테니까 아프면 말해봐." 윤두준은 손가락으로 내 무릎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이 양반아 그렇게 누르면 안아픈 무릎도 아프겠네. 나는 그래도 괜찮은척 하려고 입술을 앙 다물고 아픈 척을 안했더니 윤두준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뼈 부러진건 아닌거 같다. 뭐 무릎뼈가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뼈는 아니니까. 그냥 좀 앉아서 쉬면 될거 같은데..의자가..아 기다려봐." 학원 옥상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냥 초록색 페인트 칠 되어있는 바닥에다 사방으로 둘러쳐진 높은 시멘트 벽이 다였다. 저쪽에 창고 같이 생긴게 있는거 같긴 한데 윤두준은 날 그대로 세워놓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안나오더니 켁켁 거리면서 의자를 끌고 나왔다. 아니..뭐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어차피 내려가서 앉아있음 그만인것을 왜 먼지까지 마셔가면서.. "야. 앉아." 나는 엉거주춤 윤두준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고 윤두준은 손을 탁탁 털고는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오늘은 짙은색 청바지에 옅은 파란색 셔츠, 그리고 남색의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뭘 입어도 그냥..그림이었다. 아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거지. "모르는 문제가 뭐냐." "아..문제가....어? 문제집 갖고 왔는데..어딨지.." 나는 또 내 손에 들려있지 않은 문제집에 당황했고 어디갔냐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까 바닥에 내리꽂히면서 문제집도 같이 바닥에 꽂혔는지 저 멀리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씨 문제집 더러워지는게 제일 싫은데. 나는 일어나서 문제집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윤두준이 먼저 그쪽으로 걸어가서 문제집을 들고 나한테로 왔다. "어딘데." "아..잠깐만 주세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미 표시해놨던 페이지를 찾았고 서있는 윤두준을 올려다보며 이거요.라고 얘기했다. 이에 윤두준은 왼쪽 손을 허리춤에 기대고 서있다가 나한테서 문제집을 받아들면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왜웃어. 내가 웃긴가... "아. 미안. 그냥 좀 닮아서." "..뭐가요? 뭐 닮았는데요?" "..눈 똥그란 강아지." 뭐..? 강아지? 그래 개라고 안한게 어디냐만은..그럼..내가..좀 귀엽다는건가... 사실 내가 잘생겼단 말은 못들어봤을지언정 귀엽단 얘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봤다. 유난히 눈이 동그란게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큰 요인인거 같긴한데 나는 동그란 눈이 싫었다. 기광이는 눈이 작고 약간 째져서 섹시하단 말도 많이 들어봤고 매력적이라는 말도 들어봤는데 나는 오로지 귀엽다는 말 뿐이었다. 난 그래서 기광이의 눈이 너무 부러웠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강아지라고 하니까 뭔가 기분이 묘했다. 평소같았음 듣기 싫었을 말일텐데도 왜이렇게 기분이 좋지.. 나는 계속해서 배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참았다. "그렇게 눈 똥그랗게 뜨고 있으니까 그거 같다. 슈렉인가 거기 나오는 고양이새끼. 눈 엄청 똘망똘망한..." "..별로 안닮았는데.." "닮았어. 니가 나 올려보는데 그거랑 똑같앴어. 좋겠다. 귀여워보여서."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서 문제집을 받아가 유심히 문제를 바라봤고 나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올려다봤다. 이건 분명 나한테 칭찬한거고 내가 이사람을 웃게 만든 거였다. 이건 분명..좋은 신호야!!!!! "아..이거. 이거 봐봐." 윤두준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손으로 문제집을 바치고 나머지 다른 손으로는 직접 찍어가면서 문제를 설명해줬다. 사실 하나도 귀에 안들어오고 그 얇고 긴 손가락에만 시선이 가서 무슨 말인지는 못알아 들었지만 이해 하겠냐는 말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윤두준은 내머리를 한번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이제 고삼인데 종합학원 다녀도 되냐?" "..아..그냥..." "어디 갈거야 대학?" 나는 내 근처에 있는 벽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려고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무는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한테 던졌던 철제라이터의 뚜껑을 열더니 비스듬히 얼굴을 돌려 담뱃불을 붙이고는 후-하고 빨아들였다 밖으로 내뱉는 윤두준.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했을때의 얼굴은 예술이었다. 콧날도 선명하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눈매가 너무 멋있었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얼굴 선이라 그런가.. "연대 경영이요." 누구때문에 꿈이 바뀌었다. 나는 사실 정치외교학과를 가서 아버지처럼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같은 정치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철저히 부유층의 편에 서서 나라를 다스리는 아버지와 나는 가치관이 달랐다. 나는 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봤자 너도 있는 집 자식이면서 서민의 고통을 알긴 아느냐 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마 할 말은 없을거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정치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는 분명히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지만 나와는 생각이 다른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누구때문에 꿈을 바꾸었다. 꿈까지 바꿀정도로 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나는 또다시 대답을 못할것이다. 정치인이라는 꿈은 말그대로 어린 꼬마아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꿈과 매우 흡사한 그런 상상일뿐이었으니까. 그냥 막연히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거였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정치인이 되겠다 라고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 꿈이 바뀌게 된게 온전히 윤두준 때문은 아니라는거다. "너처럼 노는 애가 내 후배님이 되시겠다고?" 윤두준은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는 나를 쳐다봤고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무시를 당한거 같아 화도 나 괜한 오기가 생겼다. "내가 선생님 후배 되면. 뭐 해주실건데요." "들어오면 니가 좋은거지. 나랑은 상관없잖아?" 저렇게 꼭 상관없다. 너랑 나는 관계가 있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저 말을 들을때면 괜히 눈물부터 차올랐다. 별말은 아닌데 그런말들이 왜이렇게 서운한지. "먼저 저 무시하셨잖아요. 제가 들어가면 어떡하실건데요." "..니가 말하는 소원 하나 들어줄게." "무조건이죠?" "까불어. 내가 생각했을때 내 능력 안에서 해줄수 있는건 해주겠다고. 뭔데. 말해봐." 윤두준은 담배를 한번 깊게 빨더니 바닥에 떨어뜨리고 신발로 짓밟은 다음에 안보이게 바닥에다 숨겨놓았다. 나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문제집만 꼭 붙들고만 있었다. 오직 딱 하나만이 내 머릿속에서 웅웅 거렸지만 그걸 지금 얘기할 순 없었다. "..지금은 안돼요. 나중에 합격장 갖고 가서 말할테니까 그때 꼭 들어주셔야돼요." "맘대로. 너 근데 좀 괜찮냐? 일어날수있겠어?" 윤두준은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었고 나는 이젠 좀 괜찮아진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예 안아픈건 아니었지만 아까보단 훨씬 덜했다. "네 괜찮아요." "그렇담 다행이고. 나 먼저 내려간다. 또 넘어지지말고 천천히 내려와." 그순간 나한테서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광이의 말만 떠올랐을뿐이었다. 최선을 다해보라는 말. "선생님." 나는 내려가려는 윤두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고 그는 자리에 멈춰 나를 바라봤다. "번호 알려주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윤두준한테 넘겼고 내가 뭘한거지 라고 생각했을땐 이미 늦어있었다. 이미 내 핸드폰은 윤두준한테 넘어간 상태. 아이씨. 그냥 농담이었다고 그러고선 핸드폰 뺏어버릴까. 표정을 보니까 싹 굳은게..느낌이 안좋았다. "..나 원래 번호 아무한테나 안넘기는데.." 윤두준은 또다시 아까처럼 피식-하고 바람빠지듯 웃으며 버튼을 꾹꾹 눌러 직접 저장까지 해주는것 같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의 폴더를 닫아 나한테 넘겨주었다. 이게...설마..꿈은 아니겠지. 꿈이면..죽여버릴거야 진짜. "..이따 보자." 윤두준은 내 볼을 살짝 꼬집고는 그대로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갔고 그가 아프지 않게 꼬집고 간 내 볼은 이미 뜨거워져있었다. 내 볼을 꼬집을때 윤두준의 눈빛은 뭔가 따뜻해보였다. 내 착각이겠지만. 그래 착각인게 분명하지만 내 심장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말 남들이 내 심장소리를 들을만큼. 나는 살며시 손으로 내 볼을 만져봤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온기에 나는... "야호!!!!!!!!!!!!!!" 나는 왼쪽 무릎이 아직도 아프다는걸 까맣게 있고 옥상에 방방 뛰고 말았다. 아마 원조 깨방정은 이기광이 아니라 나인것 같기도 하다. #5.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내려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내내 윤두준의 수업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왜하필 마지막시간인건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몰래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검색했다. 뭐라고 저장해놨을까. 「윤두준」 정확하게 딱 세글자. 윤두준. 선생님이라던가 멋진선생님 뭐 이딴식으로 해놓았을줄 알았는데 뭔가..딱 그 사람 스타일이 느껴져서 나도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딱딱하고 애교와는 거리가 완전 멀것 같은 스타일. 그래도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좀 더 깊게 친해지면 따뜻하고 애교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런 속내를 알리기 싫어 몇겹의 껍질을 두껍게 싸고 있을 뿐이지. "너 뭐 좋은일있냐?" 쉬는시간에 기광이가 뽑아온 사이다를 먹으면서 실실쪼개고 있자 기광인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물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계속 띄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기광 한테도 좋은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너야 말로 무슨 일 있냐?" "..현승이랑 문자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이 형님이.." "벌써?" "좋아한다는 말은 당근 못했지. 그냥 친해지고 싶다고 내가 그냥 동네 형이 잘해주듯이 해주니까 얘도 친해지고 싶었나봐. 문자하는데..아존나귀여워진짜. 깨물어서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싶다..아! 문자왔다." "..천하의 이기광이..문자에 목매는 날이 오다니...진짜 어이가없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한 기광이를 빤히 쳐다봤고 그때 나도 윤두준의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그래도 아직 같은 학원에 있는데 문자를 하기엔 너무 쑥쓰러운 일이었기에 문자는 이따 집가서 날려야지 싶어 조용히 핸드폰을 닫고 시간표를 보는데...윤두준의 시간이었다. 하루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시간. 이 50분 때문에 하루를 산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이미 이 사람은 내 안에서 너무 크게 자리잡아버렸다. 그럼 뭐해. 좋아한다고 떳떳이 말도 못하는데. 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옥상 사건을 계기로 나는 조금 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래 까짓거. 수업은 한창 진행중이었다. 다들 윤두준의 판서에 계속 고개를 들었다내렸다하면서 문제집에 필기를 했고 나역시 마찬가지로 꼼꼼히 필기를 해 놓았다. 행여나 그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귀를 쫑긋 세워가면서 열심히 집중했다. 이렇게 하다간 이번 모의고사에서 언어 1등급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건 다 그럭저럭 하겠는데 언어는 왜그렇게 취약한지..나는 열심히 수업을 들으며 옆에 앉아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생글한표정으로 필기를 하는건지 뭐를 끄적거리는건지 알 수 없는 기광이를 쳐다봤고 그의 한손엔 핸드폰이 꼭 쥐어져있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싶다가 내가 윤두준을 좋아하는 그것만큼이겠지 싶은 생각에 기광이의 어깨를 두어번 친뒤 공부 하라며 말해준 뒤 다시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윤두준은 교실 사이의 복도를 왔다갔다거리면서 현대시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나는 빨간펜 파란펜 이것저것 바꿔가면서 최대한 복습하기 편하게 필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쓰윽-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그게 기광인줄 알고 이새끼가 미쳤나 하고 기광이를 째려보는데 이새끼의 두 손은 여전히 문자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하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다 설마 싶어서 반대쪽 옆을 보는데 윤두준이 다시한번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무렇지않게 교실 복도를 걸어 교탁앞으로 가 문제집을 내려놓고선 칠판에 필기를 하기시작했고 갑자기 그가 나한테 안보이던 관심을 보이니까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수업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머리 감고 나서 에센스도 뿌리고 와야지 싶은 생각만이 머릿속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나 오늘 현승이랑 영화보러 간당~~부럽지?" 한층 더 가까워진 수능때문인가, 수능한파니 뭐니 어쨌든 하루가 다르게 날은 점점 얼어붙었고 추운걸 워낙 싫어 하는 나는 교복 셔츠만 입고 회색 후드 집업을 입고 거기다가 하얀색 목도리도 매고 또 거기다가 나이키 남색 패딩점퍼를 갖춰 입었다. 맘같아선 다리에도 뭔가를 꾸역꾸역 입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는 탓에 나는 갑자기 불어오는 강풍에 으..하면서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손을 더 깊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근데 내가 이렇게 더 추워하는건... 이 망할 이기광새끼 때문에. 이게 어디서 자랑질이야. 사람 속쓰리게. "그래서 학원 안가?" "아니. 학원 끝나고 심야영화 보러 가기로 했지롱~~~~" 기광이는 진짜 신나는지 코끝이 빨개가지고는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얼굴은 동그랗고 눈도 동그란게 귀여운것 같긴 했지만 이기광이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에 비하면..특출나게 뭐가 잘난것 같이 보이진 않던데... "그럼 버스 끊기지 않냐?" "야. 당연히 택시타고 가야지. 그래서 오늘 용돈 좀 두둑히 받아왔다는거 아니냐." "미친새끼." 버스에서 내려서 십분을 더 걸어가야되는 학원까진 너무 멀었다. 왜이렇게 바람이 쳐불고 지랄이야..사람 짜증나게. 이새끼는 계속 문자를 하면서 후후후 손시렵다 하면서 내 목에다가 손을 넣었고 난 진짜 이새낄 길바닥에서 죽여버릴뻔했다. 어우 짜증나! "..으..춥다." 나는 학원 현관문을 열고 냉큼 들어오면서 계속 덜덜 떨었고 기광이는 그렇게 중무장을 해놓고 왔으면서 뭐가 그렇게 춥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래서 나는 짜증나서, 아니 무엇보다 옆에서 계속 자랑질하며 싱글벙글인 그 꼴을 보기 싫어서 암말도 없이 그냥 휙 째려보고는 쿵쿵쿵 계단에 올라갔다. "야 같이가! 삐졌냐?" "꺼져. 그래 어디 얼마나 오래가는지 보자. 너 박수경이랑은 정리했냐?" 기광이는 다다다다 뛰어올라오면서 내 어깨에 척-하니 팔을 얹고서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당연한거아니냐. 나한텐 우리 현승이뿐이지롱." "..짜증나 너." 나는 짜증난다며 내 어깨에 무겁게 올라와있던 이기광의 팔을 툭 던지고는 나머지 계단을 쿵쿵쿵 올라가버렸고 야 양요섭!!하면서 쫓아오는 기광이가 보였지만 그냥 쌩깠다. 나쁜새끼. 어따대고 자랑질이야. 남은 병신같이 이러고 있구만.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교무실을 보면서 나는 저 안에 혹시나 윤두준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두근두근댔다. 병신같이 이젠 교무실만 봐도 가슴떨리냐. 난 이런 병신같은 내가 너무 싫어서 아까보다 훨씬 더 짜증났다. 에이씨. "..저.." 나는 왼쪽으로 꺾어 교실로 가려는데 그때 어떤 여자애가 나한테 수줍게 다가왔다. 뭐야 이건또. "..네?" "..저 번호좀.." 나는 이런 일이 닥칠때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여자는 관심에도 없었을뿐더러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매몰차게 거절해버리기엔 나한테 호감있어서 다가온 상대한테 예의가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번호를 주자니 희망의 여지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해서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나는 어떡해야될지를 몰랐다. 물론 이런 당황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는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네? 아..." 나는 잠시동안 망설였다. 여자애는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길이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도 하얗고 나름 귀염상이었다. 그냥 평범한 남자애들이었음 좋다고 했을만한 얼굴이랄까. 나한테 번호를 물어보며 핸드폰을 내미는 이 여자애의 얼굴은 수줍어 보였고 내 얼굴은 쳐다도 못본채로 바닥에 고개를 숙인채 있었다. 그래서 난 아..난 어떡해야되나 싶어 일단 핸드폰을 받아들고서는 차마 번호를 못누르고 있는데.. "안승희?" 나는 별안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 옆을 쳐다봤고 그 곳엔 맨처음 봤던 그의 모습처럼 깔끔한 수트차림의 윤두준이 서있었다. 아..뭐야. 내가 잘못한것도 없는데 무슨 애인 냅두고 작업하다 걸린것마냥 찔끔찔끔 찔렸다. 뭐지 이따위 기분은. "..아. 선생님!" 여자애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환하면서도 부끄러운듯 웃었고 윤두준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그러니까 옛날처럼 그런 무심함과 무뚝뚝한것을 얼굴에 담아 나를 보더니 내 어깨에 팔을 턱-하니 올렸다. 그리고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옆에서 기광이는 흥미로운 듯 구경만 하고 있었고. 이새낀 왔으면 도와주질 못할망정. 천하의 빌어먹을놈. "안승희 지금 얘한테 번호따는거?" "..아..네..." "얘 영 불량하게 보이지 않냐? 얘 은근히 센애야. 머리도 노랗지 얘 담배도 핀다?" "아 선생님! 좀!!" 나는 자꾸 담배담배 거리는 그 소리가 듣기싫어 나를 감싸안듯 그러고 있는 윤두준을 째려봤고 윤두준은 나를 한번 흘끗 보더니 승희라는 여자애한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따로." "...네?" "내가 얘랑 좀 친해서 아는데..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래서 아까부터 망설인거 같은데..아니야 양요섭?" 왜이래 또... 나는 이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일단 이 여자애부터 돌려보내야겠단 생각에 내가 갖고 있던 핸드폰을 돌려주며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여자애는 아 그런줄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하고서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버렸다. 이에 나는 계속 신경이 쓰이는 이런 찜찜한 마음때문에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봤고 윤두준은 내 어깨에 언제 팔을 올려놨냐는 듯 매정하게 확 뺀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이번엔 귀걸이가 바뀌어있었다. 은색 테두리에 가운데 검은색 원석이 박혀있는 디자인이었다. 멀리서 봐서 잘 안보였지만 은색 테두리에 불가리 라고 쓰여있는것 같았다. 역시 수트엔 저런 시크한 귀걸이지..아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좋겠다? 여자애한테 번호나 따이고?" "..제가 따이고 싶어서 따인거 아니거든요." "어련하시겠어요. 맨처음부터 여자 꼬시려고 학원 들어오셨는데..어떻게..만족은 하셨나?" 나는 그런 비꼬는 말투에 빈정이 상해 말없이 윤두준을 째려봤고 윤두준도 나를 턱하니 살짝 내려다봤다. "앞으로 종종 이런일 있겠네? 이런일 있으면 나 좀 불러라.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거리했네." "..왜그러시는데요." "뭐." "지금 비꼬시잖아요. 뭐 마음에 안드세요? 제가 모르는 애한테 번호 따이고 그러는거 맘에 안드세요?" "너랑 나랑 무슨 관계라고 그런걸 맘에 들고 안들고를 따져? 난 그냥 재밌어서 그러는건데?" 나는 진짜 이대로 윤두준앞에 서있으면 서운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것 같아 그대로 뒤돌아서 교실로 가려는데 내 손목을 윤두준이 낚아채듯 잡아 나를 세웠다. 나는 그래도 지금만큼은 윤두준의 얼굴은 보고싶지가 않았다. 자꾸만 우리가 무슨 관계냐. 별사이 아닌데 왜그러냐. 이딴 말을 들을때마다 윤두준이 나한테 조금만 잘해줘도 금방 좋아지고 조금의 기대를하고 있었던 내가 너무 병신같고 짜증나서 이딴거 다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둬지지가 않아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지금이 딱 그런 마음이었다. "너 왜그래." 지가 사람 하나 병신 만들어놓고 왜이래라니. "교실 들어갈게요. 놔주세요." "내가 뭐 잘못한거 있어?" "..됐으니까 좀 놔주시라구요." 어느새 눈물이 툭툭 하고 내 점퍼 위로 떨어졌고 난 그순간 윤두준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해야했다. 그 사람 앞에서 우는건 진짜 너무 쪽팔리니까. "..너..우냐?" "아 됐으니까 좀 놓으시라구요!!" 나는 확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도망치듯 교실로 향해 걸어갔고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기광이가 야..야 같이가. 하면서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교실로 들어와 눈물을 쓱 닦고 의자에 앉아 탁탁 신경질적으로 문제집을 꺼내는데 어느새 따라온 기광이가 살살 내 눈치를 보면서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울어 또 병신같이." "아는척하지마. 쪽팔려." "원래 걔 성격 그런거 뻔히 알면서 왜 또 상처를 받어. 원래 말하는거 싸가지없잖아 그새끼. 아니 존나 웃기네? 지가 와서 끼어들어놓고 맘에 안든다는듯이 비꼬는건 뭔데. 아니 막말로 니가 걔한테 번호 땄냐? 니가 잘못한건 아무것도 없구만 혼자서..아 존나 개싸가지새끼." "입다물어 이기광." 나는 또 윤두준을 욕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무표정으로 기광이한테 말했고 그냥 바로 입을 꾹 다문 기광이는 지도 똑같이 문제집을 책상위에 올려놓으면서 계속 흘끗거리고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진작에 눈물이 안나왔길 망정이지 청승맞게 계속 울었음..안그래도 오늘 윤두준 수업도 있건만. 나는 정말 진심으로 윤두준을 보기가 싫어 국어 시간이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니까 그냥 빠질까라고 고민도했다. 사람 좋아하는 일도 공부처럼 딱딱 답이 안나오면 해설지보고 이해하고 다시 풀어서 내껄로 만드는 그런거였음 좋겠다. 하기 싫으면 좀 미뤘다가 하고, 정말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그러고 싶었다. 안좋아하고 싶으면 안좋아해도 됐으면 좋겠다. 사람 마음이란게 정말 마음같지가 않아서 이렇게 누구때문에 자존심 상해도, 상처받아서 눈물까지 나와도 다 참아내고 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난 너무 짜증이났다. 왜이렇게 내 마음이 내마음 같지가 않은지.. "나 세수 좀 하고 올게." "어. 야..추우니까 살살 하고 와라." "어." 찬물로 세수라도 하면 정신이 좀 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기광이는 같이가줄까 싶은 표정이 얼굴에 서렸지만 분위기상 나 혼자 보내는게 낫겠다 싶었는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배웅아닌 배웅을 해줬고 나는 그길로 바로 화장실로 직진했다. 아..맞다. 뜨거운물 안나오지.. 모든게 다 맘에 안들어 이 학원은. 제길. 나는 수돗물을 틀어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얼굴에다 물을 묻히는데 너무 차가워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우 진짜 추운건 딱 질색인데. 세수를 두어번 더 하자 내 손은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고 거울로 얼굴을 보니 볼도 빨개져있었다. 그래도 찬물로 세수를 하니까 정신이 좀 드는것 같기도 하고..아 드럽게 춥네 진짜. 나는 마지막으로 물을 한번 더 묻힌뒤 물기를 닦으려고 뒤를 돌아 휴지를 뽑으려는데 누가 내 정수리에 부딪쳤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누군지 몰라 대충 미안하다고한뒤 휴지를 뽑으려고 걸어가려는데 그 사람은 내 손목을 잡더니 내 얼굴을 휴지로 닦아 주었다. 누구야. 이기광인가.. "이기광 병신아. 왜 안하던짓이야." 애가 나름 거칠게는 보여도 정도 많고 인심도 좋은애라 가끔 이런 귀여운 짓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잘해주는걸 못이기는척 받아주려고 얼굴을 빤히 들고 물기가 다 닦일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어느정도 다 닦인것 같아 눈을 뜨니.. "그 입 언제 고칠래." 사람 여러번 갖고 노는 윤두준. 그렇게 사람 마음 후벼파놓고 울릴땐 언제고 이제와선 얼굴까지 닦아주냐. 나는 아까 생각이 다시 나서 그냥 아무말도 없이 그를 피해 지나가려는데 아까처럼 또다시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왔다. "너 아까 나때문에 울었냐?" 나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고 윤두준은 손목을 잡아 끌어 자기 앞에 나를 세워 놓은 뒤 내 양 어깨를 잡았다. "말해봐. 너 나때문에 울었냐고." 그제야 보는 윤두준의 얼굴. 무언가 굉장히 화가난 듯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표정이긴 했어도 지금과 같은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것 같고 화가난것 같기도 하고..감정을 좀처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왜 맨날 아무 사이 아니라고 너랑 내가 무슨 사이냐고 그렇게 말해요?" 그 생각을 하니까 또 서러워서 눈물이 차올랐고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질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쓱 닦았다. 아씨 쪽팔리네 진짜. "뭐?" "맨날 그런식으로 얘기하면서 왜 나한테 잘해줘요? 선생님 말대로 별 사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말고 내가 뭘 하건 어떻게 지내건 관심 안가지면 되잖아요. 근데 말로는 정말 모르는 사이인것처럼 해놓고 지금와서는 얼굴도 닦아주고 그때 다쳤을때도 의자 가져다 주면서 잘해주고..왜그러는건데요? 나 갖고 노는거 재밌어요?" 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사실 나는 눈물이 절대 많은 편은 아닌데. 그래서 일년에 한번 울까말까할 정돈데 요즘들어서는 뭐 그렇게 서러운 일이 많은지 닭똥같이 눈물이 자꾸만 뚝뚝 떨어졌다. 아무리 닦아내도 계속 차올라서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윤두준은 나를 진짜 병신찌질이라고 생각하겠지. 사내새끼가 아무데서나 질질 짠다고..아 진짜 다른 사람앞에서는 몰라도 윤두준 앞에서는 이래서 울기 싫었는데. 씨발. "..그래서 뭐가 화가 나서 지금 이렇게 울고 있는 건데." 정말 모르는건지. 알면서 모르는척 하는건지.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게 낫지. "..모르면 됐어요. 갈게요." "야." "내가 말해도 선생님은 못알아듣잖아요. 내가 뭐에 화가 났는지 내가 왜 이러는지..모르잖아요. 말해도 모를거면서. 왜 물어봐요 왜." 점점 억세게 잡아오는 손 힘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두준은 이에도 아랑곳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서로 짜증나면 그냥 그만하면 될걸 왜 붙들고 있냐고. 대체. "내가 이해하고 말곤 나중문제고. 말을 해봐. 너 왜그러는건데." "..선생님이 하는 말마다. 본인은 못느끼겠지만..나는 많이 서운하거든요? 또 이말 하면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다구요. 잘해줄꺼면 말로도 잘해주던가. 못하겠으면 나한테 잘해주질 말던가. 왜 섞어서해요. 사람 기대하게." 나는 나머지 한쪽 손으로 그한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몸에 좋은걸 많이도 먹는지 힘이 장사였다. 꿈쩍도 안하는 내 손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는데..니가 상처 받은거면.." "나는요. 세상에서 일부러 그런거 아닌데, 본의 아니었는데. 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일부러 그랬으면 화라도 내겠는데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면 어쩔수없이 사과를 받아들여야되는거잖아요. 그런 변명 할거면 안해도 돼요. 선생님 말처럼 우리는 별 사이 아니니까. 그냥 학원 선생이랑 학생인거잖아요. 어차피 다음달까지만 다니신다면서요. 그이후로 안볼사인데 뭐 그렇게 계속 신경쓰세요. 제가 어떤 말로 상처를 받아서 울든 말든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좀 놔요. 아프니까." 아프다는 말이 통했는지 윤두준은 내 손목에서 자신의 손을 뗐고 나는 그가 나를 놔주자마자 미련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내 진심을 다 표현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근데 난 정말 병신인지 윤두준이 내 손목을 잡고서 나를 못가게 막았다는 그런 사실만으로도 나는 아까 계속 가슴이 쿵쾅 거려 혼났다. 왠지 내가 울었던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사람마냥 행동하게 내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들어서 정말 병신같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 빌어먹을 짝사랑 같은 짓을 계속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옛날엔 짝사랑 노래를 어쩌다 듣다보면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해가면서 사람 좋아해야되나? 나 싫다그럼 안좋아하면 되는거아냐? 라고 생각했었는데..겪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그 기분을 아는법. 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착잡해진 그런 뒤숭숭한 마음으로 교실로 들어왔고 이기광은 하도 내가 안와 나를 찾으려 가려고 했었는 듯 교실문을 열자 마주친 이기광때문에 놀란 마음을 쓸어내려야만했다. "..아까 윤두준 만났어." "우연히?" "몰라. 세수하고 있다가 얼굴 닦을라고 하는데 누가 닦아주길래 나는 니가 나 쫓아와서 그러는건줄 알고 가만히 있었지. 근데 윤두준이었어." "헐..그 개싸가지가 직접 가서 니 얼굴을 닦아줬다고? 세상 뒤집어질 일이네. 그래서 걔가 뭐래?" "..그냥. 왜그러냐고. 지때메 울었냐고." "그래서 뭐라그랬어?" "..몰라. 그냥 말 그렇게 할거면 잘해주질 말던가 왜 말이랑 행동이랑 다르냐고 그랬지. 무슨 사람갖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 쥐락펴락..짜증나 씨발. 내가 왜 그까짓새끼때문에..에이씨발." 나는 답답해서 문제집을 아무거나 뒤적거리고 있다가 그냥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아버렸고 이기광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야..이건..그냥..내 느낌인데. 물론 아닐수도 있어. 근데..내 경험에 의하면 말야..틀림없이..윤두준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것 같아." "..지랄 즐." "아니. 진짜 필이 딱 꽂혔다니까. 야 안그러면 뭐하러 번호따이는 그런현장에 와서 훈수를 둘것이며 우는 너 쫓아가서 달래주고 그러냐?" "거야 지때문에 우는건줄 알았으니까 신경쓰여서 그럤나보지." 나는 아까 세수때문에 촉촉히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탁탁 치면서 말렸고 슬쩍 본 이기광의 표정은 정말로 심각했다. "..내느낌엔...확실한데..아 그새끼 존나 고수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확신이 안서네.." "쓸데없는 생각말고 그시간에 장현승이나 생각해 새꺄." "아..현승이? 현승이는 늘 생각하고 있으니까 걱정마." "아..닭살돋아. 병신새끼." 내말에 교실 뒤집어질 듯 크게 웃은 이기광은 지가 생각해도 쑥쓰러웠는지 뒷목을 긁적이더니 마침 들어온 한국지리 선생님을 보며 급하게 한지 책을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나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을 몰랐다. 그냥 멍하니 있다보니 50분이 훌쩍 지났고 쉬는시간이 왔고 또 50분이 지나고.. 그 두시간의 수업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는지 정신차려보니 머릿속에 남은건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 이시간은 윤두준의 시간이었다. 나는 결국 짐을 차곡차곡 싸기 시작했고 잠깐 현승이를 만나고 왔는지 교실로 들어오던 기광이는 내가 짐을 싸자 놀란 눈을 하고 나에게 달려왔다. "야. 지금 니가 제일 즐거워하는 윤두준 시간인데..집가게?" "어. 너같음 얼굴 보고 싶겠냐. 집에 갈거야." "..야..그래도.." "아 몰라. 너 안가?" "난..현승이랑 영화보러 간다니까.." "아 맞다. 그럼 수업 잘 들어라. 윤두준이..뭐 그럴일은 없겠지만 나 찾으면 그냥 집에 무슨 일 있어서 갔다고 둘러대줘. 나 간다." 나는 빠르게 짐을 챙긴뒤 이어폰을 귀에 꽂은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한번 결정한건 무슨일이 있어도 바꾸지 않는다는 똥고집을 갖고있는걸 아는 기광이는 날 끝까지 말리지는 못하고 야..그래도..라면서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나는 매정하게 간다는 말을 다시한번 남기고 교실 밖으로 나가 교무실을 한번 째려봐준다음에 계단을 차근차근 내려갔다. 그렇게 2층을 내려갈 무렵 누군가 갑자기 내 팔을 잡더니 나를 멈춰세웠고 그 힘에 의한 반동에 넘어질뻔 한걸 그 누군가가 잡아준 덕에 넘어지는 그런 처참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는데..근데 이건 뭐야 또. 오늘 왜이렇게 붙잡는 사람이 많아 짜증나게. "야!!!!!!!" 급하게 뛰어왔는지 윤두준이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하도 당황스러워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뺄 생각도 못한채 가만히 눈만 꿈뻑 거리며 쳐다봤다. 이에 윤두준은 그냥 말없이 한숨을 쉬는것 같더니 내 손목을 아까처럼 꽉 잡아 계단 위를 끌고 올라갔다. 내가 암말도 없이 수업 빼고 도망가는게 화가 나서 그런가..교실로 갈 줄 알았는데 3층까지 올라가더니 3층을 지나쳐 곧장 5층 옥상까지 올라갔고 문을 열어 나를 먼저 들여보낸 윤두준은 곧바로 지가 들어오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순간 느껴지는 찬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고 윤두준은 그냥 까만 수트 재킷만 입고만 있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쿵쿵 걸어오더니 내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우왁스럽게 잡아 뺐다. "너 사람 신경쓰이게 하는데 취미있냐?" 무슨말이야 이건 또. 내가 뭐 어쨌다고. "..네?" "수업 왜 빼." "..그냥..집에 일이 있어서요." "수업 잘 듣다가 내시간 되니까 가는건 무슨경운데?" "갑자기 연락와서요." 따박따박 지지않고 대답하자 윤두준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후-하는 큰 숨을 내쉬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지지않으려고 눈을 크게 떠 윤두준을 올려다봤고 윤두준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착잡하게 서 있었다. "할말있음 하세요." "...내 성격이야." "..에?" 무슨 국어선생이라는 놈이 앞뒤 다 잘라먹고 중간만 얘기하냐. "말 그런식으로 하는거 내 성격이라고. 고칠라고 했는데 안고쳐져. 그러니까..그런거에 일일이 상처받지 마." 나는 이게 지금 무슨말인가 싶어 눈만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가만히 양 주머니에 손을 꽂고 쳐다보는데 갑자기 윤두준이 다가오더니 나를 끌어안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어깨에 양 손을 올리고는 입을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내 앞에서 울지마." 나는 순간 그 말이 너무 달달해서 귓속에서 종소리가 댕-댕-하고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누가보면 아 존나 오글거리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비웃겠지만 나는 이 말이 귓가에 스며들자마자 나는 추운것도 싹 잊고 그대로 멍한 표정으로 윤두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에 윤두준은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한걸음 물러서 한마디를 더 했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가지말고 수업 들어."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옥상에서 내려가버렸고 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기광 말대로..윤두준은 엄청난 고수일지도 모른다. 정말..엄청난 고수. 사람을 쥐고 흔드는데 굉장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윤두준은. #6. 나는 결국 옥상에서 내려와 교실로 컴백했고 다시 돌아올줄 몰랐는데 돌아오자 이기광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 윤두준을 바라봤다. 그렇게 두어번을 나와 윤두준을 번갈아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의 미소를 살짝 흘렸다. 또 헛생각 하고 있겠지 저 또라이.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슬며시 들어와 자리에 앉아 국어 문제집을 펼쳤고 이기광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귓속말로 속삭였다. "뭐야. 간다면서." "..그럴일이 좀 있어서." "..윤두준이 너 불러서 뭐라고 했지? 왜? 뭐래?" "아 몰라 새꺄. 수업이나 들어." 나는 윤두준을 한번 째려봐준뒤 필통에서 펜을 꺼내 수업 들을 준비를 했고 이기광은 아..분명..뭔가 있는데..라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기광이처럼 슬쩍 윤두준을 쳐다보는데 그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순간 마주친 시선에 나는 놀라 먼저 피해버렸다. 쿵쾅쿵쾅. 이제는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정말 기광이 말대로..한번 질러봐야겠다. 이렇게 된 모든건 다 내가 체념하려고 할때마다 나를 쥐고 흔든 윤두준 탓이다. 모두 다. ** 나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그동안 생각만했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리하야 세운 계획은 윤두준 집에 쫓아가기. 아 뭐 그렇다고 스토커처럼 그 집앞에서 맴돌면서 뭐하고 있나 감시를 하겠다는게 아니라 나는 단순히 집이 어딘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광이도 먼저 보내고-내가 먼저 보내지 않아도 장현승과 먼저 팔랑거리면서 가버렸다.- 학원 옆에 숨어서 택시를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택시아저씨가 좀 짜증낼 무렵 윤두준이 감색의 숏코트를 입고 왼쪽 어깨엔 검은색의 아무 패턴도 그려져있지 않은 버버리 크로스백을 걸쳐맨채로 주차장에 나타났고 윤두준은 인피니티 G37을 타고 슝-하고 학원을 빠져나갔다. 이에 난 다급하게 택시아저씨의 어깨를 툭툭치며 저 차 좀 빨리 따라가달라며 재촉했고 아저씨는 알았다며 차를 출발시켰다. 사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서울 시내 지리를 잘 몰랐다. 그냥 내가 아는건 집에서 학교가는 길과 학교에서 집 가는길, 그리고 학원 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로 표지판에 적혀진 청담역 이라고 쓰여져있는것에 여기가 청담동이 라는걸 알았고 어느새 택시비는 만원을 훌쩍 넘어버렸다. 만팔천원이라는 거금을 택시비로 날리고, 어느 한 오피스텔 앞에서 내렸다. 윤두준은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지만 택시는 못들어가게 경비원이 막는 바람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결국 몇층에 사는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오피스텔 현관에서 내릴수밖에 없었다. 아파트에 살줄 알았는데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지 주상복합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며 나는 한숨을 지었다. 사실 나는 주택만 잔뜩있는 동네에 살아서 이렇게 스타벅스나 편의점, 던킨도넛과 같이 가게들이 가까이에 있는 곳에만 오면 나도 모르게 신기해했다. 집에 이런 가게들이 같이 있으면 심심할때마다 엘레베이터 타고 슝 내려와 사갈거 사갖고선 다시 엘레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편하겠다 싶은 생각에 새삼 이런 곳에서 사는 윤두준이 부러워져 높이 치솟은 오피스텔 건물을 목이 부러져라 쳐다보았다. "뭐하냐." 뭐야. 이건. "..뭐..뭐에요!??"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몇층에 사는지도 못알아낸것도 속상하고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벅스 화이트초콜릿모카나 사갖고 집에 가야겠다 싶어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그 곳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나오는 윤두준과 마주쳐버렸다. "왜 쫓아왔어?" "..네? 저 안쫓아왔는데요. 저..아 저 여기 근처 사는데요!!" "..너 삼성동 사는거 다 알거든." "어..어떻게 알았어요!?" "니 학원 등록서 봤는데." 윤두준은 커피를 스트로도 없이 그냥 마시며 나한테 말했고 나는 급격하게 찾아오는 쪽팔림에 어떤 변명거리를 대야되는지도 생각이 안나 가만히 윤두준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 택시타고 나 쫓아온거 아니야? 나 너 봤는데." "..어디서요? 어떻게 봤는데요?" "니 택시가 내 차에 너무 가까이 붙어서 룸미러로 봤지. 누군가 하고. 내 룸미러는 멀리있는 것도 다 보여서 말이야." "....그러니까..일부러..그런게 아니구요..어.." "됐고. 너 뭐 마실거야?" 어정쩡하게 문만 잡고 있는 내 손목을 끌어잡아당겨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나를 카운터 앞까지 데려갔고 나는 화이트초콜릿모카 라는 말을 조그맣게 하자 윤두준은 익숙한 듯 주문을 하며 직접 계산했다. 이에 내가 사겠다고 나서자 윤두준은 됐다며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한다음에 금방 커피가 만들어져 나오자 그 컵을 나한테 건넸다. "여기까지 왔으니까..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네. 집 구경 하고 가. 뭐 할것도 없지만." 윤두준은 아까 나오려던 문말고 그 반대쪽에 있는 문으로 나갔고 내가 나오질 않자 계속 문을 붙잡고 서있었다. 이에 그를 따라 나서자 윤두준은 익숙한듯 휘적휘적 걸어가 왼쪽에 있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왜 엘레베이터가 두개에요?" "하나는 여기 사는 사람들 타는거고 하나는 방문자용." "..헥..뭐 그런걸 나눠서 타요?" "몰라 나도." 윤두준은 엘레베이터가 1층에 띵-하고 도착하자 그 안으로 올라타 14라는 버튼을 눌렀다. 엘레베이터도 무슨 백화점 마냥 온통 금색의 호화롭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14층에 내린 윤두준은 오피스텔 복도를 쭉 걸어가다 맨 끝에 있는 문 앞에 서서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문을 열었고 내가 먼저 들어 갈 수 있도록 문을 잡고 서있었다. 이에 나는 커피잔을 두손으로 꼭 붙든채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아무 기대도 없이 따라온거였는데..이렇게 집 구경을 시켜줄줄은 몰랐다. 쿵쿵쿵- 안그래도 밤이라 주변이 조용한데 행여나 심장소리가 들릴까봐 나는 노심초사했고 신발도 벗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제사 지내냐며 퉁명스럽게 얘기한 두준은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나도 재빨리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다음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 바로 앞엔 좁은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윤두준은 망설임도 없이 그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나는 상관않고 집 구경에 신나있었다. 집을 복층으로 사용하는지 전체적으로 좀 좁은거 같은 느낌이었다. 좁은데 공간 활용도는 엄청난..알짜배기 같은 집이랄까? 어쨌든 나는 바로 보이는 계단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꺾었고 그 곳엔 들어와서 생각한 집의 크기보단 좀 많이 큰 거실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바로 보이는건 벽을 등지고 있는 갈색 소파와 그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벽걸이 TV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원탁 테이블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거실이 오른쪽에 있었다면 부엌은 왼쪽에 있었는데 그곳엔 따로 식탁은 없었고 싱크대와 찬장이 쭉 이어진 곳에 내렸다 올렸다 할 수 있는 바(BAR)형식의 식탁이 있었다. 부엌은 전체적으로 빨갛고 하얀색의 향연이었다. 혼자사는 남자의 집 답게 음식을 해먹은 흔적은 거의 없었고 설거지통엔 먹은 그릇도 없이 말끔히 비어잇었다. 그리고 거실 끝에 다른 아파트들 처럼 발코니가 있었는데 거기서 보면 서울 야경이 훤히 내다 보여 좋았다. 어정쩡하게 서서 윤두준의 집을 구경하는데 어느새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는 윤두준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윤두준은 검은색 긴팔 티셔츠와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내려오자마자 싱크대 옆에 있던 냉장고로 가 홈바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따라 마셨다. "우두커니 서서 뭐해. 저기 가서 앉아." 나는 가방을 소파 귀퉁이에 내려놓고 어느 정도 식은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며 연신 두리번 거렸다. 윤두준은 투명한 크리스탈 물컵에 물을 잔뜩 따라갖고 와서는 내 옆에 털썩 앉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문들을 별 관심없는 듯 뒤적였다. "저 위엔 뭐 있어요?" "화장실이랑 내 방." "..복층으로 쓰나봐요. 돈 되게 많으신가보다." "너네집보단 없으니까 걱정마." "..그게..내 돈도 아닌데 왜그래요.." 나는 괜히 퉁명스러운 윤두준의 말에 울상지으며 스트로로 커피만 쪼르륵 마셨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흘끗 보더니 피식하고 웃고는 리모콘으로 TV를 틀었다. 틀자마자 나오는 건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고 그걸 보니 괜히 배가 고파져 별의 별 감탄사를 내며 볶음밥을 먹는 연예인들을 바라봤다. 윤두준은 나를 보더니 배고프냐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에 나는 뭐하냐며 따라 일어서 그를 쫓았고 윤두준은 꽉찬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뒤져보더니 양파며 햄, 김치 같은걸 꺼내기 시작했고 볶음밥을 만들어줄 요량이었는지 대책없이 볶음밥에 들어갈 것 같은 재료들은 몽땅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할줄알아요?" "아니." "근데 왜 해요?" "배고파서." 윤두준은 손도 안씻고 햄껍질을 벗기기 시작했고 그나마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어깨너머로 볶음밥을 배운 지식이 있는 나는 그래도 내가 하는게 낫겠다 싶어 윤두준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왜?" "제가 할게요. 저 할 줄알아요." "그래? 그럼 진작 말하지." 윤두준은 아무 미련없이 손을 물로 씻더니 바지춤에 쓱쓱 닦고는 부엌 밖으로 나갔고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한 볶음밥을 윤두준에게 먹일 생각을 하니까 뭔가 자꾸만 손끝이 떨려와서 애꿎은 양파만 계속 씻어대면서 진정했다. 그러다 살짝 거실을 보니 그곳엔 어느덧 신문에 집중해서 글을 읽고 있는 윤두준이 있었고 뭔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야만 했다. 음..일단 양파랑 당근, 감자, 햄을 송송 썰어서 후라이팬에 넣고 볶다가.. 김치를 작게 썰어서 국물과 같이 넣어서 볶은 다음에..찬밥이... 나는 냉장고를 뒤적거려 겨우겨우 찬밥 두그릇을 찾아냈고 쉰밥이 아닌가 싶어 계속 킁킁 대다가 별로 상한것 같진 않아 그 밥을 전자렌지에 데웠고 1분 동안 돌려서 그나마 따뜻해진 밥을 움푹한 후라이팬 안에 넣고 같이 볶기 시작했다. 중간에 간을 보니까 그래도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에 다시다를 좀 넣어야겠어서 조미료를 찾아헤맸다. "..어딨는거야..." 이곳저곳 찬장을 찾아봐도 조미료의 흔적은 아무데도 없었다. 조미료 같은거 없나..싶은 생각에 그만 포기하려는 찰나. "뭐 찾는데?" "..네? 아..다시다..." "아. 그거." 윤두준은 언제 내 뒤에 와서 있었는지 다시다를 찾는다는 내 말에 아 그거. 라면서 내 뒤로 바짝 붙어 내 머리 위에 있는 찬장 문을 열고 수납 두번째 칸에서 뭔가 작은 병 하나를 꺼냈고 내가 서있는 곳 바로 뒤에 바짝 붙어있어서 그의 숨이 내 머리에 와서 닿았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윤두준이 건네는 다시다통을 빼앗듯 받아들어 볶음밥 위에 솔솔 뿌렸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참기름과 깨를 찾는데 그것도 안보여서 그래도 아까처럼 또 그렇게 찾아줄까봐 떨리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찾는데 아니나다를까 윤두준이 또 와서 물어봤다. "이번엔 뭐." "..참기름이랑..깨요.." "깨는 없고. 참기름이.." 다행히도 참기름은 내 위에 있는 찬장에 없었는지 냉장고 바로 옆에 있는 찬장에서 꺼내서 나에게 건녰고 나는 그걸 쉬익-하고 한바퀴 돌려 뿌린 다음 다시 골고루 섞은 다음에 밥그릇 두개에다 알맞게 퍼냈다. 그리고선 그걸 들고 식탁에다 내려놓으려는데 윤두준이 바로 그걸 나한테서 받아들고는 식탁에다 내려놓고 테이블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할게 없어서 손을 씻고 의자에 앉았고 내 앞에 앉은 윤두준은 숟가락으로 한술 떠서 먹었다. 이에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꼴딱 삼키곤 그의 반응을 살피는데 윤두준은 한입 먹더니만 나를 보고는 티 안나게 살짝 웃었다. "괜찮네." "..아..진짜요? 다행이다..어깨너머로 배운거라.." 나는 그제야 맘을 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음 역시 다시다를 치니까 아까 간 본 것보단 훨씬 맛있었다. "그러고보니까 내일이 수능이네." 윤두준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고 나는 윤두준을 빤히 보다가 날짜를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1월 둘째주 수요일이니까. 매년 목요일마다 시험을 보니까 내일이 수능일이었다. 다음해엔 내 차례가 되겠지 싶은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쉬며 볶음밥만 먹는데 윤두준이 입을 열었다. "너 집에 안가도 되냐. 벌써 열한신데." "..아 내일 수능일이니까 학교 안가요." "학교 안가는거랑 집에 가는거랑 무슨 상관이 있지? 내일 학교 안가니까 여기서 자고 갈라고?" "..네!? 아..아니..그게 아니라..좀..늦게 가도..된다고.." "이제 버스 끊기면 나보고 너 데려다주라고?" "..네? 아니..저 그냥 택시타고..가면..되는데.." 왜 말이 그렇게 흐르는건지. 등으로 땀 한방울이 쭈욱 흘러내리자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밥만 먹고 집에 가야겠다는 말을 덧붙이려는데 다시 윤두준이 묵묵히 밥을 먹다가 입을 열었다. "장난친거야. 데려다줄게." 그 말이 너무 멋있어서 나는 순간 엄청난 감동을 먹어버렸다. 대체 왜 나는 별것도 아닌 말에 이럴까....병신같이. 결국 나는 아무말 없이 밥그릇에 코가 빠질것같이 처박은채 밥만 먹었고 어느새 윤두준은 다 먹었는지 빈 밥그릇을 들고 싱크대안에 넣어놨다. 그리곤 내가 밥을 만드느라 쓴 그릇들을 다 싱크대 안에다 넣고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도 밥을 다 먹어서 밥그릇이랑 숟가락을 들고 일어서는데 윤두준이 바로 뒤에 있다가 내가 들고 있던 그릇을 받아들고는 싱크대 앞으로 갔고 나는 내가 설거지 하겠다며 그의 옆으로 가는데 윤두준이 어느새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서 그릇들을 닦고 있었다. "가서 티비봐." 윤두준의 말 한마디에 나는 쫄랑쫄랑 부엌 밖으로 나와 소파에 앉아 리모콘으로 채널을 뒤적였다. 워낙 티비에는 관심이 없는 나는 그냥 영화 같은거 하길래 그 걸 냅두고 앉아서 있는데 밥도 먹었겠다 집도 따뜻하겠다 잠이 솔솔 몰려와 나도 모르게 소파에 누워버렸다. 나는 뭐 이따 깨우겠지 싶은 마음에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팟- 아주 가끔은 누가 깨워주지 않았는데도 눈이 떠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나는 주위가 온통 까매서 아직 밤이구나..하고 다시 자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런 이상한 기운은 뭐지? 뭔가..지금 굉장히 어색해... 그러니까..아까 윤두준이 설거지를 할때 내가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근데 왜 여긴 침대지? 뭐지? 나는 이상한 느낌에 누웠던 자리에서 확 일어났고 주위는 온통 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조금씩 조금씩 주위에 있는 것들이 보일때 쯤 나는 여기가 누군가의 방이고, 그 누군가의 방에서도 침대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열리는 방문에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그대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는데 윤두준은 밤새 뒤척였는지 반쯤 눈을 감은 상태로 베개를 들고 들어와 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않고 내가 누워있던 곳 바로 옆자리에 베개를 갖다놓더니 바로 척-하고 누웠다. 뭐야 이 상황은. "니가 하도 곤히 자길래 깨우기가 그래서 침대로 데려온거야. 일단 늦었으니까 그냥 자." 한껏 잠긴 목소리로 나를 등지고 누운 윤두준은 이불을 목끝까지 덮은채로 다시 잠을 청했고 나는 이미 윤두준이 내 옆에 누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잠은 확 달아나있는 상태였다. 지금 몇시야 대체. 나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들어 시계를 확인했고 03:28 AM 이라는 숫자에 아직 깜깜한 새벽이구나 싶어서 핸드폰을 침대 주변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여기서는 도저히 그러니까 윤두준과 같이 누워서는, 이 밤을 꼴딱 뜬 눈으로 지새울것 같아서 나는 윤두준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 밑으로 한발 한발 내려놓고 슬쩍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윤두준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앗!" 자는줄로 알았는데 갑자기 손목을 잡아오니 당황스러웠던 나는 아주 작은 비명을 질렀고 윤두준은 내 손목을 꼭 잡고 놓질 않았다. "보일러 안돌려서 밖에 추워. 여기서 그냥 자." "..아..그러니까.." "내외하냐. 그냥 자. 감기걸렸다고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말고." "...네.." 나의 순종적인 대답에 윤두준은 내 손목을 잡았던 아귀 힘을 빼고는 나를 바라본채로 누웠고 나는 일단 엉거주춤 그를 등지고 눕긴 했는데 이럴줄 알았다. 심장이 쿵쿵쿵 거리는게 아마 방안에 있던 시계가 아니었다면 내 심장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갔을 것이었다. 벌써 몇분째, 나는 양을 천마리나 셌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올리가 없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이미 진작에 잠에 들었는지 색색-거리며 규칙적인 호흡이 오가는 소리만 들렸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워서 코라도 비틀어주고 싶었다. 남은 양 세어가면서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개고생중인데 누구는 편안하게 잠이나 처자고 있으니.. 나는 더듬 더듬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다시 시간을 확인했고 03:58 AM 이라는 시각에 경악해버렸다. 내일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니까 망정이지 아마 학교가는 날이었음 하루종일 꾸벅꾸벅 졸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여기선 무리야. 나는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거실 소파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선 벗어나야겠다 싶어 완전히 잠든것 같은 윤두준이 깨지 않게 정말 아주 조심 조심히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상체를 들어올리려는데 그때 내 허리로 윤두준의 팔이 감겼다. "...헙." 어린애기가 인형 끌어안고 자듯 윤두준한테도 그런 버릇이 있는지 이미 침대 구석으로 몰린 나는 더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데 윤두준은 나를 마치 인형으로 생각하며 끌어안고 자기 위해 내 허리를 좀 더 감싸오며 더욱 가깝게 달라붙었다. 그리곤 내 뒷목에서 느껴지는 작은 콧바람에 진짜 한숨만 나왔다. 계속 건전한 생각을 하려 노력하고 애국가도 불러보고 지리산 금수강산을 생각하며 자연의 소리를 생각하고 온갖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데도 이 망할 인간은 내 허리를 붙들고 놔주질 않는다. 이젠 도망도 못가겠고 어떻게 해야되는지 머릿속이 새 하얀 가운데에서 내 머리 안으로 이게 또다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획기적인 생각이 싹 스쳐지나갔다. 어차피 이사람은 지금 자고 있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모르는거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에 미치자 나는 그가 절대 깨지 않게 조심 조심 몇분에 걸쳐 몸을 돌려 윤두준을 마주 바라보았다. 깨어있을때는 영 무표정인 무뚝뚝한 눈매가 잠잘때는 선해져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윤두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 앞으로 단 한번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어차피 자긴 글렀고 이 사람 얼굴이나 마음껏 감상해야겠다 싶어 얼굴 이곳저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평소엔 그냥 까무잡잡한 피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잡티도 별로 없고 콧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눈썹은 적당히 남자답고 깔끔하게 다듬어져있었고 속눈썹도 은근히 길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구경하며 나는 킥킥 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았다. 무슨 남자가 얼굴에 여드름 하나 없을 수가 있지.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도 보고싶었으나 하도 어두워서 그렇게 자세한거까진 안보였고 내 눈에 들어오는건 적당히 얇은 그의 입술. 그 입술에 내 눈이 고정되자 내 심장은 자동적으로 빨라졌다. 지금 뽀뽀를 살짝 해도 윤두준은 모를것이다. 내가 살짝 몸을 내리기만하면 충분히 아무렇지 않게 닿았다 떨어질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베개에서 머리를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밑으로 내려가 그의 입술 가까이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막상 닿으려니까 너무 떨리는게 여기서 윤두준이 깨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건조하지만 말캉하고 따뜻한 느낌이 내 입술에 와닿자 마치 내 귀에선 크리스마스 종소리가 울리듯이 뭔가가 댕댕-거리면서 입술에 온갖 피가 몰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뜨거워져서 금방이라도 펑-하고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느낌. 나는 조금 더 맞대고 있고 싶었지만 행여나 그가 깰까 무서워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그리고 나는 내 입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아직도 말캉한 느낌이 남아있어 기분이 묘했다. 후..더워.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수능 한파다 뭐다 별 소리가 많은데 왜 난 더운거지. 땀까지 날 정도였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혈액순환이 잘돼서 그런가 자꾸만 거친 숨이 뱉어져 나왔다. 아 도저히 안되겠다. 윤두준이 깨더라도 나는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이 손을 빼서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윤두준의 손목으로 양 손을 가져다대는데.. "..엄마야." 윤두준이 잠깐 뒤척이는가 싶더니 내 머리가 베개 끝을 베고 있는 그 사이 틈에다 자기 한쪽 팔을 끼워넣고 내 허리를 감싸안고 있던 손은 더 나를 꽉 안아 마치 내가 그에게 폭 안긴 꼴이 되었다. 내가 그 사람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듯한 상황에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 눈만 이쪽 저쪽으로 굴렸다. 눈을 뜨면 윤두준의 목과 쇄골이 보이고 내가 숨을 조금만 거칠게 쉬어도 그 목에 가서 닿을 것 같아 숨도 조심 조심 쉴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이 너무 가까이 맞대어있어 잘하면 내 쿵쿵거림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같아 최대한 몸을 뒤로 빼는데 자는 사람의 몸에선 왜이렇게 힘이 나오는건지 내가 조금만 더 몸을 빼서 좀 뒤로 물러나는가 싶을땐 더 세게 껴안았다. 아 어떡해 진짜. 애초에 내가 이 집에서 잠을 자는게 아니었다. 왜 잠을 자가지고 이런 사단이... "..야. 윤두준. 너는 속편하게 자고 있으니까 편하냐? 남은 지금 죽을것 같구만.. 자면서 뭐 그렇게 힘이 세냐..더워 죽겠는데..심장도 쿵쿵쿵... 내가 사실..여태까지 살면서 누굴 좋아해본적이 없어. 근데..너 만나고 나서부터 내가 병신됐어. 이 망할놈아. 너만 안만났어도..내가 이러고 있진 않을텐데.. 넌 맘편해서 좋겠다. 누구는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쳐버릴것 같은데 누구는 실실 거리면서 남 놀려먹기나하고..진짜 못된새끼. 내가 이렇게 남한테 매달린 적도 없었는데..짜증나 너때문에. 윤두준 이 망할새끼.." 기왕 이러고 있는거 들어주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라도 하니까 속은 편했다. 사실 이런 얘기는 기광이한테도 쪽팔려서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기집애들처럼 일기장이나 끄적거릴 성격은 아니니까 아무한테도, 아무곳에서도 말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는데 역시 사람은 말로 내뱉어야 후련한가보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서투른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고 내뱉으니까 묵은 체증이 가라앉듯 요동치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앞으로 종종 윤두준이라고 생각하고 인형 하나 갖다 놓고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기도 하면서 고해성사 해야될 것 같다. 이러다간 속 썩고 썩어서 홧병으로 죽겠네. "..이게..어따대고..반말이야." .....뭐야. 나 지금...제대로 들은거..맞는건가.. 분명히..자고 있었는데...잠깐만. 잠깐만!!!!!!!!!! "...뭐...뭐에요. 지..지금..잠..꼬대..하는거에요?" "잔적 없는데." 숨이 턱 막혔다. 잠깐만..잔적 없다니. 나 그럼..아니..아까 내가 이상한 말 지껄인것보다 훨씬 전에... 어떡해 씨발..새됐다. 아 이럴땐 어떡해야되지. "..왜..왜 자는척 했어요 왜!?!?!?!"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에게서 안겨있다가 그의 가슴팍을 팍 밀치고 침대 끝으로 물러났다. "너 하는 꼴이 웃겨서. 어떻게 하나 볼라고." 지금..이걸 말이라고.. 그나마 어두워서 다행이다. 아마 밝았으면 나는 쪽팔려서 이자리에서 혀깨물고 죽었을거야. "..저..정말..잔적 없어요?" "방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깨어있었는데." "..씨발.." "다시말해봐." 욕하는걸 제일 싫어하는 윤두준이지만 그 앞에서 욕을 할만큼 나는 너무 부끄럽고 민망하고 쪽팔렸다. 이럴땐 그냥 초고속으로 달려서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나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그 손을 윤두준이 빠르게 붙잡아챘다. 무슨 손아귀 힘이 이렇게도 센지 손목 잘릴거 같다. "다시말해봐. 뭐?" "..아..아니..욕하려고한게 아니라...너무 쪽팔리니까!!!!왜 자는척 했어요 왜!!!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선생님 입..입술..아우. 미안해요." 나는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사과하고말았다. 내가 이집에서 잠을 자는게 아니었다. 아니 잠에서 깨어나는게 아니었다. 정말 이건...있을수가 없는일이야. "일로와봐." "..네?" 이미 둘다 침대에 앉아있는 상태. 나랑 윤두준. 둘다 이 밤을 잠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늦은 것 같았다. "가까이 와보라고." "..때릴라고...그러는거에요 설마?" "일단 와봐." 솔직히 입장을 바꿔놓고, 내가 윤두준인데 어떤 새카만 남자애가 내가 자는틈에 뽀뽀를 했다면. 정말 기분 더럽고 짜증났을 것이다. 그래. 그마음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때리는건 너무하잖아!!!!!!!! 내가 맞을정도로 잘못한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사과 했잖아. 에이씨. 나는 쭈삣 쭈삣 윤두준 앞으로 다가갔고 윤두준은 정말 나한테 딱밤을 먹일것처럼 한손을 들어올렸다. 이에 나는 히익-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뭐지 싶은 마음에 눈을 뜨는데...갑자기 입술위로 뭔가 말캉한것이 겹쳐들어왔다. 아까 내가 몰래 입술을 훔친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촉촉한 것이 내 입술을 적시더니 내가 살짝 입을 벌리니 그 안으로 밀물 밀려들듯 빠르게 들어왔다. 나는 그 힘에 놀라 몸이 뒤로 기울어졌고 넘어지지 않도록 한손으론 내 뒷목을, 그리고 나머지 한손으론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고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눈만 껌뻑이고 가만히 있자 윤두준도 눈을 살짝 뜨더니 손으로 내 눈을 직접 감겨주었다. 윤두준의 촉촉한 혀는 내 치아 전체를 쓱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내 혀와 실타래 엉키듯 엉켜가며 잡았다 풀었다를 반복했고 이미 내 정신은 반쯤 나간 상태에다, 몸은 자꾸만 축축 쳐졌다. 사람 몸에 힘이 들어올 수 없게 할만큼 정신을 혹 빼놓는 그의 키스는 입술이 알알해질만큼이나 강했다. 윤두준은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렸다를 반복하며 내 입술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고 그렇게 몇분을 했을까 점점 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즈음 윤두준은 내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고 내 입가 전체에 촉촉히 묻어있는 타액을 손으로 직접 닦아주었다. "..할거면 이렇게 제대로해야지 꼬맹아." 생전 처음 보는 윤두준의 달콤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간질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하는 그의 말투. 여태까지 들었던 그런 딱딱함이 아니라 마쉬멜로우처럼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것 같이 달콤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이 멍-했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보면서 피식-하고 웃더니 내 볼을 살짝 꼬집고는 내 귓가에다 속삭이기 시작했다. "..한번 더 해줘?" 나는 이렇다 저렇다할 대답을 할 기운도 없어 그냥 윤두준만 빤히 바라봤고 윤두준은 내 한쪽 볼을 살짝 잡더니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주었고 나는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선생님 좋아하는거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면 병신이지." "..근데..왜 아는척 안했어요?" "너 어떻게 하나 볼라고." "..내가 재밌었어요?" "옆에서 보면 너 엄청 재밌는데. 모르는 문제 있다고 해놓고 문제집은 없지. 갖고 오겠다면서 옥상에서는 문고리도 돌리지 않고 문 열려다가 왜 갑자기 그렇게 세게 들어오는지 옥상 바닥에 처박히질 않나 택시타고 남의 집까지 쫓아오질 않나. 밥 먹여놓으니까 소파에서 편하게 자질 않나. 너 가관이었는데?" 여태까지 내가 윤두준한테 했던 짓들을 생각하니 나도 너무 쪽팔려서 고개를 푹 숙였고 윤두준은 내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너 뭐라고 할거야?" "....에?" "싫다그럴건가?" 윤두준의 말에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도 구별이 안가서 또 멍때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사람과 처음 만나게된건 지금으로 부터 이주 전. 이렇게 빨리 이런 시간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윤두준의 입에서 사귀자는 말 따위는 절대 나오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언젠가 고백을 해도 내가 먼저 하고 그냥 내 스스로가 정리할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나한테..벌어진 일이...꿈이라고한다면..난 정말...그자리에서 죽을거다. "..왜..갑자기.." "나 원래 남일에 관심 없는 사람이야. 남이야 머리가 금발이건 빨간색이건 귀를 뚫건 말건 담배를 피건말건 상관 없어. 근데 내가 너한테 내 라이터를 던져주고 왜 계속 니 머리 갖고, 니 행동 갖고 뭐라고 했는지..이해가 안가?" "..그거야..선생님이니까.." "난 학교선생이 아니야. 수업만 하면 되는 학원 선생이지. 애 인성까지 담당할 의무는 없어." 윤두준의 또박또박한 말에 나는 할말을 잃었고 뚫어지게 그 사람의 눈만 바라보았다. "..좋았다고 니가." "...." "처음봤을때부터." 기광아. 나 너보다 진도 빠른거 같다. 윤두준이 나보고 좋대. 처음부터 좋았대. 내가 윤두준 보고 첫눈에 반한것처럼 이사람도 나한테 첫눈에 좋았대. 나..지금 좋아서..미쳐버릴것 같아. 그냥 여기서 죽어도...좋을만큼. 좋아. 나는 아무생각없이 윤두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부딪쳤다. 사실 키스같은거 할줄도 모르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진짠지. 그냥 내가 하는 짓이 어이가 없고 웃겨서 장난노는건지 내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갑자기 확 다가오자 잠시 당황하던 윤두준은 아까와 같이 자세를 잡더니, 아니 사실은 아까 어깨에 가있던 손이 내 허리로 내려가 있었다. 어쨌든 다시 내 입 안으로 들어와 내 말캉한 혀와 엉키기 시작했고 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그의 목에 내 팔을 올려 감싸안았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런게 지금 무슨 소용인가. 내가 좋고 이사람도 좋으면 되는거지. 우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깊게, 훨씬 더 오래 서로의 마음을 나누어버렸다. #7. _윤두준의 이야기 Ⅰ 맨처음에 이 학원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이년전 일이다. 나는 선생이라는 직업엔 단 한가지조차의 관심도 없이 정말 말그대로 경영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이자 친한 형이 갑자기 아파서 입원했다는 얘기에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장기 입원을 해야될것 같다며 내 손을 꼭 붙들고 자기 자리를 채워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나는 그 앞에다 대고 차마 그까짓 학원 선생 자리에 뭘 그러느냐고 얘기를 할수가 없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해버렸고 호기심반 두려움 반으로 이 학원에 들어섰었다. 그렇게 다니기를 이년째. 몇번의 과외 경력을 살려서 애들을 가르친다고 했는데 그게 먹혀들어갔는지 이 근방에선 내 소문이 좀 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나를 보고 학원을 등록하는 학생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주변의 선생님들은 좋겠다는 부러움의 표시를 농담식으로 툭툭 던지셨지만 나는 점점 어깨가 무거워져갔었다. 맨 처음엔 그냥 말그대로 대타였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가 책임지는 학생들이 생겨났고 그 아이들은 나를 보고 내 수업을 듣고 대학 진학을 한다는 생각에 엄청 커다란 짐을 들춰메고 있듯 무겁고 버거웠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샌가 학원에 수업하러 들어가는 길이 기계처럼 바뀌어져있을 즈음. 학원 정문에 웬 남자애 두명이 껄렁한 차림으로 중앙 현관문에 턱하니 서서 있었다. 아니 한놈은 쭈그려 앉아 있었고 한놈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근데 내 눈에 띈 그 놈 한명. 머리는 백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의 샛노란 아니, 어떻게 보면 하얀색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의 금발머리를 한 남자아이. 귀는 뚫고 교복을 입은 상태로 담배를 입에다 척 하니 문 꼬라지가 영 아니꼬웠다. 어린 자식이 이 차림으로 대담하게 담배를 피울 생각을 한다는게 어이도 없고 대체 뭐하는 새낀가 싶어 쪼그려 앉아있는 남자애한테 다가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라이터를 찾아 뒤적거리는 그 아이를 본 나는 내 라이터를 그 애의 발밑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사실 나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람이었다. 주변에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나는 나밖에 몰랐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게 내 잇속 다 차리면서 남들한테 관심두지 않고 스무해를 넘기는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왔었는데 생판 모르는 남자애한테 다가가서 내 라이터를 던지는 행동은 나 조차도 놀랄만한 짓이였다. 뭐 어쨌든 이미 내 라이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고개를 드는 금발머리 남자아이. 눈은 지나치게 동그랗게 얼굴은 또 왜그렇게 작은지 머리카락 속에 얼굴이 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사내녀석 치곤 하얀 얼굴에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 나는 그 짧은 시간에도 많은걸 보고 있었다. 남을 눈여겨 보지 않아서 웬만해선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데 이 금발머리 녀석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깊게 패어버렸다. 머리가 금발이라 그런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 남자애는 아무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길래 나조차도 민망해져 평소처럼 얘기했다. "라이터 찾는거 같길래." 그 말에 라이터를 순순히 건네주는 녀석의 얼굴은 옆에 있던 친구가 뭐라고 할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그래서 우는 아이 더 콩-하고 쥐어박고 싶다는 것처럼 더 민망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당당하네. 고등학생인거 같은데 머리는 금발에..교복에..담배? 그것도 학원 앞에서..? 요즘 애들은 미친건지 병신같은건지..이해가 안가네. 라이터 안쓸거면 내놓지?" 내가 생각해도 처음보는 애들한테 이런말을 한다는건 상당히 매너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이라 어쩔 수가 없어 난 당당한척했다. 근데 정작 이 얘기를 들은 금발머리애는 멍 때리고 있고 오히려 옆에 있던 애가 더 나불거렸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거슬려 그 금발에게서 라이터를 가지고 와 학원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학원 계단을 걸어 교무실로 올라가는 내내 뭔가 짜릿한 느낌이 내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내 평생에 이런 느낌은 4년전 그때 이후로 없을 줄 알았다. 진작에 내 취향이 이런쪽이라는건 알고 있었으니까 상관 없었지만 이렇게 어린 남자애를 상대로 이따위 후줄근한 감정을 느낀다는게 나는 퍽 기분이 상했다. 마치 어린애를 데리고 안될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그이후로 학원에 들어올때마다 주위를 서성거리게 되었다. 혹여나 그 금발머리 남자애가 오진 않았을까. 그래서 일부러 그때와 같은 시각에 출근했지만 남자애는 며칠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삼일째 되던 날. 나는 오히려 이게 잘된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어린 남자애를 상대로 그러는건 범죄니까 안 만나는게 나을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위로했었다. "야 2층 등록상담실에 니 택배 와있대. 너는 왜 맨날 여기다 시키냐?" 고등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 용준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어떻게 하다보니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들어오게 되어 학교 동기가 되었다가 준형이가 먼저 학원선생 알바를 뛴 후, 나도 뒤늦게 뛰어들어 요즘은 매일 매일 보는 사이가 되었다. 용준형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일년에 얼굴조차 몇번 볼 수 없는 가족들보다도 더 진한 관계인 것 같은 용준형. 내가 이렇게까지 용준형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윤 그의 성격이 털털하다는 것도 있긴 했지만 대학교 1학년때, 어렵게 뱉어낸 커밍아웃 발언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없이 나한테 맥주 한캔을 내밀었다는것이었다. 그때 나한테 아무말없이 내민 그 맥주캔을 난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아연실색하거나 그 다음부터 연락을 끊거나 나를 마치 벌레 보듯이 보던데 준형이는 달랐다. 용준형은 뭐 어떠냐며 사람이 사람 좋은걸 굳이 성을 나눠가면서 좋아해야되는건 아니지 않냐면서 허허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오징어 다리를 물고는 잘근 잘근 씹었더랬다. 나는 준형이의 이런 쿨한 모습에 다시 한번 더 진한 우정을 마음으로 깊게 느끼게되었고 겉으로는 틱틱대고 거칠어도 속으로는 내가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집으로 시키면 맨날 경비아저씨가 뭐라고 해." "왜? 그게 일 아니냐?" "집 지켜주는게 일이지 택배 물건 받아주시는게 일은 아니잖냐." "하여튼..혼자사는거 티내고 다니는것도 아니고..가서 물건이나 받아와 새꺄." 어쨌든 용준형은 지가 제일 좋아하는 포카칩을 우적우적 먹으며 내 엉덩이를 발로 툭 찼고 나는 한번 째려봐준뒤 2층 등록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실 준형이의 말대로 나는 오피스텔에서 혼자 독립해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그렇게 해와서 이젠 혼자 밥해먹고 혼자 사는게 익숙한데 부모님이 있으면서도 그 집에서 살지 않고 나와서 사는 이유는 주위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 그 집 자체가 나한텐 끔찍하기 짝이없는 곳이기도 했고. 사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기업가였다. 할아버지때부터 시작해온 작은 가게가 점점 커져 하나의 기업이 되어 아버지대에 와서는 그 기업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 할 정도로 경제를 꽉 잡고 있는 건실한 대기업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또한 명망높은 기업가의 따님이셨다. 기업가 자제들끼리의 만남이라며 부모님께서 결혼하실때에도 온갖 매스컴에선 난리가 났었다고 종종 외할머니께선 말씀하시곤 하셨다. 외할머니는 굉장히 소탈하고 서민적인 분이셔서 태어날때부터 명품을 끼고 나온것처럼 행동하는 부모님과는 다르게 나를 대해주셨다. 부모님께서는 절대 해주지 않는 김치부침개라던가 비빔밥, 김밥 같은것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먹고 컸고 그게 내 배경이 돼서 지금은 기업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질려버렸다. 나는 그냥 따로 독립해서 혼자 떡볶이며 자장면 먹는게 편했다. 이건 어렸을때부터도 그래서 부모님은 나를 늘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다. 늘 본데없이 행동하지 마라. 어디가서 이런 싸구려음식 먹는거 티내고 다니지 마라. 뭐 등등 초등학교때부터 이따위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서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내가 틈틈이 마련해놓은 돈과 할머니께서 보태주신 돈으로 오피스텔을 하나 잡아 나가 살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나도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 위해 일류대 경영학과로 진학한거 보면 내 안에서도 모순이 있는것 같아 가끔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었다. 언젠가는 결국 틀에 박혀 다람쥐처럼 살게될 인생. 짧은 시간이나마 편하고 즐겁게 살자는게 내 인생 모토였다. 그게 스물넷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있다는게 신기하고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뭐 어쨌든 내 옛날 얘긴 여기서 그만하고, 나는 택배를 찾으러 들어간 상담등록실에서 며칠동안 알게모르게 찾았던 금발머리의 남자아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놀랍기도 하고 이렇게 학원에 등록하러 올줄은 몰랐는데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어 나는 내가 너무 미친놈 같았다. 그리고 원래 나는 관심 가는 사람한텐 더 무뚝뚝하고 차가운 타입이라 이 애의 앞에서도 차가운 말만 늘어놓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본의아니게 내 말에 주눅들어하고 내 말에 얼굴이 울긋불긋 해지는 애를 보며 한두번 미안한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내 성격이라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번 보일때마다 금발머리를 눈여겨보면서 느낀건데 고등학생 신분으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다는건 그만큼 깡도 있고 용기도 있다는 뜻일텐데도 이 남자애, 그러니까 양요섭은 너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보였다. 교무실에 들어가면 될것을 자꾸만 주위를 서성이고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가게 만들었다. 그 작은 등짝으로 교무실에 누구를 찾는건지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모습이 뒤에서 꼭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지만 매번 겨우겨우 참아냈었다. 그러다 한번은 또 교무실에서 서성이고 있길래 귓가에다 대고 장난을 쳤더니 애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지나치게 놀라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놀래라고 한건 아니었는데 내가 한 장난이 기분 나빴는지 얼굴까지 새빨개지더니 갑자기 하는 말이 물어볼게 있다는거였다. 그래서 뭐냐고 물어봤더니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요섭이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당황하는가싶더니 문제집을 두고 왔다며 갖고 오겠다며 허둥댔고 나는 그 순간에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귀여운 애를 꽉 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최대한 태연한척하며 양요섭을 옥상으로 불러냈고 옥상에 올라가서 그 아일 기다리는 동안 내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괜히 옥상으로 불렀나 싶고 날씨도 추운게 다시 내려갈까 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옥상문이 쿵-하고 열림과 동시에 어떤 애가 쏟아져나왔다. 그래, 이건 정말 쏟아져나온것이었다.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꽂혀버린 양요섭은 바닥에 무릎을 찧었는지 무릎을 끌어안고 낑낑댔고 나는 걱정반 흥미반의 감정으로 그애에게 다가갔다. 많이 아픈지 얼굴까지 새빨개지면서 끙끙 앓았고 어쩐지 너무 심한 소리가 나더라니만 걱정되는 마음에 요섭이를 일으키려는데 순간 아이가 휘청거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이 아일 끌어안아버렸다. 순간 느껴지는 심장박동소리. 참 오랜만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심장이 뛴다는 것. 나는 4년전 그 일 이후론 이런 일이 절대 없을 줄 알았다. 내 심장은 그냥 피를 공급해주는 기능만 할거라 생각했는데 사람일은 모른다고 했던가. 작고 귀여운 금발머리 남자애한테 내 심장이 다른 의미로 작동해버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도모르게. 어쨌든 요섭이는 제대로 서있는것조차도 힘겨워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도모르게 그 애의 바지를 걷어올려 무릎을 확인했고 민망해하는걸 알면서도 나는 꾹꾹 눌러가면서 상태를 살폈다. 뭐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만져본들 알겠느냐만은 뼈가 부러진것 같진 않아 그래도 나는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렇게 애를 힘들게 세워둘 수가 없어서 창고로 들어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의자 하나를 꺼내서 갖고 왔다. 먼지를 좀 많이 마신것 같았지만 그래도 좀 앉아있음 나아질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제일 튼튼한 의자로 골라서 갖고 나와 애를 앉혔고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모르는 문제 있다면서 라며 화제를 돌렸고 애는 또다시 당황했다. 손에 문제집이 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옥상에 들어오면서 넘어질때 문제집도 같이 내리꽂혔는지 저멀리 떨어져있었고 애가 주으려고하길래 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 문제집을 갖다주니 되게 심각한 얼굴로 문제를 찾더니만 고개를 들어 나한테 문제를 보여줬고 그 순간 나는 양요섭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슈렉인지 뭔지 그 초록색 괴물이 주인공인 만화영화에 나오는 고양이를 많이 닮아있었다. 눈은 크고 눈동자도 맑고 초롱초롱한게 어렸을적에 키웠던 강아지랑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강아지를 닮았다고 해버렸고 순간 당황하는 그 표정도 너무 귀여워보였다. 무슨 사내새끼가 얼굴은 저렇게 하얗고 귀엽게 생겼는지 망치로 머리를 통통통 때려서 작게 만들어갖고 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싶었다. 만지고 싶을때마다 만지고 볼 찌르고 싶을때마다 찌르게. 그래도 나는 선생답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하기 위해 문제를 설명하는데 온힘을 쏟았고 왠지 내가 설명해주는게 양요섭의 머리에 흡수되지 않고 팡팡 튕겨져나오는것 같았지만 나는 다시한번 설명했다간 내가 쓰러질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그자리에 계속 있으면 꽉 끌어안아버릴것만 같아서 얼른 내려가려는데 요섭이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다짜고짜 핸드폰을 내밀었다. 난 이순간에 확신할 수가 있었다. 요 며칠동안 계속 교무실 서성거리고 나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는게 맨처음엔 어디 아파서 그런건줄 알았지만 이 의미가 내 마음이 향하는 의미와 같다는걸 나는 지금 양요섭의 행동으로 알아낼수가 있었다. 관심없는 사람한테는, 그것도 학생이 선생한테 따로 번호를 따진 않는다. 학교 담임도 아니고 일개 학원 선생한테 번호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내가 여자애들 몇몇한텐 인기가 많다하더라도 남자애들한텐 내 특유의 싸가지없는 개매너 때문에 거의 비호감의 수준에 달해있었는데 남자애들 중 한명일 양요섭이 나한테 이렇게 다가온다는건 단순한 의미는 아닐것이었고 아님에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애의 볼을 꼬집어 버렸고 교무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은 내내 내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어떻게든 표정을 굳히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며칠사이에 설마설마 했던것이 사실로 다가오자 기분이 찢겨날아갈만큼 좋았다. 내가 이래도 되는건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건지는 잘 모르겠어서 죄책감 반 혼란스러움 반의 감정을 갖고 있던 찰나, 어젯밤 꿈에 현우가 나타났었다.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 듯 늘 꿈에만 나오면 선명했던 현우의 모습이 그날따라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었다. 손에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을 연기같은 느낌이어서 나는 다급하게 현우를 붙잡았지만 현우는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우는 나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늘 나를 보던 그 따스한 눈빛을 하고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 의미를, 현우가 내 꿈에 찾아와서 남긴 의미를 내 새로운 사랑을 용서해주겠단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잘못에 대한 용서는 나중에 현우를 만나게되면 그때 하고 싶었다. 지금은..작고 귀여운 금발머리 아이가 너무 좋으니까. 현우한테는 늘 미안한마음이 있었지만 그 마음을 같이 안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할만큼 어느샌가 내 마음안에선 금발머리아이가 크게 자리를 잡아버린것이었다. #8. _윤두준의 이야기 Ⅱ 그러다 한번은. 그날도 어김없이 학원에 출근해서 교무실에 있다가 잠깐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온 사이 학원 계단 앞에선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보이는 금발머리 양요섭의 모습에 또 저기서 뭘 하고 있나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띄며 걸어가는데 조금 더 가까워 지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키가 작은 여자아이가 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딱 봐도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굳혀버렸다. 그냥 애들끼리 순수하게 연락이나 지내자고 그러는거고 번호를 따고 따이는 일 같은건 요즘 애들한테는 일도 아니라는걸 뻔히 아는데도 나는 그순간 이유 모를 짜증이 솟구쳤다. 표정을 보아하니 양요섭은 뭔가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고 뒤에서 불구경 하듯이 뒷짐지고 서있는 이기광 또한 가관이었으며 그 앞에서 번호를 따고 있는애는 내가 가끔 땜빵으로 들어가는 중3 수업때 봤던 여자애였다. "..안승희?" 나는 분명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걸 알았고 아는척을 해선 안되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지금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내 감정적인 행동을 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짜고짜 다가가 양요섭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안승희에게 여러 말을 해줬다. 사실 양요섭에 대해서 아는거라곤 눈꼽 만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끼어드는게 어이가 없고 그냥 학원 선생일 뿐인데, 몇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무 주제 넘었구나 라는 생각을 할 즈음엔 이미 내 혀가 이리저리 놀려지고 있는 다음이었다. 후회를 해도 너무 늦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내가 몇마디 하자 양요섭은 미안하다며 안승희를 돌려보냈고 승희가 돌아간 그 자리에서도 나는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노망난 혀를 놀려댔다. 내가 생각해도 심하게 양요섭에 대해 비꼬는 말투에 나조차도 놀랐지만 내가 더 놀란건 양요섭의 반응이었다. 마치 여자애처럼, 내가 몇마디 했기로서니 뒤돌아서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양요섭.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그 아이의 손목을 잡고 돌려세울랬지만 그 자신도 쪽팔렸는지 놓으라는 한마디의 큰 소리를 친 뒤에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이에 옆에있던 이기광은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뭐 마린 강아지마냥 먼저 사라진 양요섭을 뒤쫓아 들어갔고 그제서야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왜 나는 양요섭이 번호를 따이는 그 상황에 열이 받았는지, 그리고 또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를 비꼬았는지, 왜 말을 그따위로 해서 애를 울렸는지. 나는 모든게 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아 착잡해져버렸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겠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은채 다시 교무실로 들어왔고 내가 멍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의자에 앉아있던 용준형이 나를 빤히 보며 의자를 끌고와 내 옆으로 다가왔고 나는 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야. 내가..지금 열여덟살짜리 애를 좋아하면..미친놈이냐?" "무슨..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야." "..아니..자꾸 어떤 애가 생각나. 자꾸 신경쓰이고 거슬려. 맘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자꾸 비뚤어지게 나가고.. 얼마전에..나 현우 꿈도 꿨다?" 내 입에서 현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용준형은 가만히 마우스로 인터넷 창만 클릭하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야." "현우가..나왔는데. 생전 안나오던 새끼가 내꿈에 나오더니 그냥 말없이 웃드라. 그러더니 싹 사라졌어. 연기처럼." "..장현우만큼이냐?" "어떻게 내가 장현우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겠냐. 근데..맨처음 현우 만났을때랑..비슷한거 같다. 자꾸 보이니까 보고싶고 신경쓰이고 잘해주고 싶은데 맘처럼 안돼서 짜증나고.. 장현우도..내가 이러는거 아는지 꿈속에서도 내가 미안하다고 한거 같은데 그냥 암말없이 웃고 사라졌다니까."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답답해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후..하고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용준형이 나즈막히 속삭였다. "누군데. 천하의 장현우를 너한테서 밀어내고 들어온 애가?" "..양요섭." "...미친새끼. 진짜. 돌았냐? 어쩐지..걔가 교무실에만 오면 계속 쳐다보고 관심 주더니만.. 난 또 왜 안하던짓을 하나 했지? 근데 지금은 또 왜그래? 병신같이." "오늘은 내가 걔를 좀 울렸다. 아 존나 병신같은 윤두준 새끼야..왜 말을 그따위로 해갖고는.." "울고있음 화장실 가 있겠네. 가서 달래주고 와." 용준형의 말 한마디에 내 정신이 번뜩 뜨임과 동시에 나는 그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무당용준형님의 말을 듣길 잘했지. 요섭이는 뜨거운물도 안나오는 세면대에서 어푸어푸-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세수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뒤에 기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는 애가 휴지를 찾는것 같길래 내가 재빨리 뽑아서 그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내가 이기광인줄 알았는지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다가 눈을 뜬 양요섭은 눈이 평소에도 큰데 두배로 커져버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울먹일 것 같은 표정에 나는 너무 미안해져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왜그러냐는 내 말에 알수 없는 질문들과 알수없는 대답들만 늘어놓는 양요섭. 나는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본 결과 아주 조심스런 생각을 해보게되었다. 내가 양요섭을 좋아하듯 얘도 혹시나 나를 좋아하진 않을까 싶은 마음. 그래도 짐작은 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아이의 눈에선 처음 사랑을 해보는 어색함과 서투름이 보였고 나는 그 안에서 4년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딱 이랬던 것 같다. 다가가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우물쭈물. 고백했다 거절당할까봐 무서워 두려움에 찬 눈빛. 이 아이의 마음이 투명하게 다 비치는데도 나는 아직 백퍼센트는 확신할 수가 없어 일단은 조금 밀어냈다. 결국 양요섭은 화장실에서 먼저 나가버렸고 나는 화장실에 혼자 남아 벽에 살짝 기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나 마음이 같다면. 내가 저 아이를 품어도 되는걸까. 나이차이도 나고 무엇보다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학생이고 제잔데? 그걸 다 제쳐두고라도 우린 성(性)이 같은데..우리가 만나는게 맞는걸까. 싶은 4년전 그때 내가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했을 무렵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또다시 들어버렸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문제에 있어선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무당 용선생님께 자문을 구하기 위해 교무실로 향했다. 그래도 4년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듬직히 믿어주는 친구는 용준형뿐이었다. 남들에게 쉬이 얘기할 수 없는 치부라면 치부를 다 드러내도 이해하고 감싸주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아마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나는 인생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부디 이 친구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내가..생각할땐. 얘도..나랑 마음이 똑같은거 같애. 근데..될까.." "야. 무슨말을 하는건지..한국말로 못하겠음 영어로 해. 내가 어떻게든 알아들을테니까. 무슨 국어 선생이라는 새끼가 말을 이따위로 해." "양요섭이 말하고 행동하는게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근데 얘랑 나는 여섯살이나 나이차가 지고 무엇보다 선생과 제잔데..이게..말이 되냐." "너 어차피 다음달에 여기 그만 둘거지. 그럼 선생과 제자는 아닌거고. 여섯살? 야 당장 tv틀어봐. 열아홉살씩이나 차이나도 잘만 결혼하드라. 대체 뭐가 문젠데?" 매사에 통쾌한 용준형은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고민 축에도 들어가지 않는 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그래도 나는 조금 조심스러워져 계속 고민하자 용준형은 발로 내 무릎을 툭-하고 차더니 말했다. "니가 어떤 점에서 걔가 너를 좋아한다고 확신을 했는진 모르지만서도 걔가 먼저 너한테 대쉬를 하면, 그냥 받아들여. 걔도 영 생각없는 애는 아닐거아냐. 지딴에도 엄청 생각했겠지. 대쉬를 한다면 수십번 수백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일거란말야. 그러니까 그땐 밀어내지말고 받아들여. 알아들어 윤두준?" "..그 대쉬가 어떤건데?" "그걸 니가알지. 내가아냐 병신아. 어떤식으로든 니가 정말 백퍼센트 확신이 들면 밀어내지 말라고. 그다음부터 니네 둘이 만나는건 하늘의 뜻이지 인간으로는 어떻게 할수가 없는거다. 하늘이 니네를 반대하면 갈라놓으실 것이고 허락하면 계속 만나게 해주실것이고. 그러니까 사귀기도 전에 이러쿵 저러쿵 머리아프게 생각하지 말란말야. 답답하게 인생을 뭐 그렇게 사냐." 용준형은 나를 한번 흘겨보듯 얘기한 뒤 다시 낄낄거리며 인터넷 만화나 쳐보았고 나는 용준형의 말을 적극수용하기로했다. 그래. 까짓거. 나이차이건 신분차이건 무슨 상관이냐 제길. 나는 수업 하나를 더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양요섭이 있는 반의 수업을 하기 위해 교무실에서 나오는데 순간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금발머리가 내 눈에 스쳤고 나는 순간 잘못봤나 싶어 교실로 뛰어들어가 늘 그아이가 앉던 자리를 봤더니 그 자린 텅 비어져 이기광의 가방이 놓여져있었다. 나는 순간 아무생각없이 책을 교실에 있던 어떤 애한테 던지듯 넘겨준 뒤 바로 계단으로 뛰어내려가 아직 다 내려가지 않은 양요섭의 팔을 붙들었다. 이 아인 순간 휘청거렸지만 내가 꽉 잡고 있던 탓에 넘어지진 않았고 그 아인 내가 자길 잡고 있다는 생각에 놀랐는지 암말없이 눈만 꿈뻑꿈뻑 거렸다. 이에 나는 아무생각 없이 있는 힘껏 양요섭의 손목을 붙들어 옥상까지 올라갔고 옥상에 올라서서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를 앞에 두고 무슨 말 부터 꺼내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나한테 단단히 화가난것 같은데. 어떻게해야 풀어질 수 있는건지. "너 사람 신경쓰이게 하는데 취미있냐?" 이 윤두준 병신아. 그 수많은 이쁜 말 냅두고 왜 이딴 말을...니가..아우 나는 이 말을 해놓고도 또 후회를 했다. 그렇게 후회할 짓을 왜 자꾸 반복하는지. 근데 양요섭 앞에 있음 말이 곱게 튀어나오질 않았다. 무슨 심본지 대체. 역시 무슨말이냐며 묻는 아이의 말에 나는 수업을 왜빼냐는 말을 했고 평소엔 말도 더듬고 느릿느릿 대답하던 애가 따박따박 지지않고 말하자 오히려 나는 더 당황했다. 그래서 할말을 잃었고 말없이 나보다 키가 살짝 작은 양요섭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좀 괜찮게 말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찰나, "할말있음 하세요." 라고 양요섭이 먼저 선수쳤고 순간 나는 생각해놓은 말이 머릿속에서 재가 되어 날아감을 느꼈다. 그래서 난 또..용준형이 그렇게 지적했던 앞 뒤 다빼놓고 가운데 토막만 얘기해버리고 말았다. "...내 성격이야." 이 병신아. 이럴거면 차라리 수화를 해라. "말 그런식으로 하는거 내 성격이라고. 고칠라고 했는데 안고쳐져. 그러니까..그런거에 일일이 상처받지 마."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질 않아 그 말까진 못했다. 나는 내 나름의 진심을 표현한다고 한 말인데 이게 그 아이의 마음에 닿질 못했는지 양요섭은 눈만 껌뻑껌뻑 뜨고만 있었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생각에 요섭이에게 한발 다가가 그 아이의 양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내 입을 귓가에 바짝 가져다대서 속삭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인 셈이었다. "...그리고..내 앞에서 울지마." 요즘 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이따위 튀김집에서 식용유를 드럼통째 들이붓고 그 안에서 열시간 냅둔 오징어 튀김보다 더 느글거리고 구워지는 오징어보다 더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어떡해. 이미 말은 입밖에서 튀어나와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미안하다. 그러니까 가지말고 수업 들어." 결국 나는 미안하단말을 해버린 뒤 나도 내가 너무 부끄러워 먼저 옥상에서 나와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온갖 로맨스 소설이랑 드라마가 사람 하나 병신 만들어놨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오는 그 시간마다 쪽팔림에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고 내 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 박기도 했지만 모든일은 후회한들 어쩔 수가 없었다. 으..생각만해도 토할것 같아. 병신새끼 윤두준. #9. _윤두준의 이야기 Ⅲ 옥상에서의 오그라드는 일이 있었던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오늘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주차장으로 내려가 집으로 가는데 아까부터 계속 내 뒤를 어떤 택시가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맨처음엔 그냥 방향이 같겠지 싶었지만 느낌이 좀 이상해 일부러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빙빙 돌았는데 그 길을 끝까지 따라붙기에 나는 속도를 낮춰 룸미러를 통해 택시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살펴봤다. 다행히도 택시가 내 차에 바짝 따라 붙어주어 그게 누군지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불빛에 비춰보아 그 주인공은 금발머리라는건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택시를 타고서 나를 뒤쫓는 사람이 양요섭이라는 생각을 하자 내 입가엔 자꾸만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나는 애써 감추지 않았다. 감추는건 요섭이 앞에서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나는 그 아일 놀리기라도 하듯 지하주차장으로 쏙 들어와버렸고 아마 주차장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1층에서 전전긍긍할 양요섭이 눈앞에 선해 주차를 하는 내내 킥킥 대고 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평소엔 잘 가지 않던 스타벅스에 들러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했고 가게 창문 너머로 밖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양요섭은 고개가 부러져라 높은 오피스텔 건물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 동네가 신기한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때마침 나온 커피를 들고 일부러 양요섭이 있는 쪽 문으로 나갔고 그 아이도 뭔가를 사먹기 위해 들어오는 중이어서 의도친 않았지만 우연히 문에서 만나게 됐고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는 양요섭을 보며 나도모르게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쩌면 나에게 찾아온 우연을 가장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진해서 요섭이에게 커피를 사주고 일부러 집구경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사실 집에 돌려보내야할 시각이었지만 왠지 그러고싶지 않았다. 이건 남자의 흑심이라고 봐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을 집에 들이고 싶은 욕심이라고 봐도 좋다. 어쨌든 나는 이 아일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고 싶지 않았고 어쩔수없는척 갖은 연기를 해가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집 구경도 시켜주지 않은채 방으로 올라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집안에서도 차려입고 다니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하기 위해 집에서 입는 옷들 중에서 제일 괜찮은 옷으로 갖춰입고 내려왔고 녀석은 거실 한복판에 서서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여기저기 눈을 똥그랗게 뜨고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번만 오시는 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다녀가신듯 집안은 다행히도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어제만해도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괜히 집 안에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니 머쓱해지고 알수없이 긴장도 되며 또 무엇보다 할일이 없어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티비를 틀었고 멍하니 그것만 보기는 뭐해 좀 있는척 하기 위해서 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래도 신문은 평소에도 잘 보는 편이라 나름 아무렇지 않은척 읽고 있다 생각했지만 글은 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흘끗 아이를 쳐다보자 요섭이는 티비에 푹 빠져있었고 뭔가 하고 보니 무슨 연예인들이 나와서 지들끼리 음식을 해먹고 서로 맛있다고 극찬하는 그런 재미없는 프로그램이 한창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한번 보니 애가 배고파하는것 같기도 해 그냥 무작정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실 할줄 아는건 아무것도 없는데 티비에서 보니까 볶음밥 같은걸 해먹길래 난 냉장고부터 열었다. 냉장고는 늘 일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 채워주시는 덕분에 꽉 차있었고 그럭저럭 볶음밥 재료로 보이는건 닥치는대로 다 꺼내놨다. 그러다 어느새 뒤로 온 요섭은 지가 하겠다며 팔을 걷어부쳤고 그 아이에게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요리는 정말 자신이 없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거실로 나갔고 그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계속 요리에 집중하는 요섭이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봤다. 작은 몸집에 금발의 머리가 찰랑거리는 요섭이는 정말 예뻤다. 그냥 뒤로가서 확 안아버리고 싶을만큼. 수십번도 넘게 그 안고싶다는 충동을 억제하느라 식은땀을 흘렸다는걸 양요섭은 모를것이다. 지금 녀석은 계속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신중하게 칼질을 하고 열심히 볶아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지지고 볶는가 싶더니 밥은 또 용케 찾아내어 후라이팬에 밥까지 넣고 휘휘 볶기 시작했고 몇분 걸리지 않았는데 볶음밥이 완성됐는지 지가 슬쩍 간을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뭔가 이곳 저곳 찬장을 뒤지는데 찾는게 없는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계속 몸을 방방 뛰면서 찾아대기 시작했고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요섭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물어보니 다시다를 찾는단다. 다행히도 그게 어딨는지 아는 나는 굳이 양요섭의 뒤로 가서 찾아주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그애 뒤에 바짝 붙어 다시다를 찾아주었고 한껏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양요섭을 내려다보던 난 마냥 귀여워서 피식-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웃었고 이번엔 참기름을 찾는다는 말에 참기름도 찾아주었다. 사실 깨도 찾았는데 깨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 그냥 어설프게 찾는것보단 없다고 하는게 나을 것같아 없다고 둘러댔고 요섭이는 괜찮다며 참기름을 쓱 두른다음에 국자로 휘휘 저었고 밥그릇 두개를 꺼내어 보기 좋게 담아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결혼한 형들이 요리하는 부인 뒷모습이 그렇게 이뻐보여서 늘 안아주다보니 신혼 초창기엔 부인이 해준 밥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며 우스갯소리로 하는 소리를 웃으면서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분이 딱 지금 내 기분일 것 같았다. 양요섭은 나한테 부인이 아니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게 속상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테니까. 나는 말 한마디 오고 가는 것도 없이 밥만 먹으니 괜히 체할것 같아 수능 얘기를 먼저 꺼냈고 요섭이는 갑자기 학교를 안가도 된다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었다. 마치 그 얘긴 여기서 자고가도 된다는 말처럼 들려 내 심장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지만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응했고 그런 나의 나름 시크한 대처에 당황한 요섭이는 밥도 못먹고 말도 더듬어가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아이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확 덮쳐버릴것 같아 그냥 밥그릇에 얼굴만 쳐박고 밥만 묵묵히 먹었고 내 눈치를 살피던 아이 또한 나처럼 그냥 밥그릇에 코박고 밥만 먹었다. 원래 밥먹는 속도가 빠른 나는 내가 더 빨리 먹은 탓에 설거지통으로 가 빈 그릇과 요리할때 썼던 그릇을 설거지하기 위해 물을 잔뜩 뿌렸고 자기가 하겠다며 빈그릇을 들고 오는 요섭이를 멀리 밀어냈다. 요리는 내가 할 줄 몰라서 시킨거지만 내가 할 줄 아는것까지 힘들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실 가서 티비나 보라며 퉁명스럽게 얘기했고 하라는대로 또 하는 요섭이는 그대로 쫄래쫄래 부엌을 나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내내 온 신경이 거실에 있을 양요섭에게로 쏠려있었다. 그래도 내가 뒤돌아보면 눈이 마주칠것 같아 계속 뒤돌아보고 싶은걸 참아가며 최대한 빨리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나왔더니 요섭이는 어느새 새근 새근 잠에 빠져있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자정을 갓 넘긴 시각. 이제와서 애를 깨워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부모님한테 전화를 해드려야겠다 싶어 요섭이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열었다. 보통 부모님들이라면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자식한테 수십통에 달하는 전화와 메시지를 남겼겠지만 웬일인지 요섭이의 전화는 잠잠했다. 그래서 나는 그자리에서 핸드폰만 들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때 요섭이가 작성했던 학원등록서에 쓰여있던 집 주소가 삼성동 에비뉴인것으로 보아 이 애는 분명 있는 집 자식인게 뻔했다. 그리고 그런곳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라 자기일 챙기기도 바빠 자식일까지 관여하진 못하고, 결국 이 부모도 마찬가지로 자기 아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을거라는 결론에 달했다. 어떻게 그렇게 넘겨짚을수 있느냐고? 내가 그렇게 커왔으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양요섭의 마음을 잘 안다. 부모한테 기대했다가도 버려지고 버려져서 지금은 기대도 않는 그런 체념의 마음이랄까.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요섭이 친구 기광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이시간까지 나와 같이 있다는것에 잠시 놀라워하더니 원래 요섭이 부모님은 하도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시질 않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다시 주머니 안에 핸드폰을 넣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소파에서 자면 다음날 허리 아플텐데..라는 생각에 방으로 데리고 올라갈까 했지만 괜히 애가 깰까 싶어 잠시 잠깐동안 망설였다. 그렇지만 원래 거실엔 보일러를 잘 안틀고 이불도 하나밖에 없어서 한겨울에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준다한들 거실에서 자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일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요섭이가 깨지 않게 살짝 안아올려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살짝 살짝 밟아 올라갔다. 다행히도 깊게 잠들었는지 요섭이는 살짝 뒤척이는가 싶더니 다행히 깨지 않았고 무사히 내 침대 위로 눕히는데 성공했다. 편안하게 눕혀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는데 나는 도저히 요섭이와 같이 잘수가 없을 것 같아 남는 베개 하나를 들고 거실로 내려가 누웠는데 어쩜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정신은 점점 맑아져갔다. 아무래도 저 위에서 그 아이가 자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두근두근거렸고 나는 내 모든 이성을 동원해 최대한 참을 수 있을때까지 참아봤지만 결국 내 인내심은 새벽 3시에 폭발해버렸으며 그와 동시에 나는 결국 내 방으로 올라갔다. 애는 언제부터 깨어있었는지 침대 위에 앉아서 이쪽저쪽 두리번 거리고 있었고 내가 들어오는걸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두워서 자세히는 안보였지만 허둥대는게 내 눈에 다 보여 나는 그 아이 몰래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 사실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미친듯 뛰어대는데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척 요섭이의 옆자리에 베개를 가져다가 놓고 누웠고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척 말을 툭 하고 던졌다. 그리고 잠시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얘가 침대에서 아예 나가려는 것 같아 나는 급히 요섭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밖에서 자기엔 너무 추웠고 소파는 불편해서 다음날 일어나면 분명 온 몸 안쑤시는데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게 빤히 보여 그걸 알면서도 애를 밖에서 자게는 못냅두겠어서 춥다는 명분으로 애를 억지로 붙잡았고 양요섭은 결국 내 말에 순종하며 눕는 것 같았고 나는 이때를 틈타 그 아이를 마주보고 누웠다. 양요섭도 한참을 그러고 누워있는가 싶더니 내가 완벽하게 자는척을 하자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또 아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깨지 않도록 노력하는지 정말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잠결이라는 아주 좋은 명분을 방패삼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양요섭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고 보기에도 얇아보였지만 직접 안아보니 훨씬 얇은 그의 허리에 새삼 놀랐다. 무슨 웬만한 여자애 허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배짝 말라있었다. 얼굴엔 볼살이 많길래 그래도 나름 통통할 줄 알았는데. 의도치는 않았지만, 백허그를 한 꼴에 나도 좀 긴장되어 숨이 조금 거칠어졌고 내 숨이 양요섭의 뒷목에 세게 닿았는지 애가 조금 움츠러드는게 느껴졌다. 나는 괜히 놀리고 싶어져 끄응..하면서 더 바짝 끌어안았고 양요섭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딱딱히 굳어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양요섭이 내쪽으로 몸을 뒤척여 돌아 누웠고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쿵쿵 뛰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척 가만히 어떻게 하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해 내 얼굴을 보는지 킥킥 대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내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나. 나는 살짝 눈썹을 꿈찔거렸고 혹시나 내가 깨어있는걸 눈치채면 어쩌나 하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들키진 않았는지 양요섭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순간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에 나는 하마터면 눈을 뜰뻔했다. 양요섭은 내가 행여나 깰까봐 정말 입술만 맞대고 있었고 내가 아무 움직임이 없자 내가 자고 있다는 것에 확신했는지 몇초를 그러고 있다가 살짝 떼더니 이내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순간 용준형이 나한테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그 식이 어떤것이든지간에 그 애가 먼저 대쉬를 하면 밀어내지 말라는 내 친구의 충고. 어떤 식으로라든지간에 그가 대쉬한다는건 지 나름대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일테니 절대 밀어내지 말라는 그 충고가 머릿속에서 종이 펴지듯 쫙 펴졌고 나는 내 친구의 충고를 백퍼센트 수용하기로 했다. 이건, 양요섭 나름의 수줍은 대쉬였고 나는 이걸 밀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래 어떻게 되든간에 그 일은 나중일이었으니까. 나는 양요섭이 또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틈이 보이자 그 순간을 먼저 선수쳐 그 아이의 목에다 팔을 집어넣고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순간 들리는 엄마야..라는 수줍은 소리에 나는 나도모르게 웃어버릴뻔 했고 지금 이게 애를 데리고 뭐하는건가 하는 책망스런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기로 했다. 이건 지금 이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도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에라이 모르겠다. "..야. 윤두준. 너는 속편하게 자고 있으니까 편하냐? 남은 지금 죽을것 같구만.. 자면서 뭐 그렇게 힘이 세냐..더워 죽겠는데..심장도 쿵쿵쿵... 내가 사실..여태까지 살면서 누굴 좋아해본적이 없거든? 근데..너 만나고 나서부터 내가 병신됐어. 이 망할놈아. 너만 안만났어도..내가 이러고 있진 않을텐데.. 넌 맘편해서 좋겠다. 누구는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쳐버릴것 같은데 누구는 실실 거리면서 남 놀려먹기나하고..진짜 못된새끼. 내가 이렇게 남한테 매달리고 남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 치우쳐진적도 한번도 없었는데.. 짜증나 너때문에. 윤두준 이 망할새끼.." 순간 들리는 양요섭의 작은 혼잣말. 나는 내가 환청을 듣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 가까이 안겨있으면서 양요섭이 한탄하듯 하는 말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너무 귀여워서, 정말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깨물고 싶을정도로 너무 예뻐서 나는 도저히 자는 척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이게..어따대고..반말이야." 나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잠긴 목소리로 얘기했고 동시에 눈을 떴다. 겨울밤이라 더 어두워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여러번 꿈뻑이니까 그제야 조금씩 드러나는 양요섭의 이목구비에 나는 피식-하고 웃었고 양요섭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찍어 남겨두고 싶을만큼. 기겁한표정, 놀란표정, 무서운 표정, 두려운 표정.. 어떻게 사람 얼굴에 이런 여러가지 감정이 단번에 드러날수가 있는지 나는 가만히 구경하듯 보고 있었고 어이없게 잠꼬대 하는거냐며 물어보는 그 아이의 말에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넌 눈뜨고 잠꼬대하는 사람 봤냐. 순간 내 가슴팍을 팍 밀치고 침대끝으로 도망가는 양요섭을 보고만 있었고 씨발..이라는 욕을 읊조리는 양요섭에 나는 순간 화가 났다. 나는 욕을 하는걸 좋아하진 않았다. 근데 이 상황에서라면..내가 양요섭이었더라도 씨발보다 더한 욕도 지껄였을 것이다. 얼마나 쪽팔리고..도망치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바로 도망가려는 양요섭의 손목을 내가 빠르게 낚아챘다. 내가 다시한번 말해보라고 촥 깔린 목소리로 얘기하자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양요섭의 모습에 나도 이이상 내 욕구를 참을 순 없다는 생각을 하며 결국 요섭이를 내 앞에다 끌어다 앉혔다. 그동안 잘 참아왔다. 수십번 끌어안고 싶은거 한번도 안아보지 않았고 수십번 볼 꼬집고 싶은거 몇번 안해봤고 이 아이가 뭐라고 조잘거릴때마다 입맞추고 싶은거 겨우겨우 참아냈다. 근데..이제 더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남자고 내 앞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게임오버. 때릴라고 그러냐는 말에 나는 그 모습조차도 너무 귀여워 일단 내 앞에 앉혔고 정말 내가 자기를 때릴거라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질끈 감는 양요섭을 보며 그대로 그 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버렸다. 나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요섭이의 입술을 혀로 노크한뒤 입 안으로 들어가 마치 집어 삼킬것 마냥 헤집어 놓았다. 한참을 두사람의 혀가 엉켜 있을 즈음 눈을 살짝 뜨자 양요섭은 많이 놀랐는지 눈을 뜨고 있었고 나는 손으로 그 아이의 눈을 직접 감겨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리드를 했다. 이런쪽으론 처음인지 가만히 있는 양요섭의 모습에 생각보다 더 귀엽고 더 이뻐서 훨씬 더 오래 끌었고 양심상 첫키슨데 너무 길게 하는 것 같아 살짝 입술을 떼니 양요섭은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해져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선생님 좋아하는거 언제부터 알았냐는 그런 초딩스런 질문에 아무렇지 않은척, 사실은 심장이 미쳐버릴것 같이 이렇게 빨리 뛰어댔다간 과부하로 멈출것 같이 무섭게 뛰고 있었는데도 나는 내 주특기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초연하게 대답했고 양요섭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숙였다. 동글동글한 머리를 빤히 보던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너 뭐라고 할거야?" 이렇게 물었고 예상대로 당황해하는 요섭이를 보며 지금부터 할 일은 내가 해야될 일인 것 같아 조금 더 진지하게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좋았다고 니가." "처음봤을때부터."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양요섭이 먼저 키스를 하는건 예상에 없던 상황이라 난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나는 편히 자세를 잡고 아까보다 더 깊고 진하게 키스를 했다. 평생 잊지 못하도록 강하게. 나보다 훨씬 아이를, 웃는게 이쁘고 금발머리가 너무 이쁜 아이를 내가 감히 탐내는 거라면, 가질 수 없는 물건인데 가지려고 했다면 그 벌은 나중에라도 받을테니까 잠깐이라도 아니 좀 오래 금발머리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4년전, 현우를 잃고 다신 없을 줄 알았던 이 일이, 내 심장이 마치 고장이라도 날것처럼 뛰게해준 이 금발의 아이를 좀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었다. 4년전 그때완 다르게 서투르지 않게, 더 잘해줄걸 이라는 후회라는 감정이 들지 않도록 잘해주고 싶었다. 비록 서로를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는건 비단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걸 나는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첫번째 윤두준의 이야기 END- #10.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생각이 안난다. 저절로 눈이 떠져 눈을 떠보니 보이는건 웬 사람의 쇄골. 잠에서 방금 깨어나 정신이 없는 나는 이게 뭐지 싶어서 빤히 바라보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한줄기 빛이 스치듯 스쳐 지나가는 한 줌의 기억. 아까..새벽에..그러니까.. 나는 그게 혹시나 꿈이 아닐까하고 나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곱게 감겨있는 두눈. 착 가라앉은 속눈썹. 나는 이게 설마 꿈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꿈이면..어떡하지. 새벽에 볼이라도 한번 꼬집어 볼걸.. 나는 괜히 후회스러운 마음에 눈을 비비고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윤두준의 팔을 살짝 들어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가려는데.. "어딜 또 가게." 언제 일어났는지 아까보다 훨씬 더 잠긴 목소리로 나를 확 끌어안으며 말했고 나는 괜히 어색해져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에 윤두준은 눈을 서서히 뜨는가 싶더니 내 얼굴을 바라봤고 나는 물어볼까 말까, 괜히 분위기 망치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입만 달싹이고 있는데 갑자기 윤두준의 손이 내 볼에 올라오더니 아프지않게 살짝 꼬집었다. "왜. 꿈인가 싶어서?" 길거리에 나가서 돗자리펴고 앉으면 꽤나 신통한 점쟁이라고 소문 날 것 같다. 나는 내 속마음이 들킨것 같아 더 크게 눈을 뜨고 바라봤고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는가 싶더니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주었다. "내가 어제 사귀자고 했더니..먼저 키스한게.." 나는 윤두준의 말에 아까 밤에 있었던 그 일이 생각나 윤두준의 입을 손으로 막았고 윤두준은 내 손을 잡아 자기 입에서 내 손을 떨어뜨리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말을 할라고 이래.. "부끄러운거 아니잖아." "...그래도..." 윤두준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술을 주욱-내밀었다. 뭐..뭐 어떡하라고..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윤두준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내 입술에 그대로 입을 맞춰주었고 나는 앞으로 눈치를 좀 키워야겠단 생각으로 어제처럼 가만히 있었다. 윤두준이 하는대로. 나는 사실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니까. 근데..생각해보면...이렇게 내 정신을 쏙 빼앗아갈만큼 잘하는거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얼마나 많이 해봤다는건가..싶은 마음에 나는 괜히 지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처음인데, 나는 모든게 다 처음인데 윤두준은 내가 처음이 아닐거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심통이 나서 윤두준의 어깨를 밀어버렸고 윤두준은 왜그러냐는듯 쳐다봤지만 나는 이런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하긴 너무 쪽팔려서 그대로 침대밖으로 나와 거실로 내려갔고 곧장 따라내려온 윤두준은 내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왜." "..왜 그렇게 잘해요?" "뭘?" "..나는 다 처음인데.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내 말에 윤두준은 잠시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무슨 개그프로그램 보듯이 크게 웃어댔다. 씨..내말이 웃긴가. 나는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냉장고로 가 물을 따라 마셨고 내가 냉장고 앞에 서 있자 윤두준은 내 뒤로 와 나를 끌어안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삐졌어?" "아니거든요. 그냥 그렇다구요." "그럼 나도 너처럼 가만히 있을까? 어? 그래?" 윤두준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고 나를 놀리는 것 같은 그 말에 또 심통이 나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질투? 그래 질투같은 거였다. "됐어요." 나는 내가 먹은 물컵을 물로 대충 닦았고 윤두준은 내허리를 계속 꽉 끌어안으며 내 뒷목에 살짝 입맞춤을 하는가 싶더니 내 어깨를 앙-하고 물었다. 이에 나는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윤두준을 바라봤고 그는 그틈을 타 내 입에 입을 맞춰주었다. 윤두준이랑 같이 있다는게 믿겨지지도 않고 무엇보다 자꾸 아랫배가 간질간질거려서 참기가 힘들었다. "배고픈데..뭐 안먹어요?" 나는 싱크대에 내 허리를 대고 윤두준을 마주보며 물었고 윤두준은 내 앞머리를 쓱쓱 정리주며 내 눈에 시선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나 할 줄 아는거 없는데." 나도 요리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선뜻 내가 하겠다며 나서지도 못하겠고 이러다간 둘다 하루종일 굶을것 같아 어떡하지 싶은 마음에 눈을 요리조리 굴리고 있는데 윤두준이 갑자기 내 양볼을 손으로 꼬집더니 쭈욱-늘렸다. 마치 삐에로같이 쭈욱 늘어나는 입에 나는 너무 민망해서 손으로 내 얼굴을 가렸고 그는 계속 웃으며 내 볼살을 꼬집어댔다. 내가 언젠가 이 망할놈의 볼살 빼고 만다. "..그럼 내가 최대한..열심히 만들어볼게요. 나가있어요." 나는 그래도 아침밥을 먹어야겠어서 내 허리를 살짝 안고 있는 윤두준의 어깨를 밀며 냉장고 문을 열었고 윤두준은 부엌에 서서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꽉찬-어제도 생각했던거지만-냉장고를 쭉 훑은 다음 제일 요리하기 만만한 계란 몇 알을 꺼내어 놓고 어제 김치볶음밥을 할때 썼던 신김치도 꺼내어놓았다. 그리고는 냉장고 구석에 먹다남은 햄과 참치 캔도 보이길래 그것도 꺼내어놓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렸을때부터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옛날부터 키워준 유모할머니를 따라 부엌에 들어가서 장난도 치고 요리도 배워보고 그랬었는데 그나마 그 기억이 내 머릿속에 희미하게라도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먼저 손부터 씻고 계란을 빈 그릇에 두개 정도 풀어 그 안에 참치를 우루루 쏟아 부었다. 이건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참치전이었다. 소금도 살짝 뿌려서 섞은 다음..후라이팬이.. "선생님! 후라이팬 어딨어요?" 식탁에 턱 하고 기대어서 팔짱을 낀채 나를 보던 윤두준은 내근처로 다가와 싱크대 밑의 수납장에서 후라이팬 하나를 꺼내어주었고 더불어 식용유도 같이 주었다. 나는 고맙다며 그걸 받아들어 후라이팬에 열이 오를때까지 기다린 다음 숟가락으로 두숟갈씩 퍼서 동그랗게 부치기 시작했다. 지지지직-하면서 노릇노릇 익는 소리가 제법 먹을만 할 것 같았다. "요리 어디서 배웠어?" "아 어렸을때 집에서 어깨너머로요. 그래두 할줄 아는건 별로 없는데..나가 있어요. 신경쓰이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신경이 쓰인대?" "누가 계속 보면 신경 쓰이지 그럼 신경 안쓰여요? 나가서 청소를 하든가 티비를 보든가." 윤두준은 아주 곱게 내 말을 씹어 드셨다. 에라 망할인간. 그는 나한테로 오더니 또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몇번 한적 없지만 왜이렇게 이런 자세가 편한건지 나는 살짝 돌아보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안그래도 잘 모르는데..계속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면..분명 소금 넣는데에 설탕 넣을지도 모른다. "너 살 좀 쪄야겠다." "안그래도 볼살부터 뺄거에요." "거길 왜." "맨날 만지잖아요. 안그래도 볼살 많은거 컴플렉슨데. 나도 기광이처럼 홀쭉해져서 좀 뾰족뾰족 해지고 싶은데.. 동글동글 해서..눈도 동글 얼굴도 동글.." 나는 김치를 도마위에서 송송 썰었고 그걸 냄비에다 넣어 물을 얼추 넣은 다음 소금도 넣고 파도 넣어서 팔팔팔 끓이기 시작했다. 나름 김치찌갠데..이렇게 하는거 맞나. 다음부턴 집에가서 요리 좀 배워와야겠다. "그래서 이쁘잖아." "...왜..왜그래요 또. 나는 기광이처럼 섹시하단 말도 듣고 싶은데..맨날 귀엽다는 소리만 듣구." 나도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렸는지 윤두준이 고개를 쭉 빼어 내 얼굴을 보더니 소리없이 눈으로만 웃었다. 그리고는 내 귀를 살짝 깨물더니 얘기했다. "어젠..충분히 섹시하던데?" "선생님!!!" 음흉하게 변태처럼 내 귀에다 대고 저딴말을 나불거리니까 나는 진짜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엄청난 쪽팔림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말을 서슴없이..내가 홱 뒤돌아서서 소리를 빽 지르자 윤두준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부인 같다." "그럼 남편답게 이따 선생님이 설거지해요." 그러다 갑자기 찌개 넘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윤두준을 팍 밀쳐버리고는 가스불을 줄였다. 그리고는 남은 참치전도 다 구워서 그릇에다 내놓고 그 위에 식용유를 부은다음 계란후라이를 시작했다. 아..밥. 밥 있나? "선생님. 밥 있어요?" "없는데." "햇반같은건?" "집에서 밥을 안먹으니까 없지." "그럼 저 반찬들은?" "아주머니가 사다놓으시는건데?" "밥없이 반찬만 먹으라구요?" "아주머니 오셨을때 같이 밥도 해 놓으셔." 뭐야..그럼 밥도 없이 반찬만 한거잖아. 지금에와서 밥을 할 시간도 없는데.. "선생님 그럼 밑에 내려가서 햇반 사와요." "밖에 추운데?" "그럼 내가 가요?" 내 말에 윤두준은 에이씨..라면서 부엌에서 나가 2층으로 올라갔고 순순히 말을 잘듣는 그의 모습에 나는 괜히 뿌듯해지고 설레서 피식피식 하고 계속 웃어댔다. 이런게 신혼의 깨소금이라는건가 싶기도 하고 왜 이렇게 좋은 연애를 한번도 안해봤을까 싶은 생각도 하고 나는 처음 느껴보는 꿀맛같은 단맛에 거의 취해버릴 정도였다. 깨져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행복이랄까. "그것만 사오면 돼? 딴건?" "..음..과자랑 아이스크림두!" "살뺀다며?" "...그럼..그냥 밥만 사와요." 나는 군것질을 좋아해서 특히 커피는 입에 달고 사는데 살뺀다며? 라고 하는 그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차마 사오라는 말을 못했다. 에이씨. 밥먹고 나서 과자는 꼭 먹어줘야되는건데... 나는 금세 또 시무룩해져서 김치찌개에 햄이나 송송 썰어서 넣었고 윤두준은 검은색 패딩점퍼를 껴입으며 내 뒤로 살짝 오더니 고개를 내 얼굴쪽으로 빼 입술에 쪽-하는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이게 어느새 익숙해져서 놀라지도 않고 계속 요리에 집중했더니 윤두준은 어쭈?라면서 다시 입을 맞춰주었다. "아 빨리 갔다와요. 반찬 다 만들어놨는데.." 내가 윤두준의 어깨를 밀치며 말하자 그는 알았다면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밖으로 나갔고 나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내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심장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너무 달달해서 머릿속까지 달아진것 같았다. 계란후라이도 식탁에 올려놓고 다 부쳐진 참치전도 내놓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게 끓여진 김치찌개는 약불로 올려놓고 윤두준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그렇게 오래걸리지? 바로 밑에 편의점 하나 있는거 같던데.. 삑삑삑- 양반님은 아니시구만. 식탁 의자에 턱하니 앉아 참치전 하나를 손으로 집어 먹고 있는데 그때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윤두준이 들어왔고 그의 양손엔 비닐봉지에 가득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뭐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이게 다.." "니가 무슨 과자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걸로 사왔다." "사오지 말라니까.." 나는 그래도 밥먹고 과자를 먹을 수 있겠단 생각에 그 봉지를 받아들어 내용물을 확인했고 그 안엔 별의별 과자가 다 들어있었다. 감자칩부터 시작해서 초코파이까지. 거기다가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왔는지 드라이아이스로 포장되어있는 것이 봉지 맨 밑바닥에 놓여있었다. 이에 나는 그걸 냉동실에 바로 넣어두고 음료수도 냉장고 안에 넣어놨다. 그리고 나는 햇반을 전자렌지에 돌리려고 하는데 이미 윤두준이 전자렌지에 넣고 있었고 나는 그 과자봉지들을 소파위에 올려놓은 뒤 찌개를 식탁 정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아직까지도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얼른 밥이 다 되길 기다리며 오른손엔 숟가락, 왼손엔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윤두준은 점퍼를 벗어 소파위에 놓고 오더니 내 모습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왜 웃어요?" "애기냐. 밥달라고 떼쓰는 거 같다." "..내가 뭐..어쨌다고.." 나는 1분도 더 남은 시간에 그냥 찌개만 홀짝거리면서 먹었고 윤두준은 내 맞은편에 앉아 식탁에 팔을 개어놓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집에 전화 안해봐도 돼?" "아...안해도 돼요.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을텐데요." "식구는 누구누군데?" "엄마 아부지 누나요." 띠딩- 윤두준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에 밥이 나왔고 윤두준이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내 앞에 밥을 놔주었고 나는 비닐을 부욱 뜯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식혔다. 뜨거운걸 잘 못먹는 나는 입김을 동원해서 최대한 식혔고 윤두준은 또 나를 보고 웃더니만 밥 먹는데 열중했다. "누난 뭐해?" "아..무용해요. 지금 뉴욕인가 어디에 있어요." "뉴욕이면 뉴욕이지, 뉴욕 어디에 있어요는 뭐야?" "어딘지는 정확히 몰라요. 누나랑 연락하는것도 가끔씩 누나가 먼저 전화할때나, 네이트온에 들어왔을때 말고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서로 바쁘니까 연락도 잘 안하게 되고.." 내가 이 말을 할때, 나를 보던 윤두준의 표정이 씁쓸했다면 그건 착각일까. 가만히 나를 보더니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눈을 돌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우리 둘 사이에선 대화는 없어지고 밥먹는 소리만이 집을 메웠고 나는 생각보다 반찬들을 맛있게 만들어 뿌듯한 마음에 윤두준이 묵묵히 먹는걸 흘끔흘끔 쳐다봤다. 맛있다고 한마디 해주면 좋을걸. 그래도 계속 먹는걸 보니 영 맛없는건 아닌거 같아 그걸로나마 위안삼기로했다. 아무래도 나는 요리에 소질이 있는것 같다. 그냥 이참에 대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여기에 눌러 앉을까... "나가서 과자나 먹어. 설거진 내가 할테니까." "진짜요? 그럼 수고해요." 나는 빈그릇을 개수대 안에다 넣어놓은 뒤 그냥 거실로 나가려다가 어느새 설거지를 시작한 윤두준의 넓은 등짝을 보던 나는 아까 윤두준이 나한테 계속 그랬던것 처럼 나도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등에다 귀를 대고 있으니 심장 소리가 울림이 되어 내 귓가로 전해졌고 나는 묘한 느낌에 계속 등에다 귀를 대고 있었다. 나완 다르게 어깨가 딱 각이 잡히고 등이건 허리건 군살이 없어 탄탄한 몸매를 가진 윤두준은 어떻게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됐는지, 그 생각을 하다 난 정말 복이 많은 것 같다라는 걸로 결론을 내리며 거품질을 하던 윤두준의 옆으로 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해주었다. "이건 설거지하느라 수고하는 선생님한테 주는 상." 내 말에 또 소리없이 웃던 윤두준은 또. 라면서 입술을 살짝 내밀었고 나는 한번 더 해주며 말했다. "아까 추운데 나가서 내 간식거리 사온 선생님한테 주는 상." 아주 귀한상 주신다면서 앞으로 맨날 설거지해야겠다며 농을 친 윤두준은 옷에 거품 묻으니까 나가있으라는 말에도 나는 가만히 옆에 서서 있다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아까보단 좀 더 길게 쪽-하는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며 말했다. "나 안밀어내고 받아준 내 선생님한테 주는 상." 으..오그라들어.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그길로 바로 부엌에서 나와 티비를 틀고 비닐봉투 안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감자칩 하나를 꺼내어 봉지를 부욱-뜯으며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 뭐 재밌는거 없나..하고 뒤적이던 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영화가 한참 나오고 있는 채널에 멈췄다. 드라마나 로맨스소설 같은건 안보고 안읽어도 영화는 제법 자주 보는편인 나는 예전에 스치듯이 한번 본 적 있는 이 영화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볼륨을 높였다. 영화속 남자주인공인 주걸륜과 여자주인공인 샤오위가 서로 좋아하는 장면이 한창 나오고 있었다. 피아노도 같이 치고 자전거 타고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음반가게에 가서 서로 노래도 들려주는 그런 모습에 나는 아직도 설거지에 한창인 윤두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한들, 그리고 내가 그를 좋아한다한들 우리는 남의 눈으로 봤을땐 분명 남자 남자였다. 저렇게 예뻐보이지 않을 것 이란 생각에 나는 먹던 감자칩도 마다하고 tv에 시선을 꽂았다. 웃는게 예쁘고 단발머리도 잘어울리고, 얼굴도 하야면서 얼굴선이 곱고 목소리마저 얇고 이쁜 저런 여자가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영화속 샤오위를 윤두준의 옆에다 살짝 갖다놓아봤다. 예뻤다. 마음씨도 예쁜 여자는 윤두준을 쏙 빼어닮은 아이도 낳고 가족을 이뤄서 알콩달콩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윤두준의 삶을 좀 더 안정되고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텐데 나는 그럴수 없다. 나는 그저 말썽 피우는 제자일뿐이며 남학생일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남들이 봤을땐 그저 이해못할 동성커플일 뿐일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남자인것에 대해 원망했다. 내가 윤두준을 좋아했을땐 그냥 마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어제부로 사귀기로 했을땐 스킨쉽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게 좋았다. 그런데 사귀기로 하고 나서부턴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중엔..내가 질릴텐데. 자신과 같은 남자보단 선이 예쁘고 목소리도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싶어질텐데.. 난 그생각을 하니 너무 우울해져 과자고 뭐고 더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리모콘에서 뭘 잘못눌러 재생 속도가 빠르게 돌아가 멈췄고, 그때 영화에선 한창 주걸륜이 다른 여자와 뽀뽀하는걸 보고 충격 받은 샤오위가 도망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나도 나중엔 저렇게 되진 않을까. 지금은 좋다고하지만, 사랑은 변하는 법. 사람이 변하기에 사랑 또한 변한다는 그 말이 나는 새삼 무서워졌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윤두준이 학교도 다 졸업하고 결혼할 나이가 됐을때, 나는 아직도 이 마음 그대론데 윤두준이 먼저 변해서 나랑 비교도 안될만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여자와 사랑을 하고 있을까봐 무서웠다. 내가 놓기 싫어도 놓아줄 수 밖에 없을까봐. "왜 울어?" 설거지를 마치고 온 윤두준이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그의 말에 눈을 만져보니 눈가가 축축해져있었다. 어느샌가 울었나보다. 아마 이기광은 이런 상황에서 딱 이렇게 말하겠지. 일어나지도 않은일 갖고 미리부터 걱정 하지마 병신아. 그따위 생각은 그런 일이 생겼을때나 고민하는거야. 라고. 근데..왜이렇게 불안해지지. 나랑 비교조차 불가한 사람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듣게 될까봐. 왜이렇게..불안하지. "아..영화가 슬퍼서.." "뭐 그런걸로 우냐. 저게 뭔데." "말할 수 없는 비밀." 내 말에 윤두준은 내 어깨에 팔을 자연스럽게 올려 나를 감싸 안으며 나처럼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몇분을 보더니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며 내 볼을 살짝 꼬집더니 자기 어깨에 내 머릴 기대게했다. 그래.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다. 답안나오는 고민같은건..해봐야 득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주걸륜이 알게 된거에요. 샤오위가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는걸." 나는 예전에 한번 봤던것과 지금 보고 있는걸 최대한 합쳐 설명해줬고 윤두준은 아...라면서 내가 먹던 감자칩을 뺏어서 먹으며 영화에 집중했으며 한창 클라이막스를 달리는 영화에 나는 나도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제일 긴장되는 부분인, 주걸륜이 부숴지는 건물 안으로 몰래 들어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secret라는 곡을 빨리 치는 장면이었다. "..으..빨리..빨리.." "어차피 돌아가겠구만 뭘." "...악..." 마지막 건반을 치고나서 피 한방울이 뚝 하고 흐르며 그때 동그란 볼 같은게 주걸륜의 머리를 강타하려는 장면을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감았고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윤두준은 내 머리를 쓱쓱 흐트리며 웃었다. "...선생님이 주걸륜이면 어떡할거에요?" "뭘?" "샤오위 찾아서 아버지도 버리고 과거로 갈거에요? 그곳에 가면 샤오위만 선생님을 볼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을 보지도 못해서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될텐데도?" "그게 어디든지 그 사람이 있다면 가야지. 남이 날 봐주고 안봐주고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만 있으면 되는거지. 그사람만 날 보고 날 좋아해주면..그걸로 되는거잖아?" 윤두준은 감자칩 하나를 씹으며 말했고 나는 그 말에 할말을 잃어버렸다. 나라면...글쎄..나라면... 모든걸 다 포기하고 그 사람 하나 보며 과거로 가는거...못할것 같은데.. 저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윤두준의 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이 사람은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넌 안올건가봐? 내가 저렇게 가버려도?" "..에?" "내가 샤오위였음, 너 올거야? 안올거지? 이것봐..표정이 영 구려." 나는 아니라며 그를 툭 때리며 말했지만 윤두준은 삐진척 했다. 실망이라며, 나는 너 따라갈건데..넌 안오냐. 라고 장난식으로 말했지만 이미 그의 말은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버렸다. 내가 어딨든지 정말 찾아올건지. 그 마음이..변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11. 「이따가 수업 끝나고 영화 보러 가야돼요!!」 어제 우리가 그렇게 놀 동안 세상은 수능으로 한바탕 들썩였다. 신문 1면엔 수능 난이도 평가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인터넷이건 tv건 온통 수능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언어 외국어가 까다롭고 수리는 평이했다는 기사가 여기저기 떠도는 지금. 아직 수능이라는게 남일처럼 느껴지는 나는 고작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수능 1년 남은게 영화나 보러 가자는 게 말이 되냐며 나를 타박주는 윤두준을 문자로 꼬시는 중이다. 그래도 어떡해. 같이 영화 보고 싶은데.. "야 너 오늘 할일없지?" 윤두준한테 언제 문자가 올지 몰라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데 기광이가 빨개진 볼을 하고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약속 있는데 왜." "헐. 니 약속있어? 아씨.." 밖이 많이 추운지 학원에 들어와서도 입이 얼어 말을 제대로 못하는 이기광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고 기광이는 뭐가 짜증나는지 그게 무슨 약속이냐며, 취소하면 안되느냐고 나를 졸라댔다. "아 왜! 뭔데." "나 현승이랑 사귄당~" "그래서 뭐." "그러니까 내가 소개해주겠다고 우리 현승이." 나는 얼마전까지만해도 이기광의 이 자랑질에 열불나했었지만 지금은 미안하게도 아니었다. 나도 사귀는 사람 생겼거든 기광아. 근데 그건 내가 나중에 얘기해줄게. 서운해도 어쩔수 없다. 「이따 수업 끝나고 주차장으로 와.」 진동과 함께 열어재낀 핸드폰엔 이렇게 사랑스러운 메시지가 도착해있었고 나도모르게 헤벌쭉 웃고 있었는지 무슨 문잔데 그러냐며 내 문자를 훔쳐보려는 기광이를 피해 핸드폰을 재빨리 닫아 주머니 안으로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니네 현승이 보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둘러댔고 많이 서운했는지 입술을 삐죽이던 기광이는 자리에 앉은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현승일 보러가겠다며 자리를 떴고 나도 괜히 윤두준이 보고 싶어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교실 앞문이 살짝 열리며 윤두준이 나타났다. "잠깐 나와." 행여나 다른 애들이 들을까 싶어 조용히 입모양으로 속삭인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고 문 옆에서 기다리던 윤두준은 내 손목을 살짝 잡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따 영화보면 늦을텐데. 그래도 볼거야?" "기광이 새끼가 심야영화 보러간다그랬을때 나 엄청 부러웠단말이에요. 보러 가요!" "조용히해. 하여튼..양요섭 누가 말려. 그럼 이따가 수업끝나고 먼저 차 안에 들어가있어. 밖에 추우니까." 내 손에 자기 차키를 쥐어준 두준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가 싶더니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허리를 숙여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원래 이런게 더 짜릿한거야." 윤두준은 내 귓볼도 살짝 깨물더니 수업 잘들으라는 말은 잊지 않은채 먼저 교무실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때문에 교실에도 못들어가고 문 앞에 쪼그려 앉아버렸다.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다. 윤두준이라는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만약 윤두준이 다른 사람을 찾아 나한테서 날아간대도 나는..놓아주지 못할것 같다. ** "으..춥다." "선생님 추울까봐 내가 히터 틀어놨어요!"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윤두준과 단둘이 그것도 심야영화를 보러간단 생각에 너무 들떠서 나는 연신 싱글벙글이었고 기광이가 좀 의심했지만 나는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좋다고 둘러대고 말았다. 어쨌든 윤두준은 내가 좋아하는 캐주얼차림, 그러니까 회색 후드티에 아이보리색 면바지, 그리고 하얀색 컨버스화를 신고 온 이 차림을 하고선 내가 히터를 빵빵 틀어놔 따뜻하게 댑혀놓은 차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뒷자석에 내려놓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내 안전벨트를 대신 매주었다. 물론 뽀뽀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은채. "우리 너무 자주 하는거 아니에요?" "뽀뽀?" "다른 커플들은 이렇게 안하잖아요." "하는지 안하는지 니가 봤어?" "..아니..그런건 아니지만..." 윤두준은 자기도 안전벨트를 맨 뒤 기어를 1단으로 옮겨놓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기 시작했다. 윤두준과 스포츠카라. 지금은 비록 추워서 뚜껑을 닫아놓았지만 여름엔 이걸 열고 다니면 진짜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 차와 차 주인은 지나치게 잘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뭘해도 잘 어울리지........풉. "무슨 영화 볼건데?" "..음..몰라요. 그냥 아무거나." 잠시 신호대기를 하기 위해 차를 멈춰세운 윤두준은 룸미러로 머리를 정돈하더니 내 머리도 같이 정돈해주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깍지까지 끼었고 나는 그의 옆 모습을 바라봤다. 윤두준은 창틀에 팔을 올려놓고 고개를 받치고 있었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나는 윤두준의 손등 위에 살짝 뽀뽀를 해주었다. "이쁜짓 많이 하네. 애기." "...애..뭐요? 애기?!" "애기지 그럼. 여섯살이나 차이나는데." "...그래두..너무 닭살이잖아.." "뭐 어때. 원래 커플들끼린 애칭도 있고 그러는거지. 넌 언제까지 나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를거냐? 니가 선생님이라고 부를때마다 나는 뜨끔뜨끔 거린다고. 무슨 원조교제하는것도 아니고.." 때마침 파란불로 바뀐 신호에 윤두준은 내 손을 잠시 놓더니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잡아 운전하기 시작했고 나는 윤두준의 길고 하얗게 뻗은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마 처음 만났을땐 얼굴에 반하고 두번째 만났을땐 이 손에 반했던 것 같다. 손이 짧고 뭉툭하고 손톱도 짧은 나랑은 비교도 안될정도로 이쁜 손. "너 근데 그렇게 공부 안해서 어떡할래." "..누구 때문에 못하는건데.." "그게 지금 나때문이라는거야? 영화도 니가 보러 가자고 그런거다?" 윤두준은 나를 슬쩍 보며 발끈했고 나는 잠깐 웃고는 헛기침을 한다음에 발뺌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귀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나 수능 일년도 안남았는데..어떻게 책임질거에요? 나 대학 못가면 선생님이 데리고 살아야겠다." "그럼 나야 좋지. 그냥 대학가지말고 나랑 살자." 윤두준의 말에 나는 벙쪄 대답도 못하고 그의 옆모습만 빤히 바라봤고 깜빡이를 틀고 좌회전을 해서 영화관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윤두준은 내 무반응에도 꿈쩍 하지 않았다. "데리고 살라며. 데리고 살겠다는데 왜그러시나?" 열한시가 넘은 시각이라 주차장은 한산했고 아무데나 단번에 주차한 윤두준은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러 차에서 내렸고 나는 책가방과 핸드폰은 차에다 둔 채로 차에서 내렸다. "핸드폰은?" "귀찮게. 안갖고 가도 돼요. 연락 올데도 없는데 뭐." 윤두준은 내 말에 삐빅-하는 소리와 함께 차를 잠그더니 내 어깨를 감싸고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고 참 오랜만에 오는 영화관에 나는 괜히 들떠버렸다.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달콤한 팝콘향에 영화관 특유의 웅장한 느낌. 윤두준은 내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고 뭐 볼거냐며 현재 상영작 이라며 걸려있는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2012?" "뻔한걸 보겠다 그러냐. 알았어. 끊어올테니까 여기 앉아있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작은 포스터가 꽂혀있는 곳으로 가 흥미가 생기는 영화 포스터들은 몽땅 뽑아와 자리에 앉아서 구경했고 잠깐 고개를 들어 표를 끊고 있는 윤두준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입으니까 아저씨 같지도 않고-한번도 아저씨 같은 적은 없었지만-그냥 형 같았다. 어딜가나 주목을 받을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 티켓박스 여직원도 윤두준의 얼굴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 같아 나는 또 괜히 심술이 났다. 치. 윤두준이 표를 들고 뒤돌아서는걸 본 나는 바로 고개를 내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포스터만 쳐다봤고 그가 나한테 오는줄 알았건만 오질 않아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팝콘과 콜라를 사고 있었다. 역시..많이 와본 솜씨였다. 흥. "들어가자. 십분후에 바로 시작이드라." 나는 팝콘을 들어 카라멜맛이 나는 팝콘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고 어두컴컴하고 시끄러운 광고가 나오는 곳으로 들어가 더듬더듬 겨우 자리를 찾았다. 윤두준이 맨 뒷자리로 끊은 덕에 안그래도 사람도 없겠다, 한산한게 딱 내스타일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와 윤두준은 편하게 자세를 취했고 나는 계속 팝콘만 먹어댔다. "너만 먹냐." "그럼 먹는다고 하던지." 나는 팝콘을 윤두준한테 넘겼고 그는 한움큼 가져가서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시작하는지 스크린이 커지고 그나마 켜있던 모든 조명들이 모두 꺼져버렸다. "진짜 오랜만이라 떨린다.." "별게 다." 윤두준은 내 손을 잡았고 나는 팝콘을 먹어야 되서 불편하기에 손을 빼려고했더니 나를 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에 나는 깨갱 소리도 못내고 그냥 가만히 있었고 팝콘을 불편하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에이씨. 미국형 블록버스터답게 처음부터 빵빵 터지는 CG에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도로가 쫙쫙 갈라지고 차들이 넘어가고..하여튼 저런 영화에선 죽어도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 쳇. 나는 팝콘 먹기를 결국 포기하고 그냥 의자에 기대서 영화를 보는데 윤두준이 내 손을 놓더니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이에 나는 얼씨구나 하고 팝콘박스를 아예 내 품에 끌어안고 홀짝 홀짝 팝콘을 흡수했고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내 볼을 살짝 꼬집고는 내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그러니까 니 볼살이 계속 살찌는거야." 나는 심통이 나서 씨..하면서 윤두준을 째려봤고 그 입에 뽀뽀를 해준 윤두준은 다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팝콘냄새나." 그래서 좋다는거야 싫다는거야. 당연히 팝콘을 먹었으니까 팝콘냄새가 나지. 나는 그래서 뭐요. 라고 중얼거린 뒤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영화는 스릴과 지루를 계속 오고갔다. 한차례 시원한 cg가 지나간뒤 또 지루해져서 무슨 영화가 이러나..싶어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비비고 있는데 윤두준이 나를 툭툭 쳤고 왜요, 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얼굴을 돌리자마자 내 입술위로 말캉한 것이 겹쳐져왔다. 으레 뽀뽀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윤두준은 자신의 혀로 내 입술을 노크했고 나는 영화관에서 이래도 되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그는 곱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이에 모르겠다 싶어 그의 입술을 허락했고 윤두준은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좀 더 깊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직은 서투른 내가 숨을 언제 쉬어야 되는지 그 타이밍을 놓쳐 윤두준의 등을 팍팍 때렸고 살짝 입을 떼준 윤두준은 내 귓가에다 말했다. "넌 언제쯤 숨 제대로 쉴래." "몰라요 나도. 하다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쉬겠죠." 내 말에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내 아랫입술을 쪽-하고 빨아들이더니 내 입술 근처에 묻은 타액을 손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다시 감싸 안아 그 손으로 내 귓볼을 어루만지며 시선은 영화에 고정시켰고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끌어안고 억지로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야. 일어나." 갑자기 환해지는 불빛에 나는 음..하면서 눈을 떴고 내가 영화를 보다 잤는지 윤두준은 내 옆에 허리를 굽히고선 나를 깨우고 있었다. "나 잤어요 설마?" "내내 자던데." "..아씨..영화가 너무 지루했어 진짜." 나는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두준은 당연하게 내 손을 잡으며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왔다. 그리고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엘레베이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영화관은 지나치게 한적했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심야영화면 사람 꽤 있지 않아요?" "몰라." 나는 띠딩-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윤두준은 B2버튼을 누른뒤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바로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입술에 입을 맞췄고 오늘만해도 이게 벌써 몇번짼지, 무엇보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어떡할라고. 나는 무서워져서 윤두준의 어깨를 밀어내려는데 윤두준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게 들어왔다. 짧은 시간내로 엘레베이터 문은 띠링-하고 열렸고 아무렇지 않은척 입술을 뗀 윤두준은 나를 냅두고 먼저 엘레베이터 밖으로 나갔고 나는 빠른걸음으로 따라잡아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꾸 사람들 있는데서 그럼 어떡해요!!" "없었잖아." "그래도 사람들 들어오면 어떡할라구!!" "뭐 어때." 속편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보던 나는 그냥 벽에다 대놓고 말하는게 낫지. 싶어서 주차해놓은 차로 다가가 삐빅-하고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에 냉큼 올라탔다. 01:15AM 이라는 시간이 번쩍하고 들어왔고 나는 놀라지도 않은채 핸드폰을 열어 혹시나 연락온게 없어 확인했지만 여전히 내 핸드폰은 묵묵부답. "너도 어지간히 인간관계 안좋은가보다. 어떻게 친구한테도 문자가 안오냐?" "원래 문자하는거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어이구. 그러셔요. 친구가 없는게 아니구요?" "아니거든요!? 그러는 선생님은!" "내가 뭐? 나는 하도 연락이 많이 와서 감당이 안되는데?" 윤두준은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맨뒤-내것도 직접 채워주는 센스를 잊지 않은채-차를 출발시켰고 니네집 가는길 똑바로 알려주라며 나한테 한마디 하곤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저쪽에서 좌회전이요. 그담부턴 쭉 직진하면 돼요." 내 말대로 좌회전을 한 차는 그로부터 쭉 펼쳐진 주택가에 윤두준은 참 재미없는데서 산다며 한마디 던졌다. 사실 정말 재미없는 곳은 맞았다. 주변에 편의점이나 PC방이 있는것도 아니고 정말 주택들만 쫘르륵 늘어선 동네에 나는 너무 신물이 났다. 그래서 대학만 들어가면 독립하겠다고 수십번도 넘게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었다. 뭐 귓등으로도 안들으셨지만. "저기서 세워줘요. 여기가 울집이에요. 들어가세요. 집 들어가면 문자해요." "..어. 꼬맹아. 공부 좀 해라. 수능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럼 선생님이 내 과외 선생님 해주면 되겠다. 나 선생님 학교 갈라면 공부 디따 해야되는데!" "생각해보고." 쪼꼬만게 까분다며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 말 안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괜히 들떴다. "어? 진짜 해줄거에요!?" "꼬맹이 대학보내려면 어쩔수 없지." "..와..나 그럼 맨날 선생님 집에서 과외 받아두 돼요?" "그러다 자고 가고?" "...나 놀리는거 대빵 재밌죠?" "재밌으니까 놀리지." 그의 말에 나는 가겠다며 차에서 내려 가방을 맸고 바로 창문을 내린 윤두준은 얼른 들어가라며 말했다. 나는 이따 꼭 문자하라는 말과 함께 초인종을 누른 뒤 바로 열리는 대문으로 들어가려다말고 손을 흔들었다. 이에 윤두준은 윙크 한번 진하게 날려주신 뒤 바로 차를 돌려 아까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갔고 나는 그 윙크에 심장이 두근거려 집 안으로 들어와서 쭈그려앉았다. 날씨는 많이 추웠지만 마음은 너무 행복했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남들은 부잣집에 살면 매일이 행복이지 않느냐고 물어볼텐데 그럼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와서 직접 살아보라고. 딱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그럼 내 기분 알거라고. 난 또다시 가족없이 빈 집에 들어가야될거고 텅빈 방에서 텅빈 침대에 누워 혼자 잠들어야할것이다. 하지만 요즘같아선 그마저도 상관 없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 내 방은 2층에 있는데 여긴 그냥 내 개인적인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여기에 누나방도 있는데 누나는 일년에 한번 한국에 들어올까 말까니까 사실상 여긴 그냥 부모님 집 안에 있는 또다른 집이라고 생각하면 될거 같다. 뭐 크기도 대충 그정도니까. 나는 일하는 아주머니의 인사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와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2층 거실의 쇼파와 테이블, 그리고 켜본지 하도 오래돼 기억도 안나는 벽걸이 tv를 심드렁하게 쳐다보곤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지저분하거나 난잡한걸 싫어해서 가구도 그렇게 많지 않아 방은 큰데 항상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내 방문은 방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그걸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건 침대와 책상이었다. 내 방안엔 얕은 계단이 2개 있어 그 위엔 세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침대와 스탠딩 오디오 컴포넌트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왼쪽을 보면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침대위에 앉아 앞을 보면 계단 밑에 아주 큰 원목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노트북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방문 바로 옆엔 작은 평면 tv와 1인용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있었다. 사실 제대로 쓴 적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1인용 소파에 앉아 오른쪽을 보면 그 끝엔 화장실 문이 있었고. 나는 그 황량한 방 안에, 사람의 온기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그 빈집 그리고 그 방에 들어서 까만방에 환한 불을 켜고 책가방을 소파위에 던진 다음 침대위에 철퍼덕 하고 누웠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니 깜깜한 밤.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냥 까만 밤이었다. 시골로 내려가면 별이 내 눈위로 쏟아지는 것 처럼 많다는데.. 정말 많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또 보나마나 이기광이겠지 싶어 액정화면을 보는데, [윤두준] 그 이름 석자만 봐도 쿵쾅 쿵쾅 뛰는 가슴. 아무래도 중병에 걸린게 분명하다. "여보세요?" 「뭐해. 나 지금 들어왔어.」 "빨리 갔네요?" 「우리집이랑 생각보다 가깝더라고. 그냥 바로 잘거야?」 "선생님이랑 선후배 될라면 공부해야죠. 공부하고 잘거에요." 윤두준은 옷을 벗는 중인지 샥샥 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조용히 침을 꼴딱 삼키며 수화기를 귓가에 더 바짝 가져다댔다. 「아. 미안. 옷 좀 벗느라. 내가 생각해봤는데. 과외하자.」 "에? 갑자기.." 「그냥..학원에서 너 제대로 못보는것도 그렇고 괜히 들키면 곤란해지기도 하니까.」 "들킬게 뭐 있어요..어차피 남들이 봤을땐 우린 아무사이도 아닌데." 나는 아무사이 라는 단어를 내 입밖으로 꺼냈을땐 가슴 한쪽이 씁쓸했다. 솔직히 남들이 봤을땐 그냥 친한 선생학생 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커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난 니꺼 넌 내꺼 라는 남들 다 하는 커플링조차도 없는데. 나는 순간 내 왼손을 바라봤고 괜히 짧고 뭉뚝한 손가락이 싫어 주먹을 꽉 쥐어버렸다. 「나 내일 말할거야. 선생 구할때 까지만 있고 바로 빠질거야. 그러니까 이주정도만 참아.」 "왜 그렇게 무리하게.." 「..계속 보고싶으니까.」 나는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다. 애정표현이라는 그 네글자는 윤두준의 머릿속엔 없는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할 줄 안다니.. 나는 나도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못들은척 하며 태연하게했다. "나때문이면 안그래도 돼요. 기광이도 이제 과외 한다고 같이 받을까 생각..." 「그새끼 싫어.」 내 말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뜸 이기광이 싫다는 말에 나는..괜시리 화가났다. 그래도 내 친군데. 나를 좋아하면 내 주변에 있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도 좋아해줘야되는거 아닌가.. 나는 용준형이 싫진 않은데..오히려 더 친해지고 싶은데..왜.. "...왜그래요? 기광이도 착해요. 애가 입이 험해서 그렇지 은근히 따뜻하고 챙겨주기도 하고 애가 정이 많아서 겉으론 툴툴대고 생각도 많이 해주고 그러는데.." 「그래서 싫다고.」 차갑게 식은 윤두준의 목소리가 지금은 좀 화가나고 짜증도 났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싫어서..기광이가 그래. 솔직히 싸가지가 있는 편은 아니야 그렇지만 영 매너가 없는 놈은 아닌데. "왜 그래서 싫어요? 선생님 입장을 바꿔서 내가.." 「니가 내앞에서 그새끼 편드는게 더 싫어.」 "편드는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내가 선생님 친구 싫다고 그러면 기분 좋아요? 아니잖.." 「난 니앞에서 딴사람 칭찬하고 좋다는 티 안내잖아.」 뭐야..이거.... "..선생님 지금 질투해요?" 「...그러니까 내앞에서 이기광 얘기 하지마. 내 앞에선 딴새끼건 딴년이건 이름도 꺼내지마.」 "..지금 질투하는거죠! 그쵸!!!!" 윤두준은 아무말도 없었다. 마침 아랫배가 꿀렁였다. 뭔가 간질간질한거 같으면서도.. 기분은 너무 좋아서 지금 모르는 사람이 나한테 와서 한대 치고 간다고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랑해. 끊어.」 뚝- 순식간에 뚝 끊기는 전화. 그렇지만 나는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해 줬는지, 어떤 말을 속삭여줬는지. 나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해주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부끄러워서 일부러 피하는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나는 문자를 치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사랑해. I love you 그 어떤말도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 하트 하나를 찍어서 보냈다. 나는..윤두준의 기습고백에..너무 행복했다. #12. "...에!? 진짜로 그만 뒀어요!?" 정말 윤두준은 오늘부로 학원을 그만두었단다. 이주 전에 하는 말이 나는 그냥 하는소린줄 알았더니 방금 전화를 걸더니 하는말이... 나 학원 그만뒀다. 못살아 내가. 「수업 끝나고 데릴러 갈게.」 "아니 잠깐만!! 그럼 앞으로 뭐할건데요?" 「너 가르쳐야지.」 학원 교실에 앉아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애꿎은 문제집 끄트머리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지금 어디에요?" 「주차장.」 "잠깐 봐요." 나는 전화를 끊고 곧장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기광이는 오늘 현승이를 소개해주겠다며 약속 잡으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에 알겠다고 하자 혼자 신나서는 또 팔랑거리며 장현승을 만나러 나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방금 차에 탔는지 가방을 뒷자석에 놓고 안전벨트를 매고있는 윤두준이 보였고 나는 바로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요?" "말했잖아. 그만둔다고." "..그럼 기광인 어떡해요. 걔 나때문에 학원 다니기 시작한건데..내가 그만둬버리면.." 순식간에 어두워진 윤두준의 얼굴에 난 그제야 내가 잘못했다는걸 알았지만 사실이었다. 다니기 싫어하는걸 억지로 겨우겨우 꼬셔서 다니게한건데 이제와서 내가 쏙빠지겠다그럼 어떡하느냔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나때문이 아니라 장현승때문에 꼬박꼬박 잘 다니고 있는거 같긴한데 그래도..이건... "..그럼 기광이두 같이 과외해주면 안돼요!?" 나는 밝게 웃으며 윤두준의 한쪽 손을 내 양손으로 부여잡고 말했고 윤두준은 나를 무슨 헛소리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잔말말고 내일부터 우리집으로 와. 과외비는...니가 밥해주는걸로 대신하고." "그런게 어딨어요! 나도 밥 할줄 몰라요!!!!" "그럼..몸으로 때우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윤두준의 표정이 어딘가 야릇해보여 나는 몸으로 뭘 어떻게 때우지? 라는 생각을 하다 설마..싶은생각에 나도모르게 기겁한 표정을 짓자 윤두준은 피식하며 웃으면서 내 앞머리를 정돈해주기시작했다. "무슨 생각하시나 양요섭씨? 난 그냥 청소하고 빨래하라는거였는데.. 그 첫날밤을 요구당한 소녀의 표정은?" "...내..내가 뭐!! 뭐 어쨌다고 그래요! 아니거든요?"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윤두준의 손을 탁 치며 내가 앞머리를 정리했고 윤두준은 그럼 왜 얼굴은 왜 빨개졌냐며 나를 놀렸고 나는 괜히 부끄러워서 입술을 비죽내밀고 뾰로통하게 앉아있었다. 맨날 나 가지고 놀고..짜증나! 그때 내 눈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지더니 내 어깨에 윤두준의 따뜻한 손이 닿음과 동시에 내 입술위로 촉촉한 어떤것이 겹쳐졌다. 나는 양 손을 꽉 부여잡고 가만히 있었고 윤두준은 내 입술을 살짝 두드리더니 내 입안을 훑었고 짧은 시간내의 가벼운 키스를 한 그는 내 입술에 쪽-하는 찐한 소리를 일부러 내놓고는 내 코를 손으로 톡-하고 꼬집었다. "오늘 어디 좀 같이 가자." "..아 오늘 안돼요. 오늘 기광이..뭐라그래야되지. 여자친군 아닌데..아 어쨌든 누구 만나러가야돼요." "또 이기광인가?" 한쪽 눈썹이 찡긋해진 윤두준은 내 귀를 만지작대다가 손을 떼더니 나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봤고 아무리 윤두준이 화난척해도 어쩔수 없었다. 기광이랑 한 약속이 먼저였으니까. "진짜 오늘은 안돼요. 기광이랑 먼저 약속 한거란말이에요. 내일 만나요 내일." "..오늘 아님 안돼." "왜 또 괜히 그래요!!" 윤두준은 아예 내 얼굴을 보던 그 방향을 정면으로 틀어 시동을 걸며 운전하려고 준비했고 나는 다급해져서 윤두준의 팔을 부여잡았다. "기광이랑 선생님은 다르잖아요. 걔는 친구고 선생님은..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질투할걸 해야지..애도 아니고.." "니가 너무 대놓고 이기광을 챙긴단 생각은 안들어?" "뭘 챙겨요! 요즘 맨날 선생님이랑 놀았잖아. 맨날 선생님이랑만 전화하구 문자하구 선생님 집에만 놀러가구!" 나는 괜히 서러워져서 윤두준의 팔을 퍽-하고 때린 뒤 그냥 차에서 내리려고 차 문 잠금 장치를 푸는데 윤두준이 내 어깨를 잡아와 자기쪽으로 돌려세웠다. "알았어 알았어. 과외시간은 매일 9시부터 12시까지." "..밤?" "데려다줄게." "뭐하러 그래요! 그냥 저녁에 해요. 나도 집에 혼자 갈 수 있는데.." "됐고. 너 손 잠깐만 줘봐." 윤두준의 말에 나는 내 왼손을 내밀었고 갑자기 내 손을 잡은 윤두준은 깍지까지 끼며 뭔가를 생각했다. "왜요?" "...아니야. 이따 수업 끝나고 이.기.광.이랑 만난담에 늦지않게 집에 들어가. 들어가면 전화하고." "..네!" 나는 차에서 내리려다가 갑자기 홱 돌아서서 윤두준의 입술에 쪽-하는 뽀뽀를 해주고는 곧장 차에서 내렸고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나는 학원으로 후다다닥 올라와버렸다. ..부끄러워.. ** "온다!!! 너 싸가지없게 굴면 죽여버린다." "아 알았다고 병신아!!! 몇번을 얘기하는거야 대체." 남자셋이서 카페에 들어가긴 좀 그래서 피자집에 들어와 앉았다. 원래 주인공은 늦게 나타난다고 하나.. 나는 이기광의 맞은편에 앉아 아까 샐러드바에서 퍼온 푸실리와 푸딩을 먹으면서 있었고 아까부터 이기광이 계속 말실수 하지마라, 욕하지마라, 싸가지없게 굴지마라 등등 당부의 당부를 거듭해서 짜증이 난 나는 요즘 윤두준때문에 욕을 줄이려고 노력했던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망할새끼. 지잉- 지잉- 단호박 샐러드도 먹고싶어서 샐러드 그릇을 들고 샐러드바로 가서 한스쿱 떠서 그릇에다 놓고 테이블로 돌아오는데 기광이는 통화중이었다. 하긴 약속시간이 여덟시였는데-학원은 오늘부로 그만뒀다-벌써 십분이 넘었으니까 장현승한테 전화를 하나보다 싶어 포크로 단호박 샐러드만 야금야금 먹는데..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집에 혼자 잘가는 새끼거든요. 뭘 간지럽게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그래요. 그런건 그쪽이 하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면 어떻게 하실건데요? 오시던가요. 그쪽이 먼저 저한테 하시는걸 생각하셔야죠. 저도 싸가지 없는거엔 싸가지없게 하거든요." 무슨 전환데 저렇게 온갖 날을 다 세우고 저러나 싶은 마음에 콜라를 한모금 쪽-마신다음 눈만 들어올려 기광이를 쳐다보는데...저거..내핸드폰..인거 같은데.. 나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 내 양 주머니를 뒤져봤고 기광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뺏어서 봤더니. "야 이기광 개새끼야!!!!!!!!" "내놔." "꺼져 병신아. 니가 뭔데 내전화를 받아! 가서 장현승이나 데리고와."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지금이 통화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따박따박 소리를 질렀고 기광이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정리하더니 싹 굳은표정으로 할말 더 있다고 내놓으라고했지만 나는 가운데손가락을 조용히 날려준다음에 가게 저쪽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 이기광을 째려보며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댔다. 화 많이 났겠지.. "..여보.." 「그새끼 바꿔.」 "아..선생님. 아 그러니까요.." 「빨리 바꾸라고 했다.」 "아 진짜 그런애 아닌데..좀 둘사이에 오해가 있는거 같아요. 저 기광이 친구 만나러 왔거든요. 그러니까.." 「양요섭. 좋은말로 할때 바꿔.」 "아..저.." "아 저 이기광인데요. 언제 한번 따로 만나죠. 양요섭이랑 그렇고 그런사이면 저랑도 한번 봐야 되는거 아니에요? 그쪽 스물넷이라면서요. 어차피 나이차이도 별로 안나는데..선생..아 선생도 아니잖아요 이제? 윤두준씨. 내일 만나죠. 만나서.." "야!!이기광!!!!" "네. 그럼 거기서 만나죠." 뚝. 나는 기겁했다. 둘다 한성깔 하는데..둘이 만나면..분명 둘중 누가 앓아도 누워도 누울것이 뻔했다. 핸드폰을 내 손바닥에 쥐어주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는 기광이의 뒷모습은 굳이 그 표정을 보려하지 않아도 화가 많이 났다는게 보였고 나는 어떡할수도 없어 쫄래쫄래 쫓아가 그 앞에 앉았다. "..뭐래?" "뭐. 아 씨발 그새끼 내가 진짜..그새끼가 죽던 내가 죽던..씨발 담판 지을거야. 개새끼 존나..지까짓게 뭔데 지랄이야. 아 존나마음에 안들어. 니가 좋아하는 사람만 아니었음.. 진작에 뒤졌어 그 개새끼." "..야 무슨 말을 그렇게하냐. 언제 만날건데?" "몰라도 돼. 아 씨발 기분 존나 좆같네." "그러니까 그 전활 왜받아서!!!" 기광이는 화가 나는지 물을 벌컥 들이켰고 그때마침 들어온 장현승의 모습에 우리 단순한 기광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봄날씨에 눈 녹듯 사르르 녹는걸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밖엔 안나왔다. 뭐야 이 병신같은새낀.. "안녕하세요." 들어오면서 꾸벅 인사하는 장현승의 매너에 나는 이기광때문에 짜증나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어정쩡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기광의 옆에 앉은 장현승의 외모는 그때 잠깐 봤던것보다 훨씬 귀여웠다. 학교에서 뭐라고 할 정도의 머리길이를 가진 장현승은 귀여운 바가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앞머리에 살짝 뽕도 들어간거 보니..만화 캐릭터 같기도 하고.. 피부는 뽀얗고 눈은 나보다도 더 동그란거 같았다. 나도 눈 크고 동그란거엔 안밀리는편인데..얘는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눈도 동글동글해서 그냥 동글했다. 현승이가 오자 기광이는 테이블 옆에 꽂아놨던 메뉴판을 들어 뭐 먹을까 서로 얼굴을 가까이대고 얘기를 나눴고 나는 피자라면 아무거나 다 좋아서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둘이 콩닥 대는걸 보고만 있었다. 내가 윤두준이랑 같이 있어도 저런 느낌이 날까. 그냥 처음보는 이기광의 따뜻한 눈빛과 수줍은 장현승의 모습은..이뻐보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남자애들 셋이서 피자먹으러 온 것 처럼 보이겠지만 내 눈엔 그냥 귀여워보이기도 하고 좋았다. 이기광 저새끼한테 어떻게 저런 면이 있을수가 있지.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야. 베셀로 먹을래?" 이기광의 말에 맘대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고 이기광은 피자 주문과 함께 컵 하나만 더 갖다달라는 말도 더했고 좀 머쓱했는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소개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쪽은 나랑 개절친 양요섭. 이쪽은..알다시피 장현승." "알다시피는 뭐냐. 안녕..나 그때 너한테 이름 물어봤었는데 기억하나?" 나는 포크로 푸실리 하나를 찍어 먹으면서 말했고 장현승은 긴장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기광이 빠질만하네. 은근히 귀엽기도 하고.. 지이잉- 지이이잉- [윤두준] "윤두준이냐?" 내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는지 그 표정을 보던 이기광은 띠꺼운 말과 함께 나를 아니꼽게 쳐다봤고 나는 고개 한번 끄덕인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 「어디야.」 "지금..미스터피잔데..이제 갈거에요. 걱정말고.." 「어디 미스터피자.」 목소리가 촥 가라앉은게..기분이 영 안좋아보였다. 아무래도 이기광 때문인거 같은데..하여튼 저 시한폭탄같은 새끼. 장현승이랑 있을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것같이 저러면서 왜 윤두준은 못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장현승한테 하듯이 윤두준한테도 하라고는 절대 안바랄테니까 반의 반. 아니 그의 반반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진짜. 나쁜새끼. "...학원 길 건너에 있는거요." 「어. 알았어 이따 집 갈때 문자하고.」 뚝 끊겨버린 전화에 나는 나도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이기광은 장현승이랑 무슨 얘기를 하는지 낄낄대다가 나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왜. 여기 온대?" "아니..어디냐고. 이따 집 갈때 문자하래." "..맘에 안들어." "너 진짜 왜그러냐고. 너 입장 바꿔서 내가 현승이한테 그런식으로 헀음 좋겠냐?" "..말 가려해라. 얘가 너한테 싸가지 없게 구냐? 나도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 잘해주는 사람이야. 오는게 있음 가는것도 있는거다." 나는 차마 할말이 없어 말을 말자며 차창 밖을 말없이 쳐다봤다. 속상하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구도 좋아해줬음 좋겠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나는 너무 속상하다. 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인데..짜증나 진짜. "저..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이기광 윤두준 때문에 짜증나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냥 멍하니 바깥을 보는데 현승이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그를 쳐다봤고 망설이는 표정으로 수줍게 나한테 말을 걸었고 나한테 소개해주는 자린데 내가 너무 내생각만 한것 같아 최대한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아. 어!! 이기광한테 형이라고 부름 나한테도 그렇게 불러야지. 너는 근데 이기광 어디가 좋아서 만나냐. 이기광 이새끼야..뭐..." 이기광의 과거에 대해 폭로하려다가 이기광 이새끼가 포크를 들고 말하면 뒤진다는 표정을 짓기에 나는 쪼르르륵 꼬리를 내렸고 그걸 눈치못챈 장현승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멋있잖아요. 웃는것도 멋있고..착하고..잘해주고.." "착하고..잘해주고...웃는게...멋있다고? 이새끼 웃는거 빙군데? "아니에요! 진짜 멋있는데..맨날 데릴러 오구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그 말에 나는 하도 어이가없어서 포크로 푸딩만 콕콕 찌르다가 이기광을 살짝 올려다봤고 지도 쪽팔린건 아는지 괜히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긁었다. 그래 이기광도 진짜 좋아하는 사람앞에서는 부끄러워할줄도 아는구나 싶어 그냥 좋아보였다. 늘 가볍게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거에 익숙해서 정말 좋아하는 사람 만나도 그렇게 해버릴까봐 내심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 현명한 기광이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땐 놓치지도 않고 용감하게 도전할줄도 알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도 알았다. 기특한 것. 몇분이 지나자 주문한 피자가 나왔고 기광이는 먼저 피자 옮기는데 쓰는 칼을 들어 한쪽을 잘라 현승이 부터 주고, 그 다음 내 접시에, 마지막으로 자기 접시에 담더니 핫소스나 치즈가루 주냐고 현승이한테 자상하게 물었고 아무것도 안뿌려먹는지 현승이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이기광은 나한테 핫소스만 넘겼다. 나는 늘 핫소스만 뿌려먹었다. 치즈가루는 느끼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서 싫었고 핫소스는 매콤해서 피자가 많이 느끼하지 않았다. 그런 내 식성을 아는 기광이는 치즈가루는 제자리에 넣고 핫소스만 넘기곤 칼과 포크로 피자를 잘라먹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나 오늘 학원 끊었어." "왜?" "아..과외 할라고..너한테 미리 말할라고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아 괜찮아. 어차피 현승이 그 학원 다니니까 나 혼자 다니지뭐." 그런게 어딨냐며 화낼줄 알았더니 별말없이 넘어가자 장현승이 좀 고마웠다. 아마 장현승 없었으면 잘 삐지는 이기광 풀어주느라 내가 애 좀 먹었을텐데.... "형 내일 토요일인데 뭐해요?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는데." "보러가자. 뭐보고싶은데?" "2012.." 2012를 보고싶단 말에 나는 장현승을 쳐다봤다. "..그거..진짜 재미없어 보지마." 나는 피클을 먹으며 말했고 장현승은 이에 뭐가 재밌냐고 물어봤지만 요즘 별로 하는거 없다고 대답해준 뒤 다시 피자를 썰어 입에 넣어 씹었다. 맛있네. "형 공부 잘한다면서요. 우리 형도 같이 과외 받으면 안돼요? 형도 대학 가야되는데..맨날 공부도 안하고.." 현승이는 정말 기광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기 생각하느라 바쁠텐데도 기광이를 챙기고 이제 코앞이 고3인데 공부도 안하고 맨날 자기랑 데이트하는게 영 미안하고 맘에 걸렸는지 조심스레 말했고 나는 괜히 목에 피자가 걸린것 같아 콜라만 마셨다. 과외를 같이 하라니..그 선생이 누군데.. "아냐 저새끼 공부 존나 잘해서 아마 나랑 수준 안맞게 수업할걸." "..형 뭐라고 했어요?" "어? 아 저새끼 존...아 너무 공부 잘해서..수준이 높다고." "형 욕하지 말랬죠. 왜 맨날 욕해요? 친구한테 이새끼 저새끼 하면 좋아요?" ...미친. 이기광새끼 장현승이 따지고들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미안하다면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하자 현승이는 표정을 굳히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욕은요. 진짜 나쁜거에요. 세상에 어떤사람이 친구한테 욕을해요. 왜 나한테도 해봐요. 이새끼 저새끼하면서 욕 해요. 요섭이 형한텐 하면서 왜 나한텐 못해요? 나는 동생이니까 더 편할거아니에요. 그럼 더 해요. 왜 나한텐 안해요?" "...안할게 진짜. 내가 몇년동안 입에 붙은 욕이라..이게 하루아침에 되는게 아니라고 그랬잖아. 좀만 봐줘. 진짜 노력할게. 안할게. 욕 안할게 진짜." 진짜 어이가없네. 나는 이기광 하는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피자 한쪽을 다 먹고 또 먹을라고 피자를 잘라 내 접시에 옮기고는 핫소스를 집어드는데 그때 가게문이 띠링-하고 열렸고 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은 나는 무심코 그쪽을 한번 보고는 다시 핫소스 뚜껑을 여는데..... "양요섭." 뭐야..왜..왜. "어? 선생님!?" 내가 내 앞에 서있는, 회색 후드티에 빨간색 패딩조끼를 입은 뒤 딥블루 스키니진에 남색 컨버스화를 신은 윤두준은 한손엔 핸드폰과 지갑을 들고선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왔지. 장현승의 해맑은 목소리와 동시에 고개를 돌린 이기광의 표정은 순식간에 똥씹은 표정이 됐고 나는 몸둘바를 몰랐다. 그래도 장현승이 있어 다행이다. 이 애앞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이기광이니까 서로 싸우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안절부절못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다 정말.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장현승의 말에 윤두준은 장현승의 머리를 쓰윽 쓰다듬은 뒤 내 옆으로 와 나를 밀어넣고 내 옆에 앉았고 이기광을 빤히 쳐다보던 윤두준은 옆에있던 장현승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여기서 당신 반기는 사람 이새끼 밖에 없는데 왜왔어요?" "..죄송해요. 형 잠깐만 나와요." 결국 윤두준한테, 그것도 선생님한테 대드는걸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장현승은 억지로 이기광의 손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그들이 없는 틈에 말했다. "왜 왔어요!?" "너 보러." "여기 이기광 있는거 뻔히 알면서 왔어요?" "담판 지을라고. 왜 나한테 그러는건지 좀 알아야겠다." 윤두준은 내가 마시던 물컵에 물을 따라 마셨고 나는 그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반지를 보았고 나는 그 순간, 잊고있었던 장현우 라는 세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장현우란 사람은 윤두준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인것 같았다. 나는 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윤두준의 마음속에 박혀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 속 한켠이 울렁댔다. 방금 먹은 피자가 넘어 올 것도 같고 무엇보다 처음보는 윤두준의 반지가 너무 신경쓰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 상해서 물어볼 순 없었다. 아..이거..하면서 대답 못할까봐. 그 사람이랑 옛날에 나눠꼈던거라고 말할까봐. 나는 우리 사귀는 사이아니냐고, 왜 이런걸 끼고다니냐고 따질 정도의 입장이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내가 너무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냥 못본척 하는게..나을 것 같았다. "여기요. 여기 접시 하나만 더 주세요. 그리고 샐러드바 추가해주시구요." 윤두준은 갖다주는 접시에다 자기가 피자를 덜어 태연하게 먹으란 소리도 안했는데 나이프로 잘라서 먹기 시작했고 나는 밖에서 무슨 얘길 그렇게 하는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둘이 너무 신경쓰여 피자를 대충 잘라서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계속 시선을 문밖으로 던지고 있는데 윤두준이 갑자기 내 그릇에 놓여있는 피자를 먹기좋게 잘라주더니 먹으라고 피자를 내 입에 넣어주었다. "니 친구 이기광이랑 안싸울테니까 불안해하지마." 윤두준은 왼팔로 내 어깨를 살짝 감싸주며 말했지만 나는 그 이질적인 반지가 끼워져있는 그의 왼손이 너무 싫어서 나도 모르게 그 팔을 살짝 내쳤고 윤두준은 나를 쳐다봤지만 그때 마침 나가서 얘기를 하고 온 그 둘이 들어오자 윤두준의 신경도 그쪽으로 쏠렸다. "죄송합니다." 대뜸 들어오자마자 이기광의 한마디에 나는 놀라서 이기광을 쳐다봤고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란건 윤두준도 마찬가지였는지 기광이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런말을 하지?" "제가 잘한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쪽도 잘한건 없으니까 나중에 저한테 정식으로 사과하세요." 이기광의 말에 장현승이 기광의 허벅지를 쿡 찌르는게 보였지만 기광이는 꿈쩍도 안했다. 이에 윤두준은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해보지. 그때 사과할게." 남북전쟁을 방불케할만큼 접전이 치뤄질것 같아 불안했지만 장현승이 어떻게 기광이를 설득했는진 몰라도 생각보다 편안히 끝난것 같아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게 아까보단 덜했다. 아무래도 현승이를 좀 이뻐해줘야 될 것 같다. "그쪽이 사는거죠?" 기광이 피자를 먹다 말했고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더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기광이는 만족스러웠는지 음..하면서 있다가 샐러드 그릇에 샐러드가 비어 그럼 이것 좀 알아서 채워오라는 말을 윤두준한테 했고 그는 군말없이 나가서 아무거나 골라담아오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내에 돌아온 윤두준은 종류대로 다 골라왔는지 수북한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놨고 기광이는 피클 하나를 집어 들어 먹었다. "이거 먹어봐." 윤두준은 키위 드레싱이 묻혀있는 샐러드를 권했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기광이가 대뜸 하는말이. "걔 그거 못먹어요." 기광의 말에 윤두준은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어색하게 입을 뗐다. "..아..사실 키위 알러지 있어서요. 그거 먹으면..두드러기 나요." 내 말에 윤두준은 그럼 다시 갖고 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내가 그러지 말라고 다른거 먹음 된다고 그를 붙잡았다. 근데 윤두준은 또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이 좀 굳어있는 것 같았다. 내가 키위 못먹는거에..기분 상했나. "이거 먹음 돼요! 저 이거 되게 좋아하는데!" 나는 애써 분위기를 업시키고자 푸실리 하나를 집어드는데 이기광이 빤히보다가 내 포크를 지 포크로 막았다. "드레싱 묻었잖아. 딴거먹어." 그 말에 내가 다시한번 보자 좀 많이 묻어있었고 나는 아..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걸 집어먹었다. "다른거 못먹는건 또 뭐있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내가 또 뭘 못먹지..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이기광이 피자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느끼한거 많이 못먹어서 피자같은건 두쪽이상 못먹어요. 먹을때 핫소스 없음 느끼해서 아예 못먹구요 치즈가루는 절대 못뿌려먹어요. 그래서 까르보나라도 못먹어서 찌질하게 맨날 칠리소스 스파게티만 먹어요. 매운건 되게 잘먹어서 속 쓰릴때까지 쳐먹구요." "야. 내가 또 뭘 속 쓰릴때까지 쳐먹냐?" "니 그때 울집에서 불닭 쳐먹었을때 너 삼일 내내 설사하다가 설사 낫자마자 또 불닭 먹은거 기억 안나냐?" "매운게 맛있으니까 그렇지." "어쨌든. 아 그리고 과일은 키위만 못먹고 비린내나는거 절대 못먹어요. 그래서 초밥이나 회도 비싼데 아님 절대 못먹고 매운탕은 국물만 먹어요 생선은 냄새난다고." "야 나 솔직히 꽃게도 먹는다." "그게 그거지 병..친구야." 병신이라고 하려다가 장현승이 신경쓰였는지 안하던 말을 하는 이기광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이기광은 뭘 웃냐며 나를 째려봤지만 나는 콜라만 쪽쪽대고 빨아먹었다. 그래도 그 순간 기광이가 중학교때부터 친구인게 맞긴하구나 싶었다. 나조차도 내가 뭘 먹고 뭘 못먹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에 이렇게 마치 외운것처럼 술술 나오는 기광의 모습에 새삼 감동하기도 했고 죽어도 친구구나 싶은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 뿌듯한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에 윤두준은 알바생을 부르더니 샐러드 그릇을 주며 이거 다 버려주고 새 그릇을 달라고 했고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왜그러냐고 팔을 붙잡았지만 그 말은 아랑곳 않고 새 그릇을 받아들어 다시 샐러드바에 가더니 음식을 담았고 나는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왜그래요!!" "키위 못먹는다며." "아 그래도..조금은 괜찮은데..아 그렇다고 푸실리만 담음 어떡해요! 기광이는 원래 푸실리 안먹고 현승이도 잘 안먹는거 같은데.." "..이따 얘기해. 가 있어." 윤두준의 차게 식은 목소리에 난 대체 뭐에 그렇게 화가났는지를 몰라 답답했다. 무엇보다 제일 답답한건 샐러드 그릇을 들고 있는 손에 끼워져있는 은색의 반지. 얇은 은색 반지에 큐빅인지 뭔지 반짝이는 보석 하나 박힌 반지는 그 누가봐도 그냥 패션으로 낀 반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괜히 샘이 난 나는 윤두준 말대로 테이블로 가서 앉았고 더이상 피자 먹을 기분도 아니라 그릇을 저쪽으로 밀어넣고 콜라만 먹어댔다. "형. 잘못한거 알아요?" 장현승의 말에 나와 이기광은 걔를 쳐다봤고 장현승은 피자를 먹으며 기광이한테 말했다. "선생님은 요섭이형 애인인데, 요섭이형이 직접 말한것도 아니고..형이 뭔데 대신 말해줘요. 요섭이형이 뭘 먹을수 있고 뭘 먹을 수 없는지. 질투 날만한 일 아니에요?" 장현승의 말에 나는 혹시 그런가 해서 윤두준을 쳐다봤고 윤두준은 심각한표정으로 아까보다 더 오래 샐러드를 담고 있었고 이기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콜라를 쭉 빨아마셨다. "양요섭은 둔해서 지가 뭘 먹을 수 있고 뭘 먹을수 없는지를 잘 몰라요. 그 음식이 지 눈앞에 없음 생각도 못해." "야. 솔직히 그게 생각이 나냐. 옛날부터 먹을 수 없는거라서 생각도 안나." "그러니까 니가 둔하다는거 아냐 새...친구야." 새끼야 라고 할라다가 또 친구야라고 바뀌는 이기광의 말에 나는 진짜 참으려고헀지만 어쩔수 없이 웃고 말았다. 용쓴다 용써. 천하의 이기광도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고 말도 가릴줄 알고..이젠 다 컸다. 자식. #13. "저 그럼 가볼게요! 선생님 학원 그만 두셨다면서요. 나중에 꼭 다시 이렇게 넷이서 만나요!! 안녕히가세요." 구십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장현승의 인사에 윤두준은 밝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었고 이기광은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다음 현승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이에 나도 가겠다며 말을 하고 뒤돌아서는데 윤두준이 내 팔을 잡았다. "내가 그래서 이기광 싫어하는거야." "...뭐가요?" "곰곰이 생각해봐. 내가 왜 니 친구를 싫어하는지." 윤두준은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이윽고 열리는 문에 그 안으로 올라탄 나와 윤두준은 말없이 있었다. 윤두준이 무슨말을 하려는건진 알겠지만 그 반지가 자꾸만 신경쓰여서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진 않았다. 이번엔 나도 화났으니까. 지이잉- 지이잉 차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하자 이기광이었다. 뭐 두고 갔나. "어. 왜." 「현승이 존나 귀엽지.」 "같이 없냐?" 「학원가야된대서 학원 바래다 주고 가는길.」 "너 근데 진짜..용쓴다. 그렇게 뭐라고 하냐? 장현승이? 욕한다고?" 「말도마. 한번만 더 욕하면 안만날거래. 실망이래.」 차는 출발하지 않았고 나는 괜히 내 무릎이나 만지작거리며 전화에 집중했다. "무슨 그런거 갖고 실망까지야..쨌든 이기광 다 컸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도 가릴줄 알고." 「어쨌든..우리 현승인..너무 귀여워.」 "고이고이 냅두고 있냐?" 「야. 아직 어린애야. 나 그리고 남자랑은 처음이라 좀 배워야돼.」 그 말에 나는 뜨악-하고 말도 못했다. 뭘 배운다는거야 이새낀. "..미친새끼. 끊어." 「현승이가 너 좋대. 친해지고 싶은가봐. 그래서 니 번호 넘겼어. 아마 문자 갈거다.」 "어. 장현승 싹싹하니 괜찮드라. 너랑 있음..아깝지. 착하고 배려있고 공부도 잘하고. 걔한테 잘해라. 애 되게 순수한거 같은데 괜히 니 욕구나 채울라고 하지말고." 「..원래 맛있는건 아꼈다 아꼈다 나중에 한꺼번에 먹는거다. 끊어.」 이기광의 말에 나는 아 이 병신새끼. 하면서 폴더를 접어 주머니안에 넣었고 아직도 차에 시동을 안거는 윤두준을 쳐다봤다. "왜 안가요?" "..너는 모르는거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거냐." "질투하는거 알아요. 근데 걱정 안해도 돼요. 기광이는 그냥 친구니까. 걔랑 있음 편해요. 같이 누워있어도 잠 잘만 자요. 선생님이랑 느낌 다른 애니까 걱정말라구요. 질투 안해도 돼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뒤 얼른 출발하라며 시동을 대신 걸어주었고 윤두준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 피곤한데 선생님 집 말고 우리집 가면 안돼요?" 나는 그 반지가 너무 신경쓰여서 윤두준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집 가." "..싫어요." 끼익- 깜박이도 없이 2차선에서 끝차선으로 와 차를 거칠게 세운 윤두준은 정말로 화가났는지 나를 쳐다보며 아무말도 없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왼손 네번째에 반짝이는 반지. 나는 내 빈 왼손을 보다가 울화가 치밀어 그냥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내리려는데 윤두준이 내 손을 억세게 잡아챘다. "뭐해 지금." "나 가라고 차 세워준거 아니에요? 집에 갈게요." "..지금 누구때문에 화났는데 니가 나한테 화내?" "나도 선생님한테 화났거든요." 그래도 말 안하고 넘어갈랬는데...왜 말하게 만들어 왜. "뭐때문에." "...됐어요. 그냥 갈게요."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는데 다시 한번 세게 잡아왔다. 더 세게. "왜 그러는데!!!" 좀처럼 소리지르는 법이 없는 윤두준은 정말 화가났는지 너무나 차가운 표정으로 나한테 소리를 질렀고 나는 내 나름대로 너무 화나고 분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거 반지 뭔데요!!!!! 내가..엿들을라고 엿들은건 아니었는데 용준형 선생님이랑 선생님이랑 하는 얘기 들었어요. 장현우..라는 사람. 누군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근데 선생님이 지금 끼고 있는 반지, 그 분이랑 관계 있는거 아니에요?" 내 말에 윤두준의 두 동공은 쉴새없이 흔들렸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자갈돌 하나 툭 하고 던진것 마냥. 큰 파랑이 일었고 윤두준은 그 눈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니 주머니 봐." 지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며 그래도 하라는 대로 점퍼 주머니를 뒤지는데... 그 안에선 차가운 금속 같은게 손 끝에 닿았고 그걸 꺼내자 윤두준의 손에 끼워져있는것과 똑같은게 내 손에 있었다. "옛날부터 봐둔거야. 너랑 끼고 싶어서 너한테 말도 안하고 그냥 샀어." "...선생님." "니 입에서 현우 이름이 나올줄 몰랐다." 나는 뭔가 건드리면 안되는 상처를 건드린거 같아 그 반지를 차마 내 손에 끼우지도 못하고 가만히 들고만 있었다. 윤두준은 답답했는지 창문을 내리더니 찬바람을 쐬었고 나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지금 갈거면 그냥 가. 화 안내." 화 안낼거라는 사람 목소리가 저런가.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 점점 마르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초조해했다. 장현우 라는 이름은 그 안에 있는 사정이 어떻든지간에 금기사항인거 같았다 나한테도. "..선생님한테 많이 소중했던 사람인거 같은데..저는..그러니까..아무 생각없이.. 그냥 나한테는 그 반지가 없는데..선생님 손엔 있길래..그 반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 안해주고 얼버무릴까봐 자존심상해서..미안해요..화..내지마요." 나는 차마 윤두준의 팔 조차도 잡을 수 없을만큼 미안해져서 그냥 그 반지를 양손으로 잡아 붙들고만 있었고 윤두준은 몇분간을 바람을 쐬더니 창문을 올려 나를 쳐다봤다. "왜 안껴." "...미안해요." 윤두준은 내 말에 대답도 않더니 내 손에 있던 반지를 가져가 직접 내 왼손 네번째에 끼워줬다. "..잘 샀네. 사이즈가 어느정돈지 몰라 그때 깍지 꼈던거 그 감으로 대충 사이즈 골랐는데." 어쩐지 갑자기 깍지까지 끼면서 손을 잡는다 싶었다했더니 그때 반지를 사러갔었는지 나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현우 얘기는..내가 준비가 되면. 내가 그 상처를 깨끗이 극복하게 되면 말해줄게. 아직은..아닌거 같아. 궁금하겠지만 좀만 참아." "..미안..." 윤두준은 어느새 울고있는 내 얼굴을 들어올리더니 그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더니 내 입술위로 자신의 입술을 닿게했고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내 손을 꽉 잡아주자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가 계속 상처를 준거 같아서 너무 미안해서 나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계속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윤두준은 그 눈물을 계속 닦아주며 내 손을 더 꽉 잡아주었다. 몇분간의 짧은 키스 끝에 윤두준은 내 눈믈을 깨끗이 닦아주며 말했다. "..울지마. 울면 안이뻐." 나는 그말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고 윤두준은 그래야 이쁘다면서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고는 다시 차를 출발 시켰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 네번째와 내 왼손 네번째엔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정말 하늘로 당장 날아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고 싶었는데, 그 이유모를 반지가 너무 아파서, 바늘이 돼서 나를 꾹꾹 쑤시는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이 반지가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만큼, 그 이상으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같은 반지를 낀다는 것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것과 같은것 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한켠이 울렁거리고, 울컥하고 벅차올랐다. 또, 그 누구라도 반해버릴정도로 옆모습이 너무 매력적인 이 남자가 정말 내거구나. 이 사람이 내거다.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만한 증표도 생긴것 같아 기분이..째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감동이벤트가 눈물이 벅차오를만큼.. 나를 많이 행복하게 했다. *** 지하주차장에서 윤두준의 집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올라타자마자 내가 먼저 그의 목에 먼저 매달려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윤두준도 당황하는가 싶었지만 그는 양 손을 모두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먼저 달려든건 나였지만 어느샌가 리드를 하는건 윤두준. 엘레베이터가 끝없이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나눴고 조금 격하게 진심을 내보였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입을 살짝 뗀 우리 중 윤두준이 먼저 가서 번호키를 눌러 집 문을 열었고 들어가자마자 들이닥치는 윤두준의 기습에 나는 현관문에 딱 달라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꽤 길어진 키스에 나는 또 숨이 차올라 윤두준의 양 팔을 잡았고 나를 놔준 그는 내가 숨쉬고 있을 동안 내 이마와 코와 볼에 쪽쪽-하는 소리를 일부러 내며 입을 맞추어 주었다. 내가 숨을 다 쉰것 같자 또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윤두준의 입을 내가 손으로 막았다. "우리 지금 신발도 안벗었거든요?" 내 말에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지 웅얼거렸지만 잘 안들렸고 나는 신발을 미리 벗어두고 윤두준을 내버려두고 거실로 냅다 튀어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둠속에서 나는 가만히 쭈그려앉아있었는데 윤두준은 자연스럽게 보일러를 켠 뒤 내 옆에 앉았다. 너무 어두웠지만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하면 그나마 그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왜 불 안켜요?" 내 말에 윤두준은 대답도 하지않고 나를 살짝 끌어안아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귓가에서 조근하게 속삭였다. "..현우..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아마 나한테 있어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일 지도 몰라. 근데...현우때문에 너 서운하게 하는일 없을거야. 현우는..니가 볼 수 없는 사람이고, 우리 앞에 다신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게 무슨.." "..시간이 필요해.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그만큼 버거워. 내가 현우를 놔줄 수 있을때, 너를..맘놓고 사랑할 수 있을때, 그때..다 말해줄게.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그러니까..조금만..봐줘." 나는 윤두준이 무슨말을 하려는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그가 지금 나한테 하는 이 말은 겨우겨우 하는 말이라는것, 지금 이 말을 하는 이 순간에도 많이 힘들고 있다는것. 그 쯤은 가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등을 따뜻하게 감싸안아주며 마치 아기를 안은것처럼 토닥토닥 토닥여주었다. "..힘들면..억지로 얘기 안해줘도 돼요." 윤두준은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한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오늘 그는 나에게 큰 마음을 선물했고, 그래서 나는 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달빛에 비친 윤두준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독 더 작게만느껴져 나는 그의 마른 어깨를 계속해서 감싸안아주었다. 그가 지고 있는 짐을, 내가 나눠서 질 순 없다는걸 알기에 내가 고작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친마음을 편히 달랠 수 있게 해주는 것 뿐이었다. 이것만으로 위안이 될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많아 보이는 그를 더이상 아프게 해주고 싶진 않았다. 외유내강인 사람은 멋있지만 내유외강인 사람은 참 안쓰럽다. 그래서 나는 윤두준을 볼때마다 아팠다. *** "이거 이렇게 풀면 안되지!! 이럼 오래걸리잖아." 언어영역 수리영역 외국어영역 사탐영역까지 모두 다 책임져주겠다고 호언장담한 윤두준덕분에 나는 새벽 1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도 윤두준의 집 거실에 붙잡히고 앉아 수학문제만 냅다 풀고 있었다. 윤두준의 양요섭 연세대 보내기 대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벌써 일주일째. 시간은 쏜 화살과 같다더니만 올해 수능을 치룬지 얼마 안된거 같은데 벌써 우물쭈물 하다보니 11월 말이 되었고 벌써 다음주만되면 12월 1일이었다. 내가 고3이라니. 평생 안올 것 같은 나이였다. "다시 풀어봐." 수학문제를 푸느라 까맣게 꽉채운 연습장이 벌써 열장째. 나는 흘러가는 시간과 비례해 계속해서 몰려오는 잠때문에 죽을 것 같았지만 윤두준은 어찌나 쌩쌩한지 검은색 뿔테안경을 쓰고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으며 틈틈이 나를 감시했고 이미 뇌는 잠들어버려서 더이상 풀리지가 않았다. 더이상은 무리라고!!벌써 수학만 4시간째잖아!!!!!! "...못해요 진짜. 너무 졸리단말야..." 나는 될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샤프를 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누웠고 윤두준은 한숨을 쉬더니 보던 책을 덮어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내 머리를 톡톡 쳤다. "이제 겨우 한시 이십분이야. 고삼이란게..한시에 졸리다는게 말이되냐. 너는 체력부터 불량이야." "...진짜..너무해. 그럼..나 한시간만 잘테니까 이따 깨워줘요. 이따 할게 진짜!!" "잘거면 거기서 자지말고 소파에 누워서 자." "귀찮아요...그냥..여기서 대충..잘거에요..." 나는 백만대군처럼 몰려오는 졸음때문에 말을 하는둥 마는둥 내 정신이 아니었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 "일어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나는 짜증부터 났다. 단잠을 깨우는 악마의 손길은 너무 끔찍해. 내가 언제부터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고 윤두준은 잠도 안자는지 계속해서 깨워댔고 나는 들은척도 않고 계속 잠을 청했다. 그러다 내 볼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그제야 눈을 부시시 떴고 내 얼굴 위로 가까이 다가와있는 윤두준의 얼굴에 나는 눈만 두어번 깜빡였다. 그러다 내 입술로 겹쳐지는 말캉한 느낌이 부드러워서 나는 더 잠이 솔솔 왔고 윤두준은 내 윗옷을 걷어올려 내 맨 허리를 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곧바로 잠이 확 달아남과 동시에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해요!?" "..아..잠자는 양요섭한텐 이게 약이구나." "....씨..이렇게 어떻게 일년을 살아요!!" "그러니까 같이 살아주잖아." 하긴, 따지고보면 윤두준은 무슨 죈가. 고3은 나고, 공부를 해야되는것도 난데 늘 새벽마다 나를 깨워주고 그때마다 같이 자지 않고 나를 옆에서 봐주고 내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그치만..이런식으로 잠을 깨우면..곤란하잖아!!!!!!!!!!! "얼른 풀어." 찬물을 가져다주며 나를 결국 거실 바닥에 앉힌 윤두준은 정확히 새벽 2시부터 공부를 시켰고 나는 씨...하면서 입술을 잔뜩 내밀고는 아까 풀다 만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반지를 낀 내 왼손은 연습장을 부여잡고, 오른손은 펜을 쥐고 치열하게 생각하며 문제를 풀었다. 왜이렇게 어려워..씨... "선생님. 이거..여기서 어떻게 풀어요?" 내 옆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아까 보던 책을 마저 보던 윤두준은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눈으로 몇초간 보다가 내 샤프를 뺏어들어 설명을 해줬다. 아니..고등학교 졸업한지 꽤 오래 됐을텐데..어떻게 이렇게 다 기억하고 있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씻고 와. 잠 깰테니까 다시 졸릴때까지 사탐 좀 외우고 자." "오늘 재워주긴 할거에요?" 과외를 시작한 날부터 나는 학교 끝나고-야자를 아예 몽땅 다 빼버렸다-부터 그 다음날 학교 갈때까지, 그러니까 나는 내 집에 들어간 적이 한번 빼곤 없었다. 속옷도 윤두준이 입지 않았던 새걸 입으며 지냈고 그 속옷마저 떨어지려고하자 윤두준은 알아서 새걸로 사놨다. 그리고 옷은 윤두준의 옷을 입고 지냈으며 그의 방에서 같이 늘 잠을 자곤 했다. 그래서 학교갈 시간이 되면 윤두준도 일어나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학교앞으로 데려오는 귀찮은 일을 도맡아했다. 엄청 귀찮고 싫을만도 한데..어찌보면 나보다도 더 열성이었다. "속옷 준비해둘테니까 씻고 와. 얼른." 윤두준은 피곤한지 안경을 벗고는 눈을 살짝 비볐고 나는 일어나다가 그의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준다음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들어갔다. 일주일째 이 집에서 살다보니 이젠 내 집에 가기가 싫었다. 텅 빈 집도 싫었고 텅 빈 방도 싫었는데 여긴 윤두준과 같이 있으니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보다 윤두준과 같이 지낸다는게...생각보다..너무 좋았다. 두근두근 대는 마음때문에 웬만해선 잠도 잘 안오고.. 오늘 이렇게 졸렸던건 일주일내내 매일 두세시간밖에 못잤기에 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그렇지 이 집에 온 초반엔 진짜 잠도 안왔다. 윤두준이 내 옆에 누워서 나를 안고 자는데..어떻게 잠이 올 수 있겠나. 그나마도 요즘엔 그렇게 두근거릴 새도 없이 피곤에 쩔어 그냥 눕기만 하면 자지만.. "선생님." 아까 나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윤두준을 빼꼼히 쳐다봤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맙고..나는 속에서 울컥하는 마음에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비스듬히 꺾인 얼굴을 감상했다. 그러고보니 요즘들어 얼굴이 많이 까칠해진것도 같고, 다크서클이 내려온것도 같고.. 어쨌든 나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것같아 좀 편히 재워주고 싶었지만 나는 이 사람을 들고 2층까지 올라갈 힘은 없었다. 등치도 나보다 크고, 키도 나보다 더 컸으니까...어쩌지 싶은 마음에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그냥 그 이마에 소리가 나지 않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래도 쿠션이라도 벨 수 있게 해주고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내 손목이 잡혔다. "..엄마!" "어디가." "...불편하게 자는거 같아서..그러지말고 올라가서 자요." 윤두준은 허리를 펴더니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많이 피곤해보이는 얼굴에 속이 상해서 쭈그려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곤 윤두준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땜에..이게 뭐야. 얼굴도 까칠해지고.." 윤두준은 내 손목을 확 끌어당겨버려 내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고 어떻게 하다보니 윤두준의 허벅지위에 앉은 꼴이 되어 나는 민망해서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려는데 그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입에도 해줘." 뭐를 해달라는건가 싶어 잠깐 생각하다가......설마.. "..뽀뽀?" 윤두준은 내 허리를 만지작대며 나머지 왼손은 내 왼손을 잡으며 윙크를 살짝 했고 나는 또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때문에 주체를 할 수가 없어 침만 꼴딱 삼켰다.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오는 윤두준을 볼때마다 난 너무 당황스럽다. 이런거에..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는데... "얼른해." "..선생님이 하면 되잖아요. 선생님이 더 잘하면서.." "니가 해주는게 더 좋아. 빨리." 평소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윤두준때문에 웃겨서 나는 피식하고 웃으며 내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아 안긴자세로 그의 입술을 내 입술에 담았다. 그래도 수십번 해본결과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어떻게 하는지는 알기에 그래도 윤두준이 늘 하던식으로 흉내를 냈다. 윤두준은 웃겼는지 바람빠지며 웃었고 나는 그래도 굴하지않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채 좀 더 당돌하게 밀어붙였다. 내가 용케 흉내를 잘 냈는지 윤두준은 일부러 더 민망하라고 춥춥-소리를 냈고 나는 그러지말라며 그의 가슴팍을 퍽-하고 때렸지만 윤두준은 내 허리를 주물대며 계속 내 리드에 응해주었다. 몇분후, 내가 먼저 떼자 윤두준은 내 귓볼을 만지며 내 입술근처에서 속삭였다. 그가 말할때마다 입술이 살짝 붙었다 떨어져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가까이 맞붙인 얼굴을 떼진 않았다. "..언제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를거야." "...선생님이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그럼 두준이라고 불러요?" 내 말에 윤두준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않게 살짝 깨물며 까분다, 라고 한마디했고 나는 흥. 하면서 그에게서 얼굴을 떼어 윤두준의 볼살을 만졌다. 예전보다 많이 말라있었다. 뒷바라지하는게 힘들긴 힘든거같았다. "형이라고 불러." "...그래도 되나..어색한데.." 윤두준은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었고 나는 나와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그 손을 잡아 그 반지위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윤두준을 한달동안 만나오면서 제일 좋았던건, 반지를 나눠꼈다는것.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게 증표로 드러나는게 좋았다. 그냥 할수만 있다면 반지낀 손을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어 속상할뿐. "..그럼 말도 놓을래." 내 말에 윤두준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러라며 내 코를 살짝 꼬집었고 나는 그대로 윤두준에게 폭 안겼다. 내 가슴을 통해 느껴지는 윤두준의 심장박동에 편안해짐과 동시에 아까까지만해도 졸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졸음이 확 몰려왔다. 나른하고 편하고 행복한느낌.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윤두준과 함께한 시간을 꼽을거다. 어느순간 나는 윤두준에게 익숙해져버려 그가 없는 생활은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버렸다. 그건 윤두준도 마찬가지였음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필름이 끊겨버렸다. #14. 나는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윤두준의 팔을 베고 누워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잤다. 처음엔 떨려서 잠도 안왔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제는 누가 안아주지 않으면 잠에 못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일어나." 꽉 잠긴 윤두준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고싶어 그의 품 안으로 좀 더 파고들었고 윤두준은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며 계속 깨웠다. "...몇신데.." "여섯시." "..오분만.." 나는 윤두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더 주어 꼭 끌어안았고 윤두준은 나를 마치 애기 다루듯 내 등을 토닥토닥해주었다. "내려가서 아침 차리고 있을테니까 씻고 내려와." 윤두준은 내 머리에 빌려주었던 팔을 빼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내려갔고 나는 침대에 홀랑 엎드려 개구리자세로 누워버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건 너무 고역이었다. 여태까진 빈 집에서, 빈 방에서 잤으므로 잠도 그렇게 오지않아 일찍 일어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요즘은 누가 자꾸 재워주고 따뜻하게 감싸주니까 잠이 솔솔 몰려와 요즘들어 제일 힘든거 첫번짼 윤두준의 새벽까지 이어지는 과외,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거 이 두가지였다. 나는 째깍째깍 초침소리를 박자삼아 계속 일분만..일분만..을 되뇌이다가 결국 핸드폰 알람까지 울리자 난 얼굴 가득 짜증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샤워 하고 머리도 감고 나와 교복까지 입었다. 매일 윤두준이 학교에서 공부할 과목과 시간을 짜주므로 탁자 위에 놓여진 종이에서 오늘 날짜를 찾아 알맞게 교과서도 챙기고 문제집도 챙겨 넣었다. ..하여튼 대학 못가기만 해봐. 나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소파위에 들기만 해도 무거운 책가방을 내던지듯이 내려놓은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요즘 윤두준은 요리 배우는데 흥미가 생겼는지 듣자하니 나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집에와선 요리를 배운다고 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요린가 싶었는데 또 저렇게 담배를 한쪽 입에 배어 물고 계란프라이를 집중해서 뒤집는 모습을 보니 영 안어울리진 않구나 싶었다. 오히려 더 멋있었지. 나는 고양이마냥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다부진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에 윤두준은 내가 오자 담배를 꺼버렸고 뜨겁다며 저리 가있으라고 한마디 했다. 그렇지만 그말을 들으면 양요섭이 아니지. 나는 탄탄한 등근육이 자리잡아있는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서있었다. "향수 뿌렸어?" "..선..아 형 방에 있길래." "학생이 무슨 향수야. 내일부터 뿌리지마." "치." 향수냄새가 그렇게 많이 나나 싶어 내 손목을 코에다 대고 킁킁 대는데 윤두준이 계란프라이가 담긴 그릇을 들고 뒤를 돌았고 나는 동시에 그를 안고 있던 팔이 빠져 거기에 서있었다. "..또 김치찌개야? 요리 배운다는거 순 뻥이지. 어제 아침, 저녁에도 먹었는데 오늘 또!!" "너 요리하는게 쉬운줄 아냐." "그럼 그냥 된장찌개라도 주던가!! 나 안먹어!!" 나는 괜히 앙탈을 부리며 가스렌지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고 윤두준은 내 옆으로 와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그냥 드시죠 양요섭씨?" "..맨날. 삐진거 같으면 뽀뽀하고. 형은 나를 너무 잘다뤄..이제..방법을 바꿔야겠어." 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숟가락 젓가락 각각 2개를 가지고 와 내자리, 그리고 윤두준 자리에 놓고 의자에 앉아 찌개를 기다렸다. 아, 그 동안에 내가 밥도 펐고-요즘은 윤두준이 밥도 한다-! "내일 모의고사 있어." "올 일등급 받아와. 안그럼 두배 더 힘들어질거야." "..씨..언어는 좀 봐줘!! 언어는..한번도 일등급 나온적 없단말야." "그러니까 이번에 맞아야지." 나는 내 밥그릇에 김치찌개를 알맞게 덜어 슥슥 비벼 먹었고 윤두준은 내 밥그릇 위에 아까 구운 스팸을 올려주었다. "요즘 무리하는거 같애. 얼굴도 쾡해지고..맨처음 형 보고 반했을땐..안이랬는데.."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너는 살 올라서 좋겠다?" "...씨..안그래도 빼고 싶어 죽겠구만. 앞으로 새벽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형은 자. 괜찮으니까. 형이 있으니깐 더 안되잖아." 내 말은 그냥 씹은 윤두준은 김 한장을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엄마 같다. "오늘 공부할거 다 챙겼지? 이따 집에와서 다 검사할거니까 쉬는시간에 이기광이랑 놀러다닐 생각말고 꼼짝말고 자리에 앉아서 공부해." "알았어!!!! 안그래도 나 맨날 쉬는시간에 공부해서 이기광 삐진단말야..몰라..짜증나." 나는 윤두준의 검은색 아디다스 패딩점퍼를 입고 그 위에 하얀색 목도리까지 두른뒤 매기만 해도 어깨가 축 쳐지는 가방을 둘러맸다. 윤두준은 그냥 입고 있었던 데에 점퍼 하나만 걸친 뒤 내 가방을 대신 짊어지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삐빅- 차에 올라탄 나는 윤두준이 올라타자마자 그의 입술을 파고 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윤두준은 당황하는가 싶더니 내 어깨를 살짝 잡으며 리드해주었고, 몇분간의 짧은 키스를 끝낸 윤두준은 내 입술에 묻은 타액을 살짝 닦아주었다. "오늘은 모닝키스도 안했고, 이따 밖에 나가면 밝으니까 사람들이 보잖아." "누가 물어봤나."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가 야속해 팔을 퍽-때린뒤 안전벨트를 매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클래식이건 뭐건 그런쪽으론 절대 관심이 없고 무조건 가요에만 관심이 있어 내 아이팟을 차에 꽂고 아침마다 듣는 노래를 틀었다. "오늘 뭐 먹고싶은거 없어?" "...음...삼겹살!" "살찔라고 작정했나보네." "...먹고 싶단말야!!!!!" 내 말에 윤두준은 피식 하고 웃더니 내 볼을 꼬집었다. "이따 학교 끝나고 가자. 맛있는데 알아." "아싸!!!!" 나는 차가 신호에 걸려 잠깐 서자마자 그의 볼에 쪽-하고 뽀뽀를 했고 어느순간부터 당돌해져있는 나는 요즘들어선 이런게 아무렇지 않았다. 누가 먼저 하면 어떤가, 하고싶은사람이 먼저 하면 되는거지. "다왔다...나 갈게!! 이따 봐!!" "어. 공부 열심히 하고. 이기광이랑 놀러다니지말고!!!" "알았다니깐! 갈게!!" 나는 그의 양 볼을 손으로 꼭 잡고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한뒤 그대로 차에서 내렸고 마침 교문앞에서 만난 기광이랑 같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 핸드폰을 봤더니 「이기광이랑 놀지 말랬더니 아침부터 만나냐」 난 그냥 이 문자를 즐겁게 씹어주었다. "나 이번주 놀토에 현승이랑 롯데월드 가기로했당" 찬바람 씽씽 부는 날씨에 나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어 몸을 덜덜 떨면서 최대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이기광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이새끼가 아침부터 또 염장질이다. "어쩌라고." "그렇다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 하든가. 아 존나 설레." 기광이의 양볼은 발갛게 얼어붙어있었지만 춥다는 생각은 전혀 안하는지 미친놈마냥 헤헤하고 웃고 있었다. 씨..짜증나. "나도 갈거야!" "윤두준이 퍽이나 같이 가주겠다. 늙은이새끼." "욕하지마. 니가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나도 장현승 이뻐해줄순없지?" 내 말에 뜨끔했는지 살짝 빈정상한 표정을 짓던 기광이는 퉁치자며 내 엉덩이를 발로 툭 깐다음 지 먼저 교실로 올라가버렸다. 나도 솔직히 놀이공원 같은데는 어렸을때 유치원 소풍으로 가본 것 외엔 한번도 가본적 없어서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는데 안그래도 공부타령만 하는 윤두준은 내가 가자고 하면 또 내앞에서 지금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삼십분 읊고 내가 삐지면 삼십분 달래줄것이다. 뻔해. 그래서 나는 주머니속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대며 천천히 교실로 올라갔다. 같이 가고 싶은데.... 나는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갈아신고 책가방만 책상위에 올려놓은채 핸드폰만 만지작 만지작 대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할까 말까..그 고민을 하고 있는데 기광이가 내 옆으로 오더니 어깨를 무신경하게 툭 쳤다. "무슨생각하냐. 보나마나 윤두준이겠지뭐." "알면 꺼져." "병신. 야 오늘 할일없지. 나랑 옷사러가자." 나는 이기광의 말에 그냥 빤히 얼굴을 쳐다봐주었다. "형이랑 고깃집 가기로 했는데?" "...형?" "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래서." "별 꼴값은 다 떨고 지랄이네. 야 그새끼랑은 다른날 먹으러 가고 나랑 오늘 옷사러가자." "지랄같은 소리하네. 씨알도 안먹힐거라는건 니가 제일 잘알지? 알아서 꺼져." 나는 사실 윤두준 앞에서만 순한 양, 어린양, 착한양이지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겐 그냥 개싸가지로 일관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한테까지도 억지로 가면 써가면서 친절을 베풀어야되는 이유도 모르겠고 그렇게 할 수도 없어서 나는 말투도 냉랭하게 표정도 늘 냉랭했다. 그렇다고 이기광이 나한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윤두준 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일테지만 이기광한테는 간지럽게 애교를 부린다거나 착한얼굴로 대하는게 너무 민망했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이게 내 성격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윤두준앞에서만 욕도 안하고 착한얼굴로 지내는 내모습을 볼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한다. 그렇지만 윤두준앞에선 애교부리고 투정부리는게 자연스러웠다. 왜그러는건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 어쨌든 나는 이기광의 이 말도 안되는 말을 정말 미친놈 보는 표정으로 가볍게 씹어준 뒤 목도리부터 차근차근 푸르고 두꺼운 점퍼도 벗어 의자에 걸어놓은 뒤 책가방에서 무거운 책들을 한꺼번에 책상위로 쏟아냈다. "야!!너 어떻게 몇년씩 친구한 나보다 그새끼가 더 소중할수가 있어?" "너도 그럴텐데?" "....아..존나 짜증나 양요섭!!!!!! 같이 가주면 안되냐? 씨발 니가 제일 짜증나 알아!?" 이기광은 투정부리는 애기마냥 나한테 욕이란 욕은 다 씨부리고는 교실밖으로 일부러 쿵쿵 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나가버렸고 나는 이기광이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썼다. 방금 나랑 이기광의 대화때문에 반 분위기가 싸해졌다는것도 몰랐으니까. *** 망할 윤두준때문에 요즘 학교에서 나는 죽을맛이다. 평소에도 공부를 안하는편은 아니었지만 옛날보다, 옛날부터 해왔던 공부량의 두배 이상을 소화하려니까 체력도 이미 바닥난지 오래. 하루라도 윤두준이 학교에서 해갖고와야할 숙제를 해가지 않으면 정말 잠을 재워주질 않아-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도록-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만했다. 학교에서 정말 이러다가 미치겠다 싶을정도에만 쉬니까 일곱시반부터 여섯시까지 거짓말안하고 점심시간 30분과 쉬는시간 15분정도 노는 것 같았다. 미친. 이게 뭐야. 노동도 이런 노동은 없을거야. 나는 여섯시 종이 땡 울리자-하루 해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윤두준이 해갖고 오라는 공부 리스트에서 차근차근 확인하며 빨간펜으로 줄을 좍좍 긋고 있는데 책상 옆으로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나는 그게 누군지 굳이 보지않아도 알 수 있었으므로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채 말했다. "안간다고 이기광." "...진짜..너..존나 나쁜새끼야.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한테 이럴수가 있냐.." 완성. 오늘도 퍼펙트다. 그래도 집에가면 세시간은 잘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 나도모르게 행복해져서-당연한건데도- 아침에 가지고 왔던 책을 다 가방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 옷 많잖아. 뭐가 걱정인데. 옷 다음에 사러가든가 아님 니 맨날 인터넷으로 시키잖아. 이번에도 시켜." "...나도..아..씨발..반지 살거야." 이기광은 민망한지 뒷목을 긁적이며 개미가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작게 얘기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신발장으로 가서 신발을 갈아신은 뒤 다시 대답했다. "근데 뭐. 야. 장난하냐? 반지사러가는데 새카만 남자새끼들 둘이서 가면..어떻게 생각하겠냐 병신아. 머리가 있음 생각을 좀 하세요 이기광씨." "..야 반지는 대체 뭐가 이쁜건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니가 낀것도 그게 이쁜거냐? 그런거밖에 없냐 커플링?" 나는 내 왼손에 끼워진 은색반지를 쳐다봤고 이게 뭐. 심플하니 이쁘기만 하구만. 난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윤두준의 얼굴에 피식-하고 웃으며 가방을 깔끔하게 다시 챙겨서는 어깨에 둘러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빨리나와. 구령대 앞이야. _윤두준」 벌써 와있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더 서두르는데 이기광이 날 잡고 안보내준다. "나 바뻐. 지금 와있대. 그리고 커플링이 무슨 패션반지냐. 휘황찬란하게. 뭐 그런것도 있긴 하다더만.. 몰라 나도 뭐가 이쁜지. 야 너만 낄것도 아닌데 너혼자가서 사냐? 그냥 아예 둘이 같이 가서 사와." "..병신아. 니 손굵기랑 비슷한거 같아서 그렇다고!!!!!" 나는 아무리 그래도 오늘만큼은 기광이를 도와줄 수 없었다. 왜냐면 정말 오랜만에 갖는 윤두준과의 데이트였으니까. 맨날 학교-집, 학교-집만 오고가다가 아무리 고깃집이어도 데이트는 데이트. 나는 기광이의 어깨를 툭툭치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갔고 이기광은 그런 나를 계속 쫓아오며 끈질기게 붙었다. "롯데월드에서 줄거냐? 아 그럼 내일가 내일. 오늘 안된다고 병신아." "...아..짜증나 개새끼. 너 내일 약속 펑크내면 뒤진다. 그때 윤두준이 어디 가자그래도 무조건 나랑 가는거야. 알았냐?" "아 알았다고!!! 추우니까 이제 꺼져." 나는 현관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터지는 입김에 하얀색 목도리를 내 코끝까지 끌어올려 덮었고 이기광은 꼴랑 교복 마이 하나 입고선도 춥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확답을 받아냈다. 끈질긴새끼. "알.았.다.고. 내일 가자고!! 아..존나 못생긴거 골라줄거야." "미친새끼. 그럼 윤두준이랑 같이 꺼져라. 에라이 쌍쌍으로 싸가지없는것들." 이기광은 조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윤두준의 차를 보면서 내 엉덩이를 발로 뻥 찼고 그 반동에 앞으로 밀려난 나는 넘어질뻔한걸 겨우 균형잡아 멈춰세웠다. 아우 저 개새끼 진짜. "너 내일 뒤졌어 이기광!!!!!!!! 이새끼가 누구 엉덩이를 발로 까!?" "어쩌라고 양요섭!!!!" 이기광은 내가 뒤돌아보자 양손의 가운데손가락을 아주 세차게 들어올리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모습에 피식-하고 웃으며 차안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윤두준을 향해 종종거리며 뛰어들어갔다. "으..춥다." 내가 유독 겨울을 타는걸 아는 윤두준은 미리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놨고 덕분에 순식간에 사르르 녹는 몸에 나는 나른해졌다. "그 입 못 고치겠냐." 윤두준은 내가 타고 안전벨트까지 매는걸 확인하고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난 윤두준의 말에 아..아까 이기광한테 말한게 목소리가 너무 컸나 싶어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베시시 웃었다. "..기광이 앞에서는..그게 잘 안된단말야. 그래도 형 앞에선 안하잖아. 그것만으로도 난 기특한거야. 십 몇년을 욕을 달고 살았는데.." "자랑인거같다?" "..자랑은 아니고...아 배고프다. 어디로 가?"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고 윤두준은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앞에서 뿐만 아니라 남앞에서도 욕하지마. 안좋아보이니까." "네 알겠슴다." 윤두준은 내 반응에 피식-하고 웃더니 내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잡아 꼭 쥐었다. 내 손으로 퍼지는 그의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져서 내 손보다 훨씬 더 큰 그의 손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뽀뽀." 차가 신호에 걸려 잠깐 멈췄고 윤두준은 시크하게 나를 살짝 돌려보며 말했고 나는 아무렇지않게 그에게 다가가 따뜻한 입술위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윤두준은 내가 떨어지려고 하는 사이 내 뒷목을 살짝 잡아채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고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내 입술에서 떨어지는가싶더니 꼭 감긴 내 눈 위에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바로 눈을 뜨자 윤두준은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이뻐서 죽겠다." "...오그라들어." "하루종일 물고빨고 만지고 그러고 싶은데." 윤두준은 내 볼을 꼬집다가 만지다가 하면서 말했고 나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변태. 지금도 그러고 있으면서." "이정돈 약과지."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의 입술에 살짝 뽀뽀를 해준뒤 신호 떨어졌다며 다시 운전에 집중시켰다. 이에 윤두준은 어쩔수없이 운전을 해야만했고 나는 계속 쏟아져나오는 따뜻한 히터바람에, 그리고 윤두준이 만들어주는 따뜻한 분위기에 취해서 몸이 점점 더 나른해져갔다. 여태껏 못잔 잠이 몰려오기라도 하는 듯. "다왔어." 또 그새 잤는지 윤두준이 날 흔들어서 깨웠고 나는 부시시하게 일어나 주위부터 살폈다. 사방이 깜깜한게 지하주차장인지 나는 일단 차에서 내렸고 윤두준은 내 앞으로 와 내 목도리를 다시 정리해준다음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물론 그 사이에 내 입술에 뽀뽀를 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론가 들어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여기 맛있는데야. 내가 가본 고깃집중에서 제일 맛있으니까 많이먹고 볼살 올라라." "...살 뺄건데...나중에 살 쫙빼서 형이 꼬집을 볼살도 없게 만들어야지.메롱." 나는 동시에 띵-하고 열리는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윤두준은 내 앞으로 와 내 눈썹을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손으로 쓱쓱 정리해주고 내 옷깃도 매만져주었다. "..내일은 안데릴러 와도 돼." "왜?" "이기광이 어디 좀 같이 가자그래서 같이 가주려고." "내일 모의고사라면서." "시험 끝나고 갔다올거야. 그리고 가는김에 집에 들러서 옷도 좀 챙겨놓을라고. 맨날 나보다 큰 옷 입으니까 거추장스럽고 답답해. 앞으로 맨날 형네 집에 있을건데 그냥 아예 짐 싸놓고 나와야지. 어차피 엄마랑 아버지도 집에 안들어온지 한달은 넘은거 같으니까." 띵-하고 열리는 문에 내려서 자동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건 깔끔하게 정돈된 가게 내부와 유니폼을 말끔하게 갖춰입은 종업원들이었다.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숙여 인사하자 나는 쭈뼛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윤두준은 익숙한지 미리 예약했다며 자신의 이름을 대면서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고깃집이 일식집도 아니고..룸이 다 있냐.." "누가보면 서민인줄 알겠네 양요섭." "...부모님이랑은 같이 올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친구도 별로 없으니까 고깃집에 와볼일이 없어서 그런거야. 씨..사람 바보만들어." 윤두준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내 입술이 삐죽하고 나오자 피식-하고 웃었다. "뭐 먹을래." "삼겹살!!!" "아. 그럼 여기 삼겹살 2인분이랑 차돌박이 2인분, 갈비 1인분 주세요." 미리 대기하고있던 종업원에게 주문한 윤두준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얼굴 많이 푸석해졌네. 그래도 어쩔수 없어. 내 후배 되는게 쉬운일은 아니니까." "..누가 뭐랬나. 잠도 하루에 두세시간밖에 안자니까 이렇잖아. 내일은 집에가서 잘거니까 좀 푹자야지. 맨날 형때문에 잠도 못자고!!" "..내일 안올거야?" 나는 물을 마시며 윤두준을 바라봤다. "..내일 짐 챙기러 집 간다그랬잖아. 거기서 자고와야지." "집앞으로 데릴러 갈테니까 나와." "뭐하러 그래 귀찮게. 형도 오랜만에 나 없이 일찍 자. 내일은 과외 쉬자." "어쭈. 니가 선생이냐? 잔말말고 집앞으로 나와." 그순간 문이 열리고 빨간 고기들이 테이블위로 올라와 불판위에 그대로 얹혀졌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함께 익는 고기들을 보면서 나는 절로 군침이 돌았고 밑반찬으로 나온 음식들을 하나씩 먹어보았다. 양념게장에 샐러드에..뭐 엄청 많았다. 맨날 윤두준이 해주는 2%어색한 음식만 먹다가 이렇게 사람 음식다운 것을 먹으니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윤두준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내일은 좀 쉴거야!!! 시험봐서 힘들텐데.." "우리집 와서 쉬어." 윤두준은 능숙하게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고 나는 샐러드를 홀짝홀짝 먹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내가 우리집에서 혼자 잔다는게 어색해져버릴만큼 윤두준이 익숙해져있었다. 같이 잠드는 것, 눈뜨자마자 보는것, 모닝키스를 하는 것, 항상 뭔가 부족한 아침밥을 먹고, 그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과외를 하고 또 잠들고. 이런 일들이 어느순간 내 일상으로 자리잡았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하루에서 절반은 윤두준이랑 붙어있는 거였으니까. 아마 윤두준도 나랑 똑같은 마음일 것 같다. 뭔가 그래서 계속 기분이 좋아지고 있지만. "..나 모의고사 잘보면 뭐해줄거야?" 아이스크림처럼 입에서 아주 살살 녹는 고기를 먹으면서 있다가 아까 이기광이 나한테 했던 자랑질을 생각해냈다. 나도 롯데월드 가고 싶은데... 나는 눈치를 보며 얘기를 꺼냈고 윤두준은 여태까지 내가 열개나 넘게 먹을동안 하나도 안먹고 고기만 굽다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시험 잘보면 니가 좋은거지 내가 좋은거냐." "..그래두..뭐 아무것도 없어?" "뭘 원하는데." 나는 상추에 노릇노릇 잘 익은 삼겹살 하나를 얹어 쌈장도 넣고 구운 마늘도 넣어서 작게 쌈을 싸 윤두준의 입에 가져다댔고 그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 쌈을 먹었다. "..놀이..공원...가면 안돼?" 윤두준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들었는지 다시 불판으로 고개를 돌려 말없이 고기만 뒤집었다. 그리고는 할말이 생겼는지 입을 여는순간 나는 먼저 선수쳐버렸다. "알아! 무슨말 하려는건지. 근데..나 진짜 가고싶단말야.. 내가 고3이라는 것도 알고 공부를 해야되는것도 알고 놀이공원쯤은 대학가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근데 난 진짜..지금 가고 싶단말야...." 나는 어차피 안될 걸 알고 있었기에 말을 뱉은거였지만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있었다. 놀이공원 가기 전에 열심히 공부하고 그날..하루..놀면 안되나.. 나는 아무말이 없는 윤두준의 모습에 기가 죽어 애꿎은 고기만 젓가락으로 쑤셔댔다. 씨...짜증나. "..언제." "...갈거야?" "주말은 사람 많을텐데." "..진짜 가는거지!? 진짜지!? 내일이 목요일이니까, 금요일날 가자!!" 기뻤다. 정말. 놀이공원이라하면 커플들의 데이트 필수 코스고, 뭐 딱히 그래서 가고 싶다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신났다. 윤두준과 그런곳에서 데이트라는건..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한테. "학교는." "아프다고 하면 되지. 그냥 안가도 되고." 나는 신나서 상추위에다 또 고기를 얹고 쌈장을 얹고 무절이를 얹어 앙-하고 먹는데 윤두준이 살짝 몸을 들썩이는가싶더니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씨..아파!!!" "못하는소리가 없어. 학교를 그냥 안가?" "..조퇴하고 올게. 아프다고하면 된단말야..주말은 사람 너무 많아서 안돼.." 나는 윤두준한테 꿀밤 먹는 자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고 그는 어이가 없는지 바람빠지는 꼴로 웃었다. 너때문에 못살겠다는 듯. "시험 진~짜 잘보고 올게!!!" 나는 고기 하나를 소스에 묻혀 윤두준한테 내밀었고 그는 낼름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싸 신난다!!!!! 내가 이기광보다 먼저 놀이공원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들떠서 지금 당장이라도 문자로 놀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예 아싸. 많이 배부르게 고기를 먹고 나와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윤두준한테 졸라 돈을 받아와 이 가게 바로 옆에 있던 나뚜루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가지고 나왔고 그 사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온 윤두준은 가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읏챠." 나는 조수석에 타서 안전벨트를 맸고 곧바로 출발하는 차에 몸을 맡겼다. 맛있는 초코맛 아이스크림은 최고다. 나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윤두준한테 내밀었고 운전중이라 조심스럽게 받아먹은 그는 내 볼살을 꼬집었다.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뭐!!!" "이쁘다구요 양요섭씨." "...씨.." 나도모르게 입술을 삐죽이자 윤두준은 창가에 팔을 올려놓고 한손으로 운전을 하다 나를 살짝 보더니 또 웃었다. 내가 그렇게 웃긴가.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면 나는 윤두준과 같이 놀러갈생각에 기분이 너무 좋았으니까. 그렇게 단번에 오케이 해줄줄은 몰랐다. 요리보고 조리봐도 너무 잘생긴 그를 온 세상 사람들한테 죄다 자랑하고 싶었다. 무슨 드라마에서 나왔던 것처럼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남자가 내남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윤두준이랑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사귀게 되고 반지까지 나눠낄 거라곤 상상도 안했었지. 그냥 그땐 보기만 해도 좋았고 얼굴이 빨개졌을 때였으니까. 그러고보면 사람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이렇게 행복할지, 어떤 시련이 닥쳐서 헤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어떤 일이 있을때까진 이렇게 마냥 행복하고 싶다. 이런게 바로 행복이구나, 라는걸 알때쯤에 행복이 깨지는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15. "형 어디야?" 나는 학교 밖으로 나와 교문 앞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 지금은 아침 아홉시반. 근데 왜 이러고 있냐고? 윤두준과의 약속 대로, 나는 어제부로 시험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치르고 이기광새끼의 커플링을 보러 같이 가주고 집에서 짐도 잔뜩 챙겨갖고 윤두준의 집으로 들어갔다. 하루종일 바쁘고 지쳤지만 나는 오늘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지냈다. 이기광 새끼가 반지 사러 갔을때 이것저것 끼워보라고 시키는데 열개째가 될 때 나는 이새끼의 엉덩이를 걷어차버릴뻔 했지만 겨우겨우 참아냈다. 왜냐면 내일은 그러니까, 오늘은 너무 신나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커다란 트렁크 두개에다가 내 옷이란 옷은 다 챙겨들고 나왔다. 옷뿐만 아니라 칫솔이나 문제집 같은 것들도 싹. 아줌마한테 미리 말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모님이 오시거든 나한테 미리 연락을 달라고. 이제 아마 그 집은 주인 없는 빈 집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거야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빨리와. 나 벌써 교문 앞이야 추워." 가고 있다는 윤두준의 말에 전화를 끊고 양손을 주머니에 깊게 찌르고는 오들오들 떨며 그의 차가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무단으로 지각하고 결석한게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윤두준이 무단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몇분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아 어쩔수 없이 학교가서 아파보이지도 않았지만 뻔뻔하게 아프다며 조퇴를 강행했고 어쩔수 없이 내 말을 들어준 담임은 나를 울며 겨자먹기로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아이팟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한 곡이 끝나갈즈음 저멀리서 윤두준의 차가 꽁무니를 드러냈고 나는 팔랑거리며 그 앞으로 다가섰다. 내 앞에 조심히 멈춘 그의 차에 나는 냉큼 올라탔고 역시나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져있었다. "집으로 가야돼. 옷 갈아입고 가야지." 내 말에 윤두준은 알았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학교 앞 신호에서 잠깐 대기중에 나는 윤두준의 귀를 바라보았다. 옛날부터 이쁘다고 생각했었던 불가리 귀걸이. "형 잠깐만 나 봐봐." 윤두준은 피곤한지 눈을 비비다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렸고 나는 오른쪽 귀에서 그의 귀걸이를 뺐다. "뭐해?" "이거 어디서 났어? 나도 사줘. 이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이뻤다. 은색 테두리에 BULGARI라고 써있고, 그 안쪽으로는 검은색으로 보석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한 뭔지 모를 것이 동그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있었고 윤두준은 귀걸이를 내 손에서 빼앗아 들더니 내 오른쪽 귀에다 달아주었다. "나눠끼면 되지 뭐하러 하나를 더사." 귀걸이를 나눠 낀다는 것. 이건 반지를 나눠낀 것보다 더 묘한 기분이었다. 그의 왼쪽, 그리고 내 오른쪽. 각각 한쌍의 귀걸이가 나뉘어져 있는 그 기분은..뭔가 간질간질 거리는 느낌이었다. 사실 반지를 같이 낀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고나 할까. 윤두준은 내 귀를 만지더니 이쁘다며 내 코에 살짝 입맞춤을 해줬고 동시에 파란불로 바뀌는 신호때문에 그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사랑해" 나는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한채 앞만보며 말했고 윤두준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다시 말해보라는 듯한 그의 모션에 나는 오랜만에 얼굴이 빨개짐을 느꼈다. 이런 직접적인 단어는 너무 민망했다. "..한눈 안팔게. 평생 형만 보고 살거야. 그러니까 형이 나 싫어져서 버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형 옆에 계속 있을거니까." 내 말에도 윤두준은 대답이 없었다. 잘 못 들었나..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못알아 들을 순 없을텐데.. 나는 다시 말해야 되나 싶어 그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치만 윤두준은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을뿐 별다른 표정변화도 없었다. 씨..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인데..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니. 나는 무반응의 윤두준때문에 조금 속이 상해 그냥 라디오를 틀어버렸고 아침부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DJ가 거슬려 그냥 그것도 꺼버렸다. 그래서 괜히 뻘쭘해진 분위기에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이기광한테 수업 잘 듣고 있냐면서 문자를 보냈고 답장은 없었다. 보나마나 아홉시 오십분이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니까 자고 있겠지 뭐. 하여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 오분 정도를 더 그렇게 뻘쭘하게 있다가 어느덧 집에 도착했는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 덕분에 주위는 순간 암흑으로 둘러 싸여버렸고 능숙하게 늘 주차하던 곳에다 한번에 주차를 시킨 윤두준은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래서 나도 차에서 내리려고 안전벨트를 푸르는데 고개를 숙인 내 얼굴 위로 주위보다 더 까만 그림자가 겹쳐지더니 곧바로 내 입술에 말캉한 것이 와 닿았다. 나는 아까 윤두준의 반응때문에 속이 상해서 장난치는 것 같은 이 행동에 괜히 더 뾰로통해져서 그 어깨를 밀쳐버렸지만 쉽사리 밀쳐지지 않는 윤두준은 계속 내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지 않은채 내 양손을 붙잡아버렸다.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섰고 그 틈을 타 내 입 안을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윤두준에 갑자기 왜이러나 싶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 안에선 우리 둘이 숨을 나누는 소리만으로 가득차버렸고 이런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나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이 붙잡혀있는 터라 그냥 윤두준이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꽤 길어지는 시간에 내 숨은 점점 차올랐고 점점 한계에 다다르자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윤두준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신호를 눈치챈 그는 살짝 나에게서 물러나주었고 그 틈으로 가쁜 숨을 내 뱉던 나는 다시 숨을 들이킬 새도 없이 뭐가 그렇게 급한지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 윤두준. 나는 윤두준에게 잡혀있던 한쪽 손을 겨우 빼내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왜 그래." 내 말엔 대답도 없이 불편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고 들어왔고 나는 그가 많이 불편할 것 같아 자세를 살짝 바꾸었다. 운전석을 바라보는 자세로 몸을 고쳐 앉았고 내 배려에 윤두준은 좀 편해졌는지 내 한쪽 목을 가볍게 쥔 윤두준은 내 몸이 자꾸만 뒤로 밀리지 않게 막으면서 몇분을 더 지속했다.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그와의 키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킨쉽이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느낌은 달랐다. 거칠때도, 부드러울때도, 달콤할때도 있었다. 마치 그의 감정이 나에게도 전이되는 듯 했고 무엇보다 제일 좋은건, 그가 나에게만 집중을 하는게 좋았다. 한참동안 나를 마치 잡아먹을 듯 거칠게 달려붙은 윤두준은 내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더니 그대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 등을 부드럽게 만져주는 윤두준의 손길에 나는 그의 양 목에 매달리듯 껴안았다. "사랑해. 너보다 더." 윤두준은 내 귓가에다,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소리로. 이 차안에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못들을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여주었고 나는 그게 너무 달콤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세상에 꿀보다도, 사탕보다도 아니 그것보다 백배 천배는 달콤하고 좋은건 사랑하는 사람이 속삭여주는 사랑한다는 한마디일 것이다.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내 귓볼을 살짝 깨물더니 내 뒷목에 자신의 고개를 파묻어 입술로 내 뒷목에 입맞춤을 해주었고 나는 간지러워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다시 내 입술위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입술이 닿을랑말랑 할 정도의 거리에서 다시한번 속삭여주었다. "사랑해."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윤두준의 그 눈길에 나는 내가 먼저 그 입술에 먼저 겹쳐버렸다. 오늘은 아마 최고가 될 것 같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가 될 것 같고. ** "..역시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네." 롯데월드 야외는 많이 춥다며 하얀색 반팔티 위에 회색 나이키 후드티를 입고 또 그 위에 많이 두꺼운 폴로 검은색 패딩을 입은 나는 하얀색 목도리도 칭칭 두르고 갔고, 나보다 상대적으로 추위를 덜타는 윤두준은 GAP 남색 라운드 티를 입고 그 위에 나이키 패딩 하나만 걸쳤다. 나는 춥지도 않냐며 뭐라고 했지만 그는 내가 너냐면서 내 코를 비틀어버렸다. 거의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내 기억에 온전히 남은 롯데월드는 신밧드의 모험 하나뿐이었다. 정말 어렸을 때 한번 와보곤 다시 와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처음 와보는 것과도 마찬가지인 나는 여기저기 뿅뿅 소리도 나고 커다란 탈인형을 쓴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도 신기했다. 가끔씩 꺄아아악-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들리고 나는 정말 신세계에 온것 같았다. "..우와.." "처음와봐 설마?" "..유치원때..빼고.." "니인생도 참 우중충하다." 내가 말없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와 서있으니까 윤두준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고 나는 뭐부터 타야될지 몰라 그냥 두리번대고 있었다. 역시 신기해. 놀이공원은. "일로 와봐." 윤두준은 바로 앞에 있던 기념품 판매대로 가서 무슨 이상한 머리띠를 고르는가 싶더니 내 머리 위에 꿀벌 모양의 머리띠를 씌워주었다. "뭐야." "귀엽네. 이거 쓰고 돌아다녀." 거울로 내 모습을 보니...으악. 어린애도 아니고..쪽팔리게. 나는 바로 벗어버리려고 했지만 윤두준은 이미 계산을 끝내고 쓰읍-한마디로 나를 제압해버렸다. 씨..그럼 지도 쓰든가. 지는 쪽팔려서 안쓰면서 남보고만 쓰라그러고. "뭐 부터 타고 싶어?" "신밧드의 모험!!!!" 무슨 저따위 재미도 없는걸 타겠다고 그러냐며 타박을 주었지만 윤두준은 순순히 신밧드의 모험을 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고 평일이라 한산한 탓에-아니 사실 수능 끝난 고3들이 왔는지 온통 학생들 밖엔 없었다- 줄이 빨리 빨리 줄어들었고 몇분 기다리지 않아 배에 탈 수 있었다. 뭔가 큼큼한 냄새도 나고 음산한 느낌에 어렸을땐 안이랬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내가 탄 배는 더러워보이는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주위가 온통 어두워 한치 앞도 안보이는데 뭔가 괴물 같은 것들도 있고 가끔 이상한 소리도 나서 나는 깜짝 깜짝 놀랬다. 그게 웃겼는지 윤두준은 내 허리를 감싸안고 있다가 내 볼을 꼬집었고 자꾸만 나한테로 물이 튀어서 나는 윤두준에게 바싹 다가가 앉았다. "나봐봐." 주위가 시끄러워서 잘 안들려 뭐라고?하면서 그를 쳐다보는데 윤두준은 내 입술에 그대로 다가왔다.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뭐하는거냐며 밀치려는데 윤두준은 내 허리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사실 주위가 많이 어둡고 그 사람들은 사람들 나름대로 신나있어서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이러는건 아무래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주 짧은 키스때문에 나는 충분히 놀이기구를 즐기지 못한채로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윤두준의 어깨를 퍽-하고 때렸다. "왜 그래 왜!!" "내가 뭐?" "...씨.." 내 반응에 윤두준은 실실거리며 웃다가 주위를 슥슥 둘러보는가 싶더니 허리를 굽혀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형때문에 입술 붓겠다!!" "뭐 어때. 어차피 내건데." 윤두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대서 혼났다. 이런 깜짝 발언때문에 나는 종종 놀라곤 했다. "후룸라이드도 탈래." 후룸라이드는 줄이 꽤 길었고 원래 놀이공원은 기다리는게 묘미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지껄이며 윤두준의 손을 잡아 끌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줄을 기다리는 동안 옆에 벤치가 있길래 거기에 앉아있는데 윤두준이 주머니에서 작은 디카를 꺼내 나를 연신 찍어댔다. 내가 하품하는거, 내가 멍때리는거, 윤두준 보면서 웃는거 등등. "왜 자꾸 찍어!!" "사진 찍을일도 별로 없는데 이럴때 찍어놔야지." 나는 그 손에서 디카를 뺏어들어 윤두준도 계속 찍어댔고 아래에서 찍었음에도 참 사진이 잘 나왔다. 역시 잘생긴 사람은 어떻게 찍어도 멋있긴 하구나.킥킥킥. "두분이서 오신분 안계세요?" 두 자리가 비는지 후룸라이드 담당자가 마이크로 말했고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윤두준은 저런자리는 뻔히봐야 앞자리라며 손을 내리려고 했지만 나는 꿋꿋이 손을 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나와 윤두준이 먼저 타게 됐다. 역시 맨 앞자리. "..물 제일 많이 튀는데.." "괜찮아. 이런건 앞자리 앉아줘야돼." 덜덜 거리며 오르막을 올라 갑자기 내려갔다가 또 어디론가 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다 이제 후룸라이드의 하이라이트코스만이 남았다. 여기서 기념촬영같은것도 찍히던데. 표정관리 잘해야지. 3.2.1. 꺄아아아아아악- 나는 표정관리를 좀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너무 급속도로 내려가는바람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착지한 배. 나는 생각보다 축축하지 않아 물이 별로 안튀었구나 싶어 머리를 정돈하며-머리띠를 고쳐쓰면서- 감았던 눈을 뜨는데 윤두준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물이 튀는게 싫어 내 대신 물을 다 맞았는지 등으로 물을 맞은 윤두준의 뒤쪽은 젖어 있었다. "축축하게 왜 막아!!" "안그래도 추운데 너 여기서 물맞으면 니 감기 수발 내가 다 들어야되잖아. 귀찮아." 말은 이렇게 해도 그냥 내가 물 맞는게 싫었다는게 뻔히 드러나서 그 앞에서 윤두준한테 뽀뽀를 해버릴 뻔 한걸 겨우겨우 참았다. 그리고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옷 말리는 곳도 있어 밖으로 나가는 도중에 나는 그 곳에서 윤두준을 말려주었다. 그렇게 많이 젖은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덜 말리면 감기에 들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 사랑스럽고 멋져서 주위 사람들이 다 나감을 확인하고나서야 내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양쪽 어깨를 잡아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상이야. 나 대신 물 맞아준 윤두준한테 주는 상." 윤두준은 내 말에 피식하고 웃더니 내 볼을 또 꼬집었고 이제 가자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점퍼 주머니에 내 손과 자기 손을 같이 넣더니 깍지까지 꼈다. 물론, 계속 내 손을 만지작대는 것도 잊지 않았고. "츄러스 사줘!!" 아침도 못먹은 탓에-오늘은 윤두준이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 공부하러 학교 가는게 아니라면서-윤두준한테 졸랐고 그는 근처 벤치에 날 앉히더니 여기 앉아있으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에 나는 주변을 샥샥 둘러보며 내 운동화도 정리하고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 내 발아래로 여러개의 그림자가 겹쳐 들어왔다. 윤두준이 아니라는건 직감적으로 느낀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었고 그 앞엔 웬 여자애들 네명이 내 앞에 있었다. "저기요.." 네명중에서 내 바로 앞에 서있던 긴 머리의 여자애가 나한테 말했고 나는 뭔가 싶어 그냥 쳐다만보았다. "그쪽 맘에 들어서 그런데..번호 좀 주심 안돼요?" 으..역시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때는 그냥 윤두준한테 왠지 모르게 죄 짓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정말 죄를 짓는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내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대놓고 보여줬지만 그걸 못봤는지 나한테서 핸드폰을 내밀며 수줍게 서있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다시 여자애 쪽으로 조심히 밀었다. "죄송합니다. 애인 있어서요.." "그냥 친구 하면 안돼요?" 여자애는 이쁘장하게 생겼다. 긴 머리에 호리호리한 몸에, 적당히 작고 하얀 얼굴. 그렇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윤두준때문에 피가 말라갔다. 이게 그의 눈에 비치는 순간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야될지도 모른다. "아..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숙여 죄송하다고 말했고 내가 몇번이나 미안하다고 하자 그 여자애들도 당황해하며 아니라며 죄송했다며 그대로 갈길 가버렸다. 아..진짜 이런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쨌든 순순히 가준 덕분에 나는 바로 주위를 살폈고 아직 윤두준은 안왔는지 나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인기 많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윤두준이 츄러스 두개와 샌드위치 두개, 그리고 흰우유 하나를 들고서 서있었고 나는 순간 어찌할바를 몰라 두 눈만 요리조리 굴려댔다. "..아..그게..형..나 진짜 번호 안줬어!!!" "관리 잘해야겠다. 여기저기서 넘보는 새끼들이 너무 많네." 윤두준은 벤치에 음식들을 내려놓고 나한테 츄러스를 하나 내밀면서 내 바로 옆에 앉았고 나는 그 츄러스를 어정쩡하게 받아들고는 윤두준을 쳐다봤다. "너한테 뭐라고 하는거 아냐. 이거 불안해서 살겠나..사람 많은데를 데리고 오면 안돼." "...미안..." 내 울것 같은 표정에 윤두준은 츄러스를 먹다가 내 얼굴을 한손으로 잡더니 윙크 한번 날려주었다. "뭐, 딴새끼들이 쳐다봐도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데..양요섭이 한 눈 팔진 않겠지?" 그의 농담에 나는 피식-하고 웃으며 그제야 맘을 놨다. 세상에서 윤두준보다 멋있고 이쁜 사람은 없다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차마 그 말은 내 입밖으로 나오질 않아 포기하고 그냥 츄러스만 먹었다. 와그작 와그작. "우리 저거 타자!!!" 나는 공중에 있는 레일 위를 달리는 작은 자동차 같이 생긴걸 가리키며 말했고 윤두준은 위를 치켜다보더니 내 머리를 꾸욱-하고 눌렀다. "초딩이냐? 저딴걸 타게!?" "왜..다 보이잖아. 저걸로 뭐가 어딨는지 다 보구 골라서 타야지!! 엔딩은 무조건 회전목마야!!!" "니가 한정서냐." "흥. 탈거지?" "누구 명령인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하겠습니까." 윤두준의 익살맞은 농담에 나는 그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한입만 남은 츄러스를 몽땅 먹어버렸고 그는 호탕하게 웃어재끼더니 내 어깨위에 팔을 두르고는 내 뒷통수를 쓰담쓰담 해주었다. 나는 츄러스로는 배가 고픈게 만족이 안돼 윤두준이 사갖고 온 샌드위치도 북 뜯어 우적우적 씹어먹었고 윤두준은 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직접 떼어주며 정작 자신은 먹지 않았다. "뭘 이렇게 묻히고 먹냐. 애기같이." "..내가 뭐." 윤두준은 자신도 먹으려다가 내가 계속 옷에 흘리고 입에 묻히고 먹으니까 들었던 샌드위치를 다시 벤치 위에 올려놓고 아예 내 옷에 떨어진 음식물들을 휴지로 다 닦아주고 내 입가도 휴지로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사실 나는 먹는 버릇이 좋지는 않다. 어렸을때 나를 붙잡고 엄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밥을 먹을때 신경을 쓰지 않으면 항상 흘리고 떨어뜨리고 묻히고 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지금 윤두준이 한숨을 쉬는거지만. "..형은 만약에 나를 포기해야될 상황이 오면 어떡할거야?"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형이랑 나랑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면 어떡할거냐구. 그냥 받아들일거야?" 나는 윤두준을 바라봤고 그는 내 입에 묻은 마요네즈를 손으로 닦아주더니 내 볼을 쓰윽 꼬집었다. "정해진 운명은 없어. 내가 만들어가는 운명만 있지. 세상에서 내가 널 포기해야될 이유는 없어. 그러니까 그럴 상황도 오지 않아." 너무 단호히 얘기하는 그의 행동에 나는 가슴 한켠이 울컥해왔다. 감동스러운것 같기도 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운것 같기도 하고. 복잡했다 마음이. "...근데..만약에 내가 형한테 나 놔달라고 그러면 어떡할거야?" "왜 나한테서 벗어나려는건지 이유 부터 알아야겠지." "만약..그게 내가 형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좋아진거면?" "..그 사람을 봐야지. 정말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 너한테 모든걸 다 바칠수 있나 없나.." 윤두준은 너무 진지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호기심 차원의 질문이었을 뿐인데. 정말 내가 이 사람한테 날 놔달라고 한것처럼, 윤두준의 눈빛은 갑자기 쓸쓸해보였다. 그냥 기분탓인가.. "형 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놔줄거야?" "..니가 행복하다면..놔줄수도 있지 않을까. 아픈건 나만 아프면 되니까." "..에이 그런말이 어딨냐!!! 끝!! 재미없다!!!" 나는 갑자기 침울해져버리는 분위기에 먹던 샌드위치를 한입에 다 털어넣고 웅얼거렸고 윤두준은 체한다며 내 등을 쳐주며 내 입에 가득 묻은 마요네즈를 휴지로 직접 닦아주었다. 그러고보니 윤두준은 츄러스 하나도 제대로 못먹고 나만 챙겨주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일이지만, 나는..기분이 좋았다. 나만을 위해 모든걸 바쳐줄 수 있는 사람. 왠지 바로 이사람이 그런 사람일 것 같았다. "읏챠-" 사람이 없어서 작은 전동차 안엔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아래가 깨알같이 보여서-오바를 조금 보태자면-아래를 내려다보는게 처음엔 무서웠지만 하도 느리고 떨어질 염려는 없어, 무엇보다 윤두준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아주고 있어 나는 계속 아래만 쳐다보며 신기해했다. 위에서 보니까 가족들끼리 놀러온 사람들,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놀러온 사람들 등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다. 맛있는걸 먹는 사람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까지도 다 보이니까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양요섭." "음?" 나는 계속 밑에만 쳐다보다가 윤두준이 부르자 고개를 들었고 바로 부딪쳐오는 입술에 나는 그의 어깨를 팍 밀쳤다. "사람들이 본단말야!!" "아무도 없어." "...그래두..." 내가 조금 망설이자 윤두준은 내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춰왔고 나도 그게 싫지만은 않아 윤두준의 허리에 살짝 손을 가져다대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들리고, 어느샌가 야외로 나왔는지 햇빛도 들어왔다. 갑자기 추워져서 나는 놀랐지만 윤두준이 좀 더 따뜻하게 감싸주어 뭔가 기분이 묘했다. 공공장소지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키스를 한다는건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느 놀이기구를 타는것보다 더 스릴넘치고..솔직히 말하면 찌릿했다. 그와의 키스는 수십번, 수백번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마치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잔잔한 노래를 듣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기도 하고, 무서운 영화를 보는것처럼 짜릿하기도 하고..하여튼 복잡한 감정이 교차되서 들었다. "..으..추워.." 윤두준이 내 입가에 묻은 타액들을 손으로 닦아주며 내 양 얼굴을 손으로 쥐었고 마치 붕어처럼 된 내 얼굴을 보며 키득거린 윤두준은 내 입술에 쪽-하고 진한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주었다. 두번, 세번, 네번. 나는 장난기 가득한 윤두준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버렸고 또 입모양만 헤벌쭉 해서 웃은 윤두준은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평생 아프지 않게, 행복하게 해줄게." "..에이 거짓말. 나 감기 들면? 그래도 아픈데?" "내가 대신 아프지뭐." "치." 내 반응에 발끈한 윤두준은 진짜야!!라면서 소리쳤고 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니가 아픈거까지 내가 다 아플거니까 걱정말고 나한테 오기나 해. 진짜 한눈팔면 혼날줄 알아!" "한눈 안팔아..감히..윤두준을 옆에두고 내가?" 누가보면 우웩 하면서 뒤돌아서겠지만 우린 말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딱 그럴 시기고. 내가 생각해도 역시 깨가 쏟아지는 연애 초창기다. 정말 눈빛만 봐도 짜릿짜릿해지는 느낌이랄까? 누구든지 연애를 해보면 알거다. 내 기분을.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행복함을 느끼고 늘 기쁘니까. 내 안에 뭐로 가득찬것처럼, 굳이 많이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정말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로..늘 행복하니까.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울만큼 행복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 사랑을 소중히 지키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서. 끝까지. #16.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날들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고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는채, 매일매일을 공부와 씨름하면서, 혹은 윤두준과 머리를 싸매면서 공부에만 파묻혀 지냈다. 아마 윤두준이 내 옆에 없었다면 끈기가 그다지 없는 난 애시당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부하기 싫어도 억지로 앉혀놓고 맨날 새벽 한시, 두시까지 공부를 시키는 윤두준의 그 고집에 나는 어쩔수없이 해야만했고 그렇게 하다보니 또 그런 생활도 나름 익숙해져 어느정도 공부하는데 있어 탄력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정말 그 사람의 후배가 될 수 있을정도로. "야. 너 크리스마스날 뭐하냐?" 시끄러운 쉬는시간땐 영어 단어를 외우는 나는 옆에 기광이가 온줄도 모르고 깜지를 써가며 영어단어를 달달달 외웠다. 아무리 외워도 외워지질 않아 미칠 것 같은데 그때 들려오는 기광이의 말에 나는 교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쳐다봤다. "오늘 며칠이냐?" "...병신. 22일이다 왜." "..벌써!?" "벌써는 무슨..너 뭐할거냐고. 윤두준이랑 계획 세웠냐?" 벌써 22일이라니..놀이공원에 가서 재밌게 논게 엊그제 같은데..그게 벌써 한달전 일이다. 끔찍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에 나는 굳어버렸다. 그러고보면 새해 맞을 날도 얼마 안남았구나.. 나는 쥐고있던 샤프를 놓고 멍하니 달력만 쳐다봤다. 크리스마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난 늘 집에 있었다. 그래도 중1때까지만해도 누나가 같이 있어줘서 외로운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었지만, 누나가 유학을 간 후로 나는 줄곧 혼자였었다. 아, 물론 크리스마스때마다 무슨 월급쟁이도 아니고 두둑하게 돌아오는 용돈이나 다른 애들이 보면 억소리가 날정도로 고가의 선물들을 많이 받았지만 그런걸로 내 원천적인 외로움이나 공허함은 채워질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몇년동안 혼자로,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니까 그게 익숙해져 남들한텐 들뜨고 신나는 크리스마스일지라도 나한텐 그저 빨간날 일 뿐이었다. 그건 올해도 마찬가질거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작년의 나완 달랐다. 지금은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아니." "그것도 안세우고 뭐했냐. 나랑 현승이..섬으로 놀러간다." "..섬?!" "그날이 디데이야. 그동안 참아내느라 고생 좀 했지.." 지금 이새끼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건가 싶어서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빤히 쳐다보다가 몇초뒤에 난 그 의미가 뭘 의미하는질 깨달았다. 변태새끼. "..어린애잖아." "한살밖에 차이안나. 그리고 내가 그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데.. 몰라. 이론이랑 실전은 다르겠지만..존나 떨린다 그 생각만하면..." "걔 만날때마다 그거 하고 싶어?" 나는..사실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와 키스하는거, 같이 안고 잠드는거. 그런건 좋았지만..그와 몸을 나눈다는건..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야. 당연한거 아니냐? 니도 남자니까 알겠지만..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음 만지고 싶고 같이 자보고도 싶은거 아니냐? 그런 마음이 안들면 사랑하는게 아니지." "..사랑하면 꼭 그런 마음이 들어야 되는건 아니잖아. 안들수도 있고..." "이성적으로 참는거 뿐이지. ...너 설마 한번도 그런 생각 안해봤냐?" 나는 이기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기광이는 어이없다는듯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곤 나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그래 너는 쑥맥이니까 그렇다치자. 과연 윤두준도 그럴까?" "...."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자려고 하지 않는 이윤 딱 한가지밖에 없어. 건드려선 안될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거지. 말하자면 친동생 같다거나, 가족같이 느껴진다거나 그런거? 근데 윤두준은 너한테 그런 생각을 하진 않을거아냐. 고로, 윤두준도 매일 밤마다 너를 품에 안는 꿈을 꾸면서 잠에 들것이다. 요말이지." "사실..요즘 나 윤두준네 집에서 살아. 같이 잠도 자고, 같이 일어나. 근데 단 한번도 그렇게 될 분위기까지도 가본 적이 없는데..." 내 말에 이기광은 경악했다. 정말 너무 놀라 기겁한 것처럼 기광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쩍-벌리고 있었다. 뭐야 이새끼 왜이래. "..대박..진짜?! 윤두준..설마..고자냐?" "야!!!!" "아니..그렇지 않고서야..그렇게 맨날 같이 자는데도.. 진짜 대단하다. 너를 정말 품에 안고싶지 않은거야, 아님 억지로 억지로 참는거야. 만약에 후자면..그건 진짜 윤두준 인간승리다. 성인군자가 따로없다야. 만약에 진짜 억지로 참는거였으면..나 윤두준 존경할거야." "아 병신새끼..아 됐어. 이딴말 할거면 꺼져." 나는 정말 윤두준이 고...어쨌든. 뭐 그런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정말 기광이 말대로 그렇게 매일밤 같이 잠 드는데.. 결단코 단 한번도 나를 억지로 취하려거나 그런 행동은 절대 없었다. 나는 그와 몸을 나눈다는 것 조차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렇다치지만 윤두준은..대체..뭐지.. "..시험해봐. 윤두준 마음이 어떤건지..안궁금해?" "..뭐." "유혹해보라고. 넘어오나 안넘어오나. 야 진짜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거 하자고 달려붙으면.. 그거 참아내는 남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절대 없다. 만약 거기서도 널 밀어내잖아? 그럼 그건..윤두준이 널 이성으로서 좋아하는게 아닌거야. 확실해 이건." "..야. 뭐 그런걸로..그렇게까지 생각을.." "너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그게 말이되나.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너를 완전히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게 니가 죽자고 달려붙는데 안넘어갈 수가 있겠냐? 만약에..진짜 니가 그랬는데도 안넘어오면..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라. 윤두준은 너를 그냥 친동생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건 너보다 훨씬 경험자가 해주는 조언이니까 새겨들어라. 엉? 그럼 형아는 간다. 계획을 좀 세워야 돼서..." 이기광은 내 뒷통수를 팍-하고 치더니 지 자리로 쫄래쫄래 가버렸고, 나는 이기광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 나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그럼 나랑 키스할리가 없는데..근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이런저런 온갖 잡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단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던 건데..하여튼 이기광이 화근이다. 그리고 나는..오기도 생겼다. 나도 남자라 알지만..이기광의 말. 하나 틀린거 없었다. 그렇다면..왜? 나는 궁금해졌다. 여태까지, 그 수많은 기회라면 그 모든 기회를 버리고 나를 건드리지 않았는지. 또 내가 유혹한다면..어떻게 할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넘어온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대처해야되는지조차 몰랐지만 나도..사실은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하고 싶었다. 인간은 지극히 본능적인 동물이기에 나도 어쩔수 없는 사람이고 인간인지라 생각을 안해봤을때야 모르지만, 이렇게 뭔가 가슴에 불이 확 질러진것마냥 뜨거워진 이 마당에,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된 지금은..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윤두준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어쨌든 복잡했다. 이씨. 망할 이기광때문에 오늘 윤두준 얼굴도 제대로 못쳐다볼 것 같다. ** "정신차려. 뭐해 지금?!" "..어? 아.." 아까 학교에서 이기광이 나한테 해줬던 조언아닌 조언때문에 나는 머리가 터질듯 복잡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을 낭비할 여력이 없다는걸 내가 제일 잘 알지만, 생각이란건 나조차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게 맘대로 안됐다. 자꾸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계속해서 머리도 흔들어보고 쥐어 박아도 봤지만 내 옆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듯 늘 똑같이 검은색 뿔테안경을 쓰고 영어로 빼곡히 적혀있는 원서를 보는 윤두준이 너무 신경쓰여서 죽을 맛이었다. 나는 한국지리 교과서를 읽는다고 펴놓았는데 샤프로 까맣게 줄만 치고 있었다. 똑같은 줄을 수십번 수백번씩. 거의 글씨가 보이지 않을정도로 말이다. 아...진짜 양요섭..미쳤어. "무슨 일 있어? 왜이래?" "..아무것도 아냐. 그냥..공부가 좀 안되네.." "그럼 좀 쉬었다하든가." 윤두준의 말에 나는 샤프를 조용히 놓고 쇼파위에 올라앉아 쇼파 밑 바닥에 앉아있는 윤두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괘씸하기도 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든게 한두번도 아니었는데, 그럴때마다 항상 윤두준은 나를 끌어안고만 있었지 내 몸을 만진다거나,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한테...그렇게 할만큼의 감정은..없는건가...... 내가..그정도의 사람인건가.. 답답했다. 그냥 툭까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그럴 수가 없었다. 쪽팔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잖아 이건!!!!!!! 마치, 하고싶어 안달난 사람마냥!!이게 뭐야!!!에이씨발 짜증나!!!!!! 내 기분은 정말 엿같아졌다. 공부도 안되고 그냥 짜증만 계속 나고..이유는 있지만, 그 이유를 남한텐 말할 수 없는 뭐 그런 류의 짜증이었다. 병맛같군. 나는 냉장고로 가 물을 한컵 가득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후련해지지 않는 마음. 대체. 난 윤두준한테 뭐지!? "..야. 내가..니 말 듣고 계속 생각을 해봤거든?" 나는 계속해서 집중이 되지 않아 좀 쉬었다하자는걸 핑계로 2층으로 올라와 화장실 문을 잠가놓고 변기뚜껑위에 앉아 기광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뭐를.」 "..아까..학교에서 했던말 있잖아..같이..안자는거..." 「아..그거 뭐.」 "왜..그렇지? 왜그럴까? 어? 내가..그렇게 매력이 없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여러번 같이 잤어. 근데!!!진짜 잠만 잤어!!!! 나는..여태까지 신경도 안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니말..들으니까..씨발..좆같다고..왜그럴까" 「몰라. 내가 그 싸이코 같은 새끼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 나는 기광이의 그 무심한 말에 더 짜증이 나 아예 변기통 위에 양다리를 올려놓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릎을 팔로 감싸안고 앉았다. "..물어볼 수도 없고..궁금하긴 한데..어떻게하면 그 사람 진심을 알 수 있을까?" 「작정하고 덤벼봐.」 "뭐?" 「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을 해보라고. 예를 들면 야한 옷을 입고 있는다든지, 뭐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든다든지..그런거 있잖아? 사랑과전쟁 이런거 보면 가끔 나오잖아. 그딴거.」 나는 그게 뭐지..라고 생각했다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병신아!!그걸 어떻게 해!! 만약 그러다가 진짜 나한테 덤벼들면?!" 「그정도의 각오도 없이 유혹할 생각이었나? 양요섭? 아 그따위 애기마인드 가지고 있을거면 전화 끊어. 이 기광이 형님은 콘도 예약중이신 바쁜몸이므로 니가 알아서 하도록.」 뚝- "야!!!! 야!!!!!!!" 전화는 매정하게 끊겨버렸다. 아 친구라는 새끼가 이렇게 매정할수가 있나.. ..그래..까짓거 해보지뭐. 일단 궁금한걸 해결하는게 우선이다. 뭐 어떻게 유혹이라는걸 해야되는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 디데이는 크리스마스 이브다!!!!!!!!!!!! .....씨발.. 자신없어..어떡해..... *** 디데이의 오후가 밝았다. 아니..무슨말이야.. 어쨌든 난 지금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브날은 약속이 있어서 저녁 늦게 들어올 것 같다며, 대신 크리스마스 날은 공부 안시키고 하루종일 같이 놀아주겠다며 나를 달래주고 나간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오늘이구나, 라는걸 직감했다. 근데..어떻게 할진..아직도 못정했다. 유혹이라는걸 본적도 들은적도 없어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유혹인건지 당최 알 방법이 없었다. 남자 맘은 남자가 잘 안다고 하던데..왜 난 그 마음을 더 모르겠는건지.. 이기광한테 물어보자니..그래도 서로 알거 모를거 다 아는 사인데.. 그런얘기까지 하자니 너무 쪽팔리기도 해서..기광이한텐 비밀로 부쳐두기로했다. 일단 그러기전에도 이기광은 이미 지 혼자 긴장타고 똥줄타고 있었으니까. 내일이 드디어 디데이라면서 오늘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더니 지금은 저렇게 쳐자고 있다. 쯧쯧쯧..쓸모없는 새끼. "대박..이거봐..존나 장난 아니다..이런거에 남자들이 죽는다며?" "그래. 존나 로망이래잖아. 근데 이런거 할라면 남자가 일단 등치가 있고 커야돼. 또 여자는 키도 작고 귀여워야되지. 와..화보 존나 장난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찍을수가 있냐. 개섹시해..대박.." 나는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내 앞자리에서 여자애들 세네명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뭔가를 보면서 속닥댔다. 남의 얘기라던가 남에 대해선 원체 관심이 없는 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다가 쓱-하고 책상을 봤는데, 거기엔 패션잡지가 펼쳐져 있었고 한번 스치듯 본건, 어떤 작고 예쁘게 생긴 여자가 남자 와이셔츠로 보이는 하얀색 셔츠를 아랫도리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입고 있는 사진이었다. 저런 이상한게 언제부터 남자들의 로망이었던건지 나는 다시 내 갈길을 가려는데 내 머릿속엔 뭔가 반짝하고 번뜩였다. 저건가..? 그래..저거다. 나는 화장실에 가려다말고 그 여자애들 중 한명에게 그 잡지좀 봐도 되겠냐며 빌렸다. 나를 좀 이상하게 쳐다보는거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세히 사진을 보니 은근히 야한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귀엽고..그래. 딱 이정도가 좋았다. 그래. 이거다. 기대해라 윤두준. 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주지. 감히 나한테 딴맘을 품지 않았다니.....괘씸한새끼.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윤두준이 나간 텅 빈 집으로 부리나케 뛰어들어왔고 곧장 윤두준의 옷장부터 뒤적거렸다. 다행히도 수트를 즐겨 입는 윤두준에겐 다양한 사이즈의 하얀색 와이셔츠들이 많았고 나는 그중에서 제일 커보이는 걸로 하나 골라서 내 몸에 대충 대보았다. 길이는 엉덩이 밑으로 조금 더 내려오는 정도였고 이정도면 충분히 아슬아슬하겠다 싶어 그걸로 선택했다. 물론 그 안에 속옷은 입어야겠지? 나는 그 옷을 침대위에 올려놓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언제들어올거야? 열두시 넘어서!? 알았어..집근처 다 오면 문자해." 나는 자정을 넘겨서야 들어갈 것 같다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윤두준의 말에 들고있던 와이셔츠를 다시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집에 먹을 것도 없고..남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뭐다, 다들 들뜬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데.. 나는 조용히 냄비에다 물을 받아 렌지 위에 올려놨다. 만인의 음식. 라면을 먹기 위해서였다. 으씨..서러워. 나는 이제서야 일곱시를 갓 넘긴 시각을 보고나선 한숨부터 쉬었다. 12시 넘어야 들어온다는데..그전에 내가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것 같았다. 뭐 그렇게 늦게오냐..누구랑 만나길래... 라면을 먹으면서 tv의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댔다. 뭐 딱히 맘에 드는 프로그램도 없어서 아무거나 틀어놓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보았다. 열한시가 되자 나는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있었던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최대한 꼼꼼히 뽀송뽀송 샤워를 하고, 평소엔 쓰지 않던 샤워 코롱 까지 칙칙 뿌렸다. 역시..샤워 후 뿌연 거울에 비춰보는 내 모습은..연예인 못지 않게 잘생겼다.....풉. 쨌든 검은색 트렁크 팬티만 입은 난 드라이기로 머리를 약간 촉촉해질때까지 말렸고 다 씻고 나오자 시간은 열한시 사십분에 육박해 있었다. 점점 긴장되는 마음. 윤두준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자정을 넘긴다고는 했으나 정말 밤을 새고 들어올지도 모르고, 지금 당장 들어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아까 침대위에 내던져놓았던 윤두준의 하얀색 와이셔츠를 맨 살에 입어보았다. 맨살에 입어보니..좀 이상하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그걸 다시 벗고 하얀색 나시를 안에 입고 셔츠를 입어봤더니 그제야 좀 덜 민망해서-아랫도리는 끔찍하게도 민망하지만-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가 이건 좀 아닌거 같아서 두어개를 풀렀다. 그러다가 이것도 아닌거 같아서 내친김에 세개까지 쫙 풀러버렸고 쇄골이 보일랑 말랑, 가슴팍이 보일랑말랑해서..내가 생각해도 좀 섹시했다....... 엄머, 나 뭐래니... 띠리리링- 띠리리링- 윤두준 다운 전화 연결음. 나중엔 꼭 최신곡으로 컬러링을 해줘야겠단 생각을 하는데 이내 통화가 이루어졌다. "어디야?" 「주차장. 3분만 있음 올라가.」 "...3분?!?!?!?" 나는 3분이라는 소리에 기겁하고 놀라 핸드폰을 내동댕이 치듯 닫아버리고는 1층으로 후다다닥 내려갔다. 그리고는 거실등을 모조리 다 끄고 소파 바로 옆 작은 수납장 위에 놓여있는 은은한 주황빛을 띄는 조명등 하나만 달랑 켜놓고는-물론 커텐으로 거실 창은 다 가려서 집은 온통 깜깜했다- 현관문 앞에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윤두준이 정말 오고 있는건지 현관문 밖에서 띠링-하는 엘레베이터 소리가 들리더니 쿵쿵 하는 짧은 발자국 소리와 함께 현관문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말 이대로 있다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침을 꼴딱 삼켰다. 지금에서라도 그만 둘 수 있었다. 그냥 후다다닥 2층으로 올라가버리고 문을 잠가버리면 그만이니까. 정말..쪽팔린데...어떡하지.. 난 다시 내 다리를 쳐다봤고 와이셔츠 밑으로 살짝 삐져나온 내 검은색 트렁크 팬티 자락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게..지금 뭐하는짓인지... 딸칵- 1초, 1초 피가 마를동안 현관문은 지체없이 열렸고 윤두준과 함께 들어온 찬 바람이 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으..추워.. "...뭐야?" 현관등 센서가 작동해 윤두준이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불이 들어왔고 현관문 벽에 기대서 말라버린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서 있는 나를 봤는지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어떡하지 진짜.. "왜 이제와?" 윤두준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세미 정장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수트 재킷과, 바지, 그리고 나와 같은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내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놀랐다는 듯. "...옷..뭐야?" 윤두준은 집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채 있었고 나는 에이씨, 어차피 인생 한방. 모르겠다 싶어 윤두준의 손목을 잡고 다짜고짜 거실로 이끌었다. 나한테 못이긴척 끌려오는 내내 윤두준은 아마 별의별 생각을 다 할것이다. 아 존나 쪽팔려 어떡해...양요섭 이 미친새끼야..왜 이딴걸 하겠다고 나서가지고 이 사단을 만드냐..어? 아이고 난 진짜 죽겠네.. 거실 소파에 윤두준을 앉힌 나는 그대로 머릿속이 하얘져버렸다. 소파로 끌고오기까진 했는데..그다음은 어떻게 해야되지.. 뭐 이런걸 봤어야 알고 들어봤어야 알지..진짜 미치겠네. "양요섭." 윤두준은 엄한 목소리로 날 불렀고 나는 마치 내가 아닌듯, 그의 허벅지위에 오토바이 타듯 걸터 앉았고 윤두준은 당황했는지 아까 그 목소리를 내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내 눈만 똥그랗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왁싱을 해서 앞머리를 올린 윤두준의 머리를 살짝 만지다가 그의 훤한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그 손은 그의 얼굴선을 따라 지나다 그의 귀에 가서 멈췄고 나는 윤두준의 귓볼을 쫄깃한 떡을 만지듯 주물렀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다 마치 입술이 닿을 것 처럼 가까이 댔다. "..나 지금..형 유혹..하는건데..."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고 최대한 얇게 그리고 조용히 내뱉었고 윤두준은 여전히 굳은 상태로 내 눈만 껌뻑 껌뻑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독한 맘을 먹고, 내일 하루종일 놀림을 당할지언정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 꽁댕이라도 잘라야겠어서 난 내 입술을 그의 코끝을 살짝 스치게한 뒤 그의 오른쪽 귓볼에 대고는 살짝 깨물었다. 살짝 움츠러든 윤두준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내 양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뭐해 너." "..말했잖아. 지금 윤두준씨 유혹하는 중이라고." "그걸 왜하는데." 윤두준의 말에 난 다시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 "..나랑 자려고 하지 않으니까." 나는 일부러 그의 귓가에 후-하고 작은 바람을 불어넣었고 윤두준은 내 허리를 양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난 다시 내 입술을 윤두준의 입술 근처로 가져다댔다. 키스를 할것처럼 하다가도 입술이 닿으면 떨어졌고 닿으면 떨어지길 여러번. 나는 최대한 눈빛을 섹시하게 한다고 했는데..이게 먹혀들어가는건지 어쩐건지 난 전혀 모르겠다. 에이씨 이거 이렇게 하는거 맞나..근데 왜이렇게 반응이 안오지? 잘못하고 있는건가... 나는 윤두준의 하얀색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개정도 풀렀고 고개를 숙여 윤두준의 쇄골에 내 입술을 파묻었다. 또다시 몸을 파르르 떤 윤두준은 내 허리를 아예 팔로 꽉 끌어안았다. 더욱 밀착되는 윤두준과 내 사이엔, 공간이 없었고 나는 숨이 막혀 그의 양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숨막혀." 윤두준은 내 허리를 한손으로 감는가 싶더니 나머지 한손으론 내 턱을 잡곤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려했고 이렇게 쉽사리 내줄 것 같으면 이짓까지 하지도 않았을 것인 난, 묘하게 살짝 고개를 틀었다. 다시 따라온 윤두준의 입술. 그렇지만 난 또다시 피하고 피했다. 내가 계속해서 그를 거부하자 윤두준은 애가 타는듯한 표정을 지어냈다. ...먹혀가고 있는건가.. 나는 계속 손으로 그의 턱선과 목을 훑었고 윤두준의 시선은 내 목과 쇄골쪽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약간 밑에 있는 윤두준의 시선은 고개를 들지 않으면 내 쇄골이 보일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을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아까 단추를 좀 많이 푸른탓에 내 쇄골이 적나라하게 보였는지 그는 그대로 내 쇄골에 입술을 파묻어 훕-하고 크게 빨아들였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따가움에 난 나도모르게 그를 밀쳐냈고 그때를 치고들어온 윤두준은 내 허리를 꽉, 아주 꽉 끌어안은 뒤 나머지 한손으론 아까처럼 내 턱을 쥐곤 그대로 입술을 맞대왔다. 나는 그래도, 이번엔 받아줘야될것 같아 내 왼손은 그의 어깨에, 그리고 오른손은 그의 뒷머리에 대놓고 슬쩍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거친듯, 조금 더 세게 밀고 들어오는 윤두준에 난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왜이러지 싶은 마음에 나는 마치 아기를 어르듯, 그의 뒷통수를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윤두준은 더 조급한 것만 같아보였다. 내 입술을 아예 잡아먹을 듯 엄청난 소리를 내며-안그래도 조용해죽겠는데-입술이 얼얼할정도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허리를 감은 그의 손에도 더 힘이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자연스럽게 밀어낼 때가 된것 같아 그의 양 어깨를 밀었고 싫다는 듯 밀쳐지지 않은 윤두준에 나는 그의 양 얼굴을 잡고 억지로 떼어냈다. 떼어내자마자 뭔가 아쉬운듯한 윤두준은 다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내 입술을 찾았지만 나는 그의 입술근처에 묻은 서로의 타액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메리..크리스마스." 자정을 알리는 시계가 띵띵-하고 두번 울리자마자 나는 윤두준의 귓가로 입을 대 속삭였고 윤두준은 그대로 내 쇄골에, 다시 훕-하면서 깊게 빨아들였다. 대체..이게 뭐지? 왜 자꾸..청소기 같이 이러는거지? 나는 윤두준의 행동은 알 수 없었지만 뭐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담엔 어떻게해야되나 싶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내가 지금..누구 허벅지 위에 어떤 자세로 올라와있는가.. 아깐..내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사람의 탈을 쓰고..어떻게 이따위 자세를.. 나는 아까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와서 그의 앞에 섰고 윤두준은 나를 소파위에 앉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그가 입고 있었던 재킷을 벗어던지곤 나와 똑같이 내 앞에 섰다. "..선물은?" 윤두준은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내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고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될지 몰라 망설이다 대답했다. "..나." 미친새끼.. 내가 내 대답에 대해 후회를 할무렵, 윤두준의 표정은 알 수 없이 굳어졌다. 역시..이따위 말은 하는게 아니었어. 나는 서둘러 그 말을 주워담으려고 윤두준의 허리에 내 양 손을 올려놓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다시 보니, 윤두준은 나를 안아들고는 묵묵히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도 뭔가를 해야할 것 같아 그의 목을 양팔로 감싸안고 내 입술을 그의 입술 근처에 가까이 가져다대 그가 움직일때마다 맞닿을 수 있도록 했고 좀 간지러운 느낌에 내가 풋-하고 웃자 윤두준은 입술을 쭉 내밀어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곧바로 다다른 윤두준의 방, 그리고 그의 침대. 나는 그 위에 조심스레 내려졌고 눈만 껌뻑 껌뻑하면서 윤두준을 쳐다봤다. 그는 바로 내 위에 올라탔고 이렇게 까지 되는건 아직 생각 안해봤는데.. 그러니까 일단 일은 저질러봤는데..사실 이렇게 한다해도 윤두준은 안넘어올거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여기까진 계산하지 않았는데..어떡하지 싶어 나는 윤두준을 바라봤고 그는 나와 달리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입술에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내리꽂았다. 정말 내리꽂았다는 표현이 옳을정도로 두사람의 입술은 세게 부딪쳤고 나는 눈을 꼭 감고 그의 목에 내 양팔을 휘감았다. 윤두준도 나처럼 눈을 감고 내 입술을 탐하면서 손으론 내 허리를 만졌다. 와이셔츠 하나를 입고 안에 나시를 입은 상태라 쉽사리 내 속살이 드러났고 윤두준은 내 맨살을 만지며 나머지 한손으론 내 귓볼을 만지작 거리면서 키스에 열중했고 나는 가만히 눈을 곱게 감고 있었다. 그러다 내 입술에서 자신을 뗀 윤두준은 내 감긴 눈에 살짝 입을 맞춰주는가 싶더니, 내 이마, 내 볼, 내 코, 내 턱까지 일일이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곤 내 귓가에다 자신의 입술을 댄 윤두준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선물."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살짝 열린 내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고 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간지러움과 아찔함에 눈을 꼭 감고 윤두준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무서워... 윤두준은 내 목에 입술을 파묻으며 깨물듯 말듯 하며 간지럽혔고 손으론 내 셔츠 단추를 모조리 풀러버리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나시를 입고 있어 완전히 드러난건 아니었지만-내 상체에 나는 좀 부끄러워져서 눈을 또 감았고 윤두준은 내 가슴팍 한곳 한곳마다 입술을 묻으며 혀로 간지럽혔다. 중간중간 흡-하고 빨아들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나도 뭔가를 해야될것 같아 팔을 들어 윤두준이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렀다. 순식간에 당황하는 윤두준, 그렇지만 피식-하고 웃더니 윤두준은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다 풀린 그의 셔츠,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얀색 나시만 입고 있었다. 윤두준은 내 나시를 배까지 살짝 들어올리며 내 허리를 만졌고 난 윤두준의 쇄골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러고보니 윤두준은 은근히 근육도 있었고 쇄골도 있었고..뭔가 나완 다르게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또 팔뚝도 은근히 굵고....이씨..난 마르기만 했는데... 윤두준은 다시 내 입술에 키스를 하다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원래 아까운 음식은..조금씩 아껴먹는거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윤두준은 그대로 내 옆으로 누워 나한테 이불을 덮어주며 자신도 같은 이불을 덮고 나를 돌아눕게 한다음 나한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아예 내가 입고 있던 셔츠를 벗겨버렸고 완전히 나를 끌어안은 윤두준은 내 등을 계속 만지며 말했다. "이런 옷 입을 생각은 어떻게 했어?" "..같은반 애가..이런거 좋아한다고 그러길래.." "누가 좋아하는데?" "남자들이." 윤두준은 내 말에 피식 하고 웃었고 내가 그의 입술에 먼저 내 입을 대고 내가 먼저 그의 입안으로 들어가 장난을 쳤고 윤두준은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 윤두준은 내 엉덩이를 만졌고 나는 그의 허리위에 팔을 올려 다부진 허리를 만지작댔다. 한참의 키스가 끝나고, 윤두준은 내 왼손을 잡더니 그 손가락 끝마디 마다 쪽-쪽-하는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주었고 내 왼손에, 반지 끼워진 그 네번째 손에선 좀 더 길게, 그리고 반지 위에도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입술을 탐하는 윤두준. "..내일..입술 붓겠다.." "..원래 내일 하루종일 물고 빨려고 그랬는데.." "..뭐야!! 변태같이." "지금 누가 변태같이 굴었드라?"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의 가슴팍을 퍽-하고 밀쳤고 푸하하 하고 웃은 윤두준은 나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나는 내 입술 근처에 닿은 그의 가슴팍에 아까 윤두준이 나한테 헀던 것 처럼 그의 가슴팍에 내 입술을 묻고 있는 힘껏 훕-하고 빨아들였다. 윤두준은 잠깐 당황하더니 내 눈을 보고는 손으론 내 볼을 꼬집으며 물었다. "이게 뭐하는건지 알고 따라해?" "..그냥..형이 하길래..뭔데?" "..니가 내꺼라고 찍는 도장."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어 훕-하고 정말 세게 빨아들였고 나는 정말 아파서 그 목을 감싸쥐었다. 이에 윤두준은 쪽-하고 내 입술을 빨아들이며 말했다. "원래 아픈거야 낙인은. 넌 무조건, 평생 윤두준꺼다." "..그런게 어딨냐.." 내 말에 윤두준은 진짠데..라면서 내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나서부터 한시간이 넘도록 윤두준은 정말 아까 그의 말처럼 나를 계속 물고 빨고 물고 빨고를 반복했고 잠깐 만져본 내 입술은 평소보다 두배는 더 부어있는 것 같았다. 약간 쓰라린 것 같기도 했고. "내일도 하루종일 이 옷 입고 있어." "싫어..불편해." "뭐가 불편해. 내 앞에서만 이러고 있어." "그럼 내가 형 말고 보여줄 사람이 따로 있나?" 내 말에 헤벌쭉 웃은 윤두준은 바보같이 내 입술을 더욱 더 깊게 탐하며 눈을 고이 감았다. #17.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게 지금 무슨소리냐고? 나홀로집에 케빈이 아빠 스킨바르고 소리지르는거 아니냐고? 그거랑 비슷하긴 한데....이건 차원이 다른...... "왜!! 무슨일이야!" 크리스마스의 날이 밝았다.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기대했지만 올해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크리스마스날 딱 일어났는데 아침에 눈이 소복히 내려있는걸 볼 수 있을까..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뭐야!!!!!" 나는 늘 그랬듯, 윤두준의 침대에서, 그가 깨워주는 소리에 일어나 샤워를 하기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서 입고 잤던 셔츠를 벗고 거울을 딱보는데... 쇄골 근처에 울긋불긋한 반점들이 여기저기에 나있었고 무슨 병이 난게 아닐까 난 너무 두려워졌다. 이게..뭐지..에이..즈...? 그때 전도연 나왔던 영화 뭐지..그 에이즈 걸린 역으로 나왔던.. 거기서 전도연 몸에 이런게 났던거 같은데....설마.... "..난 또..큰일난줄 알았네." 윤두준은 내 비명소리에 놀라 화장실문을 열어재껴 날 봤고 내가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차있는 눈으로 내 쇄골을 가리키자 윤두준은 후..하고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기대며 허탈하게 웃었다. "..나..병..걸렸나?" 내 말에 윤두준은 잠깐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왜. 뭔데!!! "...잠깐...너...이거...혹시.." "..맞아? 이거..에이..즈.." "..너 뭐하고 다녔어. 요즘." 나는 설마설마했는데 윤두준의 말에 거의 절망수준에 이르렀다. 그래도 아닐거 같았는데..윤두준의 표정이 이렇게 심각한거 보면.. 장난은 아닌거 같은데.. 어떡하지..나..병걸린거면..진짜..어떡하지? "..나..한거 없는데..나 진짜!!딴사람도 안만나고 형만 만났어!!!! 알잖아!! 맨날 공부만 하고..어제..." "일로와봐." 윤두준은 화장실에 있던 나를 끌어당기더니 자기가 먼저 침대에 앉아 울면서 서있는 나를 올려다봤다. "어제같이 해봐." "..어제? 뭐? 내가 어제 뭘..." 어제가 생각났다. 그 이상한 옷입고..윤두준을 유혹하겠다고 꼴사납게 군 그 꼴을.... 생각하기도 싫은데..이걸 왜.. "빨리 해봐." 윤두준의 재촉에 난 어쩔수없이 그 허벅지위에 또 올라앉았고 그는 어제 했던것처럼 내 쇄골 근처에 훕-하고 빨아들였다. 지금 이런걸 하자는게 아니잖아!!!!!! 심각해 죽겠는데 진짜!!!! "뭐해!!!" "..그래도 몰라?" "..뭐가.." "내가 지금 뭐했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윤두준은 뭘한거지? 그냥 빨아들인건데.. "..몰라." "넌 뭐 이런걸 하나도 모르냐..애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내가 너한테 뭘 할 수가 없다..진짜.." "뭐?" "이봐요 양요섭씨. 그쪽은 에이즈니 뭐니 이딴 병에 걸린게 아니라.. 이거 다 내가 그런거라구요. 이런걸 일일이 설명해줘야되냐?" 윤두준의 말에도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윤두준이 그런거지? 이게 뭔데?" "..그래도 몰라 그래도? 근데 어떻게 유혹을 하겠다고 덤볐는지.. 키스마크라고 애기야..어? 알아들어? 내가 그런거라고. 너 내꺼라고 내가 도장찍는다 그랬지. 그게 이거라고...알겠어 양요섭?" 키스마크?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그럼 병걸린거 아닌가? 아닌가봐!!!!!! "그럼 나 병걸린거 아냐!?" "..어휴.." 나는 윤두준의 한숨에 그제야 맘을 놓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 놀랐었다. 그 순간 수십가지, 수백가지의 생각이 오고가는데...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두렵기만 했는데... 병걸린게 아니었어♡ "..아침부터..나 유혹해?" 윤두준의 말에 난 정신을 차렸고 그러고보니 내가 팬티만 입은채로 그를 꽉 끌어안고 있는게 아닌가.. 뭐야!!!!!!! 나는 도망치려고 재빨리 일어나는데 그 틈을 놓지 않은 윤두준은 그대로 내 손목을 잡아당겨 나를 잡았고 침대에서 일어서 내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꿔 나를 침대위에 앉히고는 그는 점점 무릎을 굽히고 그 무릎을 바닥에 대더니 반쯤 앉은 자세로-L자자세-내 허리를 감으며 아침부터 내 입술로 식사를 할건지 내 몸은 뒤로 점점 밀리는데도 계속 내 허리를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윤두준의 키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와 이 이상의 관계를 가진다해도, 왠지 그와의 키스가 제일 짜릿하고 달콤할 것 같단 느낌?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급해보이는 그를 안정시켰고 윤두준은 그러면 그럴수록 좀 더 깊게 밀착해왔다. 십분이상은 지나고, 내가 먼저 윤두준의 볼을 감싸안으며 입술을 떼었다. "..나 씻을거야." "씻겨줄게." "쪽팔려." "그럼 같이 씻자." "싫어 쪽팔려." 장난같은 신경전이 오가고 윤두준은 알았다며, 내 볼을 한번 꼬집어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맘편히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윤두준은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으라고 했지만 낮부터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게 너무 쪽팔려서 그냥 반팔티에 반바지를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윤두준은 밥을 하고 있었는지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고 나는 그 뒷모습이 너무 멋져서 나도모르게 고양이마냥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두준은 놀랐는지 헉 하더니 내가 베시시 하고 웃자 윤두준은 윙크를 하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뭘 만드나 했더니 아침부터 스파게티였다. 무슨 아침부터 밀가루냐 싶었지만 요리는 엄청 서툴러 보이는 윤두준에게 뭐라고 할 순 없어 그의 듬직한 등에 귀를 대고 있다가 나도 그를 좀 도와야될 것 같아 식탁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접시도 놓고, 포크랑 숟가락도 놓고..물이랑 김치랑..피클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김치만 놓고 윤두준의 뒷모습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스파게티가 다 될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뭔가를 지지고 볶더니 윤두준은 후라이팬을 들고 뒤돌아서 나한테 다가와 집게로 한움큼 퍼서 접시위에 올려놔줬고 냄새는 그럴듯해서 일단 합격이었다. 맛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때?" 윤두준은 나름 긴장되는지 내 눈치를 보며 있었고 먹어보니..뭐..이정도면 괜찮았다. 처음한 솜씨치곤 훌륭했지만, 소스가 너무 없어서 싱거웠다는게 흠이랄까. 그치만 이정도면 먹을만했다. "맛있어." "..아..이까짓게 뭐라고..긴장되네.." "원래 그런거야. 나 그때 처음 형한테 밥해줬을때 얼마나 긴장했는데.. 그땐 맛있단 말도 안해주고 그냥 밥만 먹고.." 윤두준은 포크로 돌돌 말다가 내 말에 아!라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그땐 나도 긴장했었거든? 난 그때도 널 좋아하고 있었는데 무작정 집에 오더니 밥을 해주겠다고 그러질않나 단둘이 밥먹는게 얼마나 긴장되는데..맛있단말을 해줄 겨를도 없었고 맛을 음미할 생각도 없었다." "..뭐 그정도였나..전혀 그렇게 안보이던데." "원래 난 포커페이스야." "웃기네." 내말에 어쭈-라면서 포크를 들이대는 윤두준을 피해 크하하-하고 웃었고 윤두준도 날 따라 웃었다. 처음 맞는 행복한 크리스마스의 아침이었다. 17년동안은-완전애기였을땐 생각나지않지만-늘 혼자서, 외롭게, 우울하게 맞이해서 모든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다 이럴거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있다는걸 알게되고 더이상 외롭지 않아서 난 너무 기뻤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크리스마스, 생각보다 많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좋은델 가지 않아도.. 단 둘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나한텐 큰 기쁨이었다. 윤두준이라는 존재 자체가 나한텐 소중했으니까. 어렵게 얻은만큼, 쉽게 내주고 싶지 않아서 난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반드시. ** 크리스마슨데 집에 트리도 없냐고 내가 뭐라고 땡깡을 부리자 윤두준은 못이긴척 마트 가서 사자며 집을 나섰고 나는 생전 처음 누군가와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너무 기분이 들떠 뭘 해도 기분이 좋았다. "...사람 많다.." 크리스마스때 집밖으로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중얼거린 윤두준은 단란한 가족들이 붐비는 마트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기분좋게 매달렸다. 기분좋아 이런거. "이걸 사서..얼마나 쓰겠다고.." 윤두준의 말에도 난 아랑곳않고 크기별로 가격이 다른 트리 앞에 서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제일 큰 트리와 그다음으로 큰 트리. 둘중에 뭘 살까 고민했다. 제일 큰건 내 키를 훌쩍 넘는 크기여서 맨 꼭대기를 장식할땐 작은 받침대를 딛고 올라가서 해야될 정도의 길이였다. 아무리생각해도 그정도의 길이는 너무 부담되는 것 같아 딱 나만한걸로 골랐다. "왜!! 좋잖아. 같이 장식도 하고.." 내 말에 윤두준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내 몸만한 트리를, 다행히도 조립식이어서 커다란 상자를 카트 안으로 겨우 밀어넣은 윤두준이 그걸 끌고 오는동안 나는 그 옆으로 가서 온갖 데코들을 사들였다. 은색 종도 사고, 별도 사고, 꼬마전구도, 방울도 사고 이것저것 트리에 달 수 있는거라면 뭐든지 다 샀다. "너무 많이 달면 조잡해보여서 안돼.." 라면서 내가 들고있던 것들중 쓸데없어 보이는건 모조리 제자리에 갖다놓은 윤두준은 내가 울상을 짓자 요리조리 주위를 살피더니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난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윤두준은 나만 볼수 있게 윙크를 날려주었다. 윤두준의 윙크는 언제봐도 녹아버릴만큼 달달했다. 그 찡긋할때 코끝도 찡긋하는게..너무 매력적이었다. "이런걸 왜사?" 윤두준은 코르크로 만들어진 작은 게시판을 사고, 노란색으로 스마일이 그려진 핀도 샀다. 이런걸 왜사지? 쓸데없이.. "다 쓸일이 있으니까 사지요." 윤두준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어디론가 향했고, 거긴 가전제품 파는 곳이었다. 여긴 또 왜와? 살거 있나.. "카메라 좀 보려구요." 카메라? 웬 카메라?" 나는 뭐하나 싶어 윤두준이 하는걸 빤히 보고 있었고 그는 한손에 들어오는 디지털카메라를 이것저것 들여다보더니 나한테 두개를 보여주며 물었다. "뭐가 더 이뻐?" 하나는 캐논이라고 써있는 은색 카메라였고, 다른 하나는 소니라고 써있는 똑같은 은색 카메라였다. 난 뭐가 이쁜지도 잘 모르겠는데... "..캐논." 그냥 내눈엔 이게 더 이뻐보여 말했고 내 말에 윤두준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걸 구입했다. 쓸데없이 디카는 왜사!? "이거 왜사?" "사진 좀 많이 찍을라고. 그때 놀이동산 갔을때 갖고 갔던건 너무 오래된거라.. 사진 현상하니까 화질도 별로고 그러길래.." 물건을 받은 윤두준은 여기서 계산해야된다는 점원의 말에 카드를 꺼내 주었고 이내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그 코너에서 나왔다. "..사진 찍으면 얼마나 찍겠다고.." "맨날 들고다니면서 찍어야지. 너 자는거, 밥먹는거, 노는거, 공부하는거.." "그럼 나도 맨날 찍어야지!! 그럼..그거 사진 붙여놓을라고 저것도 산거야?" "사진도 붙이고 메모도 붙이고..겸사겸사." 윤두준의 말에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영 안좋은 생각 같진 않아서 윤두준의 옆에 서서 걸어갔고 그는 곧장 식품코너로 들어갔다. 그 근처에 다다르자마자 풍기는 음식냄새에, 나는 자동적으로 시식을 할 준비를 갖췄다. 아무리 비싼걸 먹어도..난 시식이 제일 맛있드라..♡ 나는 군것질을 너무 좋아해서 정작 윤두준이 반찬거리를 고르고 있을때, 나는 계속 카트에 요플레도 집어넣고 커피우유도 넣고 아이스크림도 넣었다. "이거 다 먹고 돼지 될라고?" 윤두준이 물만두를 카트에 담으면서 이미 수북히 담겨있는 군것질거리를 보며 말했고 나는 그냥 웃었다. 맛있는걸 보면 주체를 못하겠는걸 어떡해.... 윤두준은 그로부터 계속해서 반찬거리를 담았고, 난 이쪽 저쪽 돌아다니면서 과자도 계속 끌어다 담았다. 초코파이도, 감자칩도, 초콜릿도..오늘 하루종일 다 먹어버려야지!!!!!!!! "..양요섭 먹여살리려다가 허리 다 휘겠다." "치. 내가 먹으면 또 얼마나 먹는다구..이거 사면 나만 먹나? 형도 먹잖아!!" "내가 군것질 하는거 봤냐." "..짜증나!!!! 안사면 되잖아 안사면!!!"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게 먹는거 줬다 뺏는거고, 그다음으로 치사한게 먹는거 가지고 장난치는거였다. 윤두준은 이 두번째에 해당하므로 조금 치사한것. 이까짓거 돈으로 하면 얼마나 한다고...사람을 그렇게..짜증나! "왜그래. 삐졌어? 장난친거잖아.." "됐어. 다 샀어? 집가자." 나는 먹는거 갖고 그러는걸 제일 싫어한다. 사실 군것질거리도 잘하고, 가만히 앉아있음 심심해서 꼭 뭐라도 먹는 습관을 들인 나는 살이 먹는것만큼 찌지 않으니-사실 마른편이다-다행이지만, 어쨌든..윤두준이 자꾸 나한테 그만 먹으라는둥, 이거 다 먹으면 돼지 되겠다는 둥 이런 말을 할때마다 나는 괜히 민망하고 쪽팔려서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먹는것만 밝히면 멍청이 같애서. "야." 나는 내가 아까 카트에 담았던 과자들을 다시 한아름 들어 제자리에 갖다놨고 윤두준은 카트를 끌고 나를 쫓아오다가 내 속도를 따라붙지 못하자 그는 결국 카트를 한가운데 버려두고 내 팔을 부여잡았다. "뭐." "왜그래. 장난친거잖아. 화났어?" "..맨날 그러잖아. 먹는거 갖고. 이까짓거 안먹어도 살아. 그러니까 안산다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과자를 제자리에 갖다놨고 먼저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크리스마스날이라 마트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보통 두세사람씩 기다리는게 대부분이어서 난 그냥 아무곳이나 가서 줄서있었다. 바로 따라붙은 윤두준. "..가서 다시 갖고와." 윤두준은 카트를 내 앞으로 들이밀고 나를 뒤에서 껴안는듯한 자세를 취하며 카트 손잡이를 크게 잡았고 순식간에 윤두준의 품안에 갇힌꼴이 된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그냥 앞만 쳐다봤다. 남들은 신나기만한 크리스마슨거 같은데..괜히 카트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트리와 장식들을 보니까 저것들도 다 갖다놓고 싶어졌다. 왜 뭣때문에 심술이 난건진 나도 정확히 말할 순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 돼지라는 말을 듣는다는건 생각보다 많이 끔찍한일이라 나도 모르게 예민해져있었던 것 같다. 돼지라니..돼지라니... "...말 안할거야 나랑?" "..비켜. 사람들 보잖아." "보면 뭐. 너 자꾸 이러면 여기서 키스해버린다." 사람들 많은데서 애정행각을 벌이는건 내가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윤두준은 한다면 하는 사람인걸 아는 나는 기겁하면서 눈을 동그랗게떴고 그는 그제야 웃으며 내 허리를 슬쩍 감았다. 난 그것조차 부담스러워서 팔을 떼어냈고 윤두준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내 귓가에다 속삭였다. "..집 가면 과자보다 더 맛있는거 줄게." "뭔데?" "가서 보면 알지." 뭐가 얼마나 맛있길래..나는 궁금해졌지만 그래도 내가 화를 낸게 있었으므로 더이상 끈질기게 물어보진 않았다. 그리고 우린 십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아무데나 가서 선곳이 하필이면 줄이 긴 곳이었다 제길- 드디어 계산을 마칠 수가 있었고 그걸 차에다 싣는것도 일이어서 나랑 윤두준은 주차장에서 꽤 오랜 씨름을 해야만 했다. * 띠링- 삑삑삑- 조립형 트리 박스를 무겁지 않은척 들고 온 윤두준과, 그 장식들을 낑낑거리며 들고온 나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따라 들어가 현관문에 내동댕이치듯 내려놨다. 뭐 이까짓게 이렇게 무겁냐..나는 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면서 계단 바로 옆 벽에 붙은 벽시계를 바라봤고 오후 한시를 가리키는 시간에 얼른 준비해야 이따 저녁에 이쁘게 장식된 트리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 현관문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버티는 윤두준의 등을 손으로 밀었다. "..안들.." 안들어갈거냐며 묻는 내 말은 묻혀버렸다. 윤두준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내가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러니까 내가 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 사이 앞에서 뻐팅기던 그는 갑자기 뒤를 돌아 내 양볼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고 나는 당황스러워서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한채 내 볼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뭐가 그렇게 급.." 내 말은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아 자기쪽으로 끌어당긴 윤두준은 나를 벽쪽으로 밀더니 아예 날 벽에다 붙여놓고 입을 맞추었고 그 하고많은 공간중에서 왜하필 현관앞에서 이러는건지 나는 윤두준을 진정시키고자 그의 등을 쓸어내렸고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윤두준은 좀 더 격해져갔다. 고요한 집안이 입을 맞추는 소리로 가득찼을무렵, 먼저 입을 떼준 윤두준은 내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갖고 싶어." "....이미 가졌잖아." 으..오그라들어.. 이게 뭐야 대체.. "..완전히..갖고 싶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까지. 완전히 윤두준꺼 됐으면 좋겠어." "..나도 형꺼 되고 싶어." 내 말에 윤두준은 밝게 웃더니 내 콧망울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눈에도, 볼에도, 이마에도, 입술에도. 도장찍는것처럼 꾹꾹. "..근데..이제..집에 들어가면 안돼?" 내 말에 윤두준은 그제야 날 놔주곤 아까 내려놨던 트리박스를 들고 거실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얼얼한 입술을 이로 잘근 깨물며 무거운 장식박스를 들고 윤두준을 따라 들어갔다. "이거 지금부터 빨리 해야 저녁에 전구도 키고 이쁘게 볼거야. 그러니깐 열심히 꾸며야돼." 윤두준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며 자리에 앉아 트리를 조립하기 시작했고 나는 윤두준의 옆에 앉아 장식들을 하나씩 꺼내놨다. 너무 조잡하게 많이 샀나.. "혼자 장식 좀 하고 있어. 뭐 안사갖고 온게 있어서 사갖고 올게." "뭐?" "케익 안사왔잖아." "..아..생크림으로 사와!!!!" 윤두준은 갔다오겠다며 뽀뽀를 해준뒤 집 밖으로 나갔고 나는 윤두준이 완벽하게 조립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에다가 장식 박스를 들고 이것저것 매달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뭔가를 꾸미는것은 내 취미가 아니었다. 전에도 얘기했겠지만 나는 최대한 깔끔하고 깨끗한걸 좋아해서 이렇게 주렁주렁 여러가지가 달린 장식품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무슨일인지 이런걸 하고만 싶어졌다. 누군가와 어떤날에 무언가를 한다는것. 그게 굳이 어떤 중요한 것이 아닐지라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나에게 좋은 추억이라는 기억은 존재하지 않을것 같았지만, 마치 선물처럼, 기적처럼 나한테 누군가가 와서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 윤두준과 만난 그 이후부터가 나한텐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었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 그와 함께한다는것. 이것만으로도 난 평생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뭐 어차피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앞으로 평생 모든 크리스마스땐 우리 둘이 같이 있겠지만. #18. "으..춥다." 금방 갔다온 윤두준은 춥다며 케익을 거실 테이블위에 내려놓더니 바로 나를 껴안았고 내 몸안으로 스미는 찬기운에 나도 추워서 그를 밀어냈다. 그치만 윤두준은 계속 나를 꼭 끌어안으며 춥다..춥다..라는 말을 반복했고 나는 그를 녹여주고 싶어서 나도 꼭 끌어안아주었다. "뭐야..왜이렇게 황량해?" "..어떻게 해야되는지 잘 몰라서..." "처음 해봐?" "..응" 사실 트리에 매단거라곤 가지 끝에 작은 방울들과 산타 지팡이, 양말 뭐 이런거 밖에 없었다. 이런걸 해봤어야 알지..제대로 본적도 없는데.. 내가 쭈삣거리자 윤두준은 아이고, 하면서 목도리와 점퍼를 벗더니 척척척 장식품들을 매달기 시작했다. 꼬마전구부터 트리에 이쁘게 감고, 철수세미같이 생긴 금색 은색의 기다란 술을 꼬마전구를 따라서 이쁘게 감았고 가지 끝 마다 작은 방울들도 달고, 지팡이도 다시 매달고 양말도 매달았다. "여기 양말에 산타할아버지가 와서 선물 넣어주고 가나?" "..글쎄. 착한일 많이 하고 안울면?" "..나 안우는데..착한일도 엄청 많이 해!! 형한테 잘해주잖아." "뭘잘해주는데?" "..뭐..이것저것..하라는대로 다 하고! 시키는것도 다 하는데!?" 내 말에 윤두준은 손바닥 두개 합친 것보다 좀 더 큰 노란색 별을 박스에서 들다가 나를 쓰윽 쳐다봤고 별을 트리 맨 꼭대기위에 걸어놓더니 나한테 다가왔다. 뭔가 그 눈빛이 너무 음흉해서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뒤로 물러서자 윤두준은 계속 나한테 다가왔고 내 몸이 거실에 있는 통유리창에 부딪쳐 더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졌다. 이에 윤두준은 싱긋 웃으며 나한테 다가와 다짜고짜 내 허리를 꽉 부여잡아 끌어당겼다. "..니가 어제 나한테 준 선물..지금 풀어봐도 되나?" 윤두준의 말에 나는, 내가 무슨 선물을 줬었지..라고 생각하는데 불현듯 어제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끔찍해!!!! "..어? 어..그러니까..아직은.." "왜? 어제 풀어보라고 준거 내가 나중에 아꼈다가 풀어볼라고 잠깐 미뤄뒀던건데.. 지금 너무 풀어보고 싶은데..궁금해서 미쳐버릴거 같은데?" 윤두준은 내 어깨와 쇄골에 손을 대며 말했고 나는 계속 아찔해지는 느낌에 윤두준의 어깨를 잡았다. "..아..그건..내가..어제..잠깐 미쳐서.." "선물 줬다 뺏는게 어딨어." "..다..다른걸로 줄게!!! 더 좋은걸로!! 엄청 좋은걸로!!" "어제 니가 나한테 준 것보다 더 좋은건 없는데?" 윤두준은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돌려 내 뒷목에 얼굴을 파묻었고 작은 숨이 내 목에 와닿아 나는 소름이 끼쳐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윤두준은 그런 나를 끌고 소파로 데리고 갔고 나는 뒷걸음질치면서 계속 어찌할바를 몰랐다. 내가 사고를 치긴 쳤지만..그래도..이건... 아직..무섭단말야!!!!!!!!!!!!!!!!! 자신이 먼저 소파에 앉고 어제처럼 그의 허벅지위에 나를 앉힌 윤두준은 그냥 내 얼굴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도 하지않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채 그냥 내 허리만 잡고 가만히 있었다. "어제처럼 또 해봐. 그럼 선물줄게." "..아..안받아도 돼!!" "니가 어제 그렇게 원했던거 줄건데?" "뭔데?"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고."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이런거 내 전문도 아니고, 어제야 이기광의 꼬임에 넘어가서 일 친거라고는 하지만 지금은..정신도 말짱하고..안그래도 나는..어제의 일을 엄청나게 후회하는 중인데 윤두준은 자진해서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 몸에 착 달라붙은 하얀색 러닝셔츠만 입은채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씨발. 모르겠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는 그말을 끝으로 2층으로 올라가 어제의 차림 그대로를 똑같이 재현했다. 이번엔 러닝셔츠도 입지 않은채 그냥 와이셔츠만 입고, 이번엔 핑크색 트렁크 팬티차림으로 내려갔다. 이게..뭐하는짓인진 모르겠지만 윤두준이 나한테 줄 선물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게 대체 뭘까..나는 뭐 갖고 싶다고 얘기한적 없는데..라는 생각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이 차림으로 또 오자 윤두준은 윙크를 하며 나한테 오라며 팔을 벌렸고 나는 어제처럼 그의 허벅지 위에 오토바이타듯 올라타 다짜고짜 윤두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댔다. 여기서 포인트는, 절대 함부로 키스를 하지 않는것!! 줄듯 말듯, 해줄듯 말듯이 키 포인트였다.....남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셔츠 단추를 세개나 풀러 내가 몸을 숙이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윤두준은 그걸 보더니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었다. 윙크를 하는것도 잊지 않았고. 나는 윤두준이 윙크를 해줄때가 좋았다. 왜냐면 멋있었으니까. 나는 그 눈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마에도, 볼에도, 코에도 해주다가 입술 근처로 와선 그냥 맴돌기만했다. 그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윤두준은 지가 입술을 쭉 내밀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피했다. 윤두준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와이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내 맨 허리를 만졌다. 나는 여기서 또 어떻게 해야되나 망설이다 나와 그가 한쪽씩 나눠낀 귀걸이가 끼워진 그의 왼쪽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선물..꼭 주는거다.." 내 말에 윤두준은 더 꽉 내 허리를 끌어안았고 나는 적당히 잡혀있는 그의 어깨 근육을 보다가 그의 어깨부터 쇄골까지 손끝으로 훑었다. 그리고 그가 나한테했던것처럼 고개를 그의 뒷목에다 파묻고 괜히 작은 바람도 불어보고 쪽-하고 뽀뽀도 해주고 살짝 깨물어주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더 나를 꼭 끌어안아 우리는 너무 밀착된 상태로 붙어앉아있었고 나는 그의 팔을 잡아 내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게 하려했지만 쉽사리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윤두준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고 윤두준은 살짝 몸을 떠는가 싶더니 아예 내 쇄골에 고개를 파묻었고 또 훕-하고 빨아들이는 그의 행동에 난 살짝 그를 밀었다. "유혹하라면서 나한테 이러는게 어딨어." "..." 윤두준은 마치 목이마른 사슴처럼 보였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은데, 저 앞에 물이 보이는데 못마셔서 안타깝고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난 그를 더 놀려주고 싶었다. 어디 한번 더 당해봐라. 나는 윤두준의 가슴팍을 만지며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댔고 윤두준이 먼저 키스를 하려하자 나는 또 먼저 피했다. 그리고 그의 왁싱해서 앞머리를 멋있게 올려 드러난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윤두준은 보면 볼수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자국 하나 없고, 트러블도 하나도 없으며 곧게 뻗은 콧날과 훤한 이마, 날카로운 턱선과 쌍커풀없이 매력적인 눈. 새까만 눈썹도 그의 강인함에 플러스 요인이 돼주었고. 이쯤..하면..됐나? 이만큼 하면 된것 같아 나는 윤두준의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고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듯, 윤두준은 내 입술을 먹어치우듯 집어 삼켰다. 무슨 진공청소기에 빨려들어가는것처럼 윤두준은 춥춥-소리를 내며 고개를 이쪽저쪽 돌렸다 말았다 하면서 이미 내 허리는 그에게 맡겨져 있었다. 너무 무섭게 치고들어와 나는 뭐가 그렇게 급하냐며 그의 뒷목을 끌어안았는데 윤두준은 그 상태에서 나를 완전히 안아들어 여전히 키스를 하는 상태로 한걸음 한걸음씩 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고 금방이라도 넘어질것 같아 내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넘어져." 바로 코앞이 계단이라 넘어질 것 같아 입술을 뗐지만 윤두준은 아랑곳않고 다시 내 입술을 찾았고 나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채 그에게 다시 내 입술을 내주었다. 윤두준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쿵쿵 올라가 마침 열려있던 방문으로 바로 들어가 문도 닫지 않고-어차피 아무도 없었지만-침대위에 곧장 나를 내려놓더니 그 위에 올라타 이대로라면 내 입술이 터져버릴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정도로 세게 밀려들어왔고 그 사이 윤두준은 손으론 이미 몇개 잠겨져 있지 않던 셔츠의 단추를 다 풀어버렸다. 어젠 러닝셔츠라도 입고 있었지, 지금은 완전 맨몸이라 부끄러워져 손으로 더듬거려 풀어헤쳐진 내 셔츠자락을 여미려고 하는데 내 손을 막아서더니 그대로 내 쇄골로 자신의 입술을 옮겨가 혀로 장난을 치는가 싶더니 흡-하고 빨아들였다. 나는 윤두준의 정수리를 보며 그의 정수리를 톡톡-하고 쳤고 윤두준이 나를 보자 나는 그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윙크를 해주었다. 이에 그가 피식-하고 웃더니 내 눈에 입을 맞춰 주었고, 내가 아까 그랬던 것 처럼 이마, 눈, 코 볼에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여주었다. "..니가 원했던 선물..지금 줄게. 여태껏 아꼈었는데..지금 줄게. 나도..고맙게 잘 받을게." 나는 윤두준의 말이 무슨뜻인지 몰라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난 순간 머릿속이 빛 줄기 하나 스치듯 반짝 거림을 느꼈다. 내가 원했던건..어제 내가 유혹해서 얻어내고자 했던 거.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어쨌든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내 귓볼을 살짝 깨물며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을 풀렀고 나도 눈을 감았다.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뜻이었다. 사실 뭘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윤두준이 하라는거라면 난 다 하고 싶었다. 내 몸이 아니라, 그 모든것도 다 그를 위해서라면 줄 수 있었다. 빠르게 바지를 벗어던진 윤두준은 순식간에 속옷까지 벗어버렸고 처음 보는 그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에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렸고 윤두준은 내 고개를 똑바로 하며 눈을 맞춰주었다. "부끄러운거 아니야." 윤두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적응이 안되는건 사실이었다. 그걸 아는지 윤두준은 내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주며 내 속옷까지 벗겨주었고 그제서야 우리는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다. 누군가의 아래에서, 이렇게 다 벗고 있을줄은..생각도 안했던 일이었는데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사실 말하자면 많이 무서웠다. "..나 믿지? 하라는대로 해." "...응.." "..사랑해" 윤두준의 마지막말에 나는 세상을 다 얻은것마냥 너무 행복해서 잠깐 감정을 잃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달콤해서 나도모르게 윤두준의 목을 끌어안았고 윤두준은 내 허리를 안으며 나에게 밀착했다. 그리고는 내 어깨서부터 쇄골, 가슴, 배까지 하나하나 입을 맞춰주며 나를 만졌고 점점 기분이 황홀해지는 느낌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잠깐만.." 왜 그래야되는진 모르겠지만 윤두준이 하라는대로 그래야 덜 힘들다는 뭐 이상한 말과 함께 엎드린 나는, 한참을 나를 만지고 어르는 윤두준에게 내 몸을 맡기고 베개에 얼굴만 쳐박고 있었다. 이런건 내가 생각했던것과는 너무 다른거여서 난 솔직히 말하자면 이상했다. 늘 봐왔던 장면은 아닌데..이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고.. 뭐 어쨌든 윤두준의 어루만짐의 나도모르게 조금씩 내 안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마냥 뜨거워지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내 엉덩이 근처로 다가와 다짜고짜 넣어버렸다. "아!!!!!" 어디에 넣었는지는 스스로 상상하길 바라지만... 뭔가 점점 변태같고..이상했다. 그래도 대놓고 이게 뭐냐며, 이상하다고 말할순 없어서 가만히 있긴 했지만 자꾸만 그의 손가락이 내 안을 휘젓는 느낌이 나를 점점 흥분상태로 몰아넣었다. 정신상태완 다르게 내 몸상태는 극으로 치닫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휘젓던 윤두준은 빼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의 그것이 내 엉덩이 근처로 다가왔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무척 생경한 느낌에 이차적으로 당황스러웠다. 이번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내 몸이 놀라서 딱딱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윤두준은 내가 그런반응을 보이자 바로 키스를 해주며 내 등을 만져주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게 힘이 들어간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본능인거 같은데 어떡해.. "..형!!!!" "..이래야 안아파. 최대한 힘빼. 힘 들어가는거 아는데 무조건 빼. 알았어?" 윤두준은 내 반응에 다시한번 손가락으로 뭔가를 하더니 결국 꽉 부풀어오른 윤두준의 그것이 내 엉덩이 사이로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베개를 물고 소리를 질렸고 윤두준은 내 입에 계속 쪽쪽-하고 입을 맞춰주며 내 뒷목에 고개를 박고 그것을 밀어넣었고 윤두준의 그게 난 너무 아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게 이런느낌인가..근데..자꾸 내 안에선 활화산 같이 뭔가가 자꾸 터져오르면서 부글부글 끓는것 같았다. 간질간질 거리는것 같고 좀 더 깊게 들어와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면서 자꾸만 기분이 이상했다. "..하...하..으.." 아픈것도 아픈거였지만..제일 미치겠는건..내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진다는 거였다. 원래 이런게 이런건가 싶을정도로 나는 애들이 보던 야동에서나 들릴법한 소리를 내 입밖으로 냈고 난 그런 내가 너무 싫어 최대한 이따위 더러운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베개를 물었다. 그치만 윤두준은 소리 내라며 베개를 내 입에서 빼주었고 있는대로 소리가 나자 윤두준은 계속 내 등에 입을 맞춰주며 좀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왔다. "...아...하...흐.." "..사랑해.." "..하..하..좀..더.." 내가 지금 뭐라는거야!?!?!? 나는 지금 내 정신이 아니었다. 입과 정신은 따로따로 놀았고, 나는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조차도 인식할 수 없을정도로 내 몸은 지극히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내 몸에서 마치 활화산이 만들어진것처럼, 아주 조금만 더, 그가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와주면 그 화산이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데 윤두준은 자꾸만 조금씩 조금씩 건드리기만 할뿐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슬쩍 얼굴을 보니 윤두준은 내 반응에 싱긋-웃고 있었고 이 사람이 장난치는거라고 그제야 알았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매달리는 수밖에. "..혀..형..빨리..좀..더.." 나는 이상한 소리 반, 숨찬 소리 반을 내며 힘겹게 말했고 윤두준은 내 입에 입을 맞춰주며 내 얼굴 양 옆으로 손을 짚어 지탱한 뒤 나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계속해서 바운스를 주었다. 그에 내 몸이 떨리면서, 그리고 점점 내 화산이 펑-하고 터질 즈음으로 치달았다. "..하...아..하.." 펑-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정한 윤두준은, 그리고 나도 그와 동시에 해버렸지만. 어쨌든 그는 나를 바로눕혀 그 위에 또 올라타 이번엔 계속 입으로 내 쇄골을 지분거리며 손으론 내 그것을 만졌고, 나는 그의 뒷목을 끌어안아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보기 좋게 잡힌 근육에 나는 그의 쇄골도 만지고 그의 얼굴도, 귀도 다 만졌다. 스킨쉽이란게 이런거구나. 자꾸만 기분이 좋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아파보는데지만, 정말 처음에 들어올땐 아파서 죽고 싶었지만 점점 이상 야릇해지는 기분이 들면서..내 몸은 지극히 본능적으로 변해버렸다. 야동을 즐겨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걸 해보고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지만.. 왠지 늦게 배운 도둑질..날샌 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내 꼴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계속 내 허리를 만지고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지분거리며 있던 윤두준은 내 입술에 입을 맞춰주며 내 옆에 그대로 누웠고 나는 윤두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완전히 몸을 밀착해 그의 몸 위에 엎드린 나는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아주자 그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댔다. 생각보다 빨리 뛰는 그의 심작박동소리에 나는 그의 가슴팍에 흡-하고 빨아들이며 말했다. "너도 내거." "뭐?!너?" "메롱." 내 말에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내 정수리에 뽀뽀를 해주었고 나는 윤두준의 위에 엎드린채로 그의 보기좋게 잡힌 가슴근육을 만졌다. "..안아팠어?" "..처음엔..좀..근데 지금은 좀 뻐근하긴 한데..괜찮아." "..체질에 맞나보다?" "어?" 내 말에 윤두준은 아니라며, 내 등을 더 끌어안으며 엉덩이를 만졌고 나는 우리의 둘다 그게 맞붙어 있단 생각에 괜히 야릇해져서 윤두준을 바라봤고 얼굴이 빨개졌는지 윤두준은 무슨 생각하냐며 내 볼을 꼬집어주었다. "..사랑해.." 내 말에 윤두준은 그대로 나를 옆으로 떨어뜨려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한뒤 나란히 누웠고 나는 윤두준의 배를 끌어안았다. "뽀뽀." 윤두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고 윤두준은 나를 양손으로 꽉 끌어안은채 더 깊게 입을 맞춰주었다. 나는 그와의 키스가 제일 기분이 좋았다.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평생 하고 있으라고 하면 정말 좋을텐데.. 윤두준은 베개에 눕고, 나한테 팔베개를 해주며 끌어안아주었고 나또한 그의 허리위에 손을 감고 나란히 누웠다. 그치만 자꾸만 그게 닿는게 싫어 내가 엉덩이를 좀 빼자 윤두준은 그러면 그럴수록 나한테 더 다가왔고 우린 어쩔수없이 밀착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 모든걸 준다는것, 그리고 그걸 받는다는것. 나는 윤두준이라면 모든걸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뭐든간에 그가 원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다 줄것이다. 지금은 처음이라 모든게 서툴렀지만, 내가 좀 더 익숙해지면 내가 그를 좀 더 즐겁고 황홀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가 나와만 잘 수 있게, 그가 나와만 사랑할 수 있게, 그 눈에 그 마음에 나만 담을 수 있게.. 나는 어느덧 소록소록 몰려드는 잠에 윤두준의 가슴에 내 얼굴을 더 깊게 파묻고 그의 등을 더 꽉 끌어안은채 눈을 감았다. ..크리스마슨데...다신 못잊을것 같은 기억이 내 몸과 마음에 남아버렸다. #19. "..몇시야.." 자동적으로 떠진 눈에 나는 여러번 껌뻑이고나서야 지금 이 상황을 파악 할 수가 있었다. 나와 윤두준은 트리를 꾸미다가 갑자기 눈이 맞아 방으로 올라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걸 했고, 그러다 지쳐서 잠에 들었다....... 쪽팔려.. 내가 슬그머니 이불을 들춰 안을 보니 우린 둘다 벗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까는 몰랐는데 확 달아오르는 얼굴에 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리고 난 여전히 윤두준의 팔을 베고 있었고 그는 나를 향한채로 누워 내 팔뚝 위에 손을 얹고 자고 있었다. 일단 이 사람 보다 일찍 일어나서 옷부터 입어야겠어서 나는 손을 천천히 옮겨 그의 팔을 내 팔 위에서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잠에서 안깬듯 곱게 내려앉은 그의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제일 시급한건 내가 옷을 주워입는 거였으니까 그 충동을 누르고 침대 끝으로 몸을 옮기려는데.. "..어디가." "엄마야!!!" "..엄마가 어딨냐.." 왜 맨날 자는척하는거야 윤두준!!!!!!!!!!!!!!!! 깼으면 깬 척을 좀 하던가!!!!!! "..옷..옷좀 입을라고.." "일루와." 윤두준은 눈을 살짝 뜨더니 내 손목을 잡아 다시 자기 옆으로 날 눕혔고 꼼짝없이 그한테 안긴 나는 벗어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자꾸만 우리의 그..것들이 부딪쳐서 난 너무 신경쓰였다. 죽겠네 진짜.. "..좀..떨어져봐." "왜" "..왜..이렇게 붙어있어. 좀.."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밀며 몸을 떼려는데 윤두준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곤 나를 아까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 완전히 밀착되어버린 우리. "..형!!" "부끄러워? 뭐가? 사랑해서 한거잖아. 아니야?" "..마..맞는데..그래도.." "어차피 볼거 안볼거 다 본사이에..이제..안참아." "뭘?" "..내가 여태까지 너 지켜주려고 수십번도 넘게 참았던거..모르냐? 내가 너랑 어떻게 한 침대에서 아무짓도 안하고 잘 수 있었는지. 내가 왜 그렇게 늘 피곤해보였는지..그게 니 뒷바라지때문에 그랬던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설마?" 무슨말이야.. 요즘 윤두준이 부쩍 피곤해보이긴했지.. 내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였던거 같긴 한데.. "어?" "정말 그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나 원래 잠 별로 없는 사람이야. 안자도 3일은 버텨. 원래 남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자고 싶은 동물이야. 내가 어떻게, 어떤 정신으로 버텼는지..넌 아마 모를거다. 이 맹꽁아." 윤두준은 내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았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쳐다봤다. 내가 뭐!! 나도 남잔데..?! "그동안..나도 많이 고생했지. 근데 이젠 안참아. 하고싶을때마다 할거야. 알았나 양요섭?" "..뭘? 아까 그거!?" "응" 나는 말도 안나왔다. 사실..생각보다 너무 좋았고, 너무 황홀했지만.. 이걸 하고싶을때마다 한다면..나는..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윤두준을 쳐다보자 그는 그대로 내 입술을 먹어버렸다. "아..잠깐만!! 형이.." 내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윤두준은 내 귓볼을 만지며 입을 맞추었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야될 말이 있는데도 자꾸만 목 안으로 삼켜졌다. 말 하려고 어깨를 밀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부딪쳐오고, 또 그러고 또 그러고.. "아 좀!!! 말 좀 하자!!!" 내가 윤두준의 어깨를 팍-밀치며 말하자 윤두준은 어쭈.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씨. "나 맨날은 못해!! 생각보다 아프단말야!! 지금 내가 안아픈척해서 안아플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얼마나 허리가 땡기는데! 지금 거기..거기도 얼얼해!! 형은 모르겠지. 모르지!? 씨...억울해!!!" 사실 아까부터 평생 안아플 줄 알았던 그 곳이 찢어진 듯 아프고, 허리도 묘하게 땡기는게 아까부터 몸이 뻐근했는데 윤두준은 자꾸 그것도 모르고 내 허리를 만져대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많이 아프다고!!! "..아파?" "어!!!" 내 말에 윤두준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내 허리를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냥 만지는게 아니라, 주물주물 해주면서 가끔 통통 쳐주기도 했고. 그리고 입으론 자꾸만 내 입을 막았다. 씨..포기다. 윤두준은 일부러 춥춥 거리는 소리를 내며 좀 더 깊게 들어오는가 싶더니 아예 내 몸 위로 올라타 내 혀를 가지고 말고 돌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목을 내 팔로 감아 그를 받아들였다. 요즘은 나도 능숙해져서 그를 밀당할 수가 있었고 그런 내 모습에 재미가 들렸는지 요즘은 한번 깊게 들어왔다하면 빠질 생각을 안했다. 아마 그래서 내 입술이 24시간 내내 부어있는 것 같다. 윤두준은 내 귓볼을 만지며 나를 자극했고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아마 내 귀는 스위치 인 것 같았다. 가만히 냅두면 윤두준이 하는대로 있는데 윤두준이 누르기만 하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끔은 그보다 더 그의 혀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입술을 뗐고 나는 밑에서 위에 있는 윤두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사..랑..해.." 내 입모양을 그대로 읽은 윤두준은 내 귀여운 행동(?)에 내 눈 위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랑해." 어떤 가수가 부르는.. 내 귀에 캔디가 따로 없다. 윤두준의 사랑한다는 말은. "..샤워 하자." "먼저해." "같이 해야지." 기겁했다. 샤워까지 같이 하자고? 맨정신에 지금 아예 대놓고 벗은 몸을 보자는거야!?!?!? 말도안돼!!!!!!!!! "형!!!!" 내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윤두준은 나를 안아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난 최대한 할 수 있는 저항을 하며, 발버둥도 치고 그의 목도 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를 욕조에 앉혀놓고 뜨거운물을 가득 채우는 윤두준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고 윤두준은 익숙한 듯 물이 점점 차올라 내 목끝까지 오자 화장실 수납장에서 뭔가를 꺼내 물 위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거품을 내는 제품이었는지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면 작아질 수록 욕조안에 거품은 늘어만갔다. "..와.." 사실 목욕을 하기보단 빠르게 샤워를 하는 편인 나는 이건 좀 신기한 경험이었다. 거품목욕은 드라마에서나 봤지 내가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데.. 향도 은은하니 은근히 기분을 좋게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물이 내 기분을 가장 좋게했지만. 내가 거품을 가지고 장난치자 윤두준이 내가 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와 자기의 다리 사이에 나를 끼워놓고 나를 뒤에서 껴안아주었다. 나는 이젠 이런건 익숙해져서 윤두준을 한번 뒤돌아봐준다음 계속 거품으로 장난쳤다. "..우아.." 나는 계속 손으로 거품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향도 맡아보고 계속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거품이 물을 가려줘서 민망하지 않아서 너무 좋았고. "나 봐." 내가 계속 거품에 빠져있으니 윤두준은 삐졌는지 단답형으로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려 윤두준을 바라봤다. 그러자마자 쪽-하고 뽀뽀해주는 그의 행동에 나는 웃으며 다시 앞을봤고 윤두준은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곤 내 어깨도 만지고 내 배도 만지고 하여튼 여기저기 만져댔다. 만지는거 최고로 좋아해 하여튼. "..몇시야?" "다섯시." "..그거 밖에 안됐네.." 윤두준은 내 볼을 살짝 꼬집더니 내 어깨에 그의 턱을 살짝 괴어 놓았다. "..머리..다른 색으로 염색하지마." "왜? 노란머리 싫다고 그랬잖아." "..보다보니까..병아리같이 이뻐서." 윤두준은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도 생각보다 눈이 컸다. 그리고 눈에 깊이가 있었고. 고생 한번 안해봤을 것 같은데..그의 눈은 뭔가가 깊었다. 말을 해도 길게 하지 않고,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고... 나를 끊임없이 만지고 나와 부대끼려고 하는걸 보니..어렸을때부터 깊은 상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윤두준은 왜. 라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뽀뽀를 해주곤 다시 앞을 봤다. "..재미 없는 얘기 하나 해줄까?" 윤두준의 말이 내 귓가에서 나즈막히 울려퍼졌고 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버지는 사업가야. 근데..많이 큰 회사의 회장이야.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알만한 회사..그래서 남들은 어렸을때부터 나한테 늘 존대를 하고 떠받들어줬어. 어린게 부모 잘만나서 호강한다면서 뒤에서 수군댈지언정 내 앞에선 늘 허리를 굽히고 내 아버지 뻘인 아저씨도 아줌마도 모두 다 나한테 말을 높였어." 그 말을 윤두준의 표정을..내가 보지 않아도 된다는것이..너무 다행이었다. 아마 그의 얼굴을 봤다면,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이 어떨지.. 상처받은, 쓸쓸한, 안타까운 그 미묘한 감정이 섞인 그 복잡한 표정이 어떨지 눈에 보여서 나는 그냥 하나씩 사라지는 거품에 눈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무 싫었어. 생각도 나지 않는 그 어린시절부터 꽉 쫘여진 생활표대로 사는것도 싫었고, 단 한명도 나한테 편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싫었고, 내가 내 아버지 윤상우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마자 모르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신문에도 실리는게 너무 싫었어. 일년에 몇번 얼굴 못보는 아버지, 그리고 늘 일때문에 바쁘고..아버지의..바람기에 이골이 난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한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그렇지만 겉으론 남들은 평생 가져보지도 못할, 만져보지도 못할 명품들을 휘감고 다녔고 중학교땐 그걸 가지고 애들을 휘두르고 다니기도 했었어." 나즈막히 욕실안에 울려퍼지는 윤두준의 목소리에, 그의 쓸쓸하고 상처 가득한 말에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놔두고 내가 할 일은 그 말을 다 들어주는 일 밖엔 없단 생각이 들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등학교 올라오니까..더 끔찍했어. 하루에도 수십개씩, 과목마다 다른 과외 선생을 붙여가면서, 내가 잠시도 딴짓못하게 늘 감시하고 사람들을 옆에 붙여놓고 내가 화장실 가는것 까지도 체크를 했어. 그렇게 3년 살고 나니까..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을 들어가고 나니까..정말 이렇게 평생 살면 죽어버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 정말..내 끝이 보였거든. 그래서 아버지한테 말했어. 나가 살겠다고. 당신의 그 뒤를 이을테니까, 당신께서 염려하는 일 없게 할테니까, 유학도 갈거고 경영공부도 끝까지 마쳐서 아버지 당신, 그리고 할아버지때부터 이어져온 그 회사를 내가 이을테니까 딱 오년만 나 하고 싶은대로 놔두면 안되겠느냐고 말했어." "..그랬더니?" "..귓등으로도 안들으실 줄 알았어. 워낙에 나한테 있어서 산 같은 존재였으니까. 산의 꼭대기는 너무 높아 올려다봐도 보이지 않듯이, 아버지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기보단, 그냥 당신의 후계를 이을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냥 나를 보고 어이없이 웃고 말 줄 알았는데..한참을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윤두준은 나를 더 끌어당겨 꽉 끌어안으며 내 어깨에 턱을 괴고 말했다. "..훤칠하게 잘 컸구나. 반항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다. 너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일 시간을 주겠다. 한번..멋대로 살아봐라. 대신..오년후엔. 넌 다시 태강그룹 윤상우회장의 아들 윤두준인거다. 라는 말이었어. 잘 컸다니..그러고보니..그때가 처음이었을거야. 나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신 적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비서를 통해서 들었겠지만, 내가 어떻게 컸는지, 내 모습이 어떤지는.. 아마 그때 처음 보셨을거야..근데 그때 나 몇살이었는지 알아?" "..몰라." "..스무살. 4년전이었어. 좆같지. 그때..눈물이 나올라고 하드라. 꾹 참고 그 길로 바로 짐을 쌌어. 갈데도 없었는데, 사실 가진돈도 별로 없었는데 무작정 그냥 이 집을 나가고 싶었어. 그리고 나중에 안건데..내 가방에 통장이 하나 있었어. 비밀번호 적힌 쪽지랑. ....십억..이 있드라. 십억..그때..정말 신물이 났던것 같다. 윤회장의 방식이..토할 것 같았어. 그 통장은 1원도 안건드리고 그대로 아직도 내 방에 있어. ..나..그렇게 살았다? 내 성격이 그렇게 싸가지없고 재수없는것도..아마 그런 집에서 살았기 때문일거야." 톡-하는 소리가 거품에 묻혀 사라졌지만 난 들을 수 있었다.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그 상처들을, 치료하기도 전에 그냥 덮어놔버려서, 그리고 그 위에 또 상처가 나고 덧나고를 반복해서 이미 물러터져버린 그 상처들을 토해내듯 말하면서 힘들었을 윤두준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예 몸을 돌려 그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나도 돌이켜보면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남들이 보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보면..행복했겠지만 사랑없이 돈만이 있는 집안에선 돈 썩은 냄새만이 날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집에서 살아온 나와 윤두준. 왠지 우린 운명공동체 인 것 같았다. 비슷한 운명으로 엮어진, 그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된 공동체 같은거. 나와 그의 같은 아픔과 상처에 나는 갑자기 그 넒은 어깨가 좁고 야위어보여서 내가 낼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그를 꽉 끌어안아주었고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에이씨발..존나 재미없네..근데..나 일년 남았다? 지금은 그냥 윤두준인데..윤상우회장 아들 윤두준으로 돌아갈 날이..일년 남았어.. ...내년 오늘..나는 뭐하고 있을까." 그 쓸쓸한 말에 나는 그가 너무 가여워서 그를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뭐하긴. 나랑 같이 있겠지. 같이 자고, 목욕도 같이하고. 그땐..내가 케익 만드는법 배워서 케익 만들어줄게. 선물도 대빵 큰걸로 줄게. ..나랑 같이 있자." 내 말에 윤두준은 피식-하며 웃으며 내 등에 손을 올려 토닥토닥해주었고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윤두준의 몸을 나는 아기 어르듯이 톡톡 해주었다. 아마..더 많은게 있을거다. 내가 들은 것보다 더 한것도 많을거고 더 깊은 얘기도 많을거다. 그치만..상관없다. 그가 어떻게 살았건, 그가 어떻게 살아왔건..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요섭과 윤두준이 가장 중요한거니까. 나와 그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게 제일 중요한거니까. 지금은..그게 제일 중요한거니까. 그의 상처는 살면서 보듬어주면 된다. 내 상처도 살면서 그가 안아주면 된다. 나는..윤두준이 있어야하고, 윤두준은 내가 있어야한다. 그냥..서로가 필요할뿐이다. 그치만..나는 자꾸만..불안해졌다. 그가 맨처음 말했던 5년이라는 시간이, 그리고 지금 남은 1년이라는 기한이..나를 너무 불안하게 만들었다. "...좋아해." 그리고 가끔은, 사랑해 라는 말보단 좋아해 라는 말이 더 가슴 깊게 와닿을 때가 있다. 나에게 있어 그건 바로 지금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귀엽긴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말. 좋아한다는말. 윤두준은 처음 만났을때나, 지금이나 말투는 무뚝뚝하고 딱딱한사람이었지만 사랑표현에 있어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표현을 잘하고 더 살가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참을 서로 끌어안고 있을즈음 윤두준이 먼저 품에 안았던 나를 떼더니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머리 감겨줄게. 기다려." 윤두준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샤워부스로 들어가 대충 거품기를 닦은 다음 욕실 밖으로 나가 몇분 있다 들어왔다. 그는 간단하게 반팔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왔고 내가 멍때리고 있자 윤두준은 내 몸을 동그란 욕조에서 욕조 바깥에 있는 윤두준 쪽으로 돌렸고 서슴지않고 샤워기로 내 머리카락을 축축히 적셔댔다. "...좋다.." 몸도 따뜻하고 머리도 따뜻하니까..너무 좋았다. 어떤..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왔던 것 같은데..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 내가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해줘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자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만큼 기분도 좋았다.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미묘한 감정이랄까. 눈을 뜨면 거꾸로 된 윤두준의 얼굴이 보였고 그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머리 하나 감겨주는거에 뭐 저렇게 집중을 하나 싶어 내가 웃자 윤두준은 나를 힐끗 보더니 샴푸 거품을 내 코에 찍어발랐다. "으씨.." 손으로 닦으며 다시 윤두준을 바라봤고 그는 내 머리를 시원하게 마사지 해주며 박박 감겨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헹궈주고, 린스까지 해주는걸 잊지 않았다. 이윽고 다 됐는지, 내 몸을 똑바로 앉힌다음 수건으로 물기를 탁탁 털어주었다. "얼른 씻고나와. 욕조는 저거 마개 빼면 지가 알아서 거품도 다 빠질거야." 윤두준은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춘 뒤 그대로 욕실 밖을 나갔고 나는 그가 하라는대로 욕조 마개를 빼고 샤워부스로 들어가 아까 윤두준이 했던 것처럼 대충 샤워기로 거품을 닦아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늘 그렇듯 문 앞에 윤두준이 준비해놓은 속옷과 옷을 입은 뒤 욕실 밖을 나섰다. "..벌써 여섯시가 넘었네." 아직 축축한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자 윤두준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헤어 드라이기의 코드를 콘센트에 꼽더니 화장대 의자로 눈짓했다. 여기 와서 앉으라는 듯. "왜 갑자기 머리 감겨준거야?" "..사랑하는 사람 머리 감겨줘보고 싶었어."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나는 묘하게 올라가는 내 입꼬리를 최대한 감추고 윤두준이 미리 끌어내놓은 의자로 가서 윤두준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는 서있었기 때문에 내 시선은 그의 배에 꽂혔고 윤두준은 위잉-하는 소리를 내며 드라이기를 켜고 내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졸린데, 따뜻한 바람이 내 뒷목에 계속해서 와닿으니까 너무너무 졸렸다. 그와 있으면 늘 나른해지고 따뜻해지고 심장이 쿵쿵 거렸다. "..졸려..." 3분 쯤 말렸을까. 결국 내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윤두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에 내 머리를 기대어놓고 눈을 감았고 윤두준은 내 뒷통수를 계속 쓰다듬어주며 머리를 말려주었다. 몇분을 더 말리다가, 이내 시끄러운 소리가 잠잠해지더니 윤두준은 드라이기를 대충 정리하고는 L자 자세로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는 졸음에 가득한 눈으로 꿈뻑꿈뻑 윤두준을 바라봤고 그는 내 양어깨를 잡고 그대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내 입에 입을 맞추었고 나는 그의 어깨에 살짝 내 팔을 올려놔 그의 목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따뜻한 맛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보다 따뜻했다. ..어쨌든..윤두준이랑 하루종일 있으면 나한테 남는건 부은 입술 뿐이다. 흥. "..나가서 케익 먹자." 아..잊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트리를 장식해놓고 그 트리를 제대로 구경하기도 전에 크리스마스가 가고 있다는 사실도 난 지금 깨달았지만. 윤두준은 그 말을 한 뒤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나를 일으켰고 졸리다며 칭얼대자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은 뒤 내 볼을 꼬집었다. "..잠만보." "아니야!!" 나와 윤두준은 나란히 2층에서 내려왔고 1층은 싸한 기운을 내며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트리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케익이 있었다. 이에 나는 트리를 마저 다 정리한다음 꼬마전구를 연결한 그 코드를 콘센트에 꼽았고 바로 예쁘게 불이 들어오는 트리의 모습에 난 입을 떡 벌렸다. "..멋있다..진짜..크리스마스 같애.." 내 말에 윤두준은 빨리 오라며 테이블 앞에 앉아 케익 상자를 열었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포크와 우유를 가져왔다. "케익 먹을때 우유 먹어?" "그래야 목 안메지!!" 내가 룰루-하면서 포크 하나를 주고 그의 옆에 앉아 내가 사오라고 헀던 생크림 케익을 한입크기로 떴다. "..달다.." 단 기운이 내 입안을 휘젓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크림만 먹었고 윤두준은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계속 내 입가에 묻은 크림만 손으로 닦아주느라 바빴다. "형도 먹어." "너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 그의 말에 나는 포크로 하나 떠서 그의 입에다 직접 먹여주었고 윤두준은 눈으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케익만큼 달다. 지금 우리가. "..나도 재미없는 얘기 하나 해줄까?" 우유 한모금 먹은 나는 옆에서 조용히 케익을 먹던 윤두준에게 말했고 그는 대답없이 나를 쳐다봤다. "..음..우리 아버진..국회의원...그러고보니까 우리 진짜..상류층이네. 남들이 부러워하는...뭐..어쨌든 우리 아버진 양승효 국회의원님이신데..요즘 너무 바빠서, 사실 매일 매일이 바빠서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도 없구.. 우리 엄마는..그래도 한달에 두번은 보고 살아. 이대 병원 가정의학과 교순데.. 맨날 바쁜척해서..우리 집은 맨날 빈집이야. 집이 엄청 큰데..맨날 텅 비었어. 아. 맞다. 우리 누나. 양승혜. 이대 무용과 다니다가 지금은 뉴욕으로 유학갔어. 그나마..의지하고 살았는데 누나 유학간지 이년짼데..연락이 잘 안돼." 내 말에 윤두준은 그냥 생크림 케익 안에 들어있던 귤을 포크로 폭폭 찌르고 있었다. "누나가 너무 바빠서..사실 너무 잘나가는 사람이라 누나가 먼저 하지 않는 이상 전화도 잘 못하구..누나가 지금...스물 둘이겠다. 나랑 네살차인데..어렸을땐 누나가 우리 엄마였어. 항상 밥도 해주고, 놀아도 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내가 무서워서 잠 안온다고 칭얼대면 항상 재워주고..나한텐..엄마야. 누나가." 윤두준은 아예 귤을 포크로 잘라버렸다. "우리 누나 진짜 이쁘게 생겼거든? 아..근데 사진이..집에 있다. 내가 나중에 꼭 갖고와서 보여줄게!! 나는..우리 누나가 엄청 행복했음 좋겠어.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만 받고, 누나랑 매형 닮은 아이 낳아서 정말 평범하게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람인데..누나는 나한테 남자 얘기도 안해줘서 누나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갑자기..보고싶다..우리 누나.." 갑자기 누나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나한테..어쩌면 엄마보다 더한 존재였다. 내가 그나마 제대로 자랄 수 있었던건, 문제아가 되지 않고 잘 살 수 있었던건 누나의 공이 컸다. 그녀가 유학가기 이년전까지도 늘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자기 일만으로도 바쁠텐데도 내 끼니 걱정해주고 건강 걱정해주고..그랬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누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용서 못할정도로 난 그만큼 누나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나중에 꼭 누나 사진을 윤두준한테 보여줘야겠다. 기광이도 몇년전에 우리 누나 사진을 보더니 소개해달라고 지랄발광염병을 다 떨었댔다. 다행히도 그때 누나는 유학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라 한국에 없었기 망정이지 한국에 있었음 누난 이기광의 표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에라이 병신같은 놈. "..우리..많이 닮았다 그치. " 내 말에 윤두준은 아무말 없이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그의 품안에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동안 나같은 상처를 받은게 나 하나뿐은 아니라서 다행이기도했고 그가 받은 상처가 내거보다 더 크고 아픈것 같아보여 내가 치료해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안타깝기도했다. 그치만..이 얘기들은 우리가 사귀고 난 후의 처음으로 꺼낸 각자의 상처였다. 다른 사람들한텐 쉽사리 보여줄 수 없었던, 그래서 더 곪을 수 밖에 없었던 썩은 상처들이었다. 나는 그저 윤두준이라는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어느정도 치유하고 있었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말..오늘은 못잊을 것 같다. 내년 크리스마스에 내가 어디에 있건, 그와 같이 있건 없건간에 난..2009년 크리스마스만큼은 절대 못잊을 것이다. 왜냐면..오늘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과 몸, 마음을 나눈 소중한 날이었으니까. #20. "나 오늘 방학해!!" 그래도 점점 느는것 같은 윤두준의 아침밥상을 받으며 나는 말했고 윤두준은 숟가락으로 찌개를 뜨다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밥그릇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늘은 12월 29일. 시간이 너무 빨리빨리 지나가서 무섭기까지하다. 더더군다나 윤두준이랑 같이 있으니 1분도 1초처럼 지나가버려서 큰일이다. 점점 수능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크리스마스때 하루만 놀고 얄짤없이 26일부터 공부를 시킨 윤두준 덕에 공부를 안한 스트레스는 안받아도 되었지만..이까짓 망할 수능 얼른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수능끝나면 윤두준과 같이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운전면허따기, 같이 여행가기, 우리 집에 초대하기 등등.. 하고 싶은게 너무너무 많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데도 아쉽게도 이건 앞으로 일년후에나 할 수 있을 것같아 좀 속상하기도 했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가진 역설성. 빨리 갔으면 좋겠지만 빨리 가면 안된다는 생각 같은거랄까.. 나 아침부터 뭐래니. "방학 보충은." "뺐지." "학교 끝나면 문자해. 데릴러 갈테니까, 짐 다 챙겨서 나와." 오늘따라 차가운 윤두준이었다. 원래 말투가 딱딱한 사람이긴 했지만..이렇게 차가운 느낌이 든 적은 없었는데..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내가 말을 해도 날 한번 보는게 끝이었다. 왜그러지..나 뭐 잘못했나.. 나는 괜히 윤두준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해버렸다. 윤두준도 그냥 밥그릇에 머리 박고 묵묵히 밥만 먹었고. ..뭐 잘못한거 없는데.. 공부하라그래서 공부했고, 씻고 자래서 씻고 잤는데.. 어쩐지, 그러고보니 어젯밤엔 윤두준이 나와 같이 자지 않았다. 잠결에 일어나보니 나 혼자였고 밥하러 먼저 내려갔나보다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 옆자리는 너무 차갑게 식어있었다. "..무.." Rrrrrrrrr 무슨일 있냐며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는데 그때 윤두준의 핸드폰이 거실에서 시끄럽게 울려댔다. 이에 그는 뭔가 착잡하고 무거운 얼굴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윤두준의 말소리가 잘 안들려 최대한 그쪽으로 귀를 쫑긋하면서 먹히지도 않는 밥을 젓가락으로 쑤셔댔다. "..어. 아니. 오늘 안가. 같이 갈거야. 매년 그랬는데 뭐. 어 신경쓰지마라. 요즘 꼬맹이때문에 바빠서 얼굴 본지 꽤 된거 같다. 조만간에 학원 앞으로 갈테니까 나와. 내가 술 살게. 어. 끊는다. 어 걱정하지말고 새끼야. 한두번 오는 날도 아니잖아. 앞으로 평생 올 날이다. 병신새끼. 그래 고맙다." 윤두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을 소파에 무신경하게 툭 던져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 그 답지 않은 무거운 표정과 답답한 한숨에 나는 괜히 걱정이 됐다. 그래도 무슨일이냐며 물어볼 만한 분위기는 아닌거 같아서 괜히 흘끗 흘끗 쳐다보는데 윤두준은 그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채 다시 식탁앞으로 갔다. "밥 다먹었어?" "..어? 아..어." "다 남겼잖아." "..아..그냥..속이..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그러니까 그 옆에도 다가가지 못할만큼 뭔가 엄숙함이 느껴져서 나는 오늘만큼은 버스 타고 학교를 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앞으로 가 점퍼를 입고 책가방을 매고 최대한 윤두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현관문 앞으로 갔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기광] "어. 왜. 뭐? 병신아. 결국 바이크 샀냐? 잘한다..됐거든요. 내가 너한테 목숨 내줄일 있냐? 너나 많이 타고 가세요. 장현승은 어따 팽개치고 나부터 태워준다고 그러냐?" 얼마전부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바이크 바이크 타령을 하던 이기광을 내가 무시했건만 이새끼가 결국 샀는지 아침부터 전화질이다. 데릴러 갈테니까 같이 학교를 가자나 뭐라나.... "병신새끼. 내가 장현승한테 가서 꼬발른다. 너 바이크 샀다고. 아마..형..미쳤어요? 바이크는 형의 목숨을 보장해주지 못해요. 게다가 이건 보험도 없잖아요. 형 면허는 있어요? 형 내가 사지 말랬죠? 킥킥킥. 이따위 소리나 듣겠지. 아 꺼져 됐어. 버스 타고 갈거야." 나는 괜히 윤두준이 들을 거 같아 조심히 운동화를 구겨신고 현관문을 잡아 도어 해제 버튼을 누르고 문 밖으로 나왔다. "..여기? 형네 집. 아..형 오늘 기분 안좋은거 같애서 그냥 버스 타고 갈라고.. 안되면 택시 타지 뭐. 아 몰라 꺼져. 니꺼 안타. 끊어." 나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아까 대충 신었던 운동화를 마저 다 신고 가방을 고쳐맸다. 아..그러고보니까 목도리 안하고 왔네.. 어쩐지 목이 허전하다 했더니만.. 다시 들어가서 가져올까했지만 내가 그 몰래 나가는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걸 뻔히 아는 나는 그냥 띠링-하고 울리며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길래 그냥 그걸 타버렸다. 대신 점퍼 지퍼를 목 끝까지 완전히 올려버렸다. "...내려." 1층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으려는데 그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들어와 문을 열게 했고 그 앞에 있는건 아까 밥 먹고 있던 윤두준이었다. "..아..오늘은 나 그냥 혼자 갈게!! 나 혼자 잘 갈 수있어!!" "..내려." "아니..나 진짜 잘 갈 수 있는데..학교 도착하면 문자할게!!내가 애도 아니고.. 그냥 혼자 갈게. 진짜 혼자 갈게." 내 말에 윤두준은 나를 무심히 쳐다보더니 어떤 말도 않고 내 손목을 잡아 이끌어 엘레베이터에서 내리게했다. 그리고는 나를 엘레베이터 옆 벽에다 밀어부치고는 나를 가뒀다.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게 눈치보지말고 물어봐. 무슨 일이냐고, 왜 기분 안좋냐고. 왜 그렇게 도망치듯이 가." "..아니..그냥..형이..좀 안좋아보이길래..걱정 끼치기 싫어서.." "니가 이러는게 날 더 걱정하게 한다는거 몰라?" "...미안..." 나는 처음보는..아니 처음은 아니고 우리가 맨처음 만났을때 그때의 표정보다 두배는 더 차갑게 얼어붙은 윤두준의 표정앞에서 굳어버렸고 그냥 눈을 내리깔아버렸다. 늘 나한테 잘해주고, 무뚝뚝함속에 따뜻함이 묻어나있어 항상 그런 윤두준에만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렇게 차가워진 윤두준엔 적응이 되질 않아 사실은 겁이 났다. 나때문에 그런걸까봐. "...오늘은..내가 무슨 일이 좀 있어. 나중에..말해줄테니까..눈치보지마. 너때문에 그런거 아니니까. 미안." 윤두준은 나를 그대로 안아주었고 나는 그래도 맘이 놓이질 않아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조심히 숨만 쉬어댔다. "잠깐만 있어. 차키 갖고 나올테니까." "..아니 안그래도.." 내 말은 고이 잡수시고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윤두준의 모습에 그냥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무슨일일까..아까 통화한 사람이..용준형이었던거 같은데.. 대체..뭐지..? "일루와." 1분도 안돼서 대충 점퍼 하나 챙겨들고 나온 윤두준은 엘레베이터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나를 일으켜 내 목에 하얀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맨날 춥다고 징징대는 애가 목도리를 안하고 가면 어떡하겠다고." 윤두준은 조금의 바람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칭칭 동여매주었고 덕분에 얼굴만 동동 뜬 모습이 된 나는 목에 깁스 한것마냥 부자연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자 윤두준은 피식-하고 소리도 나지 않고, 심한 표정 변화도 없이 웃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1월 1일날 약속 잡지 말고 비워놔." "왜?" "어디 좀 가게." "어디? 해돋이 보러?!" "..그건 내년에 가자." 창가에 팔을 대어놓고 손으로 턱을 만지는 윤두준은 한손으로 능숙하게 운전을 했고 착 가라앉은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조금이라도 그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계속 방방거리며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갈뿐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대체 뭔데..저러는거야 대체!!!!! "..이따가 끝나고 문자해. 데릴러 올테니까. 학교에서 쓰는 문제집같은거 다 갖고 오고." "...알았어.."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너무 신경쓰여서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형..사랑해." 나는 윤두준의 입에 쪽-하고 뽀뽀를 해준 뒤 차에서 내렸고 윤두준은 그냥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창문을 내려서 나도 사랑한다든지, 아님 윙크라도 날려줄줄 알았는데.. 쌩하니 멀어져가는 차 뒷꽁무니에 나는 허무해져서 온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다. 나한테 마음이 식은건가..그래서 지금 저러는건가.. 나는 윤두준이 나한테 맘이 식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끔찍해져서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럴일은..절대로 없어야했으니까. *** "다 와가니까 좀만 기다려." 사실 모든 문제집이 윤두준의 집에 있는 터라 뭐 딱히 가져갈것도 없어서 그냥 됐다며 혼자 집에가겠다고 문자하자마자 번개속도로 전화가 오더니 여전히 목소리는 차가운채로 말해서 난 더이상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바이크 산 기념으로 우리집가서 놀자는 기광이의 제안도 겨우겨우 거절하고 -삐진 이기광 달래느라 애좀 먹었다-학교 교문 앞에 서있는데 기광이가 바이크를 타고 내 앞을 보란듯이 쌩-지나가버렸다. 저 망할새끼. 한번 삐지면 오래가는데..에이씨..몰라!!! "..으..춥다.." 겨울 내내 내 입에 붙어다니는 말은 춥다 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춥지 않아도 겨울만되면 춥다는 말만 하고 돌아다니는터라 언젠가부터 자동차나 집안을 따뜻하게 해놓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은 윤두준은 역시나 내가 탈 것을 대비해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놨고 난 들어가자마자 스르르 녹는 몸에 별로 들어있지않은 책가방을 내 무릎위에 얹으며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윤두준은 아직도 저기압인지, 운전하는 내내 앞만 보며 말이라곤 한마디도 없었고 또 그런 상황에 내가 이렇다저렇다 할 말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나도 앞만 바라보았다. 뭐가 뭔지, 어떻게 된건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괜히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재주는 윤두준이 아주 탁월했다. 나쁜놈. "..먼저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어. 약속있어서 아마 오늘 늦게 들어올거야. 어쩌면 못들어올지도 모르니깐 기다리지말고 공부 다 하면 먼저 자."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서 날 내려준 윤두준은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차를 돌려 그대로 그 곳을 빠져나가버렸고 나는 괜히 서러워져서 눈물까지 핑 돌아버렸다. 오늘 아침엔 걱정도 되고 눈치도 보이고 괜히 잘못한것도 없는데 미안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그냥 짜증이 났다. 아무 이유없이 저러는거, 왜 그러는건지 말도 안해주고 저렇게 찬바람 쌩쌩부는거 윤두준이 그러는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나한테만큼은 무슨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왜 안좋은건지, 이런 얘기는 해줄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얼마나 큰 문제건 작은문제건간에 나한테 얘기하고 털어놓고 위로받을 일이면 위로 받고 혼날 일이면 혼나야한다고 생각했는데..괜히 배신감까지 들고 속상하고 짜증나고.. 윤두준이 저렇게 나오면 나도 그 사람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을 순 없었다. 씨발 짜증나!!!!!!!!!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달칵. "여보세요? 어 난데.." 「뭐.」 바이크 태워준다고 같이 가잘때 안갔다고 삐져버린 이기광이다. 미친새끼. 이새낀 가끔 지나치게 쪼잔할때가 있다. "..데릴러와라. 오랜만에 너네집 가서 좀 놀아야겠어." 「꺼져. 언제는 싫다며. 이젠 내가 싫거든」 "..야..나 지금..씨발..기분 좆같으니까 좀 와주면 안되냐." 「...무슨 일 있냐?」 "..그냥 여기로 좀 와. 청담동인데..주소는 문자로 찍어서 보내줄게." 내 말투와 목소리 톤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이기광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윤두준의 집 주소를 문자로 찍어서 보내주고 그대로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짜증나..윤두준.." 가방을 끌어안고 있던 내 무릎위로 내 눈물들이 투둑하고 떨어졌고 나는 행여나 누가 볼새라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더 굵어져가는 눈물줄기에 나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고 그냥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박고 엉엉 울어버렸다. 서운하고 속상하고 배신감들고 짜증나고 그렇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고 미안하고 눈치보이고 걱정되고.... 내가 누구때문에 이렇게 좌지우지 되어야하는지, 내가 왜 그래야하는지 정말 짜증났다. 그렇지만 오늘 또 하루종일 연락도 없을 그에게,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할수 없는 그 사람에게 나는 괜히 들리지도 않을 욕을 씨불거리며 금방 날아올 기광이를 여전히 울면서 기다렸다. ** "..야. 대체 뭔일인데. 윤두준이 너보고 뭐라고 그러디?" 훌쩍거리는 나를 발견한 이기광은 차마 할 말은 없었는지 한숨을 쉬더니 그냥 말없이 헬멧을 씌워주고 바이크 뒷자리에 나를 태워주었다. 그리고는 지는 헬멧도 안쓰고-하여튼 법하고는 등진새끼다-바람처럼 달려서 십분이 채 됐으려나.. 어쨌든 엄청 빠른 시간내에 기광이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거 아냐." 윤두준을 알기 전엔 기광이네 집은 내집인 것 마냥 수시로 드나들어서 익숙해진터라 나는 벨을 누르고 정말 내집처럼 나를 알아보는 아주머니의 인사를 마주한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바이크를 지네집 앞마당 한켠에 행여나 먼지 쌓일까 덮개까지 깨끗하게 씌우고 들어오던 기광이는 나를 쫄래쫄래 쫓아오며 계속 물어봤다. "그럼 뭔데. 찌질하게 울고 있었던 이유가 대체 뭐냐?" 나는 여전히 벌개진 얼굴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곤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이에 기광이는 먹을거 안갖다줘도 되니까 올라오지 말라는 당부를 한 뒤 또 나를 쫓아 올라왔고 나는 대뜸 기광이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푸덕 나자빠졌다. "야. 양요섭. 왜그러는데 대체?" "..씨발..개새끼..좆같은새끼..망할새끼.." "아 이 찌질아 대체 뭐냐고!" 오늘 아침부터 나한테 냉랭하게 했던 윤두준의 그 얼굴이 떠올라 내 눈은 또 붉어져버렸다. 우는건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 일인데, 그것도 기광이 앞에서 우는건 정말 더 죽고싶을만큼 쪽팔린일인데... 윤두준 그새끼 때문에...!!!!!! "..몰라..오늘 아침부터 윤두준이 이상했어. 분위기도 싸하고..난 잘못한거 하나도 없는데.. 오늘도 데릴러 온다그래서 기다렸더니 대뜸 약속있다고 먼저 자라고..내가 인사하기도 전에 가버리고..표정 싹 굳어서는..씨발..짜증나." "무슨 일 있나보지뭐." 기광이는 뭐 그런거 때메 그러냐는 듯 심드렁하게 책상 의자에 앉아 책가방을 열었고 그 안에선 놀랍게도 문제집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나..제대로 보고 있는거 맞니... "..말도 안해준다고. 아니..최소한 나한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거 아니냐!? 내가 무슨 지 하인이야 꼬봉이야!! 씨발..명색의..지 애인인데 무슨일이 있으면 있다, 내가 여차저차에서 기분이 안좋다. 뭐 이렇게 말해줄수 있는거 아니냐고. 사람 존나 서운하게..물어봐도 대답 안해줄거 뻔히 보여서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존나 지생각만해 개새끼.." 내가 침대위에 앉아 나한테 등돌리고 스탠드 불을 켠채 뭔가를 열심히 하는 기광이를 바라봤고 기광이는 이번에도 관심없다는 듯 대답해버렸다. "이따 집 가서 물어보면 되겠네." "...니 일 아니라고 막말하냐 지금?! 아..존나 심란해..진짜..대체 무슨일일까.. 사실 아까 윤두준이 통화하는거 살짝 엿듣긴 했거든? 용준형이랑 전화하는거 같긴했는데.. 뭐..한두번 있었던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게..이렇게 얘기하면서..하여튼..가벼운 문젠 아닌거 같았단말야..야!! 이기광!! 내 말 듣냐?" 내 외침에 기광이는 샤프를 탁 소리나게 책상위에 놓더니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쭈. 안경까지 쓰고..뭐하냐 지금. "..엉아 지금 공부중이시다. 그냥 쳐 자." "..뭐? 야..이기광..너 내가 아는 기광이 맞냐? 너 혹시 이기광의 탈을 쓴 김기광아냐!?" "병신새끼. 맘 좀 잡고 공부 좀 해볼라 그런다 왜. 나도 대학은 가야될거아니냐." 대학..이라고? 지금 나 이기광 입에서 대학이라는 얘기..들은거 맞니? "...뭐?" "..솔직히 내가 공부에 담쌓고는 살았지만..이래뵈도 한다하면 하는 새끼야 내가. 공부 그까짓거 안해서 그렇지 하면 너보다 잘할 수 있어 새꺄." 기광이는 다시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책상앞에 앉았고 나는 그저 멍할수밖에 없었다. 저새끼가 자꾸 뭐라고 씨불대는거야..병..걸렸나? 사람이 안하던 짓 하면 곧 죽을거라던데.. "..사실 토까놓고 말하면. 현승이한테 좀 떳떳하고 싶어서 그런다. 명색의 그래도 애인이고 형인데..현승이는 공부도 잘하고 똑부러지는데 내가 이상한 이름도 없는 지방대학 가서 돈이나 축내면..현승이가 나한테 질리지 안질리겠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해볼 수 있는데가 어딘가, 내 한계가 어딘가 궁금하기도 하고." "..정신..차렸구나 너?" "그래서 요즘은 현승이 만나는것도 학교에서 점심시간때만 잠깐 만나고 안만나. 그때..크리스마스때..섬 갔다온 이후로..맘 먹었다. 우리 이쁜 현승이 안놓치려면 내가..멋있어지는 수 밖엔 길이 없어." 섬..? 아..맞다. 이새끼..그날 만리장성 쌓는 날이랬지? 내가..너무 내생각만 했다. 문자로 연락이라도 좀 해볼걸. 사실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가 너무 윤두준이랑 달콩하게 살아서....미안..기광아... "..너 어떻게 됐냐? 섬에서?" "..씨발..존나 죽였지. 진짜..내가 웬만해선..알지. 나 깔끔한거. 근데..장현승..내가 매달리잖아 씨발. 솔직히 존나 자존심 상하기는 한데.. 존나 좋아 진짜. 너같은 애송이가 뭘 알겠냐만은.." "..나도했어." "그래 너도 했겠..뭐!? 야!!! 너 뭐라그랬어?" 기광이는 다시 의자를 돌려 나를 보면서 안경을 벗고 자신만만하게 웃다가 내 말에 기광이는 눈이 마치 튀어나올 듯하게 크게 뜨며 의자를 끌고 내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형이랑 했다고. 나도 크리스마스날." "..대박..결국 윤두준이 너 잡아먹었구나. 어때. 기분이." "....몰라..그냥..간질간질 거리기도하고..느낌도 이상하고..근데 기분은 하늘날아가는 것 처럼 찌릿찌릿하고 너무 좋아서 그것도 좀 이상했고..처음이라 그런가..다 이상했어." 내 말에 기광이는 팔짱을 끼고 내 얼굴과 몸통을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았다. "뭐해!?" "..하긴..윤두준 그새끼가 좀 참는다 했다..그럼 그렇지. 지가 공자가 아니고서야 지 애인이 옆에서 대놓고 유혹하는데 참을 수 있겠냐...그동안 참은것도 용하지." "..병신." 나는 기광이의 무릎을 발로 툭 까며 침대에 누웠고 기광이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축하한다. 너도 드디어 꼬맹이에서 벗어났구나. 반갑다 친구야." 손을 내미는 이기광의 손을 나는 미친새끼 지랄하네, 라면서 툭 차주었고 지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책상앞으로 의자를 끌고 가버렸다. "..어쨌든 윤두준이 왜그러는지는 지가 알아서 얘기해주겠지. 그러니깐 너무 그렇게 생각말고 그냥 자라. 형아 귀찮게 하지 말고." "사랑이 좋긴 좋은가보다. 씨발. 존나 내가 공부하라고 목이 터져라 말할땐 듣지도 않더니 장현승이랑 한번 자고나니까..기분 잣같네." "현승이랑 앞으로 만리장성 아닌 억리장성을 쌓기 위해선 내가 좀 발전해야돼.. 니 어디 갈거냐." "연대 경영." "그럼 난 그냥 연대 가야겠다. 니가 경영 가겠다는거 보면..거기 보나마나 존나 높은데겠지? 그럼 난 그냥 연대로 목표를 잡겠어. 그정도 쯤 가면 우리 현승이 딴눈 안팔고 나만 좋아해주겠지?" 기광이의 말에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병신아, 사람이 사람 사랑하는데 학벌이 문제냐. 사랑이 취업도 아니고.. 하여튼 저 단순한 새끼. 너는 인생사 편해서 좋겠다. 근데..윤두준 이새낀..전화도 한통없고..문자도 없고. 진짜 나쁜새끼..사람 속 타들어가는건 생각도 안하고.... 진짜 못됐어!!!!!!!!!!!!!!!!!!! *** "야!! 안일어나냐!? 아침이야 병신아!!!" 아 존나 시끄럽네.... 아침인데 뭐... 어차피 방학해서 상관없잖아. 시끄러운 이기광새끼야 넌 좀 꺼져...제발... "야!!너 니네 집 안가냐고!! 윤두준한테 전화 벌써 열통째야!! 안받을거냐? 내가 받어?" "..꺼져 병신아.." 아 존나 시끄럽게... 윤두준? 아 그 그지같은 나쁜새끼? 그새끼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 왜?! 전화 한통 없다가 무슨 바람이 드셔셔 전화를 하셨...... 뭐라고!?!??!?!!? "야!!!!! 뭐!?" "아 깜짝이야!!!!! 아 병신아!!! 왜 여기서 아침까지 쳐 자냐고!! 아이고 지금 열한통째다. 어쩔래. 전화 받을거야?" 여긴 어디..난 누구.... 그러니까 여긴 기광이네 집. 아까 분명히 기광이네 집에 놀러왔었는데.. 왜 지금은 환한 낮이고..난 교복을 입고 있고.. 기광이는 씻고 왔는지 하얀색 나시에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지... 이거..뭐야. "나..뭐야?" "뭐긴 뭐야 병신아. 니가 어제 여기서 잤잖아. 나도 공부하다가 책상에서 잠들었다고. 일어나보니까 넌 계속 자드라? 이야..어떻게 어제 네시부터 오늘 9시까지 잘 수가 있냐.. 새벽 네시가 아니라 오후 네시에 잤다고 니가. 어우 징한새끼. 윤두준이 안재워주냐?!" "씹새끼..구라까지마." "양요섭씨가 구라라고 믿고 싶으신거겠지요..어우 열두통째다. 이새끼..존나 사이코 새끼냐? 전화 한두통 하다가 안받으면 그냥 끊으면 되지, 이렇게 줄기차게..어우 무서워. 니가 알아서 해라. 난 잘못없다." 지칠줄 모르고 지잉 지잉 하고 울려대는 핸드폰을 나한테 던진 기광이는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방 밖으로 나갔고 핸드폰 액정화면에 뜨는 시간이.. 그러니까 정확하게 09:23am 이라고 뜨는 그 시간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어제..그러니까.. 윤두준은 나한테 공부하고 있으라고 했고, 먼저 자라고 했는데.. 나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여태껏 연락이 안된다....... 난..죽었다 이제. 무서워서 전화도 못받고 벌벌 떨고 있는데 또 전화는 끊겨서 부재중통화로 넘어갔고 부재중통화 12통 이라고 쓰여진 액정화면이 나를 더 무섭게 했다. 어떡하지..무슨 말을 해야되지..태어나서 이렇게 무서워본적은 처음이다. 지잉- 난 또 전화가 온줄알고 눈을 질끈 감는데 짧은 진동으로 끝나 문자가 온것 같아 폴더를 열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 받아.」_윤두준 "..어떡해..씨발...아 어떡하지..." 나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문자만 보면서 있는데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도 안받으면..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이따 집가서 한시간 내내 무릎꿇고 싹싹 빌어야 될지도 모른다고.... 에이씨발 모르겠다. 달칵- "여보..." 「어디야.」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너무 차가운 목소리. 어제 아침부터 들었던 그 냉랭함과는 차원이 다른..정말 나한테 화가난 목소리였다. 어떡하지 진짜... "..아..그러니까.." 「양요섭.」 "..어 형..그러니까..내가.." 나는 침대에 앉아 대체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그냥 있는대로 말하면 되는데 윤두준이 기광이를 싫어하는 탓에 얘네 집에서 잤다고 말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우리 집에 갔다고 하자니 거긴 이미 갔다와봤을 거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야 양요섭!! 아줌마가 내려와서 밥먹으래. 아우..얼굴 개기름봐..좀 씻고!! 옷장에 니가 맨날 입었던거 그대로 있으니깐 씻고 갈아입고 내려와라. 비위 상하게 그 얼굴 그꼴로 그대로 내려오지 말고." 씨발..기광아.... 너 입 좀 닥치지..아님 목소리 데시벨을 좀 줄이던가.. 어유 망할 기광아..이 씹새 기광아..난 몰라 이개새끼야. 「이기광이랑 같이 있어?」 "..어?..어..아..그냥 놀러온건데..어떻게 하다보니깐 잠이 들어서.." 「거기 어디야.」 "아니..내가 알아서 갈게!!금방 튀어갈테니까.." 「어딘지 말하랬다.」 이거 진짜 바른대로 말 안하면 나를 죽여버릴 태세의 윤두준이었다. 아우 입방정 이기광!!!!!! 「지금 당장 짐 싸서 내려와 있어. 오분안으로 갈테니까.」 뚝- 기광이네 집 주소를 우물쭈물 거리며 얘기하자 윤두준은 저렇게 얘기해놓고 전화를 멋대로 끊었고 나는 정말 심장이 떨어질것 같아서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어도 손색없을정도로 아직도 덜덜덜 떨렸다. 내가 세상에서 우리 누나 빼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윤두준이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도 윤두준이었다. 이렇게 화가났을때 그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면 난 진짜..윤두준 얼굴을 일주일에 한번 볼 수도 있었다. "..이기광 개새끼야!!!!!!!!!!!!!!!!!!!!!!!!!!!!!!!!!!!!!!" * "타." 나 지금 뭐하냐고? 그래도 이기광 집에서 그냥 나올수는 없어 세수만 대충 해준 뒤 도망치듯 대문 밖으로 나와 책가방을 끌어안고 문 앞에 쪼그리며 앉아있었는데 정말 거짓말 안하고 전화 끊은지 오분만에 달려온 윤두준은 내 앞에 차를 대더니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는 정말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딱 한마디 날렸다. 그래서 나는 깨갱하고 그냥 하라는 대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타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매고 차마 윤두준의 얼굴은 무서워서 못보겠어서 그냥 앞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너 걱정할건 하나도 생각 안했어?" 묵묵히 운전만 하던 윤두준이 차갑게 날린 말에 나는 움찔해서 그를 살짝 쳐다봤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 그리고 밤새 뭐를 하고 왔는지 얼굴도 푸석푸석하고 그새 수염도 좀 자란것 같았다. 까칠해보이고 힘 없어보이고... "..그냥..잠깐..누워있었던건데...그게 잠이 들어버려서...미..안..." "이기광이랑 같이 잤어?" "아니!!! 그새...아니..걔는 공부하다가 책상에서 자고 나는 걔 침대에서..." 침대라는 말에 윤두준은 나를 냉하게 쳐다봤고 나는 또 움찔해서 눈을 내리 깔았다. "...너까지 안그래도 나 지금 충분히 힘드니까..제발 보태지마." 신호대기를 하기 위해 차를 세운 윤두준은 창문가에 팔을 얹어 머리가 아픈듯 관자놀이를 쿡쿡 쑤셨고 나는 어제하루종일 궁금했던걸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는건 비밀이라는거고 그게 어찌됐건간에 나는 서운하지만 굳이 물어봐서 들을 필요까진 없단 결론을 내렸다. 많이 속상하고 서운하지만, 나는 나고 윤두준은 윤두준이니까. 아무리 우리가 연인이라도 각자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라는건 있는거니까. 조금 억울한건 나는 그한테 말 할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지 않고 있다는것이랄까. 어느새 그의 집 지하 주차장으로 차는 쑤욱 내려갔고 순식간에 잠식된 어둠에 나는 아무것도 안보여서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었다. 윤두준은 익숙하게 단번에 주차를 시키고 안전벨트를 푸르자 나도 안전벨트를 푸르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그의 따뜻한 손이 내 얼굴에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내 입술에 말캉한 것이 와 닿았다. 나한테 말이며 행동이며 차갑게 했던것과는 다르게 나를 너무 찾는듯한, 나를 너무 그리워했던것처럼 애타게 내 입술을 파고 드는 윤두준의 모습에 한번도 이런 감정으로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던 윤두준에 난 너무 당황해서 그냥 눈만 떴다 감았다하면서 윤두준의 곱게 감겨있는 두 눈을 볼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듯하게 위태로워보이는 윤두준. 지금 당장이라도 울어버릴것같이 안쓰러워보이는 윤두준. 나는 그의 목을 최대한 꽉 끌어안아 행여나 그를 놓칠세라 점점 더 힘을 주어 껴안았고 내 양어깨를 잡고 있던 윤두준의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고요한 차 안엔, 우리 둘이 숨을 나누는 묘한 소리만으로 가득차버렸고 한순간도 나를 놓치기 싫어 나한테 여유도 주지않고 계속 밀고 들어오는 윤두준에 나는 그를 살짝 밀었지만 윤두준은 전혀 밀쳐지지않고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좀 더 세게 밀어왔다. 그리고 윤두준의 왼손이 살짝 내려가는가 싶더니 단번에 내 의자가 백팔십도로 젖혀졌고 바로 눕혀진 내 위로 재빠르게 올라탄 윤두준은 너무 급해보이는 손길로 내 교복 셔츠단추를 푸르며 내입술을 거의 물어뜯다시피 해버렸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건가... "..형.." 내 입술에서 빠져나와 살짝 풀어헤쳐진 내 셔츠 사이로 입술을 대고 내 쇄골을 혀로 만지작거리는 윤두준의 행동에 나는 당황스럽기도 전에 좀 놀라서 뭔가에 쫓기듯 나를 찾는 윤두준의 머리를 쓱-쓰다듬어주었고 이에 윤두준은 행동을 멈추고 내 눈을 깊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셔츠 단추를 푸르다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 그냥 북 찢어버린 윤두준은 바로 드러난 내 하얀색 나시도 찢으려고 시도하다가 그건 포기하고 내 가슴팍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손으로는 내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러닝셔츠 안으로 들어와 내 맨 허리를 어루만졌고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 그냥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내 가슴팍이며 쇄골에 남은 붉은기가 이제 겨우 가시는가 싶었는데 또 여기저기 흡흡-거리고 빨아대는 윤두준때문에 내 가슴팍은 또 붉은 꽃 잔치로 축제를 열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있어?" 내 말에 윤두준은 그 말조차 듣고싶지 않은지 다시 내 입술을 그의 입으로 막아버렸고 손으론 내 가슴팍을 끊임없이 어루만지며 그 행동을 지속해나갔다. 무슨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듯한 직감에,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가 이리저리 헤매는것 마냥 혼란스러워 보이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아 그의 등을 쓱쓱 어루만져주었고 내 이 행동에 윤두준의 급작스러운 모든 행동들은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랑해.." 내 귓가에 아주 작은소리로 속삭이며 말한 뒤 내 귓볼을 깨물었고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떤 나는 그냥 윤두준의 등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해." 또다시 속삭이며 이번엔 귓바퀴를 깨문 윤두준은 계속해서 사랑한단말을 기계처럼 되내이며 내 뒷목에 입술을 묻고 핥았다가, 빨았다가, 깨물었다가를 계속 반복했다. "..사랑해. 윤두준." 뭔가 애타보이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그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고 그 순간 무슨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마냥 모든 행동을 중지한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번 더.." "사랑해 윤두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내 입을 막아버린 윤두준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춥춥 대며 내 입술을 빨았고 이미 얼얼해져 감각이 없어진 내 입술은 윤두준의 혀 안에서 이리저리 놀려지고 있었다. "..이젠..너만 사랑해." 내 입술위에서 저렇게 말하더니 미안해..라고 한것 같은데 그건 잘 들리지 않아 패스하고 그 말을 끝으로 내 위에서 물러난 윤두준은 다시 운전석에 앉아 내 의자를 원위치 시켜주고 아까 그가 찢어놨던 복구 불가능한 내 교복셔츠 단추를 잠글 수 있는 데까지 잠궈주다가 결국 안되겠는지 자기가 입고 있던 패딩 점퍼를 벗어 내 어깨위로 덮어주었다. 그리곤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해주면서 내 눈과 시선을 같이 했다. "..미안해." 나는 알 수 없는 그의 행동과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 속 깊이 뭔가 울컹 거려서 하마터면 울어버릴 뻔 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의 눈속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 같아서, 그 눈물 위로 내가 그려진게 보여서 나는 정말 울어버릴 뻔 했다. 어쨌든 윤두준은 먼저 차에서 내려 내가 옷을 대충 입고 차에서 내릴때까지 기다리다가 차 문을 잠그고 내 옷을 다시 매만져주었다. 그냥 엘레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되는데 행여나 내가 추울까봐-지는 반팔 입고 있으면서- 점퍼 지퍼까지 완벽하게 채워준 뒤 나보다 조금 빨리 걸어가버렸다. 어제는 많이 속상했는데, 무슨 비밀이건간에 나한테 다 말해줘야 되는거 아니냐며, 내가 윤두준한테 그정도도 말 못할 존재였던거냐며 화도 많이 나고 서운하기도 했었는데 방금 윤두준의 행동을 보고나서야 나는 깨달은게 하나 있었다. 굳이 그 비밀이 무엇이건간에 나한테 어떠한 단어로, 문장으로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엔 틀림 없기에, 그 비밀을 캐내어서 물어보기보단 마음으로, 눈으로 내 스스로가 그 속을 읽어내면 되니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상처로 보이는, 아픔으로 보이는 윤두준의 마음을 내가 느낄 수 있었던것 같아 더 많이 벅찼고 애틋했다. 이런게...남들이 말하는 사랑 나부랭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1. "빨리 준비해." 오늘은..2010년의 첫 해가 밝은 날이었다. 어제 그와 2009년의 마지막 시간을 같이 tv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잠들었고 지금은 2010년 1월 1일 새벽 6시였다. 윤두준은 29일날 하루종일 저기압이다가, 30일날은 원래 윤두준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는데 31일날은 다시 저기압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사람은 많지만 그래도 보신각을 가서 종소리를 같이 듣는다던가, 아님 정동진을 가서 해돋이를 본다던가 뭐 이런것들은 꿈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난 29일날 못했던 공부에다가 말도없이 없어진것에 대한 벌로 2배는 더 공부를 해야했고 그 끔찍한 공부는 12월 31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거짓말 안하고, 놀러가기는 커녕, 나는 종소리도 윤두준이 때맞춰 틀어놓은 tv 아니었음 듣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 싫었지만, 남들은 연말이다 뭐다해서 다들 기분내고 있을때 나는 초라하게 공부를 하고있는게 너무 싫어서 반항을 하려고 했었지만 그러자니 윤두준의 착 가라앉은 기분과 형한테 지은 죄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냥 잠자코 공부에 매진 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그런 내 기분을 알아챈 윤두준은 내년 12월 31일엔 정동진에 해돋이 보러 같이 가자고, 대신 니가 연대 합격증을 받아와야 가능한거라며 얘기해주었고 나는 또 그 말이 서운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해서 그냥 대꾸도 하지 않았더랬다. 내가 생각했던 연말이 아니었다 이건. 윤두준의 기분이 저렇게 당장이라도 태풍이 불어닥칠만큼 안좋을거라는건 내 예상 시나리오에도 없었고, 이렇게 꼼짝없이 공부만 하고 있을거라는건 생각은 했지만 설마 싶었다. 그래도..2009년의 마지막 날이었는데..싶었건만.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어제..아니지 말하자면 나는 2010년 1월 1일날 잠든게 맞았다. 새벽 3시에 잤으니까. 그리고 정말 잔인하게도 딱 3시간 재워주고 날 깨우는 이 망할 윤두준. 윤두준은 언제 일어나서 준비를 했는지 검은색 수트에 넥타이는 하지 않은채 침대에 디비져 누워있는 나를 깨웠고 나는 정말 죽고싶어서 베개에다 내 얼굴을 묻어버리곤 엎드려버렸다. "일어나. 갈데 있다고 했잖아." 나는 며칠전 윤두준이 나한테 했던 말을 떠올렸고 그게 어딘지는 몰라도 꼭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가야되는건가 싶어서 그냥 묵묵히 눈을 감고 엎드려있었다. "..나한테..중요한데니까..최대한 점잖게 입고 나와. 밑에서 기다릴테니까." 또 저렇게 말하는거 봐라. 이제는 서운하지도 않다. 나한테 사랑이 식은건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며칠전 기광이네 집에서 자고 온날, 차에서 나한테 그렇게 한것도 그렇고 그리고 저 말투가 나를 향한 쌀쌀함은 아니란걸 그날이후 알게 되었으므로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윤두준은 밖으로 나갔는지 쾅-하는 작은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고 나는 좀 더 비비적거리다가 온갖 욕을 씨불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까 아까 수트를 입고 있던 윤두준을 보면.. 어딜 가는진 모르겠지만 점잖게 입고 나오라는거 보니까 되게 엄숙한데를 가는 것 같았다. 뭐 그래봐야 별난 곳을 가겠냐싶어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싹 씻고 내가 가진 최대한 점잖은 옷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냥 블랙진에 회색 후드티, 그리고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여들어간 야구 점퍼를 입었다. 물론 목도리는 절대 잊지 않았고. 좀 추울까 싶어 거울앞에서 망설였지만 어차피 차타고 왔다 갔다 할거 같아서 그냥 핸드폰이랑 지갑 정도만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니 윤두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 같진 않았다. 왜냐면 내가 내려오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그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 나를 쳐다봤으니까. 윤두준의 눈에 내 스타일은 합격한것 같았다. 별말 않는 거 보니. 윤두준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초코우유와 샌드위치를 꺼내어 들고와 나한테 넘기고는 바로 현관으로 나가 검은색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고 하얀색 나이키 에어포스 로우를 신었다. "..어디 가는데?"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언제나 깜깜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자기가 늘 주차하던 곳으로 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들어가는 윤두준의 등에다 대고 말했지만 아주 고이 그 말은 씹혀버렸다. "대체 어디가는건데?" 윤두준은 내 말에도 대답않고 안전벨트를 매고 난후 바로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나도 짜증이 나서 그냥 앞만 보고 있다가 너무 적막한 분위기가 싫어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DJ가 자기가 매년 1월 1일에 있었던 그 경험담을 시끄럽게 늘어놓자 윤두준은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꺼버렸고 나는 그를 홱하니 쳐다봤다.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여자면 생리한다고 생각이나 하지, 이건 뭐 3일 연속으로 짜증에 신경질에 저기압에.. 대체 내가 어떻게 어디까지 이해를 해야되는건지도 모르겠고 물어봤자 분명 대답 안하고 내 물음은 고이 씹어드실게 뻔했으므로 그냥 입을 꾹 다물어서 입술을 깨물어버렸다. 행여나 나도모르게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윤두준은 묵묵히 운전만했고 그 얼굴엔 그늘이 가득 져서 농담 한마디 건넸다간 맞아 죽을만한 분위기여서 나도 그냥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만 바라봤다. 강변북로를 타고 자유로를 지난 차는 일산쪽으로 빠지기 시작했고 일산에 뭐하러 왔나 싶어 그냥 말없이 밖을 보다가 세시간밖에 자지 못했던탓인가 나도모르게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어나. 다왔어."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윤두준에 나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펴봤다. 주변엔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건물들이 있는것 같긴한데... 일단 차에서 내린 나는 여기가 대체 뭐하는덴줄 몰라서 계속 두리번 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윤두준은 내 어깨를 붙잡고는 오랜만에 내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납골당이야. 여긴..내가 가장 아꼈던..사람이 있는 곳이니까... 많이 당황스럽겠지만..따라와줘." 납골당? 아꼈던 사람? 나는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납골당이라면 사람이 죽어서 화장을 하고 그 사람이 담겨 있는 곳..인데.. 그럼..윤두준이 아꼈던 사람이..죽었다는 건가..뭐지 대체... 나는 납골당이라는 말에, 그냥 그 말만 들어도 위축되고 엄숙해져서 나는 윤두준이 내 손을 잡고 걸어가길래 그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윤두준은 너무 익숙하게 어디론가 들어갔고 청아공원 기독교관 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읽고 나서야 나는 정말로 실감했다. 여기는 죽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것을.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계속 걸어가다가 수많은 함들이 담겨있는 곳으로 들어가 어느 한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중에서도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나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칸들때문에 대체 누구를 보러왔는지조차도 모르겠어서 윤두준의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서 그 곳을 쳐다봤고..그곳엔. "..장...현..우..." 장현우였다. 어떤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만 아는 사람. 윤두준이 한때 엄청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그 장현우. 그 장현우가..왜...여기에.... 학교 사물함 보다도 더 작은 것 같은 칸 속엔 작은 함과 장 현 우 라는 이름과 함께 1985.12.29~2005.12.29 라고 그 짧은 생을 알게해주는 기간이 쓰여있는 작은 석패 같은게 들어있었다. 태어난 날에 죽은 사람이라.. 신기하게 생각해야되는지 안쓰럽게 생각해야되는지.. 나는 문득 장현우라는 사람이 더 안타까웠다. 다른날도 아니고 생일날 죽었다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것이다 윤두준에겐. 뭐 어쨌든 장현우가 있는 곳은 다른데는 화려하게 꽃같은 것도 있고 그런거 같은데 여기엔 황량하게도 딱 두가지 밖에 없었다. 그가 담겨있을 작은 단지와 석패. 사진이라도 있을 법 한데...나는 순간 느껴지는 윤두준이 받았을 고통에 대해 놀라버렸다. 12월 29일. 그 날은 나한테 말도 안해주는 윤두준때문에 속상했던 날이었다. 저기압에 기분은 축 가라앉아서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말도 안해줬던 그날. 그날..이..기일이었을줄은..꿈에나..상상에서나 한번도 해보지 못했었다. "..니가 나한테 많이 서운했을 날이..현우 기일이었어. 너한테 진작에 말을 했어야했는데..차마 용기가 나질 않아서 말 못했다. 미안." 윤두준의 시선은 장 현 우 라고 쓰여있는 석패에 꽂혀있었고 나는 윤두준의 얼굴과 석패를 번갈아보다가 그냥 나도 석패에 시선을 꽂아버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될지는 모르겠다. 그때..너한테 말했었잖아. 말할 준비가 되면..그때 말 해주겠다고. 너랑 만난지도 두달은 넘은거 같은데..사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준비가 다 된건 아니야. 근데..말..해주고 싶었어. 나한테 현우가 어떤 존재였는지..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직도 윤두준에게 장현우라는 존재는 버거운 것 같았다. 왜냐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게 힘들었던 윤두준의 눈에선 작은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으니까. "..현우야. 보여? 여기 금발머리애가..내가 말했던 꼬맹이야. 귀엽지. 너랑은 많이 다르다? 얘는 너처럼 키가 크지도 않고, 말이 없지도 않고 어딘가 그늘이 있는 것 처럼 어두워보이지도 않아. 요섭이는 항상 밝고 귀엽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통볼 같은 애야. 너도..그렇게 보이지? 요섭이가..니 맘에도..들었으면 좋겠다." 윤두준은 내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진 않고 신기하게도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걸 보던 나는 어떻게 해야될지를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장현우. 서운하겠지만..앞으로 자주 못올거야. 나는..앞으로 얘만 보고, 얘만 사랑할거야. 너 그렇게 되고 나서..다시는 어떤 사람도 좋아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앞에 꼬맹이가 탁 하고 나타난거 보면..니가 보내준거 같기도 하고..뭐 아님 말고. 어쨌든..나 앞으로 니 생각도 일년에 한번만 할거야. 그리고 삼백육십사일은 모두 다 꼬맹이 생각만 할거야. 서운하냐? 그래도 어쩔수가..없다..미안하다. 나중에..니 옆으로 가면 그때 무릎꿇고 빌테니까.. 그동안은 좀 봐주라. 현우야. 미안하고..고맙다." 저 긴말을 하는데는..말이 긴만큼 시간도 오래 걸렸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내 눈에도 선해 안쓰러워보였다. 눈은 우는데 입은 웃었다. 하지만 웃는 입조차도 파르르 떨리는게 너무 안타까웠다. 굳이 말로 해주지 않아도 윤두준한테 장현우라는 존재는 너무 커서 그 존재를 애써 지워버리는게 미안하고 힘든..그런 느낌이 들었다. 너무 버거운 짐. 그렇지만 그 누구도 같이 짊어질 수 없고, 평생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짐..이랄까. 장현우가 윤두준한테 그랬다. 윤두준이 죽었다 깨어나도..놓지 못할 사람. 나는..단 한번도 장현우가 죽은 사람일거라곤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냥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 그게 궁금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가 궁금했을 뿐 정말로 한번도 죽었을거라곤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사람이 너무 뜻밖의 일이 닥치면 멍하고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드는것처럼 내가 지금 그랬다. 윤두준한테 장현우라는 존재에 대해서 질투가 나거나 화가 나기는 커녕 나는 그냥 멍했다. 너무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라서.. "..너한테 못해준거..얘한테 다 해줄 생각이야. 너한테 해주지 못해서 후회했던거까지 모두 다. 다신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잘해주고 사랑해주고 이뻐해줄거야. 그리고...너를..잃었던것처럼.. 그렇게 허망하게..잃지 않을거야. 다시는...안..놓칠거야. 그러니까..너도..거기서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지내. 그래야..내가 덜 미안하니까.. 갈게..장현우." 윤두준은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지진 않았어도 그냥 쉴새없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흐느끼기는 싫었는지 계속 입술을 깨물어가면서 힘겹게 힘겹게 말을 이었다. 윤두준이 하는 말, 그 말에서조차 느껴지는 아픔과 고통에 나는 차마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지도 못하고, 그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가 겪었던 그 아픔이 뭔지 모르고, 그 아픔을 함께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장현우때문에 우는 윤두준을 달래줄 수 있는건..유일하게 용준형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라면 모든 아픔과 고통을 윤두준과 함께 겪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윤두준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그는 울었다는게 쪽팔렸는지 손으로 쓱 얼굴을 훑어 눈물을 대충 닦아낸다음에 내 앞에서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다는 듯이. 하나도 안괜찮은게 눈에 보이는데도. "가자." 윤두준은 벌개진 눈을 하고 하나도 안슬픈척하기 위해 애썼을 입에선 이미 경련이 일어나 파르르 떨리는데도 결국은 겨우겨우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그 곳을 벗어났고 끝까지 내 시선 끝에 머물렀던 장 현 우 라는 세 글자가 박힌 석패는 내 머릿속에 꽉 박혀버렸다. 윤두준한테 장현우라는 존재가 아픈 짐이라면, 나한텐 무거운 짐이었다. 단한번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사랑했던 남자를 나도 사랑하고 있는게 아닌가. 묘한 동질감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갑자기 심장 한켠이 바늘로 콕콕 쑤시는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치..죄를 지은 것 같아서. 윤두준의 사랑을 내가 장현우로부터 빼앗은 것 같아서. 아팠다. 윤두준은 나를 끌고 나와 근처 벤치에 나를 앉히고 내 바로 옆에 그도 앉았다. 날씨는 추웠지만, 워낙에 추운걸 견디지 못하는 나지만 지금은 추운줄도 몰랐다. 너무 복잡하고 답답해서 이렇게 찬바람이라도 맞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을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는 윤두준은 오죽할까 싶어서 나는 옆에 앉아있는, 양 팔꿈치를 무릎에다 대고 등을 굽혀 그 얼굴을 양손바닥으로 다 가린채 있는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엔 넓고 든든할것 같은 그 등이, 왜 오늘따라 이렇게도 야위어보이고 안쓰러워보이는지.. 안아주려고 손을 가져다댔지만 나는 차마 그를 안아줄 수가 없었다. 다른 고통이라면 모를까, 장현우에서 비롯된 아픔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윤두준을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윤두준을 보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저 끝에 자판기가 있는 것 같아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따뜻한 캔커피가 있길래 그거 두개를 뽑아서 윤두준한테 다가갔고 그 커피를 윤두준의 바로 옆에다가 올려두었다. 이에 윤두준은 평생 그러고 있다가 굳어버릴 것 처럼 하더니 발갛고 촉촉해진 눈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사갖고 온 캔커피를 들어 톡-하고 따서 마셨다. "..4년전에..아니다. 오늘이 2010년이니까..5년전인가.. 내가 학교 OT(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었는데..그때 현우를 처음 만났어. 걘 많이 어두워보였어. 무리랑 섞이는걸 원하는것 같지도 않아보였고 그냥 따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어. 웃지도 않고 키는 크고..생긴건 깎아지른것처럼 잘생겨서 과 여자애들이 많이 반했었는데 걘 그런거랑은 거리가 멀었던 애였어. 대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것조차도 의문일정도로.. 그렇게 모든 일에 무관심했었어. 근데..웃긴건..나랑 많이 닮았었어. 그런 모습이." 간단히 말하자면 장현우는 아웃사이더 였다는건데.. 아웃사이더라는건 윤두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그를 보자면 아직 시크한면은 있지만..그렇다고 남들과 못어울리는 성격도 아니며 나름 친화적이기도 하고 자주 웃진 않아도 늘 인상을 쓰고 있진 않아서 그래도 잘 지내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아웃사이더였다니. "오티때는 다 그렇듯이 방잡고 선후배 뒤엉켜서 술 쳐마시잖아. 그때도 그랬는데..그냥 주는술 다 받아먹는거 같았는데 멀쩡하더라고. 나도 술은 센편이라서 애들 거의 다 뻗었을때 답답하기도 하고 잠도 안오고 해서 민박집 밖으로 나갔는데 걔도 나와있드라고. 그냥 처음 봤을때부터 나랑 비슷한거 같아서 무작정 다가갔지. 근데 또 내가 생각했던것보단 대답도 잘해주고 웃는법을 모르는줄 알았는데 나름 잘 웃더라고. 그래서 그날 바로 친해졌었다?" 윤두준은 옛날생각을 하니 그래도 맘이 편해졌는지 세상 모든 근심을 다 끌어안은 표정에서 약간 편한..마치 할머니가 옛날얘기 해주는것처럼 희미한 웃음까지 띄면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커피 한모금을 마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과도 같겠다..여차저차 하다가 많이 친해졌고..6월 쯤에 내가 술먹고 고백을 했었는데.. 단번에 오케이하드라. 그래서 다른 커플들 부럽지 않게 엄청 잘 사귀었었어. 옆에서 용준형새끼가 닭살이라고..지랄 발광을 떨긴 했었지만.. 아, 용준형 그새낀..내가 현우 때문에 고민할때 게이인게 뭐 어떠냐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남자건 여자건 그게 무슨상관이냐고 말해준 유일한 놈이었어. 난 그말 꺼내면 준형이새끼가 침 뱉고 달아날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그건 그렇고..어쨌든..남들몰래 도서관 데이트 하는것도 재밌었고, 사람 많은데서 몰래몰래 뽀뽀하는것도 재밌었고..그냥 하루하루가 재밌었어. 단 한번도 살면서 재밌게 살아본 적 없는데 말이지. 그때 말했었잖아.. 나는 꼭두각시처럼 살았었다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독립을 했으니까 아무도 날 방해하지도 않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내인생 황금기 였던 것 같다." 이런 얘길 들으면..뭐 말하자면 내 애인의 옛 애인 얘기를 듣는게 아닌가. 이런 얘길 들으면 으레 기분이 상하고 질투가 나야 정상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의 얘기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손주가 할머니 얘기 듣는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고..내가 좀 또라인가.. "그러다가..그해, 12월 29일. 그날은 현우 생일이었거든. 아는형이 카페를 하는데 사정사정해서 그날만 통째로 빌려서 거기에서 파티를 해주려고 했었어. 케익도 사다놓고, 와인도 놓고 풍선도 매달고.. 노래도 불러주려고 일주일 내내 노래 연습도 했었어. 근데 얘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오길래 카페 앞으로 나가봤어. 신호등 건너편에 서있더라. 미안해 라면서 소리를 크게 지르는데 나는 내가 준비한 깜짝이벤트에 놀랄 현우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신호등 바뀌자마자 뛰어갔어." 윤두준은 말을 멈췄다. 그리곤..그때 생각을 돌이키는지 갑자기 잔잔했던 그의 두 눈이 파도가 일렁이는것처럼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고 갑자기 눈물이 툭-하고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차가..오는 줄 몰랐어. 알았으면..피했을텐데. 나..혼자 피할 수 있었는데. 그 병신같은 새끼가..좆같게도.. 차가 오는걸 나보다 먼저 봤어. 그래서..씨발..펑.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저 멀리서 툭-하는 소리가 또 나드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는데 나는 무서워서.. 눈을 못떴어. 내 몸은 멀쩡했는데..씨발..나는..멀쩡했는데..그새끼가..." 윤두준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감정이 북받치는듯. 나는 내 주제를 넘는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가 우는걸 가만히 볼 수 만은 없어서 그를 끌어안아 그의 등을 계속 토닥여주었다. 윤두준은 내 어깨에 턱을 괴어놓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차라리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고 울면 후련할텐데도, 그러지 못하는 윤두준때문에 나는 나조차도 울어버릴 것 같이 위태로웠지만 나는 꾹꾹 눌러 참았다. 나는 단지 동정이라는 마음때문에 윤두준 앞에서 울 순 없었으니까. "..나를 밀쳐놓고 지가 대신 부딪쳤어. 존나..누가 들으면..드라마냐고..소설이냐고 지껄일텐데. 세상엔..드라마같은 일들이 많드라. 내가 살아온것도..어떻게보면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삶이었으니까. 어쨌든...장현우..거짓말안하고..십미터는 더 넘게 날아갔어. 저 멀리에서 현우가 누워있는데.. 거기까지 걸어가는게..얼마나 무서웠는지..아무도 모를거야. 아무도.. 그리고 설마했어. 설마..설마. 머리에서 피가 나오긴 했는데..원래 머리가 땅에 부딪치거나 어디에 부딪치면 피가 나는게 더 좋은거랬으니까..차라리 그게 나은거랬으니까 나는..괜찮을거라 생각했어. 근데...씨발..어떻게..그렇게..단번에..한번에..한마디 말도 못하고..죽을수가 있냐..." 나를 끌어안고 말하는 윤두준의 등은 아까보다 더 작아보여서 나는 그냥 안아주기만했다. 자기 자신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윤두준. 그 아픔이,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나는 생각치도 못할만큼의 크기 였을것이다. 지금도 그 죄책감에, 그 미안함에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4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런데 나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을땐 얼마나 아팠을지, 나를 만나면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속삭일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내가 아팠다. 윤두준이 아파서..나도 아팠다. "..사람 팔자가 얼마나 좆같으면..지가 태어난 날..죽을 수가 있냐. 그것도 누구 대신. 그냥..차라리 내가 죽는게 나았겠다 싶은 마음으로 4년을 살았어. 걔가 죽을 운명이었으면..그냥 걔 운명이 거기까지였다.라고 생각해버렸을텐데.. 나때문에 죽었으니까. 내 운명을 그새끼가..뒤집어 쓴거니까..나한테 장현우는.. 그때도 지금도..앞으로도 평생 못지울 낙인 같은 존재야. 평생..남을거야. 일년에 삼백육십사일동안 널 사랑해도..하루만큼은 그새끼 생각을 해야돼. 너한테..나는 백프로를 줄 수 없는데..그래서..너한테..너무 많이 미안한데... 단 하루만큼이라도 그 새낄 생각하지 않으면..내가 죽을 것 같아서..어쩔 수가 없어." 힘겹게 한단어 한단어, 그리고 한 문장을 만드는 윤두준의 모습에 내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주제넘게 내가 울면 안되는데..나는 그의 아픔을 동정쯤으로 여길 수 없는데 너무 안쓰러워서. 고작해야 스물넷인 남자가 짊어지기엔 너무 큰 짐인데 그 짐을, 평생 크기가 줄어들지도 않고 늘어만가는 그 짐을 앞으로 죽는 그날까지도 안고 살아야한다는게 너무 안타까워서 끝까지 참아보려했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었어.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현우한테도 너를 소개해주고 싶었어. 내가 너를 잊어가면서까지..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근데..그새낀 너무 착해서..나한테만큼은 너무 착하고 머저리같아서.. 자꾸만 꿈에나와서 웃고 가. 목소리 한번만 들려주면 좋을텐데도..4년동안 몇번 찾아와주지 않다가 요즘들어선 자주 나와서는 말도없이 희미하게 웃고 사라져버려. 그래서..너한테 고백했던날도.. 너를 잡았던 날도..그 전날 현우 꿈을 꿨는데 그새끼가 그렇게 하고 가버려서..말하자면 용기..라는걸 얻어서. 내가 다른 사랑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거 같아서 너를 잡았던거야. 그리고..너를 만나면서, 너랑 같이 지내면서..처음엔 아팠는데..힘들었는데. 점점 갈수록 행복하고..기쁘고..즐겁고..언젠가부턴 장현우도 깜빡 잊고 살아서 나도 놀라. 아마..그새끼 많이 서운하겠지.."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계속 그를 위로해주었고 윤두준도 내 등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많이 속상했지. 29일부터..오늘도..속으론 계속 너한테 그러지 말아야지..말아야지 하는데도 자꾸만 니 얼굴 앞에 현우 얼굴이 겹쳐보여서..매년 12월 29일엔..늘 그랬어. 그냥..그날만 되면..기분이 너무 안좋아서..항상 여기저기 장현우가 보여서 죽을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미안하다." 나는 아니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메어서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냥 좌우로 고개만 도리질쳤다. 나를 안고있는 윤두준이 내 행동을 알 순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거." 윤두준은 나를 안고 있다가 빼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어떤 사진 한장을 보여주었다. 한눈에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수려한 외모에 나는 이게 누구냐며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지갑을 들고있는 윤두준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잘생겼다." 윤두준과 장현우가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바닷가로 놀러갔었는지 사진 배경엔 바다도 보였고 겨울바다가 참 좋다던데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는 장현우는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행복하게 웃고있었다. 윤두준의 키도 그렇게 작은편은 아니었지만, 장현우는 그보다 조금 더 컸다. 확 큰건 아니고 미세하게 한 이삼센치 정도.. 얼굴은 주먹만하게 작고..그러고보니..쌍커풀은 없지만 매력적으로 찢어진 눈에 높은 코에..무슨 아이돌 그룹에 있는 어떤 멤버를 닮은 것 같았다. 그 이름이..네글잔데..무슨 윤호 였던거 같은데.. 잘 기억은 안나지만 중학교때부터 여자애들이 그렇게 이름 부르고 맨날 사진 갖고오고 잡지를 갖고 와서 구경하던걸 슬쩍슬쩍 거들떠본 기억엔 확실히 그 사람과 닮아있었다. 그래. 유노윤호였던가. 얼굴도 작고 눈은 쌍커풀없이 매력적으로 찢어진 눈에 코도 높고 입술도 적당히 도톰하고.. 정말 얼굴만 봐도 여자애들한테 대쉬가 끊이지 않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딱 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든 생각은.. 이 두사람이 길을 걸어가다보면 정말 길가다가 뒤를 돌아서 볼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겠구나, 특히 여자들의 시선을 아주 한몸에 우르르 받았겠구나 싶었다. 참..잘어울리는 한쌍이었다. 조금 속이 쓰리긴 하지만. "잘생겼지. 거짓말안하고 얘한테 고백하러오는 여자애들만 하루에 한명은 있었어. 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모르는 여자애들한테 헌팅..이라고 하냐. 뭐 그런거 당하는건 일상이었지. 그래도 맨날 그때마다 관심없다는듯이, 뭐 사실 정말 관심도 없었지만 그렇게 쳐다보고 근데 난 또 그게 짜증나서 맨날 툴툴거리고..그땐..참..재밌었는데." "..나같아도..반하겠다. 잘생겼어." "..어쭈 양요섭. 내가 하다하다 장현우한테까지도 질투를 해야겠냐. 얘가 내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잘생겼구만. 사실 형보다 두배는 잘생겼다뭐. 얼굴도 작지..키도 크지.. 근데 이거 사진은 누가 찍어준거야?" "용준형." 역시 용준형일줄 알았다. 어쩌면 용준형이라는 사람은 윤두준의 부모님보다도 더 가깝고 진한 사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은 맞는것 같았다. 말하자면 윤두준이 살아오면서 느꼈던 희로애락을 다 같이 한 산 증인이 아니던가. 새삼 부럽기도 하고..나는 고작해야 윤두준을 만나온지 얼마 안됐으니까, 그에 대해 아는것 보단 알아야하는게 많은데 용준형은 이미 알고 있는게 많으니까..많이 부러웠다. 나도 윤두준에 대해서 아는척 좀 해보고 싶은데, 이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먹고 취미는 뭔지. 이런걸 딱딱 알고 다른사람들한테도 서슴없이 말해보고 싶은데..아직 나는 그럴정돈 아니었다. 그리고 또 든생각은.. 만약 장현우가 죽지 않았다면..내가 이들 틈에 끼어들 수 있었을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대답은 안된다 였으니까.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견고한 사이였는지, 얼마나 단단하고 다부진 사이였는지. 굳이 말로 듣지않아도 사진 한장으로 알 수 있었다. 나같은 꼬맹이는 이 둘에게서 동생을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을 바라는건 애초에 사치였다는걸 말이다. "..이..사람이 만약 형 옆에서 없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나타났다면.. 형은 꿈쩍도 안했겠지? 형한테 나같은건..그냥 생각도 안해봤을 사람이었겠지? ..나 그럼 되게 고마워해야되나...형한텐 미안한말이지만.. 이분이..형 옆에서 사라져줘서..내가 형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미친소리였다. 내가 생각해도..대체 누구앞에서 무슨 얘길 하는건지. 어떻게 저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는건지. 돌았다.양요섭. 단단히 미친새끼다 너는. "..미..미안. 아..그러니까 나는...그런 뜻으로 말을 하려던게 아니라.. 미안해..." 나는 윤두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보지도 못하고 무서워서 그냥 내 발만 뚫어지게쳐다보며 급하게 사과를 했지만 윤두준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화가 날것이다. 내가 윤두준이었어도, 남한테 상처인 그 사람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고맙다는둥 어쨌다는둥 가십처럼 얘기했다면 정말 나를 때려버렸을 것이다 정말. "..미.." 미안하다고 다시 말을 하려는데 윤두준이 내 앞에 내밀었던 지갑을 거둬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어놓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말도없이 먼저 걸어갔고 나는 내 입을 계속 때리면서 그를 쫓아갔다. 병신새끼. 사람이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란게 있는건데.. 윤두준은 다 먹지도 않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놓고는 바로 차에 올라탔고 나는 이미 차게 식어버린 커피를 주머니 안에 넣어놓고 그 바로 옆에 올라탔다. 무서워서 윤두준 얼굴도 못쳐다보겠다. 아 그냥 뒷자석에 앉을걸 그랬나.... 지이이잉- 지이이잉- 안그래도 어색해죽을뻔했는데 때마침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고 난 이게 광고 전화라도 고마울 것 같았다. 구세주가 따로 없으니까말이다. [이기광] "여보세.." 「야!!무조건 바이크 니꺼라그래. 현승이가 물어보면 니가 무조건 샀다그래 알았어? 야 이거 현승이한테 들키면 나 뒤지니까 제발 친구 살리는셈 치고..헐 씨발. 알았지!?」 "..뭐? 야. 여보세요?" 「형. 저 현승인데요. 뭐 하나 물어볼게 있어서요. 통화 괜찮으세요?」 통화 괜찮냐고...? 괜찮다마다. 고맙기까지 하다니깐. 지금 윤두준씨는 내 말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냥 운전에만 몰두하셨고 나는 가시방석에 앉는게 지금 이상황보단 덜아프겠다 싶기만 했다. "어? 어..왜?" 「바이크요. 이거 형꺼아니죠. 기광이형꺼죠?」 "..바이크..? 그거..어. 내꺼야. 내가..그걸 둘데가 없어서 잠깐 기광이한테 맡겨놓은건데. 왜?" 이기광. 너는 나한테 엎드려 절해야된다 새끼야. 「진짜에요? 혹시 기광이 형이 형한테 미리 전화해서 부탁한거 아니죠?」 "아니라니까. 나 원래 바이크에 관심 있었어. 그거 살려고 1년전부터 돈 모았던건데. 왜그래? 무슨일있어?" 「형 집에 놀러왔는데..바이크가 보이길래요. 제가 계속 얘기했었거든요. 저런거 절대 안된다고.. 정말...형꺼..맞는거죠? 진짜죠?」 "속고만살았냐. 내꺼라니까. 이기광한테 오늘 가지러 갈테니까 제대로 보관하고 있으라고 좀 전해줘. 가서 흠집 하나라도 나있으면 죽여버릴거라고. 아, 그리고 기광이한테 할말 있는데 잠깐만 바꿔줄래?" 이기광. 어쩌다가 그걸 장현승한테 들켰냐... 쯧쯧 어쨌든 하는짓이 꼭 모자르다니깐. "야. 그거 웬만하면 팔던가 아님 딴데다 맡기든가 해라. 나 그거 탈줄도 모르는데 현승이가 타는거 보여달라그럼 어떡할래. 너 진짜 뒤지는수가 있어. 그리고 나 생일날. 미국 가야될거 같은데. 같이갈래? 이번에 어떻게 하다보니까 엄마 아버지가 누나있는데로 출장이 겹쳤대. 근데 그때가 딱 내 생일이라 엄마가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네. 같이 갈래?" 생일이란걸 원래 그렇게 거하게 챙기거나 그렇진 않았다. 부모님은 그냥 사고싶은거 사라고 카드를 주거나 그럴뿐이었다. 근데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소엔 시간도 안맞던 부모님이 시간을 맞춘건지 아님 우연히 그렇게 된건진 잘 모르겠지만 다 같이 미국으로 가게 됐으니까 이왕 이렇게된거 생일 기념으로 미국에 같이 가자며, 그리고 엄마도 누나도 아버지도 거기서 다 일을 해야되니까 너 혼자 심심할테니까 기광이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얼마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다. 난 뭐하러 그렇게 하냐며, 여태껏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광이랑 같이 지내겠다며 말했지만 엄마는 그러지말고 오라고, 십팔년동안 생일을 혼자 지냈으면 이번만큼은 같이 지내야되는거 아니겠냐며 평소 엄마답지 않은 말을 늘어놓으며 권유했고 나는 뭐 썩 그렇게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했었다. 근데 문젠..그게..바로 지금..윤두준의 옆에서 생각이 났다는거지.. 「미국? 나 비자 만료 됐을걸? 하도어렸을때 갔다와서.」 "그건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준대. 같이 갈거야? 웬만하면 같이 가지? 뉴욕 가면..니가 그렇게 꿈에도 그리워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이 브랜드별로 쫙 늘어져있을텐데?" 「야. 무조건 간다. 1월 5일? 니 생일선물은 거기서 해주는걸로 하자. 며칠 있다 오는건데?」 "..몰라. 한 삼일? 어차피 누나도 그렇고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결국은 너랑 나 둘만 있게 될걸. 말이 가족여행이지 이건 무슨..그럼 너 가는걸로 안다. 나중에 안간다고 발빼면 뒤져. 그순간 난 장현승한테 가서 니가 가진 모든 비리들을 다 토해낼거니까 알아서 해라. 그럼 끊어." 「어. 아 현승아!!! 그거 진짜 내꺼아니..」 뚝- 쯧. 병신기광이. 어떻게된게 딴데가선 큰소리 뻥뻥치고 잘만 다니면서 장현승 앞에선 꿈쩍도 못하냐. 저까짓 바이크 지꺼 아니라고 그냥 우기면 되지 그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가 있는건가..하여튼 우리 기광이는 어지간히 병신이다. "양요섭." "..어? 어." 다시 서울방향으로 되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랑 윤두준은 또다시 싸한 분위기를 느껴야만했다. 하여튼 입이 방정이다. 어쩌면 나는 기광이보다 더한 병신일지도. "..미국가는거. 왜 말 안했어." "..어? 아..그게..얼마전에..엄마한테 연락이 온건데.. 형한테 말할 틈도 없었고..그리고 그게 지금 생각이 나서.." "..니 생일. 나는 신경 안쓸줄 알았냐?" 윤두준은 강변북로 한가운데서 그냥 브레이크를 확 밟아버렸고 뒤에서 연달아오던 차도 계속해서 브레이크를 밟아댔다. 미쳤어 진짜!!!! "형!!!!!!!!!!" "양요섭. 너 어떻게 너만 생각하냐." "..형. 일단..좀 어떻게 해봐. 여기서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형!!!" 우리를 비켜가는 차들도 있었고 지나갈때마다 욕을 소리쳐서 외쳐대는 운전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여전히 클락션을 울려대며 우리가 움직일때까지 가지 않을건지 뒤에서 계속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체 왜이러는거야 왜!!! "윤두준!!!나한테 화난건 알겠는데 집가서 얘기해!! 지금 뭐하는거야 이게!!!!" 나는 어찌할바를 몰라서 윤두준의 이름을 막 부르면서 그의 어깨를 있는힘껏 때리면서 말했고 윤두준은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더니 일단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윤두준때문에 미칠것 같다. 내 생각이 짧았지만, 사실 생일같은건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난 사실 내 생일이 언젠지조차도 엄마한테 얼마전에 전화가 와서 알았다. 그만큼 나한테있어서 생일은 그냥 매년 돌아오는 날일 뿐인데..그걸 그렇게 윤두준이 크게 생각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윤두준이 내 생일을 모를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말해준적은 없었으니까. 아까는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세우질않나, 지금은 모든 신호위반 속도위반에.. 대체 왜이러는건지 그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있는것조차가 의문일정도로 빨간불인데도 그냥 직진하질않나, 시내도로인데도 거의 100을 웃돌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하루종일..간이 떨어졌다 붙었다 수십번은 반복했다. 정말 이러다 죽겠다 싶을정도로. "양요섭." 덕분에 아까 강변북로부터 집까지 단 십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말 누가들으면 까무러칠정도의 속력이었다. 그러는 나는, 직접 경험한 나는 어떻겠는가. 지금 난 내정신이 아니었다. "왜." "생일날 미국가는건 좋은데. 왜 그 얘길 내가 아닌 이기광이 먼저 들어야 되는건데?" "..말했잖아. 방금 생각난거라고. 그리고 내가 형한테 말할..틈이나 줬어? 맨날 인상굳히고 있고 말걸어도 대답도 않고, 집안은 초상집분위긴데 내가 거기다대고 내 생일 얘길 하고 있는게..병신 아냐? 그리고 어차피 생일이란게 별건 아니잖아. 그냥 오늘도 일년에 한번이듯이 내 생일도 일년에 한번인거야. 어차피 이번 생일 아니면 내년에 같이 있음 되는거고..그건 상관없는거잖아. 왜이렇게 화를내? 그게 그렇게까지 할정도로 화낼일이야? 알긴 알아? 우리 거기서부터 오는데 목숨 담보로 온거?" 나는 아직도 급하게 뛰는 심장이 가라앉질 않아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만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도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거 무슨 헐리웃 드라마에서나 봤지 실제로 겪어볼줄이야.... 정말 오줌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널..어쩌면 좋냐.." 내 얼굴을 보며 말하는 윤두준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형이 내 생일 알고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어. 내가 말해준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생일..별거 아니잖아. 왜 그렇게 화를 내. 미국..안가도 돼. 어차피 생일이 특별한것도 아니고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내 생일을 가족들이랑 같이 보내본 기억이 없어." "..갔다와. 화 안내." "..그게 화 안낸다는 사람 얼굴이야? 그럼 같이 가면 되겠다. 형도 와. 현승이도 같이 오라그래서 더블데이트 하면 되겠네. 어차피 우리집 가족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말만 내 생일 기념이지 결국은 자기들 할거 하러가는거야. 그래. 좋겠다. 형이랑 같이 미국가서 놀다오면..진짜 좋겠다. 내 생일날도 같이 있고!! 같이 가자. 응? 형 같이가자!!!" 나는 어떻게든 윤두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의 팔에 매달려 안겨붙었다. 하여튼..별짓다한다 양요섭. "..그래도..되나." "같이 가자!!!어차피 기광이랑 놀아봐야 재미도 없어. 그새낀 그냥 쇼핑만 하러다닌단말야..같이 가자!!응? 우리 여행도 못가봤잖아. 같이가자. 응?" 내 말에도 계속 고민하는 윤두준에 나는 고개를 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에 윤두준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며 있었고 나는 자세는 좀 불편했지만 화가난 그를 달래주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결국 화가 풀렸는지 피식-하고 웃은 윤두준에 나는 바로 입술을 떼며 그의 목에 매달려 안겼다. "..같이 가자. 형이랑..같이 있고 싶어." 내 말에 윤두준은 알았다며 대답하고는 나를 안아주었다. 기분이 많이 나아져보였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의 품에서 나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옆에..현우가 있었는데, 니가 나타났다면...흔들렸을거야." "..어?" "너를 사랑하게 됐을거라고는 말 못하겠지만..많이 흔들렸을거야. 장현우랑 양요섭 사이에서." 나는 지금 이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건가 생각하다가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까 납골당에서 내가 미친 헛소리를 지껄였던 그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장현우가 윤두준의 옆에 있었을때 내가 나타났다면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였을거라고, 나는 윤두준의 눈엔 들지도 않았을거라고. 그렇게 말했던 그 말에 대한..소중한 대답이었다. "..누구를 선택했을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확실한건.. 너는 그때 나타났건, 지금 나타났건..날 흔들어 놨을 사람이란거야.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는 아니야. 왜냐면..지금은 내가 널 많이 사랑하니까." 많이 오그라드는 말이었지만, 로맨스소설에서나 나올법하게 유치한 말이었지만 그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리고야 말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횡설수설하고 앞뒤가 안맞지만..그렇기에 바로 진심이라는걸 알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냥 윤두준의 생각이라는걸, 진심이라는걸 알 수 있어서 나는 그렇게 입에바른 소리가 아닌 서투른 말에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을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많이 벅차고..행복하고..기쁘고..사랑스럽다. 지금 내가 윤두준한테 그랬다. 지금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키스건 뭐건 다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음만 그랬지 찌질한 나는 그냥 울고 있을 뿐이었다. 기쁘고 행복하고 고마워서. 그래서 윤두준은 나를 보더니 왜 우냐며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곤 등을 토닥여주며 계속 속삭여주었다. "..고마워..사랑해..미안해.." 윤두준은 이 세 단어만 내 울음이 그칠때까지 계속 반복해주었다.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건,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한건. 그건 바로 윤두준을 만나고, 그와 만나고 사랑한 일이었다. #22. _윤두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12월 29일. 나는 4년전부터 이날만되면 지금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만큼 기분이 최악으로 좋지 않았다. 그건 4년전, 그날. 현우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래서, 오늘 요섭이와 함께 잠에 들지도 않았다. 항상 같이 잠들었고, 같이 깨어났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평생을 그 아이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그래도..29일.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품에안고 잠에 들고 깨어나는 일은..오늘만큼은 해선 안될 것 같아서 요섭이에겐 미안하지만 그 아이한텐 이렇다 저렇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냥 소파에 누워서 잤다. 사실 잠을 잔것같지도 않고, 자꾸만 현우가 눈 앞에 어른거리는거 같아서 깨는둥 마는둥 하면서 밤을 꼴딱 새버렸다. 그러고싶지 않았는데 항상 이맘쯤만 되면 없던 불면증도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을 못자서 그런가 사람이 더 예민해져서 남들한테 까칠하게 구는것도 같았고. 어쨌든. 29일, 오늘도 날이 밝았고 나는 계속 내 눈치를 보는 요섭이가 눈에 보였지만 그렇다고해서 오늘이 현우의 기일이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 라고 설명을 해줄 순 없었다. 어떻게 지금 내 사람한테 내 전사람 얘기를 들먹이면서 그사람때문에 기분이 안좋으니 이해좀 해달라라고 어떻게 말을 할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많이 미안했지만 나는 어쩔수가 없었다. Rrrrrrrrr 목구멍으로 안넘어가는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다가 거실에 아무렇게나 놔뒀던 핸드폰이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댔고 난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 수가 있어서 더 착잡했다. 현우의 죽음을 함께, 그리고 그 아이가 화장이 될때까지도, 납골당에 묻히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해주었던 사람. 용준형. 「괜찮냐?」 전화를 받자마자 괜찮냐는 물음을 던져오는 용준형. 워낙에 성격이 살갑지 못하고 무뚝뚝해서 말은 저래도 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하고있다는게 보여서 그것도 매년, 같은날에만. 미안했다. "..어." 「오늘..갈거냐?」 "아니. 오늘 안가. 같이 갈거야." 「..같이? 아 꼬맹이랑? 그래도..오늘이 기일인데 오늘 가봐야되는거 아니냐.」 "매년 그랬는데 뭐." 사실 오늘 요섭이를 데리고 현우가 있는 곳으로 갈까 싶었지만, 오늘 방학이라고도 하고 아직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조차 준비가 안됐는데 무작정 그 아일 현우가 있는곳으로 데려갈 순 없었다. 매년 오늘만되면 늘 나 혼자 가서 울어보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쓰러져서 자보기도 하고. 항상 그렇게 누가보면 병신짓이라고 손가락질 할만큼 그렇게 했었는데 그래도 매년 늘 그랬어도, 오늘 만큼은..내가 준비가 되면 그때..요섭이한테 소개를 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한때 어떤 사람을 사랑했었는지에 대해서. 「..괜찮은거 맞지?」 "어 신경쓰지마라. 요즘 꼬맹이때문에 바빠서 얼굴 본지 꽤 된거 같다. 조만간에 학원 앞으로 갈테니까나 나와. 내가 술 살게." 나는 학원을 그만뒀지만 준형이는 아직 복학할 준비가 안됐다며 다음해까지만 더 다니고 그만두겠다고 그래서 걘 아직도 학원 선생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 사실 내가 이제와 말하는거지만, 학원을 그만둔 이유는.. 그때 요섭이한테도 말을 했지만..딱 1년 남았기 때문이었다. 꼬맹이를 과외해주기 위해서라는건 뭐 그것도 어느정도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앞으로 남은 1년을 좀 더 보람있게, 말하자면 요섭이와 많은 추억을 만들고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원을 그만둔 것이었다. 내가 애초에 아버지한테 말했던 5년. 그 5년중 4년은 흘러가고 1년만이 나한테 남았고, 내 아버지가 정말 1년후에 나를 불러들일지, 아님 그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불러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거야말로 아버지의 마음이었으니까. 그치만..내가 그 집으로 들어간다한들 요섭이와 헤어진다거나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일만 잘한다면,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그 무엇이든 다 해낸다면 내 사생활에까지는 관여를 하지 않을거란 믿음이 있기때문에, 그리고 아직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거나 그 결혼을 전제로 선을 보러다녀야할 나이도 아니기때문에 내가 어떻게되든간에 요섭이를 놓치진 않겠다는게 내 각오였다. 어떻게 잡은 사람인데. 현우 그렇게 보내고나서 겨우 얻은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아프고 싶진 않다. 「..그래 새끼야. 이맘때쯤이면 맨날 불안했는데..그래도 니 옆에 꼬맹이가 있다니 덜 불안하긴하다. 하여튼 내 인생 짐이야 윤두준 너는.」 "어. 걱정하지말고 새끼야. 한두번 오는 날도 아니잖아. 앞으로 평생 올 날이다. 병신새끼." 「쨌든..몸 잘 챙기고. 너무 장현우생각때문에 매달려서 꼬맹이한테 소홀하지말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한거 알지?」 "그래 고맙다." 전화를 끊고 난 착잡해서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장현우 얼굴도 아른거리고 그때의 악몽도 생각나고 항상 이맘때쯤이면 느껴지는 머리와 가슴통증에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듯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식탁에 앉아 나를 걱정스레 혹은 속상한듯 쳐다보는 양요섭이 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차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식탁으로 가 지금 당장이라도 음식을 구겨넣으면 체할것이 뻔히 보였지만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식탁앞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데, 밥을 다 먹었는지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양요섭의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꼬맹이는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냥 먹는 흉내만 낸것같이 깨작거리다가 만듯한 걸 본 나는 괜히 나때문에 요섭이까지 밥을 못먹은것 같아 미안해서 말을 건넸다. "밥 다먹었어?" 최대한 따뜻하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내 굳은 얼굴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요섭이는 매우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아..어." "다 남겼잖아." "..아..그냥..속이..좀.." 멀쩡한애가 속이 안좋을리는 없었지만 그냥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고싶진 않았다. 밥 먹고 싶지 않은 애를 붙들고 먹여봐야 속만 탈나지 좋은건 없을테니까. 요섭이는 학교를 가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가서 책가방을 맸다. 나는 아이를 보지않는척 하면서 요섭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뭐 하나라도 두고가는게 없나. 나는 체할거 같았지만 몇숟가락 남지 않았길래 그걸 또 꾹꾹 목구멍 안으로 쑤셔넣었다. 내가 지금 밥을 먹는건지, 쇳덩이를 먹는건지 분간이 안될정도였지만 지금은 어느 한 사람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꽉차서 아주 잠깐이라도 어딘가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 생각이 금세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또 꽉차고 꽉차서 정말 죽고싶었다. 지금도 그랬고. 난 남은 밥만 먹고 요섭이를 데려다주기위해 일어나려고 했지만 나는 밥을 씹으면서 또 꽉찬 생각에 멍때렸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요섭이는 이미 집안에서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분위기 상 요섭이는 혼자 학교에 가겠다고 생각한건지 정말 가방과 점퍼 모두가 다 없어졌고 나는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다를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여기서 학교까지 가는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혼자 가겠다는건지, 엘레베이터를 타는 양요섭을 본 나는 급하게 달려가서 바로 닫혀버릴뻔한 문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겨우 잡았다. "...내려." "..아..오늘은 나 그냥 혼자 갈게!! 나 혼자 잘 갈 수있어!!" 자기 자신도 여기서 학교를 어떻게가는지 모를것인데도 부득부득 우겨 저렇게 말하는꼴을 보니 나는 너무 미안해졌다. 내가 요섭이한테 미안해야 옳은건데 왜 이 아이가 나한테 미안해하는건지.. "..내려." "아니..나 진짜 잘 갈 수 있는데..학교 도착하면 문자할게!!내가 애도 아니고.. 그냥 혼자 갈게. 진짜 혼자 갈게." 어떻게든 웃으며 말하는 양요섭을 보던 나는 너무 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냥 이러저러 복잡한 마음에 이러쿵저러쿵 엘레베이터 붙잡고 말하기 싫어 무작정 요섭이의 손목을 잡고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바로 엘레베이터 버튼이 있는 쪽 벽에 밀어부치고 꼬맹이의 얼굴 양 옆으로 손바닥을 대 살짝 몸을 기울여 지탱했다.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게 눈치보지말고 물어봐. 무슨 일이냐고, 왜 기분 안좋냐고. 왜 그렇게 도망치듯이 가." "..아니..그냥..형이..좀 안좋아보이길래..걱정 끼치기 싫어서.." 착하고 순한 양요섭은 아마 내가 이러는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게 뻔했다. 나같아도 그럴수밖에 없겠지. 갑자기 같이 잠도 안자고, 말도 안건네고 눈도 안마주치고 화난듯 딱딱하게 말하는거에..아마 양요섭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을것이다. 행여나 자기가 나한테 잘못한게 있진 않을까 아마 밥먹는내내 그 생각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방금 엘레베이터를 혼자 타는 그 순간까지도 복잡했을것이다. 그래서 미안했다. 너때문이 아니라고, 니가 미안해야될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장현우에 대해선 그 누구와도 얘기해 본적이 없어서, 남한테 이 얘길 해줄 날이 올거라고 생각도 안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해야될지도 몰라서 나는 또 답답해져버렸다. "니가 이러는게 날 더 걱정하게 한다는거 몰라?" "...미안..." "...오늘은..내가 무슨 일이 좀 있어. 나중에..말해줄테니까..눈치보지마. 너때문에 그런거 아니니까. 미안." 내가 지금 당장 요섭이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미안해하지말라고,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오늘같은날 다른 누군가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이 느껴져서 나는 예전처럼 설레거나 기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앞으로도 계속 오늘은 그럴 것이다. "잠깐만 있어. 차키 갖고 나올테니까." "..아니 안그래도.." 나는 양요섭을 그대로 거기다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시간을 보니 학교에 늦을 것 같기도 한 시간에 나는 서둘러 점퍼 하나와 지갑만 챙겨서 나왔고 나오는 길에 소파에 요섭이가 깜빡 잊고 두고간 하얀색 목도리도 챙겼다. 항상 덜렁거려서 밥도 늘 흘리고 먹고, 입에 묻히고 먹고, 꼭 뭔가를 빼놓고 다니는 양요섭때문에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일루와." 바로 집 밖으로 나오니 그래도 착하게 내 말에 아무데도 안가고 엘레베이터 옆 벽에 쭈그려 앉아있는 양요섭을 본 나는 나도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동글동글한게 웅크리고 있는게 너무 귀여워서. "맨날 춥다고 징징대는 애가 목도리를 안하고 가면 어떡하겠다고." 이렇게 겨울을 못견뎌하는애는 보다보다 처음이었다. 별로 춥지도 않은 날씬데도 춥다는 말을 하는게 버릇처럼 베어들은건진 모르겠는데 항상 추워하는 양요섭때문에 작년보다 보일러도 2배 이상 더 높게 더 자주 틀었고 차에서도 히터를 항상 3단으로 틀어놓고 다녔다. 덕분에 나는 더워죽겠지만. 어쨌든 목도리를 칭칭 감아주자 목이 부자연스러워서 나를 뻣뻣하게 올려다보닌 양요섭에 또 웃음이 나와 그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아무래도 매년, 오늘은 양요섭과 같이 있어야될 것 같다. 나는 처음 알았다. 내가 12월 29일에도 웃을 수 있다는걸 말이다. 요섭이를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내내 생각을 해봤다. 오늘 현우한테 데려가는게 좋을까, 나중에 데려가는게 좋을까.. 결국 내린 결론은 새해에 현우한테 보이는게 나을 것 같단 것이었다. 오늘..내가 현우한테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섭이랑은 1월 1일날 가서 다 말하고,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좀 접어두고 요섭이와 살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마음을 안고 학교에 요섭이를 내려주고, 요섭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지만 나는 그 말에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부터 입까지 쭉 마비가 된 것같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내 입술에 귀여운 뽀뽀를 해주었어도 나는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양요섭이 있었고 나는 그냥 그대로 차를 출발시켜버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머리와 마음은 참 멀리 있어서 생각은 했는데, 나도 사랑해. 라는 말을 해주고 윙크라도 날려주라고 명령은 내렸는데 마음에서 허락이 떨어지질 않아 결국 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서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미안하게도 준형이한테 온 문자 한통으로 나는 요섭이를 싹 잊을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날아온 문자 한통. 「이따 저녁에 술 한잔 하자. 나는 너도 아닌데 왜이렇게 죽을거 같냐.」_용준형 현우의 죽음을 누구보다 제일 잘 기억하는 사람은 나보다도 용준형일 것이다. 나는 그때 그 장면이 너무 충격이어서 아직도 드문드문 마치 조각난 퍼즐같이 기억나는데,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그 조차도 너무 힘들고 아파서 늘 기억에 피해다니다보니 자연스레 어느정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생각나고 있었지만 용준형은 내 뒤에서 모든걸 다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어쩌면 준형이가 더 괴로울 지도 모르겠다. 「니네 집으로 갈테니까 술 잔뜩 사놔라. 먹고 미쳐보자.」 나는 문자를 날린 뒤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가만히 앉았다. 참 다행인건..이 집에 장현우의 흔적은 없다는것. 이 집안에 가득한건 온통 양요섭의 흔적과 향기뿐, 장현우는 그 어느곳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정말 가까운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기분을 알것이다. 그 기억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사람이 죽은 그 날이 얼마나 고통인지. 그리고 가장 많이 나를 힘들게 하는건, 내가 그 사람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망각이라는건 양날의 검인것 같다. 기억을 잊음으로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지만, 기억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드문드문 놀라곤했다. 요섭이와 지낼때, 내 얼굴 가득 번져있는 웃음,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행복, 기쁨, 설렘. 이 모든 감정들은 다 끝난줄만 알았다. 4년전 그때 이후로 나한테 이러한 감정들을 사치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참 인간이란게..산 사람은 살아간다는 말이 맞는듯 예전처럼 설레고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아침이 오는게 행복하고, 밤을 맞이하는게 기쁜 날들이었다. 요섭이와 함께한 이후부터는 매일매일이 소중하고 기뻤다. 그래서 아주 가끔, 곱게 잠들어있는 요섭이를 한밤중에 갑자기 놀라 깨서 보면 너무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참 잔인하게도, 너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분명 현우도 볼텐데..많이 서운할텐데..내가 평생 그렇게 그 기억에 매여서 장현우라는 사람한테 매달려 그렇게 사는걸 원하진 않을테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행복한걸 보면 많이 섭섭할텐데.. 라는 생각때문에 잦게는 일주일에 한번, 보통 이주일에 한번씩은 꼭 새벽에 깨서 서랍장 저 안쪽에 넣어둔 장현우와 내가 같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찌보면, 내가 현우의 못다한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건데도. 그때 사고를 당해야했던건 장현우가 아니라 윤두준 나였으니까. 근데 하필, 현우가 내 앞을 막아서서 그 일이 일어났고, 난 그때 죽었어야했는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현우가 나한테 주고간 삶이라는 선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했다. 4년전 12월 29일, 현우의 생일날. 그때 그 장면이 필름 끊기듯 부분부분 기억나긴 하지만. 기억나는 그 것들은 모두다 선명했다. 바로 어제의 기억처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너무 생생해서 내 목을 죄여오곤 했다. 내가 신호등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아니 좀 더 빨리 현우가 왔었더라면, 아니..그때 그 곳에서 파티를 해주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자동차가 그 곳을 지나지만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바뀌어 있었을까.. 나도 모르는 새, 울고 있었다. 나는 장현우에 대해서 생각하면 소리내어 크게 울수 없었다. 현우가 사고 당했던 그 현장에서도, 병원에 실려가는 내내,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도, 화장하는 그 순간, 납골당에 안치하는 그 시간 까지도 나는 울 수 없었다. 현우의 부모님께서 내 옷깃을 잡고, 나를 흔들고 뺨을 때리고 원망한다며 내 가슴팍을 두들겨 팼을때도 나는 울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 아들이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내 아들 생일을 니녀석이 챙겨주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니가..너같은 새끼가 신호등에 나와서 그 길을 건너지만 않았어도!!내 아들 저렇게 안됐어!!! 내가 평생 아끼면서 키운 애야! 너는 친구를 잃었지만 난!!!! 난 스무해동안 품어온 아들을 잃었어!!!!!! 너때문에!!!!!!!! 내 아들이!!!!내 아들 장현우가!!!!!! 너..] 내 멱살을 잡고 오열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현우의 어머님의 말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 목소리, 그 소리가 유리조각이 되어 내 머릿속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나는 그 기억을 되살리자마자 관자놀이가 깨어질듯 아파와서 너무 아픈데, 아픈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엎드려버렸다. 나를 원망하던 그 눈빛, 눈엔 모든 실핏줄이 다 터져 저러다 피눈물이 나진 않을까 싶을정도로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셨던 분이셨다. 우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 계속해서 핏줄만 터져 얼마나 슬퍼야, 그 슬픔이 얼마만큼돼야 눈물이 나오지 않을정도가 되는지, 나는 그때 현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시고 졸도해버리시는 바람에 나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그때 현우의 아버지께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울 자격이 없어서 울 수 없었던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즈막히 말씀하셨었다. [니 잘못이 아니야. 죄책감 갖지마. 내 아들의 운명이었을테니까. 힘들겠지만..다 잊었으면 좋겠다. 애 엄마도..그게 진심은 아닐거야. 상처..받지 마라. 대신 사과한다. 미안하다.] 고개를 들었을때, 아버지는 투명한 안경너머로 가득 고여있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셨다. 그렇게 현우의 화장날, 그 시간이 끝나고 나는 내 집으로 가서 차마 혼자 그 끔찍한 시간들을 보낼 자신이 없어서 준형이네 집으로 가서 정말 하루하고도 이튿날 반을 잠만 잤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잤는지 몰랐지만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준형이는 내가 32시간을 꼬박 잤다며, 밥도 먹지 않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정말 죽은것 같이 잤다며. 난 니가 조금 더 잤으면 혼수상태로 119 부르려고 했다고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직접 겪은 일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모든건 다 꿈이었다. 현우와 내가 단 둘이 바닷가에 가서 노는 꿈을 꿨다. 같이 수영도 하고, 밥도 해먹고 서로 팩 해준다면서 이상한 얼굴 만들어놓으면서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내내 웃고만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 챙겨주지 못했던 생일도 케익을 사다가 조촐하게 챙겨주고 현우가 늘 갖고싶어했던 캘빈클라인 은색 메탈시계를 한달동안 알바해서 선물로 주고, 또 그 선물을 받은 현우는 입이 귀에 걸려 함박웃음을 짓는... 근데..현우가 갑자기 점점 희미해져서, 얼굴은 웃고 있는데 점점 멀어지고 유령처럼 희미해져서 나는 그 바람에 눈을 떴고, 그 시간이 내가 잠에 든 시간으로부터 32시간째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자마자 귀를 통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고마워. 지켜줄게. 미안해.] 그때서야 나는 침대에 앉아 소리내어 엉엉 울었던 것 같다. 환청이겠지만, 현우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린 순간, 고맙고 미안하다는 그 말에 나는 미안해서 울 수 없었던, 겨우겨우 꾹꾹 참았던 내 울음이 결국 바깥으로 터져버렸고 죽은듯이 자던 내가 일어나자마자 우니 용준형은 그때 내가 미친줄 알았다고 했었다. 드디어 정신줄을 놓은건가 싶었다고. 내가 그렇게 삼십분도 넘게 집이 떠나가라 울고 나니, 용준형은 그때 딱 한마디 헀었던 것 같다. [밥먹자.] 그 어떤 말보다도, 내가 살아있다는걸 각인시켜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요리 솜씨가 수준급인 준형이의 밥상을 받아들고 정말 며칠 굶은 짐승마냥 게걸스럽게 밥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 시간 그 이후부터, 준형이와 나 사이엔 서로 묻을 수 밖에 없는, 입밖으로 내뱉어서는 안되는 사람 한명이 생겨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깨질듯 아픈 머리때문에 소파에 엎드려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당연히 용준형일거라 생각한 나는 겨우겨우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는데, 생각도 못했던, 생각날 틈이 없었던 요섭이었다. 「가져갈 물건도 별로 없어서..오늘 집에 혼자 갈게! 안데릴러와도 돼!」_양요섭 나는 문자를 칠 힘도 없어서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형 지금 출발하니까 학교 안에서 좀만 기다려." 「아니야!!! 나 진짜 괜찮은데. 오늘은 혼자..」 "10분이면 가니까 꼼짝말고 기다려." 뚝.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자마자 시야가 거멓게 변하면서 순간 휘청댔지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소파에서 그러고 있었던게 몇분 안있었던거 같은데 거의 3시간 이상을 내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도 놀라서 차에 타자마자 그냥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늘 나한테 연말이란건 끔찍한 시간일뿐이었다. 남들은 연말이다 뭐다해서, 해돋이도 보러가고 임진각이니 보신각이니 이런데 가서 새해맞이 종소리도 듣고 각자 여행도 가면서 새해 다짐도 하고 그런다는데 내 연말은 정말 늘 아프기만해서 항상 새해를 고통속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그런건 이번해 까지만 하고 싶었다. 내 옆에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현우한테 못했던걸 다 해줘야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그 아픔을 다시 느낄 순 없으니까 나는 정말 이번까지만 이렇게 힘들어하는거라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그래도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을텐데, 늘 건강해도 오늘만 되면 아픈걸 보면 머리부터 마음 속까지 뼈저리게 다 기억하는거 같은데 그걸 어떻게해야하나 싶었지만 일단 나는 요섭이를 통해서 차차 치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작년같이 몸져누워있을만큼 아프진 않은걸 보니 이미 낫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지만. 차에 타면 나는 히터부터 켜는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아 한겨울에도 웬만해선 보일러도 별로 안켜고, 히터도 안켜는 사람인데 누구 덕분에 올 겨울은 아주 훈훈하게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난 늘 그랬듯이 3단으로 틀어놓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갈 수 있게 액셀레이터를 밟았고 교문앞엔 정말 짐이 없는지 책가방 하나만 달랑 매고 오들오들떨며 기다리는 요섭이가 보였다. 바로 차에 타면서 춥다라는 말을 하는 요섭이를 한번 본 나는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고 학교서부터 집에 도착할때까지도 요섭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는게 더 어울리겠지만. 영문도 모르고 답답해할 요섭이한텐 미안했지만, 내 생각이 정리가 되면, 그때 좀 더 차분하게 말을 해주기 위해 나는 말을 아꼈고, 바로 준형이네 집으로 가기 위해서 지하로 들어가지 않고 지상에서 차를 대놓고 요섭이를 내려주었다. "..먼저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어. 약속있어서 아마 오늘 늦게 들어올거야. 어쩌면 못들어올지도 모르니깐 기다리지말고 공부 다 하면 먼저 자." 최대한 따뜻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를 아련하게 쳐다보는 요섭이의 표정때문에 나는 더 차가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내 차가운 말투에 또 상처를 받았는지 울상이 되어버린 요섭이는 아무말도 없이 내 차에서 내렸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오른쪽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요섭이는, 멀어져가는 차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시선을 거둬버렸다. 미안한데..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요섭이의 감정까지 세세하게 살펴줄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참 이기적인 인간인 것 같다. 딩동- 준형이는 신사동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산다. 준형이의 부모님께선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시는데, 말이 좋아 작은 중소기업이지, 대한민국 대기업에 하청을 넣는 무시못할 중소기업의 사장님이 준형이의 아버지이시다. 근데 준형이나 나나 집안 배경이 어떻든 그런것에 구애받는 성격이 아니기에 어쩌면,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만나면서부터 마음이 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형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는것을 원해서 아주 피통 제대로 싸면서 3년 내내 공부에 매진한 끝에 연세대 경영학과 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아냈고, 그는 그 통지를 인터넷을 통해 보자마자 아이처럼 엉엉 울었었다. 상대적으로 같이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내가 죽자사자 공부에 매달린게 아닌 어떻게 보면 돈을 처발른 결과였기에 나는 그냥 밍숭맹숭했다. 합격한 기쁨이 어떤건지도 잘 모르겠고, 하라는대로 하는 꼭두각시 인생이었을뿐이니까 그때까지만해도. 뭐, 그렇게 어떻게 하다보니 3년내내 같은반에, 이젠 대학교까지 같이. 그것도 과 동기로 다니다보니 내 가족들보다 용준형이 나한테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내 인생에서 7년이라는 시간동안 희로애락을 같이 한 유일한 사람이 용준형이었으니까, 그건 용준형한테도 내가 마찬가지겠지만. 나한테 용준형은 어떤 의미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복잡해서 대답 못할것이다. 가족이기도 하고 친구이면서도 동반자, 소울메이트? 그래. 소울메이트 정도가 딱 맞을 것 같다. 평생을 같이 갈 친구.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피를 나눈것보다도 더한 것을 나눈 사이인 나와 용준형은 정말 질긴 사이였다. 내가 가장 힘들때, 기쁠때를 늘 같이 해주었으니까. "왜이렇게 일찍왔어?!" "그냥.."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깔끔할수가 있을까, 싶을정도로 정리정돈도 잘하고 아까도 말했듯 요리솜씨도 일품인 용준형은 늘 완벽했다. 항상 자기 컨트롤하고, 다스릴줄 아는 사람이었다. 속도 깊고 정도 많고 자기 프라이드도 강해서 항상 닮고 싶은 친구였다. 부럽기도하고 멋지기도 하고. "안주로 뭐가 좋냐? 매운탕?" "그냥 아무거나해 새끼야." 나는 평소에 욕을 잘 하지 않는다. 사실 욕을 한다는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요섭이가 욕할때마다 혼내고 그랬었는데 이상하게 준형이랑만 같이있으면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욕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뭐 욕이라는게 사람 기분 나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친근함의 표시정도? 나는 가끔 우리집보다도 여기가 훨씬 편했다. 그냥 작은 거실 하나에 방 두개 있는 너무 평범한 집이었지만, 준형이네 집 소파에 드러누워 리모콘으로 tv채널이나 뒤적거리고 있으면 꼭 부엌에서 맛잇는 냄새가 솔솔 풍겨서 마치 시골집에 온 것 같았다. 굳이 뭔가를 해먹어야겠단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뚝딱 맛있는 밥이 차려져 나와서 그렇기도하고 많이 편하기도 하고.. "..그럼 그냥 김치찌개나 해서 먹자. 너 밥 안먹었지? 그렇게 나 힘든사람이오..하고 티내고 다녀야되냐? 수염도 안깎았구만? 너 그래놓고 꼬맹이 얼굴 어떻게 봤냐 미안해서." "안그래도 죽을거 같다." "참..너같은 새끼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싸가지도 없지, 제멋대로에..말은 또 따뜻하게 할줄을 아나.. 맨날 잔소리에, 명령에..지겨워 윤두준. 어우." 바로 소파에 드러눕는 내 엉덩이를 발로 차버린뒤 부엌으로 들어간 준형이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핏-하고 웃었다. 이런게 일상이었다. 아주 가끔 소소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일상. 요즘은 요섭이랑 지내느라 준형이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살지만, 더군다나 내가 학원을 그만둔 이후로 더 얼굴 보는게 힘들었지만 언제봐도 준형이는 참 정겨웠다. 준형이 성격도 나랑 비슷해서 이러쿵 저러쿵 손발 오그라드는말은 잘 못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말투도 약간 어눌해서 카리스마도 별로 없고..근데 또 밖에 나가면 용칼마 라고 불려서 내가 많이 비웃고 다녔었는데. 어쩄든 할머니 같은 존재다 용준형은. 할머니가 있어본적이 없어서 이런게 할머니 같은게 맞는건가 싶긴하지만 뭐 대충 동화에서 읽으면 마음 편안해지고 상처 치유해주는 역할로 나오는게 대부분 할머니길래..나는 그 이후부터 용준형을 내 할머니로 생각하고 있다. 뭐 하는짓도 어지간히 늙다리기도 하지만. "야. 야. 그새 잤냐?" 작은 원목 테이블에 어느새 술상을 차려놓은 용준형은 소파위에 엎드려있던 내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고 그 바람에 일어난 나는 그 몇분사이에 잠들었던 내가 웃겨 부스스하게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았다. "너 오늘 밥도 제대로 안먹었을거 같아서 밥도 좀 했으니깐 밥부터 먹고 술을 처먹든 뭘 처먹든 니 맘대로 해라. 빈속에 술마시면..너 내일 뒤진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마음이 고마워 눈을 대충 비비고 앉아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쌀밥에 무작정 숟가락을 집어넣어 크게 한술 떴다. 아침엔 정말 밥을 먹고 있다는 자체가 고역이었는데 웬일인지 밥이 꿀처럼 술술 잘도 넘어갔다. 용준형표 김치찌개가 맛있어서 그런가..나도 집에서 김치찌개 만들때 내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용준형 이새끼는 여기다 뭘 넣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이 맛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에이씨. "나중에 너 요리책 하나 만들어라. 나는 왜 집에서 아무리 만들어도 이 맛이 안나지?" "야. 한국음식은 손맛이 중요한건데..니까짓놈이 뭘 알겠냐..그냥 닥치고 쳐먹어라." 특유의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며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꿀꺽 하고 마시는 용준형의 모습에 나도 지금 당장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정말 완전 빈속인데..내일 속 뒤집어질거 생각하니까 끔찍해서 그냥 잠자코 밥이나 먹었다. "..꿈에 현우가 나왔어 오랜만에. 그놈의 새끼는 맨날 너한테만 가는줄 알았는데 나한테도 오드라. 그새끼도..아나봐. 너 다른 사람 만나기 시작한거..말 한마디라도 어쩌고 저쩌고 해주고 가면 오죽 좋아? 그냥 병신같이 계속 웃는거야. 답답한새끼. 살았을때도 그렇게 답답하더니 어떻게..아직도 답답하냐.. 근데 웃는게 꼭..너 축복해주는거 같아서 일어나니까 기분 찝찝하드라." 김치찌개 한숟갈을 안주삼아 먹으며 잠자코 밥그릇에 코박고 밥만 먹는 나를향해 용준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니가 맨처음 나한테 니네 꼬맹이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을때..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그랬었는데..한참 생각하니까 기뻤다? 나는 니가 평생 장현우만 끌어안고 살면 어떡하나.. 물론 잊을 수 없는 상처겠지만 그래도 계속 그렇게 돌아올수 없는 사람 품에 안고 살면 어떡하나 싶었단말야.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중매설수도 없고. 근데 니가 꼬맹이가 신경쓰인다고 했을때..마음이 놓였어. 니가 이제야 좀 살수 있게 됐구나 싶어서." "..병신새끼." 밥 한그릇 뚝딱하고 나도 소주잔을 내 앞에다 놓고 소주를 가득 따라 쭉 들이켰다. 술을 즐겨마시는 사람은 아니지만 참 오늘같이 기분 뭐같을땐 소주가 딱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을만큼 쓰고, 취하면 아무생각도 안나게 해주니까. "..근데 너 그거 아냐? 현우..그자리에서..바로 죽은거 아니다?" 처음..듣는 얘기였다. 나는 현우가 저 멀리, 거의 십미터 이상은 날아가서 바닥으로 떨어졌을때 바로 그자리에서 즉사했다고 들었다. 근데....뭐? "..일분? 그래..한 일분 정도..있다가 죽었어. 그게 남들이 말하는 즉사겠지만 분명..현우가 어떤 말을 했었거든. 내가 제일 빨리 달려갔었잖아. 근데도 잘 안들렸어. 입모양을 봐도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잊고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알겠드라." "..무슨..말인데." "미안해." 또렷한 눈을 하고서 나한테 말을 하는 용준형의 얼굴만 몇초간 멍하니 보다가 허-하고 헛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리고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고 눈이 점점 뜨거워지는게 아무래도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쪽팔리게. "..씨발..그새낀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대체." "..너는 못봤지. 그 눈. 현우새끼..그 눈..눈물이 가득 고였는데..실핏줄 같은거 다 터지고 뭐 이미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러서 만신창이가 된 그 상태에서 눈에 그득 고인 눈물이 떨어지니까 그제서야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이는데..뭔가를 찾는 눈빛이었어. 참 강렬했었어. 마지막이라는걸..지도 알았었나봐." 또다시 머리가 미칠듯 아파왔다. 술이 넘어가는 목구멍은 마치 불에 타들어가는것처럼 뜨거웠다. 견디기 힘들만큼. "...좆같네." "..뭐 인생이 원래 다 좆같은거지." 나는 용준형과 마주앉아 장현우 얘기를 할 수 있다는게..그럴 수 있을만큼 내 안의 내공도 쌓였다는 것에 놀라 웃음밖에 안나왔다. 평생 할 수 없는 얘기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올해 이렇게 얘기를 했으면, 내년 내 후년엔 웃으면서 추억 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참..인간이란게 이렇게 간사할 수가 없다. "..그때도 말했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대체 양요섭 어디가 그렇게 좋냐? 현우랑 닮은거라곤 단 하나도 없던데." "..그래서 좋은가봐." "뭐?" "..현우랑 뭐 하나라도 닮은게 있었음..걔 볼때마다 장현우 생각났을테고.. 일년 내내 오늘같이 살았을텐데..요섭이는 현우랑 닮은게 단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장현우 생각 안할 수 있어서 좋다." 내 말에 준형이는 또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어느새 두병째. "소개 안해줄거냐." "조만간.." "..너 그럼 이번해는 건너 뛸거냐." 뭘 건너뛰는건지 난 잠시 멍해있다가 다시 소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같이 갈거라니까. 1월 1일날." "..뭐 어떻게 얘기할건데? 어디서부터?" "몰라. 그냥 생각나는대로. 현우랑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친해지고 어떻게 사귀다가 어떻게..된건지." "..참..장현우 그새끼는..평생 짐이다. 짐. 딴사람이랑 나눠질 수 있는 짐을 지어주던가.. 나쁜새끼. 내가 언젠가 그새끼 옆으로 가게 될 날되면 가서 따질거야. 나랑 윤두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분명 그냥 또 웃겠지. 에라이 병신같은새끼." 나는 김치찌개를 먹다가 속이 좀 쓰린거 같아서 잠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주량도 별로 안돼서 벌써 취한건지 자꾸만 몸이 휘청댔다. 정신도 휘청대는거 같고. "..너는 연애 안하냐 새꺄." "너같은 꼴 당할까봐 무서워서 못하겠다 새꺄." "..좆같은 소리하고있네. 너도 여자를 찾든 남자를 찾든 좀 만나봐라. 그나이 되도록 혼자가 말이 되냐." "..별로 관심없다. 꼭 만나야되는것도 아니고..난 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도 버거운 사람이야." 별 시덥잖은 말을 하는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평생동안, 우리는 장현우에 대한 진짜 얘기는 하지 못할것이란것을. 그건 서로한테 상처였으니까. 현우에 대한 얘기는 나누지만, 그건 가짜 얘기였다. 진짜 얘기는. 진짜 속마음은 정말 속마음이라 겉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그걸 겉으로 내보이는 순간 서로 상처를 입을테니까. 그리고 지금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나나 용준형이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기엔 이미 글러먹은 것 같았다. 무슨놈의 인생이, 그렇게 오래 살진 않았건만 이따위로 좆같을 수가 있는건지.. 나는 용준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냥 그대로 눈을 감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23. _윤두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야. 니네집 가서 자!!!" 내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임을 느끼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내 눈 앞에 있는건 용준형의 발. "..몇시냐." "일곱시." "..좀 진작에 깨우지 새끼." "뭐!? 뭐 이딴놈이 다있어. 집에가서 구질구질하게 혼자 해장하지말고 여기서 한술 뜨고가." 나는 순간 집에 혼자 있을 요섭이 생각이 났지만 어차피 못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했으므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준형이가 부엌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도 하고 양치도 했다. 뭐 양치야 어차피 얘네집에 내 전용 칫솔이 있었으니깐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쨌든. 떡진 머리도 대충 물을 묻혀 정돈한다음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혼자 바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음식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집에서 음식할때 요섭이가 내 등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어제는 하루종일 장현우 생각으로 머리가 뽀개지고 죽을거 같았는데 하루 지났다고 어떻게된게 현우 생각은 요만큼도 안나고 온통 양요섭 생각으로 가득찼는지.. 진짜 내가 병신은 병신인것 같다. "야. 먹어." 고춧가루 팍팍 뿌린 콩나물국을 끓였는지 내 앞엔 늘 먹음직스러워보이는 하얀 쌀밥과 국, 그리고 시금치무침이라던지 김이라던지 그냥 늘상 먹는 반찬들이 올라와있었다. "..맛있네." "그럼 당연히 맛있지. 누가 끓인건데." 지가 생각해도 멋쩍었는지 피식-하고 웃으며 내 앞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말 없이 밥만 먹는 우리. "나는 오늘 갈거다. 현우한테." "..어." "걔가 바나나 좋아했었지? 그래서 맨날 사갖고 가긴했는데..좀 지겨울거 같아서. 걔가 또 뭐좋아했었냐." "먹는건 다 좋아했지. 특히 니가 해주는 밥을 제일 좋아했었는데. 아,맞다. 걔 딸기주스면 환장했잖아. 왜 기억안나냐? 그때, 학교 앞 생과일주스집에서 딸기주스 먹고 싶은데 그날 지갑을 안갖고온거 모르고 들어가서 시켰다가 돈 없는거 그제야 알고 존나 당황하고 있는데 거기있는 여자애들이 다 사준거." 내 말에 용준형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푸학-하고 웃으면서 박수까지 치고 난리가 났다. 뭐야 이새끼. "아 맞다!! 맞다 그랬었다. 그래서 걔 딸기주스 여덟잔인가 갖고 나오지 않았냐? 그때 우연히 나랑 너랑 길 가는데 마주쳐서 걔가 나눠주고..질릴만도 한데 그걸 계속 먹었었지.. 징한새끼. 그러고보니까 걔도 진짜 인기가 많은 새끼였어. 하긴 잘생겼으니까 뭐." "내가 걔 여자애들한테 인기많은거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데. 야 솔직히 걔가 나 좋다고는 하지만 사람 맘이란게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거고 그리고 진짜 신촌일대에서 이쁘다하는 여자애들은 다 걔한테 대쉬했었잖아. 인기 많은거 가지고 뭐라고도 못하고 진짜..그때만 생각하면 죽을뻔 했다 내가." "..병신새끼. 너도 만만치는 않았잖아? 현우가 너 여자애들한테 고백받고 선물받고 그러는거 보면서 너한테 말은 못하고 계속 나한테 얼마나 끙끙댔는데. 내가 인기많은 친구 두놈을 둬서 덕분에 내가 선물도 좀 챙기고 그랬긴했다만." 용준형은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웃긴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밥을 먹었다. "그랬어 장현우가? 전혀 몰랐는데. 난 내가 여자애들한테 선물받고 그러는거 현우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병신. 걔가 너같지 않아서 선물 많이 받는거 고백 받는거 마음에 안드네 어쩌네 말은 못했지. 속으로 끙끙 앓았다고. 너 선물 받는 장면을 본게 한두개가 아니라고 나한테 그랬었는데 무슨. 너는 참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는 별로 없는거 같다." "..아닌데..나 그래도 그거 선물들 다 버렸어. 그 자리에서는 아니었지만." "뭐 둘다 그랬으니까 계속 사귄거 아니겠냐. 그럼 이번에는 딸기주스랑..아 맞다 그새끼 치즈케익 진짜..까먹을뻔했다. 치즈케익 두개 사갖고 가야겠네." 현우를 떠올리는것조차가 아픔이었는데, 그건 어제도 마찬가지였는데 장현우라는 사람에 대한 처음부터 끝까지의 기억을 나와 용준형은 공유하고 있어서 아주 가끔은 떠올리면 웃음이 지어질만한 대화를 용준형과는 나눌수가 있었다. 아프지 않게. 오히려 행복하게. 내 상처가 가끔은 아픔이었다가 가끔은 행복이라는건 모두 다 용준형이 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 학원 언제 그만둘거냐. 우리 꼬맹이 우리과 들어오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꼬맹이 학교 들어가게되면 나도 복학할 생각하는데 너도 같이 복학하지?" "군대도 갔다와야되고..그냥 여기서 일년이나 반년정도 더 있다가 돈좀 모아놓고 군대 갔다온 다음에 복학할 생각이다. 근데 요섭이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걔 나한테 정치외교학과 갈거라고 그랬었는데..." "꿈 바뀌었나보지 뭐. 몰라 우리과 들어오겠대. 귀엽지않냐. 그래서 요즘 내가 맨날 하드트레이닝 시키는 중이다. 수능 끝나자마자 그때부터 장난아니게 시켰거든? 하루에 두세시간 재우면서 맨날 숙제만들어주고 옆에서 공부하는거 지켜보고 내가 그러고 있어. 근데 잘 따라온다. 대견하게." 밥을 거의 다 먹은 나는 마지막 한숟갈을 입 안으로 밀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이에 용준형은 더럽다며 휴지랑 물을 건넸고 나는 싱긋 윙크를 날려주었다. 덕분에 나한테 돌아온건 용준형한테서 짓밟힌 내 발뿐이었지만. "아직도 그렇게 계속 공부해?" "어. 어제도 공부 하고 자라고 시켰으니까 지금쯤..뭐 나 없다고 늦잠 자겠지. 근데 진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내가 무슨 부모라도 된것 마냥 이것저것 안시키면 불안해서. 정작 대학가는 본인은 불안하지 않은거 같은데 내가 더 못살겠어서 계속 시키고 시키고..나야 맨날 운동하고 그랬으니까 며칠밤 새도 상관은 없는데 요섭이는 애가 골골대는게..조만간에 보약도 좀 지어줘야될거 같고.." 내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용준형을 보자 준형이의 시선은 내 손에 박혔다. "너..그거 반지 요섭이랑 한거냐?" "어? 아..어. 옛날에 현우랑 커플링 못한게 천추의 한이 돼서..이번엔 도망 가지 말라고 내가 족쇄 채워놨다. 이쁘지." "니가 골랐지? 딱 니가 고른거 같다. 뭐가 그렇게 심플하냐." "화려한거 질색이다 나는." 어련하시겠어요. 라는 말과 함께 준형이도 밥을 다 먹었는지 일어나서 치우기 시작했고 밥 얻어먹은것도 고마운데 가만히 있긴 미안해서 나도 부엌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채워넣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커피야 어차피 인스턴트 부욱 찢어서 탈탈 털어넣으면 되니까. "일찍 안가봐도 되냐." "좀 더 자라고 냅두지 뭐." "전화라도 해보지?" "애 깨잖아. 미안하기도 하고..세상모르고 잘텐데." 내 말에 그냥 나를 흘깃 쳐다보고 마는 준형이는 능숙하게 설거지까지 빠른 시간내로 마쳤다. 딱 내가 커피를 타서 식탁위에 한잔을 내려놓고 내껀 가지고가서 소파에 앉아서 먹으려고 하는 그 타임에 말이다. 혼자 산지 거의 6년? 얘는 고등학교때부터 혼자 올라와서 생활했으니까 올해까지 따지면 7년이라 그런가 살림엔 척척이다. 집안도 어떻게 된게 밀린 빨래도 없이 깔끔한게..누군진 몰라도 용준형한테 시집가는 여자는 참 복 터진거다. 근데 정작 본인이 연애니 결혼이니 이딴거에 관심이 없으니..내가 소개를 해주고 싶지만.. 남 연애사에 끼어들정도의 정신이 있지도 않고 그럴만한 여력도 없어 진작에 포기해버렸다. "같이 복학 하자. 나 혼자 다니면 심심한데.." "니네 꼬맹이랑 같이 다녀 새끼야." "야. 걔는 일학년이고 나는 이학년 복학인데!!!" "뭐가.그래서 뭐. 됐어. 나는 좀 더 할일이 많아. 그리고 학교 복학해봐야 그거 졸업하고나면 바로 아빠 회사로 들어가야되는데..난 좀 더 내 인생 즐길거야." "아..나쁜새끼.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응." 굳이 저 얄미운 대답까지 하면서.. 나는 집에 있을 요섭이도 걱정이 되고 이래저래 가봐야될 거 같아 커피잔을 싱크대 안에다 내려놓고 소파 팔걸이에 걸려있는 내 점퍼를 입었다. "간다. 자주 연락할게." "어. 그리고..이제 현우 생각은 하지 말고 니 인생 살았음 좋겠다. 죽은 사람 붙들어봐야 뭐가 나오겠냐. 걔한테 미안해하지도말고 그냥 너는 너대로 행복하게 살아. 그러라고 현우가 너 대신..그렇게 된거 아니겠냐. 4년동안 힘들었음 됐어. 알았냐 내 말뜻이 뭔지?" "어. 그래. 간다." 나는 그 길로 바로 준형이네 집에서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용준형의 그 말이 생각이 나서 좀 답답하기도 하고 안아팠던 머리가 다시 뽀개질것 같기도 하고..기분이 이상했다. 친한친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특히 그 모든걸 같이 한 친구한테 그 얘길 들으니까 마치 현우한테 직접 들은거 같고..그래서 내가 그렇게 싹 잊고 살면 안된다는건 알지만 그래도 이제는..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싶었다. 그러면...안되나... ** 나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왠지 모를 썰렁함을 느꼈다. 집에 아무도 없는것 같은..그러니까 며칠동안 사람없이 빈집이었던것처럼 황량한게..느낌이 안좋았다. 뭐지..이건.. "양요섭!!!!" 나는 일층에 없길래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 내 방문을 열었는데 방안엔 차가운 한기만 돌고 침대도 가지런하게 정돈된게..딱 어제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교복도 안보이고 책가방도 없고... 나는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이렇게 말도없이 사라지는거, 말도없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거.. 아무래도 그때이후로 나한테 생긴 트라우마인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연락이 와있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납치라도 당했나. 아님 내가 서운하게 해서 이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자기 집으로 가버렸나. 아님...사고..를 당했나... 나는 무작정 요섭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만 일분이 넘는 연결음에도 통화는 되지 않았고 나는 대체 어떻게해야되는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서서 계속해서 안받는 전화만 계속 해댔다. 이렇게 아무말없이 사라질 애가 아니다. 항상 어딜 가더라도 문자를 하거나 미리 말을 하거나 전화를 하는 앤데 이렇게 말없이 없어질 애가 아닌데.. 내가 어제 하루종일 서운하게 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렇게 사람 걱정시키고 이러는 애는 아닌걸 내가 아는데..대체 어떻게 된건지.. 그냥 잠깐 어디 나간거라고 생각하기엔 집이 너무 썰렁했다. 사람의 온기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추운걸 워낙 싫어해서 지가 알아서 보일러를 틀고 끄고 하는 애였는데.. 나는 기광이와 같이 있지 않을까 싶어 전화를 해보려고했지만 이기광의 전화번호는 내가 몰랐다. 대체..어딜 간거지. 나는 계속 전화를 걸면서 다시 집 밖으로 나가 주차했던 차를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일단 요섭이의 집으로 가보는 수밖에. 8:56am 이라고 뜨는 차 시계에 나는 절망했다. 꼬박 하루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하고 있는건지... 다행히 집에서 있었던거면 그래도 나을텐데..제발..제발.. 나는 요섭이가 집에 있길 바라며 계속 속으로 제발..제발 하면서 계속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준형이가 봤다면 뭐 고작 하루 없는거 가지고 그냥 어디 갔겠지. 들어오겠지. 뭐 그렇게 지랄을 떠냐. 라고 말하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내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던 사람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가 겨우 사랑하게 된 사람을 놓쳐버릴까봐 너무 불안해서 미쳐버릴것 같았다. 다른사람들조차도 내가 유난이라고 손가락질한다한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이러고 싶지 않아도 이렇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거였으니까. 무슨 생각으로 무슨 정신으로 요섭이의 집까지 다달았는지 기억도 안난다. 나는 무작정 차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러댔다. 「누구세요.」 "아..저 요섭이랑 좀 잘 아는 형인데..혹시 요섭이 집에 있나요?" 「도련님, 아예 짐 싸들고 친구 집에서 지내겠다고 나가셨어요. 왜요. 무슨일 생겼나요 혹시?」 "..아..아니요. 요즘 잘 연락이 안돼서 친구네 집에서 지낸다는거 몰랐어요.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나는..혹시나했던게 절망으로 바뀌자 그냥 요섭이네 집 대문앞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계속 전화를 해댔다. 제발 받아라..받아라... 이기광 전화번호라도 알아둘걸..여기에 없으면 요섭이가 갈데라고는 이기광네 집 일텐데.. 나는 문자를 보냈다. 전화도 안받는데 문자라고 보겠냐만은..그래도.. 「전화 받아.」 뭐 이따위 문자를 보내는가 싶었지만 난 지금 내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차안으로 들어갔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요섭이가 갈데라고는 없었다. 워낙에 길치인데다가 노래방이니 오락실이니 이런델 즐기는 성격도 아니어서 그냥 집-학교 집-학교 이렇게 오고가는 앤데..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이럴줄 알았으면 좀 따뜻하게 해주는건데.. 내가 너무 내생각만하고 내입장만 중요시했었다. 요섭이가 걱정하는거, 눈치보는거 생각도 안하고..나는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나를 옆에서 보는 요섭이는 생각도 안하고 그냥 난 나만 챙기기 급급했었다. 나는 너무 절망스러운 마음에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벌써 9시 20분이 넘은 시간에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수 밖엔 없어서 마지막으로 전화를 해보는데... 달칵- 「여보..」 "어디야." 나는 화가나면 오히려 목소리가 가라앉고 침착해진다. 지금도 그랬다. 전화가 연결 되자마자, 양요섭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지만 뒤늦게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또 목소리가 저렇게 가라앉아버렸다. 「..아..그러니까..」 "양요섭." 「..어 형..그러니까..내가..」 잠에서 방금 깬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친구네 집에서 잤는지 옆에서 아무도 안깨우니까 아홉시가 넘도록..남 걱정할건 생각도 안하고..저렇게.. 「야 양요섭!! 아줌마가 내려와서 밥먹으래. 아우..얼굴 개기름봐..좀 씻고!! 옷장에 니가 맨날 입었던거 그대로 있으니깐 씻고 갈아입고 내려와라. 비위 상하게 그 얼굴 그꼴로 그대로 내려오지 말고.」 수화기 너머로 이기광 목소리로 추정되는 남자애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렸고 나는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기광네 집에 있었으면 그래도 편하게 하룻밤 지냈겠구나..싶어서. 근데..화가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광이랑 같이 있어?" 「..어?..어..아..그냥 놀러온건데..어떻게 하다보니깐 잠이 들어서..」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그 목소리에, 표정까지 안봐도 뻔히 보였다. "거기 어디야." 「아니..내가 알아서 갈게!!금방 튀어갈테니까..」 "어딘지 말하랬다." 나는 이번기회에 이기광네 집이 어딘지 알아야될 필요가 있었다. 전화번호도 알아두어야겠지만 일단 집이 어딘지 알아야 이렇게 멋대로 없어져도 찾아가볼 수 있지 않겠는가. 요섭이가 우물쭈물거리며 주소를 말해주자 난 바로 네비로 찍었고 "지금 당장 짐 싸서 내려와 있어. 오분안으로 갈테니까." 나는 이기광네 집에서 샤워까지 다 하고, 걔네 집에 있을 양요섭이 입고 다니는 옷이나 속옷을 입게 하고 또 거기서 밥까지 먹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건 우리집에서 하는거지 이기광네 집에선 하는게 아니다. 나는 은근히 쓸데없는데 질투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쩄든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달려갔다. 참 내 연말은 지긋지긋하도록 끔찍하고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어제 술을 쓰러질때까지 쳐마시고 아직도 그 술냄새가 몸에서 진동하는거 같은데.. 어쨌든 거기다가 아직도 술때문에 골이 흔들리고 그러는 와중에 양요섭은 말없이 사라지고..걔 찾느라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보고싶었다. 사실 솔직히 내 마음을 표현하자면 지금 당장 요섭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루도 안되는 시간동안 못본거지만 그래도 힘들었던 어제를 보내고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행복하고 싶었다. 아까 용준형의 충고처럼. 어쨌든 네비가 가르쳐주는 길대로 최대한 빨리 날아가니까 커다란 단독주택 대문앞에 책가방을 끌어안고 동그랗게 쪼그려앉아있는 금발머리 남자애가 멀리서도 보였다. 어쩜 그렇게 동그랗게 작을수가 있는지 난 바로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일단 나는 화난척을 해야 다음부턴 이러지 않을거 같아서 요섭이 앞에다 차를 댄다음 조수석 창문만 열어 최대한 화난듯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타." 한눈에 봐도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요섭이의 표정만 봐도 알수 있었다. 여기서 잘 생각은 없었는데 깜빡 잠이들었고 일어나보니 그게 오늘이었다는것. 굳이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막상 아무일없이 말짱한 요섭이 얼굴을 보니까 마음도 놓이고 아까 그렇게 속탄것만 생각하면 원망스럽기도 해서 그냥 말없이 운전만 하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너 걱정할건 하나도 생각 안했어?" "..그냥..잠깐..누워있었던건데...그게 잠이 들어버려서...미..안..." 저럴줄 알았다. 미안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울기세였다 양요섭은. 정말 지금당장이라도 끌어안고 키스하고 그러고 싶은데 계속 꾹꾹 눌러참았다. "이기광이랑 같이 잤어?" "아니!!! 그새...아니..걔는 공부하다가 책상에서 자고 나는 걔 침대에서..." 침대? 나는 양요섭이 딴놈 침대에서 잤다고 생각하니까 또 갑자기 화가났다. 그냥 혼자 잤다는데도..왠지 이기광놈은 싫었다. 나랑 용준형이 친하듯 요섭이도 이기광이랑 친한건데도 왜 난 그게 그렇게도 싫은건지.. "...너까지 안그래도 나 지금 충분히 힘드니까..제발 보태지마." 요섭이의 얼굴을 보니까 순간 현우 얼굴과 겹쳐보여서 또 관자놀이가 콕콕 쑤셔댔다. 언제쯤이면 그 멍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장현우라는 기억이 언제쯤 편안해질는지... 머리가 아파오자 결국 안그래도 미안해죽겠는애한테 또 화를 내버렸고 요섭이는 말한마디 못하고 또 기가 죽어버렸다. 그럴생각은 아니었는데..내가 너무 병신같아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주지말자, 잘해주자, 이런 생각만 갖고 노력했는데.. 내 싸가지없고 이기적인 성격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나는 우리집 지하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가 단번에 주차를 시켰고 안전벨트를 풀렀다. 나를 따라서 벨트를 푸르는 요섭이를 본 나는 집까지 올라가는 그 충동을 참지 못하고 결국 요섭이의 입술에 내 입을 맞추어버렸다. 순간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에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원래 이렇게 충동이나 이런걸 자제 못하는 사람은 아닌데도 오늘따라 왜이렇게 힘든지, 사람 온기를 느끼고싶고 무엇보다 요섭이를 안고 싶어서 나는 너무 애가탔다. 그렇게 급할게 없는데도..왜이렇게 하나하나가 다 급한건지..천천히 해보려고 컨트롤을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가 않았다. 나는 자세가 너무 불편해서 조수속 오른쪽에 있는 바를 내려 아예 의자를 백팔십도로 젖혀버렸고 순간 당황하는 요섭이의 표정이 보였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그 위로 올라타 요섭이의 입술을 마치 잡아먹을듯 하면서 요섭이가 입고 있던 교복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차에서 이렇게까지 하는걸 원하진 않았지만 나도 나를 모르겠다. 정말 이건..아닌데..아닌데..싶지만 본능이 먼전지 손이 멈춰지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셔츠를 찢어버렸고 단추가 여기저기 튀어나감으로써 옷이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요섭이의 뽀얀 속살과 툭 튀어나온 쇄골. 나는 무작정 그곳에 입술을 대었다. "...형..." 요섭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이상해보였는지 내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기서 멈춰버리기엔 이미 반응이 온 내 몸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요섭이랑 있으면 이런 작은 충동을 쉽게 억제 할수가 없었다. 내가 그만큼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지만..또 다시 요섭이한테 미안한 일을 만들어버리고야 말았다. 나는 하얀색 러닝셔츠를 찢으려다가 이것마저 찢으면 안될것 같아서, 사실 잘 찢기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건 포기하고 요섭이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그의 쇄골에 계속 마크를 남겼다. 할수만 있다면 몸 이곳저곳 마크를 남겨 양요섭은 윤두준꺼다. 이렇게 도장 쾅쾅 찍어두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마음일뿐..현실은 다르니까 어쩔수 없어서 요섭이의 하얀 가슴팍에 빨간 꽃 잔치를 열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무슨 일있어?" 요섭이의 맑은 목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오자마자 나는 그의 입술을 또 막아버렸다. 요섭이의 입술은 말캉하고 젤리같아서 마냥 씹고싶고 깨물고 싶고 핥아먹고 싶었다. 그리고 요섭이가 립글로스를 바른다거나 챕스틱 같은걸 바르지도 않는데도 왜이렇게 입술이 단지 꿀을 먹는거 같아서 한번 물었다하면 나올 수가 없었다. 마치 옛날에, 어렸을적에 사루비아 라는 꿀나오는 꽃을 먹는것처럼 달달했다. "..사랑해.." 나는 요섭이의 귓가에 나즈막히 속삭여주었다. 사실 사랑고백은 나한테 익숙치 않은거였지만 꼭 이렇게 요섭이를 안고있을때면 그 말이 절로 절로 나왔다. "..사랑해." 난 또다시 이 말을 반복하며 요섭이의 귓볼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그의 귀를 괴롭히고 있는데, "..사랑해. 윤두준." 이순간만큼은 나를 형이라 부르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요섭이가 그래도 나이차이가 있으니까 애기로 보였던건 사실이었는데 지금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대 사람으로..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다는걸 느끼게 해주는 순간. "..한번 더.." "사랑해 윤두준." 나는 거의 정신을 놓았던것 같다. 나를 사랑한다는 요섭이의 말에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요섭이와 좀 더 깊은 사랑을 나눌뻔한걸 겨우 참았던것 같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건 사랑을 나누는 일을 아무데서나 한다는 것 이었으니까. 무조건 그런건 침대에서 해야된다고 생각했다. 내 욕망을 채우고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적이고 치욕적으로 만들 순 없었으니까. "..이젠..너만 사랑해." 이 말을 하는 나도 놀랐다. 항상 내 마음에선 70퍼센트는 요섭이가, 그리고 30퍼센트는 평생 지우지못할 낙인인 현우가 있었는데 그래서 요섭이를 사랑하지만 너만 사랑할 순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순간 현우한테 미안했다. 그래도..아까 준형이의 말처럼..나도 이제 남들처럼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겹쳐 들었고 현우를 향한 미안하단 말이 내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그치만 요섭이가 듣지 못한거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리고 난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의자를 원위치 해주고 아무렇게나 찢긴 교복셔츠가 너무 흉해서 내 점퍼를 벗어서 요섭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곤 요섭이의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앞머리를 곱게 정돈해주고 시선을 마주했다. 똘망똘망한 요섭이의 눈.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마치 우는것처럼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아 수십번 미안하고 수십번 고맙고 수백번 사랑스러웠다. "..미안해." 나는 바로 차에서 내려 요섭이가 옷을 대충 추스를때까지 기다렸다가 역시나 그렇듯 지퍼도 잠그지 않고 대충 차에서 내린 요섭이의 옷을 말끔하게, 그리고 춥지 않게 해준다음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올해만큼 힘들고, 올해만큼 고맙고 미안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젠 잊어야할, 그리고 어느정도 잊어버린 현우한테도 미안하고 고마웠고. 앞으로 내가 계속 사랑할, 평생 이뻐하고 좋아할 요섭이한테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나와 힘든때를 같이 해준 용준형한테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제 1월 1일. 이틀만 더 있으면 요섭이한테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소개해 줄 것이다. 요섭이도 아예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 있진 않으니까..많은 충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2010년 1월 1일부로 현우를 잊을 생각이다. 그리고 굳이 생각해내지 않는다면 저절로 생각이 나진 않아서, 그 사람한텐 미안하지만 요섭이랑 함께 있는 그 시간들이 너무 이쁘고 기쁘고 사랑스러워서 예전처럼 그렇게 늘 생각이 나진 않았다. 근데 앞으로 요섭이한테만 잘해주고, 요섭이만 사랑하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현우를 없애버려야했다. 그치만 12월 29일. 이 날만큼은..올해 그날은 나와 용준형이 같이 했지만 다가오는 해 12월 29일엔 나와 용준형, 그리고 양요섭까지 셋이서 함께 할 수 있도록. 이젠 아파하지 않고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도록..그렇게 할 것이다. 역시.. 사랑으로 받은 상처, 사랑으로 치료해야된다는 말이 딱인 것 같다. 지금 내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귀여운 요섭이만 생각하면 언제 아팠냐는듯 입가엔 미소가 저절로 지어져 있었으니까. 윤두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THE END #24. "어. 왜. 뭐?! 왜 안가는데? 현승이가 싫대? 그래서..니네 어떡할건데? 부산?! 아..알았어. 아냐. 나도 생각중이야. 괜히 거기 갔다가 들키면 어떡하나 싶고..미국은 재미도 없고.. 알았다. 끊어. 어." 나른한 1월 2일 오후. 아니..날씨는 나른한데 나는 참... 오늘도 피터지게 공부중이신 양요섭이다. 윤두준은 뭐하냐고? 옆에서 행여나 졸까봐 감시중이시지. "이기광?" 윤두준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무슨 책을 보는지 온통 영어로 된 걸 집중해서 읽다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어. 얘 미국 안가고 부산으로 놀러간대. 1박 2일 잡아서." "그래?" "..형. 그러지말고..우리도 그냥 간단한데 갈래? 미국은 재미도 없고..뉴욕은 무슨..사람구경하러 가는것도 아니고.. 뉴욕이나 서울이나 그게 그거잖아. 제주도..어때? 그냥 제주도 가자. 어?" 제주도를 가자는 말에 윤두준은 나를 힐끔보다가 아예 책을 덮고 안경을 벗은 다음 나를 쳐다봤다. "어머님이 너 부르신거잖아. 안가도 돼?" "안가도 돼. 말했잖아. 다들 일하러가는건데 그냥 생일챙겨주는거 생색낼라고 그러는거라니까. 그냥 제주도 가서 놀자. 그때 수학여행때 제주도 갔다왔는데 진짜 좋드라. 겨울이라 좀 추우려나? 근데 원래 바다는 겨울바다가 최고라던데..제주도 가면 안돼?"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자 윤두준은 내 머리에 콩-하고 꿀밤을 먹이더니 하던 공부나 마저하라며 구박했고 나는 입이 댓발 나와 삐죽거리면서 풀던 영어문제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제주도 가고싶은데.. 겨울이라 추워서 밖에선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그냥 바다보고..무엇보다 윤두준이랑 같이하는 여행인데 어딘들 재미없겠냐만은 사람 많은 미국은 싫었다. 그래도 제주도는 여름에야 사람이 많지만 겨울엔 꽤나 한적한 곳이니까..딱인데... "집중안해 양요섭?!" "...씨..."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딴 생각만 하다가 벌써 영어 지문 첫째줄만 세번째 읽고있는 중이었다. 제주도 진짜 가고싶은데..그때 카메라 샀던걸로 사진도 찍고...그러고보니까 사놓고 한번도 안썼잖아?! 아마 그 포장박스도 안뜯었을게 뻔했다. 돈아깝게.... "빨리 거기까지만 풀어. 맛있는거 해먹자." "뭐해줄건데?" "김치부침개." "그것도 할줄알아!? 우와!!!!" 내가 신기해하자 윤두준은 내 볼을 꼬집더니 마저 풀라며 내 뒷통수를 잡아 문제집쪽으로 머리를 향하게했고 나는 윤두준표 김치부침개를 먹을 수 있단 생각에 설레 정말 빛의 속도로 문제를 풀어냈다. 정말 날이가면 갈수록 요리 실력이 느는 윤두준의 모습에, 그가 차려주는 밥상을 기대하는것도 내 나름 생활의 즐거움이었다. "..용준형..부를까?" "..왜?" "준형이가 너 보고싶다고 그러기도 하고..사실 용준형새끼가 김치부침개는 제대로 부치는데.." "맘대로!!" 쪼잔한 윤두준은-이얘길 윤두준이 들으면 절대 안되지만-이기광을 싫어하지만 쪼잔하지않은 나는 용준형을 좋아한다. 사실..솔직히 질투가 안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서 윤두준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용준형이었으니까 그건 사실 질투도 나고 샘도 나긴 했지만, 용준형이 윤두준과 함께한 시간만큼 나도 윤두준과 같이 지낸다면 아마 용준형이 아는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될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용준형과 친해지기로 했다. 사실 멋진사람인것 같기도하고.. 많이 겪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학원 다녔을때 나의 담임으로써 겪어봤던거에 의하면.. 참 멋지고 좋은 사람인것 같았다. 약간 말투가 어눌해서 그렇지.. 뭐 그것도 매력이니까. 윤두준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용준형을 불렀고 마침 할일이 없었는지 알았다는 대답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재료는 다 있어?" "있...을걸." "..아 신난다..맛있겠다..." 나는 김치를 되게 좋아해서 김치로 만든 음식이라면 다 좋아한다. 김치볶음밥, 김치부침개, 김치찌개....뭐 그외 많은 음식들... 나는 생각만해도 배가고파서 배를 부여잡고 윤두준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이에 윤두준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나를 바라봤고 나도 그런 윤두준을 빤히 올려다봤다. "..밑에서보니까 에이..못생겼어." "뭐?!" "막..콧구멍도 이따만하구..얼굴도 대땅 커보인다..나는 얼굴 대땅작은데!!" 내 말에 윤두준은 완전 박장대소를 하면서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딱-쳤다. 사실인데!?!?!?!? "..이게..까불어." "내가 뭐!! 아..나 머리 다시 염색할까..나 지금 내 머리 자라는데.. 이거 다시 염색하러 가기도 귀찮은데..." "보다보니까 이뻐. 그냥 이걸로 냅둬. 미용실 갈 시간은 줄게." "뭐야. 돈 주는것도 아니면서 되게 인심쓰는척한다.." "돈 주면 돼?" "됐어! 아..배고파..." 내가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리자 윤두준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앉은자세에서 고개를 내리는데 한계가 있어 꽤 먼거리에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뭐..어쩌라고.. "뽀뽀." 윤두준의 말에 나는 괜히 그 사람이 너무 귀여워서 그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윤두준의 옆에 앉아 양볼을 꽉 잡고 입술을 맞췄다. 그치만 그냥 입술만 맞대고 떨어지자 윤두준은 내 눈을 바라보며 윙크를 날렸고 그건 내가 윤두준의 윙크에 약하다는걸 알고 일부러 한 술수였다. 그치만 안넘어갈수가 없는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고 윤두준은 내 허리와 내 뒷목을 잡으며 좀 더 안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나는 옛날부터 늘 느꼈던거지만, 윤두준과 하는 키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이런 입술이 마주칠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좀 듣기가 거북해서 그랬지 말캉한 젤리 먹는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고 좋았다. 정말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또 옛날부터 느꼈던거지만, 윤두준은 몰입을 잘하는거 같았다. 나는 키스를 하면 그냥 키스만하고 싶은데, 윤두준은 그게 아닌지 항상 나랑 키스를 하고 있으면 손이나 몸은 한단계 더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이미 그의 손은 내 옷속으로 들어와 내 맨허리를 만졌고 점점 몸을 기울여 나를 소파에 눕히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안넘어가려고 버텼지만 나보다 힘이센 윤두준이 언제나 이겨 난 늘그렇듯 결국 소파에 누워버렸고 윤두준은 내 몸에 밀착해 내 입술을 계속 먹을것처럼 했고 나는 그의 목을 꽉 감싸안았다. "..오늘은..여기까지." 내가 먼저 윤두준의 어깨를 밀어내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윤두준은 무슨 소리하냐며 다시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윤두준의 입을 내 손으로 막았다. "선생님 언제 올지 모르잖아." "근데. 뭐. 우리가 죄졌냐." "사람이 좀 부끄러운걸 알아라!!!!" 내 말에 윤두준은 장난기가 도졌는지 내 손을 지 손으로 잡아 포박하더니 내 얼굴 근처로 가까이 다가와 닿을듯 말듯한 거리에서 자꾸만 숨을 쉬어댔다. 간지럽게. "뭐해!!" 나와 윤두준의 콧등이 서로 부딪치고, 입술이 살짝 닿았다떨어졌다만 수십번 반복하는데 난 대체 지금 뭐하자는건지를 몰라서 확 밀쳐버렸다. "재미없거든요 이런건?" "..요새..기어올라 양요섭." 윤두준의 말에 나는 메롱 하고나서 부엌으로 가려는데 내 손을 끌어당겨 자기 허벅지 위에 나를 앉히더니 허리를 안전벨트마냥 꽉 잡아맸다. 그리고 내 등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너 대학가면 나도 복학할거야." "맘대루." "..너 대학가서 다른 새끼들한테 눈길 한번만 줘봐. 가만 안둔다." "아이고..윤두준씨 무서워서 바람이나 피겠나?" "절대 못피지."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에 내 입술에 쪽-하고 맞대어오는 그의 입술. 마치 기다렸다는듯한 동작에 웃겨서 그냥 웃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고있는게 맞긴 한가보다. 나는 윤두준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그 손을 바라봤고 윤두준은 그런 내 손을 꽉 잡았다. "바람은 절대 안되고, 딴놈한테 눈길도 주지마. 내가 하지말란건 다 하지마. 그냥..나만 믿고 살아." "..뭐야 이기적이잖아. 그러면서 형은 클럽도 가고 여자들도 만나고 그럴라구!!" "내가 너냐." 또 꿀밤을 맞은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고 윤두준은 소리없이 입으로만 웃으며 내 입술을 손으로 살짝 집었다. "얼른 너 수능 끝났음 좋겠다. 놀러가게." "맞다. 우리 그냥 제주도 가자!!! 나 공부때문에 거기 못간다고 하면 돼. 응? 가자. 기광이랑 현승이도 부산가서 놀거래. 우린 제주도 가자. 그때 샀던 카메라도 하나도 안썼으면서!!" "썼는데?" "언제!?" "너 자는 사진이 얼마나 많은데." "...몰카찍지마!!!!" "사진 보여줘?" "됐어!!! 내가 카메라 찾아내서 다 지울거야!" "찍자마자 컴퓨터로 옮겼는데 어쩌나?" 윤두준이 너무 얄미워서 하마터면 확 얼굴을 때려버릴뻔 했다. 으 너무 얄미워. 하여튼 나 갖고 노는 사람중 일등이다. 들었다 놨다.. "알았어 제주도 가. 대신 공부할거 싸갖고가." "아진짜!!!너무해!!!" "스읍. 내 후배가 되는게 그게 그렇게 쉬운일인줄 알아?" "...짜증나.." 내가 또 삐지자 윤두준은 내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선물 갖고 싶은거 있어?" "...없는데..." "그럼 내가 알아서 산다." "맘대루." 윤두준은 내 말에 알았다며 다시 내 등에 얼굴을 묻었고, 등을 통해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뭔가..따뜻한게..기분도 좋고....나른해지고... 이렇게 가끔씩 있는 이런 한가로움이 너무 좋았다. 딩-동 요즘 공부때문에 잠을 못자서 그런가 초인종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듯 눈을 떴다. 어느새 자고 있었는지 내가 윤두준의 어깨에 기대어 나란히 앉아 같이 잠들어 있었다. 윤두준 또한. "..아우.." 윤두준은 귀찮았는지 귀를 후비고 있었고 나는 잽싸게 일어나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 안녕." "안녕하세요." 나는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하며 손님을 맞이했고 용준형은 당황스러워하며 가만히 있다가 씨익 하고 웃더니 내 뒷통수를 쓰담쓰담 해주었다. "윤두준은?" "거실에요." "아, 이거. 너 군것질 좋아하는거 같길래 대충 아무거나 사와봤어." 내가 또 군것질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용준형이 들고온 비닐봉투에는 감자칩, 음료수, 빵, 케익 등등 여러가지가 들어있었고 윤두준은 저렇게 단거나 짠건 별로 안좋아해서 나혼자 먹기도 그렇고 그래 별로 못먹었는데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왔냐." 윤두준은 소파에 앉아서 용준형을 맞이했고 내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비닐봉지 안을 구경하며 들어오다 용준형의 등에 머리를 처받았고 나는 당황스러운마음에 그냥 배시시 웃었다. "야. 손님이 오셨는데..집주인이 가만히 있어!?" "지라...됐고..가서 밥해." 나한텐 욕하지 말라더니, 지 친구 오니까 욕하는 꼬락서니 봐라.. 나는 윤두준을 째려봤고 그는 뭐, 라면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흥. 오늘은 과자 있으니까 봐준다. "니네 뭐 먹을건데? 재료는?" "선생님 김치부침개 잘 만드신다면서요! 형이 그거 해줄거라고 그랬었는데.." "아. 김치부침개. 지가 할것이지..꼭.." 용준형은 불만많은 소리를 웅얼거리면서도 걸음은 부엌으로 향해 익숙한듯 손을 씻고 냉장고 옆에 있는, 냉장고랑 비슷하게 생긴 스탠딩형 김치냉장고의 문을 열더니 제일 밑칸에 있는 김치통을 꺼내어 싱크대 옆으로 가져갔고 나는 요리하는거 구경하는걸 좋아하는터라 계속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꼬맹아. 윤두준보고 부침가루랑 밀가루 어딨냐고 좀 물어보고 와봐." "..꼬맹이?" "..아. 윤두준이 내앞에서 니얘기할때 꼬맹이라 그래서 나도 입에 뱄다. 미안. 기분 나빠?" "..아 아뇨. 자주 들어본 말이 아니라서.." 꼬맹이..? 뭔가 귀여운 어감이어서 기분 좋았다. 그냥 나를 가까운 동생으로 여겨주는것 같고 또 나한테 잘해줘서 기분도 좋았고. 이렇게 나랑 용준형처럼 훈훈한 사이여야지, 이기광이랑 윤두준은 만나면 으르렁 으르렁. 망할것들. "부침가루랑 밀가루 저기 싱크대 밑에 찬장에 있으니까 니가 알아서 꺼내오고, 양요섭. 너 거기서 뭐해. 괜히 방해하지말고 일루와." "싫어! 구경할거다 왜!" "어쭈. 일루 오라고 했다." "싫어!!" 나랑 윤두준의 대화가 웃겼는지 용준형은 부침가루랑 밀가루를 찾으면서 킥킥대고 웃었다. 아 진짜 쪽팔리게 윤두준은 왜저러는거야 갑자기.. "니네..진짜..아이고.." 용준형은 부침가루와 밀가루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더니 일단 도마와 칼을 꺼냈고, 도마위에 김치 한포기를 꺼내어 알맞은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꼬맹아. 커다란 볼..같은거 없어? 움푹하게 패인 양재기 같은 그릇. 비빔밥 같은거 집에서 해먹을때..양푼 같은거." "아..그거 있을텐데..잠깐만요." 나는 싱크대 밑을 요리조리 보다가 저기 구석에 박힌, 스테인리스 양푼을 꺼냈고 좀 큰가 싶을정도의 크기였는데 용준형은 딱 좋다며, 그것좀 씻어서 도마 옆에 놔달라고 했고 나는 주방장 셰프의 도우미가 된것같아 괜시리 재밌어서 방긋방긋 웃었다. 윤두준은 요리할때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맨날 저리 가있으라고 그러는데 용준형은 나한테 일도 시키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 "여기요." "아. 어." 용준형은 잘게 썰은 김치를 양푼 안에 넣으려다가 멈췄다. "..아우..내정신. 꼬맹아. 이거 이정도 크기로 김치 썰수 있지. 너무 크게 썰지 말고 잘게 썰어놔봐." "아..네!!!" 윤두준은 나한테 칼을 잡게도 못한다. 무슨 내가 두세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칼만 잡으면 불안한지 계속 조심 조심 이라는 말을 아주 달고 살아서 내가 그 소리 듣기싫어서 칼은 안잡는데 나는 조심히 칼을 들었다. 살짝 윤두준 눈치를 보니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듯 tv에 시선이 꽂혀있었고 나는 더욱더 신이났다. "양요섭." "..아!!!" 용준형이 양푼을 들고가 부침가루와 밀가루를 양푼에 넣을동안 나는 조심 조심 김치를 썰고있는데 옆에 윤두준이 언제 와있었는지 갑자기 나를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결국 칼에 베이고 말았다. "야 용준형!! 이런거 니가 해야지 왜 애를 시켜!!!다쳤잖아!!!" "뭐!?" "아..아 진짜 괜찮아요. 아 형이 갑자기 불러서 그러잖아!!!아 진짜 괜찮아요!!!!안아픈데.." "일루와봐." 내가 김치국물로 범벅된 손으로 피나는 왼손 두번째 손가락을 움켜쥐자 용준형은 빠르게 와서 나를 싱크대 앞으로 데리고가 흐르는 물에 천천히 씻겨주었고 자꾸 따끔따끔거려 인상을 쓰자 윤두준은 그냥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넌 진짜..왜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다쳐 왜. 누가 너보고 하래!?" "..씨..형만 없었어도 나 안다쳤거든? 갑자기 와서 왜 불러 왜!!" "어쭈. 니가 잘못한건 생각안하고 목소리 크다?" 윤두준은 화가났는지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봤고 나는 사실 좀 많이 베여서 피가 계속 뚝뚝 흐르는데도 윤두준한테 지기싫어 똑똑히 쳐다봤다. 그러다 윤두준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나를 앉히곤 구급상자를 가지고 와 휴지로 대충 피를 닦은다음 그 위에 후시딘을 발라주고 밴드까지 붙여주었다. "가지마." "싫어." "야." "뭐."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고 괜히 내가 다친것때문에 용준형이 신경쓸까봐 그게 더 신경쓰여서 윤두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결국 진건 윤두준. "들어가지마. 이번엔 또 어디 다칠라고." "안다칠거니까 걱정마. 요리보는거 재밌단말야!!!" 나는 윤두준이 꽉 잡고있던 내 손목을 놔주자 바로 부엌으로 달려갔고 윤두준은 구급상자를 정리하더니 또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래서 옆에서 김치를 썰고있던 용준형 옆으로 숨었고 용준형은 능숙하게 칼질을 하며 나를 엄하게 쳐다보는 윤두준을 힐끗보며 말했다. "고작 손가락 베인거가지고 유난떨지마 재수없어보여. 얘가 구경하겠다는데 니가 왜 지랄이야 새끼야. 너나 꺼져. 신경쓰이게. 얘 다치는거 안시킬테니까 걱정말라고 이 팔불출새끼야." 용준형은 두가지 가루를 섞어 물까지 넣어 걸쭉해진 반죽에다 김치를 썰어넣으며 말했고 윤두준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역시...최고. "이거 지금 가루 응어리진거 보이지. 이거 없어지도록 살살 저어." "네!!" 거품기로 휘휘 돌려가며 김치와 반죽을 섞었고 용준형은 내가 젓고 있는 반죽 안에다 후추도 뿌리고 소금도 뿌리면서 대충 간을 맞추기 시작했다. 계란까지 넣는것도 잊지 않았고. "계란은 왜 넣어요?" "그래야 바삭바삭해." "..우와..신기하다..이런거 어떻게 할줄 알아요?" "고2때부터 혼자 살았으니까 뭐 이정도야.." 용준형은 줘보라며 나한테 거품기를 뺏어가 정말로 능숙하게 휘휘 젓기 시작했고 대충 응어리진게 없어졌는지 세세하게 살펴보다가 다시 나한테 넘기고는 후라이팬을 스스로 찾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그리곤 식용유를 휘휘 둘러 열을 오르게 했고 나는 그사이에도 계속 반죽을 저었다. "이제 뜨거운거 할거니까 너 절로 가. 너 데이면 나 윤두준한테 죽게생겼다. 아이고 저거 눈빛봐라." 용준형의 말에 옆을 쳐다보니 윤두준은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지 옆에 서서 감시를 하고 있었고 나는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반죽에다 시선을 돌렸다. "국자좀." 나는 서랍에서 국자를 꺼내 주었고 용준형은 그걸 받아들어 어느정도 열이 오른 후라이팬 위에 국자로 반죽을 떠서 놓고 쫙 펴기 시작했다. 곧바로 지지직 하면서 익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소리만으로도 맛있을것 같아 아예 용준형 옆에 바짝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와..진짜 맛있겠다." "진짜 맛있어." "..우와..저는요. 김치 들어간건 다 좋아하거든요.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부침개...와 진짜 맛있겠다. 그럼 이거말고도 엄청 맛있는거 되게 많이 하시겠네요? 스파게티랑..막 피자도 구울줄 아세요?" "피자는..오븐이 없어서 아직." "우와!!오븐만 있음 만들줄 아시는거에요? 그거 도우는요?" "뭐 대충 밀대로 밀면 되지 않을까..." 대단하다.. 매일매일 요리를 하는지, 되게 익숙하게 부침개를 부치기 시작했고 부침개를 뒤집는것도 그냥 후라이팬으로 뒤집었다. 우와 이런거 티비에서만 봤었는데..신기하다.. "..와..저 나중에 수능 끝나고 선생님네 집 맨날 놀러가서 요리 배우면 안돼요? 저 진짜 요리 배우고 싶은데..그래도 제가 한번 보면 대충 따라는 하거든요." "맘대로." "우와 진짜요? 아싸!!" 나는 너무 신나서 용준형의 손을 잡았고 용준형은 나를 보며 씨익 웃더니 손을 뺐다. 왜냐면 부침개를 뒤집어야했으니까. "이거 담을 그릇." 나는 무슨 그릇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싱크대 위에 있는 수납장에서 민무늬의 하얀색 접시를 꺼내어 용준형에게 주었고 그는 후라이팬 채로 옮겨담았다. "저 먹어봐도 돼요?" "처음한건 원래 맛없어." "아니에요 엄청 맛있을거 같은데.." 나는 젓가락을 들어 크게 잘라 먹었고 맛은....대단했다. 바삭바삭한게..딱 짭쪼름하고 최고였다. 정말. "어때?" "진짜..진짜 되게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나는 젓가락으로 쓱 잘라 용준형한테 내밀었고 그는 자기가 먹겠다며 사양했지만 요리하는 사람을 번거롭게 할수는 없는법. 결국 입안으로 내가 직접 넣어주었다. "..좀..싱거운가.." "아니에요. 딱 맞아요. 와 진짜 맛있다..형. 형도..." 나는 진짜 맛있어서 옆에서 호들갑 떨며 있다가 그제야 생각난 윤두준한테도 주려고 고개를 돌리는데..순간 소리지를뻔 했다. 뭐 저렇게 저승사자같이 서있어 무섭게. "..분위기 좋다?" "..어?" "윤두준. 작작 해라." "..야. 너 그것만 만들고 니네 집 가." "어이없네. 미친새끼." 용준형은 귓등으로도 안듣고 다시 부침개를 뒤집었고 나는 윤두준한테 가까이 다가가 부침개를 직접 먹여주었다. 용준형이랑 가까이 붙어있어서 삐졌나... "삐졌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자 윤두준은 아니, 라고 말했지만 삐진거 같았다. 뭐 이런거 가지고 남자가 속좁게.. "너 거실 가 있어." "왜 자꾸 그래!!" "너 용준형이랑 떨어져있어." "속좁게 또 왜!!" 내 말에 윤두준은 나를 또 무섭게 쳐다봤다. 그러면 내가 쫄 줄 알고!? "요섭아. 새 그릇." "아. 네!!!" 나는 다시 용준형 옆으로 가서 새 그릇을 내밀었고 아까 처음 구웠던 부침개는 젓가락과 함께 윤두준한테 넘겼다. "형님. 가서 맛있게 드시지요." "...양요섭." "아 좀 가!!!!" 내가 윤두준의 등을 밀며 부엌 밖으로 내밀었고 윤두준은 뭐가 그렇게 맘에 안드는지 나를 계속 쳐다봤다. 근데 사람 심리라는게 또 청개구리 같아서 윤두준이 질투하는것도 귀엽고 웃겨서 나는 더 짓궂게 용준형한테 다가가 붙었다. "야 양요섭." "어. 왜. 가서 먹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용준형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조금씩 더 넣어가며 자작 자작 부침개가 더 맛있게 부쳐질수 있도록 도왔고 용준형은 계속 반죽을 국자로 휘휘 저어가며 계속 부치기 시작했다. "너 나와. 내가할테니까." 윤두준은 내 팔을 잡고 끌었고 나는 싫다며 용준형의 팔뚝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안끌려가기위한 내 발악... "야. 방해되니까 윤두준 너 꺼져. 여기서 안꺼지면 니가 먹는 부침개에 소금 들어부어버린다." 용준형은 윤두준을 쳐다보며 말했고 윤두준은 진짜 빈정상했는지 그냥 그대로 부엌 밖으로 나가버렸다. 화났나.. "..화났나.." "냅둬. 저새끼는 쓸데없는데 질투하고 지랄이야." "..그래도..그냥..저 갈까요?" "맘대로." "..근데..은근히 재밌지 않아요? 윤두준 놀리는거?" 용준형은 부침개를 쓰윽 뒤집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거실에 뾰로통하게 앉아서 리모콘이 고장날거 같이 채널을 쉭쉭 돌리는 윤두준을 살짝 보더니 날 다시 보고 씨익 웃었다. "..윤두준 갖고 제대로 놀아볼래 우리?" "..어떻게요?"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냥 넌 가만히만 있어." "....좋아요." 재밌을것 같았다. 평소 무뚝뚝한 윤두준의 질투심을 건드려 폭발하게 만들면 뒷감당이 무서웠지만...그래도 재밌을 것 같았다. 재밌는 놀이. "어, 요섭아 잠깐만!!!!" 가만히 부침개를 부치던 용준형이 큰 소리로 말하자 내가 에? 이러면서 쳐다보자 그는 내 뒤에 바짝 붙어 내 머리 위에 있는 수납장의 문을 열어 후추가루를 꺼냈다. 굳이 내 뒤에 붙어서 할필욘 없었고 그냥 나한테 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그러나 싶었다가 용준형이 내 뒤에서서 내 귓가에 한마디를 속삭였다. "시작." 난 그제야 알았다. 용준형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건지.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윤두준을 보자 그는 정말 눈에 스파크를 튀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먹혀들어가는 느낌...좋았어. "이거 되게 맛있겠다. 먹어봐." 용준형은 방금 부친걸 젓가락으로 대충 찢어 나한테 직접 먹여줬고 나는 일부러 아-라는 소리까지 내며 받아먹었다. 근데 진짜 맛있다. 바삭바삭하고 적당히 짭쪼름한게..딱 내스타일이었다. 아 너무 맛있어!!!!!!! "진짜 맛있어요. 저 나중에 이거 어떻게 만드는지 꼭 가르쳐주세요 알았죠?" 나는 냉장고로 가 우유를 따라먹으며 말했고 용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다 내 입가에 손을 가져왔다. 나는 순간 놀라서 살짝 몸을 뒤로 뺐고 용준형은 내 입술 근처에 묻은 우유를 손으로 직접 닦아주었다. "야!!!!!!!!!!!!!!!!!" 결국 폭발윤두준. 내가 부끄러워하며 입을 닦자 거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우리가 동시에 쳐다보자 윤두준은 리모콘을 소파에 집어 던지더니 쿵쿵쿵 하는 곰같은 소리를 내며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아..아직 멀었냐?" 윤두준은 뭔가 비장한 말을 할것처럼 굴더니 우리가 되게 당당하게 쳐다보자 오히려 할말을 잃었는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부침개를 쳐다보면서 말까지 더듬었고 나는 순간 나오려는 웃음을 꽉 참아냈다. "거의 다 끝나가." "..빨리하고 나와. 배고프니까." 윤두준은 그대로 거실로 나갔고 용준형은 얼마 안남은 반죽을 싹싹 긁어모아 후라이팬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섯장이나 되는 김치부침개가 들어있는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가 테이블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윤두준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어차피 다 된거 같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 "..왜. 도울거 많아. 혼자 먹고있어." "..말 안듣지. 양요섭. 내가 가서 할테니까 너 여기 있어." 윤두준은 기어코 나를 소파에 앉히더니 지가 부엌으로 들어갔고 뭐 굳이 일을 하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어 나는 소파에 앉아 야금야금 부침개를 찢어먹었다. 와 진짜 너무 맛있어..... "맛있어?" 마지막인지 노릇노릇한 부침개를 들고 나온 용준형은 내 옆에 앉았고 부엌을 보니 윤두준은 인상을 팍팍 쓰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어요?" "몰라 지가 도와준다길래 설거지하라고 하고 나왔지." 용준형은 윤두준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김치부침개를 먹었다. "쟤가 어디가 좋냐. 대체." "..잘생기고..멋있고..착하고..매력적이고..잘해주고...뭐.." 내가 부끄러워하자 용준형은 내 볼을 쓱 꼬집어주었다. 나는 뭐 워낙에 윤두준한테 자주 당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김치부침개를 먹는데 열중했다. 하여튼 먹는것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다. "아, 기광이는 요즘 공부 열심히 하는거 같드라." "걔 아직도 학원 다니죠? 어때요? 걔 진짜 요즘 공부하는거 같더라구요. 그때 보니까." "마음 잡았나봐. 쉬는시간마다 나한테 수학 물어보러 오기도 하고.. 공부엔 영 관심 없는 앤줄 알았더니." "걔가 머리는 디따 좋아서 한번 한다 하면 다른애들보다 훨씬 잘해요. 진짜 맘만 먹으면 반에서 일등하는건 한달이면 될걸요?" 용준형은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계속 김치부침개에 시선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현승이라고 아세요? 장현승." "걔 우리학원에서 인기 쩌는 애 아닌가..니네학교 1학년. 이제 2학년 올라가는애." "인기 많아요?" "여자애들이 걔때문에 목숨 걸드라. 번호 따이는걸 내가 한두번 본게 아닌데 뭐. 솔직히 애가 하얗고 잡티도 없이 목소리도 여리여리한게..기생오래비같이 생겨서 인기 많게 생겼더만. 근데 걘 왜?" "..걔가요..우리 기광이랑 사귀거든요." 용준형은 김치부침개를 먹다가 사레가 들었는지 켁켁 댔고 나는 놀라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물을 건넸다. 갑자기 왜이래. "..진짜!? 어쩐지...걔네둘이 뽀뽀를 하는걸 내가 얼핏 본거 같았거든? 근데 내가 잘못봤나 싶었건만..걔네둘이 그런사이야!?" "기광이가요. 장현승한테 껌뻑 죽어요." 내 말에 용준형은 그렇게 안생겨가지고는..하면서 김치부침개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그때 내 앞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에 내가 고개를 들자 윤두준이 온갖 인상을 쓰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용준형과 대화를 이었다. "선생님은 애인 없어요?" "귀찮아 그런거." "왜요? 그럼 한번도 안사겨봤어요?" "어." "말도안돼!!!" 윤두준은 거실 바닥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부침개를 찢어 입에 쑤셔넣었고 나는 좀 더 용준형 옆으로 붙어앉아 완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꽂아넣었다. "그럴수도 있지. 꼭 만나라는 법있냐." 용준형은 내 머리에 콩-하고 꿀밤을 먹이며 말했고 나는 내 머리를 매만지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대쉬하는 사람들도 없었어요?" "있었는데..그런거 관심없다구. 내가 한가하게 여자나 만나고 다닐때냐." "그럼 무슨땐데요!?" "꼬맹이가..뭘 자꾸 이렇게 캐물어." 용준형은 또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고 별로 아프진 않아 그냥 멍하니 용준형의 얼굴만 보면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이해가 안돼...대체 왜? 멀쩡하게..아니지 진짜 멋있게 생겼는데 왜 한번도 여자를 만나보지 않은거지? "..제가요..누나가 있는데 되게 이쁘거든요? 누나친구들 소개해드릴테니까 언제든지 옆구리 시려우면 말씀하세요. 무조건 소개팅 주선해드릴게요." "..고맙다 그래." 용준형은 내 볼을 꼬집으며 말했고 나는 씨익 웃으며 윤두준을 슬쩍 보는데... 진짜 한대 때릴 기세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그래 눈빛이?" "..니네 떨어져." "왜?" "용준형. 너 요섭이한테서 떨어져." "미친새끼. 또 지랄하네." 용준형은 귓등으로도 안듣고 부침개를 먹었고 윤두준은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외면했다. 이거...재밌는데? "..아 맞다!!!저 물어볼거 있는데!!!" 순간, 아까까지 낑낑 거렸던 수학문제가 생각나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진 수학문제집을 들고가 용준형한테 보였고 용준형은 슬쩍 보더니 책 사이에 끼워져있던 샤프로 문제를 단번에 쓱쓱 풀기시작했다. "...남자는..수학문제 풀때..진짜 멋있는거 같아요." "영어문제 풀땐 안멋있냐?" 용준형이 나를 힐끗 보면서 말했고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수학문제는 집중해서 풀잖아요. 그때 딱 인상을 쓰는데..진짜 멋있는거 같애요. 우와...." 사실 용준형은 굉장히 매력있는 마스크였다. 말투는 살짝 어눌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카리스마도 있었고, 키도 그정도면 적당하고 몸매도 슬림해서 어떤 옷이든 다 잘 소화해내는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서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이거 봐봐. 너는 그때도 보니까 지표와 가수 문제를 제일 어려워하는거 같드라. 잘 봐봐. 니가 지금 개념이 제대로 안잡혀 있어서 그래." 용준형은 자기 무릎에 문제집을 놓더니 능숙하게 설명해주었고 나는 바짝 얼굴을 가져다대고 설명을 들었다. 확실히 윤두준보다 수학문제를 다루는게 익숙해서 내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어떻게 푸는게 더 좋은방법인지 까지도 덧붙여 주었다. "..이제 알겠어?" "...아..그러니까..이런 경우에는 이런식으로 풀면 되는거에요?" "어." "....아..이제 알겠다. 맨날 헷갈렸었는데..와 진짜..선생님 너무 좋아." 나는 마지막 하나까지 모조리 이해하기 위해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말했고 용준형이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윤두준이 미처 짚어주지 못한 부분까지 용준형이 지적해주니까 나는 너무 좋았다. 항상 이런 문제를 풀때마다 뒷끝이 켕기는게..뭔가 나중에 시험에 나오면 틀릴것 같았는데...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최고. "..저 나중에 수학 문제 모르는거 있으면 별표 쳐놓고 물어보러 가도 돼요?" "어디로? 학원으로?" "아무데나요! 선생님 집도 괜찮고.." "맘대로." "아싸!!! 감사합니다..." 나는 배에 손을 얹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수줍게 말했고 용준형은 킥킥 대고 웃으며 내 뒷통수를 꾹 눌러 고개를 들지못하도록 장난을 쳤고 나는 그대로 용준형의 허벅지에 고개를 박아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손을 계속 휘저으며 용준형의 손을 잡아 내 머리에서 손을 떼게 했지만 힘이 워낙 센지라 나는 계속 그의 허벅지에 이마를 대고 있을수밖에 없었다. 이씨. "..아 놔요!!!" 내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용준형은 싫은데, 라면서 내 뒷통수를 손으로 헤집어놨고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나는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제야 놔주는 내 머리통. 나는 씨..라면서 내 뒷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돈했고, 나를 도와 용준형도 내 머리를 같이 정돈해주었다. 병주고 약주나... "..씨..." "뭐." "..아프잖아요!!" "그랬어? 미안." 내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말하자 용준형은 내 볼을 꼬집으며 물을 마셨고, 나는 약이 올라서 가만히 노려보다가 그냥 우적우적 부침개를 입안으로 쑤셔넣었다. 그때 슬쩍 본 윤두준의 얼굴. 정말 사람 한대 칠 기세였다. 이제..그만해야되나...무서운데..... 지이이잉- 지이이잉- 내가 수학문제집을 다시 접어서 소파 옆 수납장에 올려놓을때, 용준형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하러 잠깐 거실에서 벗어났고 나는 뻘쭘히 할것도 없어 부침개나 먹으려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 내 옆으로 와서 앉는 윤두준. "야." "엉?" 나는 부침개를 먹으며 쳐다봤고 윤두준은 엄청 화가나 보였다. 평소에도 그렇게 다양하고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말 화가나보여서 나는 순간 뒷감당이 너무 무서워졌다. 윤두준의 질투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재미삼아 했다치지만..좀 심했나..어떡하지. 나는 어떡해야될지 몰라 일단은 모른척 하기로 했다. "..용..준형 멋있냐?" "뜬금없이 무슨소리야." 나는 우유를 먹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부침개를 먹었고 윤두준은 아직도 전화통화중인 용준형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다시 나를 툭툭 치더니 진지하게 물어봤다. 용준형이 멋있냐고. "...멋있지. 자상하잖아. 요리도 잘하고." "요리는 하면 나도 잘할수 있어." "근데?" "...용준형이 그렇게 좋으면 용준형이랑 살지 왜 나랑 사냐 양요섭." 나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픽 하고 웃었다. 진짜 질투하는구나 윤두준. "왜이래 또.." 내가 왜이러냐며 다시 딴짓을 하려는데 윤두준이 내 팔을 꽉 잡아왔다. "너 입장을 바꿔서.." "어, 야. 나 가봐야겠다. 친구놈이 부르네." 윤두준이 말을 하려는 찰나 용준형이 걸어오며 말했고 나는 좀 더 얘기하고 놀고 싶었는데 간다는 그의 말에 아쉽고 서운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요? 아직 할얘기도 많은데..." "아, 어 나중에 하자. 나 갈게. 요섭아 나중에 또 보자." 용준형은 소파에 걸쳐뒀던 자켓을 들고 현관문으로 나가 금세 집을 나갔고 순간 황량해진 느낌에 나는 괜히 서운했다. 윤두준이 무뚝뚝하다면, 용준형은 확실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입은 거칠긴해도 용준형은 엄마포스가 좌르르 흐른다고 해야되나 어쨌든, 좀 더 얘기하고 윤두준의 단짝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데..너무 짧게 끊어진 만남이라 나는 내심 많이 서운했다. 윤두준은 용준형을 집앞까지 배웅해주고 다시 들어와 내가 입술을 내밀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는 내 앞에 우뚝 섰다. "그렇게 좋으면 따라가. 왜, 데려다줘?" "..씨..앞으로 보면 뭐 얼마나 본다구.." 나는 얼마 안남은 부침개를 입에 쑤셔넣으며 소파에 앉았고 윤두준은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용준형이랑 언제부터 아는사이였다고 그렇게 하하호호..아주 먹여주고 웃고 떠들고 난리가 났드라 양요섭?" 아무래도 우리의 시덥잖은 작전이 통했는지 윤두준은 어떻게든 쿨해보이려 최대한 굳어진 인상을 펴보려고 노력하는게 눈에 보였지만 뜻대로 안되는것 같아 더 웃겼다. 마음같아선 대놓고 웃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어 계속 억지로 웃음을 참아냈다. 윤두준이 질투를 할줄 안다니... "왜그래. 왜." "왜그래?! 수학 용준형이 더 잘가르치면 그새끼한테 가서 배워. 왜 나한테 배우냐? 앞으로 수능 끝나면 맨날 그새끼 집에 가서 살아. 가서 살면서 요리도 배우고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김치부침개도 실컷 먹어. 어?!" "진짜 그래도 돼?" "뭐?" "형만 괜찮으면 난 좋은데. 요리 배우는거 재밌잖아. 나 진짜 그렇게 해도 돼?" 내가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는지 윤두준은 당황하며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싹 비워진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또 그런 나를 쫓아오는 윤두준. 굳이 여기까지 쫓아와서는 내가 대충 설거지를 하려고 들자 아무말도 않고 그냥 내 뒤에서서 나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지말고, 그냥 지금 당장 걔네집으로 짐 싸들고 가. 용준형도 너 좋아하는거 같던데 잘 됐네 서로!!!" 나는 몇 안되는 그릇들을 그냥 대충 물에만 담궈놓고 뒤를 돌아 윤두준을 쳐다봤고 윤두준은 식탁에 대충 걸터앉아 나를 맘에 안든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나는 계속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윤두준한테 다가갔다. "..삐졌어?" "내가 삐지는 사람이냐. 그냥 허락하는거잖아. 너 좋을대로 하..." 윤두준의 뾰로통한 말투에 나는 그대로 그의 목을 손으로 감아 입을 맞춰버렸다. 역시 내가 다른 사람하고 더 친한 모습에 질투를 하는 윤두준의 모습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러웠다. 정말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부풀기도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한건, 앞으로 이런걸 종종 해야겠구나..이런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재밌기도 하고. 물론 당하는 사람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내가 먼저 윤두준의 입술에 부딪쳐오자, 윤두준은 당황했는지 순간 움찔거렸지만 어느새 내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꽉 끌어안은 윤두준은 계속 내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내 입술을 물었다. 서로 밀고당기고, 윤두준은 아까 내가 용준형과 했던 그 행동들이 미웠는지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고 내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자 윤두준은 내 아랫입술을 계속 혀로 만지며 장난을 쳤다. 어느새 윤두준의 마음도 풀렸는지 나를 계속 꽉 끌어안았고 내가 먼저 입술을 뗐다. "장난친거야. 선생님이랑 짜고." 내가 윤두준의 짙은 눈썹을 만지며 말하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졌다. 그리고는 내 볼을 세게 꼬집더니 내가 아!라는 소리를 내자 다시 그 입술에 뽀뽀를 해주었다. "..앞으로 용준형 옆엔 가지도 마." 내가 윤두준의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올려다보자 윤두준은 내 눈에 깊게 입을 맞춰주었고, 코에도, 볼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윤두준의 귀에 내 입술을 가까이대놓고 속삭였다. "형밖에 없는거 알잖아." 윤두준은 그대로 나를 꽉 끌어안아버렸다. #25. 기광이 현승이만의 아주 짧고 사소한 이야기. "..형!!!" 1월의 날씨는 참 많이 추운데도, 교문 저 너머에서 환히 웃으며 뛰어오는 현승이를 본 기광이는 자기가 교문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린게 벌써 십 오분 째건만, 그 추위와 짜증남은 저 멀리로 벗어던진지 오래. 기광이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의 미소가 가득 피어올라있었다. 이게 바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화가나고 짜증나도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후라이팬에 버터가 녹듯 사르르 녹는것. 현승이가 갈색의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와 바로 기광이의 팔에 팔짱을 끼자 기광이는 환하게 웃으며 자기가 목에 두르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풀어 현승이의 목에 둘둘 감아주었다. 현승이는 괜찮다며, 형 하라며 만류했지만 기광이는 스읍-이라는 협박같지도 않은 위협으로 결국 현승이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었고 현승이는 그런 기광의 얼굴을 보며 환히 웃었다. 정말 예쁘고 풋풋한 풋사과같은 아이들이었다. 이기광, 장현승이 맨 처음 만났던 때를 아주 살짝, 아주 잠깐 떠올려보자면, 때는 11월의 초순이었을것이다. 그때 기광이에겐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것도 여자친구의 학교 근처에 있는 남학생들 중 몇몇은 벌써 그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있을정도로 예쁘고 똑똑한 여자애였다. 그런 애를 사귀고 좋아하던 기광이는 우연하게도, 그 여자아이가 다니는 학원을 찾아가게 되었었다.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많았지만, 이런걸 인연이라고들 하는건지. 학원 앞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고, 정말 어이없게도 순둥이 양요섭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양요섭에 이끌려 그 학원을 등록하게 되고, 그날, 기광이는 현승이를 만났다. 계단에서 스치듯 만난 현승이를 기광이는 잊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두눈, 맑고 맑아서 마치 사슴 눈 같은 그 눈에 기광이는 시선을 뗄수가 없었고 남자애 치고 너무 하얗고 뽀얀 피부와 날카로운 턱선이 기광이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어버렸다. 현승이는 역시나 도도하게 기광이를 아무렇지않게 지나쳤지만 그때부터 기광이의 마음은 시작되었다. 아무 생각도 안나고 아무 소리도 안들리고 그저 쿵쿵쿵 하는 자기 심장소리만 들릴뿐 멍해져버렸다. 이런걸 흔히들 첫눈에 반했다고들 하지. 기광이는 그렇게 현승이한테 반했고, 제일 친한친구 요섭이에게 속을 털어놓고, 요섭이를 미끼삼아 현승이의 이름이 뭔지, 어디 학교를 다니는지, 나이는 몇살인지를 알아두게 되었고 처음으로 기광이는 서툰사람이 되었다. 연애에 있어서, 어떤 사람을 자기껄로 만드는것엔 익숙했던 기광이가 처음으로 긴장하고 처음으로 어색해했다. 진짜 사랑이 기광이에게도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쯤, 현승이는. 정말 눈치가 백단인 현승이도 기광이가 자신을 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것, 자신이 어디에 있건 항상 자기 뒤에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기광이라는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미 학교에선 꽤 유명인사였으니까. 기광이를 비롯한 금발머리의 양요섭. 이 두사람은 친구인것 조차가 아이러니하게 성적차이가 났지만 유일하게 이 두사람에게만 두발자유가 인정된,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알기 싫어도 알게되는 유명인사였으니 현승이가 모를리 없지 않았겠는가. 맨처음 현승이는 당황했었다. 자꾸 자기를 쳐다보고 눈이 마주치면 서투르게 피하는 기광이를 보고, 게다가 얼굴도 빨개지고 자기 친구를 나한테 보내서 이름 학교 나이를 물어보게 한걸 보고 뭐하자는건가 싶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현승이도 싫진 않았다. 서툴러보이는 기광이가 좋았다. 말도 더듬고 어딘가 허술해보이는 모습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얼굴이 빨개지는 귀여운 모습이, 맨처음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때 나한테 무작정 다가와 앞을 막아서더니 한다는 말이 안녕, 이라는 그 수줍은 모습이 현승이에겐 마냥 기쁘고 좋았다. 이기광이라는 사람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두사람은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듯, 전류가 흐르듯 단번에 통했고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어갔다. 뭐, 어쨌든 두사람의 지난 이야기는 여기쯤에서 접어두고. 현승이와 기광이는 나란히 버스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한짝씩 나눠 끼고 노래를 같이 들었다. 가끔씩 덜컹거리는 자리때문에 몸이 좀 불편했지만, 몰래몰래 스킨쉽을 하기엔 버스 뒷자리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1월 한낮, 짧고 따뜻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이 두사람을 나른하게 비추고, 기광이와 현승이의 손은 꽉 맞닿아져있었다. 기광이의 은색의 심플한 반지가 끼워진 왼손과 현승이의 작은 오른손. 잔잔한 발라드가 흘러나오자 더욱 나른해졌는지 동시에 눈을 감은 두사람은 너무나도 예쁘게 나란히 앉아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남자애 둘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을만큼 곱고 예쁘게. 그러다 잠깐 눈을 뜬 기광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눌러 어떤 글자를 쓰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 있던 현승이의 손을 꽉 잡아 눈을 뜨게한 기광이는 현승이의 눈 앞에 그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을 보자마자 환한 웃음으로 물드는 현승이의 얼굴. [사랑해] 현승이는 기광이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들어 기광이의 오른손 손바닥에 작게 뭔가를 그렸다. 수줍은 하트. 기광이는 항상 이렇게 수줍게 자신에게 말하는 현승이가 너무 좋았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런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큰 행복으로 다가올 정도로. 평소엔 몰랐던 그런 사소한 일상들이, 소소한 생활들이 모두 다 즐거움이란것을 깨달을 정도로. 기광이의 마음은 그렇게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 "..형..이거 뭐에요?" 기광이네 집에 놀러온 현승이는 기광이가 잠깐 손을 씻으러 갈 동안 방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익히 들어서 잘사는 집 외동아들이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잘살줄은 몰랐는데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집에서부터 놀라 집안이 복층이라는 것과 2층은 모두 다 기광이의 차지였다는것. 그 모든것이 현승이에겐 그저 충격이었다. 2층은 말하자면 작은 집이었다. 거실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방도 있었다. 방이 3개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드레스룸, 하나는 책이 잔뜩 쌓여있는 서재, 그리고 다른 하나가 기광이의 침실이었는데 말이 침실이지 그건 그냥 또 집이었다. 집안의 집 또 집 집. 정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이 안나올 정도의 규모에 현승이는 맨처음 이 집에 놀러왔었을때 정말 거품물고 쓰러질뻔 했었다. 이렇게 잘사는 집 아들이었을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그리고 방에는 성인 남자 세명이 누워도 거뜬 할정도로 큰 침대와 아주 커다란 매우 짙은색의 원목 책상, 작은 유리 테이블과 소파 두개 이렇게 간단한 가구들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은색의 애플 맥북이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고 책상 위엔 요즘 마음을 잡고 산다는 걸 증명해주는 수학 문제집이 여러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현승이가 놀랍게 발견한건, 야한 잡지. 펼치자 마자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자들의 몸들. 현승이는 바로 덮어버리고 이게 놓여져있던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리하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이었는지 서랍엔 그거 하나 말고는 별다른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딱 들어온 이기광. 기광이는 쏜살같이 달려와 현승이의 손에서 잡지를 뺏어들어 뒤로 감추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아..어..이게..아 이게 왜 여기있지..아니야 오해하지마!!! 나 요즘 이딴거 안봐!!!" "..실망이에요." "아니야 진짜!!! 이게 왜..아 이게 왜 여기있어 대체..아니야 진짜로..." 기광이는 잡지책을 방 구석 저 멀리로 집어 던지며 말했고 현승이는 실망했는지 기광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지만 표정이 확 굳어져있었다. 하여튼 이기광은 하루에 한번씩 꼭 현승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내가..옛날에 보던거야. 그게 거기있는지도 몰랐어. 나 요즘 맘잡고 사는거 알잖아. 응? 아니야 진짜.." 기광이는 안절부절못하며 현승이의 앞에 와서 말했고 현승이는 수학 문제집을 뚫어져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형." "응? 화내지마. 진짜 안볼게. 아니 안봐 이미." "이거..이렇게 풀면 더 어려워지잖아요." 현승이는 샤프를 들어 기광이가 문제를 푼 곳 바로 옆에다가 쓱쓱 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고 워낙에 뜬금없는 애라 기광이는 잠깐 당황했지만 얘가 많이 화가나지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기뻐했다. 아마 이 모습을 양요섭이 본다면 뒷목잡고 쓰러졌을 일이다 정말. "..아..이렇게 풀면 되는구나. 형이 아직 갈길이 멀다. 아휴...한다고는 하는데..많이 늦은건가봐..역시.." 기광이는 샤프를 들어 다시 문제를 풀며 말했고 현승이는 의자에 앉아 허리를 굽히고 있는 기광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는 현승이. "다신 이런거 보지마요." 현승이가 기광이의 귀에 속삭이자 기광인 놀라 눈이 2배는 커져 그를 바라봤고 현승이는 아예 기광이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이에 기광이는 당황스러운것도 잠시 살짝 책상에 몸을 기대어 서서 현승이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시작은 현승이가 했을지언정, 결국 리드를 하는건 기광이었다. 아무래도 이쪽으론 경력자(?)였으니까. 그리고 현승이는 키스를 할때만큼은 수줍지 않았다. 조금도 망설이는것 없이 무섭게 치고들어왔고 기광이는 그런 현승이의 이중적인 모습도 좋았다. 뭔들 기광이의 눈에 현승이가 안이뻐보이겠냐만은. "...사랑해." 몇분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키스가 끝나고 먼저 입술을 뗀 기광이가 현승이의 볼을 만지며 말했고 현승이는 후..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또다시 그 입술에 뽀뽀를 한 기광이. 현승이는 핏-하고 웃으며 어느새 잡고있던 기광이의 허리에서 손을 내렸고 기광이 또한 굽혔던 허리를 펴고 빤히 현승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쁘다. 옆에서봐도, 앞에서봐도 이뻐." "어우 진짜." 현승이는 기광이의 배를 퍽-때리더니 침대로 걸어가 그 끝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이에 기광이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잠깐 현승이를 보다가 겨우 맘을 잡고 문제집에 시선을 꽂았고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현승이 또한 침대 밑에 놔두었던 책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이렇게 건전한 만남을 기광이가 가지게될줄이야.. 정말 자기 자신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공부와 담쌓은 자신이어도,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 당당하고 더 멋지고 싶은 마음은 이세상 누구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것 이다. 떳떳하고 멋있을 수 있도록. 그냥 부모의 등에 업혀 물려준 재산으로 찌질하게 사는게 아니라 정정당당히 일류대에 들어가서 자기 힘으로 직장을 얻어 돈을 버는, 그런 떳떳함. 그리고 그런 모습을 현승이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동안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기광이는 책을 들었다. 이걸 바로 그 사랑의 힘이라고들 하나? 기광이는 책상에서, 현승이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어 앉아 수학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이 두사람 모두 공부를 시작하면 누가 건드려도 모를만한 집중력을 지니고 있어서 한시간, 두시간이 넘어가도록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으아..." 고요한 방 분위기의 흐름을 깬건 기광이. 기광이는 자기가 목표했던 문제들을 다 풀었는지 문제집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고 침대에 앉아있는 현승이를 바라보았다. 현승이는 코가 높고 콧날이 날카로워서 옆모습이 참 예뻤다. 그리고 도톰한 입술도 엄청난 매력이었다. 그중에서 기광이가 제일 좋아하는 현승이의 얼굴은 눈이었다. 남자애의 눈이 맞는가 싶을정도로 너무 맑고 깊어서 그 눈안에 담겨있는 자신의 얼굴을 볼때면 너무 신비한 느낌이 들어서 현승이의 눈이 가장 좋았다. 까만 눈동자와 커다란 눈. 정말 이 사람이 내 사람인가, 매번 기광이는 현승이를 볼때마다 행복했다. "뭐 먹을래?" 기광이는 현승이의 다리맡에 걸터 앉으며 말했지만 현승이는 옆에 기광이가 왔는지도 모르는채 문제에만 집중했다. 뭐가 잘 안풀리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하얀 종이위에서 샤프를 놀려댔고 결국은 못풀었는지 신경질적으로 연습장에다 낙서를 하는 현승이를 보던 기광이는 피식웃으며 그 문제집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알았는지 현승이는 고개를 들어 기광이를 바라보았다. "뭐 먹고해. 벌써 다섯시야." "..별로 먹고싶은거 없는데...아 짜증나..이거 왜 안풀리지...." 현승이는 안풀리는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지 시선을 문제집에다 꽂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고 기광이는 알려주고 싶었지만 역시나..갈길이 먼 기광이였다. 이럴때면 참 무능한 사람인것 같아 속상하곤 했었다. 명색의 그래도 형인데.. 한학년 위인데도 동생한테 수학문제를 알려줄 수 없다는게..이건 너무 비극이었다 기광이에겐. "..아 나도 모르겠다. 아이고 졸려." 기광이는 현승이의 옆에 누웠고 현승이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똑같이 누웠다. 이에 기광이가 손을 뻗어 팔베개를 해주었고 현승이는 그 안에 폭 안겨 버렸다. 기광이는 현승이의 머리를 만지며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고 현승이는 기광이의 옆모습을 빤히 보다가 살짝 고개를 들더니 기광이의 도톰한-많이 도톰한-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고 기광이는 귀여운 현승이의 도발에 흐뭇한듯 웃다가 아예 현승이의 몸 위에 올라타서 입을 맞추었다. 사실 기광이가 이런쪽으로는 많은 경력(?)이 있었지만, 정말 진짜 사랑을 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데 그게 맞는 말인지 얼마전, 크리스마스때 섬에 놀러갔다가 현승이와 마음을 나눈 이후로,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도 단 한번도 자기의 욕심때문에 현승이를 차지한적이 없단 뜻이었다. 이건 정말 인간승리였다. 예전에 여자를 사귀었던건 그런 욕구를 풀어내기 위한 목적이 없지않아 있었는데, 현승이를 만난이후로 사실 매일매일이, 매 시간마다 현승이와 하는 생각이 상상이 들고는 있지만 항상 참아내었다 용케도. 뭐, 일단은 현승이가 한살 어리기도 하고 그렇게 급할것도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현승이가 아파하는걸 보고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그렇게 자기 욕심만 차리고 싶진 않았다.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알게된 기광이. 아마 요섭이가 본다면 우리 기광이 다 컸다며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주겠지만. 어쨌든 기광이는 현승이의 위에서 입을 맞추고 귓볼을 만지작 거리며 장난을 쳤고, 현승이는 무겁다며 기광이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쉽사리 밀쳐지지 않은 기광이는 최대한 자기 팔에 무게를 싣고 지탱한뒤 현승이의 부드러운 앞머리를 예쁘게 정돈해주었다. "..이쁘다." "..형은 못생겼는데요?" 현승이의 장난에 기광이는 또 볼을 살짝 꼬집더니 입술에 쪽-하는 소리를 유난히 크게 내며 뽀뽀를 했고 짓궂은 기광이의 행동에 현승이는 부끄러웠는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뒤 킥킥 대고 웃었다. "나가서 영화보자. 딱 두시간만 놀고 다시 공부 시작. 어때!?" "콜." 기광이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고 따라 나간 현승이는 익숙한듯 소파에 앉아 tv 리모콘으로 전원을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기광이는 1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간뒤 아까 집에 오기전에 전화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달라고 아주머니께 부탁드렸던 그 샌드위치와 우유 두잔을 따라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소파엔 이미 작은 쿠션을 끌어안고 앉아 tv에 시선을 꽂은 현승이가 있었고 기광이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뒤 그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현승이가 보고 있었던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 사실 기광이는 액션이나 스릴러물을 좋아하는데, 현승이는 조용조용한 성격과 비슷하게 로맨틱 코미디 물을 좋아했다. 대부분 남자애들은 로맨틱 코미디는 여자친구 따라서 보던데, 현승이는 늘 그렇게 달달한(?) 뭐 그런 영화만 즐겨봤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러브액츄얼리 또한 현승이는 여러번 봤을게 뻔했다. 기광이는 처음 보는거지만. "이거 재밌나? 그것만 봤는데. 스케치북으로 프로포즈하는거." 기광이는 현승이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앉아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먹었고 현승이도 샌드위치를 들어 야금야금 먹으면서 대답했다. "되게 멋진 장면이에요. 그거. 친구 아내를 좋아하는 남자가, 크리스마스니까, 진심을 말하는 날이니까 고백하는 장면이잖아요. 정말..진짜 멋있어요 진짜..." 휴 그랜트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서 나탈리라는 여자를 찾아다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고 워낙에 이런 영화엔 흥미가 없어 그냥 억지로 재밌는척 보던 기광이는 절로 나오는 하품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현승이는 알아서 리모콘을 기광이에게 넘겨주었다. "보고싶은거 봐요. 무서운것만 빼고." 워낙 무서운걸 싫어하는 현승인지라 기광이는 무신경하게 채널을 돌리다 그냥 음악채널에 멈췄다. 그냥 가수들 뮤직비디오가 나오길래 멈춰세운 기광이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관심없는 듯 TV를 바라보았다. "..멋있다.." "..뭐가? 누군데?" TV에는 여섯명의 남자들이 이상한 좀비같은 화장을 하고 나와서는 춤을 추고 있었다. "listen to my heartbeat.." 조용히 노래를 따라부르는 현승이의 시선은 tv에 완전히 꽂혀있었고 기광이는 저게 누군지 몰라서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뭐, 잘생긴 놈들도 없구만. "저기..저 남자 보여요? 머리 묶고...제일 잘생긴사람." "..잘생긴 사람 없는데?" "왜, 저기 있잖아. 제일 남자답게 생긴 사람. 오 지금 지금!!!!!!!!" 기광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잘생긴 사람은 없는데, 현승이의 표정을 보자니 아주 가관이었다. 그냥 tv에 빠져들어가고 싶어 죽겠는 사람마냥 입까지 헤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고 기광이의 감정은 팍 상했다. 잘생긴 놈이라곤 단 한명도 없는데?!!??!?!??!?!?! "옥택연이라는 사람인데 진짜 잘생겼죠. 너무 멋있는거 같아요 진짜..되게 남자답고...키도 대빵 크고.." 현승이는 마치 tv에 빨려들어갈듯 샌드위치는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집중했고 기광이는 괜히 짜증이 솟구쳤다. "얼굴 존...엄청 크네. 뭐가 멋있냐. 하나도 안멋있는데?" "..아니야...진짜...멋있다...실제로..보고 싶다. 우리반 여자애들도 장난아니에요 진짜. 남자가 남자연예인 좋아하는게 좀 웃기긴해도..진짜 멋있다..근육..장난아니던데.." 기광이는 뮤직비디오가 끝나기도전에 리모콘으로 딴데를 틀었고 현승이는 다시 틀어보라며 기광이를 잡았지만 기광인 아랑곳않고 재빨리 저 멀리 다른 채널로 틀어버렸다. "..근육은 나도 있거든." "에? 갑자기 뜬금없이.." 현승이는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먹으며 기광이가 아무데나 틀어놓은 tv를 대충 보고있다 기광이를 쳐다봤고 기광이는 갑자기 팔을 들더니 근육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저게 갑자기 뭐하는짓이지.. "..옥..무슨 어쩌고보다 내가 더 근육 많다고. 그리고 난 얼굴도 작아. 그리고 저새끼는 화장빨에 조명빨이겠지만 나는.." 현승이는 기광이가 말을 하는내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실실거리며 웃다가 기광이의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질투한거죠 방금." "..질투가 아니라 나는 진실을 말한것 뿐야." "..에이..옥택연보다 형이 훨씬 더 멋있으니까 걱정마요. 내가 이기광 냅두고 딴사람한테 한눈팔까봐?" 현승이의 말에 그제서야 빙구처럼 웃는 이기광이다. 정말 사랑을 하고 있긴 한건지, 상대의 말에 웃고 울고 기분상했다 좋아졌다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말도 안되는 질투도 할줄알고 어이없는 자랑도 하고..이기광은 점점 팔불출이 되어갔지만 현승이의 눈엔 그런 기광이의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너무 예쁘고 멋있고 행복했다. "아 맞다. 현승아 내일 영화보러 가자!!!" "..무슨?" "아바타 보러가자. 그거 대박 재밌대." 현승이는 기광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기광이는 아싸, 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더니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더니 인터넷을 바로 들어가 cgv를 검색해 영화 시간까지 단김에 알아보는 기광이의 모습에 현승이 또한 옆에서 같이 구경했다. "내일 열두시 영화 보고, 근처에서 밥 먹고...노래방 가자. 같이 사진도 찍고." "..사진? 무슨 사진이요?" "스티커사진!!!!!" "유치하게..." "유치하다니!!! 남는건 사진밖에 없는거에요 장현승씨. 잔말말고 내일 니네집앞으로 데릴러 갈테니까 열두시까지 준비하고 있어. 문자할게." 현승이는 알았다며 기광이의 노트북을 뺏어들어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뭐 사게?" "..그냥..옷 좀 살까 생각중인데..넘 비싸요..." 현승이는 스트릿브랜드의 옷을 파는 사이트로 들어와 이것저것 한참을 구경하다가 결국은 비싸서 못산다며 노트북을 덮고는 공부시작하자면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에 기광이는 알았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간 현승이의 눈치를 보더니 아까 컴퓨터를 끄지 않고 그냥 덮어버렸기때문에 바로 켜서 현승이가 마지막까지 보던 옷을 살펴보았다. 기광이는 그 사이트를 빠르게 뒤지다가 언디핏이라는 브랜드의 야구점퍼 두개를 색깔을 다르게 해서 주문했다. 그리고는 입가의 미소를 씨익-지었다. 아무래도 커플점퍼로 맞춰 입으려는듯 기광이는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똑바로 끼며 킥킥 대고 웃었다. 그렇게도 좋을까. Fall In Love 이기광은 병신. *** "..와..진짜 오랜만이다..영화관." 현승이는 평일이라 꽤 한산한 영화관 내로 들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화관 특유의 웅장함과 달달한 팝콘냄새에 현승은 어쩐지 들떠보였다. 이에 기광이는 현승이의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더니 익숙한듯 티켓박스로 가서 티켓 두개를 끊었고 영화가 시작하려면 십분정도 남아 바로 팝콘파는 곳으로 가서 스윗카라멜팝콘과 콜라 큰거 하나를 시켰다. 물론 빨대는 하나. "..이런영화 별론데...." "진짜 재밌대. 한번 보자. 얼마나 재밌는지." 광고가 한창 나오고 있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간 두사람은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아있다가, 화장실이 가고싶어졌는지 현승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기광이는 그런 현승이를 앉아서 기다렸다. 하도 오랜만의 데이트라 떨리기도 하고, 밥은 뭘 먹어야 좋을지 고민도 하고.. 어제 주문한 옷은 아마 내일쯤 올테니까 그걸 어떻게하면 깜짝 놀래켜주면서 줄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우리둘이 같이 입으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 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괜히 실실 쪼개며 팝콘만 먹는데 어느새 상영관의 불은 착 꺼졌고 여기서 화장실이 그렇게 멀진 않을텐데 영화가 시작해도 안오는 현승에 기광이는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어 결국 밖으로 나갔다. "..네? 아..저 애인 있거든요..아뇨..아 저 진짜.." 기광이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저쪽너머에서 현승이가 어떤 남자애들 세명정도한테 둘러싸여있는게 보였다. 딱 봐도,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딱 느낌이 온 기광이는 현승이가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자 전혀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이 그 무리들 사이로 다가갔다. "그냥 친구하자고. 번호 주는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어려운 일인데요." 키가 꽤 큰 남자애가 현승이한테 말하자, 그 뒤로 다가온 기광이가 대신 말했고 기광의 등장에 더 놀란 현승이는 안그래도 큰 눈이 두배는 커져있었다. 그리고 그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에 기광이는 대뜸 현승이의 손목을 끌어당겨 자기 뒤로 숨겼고 현승이의 왼손을 기광이의 왼손이 잡아 그 사람들 눈 앞에 가져다댔다. "..그만 가시죠. 싫다는 애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고." 기광이는 어디가서 기죽는 애는 아니었다. 사실 학교에선 유명인사였고 그 일대에서도 이기광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없을 정도였으니까. 항상 그렇게 남들이 자기한테 시비를 걸어오고, 그 싸움에 맞서는 일이 기광이에겐 익숙해져서 이러한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광이는 딱 한마디 했을 뿐이었는데, 딱 봐도 찌질해보이는 남자애들 셋은 지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더니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자기 갈길을 갔고 기광이는 그 새끼들이 머리끝까지 없어질때까지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 무리들이 싹 사라지자마자 바로 뒤를 돌아 현승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쩔쩔 매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한테..못되게 할 순 없잖아요." "너 난처하게 하는 사람들이면 싸가지없게 굴어도 되는거잖아. 너 내가 안왔으면 좋게 끝내려고 번호도 주고 왔을거고, 저새끼들 하는 꼬라지 보니까 너한테 끝까지 들러붙어서 거머리처럼 굴것 같던데.. 너 그렇게 당하고 있어도 나한테 암말도 안하고 있었을거잖아." "..그런건..아닌데..." 현승이가 기광이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괜히 바닥만 쳐다보며 말하자 기광이는 그런 현승이를 꼭 껴안아주었다. "너 이뻐서 똥파리새끼들이 펄펄 꼬이네. 어떡하나..꽁꽁 싸매고 다닐수도 없고?" 기광이가 농담투로 말하자 현승이는 뭐냐며 기광이를 밀치더니 상영관 안으로 혼자 들어갔고 기광이는 좀 찝찝했지만 애써 괜찮은척 하며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니 이미 영화는 시작한지 오래였고, 앞부분을 놓쳐 좀 아쉽긴 했지만 뭐 어쩔수 없었으니까 현승이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머리를 기광이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음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잠깐 지루해졌을무렵, 기광이는 팝콘을 집는척 하면서 현승이를 바라봤고 이런영화는 별로라던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현승이가 가장 예쁠때는 이기광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때였고, 두번째는 어딘가에 몰입해 있을 때였다. 정말 누가 건드려도 모를정도로 깊게 빠지는 현승이를 볼때면 그 특유의 심각한 표정과 미간에 드는 주름이 참 귀여웠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거라고 저렇게 얼굴까지 구겨가며 집중하나 싶은 생각에 기광이는 자기는 보지도 않고 스크린만 보는 현승이가 얄미워서 현승이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가리고 그 입에 쪽-하고 긴 뽀뽀를 했다. 현승이는 자기 얼굴 위로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놀랐는지 헉.이러더니 기광이의 어깨를 밀쳤다. 아무래도 영화 보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지만, 하지말라는건 더 하고싶어하는 이기광인지라 기광이는 그냥 짧은 뽀뽀로 끝내려다가 아예 현승이의 얼굴을 살짝 잡고 좀 더 깊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기서 참 다행인건, 평일 아침 영화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겠지. 어느새 현승은 기광이에 맞춰 자기의 무릎 위에 얹혀져있는 기광이의 손을 양 손으로 곱게 잡고는 수줍은듯 기광이를 따라오고 있었다. 현승이는 항상 모든게 수줍었다. 작은 들꽃의 꽃봉오리처럼 수줍고 어려서 기광이 조차도 조심스러운 존재였다.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장현승은. "사.랑.해" 기광이는 현승이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고 그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좀 큰소리로 속삭였고 현승이는 그냥 기광이를 끌어안았다. 아주 잠깐, 안은 뒤 현승이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고 또 방해하면 현승이가 화낼것 같아 기광이 또한 잠자코 생각보다 별로 재미없는 영화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현승이의 손을 꼭 잡은채로. - "3번 방으로 들어가세요." 영화를 보고나오니까 얼추 2시가 넘었고, 근처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두 사람은 눈에 보이는 노래방으로 무작정 들어왔다. 기광이도, 현승이도 노래방은 거의 일년만이어서 처음엔 어색해서 현승이는 책만 뒤지고 기광이는 리모콘으로 인기차트나 뒤적이다가 기광이가 먼저 부르려는지 뭔가를 검색하더니 사운드가 빵빵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에 현승이도 처음 들어보는 기광이의 노래솜씨인지라 좀 기대가 되는지 하하하 하고 크게 웃더니 의자에 양 무릎을 모아 세우고 팔로 끌어안아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앉더니 커다란 모니터 바로 앞에 서서 노래를 준비하는 기광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눈독 들지 마요 나만 바라봐 주세요 손한번 잡을께요 please don't afraid me! 아찔한 느낌 한자리 비워 주세요] 현승이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지, 노래가 너무 상큼해서..무엇보다 그 노래를 부르는 기광이가 이리저리 몸을 방방 뛰며 윙크 날리고 싱글싱글 웃는 모습에 현승이는 결국 큭큭큭 대고 웃음보를 터뜨렸고 기광이는 꽤 수준급의 노래 실력으로 현승이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이리봐도 깜찍! 저리봐도 깜찍! 살살녹아 또 녹아 우짜면 좋노 어떡해야 하노 우리커플 완벽해요] 기광이는 폴짝 폴짝 뛰어오더니 현승이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아 현승이의 얼굴 앞으로 자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고 현승이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 입을 가리고 웃기에 바빴다. 노래 가사가 너무 깜찍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도 너무 깜찍해서 웃긴건지 기광이가 현승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부르자 아예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언젠가 내게 약속하나만 할께요 나만을 아껴줄 그런 사람이 되어줘요 I can do it!! do it!! do it!!] i cad do it do it do it 부분에서 짱구처럼 엉덩이를 흔드는 기광이에 현승이는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으르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노래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라 오래 녹화는 못했지만 그래도 현승이의 핸드폰 안에는 완전 상큼발랄 이기광이 쏙 들어가 있었다. 밖에서는 무게잡고 있는척 하고 돌아다니는 이기광한테 이런 모습이 있을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 그럼 이기광의 두번째 노래 들어갑니다!!!" 노래가 끝나자 현승이는 옆에 있던 탬버린을 흔들며 이기광! 이기광! 이라며 외쳤고 기광이는 살짝 윙크를 날리더니 두번째 노래를 스타트 시켰다. 또 발랄한 반주가 이어지고, [in side you 믿을수 없겠지만, 눈뜨면 내두손 가득 네 사랑이 모든게 네안에 내가 되어 부르고 있어. live for you 하나만 약속할께. 널위해 꿈꿔왔던 선물은, 너와나 함께할 아름다운 세상.] 기광이는 핑클 안무를 따라하며 온갖 발랄한척을 다했고 현승이는 아예 처음부터 녹화를 시작했다. 저렇게 애교가 많았나 싶고, 저렇게 귀여웠었나 싶어 현승이는 놀랍고 신기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끔 힘든 눈빛 아파할 네가 생각나 그땐 내가 정말 네맘을 몰랐 던거야 혼자 망설였던 눈물의 시간들은 이제 내가 지켜줄께 눈을 떠봐 feel me up] 기광이의 노래실력은 진짜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남자가 부르기엔 좀 높은 음인것 같은데도 너무나도 깜찍한 율동까지 덧붙여서 현승이앞에서 때아닌 재롱잔치를 시작했고, 노래가 끝날즈음엔 현승이 앞에 서더니 허리를 숙여 그의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사랑해 장현승." 마이크에다 대고 말하는 기광이의 모습에, 아까 노래부를때와는 다르게 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기광이의 모습에 현승이는 입가에 베어나오는 미소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만 저렇게 귀여운 척, 애교를 부리고 내 앞에서만 춤 춰주고 윙크까지 날려주는 멋진 사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현승이의 머릿속에 가득차버렸다. "자. 이제 너도 불러." 기광이는 그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으며 마이크를 넘겼고 현승이는 뭘 부를까 고민하면서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뭘 불러야하나..이기광처럼 발랄한 노래를 불러야하나, 아님 발라드를 불러야하나.... 일단 쭈뼛쭈뼛 앞으로 간 현승이는 책을 뒤적뒤적 거렸다. 몇분을 고르더니 드디어 결정했는지 현승이는 번호를 꾹꾹 누르고 수줍은 듯 기광의 앞에 섰다. 발랄한 반주가 흘러나오고 기광이는 호오~라면서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와 일분을 만나려고 하루를 아낌없이 버리고 혹시나 이 순간이 추억이 될까 불안해하기도 해 사랑해 그 흔한 말이라도 내 작은 심장을 멈추죠 수줍은 미소로 나에게 다가와 속삭일 때] 현승이의 목소리는 허스키하고 낮은 기광이의 목소리에 비해 얇고 맑아서 이렇게 발랄한 노래엔 더 잘 어울리는 보이스였다. 그리고 노래 중간에 나오는 그녀라는 가사를 센스있게 그로 바꾼 현승은 기광이에게 웃으면서 노래를 불러주었고 기광이는 소파에 앉아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저렇게도 좋을까. 바보기광이를 드러내며 계속 실실거리면서 사진도 찍었다가 동영상 촬영도 했다가 혼자 바빴다. 그치만 현승이는 많이 부끄러운지 계속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까 기광이처럼 귀엽게 다가가서 뽀뽀를 하는건 엄두도 못냈다. 그치만 그런게 더 매력인 현승이는 노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때 까지도 계속 웃기만 했다. [사랑은 그렇게 유치하고 사랑에 눈이 먼다고 해도 그래도 그녀만을 난 사랑할래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우리가 잡은 손을 혹시나 놓치려 한다면 그때는 내가 더 힘껏 잡을게요 지금처럼] 기광이 못지않은 노래실력을 뽐낸 현승이는 노래가 끝나자 그 앞에 가만히 서서 기광이를 빤히 보다 마이크다 대고 말했다. "사랑해 이기광." 그리곤 바로 얼굴을 가리더니 기광이의 옆에 앉았고 기광이는 계속 킥킥 대며 현승이를 바라보았다. 이 두사람한테선 상큼한 딸기향이 폴폴 풍겼다. 요섭이와 두준이와는 다른 상큼하고 풋풋하고 귀여운 매력이 있는 기광이와 현승이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귀여운 커플이었다. 지금 현승이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만큼. 이기광. 장현승. 한명은 남자답고 멋있고, 다른 한명은 귀엽고 수줍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사람.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좋아하는게 눈에 훤히 보이는 귀여운 커플. 누구든지, 이런사랑을 해본적 없다면 이런 사랑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두사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정도로 너무 예쁜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 두사람에게는 어떤 어둠과 슬픔도 찾아올 수 없을 것같았다. 예쁜 사랑. 예쁜 커플. 예쁜 이야기. 기광이와 현승이의 귀여운 이야기 To Be Continue #26. 기광이와 현승이의 짧고 사소한 이야기 두번째. "여보세요? 어디야?" "나 지금 형 뒤!!" 기광이가 뒤를 돌자 현승이는 핸드폰을 닫으며 해맑게 웃으며 서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손엔 작은 가방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그렇게 큰 가방은 아니었지만, 뭐 책가방 같은 크기의 가방들이. "아직 기차시간까지는 좀 시간 남았다." 지금은 1월 4일 오후 여섯시였다. 기광이와 현승이는 오늘 저녁 6시 30분행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둘이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여행 다운 여행에 이 둘은 엄청나게 설레는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서울역 벤치에 나란히 앉은 현승과 기광은 둘이 손을 맞잡고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키득키득 대고 있었다. "좋다..너랑 여행가는거." "나두요. 형 카메라 갖고 왔어요!?" "당연하지." 기광이는 가방에서 디카를 꺼내더니 무작정 카메라를 켜더니 현승이를 마구잡이로 찍기 시작했다. 이에 현승이는 찍지 말라며 렌즈를 가렸지만 그래도 계속 도촬하는 기광에 현승이는 인심쓴다 생각하며 김치-라면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에 현승이는 그의 카메라를 뺏어들어 기광이를 도촬하기 시작했고 기광이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계속 눈이 째지도록 웃으며 현승이랑 장난을 쳤다. "나 태어나서 부산 처음가봐." "어? 저두요!!!!" "..가서 길 잃는거 아냐 우리?" 기광이는 키득대며 얘기했고 현승이는 그럴지도 모른다며 사뭇 진지한 얼굴을 했다. 이에 기광이는 괜찮다며 어차피 둘이 있을건데 그까짓 길 잃는게 뭐가 대수냐면서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고 현승이는 뭐 아무래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광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일 요섭이 생일인데..선물 뭐 사다주지?" "..요섭이형 생일이에요!? 내일!?" "엉. 그새끼 윤두준이랑 제주도 갔어. 지금 제주도에 있을걸? 아님 제주도 갔거나." 현승이는 기광이의 말에 아..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바로 기차가 선로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짐을 들고 티켓을 확인하면서 자리를 찾아갔다. 기차를 타보는건 태어나서 처음인게 기광이와 현승이 둘 다 마찬가지였는지 둘이 나란히 앉아 신기해했다. 제일 느리다던 무궁화호를 탄 둘은 아직 출발시간이 되지 않아 멈춰 있는 기차 안에서 그저 웃고 떠들며 곧 있음 도착할 부산에 대한 설렘에 부풀어 있었다. "막 가판대 같은걸로 사이다랑 육포 같은것도 팔고 그래요 진짜?" "몰라 나두..근데 그러지 않을까?" "와..그런거 드라마로만 봤었는데!!!!" 현승이는 얼른 기차가 출발했으면 좋겠는지 계속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기광이를 향해있었고 들뜬건 기광이도 마찬가지였는지 현승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자신도 웃었다. "양요섭한테 전화나 해볼까? 제주도 벌써 갔나?" 기광이의 말에 현승이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기광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바로 양요섭한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화음이 들린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양요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현승이랑 부산가니까 좋냐!? 너 지금 어디?」 "방금 기차 탔다. 너랑 우중충하게 미국가서 노는것보다 훨씬 좋지. 옆에 우리 현승이도 있고." 현승이는 기광이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그렇게 말하지말라고했지만 기광이는 가만있어보라며 전화에 집중했다. 「..아 재수없어 진짜. 야. 나는 제주도 가거든? 장현승이랑 재밌게 놀아라. 아니..어떻게 중학교때부터 친구라는 새끼가..말하는 꼬라지 하고는..재수없어 너 이기광.」 "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솔직히 내가 너랑 미국가서 뭐하고 노냐? 솔직히 너나 나나 잘된거 아니냐. 난 현승이랑 놀러가고 넌 윤두준이랑 놀러가고. 딱 됐네." 양요섭이 삐졌다는걸 두 눈으로 보지않아도 알 수 있는 기광이는 실실 웃으며 말했고 양요섭은 약오르는지 목소리가 점점 하이톤이 되어갔다. "어. 안그래도 그럴 예정이다. 넌 이미 제주도냐?" 「지금 공항 가는 중이다. 왜. 알아서 뭐하게」 "그냥..예의상 물어본것 뿐이다. 잘 놀아라 안녕." 유치한 면이 있는 이기광은 킥킥 대면서 전화를 끊었고 현승이는 대체 왜그러냐며 질책했지만 기광이가 히히 하고 웃자 현승이도 어쩔수 없는듯 허탈하게 웃었다. "와..근데 되게 좋겠다 요섭이 형은..애인이랑 생일날 놀러가는거잖아요?" "니 생일에도, 내 생일에도 그러면 되지!!" "에이..형 생일은 3월이구, 제 생일은 9월이잖아요. 다 학기중인데?" "..그런가..그럼 우리 둘 다 대학가면, 그때 생일날 놀러가자. 양요섭이 부러워할거 하나도 없어. 그새끼가 늙다리 아저씨를 만나가지고 호강하는거니깐.." 기광이는 가방에서 미리 사갖고 온 오렌지 주스와 감자칩을 꺼내어들어 주스 하나는 현승이에게 주고 감자칩을 부욱 뜯어 또 먼저 건넸다. "요섭이 형은 진짜 단 한번도 누구랑 사겨본적 없어요 진짜? 단 한번도?" "엉." "와..그럼 첫사랑이 이뤄진거네요? 원래 첫사랑은 안이뤄진다던데.." 현승이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감자칩을 씹으며 말했고 기광이는 주스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걔네가 끝까지 갈지 안갈지는 모르는거지. 막말로..걔네 나이차이가 얼만데..지금 양요섭이 눈에 콩깍지가 잔뜩 껴서 윤두준이 멋있어보이는거지, 대학들어가봐. 멋있고 이쁘고 젊은 애들이 얼마나 널리고 깔렸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해요. 두준이선생님도 엄청 멋있어요. 솔직히 스물넷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믿어요. 딱 보이는 얼굴이 스물하난데. 내가 봤을땐 엄청 잘어울리던데..두준이쌤은 엄청 남자답게 생겼잖아요 훤칠하고. 근데 요섭이형은 선이 가늘다고 해야되나? 좀 귀여운상? 뭐 어쨌든 남자답게 생긴 얼굴은 아니니까.. 둘이 천생연분같던데..저는 둘이 끝까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현승이는 두준 요섭 커플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말했고 기광이는 뭐 어차피 두사람일이야 지들끼리 알아서 할텐데 우리가 왈가왈부 할게 뭐가 있겠냐며 일축해버렸다. 순식간에 싹 조용해져버린 두 사람의 분위기. 솔직히 현승이 스스로 생각했을때도 딴 커플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한게 어이가 없긴 했는지 하긴..이라면서 주스를 마시는 걸로 입을 닫았다. 그때 다시 말문을 연건 기광이. "여기 봐봐." 기광이의 말에 현승이가 고개를 돌리자 기광인 카메라로 현승일 찍었는지 잘나왔다며 카메라 액정에 나온 현승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워낙 순식간에 찍힌 사진이라 좀 흔들린채로 나와 현승이는 맘에 안들었는지 카메라를 뺏어들어 기광이와 얼굴을 맞대고 셀카를 찍었다. 현승인 워낙 셀카의 달인인지라 처음 만져보는 카메라도 능숙하게 다뤘다. "와..진짜 잘나왔다. 이거 나중에 사진 뽑으면 나도 하나 줘요. 갖고 있게." "부산가서 사진 엄청 찍어와야지." 기광이는 둘이 찍은 사진이 맘에 들었는지 계속 보고 있다가, 자기도 셀카를 도전해봤다. 현승이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잘 나와 맘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둘이 몇십장에 달하는 셀카를 찍고 웃고 떠들면서 놀 동안 어느덧 기차는 출발할 시간이 됐는지 부우웅-부우웅-하는 소리를 내며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인다는 흥분에 기광이와 현승이는 아까보다 더 웃으면서 즐거워했고 기차는 3분도 되지 않아 천천히 서울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노래 되게 좋죠?" 현승이의 아이팟에 연결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낀 기광이와 현승이. 기광이는 요즘들어 공부한답시고 무리해서 그런지,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자동적으로 잠이 몰려왔고 그래도 여행가는건데, 처음 타보는 기차안에서 잘수는 없어 눈을 부릅뜨고 억지로 버텨보는 중이었다. 뭐 그나마 현승이가 발라드가 아닌 댄스 음악을 들려줘서 잠을 깨는게 좀 수월했지만. "어..좋다. 제목 뭐야?" "Akon의 Right now요." "..아..좋다. 너두 힙합 쪽 좋아해?" "잘 아는편은 아닌데 이렇게 비트 있는 노래 좋아해요. 힙합도 막 멜로디 없이 랩만 있는건 별로 안좋아하구.. 전 멜로디를 주로 듣는 편이라.." "그건 나도 그래. 좋다." 기광이는 자꾸만 졸음이 몰려오는지 결국 현승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고 기꺼이 어깨를 기광이에게 넘겨준 현승이는 기광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에 기광이는 피식 하고 웃더니 눈을 감았고 현승인 기광이의 얼굴에 살짝 자기의 얼굴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는건 참 설레고 좋은것 같았다. 나른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 "...형!!!! 다왔나봐요!!!" 현승이는 잠깐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었는데 결국 기광이와 같이 잠에 들어버린건지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어수선한 소리에 살짝 눈을 떠보니 기차는 어느새 멈춰있었고 부산역 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때 현승이의 말에 그제야 부시시 눈을 뜬 기광이는 상황파악이 안되는지 눈만 두어번 껌뻑껌뻑 거리며 떴다 감았다를 하더니 계속 기대고 있었던 현승이의 어깨에서 일어나 주위를 쉭쉭 둘러보았다. "..벌써?! 아씨..기차에서 오징어 사먹을라그랬는데.." "일단 빨리 나가요." 기광이는 기차에서 오징어를 못사먹은게 아쉬웠는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며 일어나 짐칸에 올려두었던 작은 가방 두개를 꺼냈고 비틀비틀 거리며 기차 밖으로 나섰다. 확실히 밤은 밤이었는지 주위가 온통 어둑어둑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40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단 가자." "잠은 어디서 자요?" "비싼 호텔은 나중에 또 오면 그때 가보고 오늘은 해운대 근처 민박집에서 자자. 그것도 매력일거 같지 않아?" 기광인 가방을 고쳐매며 현승이에게 말했고 현승인 아무래도 좋은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운대요." 그냥 무작정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 현승이와 기광인 그렇게만 말하고선 이미 어두워져 밖이 보이질 않는 주변 풍경을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잘 안보여서 그런가..여기가 부산인지 서울인지 뭐가 다른건지도 잘 모르겠는 두사람은 여전히 손을 꼭 부여잡은채 있었다. "근데 내일 요섭이 형 생일이라면서..선물은 어떡할거에요?" "선물? 그냥 대충 서울가서 사지뭐." "그래두..부산까지 놀러왔는데..여기서 뭐 좋은거 사갖고 가야되는거 아니에요?" "..걔가 선물에 연연하는 애가 아닌데..그냥 대충 암거나.." "무슨 친구가 이래!!" 현승이의 말에 기광이는 그제야 골똘히 생각했다. 여태까지 줬던 선물은 그냥 대충 자기가 갖고 싶은 것들이었다. 뭐 예를 들면, 작년 생일땐 psp를 줬었고 재작년엔 프레드릭 콘스탄트 시계를 줬었다. 뭐 그걸 양요섭이 쓰는건 기광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원래 선물을 고르고 이러는거엔 젬병인 기광인 그렇게 몇년을 별 생각없이 선물을 줬었는데, 현승이의 말에 기광인 곰곰이 양요섭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공부잘하고, 게임같은거 별로 안좋아하고, 그리고 뭔가를 해주자니 웬만한건 다 갖고 있고.. 별로 해줄만한게 없는데.. "해줄만한게 없는데? 그새끼 게임도 별로 안좋아하고..일단 모든지 그새낀 다 갖고 있어!" "그래도 그렇지..그렇게 아무생각없이 어떻게 그래요. 아..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 서울 올라가면 요섭이형이랑 두준이선생님이랑 우리둘 이렇게 넷이서 파티 같은거 하는건? 깜짝파티는 아니더라도 그냥 모여서 얘기하고 놀고 그러면 좋잖아요." 파티? 별로 윤두준을 좋아하지않는 기광이로선 그닥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윤두준이 자기 친구 양요섭의 애인이라면 언젠가는 풀어야할 숙제가 아니겠는가. 평생 안보고 살수도 있지만 그렇게하자면 양요섭 마음에도 좋지 않을거고..언젠가 한번은 만나서 얘기하고 이렇게까지 사이가 안좋아진것에 대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풀어보고 싶긴 했는데 그렇게 하자면 어쩌면 이게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 기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여기서 회라도 사갖고 가면 좋겠는데..그럼 서울 올라갈때쯤이면 다 상해있겠죠? 아..아깝다.." "그냥 대충 서울가서 회 사갖고 가면 되지. 그래. 양요섭. 윤두준네집에서 사니까 내가 그새끼 집 어딘지 알거든? 그냥 무작정 쳐들어가자. 걔 5일 밤에 제주도에서 오는거 같으니까 6일날 저녁에 가자. 어때." "좋아요!! 아 재밌겠다.." 요섭이와 두준이를 유난히 좋아하는 현승이는 그렇게 넷이서 모여 놀 생각을 하니 절로 흥이 났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애처럼 좋아하는 현승이를 물끄러미 보던 기광이는 그의 볼을 꼬집었다. 현승이가 뭐를 하든 기광이의 눈에 안이뻐보이겠는가. 딱 깨소금 폴폴 날릴 때였다. 만 사천원이라는 거금을 택시비로 내고 해운대 앞 아무데서나 내린 두사람은 그나마 제일 깔끔해보이는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겨울이라 비수기인 덕에 방을 잡는건 수월했고 그냥 부엌있고 방하나 있는 민박집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창문을 열면 바로 해운대 바닷가가 한눈에 펼쳐졌고 바다를 보니까 그제야 여기가 부산인게 실감이 나는지 기광이와 현승이는 둘이 나란히 창문가에 매달려 찬 바람이 부는데도 아랑곳 않고 철썩 철썩 하면서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들리는 파도소리에 기분이 묘해졌는지 기광이와 현승인 가만히 한 곳을 응시했다. "사실 내가 너 만나기전까지는 정말..막살았거든? 아 막 그렇다고 완전 개새끼같이 산건 아니고.. 그냥 이여자 저여자 막 만나고 다니고 공부라곤 죽어라 안하고..그랬었는데.. 너 만난 이후로는 좀 착실하게 살고 있다고 해야되나..? 내가봐도 내가 많이 변해있드라." "그래보여요. 사실..말은 안해서 그렇지..형 그때 나 학원에서 맨처음 봤을때 막 몰래몰래 쳐다보고 요섭이형 시켜서 내 이름, 나이, 학교 같은거 물어봤었잖아요. 나 그때 형 누군지 알고 있었는데.." "진짜?! 어떻게!?" 기광이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승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고 현승인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낀채 기광일 보지 않은채 정면에 시선을 꽂은 뒤 입을 열었다. "울학교에서 이기광 양요섭 모르면 간첩이잖아요. 한명은 머리가 금발이야, 한명은 생 양아치야.. 둘다 집안 좋기로 소문났지, 또 한명은 전교 일등을 안놓치는 수재에 한명은 전교 꼴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꼴통. 그게 바로 양요섭 이기광. 아니에요? 두 사람 모르면..그게 병신이지." 기광이는 처음 듣는 소리에 정말 놀랐는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현승이를 바라봤다. 가끔 짓는 이런 얼빵한 표정을 제일 좋아하는 현승이는 기광이의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광이. "..진짜? 그정도야? 나랑 양요섭이!?" "소문에 너무 무딘거 아니에요? 뭐 어쨌든..사실 엄청 겁났는데..형이 나 이상하게 쳐다보고 자꾸 얼굴 빨개지고 눈 마주치면 어색하게 피하는거 보면서..나 잘못걸린건가..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때도 엄청 수줍은 얼굴로 인사하고 가는 형 보면서 솔직히 무서웠어요. 무슨생각으로 저인간이 나한테 그러나..싶고 저사람이 이젠 여자가 질려서 남자한테도 그러는건가 싶기도하고.." 현승인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웃긴지 피식피식 하면서 웃었고 기광인 충격을 받았는지 여전히 눈만 껌뻑껌뻑 뜨면서 현승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근데..그게 좋았어요. 소문으론 오분이면 여자친구 사귀는건 일도 아니라는 이기광이.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선 얼굴 붉히고 말도 제대로 못거는 게 귀엽고 멋있고..궁금하기도 하고. 형 그때 나한테 고백했던 날 기억해요? 우리집까지 쫓아오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뽀뽀하면서 사귀자고 했었잖아요. 그 모습이 좋았어요. 막 느끼하고 오그라들게 별 이상한 고백을 하는게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면 딱 이기광다운 스타일인거 같아서." "..내가 그때 얼마나 떨렸는지 장현승..너는 모를거야. 내가 너 쫓아가면서 별 생각 다했다. 그냥 집으로 갈까, 니가 갑자기 뒤돌아서면 어떡하나, 뭐라고 말해야되나.. 남자가 남자한테 그러는걸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뭐 이런저런 생각으로..진짜 토할뻔했어 나." 기광이도 그 수줍었던 때가 생각이 나는지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를 했다. 모든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 되는 법이니까. "..어쨌든..그렇게 형이랑 사귀게 됐을때도 솔직히 반신반의 했었는데.. 생각보다 형은 많이 순진하고 귀엽고..무섭기는 커녕 오히려 얼빵하고.." "형한테..그게.." "그러니까 좋다구요." 현승이는 갑자기 기광이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가까이 다가와 기광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귀로는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은 어둡고. 기광이는 현승이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의 입술을 좀 더 깊게 탐했다. 허름한 민박집이었지만, 그들이 느끼기엔 최고의 장소였다. 정말 이대로 1박 2일이 아니라, 평생을 이렇게 살고 싶을만큼. 눈앞엔 바다가 있고, 각자의 옆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바로 낙원이었다. "..와...좋다!!!!!!!!!!!!!!!!!!!!!" 바닷가로 나온 둘은 물만난 고기마냥 추운줄도 모르고 모래사장에서 뛰놀았다. 파도가 저 멀리 도망가면 그 앞까지 나갔다가, 또 파도가 이 앞까지 다가오면 호들갑떨며 뒤로 물러나고.. 날씨가 너무 추워서 차마 바닷물엔 발조차도 담글수가 없어 포기했지만 아쉬운대로 손이라도 담갔고 정말 거짓말 안하고 그대로 손이 잘려버릴 것 같은 추위에 현승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손을 왜 담가!" 기광이는 실실 쪼개며 현승이의 손을 꼭 잡아 자기 주머니에 넣었고 현승이는 많이 추운지 이까지 딱딱 부딪쳐가며 추워했고, 기광이는 손을 살짝 빼서 현승이가 하고 있는 목도리를 좀 더 바짝 매주었다. 코끝까지 목도리를 매준 기광이는 안그래도 하얀얼굴, 추워서 더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의 이마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고 현승이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바다 와본지도..엄청 오래됐는데..진짜 좋다. 아 여름이면 더 좋을텐데.." "여름이면 해운대 대박나서 안돼. 온갖 쓰레기같은 새끼들이 넘쳐나잖아. 아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기광이의 말에 그래두요..라면서 중얼거린 현승이는 기광이의 주머니에서 손이 좀 녹자 바로 또 물가로 뛰어갔다. 그렇게도 바다가 좋은지 철썩 철썩 치는 파도에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좋아했고 현승이와 사귄이후론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본 기광이는 놀랍고도 좋았는지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연신 카메라로 현승일 찍어댔다. 다행히도 바닷가 근처에 있는 횟집들이 불을 밝게 밝게 비춰줘서 사진은 적당하게 잘 나왔고 기광이의 카메라엔 아이같이 해맑게 웃는 현승이로 꽉꽉 들어차고 있었다. "나중에 여름되면 여기 꼭 와요!! 날씨만 좀 덜추웠더라도 들어가는건데.." 현승이는 정말 바다를 좋아하는지 바닷바람이라 바람이 예삿바람이 아닌데도 귀가 새빨개져도 그렇게 좋은지 혼자서도 잘 놀았다. 반면 추운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바다는 더 별로인 기광이는 그냥 뒤에 서서 좋아하는 현승이를 보며 웃고 있었고 평소엔 좋아하지 않더라도 현승이가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좋아진것들이 많은지라 아마 이 바다 또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정말 바보같게도 자기 자신이 십년이 넘도록 싫어했던거라할지라도 현승이가 좋아하면 무조건 바로 좋아졌다. 그건 현승이도 마찬가지였고. "들어가자!!추워!!!" "좀만 더!!!!" "내일 아침에 나오자! 이러다가 너 감기들어!!!!!" 기광이의 만류에 현승이는 아쉽지만 뒤돌아서서 기광이에게로 다가왔다. 이에 기광이는 바로 현승이의 양 귀에 손을 올려놓고 얼음장같이 땡땡 얼은 귀를 따뜻한 손으로 녹여주었다. "이렇게 꽝꽝 얼었구만. 얼른 들어가자." 기광이는 현승이의 오른손을 잡아 자기 주머니 안에 넣곤 바로 민박집으로 향했고 현승이는 연신 좋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좋은가. "..아 맞다!!!! 지금 몇시에요!?" "지금? 열한시 오십분." 민박집으로 들어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곤 놀란듯 묻는 현승이의 말에 기광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고 왜그러는지 현승이는 다행이라며 다시 걸음을 옮겨 민박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열두시 땡 하면 요섭이형한테 전화해서 축하해줘요!!" "..뭘 또 그렇게까지.." "형 진짜..친구가 뭐 그래요!!!" "옆에 윤두준 있는데 뭐 어때." "두준이선생님이랑 형이랑은 다르잖아요!!!" 현승이는 꼭 이렇게 별거 아닌데에 목소리를 높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기광이는 알았다며 방에 불을켜며 들어와 이불부터 꺼내와서는 현승이를 바닥에 앉히고 두꺼운 솜이불을 그 몸 위에 덮어주었다. 다행히 방바닥은 주인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데워줘서 뜨끈뜨끈했고 그러고보니 아까 기차에서 과자랑 주스 먹은게 다여서 출출해졌는지 기광이는 그럴줄 알고 미리 챙겨온 컵라면 두개를 꺼냈다. "짜잔." "우와..안그래도 배고팠는데!!" "좀만 기다려. 물 부어올게." 기광이는 컵라면 두개를 밖으로 들고나갔고, 혼자 방에 남은 현승이는 방을 쭉 둘러보았다. 그냥 작은 방에 지퍼로 된 장롱이 하나 있고 제대로 나올지 의심이 가는 작은 tv와 수납장이 있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방에 속하는 방인지 현승이는 만족했다. 뭐 사실 우리나이에 비싼 호텔방도 웃기고 이렇게 조용하고 바다가 더 가깝게 잘 보이는 이런 방이 훨씬 좋았으니까.. 그렇게 뜨뜻한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보기만해도 따뜻해지는 솜이불을 덮고 있으려니 또 잠이 솔솔 몰려오는지 눈이 저절로 감기려는 찰나, 기광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바로 눈을 떴다. "이거 먹고 자면 내일 얼굴 엄청 붓겠다." 기광이는 실실거리며 들어와 컵라면 두개를 방바닥에다 내려놓았고 기광이가 들어오자 바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현승이는 기광이의 옆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얼른 전화해요!!" "..뭐 쪽팔리게..이런걸..다..알았어. 알았다고..지금 한다고.." 기광이가 투덜대자 바로 그를 째려보는 현승이의 눈빛때문에 깨갱한 기광인 12시가 되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양요섭. 생일축하합니다." 기광이와 현승이는 핸드폰을 중간에다 두고 고래고래 행여나 안들릴까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이런거까지 해볼줄이야..기광이는 지가 하고 있으면서도 기가막힌지 계속 웃어댔다. 하긴 웃기기도 하지. 남자애 둘이서 남자애 생일을 축하해주는데 이런식으로 노래까지 불러준다니... 하여튼 장현승도 어지간히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다. 「..너..」 "내가 너랑 친구하고 처음으로 생일날 같이 안있어주는 날인데..뭐 넌 더 좋겠지만. 윤두준이랑 생일 잘 보내고..현승이랑 나랑 돈 모아서 서울 올라갈때 좋은 선물 사갖고 갈테니까 기대해라. 생일축하하고..현승이가 할말있대." 기광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양요섭과 친구를 먹은 이후부터 자기 생일이건 양요섭 생일이건 늘 함께 있었다. 기광이한테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생일날은 으레 그렇듯 함께 있었는데 올해가 처음으로 같이 있지 않은 날이었다. 그치만 둘 다 하나도 서운한거 없이 참 자연스러웠다. 각자의 짝을 만나..어떻게 보면 더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걸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정도로. "아..여보세요? 형. 저 현승인데요. 생일 진짜 축하드려요!! 형 두준이선생님이랑 제주도 놀러가셨다면서요!! 저는 기광이형이랑 부산 놀러왔는데 여기 되게 좋아요!!우리 꼭 넷이서 여기 다시 놀러와요!!네?" 현승이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기광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어..고맙다.」 현승이가 기광이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자 기광이는 한마디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 야. 그럼 윤두준이랑 화끈한 밤 보내고. 끊는다. 생일 축하!" 그리고 기광이는 생각했다. 다시는 양요섭 생일날 이런식으로 오그라드는 전화는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뭐 어쨌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무렵 현승이가 또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기광이는 다시 놨던 정줄을 챙겼다. "제가 요섭이형 줄 선물을 생각해봤는데요. 형이 이제 고3이니까..되게 좋은 샤프를 해주면 좋을것 같아요. 그쵸? 열심히 공부하라구. 그럼 형은 파티할때 먹을 음식들 사요!!" "샤프? 뭐 그런걸 해주냐..그럼 나는 걔네집에 들고갈 회랑..그새끼가 환장하는 초밥이나 좀 사갖고 가야겠다." "아..초밥 좋아하는구나..근데 너무 먹는걸로 하면 나중에 기억도 안남고..아 그거 어때요? 사진 끼울 수 있는 팬던트 목걸이 같은거! 그거 두개 해서 두준이쌤이랑 요섭이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 끼워서 갖고다니라고 나눠주는거에요!! 와 진짜 좋다!!!!!" "..그런걸..할까?" "하지 않을까요? 아 진짜 좋다. 그거 해줘요 그거!!!! 막 드라마에 나오는거 있잖아요. 뚜껑도 있는거." 현승이는 지가 생각해도 좋은 생각인지 캬-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고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기광이는 현승이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놀랐는지 현승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안그래도 큰 눈이, 놀라니까 더 커져서 놀라웠다. 눈이 커서 귀엽고 매력적인 현승이었다. "..형 여기 봐요." 이제 다 익은 컵라면을 먹으려고 뚜껑을 찢는데 현승의 말에 기광이 고개를 들자 현승인 자기 핸드폰을 들고 셀카를 찍고 있었다. 이에 기광이가 환히 웃으며 같이 찍자 너무 맘에 든다며 단번에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놨다. 이에 기광이의 핸드폰까지 뺏어들어 또 한장의 셀카를 둘이서 찍고, 그것도 배경화면으로 해놓았다. "이쁘다." 현승인 자기 핸드폰과 기광이의 핸드폰 두개를 나란히 열어놓고 비슷하게 찍힌 사진 두장을 빤히 바라보면서 웃었다. 별거 아닌거에도 쉽게 좋아하고 쉽게 기뻐하는 현승이는 기광이한텐 눈에 넣어도 안아플 사람이었다. 현승이가 해달라면 간이고 심장이고 다 떼어줄수 있을만큼. "우리 내일은 뭐해요?" "..아침먹고..바다 구경하고나서..자갈치 시장 가볼래? 가서 회도 먹자. 뭐 유명하다는데는 다 가보지뭐. 부산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깐.." "..아 내일 진짜 재밌겠다...." 비록 지금 먹고있는건 컵라면이지만 그래도 행복한지 기광이와 현승이는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정말 같이 있는것만으로도 좋다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참 잘어울리는 한쌍이었다. 한명은 남자답게 생기고, 한명은 곱상하게 생겨서. 정말 영원히 오래토록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커플이었다. * "...우와...." 오후 2시. 기광이와 현승이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그 유명한 자갈치시장이었다. 정말 전세계 해산물들은 여기에 다 모인듯 처음 보는 생선들이 여기저기 넘쳤고 다 광어같이 생겼는데 이름이 다 달라 그것도 신기한지 기광이와 현승이는 정말 유치원생마냥 계속 우와 우와만 미친듯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다 횟집중에서 제일 괜찮아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무작정 광어회 하나를 시켰고, 엄청난 밑반찬들과 함께 나온 광어회는 정말 방금까지 살아있었다는걸 여실히 증명하듯 몇개의 살토막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현승이와 기광이 둘다 본토 서울사람인지라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곳은 처음이었다. 서울이 미국 같다면, 부산은 브라질 같았다. 활기가 넘치고 생기가 있고, 무엇보다 정겨운 부산 사투리. 사투리는 서울말과는 다른 구수한 맛이 있었다. 그리고 말 하나로 '우리'라고 엮여질 수가 있으니까, 할줄 아는거라곤 서울말 밖에 없는 둘은 자갈치 시장의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에 마치 외국에라도 온것마냥 혼이 빠져있었다. "..진짜..대빵 맛있겠다..." 현승이는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살아 숨쉴 것 같은 회 한점을 들어 초장에 푹 찍어 입에 넣었고 거짓말안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것마냥 입에서 살살 녹는 그 맛에 현승이의 두 눈엔 하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기광이는 현승이의 반응에 반신반의하며 회 한점을 들었고 그걸 먹은 기광이의 눈에도 하트가 담겨있었다. 이러다간 회가 담긴 그릇까지 씹어먹을 기세로 둘은 허겁지겁 광어에 달려들었고 남자 둘이 먹기엔 조금 모자랐는지 금세 싹 사라진 광어회에 현승이와 기광이는 조금 아쉬운 낯빛을 했다. "..또 시킬까?" "어우..이 비싼걸..됐어요. 그냥 밑반찬이나 먹구 가요!! 와 부산..진짜 완전 좋다.." 현승이는 밑반찬으로 나온 양념게장을 먹으며 신나했고 그런 현승이를 물끄러미 바라본 기광이 역시 현승이가 기뻐하는것에 만족했는지 이것저것 밑반찬을 흡수했다.-흡수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우리 나중에 꼭!! 꼭!! 요섭이형이랑 두준이선생님이랑도 같이 오는거에요. 부산 부산 말로만 들었는데...진짜 최고야." "너는 대체 양요섭 윤두준을 왜그렇게 좋아하냐..." 기광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샐러드를 먹으면서 말했고 현승이는 기광이의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큰 두 눈을 동동 굴리더니 해맑게 입을 열었다. "요섭이형은 되게 귀엽구, 두준이선생님은 엄청 멋있잖아요! 그리구 둘다 너무너무 착한것 같거든요 내 눈엔.. 무엇보다, 요섭이형은 형 친구고 두준이선생님은 요섭이형 애인이니까..다 좋죠!!!" "..그래..좋은사람 많아서 좋~겠다 장현승."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그러니까 형두 두준이 선생님이랑 좀 친해져요!!!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현승이는 게장을 다 먹었는지 매운 입을 달래려 물을 벌컥 벌컥 마시더니 기광이가 먹고 있던 샐러드도 입에 넣었다. "근데 우리 몇시에 갈거에요?" "..여기서 아홉시 쯤 출발할까?" "너무 늦는거 아니에요? 나 그냥 엄마한테 친구네집에서 자고 온다고 그랬는데...." "그래도 우리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잖아." "그럼 여기서 일곱시에 출발해요!!!" 현승이의 말에 기광이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야금야금 잘 먹는 현승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불출 이기광의 눈이라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광이가 봤을때 현승이는 그 어떤 여자애들보다 훨씬 훨씬 엄청 많이 예뻤다. 얼굴도 동그랗고, 눈은 귀엽게 크고 입술은 아담하니 도톰하고. 무엇보다 남자애얼굴이라기엔 믿기지 않을정도의 하얀 얼굴. 어떻게 이런 애와 사귀게 되었는지, 그 조차도 너무 놀랍고 행복한지 기광이는 냠냠 먹고 있는 현승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왜..왜요?" "이뻐서." "어우 진짜!!!!!" 현승이는 이쁘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닭살돋고 오그라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어렸을때부터 이쁘다는 소리는 주야장천 늘 듣고 자라서 멋있다는 말을 듣고 싶을뿐 이쁘다는 말은 늘 거부했다. 뭐 이런것엔 아랑곳 않고 기광이는 하루에 한번씩은 늘 현승이에게 이쁘다고 칭찬해서 현승이가 늘 화를 내지만. 정말 보면 볼수록 상큼한 커플이었다. 기광-현승은. - 오후 다섯시. 이제 곧있음 짐 챙겨서 부산을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부산 이곳저곳 볼만한 곳은 다 돌아다닌 기광 현승이-기광은 국제시장에 들러 또 엄청 옷을 사재껴서 현승이의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해운대였다. 어젯밤엔 사방이 온통 칠흑같은 어둠 뿐이어서 잘 안보였는데 이렇게 어스름한 저녁에 오니까 적당히 운치 있고 딱이었다. 유난히 파도소리를 좋아하는 현승은 해운대에 다다르자마자 아이처럼 와다다다다 달려가 바닷물이 철썩이는 곳까지 갔고 기광이는 그렇게 좋아하는 현승이를 계속 카메라에 담으며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왔다. "..와..진짜 물이 엄청 파래요!!" 딱 봐도 엄청 차가울것이라는게 느껴질만큼 새파란 바닷물은 하얀색 물거품과 어우러져 참 이쁜 색을 내고 있었다. 저 멀리에는 온통 짙은 파란색인데, 그들이 있는 이곳은 하얗고 투명한 곳. 현승이는 계속 하하하 하고 웃으면서 치고 빠지는 바닷물을 따라다녔고 기광이는 말없이 뒤에서 사진만 찍어댔다. 핸드폰으로도 찍었다가, 카메라로도 찍었다가. 그러다 현승이는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기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뭔가를 찾는지 주위를 슉슉 둘러봤고 근처에서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고오더니 하얀 모래사장위에 어떤 것을 크게크게 그리고 있었다. 기광인 그게 궁금했지만, 현승이가 동작을 멈출때까지 기다렸고 한눈에 하나만 볼수 있을정도로 아주 크게 글씨를 새긴 현승인 저 뒤에 있는 기광이를 불렀다. "짠-" 현승이는 나뭇가지를 대충 바닥에 버려놓으며 손을 탁탁 털었고 기광인 걸음을 옮기면서 현승이가 쓴 글씨를 읽었다. "이..기..광..알..러..뷰..사..랑..해." 현승인 센스있게 I Love You를 I♡U 라고 썼고 그걸 읽은 기광이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더니 현승일 대뜸 꽉 끌어안았다. 이에 현승이는 헤헤-하고 부끄럽게 웃더니 기광이의 등을 안았고 기광인 현승일 아무말도 없이 꽉 끌어안고 있더니 현승이의 입술에 쪽-하고 가벼운 뽀뽀를 해주고는 아까 현승이가 버려둔 나뭇가지를 들어 현승이가 새겨넣은 글자 옆에 또 뭔가를 쓱싹쓱싹 적어내려갔다. "사..랑..해..행..복..하..게..해..줄..게" 악필기광이가 써내려간 글씨는 삐뚤빼뚤 마치 초딩이 쓴것같았지만 그렇기에 더 진심이 느껴지는지 현승이는 약간 울먹이며 기광이에게 천천히 걸어오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이에 기광이는 현승이의 오른쪽 얼굴을 잡고, 한손은 허리를 끌어안은채 자세를 취했고 현승이는 기광이 목에 팔을 둘렀다. 파도소리가 깊게 울려퍼지고, 그 둘이 써놓은 약간은 오글거리는 그 글씨 위에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날씨가 매우 추운데도, 두사람은 추운것도 못느끼겠는지 계속 서로의 입술을 탐했고 그러는 그 시간. 현승이와 기광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제일 기쁜 커플이었다. 누가 뭐래도, 남들은 남자 둘이서 뭐하는거냐며 손가락질 할 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이뻤다. 서툴어보이지만 절대 서툴지 않은 두사람. 두 사람이 평생 삶을 같이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두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 끝이 언제건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마지막까지도 서로를 열렬히 사랑할 것이라는 것을. 처음 와본 부산.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 위에 써내려간 서로를 향한 마음. 이기광 장현승.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기광 장현승이의 짧고 사소하지만 달콤한 이야기 The End. #27. "양요섭!!!! 너 안내려올래!?!?!?" 1월 4일 오후 6시. 앞으로 1시간 반만 더 있으면 이 양요섭과 윤두준은 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탈것이다. 왜냐고? 나는 1월 5일, 내 생일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복잡한 미국보단 한가한 제주도가 더 좋을 것 같아 엄마한텐 집에 그냥 있겠다는 핑계를 대고 며칠전 바로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두장 끊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나와 윤두준이 처음으로 여행을 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알았어!!! 지금 내려가!!!!" 윤두준은 뭐 그렇게 준비하는게 빠른지 1박 2일로 짧게 놀다오는거라 간단히 챙기면 된다며 작은 트렁크에 옷 몇벌과 세면도구만 챙겨서 이미 1층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윤두준이 짐을 쌀때 늦장을 부려 결국 허겁지겁 짐을 싸고 있었다. 쌀때 내것도 좀 같이 싸주지. 에이씨. 나는 대충 옷장에서 보이는 옷은 트렁크안에 구겨넣었고 핸드폰, 지갑은 대충 점퍼 주머니에 쑤셔넣은 뒤 1층으로 부리나케 내려갔다. 내가 내려가자 윤두준은 소파 팔걸이에 대충 걸터앉아 팔짱을 낀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헉헉 대며 내려오자 내 머리에 콩-하고 꿀밤을 먹였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 준비하랬지." "..씨..어차피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비행기 처음 타보냐? 지금도 늦은거거든요 양요섭씨? 잔말말고 얼른 나와." 윤두준은 검은색 패딩점퍼에 회색 후드티를 입고 블랙진을 입고 있었고 나는 있는대로 주워입고 나오느라 패션이고 뭐고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뭐 어쨌든간, 윤두준은 내가 들고 내려온 트렁크까지 들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고 내가 뭐 두고온게 없나 집을 휙 둘러보다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카메라 챙겼어 형!?" "넌 니 몸이나 잘 챙기면 되니까 빨랑 나와." 윤두준은 신발을 신고 문을 열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대충 운동화를 구겨신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또 순간 스며들어오는 찬기운에 몸을 웅크렸고 문을 단단히 잠근 윤두준은 으휴, 하는 노인네 소리를 내더니 자기 팔에 걸려져있던 빨간 목도리를 내 목에 둘둘 감아주었다. "옷 따뜻하게 입었어?" "엉? 대충!!" 윤두준은 내 점퍼의 지퍼까지 쫙 올려주더니 양손에 트렁크 두개를 들고 엘레베이터 앞으로 갔고 나는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갔다오면 앞으로 놀러가는거 없이 무조건 공부야. 알지. 딴생각하지도 말고 지금이 우리 마지막으로 노는거다. 알았어 양요섭?" "..씨..그래도 사람이 공부하는 기계도 아니고 가끔은.." "너 실력이 얼마나 모자른지 아직도 몰라? 놀생각은 꿈에도 꾸지말고 수능때까지 무조건 공부만 해. 이제 너랑 안놀아줄거니까 알아서해." "..형이 안놀아준다고 내가 못노나? 나 혼자 되게 잘 놀 수 있다 뭐!!! 오락실도 있고 피씨방....." 내가 중얼거리자 윤두준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뭐 어쨌다고!!! 이씨... "알았어!!! 공부만 할게!! 그럼 되잖아!!! 이씨.. 대학가면 형 말고 더 잘생기고 멋진 사람이랑 놀꺼야!!!!! 미워!!!" 어느새 올라와 문이 열린 엘레베이터에 탄 나와 윤두준. 윤두준은 나를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다시 말해봐." "...혀..형보다 훨배 멋있고 잘생긴 선배랑..놀..꺼..라...구..." 나를 태워죽일듯 노려보는 윤두준의 시선에 나는 결국 쫄아버렸다. "다.시.말.해.봐." 더 살벌하게 웃으면서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오며 한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는 윤두준의 모습에 결국 나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이러다가 진짜 제주도 안간다며 깽판칠까봐 무섭기도 했고... 사실 지금 윤두준의 표정이 제일 무서웠다. "..윤두준이랑만 논다구. 한눈 절대 안팔고 무조건 형이랑만 놀거라구." 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윤두준은 트렁크를 살짝 내려놓더니 내 볼을 꼬집었다. "너는 그래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먼저 앞서나가는 윤두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고 차 트렁크에 짐 두개를 실은 윤두준은 차에 올라타 너무나 익숙한듯 내 안전벨트를 먼저 매주고, 자기 안전벨트를 맨 뒤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이기광] "..야!!! 현승이랑 부산가니까 좋냐!? 너 지금 어디?" 「방금 기차 탔다. 너랑 우중충하게 미국가서 노는것보다 훨씬 좋지. 옆에 우리 현승이도 있고.」 "..아 재수없어 진짜. 야. 나는 제주도 가거든? 장현승이랑 재밌게 놀아라. 아니..어떻게 중학교때부터 친구라는 새끼가..말하는 꼬라지 하고는..재수없어 너 이기광." 「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솔직히 내가 너랑 미국가서 뭐하고 노냐? 솔직히 너나 나나 잘된거 아니냐. 난 현승이랑 놀러가고 넌 윤두준이랑 놀러가고. 딱 됐네.」 그래도 내심 서운했다. 뭐, 까놓고 얘기하면 이기광 새끼랑 놀러가는것 보다야 윤두준이랑 놀러가는게 훨씬 재밌고 즐겁긴 하겠지만..그냥 말뿐이어도 아쉬운척좀 해주면 안되나.. 나쁜새끼. 하여튼 장현승이랑 헤어지고 나한테 다시 돌아오면 엉덩이나 세게 걷어차줄거다. 나쁜놈. "그래. 아주 좋~게 된거지. 나랑 통화하는 시간도 아까우실텐데 잘난 장현승이랑 놀지 그러냐?" 「어. 안그래도 그럴 예정이다. 넌 이미 제주도냐?」 "지금 공항 가는 중이다. 왜. 알아서 뭐하게" 「그냥..예의상 물어본것 뿐이다. 잘 놀아라 안녕.」 뚝. 변했다. 그래도 이기광새끼 여자친구 있을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진 아니었는데.. 뭐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기광한테 우정으로 뭔가..그런 깊은 감정이 있는건 아니지만 서운한건 사실이었다. 이기광이 사랑과 우정 중에서 사랑을 더 중요시 여기는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해도 그래도 진짜 오랜만에 둘이 여행갈 뻔한 일이었는데도..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파토를 내더니 이제는 저렇게 전화를 뚝 끊어버리다니..진짜 놀러갔다 오면 엉덩이 말고 정강이도 발로 까버릴거다. 괘씸한새끼. "..나쁜새끼..갔다오면..정강이 까버릴꺼야. 개새끼..." 나는 전화기만 내려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고 윤두준은 나를 살짝 보더니 말을 걸었다. "말버릇 언제 고칠래 양요섭?" "...뭐. 형도 준형이 선생님이랑 있을때 욕 엄청 하던데!! 나도 형 앞에선 안하잖아! 그냥 쌤쌤이라고 쳐. 아..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내가 지랑 몇년 친군데..그렇게..아 짜증나." "..그렇게 짜증나면 지금 당장 부산으로 달려가서 이기광이랑 놀던지." 윤두준의 말에..난 그제야 내가 실수를 했다는걸 깨달아버렸다. 요즘들어 자꾸 내 말한마디 한마디,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쓰고 별거 아닌거 가지고 툴툴대는게 늘었다. 평소 윤두준 답지 않게..질투는 무슨.... 맨처음 질투야 귀여웠지만..자꾸 이런식이면...곤란한데....? "..그냥..말이 그렇다는거지..삐..졌어?" "내가 애냐. 시도때도 없이 삐지게." 윤두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운전에만 집중하며 대답했고 나는 에이..삐졌구만..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푹푹 찌르자 하지 말라며, 사고 난다고 얘기해서 나는 최대한 자제했다. 운전은 안전 운전이 제일 중요한거니까! "..기광이랑 나랑..참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다? 기광이 새끼가 겉으로 보기엔..좀 불량해보여두 애가 속도 깊고..워낙 낯간지러운걸 잘 못해서 그런 표현은 잘 안하는데..뭐 사실 사내새끼들 둘이서 콩닥 대는것도 웃기기도 하지만..그래도 걔랑 나랑은 부모님이 그렇다는게 공통점이라 말도 잘 통하고.. 생각하는것도 비슷하고..그래서 처음 만나면서부터도 친해졌었어. 묘하게 자꾸 친해지고 싶더라고." "친구는 원래 끼리끼리 만나는거야." "..이상하다..형이랑 준형이 선생님은..안비슷해보이는데...? 속 깊은것도 준형이 선생님이고, 막 따뜻하고 배려해주고 그런것도 다 준형이 선생님이고...." 윤두준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냥 다시 앞에만 보며 운전에 집중했다. 일부러 놀려줄라고 장난친건데..진짜 화났나... 비교하지 말걸 그랬나.... "..화..났어?" 요즘들어 부쩍 질투가 심해진게 느껴진다 정말. 왜그러지? 왜? 왜지?! "너는..알면서 그러는거냐, 진짜 모르는거냐.." "어?" "니가 나라고 생각해봐. 내가 니 앞에서 이기광 칭찬하고, 좋다고 그러면..너 기분 좋아?" "형은 그럴리가 없잖아." "가정을 하면." 가정..? 글쎄..어차피 이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한다고 윤두준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건 아니니까..별로 상관 없는거 아닌가? "..상관없잖아. 어차피 형이 좋아하는 사람은 나니까." 내 말에 윤두준은 그냥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그러니까 화난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삐진것 같지도 않은.. 그냥 생각에 잠긴 뭐 그런거 같아서 괜히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아 나도 그냥 잠자코 눈을 창밖으로 돌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쳐다봤다. 내가 뭐 또 잘못 말했나...? "일단 여기 앉아있어. 티켓 확인 좀 하고 올테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공항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보니까 김포공항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인천 국제공항에는 그래도 다섯번은 넘게 가봤던 거 같은데.. 규모도 거기보다 작고 아담하고..평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그렇게 북적이지도 않아 좋았다. 인천 공항은 뭔 놈의 사람이 그렇게도 많은지 항상 북적북적..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었으니까. 나는 사람이 많은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때부터 사람들의 손길을 별로 타지 않고 자랐기때문에, 사람에 대한 애착 이라고 하나 뭐 그런것도 없고 그냥 딱 있을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와서 유난히 사람이 모이는 곳을 싫어했었다. 그래서 명동거리나 주말의 놀이공원은 정말 내가 생각했을때 제일 끔찍한 곳. 그러니까 일부러 여행가는 것도 미국이 아닌 제주도를 선택한거였고. "삼십분 남았다. 가자." 그냥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때릴동안 언제 왔는지 윤두준이 내 앞에서 티켓을 들고 있었고 나는 대답대신 그냥 트렁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웬일인지 게이트로 가지도 않고 그냥 나만 보고있길래 뭐 문제 생겼나 싶어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너처럼 생각 못했어." "에?" "니가 나를 좋아하는건 변함없는데, 니가 내앞에서 다른 사람 칭찬한다고 그게 변하는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 못했어. 그냥 불안하고 짜증나기만했는데..." 윤두준은 정말 너무 뒷북이 심한편이다. 내가 아까 그 말을 한게 언젠데 이제와서.... 근데 그동안 계속 진지했던 얼굴이 그 생각때문에 그랬던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귀여워졌다. 나보다 6살이나 많은 형이지만..그래도 귀여워. 나는 윤두준이 순간 너무 귀여워보여서 그냥 남의 눈치 볼것 없이 살짝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순간 눈이 커지는 윤두준. "윤두준 어린이. 얼른 비행기 타러 갑시다." 나는 트렁크의 손잡이를 길게 뺀 뒤 윤두준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친뒤 어딘지도 모르면서 일단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윤두준은 살짝 뛰어오더니 내가 양손 가득 쥐고 있던 트렁크를 잡아챈 뒤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바보야. 이쪽 아니거든."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나보다 살짝 앞서 걸었고 나는 그런 윤두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멋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봤을때부터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 윤두준은 여전히 멋있었다. 우리가 같이 새해를 맞이하고 지금은 내 생일날 같이 놀기 위해 여행을 가고.. 작년 오늘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지금 나한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내년 오늘엔, 오늘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 "..으..나는 비행기 착륙할때가 제일 싫어..." 심하게 덜컹덜컹거리는 비행기에 나는 그냥 두눈 질끈감고 잠잠해질때까지 앉아있었고 윤두준은 그런 날 보면서 웃는지 키득키득 소리도 나고 무슨 핸드폰 소리도 나는거 같았다. "..나찍었어!?" "기념촬영." "...씨...으아..아이씨..진짜싫어." 마지막으로 세게 쿵-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해진 비행기안에선 승무원들이 이리저리 분주했다. 착륙이 완료된 기내에서는 사람들이 차근차근 일어나서 짐을 꺼내고 이것저것 바빠서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좀 사람들 빠지면 나가려고. 근데 성격이 좀 급한편인 윤두준은 어느새 짐칸에서 짐을 빼어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이따 나가. 사람 너무 많아." 나는 입구에 사람들이 깨알같이 모여든걸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서 내 옆에 서있는 윤두준의 손을 붙잡아 자리에 도로 앉혔다. "호텔은?" "예약했어." 나는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살짝 윤두준의 어깨에 기댔다. "..좋다. 여행도 오고..내가 문득 생각한건데..우리가 평생..같이 이렇게 살수 있을까?" 나는 가끔..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내가 평범한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안이 그렇게 평범한 집안도 아닌데, 나는 지금 남자를 만나고 있고, 남자와 사랑하고 있고, 이 남자의 집안도 그리 평범한 집안은 아니며 나보다 여섯살씩이나 많은데..이 사람이 나를 지금처럼 아껴줄수 있을까. 분명 역경이라는 뭐 그런게 올텐데..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뭐 이런저런 복잡한생각들? "살아야지 평생. 같이." "..형한테 나는..일순위야?" "뭐?" "..나는..미안한데..이건 삐질 일도 아니고 화낼일도 아니야..그냥 내 생각인데.. 나한테 형은 일순위가 아니야..형을 제일 먼저로 치기엔..누나가 있고.." 나는 이렇게 여행까지 와서 우울한 생각과 암울해지는 대화를 하고싶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눠야할 얘깃거리였고 언젠가는 매듭지어야할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지금 이렇게 소란스러운 비행기 안이었다는게 조금 문제인거 같긴 했지만.. 어쨌든 윤두준은 내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떤 답을 바라고 한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나한텐 니가 제일 먼저야. 니가 누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텐 너보다 먼저 생각해야될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 근데 내가 니네 누나한테까지 질투를 해야되는건 아니겠지?" "..윤질투씨. 이제 그만 가시죠!!" 윤두준은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리며 의자에서 앉아 트렁크 두개를 들며 기내에서 나갔고 나는 묵묵히 짐을 들고 나가는 윤두준의 뒷모습을 또 바라보면서 답이 나올것 같지 않은 질문들을 했다. 내 스스로에게. 누나와 윤두준. 둘 중 선택해야되는 날이 오면 난 누굴 선택해야되지? 뭐. 역시 쓸데없는 질문이다. 왜 둘 중 한명을 선택하는 날이 오겠냐. 정말..나는 좀 너무 쓸데없는 걱정과 너무 앞선 고민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짜증나게. "타." "..뭐야?" "렌트카." 아니..무슨 우리가 2박 3일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1박 2일 있는건데 뭐하러 차까지 빌렸나 싶어서 나는 그냥 멍하니 운전석 문을 여는 윤두준을 바라봤다. 나는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게다가 지금은 벌써 밤 11시 반이나 됐는데 여기 지리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직접 운전을 하겠다는건지.. "..그냥 택시타고 다니면 되지. 왜 빌렸어?" "택시 불편해. 얼른 타. 시간 없어." "무슨 시간이 없어. 남고 남은게 시간이구만.." 차는 SUV 였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큰차. 윤두준의 차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중형 승용차였으니까..이런건 또 다른 매력이라 나는 뭐 이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뒷자석에 트렁크를 집어넣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확실히 시야가 넓어지는구나..나는 이것도 좋아서 안전벨트를 매고 완전 익숙하게 운전을 시작하는 윤두준을 바라봤다. "어디에 예약했어?" "라마다." "거기 비싼데잖아." "호텔이 다 거기서 거기지." 윤두준은 밤길운전이라 더 집중하는지 최대한 단답으로 말하며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대로 따랐고 나도 그 운전을 방해할 마음은 없어서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창밖만 내다봤다. 나도 언젠가 윤두준처럼 운전하고 싶은데..아마 윤두준은 말릴게 뻔했다. 운전은 자기가 하면 되는데 뭐하러 배우냐고, 운전해봐야 위험하기나 하지 뭐하러 하냐며 또 엄청난 잔소리를 쏟아낼거고...으 끔찍해. 나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서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쳤고, 또 윤두준을 바라봤다. 가끔은 너무 꿈 같았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거, 사실 생각조차 해본적 없는 일이었는데. 그리고 그런일이 나한테 일어날줄은, 그리고 그런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줄은..몰랐는데. 그런일이 나한테 일어났고, 이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열심히 사랑하고 있고. 나도 그러고보면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으니까. 이세상엔,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사람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은 많다. 뭐, 예를 들자면 짝사랑을 하는 사람,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 이러한 사람들은 그 사람을 그 누구보다 제일 많이 사랑하지만 그 사람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 많이 슬픈 사람들인데, 그에 비하면 나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만지고 싶을때 만질 수 있고, 그 사람의 입으로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그 사람 입에서 내 이름이 불려지고, 같이 잠도 자고 여행도 가고..옆에 있을 수 있고. 어떻게보면 윤두준과 함께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들이 나한텐 다 하나같이 버릴 수 없는 추억과도 같은 기억들이었다. 어떤일이 일어난다한들, 절대 버릴수 없는 기억. 그럴리는 없겠지만, 윤두준이 싫어지는 날이 온다해도 이 기억만큼은 싫어할 수 없는.. 나한텐 엄청나게 소중한 시간들이었으니까 정말..그럴리는 없지만 정말 그런일이 있어서도 안되지만 내가 만약 윤두준과 어쩔수없는 이별을 한다해도 추억 하나하나 꺼내어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이기억, 내일은 이기억.. 아, 그렇게되면 내가 윤두준을 잊을 수가 없겠구나..... "양요섭! 무슨 생각을 그렇게해!! 내려!" 내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왔다갔다거리며 나를 툭툭치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해져있어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 환한 불빛이 나오는거보니 여기가 호텔이구나. 라는생각을 하면서 바로 내렸다. 윤두준은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내가 내리자마자 관리인에게 키를 넘겨준 뒤 혼자 호텔 로비로 들어갔고 나는 곧장 윤두준을 따라 올라갔다. 윤두준은 카운터로가서 키를 받아서 엘레베이터 앞에 섰고 나는 서둘러 그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렇게 서둘러? 남는게 시간이래니까?!" "아 시끄러. 빨랑 타." 바로 1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를 탄 나와 윤두준. 대체 뭐야. 나는 12층에 내려 윤두준을 따라 걸었고, 1206 이라고 쓰여있는 방 앞에서 윤두준은 나를 가로막았다. "딱 20까지만 세고 들어와." "왜!! 뭐하는데!?" "씁. 시키는대로 해!! 이십까지 세고 들어와!!!" 윤두준은 나한테 키를 넘겨준뒤 먼저 들어가버렸고 나는 왜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그냥 대충 서있었다. 무슨 초딩같이 이십이야.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이기광] "여보.."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양요섭. 생일축하합니다.」 나는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싶어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핸드폰 화면을 다시 켜서 봤더니 딱 열두시였다. 1월 5일 0시. "..너.." 「내가 너랑 친구하고 처음으로 생일날 같이 안있어주는 날인데..뭐 넌 더 좋겠지만. 윤두준이랑 생일 잘 보내고..현승이랑 나랑 돈 모아서 서울 올라갈때 좋은 선물 사갖고 갈테니까 기대해라. 생일축하하고..현승이가 할말있대.」 「아..여보세요? 형. 저 현승인데요. 생일 진짜 축하드려요!! 형 두준이선생님이랑 제주도 놀러가셨다면서요!! 저는 기광이형이랑 부산 놀러왔는데 여기 되게 좋아요!!우리 꼭 넷이서 여기 다시 놀러와요!!네?」 현승이가 기분이 좋은지 아주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원래 그렇게 방방뛰는 애가 아닌데.. 뜻밖의 축하 전화에 나는 가슴 끝부터 찡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친구라고 하나 있는게 친구 노릇 하는구나 싶어서. "..어..고맙다." 「어. 야. 그럼 윤두준이랑 화끈한 밤 보내고. 끊는다. 생일 축하!」 기광이가 원래 깨방정이기는 하나, 이런 낯간지러운 잘 못하는 애라 그냥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왠지모르게 기분이 묘해져서 가만히 서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중학교때부터 걔랑 친구 먹은 이후, 항상 내 생일엔 기광이와 같이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누나도 같이 있었지만, 항상 선물도 엄청 비싸고 엄청 좋은걸로 줘서 매년 깜짝깜짝 놀랐는데 올해는 참 많은게 바뀌어 있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기광이 옆에 있는 사람도. "야! 안들어와!?" 문을 빼꼼히 열고 나를 보는 윤두준의 등장에 나는 놀라서 눈만 크게 떴다. 어우 깜짝이야. 나는 알았다며 윤두준이 문을 열어준 틈으로 손을 넣어 문을 열었고 윤두준은 내 눈을 두 손바닥으로 가렸다. "뭐야. 왜이래?" 내 말을 고이 씹어드신 윤두준은 내 뒤에 서서 나를 슬슬 밀며 어디론가로 데려갔고 나는 안보여서 더듬더듬 거리며 어딘가에 멈췄다. 그제야 풀어주는 손. 내 눈앞에 펼쳐진건 침대위에 놓여진 내 얼굴보다 큰 생크림케익과 샴페인, 그리고 커다란 선물 상자 였다. "..뭐야..?" "생일 축하해." 윤두준은 내 앞에 서서 말했고, 무슨 이게 영화도 아니고 방 분위기도 온통 주황빛으로 은은했다. 사실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고맙다며 방 불을-멀쩡한 형광등- 켜려고 했지만 윤두준이 내 양 얼굴을 붙잡아왔다. "생일 축하해. 사랑해." 윤두준은 그대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고 나는 살포시 윤두준의 등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기광이의 전화가 나를 감동하게 만들었다면, 윤두준의 이런 상큼한 이벤트는 찡하게 만들었다. 정말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라는게 느껴져서. 나를 낳아준 부모도 오늘이 내 아들 생일이란걸 모르고 있을 이시간에, 윤두준은 나를 위해서 여행을 준비하고 이런 이벤트를 미리 준비하고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나왔다. 고맙고 미안해서. 윤두준은 내 양 얼굴을 꽉 잡은채 부드럽게 내 입안을 헤집어 놓았고, 나는 자꾸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때문에 손으로 볼을 닦으려했지만 윤두준은 이미 내가 울고 있다는걸 알았는지 직접 계속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왜울어." 윤두준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내 눈을 보며 말했고 나는 그냥 웃었다. 윤두준과 만나서 지낸 시간들 모두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웠다. 내가 그렇게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오면서 느껴왔어야할 모든 기쁨 행복 즐거움을 윤두준과 만난 이 짧은 삼개월 동안 다 느끼고 있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들은 윤두준과 함께. 아마 이 사람이 나한테 있음으로써 행복한 거겠지만. "..고마워서.." 윤두준은 침대 바로 앞에 있는 화장대 쪽으로 나를 밀어 화장대에 나를 기대어 놓은채 계속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자꾸만 맺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시는..안놓칠게." 윤두준은 나를 끌어안으며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고,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했다. 그 순간 든 생각. 윤두준은 평생 장현우를 놓쳤다는 자괴감으로 살았었고,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일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두려웠을지, 무서웠을지. 그때 그 일이 또다시 나에게 반복될까봐 얼마나 공포였을지..나는 또 윤두준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이에 윤두준은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갑자기 나를 풀어내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선물 궁금하지." "..뭔데?" "오늘 선물은 두개가 있어. 하나는 저기 저거고, 하나는..비밀." 윤두준이 웃으며 말하는거 보니, 뭔가 나한테 좋은거 같진 않았다. 그래도 선물이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윤두준의 옆에서 물러나 침대에 가서 앉았는데 윤두준이 그런 나를 일으키더니 지가 침대에 앉고 자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다. "..뭐." "여기앉으라고." "또!? 아 싫어!!" "쓰읍. 또 말안듣지?" 나는 그때 그 이후, 윤두준의 허벅지에 앉는걸 꺼려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그때 말도안되는 유혹을 하겠다고 나서서..그랬던것도 또 생각나서 괜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생각만하면...으.. 하지만 윤두준이 나를 엄한 얼굴로 보자, 그걸 이길수 없는 나는 그냥 곧이곧대로 윤두준의 허벅지에 한쪽으로 다리를 모아놓고 앉아 선물 상자를 들었다. 이에 윤두준은 내 허리를 한손으로 감아주며 선물상자의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는 하트 반쪽이 팬던트로 달린 핸드폰 고리가 들어있었다. 빨간색인데 삐죽삐죽 하트 반쪽이 깨져서 나머지 반쪽은 분명 윤두준의 핸드폰에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딱 들어 나는 받자마자 피식 하고 웃었다. "왜웃어?" "..귀엽네. 이거 반쪽은 형한테 있어?" "당연하지. 짠." 윤두준은 자기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었고 아니나다를까, 나머지 하트 반쪽이 윤두준의 핸드폰에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진짜 애도 아니고.." "그래서..맘에 안든다고 양요섭!?" "아니..누가 맘에 안든대!?" 나는 활짝 웃으며 내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에 고리를 달려는데 갑자기 지이이잉- 지이이잉-하고 진동이 울렸다. [누나] "...어!?!??!?!?" 나는 핸드폰고리를 달다말고, 핸드폰 액정 화면에 뜬 너무 반가운 이름에 나도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이에 윤두준은 왜그러냐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큼큼-하고 목까지 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동생!!! 누나야!!!」 "누나!!!! 왜 이제 전화해!!!!!" 「미안미안..섭섭했지!!! 누나가 자주자주 전화 했어야했는데..요즘 콩쿨 준비때문에..너무 미안! 동생 오늘 생일이지? 오늘같은날 누나가 옆에 있어줘야되는데..작년에두 올해두..매번 미안하네..」 누나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지 늘 그렇듯 목소리가 맑았다. 얼굴을 못본지는 거의 일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고, 전화통화를 한지도 벌써 팔개월 정도 되어가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인 누나 목소리에 나는 갑자기 찡하기도 하고 그리워져서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그래..누나 잘 지내고 있지? 밥 잘 챙겨먹고? 잠도 꼬박꼬박 잘 자고?" 「누나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동생은 어떠십니까? 맞다. 너 올해 고삼이지! 공부는 잘 하고 있어?」 윤두준은 내가 누나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걸 알았는지 그냥 옆에서 내 손만 만지작 거리다 장난기가 솟았는지 내 볼에 쪽-하고 뽀뽀를 했다. "왜그래!!!" 나는 너무 놀라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고 윤두준한테 말했고 윤두준은 그 틈을 타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나는 하지 말라며 윤두준을 밀었지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웃으며 내 허리를 꽉 잡아 안았다. "그럭저럭..누나 밥 잘 챙겨먹어. 귀찮다고 빵같은걸로 떼우지말고.." 「나는 잘 지낸다니까? 너..왜 미국 안왔어? 엄마 아빠가 너 오라고 그랬다던데..」 "..그냥..사람 많은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가봤자 할 것도 없구.." 나는 윤두준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고 윤두준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 기광이랑?」 "..아..기광이는 친구랑 놀러갔고..나는..혼자 있어. 혼자. 이 밤에 내가 누구랑 같이.." "오빠아~~얼른와~~~~" 내 귀에 스미는 이 여자목소리가..지금...뭐지!? 「뭐야? 너 여자애랑 같이 있어 양요섭?」 윤두준은 지가 낸 여자목소리에 감탄하며 계속 킥킥대면서 웃었고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퍽 하고 밀쳐 그의 허벅지 위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윤두준이 날 꽉 잡아 매는 바람에 일어날 수 없었고 나는 그대신 윤두준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아니야!! 드라마. 드라마소리!! 누나..한국 언제올꺼야?" 「..글쎄..빠르면 내년..이나..내후년쯤? 나도 얼른 가고 싶다.. 내동생도 보고 싶고..한국도 가고 싶고..니가 해준 김치볶음밥 엄청 먹고 싶은데...」 "얼른 와. 내가 누나 배 터지게 맨날맨날 만들어줄게." 「알았어. 얼른 갈게. 동생. 생일 축하하고, 누나가 옆에 못있어줘서 너무너무 미안하구.. 건강 잘 챙기고, 고삼이라고 너무 무리해서 공부하지 말구! 선물은 그저께 항공우편으로 부쳤거든? 아마 빠르면 내일쯤 도착할거야!! 큰건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구. 동생. 사랑해.」 "나두...고마워 누나. 누나도 몸 잘챙기고 다이어트 한다고 샐러드 같은것만 먹지말고 밥 먹어 밥. 그리고 종종 연락해! 알았지? 끊을게.." 「응. Happy Birthday!」 누나 목소리가 생각보다 괜찮게 들려 다행이었다.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공부 잘 마치고 한국 왔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그리워져서 나는 시무룩해졌다. 누나를 못본지 꽤 오래된거 같은데..내년에나 한국에 올것 같다는 말에 나는 너무 서운해졌다. 미국 갈걸 그랬나..싶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여자 혼자서 타지 생활하는게 좀 힘든게 아닐텐데.. 내 표정이 안좋아진걸 느꼈는지 윤두준은 내 볼을 툭툭 건드려 자기를 보게했고 내가 그를 쳐다보자 윤두준은 살짝 고개를 꺾어 내 입술에 촉촉한 입술을 갖다대었다. 마치 나를 위로라도 해주는것마냥, 내 뒷통수를 살짝 부여잡고 눈을 곱게 감아 내 입안으로 스며들어왔고 나는 윤두준의 손을 꽉 잡은채 그를 받아들였다. 그때 마침 생각나는 아까 윤두준의 장난! 나는 입술을 확 떼고 앙 다문채 윤두준의 얼굴을 화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왜!? 왜 그런 장난쳐!!" "내가 뭐? 아..그거? 오빠~얼른와~~~" 그 덩치에 여자목소리가 가당키나 한지, 나는 하도 어이없어 핏-하고 웃었고 윤두준은 지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자기도 킥킥 대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내 허리를 좀 더 껴안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니네 누나 생각 안나게 잘해줄게. 사랑해주고 아껴줄게." "..오그라드는 말 좀 하지마!!"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윤두준의 어깨를 살짝 밀친뒤, 아까 달려다가 만 핸드폰고리를 다시 핸드폰에 달려고 거기에 집중하는데 윤두준이 자꾸만 내 볼에 뽀뽀를 하는 장난을 쳐서 쉽사리 들어가지 않았다. 이건 집중해도 안되는데!!!이씨!!! 내가 화를 내려고 윤두준을 쳐다보자 윤두준은 그 때를 기다렸는지 쪽-하고 내 입술에 뽀뽀를 했고 나는 이제 윤두준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겠단 생각으로 아무렇지않게 다시 고개를 핸드폰에 돌려 모든 집중을 다해 매달려는데 계속 윤두준이 내 얼굴 곳곳에 뽀뽀를 하는 장난을 쳤다. 들어갈듯, 들어갈듯 하면서 안들어가는 고리에 나는 짜증이나서 차마..던지지는 못하고 그냥 핸드폰과 고리를 고이 침대에 놔두었다. "하지마!!" 나는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또 입술에 부딪쳐오는 그의 입술에 억지로 그를 밀쳐내며 말했고 윤두준은 내 말을 들리기는 하는건지 내가 떨어지면 또 다가오고 떨어지면 다가와서 결국 나는 포기해버렸다. 이에 윤두준은 지치지도 않는지 내 입술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고 그의 입술이 내 입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점점 그 입술이 내 턱, 목으로 내려오더니 내 쇄골가에 머물렀다. 간지럽게 할짝이다가 또 흡-하고 빨아들이는 그의 행동에 나는 또 소름이 쫙 끼쳐서 윤두준의 어깨를 꽉 잡았고 윤두준은 싱긋 웃더니 내가 입고 있던 점퍼와 티셔츠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왜..왜.."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 윤두준의 손을 살짝 잡았고 윤두준은 입을 열었다. "두번째 선물." 윤두준은 내 옷을 벗기다말고 나를 세워놓더니 침대에 올려져있던 케익과 온갖 물건들을 대충대충 바닥에다 내려놓았고 뻘쭘히 서있는 나를 안아들어 침대위에 눕혔다. "..아니..잠깐..잠깐만." 내 위에 자연스레 올라탄 윤두준은 내 옷을 벗겨 러닝셔츠만 남겨뒀고 나는 당황스러워 일단은 웃으면서 윤두준을 제지했다. 그치만 윤두준은 살짝 윙크를 하며 내 입에 입을 맞추었고 나는 내 입술에 그의 입이 닿자마자 느껴지는 설레는 느낌에 그가 나에게 좀 더 깊게 들어올 수록 나는 점점 황홀함에 정신을 잃어갔다. 윤두준의 키스는 그런 마력이 있었다. 내 혼을 쏙 빼놓는 뭐 그런.. 윤두준은 키스를하며 자신도 옷을 차근차근 벗었고 나와 같이 러닝셔츠만이 남아있을무렵 윤두준은 입술을 떼며 나를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내 이마서부터 눈, 코끝, 볼, 입술, 턱까지 어느곳 하나 빼놓지 않고 마치 도장을 찍는것처럼 입을 맞추어주었고 나는 그냥 눈을 멀뚱멀뚱 뜬채 윤두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하나 빼놓을 곳 없이 훤칠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 그의 얼굴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할때동안 나는 윤두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완전 근육질은 아니지만, 적당히 잡힌 근육에 나는 윤두준의 귓볼을 살짝 만지작대며 웃었고 윤두준은 내 바지를 한번에 벗겨내며 윙크를 날렸다. "생일 축하해." 윤두준은 내 러닝셔츠마저 벗겨내고, 내 브리프까지 모조리 벗겨내었다. 순식간에 알몸으로 되어버린 나는 확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렸고 윤두준은 내 손등위에 따뜻한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사랑해." 윤두준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입술에 달콤하게 뽀뽀를 해주더니 자신이 입고있던 모든것들을 다 벗어던지고 내 몸위로 가까이 몸을 겹쳤다. 저번에 했던것과는 다르게, 윤두준의 얼굴을 빤히 볼 수 있다는게 저번과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오늘이 더 좋다는거.. 윤두준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파묻고 혀로 장난을 쳤고 너무 간지러웠던 나는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이에 윤두준은 계속 촉-촉-하는 소리를 내며 내 쇄골언저리에서 장난을 쳤고 윤두준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시선은 내 눈에 고정되었는데, 그 두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있는걸 보자 나는 무척이나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있을 즈음, 윤두준은 갑자기 내 어딘가에 손가락을 넣었고 나는 또다시 그 아픔이 시작되는구나 싶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꾸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 나는 점점 말라가는 내 입술을 계속 깨물며 있었고 그런 나를 눈치챈 윤두준은 하던것에 열중하다 다시 내 얼굴위로 겹쳐와 나를 입술로 달래주었다. 그의 행동에 좀 나아지긴 했지만 두려운건 사실이었다. 그때 아팠던것만 생각하면......정말 지금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내 허리에 다리 감고..최대한 힘 풀어. 안그럼 너 많이 아파." 윤두준은 내 귓가에 속삭여주더니 내 귓볼을 살짝 깨물어주었다. 그리고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혀로 할짝이고 손으로는 내 허리와 그것을 만지며 자꾸만 나를 자극했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점점 달아오르는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민망하기도 하고, 몸 안에서 뭔가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거리고 울렁거리기도 한 뭐 이따위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에 나는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윤두준은 계속 손가락을 넣어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하다가 윤두준의 페니스를 내 엉덩이 근처로 가까이 가져다댔고, 그냥 그것만으로도 나는 몸이 확 뜨거워져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차마 윤두준의 얼굴을 민망해서 볼수가 없었다. 이건 민망한게 아니라고, 서로 사랑하니까 마음을 나누고 몸을 나누는 것 뿐이라고 아무리 생각을 하려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질 않아 나는 입술을 꽉 깨문채 눈을 감았고 그럴즈음에 윤두준은 내 페니스를 자기의 입 안에 넣었다. 순간 경악한 나는 엄청나게 놀라며 윤두준을 바라봤지만 윤두준은 아무렇지 않은척 계속 해댔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자극이 되어 뭔가 지릿지릿 거리는 느낌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금방 울어버릴것 같았고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쯤 윤두준은 바닥에 침을 뱉더니 다시 내 얼굴위로 얼굴을 겹쳐왔다. "..왜..하지마?" 윤두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치만 무서운건 사실이어서 윤두준의 눈을 쳐다보는데 윤두준은 씨익 웃으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서워?"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 아니라고도 못하겠고, 그렇다고도 못하겠어서였다. "..아플거야. 좀." 윤두준은 내 입술에 입을 맞춰오며 윤두준의 그것을 내 안에 넣었고 순식간에 터지는 아픔에 나는 윤두준의 아랫입술을 깨물어버렸다.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너무 놀라고 아파서 나도모르게 그렇게 됐고 윤두준은 괜찮다며 계속 내 입안에서 나를 달래주며 한손으론 내 허리를 계속 만져주며 천천히 내 안으로 더 깊게 들어왔고, 그가 나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안에선 마치 활화산이 나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까 간지럽고 울렁거렸던건 약과라며 비웃는듯 정말 숨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윤두준이 내 안에 들어왔다 살짝 뺐다를 서너번 반복할즈음 나는 정말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마치 달리기라도 하는것마냥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수록 아픔은 심해져 자꾸 입 밖으론 이상한 듣기도 싫은 소리가 자꾸 새어나왔고 그따위 더러운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을 막았지만 윤두준은 괜찮다며 내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하...아...하.." 나는 윤두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점점 벅차오르는 숨을 골랐고 이상하게 힘은 드는데 기분은 점점 좋아지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는 정신이 점점 멍해져갔다. 아무 생각도 안들고 그냥 윤두준이 더 나에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찼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밝히는것 같아 너무 싫었다. 윤두준이 그런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더...좀만...조..좀만.."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고 그는 싱긋 웃으며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쭈..?" 윤두준은 내 목과 쇄골에 흡-하고 빨아들이며 손으론 내 가슴팍을 어루만졌고 나역시 그의 목에 내 손을 감으며 그의 얼굴이 내 몸쪽으로 가까워질때마다 그의 얼굴 닿는 곳 모두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랑해.." 내 입에선 나도 모르는 사랑 고백이 흘러나왔고 윤두준은 윙크를 하며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는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들어왔다. 정말 순간 뭔가 빵-하고 터지면서 황홀해지는 기분이었다. 천국에 있는 것 같기도하고, 구름위에서 신선처럼 노는것 같은..기분이 좋다는 그런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그런 생경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분이 흐르는 지도 감각이 없을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윤두준은 이미 부풀어오를만큼 오른 내 페니스를 손으로 계속 만져주며 자극을 했고 결국 그의 손 위에서 해결을 봐버린 나는 또다시 정신이 들어옴과 동시에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고 윤두준 역시 그로 몇십분을 내 안에서 휘젓다가 살짝 나옴과 동시에 뭔가를 뱉어버렸다. 둘다 지쳐 쓰러져버린 우리.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래토록 윤두준이 나를 만지고, 내가 그를 만지고 서로 몸을 나눴다는 그 생각밖엔 아무것도 들지않았다. 윤두준은 내 목 사이에 팔을 끼워넣으며 나를 끌어안은채 나란히 누웠고 나는 그의 팔을 베고 그의 쇄골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고 윤두준이 나를 내려다보자 그 입술에도 또 뽀뽀를 해주었다. "..적극적이네?" "사랑해." 나는 윤두준의 품에 폭 안겨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고 윤두준은 내 이마에 쪽-하고 뽀뽀를 했다. "나도. 사랑해." 나는 윤두준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팍에 내 얼굴을 묻었고 윤두준은 내 정수리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내 등을 아래위로 어루만졌다. "..아픈데..좋아.." "뭐가?" "형이랑..이러고 있는거..아까 우리가 했던거..좋아.." 내가 수줍게 말하자 윤두준은 크하하-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윤두준은 손으로 내 볼을 감싸안으며 내 볼을 어루만졌고 입술을 쭉 내밀자 내가 얼굴을 올려 그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했고 그때 나를 꽉 끌어안은 윤두준은 내 입술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붙어있다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윤두준의 혀와 내 혀가 엉키고 설키고 서로 당겼다 밀었다 장난을 치고 있을때 윤두준은 계속 내 귓볼을 만지며 내 입술을 삼켰고 내가 일부러 장난을 친다고 춥춥-거리는 소리를 더 내자 윤두준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대며 콩-하고 부딪쳤다. "..왜에.." 내가 귀여운척하며 말하자 윤두준은 일로 올라오라며 자신의 배를 탕탕 쳤고 나는 무거울텐데..라면서 중얼거리면서 그의 위에 올라탔다. 윤두준은 윽-하며 무거운척을 했고 내가 내려가려고하자 내 허리를 두팔로 꽉 끌어안아 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애기." "..어?" "애기." "..치. 내가 애기냐." 내가 윤두준의 가슴팍에 턱을 대고 빤히 바라봤고 윤두준은 그런 내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어주며 내 볼을 꼬집었다. "아무도 안줘야지." "뭘?" 내가 윤두준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누워 쿵쿵-하는 심장박동소리를 듣고 있는데, 윤두준의 말에 나는 또 고개를 반짝 들어 다시 물어봤다. "난 니가 헤어져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려도 안헤어져줄거야." "그런일 없거든요." "만약에 그러면. 나는 너 절대 못놔. 안놔줄거야. 꽉 잡고선 안놔줄거야." 윤두준의 말에 나는 무슨 그런 생각을 다하냐며 중얼거리며 다시 그의 심장박동소리를 들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내가 애기가 된 것 마냥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니까 잠이 새록새록 몰려왔다. 뭐 시간도 새벽이니까 그럴만도 했지만 점점 눈이 감겨오고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이 들었나보다 나도모르게.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서. #28. "...으..." 항상 나보다 먼저 깨어나는 윤두준이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내가 일어났는데도 윤두준은 자고 있었다. 내가 몸을 뒤척이자 느껴지는 허리부터 다리까지의 그 찌릿한 고통에 난 지난밤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야만했다. 그순간 제대로 스쳐지나가는 기억하나. 그냥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쪽팔린 나는 윤두준이 깨기전에 얼른 샤워부터 하고 옷을 입으려고 내 팔 위에 얹어져있는 그의 팔을 조심조심, 아주 조심조심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하얀 이불이 자연스레 들렸고 윤두준은 살짝 뒤척였다. 그순간 나는 숨을 들이참고 쥐죽은듯 가만히 있었고 또 다시 잠든것 같은 모습에 나는 정말 천천히 침대에서 한발, 한발을 빼고 이제 엉덩이만 들면 끝이라는 생각에 기뻐하며 딱 일어나는데 그 순간 윤두준의 팔이 내 허리에 슈사샥 감겨왔다. "..으아!!!" 순식간에 또 침대에 엎어져버린 나는 윤두준을 등지고 어정쩡하게 침대에 누워버렸고 윤두준은 내 등에 얼굴을 부비적 거리면서 평소 안하던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디가게.." "..좀 씻을라고..." "좀 이따 같이 씻어." 아주 푹 잠긴 윤두준의 목소리에 나는 아우 괜찮다며 혼자 씻을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 얘긴 콧등으로도 안들은 윤두준은 뒤에서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으며 더 부비적거리고는 말했다. "..나 보고 누워봐.." 윤두준의 말에 나는 느껴지는 허리통증에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누웠고 내가 윤두준의 얼굴 바로 앞에 얼굴을 가져다대자 윤두준은 눈을 살짝 뜨더니 피식 하고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내 팔에 자기 팔을 얹어놓았고 또 눈을 뜬 윤두준은 내 콧등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내리는가 싶더니 내 입술에 조금 진한 뽀뽀를 했고 내가 눈을 껌뻑이자 윤두준은 왼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굿모닝키스." 내가 얼굴을 살짝 들어올리자 윤두준은 마치 기다렸다는듯 내 입술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쳐왔고 내가 그를 꼭 껴안자 윤두준은 아픈 내 허리에 손을 대며 살살살 어루만져주면서 입술로도 위로를 해주었다. 아픈건 귀신같이 알아가지고는. "..이쁘다 우리애기. 아침에 보니까 더 이쁘네." 윤두준은 아직도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윤두준의 품에 더 깊게 폭 안겼다. 이에 마치 엄마처럼 나를 꽉 감싸주는 손길에 너무 따뜻해서 그냥 몸을 동그랗게 말았고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춰주었다. "나가기 싫다.." "그럼 그냥 여기서 계속 있을까? 하루종일?" "..안돼..제주도까지 왔는데..." 나가기싫단 내말에 엄마처럼 따뜻하게 대답해주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눈을 감았다. 아까까지는 얼른 씻으려는 마음이 가득했었는데 또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기니까 나가는게 싫었다. 분명 바깥으로 나가면 추울게 뻔했으니까...추운건 세상에서 딱 질색이다. "욕조에 물 받아놓을테니까 5분만 있다가 욕실로 들어와." 윤두준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여전히 누워있는 내 입에 쪽-하는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주고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오분이고 십분이고 그냥 침대에서 나가고싶지 않아 계속 웅크리고 있었다. 허리도 많이 아프고 너무 따뜻해서 나는 금방이라도 잠이 또 쏟아질것같았고 그냥 모든게 다 귀찮아서 눈을 감았다. "양요섭!!!!" 욕실문을 열고 나를 부르는 윤두준의 목소리에 나는 놀란듯 잠에서 깼다. 그새 또 잠에 들었었는지 정말 움직이기 귀찮았지만 윤두준의 말에 나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눈은 반쯤 감은채 욕실안으로 들어갔고 윤두준은 내 팔을 잡더니 욕조 안에다 넣어버렸다. 그리곤 따라 들어온 윤두준. 엄청 따뜻한 물에 몸이 사르륵 녹는것 같았고 금세 기분이 좋아진 나는 헤헤 거리면서 바보같이 웃었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준 윤두준은 뽀뽀를 해주며 내 볼을 꼬집었고 나는 그냥 무작정 윤두준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이에 나를 뒤에서 감싸안는 자세를 취한 윤두준은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내 어깨에 턱을 갖다대었고 나는 또 눈을 감았다. 너무 졸려... "그렇게 졸려?" "...응..." 내가 아예 윤두준의 가슴팍에 기대자 윤두준은 피식 하고 웃으며 내 앞머리를 깔끔하게 싹 넘겨주었다. "안아파?" "...아파...허리랑..다리랑....씨...." 나는 괜히 억울해졌다. 왜 나는 아파야 되고, 윤두준은 멀쩡한거지!?!?!?!??!?!?? 나는 왜 내가 아파야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윤두준이 하라는대로 했을뿐인데.. 이건 어딘가에 음모가 있음에 분명했다. "근데 왜 나만아파!?" "뭐?" "형은 하나도 안아프잖아!! 씨..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떼고는 고개만 돌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윤두준은 나를 어이없이보더니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킥킥 대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어깨까지 들썩여가면서 웃어댔고 나는 더 약올라서 씩씩 거리면서 윤두준을 바라봤다. "..그래서..그럼 니가 위에할래? 내가 밑에 하고?" "..뭐?" "원한다면 자리 바꿔주겠다고. 너 내가 한것처럼 할래?!" 윤두준이 한것처럼? 하긴 그러고보면 나는 그냥 밑에서 잠자코 있었지, 윤두준은 뭐..이상하고 괴상한걸.. 혼자 다하긴 했었다. 그러고보니까..막상 위치를 바꾸면 나는 우물쭈물 할 것도 같고...못하겠다는게 아니라!! 처음이니까..그저 자신이 없는거였다. 그래..자신이 없는거야. "..그..그건.." "왜. 내일은 위치 바꿔서 하지 뭐. 너 아픈거 싫다며." "...씨..안해!! 안해!!! 형이랑 다시는 안해!!!!" 내가 욕조에서 일어나려고하자 윤두준은 내 손목을 잡아쥐더니 그대로 내 입술 위로 말캉한 젤리같은 입술을 겹쳐왔다. 내가 심술이 나서 이런 키스조차도 하고싶지 않아 윤두준의 어깨를 밀쳤지만 힘은 워낙 장사라서 쉽사리 밀쳐지지않고 오히려 나를 더 꽉 끌어안으며 내 입술을 씹어먹을 듯 덮쳐왔다. 마치 성난 상어마냥 요동치던 내가 잠잠해지자 윤두준은 이미 젖은 내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나한테서 떨어져 말했다. "..아주 가끔은..너 없었을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이 안나." 나는 순간 너무 오그라들어서 소름이 다 끼쳤지만, 윤두준이 너무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해서 내 기분을 솔직히 토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다른쪽으로 돌리며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는데 윤두준은 여전히 내 머리를 쓱쓱 쓸어넘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서 떨어지지말고 내 옆에 있어. 앞으로도 너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될지는 생각이 안나니까."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냥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같이 있었던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에 비하면 정말 터무니 없이 작은데, 어느새 서로가 서로한테 너무 많이 익숙해져버려 윤두준의 말처럼 내가 그 전엔 어떻게 살았었는지, 지금은 윤두준과 함께 있어 늘 행복하고 늘 기쁜데, 예전엔 어땠는지 어떤 기분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선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미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고.. 항상 뭘하든 같이 뭔가를 하는 나와 윤두준. 어느새 나와 이 사람은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떨어져버리면 오히려 어색한. 정말 행여라도 혹시나 우리가 헤어지게되면 그땐 어떻게해야되나 정말 답이 나오지 않을만큼의 지독하게 배어있는 습관이었다. 뭐 어쨌든, 우리 둘다 대충 샤워를 끝내고 나와 싸가지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뒤, 나는 침대에 앉아 윤두준이 헤어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말려주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내 목을 스치자 잠이 스르르륵 와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윤두준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아 나는 다시 눈을 떠 고개를 들어 내 뒤에 서있는 윤두준을 밑에서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머리 다시 자라니까 염색하라구." "..씨..귀찮아. 나 그냥 다시 검은색으로 할까봐..너무너무 귀찮아!! 나는 동양인이라 머리가 자꾸자꾸 자라는데..맨날 몇센치씩 다시 염색하는것도 귀찮고! 사실 이게 염색도 아니고 탈색이잖아!? 내 머리 상하는건!!!!" 뭐,맨처음 금발을 선택했던건 나였지만 괜히 하지말라면 더 하고싶은것처럼 윤두준이 금발로 계속 있으라니깐 괜히 더 검은색으로 염색해버리고 싶었다. 사실 엄청 귀찮기도 했고. 매번 미용실가서 가만히 앉아있는것도 고역이었으니까. "니가 맨처음 금발로 한거잖아." "그건 그런데..형이 계속 가만히 냅두라며. 귀찮단말야." "그럼 검은색으로 다시 물들이던지." 윤두준의 퉁명스런 대답에 나는 괜히 심술이났다. 사실 윤두준이 금발로 하라면 금발로 할것이고, 갈색으로 하라면 갈색으로 할건데도 말도안되는 반항을 하고 싶다고 해야하나. 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기도 하고.. 어렸을때 어리광을 못부리고 살아서 그런가 유독 윤두준 앞에서만 귀여운척이 심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게. "..에휴 모르겠다. 졸려라.." 대충 머리를 만지자 마른것 같아 나는 그냥 침대위로 퍽 엎어졌고 윤두준은 자기 머리를 말리면서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우리 어디가?" "일단 내려가서 밥부터 먹고오자. 가고 싶은데 있어? 제주도가 다 그렇지. 추워서 밖에 오래 있지도 못하겠다 우리 요섭이." 윤두준은 머리를 말리며 말했고 나는 추울거란 말에 머리를 도리질쳤다. 추운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러다 내 눈에 띈 바닥 위에 놓여진 케익과 어제 선물받은 핸드폰고리가 있었고 나는 케익과 상자를 들어 침대위에 올려놓고 케익을 칼로 대충 잘라 먹으면서 핸드폰에 고리를 끼우기 시작했다. "밥도 안먹고 단거부터 먹음 어떡하냐." 윤두준은 머리를 다 말렸는지 가져온 왁스로 앞머리를 싹 올리고 옆 구렛나루를 정돈했고 거울을 통해 나를 보던 윤두준이 먹지말라는 식으로 얘기하자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케익을 잘라 입에 가득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입가에도 침대 시트위에도 크림도 묻어 난장판이 되자 윤두준은 화장실에서 손을 대충 씻고 오더니 내 입에 묻은 크림부터 손으로 닦아 자기가 먹으며 내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았다. "너 먹는버릇 언제 고칠래. 언제까지 흘리고 먹을거야?" "계속 이렇게 살았는데 어떡해!! 이게 한순간에 고쳐지는것도 아니고.." "곧죽어도 잘했지?" 계속 내 입가를 닦아주며 말하는 윤두준을 보며 나는 그 입에 케익을 잘라 넣어주었다. 나완 다르게 아무데도 안묻히고 깔끔하게 먹는 모습에 나는 모든지 잘하고 다 완벽한 윤두준에 또 심술이나버렸다. "어차피 형이 계속 옆에있을건데 뭐. 닦아주면 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윤두준은 시트에 묻은 크림을 휴지로 대충 닦았고 나는 허기진 배를 케익으로 채우려는 듯 계속 먹어댔다. 너무 맛있어.... "다됐다!!" 입으론 먹으면서, 손으론 고리 끼우면서 낑낑대던 나는 드디어 고리를 끼우고 나서 그걸 윤두준 눈 앞에 내밀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수줍은듯 웃던 윤두준은 괜히 부끄러웠는지 그만먹으라며 케익을 정리했고 나는 화장대 위에 올려져있던 그의 핸드폰을 가져와 반쪽씩 나눠진 하트를 끼워맞췄다. "귀엽다.." "니가 더." "...뭐?" "밥먹으러 가자고." 윤두준은 맨정신에 이런 부끄러운 고백은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맨정신이라는건 술을 먹었다거나 키스를 하고있다거나 밤에 같이 자고 있는 상황을 제외한 그 모든 상황을 말하는거였다. 워낙 사람이 대놓고 다정한 스타일은 아니라 그냥 연인들끼리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에도 윤두준은 늘 서툴렀다. 난 그래서 그게 좋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분명 내가 더 귀엽다는 것 같았는데 내가 다시 물어보자 말 돌리는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 "..우와!!!" 뷔페식으로 된 호텔 레스토랑엔 이쁘고 맛있어보이는 음식들로 가득가득 차있었다. 대체 뭐부터 먹어야될지 모를만큼. 근데 윤두준은 이런곳엔 익숙한지 아무렇지않게 내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어주더니 그릇을 들어 무슨 자기가 뉴요커인것마냥 빵쪼가리 몇개와 수프를 가져가 식탁에 앉았고 한국사람은 밥심이라며 나는 밥과 김치, 된장국, 꽁치구이 뭐 등등 여러 맛있어보이는 반찬들을 잔뜩 이고 갔다. "아이고..많이도 드시네요." "그럼요 많이먹어야지요.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기하자 윤두준은 또 피식-하고 고개를 돌리면서 웃더니 샌드위치를 들어 나를 보면서 먹었고 나는 냠냠 거리면서 밥을 아주 꼭꼭 씹어먹었다. 사실 윤두준의 요리솜씨는 그렇게..썩 좋은 편은 아니라 그래도 못먹을만큼은 아니었으나 요리에도 재능이라는게 있는게 분명했다. 아무리 밥을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윤두준을 보면 말이다. 아 어쨌든, 참 오랜만에 밥다운 밥, 맛있는 밥을 먹으니깐 난 신이 절로났고 윤두준은 그렇게 맛있냐며 물컵을 나에게 쓱 밀었고 나는 몇모금 마시고는 다시 또 밥에 집중했다. "너 먹여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겠다." "사람은 원래 이렇게 복스럽게 먹어야되는거야. 뭐야 그게. 빵만." 사실 빵도 맛있어보여 윤두준의 접시에 있는 작은 샌드위치 하나를 뺏어들어 먹었고 여기 호텔 주방장은 어떤 사람이길래 온통 밥이 이렇게 다 맛있을수가 있는지 나는 너무 신이났다. 호텔 전면을 유리로 만들어 밖을 내다보면 정말 여기가 제주도가 맞긴하구나 싶을만큼 푸른 아니 사실 온통 겨울이라 그렇게 푸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무도 많고 산도 있는것 같고.. 경치도 좋아서 정말 너무 기뻤다. 항상 서울에서만 갇혀살아서 그런가 삭막한데에 익숙해져있었는데 역시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된다는 말이 딱맞는다. "여기에 테디베어 박물관 있대!! 우리 거기 가보자." "기집애도 아니고 무슨 인형이야." "아니야. 거기 진짜 이쁜거 되게 많대!!!! 거기도 갔다가..바다도 보러 가자!!! 제주도 푸른 바다!!!!!!! 나 바다 가본지..엄청 오래됐는데.." 내가 들떠하며 말하자 윤두준은 그냥 아예 제주도를 한바퀴 돌자고 얘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고 때마침 내 그릇도 비어 나도 음식을 가지러 갔다. 이번엔 나도 윤두준처럼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수프, 후라이드 치킨을 가져왔다. "안배불러? 아까 밥 그렇게 먹어놓고?" "...뭐....배 안부르니까 먹는거지.." 윤두준이 원래 나보다 먹성이 좋은데 오늘따라 별로 입맛에 안맞는지 대충 깨작거리고 만다. 괜히 나만 민망해지게. "오늘 저녁 아홉시 비행기니까 적당히 먹고 일어나. 벌써 열두시 다돼가네." 내가 언제 또 제주도에 올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작 아홉시간만 더 있다가 간다니..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내 입으로 들어가는거 반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거 반이었다. 이에 윤두준은 아예 포기했는지 계속 엉덩이를 들썩이며 내 입술에 묻은 소스들을 닦아주었고 체하겠다며 직접 오렌지 주스까지 떠다 주었다. "가자." 나는 괜히 급한 마음이 들어 엘레베이터로 올라가 곧장 우리 방으로 들어갔고 윤두준이 카메라며 뭐며 이것저것 챙길때 나는 치카치카 양치를 하고 나왔다. 순식간에 셔터 소리가 들리고 아무래도 내 엽사가 찍힌모양인지 윤두준은 카메라를 보면서 킥킥 대고 웃었다. "나도 보여조!!" "싫어. 와..대박이다." "왜!!내사진인데 왜 내가 못봐!!" "너 보면 지울거잖아. 절대안돼." 윤두준은 절대 안된다며 나보다 큰 키를 이용해 손을 번쩍들어 카메라를 낚아채지 못하게 했고 나는 괜히 또 약이 올라 됐다며 퉤퉤퉤-라고 유치하게 침도 뱉은 뒤 캐리어로 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들었다. 아주 치밀한 윤두준은 행여나 내가 그 사진을 지울까 카메라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고 뭐 어차피 이런들 저런들 상관없어서 옷을 갈아입고 대충 로션도 발랐다. 처음와보는 제주도를 윤두준과 여행한다는거. 참 너무 기쁜 일이었다 나한텐. 어쨌든 내가 계속 조르고 조른결과 윤두준은 테디베어 박물관으로 향했고 나는 옆에서 딱히 할일도 없어 윤두준의 핸드폰에다 셀카 수십장을 폭탄으로 남겨놓고, 내 핸드폰에도 셀카를 수십장 저장했다. 사실 사진찍는걸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하면 사진이니까?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길래, 나는 내 머리를 윤두준한테 가까이 대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에 윤두준은 뭐하는거냐며 안찍겠다고했지만 내가 막무가내로 계속 찍으려들자 윤두준은 어색한듯 카메라를 보며 웃었고 뭐 생긴게 워낙 잘생겨서 아무렇게나 막찍어도 잘나오기때문에 나는 그걸 내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놨다. 그리고 또 다시 찍으려는찰나. "..어!!!" 카메라 버튼을 누르려는데 윤두준이 내 볼에 갑자기 뽀뽀를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 사진이 찍혀버렸고 놀란 내표정과 윤두준의 눈감은 표정이 아까 찍은것보다 더 재밌고 괜찮았지만 차마 이걸로 배경화면으로 해놓기엔 좀..그래서 이건 잠금까지 해놓고 저장해두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만 둘이 찍은 셀카를 넣어놓기는 좀 미안해서, 난 또 윤두준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윤두준은 운전해야된다면서 나를 살짝 밀길래, 그래도 운전하는 사람 방해할순 없어서 대신 내 핸드폰을 들어 윤두준 몰카를 촥촥 찍어댔다. 운전하는 옆모습, 찍지말라며 가끔 날 볼때 신속하게 찍는 엽사 등등. 그러고보니까 우리가 사귀면서 사진을 너무많이 안찍었던것 같았다. 뭐 하긴, 사진 찍고 뭐 그렇게 재밌게 논적이 그때 롯데월드 갔었을때 말고는 맨날 집에서 공부하고 자고 공부하고 자고 그러기만 했었으니까. "..내가..이걸로 형 핸드폰 배경화면 해놨다!! 어때?"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고양이 손을 만들어 찍은 셀카를 배경화면으로 정해놓고 보여주자 윤두준은 이게뭐냐고는 말했지만 입으로는 실실 웃길래 나는 뿌듯했다. "귀엽지!?" "니입으로 그런말을 하고 싶냐." 윤두준은 내 머리를 콩-하고 때리며 어느새 다 왔는지 근처에 주차를 했고 나는 들뜬마음으로 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순간 부는 찬 바람에 나는 으..하면서 가만히 얼음처럼 굳었고 윤두준은 자기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내 목에 감아주었다.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다녀야지." 나는 내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는 윤두준이 너무 멋있게보여서 그의 양 어깨를 잡고 살짝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이에 윤두준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나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대고는 윙크를 해주었고 내가 씨익 하고 웃자 내입술에 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너 귀여워." 내 귀에다 입을 바짝대고 나한테만 속삭여주니까 더 멋있어서 그냥 활짝 웃어버렸다. 정말 내가 윤두준을 좋아하는게 맞긴 한것 같았다. "우와!!! 짱귀엽다!!!" 윤두준의 말대로 내가 무슨 여자애도 아니고, 인형에 그렇게 미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제주도에선 테디베어박물관도 가볼만하다는 것 같아 와보고 싶었던건데.. 안왔으면 진짜 크게 후회할뻔했다. 곰돌이 인형이 갖가지 옷도 입고, 귀여운 포즈도 취하고 있는게.. 너무너무 깜찍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깜찍했던건 결혼하는 신랑신부 테디베어였다. 여자곰인형은 양볼에 연지곤지 찍고 빨간색 신부복을 입고 있었고, 남자곰인형은 관 같은거 쓰고 파란색 도포를 차려입은채 둘다 수줍게 서있는데..정말 너무너무 귀여웠다. "..귀엽다..진짜 귀엽다. 형 이것좀봐. 연지곤지도 찍었다? 와.." 투명한 유리상자 안에 들어가있는 곰인형을 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아예 코를 박고 뚫어지게 보고 있었고 윤두준은 아무래도 이런쪽으론 흥미가 없는지 그냥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쿡 찔러놓고 이곳저곳 대충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허리를 숙여 보고 있자 터벅터벅 걸어와 한번 흘끗 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귀엽네." 윤두준이 아무리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여기서 윤두준의 저 시큰둥한 반응때문에 서운할틈은 단 1초도 없었으니까. 영국왕비 엘리자베스여왕을 따라한것 같은 곰인형도 있었고..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해서 가족곰인형들도 있었다. 정말 말그대로 깜찍 그 자체. 나는 이곳저곳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구경하기에 바빴고 윤두준은 그냥 나를 쫓아다녔다.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갖고 싶어?" "...엉?" 내가 허리를 숙여 빤히 보고 있는데, 윤두준은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쿡 찔러넣은 자세로 그대로 ㄱ자로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을때 하마터면 뽀뽀를 하는 사고가 날뻔해 살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다시 고개를 돌려 곰인형에 집중했다. "사줄까?" "테디베어가 얼만데..그냥 귀엽다는거지. 갖고 있어봐야 집에서 먼지만 잔뜩 앉을걸." 정말이었다. 갖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큰 돈 주고 살만큼 곰인형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냥 내가 여기서 신이난 이유는 단 한번도 이런 구경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윤두준한테도 참 고마운게, 정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는 듯한게 얼굴에 잔뜩 쓰여져 있는데도 불평불만은 하지도 않은채 그저 신나하는 나를 보면서 가끔씩 웃어주기도 하면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나도 나중에 내가 재미는 없어도 윤두준이 재밌어한다면 그게 뭐든간에 꾹 참아줘야지. "..그래도 우리나라커플이 더 이쁘네." "..엉?" 내가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턱시도를 차려입은 곰인형 두마리를 빤히 쳐다보자 윤두준은 언제 내 옆으로 왔는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고 나는 두어번 눈을 깜빡이고나서야 그게 무슨말인지 알았다. "..아..뭐 둘다 매력이 다른거지. 난 둘다 이쁘다. 형은..진짜 턱시도 되게 잘어울릴텐데.." 나는 갑자기 또 애써 접어두었던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예전에, 나는 윤두준과 사귀기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즈음 그의 집에서 밥 먹고 tv를 보는데 우연히 말할수없는 비밀이라는 영화를 볼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윤두준의 옆엔 나같은 남자가 아니라 예쁜 여자가 있어야한다고. 내가 남자들중에선 그래도 귀여움 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을만큼 그다지 강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나는 누가뭐래도 남자였다. 지금은 그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니까, 그냥 그거면 되니까 사랑하면서 지내는거지만 언젠가는 우리 둘 다 지쳐버릴것이다. 우리가 좀 더 크게 되면, 가까이 생각하면 윤두준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여기저기서 많이 시달릴 것이 뻔했다. 윤두준은 나를 지키기 위해 부모님과 싸우는 것도 불사하겠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고, 그런 문제로 싸우다보면 우리 둘다 지쳐버릴거고.. 어쩌면 어떻게 보면..우리 둘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저 나한테 윤두준, 윤두준한테 나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 이라는 말로 포장되는 사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단 뜻이었다. 난 결국 그게 무서운거였다. 내가 현실을 깨달아버릴까봐, 그 현실에 우리가 지쳐버릴까봐. 결국 나와 윤두준의 옆에 어울리는 사람은 남들이 맞춰놓은 기준에 따라 나의 옆에, 그리고 그의 옆엔 그와 내가 아닌 너무 예쁘고 착한 여자일테니까. 그리고, 지금 이 테디베어처럼 듬직하고 멋있는 턱시도를 입은 윤두준을 상상했을때 결국은 그의 옆엔 그 어떤 하얀색보다도 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어야했다. 둘 다 턱시도를 입고 있으면 그림이 안나오니까. "야." 윤두준이 내 볼을 콕-찔러 나는 그제야 내 정신을 찾았다. 내가 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는 시간이 좀 길었나보다. "...어?" "뭔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형 턱시도 입은거 생각하니까 멋져서." "턱시도나 수트나 그게 그거지." 윤두준은 테디베어에 시선을 꽂으며 퉁명스럽게 말했고 나는 그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두준이라는 새는 참 너무 멋지고 큰 독수리 같아서 내가 만든 새장이 언젠가 답답해질 것 같았다. 그 새장을 벗어나려고 할 것만 같았고, 그 문을 열어주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훨훨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치만 이건 언제까지나 생각에 불과한거니까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뭐, 이런 진지한 생각을 깊이 담아둘만큼 내가 진지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 "성산 일출봉 갔다가 바닷가 가자!!" "성산일출봉!? 미쳤어!!! 거기가 얼마나 추운데!!! 거긴 여름에도 추워!!!" "가보고 싶단말야. 거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거 말고.. 그냥 산등성이만 올라가는것만으로도 좋을것 같단말야. 거기서 보는 경치가 진짜 최고래. 응? 가자..." "너 감기걸려!! 옷도 얇게 입고 와서는 무슨..안돼." 테디베어 박물관에서 그 이후로 한 삼십분 정도를 구경하다가 차안으로 돌아왔고 나랑 윤두준은 이렇게 싸우는 중이었다. "..가자..이제 진짜 해지면 더 추워진단말야. 벌써 세시 다돼가잖아..어? 가자.." "너 감기걸린다구. 거기 바람 장난 아니야. 서울에서 맞는 바람이 아니라고 양요섭." "..갈래..거기 갈래..갈거야.." 내가 앞뒤 망설이지도 않고 계속 조르자 윤두준은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는 듯 안전벨트를 매다말고 아예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양요섭. 나중에 여름에 오자. 여름에 오면, 거기 바람 시원하니까 그때 가자. 지금은 너무 춥다구!! 지금 한겨울이야. 아무리 제주도라도..근처가 바다에다 산이라서 추워!!" "추워도 내가 추운거잖아! 형은 안춥잖아!!" "니가 추우니까 문제 아니야!! 안돼. 절대 안돼. 딴데 가." 윤두준은 죽어도 거길 안갈건지 안전벨트를 매려다가 완전 심술이 나 뾰로통해진 내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 감기걸려도 아프다고 징징대면 혼나." "알았어!!! 감기 안걸릴거야!!!" "..내가 양요섭을 어떻게 이기겠냐.." 윤두준은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전벨트를 맸고, 나는 그가 너무 고마워 그냥 무작정 끌어안고 입술에다 아주 깊게 입을 맞춰주었다. 윤두준은 내가 얄미웠는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않게 물며 눈으로 찡긋했고 나는 입술을 떼고 입모양으로만 고마워 라고 말한뒤 다시 그의 입술을 물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내가 먼저 떨어지자 윤두준은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주더니 안전벨트까지 매주었고 나는 내 벨트를 매주기 위해 자기 벨트까지 푸르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또 양손으로 붙잡아 입술에 쪼오오오옥-하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뽀뽀를 해주었고 윤두준은 연속으로 세번을 쪽쪽쪽 하더니 코를 손으로 살짝 꼬집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지금 기분은 너무너무 답답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는데, 좀 높은데 올라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춥겠지만 찬 바람도 맞으면 마음이 좀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부득부득 우긴거였고. "..만약에.." "어?" 한창 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나는 물끄러미 앞만 보다가 말했다. "만약에..정말 만약..내가 형을..놔주면..그때는..미련없이 가야된다.." "무슨 소리야 또." 윤두준은 창가에 팔을 기대어놓고 손에는 머리를 살짝 받친뒤 운전을 했고 나는 윤두준을 보지도 않은채 그냥 창가로 슉슉 지나가는 나무랑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평생 같이 살 순 없을거아냐. 그러니까 내가 만약 헤어지자고.."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하면..뒤도 돌아보지말고 그냥 가. 알았지?" "무슨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나 양요섭씨?" 윤두준은 내가 그냥 하는 소리로 받아들였는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까지하면서 대답했고 미안하지만 나는 너무너무 진지했다. 남들처럼 오년씩, 십년씩 사귀기엔 우린 너무 특별한 사이였으니까. "그리고..만약에..형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그럴일없어." "나 형..안붙잡을거야. 어디 얼마나 좋은 사람 만나나 두고 보자. 라는 생각도 안할거고 내가 너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할거다. 라는 생각도 안할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형은 나보단 더 이쁘고 덜렁거리지도 않고 착하고 멋진 여자.." "양요.." "가 더 어울리니까. 나는 착하니까 나는 착한 양요섭이니까 형 절대 안붙잡을거야. 막 울면서 매달리지도 않을거고 집앞에 찾아가서 한번만 봐달라고 울지도 않을거야. 그러니까 형도 내가 그렇게 할것처럼 형도 그렇게 해. 정말 멋있고 쿨하게." 차는 갑자기 갓길로 확 들어서더니 급하게 멈춰졌고 나는 직감적으로 윤두준이 화가났구나 라는걸 알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한말은 주워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나는 헤어지더라도 멋있게 헤어지고 싶었다. 서로한테 상처가 되지 않게, 옛날 생각하면 인상을 찌푸리는게 아니라 그럴정도로 괴로워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 어쩌다 가끔 떠올리면 웃을수 있는 기억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 제주도에 같이 왔지만, 만약 다른 사람과 여길 같이 오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그런 헤어짐을 하고 싶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안아파. 그냥 옛날부터 생각했던거야. 우리가 헤어지면.." "그런 생각하지마. 그럴일은 없으니까." "그럴일은 없으니까. 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세상엔 백퍼센트 가능한 일은 없고, 백퍼센트 가능하지 않은 일도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그때 돼서 허둥대지 않게 미리미리 생각해둬야.." "그런거 미리미리 생각해둔다고? 그런거 생각하면? 뭐가 나오는데? 우리 안헤어져. 그럴일 없어. 세상에 백퍼센트 가능한일도 가능하지 않은일도 없다고? 그 어떤 일도 백퍼센트가 없을진몰라도 너랑 나랑은 백퍼센트 안헤어져. 알아들어?" 나를 보며 말하는 윤두준의 눈이 조금 빨개져있었다. 나 지금 화났어, 라고 말하는 알게모르게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헤어지는 것에 대한 말을 했다는 자체에 대한 분노. "..알았어. 알았어. 지금 내가 헤어지자고 한것도 아닌데 왜그렇게 흥분해. 잘못했어. 그냥 나는.." "앞으로도.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마. 내 옆에 여자가 더 어울릴거라느니, 너보다 이쁘고 덜렁대지도 않고 멋지고 착한 여자가 더 나을거라느니 이딴 생각은 하지도 마. 나는 니가 남자라서 좋은게 아니라 니가 좋은데 남자인거 뿐이니까. 근데. 남자인게 뭐. 그게 뭐 어때서 니가 그런 생각 하는건데? 너 여태껏 내 옆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했던거 한두번 아니지. 말해봐 양요섭." 평소엔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지금 이것 또한 윤두준이 매우 화가 나있는 상태라는걸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가 없는건데도..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냥 그런 생각 나혼자만 하고 있을걸. 입방정 떨어서..하여튼 나는 이기광이 말하는대로 양방정이다. "흥분 하지마. 왜그래 진짜." "대답해." "..미안하니까. 내가 여자라면 더 좋았을텐데, 남들 앞에서도 얘가 내 여자친구다, 얘가 내 여자다. 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면 참 좋을..." "양요섭!!!!!!!너 진짜 나 화나는거 볼래!?"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게 자꾸 맘처럼 안됐다. 분명 이런 얘기 하면 할수록 윤두준은 화가 날거고 점점 돌이킬 수 없어질텐데도 나는 자꾸만 입이 막 움직였다. 그냥 생각은, 생각으로만 냅둬야되는데..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저지른 잘못, 내가 해결해야되니까 나는 밝게 웃으며 윤두준의 팔을 잡았지만 윤두준은 내 양 어깨를 잡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 너 잘못한거야. 잘못 생각한거고 잘못 말한거야. 너 한번만 더 그런 생각하면..나 진짜 화낼거야. 제발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하면서 끙끙 앓지좀 마. 니가 나한테 미안하면, 나도 너한테 미안해야되는데 난 너한테 안미안해. 나는 니 옆에 다른 사람이 더 어울릴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어. 그런 생각같은건 하기도 싫어. 내가 니 옆에 있는데, 왜 내가 있지도 않는 사람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더 잘어울리겠다 이딴 생각을 해야돼?" "잘못했어 형. 미안. 그러니까 화풀.." "..너 니가 지금 한 말에..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는..생각도 안해봤지." 나는 윤두준의 말에 놀랐다. 내가 그냥 한말인데, 그냥 내가 늘 해오던 생각을 말했던게 그한테 상처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이게 왜 상처인건지, 대체 어디서 왜 상처를 받은건지 나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헤어짐에 대해서 생각한건 우리가 언젠가는 헤어질것 같아서 한 말이었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울릴거라고 말했던건 그건 정말 내 솔직한 진심이었을 뿐이었는데. 대체..어디서. "..어?" "배신이잖아. 난 너랑 지금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할거 생각하고 앞으로도 쭉 평생 같이 기쁘고 행복할것만 생각했는데 너는 내앞에선 웃으면서 속으론 헤어질거 생각하고 있었잖아. 지금 당장 헤어질 마음이 없더라도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배신이야. 알아?" 윤두준의 표정은 너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제서야 실감했다. 또 내가 일을 저질렀구나. 또 이놈의 입이 방정이어서 사고쳤구나. 무작정 다가가서 껴안고 애교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형..." "잠깐 있어." 윤두준은 그대로 차 밖으로 나가 찬바람이 쌩쌩부는 도로 한 가운데서 그냥 그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차 안에서, 어떡해야될지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 진작에 입 닥칠걸..왜 불난집에 기름 붓고 부채질해서..... 옆에 이기광이 있었으면 분명 이랬을거다. 지금 당장 혀 자르라고. 진짜 혀를 자르고 싶은 생각에, 아직도 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것, 그리고 그 생각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말을 내뱉은것에 대해선 후회를 했다. 그냥 나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될걸..굳이..입밖으로 내뱉어서는 화근을 만들고.. 나도 일단 차에서 내려 윤두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치만 나를 보지 않는 윤두준. "..미안해. 그냥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을..말하고 싶었어. 형이랑 나랑 평생 잘 살고 싶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정말 멋있게 끝맺고 싶었으니까. 그건 형도 마찬.." "..들어가. 추워." 또 나는 입방정을 부린것 같았다. 이젠 진짜 입 닥쳐야지. 나는 그냥 무작정 윤두준의 앞으로 가 그를 꽉 껴안았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어놓은채 고개만 살짝 올려 윤두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는 그의 시선에 나는 더더욱 어찌할바를 몰랐다. "..미안해..어차피 내가 했던 말은 그냥 다 나중일이고..지금은 내가 형 사랑하는데, 그냥 그것만 생각하면 되잖아. 어? 미안해..형아..미안.." 이러다간 내가 울 것 같았다. 난 세상에서 윤두준이 냉담한게 제일 싫었다. 너무 무서웠으니까. 차라리 소리지르고 화내면 덜 무서운데, 이렇게 아무대답도 없이 날 보지도 않고 있는 윤두준은 정말 호환마마보다도 더더더 무서웠다. "..다신 안할거지." "어?" "그런 생각. 다신 하지마. 알았어?" ".....어.." 한참동안을 그러고 있다가,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냥 대답했다. 그제서야 윤두준은 나를 안아주며 내 뒷통수를 쓰담쓰담해주면서 말했다. "..근데..난 너 안놓을건데?" "...엉?" 내가 고개만 올려 바라보자 윤두준은 내 양얼굴을 손으로 잡으며 내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난 니가 헤어지자고 해도 죽어도 안헤어져줄건데. 끝까지 매달릴거야. 울고 불고, 무릎도 꿇고 돌아와달라고 애원하고..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온갖 구질구질한건 다 할거야." "..에이..형 자존심 센거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데.." "너한텐 자존심 같은거 없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를 안고 있던 팔을 떼어내 살짝 떨어져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에 윤두준은 내가 감고 있던 목도리를 바람이 스미지 않게 더 촘촘히 정돈해주며 내 앞머리 또한 만져주었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마." 추워서 입도 얼고, 빨개진 윤두준의 얼굴을 보던 나는 그냥 아무 생각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윤두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윤두준은 내가 행여나 추울까 바람이 오는 쪽으로 자기가 돌아서더니 그 찬 바람을 다 막아주며 나를 꼭 껴안고는 입술을 나눴다. 아마, 우리가 집이 아닌 밖에서 나눈 키스 중에선 지금이 제일 길게 확실했다. 너무 춥기도 하고, 간혹 지나다니는 차가 좀 신경쓰여 내가 떨어질라치면 윤두준은 내 허리를 더 꽉 감싸안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내 입술을 햄버거 먹듯 덥썩 물었고, 내가 또 떨어지려고하면 또 덥썩 무는 것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그리고 내가 눈을 살짝 뜨자 윤두준도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눈을 떴는지 싱긋 웃더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윙크를 날렸고 내가 눈웃음을 짓자 윤두준 내 혀를 살짝 깨물었다. 그리곤 그의 빨개진 귀가 내 눈에 들어와 그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 그의 양 귀에다 내 손을 얹었다. 이에 윤두준은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또 웃으며 내 입술근처에 일부러 더 입술을 문대며 내 입술을 할짝였고 간지러워서 하지말라고 살짝 움찔하자 윤두준은 나를 좀 더 꽉 안더니 어느새 우리의 입술 근처에 흥건히 묻어있는 타액을 손으로 닦으며 내 볼도 꼬집었다. 정말 셀수 없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그의 어깨를 밀자 그제서야 떨어진 윤두준. 내가 먼저 그의 입술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주자 윤두준 또한 나한테 그랬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내 귓가에 가까이 오더니 속삭였다. "좀 더 하자." 나는 변태라며 그의 배를 장난처럼 퍽-하고 때린 뒤 차 안으로 냉큼 들어왔고 나를 따라들어온 윤두준은 내 안전벨트를 매준답시고 또 내입술위로 겹쳐왔다.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제..가자.." 내가 싫다며 윤두준의 양 얼굴을 붙잡자 윤두준은 지금 당장 나랑 키스가 하고 싶은지 내가 똘망똘망 뜨고 있는 눈에 차가운 손바닥을 얹어 마치 안대처럼 내 눈을 가리더니 내 입술위로 말캉한 것이 겹쳐왔다. 아무것도 안보이니까 답답하기도 한데, 또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는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어느새 차안에는 우리의 숨이 나눠지는 소리만으로 가득찼고 윤두준은 오늘따라 더 진하고 더 깊은 키스를 하며 나한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뭐 딱히 할 도리는 없고 그냥 아직도 차가운 윤두준의 귀를 만지작대며 녹여줬고 윤두준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입술을 떼더니 내 왼쪽 귓가로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자꾸 그렇게 내 귀 만지면..여기서 확 눕혀버린다." "..변태!!!!!!"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윤두준은 풉-하고 웃더니 내 입술에 쪽-하는 소리를 유달리 크게 내며 다섯번이나 더 하더니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었다. "아쉽지만 나머진 집에서." "뭐가 아쉬워!! 우리 여기서 키스한것만 이십분은 되겠네!!!" "두시간도 아니고 그까짓 이십분 갖고 뭐." 윤두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매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고 나는 아직도 얼얼한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내일 대땅 붓겠다.." "붓기 또 빼줄게 키스로." "..아 진짜..왜그래!!" "뭐가? 사랑하면 당연히 키스하고 자는거지." 잠시 신호에 걸려 대기하자 윤두준은 내 손을 잡더니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그렇지..어떻게 그런말을.." "뭐가 어때. 어차피 너 내껀데. 내가 내꺼갖고 맘대로도 못하나?" "..씨...그래도 그렇지. 형은 별로 티 안나는데..난 입술 부은거 너무 티나. 어떡해.." 윤두준의 입술은 말짱해보였지만 나는 굳이 보지않아도 만져만봐도 알 수 있었다. 이에 윤두준은 내 얼굴로 가까이와서는 내 입술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또 뽀뽀를 했다. "괜찮아. 어차피 집에만 있을건데 뭐." 또 다시 신호가 떨어지자 차는 부웅-하는 소리를 내며 차도를 미끄럽게 달렸고 참 짧은 시간내에 싸웠다가 키스했다가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29. "..우와..."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온 성산일출봉..사실 거기 정상까진 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언덕같은데 서있는것 뿐이지만 정말 오길 너무너무 잘한 것 같았다. 비록 지금 겨울이라 그렇지 여름이면 여기 산등성이가 온통 푸른밭으로 변할걸 생각하니까 생각만해도 너무너무 상쾌해졌다. 그리고 제주도라 그런가, 바람 자체가 서울의 그 무섭기까지한 칼바람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로 비교적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바닷가 근처라 강하게 불었지만 그래도 바람이 많이 차진 않아 다행이었다. "..진짜..좋다.." 나는 산등성이 중간 정도 올라가서 밑을 바라보니 뭐 별로 볼건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탁 트이는게 느껴졌다. "올라가자!!!!" 나는 내친김에 정상까지 올라가보고 싶었다. 별로 그렇게 높아보이지도 않아 냉큼 올라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돼." 윤두준은 내 목도리를 계속 여며주며 단호하게 말했고 난 또 울상을 지었다. "..왜에..." "지금 이렇게 바람 부는데.." "그래도 여기 왔으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와야지..갔다오자!!" 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윤두준은 안된다며 단호히 거절했고 난 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니..근데.. 내가 왜 윤두준이 된다고 하면 하고, 안된다고 하면 안하는거지!? 내가 왜!? 나는 엄연히 생각이란걸 하는 사람인데!?!!!?!? "..갈거야!!" 윤두준의 만류에도 나는 휙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올라갔고 윤두준은 단번에 내 손목을 낚아채고는 날 세웠다. "말 또 안듣지?" "내가 왜 형 말 들어야돼!? 나도 생각할줄 아는 사람이야! 이거 왜이래?" 나는 반항같지도 않은 반항을 부렸고 윤두준은 다시 날 잡고 질질 끌고 내려왔다. 에이씨. 내가 뭐 위험한데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암벽등반을 하겠다는것도 아닌데!! 왜그래 왜!!!!! "그럼 형은 여기 있어! 나 혼자 금방 갔다올게. 저거 왕복 사십분이면 충분히 올라갔다오겠다. 갔다오께...엉? 형아..." 내가 윤두준의 어깨에 양 손을 올리고 기대듯 서서 앙탈을 부리자 결국 내 애교와 앙탈(?)에 제일 약한 윤두준은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더니 자기 잘 따라오라며 손을 잡고 먼저 올라갔다. "치. 어차피 갈거면서! 꼭!" "원래 산 올라가는거 안좋아해. 그리고 이렇게 추운데 무슨.." "별로 안춥네! 솔직히 서울보다 안춥잖아! 서울에 있다가 여기오니까 뭐 아프리카네." "입은 살아가지고.." 윤두준은 뒤에서 손을 잡고 따라올라오는 나를 흘깃 보더니 피식-하고 웃으며 다시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한 경사였지만 어쨌든 넓게 넓게 만들어진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가며 정상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산에 올라가본적도 없고 별로 올라가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기라면 꼭 한번은 올라가보고 싶었다. 요즘 답답한 생각때문에 그런가..산 꼭대기에 서는게 어떤 느낌인지 꼭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하..아..힘들어.." 얼추 중간 정도 올라온거 같은데 역시 내 체력은 영 꽝이었는지 날 끌고 올라가는 윤두준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헥헥 댔다. 요즘 공부하느라 너무 운동을 안해서 그런가..아니 사실 그닥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윤두준은 그래도 농구도 하는것 같았고 스쿼시도 치는 것 같았다. 뭐 요즘이야 내 뒷바라지 때문에 그 모든걸 다 중단한 상태였지만. 나중에 대학 가면 꼭 윤두준이랑 운동을 같이 다녀야겠다. 나도 근육을 좀 키워봐야지. 나는 너무 마르기만 하고 볼륨이 없었다. 다부진 뭐 그런....하긴 그런건 나한테 좀 안어울리는것 같기도 했지만. "벌써 힘들어? 그러니까 내가 안된다고 했지." "힘들다는거지 올라온거 후회한거 아냐!!! 얼마나 남았어?" 낑낑 대며 올라가는데 윤두준이 잠깐 멈춰서자 나도 그 옆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등산이 진짜 힘든거구나..밑에서 볼땐 그렇게 안높아보였는데...씨... "한 십분 쯤 더 올라가면 될 거 같다." "많이 남았네..아 물먹고 싶다.." 내가 허리를 ㄱ자로 숙이고 양무릎에 손을 얹어 숨을 헥헥 대고 쉬자 윤두준은 내 뒷통수를 쓰담쓰담 해주며 말했다. "너 운동 좀 해야겠다. 사내새끼가 이까짓것도 힘들어서 낑낑대는게 말이 되냐?" "안그래도 수능 끝나면 운동 할거야. 나두 기광이처럼 근육 키워야지. 울끈불끈!" 내가 남자들 팔근육 자랑할때 팔을 꺾어보이는 것처럼 흉내를 내자 윤두준은 나를 어이없게 보면서 웃더니 또 내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씨! "근육은 무슨. 안돼." "형은 맨날 내가 뭐만 하면 안돼. 안돼. 뭐가 그렇게 안되는게 많아! 그럼 되는건 뭐야 대체!" "너가 무슨 근육이야. 그런거 하나도 안어울리니까 웨이트 하지마. 절대." 나는 치-라면서 입술을 쭉 내밀었고 윤두준은 살짝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이젠 이런게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여긴 올라오겠다는거야?" "그냥..이제 서울 올라가면 형말대로 직싸게 공부만 해야되는데..내 생각도 좀 정리할거 하고.. 비울건 비우고. 좋잖아. 이런데 한번씩 올라갔다오면." "..기특하네." 윤두준은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더니 다시 가자며 내 손을 붙잡고 점점 더 험난해지는 산을 올라갔고 나도 으쌰!하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손을 잡고 나를 끌어주는 윤두준이 있어서 든든하기도 하고 용기가 되어서 생각보다 덜 힘들었다.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인생이란게 등산과 같다고들 하셨는데 지금처럼 항상 윤두준이 먼저 날 잡고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옆에 있었으면 인생 사는게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힘든일이 있어도 항상 내 앞에서서 막아주고 달래주고.. 근데 그러다 갑자기 한순간 휙,하고 바람처럼 윤두준이 사라져버리면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 이 산을 올라가는 법을 모르니까 말이다. 뭐 이순간에도 이 말을 하면 윤두준은 자기가 계속 옆에 있을거니까 상관없다고 말하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거니까..너무 윤두준만을 의지하면 안될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안됐다. 그렇게 하기엔 윤두준은 너무 듬직했으니까. "올라오니까 좋냐?" 무려 30분이나 걸려 도착한 정상. 밑에있었던 것 보다 칼바람이었지만 훨씬 더 시야는 탁 트여 좋았다. 바닷가도 보이고 바로 밑에는 절벽인지 나무, 바위들도 있고..생각보다 너무 상쾌했다. 역시 정상에 선다는게 이런 느낌인가. "와..진짜 좋다.." "일로와봐." 윤두준은 내가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계속 목도리를 여며주고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었다. 지금만큼은 기분이 너무 짜릿해서 추운것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와..나 나중에 수능 끝나면 진짜 뒷산부터 시작해서 등산 좀 해봐야겠어. 이런 느낌이구나. 형!! 카메라 줘봐." 윤두준이 카메라를 내밀자 나는 바로 산 정상에서 보이는 저 멀리 있는 바다를 마구마구 찍어댔다. 거기다가 내가 여기에 왔다는걸 꼭 사진으로 남겨야 될 것 같아 셀카까지 온갖 귀여운 포즈를 하며 찍었고, 옆에서 윤두준은 웃겨죽겠는지 팔짱을 끼고 산 정상에 설치해둔 나무 난간에 기대어 서서 웃어댔다. "형 웃어봐." "지금도 웃고 있는데?" "그렇게 빙구처럼 말고!" "..빙구?" 윤두준은 갑자기 인상을 굳히더니 눈썹 한쪽을 찡긋 거리며 말했고 나는 그냥 찍어버렸다. 윤두준은 웃는것도 멋있었지만 무표정인게 더 멋있었다. 특히 눈썹 찡긋 할때. 나는 내 눈매가 동글동글한 귀여운편이라 그런가 윤두준의 약간 찢어지고 날렵한 눈매가 너무 부럽고 좋았다. 그리고 사진 나온거 보니까 내가 원했던대로 그 날렵한 눈매가 딱 이쁘게 찍혔고 나는 룰루-하면서 다시 윤두준을 찍었다. "이거 서울 올라가자마자 바로 현상신청 해야겠다. 우리 사진 거의 백오십장은 찍었나보다." 내가 여태까지 찍었던 사진을 돌려보며 말했고 윤두준은 카메라를 빼앗아들더니 팔을 쭉 뻗은뒤 내 머리에다 머리를 맞붙여댔다. "..하나..둘..셋." 윤두준이 나즈막히 세자 나는 씨익 웃으며 양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어쩐지 이 사진이 제일 이쁘게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몇시야?" 내가 좀만 더 있자고 졸라서 그럼 딱 오분만이라며 나한테 시간을 준 윤두준은 나를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 "다섯시 다돼가." "히익..벌써!? 여기서 제일 가까운 바닷가 간다고해도..여기서 저녁도 먹고 가고..그러면..금방이네.." 시간이 너무 빨리빨리 지나갔다. 여기서 뭐 한것도 없는데..역시 다음에 수능끝나면 아예 3박 4일로 일정을 잡고 놀러와야겠다. 제주도는 진짜 공항입구부터 생각했던거지만 한국속 외국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정말 너무너무 매력적인 곳. 나중에 꼭 다시 윤두준이랑 와야지. "나는..나중에~정말 나~중에..막 힘든일 있고 그러면 꼭 여기 다시 올거다?" "힘든일 뭐?" "음...뭐..내가..연대에 떨어졌다거나? 거길 들어갔는데 시험 성적이 안좋다거나...그러면?" "으이구. 딱 양요섭 수준에서 힘든일이다." "흥. 형도 여기 오니까 좋지? 나는 맨날 형한테 미안하고 고마운거있지. 내 공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그러는거보면 미안하고 고맙고.." 내가 웅얼웅얼거리며 말하자 윤두준은 허리를 살짝 숙여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내 얘길 들었고 윤두준은 괜히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내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알면 좀 잘하지? 아까처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근데 그건 진짜 진.." "또." 진심이라고 말하려다가 윤두준 특유의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는 그 표정을 보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게 완전한 내 진심이라 할지라도 윤두준한테는 해선 안될 말일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윤두준이랑 나랑은 생각이 맞는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틀어지는 것 같아 가끔은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뭐 이정도의 의견차이는 어떤 커플에게나 있는거니까. "가자." 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제주도의 풍경을 내 머릿속에 다시한번 콱 새겨두고 아까처럼 윤두준의 손을 잡고 차근차근 정상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지금 어디 가?" "바다 보러 가자며." "어디 바다?" "그냥 근처 가고 있는데...산양 해수욕장인가보다."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냥 고개만 두어번 끄덕이고는 다시 차창밖으로 흩어져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봤다. 눈만 돌리면 바다에, 시선만 꽂으면 절벽들이 많았다. 풀, 나무, 바람. 서울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풍경이었는데..여행오길 참 잘한 것 같았다. 제주도가 이렇게 좋은 곳일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정말 여름에 오면 최고일 것 같았다. 아..아쉽다. "..일어나. 다왔어." 어느새 잠들었었나보다. 윤두준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고 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차는 바닷가 모래사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마치 드라마처럼. 나는 너무 신나서 마치 강아지처럼 차 밖으로 뛰쳐나갔고 윤두준은 느릿느릿 걸어와 내 옆에 섰다. "물 되게 맑다..우와." 바다는 참 파랬고 파도가 쳐 생기는 거품은 맥주거품마냥 하얘서 신기했다. 맘같아선 신발 벗고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대충 손을 담가보니 온몸이 찌릿할정도로 차가운 물에 놀라서 용기가 싹 가셨다. "우와..바다다!!!" 나는 파도가 다가왔다 물러났다 하는걸 마치 어린애마냥 쫓아다니며 좋아했고 살짝 뒤돌아보니 윤두준은 차에 기대어 서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것도 잊지 않았고. "형도 와서 놀아!!" "됐거든요. 꼬맹이 양요섭이나 물이랑 실컷 노세요." 윤두준의 말에 나는 또 씨익 웃으며 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은 바닷물과는 다르게 옅은 파란색이었다. 구름하나 없이 맑은 날. 하늘도 맑고 바다도 맑고. 나는 지금 윤두준과 같이 있고. 오늘은 내 생일이고.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생일선물은 처음이었다. 받아서 이렇게까지 기뻤던 선물도 처음이었다. 매년마다 오늘이 생각날 것 같았다. 내년 오늘 제주도보다 훨씬 더 좋은곳으로 윤두준과 여행을 가면 모를까, 아니 사실 그렇게 된다해도 오늘의 이 제주도 여행은 평생 못잊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떠난 여행이었고 나한테있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여튼 오늘 기분 최고였다. 이렇게 서울로 올라가면 공부 하기 싫어질정도로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나는 주변에서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와 바닥에 쭈그려앉아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돌멩이라서 글씨를 크게크게 쓰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열심히 한자 한자 꼼꼼히 적었고 윤두준은 그런 내가 궁금했는지 뒤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잇챠. 다됐다. 형!! 일로 와봐!!!" 일어나서 보니까 참 소심하게 작게 썼다. 내 나름대로 크게 쓴다고 쓴건데..... 다시 쓸까 했지만, 이미 윤두준이 걸어오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뭐야?" "짠." "윤두준 하트 양요섭?" 윤두준♡양요섭 나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이렇게 또박또박 썼고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때. 멋있지. 이거 얼른 사진 찍어." 윤두준은 내 말에 바로 사진을 찍었고 내가 보거스같이 웃으며 양손에 브이를 그리고 웃자 나도 찍어줬다. "가서 손 씻고와. 더럽다." 윤두준의 말에 내 손을 보니 손은 흙투성이가 되어있었고 나는 바로 물앞으로 가서 손을 빡빡 씻었다. "사랑해." 윤두준은 내가 손을 씻고 돌아서자 바로 나를 껴안았고 나는 웃으면서 윤두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저렇게 내 귓가에 속삭이니까 이보다 더 좋은 생일 선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의 입에 입을 맞췄다. 윤두준이 너무 격하게 다가오는바람에 내가 뒤로 밀렸고 내가 넘어질까 윤두준은 내 허리를 바싹 끌어당겨안았다. 이에 나는 윤두준의 목에 팔을 감으며 윤두준의 입술을 탐했고 우리는 너무 기뻤다. 행복하고. 윤두준의 혀는 내 혀와 부드럽게 엉키며 닿았고 나는 윤두준이 아찔할정도로 입안을 헤집자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하루에 몇번을 해도, 그와 키스는 항상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맨처음 우리가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았을땐 온몸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듯 찌릿찌릿 거렸는데 요즘은 마냥 설레고 두근거린다고해야되나. 예전엔 심장이 터질것같이 떨렸는데 지금은 몸끝에서 끝으로 행복했다. 정말 행복이란게 이런거구나 라는걸 나는 매일매일을 윤두준이 있어 맛보고 있었다. "..후.." 꽤 긴 키스가 이어지고 내가 잠깐 숨을 돌리려 입술을 떼자 윤두준은 아쉬운듯 내 입술근처와 턱에 계속 입을 맞췄고 내가 잠깐 숨을 쉬자 다시 내 입을 막았다. 하여튼 키스를 하거나 잠자리를 같이 할때면 무섭게 저돌적으로 치고나오는 윤두준은 아무리 나라도 말릴 수 없었다. "사랑해."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의 눈썹과 눈매를 매만지며 살짝 윙크를 했고 그는 또 씨익 웃었다. 나는 윤두준이 소리내어 웃는것보다 이렇게 은근히 미소짓는게 더 멋있었다. 얼굴선이 날렵해서 그런가, 살짝만 바뀌는 표정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윤두준은 내 얼굴 어디가 좋을까, 어떤 표정 짓는걸 좋아할까? 나는 갑자기 문득 궁금해졌다. "뭐 먹을거야? 헥..벌써 여섯시 다돼가네?" "글쎄..시간이 좀 빠듯할것 같기도한데..." 바닷바람때문에 언 손을 히터 앞에다 바짝 대놓고 말리며 윤두준을 쳐다봤고 윤두준은 05:49 pm 이라는 시간을 보더니 살짝 고민스러운지 나를 바라보았다. "아홉시 비행기면 적어도 여덟시엔 가야되는거 아냐?" "응. 그럼 그냥 근처 지나가다가 식당 보이면 들어가서 먹고 가자. 아니 그냥 호텔 가서 먹을래?" "아니. 호텔 밥이야 서울 가서도 먹을 수 있잖아.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뭐 그런거 없나..." 윤두준은 아 그럼 일단 출발해보자며 안전벨트를 맸고 나 또한 벨트를 맸다. 윤두준은 능숙하게 후진을 해서 모래사장에서 빠져나갔고 나는 점점 멀어지는 바다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앞으로 일년 뒤, 다시 올것을 기약하면서. "..어!? 형!! 우리 똥돼지 먹자!!!!! 저기저기!!" 윤두준이 호텔방면으로 운전을 하고 있을때, 저 멀리 제주 똥돼지집 이라는 가게 간판이 보여 내가 서둘러 윤두준을 불렀고 윤두준은 그 가게에 다가갈즈음 속도를 낮춰 갓길에 차를 세웠다. 겉보기엔 좀 많이 허름해 보이는데..사람은 꽤 있었다. 아무래도 관광객인듯 했다. "..그냥 호텔가서 먹자." "아냐. 원래 이런데가 더 맛있을 수도 있어. 들어가자." 먹성은 좋지만 살아온 환경자체가 워낙 럭셔리하신 윤두준님이시라 딱 보기에 꺼려지는 음식점은 아예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에 반해 나는 호기심이 워낙 많아 항상 직접 경험해보고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또한, 윤두준이 좀 망설이는 것 같자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 운전석 문을 열어주면서까지 윤두준을 이끌었고 그는 아무래도 탐탁지 않은지 내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들어가는 그 발걸음이 쇳덩이만큼이나 무거웠다. "뭐드릴까요?" "어..그냥 여기서 제일 맛있는 고기루 2인분 주세요." "그래요. 여기 똥돼지 2인분!!! 어디서 오셨어요?" 키는 작고 뽀글파마에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는 나와 윤두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넉살좋게 말을 걸었고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서울이요!" "어유..도시총각들이구만. 근데 우중충하게 이렇게 둘이서 왔어요? 여자친구들은?" 아주머니는 불판을 새로 끼우고 테이블을 쓱-닦으며 물었고 나는 그냥 웃었다.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굳이 커밍아웃을 할 필욘 없었으니까. "아유..잘생겼구만 둘다. 우리 딸이 시집만 안갔어도 소개해주고 싶네 그래..어휴.." 아주머니는 허허허 하고 웃으시더니 주방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그 아주머니가 맘에 안드는 눈치인 윤두준을 쿡쿡 찌르며 웃어보였다. 뭐가 저렇게 불만인지. "겉에서 볼땐 되게 볼품 없었는데..안에는 그래도 괜찮다. 통나무로 된 테이블도 좋구..의자도 통나무야!" 내가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윤두준은 좋냐.라면서 눈을 흘겼고 나는 좋다며 히히-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까 주방에 들어가셨던 아주머니가 물과 컵, 간소한 밑반찬, 그리고 돼지고기를 가져오셨고 능숙하게 상을 차리셨다. "야 박군아!!!! 여기 숯불 넣어라!!!" "예에!!!!" 아주머니는 가게가 울릴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쳤고 나는 젓가락을 들어 초록색 드레싱이 묻혀진 샐러드를 쓱쓱 비벼 입으로 넣었다. 초록색 드레싱이 사과 드레싱이었는지 정말 맛있었다. 상큼하고 달콤하고. "형 이거 되게 맛있어!! 먹어봐!!" "너나 많이 드세요 양요섭씨." 윤두준의 말에 나는 흥 이라면서 야금야금 먹어댔고 그 사이 박군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뜨거운 숯불을 가지고 나와 테이블 위에 앉혀준뒤 불판까지 올리고 그 위에 집게로 대충 고기를 올려놓았다. "고기 뒤집어 드릴테니깐 기다리세요." 그러고선 남자는 휙 사라졌고 나는 생각보다 맛이 더 괜찮을 것 같은 고기에 기대를 했다. 그리고는 도토리묵도 먹고, 동그랑땡 크기만큼 부쳐진 김치부침개도 먹었다. 역시..고깃집은 이 밑반찬이 최고지. "형 안먹어? 왜 갑자기 그렇게 까탈스러운척해? 먹어봐 진짜 맛있다니깐." 나는 김치부침개를 윤두준의 입 안에 쑤셔넣었고 이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더니만은 맛이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괜찮네..라면서 우적우적 씹어댔다. 그리고는 아까 내가 먹었던 샐러드도 먹더니 그건 자기 입에도 맛있었는지 한번에 많이 집어서는 입에 가득 넣고 먹어댔다. 누가 식신윤두준 아니랄까봐. "총각들. 반찬 모자른거 있음 말해. 많이 줄테니까." "네에.." "아 근데 총각은 머리가 왜이렇게 노래? 아니..하얀건가..." 아주머니는 고기를 잘 정돈해주고 그 옆에 버섯과 마늘까지 올려주며 내 머리를 쓱 쳐다봤고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머리에 손을 얹어 살짝 가리며 웃었다. "염색..한거에요." "하여튼..뭐 이쁘니깐 됐네. 이거 샐러드 더 줄까? 김치전도?" "네!!!" "잘먹으니까 보기 좋네. 꼭 아들같구만. 몇살인가?" "...고..삼..이요." "고삼!? 고삼인데 머리가 이래!? 에잉...그러면 안돼!!" 아주머니는 정말 엄마처럼 내 어깨를 아프지않게 슬쩍 때리고는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셨고 나는 괜히 멋쩍어져 뒷목만 벅벅 긁다가 남은 샐러드만 야금야금 먹어댔다. "형 카메라 줘봐." 윤두준은 주머니에 넣어둔 카메라를 꺼내 나한테 줬고 나는 고기도 찍고 앞에서 뚱하게 앉아있는 윤두준도 찍었다. 물론 몰래몰래 내 셀카도 좀 찍고. "..우와..진짜 많이 찍었다. 서울 가면 사진부터 정리하고 현상해야지. 신난다.." 오늘 하루동안 우리의 시간들이 담겨있는 카메라를 나는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거의 이백장은 얼추 되는 것 같았다. 그럴정도로 여기저기 막 찍어댔으니깐. 흔들린 사진도 많고 웃기게 나온 사진도 많았지만 그냥 컴퓨터에서 정리하는게 나을것 같아 계속 넘겨댔다. "형 이거봐. 나 귀엽게 나왔지?" 오늘 아침에 테디베어 박물관 갈때 차안에서 찍은 셀카 한장을 윤두준한테 보여주자 그는 핏-하고 웃더니 내 머리를 또 흐뜨려놓았다. "이거 무조건 현상해서 나 줘." "왜?" "지갑에 넣고 다니게." "..에..닭살이다!!!" 나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다시 카메라 속 사진을 넘겨봤고 어느새 끝이 드러나자 좀 더 찍을걸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나중에 남는건 사진이라던데.... "먹고 또 시켜. 알았지?" 어느새 오셨는지 아주머니가 고기를 작게 잘라주며 말했고 나는 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새로 갖다준 샐러드를 쓱쓱 비벼 먹었고 김치전도 홀짝홀짝 먹었다. 이러다가 고기 먹기도 전에 배부를 것 같았다. "얼추 익었는데 대충 봐가면서 먹어요들." 아주머니는 이 말을 끝으로 딴곳으로 가버렸고 나는 빨리 고기를 먹고 싶은마음에 젓가락만 입에 물고 뚫어져라 고기만 바라봤다. "그런다고 고기가 익냐." "빨리 익을지 누가 알아? 아 고깃집에서 고기 먹은것도 엄청 오래됐다." 나는 아예 고기 하나를 젓가락으로 찌른뒤 꾹 눌렀다. 얼른 익으라고. 그런 내모습을 보던 윤두준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입을 살짝 가려가면서 웃어댔고 나는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계속 고기가 빨리 익기만을 기다렸다. "먹어. 먹어도돼." 윤두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냉큼 쌈장에 푹 찍어 입안으로 넣었다. 세상에...생각보다 이건 기가막힌 맛이었다. 정말 너무너무너무 맛있잖아!? 아무래도 나혼자 2인분은 너끈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그래도 나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서울에서 먹는 삼겹살과는 좀 다른 맛이었다. 삼겹살보단 기름도 적고 훨씬 더 쫄깃쫄깃한게... 하여튼 딱 내스타일이었다. 우와.... "형 진짜 맛있어!! 먹어봐!!" "됐으니까 양요섭 너나 많이 드세요." 아무래도 윤두준은 허름해보이는 가게의 모습에 완전불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상추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고기랑 쌈장, 파무침까지 싹 이쁘게 싸서 윤두준한테 내밀었다. 이에 고개를 빼며 거부하는 윤두준. "아 먹어봐!!!" 나는 윤두준의 입에 억지로 쑤셔넣었고 윤두준은 나를 무섭게 째려보며 씹었고 굳어져있던 표정은 점점 풀려갔다. 제입에도 맛있는거겠지. "맛있지!? 맛있다니깐...사람이고 가게고 겉모습으로 판단하는거 아니야.." 윤두준은 내 말에 어이구 그러십니까? 하면서 내 볼을 꼬집었고 나는 양볼에 바람을 넣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냥 하지말라는 표시였는데 순간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 "미쳤어!?!??!?!" 가게에 사람들도 많은데 윤두준은 겁도없이 나한테 뽀뽀를 하고... 하지만 윤두준은 싱긋 웃기만하면서 고기를 묵묵히 뒤집었고 나혼자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스킨쉽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윤두준은 딴사람 시선이 신경쓰이지도 않는지 가끔씩 이렇게 내 간을 떨어지게 만들때가 있었다. "나중에 여기 많이 생각나겠다." "생각까지야.." 윤두준은 이제 지가 직접 쌈을 싸먹으며 말했고 나는 고기를 쌈장에만 찍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형이랑 여행다운 여행한건 이번이 처음이고 오늘은 내 생일이기도 하고..좋잖아." "나중에 또 오면 되지뭐. 내년 니 생일날 또 오면 돼." "근데 막상 내년 내 생일 되면 딴데 가고 싶어질걸?" "그래. 누가 양요섭을 말리겠냐.." 윤두준은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하고 웃더니 고기 3인분을 더 주문했고 우리는 그렇게 5인분을 먹고 냉면까지 싹쓸이한 뒤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우 배터져." 내가 어느새 불룩 나온 내 배를 두들기며 차에 올라타자 윤두준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나중에 여기 꼭 한번 더 와봐야지. 아 맛있다..." 내가 냠냠냠 대자 윤두준은 내 입술을 손으로 탁-하고 때렸다. 이에 내가 이씨 하면서 쳐다보자 쪽-하고 나는 소리. "벌써 일곱시 넘었네. 호텔가서 짐챙기고 나오면 딱이겠네." "안돼. 샤워도 하고 가야지. 고기냄새난단말야." 내 말에 윤두준은 자기 옷 냄새를 킁킁 하고 맡더니 그럼 샤워까지 하고 가자며 서둘러 출발했다. * "아 하지마!!!!!" "싫은데? 계속 할건데 양요섭?" "아 하지마!! 간지럽잖아!!!! 아 진짜 윤두준!!!" "뭐!? 윤두준?! 어쭈 이게 맞먹네!?!?!??!?" 지금 이게 뭐하는 소리냐고? 최대한 빨리 샤워를 하고 가기 위해 우리 둘이 한꺼번에 욕실로 들어왔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좁은 샤워부스에 같이 들어간것 자체가 문제였지만, 원래 1인용 부스이기 때문에 남자둘이서 들어가서 편하게 움직이기엔 좀 좁았고, 그걸 빌미로 윤두준이 자꾸만 내 몸에 붙으며 자꾸만 간지럽히고 바디워시로 거품질을 대충 하고 물로 씻어내는데 자꾸만 옆에서 거품을 묻혀대서 더 오래 씻어대야만했다. "아 진짜 하지마!! 시간 없단말야!!" 윤두준은 나를 뒤에서 꼭 껴안으며 아직 물로 씻지 않은 윤두준의 몸에 있던 거품이 내 몸에 다 묻었고 나는 이제 수건으로 물기만 닦고 나가려는데 또 씻어야돼서 진짜 짜증이 났다. 에이씨 왜이래 진짜!?" "이씨!!!! 하지마 진짜!!!!"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 심리야 꼬맹아." 윤두준은 계속 아이같이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말했고 나도 이런 윤두준을 말릴수가 없어서 그냥 허-하고 웃고는 또 샤워기로 내 몸을 닦아냈다. 그리고 나는 윤두준에게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을 뿌리며 얼른 씻으라고 재촉했고 윤두준은 알았다며 샤워기를 넘겨받고는 쓱쓱 씻었다. 그 사이 몰래 빠져나온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와 어제 제주도 올때 입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어쩔수없었다. 옷을 한벌밖에 안갖고 왔으니까. 그렇다고 잠옷을 입고 갈순 없지 않은가. 누구때문에 그 잠옷이 필요없게 되었지만. 나는 드라이기를 켜서 최대한 빨리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엄마!!!!!!!!!!!!" 드라이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윤두준이 나오는 소리를 못들었고 나는 원래 머리를 말릴때 눈을 감고 말리기때문에 더더욱 윤두준이 뒤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윤두준은 살금살금 오더니 나를 뒤에서 확 껴안았고 나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드라이기를 바닥에 떨어뜨릴뻔했다. "뭐 그렇게까지 놀래냐." "그렇게까지 놀래냐니!? 아우 진짜..윤두준.." "윤두준?! 아예 친구하지그래?" "그럼 나야 좋지!!" "어쭈." 윤두준은 옷도 안입은채로 계속 내 뒤에서 얼쩡거렸고 맨정신에, 그것도 밝은 방에서 윤두준의 맨몸을 보자니 너무 민망해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왜저래 진짜. "아 빨랑 옷이나 입어!!!!" "입을거거든." 윤두준은 내 입술에 가벼운 뽀뽀를 해주더니 침대근처로 가서 옷을 입기 시작했고 나는 그냥 대충 머리를 말려야겠다 싶어 드라이기를 화장대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뭐 짐이라고하기엔 민망할정도의 간소한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하나하나 개어서 넣었고 옷을 다 입은 윤두준은 내가 올려놨던 드라이기를 켜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형 왁스 갖고 왔어?" "어. 내 가방 봐봐." 윤두준의 가방에서 왁스를 찾아내 윤두준의 옆에 허리를 살짝 숙여 왁싱하기 시작했다. 어떤 스타일로 할까 하다가 그냥 앞머리를 윤두준이 맨날 그러고 다니는것처럼 싹 올렸다. 옆에 구렛나루도 살짝 정리해주고. "앞으로 그러고 다녀. 그게 훨씬 낫다." "그래?" "그나마 남자다워보이네." "...그나마? 이씨..그래 좋겠다. 윤두준씨는 남자답게생기셔서요?" "그럼 좋지. 나같이 남자답게 생긴 사람이 어딨냐. 어우 잘생겼네. 눈이 부셔 아주." 윤두준의 자화자찬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풉-하고 비웃고는 침대에 앉아 윤두준이 머리를 말리는걸 거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일곱시 오십분. 이제 슬슬 출발해야될 시간이었다. 제주도에서 볼것도 많이 남은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가야된다는게 참 아쉬웠다. 나는 발코니 커튼을 열어재껴 호텔밖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봤고 언제 한번은 꼭 다시 오고 싶었다. 분명 우리가 오늘 가본데 말고도 엄청 좋은데가 많을 것이다. 단지 시간이 없어서 못본것 뿐이지. 또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늘만큼 진지하게 생각을 했던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았다. 사실 진지한생각을 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서울에 있을땐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은 피했는데 서울에서 떨어져 마치 외국과도 같은 곳에 와서보니 저절로 윤두준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이 들었다. 뭐 물론 그것때문에 싸울뻔도 했지만. "다 챙겼어?" 내가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윤두준은 머리 왁싱까지 다 끝냈는지 아까 봤던 모습보다 훨씬 더 말끔한 모습이었다. 멋있게 앞머리를 싹 올린 머리스타일.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윤두준의 사진을 바로 찍었다. "뭐야 갑자기. 그럼 가자." 윤두준은 짐을 대충 챙기고선 내 짐까지 들고 먼저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못내 아쉬워서 끝까지 방을 바라보았다. 너무 좋은 기억뿐이었다. 나중에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너무 따뜻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윤두준에게도 다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새겨넣었다. #30. "형!! 내가 대충 사진 골라봤는데 그게 백육십오개야!! 다 현상해?" 나는 윤두준의 노트북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닥에 앉아 계속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원래 생각같아선 서울 도착하자마자 집에 오면 하려고 했지만, 집에오니 거의 열한시 반이 되어있었고 나는 뭐했다고 피곤한지 잠이 몰려와 그냥 죽은듯이 윤두준과 같이 누워 잠에 들었고 윤두준도 피곤했는지 둘 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지금은 1월 6일 오후 2시였다. "맘대로 해. 양요섭! 공부안해!?" "또또!!! 알았어!! 할거야!!!" 윤두준은 아침에 내린 원두커피를 머그컵에 따라 오면서 나한테 또 잔소리를 했고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알았다며 소리를 지른 뒤 계속 사진을 골랐다. 사진을 보다보니 웃기게 나온 사진도 많고 멋있게 나온 사진도 많았다. "저거 귀엽네. 저것도 뽑아." "뭐? 이거? 싫어!! 이거 바보 같단말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양이포즈를 하고선 찍은 셀카였고 이건 현상 안하려고 했는데 윤두준이 억지로 마우스를 뺏어들더니 그 사진에 체크를 했다. 현상 하겠단 뜻이었다. "..씨..싫은데.." "아 대충해. 그냥 다 뽑던지." "이게 돈이 얼만데!! 그럼 이것만 현상한다?" "어." 윤두준은 신문을 펼쳐들며 커피를 마셨고 나는 혼자서만 여유로운 그 모습이 샘나서 윤두준 몰래 메롱 하고는 현상 신청을 했다. 빠르면 내일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앨범도 하나 사야되나.... "형. 앨범도 사자!" "무슨?" "사진 넣어놓게. 형이랑 나랑 서로 맘에드는거 반반씩 골라가져서 끼워넣게 앨범 두개도 산다!!" "맘대로 하세요. 이미 결정해놓고선 나한테 물어보는건 무슨 경우냐." 윤두준의 핀잔에도 난 아랑곳않고 쇼핑몰로 들어가 앨범을 구경했다. 그중에서 갈색과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엄청 심플하게 생긴게 있길래 가격은 생각도 않고 그냥 두개를 질렀다. 물론 윤두준 카드로.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이기광] "왜 나쁜놈아." 나는 아직도 이기광의 배신을 잊지 않았다. 나쁜새끼. 「뭐야.」 "뭐. 나쁜놈아. 현승이랑은 재밌게 놀다 왔냐?" 「또 뭐가 맘에 안들어서 이러나 양요섭.」 "됐거든. 근데 왜 전화했냐." 나는 전화를 받으며 인터넷 기사나 이것저것 클릭해서 봤다. 별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야. 오늘 여섯시에 윤두준네 집 간다. 현승이랑.」 "뭐!? 왜!!!! 왜 와!?" 내가 별안간에 소리를 지르자 윤두준도 놀랐는지 나를 쳐다봤고 나는 큼큼-하며 헛기침을 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뭐야 갑자기..우리집도 아니고 여길 왜 오겠단거야.. 「그냥 파티 하자고. 현승이가 낸 아이디어다. 가도 괜찮냐고 윤두준한테 얼른 물어봐.」 "..아..원래 사람들 데려오는거 싫어하는데..." 「아 그러니까 물어보라고.」 "안된다고 그럼 안올거야?" 「아니? 갈건데.」 "뭐야 이 미친놈아!!!!!" 윤두준은 이기광 싫어하는데..난 중간에서 난감해 죽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 만날거면 밖에서 만나자고 하던가. 왜 하필 여기야. "..형.." 나는 잠깐 핸드폰을 내려놓고 윤두준을 바라보며 그를 나즈막히 불렀다. 이에 대답대신 나한테 꽂히는 시선. "현승이랑 기광이가..여기 오겠다는데...괜찮아?" "걔네가 여기 무슨 볼일이 있다고 와?" 윤두준은 커피잔을 테이블위에 올려놓으며 말했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 미친 이기광새끼. "그냥..파티..해줄건가봐. 생일축하..." "생일도 지났는데 웬 뒷북." "..안된다..그래?"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윤두준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라그래." "진짜!?!?!?!? 아싸!!!!" 단번에 허락할거라곤 생각도 안했는데..다행이었다. "야. 먹을거 많이 사갖고 와라." 「웬일이냐 윤두준이. 그렇게 순순히 오라그러고?」 "몰라. 그러니깐 맛있는거 많이 사와. 올때 문자해." 「오냐.」 이기광놈이 먼저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바람에 난 또 승질이 나버렸다. 이새끼 진짜..오늘 만나면 뒤졌어 개새끼. "걔네 몇시에 온대." "여섯시?" "그럼 그때까지 얼른 공부해." "밥도 안주고..?" 내가 열두시에 일어났고 씻고 난 다음부터 지금 이시간까지 사진 고르는데만 열중해서 밥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밥. 집에 뭐 없을텐데..그냥 시켜먹어. 뭐 먹을래?" 윤두준은 테이블 밑 선반에 놓아두었던 음식점들이 쭉 있는 광고책을 열어들었고 나는 그걸 빼앗아들어 곰곰이 고민했다. 뭐 먹지.... "..피자!!!" "어디꺼." "그냥 싼거 먹지뭐." "됐네. 그럼 내가 먹고 싶은거 시킨다." 윤두준은 핸드폰으로 번호를 눌러 능숙하게 주문을 했고 전화를 끊은 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공부할거 갖고와." "...씨...아 진짜 윤두준!!!" "말 안듣지." 윤두준이 무표정으로 얘기하면 그건 꼭 들어야만 되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명령 같은거.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영어랑 수학 문제집을 가지고 내려왔고 윤두준은 A4용지에다가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이번주 새로 시작되는 내 시간표였다. 짜증나!!!!!!!!!!공부하기 싫은데...... 원래부터 별로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옛날엔 공부말곤 딱히 할 것도 없어 공부만 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윤두준을 만나면서 재밌는것도 많이 알게되고 하고싶은 것도 많아져서 점점 더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그렇다고 공부하기 싫다며 땡깡을 피워봐야 윤두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결국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잘 안풀리지!?" 오랜만에 공부를 하는거라 그런가..수학을 푸는데 좀처럼 잘 풀리지가 않았다. 샤프는 계속 내 손위에서 빙빙 돌려지고만 있고 연습장에다가 머리를 대고 쓰여질 생각은 안했다. ".....응..." "이거봐봐. 공부 며칠동안 안하니까 이따위지." 이따위라는 말에 나는 윤두준을 째려봤지만 윤두준은 뭐. 라면서 나한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고 할말이 없어진 나는 훽 고개를 돌리곤 다시 수학문제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안풀리지....씨.... "답지 보고 풀고 답지 덮은다음에 다섯번 더 풀어." 윤두준은 냉랭하게 말한 뒤 항상 내가 공부할때마다 읽는 영어 원서에다 시선을 박았고 나는 해답지를 뒤적거려 해설지를 찾아본 뒤 차근차근 다시 풀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나는 그때도 말했지만 공부에 집중을 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건, 어떤 소리가 나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누가 옆에서 툭 쳐야만이 그때서야 비로소 주변 상황을 알곤 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파에 앉아 책만 보던 윤두준이 내 팔을 툭툭 치곤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가리켰고 나는 그제야 진동이 여러번 울렸다는걸 알았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들며 무심코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내가 공부를 시작했던 시간이 2시, 점심을 대충 피자로 떼우고 다시 문제집에 집중했을때가 얼추 3시 10분 쯤이었던거 같은데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져서 세상은 서서히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이기광] "어.왜." 「야. 마중나와. 아 씨발 경비아저씨가 자꾸 막아. 내려와라 일층으로.」 뚝 지말만 하고 끊은 이기광에 나는 뭐야..라면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샤프를 드는데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따 늦은 생일파티를 해준답시고 현승이와 기광이가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현관문 앞으로 나갔고 윤두준은 따라나오며 물었다. "갑자기 어디가?" "일층에서 못올라오나봐 이기광. 데릴러 내려갈라구." "..아..추울텐데.." 윤두준의 말에 내 차림을 보니 난 그냥 반바지에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살짝 추울거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어차피 건물 내에 있을거니깐 상관 없어서 그냥 빨리 갔다오겠다며 문을 열고 나가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아 저 진짜 여기 사는 윤두준씨네 왔다니까요!?" "아 글쎄. 몇호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야 양요섭!!!!빨랑 안와!?!?!?" 1층에 내려가자 현관문 앞에서부터 막혔는지 경비아저씨-말이 아저씨지 30대였다-와 말씨름을 하고 있는 기광이가 보였고 뒤에서 어쩔줄 모르는 현승이도 보여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경비아저씨에게 말한뒤 집에 인터폰을 넣어 윤두준의 허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겨우겨우 오피스텔 안으로 이 애들을 데리고 들어 올 수가 있었다. "아 존ㄴ...진짜 짜증나. 이놈의 집은 왜 막고 지랄이야. 짜증나게. 내가 여기 뭐 물건 훔치러 왔겠냐? 아 진짜 내가 이래서 오피스텔이고 아파트고 안좋아하는거야. 아 짜증나." 기광이는 진짜 짜증나는지 엘레베이터에 타서 올라가는 내내 툴툴 거렸고 나는 거기에 뭐라고 장단을 맞춰줄수가 없어 그냥 이기광을 보는데 갑자기 괘씸한 생각이 났다. 내 생일날 그렇게..성의없이 전화를 하고 끊었던 그거 말이다!!! "야!!!" 나는 그 생각이 나자마자 들입다 기광이의 엉덩이에 하이킥을 날렸고 이기광은 놀란듯 나를 쳐다보는데 그때 마침 띵-하고 윤두준의 집 앞에서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에 나는 씩씩 거리는 표정과 함께 일단 엘레베이터에서 내렸고 이기광은 어이가 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면서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걸어나왔고 현승이는 뭐 그렇게 바리바리 손에 든게 많은지 당황스러워하며 따라 내렸다. "미쳤어?" "너..너한테 아무리 애인이 생겼다고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친구 생일에 무성의한 전화를 할 수 있는거냐!? 그럴거면 아예 전화를 하지 말든가!!!!" "전화 해준게 어딘데..이게 진짜..야 그리고 너도 윤두준 있었잖아!!! 니가 혼자있었냐!? 어? 내가 현승이랑 놀러가면서 너 혼자 냅뒀냐고 아니잖아. 그리고 갑자기 웬 질투!?" 기광이는 어이없다는듯 나한테 말했고 나는 그냥 친구로서 서운했던것뿐인데 질투라는 그 말에 또 발끈했다. "질투는 무슨..그냥 서운하다고! 어? 아니 말이라도 좀 이쁘게 하면 좀 좋아!? 하여튼 너한테 실망했다 나쁜놈아." "실망은 무슨. 아 됐고. 빨랑 집이나 들어가. 아 현승아!! 무거웠지!! 미안미안! 내가 정신이 없었다." 기광이는 됐다며 내 팔을 밀며 말하다 현승이를 쳐다봤고 그의 두손 가득 들린 짐을 보며 화들짝 놀라면서 그 짐들을 빼앗아 들었다. "..하여튼..너 그리고 윤두준 신경 긁지마라. 알았냐?" "그새끼가 먼저 시작하는거거든." "그새끼!? 이게 어따대고 진짜.." "아 시끄럽고 빨랑 문이나 열어. 무거워 죽겠으니까." 기광이는 내 엉덩이를 발로 차며 말했고 내가 쨰려보자 뭐. 라면서 도리어 화를 내자 또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참으며 번호 도어락을 해제시키곤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어 재끼자마자 나를 밀며 들어오는 이기광의 태도에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째려봤다. 저새끼 왜저래 진짜?!!!!?!?!? "안녕하세요..." 우리가 오자 현관문 앞에 뻘쭘히 서서 나름 손님을 맞는 윤두준에 현승이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기광이는 그냥 쉽게하는 고개만 까딱하는 인사로 대신했다. 그리곤 바로 척척 걸어들어가더니 거실에다 뭐 그렇게 많이 싸갖고 왔는지 쇼핑봉지들을 턱 하니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앉으란 말도 안했는데 말이다. "아. 앉을게요." 윤두준이 이기광을 심상치않은 눈으로 째려보자 기광이는 그제야 손을 살짝 들며 뻔뻔히 말했고 저런 태도가 문제인 기광이한테 나는 윤두준의 뒤에 서서 눈을 찡긋했지만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기광인 현승이의 손목을 잡아 자기 옆에다 앉혀버렸다. 저 망할인간. "야 근데 뭐 이렇게 많이 사왔냐. 이게 다 뭐야..." 내가 봉지에 관심을 보이자 싹싹한 성격을 가진 현승이가 일어서서 봉지에 담긴 음식들을 하나하나 꺼내었다. "이거는 저희가 부산 갔다온 기념으로 사온건데..사실 서울에서 산거에요. 부산에서 사오면 상할까봐..회 괜찮으세요?" "회 킬러야. 와 맛있겠다." 내 반응에 참 이쁘게 환히 웃던 현승이는 그 다음 봉지를 열어재꼈다. "이건..사지 말자고 그랬는데 형이 부득부득 우기는바람에..술이요." 말이 술이지 진짜 이거 먹다 죽을 것 같을만큼의 양이었다. 맥주 페트에 담긴 엄청 큰거 3병에 캔맥주 6병, 소주 5병. 이걸 누가 먹으라고..미쳤다 진짜.... "야..미쳤냐? 이걸 누가다먹어!?" "누가 다먹어. 우리가 다 먹지." "미쳤냐? 나 술 못마시는거 알잖아." "누가 너보고 마시래? 너 행여나 입에 술 댈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라. 또 옛날처럼 그따위 술주정할거면..." 기광이의 말에 나는 내 술주정이 뭐였더라..라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생각이 안났다. 내가 뭐?! 내 술주정이 뭐 어떤데!?!?!? "...설마..생각안나는건아니지?" "....안나는데..." 나와 기광이의 대화에 어느새 주목하고 있는 윤두준과 장현승. "...대박..너 작년에 박성식, 강재현, 김형만, 너,나. 이렇게 울집에서 술 마셨을때가 생각 안난다고!? 너 그때 캔맥주 하나 먹고 뻗어서 무슨 짓 했는데...애들 한명한명한테 뽀뽀하고 껴안고 부비적댄거..생각 안난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그때 애들이 너 하는짓이 하도 끔찍해서 내방에다 가둬놨던거 모르냐!?" "..구라까지마." "구라 같은 소리하네. 그때 재현이새끼 첫키스도 못해본 놈이었는데 니가 강제로 하는바람에 재현이가 너랑 쌩깐다고 존나 지랄했었어. 내가 걔 말리느라고 진짜 죽을뻔했는데..와..진짜 뻔뻔한놈. 아 됐고. 너 하여튼 술 입에도 대지마. 아 너 술 먹지 말라고 내가 사이다 사왔다. 넌 그거나 쳐먹어 찌질아." 기광이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초록색 사이다병을 꺼내어 나한테 넘겨줬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한테 그런 주사가 있었다니!? 난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난 생각이...... 그러고보니까 그때 술먹고 다음날 애들이 나를 좀 피하긴 했었던 것 같았다. 기광이가 그날 일을 다 얘기해줘서 일일이 사과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근데...그 얘길 윤두준앞에서 하면 어떡하냐 이기광 개새끼야!!!!!!!!!! "..아니야. 쟤가 구라까는거야. 아니야..진짜 나 안그래.." "이기광. 똑바로 말해봐. 얘가 몇명한테 뽀뽀를 하고 다녔지?" 기광이한테 묻는 윤두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씨..진짜!!!!!! "거기있는 애들한테 다요." "너한테도?" "저도 거기 있었다고 말했잖아요." 윤두준은 기광이의 말에 나를 바라봤고 나한테 약점은 오로지 윤두준뿐인데, 윤두준이 이렇게 나오니 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사이다만 먹을게. 술..안먹을게.." 내가 차마 윤두준의 눈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하자 이기광은 킥킥대며 웃어댔다. 하긴, 남들앞에서 기가 죽는다거나 움츠러드는 내가 아니었기때문에..웃길만도 했다. 아 쪽팔려.... "...아....요섭이형..그리고 이건 저희가 드리는 선물이요!!" 얼음물을 끼얹은듯한 분위기에 어색하게 말문을 연 현승이에게 세사람의 눈이 확 쏠렸고 현승인 부끄러운듯 나한테 종이봉투에 담긴 선물하나를 주었고 작은 박스 같은게 있어 난 망설임없이 비닐을 뜯어냈다. 작은 박스를 열자 들어있는건 두개의 팬던트목걸이. 그러니까 뚜껑을 열면 사진을 넣을 수 있는 그런 목걸이였다. "거기에다 요섭이형은 선생님 사진, 선생님은 요섭이형 사진 넣고 하고 다니시라고..." 그런 목걸이는 되게 무거워서 목걸이로 못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이런거 생각도 못했는데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지고 추억이 될만한 선물을 준것 같아 너무 고마웠다. 이에 나는 목걸이 하나를 윤두준한테 주고 나는 그 목걸이의 뚜껑을 열었다닫았다하면서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그란모양이었는데 그냥 은색에 어떤 문양이 새겨진 약간 앤틱느낌의 목걸이였다. 정말 너무너무 예뻤다. "형 증명사진 찍은거 있어?" "..몰라..있나?" "여기에 우리 제주도에서 찍은사진 넣기엔 좀 힘들거 같은데...있으면 갖고와봐." 윤두준은 tv 밑 수납장을 열더니 거기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뭔가를 우르르 바닥에 쏟아냈다. 그리고는 있다며 사진 한장을 가지고왔고 그건 다행히도 윤두준이 최근에 찍은 사진인듯 지금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보이는 모습이 들어있었다. 이에 소파 옆 서랍장에서 가위를 꺼내 목걸이에 맞게 윤두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 팬던트 안에 넣었고 딱 들어맞아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 "우와 딱이다!!! 고마워!!!!!" "양요섭. 너꺼 사진줘봐." "..지갑에 하나 있을걸? 형 내 지갑 갖고와봐." "어쭈." "아..왜.." 내가 살짝 웃으며 윤두준의 팔에 매달리자 윤두준은 보는 눈이 있어 차마 더는 못하겠는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목걸이를 들고. "야..진짜 어떻게 이런거 해줄 생각을 했냐. 와 진짜 이쁘다.." 내가 바로 목에다 목걸이를 하자 현승인 어느때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이쁘다고 해줬고 기광이 눈에도 괜찮았는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간직해야될 물건 하나가 나한테 더 생겼다. 하나는 커플링, 둘은 나눠낀 귀걸이, 셋은 이 목걸이. "..아 이제 빨리 먹자. 배고프다." 기광이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더니 피식 하고 웃으면서 술병들을 모조리 거실바닥에 내려놓고 테이블은 저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곤 한가운데에 포장을 벗긴 회를 놓았고 그 주변으로는 과자들을 쭉 깔아놓았다. 육포와 버터구이 오징어도 놓았고. "너 진짜 술 마심 죽여버린다." "...씨..나도 먹고싶은데.." "왜. 먹다가 윤두준한테 직싸게 혼나보고 싶음 먹던가." "...안먹어 안먹어. 그리고 그정도 술주정이면 귀엽잖아!! 내가 뭐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에 토해놓는 것도 아니고!!" "너야 필름이 끊겨서 모르겠지만 니 술주정 받아주는 사람들은 끔찍하게 괴롭다." 기광이는 벌써 캔맥주를 따서 한모금 두모금 마시면서 말했고 나는 병따개로 사이다를 따고선 병나발을 불었다. 사이다 병나발. 나만 초라하게. 한살 어린 현승이도 아무렇지않게 술을 먹는데....이씨.... "사진 있지 지갑에? 목걸이에 넣었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있는데 마침 윤두준이 2층에서 내려왔고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에 윤두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나한테 자기 목걸이를 주었고 덮개를 열어보니 아마 머리 염색하고 기념으로 찍은 듯한 아주 미친듯한 금발의 양요섭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이쁘네." "지가 지입으로 꼭 저런말을...." 내가 방긋 웃으면서 윤두준한테 목걸이를 넘겨주며 말했고 기광이는 맥주를 마시다가 나를 핀잔했다. 저새끼는 근데 왜 아까부터 시비야!?!?!? "왜이래!? 아까부터!!!" "내가 뭐?" "니가 내 술주정 얘기만 안했어도 나는 지금쯤 술을 먹고 있었을텐데..다 너때문이야 이 망할 이기광자식아." "저기요. 내가 양요섭 술주정에 대해서 말한거 잘못한거에요?" 목걸이를 목에 거는 윤두준한테 묻는 이기광. 윤두준은 나와 이기광을 번갈아보더니 이기광한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저건 악수하자는 제스쳐인데... "..뭐..." "고맙다고. 생각해봤는데 내가 너한테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미안. 내가 재수없게 굴었던거, 싸가지없게했던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미안." 생각도 못했던 윤두준의 저자세에 놀란건 기광이 뿐이 아니었다. 나와 현승이도 놀라 그중에서 나는 사이다를 먹다가 하마터면 내 앞에 앉아있던 현승이 얼굴에 뿜어버릴뻔 했다. 겨우 얼굴 돌려 바닥에 뿜었지만. "...에?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니고..그냥. 내가 양요섭이랑 잠깐 만날사이도 아니고 너는 양요섭 친구니까. 언제까지 얼굴 붉히면서 지낼순 없는거 아니겠냐. 좋은게 좋은거라고 양요섭도 그걸 바라는눈치고.." 윤두준은 자기 앞에 놓여진 캔맥주를 따더니 한모금 먹으며 말했고 기광인 얼떨떨한지 가만히 있다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 이에 윤두준은 아까 거뒀던 손을 다시 내밀어 둘이 손을 잡았고 좀 어색한것 같아 내가 우와...하면서 박수까지 쳐가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기특한 윤두준. "와 그럼 둘이 화해 한거네요?! 보기 좋고 얼마나 좋아요!!! 주변사람이 눈치 안봐도 되고!!" 현승이가 육포를 씹으며 말하자 기광이는 그의 뒷통수를 쓰담쓰담해주었고 분위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오늘 뭔가 정말 화기애애하게 별의별 얘기를 다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우연히 승혜누나를 봤어요. 진짜..태어나서 그렇게 이쁜 여자는 처음봤다니까요. 아니 이게 현승이 질투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진짜 진짜 되게되게 이뻐요. 거기다가 무용을 전공해서 몸도 되게 호리호리한데 눈은 또 그냥 딱 양요섭 눈이에요. 저기다 머리만 길고. 어우...형도 보면 진짜 입 벌릴걸요."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기광. 양요섭이 형이라고 부르니까 자기도 형이라고 부르겠다며 먼저 편하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윤두준은 울며겨자먹기로 오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덕분에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지만. 거기다가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현승이 까지도 윤두준한테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뭔가 되게 넷이서 똘똘 친해진것 같은 느낌에 나는 너무 뿌듯했다. 난 늘 이런걸 바라왔었다. 내 사람과 내 친구들이 서로 친해지는 것. 서로 모여서 놀기도 하고 여행도 가면서 이렇게 즐겁게 지내고 싶었었는데 그게 드디어 윤두준과 이기광의 노력으로 이루어진것 같아 난 너무 뿌듯했다. 사실 아까 기광이가 갑자기 쳐들어온다고 했을때 내심 불안불안하고 빙판위를 걷는것 마냥 아슬아슬했는데 이런 뜻밖의 전개가 펼쳐져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 조차도 구별이 안갔다. 뭐 주변 사람들이 지금 조금씩 맛이 가는 상태라, 혹시나 술이 깨면 모두 다 없던일로 엎어버릴까봐 조마조마 하기도 했고. "그렇게 이뻐 얘네 누나가? 아니 요섭이도 지네누나 그렇게 이쁘다고 극찬을 하긴 하던데..." "그냥 쩔어요. 미스코리아감이라니까요. 야 승혜누나 언제 한국 입국하냐?" "몰라 내후년쯤에 올 것 같다는데? 빠르면 내년쯤?" "어우 너무 늦다...누나 미국 간지도 꽤 됐지? 아 진짜 보고 싶다.. 착하기는 또 얼마나 착한지....하여튼 양요섭 너는 그런 누나 둔거 평생 복으로 생각해야돼. 그렇게 너 끔찍하게 생각해주는 누나가 어딨냐." 어쩌다 누나 얘기까지 나온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광이 말대로 나한테 끔찍한 사람이었다. 뭐 맛있는거 있음 그냥 자기만 먹어도 되는데 꼭 안먹고 남겨주고, 내가 어쩌다 늦으면 그게 몇시건 기다렸다가 내가 오는걸 확인하고 잠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랬기때문에, 양승혜가 나한테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밖에 나가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고 나를 최고로, 어느 방면에서건 무조건 최고로 생각해주는 누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달렸었던것 같기도 했다. 정말 내가 살아온 내내 누나가 없었으면 없었을 인생이라고나 할까. "양요섭..뭐..과거에 있었던 일 없냐. 내가 모르는거." 윤두준은 맥주 한 캔을 말끔히 비우고 다른 캔을 따며 기광이한테 물었고 기광인 이미 두번째 캔 조차도 끝나가는지 탈탈 털어 먹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 없나 곰곰이 생각 하는 듯 했다. "저새끼야..뭐..맨날 공부만하느라..맨처음에 만난게 중일때였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다 남녀공학을 다녔고 다니고 있는데... 인기는 댑따 많았어요 진짜. 애가 워낙 학교 규칙이랑 상관없이 사니까..그냥 지 배알 꼴리는대로 사는거에요. 학교에서 하지말라는거건 하라는거건 그냥 자기가 하고싶으면 하는 스타일이라..근데 또 쟤네 아부지가 한가닥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암암리에 양요섭이를 터치를 할 수가 없고.. 또 애가 사복을 완전 잘입고 댕기니까 여자애들은 빠지고.. 지금도 저거 머리 봐요. 저거 머리도 갑자기 미용실 가더니 저렇게 해갖고 나오는거에요." 기광이는 세번째 맥주캔을 따며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대체 저입에서 어떤 폭탄발언이 나올지 나는 너무 두근두근 댔다. 얘네들이야 저지르면 그만이지만 후폭풍을 맞는건 오로지 나 뿐이었으니까. "그때 미용실에 같이 갔었는데 저따위로 금발을 하더니 아무렇지 않게...아니 밖에 나가봐요. 금발 한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나..근데 그것도 고딩이..어우 진짜 친구지만...그리고 쟤는요. 형도 알겠지만, 한다고 딱 맘을 먹는건 어떻게든지 해요. 뭐가 갖고 싶거나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거나 그런거 맘 먹고 결단 내리면 절대 안바꿔요. 그리고 반드시 이뤄낸다니까요. 독종이야...어후." 기광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한테 말했고 현승이가 나를 두눈 동그랗게 뜨며 진짜 형이 그래요? 라고 물어보자 민망해져서 그냥 얼마 남지 않은 사이다나 마셨다. 이기광이 말한건 다 사실이었으니까. "근데..진짜 형이 좋아할만한건..저새끼 형이 처음이에요. 좋아한 사람도, 사귄 사람도 모두 다 처음이라 형은 진짜 좋아해야돼요. 쟤를 좋아하는 애들은 엄청 많았는데 정말 매정한 저새끼는..사람이 자기 좋다고 주는 선물인데 그냥 예의상 받으면 되잖아요. 근데 모르는 사람이 주는 선물은 그게 그냥 물한컵이 됐더라도 절대 안받고 그냥 버려버린다니까요. "야 내가 언제." "언제는 무슨..근데 작년 10월 말쯤이었나. 11월이었나. 사실 거기 학원 간게.. 저때문에 얘가 따라간거거든요? 제가 그때 여.....무슨 볼일이 좀 있어서..." "그게..무슨 볼일이었더라 기광아? 현승아..궁금하지. 그게 무슨 일이었을까?" 내가 싱긋 웃으며 과자를 씹으면서 말하자 현승이는 나와 기광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혹시.....여자친구..만나러?" "딩동댕." "야!!!!!!!!" "뭐. 내가 틀린말했냐? 그때 그 무슨..어디 학굔지도 생각안나는데..박...박수...그래 박수경!!!!! 박수경이 그때 이기광 여자친구였었는데 걔 만나러 간거였어. 그치 기광아?" ".....너..뒤진다....아니야 현승아. 아니야. 양요섭 저 호로가 구라 까는거야..진짜.." "..이따 얘기해요." 나는 통쾌했다. 사실 이기광에 대해서 폭로하면 말할게 아주아주 넘쳤으나...참아주기로 했다. 오늘은 기광이가 이쁜짓 한 날이니까...이건 그냥..약간의 애교정도? 아마 현승이는 기광이가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다는건 알고 있겠지만.. 그게 어느정도건간에 현승이는 그저 빙산의 일각 정도만 보고 알고 있을게 뻔했다. 친구인 나도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지는 이기광의 저 화려한 전적들..... "...어..쨌..든..그때 양요섭 저새끼가..형한테 완전 반해가지고..계속 헤롱헤롱..학교와서도 밥도 못먹고 무슨...갖은 지랄은 다 떨고..그 와중에 제가 현승이한테 완전 반해서 막 다가갈즈음이었는데..저 맹꽁이 같은 새끼는 형이 뭐 하나만 그냥 어떻게 좀 해줘도 혼자 좋다고 지랄지랄..그때만 생각하면..." "야. 너 그때 나 신경도 안써줬잖아!!너 현승이 좋다고 맨날 현승이 만나러 가고!!!!!!!!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어?" "야. 그래도 내가 영 신경 안쓴거 아니다. 내가 충고도 해줬지 조언도 해줬잖아!!!" "충고는 개뿔..." 그냥 그때 속끓였던거 생각하면 아직도 부글부글거려서 마침 내가 먹던 사이다도 똑 떨어져 윤두준이 마시던 맥주캔을 뺏어들어 그냥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반 정도 남은거 같았는데 내가 그냥 아예 깨끗하게 비워버리자 윤두준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날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현승아. 기광이 저새끼가..사귄 여자애들이..이 열손가락 안에 다 안들어간다? 니가 그걸 알아야돼. 쟤가...맨날 나한테 여자 소개해주고, 싫다는데 무슨 어디 학교 어떤 앤데 남들은 소개 못받아서 난린데 넌 왜그러냐면서 억지로 소개받은 애가 나도 다섯명이 넘어. 저새끼 진짜...니가 고쳐줘야된다..지버릇 남 못준다고..니가 꽉 잡고 저새끼 갱생시켜야돼. 현승아. 그게 니 몫이다." 내 말에 윤두준은 이기광을 째려봤고 현승이도 이기광을 째려봤다. 이에 기광이는 하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애꿎은 술만 자꾸만 들이켰고 나도 어느새 맥주캔을 잡고 마셔대고 있었다. 분위기상 내가 안마실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이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근데..기광이 너무 혼내지는 마라. 기특한 놈이야. 내가 중학교때부터..공부하라고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어도 귓등으로도 안듣다가 저새끼 요즘 마음 잡았지? 그거 다 너때문이라고 그러드라. 너한테 당당하고 떳떳해지고 멋있어지고 싶단다. 그러니까 그래도 아직은 저새끼가 많이 모자를테니깐 니가 좀 도와주고.. 내가 말할땐 안듣다가 너 하나때문에 저렇게 바뀐 이기광 보면 좀 씁쓸하기도 하지만..뭐..어쩔 수 없는거 아니겠냐." 내 말에 윤두준은 그냥 뒷통수를 쓰담쓰담 해주었고 기광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 후로도 우리는 많은 얘기를 하고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정말 내가 바랐던 시간을 보냈다. 장현승 이기광 나 윤두준. 아마 나랑 기광이는 고3이라 올해엔 이런 자리는 못갖겠지만, 그리고 내년엔 또 현승이가 고3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모두가 대학생이 되면 정말 이렇게 뭉쳐서 꼭 여행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참 재밌을 것 같았다. 여름엔 바다에, 겨울엔 스키장에. 정말 그렇게 끝까지 우리 넷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구하나 다치지 않고, 올한해 무사히 보냈으면 좋겠다. 서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고. 평생을. #31. 1년 5개월, 그리고 보름 후. "야!!!! 어디야!!!!!! 미친 이기광!!!!" "어. 지금 가고 있어." "..어..지금..가고 있어!? 내가 도서관 자리 맡을라고 아침일찍부터 와서 예약해둔거 알지?!" 2011년 6월 19일. 여기는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나는 양요섭. 그리고 저 멀리서 미친듯이 천천히 걸어오는 이기광. "야 이기광!!!!!!!!!!!!!!!!!!!!!!!!" 나는 운좋게 수시에 합격해-물론 최저등급이 있어 수능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연세대 경영, 그러니까 윤두준의 후배가 될 수 있었고 이기광은 정말로 인간승리의 표본이 되었다. 학교에선 거의 전설적 인물로 남은 이기광. 기광이는 수능점수를 거의 기적과도 같은 점수를 맞아냈다. 등급으로 따지면 121 1121....이건..정말 인간승리이자 기적이었다. 그렇지만 수리 점수때문에 연대가 조금 불안불안한 가운데 그냥 영어영문학과로 질러버렸다. 수리때문에 영문과는 커녕 대학을 낮추자는 담임과 학년부장의 만류가 많았지만 인생 까짓거 한방이라며 그냥 지가 전공하고싶은거 하겠다면서 질러버렸고..결과는.... 발표날. 다행히도 예비합격을 하긴 했지만...너무 불안한 번호를 받아 기광인 똥줄을 탔었다. 결국 졸업식때까지도, 졸업식이 끝난 그 이주 뒤까지에도 연락이 오질 않아 기광이는 거의 포기하고 다른 군에 붙은 대학에 입학 하기 위해 마음을 추스리고 있엇는데 그때 기적처럼 입학처에서 전화가 왔더랬다. 합격했으니 등록금 넣으라는 그 말에..기광이는 그자리에서 주저앉아 정말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랑 같이 있었는데 엉엉 울면서,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연대생이라고..자기 이제 연대생이라며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하면서 고해성사를 하더니 정신줄을 되찾았을때 이기광은 장현승한테 전화를 걸었더랬다. 부모님이 아닌 장현승한테. 그리고나선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현승이한테 멋지고 당당한 사람 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나는 그때 기광이의 진심을 느꼈다. 얘가 한때 치기로 현승이를 만나는게 아니구나. 진심이구나. 항상 가볍게 살아서 가벼운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여태껏 그랬던것처럼 현승이 또한 얼마 가지 않아 지겨워질거라고 버릴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나나 이기광 모두다 각자 애인과 만난지 일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젠 우리 둘다 이년을 바라보는 사이였다. "미안." "..진짜..죽이는 수가 있다..." "야 더운데 무슨..집에서 공부 하자니깐.." "도서관에서 해야 열심히 하게 된다니깐. 집에서 하면 풀어져서 안돼." 학교는 이미 많은 과가 방학을 한 상태고, 나나 기광이의 과 또한 지금 방학중이었다. 근데 우리가 공부를 하려는건 바로...토익..이었다. 그렇게 대학생들이 토익토익 할때도 그걸 실감 못했는데.......내가 이렇게 준비를 하게 될 줄이야... "야. 음료수 사줄게. 매점 가자." 기광이는 더웠는지 나를 끌고 매점으로 향했고 나는 진짜 짜증이 나서 기광이에게 끌려가면서도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늦을라고 늦은게 아니라, 잠깐 학교가서 현승이 좀 보고 올랬다가 선생들한테 잡혀갖고 고3애들한테 공부 어떻게하면 되는지 알려주고 와서 그래." "지랄.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모범학생이었냐?" "닥쳐. 너는 머리 색깔이나 바꿔. 대체 몇년째 금발이냐. 미친." 나는 아직도 금발이었다. 사실 물건이건 뭐건간에 금방금방 질리는 스타일인 나는 이미 이 머리색이 질린지 오래였지만 윤두준이 내 머리색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상관마셔." "어. 아이고 힘들다.." 매점 가는 길에 그냥 커다란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주저앉은 이기광에 나는 어이가 없어 그냥 내려다봤다. "좀만 쉬자. 너무 힘들어. 너때문에 빨리 오느라.." "야. 양심이 있으면 말은 똑바로해. 미친새끼야. 너 천천히 걸어왔잖아 병신아." "더워죽겠는데 그럼 뛰냐!? 아 내일은 우리집에서 공부해. 나 힘들어서 학교 못와." 나는 그냥 대답할 말이 없어 기광이 옆에 앉았다.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진동. [윤두준] "어." 「어디야?」 "매점 가는길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기광이랑 같이 있어? 그러지말고 밥먹자. 밥사줄게.」 "형이 밥사준대? 콜." 귀신같은 이기광은 어떻게 알았는지 벤치에 누은건지 앉은건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늘어지게 앉은 기광이는 나를 올려보며 말했고 나는 그냥 가운데손가락을 날렸다. 병신새끼. "나 공부해야되는데...도서관 자리도 되게 힘들게 맡았는데..." 「점심땐데..밥먹고해. 거기로 갈테니깐 있어.」 "...응.." 윤두준도 내가 입학함과 동시에 3월에 복학을 했다. 윤두준은 3학년 수업을 들었고 나는 1학년 수업을 들었는데, 교양과목은 일부러 같은걸로 신청해서 우리 둘이 같이 듣곤 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는거지만, 윤두준과 같이 듣는 수업은 제대로 들은적이 별로 없었다. 자꾸 손잡고 있고, 몰래 뽀뽀하고, 가끔 수업 땡땡이치고 놀러가느라...... 사실 요즘은 작년보다도 더 행복한 날들이었다. 선배들도 너무 착하고, 잘해주고, 무엇보다 윤두준과 같은 학교 같은 과라보니까 말도 더 잘 통하는 것 같고 내 공부를 도와주기도 하고, 그리고 항상 가까이에 있을 수 있어 그게 가장 좋았다. 뭐 제일 안타까운건 고3과 대학생이라는 장현승과 이기광이었지만. "야. 그냥 집 가자. 오늘 공부 삘 아니야." "아 병신아!!!!!!!!!!!!!!!그럼 도서관 가자고 하질 말던지!!!!!!!!!" "미안미안. 잘못했어." "아 진짜 이기광..너 존나싫어 진짜." 도서관 자리는 방학이 되면 맡기가 더 힘들었다. 예약제라서 컴퓨터로 예약을 하긴 하는데, 그조차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서 요즘은 매일매일 도서관홈페이지 들어가서 빈자리 없나 맨날 보는데..그래서 겨우겨우 자리 맡아놨더니 이기광이 이지랄이다. 아우...더러워.정말. "아..배고파...." "..아 짜증나 진짜." 덥기도 하고 저렇게 태평하게 나를 쳐다보며 웃는 이기광이 짜증나서 그 옆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다행히도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시원하게 만들어줘서 딴데보단 덜 더웠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건 사실이었다. "야. 짐챙겨갖고 나올테니까 여기 꼼짝없이 있어. 윤두준 학교에 있었던거 같으니깐 여기 있다가 보이면 잠깐 같이 있어." "옹야." 이기광은 손을 휘휘 저었고 진짜 저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버릴수만 있다면 찔러버리고 싶었다. 어휴 저 웬수. 친구가 아니라 저놈은 내인생 업보였다. 전생에 내가 뭔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도움 안되는 놈을......어우씨. 나무그늘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덥다못해 따가운 햇빛이 내 몸 이곳저곳을 때려댔고 더운것도 추운것도 싫은 나는 그냥 아예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라리 바짝 더운게 낫지..이렇게 햇빛 비추는데서 천천히 걸어가는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니 단번에 시원한 에어컨의 공기가 느껴져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주 넓은 열람실 안에는 다들 무슨 공부를 그렇게들 열심히 하는지 도저히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어 문을 천천히 열고 들어가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내가 겨우 맡아놨던 자리로 갔다. "....뭐지.." 황토색으로 된 칸막이 책상이 있는데, 내 자리에 오렌지 주스와 쪽지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의자에 대충 올려놓았던 가방을 들다 말고 쪽지부터 펴보았다. [학교에서 종종 봤어요. 아마 그쪽은 저 모르실텐데..당장에 그쪽이 맘에 드니까 잘해보자 라는건 절대 아니고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친구를 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나 이 쪽지 보시면 열람실 바로 앞 자판기 옆에 서있을테니까 잠깐만 나와주세요.] 글씨체가 여자애들의 글씨는 아닌것 같았다. 그냥 딱 남자애들 글씨마냥 삐뚤빼뚤하고 엉성한게..느낌이 이상했다. 사실 누군가가 나한테 이런 접근(?)을 해오면 나는 늘 불안했다. 그 불안의 근원을 쭉 올라가다보면 결국은 윤두준이 있었다. 늘 윤두준이 알아챌까봐 무섭고 불안했다. 같은 학교인데다가 같은 과이기까지한데 또 윤두준 발은 왜그렇게 넓은지 캠퍼스를 걸어다닐때마다 인사를 열번도 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무서웠다. 가끔 이렇게 조용한 접근도 있지만 정말 가끔은 길거리에서 대놓고 내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안주고 거절하면 그냥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끝까지 안놔주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고등학교때보다도 더 심한 상황에 나는 이럴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어 대충 가방에 책을 구겨넣고 음료수와 쪽지는 손에 따로 들었다. 아직도 그 사람이 서 있다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런거 모르는 사람한테 받을 이유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람실 문을 조심히 열고 나오자마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댔다. 나는 이 작은 진동에도 심하게 깜짝 놀라며 황급히 문을 닫고 전화부터 받았다. "여.." 「아 왜안와!!! 형 왔어. 여기 도서관 바로 앞이야.」 "...윤두준 왔어!? 아..알았어. 금방 갈게. 너 거기서 꼼짝말고 기다려. 들어오지말고." 「뭔데. 뭔일 있냐?」 "아 됐으니깐 거기 똑바로 있어. 끊는다." 일단 전화를 서둘러 끊고 자판기를 찾았고 정말 그 옆엔 상당히 준수하게 생긴데다 키도 엄청 큰.....남자 분이 서 있었다. 대체 지금 뭐하자는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당황스럽기만 해서 무작정 다가갔다. "...아..저.." "오셨네요." 가까이서 보니 키가 나보다 훨씬 컸다. 모델을 해도 될만한 키였다. 백팔십은 우습게 넘을만한 키였다. 한 백팔십육..정도 되려나..얼굴이 작아서 더 커보였다. 정말 어디가면 못생겼다는 말은 커녕 잘생겼다는 말만 들입다 듣고 올 타입으로 정말 준수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거기다 머리통은 또 얼마나 작은지..머리스타일은 윤두준처럼 앞머리를 왁스로 넘겼는데 참 뭐랄까.. 잘생기긴 했는데..아 그러고보니 누구 닮았다. 누구지..그게..임주환..? 맞나. 잠깐 티비에서 본 연예인이었는데 이목구비가 좀 비슷했다. 얼굴도 하얗고 조막만하고 콧날도 오똑하니 눈은 쌍커풀없이 큰 눈에...근데 이렇게 허우대 멀쩡한 사람이 왜... "아 그게 아니라..제가..사귀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거랑 상관없이 그냥 친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느낌 좋아서 그러는데.." "아..죄송해요. 제가..이런걸 별로 안좋아해서..아 이거 음료수요. 죄송합니다.." 지금 도서관 앞에 윤두준이 있을거란 생각에 나는 서둘러 그 쪽지와 음료수를 건네주고는 무작정 도서관 현관을 향해 걸었고 저 멀리 윤두준과 이기광이 서있는게 보여 나는 애써 웃으며 아무일 없다는척 최대한 빨리 걸어가는데, 내 어깨가 누군가의 우왁스러운 힘으로 휙 돌려지는게 느껴졌다. 순간 드는 불안함과 당황스러움, 무서움. 어떡해야되지. 아까 내가 윤두준을 보며 웃었고 그도 나를 보며 웃었으니까 지금 내가 보일거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나한테 접근했던 그 남자고... 나는 순간 머리가 텅 하얘졌다. "저기요. 저 생활과학부 10학번 김태경이거든요. 그쪽은...경영학과.. 10학번 양요섭. 기억해둘게요. 그리고 이거 음료수 가져가서 먹어요. 그쪽 주려고 산거니까." 내 이름, 내 과는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그 남자는 나한테 음료수를 직접 손에 쥐어주며 늘 윤두준이 나한테 하던 앞머리를 손으로 흐트려놓더니 그대로 뒤돌아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벙쪄버렸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이라곤 생활과학부-말하자면 의류학과-라서 옷을 잘 입는구나.. 어쩐지..잘입는다 했더니만..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뒤에서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지 뻔히 보이는 윤두준이 무서워 차마 다시 뒤를 돌지 못하고 나한테 음료수를 주고간 이 남자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잘생겼네. 키도 백팔십오는 되는거 같다. 모델이래냐?" 내가 멍때리며 서있자 어느새 기광이가 내 옆으로 와서는 깨방정을 떨어댔고 나는 기광이도 보지 못하고 앞만보며 말했다. "..윤두준이 뭐래.." "몰라. 별로 표정 없던데. 번호 줬냐?" "아니." "그럼 쟤가 뭐래? 뭐라고 하는거 같던데." "그냥 지가 생활과학부 10학번이라고..기억해두겠다나 뭐라나...아씨발..어떡해.. 너 내가 거기 있으랬잖아!! 왜 이 앞까지 와서 지랄이야!!!" "..대박..너 지금..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푸냐!?" "아 몰라 씨발." 나는 그냥 몸을 홱 돌려 윤두준한테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 내가 죄졌어!? 내가 번호 달라 그런것도 아닌데 왜!!!!!!!! "저새끼가 뭐래." 단번에 욕부터 튀어나오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들고 있던 음료수를 기광이한테 넘겨주며 말했다. "아니 별말 안했어. 가자. 아 배고프다..." "..어떡하냐..양요섭 이슬람 여자들처럼 천 같은거 둘둘 말고 다니게 하고 싶다 진짜." "...아 닭살..됐거든요 윤두준씨!? 그딴 닭살은 둘이 있을때만 떠시죠?" 윤두준의 말에 이기광은 지가 나 대신 음료수를 마시며 말했고 윤두준은 생각보다 기분이 그렇게 최악은 아닌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시선은 기광이한테 주고 대답했다. "내가 뭐. 너도 장현승한테 그러고 싶잖아. 나야 얘랑 붙어있지만..너는 좀 불안하겠다? 안그래도 현승이 좀 이쁘장하게 생겼는데..?" "..괜찮아요. 현승이 믿으니까." 기광이는 다 먹은 음료수 병을 꽤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더니 혼자 앞질러갔다. "내가 먹고 싶은거 먹어도 되죠? 오늘은 파스타 콜." 가끔 이렇게 살떨리는 일만 없다면, 요즘 같아선 참 살맛났다. 윤두준과 수업을 때때로 같이 듣고, 학교에 같이 다니고, 기광이랑도 같이 지내고 티격태격은 하지만 그것도 다 서로가 편하니까 칠수 있는 장난이고.. 여태껏 살면서 참 재미없게 산 인생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거의 이년전부터 나는 늘 행복이었다. 그 기점이 윤두준을 만난 이후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계속해서 같이 지낼 수 있는것, 하루를 기분좋게 열어서 기분좋게 끝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한테는 행복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그건 다 부질 없는거라고 말이다.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정도로. ** "..아이고..죽겠다." 기광이가 무작정 끌고간 파스타집에서 정말로 엄청 맛있는 까르보나라를 먹고 별별 얘기를 다 하며 있다가 오늘은 현승이 야자 안하는 날이라며 먼저 토껴버린 이기광때문에 우리도 가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까지 겨우겨우 왔다. 오늘은 왜 차 안갖고 왔냐고 윤두준한테 묻자, 윤두준은 그냥 갖고 나오고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랬고 나는 이렇게 더운데 에어컨 틀고 가면 얼마나 좋냐며 투정대자 택시에서도 충분히 빵빵했다면서 내 입을 막아버려 그냥 입을 다물고 집에 와버렸다. 벌써 다섯시. 소파에 벌러덩 나자빠진 나는 윤두준이 티비 옆에 있던 에어컨을 틀자 그냥 눈을 감았다. 여름은 너무 피곤했다. 사람을 진이 빠지게끔 만드는 날씨였다 정말. "토익 언제봐?" "이번 돌아오는 일요일." "공부 안해?" "아 몰라..힘들어. 좀만 쉬었다가.." 내가 눈도 뜨지 않고 얘기하자 윤두준은 소파 앞 테이블에 시원한 물을 갖다주며 거실 바닥에 앉았고 그 물조차 마시는것도 귀찮아 그냥 누워있었다. 그리고는 눈을 돌려 새삼스러울것도 없는 집을 빙 둘러보았다. 별로 바뀐건 없었다. 워낙 인테리어에 별 관심 없는 윤두준이라 소파도 티비도 모두 다 똑같았고 그저 바뀐게 있다면, 소파 바로 위에 코르크 칠판이 있었는데 거기엔 우리가 여기저기 놀다온 사진으로 가득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소파 옆에는 검은색과 갈색 두가지 색으로 이뤄진 작은 가죽 앨범이 놓여져 있었는데 거기엔 우리의 사진들로 빼곡했다. 검은색은 윤두준꺼, 갈색은 내꺼다. 앨범안에는 옛날에 제주도 갔다와서 그 다음날 바로 현상하고 사진 도착했을때 서로 사진 갖겠다고 싸웠던 사진도 엄청 많았다. 결국 윤두준이 그 자리에서 한장씩 더 시키는 바람에 그 싸움은 무의미하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함께한 시간이 많은만큼 그만큼 추억도 많았다. 우리 목에 나란히 걸린 목걸이도 그랬고, 나눠낀 반지도, 귀걸이도. 같이 생활하는 이 집에서는 이제 윤두준만의 향이 아닌 내 향도 같이 났다. 이제 이 집은 윤두준 집이 아니라, 윤두준 양요섭의 집이라는 거였다. 어느순간부터.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천장만 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려댔고, 보나마나 이기광일게 뻔해서 받을까말까 고민하다 그냥 핸드폰을 집어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누나] 누나라는 이름만으로도 너무 기쁜나머지 냉큼 소파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고,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윤두준은 나를 쳐다보며 누구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이에 누나 라고 대답해준 나는 기쁘게 입을 열었다. "누나!!!!!" 「어 동생!!!!! 나 이번주 24일날 한국 들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냥 단순히 안부전화 일 줄 알았는데...요섭은 자기가 들은 말이 진짜가 맞나 싶어 멍하니 있었다. "..정..말로?" 「어!! 이번에 졸업하구 한국 아예 들어갈거야. 안기뻐 동생?! 난 너 볼 생각에 기뻐 죽겠는데.... 좀 서운한데 양요섭?」 "..진..짜..진짜..로..오는거지.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너무 기뻤다. 기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게 애석할 뿐. 정말 누나가 온다는게..거의 오륙년..만에 오는건데 정말 오는게 맞는지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었다고 할까봐 무서워졌다. 그만큼 그럴정도로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왜 이런걸로 거짓말 하겠어!! 진짜 가는거야. 너무..너무 기쁘고 설렌다. 너 많이 컸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너 본게 언제더라...그땐 마냥 애기같았는데...궁금해 죽겠다.」 "좀 더 빨리 오면 안돼? 그냥 당장 지금 와!!!" 「아직 졸업 수속이 안끝나서! 그게 24일날 끝나서 그날 가는거야. 좀만 더 참아. 나도 너 보고 싶어 죽겠다.」 나는 내 얼굴을 굳이 거울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나를 무슨일이냐며 쳐다보는 윤두준에게도 얼른 말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기쁘고 좋은 소식, 윤두준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비행기 티켓 끊으면 몇시 비행긴지 말해줘!! 공항에 마중 나갈게!!!!!" 「뭐하러 그래..알았어. 며칠 이따 보자 동생!!!!」 "응 끊어.." 전화를 끊고 궁금하단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윤두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냥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요즘은 나날이 행복이었는데, 누나까지 온다니..정말 내가 양요섭인게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뻤다. "누나 온대!!!!" "니가 그렇게 좋아해마지않는 그 누나?" "어!!!!! 누나 오면 누나 소개해줄게. 진짜..진짜 착하고 이쁘고 능력있고..엄청 멋있는 사람이야 우리 누나. 아..얼른 왔으면 좋겠다..진짜..많이 이뻐졌을거야. 그렇지? 아...." 나는 너무 기뻐 다시 소파에 누우며 소파에 있던 쿠션을 꽉 끌어안았고 그렇게 좋냐며 내 이마에 콩-하고 꿀밤을 때린 윤두준은 내가 기쁜걸 보니 자기도 기쁜지 얼굴 가득 은은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24일이 너무너무 기다려졌다. 아마 꼬마애기들처럼 하룻밤 하룻밤 하면서 새면서 잠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뻤다. *** "아 진짜 이건 비싸다니까? 가격을 보고 사!! 덮어놓고 사지 말고!!" "그게 그거지 뭐! 그리고 이거랑 얼마 차이도 안나는구만!!!" "무슨!! 천원이나 더 비싼데 무슨 소리야!!!" "아 진짜 아줌마같이..그리고 비싼게 좋은거겠지 뭐 그걸 꼼꼼히 따지냐?" "비싼게 좋다는 편견을 버려!!! 그리고 이렇게 많이 사면 뭐해! 누가 다 먹는다고!?" 지금 나랑 윤두준이 뭐를 하고 있는거냐면... 우리는 마트에서 피자치즈를 사면서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어제, 누나가 온다는 그 기쁜 소식을 듣고 오늘은 윤두준과 할일없이 있는게 심심해서 집에서 스파게티나 해먹을까 하고 마트를 찾았더니 씀씀이 헤픈 윤두준과 나는 아주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었다. "그냥 사놓고 많이 먹음 되지. 안먹음 버리면 되고." "또또또!! 돈 많다고 자랑해 지금?! 그리고 그렇게 돈 쓰는거 아니야. 이렇게 이런데다 낭비할 돈 있음 보기 좋게 기부를 하던가!!!!" "기부는 무슨..마트까지 와서 기부얘기가 왜 나와!? 아 그냥 이거 사. 이게 더 좋아보여." "안돼. 이거 사. 조금만 있음 된다구!!" 결국 내 주장에 밀린 윤두준은 알았다며 지가 고른것보다 양도 작고 훨씬 싼 피자치즈를 카트 안에 쉭 던져버렸고 나는 씨익 웃으며 윤두준의 등을 툭툭 쳤다. "삐졌어요 윤두준씨?" "삐지기는..앞으로 장은 니가 봐라. 이거 무슨 뭐 살때마다 이러쿵 저러쿵.. 내가 양요섭을 데리고 사는건지 사십먹은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건지.." "사십먹은 마누라라니? 지금 대한민국 아줌마들 비하한거야!?" "아 시끄러워. 이거나 먹고 조용히 하세요 양요섭씨." 윤두준은 시식용 만두를 콕 찍어 내 입에 넣어주며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고 나는 씨이..하면서 노려보다 입에 들어온 만두 맛이 좋아 나는 그것도 하나 질렀다. 그런 내 행동에 아까까지만해도 비싼거 아무생각없이 산다고 나무란 양요섭이 맞냐며 쳐다보다 그냥 어이가 없었는지 바람빠지듯 웃으며 카트를 밀고 딴데로 가버렸다. 이에 나는 종종거리며 따라가 윤두준의 팔에 팔짱을 꼈고 윤두준은 나를 앞에다 세우고 뒤에서 끌어안는 듯한 자세를 하면서 카트를 밀었다. "파스타 어떤거 해줄거야?" "크림소스 해줄까 토마토 소스 해줄까." "토마토!!" "크림이 더 맛있을텐데..." "느끼한거 못먹어..." 윤두준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면 코너로 가서 적당한 양의 파스타 면을 사고 토마토 소스도 샀다. 그리고는 양송이버섯이나 당근, 양파와 같은 소스에 넣을 야채들도 사고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잔뜩 샀다. 또 이런거 먹냐며 핀잔은 주었지만 예전처럼 뭐라고 하진 않아 그냥 예의상 감자칩 몇개와 초코파이, 오예스 정도만 샀다. 이건 정말 예의상 조금 산거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 떨어져가는 샴푸와 린스, 치약, 휴지들도 샀고 정말 이런 생필품도 사니까 우리가 평범한 부부가 된 것 같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냥 먹는것만 사는거면 상관없는데 치약이니 휴지니 퐁퐁이니 이런 말그대로 생활용품을 사니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신혼부부가 장보러 나온 것 같은..그런...? 하여튼 느낌이 좋았다. 신이 나기도 하고. "십팔만오천이백원입니다." "...와..별로 산거 없는거 같은데..." 십팔만원이라는 말에 나는 카드를 꺼내는 윤두준의 옆에 서서 카트에 한가득 실린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뭐 카트에 넘치기 직전까지 사날랐으니까 당연한건가..싶기도 해서 묵묵히 사인하고 영수증을 받는 윤두준을 기다렸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트렁크에 쇼핑한 물건 네봉지에, 두루마리 휴지까지 넣으니 꽉 들어찼다. 이러고보니까 정말 많이 샀구나 싶었고 집에가서 스파게티 먹을 생각에 나는 기분이 들떠버렸다. 정말 요즘같이 행복한 날은 없었다. "아 뜨거우니까 저리로 가!!!" 삶은 스파게티 면을 후라이팬에 넣고 올리브유를 넣어가면서 볶는 윤두준을 도와준답시고 옆에 서있었다가 또 욕먹었다. 씨..윤두준은 지가 요리할때 내가 오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대체 왜그러는건지 모르겠는데, 나도 윤두준이랑 같이 요리하고 그러고 싶었는데 왜 자꾸만 거실 가서 있으라는둥 부엌 의자에 가서 앉아있으라는 둥 마치 엄마가 다섯살난 애기를 부엌 근처에도 못오게 하는 것 같았다. "아 왜!!! 나도 같이 할래!! 그럼 나 이거 썰게!!" 토마토 소스를 움푹한 프라이팬에 넣고 약약불로 은근하게 끓이고 있을때, 나는 도마에서 잘게 썰다 만 양파가 있길래 그것도 마저 썰고 당근도 손톱보다 조금 크게 썰었다. 윤두준은 차마 그것마저도 하지말라고는 못하겠는지 면을 볶으면서 계속 나를 쳐다봤고 나는 보란듯이 척척 썰어서 토마토 소스에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양송이버섯은 적당한 두께로 썰어 좀 많이 넣었다. 그리곤 휘휘 젓는데 면이 다 볶아졌는지 볶은 면을 레스토랑에서 볼법한 가운데는 움푹히 파이고 접시 가장자리는 그냥 접시같이 평평한 그런 접시에다 적당히 넣은 윤두준은 내가 볶던 소스 프라이팬을 잡더니 능숙하게 국자로 휘휘 저어 거의 보글보글 끓을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소스를 아까 면 담은 그릇에다가 적당히 부었다. 그리곤 그 위에 아까 사온 피자치즈를 솔솔 뿌려 얼마전 사들인 오븐기에 넣었고 타이머를 맞춘뒤 윤두준은 싱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와..맛있겠다..." 나는 오븐기 앞에 서서 지글지글 치즈가 녹는걸 빤히 바라보며 말했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하고 웃으면서 내 앞머리를 흐뜨려놓았다. 하지만 그런거엔 아랑곳않고 타이머 시간이 얼른 다 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드디어 띵-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오븐의 불이 꺼지자 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그냥 잡지마!!!!" 내가 그냥 잡으려고 하자 윤두준은 소리치며 두꺼운 솜장갑을 끼며 다가왔고 그제야 그릇이 뜨거울거란 생각을 한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윤두준은 나를 살짝 째려보더니 식탁에 조심히 올려놓았고 그릇 만지지 말라는 당부에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파게티위에 정말 맛있어 보이는 피자치즈가 녹은걸 보며 나는 맛있겠다며 함박웃음을 짓고는 포크와 숟가락을 세팅한다음 김치를 꺼내왔다. 피클 없으니까 꿩대신 닭으로 김치라도 있어야 될 것 같아 윤두준이 부엌 뒷 마무리를 하고 있을때 나는 먼저 먹기 시작했다. 윤두준의 요리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옛날에 정말 옛날에, 나 예비 고3때 뒷바라지 해준답시고 겨우겨우 먹었던 그 밥이랑은 차원이 달랐다. 이 실력을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당장 스파게티 레스토랑에 취업해도 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우와.... "어때? 괜찮아?" 대충 정리만 하고 온 윤두준은 내가 맛있게 먹는걸 보며 자기도 숟가락과 포크를 들었고 나는 그냥 대답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이에 흐뭇하게 웃은 윤두준은 자기도 먹으면서 만족했는지 흡족하게 웃었다. "근데 진짜..형 작년보다 훨씬 나아졌다...." "내가 누구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요리를 하면서..이렇게 됐다. 너 만나기 전에는 집에서 밥해먹는건 정말 가뭄에 콩나는 것처럼 드물었었는데.. 너 뒷바라지 한답시고 맨날 컴퓨터에서 레시피 뒤지고..해보고... 별 짓 다했지 진짜.." "고맙습니다.." "고마운건 알긴 알어? 너 나 아니었음 연대 못갔어." "그건 아니다!! 형 아니었어도 나는 갔을거야!!!" "내가 너 공부 하기 싫다는거 억지로 앉혀서 한게 몇번인지나 아냐? 고삼씩이나 된게..옆에서 하라고 시켜야 억지로 억지로..하여튼..널 연대에 보낸건 나한테도 기적이다." "기적은 무슨...그래 윤두준씨는 태어날때부터 잘나셔서 연대 딱지 달고 나오셨나봐요?" "당연하지. 나는 태어날때부터 못하는게 없었어. 진짜 천재 소리 들으면서 자랐다니까." 윤두준의 허풍에 나는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파게티에만 집중했다. 정말 너무 맛있었다. 원래 집에서 해먹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는 소스가 별로 맛이 없어서 그런가.. 그렇게 맛있단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윤두준이 아까 소스에 무슨 소금같은 그런 조미료들을 막 뿌려넣더니 완전 새큼한 밖에서 사온 특유의 맛을 없애주었다. 이건 정말 신기했다. 아무래도 윤두준은 정말 태어날 때 부터 울지 않고 점잖게 있었을 것 같았다. 뭐든지 잘하고 듬직하고 모자른 것 하나 없이... 나랑은 너무 다르게 완벽해보여서 괜히 질투가 났다. 나는 어렸을때부터도 공부 잘한단 소리는 들었을지언정 그 외의 것은 잘한단 칭찬을 별로 들어본적이 없었다. 뭐 예를 들어 교양차원으로 피아노와 미술을 배웠을때도 그걸 중간에 그만둘때까지 선생님한테 별로 칭찬은 못들어봤던 것 같았다. 그냥 예의상 하는 그런 말 말고 정말 진심을 담아 잘한다는 칭찬은..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이런 반면에 윤두준은..인간미가 없었다. 난 그냥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나같이 덜떨어진데도 있고, 서투른것도 있어야 인간답고 사랑스러운거지 저렇게 대놓고 모든것에 다 완벽해버리면 재수없어서 안된다. 난 그냥 그렇게 합리화 해버렸다. 치. "양요섭. 설거지해." "...왜!?!?!?" "왜긴 왜야. 내가 스파게티 만들었으니깐 넌 설거지 해야지." "....씨...그런게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잔말말고 설거지 하고 나와." 윤두준은 그길로 미련없이 부엌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윤두준이 얄미워 혀를 내밀어 메롱했다. "다 보인다 양요섭." "...미워!!!!!" 나는 계속 투덜거리며 산더미 같이 쌓인 그릇들을 바라보며 분홍색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웠다. 냄비에 도마에...그냥 작은 그릇들만 하는거면 별로 안힘든데, 프라이팬 같이 큰 그릇들이 있으면 설거지 두번 한것보다 힘들었다. 왜 나는 윤두준이 하라는건 하고, 하지 말라는건 안하는 지, 왜 이렇게 윤두준의 말을 잘 듣는건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왜지? 윤두준이 안돼. 이러면 안했고 해. 라고 한건 했다. 그게 뭐 딱히 윤두준이 무서워서라던가 안하면 때려서 그러는건 절대 아니었다. 참 미스테리였다. 윤두준을 좋아하는 양요섭이. 설거지를 하고 나오니 벌써 밤 아홉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토익 시험도 얼마 안남았는데 어제는 이기광때문에 못하고 오늘은 늦게 일어나고, 마트 갔다가 요리 해먹으니깐 시간이 이렇게 되고...갑자기 급해진 느낌이 들었다. 토익이란게 무슨 초등학교 중간고사도 아니고 벼락치기 한다고해서 잘하는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험을 앞둔 수험생으로서-이런말이 좀 웃기지만-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상황에 자꾸만 노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당장은 몸이 피곤하므로 오늘까지만 놀기로 했다. 뭐 어쩔 수 없지. 토익 시험이 수능도 아니고 못보면 나중에 또 보면 되는거니까...난 이제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다. "들어와." "나 오늘은 목욕 안하고 그냥 샤워만 할거야." "알았으니깐 들어와." 우리는 이제 샤워를 같이 하는데는 어떠한 부끄럼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옛날엔 참 많이 부끄러워했던것 같은데, 우리가 사귀게 된지도 벌써 이년이 다되어가니까 생활이라고 해야되나, 윤두준 앞에서 옷을 홀딱 벗고 누워있는것도,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도 이젠 그렇게 많이 민망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감추고 그럴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지금도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며 윤두준이 먼저 들어가있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오늘은 샤워만 할거라는 말에 윤두준도 샤워만 할거였는지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묻혀 거품을 내 몸을 닦고 있었고 나는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몸부터 적셨다. 그리곤 윤두준이 지가 쓰던 샤워볼을 넘겨주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어 그걸로 또 내 몸을 닦았다. 맨 처음 그랬을땐 그래도 좀 닦고 새로 바디워시를 묻혀서 써야되는거 아닌가 싶었지만 요즘은 괜히 빨았다가 다시 쓰는것도 귀찮고 해서 윤두준이 주는걸로 대충 닦았다. 정말 나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그만큼 윤두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나한테 습관처럼 배어버려서 그런가 정말로 부부처럼 행동하는것도 많이 닮아있었고 같이 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공통점도 늘어만 갔다. 비단 행동에서만 그치는게 아니라, 성격도 말투도 많이 닮아있어서 문득 문득 놀라곤 했다. 동시에 말을 꺼낸다든지,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할땐 오른손을 계속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든지 뭐 그런거 말이다. 거의 이십년씩을 서로 모른채 살아왔지만, 그 시간들에 비해 현저히 짧은 시간동안 같이 했을 뿐인데도 서로가 닮아있다는것. 그것 자체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윤두준과 함께하는 나 양요섭은 매일매일이 늘 행복했다. 서운하고 그랬을지언정 윤두준이 절대로 미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평생 그럴거다. 윤두준이 나한테 어떤 잘못을 하든, 윤두준은 나한테 늘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억될 게 분명했다. #32. 「나 오늘 늦을 것 같다.」 이틀동안 못했던 토익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윤두준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까 아침에 무슨 전환지 심각하게 받더니 평소에 잘 안입는 수트까지 쭉 빼입고 나가더니 지금 전화하는 목소리는 엄청 피곤해보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딘데? 왜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아 그냥 잠깐..나 끊을게.」 뚝- 어디에서 뭐를 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윤두준 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이 빠진게 영 마음에 걸렸다. 뭔가 바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전화하면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냥 매정하게 끊긴 전화기만 바라보다 토익책에 다시 시선을 꽂았다. 지금은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나는 문득 용준형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까지도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엔 그만 둘거라고 하더니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꽂혔는지 어쨌는지 윤두준이 복학을 하든말든 용준형은 묵묵히 그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쳤고 윤두준은 너 아버지가 기다리는건 생각 안하냐고 뭐라고 했을때도 귓등으로 안들었었다. 한번...도시락 싸들고 가볼까.. 나는 그냥 무작정 찾아가면 바람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단 용준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음 소리가 들리고 딱-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된 통화. "여보세요?" 「어. 왜.」 "아 지금 학원이세요?" 「어. 오늘 일이 좀 많아서 일찍 나왔는데. 왜?」 "아..아니에요. 그럼 일 하세요."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이번 토익시험은 기대하지 말아야될 것 같았다. 공부를 이렇게도 안했으니 원..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마트에 갔다왔기 때문에 냉장고엔 별의별거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도시락에 뭐를 싸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그냥 유부초밥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걸 꺼내들고 밥에다 넣고 섞을 햄과 어제 쓰다 남은 양파와 당근, 버섯까지 꺼내었다. 유부는 일단 남겨두고 당근과 양파, 햄을 아주 잘게, 거의 다지다시피 잘게 썰어서 미리 달궈놓은 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았고 오늘 아침 갓 만든 쌀밥을 전자렌지에 살짝 데워놓고 야채들을 그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참깨도 뿌려준 뒤 장갑을 낀 손으로 조물조물 섞었고 그걸 사온 유부 안에 꽉 차게 넣었다. 밥에 소금간을 살짝 했는데, 좀 짠 것 같은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뭐 싱거운것 보단 나을 것 같아 유부안에다 꽉꽉 들어차게 넣은뒤 머리 위에 있는 찬장에서 도시락통을 꺼내어 그 안에 차곡차곡 담았다. 내가 현명하게(?)담은 결과 밥 한톨, 유부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모아 도시락통에 이쁘게 담았고 반찬으로 먹으라고 김치까지 작은 통에다가 한입 크기로 썰었다. 그리고 밥만 가져가기는 좀 민망해서 집에 있는 과일은 다 꺼냈다. 사과와 딸기, 귤 밖에 없길래 사과는 박박 씻어 껍질을 깎지 않고 놓았고-껍질에 몸에 좋은게 많다길래..- 딸기는 먹기 좋게 잎파리를 떼어냈고 귤은 그냥 통째로 담아버렸다. 그렇게 싸놓은 도시락통을 보니 꽤 무거워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그걸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옷을 대충 갈아입었다. 그러고보니까 느낀건데, 윤두준네 집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용 옷이 다 있었다. 지금 우리집에 옷이 있긴 하나..싶을정도로. 옷을 사도 여기다 갖다 놨고, 우리집에 있는 것도 웬만한건 쓸어오다시피 해서 안그래도 윤두준도 옷 많은데, 내 옷도 윤두준 만큼이나 많아 간이 옷걸이도 따로 하나 더 사야만 했다. 옷방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든 나는 초여름이라 더워서 검은색 폴로 카라티와 블랙진을 대충 입은 뒤 핸드폰, 지갑, 아이팟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 용준형한테 배달할 깜짝 도시락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탔지만 하도 오랜만에 가는 곳이라 가는 길이 마치 처음 보는 길인양 낯설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옛날에 윤두준을 짝사랑했을때 윤두준 차를 보고선 무조건 따라왔던 기억이 났다. 그땐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건지, 그때 윤두준이 나를 좋아하고있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진짜 미친놈 될 뻔 했었던 일이었다. 그렇게도 윤두준이 좋았었는지, 어디로 가는길인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앞차만 따라가달라고... 근데 그 일이 무려 재작년의 일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고 그때 학원선생이었던 윤두준도 이젠 나와 같이 대학생이 되었다. 옛날엔 선생과 제자 사이라 불편하고 어색했는데 지금은 나이차이가 얼마가 나건 똑같이 대학생이라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가끔 대들어서 혼나긴 하지만. "다왔습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년 넘게 오지 않았던 곳인데, 택시에서 내려 바라본 학원 현관문에선 또 옛날 생각이 났다. 옛날에 기광이 새끼가 지 여자친구 보여주겠다고 억지로 끌고와서는 우연히 만난 윤두준을 봤던 그때. 그때 그 이후로 나는 담배를 싹 끊었고-골초가 아니었다 정말-가끔이어도 담배를 아예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같은 게 있다면 아직도 내 머리가 금발이었다는 것. 맨처음엔 금발가지고 윤두준이 뭐라고 맘에 안드는 소릴 했었지만 지금은 또 그게 병아리같다고 좋다 그래서 내가 한달 간격으로 맨날 미용실을 찾아서 염색을 새로 해야만 했다. 금발에 검은머리가 자라면 흉하니까...... 뭐 어쨌든 새록새록 나는 기억을 뒤로한채 나는 성큼성큼 학원 안으로 들어가 3층으로 올라가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여기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무작정 문을 열었고 그 안에 있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모조리 나한테 꽂혀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교무실을 둘러보았다. "..양요섭?" 다행히도 용준형은 옛날 그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물론 그의 옆자리엔 윤두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앉아있었지만. "형!!" "무슨일이야 여기까지!?" 얼마전에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걸 형이라고 호칭을 바꾸게 됐다. 존댓말을 하는건 여전한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에서 형이라고 바꾼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용준형과 친해지는 것을 느꼈고 용준형 또한 그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오랜만에 생각나서요. 도시락 들고 왔지요~" 내가 환히 웃으며 도시락을 내밀자 용준형은 함박웃음을 짓더니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나가자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려 데리고 나가 옥상으로 향했다. 학원에는 곳곳에 윤두준과의 추억이 숨겨져있었다. 옥상, 교실, 교무실, 화장실.. 그 어느곳 어디에도 윤두준과의 시간이 없는 곳이 없었다. 윤두준과 만난게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나는 따뜻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에 흐뭇하게 웃으며 옥상으로 향헀다. 옥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옛날엔 그냥 허허벌판에 창고 하나 달랑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로 된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엔 파라솔이 있어 한여름 뜨거운 햇빛을 시원하게 가려주는 곳 밑에서 밥도 먹고 쉴 수도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맨날 학원에서 공부만 하는 애들을 위해서 원장선생님이 특별히 만든거라는데 그만큼 인기 폭발이라 애들 많은 시간엔 여기 앉는게 하늘에 별따기라며 여전히 어눌한 발음으로 용준형이 설명해주었다. 국어선생님인데 발음이 어눌하다니...뭔가 이 사람도 참 미스테리한 사람이었다. "근데 갑자기 왜?" "말했잖아요. 갑자기 생각나서 그렇다구..왜 형은 복학 안해요?" "그냥. 애들 가르쳐서 대학보내는게..힘은 들어도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그냥 중독 같애. 비록 종합반이라 고3애들이 끝까지 남아있진 않아도 그래도 대학 붙은 애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찾아오고 그럴때마다 항상 연말엔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다가도 찾아와주는 애들 생각하면 고마워서 못그만두고... 윤두준은 학교 잘 다니냐? 아 지금은 방학이겠구나." "네. 교양과목은 같이 들어요! 형은 삼학년이고 전 일학년이라 전공과목은 똑같은거 못듣는데요, 그래도 교양과목 세갠가? 그건 같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용준형은 도시락을 펼쳐 유부초밥을 먹으며 내 얘길 들었고 맛이 없을까봐 떨리는 마음에 슬쩍 슬쩍 눈치를 보니 그래도 맛이 괜찮은 듯한 표정이라 안심했다. 역시 요리를 손보이는건 진짜 너무 떨리는 일이다. "근데 윤두준은 어따 팔아먹고 너 혼자 왔어?" "아 형 오늘 어디 가서 늦게 온대서요." "..아..그래. 과 선배들이 잘해주지? 누나들이 더 잘해주지?" "그냥 다 잘해주세요..밥도 사주시려고 하는데..항상 옆에 형이 있어갖구.... 형이 또 질투가 좀 심해요? 요즘엔 봐준다고 봐주는데..그래도 그 버릇 개 못준다고 어떻게 하다보면 선배랑 단 둘이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걸 귀신같이 알아서는 닦달해대고..." 나는 유부초밥 대신 귤을 까먹으며 말했고 용준형은 킥킥 대고 웃어댔다. 지 친구 험담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순수한 눈웃음 보이며 웃어댔고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윤두준이 그렇지 뭐. 근데 나도 다음해엔 복학 할거야. 더 있고는 싶은데..너무 늦어져서 안될 것 같아서.. 나이도 있고..아버지는 자꾸 얼른 졸업해서 일배우라고 하는데..그것도 짜증나고... 그리고 윤두준새끼랑 같이 수업 듣는것도 짜증난다." "왜요?" "그새낀 맨날 A받는데 나는 맨날 B아님 C. 아 교수님들은 왜 그러시나 몰라. 내가 뭐가 못났다고. 에이씨. 아 기광이는 국문과 들어갔지?" "네. 기광이도 착실하게 학교 잘 다니고 있더라구요. 또 마음 틀어져서 막 놀면 어떡하나 했는데 놀건 놀고 학점 챙길건 확실히 챙기더라구요. 이게 다 현승이 덕분이죠 뭐.." 내가 사과를 집어 먹으며 말했고 용준형은 만든사람 뿌듯해질정도로 유부초밥을 맛있게 먹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니네 엠티는 언제가냐?" "모르겠어요. 7월달에 계곡으로 한번 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경영학과 애들이 워낙 많으니까 안가도 될 것 같기도 해서..뭐 7월 되면 미리 연락 준대요. 형 가면 갈거고 안가면 안갈건데.. 뭐 형이 가겠어요? 단체생활 안그래도 싫어하는 사람인데.." "하긴. 그새낀 우리 신입생때 오티도 안갔잖냐. 근데 또 그새끼 배경이 좋다는건 기가막히게 알아가지고 선배들도 뭐라고 안하고..내가 존나 억울해서 진짜..나는 갔는데도 미움받고, 그새낀 안갔는데도 이쁨받고. 그래..윤두준은 뭘 해도 이쁨 받는 놈이었다. 어후씨 억울해." 윤두준과 친구하면서 설움이 많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유부초밥은 입안 가득 털어넣어 우적우적 씹어댔다. 그 꼴이 얼마나 웃긴지 진짜 사진 찍고 싶은걸 겨우겨우 눌러 참아냈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 방학인데?" "이제 얼마 있음 토익시험 있어서 그거 공부하고 있구요..뭐..공부 할게 워낙 많아야죠. 이번 학기 수업도 겨우 따라갔는데 다음학기는 어떡하나 싶고...." "하긴. 고등학교때 공부가 훨씬 더 쉽지? 원래 그런거다...." 어느새 그 많던 유부초밥을 게눈 감추듯 싹 먹어치운 용준형은 내가 싸갖고 온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먹성 좋기론 윤두준이나 용준형이나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과일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테이블 위에서 팔짱을 끼고 용준형을 바라보았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날씨가 너무 더웠지만 옥상이라 바람이 솔솔 부는게 저녁이 되어 가나 해가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다. "수업 시간 언제에요?" "여섯시 반." "아...좀만 더 있다 갈게요." "엉. 어쨌든 윤두준이랑 싸우지도 말고 헤어지지도 말고 잘 만나서 잘 살어. 그새끼 상처 많은거 너도 알잖아. 현우 잃고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그새끼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다. 소개팅을 시켜줘도 싫다, 여자들이 접근해와도 싫다, 클럽은 근처도 안가고.. 너 만나고 나니까 새끼가 그제야 사람답게 살기 시작하드라. 니가 사람 하나 살린거지." 마지막으로 남은 딸기 하나를 입에 톡 털어넣으며 말하는 용준형. 나는 그냥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웃었다. "살리기는요.." "윤두준 너랑도 힘들어지면 진짜 복구 불가능이야. 그러니깐 그새끼가 좀 맘에 안들더라도 니가 좀 참아주고 봐주고 하면서 잘 지내. 내가 두준이 친구기도 하면서 니 형이기도 하잖냐. 나한테 윤두준 욕 실컷 해도 안 일러 바칠테니깐 힘들면 속끓이지말고 와서 얘기하고. 엉?" "네..." "읏챠. 그럼 수업 준비 하러 가봐야겠다. 오늘 도시락 잘 먹었고 나중에 두준이랑 같이 또 와." "네. 수업 잘 하세요!!! 저는 여기 좀만 더 있다가 내려갈테니까 먼저 내려가세요." "그래. 고맙다!!" 용준형은 옥상에서 사라졌고 나는 해가 기울어져 붉은 노을이 타오르는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하늘은 누가 불 지른 것 마냥 빨갰다. 나와 윤두준의 사이를 이쁘게 봐주고 있는건 용준형 뿐만 아니라 기광이도 현승이도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남의 눈이 신경쓰이고 우리 둘이 사랑한다 할지라도 가족들에게 내가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은연중에도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건 죄악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용준형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우리를 따뜻하게 봐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용기를 내어봐도 괜찮을거라고, 힘들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떡하니 있으니 두려울 건 없다고 말이다. 아주 가끔은 내가 윤두준과 만난게 잘 한 일일까 하고 생각 할때도 있었다. 물론 윤두준이 나를 만난게 잘된 일일까 하고도 생각해 봤었고, 그럴때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이제는 답이 없어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변했다면 모를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데 그 후의 상황을 미리 생각하고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하는건 정말 바보 천치나 하는 짓이라 결론을 내렸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손가락질 한다해도 용준형 이기광 장현승 이렇게 세사람만 우릴 믿어주고 좋아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읏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락을 챙겨 옥상 계단을 내려갔다. 오랜만에 용준형과 만나서 속시원하게 윤두준 험담도 하고 진지한 충고도 얻고.. 도시락 하나가 전혀 아깝지 않을만큼 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오길 잘한 것 같다. ** 열시가 넘은 이 시간에도 윤두준은 전화 한통 없이 올 생각을 안했다. 나는 용준형한테 갔다와서 씻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공부를 잡아가며 억지로 했는데, 밤이 깊어가는데도 오지 않는 윤두준 때문에 핸드폰을 계속 쳐다보며 이젠 진동소리가 환청으로까지 들려 진동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움찔 움찔 놀라곤 했다. "..아 진짜..왜 안와.." 문법 공부를 하고 있다가 나는 샤프를 신경질 적으로 책상위에 놓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벌써 열시 이십분인데..어디야 대체. 뚜르르르 하는 신호음이 잠깐 들리고 통화가 연결이 됐다. "여.." 「....놈이야!!!」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 중후하게 낮은 목소리지만 어딘가 화난 호통소리가 잠깐 들리고 전화는 뚝 끊어져버렸다. 대체 어딘데 이런 소리가 나고 전화가 뚝 끊기는지..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꺼져있는 전화기.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래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손톱도 물어 뜯었다. 뭐 이제 고작 열시 밖에 안됐으니까..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고요해진 전화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샤프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든 집중해서 한자라도 더 보려고 했지만 이미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탓에 그것 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아침에 그렇게 급하게 나가더니..그리고 전화를 받는 그 얼굴조차도 좋지 않았다. 아직도 그 얼굴이 마음에 걸리는데 이 시간이 되도록 집에 들어오질 않자 내 불안함은 극에 달했다. "..뭐하는거야 대체.." 나는 결국 샤프를 내려놓고 스탠드 불을 끈 뒤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 불을 끄자 어느새 깜깜해진 방안에 나 혼자 어두워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깜빡깜빡 거리며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들어온 적도 없었고, 낮에 연락 한번 준거 가지고 말도 없이 늦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고 조바심까지 들었지만 어차피 지금 전화해봐야 또 꺼져있을 것 같아 그냥 이불을 덮고 누워버렸다. 그래도 아침엔 들어오겠지. 별일 아니겠지..싶은 마음으로 애써 위로하면서 눈을 감았다. - "...으..." 여름이라 해가 빨리 뜨는 바람에 나는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동적으로 잠에서 깼고, 아침이란걸 안 나는 당장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핸드폰엔 06:12 am 이라는 숫자만 뜰뿐 문자고 전화고 한통도 온게 없었다. 침대 옆자리를 보니 휑한게..결국 외박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생각대로 굳게 꺼져있는 전화기. "..진짜..."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일층으로 내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한번도 한 적 없는 외박까지 하는건지.. 어제 아침에 굳은 얼굴로 나간 걸 보고, 밤에 전화했을때 누군가가 호통치는 소리만 듣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걱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진짜..들어오기만 해봐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들어가려는데 소파에 이상한 검은게 있었다. 이에 몸을 홱 돌려 바라보니 어제 나간 수트 차림 그대로 소파에 반듯이 누워있는 윤두준이 있는게 아닌가. "형!!!!" 눈을 팔로 가리고 누워있는 윤두준에게 급하게 달려간 나는 이 사람이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흔들어 깨웠다. "....어.." 팔을 치우더니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윤두준의 표정에 분명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근데 딱 봐도 그게 무슨일이냐고 물어봐도 대답 안해줄 것 같은 느낌에 하루사이에 푸석해진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 보던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고 윤두준은 내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뭐했어 어제!?" "..그냥..걱정 했어?" "당연하지!! 외박을 하냐..몇시에 들어왔어!?" "세신가...." 윤두준은 내 볼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술냄새가 나지 않는걸 보니 늦게까지 술을 마신건 아닌거 같은데... 지금 이렇게 키스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윤두준이 좀 씻어야 될 것 같아 그의 어깨를 잡고 내가 먼저 입술을 뗐고 윤두준은 소파에 앉더니 자기 옆자리를 통통 하고 손바닥으로 치기에 나는 그냥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나를 꽉 끌어안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 있지?" "내가 무슨일이 있어. 그냥 친구 만났는데..그새끼가 암인지 뭔지..그딴 병에 걸려서.. 좀 속상해서 그랬어. 어제 걔 옆에 있느라고 늦었다. 미안." "어제 전화했을때 소리지르던 사람은 누군데?" 내가 물어보자 윤두준은 내 앞머리를 부드럽게 만져주며 내 눈과 시선을 맞추고 대답했다. "아..친구 아버진데..나한테 소리지른게 아니라 친구놈한테..그새끼가 하도 지금 당장 죽을 사람처럼 그러고 있으니깐 속상해서..그때 전화 받을 타이밍이 아니라 그냥 끊었어. 걱정 많이 헀구나.." "당연히 걱정하지!!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그 친구는 뭐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냐.." "그르게..박복한새끼..아직 할것도 많고 해야될 것도 많은데..나 이따가 또 가봐야돼. 친구라곤 나밖에 없어서 나라도 안돌봐주면..안될 것 같아서. 이해해줄 수 있지? 오늘 나가면 또 내일 들어올지도 몰라...오늘은 나 기다리지말고 그냥 자. 나한테 무슨 일 있는거 아니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두준은 내 뒷목을 살짝 잡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왔고 힘들어보이는 윤두준한테 해줄 수 있는게 이것밖엔 없을 것 같아 그의 등에 손을 얹은 뒤 윤두준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지만, 윤두준은 나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참이 더 지나서야 그것도 내가 윤두준 때문에 걱정이 돼서 이층에서 가지고 나온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그때 나를 놔주었다. 그렇지만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은채로 놔주질 않아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전화는 받았다. "여보세요?" 「어. 엄마다. 너 어디가서 지내는거야?」 "..엄마?!" 윤두준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는 바람에 액정을 제대로 확인 못했더니...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는 사람이 울 엄마랑 아버진데..무슨 바람이 들어 전화까지 했는지.. 「어. 승혜 곧 한국 들어오는거 알지? 아버지도 나도 당분간 일 때문에 집에 있을 거 같으니까 집으로 들어와. 아니 대체 집을 얼마나 비운거야?!」 "..아..그냥..친구네서 자고 있었지. 누나 한국 들어오면 그때 들어갈게요. 어 끊어요." 이제 꼼짝없이 집에서 지내야 될 판이었다. 누나만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뭔 바람이 들어서 외국 출장이다 뭐다 바쁜 엄마와 거의 호텔에서 지내는 아버지가 한꺼번에 집으로 들어오는지..앞으로 윤두준과 지낼 시간이 많을 것 같지 않은 생각에 그냥 짜증이 났다. "어머님?" "엉..아씨..뭐야..엄마랑 아버진 또 왜..아우씨 뭔 바람이 들어서 집으로 다들 들어오고 난리야. 나도 이제 눈치 봐가면서 와야 될 것 같은데.." "...안들어 가면 안돼?" 나를 좀 더 꽉 끌어안으며 말하는 윤두준에게 너무 미안해져 그의 손을 덮어 잡으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아버지가 무서워서..그래도 우리 집에선 다들 누나만 좋아하니까 내가 없어져도 모를걸? 잠깐만 들락날락 거리면 될거야. 걱정마!!" "..니네 누나 어떤 사람 이랬지?" "우리 누나? 나한테 하늘 같은 존재지.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미안하지만 형도 우리 누나 다음이야. 난 우리 누나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거고 장미씨앗이 해바라기 꽃을 피운데도 무조건 믿을거야. 누나가 하라는대로 할거고 누나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팔아버릴 수도 있어. 나한테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지." 내 말을 듣던 윤두준은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슬쩍 쳐다보자 윤두준은 자기 얼굴을 내가 못보게끔 내 등 뒤로 얼굴을 숨겼고 나는 그냥 윤두준의 손을 잡으며 계속 말했다. "진짜 이쁘고 착하고 멋진 여자야. 하여튼 우리 누나한테 장가드는 사람은 복을 넝쿨째 받는 거라니깐. 솔직히 우리 누나랑 결혼상대로는..아직까지 내 눈에 차는 사람은 단 한명도 본적이 없는데 그 누가 됐든간에, 동네 바보여도 누나가 좋다고만 하면 난 무조건 오케이야. 누나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남자면 부자든 거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치?" "...너는..병신같이..니 행복 먼저 챙겨야지. 남의 행복을 더 챙기냐." "누나가 남이야?! 내가 불행해도 우리 누난 행복해져야돼 반드시." "막상 니 행복이냐 니네 누나 행복이냐..딱 둘 중 하나만 고르게 되면 넌 결국 니 행복 챙길거야. 그게 사람이니까." 윤두준은 내 귀에 나즈막이 속삭였고 나는 강력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아니. 절대. 그런 일이 닥치지도 않겠지만 만약 닥쳐도 난 무조건 누나 행복을 일순위에 둘거야. 못믿겠음 내 말 기억해뒀다가 행여나 그런일이 오거든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봐. 내가 어떻게 하나." "..니가 불행해지는걸 내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겠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든 너 불행하지 않게끔 혈안이 되어 있을텐데." "에이. 형은 빠져야지!! 그럼 누나가 불공평하잖아. 이대 일이니까. 아..어쨌든!! 누나 오려면 이틀 남았다. 오늘이 22일이지? 누나 24일날 온대!!! 내가 오늘은 예의상 집에 가서 엄마한테 얼굴 비춰주고 나오면서 누나 사진 갖고 올게. 진짜..형도 놀랄걸.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이뻐." 누나가 온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너무 설렜다. 아마 세상에 이렇게 의좋은 남매는 없을거다. 뭐 그건 그렇고 이따 들어가기도 싫은 집에 잠깐 들러야된다는게 고역이라 생각만 해도 우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그냥 한숨이나 폭폭 쉬어댔다. 아무리 누나가 있어도 그 집은 정말 들어가기 싫은 집이었다. 우리집이지만 너무 정떨어져. "언제 나갈거야?" "...글쎄..좀만 더 쉬었다가 씻고..." 윤두준은 참 많이 피곤해보였다. 솔직히 뭐 얼마나 친한 친군진 모르겠는데 환자분들 돌봐주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굳이 윤두준이 사서 고생을 해야되나 싶었지만 그 앞에다 대고 이런식으로 말은 할 수 없어 그냥 참았다. 내가 잔소리 해봐야 더 짜증만 날 것 같아 나를 꼭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묻은채 가만히 있는 윤두준의 손을 덮어 잡은 뒤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 이따가 잠깐 집에 갔다 와야 될 것 같은데 만약에 집에와서 나 없음 전화해.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먹고 다니고. 무슨 하루만에 그렇게 녹초가 되냐.." "..알았습니다." 윤두준의 말에 나는 뭔가 가슴 한켠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순전히 윤두준이 피곤해보이는 것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겨버렸다. - "...어후씨..." 윤두준네 집에서 살았으니까 내가 우리집에 들어가본지도 거의 세달은 넘은 것 같았다. 엄마때문에 억지로 갔더니만 텅비고 냉랭한 내 방을 보면서 대체 어디가서 뭐 하고 사는거냐며 내가 집에 없다고 그렇게 막 지내도 되는거냐며 하나부터 열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평소에 나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렇게 평범한 집 엄마 행세를 하는걸 보면서 그냥 웃음이 나왔다. 여태까지 살면서 내 생일을 단 한번도 챙겨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냉 선물 알아서 사서 쓰라고 돈을 넣어주고 가거나 카드를 주고 가는 것 말고는 생일 축하한다고 미역국을 직접 끓여준 적도, 축하한다는 말을 해 준적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와서, 내가 이 집에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으면서 그렇게 나를 꾸짖는 걸 듣고 있으면 대체 뭔데 나한테 그러느냐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치만 나를 낳아준 사람이었기에 뭐라고 말은 못하고, 또 엄마가 벌어온 돈으로 호의호식 하고 있었으므로 억지로 꾹꾹 참아내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 집에만 있으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아버지까지 들이닥쳐가지고는 둘이 나란히 나를 탐탁치 않게 쳐다보는데, 밥 먹으라는 말에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와버렸다. 누나가 오는 날부터 며칠동안은 누나 생각을 해서라도 그 집에서 지내야 될 것 같은데 그 생각만으로도 이렇게도 가슴이 답답한데 미리부터 들어와서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미쳤나. 또 아버진, 니 누나는 어쩌고 저쩌고..또 비교하고, 내 금발 머리 가지고선 국회의원 양기태 아들이 그딴식으로 생양아치처럼 돌아다니면 부모 얼굴에 먹칠하겠다고 작정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며..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든다는 듯, 마치 나를 벌레보다 더한 취급을 하는 듯 말하는 태도에 나는 학을 뗐다. 하도 어렸을때부터 들어왔던 말이라 상처는 커녕 눈물도 안나왔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 집에서 누나 사진 하나 달랑 들고 뛰쳐 나온거 아니겠는가. 뭐 어쨌든 여덟시가 넘어서야 나는 비로소 윤두준의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고, 혹시나 윤두준이 와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빼꼼히 현관문을 여는데 노란색 센서등만 켜질뿐 거실은 온통 깜깜했다. 윤두준은 오늘도 늦게 들어오는지 핸드폰에도 전화 한통 와있지 않았고 그만큼 내 실망감은 더했다. 윤두준한테 우리 누나 사진 보여줄라고 제일 잘나온 사진으로 한장 갖고 나왔는데.. 왠지 오늘도 윤두준의 얼굴을 못볼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 차갑게 불이 꺼진 집을 현관에 서서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나 불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건 너무 쓸쓸한 일이었다. 뭐 그래도 어쩔 순 없어서 신발을 벗고 거실의 불은 있는데로 다 켜고는 소파에 주저앉듯 털썩 앉아버렸다. 쥐 죽은듯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 tv를 잘 보지 않는 나지만 tv를 켜서 채널 여기저기를 돌려보았다. 그러다 아무데나 틀어놓은 곳이 하필이면 뉴스가 나오고 있는 채널이었고 바꾸기도 귀찮아 그냥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누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행여나 구겨질까 테이블위에 올려놓는데 아나운서가 참 익숙한 이름을 얘기해 자동반사적으로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 되는 새나라한국당 대표 양기태 의원이 오늘 아침 정부의 개혁안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제기하며 당원들과 회의를 가졌습니다. 양기태 의원은 이번 정부의...」 "...무슨..헛소리야.." 내가 가족일에 대해 무관심한건 나조차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tv를 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보통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라는 것도 몰랐고, 우리 누나 양승혜가 한국에서 얼마나 주목하는 무용수인지도 몰랐고, 우리 아버지가 다음해 대선때 대통령으로 출마할 국회의원이라는것도 몰랐다. 나는 그저 우리 아버지가 조금 유명한 국회의원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저렇게 대선에 까지 출마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던 분이었는가 하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냥 동네에서 통장을 뽑는게 아니고, 아파트에서 부녀회장을 뽑는게 아니라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 대통령을 뽑는 그 선거에 우리 아버지가 나간다니. "...허.." 내가 아무리 우리 집안과 별개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내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내 삶도 바뀐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내 주변엔 주위 사람들 모르게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 붙을것이며 우리 누난 영애, 나는 영식 이라는 그런 처음 들어보는 높임말로 불려질 거였다. 항상 주변에선 내가 대통령의 아들이라며 추켜세워질 것 이고 어딜 가나 주목을 받게 될게 뻔했다. 나는 절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 하고 싶은대로, 내가 즐기고 원하는대로 소박하게 사는 삶을 원했었지 일거수 일투족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관심을 받는 그런 삶은 나는 생각도 못했던 삶이었다. 그 말인 즉슨 내가 윤두준과 이런 사이라는게 밝혀지면 끝난다는것, 또한 그렇게되면 나와 윤두준의 미래는 불투명 하다는것이었다. 불보듯 뻔했다. 매사에 철저하신 양기태씨는 자식들 행동 하나하나에 이제 모든 촉수를 세우고 관심을 가지실 것이었다. 그건 몇년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누나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입국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증거였다. 이젠 차기 대통령이 될 양기태의 아들 딸 이라는 것을 각인 시키고 행동 똑바로 하라는 명령을 내릴거였고 즉 나는 이제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항상 감시를 받게된다는것. 끔찍했다. 내가 윤두준과 마냥 행복해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아버진 내가 모르는 엄청난 계획을 갖고 계셨던거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인생을 엄청나게 뒤 흔들만한 그런 계획을. 나는 우리 아버지 기사가 끝난 뒤에도 그 뉴스를 얼빠진 사람마냥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대통령 안될수도 있는거잖아. 그럼 상관없잖아? 라는 생각을 했다가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 어떤식으로든 대통령이라는 꿈은 이뤄내실분이라는 생각을 하면 속이 갑갑해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일단 확실한건 누나가 집에 오면 그때 물어봐야 될 것 같았다. 「태강그룹은 올해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150조원에서 100조원이 늘은 약 250조원으로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태강그룹 윤상우회장은 올 하반기에는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의류 산업에 더욱더 치중할 것이라 밝혀 그 귀추가 주목 되고 있습니다. 태강그룹은...」 ...잠깐만. 나는 리모콘을 들어 화면을 잠깐 정지시키고 흐릿하게 멈춰진 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강그룹이라면 윤두준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그 기업인데, 내가 지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건 기자들 틈에서 태강그룹 임원들에 둘러싸여 걸어가고 있는 윤회장이 아니라 그 옆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는 윤두준이었다.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저 화면을 언제 녹화한건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기론 윤두준의 차림은 어제 입고나갔던 그 옷 그대로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정지시킨 화면이라 이목구비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분명 윤두준은 맞았다. 병원에서 친구를 간호한다는 윤두준이 저기 저자리에 있는 이유가 뭔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게 맞는건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도 복잡해죽겠는데 저렇게 윤회장 바로 오른편에 서있는 윤두준이 내 눈앞에 있는걸 도저히 어떻게 받아들여야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tv를 꺼버렸다. 혼자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이상한 생각까지 다 했지만 윤두준이 나를 속일리는 없었다. 아버지한테 간거면 간다고 말했을 사람이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 나한테 다 얘기했을 사람이다 윤두준은. 그래서 그냥 나 혼자서 하는 망상과 다름 없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를 가운데로 해서 양쪽으로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음은 분명했다. 나는 끊임없이 미친듯 불안해졌다. - "..그래서..어제도 형 집에 안들어왔다고?" "...어." 어젯밤 내내 잠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드는가 싶더니만 아침 일찍 깨어보니 여전히 윤두준은 집에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그때처럼 소파에 지쳐 쓰러져 누워있나 싶어서 일어나자마자 1층으로 내려가봤지만 오늘은 윤두준이 없었고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어제 그 뉴스만 보지 않았더라도 윤두준을 철썩같이 믿었을텐데, 어제 뉴스에 나온 윤두준을 본 이후부턴 마음이 자꾸만 갈대처럼 흔들려댔다. 윤두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화해서 무슨일이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왜냐면 어제부턴 아예 전화기가 꺼져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윤두준의 집에 혼자 있으면 정말 혼자 별의별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아 도망오듯 기광이네 집으로 와버린 것이다. 기광이는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서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윤두준의 집 처럼 오피스텔 같은 거였는데 그냥 혼자 살기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원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부엌이 한눈에 보이고, 방 두개에 화장실 하나가 고작이었지만 기광이는 그 집을 얻고 나서 정말로 엄청나게 행복했었던것 같았다. 드디어 독립해서 혼자 산다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종종 여기에 놀러오곤 했었다. 옛날엔 부모님과도 같이 지내는 집이라 쉽게 드나들 순 없었는데 여긴 이기광 혼자 밖에 없으니깐 와서 추태를 부려도 괜찮고 부담이 없어서 그냥 가끔 심심할때마다 가끔씩 놀러왔었던 것이었다. "근데 뉴스에 나온 형을 봤다고? 야. 그게 형인지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알아." 기광이는 하얀색 나시에 파란색 줄무늬 트렁크 팬티만 입은채 내 옆에 앉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고 나는 쿠션을 끌어안고 앉아 한숨만 폭폭 내쉬어댔다. "울집 tv 순간 정지 돼서 딱 정지 시켰더니...영락없이 윤두준이었어. 확실해." "근데 왜 구라를 깠겠냐. 아들이 아버지한테 가는게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몰라...거기다가 씨발 나 돌겠다 진짜. 울 아버지.... 그 대단하시고 고매하신 양기태님께서 차기 대통령 후보시란다. 나 어제 진짜 존나 충격 받아서..." "..헐..니네 아버지? 진짜? 헐 대박..." 기광이는 놀랬는지 나를 동그란 눈을 크게 떠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소파에 누우며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어쩐지 요즘 맨날맨날 행복하다했더니..역시 영원한 행복은 없고 영원한 고통도 없다는게 맞는건가.. 여전히 윤두준 핸드폰은 죽어있었고, 할 수 있는거라곤 이기광한테 속시원하게 털어놓는 것 밖엔 없었다. "야. 만약에 니네 아버지 대통령 되시면..너랑 형은 어떻게 되는거냐. 그거 대통령 되면 청문회 같은거 해서 집안 조사 같은거 막 하지 않냐? 뭐 아들이 군대를 갔다왔나 안갔다왔나 이런거부터 시작해서..." "몰라. 대통령이 말이 되냐? 그게 쉬워!? 미치겠네 진짜...울 아버지 대통령 되시면 무조건 한국 뜰거야. 미쳤냐 여기서 살게. 윤두준이랑 도망쳐야지." "야. 니가 어제 본게 형이 맞으면..그쪽도 심상치 않다는거 아니냐?" "뭐가?" "머리가 있음 생각을 해봐. 형네 아버지가 여태껏 가만히 냅뒀던 아들을 왜 불렀겠냐. 나도 사실 들은건데..울 아버지가 검찰청 검사잖냐. 집에서 통화하는거 우연히 들었었는데 태강이랑 지금 현 정치권이랑 결탁해서 비리 있는 것 같다고 아무도 모르게 수사를 좀 해봐야 될 것 같다고 그랬었거든?" 기광의 말에 나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 "너 머리가 있는놈이냐? 그 정치권이 뭐겠냐. 차기 대통령으로 니네 아버지가 유력시 된다며. 태강이 무슨 동네 슈퍼도 아니고 어떤식으로 어떻게 결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아우 시끄러. 뭐 어떡하라고. 결탁을 하건말건!! 정경유착이 뭐 한두번 있는 일이냐!? 울 아버지가 태강 등에 업고 대통령 할라고 기 쓰나보지 뭐!!!!" 짜증이 폭발해버렸다. 정치권이랑 태강그룹이 결탁을 하건말건, 그게 대체 나랑 지금 무슨 상관이라고. 울 아버진 뭐 하나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 방법이 옳든 옳지않든 반드시 이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태강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대통령하고도 짜고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근데 지금 그게 뭐.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기광 이새낀 별 시덥지않은 말을 하고 있는건지... 남은 지금 연락 없는 윤두준때문에 걱정돼 죽겠구만.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또 뭐!!! 헛소리 할거면 죽인다. 혓바닥 잘라버리는 수가 있어."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냐..아니 뭐 모르긴 몰라도, 윤두준도 이제 몇살이냐? 스물여섯인가? 슬슬 경영권 승계..해야되는거 아니냐?" "..뭐?" "아니..윤상우 회장이 지금은 건강하다고는 해도 늙은이들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건데 미리미리 준비를 해놔야되지 않느냐 말이지. 그리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내 아들을 사장 자리에 앉히겠소. 하면 앉을 수 있냐? 회사에서 실적 만들어놓고 능력을 보여야 이사진들도 인정하고 그렇게 해서 초고속 승진 하는거지... 니 말 듣고선 생각했던건데..아무래도 이제 윤회장이 아들 길들이기에 들어간게 아닐까 싶다..." 아들 길들이기라니.. [..에이씨발..존나 재미없네..근데..나 일년 남았다? 지금은 그냥 윤두준인데..윤상우회장 아들 윤두준으로 돌아갈 날이..일년 남았어.. ...내년 오늘..나는 뭐하고 있을까.] 순간 뇌리를 스치듯 지나가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그때 옛날에 윤두준이 자기가 살아온 얘기 해주겠다고 했었던 날이었는데 분명 일년 남았었다고 했다. 그게 작년이었으니까 일년 남았다고 하면 그건 올해였다. "...설마..." 윤두준의 아버진 한번 뱉은말은 주워담은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윤두준 또한 그 것 때문에 많이 불안해했었고, 일년 남았다는 그 말을 하던 윤두준의 눈빛은 어딘가 갈길을 잃고 불안해하는 아이의 눈빛과도 같았었다. 그때 나는 그냥 귓등으로 듣고 말았는데... 뭔가...알 것 같았다. 윤두준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밖에 나가 있는 이유를, 뉴스에 나왔던 윤두준을. 그게 나한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뭐야..너 왜그렇게 손을 떨어. 왜이래."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고 있었나보다. 불안이라는 덩어리가 실체없이 마음속에서 떠돌아다니다가 그 덩어리가 정확하게 실체를 드러내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내가 이토록 불안한 이유를, 앞으로 나와 윤두준이..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진 않을거란 걸. "...일년...남았다고 했는데...그게 지금이야..어쩌면...그게..벌써 부터 시작 됐을는지도..." "뭐? 무슨 헛소리야. 야 양요섭? 정신차려봐 새끼야. 왜이래. 야!" "..야. 만약에..입장을 바꿔서..너가 현승이를 만나는 그 자체가 현승이한테 짐이면..너 어떡할거냐?" "뜬금없이..내가 힘든건 상관없을텐데 나 때문에 현승이가 힘들면..당장 헤어져야지."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내가 이 질문을 할거란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단호하고 명료했다. "근데 그걸 현승이가 원치 않으면?" "그래도 나때문에 장현승이 힘들면 당연히 헤어져야지. 헤어질땐 당장 이별때문에 힘든것 같아도 나중에 지나고보면 헤어지길 잘했다..싶을 때가 올테니까. 근데 그건 왜. 야..너..." "아니야. 그냥. 그래...내가 힘든게 낫지. 그치?" "너...행여나 딴맘 먹지마라. 윤두준..너보다 훨씬 강한사람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너도 나도 확실하게 몰라. 그러니깐 괜히 안그래도 복잡한사람 붙잡고선 더 심란하게 만들지말고 형이 어떻게 하자는대로 넌 가만히 따르기만해. 알았어? 괜히 형 힘들지 않게 도와준답시고 나서서 더 심각하게 만들지 말고. 어?" 기광이는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이기광 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을 보이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기도 하고 나한테 적잖은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알았다 새끼야." 나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윤두준이 힘들어하는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것 보단, 나혼자서 아무도 몰래 내가 힘든게 훨씬 나았다. 그건..아무리 이기광이 지랄해도 변치 않는 내 생각이었다. 만약 기광이의 추측이 맞는거라면, 이제는 때가 된 것이다. 새장에 갇힌 새를 훨훨 날아보내줄 그 때가.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야. 너 전화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윤두준에 대해 생각하느라 진동이 울리는지도 몰랐는데 기광이가 핸드폰을 내 눈앞에 들이밀며 말해서야 알았다. 화면에 뜬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말까 고민하다 혹시나 윤두준이지 않을까 싶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동생!!!!!!!! 누나 한국이야!!!!!!!!!!」 "...누나!?" 누나라는 내 말에 딴짓을 하고 있던 기광이도 나를 큰 눈으로 바라보며 누나? 라며 입모양으로 뻥긋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일찍 도착했어!! 놀랬지!!!」 "...오늘이...23일이지? 왜? 수속이 24일날 끝난다며!!" 잠깐 시계를 보니 딱 1시였다. 무려 하루나 더 빨리 온거였다. 「그게 생각보다 좀 일찍 끝나서..동생 지금 어디야? 집?」 "나 지금 기광이네 집. 누나 벌써 집 왔어?" 「아니. 지금 공항이야. 출발하려구!!」 "알았어. 나 지금 갈게!! 지금 공항 가려면 늦어서 안되겠다. 이따 집에서 봐!!!! 바로 갈게!!!" 「어!! 이따봐 동생!!!」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었다. 이에 기광이 또한 따라 일어나며 나한테 계속해서 말을 해댔다. "승혜 누나 한국 왔어!?" "어. 아예 들어온거래. 드디어." "갑자기!? 왜!?" "왜가 어딨냐 새끼야. 가족이 한국에 있으니까 들어오지." 나는 가방을 어깨에 들쳐매며 신발 신으러 현관으로 나가며 말했고 기광이도 평소에 누나를 좋아했던 애라 나만큼이나 좋은지 말은 그렇게해도 신이난 듯한 눈빛이라 아까보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야...진짜..대박이다....누나 보고 싶다 나도.." "나도 못봤어 새끼야. 어쨌든 간다. 누나 지금 집으로 온대. 나도 빨리 가봐야지." "어. 그나마 누나 오니깐 그걸로 위안삼고 딴생각은 하지마라. 자고로 머리 복잡할땐 현실도피가 최고다." "그것도 조언이라고....시끄러. 나 간다." 나는 기광이의 배를 주먹으로 퍽-갈긴뒤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정말 그나마 다행인건, 이렇게 이것저것 갑자기 복잡할때 누나가 왔다는 것. 그냥 누나는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으니까 윤두준 얘기까지야 못하겠지만 평소에 아버지나 엄마랑도 관계가 좋은 편이었으니까 아버지에 대해선 뭔가를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나는 행여나 내가 누나보다 늦게 갈까 택시를 잡아탔다.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고통도 없다. 세상은 늘 공평하니까. #33. "...너는 그 머리 좀 어떻게 못하겠냐?" 오늘 하루종일 뭐 제대로 먹은것도 없었지만 위가 울렁울렁 거리는게 지금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이 집안 분위기는 내가 십몇년을 살아왔지만 나한텐 죽어도 안맞았다. 만약 내가 윤두준을 알지 못했더라면 마치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모르듯 그냥 모든 집안이 다 이렇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체념하면서 살았겠지만 어떤게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새삼스럽게 고역스러이 느껴지는 위압감에 소파에 양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벅지 위에 주먹을 꽉쥔 양손을 올려놓은 뒤 거실 바닥에 깔린 카페트만 빤히 바라보았다. "...." "니가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아니고, 그 머리꼴이...행여나 니가 내 아들이란걸 알게될까 무섭다."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나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고 있다는걸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와 비슷하게 눈이 크고 그 큰 눈을 무테 안경으로 가린 아버진 늘 단정하신 모습 그대로였다. 단 하루, 일분도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적이 없으셨다. 내가 어렸을때 봤던 아버지의 모습은 태산같이 높아서 감히 쉽게 바라볼수도 없었고 대들수도 조차 없는 그런 분이었다. 항상 어려웠던 존재. 그건 내가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나를 맘에 안든다는 눈빛으로 보는 시선, 내 행동 하나하나 모두 다 싫다는 듯한 말투. 익숙해질만도 한데 시간이 가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조만간 머리 바꿔라. 검은색으로. 듣자하니 니가 고등학교때부터 그러고 다녔던 거 같은데...참..." "안바꿉니다." "뭐?" "바꾸기...싫습니다." "긴말 않겠다. 시간 줄테니 당장 바꾸도록 해라. 너도 어느정도는 알겠지만 지금부턴 모든 행동거지들을 다 조심해야 될때야. 그건 니가 내 아들이라 한들 제외되는건 아니다. 니가 내 아들인 이상 최소한 니 아비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 되는거 아니냐? 효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버지 가는길 꽃은 못뿌릴지언정 시커먼 재는 뿌리지 마라." 차라리 화를 내고 꾸짖으면 반항이라도 할텐데, 정말 안면도 모르는 남을 훈계하듯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톡톡 골라서 하는 아버지를 이젠 미워하기도 지쳐버렸다. 그저 숨이 턱턱 막혀 질식 할것 같아 괴로웠을뿐. "...짐이야..짐. 네 누나는 어딜가나 부끄럽지 않고 그 아이가 내 딸이라는게 자랑스럽기만한데..너는..." 말을 삼킨 아버지의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이 집안의 수치라고 말하고 싶은걸 옆에서 엄마가 눈치를 주어 참은게 뻔히 보였으니까. 나는 누나가 언제 오나 오늘따라 시간이 가지 않는 벽시계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기광이네 집에서 좀 더 있다 오는거였는데, 차라리 누나보다 늦게 왔으면 이런 잔소리는 듣지 않아도 됐었을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면서 나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마치 이 공간에 산소가 없는것처럼 숨쉬기가 벅찼다. "그리고..왜 경영학과에 지원한거냐? 니 아버지가 정치인이면 당연히 그 뒤를 이어야지." "싫습니다." "싫으면. 회사 들어가서 회사원이나 할테냐?" "그럴지언정 정치인은 안합니다." "...네놈은...." 내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그는 그냥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냥 내가 처치 곤란한 짐덩어리라는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엔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늘 이런식이었으니까. 딩동- 세상에 이렇게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두근대는 소리였다. 이시간에선 나한테 구세주나 다름 없었고. 근데 그건 비단 나한테만 그런건 아니었는지 아버지와 엄마또한 나와 대화하던 답답하고 무거운 표정은 싹 씻어내버리고 은근한 웃음기를 띄셨다. 차라리 안봤으면 모를까, 서운한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도 사람이었으니까. 부모한테 사랑받고 이쁨 받고 싶은건 자식의 공통된 마음이니까. "아가씨 오셨습니다." 이집에서 유일하게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주머니가 공손히 말한 뒤 현관문으로 나가 누나가 들고 들어오는 짐을 받아들어 2층으로 올라갔고 누나는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는 예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보다 훨씬 더 말라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키가 더 커보였다. 누나 키는 165정도 되는데 얼굴도 홀쭉하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하면서 말라서 보기 안쓰러울정도였다. 누나는 밝은 갈색의 머리에 굵은 웨이브를 넣어 허리까지 오는 긴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라운드로 약간 파인 하얀 민소매티셔츠에 남자 트렁크 팬티보다 조금 길것 같은 밝은 하늘색의 핫팬츠 진을 입은채로 나타났고 누나는 날 보자 와락 껴안았다. "동생!!!!!!!!!!!!!"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이 집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활짝 웃은것 같았다. 역시 누나가 우리 가족 중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만큼 좋았다. 저렇게 나를 환하게 맞아주는 사람 또한 누나 뿐이었으니까. "누나!!!!! 왜이렇게 말랐어...가서 밥 제대로 안먹었지!!" "한국 들어오는거 준비하느라 신경써서 그랬나봐...근데 너 머리...진짜 이쁘다. 병아리 같애!!!! 보들보들거리는게.." 누나는 내 머리를 만지며 함박웃음을 지었고 안그래도 이 머리 때문에 아버지한테 까여서 기분 상했는데 누나한테 이쁘단 소리를 들으니깐 또 기분이 금세 좋아져버렸다. 뒤에서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뻔히 보이는 아버지 때문에도 기분이 좋았고. "승혜야. 들어왔음 앉아라." 나와 누나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을때 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고 누나는 갑자기 옷차림이 신경쓰였는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일단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역시 아무리 누나여도 그런 야한 차림은 아버지 눈에 거슬렸는지 또 한마디 하기 시작했다. "..그런 옷차림은...눈에 거슬린다. 다음부턴 그런 옷들은 다 버리고 단정하게 입고 다녀라." "...네.." 누나는 상대적으로 나에 비해 굉장히 순종적이고 착했다. 부모님이 말씀하시는거라면 무슨 조선시대 여인네 마냥 곧이곧대로 들으면서 살았다. 사실 좀 야하긴 했어도 밖에 나가면 몸매좋은 여자들은 다 이렇게 다니는데... 완전 보수성향인 아버진 이런것 조차도 용납할수가 없는 것 같았다. "양요섭. 너는 이제 누나도 왔으니까 딴데서 자지말고 집에서 생활해. 나와 네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에 막 행동하고 다녔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와." "..학교랑 거리가 멀어서 힘듭니다. 여태껏 친구네 집에서 생활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시끄러워." "아빠. 솔직히 요섭이 학교 가려면 강을 건너야 되는데..힘들지 않겠어요? 그냥 친구네 집에서 생활하는것도..." "차 내줄테니까 그거 타고 다녀." 아버진 완강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꼬박꼬박 들어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가끔씩 눈치 봐가면서 들어오긴 할건데, 뭐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들으면서 살아온 인생도 아니고 이런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으로 나를 집에 옭아매려했다면 그건 아버지의 오산이었다. 내가 갈 곳은 따로 있는데 이렇게 숨막히는데서 지낼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승혜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집안끼리 결혼 얘기가 오고 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승혜 너도 마음.." "...그게 말이 됩니까? 누나 이제 겨우 스물 넷이에요. 벌써 결혼이 말이 됩니까? 지금이 조선시대에요? 누나 이제 공부 마치고 왔어요. 앞으로 무용수로서 갈길이 창창..." "니 일 아니니까 잠자코 있어라.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본데없이 그렇게 대드는건 어디서 배웠니. 딴데가서 그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지마라. 그게 다 네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니까." 그놈의 아버지 얼굴에 먹칠 먹칠..애초에 먹칠할 이미지도 없었다. 아버지의 이미진 국민들에게 있어 그렇게 호감형은 아니었으니까. 그도 그럴것이 내 아버진 항상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했으니까. 민심이 흉흉한건 당연한거 아닌가. 또한 지금 새로운 당을 창조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 되기 위한 하나의 꼼수 였을 뿐 국민을 위한 당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건 진실로 국민을 위해 힘쓰는 당은 아니란거다. 그는 국민을 위할줄은 꿈에도 할 줄 몰랐다. 무조건 본인 안위, 본인 행복만이 우선이었으니까. 자식이 어떤 삶을 살건 어떻게 살건 그건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 볼 수 있을만한 지위를 만들고 명예를 얻는것. 그것만이 내 아버지 양기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참모습을 알게된 이후, 나는 더이상 아버지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에게서 인정을 받기 싫었다고 해야하나, 왠지 아버지에게 내가 인정을 받으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싫었다. 나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국민을 노예처럼 부리며 호의호식하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 밑에 설 줄 알고 국민에게 겸허히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가 될 줄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아버지와 나는 정치노선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조선시대 당파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이러는게 조금 어이없었지만 어쩔수없이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 현 정치권 내에도 보수파 개혁파가 있었으니까. 아 뭐 이런 개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고. 나는 갑작스런 누나의 결혼 발표에 충격을 먹어버렸다. 안그래도 아까 윤두준 때문에도 그렇고 아버지의 차기대통령설 때문에 골치 아팠는데..이젠 결혼? "절대 안됩니다. 누나 재능, 그렇게 결혼하고 남편 보필하면서 현모양처로 살아가면서 버려질만큼 하찮지 않은건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굳이 지금 결혼을 해야될 필요도 없고.." "내가 대통령이 되려면 누나의 결혼이 반드시 필요하다. 승혜 너도 이제 아예 한국에 들어왔으니까 적응을 좀 하고 있어라. 나는 집안끼리 혼사 얘기를 꺼내볼테니." 더 들을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누나를 쳐다보았다. 누나는 어느정도 예상을 했었던건지 담담한 표정으로 어떠한 대답도 없이 그냥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있었고 정말 야망을 위해서라면 딸자식이고 부인이고 다 내팽겨칠 위인이라는걸 다시한번 깨닫게 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버릇없다고 말씀하실거 아는데요.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아버지..정말 이기적이신거 아십니까? 누나. 올라가자." 나는 그냥 누나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어났고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앉으라 명령했지만 나는 그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채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가 2층 거실에 누나를 앉히고 그 맞은편에 내가 앉았다. 누나는 숨을 돌릴틈도 없이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또 착하고 순한 누나는 그걸 아무런 반항없이 받아들이고.....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이야. 나는 나조차도 숨을 못쉬겠어서 나를 향해 밝게 웃는 누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무슨일 있어?" "무슨일 있냐고 물을때야? 어떡할거야. 결혼..할거야? 누나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처음 보는 남자한테 시집가게 될텐데..." "어차피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면..각오 해야되는 거잖아.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너도 해당된다는 소리야. 다시 말하면 니가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을 못할 수도 있다는거야. 어쩔 수 없어. 이 바닥에선 자식도 하나의 거래품목이었으니까." "누나!!!" 나는 누나가 아버지한테 반항 하길 바랐다. 싫다고, 내가 고작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 그렇게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무용을 배우고 아무도 없는 미국으로 가서 혼자 공부를 한거냐고, 아무리 아버지의 야망을 위해서라지만 그럼 내 인생은 뭐가 되는거냐며 울고불고 따지길 바랐는데 생각보다 너무나도 태연작약한 누나의 모습에 나는 정말 더더욱 할말을 잃었다. 누나의 일이지만, 엄연히 굳이 따지고 들면 내 일은 아니라서 내가 그렇게 길길이 날뛴다고 해서 아버진 코웃음도 치지 않을거였고 이대로라면 누나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게 불보듯 뻔했다. 나는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제일 사랑스러운 남자와 사랑하면서 결혼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세상 그 어떤 아내보다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게, 또 자기 꿈을 버리지 않고 세계 최고의 무용수가 되기를 꿈꿨었다. 근데..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내 모든 꿈이 다 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했고 정작 당사자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줄 선물꾸러미를 잔뜩 꺼내어 놓으며 마냥 소녀처럼 웃고 있었다. 저 속이 어떨지 짐작이 가는데....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에이..그러지말고. 오늘 누나 몇년만에 처음 보는데 그렇게 인상쓸거야? 이거 봐봐. 내가 너 생각날때마다 하나둘씩 사서 모은거야. 너한테 잘어울릴거 같은거, 니가 좋아할거 같은것만 조금씩 모은다는게...한가득이다 한가득." 누나가 테이블 위에 꺼낸 선물상자들은 별의별거로 가득했다. 메탈 시계부터 시작해서, 귀걸이, 옷, 운동화, 구두...등등등. 한국엔 출시되지도 않은 리미티드 에디션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선 정말 중고로 팔아도 몇천은 우스울 정도의 돈을 호가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정말 입이 떡벌어질 정도로 비싼 선물들. 아무리 돈 귀한줄 모르고 자란 나라지만...이런 과한 선물들은 좀 그랬다. "..뭐 이렇게 비싼걸 샀어!!!" "제일 이쁜걸로 고르다보니까...이거 지금 다 신겨보고 입혀보고 하고 싶지만..나중에 너 이거 꼭 다 하고 다녀야된다. 친구들한테도 자랑하고..아..근데 집 진짜 변한거 하나도 없다. 1층은 좀 변한거 같긴했는데 여긴 그대로네." "내가 그대로 냅두라고 했으니까. 여기 건드린거 단 하나도 없어. 버린물건도 하나도 없고 새로 갖다놓은 물건도 없어." 누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빙 둘러보며 장식장 안에 놓여진 크리스탈조각들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참 그리웠었다? 여기도 그립고 너도 그립고..한국도 그립고.." "그러면서 왜 연락도 자주 안하고." "당장 한국으로 뛰쳐갈까봐 무서워서 그랬어. 생각보다 녹록치않은 곳이야. 미국이라는데가. 그래도 너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기광이랑은 아직도 사이 좋지?" "그새끼 누나 온다는 소리에 좋다고 방방 뛰고 난리 났었어. 언제 집에 한번 데리고 올테니깐 인사라도 해. 걔가 누나 좀 좋아했어? 맨날 쫓아다니고..." 누나는 계속 웃으며 거실 한바퀴를 마저 빙 돌더니 아까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하긴...아..좋다..역시 집이 최고지..." 누나는 소파에 누우며 말했고 나는 그냥 그런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나가 내 앞에 있었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는건 사실이었으니까. 거의 5년? 6년만인 것 같았다. 그 사이 누나는 정말 더 예뻐졌고 성숙해져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여전히 어린애 티 폴폴 풍기며 있는 것 같아 조금 머쓱해지기도 했지만 뭐 어쨌든 은색의 링 귀걸이를 하고 있는 누나를 보며 참 많이 변한 것 같다 싶었다. 유학가기 전엔 아무리 여름이어도 항상 반팔에다 긴바지를 입고 다니며 과도한 조신함을 풍기면서 다녔었는데 내 눈으로 보기엔 지금이 훨씬 좋아보였다. 개방적이고 편해보이고...아버지 눈에야 심하게 탐탁치 않았겠지만. "...어? 너 그 반지..." 누나는 누워서 나를 웃으면서 보다가 내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봤는지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나한테 눈을 토끼마냥 크게 뜨며 물었고 나는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손을 뒤로 감췄다. 그러다 다시금 생각나버린 윤두준. "어? 어...그냥.." "그냥..? 그냥이 어딨어!! 거기다 끼는거면...너 여자친구 생겼구나!!!누군데? 어? 누구야? 이름은? 몇살?" 나는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이름은 차마 밝히지 못하더라도 나이나 어디 학교 다니는 사람인지 정도는 말해주려고 했었는데 대뜸 누나 입에서 나온 여자친구라는 말에 나는 또다시 잊고 있었던 현실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게 죄가 되지 않듯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죄는 아닌데 죄를 짓는 이 기분은 참 엿같았다. 세상이 수백번 수천번 바뀐다한들 태초부터 금기시됐던 잘못된 사랑은 결코 용인 될 수 없을것이다. 그걸 내가 제일 잘 알기에 나는 그냥 웃기만 할뿐 입은 열지 않았다. 열지 못한게 맞는 말이지만. "..누군데...누나한테도 비밀인거야? 왜?" "..아..아니야. 진짜 별거 아니야. 누나는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 미국에서?" "눈뜨면 연습에 수업에..바쁜데 뭐..근데..나 아까 되게 잘생긴 사람 봤다?" "아까? 한국에서?" 누나는 마치 유치원생이 엄마한테 좋아하는 사람 말할때처럼 수줍어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아주 잠깐동안 우울했던 기분은 또 씻은듯 사라졌다. 하여튼 누나랑 있으면 우울해질 틈이 없어 좋았다. "응. 아까 스타벅스 잠깐 갔었거든? 집에 오는 길에 스타벅스가 보이길래 갔다왔는데.. 거기서 진짜 잘생긴사람 봤어. 너무 순식간이라 이름도 어디사는지도 아무것도 모르는데...진짜 멋있드라." "누구길래..콧대 높다고 소문난 양승혜씨의 마음을 홀딱 뺏어가셨을까..." "장난은..그냥..어깨도 넓게 벌어지고 딱 봐도 잘사는 집 아들인게 티가나는 차림이었어. 그 옷들이 명품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명품을 입는다고 사람도 명품이 되는게 아니잖아. 근데 그 사람은 시장에서 사온 옷을 입혀놔도 명품일 것 처럼 참 다부져보였다고 해야되나? 뭐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나랑 결혼하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누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나를 주기 위해 사왔다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다 분위기가 가라앉은걸 느꼈는지 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나는 그런 누나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미국에서 오지 말지. 좀 더 하고 싶은거 하다가, 실컷 놀고 실컷 즐기고 오지. 스물넷에 결혼이라니..너무 이르다. 너무 빠른데..그것도 자기 의지가 아니라 부모의 의지대로 결혼을 한다니.. 난 이 집에만 들어오면 마치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을 한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이렇게 보수적인 집안도 없을거였다. 정말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아버지한테 말씀 드려서 결혼 못하겠다고 해.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나는 누나가 그렇게 억지로 남이 등떠미는 결혼 하는거 싫어. 나는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상 어떤 신부보다 제일 행복하고 제일 이쁘고 제일 기뻐야되는데..누나 못하잖아. 그러니까.." "어차피 나랑 결혼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만난 그 다음날 바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몇개월 동안은 연애도 하면서 정들고 그럴거니까..상관없어. 누구든지 다 첫만남이라는건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속상하게 생각하지마 동생!!" "...누나..." "아..좀 씻어야겠다. 아 잠깐.." 누나는 씻어야겠다며 일어나다가 곧장 내방으로 향했다. 내방은 나도 안들어가본지 오랜데, 누나는 바로 내 방문을 열더니 여름이었지만 냉한 방공기에, 그러니까 그동안 사람이 없었다는 느낌이 역력한 그 방을 휙 둘러보더니 뒤에 있던 나를 쳐다봤다. "어디서 지냈어?" "친구네집에서..." "왜? 집놔두고?" "..집 싫어하는거 알잖아. 나 앞으로도 여기서 안지낼거야. 몰래몰래 나갔다가 들어오고 할거니깐.. 만약 아버지나 엄마한테 들키면 누나가 대충 둘러대줘야돼. 알았지?" 내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누나는 어이없는지 피식 하고 웃더니 내 머리에 콩-하고 꿀밤을 먹였다. 또다시 윤두준이 생각나버렸다. "니 집이 여긴데 어딜 나가 살어. 너....설마...애인이랑 동거하니?" 맞긴한데, 누나한테 그걸 맞다고 말할수도 없고 아니라고 말할수도 없어서 살짝 우물쭈물거리자 눈치 챈 누나가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이란건 알겠어. 근데..엄마 아빠도 내 결혼문제때문에 옛날처럼 밖에서 지내시는 일은 없을거 같으니까..자제해. 아빠..무서운 분이야. 너한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뒷조사 하실 분인거..알지? 그러니까 조심해. 아빠 안그래도 너 많이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잖아. 눈밖에 날 짓..하지마. 어?" "이미 눈 밖에 난거..몰라. 난 지금 이 집에 있는 것 조차도 싫어. 누나만 아니었어도 안왔어." "니가 아버지 눈밖에 나는건 상관없어. 그래도 너는 아들이잖아. 근데 니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그사람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너보다 그 사람한테 더 흠집 내실 분이야. 그러니까 자중해 앞으론. 현명하니까 니가 잘 알아들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알았지 동생?"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누나는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여주며 그대로 욕실로 향했고 나는 그냥 내 방문에 기대어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난 여전히 대답없는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다 기계처럼 윤두준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굳게 꺼져있는 전화.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무슨 큰일이 난건 아닌지 걱정이 커다란 눈덩이만큼 불어났지만 당장 내가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어 결국 바닥에 쪼그려 주저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안그래도 감옥같은 집에서 몇시간 있는것조차도 힘들어 죽겠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동안 내가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한들 이렇게 고통도 한꺼번에 줄수 있나... 고통을 줘도 조금씩 나눠가면서 주시지, 이렇게 한꺼번에 감당 못하게 줄수가 있냐 매정하게... 나는 괜히 찔끔찔끌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계속 연락이 없는 윤두준의 생각에 잠겨버렸다. 그리고는 내 목에서 목걸이를 풀어내 훤칠하게 잘생긴 내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하고 다니는건지 안 물어 볼테니까...잘 있는지는 좀 알려주지...하여튼 못됐어 윤두준 너." 사진 찍을땐 대부분 웃는데, 윤두준은 지 성격이 그대로 사진에 나타났다. 어떠한 웃음기도 없이 무표정으로 나온 사진을 보며 야속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려내며 목걸이를 손에 꽉 쥐었다. 순간 눈물에 반사돼서 그런가 유난히 반짝 하고 빛나는 은색의 심플한 반지를 보다 결국 양 무릎 사이에 내 얼굴을 묻어버렸다. 힘들어도 기댈 버팀목만 있으면 좋을텐데, 지금은 나한테 그런 버팀목 조차도 어디서 뭘하는건지 알 수 없게 사라져버려서 나는 지금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쓰러져버리기전에 좀 와주지. 하여튼 아무일없단 듯 나타나면 죽었어 윤두준. 그러니까 얼른 좀 오지...힘든데.... - "저녁 먹어."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고 나는 그제야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여섯시 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윤두준 생각 하나하나, 윤두준과 있었던 일 추억 하나하나 꺼내어보고 돌이켜보기만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쏜살같이 흐를수가 있다니... 나는 저녁을 먹기 싫었지만, 안먹는다고 하면 또 듣기싫은 소리를 잔뜩 들어야될게 뻔히 보여서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고 누나는 이미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아까의 차림과는 다르게 긴팔 트레이닝복 져지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나를 무테안경 너머로 또 안좋게 보는 아버지를 본 후에 바로 누나의 옆에 앉아버렸다.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다음 대 대통령이 될거다. 그러니까 너네들은 행동들 똑바로 하고 아버지 명예 더럽히지 않도록..." "..본인만 잘하면 되는데..' "뭐라고 했냐." 아버지의 말에 어이가 없어 국을 뜨면서 중얼거렸는데 그게 들렸는지 아버진 숟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나를 바라봤고 나는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밥 한술 떠 억지로 입에 쳐넣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시금치를 집어먹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니가 제일 문제야. 내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 중에서 제일 후회가 되는 게 뭔지 아느냐? 바로 내가 너를 낳은 것이다. 처음엔 니가 나의 아들이라 좋았지만 니가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줄 알았더면 진작에 너를 처리했을 것이다." "아버지!!!" "여보!!" 세상에는 부모가 하지 말아야될 말이 딱 하나가 있고, 자식이 하지 말아야할 말이 딱 하나 있다. 그건, 내가 왜 널 낳았는지 모르겠다. 후회된다. 라는 부모의 말이었고 날 왜낳았냐는 자식의 말이었다. "낳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낳으시곤 행복하셨다니 그건 제가 고개숙여 감사드려야겠네요. 근데요. 아버지 말처럼 처리 하시지 그러셨어요. 고아원에 가져다 버리시든지 그게 아버지의 그렇게 대단하고 엄청난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이었다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죽이시지 그러셨어요. 그러고는 티비에 나오셔서 아들 잃은 아비의 심정을 담은 말로 거대하게 포장하셔서 또 이미지 만드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 그런거 잘하시잖아요." "요섭아. 가만 있어." 누나는 내 손을 잡으며 그만 하라는 눈짓을 했지만 나도 사람이고 나도 자식이다. 부모한테 끝끝내 짓밟혀버리면 그런 부모를 찌를 수도 있는 자식이다. "차라리 고아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자라면서 골백번도 넘게 했어요. 입고 있는 옷이 백만원 천만원이면 뭐해요. 부모가 직접 사다준 오천원짜리 옷보다도 못한데. 차라리 고아면. 내 부모가 누굴까 궁금해하고 낳아준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왜 나를 버렸을까 하는 원망은 했을지언정 미워하진 않을거에요. 죽도록 싫어하진 않았을건데..항상 잘나고 본인 안위가 먼저인 아버지 밑에서 산다는게 얼마나 고역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신적 있으세요? 자식은 돈으로 다 되는게 아니에요." "니가 날 가르치려 드는거냐." "아니요. 감히 제가, 천하고 본데없이 자란 제가 어디 감히 아버지를 가르치려 들겠어요. 근데요. 안심하세요. 제가 혀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아버지가 죄없는 사람들 죽이고 감옥에 넣으면서까지 쌓아오신 명성, 명예. 절대 더럽게 안할거니까요. 아버지께서 그 잘난 대통령에 당선되시면.. 죄송한데..저는 아버지가 이끄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이십년동안 아버지 밑에서 살아온 것도 저는 충분하거든요." "양요섭!!! 그만해!" 이번엔 엄마까지 나섰다. 엄마도 아버지와 비슷한 분이셨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한테 낳아서 후회했다는 말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으신 분이었다. 관심이 없어보이긴 했어도 생일이라며 기억해주고 돈을 챙겨주는 모습에서 그게 평범한 부모와 다른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표현의 방식이 다른거라고. 딴집 엄마들이 미역국 끓여줄때 우리 엄만 그런건 할줄 몰라 돈을 주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내 눈엔 아버지나 엄마나 똑같이 보일 뿐이었다. 엄마도 내색은 안해도 나를 낳고 후회했을거란 생각을 하니 그게 내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혀버린 것 같았다. 이젠 아버지의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내공을 기른 것 같았는데 아직도 한참 먼 것 같았다. 눈물이 자꾸 차오르려고 하는걸 보면. "내가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기 전에 니가 알아서 나가준다니 고맙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은 뒤 아무렇지 않은척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넣었다.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건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건지, 내가 지금 뭐를 먹는건지도 몰랐지만 최대한 강한척 해보이기 위해 손은 벌벌 떨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식탁내엔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고 오로지 들리는건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밖엔 없었다. 자꾸만 속에서 울렁거리며 겨우 삼켰던 음식들이 입밖으로 토해져 나오려는걸 억지로 억지로 참아냈고, 이런 분위기가 미칠 것 같은지 엄마는 말 한마디를 꺼내었다. "승혜 하나만 왔을 뿐인데..집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그쵸 여보?" 밥먹으며 슬쩍 본 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나를 바라볼때의 그 소름끼칠정도의 무표정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 누나를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또한 누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고. 어렸을때부터 늘 그랬다. 엄마 아버지의 관심사는 늘 내가 아닌 누나였다. 항상 조신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학교건 어디에서건 칭찬이 자자했고 거기다 공부까지 월등히 잘해 아버지의 자존심은 양승혜 이기도 했다. 그래서 밥만 먹고 항상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완 다르게 누나는 밥 먹고 과일까지 먹으면서 부모님과 뭐 그렇게 할말이 많은건진 모르겠지만 웃음꽃을 피며 대화를 주도했고 그런 딸을 엄청나게 사랑하는게 내 두눈에도 보였다. 그렇기에 이 집안에서 나는 의도친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렸다. 집안에서 감추고 싶고 가시같은 존재가 바로 양승혜 동생 양요섭, 나였던 것이다. 그걸 깨달았던건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쯤이었던 것 같았다. 그냥 어렴풋이 느껴지는 화목한 가족 분위기에서 나만 끼어들면 찬물 끼얹은 듯 가라앉는걸 보며 나는 그때부터 체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마음의 문을 닫고 구석으로 소외되고 초라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주었던건 다름아닌 누나였고. 어쩌면 내가 이 집안에서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살수 있었던건 다 누나 덕일지도 모른다. 부모의 몫을 누나 혼자 다 해주었으니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미친듯 밥을 구겨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바로 2층으로 올라와버렸고, 나는 올라오자마자 미슥대는 속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들어가 아까 먹었던 음식들을 모조리 다 토해내었다. 소화될 틈도 없이 밖으로 쏟아져나온 토사물을 보는것조차 더러워서 물을 내려버리며 어이없어 웃어버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나마 이 집에 남아있는 내 짐을 모조리 싸 짊어지고 윤두준의 집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아까 누나의 말처럼 그렇게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칠수도 있다는 그 말이 두려워서 여전히 연락없는 윤두준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방 침대에 혼자 앉아 어느새 깜깜해진 바깥 하늘을 바라보며 손엔 울릴 생각을 안하는 핸드폰을 꼭 쥔채 윤두준 생각 하나, 윤두준 생각 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똑똑- 누나인것 같아 방문을 쳐다보니 그릇과 물을 갖고 올라온 아주머니가 있어 나는 침대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아주머니는 누나에 이은 제 2의 엄마였다. 내가 죽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셨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봐왔던 모습과는 다르게 많이 늙은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서도 일하신지도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시니... 내가 아주 어렸을땐 풋풋한 처녀였는데 지금은 제대한 아들 둘에 고등학교 다니는 딸을 두신 어엿한 어머니셨다. 참 부러웠다. 아주머니를 보면서, 아주머니의 자식들은 이런 엄마를 뒀으니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모르게 부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까..속 다 게워내는거 같길래..빈속 그렇게 두면 상해서 안돼. 죽이라도 조금 먹고..약 꼭 먹어. 알았지?" 내가 토하는걸 다 보셨는지 아주머니는 침대위에 미음 한그릇과 약, 물을 담은 쟁반을 올려놓으신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시더니 그대로 나가셨고 나는 내 앞에 놓여진 하얀 미음을 보며 괜시리 마음이 짠했다. 부모한테 상처받은 나를 늘 이렇게 위로해주셨다. 어렸을땐 직접 구운 쿠키를 가져다주시며 나를 달래주셨고, 초등학교땐 천원짜리 하나와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몰래 건네주시며 위로해주셨으며 중학교땐 직접 뜬 목도리를 주시며 토닥여주셨다. "...휴..." 사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정성을 봐서라도 나는 천천히 미음을 한술씩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 먹고 보니 아까보단 속이 좀 편해진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고 약까지 말끔히 먹은 뒤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선 다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어 앉아 양 다리를 굽혀 몸으로 가까이 붙여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대충 아홉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인 것 같은데도 아주 까만 밤처럼 어둡진 않았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팟- 어느새 잠이 들었나보다. 하긴 집에와서 계속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경계 태세로 있었으니 몸이 축날 밖에. 아까 앉아있는 자세에서 잠이 들었는지 발 근처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에 바로 폴더를 열어재꼈다. 혹시나 내가 기다리던 사람일까봐. [이기광] "...어..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집이냐?」 "어. 왜." 「형한텐 아직 연락없냐? 벌써 새벽 두신데..」 새벽 두시라는 말에 나는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시간을 바라보았다. 01:57am 이라는 시간에 모두들 자는건 확실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지갑에다 돈을 두둑히 챙겼다. "어. 끊어. 지금 윤두준네 집 가봐야겠다." 「지금? 그러다 니네 아버지 아시면?」 "어차피 지금 주무시니까 상관없어. 아침 일찍 나갔다고 하면 돼. 끊어." 나는 혹시나 몰라 쪽지에다 아침에 일이 있어 일찍 나간다는 메모를 적어 책상위에 올려놓은 뒤 쥐새끼마냥 조심조심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음 바깥 정원에서 신발을 신으며 후다다닥 대문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리막길을 쭉 내려가 번화가로 나간 뒤 힘들게 힘들게 택시를 잡아타고 윤두준네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집에 없겠지 하는 마음 반, 그래도 지금 시간이 몇신데..집에 있을거야 하는 마음 반. 깜깜한 밤이라 그런가 길이 막히질 않아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가 있었고 나는 오피스텔 앞에 와서야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엘레베이터를 탔을 뿐인데도, 여기가 내가 살아왔던 집 같고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윤두준의 집 앞에 오자마자 모아두었던 숨을 탁-하고 쉬었다. 우리 집에 있었을 땐 숨을 쉬어도 몰래 몰래 쉬는 것마냥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는데..이제야 살 것 같았다. 윤두준이 여기에 있건 없건,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자기 생일을 번호로 해놓은 도어락을 해제한뒤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내가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켜지는 센서등과 함께 아주 깜깜히 꺼져있는 집을 보며 또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또 안들어왔나보다. 나는 거실로 가 거실등을 환하게 켜보았다. 윤두준은 없었다. 물론 부엌에도 없었다. 이 집안에 없을거란 생각은 했는데 정말 없는걸 내 두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목이 죄이는 것마냥 답답했다. 이러다간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이젠 화도 안났고 분노도 없었다. 마냥 걱정이 될 뿐이었다. 나는 이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깜깜하게 꺼져있는 이층 거실. 나는 모든게 다 끝난 심정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윤두준은 오늘도 안들어온 것이다. 어제 아침에 잠깐 들어와놓고는 또 오늘 하루종일 코빼기도 안비추고, 연락할 시간이 그렇게도 없었는지 연락도 없고 내가 걱정할거란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멋대로 행동할수가 있는지..어둠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살짝 반짝이는 반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밥은 잘 먹고 있어?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지..사람 기다리는거 뻔히 알면서 그러냐... 나 오늘 죽다 살아왔는데..누나가 오긴 했는데..아버지도 같이 와서는.. 날 못잡아먹어 안달난 사람마냥 그렇게 달려드는데.. 오늘 있었던 일 말해주고 싶은데.. 연락도 없이 어딨는거야 대체..하여튼 윤두준 못된건 타고 났지 아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툭 바지위로 떨어졌고 닦을 생각도 안하고 그냥 멍하니 반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하루 연락 안되는거 가지고 왜그러냐고 왜 그렇게 유난이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안좋은 느낌이 자꾸만 와닿는게 너무 예감이 불안해서 내가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또한,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 사람은 어디로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도 않고 위로도 안해줘서 그것도 속상해서... 아마 그래서 그런가보다. 사실은 내가 그 사람을 위로해주고 싶은데, 위로해줄 수가 없어서 답답해서...그래서 그렇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가 힘든것엔 견주지 못할만큼 힘든건 윤두준일텐데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밉고 야속해서. "..나 그냥 확 바람 피워보릴까보다. 나 좋다는 사람들 널리고 깔렸는데.. 윤두준 너보다 잘난 사람도 엄청 많아!!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연락도 안하는 사람 죽자고 기다리면서..." "...어쭈?" 나는 순간 몸이 얼음이 된 것 마냥 굳어버렸다. 순간, 도둑인가 강도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지금 귀신 목소리를 들은건가 아무것도 가늠이 서질 않아 뻣뻣하게 굳은 몸을 하고선 눈만 껌뻑 껌뻑 뜨고 있었다. 그때 느껴지는 따뜻한 사람의 체온.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나를 바스라질듯 뒤에서 꽉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귀신도 강도도 아닌 윤두준이라는걸. "...뭐..뭐야?" "바람필거야 양요섭? 내가 하루 연락 안했다고 그렇게 마음이 바뀌냐...." 내가 숨을 쉬기 곤란할만큼 내 배를 꽉 끌어안은 뒤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윤두준에 나는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를 잡고 있던 손을 잡아 떼어내려고 하는데 윤두준은 놓질 않았다. "잠깐 놔봐. 언제 왔어!? 있었으면 인기척을 하던가!!!" "사람이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데 그걸 모르고 앉는 니가 더 이상한거지... 혼자 잘도 중얼거리길래 무슨 말 하나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왜." 윤두준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목소리를 듣자 나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울면 안되는데, 오늘 하루종일 너무 보고싶었던 사람이 내 뒤에서 나를 안고 있다는게 너무 기뻐서, 하루종일 걱정되고 또 걱정이 돼서 미칠뻔했는데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게 너무 좋아서 자꾸만 눈이 뜨거워졌고 나는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눈을 꽉꽉 눌렀다. "또 울어? 울보." "안울어!!!! 그냥..졸려서!!하품한거야." "..미안해..오늘도 너무 바빴어..친구..항암치료 받는데..그거 수발 들어주느라..애가 토하고.. 거기다가 오늘은 머리가 너무 많이 빠져서 그거 다 바리깡으로 밀어버렸거든.. 또 그거 슬프다고 우는 애 달래주느라..미안..많이 기다렸어?" 거짓말인걸 알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얼마나 크게 있으면 거짓말까지 할까 싶어 스스로 나한테 고백할 때 까지 참아주기로 했다. "얼굴 좀 보자." 나는 억지로 그 손을 떼어내어 뒤를 돌아 윤두준의 얼굴을 보려는데, 윤두준은 곧바로 내 입술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쳐왔고 내가 지금 원하는건 키스보단 그냥 얼굴을 보는거라 그의 어깨를 잡으며 떼어내려는데 윤두준은 내 양손을 꽉 쥔채 마치 목이 말랐던 것처럼 급하게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내가 숨 돌릴틈도 없이 자꾸만 밀어닥쳐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가며 피하며 틈을 만들었지만 윤두준은 그것조차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계속 내 입을 막아버렸다. 결국 포기한 나는 양 손에 힘을 빼자 윤두준도 내 손을 잡았던 팔을 내 허리에 둘러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내 맨 허리를 만지기 시작했고 나는 윤두준의 귀를 만졌다. 그의 왼쪽 귀에 있는 나와 반쪽씩 나눠낀 귀걸이. 나는 그의 귓볼을 만지며 윤두준의 혀와 엉켰고 우리의 키스가 좀 더 짙어질수록 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윤두준은 내 볼을 만지며 입술을 떼었고 그 사이로 숨을 쉰 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렴풋 보이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에 윤두준은 피식-하고 웃으며 콧망울과 볼, 인중, 턱 등을 입술로 맴돌았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건 답답해보이는 그의 넥타이라서, 손을 들어 그의 넥타이를 풀어 바닥으로 던져둔 뒤 셔츠 단추 두어개를 풀어주었다. 그제야 편해보이는 모습.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윤두준은 입술로 계속 내 입술을 마치 사탕 먹듯 핥았다가 빨았다가 깨물었다가를 반복했고 너무 입술이 부어버리면 내일 아버지한테 들킬 것 같아 그만하라며 윤두준의 눈썹을 손으로 훑으며 살짝 눈을 찡긋했고 윤두준은 나를 그대로 끌어안아버렸다. 그러면서 또 내 뒷목에단 키스마크를 남기는게 아닌 뽀뽀를 하며 계속 목 뒤를 간지럽게 했고 나는 윤두준이 입고 있던 수트 재킷을 벗기곤 나도 그의 날렵한 턱선에 입을 맞춰주었다. 윤두준은 셔츠까지 다 벗어던지고 하얀 러닝셔츠만 입은채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고 나는 그의 양 다리 사이 안으로 들어가 폭 안겼다. 그는 내 허리를 양 팔로 감싸 안아 계속 뒷목에 입을 맞추며 혀로 핥았고 내가 하지말라고 목을 손으로 가리자 손등에도 입을 맞추었다. 오늘따라 과한 스킨쉽에 고개를 살짝 돌리자 또 그 틈에 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윤두준. 윤두준은 내 턱을 살짝 잡아 입을 맞추었고 그의 혀는 내 입안으로 들어와 정신없이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이따 날 밝으면 데이트 가자." 키스를 끝내고 다시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윤두준은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곤 내 귓볼을 살짝 깨물며 말했고 이젠 그런거엔 익숙해진 나는 윤두준의 허벅지를 만지며 살짝 뒤돌아보았다. "친구는?" "..딴 친구 불렀어. 이따가 여기저기 놀러갔다오자. 형이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형이나 밥 제대로 챙겨 먹고 다녀. 얼굴 좀 봐..까칠해졌어. 수염 안깎았지?" "이따 니가 깎아주면 되잖아." 나는 몸에 털이 별로 없는 편이라 수염도 별로 그렇게 많이 안나서 수염 깎는데는 서툴렀다. 게다가 윤두준은 쉐이빙 크림을 묻혀 면도 칼로 직접 깎던데..그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피도 나고 흉터도 난다는데.. 순간 자신이 없어져 고개를 흔들었다. "피나면 어떡해." "괜찮아." 윤두준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후..하고 긴 한숨을 쉬었고 그 한숨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몰라도 깊은 걱정이란건 느낄 수 있어서 나조차도 마음이 무거워져버렸다. 나한테 속시원히 말이라도 하면 좋을텐데..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내가 물어본다한들 또 저렇게 없는 친구를 만들어 거짓말 할게 뻔해 그냥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 그저 내가 지금 이순간 바라는게 있다면, 윤두준에게 일어나고 있는 그 일이 별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힘든 일일지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별일이 아닌, 마치 강한 바람이 불고나면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잠잠해지는 것처럼 윤두준 또한 그럴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랐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 "우와...여기 진짜 이쁜거 되게 많다..." 그러고보니 나는 참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윤두준이 오늘은 차를 타지 않고 택시나 지하철, 버스를 타면서 다녀보자고 제안해 그것도 색다른 재미일 것 같아 오케이 했는데 역시 그렇게 하길 훨씬 잘했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2가에서 내려 인사동 거리에 다다른 나는 골동품을 파는 가게들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혼자 신나했다. 윤두준은 여기에 한두번 와본 기억이 있는지 내가 방방거리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계속 카메라로 찍어댔다. 하긴. 남는건 사진 밖에 없다는걸 난 작년에 제주도에 갔다와서 엄청나게 느꼈으니까.. 가끔씩 익살맞게 웃으며 브이자도 해주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가판대에 나와 신기한 물건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게..그..못난이 인형..맞나?" 단발머리에 주근깨가 잔뜩 있는, 어딘가 심술나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아이 세명이 나란히 앉아있는 인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윤두준한테 말하자 윤두준은 내 옆으로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 같은데.." "..우와..저기요. 이거 얼마에요?" "이만원." "인형이 이만원이에요!?" 우리가 안살것처럼 보였는지 아저씬 내 말에 대답도 않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내가 인형을 들고 윤두준을 아련하게 바라보자 으이고 라면서 내 볼을 살짝 꼬집더니 인형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그 인형을 들고 나와 나한테 넘겨주었다. "꼭 지랑 똑같이 생긴거 좋아한다니깐." "...귀엽기만 하구만 뭘."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메롱 하자 내 콧망울을 손으로 잡고 비틀었다. 씨.... 뭐 어쨌든 못난이인형 삼형제를 아니..세자매인가? 뭐 어쨌든 이것들을 가방에 넣어놓고 인사동 거리를 돌아다녔다. 정말 옛날 옛적에 할머니 할아버지나 썼을법한 교과서들도 있고 옛날 전화기, 가방 등등 정말 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가격이 별것도 아닌데도 엄청 비쌌고 나는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이가게 저가게를 들락날락거렸다. "덥지도 않아? 여기 잠깐 앉아있어봐. 음료수 좀 사갖고 올게." 나는 어디 한 곳에 정신이 팔리면 주변 환경이 어떻든 그건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운지 힘든지도 모르는채 신기하고 오래된 물건들을 잔뜩 진열해놓은 가게를 구경하느라 신이났었는데, 잠자코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윤두준은 지쳤는지 가게 앞에 있는 무릎만치 오는 작은 돌기둥 같은 곳에 나를 앉히더니 좀 멀리 떨어진 슈퍼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냥 한 여름의 맑은 하늘도 구경하고, 참 많은 외국인들도 보면서 여기저기 두리번 거렸다. "..사방이 적이야." "에..?" 내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는데, 바로 옆에 있던 가게 앞에서 색동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입술은 아주 새빨간색으로 칠한 할머니가 쭈그려 앉아있다가 내 앞으로 다가오셨다. "니 선택에 사람이 죽을수도 살수도 있다. 니 주변엔 온통 적들 뿐이야. 정신 팔고 헬렐레 거렸다간 모두 다 잃을거야." "...할머니...저요?" "온실 속에서 살아온 화초는 그 온도가 조금만 낮아져도 금방 시들어 죽어버린다. 니 까짓게 그 온도가 낮아지지 않게끔 할 순 없어. 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 뿐이다." "저..지금 무슨 말씀을..."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게 세상 속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주름이 자글자글 진 할머니의 얼굴을 빤히 보는데 할머니는 그렇게 정체불명의 말만 늘어놓더니 ㄱ자로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채 지팡이에 의지해 나를 등진채 길을 걸어가셨다. 내가 들은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치매에 걸리신거구나 라는 생각으로 접어치우며 점점 멀어져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헌신하면...헌신짝 처럼 버려진다....사방이 적이다..." "무슨 말을 혼자 중얼거려?" 할머니는 그 말을 할때만큼은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마치 그 눈빛에 타버릴만큼 너무 강렬해서 할머니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그저 노망난 할머니가 이상한 말을 한거구나 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찜찜했다. 별 생각을 하지 않으려했지만 사람이 느낌이라는게 있는건데.... 느낌이..참 별로였다. "...어? 어 아니. 아 시원하다." 포카리스웨트를 건낸 윤두준은 내 맞은편에 내가 앉은 것과 같은 곳에 앉았고 아깐 구경하느라 못봤는데 이렇게 밝은데서 윤두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얼굴이 참 많이 상해있다는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무슨일이 있는거나고 묻고 싶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말?" "아무거나. 하고싶은말...없어?" "...없어." 나는 그한테 진실을 원했지만 그는 나에게 진실은 커녕 사실조차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근데 내가 만약, 지금 이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라도 매달려 무슨일이 있는거냐고, 대체 뭣때문에 그러고 다니는거냐고 물어봤으면...훗날 내 상황이 아주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나 뿐만 아니라 윤두준도..그 누구도. 모두다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이 조금은 바뀌어있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이때, 좀 더 솔직하게 물어보지 않은걸 뼈저리게 후회할거라곤..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생각조차도 못했겠지. 인간이란 아둔한 동물이니까. "다 먹었으면 가자." "이번엔 어디갈건데?" "남산타워." "...우와...근데 남산도 남산인데..밥부터 먹고 가면 안돼? 배고픈데..." "타워 라운지에서 먹자. 거기가 전망도 좋고.." 생각해보니 나는 남산타워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 생각을 하니 정말..여태까지 내가 뭐하면서 살았나 싶을정도로 바보같았다. 그렇지만 다행이었다. 내가 처음 가보는 이 곳들을 모두 다 다른 사람이 아닌 윤두준과 같이 보고 듣고 즐기고 있었으니까.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가면 기억으로 남았다가 추억으로 바래진다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즐거운 기억일지라도 나중에 다시 돌이켜보면 흐뭇한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중에 오늘의 이 날을 기억할때쯤에도 내 옆엔 윤두준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멍하니 있을때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때면 나도 모르게 흐뭇해지고, 내 옆엔 그때와 마찬가지로 윤두준이 있어 더 행복한것처럼 나중에도 꼭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떨쳐버리려던 정체모를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걸려 떠나질 않았다. 마치 갈고리에 걸린듯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산타워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우린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유난히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아이팟 이어폰을 서로 나뉘어 끼며 밝은 창 밖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노래 뭐야?" "Eric Benet, Still With You. 노래 좋지?" 내가 윤두준을 쳐다보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햇빛에 비춰 내 머리가 더 밝아 보였는지 눈을 살짝 찡긋거리더니 내 머리를 부비부비 거렸다. "나 믿지?" 내 앞머리를 쓸어넘기다 나한테 묻는 윤두준의 모습이 오늘따라 쓸쓸해보였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태양빛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비추는데도, 환하게 보여야할 얼굴이 오히려 어두워 보였다. "믿어." "..앞으로 어떤일이 일어날지 몰라. 근데..무조건 나 믿고 있어. 알았어?"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냐고 물어보려는 그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아랫입술을 꾹 물어 참아냈다. 사랑하면 믿어야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해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믿고 가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윤두준은 그런 내 손을 꽉 잡아왔다. 평소완 다르게 그의 얼굴 속 웃음 뒤에 새겨진 어둠이 내 마음 한끝을 잡았지만 나는 모른척하며 나도 그에게 웃어보였다. "...설마...이거 걸어 올라가!? 케이블카는?!" "손잡고 천천히 올라갔다오자. 케이블카는 나중에 타고." "...씨...케이블카 놔두고 왜..." 아까 탔던 버스에서 내려 남산타워까지 가는 순환버스로 갈아타 우리는 남산타워로 가는 길 중턱에 내렸다.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꽤 가파른 언덕에 안그래도 더운데.. 그걸 올라가야한다는게 갑자기 짜증이 나 윤두준의 앞에 서서 투정을 부렸고 윤두준은 씽긋 웃으며 내 손을 꽉 잡고는 앞서서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윤두준이 그러니까 내가 뭐 어떻게 할순 없어서 비록 투덜투덜 되긴 했지만 걸어가는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얕긴 했어도 산은 산이라 나무들도 많고 그 울창한 나무들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줘서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게 밑에 도심 속 보다 훨씬 시원했다. 아마 저 위에 까지 올라가면 더 시원 할 것 같아 가족들끼리 나와서 여유를 즐기는 그 틈에서 윤두준과 나는 잡은 손을 더욱 더 꽉 잡고는 천천히 올라갔다. "..아..저거?! 저거 티비에서 봤던거다!! 그 자물쇠 엄청 많은?!" 거의 끝까지 올라오자, 타워 같은것이 하나 보이고 양 사방에 철조망이 쳐져있는 그 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자물쇠가 채워져있는걸 본 나는 윤두준의 손을 뿌리치듯 놓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바람도 엄청 시원하게 불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게 기분도 말도 못할만큼 상쾌했다. 거기다가 각자 이름을 쓰고 자물쇠 두개를 엉켜 걸어잠근 그것들을 나는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쁜 자물쇠도 있었고, 철물점에서나 파는 투박한 자물쇠도 많았다. 네임펜으로 처음 사귄 날짜를 쓰고 평생 사랑하자. 이렇게 써놓은 것이 대부분이었고 개중에는 친구들끼리의 우정을 적은 자물쇠들도 있었다. "...와...저것봐..서울이 다..어?" 빼곡히 들어차있는 철조망 속 자물쇠 너머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는 서울 시내의 모습에 넋을 잃고 보다가 그제야 알았다. 윤두준은 어디로 갔는지 옆에 없었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윤두준은 없었다. 갑자기 순식간에 차오르는 불안감에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이쪽 저쪽을 다니며 눈이 빠져라 둘러보았지만 윤두준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걸려는 찰나, 내 뒤편 귓가에서 들리는 쇳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윤두준이 있었다. 순간 풀리는 긴장에 나는 해맑게 웃고 있는 윤두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그의 품에 안겼고 윤두준은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스러워하며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왜 그래 왜." "..왜 말도없이 없어져 왜!!!" 그냥 아주 잠깐 없어졌던건데도 왜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나조차도 알 순 없었지만 내 뒷통수를 말없이 쓰다듬어주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윤두준의 품에 안겨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쳐냈다. "잠깐 어디 갔다온다고 말했잖아!!" "언제!!!!" "지가 못들어놓고는..또 왜 울어..울보야." 눈이 빨개져 윤두준의 눈을 쳐다보자 그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내 눈가를 닦아주었고 내가 부-한 얼굴로 서있자 그는 내 볼을 꼬집으며 또 내 머리를 흐트려놓았다. "자물쇠 사왔다!! 우리도 이거 채우자." 윤두준은 내 눈앞에서 자물쇠를 흔들며 철조망 앞으로 척척 가더니 주머니에서 네임펜을 꺼내어들었다. 내가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뭐 하나 지켜보자, 윤두준은 네임펜으로 [2009.11.11 윤두준♥양요섭] 이렇게 쓰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자물쇠 하나와 네임펜을 넘겨주더니 말했다. "나한테 하고싶은말 여기다 써서 갖고 있어. 나한테 보여주지 말고." 윤두준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을 쓸까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를 웃으며 바라보는 윤두준을 올려다보고는 쓱쓱 쓰기 시작했다. [믿을게] 자물쇠를 감추고는 네임펜만 넘겨주자 윤두준은 내가 쓸때 미리 생각해놨는지 거침없이 쓱쓱 써내려가더니 철조망 앞에 섰다. 나도 그 옆에 서서 내가 먼저 빈 철조망에 채우고, 윤두준은 내가 잠근 곳에 엇갈려 같이 걸어잠그고는 열쇠를 철조망 너머로 던져버렸다. "열쇠 버려야 안헤어진대." "그런게 어딨냐. 근데...뭐라고 썼어?" "비밀이야. 물어보는게 어딨냐 바보야." 윤두준이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서 괜히 자물쇠만 만지작거리자 윤두준은 내 양볼을 잡더니 내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궁금하면, 나중에 우리가 혹시라도 싸워서 잠깐 헤어지면 그때 와서 봐봐.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기억해놓고." 윤두준의 생각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윤두준은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내 등을 토닥토닥해주며 주위 시선일랑 아랑곳않고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도 좋았고, 뜨겁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따뜻한 태양빛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가슴 탁트이는 곳도 좋았고, 모든게 다 좋았다. 사실 여기가 아마존이라 한들 윤두준과 함께 있다면 아마존 아닌 사하라 사막도 좋지 않을까. 어느새 내 전부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양요섭을 말하기 전에 윤두준을 먼저 말해야 할 정도로 너무 큰 존재. "..와..저기 해 지는 것 좀 봐봐. 엄청 빨갛다. 불난것 같아." 우리는 남산타워에서 맛있는 밥을 먹은뒤 남산 주변을 좀 더 산책한 뒤 내려와 한강으로 향했다. 어느새 여섯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여름해는 무척 길어 이제서야 해가 조금씩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한강 둔치에 앉아 보던 나는 윤두준의 얼굴조차 빨갛고 노랗게 물드는 것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강 둔치엔 우리 뿐만이 아니라 연인들, 가족들, 친구들로 약간 수선스러웠고 나는 그런분위기조차도 좋아 하염없이 이러고 있고만 싶었다. 언제 다시 이렇게 데이트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내 옆에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날 끌어안은 윤두준이 있지만 이 사람과 내일이면 또 연락이 안돼서 나혼자 전전긍긍 할지도 모르고.. 요즘은 하루하루가 늘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마냥 불안해져서 지금 이 시간이 마치 황금같이 소중했다. "핸드폰 꺼놓지 마." "..아..핸드폰..그게 고장이 나서..오늘 하나 살라고 했는데 까먹었네." "왜 고장났어? 어디가?" "아..친구..마지막으로 머리 감겨주다가 세면대에 빠져서..친구 핸드폰으로라도 연락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틈이 안나서..진짜 미안. 내일은 핸드폰 꼭 사서 연락할게. 그리고 내가 연락 없더라도 그렇게 목매면서 기다리지마. 나 밥 잘먹고 있고, 잘 지내고 있는거니까 너무 걱정말고.." 윤두준의 목소리는 다시 가라앉아있었다. 속시원히 말이라도 해주지 제발.. 속이 너무 답답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지만, 윤두준을 믿기로 했으니까, 믿겠다고 아까 자물쇠에도 그렇게 써놨으니까 묵묵히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윤두준을 믿으면서. "..그래도..문자 한통이라도 해. 어제는...하루종일 연락도 안되고.. 아버지한...아니 어쨌든..피말라 죽는줄 알았어." "미안미안. 앞으로도 연락 자주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매번 기다리진 말고.. 그럼 집에 들어가서 지내는거야?" "아니. 미쳤어? 거기만 들어가면 숨이 턱턱 막혀 죽을 거 같은데..그냥 친구 핑계대면서 안들어가고 그러려고." "..아..누나..는 왔고?" "누나? 왔지!! 엄청 이뻐졌다? 아!! 내가 사진 챙겨왔어!!!! 여기 지갑에......여기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우리 누나 사진을 챙겨서 지갑속에 넣어놨는데, 그걸 자랑스럽게 윤두준에게 보여줬고 윤두준의 표정은 그냥 무뚝뚝했다. 뭐야..안이쁜가? "안이뻐? 우리누나 진짜 이쁜데..이것보다 좀 더 마르고 머리는 좀 더 길어. 근데...그거 알아? 우리 누나 결혼한대. 처음 보는 남자랑. 내가 또 그것때문에 아버지한테 대들었다가... 미친..노망난 할아버지 주제에..자기가 대통령 되는거랑 누나가 결혼하는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대통령? 결혼?" "몰라. 울 아버지가 다음 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지 뭐 어쩐지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 갑자기 어제 들어온 누나한테 결혼하라고, 근데 또 병신같이 착한 누나는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그정도는 감수 해야된다는거야. 내가 말했었잖아. 나는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라구. 누나가 사랑하고 누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랑 만나서 정말 남부럽지 않게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는데. 또 누나 나이 이제 스물넷인데. 공부 그렇게 죽도록 해갖고 와선.. 고작 한다는 일이 남편 내조하고 애기 생기면 애기 키우고..그게 뭐야 진짜!!" 나는 또 울컥해버렸다. 누나만 생각하면 안쓰럽고 불쌍하고 가여워서 누구든지간에 누나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열변을 토하곤 했다. 정말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거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얼굴 한번 제대로 못본 사람이랑 결혼 얘기가 오고간다는게.. 나는 그런거 드라마에서나 봤지 정말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날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아 불쌍해죽겠어 우리 누나..내가 할수 있는거라곤, 누나랑 결혼할 사람이 멋있고 착하고 매너도 좋고 누나만 사랑하고 아껴줄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기도해야된다는거야. 근데..그럴 가능성이 있겠냐구. 나이 차이나 얼마 안났으면 좋겠네. 아 진짜..엿같다고. 말이 돼 이게!? 형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만약에..누나랑 결혼하는 사람이 누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본체만체하고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내가. 못할거같지? 사람 죽이는거..그게 별건가? 누나 눈에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리게하면, 그 순간 진짜..나 빡돌아서 뭔짓 할지 나도 몰라. 우리 누나를 두고 딴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 자체도 말이 안되지만, 설령 그렇다하면 진짜 죽여버릴거야. 감히..." "..좋겠네 니네 누난. 그렇게 헌신적으로 지켜주는 사람도 있고. 부럽다." 윤두준은 그 말을 하면서 우리 누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고, 윤두준의 눈에도 우리 누나가 이쁘긴 한지 나는 괜히 뿌듯해져 헛기침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형 지킬 수 있어! 나도 형 안힘들게, 안아프게 지켜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줄게." "..지금..도 나 많이 힘든데.." "..뭐라고? 안들려. 다시 말해봐." 윤두준이 뭐라고 작게 웅얼거린거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아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며 묻자 윤두준은 그대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 보는데..내가 갑자기 느껴지는 사람들 시선때문에 황급히 그의 어깨를 밀자 웬일인지 순순히 밀린 윤두준은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해." 빨간 노을이 윤두준의 한쪽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조차도 너무 강렬해서 나는 눈이 부시단 핑계로 눈을 감아버렸다. 왜이렇게 오늘따라 윤두준의 사랑고백이 가슴 시리게 들리는건지. 요즘 내 기분이 불안하고 우울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너무 윤두준의 말이 아파왔다. 너무 슬프고 안타깝게. 그래서 나도 사랑한다고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34. 윤두준과 즐겁고 신나기만한 데이트를 한것도 벌써 그저께의 일이었다. 내 불안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역시나, 25일. 그 러니까 어제 하루종일 윤두준한텐 연락도 없었고 오늘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그 새벽에 잠깐 윤두준의 집에 가봤지만 이번엔 집에도 없었다. 거실, 화장실, 방, 옷방 등등 방이란 방은 다 뒤져봤는데도 윤두준은 없었다. 대체 요즘들어선 왜이렇게 윤두준이 홍길동 같은지 동에번쩍 서에번쩍, 사람이 너무 불안해져서 살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못보면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어떤 일도 손에 안잡히고 괴로웠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내 연락만 기다리지 말아라, 라고 말은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싶어도 들어지는게 아니었다. 걱정하는게 내가 걱정하고 싶어서 걱정하는것도 아니고, 나도 걱정 안하고 싶은데 본능적으로 윤두준의 생각이 일분마다 드는걸 어떡하는가. 정말 이럴땐 어디 하나에 미친듯 집중하지 않으면 미쳐버릴것 같아 나는 바로 내일 있을 토익시험을 핑계로 집 밖으로 나와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방엔 마음의 걱정만큼이나 무거운 토익책들이 잔뜩 들어있어 가는길이 더 고단했다. 지이이잉- 짧은 진동이 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홱 열어재끼니 윤두준이 아닌 기광이의 문자가 와있었다. [자리 맡아놨으니까 98번 자리로 와.] 오랜만에 기특한 짓을 하는 이기광에 나는 피식 하고 웃으며 도서관 현관문을 열고 카드를 찍고 들어가려는데 내 손목을 휘어잡고는 한쪽으로 끌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에 놀라 이끌려갔다. "오랜만이에요." 나는 순간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 기억을 더듬어야만했다. 그런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유난히 키가 큰 남자는 허리를 숙여 내 얼굴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며 싱긋 웃었다. 웃는게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섭섭하네. 나 김태경인데." "...김태경..? 아 그때 그!?" "기억하시나보네요. 그 음료수 친구분이 드시던데. 그렇게 안생겨서 은근히 매몰차시더라구요."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기광이한테 이 사람이 준 음료수를 줘버렸고 그걸 모조리 봤는지 순간 미안함이 들어 한걸음 뒤로 물러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은지 괜찮다며 한번 손짓하더니 멀찌감치 떨어져 벽에 살짝 기대어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왜..." "맨날 기다렸는데..오랜만에 도서관 오시네요. 그동안 바쁘셨나봐요?" "네? 아..좀 일이 있어서..근데 왜.." "말했잖아요. 친구 하고 싶다고. 저 지금 그쪽한테 친구하자고하는건데..모르겠어요?"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 없을정도로 큰 키에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계속 나를 향해 부담스럽지 않게 웃으며 말했고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공부해야된다고 가보겠다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질 않아 그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 검은색 반팔티셔츠에 딥블루 스키니진에 덥지도 않은지 검은색 워커를 신은 김태경은 내가 든 가방에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독수리가 먹이 낚아채듯 내 가방을 가져가버렸고 손쓸 틈도 없이 내 가방은 김태경의 어깨에 매어져있었다. "가방주세요." "제가 그때 그쪽 이름 어떻게 알았나 궁금하지 않았어요?" "..에?" "그때..이책 들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다 보이도록." 김태경은 내 가방에서 토익책 하나를 꺼내들더니 책 맨 꼭대기, 종잇장 위에 써놓은 과,학번,이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그래서 알았구나. "여기다 과 까지 써놓는 사람이 어딨어요. 대부분 학번이랑 이름만 적어놓지않나?" "..제 마음이거든요. 됐으니까 가방 주실래요?" "마음만 먹으면 그쪽 번호는 물론, 어디사는지, 애인이 누군지, 다 알아낼 수 있거든요? 근데 왜 안그랬는지 알아요? 내가 왜 여기서 병신같이 그쪽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지..알아요?" 지금 뭐하자는건지 몰라서 그냥 김태경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무례한 행동인 것 같긴 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은 안나쁜게..참 신기했다. 처음보는 사람이 내 가방을 가져가고, 나한테 이상한 말이나 해대고, 기분이 나쁠법도 한데 이상하게 자꾸만 말을 들어주게 되고 대답을 해주게 되었다. 왜그런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매너없게 다가가면..그쪽 아예 저 무시해버릴거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그쪽은 매너 없으시거든요?" "처음 봤을때부터 느낌이 달랐어요. 그렇다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거나 그런건 아니니까 걱정은 말구요. 그냥 그렇게 뒷조사하듯 다 캐내서 더러운 방법으로 다가가고 싶진 않았어요. 힘들어도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싶어지더라구요. 사람 그렇게 맥없이 기다려본거 태어나서 그쪽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지금 어쩌라는건지, 내가 기다려달라고 한것도 아닌데 지가 혼자 막무가내로 나 기다려놓고는 저런식으로 말하는게 하도 어이없어 그냥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핸드폰 잠깐만요." 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가 내가 하지말라며 말릴틈도 없이 뭔가를 꾹꾹 누르더니 자기 핸드폰에 진동이 오는걸 확인하곤 내 핸드폰을 다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지금.." "번호 딴거에요." "저기요. 제가 말했듯이 저는 사귀는 사람이 있고.." "상관없어요. 그쪽이 사귀는 사람이 있건 결혼을 했건 상관없어요. 친구하자는데 그게 무슨상관인데요? 근데..어차피 문자해봐야 보나마나 다 씹을거죠? 그럼 또 기다려야겠네. 아 맞다, 다음에 만날땐 말 놓을게요. 공부 열심히 해요." 김태경은 내 가방을 다시 내 품에 넘겨주더니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더니 그대로 도서관 바깥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빠르게 없어지는 김태경의 뒷모습을 넋이 나간 사람마냥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 마치 내 머릿속은 핵폭탄을 맞은 듯 심하게 어지럽고 뒤죽박죽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저 사람은 뭔지.... "야! 뭐해!" 나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와봤는지 기광이가 내 어깨를 툭치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보다가 아무것도 없자 내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댔다. 그제야 정신 차린 나는 기광이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아무것도 없구만?" "..어? 아니야 아무것도. 들어가자." 나는 기광이를 내버려두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지도 그때 그 일이 미안하긴 했는지, 좋은데로 자리를 맡아놓은 내 자리로 가 앉아 책을 펼쳐들었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은 김태경이라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때문에 뒤죽박죽 어지러웠다. 안그래도 또 연락 없는 윤두준때문에 머리가 터질것 같구만, 아주 요즘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나서서 내 머릿속을 미칠듯 헤집어놓았다. 그래. 이렇게 정신 없을땐 공부가 최고였다. 딴생각을 없애주니까.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든뒤 책에 집중하려 볼을 찰싹 때린다음 펜을 들어 영어 문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역시 머리 복잡할땐 공부가 특효약이라는걸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여태껏 밀렸던 진도를 거의 다 따라잡고 주요 문법만 다시 점검하고 있을때 내 책상위로 기광이가 쓴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여졌다. [집에 안가냐? 배고파죽겠다.] 시계를 보자 벌써 7시가 갓 넘은 시각이었고, 나는 기광이의 급피곤한 얼굴을 보자 그냥 웃고는 말없이 가방을 쌌다. 내가 가방을 싸자 기광이는 신난얼굴로 마치 기다렸다는듯 가방을 챙겨 일어나 바깥으로 먼저 나갔고 나 또한 가방을 매고 바깥으로 따라나갔다. "너 요즘 머리 복잡하지? 형은..아직도 연락 없어?" 해가 어둑어둑 진 캠퍼스를 거닐며 정문으로 향하는데 윤두준의 말이 나오자, 공부로 간신히 현실도피를 했건만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나는 생각에 머리가 깨어질듯 아파왔다. "그저께..만나서 데이트했는데 어젠 또 하루종일 연락 없고..오늘도..역시 연락이 없고." "야. 그냥 그렇게 속 끓지말고 물어봐. 무슨일있는거냐고. 친구 병간호때문에라는건 진짜 말도 안되는거 아니냐? 그런 구라를 누구보고 믿으라고..물어봐. 너 그러다가 진짜 미치는거 아니냐?" "..그냥 믿어볼라구. 믿으라고 했으니까..무슨 일이 있겠지. 근데..그냥..윤두준 한번 믿어보려고." "야. 믿는것도 뭐가 있어야 믿지. 그렇게 아무것도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 병신아. 야 그럼 거의 이틀동안 연락이 없는거 아냐. 진짜..형도 해도해도 너무한다. 자기 걱정할거 뻔히 알면서..양요섭이 어떤 인간인지는 지가 제일 잘알면서 그러냐..에휴." 기광이는 지도 속이 답답한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기 발 앞에 놓여진 돌멩이를 발로 차버렸고 그래도 속이 후련하지 않은지 한숨을 쉬어댔다. 지금 한숨 쉬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내앞에서 이기광이 저러는건지... "너 그럼 집으로 가는거냐? 형네 집 말고." "그래야지. 진짜 요즘 같아선 사는거 존나 싫다. 그 집은 감옥보다도 더 끔찍한데..가서 또 밥먹을 생각만하면.." "그럼 나랑 먹고 들어가자. 너 거기서 밥 먹어봐야 뭐 제대로 소화는 되냐?" 기광이의 말대로 하는게 나을 것 같아 나는 그냥 기광이를 따라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작은 분식집이었는데 나한테 뭐 먹을거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지 멋대로 김밥, 떡볶이, 순대, 튀김 이렇게 대한민국 분식4종세트를 시켜버렸다. "여기 떡볶이 완전 환상이야. 그렇게 속 뒤집힐때는 자고로 매운걸 먹어야되는거다."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오뎅국물을 떠먹으며 기광이가 말하자 나는 그나마 기광이가 해주는 위로에 애써 웃으며 국물을 마셨다. 이렇게 힘들때 기광이라도 있어주는게 너무 고마워서, 역시 친구는 친구구나 싶은 생각에 힘들어도 참아보기로 했다. 지이이잉- 나는 요즘 작은 진동이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아무래도 핸드폰에 신경을 쏟아붓고 있어서 그런가.. 가방에서 작게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모르는 번호. 핸드폰이 고장났다고 하더니 혹시나 윤두준일까 싶어 확인키를 누르는데.. [아직도 공부중?] 느낌이 윤두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순간 누구지..라고 생각하다가 아까 만났던 김태경인가 싶어 답장버튼을 눌렀다. [김태경?] 내가 왜 답장을 해주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핸드폰을 닫아 테이블에 올려놨고, 올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려댔다. 이에 기광이는 윤두준이냐며 물었고 나는 그냥 친구라며 둘러댔다. 언제부터 김태경이 친구였지!? [알아보네. 문자하는거 보니까 도서관은 아닌가보네. 밥 먹었어?] [지금 먹는중.] [맛있는거 먹어. 아까보니까 안색이 많이 안좋아보이던데.] [남이사. 신경꺼라.] 답장을 해주고나서 문득 든 생각은, 내가 대체 왜 답장을 해주고 있는거지? 라는 거였다. 그러고보면 이사람은 정말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나같았으면 그냥 무시해버렸을건데도 이렇게 답장을 하게되고 나한테 와서 이상한 말을 해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게 했다. 이 사람이 비단 잘생겨서 그런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이 매너가 좋은것도 아니었고, 뭔가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냥 자꾸만 끌렸다. 끌린다는게 사랑으로 끌리는게 아니라, 그냥 말그대로 인간대 인간으로 끌리는거 말이다. 김태경이 그랬다. "..누군데 그렇게 문자가 빗발치냐? 무슨..일초만에 답장오는거 같이.." 기광이는 떡볶이 국물에 김밥을 찍어먹으며 말했고 또다시 진동이 울렸지만 그냥 바로바로 답장하는건 왠지 싫어서 문자 확인도 안하고 그냥 냅뒀다. "연락 기다리는 사람한텐 문자는 커녕 아무것도 없고...기다리지도 않는 사람은 이렇게 문자나 해대고.." "누군데? 과친구?" "..어? 어.." 기광이의 눈치를 봐 핸드폰을 여니 이미 도착해있는 문자. [말로는 싫다고 해놓고 막상 너도 내가 별로 안싫은가보다?] 답장을 안하려했지만 김태경은 사람을 발끈하게 만드는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싫거든. 문자하지마.] [그럼 니가 먼저 씹든가. 문자하지말라고 답장하는건 뭐냐ㅋㅋㅋ] 김태경의 쏜살같이 빨리 날아오는 문자에 할말을 잃은 나는 그냥 핸드폰을 닫아 가방에 쳐넣어버렸다. 에이씨. 뭐야. 짜증나게. 내 반응에 기광이는 튀김도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으며 나를 쳐다봤고 난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김밥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안그래도 마음 복잡해죽겠는데. * 「들어가선 아버지한테 개기지말고 잠자코 지내라. 너랑 형 사이 아시면..불호령 떨어지실거 뻔하니까. 니가 철저하게 무릎 꿇고 들어가야돼. 알았냐?」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은 뒤 기광이와 헤어져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기광이한테 걸려온 전화에 대충 대충 대답하며 어느새 대문 앞에 다다랐고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가슴이 묵묵하게 짓눌려지는 것 같았다. 집이라는게 편하고 휴식처여야되는거 아닌가..뭔놈의 집이 들어가기만 하면 죽고싶게 만드는지... "나도 그러고 싶지만...이 망할놈의 집이 내 신경을 건드려놓는다. 난 이 집이 왜이렇게 싫은지 모르겠다. 그냥 들어오기만 해도 속이 답답해." 「오죽하면 내가 집에서 나와서 독립했겠냐. 너도 상황봐서 독립한다고 그래.」 "집에 꼬박꼬박 안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나 못미더워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아버지가. 독립한다고 하면..퍽이나 허락해주시겠다? 그리고...아우 하여튼 복잡해. 몰라. 아 진짜 어디건 확 뜨고싶다. 답답해서 못있겠다." 나는 어느새 집 현관문에 다다라서 그 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데 유일하게 이 집에서 나를 반기는건 역시 아주머니 뿐이었다. 아주머니는 거실에 아버지 계신다며 눈짓을 해주셨고 서둘러 전화를 끊은 나는 아주머니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신발을 벗은뒤 거실로 갔다. 역시나 아버진 무테안경을 쓰곤 깨알같이 적힌 신문에 시선을 꽂으며 내가 옆에 왔지만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으셨다. "..어..왔니?" 보다못한 엄마가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아버지에게 건네며 나에게 인사했고 나는 그냥 엄마와 아버지한테 고개숙여 인사만 한 뒤 2층으로 올라와버렸다. 정말 그나마 2층은 공기가 다른 것 같았다. 1층은..못견디겠다. 너무 끔찍해서. 누나는 아직 집에 안들어왔는지 누나 방에 노크를 했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방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보니 불이 꺼져있어 그냥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시간이 여덟시가 다돼가는데도 어디가서 뭘 하는건지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다들 걱정만 하게 만드는건지 몰라 그냥 침대에 벌러덩 자빠져 대자로 누운뒤 눈을 감아버렸다. 지이이잉-지이이잉- 눈을 뜨기도 귀찮아 아까부터 손에 쥐어져있던 핸드폰 폴더를 열어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집이야?」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떠 핸드폰을 확인하니 뭔가 낯설지않은 번호. "김태경?" 「번호 저장 안해놨냐?」 "내가 니번호를 왜 저장하냐. 끊어." 그러고보니, 아까 만났을땐 존댓말했던거 같은데..언제 또 이렇게 반말을 하고 있는건지. 아 요즘은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 늘 정신이 반쯤 빠진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평소의 나답지 않아서. 「에이 또 왜그러시나. 내일 토익 시험 보지?」 "알아서 뭐하게." 「시험 잘봐라. 내가 직접 응원까지 가주고 싶지만...뭐 그건 니가 별로 안 좋아 할 것 같아서..」 "지금 너랑 전화하는 것도 좋진 않거든? 끊어. 전화하지마." 「너는 그게 매력이야. 어쨌든 잘자고, 내 번호 꼭 저장해놔라. 웬만하면 우리태경이로. 끊는다.」 뚝 끊긴 전화에 나는 멍때리며 가만히 있었다. 대체 저 넉살은 어디서 나오는거고, 사람이 싫다는데도 계속 저렇게 달라붙는건 뭔지. 근데 여기서 제일 문제는 거절을 할 수 없다는거였다. 말로는 싫다고 싫다고 하면서도 정말 마음속으론 김태경이 싫진 않은지 지금 나는 김태경의 번호를 또 저장하고 있었다. 뭐하자는거야 양요섭. "..미쳤다..양요섭..미쳤어. 니가 윤두준이 없으니까..미쳤냐? 제길." 김태경이라고 저장을 하자마자 나는 그냥 핸드폰을 침대위에 던져두고 침대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안았다. 나는 지금 머리도 마음도 속도 다 정신이 없었다. 이런 내 상태를 보면...보나마나 내일 시험은 망할게 뻔히 보였다. 똑똑- 아홉시가 살짝 안된 시간에, 나는 따뜻한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흐트러진 마음을 공부로써 다스려보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자꾸만 안외워지는 문법을 머릿속에 억지로 넣고 있는데, 뒤에서 노크소리가 들렸고 아주머니일 것 같아 대충 대답했다. 이에 문이 열리고 간식같은걸 가져다주려나보다 해서 살짝 뒤돌아보는데, 거기엔 아주머니가 아니라 이쁘게 차려입은 누나가 있었다. 어디 갔다왔는지 긴 웨이브머리를 예쁘게 내리고 검은색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는 너무너무 예쁜 누나를 본 나는 나도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생. 공부하고 있었어?" "어? 아 그냥..누나 어디 갔다와? 이쁘게 입었네." "아..나..사실...선보고 왔어." 누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고 나는 의자를 누나 앞으로 바짝 끌어다 앉아 물었다. "선? 결혼!?" "응..." 웬일인지 누나의 얼굴은 나빠보이지 않았다. 훗날 내 매형될 사람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지 심지어 얼굴엔 미소도 걸려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괜찮은가? "어때? 뭐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때 스타벅스에서 잘생긴 남자 한번 봤다고 했었지? 그 남자였어...진짜..나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진짜?! 누나가 잘생겼다고 했던 그 남자가...선보러 나왔단말야? 진짜?! 완전 인연인가보네!! 어때?" 내가 물어보자 누나는 괜히 부끄러운지 핸드백 끝만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이름은...아 준섭씨야. 윤준섭씨. 그때 홱 봤을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더 잘생기고..매너도 좋은거 있지." "그사람도 누나 좋아하는 눈치야?" "아직..그건 잘 모르겠어. 근데 뭐..오늘 처음 본 사람이니까..사실..누나 너무 기뻤다? 내심..정말 못난 사람이면 어떡하나 하고 고민했었는데..우연히 봤던 그 남자가 그 사람일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정말 너무 꿈같은거야...아직도 안믿겨...정말..너무너무 좋은거 있지..." 누나가 저렇게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는 얼굴은 처음봤다. 사실 누나가 나한테 남자 얘기를 해준적이 없어서 내가 모르는건가 싶기도 했지만, 저렇게 남자얘기를 하면서 수줍어하는거 동생인 내가봐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정말 그 남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복이 넝쿨째 들어온거라고..누나가 저렇게 좋아하는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어차피 그 남자는 미친놈이 아닌 이상에야 분명 우리 누날 좋아할거고, 그렇게되면 내가 바랐던 누나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실제로 그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도 흐뭇하게 웃었다. 요즘 되는 일 없이 답답하기만 했는데, 그중에서 정말 다행이라서. 무엇보다 누나가 저렇게 행복해한다는게 너무 좋아서 나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잘생긴 사람이길래..너무 궁금해서 미칠지경이었다. "아..진짜..너무 궁금하다. 누나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단말야? 얼마나 좋으면 그냥 말을 하는데도 그렇게 웃어?" "..내가..그래? 아..그래..동생 앞에서 숨길게 뭐가 있겠어. 정말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까도 집앞까지 바래다줬는데..너무 듬직한게...키도 커. 백칠십팔쯤 되나? 근데...있지.." "뭔데. 말해봐." "남자들은 여자가 좋으면 어떤 반응이 나와? 뭐 예를 들어..웃는다거나..말을 많이 한다거나..."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근데 여자가 맘에 들면 어떻게든 잘보이려고 하지 않을까? 웃기도 자주 웃고, 여자가 하는 말에 최대한 잘 받아주려고 하고..." 내 말에 누나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 남자 반응이 별로였었나? "...그 남자는 내가 별로인가봐..그냥 나는 너무 신나서 이말 저말 막 떠드는데.. 그 사람은..그냥 억지로 대답한다고 해야되나? 어차피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 번호를 주고받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전화번호 교환은 해야되는거 아냐? 그것도 없었구..아까 차에서 내릴때도 그냥 문 열어주고 인사만 한다음에 쌩 가버리구..." "그런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겠지. 세상에 어떤 남자가 누나를 마다하겠어. 걱정마!!!!" "..아니야..좀 걱정돼. 그 사람이 나 마음에 안들어할까봐...내가 좀 못나게 굴었나? 옷도 되게 신경쓰고 입고 나간건데...내가 한 말이 뭐 마음에 안드는거 있었나? 얘기하는 내내 웃지도 않고..내가 말하면 마지못해 대답은 해주는데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없었어. 왜그럴까..동생?" 누나는 입꼬리가 살짝 내려가 우울한 표정으로 물어봤고, 난 괜한걱정이라며 괜찮다고는 했지만 누나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선본 남자는 누나를 별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는걸. 남자들이 다 똑같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앞에 있는 여자가 맘에 들고 계속 만나고 싶다면 얘기도 좀 주도적으로 하고, 최대한 많이 웃을텐데...좀 걱정이 됐다. "언제 또 만나기로 했어?" "글쎄...그런 말은 없었는데.." "언제 또 보자는 말도 없이 헤어졌단말야?!" "어차피 부모님들이 만들어주신 자리니까..." "아니 부모님들이 해준 자리건 아니건간에..언제 또 만날지는 본인들이 정해야지. 부모는 멍석만 깔아주는거지, 거기서부터 하는건 누나랑 그쪽 몫이잖아." 내 말에 누나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누나가 생각하기에도 그런지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 어깨를 툭툭치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방에서 나갔고 나도 내심 누나가 걱정이 되어 누나가 나간 방만 바라보았다. 누나가 그 남자를 맘에 들어하는건 좋았는데, 어째서 그 남자의 반응은 신통치 않은거냐고. 혹시나 누나가 짝사랑을 하게되진 않을까 살짝 조바심도 났다. 근데 뭐 어차피 지금 당장 결혼을 하는것도 아니고..사람이 첫 술엔 배부를 순 없는 법이라며 좋게 생각하려했다. 그래서 그냥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두 눈을 꽂았다. 아직도 연락이 없는 윤두준을 기다리며.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김태경]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윤두준이 아닐까, 정말 노이로제에 걸릴만큼 정신병에 걸려버릴만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데 무심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었고 결국 그에 대한 짜증이 애꿎은 사람한테도 튀어버렸다. 너무 미안하게도. "아왜!!" 「번호 저장해놨나보다? 근데 왜 신경질이야. 안좋은일 있어?」 대부분 처음 전화 받을때 상대가 먼저 화를 내버리면 기분이 팍 상할텐데도, 김태경은 그것마저도 아무렇지않게 웃어넘기며 오히려 내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그 모습에 차라리 나한테 똑같이 신경질을 부리면 덜 미안할텐데도 상대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더 미안해져서 괜히 입술만 오물오물거렸다. 미안하다고 말은 해야겠는데 그건 또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겠고... "..아니. 왜.." 미안하다는 말 대신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그러게 왜 사람 성질 날카로워지게 새벽에 전화하고 난리야. 용건도 없으면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지랄. 끊어. 공부해야돼." 「몸생각하면서 공부해라. 너 내가 맨처음 봤을때랑 오늘 봤을때랑 얼굴 너무 달라져있어서 깜짝 놀랜거 알아? 밥도 제대로 못먹고 다니는 사람마냥..홀쭉 말라서..일찍일찍 자고, 밥 제때제때 먹고!!」 대체..이런 걱정을 해줘야될 사람은 나타나지도 않고, 왜...사람 서러워지게. "....." 다 좋으니까, 윤두준 얼굴 한번만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김태경의 목소리가 윤두준의 목소리로 들려 눈물이 울컥 쏟아져나왔다. 요즘은 눈물이 왜이렇게 자주 나는건지 별거 아닌일에도 울컥울컥 하면서 눈물이 쏟아지기까지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아 나를 늘 난처하게했다. 지금도. 「왜 대답이 없어? 그럼 공부 좀만 하고 자. 나는 이제 잔다. 안녕!」 "..어.." 전화를 끊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어버렸다. 참아보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믿어보려 노력했는데 아직도 나는 한참 먼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이 사람을 믿는것,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 의심없이 그냥 그 자체를 믿는것. 내가 이 경지에 다다르기엔 아직도 내가 한참 부족 한 것 같아 속도 상하고 멈춰지지 않는 눈물때문에도 짜증이났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새끼는 뭔 생각을 하고 사는건지 전화 끊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화질이다. 지금 목소리도 울렁거릴텐데 전화를 받을까 말까 하다가, 아까 확 받으면서 신경질부린게 미안해서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은 채 전화를 받았다. "왜 또." 「....」 이건 또 무슨 작전이야. 겉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아니지 멀쩡하다못해 준수하고 잘생긴 놈이 왜이렇게 관심없다는 사람 붙잡고 목매는건지 이유를 몰랐다. 그냥 나를 갖고 노는건지. "여보세요? 김태경. 전화를 걸었음 말을해. 또 장난치냐?"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가버렸다. 「....」 "야. 끊는다? 너 만나면 죽어. 이게 어디서 야밤에 장난질이야. 끊.." 「...요섭아.」 그냥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쪽에서 김태경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 그제서야 핸드폰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 "...여보세요? 형? 윤두준? 형이야!?" 「집앞이니까..잠깐만 나와봐.」 윤두준이 틀림 없었다. 근데 심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 약간 떨리기도 하는게..술에 취한것도 같아 나는 어떤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냥 무작정 핸드폰만 갖고 방 밖으로 나가 거의 뛰어나가다시피 현관문을 열고 신발도 대충 구겨 신은채 대문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주무시는 중이라 최대한 소리를 죽여야된다는건 이미 내 머릿속에서 펑-날아가버린지 오래였다. 지금 이 집 앞에 윤두준이 있는데, 그렇게 그립고 그립던 윤두준이 있는데.. 내 눈에 뭐가 보일리가 없지 않은가. 띵- 대문을 열고 나가보니 차 본네트 위에 살짝 걸터앉고는 팔짱을 낀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윤두준이 있었다. 왁스로 앞머리를 올리고, 검은색 재킷에 검은색 바지, 그리고 검은색 넥타이에 하얀 와이셔츠. 정말 수트의 정석을 보여주는 윤두준은 아무래도 술에 살짝 취한듯 보였고 나는 너무 그리웠던 윤두준이 내 눈앞에 있는데도 그 앞까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다가가면 꿈인것마냥 펑 하고 터져버릴까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릴까봐 무서웠다. "왔어?"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윤두준 앞에 다가갔다. 그는 내 신발을 보더니 피식-하고 웃더니 내 양볼을 손으로 잡아 고개를 끌어내려 내 신발을 보게했다. 아무거나 신고 나온다는게 그만 슬리퍼와 운동화를 짝짝이로 신고 나와버렸고 찾아드는 부끄러움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쪽팔려..... "뭐 그렇게 급하다고..뛰어나왔어. 천천히 나오지.." "술 먹었어?" "조금." "그럼 집에 가지 왜 왔어." 얼굴이 많이 핼쓱해져있었다. 살이 많이 빠진듯 콧날은 더 날카로워졌고 볼살도 많이 빠져있었다. 괜히 눈밑이 쾡한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다. 술 냄새가 많이 나질 않는거 보니 살짝 한 것 같은데... 무엇보다 지금 윤두준은 너무 많이 피곤해보였다.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눕히면 잠들어버릴만큼. "너 얼굴 봐야 정신 차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윤두준의 얼굴을 만지며 급격히 까칠해진 피부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대체..뭐하고 다니니 너. "너 밥 제대로 먹고 다니는거 맞아? 얼굴이 왜이렇게 야위었어. 손목도 마른것봐. 너 내가 내 걱정 하지말랬지. 나 잘먹고 잘 자고 있어." "그런 사람이 이렇게 피부도 까칠하고 피곤해보여? 얼굴 나보다 더 말랐잖아 형. ...내가 어디까지 믿어야돼? 형 암 걸린 친구 병간호 한다는거..그거 거짓말인거 다 알아. 나한테 말 못해줄 일이라도 있어? 나 형 기다리는거 너무 힘들어. 눈만 뜨면 형 걱정에 눈 감을때까지 형 걱정이야." "...거짓말. 그럼 김태경은 누군데?" 윤두준의 입에서 김태경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했다가 아까 전화 잘못 받은걸 기억하고 있는듯 해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야. 걔가 형이 전화하기 전에 전화했는데 당연히 걔가 또 한줄 알고 받은거야." 윤두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그의 등에 손을 얹어 토닥여주었다. 많이 지쳐보이는 어깨라 마음이 상해버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윤두준이었는데, 이렇게 힘들어보이는 사람한테 고작 해줄수 있는거라곤 안아주는 것 밖엔 없다는게 내가 나를 제일 싫게 만들었다. "...좋다. 하루하루가..너무 힘들었는데..이렇게 너 안고 있으니깐..배터리 충전 되는거 같다." "형..." "나중에..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말해줄게. 지금은..안돼. 나 믿는댔으니까..믿어야돼. 알았지? 아...그냥 평생 이러고 있고 싶다. 아무생각도 안하고..아무것도 안하고...양요섭하고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않고 윤두준의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늘 나한테 해주던 것처럼 나도 역시 그에게 해주었다. "...힘들때마다 이거 목걸이 보는데..효과 좋드라. 약해지려고 할때마다 강해지고, 힘나고. 이기광이 엄청 좋은 선물 해준거라니까." 윤두준과 나한텐 서로의 사진이 들어간 목걸이를 나눠갖고 있었다. 아마 윤두준에겐 셔츠 속에 숨겨져 있을거고, 나에겐 티셔츠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나도 힘들때마다 목걸이를 열어 윤두준을 바라보며 힘을 얻었다. 윤두준이 너무 보고싶어질때마다 목걸이를 열어 빤히 바라보면서 욕도 하고 걱정도하고..말하자면 목걸이는 내 분신이었다. "..얼른 들어가. 술 먹었는데..운전 괜찮아? 대리 불러야되는거 아냐?" "티도 안나게 먹었는데 뭐..좀만 더 있자." "내일 또 보면 되잖아. 내일 내가 맛있는 저녁 엄청 많이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언제가 되든 좋으니까 꼭 와. 새벽 한시도 좋고 두시도 좋으니까..집에 들어와. 잠 아무데서나 자지말고. 어?" 내가 윤두준의 얼굴을 보며 말하자 그는 싱긋 웃으며 그대로 눈을 감더니 내 입술위로 입술을 겹쳐왔다. 예전처럼 거친 느낌이 아니라, 나를 위로해주고 자신이 위로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내 혀를 만지며 아주 천천히 내 입안을 탐했고 나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천천히 그를 받아들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입술을 뗀 윤두준은 내 양어깨를 붙잡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시험보지. 몇시에 끝나?" "아 토익? 한시나 한시 좀 넘어서 끝날걸? 왜?" "..놀러가자. 우리도 부산 가자. 짐 대충 챙겨서..3시까지 서울역으로 와. 알았어?" 갑자기 다급하게 말하는 윤두준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정신 없을텐데 놀러갈 시간은 있는지 내 어깨를 점점 세게 잡아오며 말하는 모습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 아니..." "무조건. 무조건 와. 아니. 짐같은거 필요없으니까..무조건..무조건 3시까지 와. 내가 좀 늦을수도 있는데..늦으면 좀만 기다려줘. 무조건 갈테니까. 몇시가 됐든..갈테니까. 아무데도 가지말고, 서울역으로 와. 알았어?" 한 마디에 무조건이 몇번이나 들어가는지, 다급해보이는 윤두준이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어디 야반도주 하자는 말처럼 들려 대체 왜그러냐고 물어보려했지만 대답을 간절히 원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약속도 없었지만 내가 윤두준이랑 같이 살 부딪치며 산것도 거의 2년이 다되어가는데 이사람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뭘 뜻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근데...나는 너무 불안해졌다. 그의 눈빛이 너무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꼭 와야돼. 나 너랑..놀러가고 싶어. 중간에 누가 만나자고 해도..만나지 말고..서울역으로 와야돼." 나를 다시 끌어안으며 주문을 외우듯 말하는 윤두준을 느꼈지만 그냥 이사람을 있는 그대로 믿어보기로 했다. 누군가를 아무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는 다는 것. 그것은 내 스스로의 방해를 이겨내는 극복이었다. #35. "양요섭." 우리집 아침 식사는 규칙적인 생활을 중요시하는 아버지 때문에, 주말이건 평일이건 항상 7시에 이루어진다. 그건 일요일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제 새벽에 윤두준을 만나고 들어오느라 잠도 제대로 못잔데다가 윤두준이 한 말 때문에 신경이 쓰여 이런저런 생각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네." "오늘 두시까지 하얏트호텔 레스토랑으로 와라." "..약속.." "승혜 결혼 얘기 오고가는 집안과 갖는 식사자리다. 늦지말고 와. 그리고...최대한 점잖게 입고 와라." 나는 단번에 누나를 쳐다보았지만, 누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나를 향해 수줍게 웃고만 있었다. 아니 어제 처음 그 남자 만났다면서 무슨 집안끼리 식사자리를 벌써 갖는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이게 딸 팔아넘기는거랑 뭐가 다른건지 설명이 필요했다. "누나..어제 처음 그 분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어떻게..벌써 그런 자리를 마련하실수가 있습니까?" "승혜는 어제 처음 본거지만, 집안끼리는 예전부터 얘기가 오고 갔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어." "지금 이게..상식적으로 말이.." "아침부터 소란피우지마라. 마음같아선 너의 그 머리색을 지금 당장 어떻게 하고 싶은거 네 누나가 말리고 말려서 겨우 참는거니까 잠자코 밥 먹어라." 내가 또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누나는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가로 저었다. 본인 결혼 문제에 당사자가 가만히 있으니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라 진짜 복장 터지는 속을 뒤로하고 또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어버렸다. 정말..이 집안에 있으면 있을 수록 내가 미쳐가는 것 같았다. 상식이란게 통하질 않는 집안이다. 결혼이 무슨 애기들 소꿉장난도 아니고..정말..싫다. "티셔츠같은 볼성 사나운건 입지 말고 최대한 격식 차려서 입고 와라." 뭐 그렇게 나한테 터치하는 사항이 많은지 나는 들은체도 안하고 그냥 묵묵히 밥그릇만 비웠다. 지금 내가 당장 시험을 보러가는데, 수트라도 입고 가야겠냐고.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참았다. 저 더운 날씨에 수트를 입고 나갔다간..찜닭이 돼서 올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내가 제일 먼저 밥을 비웠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버지는 나에게 시선을 꽂으며 또 듣기 싫은 말을 하셨다. "그따위 옷 입고 오지 말란 소리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냥 검은색 스투시 티셔츠에 블랙 스키니진. 이게 뭐. 이게 뭐 어떻다고 이따위 옷이라고 하는거지? 대체 그런 자리를 가봤어야 알지, 어떤 옷을 어떻게 입고가야될지도 모르겠는데..뭐 어쩌라는건지.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포기해버렸다. 내가 그 자리 주인공도 아니고, 내가 마음에 안든다고 물릴 혼사 같았음 이렇게까지 무대포로 추진하지도 않았을건데 왜이렇게 내 옷차림새에 신경을 쓰는건지. 나는 아메리칸어패럴 형광주황 가방에 토익책 몇권과 필통만 넣어놓고 지갑과 핸드폰, 아이팟은 손에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시험 시작은 열시였으니까 두시간 정도 시험을 본다치고 이것저것 신경쓰다보면 얼추 한시에 끝날 것 같아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기광이네 집으로 향했다. 역시 만만한게 기광이네 집. 지이이잉- [오늘 세시까지야. 잊지말고 꼭 나와.]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두시까지 하얏트에 갔다가 서울역에 세시까지는...좀 무리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떡해야될지 몰라 문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누나랑 결혼하는 사람이 누군지 내 눈으로 봐야 될 것 같고, 집안끼리 갖는 자리라고 했으니까 멋대로 내가 빠질 수도 없고...부산은 나중에 또 갈 수도 있는건데 굳이 오늘로 잡은 이유도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호텔로 가는것에 마음을 반쯤 기울인 뒤 답장은 하지 않고 기광이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딩동- "누구세여!!!!" 이기광은 꼭 저렇게 '요'자 발음을 확실히 못하고 맨날 '여'라고 발음을 흘렸다. 쟤도 혀에 문제가 있는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하여튼 생긴것과 행동과는 다르게 말투가 참...얼레벌레했다. "나." 내 말에 문을 열어준 기광이는 아직 씻지도 않았는지 하얀나시에 검은색 트렁크팬티 차림이었다. 머리는 부스스 해갖고는..이제서야 밥을 먹는지 식탁이라고 할것도 없이 그냥 작은 원목 테이블에 차려진 햇반과 김치, 김 이렇게 딱 세가지 음식들을 본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가방을 소파위에 내려놓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너도 먹을래?" "밥 먹고 왔다." 기광이는 그대로 거실에 주저 앉아 밥, 김, 김치만으로도 맛있는지 우적우적 먹었고 나는 양 무릎을 세워 몸쪽으로 끌어안은뒤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묵묵히 밥만 먹는 기광이를 바라보았다. "뭘봐." "부러워서." "뭐가?" "듣기싫은 소리 하는 사람도 없지, 현승이랑 잘 지내지, 걱정도 없지." "...하긴. 내가 걱정이 없긴하다." 기광이는 헤벌쭉 웃으며 먹던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고 나는 그냥 엉덩이를 앞뒤로 살짝 살짝 움직이며 오뚜기같이 왔다갔다거리다 때마침 생각난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두시에..누나랑 결혼할 사람 본다?" "...뭐? 벌써!?" "아까 아침에 밥먹는데 아버지가 그러드라. 두시에 집안끼리 갖는 자리니까 격식차려서 입고 오라고." "..근데 꼴이..그게 뭐냐." 김치를 손으로 찢어 먹으며 손가락까지 쪽쪽 핥는 기광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냥 바닥만 쳐다보았다. "내가 싫다고 물릴 혼사도 아닌데 뭐. 근데..문젠..형이 오늘 세시까지 서울역으로 나오래. 부산 가자고." "..갑자기 연락 온거야?" "어. 오늘 새벽에. 그러니까 몇시간 전에." "진짜? 어떻디? 사람 꼴은 하고 있어?" 나는 그냥 입술을 앙 다물어버렸다. 사람꼴? 글쎄..워낙에 덩치있던 사람이라 살이 좀 빠졌다고해서 피골상접이라고 말하기도 뭐했고 그렇다고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고..좀 애매했다. "그냥..좀 야위었드라. 아 근데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형이랑 한 약속을 지켜야될지... 아님 거길 가야될지...." "야. 솔직히 생각을 해봐. 니가 요즘 형이랑 연락이 잘 안되고 있긴 하지마는..니 매형될 사람 오늘 안보면 언제 볼거고 또 그 자리 안가봐. 너 아버지한테 진짜..제대로 찍히는거야. 안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자식 그렇게 대외적으로 망신 당했다고 생각해봐. 너 끝장이라니까. 내 생각엔 니가 말하자면 그게 상견례지? 거길 가는게 나을 것 같다. 부산이야 오늘이 아니라 내일 가도 되는거고..언제가도 상관없는거잖냐." "..아니..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긴 한데..형이랑 한 약속이 먼저고.. 아까도 문자로 꼭 나오라고 왔길래..안나가면 어떻게해야되나.." "좀 미안하긴 해도..아버지한테 찍히는것 보단 낫지않겠냐? 아 뭐 니 선택이지만.... 그리고 꼭 세시일 필요가 뭐가있어? 네시까지 만나자그래. 네시면 충분하지 않냐? 시간 안될 것 같음 중간에 약속있다고 나오면 되는거고.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안그래도 복잡한 놈이." 기광이는 먹던 밥을 싹싹 긁어 다 먹은뒤 그릇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고 나는 소파 위에 벌러덩 누우며 기광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모르겠다. 아 요즘 같아선 존나 살기 싫어 죽겠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김태경] 이라는 세글자가 떴고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받아버렸다. "또 뭐."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지랄..아침부터 그런소리 할거면 끊어." 「시험 잘보고 와라. 끝나고 약속 있어?」 "엄청 많다 엄청. 너 만날 시간 없으니까 끊어." 「누가 만나자그랬어? 그냥 약속있냐고 물어본건데?" 하여튼 김태경은...나를 할말없게 만든다. 다행히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길 망정이지 지금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봐...끔찍하다. 아마 나는 쪽팔려서 얼굴도 못들었을게 뻔헀다. "아 어쩌라고. 끊어. 전화하지마. 해도 안받을거다." 그냥 전화를 멋대로 끊어버린 나는 핸드폰을 바닥에 살짝 던졌고 기광이는 물기 묻은 손을 나시티에 슥슥 닦으며 나한테 다가왔다. "뭔 전환데 그렇게 받냐?" "아. 친구.." "친구는 무슨..친구 친구 하지마라. 너 친구 많은척 하는거 우습다." 기광이는 내 허벅지를 발로 슬쩍 차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요즘같이 생각 복잡할땐 아무 생각 없이 여행 가는게 최곤데.... 갑자기 제주도가 생각이 나버렸다. 그땐 정말 아무생각없이 웃고 떠들었었지. 역시 인간은 추억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누가 한말인진 모르겠지만 이시간 또한 지나가면 추억이겠지. * "..아..미친..개어려워. 나 이번에 못푼문제 존나 많아." 시험이 끝난시각은 12시 15분 정도 였지만, 기광이도 기다리고 이것저것 할게 있어서 정작 시험장에서 나온건 1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기광이는 어려웠는지 옆에서 계속 툴툴거렸고, 어려웠던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리고 내가 무슨 정신으로 시험을 치른건지도 생각이 안났다. 시험지를 받아든 것 까진 생각이 나는데 어떤 생각으로 풀어냈는지 마킹은 제대로 하긴 했는지..내가 이럴줄 알았다. "야. 너 그래서 어떡할건데?" 시험장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데 기광이가 내 등을 퍽-치며 물었고 안그래도 그 고민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 그냥 고개만 푹 숙였다. "야.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니까? 그럼 그렇게해. 2시까지 가. 그래서 30분정도만 있는다음에 정말 급한 약속 있다고 하고서는 나와. 그다음에 택시 타고 서울역 달려가면 되잖아!!! 야 너답지 않게 왜이렇게 병신같이 구냐?" "..하...몰라...니 말대로 해야겠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근데..그 옷차림으로..괜찮겠냐? 딱 애들끼리 어디 놀러가는 차림인데?" 기광의 말에 내 옷을 내려다봤지만 이제와서 옷을 살 수도 없는거고, 어쩔 수 없는거니까 그냥 가겠다고 하자 기광이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명복을 빈다는 쓸데없는 말을 했고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버린 나는 기광이와 지하철역까지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현승이는 잘 지낸대?" "죽을라고 그러지 뭐..딱 힘들때 아니냐. 여름방학." "그래서 너 뭐 어떻게 해주고 있는데?" "내가 해줄수 있는게 있냐..모르는거 물어보면 알려주고..그냥 맛있는거 사다가 주고.. 오늘은 안그래도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삼계탕 집 가서 삼계탕 포장해서 갖다줄거다. 우리 현승이 점점 말라가..." 현승이가 말라간다며 울상을 짓던 기광이는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미리 봐둔 삼계탕 집에 예약을 하는건지 전화를 끊더니 또 실실 거린다. 그렇게나 좋을까. "좋겠다 너는. 아무생각 없이 살아서." "야. 내가 또 뭐 아무생각없이 사냐!? 니가 인생을 복잡하게 사는거야. 병아." 나는 여전히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기광이는 병신같다며 혀를 찼고 내가 생각해도 병신같아서 그냥 바람빠지듯 웃어버렸다. 나도 지금 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는데 이기광 니가 알겠냐... "나 간다." "옹야. 니 매형 될사람 최대한 잘 보고 와라. 승혜 누나가 결혼한다는게 참 마음 아프지만... 보내줘야할 사람은 미련없이 보내줘야지.....흑흑흑" "병신새끼." 그나마 웃을 수 있는건 기광이의 시덥잖은 농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어이없게 웃으며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사실 지하철 환승하고 이런걸 잘 못해서 혹시나 잘못타면 어쩌나 떨렸지만 뭐 정 안되면 아무데나 내려서 택시를 타야겠단 생각으로 일단 도전해봤다. 어차피 시간도 좀 많이 있었으니까. "...아저씨!! 좀만 더 빨리 가주세요!!!" 내가 이럴줄 알았다. 그냥 아예 택시타고 갈걸.... 괜히 지하철 탄다고 깝쳤다가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돌아버렸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언젠간 나오겠지 나오겠지...하던게 지금 벌써 한시 오십분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도착하려면 한참 먼 것 같은데... 일찍 도착해있어도 모자를판에 늦고, 옷차림새도 엉망이고..나는 진짜 집에 들어가면 아주 죽었다. 어떡해 진짜...입에선 어떡해 어떡해 라는 말밖에는 안나왔고 계속 손톱을 물어 뜯어댔다. 지이이잉- [동생. 왜 안와!!] [지금 가고 있는데...내가..지하철을 잘못타서..금방 갈 수 있어!!] [얼른와!!] 누나한테까지 문자가 오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애꿎은 입술만 자꾸 물어뜯고 아직 멀었냐는 물음에 십오분이면 도착 할거라고...십오분이면.. 이미 두시는 훨씬 넘는 시간이다. 진짜 피가 마르고 머리가 텅텅 하얘지는 기분이다. 시간 많다고 여유 부렸다가 결국 이런사단이......내가 병신이다. 양요섭 니가 병신이야. 02:12 pm 내가 택시에서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내린 시간이다. 하얏트 호텔을 그전에 여러번 오긴 했지만 혼자선 들어가본 적이 없는데.... 일단 데스크에 가서 레스토랑 물어보고, 찾아가고... 한 오분 정도를 호텔 안에서 해맨 결과, 룸 앞에 설 수 있었다. VIP 예약룸 이라고 쓰여져 있는 문 앞에서 일단 숨은 돌리고 문고리를 잡아당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제 막내아들입니다. 늦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거늘..." 나는 일단 보이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버지의 탐탁치 않은 말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나는 숨이 벅차고 다리까지 후들거려서 제정신이 아니라 식탁만 보면서 숨을 몰아쉬어댔다. "괜찮습니다. 아드님이 굉장히 미남이시네요. 자유분방해 보여 좋습니다." 말이 자유분방이지..저게 그냥 날라리같다는 말과 다를게 뭐가 있는가. 나는 고개만 숙여 가만히 있다가 좀 진정이 되자 땀부터 좀 닦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앉아있는 누나는 괜찮냐며 나에게 다정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괜찮다며 물을 마시면서 제일 궁금했던 내 매형 될 사람을 쳐다보는데. "......!!!!" 하마터면 물컵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왜. 왜 여기에..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그 사람이 맞는건지. 윤두준. 당신이 왜 여기에..이자리에..누나 앞에 앉아있는거지. 대체..왜. 나는 윤두준과 눈이 마주쳤고, 윤두준의 표정은 심각했다. 마치 왜 왔냐는 듯 날 책망하는 눈빛같기도 하고 뭔가 뜻이 많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손이 너무 부들부들 떨리고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 윤두준만 빤히 쳐다봤다. "..잘생겼지. 내가 말했던 그 사람이야." "...이름이..준섭이라며?" "아 그건 아명인데..너한텐 그렇게 소개해줬음 좋겠다고 해서..진짜 이름은 두준씨야 윤두준." 아니길 바랐다. 그냥 닮은사람이라고. 내가 윤두준이 너무너무 보고싶어서 환영이 그려진거라고. 누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누나와 결혼을 하게될 사람은 아예 다른사람이기를 바랐다. 근데 누나의 입에서 윤두준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나오니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가족들도 다 모였으니..식사 부터 하실까요?" 그때 뉴스에서 봤던 윤상우 회장이었고, 그 옆은...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있는 사람은 윤두준이 맞았다. 지금 이게 꿈은 아닐까, 내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이런 악몽을 꾸고 있는건 아닐까 싶어 손등을 꼬집어 봤지만 역시 아팠다. "..어디 아파?" 누나의 귓속말이 좀 컸는지 집안 어른들도 다 나를 쳐다봤고 나는 순식간에 꽂힌 시선에 어찌할바를 몰라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뛰어오느라..괜찮아요." 아버지의 탐탁치 않은 시선이 느껴졌고, 윤두준의 걱정스러운 표정도 느껴졌다. "승혜양과 동생분이 참 많이 닮았네요. 누가봐도 남매라는걸 딱 알겠어요. 저렇게 닮기도 쉽지 않을텐데..특히 남매가. 둘다 아주 선남선녀로군요." 윤회장이 나와 누나를 번갈아보며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하자 엄만 얘네둘은 또 워낙 친해서 집안에서도 둘이 붙어서 속닥속닥 거린다며 농담처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런 시덥잖은 얘기에 귀를 기울일 힘도 없었고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제서야 슬슬 실감이 나 아까보다 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두준이 나보고 세시까지 오라고 했던거, 그렇게 신신당부 하면서까지 세시까지 서울역으로 오라고 했던건 아무래도 이 자리에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은 왜 이자리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늠름하게 앉아있는건지. 나는 윤두준의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윤두준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본다면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기 때문에 최대한 시선은 식탁위에 올려진 식기들에 꽂았고 어떻게든 진정하려 괜찮다. 괜찮다.라는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그렇지만 괜찮지 않았다. 도저히 괜찮아지질 않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각자의 앞에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수프와 샐러드가 내 앞에 놓여졌고 지금 물 한모금이라도 먹으면 토할 것 같았지만 음식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혀질까봐 마치 수전증 걸린 사람마냥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집어들어 수프를 한모금 떠먹었다. 역시나 올라오는 구역질. 그렇지만 티나지 않게 나는 계속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진정하려 애썼고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약혼부터 치르는게 어떨까 싶은데..아직 아이들 나이도 어리고. 특히 승혜양이 이제 갓 졸업했으니까.. 아직은 아이들한테 만날 시간을 좀 더 주는게 나을 것 같은데 양의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자리를 갖게된 목적이 윤회장의 입에서 먼저 물꼬를 틀며 나왔고 아버진 나한텐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가득 띄며 말했다. "저도 그게 옳을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제 딸이 미숙하고 어려서..조금 더 가르쳐서 보내고 싶기에.. 그럼 약혼은 9월정도가 어떠한지요. 날씨도 선선하고 좋을 것 같은데.." "9월 좋지요. 그럼 결혼은...?" 드르륵- 가만히 얘기를 듣던 나는 결국 목 끝까지 밀어넣었던 수프가 넘어가질 않고 넘어올 것 같은 상황에 부딪쳐 두분이서 얘기 중이라는걸 알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또 나에게 다다다 꽂히는 여러개의 눈에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일단 입은 가린채 말했다. "..죄송한데..잠깐..화장실좀.." "..양요섭." 아버지의 언짢은 기분이 드러났고 윤회장은 아까부터 아파보이는데 얼른 갔다오라며 고개를 끄덕여 정말 죄송하다고 인사한 뒤 서둘러 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다행히도 단번에 눈에 띈 화장실로 튀어들어가 문을 잠그고 변기통 앞에 쭈그리고 앉아버렸다. 뭐 먹은게 없으니 나올 것도 없었고 속 뒤집어지는 헛구역질만 수십번을 한 나는 휴지로 대충 입을 닦고 변기통 위에 주저 앉았다.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미친듯 쏟아져내려왔고 이젠 손 뿐만이 아니라 온 몸까지 마치 오한이 들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어댔다. 지금껏 답답했던,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몰랐었던 그 일들이 내 머릿속에서 퍼즐조각 맞춰지듯 속속 맞춰들어가기 시작했고 결론이 나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언젠가 한번 윤두준이 말한 적이 있었다. 자기한텐 이제 자유시간은 일년밖에 안남았다고. 근데 그 만료기간이 작년이 끝. 즉 올해부턴 그냥 윤두준이 아니라 윤상우회장 아들 윤두준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었고, 그 결과는 우리 누나와의 결혼. 또한 tv에서 봤던 윤두준의 모습도 내가 잘못본게 아니라 진실이었다. 이제 슬슬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고, 그 작업의 일환이 바로 현재 정치권 바닥을 주름잡고 있는 우리 아버지 양기태의원의 딸 양승혜와의 혼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맞춰지는 퍼즐조각에 나는 마치 미친사람마냥 헛웃음이 나왔다. 눈에선 눈물이 멈춰지질 않는데, 입에선 웃음이 나왔다. 정말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꼴이었다. 그럼 앞으로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생각에 대한 퍼즐 조각은 아직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어 모여지질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되는건지는 이미 알고 있었고 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내가 이 곳에 들어온 이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마음이 자꾸 그걸 피하고 있어 힘들뿐. 그렇지만..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송이 같은 나에겐 피할 방법도, 그렇다고 부딪칠 방법도 없었다. 일단 나는 화장실 칸에서 나와 세면대로 다가갔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서 나가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또 나한테로 쏟아질 아버지의 비난이 무서워 그럴수도 없었다. 맞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그 런데 윤두준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니 누나와의 결혼은 이뤄질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고를 백번 천번 반복 한다 해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윤두준을 너무 좋아하는 누나의 눈빛을..내가 보고야 말았으니까. 아까 룸 안에 있었을때 수줍어서 윤두준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 보지도 못한 누나의 눈빛과 얼굴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와 연을 끊는 상황이 온대도 어떻게든 부딪쳐보자라고 용기를 낼 수 있었겠지만, 이미 그걸 본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행복을 찾자고 누나의 행복을 앗아갈 순 없는거니까. 아니, 내가 죽는 한이 있다해도 누나의 행복은 지켜줘야했으니까. 나는 두눈 뜨고 나보다 더 사랑하는 윤두준을 누나에게 보내줄 수 밖엔 없었다. 그 외엔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일단 입부터 물로 헹궜다. 여러번 헹궜는데도 입안에선 너무 쓴맛이 나 계속해서 헹궈댔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주 찬물로 세수까지 했는데도 뜨거운 눈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고 흐르고 차오르고 흐르고.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나는 휴지로 대충 얼굴을 닦은 다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태경] 내가 힘들때마다 전화를 거는 신기한 놈이다. 내가 힘든지 안힘든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타이밍 기가 막히게 전화를 주는지. "...어." 어떻게든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뭐하냐?」 "..알아서 뭐하게." 「궁금하니까 그렇지. 너 사실 약속 없지? 근데 있는척 한거지?」 나는 세면대 옆 휴지가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계속 나오는 눈물을 휴지로 꾹꾹 눌렀다. "..약속 있거든. 나 엄청 바쁘.." 「..너 울지.」 내 흔들리는 목소리를 김태경이 눈치 챘는지 단번에 알아채는 말에 나는 뜨끔했다. "..아니거든. 내가 왜 울어. 쓸데없는 소리 할거면.." 「어디야.」 "야. 나 진짜 안.." 「어디냐고. 말해. 어디야 지금.」 항상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던 김태경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목소리만 들어도 화났다는걸 알 수 있을만큼 차가워져 있었다. 대체 너는 뭔데 내가 울건말건 지가 화를 내고 지랄이야. 지금 화내고 싶은사람이 누군데. "..됐어 끊어." 「양요섭.」 "김태경. 나 괜찮으니깐 신경 꺼. 니가 뭔데 내가 울건 말건.." 「데릴러 갈테니까 지금 어디야.」 "너 오지랖 넓은거 자랑하냐? 너랑 내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친한척...됐고. 끊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그래도 나 걱정하는 사람한테 친한척 하냐느니 어쨌냐느니 이따위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역시나 계속해서 오는 진동에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여기서 전화를 받으면 지금 내 기분도 좆같은데 애먼데다 화풀이 해버릴까봐 끝까지 울려대는 진동에도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양요섭."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멈추질 않는 눈물때문에 다시 세수를 하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누군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어서 나는 세수하던 손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 봐." 지금 윤두준을 보면 어떤 말을 해야될지 어떻게 해야될지 아직 모든게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하던 세수를 마저 한 뒤 휴지로 대충 물기만 닦은 다음 윤두준은 보지도 않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윤두준이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 세웠고 화장실 문은 아예 닫아 문을 잠가버렸다. 저렇게 멋대로 행동한다는건 윤두준 또한 지금 패닉상태라는 증거였다. "양요섭." 나는 눈을 한번 쓱 훔친 뒤 윤두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게도 보고싶었던 얼굴인데, 보고싶어서 미칠 것 같았던 얼굴인데 이렇게 아프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윤두준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툭툭 떨어져내리는 것 같이 힘들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윤두준이 아니라, 앞으로 내 매형이 될 윤두준이라는게...인정해야하는건데도 인정할수가 없었다. 만나기도 내가 먼저 만났고, 사랑하기도 내가 먼저 사랑했는데. 대체..왜. 내가 남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물러나야만 한다는게, 누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한테 전부인 윤두준을 포기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죽는 것 만큼이나 싫어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윤두준이랑 손잡고 미국이건 아프리카건 우리를 못찾는 그 어느 곳이나 좋으니까 그런데로 가서 도망쳐서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도망간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거란건 나도 윤두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원망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래서 윤두준도 어쩔수 없었던거 아는데도..그 화가 윤두준한테 토해져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감췄어? 나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고..밤엔 나 만나고 낮엔 누나 만나고..그렇게 하면 기분 좋아?" "양요섭."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앞에서, 형 힘든것 같아 병신같이 걱정해주던 모습 봤을때 기분 어땠어? 내가 그냥 마냥 병신 또라이로 보였지?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만약 여기 안왔으면..형 여기서 아주 무사히 상견례 끝내고 나한테로 와서 부산 가서 놀 생각이었어?" "그런거 아니.." "형이 지금 나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그때 물어봤었잖아.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때 없다고 그랬지. 그럼 지금도 형은 할 말 없어야돼. 나한테 무슨 염치로..무슨 말을 하려고? 어쩔수 없었다고? 집안끼리의 일이라 내가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그렇게 비겁한 변명하려고? 그래놓고 형 믿으라고 하면..내가 형 믿을 수 있을 것 같애? 내가 바보 천치 또라이도 아니고.. 상황이 이딴식으로 개같이 흘러가는데..그냥 무작정 형 믿고 있으라고? 믿으면? 믿으면 뭐가 남는데? 결국 누나랑 형이랑 결혼하는거 밖에 더 봐!?" 신기하게도 윤두준한테 독설을 토해낼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독한 눈빛을 그에게 쏘며 윤두준이 내 손목을 잡으려고 할때마다 거세게 뿌리쳤다. 한번도 윤두준을 뿌리쳐본 적 없는 난데도 정말 매섭게 피해버렸다. "나 만지지마." 내 한마디에 윤두준은 내 손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으로 툭 떨어지는걸 봤고 나는 더욱더 독한 눈빛으로 윤두준을 바라보았다. "요섭아. 일단 내 말부터.." "형 말? 안들어도 뻔하잖아. 뭐 설마..이 결혼 없었던걸로 하겠다고 하려고? 그럼 상처받는게 누군데? 내가 말했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누나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꼴 절대 못본다고. 우리 누나 눈에서 형 때문에 눈물 한방울이라도 떨어지는거 보는 순간...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내 말을 듣고나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듯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윤두준을 화장실에 남겨두고 내가 먼저 밖으로 나와버렸다. 나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화장실 앞에 주저 앉아버렸지만 다행히도 윤두준이 밖으로 나오질 않아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한 뒤 룸 안으로 들어갔다. "..안색이..더 안좋아진거 같은데...괜찮아요?" 처음보는 윤두준의 엄만 정말 처녀시절에 미인이라는 말은 수두룩하게 듣고 살았을법하게 굉장한 미인이셨다. 그렇기에 윤두준같이 잘생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가... 정말 교양있고 부드러운 말투로 나를 걱정해주셨고, 그 온화한 얼굴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괜찮다고 대답했고 바로 가방을 갖고 아버지 앞에 섰다. "...먼저...가볼게요. 예의 아닌거 아는데..몸이 너무 안좋아서...정말..죄송합니다. 폐끼쳐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허리를 숙여가면서 윤회장과 그의 부인에게 정중히 인사하자 괜찮다며, 몸이 너무 아파보이니 집에서 쉬라고 온화하게 대답해주었고 그 분들의 반응이 그러하니 아버지조차도 날 잡을 순 없어 집에서 보자는 무언의 눈빛을 나에게 날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에 나는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룸 밖으로 나와버렸고 문 앞에 서있는 윤두준과 또 마주쳐버렸다. "..데려다줄게. 가자."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아오는 윤두준에 나는 이제 더이상 뿌리칠 힘도 없는데도 있는 힘껏 그 손을 내동댕이쳐버렸다. "놔. 혼자 갈거야." "고집피우지마. 너 지금 이대로 집에 혼자 갔다간..쓰러져. 안돼." "...상황 파악 좀 해. 형이 주인공인 자리야. 형이 이대로 나 데려다준답시고 나가면..우리 누나 어떡할건데. 들어가서 끝까지 자리 지켜. 나중에..정리하자."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것 조차도 다행스러울만큼 어지러웠지만 차분히 말한 뒤 그대로 윤두준에게 등져 엘레베이터로 가 금방 올라오는 엘레베이터 안에 올라탔고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또다시 고장난듯 흘러내리는 눈물에 이대로 길거리로 나갔다간 미친놈 취급 받을게 뻔하고 어떻게 집에 가야되나 그냥 아무 생각도 안나서 일단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1층 로비에 앉아있었다. 근데 병신같게도 이 순간에 생각나는데 왜 김태경인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이미 나는 김태경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엔 그가 전화를 받아버려서 어쩔 수 없었고. 「여보세요?」 "..난데..." 「어. 너 목소리 더 안좋다. 어디야. 데릴러 갈게.」 "..하얏트 호텔.....미안한데 내가 지금 몸이 너무 안좋아서...데릴러.." 「끊어. 십분만 기다려.」 누가보면 십년지기 친군줄 알겠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지 안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스스럼없이 데릴러 오겠다고 하고, 데릴러 와달라고 하는건지..싫다고 그럴땐 언제고 이렇게 필요할때 김태경을 찾는 나도 정말 싫었다. 이순간에 기광이가 떠올랐으면 참 좋았을텐데 왜 기광이는 떠오르지 않고 애꿎은 김태경이 떠오르는건지... 앞으로는 기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생각한건데 아까 있었던 그 일들이 마치 몇년전에 있었던 일처럼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 뜨면 윤두준이 있을 것 같은데, 전화를 하면 아무렇지 않게 윤두준이 나를 반겨줄 것 같은데..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윤두준과 행복하고 즐거웠었는데...모든게 다 엿같다. "양요섭. 야. 정신차려봐." 몇분이 지났을까, 누가 나를 흔들어 깨우길래 눈을 떴더니 눈 앞엔 김태경이 있었다. 전화 한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진짜 빨리왔네. "..왔네.." "뭐야. 너 왜이래? 병원부터 가야되나." "..아니...집으로..." 김태경이 손을 잡고 일으켜주길래 일어나려는데 순간 눈앞이 깜깜하고 아무 소리도 안들렸다.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김태경의 목소리가 잠깐 들린 것 같았는데..아무것도 안보였다. "양요섭 빨리 안올래!?" 눈 앞에 윤두준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건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윤두준은 나보다 훨씬 더 앞에 있어서 그한테 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데도 이상하게 가까워지질 않았다. 나는 죽을만큼 뛰는데도..여전히 그 거리 그대로,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다. "..형!!" "빨리 와 양요섭! 나 먼저 가버린다!?" "..가지마!! 나 금방 갈게!!!! 근데..형! 안가져!! 나는 뛰는데...왜 안가까워지지!?" 윤두준은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얼른 뛰어가서 그를 안고 싶은 마음에 다가가는데도 이상하게..... 모든게 다 멈춰있는 것 같았다. "나 간다 양요섭!?" "....가지마!!!!!" 꿈이었나보다. 어쩐지..아무리 뛰어가도 붙잡아지질 않더라니..... 나는 눈을 살짝 깜빡깜빡거렸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건 익숙치 않은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라고 생각할 무렵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니 키가 엄청 큰 남자가 나한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게 순간 윤두준인 것 같아 환하게 웃는데...점점 가까워지니 윤두준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나한테 다가오다 말고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는가 싶었는데 핸드폰을 집어들어 나를 살짝 쳐다보는가 싶더니 전화를 받았다. "..요섭이 지금 쓰러져서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친군데요. 김태경입니다. 죄송하지만 아직 요섭이가 안일어나서 스스로 일어날때까지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요. 그쪽이 그렇게 무례하게 나올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끊겠습니다." 그 남자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테이블위에 내려놓고 뭔가를 들고 오는거 까지 봤는데... 그 이후로는 점점 흐릿해지더니 또 깜깜해져서 기억이 없다. 팟-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미친듯한 갈증에 일단 누워있었던 몸부터 일으켰고 저녁때쯤이 되었는지 약간 어둑어둑한게 주변이 잘 보이질 않았다. "...깼어?!" 침대 맡에서 엎드리고 있는게 누군가하고 봤더니 김태경이었나보다. 그는 내가 침대위에 앉아있자 바로 내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체크하더니 볼도 만졌다. 뭐하는거야 지금. "..물 좀.." 김태경은 알았다며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놓은 물을 나한테 내밀었고 나는 컵 한가득 담겨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드는게 또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아까의 일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여기 어디야." "니가 데릴러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대뜸 쓰러져서..집이 어디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없고.. 어쩔 수 없어서 우리집으로 일단 데리고 왔다. 일부러 그런거 아니야. 니가 정신 잃어서 어쩔 수 없었던거야." "..누가 뭐래..고맙다." 어쩐지..익숙치 않다 했더니 김태경의 집인가보다. 그러고보니 아까 김태경한테 전화했던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부턴 까마득하더라니만 내가 결국 쓰러졌었던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게 웃으며 이제 집에가려고 이불을 걷어내는데 김태경이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잠깐 누워있어. 죽 끓이고 있으니까 그것만 먹고가." "..됐어 무슨.." "아 누워있어. 너 안먹으면 저거 누가 먹냐. 가만히 있어." 고맙고 미안하기도 해서 일단은 김태경이 하라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깨어나자 방의 불을 켜고 나간 김태경 덕분에 방구경은 할 수 있었다. 얘도 잘사는 집 아들인지 방이 꽤 컸다. 그리고 얘도 약간 지저분하고 난잡한건 싫어하는 스타일인지 커다란 방에 있는거라곤 내가 누워있는 침대,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스탠드가 놓여진 서랍장.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놓여진 1인용 소파 두개와 유리 테이블, 그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벽걸이 tv가 다였다. 무슨 방에 장롱도 없냐....장롱은 고사하고 책상도 없다. 공부 안하는거 자랑하나... "맛있는건진 잘 모르겠다. 내가 이래뵈도 요리는 좀 하는데..죽은 뭐 해본적이 없어서 대충 인터넷보고 했는데.." 죽이랑 물을 가지고 온 김태경은 내가 일어나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있자 허벅지 위에 쟁반을 올려놔주었고 나는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쓰러진거 돌봐준거에 대한 고마움에 안먹을 수는 없어서 한숟갈 떴다. "...어때?" 꼭 하는 짓이 내가 윤두준한테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또 윤두준이다. 이제는 생각조차 하면 안되는 사람이라는걸 알지만.. 참 내 머리, 마음 여기저기에 많이도 박혀있는 사람이라.. 썩은 사과 도려내듯이 딱 윤두준에 관한 기억만 도려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괜찮네." "아 다행이다. 무슨 숙제 검사맡는것도 아니고.." "야..근데 무슨 방에 책상이 없냐? 공부는 해?" "아 작업실이 다른 방에 있어서 책상도 거기다 옮겼어." 그냥 미음같은 죽을 후루룩 넘기며 작업실이 뭐냐는 듯 눈빛으로 물었고 김태경은 쑥스러운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의상 전공이니까..옷도 만들어야되고 또 모델일도 하고 있으니까 피팅 작업도 해야되고..그냥 그래서 만든 작업실." "모델도 해!?" "그냥..아르바이트 정도로..전문 모델은 아니고..그냥 좀..." 김태경은 내가 이렇게 막 대할만큼 우스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가볍게 사는 그런애인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나름 자기 일도 있고, 착하기도 한 것 같고..어쨌든 오늘 김태경에 대한 내 불신은 좀 사그라든 것 같았다. "내가 생각없이 사는 애처럼 봤을지는 몰라도 나름 신념도 있고..정신 차리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양요섭씨." "..내가 뭐. 뭐라고 했냐?" 내 눈빛이 그렇게 보였는지 내 마음을 알아챈 김태경은 묻지도 않은말에 대답했고 괜히 속마음을 들킨것 같아 뜨끔해서 따뜻한 미음만 먹어댔다. "야..근데 윤두준이 누구냐?" 하마터면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릴뻔했다. "...윤두준은..왜." "아니 아까부터 전화가 계속 오길래..안받을라고 했다가 하도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대뜸 나보고 화를 내는거야. 너 어딨냐고 그러길래 쓰러져서 집에 데리고왔다니깐 이름이 뭐냐그러드라? 그래서 김태경이라고 하니까 더 화를 내는거야. 내가 무슨 너 보쌈해서 데리고 왔냐? 아 어이가 없어서.." "그러게 왜 전화를 받아서 그래!!!!!!" "..양요섭. 왜이래?"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내가 쓰러진걸 윤두준이 알았으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집 앞에 와서 나를 기다릴 수도 있는거고, 나는 아직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해야될지도 모르겠는데 무작정 찾아오면 나는 그냥 윤두준을 잡아버릴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래서 김태경은 잘못한거 하나도 없는데,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은것 뿐인데.. 오히려 김태경한테 내가 사과를 해야되는건데도 그냥 윤두준이라는 이름을 들으니까 나도모르게 울컥해버렸나보다. "...미안. 나 집에 가볼게. 고마웠어." "기다려. 그몸으로 어떻게 가겠다고." 태경이는 쟁반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고, 나는 저쪽 테이블에 놓여져있는 내 핸드폰으로 다가가 그걸 집어들어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 23통] 확인해보니 모두 다 윤두준의 것이었다. 그리고 문자도 왔길래 확인하니, 문자도 거의 스무통이 넘게 와있었다. 모두 다 어디야, 데릴러갈게, 미안해, 만나서 얘기하자...다 똑같은 내용이었다. 이에 나는 그냥 지금은 무조건 피하고 싶어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다음 방에서 나왔고 김태경이 데려다준다고 계속 그러길래 사실 혼자 갈 자신도 없어서 못이기는척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김태경도 기광이처럼 오피스텔에서 독립을 하는지, 집도 적당한 크기에 깔끔하니 딱이었다. 남자가 사는 집 치곤 더럽지도 않고..뭐 어쨌든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간 김태경은 나보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차 문을 열었고, 나이도 나랑 똑같은게 벌써부터 운전을 하는건가 싶어 쳐다보니 또 쑥쓰럽게 웃었다. "내가 1년 재수하고 들어와서 너보다 한살 형인데..뭐 한살갖고 이러쿵 저러쿵 하고 싶진 않아서." "...아...차 좋네." 제네시스 쿠페를 끌고다니는 김태경은 보나마나 잘사는 집 아들이라고 내 스스로 판단해버렸다. 쿠페도 꽤 비쌀텐데..어린나이에 스스로 돈을 벌어 차를 샀을리도 없고... 너도 어지간히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안전벨트도 맸다. "일단 나갈테니까 집 어딘지 중간중간 설명해." "어." 지이이잉- 지이이잉- 조용한 차 안에서 울리는 진동. 내 가방에서 울리자 김태경은 안받냐는 듯 나를 쳐다봤고 왠지 윤두준일 것 같아 그냥 안받으려는데 계속 피하면 혹시나 김태경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싶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이기광] 다행히도 기광이었다. "여.." 「병신아!!!! 너 어디야 지금!?!?!?」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이기광에 난 또 짜증이 나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김태경은 뭐가 웃긴지 실실거리면서 나를 쳐다봤다. 이씨. "아 왜 소리지르고 지랄이야. 뭐! 왜!!" 「...형한테 연락 받았다. 너 지금 어디야. 당장 불어.」 "지금 집 가고 있어." 「지금껏 어디있었는데?」 "친구네 집." "여기서 어떡해?" "어? 아..나도 잘 모르는데..우리집 삼성역 근처니까 일단 그쪽으로 가봐." 나도 지리를 잘 모르는데 대뜸 처음 보는 길에 와서는 어떻게 가냐고 그럼 내가 어떻게 알아. 「너..김태경이랑 같이 있냐?」 김태경..아주 오늘 유명인사 되는구나... 괜히 미안해져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김태경의 옆모습만 슬쩍 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 아 근데 왜! 전화한 용건이 뭔데." 「일단 우리집으로 와. 할말 있어.」 "나 지금 아직도 어지럽거든. 나중에 얘기해." 「그럼 내가 니네집앞으로 갈테니까 나와.」 "아 좀 나중에 얘기하자고. 나도 지금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끊어." 그리곤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지금 이기광이고 윤두준이고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안그래도 머리아파 죽겠는데..주변에서 아주 달달 볶고 난리가 났다. 이기광 이새끼는 또 왜 지랄이야. 사람 힘들어 죽겠는데. "근데 무슨 일이 있길래..그렇게 피죽도 못얻어먹은 사람 꼴을 하고 다니냐." "..나도 모르겠다. 아 머리아파..." 나도 지금 나한테 벌어진 일을 누가 딱 해결해줬으면 좋겠는데..아주 죽겠다. 그냥 지금 당장은 집에 들어가서 자고만 싶다. 아무 생각도 안하고 하루종일 자고 일어나면 아무일도 없었던것 마냥 싹 사라졌으면 좋겠는데..그냥 악몽꾼거라고 생각해버렸으면 좋겠다. 근데 참 좆같은 일은...윤두준을 보고 웃는 누나와, 누나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두준이 너무너무 잘어울렸다는 것. 내가 옛날에 생각했던 그 이미지였다. 착하고 이쁜 여자와 같이 있는 윤두준. 마치 한폭의 웨딩사진과도 같아서 부러워서 질투가 나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게 화가나고 짜증이 나서. 나만 물러나면 모든게 다 정상인데 내가 물러날 수가 없어서.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또다시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생각하지 말아야될 것 같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현실도피를 할 순 없겠지만..그래도 일단 오늘은..좀 쉬어야 될 것 같았다. "야. 여기서 어떻게 가?" 잠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김태경의 말에 눈을 떠 주위를 살폈다. "..아..여기서 직진. 그러면 사거리 나오는데 우회전하면 골목길 나와. 거기서 일단 쭉 올라가야돼. 오르막길인데 거기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우리집 나와." "너 이런동네 사냐? 별로 잘사는 집 아들내미는 아닌거 같았는데.." "...미친..닥쳐." 내 말에 킥킥 대며 웃은 김태경은 오르막길에 오르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언뜻 우리집이 보이자 나는 내릴 준비를 했다. "어 여기." 여기라는 말에 차를 세운 김태경은 자기도 안전벨트를 푸르더니 차에서 내렸고 그렇게 과한 친절은 바라지 않았는데 문까지 열어주자 좀 당황스러움에 어쩔줄 몰라하며 내리긴 했다. "..아..여기 사는구나..." "오늘 고마웠다. 나중에 밥 살게." "아싸. 이것봐. 너도 나 별로 안싫은거라니까?" "그딴 소리 할꺼면 당장 꺼져." 내 말에 알았다며 내 머리를 흐트려놓더니 차로 올라타 손을 한번 흔든뒤 차를 돌려 아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고 그 차가 멀어질때까지 서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툭- 둔탁한게 내 가슴팍을 때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흡-하고 숨이 막혀 앞을 보는데 그 앞엔 나를 분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버지가 있었고 내 발 밑엔 사전 만한 두께의 책이 떨어져 있었다. 저걸 던지다니...거의 살인감이다. "너 뭐하는 놈이야!?" "아 여보. 애가 아프다는데 그럼 어떡해요!!" "당신은 가만히 있어. 너 내가 늦지 말라고 몇번 얘기 했어 안했어!? 근데 늦고..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려!? 니 아비 체면이 뭐가 돼!!!! 자식 교육 제대로 안시켰다고 생각할거 아냐!? 넌 어쩜 그렇게 부모 입장은 생각도 안하고 항상 니 멋대로야!!!!! 막자란거 티내?" "..막 자란게 아니라 막 키우신거잖아요." "뭐!?" "부모체면 먼저 생각하시기 전에 자식 걱정 좀 먼저 해주시면 좋잖아요.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건 누구건 말싸움할 기력이 없어 그대로 뒤를 돌아 2층으로 올라가버렸고, 너 이리 안내려오냐며 호통치는 아버지와 애 아픈게 눈에 보이는데 그런애를 붙잡고 혼내고 싶냐며 말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렇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정말 토할것 같아. 지이이이이잉- 가방을 맨채로 누워버려 등에서 진동이 적나라하게 울려댔다. 귀찮은 마음에 그냥 냅둘까 했지만 그로부터 진동이 계속 와서 핸드폰이라도 꺼놔야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아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집에 잘 들어 갔냐? _김태경] 집 앞까지 지가 데려다줬으면서 잘 들어갔냐는 또 뭐야. 나는 피식-웃으며 답장버튼을 눌러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잘 들어갔냐?] 답장을 보내고 나니 핸드폰에 뜨는건 무수히 많은 부재중통화와 무수히 많은 문자메세지들. 다 하나같이 1/3은 기광이, 2/3는 윤두준이었다. 정말 보기만 해도 깝깝해지는 문자에 그냥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팔로 눈을 가린채 누워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동생....괜찮아?" 항상 고맙고 좋은 누나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왜이렇게 누나가 미운지. 누나도 집안끼리의 선자리에 나간거고 그게 윤두준일 뿐인건데 누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왜 나는 그냥 누나가 미운건지. 어떻게든 퉁명스레 대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워낙에 표정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사람이라 쉽지 않았다. "...아....응." "아까 갑자기..안색이 파래지더니...진짜 괜찮은거야? 지금껏 어디있었어?" "친구네 집에..." "기광이네?" "아니. 다른 친구." 침대에 나와 나란히 앉은 누나는 내 얼굴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고 난 어떻게든 누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땅바닥을 봤다가 그냥 손만 봤다가. "..근데 니가 봤을때..어땠어? 두준씨?" 누나의 입에서 두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게 나는 너무 듣기가 싫었다. 내가 먼저 안 사람이고, 내가 먼저 좋아한 사람이고, 나랑 지금 사랑하는 사람인데... 왜 어째서. 내가 모든게 다 먼전데 포기해야되는건지. 억울하고 짜증나고 화가났다. 만약, 그 상대가 누나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면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윤두준의 결혼을 막으려고 했을것이다. 근데 그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누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누나이기 때문에.. 나는 맥도 못추고 이렇게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거다. "..잘생겼드라. 멋있고. 누나가 반한....사람이 누굴까..하고 궁금했었는데...멋있었어." "남자가 봐도 그치? 멋있지? 되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 않았어? 사실..좀 많이 차가운 사람이야." 안차가운 사람인데..나한텐 윙크도 해주고, 애교도 떨고..아침마다 밥도 차려줘. 맨처음에 밥 차려줬을땐 이게 사람 먹는 밥인가 의심 될 정도로 맛이 이상했는데 점점 나아지더니 얼마전엔 스파게티까지 해줬다? 안차가운 사람이야. "..아직 어색해서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되게 말이 없어서..내가 뭐라고 말하면 그냥 대답만 하구..눈도 별로 안마주치고... 그게 단순히 좀 어색해서 그런걸까? 내가 싫은건 아니고?" 그사람 원래 그래. 말 많은 사람은 아니야. 근데 눈은 엄청 잘 마주치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항상 웃어주면서 들어줘.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먼저 말 꺼낼때도 많아. 근데..누나는 윤두준의 이런 모습을 몰랐으면 좋겠다. 못된거 아는데...몰랐으면 좋겠다. "..누나가 왜 싫어. 그냥...만난지 얼마 안됐으니까."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어? 너 전화온다. 받아." 침대 위에서 유난히 시끄럽게 울려대는 진동때문에 누나를 등지고 슬쩍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윤두준] 나는 서둘러 전화를 꺼버렸고 순간 보이는 반지를 빼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왜 안받아?" "아..끊어졌어." "아...어쨌든...누나도 고민이 많네..아픈 동생 붙잡고 할 얘긴 아닌거 같다. 내가 나중에 다시 얘기해줄게!!" "...아니 괜찮은데.." "아냐. 아픈애 붙잡고 사랑고민 할때니 내가. 좀 쉬어. 아직도 많이 아파보인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뭐라고 하신거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 너 아픈게 속상하신건데 표현이 그럴뿐이니까." 누나의 말에 나는 누나 모르게 코웃음을 친뒤 그냥 웃었다. 세상에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 있냐고? 있다. 그냥 뭐라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있다는 것만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랄뿐. 어쨌든 누나가 쉬라면서 방의 불을 끄고 나가 어둠에 갇힌 나는 텅 비어버린 왼손 네번째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한번도 반지를 빼 본적이 없었다. 세수를 할때도, 머리를 감을때도 단 한번도 반지를 빼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내가 누군가가 보는게 무서워 반지를 빼버렸다. 정말 내 한심한 입장에 하도 울어서 굳어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 솟구쳐올라왔고 비어버린 손이 너무 어색해 지금 당장 반지를 빼는게 무서워 침대에서 더듬거려 반지를 찾아 다시 손에 끼웠다. 결심을 하게되면, 그때 반지를 빼서 윤두준한테 돌려줄거다. 근데 지금은...아직은 아니야. 똑똑- 지친 마음에 그냥 잠에 들려는 찰나 또 노크소리가 들렸고 조심히 들어오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동생..진짜 미안한데..전화 좀 받아볼래?"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누나의 난처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전화를 받았다. "여보..." 「전화 왜 안받아.」 귓속으로 파고드는 윤두준의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전화기를 놓칠뻔했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뭐냐는 듯 물어보자 누나가 정말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너가 너무 걱정된다고 하셔서..괜찮다고 말했는데..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너무 안좋아보여서 마음에 걸린다고 자상하게 걱정하길래...미안..." 하다하다...내가 연락을 피한건 내가 윤두준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생각을 해보지도 못해서 그런거였는데, 나와 연락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를 이용하는건...안된다. 참을 수가 없어. "..저 괜찮습니다. 아까 속이 좀 더부룩 해서 그런건데..걱정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인상이 차가워보여서 걱정했는데..승혜 누나도 아니고 동생인 저를 걱정해주실만큼 따뜻한 분인줄 몰랐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끊겠습니다." 「양..」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전화를 끊고 누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나까지 걱정할 사람이면..누나가 고민 안해도 되겠네." "..그치..되게 자상한 사람인가봐..난 그것도 모르고...정말..너무너무 좋다 두준씨. 정말..내가 여태까지 만나본 남자들 중에서 최고로 좋아. 너도 남자가 봤을때 그렇지? 좋은 사람인것 같지?" "..누나 나 좀 피곤한데.." 윤두준이 좋다며 수줍어하는 누나의 얼굴을 보는게 아직은 힘들었다. 아까 김태경네 집에서 먹었던 몇술 되지도 않는 미음이 또 넘어올 것 같은 울렁거림에 나는 침대에 누웠고 누나는 미안하다며 쉬라고 따뜻하게 말해준뒤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말..하다하다..윤두준..진짜... 누나가 눈치도 좀 없고 이렇게 저렇게 약삭빠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지, 세상에 맞선 본 여자 동생을 이렇게 직접 전화까지 바꿔달라면서 걱정해주는 사람이 어딨냐는 말이다. 걱정이야 그냥 그 앞에서만 대충 하는 척만 하면 되지 이렇게까지...정말 간 떨려 죽을 것 같다. 이렇게 계속 전화 피하면 누나를 통해서라도 연락을 하겠다라는 무언의 압력이 나를 더 조여왔다.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아직 할 말이 없는데 이렇게 계속 연락하고 그러면..나더러 어떡하라고. 그냥 오늘은 현실도피 해버리고 싶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죽을 것 같았으니까. #36. 몇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점심때라는건 알 수 있을만큼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마 내가 깬 것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가운 햇빛 때문이리라 생각하고 그냥 눈만 대충 부비적거린다음에 계속 누워 있었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너무 싫어 방엔 시계가 단 하나도 없어 지금이 몇신지 몰라 베개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어 폴더를 열었다. 차갑게 꺼져있는 핸드폰. 순간 이게 왜 꺼졌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나버렸다. 전쟁 같은 어제의 일이. 나는 일단 시간 부터 알아야될 것 같아 핸드폰을 켰고 11:23am 이라는 시간을 보고 나서 핸드폰을 닫으려는데 정말 미친듯한 진동이 손에서 울려댔다. 문자건 뭐건 계속 날아들어 혼란스러웠고 대충 보니 윤두준이 대부분, 그다음 기광이 김태경. 이렇게 세명이서 아주 내 핸드폰을 괴롭혀대고 있었다. 윤두준 문자는 보지 않아도 뻔할 것 같아 진동이 겨우 멈추자 기광이 문자를 대충 읽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개새끼야!!!!!」 "미쳤냐? 이게 아침부터.." 「너야말로 미쳤냐? 문자는 왜씹어? 전화는?! 그리고 핸드폰은 또 왜꺼놨는데!?!??!」 "전화랑 문자가 하도 와서 시끄러워서 껐다 왜!!!" 아침부터 소리지르게 만드는 망할 이기광놈. 「넌 너 걱정할 주변 사람은 생각도 안하냐!?」 "니가 내 걱정을 왜 해!!" 「..닥치고. 너 지금 어디야.」 "집. 이따 니네집 갈테니까 맛있는 것 좀 해놔라." 「...병신. 언제 올건데.」 "방금 일어났으니까..씻고 바로 갈게." 「어.」 전화를 끊고도 나는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순간 어지러움에 계속 누워있었고 누워있으면서 윤두준한테 온 문자를 다 살펴보았다. [어디야.] [전화 받아.]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몸 괜찮아?] [양요섭.] 전화도 무려 40통이 넘게 와 있었다. 그러게,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나한테 미리 말 해주면 좋았잖아. 부모님의 의지로 너네 누나랑 결혼하게 생겼다, 어떡하면 좋겠냐, 뭐 이런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될지 생각이라도 했을거아냐. 이렇게 사람 뒷통수 쳐놓고선 얘기하자고 매달리면 나는 지금 당잘 할 말도 없는데. 그리고 이미 나는 우리는 안된다라는 결론으로 마음을 먹고 있는데.. 이렇게 한들 만나서 얘기를 한다한들 달라지는게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또 윤두준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와서 그냥 핸드폰을 닫아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씻고 나왔다. 도저히 누나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지낼 수 없을 것 같아 며칠동안은 기광이네 집에 있으려고 속옷이나 옷가지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보니 모든 옷이며 뭐며 다 윤두준네 집에 있는데.. 그건 또 언제 어떻게 가지러 가야할지...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될 건 내 손에 반짝이고 있는 이 반지. 역시 마음과 머리는 만리길보다 더 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생각은 1촌데, 행동하기까지는 일년도 더 걸릴 것 같다. 가방을 대충 챙기고 나서기 전에 거울에 비춰본 나는 거의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다크서클은 턱밑까지 내려오고 안그래도 말랐단 소리 많이 듣고 살았는데 더 말랐다. 이건 무슨 피골상접이 따로 없네. 나는 이대로 그냥 나가기는 민망해서 대충 아무거나 모자를 하나 쓰고 나왔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는지 아주머니에게 학교에 일이 있어서 며칠 못들어올 것 같다고 전해달라고 한뒤 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며칠동안 집에 있다가 나온사람 마냥 햇볕은 왜그리 뜨거운지. 사람 태워 죽일 것 같다. 딩동- 딩동- 벌컥- "망할새끼!!!!!!" 나를 보자마자 내 등을 때리는 이기광에 나는 미쳤냐는 듯한 눈빛을 쏘아주며 거실 소파로 가서 드러누웠다. 아 더워.. "야 에어컨 좀 틀어봐." "..병신아!!!! 진짜..내가 니놈때문에.." 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해도 순순히 에어컨을 트는 기광의 모습에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 뒷모습이 누구랑 참 비슷해보여서 웃었다고 하면 내가 미친놈이겠지. "너 대체 어떻게 된건데? 형이 나한테도 연락해서 지금 나도 죽을 것 같다고!" "..뭐가." "뭐가?! 뭐가!? 야 너 지금 뭐가라는 말이 나오냐? 아 나 진짜 미치겠네.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건데!? 너 서울역 안갔냐? 그래서 지금 형이 화내는거야? 아 뭐야 대체!!!!!" 어제의 일을 얘기하자니 또 한숨부터 나와 가방부터 바닥에 내려놓고 기광이를 마주본채 앉았다. "상견례 자리에 갔어. 갔는데 윤두준이 있었어." "왜 거기에 있어!? ...뭐..뭐!? 왜!? 헐..씨발..내가..헐.." 기광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나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온지 아니지 아직도 헤어나오질 못했는데 너라고 말짱 하겠냐. "누나랑 결혼하는 사람이 태강 윤상우회장 아들 윤두준씨더구만. 몰랐지. 난. 그럴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왜냐면 누나가 나한테 선본 남자가 윤준섭이라고 얘기하길래 윤두준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래서 물어봤지. 그랬더니 준섭이라는 이름은 아명인데 나한텐 그렇게 얘기했음 좋겠다고 했다는거야. 나 갖고 장난을 친건지..뭐 어쩌겠다는건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난 그날 거기 가서 알았고.. 그런 상황에서 너같음 밥이 넘어가겠냐? 먹다가 또 중간에 나와서 아버지한테 존나 욕 처먹고.." "그럼 어제 어디있었는데?" "김..아니 친구네 집에." "친구 누구?" "그게 중요하냐 지금. 뭐 어쨌든 친구네집에서 있다가..내가 쓰러졌었는지 우리집 데려다주려고했던걸 걔네집에서 좀 있다가 집에 와서...뭐 그렇게 됐다. 일어나보니 오늘이고." 꽤나 담담했다. 어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것에 비하면 참...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내가 신기했다. 하루동안 나한테 닥친 일에 대해서 적응을 한건지. 아님 상황파악을 지나치게 잘 하고 있는건지. "그래서 너 어떡할건데? 형이랑 헤어지기라도 하려고?" "헤어지기라도 하려고가 아니라 헤어져야지." "...니가 왜!? 어째서!?"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계속 만나? 우리 누나랑 결혼할 사람이랑 계속 만나?" 결국 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결혼 막아야지. 어떻게해서든!!!" "어떻게 막을건데? 이미 집안끼리 서로 맘에 드는 눈치였고, 약혼은 9월쯤이 어떻겠냐고 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윤두준이랑 사귀는 사람은 나다. 라고 말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나한테는 내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야!!! 그래도 그렇게 손 놓고 있을거야!? 어떤 방법이든지 윤두준이랑 서로 머리 맞대고 궁리를 해야지!!! 그렇게 헤어지려고부터 생각하면.." "윤두준은 나랑 같이 방법을 생각해보려고도 안했던 사람이야. 미리부터 알고 있었을텐데, 나한테 미리 말해줬으면 뭐라도 어떻게 해볼거 아냐. 근데 내가 맨처음 안건 상견례자리야. 막아도 그 자리 만들어지기 전에 막았어야했다고. 이미 늦었어. 방법이 없어." 나는 또 쪽팔리게 차오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고 이기광은 나를 답답하단 눈빛으로 보고만 있었다. 그래 니가 생각해도 방법이 없겠지. 당사자인 나도 방법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데. "그럼..너 형이랑 누나랑 결혼하는 꼴을 보겠다고? 니 두눈 뜨고!?" "유학을 가든지 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 꼴을 보냐. 윤두준 아이 갖고 아이 낳고 잘사는 누나... 아무리 누나지만..보기 싫을 것 같다. 나도 사람인데." "..야...씨발..이게 말이 되냐?! 왜하필 하고 많은 사람중에 왜 하필!!! 윤두준이야? 좆같네 진짜. 누나는? 누나는 어떻대?" "..좋아 죽지. 윤두준이 그렇게 좋단다. 아주 좋아서 항상 발그레....좋아해야되는건지..뭐 어떻게 해야되는지.. 그렇게 좋아하는 누나 행복 깨고 싶지도 않고..그냥 내가 잠깐 괴로우면 되는건데 집안에서 난리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지금 당장이야 윤두준이랑 헤어지면 죽고 싶겠지만..뭐 사랑하다 헤어지는사람이 나만 있는것도 아니고 다 잊혀질거고...지나가면 이 또한 추억이리라 뭐 이런 말도 있잖냐 그러니까.." "병신. 시 쓰고 앉아있네. 지나가면 이또한 추억 같은 소리. 지랄하지말라그래. 그래 아예 윤두준이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게 된거라면 그래. 더럽고 치사하니까 떨어져준다. 하고 헤어질수도 있다치자. 이제 니 가족이 되는거야. 누나는 윤두준과 누나 얼굴을 똑같이 닮은 아이를 낳을거고 그 아이가 니 조카가 되는거야. 가족의 연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거라고 생각하냐?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는 항상 너한테 아이 사진 보내주고, 아이 자랑을 하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 너보다 누나가 윤두준에 대해 더 많이 아는 날이 올거야. 니가 그걸..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 그냥 죽으면 죽었지. 나같음 절대 못해."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터져나왔다. 정말 남앞에서 우는게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데..... 아무리 이기광놈 앞이라도 쪽팔린건 쪽팔린건데..... 나는 양 다리를 모아 곧추 세우고 그 다리를 끌어안아 몸을 동그랗게 말은 다음 양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이 눈물을 참아냈다. 그렇지만 이기광의 말이 너무 적나라하게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혀 상처로 남았다. 어떻게든 안울려고 다짐하면서 왔는데.. "그럼..나보고 어떡하라고. 난들 쉽겠냐!? 너보다 더 힘들어 새끼야. 몰라. 결혼 얘기 서로 오가면..나 그냥 유학갈거야. 아버지도 항상 날 보면서 말은 안해도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길 바라고 계시겠지. 그냥 나하나만 빠지면 모든건.." "형은 뭐래. 형 말은 들어봤어?" "형 말이 뭐가 필요하냐. 이미 집안에서 그렇게 정해버린걸. 형이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거냐?" "그래도 형 말 하나도 안들어보고 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고 있는건 아니냐고. 형도 무슨 생각이 있었으니까 너한테 숨겼을거아냐. 야 막말로 형이 니네 누나 좋아하기나 할것 같냐? 너라면 껌뻑 죽는 인간인걸 내가 다 아는데? 내가 아는 윤두준은 죽으면 죽었지 죽어도 니네 누나랑은 결혼 같은거 안할걸. 집안을 박차고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결혼은 안할거라고."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긴, 어쩌면 나는 너무 나만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윤두준의 마음이 어떤지, 어떻게 할건지에 대한건 물어보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채 나는 나만의 생각에 갇혀 아무것도 해보려 하지 않고 그냥 도망치려고만 했었다. 그냥 방법이 없단 이유 하나만으로. 윤두준의 말은 듣지도 않은채. 들어봐야 다 똑같을거라는 생각만으로. "결혼 안하면? 우리집안에선 누나 말이면 껌뻑 죽어. 윤두준이 안한대도 누나가 한다고 하면 이 결혼은 무조건 오케이야. 그리고...뭣보다 우리 누나 행복 깨기 싫어. 나만 힘들면 되지 누나까지 힘들게 하고 싶진 않다." "아 병신새끼야!!!! 윤두준이 어떤 생각하고 있을진 생각 안해봤냐고!!! 사랑이란게 일방통행이 되냐!? 쌍방통행이어야 사랑도 되는거라고!!! 그래. 니 말대로 너는 니네 누나 행복 생각한답시고 물러났어. 윤두준도 니가 그렇게 막강하게 나오니까 여차저차해서 결혼 하게 됐다? 이미 윤두준 마음은 너한테 있는데, 몸만 승혜누나 옆에 있는다고 그게 행복일 것 같냐? 누나가 아무리 착하고 눈치가 좀 없다손 치더라도 그정도의 느낌은 있어!! 이 남자가 다른 사람을 맘에 두고 있구나.하는 눈치는 있다고. 사랑받지 못한채 살아가는 여자는 생각해봤냐? 어!?"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내가..뭘 할 수 있냐? 말해봐. 내가 뭘 해야되냐고." 내 말에 그렇게 입을 신나게 놀려대던 이기광은 어디로 갔는지 내 앞엔 꿀먹은 벙어리만 있었다. 나도 이기광이 한 말에 대해선 익히 동감하고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면..뭐? 어떡해야되는데? 수백번 수천번 생각해도 이 일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다. 말그대로 답은 있는데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는 소리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문제. "..일단..형 피하지 말고..형이랑 얘기를 해. 헤어질건지, 아니면 집안에 맞서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야반도주...그래!! 야반도주 괜찮네!!!" "...소설 쓰냐? 야반도주가 말이 돼? 양쪽 집안이 그냥 평범한 집안이면..그래. 말이 될수도 있겠지. 부모가슴에 못 박는다 셈치고 그럴수도 있어. 근데 우리집안, 저쪽 집안..하나같이 한다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뒤져서라도 우리들 찾아낼 사람들이야. 태강은 전세계 어디건 공장이 없는 나라가 없고, 손길이 안뻗치는데가 없어. 그래 아마존이라면..숨어 살수도 있겠다. 근데 그렇게 살면..우리가 행복할 것 같냐?" "..하..씨발. 진짜 좆같네. 뭐 이딴 일이 벌어지고 지랄이야. 씨발. 아우!!!" 기광이는 짜증이 나는지 쿠션을 바닥에 집어던졌고 나는 그냥 다시 무릎에다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그나마 제일 현명한 방법은, 내가 물러나고 그 둘이 결혼을 하는것. 윤두준도 처음엔 적응을 하진 못하고 자꾸만 겉으로 떠돌수도 있지만 결국은 결혼이란게 현실이라고 자기한테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누나를 보면 마음이 변할거다. 남자란게..다 그런 동물들 아니겠는가. 나야 끔찍하겠지만, 그냥 미국이건 어디건 가서 살면서..어쩌다 한번씩 연락하면 잠깐만 괴로우면 되고 나도 지금은 윤두준이 좋아서 죽을 것 같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어디선가에서 만난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할 수도 있고. 모든건 시간이 약이니까. 결국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 "야!!!!!! 너 니네집 가!!!" 이 망할 이기광놈은 자고있는 친구의 엉덩이를 발로 열심히 까댔고 내가 귀찮아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그 이불을 휙 걷어내며 내 등을 퍽 때렸다. "아씨!!!!" "아씨!? 야. 너 니네집 가!!!!! 너 벌써 우리집에 3일동안 있었던거 알고 있기는 하냐!? 인간적으로...진짜...그럼 며칠동안 형이랑 연락 안한거냐?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거야!!!!야 얼른 가!!!!"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나... 하긴 그날 맘먹고 가방에 짐 대충 싸들고 와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냥 아무생각도 하기 싫어서 이기광네 집에서 지냈었다. 근데 그게 벌써 오늘로 3일째라니...시간 무섭게 지나간다. "아 오늘만." "오늘만은 무슨 얼어죽을 오늘만이야. 너 어제도 오늘만이라고 그랬지!? 당장 꺼져." "...집에 들어가봐야..어차피 누나 있을거고..아 끔찍해." "난 너 보는게 끔찍해!!! 지금 나한테 연락이 얼마나 많이 오는줄 아냐? 나도 너따라서 핸드폰 꺼야될 판이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형이랑 만나서 해결하고 와." 결국 이기광의 잔소리에 못이긴 나는 침대에서 쿵쿵 거리며 내려와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부터 했다. 대충 시간을 보니 오후 한시 십분. 어디 갈데도 없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봐야 숨 막힐 것 같아 그냥 멍하니 그동안 살이 좀 오른 내 얼굴을 보는데 문득 휘황찬란한 내 금발머리가 눈에 띄었다. 이 머리를 하고 있은지도 거의 이년이 다 되어 가는데...어느샌가부턴 이 머리가 정말 내 머리색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정도 들었었다. 근데..이 머리색을 이제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졌다. 왠지 더이상은 하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며칠동안 꺼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역시나 많이 와있는 문자에 지치지도 않는 윤두준을 생각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미리 말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거다. 나는 은근히 차오르는 배신감과 분노에 나한테 도착한 문자는 전체 삭제 해버리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수화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연결되는 통화. "여.." 「왜 이제야 전화해!? 어디야 지금!?!?」 하여튼 요즘 내 연락 기다리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아주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친구네 집. 이따 만나자. 두시까지 나올 수 있어? 학교 앞으로." 「어. 갈수 있는데..뭔 일 있었어? 왜 연락이 그렇게 안돼? 전화기는 꺼져있고?」 "그냥..별로 연락 안하고 싶은 사람한테 계속 전화와서 좀 피하느라. 그럼 이따 보자. 내가 밥 사줄테니까 밥 먹지 말고 나와." 전화를 끊은 나는 가방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자 옆에서 팔짱을 낀채 나를 바라보던 기광이가 입을 똈다. "...옛날부터 궁금했던건데..걔 누구냐?" "아 그냥 친구라니까!!" "..그때 너한테 번호 땄던 걔지?" "몰라. 나 간다." 내가 가방을 매고 일어나자 내 손목을 잡으며 다시 물어왔다. "걔랑 잘돼가냐?" "무슨 소리야. 친구라고!! 친구. 너랑 똑같은 친구!!!" "걔도 너 그렇게 생각해?" "아 헛소리 지껄일꺼면 밥이나 처먹어." 나는 기광이의 손을 뿌리친다음 신발을 신고 나왔고 여전히 나를 탐탁치않은 눈길로 보는게 느껴졌지만 김태경은 정말 친구다. 어떠한 사심도 들지 않는 그냥 친구. 이기광과 같은 친구. 6월 30일. 벌써 6월의 마지막 날이다. 햇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뜨거워져만 갔고, 당장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으로 숨고 싶어 마침 학교 가는 버스가 오길래 거기에 냉큼 올라탔다. 역시 버스는 에어컨이 빵빵하니 시원하다. 나는 늘 앉던 맨 뒷자리로 가 앉아 아이팟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금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윤두준 생각에 이렇게 무작정 연락을 씹는것도 너무 못된 짓 같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변명이건 뭐건 간에 윤두준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을텐데 이렇게 연락 안받고 그러면 화도 나고 애도 타고..사는게 사는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 끝에 미치자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잘지내고 있으니까 연락 그만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한거 알잖아.] 이 문자를 쓰기까지 여러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보내야 하나..이렇게 윤두준한테 하는 문자가 망설여지고 주저한건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냥 전송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역시나 바로 길게 울려대는 진동. [윤두준]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벌써 내릴 때가 다 되어 일단 벨을 누르고 뒷문 앞에 섰다. 그리곤 폴더를 열어 재꼈다. "여.." 「나와.」 화가 많이 난듯한 목소리였다. 하긴 내가 며칠을 잠적하고 있었던가...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내고 나올만한 입장은 아니라 생각했다. 누가 잘못한건데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 "나 지금 친구 만나러 왔어. 나중에 얘기해." 「어디야. 갈테니까 있어.」 "무작정 만난다고 해결돼? 나 아직 결정 못내렸으니까.." 차에서 내린 나는 정문 앞까지 슬슬 걸어갔다. 햇볕도 따갑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이 사람의 목소리도 따갑고. 「무슨 결정 내릴건데. 헤어지자고? 그딴 말도 안되는 소리 할거면 생각 하지마.」 "..그런 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받은거.." "양요섭!!!!!!!!!!" 감정이 상하려는 찰나 누가 뒤에서 나를 크게 부르더니 내 어깨를 감싸왔고 나는 순간 그 반동에 앞으로 튀어나가버렸다. 그리곤 너무 놀라 내가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고 핸드폰을 손에 쥔채로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 진짜!! 깜짝이야!!!!" "살아있긴 했냐?! 삼일동안 감감 무소식이더니? 뭐하고 지냈어!!" "니가 알아서 뭐하게. 아 진짜..깜짝 놀럤네." 나는 아직도 놀란 마음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김태경을 노려보는데 김태경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실실 거렸다. 밸도 없는 놈. "너 근데 아직도 아픈거 아냐? 얼굴이 왜이렇게 창백해? 헤엑..이 다크서클봐." 맨처음 봤을땐 이렇게 촐랑거리는 이미지는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게 맞는 말인가. 맨처음엔 무게잡고 좀 이상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기분 안좋을때 같이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사람 기분을 좋게만들어주는....그런 사람이라고 해야되나.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얼굴에서 손 떼시지?" "비싼척 하기는. 너 근데 지금 전화하고 있는거 아니냐?"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윤두준과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아. 여보세요?" 「옆에 누구야.」 "친구.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 「당장 만나. 어딘데 지금.」 "나 지금 친구랑 만나고 있다고. 끊어."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 지금 당장 만나서 뭐 어쩌자는건데. 그리곤 그냥 전화기를 꺼버렸다. 내가 점점 못되고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는건 알겠는데.. 지금 당장은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안된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한들, 윤두준의 얼굴을 보면..그 말들이 분명 안나올텐데..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분명 윤두준의 얼굴만보면 내 다짐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릴까봐. 무서웠다. "뭔 전환데 그렇게 살벌하게 받냐." "..그냥. 야 미용실 같이 가자." "뭔?" "머리색 좀 바꿀라고." "이쁜데..그냥 냅두지? 스타일리쉬하고 괜찮잖아." "싫어. 바꿀거야. 미용실 같이 가주면 내가 밥 사줄게." 내 단호한 태도에 김태경은 알았다며 자기가 잘 아는데 있다면서 나를 끌고 갔고 순간 남자 둘이 미용실 가는게 좀 이상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할때쯤엔 이미 내 몸은 미용실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염색..다시 하려구요." "아..어떤 색으로?" "..색깔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미용사는 나한테 염색머리가 잔뜩 끼워져 있는 책자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색으로 할까 망설이다 김태경의 말대로 다크브라운으로 하기로 했다. 뭐 얼굴이 하얘서 이렇게 계속 밝은 색을 하면 사람이 가벼워보인다나 어쩐다나 한번쯤은 어두운 색을 해도 괜찮다며 추천해주었고 나도 뭐 딱히 마음에 드는 색은 없어 다크 브라운으로 선택했다. 이제 정말..하나씩 하나씩 윤두준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없애버리기로 했다. "...괜찮다!!!! 염색 완전 잘됐네!!" 두시간이 미처 되지 않았을무렵 내 머리색은 금발이 아니라 약간 무거운 다크브라운으로 변해있었고 생각보다 괜찮은 내모습에 나도 나름 만족스러워 거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좀 나이 들어보인다. 너 원래 동안이긴 한데..이제야 니 나이를 찾았다고 해야되나? 어쨌든..훨씬 낫다." 이년 가까이 금발머리의 내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머리 하나 바꾼건데도 사람 인상이 달라보일 수 있다니, 왠지 이정도의 색깔이면 아버지한테도 더이상 꾸중은 안들어도 될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점잖은 스타일이었으니까. 뭐 그렇다고 검은색만 하겠냐만은. "야 여기 봐봐." 김태경은 갑자기 핸드폰을 대더니 사진을 찍어댔고 내가 하지말라며 핸드폰에 손을 뻗칠때쯤엔 이미 자기 머리를 내 머리 옆에 갖다대놓고 같이 셀카를 찍어댔다. "이야...잘나왔네. 이쁘다." 김태경은 내 머리를 부비적거리더니 볼을 꼬집었고 이런 행동들 조차 누가 나한테 늘 했던거라 갑자기 슬퍼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금발로 바꿀까 하는 아주 작은 망설임이 들었지만 이제 더이상은 안된다라는 생각에 미용실에서 나왔다. "밥 뭐 먹을래? 니가 골라." "...올...아싸...그럼 피자 먹자. 피자 땡기네." 미스터피자에 들어간 나와 김태경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피자를 골랐다. 샐러드 그릇을 들고 가서 자기가 먹고싶은것만 퍼오겠다며 짓궂게 웃는 김태경에 점차 기분이 나아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을 편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사람임엔 틀림없었다. "..야..존나 잘생겼다니까..번호 따볼까? 야. 안주면 어떡해?" "일단 해봐. 줄지도 몰라. 같이 온 사람도 친구잖아. 여자친구 없을걸. 반지 없잖아. 가서 도전해봐." 나는 내 바로 뒷 테이블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러면 안된다는건 알았지만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여자들 두명이 있었는데 시선을 따라가니 뭔 샐러드를 푸는지 싱글벙글 거리면서 집는 김태경이 있었고 아무래도 김태경이 마음에 드는지 여자 둘이서 망설이고 있었다. 하긴..내가 봐도 저렇게 잘생겼는데..여자들이야 혹하고도 남았겠지. 내가 싱긋 웃으면서 김태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김태경이 나를 보더니 윙크를 하는게 아닌가. 난 순간 당황해서 쳐다보는데 뒤에 여자들은 자지러지고 난리가 났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니. 모처럼 재밌는 상황에 나는 팔짱을 끼고선 여자들이 어떻게 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김태경이 샐러드 그릇을 들고 오려는 찰나 뒤에있던 여자들 중 한명이 김태경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이 나와 최대한 안웃는척 하려고 입을 가리고 그 둘을 쳐다보는데 김태경에게 대쉬하는 여자도 이쁘장하게 생겼다. 눈도 크고 얼굴은 작고.. 몸매도 마르고 이쁜게.. 나같으면 거절 안할것 같은데 김태경이 어떻게할까, 궁금한 마음에 주의깊게 쳐다봤고 김태경은 난처한지 여자를 쳐다보다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를 왜봐!? 김태경은 나를 계속 보더니 여자한테 뭐라고 뭐라고 하고는 나한테 왔다. 바로 뒷테이블이라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기가 좀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여자들 둘이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뭐라고 했어?" "아 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 있어!? 누군진 몰라도..저 여자 되게 이쁘게 생겼던데..." "별로 내 스타일은 아냐." 나는 포크로 푸실리나 집어먹으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이쁘게 생겼지만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궁금한게 있는데..물어봐도 되냐?" "뭔데." "너랑..사귀는 사람은..어떤 사람이냐." 순간 나는 할말을 잃었다. 윤두준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설명을 하기전에 또 울어버리는건 아닐까 망설여지는 와중에 마침 피자가 테이블에 나왔고 그냥 거기에 빠진척 하며 못들은 척 했다. "말해봐. 어떤 사람이냐고." "..그냥..멋있는 사람이야." "니눈에야 당연히 멋있겠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그냥 내 입에서 얼굴을 떠올리고 세세히 묘사하는게 힘들 것 같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목에서 목걸이를 풀어 내밀었다. 이에 김태경은 사진을 보더니 그것도 말없이 한참을 봤고,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피자를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곤 뭘 그렇게 보는지 김태경은 꽤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나한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목걸이까지 하고다니냐.." "뭐." "..얼마나 만났냐?" "몰라. 이년 다돼갈걸." "...씨발." "어디서 욕이야 이게!" 나는 우씨 하면서 피클을 집어먹었고 김태경의 표정은 좋지않았다. 나는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할뻔했지만 이미 얘는 나한테 친구였기 때문에 더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지금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신경쓸 여유도 틈도 없었다. 지금 나는 이 피자가 어디 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없었으니까. "너 근데 안좋은 일 있냐? 왜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안색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이거..그냥 궁금해서 묻는건데...만약에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니 친 누나랑 결혼할 수 밖에 없음 넌 어떡할거냐?" "무슨 그런 좆같은 일이 있어." "있다고 치면." "..뭐..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서..나를 더 좋아하면 절대 안놓치는거고, 누나를 더 좋아하면 누나랑 되게끔 물러나는거고. 근데 그거 니 얘기지?" 나는 갑자기 피자 입맛이 뚝 떨어져서 먹던 피자를 그릇에다 놓고 그냥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저렇게 재밌게 웃고 다니는데... 새삼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부러워졌다. "고민하지 말고..니가 어떻게하면 행복할지나 생각해라. 헤어지는게 더 행복할것 같음 헤어지는거고 계속 만나는게 행복하면 계속 만나는거고. 남의 행복 신경쓰다가 니 행복 못찾으면 그거야말로 병신이지." 남의 행복 내 행복. 별로 그렇게 딱 나눠서 생각해본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냥 윤두준이 행복한게 내가 행복한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고, 누나가 행복한게 내가 행복한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렇지만 나한테 닥친 일에서 내 행복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 행복을 위해선 누구 하나 상처입고 힘들어져야되는데..그건 우리 누나 였으니까. 여태까지 누나가 나한테 해준 희생이 얼만데...절대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힘들더라도 누나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 윤두준과 같이 있어서 누나가 행복할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 누나는 윤두준과 같이 있는게 행복한것처럼 보이니까. 그렇다면 그걸 내가 지켜줘야되는건 아닐까? "야. 울어!?" 이렇게 멍때리고 있음 꼭 이런 사단이 났다. 더 울기전에 집에 가버려야지. "..울긴 무슨. 야 안먹을거면 가자. 너 이거 집에 갖고가서 먹어." "별로. 피자 식으면 맛없어. 너나 집에 갖고 가서 많이 드세요. 여기 이거 포장좀 해주세요." 결국 김태경의 주장대로 내가 피자박스를 들었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는걸 억지로 억지로 말렸다. 바빠보이는 애 시간 뺏은것 같아 미안한데 무슨 집까지... 나는 기어코 버스에 혼자 냉큼 올라탔고 비로소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머리는 윤두준이 그렇게 좋아하던 금발이 아닌, 다크브라운으로 해놓고. * "..다녀왔습니다." 나는 유일하게 나를 반기는 아주머니에게 피자 박스를 넘겨준뒤 그냥 2층으로 올라와 바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뭔놈의 집이 들어오기만 하면 진이 빠지냐.... 손목시계로 시간을 보니 대충 여섯시가 다돼가는 시간에 또 아버지가 올 시간이군 싶어 엎드린채로 가만히 있었다. 똑똑- 또 잠에 들었나보다. 요즘은 머리 굴리는 날이 많아서 머리만 대면 잠에 들었다. 아무래도 자는게 현실도피라는걸 몸도 아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대충 대답한뒤 문을 쳐다보는데 아주머니인지 나한테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저녁 먹어. 아버지도 오셨어." "...왜 아버진 맨날 일찍 들어와요!?" "...의원님 들으실라. 얼른 내려와. 그리고 머리색 이쁘다. 이게 훨씬 이뻐." 역시 이 머리가 훨씬 나은가.. 뜻밖의 칭찬에 쑥쓰러워하며 나는 내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어색하긴 한데..이게 나은가..모르겠다. 별로 배도 안고픈데 또 안내려갔다가는 며칠동안 집도 비웠는데 불호령 떨어질 것 같아 1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근데...왜.. "동생. 두준씨가 식사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근데 머리 바꼈네?" 얼굴을 보니 또다시 손이 벌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만나면 어떻게 얘기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 조차 펑-하고 날아가버렸고 아무생각이 안들었다. 왜. 무슨 생각으로 들어와서... "머리 색...괜찮구나. 앞으로 그렇게 하고 다녀라." 아버지의 칭찬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윤두준만 눈에 들어와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윤두준의 옆에 앉히는 바람에 얼떨결에 앉긴했는데 내가 왜 윤두준의 옆에 앉아야되는지. 자리를 바꾸려고 일어나는 찰나 윤두준이 내 손을 잡아왔다. 앉아 라는 말을 입모양으로 뻥긋한 윤두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옆에 앉았고 나만 빼고 가족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아버지는 나한테 하던 그 엄한 말투가 아니라 부드러운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나만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것 처럼 겉도는 느낌이었다. 오로지 드는 생각이라곤 얼른 밥을 먹고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뿐. "그때 얘기를 마무리 짓지 못해서 좀 아쉬웠는데...약혼은..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승혜랑 얘기 해봤고?" "저희 나이도 나이인 만큼..약혼은 너무 이른것 같습니다. 아직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니까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윤두준의 단호한 어조에 아버지 조차도 그렇게 나올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하는 기가 엿보였다. "..그래도 집안끼리 약간 재촉하는..." "저는 이제 스물여섯이고 승혜씨는 이제 스물넷입니다. 아직 경험해야할 것도 많고 결혼이 시급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아직 결혼까지는 생각이 없어서.. 저는 부모님께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윤두준의 말에 누나 또한 약간 실망한 기가 얼굴에 비췄고 아버지 또한 당혹스러워했으나 윤두준의 말에 틀린것이 없어 뭐라고 꼬투리는 못잡겠는지 허허허 하고 웃으며 다시 밥을 드시기 시작했다. 대체 뭐 어떡하자는건지. "..속이 안좋아서..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너는 맨날 어디가 그렇게 아프냐? 병원은 가봤어?" "병원까진 갈 건 아닌 것 같아 안갔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윤두준이 내 손을 잡아오려는 찰나 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어쩌자고 집에 처들어와서는 내 앞에서 결혼 얘기를 운운해. 갑자기 또 터져나오려는 울음에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책상앞에 앉았다. 별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뭐라도 펼쳐놓고 집중해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 윤두준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좋은 마음이 드는건 또 어쩌겠다는건지. 똑똑- 하여튼 요즘 내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누나나 아주머니 둘중에 한명이겠거니 싶어 그냥 문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근데 들어온 사람은 무슨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아 무슨 일 이냐며 등을 돌리는데... "방이 왜이렇게 휑해?" "...나가." 이젠 하다하다..누나가 보면 어떡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와서는.. "머리 왜 바꿨어." "나가라고 당장!!!" "머리 다시 금발로 해. 내가 딴색으로 바꾸지 말랬잖아." 며칠동안 못본사이에 윤두준도 참 많이 말라있었다. 워낙 체격이 좋은 사람이라 확 말랐다라고 느낄 정돈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눈엔 마른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도. 여전히 반듯한 검은색 재킷에 하얀 와이셔츠,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바지. 올블랙을 좋아하는 윤두준은 항상 이 차림을 좋아했고 나도 그런 윤두준이 멋있어서 좋아했었다. "나가...좀!!! 누나가 보면 어떡하려고!!" "말하고 들어왔어. 너랑 친해져보겠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아무 의심 없이 들여보내주던데?" "...형!!!!" 윤두준은 내가 가슴팍을 밀치며 내보내려해도 내 힘은 거뜬히 이기는 그로선 나를 살짝 밀쳐놓고 침대로 가 아무렇지 않게 걸터 앉았다. 그리곤 내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아내더니 꺼놨던 핸드폰을 켜서 뭔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뭐해 지금!!!" "이새끼가 김태경이야?" 나는 윤두준이 다리를 꼬고 앉아 보고있는 내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고 거기엔 아까 미용실에서 같이 찍은 셀카를 김태경이 사진 잘나왔다며 보내준 멀티메일이 있었고 나는 그냥 핸드폰을 감춰버렸다. "그새끼 싫어. 만나지마."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좀 나가!!!" 나는 윤두준을 내보내기 위해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고 끌어내려는데 나를 확 끌어당겨 끌어안아버렸다. 피해야되는데, 밀치고 일어나야되는데 그 품이 너무 익숙해서..너무 그리웠던 품이라서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미안해. 미리 말 못한거 미안." "...놔.." "너 모르게 내가 다 해결하려고 했어. 사실 그 상견례 자리도..나가서 안된다고 못한다고 말 하려고 했어. 내가 그렇게 대놓고 싫다고 해버리면 니네 누나도 자존심이 상해서 결혼 안한다고 할거고 그래서 난 그걸 바라고 그런건데..니가 나올줄 몰랐어. 내가 너 세시까지 나오랬잖아. 거기 왜 왔어." "장난해? 그것도 지금 변명이라고." 윤두준은 나를 계속 꽉 끌어안으며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니가 그렇게 당장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으로 뛰쳐나가는데..나도 머리가 새하얘져서 말 못했어. 화장실 가서 안오는 너가 걱정돼서 지금 무슨 얘기가 오고가는건줄도 몰랐고. 너 그렇게 가고 나서 나도 그냥 나왔어." "..이미 늦었어." "안늦었어. 얼마든지 파토 낼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믿고..." 나는 윤두준의 품에서 억지로 빠져나왔다. "형 그냥 누나랑 결혼해." "...뭐?" "결혼해서 누나 행복하게 해줘. 그럼 그게 내가 행복한 길이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그런 생각할거면.." "나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우리 누나 형 많이 좋아해.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해. 그러니까..누나 상처주지 말고. 우리 누나 이쁘고 착해.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니가 아니잖아. 이쁘고 착한건 상관없어. 니가 아닌데." 나는 윤두준의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려니까 또 참아왔던 눈물이 흘렀다. 이놈의 눈물 안나오게 하는 수술 없나. "...앞으로 이렇게 집에 불쑥불쑥 찾아오지마. 형 보는거 힘들어. 나 형 안좋아할거야. 이렇게 된거..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넌거고..이제 형이랑 나랑은 모르는 사이야. 아는척 하지도 말고..아까같이 그렇게 간떨리는 짓은 더더욱 하지마." "양요섭." "이름도 부르지마. 이제 오지마. 연락도 하지말고. 나 형 잊을 수.." "그럼 그 반지부터 빼." 윤두준의 손과 내 손에 끼워져있는 똑같은 반지. 나는 그 반지를 살짝 쳐다봤다. 빼려고 했지만..도저히 오른손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직..이 반지를 빼버릴 내공은 안되나보다. "...알아서 뺄거니까. 나가." 윤두준은 내 반응에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고 나한테 다가오더니 또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그의 가슴팍을 치며 발버둥을 쳤음에도 윤두준은 그 매질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안은 손은 끝끝내 풀지 않았다. 결국 제풀에 지친 나는 양팔을 내리고 차렷자세로 그에게 안겨있었고 윤두준은 나를 더욱더 꽉 안았다. "..다 보여. 그렇게 애안써도 니가 나 좋아하는거, 니가 나 못잊는거 눈에 훤히보여. 그거 연습하려고 내 전화 문자 다 씹었어 양요섭?" "..그런거..." "너마저도 나 싫다고 도망가버리면..나 진짜 주저앉을지도 몰라. 나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너가 나 안아주고 위로해줘야지만 다시 힘내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니가 먼저 힘들다고 피해버리면 나 어떡해. 도망가지마. 내 옆에 있어. 여태껏 그랬던 것 처럼 옆에 있어." "...지금 그게 말이 돼!? 상황파악이 안돼? 형은 지금 우리 누나랑 결혼할 약혼자야. 그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그럴일 없어." "진짜 좀!!!!" 내가 윤두준의 어깨를 밀치자 윤두준은 내 양어깨를 뼈가 바스라질정도로 세게 붙잡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내 입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걸 피하기 위해 고개도 돌리고 애를 썼지만 내가 하도 반항을 하니 윤두준은 내 양손목을 꽉 잡았고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계속 쫓아오며 내 입을 탐했다. 나는 행여나 누가 들어올까봐 무서운 마음에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피해지질 않았다. "..문자 씹지말고 전화도 씹지마. 하루에도 수십번씩 전화할거니까 전화 받아." "싫어." "그럼 맨날 집에 찾아온다. 맨날 와서 너 간졸아붙게 니네 누나 앞에서 이렇게 은근히 끌어안고 허벅지도 만지고 손도 잡을거야. 그래도 좋아?" "지금 협박해!?" "어. 협박해. 나 지금 눈에 보이는거 아무것도 없어. 맘만 먹으면 니네 누나 앞에 가서 보란듯이 너랑 키스도 할 수 있어." 나는 눈물이 꽉찬 눈으로 윤두준을 바라보았다. 얼마전까진 우리 행복했는데 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거야말로 병신같은 생각이니까. 지금 현재는 행복하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궁리를 해야만 했다. "...나 좀 봐주라." 윤두준은 나를 다시 안으며 말했고 나는 차마 그의 등을 감싸안아줄수가 없어 그냥 눈을 감았다. 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도 힘든데, 가지말라고 이렇게 잡으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대체.... "잘 먹고, 잘 자. 하루에 한번은 꼭 보러 올테니까.. 너는 그냥 아무생각하지도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있어." "..싫어." "또 말 안듣지!" "들을 말을 들으라고해. 형이 하겠다는 짓이 우리 누나한테 상처주겠다는거잖아. 그걸 내 두눈으로 똑바로 보라고?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고 도망치면 도망쳤지 그꼴은 못봐. 그러니까 내가 자살하는꼴 보고싶으면 어디 우리 누나한테 상처 줘봐. 누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라도 나면 내 몸에서 피 한방울씩 나는거라고 생각해. 못할것 같애? 그까짓거 칼로 손목 그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렇게 해도 안죽는다드라. 그냥 형 보란듯이 긋지 뭐." "...말 그렇게 할래!!!!!" 윤두준은 정말 화가났는지 소리를 질렀고 나도 이제 더이상은 무서운게 없었다. 이렇게 된거..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러니까..우리 누나 상처 주지마." 나는 눈물을 닦으며 윤두준한테서 뒤돌아섰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말 그 순간 다리의 힘이 풀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무슨 정신으로 윤두준을 봤던건지도 생각이 안나 그냥 기가막혀 웃어댔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야. 세상에 이런일이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 나한테..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책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고 더듬더듬거려 핸드폰을 집어들어 화면을 보자 [이기광] "여보세요." 「형 만났어?」 "..어." 「진짜!? 뭐라고 그랬어!?」 "..몰라. 근데 왜." 「어. 야 너 영어 과외 하나만 해라.」 이새끼가 미쳤나 진짜. "돌았냐? 헛소리할거면 끊어." 「야. 너 그렇게 정신 어지럽고 그럴때 뭐 하나 집중할게 있어야되지 않겠냐? 너 그러다가 정신 놓고 살까봐 무서워서 안그래도 과외자리 들어온건데 너한테 넘기는거야. 너 해라. 옆에서 보는 내가 걱정이 돼서 살 수가 없다.」 "시끄러. 내가 누구 가르칠 입장이냐. 정신없어죽겠는데." 「그러니까 하라고. 과외 준비 해야되니까 그거때문에 공부하다보면 잠깐이라도 잊을 수도 있고, 과외하러가야되니까 그렇게 맥놓고 살진 않을거 아니냐. 어? 」 "..몰라." 「야 너 하는걸로 한다!?!?!?? 그리고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이거 원..옆에서 보는 사람 가슴 쪼그라들어서 살겠냐?! 끊는다!!!」 사실 과외를 할 정신도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기광이 말대로 이대로 영영 맥 놓고 살것 같기도 하고 뭐 하나 내가 할 일이 있어야 그래도 정신차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못이기는척 오케이했다. 근데 사실 잘할 자신도 없고...지금은 무엇보다 몸이 너무 지쳐버려서...아무생각도 하기 싫었다. #37. "...으..." 밤새 잠을 자는둥 마는둥 했더니 몸이 축나기 시작했는지 온몸 구석구석 안아픈 곳이 없었다. 그중에서 제일 아픈건 머리. 누가 망치로 뽀개는 듯 머리가 미친듯 아파와서 두통약을 하루라도 먹질 않으면 시간을 견뎌내질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힘든건 미친듯이 울려대는 핸드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꺼놓는다해도 잠깐이라도 켜면 미친듯이 날아드는 수십통의 문자때문에 정말 미쳐버릴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젠 아예 문자도 전화도 무음으로 해놔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쉴새없이 불이 반짝반짝 거리는 핸드폰만 보면 그 내용을 읽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나는 새벽에 신경질이 나서 바닥에 핸드폰을 던져버렸는데 그냥 거기다가 냅둘수는 없어서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오전 11시 14분. 요즘은 항상 이런 시간에 일어났다. 새벽 세네시가 되어야만 겨우 잠이 들어서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찍 일어나고 싶어도 마음같이 안됐다. 모든 생활패턴이 흐트러진것 같아 짜증도 나기도 하고 뭐 이런저런 마음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마침 전화가 울렸다. [이기광] "여보세요." 「웬일이냐? 단번에 받고?」 "방금 일어났어. 왜." 「어. 어제 말했던 그 과외자리 말인데. 이따 한시까지 그 집에 가보라구. 너 이제와서 안한다는 소리 하지마라. 이미 학생네 집에 니 신상정보 다 넘겼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일을 한다는건 무리였지만 정말 기광의 말대로 요즘은 방학이라 공부하는 텀이 좀 수월해져서 맘잡고 공부를 해보려해도 쉽지 않았는데, 과외준비하면서 공부하고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현실도피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것 같긴했어도 그냥 하기로 했다. 이참에 돈도 벌고 좋지 뭐. "할거야." 「그래. 잘생각했다. 학생네 집 주소는 문자로 쳐서 보내줄테니깐 한시까지 늦지말고 꼭 가!!!」 "어. 생각해줘서 고맙다." 「나아니면 너같은놈 누가 신경써주냐? 그럼 끊는다. 아. 밥 챙겨먹고. 밥생각없다고 거르지마라.」 말은 저렇게 딱딱하게 해도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게 듬뿍 느껴져서 전화를 끊고 한참을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저렇게 맑고 나뭇가지는 앙상했던것 같은데 어느새 잎을 돋워 푸른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 완연한 여름이라는게 느껴질정도로 살랑히 부는 더운 바람에 나는 또 멍해져버렸다. 나도 그냥 아무생각없이 시간이 흐르는대로 물 흐르는대로 살고 싶었다. 봄이 가면 여름이오고, 그럼 가을이 겨울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그냥 딱 남들처럼만 살고 싶었다. 근데 왜 나는 이렇게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일을 겪고 있는건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정말 없는건지. 근데 원래 인생이란게 장기판과 같다고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장기를 두는 사람은 다음 수가 보이지 않아도 옆에서 보는 사람은 모든게 다 훤히 보여 훈수를 둘 수 있다고 그러니 자기네 인생 또한 너무 가까이서 보려하지말고 조금 멀리 떨어져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렇지만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 나에게 닥친 일을 볼 여유는 없었다. 내가 시간을 가지려고 해도 주위에서 날 가만히 냅두질 않았으니까. 난 결국 또 미친듯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기광의 말대로 밥은 먹어야 될 것 같아 대충 깨작이고 올라와 씻고 가방을 챙겼다. 그러고보니 내가 가르칠 애가 몇학년인지, 이름은 뭔지 아무것도 몰랐다. 뭐 이런게 다있어. 일단 내가 쓰던 영어문제집 세권정도를 챙겨 넣고 지갑, 필통 정도를 넣은뒤 가방을 맸고 이미 도착해있던 기광이의 문자를 확인했다. 신사동? 여기서 신사동은 또 어떻게 가야되는거야 대체. 나가서 택시를 타야겠단 생각으로 일단 집 밖으로 나왔다. 모자라도 쓰고 나올걸 그랬나..햇빛이 생각보다 너무 강렬해서 선크림도 바를걸 하는 후회까지 만들었지만 모든게 다 귀찮아 마침 운좋게 집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겨우겨우 붙잡아 타고선 이어폰을 꽂았다. [가슴이 멈추질 않아 이별을 말하고도 한동안 사랑했잖아 아직까지 그런듯 한데 아픔이 가시질 않아 다시 몇번을 참아봐도 너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이들어 내겐 너뿐인데.] 갑자기 문득 귓속으로 들어오는 가사에 울컥해버렸다. 이젠 하다하다 노래 듣고 청승맞게 눈물까지 맺히려고 하다니. 노래 가사에 공감하고 울어보긴 또 처음이다. 이런건 노래 가사에서나 들어봤지 이따위 짓을 내가 하고 있을줄이야.. 정말..이젠 아무것도 못하겠다. 울기 싫어서 노래도 못듣겠고 윤두준의 전화건 문자건 아무것도 확인 못할거고 멍하니 있지도 못하겠다. 잠시라도 멍해지면 그건 온통 윤두준의 생각으로 가득차버려서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윤두준으로 잠식되어버렸다. 밥은 잘 먹고 있을까, 내가 연락을 받지않아 애가 타고 있을까, 걱정하고 있을까. 잠은 제대로 자고 있나 내걱정을 많이 하는건 아닌가, 화가나서 누나한테 확 불어버리면 어떡하나. 윤두준의 생각으로 시작해 항상 윤두준의 생각으로 끝을 맺어버렸다. 아니지, 끝을 맺은건 아니다.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아마 윤두준을 생각하는 것이 끝나진 않을거다. 그냥 잠시 멈춰진 것 뿐이겠지. 나는 틈만나면 꺼두는 핸드폰을 다시금 켰다. 지치지도 않는 윤두준이다. 누가 악바리 아니랄까봐..나한테 쌓인 문자만해도 하루에 백통은 넘었다. 이게 무슨 윤두준 전용 핸드폰도 아니고..처음부터 끝까지 간혹 있는 김태경과 이기광 빼면 다 윤두준의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나를 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안된다는걸 자기도 뻔히 알텐데, 분명 윤두준도 나처럼 방법이 없을텐데 뭐 어떡하겠다고 나한테 자꾸만 이러는건지..답답하기만 했다. 나한테 그렇게 죽자고 매달리는 윤두준이 안타깝기도 해서 더이상은 이렇게 무작정 연락을 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뭐 연락하지말라고 안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알아듣게 타이르면 뭔가..깨닫는게 있지 않을까. 나는 무작정 통화버튼을 눌렀다. 또 잠깐의 선택이 두려워져서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핸드폰만 쥐고 사는 사람마냥 단번에 받았다. 신호음이 들리지도 않았는데. 「밥 먹었어?」 전화를 받은 첫 말이 밥먹었냐는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우리가 늘 지냈던 그런 날들처럼 전화를 받아서 나는 순간 우리한테 아무일이 없었나 하는 착각까지 일었다. "..." 「밥 굶지말고, 잠 제때제때 자고.」 "..형이 맨날 문자하고 전화하니까 신경쓰여서 그렇게 못해." 「어차피 문자나 전화같은거 해도 너 안받잖아.」 "서로 시간을 갖자. 형이 나한테 이렇게 자꾸만 연락한다고 해서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어. 형도 현실적인 방법 없잖아. 떨어져서 냉철하게 생각하고.." 「그러면 니입에서 나올말 뻔하잖아. 헤어지자는거 아니야?」 윤두준은 이미 내 머릿속을 다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해선 뼛속까지 아는 사람이라 그 앞에선 거짓말도 안통한다. 안아픈척해도 아픈걸 알고, 괜찮은척해도 안괜찮은걸 아는 사람이라서 내가 더 힘들다. "..일단은..이렇게 나한테 무작정 연락하지마. 형이 그러면 그럴수록..나 계속 도망치고 싶어지니까." 「도망쳐도 내 손바닥안인거..몰라?」 "그건 안도망쳐봤으니까 모르는 일이지. 내가 한순간에 없어져버리면..어떻게 찾을수 있는데? 어쨌든..연락안받는데도 계속 하는 형도, 그리고 피하는 나도 힘드니까 그만하자. 더 지쳐." 「...내가 더 힘들거란..생각 해본적 없지 너.」 "...." 「너한테 나는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 안해준 배신자, 니네 누나한테 상처주는 못된놈, 싫다는 너 붙잡고 매달리는 끈질긴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내말이 틀려? 근데..니가 나 힘들게 하면 할수록 그 화살..니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한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거 알았으면 좋겠다.」 "협박.." 「협박 아니야. 니가 니네 누나 생각하듯이 나도 너만 생각할거니까 끝까지 가보려거든 마음대로 해. 사람이란게 다 이기적인거니까 너도 니 멋대로해. 나도 내 멋대로 할거니까.」 나는 그냥 윤두준의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금껏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제보니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칼자루보다 더 강한 것이 윤두준에게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고 결국 모두가 다 상처를 받는. 그런 일이었다 지금 나한테 벌어진 이 기막힌 일이. * "..지금..고3이라구요?! 근데 저한테..." "방학때만 단기로 스퍼트 내려구요. 해주실수 있으시죠?" "저..일학년이에요. 학생이랑 한살밖에 차이 안나는데..이렇게 중요한 때에 저한테 맡기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저 아직 미숙하고..과외는 해본적도 없고..." "연대 경영학과생이면 충분히 믿을만해요. 요섭군..아 이렇게 불러도 되나? 아들같아서.."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상관없어요. 아니..근데 제가 자신이 없어서..." 예비 고3도 아니고 진짜 고3이란다. 아니 과외라고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고3을 맡을수가 있지? 게다가 나한테 믿고 맡기겠다는 이 어머님의 태도는 또...뭐지? "그럼 하는걸로 알겠습니다. 수업시간은 어떻게...?" "..네? 아 저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왔는데..일주일에 세번..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루에 한시간 반씩..." "그럼 과외비는 얼마나 드려야 하나..팔십 정도 드리면?" "에!? 아니 그렇게까진!!!!!!!! 그냥 아무렇게나 주셔도 돼요..저 정말 자신 없는데.. 지금이라도 안하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너무 큰 부담 느끼지말아요. 어차피 한달이나 두달정도 단기로 스퍼트 내려는거니까." 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어머님을 닮았다면 굉장히 미인일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남잔지 여잔지도 모르는구나. 하여튼 이기광 일처리 이따위로 하는건 알아줘야된다. "..그..그럼 혹시라도 맘에 안드시면 당장이라도 자르셔도 되니까요.." "알았어요. 맘에 안들면 확 잘라버릴테니까 걱정말고 우리 아들 공부 열심히 가르쳐줘요. 알았죠?" 아..아들이구나.. 확 잘라버릴테니까 라고 말할때 인자하게 웃는 어머니의 인상은 참 좋았다. 되게 젊어보이시는데 고3씩이나 된 아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무엇보다 내가 가르치게 될 학생이 제일 궁금했다. 어머님을 닮았다면 착할것 같은데... "방에 우리 아들 있으니까 들어가서 한번 얘기 나눠보고, 언제 언제가 좋을지 요일, 시간 같은거 맞춰봐요." 어머님은 나를 현관문에서 들어와 왼쪽 벽에 있는 방문을 가리키셨고 나는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노크를 한 뒤 들어갔다. 방은 넓으면서도 깔끔했다. 얘도 약간 내 취향인듯 침대하나에 장롱, 책상이 끝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텅 빈듯한 공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허하게 만들기도 했다. 테이블이나 의자같은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안녕." 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잘 다가가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그런 새로운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 책상에 앉아있다 내가 들어오자 뒤를 돌아보는 남자애와 눈이 마주쳐 방문 앞에 어색하게 서 있어버렸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 과외선생님? 안녕하세요." 생긴건 깎아지른듯한 조각같이 생겨서 나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도 엄청나게 커 위압감이 느껴졌다. 얼굴도 작고 피부는 약간 까무잡잡한 것 같은데... "어...아..안녕. 공부 하고 있었나보네. 미안.." "아니요. 아 여기 앉으세요."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나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남자애는 침대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생긴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데... "이름이..?" "아. 손동운이구요. 들으셨겠지만 지금 고3이에요. 문관데 영어를 아예 1등급으로 굳혀놓으려구요. 공부는 그렇게 잘하는편은 아니고.." "몇등 정도 하는데?" "....1...등?" 지도 말하면서 쑥스러운지 뒷목을 긁적이는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 나도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일등이 못하는거면..하여튼 저런 일등이 세상에서 제일 미웠다. 겸손도 적당히 있어야 미덕이지 오바스러우면 그건 밉상이다. "..아..그럼 영어는 어느정도 해? 아니다. 이번에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언수외 몇등급정도 나왔어?" "112요." "....뭐야..근데 왜 거짓말 했어!?!??!" "..그냥..부끄러워서요." 얼굴을 붉히는 동운이의 모습에 난 또 웃어버렸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거기에 맞는 점수를 받은건데 그게 왜 부끄러운건지...뭐 어쨌든. "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내 이름은 양요섭이고, 너보다 한살많고, 연대 경영 다니고 있고, 딱히 가리는 과목은 없으니까 내가 가르치는게 영어라고 해도 다른 과목 중에서 모르는거 있음 물어봐도 돼. 근데..나 과외 처음이라 정말 서투를지도 몰라. 대체 뭘 가르쳐야되는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니가 생각했을때 내가 아니다 싶으면 주저하지말고 그만둬. 너한테 제일 소중한건 시간이란거..알지? 쓸데없는데다 시간 낭비해버리면 절대 안돼." "저도 알아요. 저는 항상 외국어만 2등급이 나오거든요? 제 시험지 보여드릴테니까...여기에 맞춰서 수업 해 주실 수 있으세요?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한살 차인데..선생님은 좀..." "나도 선생님 소리는 별로 듣기 안좋았어. 일단 시험지 줘봐. 내가 집에가서 니가 뭐가 약한지 분석해서 올게. 여태까지 모의고사 봤던거 다 줘. 사설까지. 아, 그리고 일주일에 세번, 하루에 한시간 반씩으로 하는걸로 어머님과 얘기 나눴거든? 날짜는 언제가 좋겠어? 아무래도 월 수 금이 낫겠지?" 내 말을 들으면서 시험지를 꺼내는 동운이의 모습을 빤히 보던 나는 내 고3 시절은 어땠나 하고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내 고3 시절엔 단 일분도 빠짐없이 모조리 윤두준이 있었다. 내가 추억하고 싶은 기억의 대부분엔 모두 윤두준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기뻐해야하나, 아님 슬퍼해야하나... "그냥 수 금으로 두시간씩 하면 안돼요?" "그럼...월수금 할때보다 내가 너한테 수업해주는 시간이 더 적은데..." "뭐 그런거 가지고..일주일에 세번씩이나 오시는것도 귀찮으시잖아요. 그냥 수금으로 해요. 그게 저도 편할 것 같고..여기 시험지요." 동운이는 약간 쌓인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걸 받아들어 가방에 넣은 뒤 얼굴을 올려 서있는 동운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잘생겼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숱하게 들어봤을법한 외모다. 거기다 공부까지 잘한다니..정말 엄친아가 따로없네. "그게 나을것 같음 그렇게 하자. 그럼 오늘이 가만..며칠이지?" "7월 1일 금요일이요." "..벌써 7월이구나..그래 그러면 다음주 월요일쯤에 전화할게. 수업 어떤식으로 할지 생각해서. 여기 번호좀 찍어줘. 연락할게." 내 핸드폰을 내밀며 말하자 동운이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핸드폰 없나? "..문자가 되게 많이 와 있는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문자들을 읽어보지도 않은채 삭제한뒤 다시 핸드폰을 넘겼고 직접 저장까지 해준 동운이는 자기 핸드폰도 내밀어 나도 내 번호를 찍어 주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과외라 너무 떨리는데.. 생각보다 동운이가 너무 괜찮은애 인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여기에 몰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그럼 가보겠습니다. 동운이랑 얘기해봤는데 일주일에 두번, 수금으로 두시간씩 하는게 낫다고 그래서, 과외비는 팔십까지 안주셔도 돼요. 오십정도면 저 되게 충분할 것 같은데..아니 그것도 되게 버거운데.." "과외비는 제가 나중에 다 알아서 드릴게요. 그럼 조심히 가요." "안녕히계세요. 안녕. 공부 열심히 해!" 나는 인사를 한 뒤 집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에 사는 동운이의 집에서 나와 또 다시 멍해져버린 머리를 하고선 터덜터덜 나와 또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여기까지 오고가는 택시비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나중엔 꼭 버스 타고 오는 법을 외워둬야지. * "다녀왔습니다." 집에 오니까 벌써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고 오늘이 며칠인지도 까마득했다. 단 한번도 이렇게 정신 놓고 산 적은 없었는데..어휴. 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고 터벅 터벅 2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 있어봐야 답답하기만 해서, 착하고 멋있는 동운이의 외국어 성적을 미친듯이 끌여올려주기 위해 과외준비를 철저히 하고 싶어 작년에 썼던 내 비법 노트와 제일 좋다고 생각했던 문제집 몇권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다. 옛날엔 손때가 묻을 정도로 보고 또 봤던 노트였는데... 내가 간추리고 간추려놓은 핵심문법 노트였다. 이건 정말 내가 가진 보물들 중 1호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5호는 됐다. 내 피와 땀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노트였으니까. 일단 이거는 챙겨 놓고.. 하도 열심히 풀어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영어 문제집 몇권을 꺼내어들었다. 툭- 그냥 휘리릭 넘기려는데 바닥에 쪽지 같은게 떨어졌고 나는 그게 뭔가 싶어 바닥에 쪼그려앉아 펴보았다. [열심히 공부중인 노란병아리 같은 요섭이에게. 너는 지금 내가 몇마디 했다고 삐져서 입술은 비죽 내밀고 공부하고 있다. 내가 쪽지를 쓰고있긴 하지만 니가 읽을지는 모르겠다. 너 몰래 숨겨둘거거든. 운이 좋으면 오늘내로 볼수도 있을 것 같은데..뭐 어쨌든. 너..실력 최고야.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어. 근데 내가 너한테 계속 모자르다고, 거만해지지말라고 한건 니가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까봐 그런거야. 너는 당장 내일 수능을 보러가도 손색없을만한 실력인거 인정해. 근데 내가 너한테 잘한다고 칭찬 한마디 하면 또 그말에 칠렐레 팔렐레 풀려서 헤헤 거릴거란거 내가 모르겠냐. 그러니까 좀 서운하더라도 이해해. 이제 수능도 얼마 안남았다. 오늘이 10월 30일이니까..수능까지 3주도 안남았지? 그동안 형이 맛있는것도 많이 해줄게. 수능 끝나면 우리 재밌게 놀자. 너 공부시키고 혼자 독수공방 하는 나도 힘들었단걸..너도 알았음 좋겠다. 꼬맹아. 그리고 니가 꼭 내 후배가 돼서 같이 수업 들을 수 있었음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서 딴 놈들이랑 선배랍시고 어울려다니면 혼날줄 알아. 쨌든, 아. 니가 나 째려봤다. 이만 줄여야겠네. 들킬까봐 무섭다. 사랑해. 너를 너무많이많이 사랑하는 형 두준이가.] 윤두준은 원래 글씨를 정갈하게 잘 쓰는 편인데, 특히나 이 짧은 편지엔 정성들여 꼼꼼하게 쓴 티가 역력했다. 왜 또 병신같이 눈이 뜨거워지는건지, 쪽팔리게 눈물 떨어지기전에 얼른 접어버려야겠다 싶어 고이고이 접어 내 서랍 안에 넣어놨다. 나는 왜 이걸 이제 본거지... 속상하다. 사실 마음이란게 까맣게 타서 없어져버린 것 처럼 아프고 쓰라린데, 그래서 이젠 좀 무뎌진줄 알았는데 아직도 속이 상한다. 얼만큼 더 힘들어야 견딜만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루에 한번씩은 꼭 이렇게 청승을 떨어댔다. 누가 볼까봐 쪽팔릴정도로 말이다. "..작작 좀 해라. 정말..." 나는 요즘같이 내가 싫은적이 없었다.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도 짜증났고, 말과 마음이 다른것도 화가났고 자꾸만 모진말을 내뱉는 내가 싫었다. 그냥 다 놓고 휙 도망쳐버리고 싶다. 그냥..도망쳐버릴까. 아무도 모르는데로 숨어버릴까...그러면 한 십년쯤..있음 기억이 희미해져서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눈을 쓱쓱 닦은 뒤 문제집을 챙기고, 내가 옛날에 풀어봤던 고3 모의고사 기출 문제집도 챙겨넣었다. 내가 어떤 유형을 틀렸었고, 어떻게 정복했는지를 알아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전자사전도 챙기고 지갑에 현금도 가득 채워 넣었다.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동운이랑 수업할 문제집도 사고 간단히 웃어넘길만한 책도 좀 사고..기분 전환을 좀 하고 싶었다. 왜냐면 이렇게 계속 내 안에 갇혀살면 정말 내 속에서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때문이다. 나는 꽤 무거운 가방을 등에다 매고 손목 시계를 쳐다보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얼추 네시쯤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서두르며 방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반대편 방에서 정말 너무 예쁘게 꾸미고 나오는 누나와 마주쳤다. 오늘 어디 좋은데 가는지, 길게 웨이브진 머리를 반묶음으로 묶고 검은색 민소매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정말 너무 예뻤다. 키도 크고 늘씬해서 원피스가 너무 잘 어울렸고. "동생. 어디가?" "..도서관. 누난?" "아..데이트!!" 내 입에선 가소로운 웃음이 나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저렇게 누나와 데이트를 가면서 나한테는 가지말라고 붙잡는 윤두준의 꼴이라... 이젠 그 사람의 진심까지도 의심 되었다. 나를 붙잡는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닐까, 사실은 나와 많이 닮은 누나를 보면서 누나를 사랑하게 된건 아닐까, 근데 나를 버리자니 양심에 찔려 명목상 나를 붙잡고 있는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냥 데이트 간다는 누나의 말이 부럽고도 미워서 별 이상한 헛생각까지 해버렸다. "근데 왜 늦은 시간에 도서관에 가? 그냥 집에서 하지. 날도 더운데." "..집보다 도서관이 더 집중 잘돼서. 혀..아니 그 분이랑 데이트 가는거야?" "응! 오늘은 연극 보기로 했어. 내가 보자고 조르고 졸라서 겨우 보는거지만..." 누나는 현관에서 발목이 꺾일듯한 구두를 신으며 말했고 나는 얼추 십센치는 될 것 같은 구두를 보며 걱정스러웠다. 안그래도 발목이 얇은데 부러지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그렇게 높은거 신고 가도 돼? 안높아?" "에이..여자의 자존심은 바로 하이힐!!이죠 양요섭씨! 여자를 너무 모르시네. 이렇게 높은 구두를 신어야 다리도 이뻐보이고 다리 선이 산단말야. 좀 아프긴 해도..이뻐보일수만 있다면 이정도쯤이야." 누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누군가한테 이뻐보이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발목 꺾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윤두준을 좋아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그 대답을 들으면 내가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그냥 속으로 삼켜버렸다. 이젠 내가 상처받을 질문들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나만 손해니까. "근데..밥 먹었어? 왜이렇게 안색이 창백해? 너 요즘 몸 많이 아픈거 같애. 뭐 걱정거리라도 있어?" 대문을 열며 말하는 누나에 나는 그냥 웃어보였다. "이것봐..손목 이렇게 얇은것봐. 너 그러다가 나보다 더 마르겠다? 밥 좀 먹어. 너 집에서 밥먹는 걸 못본거 같애!!! 정말..걱정돼 양요섭. 누나한테 뭐 숨기는거 있지? 어?" "아니라니깐..괜찮아. 얼른 가봐. 걸을 때 조심하구!!!" 나는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나서는데 누나가 나를 급하게 잡았다. "잠깐만!!" "왜?" "너 선크림 안바르고 다니지! 얼굴 타!! 아휴 정말.." 누나는 마치 엄마 같았다. 내가 뜨거운 햇빛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자 누나는 나를 대문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늘로 오게 해 핸드백에서 파우더 같은걸 꺼내 내 얼굴에 토닥여주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꼭 밖에서 놀려고 나가던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꼼꼼히 팔과 다리까지 선크림을 발라주었었다. 얼굴 그을리면 안이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좀 바르고 다녀! 요즘 남자들도 비비 잘만 바르고 다니던데..얼굴 그을리면 안이뻐. 좀 발라. 이거 갖고 다니면서." "..으..내가 여자도 아니고..이걸 갖고 다니면서...어떻게 발라!!" "..그런가? 그럼 누나가 선크림 사다줄테니까 그거 갖고 다니면서 틈날때마다 발라. 어, 벌써 왔네요?" 내 등뒤에서 뭔가를 본 누나는 파우더를 핸드백에 다시 넣으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뭔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환해졌다 억지로 얼굴을 굳히는 내가 느껴졌다. 정말 우습게도. 얼마나 웃겼을까. 이 사람을 봄과 동시에 반갑고 좋아서 환해지는 본능에다 그러면 안된다는 이성이 끼어들어 억지로 얼굴을 굳히는 그 꼴이.. 내가 못봐서 모르지만 참 가관이었을거다. "..그럼 가볼게. 누나 걸을 때 꼭 조심해. 그냥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좀 얕은걸로 신고 나오지?" 나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내 뒤에 있는 윤두준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버렸기때문이다. "..얘는..아 너 그러지말고, 두준씨. 요섭이가 학교 도서관 간다는데 거기까지 태워다 주고 가도 되죠? 여기서 학교까지 너무 멀어서..우리 어차피 시간 좀 있는데..." "괜찮아!!!!" "가만 있어. 타고 가. 언제 저기 밑에까지 내려갔다가 버스 타고 갈래. 잠자코 있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윤두준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되는거라며 대답하는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두 사람이다. 한명은 고의로, 한명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아니요. 저 괜찮아요. 그냥 혼자.." "타고가. 더운거 질색..더운거 짜증나잖아. 태워줄테니까 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누나는 나를 뒷자석에 태우고 내가 늘 앉았던 앞자리엔 누나가 탔다. 정말 뭐 이런..개같은 경우가..기분이 찝찝했다. 저자리는 항상 내가 앉았던 자리였는데..이젠 내자리가 아니다. 나는 앞에 나란히 앉은 두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 그냥 아이팟을 꺼내 귀에다 꽂아버렸다. 아무것도 안듣고 아무것도 안보는게 상책이다. 이미 차는 출발했고 적어도 삼십분은 여기 꼼짝없이 있어야될 것 같아 괴로웠다. 윤두준 한명 보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생각해도 눈물나게 잘어울리는 두 사람을 보는건 구역질나게 고역이라 가슴이 턱턱 막혀 날 너무 잘 아는 윤두준의 배려로 에어컨이 빵빵했지만 창문을 열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또 누나가 뭐라고 하고, 그럼 윤두준이 끼어들고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겨우겨우 참으며 가방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두 사람의 도란도란한 대화소리를 듣지 않으려 볼륨을 높이면서. [김태경] 전화가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나보다. 나는 얼른 한쪽 이어폰을 뺀 뒤 전화를 받았다. "어." 「야!! 너 또 연락 안돼!! 너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냐!?」 통화 소리가 너무 컸는지 누나도 나를 쳐다보았다. 최대한 작게 줄였는데도 이새끼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나는 난감해졌다. 이미 윤두준도 룸미러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지 오래고. "..좀 조용히 말해. 왜 전화 했는데." 「너 어디야?」 "학교 가는길." 「아 잘됐다. 먼저 가서 기다릴테니까 얼른 와. 보고 싶어 죽겠다.」 김태경 얘는 툭하면 지랄이다 아주. "..끊자." 「너 몇시쯤 오는데? 올라면 멀었어?」 "이제 출발했어. 기다리지말고 니 공부나 하고 있어. 알아서 갈테니까." 「..네 알겠슴다. 너 그리고..한번만 더 내 전화 씹으면 진짜 죽는다. 그렇게 전화 씹을거면 대체 핸드폰은 왜 들고 다니냐!? 계속 그러면 무전기 달아놓는다. 너.」 "뭐래." 김태경은 오늘도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생긴것만 봐서는 좀 과묵할 것 같고 매사에 진지할 것 같은데..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게 맞나보다. 이렇게 사람이 다를수가 있냐..완전 깨방정에 어떻게 보면 이기광보다 더 심한 케이스다 김태경이. 「쨌든 빨리와. 사람들 눈치 받으면서까지 제일 좋은 자리 맡아놨으니까. 도서관 앞에 오면 전화해.」 "어 알았어."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벌써 배터리가 하나밖에 안남았다. 요즘은 만땅으로 충전해놓고 다녀도 내 앞에서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는 저 사람때문에 내 핸드폰이 가만히 있을 틈이 없어 하루에 하나씩은 꼭 방전 되고 말았다. "누구야?" 살짝 뒤로 고개를 돌려 나한테 묻는 누나에 나는 그냥 친구라고 대답했다. "니가 기광이 말고 친구가 또 있어!?" "..이기광이랑 똑같은 말하고 있네. 나 이래봬도 친구하자고 오는 애들 많어. 누나가 몰라서 그래. 나 인기 엄청 많..." 순간 룸미러로 나를 쳐다보는 윤두준과 눈이 마주쳐버려서 입을 다물었다. 왜 아직도 윤두준의 눈치를 보고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나저나 너..연애하는 사람 누군데. 말 안해줄거야?" "..어? 아..아니라니까. 깨졌어." "뭐!?!??! 언제!?!? 근데 그 반지 아직도 끼고 있잖아!?" 누나는 놀랬는지 아예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서둘러 왼손을 감추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다른반지야. 얼마 안됐어. 그냥...내가 나중에 말해줄게." 나는 윤두준이 신경쓰여 입을 다물었고 누나도 그걸 눈치챘는지 알았다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내가 이럴줄 알고 차에 그렇게 안타겠다고 했던건데...미치겠다. "..너랑 만나던 사람도 너랑 헤어지는거 오케이 한거야?" 생각도 못헀던 윤두준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 질문을 누나 앞에서 하는 의도가 뭔지 가늠이 안돼 눈만 떴다감았다를 반복했다. "승혜씨 동생이면 나한테도 동생인거 아닌가? 반말한거 기분 나빠?" "...아..아뇨. 근데 제가 그 질문에 꼭 대답 해야돼요?"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너만 일방적으로 끝낸건 아닌가 해서. 요즘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많길래. 내 주변에도 그런애 한명 있는데..너무 착해서, 병신같이 착해서 남들 생각하느라 정작 자기 생각은 못하고 자기 다치는 줄은 모르고 자꾸 남생각만 하면서 억지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지려는 사람이 있거든..걱정 돼서 그래. 혹시나 그런건 아닌가 하고." "...." 나는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런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하는게 좋을거 같은데. 니가 헤어졌다고 말하는 그 사람은 너랑 헤어질 마음이 이만큼도 없는데 너혼자서만 그러는거라면.. 그거 너무 잔인하지 않나? 자꾸만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데..연락 피하는걸 뻔히 알면서도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잘 지내는지 너무 걱정되고 생각나서 끊임없이 전화하고 문자하는 그 사람 생각은..해본 적 있어? 그사람..아마 지금쯤 눈에 보이는거 아무것도 없을걸. 지금 당장이라도 차 사고라도 내서 눈에 가시같은 한 사람만 딱 죽여버리고 싶을거 같은데." 내 대답이 없자 윤두준은 또 덧붙였다. "오해는 마. 그냥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해준거 뿐이니까. 하나만 더 얘기해주면..내가 말했던 그 애는 너무 병신처럼 착해서 말로만 싫다고 말하는 애야. 만나지 말자고, 얼굴 보지 말자고 입으로는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데 눈으론 항상 울고 있어. 여전히 끼고 있는 반지, 귀걸이, 목걸이 까지 모든게 다 그대론데 말로만 헤어지자고 하면..그게 진심일까? 어떻게 생각해?" "...제..얘기가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얘기는..그만하시죠. 별로 재미도 없는데." 나는 입술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너무 꽉 깨물어서 피맛이 지릿하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손은 수전증에 걸린 사람마냥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정말 얇게 얼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보다 더 무섭고 아찔했다. 윤두준의 저 속을 알 수가 없어서. 그리고 또 잠자코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누나 속도 모르겠어서. "근데 두준씨. 그 사람이 누구에요?" "..있어요. 내가 너무너무 잘 아는 사람. 병신짓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뭔일인지는 몰라도..복잡하네요. 얘기 들어보면 서로 사랑하는거 같은데..." "그러게요. 딱 한사람만 없어지면 되는데, 참 눈치가 없네요. 얼굴만 닮은게 아니라 다 닮았나봐요." "..에? 뭐가..." 나는 윤두준의 입에서 정말 무슨 말이 나올까 심장을 끈으로 묶은것처럼 꽉 조여와서 숨이 막혔다. 왜 저러는건지, 내 앞이라 저렇게 보란듯이 저러는건지..미치겠다 정말. "..아..아니에요. 혼잣말. 동생분 안색이 너무 안좋네요. 밥 좀 잘 챙겨주세요. 안먹는다고 그러면 억지라도 먹이던가 해야지 처음 봤을때보다 너무 말라서 걱정되기까지 하네요. 승혜씨 자상하시니까 동생분 끔찍히 아끼시지 않으세요? 누구처럼.." 누구처럼 이라는 말은 너무 작게 속삭여줘서 다행이었다. 사람 갖고 노는데는 아주 타고 났다 윤두준. "..그러게요. 쟤가 도통 밥을 안먹고..무슨 일이 있긴 있는거 같은데 말을 안하네요. 평소엔 별의별 고민까지 다 털어놓는 사이였는데.. 양요섭!! 너땜에 요즘 누나 서운할라그래. 애인있는것도 말 안해주고, 헤어진것도 말 안해주고..아..너 진짜 헤어져서 그래? 누군데 그래? 뭣땜에 헤어졌는데? 아니 얼마나 잘난 기집애길래 너를 차!? 무슨..지까짓게 뭐 얼마나 잘났다고." "..아니야 그런거. 그냥 공부 힘들어서 그래. 그리고 나 원래 여름엔 밥 잘 안먹잖아. 더워서 지쳐서." "..그거야 그렇긴 해도. 너 음식 뭐 좋아하지? 누나가 그거 해줘야겠다." "찹쌀 잔뜩 넣은 삼계탕, 김치 들어간 모든 음식, 치즈 듬뿍 뿌린 스파게티, 후라이드 치킨."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까지 왔다. 정말 여기 더 있다간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윤두준은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음식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술 내뱉었고 누나는 그런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러다간 아무리 눈치없는 누나라도 뭔가 낌새를 채버릴 것만 같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기운 없을때 먹으면 힘 나는 음식들. 그냥 생각나길래.." "..아..그러고보니까 너도 두준씨가 말했던 음식들 좋아하지 않나? 우리 동생이랑 약간 취향 비슷하신가봐요!!" "...그러게요. 이상하게." 윤두준은 나를 룸미러로 쳐다봤고 난 그 시선을 단번에 피해버렸다. 얼추 다 온듯해 나는 서둘러 말했다. "..저 여기서 내릴게요. 속이 좀 안좋아서 걸어가고 싶어요." "...너 진짜 안색 안좋다. 두준씨 잠깐만. 너 몇시에 들어올거야?" "몰라. 김태경...아니 친구가 가자고 할때 가려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갈 것 같으니까..데이트 제대로 즐기고 와. 아,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앞으론 이렇게 친절하게 안해주셔도 돼요. 물론 제가 누나 동생이라서,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잘해주시는거겠지만.. 좀 부담스러워서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그대로 뒤를 돌아섰다. 이내 차는 길을 박차고 나갔고 나는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가는 것 같아 길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버렸고 주위 시선일랑 아랑곳 않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미운데..좋았다. 얼굴 한번이라도 봤다는게..병신같이 좋았다. 누구말대로 병신같이. * [몇시에 갈거야?] 김태경이 맡아놓은 자리에서 정말 미친듯이 공부에만 열중했다. 하루종일 아침 빼곤 아무것도 안먹었지만 배가 고픈줄도 몰랐고 아주 잠깐이라도 단 1초라도 아까 그 장면이 기억날까봐 나는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내 모든 정신력을 끌어모아 과외 준비에만 몰두했다. 내가 틀렸던 문제 유형들 다 정리하고, 동운이가 매번 틀리는 유형들만 따로 체크해서 내가 옛날에 풀었던 문제집에서 체크까지 해 두었다. 그리고 문법 비법들중에서 동운이가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필기를 하고.. 그 사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지 김태경은 옆에서 그런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필사적이었다. 김태경은 일곱시 십분 쯤에 핸드폰 문자로 적어 내 책상에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고 그제서야 이제 저녁을 먹어야 될 시간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밥생각은 없었기때문에 그냥 여기서 계속 있고 싶어 그 핸드폰에다 김태경이 썼던 글씨를 지우고 내 할말을 적었다. [밥생각없으니까 먼저 집에가. 나 할게 남아서 더 하다갈테니까.] 핸드폰을 넘겨준뒤 나는 곧바로 다시 필기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나는 기광이한테 크게 한턱 쏴야될 것 같다. 생각의 도피처를 마련해줬으니까 말이다. 아마 이마저도 나한테 일거리가 없었다면 지금쯤 뭐하고 있었을까. 가정조차 하기 싫게끔 끔찍했다. 근데 김태경은 갑자기 내 옆으로 쓱 밀치고 들어오더니 내 대신 내가 보고 있던 책을 덮어버리고 정리를하는게 아닌가. 나는 일어서있는 태경이를 올려다봤고 김태경은 나한테 눈길도 주지않고 책을 묵묵히 싸서 의자에 걸려있던 가방에다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 가방을 지 어깨에 매더니 그저 멍때리고 있던 내 손목을 우왁스럽게 잡더니 도서관 바깥으로 끌고 나갔고 나는 차마 도서관에선 행패를 부릴수가 없어 도서관 현관 밖으로 나가서야 반항했다. "뭐해 지금!!!!!" "공부에 미치려고 작정했어!? 적당히해." "공부하겠다는 사람 말리는게 세상에 어딨어!! 놔!! 할거 많아!!" "나중에 해!!!!!!!!!!" 김태경은 뭐가 그렇게 화가난건지 단 한번도 화가난듯한 표정으로, 그런 눈빛으로 날 봐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 살벌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따갑게 노려봤고 안그래도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풀어내고 싶어 죽을뻔 했는데 이렇게 겨우겨우 참고 있던 걸 자극하니 도에 지나치게 화를 내버렸다. "니가 뭔데!!!!! 니가 날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래라 저래란데!? 안놔!? 놔!!!" "...니 꼴이 어떤지..안봤어? 니 얼굴이 어떤지. 니 몸이 어떤지. 니 눈으로 안봤냐고!!!! 너 며칠째 굶은 사람 같애. 손목이..이게 사내새끼 손목이냐? 그리고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사람처럼 왜 그러는건데!!!!" "미치겠으니까!!!!!!니가 나한테 안이래도 나 충분히 돌아버릴거 같으니까..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라. 집에 갈거면 너나 가!!!!!!!" 시간이 어둑어둑해졌지만 캠퍼스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시끄럽게 싸우고 있는 나와 김태경을 쳐다봤고 평소같았음 그만하자며 내가 먼저 물러났겠지만 정말 이 화를 풀어내지 않으면 이 홧덩어리가 가슴을 꽉 막아 나를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김태경의 잘못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내 화를 이유도, 영문도 모른채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라 이기적인 행동이란걸 알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왜 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왜!!!!! 남들은 쉽게쉽게 사랑하는데 왜 나는!? 왜 난!!!!! 이래야 되는건데? 어디 하나에 미치지않으면 정말 내가 미친개새끼 될거 같아서 그래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척 하려고 하지마. 도와줄수도 없으면서 도와주려는척 하지 말라고!!!!!" 나는 김태경이 꽉 잡고 있던 손목을 있는 힘껏 뿌리쳐 그의 손을 떼어낸다음 그의 어깨에 매어져있던 가방을 끌어내려 그대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고 때마침 뚝 떨어지는 눈물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닦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잡았던 그 손목을 또 잡아채서 마치 수갑처럼 단단히 조여와 움직이지도 못하게 잡고는 나를 끌고가버렸다. 이번엔 내가 어떤 지랄을 해도 봐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서 나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와 그걸 손바닥으로 거칠게 닦으면서 끌려갔다. 김태경이 날 끌고 간 곳은 그때 한번 탔던 적이 있던 그의 차였고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억지로 태우고 내 가방과 지 가방은 뒷자석에 던져넣은 뒤 운전석으로 냉큼 올라탔다. 내가 내리겠다고 반항할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자코 있자 살짝 당황했는지 운전석에 앉아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밥은 먹어." "...가다가 집 앞에 내려줘." "고집부릴래 양요섭!!!!!! 너 진짜 소리 지르고 화내야 말 들을래!? 니가 다섯살짜리 꼬마애야!? 왜 멀쩡한 몸 혹사시켜서가면서까지 투쟁하는건데!!!! 무슨일인진 모르겠는데!! 니가 밥 안먹고 잠 안잔다고해서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막무가내로 땡깡 부려봐야 무엇하나 달라지지않는다고." 김태경의 이렇게까지 화난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사실 우리가 알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적이 없는게 당연할테지만 이런 화난 목소리는 그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김태경한테 잘못한게 아닌데도 내가 왜 얘한테 이런 소리를 들어야되는건지 안그래도 억울한 일들 뿐인데 더 억울해져서 그냥 두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꽉 깨물면서 눈물을 감췄다. "또 아는척 하지말라고 할거라는거 아는데. 그때 너 피자집에서 나한테 했던말.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니 친누나랑 결혼하게 됐다는 그 말. 그것때문에 너 지금 이렇게 울고불고 지랄하는거 아니야? 아니면 어쩔수없는건데. 맞는거면..만약 그런 일이 정말 너한테 있는거라면.. 그럴수록 니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되는거 아니야? 밥맛없어서 안먹는건 알겠는데. 그렇게 병신같이 굴면..누가 알아주긴 해? 너만 힘들잖아. 아니야?" "...." "..니가 힘든건 둘째치고..옆에서 보고있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 생각 안해봤지? 그래 니가 너 몸하나 힘든것도 간수 못하겠는데 남 힘든거까지 신경쓸 겨를이 있었겠냐. 근데..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아슬아슬해서 미치겠거든? 사람 속 뒤집히고 눈 뒤집히게 만들어 니가. 그러니까 잠자코 밥 먹어. 내가 아는 집중에서 최고로 비싸고 최고로 맛있는데로 데려갈테니까 무조건 먹어." 나는 나를 향한 이런 과도한 친절은 부담스러워서 옛날부터 싫어했다. 내가 이사람에게 특별한 뭔가를 해줄 수 없다면 이런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김태경한테 기대게 됐다. 내가 유일하게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사라져버린 이 시점에 그 누구라도 붙잡지 않으면 내가 마치 연한 잎과 같아서 금방이라도 후-불면 쓰러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한테 뭘 기대하고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기대게 됐다. 나도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이러면 안된다는건 알지만 자꾸만 몸이 김태경에게로 기울어졌다. "..미안..해." "미안한줄 알면 가서 맛있게 먹기나 해." 나는 한참을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좀 진정이 된 것 같아 손을 내리고 그냥 정면만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슬쩍 본 김태경은 내 볼을 툭 치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해주었다. 정말 많이 편한 사람이었다. 거의 팔년을 친구한 기광이보다도 이상하게도 김태경이 더 편했다. 더 친구같고 마음을 터 놓을 수 있을 것 같은..그런 느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주고 받아줄 관대함이 김태경한텐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을 앞뒤 맞지 않게 털어놓게 되었다. "..우리 누나는 나를 유일하게 이뻐해주고 바라봐준 가족이었어. 우리 아버진 자기 명예, 자기 안위에만 신경쓰시느라 자식을 그저 자기를 돋보이게 할 장식품이라는 것처럼 대했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난 늘 무시받고 모든지 잘하는 누나와 비교당하면서 억눌리고 살았었어. 엄마는 나를 항상 돈으로 대했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모두 돈으로 표현되는 사람이야. 그런 집안에서 누나 아니었음 나 진작에 자살했겠지. 아님 아버지 보란듯이 국회의원 양기태의 아들이 이렇게 개망나니 개쓰레기입니다 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막나갔을거야. 근데 누나는 항상 나를 엄마처럼 봐주고 위로해주고 믿어줬어. 내가 뭘 하든 믿어주고 바라봐줬어. 그래서 나는 누나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좋아해. 누나가 하라는건 그게 어떤거든지 다 했고, 하지말라는건 무조건 안했어." 이제 막 윤두준의 말이 나오려는 찰나에 난 또 울컥했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어놓는 것 조차도 이젠 상처가 되었나보다. 내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자 김태경은 괜찮다는 듯 에어컨 바람을 끄고 창문을 열어주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었지만 그게 훨씬 좋아 몇초동안 창문에다 머리를 내어놓고 그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내가 누나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니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윤두준이야. 내가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렇게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본적..윤두준이 처음이었어. 아무것도 모르던 고2때부터 좋아해서 지금까지. 그사람이랑 나눠낀 반지, 귀걸이, 목걸이. 내 보물 1혼데.. 그 사람이랑 같이 살면서 사람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기쁠수가 있구나를 느껴봤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내가 사랑받고 있단 느낌을 받게해준 사람이었어. 어쩌면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일지도 몰라. 근데..내가 세상에서 절대 잃고싶지 않은 두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하고 믿고 의지했던 그 두사람이..결혼을 하게 됐네? 손쓸틈도 없이..말릴새도 없이.." 눈물은 눈에서 고여있을 틈도 없이 바지위로 툭툭 떨어졌다. 사람 마음에도 굳은살이 만들어진다는데, 난 언제쯤 굳은살이 단단히 배겨 이깟일갖고는 울지 않을정도가 될까. "머리로는 하루에도 수백번씩 생각해. 우리 누나는 윤두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결국은 윤두준도 우리누나를 사랑하게 될텐데 나 하나만 물러나면 되는거라고. 나만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행복해질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그게 안돼. 두 사람이 같이 있는거 보면 미치겠고 돌겠고 이러면 안되는데 우리 누나가 너무 미워져. 그 자리는 내가 앉았던 자리였는데, 윤두준과 마주앉아서 식사를 하는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윤두준과 우리 누나를 반반씩 닮아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면.. 그냥 내가 미친새끼가 된것같이 머리가 텅 비어버려. 이제부턴 윤두준 옆엔 양승혜가 맞는건데, 그게 남들 눈에도 맞는건데 왜 그게 내 눈엔 안맞는건지 모르겠다. 병신같지...근데 윤두준이 나 쉽게 놔줬으면 나쁜새끼라고, 여태껏 나 갖고 논거라고 원망하고 욕이라도 퍼부을수 있을텐데.. 하루에도 몇십통씩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하고..자기 놓지 말라고 애원하고.. 지금도 입으로는 이러지마라 라고 기계처럼 반복해도 그 얼굴만 보면 좋기만 한데.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더이상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망가려고." 김태경이 건넨 휴지에 코를 흥-풀며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뭐?" "도망갈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 누구도 눈치 못할 때에..아마존이라도 들어가야지." 김태경이 말한 곳에 다 왔는지 가게 주차장으로 들어가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 난 김태경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나는..아니다. 여기 기가막히게 맛있는데야. 가서 배터지게 먹여줄테니까 좀 진정하고 나와. 난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있어야겠다. 여기 어지간히 답답하네." 김태경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차에서 내렸고 나는 그냥 의자에 몸을 푹 기대어 놓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었다. * 태경이 데려온 곳은 한 눈에 봐도 고급 식당이란게 느껴질정도로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있었다. 무슨 메뉴를 주 메뉴로 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웨이터의 안내를 따라 나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대충 손님들 식탁을 보니 스파게티도 있는 것 같고 스테이크도 있는것 같고.. 별로 딱히 먹고 싶은 메뉴들은 아니었지만 내 두서없는 얘기를 들어주고 밥 먹여주겠다며 데려온 김태경의 정성을 봐서라도 오늘은 집에 가서 토한대도 꾸역꾸역 다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되새겼다. "이쪽 어떠십니까." "..여기 어때?" 적당히 코너쪽이라 사람들 시선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터가 살짝 몸을 비켰고 아무생각없이 그 옆테이블을 쳐다본 나는 순간 온 몸이 석고상이 된 것 마냥 굳어버렸다. 세상에 이따위 개같은 우연은 없을거다. "...딴데가자." "왜? 여기 진짜 맛있어." "..딴데 가자 제발..."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내 바로 뒤에 서있던 김태경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고 김태경은 당최 왜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제발. "..요..섭이? 양요섭?" 이 순간 내 귀에 절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목소리가 내 귓전을 댕댕 때려댔다. 내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물자 김태경은 나와 그 목소리가 난 곳을 번갈아쳐다보더니 눈치를 챘는지 내 몸을 휙 돌려 내 어깨를 끌어안듯 바싹 당겨안아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리 요섭이 누나분 되세요?" "...아..예..친구...?" "네. 듣던대로 미인이시네요." 나는 누나와 눈이 마주치자 굳어진 얼굴이 펴질줄을 몰랐다. 더더욱이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윤두준 때문에 나는 눈을 어디다 둬야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김태경은 일부러 그러는건지 더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더 바짝 끌어다당겨안았다. "..그러지말고 같이 합석해요. 괜찮죠 두준씨?" 누나의 눈치없음이 또 보기좋게 발휘하는 순간이다. 나는 괜찮다며 말을 하려는데 윤두준은 웨이터를 부르더니 옆 테이블을 본인의 테이블과 붙이도록 했고 누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만 벌써 껄끄러운 부딪침이 두번째다. "..너 뭐먹을래." "아무거나." 내 말에 김태경은 씨익-웃으며 웨이터에게 뭐라고 조잘대면서 주문을 했고 나는 그 사이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갈증을 느껴 괜히 물만 들이켜댔다. 내 대각선에 앉아있는 윤두준의 시선이 너무 신경쓰여 안그래도 먹기 싫은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면 백퍼센트 체할 삘이다. "근데..못보던 친군거 같은데..이름이 어떻게 돼요?" "아. 김태경입니다. 요섭이랑 같은 학교구요, 생활과학부 다녀요. 요섭이한테 누나 분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요섭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요섭이랑 되게 많이 닮으셨어요. 요섭이랑 닮았음 무지하게 이쁘겠다라고 생각했는데..역시나네요." 김태경의 말에 누나는 환히 웃었고 나는 김태경을 보며 작작 좀 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김태경은 그 눈빛을 알아채긴 한건지 내 볼을 꼬집으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왜이래 진짜!? "근데 같이 계신 분..소개..안해주세요?" "아. 내정신 좀 봐. 이쪽은 윤두준씨. 음..아직 확실한건 아니지만..집안끼리 결혼..얘기가 오고가는..사람이에요." "아..처음뵙겠습니다.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두분 되게 잘 어울리시네요. 선남선녀가 따로 없..." 내가 김태경의 발을 콱 밟아버렸다. 이제 웬만하면 닥칠때가 됐는데..이게 미쳤나. "그럼 결혼은 언제쯤 하세요?" "..초면에 너무 실례되는 질문 하는것 같은데요."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윤두준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바라본 나는 서둘러 눈을 다른데로 돌렸지만 원래 모르는 사람한텐 날을 세우는 윤두준이었지만 과하게 세우는 모습에 왜그러나했더니 은연중에 윤두준은 내 옆에 있는 김태경을 경계하고 있었던거라 생각했고 그렇게되면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미친듯이 후회할지언정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윤두준에게서 정을 떼고 그도 나한테 미련을 버리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김태경을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얘가 눈치가 없는애라..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내 태도에 놀란건 윤두준 뿐만이 아니라 김태경도 심했다. 나를 쳐다보며 왜그러냐는 듯 쳐다보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속이 타들어가는걸 감추기 위해 물을 계속 마셔댔다. "..많이 친한가봐요 둘이." 윤두준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고 나는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정말 처음 보는 남 대하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게된지는 얼마 안됐는데..아시잖아요. 힘들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한테 기대게 되는거. 그렇게 되더라구요. 착하고..멋있잖아요. 그리고 은근 깨방정이에요. 그렇게 안생겨서는 말도 재밌게 잘하고.. 누구랑 다르게 되게 편하게 해줘서 잘 지내고 있어요." 윤두준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주문한 음식이 나와 김태경의 앞에 놓여졌고 마음같아선 그냥 샐러드나 먹고 말고 싶었지만 아무거나 시키랬다고 이렇게 고깃덩이를 시킬수가 있냐 김태경. 내 앞에 놓여진 적당히 익은 스테이크를 본 나는 김태경을 째려봤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두들겼다. "많이 먹어. 너 무조건 다 먹는다고 그랬다." "내가 언제!?" "차에서 한 얘기 금세 잊었냐?" "차에서 무슨 말을 했는데 내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김태경은 시끄럽다는듯 내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먹기좋게 잘라 내 입에 직접 넣어주었다. 그냥 알아서 닥치라는 뜻인것 같아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우적우적 씹었다. 그래도 맛이 영 나쁘진 않아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이 자리가 너무 불편해 울렁거리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아 근데 태경씨. 뭐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우리 요섭이랑 사귀는 사람이 누군지 혹시 알아요?" 누나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순간 윤두준을 쳐다봤고 순식간에 고기가 목에 걸려 사래에 들어버렸다. 내가 켈렉켈렉 대자 윤두준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옆에 있던 태경이 물컵을 직접 내 입에 대주며 등을 두드려주면서 물을 먹였고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김태경은 좀 조심좀 하면서 먹지 그랬냐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괜찮아?" 서서히 가라앉은 덕에 그래도 여파가 남아 가슴을 툭툭 치고 있는데 누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어왔다. 이에 나는 괜찮다며 애써 웃은뒤 다시 고기를 썰려는데 순간 내 눈엔 왼손 네번째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설마 하고 윤두준의 손을 살짝 쳐다봤더니 그의 손에도 어김없이 끼워져있는 반지. 나는 아무렇지않게 고기를 입에 넣으며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 반지를 바지주머니안에 쏙 집어넣었다. 이렇게 한 테이블에서 똑같은 반지를 나눠끼면..나랑 윤두준은 그렇고 그런사이라고 말하는 꼴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왜 내가 이거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놓여진 샐러드에 손을 댔다. "먹지마." 윤두준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순간 나를 포함한 세사람의 시선이 모두 윤두준한테 주목되고 나는 설마 하고 내가 포크를 대고 있는 샐러드 그릇을 살펴봤더니..언제 봤는지 샐러드엔 키위 드레싱이 묻어있었고 내가 키위 알러지가 있다는걸 빠삭하게 아는 그로선 내가 정신없이 먹으려고하자 본능적으로 막은 것 같았다. 그치만 이 상황수습은 어떻게 할건데. "..뭘 먹지마요?" "...아..요섭이가 먹으려는 샐러드에 뭐 이상한게 묻은 것 같아서요. 아닌가.." "...아니..잠깐만..그거 키위 드레싱이지? 먹지마." 키위에 알러지가 있다는걸 누나 또한 잘 알고 있어서 누나는 아예 내 앞에서 샐러드를 치워버렸고 나는 내가 뭐를 하고 있나, 내가 먹는 음식엔 뭐가 있나 안보는척 하면서도 다 보고 있는 윤두준에 또 울컥해버렸다. 그치만 이정도엔 어느정도 단련이 되어있어 겨우 눌러참은 나는 그냥 기계처럼 고기만 씹었고 그런 나를 김태경이 툭툭 쳤다. "..니가 애냐..묻히고 먹게." 스테이크 소스가 입가에 묻었는지 김태경은 냅킨으로 내 입을 직접 닦아주었고, 머쓱해진 난 괜찮다며 다시 음식에 시선을 놓고 기계처럼 씹었다. 정말 기계처럼. 이게 무슨맛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할수 있는거라곤 앞에 놓여진 음식에만 집중하는 것. 처음 걱정했던것 처럼 슬슬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두준씨." 누나의 말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두준의 수트 재킷에 빵가루가 좀 묻어 있었고 누나는 그걸 손수 털어주며 싱긋 웃었다. 죽도록 인정하긴 싫었지만 미치도록 예쁘고 잘어울리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점점 체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 그 누가봐도 이 두사람을 보면 정말 잘어울린다고 시샘할만큼...밉게도 잘어울렸다. "두분..정말..되게 잘어울리시네요. 애인없는 저는 되게 질투나네요." 김태경의 말에 누나는 쑥스러운지 입가를 가리며 수줍게 웃은 반면 윤두준은 그런 김태경의 얼굴을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혼자 좋아하는 누나 민망하게시리. "..애인 없어? 준수하게 잘 생겼는데..내 주변에 아는 애들 많은데..소개해줄까?" "아. 뜻은 감사한데 괜찮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요." 순간 윤두준의 한쪽 눈썹이 찡긋-하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저건 뭔가 배알이 꼴린단 뜻이었다. "그래?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되나?" "..그냥..귀엽고..애기같고..옆에서 마냥 챙겨주고 싶고. 걔가 아직 딴데 쳐다보고 있긴 한데.. 원래 사랑은 빈틈을 노리는거 아니겠어요? 힘들때 옆에서 챙겨주고 보살펴주면..언젠간 돌아보겠죠." "그런 말도 안되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거지?" "내기 하실래요? 제가 그 애를 갖게 될..." 또 또 쓸데없는 말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김태경의 입을 서둘러 막기 위해 마침 포크에 꽂혀있던 고기를 그 입으로 쏙 넣어버렸다. 그리곤 윤두준에는 등을져 김태경을 본다음 복화술을 했다. 그만 좀 닥치라고. 그 말에도 김태경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이었고 본격적으로 울렁거리는 속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은게 문제였는듯, 그리고 자리도 이렇게 부담스러웠으니..뭐.. "둘이 많이 친하네. 보기 좋다. 근데 기광이는 어쩌고?" "이기광? 걔 연애하느라 바뻐 누나." "기광이 연애해? 누구랑? 걔 나좋다고 죽자고 따라다닐땐 언제고..." "그래도 누나 한쪽 마음엔 있다고 전해달래. 걔 고3짜리랑 사귀지뭐. 오래됐어 사귄지. 걔한테 떳떳해보겠다고 죽자고 공부하더니 기어코 연대 합격한거 아냐. 내 친구지만..이기광 그새끼가 제일 미스테리야." 그나마 마음 편한 주제로 돌아오니까 숨 좀 돌리겠다. 그냥 아예 윤두준을 안쳐다보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김태경은 또 내 어깨위에 손을 둘렀다. 나는 김태경을 째려보며 그 손을 떼려했지만 김태경은 여전히 방실방실 웃으며 떨어지질 않았다. 아 얘가 미쳤나 진짜 왜이래. "...아..좀!! 아..저 화장실좀.." 기어코 안떨어지는 김태경에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린 난 좀 민망해져서 그냥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확 올라오는 구역질에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까 먹었던 음식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게워내버렸고 다 뱉어낸 후에도 계속해서 나오는 헛구역질에 정말 정신까지 아찔했다. 먹은것도 없는데 체력 달리게 계속 헛구역질이나 해대고 있으니. "..정신차려. 헤어지기로 한 사람이야. 딴 맘 먹지마. 흔들리지마." 나는 나한테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들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반지에 나는 그걸 다시 끼우려다 멈칫해버렸다. 왠지 더이상 이 반지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어야만 할 것 같았다.아니, 여기가 아니어야만했다. 내가 맘을 굳게 먹지 않으면 누나마저도 힘들어질수도 있기에 나는 그 반지를 손에 꽉 쥐었다. 그래서 다시 주머니에 넣어둔 뒤 입을 대충 휴지로 닦은 뒤 세면대로와 입부터 헹궜다. 헹구고 헹궈도 왜이렇게 쓴지..온 몸도 부들부들 거리고.. 정말 아무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딱 며칠동안만 죽은듯이 자고 싶었다. "양요섭." 나는 세면대를 양 손으로 짚은뒤 간신히 서있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여기서 컨트롤을 하지 않으면 또 흔들리고 울어버릴게 뻔했기때문에 아까 외웠던 주문을 계속해서 걸었다.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왜."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져서 윤두준이랑 입씨름 할 힘도 없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하기 위해 뒤돌아섰고 윤두준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새끼..뭐야." "내 친구야. 그딴식으로 말하지마." "만나지마." "내가 왜?" "하지말라면 하지마." "..주제 넘는다는 생각 안들어? 상황파악 해. 형이 나한테..그런말할 입장 아니잖아." 나한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나, 독했다. "...뭐?" "누나 옆에서 약혼자인 티 팍팍 내면서 뒤에와서 나한테 뭐하는짓이야 이게? 하나만 해. 누나 약혼자 하든지 다 버리고 나한테 오던..." "다버리고 가겠다고 했잖아. 사람이 왜 약해지는지 알아? 잃을게 있어서래. 나..잃을거 아무것도 없어." 윤두준이 한걸음 다가오자 난 한걸음 물러났다. "내 앞에서 대놓고 끌어안고, 먹여주고, 입 닦아주는거. 너 잔인한거 알고있어, 양요섭?" "누나랑 형도..." "내가 양승혜를 왜 만나는데? 내가 그 여자랑 밥 먹고 싶어서 온줄 알아? 그여자랑은 일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근데 내가 그걸 왜 참고 있는건데!!!! 니가 건드리지 말라며!!! 니 그 잘나고 잘난 누나 다치게 하지 말라며!!! 그 사람 다치면 너 다치는거라고 그렇게 하지말라며. 나 그래서 겨우겨우 참고 있는거야. 안보여? 나도 사람이야. 참는데 한계가 있어. 양승혜가 상처받건 말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여자가 하자는대로 하는것조차도 돌아버리겠는데!!!!! 너 때문에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근데..넌 내앞에서..뭐했어. 어? 양요섭!!!!!!!!" 윤두준은 정말로 화가났는지 나한테 다가오더니 내 양 손목을 꽉 붙든다음 화장실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치곤 그대로 고개를 꺾어 내 입술에 입을 맞추려했다. 내가 강력히 거부했지만 윤두준은 마치 내 입술에 폭력이라도 행사하는듯 거칠게 대응했고 안그래도 먹은게 없어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힘을 쓰려다보니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 인내심 테스트하지마. 내눈에 한번만 더 너랑 그새끼 같이 있는 꼴 보이는 순간..나도 안참아." "그럼 어떡할건데. 누나한테 가서 우리 사이 다 까발리려고? 어디 그렇게 해봐. 형 앞에서 보란듯이 죽어줄게." 짝- 처음으로, 윤두준과 사랑하고 만나오면서 처음으로 윤두준한테 맞았다. 손에 온 힘을 뺀게 느껴질정도로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지만 그 충격은 나를 에워싸버렸다. 내가 윤두준한테 맞았다는 사실이.. 그가 나를 때렸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라서.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 할 생각도 못했다. "..죽는다는 말 내 앞에서..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너..사람 마음에 칼질 하는거..정도껏 해. 다시한번 말해줄게. 나 너 안보내. 죽어도 못보내고 안보내. 나 니가 싫다고 그래도 계속 전화하고 문자 할거야. 무슨수를 써서라도 너..다시 나한테 돌아오게 만들거야. 양승혜가 어떻게되든 내 알바 아니야. 난 너만 신경쓰이고 난 너만 걱정되니까." 윤두준은 그대로 뒤를돌아 나가려고 했고 나는 그 팔을 양팔로 잡아세웠다. "....제발..." "뭐?" "..제발..우리..헤어지자. 제발..부탁할게. 헤어지자. 그만..하자. 여기서 멈추자. 더 아프기 전에..조금이라도 덜 힘들때..헤어지자." 윤두준은 평소 보이지 않았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아까 자기가 때린 내 뺨을 손으로 살짝 감싸안는가 싶더니 서둘러 손을 떼며 말했다. "..못해." 그리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나가려는 윤두준을 난 또다시 붙잡았다. 더이상은..힘들어서 못하겠다. 더이상은..이렇게 힘들게 윤두준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한번만 더 윤두준이 나와 못헤어지겠다고하면 정말 다 놓아버리고 내 진심을 토해낼까봐 무서웠다. "...나...너무 힘들어. 서로한테 더 많은 상처 주기 전에..끝내자." 내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말하자 윤두준은 아예 뒤를 돌아 나를 아까의 벽으로 밀어부치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나는 더이상 막을 힘도 없고..아니 사실 그를 거부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채 가만히 있었고 윤두준은 아까 그한테서 맞은 내 뺨을 손으로 계속 어루만져주며 입술을 부드럽게 감싸안아왔다. 아주 짧은 키스를 끝내고 윤두준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말. 니 진심에서 우러나올때 말해. 이렇게 울며불며 말하지말고. 지금 니 얼굴..절대 헤어지지말자는 말이랑 똑같으니까. 때린거..미안하다. 내가 순간 미쳐서..." 윤두준의 말은 냉담했지만 여전히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은 너무 따뜻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것 같아서 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이에 내 눈물을 직접 닦아준 뒤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대고 윤두준은 딱 한마디를 속삭였다. "...사랑해." 그 목소리, 그 말투가 너무 옛날이랑 달라진게 하나도 없어서.. 그 말을 하고나서 뒤돌아서는 윤두준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마침 하도 안나오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화장실에 들어오던 김태경과 마주친 윤두준과의 약간의 신경전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주저앉아있는걸 본 김태경은 서둘러 나한테 다가왔다. "괜찮아!? 야..너 맞았어!? 볼 왜이렇게 부었어!!!!" "..나..어떡해...이제 어떡해..나 진짜...어떡해야돼? 말좀 해봐. 어? 나..어떡해야돼?" 더이상 힘이 없었다. 윤두준을 억지로 밀어내려는 힘도 이젠 바닥이 났고 이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정말..혼자서 도망치고 싶단 생각밖엔 안들었다. 이대로 한국에선 단 일분도 못살것 같았다. 지독했다. 세상 그 어떤것보다도 너무 독했다. 견뎌내기 벅찰정도로. #38. "..저 먼저 가볼게요. 죄송합니다. 누나 이따봐." 나는 태경의 걱정스러운 눈을 뒤로하고 테이블로 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윤두준과 누나를 보며 말했고 누나는 너무 걱정되는지 나를 계속 올려다보았다. "..너 볼 왜이렇게 울긋불긋해?" 살짝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좀 티가 나나보다. 나는 그냥 세수하다가 볼 좀 때렸더니 빨개졌다며 둘러댄 뒤 윤두준을 살짝 바라보았다. 웬만해선 무표정을 짓고 있는 윤두준의 표정은 그때만큼은 달랐다. 마치 자기가 미친새끼라며 자책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애써 무시한뒤 가게 문으로 나갔고 김태경 또한 나를 따라나왔다. "괜찮아 너? 저사람이 너 때린거냐 혹시?" "조용히해. 머리 울린다." 나는 밤이라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게 앞 계단에 주저 앉았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윤두준이 저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는데 이제 그럼 어떻게해야되나 정말 도망이라도 가야되나 싶어서 아직 화끈화끈한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바닥으로 고개를 내려버렸다. "...돌겠네." 김태경은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에 배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며칠만 더 있으면 몸 어딘가가 고장나버릴 것 같았다. 그냥 아무생각도 안하게 도망치고 싶단 생각밖에 안들었다. 정말 며칠동안이라도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이대로 서울에선 몸도 마음도 축나서 내가 못견디겠다. "진짜..설마설마했다 내가. 니 말 들으면서 진짜 설마 했거든? 존나..미치겠네 진짜. 야 이게 말이 되냐? 세상에 남자가 몇이고 여자가 몇인데..저 두사람이 만나냐? 아 개어이없어." "좀 조용히해. 나도 어이 없으니까." "..너도 참 너다. 저 꼴을 그냥 보고만 있는다고?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내가 순간 화가 울컥 치밀어 대답을 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시야가 뿌옇게 변했고 아주 잠깐 눈을 감고있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도망쳐야겠다." "니가 뭘 잘못했다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법이야. 결혼 막을 수 없으니까 내가 떠나야지." "왜 막을수가 없는데?" "어떻게 막을수가 있는데? 기가 막힌 방법 있으면 말 좀 해봐." 내 말에 김태경은 지도 할말이 없는지 그냥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더니 앉아있던 나를 일으켜 차로 데려갔고 나도 집에가서 좀 쉬어야될것 같아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맨 뒤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 차는 이내 아까 지옥과도 같았던 곳에서 빠져나갔고 그걸 본 이후에 나는 눈을 감았다. "야 내려." 잠깐 눈만 감는다고 있었는데 그새 잠이 들었었는지 김태경이 흔들어 깨우자 부시시 눈을 떴다. 근데 주변에 보이는건 집이 아니라 웬 물에..풀밭에... "뭐야?" "여기서 정신 차리고 들어가라고. 한강둔치." 먼저 차에서 내린 김태경은 차에 그냥 앉아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귀찮았지만 나도 일단은 내렸다. 내가 내리자 김태경은 내 손을 잡더니 강가 근처 계단에 앉히고는 잠깐 있으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한강 위에 있는 다리에는 예쁜 조명이 비추고 거기에 비춰진 물은 알록달록 예뻤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윤두준이랑 했던 마지막 데이트 코스도 여기였던 것 같은데... 그 생각을 돌이키고 나니 갑자기 씁쓸했다. 처음 같이 온 사람은 윤두준인데 이제 다시는 같이 올 수 없다. 같이 갔던 제주도, 남산타워, 인사동 그 모두 이제는 나 혼자만이 남겨져버렸다. 기억속에서의 우리 둘은 여전한데 지금은 너무 많이 틀어져버렸다. "...아프다.." 나는 아까 맞은 뺨에 손을 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젠 어디가 어떻게 아픈건지도 모르겠고 아픈게 내 시간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아프지 않은게 더 이상할 정도로 매일매일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속도 아팠다. 티는 내지않아도 윤두준도 나만큼이나 아플까? 그러다 갑자기 나를 때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윤두준이 걱정되었다. 맞을 만한 말을 했는데, 잘못한건 난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하고 있는건 난데 괜히 내가 가져야할 죄책감마저도 그 사람이 다 가져간것 같아 미안해졌다. 사실 소리만 유난히 컸지, 그 소리에 비해선 별로 안아팠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가 가방에 있을 핸드폰을 주섬주섬거리며 찾아 폴더를 열었다. 아직 누나와 같이 있는지 참 오랜만에 잠잠한 내 핸드폰이 날 맞이했다.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이 문자를 쓰고도 보낼까 말까를 고민했다. 또 이 문자를 보내면 다시 기대고 싶어지지 않을까, 윤두준도 나를 더 못놔주지 않을까 복잡한 고민이 들었고 결국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가방에 다시 던져넣어버렸다. "거기서 뭐해?" "어? 아 아니 아무것도." 마침 뭐를 들고 오는 김태경이 눈에 보였고 나는 차 문을 닫으며 아까 앉아있었던 곳으로 다시 가 앉았다. 김태경이 나한테 넘겨준건 아주 시원해보이는 맥주 한캔. "힘들땐 술이 최고다." "나 술 못마시는데?" "그냥 먹어. 아..근데 아무것도 안먹어서 속 쓰리려나? 그냥 콜라 사다줄걸 그랬나?" 김태경이 캔 따는 소리가 왜그렇게 시원하게 들렸는지 술은 제대로 입에 대지도 못하는 나지만 그냥 오기로 캔을 입에다 댔다. 시원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듯 그냥 벌컥벌컥 마셨고 단번에 캔의 반을 비워버린 나는 입을 쓱 닦으며 하-하고 숨을 쉬었다. "시원하다." "머리 복잡할땐 이런데서 술먹는게 최고야. 이건 내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인데..정말 좋은것 같다." "..내가 아까 윤두준 붙잡고 나 놔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렸어." 내 말에 김태경은 살짝 놀란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귓등으로도 안듣지 뭐. 내가 더 강해지고 담담해져야되는데...그게 맘처럼 안된다? 속으로는 수백번씩 생각해. 헤어지자고 아무렇지않게 말해야지, 그냥 그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는데도 막상 얼굴만 보면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이 안난다?" "..당연히 그렇겠지. 니가 그 사람 싫어서 헤어지자고 하는거 아니잖아. 얼굴만 봐도 좋겠지." 김태경은 술을 몇모금 마시며 눈 앞에 있는 강을 빤히 바라보았고 나도 술을 먹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내가 아직 정리를 못해서 그런거 같아. 그래서 생각해봤는데..일주일이고 한달이고.. 그냥 가보고 싶은데 다녀보면서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하나하나 정리하고 올라구. 서울 와서는 정말 아무것도 미련 안가질거야. 그 누구한테라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여행하면서 머리 식히는 거 좋지. 너 근데 사람 사랑하는게 생각같지 않다는건 니가 젤 잘 알지 않냐? 막상 또 그 사람 얼굴 보면 흔들릴거잖아. 그 사람이 너 붙잡으면 매몰차게 못 뿌리칠거잖아." 나는 마음이 찔려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나 이용해." "뭐?" 김태경을 바라봤지만 그는 나를 절대 보지 않았다. "어떤식으로라도 좋으니까 나 이용해도 된다고. 사귀는척 해달라고 하면..해줄수도 있고, 그 사람한테 충고를 해달라고하면 해줄수도 있어. 니가 해달라고 하는거, 원하는거..다 해주겠다고." "니가 왜? 뭣때문에?" "...해주고 싶으니까." 그 말을 하고나서 캔 하나를 비워버린 김태경은 술을 많이 사왔는지 미처 보지 못했던 검은 봉지에서 한 캔을 더 꺼내들어 그것마저도 마구 들이켰고 나는 술만 먹는 김태경을 빤히 바라봤다. 왜이렇게 안쓰러운건지.. 왜 이런 마음이 드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렇게 안타깝게 보이는건지 순간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아 나도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술을 찔끔 들이켰다. "..말이라도 고맙다." "진심이야." "..됐네요. 어떻게 사람이 자기 이용하라고 그런 말을 대놓고 할수가 있냐. 참..너도 이해가 안가는 사람중 한명이야." 나는 얼마 안남은 술을 다 먹고는 옆에다 놨다. 내가 한 캔을 한방울도 빠짐없이 비운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는데도 정신이 말짱했다. 이대로라면 맥주 열캔을 마셔도 술에 안취할 것만 같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아 이상할정도였다. "근데..그 사람도 너가 끼고 있었던 반지, 계속 끼고 있더라. 니네 누나분도 참 신기하다. 그게 의심이 안되나? 자기 동생이랑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뺐잖냐. 이제..안낄거야. 맘같아선 오늘 목걸이, 귀걸이까지 다 빼버리고 싶은데.. 그거까지는 용기가 안나서 못하겠고..시간을 두면서 천천히 하나씩 없애버릴거야. 나만 입 다물면 모든건 다 해결돼. 나만 물러나면 우리 누나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왜그렇게 멍청하냐..이런 말이 있어.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하면 결국은 행복해지지만 남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이상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 사람이 너한테 마음을 접지 않는 이상 니가 입 닥친다고해서 니네 누나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단 뜻이야. 말하자면 니네 누나는 허수아비 보고 사는꼴이나 똑같단거야. 아니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닮은 아이만 끌어안고 그 남자 등만 보면서 사는거거나. 그게..니가 바라는 누나의 결혼생활이었냐? 그렇게 니가 끔찍히 아끼는 누나의 행복이..그렇게되길 바래?" 나를 바라보는 김태경의 눈에선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쓸쓸함이 엿보였다. 자꾸만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고,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내가 술에 취해서 이렇게 보고 있는건가보다 하고 넘겨버렸다. "..아닐수도 있어." "아닐수도 있단건 너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는거잖아. 솔직히 말해줄까? 나는 그 두 사람 결혼했으면 좋겠어. 근데..싫어." "..무슨 말이야 그게. 좋겠다면서 싫다는건." "...들어 하는거 보고싶지 않으니까 싫어." 뭐 저렇게 중얼거려 안들리게. "뭐라고?" "...너 이쁘다고." 결국은 웃으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김태경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 등 뒤에다 양 손을 넓게 벌린다음 땅을 짚어 몸을 살짝 뒤로 젖힌 뒤 아주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은 별 하나도 반짝이지가 않네. 어디 시골에 가면 정말 별이 쏟아지는게 뭔지 알 수 있을만큼 별이 여기저기 막 있다던데...까만 도화지에 아무 그림도 안그린 것 같이 휑한 하늘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근데 점점 까만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말짱히 보였다를 두어번 반복하더니 아예 내 눈앞은 아까 봤던 까만 하늘보다도 더 까만 막으로 가려져버렸다. * "...으..."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속은 누가 위 안에다 산을 잔뜩 뿌려놓은것처럼 쓰리고 부대끼고 죽을 것 같았다. 대충 보니 내 방인것 같은데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도 생각이 안났다. 김태경이랑 한강에서 술을 먹은 기억까지는 있는데 그 이후론 필름이 딱 끊겨버렸다. 어쩐지 술이 술술 잘 넘어간다했더니만... 벌컥- 침대에 바로 누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 조차도 속이 울렁거려 감고 있었는데 누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길래 눈을 떠 방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뭔가를 들고 들어온 누나가 있었고 누나는 내가 깬걸 봤는지 서둘러 달려오며 그릇이 담긴 쟁반은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는 내가 누워있는 곳 옆에 걸터앉았다. "너 어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나 해?" "...안나.." "어디서 그렇게 술을 마셔서는!! 어제 같이 식사했던 니 친구가 업고 들어왔어. 나한테 전화했드라. 잠깐 나와달라고. 내가 정말..속 괜찮아? 너 어제 먹은것도 다 토했다며. 너 요즘 대체 왜그래? 누나랑 말도 잘 안하려고 하고?" 누나의 말에 나는 그냥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으론 웃었다. "..진짜..너때문에 속상해 죽겠다..너 안그래도 말랐는데...환자같이 이게 뭐야. 뼈만 남아서...진짜..너 뭐 먹고싶은거 없어? 딱 생각나는거. 없어?" "....스파..게티?" "스파게티? 토마토소스로? 알았어. 누나가 해줄게. 좀만 기다려. 일단 씻고..아 맞다. 이거 먹어. 속 많이 쓰리지? 부모님 집에 안계시니깐 방에만 있지말고 밖에 좀 나갔다 와. 정원 좀 거닐고.." 누나는 나에게 직접 꿀물을 손에 쥐어주며 기어코 내가 끝까지 다 먹는 것 까지 본 후에야 방에서 나갔고 나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거울 앞에 섰다. 내가 그렇게 말랐나... 정말 남들 말대로 거울엔 웬 초췌하게 생긴 미라 한명이 있었다. 머리는 다크 브라운에 머리색보다 좀 더 짙은 다크서클이 눈 밑에 짙게 깔려있고 손목은 앙상히 말라있었다. 안그래도 근육은 별로 없는 편인데 이건 아까 누나 말대로 환자의 모습이었다. 늘 윤두준이 쿡쿡 찌르고 꼬집어대던 볼살도 이젠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홀쭉히 들어가서... 그러고보니 콧대가 좀 높아진거 같아 그거 하난 맘에 들었다. 그렇게 몇분을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도 감고 샤워까지 말끔히 끝냈다. 방으로 나와 스킨 로션도 바르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또 배터리 없다고 폴더 열자마자 삐빅 하고 꺼지는 모습에 매일 충전 시켜놓는 배터리를 갈아끼우고 다시 켰다. 휘리릭 날아오는 문자 한통. [일어나면 문자해. _김태경] 내가 요즘 얘한테 신세진게 한둘이 아니다. 고민도 들어줘, 화풀이 대상도 해줘, 위로도 해줘, 술 먹고 떡실신한거 집까지 업어다줘...정말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다. 어쩌면 김태경과 친해진건 하늘이 준 일종의 약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윤두준과 그렇게 된게 나한테 병이라면 나를 위로해주고 돌봐주는 김태경은 약. 그래서 늘 고마웠다. 아마 평생 고마울지도 모른다. 미안하고. 답장을 하려는데 또 날아드는 문자. [문자 보면 전화해. _윤두준] 나는 아무래도 이 번호부터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놓던가 해야지, 혹시라도 누나가 볼까봐 무서워졌다. 이렇게 윤두준과 공유하고 있는게 많은데 같은 집에서 사는 누나가 눈치 못채는것도 참 신기했다. 하여튼 더럽게 눈치없고 눈썰미 없는건 아주 똑같이 닮았다 나랑 누나는.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일부러 피하고 싶지 않았다. 피한다고해서 내가 덜 힘든것도 아니며, 잊을 수 있는것도 아니니까 피한다고해서 모든게 다 해결되진 않는다는걸 서서히 깨달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고 설득을 해봐야할것 같았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간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윤두준이 절대 아니기때문에. 한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달칵-하는 짧은 소리가 나더니 연결이 되었다. "여보..." 「집 앞이니까 잠깐만 나와. 잠깐만.」 "지금? 우리집앞?" 「할말있으니까 잠깐만 나와.」 윤두준의 목소리는 상당히 차분했다. 뭐 늘상 차분하고 차가운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다시 거울앞에 섰다. 너무 눈밑이 쾡한게 보기 싫어서 어떡하지 하다가 누나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를 살폈다. 뭐 크림 같은게 있을텐데.... "..아 여기있다." BB크림 이라고 쓰여있는걸 손에 살짝 짜서 얼굴에 발랐다. "..이쁘게 보이고 싶냐...아직도.." 나는 다 바르고 나서 누나의 화장대 거울앞에 서서 한결 뽀얘지고 사람다워진 내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요즘도 웬만한 남자들도 다들 BB는 바른다고 하던데 나는 귀찮기도 해서 잘 바르고 다니지도 않았건만.. 이런날, 이런때에 바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정말 내가 먹고 싶다던 스파게티를 해주려는지 아주머니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틈에 들어가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올게. 슈퍼에 뭐 사올게 있어서.." "어, 그래. 천천히 갔다와. 바람도 좀 쐬고." 누나는 뭐를 그렇게 하는지 나를 살짝 쳐다보다가 다시 칼질을 하며 말했고 나는 그대로 나가 대문을 열었다. 정말로 언제부터 기다렸던건지 윤두준이 집 앞에 있었고 누나 몰래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죄책감이라 순간 망설였다. 그냥 다시 들어가버릴까. 이순간 나는 마치 불륜이라도 저지르는것처럼 끔찍한 기분이 들어 소름이 쫙 끼쳤다. 엄연히 말하면 내가 먼전데도..떳떳할 수 없는 만남이라 그런가 갑자기 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타." 윤두준이 창문을 내리며 말하자 나는 그냥 차에 올라탔고, 윤두준은 내가 타자마자 집 근처 공원으로 날 데려가 차에서 내렸고 나도 윤두준을 따라 내려 커다란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슈퍼간다고 하고 나왔어. 금방 들어가야돼." "괜찮아?" 내 말은 듣지도 않았는지 대뜸 괜찮냐는 말에 난 어떻게 대답해야될지 몰라 윤두준을 바라보았다. 나만큼이나 상해보이는 얼굴이라 또 속이 상했다. 나만 힘들고 윤두준은 괜찮기만을 바란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이 힘든건 나 혼자 힘든것보다 훨씬 더 싫었다. "..밥 거르지 말고 먹고 다녀." "대답해. 괜찮아?" "...어." 나는 양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앞으로 쭉 편 뒤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손에 시선을 꽂아 윤두준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만이라도 보지 않는다면 그나마 차갑게 말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미친새끼다. 내가..널.." "아..어제 때린것땜에 그러는거면 신경 안써도돼. 소리만 컸지 하나도 안아팠으니까." "김태경 그새끼랑 같이 있는거 보니까..내가 눈이 뒤집혔나보다. 미친짓 했어 내가. 그리고 너..걔랑 만나지마. 건방지고 싸가지없는 새끼..." "친구라고 헀잖아. 왜 형은 늘 내 친구들한텐 경계부터해? 기광이한테도 그랬었잖아. 나 걔 아니었음 못버텼어. 나 걔 없었음 당장 어떻게 됐더라도 수백번 됐을거야. 형 없었을때, 나 혼자 죽고싶을때 있어준 애가 걔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 아무말이나 하지마." 내 말에 윤두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순간,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윤두준이 싫어하는 사람을 그 앞에서 감싼 내 말은 아마 윤두준으로 하여금 빡치게 만들었을거다. 그래서 내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슬쩍 들자 윤두준의 표정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무표정이었다. "그렇게 대단한애야?" "...아니..그러니까 내 말은..아니다. 내가 형한테 변명할 이유 없는것같고.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뭔데?" "보고싶어서." 이젠 지쳐버렸다. "..이제 보고싶을때 볼 사이 아니잖아. 근데..나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 "...우리 누나..행복하게 해줄수 없어? 그럴수 없을 것 같애?" "어." 그렇게 생각도 안하고 나오는 말에 쳐다보지 않으려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수트 차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그냥 티셔츠에 스키니진 차림이었다. 검은색 컨버스화를 신은 정말 대학생같은 윤두준의 모습. 여전히 좋기만 했다. 여전히. 변함없이. "나라고 생각하고..잘해주고..이뻐해주고..사랑해주면 안돼?" "양승혜가 양요섭이 아닌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해." "...그래도..우리 누나 형 많이 많이 좋아해. 형이 생각하는것보다..아니 어쩌면 내가 짐작하고 있는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이 좋아할지도 몰라. 부탁할게. 우리누나..힘들지 않게 해줘." "그럼 너가 나한테 해주는게 뭐가 있는데? 뭐 해줄건데?" 글쎄..내가 윤두준한테 뭐를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능력이 없는데.. "..하루에 한번씩 꼭 만나. 내 문자, 전화 씹지 말고...지금 뺀 반지. 다시 껴." "...그건 싫어. 불륜 같아서 싫어." "나랑 양승혜랑 만나는게 잘못된거야. 내가 너랑 만나는게 잘못된게 아니라.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데? 남자끼리 사랑하는거라? 그리고 너 헤어지자며. 근데 나보고는 양승혜한테 잘해주라며. 왜 다 너 하고싶은대로 해? 나는 너 얼굴 보고 싶어도 못보고, 안고 싶어도 못안는데 너는 왜 다 하고싶은대로만 하려고하는데? 니가 싫음 나도 싫어." "..누나 상처받는거 싫다고 말했잖아." "나는 니가 상처받는거 지금도 보고 있어. 마음같아선 양승혜 죽여버리고 싶은데..참는거야. 너 그렇게 말라가는거, 힘들어하는거 보는것만으로도 미치겠다고. 근데 나..노력하고 있어. 니네 누나가 만나자고 하면 싫어도 만나. 하자는거 다 해. 너때문에 노력하고 있다고." "그럼 앞으로 계속 더 노력해주면 안돼? 우리 누나..이쁘잖아. 착하고 형 생각많이 하고..잘해주고.. 형만 보잖아. 형만 보면 좋은게 얼굴에 다 보이잖아. 지금은 내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형도 남자니까 결국은 형도 우리 누나 좋아하게 될거야. 조금만 더 견디다보면..내가 없어지..아니 그러니까..조금만 더 만나면 우리 누나가 더 좋아질 수도 있고..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지도 모르게끔 횡설수설했다. 그냥 나 말고 누나한테 잘해달라고 결론은 헤어지자는건데..아마 못알아들었을것 같다. "그럴일 없어." "...됐어. 그럼 형이랑 할 말 없어. 누나한테 잘해주기 싫음 마음대로 해. 형이 누나한테 잘못할때마다 나 형 이렇게 보지도 않을거고, 대놓고 형한테 상처줄거야. 갈게." "양요섭!!!" 먼저 일어나 가려는 나를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긋지긋한 싸움을 계속 해야만 하는건지 이젠 슬프지도 않고 속상하지도 않다. 이렇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 조차도 마음속에서 인이 배겼는지 처음엔 그렇게 죽을듯 못견뎌했던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느낌이 없어. "싫다고!!! 형 이러는거!! 그래. 솔직히 말해줄게. 나 형 아직도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이렇게 얼굴 보는것도 좋고 내 이름 불러주는것도 좋아!! 그러면 형은 그렇게 말하겠지. 우리 둘이 좋아하는데 딴거 생각하지말고 우리둘만 생각하자. 도망이라도 가자. 근데..그거 되게 철없는거 알아?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형이 누나랑 결혼을 하건 말건 그건 별개야. 나는 이런 일이 없으면 몰랐을까, 이런 일이 생긴 후에도 이렇게 죄책감 느끼면서까지 형 만나고 싶지 않아." "나 너 못보내." "지금 이게 초등학생 싸움이야?! 나..진짜 매일매일 죽고 싶어. 얼마전까진 매일매일이 행복했는데 이젠 누구때문에 매일이 힘들어. 전쟁터에 있는것 같아서 괴롭다고. 형이 나 제일 힘들게 하는거..알고 있어? 제발..더 힘들어지기전에..끝내자. 제발." 나는 또 먹은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니까 순간 휘청했고, 그런 나를 본능적으로 잡아준 윤두준의 손길을 내가 생각해도 차갑게 뿌리쳤다. 역시 나오는게 아니었다. 이렇게 결론도 없이 부딪치기만 하는거라면...그냥 내가 없어지는게 나아. "그렇게..힘들어? 죽고싶을만큼?" "...형 보고 있는것도, 이렇게 말싸움 하는것도 이제 다 지쳐." "...노력해볼게." 나는 윤두준의 말에 대체 뭘 노력하겠다는 뜻인지 모르겠어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니네 누나한테 최대한..노력해볼테니까. 나 너 없음 아무것도 안돼. 나 좀..봐줘. 어?" 윤두준이 나한테 매달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사람한테 누나랑 결혼하지 말라고, 헤어지기싫다고, 우리가 먼전데 왜 누나랑 만나야되는거냐며 내가 매달려야하는건데. 오히려 윤두준이 나한테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날 붙잡고 있었다. 정말...이건 아니야.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거다 이건. "...형." "노력한다고. 니가 원하는거, 해달라는거 다 할테니까..나한테 날 세우지마. 칼질하려고 덤비지도 말고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말고 너한테 바라는거 없으니까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마." 윤두준은 나를 끌어안았다. 모르겠다. 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이 기나긴 전쟁과도 같은 싸움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끝나게될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렇게 집으로 들어와서 마침 누나가 내놓은, 예전에 윤두준이 나한테 했던것과 맛도 모양도 비슷한 스파게티를 최대한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면서 한그릇을 겨우 비우고 바로 기광이네로 향했다. 기광이를 본지도 꽤 오래됐고, 이래저래 할말도 많아서 집으로 찾아가 벨을 눌렀는데도 문을 열어주질 않아 전화도 계속 하고 초인종도 수십번 눌러야만 했다. 딩동- 딩동- "....누구세여....." "아 개새끼야!!! 왜 문을 이제서야 열어!!!!" "어? 아씨..나 자고 있었어..." 이기광은 하얀 런닝셔츠를 가슴팍까지 들어올려 배를 벅벅 긁으며 말했고 나는 이기광을 밀치며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파에 턱하니 앉았다. "...이야...양요섭 꼴 봐라..아프리카에서 굶주린 고아마냥..비쩍 말라갖고.." 이기광은 눈을 부비적대며 내 발 근처 거실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았고 팔자 좋아 보이는 이기광의 무릎을 발로 툭-찼다. "..너 어떡할거냐. 그러고보니까..반지 뺐네?" "서랍에 넣어뒀다. 이제..안낄거야." "그대로 포기하려고?" "그럼..뭐..어떡하겠냐." 내 말에 이기광은 어후씨 라면서 바닥에 벌러덩 나자빠졌다. "양요섭. 내가 진짜 진지하게 제안하는건데...그냥 도망치는거 어떠냐? 니네 부모님이나 형네 부모님이 어떻게든 찾아낸다고는 해도..이렇게..끝낼순 없지않냐? 니네둘이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는것도 아니고.." "애꿎은 사람들한테까지 상처입혀가면서 도망치면 우리가 행복하겠냐. 그냥 만남에는 끝이 있듯이, 우리 사이에 끝이 좀 일찍 왔다고 생각하면 돼." "..며칠사이에 스님 다됐네. 도 닦았냐? 병신...형도 그렇게 하겠대? 헤어지자고하디?" 이기광의 말에 난 아까 아침에 있었던 그 일을 떠올렸다. 헤어지기는 무슨..원하는대로 다 할테니까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말라드라. 천하의 윤두준이. 그 자존심 센 사람이.. "..절대 못한다고 그러지." "그럼 너 어떡할거야?" "유학..생각중이다. 어차피 아버지도 나 한국에 있는거 별로 안좋아하고.. 나는 영국에 가서 몇년 있다가 오고 싶다." 내 진지한말에 기광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날 쳐다보았다. "..진짜 가게?" "그럼 가짜로 가냐. 그냥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내가 형이랑 헤어지는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형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그때 갈거야. 근데 아직은 나도 오기로 헤어지자고 고집 부리고 있긴 한데 사실 나도 준비가 안돼서.." "근데 그 전에 승혜누나가 니네 둘 그렇고 그런사인거 알게되면?" "그럴리 없어." "그럴리가 없기는. 야 니네둘이 귀걸이도 나눠꼈지, 목걸이도 똑같지..알게되는건 한순간인데 무슨.. 그리고 너 유학간다고 그러면 승혜누나가 옳다쿠나 하고 바로 보내주겠다? 어떻게든 붙잡겠지. 그 와중에 형 귀에 들어가면...또 난리난다." "그래서 유학 가는거 맘 먹으면 아버지한테만 말할거야. 아버지라면 그 누구도 모르게 속전속결로 준비해주실 분이니까. 아마 하루만에 절차 밟아 놓으실걸? 내가 아버지한텐 눈엣가시잖냐.." 내 말에 기광이는 바닥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으며 어깨를 툭 쳤다. 뭐 힘내라는 무언의 표신거 같아서 그냥 싱긋 웃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근데..괜찮냐.." "안괜찮을게 뭐있냐." "하나도 안괜찮아보여. 너는 지금 니가 괜찮은척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거 착각이다. 나 지금 실연당했어요. 힘들어죽겠어요. 라고 얼굴에 쓰여있어." 오랜만의 이기광 진지한 얼굴을 보자 또 울컥해서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이제 남들 앞에서 우는건 그만하기로 했다. 어제 김태경한테 업혀들어왔다는 얘길 들은 이후로 더이상 남한테 내 고민으로 인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다짐했건만.. 저렇게 따뜻한 얼굴로 물어오면 난 또 무장해제 돼버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눈물 참고 있냐? 너 그거 참으면 병된다. 울땐 울어. 뭐 지금까지도 수도꼭지같이 울어댔겠지만.. 뭐 쪽팔린것도 아니고..걍 울어." "..누나랑 같이 있는 형 보면..속에서 막 뭐가 확 끓어오르고..누나가 밉고 보기싫고 그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 둘을 한꺼번에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텅 빈거 같아서 미치겠다. 그거 아냐.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버린 기분? 어디로 가야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주저앉아 있는데..언젠가는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야되는데 그게 무서워서..돌겠다. 이런거 꿈 꿔본적도 없는데..아까는 형이 나한테 와서.. 내가 해달라는거 다 해줄테니까 헤어지잔말만 하지말라고 그러는데.." "형이 그랬어? 니가 원하는거 다 해줄테니까 헤어지지말자고?" "어. 형이 그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는데..이젠 다 모르겠어. 우리 둘다 아직도 여전한데 왜 헤어져야되는건지도 모르겠고 니 말대로 도망쳐서 숨어 살고 싶고 딴 사람 생각안하고 나만 생각하고 싶은데...근데..그러면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그러겠어. 근데 또 다치는 사람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못하겠다 진짜." 나는 정말 애기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한번도 이렇게 울어본 적 없었는데, 울어도 그냥 어떻게든 참으려고만 했지 이렇게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면서 운 적은 없었다. 근데 이렇게 우니까 속도 뻥 뚫리는것 같긴했다. 좀 쪽팔리긴 했어도. "그래 걍 울어라. 울어. 니 속이 속이겠냐. 그리고 그냥 니가 하고싶은대로 해. 니가 그 두사람 결혼 시켜야되겠다 싶으면 시키고, 도망쳐야겠다 싶음 도망치고, 너 혼자 토껴야겠다 그럼 그래버려. 니가 제일 맘 편할 것 같은걸로다가 질러버려." 나는 내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싼다음 정말 통곡이란 표현이 딱 맞을만큼 크게크게 소리내서 울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울었던게 정말 갓난아기때 말고도 또 있었을까 싶을정도로. 아마 부모가 죽어도 이렇겐 안울겠다 싶을정도로 심하게 울었다. 몇십분 동안을. "다 울었냐?" 나는 이기광이 건네준 티슈에다 코를 흥-풀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기광은 한숨을 쉬며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야 너 그러고보니까 염색 했네? 왜 했냐?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을땐 귓등으로도 안듣더니." "...그냥.." "근데 금발이 더 익숙해서 그런가..좀 어색하다. 어쩐지 뭐가 달라졌다했더니..머리가 바뀐거였구나..." 나는 코를 또 흥-하고 푼 뒤 코푼 휴지를 바닥에다 던져버리곤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너무 힘들게 울었나보다. 머리도 지끈거리면서 아픈게..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참지않고 털어버리는게 효과가 있나, 또 나중에 혼자있을때 이렇게 울어봐야겠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내 가방에서 울리는 진동에 기광이는 핸드폰을 건네주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나는 뭐냐며 핸드폰을 가로채듯 가져가 화면을 보는데 [김태경] "...왜." 「일어나면 문자하랬더니 문자도 안하냐?」 "아..까먹었다. 어제 미안. 니가 업어다줬다면서. 한번도 아니고...미안." 「너 그렇게 술 못하는줄 알았으면 애초에 안먹이는건데...」 "내가 먹고싶어서 먹은건데 뭐. 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지금 친구랑 같이 있어서. 끊는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기광이를 쳐다보았다. 쟨 또 왜저래. "..김태경..걔 유명한앤거 알아?" "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데." "걔..TV랑 잡지에도 나오는 엄청 유명한 모델인거 아냐고. 일반인들은 잘 몰라도 패션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김태경이라고 이름만 대면 다 알걸? 걔네 집 무슨 회사 한다던데..엄친아라고 소문 장난아니야. 키도 크고, 잘생기고, 소문엔 성격도 좋다고 그러드라?" "다른건 다 모르겠고, 모델이라고는 하드라. 뭐 알바라고 그러더니..프로였나보네. 성격은 좋아. 착한거 같고..그래서 미안해." "..걔..너한테 뭐냐? 그냥 친구냐 아님..." "친구다 친구. 이기광 너랑 똑같은 친구." 내가 이기광의 허벅지를 뻥 차며 아직도 뜨거운 눈을 손바닥으로 누르는데 이새끼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물었다. "...걔도 너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뭐!!! 날 좋아하기라도 한단거냐?" "야..좋아하는게 아님 번호를 왜 그렇게 따가는데? 그리고 그렇게 매번 전화하면서.." "친구하고 싶다고 그랬다니까? 그리고 걔가 눈이 삐었냐? 지 좋다는 수많은 사람들 냅두고 나 좋아하게? 아 몰라 내가 지금 그게 문제냐!? 아 진짜..." "...내가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너무 걔한테 기대지마라. 남한테 상처 줄 생각 아니면." 이기광은 이 말을 하고나선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기광이의 말을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나는 김태경의 마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한테 잘해주긴 했지만, 그냥 그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해주는거라고만 생각했었고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어느정도의 친절과 호의도 아무생각없이 잘 받아들여왔었다. 만약 걔가 날 좋아하는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면 나는 작은 친절조차도 부담스러워서 안받았을거다.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순간 김태경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역시나 현실성 없는 얘기. 그렇게 잘나고 멋진 애가 나같은 찌질이를 좋아할리가 없다.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 고민을 가장 열심히 들어주었던 친구가 아닌가. 의심할 여지조차도 없었다. "...야. 김태경은..." "니가 무심코 한 행동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수도 있다고, 행동 조심해. 내가 생각했을때...그냥 단순한 느낌은 아니니까." 기광이는 뭐를 먹으려는지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있다가 영 먹을게 없는지 찬장에서 달랑 하나 남은 라면을 꺼내들어 냄비에 물을 들이고 거실 한복판에 앉았다. "..너땜에 나도 복잡하다. 아 우울해. 우울해!!!!!" "병신." 기광이는 누구랑 문자를 하는지 계속 문자를 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무슨 자린고비가 밥한술 뜨고 천장에 매달린 굴비 한번 보고 씹듯이 이새끼는 내얼굴 한번 보고는 한숨을 쉬어댔다. 지금 누구 앞에서 힘들다고 저러는건지. "..안쓰러운새끼. 원래 첫사랑은 힘들다던데...왜 하필 형이 니 첫사랑이냐.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새끼가..아주 완벽하게 데였다. 너 다시는 사랑같은거 못하겠다 무서워서. 나같음 못해.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근다는 말이 딱 맞아." "지금 다음 사랑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냐. 내 머릿속엔 온통..윤두준을 어떻게 설득해야하나..이 생각밖에 없는데." "..헤어지기로 완벽하게 마음 먹은거냐?" "헤어지긴 헤어질거야. 이렇게는 못만나지. 형이 누나랑 결혼을 하건말건 그거랑 별개로.. 못만나. 죄책감들어서 어떻게 만나. 우리누나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옆에서 봐도 좋아하는게 그렇게 티가 나는데...그냥 누나가 알기전에 헤어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안힘들겠어?" "그래도 견딜만은 하다. 죽고싶을만큼은 아니야. 인이 배겼나봐." 내 말에 기광이는 또 긴 한숨을 쉬더니 냄비 물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라면을 거칠게 부숴 아뜨거워 라는 말은 데코처럼 곁들이며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고 솔솔 내 코에도 고소한 라면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다. "..너 근데 솔직히 형 얼굴 보면 아직도 좋지?" "....말이라고 하냐. 나 아직도 좋아한다니까? 아 몰라. 생각하고싶지 않다." 나는 그냥 소파에 드러누우며 눈엔 팔을 올려 가렸고 기광이는 계속 라면을 끓이는지 아무 소리도 안들렸다. 그나마 내가 맘편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고보니..내 모든 짐이 윤두준네 집에 있는데..그것도 가져와야되는데..그것조차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집에 다시 가는 것조차도 무섭고 두려워서..혹시나 마주칠까봐 그것도 걱정되고. 그렇다고 거기있는 짐을 그냥 냅두자니 찜찜해서 싫고...아휴. 한참 라면을 끓이던 기광이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다시 멀어졌다. 아무래도 방으로 들어간건지 방문까지 닫고선 몇분을 있다가 다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이제 가." "뭐!?" "현승이 오기로 했다. 현승이 니 그 시체같은 얼굴 보면 기겁해서 울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 또 걔앞에서 울지말고 얼른 가." "..아 진짜 나쁜새끼..애인때문에 힘든 친구를 이렇게 쓰레기 내다버리듯 버리냐!?!?" "사랑앞엔 우정도 없는거다. 얼른 가라. 조심히 잘가고..밥 꼬박꼬박 먹어라. 밥 맛 없어도 좀 먹어. 죽을 생각 아니면." 이렇게 온지 한시간만에 나는 기광이네 집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이 후회와 서운함에 기광이의 집 현관문을 발로 까버렸고 그래도 분이 안풀려 완전 발길질을 해놓은뒤 하얀 문에 시꺼먼 발자국을 여러개 낸 뒤에야 오피스텔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에라이 재수없는 새끼. 확 망해버려라 퉤!!!!! "양요섭." 나는 계속 이기광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또 햇빛 쨍쨍한 곳으로 나오니 짜증나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내 바로 앞에서 아까 아침에 봤던 그 사람이 차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젠 어딜가나..내가 어디에 있건..항상 같이 있는 것 같았다. 할일도 없나..옛날엔 그렇게 바쁜것 같더만. "..이기광 보러 왔어? 그럼 보고 가." 나는 그냥 지나치려는데 내 손목을 아프지않게 쥐곤 날 잡은 윤두준은 날 바라보았다. 뭐 어떡하자고. 여기까지 날 보러 온건 아닐텐데. "뭐." "데려다줄게. 타." "안타 이제." "고집부리지말고 타." 아주 짧은 시간동안 팽팽한 신경전이 오고갔다. 그치만 항상 이런 전쟁에서 지는건 무조건 내쪽이었다. 이건 아직도 내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난 멀었다는 뜻. 나는 내가 늘 타던 조수석에 타려다가, 어제 누나가 그 자리에 앉은 그 모습이 떠올라 문고리를 당기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이젠 여기에 내가 타면 안될 것 같아 뒷자석 문을 열어 탔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뭐해 너?" "그냥 가. 여기가 편해." "쓸데없는걸로.." "나 내린다." 윤두준은 입술을 앙 다물고 나를 빤히 보다 그냥 차를 출발시켰다. "..요즘 할일 없어? 그땐 그렇게 바쁜척 하더니..왜 요즘은 맨날 이렇게 찾아오고 그래? 한가한가봐?" "이제..바빠질거야. 잠깐 틈 나서..보러온거야." "어련하시겠어요." "..그런식으로 말하지마 양요섭." 이제 윤두준의 이런 말에도 난 쫄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내공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근데 이런 내가 왜이렇게 싫은건지..기광이네 집에서 우리집까지 별로 먼 거리는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지독히도 멀게 느껴졌다. 이젠 윤두준과 같이 있으면 불안하고 불편했다. 여전히 얼굴을 보면 좋고 설레는건 그대로였지만, 불편하고 마음이 무거운건 사실이었다. 아마 이런 짐은 평생 가지고 갈테였다. 이것이 내가 윤두준과 도망쳐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다신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지마."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잘가라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차에서 내렸고 내리자마자 난 뜻밖의 상황에 부딪쳐야만했다. "야!! 어디갔다오냐!?" 윤두준의 차 바로 맞은편에 주차해둔 차에서 내린 김태경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얘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바로 윤두준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싹 굳어버린 윤두준의 얼굴. "...너 왜 여기있어?" "같이 해장하려고 왔더니..누나가 너 나갔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그냥 기다렸지. 어..? 아.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윤두준에 나는 김태경의 옆으로 가려는데 윤두준이 내 손목을 꽉 잡아왔다. 피가 안통할정도로 꽉 잡아서 내가 그의 얼굴을 보자 윤두준은 날 보지도 않고 여전히 김태경의 얼굴에 차가운 시선이 꽂혀있었다. "어디 같이 다녀오시나봐요. 양요섭! 내가 너 어제 떡실신하게 만들었으니까 해장국 사줄게. 가자." 내가 김태경에게 가려고 발을 움직이자 윤두준은 더욱더 꽉 내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놔. 앞으로 내 몸에 이렇게 멋대로 손대지마." 내 말에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쳐다보는 틈에 그의 손힘이 풀렸고 나는 그 사이 손을 뿌리친 뒤 김태경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 뒤에서 윤두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생각만해도 가슴이 무너지는 듯 쓰라렸지만 언젠가는 꼭 겪어야할 일이었으므로 참아내야만했다. 김태경은 내가 다가오자 대뜸 나를 끌어안더니 귓속말을 했다. "가만히 있어." 김태경의 말에 내가 가만히 있자 그는 내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더 꽉 끌어안았고 왜이러냐고 밀어내려는 찰나 갑자기 내 몸이 휘청거렸고 이내 김태경은 바닥에 나가떨어져있었다. "형!!!!!!!! 김태경!! 괜찮아?" 나를 끌어안은 김태경에 결국 폭발했는지 윤두준이 김태경에게 주먹질을 했고 무방비 상태로 맞은 태경이는 바닥에 주저 앉아있었다. 입가가 터졌는지 핏방울이 맺혔고 나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폭발해버렸다. "미쳤어!??!? 어따대고 주먹질이야!!!!!" 내가 윤두준의 앞에 가서 말했지만 그는 나를 살짝 밀친 뒤 주저앉아있던 김태경의 멱살을 쥐어 일으킨 뒤 다시 주먹으로 김태경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퍽-하는 소리가 끔찍하게 들리고 이번엔 살짝 밀렸을 뿐 넘어지진 않은 김태경은 손으로 피를 살짝 닦더니 웃었다. "...건방진 새끼." 윤두준은 다시 김태경의 멱살을 잡았고 나는 그 사이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둘의 눈엔 내가 안보이는지 아주 스파크가 장난 아니었다. "...이제 이러시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요섭이 매형 되실분이.. 이렇게 감정 정리 못하고 추하게 매달리는 꼴..우스운데요." "니까짓게 뭔데. 그따위 충고를 하는거지?" "양요섭이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젠 그쪽이 아니라..접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쪽은 요섭이 힘들게만 하는 사람이라는거. 싫다는데도 굳이 쫓아와서 괴롭히는거..취미있으신가봐요. 요섭이가 그쪽덕분에 밥도 제대로 못먹고 토하기 일쑤에요. 저러다가 병나도 전혀 놀랍지 않을만큼이요. 죄책감 같은거 없으신가봐요. 그렇게 뻔뻔하게..." 김태경의 뺨엔 세번째 주먹이 날아들었다. 짝- 이번엔 내가 윤두준을 때렸다. 예전에 그가 날 때렸을때처럼 온 손에 힘을 빼고 때린게 아니라, 내가 실을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담아 윤두준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려버렸다. 정말 귀를 갈라놓을 듯한 소음이 들렸고 그때 나처럼 윤두준은 돌아간 고개를 다시 원위치 시킬 생각을 안했다. "..점점 더 실망하게 만들지마." 내가 뒤돌아서 피가 흐르는 김태경에게 다가가려하자 윤두준은 나를 힘이 쫙 빠진 손으로 잡았다. "..가지마." "놔. 한번만 더 소란 피우면...형 다신 안봐." "..양요섭!!!!!!!!!!" 윤두준이 울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했던 사람이, 하품을 해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던 윤두준이 내 앞에서 나를 잡고 울고 있었다. 눈이 토끼처럼 새빨개져서 내 이름을 외치며 우는 윤두준의 모습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윤두준의 눈에선 옛날 장현우 때문에 울었던 그가 보였다. 그때처럼 나마저도 자기 눈앞에서 잃어버릴까봐 불안하고 무서운듯한 눈빛이 그의 눈에 가득 서려있어서 하마터면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안아줄 뻔했다. 정말....하마터면. "...뭐야..지금?" 대문이 땅-하고 열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는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던 누나가 어지러운 상황을 보며 말했고 나는 내 손목을 쥐고 있는 윤두준의 손을 뿌리친 뒤 그를 등졌다. "...어? 아..아니야!!" "..둘이..아는사이에요? 두준씨?" 누나의 말에 내 옆으로 오더니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아오더니 누나의 눈 앞에다 내밀려고 했고 당황한 나는 얼른 그 손을 내 등뒤로 감췄다.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너무 뜨겁고 세서 막는게 너무 힘들었다. 누나에게 우리 둘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않았다. 그렇지만 윤두준의 힘을 막을 순 없어서 자꾸만 힘이 빠져갔고 윤두준이 나를 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도 감았다. 제발. "...과..과외 선생님이었어 사실." "뭐?" "사실..나 고3때 과외선생님이었는데..말 미리 못한거 미안. 그냥..내가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면..좀 그럴거 같아서..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라.. 속이려고 속인거 아니야 정말!!! 누나!! 아무사이 아니야." 윤두준은 내 손을 더욱 꽉 잡아왔다. 내 등뒤에선 어떤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누나는 그런거였냐며, 뭐 숨길일이라고 그걸 말안했냐며 웃으며 넘겼고 정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을 뻔 했다. "..어머..태경이도 있었네? 너..누구한테 맞았니!? 얼굴이 왜..." "...아..제가 취미가 복싱이라 아까 연습좀 하다 다쳤어요. 혹시..집에 약 있어요? 들어가도 돼요?" "어? 어!! 들어와. 두준씨도 들어와요. 요섭아 너도 얼른 들어와." 김태경은 냉큼 누나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고 누나와 좀 멀어지자 나는 윤두준을 막아섰다. "그냥 가." "싫어." "그냥 가 제발!! 또 무슨 사고 치려고!!!" "사고 안쳐." "..형!! 좀..제발..나 죽는꼴 보고 싶어서 이래!?" 내 말에 윤두준은 손을 놓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정말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더이상은 못지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는...못살것 같다. 하루하루 미칠것 같아서. #39. 내가 다 포기한 걸음을 하고서 먼저 들어간 윤두준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집안에서 김태경과 윤두준을 맞이한 누나는 그 둘을 붙잡으며 참 눈치 없는 말을 해댔다. "차 마시고 가요." "아 누나.." "먹고 가죠! 야..집 좋다!!" 김태경은 넉살좋게 웃으며 입술엔 벌써 피딱지가 앉았는데도 실실거리면서 거실로 들어갔고 윤두준이 따라 들어가려하자 순간 손을 잡아 멈춰세워버릴뻔 했다. 누나가 있는데도. 결국 김태경과 윤두준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나는 김태경의 옆에 앉았다. 사실 김태경의 옆에 앉는것도 윤두준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신경쓰였지만 윤두준의 옆에 있다간 내가 피가 마를것 같아서 그냥 그 시선은 애써 무시한채 김태경의 옆에 앉아있다가 그의 터진 입술을 본 나는 괜히 속이 상해 자리에서 일어나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누나는 차를 준비하고 있는지 부엌에서 안나왔고. 좀 빨리좀 나오지. "..안아프냐?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거려." 구급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독약을 거즈에다 살짝 묻혀 김태경을 보기 위해 얼굴을 드는데 순간 너무 차갑게 식어있는 윤두준의 눈빛과 마주해버렸다. 그만하라는 듯한, 자기 앞에서 남 챙기지 말라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무시해버렸다. 이제 윤두준의 시선은 무시해야만 했다. "가만 있어." "..아..아..아 따거!!" 터진 입술에 굳어있는 피를 거즈로 닦아내는데 김태경은 따가운지 계속 눈을 찡긋찡긋 거리면서 내 손을 잡았다. "아 가만 좀 있어." "진짜 따갑다고!!!" "그럼 이대로 살던가!!" 나는 김태경의 손을 왼손으로 붙잡은 뒤 오른손으로 입술 주변을 거즈로 닦았다. 그리고는 연고를 짜서 입술가에 살살 발라주었다. "..이거 말할때마다 다 먹겠다." "너 입안에도 터진거 아니야? 이는 안흔들려?" "내가 순발력이 장난아니거든. 순간 이 꽉 깨물었지롱." "자랑이다 그래." 나는 김태경의 볼을 슬쩍 밀며 연고가 묻은 손을 휴지로 닦으며 구급상자를 정리하는데 순간 무릎위에서 주먹을 꽉 쥔 윤두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김태경을 때리다 어디에 긁혔는지 윤두준의 손 또한 상처가 나있었다. 나는 못본척 하려는데 그런 거짓된 행동이 내 진심은 막을수가 없었는지 연고를 윤두준 앞에 내밀었다. "상처 났네. 발라." "됐어." "..사과해. 태경이한테." 내밀었던 연고를 다시 상자에 넣고 닫으며 말하자 윤두준은 뭐?라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에 나는 정말 당당한 눈빛을 하고서, 절대 피하지 않겠단 그런 눈빛을 하고선 윤두준에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라고. 애 지금 얼굴 엉망된거 안보여?" "...양요섭." "잘못한거잖아. 사과해." "..넌 나한테 잘못한거 없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김태경의 터진 입술에만 신경쓰느라 아까 윤두준의 뺨을 힘껏 후려치면서 터져버린 그의 입술은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정말 있는힘을 다해 때린터라 아마 입 안은 완전 헐어있을게 뻔했다. 내가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어떤 사람때문에 윤두준을 때렸다는게 너무 미안하고, 이렇게까지 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에 나는 목이 메어버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되는데..말이 차마 나오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그 앞으로 가서 키스 해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은데...정말 그러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너무 주제넘게 말했던거..인정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적막을 사이로 김태경이 먼저 고개 숙여 윤두준에게 사과했고 윤두준은 생각지도 못했던 시나리오였는지 김태경과 나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누나가 찻잔이 담긴 쟁반을 조심스레 가지고 나왔고 참 적절한 타이밍에 다들 따가운 시선은 거둬버렸다. "녹차 괜찮죠? 커피보단 괜찮을 것 같아서..아 태경군. 우리 요섭이가 그렇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법이 없는데.. 업고 오느라 수고했어요. 어제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나중에 정말 크게 대접할게요." "아니에요. 얘가 안마신다는거 제가 억지로 마시게 한거에요. 앞으로 그런일 없게 주의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윤두준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치만 나는 윤두준한테 드는 그 미안한 마음에 아까 했던 떳떳한 눈빛은 다 없애버리고 그냥 초록색 녹차가 담긴 찻잔만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두준씨. 왜 말 안했어요? 요섭이랑 아는사이였단거?" "..요섭이가 싫어해서요." "..네? 요섭이가 왜..양요섭. 너 왜 모른척했어?!" 순식간에 돌아오는 포커스에 나는 계속 벌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아..별로 그렇게 많이 친했던 사람도 아니고..아는척 하면 좀 그럴거 같아서..그랬지." "하여튼 양요섭 너. 요즘 나한테 비밀 늘었다? 서운해.." 누나의 말에 나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내마음 안에선 당연하다는 듯 윤두준의 옆에 앉은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나란히 앉은 둘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헤어지지 않으면 안될까, 그래도 내가 더 잘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한 답이 조금씩 조금씩 내려지고 있었다. 정말 너무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잘 어울리는 둘의 모습에.. 나는 어느 순간 누나의 무릎 위에 윤두준을 쏙 빼닮은 아이가 앉아있는 상상까지 해버렸다. 그렇게 세가족이 나란히 앉아있는다 생각하니까 동화에서만 나오는 단란한 가족의 표본인 것 같아 나는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윤두준에게 저렇게 해줄 수 없었다. 남들 눈에 참 잘어울린다는 그런 흔한말조차 듣게해줄 수 없었고, 그와 나를 쏙 빼닮은 아기를 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늘 남들 모르게 숨어서 사랑을 해야만 했고,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해야만 했다. 나는 윤두준에게 그정도밖에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윤두준이 장차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 모든 사람들의 포커스를 받을 때도 나는 그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될 뿐, 그의 떳떳한 자랑거리는 죽어도 될 수 없는 그런 짐덩어리같은 존재였다. 사랑이란건 아주 잠시 잠깐 활활 타오르는 폭죽과도 같아서 언제까지나 밝고 환하고 이쁘게 타오를것 같은 폭죽 또한 그 시간이 다해버리면 아주 차갑게, 언제 타올랐냐는 듯 거멓게 변하는 것 처럼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지금은 사랑해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우리 둘만 보일지언정, 조금 더 크면, 세상을 좀 더 알아가게되면 반드시 서로를 자신의 벗을 수 없는 짐이라고 생각하게 될거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멀리 보는 눈이 필요했다. "..잘어울려.." "뭐?" "...너무..잘어울려서..둘이..너무 잘어울리는거 알아? 진작 이렇게 만났으면 좋았을걸..." 나는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게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역시 그것때문에 일렁이는 눈빛을 하고서 나를 보는 윤두준을 알아버렸지만 정말 이쁘게 잘 어울렸다. "..정말..이젠..물러나야겠다. 둘이 시간 가져. 방해꾼은 사라질테니까." "뭐? 양요섭 왜이래 진짜.." "시간 만들어드릴테니깐 좋은시간 보내시라구요 양승혜씨. 김태경. 넌 집에 가고."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김태경은 무슨소리를 하냐며 나보다도 빨리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버렸다. 쟨 또 왜저래 진짜. 안그래도 온 몸에 있는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아서 죽을 것 같은데... "야!! 니 방 어디야?" "오른쪽." "...헥!! 왜이렇게 휑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더니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저런 소리라서 나는 그냥 문지방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채로 김태경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너마저도 없었으면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럭저럭 죽으려고 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던건, 그것도 아주 가끔씩은 웃으면서 지낼 수 있었던건 다 저 고맙게 철없이 웃는 김태경 덕분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영문없이 쥐어터졌으면서도..저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 왜 저렇게 나한테 잘해주고 신경을 써줄까. 이제 조금씩 태경이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질 것 같았다. "이야..책 많네. 공부 열심히 했나보다 꼴에?" "꼴에 같은 소리하네." 나는 피식 하고 웃으면서 방문을 닫고 들어와 내 첫번째 서랍속에 있을 반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저것도, 내 귀걸이도 다 돌려줘야할텐데..무서웠다. 정말 그렇게 되면 끝이라는걸 내가 먼저 선언하는 꼴이었으니까. "야..근데 이 시험지들은 다 뭐야?" "과외준비한다고 헀잖냐." "니가!? 스스로 돈 벌 줄도 알고...기특하네?" 김태경은 내 뒷통수를 쓰담쓰담해주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장난스레 툭-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김태경은 뭐 그렇게 구경할게 많은지 책장도 보고, 책상에도 앉아보고 tv도 켜보았다. 마치 호기심이 많은 애처럼. "..근데..저 사람이 니 첫사랑이냐?" "뭐?" "그냥..사랑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여서. 아님 말고." "사랑 처음 해본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김태경은 그냥 tv 채널이나 리모콘으로 뒤지면서 나한테 등지고선 말했다. "너 사랑에 목매고 있잖아. 이 사랑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필사적인게 눈에 보여. 사랑 여러번 해본사람은 사랑에 능숙해서 사랑때문에 다쳐도 최대한 안아픈 방법을 알고, 자기 상처 생각하느라 사랑하던 사람은 신경을 쓰지 못해. 근데 넌 아니야. 눈빛 하나하나에도 아프고 애달픈게 훤히 보인다. 그러니까...나도 병신같이 이러고 있는거지만." "무슨 소리야?" "...너무 그 사람만 보지말고..옆도 보고 앞도 보고 뒤도 봐." 그 순간, 왜이렇게 김태경이 안쓰럽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자리를 피하고 싶단 생각때문에도 그랬고 그냥 김태경한테 내 진심이 훤히 보여진것 같아 쪽팔려서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먹을 것 좀 갖고 온단 핑계로 방 밖으로 나갔고 마침 보이는 누군가의 두 발에 나는 굳어 버렸다. "..나도 다쳤는데." ".....때린거 미안. 순간..나도 모르게." 내 눈빛이 남들이 봐도 애달파보이나..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아닌가보다. 김태경의 눈에 내 진심이 훤히 드러나보일정도였으면..나는 제대로 거짓말을 하고있지 않은거였다. "내일 시간 비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윤두준을 바라보았다. 이에 윤두준은 아무짓도 하지 않고 내 두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내 생일날 시간 비우라고." 벌써 7월 4일인가..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거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엔 윤두준 깜짝 생일파티 해준답시고 집에서 별 생쇼 다 했던게 아직도 생생한데 그게 벌써 1년전이라니..믿겨지질 않았다. 그리고 불과 일년만에 이렇게 된 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윤두준과 그런 특별한 날에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없고 만들어서도 안된다. 내가 독하게 마음 먹지 않으면 이런 지지부진한 사이가 평생 될 수도 있었다. 윤두준은 나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이니까, 내가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자꾸만 마음이 시키는대로 해버리면 결국은 우리 셋 다 다쳐버릴게 뻔했다. 내 안일한 태도 때문에. "..나 내일 시간 안..." "왜 여기 모여있어?" 내가 시간이 안된다고 거절하려는 찰나 누나가 쿠키가 든 쟁반을 들고 올라오고 있었고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 내일 형..아니 선생님 생일이라는데 누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데 쑥스러워서 말 못했나봐. 나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길래..그 얘기 하고 있었어!!" 내가 오바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정말 환하게 웃는 누나와는 달리 나를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선 쳐다보는 윤두준이 있었다. "양요..." "누나 그거 나 주는거지? 잘 먹을게!!!!" 윤두준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터져나오기 전에 자리를 피해버려야될 것 같아 누나가 들고 있던 쟁반을 잽싸게 낚아채가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았고 나는 금방이라도 쟁반을 떨어뜨릴 듯하게 손을 벌벌 떨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아까 앉아있었던 의자에 그대로 있던 김태경이 빤히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와 쿠키가 담긴 쟁반은 아무데나 내려놓고 멍하니 눈물만 그렁그렁하게 고여있는 내 눈을 빤히 보다가 내 양 어깨를 꽉 붙잡아왔다. "..병신같이 울지 말고. 나 이용해. 니가 부르면 거기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무조건 갈거고 니가 해달라는건 죽는거라도 다 해줄거야. 그러니까..그렇게 다른 사람때문에 울지마. 짜증나니까." 김태경이 나를 안아주자 나는 그의 등을 꽉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려버렸다. 정말 하루에 아주 조금씩 내 마음이 칼로 잘려나가는 것 같이 아팠다. 정말 사랑을 여러번 해본 사람은 나 같은 상황에서도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처음 해보는 사랑이라 이렇게 힘들고 아픈건가? 나는 정말 끝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김태경의 옷깃에 뚝뚝 흘리면서 입을 꽉 깨물었다. 아직도 난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끔찍한 악몽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제 더이상은 현실적이지 않은건 생각하면 안된다는 건 알지만, 매일매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누가 나를 좀 구해줬으면, 도와줬으면, 어떻게 좀 해줬으면. * "..동생. 나 노트북 좀 써도돼?" 오늘 있을 과외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러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나혼자 중얼거리면서 방에 있는데 누나가 슬며시 들어오더니 말을 걸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테이블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맥북을 켰고 그것까지만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동운이가 약한 유형을 종이에 적어 정리하고 얼마전 서점에 가서 사왔던 문제집을 훑어보며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머릿속으로 개요를 짜냈다. 풀어보고 어려울것 같은건 내가 미리 표시해두는 등 정말 완벽에 완벽을 기하며 겨우 끝낸 나는 무거운 책들을 가방에 다 챙겨넣으며 의자에서 일어서 인터넷 서핑을 열심히 하고 있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쇼핑을 하고 있는것 같은데 뭐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있나싶어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팔짱을 끼고 컴퓨터를 내려다보았다. 옷 사는 줄 알았더니 웬 넥타이를 구경하고 있는게 아닌가. "웬 넥타이?" "아 깜짝이야. 아 두준씨 생일 내일이잖아. 뭐 줘야되나..고민중이라.." 오늘이 벌써 3일이구나. 작년에 나는 그한테 내 사진만 가득 찍혀있는 앨범과 함께 운동화를 선물했다. 커플 운동화. 컨버스 하이였는데 나는 남색, 윤두준은 검은색. 정말 작은 선물이었지만 윤두준은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었다. 내 깜짝 파티때문이었나? 작년에 나는 생일파티 해준답시고 준형이형한테 연락해서 좀 늦게까지 잡고 있어달라는 부탁을 한뒤 집에서 기광이랑 현승이까지 합세시킨다음 풍선도 집안 곳곳 가득 달고 케익도 놓고 내가 손수 직접 만든, 아니 사실 아주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은 잡채와 미역국도 같이 한상 차려놓았다. 그런 다음 나는 고양이 잠옷을 더워죽겠는데 모자까지 뒤집어 쓴채 있었고 그가 딱 들어올때 앞에서 폭죽을 빵-하고 터뜨리면서 엄청 깜짝 놀래켜줬었다. 물론, 내가 고양이 잠옷을 입었으니까 윤두준에겐 강아지 잠옷을 입혔고 우리 세사람은 밤 늦게까지 웃고 떠들다가 유난히 자꾸만 집으로 보내려는 윤두준의 행동에 눈치 챈 현승이와 기광이는 슬쩍 물러났고 나는 윤두준에게 또 다른 선물이 되어버렸다. 생각지도 못해서 당황했지만 정말 좋았었는데.. 그게 벌써 작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 무슨 생각해? 이거 어떻냐니까?" 잠깐 옛날 생각하느라 멍했었나보다. 누나는 나를 툭툭 치며 물었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컴퓨터 화면에 뜬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자줏빛의 넥타이에 나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색깔 싫어해. 넥타이도 원래 잘 안매지만 매면 맨날 검은색만 매드라. 왜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다른 색깔은 싫다고 그러던데." "..아 그래? 아 어쩌지..넥타이 별로 안매? 내가 볼땐 매번 매고 있던데...." "원래 넥타이 잘 안매. 답답하다고." 내 말에 누나는 그러냐면서 다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엔 지갑인지 이것저것 들여다보던 누나는 또 다시 나를 쳐다봤다. "지갑은 어때?" "...글쎄. 괜찮지 않을까? 너무 비싼거만 아니면.." "그렇겠지? 아 무슨 브랜드로 해줄까...좋아할까? 아 이런거 처음이라 설렌다.." 누나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윤두준을 위해 선물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저렇게 기쁘고 설렐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나도 저렇게 행복해했었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모르긴 몰라도 저만큼은 했었을것 같다. 윤두준을 위해 미역국을 끓였을땐 정말 너무나도 행복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만을 위해 뭔가를 해준다는건 정말 가슴 벅찬 일인 것 같다. "요섭아! 이거 어때?" "그냥 민무늬로 해줘. 그렇게 체크무늬 있고 브랜드네임 막 박힌거 요란하다고 싫어해." "..아..난 정말 두준씨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네..너 그러고보니까..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더 친했던것 같다? 근데..말도 안하고..아직도 괘씸해 너!" "...그냥..좀 껄끄러울까봐.." 나는 그렇게 둘러댄 뒤 누나의 앞에 앉아 쇼핑에 한창인 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실실거리는 모습 처음 본다. 항상 웃는 상이긴 했지만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리정도로 웃는 모습은 별로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다시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는 헤어졌을텐데, 그러면 평생 못볼텐데, 이렇게 헤어져서 누나의 짝이 된다면 보는게 괴로울지언정 그 얼굴만큼은 볼 수 있으니까..잘된 일은 아닐까? 그것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두 사람의 만남이라면..괜찮은건 아닐까? "..누나..꼭 그 사람이랑 결혼해라." "..엉?" 서핑에 빠진 누나는 나를 동그란 눈을 떠서 바라봤고 나는 그냥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꼭..무슨 일이 있어도..결혼해야돼. 무슨 일이 생긴다해도..결혼해. 결국은..누나한테로 돌아설거야." "무슨말을 하는거야. 아..아무래도 매장가서 봐야겠다." 누나는 무슨말을 하는거냐며 중얼거리다가 노트북을 닫고 여전히 실실거리는 웃음을 띈채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는 포기할테니까..누나는 포기하지마. 누나라 다행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툭-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쓱 닦은 뒤 내 한쪽 귀에 있던, 여태까지 단 한번도 뺀 적 없던 귀걸이마저 귀에서 빼내어 꽉 쥐었다. 이젠 손도 휑하고 귀마저도 휑해져서 마음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이제 정말 하나하나씩 정리해야될 것 같다. 그게 윤두준의 생일이란게 씁쓸하지만..이제 미련을 두면 안될 것 같다. 이제 정말..안녕이다. - "너 그럼 수요일부터 과외하는거야?" "엉." 동운이한테 연락해서 다섯시부터 여섯시 반까지 하자는 문자를 남긴 나는 도서관에 있다가 괜히 뒤숭숭한 마음에 공부에도 집중 못하고 있자 그걸 눈치챈 기광이가 나를 툭툭쳐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커다란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다. "애는 어때?" "엄청 착해. 애가 되게 잘생겼다? 되게 깎아지른 것처럼 눈도 쌍커풀이 짙고..콧대도 높고.. 말하는 것도 되게 착하고..쨌든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그래서 그렇게 과외 준비 열심히 했냐?" "그렇기도 하고..한번 하는거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고3이면 일분일초가 아까울땐데.. 그 시간 나한테 주는거잖아. 미안하기도 해서..정말 제대로 해야될 것 같아서." 매미가 바로 위 나무에 붙었는지 울음소리가 꽤나 커서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치만 이것도 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특권이라 그냥 싱긋 웃으며 벤치에 등을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워낙 커서 나뭇가지에 가려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러고보니 요즘들어선 하늘도 제대로 못보고 나한테 닥친 상황에만 급급해하며 전정긍긍했던 것 같다. 조금 여유를 가지면 이것저것 드는 복잡한 생각도 다 털어버릴 수 있을텐데.. "아..너 근데 내일 형 생일인데..어떡할거냐?" "뭘 어떡해. 어차피 누나가 다 알아서 하는데." "양요섭. 너 진짜 이대로 포기할거야!?" 이기광은 나한테로 몸을 돌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이제 모든것에 대해 초탈해버리고 싶어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엉." "...아 진짜...아 나도 모르겠다 새끼야. 니 일이지 내 일이냐..아 진짜!!!!!" "왜이래. 시끄러워." 나는 마지막 한방울도 남김없이 탈탈 털어먹은 뒤 종이컵을 구겼고 이기광은 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내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한개. "..형." 나는 어쩔줄 몰라하는 기광이의 표정만 봐도 내 뒤에 누가 서있는건지 알 수 있었다. 대체 내가 어디에 있건, 뭘 하고 있건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내곤 쫓아오는건지 이젠 그게 궁금해졌다. "그냥 있어." 슬며시 일어나려는 기광이의 손을 잡은 나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얘기해." 기광이는 내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아 풀더니 다른 곳으로 사라졌고 그닥 할말도 없는데 자리를 비켜주는 기광이 때문에 나는 더 피할 수가 없어져 그냥 그자리에 잠자코 앉아있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앉는 윤두준. 윤두준은 평소완 다르게, 수트 입은 모습이 언제부터 평소가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검은색 반팔티에 검은색 블랙진에 내가 작년 생일날 사줬던 컨버스화를 신고 있었다. 난 이렇게 편한 캐주얼 차림이 좋았다. 윤두준이 수트를 입으면 뭔가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생긴 것 같아서 싫었었다. 뭐 이젠 내가 좋고말고 하는 것 조차도 다 소용없어졌지만. "내일 시간 비워." "바빠." "너 진짜 이럴래?" "..형이야말로 좀. 안지쳐? 나같음 드럽고 치사해서라도 헤어질 것 같은데..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세상에 사람이 나 하나야? 왜 나한테 목매는건데? 내가 싫다고하니까, 여태껏 형 싫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싫다고 하니까 그것때문에 오기생겨서 이래? 아님..." "너니까." 윤두준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지만 당황하지 않은척 하며 하려던 말을 계속 했다. "그럼 그 마음 이제 딴데로 돌려. 나이제 형 싫다고 밀어내는 것도 지겨워서 못해먹겠다. 며칠짼데 대체. 그만 좀 하자. 어?" "...니가 원하는게...정말 그거야?" "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또 윤두준이 그 틈을 치고 파고들어올까봐 나는 최대한 독해져야만 했으니까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에 시선을 꽂은채 입을 꽉 깨물었다. "..근데 다행인게 뭔지 알아?" "..." "양승혜가 너랑 너무 닮았다는거야. 그 여자보면 니 얼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다행이야. 니가 갖기싫다고 버린몸 이왕이면 너 닮은 사람 만나면서 너 평생 안고 사는 것도 괜찮잖아? 거기다가 그 여잔 니 누나니까..그 핑계로 맨날 찾아가면 볼 수도 있을거고. 아, 이참에 데릴사위를 하는것도 괜찮겠네. 맨날 얼굴 보고.." "내가 도망가면 돼." "그래? 그럼 거기까지 쫓아가지뭐. 미국이면 공부 핑계로 가면 되고, 일본이면 여행핑계로 가지뭐. 니 누나가 양승혠데..니 소식 하나 듣기 힘들까봐?" 지독했다 정말. 숨이 쉬어지지 않는 화생방에 있는 것처럼 눈물 콧물이 찔찔 나왔다. "...고마워. 형한테 끝까지 질릴 수 있게 해줘서. 덕분에 형 쉽게 잊을 수 있겠다. 먼저 갈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두준은 내 손목을 잡아채 나를 확 끌어안았다. 벗어나려고했지만 옛날부터 생각했던건데 윤두준은 참 힘이 세다. 맨날 체력단련하나? "...나 포기 안해. 그러니까 니가 포기해. 나 니가 아무리 싫다고해도, 몸서리 쳐도 나 니 옆에서 안떨어질거야. 니 옆에 있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 니 근처에 있을거야. 고개 들면 니가 항상 보일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을거야. 그러니까 니가 포기해." 나는 순간 윤두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아마 이 안에는 내 사진이 담겨있을테지. 난 그대로 윤두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주위 시선엔 아랑곳 않고 그 어느때보다도 더 뜨겁게 그의 입술을 탐했고 윤두준은 내 순간의 행동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내 등을 꽉 끌어안고 내 입안을 헤집었고, 키스를 할때면 딴데는 신경 쓰지 못하는 윤두준을 아는 나는 그의 목에서 목걸이를 풀어 그의 목 뒤에서 내 사진을 쏙 빼서 구겨버렸다. 그리곤 그 목걸이를 손에 꽉 쥔뒤 윤두준의 입술에서 내가 먼저 떨어져나왔다. 그리곤 한 손으로 내 입술을 닦으면서 내 손에 쥐어져있던 목걸이를 그의 눈 앞에서 펼쳐보았다. 순간 자기의 목을 더듬는 윤두준, 그 목걸이를 다시 가져가려는 찰나 나는 그 목걸이를 차 다니는 도로에 던져버렸고 마침 쌩하고 다가오던 차가 그 목걸이를 완전히 박살내주었다. 저렇게 되는 것 까진 바라지 않았는데. "...양요섭!!!!!!" "잊어. 나는 이제 없는 사람이야. 형 집에 있는 짐도 조만간 가져갈게. 아 버려서 문 앞에 내다주면 더 고맙고." "..사진 내놔!!!!" 내가 먼저 뒤를 돌아 가려고 하자 윤두준은 내 손목을 쥐어채더니 소리를 질렀고 나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모른단 눈짓을 했다. 그리곤 최대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착각하지마. 우리 이제 그렇게 애틋한 사이 아니야. 끝까지 가보고 싶으면..이렇게 맨날 찾아와.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줄게. 궁금하면 찾아와봐. 이것보다 더 한짓도 보여줄테니까." 윤두준은 순간 나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윤두준은 나를 때리지도 못하며 그대로 주먹을 꽉 쥐어 손을 내리며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도서관으로 들어와버렸다. 아마 그 목걸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산산조각이 나있을것이었다.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차가 그대로 밟고 지나갔으니까. 그 순간 내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에 손이 갔다. 설마 내 목걸이도 없을까봐. 이 목걸이가 서로한테 어떤 의미인지 뻔히 아는 내가, 나는 이 목걸이 하나에도 벌벌 떠는데 윤두준의 목걸이를 내 손으로 직접 박살내버렸다는 사실이,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가 하는 회의감에 도서관에 다시 돌아와서도 그저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백번은 넘게 더 잔인해져야했다. 나 자체도 떨쳐내버릴 수 없는 윤두준을 어떻게든 떨궈내버리려고, 아니 그가 나를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모질어야만 했다. 앞으로 열배는 더 넘게. [무슨 얘기 하고 왔냐.] 이기광에게 온 노란 포스트잇. 나는 그 위에 펜을 들어 답장을 써 주었다. [니가 선물해준 목걸이 박살내고 왔어.] [설마..그 사진있는 그 목걸이!?] [어.] 이기광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손목을 잡고 도서관 밖으로 데려갔다. 뭔가 엄청나게 화가 나보이는 모습에 왜그러냐며 끌려가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내 손목을 풀어주더니 갑자기 내 눈엔 불꽃이 반짝였다. "개새끼야!!!!!!!" 아무런 준비없이 맞아버린 한방이라 내 입안엔 피맛이 흥건했다. 이렇게 세게 누군가한테 맞아본 건 처음이라, 그것도 주먹 세다는 기광이한테 맞을거라곤 생각도 못해봤어서 나는 단번에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앉아 나한테 욕하는 기광이를 쳐다보았다. "..너 진짜..내가 아는 놈들중에서 제일 못된새끼야. 알아!?!??" 이기광은 내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더니 그대로 또 같은 곳을 주먹으로 쳐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게 같은데 또 때리는 거라는데..나쁜놈.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냐. 그 목걸이가 형한테 어떤건데!!!!! 내가 니 목걸이 끊어줘!? 그럼 기분이 어떨 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요섭 니가 어떻게 형한테 그래!!!!" "아니까 그런거다." "...잔인한새끼. 피도 눈물도 뭣도 없는 새끼. "...욕 먹으니까 속 시원하다." 나는 그대로 맨 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했고 이기광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얘도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너 어떡하려고 그러냐. 미안해서 어떡할라고 그래. 니가 그런다고...다 정리 될 것 같았음 진작에 됐지 새끼야.. 니가 그렇게 못된놈 한다고..달라질 것 같냐? 너만 힘들어져 병신아." "...나 그냥 도망갈까봐 기광아." "..어떡하냐..양요섭..너 진짜 어떡하냐...병신새끼야..씨발..너 어떡할거야.." 기광이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지 않았는데 기광이가 나보다 더 슬퍼해줬다. 나는 윤두준에게 미안해서 울수조차 없었는데. 기광이가 나보다 더 진실되고 진정으로 슬퍼해줘서 나는 오히려 속이 후련해졌다. 안그래도 맞을 짓 했는데 기광이가 대신 때려줘서 고맙고 정신도 번쩍 드는게..다시한번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때려서 미안. 나도 모르게..집에가서 약 꼭 바르고자. 너 그거 흉터생기면..나 누구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기광이는 나처럼 바닥에 드러누워서 울다가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더니 그대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나는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냥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있었다. 윤두준에게 더욱 확실히 내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그의 목걸이를 끊어버리는게 아니라 그 앞에서 내가 내 목걸이를 직접 버려야했는데..정말 미안하게도, 너무 비겁하게도 난 내 목걸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너무 소중해서, 소중하다는 그 말보다 더 소중한 목걸이를 그렇게 산산조각 내버릴 수가 없어 윤두준의 목걸이를 대신해버렸다. 아마 윤두준은 나를 죽이고 싶게 미워할거고, 그 부숴져버린 목걸이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슬퍼할지도 모른다. 윤두준한테 나는 죄인이다. "거기 그렇게 누워있지 말고 빨리 가." 기광이는 내 가방을 내 옆에 내려놔주고 나를 일으켜주었다. 바보같이 눈이 퉁퉁 부어있는 기광이의 얼굴을 본 나는 피식-하고 웃었고 기광이는 진심으로 미안한지 내 입술에 난 핏자국을 빤히 보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게 기광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과였던 것이다. "간다. 신경쓰지마. 내가 맞을짓 한거니까. 패줘서 고맙다." 나는 그 가방을 어깨에 대충 걸쳐맨 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그림자가 잔뜩 길어진 캠퍼스를 터덜터덜 걸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축이 나서 언제 한번 고약하게 앓아 누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윤두준에게 못된 짓을 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게 되어버렸다. 못된말 하나 뱉을 때마다, 나쁜 짓 할때 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잃어버리고 끝없이 추락해버렸다. 아직까지도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만 봐도 가슴이 아픈데 그 사람에게 내가 직접 흠집을 내고 칼집도 낸다는건 정말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행복보다는 다른 사람의 행복때문이었다. 그거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죽도록 달려왔는데, 지금에와선 이런 회의감도 들었다. 내가 희생을 하면 내가 얻을 수 있는건 대체 뭘까, 희생에 상응하는 또 다른 행복이 나를 찾아올까. 그렇지만 언제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은 no였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프고,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걸까. 대체 왜.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커다란 백화점 하나. 평소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나는 무슨 생각이 들어선지 그 앞에서 후다닥 내려버렸다. 그리고선 생각난 단 한가지의 생각. 내일은 윤두준의 생일. 그의 생일이라는 것 또한 버스에서 내리고나서야 생각한건데, 그러고보면 모든게 다 몸에 배어있었나보다. 그의 생일을 챙기는 것도,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졌다. 정말 이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가 너무 많이 가까워져 있었나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된걸 보면. 찜통같은 밖의 날씨와는 달리 백화점은 언제나 서늘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여기에 한시간동안 있음 추워서 긴팔옷이 생각날 정도로 냉방이 빵빵한 곳으로 무작정 들어가 그냥 이것저것 보면서 걸었다. 뭐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없는데, 내가 만약 여기서 윤두준에게 줄 선물을 산다고 해도 그사람한테 전해줄 순 없었다. 그 사람에게 닿지도 않을 선물, 사봐야 속만 상할텐데도 나는 아까 누나처럼 슬며시 웃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생각하는건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는 관계없이 흐뭇한일인가보다. "어서오십시오." 여러 브랜드의 시계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 아주 깨끗한 유리를 너머 시계를 구경했다. 마음같아선 여기있는거 다 해주고 싶은데, 지금 그럴 만한 여력은 되질 않고... "손님이 착용하시게요?" "아...아니요. 선물..할건데.." "아..나이는 어느정도.." "스물넷이요." 친절한 점원은 나에게 그 나이 또래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스타일이라며 세개 정도를 꺼내서 보여줬고 별로 내 맘에 들지 않아 민망하게 웃으며 다른것을 더 구경했다. "..아..저거.." "태그호이어제품 말씀하시는거세요?" 내 눈에 들어온건 은색의 메탈시계였다. 동그란알 가장자리에는 10 20 30 40 50 이렇게 큰 숫자가 쓰여있고 흰 바탕에 뭐를 나타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분할된 시계 두개가 따로 들어가 있었다. 너무나도 심플하고 멋진 디자인에 한눈에 혹했고 점원은 친절히 웃으며 그 시계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가볍고 가까이서 보니 더 멋진게, 윤두준이 수트를 입고 차면 딱 멋있을 것 같았다. 그냥 딱 윤두준의 것이라고 낙인이 찍혀 나온 것 마냥. "..이거 최대한 예쁘게..포장 좀 해주세요." 나는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카드로 결제를 했고 작은 선물 상자를 받아들어서야 내가 비로소 미친 짓을 했다는 걸 또 깨달아버렸다. 옛날에는 생각부터 하고 신중하게 행동을 했었는데 요즘은 내가 정신을 전당포에 맡겨두고 사는지 행동부터 하고 그다음에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게되면 어쩌지 라는 걱정과 함께 일단 백화점에서 나와 아까 타고왔던 버스와 똑같은 번호의 버스가 마침 오길래 냉큼 올라탔다. 내 무릎위에 올려져있는 검은색의 선물 상자. 줄수 있을까..윤두준꺼라고 생각하고 산 이상, 이건 내것이 절대 될 수가 없는데.. 만약 주게 된다해도, 이 시계를 차고 있는 윤두준을 볼때마다 가슴 한켠이 저릿거릴텐데..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요즘의 내행동엔 온통 후회만이 가득했다. * "동생!!!" 2층 거실에서 뭐를 하고 있는지 바닥에 앉아 뭔가에 집중하고 있던 누나가 내가 올라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단번에 고개를 돌리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에 서둘러 내 등뒤로 감춰버린 선물 상자. "뭐해? 거기서?" "아..일루와봐. 이거 두준씨 주려고 사긴 샀는데..괜찮을까?" 누나는 카드를 쓰고 있었는지 한자 한자 정성들여 쓴 티가 작은 카드에 역력히 드러나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펼쳐보인 선물은 넥타이와 키링이었다. 키링을 보니 생각나는 내 핸드폰에 걸린 반쪽 하트고리. 이건 작년 내 생일날 제주도에서 윤두준에게 받았던 선물이었다. 반반씩 나눠가졌던 고리. 여태까지 이건 생각도 못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드는 생각은 핸드폰 안에 꽉차있는 윤두준과 나의 사진들. 내 핸드폰 배경화면조차도 나와 윤두준이 예전에 같이 찍었던 사진이라 나는 그걸 보고나서 허탈하게 웃었다. 내 옆엔 내가 윤두준을 사랑한 증거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이걸 언제쯤이면 다 지워버릴수 있을는지. 아니, 지워버릴 수는 있는건지. "..이쁘네." "괜찮아? 아..맘에 안들어하면 어쩌지? 이거 두준씨 스타일 맞는거 같애?" 넥타이는 슬림한 스타일의 남색계열이었다. 워낙에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 윤두준이라 넥타이는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고, 키링은 금색의 동그란 금속이 달려있는, 그리고 그 안에 무슨 문양이 있는 구찌 키링이었다. 별로 키 자체를 갖고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이게 필요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냥 괜찮다며 적당하게 웃어보였고 누나는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폭-쉬었다. "..아..저..." "어? 왜?" "이거..혹시..전해줄 수 있나 해서.." 이왕 산거 어차피 내것도 될 수 없는데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었다. 이제 더이상 내가 그의 생일을 직접 챙겨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미치게 만들었지만 이런 상황은 내가 만든거였으니까, 내무덤 내가 판거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했다. 그 무덤에 어쩔수없이 같이 빠져버린 윤두준에게 난 또다시 미안해졌다. "뭔데?" "아..생일이라고해서..지나가다가..그냥 샀는데..내가 샀다고하면 좀 부담스러워할거 뻔하니까.. 누나가 산걸로 해주라. 내가 샀다고는 절대 하지말고. 응?" "아..두준씨 생일선물? 근데..이거 시계야? 풀어봐도 돼?"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누나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며 포장을 뜯어 시계를 보며 이렇게 비싼걸 어떻게 내가 줬다고 하냐며 난색을 표했지만 내가 너무 간절해보였는지 누나는 알았다며 환히 웃어보였다. "..착하네 우리동생. 너 덕분에 나 두준씨한테 점수 제대로 따겠다." "...그럼 부탁할게. 고마워." "잠깐만. 너..얼굴..누구한테 맞았어?" 내가 돌아서자 누나는 내 손목을 잡아오며 날 붙잡았고 그제서야 입술이 터진채로 그냥 돌아다녔다는걸 깨달은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 웃으며 책 모서리에 찍혀서 그렇다고 둘러댄 뒤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와버렸다. 약을 발라야된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귀찮아서 그냥 문에 기대어 있다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윤두준도 아까 일때문에 충격을 받은건지 어쩐건지 연락이 없었고 나는 바탕화면 속 윤두준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나를 빤히 보았다. 이렇게도 행복했었나보다. 그냥 이 사진을 보고 있는 내가 저절로 웃음이 지어질정도로. 나는 앨범으로 들어가 몇장인지 세는 것 조차 힘들만큼 많이 있는 사진들을 한장 한장 넘겨보았다. 이건 올해 내 생일날 찍은거, 이건 작년 윤두준 생일날 찍은거... 이건 제주도 놀러가서 사진 찍은거...사귀고 얼마 안돼서 찍은거.... 추억이 너무 많았다. 돌이켜볼 추억조차 없다면 잊는게 수월할텐데 하나하나 짚어볼 기억이 너무 많아서 윤두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메뉴로 들어가 전체삭제 버튼을 눌렀다. 이제 확인 버튼만 누르면 이 안에 있는 사진은 모조리 싹 사라지는 거였다. "....못..하겠다." 나는 그냥 폴더를 닫아버렸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난 그 대신 책상으로 가 가위를 들어 내 핸드폰에 아직도 매달려있는 고리를 싹둑 잘라서 서랍안에 넣어놨다. 이로써 윤두준에게 돌려줘야할 물건이 세개로 늘어났다. 하나는 반지, 두번째는 귀걸이, 세번째는 핸드폰 고리. 이젠 윤두준의 집에 있는 내 흔적을 다 없애버리는 것만이 남았다. #40. 7월 4일. 나는 아침 일찍부터 휴대폰 대리점으로 가 최근에 나온, 제일 좋은 핸드폰을 구입했다. "번호는 지금 쓰고 계신거 계속 쓰실거죠?" "아뇨. 싹 바꿔주세요." 내 말에 직원은 알았다며 어떤 번호를 불러주더니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그냥 듣지도 않고 끄덕였다. 생각 같아선 지금 갖고 있는 이 휴대폰 또한 대리점에 넘겨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 나중에 돌이켜볼 추억이 없어질까봐 추억이 있는것도 무서웠지만 없는건 더 무서워서 그 핸드폰은 조용히 가방안에 넣어두었다. "감사합니다." 참..유난히 맑은 날이다. 이제 더이상 윤두준으로 인해 내 핸드폰이 괴로워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누나하고는 핸드폰으로 연락은 잘 안해서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기광이한텐 신신당부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면 정말 윤두준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끊겨버린거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이상. 이제 나한테 남은건 그의 집에 남은 내 짐들을 가져오는것, 그리고 다른곳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 나는 되도록이면 한국인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게 어디든 상관 없었고 그냥 한국인이 없고, 한국이 기억나지 않을만한 곳으로 가서 살고 싶었다. 행여나 문득 윤두준이 생각나지 않도록, 윤두준을 닮은 까만 머리의 유난히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는 눈매가 강렬한 한국인을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도록, 저 멀리멀리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러고보면 참 이기적이고 못된 놈인 것 같다. 이렇게까지는 아닐줄 알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거라고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참 못됐다. 남의 마음에 그렇게까지 상처를 주고 흠집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을까? 그렇기에 오늘은 참 유난히도 시린 날이다. 나는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어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난 책을 참 좋아하는 편이라, 오랜만에 책도 사고 CD도 사면서 그와 함께해야할 오늘을 혼자서라도 잘 보내고 싶었다. 윤두준은 오늘같은날 우리 누나와 같이 있겠지만, 내 생각을 많이 할테지만, 나는 오늘 윤두준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늘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려지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평생 매년 7월 4일은 이렇게 마음이 얼음장같이 시릴 것 같았다. 그리고 11월 11일도. 우리가 처음으로 사귀게 된 그 날도.. 많이 아플 것 같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광화문 교보문고는 정말 언제 와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크기도 엄청 컸지만 사람도 그만큼 많아서 나는 원래 사람많은걸 싫어하는데 그렇게 사람들한테 치이니까 외롭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날에는 밖으로 나와야 될 것 같다. 나는 먼저 문제집 코너로 들어가 동운이를 위해 풀 문제집을 다시 한번 골랐다. 역시 작년까지 봤던 문제집이라 눈에도 익고 익숙해서 내가 풀어봤던 문제집중에서 제일 좋았던 문제집 몇권을 사고 동운이한테 줄 선물도 골랐다. 학교에서 틈틈이 잘때도 편히 자라고 작은 쿠션을 샀고-너무 소녀틱해서 망설여졌다.- 파커 샤프도 하나 샀다. 반은 검은색, 반은 메탈로 된 이 샤프는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샤프이기도 했다. 뭐 어쨌든 그것도 사고 검은색, 남색, 하늘색 이렇게 단색으로 된 공책도 몇권 사고 스터디 플래너도 하나 샀다. 한창 여름방학때인데, 이때 흐트러지면 큰일이니까 마음 다잡으라고 아직 동운이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생긴걸 봐서는 요란한건 별로 안좋아할 것 같아 갈색의 가죽케이스로 덮인 플래너까지 사니까 돈이 꽤 많이 나왔다. 초면에 너무 큰 선물을 하는건가 하고 망설여졌지만 그냥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애라서 종이봉투에 차근차근 담았다. 처음으로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 애라 그런가..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건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소녀시대의 앨범도 하나 샀다. 사실 연예인에는 관심도 없지만, 남자애들이 소녀시대에 환장한다는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래 들으면서 스트레스 풀라고 최대한 이쁘게 포장한 뒤 아까 샀던 종이봉투에 쏙 넣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산건 나를 위한게 아니라 모조리 동운이를 위한거였다. 나는 정말 참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보다. 모든게 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위주였다.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프고 힘든 것 또한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참 이기적인데도 이타주의적이다. 참 이율배반적인 얘기지. 양요섭이라는 인간 자체가 모순인가보다 이제와서 보니. - 집에 들어와서 보니 누나는 역시 나가고 없었다. 대신 내 책상에 올려진 작은 쪽지 하나. [시계 꼭 잘 전해줄게. 너가 있어서 나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다. 사랑해 동생!!! _누나] 나도모르게 귀엽고 동글동글한 글씨가 써진 쪽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아까 사온 봉투를 책상 의자에 올려놓고, 가방에서 새로산 핸드폰과 옛날에 쓰던 핸드폰 두개를 꺼내 새 핸드폰에다 기광이랑 현승이, 태경이, 준형이형, 엄마, 아빠, 누나 번호를 쫘르륵 입력했다. 참 협소한 인간관계다. 그리고 나는 굳이 옛날 번호를 보지 않아도 자동으로 떠오르는 번호를 꾹꾹 눌러 저장했다. 윤두준. [나 양요섭이다. 번호 바꿨으니까 이제 여기로 연락해.] 태경이와 현승이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준형이형한테는 이 번호를 알려주면 윤두준의 귀에까지 들어갈까봐 일단은 보류해두었다. 그리고 기광이한텐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랜 신호음이 들리고. 「여보세요.」 "어, 나 양요섭. 번호 바꿨으니까 앞으로 여기로 연락해." 「양요섭!? 너 왜 갑자기 번호 바꿨어? 핸드폰 바꾼거냐?」 나는 에어컨을 18도로 틀어놓은 다음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말했다. "어. 뭐 그렇게 됐다. 너 형한테 이 번호 알려주면 죽는다. 진짜 쌩깔거야 너랑. 이 번호 절대 누구한테도 알려주지마. 그 누구도. 우리 누나가 물어봐도 말해주지마." 「..너..진짜 마음 먹은거냐.」 "질질 끌면 뭐하냐. 끝낼거면 빨리빨리 해야지." 에어컨 바람이 잘 오지 않아 더 짜증이 난 나는 아예 에어컨 앞에 서며 말했다. 「독한새끼...그래. 나 너 믿는다. 힘들면 혼자 끙끙 앓지말고 언제라도 와. 형한테는 안꼬지를테니까.」 내가 아는 사람은 몇 없어도,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나는 너무 고마웠다. 기광이 뿐 아니라 태경이도 나한테 그런 존재였다. 정말..고마웠다. "그래. 끊는다." 「야!! 잠깐만!!! 너 오늘 하루종일 집에 있을거야? 형이..집으로 너 보러 갈거같은데...」 "..몰라. 나 좀 자야겠다. 끊어." 나는 그냥 핸드폰을 침대 옆에다 둔 다음에 태경이한테 온 문자에 대충 답장해주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무 생각 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뒤 가만히 누워있으려니까 잠이 솔솔 오는게 여름이라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에어컨을 세게 틀어놔서 그런지, 쌀쌀해졌고 이젠 저걸 꺼야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기까지 가는게 너무 귀찮아서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더이상의 기억은 없었다. "...양요섭!!!!! 양요섭!!!!! 정신차려봐!!!!!!" 누가 나를 잡고 흔드는 것 같아 슬쩍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까맸다. 내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몸이 먼저 알아 들을만큼 익숙해서 이게 누군지 생각을 더듬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근데 아무것도 안보였다. 그리고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잉-하고 울리는게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그 소리는 점점 흐릿해졌다. 귀에서도 눈에서도 전부다. 팟- 무언가에 놀란듯 나는 눈을 확 떠버렸다. 이에 단번에 환한 햇빛이 내 눈을 파고 들어와 눈을 또 감았다 떴다 하면서 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고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내 방의 익숙한 분위기가 내 시야로 들어왔다. 근데 왜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를 누가 망치로 깨부수는 것 마냥 아픈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뭐 먹은 것도 없는데도 하다못해 위산이라도 넘어올 것 같아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위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묵직함에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에 느껴지는 차가운 물수건 하나. 나는 그걸 집어 이마에서 내리고 고개를 돌려 내 오른쪽을 살짝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정수리가 빤히 보였다. 의자에 앉아 머리는 침대에 기댄채 엎드려 자고 있는 사람에 나는 여기가 순간 내 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으..." 누군지 모르겠어서 양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나려는데 동시에 터져나오는 신음소리에 자고 있던 사람이 깼는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나도모르게 흡-하고 숨을 참아 가만히 누워있었고 이 사람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비더니 나를 멍한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깼어!?!??!" 어째서 김태경이 여기있는거지? 나는 그게 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잠결에 윤두준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나를 너무 급하고 안타깝게 부르는 윤두준의 목소리를 듣고는 나도모르게 좋았었는데, 왜 내 앞에는 김태경이 있는건지.. 아니 그보다도 왜 얘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건지? "..너..뭐야?" "...너 죽을뻔 한거 알아 새끼야!?" 아까까지만 해도 반가운 눈빛을 하더니 이젠 갑자기 나한테 욕까지 하면서 내 양 어꺠를 붙잡아 흔들어재꼈다. 덕분에 심하게 흔들리는 골에 눈을 감곤 입술을 깨물었고 김태경은 아..라면서 내 어깨를 놔주더니 나를 확 끌어안았다. 내 뒷통수를 쓰다듬어주면서 계속 다행이다..다행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해댔다. "뭐야..너 왜 여기있냐고." "너..미쳤냐? 더우면 창문을 열어놓고 자던가!!! 에어컨을 18도로 해서 자는 놈이 어딨어 세상에!! 문이란 문은 꼭꼭 닫고!!!너 밤에 응급실 실려갔다왔대!!!기억은 나냐?" 김태경은 침대에 걸터앉더니 나를 보며 소리쳤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도 않는데 이새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우웩-하고 헛구역질을 해버렸다. "괜찮아!?!?" "...시끄..러워." 내 말에 단번에 입을 다문 김태경은 괜찮냐며 내 등을 쓸어주었고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김태경의 손을 끌어내렸다. "하도 연락이 안돼서 집에 와봤더니..윤두준이랑 마주쳤어. 응급실 갔다왔대. 너 윤두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봤으면 저체온으로 죽을뻔했단다. 죽으려고 작정하고 일부러 그런거냐? 아니 어떻게..." "..형이...왔었어?" "너 연락 기다리다가 걱정돼서 밤 11시쯤에 집에 와봤는데, 윤두준이 마침 집에서 나오는거야. 그러면서 나한테 하는 말이.. 너 응급실 갔다왔으니까 옆에서 좀 보살펴주라고. 나 그사람 존나 싫어하는데...뭐라고 못하겠드라." "...나..아픈거..그럼 형도 아는거야?" "머리가 안돌아가냐?! 어쨌든 그렇게 여기 와서 너 옆에서 간호해주다가..깜빡 잠들었네. 어쨌든..괜찮아? 뭐 어디 막 아픈데는 없어?" 그럼 꿈인줄 알았던 윤두준의 목소리가 그냥 꿈만은 아니었나보다. 저체온증이라니..나는 그냥 더워서 에어컨을 켰던거고 마침 리모콘도 근처에 없어서 끄러가는게 귀찮아 이불을 덮고 잤던 것 뿐인데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다니, 윤두준이 나를 좀만 더 늦게 봤어도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니. 많이 놀랬을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보낸 아픈 기억이 있는 윤두준한테, 내가 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였던건 그한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한 공포였을거다. 근데 그런 사람이 내 옆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두고 나왔다는건.. 그리고 윤두준이 그렇게 죽도록 싫어하는 김태경에게 나를 맡겼다는건.. 윤두준도..어느정도는 내 생각과 내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는건가.. 막상 윤두준이 이렇게 나오자 나는 또 마음 속에서 이기적인 서운함이 들었다. 나만 윤두준을 거부하고, 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 윤두준도 나와 같이 나에게 멀어질수도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다. 그런건 온전히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는데..서운하고 속상했다. 역시나 나는 너무 이기적인 미친놈인가보다. "..응급실에 더 냅두려고 했는데..윤두준이 싫다그랬대. 병원에 있는거 싫다고. 그래서 억지로 우겨서 집으로 데려왔단다. 누나가 나한테 해준말이야. 아무래도 윤두준이 너 두고 그냥 간건..누나때문인거같다. 여기서 밤새워서 지킬만한..사이는..좀 그렇잖냐." "....나...죽으려고 그랬던거 아닌데..그냥..그냥..." "그래 뭐 니가 죽으려고 그랬겠냐. 속은 좀 어때? 머리는 안아파?" 나는 김태경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윤두준이 나를 어떻게 봤을까,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지금까지도 계속 걱정할텐데..어떡해야되지. 핸드폰도 번호를 없애서 연락도 안될텐데..어떡하지 어떡하지. "...나..핸드폰 좀..빌려줘봐." "뭔? 내꺼?" "어..니꺼.." 김태경은 나를 살짝 고개를 갸우뚱 하며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넘겨주었고 내가 그걸 가만히 쥐고 있자 태경이는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번호를 누르긴 했는데 전화를 걸까말까 계속해서 고민했다. 꽤 긴 신호음이 가고 역시 전화를 하는건 아닌것 같아 끊으려는 찰나 딱-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자다깬 윤두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뭐라고 얘기를 해야될 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나는 그냥 끊어야 될 것 같아 핸드폰을 귀에서 떼려는데 그때 다급한 윤두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요섭?」 "....." 「...괜찮아? 안아파?」 "....미안..." 약해지면 안된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큰 상처가 있고 그것이 그의 아킬레스건인데, 목숨까지 위태로웠다던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윤두준이라는데.. 그것도 그의 생일날 지독하게 아픈 나를 선물로 받았다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약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니가..원하는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아프지만마. 헤어지자면 헤어져줄게. 앞에 나타나지 말라그럼..안나타날테니까... 제발..좀..아프지마. 너 그러면...나 힘들어.」 "...일부러 그런거 아니야. 더워서 켰던건데..그렇게 될 줄 몰랐어. 진짜..일부러 그런거 아니야." 「..너마저도..잘못되면...그때...나 진짜 죽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참 강한 사람인데..나때문에 또 우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지금 이 전화를 하고 있는 동안, 수십번도 넘게 사랑한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뻔 한걸 겨우겨우 참아냈고 같이 도망치자라는 말이 목 끝까지 비집어 나오려는걸 꾹꾹 눌러참았다. "...미안...해."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흘러나온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고 나는 윤두준의 뒷말은 듣지도 못한채 그냥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윤두준이 나를 살렸다 죽였다했다. 수십번도 넘게 나를 죽였다가, 수십번도 넘게 나를 살려냈다. "...옆에서 밤새 간호한건 난데..너는 윤두준부터 찾냐..서운하게."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죽 그릇을 들고 있는 김태경이 내 앞에 있었고 나는 볼에 번져 있는 눈물 자국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환히 웃어보였다. "고마워." "...엎드려 절받냐. 언제쯤이면...나도..." "뭐?" "아니다. 이거 먹고 얼른 나아. 아프지말고." 내 손을 잡아 일으킨 다음에 이불을 젖히고 침대머리에 내 등을 기대게끔 한 뒤 허벅지 위에 베개를 받쳐주고 그 위에 쟁반을 올려둔 태경이는 숟가락으로 하얀 미음이 가득 담겨있는 그릇을 휘휘 저어 입으로 호호 불면서 한숟갈 떠서 내 입에 내밀었다. 이에 나는 내가 먹겠다며 손으로 숟가락을 잡으려고 하자 김태경은 씁-이러더니 기어코 내 입에 미음을 밀어넣었다. "..대체..며칠째 굶고 있냐. 영양실조도 보인다고 그랬대. 심각한 정도는 아닌데 좀 더 냅두면 진짜 그땐 입원해야된다고." "...그냥..입맛이 없어서..안먹었더니..."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거다. 힘들어도 밥 먹어. 니몸 이렇게 안좋아진거.. 그 사람도 뻔히 알고 있을텐데..그 사람 보란듯이라도 잘 살아야되지 않겠냐? 그몸으로, 그꼴로 헤어지자고 하면..내가 윤두준이어도 안헤어져주겠다." 나는 태경이의 말을 듣는둥 마는 둥 하면서 얘가 계속 떠먹여주는 미음만 순하게 받아먹었다. 사실 역겨워서 몇번씩 구역질을 하려는걸 겨우겨우 참아야된다는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여 먹고 또 먹었다. 어느새 한그릇이 뚝딱 비워지고 잘먹었다며 약과 함께 물을 내민 태경이를 빤히 본 나는 고마워서 웃었다. 사실 웃을 기분은 아니었는데, 나 때문에 옆에서 밤도 새주고 보살펴준게 고마워서. "...근데.." "어?" 약까지 먹고 난 나는 좀 더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아 태경이를 바라봤다. "..오늘 나 패션쇼 있는데..이렇게 아플줄은 모르고 초대장 갖고 왔는데..아무래도..무리겠지?" "나 이제 괜찮아!! 초대장 줘. 나 그런데는 한번도 안가봤는데..이참에 구경도하고 좋네!!" "..아니야. 그냥.." "니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면서?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내 두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 오늘 몇시에 하는건데? 어디서?" 패션쇼고 나부랭이고 지금 내가 그런걸 신경쓸 여유겠냐만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척 해주고, 태경이가 원하는걸 해주는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말하자면 내 고마움의 표시랄까. "..오늘 코엑스에서 하는건데..7시." "얼른 줘!! 꼭 갈게. 아..거기 가려면..옷은 뭐 입고 가아되나.." "..진짜..올 수 있어?" "괜찮다니까? 어차피 오늘 저녁이라며. 그럼 낫고도 남지!!" 태경이는 미안한지 뒷목을 긁적이면서 초대장을 나한테 넘겨주었고 나는 청첩장 같이 생긴 걸 펴보고는 옆에다 내려놨다. "만약에..혹시라도 갑자기 막 아프고 그러면 안와도 된다!! 알았지?" "걱정마셔. 너..안가봐도 돼? 뭐 준비하고 그래야되는거 아니야?" "..가봐야지. 오늘 점심 꼭 챙겨먹고 약 먹어. 저녁은...내가 맛있는 죽 사줄게." "됐어. 얼른 가봐. 고마워." 내 말에 태경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매며 내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했고 뒷통수도 쓰다듬어주었다. "갈게. 아 맞다. 웬만하면 바깥바람 쐬지 말라고 했으니까..아..진짜...너 그냥..오지마라." 태경이는 망설이다가 내 옆에 놓여진 초대장을 가지고 가려는걸 내가 낚아채서 숨겼다. "꼭 갈거니까 준비나 열심히해라. 너 실수 하나라도 하면 평생 놀려줄거니까 각오해." 내 말에 알았다며 싱긋 웃은 태경이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나는 정말 하나도 안괜찮은데 괜찮은척 하느라 정신까지 어지러워져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렇게 아프지만 않았어도 좋은 구경이 될수도 있었을텐데.. 가만히 누워있자 또다시 아까 통화했던 윤두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리며 맴돌았다. [...니가..원하는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아프지만마. 헤어지자면 헤어져줄게. 앞에 나타나지 말라그럼..안나타날테니까...제발..좀..아프지마. 너 그러면...나 힘들어.] 내가 아무리 헤어지자고 해도 헤어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다 받아줄 것 같았는데... 윤두준이 막상 이렇게 나오니까 헤어지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젠 그게 정말 현실이 된다는게 무서워서. - "어디가?" "..아..잠깐..." "집에 있어. 아픈데 괜히 바깥바람 쐬지말고. 바람 쐬지 말라고 하셨어." 나는 패션쇼에는 대체 어떻게 입고가야되는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흰색 반팔 셔츠에 짙은 블루색의 스키니진을 입었다. 물론 포인트로는 노란색 나비넥타이를 매주었다. 가서 이상한 것 같으면 빼면 되니까. 근데 정말 패션쇼라는데는 가본적이 없어서 곤란했다. 그냥 반팔티셔츠를 입자니 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수트를 차려입자니 너무 격식차리는 것 같아서 나름 절충안을 찾은게 이거였다. 너무 이상한가 싶어서 거울앞에서만 망설인게 십분이 넘었다. 아픈건 좀 가라앉았는데, 그게 나아지니까 슬슬 걱정이 되었다. 김태경의 초대로 온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꼴이 저렇다니 하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내 소심한 마음이 더 작아져버렸다. "그래도 꼭 가야될일이 있어서..갔다올게." "너 진짜..에어컨 니 방에서 치울거야. 나는 니 방 들여다볼 생각도 못했는데.. 두준씨 아니었음 너 진짜..끔찍하다. 너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나는 발만 동동 구르는데..두준씨는 정말 너무 침착하게 업어서 응급실 데리고가서 링거 맞히고.." 나는 그냥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 두준씨가 그렇게 놀라는거 처음 봤어. 너 다 죽어가는데..아휴..어젯밤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너 나중에 두준씨 만나면 꼭 고맙다고 해!! 아, 시계는 잘 전해줬어." "..누나가..샀다고 말했지?" "응. 니가 그렇게 하라며. 부담스러워하더라...뭐 어쨌든..적당히 있다가 들어와. 또 아파서 쓰러지지말고!!" 누나는 현관문까지 마중을 나왔고 나는 알았다는 말을 한 뒤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6시 5분이니까, 헤매지만 않으면 제 시간에 무사히 도착할 것 같았다. 나는 예전 상견례때처럼 병신짓 하지 않으려고 언덕 밑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코엑스로 향했다. [나 지금 출발했어.] 김태경에게 문자를 하자, 아직 그렇게 바쁘진 않은지 빛의 속도로 답장이 날아들었다. [니가 온다고 생각하니까 떨린다. 휴.] [떨지말고 열심히 잘해. 나 가서 기다리고 있음 되지?] [응. vip는 지정좌석이라..니 자리 어딘지 봐뒀으니까..내가 이따 무슨 세레모니 하는지 잘 봐.] 나는 김태경의 문자에 그냥 피식 하고 웃고는 그냥 기본 바탕화면이 깔려있는 핸드폰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다. 앨범에 들어가도 어떤 사진도 없었고, 핸드폰엔 예전처럼 이쁜 고리가 달려있지 않았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들어 주머니에 넣어놓고는 빠르게 지나쳐가는 차창 밖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는지..시간은 언제 빨리빨리 흘러갈지. 시간이 약이라는데..언제쯤 그 약이 나한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갑자기 또 윤두준이 보고 싶어져서 코끝이 짠해졌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와 윤두준의 사이는 끊으려야 절대 끊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았다. 참 너무 질기게 엮여져서 억지로 하려니까 더 끊기지가 않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깊게 엉켜만갔다. 그냥 이럴땐 스스로 풀릴때까지 놔둬야하는건가... 한창 퇴근 시간이라 코엑스에는 40분정도가 되어서야 도착 할 수 있었다. 혹시나 늦는건 아닐까 안절부절 못한 까닭에 안그래도 컨디션이 완벽하게 좋은 상태가 아니였어서 몸은 이미 기진맥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게 큰 무대인건지 별의별 사람들로 아주 인산인해를 이뤘다. 철저하게 초대장을 갖고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건지 쇼장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검은 수트를 쫙 빼입은 경호원에게 김태경이 주고 간 초대장을 보여주었고 의자에 이름이 붙어있으니 거기 가서 앉으면 된다며 안내를 해주었다. 아니 무슨 이름까지..나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vip대접에 좀 얼떨떨해하며 쇼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밖이나 마찬가지로 소란스러웠다. 커다란 홀 안에 T자 무대가 놓여져있었는데 나는 무대 정 중앙을 바라봤을때 길게 쭉 뻗은 런웨이의 오른쪽에 앉게 되었다. 나는 적당한 좌석이겠거니 했는데..맨 앞자리라 너무 놀랐다. 의자에 하얀 천을 씌워놓고 그 위에 양요섭님 이라고 커다랗게 이름이 적힌 종이가 놓여져있었다. 나는 이런 자리가 너무 어색해 그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고는 여기저기서 터져대는 플래쉬를 바라보며 불편하게 있었다. 뭐 이렇게 하나의 무리가 우르르 온다 했더니 연예인인가 멋있게 빼입고 나타난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워낙 연예인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냥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정도를 봐서는 많이 유명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그 사람을 대놓고 바라보았다. 인터뷰라도 하는건지..역시 이런 자리는 너무 불편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손에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댔고 [김태경]이라고 뜨는 이름에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어디야. 왔어?」 "어. 와서 앉아있는데..되게 정신없다.." 김태경의 목소리가 안들려 전화기를 봤더니 전화는 무심히 꺼져있었다. 많이 바쁜가..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대면서 하얀색 조명이 무대를 밝히고 있는 아주 환한 런웨이를 바라보았다. 백스테이지에선 김태경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을거란 생각을 하니 새삼 김태경이 멀게 느껴졌다. 항상 내 옆에서 날 봐주고, 도와주던 사람이 저렇게 세간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라니.. "양요섭!!" 50분이 다 돼가는 시각에 얼른 좀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백스테이지에서 뛰어나오는 김태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대를 준비하다가 잠깐 나왔는지 평소완 다르게 화장이 너무 진했다. 이런걸...스모키라고 하는것 같은데.. 눈화장이 너무 짙었다. 그리고 머리는 80년대 아저씨들의 2:8 가르마에 무스를 쫙 바른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남색바탕에 하얀색으로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수트를 차려입은 김태경은..낯설었지만 정말 멋있었다. 얘가 이렇게 몸매가 좋았나 싶을 정도로. "..김태경?" "여기 되게 정신없지? 완전 vip만 올 수 있는데라서 그래." "근데..내가...어떻게.." "내 초대니까! 넌 그러니까 vip인거야..장난이고. 아 정신없다. 나 오늘 6번 나올거야!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꼭 봐!! 사진은 몰래몰래 찍어도 되니까..아..너 카메라도 안갖고 왔어!?" 말하는 투는 여전히 김태경이었다. 깨방정. "쨌든..너..괜찮아? 안색..아직도 안좋다. 이따 밥 사줄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어.." "아...떨린다. 원래 잘 안떠는데..니 앞이라 그런가봐." 히죽대며 웃는 김태경의 모습에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근데 나를 별안간 꽉 끌어안으며 떨린다며 방정을 떠는 김태경에 나는 그의 등을 톡톡 토닥여주며 잘하라고 응원해줬다. "태경씨!!! 얼른 백으로!!!" 마이크를 끼고 있는 스탭이 태경이를 급히 불렀고 얘는 아쉬운지 내 볼을 살짝 꼬집고는 꼭 잘보라며 소리친 뒤 다시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안그래도 정신 없는데 김태경까지 와서 이러고 가니까 더 정신이 없었다. 어지러운게 더 어지러워진 것 같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곧 시작할텐데..자리는 여기저기 텅텅 비어있었다. 유명한 사람들은 이런데 5분씩 10분씩 늦는게 기본이라고 하던데.. 정말인 것 같아 기자들이건 카메라맨이건 막 왔다갔다거리는 그 틈바구니안에서 난 혼자 앉아있었다. 마음같아선 그냥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들었지만.. 나를 보며 아이처럼 떨린다며 해맑게 웃던 김태경이 떠올라 차마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때 쇼장 입구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우면서 어떤 무리가 떼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오길래 저렇게 기자고 카메라맨이고 들이대는건가 궁금해서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들썩 거리면서 그 요란스러움의 주인공을 보려고했지만 워낙 많은 인파에 쌓여버린지라 얼굴 보는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 무리는 중간에 런웨이를 사이에 두고 내 반대편으로 몰려갔고 저 무리가 내 옆이 아니라는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그 곳을 응시했다. "....!!!!!" 다섯명 정도의 사람들이 앞을 비키자 그 가운데 있던 주인공이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이...내가 이 사람이 너무 그리워서 환영을 보고 있는건가 싶어서 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내가 앉은 바로 옆자리에 이 쇼에 대한 글이 적힌 팜플렛이 놓여있었고 나는 그걸 펼쳐보았다. [태강그룹, 한일모직의 새로운 탄생. DIVIO의 런칭쇼.] 한일모직은 태강그룹 안에 속해있는 의류라인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지금 이 쇼에서 런칭될 브랜드는 태강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브랜드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윤두준이 여기에 있는거고 그 옆에 윤상우 회장이 있는거겠지. 윤두준은 늘 봤던 모습 그대로,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해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벽. 저렇게 대단한 사람을 내가 사랑하고 있었고, 저렇게 대단한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기껏해야 나는 저 사람의 숨겨둔 애인밖에 되지 않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이런 행사에도 수십명이 넘는 기자들을 대동할만큼 엄청난 위치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윤두준은 동성애자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있을만한 그런 명예와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순간 왜이렇게 허탈해지는건지, 알고는 있었지만..왜이렇게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건지.. 나는 이 공간에선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침 그 반대쪽에 있던 윤두준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쳐버렸다. 먼저 피해버려야했는데 그러질 못하고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윤두준은 나를 보며 놀라움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니가 왜 여기에 있냐는 눈빛, 아프면서 여기에 왜 있냐는 듯 나를 질책하는 눈빛. 그가 하려는 말은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눈빛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다시 사람들로 인해 둘러싸여버려서 윤두준이 가려졌고 나는 그 틈에 김태경에겐 미안하지만 쇼장에서 나가려는 찰나 마침 쇼가 시작되려는건지 모든 등이 꺼져버렸고 오로지 런웨이에만 환한 불이 켜있었다. 그러고보니 내 옆이고 뒤고 텅 비어있던 좌석들도 꽉꽉 들어차있었고. 나는 나갈 타이밍을 놓쳐버려 어쩔수 없이 앉으며 무릎만 바라봤다. 왜 하필 직선으로 딱 보이는 자리에 앉은건지. "디비오 런칭쇼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내 음성이 들리더니 아까보다 더 환한 불이 탁 켜짐과 동시에 노래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웅장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 첫 스타트를 끊은건 아까 봤던 김태경이었다. 아까 나한테 와서 떨린다며 깨방정을 떨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엔 오로지 묵묵함만이 담겨있었다.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은 무뚝뚝한 표정. 그리고 그 긴다리로 꽤 긴 런웨이를 척척 걸어서 포즈를 취하고 다시 돌아 걸어왔다. 김태경이 나오자 카메라 플래쉬는 엄청나게 터져댔고 주변에서도 웅성웅성거렸다. "...김태경이 왜 이런 무대까지 서지? 이해가안가네.." 옆 사람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바라봤다. "..아 저 죄송한데..저 사람..유명한 사람이에요?" "김태경 몰라요? 한국 모델 최초로 뉴욕이랑 파리에서 각 콜렉션마다 5개 이상 무대 따낸 모델이잖아요. 그것도 이름만 들어도 입 떡벌어지는 브랜드로만. 패션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김태경정도는 무조건 알텐데... 처음이신가봐요?" "...아.....예...근데 이런 무대까지 선다는게..무슨 뜻인지..물어봐도 돼요?" "..아..아무리 태강라인이라고 해도, 처음 출시하는 브랜드고..사실 태강의 주 산업이 의류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뭐..비하하는건 아니지만 좀 레벨이 떨어지는 브랜든데 김태경이 나설정도면..대단하다는거죠. 그만큼 태강의 입김이 세다는 걸수도 있고..봐봐요. 윤상우회장이랑 아들내미까지 대동한거보면.. 아마 처음 일거에요. 이렇게 큰 런칭쇼를 연건." "...아.." 김태경이 유명하다는 소리는 기광이한테 얼핏 주워들은 기억은 있었지만 이렇게 모르는 사람조차 극찬할 정도의 사람일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러고보니 내 주변엔 왜이렇게 나보다 멋있고 잘난 사람들로만 가득찬건지.. 안그래도 열등감으로 가득차있는 내가 점점 더 초라하게 느껴져버렸다. 나는 옆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채 계속해서 팔다리 길쭉길쭉한 모델들이 입고 나오는 옷에 주목했다. 이 브랜드가 무슨 브랜든지는 몰라도 남성복 전문인지, 김태경이 입고나온건 완전 정석수트였고, 다른 모델들은 약간의 변화를 준 세미 수트 스타일이었다. 뭐 어쨌든 남성복 브랜드구나 라는건 알 수 있어서 그냥 넋놓고 보는데 또 김태경이 등장했다. 들어간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아까처럼 조끼와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갖춰입은 수트 스타일이었다. 이번에 입은건 어두운 자주색의 민무늬 수트였다. 바지는 저게 스키니진인지 정장바진지 모를만큼 꽉 끼는게..역시 김태경이라 소화할 수 있는건가 싶을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일반인이 입겠다고하면 말리고 싶을 정도로. 처음보는 김태경의 진지하고 멋있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고 김태경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내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찡긋하는 모습. 나는 기겁하며 김태경을 바라봤고 얘는 나한테 언제 윙크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시크한척하며 턴을 돌아 다시 돌아왔다. 올때도 또 윙크하는걸 잊지 않았다. 아 쟤가 미쳤나 진짜 왜저래. "..김태경 방금 윙크한거야?" 아까 나한테 정보를 주던 사람은 기자였는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수첩에 뭔가를 기록했고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리며 숨을 쉬었다. 그 이후로도 태경이는 정말 자주자주 나왔다. 여섯번이나 나온다더니 정말 끝도없이 나왔다. 대체 옷을 얼마나 빨리 갈아입는건지, 그래도 머리스타일에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서 놀라웠다. 꽤 많은 모델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마지막인 느낌이 팍 드는 김태경이 나왔다. 김태경은 흔히 백바지라고도 하는 흰바지에 흰 재킷을 입고 완전 분홍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나는 순간 드라마에 나오는 바람둥이가 떠올라 풉-하고 웃어버렸다. 태경이가 못본게 다행이었다. 뭐 어쨌든 태경이가 턴을 하고 다시 돌아오고는 정 중앙에 살짝 멈춰있나 했더니 완전 커리어우먼으로 보이는 여자가 태경의 옆에 서더니 그에게 팔짱을 끼고는 런웨이를 한바퀴 휘돌았다. 저걸 피날레라고 하는건가? 어쨌든 쇼는 1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끝났고 나는 끝나자마자 불이 켜지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다 나갈줄 알았는데 조명은 약간 어두우면서도 파란빛으로 바뀌었고 런웨이를 하얀색 불빛으로 비추고 있던 조명조차도 은은한 남색으로 켜졌다. "..아 이제..뭐하는거에요?" "처음이세요 정말? 아..이제 뒷풀이 하는거에요. 사람들끼리 모여서 파티하는거죠 말하자면. 이게 백퍼센트 초대로만 올 수 있는 자리라..아마 오늘 새벽까지 파티 할거에요. 근데..실례지만 누구 초대로 오셨어요?" 아무래도 이곳 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의심스러웠는지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머리를 포니테일스타일로 묶은 여자가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김태경이라고 말을 해야되나, 혹시라도 말했다가 태경이한테 누라도 끼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때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양요섭!!" 내가 옆을 보자 아까 입고 있었던 흰색 수트를 입은 태경이 뛰어오고 있었다. 이에 이 여자는 의심의 눈초리로 날 보고 있던 눈을 갑자기 호의적으로 바꾸며 환하게 웃었다. "아..김태경씨 초대로 오신거구나. 안녕하세요. 저 람스퀘어잡지 편집장 신우정이에요." "아..안녕하세요." 태경이는 자신에게 악수 요청을 하는 여자의 손을 잡아 호의적으로 웃었다. "태경씨 소문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해외에서도 평판 장난 아니던데.. 나중에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할게요. 꼭 우리 잡지 화보 찍어줘요. 알았죠?" "아, 네. 불러만 주신다면야."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요." 여자는 H라인 스커트를 몸에 딱 피트되게 입었고선 나한테도 살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 여자가 자리를 뜨자 태경이는 내 양어깨를 붙잡아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후-하고 숨을 쉬었다. "나 어땠어?" "잘하드라. 너 그렇게 유명한사람인거..아까 저사람한테 듣고 알았어. 너 왜 얘기 안했어!?" "뭐하러 얘기해. 뭐 대단한거라고. 나 아까 너한테 윙크했는데..봤어?" "아 맞다 그거. 너 미쳤어!? 무대 위에서 그러면 어떡해!!!" 내가 그의 팔뚝을 때리며 말하자 태경이는 더운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으며 또 깨방정 얼굴을 하고선 대답했다. "너 보라고. 내가 세레모니 한다고 했잖아. 나 멋있었지? 어? 반할거같지?" "..반하기는..내가 너한테 왜.." 태경이는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고 확 느껴지는 더운 기운에 그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얘가 아까부터 왜이래 진짜. "..너한테 잘보일라고 애쓴건데..하나도 안멋있었냐? 나 오늘 무대에서 입을 옷 내가 직접 골랐는데..." "멋있어. 여자들이 완전 넘어가게 멋있었다. 됐냐? 아 근데.." "양요섭." 좀 놓으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우리에게로 걸어오는 윤두준이 보였고, 그의 목소리가 이윽고 내 귓전을 때렸다. "안녕하세요." 윤두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고있던 나를 풀어준 태경이는 고개를 숙여 윤두준한테 인사했고, 그는 역시 태경이가 마음에 안드는지 그 인사를 받지도 않은채 시선은 나한테 고정했다가 또 무뚝뚝한 눈빛을 태경이에게로 꽂았다. "...제정신이야?" "네?" "얘 어제..아팠던 애야. 내가 너한테 지켜달라고 부탁했었던거 같은데..그런 애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 "아..그건.." "양요섭 남의 부탁 거절 못하는 애야. 밤새 죽을뻔했던 애를..." 윤두준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간게 내 눈에 보였다. 다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사람들 눈이 많아서 참고 있을 뿐. "형. 아니야. 내가 온다고 그랬어. 얘가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오겠다고 한거야." "가만 있어 넌." "김태경. 니가 그러고도.." "이제..그렇게 관여하실 일 아니지 않아요? 떳떳하게 사랑하는 사람 지켜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래서 저한테 부탁까지 하셨던 분이..저한테 이러시는거 좀..웃긴거 같은데." "김태경!! 너 좀!!" 나는 점점 굳어가는 윤두준을 살피면서 그 둘 사이를 가로 막아 태경이를 말렸다. 안그래도 정신없고 어수선해서 울렁거리는데 이 사람들은 또 왜 이러는거야 대체. 왜. "태경씨!! 백으로 들어와요!!" 정말 이순간 구세주처럼 스탭이 나타나 태경이를 불렀고 태경이는 대답한뒤에도 그냥 갈 수는 없었는지 윤두준을 싸늘한 눈빛을 하고선 계속 바라봤다. 이에 나는 태경이의 팔을 밀며 얼른 들어가라며 재촉했고 계속 시선이 윤두준에게 머물러있다가 결국 백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다. 순간 탁하고 놓이는 맥에 나도 모르게 휘청했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뒤에서 잡아주었다. "너 미쳤어!? 어제까지만해도 죽을뻔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밖에 나가지 말라는 소리 들었을텐데 왜!!" "괜찮으니까..나온거야. 태경이 말대로..형 이제 나한테 관여하면 안되는 사람이잖아. 신경꺼. 내가 아프던 말던." "너 진짜 말 그런식으로 할래!!!" 음악소리와 사람들 대화소리 때문에 주위가 시끄러운게 다행이었다. "..나 형한테 미안한거 너무 많아서 이젠 미안하단 말도 못해. 그러니까 내가 형한테 한것 만큼 형도 나한테 똑같이 해. 못되게 굴고 나쁜 말만 쏙쏙 골라서 해. 왜 그렇게 병신같이 맨날 참고 살아 왜. 그러다 형이 나보다 더 아플것 같애." "그런거 걱정되는 놈이..나한테 이러는거야 너?" 윤두준은 내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 열을 체크했고 아무래도 내가 걱정이 되는지 내 손을 잡고 의자에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자." "...." "집에 데려다줄테니까 가자." 나는 윤두준의 손에서 손목을 잡아 빼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가방 또한 뺏어들었다. "태경이랑 갈거야." "뭐?" "형 말고 김태경이랑 같이 갈거라고. 형 여기 오는줄 알았음 안왔을거야. 나 안아팠는데 형 보니까 갑자기 또 아파. 정말 괜찮았는데 형 보고 나서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터질것 같애. 나 이제 형만 보면 안아프다가도 아파. 이제 형은 나한테 그런 사람이야. 나 더 아프게 하고 싶으면 맨날 나타나고 맨날 찾아와봐." "...너...진짜...못됐다." 한번도 나한테 비난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인데, 나한테 처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윤두준이 나한테 못됐다라고 할정도면 정말 내가 심했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차라리 윤두준이 나한테 별의별 욕을 지껄여줬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러면 이렇게 죄책감은 안들텐데..혼자서 악역을 자처하는건 너무 힘들다. 다 놓고 싶을정도로. 내가 윤두준을 피해서 어디론가 가려는 찰나에 윤두준의 옆에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잠깐만요." "잘나신 도련님. 가보셔야죠. 회장님께서 부르신다는데요." 내 말에 윤두준은 나한테 뭐라고 하려던 그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윤두준을 바라보고 있는 윤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행여나 윤회장의 화살이 나한테로 돌아올까봐 계속 눈짓했다. 가보라고. 그렇지만 윤두준은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었다. "...도련님." "알아요. 가요. 잠깐만 자리좀 비켜줘요." 윤두준은 짜증이 났는지 자기 뒤에서 탐탁치않게 쳐다보고 있는 윤회장을 돌아보더니 다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양요섭. 아프지마. 나 이제 니 옆에서 못돌봐줘. 그러니까 아프지마. ...너한테도 시간이 필요했듯이..나한테도 시간을 줘. 니가 하자는대로 할테니까..그렇게 자꾸만 밀어내지마.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나만 보면 아프다는 너..옆에서 괴롭히고 싶은 생각 없어. 멋대로 번호 바꿔버릴만큼 니 생각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니 말 다 알아 들었으니까..좀만." 윤두준은 한마디 한마디를 어렵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나도 너무 어려웠다. 내 뜻대로 해주겠다는데도 그게 왜그렇게 서운하고 미운건지. 해줘도 슬프고 안해줘도 슬펐다. 나는 정말 태생자체가 못됐나보다. "가자." 어느새 김태경 평소의 스타일로 돌아온 태경이는 내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며 윤두준에겐 까딱하는 목인사만 한뒤 나를 이끌었고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태경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겨우겨우 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윤두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순간 다리에선 힘이 풀려버렸고 이럴줄 알았는지 태경이가 붙잡아준 덕에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꼴은 면할 수가 있었다. "괜찮아?" "....응.." "장하다. 이젠 울지도 않고." "..이제 안울어. 내가 무슨 염치로 울어.." 내 말에 태경이는 말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흐트려놓았다. "아 근데..저거 뒷풀이 한다는데..너 있어야 되는거 아니야?" "너 밥사주기로 했잖아. 뭐 먹을래? 음...죽이나 먹으러 가자. 그게 제일 낫겠다." 태경이가 내 손을 꽉 잡은채로 엘레베이터 있는 쪽으로 나를 끌었고 나는 계속 쇼장 안에 미련이 남아 끌려가는데도 발걸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내가 윤두준에 대한 추억을 정리하고 있으니까, 이젠 윤두준에게서 내 추억을 억지로 빼앗아올 차례였다. #41. "...우와...대단해요 진짜." 내가 며칠동안 준비했던 자료들을 동운이에게 내밀고 그에게 가장 맞춤일 것 같아 사온 문제집도 꺼내 놓았다. 방대한 자료에 동운이는 대충 훑어보다가 놀라움을 금치못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쑥쓰럽게. "이 노트는 내가 고등학교때 정리해놨던 문법노트거든? 니가 알아보기 쉽게 다시 정리한거구... 이 문제집들은 내가 작년에 풀어봤을때 되게 좋다고 생각했던거 몇개 간추려봤어. 그리고 내가 니 시험지 보면서 어디가 제일 약한지 유형 같은거 파악해서 메모해놨거든? 앞으로 이거 중점으로 수업하려고." "...이걸..다 준비하신거에요? 며칠동안?" "뭐..그냥 한번 해보는거 열심히 해보고 싶어서. 그리고 너 나한테 아까운 시간 짬 내주는건데 내가 너한테 폐끼치면 안되잖아. 일단 너 이 문제집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시간 20분 줄테니까 한문제당 일분씩 얼른 풀어봐. 시작." 내 말에 동운이는 어?라면서 당황하더니 금세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고 난 그사이 내가 미처 먼저 풀어보지 못했던 문제를 다시 풀어보았다.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참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특히, 딱 여름방학때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면 그런거 다 받아주지도 않고 제일 무섭고 엄한 표정으로 가르치려들고 한 순간도 나한테 친절하게 해주지 않았던 윤두준이었다. 그래서 내가 삐지고 그럼 맛있는 음식으로 달래주고..그랬었는데..이젠 모든게 다 옛일이다. "땡. 이것봐. 너 시간도 모자르지? 빈칸완성에서 제일 중요한건 밑줄친 문장 바로 앞뒤문장이야. 그리고 바로 첫문장을 읽어. 대개 첫문장이 주제문일 확률이 높거든? 그리고 니 생각에 빠지지마. 니가 아는 배경지식을 동원하는건 좋은데 거기에 사로잡히지말란말이야. 니가 글쓴이는 아니잖아. 답은 무조건 글쓴이의 주관이라고." 내가 말하자 동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노트에 메모를 해놓고 있었다. "안적어도돼. 여기 노트에 다 있어. 문법 노트 맨 끝장 보면 독해비법도 있으니까 수업 끝나고 한번 읽어봐." 내가 채점을 해주며 말하자 동운이는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여 다행이었고. "..근데..되게 안색 안좋으세요. 뭐 안좋은일 있으셨나봐요." "그냥 뭐..이거 틀린거 니가 왜틀렸는지 꼼꼼히 해석해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물어봐." 동운이가 다시 문제에 집중할동안 나는 그냥 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좀 늦었고..아무래도 내일 윤두준네 집에 가서 내 짐을 다 챙겨와야 될 것 같았다. 어떻게 가지러 가야되나...깝깝해져서 나는 손으로 펜을 돌리면서 턱을 괴고 있었고 동운이는 다 알겠는지 펜으로 자기만의 표시를 해두는게 보였다. "아 그러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20분 준다. 시작." - 과외는 생각보다 되게 일찍 끝났다. 아무래도 첫 수업이고 미리 준비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 내에 문제를 풀어야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나는 동운이에게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주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했으니까. "아, 나 핸드폰 번호 바꼈거든? 다시 저장해줄테니까 폰 좀." 하마터면 동운이한테 새로운 번호를 안알려줄뻔했다. 나는 동운이가 건네는 핸드폰에 다시 입력을 해준다음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방 밖으로 나왔다. "어, 잠깐만요. 엄마! 밖에 비와?" 동운이는 멋있게 웃으면서 나가려는 나를 현관문 앞까지 배웅해주는데 신발을 신는 나를 살짝 붙잡았다. "어머. 비오네. 요섭군 우산 갖고 왔어요?" "...비와요? 그런말 없었는데..." 우산이 없어서 난처해진 나는 두 모자를 바라보는데 어머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며 신발장 옆 수납장에서 검은색 3단우산을 내미셨다. "이거 쓰고 가요." "아, 감사합니다! 깨끗하게 쓰고 갖다드릴게요!!" "안갖다줘도돼요. 오늘 수업 열심히 해주시는거 같은데..앞으로도 우리 동운이 잘 부탁드릴게요." "아니에요!! 동운아 너 내가 내준 숙제 꼭 해갖고 와야된다. 금요일날 보자! 안녕히계세요!!!" 꾸벅꾸벅 인사를 한 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정말 밖에선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렸다. 저 비에 맞으면 진짜 아프겠다 싶을정도로 뭔 비가 저렇게 후두두둑 떨어지는지 정말 우산도 없이 밖에 있었으면 낭패봤겠다 싶어 나는 3단우산으로도 부족하지만 어쨌든 그것에나마 의지해 세차게 내리는 비에 맞서 단지 앞까지 걸어가 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어우..비 너무 많이 오죠?" 머리카락만 빼고 거의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내 모습을 보던 택시아저씨가 느긋한 웃음을 보여주시며 뒷자리에 탄 나에게 물어보셨고 나는 우산을 바닥에 정리해놓고 머리를 탈탈털며 말했다. "네. 진짜 너무 많이 오네요. 비 온다는 뉴스 못봤는데... 아, 삼성동 힐스테이트 건너편에 있는 애비뉴 아시죠? 거기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가 오는걸 별로 좋아하지만은 않지만 이렇게 어딘가에 앉아서 비오는걸 구경하는건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맞는건 질색팔색이지만 비가 오는 그 자체는 운치있는 느낌이라 나는 차 보닛이며 천장이며 커다란 빗방울이 세차게 때려서 생기는 투둑투둑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워낙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내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찝찝한 습한 느낌만 없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지이이잉- [집에 들어가셨어요?] 모르는 번호라 잠깐 망설였지만 존댓말을 쓰는거 보니 동운이일것 같아서 번호를 저장한다음 답장을 써주었다. [가고 있어. 숙제 꼭 해와야돼. 모르는거있음 언제든지 전화해서 물어보고!!] [네. 집에 잘 들어가세요. 비 되게 많이오네요. _동운] [응! 열공!!] 비때문인지 아님 딱 퇴근시간에 나와서 그러는건지 차가 너무 막혔다. 정말 내려서 걸어가는게 빠르다고 생각될만큼. "감사합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나는 평소보다 십분이나 더 늦게 집에 도착해 집으로 들어왔고 빗물이 잔뜩 묻은 우산은 현관문 옆에 있는 테라스에 널어놓고 거의 홀딱 젖다시피한 옷을 탈탈 털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여름에 내리는 비는 너무 찝찝했다. 안그래도 더운데 비까지 오면 너무 습해서..영 기분이 꽝이었다. 나는 바로 샤워부터했고 누나가 에어컨을 빼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여전히 그대로 내방에 있는 에어컨을 25도로 맞춰 틀어놓은다음 침대 옆 커다란 통유리 창문에 기대어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꾸리꾸리하고 거뭇거뭇한게 딱 내 마음 같았다. 가끔씩 쳐대는 우르릉쾅쾅하는 번개소리는 내가 나한테 하는 꾸짖는 소리 같았고 땅바닥에 구멍이라도 뚫어버릴 듯하게 아주 세게 내리는 빗줄기는 하루가 멀다하게 눈물을 쥐어짜는 내모습 같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 30분이 다 되어갔고 약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했지만 역시나 밥 생각이 없고 괜히 졸리기만 해서 이번엔 에어컨을 끈 뒤 침대에 누워 따닥따닥 하는 창문에 빗물이 부딪쳐 나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면서 잠에 빠졌다. * 너무 밝은 빛줄기에 자연스레 눈이 떠져 일어난 나는 어제완 다르게 언제 그렇게 비를 쏟아냈냐는 듯 맑게 개어있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비온 뒤 하늘은 맑다던데 정말 청아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만큼 환하고 밝았다. 어딘가에 무지개도 있을 것 같이 구름 한점 없이 아주 하얀 도화지 같은 하늘이었다. 핸드폰을 보니 벌써 11시 10분. 어제 저녁에 잠든 것 같은데..요즘은 하여튼 잠만 들었다하면 시간이 어떻게가는줄도 모르고 기절한듯 자곤 했다. 보통 자봐야 6시간, 7시간정도였는데 요즘은 12시간은 기본이었다. 이러다 개강하면 어떻게해야되나 걱정이 될만큼. 나는 그렇게 별별 생각을 하면서 누워있다가 갑자기 오늘 하려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에 핸드폰을 들어 준형이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형. 저 요섭인데요." 「양요섭!?」 "네..아 저 뭐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일어난지 얼마안돼서 목이 확 잠겨버렸다. 좀 쪽팔리게. 「...너임마 어떻게된거야!? 갑자기..윤두준새끼랑은 어떻게 된거고...뭐야 니네!?」 윤두준한테 어느정도 얘기를 들었는지 나한테 다짜고짜 궁금했던 것을 쏟아냈고 그런 말이라면 별로 대답해주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아..좀...일이 있었어요. 저 물어볼게 있는데..혹시 지금 형이랑 같이 계세요?" 「윤두준이랑? 왜?」 "아..형네 집에 두고온 물건이 있어서 그런데..혹시 같이 있나 물어보려구요. 마주치는게..좀 그래서.." 내가 머뭇머뭇 거리며 말하자 수화기 저편에서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같이 있는건가? 「아..어. 지금 우리집에 있는데. 바꿔줄까?」 "..아..아니요. 언제까지 같이 있을거에요? 몇시쯤?" 「글쎄..잘 모르겠는데..한 세시쯤?」 "아. 알겠습니다. 끊을게요." 나는 용준형이 뭐라고 할까봐 무서워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고 일단 윤두준은 용준형네집에 있다니까 지금 빨리 뛰어가서 후다닥 챙겨갖고 나오면 어색하게 부딪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에 나는 빨리 화장실로 튀어들어가 대충 세수랑 양치만 한다음에 옷도 대충 아무거나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가방이야 윤두준네 집에 있을거고..하나도 남김없이 싹 가져올거다. 나와 관련된 물건이라면 숟가락 한짝이라도 모조리. 나는 서랍속에 넣어두었던 반지와 귀걸이, 휴대폰고리를 챙겼다.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윤두집네 집 엘레베이터와, 정말 오래간만에 앞에 서는 현관문 앞에서 나는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걸 알지만 그래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면서 답답해졌다. 짐 챙기다가 들어오면 어떡하지, 마주치면 어떡하지 등등. 그리고 정말 너무나도 그리웠던 공간이라 나는 행여나 번호가 바뀌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의 생일인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삐비빅- 다행히도 안바꿨나보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찰칵-하고 열리는 집에 나는 정말 처음 집 방문을 하는 손님처럼 빼꼼히 열고 집안부터 살폈다. 정말 아무도 없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서서 거실부터 바라보았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의심될정도로 원래 깔끔한 성격인 윤두준은 항상 집을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치우곤 했었는데..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는건지 설거지통에는 밥 먹은 그릇이 아니라 맥주캔, 소주병들로 아주 난잡하게 쌓여있었고 거실엔 소파, 테이블, 바닥 여기저기에 입다 벗어놓은 옷들과 과자봉지들, 설거지통으로 들어가지 못한 먹다남은 술병들로 아주 어지러져있었다. 정말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정신없이 난잡했다. 나도모르게 한숨을 쉬며 벗어놓은 셔츠를 바닥에서 주워들며 대충 치우고 소파 한쪽에 걸어놓다가 가만히 멈춰섰다. 이제 나는 이 집을 치울 권리도, 그 어떠한 권한도 없는데 또 오지랖이다.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숨을 쉬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에도 먼지가 잔뜩 쌓여서 걸을때마다 먼지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대체..어떻게 하고 사는건지. 그나마 2층엔 거실이 없다는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여기에도 저렇게 어지를 공간이 있었으면 여기또한 난장판이었을테니까. 나는 곧장 방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방문. 옛날에는 여기서 항상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났었는데 그것또한 이젠 기억일 뿐이었다. 달칵- "..으아!!" 방문을 여는데 까만게 내 몸위로 덮쳤고 무겁고 축축한 느낌에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기겁했고 나는 몇초가 걸리지 않아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게 다 죽어가는 윤두준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형!!!!! 형!!!!" 윤두준은 나한테 기대서 정신을 못차렸다. 몸은 또 왜이렇게 축축한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것도 같고 무엇보다 지금 윤두준이 기절한 것 같아 나는 너무 놀랬다. 안그래도 요즘들어 먹은게 없어서 힘도 없는데 이렇게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있는 사람을 들어올리는건 나한테 너무 무리여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등을 퍽퍽 치는데도 윤두준은 깨어날 생각도 못했다. 이에 나는 윤두준을 꽉 끌어안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침대로 옮겨가 눕혔고 아까까지 누워있었던걸로 보이는 침대는 무슨 물이라도 끼얹었는지 군데군데가 축축했다. 반듯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윤두준의 모습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입술은 파랗게 질리고 얼굴은 하얀게..뭐가 그렇게 추운지 몸을 오들오들 떨어댔다. 수트 재킷까지 벗지도 않고 그냥 잤는지 재킷의 어깨부분은 아직도 축축했다. 대체 뭘 하고 다닌거야? "...설마...어제...비맞은건가?" 어제 내린 비는 그야말로 최고였는데, 설마 그 비를 된통 맞고 다닌건지 이불도 침대 시트도 시간이 몇신데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윤두준이 입고 있는 옷에서도 유난히 두꺼운 부분은 아직도 젖어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덜덜 거리고 떠는걸 보면...분명했다. "..미쳤어 진짜..왜 비를 맞아 왜!!!" 안울겠다고 다짐했던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내 눈물은 툭툭 떨어져 윤두준의 셔츠를 물들였다. 어쨌든 나는 눈을 쓱쓱 닦으며 어떻게든 씻겨야될 것 같아 누워있는 윤두준의 몸을 일으켜 재킷부터 벗기고 셔츠 단추를 다 풀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이에 윤두준의 몸에는 하얀 런닝 셔츠만이 남았고 이것 마저 벗기면 지금 너무 추울 것 같아 냅뒀고 이럴게 아니라 일단 목욕물 부터 받아야 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게 다 엉망이었다. 뭐부터 해야되는지 생각이 덩쿨처럼 엉켜버려서 허둥지둥 대고 있었다. 내 앞에서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윤두준도 얼마전 내 모습을 보고도 이랬을까. "..엄마." 목욕물을 받으려고 일어나는데 윤두준은 내 손목을 잡아세웠다. 정신이 드는건가? "정신 들어?" "...양..요섭.." "나 누군지 알겠어? 어제 비맞았지? 미쳤어!? 그걸 맞으면 어떡해 진짜!!" "...진짜..양요섭...이네.." 윤두준은 다 풀린 눈으로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병신아. "여기 잠깐만 있어." 화장실로 가려고 내 손목을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윤두준의 손을 내 반대쪽 손으로 풀려고 하는데 윤두준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를 안는 힘이 너무 세서 지금 이사람이 아픈게 맞긴 한건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 아픈거 어떻게 알고 왔어." "형 지금 춥잖아. 일단 씻자. 좀 놔봐. 진짜 감기 걸려!!" "안추운데..너 안고 있으니까..하나도 안추운데.." "장난해? 잠깐만 놔봐. 잠깐만." 나는 지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데, 몸이 덜덜 떨리는게 느껴지는데도 안춥다고 저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윤두준때문에 아주 내가 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자기가 아픈데 왜이렇게 태연한거냐고. 왜. "..보고..싶었는데.." 윤두준의 목소리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일단 씻기고나서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되나, 아니면 집에서 냅둬야하나 이럴땐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뭐부터 해야되는건지 너무 복잡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지금 뭐라도 해야겠는데 나를 놔주지 않고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는 윤두준때문에 더 심란했다. 나를 안고 있는 윤두준에게서 절박함이 느껴져서 도저히 뿌리치고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형." 나를 안고 있던 윤두준이 내 양어깨를 꽉 잡은채로 안고있던 팔을 풀고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또 왜이렇게 푸석푸석한지..밥 좀 잘 먹고 다니지. 분명 집에선 밥도 안먹고 술만 들이부었을거다. 저렇게 술병들이 나동그라져있는거면..어쩜 방에도 술병들이 굴러다니는건지. "어제..너무 보고 싶어서..집앞에 갔는데..니 번호도 모르고..니 방 불은 꺼져있고... 어디 갔다오는건가 싶어서 계속 기다렸는데..안나오드라." "...몇시까지 그러고 있었어?!" "여섯신가..." "...새벽!?!?!?" 윤두준은 대답대신 그냥 싱긋 웃었다. 미쳤어 정말. 미쳤다. "...미쳤어..미쳤어 진짜!!! 비가 그렇게 오는데!! 그냥 가지 왜 거기서 병신같이 왜!!!" "그냥..너무..보고싶어서. 사진은..맨날 보는데..니 얼굴..직접 보고 싶어서..이렇게 만져도 보고..안고도 싶어서.." 윤두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으려고했지만 뭐 이렇게 눈물이 빠르게 뚝뚝 떨어지는건지 손으로 닦아내도 계속 흘렀다. 윤두준앞에서 이렇게 울면 안되는데..약해지면 진짜 안되는데.. 내가 계속 울자 윤두준은 나한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내 볼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눈물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는 내 눈에도 입을 맞추어주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단번에 까끌한게 느껴져 또 속이 너무 상했지만 밀어내야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야되는건 알지만 나도 이 사람이 너무 그리웠으니까, 너무 보고싶었으니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윤두준은 내 어깨를 꽉 잡은채로 내 입안을 예전처럼 헤집어놨다. 아픈사람이 맞는지 정말 저돌적이라는 단어가 딱 맞을만큼 윤두준이 내 어깨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뒤로 밀려났을만큼 세게 밀고 들어왔고 나는 그의 키스가 너무 벅차서 나도 모르게 윤두준의 허벅지를 꽉 잡았다. 정말 오랜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키스를 하고 있으면 10분도 1분처럼 흐르기 마련인데, 내가 생각해도 오래하고 있었다는건 정말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윤두준이 살짝 숨을 고르고 있을 즈음에 입술을 뗐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키스를 하기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나는 살짝 피했다. "..형 이러고 있으면 진짜 감기걸려. 일단 씻자." "...나 씻을동안..너 갈거잖아." "...안갈테니까..씻어. 목욕물 받아놓을게." 갈거라고 말하는 윤두준의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정말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내 흔적을 챙기기 위해 온건데..어느새 내 목적은 사라져버렸다. 그저 윤두준이 아프지 않게 간호해줘야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버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두준은 내 손을 꽉 잡고 같이 일어섰다. 이에 내가 여기 누워있으라고 손을 놓으려고하자 그가 먼저 욕실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아까까지는 엄청 아파보였는데..왜 저렇게 씩씩해보이는건지. "..괜찮아? 얼굴은 다 죽어가는 사람 얼굴인데.." "아파. 죽을 것 같애. 그러니까..나 다 나을때까지 어디 가지마. 아파서 죽을거 같아." 윤두준은 자기가 스스로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욕조에 살짝 걸터 앉아 나를 자기 다리 사이에 세워놓았고 그를 내려다보던 나는 지금 내가 뭐를 하고있는건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쉰 뒤 윤두준의 옆으로 빠져나와 슬슬 받아지는 물의 온도를 손으로 쟀다. "...가지마.." "안가." "거짓말. 갈거잖아. 나 재워놓고 그 사이에 가고 또 꽁꽁 숨을거잖아." 오늘따라 윤두준 답지 않게 자꾸만 칭얼거리고 아기같이 굴었다. 이게 아프다는 증거인가..사람이 안하던짓을 하고. "일루와봐." 윤두준의 말에 나는 쪼그려앉아 점점 차오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갔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배에 다가온 윤두준의 뜨거운 얼굴에 그냥 말없이 그의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참 많이 야위어보인다. 항상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역시 윤두준도 사람은 사람인가보다. 이렇게 약해진걸 보면. "..좋다...양요섭이랑 이렇게 있으니까...좋다. 옛날로 돌아간거 같아서.." 윤두준은 정말 조용히 웅얼거렸고 나는 그냥 계속 그의 머리만 쓰다듬어주었다. 정말...그냥..도망쳐버릴까..다 놓고..나는 윤두준만 있음 되는데.. 어쩌면 윤두준과 같이있으면 아마존이건 남극이건 그 어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윤두준 하나 잡아버릴까. 나 정말..그러면 안되나... "..옷 벗어. 물 다 받아졌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윤두준의 어깨를 잡아 떼고 물을 손으로 만져보니 적당히 뜨거운게 딱이었다. 이에 나는 윤두준이 씻을동안 죽이라도 쒀야될 것 같아 나가려는데 옷을 벗던 윤두준이 나를 또 잡았다. "안갈.." "같이..하자." 나한테서 자꾸만 떨어지지않으려는 윤두준에 나는 너무 짠해졌다. 어떻게서든 나와 같이 있고 싶어하는 윤두준의 모습에 안그래도 흔들리는 마음이 갈대처럼 자꾸만 흔들려댔다. 이러면 안된다고 계속 생각하지만 내가 가만히 있자 윤두준은 자기 옷은 다 벗고 내 옷마저 벗겨버렸다. 내가 그냥 말없이 서있자 윤두준은 거품목욕제를 하나 떨어뜨리더니 거품이 가득 차오를때까지 휘휘 젓다가 나부터 욕조 안에 밀어넣고 그다음 윤두준이 들어왔다. "..나 아프니까..내가 해달라는대로 해줘." "뭔데.." "오늘만..딱 하루만..내일 이시간까지만..옛날처럼..해줘. 사랑한다고도 해주고..안아도주고 키스도 해줘. 애교도 부려주고 같이 자고..그래주면..안돼?" 내 앞에 앉아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하는데 아마 그 누구라도 거절을 못했을거였다. 더더군다나 나라면 더욱. 나는 자꾸만 끝없이 속상해져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은다음 환하게 웃었다. 정말..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만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내고..더이상은 없는거다. 정말 더이상은..안된다. "사랑해." 나는 너무 하고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하며 그대로 윤두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입을 맞추었고 윤두준은 나를 다리 사이에 꽉 끼워놓고 내 등을 어루만지며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아까보다 더 뜨겁게 입을 맞춰주었다. 너무 그리웠던 품이고, 너무 그리웠던 입맞춤이라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고 눈을 살짝 떠 그의 얼굴을 보니 윤두준의 볼에도 한줄기의 물이 짝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대체 누구를 위하여 우리가 이별을 하는건지.. 우리 둘다 여전한데 그대론데 우리는 왜 이렇게 끝을 선택해버린건지 회의감이 찾아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나다. 내가 스스로 끝을 선택했고 내가 선택했기때문에 윤두준은 어쩔수없이 그 끝에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거다. 모든 원흉은 바로 나였다. 윤두준의 혀는 내 이를 쓱 훑고지나가더니 내 혀와 마구 엉켜댔다. 윤두준이 자꾸만 내 입술을 먹었다 뺐다 하는 바람에 내 입술 근처는 온통 침범벅이 되어버렸고 그가 나를 꽉 안고있는 내 허리는 너무 뜨거웠다. 물때문에 뜨거운건지, 윤두준의 체온이 닿아서 뜨거운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입술이고 허리고 너무 다 뜨거웠다. "...잠깐만.." 하도 오랜만이라, 숨이 차올라 내가 잠깐 입술을 떼자 윤두준은 나를 배려해주면서도 내 얼굴 이곳저곳에 다 입을 맞춰댔다. 눈썹과 눈, 코, 양볼, 귀, 그리고 입술근처까지. 아랫입술을 살짝 빨더니 싱긋 웃는 윤두준에 예전 그의 모습이 보여 나는 너무 행복했다. 정말 예전처럼 돌아갔다는 착각이 일어버려서. "..사랑해." 윤두준은 내 눈을 똑바로보며 내 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아랫입술, 윗입술에 쪽-하고 뽀뽀를 해주고는 다시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나는 그의 수척해진 볼에 손을 올려 어루만지면서 그를 받아들였다. 한참을 또 내 혀가지고 장난을 치더니 입술을 떼더니 내 귓볼로가 잘근 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나는 오랜만의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자 한손으로는 다른쪽 귓볼을 만지며 귀밑부분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 죽도록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이런 말 말고..정말..더 사랑한다는 말같은거 없나?" 윤두준의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으며 그의 등을 살짝 때렸고 윤두준 또한 웃으며 내 목덜미에 훅-하고 키스마크를 남겼다. "여름인데!!!!" "여름이면 뭐. 너 내껀데." "안보이는데다가 하던가..하여튼 못됐다. 내가 형 볼에다가 남겨주면 좋아?" "맘대로해. 볼 말고 그냥 얼굴에다 다 해. 난 좋지." 히죽거리며 말하는 윤두준에 나는 어휴 라면서 그의 가슴팍을 툭 쳤고 윤두준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프면서도 계속 웃으면서 내 입술에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면서 쪽쪽댔다. 그리곤 내 몸을 빙 돌리더니 나를 뒤에서 꽉 끌어안아주었다. 내 어깨에 턱을 묻고는 귓볼을 살짝살짝 깨물면서 말했다. "..그냥..도망치자..난 어디라도 좋으니까..난 너만 좋다면 아프리카여도 좋으니까..응?" 내 허리를 뒤에서 안아 배에서 깍지를 끼고있는 윤두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그냥 그 입에 입을 맞춰주었다. 이에 또 나를 놓아주지않고 딥키스를 하던 윤두준은 내 마른 배를 만지고 허리를 만지더니 말했다. "..안그래도 말랐는데..더 말랐네. 손목도..내가 맛있는 밥 맨날 해주고, 니 말도 잘듣고 하지말라는건 다 안하고 하라는것만 하고 살테니까..내 앞에만 있어. 딴데 보지도 말고..딴사람 보지도 말고..그냥 나만 보면서..나만 사랑해주면 안돼?" "..지금도 형만 사랑하고 있는데?" "내 앞에서 딴새끼 편든거..그때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너 알아?" 아무래도 김태경을 말하는건지 윤두준의 투정에 나는 또 피식-하고 웃었다. "바보야. 친구랑 애인이랑 똑같냐? 김태경은 친구고 형은..아니잖아." "김태경은..그게 아니잖아." "뭐?" "..불안하단말야. 김태경이 너한테 너무 잘해주니까..니가 넘어갈까봐..그생각만하면..잠도 안와. 마음같아선 죽여버리고 싶은데.." "또. 또. 아니라니깐?" 서로 사랑한다는 말로만 하루를 보내도 모자를 시간에 우린 또 다투고 있었다. 만나면 다투고 사랑하고 싸우고 사랑하는게 일이었다. 정말 모든게 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윤두준의 손을 꽉 잡은채 나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어놓았다. 너무 편안하고, 너무 행복해서 그냥 딱 여기서 이대로 죽고싶었다. 이기분대로라면 죽어도 좋을텐데.. 앞으로 딴 걱정도 안하고 누구를 그리워하지도 않아도 되면 참 좋을텐데. "..맨날 술 먹지 말고 밥 먹어. 그러니깐 이렇게 탈이 나지. 어제 몇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몰라. 밤에 간거같은데..집 와서보니까 해떴드라." "미쳤어 진짜..어제 비 엄청 많이 왔는데..그 비를 쫄딱 맞았으니..감기에 걸리고도 남지. 못살아 진짜." 나는 윤두준의 반쪽이 된 얼굴을 손으로 만지다가 문득 내가 그의 뺨을 때렸던 그 곳이 떠올랐다. 아직도 죄책감이 들어 나는 그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다가 입을 맞춰주었다. "아..난 진짜 니가 여기다 마크 남기는줄 알았네." "진짜 할수도 있어. 해?" 내 말에 또 웃으면서 내 입에 쪽-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꽉 끌어안고 동시에 눈을 감았다. 너무 나른하고 편해서 긴장을 다 놔버려서 많이 잤는데도 잠이 솔솔 밀려왔다. -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 침대 시트부터 갈아야돼." 나는 윤두준의 고집을 못이기고, 결국 밑에 속옷만 입은채로 그의 하얀 셔츠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옛날에 이러고 윤두준 유혹해보겠다고 깝쳤던게 어렴풋하게 기억나 나는 싫다고 발버둥쳤지만 윤두준의 키스 한방에 난 나가떨어져버렸다. 이 옷입고 어떻게 일을 해 진짜..집도 치우고 형 먹을 죽도 쒀야되는데.. "내가할테니까 있어." "아픈사람이..어딜..여기 그대로 있어." 내가 머리까지 직접 감겨주고 머리 말리라며 화장대 의자에 앉혀놓는데 윤두준은 나를 잡더니 드라이기를 넘겨주었다. 자기 머리를 말려달라는 뜻 같아서 나는 진짜 애키우는것도 아니고.. 핏-하고 웃은다음 윤두준을 앉혀놓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위이잉 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채우고 거울을 통해 윤두준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로 우리가 눈이 마주치면 윤두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윙크를 날려주고 나는 또 웃고. 그러다 윤두준은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마주보았고 왜그러냐며 내려다보는데 그냥 나를 또 끌어안았다. 이에 나는 좀 놓으라며 뒤로 물러나는데 윤두준은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내 맨 허리를 만졌다. 아무래도 이런 속셈이 있는것 같았다. "이러려고 이옷입으라고 그랬지?" "응. 너 이러고 다니는거 너무 좋아. 내앞에서만..이러고 다녀. 꼭 내 앞에서만." "이런꼴 보여줄 사람도 없거든요 윤두준씨?" 나는 거의 다 마른 윤두준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들겨준다음 내 머리도 말렸다. 여름이라 이렇게 꼭 붙어있으니까 안그래도 드라이기 바람도 뜨거운데 목욕한 보람이 없이 더운 것 같아 그냥 대충 머리를 말리고는 드라이기를 화장대 위에 놓고 셔츠를 펄럭펄럭거렸다. 청소는 해야겠고..에어컨을 켜자니 너무 낭비고... "에어컨 안돼." "어?" "너 에어컨 절대 안돼." "이따 청소 다 하면 그때.." "에어컨은 죽어도 안돼." 아무래도 내가 에어컨때문에 죽을뻔한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지 에어컨은 안된다는 그 말이 너무 단호하게 들려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어버렸다. 더운데... "선풍기는 허락해줄게." "싫어..에어컨.." "또 말 안듣지?" "...씨..." 윤두준은 내 앞에 서서 말했고 나는 됐다며 그의 배를 퍽-밀고는 장롱에서 여름용으로 쓰는 얇은 시트를 꺼내 바닥에 놓고 침대위에 있던 이불은 죄다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놔. 내가 할테.." "아픈거 다 알거든요? 지금도 춥지? 저거 이불 좀 덮고 있어." 감기에 단단히 들렸는지 아직도 오들오들 떠는게 보이는데 윤두준은 내 옆으로 와서 내가 하려던 일을 빼앗으려했고 나는 됐다며 거절하고는 침대 위 시트를 싹 벗겨내고 눈에 보이는 먼지는 대충 턴 다음에 시트를 양 귀퉁이에 꽉 맞게 끼워넣고 이불까지 싹 덮은 다음 베갯잎까지 바꿔꼈다. "..너 감기 들면 어떡하냐.." "엉? 왜?" "키스했잖아." "아..뭐..어쩔 수 없지." 나는 베개 두개를 다 바꿔끼고는 훨씬 깔끔해진 침대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돌아서는데 언제 뒤에 있었는지 윤두준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감기 옮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시도때도없이 끌어안고 그러나?" "너 아프면 내가 또 돌봐주면 되지." "..치. 그때 비겁하게 도망가놓고."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밀치고는 바닥에 쭈그려앉아 세탁기에 넣을 이불보들을 정리해서 한아름 안아들고 1층에 있는 부엌 옆에 있는 다용도실로 내려갔다. 가는길 마다 쓰레기가 아주 진을 치고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우나.. "그땐..어쩔 수가 없었어. 양승혜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옆에서 지켜보겠다는 구실로 마땅치않았으니까.." "네 네. 좀 가서 앉아있어. 왜이렇게 쫓아다녀?" "..그냥 아주머니 불러서 치워달라고 할테니까..나랑 있자." "한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왜이렇게 윤두준 답지 않게 칭얼거려?" 나는 세탁기에 있던 언제 넣어놨는지도 모를 쾨쾨한 냄새까지 나는 빨랫감은 다 세탁기 옆으로 내려놓고 그 안에 이불을 구겨넣고 세탁기를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세번 정도는 더 돌려야 될 것 같다. "..너 끌어안고 보고 있을 시간도 모자른데..너 자꾸 이렇게 돌아다니면 시간 줄어들잖아." "금방 끝나. 형 같음 이런 돼지 우리 같은데서 놀고 싶어?" "난 어디라도 상관 없으니까.." "올라가서 누워있어. 안그러면 나 진짜 가버린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윤두준은 더이상 나한테 뭐라고 말도 못하고 계속 내 근처에만 얼쩡대다가 결국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꼭 이렇게 말을 해야 말을 듣지 아주. 나는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단 설거지통에 있는 병들부터 봉지 두개를 갖고와서 분리수거를 했다. 페트병이랑 유리병은 따로따로 골라넣으니까 어느새 커다란 봉지엔 술병들로 가득차버렸다. 정말..이렇게 먹고도 병 안난거 보면..대단하다.윤두준. 그리고 나는 쌀을 일단 불려놨고, 어느정도 불을때까지 기다려야돼서 청소기까지 싹 돌리고, 먼지가 뽀얗게 앉은 테이블이며 tv며 걸레로 빡빡 닦아댔다. 그러고보니까 소파 옆 수납장에는 내가 꼭 챙겨가야만 했던 앨범이 눈에 띄었고 이따 윤두준을 재워놓은다음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앨범 앞에 서서 가만히 있다가 세탁기가 뿅뿅-하고 소리를 내자 이따 챙겨야겠단 생각을 하고선 다시 다용도 실로 들어가 그 이불보를 거실 옆 테라스에다 탈탈 털어서 널고 이번엔 소파 한 귀퉁이에 모아놨던 윤두준이 입고 던져버린 옷을 죄다 빨았다. 요즘은 수트만 입는터라 빨랫감은 온통 셔츠와 정장바지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재킷은 빨면 안될 것 같아 재킷은 따로 세탁소에 보내려고 모아 놓은 다음 한번 더 세탁기를 돌렸다. 정말 쉴새없이 일만하니까 운동장 열바퀴 뛴 것보다 더 힘들고 땀은 더 주룩주룩 비져나왔다. 이럴줄 알았음 씻지 말걸... 나는 냄비에다 아까 불려놨던 쌀을 넣고 물을 많이 한다음 계속 끓여댔다. 죽을 이렇게 쑤는게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밥이 퍼질때까지 끓이다보면 뭐 그게 죽이지 않을까 싶어서 대충 뚜껑을 닫아 놓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옛날엔 반찬들로 꽉 차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건 온통 맥주, 소주로 가득찬 냉장고 뿐이었다. 반찬이라곤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찬을 만들어놓기에는 또 찬거리도 마땅치않아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집에서 싸가지고 와야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아마 그 반찬꾸러미를 갖고 오는건 내가 아니라..우리 누나가 될거다. 곧 있음 나는 여기서 도망치듯 나가버릴거니까.. 아마 자고 일어나면 윤두준의 옆엔 내가 없을거다. 정말..끝이니까. 내가 해줄수 있는건 여기까지였다. 다행히 물처럼 쑤어진 죽을-죽 같지도 않다-쟁반에 놓고 다 된 빨래를 탈탈 털어 다용도 실 구석에 처박아놓았던 행거를 끌고나와 거기에 옷걸이에다 걸어 놓고 잠깐 식게 내버려뒀던 죽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슬며시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윤두준은 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파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프면서 아프지 않은척 괜찮은척.. 나는 죽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둔 뒤 거실로 다시 내려가서 감기약을 갖고 올라갔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을테지만 일단 내가 여기 있는한 병원은 안갈거고.. 이렇게 아픈데 바깥바람 쐬는것도 안좋을 것 같아 어떻게든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침대 옆에 걸터 앉았다. "..무슨 땀을 이렇게.." 나는 화장실에서 수건을 들고나와 축축히 물을 적신 수건을 이마위에 올려줬고 그 차가움에 눈을 뜬 윤두준은 나를 보며 또 웃었다. 저렇게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는데도 웃음이 나오냐 진짜.. "일어날 수 있겠어?" "일..다 했어?" "정신 없는건 알겠는데..집 좀 치우고 살아. 집에선 술밖에 안먹는거 티내? 어떻게 냉장고에 술밖에 없냐.." 윤두준은 힘들게 일어나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잔소리 하는 나를 보다가 볼을 꼬집었다. 하여튼 너무 속상해서 한숨을 절로 쉰 나는 죽이 든 쟁반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먹어. 그리고 약 먹자." "...싫어.." "왜. 이거 이래보여도 맛은 괜찮아. 뭐 아무것도 간도 안해서 싱거울테지만.. 아픈사람한테 맛있는거 줄순 없는거니까. 얼른 먹어 고집부리지말고." "...싫어.." 나는 윤두준한테 바짝 다가가 앉으며 그에게 쥐어줬던 숟가락을 뺏어 아직 뜨거울 죽을 휘휘 젓어 식힌다음 한술 떠서 윤두준의 입에 가져다댔고 윤두준은 먹기 싫은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진짜 안먹을거야?" "..토할거 같애." 원래 독감에 들면 먹는것도 싫어지고 입맛 없어지는건 알지만 그래도 약 먹어야되는데.. 나는 어떡해야될지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으로 직접 넘겨주면 받아먹을 것 같긴한데 좀 물 같아서 다 흐를 것 같고..그렇다고 직접 먹여줘도 먹질 않고.. "나중에..나중에 먹을게." 나는 지금 먹이고 싶었다. 지금 먹이고 약 먹인 다음에 재우고 싶은데.. 저렇게 안먹겠다니 어쩔수가 없어서 그냥 죽 그릇을 옆에 서랍장 위에 올려두고 약이랑 물도 같이 쟁반위에 놨다. "먹은다음에 꼭 약 먹어." 나는 윤두준을 다시 자리에 눕혀주고 수건을 이마위에 올려놔주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싶어서 일어나는데 윤두준은 또 나를 붙잡았다. "어디가." "샤워하게. 너무 더워." "..그냥..여기 있어." 아무래도 내가 갈까봐 불안한모양이다. 윤두준이 깨어있는한 갈 생각은 없는데..일단 나는 너무 끈적거려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윤두준이 감기에 걸려버려서 에어컨도 못트는데.. 찬물로 시원하게 샤워하면 좋을 거 같은데 뭐 이렇게 환자 힘이 센지..놔주질 않는다. 결국 다 포기한 나는 윤두준이 옆으로 자리를 물러주자 거기에 같이 누웠고 윤두준은 옛날처럼 나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나를 본채 누웠다. "반듯이 누워. 수건 떨어져." 내가 다시 수건을 올려놓으려고 하자 수건을 집어 아예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땀흘려서 땀냄새가 나는게 너무 신경쓰여 어깨를 밀었지만 윤두준은 개의치않고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아..더워..좀.." 윤두준은 내가 덥다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내 등을 어루만지며 안았고 나는 다 포기하고 그냥 윤두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등을 안았다. "..나 잠들면..너 갈거지." 정곡에 찔린 나는 아니라고 대답해야되는데 말이 안나왔다. 아직도 나는 거짓말에 너무 서툴렀다. "...이러니까 내가 못자지.." "안갈테니까 푹 자. 자야 낫지. 내일은 병원 꼭 가봐. 정 안되면 링거라도 좀 맞고.." "내일까지 같이 있어준다고 그랬잖아. 왜 약속 안지켜?" "내가 언제. 그냥 내일 병원 가. 죽도 안먹겠다, 뭐도 안하겠다.. 그냥 계속 내 옆에만 있을라고 그러니까 그러잖아." 내 말에 윤두준은 그냥 아무말도 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이 얼마나 뜨거운지 윤두준이 가진 열이 모두 다 나한테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에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체크했고 펄펄 끓는 이마에 난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되겠다. 병원가자." "싫어." "지금 펄펄 끓어!! 안아픈척좀 하지마. 아파서 말할 기운도 없는게 정상이야. 좀!!! 말을 왜이렇게 안들어!!" 이렇게 아픈데 내가 해줄수 있는게 없다는게 속이상해 나도모르게 아픈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질러버렸고 윤두준은 내 손을 다시 잡아 누으라는 눈짓을 했고 속이 답답해 미칠지경이었지만 일단은 하라는대로 했다. "..키스해주면..다 나을거 같은데..너 감기 들면 안되니까.." 콜록거리며 말하는 윤두준의 입을 내가 그냥 막아버렸다. 내가 감기드는게 뭐. 어차피 이젠 아픈것도 이골이 나서 이렇게 아프건 저렇게 아프건 상관 없었다. 그리고 윤두준이 아팠던거 내가 가져가면 그거야말로 다행인거지. 감기는 남한테 주면 낫는다는데.. 마음같아선 내가 다 아프고 싶었다. 이렇게 아픈사람 속수무책으로 두고 보는것보단 그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윤두준은 내가 혀를 밀고 들어오자 아무래도 내가 감기 걸릴게 걱정됐는지 아까처럼 하지 못하고 내 어깨를 밀었지만 나는 아예 윤두준의 몸 위에 올라타서 키스를 퍼부었다. 어쩌면..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일거다. 그동안 윤두준과의 키스가 너무 그리워서, 아니 키스 뿐만이 아니라 그냥 윤두준이라는 자체가 너무 그리워서 나도 미쳐버린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마..안돼.." 윤두준은 내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고 나는 그냥 내가 하고싶은대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에 윤두준도 더이상 밀어내기는 힘들었는지 자세를 바꿔 자기가 내 위에 올라타 입술을 부딪쳤고 본능적으로 윤두준은 내가 입고 있던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러냈다. 하지만 나는 막아서지 않았다. 다만 윤두준의 몸이 축날까 두려웠을뿐. 윤두준은 내 입술에서 턱으로 내려가고 목덜미로 내려가더니 쇄골즈음에서 입술로 할짝였다. 정말 오랜만의 느낌이라 나는 살짝 떨며 윤두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윤두준은 티셔츠에 가려 보이지 않을 위치에 흡-하고 빨아들여버렸다. 정말 따끔따끔해서 놀랐지만 윤두준은 내 가슴팍 언저리에서도 혀를 지분거리다가 또 흡-하고 장난을 치고 또 그러고 또 그랬다. 내가 말리지 않자 윤두준은 점점 과감하게 점점 내려오더니 내 브리프마저 벗겨버렸고 그제서야 윤두준의 몸이 생각난 나는 윤두준의 어깨를 잡았다. "..안돼." "왜." "형 이거하면..쓰러질지도 몰라. 안돼." 내가 하는말에 그냥 웃으며 자기가 입고 있던 옷마저 훌렁 벗어던지더니 단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된 우리는 벌건 대낮에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조명삼아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밝은데서 하는걸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서로가 다 보이니까 민망하고..내가 얼굴이 빨개진걸 보이는건 너무 쪽팔렸고..뭐 어쨌든 싫었다. "..하지말자." "싫어." 윤두준은 내 입을 자기 입술로 막더니 손으로는 나의 그것을 만지기 시작했다. 단번에 반응이 온 나는 살짝 허리를 튕기며 그의 목을 팔로 휘감았고 윤두준은 내 귓볼을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리며 나한테 바짝 붙어있으면서 점점 달아오르는 내 그것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 "사랑해." 윤두준은 사랑한단말을 속삭인뒤 귓바퀴를 살짝 아프게 깨물더니 유두를 살짝 또 깨물고 그 주변을 어루만지다 흡-하고 마크를 남겼다. 그리고는 점점 내려가더니 내 아랫배에서 풉-하고 바람을 불어넣는 장난을 친 윤두준을 고개를 들어 나를 살짝 보더니 이미 자극된 그것을 입에 물어버렸다. 나는 윤두준이 이러는게 제일 싫었다. 정말 너무 싫었다. "하지마!!" 윤두준은 그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도 않은채 자기가 하는것에만 열중했다. 윤두준이 자극을 해주면 해줄수록 점점 나는 흥분했고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을즈음 윤두준은 나와 비슷한 꼴이 된 그것을 내 엉덩이 주변에서 비비더니 손가락을 넣어 자기가 들어갈 자리를 봐두고 있었다. "..흐...아.." 나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와 입술을 질근 깨물었고 계속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휘젓던 윤두준은 다시 그것을 내 엉덩이께에 가져다댔고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주체못하고 내가 흘려버리자 윤두준은 내 양어깨를 꽉 잡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춰줌과 동시에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아...앗..아 잠ㄲ..깐ㅁ.." 내가 시트를 꽉 잡고 있자 윤두준은 내 손을 자기 등에 올려주며 여기 잡으라며 말했고 자칫 잘못하면 할퀴어버릴 것 같아 그냥 시트를 잡아버렸다. 점점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윤두준은 내 목에다 자꾸만 할짝이며 간지럽혔고 아픔이 사그라들고 점점 달리기를 듯한 헐떡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으...하.." 숨이 벅차서, 그리고 자꾸만 아랫배가 간질간질거려 윤두준의 얼굴을 만지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갔고 윤두준은 그런 나에게 싱긋 하는 미소를 보이더니 피스톤을 넣기 시작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점점 더 끝으로 치닫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정말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런거라고 해야하나 윤두준이 허리를 돌릴때마다 아프긴 아팠지만 그에 상응하는 환희가 나에게 찾아들었다. 여태까지 이사람때문에 힘들었던 내가 맞는지,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소리지른 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나는 윤두준의 허리를 양 다리로 끌어안고 계속 당겼다. 이에 윤두준은 내 입술에 입을 맞춰주며 같이 박자를 맞췄고 우리는 점점 더 행복에 젖어들어갔다. "...하..." 결국 시트 위에 우리 둘다 사정을 해버렸고 윤두준은 정말로 녹초가 되어 내 위에 쓰러져버렸다. "..그러니까..내가.." "이따..또.." "또!? 미쳤어.." 윤두준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고 나는 숨도 못쉬겠어서 켁켁대자 침대위로 떨어진 윤두준은 내 코를 손으로 톡-치더니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은 우리의 그것이 마주쳤지만 이제는 그런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더운데 더운것조차도 행복할 지경이었다 지금은.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얼굴에 써있네 양요섭?"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얼굴에 써있는건 어떻고?" 내 말에 소리없이 환하게 웃은 윤두준은 내 얼굴을 손으로 쓱 쓸어주다 내 볼을 감싸안았다. "..그때..때린거 미안. 아직도..그게 안잊혀져. 내가 미친새끼지. 너 때릴데가 어딨다고.." "내가 잘못한거잖아." "근데..너..진짜 잘못한거야. 어디서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해." 윤두준의 말에 나는 그냥 잘못했다는 표현을 애교로 보여주려고 윤두준처럼 윙크를 한뒤 그냥 그의 품에 폭 안겨버렸다. 내 덩치가 윤두준보다는 작아 쏙 들어갔고 윤두준은 또 피식하고 웃더니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아기달래는 것 마냥 나를 토닥여주었다. "너 감기 들면 여기로 와. 돌봐줄게." "됐네요." 내 말에 윤두준은 그럼 감기 한번 왕창 걸려보라며 내 입술에 짓궂게 장난을 쳤고 나는 간지럽다며 발버둥쳤다. 내 웃음소리와 윤두준의 웃음소리가 섞여 방안을 가득 메웠고 나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 행복함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날을 견딜 수 있겠다 싶을정도로. * 오후 7:40. 나는 온 몸이 젖은 솜마냥 무거워짐을 느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름이가 해가 길어서 그런지 어둑어둑하지 않고 방안 전체가 빨간 노을빛을 받아 온통 벌건빛이었다. 나는 그냥 두어번 눈만 떴다감았다하며 정신을 차린뒤 정말 죽은듯이 자고 있는 윤두준을 침대에 앉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많이 아픈지 아직도 이마 군데군데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나는 그걸 손으로 닦아준 뒤 침대에서 일어나 장롱에서 옛날에 갖고왔던 내 옷을 아무거나 주워입고 차근차근 옷을 꺼내 커다란 짐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정말 사계절 옷이 여기 다있었다. 방 안에 있는 옷은 온통 다 내옷이었다. 여기에 있던 윤두준의 옷은 모조리 옷방으로 옮겨갔고. 뭐 어쨌든 바닥에 주저 앉아 하나하나 옷을 개어 가방에 넣는데 아직도 잠들어있는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일어나면 나는 옆에 없을거고 방안도 휑할거다. 그럼 또 나한테 배신감을 느낄거고 나를 찾아올거고 그럼 우린 또 싸울거고.. 지긋지긋한 이 더러운 쳇바퀴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아픈 사람한테 너무 못된 짓 하는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내가 이렇게 강해지지않으면 결국 우리 둘다 주저앉아버릴게 뻔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 가방 하나를 옷으로만 꽉 채우고, 또 다른 가방에 그 옆 장롱에서 옷을 다 꺼내 또 개어넣었다. 거의 이년동안의 생활이 모조리 윤두준의 집에 남아있었다. 아마 내가 나간 뒤에도 이 흔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것 같다. 이런 집에서 나는 없지만 내가 남겨놓은 흔적을보며 나를 그리워할 윤두준이 문득 불쌍해졌다. 그래서 나는 또 나도모르게 툭 떨어지는 눈물을 아무렇지않게 쓱 닦은다음 옷을 다 개어놓고 내가 아까 챙겨왔던 반지와 귀걸이 그리고 휴대폰 고리는 화장대 서랍안에 넣어두고 거기에 있는 내 문제집이나 책들도 다 챙겼다. 이거 들고가는 것도 힘들겠다. 나는 윤두준의 방에 서서 쭉 둘러보았다. 장롱이 텅비고, 화장대에 대충 올려놨던 문제집도 사라지고, 대신 서랍 안엔 나와 같이 했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난 화장실로 들어가 내 칫솔을 챙겨넣었다. 내 생각엔 정말 세상에서 제일 대책없는 말이 미안하단말인 것 같다. 뭐 어떻게 해주지도 않으면서 잘못만 인정하는, 그런 무책임한 말이었다. 미안한짓인줄 알면서도 하는 내가 참 밉고 싫었지만 어쨌든 나는 세상모르고 자는 윤두준에게 다가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준뒤 그의 마른 입술에 뜨거운 내 입술을 갖다댔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는건 분명 또 찾아와 나에게 뭐라고 할 윤두준이 눈에 선했기 때문에 장담은 못하지만 내가 내 진심을 담아 하는 키스는 이게 마지막일거란 뜻이었다. 앞으론 하고싶어도..안되는거니까. 나는 빵빵하게 부푼 가방을 양손에 짊어지고 소리가 나지 않게 방에서 나와 아까 가져가려고 생각했던 옛날에 윤두준과 나눠가졌던 앨범을 챙겼다. 그리고 그 옆에도 내가 남겨둔 문제집이 있어 그것마저 싹 챙기니까 왠지 집이 휑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부엌으로 들어가 나만 쓰던 머그컵도 챙기자 정말 이 집에서 내가 있었단 흔적은 싹 사라져버렸다. 아마..참 많이 서운하고 속상하고 미울거다. 아프다고 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모진 짓을 할정도로..나도 참 내가 나빴지만 골백번 미안하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게 바로 현실이니까 나는 양손 가득 무겁게 가방을 든 다음 앞으로 다신 못올 집을 내 눈에 되새겼다. 눈에도 새기고 머리에도, 마음에도 새겼다. 분명 많이 그리워질거다. 오늘이 뼈아프게 그리워질거다. 나는 삐빅-하는 소리와 함께 문 밖으로 나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다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김태경에게 온 문자도 그냥 씹어버리고 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누나. 아 이거 친구 핸드폰. 아까 윤두준..그 사람네 집 갔었거든? 그 친구가 나랑 같이 수업 받았던 앤데 궁금하다고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갔었는데.. 많이 아파보이더라고. 근데 딱히 돌봐줄 사람도 없는거 같아서..나는 그냥 나왔는데 좀 걱정이 돼서.. 그리고 아까 친구가 하는말이..냉장고에 먹을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소릴 들었거든? 집에서 밑반찬 같은것 좀.. 싸갖고가면 그 사람이 되게 누나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아 집 비밀번호는 그사람 생일이라고 하드라. 아 나는 친구랑 잠깐 어디 좀 갔다가 집에 가려고. 아..고맙긴. 아니야. 어 끊어." 윤두준이 일어나면 그 자리엔 내가 아닌 우리 누나가 있을거다. 우리 누나는 나보다 요리도 훨씬 잘하고 싹싹하니까 어떻게든 윤두준이 약을 먹을 수 있게끔 할 사람이니까 안심이 되었다. 딱 누나랑 전화를 끊으니까 온 몸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에 지나가던 사람이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봤지만 나는 괜찮다며 말한 뒤 한동안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윤두준한테 감기가 옮아버린 것 같다. 앞이 너무 캄캄하고 어지러웠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정말 어떤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도 기억이 안날만큼 힘들게 와서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버렸고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기광] "어." 「야. 니네 과 선배중에 문종호라는 사람 있냐?」 "...아..어. 왜?" 「그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서 니 전화번호 물어봤어. MT때문에 연락했는데 니가 연락이 안된다고.. 그래서 번호 알려줬는데..나 잘못한거냐?」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이마에 팔을 얹은다음 다 잠겨버린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푼 뒤 대답했다. "..아. 아니. 내가 학교 사람들한테 번호 알려줄 생각을 못해서..잘했다." 「아..근데 너 왜이렇게 목소리 안좋냐. 감기걸렸어?」 "아니..그냥..몸이 좀.." 「몸 좀 잘 챙겨라. 애인잃은 놈인거 티내고 다니냐? 그럼 쉬어라. 아마 좀 있음 그 사람한테 전화갈거다. 끊는다.」 기광이와의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목말라 죽을 것같은걸 참으면서 그냥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감기에 된통 걸려버린거 같다. 속도 울렁울렁 거리는게..죽을 것 같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기광이의 말대로 그 선밴지 모르는 번호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양요섭 맞아? 나 종호선밴데..너 번호 바꿨으면 말을 해줘야지 새끼야. 너랑 같이 다니던 친구녀석 과 다니는 친구한테 물어서 물어서 전화번호 캤다. 그 친구한테 깜빡잊고 미안하단말 못했는데 좀 전해주고.. 내가 전화한게 MT 때문이거든? 내일 모레 속초." "..아..죄송한데요..제가 몸이 너무 안좋아서.." 「야. 니가 빠지면 어떡해. 안돼 무조건 와. 이번에 4학년 선배들까지 쫙 오는 큰 MT야. 너 빠지면 미운털 박힐수도 있다? 그러니깐 알아서 참석하지 웬만하면?」 지금 내가 MT갈 때가 아니다. 지금 몸도 마음도 아파죽겠는데 무슨..MT야. "아..제가 감기에 걸려서..너무 아파서.." 「술같은거 안먹일테니까 와. 시골이니깐 여기서 좀 쉬면 낫지 않겠냐? 산도 보고 계곡도 보고. 일단 왔다가 너 정 안되겠다 싶으면 보내줄테니까 일단 참석해. 내일모레 아침 7시까지 서울역으로 와.」 "아 선배.." 「끊는다. 무조건 와라. 2박 3일이니까 짐은 그렇게 많이 안꾸려와도 되고.」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너무 피곤해서 샤워를 해야되는데도 그냥 침대에 자리잡고 누워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정말. #42. "여보세요? 아..나 요섭이형인데. 내가 내일 일이 좀 있어서..금요일날 하는 수업 오늘로 땡기면 안될까?" 「숙제 다 해놨으니까 상관없어요. 언제오실건데요?」 "맨날 가는 시간에 갈게! 고마워!! 앞으로 이런일 없도록 할게..학교에서 MT가는날이 딱 내일이라서...미안.." 「괜찮아요! 그럼 이따 뵐게요.」 나는 또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일어나서 일어나자마자 동운이한테 전화해서 과외시간을 바꾸고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어제 그냥 씻고잘걸 그랬나..잠결에도 찝찝함이 느껴져서 아주 혼났다. 나는 머리까지 싹 감고 뭔 연락을 그렇게 해댔는지 잔뜩 와있는 김태경에게 전화를 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뒤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자 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누나와 마주쳐 나는 싱긋 웃었다. "먹다 남은 밥 있어요? 저 그것좀.." 설거지를 하시던 아주머니께 죄송한듯 말하고 있는데 마침 달칵-하고 연결된 전화에 나는 대답했다. "아. 어. 왜전화했어?" 「뭔놈의 연락이 그렇게 안되냐. 그렇게 연락 안받을거면 그냥 핸드폰을 버려.」 "또 왜..뭐 급한일 있었어?"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내 앞에 순두부찌개와 시금치나물, 김치, 김 등등 맛있는 반찬을 쭉 차려주셨고 나는 꾸벅 인사한 뒤 아직도 물을 마시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시선이 냉랭한게...뭔 일 있었나... 「어제 뭐했어? 하루종일.」 "..어제? 친구랑..어디 좀 갔다왔어. 왜." 「..됐고. 너 내일 뭐해?」 "내일 MT가는데? 2박3일로." 누나는 물을 마시고 있는건지 컵을 입술에만 갖다대놓고는 나를 계속 쳐다봤다. 왜저러는거야 대체. 「진짜!? 어디로? 누구누구 가는데? 윤두준도 가냐?」 "..그사람이 미쳤냐..할일없이 오게." 「야. 같은 과 아니냐? 그럼 오는거 아닌가? 너 온다 그럼 하던일 다 제쳐두고 갈텐데...?」 나는 윤두준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당연히 안올거라고만 생각했는데..윤두준은 과에서도 인기가 많은 사람이니까 분명 불렀을거고 내가 가느냐 안가느냐에 따라 윤두준도 올지 말지가 결정되는건데..왠지 내가 가면 윤두준도 올 것 같았다. 그럼 그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기광이고 태경이고 친한 사람도 별로 없는데 괜히 더 난처해질 것 같고 내가 어제 저지른 일이 있었기때문에 어떻게든 따지려고 들테고..그럼 또 싸우고 얼굴 붉히고..지긋지긋했다 진짜. "...몰라. 그냥 가지말까.." 「..안..갔으면..좋겠는데.」 "아 모르겠다. 야 끊어. 밥먹어야돼." 나는 아무래도 윤두준한테서 감기를 옮아온건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추워서 얼른 밥 먹고 약을 먹어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MT고 뭐고..일단은 다 모르겠고, 밥부터 먹어야지. "..뭐..할말있어 나한테?" 밥을 한술 뜨고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있는 찌개도 한술 떠서 먹는데 정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평소에 보인적 없던 무표정으로 나를 그냥 바라 보고만 있었다. "너 나한테 속인거 하나도 없지?" "뭐? 뜬금없이 그게 무슨.." "정말..나한테 속인거 하나도 없지? 나 너 믿어도 되는거 맞지?"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했던가..그냥 나는 너무 찔렸다. 그렇지만 속인건 없었다. 그저 말을 안하고 숨긴게 있을뿐.. 윤두준과 과외를 했던 사실도 맞는거고 사귀었단건 숨긴거지만 뭐 어쨌든. "응." 내가 대답하자 누나는 몇초동안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냥 부엌에서 나가버렸고 나는 마음한켠이 좀 찔렸지만 내가 윤두준의 집을 쭉 둘러봤을때 내 흔적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뭐 알았을리도 없고... 만약 그런 사이였다는걸 알았다면 아무리 누나여도 저렇게 태연할 순 없었을거다. 성인군자가 아닌이상. 그래서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보세요? 형, 저 요섭인데요." 약간 이상해진 누나도 누나였지만, 나는 김태경의 말이 너무 신경쓰였다. 진짜 윤두준이 오려나? 아닐텐데... 「어. 왜. 안올라고?」 "아뇨..뭐 물어볼게 있어서..혹시..윤두준..선배도 와요?" 「계속 전화 안받아서 문자 남겼는데..잘 모르겠다. 왜? 아, 니가 부르면 되겠네!! 두준선배랑은 니가 더 친하잖아?」 "..아..아니요. 아니에요. 끊을게요." 휴..뭐 어떻게 되는거야. 에이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 한숟갈까지 밥을 싹싹 긁어모아 먹은다음 감기약을 찾아 먹었다. 이상태로 내일 MT에 갔다간..병은 된통 걸려서 올 것 같은데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 과외에서 공부할 교재들을 가방에 챙기고 커다란 백팩에다가 2박 3일 여행에 맞게 짐을 꾸렸다. 그러고보니 내가 윤두준 집에서 챙겨갖고 온 짐들이 방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었고 나는 그 앞에 가서 쭈그려 앉은다음 하나씩 하나씩 꺼냈다. 너무 대충 넣었는지 옷이 죄다 구겨져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건 모조리 세탁기행이었고 나머진 다 텅 빈 장롱에다 가서 걸어놓고 개어놓았다. 그리고 그 집에서 챙겨온, 내 가장 소중한 추억이 담긴 앨범을 방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 펼쳐보았다. 사진 속 나를 본 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 모습이 정말 너무 행복해보였기 때문에, 윤두준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나 너무 기뻤기 때문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툭- 툭- 사진을 덮어놓은 비닐 위에 떨어지는 내 눈물에 혹시라도 사진이 상할까봐 서둘러 닦아내며 결국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 그래도 사진을 많이 찍어놓은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누군가 그랬었다. 돌이켜 볼 추억이 없는 사람만큼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에겐 되새기고 추억할 기억이 너무 많았기때문에 이정도의 고통쯤은 잘 이겨낼 수 있을거다. 분명. * "양요섭!! 너도 얼른 와서 껴!!" 선배 말이라 어쩔 수 없이 MT에 오긴 했다만..산속에 있어서 추운건 서울보다 더 심해갖고 안좋은 몸이 더 안좋아져버렸다. 그래서 도착해서 바로 계곡으로 들어가는 선배와 동기들 무리에서도 빠져 방에 있었건만 한참을 놀다 들어와서는 지들끼리 밥해먹더니 지금은 이렇게 거실 한복판에다 맥주 열병 소주 열병 갖다놓고 술판을 벌여놨다. "저 몸 안좋아서.." "그래서 계곡 들어가는것도 빼줬잖아!! 얼른 와!!!" 그냥 소파에 앉아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는데 계속 이불 갖다 치워버리고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 열댓명 모여있는 무리에 낄 수 밖에 없었다. "게임 하는데, 진 사람 술 원샷." 나는 원래 이런 게임을 한다는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이렇게 우르르 뭔가를 한다는 것도 별로 즐겁진 않아서 삼육구 게임으로 일단 시작을 하긴 했다. 그냥 별거 아닌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떤 애가 걸려 술을 먹자 다들 환호가 벽을 찌를 정도였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는시간. 자꾸만 으슬으슬 몸이 떨려오는게 여기서 몇판만 한 다음에 은근슬쩍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아싸!!! 양요섭 당첨!!!!!" "왜. 뭔데, 뭔데요 이게?" "숫자 31 걸리는 사람이 지는거야. 효승이가 30했으니깐 니가 걸린거지. 자 시원하게 원샷!!!" 선배가 소주잔에 찰랑찰랑 거릴정도로 술을 가득 따라주었고 맥주는 그럭저럭 먹어도 소주는 제대로 못마시겠어서 살짝 머뭇머뭇 거렸지만 양요섭!! 양요섭!! 이렇게 사람들이 외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원샷을 해야만했다. "..으.." 입안 가득 퍼지는 쓴맛과 코로 뿜어져나오는 알콜향에 정신까지 아찔해져서 앞에 놓여있는 새우깡을 한움큼 집어 입에 털어넣었고 내가 술을 먹은 후로 애들은 점점 달아올랐다. 무슨 게임에 저렇게 목숨을 거는건지. 연속으로 마시는 애도 나왔고 일부러 목표를 세워서 골탕을 먹는 나같은 애들도 있었다. 나는 게임 시작 10분만에 벌써 소주만 3잔을 들이켰고 진짜 울렁울렁거려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대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딩동- 딩동- 또 내가 걸릴 차례에 나는 두근두근 대며 있는데 마침 벨이 울렸고 아..아까비..하면서 종호선배가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어!? 선배!!!! 온다는 연락도 없이?" 나는 누가 왔나 고개를 빼꼼히 내빼는데 벽때문에 안보여서 그냥 포기하고 어떻게든 이번판은 무효라며 술을 먹지 않겠단 내 의사를 아주 강력하게 내비췄다. "이번판 무효!! 종호형이 중간에 나간거니까!!!" "야. 안나갔어도 넌 무조건 걸리는거야 임마. 무조건 원샷. 들어간다 들어간다 원~샷!" "아 진짜 그런게 어딨어요!!! 저 진짜 연속으로 세잔 먹었어요! 다들 나만 골탕 먹일라고.. 아 진짜 못먹어요 더이상!!!" "그런게 어딨어!! 자. 양요섭!!! 잔 받으시고!!! 그럼 내가 봐준다 까짓거. 반잔!!!" 화끈화끈 거리는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볼을 손으로 감쌌고, 오른손엔 이미 소주잔이 들려있었다. 분명 저기 저렇게 막 나동그라져다니는 빈술병들 중에서 내가 한병은 먹어치웠을거다. 우웩. "못 먹겠다는 애한테 뭐하냐 김상호?" 나는 너무 놀라서 술이 담긴 술잔을 떨어뜨렸고 멍하니 동그랗게 모여있는 무리들 근처에 서있는 윤두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술에 취해서 진짠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자꾸만 어릿어릿해서 나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다시 떠 봐도 윤두준은 그자리에 있었다. "...아..게임에서.." "이딴거 하지 말라고 선배들이 누누이 말했을텐데? 쟤보다 고작 한 학번 높은주제에 위세부리냐? 어? 그래?" "아..선배..그게 아니라.." "앞으로 한번만 더 술 억지로 먹이는거 내 눈에 띄면 학회장한테 말한다. 그럼 니네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리고 너. 너는 잠깐 나가서 쉬고 들어와." 그때 그렇게 다 죽어가는 것 처럼 아프더니 살도 쫙 빠진게 얼굴선이 더 날렵해져서 나타난 윤두준에 나는 그냥 눈만 껌뻑껌뻑 거리면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사실 윤두준은 과에선 꽤 영향력이 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 아들이라는 그런 지위때문에도 그랬고, 공부도 과수석은 놓치지 않을정도로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윤두준은 그의 선배도 후배도 다 잘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불의에 어긋나는건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면 아까처럼 저렇게 정색을 하면서 사람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그런 그를 유일하게 막 대할수도 있고, 끔찍하리만치 상처도 줄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남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술병만 보는 와중에도 나는 그냥 윤두준을 올려다 보았다. "안들려? 나가서 쉬고 들어오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엄청나게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문을 열고 발코니에 섰다. 여기는 우리 과 애들이 통째로 빌려버려서 다른 과 애들도 없었고 또 그렇게 큰 곳도 아니라 방이 4개 정도 있는 작은 빌라라고 생각하면 됐다. 문을 열고 바로 나가면 마치 복도식 아파트처럼 나무로 된 살이 있고 좁은 복도가 있었다. 아마 겨울에는 엄청나게 추울 것 같다. 복도엔 창문도 뭣도 없었으니까. 뭐 어쨌든 지금은 여름이고,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나는 펜션 발코니에다 팔을 올린다음 바람을 만끽했다. 그렇잖아도 몸도 안좋은데 취해버려서 정신도 없었는데 서울과는 다른 바람이 불길래 기분도 좀 상쾌해진 것 같아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야. 좀 어떻게 해봐." 나는 몸을 ㄱ자로 숙이고 있었는데 내 등을 툭 치며 다가온 종호 선배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에 나는 왜요? 라는 표정으로 물었고 종호선배는 난감한지 살짝 열어둔 현관문을 슬쩍 쳐다보며 속삭였다. "분위기 장난아니야. 상호새끼..지금 두준선배한테 장난아니게 깨지고 있어. 좀 말려봐 어떡하냐." "왜 깨져요?" "왜는 무슨. 너 술 억지로 먹이게 했다고. 그냥 조곤조곤하게 말하는데 두준선배가 말하는게 어디 그러냐? 아 좀 괜찮다고 말려봐. 너 말고는 말릴사람 아무도 없어. 아 왜 이 야밤에 와서는..." "좀 하다가 말겠죠 뭐." "...아 진짜..그럴 상황이 아니라니까. 너 여기서 좀만 있다가 들어와라. 정신 좀 챙기고." 종호선배는 그대로 또 들어가버렸고 나는 아직도 어지러워서, 또 속도 울렁거려서 계속 거기에 있었다. 바람 맞으니까 정신도 들고..몸은 또 왜이렇게 떨리는건지..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에서 물을 마셨다. "쟤 얼마나 마셨냐?" "...한..열잔...." "...소주 한병도 넘게 먹였네? 누가 먹였어." 나는 찬물이 가득 담긴 물컵을 든채 여전히 그자리에 서있는 윤두준과 쥐죽은듯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선배와 동기들을 빤히 바라봤다. 하여튼 분위기 망치는데 뭐 있다. "누가 먹인게 어딨어요. 내가 먹은거지. 게임에서 진거니까 먹은거에요. 원래 이런데 오면 다 그러고 놀잖아요. 한번도 이렇게 안놀아본척 왜그래요 갑자기?"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고, 그들 눈엔 내가 무슨 구세주로 보이는지 아무렇지 않게 윤두준을 지나쳐 아까까지 계속 앉아있었던 자리로 들어가 앉은다음 물을 마셨다. "..양.." "됐고. 뭣들해요 게임 안해요? 진짜 아까 그건 무효에요. 저 그리고 진짜 술 못먹어요. 토할것 같아." 내 말에도 아무도 입을 열 생각도 안했다. 아마 윤두준 때문이겠지. "선배도 게임 같이 하실래요? 자 이번 목표는 윤두준!!!!" 내가 아무래도 술이 잔뜩 취해서 이러는건지 내가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어 굳이 내 옆에 윤두준을 앉혔고 윤두준은 또 내가 그러니까 못이기는척 자리에 앉아 무리에 합류했다. "종호형. 뭐해요? 분위기 안띄울거에요?" "..아...아 그래. 어...뭐부터 하지.." "요섭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랜덤 게임!! 일이삼!" 술 먹으면 기분이 원래 이렇게 좋아지나? 나도 모르게 기분이 업 돼서 베스킨라빈스 31 게임을 하자며 123을 외쳤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45라고 말했다. 윤두준이 이렇게 게임에 참여하자 선배들도 슬슬 눈치를 보다가 게임에 발동을 걸었다. 또 또 내 옆에서 숫자의 마지막이 다가왔고... "30!!" "아..또야!?!?!?!? 선배들은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래요!? 진짜..씨.." 또 내가 걸려버렸다. 맨날 나만 걸려 맨날. 나는 소주잔을 들어 옆에 있는 선배한테 술을 따라달라고 했고 선배들은 또 눈치를 살폈다. "강요한거 아니고 내가 먹겠다고 한거잖아요. 술 따라줘요. 대신 조금만!" 나는 잔의 반정도만 담긴 술을 먹으려고 입에 가져다대는데 윤두준이 내 잔을 손에서 뺏어들어 지가 먹어버렸다. "오..흑기사?" "아니죠! 내가 먹을라고 그런건데 뺏어간거잖아요!!" 내 말에 뭐 다들 뭐라고 할 수는 없어서 31게임을 한번 더 했다. 이번엔 다른 누군가가 걸렸다. "자! 게임은 그만하고!! 엠티의 꽃!!!!진실게임하자!! 후오~~~" 종호선배는 나동그라져있는 술병들을 저쪽으로 치우더니 중간에 소주병 하나를 뉘여놨다. "자..그럼 돌립니다..일단 맨처음 질문은 내가 한다!! 그다음부턴 걸리고 대답한사람이 질문하는걸로!" 딱 나를 염두에 두고 돌린것처럼 병주둥이가 정확히 날 가리켰고 선배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박수까지 짝짝 쳐대며 종호선배가 나한테 뭘 물어볼지 궁금한 눈빛을 하고선 죄다 선배에게 시선을 꽂았다. "...음...아!! 지금 애인 있어?" "아 진짜!!! 형!! 그렇게 짧게 하면 어떡해요!!! 하여튼..." 다들 나한테 궁금한게 많았는지 종호선배의 그 맥이 놓이는 허탈한 질문에 다들 안주 껍데기를 던져가며 비난했고 나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없어요." "어?! 있는거 아니었어!?!?!??!" "진실게임이잖아요. 진짜 없어요." 나는 새우깡을 집어먹으며 옆에 앉은 윤두준을 바라보았다. 뭐 화난 표정이라던가 나를 노려본다거나 그럴줄 알았는데 웬일로 되게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제 정말 마음 접은건가....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새우깡만 마저 씹었다. "자 그러면...이제 니가 질문해." 소주병은 어떤 누군가에게 향했고 나는 그냥 진실게임의 단골 질문중 하나 선택했다. "애인 있어요?" "있어." 있다는 말에 또 다들 환호하면서 즐거워했고 나만 빼고 점점 흥분하는 것 같았다. 뭐 이런게 별것도 아닌데 다들 애들마냥 왜 그러는건지... "...자.....제발..제발....와하!!! 양요섭!!!!!" 종호선배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박수까지 쳐대며 기뻐했다. 내가 걸린게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나는 그 행동이 웃겨서 종호선배를 웃으면서 쳐다봤고 아까 걸렸던 그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너 질문 똑바로 해라. 최대한 많은걸 얻어낼수 있는 질문으로." "확실히 사귀었던 적은 있는걸로 아는데...그러면..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다들 뭘 바라는건지 그 질문도 약했다며 아쉬워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이다만 마시면서 생각했다. 어떤 사람? 글쎄. "안만날건데요. 사귀었다 헤어지는 그런 드러운짓 더 못해요. 한번 했음 됐지 뭘 또해요." "대박 힘들게 헤어졌나보다? 아..나 번외 질문 하나만..." "하세요." "니가 찬거야? 아님 차인거야? 헤어져서 후회는 없었어? 그사람 생각 안나?" 질문이 완전 고급스럽다며 자축 박수를 치는 종호선배를 웃으며 바라보다 눈을 살짝 윤두준으로 돌렸다. 그는 말없이 자작하며 소주를 마셔댔고 나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답했다. "엄연히 말하면 내가 찬거고..내가 찼는데 후회를 어떻게 해요. 후회해도 할 수 없는거고..생각이야..많이 나죠. 하루종일. 매일매일. 근데 뭐..어떡하겠어요. 받아들여야지." 나는 술을 먹지 않으려 했는데 이런 씁쓸한 말을 하니까 술이 더 땡겼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덜 독한 맥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쭉 마셨고 나와 윤두준 빼고는 다들 진실게임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두구두구두구두구.....어?" 종호선배는 한껏 들뜬 얼굴로 소주병을 또 돌렸는데 주둥이는 묘하게 윤두준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두준이 이 자리에 있긴 한데..질문을 해야되나 말아야되나를 고민하는지 어차피 바로 전에 걸린 사람이 나였으니까 질문권은 나한테 있었다. "애인 있죠?" 나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물어봤다. "....있는것 같은데 없대."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잠깐 생각하다가 핏-하고 웃었다. 나와 윤두준만이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못알아들었는지 무슨말이냐며 다시 물어보지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윤두준만 다들 바라보았다. "그러면 포기하세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인력으로 안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냥 그런것들 중 하나려니 생각하고..." "속편해서 좋겠다." "좋죠. 세상에서 제일 좋은게 속편하게 잘 사는 놈이라잖아요. 잘 살면 되는거 아니에요? 나는 너보다 잘산다. 나는 아프지도....않고, 니가 나 버리고 갔으니까 너는 매일매일 불행해라 빌면서 본인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되잖아요? 여우같은 마누라 두고 토끼같은 자식 데리고 살면..그게 행복 아니에요?" "남들이 말하는 행복이겠지 니가 말하는건." "결국 남들이 인정하는 행복이 행복이에요. 남들이 인정안하는 행복을 진정 행복이라고 말 할수 있겠어요?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제대로 드러내보일수도 없으면서 둘만 행복한거..그거 결코 오래 못가요. 겪어보심 알겠지만요." "겪어본것 처럼 말하네." 우리 둘 사이의 대화에서 그 누구도 끼어들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우리 둘만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대답이었으니까. 나는 싸해진 분위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양 볼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아이고. 덥다. 저 빼고 열심히 노세요! 다들. 저는 좀 피곤해서.." "양요섭 너 빠지게!? 너 없음 뭔 재미로 놀아!!" "치. 다들 나만 골탕먹이려고 그러면서..안해요!!!!" 나는 삐진척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갔고 계단을 내려가 잔디가 있는 풀밭을 걸었다. 바로 앞에 있는 차는 윤두준이 타고 온 차인 것 같아 그냥 그것만 빤히 보다가 풀밭에 앉아버렸다. 머리는 어질어질한데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옆에선 매미 울음소리가 맴맴 울려들렸다. 오늘이 며칠이드라..얼마전에 윤두준 생일인것 까진 아는데..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날인지도 모르면서 사는건 여전했다. 아마 평소의 나였다면 아까같은 상황에서 몸둘바를 몰랐을거다. 근데 술은 사람한테 용기를 주는 힘이 있는지 윤두준과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눈빛하나 변하지 않고. "...아!!!" 엄청 강력한 힘이 내 손목을 잡아왔고 나는 단번에 풀밭에서 일어나 그 사람이 날 잡아 끄는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펜션이 있는 그 뒷골목쪽으로 이끌렸다. 거기는 으슥해서 유난히 사람들의 발걸음도 없는 것 같았는데 저 길 끝엔 뭐가 있는건지 그냥 까마득하게 어두울 뿐이었다. 펜션에서 나오는 빛으로만 희미하게 사람 얼굴정도만 가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양요섭." 자기 앞에다 나를 놓고 놔준 윤두준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없이 그냥 바라만 보았다. "어디까지 잔인해질건데?" "내가 뭐?" "...집에 있는 짐..왜 다 갖고 갔어?" "거기서 살것도 아닌데 거기에 내 짐 있는게 더 웃기잖아. 당연한거 아니야? 미리 못갖고 간건 미안." 내가 생각해도 한대 후려치고 싶을만큼 얄미웠다 정말. 어쩜 사람이 이럴수가 있냐. 진짜..... "...나..그날 아팠어. 아픈데..양승혜 니가 불렀어?" "어." "왜, 죄책감이라도 느껴졌어? 아픈사람 혼자 집에 냅두고. 그렇게 안가겠다고 해놓고선 집에 있는 짐까지 싹 빼고 나니까 마음에 찔렸어? 어? 그래!?" "아니. 내가 왜 찔려? 난 당연히 내가 해야될 일을 한것 뿐이잖아? 누나를 부른건 형한테 똑바로 알려주고 싶었어. 앞으로 형이 아프면 그 옆엔 내가 아니라 우리 누나가 있는거라고.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어. 아직도 파악 못한 것 같길래." 아무래도 술에 취했나보다. 어떻게 이런말이 내 입에서 술술술 잘도 나올 수 있는거지? 참...못됐다. "...너는 혼자 그렇게 다 정리했냐?" "어." "그래? 그럼 이것도 필요없겠다?" 나는 순간 목에서 찌릿한 아픔이 느껴짐과 동시에 휑하니 비어진 듯한 느낌도 받았다. 나는 내 손으로 내 목을 더듬어봤고 그 자리엔 내가 늘 매고 있었던 그 목걸이가 없었다. 있어야 되는데 없었다. 이것만큼은 있어야되는데..없었다. 내가 예전에 그랬던것처럼 그 목걸이는 다른 사람 손에 들려있었다. "내놔!!!!!" "..내껀 그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너는 뻔뻔하게 이거 매달고 있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윤두준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골목길 안으로 목걸이를 던져버렸고 나는 그를 원망할 틈도 없이 어디로 갔는지 잘 보지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로 손바닥을 더듬더듬 거리면서 목걸이를 찾았다. 그래도 이건 있어야했다. 언젠가는 이 목걸이 또한 내 목에서 내 스스로가 풀어낼 생각이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내 스스로 마음이 단념이 되면 풀겠다는 뜻이었지 이렇게 타의에 의해 내 목걸이가 없어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절대. 어느새 또 내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안그래도 보이지도 않는데, 더 뿌옇게 보였다. 나는 흙과 모래가 잔뜩 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빗자루 마냥 쓸어대는 바람에 손에 흙모래가 잔뜩 묻었고 가끔 따끔거리는게 아무래도 양 손바닥이 제대로 까진 것 같다.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양요섭!!!!!" 힘껏 던졌으니까 멀리 갔으려나? 그래도 혹시라도 이근처에 떨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멀리 가지도 못하고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계속 더듬더듬 거렸다. 핸드폰이라도 갖고 왔음 비춰서 볼텐데... "양요섭!!! 좀!!!!" 윤두준은 내 팔을 잡고 땅바닥에서 일으켰고 나는 놓으라며 그 손을 뿌리친 다음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데 또 다시 잡아 세웠다. 이번엔 양팔로 내가 다시 앉지 못하도록 꽉 잡았다. "그게 어디로 떨어진줄 알고 무작정 찾아 지금!!!!!!!" 나는 그 팔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다시 주저 앉아서 더듬더듬 거렸다. 눈물은 쉴새없이 차오르고 뭐 손에 잡히는건 없고..이러다 행여나 못찾게 되는건 아닐까 불안하고 무서워서 나는 이렇게 찾는걸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혹시나 남의 손에 들어갈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너 진짜 나 미치는 꼴 볼래!!!!!!!" 윤두준은 나를 잡아일으켜 그대로 꽉 끌어안았고 나는 벗어나려고했지만 워낙 센 힘으로 안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한시가 급한데, 그거 찾아야되는데.. 그래도 형 목걸이처럼 차가 와서 밟고 지나갈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정말...다행이었다. "..이러면서!! 이런식으로 할거면서! 그까짓 목걸이에. 내 사진 있는 그 목걸이에 정신나가서 이렇게 미친새끼처럼 찾아헤맬거면서!!!!그럴거면서..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헤어지자고 할거면 아무렇지 않은척 연기라도 하던가!!!!!" "...놔. 찾아야돼..나 그거...있어야돼." 나는 정말 윤두준의 말대로 반 미친 사람처럼 그의 어깨를 미는데 손바닥이 윤두준의 옷에 닿자마자 엄청나게 쓰라렸다. 이에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소리를 내자 윤두준은 내 손목을 꽉 잡아 손바닥을 뒤집어봤다. 나도 잘은 안보였지만 이정도는 알 수 있었다. 흙 반, 피 반. 피가 아주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엄청나게 찢어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들어갔는지 엄청 따끔거리면서 아팠다. "..양요섭...진짜...너..." 윤두준은 내 상처를 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까짓 아픈건 괜찮으니까 목걸이나 내 손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정말..그러면 좋겠다. 아직 그 목걸이를 잃어버려도 괜찮을만한 정도는 아닌데..진짜 아직은 안되는데. "...핸드폰..있어? 잠깐만 빌려줘. 안보여서 못찾겠어. 저쪽에 떨어졌을..." "그거 갖다가 뭐하려고? 내앞에선 필요없다고, 다 소용없는거라고 얘기해놓고 혼자있을 땐 목걸이나 끌어안고 살려고? 내껀 그렇게 다신 쓸수도 없게 망가뜨려놓고..너는 니 손바닥 다 까지는줄도 모르고 그렇게 찾아헤매!?" "..소중한거야. 함부로 뺏..." "소중? 너한테만 소중했어!? 너한테 소중한만큼 나한테도 그랬어!!" 윤두준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고 나는 윤두준이랑 이렇게 말싸움을 할 기운도 없었다. 안그래도 어질어질한데..근데 자꾸만 흐르는 눈물때문에 쪽팔려서 우는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꽉 깨물며 놓으라고 몸을 비틀었지만 그 순간 내 눈 앞에서 뭔가 반짝였다. "...안던졌어." "내놔!!!!!!" "양요섭. 안되는거 가지고 발악하지마. 안괜찮은데 괜찮은척, 사랑하는데 안사랑하는척..그딴거 하지마. 하나도 안어울려." "내놔." 윤두준은 그대로 내 꽉 깨문 입술에 입을 맞췄고, 더이상 윤두준을 허락하고 싶진 않아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열지 않겠단 생각으로 더욱 꽉 깨물자 어느새 입안에서도 천천히 피맛이 퍼져왔고 이런 피맛은 언제 느껴도 토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놓지 않고 계속 꽉 깨물었다. 윤두준이 내 입술 근처에 혀를 갖다대어 틈을 찾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꽉 깨물고 열어주질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피맛은 더욱 짙어지고 마음 같아선 이 피를 뱉어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입을 열어야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 다행인건.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거. 그거 하나는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방심하고 있는 순간, 언제 느껴도 너무 그리웠던 느낌이라, 꿈을 꿀만큼 너무 많이 그리워했던거라 아닌걸 알았지만 순간 입술이 살짝 열렸고 윤두준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내 입안을 촉촉히 적시고 있는 피를 내 대신 자기가 다 핥아먹었다. 비릿할텐데도 윤두준은 계속 찢긴 내 입술을 핥으며 피가 나오지 않을때까지 계속했고 어느정도 멈추자 내 입안으로 치고 들어와 정신이 어지러울정도로 헤집어놓았다. 나는 어떻게든 입술을 떼려고 물러났지만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건지, 내 허리를 완벽하게 끌어안은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윤두준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혀를 꽉 깨물었고, 이젠 내 피가 아닌 윤두준의 피가 내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지만, 윤두준은 아프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내 혀와 엉켜댔다. 하지 않으려는 나와, 어떻게든 하려는 윤두준과의 사이에서 실랑이가 있고 한참을 씨름한 끝에 내가 먼저 포기했다. 결국 내가 얌전하게 가만히 있자 윤두준은 내 입술을 먹어치울듯 내 입가 근처에 타액을 잔뜩 묻혀놓으며 계속해서 핥았고 내가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갖다대자 윤두준은 좀 더 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아직도 피맛이 나는걸 보니, 여전히 윤두준의 혀에서 피가나는것 같았고 나는 너무 미안해져서, 어떻게 해줄수 있는거라곤 윤두준의 혀놀림에 맞춰주는 거 밖엔 없어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숨을 쉬어가며 조절했고 윤두준은 내 입술을 물고서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윤두준의 몸에 좀 밀려고 손바닥을 그의 어깨에 대는데 또 순간 머리카락까지 쭈뼛 설 정도로 아픈 고통에 나도모르게 움찔하고 놀랐고 윤두준은 내가 그런걸 알고 있기는 한지 계속해서 내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허리가 윤두준의 팔 안에서 꺾일정도로 정말 너무 세게 휘어져있어서 숨도 못쉬겠고 답답해서 주먹으로라도 어떻게 때리고 싶었는데 주먹조차 쥐어지질 않았다. 결국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나는 정신없이 내 입안을 혀로 헤집는 그에게 반항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윤두준의 움직임이 살짝 느려질 무렵 나는 손바닥으로는 밀 수가 없어서 손등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생각보다 쉽게 밀리는 윤두준에 나는 목걸이부터 찾아내려고 그의 손바닥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그 사이에 던졌나 싶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내가 아까 정신없이 그의 입술이건 혀건 막 깨물어댄터라 하필 유난히 불빛이 세게 닿아있는 데가 입술이라 아직도 멈춰지지 않은 피가 눈에 보였다. 많이 아플텐데. "...깨문거..미안한데..목걸이 빨리 줘." 윤두준은 손으로 자기 입술을 쓱 닦더니 나한테 한발자국 다가왔다. 그러면 난 또 한발자국 물러나고, 다가오고 물러나고를 몇번 반복했다. "...미안..." 아무래도 그 흐르는 피가 너무 신경이쓰였다. 깨물거면 살짝 좀 하지. 너는 왜 정도를 몰라 양요섭 너는 진짜... 나는 점점 다가오는 윤두준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순간 닿은 차가운 금속 느낌에 환하게 웃으며 집어 들려고 했지만 아예 접어지질 않는 손바닥 때문에 목걸이를 놓쳐버렸다. 찰랑-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 윤두준의 신발 근처를 더듬거렸고 또 흙이 잔뜩 묻었는지 미칠듯한 따가움에도 계속 더듬어 결국 손가락 끝에 걸리는 목걸이를 꽉 쥐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다행이다. "..양요섭." 말하는 윤두준의 눈썹이 살짝 찡긋하는게 눈에 보였다. 조금 더 걸어오니 불빛이 좀 더 세져서 윤두준의 얼굴이 그렇게 환하진 않아도 이목구비 정도는 확실히 볼만해졌고 계속 붉게 달아오르는 입술이 너무 신경쓰여서 그냥 가야됐는데 갈 수가 없었다. "..입술...미안. 그렇게 세게..깨물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손바닥 봐봐." 나는 윤두준한테 드는 미안함에 계속 입술만 쳐다보다 그제야 난 내 손바닥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세상에..피와 흙알갱이가 뭉쳐서 손바닥에 달라붙어있었다. 어쩐지 너무 따갑다했더니... 나는 손바닥끼리 부딪쳐 탈탈 털려고 했는데 정말 소리가 나올만큼 아파서 경악했다. "..나와. 약바르자." "..자..잠깐만." "왜." 나는 아팠지만 손바닥을 그의 어깨에 댄 뒤 살짝 까치발을 들어 윤두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순간 느껴지는 피맛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그 곳을 빠져나왔다. "야 어디 갔다가 이제..." "어, 종호야. 약 좀 갖고와봐. 애 손바닥 다 까졌으니까. 알아서 챙겨와." 윤두준보다 먼저 온다고 왔는데 어느새 내 뒤에 서있는 윤두준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방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쭈뼛거리면서 들어갔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더욱 환한 불빛에 손바닥을 비춰보니 정말 말그대로 처참했다. 아직도 손을 쥐었다폈다하면 새어나오는 피에, 이미 굳어버린 피에..말도 못했다. 윤두준은 순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내 손바닥을 씻어냈고 나는 너무 아파서 눈까지 꽉 감고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그리곤 내가 계속 손바닥을 빼려하자 윤두준은 스읍-하면서 더욱 센 힘으로 내 손목을 쥐고는 콸콸 쏟아져내리는 수돗물에 내 손을 맡겼다. "..이지경이 되도록...진짜..." "..목걸이..안던졌다고 빨리 말했어도 이렇게 안됐어." "그래도 말이 많지 양요섭!?" 윤두준의 말에 난 그냥 입을 다물고 머리까지 지끈거릴정도로 따가운 고통을 참아냈다. 대충 씻겼는지 꼼꼼히 보던 윤두준은 자잘하게 난 상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거실로 가 종호선배가 미리 준비해둔 구급상자를 펼쳐 나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자기가 앉더니 거즈에다 소독약을 잔뜩 묻혀 또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따가운 것에 열배는 더 아파서 나도 모르게 아픈 소리를 냈고 선배들도 우르르 몰려와 어쩌다 이랬냐며 혀를 끌끌 차댔다. "..진짜 아프겠다..어쩌다 양손 다..뭐 넘어지기라도 했어?" "..아...네.." "조심 좀 하지..안그래도 아까 감기 걸렸다고 아프다고 그러더니만..." 감기라는 말에 소독을 해주던 윤두준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눈길을 피하며 내 손을 꽉 잡고 치료를 해주는 그냥 내 손바닥만 바라봤다. 윤두준은 연고를 그냥 손바닥 전체에 펴바르더니 붕대로 손을 칭칭 감아주었고 복서처럼 양손에 붕대 감긴 신세가 된 나는 뭐 하나 제대로 쥘 수도 없는 꼴이 되어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들 시간 늦었는데 안자냐? 또 술 푸려고?" "아니요..뭐..그냥...요섭아 너 그냥 날 밝으면 서울 올라가. 이대로 뭐 아무것도 못하는데 있어봐야 뭐하겠냐." "..안그래도 되는데.." "너 여기 있어봐야 놀지도 못하니까 그냥 올라가." 종호선배의 말에 윤두준도 같이 듣다가 내가 그냥 가만히 있자 말했다. "얘 짐 좀 다 갖고 나와." 윤두준의 말에 두세명이 쪼르르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미처 풀지도 않은 짐을 들고 나왔고 윤두준은 한손으론 내 손목을 잡고 한손으론 짐가방을 들며 날 일으켰다. "나도 오늘 올라가봐야됐는데 잘됐네. 나같은 방해꾼은 사라질테니까 니들끼리 재밌게 놀아라. 아 이거 분위기 망치기도 하고 선배가 돼서 뭐 해준건 없고..올라가서 맛있는거라도 사먹어." 윤두준은 짐가방을 내려놓고는 살짝 내 손목도 놓은 뒤 지갑에서 십만원짜리 수표 여러장을 꺼내 종호선배의 손에 쥐어주었고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웃음 짓는 후배들을 보던 윤두준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날 그냥 데려가버렸다. 솔직히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정말 서울로 당장 올라가고 싶은 마음 뿐이라서 거절 하진 않았다. 윤두준은 차로 가서 트렁크에 내 짐을 넣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이번에도 내가 뒷자석에 탈걸 생각했었는지 문을 열며 타라고 눈짓했고 또 거기다 대고 뒷자석 앉겠다며 고집 부릴 필욘 없을 것 같아 그냥 순순히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려고 했는데 붕대를 많이 감아놔서 손가락이 움직이는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윤두준이 옛날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안전벨트를 직접 매주었고 차는 부드럽게 그 곳을 떠났다. "올라가면 딴거 할 생각 말고 그냥 쉬어. 감기까지 걸렸다며. 나때문이잖아." "내 생각 말고 운전이나 해." 나는 의자에 몸을 맡기고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된게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건지, 요즘엔 하루하루가 소설처럼 아주 드라마틱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하게 사는 사람도 드물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잠을 청했고 이윽고 내 눈과 귀는 세상과 멀어져버렸다. "다왔어. 내려." 윤두준은 안전벨트를 풀어주고는 차에서 내렸고 나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바라봤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주황빛으로 빛나는 가로등불빛에 여기가 우리집이구나를 깨달았고 02:13AM 이라는 시간에 경악해버렸다. 이 새벽까지 운전을 해갖고 온건가.... 내가 문을 열려고 하자 윤두준은 전화를 하면서 문고리를 잡아 열어주지 않았고 나는 뭐하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자 전화 통화를 마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내리자 윤두준은 내 발 앞에 짐을 놔주며 말했다. "병원 가서 꼭 치료 받아." "뭐 이까짓거 갖고.." "내가 씻어낸다고 했는데 모래가 안빠졌을수도 있어. 그러니까 잔말말고 날 밝으면 꼭 병원부터 가. 귀찮다고 미루지 말고. 그리고 감기 기운 더 도졌을수도 있으니까 간김에 감기약도 받아오고." 윤두준의 말에 나는 알았다며 바닥에 놓인 짐을 들려는데 그 손을 막았다. 순간 댕강-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열린 대문에 나는 깜짝 놀라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누나가 있었다. "..아 누.." 누나는 대문앞에 서서 나란히 서 있는 우리 둘을 보더니 순간 나를 향해 뭔가 둔탁한 물건을 집어 던졌고 나는 그걸 받을 생각도 못한채 가슴으로 받아버렸다. 순간 턱-하고 막히는 숨에 가슴을 잡고 허리를 숙이자 윤두준은 나를 감싸안고는 말했다. "미쳤습니까?" 윤두준은 내 발 밑으로 떨어진 뭔가를 집어올렸고 그걸 보는 윤두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에 나는 뭐냐며 그것을 받아드는데..이건 윤두준과 내가 같이 찍은 사진들로 가득한 앨범이었다. 이게 어떻게 누나의 손에 들려있는건지 누나를 보자 누난 천천히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때렸다. 짝- 오늘은 진짜 여기저기 안아픈 날이 없다. 나는 뺨을 맞았다는 것 보단, 누나한테 맞았다는게 너무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돌아간 고개를 그냥 냅뒀다. "지금 뭐하십니까!?" 윤두준의 언성은 높아져있었고 내가 고개를 들자 누나는 날 또 때리려 손을 들었고, 내가 눈을 질끈 감았는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뜨자 윤두준이 누나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감히 누굴 때려요 지금!!!" "...둘이..뭐에요?" "누나..그러니까.." "너 조용히해. 둘이 무슨 사이인지..나한테 설명 해 줄수 있어요? 윤두준씨?" 누나는 모든걸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리 모르는척 하려고 하고, 속이려고 해도..왠지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돌리고 싶었지만 윤두준은 내 손목을 끌어당겨 자기 뒤로 숨게한다음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거 같은데..굳이 들어야겠습니까?" "...반지..어쩐지 낯익다 했어요. 둘이..날 속이고..얼마나 재밌었던가요?" 누나의 손엔 내가 빼놨던 반지가 들려있었다. 저건 분명 내가 윤두준의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고 온건데... 저게 어떻게..누나의 손에. 그러고보니 앨범도 내것이 아니었다. 윤두준의 검은색 가죽 앨범이었지. "미안하게도 재미 하나도 없더군요. 당신이 끼어드는 바람에..나랑 요섭이는 하루하루가 힘들었어요. 이제 알았으면..좀 빠져줄래요?" "형!!!! 진짜 왜그래!!!" "너 가만히 있어." 왜 다들 나한테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건지.. 윤두준은 내 손목을 꽉 잡으며 내가 그의 등 뒤에서 못나오도록 막았다. 혹여나 누나가 날 때리려고 할까봐 그러는건지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누나의 표정을 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누나는 절대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아마 여기에 이 물건들을 끌고 나온건 자기가 아는게 다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같잖은 변명이라도 늘어놔주길 바라고 있을거였다. "...어떻게.." "안믿기겠죠. 나도 못믿었으니까. 그동안 요섭이가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참고 있긴 했는데..차라리 잘 됐네요. 이쯤에서 방해꾼은 사라져주는게 어때요? 당신만 빠지면 모든게 다 제자린데." "내가..가만히 둘것 같아요?" "아뇨. 뭐든지 해요. 당신의 그 잘난 아버지한테 강아지마냥 쪼르르 달려가서 이 모든걸 다 얘기를 하던지, 아님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협박이라도 해봐요. 당신 아들놈이랑 내 동생놈이 그렇고 그런사이다. 사랑해서 죽는사이니 이걸 어떻게 할거냐.라고 말이죠." "..뻔뻔한거 아니에요? 최소한 이렇게 됐으면 미안하다 말 한마딘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나는 당신한텐 죽어도 안미안해요. 당신때문에, 착하고 착한 당신 신경쓰느라 지 상처 덧나는건 생각도 못하고 있는 얘가 신경쓰여서 죽겠고 미안하지 당신한텐 전혀. 양요섭은 지 누나 걱정에 목매는 애에요. 우리 누나가 윤두준 너 좋아하니까 우리는 헤어지자. 양승혜랑 윤두준이랑 만나는게 맞는거라고 수도없이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그러는 애에요. 근데..당신 얘한테 무슨 짓 했어요? 한번만 더..손찌검하면..당신이 그 누구건 상관없이 가만 안둬. 그동안 많이 참았고 양요섭이 죽으려고 하니까 그거 봐서 참았는데..더이상은 안참으니까 어디 할거면 마음대로 해요." "형!!!" 나는 그 등을 밀며 옆으로 나와 누나의 앞에 섰고, 내가 미안하다고 무릎이라고 꿇려는 찰나 누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채로 나를 보더니 또다시 뺨을 때려버렸다. 나는 사실 누나한테 골백번 더 맞아도 시원찮을 놈인거 나도 아니까 누나한테 맞았다는 충격에 휩싸이기 보단 미안해서..차라리 더 때려줬으면 싶었다. 짝- "미쳤어!!!!!! 형!!" 나는 나처럼 고개가 휙 돌아간 누나의 모습을 보고는 윤두준의 가슴팍을 때리며 말했고 누나는, 어쩌면 난생처음으로 맞아봤을텐데 뺨을 손으로 잡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윤두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용서 안해요. 이 결혼. 어떻게든 할거야. 두준씨 나한테 뭐든지 해보라고 했죠? 나요, 이 결혼 무조건 할거에요. 당신이 나한테 도망 못치도록 나 꽉 잡을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반지는 주시죠? 그 반지..소중한거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끼던 반진데 그쪽 손에 들려있는거 불쾌하거든요." 누나는 입을 꽉 다물고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선 윤두준의 손바닥에 내가 끼던 반지를 주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순간 맥이 풀려 주저 앉아버렸다. "괜찮아?" "...나...몰라...어떡해...이제 어떡할거야!!!" "차라리 잘된거야." 차라리 잘된거라는 윤두준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잃고 짐가방을 어깨에 걸쳐맨 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나는 집 앞 정원에 혼자 서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누나.." "...너..그렇게 안봤는데..사람 뒷통수 제대로 때린다. 내앞에선 아무것도 모르는척 해놓고...너 연기 잘한다. 남우주연상 받아도 되겠어.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그동안 같이 식사는 어떻게 했고 집에서 만날땐 어떻게 했어? 진짜 너 대단하다. 너 내 동생이지만 소름끼쳐." "..누나 그게 아니라..." "변명같은거 됐어. 진작에 못알아차린 내가 바보지. 근데 너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나 절대 두준씨 포기 못해.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고 설렌 사람이야. 설령 지금 두준씨 마음이 너한테 있다고는 해도 언젠가는 나한테 올거야. 남자라는 동물이 결국엔 여자랑 맞는거니까. 안그래?" 누나의 목소리는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더 소름끼쳤다. 이렇게 미리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만약 알았더라면 이런 상황엔 어떻게 해야겠다 라고 미리 생각이라도 해놨을텐데 그렇지를 못해서 나는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당분간 너 안보고 싶으니까 마주치지 말자." "누나!!! 미안해. 진짜 미안해..내가 다 설명.." 내가 누나의 팔을 살짝 잡자 누나는 마치 더러운게 붙어 떼어내듯 내 손을 확 치우며 뒤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냥 무릎을 꿇은채 정원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갈 바에야...그냥 죽는게 낫겠다 싶을정도로. 몸도 마음도 너무너무 아팠다. 누나 만큼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누나 만큼은 상처 받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모든게 다 물건너가버렸다. 내 어리석은 행동 하나가 모든걸 다 망쳐버렸다. #43. 윤두준의 번외1. 안 올 것 같은 그 시간이 와버렸다. 아니,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그 시간이 와버린거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침밥 담당은 나였으니까 늘 그렇듯 아침밥을 하려고 1층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는데 식탁에 올려놨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고 순간 뜨는 번호에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굳어버린듯 어색하게 서있었다. "여보세요." 「아비다. 집으로 오너라.」 "지금..요?" 「그래.」 "아 지금은..." 「기다리고 있겠다.」 아버지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리고 태강이라는 기업의 우두머리에 서 계신 분이므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행동 하나하나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아시는 분이시라 말을 줄이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게 아버지 몸에 아주 배어있는 습관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끊긴 전화에 나는 컵을 식탁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씻은 뒤 도통 입질 않았던 수트를 꺼내입었다. 하도 오랜만에 입는거라 어색했지만 지금 그렇게 거울을 보며 이리보고 저리볼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섭이에게 급한일이 있다며 둘러댄 뒤 그대로 몇년동안 향하지 않았던 집으로 향했다. 몇년동안 가지 않았던 곳이라 까먹었을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핸들이 스스로 움직였다. 본능처럼. 딩동- 찰칵- 한남동에 위치한 집은 정말 저택이었다. 서울 땅값 비싸다던데..이렇게 넓고 큰 집이... 무슨 작은 나라 궁전 같았다. 언제봐도 적응 안될만큼 호화스러운 저택에 발을 들여놓으며 나는 계속 긴장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보기좋게 깎여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밟아올라갔다. 현관문을 미리 열고 기다리시던 아주머니께 인사를 한 뒤 들어간 집. 워낙 인테리어나 이런걸 바꾸는걸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몇년 전 이 집을 나갈때랑 똑같았다. 혹시라도 뭐가 좀 달라져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든게 다 그대로였다. "저..왔습니다."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아버지는 내가 다가가자 흘낏 보더니 신문과 쓰고 계시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둔 다음 앉으라고 손짓 했고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은 뒤 침을 꼴딱 삼켰다. "그래. 보아하니 잘 지낸것 같네. 안색이 좋아진것 같구나." "...그냥...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불러들인 이유는..너도 알다시피. 기한이 다 되었질않니?" 순간 나는 맨 처음 이 집에서 나갈때 아버지에게 했던 그 기한이 생각났다. 어느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작년이 끝이었고, 올해부턴 언제든지 불러들이는 그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는 뻔히 보여서 나는 그래도 그 말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 "아직..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너에게 업무를 맡길 생각은 없다. 게다가 유학도 다녀와야하는데.. 너는 그 귀중한 시간을 니 자유시간이랍시고 버리질 않았니? 그점은 아쉽게 생각하지만..그만큼 니가 컸을거라 생각한다.니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제대로 깨달았을거란 뜻이다." "그게.." "너는 오늘부터 그냥 윤두준이 아니다. 너는 윤상우 회장 아들 윤두준이야. 앞으로 너는 피터지게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군인이 될거야. 그럼 거기서 안타까운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너를 튼튼하게 만들어줄 지지기반을 만들어야하질 않겠니?" 대체 지금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안돌아가는 머리를 굴려가며 생각해봤다. 졸업도 안한 나한테 업무를 맡기지 않겠다면서 지지기반을 만들라는건 대체 무슨 소린가. "..혼처가 오고가고 있다." "..그..그게.." "양기태 의원이라고 들어봤겠지. 그사람..다음 대 대통령이 될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그 사람은 우리 기업에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사람이야. 아마 대통령이 된다면 상상 그 이상의 이득을 우리에게 주겠지. 하지만 영원한 적군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가장 끈끈하게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관계는 뭐라고 생각하니." "...." "결혼이다." 이제 나는 스물 여섯이다. 결혼을 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졸업 조차 하지 않은 새내기 일 뿐이다. 근데 나한테 결혼 이라니? "물론. 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당장 중요한건 니가 서둘러 학교를 졸업하는 거고. 그 동안은 약혼이라는 끈으로 매어둘 생각이다. 양의원의 딸이 그렇게 이쁘다더라. 자. 사진." 아버지는 나에게 사진 한장을 넘겼고, 거기엔 어떤 한 여자가 너무나도 익숙한 웃음을 보이며 환하게 있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혹시 어디서 마주치기라도 했었나... "이름은 양승혜. 동생이 하나 있고, 동생도 너랑 같은 과라고 하던데..보지 못했니?" 많이 봤다 했더니, 너무 익숙타했더니 그럼 이 사람이 양요섭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누나구나. 양요섭 말대로 많이 이뻤다. 정말 누구 닮아서 너무너무 이뻤다. 내가 양요섭을 먼저 만나질 않았더라면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만큼 이쁘고 눈이 부셨다. "..." "뭐..그건 그렇고. 얼굴도 적당히 이쁘고..괜찮지? 미국에서 무용 전공하다가 이번달 24일에 한국 들어온다고 하더구나. 그 아이가 한국 들어오면 좀 더 깊게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야." "저는 아직 결혼..." "잊었니. 너는 이제 단순히 너가 아니라고. 집안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해야되는게 니 일이다. 니가 좋건 싫건 그 의사는 중요치않아. 단지, 니가 하려는 일이 그리고 니가 앞으로 해야하는 일이 태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게 중요한거지. 똑똑한 녀석이니 알아들었을거라 생각한다." 이런 집안이라서, 아버지가 이렇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지겨워했던거였다.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고 내가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십몇년을 살아왔는데 이제 또다시 그런 삶의 시작이라니 그 모든게 다 끔찍했다. "아버지 저는.." "니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긴 하지만 회사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되지 않겠니. 니 사촌 형 옆에 붙어서 어떤 식으로 업무처리가 이뤄지는지, 어떻게 회사가 돌아가는지 익히도록 해라. 내일부터 회사에 나와." "아버지!!!" "..그동안 말이 많이 는것 같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말을 끊어도 계속 할 각오였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 그게 뭐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결혼 조차도 아버지 손에서 좌지우지 되는거 참을 수 없습니다. 회사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미국으로 발령내셔도 갈거고 어딜 가라고 하셔도 할건데 결혼 만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사내새끼를 좋아하는거냐?"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순간 나는 아버지가 알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망치로 머리를 후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또 입을 다물어버렸다.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양승혜 동생 양요섭군이라는 말이다. 대답해라. 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양요섭이냐?" "맞습니다." "거짓을 말하진 않아 다행이구나. 그래도 상관 없다. 니 의견은 중요치않아." "아버지!!!!" "그리고..따지고 보면..잘된 일 아니냐? 승혜양과 결혼을 하게되면 니가 그렇게 사랑한다는 그 아이를 매형으로서 볼 수 있는거 아니겠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바에는 근처에서 맴돌 수라도 있는 그런 여자와 결혼을 하는게 너한테도 나은거 아니냐는 말이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요섭이, 그 아인 누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앱니다. 근데 그런 애한테..니 누나와 결혼하니 우리는 헤어지자 이런 말을 하라는 겁니까? 저 죽어도 못합니다." 내 언성이 높아지자 아버지는 더욱 더 냉철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짓 하려하지 마라. 듣자하니 양의원이 그 아들녀석한테는 꽤나 차갑다고 했다. 그런 사람한테 자기 아들이 입에 담기 조차 민망하고 수치스러운..동성애자라는 말이 귀에 들어가면 양의원은 그 아들녀석을 어떻게 해버릴 것 같니? 그냥..니 안에서 끝내는게 그 아이를 위해서도 낫지 않겠니?" "...협박..하시는 겁니까." "말로 해서 되지 않는다면 협박이라도 하는 수 밖에." "무조건..몰라야합니다. 요섭이는 아무것도 몰라야돼요. 비밀..지켜주십시오." "니가 잠자코 모든 일에 응한다면..내 뭐하러 입을 놀리겠니. 나만 귀찮아질뿐이지." 아버지의 고단수에 나는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될지 막막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수를 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니 아비, 니 손에서 당할만큼 어리석은 사람 아니다." "이만 가보겠..." "어딜가니. 나랑 같이 회사로 들어가자." "내일부터라고 하셨잖아요." "하루라도 더 빨리 실무를 익혀야지. 방학동안엔 꼬박꼬박 회사에 나오도록해. 그리고 임원들한테도 니가 장차 내 뒤를 이을 사람이라고 도장을 박을 필요가 있으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아버지는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셨고 나는 망연자실한 마음에 소파에 기대어 눈을 팔로 가려버렸다. 그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되는지, 어떻게하면 이 일을 막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요섭이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히 일을 끝마칠 수 있을지 모든게 다 계획이 서지 않았다. 평소엔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잘 돌아가는 나인데도..이건 너무 생각지도 못헀던 시나리오라 멍해져버렸다. 이건..꿈이어도 말이 안되는 그저 기가 막힌 일이다. *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이 회사에 와본건 처음이었다. 여러 갈래로 나눠져있는 회사들 중에서 아버지가 있는 곳은 말하자면 총괄담당지사였다. 딱히 무언가의 일을 행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기업의 이미지를 담당하는 홍보팀과 대외적인 이미지를 담당하는 국제홍보팀 등 사무적인 일이 행해지는 곳이 바로 여기였고, 으리으리한 건물에 이게 내 아버지가 이끌고 있는 회사구나 라는게 확 와닿았다. 생각만 했던것보다 훨씬 더. 아버지 바로 옆에서 비서들과 함께 로비를 걸어가니 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직원들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회장실까지 들어가는 십분정도의 시간동안, 아버지는 수십번에 걸친 인사를 받아야만 했고 옆에 있는 나도 가만히 있기는 민망해서 같이 목례를 한지라 목이 왠지 뻐근한 것 같았다. 그냥 인사로 인한 뻐근함은 아니고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뻐근함이라고 해두자. "국내홍보팀 팀장 윤재신좀 회장실로 불러요." 비서실로 연결된 인터폰으로 말한 아버지는 양복 재킷부터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으신 뒤 그새 쌓여있는 결재서류에다 자신이 늘 쓰시던 만년필을 들어 차근 차근 읽어보시며 사인을 한 서류와 하지 않은 서류를 분류해놓으셨다. 회장실은 그냥 늘 그렇듯 가죽소파 여러개에, tv와 집무책상 정도만 있었다. 하지만 소파 앞 테이블엔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들과 하물며 스포츠 신문까지 놓여져있었고, 아버지가 자주 보시는 경제전문지 또한 놓여져 있었다. 이걸 다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하겠다 싶을정도의 방대한 양이었다. 똑똑- 커다란 짙은 갈색문이 열리고 그 곳엔 오랫동안 못봤던 사촌형 재신이형이 있었다. 이형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유독 따랐던 사람이라 정말 몇년만에 본건데도 바로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처럼 친숙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가족끼리 있는데 그런 거한 호칭은 빼고. 와 앉아라." 아버진 만년필을 책상위에 놓더니 소파로 와 정 가운데에 있는 곳에 앉았고 내가 앉은 곳 바로 앞에 앉은 형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형도 참 미남형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돌아볼 만큼은 아니어도 그냥 호남으로 준수하게 생긴편이었다. 깔끔하고 완벽한 생김. 아마 인기도 엄청 많을 것 같다. 사내 여직원들한테. "내가 너를 부른건..내 아들을 좀 부탁하기 위해서다." "..두준이를요?" "알다시피 이녀석은 지 하고싶은거 하겠다고 집 뛰쳐나가서 몇년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질 않았니? 근데 이제 슬슬 돌아올때도 됐고..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실무를 맡기는건 너무 무리고.. 그냥 방학동안에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할수있게끔 재신이 니가 도와줬음 좋겠다는거다." "큰아버지, 그렇지만 저도 아직 너무 미숙하고.." "니가 회사일에 미숙하면 대체 누가 익숙하다는거냐? 긴말 필요없고..차근차근 옆에 붙어서 알려줬음 좋겠다. 똑똑한 놈이니 금방 알아들을테니 그건 걱정 안해도 될거고." 재신이형은 나를 난감한 표정으로 빤히 보다가 씨익-하고 웃었다. 나는 인상이 좀 강하고, 세게 생긴 편이었는데 재신이형은 나완 상반되게 매우 부드럽게 생긴 스타일이었다. 유명 커피 CF에서나 나올법한 되게 선한 인상이어서, 정말 얼굴만 보면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물론 성격도, 스펙도 대한민국 최고 신랑감이었지만. "그럼 지금부터 가르치면 되는겁니까?" "그래주면 고맙겠구나." "알겠습니다. 가자." 나는 재신이형을 따라 회장실 밖으로 나왔고 내가 그와 동시에 후-하고 숨을 쉬자 싱긋 웃던 형은 휴게실로 가자며 나보다 앞서 걸어갔다. 이에 나는 따라걸으면서 건물 복도 조차도 화려하고 멋진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신다니 큰아버진." "...몰라.." 소박하게 자판기 커피 하나를 뽑아 나에게 건네주며 내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형은 꽉 조여매고 있던 넥타이를 살짝 풀며 커피 한모금을 마셨다. 이에 나도 지나치게 단 자판기커피를 먹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졸업도 안한애한테 무슨..회사일 익히는거야 입사해서 해도 되는거 아닌가? 왜 저렇게 서두르시는건지.." "결혼하래. 나보고." "..푸웁." 형은 커피를 먹다가 바닥에 커피를 뿜어버렸고 내가 괜찮냐며 묻자 대답대신 손을 들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 주위를 닦아냈다. 그리곤 계속 기침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결혼!?" "...하...어떡하냐 형..나 어떡하지?" "너 올해..스물..여섯이지? 지금이 조선시대냐!? 갑자기 왜그러시는건데 대체!?" "그걸 알면..내가 이러고 있겠어?" 나도 내 목을 밧줄처럼 죄고 있는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러내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고 형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약점 잡힌거 있냐?" "..약점?" "왜..큰아버지 특징이잖아. 딴 사람들이 알아선 절대 안되는 그런 걸로 사람 쥐고 흔드는거. 너도 그런거 아니냐는거지. 니가 떳떳한 입장이면 결혼 하라고 해도 안한다고 우기면 그만 아니냐? 뭐 이바닥이 원래 결혼도 전략중 하나니까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못한다고는 한다해도..그래도 너무 이르잖냐. 나이가." 약점이라면...하나 있었다. 양요섭. 내가 게이건 뭐건 간에 그건 세상에 알려져도 상관 없는데, 요섭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단지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받게 할 순 없었다. 그리고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또 사랑할 요섭이가 제일 무서워하는건 자신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에 그런 얘기가 흘러들어가면..어떤 식으로든 무사할 순 없을거다. 그래. 이거였다. 내 아버지가 날 손바닥에 넣고 쥐고 흔들 약점은 바로 내 사랑이자 아킬레스건인 양요섭이었다. "...나..사랑하는 사람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섣불리 행동 할 수가 없어. 나 어떡해야돼 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 큰아버지도 아셔?" "...어." "근데도 반대하시는거야? 아니. 니 신붓감이 누군데 그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누나." 내 말에 형은 음..이라고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이상한 어감을 눈치챈거겠지. 그렇지만 내가 어렸을때부터 유독 따랐던 사촌형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여자를 좋아하건, 남자를 좋아하건간에 나에게 등질 사람은 아니란걸 알기에 형의 놀란듯한 반응에도 그냥 시크하게 웃었다. "...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나 어떡하지 형? 이결혼..말도 안되는건데..요섭이 귀에 들어가면 절대 안되는건데.. 어떡하지? 진짜..어떡하지.." "야임마. 너..진짜..너..아우..미치겠네 진짜." 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내 일인데도 내가 아무 생각이 없는데 형이라고 무슨 생각이 있겠냐만은.. 정말 아직까지도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 같았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아버지에게 애원하고 호소라도 해서 선처라도 얻는 법 뿐이었다. 아님 같이 도망치던가. "..그러니까..니 말은. 큰아버지가 너한테 결혼하라고 하는 그 상대가 니가 사랑하는 사람의 친 누나라고? 너는...그러니까 남자를...사랑한다는거잖아? 그래..뭐 그럴수도 있어. 근데..그럼 어떡할건데? 니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가만히 있을건 아닐테고..죽네 사네 난리치는거 아냐? 막 뒤집어 엎고?" "..병신같이 조용히 물러나면 물러났지 깽판칠 사람은 절대 아냐. 너무 멍청하고 병신같아서 지 누나라면 자다가도 번쩍 깰만큼 껌뻑 죽어. 지 누나가 지한테 뭐 얼마나 잘해준건지는 모르겠지만..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방법은..그 여자가 날 싫어해서 결혼을 싫다고 하는것, 아버지에게 애원하는 것, 도망치는 것. 딱 세가지 밖에 없어. 형은 뭐가 제일 현실적일 것 같아?" "...그 여자가 널 싫어하게끔 만들어. 여자들이 싫어하는 행동은 다 하고 정떨어지게끔 해. 그럼 뭐..그 여자 아버지도 설마 지 딸이 싫다는데 무리하게 결혼 시키겠냐? 아무리 혼처자리가 태강후계자라고는 해도..그 여자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데?" "양기태 의원. 대선 출마 하는 국회의원인가봐." 내 말에 형은 까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생각하다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딱 쳤다. "..그인간..절대 이 혼사자리 안놓을거다. 그러니까 방법은 그 여자가 널 싫어하게 만드는 수 밖엔 없다. 진짜..너도..어쩌다가...그리고 큰아버지..어쩌면..이건 정말 어쩌면인데.. 니가 그 아일 좋아하는걸 알고 일부러 그러신걸지도 몰라. 솔직히 태강이 뒤에서 서포트 해주는데..양의원 아니라 일반 국민이어도 대통령되는건 어려운일이 아냐. 근데 왜 하필 양기태냐고. 일부러..그러신 것 일수도 있다는거야. 일부러.." "..왜?" "글쎄..뭐..당신 아들을 함부로 탐낸 그 아이한테 벌주려는 걸 수도 있고.. 니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영화보는 것 처럼 구경하고 싶으신 걸수도 있고.. 뭐 그런거 있잖아. 사랑이냐 집안이냐 그런거. 앞으로 니가 큰아버지 자리 이을텐데..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기가 가진걸 희생하는걸 감수 해야될때가 있잖아. 예를들면 가족이냐 회사냐 뭐 이런거? 그러니까 그런 선택에 있어서 이번판은 전초전이라고나 해야하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큰아버지 상대로 싸우려면 일단 니가 좋아한다는 그 아이부터 니 편으로 만들어놔. 그 아이가 흔들리지 않게,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너만 믿을 수 있게끔 하란소리야. 너한테 그 아이가 전부아니야? 근데 그 아이가 흔들려서 너한테 헤어지자고 해버리면..너 어떻게 살래? 그러니까 그러기전에 니 뿌리..튼튼하게 잡아두라고." 역시 형은 달랐다. 나보다 생각하는게 깊었고 더 넓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조차도 형은 아주 능숙하게 잘도 짚어냈고 나는 형의 말대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벌여놓은 게임 한판에 제대로 놀아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배끝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마침 다 먹은 종이컵을 꽉 구겨버렸다. "일단 가자. 뭐라도 배우는 시늉은 해야될거 아니냐." 형은 다시 넥타이를 원위치 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형처럼 한 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따라가는 내내 너무 보고싶어서 머릿속에서 아른아른 거리는 요섭이를 떠올렸다. 형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든 요섭이를 내 곁에 남을 수 있게 해야만했다. 그 아이가 흔들리지 않게.. 분명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지만..그렇게 알게된다고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어놔야만했다. 내가 지쳐 쓰러지지 않으려면..그 아이가 옆에 있어야 나도 싸울 힘이 났으니까.. 요섭이가 없으면 나는 총알없는 총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내가 일하는데는 국내홍보팀이고, 저쪽은 국제홍보팀. 국 내홍보팀은 우리나라에서 홍보하는 그 일을 총괄 담당하는 부서야. 광고를 낼때는 어떤 컨셉으로 잡을지, 광고를 찍을땐 어떤 사람을 캐스팅하고 콘티는 어떻게 잡을건지에 대한 모든 일을 맡는데지. 그리고 국제홍보팀은 전세계 각지, 우리 회사가 들어가있는 나라에 어떻게 홍보할건지, 그리고 현재 어떻게 홍보되고 있는건지를 수시로 체크하는 부서야." 형은 자기만 쓰는 사무실로 들어가 나를 소파에 앉히고 대충 얘기해주었다. 그리곤 아까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적당히 쌓인 결재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사인을 했고 나는 그냥 멀뚱멀뚱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건 너무 토할것 같다. 이런거 안하면 안되나.... "아..모르겠다 진짜." 나는 테이블에 양발을 올리고 길게 뻗어 소파에 늘어지듯 누워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냥 현실도피 하고 싶어서 눈을 감아버렸고 이내 떠오른 요섭이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짓고 말았다. "정말 이쁜애다? 눈은 되게 동그랗고 맑아서..애기 눈동자 보는 것 같아. 그리고 눈동자는 갈색이어서 남들과는 좀 다르지. 머리도 엄청 이쁜 금발이야. 걔만 보고 있음 그 주변이 온통 환해지는거 같다? 햇빛처럼? 하긴 햇빛 같은 머리색이긴 해. 얼굴은 또 얼마나 작은지..한손으로 쏙 가려져. 그리고 애교도 많아서..걔랑 같이 있음 내가 그냥 녹아버리는거 같다니까... 말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이쁘고 사랑스러워. 다른 사람들한테도 너무 착하게 굴어서 가끔 질투도 나긴 하지만..애가 너무 여리고 착해서.. 그게 너무 걱정이다 형. 또 남생각만 하느라 지 생각 못하고 어리석은 짓 할까봐.." "그렇게 좋냐? 실실 거리는거 처음 본다 너." "...그냥..좋아. 왜 좋냐고 물어보면 대답 못하겠어 그냥 좋아. 아까도 아침에 하도 빨리 나오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아..지금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걱정하고 있을텐데." 내가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에 나는 뭔가 싶어 형을 보다 그의 시선이 꽂혀있는 곳으로 얼굴을 돌리자 그자리엔 아버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난리야 진짜. "회장님." "윤재신팀장. 내가 너한테 준 임무가 우습게 들렸나? 내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았나보군. 저렇게 한량처럼 늘어져서 듣는것만으로도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은 저따위 얘기를 늘어놓는 저 녀석을 가만히 놔두는걸보니. 저렇게 하라고 내려보낸거 아닐텐데?" "아..그게.." "윤두준. 너는 당장 내방으로 올라와. 그리고 여태까지 여기에서 이뤄진 업무처리 현황 정리해서 당장 내방으로 갖고와." "아버지.." "..큰일 치루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당장 올라와." 아버진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고 얼음처럼 굳어버린 형과 눈이 마주친 나는 진짜 미치기 일보직전이라 테이블을 발로 차버렸다. 저렇게 자기 자식을 인형다루듯 마음대로 할거면 자식을 왜 낳은건지, 어디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된다고 하던가...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리 주의를 줬어야한건데..얼른 올라가봐. 또 불호령 떨어지기 전에." 형의 말에 나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아 진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뒤 후다닥 회장실로 올라들어갔다. 여긴 그냥 들어옴과 동시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산소는 없고 이산화탄소만 가득 찬것 같이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속도 울렁거린다. "..이름 양요섭. 1993년 1월 5일 생. 서울 출생에 양기태 의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어머니는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이며 누나 양승혜는 미국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있음. 양요섭은 최근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에 입학해 재학중임. 머리는 지나친 금발에 키는 평균보다 살짝 작음. 현재 청담동 아일스오피스텔 1202호에 거주중. 그 집은 윤두준의 명의로 되어있음. 그의 현재 동거인은 윤두준." "..뭐하십니까." "윤두준과 양요섭이 처음 만난해는 2009년 11월 경. 학원에서 우연히 마주쳐 애들 불장난처럼 쉽게 만나기 시작함.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겁없이 사랑을 하기 시작함. 한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늘 같이 지내는 모습이 포착됨. 작년 1월 5일엔 제주도로 단 둘이서 여행을 갔음." "아버지!!!!" "...화려한 전적이구나. 어려서 세상 무서운줄 모르는 강아지새끼같이 덤벼댔어. 그동안 얼마나 어줍잖은 행복을 느꼈을지는 모르고. 그거에 대해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일은 용납치 않겠다. 니가 어디서 뭘 하든, 니가 누구와 어디에 있든 너에 대한 보고는 늘 나한테 올라올거고, 그와 더불어 양요섭이라는 이 아이에 대한 보고 또한 들어올거다. 숨으려는 생각을 한다거나 도망을 가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봐야 서로 힘 낭비만 될테니까." "...그렇게..자식을 손에 넣고 쥐고 흔들고 싶으십니까?" "너는 나한테 하나뿐인 아들이다. 넌 유일하게 내 자리를 이어받을 귀한 사람이야. 근데 그런 사람을 이렇게 구렁텅이로 쳐넣을순 없지않니? 한낱 사랑이라는 같잖은 감정에 휘말려 내 아들이 신세 망치는건 아비로서 두고 볼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니가 그렇게 사랑한다는 이 아이 또한..어떤 집의 귀한 아들 아니겠니? 나는 그저 그 아이 또한 내 아들 같기에 하는 말이다." "..남 생각하는척하시는거...말이 안된다는 생각 안하십니까?" 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내가 서있는 자리에, 내 가슴팍위로 뭔가를 집어 던졌고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그 물건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이게.." "이따위 짓이나 하라고 너한테 귀한 5년 준거 아니다. 이따위 사람 같지도 않은 짓 하라고 널 이렇게 키운거 아니란소리다. 나는 너를 다루는 방법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너를 다치게 하는것보다, 저 아이를 힘들게 하는게 더 효과가 난다는 것을, 너한테 이렇게 골백번 말하는 것 보다 그 아이한테 말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게 바로 너라는 자식이란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단 뜻이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나마 내가 하라는대로 하면..그 아이만큼은 내가 지켜줄 수가 있다." "..그것도 협박이라고 하시는겁니까?" "못믿겠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그 후의 일은 나도 장담 못한다." 나는 내 발밑에 떨어진, 요섭이와 내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치를 떨었다. 이런 사람이란건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치졸하고 비열해서 정말 치가 떨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건 굴복의 눈물이 아니라 분노의 눈물이었다. 자꾸 그런 눈물들이 뚝뚝 떨어져 사진을 적셨고 행여나 사진에 눈물이 물들어 번져버릴까봐 서둘러 닦고 또 닦았다. "그래. 너는 너한테 닥친 일 조차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래놓고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그저 어이가 없구나. 그 따위 보기도 싫은 사진은 니가 챙겨서 집에갖고 가서 끌어안고 보든 마음대로 해라. 당장 그 사진들을 치워버려." 나는 사진을 고이고이 주워담아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론 주먹을 꽉 쥐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같아선 이 사무실을 다 뒤집어 엎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싶은데 아직은 감성보단 이성이 더 강한모양인지 그렇게 되질 않았다. 똑똑- "들어와." "지시하신 서류 가지고 왔습니다." "저기 테이블에다 두고 나가." 다섯살짜리 애기 키만한 서류 뭉치들을 가지고 들어온 형은 소파 테이블 위에 흐트러지지않게 조심히 놓은다음 겸손하게 목례를 한 뒤 나에겐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기 앉아서 저거 다 읽고 프리젠테이션 자료 만들어. 저거 다 할때까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마라. 그 아이와 통화를 한다거나 문자를 한다거나..그따위 짓은 하지 않도록." "...잘못..했습니다." "뭐?" 나는 절대 꿇고 싶지않았던 무릎을 아버지 앞에서 꿇어버렸다. 다른 사람 그 누구에게도 꿇을 수 있는 무릎이었지만, 절대 내 아버지에게만큼은 이렇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잘못한거 없다. 너는 그저 내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돼. 그럼 다 되는거다." "...한번만..봐주세요. 저..안돼요. 걔 없음..안돼요. 진짜..안돼요 아버지. 저 태어나서 아버지 말씀 거른적 한번도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한번만..당장 회사에 들어오라면 들어올거고, 졸업을 올해 안으로 하라면 할테니까..그러니까 요섭이 만큼은..." "다른건 다 봐줘도 걔 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너한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니?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양의원 여식으로 니 혼처로 알아본 이유를 모르겠니? 근처에서라도 맴돌면서 보라는 니 아비로서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게..더..잔인하단거 모르십니까?" "그렇담 다른 자리로 주선해줄까? 아예 영영 못보는게 낫니? 그녀석에게 너는 배신자로 생각되게끔 하고 싶니? 뭐 그렇다면 내가 다른 자리를 알아봐줄수도 있다." "지금 그런 말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려거든 입 다물고 저기 가서 저렇게 쌓여있는 서류들이나 검토해. 니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기 이전엔 이 모든건 절대 변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행동 하지말고 현명하게 받아들여."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입술을 꽉 깨물고 소파에 앉아 눈물로 이지러져보이는 서류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의 말이 다 옳았다. 나는 내 손으로 어떤것 하나조차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서 내가 할수 있는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나를 더 화나게 했고 더 분노케 만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향한 내 화살은 원래 나를 향해있어야하는걸지도 모르겠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아침에 집에서 나온것 같은데 벌써 깜깜한 밤이고 그동안 나를 오매불망 기다렸을 요섭이가 생각이 났다. 잠깐 화장실 갔다오는것처럼 해서 연락을 해도 되는거였는데 왜 그생각을 못했는지 나를 감시하려고 야근을 하는건지 어쩐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버지 또한 같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에게 걸어오셨고 그 순간 재킷에서 울려대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을 확인하니 역시나 요섭이었고 핸드폰을 열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너 어디까지 못나게 굴래. 너 뭐하는 놈이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닫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방금 통화가 된 것 같은데..호통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근데..갑자기 또 왜이래. "왜.." "...나를 더이상 실망시키려들지마라. 내 아들이 동성애자라는걸 그 누구의 입에서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행동 조심히 하고 다니도록해. 그렇게 말을 했으면 알아들었을거라 생각했는데..아직 모자른가보구나. 되도록이면 결혼 날짜를 앞당기도록 하겠다. 너는 저기 있는 서류 다 읽어보고 내일아침 10시까지 PPT자료 만들어서 갖고와." 아버진 그 길로 사무실에서 나가버렸고 나는 거의 녹초가 된 몸으로 쓰러지다시피 소파에 앉아버렸다. 정말 진이 빠져서 아무런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산더미 같은 서류를 보는걸 끝마친 시간은 새벽3시였고, 대충 만든 PPT자료는 거의 새벽 네시반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루를 꼬박 샌 나는 마음같아선 그냥 회사에 있고 싶었지만 아침에라도 잠깐 요섭이를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요섭이는 들어와서 자는지 현관문에 신발한짝이 나란히 놓여있었고 2층으로 살짝 올라갔다. 침대에 엎드린채로 세상 모르고 자는 요섭이의 손엔 하루종일 내 연락을 기다렸단듯이 핸드폰이 있었다. 미안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나 갑자기 막막해져버린 나는 요섭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행여나 잠에서 깰까봐 만지지도 못하고 몇분동안 빤히 보고만 있다가 그냥 1층으로 내려와버렸다. 옷 갈아입기도 귀찮고 씻는것도 너무 귀찮아서 그냥 소파에 누워버린 나는 다섯시가 넘은 시각에, 점점 동이 터오는 새벽녘을 바라보다 천장으로 시선을 옮겨 하염없이 바라만봤다. 양요섭은 자기 친누나를 그 누구보다도 아꼈다. 어쩌면 나보다도 지 누나가 더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되면, 양요섭은 미련없이 내가 아닌 누나를 선택할거고 그럼 나는 그 아이에게 버려질게 뻔했다. 양승혜라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만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만약..정말 만약 나에게 호감이라도 있다면 문제는 풀어낼 수 없을정도로 꼬여만 들어갈 것이다. 누나와 나 사이에서 갈등하던 양요섭은 보나마나 지 누나 행복 찾아준답시고 나한텐 어리석게 헤어지잔말을 하겠지. 나는 또 그런 요섭이를 붙잡을거고. 점점 더 끔찍해질지도 모른다. 그러기전에 모든걸 다 내 손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무조건 어떻게해서라도 내 손에서. 무조건.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머리에서도 쥐가 났는지 잠에 든 것 같았고 요섭이가 날 깨우는 그 손길에 잠든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고작 하루만에 보는건데도 왜이렇게 보고 싶었고 왜이렇게 이뻐보이는건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애를, 내 걱정이 돼서 제대로 잠도 못잤을거면서 아무렇지 않은척 오히려 내 걱정만 하고 있는 이 이쁜애를 어쩌면 내가 울릴수도 있고 아프게 할 수도 있다. 예전에, 현우가 그렇게 되고 나서 맹세했던 것이 있다면. 내가 만일 현우 외의 어떤 누군가를 현우만큼 혹은 현우보다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땐 반드시 내 손으로 내가 그 사람을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현우의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다짐했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서 그 사람이 아파하는걸 보지 않기를, 죽어가는걸 보지 않기를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었는데..자꾸만 힘이 들었다. "..니네 누나 어떤 사람 이랬지?" "우리 누나? 나한테 하늘 같은 존재지.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미안하지만 형도 우리 누나 다음이야. 난 우리 누나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거고 장미씨앗이 해바라기 꽃을 피운데도 무조건 믿을거야. 누나가 하라는대로 할거고 누나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팔아버릴 수도 있어. 나한테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지." 이럴줄 알았다. 양요섭한테 누나는 하늘일줄 알았다. 그 사람의 행복이라면 간 쓸개 뿐만 아니라 지 몸도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수도 있는게 바로 내 앞에 있는 이 금발머리 양요섭이었다. 누나를 조금만 덜 아꼈으면, 누나를 조금만 덜 좋아했더라면 내가 지금 너한테 이 모든 사실을 얘기하고 앞으로의 일은 걱정말라며 호언장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말을 해야되는건 알았지만, 그럴순 없었다. 이 얘기를 들으면 현우처럼 또다시 내 손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가버릴 것 같았기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그럴수가 없었다. 나중에 제3자에게 이 얘기를 듣는다면 나한테 엄청 화를 낼것이 뻔했고, 나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죽어도 내 입으로 먼저 말을 할 순 없었다. 역시 사람이 약해지는 이유는 잃을 게 있어서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나한텐 죽어도 잃어버리면 안되는 그 어떤 무엇이 있어서 자꾸만 약해졌다. 아버지의 말도안되는 고집 조차도 꺾어버릴 수 없는건 행여나 내 소중한 그 것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 때문이 아닐까. "진짜 이쁘고 착하고 멋진 여자야. 하여튼 우리 누나한테 장가드는 사람은 복을 넝쿨째 받는 거라니깐. 솔직히 우리 누나랑 결혼상대로는..아직까지 내 눈에 차는 사람은 단 한명도 본적이 없는데 그 누가 됐든간에, 동네 바보여도 누나가 좋다고만 하면 난 무조건 오케이야. 누나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남자면 부자든 거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치?" 나는 점점 절망이라는 감정이 내 마음속에 깃들고 있었다. 내 손에서 해결할 수 있을거란 희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의지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을 대신 해결해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더 무서웠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있다면 딱 한가지만 물어보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해야되는거냐고 말이다. * "아마 지금쯤 로비에 기자들이 많이 왔을거다.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붙어서 가도록 해." "기자들이 왜 오는겁니까?" "니가 내 아들이고, 니가 앞으로 내 후계를 이을 사람이란걸 암묵적으로 알리기 위해 내가 손을 좀 썼다. 대놓고 니가 나타나는 것 보다야 계속 내 옆에 있는 너를 비추는게 더 낫지 않겠니?" 아버진 내가 기껏 만든 PPT자료는 보지도 않은채 자기 업무에만 집중했고 나는 어느새 아버지 앞에만 서면 속이 울렁거리는 울렁증이 생겨버려서 아버지 앞에 서있는 내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마 오늘쯤이면 승혜양이 한국에 입국할거다. 그러면 너랑 만나는 일은 속속 진행될거니 준비하고 있어라." "..일부러..그러신겁니까?" "뭐?" "일부러 양기태의원집으로 혼처를 넣으신거냔말입니다. 그 하고 많은 집안들 중에서 왜 하필.." "좋을대로 생각하거라." 아버지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나를 보더니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꽂았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문채 서있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 싶으셨습니까? 회사냐 감정이냐 둘 중에 어떤걸 선택할지 시험해보고 싶으셨냔말입니다. 정말..만일 그렇다면..아버진..생각보다 많이 낮으신 분입니다. 치졸하고 비열하신분이란말입니다." "..아비한테 할 수 있는 말이더냐 그런 말이?" "세상에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부모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자식이 맞긴 한겁니까?" "아프리카에 있는 호랑이는 일부러 자기 새끼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다더구나. 그 호랑이와 내 마음이 같다면 이해해주겠니?" "아니요. 그건 아버지의 마음을 좋게 감싸는 포장일뿐이니까요. 이 결혼..제대로 될지 안될진 끝까지 두고 보셔야할겁니다. 저도 이렇게 물러나진 않아요. 저는 누구처럼 착하질 못해서 남의 행복 같은거 따질 순 없거든요. 끝까지 해보죠." 아버지가 뒤에서 큰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 소리는 무시한채 그대로 회장실 밖으로 나와 어제 재신이형과 같이 갔던 휴게실로 가 커다란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층이 워낙 높아서 그저 한강과 여러 대교들만 큼지막하게 보일뿐 세세한건 안보였지만 정말 여름 하늘답게 파랗고 높은 하늘을 보던 나는 유리창 앞에 있는 갈색의 상자 같은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곳에 앉아서 하늘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남들은 대기업 회장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들 푸념하듯 말하지만, 나도 재벌 2세여서 있는돈 없는 돈 펑펑 쓰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회사에서 잘릴걱정없이 아버지 빽으로 회사 다니고 싶다고들 쉽게쉽게 말하지만 한번이라도 내 삶을 겪어보면 알거다.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제일 행복한 삶은 그 누구처럼 평범한 삶이란걸. 평범한게 일반적인게 가장 어렵고 가장 부러운 거였다 나한텐. "..보고싶어죽겠네 진짜." "뭐하냐 청승맞게." 내가 가만히 앉아서 하늘만 빤히 바라보자 언제 왔는지 재신이형이 내 어깨를 팍 치며 내 발근처에 자리를 잡고 내 반대쪽에 앉아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냥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계속 하늘만 봤다. "하루사이에 폭삭 늙었다." "..늙을만하지. 이러고 계속 살아야되냐 형?" "그럴지도." "..나는 정말 지난 오년이 진짜 너무 좋았다? 태어나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꼽을거야. 정말 뭐 특별하게 지낸건 아니었는데..딱 남들처럼 지냈는데..역시 평범한게 제일 좋은거라는말이 맞나봐. 그치? 솔직히 형도 이런 집안에 태어나서..남들같이는 못살잖아. 근데 그런 사람들은 우리같은 사람이 되려고 혈안이 되어있으니.. 얼마나 좆같은 일이야 이게. 그치?" 나는 너무 답답해서 넥타이를 풀어 손에 쥐고는 단추까지 풀어버렸다. 왜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모르겠다. 마음같아선 산소통을 쥐고 다니고 싶을정도다.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건지 생각해둔건?" "답이 없는 문제라는건 형도 알잖아. 오늘이면 그여자 한국 들어온다는데..그럼 내일쯤 만나게되지 않을까? 하..." "형으로서 뭐라고 얘기를 해줘야될텐데..할말이 없다 진짜. 할말이. 이게..상식적으로 말이되는 소리는 아니잖아?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냐?" "몰라. 아버지 시다바리지뭐. 이따 기자들 올테니까 따라내려오래. 그다음엔 뭘 할지 내가 알게뭐야. 어제도 새벽에 들어갔어. 어제가 아니지, 오늘 새벽에 집에 들어갔어. 그래서 애 얼굴 잠깐 보고 나와서 오늘도 또 하루종일.." "아니 대체 어떤앤데? 사진 있음 좀 보여줘봐. 천하의 윤두준이 아주 홀딱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나오는 사람이?"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메인 화면을 형에게 보여줬다. 예전에 제주도 갔을때 요섭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 귀엽게 나온 사진이라 배경화면으로 해놓은지도 꽤 됐는데 질리지가 않았다. "귀엽네 진짜. 얘도 인기 많지?" "당연하지. 맨날 번호 따이고 다니는거 같애. 내가 정신 팔면 안되는데.." "다른 사진은 또 없냐?" "앨범 들어가면 잔뜩 있어. 걔가 찍어놓은 사진." 요섭이를 보는지 형은 그냥 웃으면서 핸드폰을 바라봤고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싱글싱글 웃었고 아버지의 비서가 내려와 나를 부르는 바람에 나는 커피 한잔도 마시지도 못한채 서둘러 올라가야만 했다. "이제 곧 내려갈거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표정관리 하면서 내 옆에 있어. 그런 다음 차에 올라타면 한일모직으로 갈거다. 가서 직원들한테 니 얼굴을 알려. 니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건지 암묵적으로 말하란뜻이다." 나는 대답 대신 먼저 회장실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내 행동이 영 마음에 안든다는 눈빛이 역력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아버지 비위에 맞춰가면서 알랑방귀를 뀌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한들 나한테 달라지는게 없다면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는게 속이라도 편하지 않겠는가. 1층 로비로 내려가니 정말 어마어마한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체 뭣때문에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별 일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저 나랑 아버지가 로비를 나서는것 그거 하나 찍겠다고 왔다는 자체가 참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지금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있는 윤상우공화국 같았다. 지시 하나 내렸다고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대동할만큼의 능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의 아들인 나. 정말...새삼 하나하나 모든게 다 놀라웠다. 오년동안 잊고 지냈던 내 지위니 명예니 뭐 그딴거 다 없어진줄 알았는데 이제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잊고살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던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할 어떤것들이. 기자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나와 아버지에게 쉴새없이 질문들을 늘어놓았지만 아버지와 나는 입을 꾹 다문채 몇걸음 되지도 않는데 사람들 때문에 밀려서 더뎌진 걸음으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이윽고 바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고 그제야 숨을 쉰 나는 뒷자석에 기대었다. "앞으로 이런일은 수도없이 많을거다. 벌써 지친건 아니겠지?" "익숙하지 않은 일입니다." "익숙해질거다. 한일모직 갔다가 태강전자에도 갈거다. 오늘 전체적으로 모든 라인에 니 얼굴을 알리려고 도는거니까 행동 똑바로 해. 행여나 찡그린 표정같은건 짓지 말고." "내일 휴가 주세요." "뭘했다고 휴가야?" "주시던 안주시던 상관없이 저 내일 안나옵니다. 연락하지마세요." 내 말에 아버진 정말로 너무 너무 맘에 안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셨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아마 오늘도 이른시간엔 집에 못들어 갈 것 같고, 새벽에나 들어갈 것 같은데.. 내일만큼은 요섭이랑 데이트라도 해야될 것 같다.오늘 양승혜가 오는 날이라니까...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라고 보채실 분이었다. 그럴순 없었다. 나도 숨 좀 쉬고 싶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걸로 대신했다. "그 어디다 내놔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너무 자랑스러웠던 니가 그런 허물을 가졌다는걸 인정할 수가 없었어. 만약 니가 그런 취향이란걸 나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어쩌면 난 너에게 지금 결혼하라고 재촉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니 말대로 양의원 딸을 니 신붓감으로 고른 이유는..어떤 선택을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이고, 아비된 입장으로서 니가 좀 덜 힘들길 바랐다." "안타깝지만 그게 더 저를 힘들게 하신것 같네요." "어차피 넌 누군가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너는 영영 그 아일 보지 못하지않니? 난 너에게 계속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기회라는 말이 어울리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주고 싶었단 얘기다. 비록 매형 처남 관계라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않니. 최소한 그 아이의 소식을 알수는 있을테니까 말이다." "고양이 쥐생각하시네요. 근데..생각 하지 마시질 그러셨어요." "내 생각이 짧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그렇고 양기태야말로 내 말을 받들어 모실 최고의 심복이니까 말이다. 내 마음대로 쥐고 흔들기엔 딱 돈에 약한 그 사람이 제격이지. 그래서 그런거다. 니 말대로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 힘들게 만들겠니. 그 점 만큼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투에 감정을 담지 않으셨다. 일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라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준다고해서 내가 감동을 받거나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냥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를 듣는것과 마찬가지로 들렸으니까.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는 뭐죠?" "...자식한테 오해 받고 싶지 않은 아비의 마음이다." "...그래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알고 있다. 너한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단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 아버지의 말에 나는 그냥 내가 앉은 쪽 창문으로 시선을 던져버렸다. 더 심란해졌다. 그냥 모든 원망의 화살을 다 아버지한테 돌려버리고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하려고 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내 손에 쥐어진 이 화살은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냥 여전히 아버진 나한테 나쁜 사람이고 악역이어만 하는데...또다시 생각이 복잡해졌다. - 역시 아버지가 몸 담고 있는 회사가 제일 큰 규모의 회사였는지, 몇분 걸리지 않아 도착한 한일모직은 그냥 일반 회사와 같은 규모였다. 요즘 뭐 새로운 브랜드 런칭을 앞두고 있는지 직원들이 죄다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브랜드마다 층이 달라서 거의 회사속 다른 회사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한일모직이 갖고 있는 라인은 아동복부터 남성복, 여성복으로 꽤 다양했고 여기서 벌어들이는 수입 자체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직원들은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꼬박꼬박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나는 괜히 그런 대접을 받는게 너무 민망해서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됐다. 하지만 인사 받는 것에 익숙한 아버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며 브랜드의 총 책임자에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들으며 어떤 회의실로 들어갔다. DIVIO 라는 남성복 브랜드를 런칭할 계획인지 커다란 PPT자료를 스크린에 띄운 누가 봐도 커리어우먼이라고 할 정도로 날카롭게 생긴 여자가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고 나는 내 앞에 놓여진 자료를 뒤적거리며 무관심하게 쳐다봤다. 사실 지금 내 신경은 온통 하루종일 연락도 못했던 요섭이한테 쏠려있었고, 그 다음으론 부족한 잠때문에 자꾸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려 거기에 신경이 쏠려있었다.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르면 7월 초쯤에 런칭쇼를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준비가 잘 되어 가고 있는것 같네. 앞으로 좀 더 수고해줬음 해요." 아버진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갔고 나도 또 쫄레쫄레 쫓아갔다. 언제까지 이런 신하 생활을 해야되는건지 알순 없었지만 아버지 말대로 뭐 내 얼굴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가는 거라니 그냥 참고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내가 원하진 않았더라도 나때문에 가는거라는데. "무뚝뚝한 표정 말고 편안한 표정을 지어." 나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언제 끝나는지 그것만 기대했다. 드디어 1층으로 내려가 마침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고 타자마자 나는 한숨부터 흘렸다. "너무 피곤해보이는구나. 집으로 가자." "...그럼 거기서 뭐합니까?" "쉬어라." "그럼 제 집으로..." "거긴..안돼. 박비서. 우리집으로 가지." 뭐 지금은 어디라도 좋았다. 당장 자고 싶었으니까. "들어가서 쉬어라." 나를 집 앞에 내려준 뒤 또 어디를 가는건지 차를 타고 가는 아버지께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바로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잠깐만 눈만 붙이고선 우리 집으로 가야될 것 같아 옷도 벗지 않은 채 누워 버렸다. 그러고보니 차는 회사에 있는 것 같은데....아휴. 요즘들어선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는 사람 같다. * 팟-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방안은 온통 깜깜했다. 이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니 12:12 AM 이었고 일단 이 시간에라도 요섭이는 아직까지도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니, 사실 집으로 들어간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안올 녀석이 아니었기때문에 나는 집에 아버지가 들어 온 것 같아 고양이마냥 살금 살금 내려가 정말 다행히도 집 앞을 지나려던 택시를 잡아탔고 밤이라 길이 막히지 않아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 할 수 있었다. 삑삑-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가니 요섭이는 없었다. 이렇게 빈 집에 들어오는게 맥빠지는 일인줄은 몰랐다. 요섭이가 이 집에서 살기 전에만 해도 난 항상 빈집에, 그리고 이렇게 어두운 집에 혼자 들어왔었는데 그땐 정말 하나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역시 사람이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티가 난다는게 딱 맞는말이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바로 내 방으로 향해 더 맥 빠지는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한켠에 쭈그리고 누워버렸다. 너무 휑했다. 마음도 집도 다. 요섭이가 있어야 되는데..얘도 지금 지 누나와서 바쁜가보다. 나는 역시 그래도 내 집이 너무 좋아서 너무 익숙한 향기에 이불에 코를 박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끼익-하고 열리는 방문소리에 나는 바람에 열렸나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단번에 그게 누군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올 뻔했다. 너무 그리웠던 사람이라, 너무 힘들고 지쳐서 쓰러지려던 순간인데 딱 나를 위해 온 사람인 것 같아 너무 반가워서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 그냥 확 바람 피워보릴까보다. 나 좋다는 사람들 널리고 깔렸는데..윤두준 너보다 잘난 사람도 엄청 많아!!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연락도 안하는 사람 죽자고 기다리면서..." 요섭이의 투정어린 말투에 나는 언제 피곤했냐는 듯, 언제 기분이 좋지 않았냐는 듯 다시 온 몸에 기운이 돌았다. 역시 양요섭이 있어야 윤두준이 있는가보다. 내가 인기척을 하자 엄청 놀란 요섭인 또 울어버렸다. 내가 요섭일 꽉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는데 요섭인 정말 아기처럼 울었다. 그동안 내 연락 기다리느라 속 좀 상했는지 계속 툴툴 대기는 해도 내가 있어서 반가운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무엇보다 보고싶었다 너무너무. 그래서 나는 요섭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아이를 탐했다. 어쩌면 내가 요섭이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사실 우리는 관계를 자주 맺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앞으로 또 언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그것도 미지수였고 무엇보다 지금 나한테 벌어진 일이 너무 시한폭탄과도 같아서 요섭이도 눈이랑 귀가 있는데..눈치 채는건 한순간일거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시간이 없단 뜻이었다. 아버지 또한 우리의 관계를 인정해주시지 않는 마당에.. 나는 그래서 너무 급했다.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인데도 나는 자꾸만 급하고 급했다. 그래서 내 손은 지나치게 서두르며 요섭이의 몸을 탐했고 점점 그 안으로 내 정신도 빠져들었다. - 우리는 다음날 아침, 서울 구경을 나갔다. 근데 요섭인..분명 서울에서 태어난 애가 맞는데도 왜이렇게 안와본데가 많은지 외국인들 조차도 신기해 하지 않는 인사동에서 계속 팔랑거리며 뛰어다니는데 여념이 없었다. 뭐 그렇게 신기하고 재밌는지 꼭 다섯살짜리 꼬마애마냥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녔다. 그런 애를 쫓아다니는 나도 덩달아 힘이 들었지만 좋아하는 요섭일 보니까 그냥 행복했다. 더워서 땀도 났지만 요 며칠간 나한테 서운했던거 많을텐데도 쨍쨍하게 비추는 햇빛 밑으로 유난히 반짝거리는 금발머리를 하고서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요섭일 보면서 가슴 한켠이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한건. 저 이쁜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것. 그거 딱 하나였다. 내가 뭔가를 위해 산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음을 알게 해주는 단 하나의 이유가 양요섭이었기때문에 만약 요섭이가 없어져버리면 나는 예전에 현우가 내 앞에서 사라졌던것 그 이상의 허망함에 빠져버릴것이 뻔했다. 현우 이후로 겨우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현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양요섭이므로 나는 이 아이를 죽어도 놓을 순 없었다. 정말..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난 후 요섭이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한다 해도 나는 절대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참 이기적인 말이지만 나도 살고 싶었으니까, 어쩔수가 없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말?" "아무거나. 하고싶은말...없어?" "...없어." 사실 갈등했다. 너무나도 많이. 말을 해야하는건가, 그래 말을 해야된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얘길 듣는것도 요섭이가 먼저여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기때문일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요섭이가 내 곁에서 떠날까봐 그게 무서웠던 걸까. 글쎄. 그리고 남산에 도착해서 나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으로 요섭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데이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일 없다며 내 스스로에게 계속 되새겨봐도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불안감이 나를 휩싸고 돌았다. 그리고 나와 요섭인 남산에선 모든 커플들이 다 한다던 자물쇠 잠그기를 하기 위해서 자물쇠를 사다가 네임펜으로 적었다. [나만 믿어줘.] 지금 나한텐 이 말이 제일 절실한 말이었다. 요섭이의 믿음이 없다면 나한테 모든건 다 의미없는 일이었으니까. 요섭이가 흔들리지만 않으면 된다. 정말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이렇게 착하고 여린 애는 반드시 흔들릴거다. 이럴때면 요섭이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으면, 요섭이가 조금만 더 나빴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늘 너무 착한 아이라 나는 너무 두려웠다. 이런 아이를 내 손에서 떠나게 만들어버릴까봐. 마지막으로 한강 둔치에 왔을때의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핸드폰에선 진동이 계속 울렸지만 그냥 핸드폰을 꺼버리고 요섭이와의 시간에만 집중했다. 아마 이따 집에 들어가면 당장 호출될 것 같은 예감이었지만 분명 어제 쉴거라고 했으니까 아버지도 어느정도는 감안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뭐 그건 지금 문제가 아니고. "..아..누나..는 왔고?" "누나? 왔지!! 엄청 이뻐졌다? 아!! 내가 사진 챙겨왔어!!!! 여기 지갑에......여기있다!!" 양승혜가 이렇게 생겼구나. 이쁜건 모르겠는데 그냥 양요섭이랑 똑같이 생겼다는건 알 수 있었다. 그냥 양요섭 얼굴에 조금 더 갸날픈 얼굴 선에 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요섭이만 지키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진을 보니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양승혜가 너무 요섭이랑 닮아버려서 만약 이 여자가 내 앞에서 울면 양요섭이 우는걸로 착각해버릴 것 같아서, 이 여자가 내 앞에서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면 세차게 뒤 돌아 서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안되는데..너무 닮아버렸다 이 남매가. "..만약에..누나랑 결혼하는 사람이 누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본체만체하고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내가. 못할거같지? 사람 죽이는거..그게 별건가? 누나 눈에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리게하면, 그 순간 진짜..나 빡돌아서 뭔짓 할지 나도 몰라. 우리 누나를 두고 딴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 자체도 말이 안되지만, 설령 그렇다하면 진짜 죽여버릴거야. 감히..." "..좋겠네 니네 누난. 그렇게 헌신적으로 지켜주는 사람도 있고. 부럽다." 부러웠다. 양요섭의 믿음을 받는 양승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양요섭은 양승혜의 편을 들거라는걸,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몸으로 느껴지니 나는 정말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약한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그저 원망스럽고 분노할 뿐이었다. "나도 형 지킬 수 있어! 나도 형 안힘들게, 안아프게 지켜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줄게." "..지금..도 나 많이 힘든데.." "..뭐라고? 안들려. 다시 말해봐." 나는 그대로 요섭이의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남들이 지나가건, 쳐다보건 상관없이 그냥 요섭이를 꽉 잡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워낙 이런 트인 공간에서의 스킨쉽을 싫어하는 요섭이지만 웬일인지 가만히 있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힘들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치유가 되는 것 같다. 나한테 충전기는 양요섭이구나 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어렴풋하게 웃었다. 언제 이렇게나 많이 양요섭한테 물들어버린건지 알 수가 없다. 맨처음 요섭이를 봤을땐 마냥 아이같고 마냥 귀여운 꼬마였는데..물론 그래서 첫눈에 반해버린거지만 어쨌든. 그때도 이런 금발머리를 하고서 유난히 동그란 갈색 눈동자로 날 빤히 바라보았었다 지금처럼. 예나 지금이나 어느 것 하나 변한것 없는데 내 주변 상황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들어가기 싫다고 땡깡 부리는 요섭이를 겨우겨우 집 앞에다 바래다 주고 집 앞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집으로 올라갔다. 요섭이가 없는 집에 들어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발걸음에 힘이 쭉쭉 빠져버렸다. 그냥 오랜만에 준형이네나 가서 자고 올까..하는 생각을 하며 도어를 열고 집에 들어갔다. "..뭐야." 현관문엔 웬 남자 구두 두켤레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올 사람이 없는데..........아. "아무 말씀도 없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시는거 반갑지 않습니다." "..참 잘도 지냈구나. 지난 오년동안." 또다시 숨이 턱턱 막혀 나는 넥타이를 풀어 손에 들고 거실로 가자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소파 바로 옆 서랍장 위에 꽃힌 나와 요섭이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펼쳐보셨고 나는 당장 다가가 그 앨범을 손에서 빼앗아 들었다. 이에 옆에 있던, 아버지를 늘 모시고 다니는 비서가 나에게 한걸음 바짝 다가왔지만 아버지가 손으로 살짝 저지하자 다시 묵묵하게 서 있었다. "그래..뭐 이런 추억쯤이야 갖고 있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으마."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겁니까." "내일 2시까지 힐튼호텔 라운지로 와." "뭡니까." "승혜양과 만날 때가 되지 않았니. 약속 잡았으니까 늦지 않게 갔으면 한다. 숙녀분을 기다리게 하는건 매너가 아니니까 말이다." 앨범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내 손을 보시던 아버진 피식 하고 웃더니 내 앞에 다가왔다. "그렇게 분하니? 몸이 떨릴만큼?" "...정말 싫습니다." "그렇게 싫고 그렇게 분하면 이 결혼, 안될 수 있는 방법은 니 나름대로 찾아봐. 내 입을 뻥긋도 못하게 할 그 방법을 찾아보란말이다. 니가 그럴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두번다신 아무말도 하지 않으마." "..양승혜가 절 싫다고 하시면..어쩔겁니까?" "....글쎄다. 그럴일..없을거라 생각하는데. 그럼 내일 두시까지 호텔 앞에서 니가 오나 안오나 보겠다. 그 다음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궁금하면 안와도 좋고." 아버진 내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더니 그대로 집에서 나갔고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소파에 주저 앉아버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거다. 생각만 했던 그 일이, 그 끔찍하리만치 더러운 그 일이 드디어 슬슬 시작된거다. 조금씩 조금씩. #44. 윤두준 번외2 01:50 pm 호텔 라운지에 들어서서 나는 잠시 잠깐 망설였다. 그냥 이대로 뒤를 돌아서 가버릴까 하다가도 아버지의 그 엄포가 무서웠고, 들어가서 테이블에 앉자니 아무것도 모르는 요섭이를 두고 바람이라도 피는 것 같은 죄책감에 나는 몇초간 서성였다. "예약하셨습니까?" "아. 네. 윤두준이요." 직원이 와서 안내를 해줘서야 나는 창가쪽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냥 차라리 이 여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이 여자가 내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으면 하고 바랐다. 이제 방법은 그거 밖에 없었으니까. 듣기로는 양의원이 딸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고 했으니까, 아마 딸이 이 결혼이 싫다고 반항하면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희망 1%에 내 마음을 걸어버렸다. 나는 아직 두시가 안된 시간에 멍때리기는 민망해서 그냥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요섭이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스테인리스로 된 꽃병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본 나는, 내가 어느새 웃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양요섭 얼굴만 봐도 이렇게 웃을 수가 있다니, 그저 사람의 얼굴을 본건데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건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 "...저.." 요섭이가 눈 옆에다 브이를 그리고 뿌-하고 있는 사진에 풉-하고 웃던 찰나에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고 나는 단번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고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요섭이랑 무슨 데칼코마니라도 해놨나, 완전 쏙 빼닮은 양승혜의 얼굴을 본 나는 순간 양요섭이 내 앞에 있다는 착각이 일정도로 정신이 멍해져버렸다. "윤두준..씨?" "아. 네. 앉으시죠." 당연히 이런 자리에선 남자가 일어나서 여자가 앉을 의자를 살짝 빼서 매너를 보여야한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이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앉으라며 정중히 손짓한다음 앉아버렸고 그런 내 태도에 역시나 당황했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저는 미처 사진은 보지 못하고 나왔는데..되게 잘생기셨네요." "아닙니다." "제 사진..미리 보고 나오셨어요?" "네." "아...그러셨구나..아, 차 시키실까요?" 단답형인 내 대답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살짝 허둥대는게 보였다. 양요섭 누나가 맞긴 한지, 당황하면 괜히 말 돌리고 허둥대는게 딱 양요섭이랑 똑같았다. "뭐 드시겠어요?" "카페모카요." "아. 카페모카하나 바닐라라떼 하나요." 주문을 하는 양승혜를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양승혜는 부담스러웠는지 내 얼굴을 살짝 보더니 눈길을 피해버렸다. 눈이 크고 눈동자가 갈색이라는건 너무 똑같이 닮은 남매다. 정말 지나치게 닮아서 생각했던것보다 더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이여자한테 완전 매너꽝으로 찍혀야되는데..어쩐지 잘해주게 될 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이여자가 요섭이 누나여서가 아니라, 양승혜가 양요섭과 너무 닮아서 이 여자가 상처받은 눈을 하면 요섭이가 상처받은것 같이 보일까봐였다. "태강그룹 윤상우회장님 아드님이라는건 들었는데..되게 그런 위치에 걸맞지 않게 잘생기셔서..좀 놀랍네요." "그런위치와 생긴건 무슨상관이죠?" "아니..대부분 그렇게 고위층에 있으면..외모가 그닥 준수하진 않지 않아요?" "저도 준수하진 않습니다." "아뇨. 준수라기보단 미남이시죠. 되게 훤칠하게 잘생기셔서..." 아무래도 첫번째 작전은 실패한 느낌이었다. 왜 나보고 잘생겼다면서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건지.... "많이 닮았네요. 제가 아는 사람이랑." "..아 정말요? 누구 닮았다는 소린 처음 들어보는데..실례가 아니라면..여쭤봐도 될까요?" "..그냥..있어요. 제가 유난히 아끼는 사람." "아...그렇군요...아, 대학은 어디 나오셨어요?" "연대 경영요." "와, 공부도 잘하시고..운동도 되게 잘하시죠? 그럼 못하는게 뭐에요 두준씨는?" 저렇게 처음부터 친밀하게 나오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와서 친한척 하는거, 아부떠는거, 알랑방귀뀌는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들인데 그중에 양승혜가 벌써 몇개를 하고 있었다. 정말 정이 안가는 여자다 끔찍하게도. 저렇게도 양요섭이랑 닮았으면서 성격은 저렇게 다를수가 있는건지.. "못하는거 많습니다." "저는..진짜 잘하는게 없거든요..요리도 그렇고...공부도 그렇고..." "그건 그렇고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죠." "...네? 벌써..아직 시간이 이렇게 이른데.." "회사에 들어가봐야 될 것 같아서요." 내가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말하자 양승혜는 서운한모양인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물컵만 만지작댔다. 사실 회사일이라는건 다 거짓이었다. 아버진 오늘 양승혜와 자리를 가지라며 하루종일 시간을 빼주셨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런 귀중한 시간을 이 여자 앞에서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오랜만에 준형이네 집에나 가볼까 싶다. "아, 동생분께 제 얘기하실땐 제 이름이 아니라 준섭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줬으면해요." "왜..왜죠?" "아, 준섭이라는 이름은 어렸을때 썼던 이름인데..그냥 뭐..딱히 이유는 없는데, 싫으시면 안그러셔도돼요." "아니에요! 뭐 그게 어려운일이라고..아 어렸을때 이름이 준섭이었구나..그 이름도 되게 이쁘네요! 두준이라는 이름이 더 괜찮은 것 같지만..." 양승혜는 싱긋 웃으며 커피를 조용히 마셨고 나는 그 미소에 순간 요섭이가 겹쳐보여 순간 멍해져버렸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건 변함없이 양승혜. 사실 준섭이라는 이름은 별 뜻 없는 이름이다. 어렸을때의 이름일리 없단 뜻이다. 그냥 두준의 준, 요섭의 섭 자를 한글자씩 따서 만든 이름인데, 이렇게 소개해달라고 한 이윤 요섭이가 그래도 최대한 이 얘기를 늦게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말 나중에 그것도 다른이의 입으로 이 얘기를 듣는다면 아마 요섭이는 충격에 빠져 나를 보려하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그래도...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들었으면 했다. 그 안에 내가 해결할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모든건 참 마음같지가 않다. 그래서 어려운가보다. "동생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쪽한테?" "...요섭이요? 마냥 착하고..이쁘고..귀여운애죠. 정말 너무너무 착해서, 자기 말고 남밖엔 생각할 줄 몰라요. 특히 제가 뭐 잘해준것도 없는데..마냥 잘해주고..정말 저는 여태껏 모든 남자들이 다 요섭이같은 줄 알았어요. 항상 걱정해주고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그런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근데요?" "..두준씬..약간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서..좀 당황스럽다고 해야하나.." "싫으시면 그냥 나가셔도 됩니다. 기분 상하거나 그런일 절대 없을거고..." "아.아뇨. 싫다는게 아니라..그냥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운거에요! 절대 싫지않아요. 오히려 좋은데..." 좋다면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양승혜의 모습에 나는 내 마지막 작전조차 물거품이 되어버린것 같다는 직감에 속이 타서 물을 들이켰다. 어쩜 남매가 보는 눈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건지 정말 미친듯이 닮아있는 남매다. 아주 끔찍하고 괴롭게 닮은 남매란 뜻이다. "그런 동생 둬서 좋겠어요. 저는 혼자라서 그런 동생..갖고 싶은데." "정말 좋아요. 제가 해줄 수 있는거라면 그게 뭐든지 간에 다 해주고 싶어요." "정말..다 해주실 수 있어요? 다? 그 어떤거라도?" "그럼요. 요섭이를 위한거라면..뭔들 못하겠어요 제가." "....참...똑같네요...참.." "네? 뭐라고 하셨는지..아 잘 안들려서.." 나는 대답대신 그냥 커피잔을 들고 바깥을 바라봤다. 한여름이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는듯 사람들의 옷차림은 다 짧고 얇았으며 차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그냥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여기는 엄청나게 시원한데도 찜통같이 더운 밖을 보니 나도 힘이 든 것 같았다. 아니면 이 자리가 버티기 힘든건가.. "아, 제가 일이 있어서. 집까지 모셔다드려야되는데 바빠서..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네?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바빠서.." 나는 반도 비우지 못한 차를 내버려두고 빌지를 들고 가서 계산 한 뒤 뭐라고 나한테 하고싶은데 말은 못하겠는지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앉아있는 양승혜를 보며 살짝 목례를 한 뒤 그대로 답답했던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버렸다. 아마 이 소식을 듣는다면 아버진 뒷목잡고 경을 치실게 뻔했지만 정말 저 여자 앞에 있으면 안그래도 보고 싶은 양요섭이 더 보고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듣던대로, 성격도 생김새도 말투도 행동도 모두 빼다 박았다. 양승혜 양요섭. 아주 기가막힌 데칼코마니 남매다. 난 호텔 현관으로 나가 직원이 미리 가지고 나온 내 차를 운전해 준형이네 집까지 갔다. 여기에 얼마만에 오는건지..요섭이랑 사귀기전엔 정말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었는데, 요섭이와 같이 살게되면서부턴 준형이가 어떻게 사는지 소식조차 드문드문 듣게 되었다. 역시 이래서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하면 우정엔 소홀해지나보다. 딩동- 네시가 살짝 안된 시간인데 벌써 밖에 나갔나 싶어 나는 조용한 집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어놓고 숨을 죽였다. 근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는 두어번 더 초인종을 눌러댔고, 그래도 대답이 없자 현관문을 손바닥으로 시끄럽게 쳐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어 그 바로 옆에 있는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이윽고 탕탕 하는 발걸음 소리가 거칠게 들리고 달칵-하는 소리가 났다. "누구." "잤냐?" "뭐야. 갑자기." 용준형은 자다 일어났는지 하얀 나시티에 트렁크 팬티만 입은채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눈을 비비면서 서있었고 나는 주인이 들어오란말도 안했는데 그냥 무작정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에 준형인 어이가 없었는지 옷을 들춰 배를 벅벅 긁으면서 내 옆구리를 발로 퍽퍽 찔렀다. "뭐야 새꺄.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좀 더운 것 같아 수트 재킷을 벗어 거실에 내동댕이 치고 넥타이마저 풀어버렸다. 그리곤 tv바로 옆에 있는 에어컨을 켜서 18도로 맞춰놓고 다시 누워있던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버렸다. "뭐야 이시간에." "학원 안나갔네?" "어. 오늘 쉬는 날이야. 근데 갑자기 뭐냐고. 요섭인 어따 내팽겨두고 너 혼자왔어? 또 이 수트는 뭐야?" "야. 한번에 하나만 물어. 요섭이....모르겠다. 지금 공부하고 있나...수트는...시발..아버지 때문에."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뭐를 하는지 달그락 거리던 준형이는 얼음이 담긴 물컵을 가지고와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그 물을 원샷한다음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 불렀다? 방학동안 일배우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결혼하래." 풉- 준형이는 물을 먹다가 내 말에 거실에 물을 분무기마냥 뿜어버렸고 나는 더럽다며 거실 바닥에 앉아있는 준형일 발로 밀어버렸고 얘는 입을 닦으며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묻는듯한 눈빛에 나는 알아서 대답했다. "양요섭 누나랑." ".....더위먹었냐?" "이게 더위 먹었어도 할 소리냐? 아 몰라..방금 그 여자 만나고 오는 길이야." "....진짜로? 너 지금 장난하는거 아니고?" "장난이었음 얼마나 좋겠냐 새꺄. 몰라 시발." 내가 그냥 다시 소파에 드러눕자 용준형은 나한테 더 가까이 와서 물었다. "갑자기 웬 결혼? 아니 그것도 왜 하필 요섭이네 누나랑? 뭔데..무슨일 있었던거냐 대체!?!?!?" "나 오년동안 자유시간 받은거잖아. 그게 작년이 끝이었거든. 그래서 뭔 일이 있긴 있겠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불러서는 결혼을 하랍신다. 아무래도 나랑 요섭이 사이를 계속 알고계셨던 모양이야. 그동안 우리가 지냈던 그 모든 걸 사진으로 다 찍어두셨드라. 치밀한인간." "...근데 왜 하필.." "일부러 그러신거래. 어차피 할 결혼, 양요섭 소식도 모르고 살바에야 소식이라도 알면서 살 수 있는데가 낫지 않겠냐고 그러더라. 미친. 당신이나 그런 결혼 해보고 말하라그래. 씨발 이게 말이 되냐?" 내 말에 용준형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계속 입만 벙긋벙긋댔다. 뭔 말을 하고 싶긴 한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듯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고 난 그냥 눈을 감고 그 위에 팔을 올려놨다. "..요섭인..알아?" "아니." "말안했어? 왜?" "..그냥..말하기 싫었어. 말하면 분명히 헤어지자고할게 뻔한데..내가 그꼴을 어떻게 보냐. 일단 어떻게든 내 손에서 해결하려고 애쓰는데..맘같이 안된다 다." "나중에 요섭이가 딴사람 입으로 들으면..걔가 받을 배신감이랑 충격은 어떡할건데?" "그러니까 그 안에 일을 끝내놔야지." 내 말에 용준형은 가만히 한숨을 쉬는게 들렸고 나는 못들은척 하면서 점점 시원해지는 공기를 느꼈다. 양요섭이랑 같이 살다보니까 여름에 에어컨부터 켜는게 버릇이 돼버렸다. 겨울엔 보일러트는게 버릇이었고. "그게 말처럼 쉽냐 새꺄? 방법은 있고?" "없어." "....야. 뭐 어쩌자고. 방법은 없는데 요섭이한테 말은 안했다? 존나 대책없는 새끼네 이거." "그럼 대책있는 니새끼가 한번 말해봐라. 방법이 뭐가 있을지." 내 말에 용준형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곤 어디로 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기척이 느껴졌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맨정신으론 안되겠다." 용준형이 바닥에 뭔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바라보니 맥주 열캔과 안주라곤 땅콩이 고작인 쟁반이 있었고 말없이 바닥에 앉아 맥주캔을 따서 바로 들이부어버리는 용준형의 모습에 나도 그 앞에 앉아 술을 마셔버렸다. 옛날 요섭이랑 같이 있을땐 술을 마실틈 조차도 없었는데 요즘은 참 많이도 부어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어떻디?" "...닮았어. 것도 엄청 많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양요섭인지 양승혠지 구별이 안갈정도로. 그래서 모질게 못하겠드라. 이여자가 나한테 정 못붙이도록 해야되는데..자꾸만 양요섭이 떠올라서..." "..그럼 그냥 깽판쳐." "무슨?" "그여자한테 싫다고 그래. 마음에 안든다고. 그럼 여자도 자존심이 있는데..자기 싫다는 남자 붙잡고 매달리겠냐? 그리고 그정도 스펙 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아무리 태강그룹이라고해도..혼사자리는 세고 셌을텐데." 용준형의 말에 나는 맥주 한캔을 말끔하게 비우고 다른 한캔을 따서 또 마셨다. 역시 괴롭고 생각하고 싶지 않을땐 술만한 약도 없는 것 같다. 원래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라 술자리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자꾸 술이 나를 불렀다. "...보고싶다.." 나는 땅콩 껍질을 대충 손바닥으로 비벼 먹은 다음 용준형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고 준형이는 병신새끼라며 혼자 중얼거리더니 땅콩 갖고 장난만쳤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나는 오랜만에 본 친구 기분을 이딴식으로 만든 것 같아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그래도 너 말고는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그럼 좀 잘 지내던가. 난 니네 진짜..끝까지 갈 줄 알았는데...시발. 너도 참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이야. 현우 그렇게 됐지, 요섭이는 또 니 눈앞에서 놔줘야할 판이지..너는 어떻게 사냐. 어? 무슨 이딴 개같은 운명이 다 있어. 그렇게 잘못하고 살지도 않았는데..참 너무한다." "내가 싫은가보다야. 아님 현우가 질투하는건가..내가 자기 생각 안하고 딴 놈이랑 잘살아서 샘나서." "...현우가 그럴 성격이냐...니 앞길 축복 해줬어도 골백번은 해줬겠다야. 하이고..." 용준형도 나와 마찬가지로 다 먹은 캔을 구겨 던져버리며 또 새로운 캔을 깠고 우리는 그렇게 몇십분동안 말없이 술만 마셔댔다. 나도 안다. 그 누구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다는것을. 그러나 이렇게 말없이 기댈 나무는 필요했다. 내 옆에 용준형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정말로 참. "..야. 안가? 벌써 저녁이다." 어느새 술 먹고 뻗어버렸는지 부시시 눈을 뜨니까 내 옆구리를 발로 차고 있는 용준형이 보였다. "몇시냐..." "일곱시 반."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자야겠다." 나는 내 주변에 다섯개도 넘게 널려있는 캔들을 치우며 자리에서 겨우겨우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고 순간 울렁거리는 속에 뭐 먹은 것도 없었는데 변기통만 붙잡고 속을 게워냈다. 빈속에 술을 먹어서 그런가..미칠듯이 속이 쓰려와서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어느새 내 뒤로 온 용준형이 이 병신새끼야 라면서 내 등을 팍팍 쳐주었다. "지지리 궁상이다. 현우때도 그러더니..몇년이나 됐다고 또 이지랄이야. 너같은 친구도 없을거다. 야. 괜찮아? 좀 일어나봐. 야. 윤두준." 용준형의 말에 나는 괜찮다며 손을 휘저은다음 겨우 일어나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말끔히 세수까지했다. 수염이 거무스름하게 나있는게 너무 보기 싫어서 치약 옆에 있는 쉐이빙 크림을 발라 면도를 했고 술이 깨지도 않았는데 넌 수염이 깎고 싶냐 라며 타박을 주던 준형이는 옆에서 내가 하는걸 말없이 바라봐주었다. "...죽겠다 진짜.." "나중에 요섭이가 알게돼서 길길이 날뛰어도..놔주지마라. 또 평생 후회할 짓 하지말라고. 니 눈앞에서 보낸건 장현우만으로도 충분하니까..어찌됐건간에 잡아. 자존심 같은거 다 버리고 양요섭 하나 잡으라고. 니네둘이 도망쳐서 어디로 가든 말든 나는 니 편이니까..앞으로도 힘들면 와라. 해줄수 있는건 없지만 그래도 니 얘기 다 받아줄테니까." "...새끼...허세부리고있네.." 나는 늘 고마운 준형이에겐 낯간지러워서 고맙단 말조차도 제대로 못했고 그 길로 바로 그의 집에서 나와 우리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직도 술에 취한건지 정신이 알딸딸했다. 내가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건지 자고 있는건지 아주 가끔씩은 헷갈리기도 할정도로말이다. 딩동- 다행히도 무사히 주차를 시키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 섰다. 예전엔 항상 이곳에 양요섭이 있었는데...어느샌가부턴 빈집에 들어가는 내가 너무 낯설었다. 괜히 마음이 휑해서 집에 들어오기도 싫고..뭐 어쨌든간.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에 들어서자 센서등이 환하게 켜졌고 순간 보이는 낯선 구두 두켤레에 내가 집에 잘못들어온건가 하는 착각마저 일었으며 나는 아직도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고선 환히 불이 켜져있는 거실로 다가갔다. "늦었구나." "...뭐하십니까 주인도 없는 집에서." "아주 잘 지냈구나. 생각했던것 그 이상으로. 그러고보니 승혜양과 정말 많이 닮았어." 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는건 나와 요섭이의 추억이 담긴 앨범이었고 나는 당장 다가가 그 앨범을 빼앗아 들었고 아버진 안경을 통해 나를 올려다보시더니 피식 하고 웃으셨다. 말그대로의 비웃음이었다. "이 좋은날 술을 마셨구나." "나가주십시오." "내일 두시, 하얏트 호텔 레스토랑으로 와." 왜냐는 물음 대신 눈빛을 보냈고 아버진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한바퀴를 휘 도시며 대답하셨다. "상견례 자리를 마련했다. 니가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영 불안해서 말야." "아버지!!!!" "나도 이렇게까지 급히 일을 처리하고 싶진 않았지만..니가 날 너무 불안하게 만들기때문에 내가 좀 나서게 되었다." "오늘 만났어요 오늘. 근데 내일이 상견례라구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술이건 잠이건 확 다 달아나버렸고 내 머릿속엔 또다시 분노로 가득차버렸다. "니가 아끼는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면 오지 않아도 좋다. 그아이와 도망이라도 치려거든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니가 힘낭비를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나도 기꺼이 받아는주마. 그러나 그것에 대한 값은 톡톡히 치뤄야할거다. 니 아비..니 손에서 놀아날만큼 어수룩한 사람 아니다. 그럼 간다. 쉬어라." "...너무하십니다. 너무 하신다구요. 아버지 맞으십니까!?" "아버지니까 너한테 이렇게 하는거 아니겠니. 니가 내 자식이 아니었다면 넌 이미..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거다." "...그냥 차라리 그렇게 만드세요. 차라리 그편이 나을테니." "아비 앞에서 할 소리가 있고 못할 소리가 있는거다. 언제까지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닐건지..내가 좀 더 기다려줘야하니? 니 아비 그렇게 인내심이 많진 않다." 아버진 정말 집에서 나가려는지 걸음을 현관문 쪽으로 옮기셨고 나는 앨범을 꽉 쥐고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아버지만 아니었어도....아버지만 아니었어도..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맴돌았고 아버진 구두를 신으며 자기를 따르는 비서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셨다. "내일 두시다. 늦지마." 아버진 그 길로 나가버렸고 나는 또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말 좆같은 일이 내 앞에 아주 스펙타클하게 펼쳐졌다. 내 일이 아니라 남일이었다면 그 다음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할정도로 한치 앞을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선을 봤는데 내일 상견례라는게..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에 미친놈처럼 맥주캔을 들고 냉장고에 기대어 서서 그냥 마냥 웃어댔다. 요섭이와 이 얘기를 나눴다면 뭔가의 방법이 생겼을까, 그래 어쩌면 생겼을수도 있지만 결국 나는 요섭이에게 버려질 것이 뻔했기때문에 말할까 하는 마음은 거둬버렸다. 그리고 내 손에 여전히 들린 앨범을 펼쳐든 나는 환하게 웃는 요섭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티없이 맑은 앤데..내 손에서 내가 직접 울리게 될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 어떤때보다 더 괴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진 못할망정 아프게하고 괴롭혀야한다는게 너무 끔찍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게 그 사람에게 미안할일은 아니라지만 이순간만큼은 너무 미안했다. 내가 이 아이를 차지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따위 더럽고 치사한 일에 연루 되진 않아도 됐을텐데... 나도 모르게 툭-떨어지는 눈물에 서둘러 닦은 뒤 다시 집에서 나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요섭일 보지 않으면 내가 백기 들고 항복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요섭이를 보면서 내 마음을 다잡고 아까 준형이 말대로 자존심 같은거 다 버리고 요섭이 하나만 잡아야했기 때문에 나에겐 충전이 필요했다. - 크고 웅장한 요섭이네 집 앞에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요섭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라도 매일매일 했었어야 했는데..내 연락 참 많이 기다릴텐데 이것저것 미안한게 너무 많았다. 앞으로 미안할 일이 너무 많은데..벌써부터 너무 미안했다. 내가 전화를 하자 헐레벌떡 나온 요섭이는 단번에 내 얼굴을 보고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아까 준형이네 집에서 수염을 정리하고 나왔으니 망정이지.. 아까처럼 그런 추한 꼴을 보였으면 양요섭은 또 눈물바람이었을게 뻔했다.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요섭이도 많이 야위어있었다. 내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이룬건지 한 품에 안는데 예전처럼 꽉 차는 느낌이 아니었다. "...좋다. 하루하루가..너무 힘들었는데..이렇게 너 안고 있으니깐..배터리 충전 되는거 같다." "형..." "나중에..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말해줄게. 지금은..안돼. 나 믿는댔으니까..믿어야돼. 알았지? 아...그냥 평생 이러고 있고 싶다. 아무생각도 안하고..아무것도 안하고...양요섭하고만..." 정말 그랬다. 아무것도 아무생각도 안하고 그냥 계속 이렇게 있고만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요섭이는 그저 내 걱정이 되는지 내 등을 어루만져주며 위로해줬고 이렇게 착한 요섭이를 나는 현우처럼 놓칠수 없다는 다짐이 내 마음 한켠에서 새록새록 자라났다. "..놀러가자. 우리도 부산 가자. 짐 대충 챙겨서..3시까지 서울역으로 와. 알았어?" "..뭐? 아니..." "무조건. 무조건 와. 아니. 짐같은거 필요없으니까..무조건..무조건 3시까지 와. 내가 좀 늦을수도 있는데..늦으면 좀만 기다려줘. 무조건 갈테니까. 몇시가 됐든..갈테니까. 아무데도 가지말고, 서울역으로 와. 알았어?"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내일 상견례자리에 양요섭이 오면..그 다음엔 내가 무슨말을 하더라도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채 피해버릴 양요섭이라는걸 뻔히 알았기때문에 일단 내일은 버텨야했다. 내일 요섭이가 없는 그 자리에서 나는 준형이 말대로 깽판을 칠 생각이었다. 양승혜도 여잔데, 그리고 그 집안도 남들이 무시 못하는 집안인데 그런 집안을 상대로 내가 대놓고 싫다고 거절하면 그쪽 부모님도 언짢을게 뻔했고 우리 아버진 그 자리에선 나한테 뭐라고 못할테고... 그렇게되면 일단 양가에서 오고가는 결혼얘기는 잠깐 멈추게 될 것이었다. 나는 내일 그렇게 해야만했다. 그러려면 그 자리에 요섭인 나타나면 안된다 정말. "..꼭..꼭 와야돼. 나 너랑..놀러가고 싶어. 중간에 누가 만나자고 해도..만나지 말고..서울역으로 와야돼." 이 순간 만큼은 양요섭이 양승혜보다 나를 더 믿어주기를, 나를 더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제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기를...제발 그렇게 될 수 있기를. * 내가 어젯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그 생각은, 내 시나리오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모래성만큼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지금 이 순간, 요섭이가 헐레벌떡 룸 안으로 뛰어들어온 순간 나는 순간 얼음이 된 것처럼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역시나 생각했던대로 양요섭은 나보단 양승혜였던거다. 그렇게 양승혜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나를 뒤늦게 본 요섭이의 표정은 놀람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당황스러움이 아닌 배신감이었다. 그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양요섭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너무 무서워서 저렇게 손까지 벌벌 떠는거라는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정말 이렇게 될거라면 차라리 다 말해버릴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담을 순 없었다. "..죄송한데..잠깐..화장실좀.." 본격적으로 결혼얘기가 오고가자 결국 아까부터 손을 벌벌 떨던 요섭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듣던대로 아버지가 엄하다던데 양의원은 요섭이가 무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제시켰다. 그러나 모든걸 다 꿰뚫고 있는 아버진 정말 놀라울정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요섭이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내 앞에 놓여있는 나이프로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누가 들으면 어디 아버지한테 그런 소리를 하냐며 혀를 내두를수도 있지만 지금의 내 기분은 그정도로 최악이었다. 이렇게 일을 배배 꼬이게 만든 장본인이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다는게..치가 떨렸다. "결혼은..." "아뇨. 이 결혼 말도 안된..." "따님이 참 미인이십니다. 참하고..정말 제 아들놈이 부끄럽군요...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에 아버진 능숙하게 대처했고 나는 덕분에 입이 막혀버려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뛰쳐나간 양요섭이 너무 신경쓰여서 결혼을 파토 내는거고 뭐고 간에 화장실에서 분명 속을 게워내고 있을 양요섭이 눈에 보여 내가 짜놓았던 계획은 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저도 화장실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화장실로 들어갔고 요섭인 역시나 생각처럼 속을 게워냈는지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있었고 내가 요섭일 부르자 요섭인 단번에 굳은 표정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울것같은 눈을 했다. "어떻게 그렇게 감췄어? 나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고..밤엔 나 만나고 낮엔 누나 만나고..그렇게 하면 기분 좋아?" "양요섭."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앞에서, 형 힘든것 같아 병신같이 걱정해주던 모습 봤을때 기분 어땠어? 내가 그냥 마냥 병신 또라이로 보였지?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만약 여기 안왔으면..형 여기서 아주 무사히 상견례 끝내고 나한테로 와서 부산 가서 놀 생각이었어?" "그런거 아니.." "형이 지금 나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그때 물어봤었잖아.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때 없다고 그랬지. 그럼 지금도 형은 할 말 없어야돼. 나한테 무슨 염치로..무슨 말을 하려고? 어쩔수 없었다고? 집안끼리의 일이라 내가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그렇게 비겁한 변명하려고? 그래놓고 형 믿으라고 하면..내가 형 믿을 수 있을 것 같애? 내가 바보 천치 또라이도 아니고.. 상황이 이딴식으로 개같이 흘러가는데..그냥 무작정 형 믿고 있으라고? 믿으면? 믿으면 뭐가 남는데? 결국 누나랑 형이랑 결혼하는거 밖에 더 봐!?" 이렇게 악에 받친듯한 요섭인 처음 이었다. 배신감을 느낄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차분히 설명하면 내 옆으로 다시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섭이가 실망하고, 느낀 배신감의 크기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한 모양인 것 같았다. "나 만지지마." 나는 어떻게든 설명하려 요섭이의 팔을 잡으려는데 단번에 저렇게 나를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정말 할말을 잃어버렸다. 할말을 잃은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는지 눈 앞이 까맣다못해 하얬다. 그렇게까지 거부반응을 보일줄은 몰랐다. 정말 이럴줄은 몰랐다. "요섭아. 일단 내 말부터.." "형 말? 안들어도 뻔하잖아. 뭐 설마..이 결혼 없었던걸로 하겠다고 하려고? 그럼 상처받는게 누군데? 내가 말했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누나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꼴 절대 못본다고. 우리 누나 눈에서 형 때문에 눈물 한방울이라도 떨어지는거 보는 순간...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안그래도 불안했었다. 양요섭한테 양승혜가 어떤 의미인지는 그 옛날부터 듣고 있었기때문에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내 앞에서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며 눈물을 툭툭 떨궈내며 말하는 요섭이의 모습이 내가 알던 양요섭이 아닌 것 같아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나도 사람인데, 분명 내가 상처받을거라는건 양요섭도 알고 있을텐데도 저렇게 가시 돋힌 말을 툭툭 뱉으며 자기 자신도 상처가 나는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퍼부어댔다. 그렇게 먼저 나가버린 양요섭, 혼자 화장실에 남아버린 나. 미로 속에서 갈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면 막힌길이고, 어디로 가면 열린길인지 분간 조차 할 수가 없었고 한걸음 한걸음 떼면 뗄수록 길을 더 잃어버릴 것 같아 무서워서 이젠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요섭이가 나한테서 사라진다면 내가 하려던 이 모든건 다 소용없는 일이었으니까. 요섭이가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한다면 내가 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칠 이유도, 어떻게든 붙잡고 얘기를 해볼 이유도 없었다. 그저 나한텐 양요섭만이 이유였는데 이유가 사라진다면 결과 또한 사라지는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난 내가 다 잘못한것임을, 내가 어리석은 생각과 아둔한 행동을 했음을 알았지만 화장실 밖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당장 식사 하러 들어가면 상처 받은 양요섭이 눈에 보일텐데..그 앞에다두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양요섭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되면 정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건 다름 아닌 양요섭이었기에 그렇게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는 좆같은 일이란거다 이게. "..데려다줄게. 가자." 겨우 화장실에서 나와 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나오는 요섭이와 마주쳤다. 여름이라 땀도 많이 빼서 힘도 없을텐데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는 요섭일 본 나는 바로 팔을 붙잡는데, 또다시 내 손을 뿌리쳐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도 같이 뿌리쳐진 것 같아 또 멍해져버렸다. "놔. 혼자 갈거야." "고집피우지마. 너 지금 이대로 집에 혼자 갔다간..쓰러져. 안돼." "...상황 파악 좀 해. 형이 주인공인 자리야. 형이 이대로 나 데려다준답시고 나가면..우리 누나 어떡할건데. 들어가서 끝까지 자리 지켜. 나중에..정리하자." 요섭이가 말하는 정리는, 무엇을 의미하는진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지금 당장이라도 알 수 있었다. 보나마나 그 누구보다 소중한 자기 누나를 위해서 말도 안되는 희생을 한다고 하겠지, 그럼 난 또 그걸 막으려고 들테고 우린 수십번도 넘게 싸우고 지치고 힘들어 할게 눈에 선했다. 그렇지만 나는 양요섭이 아무리 날 밀어낸다해도 밀릴 생각은 없었다. 내 손에서, 내 눈앞에서 놔준건 현우만으로도 충분했기때문에. 나는 두번다시 그 고통을 겪어낼 자신이 없었다. 정말 이기적이라는건 알지만, 이 일이 여기까지 올 수 밖에 없었던건 모두 다 요섭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그 모든걸 다 해서라도 요섭이만큼은 놔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 눈에 이뻐보이는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머리가 내 눈에 툭 튀어 보일만큼 사랑스럽고 귀엽고 앙증맞아 보이는데..아직도 요섭이 앞에만 있으면 가슴이 벌컥벌컥 뛰어대는데 어떻게 내가 요섭일 놔줄 수가 있겠는가. 행여나 요섭이가 날 싫다고 때리며 소리쳐도 나는 못놔줄 것 같았다. 보낼 수가 없다. 절대로. 저렇게 내 눈앞에서 안그래도 눈엣가시인 김태경이 다 쓰러져가는 요섭이를 들춰업다시피 해서 데리고 가는 그 모습을 다 보고 있음에도 나는 놓아줄 순 없을 것 같다. 그냥 저 김태경을 때려 눕히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지. 저렇게 나때문에 힘들어해도 나는 못한다. 죽어도. - 정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요섭이 핸드폰이 불이 날정도로 연락하고, 그쪽은 내 연락을 무작정 씹고. 내가 억지로 억지로 만나려고 들면, 또 그렇게 겨우겨우 만나면 한다는 소리는 헤어지자는 소리 뿐. 누나한테 상처 주지 말라는 들리지도 않는 협박 뿐이었다. 어쩜 이렇게도 바보같은지, 나와 양요섭이 이렇게 바보 천치 같을 수가 없었다. 서로가 좋아하는데 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별을 하겠다고 하는건지 나는 양요섭이 마냥 답답했다. 그냥 너 하나만 이기적이면 되는데, 너 하나 그냥 딱 양요섭 너 하나만 생각하면 딱 나오는 결과가 있는데도 요섭인 그걸 보려고 들지 않았다. 자기를 좋아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김태경을 데리고 다니면서 내 신경 박박 긁어놓고 또 주제넘게 김태경이 나한테 조언 아닌 조언을 할때마다 죽이고 싶은거 겨우겨우 참아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오늘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할 날인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도 모자른 시간인데 그런 시간에 요섭인 연락이 없고 요섭이 대신 양승혜와 함께 했다. 나는 작년 오늘, 이렇게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그땐 아..다음 내 생일엔 요섭이랑 뭐 해야지. 라는 생각만 했었는데..역시 사람일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옛말 그른거 하나도 없다. 좆같게도. "생일 정말 축하해요 두준씨." 나와 양승혜는 처음 선본 날 이후로, 꽤나 많이 만났다. 둘이 있다가 요섭이와 눈엣가시같은 김태경과 마주친 적도 있었고 둘이 있다가 요섭이와 같이 차를 탄 적도 있었다. 나는 정말 양승혜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이 눈치 없는 여자를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으나 이 여자가 나한테 호감 있다는걸 지 동생이랑 똑같이 대놓고 내보이면서 자꾸만 만날 약속을 잡았고 자기 누나한테 상처주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양요섭때문에, 행여나 양승혜가 집에 들어가서 또 눈치없이 양요섭 앞에서 나한테 상처받았다며 눈물바람을 해버릴까봐 무서워서 나는 그저 양승혜가 하자는대로 하곤 했다. 물론 만날때마다 어떻게든 같이 있기 싫어 일 핑계를 대며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만나는 것조차도 나에겐 고역이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엔 더더욱. "..아 네." "이거..작지만 선물..준비했어요." 양승혜가 좋은 레스토랑을 안다며 거기로 날 데려가더니 대뜸 쥐어주는건 선물 꾸러미. 받을 이유가 없어서 안받으려고 거절하자 양승혜는 서운하다는 눈빛을 지어보이며 계속 나에게 내밀었고 어쩔 수 없이 그냥 풀어보지도 않고 가방에 넣어버렸다. "..풀어보지도 않으시고..." "집에가서 풀어볼게요. 고마워요." "근데..우리 요섭이랑은 정말 많이 친했던 사이였나봐요. 제가 두준씨 선물 고를때 이것저것 조언..많이 받았거든요." "..조언..이요?" "아, 넥타이를 하려는데 이색깔이 낫니 저색깔이 낫니 물어보기도 하고..어떤 취향인지 물어보니까 생각도 않고 바로바로 대답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둘이 감쪽같이 저 속이구... 저 혼자 바보 된 것 같아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세요? 그렇게 친한 사이였으면서.." 정말 할수만 있다면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목소리만큼은 확연히 달라서 안그래도 찢어죽이고 싶을정도로 미운 사람이 양요섭에 대해서 말하니 정말 더 듣기가 싫었다. 내가 누구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건지 아마 아둔한 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 "근데 요섭인..지금 뭐해요? 같이 생일 축하라도 해주지." "아..요섭이..아침 일찍부터 어디 나가던데요..모르겠어요. 걔때문에 속상해서.. 밥도 잘 안먹고 웃지도 않고..무슨 일이 있는거 같긴한데 말도 안하고 맨날 집에 들어오면 그냥 자기만 하고.. 하루하루 말라가는게 눈에 보여서 안쓰러워 죽겠어요. 대체 왜그러는건지.." "..밥..안먹습니까?" "안먹는게 아니라 그냥 거의 쫄쫄이 굶어요. 배도 안고픈지..얼굴도 반쪽이 돼갖고는..아유 속상해..." 그럴줄 알았다. 안그래도 요즘 볼때마다 야윈게 너무 보기 싫었는데 또 그렇게 밥도 안먹고 그런다니까 짜증도 나서 포크를 내려놓고 물만 마셨고 양승혜는 입으론 동생 걱정 하면서 자긴 밥이 잘도 넘어가는지 고기를 썰어서 입으로 쏙쏙 넣었고 그 꼴이 얼마나 얄미운지 진짜 물을 부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양승혜가 남자였음 줘팼어도 수십번 줘팼을거다. "식사 다 하셨어요?" "아. 네. 속이 좀 안좋네요." "...아..그럼 카페 갈까요? 제가 되게 분위기 좋은 카페..." "시간도 늦었으니까 오늘은 집까지 바래다드릴테니까 집에 들어가세요." "...아..아니에요. 시간도 별로.." "아뇨.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승혜씨도 다 드신거죠? 그럼 일어나죠." 나는 빌지를 들고 가서 계산을 마치고 양승혜는 이렇게 내가 봐도 매너가 꽝인 내가 그래도 좋은지 아쉬운 표정은 드러냈지만 그래도 내가 뒤돌아서자 웃으면서 나를 반겼고 참 남매가 둘다 바보같아서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차장으로 나갔다. 차에 타서 요섭이네 집까지 가는 그 길에도 나는 여전히 마른 요섭이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고 중간에 양승혜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들리지 않아 그냥 대충 알아들은 척 하며 대답만 했다. "아까 카페도 못갔는데..집에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 하시고 가세요. 이번에도 그냥 가신다고 하시면 저 진짜 화낼거에요." 양승혜의 말에..이 집에 들어가면 그래도 요섭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난 거절 하지 않고 들어갔다. 1층 거실에 나를 냅두고 2층으로 올라간 양승혜는 요섭이를 데리고 내려오는 것 대신 무언가에 놀란듯 소리를 질러댔다. "..두..두준씨..잠깐만..요섭이 방으로 좀...요섭이가..요섭이가.." 나는 단번에 양요섭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바로 계단을 뛰어올라가 방으로 튀어들어갔다. 방이 왜이렇게 냉골인지 수트재킷까지 챙겨입은 나조차도 쌀쌀해서 놀랐다. 에어컨을 보니 18도로 맞춰져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질려 죽은 듯 누워있는 양요섭을 본 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 할 수가 있었다. "당장 에어컨 꺼요!!!" 내 뒤에 아무것도 못하고 놀란듯 서있는 양승혜에게 소리쳤고 난 바로 요섭이에게 다가가 양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정말 죽은 것 처럼 몸도 좀 딱딱하고 입술은 하얗다못해 파랗게 질리고 얼굴은 밀가루를 바른 것 처럼 하얬다. 심장이 멎은것처럼 쿵 하고 떨어져내리는 기분이었다. 몇 년전 현우가 내 앞에서 사고를 당했을때보다 백배는 더 두려웠다. "..양요섭!!!!! 정신차려봐!!! 요섭아!!!!!" 내가 어깨를 쥐고 흔들어대도 요섭인 눈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이고 몸이고 너무 차가워서 정말 이대로 있다간 큰일 치를 것 같아 난 바로 요섭일 들춰 업고 내려가 차에 태웠다. 뒷자석에 양승혜도 같이 태운 뒤 네비에 제일 가까운 병원을 찍은 뒤 가차없이 내달렸다. 룸미러로 위태로이 누워있는 양요섭을 본 나는 아무 생각이 안났다. 계속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차가 막힐때면 나는 핸들을 쳐대며 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너무 급한데, 양요섭은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안그래도 요즘 뭐 먹은게 없다니 큰일이 나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는 미친듯이 밟은 탓에 정말 기적과도 같은 시간내에 병원에 도착했고 주차는 생각도 못한채 그대로 다시 들춰업은뒤 응급실로 들어가 빈 침대에 눕혔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양요섭을 봐줄 생각도 안했다. "사람이 다 죽어간다구요!!!!!" "좀 기다리세요!! 그쪽보다 더 먼저온 응급환자도 많은거 안보이십니까!?" 내가 지나가는 의사의 멱살을 잡자 그 의산 신경질적으로 내 주먹을 끌러내리며 다른데로 가버렸고 여전히 아까처럼 죽은 듯 누워있는 양요섭에 난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병원엔 왔지만 아무도 봐주는 사람은 없고 저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끔찍한 생각에 병원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이 병원의 이름. 나는 바로 핸드폰을 찾아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저 두준이요. 아, 지금 아저씨 병원에 왔는데..응급실인데..의사들이 나몰라라해서요. 아저씨가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너무 급한데...네. 응급실이요. 알겠습니다." 이 대학병원은 어렸을때부터 아버지 친구로 잘 알고 지내던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었다.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와서 정말 운이 좋게도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맴돌며 아저씨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고, 정말 빠른시간내에 흰 의사 가운을 차려입은 여전히 젊어보이시는 아저씨가 걸어오셨다. "아저씨!!" "어, 그래. 너 더 잘생겨졌다? 그건 그렇고..이 아이냐?" "네. 에어컨을 틀고 잔 거 같아요. 아무래도 저체온증 같은데..." 이 병원의 원장이 직접 응급실환자를 치료한다는것에 다른 의사들도 우르르 몰려왔고 아까는 보려고 하지도 않더니 아까 내가 멱살을 잡은 의사가 가장 빨리 내 옆으로 와서 자리를 지켰다. 더러운 세상 같으니. "여기는 내가 볼테니 다들 가서 환자들 돌보세요."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다른 의사들은 쭈뼛쭈뼛거리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아저씬 요섭의 눈을 뜨게 해 전등 같은걸로 비춰보며 상태를 체크했고 아주 간단한 체크가 끝나자 옆에 있던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니 말대로 저체온증 맞고..영양실조 기운도 보인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을 수도 있어. 영양분이 없으니 몸에선 당연히 저항능력이 떨어진거고. 정말 드라마에 나오는 것 처럼 십분정도라도 더 늦었음 장담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일단 안심은 해도 되고..링거는 놔줄테니까 다 맞을때까지 좀 기다려라. 입원은..시킬테냐?" "꼭 시켜야돼요?" "그런건 아니지만..안정을 취하려면 병원이 낫지." "아뇨. 그냥 집으로 갈게요. 집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 뭐. 그럼 절대 찬바람 쐬게 하지 말고, 무조건 밥 먹여라. 밖에 나가는거 자제시키고..한동안은 집에만 있게해. 되도록이면 옷 챙겨입게 하고... 그건 그렇고 느이 아버진 여전하지? 그친군 아직도 정정하더구나. 영 몹쓸사람. 알아서 자리 좀 비켜주지 않고.... 아버지한텐 안부 전해드려라. 앞으로 일 있음 부르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고맙긴. 훨씬 잘생겨졌구나." 아저씬 흐뭇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어번 치시더니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가셨고 이윽고 간호사가 요섭의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고 링거를 놔주었다. 이에 양승혜는 그제야 숨을 돌리겠는지 보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고 동시에 나 또한 긴장이 풀려 양승혜 반대쪽에 있는 의자에 주저 앉았다. "...정말..고마워요. 두준씨 아니었음...정말 두준씨 아니었음..." "할일 한겁니다. 고마워 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에요. 제 동생 이렇게 살려주신 은인이신데..." "...아닙니다. 놀라셨을텐데 어디 잠깐 가 계세요. 여긴 제가 볼테니까." 내 말에 양승혜는 아니라며 거절하다가 그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나는 양승혜가 사라지자 사방에 커튼을 친다음 아직도 얼굴 색이 돌아오지 않은 양요섭의 얼굴을 매만졌다. 예전처럼 부드러운 피부가 아니었다. 다크서클은 또 왜이렇게 내려왔는지..영 못생겨졌다. 나쁜놈. "...사람 놀래키는 것도 가지가지다 양요섭 진짜.." 나는 아까 놀랐던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정신이 아찔해져서 요섭의 얼굴을 계속 만지다 다시 의자에 앉아 손을 꽉 잡았다. 요섭이의 손은 아직도 차가웠다. 그래도 슬슬 따뜻해지는 거 같긴 한데... 하여튼 에어컨 병적으로 좋아하다가 일 칠 줄 알았다 양요섭. 정말 십분만 늦었다면 장담 못했다는데.. 그 십분..내가 레스토랑에서 십분만 늦게 나왔어도 벌어질 일이었다는게 나는 믿겨지지가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제일 아끼는 사람이 아프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때의 그 트라우마때문에 남들보다도 더 신경이 날카로워지곤 했다. 이게 남들이 말하는 아킬레스건인지는 몰라도 양요섭이 아픈것 만큼은 내가 참아내질 못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고마워요." "나중엔..고마워하신거..후회하실겁니다." "..네?" "..아닙니다. 요섭이 최대한 밖에 못나가도록 자제시켜주세요. 그리고 옆에 꼭 붙어서 죽이건 밥이건 무조건 먹이시구요. 그래도 지 누나가 주는 거라면 먹기 싫어도 먹을 놈이니까..어떻게든 승혜씨가 책임지고 요섭이 돌봐요. 그쪽 동생이니까. 끔찍하리만큼 아끼는 동생 아닙니까." 내 말에 승혜는 알았다며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선 요섭을 바라봤고 나는 큰 한숨을 쉬며 그대로 요섭의 손을 꽉 쥔채로 침대에 엎드렸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려 진정이 되질 않았기 때문에..정말 예전처럼, 그때 그날 처럼 생일날 큰 선물 받을 뻔했다. 그 무엇보다 제일 끔찍한 선물을 받을 뻔 했다는게 나를 아직도 진정케 하질 못했다. - "고마워요. 배웅 멀리 못하겠네요. 수고하셨어요." "아뇨. 요섭이 잘 돌봐주세요. 가겠습니다." 한시간 반 정도를 병원에서 링거를 맞은 뒤 그대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두꺼운 가디건 하나를 덧 입히고 얇은 이불을 하나 더 갖고와 이중으로 덮게 한 다음 집에서 나왔다. 원래 그 옆에서 돌봐야 하는건 난데도... 나는 이제 떳떳하게 요섭일 돌볼 수 없는 입장이라 씁쓸한 마음을 가득 안고 대문을 열고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김태경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한테 인사를 했고 나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져서 눈썹을 찡긋해버렸다. 이건 맘에 안들때마다 하는 내 버릇 중 하나였는데 어쨌든, 건방지게 나한테 인사를 건네는 김태경의 모습에 나는 그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요섭이 많이 아프니까 니가 옆에서 돌봐줘. 애 찬바람 쐬면 안되니까 밖으로 불러내지 말고. 밥도 잘 안먹는다니까 협박을 해서라도 먹여." "..왜..직접하지 않으시고?" 더럽게 빈정대는 김태경의 모습에 나는 또 주먹이 쥐어졌지만 양요섭이 이런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탓에 일단은 참았다. "너랑 싸울 기분 아니다. 들어가서 나대신 잘 돌봐줘." "...그러죠. 그럼 안녕히." 김태경은 그대로 내 옆을 지나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란듯이 쾅 닫고 들어가버렸고 나는 순간 치밀어오르는 화에 화풀이 할 데가 없어서 꽉 쥔 주먹을 대문 옆 벽에다 쳐버렸다. 그래봐야 아픈건 내 주먹이었지만 그래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저렇게 지금 양요섭이 자기한테 기대고 있다고, 기고만장한 김태경의 꼴은 죽이고 싶을 만큼 짜증났다. 눈치 더럽게 없는 양요섭은 김태경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잘해주니까, 요즘 양요섭이 힘들때니까 그냥 기대고 있는거겠지. 그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분했다. 빈틈을 노려야 된다는 헛소릴 지껄이고, 힘들때 옆에 있어주는건 윤두준이 아니라 김태경 자기 자신이라며 나를 훈계하려 드는 그때 그 모습이 떠올라 나는 분노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요섭이가 아픈 상태니까..일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나중에 김태경이 또 저렇게 눈꼴 사납게 굴면..그땐 나도 장담 못한다. - 어젯밤 그 큰일을 치루고 집에 들어와서 밤새 핸드폰만 쥐고 있다가 겨우 잠에 든거 같은데 역시나 아침에 요섭이에게 전화가 왔다. 순간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말까 했는데 역시나 내 감이 맞았다. 일부러 그런거 아니라며 울먹이는데..나는 또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가 뭐를 위해서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건지, 누구를 지켜주기 위해서 이렇게 이러고 있는건지.. 난 정말 그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이 내가 제일 병신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지금 다들 남 생각만 하고 있는거 아닌가. 지이이잉- 지이이잉- 날 자꾸 피하는 요섭이는 전화를 서둘러 끊어버렸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 "여보세요." 「오늘 회사로 와라.」 "언제는 안갔습니까." 「오늘은 본사로 오지말고 한일모직으로 와. 오늘 런칭쇼가 있을거다. 이번 우리 회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브랜드니까 어떻게든 화려하게 런칭쇼를 해야하니까 제대로 차려입고 와라.」 전화는 그렇게 사무적으로 끊겨버렸고 나는 내가 왜 사는지 그런 멍한 생각을 하다가 기계처럼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다른 수트로 갈아입었다. 내 방 장롱엔 온통 요섭이의 옷으로 가득차있는데, 요섭이 옷으로만 꽉 차서 내 옷은 모조리 다른 방으로 옮겨놨는데 난 또 습관적으로 내방 장롱을 열어재꼈다. 요섭이가 제일 좋아하는 검은색 티셔츠, 맨날 이것만 입냐고 뭐라고 했던 청바지. 모든게 다 그대론데..요섭이가 예전에 공부하던 문제집도 여기 이 방에 있고 같이 누워서 자던 베개도 내 베개 옆에 있는데 정말 이 집에는 그 모든게 다 그대론데..우리의 사이는 여전하지 않았다. 요섭이만 여기에 오면 다 정상인데...그러면 되는데.... 툭- 요섭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들고 있던 나는 그 위에 눈물이 툭 떨어지자 나 혼자 있는데도 쪽팔려서 눈물을 서둘러 닦은 다음 구겨지지 않게 잘 해서 옷을 걸어놓고 장롱 문을 닫아버렸다.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체념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꾸만 내 품에서 달아나려는 요섭이를 잡는것도 조금씩 한계가 느껴졌고 그렇게 죽도록 힘들어하는 요섭이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면서 아이를 잡아야하는건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나와 헤어지겠다고 하는 것 또한 요섭이가 어렵게 어렵게 생각한 결론일텐데, 난 그걸 일방적으로 무시하려 들었다. 너는 나랑 있는게 제일 행복한거라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뭘 걱정하는거냐며 그냥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것이다. 나는 이제 슬슬 현실을 깨달았다. 현실이라고 해서 내가 양승혜와 곱게 결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요섭이가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걸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지 못하고 잡는것도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보내주는 것 또한 사랑이란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여갔다.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외면하고만 있었는데 그것 또한 받아들이는 중이다. 너무 한꺼번에 받아들이면 내 안에서 과부하가 일어날까봐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인정했다. 나로 인해 요섭이가 힘들다면..그건 내 방법이 틀린게 분명한거니까. 나는 그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대충 옷을 입고 내려와 회사로 향했고 아버지가 오라는 한일모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정말 런칭쇼를 하긴 하는건지 직원들이 죄다 옷을 들고 다니면서 거의 뛰다 시피 했고 나는 로비 한가운데에 서서 어디로 갈지를 몰라 우왕좌왕 했다. "여기서 뭐하냐. 가자." 마침 현관 로비를 들어오던 아버지와 마주쳤고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그 옆에 섰다. "어제 박원장한테 전화 받았다. 웬 어린 놈을 병원에 데리고 왔다더구나." "..요섭이가 아팠습니다." "..아직도 그녀석 타령이냐." "...." "됐다. 너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게 되겠지. 니가 있을 자리가 아니란걸." 아버지의 말에 이제 난 화도 나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매번 이런식이었기때문에 나는 다른 직원들 때문에 표정 관리를 하며 예전에 한번 와봤던 기억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서 앉았다. 그 곳엔 예전에 봤던 그 여자가 서 있었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려는 듯 ppt자료를 손보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H라인 스커트를 몸에 피트 되게 입은 여자는 깔끔하게 머리는 하나로 묶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채 유식하다, 엘리트다 이런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다. 개인적으로 저런 여자들을 싫어하는 탓에 나는 그냥 스크린만 응시했고 회의실의 불이 다 꺼지면서 본격적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오늘 저녁에 있을 런칭쇼는 저희가 거의 일년이 넘게 준비했던 프로젝트입니다. 모델도 심혈을 기울여서 캐스팅 했구요, 김태경군이 저희 쪽 모델로 서주기로 했습니다." "..김태경이요!?" "네. 그렇습니다. 이미 모델계에선 촉망받는 인재라 저희가 설득하는데 좀 애를 먹었지만, 이 친구가 이번 런웨이에 서주기만 한다면 저희 브랜드를 알리는건 시간 문제일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디비오는 세련된 남성복이라는 이미지를 세워 평범한 회사원의 양복이 아니라 조금 더 세련미를 추가해 몸에 피트될 수 있게 감각적으로 디자인..." 김태경이라니..내가 아는 김태경이 그 김태경이 맞는건가.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스크린에 뜬 얼굴을 보고나서야 나는 확신했다. 나는 저놈이 뭐하는 놈인가 했는데..저렇게 촉망받는 인재라고 손꼽힐 정도였다니.. 저런 놈이 양요섭 옆에 있다는걸 좋아해야하는건지, 짜증내야되는건지 나는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그 옆에 있어주지 못할거라면, 정말 잘나고 멋있고 좋은 놈이 옆에 있어주는게 낫다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A4용지나 뒤지면서 지루한 듯 자리에 앉았다. 어딜가나 양요섭과 연관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게 끔찍했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김태경 말입니다." "네. 말씁하십쇼." "..김태경 말고는 없습니까?" "요즘 김태경보다 잘나가는 모델은 한국엔 없습니다." 딱잘라 말하는 담당자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놈일줄은 몰랐는데 예상외의 반전이었다. "그럼 이따 쇼 기대하겠네. 우리 회사가 여기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건 자네가 더 잘알겠지. 워낙 실력있는 사람이니까 믿고 있겠네. 그럼." 아버진 그 여자와 악수를 한 뒤 회의실에서 나왔고 바로 1층으로 내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물론 나 또한. "근데 그 모델은 왜 걸고 넘어진거냐?" "...그럴 일이 있습니다." "보나마나 양요섭과 관계된 일이겠지." "....네?" "니가 흥분할 일이 그 녀석과 관계 된 것 밖에 더 있니. 모자란 놈 같으니." 아버지의 질책에도 나는 아랑곳 않고 그냥 창밖만 내다봤다. 이제 정말 여름이 시작이구나 싶을만큼 쨍쨍 비추는 햇빛에 나는 나도모르게 눈을 가려버렸고 차는 소음도 내지 않고 정말 조용하게 도로 위를 질주 했다. "여기서 재신이와 같이 있다가 시간 되면 부를테니까 부르면 내 방으로 오너라." 아버진 그 말을 남기고 30층인 회장실로 올라가셨고 나는 17층에 내려 재신이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똑똑- "네." 형은 여전히 깔끔한 모습을 하고선 책상에 앉아 있었고 내가 얼굴을 내밀자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디갔다왔냐." "한일모직." "아..오늘 무슨 런칭 쇼 있다고 했었나? 그것때문에 회사가 떠들석하다. 뭐 그렇게 대단한 브랜드라고 나원참...그건 그렇고..밤새 얼굴이 야윈거 같다? 뭔 일 있었냐?"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휘저었다. "..양요섭 쓰러져서 응급실 갔다오고..난리도 아니었어." "왜 갑자기?" "걔가 더운거 싫어하고 추운거 싫어하거든. 그래서 여름엔 에어컨 끼고 살고, 겨울엔 보일러랑 히터를 끼고 살아. 근데 어젠 밤새 에어컨을 틀고 잤는지..꽁꽁 얼어서..진짜 하마터면 저세상 갈뻔했다는 소릴 듣는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진짜..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형." 내 말에 형도 놀랐는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냐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럼 오늘은 시간 될때까지 여기서 쉬라며 다시 책상으로 가 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나도 곧 졸업만 하면 저런 진부한 인생을 살거란 생각을 하니 답답해졌다. 정말 그러고보면 지난 오년이 꿀맛같이 행복했던 시간이구나, 라는걸 요즘들어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정말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난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는걸까 라는 생각도 했고. * 직접 와보기도 처음이고 눈으로 보는 것도 처음인 패션쇼장은 정말 말그대로 인산인해였다. TV는 잘 안봤어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연예인들도 많이 온 것 같고 기자들이고 카메라맨이고 하여튼 아주 포토라인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호원들은 얼마나 많은지 진짜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그외 많은 임원분들이 쇼장에 도착한건 쇼가 시작하기 몇분전이었고 나는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도 어둡고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계속 주위만 두리번 거렸다. "....!!!!!!" 그러다 내 눈에 띈건, 어둠속에서 혼자 동떨어져있는 듯 보이는 동글동글한 양요섭이었다. 왜 니가 여기에 있는거냐, 라는 눈빛을 하는데 요섭이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요섭이도 내가 올줄은 몰랐는지 옆에 있는 홍보지를 보며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요섭이 앞을 가로막은 사람 한명. 뒷모습만 봐도 저게 누군지 알 수가 있었다. 김태경 이 망할 개새끼는 분명 찬바람 쐬게 하면 안된다고 당부에 당부를 했건만....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움직이는 것 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관심도 없는 패션쇼가 시작이 되었다. 하얀 조명이 비춰지고 있는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이 옷을 선보였고 나는 모델들보다 저 건너편에 앉아있는 양요섭만 보였다. 어제 죽다 살아온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나온 건지.. 여기는 듣기론 VIP쇼로서 초대권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럼 분명 초대권은 김태경이 줬을 거고..아픈 놈한테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초대권을 내밀었는지.. 안그래도 거절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인 양요섭은 아파도 그냥 나왔을게 뻔했다. 모든게 다 퍼즐 조각 맞추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들어맞춰졌고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화가났다. 몸도 안좋은데 지금 여기서 뭐하는건지. 십오분 정도 이어진 쇼가 끝나고 끝나고 뒷풀이가 있을거라던데 역시 쇼가 끝났는데도 그 누구도 나가지 않고 웅성웅성 지들끼리 모여있었다. 아버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길래 그 틈에 반대 편에 있는 김태경과 같이 있는 요섭이에게 다가갔다. "양요섭." "안녕하세요." 김태경이 하는 인사는 무시했고, 내 신경은 오로지 아플 양요섭에게 꽂혀있었다. "...제정신이야?" "네?" "얘 어제..아팠던 애야. 내가 너한테 지켜달라고 부탁했었던거 같은데..그런 애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 "아..그건.." "양요섭 남의 부탁 거절 못하는 애야. 밤새 죽을뻔했던 애를..." 아직 아픈 얼굴을 하고 있는 양요섭을 보던 나는 김태경에게 퍼부었고 마음 같아선 진짜 여기서 때려 눕히고 싶은걸 주먹만 꽉 쥔채로 겨우겨우 참아냈다. 요즘 같은 인내심으론 보살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형. 아니야. 내가 온다고 그랬어. 얘가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오겠다고 한거야." "가만 있어 넌." "김태경. 니가 그러고도.." "이제..그렇게 관여하실 일 아니지 않나요? 떳떳하게 사랑하는 사람 지켜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래서 저한테 부탁까지 하셨던 분이..저한테 이러시는거 좀..웃긴거 같은데." "김태경!! 너 좀!!" 김태경은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잘나가는 모델이라는거, 한국에서 탑으로 손꼽힐정도로 최고라는건 알겠는데 이런식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덤벼든다더니 딱 그짝으로 달려들면 곤란했다. 왜냐면 아주 치가 떨리게 재수가 없었으니까. 정말 주먹이 날아가려던 찰나, 스탭이 김태경을 불렀고 이런 장에서 큰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아 일단 조용히 주먹을 폈다. 그리고선 김태경이 없는 자리에서 나는 양요섭에게도 퍼부어댔다. "너 미쳤어!? 어제까지만해도 죽을뻔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밖에 나가지 말라는 소리 들었을텐데 왜!!" "괜찮으니까..나온거야. 태경이 말대로..형 이제 나한테 관여하면 안되는 사람이잖아. 신경꺼. 내가 아프던 말던." "너 진짜 말 그런식으로 할래!!!" 양요섭은 나한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러는건지, 아니면 그냥 내뱉는 말이 족족 내 마음에 꽂히는건지 알 순 없었지만 정말 마치 칼을 집어던진 것처럼 너무 아팠다. "..나 형한테 미안한거 너무 많아서 이젠 미안하단 말도 못해. 그러니까 내가 형한테 한것 만큼 형도 나한테 똑같이 해. 못되게 굴고 나쁜 말만 쏙쏙 골라서 해. 왜 그렇게 병신같이 맨날 참고 살아 왜. 그러다 형이 나보다 더 아플것 같애." "그런거 걱정되는 놈이..나한테 이러는거야 너?" 미안하다면서, 너무 미안해서 이젠 미안하단 말도 못한다면서. 아픈건 자기면서 또 내걱정 하고 있는 이 병신같은 양요섭에게 나는 더이상 뭐라고도 못하겠어서 집에 가자며 팔을 잡았는데 난데없이 목걸이 얘기를 꺼냈다. 얼마전 양요섭이 내 목에서 풀어내 도로로 집어던져 산산조각이 난 그 목걸이. 난 그때 거의 패닉이었다. 정말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목걸이에 그냥 아무 생각이 안났던것 같다.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아마 내가 양요섭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도 그게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다. 정말 그렇게까지 할정도로 나와 헤어지겠다는 의지가 강한건가, 그때 처음으로 나는 요섭이의 의지를 알게 되었던 것 같았다. "태경이랑 갈거야." "뭐?" "형 말고 김태경이랑 같이 갈거라고. 형 여기 오는줄 알았음 안왔을거야. 나 안아팠는데 형 보니까 아파. 정말 괜찮았는데 형 보고 나서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터질것 같애. 나 이제 형만 보면 안아프다가도 아파. 이제 형은 나한테 그런 사람이야. 나 더 아프게 하고 싶으면 맨날 나타나고 맨날 찾아와봐." "...너...진짜...못됐다." 다른건 다 좋았는데, 다른건 다 참겠는데.. 이제 더이상 내 옆엔 내가 아니라 김태경이라 말하는 그 모습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김태경이 그렇게 뻔뻔하게 얘기해도, 혼자 김칫국 마시는거라며 생각하려고 했는데 양요섭 조차도 내가 아닌 김태경을 찾아버리면 나는 정말 어디로 가야할지 갈길 잃은 어린 애처럼 혼자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나는 지금 엄마를 잃은 다섯살짜리 꼬마애의 기분과도 같았다. "..양요섭. 아프지마. 나 이제 니 옆에서 못돌봐줘. 그러니까 아프지마. ...너한테도 시간이 필요했듯이..나한테도 시간을 줘. 니가 하자는대로 할테니까..그렇게 자꾸만 밀어내지마.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나만 보면 아프다는 너..옆에서 괴롭히고 싶은 생각 없어. 멋대로 번호 바꿔버릴만큼 니 생각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니 말 다 알아 들었으니까..좀만." 그때 김태경이 나타나 요섭이를 데리고 나갔고, 나는 순간 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진 요섭이를 그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정말 그 옆엔 내가 있을 순 없는거구나, 이제 그 옆엔 김태경이구나. 라는 생각이 정말 실감이 났다. 정말 그 기분이 내 몸에 와닿아서 나는 너무 기분이 이상했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술을 퍼먹고 싶은 좆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말로는 내 기분을 형용할 수 없었지만, 그냥 모든걸 다 잃어버리고 난 뒤의 자포자기의 심정과도 비슷한 것 같았다. 이제 정말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걸까,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 나는 그 다음날 저녁부터 내리는 비를 내리 맞아버렸다. 요섭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무작정 그의 집 앞으로 갔는데 요섭인 보이질 않았고 나는 새벽 여섯시가 넘도록 그 앞에서 비를 다 맞아버렸다. 그냥 차 안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만약 차에 있다가 지나가는 요섭이를 못볼 수도 있을 것도 같아 나는 마냥 벽에 기대어 서서 나오지 않는 요섭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저녁 여덟시 쯤부터 기다린거 같았는데..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깜깜해질 때까지도 나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시원하게 비가 내린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맞는 내내 무슨 누가 나를 때리는 것 처럼 아팠는데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는 내가 집에 도착해서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정말 흠뻑 젖어버려서 차 시트도 온통 빗물 투성이가 되었고 나는 그 꼴로 집으로 들어와 씻지도 않고, 옷도 벗지 않고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집앞에 서있었던건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연락을 피하려고 핸드폰 번호도 무작정 바꿔버린 양요섭과, 어제 그렇게 나한테서 벗어나는 양요섭을 보면서 정말 마지막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마음으로 있었던 것 같다. 이번 한번만 얼굴 보고 그만 보려고, 이제 나도 놔주려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끝까지 보질 못했다. 온 몸이 미친듯이 떨려오고 너무 추워 이불을 덮어도 추웠다. 아무래도 지독한 몸살을 앓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새벽에 들어온거까진 기억이 나는데 지금이 몇신지도 모르겠고, 그냥 방이 환하길래 낮인건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목이 말라 몸이 젖은 솜마냥 무거워서 움직여지지도 않는데도 겨우겨우 일어나서 침대에서 나왔고 한걸음 한걸음 떼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나는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버렸다. 나는 땅바닥에 그대로 헤딩할 줄 알았는데 순간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나는 그냥 기대었다. 순간 몸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누가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게 느껴졌다. "..미쳤어 진짜..왜 비를 맞아 왜!!!" 너무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려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래도...양요섭인거 같은데..걔가 여기에 올 리는 없고..그럼..누구지.... 눈을 떠 바라보니 갈색 머리가 보였고 나를 등지는게 보여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양..요섭.." "나 누군지 알겠어? 어제 비맞았지? 미쳤어!? 그걸 맞으면 어떡해 진짜!!" "...진짜..양요섭...이네.." 양요섭일줄은 몰랐는데 진짜 양요섭이었다. 정말 양요섭이었다. 내 걱정을 하고 나때문에 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양요섭이었다. 꿈에서조차도 그리웠지만 나타나질 않아 보지 못했던 그 양요섭이었다. "..나 아픈거 어떻게 알고 왔어." "형 지금 춥잖아. 일단 씻자. 좀 놔봐. 진짜 감기 걸려!!" "안추운데..너 안고 있으니까..하나도 안추운데.." "장난해? 잠깐만 놔봐. 잠깐만." 사실 너무 추웠다. 정말 너무 추워서 이끼리 부딪칠정도였는데 이렇게 양요섭을 안고 있으니까, 어떤 틈도 없이 양요섭을 꽉 붙들어 놓고 있으니까 많이 춥진 않았다. 정말...춥지 않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고 현실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내 눈앞에, 아직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 내 눈앞에 양요섭이 있었다. 너무 보고싶었던, 따뜻한 양요섭이. 나를 향해 차가운 말만 내뱉는 나쁜 양요섭 말고 착한 양요섭이.. "어제..너무 보고 싶어서..집앞에 갔는데..니 번호도 모르고..니 방 불은 꺼져있고... 어디 갔다오는건가 싶어서 계속 기다렸는데..안나오드라." "...몇시까지 그러고 있었어?!" "여섯신가..." "...새벽!?!?!?" 놀랄 줄 알았다. 나도 그렇게 있다가 아침 된걸 보고 나도 놀랐으니까. 니가 안놀라겠냐.... 그래도 그렇게 비맞고 있길 잘했다. 양요섭이 이렇게 짠-하고 나타나서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나를 돌봐줄테니까 아프길 잘했다. 아픈게 다행일줄이야. 나는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요섭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있는 힘껏, 정신이 아찔해질때까지 입을 맞춰본건 처음인 것 같다. 너무 힘이 없고 몸이 떨려 내 몸을 내가 가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요섭이를 놓고 싶지가 않아서 이건 정말 본능적인 힘이라 오랫동안 요섭이의 입술을 탐했다. 탐하고 또 탐하고, 닳아버릴때까지 끝까지. 요섭이가 여기에 무슨 일로 온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자꾸만 날 두고 가려는 것 같았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날 씻기겠다는 목적으로 욕실에 데려다놓고 나를 냅두고 그냥 도망칠 것 같았고 재워준답시고 내가 잠들면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 정말 연기처럼 푸시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한시도 요섭이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욕도 같이하고, 정말 오랜만에 내가 원하던, 내가 이쁘다고 했던 그 차림으로 만들어놨다. 요섭이가 내 머리를 직접 말려주고 나를 위해 죽도 쒔지만 나는 정말 지금 먹으면 있는대로 다 게워내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거부했다. 그리고선 그냥 끌어안았다. 집이 왜이렇게 더럽냐며 뭐라고 타박하고 덥다고 샤워 한번 더 하겠다는걸 내가 억지로 막아서 그냥 내 옆에 눕혀버렸다. 내가 이렇게 양요섭을 안고 있다는게 믿겨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내 팔을 꼬집으니까 아프긴 한걸 보니 확실히 현실은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요섭이가 덥다고 발버둥을 쳐도 꽉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져버리면 아까도 말했듯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결국 나는 또 내 욕심대로 요섭이를 안아버렸다. 정말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참아와서. 요섭이 안고 싶은거, 키스하고 싶은거 매일 매일 참아 와서 그게 폭발했는지 그냥 아프단 핑계로 칭얼거리면서 요섭이를 원했고 역시 모질지 못한 요섭인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정말 오랜만인 요섭인 너무 사랑스러웠다. 밑에서 얼굴이 발개진 모습을 하고 있는것도 귀여웠고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귀여웠다. 모든게 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이뻤다. 이렇게 아직까지도 내 눈에 넣어도 안아플 만큼 이뻐죽겠는데 얘를 놔줘야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지긋지긋할정도로 괴로웠다.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얼굴에 써있네 양요섭?"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얼굴에 써있는건 어떻고?"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웃는 요섭이를 보면서, 정말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는 요섭이를 보면서. 요섭이를 울리지 않고, 괴롭히지 않은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나도 행복했다. 꿈이라고 해도 괜찮을만큼 나는 너무 행복했다. 정말 너무 행복했는데...역시 그건 아주 잠시 잠깐 동안의 행복이었을 뿐이었다. 나에겐 행복의 시간을 누리는건 사치였는지 내가 생각했던대로, 정말 그대로 일어나버렸다. "....으..." 아까보단 훨씬 또렷한 정신으로 깨어난 나는 옆자리가 휑해서 손으로 휘휘 젓다가 깨달았다. "..양요섭!!!" "....깨어났어요? 아..깜빡 잠들었네..."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정말 같이 있었는데....왜..양요섭은 없고 양승혜가 있는건지. "..잠깐만 나가줄래요. 나 옷을 벗고 있어서.."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이 내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었고 양승혜는 뒤늦게 깨달았는지 미안하다며 방에서 서둘러 나가주었다. 이에 나는 방을 휘 둘러보았다.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여져있는 죽이며, 아까 쓰다가 대충 올려놓은 헤어드라이기도 그대론데.. 양요섭만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차근 차근 주워 입고 약간 열린 장롱문을 열어봤다. "....!!!!" 텅 비어있었다. 마치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 처럼. 어제까지만 해도 꽉 차있었던 장롱안에 옷이 싹 사라져버렸다. 먼지만 남기고 싹 사라져서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주저앉았다. 짐 가지러 왔었구나. 왜 왔었나 했었는데..진짜..끝까지..잔인하다. 너. 나는 그렇게 앉아있다가 아까 장롱문처럼 약간 열린 화장대 서랍이 눈에 들어와 부리나케 일어나 그 곳을 열어보았다. 그 안엔 요섭이 반지와, 예전에 내가 생일 선물로 줬던 핸드폰고리와 예전에 나눠꼈던 귀걸이가 놓여져있었다. 니 짐 싹 가져가고 니 흔적 여기다 남겨두고 간거냐 양요섭? 진짜..잔인하다. "....진짜...잔인하다..나..아픈데..이렇게까지 해야되겠냐..." 나는 그 반지를 손에서 쥐고 있다가 그냥 화장대에 올려놓고 서랍을 닫아버렸다. 그리고선 침대로 들어와 누웠고 마침 따뜻하게 데운 죽 그릇을 들고 들어온 양승혜에 나는 순간 양요섭과 겹쳐보여 등을 돌려 누웠다. "..정말 미안한데, 나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는데 가줄래요?" "네? 아 그래도..아프다고.." "요섭이가 불렀죠. 괜찮으니까 그냥 가요. 나 아플때 누구 있으면 신경쓰여서 더 아프거든요. 와준거 너무 고마운데 오늘은 그냥 가요. 미안해요." 내 말에 양승혜는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알았다며 그럼 잠들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다며, 그건 말리지 말라며 침대 옆에다 화장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고 그것 까지 말리는건 너무 하는거 같아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동시에 코를 타고 흐르는 눈물 줄기에 나는 쪽팔려서 손으로 대충 닦은 다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너무 추웠다. 추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이불을 덮어도 추웠다. 왜 추운지는 알 거 같은데 안춥게 하는 방법은 없어서 그냥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를 달달 떨었다. 이제 정말..놔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생각만 했는데...이제 정말 놔줘야만 하는 것 같다. 이제는 정말. 나에게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45. "누나 미안.." 다음날 아침, 나는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푸석푸석한 얼굴로 부엌에서 마주친 누나 앞에 섰다. 그리고선 누나의 팔을 살짝 잡았을뿐인데도 누난 내 손을 마치 더러운 벌레를 몸에서 떼어내는 듯 나를 툭 친 뒤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고 나는 내 손이 너무 무안하고 얼굴을 들 수 없을만큼 미안해서 냉장고 앞에 계속 서있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김태경] "어. 여보세요." 「..무슨 일 있냐? 하도 연락이 없어서 화낼라고 했더니..화도 못내겠네.」 "아니..일은 무슨. 왜 전화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너 근데..진짜 목소리 안좋다. 무슨 일 있지?」 "아니야. 끊어. 나 바뻐." 나는 그냥 전화를 끊고 뒤돌아 서서 여전히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누나를 빤히 바라보다 지금 이상황에선 내가 무슨말을 해도 누나 귀엔 듣기 싫은 소리 일거 같아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것 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져 나는 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내 방으로 향했다. "야." 내가 누나와 좀 더 떨어졌을때 누난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차가운 말투로 나한테 말을 걸었고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너 그냥 김태경이랑 잘해보는건 어때?" "...뭐?" "어차피 니 취향이 그런 쪽인거면..여자는 관심 없을거 아냐. 너 두준씨랑은 절대 안돼. 그러니까 그냥 김태경이랑 잘해보라고. 괜히 남의 남자 넘보지 말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누나한테 이렇게 가시 돋힌 말을 들어 본 적도 처음이었고, 저런식의 말은 그 누구에게건간에 처음 들어본 소리라 나는 너무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사람은..겪어봐야 아나봐?"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마. 아니 그냥 아예 날 부르지마. 넌 내가 부르면 그때 대답만 해."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단 한번도 누구한테 이렇게까지 상처받아 본 적 없는데 누나가 하는 말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그게 모두 다 칼날 같아서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징그럽게 쑤셔댔다. 정말 끔찍하리만치 상처가 되는 말들 뿐이라서, 그렇지만 죄인인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2층으로 올라왔고 침대에 엎드려 정말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엉엉 울어본 적 없는것 같은데 이불로 입을 막고 그야말로 통곡을 해버렸다. 윤두준에게도 이렇게까지 상처는 받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줬지만 어쨌든 태어나서 이렇게 가시 같은 말은 처음 들어본 난, 그것도 믿고 믿었던 누나에게 한없이 착하다고 생각했던 누나에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들어서 나는 너무 괴로웠다. 어차피 윤두준이랑은 더이상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태경이까지 끌어들이면서 내 취향을 운운하는 누나가,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건 알지만 너무 미웠다. 내가 상처받을거란걸 뻔히 알면서도 나한테 그런 말을 뱉어내는 누나가, 일부러 나한테 상처 주겠다는 그게 뻔히 보여서 힘들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윤두준] 나는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 때문에 전화를 받을까 말까 했지만 내가 받지 않으면 끝까지 전화할 사람이란걸 잘 알기 때문에 나는 큼큼 거리며 목을 푼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번호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을거지? 기광이한테 떼써서 알아낸거니까 기광이한텐 뭐라고 하지마라.」 "...누가 뭐랬냐..왜전화했어." 「..울었어? 너!? 양승혜가 뭐라고 해?」 나는 굳이 보지 않아도 퉁퉁 부어있을 눈이 느껴져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야..왜. 왜 전화 했는데.." 「잠깐 나와봐. 할말있어.」 "전화로 해.." 「당장 나와. 집 앞이야.」 뚝. 집 밖으로 나갈 기분도 아니었고 나가서 윤두준이랑 머리를 맞대고 있어봐야 나오는 답도 없는데 그래봐야 누나한테 미운털만 더 박힐게 뻔한데..난 그래서 사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 앞 이라는데..안나갈 수는 없어서 겨우겨우 침대에서 일어서 집히는대로 아무거나 모자를 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나..잠깐 나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거실에 있던 누나한테 말을 하려고 했지만 누나는 내 말이 마치 들리지 않는 것 마냥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또다시 울컥해져서 무심한 누나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뒤 돌아서 대문으로 향했다. 더운데 차 안에 들어가서 에어컨이나 쐬고 있지 엄청나게 뜨거울 차 보닛 위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나를 기다리던 윤두준은 내가 나오자 바로 일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모자를 썼지만 그래도 붕어처럼 부은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내 신발 앞에 윤두준의 신발이 놓여짐을 봄과 동시에 내 손목은 차로 이끌렸다. "일단 타." 시원하게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차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그나마 좀 정신이 차려지는 것 같아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젠 윤두준을 만나는 것 조차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이젠 윤두준과의 만남이라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단 거다. "..나 봐봐." "얘기해 그냥." 내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 괜히 손톱만 만지작 거리고 있자 윤두준은 내 모자를 홱 벗겼고 모자 달라며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윤두준과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울었냐 대체. 대체 얼마나 울어야 눈이 이꼴이 돼?" "..신경꺼. 모자나 줘." "너 내가 나 믿으라고 했잖아. 근데 그렇게 기어코 안믿더니..니가 바라던 결과가 이거야? 양승혜가 알게되고, 너 양승혜한테 미운털 박혀서 지내는게..그게 니가 바라던거냐고. 어?" 윤두준의 말에 나는 뭐가 또 그렇게 서러웠던건지, 아니 사실은 윤두준의 말에서 아까 누나한테 들었던 그 말이 떠올라서 또 눈시울이 붉어졌고 내가 점점 눈이 빨개지면서 눈물이 고여오는걸 가만히 보던 윤두준은 내 눈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렸다. "너 우는거 보면 나 미친 짓 할지도 몰라." "..할..말..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이제 양승혜도 알게 됐으니까..내가 설득해보겠다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거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라고 하면 빌거니까..너 뒤에 있어. 괜히 나서서 욕이나 들어서 이렇게 울지 말고." 윤두준은 그대로 나를 꽉 끌어안아줬고 원래 우는데 옆에서 달래주면 더 서글퍼지는거라 나는 정말 아까처럼 또 엉엉 소리내서 울어버렸다. 다른 사람 한테 다 미움받고 손가락질 받아도 누나한테만큼은 그런 꼴 당하고 싶지 않았는데 누나한테만큼은 배신감 같은거 그런 기분 따위 들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모든게 다 내 잘못이었다. "..일단 내려." 뭐를 하려는건지 아직도 진정이 안된 나를, 시동을 끄면서 차에 냅두고 먼저 내린 윤두준은 집 앞 대문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고 나는 기겁해서 바로 차에서 내려 윤두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열어요." "뭐해 지금!!!!!" 윤두준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뒤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한참만에야 띵-하고 열리는 대문에 내 손을 꽉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만!!! 지금 뭐할건데!!!! 이렇게 만나봐야 좋을거 하나도 없다는거 형이 제일 잘 알잖아!! 불난집에 부채질하러가? 왜그래 진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양요섭." "형!!! 좀!!! 형 이렇게 할때마다 내가 더 힘들어진다는거 몰라!? 형이 누나한테 상처 주면 줄 수록 그거 다 나한테 온다고!!!! 알면서도 그러는거야 지금!?" 한여름 더위에, 발악을 해대는 나를 빤히 보던 윤두준은 내 양 어깨를 잡아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동안의 체온이 서로 닿은 뒤, 윤두준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겪어야할 일이니까." 윤두준은 그대로 내 손을 꽉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그럼 손이라도 놓고 들어가자고 어떻게든 잡힌 손을 빼려했지만 예전에도 늘 말했던 것 처럼, 윤두준의 힘은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힘이라서 안그래도 먹은 것도 없이 순간 현기증이 일어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윤두준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대놓고 다니시네요? 창피하지도 않으신가봐요?" "그 쪽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다니는게 창피하신가봐요?" "되게 당당하시네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게 자랑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숨겨야되는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신발도 벗기전에 벌어진 신경전에 나는 그만 하라며 손을 꽉 잡았고 윤두준은 그런 나를 쳐다보고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까지 들어간 나와 윤두준은 손을 여전히 꽉 붙잡고 있는터라 누나의 시선이 이 곳에 닿았다는걸 느낄 수가 있어서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게 나와도 저 마음 안바꿔요. 이 결혼. 무조건 할겁니다." "저도 마음 안바꿉니다. 이 결혼. 절대 안해요. 죽으면 죽었지." 윤두준은 앉으란 소리도 안했는데 자연스럽게 소파로 가 앉으며 그제서야 내 손을 놔주었고 나는 정말 숨이 쉬어지질 않아서 마치 천미터 달리기를 하고 온 사람마냥 숨을 크게 쉬었다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여기에 온건. 싸우자고 온게 아니라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그게..사과 하러 온 사람의 태돈가요?" "전 지금도..내가 왜 당신한테 사과를 해야되는지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속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양요섭이 죽어도 안된다고 하더군요. 지 누나한테 상처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질 않나, 보란듯이 딴새끼 옆에다 차고 다니면서 자극하질 않나.. 사실 말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양요섭때문에 말 못했습니다. 그렇게되다 보니 우리가 당신을 기만한 꼴이 되었고 지금 당신은 그거때문에 화가났고..하지만 여기까집니다. 그냥 똥밟았다 생각하고.." "아뇨. 그렇겐 못하죠. 나는 온갖 상처와 충격은 다 받았는데..둘이 잘 될 수 있도록 빠지란 뜻인가요? 그렇겐 못해요. 나 당신이랑 양요섭, 너한테 복수할거에요. 어떻게 복수할지는 차차 살면서 생각할거구요. 이렇게 쉽게 놔줄 것 같았음 애초에 당신이랑 결혼하겠단 맘도 안먹었어." 나는 누나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손을 벌벌 떨며 그저 손만 바라보고 있었고 윤두준은 그런 내 손을 잡더니 한손으론 내 턱을 잡아서 자기를 볼 수 있게끔 돌렸다. 난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 놓으라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대로 내 입술위로 윤두준의 입술이 겹쳐왔고 나는 정말 경악에 경악을 해버려서 어떤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오금이 굳어버린다고하던데, 지금 내가 그랬다. 윤두준의 혀는 내 혀와 섞이고 아주 옅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선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쪽-하는 소리를 내며 내 입술에 묻은 타액은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며 윤두준의 얼굴은 다시 울그락불그락해 있는 누나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이런거 다 참을 자신 있습니까?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나 당신이랑 결혼해도 양요섭은 절대 못놓으니까. 두집살림 하는 꼴 보고 싶음..마음대로 해요. 안말릴테니까. 당신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오겠다는데..말릴 이윤 없잖아요?" "..윤두준..당신.." "그러니까. 말로 했을때, 알아 듣고 빠져요. 더 험한 꼴 보고 험한일 당하기 전에." 누나는 울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고 나와 윤두준을 번갈아보는 눈빛은 마치 야수의 눈빛과도 같아 섬뜩하고 무서웠다. 이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에게로 다가가 누나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누..." 누나의 손이 또 치켜 올라가는게 내 눈에 보였고 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짝- 뺨 맞은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프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눈을 떠보니 이미 돌아가있는 누나의 고개와 얼마나 세게 때린건지 벌써 붉게 달아올라있는 누나의 뺨이 내 시야에 들어오고 정말로 화가난 듯한 윤두준이 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건방지게 굴지마. 나한텐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 애야. 함부로 손찌검하지말라고. 양요섭, 당신이 때리라고 있는거 아니야. 화풀이 할거면 애먼데다 화풀이 하지말고 나한테 해. 그때 한번은 참았지만..다시는 용서 못해." "윤두준!!!!!!! 당신이 어떻게...내가 가만히 놔둘거 같아요!? 나 니들 둘 그렇게 당당하게 다니게 냅두지 않을거야. 당신 내 옆에다 붙들어 놓고 평생 지옥이 뭔지!! 끔찍한게 뭔지!! 깨닫게 해줄거라고..내가 못그럴거 같아요?" "...마음대로해. 끝까지 더러운 수 써봐. 병신같이 당하고 있진 않을테니까." 윤두준은 내 손을 잡고 다시 집 밖으로 나갔고 나는 윤두준에게 끌려가면서까지 누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누나는 정말 한쪽 뺨이 선명하게 붉어져 있는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렇게 악에받치고 분 해 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거라 나도 누나가 너무 무서웠다. 항상 온화하고 착하고 순할줄만 알았던 누나였는데... "...우리..누나..정말 형 좋아하는데.." "근데." "..그런 사람한테 상처주면 안되잖아. 형 좋다고 하는 사람인데..그러면 안되잖아. 어?" "너한테 상처준 사람이야. 니가 받은거에 비하면..나 저여자한테 아무것도 안한거나 다름없어." "..그러지마. 어? 우리 그러지말자. 한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살면..결국 우리 둘다 힘들어져. 그걸 왜 몰라. 남이 축복해주지 않는 만남은..안만나는 것보다 못하다고..어? 형." "너 또 헤어지자고 할거면..진짜 보쌈해서 데려가는 수가 있다. 나도 이제는 안참을거야. 그동안 니가 해달라는대로 나 다해줬어. 만나지 말자고, 헤어지자고해서 나 진짜 그럴 생각이었어. 어제 엠티까지만..그때까지만 얼굴 보고 그게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다짐했어. 근데 이렇게 된 이상..나 너 못놔." 윤두준은 대문을 거칠게 열더니 다시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나는 이제 소리를 지를 힘도, 그럴 기분도 아니어서.. 아니 무엇보다 흥분하고 발악한다고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음을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아는 나기에 나는 조금 더 차갑고 냉정하게 생각해보기로했다. 윤두준은 나를 잡고 물러서지 않겠다하고, 누나는 윤두준을 잡고 물러서지 않겠다하면 결국은 피바람이 몰아칠 수 밖에 없을거고 그렇게되면 우리 셋. 모두 다 불행해질게 뻔했다. 내가 애초에 떠났어야만했다. 예전에, 내가 밍기적 거리지 말고 후회없이 떠났어야만했는데.. 나도 윤두준이 너무 보고싶어서, 나도 이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놓겠다고 말은 했는데 정말 내 마음에서 놓아지질 않아서 그래서 떠나질 못했다. 하지만..지금은, 정말 지금이라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결국은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가 없을거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는 말처럼 내가 떠나고 나면..분명 혼란이 있겠지만 또 날 찾겠다며 동분서주 할테지만 현실이란 벽은 꿈을 찾으러 무작정 떠날 수 있을만큼 녹록치가 않기 때문에 나는 윤두준이 언젠간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나같은건 그냥 한때의 풋사랑으로 남게 될거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쯤에서 내가 빠져주는게 모두를 위해서 나은거라고. "밥 먹자." 나는 아무대답도 않고 윤두준이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제 더이상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가만히. "어서오십시오." 동네 죽집으로 들어간 윤두준은 뭐 먹을거냐며 메뉴판을 내밀었고 나는 아무거나 라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말없이 떠날건데, 마지막까지 잘해주고 싶어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해물야채죽?" "알았어. 아, 해물야채죽하나 삼계죽하나요." 주문을 하고 온 윤두준은 내 볼에 손을 대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떡하냐..얼굴 까칠해진것봐. 안그래도 못생긴얼굴 다크 잔뜩 내려와서 더 못생겨졌네 양요섭." "..사돈남말하지마. 형도 만만치않거든?" "나야 늘 잘생겼지. 너 행운인줄 알어. 아직도 나한테 관심 갖는 여자들 많다?" 또다시 내 머릿속엔 상처 가득한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런 내 표정을 알아챈 윤두준은 잠깐 할말을 잃은듯해보였지만 마침 밑반찬이 테이블 위에 차려져 우리는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딴생각하지마." "..어?"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허튼 생각은 내가 뭐..안해 그런거.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어." 나는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고 나빼고 다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재밌고 웃긴건지 저렇게 날씨가 더운데도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면서 하하호호 웃으면서 지나다녔다. 지금 내 상황이 너무 최악이라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 기쁘고 행복해보였다. 나만 우울한것 같았다. 오로지 나만. "이거 남은거 포장한거니까. 꼭 데워먹어.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이따 잘때 연락할게." "...어..운전 조심하고." "...옛날 같다. 꼭. 옛날로 돌아간거 같아." "됐네요. 얼른 가. 바쁘면 연락 안해도 돼. 걱정마." 내가 애써 웃으며 말하자 윤두준은 알았다며 손을 흔들면서 윙크를 하곤 집 앞에서 차를 돌려 내리막길을 내려갔고 나는 그 차 꽁무니가 사라져 점이 될때까지 끝까지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서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버지. 저 요섭이요. 잠깐 드릴말씀 있는데..사무실에 가도 괜찮아요? 네,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아주 잠깐동안 쉬었다. 한걸음만 걸어나가면 바로 햇빛이라 계속 저 밑에 있으면 토할것 같이 어지러워서 무릎을 껴안고 잠깐 있다가 그래도 해결할 일은 빨리빨리 하는게 나을 것 같아 나는 내리막길을 단숨에 다다다다 내려가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아버지..뵈러 왔거든요." "아, 잠시만요. 네, 들어가세요." 여비서가 나한테 안내를 해주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아버지의 일터에 조금 긴장했는지 목이 말랐다. 사실 아버지랑 이렇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본적은 없었던지라 입에 침이 다 말랐다. "갑자기 무슨일이냐. 여기 시원한 물한잔만." 아버진 책상에 앉아 일을 보시다가 내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서 소파로 오시면서 말했고 나는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조심히 앉았다. 이윽고 비서는 얼음까지 띄운 물을 나한테 갖다줬고 나는 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드릴..말씀이 있어서요." "웬만하면 집에서 하지 그러냐." "...유학...보내주세요 아버지." 내 말에 아버진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대답 대신 나를 바라보셨고 나는 다시한번 물을 마신 뒤 대답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한거냐." "그냥..그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도 제가 유학가는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그렇다만..그럼 언제쯤으로?" "최대한 빨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준비만 빨리 해주시면..저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내 확고한 말에 아버진 여간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는지 날카로워보이는 무테안경 너머로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계셨다. "무슨일 있냐?" "네?" "안색도 안좋아보이고..게다가 지금 유학을 가겠다는건.. 니가 그렇게 끔찍히 생각하는 니 누나 결혼식도 안보고 가겠다는거 아니냐?" "..그건..안타깝게 생각하지만..지금이 아니면 다신 유학길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라고 생각을 했고.. 아직 제가 우물안 개구리니까 세상을 좀 더 넓게 경험해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최소한 제가 아버지 앞길에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되는거 아닙니까." 내 말에 아버진 허-하고 실소를 터뜨리셨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동안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생각을 하시는가 싶더니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내 얼굴을 다시 바라보셨다. "어디로 갔으면 하냐." "..프랑스요." "거기 가서 뭘 공부할 생각인데?" "...그냥..이것저것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직접 돈도 벌어보고, 프랑스어도 배우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살아가는 법도 배우고 싶고..그냥 인생경험 하고 싶습니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이나 축내겠단 뜻이 아니냐?" "..정 그러시면 일단 비행기값만.." "아니다. 그냥 해본소리다. 그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나. 꼭 어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유학을 가는게 아니라 말그대로 인생 사는 법을 배워보겠다는 뜻이니까.. 그건 한국에서도 가능한거지만 니가..그렇게 유학을 간곡하게 원하고 있으니 말리지는 않으마. 그럼 내가 최대한 유학 수속 밟아놓을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빨리 가고 싶다니까 나도 최대한 노력해보겠다." 내가 당신의 앞길에 방해꾼이 될까 두려워서 나를 보내려는건 아닌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생각해주는 아버지의 눈빛이라고 해야하나. 그냥 아들이 하고싶다니까, 아들이 처음으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는거니까 그걸 들어주고자하는 부모의 눈빛이었던 것 같았다. 순간 느껴진 이게 착각이라면 할 수 없는거지만 난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아..그리고..유학 가는거..제가 비행기 타는 날까지..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엄마한테도, 누나한테도 다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것 같았지만 더이상 묻지 않으시고 대답을 했다. 이에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나와 정말 햇살 쨍쨍한 길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일처릴 신속하게, 정확하게 하시는 분인건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빨리 해주시겠다고하면 정말 당장 다음주에도 떠날 수 있을것 같았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나혼자 쏙 빠져도 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대한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면 빠지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속에서 나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있는거다 나는. 한국에 남아있는 두사람이 어떻게 되건, 나는 그냥 무섭고 두려워서 도망가는거다. 윤두준을 아직도 많이 좋아하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거라는건 아주 잘 알지만 그 마음보다 누나한테 상처받고 그 두사람에게 상처줄 내가 더 무서워서 나는 떠나려고 하는거다. 그것도 아주 비겁하게 아무도 몰래. - "다녀왔습니다." "어, 저녁 차릴까?" "아뇨. 이거 죽인데..제가 알아서 대충 먹을게요!!" 나는 앞으로 듣지도 못할텐데, 윤두준의 사소한 말이라도 다 들으려고 부엌으로 가서 죽을 대충 데운다음 쟁반에다 물이랑 수저까지 놓고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2층 거실에선 누나가 하고 있던 노트북이 눈에 띄었고 보려고 하진 않았는데 슬쩍 보여 나는 다가가서 뭐하고 있었나 봤다. 누나는 마침 화장실에 갔는지 없어서 내가 마우스로 확인하는데... 노트북에 켜진 창은 모조리 웨딩드레스 사진이나, 허니문여행지 등등 결혼에 관한거였고 분명 결혼한다해도 사랑받지 못하고 평생을 불안에 떨며, 형을 미워하며 살걸 자기 자신도 잘 알면서.. 왜 그 지옥에 스스로 뛰어들겠다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혼 할거야." "...누나." "못할거라고 생각해? 할거야. 어떻게든 할거니까..." "사랑 못받을거란거..누나가 제일 잘 알잖아. 난 누나를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게 아껴주고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근데 형은..그렇지 않다는거 알면서..왜.." "너 지금 유세부려? 두준씨 사랑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세등등한가보다? 어디다대고 훈계야." "지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윤두준이랑 결혼하겠다는거 말리는게 아니라!!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거 말리는거잖아. 내가 지금 정말 누나앞에서 유세부리고 있다고 생각해? 형이 나 좋아하는게..그게 뭔데? 그거 시간 지나면 다 빛바랠 감정들이야. 나는, 누나가 나 미워서 복수하고 싶어서, 형이 누나 그렇게 감쪽같이 속인거 분하고 억울해서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리는걸까봐 그거..그게 걱정돼서 그러는거잖아." 나는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한척 혼자 다하고 있는 누나를 보면서 또 마음이 아파 눈물이 떨어졌고 쟁반을 한손으로 옮겨든 다음 눈물을 닦고 뒤돌아섰다. "착한척하지마 양요섭. 니가 그런다고 내가 끄떡이나 할거 같아? 니네둘, 잘먹고 잘사는꼴..죽으면 죽었지 나 그꼴 못봐. 나 사랑해주는 남자 필요없어. 이제는 내가 윤두준을 좋아하니까, 같이 살고 싶어진거 뿐이야. 평생 나한테 앞 안보여줘도 상관없어. 너만 사라진다면 난 그 등이라도 끌어안고 살 자신 있으니까." 어쩌면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는게 덜 무서울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저렇게 촥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는 누나의 말에 마치 고드름같이 차가운 칼이 내 등에 쑤셔 박히는 느낌이었고 나는 그 말을 모조리 내 머릿속에 새겨넣은 뒤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쟁반은 책상위에 올려놓은 뒤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누워서는 아마 밤 새도록 뒤척였던 것 같다. 잠이 잠깐 들었던거 같은데도 깨어보면 여전히 밤이고, 또 잠깐 잤던거 같은데도 깨어보면 또다시 밤이고. 그래서 아침이 되어서야 나는 차라리 안자느니만 못한 컨디션을 가진채로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 잠을 푹 자질 못해서 더 몸이 안좋아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아주머니가 문 밖에서 나즈막히 말하는게 들렸고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뒤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만 한 뒤 부엌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니 웬일인지 몇주 전 이후 처음으로 엄마 아버지 누나가 모두 모여있었고 내가 멋쩍은듯 뒷목을 긁적이며 자리에 앉자 아버진 숟가락을 드시며 식사를 시작하셨지만 나는 물 부터 먹은 뒤 아직 입맛이 없어 그냥 국만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저 결혼..앞당기고 싶어요." 누나의 말에 나는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숟가락을 놓고는 누나를 빤히 바라봤고 누난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엄마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뭐? 갑자기.." "어차피 치를 결혼이면..하루라도 빨리 해서 자리 잡는게 낫지 않을까해서요. 당장 결혼부터는 껄끄러우면 약혼이라도 했으면 해요." "두준군과도 얘기가 된거냐?" "어차피 당사자의 의견 같은건 상관 없는 결혼이잖아요." 누나의 싸늘해진 말투에 엄마와 아버진 당황했는지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아버지조차도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래. 어차피 할거라면 니 말대로 미룰 이유는 없지. 내가 윤회장이랑 만나서 얘기 해보마." "최대한..빨리 했으면 해요 아버지." 누나의 말에 아버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정말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서 말을 꺼내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아 나는 결국 밥도 제대로 못먹고 대충 깨작깨작 댄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요섭. 잠깐만 들어와라."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아버지가 날 불렀고 먼저 서재에 들어가시기에 나는 대충 무슨 말씀을 하실지 감이 잡혀 조심히 따라들어갔다. 아버지의 서재는 참 조용하고 과묵한 분위기였다. 어려운 책들이 잔뜩 있는건 물론이거니와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여기였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참 웃기게도 스무해가 넘도록 이 집에 살면서 아버지의 서재에 지금 처음 들어온다는게 어이도 없었지만 어쨌든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너무 어색해 소파 귀퉁이에 살짝 앉았다. "니 누나도 결혼이건 약혼이건 빨리 했으면 한다는데..그래도 니 누나 식 치르는건 보고 가는게 낫지 않겠니?" "아뇨. 식 치르기 전에..가고 싶습니다." "대체 이유가 뭐냐? 니가 하는 행동은 마치 니 누나의 식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데.. 니가 그렇게도 끔찍히 아끼는 누나가 한 남자한테 시집을 간다는데..그걸 안보겠단 이유가 뭐야?" "그냥..좀 싱숭생숭 할 것 같아서..그리고 언젠가는 가야할 유학이니 뒤로 미뤄봐야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해섭니다. 당장 이번주라도 좋으니까 최대한 빨리 도와주세요 아버지." "대체 니네 둘은 왜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 마냥 서로들 빨리 하려고 애를 쓰니. 어쨌든 알았다.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진 않을거야. 니가 원한다면 당장 내일 모레라도 떠날 수 있게 해주마." "..아무때건 좋으니까..날짜 잡히면 다시 불러주세요." 나는 어색하게 일어나 인사를 한 뒤 서재에서 나왔고 나오자마자 아버지랑 무슨 얘기를 했냐며 날카로운 눈을 하고서 쳐다보는 누나와 눈이 마주친 나는 그냥 별 거 아니라며 둘러 댄 뒤 내 방으로 올라와 어젯밤 먹으려던 죽을 다시 부엌에다 갖다놓은 뒤 샤워부터 했다. 오늘은 어쩌면 동운이와의 마지막 과외가 될 것 같다. 그래도 이번 방학 끝날때까지 끝까지 책임져주고 싶었는데.. 많이 만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이 꽤나 들어 있었던지라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너 어디가?" "과외하러." "몇시에 끝나?"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비법을 전수 해 주기 위해 가방에 가득 챙겨서 짊어메고 나가려는데 누나가 날 붙잡았고 신발을 신으면서 대답하자 누나는 정말 늘 그렇듯 차갑게 말을 이었다. "일곱시쯤." "그럼 일곱시 반까지 청담동 리베로 라는 샵으로 와. 두준씨랑 같이 와. 꼭." "왜. 뭔데.." "오라면 와. 시끄럽게 대꾸하지말고." 누나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가버렸고 순식간에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누나가 사라진 계단을 빤히 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윤두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이따 일곱시 반까지 청담동 리베로 라는 샵으로 와." 「거기가 어딘데? 청담동이 무슨..동네 놀이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가.」 "..몰라. 모르면 그냥 택시 타고 오든지. 늦지말고 와."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은다음 집 밖으로 나가버렸고 리베로가 뭐하는 덴데 나와 윤두준을 같이 부른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상태로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동운이와의 과외를 위해서 그의 집으로 향했다. - "오셨어요? 요즘 날이 너무 덥죠?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주스라도 갖다드릴까요?" "아..저..어머니..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뭔데요?" 동운이의 집에 도착해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소파에 앉았다. "정말..너무너무 죄송한일인데요..제가 갑자기 유학을 가게 돼서..과외를 그만 둬야 될 것 같아서요." "네? 갑자기..아니 한달도 안하시고 갑자기 그러시면..." "그래서..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한 과외비는 안받을거구요..제 대신으로 가르쳐주실 분 꼭 구하고 갈게요.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미리 말씀 드렸어야하는건데..." 나는 여기저기서 죄인만 되는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수 없죠. 그래도 과외비는 받으세요. 동운이가 요섭군 얘기 많이 했어요. 선생님 너무 좋다고, 너무 잘 가르치신다고..그래도 우리 아들은 우리 아들이고, 요섭군은 또 요섭군이니까. 유학 때문이라는데 제가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과외 선생님 안알아봐주셔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정말..감사하고...죄송합니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어머님은 아니라며,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오히려 위로를 해주셨고 요즘 너무 다른 사람들한테 폐만 끼치는 것 같은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누나에게도, 동운이에게도, 윤두준에게도.. 정말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쳐버린 것 같아서, 나란 인간은 원래 그렇게 남한테 피해만 주는 사람인건가 싶을 정도의 생각까지 들어버려서 나는 정말 너무 괴로웠다. 한시라도 이 나라에서 떠나서 내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 하고 싶었다. "형! 저 오늘 숙제 다 하고, 또 예습까지 했어요!!!" "...어..잘했다." "또..뭐 안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안좋아요. 형."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형이라며 따르고 제대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수업에 잘 따라와준 동운이가 그저 미안하고 고마워서 얘가 문제를 푸는 내내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면 안되는데, 내가 잘못한건데 그저 미안하기만 해서.. "..오늘..마지막이야." "...에? 무슨.." "나..유학 가. 미리 말 했어야했는데..갑자기 가게 된거라서 미리 말 할 틈이 없었어. 정말 미안해. 그래도 이번 방학 끝까지는 책임져주고 싶었는데..정말 미안해. 정말 너무너무 미안." 내 말에도 동운이는 대답이 없었다. 화가 많이 난걸까, 하긴 그럴만도 했다. 고3인데..정말 1초 1분이 너무 아깝고 소중한 시간일텐데..그 시간을 나한테 허비만 한 셈이었으니까 화가 날만도 하지. 나는 차마 고개를 못들겠어서 문제집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고 동운이는 뭐를 하는지 뭔가를 쓱삭쓱삭 적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내가 보던 문제집 위에 붙여진 노란색 포스트잇 한장. [내가 화내야 되는거 아니에요? 왜 형이 울고 그래요. 너무 미안해 안해도 돼요. 형한테 엄청 많이 배웠으니까,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쓸데없는데가 시간 낭비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근데 형하고 같이 한 시간은 하나도 안아까웠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말고, 유학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와요.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형이 여기 다시 오면 전 대학생이 되어있겠죠? 그때 와서 꼭 밥사주세요. 그럼 용서해줄게요.] 동운이가 직접 정성들여 쓴 쪽지에 나는 감동까지 받아서 그냥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남 앞에서 우는건 너무 쪽팔린 일이었으니까. "..진짜..너무 미안하고..너 분명 너가 원하는 대학 반드시 갈 수 있을거야. 독하기도 하고 꼼꼼하기도 하니까. 이건 내가 고3때 썼던 노트거든? 그냥 다 가져가. 그리고 나중에 이걸로 도움 받아서 과외도 하고 그래. 알았지? 진짜 해줄 수 있는거라곤 이게 고작이라..미안해.." "대체 미안하단말을 몇번이나 하는거에요. 그런 말도 되게 많이 들음 질리는거 알죠?" 동운이는 내가 자꾸 미안해하자 오히려 분위기를 띄우며 괜찮은척했고, 그렇게 나의 첫번째 학생이자 마지막 수업은 천천히 끝나가고 있었다. "근데 어디로 유학 가시는건데요?" "그냥..뭐..잘 지내구. 아마 많이 궁금할거야. 넌 내 첫번째 학생이었으니까. 열심히 하고, 절대 방심하지 말구. 손동운 수능까지 화이팅이다!!!!!!" "마지막으로 악수 한번 해요! 너무 짧은 만남이었는데. 아쉽기도 하니까요." 동운이가 내민 손을 난 꽉 잡으며 세차게 흔들었고 동시에 웃음이 터진 나와 동운이는 몇초간 웃다가 서로를 위로하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빈 가방을 들쳐메자 안녕히 가시라면서 아랫배에 손을 공수 자세로 한다음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꾸벅 인사하는 동운이의 모습에 난 그냥 빙긋이 웃었다. "잘지내. 고마웠고 미안하고..나중에 한국 오면..꼭 연락할게!" "안녕히 가세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짧은 만남이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최고의 선생님이었어요!" 동운의 인사를 받으며, 그리고 동운이의 어머님이 기어코 쥐어주신 과외비를 억지로 받은채로 그의 집에서 나왔다. 맨처음엔 정말 억지로 했던 것 같은데, 과외 준비 덕분에 윤두준과의 그 복잡한 일 속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거고 그래도 동운이가 동생 같아서 정도 가고 그랬었는데..역시나 사람 관계에 있어서 이별은 언제나 있는거라지만 헤어짐은 참 슬픈 일 인 것 같다. 아쉬움 없는 헤어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시계를 쳐다봤다. 일곱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었지만 여기서 청담동은 꽤 가까웠기 때문에, 아 무엇보다 리베로가 뭐하는덴지도 모르겠고 택시 아저씨한테 말씀드려도 모를 것 같아 나는 잠시 그 곳에 멈춰서 있다가 결국 윤두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니가 리베론지 어딘지 오라며. 갈라고.」 "아..그럼 나 좀 데릴러 와. 여기 신사동..."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윤두준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부르면 항상 자신이 어디에 있건 늘 달려왔다. 그것이 한창때는 당연했고, 지금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내가 윤두준을 부를 일도, 윤두준이 나에게 발 벗고 달려와줄 일도 없을거란 생각을 하니 이제 정말 말로만 이별이 아닌 사실로의 이별이구나 라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의 헤어짐이야말로 정말로 끝인거니까, 다시는 만날 수 없을거고 다시는..다시는 볼 수 없을거다. 만약 본다해도, 더이상 윤두준과 양요섭이 아니라 매형과 처남의 사이일거라는 생각에 나는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런 너저분한 가족 관계로 얽히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과감히 한국을 떠나겠단 결심을 했던거고 이 결심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도망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사실, 윤두준과 이따위 가족으로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가족이란건, 정말 사랑으로의 두근거림이 아니라 인간으로의 따뜻함이 있어야하는건데, 나는 윤두준에게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와 윤두준은 이제 만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윤두준이 들으면 또 버럭하고 화를 낼 생각이지만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거다. "가자." 아파트 현관문 계단에 쭈그려 앉아서 이것 저것 생각하는데 차도 위로 익숙한 차가 들어왔고, 차에서 내린 윤두준은 내 손을 잡아 일으킨 뒤 차에 태웠다. "근데 거기가 어딘데? 네비에 찍으니까 나오기는 하는데..대체 뭐하는 데야? 식당 같은거야? 그렇기엔 좀 너무 큰데..." 윤두준의 말에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고 말할뻔 한걸 겨우 삼키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양승혜는 어때." "뭐가." "너한테 또 손찌검을 한다거나..막말한다거나..그렇지 않아?" "안그래. 걱정마." 내 말에 윤두준은 근데 얼굴은 왜이렇게 푸석푸석하냐며 내 볼을 만졌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양요섭, 너 밥 좀 많이 먹여야겠다 내가. 툭치면 부러질것 같이 깡 말라서는.... 맨처음 만났을땐 그래도 볼살도 있고 포동포동했었는데..볼도 움푹 들어가고..너 이래서 나한테 이쁨 받겠어!?" "..어차피 그래도 이뻐해줄거면서." "그거야..뭐..당연한거지만. 웃자고 한 농담에 그렇게 받아들임 내가 뭐가되냐. 쪽팔리게.." 이제는 별 시덥지 않은 농담까지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굴었었는데, 그게 정말 엊그제의 일인데 우리는 지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앉아있고 아무 것도 없었던 것 처럼 행동했다. 정말 칼로 물을 벤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신기했지만 이상하진 않았다. "...웨딩홀?....뭐야?" 리베로는 웨딩홀이었다. 순간 누나가 왜 여기에 나와 윤두준을 불렀지, 라고 생각하자마자 답이 터져나왔다. 누나가 지금 뭐를 하려는건지, 나와 윤두준에게 뭐를 보여주고 싶은건지. "..일단 들어가자." 내 눈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나와, 턱시도를 입은 윤두준을 보여주고 싶기라도 한건지 건물 외관 부터 으리으리 번쩍번쩍한 곳으로 나는 무섭게 한걸음씩 내딛었다. "여기." 1층 로비로 들어오자 누나는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일어서서 앞장 서 걸었다. 윤두준은 양승혜가 나타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는 그냥 일단 잠자코 따라오라는 눈짓을 한 뒤 먼저 걸어가는 누나를 따라갔다. "...너. 잘봐. 니 주제를 알라는 뜻이야." 윤두준이 조금 떨어져있는걸 본 누나는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두준한텐 웃으며 다가갔다. "약혼식 날짜, 정확한건 아니지만 2주 뒤로 잠정적으로 결정 하셨대요." "...." "나 그래서 지금 드레스 입어보려고 하는데, 두준씬 저기서 맘에 드는 턱시도 있음 가지고 와봐요. 우리 같이 입어..." "약혼은 당신 혼자서 하는건가보지?" 웨딩홀의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고드름같이 뾰족하고 차가운 말투가 그 속 공기를 가로질렀고 윤두준의 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웨딩홀에서 일하는 직원들 조차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이에 나는 윤두준의 팔을 잡고 매달렸지만 윤두준은 내 손을 꽉 잡으며 얼굴은 누나를 향한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이 여자니까,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하나는 지켜주고 싶었는데. 자존심..같은거 없나?" "...우리는 약혼해요. 두준씨도 지금은 못받아들이겠지만..이 약혼은 무조건 하는거고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에 앉아서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봐줘야만 한다구요. 그게 당신이 지금 해야되는 일이야. 꼼짝말고 있어요." 처음보다 많이 강해진 누나는 이젠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차갑게 얘기한다음 붉은 커텐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윤두준은 붉은 커텐을 빤히 바라보다 허-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형. 잠깐만. 여자들한테 드레스 입어보는거, 진짜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형이랑 결혼할..." "그딴거 없으니까 나와." "형!! 좀..이러지 말자. 여기서 형이 나가면, 옷 갈아입고 짠 하고 나타날 누나는 뭐가 되는데!!!" "..그럼 너는 뭐가 되는데. 다 필요없으니까 당장 나와." 나는 차마 언성을 높일 수가 없어 계속 목소리를 낮춰가며 사정했지만 윤두준은 내가 말리기엔 너무 강경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형!!" 결국 내 손을 꽉 잡고 힘으로 밀어부친 윤두준은 그대로 샵에서 나와 건물 바깥까지 끌고 나왔고 내가 아프다며 손을 빼려하자 건물 앞에 와서야 겨우 놓아주는 윤두준은 화가 나는지 나를 분노의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양승혜가 불렀다는거 왜 말 안했어?" "그럼 형 안올거였잖아." "양요섭!!! 너 끝까지!!! 너 때리고 너한테 상처주는 말만 하는게..누나야!? 어? 그게 니가 그렇게 지키려던 누나 맞냐고!!" "누나가 화내는거 당연하잖아. 내가 누나였음 나같은 동생 이미 어떻게 해버렸을거야. 누나니까 참는거라고. 그러니까 이러지말고 들어가자. 누나 옷 다 갈아입었을거야. 형!!!" "..한마디만 더해." 윤두준의 차갑게 깔린 목소리에 나는 또 병신같이 대꾸를 하지 못했다. 뭐라고 계속 말렸어야했는데, 결국 나는 아직도 샵 안에 있을 누나를 뒤로한채 윤두준의 차에 억지로 태워졌고 나는 또다시 내 안의 자책감으로 밀려들 수 밖에 없었다. 앞 뒤 상황 보지도 않고 무조건 결혼하겠다고 하는 누나나, 누나를 설득시켜보려고 하지도 않고, 얘기하려 하지도 않고 무조건 누나를 미친 사람 취급 하는 윤두준이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병신같이 쭈그리고 있는 나나 셋 다 또라이였다. 다 정상이 아니란 뜻이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버렸다. 맨 처음 묶인 매듭은 점점 조여져서 이젠 내가 풀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답답한 상황만 닥쳐오는 바람에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라서, 결국은 내가 도망치는것도, 윤두준이 결혼을 거부하는것도, 누나가 결혼을 고집하는것도 결국은 다들 사람이기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서 일어난 일이란걸 요즘들어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 셋이 모두 다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방법이 있긴 한걸까. #46. "자."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와 앉으니 아버지께서 대뜸 내미신 티켓 한장. "최대한 빨리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 부랴부랴 가장 빠른 비행기로 구했다." 티켓을 확인하니 France 라고 쓰여있는걸 보니 프랑스가 맞는거같고... 날짜가.... "..당장 내일이네요." "그래도 너한테 짐도 싸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장시간 비행이니 비즈니스석이 좋을 것 같아 물어봤더니 내일 비행기 딱 한자리만 남아있다고 하더구나. 원한다면 날짜를 좀 더 뒤로 미뤄서 구해볼수도 있는데..." "아뇨. 좋습니다. 어차피 오늘 하루종일 시간도 많으니까요, 떠나기로 한거 금방 떠나는게 저한테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 그리고 이거." 아버지가 또 다시 테이블 위에다 올려주신건 작은 쪽지 하나와 흰 봉투였다. 나는 쪽지부터 들어 펼쳐봤고, 그 안엔 내가 지낼 집 주소인지 프랑스어로 적혀져 있었고 그 밑엔 어떻게 가면 되는지 한국말로 간략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에 나는 감사하다며 다시한번 고개를 숙인 뒤 그 옆에 있던 봉투를 열어봤고 그 안엔 엄청난 양의 유로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게.." "니가 일단 거기가서 쓸 생활비다. 그리고 이건 통장인데, 여기다가 돈을 넣어줄테니 필요할때마다 빼서 쓰고." "..제가 지금 당장 모아둔 돈이 없어서..이 돈만큼은..거절 못하겠습니다. 근데 통장까진 안주셔도 됩니다. 지금 주신 돈으로는 적응 할때까지만 쓰고 나머지는 제가 직접 벌어서 쓰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더이상 손 벌리는건 자식된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뭐..니가 직접 돈을 버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니까..그래도 밥은 굶지 말고, 돈없어서 생활비 아껴쓰지말고. 돈 낭비는 하지 않아도, 꼭 필요한데는 꼭 쓰고 살아라. 자존심 세운답시고 돈 필요한데 연락을 안한다거나..그런 짓은 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아버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아버진 그저 내가 맘에 안드는 자식, 누나보다 못한 아들놈, 이라고 한심하게 여기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어제 오늘, 아버지의 진심을 느껴서 그동안 못되게 굴었던거 버릇없이 굴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했다. "..죄송하고..감사합니다.아버지." "....너한테 늘 차갑게 했던거..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늘 생각은 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나한테 화가나곤 했었다. 그 화는 내가 나한테 내는건데도, 늘 너한테 번져서..아마 어린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았을거다. 그치만..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니까, 세상에 자식 싫어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니. 그러니까 지난일은 다 잊고..내가 내 꿈을 위해서, 내 열망을 위해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거, 그래서 너를 늘 등한시 했던건..부모로서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원망은 하지 말고. 가서 잘 지내고, 밥도 잘 먹고..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항상, 내가 입양된 자식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늘 나를 바라보던 그 차가운 시선과 나를 한번도 따뜻하게 안아준적 없는 아버지는 나한테 있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고 선생님보다 더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던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사춘기를 겪은 후 나는 아버지에게 대들고 버릇없이 구는 행동이 더 잦아졌고 어느새 말도 안되는 반항심이 내 안에 똘똘 뭉쳐진 채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건 엊그제까지만해도 여전했는데, 역시 자식이란건 부모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다른건지 아버지가 이렇게 따뜻하게 나오니까 적응도 못하겠고 마냥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정말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진작에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으면 이렇게까진 오지 않았을텐데, tv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편하게 남자 대 남자로 지낼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원망감과 죄송함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죄..." "죄송하다거나 잘못했다는 말은 니 입에서 들어야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한테 해야될 말이다. 그치만..나는 그런 말은 죽어도 입에서 안나오니..미안해도 미안하지 않은척 해라. 나도 그럴테니까 말이다. 어쨌든..이제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얼른 올라가서 짐 챙기고 정리할 곳이 있으면 정리해라. 근데..니 엄마한텐 말 안해도 되겠냐? 그래도 엄만데.." "...나중에 제가 비행기 타거든..그때 아버지가 말씀해주세요. 누나한테두요. 그리고 제 주소와 연락처 같은건 아버지만 알고 계셨으면해요. 엄마가 많이 걱정하시면 그저 잘 지내고 있다고 한마디만 해주시구요, 누가 찾아와서 연락처를 묻거든 절대 대답하지 말아주세요. 아버지가 저한테 정말로 많이 미안하시면, 꼭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아버지." 내 말에 아버진 알았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시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서재에 있는 창문가에 다가가 밖을 바라보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등만 볼 수 밖에 없었고, 옛날엔 참 많이 넓었던 등 같은데 어느새 왜소해져있는 그 어깨가 나는 안쓰러워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직접 아버지를 볼 수 있는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가슴이 찡해졌다. 부모님이라는건, 아무리 나한테 차갑게 대해주셨어도 그런 존재인 것 같다. 늘 그리울 것 같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 타지에 있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어디 나라 사람이건간에 모두다 똑같이 그들의 부모님이 아닐까. 나는 그렇지 않을거라고 늘 생각했었는데..떠나기 전날에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시니. 어쩐지 그것조차도 원망스러웠다. 20년이상을 그렇게 컸는데 갑자기 뭉클함이 마음속에 가득 담겨져 나는 흰 봉투와 비행기 티켓,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버진 나를 돌아 보지 않으셔서 그 등에 그냥 인사를 한 뒤 방으로 올라와버렸다. 그리고선 2층 창고방에 있던 아주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대고 가져와 방에다 펼쳐놓고 옷을 차근차근 개어 넣었다. 일단 옷장에 있는 것은 다 넣었고, 옆에 있는 옷방에서도 내 옷을 싹 쓸어서 가지고 왔다. 양말과 벨트, 모자 등등 사소한 악세사리까지도 내 물건이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방으로 가져왔고 그렇게 모두 다 챙기려니 커다란 캐리어도 모자라 창고에서 그와 똑같은 크기의 캐리어를 하나 더 갖고 와야만 했다. "...하..." 정말 거짓말 안하고, 옷만 차지하는게 커다란 캐리어의 하나하고도 반이었고, 나머지 남은 공간엔 내가 쓰던 책들과 꼭 가져가고 싶은 물건들을 하나하나씩 챙겨넣었다. 일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부터 넣고 수첩이라던가 그 외 필요할 것 같진 않아도 왠지 여기다 두고 가면 아쉬울 것 같은 물건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싹 쓸어모았다. 그리고선 열어본 책상 속 첫번째 서랍. 그 안엔 윤두준과의 추억이 가득한 앨범이 놓여져 있었다. 그 외에 많은 물건들은 내가 예전에 윤두준이 한참 아팠을때 두고 와서 없었고 나한테 남은거라곤 딸랑 앨범 하나였다. 그래도 여기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있는거라 나는 그 앨범을 손에 꽉 쥐었다. 이 앨범을 펼쳐본 순간 또 눈물이 터져버릴까봐 차마 열어보지도 못한채 그대로 캐리어에 넣어버렸고 그렇게 짐을 싹 챙기니 이미 방은 텅 빈것 과도 마찬가지로 변해버렸다. 나는 두개의 캐리어는 항공편으로 부쳐야 될 것 같아 방 귀퉁이에 세워놓았고 내가 비행기에 갖고탈 물건들은 따로 백팩안에다 챙겼다. 맥북과, 카메라, 만땅으로 충전한 아이팟은 필수로 챙기고 혹시나 뭐 두고가는게 있을까봐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선 책상위에 올려둔 비행기 티켓을 들어 다시한번 확인했다. [2011.07.21 THURSDAY 1:00 PM] 이라고 쓰여있는 티켓에 나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2011.07.20 WEDNESDAY 12:23 PM] 내가 한국에 있을 시간은 하루하고도 한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에 묘한 씁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정말 프랑스에 가고 싶어서 가는게 아니기 때문에, 말그대로 이건 야반도주나 다름 없는 도망침이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 물리고 싶은데.. 내가 빠지지 않으면 어떤식으로든 해결이 나지 않을 일이라는걸 잘 알기에 나는 염치없이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슬퍼할 자격도 없다는걸 알았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씁쓸할 수 밖에 없어 티켓을 마냥 바라본 뒤 책상위에 고이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때,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것 마냥 태경이한테 연락이 왔고, 마침 연락할 참이어서 나는 신기하기도 해 전화를 냉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난데. 오늘 뭐해?」 "..오늘? 왜?" 「약속 없으면..6시에 나랑 만날래?」 "어. 어디서 만날건데?" 「..홍대에 라비아 라는 카페가 있거든? 그게 어딨는거냐면.. 홍대입구에서 내려서 쭉 올라오다보면 중간에 스타벅스 있을거야. 거기 골목으로 꺾어서 쭉 걸으면 술집 같은거 많은데 그쯤 가서 그 근처 가게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럼 대답해줄거야. 좀 작은 카펜데..꽤 유명해서 물어보면 아는 사람들 많을거다.」 "뭐 그렇게 물어물어까지 가야돼? 그냥 스타벅스에서.." 「안돼. 거기 진짜 좋은 카페란말야. 소개해주고싶어서 그래. 꼭 와. 늦지말고. 6시까지다 6시!!!」 "어. 알았어." 내 기분과는 다르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도 모르면서 마냥 들뜬 것 같은 태경의 목소리에 나는 또 짠해졌다. 어쩌면 다신 못볼 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디로 가는건지 언제 가는건지 하나도 안 알려줄건데.. 그럼 내 연락이 내일부턴 뚝 끊겨서 걱정도 많이 할텐데.. 그치만 태경이한테 알려주면 윤두준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 뻔했으니까 미안해도 알려줄 순 없었다. 그렇게 끊긴 핸드폰을 보다가, 갑자기 든 기광이 생각에 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오냐.」 "어디냐." 「현승이 만나러 가려고 준비중.」 "..잘됐다. 너 현승이 어디서 만나냐?" 「그건 왜.」 "현승이 못본지도 오래 됐으니까 좀 보려고 그런다. 아, 그러지말고..학교로 와라. 현승이가 있는 학교. 우리 학교." 「뜬금없이 거긴 왜?」 "나는 졸업하고 한번도 안가봐서..궁금해서 그런다 왜. 어차피 현승이도 지금 보충하고 있을거 아니냐. 괜히 딴데로 나오라고해서 애 귀찮게 하지말고 그냥 거기서 보자. 두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와. 늦지말고 와라. 알았냐? 끊는다." 나는 전화를 끊은 뒤 캐리어에서 부랴부랴 옷을 꺼내 갈아입고-내일 입고 갈 옷도 미리 꺼내뒀다- 다른 백팩에다 카메라와 지갑을 챙겨 넣고 집에서 일찍 나왔다. 학교에 가서 사진도 찍고, 프랑스에 가면 많이 그리울 한국도 카메라에 잔뜩 담기 위해 나는 아까 집에서 나오기 전에 내 방을 찍고, 집에서 나와선 집 전체를 찍고 대문도 찍었다. 우리집 골목도 찍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내내 사소한 그 모든것들을 다 카메라에 담았다. 사람들이 더워서 손 부채질을 하며 걸어가는 모습도, 햇볕이 쨍쨍한 길거리도,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있는 카페와 식당도 찍고 더운 열기가 뜨겁게 올라오는 도로 위 택시며 자동차들도 찍었다. 사실 이렇게 사진을 찍는걸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여기가 그리워지면 찾아볼 사진이 있어야 덜 외로울 것 같아 최대한 많이 찍어댔다. 그렇게 하다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한 학교 앞. 여전한 학교 앞 문방구도 찍고, 교문도, 여전히 커다랗게 보이는 학교 건물도.. 누가 보면 사진간줄 알겠다 싶을정도로 무섭게 찍어댔다. "넌 뭘 그렇게 찍냐? 웬일로 카메라는 다 갖고 나와서는?" 언제 왔는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 기광이에 나는 놀라기도 잠시,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고 멍한 기광이를 담았다. 이에 미쳤냐며, 내 카메라를 잡으려는데 그 모습도 찍고 찍고 또 찍었다. 그러고보니까 기광이 사진은 별로 없구나, 싶은 생각에 나는 눈물이 고여버렸다. 많이 친한 친구고, 앞으로도 그럴거고, 그건 변함이 없을건데도..앞으로 못볼거란 생각을 하니까 괜히 서러워져서 내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냅두고 왜 가야하는건가 또다시 그런 회의감이 들었지만 어차피 선택해버린거 후회는 해봐야 소용 없을 것 같아 기광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손으로 눈물을 쓱 닦은다음에 괜히 큰소리로 말하며 계속 기광이를 카메라 안에 담았다. "왜!! 사진 몇방 찍는다고 니 얼굴 닳냐?" "그래도 찍지마!! 왜 갑자기 카메라는 갖고 나와서 난리야!!" "새끼..그러고보니까 너랑 나랑 찍은 사진 하나도 없는거 알고 있냐? 야 일로 와봐." 나는 기광이에게 뒤돌아서서 눈을 쓱 비벼 닦은 다음 애써 환하게 웃으며 기광이의 옆에 서서 카메라를 쭉 뺐고 어색하다며 안찍겠다고 했으면서도 내가 하나 둘 셋, 이라니까 어색하게 웃는 기광이었다. 이에 나는 또 웃기다며 웃다가 좀 특이한 포즈좀 취해보라면서 다시 셀카를 찍었고 무거운 카메라를 한손으로 들고 있자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이러다 사진이 흔들리게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으..사진 흔들렸다." "니가 하는게 그렇지 뭐." 기광이는 구령대위에 올라가 방학이라 애들도 없는 학교에서, 텅빈 운동장을 빤히 바라보다 난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중학교때부터 친구였었나?" "어." "..질기기도 하다. 맨날 싸우면서도 이렇게 지낸거보면..." "그러게." 나는 기광이 얼굴을 보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카메라에다 내 눈을 숨긴 뒤 멍때리는 기광이와 말하는 기광이를 계속 찍고, 운동장도 찍고 하늘도 찍었다. "근데 카메라 왜 갖고 왔냐? 사진 찍는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냥...뭐..학교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온김에 사진이나 찍어서 남겨둘라고." "언제부터 학교에 그렇게 깊은 애정이 있으셨다고..." 기광이는 구령대 위에 아예 누워버렸고 나는 차마 기광이에게 말을 할 수가 없어 괜히 입만 달싹거렸다. 분명 화낼텐데..미친거 아니냐고 장난치지 말라고 화낼텐데..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기광이한텐 잘해준 기억은 없고 늘 잘못한 기억만 있어서 마냥 미안했다. "현승이..언제온대?" "몰라. 이제 오분만 있음 수업 끝날걸?" "..이기광." "오냐." "...밥 잘먹고, 현승이랑 잘 지내라. 현승이한테 잘하는건 알지만 한눈 같은건 팔지 말고. 운동은 좀 작작하고. 너 그러다 김종국처럼 된다. 근육만 빵빵하게." 차마 기광이한테 유학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나오질 않아서 괜히 아까 계속 찍어왔던 사진만 카메라로 보고 있었다. 기광인 대수롭지 않게 들었는지 여전히 바닥에 누워서 대답도 안했고 나는 개의치않고 말을 이었다. "현승이도 이번에 수능봐서 우리 학교 들어오면 공식적으로 cc되는거냐? 근데 너..똥줄 좀 타겠다? 현승이 잘생겨서 여자애들한테 인기 되게 많을텐데..그래도 현승이는 너만 좋아하니까.. 내가 니네 보면서 부러웠던 적이 한 두번 아니었던거 아냐? 서로 배려해주고 걱정하고... 천하의 이기광이 벌써 몇년째냐 현승이랑. 다시봤다 새끼야." "...뭐래. 갑자기." "어쨌든 앞으로도 싸우지 말고. 그러고보니까 내가 너네한테 변변한 선물 같은것도 못해줬네...좀 진작에..." "야." "너는 나한테 준 것도 많은데..왜 나는 참..나는 되게 이기적이야 그치. 나도 몰랐는데 요즘들어선 내가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란걸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역시 사람이 옆에 있을때 잘해야된다고 하더니만..." "양요섭." "나 유학가." 차마 기광이를 볼 수가 없어 이미 끝까지 다 본 사진만 빤히 바라봤다. 기광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는걸 보면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야." "아..현승이 언제오냐. 빨리 좀 봤으면 좋겠는데..." "양요섭!" "이따 태경이도 봐야..." "야!!!!!!!!" 기광이는 내가 카메라만 쳐다보자 카메라를 뺏어들어 지 등 뒤로 숨겼고 어느새 울고 있었던 내 눈이 기광이한테 들켜서 나는 너무 쪽팔려 손등으로 쓱 훔친다음 왜그러냐며 카메라 달라고 말했고 이기광은 많이 화가났는지 엄청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갑자기 아니야. 그냥 가고 싶었어 예전부터. 말했잖아. 유학 가고 싶다고." "도망치는거잖아 너." "..도망이건 뭐건..그냥 가고 싶어졌어." "언제 가는데." "...일주일 뒤에." 당장 내일 간다고 말하면 이새낀 나를 어떤 방법으로든 안보내줄 사람이란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기광이는 그런 내 말을 믿었는지 하..하고 한숨을 쉬더니 구령대를 조금 서성였다. "..형은. 형은 알아? 너 유학가는거?" "...무..무슨..소리에요? 유학...요섭이형..유학가요? 갑자기 왜요!?" 언제 와있었는지 내 등 뒤에서 교복을 입고 유난히 검은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서있었고 기광이는 그런 현승이를 한번 보더니 텅빈 운동장에 시선을 쳐박았다. 사람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왜들 그러냐. 가는 사람 마음 안좋게. "..그냥..예전부터 생각했던거야. 갑자기 아니야 현승아."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럼 선생님은요?" "형도..여기서 할 일 해야지." "..헤어지는거에요 그럼?" "뭐...그렇게 되나..." 내 말에 이기광은 빨개진 눈을 한채로 다시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로 가는건데." "...프랑스. 근데..형한텐 말하지마. 진짜..말 하지마. 어차피 일주일 뒤에 나 가니까.. 그 전엔 내가 내 입으로 말하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가기 전까지는 절대 형한테 말하지마. 어? 이기광." "..말 하고 갈거야?" "할거야. 할거니까..내가 직접 말 할거니까..그 전엔 말하지마." "...그렇게..힘들었냐? 그 두 사람 보는게?" 기광의 말에 나는 그냥 대답 없이 웃기만 하고 기광이한테 다가가서 카메라를 뺏어든 뒤 넋이 나간듯 보이는 현승이를 찍었다. 이에 현승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난 그것도 놓치지않고 또 찍었다. "..가기 전에..사진 남겨놓는거에요 형? 보고 싶으면..오면 되잖아요." "올건데..그래도..비행기 값이 얼만데..보고싶을때마다 어떻게 오냐. 아, 현승아 일로와서 기광이 옆에 서봐. 니네 둘 좀 찍자."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나란히 선 현승과 기광이를 바라봤고 또다시 눈물이 고여 찍을만하면 눈앞이 뿌얘지고 또 찍을만 하면 눈이 뿌얘져서 자꾸만 사진 한장 찍는게 오래걸렸다. "아 얼른 찍어." 기광의 짜증에 나는 알았다며 눈물을 쓱 닦으며 찰칵 찰칵 여러장을 찍었고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뒤 현승이에게 카메라를 넘겼다. "현승아, 우리도 좀 찍어주라. 얼굴 이쁘게 나오게 잘 찍어." 나는 기광이의 옆에 서서 환히 웃었고 현승이는 이쁘게 나왔다며 웃었고 현승이 눈도 가까이서 보니 빨갰다. 이럴줄 알았음 만나지 말걸.....괜히 후회가 들었다. "..꼭..가야되냐?"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내 공부하러 가는거야. 가서 공부하려고." "그걸 꼭 지금 가야되냐는 말이야. 나중에 가도 되잖아."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래." 내 말에 기광이는 답답한지 뒤돌아서서 한숨을 쉬더니 아무 말도 없었고 현승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잘 갔다오라고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보고싶을거에요. 연락 자주하고, 바쁘다고 메일 같은거 씹지말고..미니홈피 들어와서 방명록도 써주고 그래요. 그래도..나 수능볼때까지는 있었으면 좋을텐데..기광이형은 형 가는게 더 아쉬워서 저러는거니까 마음 쓰지말고 잘 가요. 가서 잘 도착했다고 꼭 전화해요 알았죠?" "...고맙다. 저새낀..꽁해서..야. 이기광! 내가 뭐 죽으러 가냐!? 왜 그렇게 울상이야. 니가 그러면 내가 퍽이나 잘가겠다? 가는 사람 축복은 못해줄망정..." "...연락 안하면 뒤진다. 가서 한달동안은 매일매일하고, 한달 뒤엔 일주일에 한번씩 해. 연락 안하면...진짜 프랑스까지 내가 쫓아가는 수가 있으니까 알아서 해라. 양요섭." "알았다 새끼야." 나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현승이의 눈물을 닦아준 다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려는데 갑자기 난 문득 우리 셋이서 찍은 사진이 갖고 싶어 지나가던 학생 한명을 붙잡고선 다짜고짜 카메라부터 넘겨준 뒤 내가 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아마 이 사진을 보면...많이 웃길지도 모르겠다. 다들 눈은 토끼마냥 빨개져있을테니까 말이다. - "간다." "한국 언제 들어올건데." "가기도 전에 언제 들어올거냐고 묻냐? 몰라 새끼야. 잘 지내고, 밥 거르지말고, 현승이는 수능 얼마 안남았으니까 지치지말고 준비 열심히 하고!! ...가기 전에 다시 연락할테니까..보자. 간다!!!" 나는 기광이와 현승이보다 먼저 뒤돌아서서 마침 식당 앞을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아 탔고 그와 동시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에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음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당장 내일 가는건데, 다신 한국에 안들어올건데..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뭘하는지..하나도 안알려줄건데.. 이제 이기광 장현승 윤두준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살거고, 그렇게 혼자 지낼건데, 말하자면 이 세사람의 뒷통수를 제대로 때리는 격이라 나는 끝도 없이 미안해졌다. 그치만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평생 나는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 같았기때문에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짜...간다.." 기광, 현승과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탄 택시에서, 아저씨가 다행히 라비아 라는 카페를 아시는 덕에 나는 헤매지 않고 카페를 찾아갈 수가 있었고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터라 얼른 만나고 집에 들어가서 나머지 정리를 좀 해야겠다 싶은 생각으로 카페를 들어섰다. 카페는 지금 문을 연게 맞는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가게 안이 온통 깜깜했다. 문이 열려있던거 보면 장사를 하는거 같긴 한데..뭐 이렇게 어둡고 사람들은 또 한명도 없는지.. 나는 아직 너무 이른시간에 온건가 싶어 다시 나가려는데 그때 카페 맨 앞에 있는 불이 환히 켜졌다. [If our love was a fairy tale, I would charge in and rescue you. On a yacht baby we would sail to an island where we'd say I do. 만약 우리의 사랑이 동화이야기라면 난 당신을 구할겁니다. 우리가 항해할 요트에서 결혼의 서약을 맺을 섬에 갈겁니다.] 카페는 정말 너무 작아서, 테이블이 달랑 2개 밖에 없었다. 그치만 작아서 더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하나, 온통 불이 꺼지고 태경이가 앉아있는 테이블 그 위에만 불이 켜져 마치 무대에서 공연하는 가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기타까지 칠 줄 아는지, 태경이는 눈을 감은채로 기타 연주에 열중하며 노래를 불렀고 생각보다 잘 부르는 태경의 모습에 나는 놀라서 입까지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You leave me breathless. You're everything good in my life. You leave me breathless. I still can't believe tha you're mine. You just walked out of my dreams. So beautiful you're leaving me. 당신은 나의 숨을 막히게해요. 당신은 내 인생의 모든것이에요. 당신은 나의 숨을 막히게합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나의 사람이라는게 믿겨지지가 않아요. 당신은 방금 나의 꿈 중 하나에서 나와버렸어요.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내 숨을 막히게 하네요.] 태경이는 늘 나한테 보여줬던 깨방정의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무슨 선생님 앞에서 가창 시험을 보는 아이마냥 한없이 진지했고 엄숙해보였다. 처음 보는, 아니 그때 패션쇼 이후에 처음보는 김태경의 진지모드에 나는 또다시 사뭇 웃음이 터져서 입을 가리며 웃었고 태경이는 계속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기타를 의자위에 놓고 나한테 다가와 내 손목을 잡고 끌고가 아까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 그 앞에 나를 앉혔다. "..잘 찾아왔네?" "아..다행히 택시아저씨가 알고 계셔서..근데 왜 불은 안켜고..손님들은 되게 없네.." "아는 형이..여기 사장님이라..오늘 하루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어." "왜?" "...양요섭. 나 지금 장난하는거 아니고, 진짜 진지하게 너한테 말하는거야." 김태경은 내 앞으로 꽉 쥔 주먹을 내밀었고 뭐하냐며 쳐다보자 주먹을 흔들었고 뭐 줄게 있나 싶어서 나는 그 주먹 밑에다 내 손바닥을 받쳤다. 이윽고 내 손바닥에 닿은 따뜻한 무언가. "....뭐야..이게?" "..우리..친구 말고 딴거 하자." "뭐? 무슨..." "나 너한테 딴맘 있다고." 나는 태경이의 말이 지금..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뜻이 맞는건가 싶어서 내 손바닥에 놓여있는 반지를 바라봤고 태경이의 왼손 네번째엔 이미 이것과 똑같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김태경." "바로 대답하라는거 아니야. 너 아직도 윤두준 좋아하는거 알아. 그 사람 못잊은거, 앞으로도 못잊을거..알아. 충분히 아는데..그냥 너 나 이용한다고 생각하고..윤두준 못잊고 힘들때마다 나 이용하면서..." "김태경. 잠깐만." "내 말 끝까지 들어. 나 좋아해달라고 안해. 그럴 수 없을거란거 알아. 근데..내가 안되겠어서 그래. 너가 해달라는것만 할테니까, 하지말라는건 죽어도 안할테니까..나도 좀 봐주면 안되냐 양요섭?" 태경이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정말 여기서 단번에 거절해버리면 상처받은 표정이 바로 드러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거절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어떤 마음인지 알기 때문에, 예전에 내가 윤두준을 멀리서 바라볼때 잠깐 봤던 내 얼굴이 정말 태경이의 이 얼굴과 같았으니까. 좀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드러난 표정이 바로 지금 김태경의 얼굴이었으니까..그 마음을 너무 잘 아는 나는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치만 그런 사람에겐 상대가 머뭇거릴때의 희망이 고문이란걸 또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태경인 나한테 기광이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이만큼까지 견딜 수 있었던건 모두 다 김태경이 옆에서 위로해주고 같이 있어줬기 때문이었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 너 못봐. 너 볼 여유 없어. 자꾸만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사람 때문에 니가 안보여. 그러니까 장님 앞에서 봐달라고 그러지말고 너만 보고, 너만 알아주는 사람 만나. 너 인기 많잖아. 멀쩡하게 생겨갖고는 왜 나한테 이러냐 김태경? 너 웃긴다?" 내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하자 김태경은 점점 더 굳은 얼굴로, 점점 더 진지해져갔다. "...양..." "나 당분간 어디 좀 가. 멀리 가는건 아니고..그냥 발길 닿는대로 다 가보려고. 그러니까 연락 잘 안되더라도 화내지말고. 그동안 더 멋있고 이쁜 사람 찾아봐." "어디가는데." "말했잖아. 그냥 우리나라..좀 돌아보려고. 서울 말고는 가본 데가 없어서..부산도 가보고 싶고 춘천도 가보고 싶고.. 그냥 한달 정도 그렇게 돌아다닐거니까 다시 돌아왔을때 너는 꼭 너랑 잘 어울리는 사람이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 나한테 정말 소중한 친구야. 그 누구랑도 못바꿔. 근데..여기까지야. 나 너랑 친구 계속 하고 싶어. 그러니까..니가 좀 도와줘." 그리고서 나는 내 손에 올려진 반지를 김태경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또 끼워주려고했는데 내 사이즈를 생각해서 좀 작게 샀는지 잘 안들어가서 그냥 새끼 손가락에 끼워버렸고 좀 헐렁했지만 대충 맞는 것 같아 이쁘다며 칭찬한뒤 그 손을 꽉 잡았다. "고마워. 너 아니었음 나..진작에 어떻게 됐을텐데...맨처음 만난건 어이없었지만 너같이 깨방정인 애 만나서 우울할때도 기분이 좀 나아졌었던건 사실이야. 여러모로 고마운데..너한텐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 나중에..정말 나중에..만나게되면..그땐 이것보다 더 이쁜 반지 내가 선물해줄게. 그땐..지금 니 마음 말고, 내 마음 담아서 줄게. 그땐 나눠끼자. 우정반지." 내 말에 김태경은, 아주 잠시 잠깐동안 눈에서 뭔가 반짝 하고 빛났지만, 정말 김태경처럼 김태경답게 웃으며 내가 아까 끼워줬던 그 반지를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끼면서 말했다. "웬만하면 새끼손가락에 맞는걸로 줘라. 사람들이 오해할라. 나 꽤 유명한 사람인거 알지?" "...또 시작이다 또." "....어디를 가든지..연락 자주하고. 문자는 맨날 할테니까 답장 꼬박꼬박하고. 위험한데는 가지 말고..무슨 일 있음 생각하지말고 바로 전화해. 거기가 어디든지 갈테니까. 너무 길게 여행은 하지마라. 지루하잖냐. 기다리는 사람도...너도." "...알았다. 길..어지지 않게." 나는 가방에 넣어뒀던 카메라를 꺼내 바로 앞에 있는 김태경을 찍었고 역시나 뭐하냐는 듯 쳐다봤지만 아무래도 기광이보다 카메라에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색하게 웃는게 아니라 정말 프로다운 미소를 지어보여 난 또 새삼 놀랐다. 뷰파인더에 비친 모습은 영락없이 모델인 것 같아서. "갈게. 마지막으로 악수 한번만 하자." "마지막은 무슨..어차피 또 볼건데." "...그래도." 내가 먼저 내민 손을 꽉 잡은 김태경의 손은 참 따뜻했다. 많이 그리울만큼이나 따뜻하고 소중해서 나는 순간 놓고 싶지 않단 생각을 했다. 계속 이런 사람들 옆에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내 머릿속을 스쳐지났지만 약해지면 안된다는 이성이 날 붙잡아 나는 태경이의 손을 놓고 다시한번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에 태경인 카메라 줘보라면서 카메라를 들고 내 얼굴 옆에다 자신의 얼굴을 붙여놓고 카메라는 하늘높이 치켜들고 셀카를 찍어댔다. 여러방 찍는것 같더니 나온 사진을 보니 셀카를 여러번 찍어본 솜씨인게 틀림없었다. 아주 잘나온 사진에 김태경은 나중에 이 사진 뽑아서 자기도 달라며 말했고 나는 알았다면서 태경이를 한번 꽉 안은 뒤 가게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거의 백장도 넘게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돌려보며 이제 내일 새벽이면 이 곳을 떠날 내 마음을 되새겼다. 마지막으로 윤두준을 보고 가고 싶었지만..윤두준의 얼굴을 보면 모든게 다 무너져버릴까봐, 다잡고 다잡았던 내 마음이 와르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게 뻔해서 윤두준과의 만남은 건너뛰었다. 앞으로 다신 못만날테지만..그래서 많이 그리울테지만 후회는 않는다. 만약, 정말 우리가 인연이라면. 정말 우리가 만나야할 인연인거라면. 내가 어디에 있던, 우리는 만날거란걸 나는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운명이라면 반드시 어디에선가 언젠가는 만날거란걸 믿고 있기 때문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보고싶을뿐. 집에 들어오자 밤 11시가 다 되었고, 2층으로 올라오자 누나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길래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제 이렇게 껄끄럽게 마주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누나." 누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마치 내 말이 들리지 않는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것이 어느샌가부터 익숙해져서 가만히 누나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좀만 참아줘." "뭐?" "나는..아직도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누구랑 결혼을 하든 그건 누나 마음인건데.. 그냥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랑 결혼 헀으면 좋겠어. 어렸을때부터 엄마 대신 누나가 나 챙겨줬을때부터 누난 나한테 그냥 엄마였었어. 나랑 나이차이도 별로 안나는데 항상 엄마같이..내 준비물 체크해주고, 숙제 봐주고 공부도 알려주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항상 전화하는건 엄마가 아니라 누나였고 성적이 좀만 떨어져도 불같이 화내면서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근데 한번도 누나가 미웠던 적이 없었어. 지금까지도 누난 나한테 늘 제일 좋은 사람이니까. 누나가 나 미워하는거 당연한거니까.. 근데 나 미워하는 것 때문에 누나가 힘들다면 안그랬으면 좋겠어. 나 미워하는건 상관없는데. 난 누나가 힘든게 싫으니까..." "또 무슨 일 쳤냐? 왜 갑자기 와서 고해성사야? 옛날얘기까지 들먹거리면서." "...꼭..행복했으면 좋겠고, 결혼식장에선 이세상 그 어떤 신부보다 제일 이뻤으면 좋겠어. 누나가 드레스 입은거..꼭 보고 싶었는데..그때 좀 볼걸. 후회 된다. 근데..안봐도 이쁠거야. 누나니까. 미안하고..또 미안하고...끝까지 미안해 누나." 나는 누나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바닥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갔고 순간 휑한 느낌이 낯설어서 내 방인데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깜깜한 방 안에 서 있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윤두준에게 줄 짧은 편지를 썼다. [형. 요섭이야. 이렇게 편지를 쓰는건 참 오랜만이라서 낯설다.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을거고, 많이 괴로웠을텐데 나 놓지 않고 있어준거..사실 고마웠어. 형한테 말로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정말 형이 그러자고 하면 어쩌나 간졸인 적이 한두번 아니었거든.. 나 되게 웃기지? 그래도..나랑 만나줘서 고맙고. 아마 못잊을거야. 평생. 밥 잘 먹고, 잠은 꼭 집에서 자고..앞으로 이런 잔소리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해줄테지만.. 그 누가 됐던간에 그 사람한테 잘해줬으면 해. 나한테보다 더 잘해주면..내가 질투할 수도 있지만 다 봐줄게. 그러니까 형도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시간이 많이..엄청 많이 지나면..볼 수 있겠지. 그때 형 닮은 아이가 있으면 꼭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네..형 닮았음..못생겼겠지?ㅋㅋㅋㅋㅋ 장난이고..나중에..정말 나중에 우리가 모든걸 다 잊을때쯤에..그때 웃으면서 보자 형. 이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안하면 후회 할 것 같다. 사랑해.] 나는 그 쪽지를 곱게 접어서 책상위에 올려놨고 핸드폰은 꺼서 책상 위에 올려놨다. 핸드폰은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다. 한국을 뜨는 순간, 이 곳과는 연락을 하지 않을거니까.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참 기분과는 반대로 찬란했다. - 눈을 뜨니 새벽 일곱시였다. 한동안은 이런 시간에 일어나보질 못했는데, 내가 어디론가 갈 것을 내 몸도 알고 있었는지 자동적으로 떠진 눈에 나는 계속 침대에 누워있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이라 그런지 해는 길어서 일곱시인데도 세상이 어느정도 환했고,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한뒤 어제 미리 꺼내놨던 옷으로 갈아입고 아직 자고 있을 가족들 몰래 나가야했기 때문에 미리 알아둔 콜택시에 전화를 걸어 집 앞에 대기 시키고 내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캐리어를 대문 밖으로 옮겨놓느라 나는 집 안팍을 두번이나 오가야만 했다. 나는 기사아저씨께 공항 대신, 윤두준의 집으로 가달라고 말했고 차는 새벽 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맨처음 윤두준의 집이 어딘지 알겠다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이 길을 달렸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새 3년전 얘기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윤두준 하나만 보고 그저 좋아서 매달렸었는데 3년후, 지금의 나는 윤두준이 좋지만 다른것들이 눈에 더 들어와 그에게서 도망치려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떠난것을 알게된다면, 윤두준은 나에게 맞는 두번째 뒷통수에 그 충격에서 꽤 오랜시간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이란건 적응의 동물이라서, 결국은 내가 없는 환경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갈테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를 무작정 그리워하기엔 현실이란게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는걸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왔습니다."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요." 나는 차에서 내려 윤두준의 집까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은 아주 고요했고, 도어락을 붙잡고 몇초를 갈등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얼굴을 보고 나올까, 하는 생각과 그냥 가야된다는 생각이 충돌했지만 결국 나는 손에 든 쪽지를 문 틈에 끼워놓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와버렸고 윤두준에게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가는게 마음에 걸렸지만..분명 약해질거라는걸 알기에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다왔습니다." 아홉시 반 정도가 되어서야 공항에 도착했고, 이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아 기사아저씨께 택시비를 내고 내 몸집보다 더 큰 캐리어 두개와 커다란 백팩을 매고 공항에 들어섰다. 아침인데도 사람이 왜이렇게 많은건지 나는 그들 틈 사이에서 요리조리 겨우겨우 피해다니면서 탑승 수속을 밟았다. 몇 분 정도가 지나서야 내 가방은 택을 단 채로 무빙벨트 위에 올려졌고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로 들어갔고 내가 오늘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한들 그 누구도 여기안까지는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면세점의 번쩍번쩍한 조명빛을 받으면서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으면 아이팟에 노래라도 좀 넣어오는건데..하는 생각과 함께 커다란 비행기가 있는 활주로를 통유리를 통해 바라봤다. 짐을 실은 화물차가 왔다갔다하고, 사람들이 왔다갔다했다. [아시아나항공, 오후 1시 프랑스행 항공기를 이용하시는 고객분들께서는 탑승 게이트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안내방송 드립니다...] 그냥 윤두준 생각 한번 했다가, 태경이 생각 한번 했다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어제 잔뜩 찍어갖고온 사진을 지겹게 돌려보고 있는데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났는지 안내방송이 들렸고 나는 백팩만 맨채로 티켓을 든 뒤에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가셔서 왼쪽으로 탑승해주시기바랍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나는 비행기로 들어가는 통로를 걸어들어가며 중간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이제 끝이다. 이제는...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하여 날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기억들은 이제 서서히 시간 속 뒷편으로 사라질거고, 그러면 난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거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모든건 다 빛이 바래지기 마련이므로.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 낯선곳에서, 시간에만 의지하며 살아갈 생각이다. 앞으로 내가 겪었던 이 일을 떠올려도 미소가 지어질 그 때까지. *** 3년 후. "알았어. 그 책 사다주면 돼? 어." 3년째 나는 백수다. 아니, 그래도 난 일하는 백수다. 공부를 해야지, 라고 생각은 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노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공부가 되질 않아서 아직까지도 학교엔 입학도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지내고 있다. 맨처음 여기에 왔을땐 모든게 무섭고 낯설었는데, 역시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서 못살 것만 같았는데도 억지로 억지로 살아지는것 같더니만 지금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있었다. 오후 3시부터 9시까지는 빵집에서 알바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다 내 시간이었다. 프랑스는 페이가 센 편이라 여태까지 한번도 아버지한테 손을 벌린 적은 없었다.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 저..기욤 뮈소 소설이 어디에 있죠?" 이제 나는 곧잘 프랑스어도 잘한다. 아직도 갈길 멀었다며 친구들은 타박하지만 그래도 난 이정도면 만족하고 있다. 내가 프랑스인도 아닌데 어떻게 프랑스인들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 대화만 되면 되는거지. 알바를 같이 하는 친구가, 서점에 갈거면 기욤 뮈소 소설 좀 사다달라고 부탁해서 직원한테 물어 기욤 뮈소의 소설이 쭉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가 쓴 작품들은 모조리 샀고 꽤 묵직한 무게에 나중에 심부름 값으로 밥이나 사달라고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원래 내가 사려던 요리책 코너로 들어갔다. 나는 요즘 요리에 흥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알바가 끝나면 집에 와서 요리책을 보고 이론을 익히고, 그 다음날 아침에 직접 만들어보곤 했는데 요리란건 역시 너무 어려워서 글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이번엔 dvd까지 들어있는 요리책을 사야될 것 같아 많이 진열되어 있는 책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서 골랐다. "...이게 좋겠다." 이번엔 파스타에 도전하기로 했다. 스테이크도 만들어보고, 스파게티도 만들어보고..나중엔 오븐을 하나 사다가 피자도 만들어봐야겠다. 어쨌든 또 새로운 요리를 배울 생각에 마음이 부푼 나는 그 책까지 들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순간 내 눈을 사로잡는 책이 있어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뒷걸음질쳐서 그 책을 바라봤다. "....김...태경...?" vogue라는 잡지 커버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있어 다가가서 봤더니, 영락없는 동양인. 김태경이었다. 나는 행여나 내가 잘못본걸까봐 책을 자세히 살폈고 그 곳엔 이 표지모델이 김태경이라는걸 알려주는 듯 태경이와 한 인터뷰가 실려있다고 쓰여있었고 나는 고민도 하지않고 이 책도 사버렸다. 그리고 이 책을 차마 그 자리에서 뜯어보지도 못한채 집까지 끌고 와서 책 겉표지에 있는, 3년전 그때보다 훨씬 성숙해지고 더 남자다워진 김태경만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유명한 모델이라고 하더니, 이젠 프랑스 잡지에까지 나올정도가 된건가..싶은 생각에, 그리고 정말 그때 이후로 처음 접하는 소식이라..그때 그렇게 떠나고나서- 나는 기광이와 현승이, 태경이, 윤두준. 그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듣는 소식이라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차마 잡지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궁금했었지만, 그래도 참았는데..참고 참고 또 참다보니 어느새 달력이 3번이나 바뀔때까지 와버렸는데 이렇게 태경이 몰래, 나 혼자만 비겁하게 그의 소식을 알게 되는것도 미안해서 나는 한동안 이 잡지만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를 몇분. 결국 잡지를 펼쳐든 나는, 프랑스어로 가득찬 인터뷰를 꼼꼼히 살폈다. 간혹가다 해석이 안되는건 건너뛰면서. 내용은 뭐 그냥 그랬다. 처음 모델을 시작한 계기나 첫사랑 이야기, 이상형. 앞으로의 포부, 앞으로의 계획.등등 그냥 흔한 인터뷰중 하나인 것 같아 대충 대충 보면서 넘기는데 인터뷰 맨 끝에 되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글자가 눈에 띄었다. [잊은 적 없어. 나 니가 줄 반지 기대하고 있는데..살아있는지 그거라도 좀 알려주면 안되냐. 기다릴게.] 나를 향한 메세지였다. 나는 이 글이 왜 프랑스 잡지에, 그것도 한글로 적혀져있는건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위에 있는 글을 읽었고 거기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모델 김태경의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 프랑스 뿐만 아니라 패션을 선도하는 나라라면 그 곳이 어디든지 가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계획입니다. 근데..한가지 부탁 드려도 될까요? 이렇게 똑같이 잡지에 실어주세요.] 라고 말이다. 김태경은 아무래도 내가 프랑스에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지, 다분히 의도적인 목적을 담아 리포터에게 쪽지를 건넨 것 같았다. 나는 순간 갑자기 그리워지고, 갑자기 미안해져서 그동안 한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잡지위로 툭 떨어졌고 나는 행여나 글씨가 번질까봐 서둘러 닦아낸 뒤 고딕체로 어색하게 적혀져있는 한글을 바라봤다. 프랑스어 속에 있는 한국말이라. 마치 잡지에다 대놓고, 나와 김태경이 비밀을 공유한 것 같은 짜릿한 기분까지 들어 너무 묘했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참아지질 않았다. 기광이의 소식이 궁금해질때마다, 현승이의 소식이 궁금해질때마다 이 사람들의 미니홈피에 들어가보려고까지 했던 나지만 매번 그렇게 될때마다 억지로 창을 끄고 컴퓨터까지 꺼버린 나였는데...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식탁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켜서 3년 동안 단 한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한국 사이트에 접속했다. 순간 내 눈에 드리워지는건, 너무 익숙해서 이젠 낯설기까지한 한국말들이었고 마치 내가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버려 왈칵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렇게 참았던건데.... 나는 예전에, 예전에. 내 소식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현승이가 내 메일로 보내준 주소를 입력창에 쳐서 들어가봤고 다행히 주소를 바꾸진 않았는지 현승이의 미니홈피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가입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시스템이라 나는 부랴부랴 가입을 해서 현승이의 미니홈피를 몰래 눈팅만 했다. "..짜식..결국 CC됐구나." 현승이와 기광이가 행복하게 찍은 사진이 그의 홈피 메인 사진이었고, 그 사진을 빤히 보던 나는 너무 좋아서 또 눈물이 나왔다. 정말 그리워져서, 지금 당장이라도 짐 싸서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을만큼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현승이의 미니홈피를 둘러보던 나는 이기광이 쓴 일촌평을 보고 나서 기광이 미니홈피까지 들어가봤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똑같은 사진으로 메인을 장식해놓은 기광이의 미니홈피엔 다이어리에 NEW 표시가 떴고 바로 클릭해서 들어가봤다. [2014.7.21. 딱 3년째다. 너 이개새끼,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릴거야. 다 이해해줄테니까..살았으면 살았다고 연락이라도 좀 해라. 프랑스 어디에 박혀있냐. 방학때마다 매번 갔는데도..니 머리카락 끝도 못봤다. 프랑스에 있는게..맞긴 하냐 양요섭? ....돌아와라 제발.] 그러고보니 오늘이 내가 딱 프랑스로 온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요즘은 시간도 모르고 사는 통에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나는 갑자기 드는 기광이 생각에..내 이기심 때문에 기광이와 현승이, 그리고 태경이와 윤두준이 받았을 상처에 난 또 너무 미안해져서 한동안을 그 다이어리를 읽고 또 읽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이럴줄 알았다. 이렇게 약해질 줄 알았어. 그치만 오늘은 3년째 되는 날이니까. 이정도면 할만큼 했으니까. 나는 그의 다이어리에 댓글을 남겼다. [살아있다. 그것도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너한텐..많이 미안하다.] 고작 한줄 남기는 건데도..썼다 지웠다를 수십번도 넘게 반복했다. 그리고선 등록을 할까 말까도 마우스를 잡고 몇 분동안 고민했고, 결국 등록을 해버린 나는 그대로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몸이 안좋다는 핑계를 대고 알바를 가지 말아야될 것 같다. - 나는 예전의 양요섭보다 훨씬 더 강해져있어서, 그렇게 내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힘들어하고도 그 다음날 멀쩡히 일어나 내 생활을 했다. 늘 그렇듯 알바를 갔고, 카페에서 책을 읽었으며 아침엔 오랜만에 밥을 지어 먹었다. 또 그 다음날엔, 친구들과 만나 밥 한끼 먹고 또 알바를 가고, 그날 저녁엔 다른 친구들이 술집으로 불러내 술 한잔 거하게 하고 또 다음날이 되고 다음날이 되고... 언제 내가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힘들어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정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8월 1일.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늘 찾는 카페에 앉아 늘 읽던 소설을 읽으며 한가로운 여유를 즐겼고 나는 하루 중에서 요리를 하는 시간 다음으로 제일 행복한 시간이 바로 카페에서 커피 하나 시켜놓고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 이 시간을 너무나도 행복하게 만끽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주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어? 비오네!?!??" 아무리 카페가 집 앞에 있는거라고는 하나, 비가 저렇게 맞으면 뼈까지 파고 들어갈만큼 세차게 내리는데 그 비를 뚫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마냥 있자니 비가 언제 그칠지 몰라 불안했고, 안그래도 이제 알바 시간이 다가오는데...어떻게해야 될지 몰라 일단 의자에 앉아서 바깥을 조용히 살폈다. 아무래도 지나가는 소나기인것 같은데 여름이라 그런가..비가 너무 아프게 내렸다. 우박이라도 되는 것 마냥 엄청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소리에 오히려 비가 무서웠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나는 카페 문 앞까지 나갔고 일단 책은 옷 속에 숨겨놓았다. 어차피 그래봐야 집에가면 이미 물에 쫙 젖어 다시는 못 볼거란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려내고 싶은 마음이 책을 몸 안으로 숨기게끔 했고 나는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쳤다. "....어?" 나는 아주 가끔씩 놀랄때마다 한국말을 쓰곤 했다. 3년 내내 프랑스어만 듣고 살다보니 웬만한 일에도 프랑스어를 하곤 했는데, 이렇게 놀랄때는 어김없이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뛰려고 마음 먹은 그 순간에 딱 내 팔을 붙잡고 그 위로 우산을 씌워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감사........." 나는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이려는데 순간 너무 낯익은 얼굴에 나는 그 사람의 얼굴에 내 눈을 박아버렸다. 정말 박아버렸다는 표현이 옳을 수 밖에 없는게, 정말 이 사람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겁도 없이." 마치 어젯밤 술 한잔 같이 하고, 오늘 만난 친구처럼. 3년전에 본게 마지막인 이 사람은, 내 앞에서 어젯밤에도 만났던 친구처럼 행동했다. "..잘 지넀어? 나는 너 찾느라..잘 못지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3년전 그때보다 훨씬 더 잘생겨져버려서, 살이 빠져서 그런건지 아님 염색을 해서 그런건지.. 콧대도 높아진 것 같고, 안그래도 날카로워보이는 눈매는 더 날카로워보였다. 게다가 어깨는 또 못본사이에 더 넓어져서 정말 남자다웠다. 원래 멋있는 사람이었는데...더 멋있어졌다. "....형..." "형이란 말은 안까먹었나보네?"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고? 너 찾는데 몇개월이나 걸린지 알기나 해? 여기 이렇게 숨어있을거면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화난 표정도 짓지 않는, 정말 3년만에 우연히 만난, 아니 인연적으로 만난 윤두준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도 지어보일 수가 없었다. 기뻤지만 슬펐고, 반가웠지만 씁쓸했으니까. "...볼살이 통통하게 올랐네. 꼭 6년전 같네. 너 고2때. 나 좋다고 따라다녔을 그때 같다." "형." "할 얘기 많지 우리? 일단 좀 앉자." 윤두준은 나를 붙잡고 가서 내가 원래 앉아있던 테이블로 가서 앉혔고 그 앞에 앚은 윤두준은 내가 빤히 쳐다보자 윤두준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보고싶어." "...." "너무 보고싶어서 보고있는데도 보고싶다." "...." "너 찾으려고 왔어. 여기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도 그리웠던 사람이라, 이젠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시간이라는 흐름속에서 빛이 바랜 사람이라서 나는 윤두준의 얼굴만 보는데도 바빴다. 마치 목마른 아기가 물을 미친듯이 들이켜는 것 처럼, 나는 그렇게 윤두준의 얼굴을 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결혼 안했어." "...뭐?" "니 누나랑 결혼 안했다고. 니 누나, 너 그렇게 떠나고 나고 일주일 뒤에 떠났어. 미국으로. 미안했대. 나를 사랑한건 맞았지만,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하는건 아니었는데, 라는 후회를 하면서 펑펑 울더라. 그래놓고서 나한테 하는 말이..나중에 널 만나면 전해달래.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나는 너를 볼 면목이 없어서 다신 오지 않을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 "얄미웠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내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게 너무 미웠대. 그래서 더 오기를 부렸대. 근데 니가 떠나기 전날 밤에 자기한테 말했던걸 잊을 수가 없대. 나는 너를 위해서 이 결혼을 포기하는게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서라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는거니까 죄책감 갖지 말라고. 난 니 말대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 자리를 찾아서 돌아가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전해달랬어. 나는 행여나 이 말을 까먹어서 너한테 못전해줄까봐 하루에도 수십번씩 되뇌였다? 꼭 전해주려고..너 만나서..널 어떻게든 찾아내서..말해주려고." 나는 윤두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때문에 윤두준이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내 귀로 흘러들어온 윤두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여태껏 이 두 사람이 결혼했을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십번씩 누나와 윤두준의 얼굴을 반반 닮은 내 조카가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는데..그래서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미워하고 혼자서 싫어했었는데.. 이 모든게 다 망상에 불과헀던거라니.. "그리고 이거." 윤두준이 나한테 내민건 아주 작은 쪽지 하나였다. 곱게 접힌 쪽지를 펴보니 엄청난 악필로, 그치만 정성들여 쓴 흔적이 보이는 글씨가 있었고 나는 그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양요섭. 너 사람 뒷통수 치는게 취미냐? 너 그렇게 가고 나서..나랑 두준이형, 그리고 기광이랑 현승이. 너 찾느라고 혈안이 되었었다. 아마 웬만한 흥신소보다 이 네사람이 사람 더 잘찾을걸? 아마 이 편지를 읽을때쯤이면..너는 두준이형이랑 같이 있곘지? 두준이형은 단순히 특사일 뿐이니까 또 만나서 좋다고 히히덕 대기만 해봐. 장난이고...잘해봐. 두준이형, 너 그렇게 가고 나서 1년동안은 미쳤다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1년만에 학교 졸업했고, 지금은 식당 운영해. 아 식당이라고 하니까..좀 웃기긴한데..파스타 전문점이야. 니가 스파게티를 그렇게 잘먹었었다면서? 두준이형 식당 차리겠다고 하니까 형 아버지가 엄청나게 반대했었다? 아, 결혼 깨졌단 얘기는 들었겠지? 그럼 이건 패스! 어쩄든..형은 결국 형네 회사로 들어가야겠지만 서른셋까지 또 자유시간 받았대. 또라는걸 보니, 예전에도 그랬었던적이 있나봐? 뭐..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남의 눈, 남의 행복 같은거 신경 쓰지 말고 너만 생각하면서 사랑하라는거다. 이제 너네 둘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 나 여자친구 생겼다. 너랑은 비교도 안되게 이쁜사람으로^^ 보고 싶으면 두준이형이랑 하루 빨리 한국으로 들어와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한국에 와선..두준이형이랑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럼 하루빨리 볼 수 있길 바라며 태경이가.] "..뭐..엄청 감동적인 말 썼나봐? 왜 또 울고그러냐. 3년이 지나도 울보인건 여전하네.."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린뒤 쪽지만 들고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머리에 느껴지는건 윤두준의 배. 살집은 하나도 없이 딱딱한 복근만이 느껴지는데 그걸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나에게 찾아들었다. "..우리 많이 힘들었다. 많이 돌아왔고, 많이 지쳤어. 그러니까...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시작하자." 윤두준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왼손을 잡더니 그 손에 아주 심플한 은색 실반지를 끼워주었다. 내가 반지와 윤두준의 얼굴을 번갈아바라보자 윤두준은 내가 낀 실반지에 입을 맞추었고 나는 드디어 입을 뗐다. "....늦었지만...다녀왔습니다." 윤두준은 그대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춰주었고, 나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윤두준을 받아들였다. 그립고 또 그리웠던 감촉이었기때문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격하게 탐했고 그러는 사이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가늘어지더니 잿빛 구름 속에서 환한 햇빛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의 입맞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를 비추는 햇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우리는 그것보다 점점 더 강렬해졌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걸. 그래서 난 이제부터 나를 제일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래서 난 윤두준을 제일 사랑하기로 했다. 아무생각 하지않고 이제는 나를 위해, 윤두준을 사랑하기로 했다. 많이 돌아왔던 그 시간만큼, 서로를 힘들게했던 그 고통만큼 더욱 더 사랑하기로 했다. 윤두준 양요섭.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인연적으로. - Academy Romance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