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령]까마귀 vs 나르시스 프롤로그 클럽 [ 카오스 ] 앞에 검은색 BMW가 서고 그 안에서 세 명의 남자가 내려섰다. “ 야! 후지게 여길 오고 그래? 니네 클럽으로 가자니까. ” 상훈이 인상을 쓰며 카오스의 외관을 못마땅하게 훑어내렸다. “ 일이 있다고 했잖아. 그러게 왜 따라와? ” 강후는 상훈에게 타박을 주고는 클럽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안에 연락할까요? ” 재룡의 말에 강후는 고개를 저었다. “ 됐어. 조용하게 훑어보기만 할거야. ” “ 네. ” 세 사람이 입구에 다다르자 서너명의 웨이터가 우르르 몰려왔다. 보기만 해도 부티가 줄줄흐르는 세 사람이 등장하니 서로 앞다투어 그들을 모시겠다고 난리였다. 그런 웨이터들의 소란스러운 환대에 강후는 못내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외관에 비해서 그다지 낡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쭈욱 훑어보니 물은 별로 안좋은게 맞는것 같았다. 평범해 보이는 대학생들이나 수수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람들 틈에 몇몇 눈에 띄는 여자들이 스테이지에서 흥에 겨워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 후지다. 후져. 아이구... 저 언니들 봐라. 옷이 아주 죽음이다. ” 상훈이 옆에서 투덜투덜하자 강후가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상훈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 룸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사장님? ” 웨이터 변강쇠가 강후를 보며 물었다. “ 그러지. 스크린이 설치된 방이 있으면 좋겠는데... ” 강후의 말에 변강쇠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 VIP 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장님. 오늘 부킹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올라가시죠. ” 세 사람은 연신 자랑을 늘어놓은 변강쇠를 따라 이층 룸으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서자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스테이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 시설이면 그리 허접하지는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강후는 여전히 조금전 보고 온 [ 제니스]가 더 끌렸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인수를 할 생각이었고 되도록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위치한 [ 제니스 ]를 인수하는게 여러모로 득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재룡이 속는셈 치고 한번 가보자고 하는 바람에 별 기대없이 들린 곳이었다. “ 알아서 갖다 줘. ” 재룡의 말에 변강쇠가 90도로 깍뜻하게 인사를 하고는 룸을 빠져나갔다. 세 사람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클럽 안은 현란한 테크노 음악에 미친 듯 몸을 흔들어대는 젊은 군상들로 일렁였다. 마치 모두들 지금 당장 미친 듯이 춤을 추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것처럼 파트너의 몸을 서슴없이 더듬으며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꽤나 취한 듯한 짧은 가죽미니스커트의 여자는 앞에 선 남자의 허벅지에 끈적하게 몸을 비벼대고 있고, 스테이지 위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약에라도 취한 듯 춤에 몰입해 있었다. 테크노 음악에 피아노 연주가 가미된 조용한 음악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DJ를 위해 마련된 중앙 무대에 드라이 아이스가 깔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지루하게 DJ를 보던 남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는걸로 봐서 새로운 DJ가 등장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지금껏 춤추기에 바쁘던 스테이지의 사람들과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이 DJ부스 쪽으로 몸을 향하고는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 까마귀... 까마귀.... ” “ 사장님. 더 필요한건 없으십니까? ” 때마침 변강쇠가 다시 문을 열고 나타나자 강후는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 네. 사장님. ” “ 까마귀가 뭐야? ” “ 네? 아- DJ 이름입니다. 우리 클럽에서 제일 인기 많은 DJ인데 한번 보세요. 죽입니다. 아주... ” 변강쇠는 스크린을 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들이 소리를 꽥꽥지르며 한손을 높이들어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맞이하듯이 DJ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 꽤나 인기가 많은가 보네. 잘 생겼나 보지? ” 상훈의 말에 변강쇠가 쿡쿡 웃었다. “ 그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데요. 사장님. ” “ 여자? 참 가지가지한다. 여자 DJ가 무슨.... ” 상훈의 말에 강후는 스크린을 쳐다보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변강쇠가 나가고 나자 재룡은 강후를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던졌다. 구멍이 뚫린 듯 비워져 있던 무대 중앙으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아래에서부터 무대 위로 올라오는 모양이다. 강후는 은근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DJ이길래 남자도 아닌 동성의 여자들이 더 난리인지... 짙은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던 드라이 아이스를 뚫고 검은색 옷을 입은 세 개의 형체가 떠올랐다. 세 사람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치 드라큐라 백작이 둘렀을 듯한 기다란 검은 망토에 감싸여 있었다. 도무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중앙에 선 키가 큰 사람의 손짓에 음악이 다시 바뀌었다. ‘ Girls Girls Girls Girls Girls All night long 뜨겁게 쳐다보는 시선도 가쁘게 차오르는 숨결도 생각따윈 하지마라... ‘ 그리고 양 옆의 두 여자가 검은 망토를 벗어던졌다. 곳곳에서 휘파람소리와 더불어 환호성이 들려왔다. 중앙의 DJ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금씩 리듬을 타고 있었다. 여자치고는 꽤 키가 큰 모양이다. 175도 넘는 것 같다. 모르지 10CM 정도 되는 힐을 신고 교묘히 속이고 있는건지. 옆의 댄서인듯한 여자들은 배꼽을 훤히 드러내는 흰색탑과 허벅지 아래부터 넓게 퍼지는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싸이키 조명에 비친 그녀들의 몸은 마치 형광색 물감을 칠해놓은 듯 화려했다. " 까마귀...까마귀...." 여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DJ가 리듬을 타면서 조금씩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스테이지를 휩싸고 있던 음악에서 여자보컬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까마귀는 입고있던 망토를 확 벗어던졌다. " 꺄악...까마귀.....까마귀.... 멋있어요. 언니..." 기다렸다는 듯 무대 아래의 여자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강후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스크린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검은색으로 온통 도배를 한 여자다. 목까지 올라오는 타이트한 검은색 티셔츠에 큰 키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 그리고 구두 역시 검은색....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묶은 머리끈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을 했다. 단지 어깨부터 가슴을 거쳐 허리로 X자로 늘어뜨린 흰색 천만이 불빛에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휘---익. 야...죽인다. " 상훈의 감탄사가 들리고 이내 상훈은 새로운 DJ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DJ는 옆의 여자들과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보통의 여자들이 추는 부드러운 웨이브가 느껴지는 춤이 아닌 보는 사람이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렬함이 느껴지는 파워풀한 춤을 추고 있었다. 긴 팔다리가 조그만 움직임도 화려하게 보이게 하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 와... 대단한대. 춤이 장난이 아니야. 뭐야. 이런 후진데서 저런 보물이 썩고 있었단 말이야? ” 조금전 까지 시큰둥하니 있던 상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긴 상훈이 좋아하는 타입이다. 큰 키에 모델처럼 균형잡힌 몸매. 얼굴은 얼핏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 관심있냐? " 강후의 말에 상훈이 눈을 찡긋했다. “ 딱 내 타입이잖냐. ” 스테이지는 점점 열기가 더해지고 있었다. 댄서인 듯한 두 여자는 입고있던 탑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옷을 입고는 현란하고 농염한 춤을 추었다. 음악이 다시 바뀌자, DJ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DJ 부스 안으로 옮겨갔다. 익숙한 팝이 흘러나오자 까마귀의 공연에 취해있던 손님들이 하나둘씩 스테이지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DJ는 숨이 찬 듯 준비되어 있던 생수병을 들고 목을 축이고 있었다. 까마귀는 스테이지를 한번 휘익 둘러보고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음악 중간중간 익숙한 솜씨로 멘트를 하기도 하고 랩을 따라하기도 하면서 손님들의 분위기를 띄워가고 있었다. 그 뒤로 20분간의 DJ타임이 끝나고 새로운 DJ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상훈은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 앗싸 재수. 걸렸다. ” 상훈은 카운터로 연결된 인터폰을 들었다. " 좀 전에 무대에 올랐던 애들있지? 걔들 좀 올려보내. " " DJ들은 손님들 룸에 안들어 올겁니다. " 재룡의 말에 상훈은 웃기는 소리 하지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 그래봐야 클럽 애들이야. 지들이 돈 주는데 안 올 이유 있어? " 재룡이 난처한 눈빛으로 강후를 쳐다보았지만 강후는 별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잠시후 변강쇠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뒤로 쭈뼛거리며 서있는 두 여자가 보였다. 둘은 서로 눈짓을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어.. 왔어. 안 들어 오고 뭐해? " 상훈은 비어있던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치면서 두 여자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 사장님. 얘들은 룸에 들어오는 애들이 아닌데요. " 변강쇠가 주저주저하며 말을 했다. " 뭐? " 상훈이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썼다. 상훈은 누구든 자신을 향해 NO라고 말하는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웨이터 주제에 상훈앞에서 호기있게 말하는게 아주 거슬린 모양이다. " 너 이 자식 짤리고 싶어? " 변강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여자들이 결심을 한 듯 안으로 들어섰다. 자기들 때문에 웨이터가 짤리는건 보기싫은 모양이었다. " 이 언니들은 말이 좀 통하네. 넌 가봐. “ 상훈의 말에도 변강쇠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 가 봐. 우리 조금 있다가 나갈거야. " 귀엽게 생긴 작은 키의 여자가 변강쇠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 현조누나 알면 가만있지 않을텐데..." “ 괜찮아. 언니 알기 전에 나갈테니까. ” “ 그럼 되도록 빨리 나와요. 나 현조누가 감당 못해요. ” “ 알았어. ” 여자들이 다시 한번 다짐을 하자 그제서야 변강쇠는 룸을 빠져나갔다. " 안녕하세요. " 키가 좀 더 큰 여자가 인사를 했다. " 여기와서 앉아. " 상훈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며 두 여자를 품평하듯 훑어보았다. 두 여자는 나란히 상훈의 양 옆에 앉았다. " 또 한 애는 왜 안와? " 상훈은 귀엽게 생긴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 언니는 이런데 안 와요. " 여자는 어색한 듯 몸을 비틀었다. " 이런데? 이런데가 어떤댄데? " 상훈이 빙글거리며 묻자 여자는 뭐라고 말도 못하고 상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넌 이름이 뭐야? " 상훈은 귀엽게 생긴 여자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 이런데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 " 강후는 상훈의 객기어린 행동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전 수안이고, 저 앤 지희예요. " 수안이라 불리는 여자가 대신 대답을 했다. " 수안이 넌 저기 있는 잘생긴 오빠 옆에 앉아. 오늘 물주가 저 사람이거든. " 상훈은 수안의 등을 밀어냈다. 지희가 오늘 상훈의 짝으로 선택된 모양이다. 수안은 조심스레 강후의 옆에 앉아 강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 우와! 진짜 잘 생겼다. ’ 수안은 넋을 놓고 강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조각같은 얼굴 ’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외국인처럼 깊은 눈에 반듯한 코는 미술시간에 보던 줄리앙을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그냥 잘생겼다라고만 말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남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났다. "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렇게 쳐다봐? " 강후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을 만든 상훈의 객기가 지루해지고 있던 판에 옆에 앉은 여자가 뚫어지게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자 강후는 기분이 한층 더 나빠졌다. 자신의 외모가 여자들에게 어떤식으로 비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시선을 즐길만큼 강후는 가벼운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좀더 남자답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 아니.. 아니예요. 그냥 " 수안은 얼른 시선을 떨궜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어지간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것 같았다. 수안은 연신 강후를 힐끔대며 훔쳐보기에 바빴다. 이렇게 두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바깥에서 변강쇠의 숨넘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누나. 금방 나올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요. 누나..누나 "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룸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문을 열고 들어와 그들을 쏘아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박혔다.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싸늘하게 룸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양주잔을 막 입에 대려던 지희를 쏘아보았다. 까마귀의 음산한 목소리가 룸안을 울렸다. " 너. 나와. " 여자는 낮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외모와 목소리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강후는 까마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도 코도 눈에 확 띄는 그런 미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을 강후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키는 한 172정도. 구두를 벗어버린 듯 굽낮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푸른빛이 도는 블랙이군. 얇은 속쌍꺼풀이 있는 눈에 시원스럽게 쭉 뻗은 코가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꽉다문 입술이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까마귀의 등장에 지희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후는 옆에 앉은 수안이 얕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흘낏 쳐다보고, 다시 까마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뭐야. 너 이제 온거야? 넌 여기 앉아라. " 상훈은 비어있던 자신의 왼쪽 옆 자리를 가리켰다. 순간 까마귀의 입에 빈정대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까마귀는 상훈의 말을 싹 무시하고 지희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 두번 말 안해. 나와. " 까마귀의 위협스러운 어조에 지희가 쭈뼛거리며 일어서자 상훈이 지희의 손목을 확 잡아 다시 앉혔다. " 누구 마음대로 나가. " 상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 어...언니. 그게 있지. " 지희는 울상이 되어 곧 눈물이라도 쏟아낼것 같았다. 순간 룸안의 공기는 영하 30도로 뚝 떨어졌다. 까마귀는 기가막히다는 듯이 상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후는 멀뚱이 까마귀의 고집스러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 너 이름이 뭐야? " 상훈은 까마귀를 쏘아보며 말했다. 까마귀는 상훈의 얼굴을 한번 노려보고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해버렸다. " 셋 셀 동안 일어서. 하나. 둘... " 지희가 누가 찌르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섰다. 강후의 옆자리에서 숨 죽이며 앉아있던 수안도 따라서 일어났다. " 죄송해요. 저희는 나가볼께요. " 지희가 서둘러 나가려 하자 상훈이 다시 지희를 끌어앉혔다. 까마귀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 " 내가 오늘 너희 셋 다 사지. 니들 일당이 얼마야? ” 상훈은 여전히 지희의 손목을 잡고서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까마귀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조금 있으면 얘들 타임이예요. 손님같은 부자들한테야 우습겠지만 얘들은 한타임 놓칠때마다 일주일치 벌이가 날아가요. 그러니 그만 놓아주시죠. ” 까마귀는 되도록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심하게 들썩였다. 강후는 못 박힌 듯 꼿꼿이 서 있는 까마귀의 옆 모습을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을 상대로 싸움이 일어나봤자 자신들이 손해라는걸 알고 있으니 선뜻 화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이쯤에서 그만 중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또다시 상훈이 깐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럼 얘들은 내보내고 니가 내 옆에 앉을래? " 상훈이 여전히 이죽거리며 까마귀를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마치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때 값을 메기듯이 그렇게 까마귀를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까마귀의 인상이 확 바뀌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테이블에 놓여있던 빈 맥주병을 들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맥주병이 깨어지면서 파편이 튀자 지희와 수안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나머지 남자 세명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깨어진 맥주병을 한손에 들고 까마귀는 상훈을 노려보았다. " 애들 내보내. 너같은 쓰레기랑 놀아줄 기분아니야. " 상훈은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 왜? 찌를려고? 돈 많이 벌어놨나 보지? 그래 찔러봐. 일자리 잃고 돈 잃고… 나야 며칠 병원에서 요양하는셈 치고 간호사 언니들이랑 노닥거리면 돼. 어디 용기있으면 찔러봐. " 재룡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까마귀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강후는 가만히 그들의 기막힌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어떻게 반응할지 사뭇 기대를 하면서… ‘ 설마 진짜 사고야 치겠어? ’ 하지만 까마귀는 이름에 부끄럽지않게 강후의 예상을 과감하게 깨버렸다. 까마귀는 여전히 상훈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깨어진 맥주병을 자신의 팔목에 가져다 그었다. 상훈은 순간 움찔했다. 까마귀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까마귀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상훈을 쳐다보았다. " 나 같은 가난뱅이가 너같은 고가의 불량품 수리 해주는데 처들일 돈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난 체질적으로 가해는 취미없어. 자해를 좋아하지. 어때... 피를 보니까 회가 동하시나? 좀더 극적이게 까무러쳐 주기까지 할까? " 상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후는 여자의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독하다… " 언니 나갈께. 그만해 제발. " 지희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수안이 서둘러 지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까마귀는 여전히 상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두 사람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 나가. ” 지금까지 별신경 쓰고있지 않던 곳에서 누군가 끼어들자 까마귀는 말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상당히 거만해 보이는 남자가 현조를 보며 귀찮다는 듯이 손가락 두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 꼴같잖게 멋있는 척은... ’ 까마귀의 아니꼬운 눈빛을 읽어낸 강후가 씨익 웃었다. “ 다음부터는 그렇게 아무데서나 병 깨뜨리지 마. 장난질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 까마귀는 피식 웃더니 맥주병을 내려놓고 아직도 피가 흐르는 손목을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뒤돌아섰다. 그리고 강후의 귀에 까마귀의 비웃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귀신들은 뭐하나 몰라. 이런 불량품들 수거안하고... " “ 뭐? ” 앞에 앉아있던 상훈에게도 그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상훈이 다시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려 하자 강후는 그의 팔목을 잡아 앉혔다. “ 시끄러운거 딱 질색이야. 그만해. ” 강후의 목소리가 불쾌해진 걸 느낀 상훈은 강후를 흘낏 한번 쳐다보고는 까마귀가 나간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강후는 술잔을 들며 무심히 재룡에게 물었다. “ 재룡아. 여기 네메시스만큼 그럴싸하게 꾸미려면 얼마나 들것 같냐? ” “ 네? 그럼 여기 인수하실 생각이십니까? ” 재룡의 말에 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물건 하나 건진 것 같다. 그만 가자. ” 강후가 벗어놓았던 재킷을 들고 룸을 빠져 나가자 재룡과 상훈은 서둘러 강후의 뒤를 따라나섰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후는 아까의 일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 재미있겠어.... 까마귀라... ’ 까마귀와의 조우는 그렇게 시끄럽게 이루어졌다. 1 [ 똑똑 ] 노크소리가 들리자 강후는 어제 매상을 정리한 장부를 내려놓았다. “ 들어와. ” 문이 열리고 재룡이 들어오자 강후는 일어나서 소파로 걸어갔다. 재룡은 강후가 자리를 잡고 앉아 그제서야 소파에 앉았다. “ 약속 날짜는? ” “ 저 그게... ” 재룡이 말끝을 흐리자 강후는 날카롭게 재룡을 쳐다보았다. “ 무슨 문제있어? ” “ 저쪽에서 금액을 높여 달랍니다. 저희가 제시한 금액에서 20%를 더 붙여달라고... ” “ 20%를 더 붙여달라? ” 강후는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강후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재룡은 강후의 결정을 기다렸다. “ 생각보다 멍청하군. 날 상대로 장사를 하시겠다? ” “ 저희 쪽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고는 값을 높여 부르는것 같습니다. ” “ 그래? 흥정을 하자는 말인데... 저쪽에 전화넣어서 내가 부른 값의 80%에 넘기라고 전해. 오늘안에 결정을 못내리면 내일은 70%, 내일도 결정을 못내리면 그 다음날은 60%. ” “ 포기하시는 겁니까? ” 재룡의 말에 강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지. 쓸데없이 객기를 부리는데는 매가 제격이야. 그리고 어머님께 전화해서 저쪽에서 빌려간 돈 내가 갚을테니까 담보 잡은거 나한테로 넘기라고 해라. ” “ 네. ” 재룡이 나가고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 카오스 ] 를 다녀온 후 그곳을 사들이기로 작정을 하고 시가보다 더 높여 값을 제시했는데, 어이없게도 저쪽에서 거기에 돈을 더 얹어달라고 말을 하는것이다. 원래 강후는 이런 식의 밀고 당기는 거래는 체질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것으로 만들었고, 아니다 싶으면 가차없이 버렸다. 그런데 후진 클럽사장 주제에 강후를 상대로 장사치들이나 하는 거래를 하자고 덤비니 강후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굳이 이런식으로 클럽을 넘겨받지 않아도 카오스의 사장이 강후의 모친인 장여사에게 빌려간 돈을 미끼로 넘겨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까지 끼워넣고 싶지는 않아서 수고스러운 걸 감수하면서까지 거래를 제안했는데, 결과가 영 신통찮았다. 진동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이 책상 위에서 빙그르르 회전을 했다. 액정을 보니 ‘ 장여사 ’ 라고 찍혀있었다. 그새 재룡과 전화통화를 한 모양이다. “ 네. ” “ 나다. 또 쓸데없는 일을 하는구나. ” 클럽을 하나하나 사들일 때마다 늘상 듣는 잔소리였다. “ 제 일에 간섭 안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 “ 그래 언제까지 애들처럼 장난질이나 할거야? ” “ 장난질이라니요? ” “ 김사장 클럽은 또 뭐하러? ” “ 아- 거기가 맘에 들어서요. ” “ 별로 좋은 위치도 아니잖니. 거기다 뭐하러 투자를 하려고 해? ” “ 제가 언제 실수하는거 보셨습니까? 이번에도 성공할겁니다. ” “ 그 놈의 자신감은... ” “ 이게 다 어머니를 닮아서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 “ 나원 참.... ” 장여사는 그 말 한마디면 그대로 무사통과였다. 그걸 알고 있는 강후는 필요할때는 꼭 그 말로 결정타를 날렸다. “ 쓸데없이 소문거리 만들지 말고 조용히 인수해. 괜히 담보 잡고 넘겨받았다는 둥 그런 구설수 일으키는거 난 불쾌하다. ” “ 꼭 그런식으로 넘겨받으려는 건 아닙니다. 귀찮아서 그럽니다. 자꾸 시간 끄는 것도 싫구요. ” 강후의 말에 장여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알았다. 재룡이 편에 서류보낼테니까 그리 알아라. 그리고... ” “ 네. ” “ 집에 좀 자주 들려. 자식 놈이라고는 둘 밖에 없는데 어떻게 두 놈 다 그 모양인지... ” “ 인후는 잘 하잖습니까? ” “ 잘 하기는 개뿔이.... 어제 결혼하고 싶다고 여자를 데려왔더라. ” “ 그래요? 잘됐네요. ” “ 잘되긴 뭐가? 원 어지간해야 생각을 해보지. 어디서 그런... ” “ 또 왜요? 이번에는 또 어떤 여자길래요? ” “ 무슨 영화배우란다. 그것도 야한 영화만 찍는다는... 그 뭐냐. 에로배운지 뭔지... ” 강후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무턱대고 웃었다가는 장여사에게 한시간은 잔소리를 들을게 뻔했다. 강후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한 달만 기다려 보세요. 곧 정리할 겁니다. ” “ 그러면 좋겠구만. 넌 아직도 그 애 만나고 다니냐? ” 장여사의 물음에 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만할 때도 됐잖니. 언제까지 그럴거야? 준희도 내년이면 귀국하는데... ” “ 제가 알아서 해요. ” “ 곧 정리해라. 안좋은 소문이 간간이 들리더라. ” “ 네. ” 강후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 책상위로 발을 올려놓고 의자를 뒤로 길게 뺐다. 아현이와 만난게 벌써 일년이 다 되었다. 처음엔 그저 며칠 데리고 놀다 보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년이나 끌어버렸다. 보내야지 보내야지 하면서도 반은 귀찮고 반은 아쉬워서 그냥저냥 만나고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까지 소문이 퍼진 걸 보니 곧 정리해야 될것 같았다. 강후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아현이 울며불며 매달릴 걸 생각하니 갑작스레 짜증이 났다. “ 재룡아. ” 강후의 부름에 재룡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 카오스로 가자. 김사장보고 내가 좀 보잔다고 해. ” “ 네. 연락해 놓겠습니다. ” 재룡이 나가자 강후는 벗어두었던 재킷을 입고는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던 아현의 얼굴을 밀어내버렸다. =============================================================================== “ 아이고 박사장님. 어서오십시오. ” 카오스에 도착하자 마자 김사장이 손수 마중을 나와서 인사를 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니 강후도 어쩔수 없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 들어가시죠. ” 금액을 올려달라 튕긴다더니 어째 숙이고 들어오는 기색이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룸으로 들어서자 이미 양주병들과 안주들이 거창하게 차려져 있었다. “ 자 앉으십시오. ” 김사장이 가운데 자리를 가리키며 강후에게 말하자 강후는 스스럼없이 그 곳에 앉았다. “ 금액을 올려달라고 하셨다더군요. ”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강후를 보며 김사장이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 저도 먹고 살아야잖습니까? 이거 정리하면 저도 빈손인데... 최대한 많이 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 “ 그래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실 겁니까? ” 강후가 김사장이 내미는 잔을 받아들며 말하자 김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잠시 실수를 했습니다. 처음 제시하셨던 가격으로 그냥 계약을 했으면 하는데. ” “ 왜 갑작스럽게 생각이 바뀌신겁니까? ” “ 장여사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오래 시간 끌지 말라고. ” 강후는 목을 타고 불쾌감이 치솟는 걸 느꼈다. 굳이 장여사의 도움을 바란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신세를 진 꼴이었다. “ 어머니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 아닙니다. 저도 얼른 정리하고 편히 쉬어야지요. ” 갑작스레 적극적으로 변한 김사장 덕분에 그 후로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계약금 조로 수표를 내밀자 김사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 여기가 조금만 손을 보면 꽤 장사가 잘 될겁니다. DJ들도 실력이 괜찮고... ” 김사장의 말에 강후는 지나치듯 까마귀에 대해 물었다. “ 저번에 여기서 일하는 DJ를 하나 봐 뒀는데, 까마귀라고... ” “ 네? 까마귀라면. 아- 현조 말씀이시군요. 근데 그 애는 전문 DJ가 아니라 용병이었습니다. DJ 하나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석달동안 아르바이트 겸 해서 잠시 봐준거죠. 원래 직업은 DJ가 아닙니다. ” 김사장의 말에 강후는 내심 실망스러웠다. 꼭 까마귀때문에 이 클럽을 인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옵션으로 끼워져 올거라는 생각에 시세보다 비싼 값에 사들였는데, 헛수고만 한 셈이었다. “ 현조... 라고 하셨습니까? ” “ 네. ” “ 원래 직업이 뭡니까? 그 여자. ” “ 프로그래머죠. 설계 프로그래머. ” “ 프로그래머라... ” 강후는 까마귀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그저 온통 검은색 일색이였다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계약을 끝내고 카오스를 나서자 재룡이 강후에게 은근히 물어왔다. “ 현조라는 여자... 알아 볼까요? ” 강후는 재룡을 흘낏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 네 충성심 이해는 한다만, 가끔씩 도를 넘어선다는거 알고있냐? ” “ 죄송합니다. ” 재룡이 얼른 사과를 해왔다. 강후는 말없이 차에 오르며 중얼거렸다. “ 까마귀 사냥이나 해 볼까 했더니... ”“ 네? ” “ 아니다. 집으로 가자. ” 강후는 의자에 몸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2 [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반복해서 들려오는 짜증스러운 소리에 미남은 한껏 인상을 쓰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그냥 아파트로 쳐들어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죽하면 전화기도 꺼놨을까 싶어서 또 망설이게 되었다.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미남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친구 자존심이 걸레짝이 되는 한이 있어도 집으로 쳐들어가 보리라. 벌써 이틀째 소식을 끊어버린 친구때문에 속이 바짝 타들어가다 못해 이제는 시커먼 잿덩이만 남아버렸다. 미남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전화기에서 낮게 가라앉은 현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미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라도 들으니 살것 같았다. “ 너 죽었어. 날 아주 말려죽여라. 지현조. 이 나쁜년. 너 이번에도 전화 안 받았으면 내가 너네 아파트 폭파해버릴려고 했다. ” [ 키킥... 지랄을 해요. ] 킥킥거리며 웃는 현조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 안 죽고 있지? ” [ 그럼. 죽긴 뭘 죽어. ] “ 내가 갈까? ” [ ... ] 현조가 대답이 없자 미남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불안스럽게 사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당장 다음주에 나갈 식단표도 작성해야 했지만 당장은 현조의 말라비틀어진 낯짝을 봐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 햄버거 먹고싶어. ] “ 뭐? ” [ 햄버거. 불고기 버거가 먹고싶네. ] “ 알았어. 사가지고 갈께. ” 그래도 오는 걸 거부하지는 않으니 다행스러웠다. 미남은 주방 아줌마들의 호기심에 찬 눈초리를 외면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는 학교를 나섰다. 퇴근시간도 되기전에 영양사라는 사람이 자리를 비운다고 주방아줌마들이 은근히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햄버거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우선이었다. 미남은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잔뜩 사서 현조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동안을 기척이 없이 조용하더니 불쑥 인터폰으로 현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암호를 대라. ] “ 죽고잡냐? ” [ 흠. 싸가지 없는 강미남이 맞군. ] 문이 열리고 현조의 퀭한 눈동자가 보이자 미남은 혀를 끌끌 찼다. “ 꼴이 참 가관이다. ” 가뜩이나 말라서 사람의 형상이 아니던 현조가 미이라처럼 흉흉한 몰골을 하고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 몇개 사왔어? ” “ 다섯개. ” 미남이 사온 햄버거를 받아들며 현조는 좋아라 웃었다. “ 웃지마. 짜증나. ” 미남이 화를 내며 안으로 들어서자 현조가 씁쓸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또 술독에 빠져있나 했더니 그래도 일을 하고 있었나 보다. 미남이 들릴때마다 무식해보이니 그만 내다버리라고 구박을 했던 커다란 목제 책상위에 어지럽게 도면들이 널려있었다. 책상위에 종이컵이 잔뜩 쌓인걸로 봐서 아마 설거지도 안하고 종이컵에다 커피를 타 마신 모양이다. 미남이 주방으로 들어가며 혀를 끌끌찼다. 씽크대 안에는 먹고난 설거지거리가 아예 탑을 쌓고 있었고, 곳곳에 휙휙 던져놓은 듯한 쓰레기들이 움직일때마다 발끝에 채였다. “ 정실장이 미쳤구나. 너같이 넋나간 애한테 일을 다 맡기고... ” 미남이 발끝에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를 대충 한쪽으로 밀어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자 현조가 주방으로 가서 쌓여있던 설거지거리를 뒤적여 머그컵 두개를 꺼내서 수세미로 벅벅 닦았다. “ 출근은? ” “ 으응. 정실장이 이번 설계도면 끝낼 때까지는 집에서 일해도 된다고 그러네. CAM처리야 나중에 회사에서 하면 되고. ” “ 그래? ” 미남은 현조에게 들리지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조가 머그컵에 넘치도록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내오자 미남이 인상을 쓰며 받아들었다. “ 무식하게 이게 뭐냐. 내가 제발 이렇게 무식한 짓 좀 하지말라고 했지? ” 현조가 어깨를 으쓱했다. “ 뭐 어때.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그게 그거지. 그릇이 뭐가 중요하냐? ” “ 그래도 손님 접대를 할 생각이면 원두커피는 못내줄망정 잔이라도 제대로 된걸 좀 가져오면 안되냐? ” “ 처먹기나 해. 다시 뺏기전에. ” “ 아이구. 이 화상아.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 “ 지는. ” 그렇게 서로에게 아웅다웅하며 철철 넘치는 커피를 다 비워냈다. “ 괜찮아? ” 배불리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미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조는 미남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담배갑을 주워들었다. 한개피 꺼내어서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길게 한모금 빨아당기는 현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그냥 습관처럼 이맘때 쯤이면 늘 그래. 그리고 이번에는 맡은 일도 많아서 더 정신이 없었고. 별일 없어. ” 다시 한모금 담배를 빨아들이는 현조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스스로를 다독이려 애쓰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 현조야. ” “ 후우- ” 현조는 담배를 비벼끄고는 미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 괜찮아. 네가 예민하게 구는거야. 난 괜찮다고 얼마나 말을 해야 알아 먹니? ”“ 네 잘못없어. 그거알지? 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던 거야. 그거 잊지마.” “ 누가 뭐래? ” 현조가 책상위에 무질서하게 놓여있던 도면을 들어서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미남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현조가 던져둔 담배갑을 집어들고는 한개피 꺼내물었다. 막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현조가 미남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휙 낚아챘다. “ 피우지마. 건강에 안좋아. ” 미남이 어이없다는 듯이 현조를 향해 툴툴거렸다. “ 넌 피우는데 난 왜 안돼? ” “ 너 아직 결혼도 안했어. 그리고 나중에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 그때되서 담배 끊으려면 더 힘들어. 애초에 피우지 마. ” “ 넌 피우잖아. ” “ 난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결혼 같은거 안해. 난 ” 현조는 미남에게서 뺏어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뒤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서 부모 죽인 원수쳐다보듯이 복잡한 도면을 노려보았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인상을 쓰고 도면을 바라보는 현조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 담배 피우는 꼬라지도 멋있네. ” “ 나야 뭘해도 멋있지. ” 현조가 피식거리며 미남을 향해 담배연기를 장난스럽게 내뿜었다. “ 켁켁... 피우지 말라더니 간접흡연으로 날 죽일 작정이구나 니가. ” 미남이 기침을 해대자 현조가 다가와서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 나 자고간다. ” “ 잘됐다. 나 내일까지 이 도면 다 해부해야 되니까 네가 설거지 좀 하고 청소도 좀 해라. 집구석이 엉망이다. 깨끗하게 청소하면 뽀뽀 열번해주마. “ “ 으윽- 미친. 난 남자 좋아해. ” “ 지랄. 언제는 내가 좋다며. ” “ 네가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내가 벌써 한입에 쓰윽했다. 뭐했냐. 고추하나 못차고 태어나고. ” “ 너처럼 변태녀 만날까봐서. ” “ 재수없어. ” “ me too. "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하면서도 둘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별다른 위로를 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서 말상대를 해주는것 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미남은 궁시렁대며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통을 들고다니며 곳곳에 산재해 있는 쓰레기들을 주워담았다. 현조는 책상에 앉아서 마우스를 따각거리며 컴퓨터의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저렇게 알록달록하고 눈돌아가게 복잡한 도면을 어떻게 다 해부해내는지 기가 막혔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자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현조가 일을 할때는 오뉴월에 폭설이 쏟아진다고 해도 끄덕도 하지 않는걸 알고있는 미남은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를 빨아서 방을 닦았다. 청소를 다 끝내고 샤워까지 말끔히 하고나서 현조의 옷 서랍을 뒤져 편한 체육복을 꺼내 입고는 창문을 닫았다. 현조의 체육복은 허리는 너무 꽉 조이고 길이는 너무 길었다. 논 매러 온 시골농부마냥 체육복을 둥둥 걷어부치고 에어컨을 틀기 위해 리모컨을 찾는데 방 한구석에 리모컨들만 챙겨놓은 바구니가 눈에 띄였다. 어지럽던 방안에 비해 리모컨들은 한군데 모아져 있는게 신기했다. 엔틱한 분위기가 풍기는 바구니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들고는 23도에 온도를 맞추었다. 더이상 할 일이 없자 미남은 학교로 전화를 해 내일 나갈 식단을 체크하고는 업체에 전화를 해 떨어진 식재료들을 주문했다. 아마 김선생이 알면 당장 시말서를 쓰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학교에 죽치고 앉아서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느니 차라리 눈앞에 두고보는게 나은걸. 현조를 쳐다보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밥 먹자. ” “ 무슨 밥? 밥 했어? ” 현조의 물음에 미남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듯 고개를 저었다. “ 내가 집에서는 밥안하는거 알잖아. 나가서 먹자고. ” “ 귀찮은데... ” 여전히 밍그적거리는 현조를 다그쳐서 옷을 갈아입히고 밖으로 끌고 나오자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져오고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은 현조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열려진 옷깃사이로 앙상한 쇄골이 보이자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 뭘 먹고 살긴 한거야? 한 사십오킬로는 되냐? ” “ 내 키에 그 몸무게면 거식증 환자야. 오십킬로에서 간당간당한다. ” “ 그래도 뼈다귀무게는 있나보네. ” “ 무식하기는. 뼈다귀가 뭐냐. ” “ 니 면상이 더 골때려. 한대 슬쩍 치기만 해도 픽 쓰러질것 같은 꼴하고는.. ” “ 후훗... ” 눈밑이 거뭇해져서 웃고있는 친구가 애잔했다. 간단하게 먹자는 현조의 청을 무시하고 미남은 끝내 삼겹살 집을 찾아나섰다. 고기라도 먹여야 안심이 될것같았다. 키만 멀대처럼 커가지고 휘적거리며 걸어다니는 꼴 보기싫어서라도 적어도 오킬로는 찌워놓고야 말겠다는 사명 감이 불끈 솟아올랐다. 두 사람은 삼겹살 집에서 5인분을 시켜서 먹고 거기다 냉면까지 추가로 먹어치웠다. 간만에 포식을 했더니 속에서는 소화를 시키느라 난리 부르스였다. “ 짜구 들겠다. ” “ 짜구? 네 그 촌실박한 말투는 도무지 바뀔 기미가 안보인다. ” 미남의 핀잔에 현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았다. 대구에서 서울로 온게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가끔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투리에 미남은 배를 잡고 웃기 일쑤였다. “ 가자. ” 현조가 지갑을 들고 나서자 미남이 재빨리 뛰어와서는 미리 계산을 해버렸다. “ 왜? ” “ 오늘은 내가 사는거야. 그러니까 넌 이따가 슈퍼에서 맥주나 사. ” “ 또 맥주 마시자고? ” “ 당연하지. 오늘은 집에 들어갈 필요도 없는데. ” “ 나 일해야 되는데... ” “ 괜찮아. 괜찮아. 정실장이 뭐라고 그러면 나한테 보내. 확 포를 떠 버릴테니까. ” 미남의 살벌한 말투에 현조는 웃으며 미남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올해는 참 빨리 지나갔어. 벌써 8월 20일이다. ” “ 그러게. ” “ 난 매년 8월달만 되면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19일 지나는게 마치 십년은 걸리는것 같아. ” 씁쓸해 하는 현조의 말에 미남이 현조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톡톡 두드렸다. “ 지났잖아. 그리고 벌써 7년 전 일이야. 언제까지 그 일때문에 힘들어 할래? ” 미남의 안타까운 시선을 피하며 현조는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그날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 미남이 사납게 현조를 돌려세웠다. “ 자꾸 바보같은 소리 할래? 네 탓 아니었고, 그리고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넌 살아야돼. 왜 니가 죽어?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걸 뭘 어쩌라구. 다시 그런 소리하면 나 진짜 화낸다. ” 미남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화를 내자 현조는 어설프게 웃었다. “ 왜 화 내고 그래? 무섭게. ” “ 무섭기는 개뿔이. ” 미남이 씩씩대며 앞서서 걸어가자 현조가 장난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 어이- 아가쒸. 엉덩이가 섹쉬한대... 우리 뜨끈한 다방 커피라도 한잔 할까? ” 미남이 뒤돌아서서 연극배우처럼 큰소리로 외쳤다. “ 싫어요. 난 고추 달린 남자가 좋아요. ” 두 여자의 원색적인 대화에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가 미남과 현조를 미친 여자보듯이 쳐다보았다. 미남과 현조는 쿡쿡거리며 손을 잡고는 후다닥 뛰어서 길을 건넜다. 집앞에 도착해서 슈퍼로 들어가려는데 미남이 갑자기 현조를 잡아세웠다. “ 우리 그냥 클럽으로 가자. 너 전에 일하던데. ” “ 카오스? 뭐하러 거기까지... ” “ 아무래도 이 밤이 너무 길것 같아. 이런 밤에는 수컷을 찾아서 날아야 되는거야. ” “ 나 일도 해야 된다니까. ” “ 안돼. 무조건 가야 돼. 오늘 느낌이 좋아. 왠지 잘생긴 킹카가 날 기다리고 있을것 같애. ” “ 신 내렸냐? ” “ 무조건 가야 돼. 빨리 들어가서 준비하자. ” 통통거리며 뛰어가는 미남을 보자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클럽을 그만둔게 벌써 이주일이나 지났다. 괜히 손님상대로 객기를 부리다 사장한테 엄청 깨지고는 열받아서 그만둔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딴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미남이 결정을 한 이상 쓸데없는 반항은 명을 재촉할 뿐이었다. “ 내 팔자야. 저것도 친구라고... ” 툴툴거리며 걸어가는 현조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3 “ 나 왔다. ” 문이 벌컥 열리고 상훈이 불쑥 들이닥치자 강후는 불쾌한 듯 상훈을 노려보았다. “ 여기 함부로 드나들지 말랬지? ” “ 친구 사이에 무슨 ” 상훈이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자 강후가 읽고 있던 책을 사납게 책상위로 내던졌다. “ 똑바로 들어. 다시 한번 말하는데 함부로 내 방에 벌컥벌컥 들어오지 마. 그리고 들어올때는 노크 좀 하고. ” “ 왜 그래? 팍팍하게. ” 상훈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 여긴 내 직장이야. 내가 나이트클럽 사장이라고 네가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까불지 마. 요즘 네 행동 많이 거슬려. ” “ 아- 이제 알았다. 너 그거 때문에 그러지? 며칠전에 내가 니네 클럽애 데리고 2차 나간거 때문에. ” 강후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물고는 상훈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 다신 그런 짓 하지마. 여기가 무슨 미아리 텍사스촌인줄 알아? 우리 애들 함부로 건드리면 친구라도 가만안둬. ” 상훈은 강후의 경고에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 오케이. 다신 그런짓 안한다. 그만 화 풀어. ” 상훈이 순순히 백기를 들고 나오자 그제서야 강후의 굳어져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 그만 가봐. 나 어디 갈데 있어. ” “ 어디? ” “ 알 필요없어. ” 강후가 재킷을 집어들자 상훈이 슬며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 나도 가자. ” “ 안돼. ” “ 어이 친구. 우리 사이에 이러면 안되지. ” 상훈이 자꾸 옆에서 추근거리자 강후는 귀찮은 참에 그냥 동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재룡을 떼어놓고 두 사람은 [ 카오스 ]로 향했다. 그가 인수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앞에 줄줄이 서 있던 기도들이 그를 향해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는 대충 손을 들어서 인사를 대신하고는 클럽으로 들어가기 위해 번쩍거리는 계단으로 향했다. 클럽안에 들어서자 멀리서 다른 테이블의 서빙을 보던 변강쇠가 그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달려왔다. “ 사장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룸으로 모실까요? ” “ 아니. 스테이지 가까운 곳이면 좋겠는데. ” “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 변강쇠가 안내한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지를 훑어보는데 어느새 소식을 들은건지 김사장이 그들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 오셨습니까? ” 강후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DJ 부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요일이라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와 봤는데 까마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 이달 말쯤에 내부 공사를 하실 예정이라구요? ” “ 네. ” “ 잘만 고치면 여기도 네메시스 못지 않을겁니다. ” “ 글쎄요. ” “ 제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될것 같은데... ” “ 네. 그러세요. ” 강후는 김사장이 인사를 하며 자리를 뜨는데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연신 DJ 부스를 힐끔거렸다. 곧이어 술병들과 안주가 차례대로 날라져왔다. 상훈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친구한테 너무 야박하게 군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강후는 상훈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 받아라. ” 상훈이 술잔을 받아들며 피식거렸다. “ 새끼. 괜히 구박하고 지랄이야. ” 상훈의 볼멘 소리에 강후는 술잔을 채워주는 걸로 화해를 청했다. 지난 20년간 두 사람은 늘 이렇게 투닥거리면서 지내왔다. 강후의 어머니가 유명한 사채업자인데 반해 상훈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대학 교수였다. 그런데 아들인 상훈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해서 이년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사고만 치고 다녔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의사다 박사다 잘 나가는데 유독 상훈만 별종처럼 밖으로 나돌았다. 행실도 그다지 좋진 못해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도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강후는 워낙 어릴적부터 어울려 왔던지라 별 의식없이 지금도 섞여서 놀긴 하지만, 솔직히 강후가 호감을 느낄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 근데 뭐하러 여긴 또 온거야? 인수하기로 이야기 끝났다며. ” “ 그냥. 어떻게 인테리어를 할지 생각도 좀 해 보고, DJ들 실력도 봐서 자를건 자르고, 떠안을건 떠안아야지. 할 일이 천지다. ” 강후의 말에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사업가란 말이지? 그러게 뭐하러 골치 썩어가며 사업을 한다고 난리야? 넌 네 어머니 재산의 10%만 가지고도 평생 탱자탱자 놀면서 살수 있을텐데.... ” “ 그게 내 재산이냐? 딴 사람이 벌어들인 돈엔 관심없어. 내가 내 손으로 벌어들인게 진짜 내 재산이야. 알겠냐? ” “ 잘났다. ” 상훈은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고는 우스꽝스럽게 흔들었다. ================================================================================== “ 꼭 여기를 가야되냐? 그냥 딴데로 가자. " 현조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반항을 하자 미남이 현조를 확 째려보았다. “ 안돼. 오늘은 이쪽에서 필이 왔다니까. 이 한 몸 아낌없이 불살라서 기필코 킹카를 낚아채고야 말것이야. ” 기대감에 들뜬 미남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괜히 궁시렁대다가는 미남에게 무시무시한 테러를 당할것 같아 현조는 체념을 하고 반쯤은 질질 끌려 [카오스]에 들어섰다. “ 누나. 왔어요? ” 멀리서 변강쇠가 안주접시를 솜씨좋게 들고가다 현조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현조는 손을 들어 아는체를 해주고는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 먼저 수질검사 좀 해볼까? ” 미남은 자리에 앉자마자 벌써 내부를 둘러보며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 헉! ” “ 왜? ” 갑자기 호흡곤란 환자 흉내를 내는 미남을 쳐다보자 미남이 잽싸게 현조의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 저쪽 테이블에 죽이게 잘생긴 놈있다. 저것이 사람이여 뭐시여. ” 미남이 소심하게 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지만 워낙 불빛이 요란스럽게 깜빡거리는지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 난 잘 안보이는구만. 시력도 좋다. ” “ 헉! ” “ 이번엔 또 뭐야? ” “ 저 남자가 우리쪽을 계속 보는것 같은데? ” “ 그래? 네 미모에 뻑 갔나보지. ” “ 하긴 내 외모가 어지간해야지. 이 놈의 인기는 사그라들지가 않아요. 진짜. ” “ 그러게 말이다. 어찌나 대단한지. ” 시큰둥하게 미남의 말에 퉁박을 주고는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데 웨이터 정우성이 현조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 누나. 오래간만이예요. ” “ 그러네. 지희하고 수안이는? ” “ 걔네들 누나 그만두고 나갔어요. 딴데로 옮긴다고. 여기가 워낙 페이가 약하잖아. ” “ 그래? 우리 기본으로 갖다 줘. ” “ 네. ” 현조는 아직도 흥분해서 저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미남의 튼실한 팔뚝에 머리를 기대고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미남이 정신을 못차리는가 싶어 남자들 쪽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미남이 찍은 킹카 후보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누구더라. 누구지? 어라? 그녀가 남자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변강쇠가 현조의 테이블로 쭈뼛거리며 다가오는게 보였다. ================================================================================ 상훈의 엽기 개그를 들으며 술잔을 들던 강후는 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 여자들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누구더라? ” 강후의 중얼거림에 상훈이 뒤를 돌아 강후의 시선이 머문 곳을 쳐다보았다. “ 아씨- 저 재수. 생각안나? 전에 그 싸가지 없던 DJ. 까마귀인지 깔따구인지... ” “ 아. ” 강후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눈에 익더라니. 그런데 오늘 까마귀는 손님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DJ 부스가 아니라 스테이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같이 온 여자와 자리를 잡고 앉는걸로 봐서 이곳의 DJ를 그만둔 것 같았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강후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 그만 둔 모양이네. ” “ 뭐? ” 강후의 중얼거림에 상훈이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강후는 상훈 몰래 까마귀를 힐끔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다가가서 아는체를 하자니 또 성깔에 못이겨 떽떽거릴게 뻔하고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영 감질맛이 났다. “ 저 사장님. ” 변강쇠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강후를 불렀다. “ 왜? ” “ 그게... 저 쪽 테이블에서 사장님들과 합석을 하고 싶다고... ” 강후는 변강쇠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냥 딱 보기에도 나 잘나가요 라고 써 붙인 것 같은 여자 둘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어- 괜찮네. 합석하자. ” 상훈이 대충 견적을 끝낸건지 강후를 바라보았다. “ 됐어. ” “ 왜? 우리끼리 놀면 심심하잖아. 합석하자. ”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 싸구려 같아 보여. 그 보다 저기 있는 쟤들한테 우리랑 합석하자고 말해 봐. ” 강후가 까마귀 쪽을 턱으로 가리키자 상훈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 야. 뭐하러. 저거 성질 드러운거 봤잖아. 그리고 까마귀보다는 저 언니들이 훨 낫다. ” “ 시끄러워. 가서 물어 봐. ”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변강쇠를 통해서 소위 부킹이란걸 넣고는 강후는 스스로의 유치함에 실소를 터트렸다. 클럽을 다니면서 부킹이란 걸 먼저 제의해 본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변강쇠가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곧장 까마귀의 테이블로 가서 까마귀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리는게 보였다. 까마귀가 흘낏 이쪽을 보더니 또 변강쇠의 귀에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변강쇠가 난처한 표정으로 뭐라고 또 말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변강쇠가 뭐 씹은 얼굴로 강후네 테이블로 돌아왔다. “ 뭐래? ” 강후의 물음에 변강쇠는 다시 한번 까마귀쪽을 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빨리 말해. 뭐래? ” “ 그게... 불량품은 취급 안한다는데요. ” “ 푸웃. 뭐? 무슨 품? ” 술을 마시던 상훈이 마치 분수처럼 술을 뿜어내며 기가 막힌 듯 되물었다. “ 저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 “ 됐어. 그냥 오면 까마귀가 아니지. ” 강후는 까마귀 쪽을 보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까마귀가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쌩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야. 관둬 관둬. 지네가 무슨 공주님인줄 아나. 됐다 그래. 아우~ 재수 없어 진짜. ” 상훈은 술이 흘러내린 상의를 탈탈 털며 씨근덕 댔다. “ 가자. ” 강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상훈이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 벌써 가자고? 이제 시작인데? ” “ 아니. 저 쪽으로 우리가 가자고. 가서 우리가 왜 불량품인지 물어봐야지. ” 강후가 씩씩하게 까마귀에게로 걸어가 버리자 상훈은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강후의 뒤를 쫓아갔다. “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까마귀가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 안되는데. ” 강후는 피식 웃으며 까마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상훈도 그의 옆에 턱하니 앉아버렸다. “ 왜 우리가 불량품이라는건지 그걸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 “ 아! ” 까마귀는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강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지금 하는 행동이 그걸 증명하는거 같은데. 허락도 없이 남의 테이블에 와서 떡 하니 앉는건 교양있는 사람들이 할 짓은 아니거든. ” “ 어라. 이 언니봐라. 말 짧게 끝나네. ” 옆에 있던 상훈이 강후를 툭툭치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 몇 살이야? ” 강후가 대뜸 반말을 하자 까마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 먹을만큼 먹었지. ” “ 나도 먹을만큼 먹었거든. ” “ 그래? ” 까마귀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쪽 스테이지를 보면서 음악소리에 고개를 까닥거렸다. “ 현조야. 누구? ”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까마귀의 친구가 강후를 보며 말했다. 눈이 동글동글하니 귀염상이었다. 그리고 몸매도 동글동글... 삐적 마른 까마귀와는 달리 통통하니 전체적으로 복스럽게 생긴 인상이었다. “ 별거 아냐. 신경 끊어. ” 무뚝뚝하게 내뱉는 까마귀의 말에도 곰돌이 푸우처럼 생긴 여자는 연신 강후를 힐끔거렸다. 정작 강후가 관심이 있는 까마귀는 소 닭 쳐다보듯이 하는데 푸우만 철철 넘치는 꿀단지 쳐다보듯이 그를 향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 손목은 다 나았나 보지? ” 강후가 까마귀의 손목을 보면서 묻자 까마귀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목을 들어 강후의 앞에 쓱 내밀었다가 잽싸게 치워버렸다. 강후가 담배를 피워물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자 곰돌이 푸우가 기침을 해댔다. “ 웬 내숭? 언니 담배 안 피워? ” 상훈이 깐죽대자 곰돌이 푸우가 가재미 눈을 하고는 상훈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상훈은 빙글빙글 웃으며 강후를 쿡쿡 찔렀다. “ 저 언니 눈 튀어 나오겠다. 근데 언니도 자꾸 보니까 귀엽네. 동글동글.. 꼭 호빵같다.” “ 호...호빵? ” 푸우가 볼을 씰룩이며 콧김을 뿜어대자 상훈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강후는 담배연기 사이로 보이는 현조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 그나저나 이유는 끝까지 말 안해줄거야? ” “ 댁들이 불량품으로 태어난 이유를 나한테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나... 댁들을 생산해낸 부모님한테 가서 왜 순정품으로 못 태어나고 이 모양 이꼴로 태어났냐고 물어봐야지. ” “ 내가 보기에 너도 KS 정품은 아니야. 알고 있지? ” 강후가 만만찮게 대꾸를 하자 현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삼스럽게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뭐 이런게 다있나 그런 눈빛이었다. “ 클럽DJ는 그만 둔 모양이지? ” 강후가 맥주병의 뚜껑을 따며 물었지만 현조는 대답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 이것봐요. 여긴 우리 자리고 댁들 때문에 우리가 불편하거든요. 그만 가주세요. ” 꿀단지에 빠진 것 마냥 황홀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푸우가 이제 사태파악이 된듯 코평수를 늘려가며 강후와 상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강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전히 현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이 정도면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 아니나 다를까 현조가 들고있던 맥주병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아씨- 진짜 짜증나서 못 있겠네. 가자 미남아. ” “ 어? 응. ” 곰돌이 푸우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드는데 현조가 강후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 불량품1,2호. 제발 부탁인데 꿈에서라도 절대 마주치지 말자. 엉? ” 까마귀의 말에 강후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다 보던 까마귀의 눈이 강후의 얼굴을 쫓아 올라왔다. “ 난 만날 때마다 즐거운데. 어쩌나. 그리고 우리 다음에 만나면 통성명이나 하자고. ” “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길 빈다. ” 까마귀는 다시 한번 강후와 상훈을 못마땅하게 훑어보고는 곰돌이 푸우의 손목을 낚아채서 나가버렸다. 4 “ 야. 누구야? ” 클럽을 나오자마자 미남이 현조를 못살게 굴었다. “ 성질은 좀 지랄맞아도 생긴거 하나는 죽이더라. 으으윽- 그 날렵한 콧날, 푸욱 꺼진 눈. 으윽 죽음이야. ” “ 신경끊어. 재생 불능한 쓰레기들이야. ” “ 그래? 근데 왜 그런 인간들이 널 아는척 해? ” “ 저번에 클럽에서 DJ 봐줄 때 잠깐 마주쳤어. ” “ 그렇구나. ” “ 그 얘긴 그만하고. 어쩔래? 우리 집으로 다시갈래 아니면 그냥 여기서 헤어질래? ” 길에 빈 택시가 있나 힐끔거리며 현조가 미남에게 물었다. “ 나 오늘은 그냥 갈란다. 간만에 멋지구리한 놈을 봤더니 기분이 팍 상하네. 같은 인간인데 어쩌면 이렇게 차이가 나냐? 도대체 그런 것들은 뱃속에 있을 때 뭐 먹고 자랐대니? ” “ 적어도 막걸리는 아니였지 싶다. ” “ 야- ” 미남의 엄마가 미남을 가졌을때 막걸리를 질리도록 먹었다는 걸 아는 현조가 은근히 자신을 놀려대자 미남이 소리를 꽥 질렀다. “ 그놈의 막걸리 소리 한번만 더 하면 껍질을 확 벗겨버린다. ” “ 아 예. ” 열받아서 펄펄 뛰는 미남을 끌고 현조는 빈택시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 아저씨. 송파 우성아파트요. ” 미남을 뒷자리에 밀어넣고 현조는 만원권 한장을 아저씨에게 주었다. “ 나 택시비 있어. ” “ 알아. 너희 집 부자인거. 내 성의다. 조심해서 들어가. ” “ 응. 내일 전화할께. ” “ 그래. ” 미남이 탄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현조는 가방을 뒤져서 MP3를 꺼내들었다. 엉망으로 엉켜있는 이어폰 줄을 꼼꼼하게 풀어서 귀에 꽂는데 누가 크락션을 빵빵 울렸다. 무심히 옆을 보자 인도쪽으로 바싹 붙은 검은색 외제차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왔다. “ 또 보네. ” 불량품 1호와 2호가 나란히 앉아서 그녀를 향해 느끼한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 가던 길 가라 그냥. 눈도 밝다 진짜. ” 현조가 혀를 끌끌차며 걸음을 옮기자 자가용이 천천히 그녀를 따라왔다. 한참을 그렇게 가던 현조가 걸음을 멈추고는 차로 걸어왔다. 그리고 차 번호판을 한번 쓰윽 보고는 불량품1호에게 말했다. “ 니들은 바쁘지도 않냐? ” “ 바쁜거 없는데. ” 조수석에 앉아있던 불량품 1호가 씨익 웃었다. “ 내 이름은 박강후거든. 니 이름은 뭐냐? ” 불량품 1호의 말에 현조는 한손으로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 알거 없고. 저기 고개 넘어가면 경찰들 음주운전 단속할거거든. 니들 혹시 음주운전 아냐? ” 현조의 말에 운전을 하던 불량품 2호가 기겁을 하고는 차를 멈췄다. 현조는 다시 한번 더 혀를 끌끌차고는 횡단보도를 건너서 택시를 잡아세웠다. “ 아저씨. 장미아파트요. ” “ 네. ” 차에 타서 반대편 차선을 보니 그 외제차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불량품 1호가 차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현조는 다시 한번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차고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다 왔습니다. ” 택시기사의 말에 현조는 감았던 눈을 뜨고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 고맙습니다. ”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리자 돼지슈퍼 아줌마가 현조를 알아보고는 그녀를 불렀다. “ 얼른와봐. 지금 드라마 시작했어. 저번에 같이 보자고 해놓고 왜 안 왔어? ” “ 바빴어요. 아저씨는요? ” “ 벌써 들어갔지. 그 양반은 꼭 이 드라마는 집에서 봐. 집중을 해서 봐야된다나 어쨌다나. 그나저나 얼른 와. 시작한다 벌써. ” 현조는 아줌마를 따라 슈퍼안으로 들어가서 계산대 뒤의 협소한 공간으로 몸을 밀어넣고는 제 집처럼 턱하니 가방을 내려놓았다. “ 오늘 이야기는 뭐예요? ” “ 그게 말이지... ” 슈퍼아줌마가 신이 나서 오늘 이야기의 줄거리를 늘어놓자 현조는 맞장구를 쳐가며 좋아라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자 벌써 열한시가 지나있었다. “ 아줌마 저 그만 가볼께요. 그리고 캔맥주 3개만 주세요. ” “ 왜 벌써 가려고? 이거 끝나고 딴 방송에서도 재미있는거 하는데. ” “ 저도 같이 보고 싶은데 요즘 일이 많아서 좀 피곤했거든요. 집에 가서 맥주 마시고 자려구요. ” “ 그래? ” 수퍼아줌마는 시커먼 비닐 봉지에 캔맥주 세개와 마른 오징어를 넣었다. “ 오징어는 됐어요. 김이랑 먹으면 되는데... ” “ 맥주에는 오징어가 있어야지. 어여 가지고 가. ” “ 여기 돈요. ” 현조가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자 아줌마가 버럭 화를 냈다. “ 어른이 주면 그냥 받는거지. 어디 버릇없이 돈을 내밀어. ” “ 매번 그러시잖아요.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 “ 언제 매번 그래? 맥주 살 때만 그렇지. 다른 거 살때는 다 돈 받잖아. ” “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근데 왜 맥주값은 늘 안 받으세요? ” 현조가 이제서야 깨달은 듯 묻자, 아줌마는 현조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 내가 현조 만난게 벌써 8년째잖아. 근데 네 얼굴에서 미소 비스무리한거 본게 몇 번인줄알아? 처음엔 잘 웃더니 어느 순간부터 안 웃더구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인상쓰고 다니면 복 떨어져. 그러지 마. 술 마셔서 해결되는 일이면 그러라고 내가 돈 안받는거야. 그래도 나쁜 쪽으로 빠지는 건 아닌거 같으니까. 기특해서. ” 현조는 아줌마의 말에 얼핏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도 참 어색했다. 제대로 큰 소리로 웃어본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남과 있을때는 늘 웃는 것 같은데 뒤돌아서면 즐거웠던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 고맙습니다. ” “ 고맙긴. 어여 들어가. 그리고 많이 마시지 말고. 아침에 속 쓰리거든 나한테 와. 빈속에 그냥 출근하지 말고. ” “ 네. ” 현조는 다시한번 아줌마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뭐에 쫓기듯 서둘러 아파트로 들어왔다. 남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안한것 같은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그녀의 그늘이 뻔히 보였나보다. 현조는 답답해져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치며 신발을 벗고는 텅빈 아파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 너 왜 자꾸 까마귀한테 집적거리냐? ” 재룡을 불러 운전을 시키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집으로 가는데 상훈이 강후에게 물었다. “ 집적? ” “ 그럼 그게 집적대는거지 뭐야? ” 강후는 대답없이 눈을 감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 괜히 그런 애랑 얽히지 마라. 까마귀처럼 성질 드러운 애는 나중에 떼어낼 때도 골치야. ” “ 그냥 팔딱거리는게 재밌어서 긁어보는거야. ” “ 재미는 그냥 재미로 끝내라. ” “ 무슨 소리야? ”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상훈이 이상해서 강후는 감았던 눈을 떠서 상훈을 쳐다보았다. “ 네가 필요이상으로 걔한테 관심이 있어보여서 하는 말이야. 관심있으면 주변 정리부터 하고 데리고 놀던지. ” “ 그런거 아니라고 했잖아. 카오스에 간건 인테리어 구상때문에 간거고 , 까마귀는 우연히 만난거야. 알면서 왜 그래? ” 상훈은 발끈하는 강후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 겉으로는 웃으면서 좋다좋다하다 나중에 지가 싫어지면 눈하나 깜빡 안하고 다른 사람한테 상처주는 거. 그거 사람이 할짓이 아니다. ” “ 내가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 “ 내가 알기로는 그래. ” 강후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듯 하다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것 같긴 하다. 근데 너 오늘 왜 이래? 조금 전까지는 실없는 소리하면서 시시덕거리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심각한거야? ” “ 너... 아현씨 정리할거냐? ” “ 아현이? ” 갑작스레 아현의 이야기를 꺼내는 상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 아까 백화점 갔다 우연히 아현씨 봤는데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 ” “ 그래? ” 요 며칠 아현에게 연락을 안한게 은근히 신경쓰였다. 어머니와 통화 후 이제 정리를 해야 되겠다 싶어 일부러 연락을 뜸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끝낼거면 그냥 깨끗이 너 그만 만나고 싶다 그렇게 말해. 괜히 미련남게 하지말고. ” “ 아현이가 너보고 뭐라그래? ” 갑자기 뭔가 스치는 생각이 있어 강후는 상훈을 보며 물었다. “ 별 말 안했어. 그냥 힘들다고... 너 보면 연락 좀 해달라고 전해달라더라. ” “ ... ” 일 년간 아현을 만나면서 상훈과도 종종 어울렸던 터라 상훈도 아현을 잘 알고 있었다. 아현도 상훈에게는 유독 편하게 대했다. 강후의 다른 친구들과는 말도 잘 안 섞는 애가 상훈과는 말이 잘 통하는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 아현씨 많이 여리잖냐. 상처주지 말고 좋게 끝내. 어차피 너 내년에 준희지 뭔지 걔 돌아오면 아현씨랑 끝낼거였잖아. ” “ 네가 신경 쓸일 아니야. ” 매정하게 딱 잘라 말하는 강후를 보는 상훈의 눈빛이 가볍게 떨렸다. 한참동안 말없이 강후를 노려보던 상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잘 나신 박강후가 여자한테 매달리는 꼴 한번만 보면 평생 소원이 없겠다. ” 강후는 상훈을 보며 삐딱하게 웃었다. “ 미안하다. 네 평생 소원 못 들어줄 것 같아서. ” 두 사람은 또다시 투닥거리며 잠시동안의 긴장의 여운을 씻어버렸다. 강후는 곧 아현과 정리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준희도 준희지만 까마귀가 사방팔방 정신없이 푸닥거리는걸 보니 꼭 낚아채서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었다. 날개 꺾인 까마귀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상훈 앞에서 더이상 까마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슬쩍 화제를 바꿔버렸다. “ 넌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야? 너희 부모님 뭐라고 안하셔? ” “ 전혀. ” 상훈은 강후의 물음에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 너희 형들처럼 의사나 교수 될거 아니면 차라리 사업을 시작해 보던가. 너희 외할아버지 아직 정정하시잖아. 그쪽으로 들어가서 일 좀 배워보든지. ” “ 됐다그래라. 사업은 무슨. 난 그런거 관심없어. 그냥 이렇게 건달처럼 살다가 잘나신 부모님들이 짝 구해주면 감사합니다 그러고 살 부비며 애새끼 쑴풍쑴풍 낳고 살거다. ” “ 넌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냐? ” 강후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상훈을 쳐다보자 상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 있었지. 딱 하나. 근데 그건 안된단다. 우리 잘나신 교수님들께서. ” “ 피아노? ” “ 그래. ” 상훈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풀어보었다. 몇년간 피아노 근처에도 가지 않았더니 손이 많이 굳어져 버렸다. 그래도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이 땋을 때 느껴지는 감미로운 설레임은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했다. “ 이해가 안된다. 피아노 전공해서 피아니스트 되면 되잖아. 그게 교수보다 못한게 뭐가 있어? ” “ 내 재능이 그 정도가 안되니까. 애초에 싹을 잘라버리는 거지. 고등학교 때 나 개인레슨했던 그 교수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난 삼류밖에 안된단다. 그 말 듣자마자 우리 어머니 피아노 바로 갖다 버리더라. 난 근 10년간을 피아노만 보고 살았는데 성공 못할 거라는 그 말 한마디에 내 10년을 완전히 깨부셨어. ” 상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지금이라도 해보던지. ” “ 지금? 뭘 어떻게. 너 모르냐? 난 우리 부모님이랑 큰형이 용돈안주면 완전히 알거지야. 내가 피아노 다시한다고 하면 아마 용돈이고 뭐고 없을걸? ” “ 그래도 지금처럼 정신없이 사는것 보다는 낫잖아. ” “ 아니. 우리 어머니는 그거 인정못해. 자기때문에 내가 이렇게 엇나간거 인정하느니 차라리 망나니 아들 소리 듣는게 낫다고 생각할 사람이야. 워낙에 완벽주의자시잖냐. 실수란 건 우리 어머니 인생에 없어.” 강후는 상훈의 어깨를 툭툭두드려 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 너 혹시 쫓겨나면 나한테 와라. 내가 먹여살려주마. ” “ 나더러 얼굴마담하라고? 그러지 뭐. 내가 원래 인물은 출중하잖냐. ” “ 미친 새끼. ” “ 더럽게 잘난 새끼. ” 늦은 밤 도심을 가로지르는 차 속에서 잘난 척하는 두 남자가 킥킥대고 있었다. 5 [ 왜 연락 안해요? 걱정되잖아. 이거 보면 꼭 전화해요. 아현 ] 액정에 뜬 메세지를 내려다 보는 강후의 얼굴이 난감해졌다. 새로 인수한 카오스의 내부수리다 뭐다 해서 요며칠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만나서 정리를 한다한다 하는게 아직까지 미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현은 절대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전화를 하면 어디에 있던지 한 시간 안에 그의 앞에 나타나는 걸 보면 늘 그의 전화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건 확실한데, 왜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런 아현이 이번에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아니면 요근래 들어 유난히 무심해진 그의 태도때문인지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내왔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전화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는 전화대신 메세지를 보냈다. [ 많이 바빠. 나중에 연락할께. ] 매정하다 싶게 짧고 성의없는 메세지를 보내놓고 강후는 어쩔 수 없이 치뤄야할 이별후유증에 머리가 아파왔다. 큰 눈망울에 물기를 가득 품고 그를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낼 아현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준희가 유학을 가면서 그에게 진지하게 하던 말이 생각났다. < 오빠는 어차피 수절은 못해. 나도 그거 알고 오빠도 아니까 우리 일정선만 지키도록 하자. 내가 여기 없는 동안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는거 나 모른척 할께. 대신 내가 돌아오면 그 즉시 모든 여자관계는 정리하는 거야. 알았지? > 똑똑하고 현실적인 준희답게 그에게 선전포고 하듯이 하는 말에 그는 반은 장난삼아 그러자고 말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준희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것 같았다. 그는 늘 뭔가를 찾아 헤매는 사냥꾼같은 습성이 있었다. 그게 여자건 사업에 관련된 일이건 상관없이 그는 뭔가 하나를 성취하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3년간 벌려놓은 일이 제법 되었다. 강남에 위치한 멤버쉽 클럽과, 네메시스, 그리고 새롭게 인수한 카오스를 빼고도 그는 상가 3개를 더 소유하고 있었다. 사업가이던 아버지와 사채업자 집안의 고명딸인 어머니의 수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돈을 굴리는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덕분에 초창기 네메시스를 인수하는데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어머니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탄탄하게 제 입지를 굳혀왔다. 이제 어지간한 중소기업 사장보다도 나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고, 이대로 가면 마흔이 되기 전에 평생 해외여행 다니면서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돈은 끌어모을 수 있을것 같았다. 내년에 준희가 귀국하면 그는 그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이었다. 정식으로 약혼을 한건 아니지만 양쪽 집안 모두 당연히 그럴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준희와 결혼하는데 일말의 주저함은 없었다. 그러려면 아현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왜 이번에는 이렇게 질척거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들은 모두들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혼해주기를 바라는 맹랑한 여자도 있었고, 단지 그의 돈이 탐나 만날때 마다 뭔가를 사달라 조르는 여자도 태반이었다. 그런데 아현은 그런 여자들과는 달랐다. 이상스레 그에게 원하는게 없었다. 어쩌다 그가 보석을 선물하면 그녀는 정중히 거절을 하고는 대신 그와 하루 온종일 데이트를 하면 안되겠냐고 말을 하곤 했다. 그러니 그도 지금까지 상대해 오던 여자들 대하듯이 막 대할수가 없었다. ‘ 조만간 만나서 정리를 해야지. ’ 그는 왠지모를 갑갑증에 단정히 묶여져 있던 넥타이를 헐겁게 풀었다. [ 삐익- ] 인터폰이 울리자 강후는 연결 버튼을 눌렀다. “ 사장님, 정효원이란 분이 전화하셨습니다. ” “ 누구? ” “ 정효원 씨라고... ” “ 아- 연결해. ” 잠시후 기분좋게 울리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 박사장. 바쁘냐? ” 강후는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 웬일이야? 몇달간 연락도 없더니. ” “ 내가 좀 바빴다. 아버지 회사로 들어오면서 일이 많았어. ” “ 아버님 회사로 들어간 거야? ” “ 응.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원하셔서 나도 어쩔수 없었다. 이제 완전히 발목 잡힌거지 뭐. ” “ 자식한테 의지하고 싶어하는 건 어느 부모나 똑같지. ” 강후의 말에 효원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 그렇게 잘 아는 녀석이 니네 어머니 속을 그렇게 썩이냐? ” “ 소문 났냐? ” “ 소문 뿐이겠냐. 우리 집에서는 네 성격 너무 쇠심줄 같다고 은근히 걱정하신다. 준희 고생시킬까봐. ” “ 너희 집 식구들은 참 대단하다. 어떻게 사촌까지 그렇게 챙기려고 드냐? ” 효원의 사촌동생인 준희에 대해 과하다 싶게 애정을 쏟아붓는 효원의 부모님이 그는 조금 의아했다. “ 형 죽고 나서 유난히 그러시네. 정 붙일 곳이 필요하셨나봐. 나야 아들이래서 살갑기를 하나 따뜻한 말을 건네기를 하나. 그런데 준희녀석은 여자래서 그런지 큰엄마인데도 여간 싹싹하게 구는게 아니야. 아마 죽은 지 엄마 생각이 나서 더 그런가봐. ” “ 그건 그렇다치고 무슨 일로 바쁘신 정효원이 나한테 전화를 다 주셨을까? ” 효원이 뭐라고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 바쁘기는... 우리 친구들 중에 너보다 바쁜 사람 아무도 없다. 전에 하기로 했던거. 그거 이번에 추진해 볼까 하는데. ” “ 뭐? ” “ 친목회 비슷한 모임 갖자고 작년 송년회때 한번 이야기 했었잖아. ” “ 아 그거. ” “ 며칠전에 준호랑 통화했는데 이번 참에 만들자고 하더라. 인원은 한 열 명정도로 제한하고, 장소는 너의 멤버쉽 클럽에 모이는 게 어떻겠냐고. ” “ 그래? 그러든지. 나야 뭐 상관없어. 근데 여자애들은 안 넣을거지? ” “ 왜? ” “ 여자들 수다떠는거 딱 질색이야. ” “ 준호는 경주랑 준희는 포함시키자고 하던데. 준희는 내년에 합류하고 일단 여자는 경주하나로 제한하자고 하지 뭐. 괜찮지? ” “ 그래라. 그럼 첫 모임은 언제할거야? ” “ 이번 금요일에 하자. 쇳불도 단김에 빼라고 말 나온 김에 시작해야지. ” “ 오케이. 그럼 그때 우리 클럽으로 와라. ” “ 그래. ” 전화를 끊고 강후는 책상위에 놓여있던 스케쥴표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두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같은 부류들끼리 모임을 갖는 횟수가 많아졌다. 준호나 효원은 집안들끼리도 모두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부모들도 대부분 그런 식의 모임을 갖고 있었고 이제 자식들이 되물림을 하는 것이다. 끼리끼리. 유유상종. 어차피 비슷한 부류들끼리는 유별난 연대의식이 생기기 마련인 모양이다. 대학 졸업할때까지는 그다지 그런 모임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친구녀석들이 그런 모임을 하자고 하는걸 보면 말이다. 강후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속물중에 하나란 생각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금요일. < 시저 >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강후는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시저에 도착했다. 그가 입구쪽에 나타나자 지배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 오셨습니까? ” 강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룸 제일 안쪽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두껍게 방음장치가 된 벽이 바깥세상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다. “ 오늘 친구녀석들 모임이 있습니다. 미리 연락받으셨습니까? ” “ 네. 조금전에 도착하셔서 지금 룸에 계십니다. ” 50대 초반의 지배인이 그가 자주 들리지 못해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보고하는 걸 들으며 강후는 그때그때 의문점들을 제시하고 또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지배인의 보고가 끝나고 나자 강후는 재킷을 벗어두고 넥타이도 풀어버렸다. 흰색 셔츠의 맨 윗 단추를 풀어버린 그는 소매도 대충 둘둘 말아서 걷어 올렸다. 지난 여름 휴가차 갔던 푸켓에서 심하게 태운 피부는 이제 거의 옅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배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 이제 곧 결혼 하셔야죠. ” “ 네? ” 강후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 어머님이 걱정이 많으십니다. 빨리 자리 잡으셔서 어머님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신던데. ” 강후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아저씨. 어머니가 또 못살게 들들 볶았나본데, 저한테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다는거 모르세요? ” 강후의 웃음기 섞인 말에 지배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 어지간해야 말이지. 내가 너희 장여사 때문에 전화 받기가 두렵다. ” “ 아저씨도 그냥 모르겠다고 하세요. 뭐하러 일일이 다 받아 주세요? 어머니 버릇 나빠져요. ” “ 녀석.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하고는... 쯧쯧. 이러니 금희가 그렇게 안달을 하지. 이제 그만 네 엄마 좀 도와주지 그러니. 금희도 이제 많이 늙었어. ” “ 어머니가 늙어요? 아휴 무슨 그런. 어머니 이제 겨우 쉰둘이예요. 아직 창창하시다구요. 그리고 인후도 있는데 왜 저만 자꾸 닥달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 “ 그래도 어디 맏이만 한가. 차남은 어쩔 수 없이 맏이보다는 믿음이 덜 가지. ” 강후는 더 이상 있다가는 지배인에게 잔소리만 더 들을 것 같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룸으로 몸을 피했다. 강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한 잔씩 하고 있었던 듯 그를 반기는 분위기가 꽤나 흥청거렸다. “ 왜 이제야 와? 어디 우리 박사장님. 비싼 얼굴 좀 볼까? ” 친구들끼리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 강후를 은근히 비꼬며 준호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 잘 봐둬라. 비싼 얼굴에 침은 흘리지 말고. 어이 정효원. ” 그는 저쪽 구석에 앉아있는 효원을 불렀다. 효원은 이미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 왔네? 어떻게 니네 클럽에서 하는 모임에 니가 제일 늦게 나오냐? ” “ 그렇게 됐다. 벌써 한잔 한것 같은데? ” “ 간만에 친구 녀석들 만나니까 기분 좋아서 마셨다. 너도 한잔 해. ” 친구들의 모임은 밤 열두시가 다 되어서 끝이 났다. 여자인 경주는 일찍 보내고 나머지 술이 덜 취한 친구들은 다시 자리를 옮겨서 2차까지 하고나서야 그들은 헤어졌다. 강후와 효원은 근처 호텔에 방을 잡고는 오래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둘다 어지간한 주당이라 양주에 맥주 나중엔 소주까지 마셨는데도 그다지 취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효원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들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 오래간만에 마셨더니 오- 좀 취하는데... ” “ 그래? 별로 표시도 안나는데? ” 강후의 말에 효원은 냉장고에서 새로운 생수병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 너야말로 끄덕없네. ” “ 나야 워낙 내공이 쌓여서 이 정도야 우습지. ” 두 사람은 냉장고에 비치되어 있던 맥주까지 마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강후가 눈을 떴을때는 따가운 햇살이 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옆 침대를 보자 이미 효원은 가고 없는 듯 메모지 한 장과 명함 한장이 남아있었다. [ 먼저 간다. 내 명함 놔뒀으니까 시간되면 회사로 놀러와라. 효원 ] “ 주식회사 청우 ? ” 다음주 쯤에 한번 시간을 내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효원의 명함을 지갑에 넣었다. 재룡에게 전화를 해 빌라에서 옷을 챙겨오라고 말하고 그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6. [.. 내게 던져질 슬픔을 두려워했던 맨처음 날 설득한 니 약속 다 바람같은거야...] 알람시계대신 맞춰놓은 오디오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자 현조는 물먹은 솜마냥 축 늘어진 몸뚱아리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반쯤 감긴 눈을 들어 익숙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제 입었던 옷은 땅바닥에 그대로 널부러져있었고, 잠들기 전에 마셨던 맥주캔도 그대로였다. 덥고 있던 이불을 대충 둘둘말아 옆으로 밀쳐놓고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발끝에 채여 넘어 진 캔맥주에서 누런 액체가 흘러내려 땅바닥을 흥건히 적셔버렸다. 뭐 닦을게없나 싶어서 방안을 둘러보니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지난 며칠간 야근하는 날이 많아서인지 집꼴이 말이 아니었다. 빨래는 바구니에 산처럼 쌓여있고, 환기를 시키지 않은 방안은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손을 대기도 싫을 정도였다. 쳐다보고 있어봤자 지들이 알아서 정리될것도 아니고, 속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 몇시간만 그대로 있어라. 오늘 갔다와서 삐까번쩍하게 닦아주마. ” 욕실로 들어가서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훌훌벗어 놓고 좀 뜨겁다 싶게 온수를 틀고는 샤워기 아래서 고스란히 물살을 맞고 서 있었다. 지은지 꽤 오래된 아파트라 부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온수 하나만큼은 시원스럽게 잘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한참동안 그러고 있다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스펀지로 온 몸을 닦아내고 머리를 감았다. 제멋대로 자라난 머리카락이 샴푸거품과 뒤섞여 무겁게 축 처졌다. “ 좀 자를까, 그냥 놔둘까...” 비맞은 중마냥 혼자 중얼거리며 린스통을 찾아 더듬거리는데 속이 텅빈 린스통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 어제 사가지고 들어올 걸... ” 린스하는건 포기하고 머리에 수건을 둘둘감고, 몸을 닦으며 욕실문을 삐죽이 열었다. 베란다의 버티칼이 조금 열려있는것을 보고는 벗어두었던 옷을 주워들고는 다시 입었다. 방으로 돌아와 화장대 앞을 대충 발로 쓱쓱 밀어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입고 왔던 옷을 벗어서 방 한구석으로 휙 던지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차피 지저분한데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고 어찌되기야 할까. 속옷을 넣어두는 서랍을 열고는 맹숭하게 생긴 검은색 속옷 한벌을 꺼내들어 입었다. 옷장속에서 목이 깊이 파인 검은색 니트셔츠를 꺼내서 대충 툭툭털어서 입고, 화장대에 주저앉아서 기초화장품들을 이것저것 챙겨 발랐다. 며칠 야근을 하고 어제는 혼자 집에서 술까지 마셨더니 얼굴꼴이 참 말이 아니었다. 잦은 야근과 말로 갖다 들이붓다시피하는 커피가 온통 피부의 노화현상을 부추기고 있었다. “ 이런 것도 산재처리 해줘야 되는데... ” 대충 화장을 하려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오래간만에 진한 눈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니 그제서야 좀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데 시커먼 머리카락이 흉물스럽게 펄펄 날렸다. 거기다 손질을 안해줘서 기다란 머리카락은 중간중간 구불구불 엉켜있었다. “ 꼴좋다. 상거지꼴이 따로 없네. ” 하늘이 두쪽나는 일이 있어도 이번 주말에는 미용실에 들러야 할까보다. 어지러운 방안을 다시 한번 한심스럽게 훑어보고는 통큰 검은색 바지를 입고 가방을 들고는 집을 나섰다. “ 택시가 있으려나. ” 터덜터덜 걸어서 아파트 상가쪽으로 가자 마침 빈 택시가 멈춰있는게 보였다. 놓칠까 싶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창을 조금 내려서 머리카락이 날리는걸 기분좋게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회사까지 가는 20분동안 집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무기력한 자괴감을 떨쳐버려야 했다.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않기, 슬프다고 주저앉아 울지 않기, 불운한 여자라는 인상주지 않기 등등등... 혼자서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칙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 밝은색 옷을 입을 걸... ” “ 네? ” 버릇처럼 중얼거린 말에 택시기사가 반문을 했다. “ 아니예요. 혼잣말이었어요. ” “ 아.. 예. ” 사람좋아 보이는 택시기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청우 ]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써 붙여진 회사의 파란 건물이 눈앞에 보이자 천원짜리 몇장을 꺼내 택시비를 치르고 내렸다. 택시가 먼지를 일으키며 가버리자 현조는 두 손을 들어올리고는 힘차게 외쳤다. “ 아자 아자 화이팅! ” “ 얼씨구. 별짓을 다한다. ” 혼자서 기운차게 아침을 시작하려는데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뒤통수에다 대고 초를 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효원이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삐딱하니 서서 현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왜 아침부터 시비입니까. 실장님. ” “ 난 또 일 잘하는 우리 지대리가 밤새 미쳤나 싶어서... ” 현조가 대답없이 출근카드를 찍기위해 회사안으로 들어가버리자 효원은 현조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실장실이 있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대리님 한일기계에서 전화왔었어요. ” “ 언제? ”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사수 경민이 현조에게 쫓아오며 말했다. “ 어제 지대리님 퇴근하자마자 왔었는데, 휴대폰으로 연락하신다더니 전화 안하셨나봐요.” “ 글쎄. 급한 일은 아니었나 보지. ” 현조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들고는 프로그램실을 빠져나왔다. 경민이 무슨 부탁이 있는지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따라나왔다. 현조가 자판기 앞에서 동전을 넣으려하자 경민이 얼른 제 동전을 밀어넣었다. “ 지대리님 밀크커피죠? ” “ 응. ” 커피가 빈 종이컵을 꽉 채우자 경민이 다방아가씨 배달나온 포즈로 공손히 갖다 바쳤다. “ 너 또 불량냈냐? ” “ 네? ” 화들짝 놀라는 폼새가 사고를 쳐도 크게 친 모양이다. “ 어디거야? ” “ 대동농기계요. ” “ 로더? 그게 왜? ” “ 설변됐다고 했었는데, 저번에 양산작업하던거 그대로 작업지시 내려버렸어요. ” “ 몇세트 작업이었지? ” “ 50세트요. ” “ 한 서른장 했겠다. ” “ 네. 서른 두장요. 그것도 철판 6T로 빡빡하게. ” “ 절곡은 ? ” “ 반쯤하다... ” “ 휴우- ”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한동안 사고를 안 치길래 잘해나가고 있나 싶었더니 소리소문없이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요근래 바빠서 제대로 챙겨주질 못한게 은근히 미안하기도 했다.경민은 아직 입사한지 반년밖에 안된 신입이라 한참 이리저리 정신없이 바쁠때였다. 아직 구체적으로 CAD를 할지, CAM을 할지 정하지도 못했다. AUTO CAD야 학교때부터 해오던거라 익숙하겠지만 기계에서 자체적으로 쓰는 TOPS란 프로그램이 의외로 까다로워서 배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서른두장이라니... 해도 너무한거 아니야? 효원과 현장 이부장이 떽떽거릴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 대동에 연락은 했어? ” “ 네. ” 경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습이 될 불량인지 아니면 고철덩어리로 넘겨야 될 불량인지 먼저 확인을 한 다음에 경민이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저 찰랑거리는 노란색 머리카락을 한웅큼 뽑아서 방쓰는 빗자루로 만들어 버리고 말리라. “ 따라 들어와. 네가 지금 한가하게 커피배달이나 할 처지인줄 알아? 내가 너때문에 제 명에 못 죽지싶다. 금액이 얼마인줄이나 알아? 철판 6T 4*8 한장에 십만 오천원 그러니까 자재비만 삼백이 넘고, 거기다 레이저 기계 돌린거, 절곡한거... 최소 오백이야. 현장가서 기수 불러와.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작업을 한거야? 프로그램이 개차반으로 나갔으면 현장 오퍼레이 터라도 잡아내야 할거아냐? ”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해야 하나 싶어 머리를 굴리며 다시 프로그램실로 향했다. 현장과 프로그램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벽면을 반쯤은 유리로 만들어 놓은게 오늘따라 유감없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 젠장. 죽겠네 진짜. ” 저절로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현장 이부장이 한 손에는 도면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버니어(vernier)를 무기처럼 휘두르면서 프로그램실로 씩씩하게 걸어오는게 보였다. 곧이어 프로그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이부장이 살벌한 눈빛으로 들이닥쳤다. “ 대동 로더 누가 CAD했어? ” 괄괄한 성격답게 앞뒤 잘라먹고 곧바로 사형집행에 들어갈 태세였다. 경민이 사색이 되어서 현조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 경민이가 한건데, 불량이라면서요? ” 현조가 경민을 대신해 대답을 하자, 이부장이 현조를 한껏 째려보았다. “ 지대리 부사수 작품이야? ” “ 네. ” “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킨거야 지대리. 영업부에서 두번씩이나 확인했다는데,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는거야? ” “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께요. 경민아. 도면 좀 가지고 와봐. ” 길길이 날뛰는 이부장을 일단 진정시켜놓고 경민이 가지고 온 도면을 보며 해결책을 찾기위해 통밥을 굴렸다. 그 와중에 대동의 담당자가 죽을상을 하고는 들어오고 효원 역시 소식을 듣고는 회의실로 찾아왔다. =================================================================================== 두 시간을 너구리 잡듯이 세 남자가 뿜어대는 담배연기 속에서 허우적댔더니 손만 풀썩거려도 담배냄새가 온 몸에서 진동을 했다. 몸에 좋으라고 담배를 끊었더니 쓸모없는 인간 혹시라도 오래살까 싶어서 그러는지 주변에서 간접흡연으로 생명선을 갉아먹는 형국이었다. “ 양쪽에 5T로 브라켓따서 베이스에 붙여서 용접을 하죠. 어차피 내부로 들어갈거니까 글라인딩하고 도장만 잘하면 그래도 쓸수는 있잖아요. ” “ 그러면 면도 지저분해지고 또 제작기간도 많이 잡아먹을텐데... ” “ 우리가 야근을 해서라도 제 날짜에 납품하도록 해볼께요. ” 현조가 이부장쪽을 힐끗 쳐다보자 이부장도 더 이상의 대안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 제품에 하자없이 마무리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대리님 같이 나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 효원이 업체 담당자를 보며 말하자, 그쪽도 그런대로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효원이 업체사람을 데리고 나가버리자 이부장이 다시한번 경민을 주눅들게 째려보고는 서둘러 현장으로 나갔다. “ 고맙습니다. 지대리님. ” 경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 괜찮다 자식아. 이러면서 배우는거지 뭐. 괜히 미안하다고 현장 나가서 얼쩡거리지 마. 프로그래머가 실수할수도 있지. 도와준답시고 나가서 얼쩡거리면 오퍼레이터들이 우습게 봐. 그러지 마. 알았어? ” “ 네. ” 경민도 자리로 돌아가고 회의실 책상 위에는 도면들과 담배꽁초들만 가득했다. 오전내내 불량건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미곡기 도면도 마무리짓고 나자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어버렸다. 평상시 같으면 불량건이 처리되는 것도 볼겸 퇴근시간을 조금 늦추겠지만, 오늘은 아침에 내팽개치고 온 집의 흉흉한 몰골이 생각나 경민이 은근히 도와주길 바라는걸 알면서도 가방을 챙겨들고 나와버렸다. 문을 따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먼지냄새가 불쾌하게 와닿았다. 오디오에 코요테의 CD를 걸고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있는대로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고작 16평인 아파트를 구석구석 쓸고 닦고 하는데 꼬박 두시간이 걸렸다.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을 크린싱으로 대충 문질러 닦고 창문을 닫고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막 욕실을 나서는데 휴대폰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 미남이가 문자를 보냈나. ” 휴대폰을 들어서 문자를 확인하며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 나 지금 선보는 중. 으윽- 원자폭탄 투하됐다. ] “ 요즘엔 주중에도 선을 보나? ” 현조는 익숙하게 버튼을 눌러 답장을 보냈다. [ 폭탄제거반 보냈다. ] 잠시 후 답장이 날아왔다. [ 파견된 제거반 초토화됐다.] [ 삼가 조의를 표한다. -__-; ] 더 이상 답장이 없는걸로 봐서 직접 폭탄제거에 나선 모양이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뒤적여서 이것저것 꺼내어 상을 차려놓고는 밥솥을 여니 쉰 냄새가 폴폴 풍기는 밥이 누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밥솥 뚜껑에 달린 액정을 보자 보온시간이 76시간이라고 나와 있었다. “ 도대체 언제 해놓은 밥이지? ” 차려놓은 반찬이 아까워서 냄비에 라면을 끓여서 그릇에 덜지도 않고 상위에 올려놓고는 무식하게 라면을 퍼먹었다. 걸신들린 사람마냥 라면을 먹다 문득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반쯤 남긴 라면을 그대로 씽크대에 부어 버리고는 커피를 한잔 타서 베란다로 나갔다. 도로에 차가 지날때마다 찰박거리며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 최악이네. 밥도 없고, 놀아줄 친구도 없고, 거기다 비까지 오고... ” 오늘따라 커피맛도 유난히 썼다. 외전 < 상훈 VS 미남-1 > “ 상훈아... 상훈아. ” “ 아씨- 진짜. ” 아침부터 자신을 불러대는 목소리에 상훈은 짜증스러운 불평과 동시에 베개를 얼굴 위로 덮어버렸다. “ 상훈아. 빨리 내려와. ” 아랫층에서는 여전히 큰형 상열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더 개기다가는 이달치 용돈이 날아갈것 같아서 상훈은 바지만 달랑 입은 채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 어머.. ” 형수인 정현이 반쯤 벌거벗은 그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녀. 여기 너 혼자 사는 집 아니야. ” 상훈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파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 거기 좀 앉아 봐. ” “ 왜? ” “ 너... 용돈이 너무 많은가 보구나. ” “ 용돈 좀 준다고 되게 유세네. ” “ 아니면 니가 벌어서 쓸래? ” “ 알았어. 얘기 해. ” 상훈이 짜증스럽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상열은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보고는 우아한 백조처럼 사뿐히 소파에 앉았다. “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래? ” “ 또또. 냅둬 제발. 이러고 살다 죽게. ” “ 이 녀석이... ” “ 그만. 그런 이야기 할거면 나 올라간다. ” 상훈이 벌떡 일어서자 상열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불러세웠다. “ 앉아. 그 이야기 할거 아니야. ” 상훈은 형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 너 내일 지문이 학교 좀 다녀와라. ” “ 지문이? 왜? 그놈이 사고쳤어? ” “ 걔가 너같은 줄 아냐? 내일 학부모회가 있는데 너희 형수 나랑 일때문에 제주도 내려가 봐야 돼. 그러니까 네가 대신 참석해. ” “ 내가 왜? 그리고 거기는 아줌마들이 가는거잖아. 나보고 아줌마들 틈새에서 뭘하라고? ” “ 요즘엔 꼭 그렇지도 않단다. 간혹 남자들도 온대. ” “ 싫어. 그리고 난 학교라면 두드러기 생겨. 한번쯤 안가면 어때서? ” “ 너희 형수가 거기 회장이다. 어떻게 안가냐? 그렇다고 부부동반인 행사에 나만 혼자 덜렁 갈수도 없고. 별거 없어. 가서 대신 왔다는 말만 하고 지문엄마가 지문이 담임한테 뭐 전해줄거 있다니까 그것만 전해주고 오면 돼.” “ 귀찮은데... ” “ 한장 줄께. ” “ 한장? 조금 더 써봐. ” “ 휴우- 그래 인심썼다. 두장. ” “ 오케이. 걔 초등학생이지? ” “ 제발 식구들한테 관심 좀 가지고 살아라. 요즘엔 초등학생도 교복입고 다니냐? ” “ 엥? 그럼 중학생이야? 벌써 그렇게 컸나? ” “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변하고 있다. ” 상훈은 상열의 잔소리가 점점 길어질 듯하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은근슬쩍 상열의 레이더망에서 탈출을 했다. [ 다음 날 . 지문의 학교 정문 앞. ] 상훈은 교문 앞에서 심드렁하니 학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학이란 걸 가서도 학교는 그냥 어쩔수 없이 다녔던 곳이라 성냥갑처럼 딱딱 규격에 맞춰 지어놓은 학교의 건물이 참 낯설어보였다. 그래도 중학교때 까지는 그런대로 학교에 적응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괜히 옛날 생각도 나고해서 그는 차를 학교 밖에 세워두고는 천천히 학교 안을 거닐었다. 수업시간이라 그런지 체육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 빼고는 학교는 조용한 편이었다. 그는 건물 하나를 삥 돌아서 구경을 하고는 형수가 지문의 담임선생에게 전해주라고 하는 봉투를 전해주기 위해 교무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참. 이것 보세요. 야채를 이렇게 갖다 주시면 어떡해요? 킬로도 모자라고, 거기다 왜 이렇게 시들시들해요? 전에도 그러시더니... 이러면 계속 거래하기 힘들어요. 김사장님 요즘 이상하시네. 계속 이렇게 들어오면 거래처 바꾸는 수가 있어요. ” “ 영양사 선생님. 이게 뭐가 시들시들해요? 요즘같은 날씨에 이 정도면 팔팔한거지. 그리고 킬로도 약간 모자라는구만. 대충대충 좋게 넘어갑시다. 다 아는 처지에 왜 이렇게 팍팍하게 굴어요? ” “ 대충이라니요? 요즘 학부모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줄 아세요? 조금만 반찬 엉성하게 나가면 바로 인터넷으로 올라와요. 어느 중학교 영양사가 이 따위로 반찬해서 내준다하구요. 근데 저 보고 대충하라는 말이 나와요? ” “ 아- 젊은 아가씨가 되게 떽떽거리네 진짜. 다 같이 먹고 살자는거 아닙니까? 어차피 반찬해 놓으면 별 표시도 안나는데.... 이러지 맙시다. 우리. ” “ 이것 보세요. ”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더 날카로워지자 상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끌끌찼다. 몸매는 동실동실하니 수더분하구만 목소리며 성깔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십이 훨씬 넘은 야채장수(?)도 화가 나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그가 한심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동실동실한 여자가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빼들고는 훽 뒤돌아서서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게 보였다. 그런데 그 시뻘개진 얼굴이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글동글한 얼굴. 호빵같이 생긴 얼굴.... “ 아- 호빵. ” 상훈은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혼자서 흐뭇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생긴건 그렇지 않는데 성깔은 까마귀 못지않게 대단해 보였다. 여자가 휴대폰을 쥐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있는 게 괜히 귀여워 보여서 그는 몸을 슬쩍 숨기고는 여자를 훔쳐보았다. “ 왜 전화는 또 안 받아? 아이 짜증나. ” “ 저희 사장님 지금 가게에 없어요. 오전에 어디 가신다고 했어요. ” 배달나온 사람이 그새 화를 좀 가라앉혔는지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끝내 통화가 되지 않는지 씩씩거리더니 남자와 야채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오늘은 이렇게 받는데 다음에 또 이러면 정말 거래 끊을거예요. 김사장님한테 가서 꼭 그렇게 전해요. 예전에 잘 갖다주시더니 요즘들어서 점점 이상해지네 진짜. ” “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건 식당으로 들여다 놓을까요? ” “ 아뇨. 식당은 곧 배식해야 되니까 식당 뒷쪽에 식재료 창고에 넣어주세요. ” “ 네. ” 남자가 야채들을 들어나르기 시작하자 여자는 못마땅하게 그 모습을 노려보고는 상훈이 있는곳으로 따박따박 걸어왔다. “ 안녕. ” “ 엄마야- ” 갑자기 상훈이 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오자 빨갛게 상기되었던 호빵이 하얀 호빵으로 변했다. “ 놀래라. 누구세요? ” 호빵은 머릿속에 팥밖에 안들었나 보다. 아니고서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기억 못할리가 없지 않은가. “ 나 몰라? 전에 클럽에서... ” “ 아- ” 호빵은 이제서야 생각이 난듯 그를 아래위로 쭉 훑어내렸다. “ 감상 끝났으면 우리 통성명이나 하자. ” 상훈이 느물거리며 웃자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왜 반말하고 그래요? 몇 번이나 봤다고. 그리고 난 댁같은 사람하고 이름 주고 받고 싶은 생각 없어요. ” “ 왜에? ” 상훈이 정말 모르겠다는듯이 묻자 여자가 통통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 그러니까... 그게 댁들은 질이 안 좋아 보여요. ” “ 질? 무슨 질? ” “ 하여튼. 비켜요. 나 들어가 봐야 돼요. ” “ 들어가봐. 누가 뭐래? ” “ 댁이 안 비켜니까 못가는거 아니예요? ” 상훈은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호빵이 들어갈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호빵이 쌔근거리며 지나가는데 코끝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났다. 파는 향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누향같기도 하고 섬유린스 냄새같기도 한 오묘한 향기가 호빵에게서 풍겨나왔다. “ 잠깐. ” 상훈은 이미 저만큼 걸어간 호빵을 불러세우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갔다. “ 휴대폰 좀 줘봐. ” “ 네? ” “ 휴대폰. ” “ 왜요? " “ 빨리 줘. 나 바빠. ” 호빵이 미심쩍은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 상훈은 폴더를 열고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서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리자 상훈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번호가 뜬 것을 확인하고는 호빵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 나중에 전화할께. ” “ 네? ” “ 나중에 전화한다고. 안녕 귀여운 언니. ” 상훈이 미남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뒤돌아서 가버리자 미남은 기가막혀서 말도 못하고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다. “ 먼지 들어가 언니. 입 다물어. ” 저만치 가던 상훈이 뒤돌아서 외치자 그제서야 미남은 입을 얼른 다물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다시한번 상훈이 손을 흔들자 미남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는 같이 흔들었다. 그러다 후딱 정신이 들어서 미남은 얼른 손을 내려버렸다. “ 아씨. 쪽팔려. 근데 생긴게 꽤 괜찮네. 쩝 ” 미남은 상훈이 만지고 간 볼을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7 “ 지대리 어디있어? ” 정실장이 프로그램실의 문을 벌컥 열고는 벌게진 얼굴로 들어섰다. 정실장의 표정으로 봐서 토네이도급 광풍이 몰아칠게 뻔했다. 프로그램실에서 일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커...커피나 한잔 마시고 할까. 어제 야근을 했더니 영... ” “ 그.. 그러게. 나도 그러네.” “ 난 현장이나 나가봐야겠다. ” “ 저두 같이가요. ” 어느새 우루루 몰려나간 버린 사람들때문에 프로그램실이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여자의 뒷통수를 보며 정실장은 화가나서 씩씩거렸다. 적어도 상대방이 화가나서 불퉁거리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것 아닌가. 그런데 지나가는 동네개가 짖는구나하면서 들은 척도 안하는데야 시비를 붙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것이다. “ 지대리. ” 정실장이 잔뜩 굳어진 목소리로 다시 지대리를 불렀다. “ 왜 그러십니까? ”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흘낏 돌아보더니 아직까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한일기계 어떻게 된거야? ” “ 뭐가 말입니까? ”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 누구 마음대로 설변이야? 지대리 말대로 그렇게 바꿔버리면 공정기간이며 단가가 얼마나 높아지는지 알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야? ” 그제서야 현조는 손에서 마우스를 놓고는 뒤돌아앉았다. 야근으로 퀭해진 눈을 들어 빤히 쳐다보는 얼굴을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 그럼 눈에 뻔히 불량날게 보이는데 그냥 넘기자는 말입니까? 걔네들 도면대로 하면 백이면 백 불량이예요.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걔네들 일본도면 그대로 들여와서 대충 손봐 서 작업의뢰하는거... 그거 일본에서도 조금 생산되다 말아먹은 기계예요. 그거 뻔히 알면서 작업해달란다고 그대로 작업해주면 뭐가 됩니까? “ “ 우리 알바 아니잖아. 지네야 말아먹든지 말든지 우린 해달라는대로 해주면 그만이야. ” “ 전 그렇게 못합니다. ” “ 그럼 계속 지대리 마음대로 하겠다는거야? ” “ 네. ” 망설이지도 않고 대뜸 대답을 하는 꼴이 끝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남아있던 직원들마저 점점 살벌해져가는 분위기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루이틀 이렇게 아웅다웅한것도 아니지만 유독 요즘들어서는 그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 “ 지대리 나 좀 봐. ” 정실장은 프로그램실을 나오며 현조를 실장실로 불렀다. 더이상 프로그램실에서 언쟁을 벌이다가는 부하직원들 앞에서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할것 같았다. 현조가 비질비질 따라오는게 보이자 정실장은 화를 억누르려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실로 들어서자 번쩍번쩍 거리는 책상과 값비싼 소파들에서 돈냄새가 철철 넘쳐났다. 현조가 실장실에 들어올때마다 돈냄새가 진동을 한다며 이죽거리던게 생각나자 괜히 여기로 데리고 온건 아닌가 싶어 또 신경이 쓰였다. 정실장은 실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휙 뒤돌아서서 현조를 노려보았다. “ 너 우리 아버지 회사 말아먹을 작정이야? ” “ 무슨 말씀입니까? ” “ 여긴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회사야. 자선단체가 아니라고. 그리고 넌 돈을 벌어주기 위해 고용된 직원이고. 그런데 직원주제에 실장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건 둘째치고, 누구맘대로 업체하고 물밑거래야? “ “ 뭐? ” 현조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 너 한일 사장하고 친하다는거 알아. 하지만 이번 건 정도가 지나쳐. TC로 작업해도 될걸 굳이 레이저로 따겠다고 욕심부리는거 까지는 이해한다. 그런데 왜 설변까지 해가면서 그 작자 도와주겠다는건데? “ “ 그 작자? 야! 정실장. 그 작자가 네 대학 선배다. 꼭 그 따위로 말해야 되겠냐? ” “ 대학선배고 지랄이고 난 수익성이 더 중요해. 우린 뭐 땅파서 장사하는줄 아냐? 단가 높아져서 그 값대로 받을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쪽에서 설변된 도면에 대한 값을 쳐주는 것도 아닌데 바쁜 일정 쪼개가면서 굳이 네가 도와주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 “ 내가 언제 일때문에 말썽피운적 있어? 아파서 다 죽어가도 내가 맡은 일에 지장준적 없어. 인간이 어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냐? 네가 싸가지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만 해도 너무한다. “ “ 뭐? 싸가지? 이게 죽을라고 용을 쓰나? 실장한테 싸가지? ” “ 실장은 무슨? 꼴에 실장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니까 눈에 뵈는게 없냐? 웃기지 마. 너 나한테 한주먹꺼리도 안돼. “ “ 이게 진짜. ” “ 어쭈- 정효원. 잘하면 사람 치겠다. ” 효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딱 죽지 않을만큼만 패주면 속이 다 시원할것 같았다. “ 지현조. 경고하는데 자꾸 긁지마라.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 “ 안 참으면? ” “ 아주 네 손으로 무덤을 파는구나. ” 효원의 눈이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하지만 마주보는 현조의 눈빛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참을 두 사람은 죽일듯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 밥은 먹고 다니냐? ” 효원이 갑자기 심드렁하니 물었다. “ 나 밥 먹고 살라고 니네 아버지가 나한테 월급주는거 아니냐? ” “ 근데 꼴이 그게 뭐냐. 비쩍 말라가지고. ” “ 흥. 비곗살이 출렁거리는 그대의 배보다는 낫소. ” 얄밉게 이죽거리는 저 주둥이에 못을 확 박아버리고 싶었다. “ 야근 그만해. 꼴이 참 민망하다. ” “ 네놈이 자꾸 일을 들이미니까 그렇지. 나라고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겠냐? ” “ 한일거만 끝내고 며칠 쉬어. ” “ 됐다. 월급쟁이 주제에 무슨... ” 효원은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 앉아. ” 손을 까닥이며 현조에게 손짓을 하자 현조가 맞은 편에 주저앉았다. 눈이 벌게져서는 머리는 산발을 해있는 친구녀석때문에 마음이 짠해졌다. 일을 맡기면 완벽하게 해내는건 좋은데 너무 완벽하게 할려다 보니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일에만 매달렸다. 저대로 놔두면 며칠씩 야근을 해 결국엔 시체처럼 실려나갈게 뻔했다. “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집에가서 자. ” 효원의 말투에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느껴지자 현조가 피식 웃었다. “ 원래 이 분위기 아니었잖아. 하던대로 해. 넌 여전히 떽떽거리고, 난 깐죽거리고. ” 현조의 말에 효원이 기름기 가득한 느끼한 음성으로 말했다. “ 난 늘 너랑 스위트 모드로 가고싶지. 네가 협조를 안해서 그렇지. ” “ 우린 원래 그런 무드 조성하면 안되는 사이잖아. ” 씁쓸한 현조의 말에 효원 역시 쓴 웃음을 지었다. “ 알아. 가끔씩 잊어먹어서 그렇지. ” 효원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며 담담하게 말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현조에게 건네자 현조가 고개를 젓는다. “ 왜? 담배 끊었냐? ” “ 노력중이다. ” “ 이번엔 제발 성공해라. ” “ 고맙다. ” 현조가 피곤한듯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 세수는 했냐? ” 효원이 또다시 시비를 걸자, 현조가 눈을 감고는 한 손을 들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효원이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업체들의 수주현황서를 집어들었다. “ 한일거 마치면 너한테 되도록 양산 작업만 넘길께. 그때까지만 참아라. ” “ 응. ” 현조는 여전히 눈을 감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그리고... 다음주에 어머니 들어오신다. ” 효원의 말에 현조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효원을 쳐다보았다. 7년이나 지났는데도 현조는 효원의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굳어졌다. “ 나 그만 둬야 되는거지? ” 현조의 말에 효원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안 그만둬도 돼. 아버지가 너 데리고 있는거 허락하셨잖아. 회사일에 대해서는 어머니도 터치못해. ” “ 그래도 불쾌해 하실거야. ” “ 괜찮아. 어머니가 회사 들리실 일 별로 없으니까 아버지나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너 여기 있는거 모르실거야. ” 현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네 사촌 여동생은 ? ” “ 내년에 귀국한단다. 준희 덕분에 어머니가 많이 나아지셨어. 이제는 신경안정제도 끊으셨고. ” “ 그렇구나. ” 어쩔수 없는 죄책감이 또 밀려왔다. 자신때문에 여러 사람이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 나 그만 두고 싶어. 효원아. ” 현조의 말에 효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 안돼. 너 이렇게 도망만 다니면 평생 그 상처... 치유못해. 부딪쳐서 깨버려야지 왜 너답지 않게 자꾸 피하려고 해? ” “ 네가 어떻게 알겠냐? 평생 고개를 들고 살수 없는 죄인의 마음을... ” “ 그러지 마. 언제까지 그렇게 자책할래? 사고였어. 단순한 사고. 어머니가 너한테 몹쓸짓 많이 한거 아는데, 그때 어머니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붙잡고 화풀이를 해야 당신이 살수 있었을 거야. 어머니는 형한테 기대가 컸어. 그랬는데 그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렸어. 그거 극복하는거 어머니한테는 힘든 일이었을거다. 그래서 준희따라서 외국에도 나가신 거구. 꼭 네가 죄인이라서 어머니가 너한테 그런 건 아니야. ” 현조는 가슴이 저릿해져왔다. 그 날의 그 참담했던 기억들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가 있을까. 피범벅이 된 효상의 얼굴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 현조야. ” 현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자 효원이 현조의 등을 토닥였다. 차라리 실컷 울기라도 하면 나을텐데, 현조는 그날 이후로 울지 않았다. 효상이 죽으면서 현조의 웃음과 눈물을 모두 가져가 버린것처럼 현조는 무미건조한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울지도 그렇다고 기분좋게 웃지도 않는... “ 그만 나가볼께. ” 어느새 현조가 마음을 다독였는지 그의 손을 털어냈다. “ 어머니 일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께. ” “ 그래. ” “ 힘내고. 지현조 화이팅 ” “ 병 주고 약 주는구나. ” 현조가 힘없이 웃으며 실장실을 나섰다. =================================================================================== 막 열두시가 되어갈 때쯤 효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 네. 정효원입니다. ” [ 나다. 박강후. ] “ 어- 웬일이냐? 그날 먼저와서 미안하다. ” [ 안 그래도 상처받았다. ] “ 뭐? " [ 지금까지 나랑 같이 호텔 들어갔다 말없이 도망친 인간은 너 하나 밖에 없었거든. ] “ 하하하.. 그 인간들 중에 남자는 내가 유일한거 아니냐? ” [ 새끼. 꼭 그렇게 확인을 해야 되냐? 다 알면서. ] “ 너 내가 준희 사촌오빠란 걸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어허 위험수위야. ” [ 설마 네가 친구를 배신하겠냐. 그건 그렇고 지금 니네 회사 근처다. ] “ 어디? ” [ 네가 한번 들리라고 해서 명함보고 대충 찾아왔다. 아- 저기 보이네. 니네 회사. 끊는다. ] 강후의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효원은 전화기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실장실을 나섰다. 그래도 친구가 오는데 마중은 나가야 할것 같았다. 효원이 막 회사 정문에 도착했을 때 강후의 차가 정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경비의 안내를 받은 그가 막 차를 세우고는 차에서 내리는게 보였다. “ 어이. 강후야.” 효원의 목소리에 강후가 고개를 돌리고는 씨익 웃었다. 강후는 참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평상시 말없이 눈에 힘주고 있는 걸 보면 꼭 어디 조직의 보스처럼 살벌한 오라를 풍기는데 또 저렇게 티없이 웃는 걸 보면 영락없이 착한 소년처럼 보였다.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이미지를 모두 가진게 강후였다. 덕분에 강후한테 목을 매는 여자 역시 넘쳐났다. 아마 준희가 강후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속을 꽤나 썩을것 같았다. “ 회사가 꽤 크다. 여기가 본사는 아니잖아. ” 강후가 공장의 규모를 대충 훑어보고는 말했다. “ 그렇지. 여기 말고도 이 정도 규모의 공장이 하나 더 있어. 아버지는 이제 이 쪽은 거의 나한테 넘기시고 유통쪽에 손을 대고 싶은신것 같아. ” “ 그렇구나. ” “ 들어가자. ” 강후는 효원을 따라들어가면서 공장 내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어보았다. 규모도 그렇지만 내부 시설도 여느 공장과는 달리 깨끗하고 기계도 꽤나 많은것 같았다. 이런 규모의 공장이 하나 더 있다면 굳이 효원의 아버지가 효원을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만했다. 전문 경영인이다 뭐다 해도 그래도 믿을 건 혈육밖에 없다는게 이쪽 부류의 생각이었다. 그것때문에 장여사 역시 그를 사채업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하지만. “ 뭐 마실래? ” “ 응? 커피. ” 효원이 실장실 밖에 앉아있던 여직원에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말하고 실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꽉 들어찬 실장실을 보고 강후가 한마디 했다. “ 이거 웬만한 기업 회장실이랑 맞먹네. ” 강후의 말에 효원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 안 그래도 여기만 들어오면 돈 냄새에 질식할것 같다는 녀석이 있어. 근데 그 녀석 말이 맞나보네. 너까지 그런 소리하는거 보니까. ” “ 누가 봐도 같을걸. 이 소파는 한 오백 하냐? ” “ 짜식. 누가 사업하는 사람 아니랄까봐 금액부터 물어보냐? ” “ 그런가? ”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 똑똑 ] 누가 문을 두드리자 효원과 강후는 말을 멈추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 들어오세요. ” 효원의 말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강후는 무심히 들어온 사람을 보고 시선을 돌리다 못 믿겠다는 듯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어? 까마귀? ” “ 엥? 불량품? ” 강후와 현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 하나씩을 겨누고는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8 현조는 멍하니 손가락 하나를 쑥 내밀고는 기막힌 얼굴로 강후를 쳐다보았다. “ 까마귀. 여기서 뭐하냐? ” 먼저 정신을 차린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물었다. “ 나야 밥벌이 하고 있지. 그런데 불량품께서는 여기 무슨 일로? ” 두 사람의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던 효원이 끼어들었다. “ 뭐야. 까마귀는 뭐고 불량품은 또 뭐야. 니들 서로 아는 사이야? ” 강후는 효원을 쳐다보고는 혼자서 머릿속으로 이 우연한 만남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었다. ‘ 까마귀... 프로그래머.... 청우.... ’ 대충 감을 잡은 강후는 현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저번에는 고마웠다. 덕분에 음주운전으로 안 걸렸어. ” “ 별 말씀을. ” 현조의 삐딱한 대답에 강후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까마귀는 그새 살이 더 빠진듯 저번보다 더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까마귀의 얼굴이 예뻐보였다. “ 도대체 무슨 일이야? ” “ 그런게 있어. ” 강후의 말에 효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현조를 바라보았다. “ 무슨일이야. 지대리? ” “ 네? ” 현조는 강후를 보고 있느라 미처 효원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맹한 얼굴로 되물었다. “ 무슨 일이냐고? ” 효원이 다시 묻자 그제서야 현조는 정신을 차리고는 들고 온 도면을 효원 앞으로 내밀었다. “ 이거 저쪽에서 설계변경한다고 작업 좀 늦춰달라는데요. ” “ 그래? 어디거지? ” “ 시림메디칼요. ” “ 그렇게 하도록 해. 그보다 지대리 아직 식사 전이지? ” “ 네. ” “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어차피 두 사람도 아는 사이인거 같으니까 상관없지? ” “ 난 괜찮아.” “ 싫은데요. ”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대답을 하자 효원은 난감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강후는 됐고, 넌 왜 싫은데? ” 효원이 현조를 보며 묻자 현조는 불쾌한 얼굴로 강후를 쓰윽 훑어보고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 소화가 안될것 같아서요. 정실장님. ” “ 왜 소화가 안돼? ” “ 아시잖아요. 나 불량이라면 치를 떠는거. 물건이나 사람이나 불량은 되도록 피해가야죠. ” “ 불량? 이건 또 무슨소리야. 알아 듣게 말을 해. ” 옆에서 강후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 지대리라고? 하여튼 지대리인지 까마귀인지 저 분께서 나의 인간성에 영 점수를 안주네. ” “ 둘이 언제 만난거야? ” 효원은 전혀 공통분모라고는 없는 두 사람이 서로 아는게 신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현조는 그걸 설명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보다 저 느끼한 미소를 마구마구 날리고 있는 저 남자의 눈에다 고추가루라도 확 뿌려서 감겨버리고 싶었다. “ 내가 새로 인수한 클럽에서 잠깐 DJ를 보고 있더라구. ” “ 현조가? ” 강후의 말에 효원은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현조가 대학때 그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한건 알았지만 설마 회사를 다니면서도 하고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 그만뒀어요. 어쩌다 한 삼개월 봐준거예요. ” 현조는 귀찮다는 듯이 대충 대꾸를 하고는 도면을 챙겨들었다. “ 전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 현조가 밖으로 나가려고 돌아서는데 강후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 뭐야? ” 손목을 잡고 있는 강후를 쳐다보며 현조는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줬다. 강후는 별 힘 들이지 않고 그냥 슬쩍 잡고 있는것 같은데 쉽게 빼낼수가 없었다. “ 이씨. 안놔? ” “ 싫어. 빼고 싶으면 빼 보던지. ”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강후를 확 노려보자 강후는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 니들 지금 뭐하는 거야? 강후는 그 손 놓고 현조는 그 말투 좀 어떻게 해라. 내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 강후가 먼저 손을 놓자 현조가 비틀거리며 뒤로 주춤했다. 그리고는 손목을 보고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 저 인간은 남의 손목을 요절낼 작정인가? 저번에는 피를 보게 하더니 이제는 멍까지 들게하네. ” “ 그만 그만. 너희 둘 그만 좀 해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현조도 같이 나가자. 도저히 니들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밥 먹으면서 찬찬히 털어놔. 알았지? ” 효원의 말에 현조는 불만스럽게 그를 쳐다보고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밥은 사 주겠지. 이번달 월급날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영 좋질 않아서 긴축경제를 펴고 있던 차에 그나마 기름기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게 어디야? 뭐 눈에 거슬리는 남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게 우선이지. 현조는 금세 좋은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는 효원을 따라나섰다. ================================================================================== 강후는 운전을 하면서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는 현조를 룸미러를 통해 힐끔거렸다. 그냥 보고 있는데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왠지 까마귀만 보면 즐거워졌다. 그런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그는 유연하게 차를 몰았다. 세 사람은 고풍스러운 한정식 집에 도착해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자 이제 이야기 좀 해봐. 니들 왜 그렇게 으르렁 거리는 건데? ” “ 으르렁 거리긴. 그냥 반가워서 그런거지. ” 강후가 현조를 쳐다보며 말하자 현조는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 나랑 내 친구가 클럽에서 실수를 좀 했어. 그래서 저기 지대리가 화가 난 거고. ” “ 무슨 실수? ” “ 별거 아니야. 근데 첫 만남부터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나만보면 저렇게 인상을 쓰네. ” 능청스러운 강후의 말에 현조가 콧방귀를 꼈다. “ 어쨌건 이것도 인연 아니냐? 두사람 동갑인데 편하게 친구하고 지내. 어차피 계속 보게 될텐데. ” “ 그럴까? ”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묻자 현조는 심드렁하니 말했다. “ 그러시든가. 볼 일 얼마나 있다고. ” 강후는 그런 현조를 보며 알 수 없는 정복욕이 치솟아 올랐다. 강후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싫다는 내색을 하는 여자는 맹세코 저 지현조란 여자가 처음이었다. 늘 그의 말 한마디에 꿈속을 헤매듯이 몽롱해지는 여자들은 수없이 봐왔지만 저렇게 거만스럽게 튕기는 여자는 까마귀 지현조가 유일했다. 오래간만에 진짜 도전욕을 불타오르게 하는 대상을 만난 것이다. ‘ 날 자꾸 자극하는데... 지현조. 내가 너 찍었다. ’ 강후는 새로운 도전대상을 보고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 날 보면 즐겁냐? 왜 자꾸 실실쪼개? ” 현조가 심히 맹랑한 얼굴로 깐죽대자 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 즐겁다 뿐인가? 정복욕이 마구 샘솟기까지 하는데. ” “ 정복욕? ”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현조 대신 효원이 되물었다. “ 그런게 있어. ” 강후는 호기심 어린 효원의 눈빛을 외면하고는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효원이 준희의 사촌오빠인 이상 더 이상의 언급은 이로울게 없었다. 적어도 준희가 돌아오는 내년 1월 이전에는 꼭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울며불며 매달리게 해줄거라는 생각을 하며 강후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그 이후로는 그나마 무난한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간간이 TV에 나오는 개그맨들의 우스개소리도 흉내내며 웃기도 했고, 효원과 강후는 각자의 사업에 대한 얘기도 하면서 느긋한 점심을 즐겼다. 두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것에 비해 현조는 꾸역꾸역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넣기에 바빴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누가 챙겨주지도 않는데 제 몸뚱아리라도 잘 건사해야 되겠다 싶어서 이렇게 포식을 할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그동안 못 먹었던걸 채워넣기에 급급했다. 효원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요즘 부쩍 체력이 딸리는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야근하는 날짜가 늘어날수록 눈앞이 어질어질하며 한쪽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편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 그쪽은 괜찮아? ” 효원이 강후를 향해 물었다. “ 우리쪽이야 뭐... 그런 말 있잖냐. 아무리 경기가 어려워도 쓸 놈들은 다 쓴다고. 그런것 같다. 그다지 매상이 들쭉날쭉 하지는 않아. 가끔씩 조직끼리 이권다툼 때문에 시끄러운 것만 빼면 무난해. ” 효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조의 앞쪽으로 갈비찜 그릇을 슬며시 밀어주었다. 현조는 묵묵히 갈비찜 한 덩어리를 들어올려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 니들은 어때? ” 강후가 밥 한숟가락을 떠넣으며 물었다. “ 우리쪽은 말이 아니지. 철강쪽이 들썩이는데 우리야 말할것도 없지. 원자재가 워낙 비싸지니까 조그마한 영세 업체들은 하루걸러 한집씩 문닫는다. 기계 한대 가지고 근근히 이어가던 사람들이 제대로 밥벌이도 못하다보니 헐값에 기계 넘기고 그냥 문닫아 버리는거지. 지금같아서는 차라리 남밑에서 월급쟁이하는게 낫지. 그나마 매달 일정한 수입은 들어오잖냐. 말이 좋아 사업이지 그게 어디 할짓이냐. “ “ 아까 보니까 니들은 시설이 엄청나던데? ” “ 우리야 운이 좋았지. 어지간히 큰 업체는 그런대로 버티니까. 영세업체들이 문제지. “ 갈비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효원이 갈비찜 그릇을 자기 쪽으로 옮겨놓고 송이구이를 담은 접시를 다시 현조의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자 현조는 또 말없이 송이구이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는 강후의 눈빛에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강후가 효원을 빤히 쳐다보자 효원도 시선을 느낀건지 강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왜? ” “ 응? 아니. 별거아냐. ” 강후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식사를 했다. 하지만 내내 현조와 효원의 친숙한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현조를 챙기는 효원도 그렇지만, 효원의 친절을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조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효원은 약혼녀까지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은 분위기 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강후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 역시 준희란 여자가 있었고, 곧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될터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지현조란 여자를 두고 어떻게 가지고 놀까 하는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두고 장난하는게 나쁘다는걸 알면서도 그는 자꾸만 현조를 툭툭 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 철옹성 같은 겉모습 안에 뭔가 다른 속내를 숨기고 있는것 같은 예감에 자꾸만 건드려서 터트리고 싶어졌다. 그냥 무작정 휘둘러보고 싶었다. ‘ 그러면 안되는건가? ’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까마귀는 그에게 있어 진짜 욕심이 나는 장난감이었다.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굳이 뺏어서라도 가지고 싶을만큼 지현조란 여자는 그에게 강렬한 도전대상이었다. ‘ 그냥 잠시 같이 즐기는 거다. 질척하게 감정을 흘리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 강후야. ” “ 응? ”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강후는 효원이 부르는 소리에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네 명함 한장 달라고. 저번에 못 받았잖아. 그리고 이건 현조 명함이다. ” 효원이 자신의 지갑에서 현조의 명함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현조의 명함을 왜 효원이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그것도 불쾌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현조의 명함을 받아들고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 두장을 꺼내들었다. “ 자. ” 강후는 명함 한장은 효원에게 건네고 다른 한장엔 그가 친한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휴대폰 번호와 집 전화번호를 펜으로 적어서 현조에게 건넸다. “ 너도 이거 받아. ” 현조는 그의 명함을 대충 훑어보고는 지갑 안에 무성의하게 집어 넣었다. “ 심심하면 전화해라. ” 강후의 말에 현조가 삐딱하게 웃었다. “ 설마... 아무리 심심해도 그런 짓을 할까? ” 강후는 만만찮게 대꾸를 해오는 현조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진짜 재미있단 말이야. ’ 세 사람은 느긋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효원이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 강후가 다시 두 사람을 회사로 데려다 주었다. “ 점심 잘 먹었다. 다음엔 내가 대접할께. ” 효원의 말에 강후가 현조를 힐끗 쳐다보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 그때도 옵션으로 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시간 내 볼께. ” 현조가 그를 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차에 올라버렸다. 강후가 떠나고 나자 현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왜 그렇게 예민하게 그래? 너 답지 않게. ” 효원이 신경쓰인다는 듯이 묻자 현조는 강후가 지나간 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 글쎄... 자꾸 신경에 거슬리네. 짜증나게. ” 툭 한마디 해놓고 현조는 터덜터덜 프로그램실로 들어가버렸다. 8편 끝. 9 [ 컬러링 바꿨구나. ] “ 응. ” [ 전에 듣던게 더 좋다. 그냥 다시 바꿔라. ] “ 싫어. 내맘이야. ” [ 네가 약발이 다됐구나. 나의 미모에 심취해 있을때는 반항을 안하더니. ] “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미남아. 네 미모에 심취한게 아니라 네 재력에 푹 빠져있었던거야. 참고삼아 얘기하는데 나 오후에 미용실 가야되는데 시간되지? ” [ 또 날 갈취하려고 하는구나. 어쩔수 없지. 팬 관리에는 돈이 필요하니까. 어디로 갈거야? 저번에 갔던 <티모시>로 갈래? ] “ 아니. 동네 미용실 갈거야. 우리 상가 미용실 아줌마가 솜씨가 좋은것 같아. 거기다 티모시는 너무 비싸. ” [ 쳇... 공짜로 하는 주제에 까다롭기는... 솔직히 말해. 거기 남자 미용사 들어 왔지? ] “ 헉! 예리한 것 같으니라고... 음하하. 쌔근한 젊은 오빠야가 들어왔단다. 어제 저녁에 지나가는데 보이더라. 한 눈에 딱 네 취향인것 같아서 내가 가서 침발라 버릴라구. ” [ 내 취향인데 왜 니가 침을 발라? ] “ 내 침이나 네 침이나 그게 그거지. 아무튼 퇴근하고 거기로 와. 나 먼저 가 있을께. ” [ 상가에 있는 거라고? 알았어. 이따가 봐. 쪽- ] “ 또 뽀뽀했지? 드러 ” [ 네 돈내고 머리할래? ] “ 싸랑해 미남아. ” [ 재수 없어. ] “ 죽도록 싸랑해. ” [ 나가 죽어. ] 현조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텅빈 프로그램실과 현장을 둘러보고는 볼펜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게 벌써 몇 주 전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주말마다 일이 밀려서 오늘에야 겨우 시간이 비었다. “ 아침에 감고 나왔는데... ” 중얼중얼거리며 기역자 모양으로 생긴 조각들을 어떻게 하면 한 판에 많이 집어넣을까 이리넣었다 저리넣었다 엎어쳤다 매쳤다하는데 어디서 진한 커피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 일 잘하는 우리 지대리. 커피 한잔 하지. ” 영업부 박부장이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현조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현조는 은근히 느끼한 눈빛을 보내며 추근대는 박부장때문에 점점 더 회사생활이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다. 박부장은 삼년전 상처를 하고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서른여섯된 홀아비였다. 평상시에도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다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인데 왜 자꾸 친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 조금전에 마셔서 별 생각이 없네요. ” 만정이 다 떨어지도록 매정스럽게 말하고나서 바쁜척 마우스를 다다닥 두드리는데 박부장은 무안하지도 않는지 여전히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 안 바쁘세요? ” 가뜩이나 자재가 빠듯한 업체의 CAM처리를 하느라 골이 빠개질것같은데, 자꾸만 신경이 거슬리게 하는 박부장때문에 미남과의 통화로 좋았던 기분마저 나빠지려 하고 있었다. “ 그게... 저 지대리 저녁에 시간 좀 되나? ” “ 왜요? ” “ 내가 영화표가 두장 생겼거든. 같이 갈 사람도 없고해서... ” 현조가 막 거절을 하려는데 박부장의 어깨 너머로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는 효원의 얼굴이 보였다. “ 박부장님. 대일에서 도급으로 들어오기로 한 스텐자재는 다 들어왔습니까? ” “ 응? ” 갑작스럽게 들린 효원의 목소리에 박부장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 정실장 그건 월요일 들어온다고... ” “ 그렇습니까? 근데 지금 회사 마당에 서 있는차가 대일금속 차인거 같은데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 효원이 딱딱하게 굳어진 어조로 박부장을 다그치자 박부장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 분명 월요일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 효원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점점 더 심하게 굳어지자 박부장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 버렸다.박부장의 뒷통수를 노려보던 효원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현조를 내려다 보았다. “ 처신 잘해. 괜히 나중에 골치 아픈 일 만들지 말고. ” 평상시라면 웃고 지나칠 얘기인데 박부장때문에 한껏 나빠졌던 기분때문인지 효원의 충고가 정도를 넘어선 불필요한 간섭처럼 여겨졌다. “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 “ 그 따위로 밖에 말 못해? 도대체 왜 그래? 갈수록 ” “ 말이 그렇다는거야. 왜 쓸데없이 간섭이야? ” “ 내 간섭 받고 싶지않으면 똑바로 처신해. 자꾸 신경쓰이게 하지 말고. ” “ ... ” 현조는 말없이 작업하고 있던 파일을 저장하고는 신경질적으로 컴퓨터를 껐다. 도면들과 PART LIST를 한군데 밀쳐놓고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데 효원이 한숨을 내쉬며 현조의 팔을 잡아세웠다. “ 미안. ” “ 뭐가 미안한데? ” 현조가 효원을 노려보았다. “ 주제넘었다. 내가. ” “ 후우- ” 현조는 한숨을 내쉬고는 효원에게 잡혀있던 팔을 빼내었다. “ 됐어. 나도 좀 예민하게 굴었다. 미안. ” “ 그러면 화해의 의미로다가 우리 찐하게 뽀뽀나 한번 할까? ” 효원이 현조의 어깨에 두손을 올려놓고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 미쳐도 드럽게 미쳤구나. 네가 ” “ 아! 내 고급스러운 화해의 제스처를 그렇게 저질스럽게 받아들이다니... ” “ 꼴갑을 떨어요. 아주 ” 쌩하니 프로그램실을 빠져나오는데 효원이 등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 경주가 너 보고 싶어해. 언제 시간 좀 내라. ” 등뒤로 손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주고 출근카드를 삑 소리가 나게 긁고는 회사를 나섰다. ================================================================================= 아파트 상가에 들어서서 미용실 안을 보니 벌써 미남이 와 있었다. “ 그러면 그렇지. 미리 안 와있으면 네가 강미남이 아니지. ” 미용실 앞에서 슬쩍 유리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자 미남이 잘생긴 헤어디자이너와 하하호호거리며 가증스럽게 웃고 있었다. “ 우웩- ” 현조가 미용실로 들어서자 미남이 머리에 알록달록한 전기모자를 쓰고는 평상시에는 들을수 없는 고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현조에게 인사를 건넸다. “ 호호호. 이제 오니? 어떻게 내가 먼저 도착했더라. ” “ 그러셔요. 마님 ” 현조가 소파에다 가방을 휙 던져두고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 미현씨 친구분은 뭐하실 거예요? ” “ 네? ”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싶어 미남을 쳐다보자 미남이 눈에다 힘을 빡 주고는 발각되면 죽을줄 알라는 듯 공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 아- 네. 미현씨 친구인 저는 커트를 하려구요. ” “ 미현씨 친구분이 유머감각이 있네요. 하하 ” 잘생긴 헤어디자이너가 웃자 미남의 얼굴이 꿀단지에 푹 빠진 곰돌이 푸우마냥 몽롱해졌다.슬쩍 헤어디자이너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보니 ‘ 찬민’ 이라고 적혀있었다. “ 오늘은 찬민씨 혼자서 일하시나봐요. 주인 아줌마는 안 계세요? ” 현조가 대뜸 찬민의 이름을 부르자 거울을 통해서 미남이 메가톤급의 살벌한 눈빛을 쏘아댔다. 현조는 얄미운 표정으로 메롱을 해주고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 누나는 지금 붕어빵 사러 갔어요. ” “ 아. 누나면... 아줌마 동생이세요? ” 미남이 현조가 다시 끼어들까 싶어서인지 초광속의 속도로 찬민에게 질문을 했다. “ 네. 제가 막내고 누나가 맏이예요. 나이차가 좀 많아요. ” “ 그렇구나. ” 현조가 무심히 대꾸를 하는데 미남이 또 확 째려보았다. “ 이제 미현씨 친구분 앉으세요. ” “ 네. ” 현조가 옆의 옷걸이에 걸려있던 가운을 입고는 자리에 앉았다. 거울로 슬쩍 뒤를 보자 미남이 가지런히 두다리를 모으고는 가방 안에서 시집을 꺼내서 읽고 있었다. 아마 여기 오기 전에 급하게 서점에 들려서 표지가 이쁜 걸로 대충 골라서 왔을 것이다. 아마 시인 이름이 누구인지도 모를걸? “ 블루블랙으로 염색하셨구나? 밝은 색도 잘 어울릴것 같은데. ” 찬민이 거울을 통해 웃으며 현조에게 물었다. 적당히 큰 키에 근육이 잘 잡혀있는 몸매, 거기다 미남이 보기만 하면 침을 흘리는 딱 붙는 검은색 쫄티를 입은 찬민을 만족스럽게 훑어보며 현조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일이 좀 바빠서 자주 염색을 못해요. 그래서 ” “ 그렇구나. 그럼 커트는 어느 정도로? ” “ 단발 보다는 좀 길게요. 층도 좀 냈으면 좋겠는데. ” “ 네. ” 찬민이 열심히 머리에 물을 뿌리고 예술적인 손놀림으로 가위질을 하는데 주인 아줌마가 붕어빵 봉지를 들고는 미용실 안으로 들어왔다. “ 왔어요? 커트할려구? ” “ 네. ” 머리를 자를때 한두번 오고 말았는데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아줌마가 내미는 붕어빵을 세 개나 해치웠다. 하지만 미남은 정중히 사양을 하고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요조숙녀 티를 팍팍 내면서 시집을 읽고 있었다. 저러다 다리에 쥐나지... “ 됐습니다. 친구분은 뒷쪽으로 가시구요. 미현씨 이리 오세요. ” “ 네. ” 현조가 일어서다 보니 아니나다를까 미남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의자에 가 앉는게 보였다. ‘ 쯧쯧... 작업에 목숨을 거는구나. ’ 자칭 미현 현조칭 미친미남은 머리를 하는 내내 찬민과 하하호호 웃으며 온 미용실을 버터로 칠갑을 하고 있었다. 찬민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 간혹 얼굴까지 붉혀가며 황홀하게 찬민을 바라보는 미남을 보자 마음이 좋으면서도 허전해졌다. 언젠가는 미남도 결혼을 하고 제 가정을 꾸리게 되겠지. 그러면 난 누구랑 놀까. 그 생각하나 만으로도 맥이 탁 풀렸다. 또 혼자서 궁상맞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뻐꾸기가 울렸다. 문자가 온 모양이다. 폴더를 열어보니 액정에 < 어디? 기분 OK? > 라는 말 밑에 <너의 영원한 오빠야> 라고 찍혀 있었다. 퇴근하기 전에 투닥거린게 신경이 쓰였나보다. 현조는 띡띡띡 문자를 조합해서 글을 찍었다. < OK. 다음에 또 그러면 뒤진다. > 라고 찍고 밑에다 < 섹쉬한 지대리 > 라고 문자를 찍어서 쿡쿡웃으며 전송을 했다. 잠시후 문자에 < 나 지금 토하는 중 > 이라고 찍힌 문자가 또 날라왔다. “ 누구야? ” 미남이 돈들인 냄새가 팍팍나게 찰랑거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옆에 앉았다. “ 효원이. 퇴근하기 전에 좀 투닥거렸거든. ” “ 그래? 근데 너 언제까지 거기 다닐거야? ” “ 언제까지라니? ” 현조는 무슨 말이냐는듯 미남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미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난 너 거기서 나왔으면 좋겠다. 네 실력이면 어디가도 지금보다는 나은 대접받아. 전에도 스카웃 제의 들어온적 있다며? ” “ 그래서? ” “ 왜 정가네 집에 붙어서 안 나오는건데? 그럴수록 너만 힘들어 지는거 몰라? ” “ 그만하자. 괜히 기분 좋은 주말 다 망친다. ” “ 하지만. ” “ 야. ” 미남이 자꾸만 다그치자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조의 불쾌한 기분을 짐작한 미남이 화를 삭히듯이 현조를 쳐다보다 결국은 백기를 들었다. “ 알았어. 그만할께. 그 대신 너 언제가는 그 놈의 회사 때려치운다고 약속해. ” “ 그래. 곧 그럴거야. ” 현조 역시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설렁설렁 마무리를 해 버렸다. “ 집에 갈때 해물탕거리 사가지고 가서 해먹자. 내가 오늘은 특별히 스페셜하게 끓여주지. ” 미남이 잘난척 하며 말하자 현조가 피식 웃었다. “ 장보는 것도 니가 낼거지? ” 미남은 밉지않게 눈을 흘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가자. ” 현조의 말에 미남이 가방을 챙기면서 찬민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자 찬민이 카운터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서 미남에게 내밀었다. “ 자주 오세요. 미현씨. 그리고 친구분두요. ” “ 네. ” 배시시 웃으며 명함을 받아드는데 현조가 툭 끼어들었다. “ 네 명함도 드려. 미. 현. 씨. ” 얄밉게 깐죽거리는 현조를 보고는 미남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지금은 명함이 없는데... 다음에 오면 드릴께요. ” “ 그러세요. ” 찬민이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 또 오세요. ”“ 네. ” “ 참. 근데 친구분 성함은... ” “ 제 이름은 현... ” 현조가 이름을 말하려는데 미남이 서둘러 현조의 입을 막아버리고는 씨익 웃었다. “ 얘 이름은 현순이예요. 지. 현. 순. ” “ 아~ 이름이 참 정겹네요. ” 찬민이 웃음을 억지로 참는듯 볼이 씰룩거렸다. 현조는 미남의 심술에 그냥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어? “ 잘 가세요. 미현씨 그리고 현순씨. ” “ 네. ” 인사를 꾸벅하고는 미용실로 들어가는 찬민을 보며 현조가 미남을 툭툭쳤다. “ 미현씨 그만 가시죠. 침은 좀 닦고. ” “ 어? ” 미남이 반쯤은 얼이 빠져서 현조를 쳐다보았다. “ 가자고... 그만.. ”“ 응. 앗싸. 하나 건졌다. ” 금세 태도가 돌변한 미남을 보며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10 휘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강후는 자신의 빌라 앞에 아현이 서 있는 것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연락없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강후는 차를 주차시키고 벗어두었던 재킷을 챙겨들고는 천천히 아현에게 걸어갔다. 아현이 그를 보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 어쩐일이야? 연락도 없이. ” “ 미안해요. 너무 연락이 없어서... ” 강후는 못마땅하게 아현을 쳐다보았다. 경비실에 있던 늙은 경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들어와. ” 강후가 먼저 빌라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아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2층에 위치한 그의 집 앞에 도착해 강후는 비밀번호를 꾹꾹눌러 문을 열었다. 굳이 집 안까지 아현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문 밖에서 이야기를 나눌수도 없었다. 재킷을 대충 소파에 던져놓고 뒤를 돌아보자 아현은 아직도 현관에서 주저주저하며 서 있었다. “ 앉아. ” 강후는 냉장고로 가서 오렌지 쥬스병을 꺼내 한 잔 따라서 아현에게 건네주었다. 아현은 살짝 웃으며 잔을 받아들고는 조금 마시고 이내 내려놓았다. “ 저... ” “ 말해. ” 강후가 아현을 똑바로 쳐다보자 아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 저... 혹시 그 분 돌아오신 거예요? ” “ 그 분? ” “ 준희.. 라는 분 말이예요. ” 아현의 말에 강후의 눈썹이 불쾌하게 움찔거렸다. 그는 아현에게 준희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굳이 말해줄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또 자신에 대해 아현이 시시콜콜한것 까지 아는 건 원치않았다. “ 네가 준희를 어떻게 알아? ” 강후의 음성에 묻어난 불쾌감을 눈치채고 아현이 서둘러서 변명을 했다. “ 전에 상훈씨랑 이야기 하는거 얼핏 들었어요. ” “ 언제? ” “ 여름에 휴가 갔을때요. ” 그는 말없이 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아현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분이 나빴다. 아마 현조를 만나기 전에 아현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별 생각없이 흘려듣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터라 아현의 불필요한 간섭이 불쾌하게 여겨졌다. “ 진짜 그분이 돌아온 거예요? ” 아현은 끈질기게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 아니. ” 강후의 짧은 대답에 아현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게 느껴졌다. “ 그럼 왜 연락 안한거예요? ” “ 민아현. 나 점점 불쾌해진다. ” “ 미안해요. ” 아현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강후는 난감해졌다. 달래주자니 괜히 미련을 주게 될것 같고, 그렇다고 울게 내버려 두자니 어깨를 떨며 우는 아현이 불쌍해 보였다. 결국 강후는 한숨을 내쉬며 아현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자 아현은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그만해. 나 여자 우는거 딱 질색이야. ” “ 네. ” 아현이 애써 울음을 삼키듯 심호흡을 하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강후는 담배를 꺼내서 피워물며 아현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 진정됐으면 내 말 들어. 오랫동안 연락 못한거 일단 미안하다. ” “ 괜찮아요. ” “ 내 말 끝까지 들어.” “ 네. ” 아현이 또다시 주눅 든 표정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 나 이제 너 안 만날 생각이다. ” “ 네? ” 아현의 눈이 충격으로 떨리는 것을 보고 강후는 길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 왜... 왜요? ” “ 그냥. ” “ 나... 난 강후씨한테 아무것도 안 바래요. 그냥 지금처럼 가끔 만나주면 안되요?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바래요. ” “ 난 그런거 싫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거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관계 질척거려서 찝찝해. ” “ 그 분이 돌아온 것도 아니라면서요. ” “ 왜 자꾸 그 이야기가 나와? ” “ 아니면 왜 날 떼어내려는 거예요? 혹시 딴 여자 생겼어요? ” 아현이 평상시 답지않게 집요하게 그를 추궁하고 나서자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껐다. “ 말 못 알아듣니? 그만 두자고. " " 난 못해요. “ “ 뭐? ” 아현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애처롭게 그에게 매달렸다. “ 강후씨. 나 욕심안내요. 강후씨가 한달에 한번, 아니 일년에 한번만 만나준다고 해도 난 괜찮아요. 그냥 강후씨 곁에 있게만 해줘요. 네? ” “ 너 왜 이래? 내가 처음에 말했지. 그냥 쿨하게 만나다 쿨하게 헤어지자고. 나 너랑 결혼같은거 할 생각 없으니까 만약 그런거 기대할거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라고. 그때 너 알았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이렇게 질척거려? ” “ 제발 강후씨. 나 강후씨 없으면 못 살아요. 나 제발 버리지만 마요.” 강후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그만 가봐라. ” “ 강후씨. ” “ 너 진짜 이럴래? ” 강후가 벌컥 화를 내자 아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 나... 기다릴께요. 강후씨 다시 나한테 돌아올거예요. 난 알아요. 강후씨는 나 못버려요. ” “ 아현아. ” “ 그만 가볼께요. 미안해요. 추한 모습보여서. 나중에 봐요. ” 아현이 가방을 들고는 나가버리자 강후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완전히 벽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거미줄이 칭칭 감겨드는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찜찜한 기분에 캔맥주를 꺼내 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네. ” “ 나다. 강후야. ” “ 효원이구나. ” “ 뭐해? ” “ 그냥 술 마시려고. ” “ 나올래? ” “ 어딘데? ” “ 여기 포장마차야. 우리 회사 근처인데. ” “ 알았어. 근데 혼자야? ” “ 지금은 혼자인데, 누구하나 더 올거야. ” “ 누구? ” “ 너도 아는 사람. 일단 나와. ” “ 알았다. 너희 회사 근처가서 전화할께. ” “ 그래. ” 강후는 청바지 위에 몸에 피트되는 검은색 니트를 입고는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 현조의 휴대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현조는 잠에 취한 채 베개에서 억지로 머리를 들어올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 누구야? ” [ 어? 이제 실장한테 막말까지 하네. 너 짤리고 싶냐? ] " 정실장? 지금 몇신데 전화질이야? " 부하직원이 상사한테 하는 말치고는 무지하게 싸가지 없는 말투다. [ 지금? 아홉시 다 됐네. 왜 자고 있었냐? ] 효원은 전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야행성 동물 지현조가 이 시간에 설마 잠을 자겠냐는 말투다. “ 젠장. 남들 자는 시간에 나도 한번 자보겠다는데 도움을 안주네. 왜? 술값 떨어졌어? ” [ 눈치챘냐? 나 지금 회사 근처 포장마차다. 나와라. ] " 어휴 지긋지긋해. 내가 빨리 그 놈의 회사를 때려치워야지. 외간 남정네 술값 들고 이 시간에 뛰어나가야 하나. 젠장. 기다려. 금방 갈께. 저번에 갔던 금마차인지 쇠마차인지 거기야? " [ 그래. 빨리와라. ] 현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서는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를 쓱쓱 빗었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다시 들어와 검은색 야구모자를 썼다. 맨얼굴로 나다니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스물 여덟의 현조아닌가. 아! 지겨운 야근의 흔적이 피부의 노화현상으로 모두 되돌아올 줄이야. 요즘들어 가뜩이나 까칠해진 얼굴을 쓰윽 쓰다듬으며 현조는 입맛을 다셨다. 현조가 연신 불평을 쏟아내며 포장마차에 도착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눈에 띄었다. " 어 저기 오네. 현조야. 여기." 효원은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현조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큰 키를 휘적이며 얼굴의 반을 모자로 가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던 현조의 입술이 씰룩이는게 보였다. “ 돈 내줄 사람있구만. 왜 나까지 부르고 그래? ” “ 일부러 불렀다. ” “ 왜? ” “ 니들 좀 친하게 지내보라고. 내가 좋아하는 두 친구가 서로 으르렁 거려서야 쓰나. ” 현조는 못마땅하게 강후를 한번 쳐다보고는 소주잔을 들었다. “ 근데 갑자기 웬 모자냐? 간만에 얼굴이나 볼까 했더니. ” 강후의 말에 현조가 소주를 한입에 털어넣으며 중얼거렸다. " 뭐 이쁜 얼굴이라고. 여자 나이 이십대 후반에 맨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심각한 범죄행위란거 몰라? 지나던 사람들이 얼굴보고 기절하면 누가 책임지라고… " 현조다운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맨얼굴의 현조는 화장한 것보다 더 이뻐 보였다. 도톰한 입술에서 내뱉는 저 얼음 뚝뚝 떨어지는 말투만 아니라면. 현조는 소주병을 들고는 빈 잔을 채웠다. “ 술 고팠구나. 짜식 연락을 하지. ” “ 그러게 월급 좀 올려달라니까. 나같은 고급인력 쓰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고. 악질고용주야 너. ” “ 그러게 저번에 계약할때 더 올려준다니까. ” 효원의 말에 현조가 피식 웃었다. “ 말이 그렇다는 거다. 평생 공짜로 일해줘도 모자랄 판에 무슨. ” “ 현조야. ” 효원이 안타깝게 현조를 바라보았다. 언제쯤 저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그나저나 네 친구 직업이 뭐냐? ” 현조가 강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효원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 저번에 명함받았잖아. 거기 보면 나와있는데. ” “ 젠장. 명함에 그냥 네메시스 박강후. 그렇게 나와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 “ 물장사 한다. ” 강후가 툭 끼어들자 현조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 어째. 돈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 너 물탄 양주도 팔지? ” “ 물탄 양주? ” 강후는 어이없다는 듯 현조를 쳐다보았다. “ 아냐? 아님 말고. ” “ 넌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 강후가 제법 진지하게 묻자 현조가 그를 보며 말했다. “ 난 첫인상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근데 넌 첫인상이 영 꽝이었어. ” “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고. 어차피 이렇게 된거 우리 한번 친해보자. ” “ 친해서 뭐할라고? ” “ 글쎄... ” 강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현조를 아래위로 쭈욱 훑어보았다. “ 니들 이제 그만해. 정신 사나워서 죽겠다. ” 효원이 얼른 끼어들어서 둘의 신경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 한번 친해보라고 불러냈더니 친해지기는 커녕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을 부리고 있는 꼴이 꼭 사탕하나 놓고 싸우는 7살짜리 꼬마녀석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세사람은 주거니 받거니하며 소주4병을 비우고서야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 운전은 안될것 같고, 택시타고 들어가자. ” “ 난 재룡이 오라고 전화해 뒀어. 5분정도 있으면 도착할거야. ” “ 그래? 그럼 내가 택시타고 현조 데려다 주고 갈테니까 넌 미리 가라. ” 효원의 말에 강후가 현조를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아냐. 내가 데려다 줄께. 조금 기다리면 재룡이 올거니까 너 먼저 가라. ” “ 그래도... ” “ 나 못 믿냐? ” 강후의 말에 효원은 현조를 흘낏 쳐다보았다. 마치 동생을 날건달한테 맡기는 기분인 모양이다. “ 됐어. 둘다. 내가 집 못 찾아 갈줄 알아? 다들 여기서 찢어져. ” 현조가 약간 비틀거리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가자 강후가 얼른 그녀를 잡아세웠다. “ 기다려. 술취한 여자가 혼자 택시타고 가는게 얼마나 위험한줄 알아? ” “ 별 걱정을 다한다.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냐? ”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데 택시에서 재룡이 내리는게 보였다. 강후는 재룡에게 차키를 던져주고는 현조를 질질 끌고는 자신의 차로 향하면서 효원에게 말했다. “ 들어가라. ” “ 어? 응. ” 효원은 못내 불안한듯이 강후와 현조를 보다 돌아서서 택시를 타고 갔다. 현조는 뒷자리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앉아서는 강후를 노려보았다. “ 됐다잖아. ” “ 말 좀 들어. 너 떽떽거리는거 이제 조금씩 질리거든. ” 현조는 가벼운 코웃음을 치고는 한쪽 구석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 집 어디야? ” “ 장미 아파트. ” “ 재룡아 가자. ” “ 네. ” 집으로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별 말없이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낡은듯한 아파트에 도착해 차가 멈추자 현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강후는 도망치듯 서두르는 현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얼른 따라서 내렸다. “ 덕분에 편하게 왔다. ” 현조가 어쩐일인지 답지않게 인사치레를 했다. “ 우리 이제 그만하자. ” 뜬금없는 강후의 말에 현조가 그를 쳐다보았다. “ 뭘? ” “ 무시하는거. ” “ 무시하는거? ” “ 그래. 너 지금까지 나 무시하고 있었잖아. 지금부터는 그러지 마라. 내 인내심이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거든. ” “ 그래서? ” “ 다음에 만나면 최소한 으르렁대지는 말자고. ” 강후의 말에 현조는 한참을 그를 쳐다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래. 안될거 있나. 악연도 인연은 인연이니까. 잘 가라. ” 현조가 뒤돌아서 가는 걸 지켜보며 강후가 중얼거렸다. “ 악연은 악연이지. 네가 내 눈에 띄인게... ” 외 전 < 효원 vs 경주 > “ 으윽- 치즈가 떡이 됐다. ” 포크로 스파게티를 뒤적거리며 경주가 있는대로 인상을 썼다. 스테이크를 먹으랬더니 굳이 스파게티를 먹겠다고 용을 쓰더니 막상 앞에 놓인 스파게티를 보더니 죽을상이었다. “ 내가 그랬잖아. 이 집 스파게티는 별로라고. 말 좀 듣지... ” 효원이 혀를 끌끌차며 안됐다는 듯이 경주를 바라보았다. “ 그러게. ” 웬일로 순순히 수긍을 하고 나오는게 영 수상쩍었다. “ 나 바람 피웠다. ” “ 뭐? ” 입으로 가져가던 스테이크 한 조각이 그대로 테이블로 수직낙하를 했다. 가끔씩 경주의 오묘한 정신세계를 무자비하게 해부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곤 했는데, 요즘에는 갈수록 도가 지나쳐져서 이제는 얼굴 마주보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 경주야. 내가 네 약혼자거든.. ” “ 알아. 근데 약혼자이기 전에 우린 친구잖냐. ”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으며 말하는 약혼녀를 보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 이번엔 또 누구야? 저번에는 모델이었고, 또 그전에는 새로 들어온 새파란 신입사원이었고, 또 그 전에는 ... ” “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쪼잔하게스리... ” “ 그래 이번에는 누가 또 이경주 가슴에 필을 팍 꽂았는데? ” “ 꽂다말고 그냥 가더라. ” “ 왜? ” “ 내가 너랑 약혼했다니까 그냥 내빼던데... ” “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 “ 응. ” “ 누구? ” “ 여기 사장. ” 일순 혈압이 200고지를 향해 힘겨운 등반을 하는게 느껴졌다. “ 그래도 이번에는 제정신 박힌 놈이었나보다. 약혼자 있다는 소리에 물러서기도 하고.. ” 효원의 말에 경주가 끽끽거리며 웃었다. “ 무슨... 네가 여기 단골손님이래서 안된단다. 너 볼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던가, 매상 이 떨어져서 안된다던가... ” 효원의 날카로운 눈빛이 저쪽 구석에서 이쪽을 유심히 지켜보던 젊은 사장에게로 향했다. 효원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기겁을 하고는 주방으로 내빼는게 보였다. “ 쯧쯧... 보기보다 소심하네. 저 남자. ” 경주가 혀를 끌끌차는 걸 들으며 효원은 앞에 앉은 이 여자와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잔머리 굴리지마라. 정효원. 넌 영원한 내 밥이야. ” 경주가 물잔을 들어 입가심을 하면서 웃었다. “ 네 이런 모습 우리 부모님이 알면 당장 파혼이다. ” “ 그래? 조심해야 되겠네.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별반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 넌 살면서 필이 팍 꽂히는 여자 한번도 못 만나봤냐? ” 경주가 궁금해서 못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불쑥 물었다. “ 꽂히긴 뭘 꽂혀. 내가 무슨 과녁이냐? 난 적어도 정상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야. 모든 사람들이 다 너처럼 기괴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건 아니라고... 약혼녀 두고 한눈 파는게 그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할 짓이냐고? ” “ 그래도 나중에라도 혹시나 필이 팍 꽂히는 여자가 나타나면 미리 말해라. 칼 갈아두게..” “ 마음대로. ” 효원은 물을 마시면서 레스토랑 안을 쭉 훑어보았다. 옆 테이블에 선을 보는건지 어색한 분위기로 앉아 있는 남녀가 보였다. “ 저 두사람 선보는 중인가 보다. 근데 밥을 먹냐. 촌스럽게... 여자가 아깝네. ” 효원의 시선을 따라 옆테이블을 바라보던 경주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 곧 쫑나겠다. ” 경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테이블의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게 보였다. 남겨진 남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는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 불쌍타. 저 남자. 여자가 좀 성질이 드럽네. 그래도 식사는 마저하고 가지... ” “ 너 만이야 하겠냐. ” 경주가 고개를 획 돌리며 살짝 그를 노려보았다. “ 그만 나가자. 피곤해서 일찍 가봐야 겠다.” “ 그래 그럼. ” 효원이 재킷을 챙겨들고 일어서자 경주도 핸드백을 들고는 따라 일어섰다. “ 네 차는? ” “ 응? 난 택시타고 왔지. 네 차타고 가려구. ” “ 잘했다. 기다려. 차 빼가지고 올께. ” 이번에 새로 뽑은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오자 입구에서 기다리던 경주가 심각하게 차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게 보였다. 또 무슨 망발을 할려고 저러나 싶어 은근히 걱정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수석에 앉자마자 잊지않고 한소리를 했다. “ 한 삼천 줬냐? ” “ 조금 더 써봐. ” “ 지난번 차도 멀쩡하던데 뭐하러 자꾸 바꾸니? ” “ 그렇게 됐다. ” “ 또 정식씨한테서 연락왔었어? ” “ 응. ” 정식은 효원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지금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워낙 인정에 약한 효원인지라 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 돈 벌어서 차 바꾸다 볼일 다 보겠다. ” “ 그래도 결혼해서 너 굶겨 죽이지는 않는다. ” 차 안 이곳저곳 열어보며 궁시렁대던 경주가 효원을 보며 물었다. “ 어머니 들어오셨다면서?" “ 응. ” “ 그럼 현조씨는 어떻게 되는거야? ” 경주의 말에 효원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 현조가 왜? ” “ 어머니 아시면 난리날텐데... 네가 현조씨 회사로 데리고 들어온거 알면. ” “ 어머니가 간섭할 일 아니야. 내가 아버지 회사로 들어오면서 실력있는 프로그래머를 더 보강해야 될것 같아서 딴 회사에서 일 잘하던 현조 끌고 들어온거야. 내가 필요해서 나 도와달라고 스카웃한거라고. ” 효원이 발끈해서 말하자 경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너 가끔 웃기는거 알아? ” “ 뭐?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효원이 또 다시 경주를 쳐다보았다. “ 현조씨 얘기만 나오면 너 흥분하잖아. 평소에는 새색시처럼 얌전하던 애가 현조씨 얘기만 하면 헐크처럼 변해. 그거 몰랐니? ” “ 내가? ” “ 그래 니가. ” 효원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아무말없이 운전에만 열중하더니 영 못미더운 투로 중얼거렸다. “ 내가 그랬나? ” 경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끔씩 효원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현조에 대해 지나치다싶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약혼녀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경주와 있을때도 효원은 끊임없이 현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같은 직장에 다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일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현조에 관한한 효원은 모르는게 없었다. 덕분에 경주까지 요즘 현조가 어느 업체의 일을 맡아서 하는지, 현조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하루에 커피를 몇잔이나 마시는지 자연스레 알게되었다. “ 기분 나쁘다. 네 약혼녀가 내가 아니라 꼭 현조씨인것 같아서... ” “ 에이. 무슨... ” 효원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고 말았지만 경주는 씁쓸한 마음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효상이라는 거대한 암초가 없었다면 아마 효원은 현조를 향해 이성으로 다가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티격태격하며 경주가 살고있는 빌라에 다다르자 경주가 갑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음흉하게 웃었다. “ 우리 오늘 확 사고 쳐 버릴까? ”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하는 폼이 금세 옷이라도 벗어던질 태세였다. “ 아서라. 나중에 뭔 원망을 들을려고... ” 효원이 안전벨트를 풀며 경주의 이마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뒤로 휙 밀어버렸다. “ 이래서 우리가 안된다는 거야. 넌 나보고 있으면 같이 자고싶다 뭐 이런 생각이 안드니? ” 경주가 입을 삐죽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 왜 안하던 짓하고 그래? 닭살 돋게. ” 효원이 차에서 내려 앞으로 돌아서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자 경주가 새침한 표정으로 차에서내렸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효원에게 다가와 누가 들을새라 효원의 귓가에 바싹 얼굴을 들이대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 너 혹시... 고자냐? ” “ 이게 진짜... ” 효원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화를 내자 혀를 쏙 내밀어 약을 올리면서 경주가 뛰어가 버렸다. “ 잘가라. 자기야. ” 빌라 입구에서 경주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효원 역시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하고는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경주와 자신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요즘들어 부쩍 그는 그런 생각을 자주했다. 분명 경주는 남자라면 본능적인 욕구를 느낄만큼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치다 열에 대여섯은 경주를 돌아볼 정도로 예쁘기는 했다. 그도 분명 그걸 알고 있었고, 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경주에게 별다른 욕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와 알고 지낸게 벌써 10년이 넘었고, 약혼한지는 1년이 다 되었지만 그와 경주는 그저 친한 친구 이상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육체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사랑이 완성되는건 아니지만, 늘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경주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을 해봤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경주를 딴 남자에게 뺏기고 싶지는 않았다. ‘ 너무 편한 사이여서 그런가. 굳이 육체적인 관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믿음직한 사이여서 그런거겠지. ‘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경보가 연신 울려대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애써 파헤쳐서 들춰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는 담배를 발로 비벼끄고는 다시 차에 올라 어두운 도시를 헤엄치듯 유연하게 헤쳐나갔다. 11 서 너대의 레이저 절단기와 TC, 그리고 절곡기들이 쉴틈없이 돌아가고 현장 사람들은 저마다 제 할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통 정신없이 바쁜 사람들 틈에 유독 한 사람만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현조는 L4030의 오퍼레이터인 기수의 책상에 건방지게 발을 포개어 올려놓고 의자를 뒤로 쭉 빼서 반쯤은 드러누운 자세로 대형 선풍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내뿜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서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방향 잃은 난파선처럼 현조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반쯤은 멍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효원은 2층 실장실에서 30분째 꼼짝도 하지않고 있는 현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10분간은 아이들처럼 현조에게 통하지도 않는 텔레파시를 쏘아대며‘돌아봐라, 돌아봐라 ’하며 킥킥거렸는데, 시간이 지나도 현조가 꼼짝을 하지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지...혹시 효상과의 일을 생각하며 불행해하고 있는건 아닌지... 저러다 그대로 땅으로 푹 꺼져버리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건 아닌가 싶어서 더럭 겁이났다. 그만 내려가서 현조를 현실세계로 소환해야지하며 실장실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정효원입니다. ” “ 나다. ” “ 네. 어머니. ” “ 저녁에 경주 불러서 저녁 먹을 생각이니까 일찍 들어와라. ” “ 어머니. 오늘은 안되요. 직원들하고 회식있어요. ” “ 그래? 그럼 언제가 좋겠니? ”“ 다음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 “ 그래 알았다. 그럼 네가 경주한테 전화해서 다음 주에 시간 좀 비워놓으라고 해라. ” “ 네. ”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효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준희와 함께 외국에 나가계시던 3년 동안은 그런대로 평온한 생활을 했었다. 끊임없이 효상의 존재를 회상해내며 불행해 하는 어머니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데 남몰래 안도하며 지낸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그 동안 많이 변해있었다. 전처럼 죽은 효상을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도 않으셨고 효원을 보며 효상과 닮은 점을 찾아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을 보는것 처럼 불안했다. 현조에 대한 미움도 그만큼 무뎌지셨으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 녹을 앙금이 아니었다. 효상과 현조가 사귀기 시작한 건 현조가 대학교 1학년 말경이었다. 같은 대학에 다니던 효상이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하면서 자연스레 효원과 효상 현조는 같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효원은 군입대다 뭐다 해서 바빠졌고 효상과 현조는 연인사이로 발전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현조의 동아리 MT에 따라나섰던 효상이 오토바이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자 현조는 평생을 고개를 들고 살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에게 있어 현조는 잘난 큰아들을 뺏어간 원수였다. 효상이 굳이 가지 않아도 됐을 MT를 간것도 현조의 잘못이었고, 효상이 현조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자신은 헬멧없이 오토바이를 탄 것도 현조의 죄가 되었고, 결정적으로 효상은 죽었는데 현조는 멀쩡히 살아난 것도 현조의 크나큰 죄가 되었다. 군에서 효상의 죽음을 전해듣고 허겁지겁 병원을 찾아갔을 때 현조는 살아있는 시체처럼 어머니의 갖은 횡포를 묵묵히 참아내고 있었다. 말려주는 사람도 없이 현조는 바보처럼 온갖 수모를 다 당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효상의 장례를 치루고 그는 다시 군대로 들어가야했고 현조는 세상 사람들의 온갖 손가락질을 혼자서 견뎌내야만 했다. 효원이 제대를 했을때 현조는 이미 졸업을 한 뒤였고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 있던 현조를 효원이 스카웃하는 형식으로 지금 이 회사로 데리고 들어왔다. 효원이 사정얘기를 하고 현조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현조는 망설임없이 승낙을 했었다. 그 이면에 효상에 대한 죄책감이 깔린거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효원은 현조를 옆에 두고 챙겨주고 싶었다. 자신이 없을 때 현조가 어머니에게 당한 온갖 수모를 보상해주고 싶었다. 다행스럽게 아버지는 별 반대없이 받아들이셨지만 문제는 어머니가 아셨을 때의 엄청난 파장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는 해도 그 원망이 다 사그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꾸만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머니가 회사에 오시지 않는 한 현조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지는 못하겠지만 평생 비밀에 부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현조를 내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현조를 곁에 두고 싶었다. 이 마음이 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현조를 눈 앞에 두고 싶었다. 효원은 잠시 동안의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효원은 현조에게 가 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어머니와 현조 사이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건 아닌지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 [ 출근은 잘했냐? - 박강후 - ] 현조는 휴대폰 액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장마차에서 만난 이후 강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아침에는 출근잘했냐, 잠은 잘 잤냐, 점심때에는 점심 맛있게 먹었냐, 저녁에는 집이니? 잘자라. 좋은 꿈꿔라.... 그렇다고 전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문자는 꾸준히 보내면서도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 뭔 꿍꿍이야 도대체... ” 현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작업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며칠동안 이런 식의 문자가 오다보니 아침이 되면 당연히 문자가 오는 걸로 알고 있었고 간혹 문자가 늦는 날이면 자꾸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의아해하곤 했다. “ 완전 파블로프의 개네. ” 현조는 자꾸만 자신이 강후에게 휩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딱 잘라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이후로는 남자친구는 물론 여자친구도 사귀지 못했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친해보자고 다가오던 친구들도 현조의 무심한 성격을 알고는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남자들에 대해서는 현조가 아예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현조가 호응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섰는데 박강후는 좀 끈질긴 면이 있었다. 은근히 줄다리기처럼 밀고당기는 놀이가 재미있기도 했다. “ 지대리님. ” 프로그램실 문을 열고 경민이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 왜? ” “ 시림메디칼에서 전화요. ”“ 알았어. ” 현조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리고는 프로그램실로 향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점심은 잘먹었냐는 문자가 왔고 퇴근시간이 됐을때는 조심해서 퇴근하라는 문자가 버젓이 액정에 찍혔다. 현조는 휴대폰을 쥐고는 한참동안 문자를 찍었다 지웠다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며칠 씩이나 문자를 보내오는데 한번쯤은 잘 지낸다는 답장을 보내줘야 하는거 아닌가 싶다가도 괜히 잘못하다 강후의 페이스에 휘말리는거 아닌가 싶어서 주저하게 되었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는데 효원이 불쑥 프로그램실 안으로 들어섰다. “ 자자 주목!!! 오늘 프로그램실과 영업부 회식이 있습니다. 다른 부서는 제외하고 하는거니까 너무 소란피우지 말고 여섯시까지 저번 회식장소인 한솔가든으로 모여주십시오. ” “ 우와. 회식이다. ” 옆자리에 있던 경민이 좋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회식한지도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요즘들어 일이 워낙 밀리다 보니 제대로 된 회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걸 염두에 둔 모양인지 제일 일이 많았던 영업부와 설계실 식구들을 영양보충 시켜줄 모양이었다. 현조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 넣어버렸다. “ 지대리하고 김기사는 내 차타고 가고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오도록. ” 효원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가 들렸다. “ 또 지대리님은 특별케이스로 챙기시네.... ” “ 그러게. 맨날 투닥투닥 싸우는거 같은데 이럴 때는 꼭 챙기시더라... ”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지자 현조는 얼른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경민도 가방을 챙겨서는 현조를 따라서 효원의 차로 향했다. 효원은 이미 시동을 걸어놓고는 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정실장 때문에 나 오래살지 싶다. ” 조수석에 타며 현조가 투덜대자 효원이 현조를 쳐다보았다. “ 왜? ” 현조가 대답없이 뚱해서 앉아있자 뒷자리에 탄 경민이 현조를 대신해서 대답을 했다. “ 정실장님이 맨날 지대리님만 챙기니까 그렇죠. 원래 편애를 받는 사람은 따를 당하거든요. ” “ 그랬나? ” 효원이 현조를 보자 현조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랬나보지. 빨랑 가자. ” 현조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은데 효원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현조가 워낙 개방적인 성격이 되지 못하다 보니 설계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거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회식 자리에 도착해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녁식사로 고기를 한껏 먹고난 뒤 설계실 사람들은 설계실 사람들대로 , 영업부 사람들은 영업부 사람들대로 따로 어울렸다. 현조는 설계실 사람들과 소주잔을 주고 받으며 부어라 마셔라 하며 떠들고 있었다. 설계실에 여자 설계기사는 현조를 포함해 3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들이어서 자칫 서먹할 수도 있을텐데 의외로 세명의 여자기사들 모두 성격이 화통해서인지 별다른 트러블은 없어보였다. 오래간만에 기분좋게 술을 마시는 현조를 보고 효원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녁식사 겸 술까지 마시고 한솔가든을 나서니 이미 열시가 지나있었다. 다들 2차를 가자며 졸라대는 바람에 효원은 어디로 갈까 고민에 빠졌다. 가요주점을 가자니 여자들이 불편해 할것 같고 그렇다고 나이트를 가자니 나이 많은 영업부 직원들이 영 걸렸다. 그의 그런 고민을 알기라도 한 듯이 영업부의 직원 몇명이 효원에게 다가왔다. “ 정실장님. 우린 우리끼리 2차 가기로 했으니까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십시오. ” “ 그래도... ” 효원이 못내 미안한 듯이 말하자 영업부 직원이 손사래를 쳤다. “ 우리도 우리끼리 어울리는게 편합니다. 젊은애들하고는 영 맞질 않아서... ” “ 그럼 그렇게 하세요. 비용은 나중에 따로 계산서 청구하시면 회식비로 지원해 드릴께요. ” 효원의 말에 영업부 직원들은 좋아라하며 근처 주점으로 우르르 몰려 가버렸다. “ 실장님 나이트가요. 나이트... ” 술에 취한 경민이 효원을 붙들고 늘어지자 나머지 사람들도 나이트를 외쳤다. 효원은 어디로 갈까하다 생각하다 그래도 아는 놈 돈 벌게 해주자 싶어서 강후의 네메시스로 방향을 잡았다. ================================================================================= 효원 일행이 네메시스에 들어서자 번쩍이는 조명들과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눈길을 휘어잡았다. 같이 온 남자직원들의 감탄사를 흘려들으며 현조는 스테이지와 DJ 부스를 훑어보았다. 이것도 습관인건지 클럽에 들어오면 오늘 손님은 많은지 DJ의 실력은 어느정도 인지를 먼저 체크하게 되었다. “ 룸으로 올라갈까? ” 시끄러운 음악에 효원이 한껏 소리를 질렀다. 현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효원은 웨이터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웨이터가 그들을 2층 룸으로 안내했다. 룸으로 들어서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던 음악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 자. 나가서 놀 사람들은 나가서 놀고 술마실 사람들은 마시자고. ” 효원이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풀며 말하자 경민과 젊은 직원들이 우르르 룸을 빠져나갔다. 남은 건 효원과 현조, 그리고 프로그램실의 샌님 현대리 뿐이었다. “ 넌 안 나가? ” 효원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저었다. “ 오늘은 술이 고프다. ” “ 그래? ” 효원은 현조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는 현대리에게도 술을 권했다. 하지만 현대리는 이미 반쯤은 졸면서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 현대리 그새 뻗었네. 오늘 어째 과하게 마신다 싶더라니. ” 현조가 혀를 끌끌차며 현대리를 소파에 누이고는 자신의 옷을 덮어주었다. “ 회식 오래간만에 하는거지? " 효원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게. ” “ 건강은 괜찮아? ” “ 응. ” “ 여기 강후네 클럽이야. 알지? ” “ 알아. 네메시스 박강후... ” 현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현조가 이곳에 와 있는걸 알면 강후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 불러볼까? 혹시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데... ” “ 글쎄... ” 현조는 선뜻 강후를 부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강후를 보고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효원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양주 한병을 다 비우고는 소파에 늘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 현조야. ” “ 왜? ” “ 그냥 불러봤다. ” “ 싱겁긴... ” 현조는 여전히 눈을 감고는 몽롱하게 들리는 음악소리에 고개를 까닥였다. 시끄럽던 음악소리가 블루스 음악으로 바뀌자 현조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 가자. 효원아. ” “ 어딜? ” 효원은 술기운에 반쯤 풀린 눈을 뜨고는 현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 블루스 땡기러... ” 현조가 씨익 웃자 효원이 키득거리며 일어섰다. “ 오호~ 지현조가 나한테 춤을 다 청하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알면 열심히 봉사해라. ” 현조는 효원의 손을 이끌고는 스테이지로 향했다. 몇몇 커플들 사이에 경민과 설계실 여기사 한명이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있는게 보였다. 현조와 효원이 다가가자 경민이 손을 들어 아는체를 했다. 현조가 효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효원이 현조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조용한 블루스 음악에 몸을 맡기고 두 사람은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현조의 귀에 효원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 나랑 춤추기 싫냐? 왜 한숨이야? ” 현조의 불퉁한 말에 효원이 현조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 아니... 싫지 않아. ” 착 가라앉은 효원의 음성이 왠지 어색했다. 현조가 살짝 몸을 빼려하자 효원이 현조를 다시 끌어당겼다. “ 효원아... ” “ 왜? ” “ 아냐... ” 현조는 어딘지 효원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이 쪽을 향해 눈을 빛내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현조의 눈에 와 박혔다. 12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벌써 겨울이 온 듯했다. 때이른 털목도리를 두른 대학생들이 리어카에서 파는 떡볶이를 먹으며 떠들어 대고 있는 걸 보는 강후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조금 전 [시저]에서 아현을 떼어놓고 오느라 강후는 진땀을 뺐다. 두 사람이 좋아서 만날때는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던 아현이 정작 강후가 헤어지자는 말을 한 이후로는 하루 걸러 한번씩 [시저]로 그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달래도 보고 나중에는 화도 내 봤지만 아현은 도무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후가 또 한숨을 내쉬자 재룡이 운전을 하다말고 룸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 제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볼까요? ” 재룡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한다는 건 절대 말로 해결을 보겠다는 게 아니었다. 아현을 그런 식으로 떼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 됐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 강후는 재룡의 간섭을 막았지만 솔직히 그렇게 해서라도 떼어내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질척거리며 끌려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지 난감했다. “ 집으로 모실까요? ” “ 아니. 네메시스로 가자. ” 며칠동안 아현때문에 정신이 없던터라 네메시스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었다. 매상도 그렇지만 웨이터들이 그가 없다고 해이해져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는 피곤한 와중에도 네메시스로 향했다. 그의 차가 클럽 앞에 멈춰서자 웨이터들이 우르르 그의 차 앞으로 몰려왔다. “ 오셨습니까 . ” “ 그래. ” 강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클럽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클럽 안은 음악소리와 술취한 사람들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잔잔한 블루스 음악이 깔리고 스테이지에 있던 사람들이 테이블로 돌아가는 걸 무심히 흘려보던 강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검은색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현조가 효원의 손을 이끌고 스테이지로 가는게 보였다. ‘ 어라.. 저거 뭐야? ’ 가뜩이나 불쾌하던 기분이 현조와 효원을 보자 아예 바닥을 쳤다. 현조와 효원은 마치 연인처럼 끌어안고는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효원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현조의 손도, 현조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효원의 손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한참동안 부둥켜안고 춤을 추던 현조의 눈이 그에게로 향하자 그는 불쾌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현조를 노려보았다. 현조가 효원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얘기하자 효원이 뒤를 돌아보고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후는 마지못해 손을 들어서 아는체를 해주고는 쌩하니 사무실로 들어와버렸다. “ 지배인 들어오라고 할까요? ” “ 아니. ” 그 동안의 매상을 체크하고 영업상태를 보고 받으려면 지배인을 불러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보고따위나 받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강후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사무실 안을 오락가락했다. 뭔가 상당히 기분이 나쁘긴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강후는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는 룸으로 올라갔다. 그가 룸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 재룡이 서둘러 강후를 쫓아왔다. “ 사장님. ” “ 왜? ” “ 친구분 저쪽에 계십니다. ” 재룡이 가리키는 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가다말고 강후는 재룡을 돌아보았다. “ 내가 누굴 찾는지 어떻게 알았어? ” 강후의 물음에 재룡은 그저 웃기만 했다. “ 가끔 네가 내 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는거 같아서 싫다. ” 강후의 말에 재룡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피했다. VIP 룸이라고 쓰여진 문 앞에서 강후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강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효원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 박사장. 오래간만이다. ” “ 그래. ” 강후가 자리에 앉으며 현조를 힐끔 쳐다보았다. 현조는 그를 보더니 고개를 까딱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 오늘 우리 회사 회식했거든. 그래서 니네 클럽으로 데리고 온거다. 너 돈 벌게 해 주려고. ” “ 고맙다. ” 강후가 효원을 보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평상시 같으면 덧붙여서 농담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효원과 농담따먹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효원의 눈이 흐리멍텅해진걸 보니 어지간히 퍼마신 모양이다. “ 나 잠깐 실례. ” 효원이 화장실을 가려는지 나가버리자 룸안에는 잠에 곯아떨어진 남자와 현조 그리고 강후만이 남았다. “ 잘 지냈냐? ” 강후의 물음에 현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많이 마신거야? ” 현조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는걸 보며 강후가 물었다. “ 별로...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조는 혀가 풀린것 같았다. “ 가자. 데려다 줄께. ” “ 됐어. 정실장하고 같이 가면 돼. ” “ 효원이도 대리운전부르거나 택시 타야 되잖아.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회식끝나면 전화해. ” 현조는 강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너 나한테 관심있니? ” 현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자 강후가 피식 웃었다. “ 몰랐냐? 나 너한테 관심 아주 많아. ” “ 네 취향도 참 특이하다. 왜 나같은 사람한테 관심이 있냐? ” 강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전화해라. ” 다시한번 다짐을 하고는 룸을 나서는데 효원이 휘청거리며 걸어오는게 보였다. “ 벌써 가게? ” “ 응. ” 강후는 효원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려와 버렸다. 내가 미리 찍어둔 물건을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흠집을 내는것 같아서 화가났다. 효원의 성격상 약혼녀를 두고 딴 짓을 할 파렴치한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 신경이 쓰였다. 강후는 조용히 뒤따라오던 재룡을 보며 말했다. “ 기다리다가 쟤 나가는거 같으면 나한테 말해. ” “ 네. ” 현조 성격에 전화를 할리 만무였다. 한 시간쯤 뒤에 재룡이 연락을 해서 나가봤더니 현조와 효원 그리고 몇명의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위해 도로에 서 있는게 보였다. “ 말은 지독스럽게도 안들어 하여튼.. ” 현조를 보며 궁시렁대는데 재룡이 차키를 그에게 건넸다. “ 직접 운전하실 거죠? ” “ 그래. ” 강후가 성큼성큼 걸어서 효원일행에게 다가서자 현조가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 어~ 몰래 갈려구 했는데 들켰네. ” 해롱거리며 말하는 폼새가 꽤나 취한 모양이다. “ 효원아 현조는 내가 데려다 줄께. ” 효원을 보며 말하자 효원도 꽤나 취한 듯 뭐라고 웅얼거렸다. 더 말해봤자 알아 듣지도 못할것 같아서 비틀거리는 현조를 끌고는 재룡이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행했다. 웬일로 조용하게 따라온다 싶더니 현조는 차에 타자 마자 가방을 꼭 끌어안고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전에 한번 가 본적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서 현조의 아파트를 찾아내고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낡은 아파트라 그런지 주차해둔 차들이 죄다 조그만 소형차이거나 낡은 중형차들이었다. 차를 세우고도 한참이 흘렀는데 현조는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심코 현조를 바라보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언제 잘랐는지 머리카락이 많이 짧아져있었다.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꼭 금방 상경한 시골 처녀같았다. 깨울까 하다 기회다 싶어서 현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스카라를 한 속눈썹이 꽤나 길었다. 그리고 눈 밑에 조그마한 점이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괜히 건드려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더니 현조가 끄응거리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강후는 현조가 깰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하고 눈을 감고는 운전석을 조금 눕혀서 드러누워버렸다. 조금 있다보니 옆자리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아저씨. 택시비요. ” 현조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지갑을 꺼내서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었다. 술이 취해서 택시인줄 착각한 모양이다. “ 이걸로 모자라는데... ” 강후가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자 현조는 다시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장을 더 꺼냈다. “ 에이... 뭐가 이렇게 많이 나왔어. ” 강후가 만원짜리 두장을 받아들고는 피식거리는데 현조가 문을 열고는 차에서 내렸다. 비틀비틀하는 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강후가 차키를 뽑아들고는 차에서 내리는데 현조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게 보였다. “ 참 여러가지 한다. ” 강후가 기가막혀서 중얼거리자 현조가 부시시 뒤를 돌아보았다. “ 누구세요? ” “ 어쭈... 이제는 술주정까지... ” 강후가 현조를 일으켜세우는데 저쪽 슈퍼에서 통통한 아줌마 하나가 뛰어오는게 보였다. “ 현조... 맞지? 어이구 어쩌다 이렇게 많이 취했대... ” 현조와 안면이 있는 사람인듯 이내 현조를 보며 혀를 끌끌찼다. “ 총각은 누구신가? 현조 애인? ” 아줌마의 은근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강후는 현조를 흔들어깨웠다. “ 지현조... 정신 좀 차려봐. ” 하지만 현조는 여전히 해롱거리며 축 늘어져버렸다. “ 에이구 못 깨겠네. 이 아가씨 102동 605호에 살아. 좀 데려다 줘야 될것 같은데... ” 아줌마의 시끄러운 수다를 들으며 현조의 집 앞에 다다르자 슈퍼아줌마가 현조의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아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수선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히 가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집이었다. 단지 보통의 아가씨들의 방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없어보였다. 현조를 침대에 눕히고 나오자 슈퍼아줌마가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 총각 이제 그만 가야지? ” “ 네? ”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되묻자 아줌마가 씨익 웃었다. “ 설마 자고 갈건 아니지? ” “ 아뇨. 지금 갈건데... ” 강후가 버벅거리자 아줌마가 그를 현관으로 슬슬 밀었다. “ 그래야지. 내가 밖에서 문 잠그고 내일 현조한테 열쇠 줄테니까 총각은 어여 집에 가. ” “ 네?... 네. ” 반쯤은 쫓겨나다시피 해서 현조의 집을 나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현조를 데리고 온건 아닌데 아줌마의 말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 술취한 여자를 데리고 뭘 하자고.... ” 혼자 중얼거리며 차에 오르는데 뭔가 허전한게 이상했다. 현조를 아무도 없는 집에 그냥 놔두고 가는게 영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슈퍼아줌마 말만 믿고 현조의 집 열쇠를 맡기는 것도 불안했다. 강후는 한참동안 망설이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약하게 히터를 켜고는 운전석 의자를 완전히 뒤로 눕히고는 드러누워버렸다. “ 하루쯤 차 안에서 잔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냐...에이구 내 팔자야. ” 현조의 집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고 강후는 재킷을 벗어서 이불처럼 덮고는 눈을 감았다. ================================================================================= [ 똑똑 ]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후는 부시시 눈을 떴다. 현조가 불쌍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후가 창문을 스스르 내리자 현조가 대뜸 물었다. “ 여기서 뭐하냐? ” 강후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현조를 빤히 쳐다보았다. “ 속은 괜찮냐? ” “ 아니. 북어국 끓여먹을려고 슈퍼갔더니 아줌마가 너 여기 있다고 가르쳐주더라. ” “ 그래? ” 현조가 인스턴트 북어국이 든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흔들고 있었다. “ 근데 여기서 뭐하냐? ” “ 그냥... 뭐 ” 강후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재킷을 뒷자리로 던지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 네가 나 데리고 왔다고 그러드라. 슈퍼아줌마가. ” “ 그래. 무거워서 죽는줄 알았다. 무슨 여자가 술이 떡이 되게 마시고 그래? ”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해장하러 가자. ” “ 해장? ” “ 그래 해장 ” 현조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그를 불렀다. 차에서 내려서 비척거리며 걸어가는데 현조가 아파트 상가의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 아줌마 콩나물 해장국 두개요. ” 현조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자 강후도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현조와 마주앉았다. “ 뭐하러 차 안에서 자니? ” “ 누가 너 업어갈까봐서... ” 현조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현조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현조가 저렇게 웃는건 처음이었다. 틱틱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웃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웃어보인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 걱정도 팔자다. ” 강후는 별 말없이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조그만 식당 안은 테이블이 겨우 서너개 놓여져있었고 소주회사에서 광고물로 배포한것 같은 야시시한 달력이 걸려있었다.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식당아줌마가 김이 폴폴 올라오는 뚝배기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콧끝에 매콤한 냄새가 풍기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두 사람은 별 말없이 묵묵히 해장국을 비워냈다. 한 그릇을 뚝딱하고나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닦는데 현조가 티슈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강후는 현조를 한번 쳐다보고는 티슈로 땀을 닦아냈다. “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궁상맞게 차 안에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 “ 기사도 흉내 한 번 내본거다. 멋있어 보일라구. ” “ 멋있기는... 그러다 황천길 가는 사람 여럿 봤다. ” 투닥거리며 식당을 나오는데 현조가 그를 불러세웠다. “ 어제 고마웠다. 본의아니게 신세를 졌네. 다음에 웬수 갚을께. ” 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 그만 출근해야 되니까 가봐라. ” “ 태워다 줄까? ” 강후의 말에 현조는 고개를 저었다. “ 아침부터 남자차 타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 괜한 오해사고 싶지 않다. ” 듣고 보니 그럴것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효원이 본다면... 그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 가라. ” 현조가 손을 달랑달랑 흔들고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강후는 멀어져가는 현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게 아닌데... ” 분명 현조에게 접근한 건 그 잘난 콧대를 꺾어보겠다는 치기였는데, 자꾸 현조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곤란한데... ”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강후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 에라. 모르겠다. 갈때까지 가보자. ” 강후는 애써 복잡해져오는 마음을 내리눌러버리고는 차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 [ 어제 연락 안되더라. ] “ 회식했어. 그 다음엔 뻗었구. ” [ 니가? ] “ 그래. 완전히 뻗어서 집까지 배달됐더라. ” [ 누가 배달을 해? 정실장이? ] “ 아니. ” [ 그럼 누구? ] “ 있어. ” [ 뭐시여?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뉘앙스는? ] “ 그런줄 알아. 뭘 꼬치꼬치 캐물어? ” [ 어라. 점점... ] “ 야! 나 일해야 돼. 끊어. ” [ 야- 지현조 ]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현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입으로 쓰레기다 불량품이다 말해놓고 강후한테 배달됐다고 하면 미남이 뭐라고 할까? 누가 배달했는지 실토할때까지 미남에게 시달릴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혼자서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휴대폰에 문자메세지가 떴다. [ 출근 잘했냐? - 노숙자 강후 - ] 피식 웃으며 답문자를 보내려는데 경민이 현조를 툭툭쳤다. “ 지대리님. 현장 호출요. ”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서 현장을 쳐다보니 기수가 도면을 흔들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 넌 내 문자받을 팔자는 아닌가보다. 박강후. ” 현조는 찍다 만 문자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다 그냥 휴대폰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13 " 언니 좀 도와줄까요? “ 주방 아줌마가 집안일 때문에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되자 정신없이 바빠진 미숙은 현조의 말에 천군만마를 얻은 사람마냥 얼른 그녀를 잡아당겼다. “ 현조야. 고마워. 딴건 내가 할테니까 식판 받아서 잔반처리하고 좀 씻어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들은 많이 올라오니 진짜? ” 미숙은 한 손으로는 밥을 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비빔밥 위에 얹을 계란후라이를 식판 위에 하나씩 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조는 대형 냉장고 위에 있던 전용(?) 앞치마를 두르고는 열심히 식판을 받아들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70명이 넘는 직원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그야말로 식판이 탑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현조와 미숙은 말 한마디 주고받을새 없이 각자의 일을 하기에 바빴다. “ 지대리. 또 알바하나? ” 현장 이부장이 미숙에게서 식판을 받아들며 말했다. 현조는 이부장을 힐끗 보고는 화를 버럭냈다. “ 이부장님, 그렇게 많이 담지 말라니까 진짜. 다 드시지도 못할거면서. 남기면 얼마나 아까운데. ” “ 어이구. 지대리 무서워서 어디 밥 먹겠나. 주인보다 어째 객이 더 큰소리야. ” “ 언니는 너무 착해서 그런 소리 못하잖아요. 저봐 저봐 또 그러네. 김은 한 개씩만 담으라니까. ” 작게 포장된 김을 은근슬쩍 두개 담고 있던 이부장이 뻘쭘하게 하나를 내려놓았다. “ 괜찮아요 부장님. 그냥 가지고 가세요. 얘가 일부러 그래요. ” 미숙이 다시 김을 놓아주자 이부장이 현조의 눈치를 보며 얼른 받아들고는 직원들 틈속으로 숨어버렸다. “ 언니는.. 그렇게 물렁해서 어떻게 장사를 해 먹을려고 그래요? 사람이 좀 모진구석이 있어야지. 평생 돈 못벌어. ” “ 다들 일하느라 힘든데, 먹는거 가지고 그러면 안되지. 나야 뭐 임대료를 내는것도 아니고 세금도 따로 내는것도 없는데. 외삼촌 덕에 이러구 자리잡고 사는것도 감지덕지야. ” 현조는 그런 미숙을 보고는 여전히 궁시렁대며 식판을 빡빡 문질러서 닦았다. 효원의 외사촌 누나가 되는 미숙은 너무 착해서 늘 손해만 보고 살았다. 현장 사람들이 반찬 투정을 하면 혼자서 고민하다 눈물 찔끔 흘리면서 비싼 식재료 구입해서 내놓고 가끔 들리는 외삼촌의 잔소리에도 찍소리 못하고 그저 나 죽었소하고 지내는게 늘 애처로웠다. 현조는 점심시간이 겨우 15분정도 남았을 때에야 설거지를 모두 끝낼 수가 있었다. 그것도 노동이라고 허리가 뻐근하니 아파왔다. “ 빨리와. 내가 조기 구웠어. ” 미숙이 따로 작은 쟁반에 조기구이와 된장찌개를 내왔다. “ 그냥 있는대로 먹지 뭐하러 귀찮게. ” “ 고마워서. ” 미숙이 생긋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 미숙아. 밖에 저 지저분한 것 좀 치워라. 사람들 다니는데 걸리적거리게 저게 뭐니? ”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미숙과 현조는 들어올리던 숟가락을 동시에 내려놓았다. 미숙은 어쩔줄을 몰라하며 얼른 일어서서 목소리가 들린 식당입구로 급히 걸어갔다. “ 외숙모 오셨어요? ” “ 그래. 좀 깨끗하게 해. 직원들이 흉본다. ” “ 네. ” 현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져 있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하든지 아니면 모른 척 빠져나가야 하는데 도무지 이 놈의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를 않았다. “ 누구니? 직원이야? ” 고상한 목소리의 여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현조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 아... 안녕하셨어요? ” “ 너... ” 김여사의 두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커지는 걸 보며 현조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너... 도대체 니가 왜 여기 있는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 바르르 떨리는 김여사의 음성이 마치 메아리처럼 귓가에 윙윙거렸다. “ 외숙모. 자리에 좀 앉으세요. 그리고 차근차근... ” 미숙의 말에 김여사는 사납게 미숙을 노려보았다. “ 너도 알고 있었니? 이 애 여기서 일하는거 너도 알고 있었어? ” “ 그게 저... ” 미숙이 어쩔줄을 몰라하며 현조와 김여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죄송합니다. ” 현조가 머리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죄송? 너란 애는 도대체가... ” “ 그만하세요. 어머니. ” 언제 온건지 효원이 김여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 저하고 얘기해요 어머니. 내려가세요. ” “ 효원이 너. 네가 한짓이야? ” 효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김여사가 매섭게 효원의 뺨을 올려부쳤다. “ 네 형이 누구때문에 죽었는데... ” “ 그만하세요. 그냥 사고였어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 효원이 벌게진 뺨을 쓰다듬으며 간곡한 어조로 김여사에게 말했다. “ 사고? 그게 누구때문에 일어난건데? ” 김여사가 다시 현조를 노려보자 효원은 분에 겨워 파르르 떠는 김여사를 억지로 끌고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식당 안은 살벌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 괜찮아? " 한참동안 뭐라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던 미숙이 현조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현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이럴수록 배를 빵빵하게 채워야 했다. 밥이 넘어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었다.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데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현조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고였던 눈물을 떨쳐버렸다. 미숙은 줄곧 현조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깨작거렸다. 현조는 끝내 밥 한공기를 다 비우고는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잘 먹었어요 언니. 나 그만 내려가 볼께요. ” “ 그래. 그리고... 너무 맘 상해 하지마. 알았지? ” 미숙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워서 현조는 설핏 웃어주고는 프로그램실로 내려왔다. 곧 그녀를 끌어낼것 같던 김여사는 어찌된 일인지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잠잠했다. 아마 효원이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을것이다. 현조는 책상 서랍을 열고는 한쪽 구석에 깊숙히 넣어두었던 봉투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런 사단이 나기 전에 미련없이 사표를 냈으면 효원이 괜한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텐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괜히 미련을 쓰고 남아있다 효원만 곤란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사표를 책상서랍에 다시 넣고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퇴근시간이었다. 오늘은 잔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미남이나 만나야 되겠다. 생각난 김에 약속시간이나 정할까 하고 미남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회식때문에 안된다는 답문자가 날라왔다. 꼭 이런 때는 놀아줄 사람이 없었다. 무심히 지갑을 뒤적이던 현조의 손에 빳빳한 종이 한 장이 잡혔다. [ 네메시스 박강후 ] 현조는 한참동안 명함을 들고는 망설였다. 오늘은 꼭 누군가를 만나서 좌절감과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하지만 툭 터놓고 속앓이를 할수 있는 상대라고는 미남 하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박강후를 만나서 농담따먹기나 하자고 할까? 그녀는 한숨을 들이쉬다 내쉬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심을 굳히고는 강후의 휴대폰번호를 눌렀다. 컬러링으로 어떤 외국가수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박강후 사장님 휴대폰입니다. ” “ 저... ” “ 네. 말씀하세요. ” 현조는 괜히 전화를 한것 같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전화를 잘못한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현조는 누가 볼새라 서둘러 폴더를 닫아버렸다. 무작정 혼자있기 싫다는 생각에 얼떨결에 전화를 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한 시간정도 지나자 프로그램실 직원들이 컴퓨터를 끄고 수선스럽게 퇴근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현조도 막 퇴근을 하려는데 현조 앞에 놓인 내선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보니 효원의 내선번호였다. “ 네. 프로그램실입니다. ” “ 나야. ” 효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조는 맥이 탁 풀렸다. 드디어 압송되는건가? “ 현조야. ” “ 듣고 있어. ” “ 나 어머니 모시고 들어가봐야 되거든. 너랑 얘기도 못하겠다 오늘은. 너무 신경쓰지마. 알았지? ” “ 응. ” “ 그래. 어머니 기다리셔서 지금 나가봐야겠다. 퇴근할거면 한 십오분만 있다 나와라. ” “ 응. ” 현조는 들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는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혹시라도 현조가 퇴근하다 다시 김여사와 마주칠까봐 일부러 전화를 해준 효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현조는 MP3를 꺼내서 이어폰을 꼽고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불렀다. 한참동안 정신없이 노래를 따라부르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현조는 눈을 감은 채 한쪽 귀의 이어폰을 빼고는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 네. ” “ 나다. ” “ 네? ” “ 나라고. ” “ 누구야? ” 전화기 속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틀렸다. 분명히 이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 나라고. 박강후. ” “ 아- ” “ 왜 전화했다 그냥 끊어? ” “ 내가 언제. ” 현조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강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너도 내숭 떨줄 아냐? ” “ 뭔 소리야? ” “ 바보야. 네 번호 찍히잖아. 휴대폰에. ” “ 젠장. ” “ 하하하- ” 강후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 나와라. ” “ 뭐? ” “ 나오라고. 니네 회사 앞이다. ”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져 버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잠시 음악을 듣다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시간이나 멍청하게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현조는 앞쪽 사무실에 비치된 출근카드를 삑소리가 나게 긋고는 털래털래 회사를 빠져나왔다. 멀리 회사 정문에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자가용이 멈춰서 있는게 보였다. 현조가 가까이 다가가자 강후가 운전석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검은색 가죽재킷에 회색 폴로셔츠를 입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꼭 의류광고에 나오는 모델같아 보였다. “ 그 놈 생긴거 하나는 미끈하네. ” 현조가 중얼거리며 차로 다가가자 강후가 앞쪽으로 돌아나와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 비 맞았냐? 뭘 그렇게 중얼거려? ” “ 남이사. ” 현조는 열려진 차문을 다시 밀어서 닫았다. “ 그냥가라. ” “ 왜? 나랑 놀고 싶어서 전화한거 아니야? ” “ 아니. ” “ 그럼 왜 전화했는데? ” “ 심심해서. ” 강후는 피식 웃으며 다시 조수석 문을 열었다. “ 심심하니까 나랑 놀자고. 나도 심심하거든. ” 현조는 한참을 미적거리다 겨우 조수석에 올랐다. 강후는 살짝 문을 닫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 어디 가는거야? ” 현조의 말에 강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내 아지트. ” “ 아지트? 니네 집? ” 현조가 기겁을 해서 되묻자 강후가 뜨악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 벌써 우리집에 가자고? 진도가 너무 빠른거 아니야? ” 오히려 너스레를 떠는 강후때문에 현조는 웃고 말았다. “ 너도 웃을줄 아네? 늘 인상만 쓰고 다니길래 웃는 법을 모르는줄 알았지. ” “ 웃지말아야 될 인간도 있는 법이다. ” 의미심장한 말에 강후가 흘낏 그녀를 쳐다보았다. 뭔가 묻는 듯한 강후의 시선에도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차로 30분쯤 달려서 번화가로 들어서자 강후가 한 빌딩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 내려. ” “ 여기가 어딘데? ” “ 내 아지트라니까. ” 현조가 차에서 내리자 강후는 현조의 손을 잡고는 빌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강후를 따라 들어간 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bar였다. 그들이 들어서자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가 서둘러 다가왔다. “ 오셨습니까? ” “ 네. 별일 없죠? ” “ 그럼요. 사무실로 들어가실 겁니까? ” “ 아뇨. 바에 있을겁니다. 우리 간단히 마실것 하고 안주 좀 챙겨다 주세요. ” “ 네. ” 지배인이 가고 나자 강후는 현조를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끌어당겼다. “ 여기도 니꺼야? ” “ 응. ” “ 부자네. ” “ 좀 그렇지. 왜? 갑자기 나한테 관심이 막 생기냐? ” “ 무슨.. 없던 정도 떨어질려고 한다. 젊은 놈이 뭐해서 이렇게 돈 많이 벌었냐? 사채놀이라도 하냐? ” 무심히 던진 현조의 말에 강후의 표정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 효원이가 무슨 얘기해? ” “ 무슨 얘기? 너 진짜 사채놀이 하나보다. ” “ 아냐 그런거. ” 강후는 괜히 예민한 반응을 보인것 같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만약 현조가 자신의 배경을 보고 생각을 바꾼거라면 진짜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를 보니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을 때 두 명의 여자가 입구 쪽에서 들어오는게 보였다. 앉을 곳을 살피듯 내부를 훑어보던 여자 하나가 현조를 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 혹시 지현조? ” 현조는 자신을 아는 체 하는 여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누구시죠? 전 기억이 없는데. ” “ 나 몰라? 우리 같은 동아리였잖아. 김정희 몰라? ” 현조는 한참만에야 생각이 난듯 어색하게 웃었다. “ 정희선배. 죄송해요. 제가 원래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해서.. ” 정희라 불리우는 여자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강후를 쓰윽 훑어보고는 현조를 향해 물었다. “ 누구? 애인이야? ” “ 아니예요. ” 현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강후는 현조의 표정을 보고는 뭔가 그녀가 난처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난 또... ” 여자는 당연히 아닐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조는 여자의 시선을 피해서 칵테일 잔을 들고는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순간 강후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조가 왠지 주눅이 든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불쾌한 시선으로 여자를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 그만 자리로 가주시겠습니까? 친구분이 기다리는것 같은데. ” 강후의 불쾌한 듯한 어조에 여자가 기분이 상한 듯 현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기들 자리로 가 버렸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일행에게 하는 소리가 강후의 귀에 와 박혔다. “ 누구야? ” “ 왜 너도 알지? 우리 대학때 동아리 MT갔다가 오토바이 사고 났었잖아. 그때 걔야. ” “ 진짜? 웬일이니. 멀쩡한 사람 죽게 해놓고 자기는 속편하게 잘 살고 있나보네. ” “ 그러게. ” 순간 현조의 얼굴이 석고처럼 하얗게 굳어졌다. 칵테일잔을 내려놓는 현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독한 술 좀 달라고 해라. 칵테일 마셔서 언제 취하겠냐? ”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는 현조의 눈동자가 불안스레 떨렸다. 과거에 어떤 나쁜 기억이 있었고, 지금 저 두 여자가 그 상처를 들춰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후는 손을 살짝 들어 지배인을 불렀다. “ 네. 사장님. ” “ 손님들 다 내보내세요. ” “ 네? ” 지배인이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후는 지배인을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 손님들 다 내보내고 bar 비우세요. 직원들도 모두 퇴근시키시구요. ” “ 하지만 손님들이 불쾌해 하실텐데. ” “ 오늘 마신 건 계산 안해도 된다고 하고 무조건 내보내세요. ” “ 알겠습니다. ” 지배인이 돌아서서 손님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강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침내 손님들과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자 강후는 직접 바에서 조니워커블랙을 꺼내고 잔 두개를 챙겨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배인이 얼음이 든 통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조에게 잔을 내밀었다. 현조는 술잔을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 사장이니까 좋다. 멋대로 손님도 내쫓고. ” “ 오늘 들어온 손님들은 질이 안 좋았어. 내 취향 아니야. ” 그의 오만한 말투에 현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요즘 술집은 손님도 가려서 받냐? ” “ 난 그래. ” 강후가 술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두 사람은 연신 술잔을 비우면서도 내내 말이 없었다. 위스키 한 병을 거의 비울 때 쯤 현조가 혀가 조금 풀린 음성으로 물었다. “ 왜 안 물어보냐? 아까 그 여자들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 “ 그거? ” 강후는 별 관심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 네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현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 너 참 특이하다. ” “ 너도 만만찮아. ” 두 사람은 마주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강후는 웃고 있는 현조의 눈에 고인 물기를 보았다. 괜히 가슴이 싸하니 아려왔다. 비실비실 웃던 현조가 한숨과 더불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오늘 참 지랄같은 날이네. 한번도 버거운데, 두번씩이나. 연타석 홈런 두들겨 맞은 투수된 기분이다. 젠장. ” 현조는 비어버린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을 내리누리는 죄책감을 아프게 토해냈다. 14 거실 안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효원도 김여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아시게 될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준비없이 당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도대체 그 앨 끌어들인 이유가 뭐니? ” 마침내 김여사가 지루한 침묵의 고리를 끊었다. “ 현조 일 잘해요. 이쪽 방면에서는 꽤 알려진 프로그래머고 제가 아버지 회사 들어오면서 도움을 받고 싶어서 딴 회사에서 일 잘하던 애 스카웃한거예요. ” “ 그 애 아니면 프로그래머가 없니?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하필 그 애를 데리고 올건 뭐야? 그리고 네 아버지도 그래. 어떻게 그 앨 데리고 온다는데 그러라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김여사의 음성이 점점 높아졌다. 효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화가 난 것도 그렇지만 솔직히 효원은 현조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전혀 준비없이 김여사를 맞닥드렸으니 충격이 꽤나 클터였다. 마음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나가서 현조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김여사를 다독여 두어야만 했다. “ 어머니. 과거는 그만 잊어버리세요. 그런다고 죽은 형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 ” 어떻게 잊니? 생떼같은 내 자식 그렇게 어이없이 잃어버리고 반쯤은 미쳐서 산 시간이 얼만데... 넌 모른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이라도 효상이가 저 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은데....“ 김여사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러실거예요. 저도 힘들어요. 그리고... 현조도 힘들구요. 왜 어머니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세요. 효상이 형 저한테도 하나뿐인 형이었잖아요. 저라고 효상이 형 죽은게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아세요? 저도 슬퍼요. ” “ 그런 녀석이 그 앨 회사까지 끌어들여? ” “ 현조 잘못 아니예요. 형이 현조 따라서 MT간거... 그게 왜 현조 잘못이예요? 형이 가고 싶어서 간거잖아요. ” “ 헬멧만 쓰고 있었어도 살 수 있었어. 근데 우리 효상이 헬멧을 그 애가 쓰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 애는 멀쩡하게 살아나고 내 자식만 죽은거야. ” “ 그럼 현조가 죽었으면 좋으시겠어요? 현조... 그 일 때문에 자살기도까지 했었어요. 도대체 현조가 얼마나 더 자책을 해야 어머니 현조 용서하실 거예요? 네? ” 효원의 말에 김여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효상이 죽고 일년 뒤에 현조가 자신의 집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반쯤 죽어있는 걸 현조의 친구가 발견해서 살려냈다는 걸 김여사 역시 알고 있었다. “ 그래도 그 앤 살았어. ” “ 어머니... ”“ 내보내라. 난 우리 회사에 그 애 있는거 용납 못한다. ” 김여사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지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효원은 화를 억누르기 위해 한참동안 눈을 감고있었다. 김여사의 마음을 돌리는게 쉽지 않으리란걸 알고있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원망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효원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버렸다. 침대에 반쯤 드러누워서 죽은 형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젠 효상의 얼굴이 어땠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웃는 모습이 참 좋았다는것 밖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해 내기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는데 효상이 남기고 간 상처는 그대로였다. 그 끔찍한 기억이 도대체 언제까지 살아있는 사람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 형... 현조 평생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해놓고 죽으니까 좋니? 오늘따라 형이 참 밉네. 형이 참 싫다... 너무 싫다. ” 죽어버린 형을 원망하는 자신이 싫어서 효원은 눈을 감아버렸다. ==================================================================================== 잠든 현조를 바라보는 강후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현조는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키더니 결국은 테이블 위에 얼굴을 박고 잠이 들어버렸다. “ 뭐가 그렇게 맺힌게 많아서 이러냐... 너 답지 않게... ” 텅빈 bar 안에 술취한 여자와 단 둘이 있는게 좋아할 일인지, 아니면 기가 막혀할 일인지 알수가 없었다. [ 스쳐가는 비바람에 낙엽들이.... ] 어디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현조가 벗어둔 재킷에서 불이 반짝거리는게 보였다. 강후는 현조를 한번 쳐다보고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에 정실장이라고 찍힌 걸 보니 효원인 모양이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잘됐다 싶어서 그냥 내려놓는데 또 벨이 울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계속 전화가 올것 같아서 강후는 찜찜한 표정으로 폴더를 열었다. “ 지현조씨 휴대폰입니다. ” [ .... ] “ 말씀하세요. ” [ 혹시... 강후니? ] 효원의 목소리가 잔뜩 굳어있었다. “ 그래. ” [ 너 현조랑 같이 있어? ] “ 응. ” [ 왜? ] 대뜸 왜 라고 물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 내가 현조랑 같이 있으면 안되는 거니? ” [ 그건 아니지만... 현조는? ] “ 지금 잠들었어. ” [ 뭐? ] 효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 이상한 생각하지마. 술 한잔 했는데 좀 많이 마시더니 그냥 뻗었다. ” [ 어딘데? ] “ 왜? ” [ 몰라서 물어? 집에 데려다 줘야할거 아냐. ] 강후는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있는 현조를 힐끗 쳐다보았다. 현조를 마치 제 애인 챙기듯이 하는 효원의 태도가 영 거슬렸다. [ 강후야... 어디냐고? ] “ 알 필요없어. ” [ 야! 박강후.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 “ 너야말로 왜 이래? 현조가 네 애인이냐? 왜 니가 난리야? ” 전화기에서 화를 참는 듯한 효원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 니네 bar에 있는거야? ] “ 올 필요없어. ” [ 기다려. 한시간 안에 도착할거야. ]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져버렸다. 강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효원의 예민한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혼녀까지 있는 주제에 현조일이라면 물불 못가리고 뛰어드는 폼새가 단순한 우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효원이 올때까지 기다릴까 하다 효원한테 현조를 순순히 넘겨주기가 싫어서 그는 현조를 부축해 bar를 빠져나왔다. 현조는 여전히 축 늘어져서 그에게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차문을 열고 현조를 조수석에 태우고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현조집으로 가자니 그 수다스러운 슈퍼아줌마가 또 끼어들것 같아서 그는 그냥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완전히 잠에 취해버린 현조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온 몸에 기운이 쫘악 빠져나갔다. 말랐어도 키가 커서 그런지 안고 다니기는 무리였다. “ 내가 네 덕분에 요근래 안하던 짓 참 많이한다. ” 현조를 소파에 눕히고 그는 냉장고를 열고는 생수병을 꺼내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후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올때까지 현조는 처음 강후가 눕혀놓은 자세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냥 소파에서 재우자니 불편할까봐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고 침대에 눕히자니 그것도 이상하고... 강후는 난감한 얼굴로 현조를 쳐다보았다. 그때 강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 네. ” [ 너 어디야? ] 잔뜩 화가 난 효원의 목소리에 강후 역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 알아서 뭐하게? ” [ 너 이자식... 뭐하는 짓이야? ] “ 정효원. 너야말로 뭐하자는 거야? 내가 무슨 인신매매범이냐? 왜 이렇게 안달이야? ” [ 현조 손끝 하나라도 건드려. 그럼 너 내 손에 죽을줄 알아? ]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는 효원의 태도에 강후 역시 화가나서 핸드폰 배터리를 빼서 집어던져 버렸다. “ 휴우- ” 자신을 양아치 취급하는 효원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강후는 화를 삭히기 위해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열을 식혔다. 현조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 이불.... 추워. ” 소파 끝에 위험스럽게 달랑달랑 매달려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걸 보니 그냥 소파에 재울수도 없을것 같았다. 강후는 현조를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현조를 눕히고 강후는 한참동안 현조를 지켜보았다. 푹신한 매트리스 때문인지 현조는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트로 몸을 대충 덮어주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현조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인지 보지않아도 알것 같아서 강후는 휴대폰 배터리를 빼서 현조의 가방에 넣어 버렸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재룡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쉴거라는 말을 하고 강후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적당히 구슬려서 즐길만큼 즐기다 깨끗이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꼬여갔다. 쉽게 떼어버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아현은 질릴 정도로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니고 까마귀 현조는 답지 않게 망가진 모습을 그에게 자꾸 보여줘서 괜히 마음만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꼬장꼬장하게 잘난 척하더니 오늘은 죽을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주눅 든 모습을 보여서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 도무지 너란 애를 알 수가 없다. 어느게 진짜 네 모습인지 헷갈린다 진짜. ”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강후는 눈을 감았다. 술기운에 쉽게 잠이 들줄 알았는데 갈수록 정신이 맑아져 왔다. 현조가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벌렁거렸다. 강후는 벌떡 일어나서 TV를 켰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케이블 방송에서는 온통 야시시한 영화만을 상영하고 있었다. “ 젠장... 뭐야. ”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TV를 끄고는 침실문을 쏘아보았다. 한참 그렇게 침실문을 노려보던 강후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 도 닦는다 생각하자. 박강후.... ” 눈을 감고는 들판에 뛰어다니는 양 백마리를 생각하며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 양 백마리, 양 99마리, 양 98마리, 양 97마리..... 까마귀 85마리, 까마귀 84마리..... 지현조 50마리... 지현조 25마리...... 으으윽 ” 강후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고는 또 다시 벌떡 일어났다. “ 미치겠네 진짜... ” 강후는 장식장에 놓아두었던 양주 한병을 꺼내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서 눈을 감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이제는 잠을 좀 잘 수 있을것 같았다. 다시 양 백마리를 잡아다 한 놈씩 세기 시작해서 반정도 남았을 때 강후는 마침내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불편한 잠자리에 몸을 뒤척이던 강후는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몸 여기저기가 결리고 허리가 아팠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가까스로 밀어올린 후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띵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열시가 지나고 있었다. 강후는 하품을 하며 침실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현조가 베개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 ” 거실 TV위에 올려진 작은 달력을 보니 토요일인듯 했다. 깨워서 출근을 시켜야되나 아니면 그냥 자도록 내버려둬야 되나 잠시 고민을 하다 그냥 자게 내버려두기로 하고는 재룡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사장님. ] “ 어디가서 해장국 좀 사가지고 내 집으로 와. ” [ 알겠습니다. ] 전화를 끊고 어제 배터리를 빼버렸던 휴대폰을 집어들어 배터리를 끼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 네. ” [ 너... 진짜 이럴래? 어디야 도대체? ] 효원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 우리 집.” [ 거기서 뭐하는데? ] “ 뭐하긴 잤지. ” [ 뭐? ] “ 잤다고. ” [ ... ] 효원이 말없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좀더 애를 태울까 하다 쓸데없이 명을 재촉할 필요는 없을것 같아 강후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아무 일 없었어. 그러니까 괜한 상상하지마. ” [ 진짜야? ] “ 야- 정효원. 넌 도대체 날 뭘로 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술취한 여자나 겁탈하는 양아치인줄 알아? ” [ 현조는? ] “ 아직까지 잔다. 어제 좀 과하게 마셨나봐. 오늘은 그냥 쉬게하는게 나을것 같다. ” [ 휴- 알았다. 내가 퇴근하고 갈께. 너희 집 어디야? ] “ 됐어. 잠 깨면 내가 집에 데려다 줄거야. 끊어. ” 휴대폰을 내려놓고 강후는 샤워를 하기위해 욕실로 향했다. ==================================================================================== “ 으음.... 목 말라. ” 현조는 아픈 머리를 감싸쥐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늘 자신의 방에서 나던 향이 아닌 달콤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 이게 무슨 냄새야...” 가까스로 눈을 뜨고 방을 둘러보니 억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늘 구질구질하던 방은 간데없고 무슨 인테리어 잡지에나 나올듯한 고급스러운 방 안에 자신이 들어와있었다. “ 여... 여기가 어디야? ” 어제의 기억을 더듬거리다 현조는 절망적인 한숨을 토해냈다. “ 진짜 여러가지하네. 아씨.... 쪽팔려. ” 현조는 후다닥 일어나서 자신의 가방이 어디있나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가방이 보이질 않았다. 옷은 그대로 입혀져 있는걸 보니 민망한 사건(?)은 없었던것 같지만, 그래도 하필 그 인간 앞에서 또 뻗다니....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내다보니 넓은 거실을 채우고 있는 소파 위에 자신의 재킷과 가방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게 보였다. 대충 훑어보니 강후는 보이질 않았다. 살금살금 걸어서 가방과 옷을 쥐고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살짝 들고 고양이 걸음으로 현관으로 나가는데 뒤에서 웃음을 참는 듯한 강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휴대폰 도둑이네. 그거 내 휴대폰인데... ” “ 어? ” 당황해서 휴대폰을 내려다 보니 액정에 뜬 화면이 생전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 아우- 진짜.... ’ 아침부터 별 미친짓을 다 한다 싶어서 한숨을 푹 내쉬며 뒤돌아섰다. 그러자 허리에 큰 타올만 간당간당하게 걸친 강후가 그녀를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 야... 오...옷 좀 입지? ” “ 뭐냐? 답지않게 내숭은... ” 강후는 코웃음을 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뒤 강후가 반바지와 하얀색 반팔티셔츠를 입고는 방에서 나왔다. “ 어제... 내가 또 뻗었냐? ” 현조의 말에 강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그럼 집에다 데려다줘야지. 여긴 어디야? ” “ 내 집. 그리고 나도 취했는데 언제 너희 집까지 데리고 가냐? ” 강후는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 한 잔을 따르더니 현조에게 내밀었다. 현조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마냥 우유 한 잔을 다 마시고는 집을 둘러보았다. “ 집 좋네. ” “ 돈 좀 들었지. ” “ 나 이제 가볼란다. 지금 가도 지각이네. ” “ 효원이랑 통화했어. 너 오늘 그냥 쉬어도 돼. ” “ 누구랑 통화를 해? ” 현조의 표정이 굳어졌다. “ 효원이. ” “ 네가 왜 정실장이랑 통화를 해? ” 강후는 현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머리는 부시시해가지고 세수도 안한 여자 얼굴이 그다지 흉해보이지는 않는걸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다. “ 내가 전화한게 아니라 효원이가 전화했어. 그리고 가서 좀 씻어라. 꼴이 그게 뭐냐? 아무리 네가 날 남자로 생각 안한다지만 지금 그 몰골은 참 그렇다. ” 현조는 얼굴을 대충 손으로 문질렀다. “ 욕실은 저기야. 들어가서 씻어. ” “ 됐어. 집에 가서 씻으면 돼. ” “ 그냥 여기서 씻어. 그런 몰골로 어떻게 집까지 가겠다는 거야? ” “ 택시타고 가면 돼. ” 강후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현조의 손목을 확 낚아채서 욕실로 질질 끌고갔다. “ 이거 놔. 안 씻어도 된다잖아. ” “ 누가 잡아먹냐? 어제오늘 내 인간성에 태클거는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 너까지 보태지 마라. 들어가. ” 강후는 현조를 욕실로 밀어넣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옷 중에 그나마 사이즈가 작은 옷을 골라서 들고 나왔다. 욕실문을 두드리니 현조가 퉁퉁 부은 얼굴을 쑥 내밀었다. “ 이거 갈아입어. ” “ 됐어. ” “ 말 좀 들어라 제발. ” 강후가 질린다는 듯이 옷을 현조에게 떠 넘기고는 문을 꽝 닫아버렸다. “ 뭔 놈의 여자가 말을 저렇게 안 듣냐.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고생 좀 하겠다. ”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재룡이 플라스틱 통이 든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 들어와. ” “ 네. ” 재룡이 집 안으로 들어서다 강후의 신발 옆에 놓인 여자의 신발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룡이 사가지고 온 해장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조금 있자 현조가 욕실에서 비적비적 걸어나왔다. 그러다 재룡을 보더니 기겁을 하고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 지현조. 그냥 나와. 너 있는거 알아. ” 욕실문이 다시 열리고 현조가 재룡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걸어나오자 강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너 오늘 진짜 웃긴다. 아까는 몇 푼 되지도 않는 휴대폰 훔쳐서 도망가려고 하더니 이제는 어울리지도 않는 요조숙녀 흉내도 내고... 아침부터 버라이어티 쇼를 해라. ” “ 냅둬. 이러다 죽게. ” 현조가 재룡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식탁을 힐끔거리며 다가왔다. “ 해...해장국이야? ” “ 그래. ” 현조가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 밥은 없냐? ” “ 그냥 대충 속만 채우고 나가서 밥 먹자. ” 현조는 대답없이 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았는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강후의 티셔츠가 너무 커서인지 쇄골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 살 좀 쪄야되겠다. 그게 뭐냐? 삐쩍 말라가지고는.... ” “ 그래도 먹고 사는데 지장없어. ”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걸 지켜보던 재룡이 웃으며 강후를 바라보았다. “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 “ 그래. ” 재룡이 현조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빌라를 나섰다. 한참동안 먹는데만 열중하더니 현조가 마침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미안한데... 나 좀 태워주라. 이 꼴로는 택시도 타기 힘들겠다. ” “ 알았어. 가자. ” 강후가 방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검은색 점퍼하나를 현조에게 내밀었다. “ 이거 입어. 꽤 쌀쌀한거 같더라. ” “ 응. ” 강후가 건네준 옷을 입으며 현조는 거실을 두리번 거렸다. “ 뭐 찾아? ” “ 내 휴대폰. ” “ 그거 네 가방 안에 넣어놨어. ” “ 으응. ” 강후와 현조는 나란히 빌라를 나섰다.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가던 강후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 먼저 차에 타고 있어. ” 강후가 리모컨으로 차문을 열고는 현조에게 말했다. “ 왜? ” “ 타고 있어. ” 잔뜩 굳어진 강후의 태도에 현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에 올랐다. 강후가 빌라 앞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걸어가는게 보였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가 현조를 가리키면서 뭐라고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 애인인가? 괜히 나때문에 곤란해진거 아냐? ”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빴다. 애인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이야기를 끝낸건지 강후가 잔뜩 인상을 쓰고는 차로 걸어왔다. 여자는 아직까지 강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가자. ” 차에 오르자 마자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시동을 걸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 누구야? 애인이니? ” “ 아니야. 그런거. ”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하더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꼬치꼬치 캐묻기도 뭐해서 그냥 잠자코 있는데 한참동안 침묵하고 있던 강후가 현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애인아냐. 전에 만나던 앤데... 아직 마음을 못 돌려서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거야. ” 강후의 말에 현조가 기가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 잘났다 진짜. 박강후 잘났네. 아침부터 울며불며 매달리는 여자도 있고... ” “ 신경 쓰지 마. ” “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냥 웃기다고. ” 갑자기 강후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덕분에 현조는 차 앞유리에다 이마를 박았다. “ 우씨- 뭐하는 짓이야? ” “ 너랑 상관있어. ” “ 뭐? ”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강후를 쳐다보자 강후가 현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너랑 상관있다고. 너때문에 정리한거니까. ” 현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뭔가를 캐내듯이 한참동안 강후를 쳐다보던 현조가 피식 웃었다. “ 근데 어쩌냐. 난 상관없고 싶은데... ” “ 후후... 글쎄... 그럴까? ”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강후를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조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강후에게 들킬까봐 시선을 돌려버렸다. 두 사람은 현조의 집에 도착할때까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 들어가서 푹 쉬어. 내일 전화할께. ” 현조는 대답없이 차에서 내렸다. “ 지현조. ” 돌아서는 현조를 강후가 불러세웠다. “ 그렇게 힘없이 축 쳐져서 다니지 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는 그냥 과거야.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괜히 붙잡고 늘어지면 너만 힘들어져. 그러지마. 알았지? ” “ ... ” 대답없이 강후를 바라보던 현조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 고맙다. ” “ 들어가. 나 간다. ” 강후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현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이런거 진짜 싫은데... 박강후... 너 왜 자꾸 내 인생에 끼어드냐... ” 다시 한번 강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현조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15 또 비가 오고 있었다. 오전에는 비가 오지 않을것처럼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더니 저녁때가 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현조는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고 손을 내밀어 차가운 빗물을 맞았다. 초겨울이라서 그런지 비에 젖은 손이 금새 싸늘하게 얼어버렸다. “ 비가 오네. ” 마치 누군가가 듣고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현조는 빨갛게 언 손을 거둬들이고 창문을 닫았다. 주방으로 가서 커피믹스 두 개를 머그잔에 털어 넣고 물을 끓여서 잔이 넘치도록 따랐다. 머그잔을 들고 다시 베란다로 나가서 멍청히 창 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지현조..... 왜 이러니 진짜. ” 참으려고 눈을 깜빡이는데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울지 말자... 약해지지 말자... ” 콧물을 훌쩍이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하나 밖에 없었다. 현조는 머그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휴지를 뽑아서 얼굴을 대충 닦아냈다. “ 누구세요? ” “ 몰라서 묻냐? ” 불퉁하게 말하는 꼴이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문을 열자 미남이 비에 젖은 생쥐꼴을 하고는 현조를 노려보았다. “ 어제 어디서 잤어? ” “ 뭐? ” “ 어디서 자빠져서 잤길래 밤 열한시에 정실장이 나한테까지 전화를 해? ” “ 효원이가 너한테 전화를 했어? ” “ 그래. ” “ 아는 사람 집에서 잤어. ” “ 누구? ” “ 있어. ” “ 요즘 수상해. 너 나 몰래 애인 만들었냐? ” “ 애인은 무슨... ” “ 수상해 수상해... ” “ 그만 하고 들어와. 우산도 없이 왔냐? 꼴이 참... ” “ 분명히 버스 탈때까지는 멀쩡했단 말이야. 버스에서 내리는데 비가 오더라. ” 미남은 비에 젖은 옷을 대충 툴툴 털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 저녁은? ” “ 아직. ” “ 나가서 먹을래? ” “ 아니. 뭐 시켜먹자. ” 현조가 주방으로 가서 씽크대 문을 열고 음식점 광고지를 쭉 훑어보는데 미남이 다가오더니 현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울었지? ” “ 아니. ” “ 아니긴 뭐가. 눈알이 빨갛구만. ” “ 아니야. ” 미남은 못내 불안한 눈빛을 하고는 현조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 울지마 현조야. ” “ 정말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 현조가 미남을 떼어내며 웃었다. 미남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식탁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 어제 정실장 엄마 만났다면서?" “ 효원이가 그런 소리까지 해? ” “ 그래. 너 걱정되서 미칠려고 하더라. ” “ 난 괜찮아. ” “ 괜찮기는. 얼굴이 영 안됐는데... ” “ 우리 탕수육 시켜서 먹을까? 간짜장도 시키고.. ” “ 에휴... 그래라. 집에 소주도 있냐? ” “ 소주? 소주는 없고 맥주는 있으려나? ” “ 내가 가서 사가지고 올까? ” 미남이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또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 또 누구지? ” 현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 누구세요? ” “ 나다. ” “ 효원이니? ” “ 그래. ” 문을 열자 효원이 뭘 잔뜩 사들고는 서 있었다. “ 어쩐 일이야? ” “ 너 어떤가 싶어서... 누구 와 있니? ” “ 응. 미남이가 왔어. 들어와. ” 효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미남이 주방에서 나오면서 영 반갑지 않은 투로 인사를 건넸다. “ 왔냐? ” “ 그래. 어제 너무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 ” “ 알면 됐다. ” 늘 만나면 틱틱거리는 사이인지라 그다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 그건 뭐야? ” 현조가 효원의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를 보며 묻자 효원이 씩 웃었다. “ 먹을것 좀 사가지고 왔다. 너 보나마다 굶고 있을것 같아서... ” “ 잘됐다. 안그래도 우리 탕수육 시켜먹으려고 했는데... ” 효원이 들고 온 봉지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어디서 잤는지 알고 있을텐데도 효원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 소주는 사 왔냐? ” 미남이 퉁퉁 부은 얼굴로 효원에게 묻자 효원이 고개를 저었다. “ 현조 어제 술 마신것 같아서 술은 안 사가지고 왔는데... ” “ 그래? 그럼 내가 사가지고 와야겠다. ” 미남이 지갑을 챙겨들고 나가버리자 효원이 현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왜? ” “ 괜찮지? ” “ 그럼. ”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서는데 효원이 현조를 잡아세웠다. “ 어제... 강후네 집에서 잤니? ” 현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전화했었다며? ” “ 걱정이 돼서... ” “ 혼자서 술 마시기는 그렇고해서 그냥 박강후한테 전화한거야. ” 효원이 뭔가 말을 할듯하다 고개를 저었다. “ 강후... 어떻게 생각해? ” “ 뭘? ” “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구? ” 현조는 봉지에 든 음식을 꺼내놓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 그냥 친구하기엔 괜찮을것 같다. ” “ 그냥 친구로만? ” “ 응. 그냥 친구로만. ” “ 그럼 됐어. ” 효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며 현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 너까지 그러니? 난 평생 이러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만나는 모든 남자는 그저 친구여야만 되는거야? ’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쓴 말을 되삼키며 현조는 손을 바삐 움직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효원한테 그런 식의 투정을 하는건 너무 뻔뻔한 짓이었다. “ 소주 사가지고 왔다. ” 어느새 미남이 소주를 사가지고 왔는지 검은색 비닐봉지를 자랑스레 흔들었다. “ 몇 병 사가지고 왔어? ” “ 그냥 간단하게 세병. 넌 어제 마셨다니까 나 한병. 그리고 정실장 두 병. 됐지? ” “ 오케이. ” 세 사람은 효원이 사가지고 온 치킨과 탕수육을 펴 놓고는 식탁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현조를 제외한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병을 비우더니 급기야 세 병의 소주를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눈이 또랑또랑하니 말짱해보였다. 현조는 길게 하품을 했다. “ 난 들어가서 잘란다. 니들 둘이 알아서 술 더 사다 마시던지 아니면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던지 해라. ” “ 난 자고간다. ” 미남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조가 문을 닫고 들어간 것을 확인한 미남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효원을 쳐다보았다. “ 정실장. 너 언제까지 현조 붙잡고 있을거냐? ” “ 뭐? ” 갑작스러운 미남의 말에 효원의 인상이 굳어졌다. “ 네가 현조 더 힘들게 하고 있잖아 지금. ” “ 무슨 말이야? ” “ 아니야? 현조가 널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니? 죽은 효상선배 생각만 더 날거야. 근데도 너 현조 네 옆에 끌어다 놓고는 고문하고 있는거잖아. ” “ 말이 좀 심하다. 강미남. ” “ 너 웃겨... 그거 알아? 겉으로는 현조 위하는척 하는데 사실 알고보면 현조 죄책감 이용해서 너 편한대로 현조 부려먹고 있는거잖아. 현조 실력이면 어디가도 홀대받지는 않아. 네가 잡지만 않으면 현조... 더 빨리 상처 씻어버릴수도 있어. ” “ 내가 현조를 더 괴롭히고 있다는 말이야? ” 효원이 미남을 노려보자 미남이 당연한것 아니냐는듯 그를 쳐다보았다. “ 네가 현조 그 회사로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현조 어제 일 같은거 안 당해도 됐어. 네가 현조 옆에서 자꾸만 옛날 상처 들춰내고 있는거야. 이쯤에서 그냥 현조 놔줘라. ” “ 난 현조를 도와주려는 거야. 자꾸 도망친다고 일이 해결되는게 아니잖아. ” “ 웃기지마. 넌 도와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현조를 더 힘들게 하는거야. 언제 현조가 네 부탁 거절한적 있니? 너 제대하고 현조 다시 만나면서 네 부탁이라면 현조 군말없이 다 들어줬잖아. 넌 그런 현조태도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드니? 내 친구지만 현조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매정스럽게 잘라내는 애야. 근데 유독 너한테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너하자는 대로 하잖아. 그게 왜일것 같아? 네가 효상선배 동생이기 때문이야. 효상선배한테 속죄한다는 기분으로 현조 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거야. 너도 알잖아. ” 효원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미남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 진정이 된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현조는... 잊고 싶어해. 효상선배도... 그리고 효상 선배에 관련된 그 어떤것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근데 너 때문에 자꾸 기억하게 되잖아. ” “ 그럼 나보고 현조를 회사에서 쫓아내라는 거야? ” “ 아니. 단순히 회사에서 쫓아내는게 아니라 현조 근처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매정하다 싶게 말하는 미남을 보는 효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 그게 현조를 도와주는 일이니? ” “ 그래. ” 효원은 한참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가보게? ” 심한 말을 많이했다 싶은지 미남이 조금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 가봐야지. 현조... 잘 챙겨줘라. 그리고 네 충고 생각해 볼께. ” “ 그래. 그리고 내 말이 좀 심했는지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봐. 어떤게 진짜 현조를 위하는 일인지... ” 효원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조의 집을 나섰다. 미남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 그런거였나? 내가 현조를 더 괴롭게 한거였나? ’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저 곁에 두고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게 오히려 현조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미남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없이 차에 올라 멍하니 앞을 쳐다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효원아. ” 경주의 기운 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효원은 미소를 지었다. “ 응. ” “ 어디야? ” “ 현조집에 와 있어. ” “ 그래? 나도 그 근처에 있는데... ” “ 그럼 이리로 올래? 내가 술을 마셔서 운전하기가 뭐하다. ” “ 알았어. 한 20분정도 걸릴거야. 괜히 운전하지 말고 그냥 있어. ” “ 그래. ” 효원은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심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미남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었다. 현조가 자살을 기도했을 때 맨 처음 현조를 발견한 것도 미남이었다. 그 이후 미남은 현조의 일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달려들었다. 덕분에 대학때 과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친하게 지내던 미남과 효원의 사이는 서서히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남에게 있어서 효원은 친한 친구를 자살로 몰아가게한 사람의 동생일 뿐이었다. 현조의 절망과 자책감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도 미남이었고, 현조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것 역시 미남이었다. 그런 미남이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비가 그쳤는지 간혹들리던 빗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조를 회사에서 내보내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조가 아버지의 회사에 있는한 언젠가는 다시 어머니와 마주칠 것이고 그럼 현조의 상처는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 효원의 눈에 저 쪽에서 팔짝팔짝 뛰어오는 경주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긴 부츠를 신은 경주의 모습이 참 유쾌해 보였다. 현조는 늘 회색하늘을 떠올리게 하는데 경주는 그에 비하면 뭉게구름이 점점이 떠 있는 짙푸른 가을하늘 같았다. 효원은 차에서 내려 경주에게 다가갔다. “ 나 왔다. ” “ 빨리왔네. ” “ 택시가 금방 잡히더라구. 차키 줘. ” “ 응. ” 효원은 차키를 경주에게 넘겨주고 조수석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 무슨 일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 “ 아냐. ” “ 무슨 일인데 그래? 나한테 얘기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우리 정효원군이 이렇게 심각한 건지. ” 효원은 대답없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경주에게 말을 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만 솔직히 경주에게 의논을 하고 싶었다. “ 경주야. ” “ 응? ” “ 너도 내가 현조를 더 힘들게 하고 있는것 같니? ” 경주가 효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현조씨가 뭐라고 그래? ” “ 아니... 현조 친구가. 내가 현조 옆에 있으면 그 녀석이 더 괴로울거라고 그러길래. ” “ 효원아.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현조씨한테 너무 지극정성이래서 말하기가 뭐하더라구. 괜히 질투한다고 오해할것 같기도 하고. ” “ 그렇구나. ” 효원이 피우던 담배를 창밖으로 휙 던졌다. “ 나만 몰랐네. 바보처럼. ” 경주는 효원의 손을 끌어당겨서 꼬옥 잡았다. “ 네가 현조씨한테 느끼는 감정은 동정심이야. 죽은 형때문에 고통받는 현조씨 보면서 너무 안되보여서 네가 집착하는 걸 수도 있어. ” “ 동정심이라고? ” “ 그래. 동정심. ” 냉정하게 딱 잘라서 말하는 경주를 보며 효원이 말했다. “ 동정심이면... 네 말처럼 단순히 동정심이라면 그냥 불쌍해 보여야 되는거 아니니? 불쌍해 보여서 뭐든 해주고 싶고, 불쌍해 보여서 자꾸만 다독여 주고 싶고... 그게 동정심이잖아. 근데 경주야. 난 현조를 보면 화가 나. 자기 잘못이 아닌걸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고, 우리 어머니한테 멸시를 당하는걸 보면 화가 나서 미칠것 같아. 너무 바보처럼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당하고만 있는게 화가 나. 이건 동정심이 아니잖아. 안그래? “ 경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효원의 손을 놓아버렸다. “ 그럼 사랑하는 거니? ” “ 뭐? ” “ 사랑하는 거냐고. 동정심이 아니면 뭐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거야? ” “ 경주야. 내 말은.... ” “ 정효원. 나 네 약혼녀야. 내가 매일 딴 남자나 힐끔거리고 장난삼아 네 앞에서 까불거리니까 난 속도 없는 사람인 줄 아나본데 나도 여자다. 내 약혼자가 내 앞에서 다른 여자때문에 힘들어 하는거 지켜보는게 기분 좋은 일인줄 아니? ” “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예전부터 현조씨 일이라면 만사 제껴두고 뛰어드는거 나 다 참았다. 어차피 너랑 현조씨는 안되는 사이니까. 근데 요즘들어서 네 태도 나한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했어. 내 앞에서 습관처럼 현조씨 얘기하고 휴일에도 나랑 약속 정하기 전에 현조씨한테 먼저 전화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보다 현조씨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 잘 아는 너... 내가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되니? ” 경주의 원망스러운 말투에 효원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 이제 그만 현조씨 놔줘. 그게 널 위해서도 좋고 현조씨 위해서도 좋아. 물론 날 위해서도... ” 경주는 시동을 걸고는 천천히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반박할 여지를 주지않는 단정적인 경주의 말이 안 그래도 복잡하던 마음속을 더 어지럽혔다. 모두 다 현조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자신은 자꾸만 미련을 쓰면서 현조를 붙들어둘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효원은 자신의 집에 도착한 것도 모르고 있다 경주가 문을 열고 내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경주를 따라 내렸다. “ 내 차 가지고 가라. 여기 택시 잡기도 힘들어. ” “ 됐어. 얼마 걸린다고... 걸어서 10분이면 돼. ” “ 그럼 같이 가자. ” “ 아니. ” 경주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있었다. “ 경주야. ” “ 효원아. 너 이쯤에서 현조씨에 대한 네 감정 한번쯤 돌아봐야 될것 같다. ” “ 내 감정? ” “ 그래. 그리고 나에 대한 감정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네가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누구인지 네 자신한테 물어봐. 그리고 결론이 나면 나한테 연락해. 나 갈팡질팡하는 남자 매력없어. 지금까지는 모른척 했는데 더 이상은 나도 못 참겠다. 그만 가볼께. ”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경주를 효원은 잡지도 못하고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 난 내 감정을 들춰내기가 싫어. 경주야. 자각하고 싶지가 않아. 만약 그 결론이 현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니. ’ 16 “ 형. 일어나서 아침 먹어. 형...” 강후는 자신을 깨우는 인후의 손을 뿌리치고는 이불을 얼굴 위로 덮어버렸다. 어제 새로 단장한 [카오스]를 둘러보던 중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본가로 들어온 것이다. “ 엄마가 일어나래. 할 이야기 있다고. ” “ 잠 좀 자자. 나 새벽에 잠들었어. ” “ 나도 그냥 놔 두고 싶은데 엄마 출근하시기 전에 형 봐야 된다잖아. ” 강후는 무겁게 축 처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인후를 노려보았다. 인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가버렸다. 강후가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가자 장여사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 와서 앉아. ” “ 네. ” 장여사는 소파에 앉는 큰아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잘나 보였다. 생긴거하며 일 추진하는 능력이며 돈에 대한 집착하며 자신을 그대로 빼다박은 강후의 모습이 가면 갈수록 듬직해보였다. “ 무슨 일이세요? ” “ 왜? 엄마가 아들 얼굴 좀 보겠다는데 불만이야? “ 어머니도... 그런 뜻 아니란거 아시잖아요. ” “ 어제 준희한테서 전화 왔더라. ” “ 준희... 가요? ” “ 그래. 도통 너한테서 연락이 없다고 나한테 전화를 했더라. 그동안 많이 바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외국 나가있으면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거 알면서 자주자주 전화 좀 해주지. ” 강후는 대답없이 장여사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현조를 만나면서 솔직히 준희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실상 약혼녀나 다름없는 준희의 존재를 잊다시피 했었다는 사실이 강후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 아직 아현이라는 애 만나고 있니? ” 장여사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 아니에요. 정리했어요. 그리고 많이 바빠서 준희 신경 쓸 틈이 없었어요. ” “ 이제부터라도 신경 좀 써 줘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한테 전화를 다 했을까. ” 강후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장여사의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 강후야. 너희 무슨 문제있니?” “ 네? ” “ 네 태도가 예전같지 않아서 그래. 무슨 문제 있는거야? ” “ .... ” 예전같았으면 별 문제없다고 말했겠지만 지금 강후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현조라는 존재가 어느새 강후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려서인지 준희는 그저 친한 동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내가 정말 준희를 사랑하기는 했던걸까? ’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강후를 보며 장여사는 아들과 준희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준희가 유학을 간 사이 강후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늘 머릿속에는 준희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는데 지금 강후는 다른데 정신이 팔린것 같았다. “ 강후야. 준희 1월에 귀국한단다. ” “ 그래요? ” “ 준희 들어오면 너희 약혼식 올릴 생각이다. ” “ 저... 어머니. ” 약혼식이라는 말에 강후가 장여사를 바라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준희와 약혼하는거 급히 서두르지 않으셨으면 해요. ” “ 왜? ” “ 지금은 말씀 드릴 수 없구요. 그냥 좀 시간을 갖고 싶어요. ” 장여사는 강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려서부터 제 앞가림은 칼같이 하는 강후인지라 어지간한 문제는 모두 제 뜻에 맡겼었다. 둘째인 인후는 아직까지 천방지축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장남인 강후는 그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런 아들이 시간을 달라고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그렇게 해. 나도 굳이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네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준희도 그렇고... 나도 빨리 손주 보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네가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 “ 고맙습니다. 어머니. ” “ 그래도 준희한테는 전화 한번 해 줘라. 너한테 많이 서운한가 보더라. ” “ 네. ” “ 주방에 가면 아주머니가 아침 준비 해놨을거다. 먹고 가. ” “ 어머니는요? ” “ 나야 벌써 먹었지. 난 그만 출근해야 겠다. ” “ 네. 다녀오세요. ” 장여사가 핸드백을 챙겨들고 나가자 강후는 현관까지 따라나가서 배웅을 했다. 강후가 아침을 먹고 본가를 나섰을 때는 이미 열 한시가 넘어있었다. 이제 골치거리인 아현을 만나서 더 이상 들러붙지 못하게 못을 박아야 했다. 휴대폰으로 아현에게 전화를 걸자 몇 번 신호가 가지도 않았는데 아현이 전화를 받았다. “ 저예요 강후씨. ” “ 지금 잠깐 만나. ” “ 어디서요? ” “ 내가 너희 집 근처가서 전화할께. ” “ 네. ” 아현의 집까지 차를 몰아가면서 강후는 현조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뭐하고 있을까? 집에서 늘어져라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곰돌이 푸우를 만나서 놀고 있을까? 현조를 생각하며 피식거리다 보니 어느새 아현의 집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강후는 허브찻집 앞에 차를 세우고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찻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현에게 전화를 걸고 10분 정도 있자 아현이 찬 바람에 얼굴이 빨갛게 얼어서 나타났다. 아현은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는 강후를 보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 왔어요. ” “ 앉아. ” 강후가 담배를 피워물며 고개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자 아현이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현의 이런 수줍음이 좋았다. 강후의 말에 절대 반대란걸 하지 않는 아현을 보며 솔직히 이런 여자라면 떼어내기도 쉬울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자신의 심각한 착오였단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 내가 말했지. 민아현. 나 끈적하게 들러붙는 거 질색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질척거려야 되겠니? ”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강후씨... 나 그냥 강후씨 곁에 있게 해주면 안되요? 강후씨 결혼한 후에도 가끔씩만 나 만나주면 되잖아요. ” 아현의 말에 강후는 기가 막혔다. 아현은 자신에게 두 집 살림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달라 매달리지 않는 대신 자신을 첩으로 삼아달라 말하는 아현을 보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 어제 봤던 그 여자분은 그렇게 못할거예요. 난 많은거 안 바래요. 강후씨가 준희씨란 분하고 결혼을 해도 전 상관없어요. 처음부터 강후씨 아내가 될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강후씨를 조금만 나눠가지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 “ 아현아. 그게 말이 되니? 너 지금 네 스스로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나더러 첩을 두고 살란 말이야? ” “ 안될거 없잖아요. 요즘에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사는 사람들 많아요. ” “ 민아현. 너 제정신이야? ” “ 난 강후씨가 유일한 남자예요. 강후씨 만난 이후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요. 네? ”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아현에게 말했다. “ 오늘 이후로 너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금까지는 내가 너한테 나쁜 짓한거 같아서 그냥 참고 넘어갔는데 오늘 너 보니까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닌것 같다. ” “ 강후씨. ” 아현이 강후의 손을 잡자 강후는 매정스럽게 아현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 너하고 나 끝났어. 모르겠어? ” “ 그 여자분 때문에 그런거라면 내가 그 여자분 만나서 이야기 할께요. 강후씨는 약혼녀도 있으니까 그냥 이쯤에서 물러서라구요. ” 아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강후의 인상이 굳어졌다. “ 누굴 만나? ” “ 어제 그 여자분요. 그 여자때문에 강후씨가 이러는거잖아요. ” “ 하! 민아현. 경고하는데 날뛰지 마. 네가 그 앨 왜 만나? 그리고 약혼녀니 뭐니 그딴 소리 내 앞에서 하지마. 난 누구와도 약혼한 적 없어. ” “ 준희씨란 분하고 결혼 할 거라면서요. ” “ 그건 내 문제야. 넌 상관할 필요없어. 그리고 다시는 나 찾아오지도 말고, 전화 하지도 마. 만약 다시한번 내 집이나 bar로 찾아오면 곱게 안 보내. 알았어? ” 아현을 찻집에 남겨두고 나오는데 끔찍한 덫에 걸린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집요하게 자신을 얽어맬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강후는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며 찻집 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현이 그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게 보였다. 순간 어느 스타의 집에 소리없이 들어와 있다던 여자 스토커가 떠올랐다. 강후는 아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 “ 싫다니까요. ” “ 몰라요. ” “ 여보세요? 여보세요? ” 미남이 혼자서 떽떽거리는 걸 들으며 현조는 잠에서 깨어났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 누군데 그래? ” 현조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묻자 미남이 벌게진 얼굴로 현조를 바라보았다. “ 그게...있잖아. 그 불량품. ” “ 누구? ” “ 그 사람 있잖아. 전에 클럽에서 봤던... ” 현조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미남이 버벅거리며 변명을 했다. “ 전에 우연히 우리 학교에서 마주쳤었어. 근데 그 이후로 툭하면 전화질이네. ” “ 네 미모에 뻑 갔나 보다. ” “ 그러게. 이래서 너무 이쁜 것도 죄라니까. 어째 이놈의 인기는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피곤해서 이거... ” 현조는 잘난 척하며 으시대는 미남을 한심스럽게 쳐다봐 주고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현조가 세수를 하고 나오자 미남이 주방에서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 뭐해? ” “ 아침 먹어야지. ” “ 나 된장찌개 끓여 줘,. ” “ 된장찌개? 그러지 뭐. ” 미남표 특제 된장찌개를 놓고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현조의 휴대폰이 울렸다. 입에 밥을 가득 채운 채 전화를 받았다. “ 어브시여” “.... ” “ 어브시여? ” “ 하다하다 이젠 바보 흉내까지 내냐? ” 강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조는 입 안에 있던 밥을 씹지도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 밥 먹고 있었어. ” “ 그래? 오후에 뭐해? ” “ 글쎄... 별로... ” “ 그럼 준비하고 있어. 세 시쯤에 데리러 갈께. ” “ 친구랑 같이 있는데... ” “ 친구? 누구? 혹시 전에 클럽에서 봤던 그 푸우? ” “ 푸우? ” 푸우란 말에 현조는 주방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남이 볼이 미어터져라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곰돌이 푸우를 닮은것 같기도 했다. “ 후후후..그래. 그 친구 ” “ 같이 나와. 가까운데 드라이브 가던지 아니면 영화를 보던지 하자. ” “ 글쎄... ” “ 이미 볼 장 다 본 사람들끼리 괜히 신경전 벌이지 말자. ” “ 에효... 알았다. ” “ 이따 보자. ”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식탁의자에 앉는데 푸우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누구야? ” “ 응? 불량품 1호. ” “ 엥? 그 사람은 또 왜? ” “ 친구 먹자고 했거든. ” “ 언제? ” “ 무신날 각중에. ” “ 이런이런... ” 미남이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따가 같이 나가자. ” “ 싫다. 나도 약속있어. ” “ 누구랑? ” “ 호호호... 찬민씨랑... ” 미남이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길지도 않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눈동자에 하트가 수 십개는 반짝거리는것 같았다. “ 그 헤어디자이너? 언제 그렇게 발전한 거야? ” “ 사실 발전이랄 것도 없다. 전에 한번 만나서 밥 먹고 오늘이 두번째야. ” “ 잘 될 것 같냐? ” “ 흐흐흐.... 열심히 꼬시고 있지. ” “ 그럼 넌 찬민씨 열심히 꼬득여 보라. ” “ 오케이. 근데 그 불량품... 괜찮디? ” “ 응? ” “ 하드웨어는 완벽하고 소프트웨어 쪽이 어떠냐구? ” “ 그럭저럭... ” 친구 앞에서 남자 얘기를 하는게 영 어색해서 시선을 피하는데 미남이 현조의 어깨를 톡톡쳤다. “ 현조야. 난 네가 남자 만나는거. 무조건 찬성이야. 알지? ” “ 그냥 친구 먹자 그런거라니까. ” “ 친구하다가 자기하다가 당신하다가 영감하면 되지... 알면서. 쯧 ” “ 아 몰라몰라. ” 미남이 자꾸 추근대자 현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거실로 가서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버렸다. 조금있자 미남이 설거지를 모두 끝내고는 현조의 옆에 누웠다. “ 우리...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 현조~ ” “ 그러게요. 미남씨. ”“ 우리 찐하게 키스바리나 한번 땡길까? ”“ 부끄럽사와요. ” “ 이리와. 현조. 내 뜨거운 입술을 받아라. ” 미남이 진짜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다가오자 현조는 기겁을 해서는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 현조야. ” 갑자기 미남이 진지한 목소리로 현조를 불렀다. “ 왜? ” “ 어제 정실장한테 너 그만 놔주라고 말했다. ” “ .... ” 현조는 말없이 미남을 쳐다보기만 했다. “ 그게 너한테 좋을거라고... 그만 너 놔주라고 했어. 내가 잘못한 거니? ” 현조는 똑바로 드러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도배한지가 오래되어서인지 흰색이던 벽지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 아니... 나도 이쯤에서 그만 둘려고 했어. 효원이가 나 때문에 많이 곤란했을거야. 그만 둬야지. ” “ 현조야. 난 정실장 걱정해서 그런 말 한거 아니야. ” “ 알아. 네 마음 어떤지... 안 그래도 이달 말쯤에 사표내려고 했어. 좀 쉬고 싶기도 하고... ” “ 생각 잘했다. 대구나 내려갔다 와. 엄마 본지도 한참 됐잖아. ” “ 그럴까? ” 그러고보니 대구에 내려갔다 온지도 일년이 다 되어갔다. 구정때 잠깐 내려갔다 이번 추석에는 어찌하다보니 내려가 보질 못했었다. 가끔 전화를 하면 엄마는 늘 그만 대구로 내려와서 살자고 말을 했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근래 들어서 자주하게 됐다. 하지만 대구에 가면 미남이 없는데... 그리고 강후도... 어느새 강후를 자신의 인생에 들여놔버렸는지 강후를 못보게 되면 많이 허전할것 같았다. 잘난 박강후는 얼마 안 있어 지현조란 여자를 잊어버리겠지만 아마 현조는 오래도록 박강후란 남자를 기억하게 될것 같았다. “ 우리 목욕탕 가자. ” “ 목욕탕? ”“ 그래. 가서 때빼고 광내서 오늘은 기필코 찬민씨를 덮치고 말것이야. 움하하하 ” 목젖이 보이도록 유쾌하게 웃는 미남이 부러웠다. 나도 남자를 생각하며 저렇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미남에게 이끌려서 간 목욕탕에서 한시간 반동안 온탕이다 냉탕이다 사우나다 들락날락 거렸더니 나중에는 멀미까지 나려고 했다. “ 미남아 그만 나가자. 나 멀미난다. ” “ 그래? 알았어. ” 집에 돌아와서 화장을 하고 무슨 옷을 입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나와. 아파트 앞이야. ” “ 응. ” 미남과 함께 아파트를 나서는 현조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16편 끝. 외 전 [ 미남 vs 상훈 vs 찬민 ] 버스에서 내려 옷가게를 지나면서 미남은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쩍 쳐다보았다. 베이지색 반코트에 무릎길이의 스커트를 입은 자신에게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며 미남은 생긋 웃었다. 찬민과 만나기로 한 서점이 가까워오자 미남은 핸드백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들고는 다시 한번 얼굴을 점검했다. 서점에 들어서자 저쪽 에세이집 코너에 큰 키의 찬민이 서 있는게 보였다. 160이 겨우 넘는 자신과 비교해서 찬민은 너무 키가 큰 것 같기도 했다. 찬민의 키가 185정도 되니 자신이 7센티 힐을 신는다해도 키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미남이 다가오자 찬민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 “ 미안해요. 조금 늦었죠? ” “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우리 어디로 갈까요? ” “ 음... 영화 보실래요? ” 미남의 말에 찬민이 난감한듯 고개를 저었다. “ 전 영화보는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 그럼 노래방 가실래요? ” “ 전 노래도 잘 못해요. ” 미남은 찬민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번에 만났을때는 그냥 간단하게 식사만 하고 헤어져서 둘 사이의 공통점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나고 보니 같이 할만한게 없었다. “ 그럼 찬민씨는 뭐하고 싶으세요? ”“ 사실 오늘 유명헤어샾에서 헤어쇼가 있어요. 거기 같이 안 가볼래요? ” “ 헤어쇼요? ” 미남은 잠시 망설이다 따로 할일도 없어서 그냥 찬민을 따라 헤어쇼를 하는 미용실로 향했다. 연예인들이 많이 출입한다고 소문이 난 미용실인지라 내부시설도 고급스러워 보였고 일하고 있는 헤어디자이너들도 하나같이 삐까번쩍해 보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헤어쇼가 시작된 이후였다. 유명한 헤어디자이너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곧이어 이곳에서 일하는 스텝들이 모두들 한껏 요란한 헤어스타일을 연출하고 있었다. 찬민이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는데 반해 미남은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지루하게 헤어쇼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다리도 아프고 결정적으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헤어디자이너들의 과장된 몸짓이 우스꽝스러워보였다. “ 저 찬민씨. 이거 언제 끝나요? ” “ 글쎄요. 아마 한시간 반정도? ” “ 하... 한시간 반요? ” 미남은 속으로 절망적인 한숨을 삼키고는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한 상황에서 벗어날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찬민이야 자신의 직업이 헤어디자이너니 충분히 흥미롭겠지만 미남에게는 그저 재미없는 쇼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먼저 가겠다고 하자니 찬민에게 미안하고, 그대로 지켜보자니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 전화받으세요. 전화왔어요. 전화받으세요.... ] 자신의 휴대폰이 울리자 미남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 네. ” “ 나 상훈이다. ” 미남은 얼른 찬민의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한껏 줄여서 대답을 했다. “ 왜요? ” “ 어디냐? ” “ 알아서 뭐하게요? ” “ 나 지금 심심하거든. ” “ 근데 어쩌라구요? ” “ 참 말귀 못 알아먹네. 같이 놀자고... ” “ 바빠요. ” “ 바쁘기는 개뿔이... ” “ 이것봐요. ” 미남이 흥분해서 소리를 꽥 지르자 앞에 서 있던 여자들과 헤어디자이너들이 미남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미남은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끊어요 빨리. ” “ 같이 놀자. 호빵. ” “ 왜 자꾸 호빵이래요? ”“ 그럼 호빵을 호빵이라고 부르지 붕어빵이라고 부르냐? ” 미남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휴대폰 폴더를 닫아버렸다. “ 누구예요? ” 찬민이 미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냥 친구예요. ” “ 아- ” 찬민의 관심은 금세 헤어쇼로 옮겨져 버렸다. ‘ 차라리 그 불량품이나 만날 걸... 아우- 심심해. ’ 미남의 말을 들은것처럼 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 네. ” “ 어디있냐? ” “ 압구정요. ” “ 그래? 나도 압구정인데. 이리로 와라. ” “ .... ” 미남은 찬민의 눈치를 슬쩍 봤다. 하지만 찬민은 미남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순간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미남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 알았어. 어디야? ” “ 얘가 갑자기 웬 반말? 호빵? 왜 그래? ” “ 장난 그만하고 어디야? ” “ 어라... 어쨌든 여기 [ 페퍼민트 ] 다. 빨리와라. ” “ 알았어. ” 미남은 휴대폰을 핸드백에 챙겨넣고는 찬민의 팔을 툭툭쳤다. “ 찬민씨. 미안한데 고등학교때 친구가 오래간만에 서울왔다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먼저 가봐야 될것 같은데... ” “ 그래요? 그럼 어쩔수 없죠. 전 이거 마저보고 갈테니까 미남씨 먼저가세요. ” “ 네. ” 미남이 헤어샾을 나오는데도 찬민은 배웅도 하지 않았다. “ 아이씨- 뭐야. 매너도 없네. ” 처음엔 생글생글 웃으며 여자를 잘 배려해 줄것 같았는데 오늘보니 매너가 꽝이었다. 미남은 투덜대며 상훈이 있다는 [ 페퍼민트 ]로 향했다. 미남이 [ 페퍼민트 ]에 도착하자 상훈이 한 손을 번쩍 들고는 그녀를 불렀다. “ 왔냐? ” 미남은 그를 흘낏 쏘아보고는 상훈에게 다가갔다. “ 왜 자꾸 전화하고 그래요? ” 불퉁대는 미남을 보며 상훈이 씨익 웃었다. “ 호빵. 나 안보고 싶었냐? ” “ 우씨- 자꾸 호빵호빵 거리지 말라니까. ” “ 좋잖아. 촌실박한 것이 딱 너네. ” 미남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뒤돌아서자 상훈이 얼른 일어나서 미남을 잡았다. “ 호빵! 그렇다고 이렇게 가면 오빠가 서운하지. ” “ 휴우- 너 도대체 몇 살이야? ” “ 나? 스물 여덟. 넌? ” “ 나... 나도 스물 여덟. ” “ 어허 수상한데. 민증 까봐. ” “ 스물 여덟 맞다니까. ” “ 그러니까 확인해 보자고. ” “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한 살 어리게 돼 있단 말이야. ”“ 거짓말. 너 일곱살때 학교 들어갔지? ” “ 이씨. 나 1월 2일생이란 말이야. 삼일만 먼저 태어났어도 나도 스물 여덟이야. ” “ 너 1월 2일이 생일이야? 난 12월 28일이 생일인데... 그래도 내가 오빠는 오빠지? ” “ 꼴랑 5일 가지고 잘난 척은... ” “ 왜 이러셔. 해가 바뀌었는데... ” 상훈이 빙글거리며 약을 올리자 미남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 나 갈래. ” “ 잠깐. 나 심심하다니까. ”“ 혼자서 놀아. 아니면 똑같은 불량품이랑 놀든지. ” “ 강후? 걔 까마귀 만나러 갔는데? ” “ 맞다. 그랬지. ” “ 너도 알고 있었냐? 강후가 까마귀 만나는거. ” “ 어. ” “ 말리지 그랬냐? ” 상훈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담배를 피워물며 말했다. “ 왜 말려? ” 미남이 상훈의 맞은 편에 앉으며 의아한 듯이 묻자 상훈이 담배를 빼들고는 연기를 내뱉았다. “ 강후... 너무 잘나서 까마귀 같은 애랑 안 어울려. ” “ 웃기지 마라. 현조가 어때서? 내가 보기엔 현조가 아까워. 왜 이러셔... ” “ 아이고 친구라고 편들기는.... 솔직히 강후가 뭐가 아쉬워서 까마귀 같은 애를 만나냐? 얼굴 잘 생겼지, 집안 빵빵하지, 돈 잘 벌지, 인간성... 그건 좀 아니다. 어쨌든 강후가 아깝지. ” “ 그럼 현조는 뭐가 아쉬워서 그런 불량품을 만나냐? 모델처럼 몸매 쭉 빠져, 얼굴 그만하면 괜찮아, 일 잘해, 똑똑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성 하나는 끝내준다. 그런 현조가 뭐가 아쉬워서? ” 미남이 만만찮게 대꾸를 하자 상훈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미남을 쳐다보았다. “ 어이구. 호빵도 화내니까 무섭네. ” “ 이씨- 한번만 더 호빵이라고 부르면 껍질을 확 베껴서 육포를 만들어 버린다. ” “ 하하하... ” 상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툭 건들이며 금세 파르르 하는게 집적거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 너 애인 없지? ” 상훈이 다 안다는 듯이 말하자 미남이 발끈해서는 말했다. “ 있어. 아까도 애인이랑 있다가 온거야. ” “ 거짓말을 해도... 야! 미쳤다고 애인이랑 있다가 딴 남자한테 뽀르르 쫓아오냐? ” “ 그건... ” 미남이 대꾸하지 못하고 버벅이자 상훈이 담배를 비벼끄며 혀를 끌끌찼다. “ 그 외모에 성질도 지랄같은데 어떻게 애인이 있겠냐? 내가 좀 아깝지만 뭐 이 한 몸 희생해서 인류를 구한다 생각하고 내가 네 애인 해줄께. ” “ 뭐... 뭐? 애인? ” “ 그래. 애인. 사랑 애, 사람 인, 사랑하는 사람. 영어로 러버, 달링, 몰라? ” “ 됐다그래. 누가 누구 애인이야? ” “ 아이고.. 좋으면 좋다그래. 뭘 빼고 그래? ” “ 싫어 싫어. ” “ 이제는 앙탈까지... 그래 귀엽다 귀여워. ” “ 이씨 진짜... ” 미남이 열이 나서 방방 뛰고 있는데 레스토랑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한 쪽에 놓여 있던 피아노 앞에 한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 잠시만요. 제가 오늘 제 여자친구한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거든요. 잘은 못치지만 피아노 연주를 할 생각인데 듣기 괴로우시더라도 참아주세요. ” 빨갛게 홍조 띈 얼굴로 남자가 말을 하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음이 어긋나기도 하고 간혹 멈추기도 하면서 남자는 최선을 다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남자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남자와 같이 온 듯한 여자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 아~ 부럽다. 프로포즈도 멋있게 하네. ” 조금 전까지 투닥이던 것도 잊어버리고 미남이 그 여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자, 상훈이 물컵에 손가락을 넣어 적시고는 미남에게 톡톡 튕겼다. “ 아. 차거워. 뭐야? ” “ 부럽냐? ” “ 그래 부럽다 어쩔래? 남자가 최소한 저 정도의 프로포즈는 해줘야 되는데.... 쯧쯧... ” 미남이 한심스럽게 상훈을 바라보자 상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왜? ” “ 피아노 쳐 달라며? ” “ 그래서 피아노를 치겠다고? 너 피아노 칠 줄이나 알아? ” “ 너 내가 멋있게 연주해주면 나랑 사귀는 거다. 알았지? ” “ 그건 좀... ” “ 뭐야 빨리 대답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쪽팔리게... ”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떡 일어서 있는 상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 그... 그럼 생각해 볼께. ” “ 약속한 거다. ” “ 그래. ” 지가 쳐봐야 얼마나 잘 칠까 싶어서 대뜸 대답을 했는데 상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상훈은 피아노 앞에서 건반을 한번 쭉 훑어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 오늘 제가 저기 앉아있는 동글동글한 여자한테 사귀자고 말했습니다. 근데 잘난 것도 없으면서 튕기네요. 그래서 피아노로 뻑가게 해줄 생각인데 여러분이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평상시 행적으로 볼때 나중에 발뼘을 하고도 남을 여자라서... ” “ 저희가 증인 해 드릴께요. ” 저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젊은 남녀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 그럼 두 분만 믿고 연주 시작하겠습니다. 그보다 신청곡 있으시면 받겠습니다. 단 클레식은 사절입니다. 뉴에이지 음악으로 신청해 주십시오. ” 상훈의 말에 증인을 해 주겠다던 남녀가 큰소리로 ‘ thanksgiving ’이라고 외쳤다. 상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남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지만 상훈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미남은 입을 떡 벌리고는 상훈의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상훈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듯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레스토랑을 가득 채우자 별 관심없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상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상훈은 악보도 없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미소를 살짝 머금고 피아노를 치는 상훈의 옆모습이 갑자기 멋있어 보였다. “ 짜식.... 멋있네... ” 미남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상훈이 연주를 마치고 일어서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앵콜을 외쳤다. 상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두곡 더 연주하고 싶은데, 저기 앉아있는 여자가 아무래도 도망을 갈것 같아서요.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상훈이 미남을 쳐다보며 테이블로 걸어오자 미남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얼른 돌려버렸다. “ 이제 됐지? 우리 애인하는거다. ” “ 그래도... ” “ 어허. 어찌 아녀자가 한 입으로 두 말을... 그나저나 이름이 뭐냐? ” “ 나? 강미남. ” “ 뭐? 미남? 이름 진짜 촌스럽다. 미남이 뭐냐? 미남이... 미녀도 아니고.. ” “ 우리 할아버지가 거금 5만원주고 지은 이름이야. ” “ 아이고... 5만원은 무슨... 복덕방 할아버지가 지어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 몰라. 너랑 애인 안해. ” 미남이 씩씩거리며 일어서자 상훈이 웃으며 미남을 잡았다. “ 성질은... 이쁘다 이름. 특이하고 한번 들으면 절대 안 잊겠네. 강미남... 좋았어. 내 이름은 윤상훈. 잊지마라 . ” “ 지 이름도 별로 이쁘지도 않구만. ” “ 어쨌든 우리 이제 사귀기 시작한 거니까 기념으로 반지 사러 가자. ” “ 뭐? 무슨 반지? ” “ 커플링 사러가자고. 모르냐? 커플링. ” “ 오늘 사귀기 시작했는데 커플링을 벌써 맞춰? ” “ 먹고 살기 바쁜 시대에 만난 시간이 무슨 상관이냐? 서로 좋으면 됐지. 가자. ” 미남은 상훈에게 이끌려 근처 쥬얼리점에서 커플링을 맞춰 끼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 왜? 다이아몬드로 해줘? ” “ 아니. 다이아몬드는 무슨... 근데 나 반지 안 끼는데... 영양사들 귀걸이나 반지 착용 안해. ” “ 그래? 그럼 목걸이는? ” “ 그건 괜찮아. 옷안에 넣으면 되니까.” “ 아가씨. 여기 체인하나 줘요. ” 점원아가씨가 가느다란 체인을 내밀자 상훈은 미남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체인에 걸었다. 그리고는 미남의 목에 척하니 걸어버렸다. “ 됐지? 이거 빼지 마라. 비싼거다. ” “ 어. ” 미남이 반쯤은 멍해져서 대답을 하자 상훈이 씩 웃었다. “ 나가자. ” “ 응. ” 상훈의 손에 이끌려 쥬얼리점을 나오면서 미남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몇 시간 전에는 찬민과 역사를 만들어 보겠다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지금은 상훈과 커플링까지 맞추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 집 어디야? ” “ 송파 우성아파트. ” “ 가자. 데려다 줄께. ” 상훈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오면서 미남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풀어서 돌려줘야할지 아니면 모른척 받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상훈의 차에 타고 어느새 자신의 아파트까지 도착해 버렸다. “ 근데.. 아무래도 우리는 좀 그렇지 않나? ” 미남이 영 어색한 듯이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자 상훈이 미남을 보며 말했다. “ 목걸이 빼기만 해봐... 그리고 작별키스는 여기다 해라. ” 상훈이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뺨을 내밀자 미남이 기겁을 하고는 상체를 뒤로 쭉 뺐다. “ 뭐하는 짓이야? ” “ 애인끼리 작별키스하겠다는데 뭐? ” “ 진짜 별종이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 ” 미남이 기가 막혀서 자신을 바라보자 상훈이 잘난척하며 말했다. “ 하긴 나같이 멋있는 놈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있겠냐? 복받은줄 알아. 강미남이 언제 나같이 멋지구리한 놈을 만나보겠냐? 로또 당첨됐다 생각해라. 내가 좀 아깝지만 뭐 어쩌겠냐. 하늘의 뜻이 널 구원하라고 날 보낸것 같으니까 이 한 몸 희생해야지. 내려. 나 가볼란다. ” 반쯤은 내쫓기다시피 해서 차에서 내리는데 상훈이 따라서 내렸다. “ 내일 전화할께. 자기야. 잘 자. 내 꿈꾸고... ” “ 재수없어. ” “ 뭐라고? 굿나잇 키스? 좋아. 해주지. 이리온. ” “ 아악! 미쳐미쳐. ” 미남이 기겁을 해서는 쌩하니 돌아서 뛰어가버리자 상훈이 큰소리로 외쳤다. “ 잘 자. 자기야. ” 느끼한 상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남은 몸서리를 치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상훈은 자신의 객기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차에 올랐다. “ 아씨- 별 미친 짓을 다한다. 윤상훈. ” 상훈은 휘파람을 불며 차를 출발시켰다. 외전 끝... 17 “ 친구는 왜 그냥 가? ” “ 약속있대. ” “ 그래? ” 현조가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후 강후는 차를 출발시켰다. “ 듣고 싶은 음악있어? ” “ 응? ” “ 듣고 싶은 음악있으면 여기 찾아봐. 어지간한 건 다 있을거야. ” 강후가 내미는 두툼한 CD케이스를 열어보니 백 장은 됨직한 CD들이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현조는 그 중에서 소지로의 오카리나 연주CD를 강후에게 내밀었다. “ 너도 잡식성이니? ” “ 잡식성? ” “ CD들이 다 제각각 이어서... ” “ 아- 그냥 뭐 듣기 편한 건 다 좋아해. 넌? ” “ 나도 그래. ” 강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CD를 플레이어에 넣었다.잔잔한 오카리나의 음률이 조금 흐린 겨울 하늘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현조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스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걷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꽤나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 잠은 잘 잤어? ” “ 어. ” “ 효원이 녀석 연락 안 왔어? ” “ 어제 집에 왔더라. ” 맥빠진 현조의 말에 강후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 뭐라 그래? ” “ 별 말 없었어. 너랑 친구 먹기로 했다니까 그냥 그러라더라. ” “ 내가 언제 너랑 친구 먹는대?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데... ” “ 그럼 뭐하러 같이 놀러가자고 그러냐? 친구 할 것도 아니면서. ” “ 남녀사이에 친구는 무슨... ” “ 관두자. 내가 너랑 말다툼해서 뭐가 남겠냐? ” 강후의 말 끝에 묻어난 묘한 뉘앙스를 눈치챈 현조가 서둘러 말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은 차가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말없이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런 어색한 침묵이 버거웠는지 현조가 행선지를 물어왔다. “ 어디 가는거야? ” “ 스트레스 해소하러. ” “ 어디? ” “ 가보면 알아. ” 차로 조금 더 달리자 [ ○○ 종합사격장 ]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보였다. “ 총 쏘러 가는거야? ” “ 응. 스트레스 해소에는 딱이야. ” 사격장에 들어서서 주차요원의 안내를 받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물었다. “ 총 쏴본 적 없지? ” “ 당연하지. 내가 군대 갔다 온 것도 아니고. ” “ 놀이공원 같은데도 안 가봤어? ” “ 아니. ” “ 그럼 초급자 코스로 가자. ” 강후를 따라서 <초급자용 클레이 사격장> 이라고 쓰여진 곳으로 가니 몇몇 사람들이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비를 갖추고 사격대 앞에 서자 강후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 25발이 1 라운드거든.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테니까 이따가 너도 해봐. ”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현조는 귀마개를 했다. “ 아! ” 강후의 신호에 피전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연이어 터지는 총성과 피전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니 의외로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25발을 모두 쏜 강후가 현조를 돌아보았다. 강후는 거의 모든 피전을 격파한 것 같았다. 아마 취미생활이 사격인 모양이다. “ 어렵지 않아. 내가 가르쳐 줄테니까 이리와 봐. ” 현조가 쭈뼛거리며 다가서자 강후는 현조의 어깨에 총을 올려놓았다. “ 으... 뭐가 이렇게 무거워? ” “ 자꾸 하다보면 무게는 별로 신경 안쓰여. 개머리판을 뺨에 고정시키고, 고개는 기울이지 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반쯤 내쉰 다음에 숨을 멈추고 조준해서 쏘면 돼. 어렵지 않아. 해봐. ” “ 못할 것 같은데... ” 현조가 총의 무게에 눌려 주눅 든 목소리로 말하자 강후가 웃었다. “ 왜 이러시나? 용감한 지현조가. 잘하면 내가 선물줄께. 25발중에 3발만 맞추면 네가 하자는거 다 한다. ” “ 으... 하나도 못 맞추겠다. ” “ 군소리 말고. 자 시작해. ” 현조는 강후를 한 번 쳐다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신호를 했다. “ 아! ” 첫번째 총성이 울리자 현조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피전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고, 총의 반동에 현조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소리가 장난 아니게 컸다. “ 와! ” “ 반동이 좀 세지? 여러 번 하면 괜찮아. 다시 한번 해봐. ” 현조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 아! ” 25발을 모두 쏠 때까지 현조는 달랑 두 개의 피전만을 격파할 수 있었다. 25발을 모두 쏘고 총을 내려놓자 어깨도 아프고 결정적으로 개머리판이 닿았던 뺨이 얼얼했다. “ 으으으... ” 현조가 손으로 뺨을 문지르자 강후가 웃으며 현조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 많이 아파? 어깨도 아프지? ” 강후의 손길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현조가 슬쩍 얼굴을 돌렸다. “ 그러네. 근데 재미있다. 또 할 수 있나? ” “ 그럼. 하고 싶은 만큼 해. ” “ 좋았어. 오늘 기필코 열개는 맞추고 간다. ” 용기백배해서 현조는 다시 총을 장전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그 다음 2라운드를 모두 끝냈을 때 현조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 한 개 모자라네. 아홉발 맞췄어. ” “ 아깝다. ” “ 그래도 처음치고는 잘했어. 그만 나가자. ” 장비를 다시 반납하고 사격장을 나오던 현조가 어깨를 감싸쥐며 신음소리를 냈다. “ 멍 들었나 보다. 되게 아프네. ” “ 어디 봐. ” 강후가 현조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현조가 기겁을 하며 강후의 손을 뿌리쳤다. “ 어딜 봐? ” “ 아마 멍들었을거야. 이따가 파스 사줄께. 붙여. ” “ 돈들여 사서 고생했네. ” “ 그래도 속은 시원해졌지? ” “ 그렇긴 하다. 고맙다. 덕분에 생전 처음 총도 쏴보고... ” “ 나랑 다니면 재미있어. 다음에는 수영하러 갈래? ” “ 물에 들어가자고? 싫어. 나 물 싫어해. ” “ 그럼 스키장가자. 곧 있으면 스키장 개장하니까. ” “ 그러든지. ”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들어오자 이미 저녁때가 지나 있었다. “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 “ 혹시 막창 파는데 아니? ” “ 막창? ” “ 응. 여기는 없나? 대구는 많은데... ” “ 곱창은 있지. 그거라도 먹을래? ” “ 그러자. ” 두 사람은 원조곱창집이라고 해서 꽤나 유명해진 한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는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들어차 있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매콤한 곱창전골에 공기밥을 한 그릇씩 비우고 나자 추위에 얼어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곱창집을 나와서 두 사람은 때이른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해놓은 작은 커피전문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이리와봐. ” 마주앉아 있던 강후가 현조를 불렀다. “ 왜? 뭐 묻었어? ” 현조가 얼굴을 쓰윽 내밀자 강후가 조심스럽게 현조의 뺨을 어루만졌다. “ 조금 부었다. ” “ 아- 괜찮아. 집에 가서 얼음찜질하고 자면 돼. ” “ 이제 괜찮아? ” “ 뭐가? ” “ 기분 괜찮냐고. ” “ 어. 사격을 해서 그런가 속에 꽉 차 있던게 조금 풀린것 같다. 고맙다 박강후. ” 강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현조를 바라보는 강후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 갈수록 너란 애를 모르겠다. 처음 봤을 때는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더니, 또 어떤 때는 상처입은 새마냥 처량해보이고, 오늘은 또 어린애처럼 신나있고... ” “ 후후... 내가 원래 카멜레온 같거든. ” 현조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었다. “ 나 어떻게 생각해? ” “ 응? ” 갑작스럽게 강후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나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냐구? ” “ 불량품이란 얘기는 했었고, 근데 지금보니까 그런대로 괜찮네. ” “ 그런대로 괜찮다? ” 강후는 씁쓸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한참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강후가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현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나 너 좋아한다. ” “ 뭐? ” 현조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자 강후가 다시 한번 말했다. “ 너 좋아한다고. 많이. ” “ 왜 그래? 어색하게... ” 현조가 애써 시선을 피하자 강후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몸을 앞으로 쓰윽 내밀었다. “ 현조야. 나랑 진지하게 만나보자. 어때? ” “ .... ” 현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난.... 누구 사귀고 싶은 마음 없어. ” “ 왜? ” “ 그냥... 난 그저 혼자 있는게 좋아. 누구 챙겨줄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거 생각해 본 적 없어. ” “ 그럼 네가 적응할 시간을 줄께. 넌 그냥 부담없이 만나. 너한테 많은거 안 바래. 그냥 편한 친구처럼 그렇게 만나보자. 그러다 보면 뭔가 달라지겠지. ” “ 왜 나니? ” “ 응? ” “ 왜 하필 나냐구? 전에 봤던 그 여자도 있고 너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설텐데, 왜 하필 나같은 애한테 사귀자고 하는거야? ” “ 난 나 좋다고 매달리는 여자들 취미없어. 너무 쉽게 가질 수 있는건 그만큼 빨리 질리거든. 그런 의미에서 넌 희소성의 가치가 엄청 크다고 봐. ” “ 결국 특이해서 좋아한다? ” 현조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까지 살면서 너처럼 날 자극하는 여자는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래서 너 잡아볼려구.” “ 쉽지 않을텐데... ” “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만족감도 큰 법이지. ” 현조는 강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박강후란 남자를 받아들이는게 잘하는 짓인지 명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강후는 지금껏 보아오던 남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나르시스트이기는 해도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있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그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는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받아들이기엔 강후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너무 부담이 되었다. 그녀와는 달리 강후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다 나중에 상처를 받게 되는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솔직히 강후가 진지하게 여자를 만나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장난삼아, 잠시 유희를 즐기자고 여자를 만나는 건 상상이 되도 강후가 여자때문에 고민을 하고 아파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도 강후처럼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강후의 제의를 두번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만큼 강후는 남자로서의 매력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고민에 빠져 있던 현조는 최초의 모험을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마음을 다 주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상처가 크지는 않을것이다. 절대 박강후란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으리라. 그저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식기 시작할 때쯤 먼저 손을 털고 떠나버리면 그녀에게도 데미지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그럼 이거 하나만 약속하자. ” 현조가 나름대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 강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 만약 어느 한 쪽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싫증을 느낀다면 두 말 없이 헤어질것. 또 두 사람이 만나는 중에 삼각관계같은 짜증나는 상황 만들지 않기. 어때? ” “ 이유불문하고? ” “ 무조건. ” 한숨을 내쉬는 강후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다. 현조와 새롭게 시작을 하려면 아현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준희 문제는 더 심각했다. 지금의 감정상태로는 현조와 얼마나 오래 갈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꼭 가지고 싶은 여자를 만났는데 그런 사소한(?) 문제로 뒷걸음질을 치는 건 못난 남자들이나 할 짓이었다. “ 오케이. 인정. ” “ 좋아. 한번 저질러 보자. 어떻게 되겠지. ” 농담섞인 현조의 말이 조금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 참... 또 하나. ” “ 뭐? ” “ 불필요한 스킨쉽은 삼가할 것. ” “ 야. 그런게 어디있어? 애인끼리 스킨쉽은 당연한 거지. ” “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박강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솔직히 애틋한 감정이 있어서 사귀어보자는거 아니잖아. 반은 호기심이고 반은 장난이야. 안그래? ” “ 그래서? ” “ 괜히 나중에 서로 발목 잡히는 결과는 미연에 방지해야지 않겠냐? 그건 너도 바라는 일이잖아? ”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현조에게 솔직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반쯤은 장난으로 억지로 관계를 끌어다 붙이고 있는게 사실이니까. “ 만약 두 사람이 동의했을 때는 제외할 것.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잖아? ”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강후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왠지 뭔가 밑지는 장사를 하는것 같은데 꼬투리를 잡자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현조는 반은 불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그런 사태가 있을까 싶다마는.... ” “ 후후... 그럼 계약이 성사된건가? ” “ 그렇다고 봐야지. ” “ 그럼 기념으로 술 한잔 해야지. 가자. ” “ 오케이. ” 두 사람은 근처 호프집으로 가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알딸딸할때까지 술을 마셨다. 강후는 끊임없이 현조를 웃게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웃게 만드는 강후의 능력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늘 우울하기만 했는데 강후에게서는 그늘이란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오래 못가겠다. 너랑 나. 너무 차이가 나서... 잠시동안 즐기는건 몰라도.. ’ 현조는 마음속에서 싹트는 강후에 대한 감정을 애써 내리 눌렀다. 아직은 강후에 대해 어떤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도 박강후란 남자때문에 마음 한 구석을 비우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리운전을 불러 운전을 시키고 현조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두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 들어가. ” “ 응. ” “ 아까 사준 파스 잘 붙이고 자. 내일되면 더 아플거야. ” “ 알았어. 그리고 고맙다. 신경써줘서. ” “ 별 말씀을. ” “ 가봐. 기다리잖아. ” “ 그래. 너도 들어가. ” 현조가 뒤돌아서자 강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 현조야. 우리 잘해보자. ” 현조는 뒤돌아서서 코을 찡긋하며 웃었다. “ 글쎄... 그건 네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달린것 같은데. ” 다시 한번 강후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현조는 총총히 사라졌다. 강후는 현조가 사라진 곳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게. 박강후! 너나 잘 해라. 착한 애 괜히 상처주지 말고.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강후는 다시 차에 올랐다. 18 [ 드르륵...드르륵...] 진동으로 맞춰놓은 휴대폰이 베개 밑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현조는 책을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에 불량품? 이라고 찍힌걸 보니 강후인 모양이다. “ 왜? ” [ 전화 받는 매너가 영 아니네. ] “ 왜 시비야? ” [ 네 서방님. 이렇게 받아야 되는거 아냐? ] “ 끊는다. ” [ 야! 무슨 말을 못하겠어. ]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 [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 “ 히히히.... 짜식. 내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그렇게 그립디? ” [ 꾀꼬리들이 단체로 감기걸렸냐? 그렇게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오게? ] “ 아님말고 ” [ 뭐하고 있었어? ] “ 망원경 들고 옆 아파트 훔쳐보고 있었지. ” [ 에? ] “ 잘 생긴 남자가 살거든. ” [ 몇 호야? ] “ 왜? ” [ 내가 사버릴려고. ] “ 킥킥킥... ” 현조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밤 열두시도 넘은 시간에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 나 안보고 싶어? ] “ 아니. ” [ 난 너 보고 싶다. ] “ 닭살이야. ” [ 우리 못 본지 삼일이나 지났어. ] “ 벌써? ” [ 그래. 네가 퇴근하고 클럽으로 놀러와. ] “ 귀찮아. ” [ ... ] 강후가 갑자기 말이 없어져 버렸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강후가 말이 없자 현조는 자신이 혹시 말실수를 했나 괜히 신경이 쓰였다. [ 너 쫄았지? ] “ 내가 왜? ” [ 내가 갑자기 조용히 있으니까. ] “ 조금. ” [ 나 보러 오라는데 귀찮다고 말하는거 기분나빠. ] “ 난 원래 솔직한 사람이야. 거짓말 안해. ” [ 잘났다. 내일도 바빠? ] “ 응. ” [ 니네 회사일 너 혼자 다 하냐? ] “ 그렇지. 내가 워낙 고급 인력이잖아. ” [ 효원이 녀석 월급은 많이 주니? ] “ 대충. ” 현조는 눈을 감았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강후의 목소리는 평상시와는 달리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 역시 평상시보다 더 허스키해져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 네 목소리 듣기 좋다. ] “ 그래? ” [ 응. 처음 봤을 때도 네 목소리가 참 인상깊었거든. ] “ 왜? ” [ 허스키하잖아. 네 외모랑 잘 어울려. ] “ 여자 목소리는 꾀꼬리 같아야 되는거 아닌가? ” [ 너한테는 안 어울려. 넌 여전사 분위기 잖아. ] “ 그렇긴 하네. ” [ 잠 안와? ] “ 조금. ” [ 이야기하다 잠오면 그냥 자. ] “ 그건 안되지. 전화하는 사람한테 예의가 아니잖아. ” [ 괜찮아. ] “ 계속 이야기해. ” [ 무슨 이야기 할까? ] “ 음.... 네 여성편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 전화기 너머로 강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현조 역시 피식 웃었다. [ 안돼. 오늘 밤안에 이야기 못 끝내. ] “ 전에 봤던 그 여자는 정리했냐? ” [ 누구? ] “ 전에 니네 빌라 앞에서... ” [ 아- 정리했어. 정리할거라고 했잖아. ] “ 믿어도 되냐? ” [ 오호- 지현조. 이거 질투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 질투는 무슨... “ [ 신경 쓰지마. 이제 마주칠 일 없을거야. ] “ 박강후. ” [ 왜? ] “ 우린 9회말이야. ” [ 뭐? ] “ 야구에서 9회말 공격이 끝인 것처럼 우린 벼랑 끝에서 시작한 거라구. ” [ 무슨 뜻이야? ] 유쾌하던 강후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굳어졌다. 현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 너랑 나... 다른 사람들처럼 1회부터 차근차근 밟아오진 않았잖아. 야구도 9회말 공격이 제일 스릴있듯이 우린 그 스릴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인 거같애. 일종의 게임 비슷한 걸 하고 있단 느낌이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 “ 인정할건 인정하자. 그러니까 게임을 조금이라도 길게 끌고가려면 서로 조심하자. ” [ 나한테 경고하는 거야? ] “ 나보다는 네가 위험부담이 크지. 아무래도... ” [ 휴우- ] 강후에게서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 알았어. ] “ 의외인데... 잘난 박강후가 이렇게 쉽게 인정을 하고. ” [ 나도 내 주제 파악은 한다. ] “ 지금은 노아웃이야. 카운터 자꾸 늘리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 ” [ 넌 얼른 끝나길 바라는 것처럼 말한다? ] “ 아니.... 그건 아니야. ” [ 그럼 다행이고. ] “ 끊자. 나 잘거야. ” [ 그래 쉬어라. 잘 자. ] “ 응. 너도 잘자. ” [ 그래. ] 전화기를 내려놓고 현조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서 읽던 책을 다시 폈다. 하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후와 이런 식의 만남을 이어가는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후의 말처럼 어쩌면 빨리 게임이 끝나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강후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강후에게 점점 더 많은걸 기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집착이 생길것이다. 그것때문에 상처를 받는 건 결국 현조 자신일 수 밖에 없었다. “ 지현조. 주제 파악해라. 네가 달리 까마귀냐... 재수 옴 붙은 여자잖아. 박강후 같은 애가 뭐가 아쉬워서 너같은 여잘 좋아하겠냐. 장난은 장난으로 끝내자.... ” 씁쓸한 자조의 말을 되뇌이며 현조는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베란다에서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는 쉽게 잠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현조의 말이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 9회말이라... ” 몇 번의 실수로 영원히 지현조란 여자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현조식으로 경고한 것이리라. 현조는 그들의 관계가 단지 게임처럼 끝이 훤히 보이는 관계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지현조란 여자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는 현조에 대한 갈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가 지금껏 만나왔던 여자들처럼 현조를 생각했다면 오히려 조금 전 현조의 말에 기뻐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강후는 기쁘기는 커녕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리자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는 쌩쌩거리며 지나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장난으로 시작한 관계였는데, 현조가 둘의 사이를 장난이라 치부하는걸 들으면 화가 났다. “ 만약 게임이라면 절대 질 수 없지. ” 하지만 현조의 말처럼 그에게는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내내 자신의 눈 앞을 알짱거리는 아현도 그렇고 무엇보다 준희문제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준희라는 존재가 떠오르자 강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두달 가량 있으면 준희가 귀국할 것이다. 만약 그전에 현조에게 싫증이 난다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그럴 가망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현조란 여자에 대한 궁금증과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게 두 달이란 시간 안에 모조리 사라질리는 없을 것이다. 효원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할지.... 현조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효원이란 존재도 그에게는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효원이 무슨 이유로 현조를 그렇게 싸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 관심도 끊어줬으면 하는게 강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느 누구와도 현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지현조란 여자 곁에는 오직 자신만이 남겨지길 바랬다. “ 준희... 현조.... 지현조... ”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 아현은 강후의 집 앞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강후가 그녀에게 마지막이란 말을 하고 난 후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아현은 몰래 그의 뒤를 밟기도 하고 그의 클럽에서 그가 나타나길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강후는 그녀를 보고는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았을 뿐, 말을 건네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철저히 자신을 무시하는 강후가 원망스럽기보다는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여자에게 화가 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후를 미행해서 그 여자의 집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강후는 자신에게 그 여자를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그 여자를 만나서 떼어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그 여자에게 차근차근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준다면 아마 그 여자도 이해를 하고 물러서리라. 추위에 언 발을 동동 구르며 빌라 입구를 쳐다보고 있는데 강후가 빌라를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그는 짙은 회색 반코트에 검은색 진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강후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후는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모든 걸 다 갖춘 사람들만이 풍기는 오만한 자신감이 강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에게 있어 강후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그를 완전히 뺏기는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의 곁에서 평생 그를 바라보고 살 수만 있다면 그깟 형식뿐인 결혼따위는 무시할 수도 있었다. 1년동안 강후와 보냈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깨우쳐 준다면 그는 다시 돌아오리라. 강후가 차에 올라 주차장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아현은 빌라 입구에 세워져 있던 택시에 올랐다. “ 아저씨.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 “ 네? ” “ 제 남편인데 요즘 바람을 피우는것 같아서요. ” “ 그래요? 저런. 이렇게 미인인 아내를 두고서.. 쯧쯧... 걱정하지 마쇼.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잘 따라가 주리다. ” 오 십줄에 들어선 것같은 능글맞게 생긴 택시기사가 아현을 보며 웃자 아현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강후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그를 미행하면서 아현은 정말 자신이 강후의 아내가 된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만약 그와 결혼을 한다면 매일 천국에서 사는 기분일 것이다. 미행을 한지 30분쯤 지났을 때 강후가 어느 낡은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는게 보였다. “ 아저씨. 여기 세워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아현은 뒷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강후의 차를 훔쳐보았다. 잠시 후 아파트 안에서 여자가 나와서 강후의 차로 걸어가는게 보였다. 여자가 다가오자 강후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 강후씨 나한테는 한번도 저런 호의 베풀지 않았었는데... ’ 새삼 강후의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던 지난 시간들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강후는 절대 여자에게 저런 식의 아부를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늘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세우는게 강후에게는 어울렸다. 강후의 차가 출발하자 택시기사가 아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 색시. 따라 갈까? ” “ 아뇨. 됐어요. ” 아현은 지갑을 꺼내어 택시비를 치루고는 차에서 내렸다. 택시가 가버리고 나자 아현은 여자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를 한심스럽게 훑어보았다. 분명 여자는 강후의 돈을 보고 그에게 접근을 한 것이리라. 이제 여자의 집을 알았으니 나중에 강후가 없을 때 그 여자를 만나서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아현은 다시 한번 아파트를 쳐다보고는 이내 돌아섰다. ==================================================================================== “ 일요일인데 꼭 출근을 해야 되냐? ” “ 이번 달 안에 정리해야 되서 바쁘다고 했잖아. 그러게 뭐하러 오니? 집에서 잠이나 자라니까. ” “ 이번 주는 내내 못 봤잖아. 일요일 이래서 어디 드라이브라도 갈려고 했더니... ” 강후는 현조가 출근을 하는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저번 일요일 클레이 사격장을 함께 다녀온 이후 두 사람은 매일 전화를 주고 받으며 초보연인 흉내를 내왔다. 현조는 하루에 한번, 어쩌다 보면 이틀에 한 번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강후는 하루에도 서너번씩 전화를 해서 뭘하는지, 밥은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는지, 일이 많이 힘든건 아닌지 세심하게 챙겼다. 유난을 떠는 강후에게 남자가 쪼잔하다느니, 의처증 증세가 보인다느니 잔소리를 하면서도 현조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오는걸 느꼈다. 효상이 죽은 이후로는 남자와 이런 식의 감정교류를 해본 적이 없었다. 미남과는 친구로 느끼는 편안함이 있었지만 강후는 그것과는 다른 뭔가 은밀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 나 회사 데려다 주고 넌 가서 자. 새벽에 들어갔다면서 뭐하러 부지런을 떠냐? 나 그냥 버스타고 가면 된다니까. ” “ 네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예 회사까지 쫓아갈려고 그런다. ” “ 가도 재미없어. 일하느라 바빠서 너랑 못 놀아줘.” “ 그래도 쫓아낼 생각은 없나보다. 가라는 소리 더 안하는거 보니까. ” “ 흠... 연인이잖냐. 비록 허울뿐이지만. ” 현조의 말에 강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 넌 나랑 만나는게 장난같냐? ” “ 무슨 소리야? ” 갑자기 냉담해진 강후의 목소리에 현조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 너 늘 그러잖아. 장난이라는둥, 얼마 못갈거라는둥, 그런 소리하면 기분 나쁘지 않냐? ” “ 난 사실을 말하는것 뿐이야. ” “ 애초에 한계를 정해놓고 만나는 거... 피곤하다. 그러지 말자.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둬. 안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으면서 어떻게 진도가 나가길 바라니? ” “ 그럼 너 나 사랑하냐? ” “ 뭐? ” “ 나 사랑하는 거냐고? ” “ 그건... ” “ 거봐. 너 대답 못하지? 우린 그런 사이야.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건 맞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이라는 말 함부로 꺼내기엔 우리 사이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생각 안드니? 나도 그렇지만 너도 우리가 결혼까지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잖아. 우린 그냥 편하게 만나는 친구이상 연인이하의 어지중간한 사이야. 그거 잊지마라. ” “ 사랑한다고 말하는게 그렇게 중요하니? ” “ 아니. 중요하진 않아. 하지만 필요하긴 하지. 적어도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건 상대방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거잖아.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거야. 하지만 난 너 완벽하게 믿지 못하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 “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사실이야. 불변이 아니라 가변이라고. ” “ 시간이 지나보면 알겠지. ” 현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강후는 현조의 감정이 처음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신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게 현조였고, 잠자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사람 역시 현조였다. 그게 사랑이라고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은 넘어섰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 너무 심각한 사이가 되지는 말자. 난 너 행복하게 해줄 자신없어. 박강후. ” “ 네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지. ” 회사까지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금은 긴장된 공기가 차 안을 가득채웠다. 강후가 회사 앞에 차를 세우자 현조가 가방을 챙겨들고는 내렸다. “ 어쩔래? 그냥 갈래? ” 강후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감안해서인지 현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있자. 너 일하는 동안 난 책이나 보고 있지 뭐. ” 강후가 뒷좌석에서 책 한권을 꺼내들고는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프로그램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서 일을 하고 있던 경민이 놀란 눈빛으로 현조를 바라보았다. “ 지대리님... 누구? ” “ 박강후씨다. 내 친구. ” “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지대리님 부사수 경민입니다. ” “ 네. 박강후입니다. ”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사이 현조는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 저 쪽에 소파있어. 거기서 책 읽어. ” “ 알았어. ” “ 커피 뽑아 줄까? ” “ 아니. 난 괜찮아. ” “ 그럼 책봐라. 난 일 시작해야 겠다. ” 현조는 강후가 자리를 잡고 앉는 걸 보며 도면을 펼쳐들었다. 이번 달 말에 사표를 내려면 지금 맡고 있는 업체의 일을 모두 마무리 해야만 했다. 거기다 지금까지 자신이 주로 해왔던 다른 업체의 양산물들도 경민에게 모두 넘겨주어야 했기에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다. 그녀 역시 강후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일이 워낙 밀리다 보니 평일에는 아예 시간을 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 경민아. 시림메디칼 도면 모아놓은거하고 일성산업 보온박스 도면들 좀 가지고 와. ” “ 네. ” 경민이 도면을 내밀자 현조는 양산물과 단품들을 일일이 구분하기 시작했다. 양산물은 앞으로도 자주 작업을 해야할 품목이기에 따로 보관을 하고 수주들어올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단품들은 단품리스트에 철을 해서 꽂았다. “ 이건 양산작업이 많은 도면이고, 또 이건 주로 단품들이니까 따로 보관해. 그리고 다른 업체것도 내가 알아서 정리를 하겠지만, 너도 시간 날때마다 미리미리 체크해 보고 나한테 물어볼거 있으면 내가 있을때 물어봐. 나중에 전화해서 난리치지 말고. ” “ 근데 정말 지대리님 그만 둘 거예요? ” “ 응. ” “ 왜요? ” “ 네 뒤치닥거리하다 지쳐서... 아마 얼마 전에도 누가 대량불량을 터트렸지. 금액이 얼마더라? ” “ 그거야 저쪽 잘못도 있었잖아요. ” “ 알아. 아니까 니가 지금까지 생명부지하고 있는거잖아. ” “ 어휴- 이럴때보면 지대리님 너무 팍팍해요. 으윽-” “ 다 너 잘 되라고 그런다. 이제 곧 있으면 네 밑으로 신참들 줄줄이 들어올텐데, 지금처럼 버벅대면 어지간히 좋겠다. ” 현조의 말에 경민의 불평이 쏙 들어가버렸다. 강후는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책에서 눈을 뗐다. 현조는 머리를 질끈 묶고는 검은색 니트 차림으로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서 경민이라는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은 한쪽 다리를 달랑거리며 심각하게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프로다워 보였다. 머리를 묶고 있어서인지 목이 유난히 길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현조는 악세사리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그 흔한 목걸이도... ‘ 목걸이라도 하나 사줄까보다. ’ 사실 연인이 되자 말은 했으면서도 선물이라든가 아니면 특별히 뭔가를 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전화를 하면 그나마 전과는 달리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빼고는 별반 달라진 것도 없었다. 현조가 시큰둥해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조는 경민과 얘기가 끝난건지 다시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쥐고는 복잡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강후는 현조에게 걸어가서 어깨너머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온통 울긋불긋한 모니터 안에 눈 돌아가게 복잡한 설계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 이게 뭔지 알아? ” 강후가 슬쩍 넘겨다 보고 있는걸 아는지 현조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 아니. 뭐냐 이게? ” “ 보온박스. ” “ 그래? 그런 기계도 있냐? ” “ 음. ” 현조의 두 손이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 개의 도면이 열렸다 펴졌다 하더니 이내 3차원으로 된 기계 하나가 모니터에 떴다. “ 이거야. 이걸 다 만들면 이런 모양이 돼. ” “ 대단하네. 이걸 어떻게 다 만드냐? ” “ 난 판금쪽만 하면되니까 별로 어려운 것도 없어. 내부설계쪽이 어렵지 판금쪽은 별로 어렵지 않아. ” 현조는 별거아니라고 말했지만 강후는 현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가 존경스러워 질려고 한다. 우와. 우리 현조 대단하네. ” “ 후후... 별 말씀을... ” 두 사람이 킥킥거리며 웃는데 프로그램실 문이 열리고 효원이 들어섰다. “ 현조야. 먹을거... 어? ” 효원은 웃으며 말을 하다 강후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오랜만이다. ” 강후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효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어쩐 일이냐? 나 회사로 올거 알고 있었어? ” 강후가 당연히 자신을 만나러 온거라 생각한 효원의 말에 강후는 현조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현조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 아니. 현조하고 같이 온거야. 현조가 출근해야 된다고 해서. ” “ 그래? ” 효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강후와 현조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더니 강후를 보며 말했다. “ 나랑 얘기 좀 하자. 박강후. ” “ 그래. 현조야 나 효원이랑 얘기 좀 하고 올테니까 일하고 있어. 들어올때 먹을 것 좀 사다줄까? ” “ 아니. 괜찮아. ” 현조는 의혹이 가득한 효원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효원 앞에서 강후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게 꼭 큰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효원이 먼저 프로그램실을 빠져나가자 강후가 현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는 효원을 따라서 나갔다. 말없이 앞장서서 걷던 효원이 강후를 향해 휙 돌아섰다. “ 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 “ 나가서 이야기 하자. 여기서 긴 이야기 할 수 없잖아. ” “ 사연이 긴 이야기인가 보지? ” 효원이 빈정거리며 말하자 강후는 대답없이 효원을 지나쳐서 회사를 빠져나왔다. 길 건너편에 [빈센트]라는 커피숖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효원이 성마르게 물었다. “ 어떻게 된거야? ” “ 뭘? ” “ 현조한테 무슨 짓을 한거냐고? ” “ 무슨 짓? ” “ 그래. 아니면 현조가 왜 너랑 같이 있어? ”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 나 걔랑 사귄다. ” “ 박강후. 장난이 심하다. ” “ 장난 아냐. ” “ 장난이 아니면? 준희는 어떻게 하고 현조한테 집적거리는거야? ” “ 너야말로 말이 심하다 정효원. 집적거리다니? ” “ 기분나쁘냐? 그럼 행동을 똑바로 했어야지. ” “ 내 행동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 “ 너 준희랑 결혼할 생각 아니었냐? 근데 왜 현조까지 끌어들여? ” “ 준희는.... 솔직히 그냥 동생같은 느낌일 뿐이야. ” “ 참 편리하네. 얼마 전까지는 결혼 할 생각이던 여자가 이제는 겨우 동생처럼 느껴진다? ” 효원이 빈정거리며 말하자 강후 역시 싸늘하게 웃었다. “ 현조를 만나기 전에는 솔직히 준희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 “ 현조도 아냐? 네가 내 사촌동생이랑 결혼까지 할 생각을 했었다는거? ” “ 아니. ” 강후는 피고있던 담배를 비벼끄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솔직히 나도 아직 이런 내 마음 정확히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근데 현조 장난으로 만나는건 아니야.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좋아져. ” “ 더 복잡해지기 전에 끝내.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넌 현조를 완전히 망가뜨릴 짓을 하고 있는거란 말이야. ”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효원의 태도가 영 마뜩찮았다. 효원은 한참동안 뭔가를 생각하듯 망설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우리 형. 효상이 형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 자세히 모르지? ” “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 강후가 의아하게 되묻자 효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햇다. “ 효상이 형 학교 MT갔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어. 자기 과 MT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아리MT도 아니었어. 형이 사귀던 여자친구 MT가는거 따라갔다가 그렇게 된거야. 그 여자 친 구가... MT 도중에 집에 일이 생겨서 형 오토바이 타고 같이 기차역으로 가다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때문에 사고가 났어. 형은 헬멧을 쓰고 있지 않던 상태라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병원에 옮겨진 후에 하루만에 죽었어. 근데 그 여자친구는 팔만 다치고 멀쩡하게 살아났지. 형 헬멧을 그 여자애가 쓰고 있었거든. ” 강후는 효원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오토바이 사고라는 말에 왠지 모를 불안이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얼마 전 현조가 술에 만취했던 날 현조의 학교 선배라는 여자도 저 비슷한 얘기를 했었던 기억이 났다. “ 그 여자... 혹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 맞니? ” 의심이 가득한 강후의 말에 효원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형 여자친구... 현조였어. 칠년 전에 난 사고에서 살아남은 형 여자친구가 네가 지금 데리고 장난치려고 하는 그 애라고. 알겠냐? ” 강후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일부러 얽어매도 이렇게 완벽하게 얽어매지는 못할 것 같았다. 현조의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웠는지 , 그리고 왜 현조가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 많이 힘들었겠네. 현조. ” 한참만에 흘러나온 강후의 목소리는 꽉 잠겨있었다. “ 그래.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현조 힘들었어. 그 원인을 제공한 건 내 형의 죽음이고, 내 어머니는 아직까지 현조를 원망해. 그리고 현조는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살고 있고. 현조는 나를 비롯해서 우리 식구들한테 늘 죄의식을 갖고 있어. 그런 현조가 네가 내 사촌동생과 결혼 얘기까지 오가던 사이라는 걸 알면 어떨 것 같니? 현조가 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 “ 자살? ” “ 그래. 현조... 형 죽고 일년후에 수면제 먹고 죽을려고 했었어. 근데 운이 좋아서 살아난거야. ” 효원의 격앙된 목소리가 강후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후는 충격으로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살이라...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들었을 현조를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 그만둬 강후야. 현조는 네가 데리고 장난치면 안되는 사람이야. 걔 상처가 너무 깊어서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었을거다. 네 장난질에 현조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지 생각해봐. 넌 단순히 장난으로 시작했겠지만 현조는 너 때문에 또 한번 죄인이 되는거라고.” “ 알았어. 알았다고. ” 강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더 이상 효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 나 먼저 가볼게. 그리고... 현조한테는 나랑 준희 사이 말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정리할 때 까지 기다려줘. ” “ 빨리 정리해. 시간 오래끌면 끌수록 현조만 더 비참해지는거야. ” “... ” 강후는 대답없이 커피숖을 나와서 현조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차를 타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며칠만 더 빨리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조한테 연인이 되자는 말을 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 휴우- 미치겠다. ” 한숨을 들이쉬다 내쉬다 하며 강후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이대로 현조를 포기하는게 서로를 위해서 좋은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자꾸만 미련을 쓰고 있었다. “ 내가 널 포기하는게 맞겠지.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겠지. ” 하지만 그는 현조를 놔주고 싶지가 않았다. 처음 현조를 본 그 순간부터 그에게 현조는 탐나는 보물같은 것이었다. 이제 겨우 그 보물을 손에 넣고는 좋아하고 있었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렇게 짜증스럽게 엮겨버린것이다.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탁탁 두드렸다. 이대로 가버리면 현조는 아마 강후가 벌써부터 싫증을 내서 떠나버린거라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며칠동안 연락을 끊어버리면 현조는 쉽게 자신을 포기해버리리라. 자신역시 한 며칠 상실감에 괴로워하다보면 어느새 다시 예전의 박강후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 그만두자... 애초에 이건 미친 짓이었어. ’ 강후는 생각을 굳히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채 5분도 가지 못하고 강후는 다시 핸들을 돌려버렸다. 이런 식으로 현조를 놔줄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현조에 대해 이제 조금 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맥없이 놔줘버리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같았다. “ 갈때까지 가보자... ” 미친 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현조를 보내버리고 후회하는것 보다는 차라리 붙잡고 있다 같이 망가져버리리라. 강후가 다시 현조의 회사에 도착했을 때 현조는 효원과 함께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현조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가리자 효원이 현조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 있었다. “ 나쁜 새끼. ” 자신에게는 핵폭탄을 투하해놓고 현조 옆에서 웃고 있는 꼴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강후는 차문을 열고는 두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현조가 먼저 강후를 알아보고는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집에 일이 있어서 갔다며? ” 오지랖 넓은 효원이 그럴듯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 별 일 아니라는 전화가 와서 되돌아 왔어. 일은 끝났어? ” “ 아니. 두 시간 정도 걸릴것 같은데... ” “ 그럼 들어가서 일해. 난 효원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 강후가 효원을 노려보자 효원 역시 강후를 쏘아보았다. “ 그래라. 난 들어간다. ” 현조가 비어버린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들어가자 효원이 강후를 보며 이를 갈았다. “ 야. 너 어쩌려고 그래? ” “ 넌 신경 끊어. ” “ 신경을 끊어? 이 자식이 진짜. 현조는 나한테 제일 친한 친구고, 준희는 내 사촌동생이야. 그런데 나더러 신경을 끊으라고? ” “ 정말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냐? ” “ 무슨 소리야? ” “ 단순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냐고? 내가 보기엔 순수한 우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것 같은데... ” “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 ” “ 그럼 간섭하지 마. 네가 나설 일 아니야. ” “ 박강후. 너 이것밖에 안되는 놈이었어? 두 여자 잡아두고 뭘 어쩌자는 거야? ” “ 정리할 거야. ” “ 정리해? 누구를 ?” “ ... ” 강후는 말없이 담배를 피워물었다.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강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준희... 정리 할거다. ” 19 “ 누구를 정리해? ” “ 준희. ” 단호한 강후의 말에 효원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겨우 몇 달 만나지도 않은 여자때문에 결혼까지 생각했던 준희를 정리하겠다는 강후의 말에 기가막혔다. “ 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현조가 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현조 안 그래도 죄인처럼 살고 있는데, 네가 준희 차버리고 자기한테 온거 알면 현조가 얼굴 들고 살수 있을 것 같아?" “ 네 말... 상당히 거슬리는데... 현조가 왜 죄인이야? 사고였고, 운이 나빠서 효상이형은 죽은거고, 현조는 살아남은거야. 너야말로 현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거 아냐? 말로는 위해준다 그러면서 사실상 너도 현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거 아니냐고. ” “ 그런 적 없어. ” “ 그러면 네가 간섭할 일도 없겠네. 네가 현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흥분할 일도 없잖아. 남녀사이 만나다 보면 헤어질 수도 있는거고, 만난 시간이 중요한거 아니잖아. 현조를 만난 후에 준희에 대한 내 감정을 확인한 거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거 아냐? ” “ 너 편리한 대로 끌어다 붙이지 마. 준희는 네가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 준희 유학가기 전에 그런 태도를 보여줬고 준희는 돌아오면 너랑 결혼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근데 너란 놈은 그새 다른 여자 만나서 준희 차버릴 생각이나 하고. 박강후 진짜 나쁜 놈이다. 아냐? ” “ 상관없어. 내가 나쁜 놈이건 어쨌건 난 내가 결정한 대로 할거야. 그리고 경고하는데, 나와 너희 집안관계 함부로 현조한테 말하지 마. 때가 되면 내가 이야기 할 거야. 혹시라도 중간에서 네가 우리 방해할 목적으로 나와 준희 사이 현조한테 말한다면 너 가만안둬. 알았어? ” “ 너 미쳤어. 알아? 박강후 너 미친거라고. ” “ 그럴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게 뭐? ” “ 나 너 그렇게 막 나가는거 지켜볼 수 없어. ” “ 안 지켜보면? ” 강후의 눈이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하지만 효원 역시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 현조한테 말 할거다. ” “ 그러기만 해. 너 죽여버릴테니까. ” “ ... ” 갈수록 감정이 격해지자 효원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대로라면 강후 성격에 더 막나갈것 같았다. “ 휴우- 현조 힘들게 하지 말자. 강후야. ” “ 힘들게 안해. 그리고 현조에 대한 네 태도 단순한 우정이라고 보기엔 과해. 너야말로 경주씨 힘들게 하지말고 네 약혼녀나 잘 챙겨. 현조는 내가 챙길 테니까. ” 효원이 뭐라 반박할 말을 찾는 동안 강후는 휑하니 프로그램실로 들어가 버렸다.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회로가 뒤죽박죽 엉켜버린것 같았다. 경주와도 냉전중인데 이젠 현조와 강후까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됐을때 현조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조가 강후에게 마음을 연것 같아 화가났다. 현조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여놓이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현조를 강후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게 더 솔직한 심정이리라.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강후도 그렇지만... 난 도대체 뭘 원하는거냐구... ’ 효원은 프로그램실로 들어가 볼까 하다 그냥 차를 몰고 회사를 나와버렸다. 정작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결론 맺지 못했으면서 강후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건 주제 넘은 짓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현조가 강후와 준희 사이를 알게 되면 현조 성격에 그냥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강후가 다행스럽게 정신을 차려서 지금이라도 물러나 준다면 손쉽게 정리가 되겠지만 강후의 강경한 태도를 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현조의 태도도 의외였다. 일하는데 강후를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강후에게 말하는 태도도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강후와 현조에게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생긴거란 예감이 들었다. 만약 현조도 강후를 좋아하고 있는거라면? 현조에게 강후를 놓아주라고 말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무슨 권리로? 단지 준희가 자신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강후 말처럼 남녀사이 십년을 만났건 이십년을 만났건 결혼하지 않은 이상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고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준희 사촌오빠라는 이유로 현조에게 강후를 보내주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이기심이었다. 자신 역시 마음속으로 현조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강후가 현조를 향해 마음을 키워가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어떻게 그럴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던 것이다. 미남도, 경주도, 그리고 강후까지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현조를 보내주기 싫어하는건 어쩌면 경주의 말처럼 자신이 현조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하긴 그는 경주보다는 현조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쩌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면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했고 길을 지니다가도 여자들이 예쁜 옷을 입고 가면 경주를 먼저 떠올리는게 아니라 현조를 떠올렸다. “ 결국은 그런 거였나? 정효원. 네가 현조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 어제까지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되어 있던 생활이 오늘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 “ 다 끝난거야? ” “ 응. 근데 효원이는 그냥 갔어? 안 보이네. ” “ 일이 있었나 보지 뭐. 가자. ” 현조가 일을 마친듯 컴퓨터를 끄자 강후는 현조의 손을 잡고는 회사를 빠져나왔다. 가슴속에서 수만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지만 강후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걱정보다 현조가 겪어내야 했을 그 기나긴 고통에 마음이 아팠다. 왜 현조가 그렇게 음울해 보였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 “ 어디로? ” “ 가까운 외곽도로나 돌고 오자. ” “ 그래. ” 현조는 일하느라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는 의자에 축 늘어져있었다. “ 현조야. ” “ 응? ” “ 많이 힘들었니? ” “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힘들지. 일하는데 힘 안들면 그게 이상한거 아냐? ” 현조가 당연한걸 물어보냐는 듯 강후를 보며 웃었다. 전에는 현조가 웃는게 그냥 좋아보였는데 지금은 마음이 아팠다. 속은 썩어문드러져 있으면서 저렇게 웃고 있는게 안쓰럽게 여겨졌다. “ 내가 잘해 줄게.” “ 뭐야.... 이 느끼한 멘트는? 어제 뭐 잘못 먹었냐? ” “ 아니.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어서. ” “ 그래라. 나야 영광이지. ” 자신의 말을 우스개소리로 받아들이는 현조의 장난섞인 태도에 강후는 현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효원의 말처럼 현조를 끌어들이지 않는게 그녀를 위해서도 나을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막상 현조를 보내겠다 생각을 하자 그는 현조에 대해 강한 집착이 생겨버렸다. 그냥 놔주기엔 너무 탐나는 보물이었다. “ 너 이상하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 “ 내가? ” “ 그래. ” 강후가 평상시와는 달리 조용하게 있자 현조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너 음악 들으라고. 너 음악 들을때 시끄럽게 떠드는거 싫다며. ” “ 그렇긴 하지만. ” “ 움직이는 쥬크박스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즐겨라. ” “ 오케이. 오늘 박강후 쪼오금 마음에 드네. ” 현조는 다시 눈을 감고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효원이 말도 없이 가버린게 영 마음에 걸렸다. 강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죄책감과 더불어 효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효원의 형은 죽게 만들어 놓고 딴 남자랑 놀아나고 있다니... “ 현조야. ” “ 또 왜? ” “ 회사 그만둬라. ” “ 그럴거야. 이번 달 말까지 하고. ” “ 아니... 당장 그만둬. ” “ 뭐? ” 현조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강후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강후의 얼굴이 꽤나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강후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그는 평상시와는 달리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정실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 “ 왜? ” “ 네 표정이 너무 굳어있다. ” “ 아냐... ” “ 그럼 왜 그래? ” 강후는 대답없이 담배를 꺼내서 물었다. 현조가 시거잭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자 강후가 씨익 웃었다. “ 넌 담배 안피워? ” “ 나? 끊었어. 자꾸 피우니까 버릇되서... ” “ 잘했다. 근데 담배 끊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라던데... ” “ 왜?" “ 독하다고. 얼마나 사람이 독하면 담배를 끊냐... 뭐 이런소리지. ” “ 후후후.. ” 현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천근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 강후야... 나 좀 잘께... ” “ 응? ” “ 피곤해. ” “ 그래... 자. ” 현조가 의자를 조금 뒤로 젖혀서 눕자 강후는 음악소리를 줄였다. 현조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자 강후는 차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 현조야. 내가 너한테 몹쓸짓을 하는것 같다. 그러면 안되는데... 너 정말 놓아주기 싫다. ’ 자고 있는 현조를 바라보는 강후의 눈에 애잔한 기운이 번졌다. 강후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스산한 겨울의 거리를 내달렸다. ============================================================================= “ 현조야...현조야... ” “ 어? ” 현조는 강후가 부르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 왜? ” “ 커피 마셔. ” 언제 커피를 사가지고 왔는지 강후가 take-out점의 커피를 내밀었다. “ 여기가 어디야? ” “ 공원. 너 조용하게 자라고 여기로 왔어. ” “ 벌써 어두워졌네. ” “ 겨울이잖아. ” “ 언제 커피 사러 갔었어? ” “ 조금 전에. ” “ 난 그것도 모르고 잤네. ” “ 너무 피곤하게 자서 일부러 안깨웠어. ” “ 음... ” 현조는 기지개를 켜고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거품이 보글거리는 카푸치노를 마시자 몸이 노곤해지는게 기분이 좋아졌다. “ 맛있다. ” “ 잠깐... ” 강후가 손가락으로 현조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금방 되돌아갈 줄 알았던 강후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현조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 현조야. ” “ 어? ”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현조는 얼굴을 살짝 돌렸다. “ 회사 그만둬. ” “ 왜 자꾸 그래? 이번 달 말에 그만둔다고 했잖아. ” “ 아니. 당장 그만둬. ” “ 박강후. 왜그래? 너 효원이랑 무슨 일 있었지? ” 현조가 영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강후가 현조의 목 뒤로 손을 뻗어 현조의 목을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뻐근해져있던 근육이 풀어지면서 몸이 노골노골해지는것 같았다. 강후의 작은 손놀림 하나에 현조는 바짝 긴장을 했다. “ 그냥 묻지말고 그만둬. ” “ ... ” 현조가 고개를 젓자 갑자기 강후가 현조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현조가 주춤해서 뒤로 물러서려 하자 강후는 더욱더 강하게 현조를 끌어당겼다. 커피맛이 묻어나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던 강후가 거칠게 현조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아플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유린하는 강후의 거친 행동에 현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키스가 불러일으키는 숨막히는 떨림이 너무나 강렬했다. 강후의 혀가 조심스럽게 현조의 입안으로 밀려져 들어왔다. 급하게 현조를 독촉하던 것과 달리 강후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지고 부드러워졌다. 현조가 다시 한번 무의미한 거부의 행동을 하자 그제서야 강후는 현조를 놓아주었다. “ 뭐하자는 거야? ” 현조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잔뜩 잠겨들었다. “ 나 너 좋아해... 많이... 알지? ” 강후가 조금 부어오른 현조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뭔지 모르게 강후의 행동이 절박하게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왜 갑자기 이렇게 매달리는 걸까? “ 강후야... ” “ 그냥...네가 힘들어 보이는게 싫어서 그래. 너무 힘든것 같아서.. ” 강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길다란 속눈썹이 강후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 원 아웃이야. 불필요한 스킨쉽. ” 현조의 말에 강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 쿡쿡.... 젠장... 벌써 카운터 시작했냐? 그럼 좀 더 찐하게 할걸... 기왕 카운터 올라가는거... ” 장난스러운 말과는 달리 강후의 표정은 전혀 즐거워 보이질 않았다. “ 너 오늘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 ” “ 아니야. 그만 가자. ” 강후는 다시 눈을 뜨고 현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의문이 가득 들어찬 현조의 눈을 보자 또 다시 마음이 심난해졌다. 강후가 차를 출발시키자 현조는 못내 불안한 눈빛으로 강후를 힐끔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오늘 강후는 뭔지모르게 잔뜩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말하기를 꺼리니 자꾸 물을 수도 없었다. 내내 침묵하던 강후가 현조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효원이... 네 옆에 없었으면 좋겠어. ” “ 무슨 말이야? ” “ 거슬려. 그리고 짜증나. 네 옆에서 잘난 척하는거 보기 역겨워. ” “ 친구사이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효원이랑 친구아냐? ” “ 오늘부로 친구 아니야. " “ 니들 진짜 싸웠나보다? ” “ 난 내꺼에 눈독들이는 놈은 인간 취급안해. ”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내뱉는 강후의 말에 현조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괜히 친구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지 않았다. 유달리 현조를 챙기려 드는 효원의 태도가 강후에게 심히 거슬렸나 보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게 신경이 쓰이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강후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미쳤군. ” 갑작스럽게 현조가 툭 내뱉은 말에 강후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 너까지 그러냐? 네 눈에도 내가 미친거같아? ” “ 뭔 소리야? 난 혼잣말한거야. 내가 미친것 같다고. ” “ 젠장... 미친커플이네. ”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효원이가 너더러 미쳤대? ” “ 그래. ” “ 너랑 내 사이... 말했어? ” “ 음. ” “ 그래서 투닥거린거야? ” “ 아냐 그런거... 그만하자. 너랑 있을때 효원이놈 얘기 안하고 싶어. 앞으로 너도 나랑 있을 때는 정효원 이야기 하지마. 알았어? ” “ 아이구... 모르겠다. ” “ 그리고 되도록 빨리 회사 그만둬. 네가 자꾸 정효원이랑 마주치는거 싫어. ” “ 휴우- ” 현조는 답을 회피하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아파트 앞에 멈춰서자 강후가 다시 한번 현조에게 다짐을 받았다. “ 빨리 그만둬. 알았지? ” “ 왜 그래? 진짜. 나 슬슬 기분나빠진다. ” “ 대답해. 그만 둘거지? ” 현조의 불쾌한 반응에도 끄덕없이 강후는 연신 그녀에게 확답을 요구했다. 현조는 한참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어쩔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급한 일만 마무리 지으면 바로 끝낼거야. 한 일주일... ” “ 알았어. 그리고 내일부터 내가 출퇴근 시켜줄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 뭐? ” “ 앞으로 네 일거수 일투족 모조리 감시할거니까 정효원이랑 사적으로 만나지 마. ” “ 그건 월권이다. 박강후. 나 진짜 불쾌해진다.” “ 월권이건 아니건 난 그렇게 할거야. 무조건 그렇게 해. ”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는 강후에게 더 이상 반박을 해봤자 타협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 알았어. 어차피 그만둘거였으니까 이번은 이렇게 넘어가는데 다시는 내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기분나빠. ” “ 알았어. ” “ 도대체 무슨 일이야. 끝까지 말 안해줄거야? ” “ 별일 아니야. 그 놈이 네 옆에서 알짱거리는게 싫을 뿐이야. 그만 들어가. ” 현조가 차에서 내려 그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가버리자 강후는 담배를 꺼내서 피워물었다. “ 정효원... 넌 나랑 게임이 안돼. ” 그날부터 현조에 대한 강후의 지독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19편 끝. 20 계속 신호가 가는데도 경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며칠 효원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회사도 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장애물 없이 백미터 달리기를 하다 갑자기 눈 앞에 허들이 턱하니 나타난 것처럼 그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현조를 향한 마음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그걸 내색한다는건 폭탄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현조가 받아들일리도 없을 뿐더러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강후가 했던 말처럼 자신이 현조를 단순히 친구라고만 여겼다면 그는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게 변했건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제 3자일 뿐이었다. 반대는 커녕 오히려 현조가 그 동안의 상처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 걸 축하해주어야만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강후가 준희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현조를 강후에게 뺏기기 싫다는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싫으면서도 그는 어느새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현조를 향한 걱정이라는 보기좋은 포장을 덧씌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의논을 할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묵히고 있자니 안개가 잔뜩 끼인 숲을 헤매이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런 치부를 드러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경주라면 자신에게 허심탄회하게 충고를 해 줄 수 있을것 같아 오전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는데, 경주는 일부러 그러는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해볼까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정효원입니다. ” “... 나야. ” 잔뜩 경직된 경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효원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 왜 전화 안 받아? ” “ 바빴어. 그보다 생각은 정리한거야? ” “ ... ” “ 아직도야? 참... 길게도 생각한다. ” 경주의 씁쓸한 말투에 효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너 한숨소리 듣자고 전화한거 아니야. 아직 결정 못 내린거면 그만 끊어. ” “ 아니.. 경주야. 아니야. ” “ 그럼 네 마음.. 정리된거야? ” “ 그래. 정리했어. ” “ .... ” 이번에는 경주가 말이 없었다. “ 경주야... 퇴근하고 좀 만나자. ” “ 알았어. ” “ 내가 그쪽으로 갈께. ” “ 응. ” 전화를 끊고 효원은 자꾸만 미련을 게워내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자신이야말로 현조를 잡을 수 없었다. 차라리 강후가 나으면 나았지, 그는 절대 현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 쓸데없는 집착이야. ’ 자신의 마음을 집착이라고 정의하고 그는 현조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접을거라 다짐했다. 그런대로 생각이 정리된 것같아 그나마 기분이 개운해지려하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 네. ” “ 정실장 나 설계실 이실장인데... 지대리 그만둔다는데 어떻게 된거야? ” 프로그램실 이실장의 말에 효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언제 그래? ” “ 오늘 아침에 사직서 들고 왔더라구. 전부터 준비를 했었는지 맡고 있는 일도 다 끝냈고, 지금까지 관리하던 업체도 부사수한테 다 넘겼던데... 정실장이랑 의논한거 아니야? ” “ 아니.. 나하고 의논한 적 없어. ” “ 그래? 그럼 어쩌나... 내일까지만 출근하고 그만둔다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그렇다니 말릴수도 없고. 어쩔까? 정실장? ” “ 내가 지금 나가서 지대리 만나볼께. ” “ 알았어. 그럼 일단 사표수리는 나중으로 미뤄놓을께. ” “ 그래. 이따가 봐. ” 효원은 전화를 끊고 불안스럽게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마 강후가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현조에 대한 집착은 버릴거라 다짐했으면서도 그는 강후가 현조를 뒤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 박강후. 끝장을 봐야겠냐? 정말? ” 효원은 신경질적으로 강후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강후가 전화를 받자 효원은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현조 빼돌려서 뭘 어쩌려고 그래? ” “ 상관 마. ” “ 나 현조한테 말할거다. ” “ 나하고 적이 될거라고? 하! 정효원. 너희 아버지 회사 문 닫는거 보고싶어? ” 비웃음이 반쯤 섞인 강후의 말에 효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 무슨 말이야? ” “ 네가 현조한테 준희얘기 한마디라도 흘리면 너희 아버지 회사는 엄청난 자금 압박을 받을거란 얘기지. 내일부터 돌아오는 어음막기 바쁠걸? ” “ 너... 우리 회사 어음가지고 장난쳤냐? ” “ 글쎄... 장난치고는 타격이 좀 크지? ” “ 너 진짜... ” “ 끊어. 너랑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제 그만 우리 사이에서 빠져. 너 곁다리 걸치고 있는거 짜증나니까. ” 매정스럽게 전화가 끊어지자 효원은 들고 있던 휴대폰 벽을 향해 집어던져 버렸다. 벽에 부딪쳐서 산산히 부서진 휴대폰 조각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 박강후.... 네가 멋대로 휘두르게 두진않아. ” 효원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차키를 들고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 [ 지대리님. 누가 찾아왔어요. ] 내선으로 경리부에서 연락이 오자 현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업체 사람빼고는 근무중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 누구요? ” [ 박강후씨라는데요. ] “ 네? 아- 알았어요. ” 현조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불안스럽게 탁탁 두드렸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강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근무중에 회사까지 찾아오는 강후의 무대포적인 행동에 짜증이 일었다. 현조는 겉옷도 걸치지 않고 그냥 프로그램실을 빠져나왔다. 현조가 나오자 경리부 미스김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강후가 차에서 내려 이쪽을 보고 있다 현조를 보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현조는 심각한 표정으로 강후에게로 걸어갔다. 도무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 무슨 일이야? ” “ 사표냈어? ” 대뜸 사표를 냈냐고 묻는 강후의 말에 현조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 너 그냥 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웃기네. 왜 그런것까지 니가 간섭을 해? ” “ 대답부터 해. 사표 냈어? ” “ 박강후. ” “ 대답해. ” 강후는 현조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대답만을 강요했다. “ 그래 냈어. ” “ 그럼됐어. 가방 가지고 나와. ” “ 뭐? ” “ 가자고. 사표냈다며. ” “ .... ” 현조는 화가 나서 강후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요며칠 짜증날 정도로 집요한 강후의 간섭을 받아온터라 이제는 더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 너 그냥 가. ” 현조가 쌩하니 뒤돌아서자 강후가 사납게 현조를 돌려세웠다. “ 말 들어. 가방 가지고 나와. ” “ 싫어. ” “ 싫어? ” “ 그래 싫어. ” “ 그럼 그냥 가. ” 강후가 팔을 질질끌고 차로 걸어가자 현조는 강후의 억센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 이거 못놔? 야! 박강후. 놔 이거. ” “ 조용히 해. ” 강후는 끝내 현조를 차에 밀어넣고는 자신도 뒷자리에 올랐다. 강후가 차에 타자마자 재룡이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현조는 화가 나서 강후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 경고하는데... 차 세워. ” “ 안돼. ” “ 안 세워? ” “ 그래. ” “ 마음대로 해 그럼. ” 현조가 차문을 열기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강후가 현조의 손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 죽고싶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거야? ” “ 그러니까 차 세우라고. ” “ 안돼. 너 데려다 놓고 재룡이한테 네 가방 가지고 오라고 할거야. ” “ 강후야. ” 현조가 기가 막혀서 그를 쳐다보자 강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한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응? 현조야... 제발 ” 갑작스럽게 애원하는 말투로 변한 강후를 보자 화를 낼수가 없었다. 이유없이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텐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현조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 이유라도 말해봐. 네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 들어보고 납득할만하면 네 행동 용서해줄께... ” “ 그냥... 널 잃어버릴것 같아서... ” 자신없는 말투로 중얼거리며 강후가 현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현조는 체념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강후가 왜 이렇게 안달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절박해 보이는 마음만은 느낄수 있었다. “ 알았어. 그러니까 이 손 놔. 팔목아파. ” 현조의 팔목을 꽉 움켜잡고 있던 강후는 손에 힘을 빼기는 했지만 차마 손을 놓지는 못했다. “ 너 이사해라. ” “ 뭐? ”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싶어서 현조는 강후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 니가 살 집 구해놨어. 그리로 옮겨. ” “ 집을 구해놔? ” 현조가 사납게 강후의 손을 내쳐버렸다. “ 너...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집을 구해놨다고? 허 참... 기가 막혀서. ” 펄펄 뛰는 현조를 보는 강후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란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그 다음 순서는 뭐니? 회사도 그만두고, 네가 사준 집에서 살면서 너한테 봉사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 박강후? ” “ 그런거 아냐. ” “ 그런게 아니면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언제 너더러 집 사달래? 너 지금 날 창녀취급하고 있잖아. 안그래? ” “ 말 조심해. 창녀라니... 내가 널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너 내꺼로 만들었어. 몰라서 그래? ” “ 그렇겠지. 잘난 박강후가 못하는게 뭐가 있겠어. ” “ 지현조... 그만해라. ” “ 왜? 기분나쁘냐? 그럼 내 기분은 어떨거 같니? 겨우 만난지 몇달 되지도 않은 인간이 떡하니 집 사줄테니 거기 들어가 살라는데 내가 기분 좋겠어? 너 지금까지 니가 만났던 여자들한테 다 집 사주고 그랬어? 돈 많아서 좋겠다. 혹시 지금도 목욕재계하고 너 오길 기다리는 여자가 줄 서있는거 아냐? ” “ 그만해. ” 강후의 목소리가 위험스럽게 낮아졌지만 현조의 귀에는 그의 말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흥분하고 화가나서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근데 어쩌니 박강후. 나 너랑 자고 싶은 생각없는데... 너같은 바람둥이 하고는 그런 짓거리 안하고 싶어. 알아들었어? ” “ 차 세워. ” 강후의 말에 재룡이 급하게 차를 세웠다. “ 재룡이 내려. ” “ 네. ” 재룡이 차에서 내리자 강후가 현조를 사납게 시트에 눕혀버렸다. 현조는 충격으로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 지...지금 뭐하는 거야? ” “ 네가 내꺼라는거 확인시켜줄려고. ” “ 무.. 무슨 뜻이야? ” “ 모르지 않잖아.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 강후는 현조의 셔츠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배려도 느껴지지 않는 거친 손길에 단추들이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본 현조는 소리를 지르며 강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나서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는 강후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 이거 놔. 너 미쳤어? 무슨 짓이야.. 놔.. ” 단추가 다 풀어지고 하얀 살결 위에 수줍게 자리잡은 검은색 브래지어가 드러나자 강후는 고개를 숙여 현조의 가슴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그만둬... 제발...” 현조의 애절한 목소리를 못 들은척 하며 강후는 현조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현조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것 같았다. “ 그만해... 제발... 강후야.. ” 현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강후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조의 막말에 화가나서 자신도 모르게 난폭한 행동을 해버린것이다. “ 미안하다... 미안하다... 현조야... ” 힘없이 내뱉는 강후의 말에 현조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비록 자신을 화나게 하고 몹쓸 짓까지 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밀쳐낼 수가 없었다. “ 왜 그러는거야? 응? ” “ 아니야. 아무것도... ” “ 휴우” 강후는 얼굴을 들어 현조를 바라보았다. 흥분해서 빨갛게 변한 얼굴과 아직까지 불안스럽게 떨리고 있는 눈을 보자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강후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흐트러진 현조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여며주었다. 자신의 난폭한 행동에 셔츠 단추 몇개가 떨어져 버린것을 본 강후는 자신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서 현조에게 내밀었다. “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다. 이거 입어. ” “ ... ” 강후가 내민 옷을 받아서 입고난 뒤 현조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강후의 난폭한 행동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터였다. 현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미안한 마음과 제어할 수 없는 강한 소유욕이 가슴속에서 요동을 쳤다. “ 이사... 해주면 안될까? ” “ 또 그 이야기야? 싫다고 했잖아. 나 너한테 그런 거 받고 싶지 않아. ” “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안돼? ” “ 안돼. ” “ 후우- 알았다. ” 강후는 창문을 내리고는 저쪽에서 멀뚱히 서있는 재룡을 불렀다. “ 가자. ” “ 네. ” 현조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보고도 재룡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현조가 강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무슨 문제가 있는거 같은데... ” “ 아냐. 네가 어디로 사라져 버릴것 같아서... ” “ 사라지긴 어디로 사라져? 우리 아직 경기중이야. 잊었어? 이제 겨우 원아웃이라고.. ” “ 그렇지.. 게임 중이지... 빌어먹을 게임. ” 씁쓸한 강후의 말에 현조의 마음 역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조 자신도 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되었다. 강후가 자신에게 내비치는 불편한 소유욕들이 거북하다기 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그녀 스스로도 당황해 할 때가 많았다. “ 회사로 다시 가. 나 옷도 제대로 안 챙겨서 왔어. ” “ 나중에 재룡이가 가져올거야. ” 고집스럽게 회사로 가는걸 반대하는 강후의 태도가 영 미심쩍었다. 그리고 며칠간 출근을 하지않고 있는 효원도 이상했다. 요근래는 온통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 그럼 집으로 가. ” “ 아니... 지금 여행갈거야. ” “ 여행? ” “ 그래. 스키장 갈거야. ” “ 야. ” “ 오늘은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하자. 응? ” “ 기가 막혀서 이젠 말도 안 나온다. 갑자기 회사에 들이닥쳐서 사람을 끌고나오더니 여행을 가자고? 그게 말이 되니? ” “ 오늘 하루만 같이 있자. 오늘은 꼭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 싫어. 그냥 집으로 가. ” “ 현조야. ” “ 너 우리 관계 오늘로 끝장내고 싶어? 여행을 가? 내가 너랑? 내가 미쳤냐? ” 강경한 현조의 태도에 강후는 주먹을 쥐고 신경질적으로 시트를 꽝꽝 내리쳤다. “ 알았어. 여행은 취소하자. 대신 우리 bar에서 나랑 놀자. ” “ ... ” 현조는 대답없이 팔짱을 꼈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끌려다니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않았다. 안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미 현조가 반대할 걸 알았는지 강후가 다시 한번 매달렸다. “ 그냥... 내가 오늘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래. 네가 위로해 줬으면 싶어서... 그래도 안되냐? ” 한참동안 말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던 현조가 체념어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대신 효원이랑 미남이 불러서 놀자. 너 효원이랑 뭔가 쌓인게 있는것 같은데 풀어야지. ” “ 효원이는 안돼. 그 자식 보고싶지 않아. 네 친구는 부르던지... ” “ 강후야. 효원이랑 왜 이렇게 된거야 도대체? ” “ 그냥... ” “ 나도 모르겠다. 니들이 알아서 풀어. 그건 그렇고 오늘 네 행동은 심했어. 너도 인정하지? ” “ 미안. ” “ 다신 이런 행동하지 마. 알았어? ” “ 알았어. ” 미남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던 현조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휴대폰도 안 챙겨왔네... 이게 다 너때문이야. ” “ 내가 다시 사줄께. ” “ 있는걸 뭐하러 다시 사? 나중에 가지고 오면 되지. ” “ 그러던지. 내꺼 써 ” 강후가 휴대폰을 현조에게 건네고는 재룡에게 bar로 갈것을 지시했다. 미남의 컬러링이 또 바뀌었나보다. 며칠 전까지는 시끄러운 댄스음악이더니 오늘은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한 음악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 “ 미남아. 나야. ” [ 현조냐? 근데 왜 모르는 번호가 뜨지? 네 전화기 아냐? ] “ 응. 그렇게 됐어. ” [ 그럼 다시 시작하자. 싸랑하는 현조~ 무신 일이여? ]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는 미남때문에 잔뜩 굳어져 있던 현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 오늘 저녁때 뭐해? ” [ 글쎄... 별 약속 없는데? 왜? 이 언니가 보고싶냐? ] “ 그래. ” [ 그럼 내가 얼굴을 보여주지. 어디서 만날래? ] 현조는 강후의 bar 위치를 말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강후는 뭘 생각하는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강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놀고먹는 한량처럼 나태하게 풀어져 있는 모습만 보다 오늘처럼 성난 야수같은 모습을 보니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괜히 건들였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것 같아 현조는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 재룡이 [시저]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현조와 강후는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 먼저 들어가 있어. 나 잠깐 재룡이랑 할 얘기가 있어. ” “ 알았다. ” 현조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강후가 재룡을 보며 말했다. “ 현조 회사가서 가방하고 옷 챙겨가지고 오고 휴대폰은... 그냥 버려. ” “ 네? ” “ 버리고 새 걸로 사가지고 와. 번호도 다시 만들고. ” “ 알겠습니다. ” 재룡이 차를 타고 떠나자 강후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효원에게서 현조를 떼어놓기 위해 반쯤 미친 짓까지 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어쩔 수 없었어. ”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말을 중얼거리며 강후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20편 끝. 21 “ 일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말이야 이실장 ? ” “ 나도 모르겠다고 글쎄.. 누가 왔다고 나갔다는데 완전히 꿩궈먹은 소식이니. 이거 참. ” 효원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급하게 회사에 도착해 보니 현조가 일하다 말고 어디로 사라져버렸다고 이실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했다. 누가 현조를 데리고 간건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렇다고 강후한테 달려가자니 그것도 꼴이 우습고 가만히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날것 같았다.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정실장은 말도 없이 며칠 결근을 하더니 이젠 지대리까지.. 회사가 어떻게 될려고 이래? 참 기가 막혀서.. ” 이실장은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말도없이 무단으로 외출한게 영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효원은 이실장의 투정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강후에게 쫓아가서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데 조금 있으면 경주와 약속도 잡혀있었고, 또 강후의 경고때문에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강후가 작정하고 덤비면 뼈도 못추리게 철저하게 아작을 내는 성격이란 걸 아는 효원으로서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때문에 아버지 회사까지 타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 저- 이실장님. ” 경리부 미스김이 프로그램실로 들어서며 이실장을 불렀다. “ 왜 그래? 미스김. ” “ 지대리님 가방하고 옷 좀 주세요. ” “ 뭐하러? ” “ 누가 가지러 오셨거든요. ” “ 누가요? ” 효원이 대뜸 미스김에게 묻자 미스김이 아까 왔던 사람의 일행이라고 말을 했다. “ 그냥 놔 두세요. 현조가 가져가겠죠. ” “ 그래도... 지금 달라고... 일부러 오셨다는데. ” “ 내가 얘기해 보죠. ” 미스김이 난처해하자 효원이 성큼성큼 프로그램실을 빠져나갔다. 손님 접대용도로 마련된 소파에 언젠가 본적이 있는 강후의 비서가 와 있었다. 효원이 다가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현조 어디로 데려간겁니까? ” “ 지금 서울에 안 계십니다. ” “ 서울에 없단말입니까? ” “ 네. 여행가셨습니다. 두 분 같이요. ” “ 하. ” 효원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렸다. 강후도 그렇지만 현조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무단으로 외출을 한 것도 기가 막힐 일인데 이제는 강후와 여행까지 가다니... “ 정말입니까? 두 사람 여행 같이간게? ” 효원이 영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사장님께 전화해 보시면 아실겁니다. 비행기 시간때문에 급하게 가시느라 그 분 가방과 옷을 못 챙겨갔다고 저더러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시겠습니까? 저도 일이 바쁜 사람이라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거든요. ” 효원은 말없이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 챙겨드리죠. 근데 어디로 간겁니까? ” “ 조금 멀리가셨습니다. 며칠동안 돌아오시지 않을겁니다. ” “ 이거 참... ” 아예 현조를 데리고 도망을 간 모양이다. 강후가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현조를 빼돌릴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효원은 그냥 멍한 상태였다. “ 제가 더 기다려야 합니까? ” 남자가 성마르게 효원을 재촉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현조의 가방과 옷을 챙겨서 남자에게 넘겼다. “ 강후 돌아오면 저한테 꼭 연락하라고 해요. 알겠죠? ” “ 네. 그럼. ” 남자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효원은 그냥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경주에게 가려면 지금 출발을 해야 했지만 쇠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 둘 다 미친거야... ” 다시 한번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쉰 효원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경주에게로 향했다. ================================================================================== “ 조금 늦었다. ” “ 괜찮아. 나도 금방 일이 끝났어. ” 못 본 사이 경주의 얼굴이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게 자신이란 걸 아는터라 그는 경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 저녁부터 먹을래? ” “ 그러자. ”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경주는 효원이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지만 효원은 내내 시무룩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단골 재즈바에 들어서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야 효원이 입을 열었다. “ 그동안 미안했다. 경주야. ” “ 알면 다행이네. ” 경주는 아직도 기분이 많이 나쁜듯 말끝에 가시가 돋아있었다. “ 그래서 이제 정말 깨끗하게 정리한 거야? ” “ 응. ” “ 그럼 내가 더이상 현조씨때문에 신경 안써도 돼? ” “ 그래. ” “ 의외네. 난 네가 현조씨 택할 줄 알았거든. ” 경주의 말에 효원이 말도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그럴 수 없다는거 알잖아. 내가 어떻게 현조를 욕심내니? ” “ 어쩔 수 없어서 포기했다는 말로 들린다? ” “ 아니야. 그런거.. 너랑 헤어지겠다는 생각 한적 없어. 한번도. ” “ 네가 정신 못차리고 헤매는거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어. 솔직히 내가 그다지 열녀스타일은 아니잖아? ” “ 이제 그런 일 없어. 현조는 나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걸.. 거기다 현조 회사도 그만뒀어. ” “ 그래?" 의외라는 듯 경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응. 어쩌다 그렇게 됐어. 남자가......생겼어. ” “ 누가? 현조씨가? ” “ 응. ” “ 진짜? 잘됐다. ” “ 잘된거야? ” “ 당연하지. 효상오빠 죽은게 벌써 몇 년인데... 이제 그만 벗어날 때도 됐지. ” “ 그렇지. ” 씁쓸하게 대답하며 효원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그 상대가 강후란 걸 알면 경주도 저런 소리를 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효원은 그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괜히 일을 더 크게 벌려봤자 나중에 현조만 곤란해질 뿐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강후와 현조가 헤어질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두 사람의 사이를 비밀에 부칠 작정이었다. “ 혹시.. 그래서 현조씨 포기한거야? 다른 남자때문에?　” 경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효원을 다그쳤다. “ 아니야. 그런거. 난 한번도 너랑 헤어질거라는 생각 안했어. 알잖아 너도. ” “ ... ” 경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네 방황이 끝난게 다행인지 아닌지... 참. ” “ 이제 너 속상하게 안해. 미안했다. ” “ 믿어보지 뭐. 하긴 안 믿으면 어쩔거야. 그래도 약혼잔데... ” 두 사람은 그동안 쌓였던 불신을 술 한잔과 함께 흘려버렸다. 오랜 시간 만나왔던 연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너그러움이 지금처럼 고맙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어떤줄 알기 때문에 경주와 효원은 말없이 술잔을 비워냈다. 재즈바를 나서서 경주를 데려다 주고 집에 들어온 효원은 다시 현조와 강후에게로 생각이 옮겨갔다. “ 시간이 지나면 끝나겠지. 잠시동안 불장난 하는 거라 생각하자. ” 그는 현조와 강후의 만남을 그저 꺼지기 쉬운 작은 불장난이라고 간주해버렸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할것 같았다. 언제가는 꺼질 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불안해져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 저기 오네. ” 미남이 bar 입구에 나타나자 현조가 얼른 일어서서 미남에게 다가갔다. 미남은 처음엔 현조의 얼굴을 보며 웃다 현조가 어울리지도 않게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있자 의아한 눈빛으로 현조를 훑어보았다. “ 뭐냐. 그 푸대자루 패션은? ” “ 이거? 내가 옷을 좀 버려서... 강후꺼 입은거야. ” 현조는 미남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변명을 했다. “ 우쨌거나 여기 죽인다. 으윽... ” “ 이리와. ”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미남을 끌고 강후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가자 강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미소를 지었다. “ 또 만났네요. 저 아시죠? ” “ 그럼요. 불량... 아니 성함이? ” “ 박강후입니다. ” “ 아... 전 강미남이예요. ” 두 사람은 새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미남의 눈빛이 또 다시 몽롱해지는 걸 보니 강후의 미소에 넋이 빠진 모양이다. “ 그만 손 놓고 앉지? ” 미남이 굳세게 강후의 손을 붙잡고 있자 현조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 어- 이게 버릇이 되서... ” “ 무슨 버릇? ” “ 잘 생긴 남자만 보면 우쨌거나 잡고 싶어서... ” “ 중증이다. 아주. ” “ 그러게... ” 미남과 키득거리며 자리에 앉는데 재룡이 현조의 옷과 가방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 재룡에게서 옷과 가방을 받아든 현조가 가방 안에 손을 넣고는 뭔가를 찾았다. “ 휴대폰은 없었어요? 내가 가방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 현조의 말에 재룡이 강후를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대답했다. “ 그게...전화가 울려서 잠시 꺼냈는데 제가 주머니에 넣어뒀다 잃어버렸습니다. 어디 잠깐 들렸었는데 거기서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 “ 그래요? 어쩌지? 어디예요? 내가 가서 찾아오죠 뭐. ” “ 아닙니다. 제가 다시 하나 사가지고 왔습니다. ” “ 네? ” 재룡이 새 휴대폰과 종이 한 장을 내밀자 현조는 영문을 몰라 멀뚱히 휴대폰을 보고만 있었다. “ 그러실 필요없는데... 제 휴대폰으로 전화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텐데... ” “ 제가 죄송해서 다시 사가지고 왔습니다. 번호는 잘 몰라서 그냥 사장님 번호와 비슷하게 했습니다. ” “ 그래도... ” 현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강후가 얼른 끼어들었다. “ 그냥 받아. 재룡이가 미안해서 그런 모양인데... 전화기에 중요한 번호 저장되어 있었어? ” “ 아니. 그런건 아닌데... 내가 미안하니까. ” “ 괜찮아. 그냥 받아. 재룡이 돈 잘 벌어. ” 강후의 말에 현조는 조금은 찜찜한 표정으로 전화기와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최신형 모델인지 번쩍번쩍 하는 것이 돈냄새가 물씬 풍겼다. 메모지에는 강후와 뒷자리가 똑같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 우와. 좋은거네. 오- 지현조 땡잡았어. ” 옆에서 미남이 휴대폰을 힐끔거리며 웃었다. 현조는 뭔지모르게 음모의 냄새가 풍기는 전화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왠지 강후가 처놓은 덫에 발이 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나저나 두 사람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거예요? ” 미남이 강후를 보며 묻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제가 현조 발목 잡고 늘어지고 있죠. 지금.. ” “ 어허- 현조 발목만 잡아서 될 문제가 아닌데... ” “ 네? ” “ 현조가 또 내 말이라 그러면 껌뻑 죽거든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어느 정도의 뇌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뭐.. 이런 얘기죠. ” “ 아- 미남씨 말만 하세요. 뭘 바라십니까? ” “ 호호호... 농담이예요. 그냥 현조한테나 잘해 주세요. 만약에 우리 현조 힘들게 하면 제가 사시미로 포를 떠 버릴테니까요. ” “ 조심해야겠네요. ” “ 둘이서 참 잘 논다. ” 현조가 콧방귀를 뀌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회사에서 그런 식으로 나와버린게 영 마음에 걸렸다. 효원이도 만나보고 왔어야 했는데, 강후가 워낙 효원이라 그러면 치를 떠는지라 현조 자신도 어쩐지 효원에게 연락을 하기가 꺼려졌다. 두 사람이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데 도무지 강후는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집에 가서 효원에게 전화를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입구 쪽에 낯익은 인물이 들어오는게 보였다. “ 어? 저 사람... ” “ 왔네. 이리와 ” 현조는 남자를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미남을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 내가 좀 늦었지? ” 남자는 자연스럽게 미남의 옆 자리에 앉았다. “ 윤상훈. 뭐야? 네가 미남씨를 어떻게 알아? ” “ 나? 왜 몰라? 우리 사귀잖아. ” “ 뭐? 언제부터.. ” “ 달링... 우리가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지? ” “ 그게 좀 됐지. ” 미남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하자 강후와 현조는 마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 두 사람 사귀기로 한거야? ” “ 어. ” “ 응. ” 망설이지도 않고 똑같이 대답하는 꼴이 꽤 오래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모양이다. “ 그러는 두 사람은 어떻게 된거야? ” 상훈이 강후를 보며 묻자 강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 보시다시피. ” “ 정말 사귀는거야? ” “ 정말이 아니면? ” 상훈의 눈에 씁쓸한 기운이 비쳤다. 강후도 그걸 알아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상훈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허락하면 상훈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었다. “ 그나저나 왜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 ” “ 나? 미국 갔다 왔잖냐. ” “ 미국? ” “ 어. 우리 마나님 대동하고 열흘정도 갔다왔지. ” “ 무슨 일로? ” “ 겸사겸사. ” “ 음... ” 네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워냈다. 밤이 깊어질수록 bar에 손님들이 늘어가자 그들은 모두 강후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완전히 분위기가 먹고 죽자였다. 강후의 집에 도착했을 때 미남은 이미 취해서 헤롱거리며 배시시 웃기만 했고, 현조 역시 머리가 알딸딸해져 있는 상태였다. 강후는 아예 뿌리를 뽑을 작정인지 장식장에 채워두었던 양주병을 주루루 꺼내놓았다. 한 시간 뒤 미남과 현조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둘 다 데려다 눕혀야 되나? ” 상훈이 강후를 보며 묻자 강후가 일어나서 현조를 안아들었다. “ 넌 미남씨 안고 들어와. 침대에 눕히자. ” “ 아씨- 얘 무거운데... ” “ 잔말 말고 빨리 들어. ” “ 허리 삐끗하면 그냥 평생 책임지라고 해야지. ” 상훈이 빙글거리며 미남을 안아들자 강후가 침실문을 열고는 현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현조가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강후가 피식 웃었다. 벌써 두번째 자신의 집에서 현조를 재우는데, 그럴 때마다 현조는 술이 떡이 돼 있었다. “ 야- 비켜. 무거워 죽겠구만. 분위기 잡으려거든 호빵 눕힌 다음에 잡던지. ” 상훈이 낑낑대며 미남을 침대에서 집어던졌다. “ 이씨- 누구야? ” 미남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서 상훈을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 어? 상훈이다. ” “ 그래 나다. 그러니까 그냥 눈 감고 자. 실실 쪼개기는... ” 미남은 그새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미남의 통통한 다리가 현조의 배 위에 떡하니 올라가자 강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아이들처럼 서로 꼭 껴안고는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 귀엽네. ” “ 그러게. ” 두 남자는 서로 마주보며 킥킥웃었다. “ 나가자. 마저 마셔야지. ” “ 그래. ” 강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자 상훈이 그를 쳐다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 어쩔려고 그러냐? 아현씨는 정리한거야? ” “ 음. 끝냈어. ” “ 그냥 좋게 끝내주디? ” “ 아니.. 솔직히 지금도 영 찜찜해. ” “ 네 약혼녀는? ” “ 약혼한거 아니라고 했잖아. 너까지 왜 그래? ” “ 했건 안했건 남들은 다 네가 그 준희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걸로 알고 있잖아. ” “ 휴우- ” 강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술을 털어넣었다. “ 정리해야지. 안그래도 그것때문에 준희한테 다녀올 생각이다. ” “ 프랑스로? ” “ 음. ” “ 곧 있으면 귀국한다며? 귀국할 때까지 참지. 괜히 타지에서 충격받아서 맘 잘못 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 “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어. 내 친구.. 효원이 너도 알지? ” “ 그래. 대충 알지. 그 친구가 왜? ” “ 효원이 형이 전에 사고로 죽었는데, 현조가 좀 연관이 되어있어. 그게... ” 강후가 대충 현조와 효원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해주자 상훈의 표정 역시 심각하게 굳어졌다. “ 뭐야 그럼. 그거 알고도 시작한거야? 까마귀랑? ” “ 현조야. 지현조. ” “ 현조든 까마귀든... 걔는 알아? 네가 준희란 애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거? ” “ 아직 몰라. 그래서 빨리 정리하려고 하는거다. ” “ 우와. 복잡해지네. ” “ 나도 답답하다. 어쩌다 이렇게 얽혀버렸는지... ” “ 효원이란 친구는 반대안해? ” “ 당연히 반대하지. 그래서 내가 아직 프랑스로 못가고 있는거고. 내가 없는 사이에 효원이가 현조한테 말해버릴까봐 하루하루 미루고 있는거야. ” “ 예감이 안좋다. ” 상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강후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졌다. “ 끝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것 같아? 나중에 까마귀.. 아니 현조가 알면 너 원망할텐데...” “ 숨길수 있을 때까지 숨겨봐야지. ” “ 참나. 오래살고 볼일이다. 박강후가 여자때문에 고민을 다 하고... 기가 막히네. ” 반쯤은 농담이 섞인 상훈의 이죽거림을 들으며 강후도 피식 웃었다. “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걸려도 제대로 걸렸어. ” “ 그러니까. 처음봤을 때부터 장난아니게 눈에 박히더라니. 결국엔 너랑 그렇게 되는구나. ” “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 “ 인연이 악연이 되지 않게 잘해. 괜히 너랑 현조사이 안좋게 깨지면 나랑 우리 호빵 사이도 타격받으니까. ” “ 그러고 보니까 웃기네. 넌 언제 미남씨한테 작업들어간거야? 관심도 없는것처럼 그러더니. ” “ 그게 그렇게 됐다. 우리 호빵이 좀 심하게 귀엽잖냐. ” “ 잘 어울리더라. ” “ 새끼.. 니들도 잘 어울려. ” “ 후후..” 두 사람은 양주 한 병을 더 비우고 나서 거실에서 불편한 잠에 빠져들었다. ============================================================================== [ 똑똑똑똑--- ] 뭔가 규칙적으로 똑똑거리는 소리에 강후는 잠에 취한 눈을 들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흐린 시야 속에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미남과 현조가 보였다. “ 뭐해 현조야? ” 강후가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다가가자 현조가 뒤돌아 보며 웃었다. “ 미남이가 술국 끓여준다네. ” “ 술국? ” “ 해장국 말이야. 콩나물국. ” “ 아- ” “ 가서 씻어라. 꼴이 참 볼만하다. ” 현조가 까치집이 된 강후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강후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 음.. 냄새 좋다. ” 현조가 국냄새를 맡으며 침을 삼키자 미남이 국자를 휘두르며 잘난 척을 했다. “ 그렇지? 내가 또 이 콩나물국 하나는 죽여주게 끓이잖냐. 난 도대체가 못하는게 없어. 얼굴 이뻐, 음식 잘해, 인간성 좋아, 돈 잘 벌어, 거기다 몸매까지... 난 너무 완벽한 것 같애. ” “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냐? ” 현조가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거실 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상훈. 아침 굶고 싶지? ” “ 설마 서방님 밥을 굶기겠냐? ” “ 이씨- 밥 안줘. 너 그냥 가. ” “ 쯧쯧... 내 뽀뽀의 위력이 다 됐구나. 이리와 호빵. 내가 이빨이 뽀사지도록 강렬한 뽀뽀를 해주지. ” “ 무.. 무슨 소리야.. 뽀..뽀라니... ” 미남의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변하자 상훈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 왜 이래? 우리 사이 이미 갈 때까지 갔잖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 “ 자꾸 장난칠래? 갈 때까지 가긴 뭘 갈 때까지 가? 키스만 한거지... ” “ 키스? ” 이번엔 현조가 뜨악해서 미남을 쳐다보았다. “ 그러니까...그게... 쟤가 날 덮쳤다니까. ” “ 덮치기는 누가 덮쳐? 지가 나 꼬셔놓고.. 입술 시뻘겋게 칠하고는 앵앵거리면서 나 유혹했잖아. ” “ 내가 언제? ” “ 어- 발뺌을 하네.. 야.. 강미남 뻔뻔하다. ” “ 그만그만... 둘이 뽀뽀를 했건 키스를 했건 난 상관안할테니까 그만해. 그리고 미남이 넌 출근 안하냐? ” 현조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중재를 하자 미남이 고맙다는 듯이 현조를 바라보았다. “ 나 오늘 연차잖아. 너랑 밤새도록 놀려구 미리 손을 썼지. 잘했지? ” “ 그래 잘했다. ” 잠시 후 강후가 씻고 나오자 네 사람은 미남이 끓여준 콩나물국을 먹으며 땀을 뻘뻘 흘렸다. 얼큰한 국물이 속을 가득 채우자 술 때문에 쓰리던 속이 얼얼해졌다. “ 나중에 너 장사해도 될거야. 이거 하나만 팔아도 먹고 살지 싶다. ” “ 그렇지? 영양사 때려치우고 그냥 국밥 장사나 할까? ” 미남이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상훈이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 됐어. 집에서 살림만 잘하면 되지. 여자가 무슨 장사냐? ” “ 남이사. 장사를 하던 말던... ” 두 사람이 투닥대는 걸 지켜보는 강후와 현조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런 장애없이 사랑을 하고 또 스스럼없이 웃으며 장난을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후는 새삼 상훈이 부러워졌다. “ 우린 그만 가볼께. ” 식사를 다 마친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어디 가게? ” 강후가 얼른 따라 일어서자 현조가 그를 보며 말했다. “ 집에 가서 옷도 좀 갈아입고, 쉬고싶다. 너무 무리했나보다. 그만둔다고 야근이다 뭐다 했더니 몸살기운도 좀 있는 것 같고. ” “ 병원 갔다 집에 갈래? 데려다 줄께. ” “ 아냐. 미남이랑 같이갈께. 너도 쉬어. ” “ 그래요 강후씨. 우리끼리 그냥 갈께요. ” 더 붙잡고 있을 명분도 없어서 강후는 불안한 마음으로 현조를 보내주었다. 현조와 미남이 먼저 가고 나중에 상훈도 일이 있다며 가버렸다. 강후는 텅빈 집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은 준희를 만나서 자신의 결심을 전해야 했지만 현조를 남겨두고 가기가 영 불안했다. 그렇다고 준희가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자니 현조를 속이고 있는것 같아 그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동안 고민을 하던 강후가 결심을 굳히고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네. 사장님. ” “ 프랑스행 비행기표 좀 예약해. 되도록 빨리. ” “ 혼자 가시는 겁니까? ” “ 음. 그리고 돌아오는 표도 같이 예약하고. ” “ 기간은 얼마나? ” “ 한 4일 정도 머물거야. ” “ 알겠습니다. ”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후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되도록 빨리 이 복잡한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요소는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러면 현조에게 해야할 거짓말도 점점 늘어갈 것이다. 현조를 며칠간 혼자 두어야 하는게 걸렸지만 그렇다고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 휴우- ” 늘어가는 한숨 속에 걱정만 쌓여갔다. ================================================================================== “ 너 먼저 들어가. 얼굴이 영 안됐네. 몸살이 맞나보다. ” 미남이 슈퍼 앞에서 현조를 떠밀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조금씩 오한이 들기 시작하더니 현조의 안색이 점점 안좋아졌다. “ 그래야겠다. 반찬거리만 대충 사가지고 와. 나 먼저 들어갈께. ” “ 알았어. 얼른 가. ” 미남이 슈퍼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현조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 저.. 잠시만요. ”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현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눈에 익은 여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누구시죠? ” “ 저 모르시겠어요? 전에 봤을텐데... ” “ 죄송한데 전 기억이 잘... ” “ 강후씨 빌라 앞에서 봤어요. 이제 기억 나세요? ” 여자의 말에 현조의 표정이 굳어졌다. “ 아- 이제 기억이 나네요. 근데 무슨 일이시죠? ” “ 잠깐 저랑 얘기 좀 해요. ” “ 미안한테 내가 지금 몸이 좀 안좋거든요. 그리고 내가 댁하고 할 얘기는 없을것 같은데...” “ 아뇨. 있어요. 있으니까 내가 댁을 찾아왔겠죠. ”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 현조가 불쾌한 음성으로 말하자 여자가 그녀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 강후씨...약혼녀 있는거 아세요? ” “ 네? ” “ 박강후씨 약혼녀가 있어요. ” 여자의 입에서 터져나온 뜻밖의 말에 현조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22 여자와 작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자 종업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 전 커피..아니 유자차로 주세요. 그 쪽은? ” “ 전 녹차로 주세요. ” 종업원이 가버리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는 불안스럽게 물컵을 들어다 놨다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 저 강후씨랑 일년동안 사귀었어요. ” 여자가 얼굴을 빳빳이 들고 얘기를 하자 현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그래서요? ” “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그냥 순수하게 만나기만 했을것 같아요? ” 일부러 그러는지 여자는 현조를 보며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알 수 없죠. 내가 두 사람 사이가 어땠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귀찮다는 듯이 내뱉는 현조의 말에 여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랑 깊은 관계까지 맺었다고 말하는데도요? ” “ 성인남녀가 만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 현조는 이 상황이 점점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자신을 찾아온 눈 앞의 여자에게도 화가 났지만 여자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불편한 만남을 있게 한 강후에게 더 화가 치밀었다. “ 강후씨가 나한테 집도 사줬어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허술하다고. ” 잘난 척하며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현조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예요? 과거에 강후가 어떤 짓을 했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예요. 아시겠어요? ” “ 당신도 얼마후에 나처럼 버림받을 거예요. ” “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죠? ” “ 아까 얘기했잖아요. 약혼녀가 있다고. 강후씨 오래 전에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가 있어요. ” 현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후가 비록 바람둥이같아 보이기는 했어도 약혼녀를 두고 딴 짓을 할 만큼 나쁜 놈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세요. ” 현조가 자신의 말을 안 믿는듯 하자 여자는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삼 년전에 프랑스로 유학간 약혼녀가 곧 귀국할거예요. 당신은 그 약혼녀가 귀국하기 전에 잠깐 즐기는 사람일 뿐이예요. ” 여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하자 현조도 점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면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하면서 저렇게 당당할 수는 없을텐데.. “ 집안끼리도 다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제 남은 건 결혼식 밖에 없다고... 강후씨가 상훈씨와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 여자의 입에서 상훈의 이름까지 나오자 현조는 여자가 단순히 화풀이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근데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죠? ” “ 알아서 물러나라는 얘기예요. 당신같은 사람은 강후씨 옆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 “ 나 같은 사람? ” “ 당신은 강후씨 돈만 보고 접근한거잖아요. 그리고 만약 강후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울며불며 매달릴거구요. ” “ 그럼 당신은 안 그럴 모양이죠?" 현조의 말에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 난 강후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도 상관없어요. 그저 강후씨가 날 잊지만 않는다면 평생 강후씨만 보면서 살 수 있어요. ” “ 기가 막히네. ” 다른 여자의 남편을 평생 바라보며 살수 있다고 말하는 여자를 보자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결혼한 남자를 마음에 두고 한평생을 살겠다는 것도 웃기지만, 자기가 약혼녀도 아니면서 현조에게 찾아와서 큰소리를 치는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 이쯤에서 그냥 떠나세요. 만약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마련해 줄께요. ” 여자가 대뜸 내뱉은 말에 현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던 현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아가씨. 내가 충고하나 할께요. 내가 보기엔 댁도 나한테 그런 소리할 입장은 아니거든. 강후가 약혼녀가 있건 어쨌건 그건 나와 강후의 문제지 당신이 끼어들면 안되는거 아닌가. 다음부터 이런 투정부리려거든 차라리 강후를 찾아가요. 난 쓸데없이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까. “ 싸늘하게 여자를 노려보고는 현조는 뒤돌아섰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이제는 기분까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당장 강후에게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도 없었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었다. “ 강후씨는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알아요? 강후씨는 날 사랑해요. ” 등 뒤에서 여자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저 윙윙 울리는 이명처럼 들릴뿐이었다. 갈수록 축 늘어져가는 몸을 질질 끌다시피 이끌고 아파트로 돌아왔더니 미남이 현관문 앞에서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 어디 갔다 온거야? 추워서 죽는줄 알았네. ” “ 어- 누가 찾아와서. ” “ 누가? ” “ 있어. 그나저나 얼른 들어가자. 너무 춥다. ” 현조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눈 앞이 가물가물 한 것이 정신이 몽롱해졌다. “ 약 먹어야지. 내가 사가지고 올께. ” “ 그래주면 고맙고. 난 좀 잘게. ” 미남이 이불을 당겨서 꼼꼼하게 덮어주고 나가자 현조는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 전 만난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현조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확 끌어당겨 얼굴을 덮어버렸다. ================================================================================== 흐릿한 의식속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자 현조는 천근처럼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떴다.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간 것처럼 삭신이 쑤시고 아팠다. “ 미남아. ” 목이 너무 아파서 미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힘이 들었다. “ 미남아... ” 다시 한번 현조가 쇳소리를 내며 미남을 부르자 미남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나 물 좀 줄래? 목이 너무 마르다. ” “ 알았어. 근데 강후씨 왔거든. 들여 보낼까? ” 현조는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 자고 싶어한다고 그냥 가라고 해. ” “ 왜? 안 만나보고? 너 아프다니까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 “ 그냥... 잠자고 싶어. ” “ 그래?... 알았어. ” 미남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가자 현조는 침대에 다시 드러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자신을 찾아왔던 여자와 나눈 대화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확실하게 의심을 풀 수 있는 방법은 강후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현조는 망설이고 있었다. 만약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으로써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 아니겠지. 설마.. 약혼녀까지 있으면서 나한테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지. ’ 분명 이성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가슴 저 밑에 웅크리고 있는 의심이란 놈은 끊임없이 현조에게 사실을 파헤쳐보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살로 온 몸이 물에 젖은 솜마냥 축 늘어진 상태에서 강후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고, 그리고 만약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뒤에 따라올 엄청난 배신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 물 가져왔어? 미남아? ” “ 나야. ” 강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조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되도록 확인하는 시간을 늦춰볼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을 모양이다. “ 많이 아픈거야? 병원에 갈래? ” 강후가 물잔을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체크했다. 하지만 현조는 슬며시 몸을 빼서 강후의 손길을 피했다. “ 그냥 가라니까. ” “ 어떻게 그냥 가? 너 다 죽어간다고 미남씨가 걱정이 늘었졌던데... ” “ 괜찮아. 그냥 좀 쉬면 나아질거야. ” “ 그래도 병원가자. 밤에 더 아파지면 어쩌려고 그래? ” “ 괜찮다잖아. ” 신경질적으로 변한 현조의 태도에 강후가 미심쩍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 무슨 일... 있었어? ” “ 무슨 일? ” “ 혹시 효원이랑 통화했어? ” “ 아니. 내가 효원이랑 통화하면 안될 일이라도 있어? ” “ 아냐. 그런건. ” 어딘지 모르게 강후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또 다시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강후야. ” “ 응? ” 강후를 불러놓고도 현조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너... 혹시 나한테 거짓말 한거 있니? ” “ 거짓말? ” “ 어. ” “ 갑자기 그건 왜 물어? ” 강후는 대답을 교묘히 피하면서 현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 대답만 해. 나한테 거짓말 한거 있어? ” “ 아니.... 없어. ” 강후는 현조의 시선을 피하며 어렵게 대답했다. 강후의 그런 태도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 정말이야? ” “ 그래. ” 의혹이 점점 깊어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강후를 채근하지 않았다. 나중에 효원에게 물어보면 모두 밝혀질 일이었다. “ 알았어. 그만 가봐라. 나 좀 더 자야되겠다. ” “ 그래. 혹시라도 밤에 많이 아프면 전화해. 아무때나 상관없으니까. ” “ 알았어. 잘 가. ” 현조는 강후의 얼굴을 외면하고는 돌아누워 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당황해하는 강후의 태도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왜 똑부러지게 아니라고 대답을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후가 나가고 나자 현조는 다시 돌아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가뜩이나 몸살때문에 아픈 머리가 강후와 나눈 대화까지 보태져서 깨질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 내가 널 믿어야 하냐? 박강후? ” 캐내서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과 그냥 강후를 믿고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결국 현조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어느새 어두워진건지 현조가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온통 깜깜해져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어서인지 허리도 아프고 목은 꽉 잠겨서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올것 같지 않았다. 옆에서 미남이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것을 보고 현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살금살금 걸어서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컵 마시고는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잠을 깊이 잔 탓인지 몸은 그런대로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목은 여전히 많이 아팠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잠을 깨고나니 또 다시 강후와 여자의 일이 떠올랐다. 이 상태로는 밤새 잠을 설칠것 같아 현조는 전화기를 집어들고는 효원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신호가 가고 효원이 잔뜩 굳어진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 현조니? ] “ 응. 나야. ” [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야? 어떻게 근무중에 그렇게 사라져? ]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다다 몰아부치는 효원때문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효원아... ”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 몸살이야. ” [ 여행갔었다며. 언제 집에 온거야? 번호보니까 네 집 전화번호던데... ] “ 여행? 내가? ” [ 그래. 강후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데. ] “ 아냐. 여행간거... 그보다 효원아. ” [ 뭐? ] 평상시에는 나긋나긋하던 효원이 화가 많이 난듯 대답하는 어투가 무척 거칠었다. “ 그렇게 나온거 미안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이해해주라. ” [ 이해? 내가 널 모르냐? 네 성격에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할 리가 없잖아. 니가 누구때문에 그렇게 된지 뻔히 아는데 내가 화가 안나? ] “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나 너한테 뭐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한거야. ” [ 뭐? ] “ 강후... 혹시 약혼했었니? ” 한참동안 효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간혹 낮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효원이 어떻게 대답을 할지 망설이고 있는듯 했다. “ 괜찮아. 대답해봐. 강후 약혼녀 있니? ” [ 그래. 약혼녀... 있어. ] “ 그 약혼녀가 지금 외국에서 공부중이고? ” [ 그래. ] “ 하- 기가 차서.. ” [ 현조야 그게 누구냐면... ] “ 됐어. 알 필요 없어. 끊자. ” [ 현조야. ] “ 됐다고 글쎄... 내가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고 이젠 끝났으니까 너도 신경쓰지 마. 알았어? ” [ 강후랑... 끝낼거야? ] 효원의 물음에 현조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마음속에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강후를 몰아내는게 쉽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의 약혼자를 뺏는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 그래. 남의 약혼 파탄내는 나쁜년은 되고 싶지 않아. ” [ ... ] “ 끊을께. ” [ 알았어. ] 현조는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현조한테 깝쭉거리며 다가온 것도 화가 나는데 거기다 효원이와의 사이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강후에게 화가 나서 미칠지경이었다. 왜 강후가 효원이와 떼어놓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약혼녀가 있다는 걸 효원이 알고 있으니 혹시라도 그 사실을 현조에게 발설할까봐 의도적으로 효원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현조는 강후의 용의주도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기가 막혔다. “ 박강후... 네가 감히 날 가지고 놀아?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여자를 데리고 놀았나본데...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어. ” 아플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는 현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22편 끝. 23 효원은 착잡한 마음에 전화를 끊고도 한참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현조가 알게 될거라 예상했었고, 그 시간이 되도록 빨리 오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만 막상 현조가 자신에게 확인을 해오자 대답 해주는게 망설여졌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후에게서 직접 들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굳이 자신에게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강후와 준희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약혼을 한 건 아니었다. 약혼녀가 있다는 말을 해줄 것이 아니라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가 있다는 말을 해주는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이 음모를 꾸미는 모략가가 된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 박강후... 니가 판 무덤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 ” 더 깊이 생각하고 있어봤자 자신이 해줄 일은 없었다. 그저 강후를 향한 현조의 마음이 그다지 깊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 똑똑- ] “ 네. ” “ 잠깐 나와봐라. 아버지가 할 말이 있으신단다. ” 김여사의 냉랭한 목소리에 효원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현조가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김여사는 내내 효원에게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배신감을 느껴서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효원은 어머니에게 서운한게 많았다. 늘 자신을 효상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용품쯤으로 여기는 태도도 싫었고, 무조건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휘둘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김여사의 고집도 이젠 지겨웠다. 효원이 거실로 내려가자 늦은 시간임에도 아버지인 정사장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 부르셨어요? ” “ 그래. 앉아라. ” “ 네. ” 효원이 소파에 앉자 김여사가 과일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정사장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너희 결혼 서둘렀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 경주와 제 결혼 말입니까? ” “ 그래. ” “ 왜 갑자기.. ” “ 경주 나이도 있고, 그리고 내년에 준희 귀국하면 준희도 결혼을 해야 하니까, 늦어도 음력 설 이전에는 결혼을 했으면 싶다. ” “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은데... ” 효원이 망설이는 듯하자 김여사가 정사장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양쪽 집안 모두 요란스럽게 할 생각없고, 혼수다 뭐다 거창하게 하지 않을 생각이니 그렇게 짧은 시간도 아니지. 거기다 경주가 요즘 힘들어 한다고 안사돈이 걱정을 하더라. ” “ 경주가요? ” “ 그래. 얼마 전부터 영 힘도 없고, 시큰둥하다더라. 혹시 너희 싸웠었니? ” “ 아니예요. 싸우긴요. ” “ 그럼 얼른 결혼식 올리자. 더 이상 시간 끄는 것도 그렇고, 또 남자건 여자건 아홉수에는 결혼 하는거 안 좋다더라. 너희 둘 다 내년에는 스물아홉 아니니. 준희네야 준희가 어리니 혹 미룰수도 있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다른 말말고 그렇게 진행시켜. ” “ 경주랑 의논해 보구요. ” 효원이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대답을 했다. 정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듯 효원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출장 좀 다녀와야 겠다. ” “ 출장요? ” “ 그래. 독일 좀 다녀와라. 이번에 새로운 펀칭 기계를 하나 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사는게 낫지 싶다. 난 연말이라 길게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 내 대신 네가 좀 다녀와. 가서 그 쪽 기계들 업그레이드된 것도 보고, 그리고 새롭게 들일만한 기계가 있는지 그것도 알아보고. ” “ 네. 기간은 얼마나.. ” “ 너희 결혼 문제도 있고 하니까 길게는 못가지. 길어도 20일 정도... ” “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서 다녀오겠습니다. ” “ 그렇게 해라. 그만 올라가 봐. ” “ 네. ” 효원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혼기가 꽉 찬 두 사람의 결혼을 서두르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렇게 서둘러서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경주도 마찬가지일텐데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경주와 만나서 진지하게 의논을 해 보리라 생각하고 그는 길고 긴 하루를 마감했다. ================================================================================== 강후는 현조와 연락이 되지 않아 신경이 몹시 날카로와져 있었다. 어제 아픈 걸 보고 온 뒤 내내 신경이 쓰였다. 찾아가 볼까 하다 괜히 아픈데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전화로 안부나 물어볼까 했는데 현조는 집전화도 휴대폰도 받지를 않았다. “ 도대체 어딜 간거야? ” 삼일 뒤면 프랑스로 가야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급했다. 현조가 아픈 걸 보고 떠나면 내내 걱정이 될 것이다. 효원으로부터 현조를 떼어놓는 건 성공했지만 그가 없는 사이 현조가 효원과 만나게 되면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터였다. 어떻게든 현조를 더 단단히 묶어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뾰족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고 불안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현조를 데리고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그곳에 가는 이유를 알려주어야만 했다. 거기다 현조가 고분고분 여행을 따라갈 것 같지도 않았다. 한 밤중이 되도록 현조에게 연락이 되지 않자 그는 불안한 마음에 현조의 집으로 향했다. 차를 주차하고 현조의 집을 올려다 보니 아직 들어오지 않은듯 불이 꺼져있었다. “ 미남씨 한테 갔나? ” 미남에게 전화를 해보자니 전화번호를 알 수가 없었다. 전에 현조가 전화를 했던게 생각나 발신번호를 검색해 봤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워버린듯 번호가 남아있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그는 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 “ 상훈아. 나다. ” [ 강후냐? ] “ 응. 혹시 미남씨 같이 있냐? ” [ 어. 왜? ] “ 오늘 현조한테 연락왔었는지 한번 물어봐. ” [ 연락없었을 걸? 안 그래도 아까 우리 호빵이 걱정하던데... 연락안된다고.. 난 너랑 같이 있는줄 알았지. ] “ 그래? 그럼 도대체 어딜 간거지? 미남씨 좀 바꿔줄래? ” [ 기다려 봐. ] 상훈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미남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조랑 만나신거 아니예요? ] “ 아뇨. 아침부터 줄곧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 미남씨랑 같이 있나 싶어서요. ” [ 어? 이상하네. 새벽에 내가 나올때까지만 해도 어디 간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저도 아까 전화해보니까 없어서 강후씨가 데리고 나갔나 했죠. ] “ 알았어요. 미남씨. 제가 계속 전화해 볼께요. 혹시 나중에라도 현조한테 연락오면 꼭 저한테 전화하라고 전해주세요. 늦어도 상관없다고. ” [ 네. ]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다시 현조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하루아침에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린 현조때문에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 도대체 그 몸을 해서 어디를 간거야? ” 순간 혹시 효원이 현조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협박까지 해가면서 둘을 떼어놓았는데 자신이 방심한 사이에 일이 틀어진게 아닌가 싶어 강후는 욕설을 내뱉았다. “ 젠장...미치겠네. 진짜. ”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현조가 너무 심하게 아파서 전화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번쩍 스쳤다. 강후는 급히 차문을 잠그고는 근처 열쇠집으로 가서 아파트문을 따줄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영 의심스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에게 집주인의 약혼자라고 얼버무리고 그는 열쇠수리공을 끌고는 현조의 집으로 향했다. 강후의 마음은 급하기만 한데 열쇠수리공의 작업은 느리기만 했다. 1분마다 열쇠수리공을 다그쳤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작업에 열중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나자 그는 급하게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현조야. 안에 있어? 현조야. ” 하지만 집안은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오래 전에 집을 나가버린것 같았다. 강후가 망연하게 서 있자 열쇠수리공이 그를 불렀다. “ 출장비는 2만원입니다. ” “ 네? 아. 고맙습니다. 그리고 열쇠를 바꿨으면 좋겠는데.. ” “ 어떤 걸로 말입니까?" “ 디지털 도어락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 “ 그럼요. 바꾸신다고 하시면 제가 다시 가게에 가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 “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 열쇠수리공이 가고 나자 강후는 깨끗하게 정리된 집 안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현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맥이 탁 풀려버렸다. 연락도 없이 어디를 간건지... 잠시 후 열쇠수리공이 꽤나 큰 박스 하나를 들고와서는 주섬주섬 풀어놓는 것을 보며 강후는 생각에 잠겼다. ‘ 왜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린 걸까? ’ 한참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강후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효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정효원입니다. ] “ 나다. ” [ ... ] “ 말 안할거냐? ” [ 무슨 일이야? 너 이제 내 친구 아닌 걸로 아는데... ] 가시가 잔뜩 돋아난 효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본론부터 꺼냈다. “ 너 혹시 현조 만났냐? ” [ 왜? ] “ 대답이나 해. 너 현조 만났어? ” [ 아니. 안 만났어. ] “ 그럼... 전화통화는? ” [ 어제 현조가 전화했더라. ] “ 너... 현조한테 나와 준희 관계.. 말한거야? ” [ 아니. ] “ 믿어도 되냐? ” [ 믿던지 말던지 내가 알 바 아니잖아. ] “ 알았다. 끊자. ” 이죽거리며 화를 돋구는 효원의 태도는 이미 강후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는 오직 현조가 도대체 어딜 갔는지 그것만이 관심거리였다. 도어락을 모두 설치한 열쇠수리공에게 돈을 치뤄서 보내고 강후는 그냥 현조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현조가 돌아오면 어딜 갔다 왔는지 왜 전화는 하지 않았는지 꼬치꼬치 물어볼 참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현조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 현조는 동대구역에 내려서야 자신이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남이 돌아간 후 그녀는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가서 제일 먼저 출발하는 대구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세 시간 동안 약기운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대구역이라는 방송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내렸더니 아직까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서울에 있으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부랴부랴 대구로 내려와 버렸다. 강후 성격에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 올게 뻔하고, 그렇다고 한참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얼굴을 마주하자니 자신이 못난 여자들처럼 강후를 상대로 악다구니를 칠것 같아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종의 피신을 한 참이었다. 그 동안 자신을 속여온 강후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약혼녀가 있는 주제에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몰아부친 것도 화가 나는데 끝까지 거짓말은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뻔뻔스러운 강후의 태도에 실망과 더불어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막말로 깊은 관계였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혔다. 그냥 툭툭 털어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지난밤 뜬 눈으로 밤을 새워버렸다. 분명히 깨끗하게 정리를 해야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강후에게 미련이 남았다. 그걸 깨닫게 되자 자신에게 마저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이것 저것 생각하다 그냥 도망쳐버렸지만, 좋건싫건 정리를 하자면 한번쯤은 강후와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을 상대로 장난질을 한 죄값을 톡톡히 받아낼 참이었다. 그러자면 먼저 몸을 추스리는게 우선이었다. 아플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부모님이라는데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 보지 못한 대구도 그립고 엄마의 얼굴도 보고 싶어서 그녀는 핑계 삼아 대구로 내려와 버렸다. 생각이 정리 될 때까지 그녀는 대구에 머물 생각이었다. 엄마에게 미리 전화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다 그녀는 다시 집어넣어 버렸다. 강후가 사준 휴대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주루룩 늘어선 공중전화박스에 가서 동전을 넣고는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꽤 오래 가는데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벌써 가게에 나가셨나? ’ 현조는 전화를 끊고는 공중전화박스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겨울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열로 인해 몽롱해져 있던 머릿속까지 개운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역 앞 버스승강장으로 다가가 집으로 가는 좌석버스를 타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구로 오면 복잡한 생각따위는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강후에 대한 생각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현조는 세차고 고개를 젓고는 버스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의 가게가 있는 성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때가 가까워져 있었다. 기차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터라 배도 고팠고 감기로 인해 잔뜩 잠긴 목은 점점 더 아파왔다. 얼른 따뜻한 방에 눕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 현준 비디오> 라고 적힌 노란색 간판이 보이자 현조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새 간판을 바꾼건지 우중충하던 회색간판이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현조는 잠시 길 건너편에 서서 유리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를 지켜보았다. 6년 전 곱게 길러온 딸이 부모가슴에 못을 치는 몹쓸 짓을 한 이후로 엄마는 늘 현조를 보면 가슴아파했다. 어쩌다 내려오는 집에서조차 안쓰러운 눈길을 받아야 하는게 싫어서 명절을 제외하고는 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내려오질 않았다. 딸을 보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이기적인 딸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늘 두 가지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죄인대하듯 냉랭하게 쳐다보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 보듯이 불쌍한 눈빛을 보내거나... 그 어느것도 그녀가 원하는 눈길은 아니었다. 그나마 강후는 그녀를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그저 지현조란 여자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게 좋아서 강후에게 마음 한 켠을 비워주었는데 알고보니 그는 그녀를 데리고 놀 작정이었던 것이다. 꽁꽁 얼어있던 두터운 얼음이 쩍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처럼 지금 현조의 마음은 심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후가 나쁜 놈이란 걸 알면서도 꺼놓은 휴대폰을 자꾸만 켜고 싶은 갈등이 생겼다. 강후가 애타게 자신을 찾으면 나 여기 있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또 다시 강후를 향해 뻗어가는 생각을 접으려 그녀는 과장되게 씩씩하게 걸어서 엄마의 가게문을 열어젖혔다. “ 어서오세요. ” 엄마는 책을 정리하는 중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했다. “ 엄마. ” 꽉 잠긴 현조의 목소리에 엄마가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 현조야... ” 엄마는 들고 있던 책을 그냥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달려와 현조를 껴안았다. 엄마는 이렇게 야단스럽게 애정을 표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눈빛으로 널 아낀다, 사랑한다 말하기는 했어도 늘 가슴속에 묻어두고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는데 얼굴을 보지 못한 일년간 엄마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 엄마.. 왜 이래? ” 무뚝뚝하니 자신을 떼어놓는 딸을 보며 경숙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 “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 나 회사 그만 뒀거든. ” “ 그래? 잘했다. 이제 대구 내려와. 뭐하러 객지서 고생하니. 여기도 일자리 얼마든지 있어. ” “ 그럴까 생각중이야. 근데 현준이는? ” “ 걔는 아르바이트갔지. 무슨 햄버거 집에서 일한단다. ” “ 그래? 철 들었네. ” “ 그럼 언제까지 막내티만 낼줄 알았니? 군대도 다녀온 녀석이 그 정도는 해야지. 밥은 먹고 온거야? ” “ 아니. ” “ 어째... 배가 고파보인다. 그리고 목소리는 왜 그 모양이야? 어디 아파? ” “ 몸살이야. 사표낸다고 일을 조금 무리하게 했더니 그러네. ” “ 에구. 비쩍 말라가지고는... 며칠이나 있다 갈거야? 온 김에 보약도 좀 먹고 푹 쉬다 가지. ” “ 아냐. 곧 내려가 봐야지. 직장을 알아보던지 아니면 엄마 말대로 아예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오던지. ” “ 대구로 와 그냥. ” “ 생각해 보고. 나 배고파 엄마. ” “ 알았어. 뭐 먹을래? 가게 때문에 집에는 못 들어갈 것 같고 시켜먹자. 저기 한정식 집에서 순두부찌개를 배달해주는데 맛이 괜찮아. 그거 먹을래? ” “ 그러지 뭐. ” “ 그래. 저기 카운터에 앉아 있어. 엄마 이거 정리 마저해야겠다. ” “ 같이 해. 키도 작은 사람이 이걸 어떻게 정리할려고.. 참. ” “ 내 자식이지만 가끔 참 얄밎게 말해. 지현조. 내가 키가 작은게 아니라 네가 큰 거라니까. 도대체 너나 현준이나 누굴 닮아 그렇게 큰지.. 네 아빠도 그렇게 크진 않았었는데... ” “ 글쎄. ” 현조는 가방을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책을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약기운 때문인지 앉았다 일어나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머릿속을 비우는데는 노동이 최고였다. 때문에 현조는 정리하지 않아도 될 선반 꼭대기에 놓인 책과 비디오테잎까지 내려서 걸레로 먼지를 닦아 냈다. 한참이 지나자 순두부찌개가 배달되어 왔고 엄마와 현조는 서로 더 많이 먹으라고 덜어주고 다시 돌려받고 하며 이른 점심을 먹었다. 3시가 조금 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조는 엄마의 어깨에 기대 깜빡 졸다 새로 손님이 들어오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 먼저 들어가서 편하게 자라니까. 말을 안 들어. ” “ 싫어. 엄마랑 있을거야. ” “ 고집도.. ”“ 엄마. 나 떡뽁이 먹고 싶어. 여기 떡뽁이 맛있게 하는 집 없나? 매콤하게.. ” “ 집 앞에 분식집 떡볶이가 맛있다고 현준이가 그러던데..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궁상맞게 이러고 있지 말고. ” “ 싫다니까... 좀 참다 나중에 집에 들어갈때 사가지고 가서 먹지 뭐. ” “ 그러든지. ” 엄마는 현조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는 손님이 내민 테잎의 바코드를 스캐닝하고 있었다. 현조는 또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약에 수면제가 첨가되었는지 약만 먹으면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현조야.. 현조야.. ” “ 어? ” 정신없이 졸고 있던 현조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만 들어가자. ” “ 에? 가게는? ” “ 하루 장사 안한다고 어떻게 되는거 아니야. 문에다 일이 있어 일찍 문닫는다고 써붙여 놨으니까 괜찮아. 가방 챙겨 얼른. ” “ 응. ” 현조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가방을 챙겨서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이미 어두워지는 골목에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 여기는 그대로네. ” “ 응? ” “ 이 골목 말이야. 1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네. ” “ 그렇지? ” “ 어. ” 현조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는 보조를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엄마와 있을때는 강후에 관한 생각은 잠시 접어야지 했으면서도 또 다시 의식은 서울에 있는 강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 진짜 젠장이네. 뭐하는 거냐. 지현조...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이 꼴이라니... ’ 스스로를 비웃어 봤지만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강후를 떨쳐버리는게 쉽지 않았다. “ 애인은 아직 없어? ” “ 응? ”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현조는 애인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엄마를 쳐다보았다. “ 무슨 애인? ” “ 얘는 참. 애인이 애인이지 무슨 애인은? 너 애인 아직 없냐고 묻는거잖아. 엄마가.. ” “ 아... 없어. ” “ 아이고 참 큰일이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데 아직 애인도 없고.. ” 엄마의 한숨소리가 깊어지는 걸 들으며 현조는 또 다시 강후를 생각했다. 이럴 때 나 사귀는 놈 있어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나도 선이나 볼까? ” 심드렁하니 내뱉는 딸의 말에 경숙은 반색을 하며 현조를 쳐다보았다. “ 그럴래? 안 그래도 슈퍼여자가 자기 조카얘기를 은근히 꺼내던데... ” “ 누가? ” “ 왜 대박슈퍼 그 여자... 딸만 셋 있는... ” “ 아... 그 수다스러운 아줌마? ” “ 그래. 뭐 7급 공무원이라던가? 하여튼 서울 중앙부처에서 일한다더라. 나이는 서른 둘인데 모아둔 돈도 제법 있다더라. ” “ 생긴건 어떻대? ” “ 생긴거? 그냥 뭐 어디 빠지지는 않는단다. ” “ 쌍꺼풀은 있을래나? ” “ 쌍꺼풀? ” “ 어... 그어놓은 것처럼 진한 쌍꺼풀...” “ 글쎄...” “ 코는 높은가? ” “ 코? ” “ 어. 조각처럼 생겼을래나? ” “ 무슨 소리야? ” “ 키는 커야되는데... 한 185정도.. ” “ 어디 영화배우 오디션하니? ” “ 그런 사람이 어디 배우뿐인가.. 강후도 그렇게 생겼는데... ” “ 누구? 강후? ” 무의식중에 강후의 외모를 떠올리던 현조는 아차싶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경숙은 딸에게서 풍기는 남자의 냄새를 감지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집요하게 추적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 너... 남자 있지? ” “ 없어. ” “ 없기는... 강후? ” “ 아니라니까. 그냥 오며가며 지나친 사이야. ” “ 어쨌거나.. 미혼이지? ” “ 글쎄... 약혼은 했다던데.. ” “ 에효.. 아깝네. 꼭 잘난 것들은 임자가 있더라니. ” “ 그렇지. 아깝지. ” 엄마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현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머릿속에다 뿌리를 내려버렸는지 강후의 얼굴이 시도때도 없이 눈 앞에서 가물거렸다. “ 돌겠네. ” “ 뭐? ” “ 아냐.. 좋다고.. 엄마 보니까. ” “ 그런 녀석이 일년동안 꼬빼기도 안비쳐? 현준이는 너한테 완전히 삐졌어. 알아? ” “ 그래봤자... 주먹질 몇 번이면 알아서 깨깽하지.. ” “ 동생 좀 그만 잡아라. 어찌된게 여자인 너는 과격하고 남자인 현준이는 곱게만 크는지... ” “ 그러니까.. ”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낡은 파란색 대문이 현조의 눈에 들어왔다. “ 좋다.. 집에 오니까.. ” “ 그러니까 푹 쉬었다 가. 아니면 일주일만이라도.. ” “ 그럴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조는 곧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강후와의 일을 어떤 식으로든지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이미 결론은 난 일인데도 자꾸만 미련을 쓰게되는 자신이 싫어서 현조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24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 밖을 내다보는 강후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다. 늦어도 집에는 들어오겠지 하며 기다린게 꼬박 10시간이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었나보다. 재룡이라도 시켜서 현조가 갈만한 곳을 모조리 뒤져보는건데... 강후는 그러고도 세 시간을 더 기다리다 열 시가 지나서야 미적미적 현조의 집을 나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화가 날 판인데 이제는 외박까지. 그는 주차되어있던 차를 몰고는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일단은 집에 가서 샤워를 한 후에 재룡이를 불러서 현조를 찾아보게 할 작정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더니 눈이 빡빡하니 아파왔다. 침침한 눈으로 집에 들어서서 그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재룡을 불러들였다. “ 현조 좀 찾아봐. ” “ 네? ”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은지 재룡이 멍한 얼굴로 강후를 쳐다보았다. “ 없어졌어. 어제부터 연락이 안돼. ” “ 네... 근데 어디서부터 찾아봐야 하는건지... ” 난감한 표정으로 되묻는 재룡의 말에 강후는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 글쎄... 도대체 어디가야 이놈의 까마귀를 잡을 수 있는지... ”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강후는 재룡을 향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됐다. 그냥 내가 알아볼테니까 넌 신경쓰지 마라. ” “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 그래. ” 재룡이 가버리고나자 강후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는 눈을 감았다. 분명 잠이 오긴한데 이상하게 정신은 점점 맑아져왔다. 혹시 지금쯤이면 집에 들어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다시 현조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공허한 신호음만 들릴 뿐 허스키한 현조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던진 강후는 베개를 끌어안고는 도망가려 기를 쓰는 수면이란 놈을 붙잡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현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 “ 엄마 누구왔어요? ” 우렁찬 현준의 목소리에 현조는 이불 속에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일어나서 반가운 척을 해야 되는데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영 움직이기가 싫었다. “ 누나- ” 문이 벌컥 열리고 현준이 후다닥 뛰어와서 강아지처럼 현조 옆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 이씨- 저리 가. ” 귀찮다는 듯이 발로 툭툭 밀치는 현조를 꼬옥 껴안으며 현준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 누나. 도대체 뭐 하고 살았어? 집에도 안 내려오고.. 이번 추석에는 엄마랑 둘이서 지냈다는거 알아? 삼촌네도 서울로 올라가 버리고 이제 누가 있다고 시치미 뚝 떼고 안 내려 와? ” “ 바쁘다고 했었잖아. ” “ 그래도.. ” “ 떨어져 빨리. 다 큰 녀석이 징그럽게 들러붙고 그래. ” 현조가 이불 속으로 더 기어들어가 버리자 현준은 서운한 표정으로 현조를 노려보았다. “ 달랑 하나 있는 동생한테 그런 말 하고 싶냐? ” “ 둘이었으면 큰일나지. 하나도 귀찮은데. ” “ 나 말 안해. ” 현준이 콧김을 내뿜으며 돌아눕자 현조가 등을 쿡쿡 찔렀다. “ 삐졌냐? 샌님? ” “ 몰라. ” “ 삐지지 마라. 샌님. ” “ 흥. ” “ 누나가 용돈을 준비해 왔는데... ” 용돈이라는 말에 현준이 얼른 돌아누웠다. “ 얼마? ” “ 한 장. ” “ 겨우? ” “ 이런 씨- 대학생 주제에 백만원이 적어? ” “ 뭐? 배...백만원? 십만원이 아니고? ” “ 쪼잔스럽기는... 누나가 얼마 전에 적금 탔다. 네 용돈 준지도 오래된 것 같아서 큰 맘먹고 뚝 떼어놨지. ” “ 어헝~ 누나 고마워. ” “ 고맙지? 그럼 나가서 물 좀 떠가지고 와. ” “ 어. ” 현준이 쌩하니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리자 현조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강후에 대한 생각이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며칠 푹 쉬자고 내려왔는데 쉬기는 커녕 속만 점점 더 답답해졌다. “ 누나 물. ” 현준이 커다란 사발에 물을 가져오자 현조는 시원스럽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 캬아- 시원하다. ” “ 무슨 물을 술마시듯이 하냐? ” “ 아- 술 땡겨. ” “ 누나 술마시고 싶어? ” 현준이 눈알을 똘망똘망하게 굴리며 바짝 다가앉았다. “ 한 잔 하러 갈래 현준아? ” “ 그럴까? ” “ 엄마도 데리고 갈까? ” “ 에이. 엄마는 안되지. 노친네 맥주 한 잔에 혼수상태 되는거 몰라? ” “ 그렇긴 하지. 나 옷 갈아 입고 나갈테니까 엄마한테 우리 나갈거라고 말해라. ” “ 응 누나. ” 현준이 쪼르르 나가버리자 현조는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위에 두꺼운 파카를 걸쳐입었다. 감기 걸린 주제에 술을 먹는게 무식한 짓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강후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떨쳐 내려면 술이라도 마셔야만 했다. 현준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집 근처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테이블로 다가와서 메뉴판을 내밀었다. “ 주문하시겠어요? ” “ 뭐 먹을래? ” 현조가 메뉴판을 들이밀자 현준이 골뱅이 무침을 손가락으로 꾹 찍었다. “ 골뱅이 무침하나 하구요, 오백 두 개 주세요. ” “ 네. ” 여자애가 가버리자 현준이 현조에게 속닥거렸다. “ 누나. 예쁘지? ” “ 어? ” “ 금방 주문받으러 왔던 애. 예쁘지? ” 현준의 말에 그녀는 서빙하느라 바쁜 여자애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 조그만 했다. 예쁘다기보다는 그냥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 글쎄.. 귀엽네. ” “ 이쁘지 않아? ” “ 그다지...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닌데? ” “ 그런가? 근데 난 왜 그렇게 이뻐보이지? ” “ 너 쟤한테 작업 걸고 싶지? ” “ 헉.. 눈치챘구나. 안 그래도 내가 작업 한번 해보려고 여기 수시로 들락거리잖아. 근데 쟤가 군대 간 남자친구가 있어서... ” “ 뭐? 이 놈 진짜 나쁜 놈이네. ” “ 내가 왜? ”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그러냐고 묻는 동생의 뒤통수를 세게 갈겨 주고 현조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 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임자 있는 여자를 집적거려? 하여튼 고추 달고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다 그 모양이야. 지꺼도 제대로 못 챙기는 주제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놈이 있질 않나, 남자친구 군대 가 있는거 뻔히 알면서 수작 넣고 있는 놈이 있질 않나. 에라이- 도둑놈의 새끼야. ” “ 누나- ” 현준이 억울하다는 듯이 현조를 쳐다봤지만 현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딴 놈들은 다 그렇게 살아도 넌 그렇게 살지 마라.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 ” “ 내가 뭘 어쨌다고? ” “ 몰라서 물어? 쟤 남자친구 군대 있다며? 근데 그 틈 노려서 낚아 채려고 하잖아. ” “ 아니... 아직 작업은 안 들어갔다니까. ” “ 때려치워. 작업이고 지랄이고. ” “ .... ” 현준은 뜨악해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유별나게 흥분하는 현조의 태도를 보자 괜히 건들였다가는 뼈도 못추릴 것 같았다. “ 누나 진정해. 이성을 찾아. 왜 이래? ” “ 내가 뭘? ” “ 왜 누나가 흥분을 하냐? 참 내. ” “ 내가? 내가 뭘 흥분을 해? ” 현조가 발끈하자 현준이 혀를 끌끌찼다. “ 누나도 나이 먹는구나. 어째 금방 일어났던 일도 기억을 못하냐. 쯧쯧... ” “ 죽을래? ” 현조가 주먹을 휘두르자 현준이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한테 꼭 주먹질을 해야 속이 시원하냐? ” 입을 삐쭉거리는 현준을 심하게 째려봐주고 현조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쉰 한숨에 땅굴이 수십개는 파졌을 것 같았다. “ 누나 무슨 고민있어? ” 한숨을 들이쉬다 내쉬다 하는 누나를 보며 현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고민은 무슨... 그냥 세상사는게 지겨워서. ” “ 누나... 혹시 아직도 나쁜 생각하고 있는거 아니지? ” “ 아냐. 다시는 그런 짓 안해. ” “ 누나가 힘들어 할때마다 엄마랑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한줄 알아? ” “ 미안해. ” 자신의 자살기도로 엄마와 현준도 큰 고통을 받았다. 무책임하게 죽어버리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약을 털어넣는 그 순간까지 엄마와 현준의 아픔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피투성이가 된 효상의 얼굴만을 떠올렸었다. “ 누나도 이제 결혼해야지. 나이도 있고, 또 누나때문에 엄마가 걱정이 많아. ” “ 결혼? 그거 꼭 해야되나? ” “ 꼭 해야되는건 아니지만 한번쯤은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 자식이 태어나면 그것도 이쁠것 같고. 그리고 난 무엇보다도 엄마 편하게 모시고 살려면 일찍 결혼해야할 것 같아. ” “ 엄마 가게 일 많이 힘들어 하시니? ” 걱정스럽게 묻는 현조의 말에 현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일이 힘드신게 아니라 외로우신것 같아. 아버지 돌아가신지도 벌써 십년이나 지났잖아. 재혼 하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고 차라리 손주들이나 안겨드리면 덜 적적해 하실것 같아서... ” “ 우리 현준이 효자네. ” “ 내가 장남인데 당연히 엄마 걱정을 해야지. ” 어른스럽게 말하는 동생을 보자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자신은 가족들에게 상처만 줬는데 현준은 벌써부터 그런 걱정까지 하고 있었나 보다. 가족을 보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강후가 있는 서울을 무작정 벗어나고 싶어서 대구로 도망쳐 온 자신의 행동이 한없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현조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남아있던 술을 들이켰다. 두 남매는 기분좋을 정도로 취해서 꼭 껴안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벌써 주무시는건지 안방은 기척이 없이 조용했다. 현준이 씻으러 들어가버리자 현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술기운에 몽롱해지는 눈을 감고는 강후를 생각했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곧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죽이던 살리던 끝장을 봐야지 더 이상 밍그적거리고 있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릴것 같았다. 이제는 숨쉬는 것처럼 익숙해진 한숨을 또 내쉬며 현조는 억지스레 잠을 청했다. ================================================================================== 클럽 안은 온통 살벌한 기운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일렬로 쭉 늘어선 웨이터들과 기도들, 지배인, 그리고 주방의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젊은 사장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했길래 이딴 소문이 도는 겁니까? ” 강후는 오늘자 신문을 지배인의 얼굴에 들이밀며 이를 갈았다. 이니셜로 N클럽이라고만 표시된 신문기사에는 요즘 유명 나이트클럽들이 고가의 상품을 내걸고 퇴폐적인 댄스파티를 벌여 매상을 올리는 상술을 부리고 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제일 심한 곳으로 누가봐도 네메시스란걸 알수 있는 클럽의 내부사진이 떡하니 신문에 올라 있었다. “ 죄송합니다. 경기가 안 좋다보니 매상을 올리려는 단순한 생각에... ” “ 제 허락도 없이 누가 이런 추잡한 짓거리를 하라고 했습니까? ” “ 그게.. 저.. ” “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 “ 네. ” 살벌한 강후의 눈빛에 지배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강후는 지배인을 한번 더 노려보고는 재룡을 쳐다보았다. “ 재룡이. 넌 뭐하고 있었어? 이런 기사가 나갈 정도로 나쁜 소문이 돌았으면 진작 나한테 알렸어야지. ” “ 죄송합니다. ” “ 내가 요즘 소홀해졌다고 너까지 이러냐? 다시 이런 일 있으면 너부터 잘라버릴테니까 조심해라. ” “ 네. ” 신문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강후는 클럽내의 사무실로 들어와 버렸다. 삼일동안 현조한테만 온통 신경을 쓰다보니 신문에 이런 기사까지 나버렸다. 아침에 장여사가 전화를 해서 한 소리를 할 때까지 그는 이런 기사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삼 일 전에 사라져버린 현조는 아직 연락도 없고, 거기다 이런 기사까지 나자 강후의 신경은 살짝 스치기만해도 손가락을 베일것같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이제 너무 자주 걸어서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린 미남의 전화번호를 다시 눌렀다. [ 여보세요. ] “ 미남씨. 강훕니다. 아직 연락 안왔습니까? ” [ 네. 이럴 애가 아닌데.. 정말 현조랑 아무 일도 없었어요? ] “ 네. ” [ 이상하네. 대구 내려갔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고 갔을텐데... ] “ 대구 집 전화번호는 모른다고 했죠? ” [ 네. 대구 내려가도 늘 휴대폰으로만 통화를 해서 집 번호까지는... ] “ 알았어요. 미안해요 미남씨. 자꾸 귀찮게 해서... ” [ 아니예요. 현조 연락되면 바로 강후씨한테 알려줄께요. ] “ 네. 그럼. ”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후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화가 났고 그 다음엔 걱정이 되고 지금은 아예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어디 있던지 잘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루 아침에 땅속으로 푹 꺼져버렸는지 도통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왜 이러냐... 지현조... 나보고 어쩌라고... ” 그는 코트를 챙겨들고는 클럽을 나와 버렸다. 가뜩이나 정신이 사나운데 강렬한 비트의 음악소리를 듣자 바짝 긴장해 있던 신경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는 습관적으로 현조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사이 현조가 다녀간 건 아닌지 찬찬히 집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현조가 다녀갔다는 흔적은 없었다. 강후는 다시 문을 잠그고는 차로 돌아와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이미 프랑스로 가는 건 포기해버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 있어야 했지만 그는 한심스럽게도 주인도 없은 아파트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 강후가 막 자신의 빌라에 도착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후는 급하게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 [ 오빠. 내 전화 기다린거야? 무지 반가워하네. ] “ 어? 준희구나. ” [ 응. 내가 전화 걸 줄 알고 있었어? ] 톡톡튀는 준희의 음성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자 강후는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요근래는 아예 한숨을 달고 살았다. [ 오빠. 나 곧 한국 들어갈거야. ] “ 뭐? ” [ 귀국할거라고. 예상했던 것보다 학기가 빨리 끝나서 곧 귀국할 수 있을거 같아. 좋지? ] “ 어. ” 강후는 어정쩡하게 대답을 하고는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엎친데 덮친다고 이제 완전히 과부하가 걸려서 여기저기 지뢰밭이 되어버렸다. “ 준희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 [ 무슨 말? 사랑한다고? ] 장난스럽게 묻는 준희의 목소리를 듣자 정리하자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 아니다. 너 귀국하고 나서 이야기 하자. ” [ 무슨 말인데 그래? 급한 얘기면 지금 해. 괜찮아. ] “ 아냐. 전화상으로 할 얘기가 아닌 것 같다. 언제쯤 귀국할거니? ” [ 음. 한달 쯤 뒤? 그것보다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고. ] “ 알았어. 그때보자. ” [ 오빠. ]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던 강후는 다시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 왜? ” [ 오빠 이상하다. 기다리는 전화있어? 왜 그렇게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고 해?] “ 아냐. 내가 좀 피곤해서 그래. ” [ 그래? 그럼 쉬어. 빠이 ] “ 그래. ” 강후는 전화를 내려놓고는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복잡한데 거기다 준희까지 보태자 이제는 자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거야? ”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지르던 강후는 기가 막히다는듯이 중얼거렸다. “ 잘하는 짓이다. 여자하나 어쩌지 못해서 이 꼴이니... 박강후 선수자격 박탈이다. ” 강후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는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내일은 대한민국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현조를 찾아낼 참이었다. 말도 없이 사라진 까마귀를 잡아다가 아예 날개를 꺾어버리리라. ================================================================================== 강후는 잠결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부시시 눈을 떠서 휴대폰을 더듬거렸다. 가까스로 휴대폰을 찾아서 귀에 가져다 대니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더불어 재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장님. 사장님... ] “ 왜? ” [ 얼른 여기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어디? ” [ 네메시스로 빨리 오십시오. ] “ 또 문제 생겼어? ” 강후는 몸을 일으키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재룡이 굳이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도 않았으리라. [ 그게 저... ] “ 말해. ” [ 그 분이... 오셨습니다. ] “ 누구? ” [ 지현조씨 말입니다. ] “ 현조가? ” 강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현조가 네메시스에 나타나다니..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 “ 나 만나러 왔다고 그래? ” [ 그게 아니라 지금 스테이지에 있습니다. ] “ 무슨 소리야 도대체.. ” [ 스테이지에서 남자들이랑 춤을 추고 계신데... 좀 걱정스러워서요. ] “ 춤을 춰? ” 강후는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을 챙겨입으며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 한 시간 전에 오셨는데, 술이 좀 취하신것 같습니다. ] “ 술까지? ” [ 네. ] “ 알았어. 삼 십분 안에 갈테니까 어디 가지 못하게 잘 지켜보고 있어. ” 강후는 전화를 끊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며칠간 행방불명이 되어서 사람 속을 있는대로 타게 만들더니 이제는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단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운전을 하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난폭하게 차를 몰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지나치는 차들의 항의성 크락션소리를 흘려들으며 강후는 급하게 네메시스로 향했다. 클럽에 도착하자 그는 차에서 내려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재룡이 입구쪽에 서 있다 강후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 오셨습니까? ” “ 그래. 어디있어? ” “ 저기 계십니다. ” 재룡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웬 여자가 남자들 틈에 둘러싸여서 춤을 추고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타이트한 셔츠를 입고 춤을 추는 여자의 모습이 굉장히 선정적으로 보였다. “ 저게... 현조란 말이야? ” 믿기지 않는다는듯 되묻는 강후를 보며 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 허 참... 기가 막혀서... ” 강후는 여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현조가 평상시 저런 야한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남자들한테 둘러싸여서 헤픈 여자처럼 춤을 추고 있다니... “ 어떻게 할까요? 모시고 나올까요? ” “ 됐어. 그냥 둬. ” 강후는 현조를 노려보며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현조는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는지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색정적인 춤을 추고 있는 현조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왜 하필 저런 춤을 다른 남자들과 추고 있는지...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현조는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몸을 잔뜩 비벼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테이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듣고 있는 강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재룡은 강후의 옆에서 불안스럽게 강후와 현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현조를 바라보는 강후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자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현조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현조에게 잔뜩 몸을 밀착시키며 비벼대는 것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강후의 인내심이 언제 바닥날지... 강후는 줄곧 현조를 노려보다 어떤 놈팽이가 현조를 끌어안다시피하고는 현조의 등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고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스테이지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현조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 뭐하는 짓이야? 지현조. ” “ 어? 강후네... ” 현조는 술에 취한 듯 그를 보고 헤롱헤롱 거리며 웃었다. “ 너 미쳤어? 지금 뭐하는 짓이야? ” “ 내가 미쳐? 왜? ” “ 몰라서 물어? 입고 있는 옷 꼴하며 삼일 동안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러고 나타나냐고? ” “ 아- 여행다녀왔지. 생각할게 좀 있어서. ” “ 그럼 연락을 했어야지. ” 두 사람은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거의 고함을 지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안되겠다. 따라나와. ” 강후가 현조의 손목을 잡아끌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강후의 앞을 막아섰다. “ 너 누구야? 누군데 잘 놀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려고 그래? ” “ 비켜. ” 강후가 짜증스럽게 대꾸를 하며 살짝 비켜나자 남자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술이 잔뜩 취한 남자에게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 어딜 가? 가려면 여자는 놔두고 가던가. ” 더 이상 추근대는 남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강후는 재룡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재룡이 서둘러 다가와 남자를 막아섰다. “ 많이 취하신것 같은데 그만 나가시죠. ” “ 뭐? ” “ 그만 나가주십시오. ” “ 하- 손님을 막 내쫓내? 종업원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여기 사장 나오라고 해. 야- 사장 나와. ” 남자가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자 스테이지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강후는 한손으로는 여전히 현조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남자를 향해 말했다. “ 내가 여기 사장인데 너같은 손님 필요없으니까 꺼져. ” “ 뭐? 이 씨발... 일루 와. 오늘 잘 만났다. ” 남자가 강후에게 성큼 다가서자 재룡이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서는 스테이지 밖으로 끌고나갔다. 남자는 끌려나가면서 강후를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욕을 해댔다. “ 나가자. ” 강후는 현조를 끌고는 급히 클럽을 빠져나왔다. 웬일인지 현조가 고분고분 그를 따라왔다. “ 이것 좀 놓고 가자. 팔 아프다. ” 현조가 혀가 풀린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강후는 뒤를 돌아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현조는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어디가서 얘기 좀 해. ” 그는 차를 타고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현조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멀뚱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강후는 짧은 치마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현조의 다리를 애써 외면하며 화가 난 음성으로 물었다. “ 어디 갔다 온거야? ” 잔뜩 굳어진 강후의 음성에도 현조는 그저 그를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 대답 안할거야? 도대체 어딜 갔다 온거냐고? ” “ 강후야. ”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서 있는 강후를 보며 현조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이리와 봐. ” “ 뭐? ” “ 이리 오라고. ” 강후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현조에게 다가섰다. 그가 다가오자 현조는 천천히 일어나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 뭐하는 거야? ” 갑작스러운 현조의 행동에 강후가 바짝 긴장을 했다. 이렇게 먼저 스킨쉽을 해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현조는 작정이라도 한듯 그를 향해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 “ 쉿- 조용 ” 현조의 입술이 감질맛나게 강후의 입술을 훑고지나갔다. “ 현조야. ” 강후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들었다. 며칠동안 애를 태운 이유를 먼저 물어봐야 하는데 현조의 입술이 닿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 키스해 줘. ” 허스키한 현조의 목소리에 강후는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조가 귓가에 대고 다시 유혹의 말을 속삭이자 간당거리고 매달려 있던 이성이 툭하고 끊어져버렸다. “ 얼른. ” 강후는 생각이란 걸 접어버리고는 굶주린 야수처럼 거칠게 현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현조가 그의 목을 껴안고는 몸을 밀착시키자 그는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두 사람은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다. 강후가 급하게 현조의 셔츠단추를 풀려고 하자 현조가 그의 손을 막아세우고는 자세를 바꾸어 강후의 위로 올라왔다. “ 너 부터... ” 현조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는 강후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는 모습이 너무 유혹적으로 보여서 강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단추를 다 풀어내린 현조가 강후의 가슴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 현조야... ” 강후가 급한 숨을 들이키며 현조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혀로 그의 가슴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강후는 눈을 감고는 현조가 전해주는 짜릿한 감각을 즐겼다. 한참동안 강후를 애타게 하던 현조가 마침내 그의 벨트에 손을 대자 강후는 참지 못하고 현조의 짧은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안돼. ” 현조는 강후의 손을 사납게 떼어내고는 천천히 벨트를 풀어냈다. 현조가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넣자 강후는 급하게 현조에게 입술을 겹쳤다. 대담한 현조의 행동에 강후는 점점 더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현조를 안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강후는 다시 한번 현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현조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내쳐버리고는 입술을 천천히 강후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 박강후. 게임 끝났어. ” 갑작스럽게 싸늘하게 변한 현조의 음성에 강후는 몽롱한 눈을 들어 현조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흥분으로 들떠 있던 현조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 현조야.. ” “ 내가 경고했지. 나한테 거짓말 하지 말라고. ” 현조는 강후에게서 몸을 떼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강후의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 어때? 기분 죽이지? 잔뜩 기대했다가 바보되니까 기분좋냐? ” “ 무슨 소리야? ” “ 너... 약혼녀 있다며. 근데 날 가지고 장난을 쳐? ” “ 현조야 그건... ” “ 닥쳐. 네 변명듣자고 온거 아니야. 잔뜩 기대했다 바보되는 기분이 어떤지 너도 한번 느껴보라고 내가 쇼 좀 했다. 어때? 괜찮았냐? 되도록이면 네 기분이 더러웠으면 좋겠는데... ” 얄밉게 이죽거리는 현조를 보며 강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 누가 너한테 말했어? ” “ 왜? 이제 그 사람까지 족쳐놓을려고? ” “ 누구야? 빨리 말해. 효원이야? ” “ 알 필요없어. 그리고 옷 좀 제대로 입어라. 니가 몸파는 창부냐? 여자 앞에서 그러고 서 있게? 너 별로 매력도 없어. 알아? ” 현조는 한심스럽게 그의 몸을 훑어보고는 뒤돌아서서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 거기 서. 지현조. 경고하는데 멈춰. ” 이를 갈며 말하는 강후의 목소리에 현조가 우뚝 멈춰섰다. “ 참. 잊어버린게 있네. ” 현조는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이거 네가 사준거지? 이제 돌려줄께. ” 현조는 핸드폰을 거실 장식장을 향해 집어던졌다. [ 쨍그랑- ] 사방이 유리로 된 장식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지자 현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후를 쳐다보았다. “ 너 돈 많으니까 새로 사라. 쓸데없이 여자들한테 집이나 사주지 말고. 그리고 장난질도 사람을 봐가면서 하라고 했지? 너야말로 사람 봐 가면서 장난쳐.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본데... 박강후... 엿 먹어라. 개자식아. ” 현조는 쌩하니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고는 나가버렸다. 강후는 아직도 정신이 멍해서는 현조가 나간 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성공했다 지현조. 진짜 기분 더럽다. 빌어먹을. ” 25 며칠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현관문에 이상하게 생긴 자물쇠가 달려있었다.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조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신경질적으로 퍽퍽 걷어찼다. 강후한테 전화를 해서 비밀번호를 물어보자니 다 끝난 마당에 그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이것저것 아무 번호나 누르자니 고장이 날것 같고... 현조는 한참동안 망설이다 그냥 아파트 앞에 있는 열쇠집으로 가서 대신 열어줄 것을 부탁했다. 열쇠수리공은 요란하게 차려입은 현조를 힐끔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 며칠 전에 약혼자가 와서 바꿔놓고 갔어요. ” 바라지도 않는 친절한 설명을 해주며 연신 짧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를 쳐다보는 열쇠수리공의 행동이 짜증스러웠다. “ 다시 다른 걸로 바꾸고 싶은데 가능하죠? ” “ 에이. 그게 얼마나 비싼건데... 우리집에서 제일 비싼 물건이예요. 그냥 그걸로 쓰세요. ” 주인이 바꿔달라면 바꿔주는 거지 참으로 말이 많았다. 거기다 약혼자가 잘 생겼더라는둥 돈이 많아보이더라는 둥 칭찬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현조는 그냥 열쇠집을 나와 버렸다. 비밀번호가 여덟자리라니 일단 생각나는 것부터 눌러볼 작정이었다. 먼저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봤지만 열리지가 않았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재수없는 박강후놈의 전화번호였다. 강후 생각이 나자 현조는 또다시 몸서리를 치며 손가락 끝으로 강후의 번호를 후다닥 눌렀다. 그러자 웃기게도 문이 삐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 하여튼 잘 났어. 내 집에 지 번호를 왜 입력시켜 놔? 어우... 재수없는 놈. ” 투덜투덜대며 집에 들어와서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벗어제끼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그제서야 다시 지현조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옷가게로 달려가 야해보이는 옷을 사입고 강후를 아작내겠다는 일념으로 생쇼까지 했더니 온 몸에 힘이 쭈욱 빠져버렸다. 현조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버렸다. 한 방 먹이고 오면 속이 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시원하기는 커녕 강후와의 노골적인 키스만 생각날 뿐이었다. “ 젠장...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지현조. ” 현조는 다시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아무데나 휙 집어던졌다. 캔맥주 한 두개로는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술에 취해 헤롱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는 애써 잠을 청했다. ================================================================================== 아현은 귀를 꽉 틀어막고는 소파 옆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어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셔버릴 듯이 문을 두드리는 화가 난 강후의 음성에 아현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민아현. 경고하는데 빨리 문 열어. ” 또 다시 문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아현은 엉금엉금 기어서 현관으로 갔다. “ 나... 난 강후씨 사랑해요. ” “ 문 열어. 빨리. ” 자신의 고백에도 강후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밖에서 옆집 아주머니가 강후에게 뭐라고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들으며 아현은 문고리를 잡고는 숨을 골랐다. 강후는 잠시 화가 났을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떨리는 손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 셋 셀동안 열어. 하나... 둘... ” 아현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강후가 사납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강후의 뒤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재룡이 보였다. “ 강후씨... ” 강후는 아현을 노려보고는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로 걸어들어갔다. “ 딱 5분 줄테니까 날 이해시켜 봐. 네가 현조를 만나서 내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를 대보라고. ” “ 강후씨. ” 아현이 애처롭게 강후를 쳐다보았지만 강후는 여전히 냉담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현은 강후의 손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는 금세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 일분 다 되간다. 4분 남았어. ” “ 난 강후씨를 위해서 한 일이예요. 강후씨 약혼녀도 곧 귀국하잖아요. 어차피 그전에 정리할 작정이었을거예요. 그죠 강후씨? 그래서 내가 대신 그 여자 만나서 얘기한 거예요. ” 마치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러운 일인양 칭찬을 바라듯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아현을 보자 강후는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 내가 언제 현조를 정리한다고 했어? 그리고 왜 네가 내 일에 함부로 나서? 너랑 나. 끝난사이야. 모르겠어? ” “ 난 안 끝났어요. 난 강후씨 사랑해요. ” “ 미치겠네. 너 스토커야? 싸이코야? 내가 싫다고 했지? 너 질려버렸으니까 그만 꺼지라고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말을 알아 먹겠어? ” “ 강후씨도 나 사랑하잖아요. 난 알아요. 강후씨 나 사랑하고 있어요. 강후씨 눈빛을 보면 알아요. 강후씨는 날 사랑해요.. ” 조금 전까지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빛이 갑자기 꿈을 꾸듯 아련해지는 것을 보자 진짜 아현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나 너 사랑 안하고, 이제 질릴대로 질려서 너 꼴도 보기 싫어. 내가 널 매정하게 떼어내지 못한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그래도 좋게 헤어질려고 했더니 너 하는거보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내일 당장 이 집 팔아버리고 그 돈 들고 사라져 버려. 알았어? ” “ 안돼요. 난 못해요. ” “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날에는 너 외국으로 보내버릴테니까 그렇게 알아.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으면 내 눈 앞에서 알짱거리던지. ” 강후가 찬 바람을 일으키며 아현의 곁을 지나쳐가자 아현이 털썩 주저앉아 강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 못 보내줘요. 아니 안 보내요. 난 강후씨 없으면 못 살아요. 제발 강후씨... 흑흑흑.. ” 강후는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현을 매정하게 뿌리치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 난 안 보내요... 강후씨 보낼거면 차라리 죽어버릴거예요. ” 마지막으로 아현이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자 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 “ 마음대로 해. 죽어버리던지 말던지. ” 강후가 막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아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 강후씨.. ” 강후는 갑작스럽게 변한 아현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그러자 아현이 눈에서 기괴한 광채를 내뿜으며 과도를 치켜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게 보였다. “ 같이 죽어요. 차라리 같이 죽어요. ” “ 민아현. 칼 내려놔. 뭐하는 짓이야? ” 미처 말릴틈도 없이 아현이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며 강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아현의 손목을 잡아채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성을 잃고 날뛰는 아현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 아현아. 그만 둬. ” 칼을 쥔 아현의 오른손을 잡으려던 강후는 손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을 내려다 보자 길게 드러난 상처가 보이고 검붉은 피가 마구 솟아나고 있었다. 밖에 서 있던 재룡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건지 문을 열고 들어서다 강후가 피를 흘리고 서 있는것을 보고는 재빨리 아현에게 다가섰다. “ 죽어요. 강후씨.. 나랑 같이 죽어요... ” 이제 아현은 완전히 미쳐서 날뛰었다. 재룡조차도 주춤거리다 가까스로 아현의 손목을 잡아채서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현 역시 자신이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어서 얼굴이며 드러난 팔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 많이 다치셨습니까? ” 재룡이 아현의 두 팔을 꼼짝못하게 움켜잡고는 강후를 바라보았다. “ 괜찮아. 심하지 않아. 그보다 걔 병원으로 데려가. ” “ 사장님도 치료를 받으셔야... ” “ 난 알아서 치료받을 테니까, 아현이 병원으로 데려가고 애들 시켜서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해. ” “ 네. ” 재룡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아현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발악을 했다. “ 강후씨... 우리 같이 죽어요. 나 강후씨 없으면 못 살아요. 같이 죽어요... 강후씨... ” 강후는 벌써부터 쓰려오는 손바닥을 꽉 움켜잡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미쳐서 날뛸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젯밤 현조가 그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고 간 이후 그는 현조의 말을 꼽씹으며 밤을 꼴딱 세웠다. 효원이 말한게 아니라면 현조를 찾아가 그런 짓거리를 할 사람은 아현밖에 없었다. 때문에 화를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아현을 찾아왔는데, 한심스럽게도 여자가 휘두르는 칼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 도대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손에 대충 둘둘 말고는 난장판이 된 아현의 집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다시는 이곳에 발걸음을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강후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 계속적으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현조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미남일 수도 있지만 강후일 가능성이 더 컸다. 잠을 자고 일어나자 기분이 훨씬 더 나빠졌다. 강후에게 뭘 바랬던건지 배신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그저 게임처럼 시작한 관계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이 빠져버린 모양이다. 온통 머릿속에 박강후에 대한 생각들이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엉켜있었다.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현조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직 잠이 덜깨서 그런거야... 더 자고 나면 개운해 질거야... 그럴거야.. ” 자신의 불유쾌한 기분이 단지 수면부족에서 오는 후유증이라고 단정하고 현조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잤을까 환하던 방안에 어둠이 깔린 것을 느끼며 현조는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반쯤 감긴 눈을 떠서 앞을 보던 현조는 기겁을 하고는 소리를 꽥 질렀다. “ 누구야? ”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시꺼면 괴물이 천천히 일어나서 문 옆에 붙은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갑작스럽게 눈 앞이 밝아지자 현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 잘 잤어? ”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강후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 무슨 짓이야? 누가 마음대로 내 집에 들어오라고 했어? ” “ 그러게 왜 전화를 안받아? ” “ 너인줄 아니까. 그리고 그만 나가. 너 꼴보기 싫으니까. ” “ 적어도 내 변명은 들어줘야 하는거 아냐? ” “ 듣고 싶지 않아. ” 현조가 벌떡 일어나서 강후를 지나쳐가려고 하자 강후가 사납게 그녀를 잡아세웠다. “ 넌 끝났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누구 마음대로 끝내?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너혼자 수건 던져버리고 나가면 끝인줄 알아? ” “ 넌 거짓말을 했어. 내가 그거 제일 싫어한다고 말했지? 반칙하는 인간하고는 게임할 생각없어.” “ 그럼 게임을 안하면 되겠네. 이제부터 게임 집어치우고 제대로 시작해보자. ” “ 싫어. ” 현조가 그를 외면하며 짧게 대답하자 강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알기전에 모두 정리할려고 했었어. 근데 빌어먹을 아현이가 중간에서 일을 이렇게 망쳐 버린거라고. ” “ 남 핑계대지마. 애초에 네가 잘못한 거야.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여자 하나도 모자라서 나까지 보태려고 해? 도무지 네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니? 어? ” 화가 나서 얼굴까지 새빨갛게 변한 현조를 보면서 강후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 미안하다. 내가 죽을 죄를 졌어. 하지만 나 너 가지고 장난칠 생각없었어. 애초에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다고는 말 안해. 하지만 그 생각 접은지 오래됐어. 나 너 많이 좋아해. 지현조. ” “ 날 좋아하는게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는거겠지. 박강후. 그만 꺼져라. 네 얼굴 쳐다보고 있는것도 짜증난다. ” 현조가 강후에게 잡힌 손을 거칠게 잡아빼며 나가버리자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는 현조에게 화가 나서 미칠지경이었다. 한참동안 굳어버린 것처럼 서 있던 강후가 천천히 거실로 걸어나오자 현조가 소파에 앉아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만 나가줄래? 내 집에 너 같은 인간이 있다는게 심히 불쾌하거든. ” “ 어떻게 하면 날 믿어줄래? ” “ 필요없어. 이미 끝났어. ” “ 지현조. ” “ 경비까지 불러야 되겠니? ” 진짜 경비를 불러들일 것처럼 현조는 소파에서 일어나 인터폰쪽으로 걸어가서 강후를 다시 쳐다보았다. “ 꼴사납게 경비한테 끌려나가고 싶어? ” “ 나 너 절대로 포기안해. 알아 지현조? ” “ 그건 네 사정이고 난 너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어. ” 냉정한 현조의 말에 강후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다 말고 강후가 현조를 돌아보았다. “ 넌... 내가... 그렇게 쉽게 포기가 돼? ” “ .... ” 현조는 대답없이 그의 얼굴을 외면해버렸다. 하지만 현조의 눈빛이 불안스럽게 떨리는 것을 본 강후는 다 꺼져가는 불씨일지언정 아직은 회생할 가망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 현조야. 다시 한번만 생각해봐. 정말 이렇게 끝내야 하는지... 네 생각이 끝날때까지 밖에서 기다릴께. 내가 잘못한거 알고 있지만, 한번쯤은 용서해 줄 수도 있잖아. 기다릴께. ” 강후가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현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질게 끝내버렸어야 했는데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상처받은 듯한 강후의 눈빛이 내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 잊자. 잊자... ”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현조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욕실, 주방, 거실, 침대방까지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급기야 빨래까지 모조리 해치우고 나자 열한시가 되었다. 또 다시 몸이 편해지니 강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중얼거리며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서 쭈욱 들이키고는 TV를 켰다. 연말이 되어서인지 곳곳에서 크리스마스다 뭐다 잔뜩 들떠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질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현조는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불편한 잠자리에 몸을 뒤척이던 현조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이불을 찾아 손을 더듬거리던 현조는 자신이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오들오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인지 희뿌연 여명이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았다.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면 이 한기가 좀 가실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던 현조는 갑자기 엄마가 끓여주시던 깊은 맛이 우러나는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다. 주방을 뒤져보니 미역이 다 떨어져 버렸는지 빈봉지만 씽크대 안에 있었다. 그녀는 두툼한 파카를 걸치고는 지갑을 챙겨들었다. 새벽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문을 열던 현조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시 문을 닫았다. “ 뭐지? ” 시커먼 물체가 문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는데.... 설마... 현조는 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문을 열고는 시커먼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시커먼 덩어리가 꿈틀꿈틀하더니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 젠장.... 얼어죽겠다. 어떻게 밤새 내다보지도 않냐... 으으윽... ” “ 미쳤어? 밤새 이러고 있었단 말이야? ” 현조가 기겁을 해서는 강후를 일으켜세우자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현조의 손을 잡았다. 싸늘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은 손이 닿자 현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 무식하기는... 죽고 싶어 환장했어? 안 내다본다 싶으면 갔어야지. ” “ 사...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근데... 조...좀 들어가면 안되냐? 너무 추워서... 주... 죽을것 같다. ” “ 내가 미쳐 진짜. ” 현조는 냉동오징어처럼 뻣뻣하게 굳은 강후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26 강후는 코트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방 안에 있어도 저절로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운 겨울에 장장 10시간을 바깥에 있었으니 안 얼어죽은게 신기했다. “ 강후야. 야- 정신 좀 차려봐. ” 현조가 강후의 얼굴을 톡톡쳐봤지만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끙끙 앓는 소리만을 냈다. “ 어이구... 화상아... 가지가지 한다. 진짜. ” 현조는 한심스럽게 강후를 내려다보고는 주방으로가서 물을 끓여 뜨거운 유자차를 만들어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 일어나봐. 이거라도 마셔봐. 강후야. ” 하지만 강후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여전히 떨고만 있었다. 꽁꽁 얼어있다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와서 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내 팔자야... ” 궁시렁궁시렁대며 이불장에서 두툼한 겨울이불을 꺼내 강후를 덥어주자 그는 이불을 목까지 바싹 끌어당겼다. 현조는 주저주저하다 강후의 얼굴에 살짝 손을 댔다. 얼마나 심하게 얼었는지 아직까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그녀는 이불 하나를 더 꺼내서 덮어주고는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저대로 놔뒀다가 괜히 독감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은게 걱정이 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지현조... 왜 이러니... 그냥 내쫓았어야지. 지가 얼어죽던지 말던지...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조는 전기요가 어디 있었는지 열심히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그녀는 실내 온도를 최고로 올려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옷장 깊숙히 넣어두었던 낡은 전기요를 꺼내서 먼지를 툭툭털었다. “ 강후야. 잠깐만 일어나봐. ”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오는지 강후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현조를 바라보았다. “ 나.. 죽지 싶다... ” “ 시끄러... 바깥에 좀 있었다고 죽지는 않아. 그나저나 일어나봐. 이거 깔고 있어. ” 강후가 비실비실 몸을 일으키자 현조는 얼른 다가가서 강후를 부축했다. “ 으으으.... 왜 이렇게 춥냐.. 난방 안했어? ” 아직도 이를 덜덜 떨고 있는 강후를 노려보며 현조는 투덜거렸다. “ 난 더워서 쪄죽을 지경이다. 젠장. ” 비틀거리는 강후를 침대에 기대어 앉혀놓고 그녀는 재빨리 전기요를 깔고는 코드를 꼽았다. “ 이제 그 코트 좀 벗자. 좀 일어나봐. ” 여전히 비비적거리는 강후를 일으켜세워서 코트를 벗기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이게 뭐냐? 궁상맞게... ” “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 그러게 왜 안 내다봐? ” “ 계속 있는지 몰랐다잖아. ” “ 그리고 아직 투아웃인데... ” “ 뭔 소리야 도대체... ” 강후가 헛소리를 지껄이며 몸을 떨자 현조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후가 무대포로 행동하는게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밤새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것 같기도 했다. “ 현조야... ” 강후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왜? ” 강후의 손이 두툼한 이불 밑에서 뻗어나와 현조의 손을 움켜잡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하얀 붕대 위로 붉은색 핏물이 비치고 있었다. “ 어디 가지마라. 나 딱 세 시간만 자고 일어날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또 도망가면 나 진짜 미쳐버린다. ” “ 미치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데, 손이 왜 이 모양이야? 다쳤어? ” 조심스럽게 붕대를 쓰다듬는 현조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 어... 다쳤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며 강후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전기요가 그나마 추위를 좀 녹여주었는지 얼어있던 강후의 얼굴에 빨갛게 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 등신처럼 다치고 그래. 짜증나게.. ” 현조는 속상한 얼굴로 강후의 손을 바라보았다. “ 많이 다쳤어? ” 하지만 강후는 이미 잠이 들어버렸는지 대답이 없었다. 현조는 멍하니 잠든 강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속에서 천사 현조와 까마귀 현조가 힘겨운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천사 현조가 그녀의 오른쪽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 정리할려고 했다잖아. 그리고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그러고 있었겠냐고... 그냥 한 번 봐줘도 되지 않을까? ’ “ 그렇지? ” 마음이 막 약해지려고 하는데 까마귀 현조가 다른 쪽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 지 버릇 개 주겠냐? 그냥 냅둬. 저런 놈 옆에 있으면 평생 고생한다.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 ’ “ 그건 또 그렇지. 아우씨- 몰라몰라. ” 현조는 양 쪽 귀에서 속닥거리는 두 놈을 떼어내기 위해 머리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강후가 깨어난 뒤에 침착하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참이었다.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겠다는 원대한 꿈은 사라지고 현조는 또 다시 커피를 한 잔 타서 방으로 돌아왔다.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한번 강후를 한심스럽게 쳐다봐주고 그녀는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잠이란건 자도 자도 끝이 없는지 하품이 또 터져나왔다. 현조는 소파 위에 불편하게 몸을 누이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 강후는 온 몸이 뭐에 두들겨 맞은듯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도록 떨고 있었더니 근육이 모두 뭉쳐버린 모양이다. 눈을 뜨고도 한참동안 강후는 멍하니 누워있었다. 다시 현조의 얼굴을 보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용서해달라는 말도 해봤고,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해봤고... 그렇다고 남자 체면에 무릎꿇고 매달릴 수도 없고... 자신이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현조는 어디에 있는지 밖은 기척이 없이 조용했다. 혹시 또 사라져버린건 아닌가 싶어 그는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빼꼼히 열었다. 거실 한 중간에 있는 소파에 현조가 불편하게 누워서 자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침대 위의 이불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현조 위에 살짝이 내려놓았다. “ 일어났어? ” 현조가 몸을 부시시 일으키며 강후를 바라보았다. “ 나 때문에 괜히 고생이네. ” “ 괜찮아. 그보다 몸은 괜찮은거야? 열은 없어? ” 강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조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생각하니 제대로 현조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 손은 어쩌다 그런거야? ” 현조가 턱짓으로 강후의 오른손을 가리키자 그는 피곤하게 웃었다. “ 자업자득, 인과응보, 뭐 그렇게 됐어. ” “ 말은 잘한다. ” 현조는 그를 흘겨보고는 주방으로 걸어들어갔다. “ 뭐 좀 먹을래? 밥은 있는데... 죽 끓여줄까? ” “ 아니. 환자도 아닌데 뭐. ” 사실 몸이 안 좋긴 했지만 그렇다고 귀찮게 죽까지 끓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어떻게든 현조의 마음을 돌려놓아야만 했다. “ 현조야. ” “ 그럼 밥 먹자. 나도 아침 굶었거든. 반찬은 별로 없어. ” “ 현조야. ” “ 씻어라. 꼬질꼬질하니 스타일 죽인다. ” “ 지현조. ” 자꾸만 자신의 말을 끊어먹는 현조를 불러세우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 일단 먹고나서 이야기하자. 사람이 배가 고프면 만사가 다 비관적으로 보인단다. 그런 기분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 ” “ 응. ” “ 그럼 욕실에 가서 씻어. ” “ 어. ” 강후는 말 잘듣는 아이처럼 욕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나왔다. 찌개를 끓이고 있는건지 현조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둘둘 말고는 식탁의자에 주저앉았다. “ 뭐해? ” “ 찌개 끓여. ” “ 무슨 찌개? ” “ 된장찌개. ” “ 음... ” 열심히 호박을 썰고 있던 현조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한 손에 칼을 쥐고 자신을 쳐다보는 현조를 보자 미쳐날뛰던 아현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왜 그렇게 놀라? ” “ 아냐. 그냥. ” “ 밥 줄테니까 먹고 가라. ”“ ... ” 강후는 대답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식은밥 줄테니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같았다. “ 내가 싫냐? ” “ 뭐? ” “ 내가 싫냐고? 보고 있으면 짜증나고 화나고... 뭐 그런거야? ” 이번에는 현조가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 뚱하니 강후를 바라보던 현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그러면 좋게. ” “ 무슨... 뜻이야? ” 어딘지 모르게 희망의 불꽃이 활활 피어오르는 것같아 강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 그렇다고 눈 반짝 거리면서 좋아하지는 마 . 너 용서했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단지... 좀 생각을 해 봐야겠다. 널 계속 만나야 할지, 아니면 그만 둬야 할지. ” “ 그럼...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는 소리네? ” “ 글쎄... 모르지. ” 현조는 다시 뒤돌아서서 남은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강후는 괜히 좋아서 실실거리며 웃었다. 밥 먹자마자 쫓겨날줄 알았는데 그나마 희망이 있다는 소리아닌가. 현조가 끓여준 된장찌개와 반찬으로 밥을 먹으니 꼭 신혼부부처럼 느껴졌다. 늘 틱틱거리는 현조와 아웅다웅 하면서 사는것도 꽤 즐거울것 같았다. “ 며칠 굶었냐? 왜 밥보면서 실실 쪼개? ” “ 어? ” “ 왜 실없이 자꾸 웃냐고? ” “ 아... 그냥. ” 자신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나 보다. 강후는 열심히 밥을 먹는 현조를 바라보며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사사건건 틱틱거리며 불퉁거리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자신이 이렇게 매달리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이었다. “ 강후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랑 난 안되겠다. ” “ .... ” 강후는 대답없이 숟가락을 그냥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맛있던 된장찌개가 소태처럼 쓰게 느껴졌다. “ 우린 달라도 너무 달라. 넌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고, 난 어쩔 수 없이 근근히 버텨나가는 사람이야. 그런 두 사람이 잘 어울릴 수 있겠냐? 우리 그만 손 털고 바이바이 하자.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 “ 싫어. ” “ 뭐? ” “ 싫다고. ” 강후는 현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다른 건 다 들어줄수 있는데 그만두자는 말은 못 들어주겠다. 내가 너 속인거 진짜 나쁜 짓이란거 알아. 근데..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나라에서 국선변호사는 대주는 시대야. 최소한 최후변론이라도 할 시간은 줘야하잖아. ” “ 그럼 해봐. ” 현조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며칠새 신경을 써서 그런지 현조의 얼굴이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네메시스에서 봤을 때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어서 그런 걸 느끼지 못했었는데 맨얼굴을 보자 마음이 많이 쓰렸다. “ 정리할거야. 꼭 너때문에 정리하겠다는게 아니라 준... 아니 그 앨 생각하는 내 마음이 전혀 신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전에는 별로 그런거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너 만나면서부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더라. 개과천선했다고 하면 넌 못 믿겠지만 적어도 난 널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추호도 거짓이 없어. 네가 믿건 안믿건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나..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나쁜놈은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막 살았다는거, 그리고 여자들한테 헤프게 정흘리고 다녔다는거 다 인정해. 이제부터는 안 그럴거야. 절대 안 그래. 그러니까 너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줘. ” 현조는 한숨을 내쉬고는 앞에 놓여있던 물잔을 들어서 빙빙 돌렸다. “ 강후야... 난 있지.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너무 피곤하고 너무 힘들게 살아서 이젠 좀 편안해지고 싶어. 근데 네 옆에 있으면 내가 더 힘들어 질것 같아. 그냥 이쯤에서 네가 물러나주면 좋겠다. ” “ 안된다고 했지? 그것만은 안된다고...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처음이야. 진지하게 결혼이란거 생각해본 여자도 네가 처음이고, 여자때문에 며칠씩 정신 놓아본것도 처음이고, 그리고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무릎꿇고서라도 잡고 싶은 여자를 만난것도 처음이야. 근데 쉽게 포기가 되겠니? ” “ 강후야. ” “ 그 애랑 약혼한거 아니야. 그냥 어려서부터 봐 왔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결혼이란 거 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었지만, 그건 널 만나기 전의 일이야. 알아? 널 만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외국 나가있는 애한테 그런 말 하기 쉽지 않아서 귀국하길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솔직히 너 사라지기 전에 나갔다 오려고 비행기 예약까지 했었어. 그 애한테는 내가 죽일 놈이 되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난 너 잡고 싶었어. 모르겠어? 그만큼 넌 나한테 중요해. ” “ 약혼을 했건 안했건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넌 그 여자한테 그런 믿음을 줬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거 아냐? 그리고 그렇게 쉽게 변할 마음이라면 언제고 너 나도 버리고 갈수 있는 거잖아. 근데 내가 어떻게 널 믿겠니. 안 그래? ” “ 달라. 다르다고...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믿어줄거야? 내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아니면 무릎꿇고 빌까?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지말고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풀릴지 말을 해봐. ” “ 강후야..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왜... ”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현조는 말을 멈추고는 전화를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 여보세요. ” [ 현조야. 효원이다. ] “ 어. ” 현조는 강후를 힐끔 쳐다보았다. 강후는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현조야. ] “ 응? ” [ 나 오늘 독일간다. ] “ 독일? ” [ 응. 출장가는거야. 새로나온 기계도 볼겸 연수차 한 20일 예정으로 다녀올거야. ] “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 [ 그리고... 강후랑 정말 헤어진거야? ] “ ... ” 현조는 대답없이 다시 강후를 바라보았다. 그냥 끝났다고,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야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거든. 효원아.” [ 알았어. 그럼 다녀와서 한번 만나자. ] “ 그래. 잘 다녀와. ” [ 그래. ] 전화기를 내려놓자 강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 효원이야? ” “ 어. ” “ 어디 간대? ” “ 응. 독일 간다고. ” “ 그래? ” 강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현조를 달래놓고 그 다음엔 효원을 찾아가 입막음을 할 작정이었다. 준희를 만나러 가는건 이미 틀려버렸으니 준희가 귀국하기 전까지 효원의 입을 막아놨다가 준희가 돌아오는 즉시 정리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효원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니 그로서는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 며칠이나 나가 있을거래? ” “ 한 이십일 정도... ” “ 음... ” 이제 효원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현조만 잘 설득하면 되는 것이다. 평상시 믿지도 않았던 하나님한테 감사의 하트를 마구마구 날리며 강후는 슬며시 미소를 삼켰다. “ 이제 그만 가봐. 밥도 먹었고, 그리고 몸도 녹혔으니까. ” “ 안돼. 못가. ” “ 못가? ” “ 그래. 못가... 네 확답 듣기 전에는 죽어도 못가. ” “ 야. 떼를 쓸걸 써라. 이게 떼쓴다고 되는 일이야? 너 답지 않게 왜 이렇게 어릿광이야? ” “ 어릿광이건 뭐건 간에 난 못 가. ” 강후는 아예 작정을 한듯 이불을 다시 둘둘말더니 소파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조는 그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 맘대로 해. 가든지 말든지. ” 지가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나 싶어서 그냥 무시하고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고 방청소를 하는데 강후의 시선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게 느껴졌다.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가다보니 괜히 이것저것 신경이 쓰였다. ‘ 입고 있는 옷이 너무 후줄근하지 않나? 참... 세수도 안했는데... 그리고 집안에 된장찌개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거 아냐? ’ 별별 생각을 다 하다 또 성질이 나서 현조는 강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얼른 딴 곳을 쳐다보며 얄밉게 입을 씰룩거렸다. “ 너... 왜 웃어? ” “ 내가? 언제? ” “ 금방 씰룩거리면서 웃었잖아. ” “ 그거야 네 표정이 하도 변화무쌍해서 웃었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표정이 확확 바뀌냐? ” “ 남이사. 근데 너 정말 안 갈거야? ” “ 안간다고 했잖아. 그리고 우리 커피나 한 잔 마시자. ” “ 싫어. 너랑 커피 안 마셔. ” “ 그래? 그럼 배달을 시킬까? 혹시 다방번호 아는거 있어? ” “ 다방? ” “ 그래. 다방... 커피는 그저 다방 커피가 최고지. ” “ 허 참. 기가 막혀서. ” 현조는 강후를 노려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성질을 내고 있는데 강후가 노크를 했다. “ 현조야. ” “ 왜? ” 현조가 짜증스럽게 대답을 하자 강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 나와서 커피마시자. ” “ 싫어. ” “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어? ” “ 싫다잖아. ” “ 그럼 나 붕대 좀 갈아줘. 피가 배어 나와서 갈아야 될것 같거든. ” “ .... ” 아프다는데 또 무시하고 있기가 뭐해서 현조는 투덜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강후가 그녀를 향해 다친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 소파에 앉아있어. 가서 붕대 사가지고 올께. ” “ 응. ” 강후는 좋아라하면서 낼름 소파에 앉았다.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꼴이 웃기기도 하고 또 귀여워보이기도 했다. “ 너 이러고 다니는거 너희 엄마는 아시냐? ” 현조는 지갑을 챙기면서 강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 태어나서 이렇게 떼 써보는 것도 처음인것 같다. 너 만나서 처음 해보는거 진짜 많다. ” 씨익 웃고 있는 잘생긴 강후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싸해졌다. 지금까지는 강후의 얼굴을 보면서 그저 잘생겼다, 괜찮네하는 정도였었다. 바라보고 있어도 어차피 내꺼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갑자기 강후의 미소가 가슴에 날카롭게 와 박혔다. 누가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강후야. ” “ 어? ” “ 강후야. ” “ 왜? ” 갑자기 현조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강후가 의아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 왜 그래 현조야? ” “ 아냐... 나 나갔다 올께. ” 현조는 다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처음엔 그저 콩콩하며 뛰던 가슴이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리며 전신을 뒤흔들었다. “ 이러면 안되는데... ” 스스로를 억제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봇물터지듯이 터져버린 감정은 온 몸을 급속도로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현조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 네가 이겼다. 박강후... 나 또 나쁜년이 되야 할까보다. 너 못 보낼것 같아. ” 현조는 두근거리는 가슴 한편에서 싹트는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26편 끝. 27 강후는 현조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나다. ” [ 네. 사장님. ] “ 아현이 상태는? ” [ 지금은 진정이 됐습니다만, 아무래도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 “ 정신과 치료? ” [ 네. 약간의 편집증 증세가 있다는 의사소견이 나왔습니다. ] “ 그래? ” 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아현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아현에게 모질게 대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아현이 그런 증상을 나타내기 전에 더 확실하게 끝맺음을 했더라면 지금의 이 유감천만한 상황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좋게좋게 끝내자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불쾌한 상황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가족한테 연락은? ” [ 지금 서울로 올라오고 계시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 너한테 귀찮은 일을 시키는구나. ” [ 아닙니다. 그보다 손은 괜찮으십니까? ] “ 괜찮아. 그럼 계속 수고해라. ” [ 네. ] 전화를 끊고 강후는 베란다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자그마한 서민 아파트라 그런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여럿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게 보였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일단은 현조를 잡아두는게 제일 급한 일이었고, 그 다음엔 현조가 알지 못하게 준희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현조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현조를 놓아주고 싶지가 않았다. 욕심대로 하자면 그는 당장 현조를 자신의 집에다 옮겨놓고 싶었다. 그와 준희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외국으로 나가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그나 현조가 포기해야 할게 너무나 많았다. 현조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야 했고, 그는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기반을 버려야만 했다.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아직 그 정도로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사실이 들통나게 되면 그는 더이상 현조를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비극적인 결말만은 기필코 막을 생각이었다. 이것 역시 현조를 속이는 일이었지만 사실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모른 척 무시해버렸다. 다 태워버린 담배를 아쉽게 쳐다보는데 막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현조의 모습이 보였다. 비닐 봉지를 달랑거리며 걸어오던 현조가 슈퍼 앞에서 전에 만났던 그 수다스러운 아줌마와 한참동안 뭐라고 떠들고 있는 것을 보며 강후는 미소를 지었다. “ 빨리 오지. 뭐하고 있냐 지현조? ”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는 베란다 난간에 턱을 고이고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현조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때 마치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현조가 여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게 보였다. 강후는 자꾸만 가라앉는 복잡한 심내를 애써 수습하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현조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 갔다 왔어? ” “ 응. 손은 계속 아파? ” “ 어. ” 현조가 비닐봉지에 든 붕대를 꺼내 들고 옆에 앉자 강후는 지저분한 붕대가 감긴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 소독은 안해도 되나? ” “ 글쎄... 병원에서 그런 말은 없었는데. ” “ 그럼 붕대만 갈자. 아파도 좀 참아. ” 칭칭 감겨있던 붕대를 풀자 촘촘히 꿰매놓은 손바닥이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 뭐하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거야? 누구랑 싸웠어? ” “ 자업자득이라고 했잖아. 넌 몰라도 돼. ” “ 휴우- 많이 꿰맸네. 흉터는 안 남는대? ” “ 모르겠다. ” 현조는 헌 붕대를 휴지통에 넣어버리고 깨끗한 새 붕대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 아파? 너무 빡빡하게 감는거 아냐? ” “ 아냐. 괜찮아. ” 연신 걱정을 하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는 현조의 모습이 참 진지해보였다. 현조는 무슨 일을 하던지 적당히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사람같았다. 너무 융통성없이 곧은 사람이라서 과거의 기억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현조야. 너 그 사고... 아직 못 잊고 있는거야? ” 갑자기 사고얘기를 꺼내자 현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그 이야기는 왜 꺼내? ” “ 그만 잊어버려.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 “ 넌 몰라. 피해를 당한 사람은 발 뻗고 자도, 죄를 지은 사람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부탁 하나 하자. 난 너한테서만은 그 사고 얘기... 안 듣고 싶어. 내가 너한테 자세한 얘기를 안하는 것도 네가 되도록이면 내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몰랐으면 해서야. 적어도 널 만나는 시간만큼은 죄책감 같은거 안 느끼고 싶어서. ” 현조의 말에 강후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 평생 그렇게 자책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강후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너 혹시 효원이한테서 무슨 얘기 들은거야? ” “ 어? ” “ 효원이가... 그 사고에 대해서 너한테 말했어? ” 잔뜩 긴장해서 묻는 현조에게 사실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마음과 끝까지 모른 척해야 한다는 마음이 격렬하게 스파크를 일으키며 충돌했다. “ 아냐. 못 들었어. ” 결국 강후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져 버렸다. 그 결과가 나중에 두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게 될지 이미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그 사실을 외면해 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강후의 말에 현조가 비로소 긴장을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나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 현조는 다시 붕대를 감는 일에 열중했다. 병원에서 해주었던 것과 비슷해 보이도록 깔끔하게 반창고로 매듭을 지어주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강후를 바라보았다. “ 움직여봐. 불편하지는 않지? ” “ 음. ” 강후는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려버렸다. 차마 현조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호언장담했으면서 그는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또 다시 그녀를 상대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이 악의를 가진 거짓말이 아니라해도 어쨌든 그녀를 속이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강후의 얼굴에 언뜻 죄책감이 서렸다. “ 강후야. ” “ 응? ” 현조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 너... 그 약혼녀라는 여자, 정리할거야? ” 머뭇거리며 묻던 현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막상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해놓고 보니 꼭 정리하라고 부추기는 소리로 들렸다. 붕대를 사가지고 오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냥 강후를 놓아주고 다시 예전처럼 무미건조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강후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험난한 지뢰밭을 지나갈 것인가. 쉽게 결론낼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녀는 자꾸만 강후를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강후를 놔줘버리고 다시 예전의 지현조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고, 한번쯤은 욕심을 내보고도 싶었다. 효상이 죽은 이후 7년동안 그녀는 하루도 효상의 망령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지워내려해도 끝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던 기억들이 강후를 만난 이후부터는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깡그리 잊어버리지는 못해도 그나마 조금씩 옅어지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강후와 같이 있으면 늘 웃을 수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웃을 수 있다는게 그녀에게는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그다지 메마르게 살아오진 않았다고 여겼는데 강후를 만나고 난 이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삭막하게 인생을 살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욕심이 나고, 그래서 겁이 났다. “ 이미 그렇게 말했잖아. 네가 믿기 힘들거라는거 아는데, 그래도 믿어줬으면 좋겠다. 나 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네 얼굴에서 미소를 보는게 좋고, 네가 날 보며 웃어주는게 좋아. 잃고 싶지 않아. ” “ 모르겠다. 널 믿고 싶긴한데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 “ 너 힘들지 않게 할게. ” “ 또 다시 속는 기분이 들어. ”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현조를 강후는 말없이 끌어안았다. 며칠간 현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속에서 그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온통 거짓말로 도배를 해서라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 그만 가라. 나 좀 쉬어야겠어. ” “ 알았어. 그리고... 너 실망 안 시킬거야. ” “ 글쎄... ” 코트를 챙겨입는 강후를 보며 현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실망시키지 않을거라는 강후의 말에다 그를 믿고 싶어하는 자신의 기대까지 조합해서 엉터리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녀는 다 잘 될거라는 정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 갈께. ” “ 그래. ” 현관문 나서는 걸 영 아쉬워하는 강후를 보며 현조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 강후야. 나 아픈거에 질린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또 아프게 하지마라. ” 그녀의 말에 강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안 그럴거야. 절대. ” “ 믿어볼께. 가라. ” “ 그래. ” 엘리베이터까지 강후를 배웅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냥 문을 닫고 돌아섰다. 자신의 행복을 찾자고 다른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 주제에 그런 호사스러운 배웅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 정말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 현조는 베란다로 걸어가 강후가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후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생길수록 점점 더 겁이 났다. 이러다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또 다시 어이없게 뺏겨버리는 건 아닌지... “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 용기없는 자신의 나약한 심성을 탓하며 현조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 그날 저녁 강후는 병원에서 돌아온 재룡으로부터 아현의 상태를 보고 받았다. “ 심각한 건 아니라고? ” “ 네. 약물로 어느 정도 치료는 될것 같다고 했습니다. ” 강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랍 속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어 재룡에게 건넸다. “ 이거 아현이한테 줘라. 고향 내려가서 가게 하나 차릴 정도는 될거다. ” “ 그럼... 아예 대전으로 보내실 겁니까? ” “ 그래야지. 언제 다시 병이 도져서 현조를 찾아갈지 모르잖아. 나한테 해코지를 하는 건 상관없지만 현조가 피해를 입는 건 막아야지. ” “ 알겠습니다. ” 재룡이 통장을 챙겨들고 나가자 강후는 찜찜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물었다. 돈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만큼 치사한 짓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겨우 아현이라는 작은 언덕을 넘었을 뿐인데 온 몸의 힘이 죄다 빠져나간 것처럼 녹초가 되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28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현조는 느릿느릿 집안 일을 해치웠다. 회사를 그만둔지 3주 가 지났다. 그 동안 강후와 소규모 각개전투를 치르고 용돈을 안주고 왔다고 투덜대는 현준이에게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내가며 온라인으로 용돈을 송금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한게 없었다. 직장을 알아보던지 아니면 이 참에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3차원 그래픽을 배워볼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요즘은 도통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줄 모른다고 강후와 자주 만나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이불을 막 세탁기에 넣고 세재를 넣는데 전화가 울렸다. 쪼르르 달려가 전화를 받자 미남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싸랑하는 현조야. 으흐흐흐... 메리 크리스마스 ] “ 뭐 잘못 먹었어? 웬 메리 크리스마스? ” [ 엥? 야- 너야말로 뭐 잘못 먹었어?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 “ 진짜? 벌써? ” [ 그래. 강후씨 전화 안왔어? ] “ 안했던데. ” [ 우와. 무심하네. 상훈이는 아침부터 전화에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난리를 피우던데... ] “ 그래? 좋겠네 강미남. 네 인생의 절정기구나. ” [ 움하하하.. 내가 언제는 안 그랬냐만서도 솔직히 요즘처럼 공주대접 받기는 또 처음이지. ] “ 저녁에도 약속 있겠다? ” [ 당연하지. 거창하게 준비해뒀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데. ] 바람이 잔뜩 든 미남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강후와 화해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만나서 데이트를 즐겼다. 강후의 클럽에서 만나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강후가 잠깐 현조의 집에 들렸다 가곤 했다. 아직은 서로 조심하는 단계라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애인 비슷한 사이인데 크리스마스 이브도 모른 척 지나가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 넌 강후씨랑 약속없어? ] “ 어. ” [ 에이 설마. 기다려봐. 강후씨 전화오겠지. 나 지금 배식시작해서 나가 봐야하거든. 내일 통화하자. ] “ 그래. ” 전화를 끊고 세탁기를 향해 걸어가다 말고 현조는 TV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재방송하는 드라마에서 어떤 여자가 날렵하게 생긴 스포츠카를 몰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니 다시 운전을 하고 싶어졌다. 적금도 탔겠다 이 참에 중고차라도 하나 사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냥 새 차를 살까? ” 2 년전만해도 현조는 소문난 스피드광이었다. 용감무쌍하게 과속을 하다 몇번 사고를 내고는 아예 차를 팔아버렸다.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현준을 통해 그간의 만행을 전해들은 엄마의 살벌한 협박에 울며 겨자먹기로 애지중지하던 차를 팔아버렸던 것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는 나쁜 버릇이 고쳐졌을리는 없겠지만, 이번에 차를 사면 최대한 자제를 하리라 마음을 먹고 그녀는 어떤 차를 살까 머릿속으로 견적을 뽑기 시작했다. 너무 작은 차는 성에 안차고 그렇다고 중형급은 유지비가 장난이 아니고... 혼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차가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보고 결정을 하는게 나을것 같아 그녀는 세탁기의 파워버튼을 눌러놓고는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두 시간 뒤 현조는 이불을 베란다 빨래걸이에 널어놓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집을 나설 때까지 강후는 연락조차 없었다. “ 쳇... 잘해주기는 개뿔. ”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기다린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 네. ” [ 나야. 집 아니지? ] 강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조금 전까지 서운하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어. 지금 막 엘리베이터 타려던 참이야. ” [ 잘됐네. 빨리 내려와. 지금 아파트 앞이야. ] “ 아파트 앞? ” [ 그래 ]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현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연애를 시작하면 여자들이 예뻐진다는데 이래서 그런 모양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여자란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강후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 “ 그냥 보고 싶어서. ” “ 음. ”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현조를 보며 강후는 그녀 몰래 웃음을 삼켰다. “ 현조야. ” “ 왜? ” “ 너 왜 선물 안 줘? ” “ 무슨 선물? ” “ 크리스마스 선물. ” “ 너도 안 줬잖아. ” “ 나? 나야 내 자체가 선물아니냐. 신이 창조한 완벽한 피조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 “ 중증이다. 너랑 미남이랑 계 하나 만들어라. 나르시스파라고. ” “ 그럴까? ” 퉁퉁거리는 현조를 끌고 그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 차타고 가는거 아냐? ” 주차장에 얌전히 세워져 있는 강후의 차를 가리키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 이런 날은 그냥 손 꼭 잡고 걸어다니는게 좋아. 무드없이 차타고 돌아다니는거 재미없어. ” “ 그런가? ” 두 사람은 유치원생마냥 손을 꼭 잡고는 온통 반짝이는 트리로 가득한 거리를 느긋하게 거닐었다. 떡볶이를 파는 곳에서 두 사람은 눈물이 나올만큼 매운 떡뽁이를 먹고, 돌아다니다 눈에 띄이는 옷가게에 들어가서 커플 목도리를 사서 서로의 목에 꼭꼭 둘러주고는 흐뭇해 했다. “ 너한테는 검은색이 제일 잘 어울려. ” “ 너도. ”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간간이 섞인 목도리를 한 서로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현조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강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올해도 집에서 할일없이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강후로 인해 바뀐 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서 예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더불어 효상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았다. “ 아무리 봐도 잘 생겼지? ” “ 어? ” “ 아까부터 너 계속 나 쳐다보고 있었잖아. 왜? 다시 봐도 잘 생긴것 같아? ” “ 무슨... ” 괜히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현조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스쳐지났던 거리의 풍경을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혼자 걸어다닐 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작은 옷가게들, 나무 한 그루,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 입간판들이 모두 새롭게 보였다. 강후 덕분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세상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추운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어스름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다시 현조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 그만 가봐. ” “ 벌써 가라고? ” 현조가 작별인사를 하자 강후가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 가라고? 그러면 안되지. ” “ 그럼 또 뭐하자고? ” “ 상훈이네랑 [시저]에서 만나기로 했어. ” “ 미남이도 같이? ” “ 응. 네 사람이 오늘 밤새도록 놀아볼 작정이거든. ” “ 넌 맨날 놀기만 하고 장사는 언제 할래? ” “ 평일에 돈 벌고 오늘같은 날은 너랑 놀아야지. 만나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 강후는 현조를 차에 태우고는 [시저]로 향했다. bar에 들어서자 이미 상훈과 미남이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꽤나 많이 가까워진 듯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또 달라보였다. “ 손님을 초대해놓고 주인이 지금 오냐? ” “ 현조랑 어디 좀 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오래 기다렸어? ” “ 아니. 우리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 ” 상훈과 강후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현조와 미남은 따로 인사를 나누었다. “ 원대한 계획이 있다고 하더니 그게 여기였구나. ” “ 그렇다네. 나 참. ” “ 잘됐다. ” “ 그렇지? 사실 나도 네가 조금 걸렸거든. 근데 강후씨가 찾아왔던? ” “ 어. ” “ 그럼 그렇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걸 잊어버리겠냐? ” 현조는 대답없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강후가 크리스마스 이브인 것도 까먹고 있었으면 많이 서운해 했으리라. 7년만에 그래도 남자친구라고 여길만한 사람이 생겼는데 모든 연인들의 날이라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냥 보낸다는 건 솔직히 억울했다. “ 오늘은 되도록 술취해서 뻗는 일만은 좀 피해주라. 두 사람 다. ” 상훈의 말에 미남이 킥킥거렸다. “ 설마. 날이 날인데 그럴리가. 그나저나 저녁은 안 먹어요? 나 배고픈데... ” “ 준비시켜놨어요. 금방 나올거예요. ” 강후가 도착한 걸 알았는지 예쁜 그릇들에 정성스럽게 담겨진 음식들이 하나 둘씩 테이블에 셋팅되었다. 각별히 신경을 쓴 듯 휘황찬란하게 데코레이션 된 테이블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네 사람은 그 동안 못 나누었던 대화를 주고 받으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와인을 마시며 미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조를 보며 강후는 미소를 지었다. 요근래 눈에 띄게 현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에는 웃고 있어도 어딘지 아픔이 느껴졌었는데 지금 현조의 얼굴에서는 그런 어두운 그늘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늘 저렇게 웃게만 해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야 할 장애물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또 가슴이 묵직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강후의 휴대폰이 빙그르르 돌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액정화면에 재룡의 이름이 뜨는 것을 보고 강후는 양해를 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나다. ” [ 지금 아현씨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 “ 가족들하고 같이? ” [ 네. 사장님이 시키신대로 다 처리했습니다. 정중히 사과의 말씀도 드렸고, 앞으로 치료에 쓰시라고 통장도 전해드렸습니다. ] “ 그래. 네가 애 많이 썼다. ” [ 아닙니다. 전 이제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 그래. ” 전화를 끊고 강후는 이제 겨우 하나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아현이 신경과 치료를 받게 된 이유가 자신때문이란게 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아현에게 사과의 뜻으로 전한 돈이면 치료는 물론이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돈으로 잘못을 탕감하려는 자신의 행동이 옳지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후는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아현의 문제를 정리하고 싶었다. “ 아직 통화 안 끝났어? ” 현조가 출입문을 열고는 빼꼼히 내다보았다. “ 아니. 왜? 어디 가려고? ” “ 상훈씨가 피아노 연주한다고 해서... 너도 통화 끝났으면 같이 듣자고. ” “ 그래? 그 녀석이 웬일이래? 피아노 끊은지 한참됐다고 하더니... 그보다 현조야. 잠깐만 나와 봐. ” “ 응? ” “ 이리와 봐. ” 현조가 문을 열고 나오자 강후는 그녀를 살며시 당겨서 품에 안았다. “ 뭐하는 거야?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 “ 괜찮아. 아무도 없어. 그리고 보면 어때? ” “ 남 눈치 안보고 사는 건 좋은데 가끔씩 정도가 지나치다. ” 그렇게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현조의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강후는 가슴 속을 내리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현조를 안고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만 들어가자. 미남이가 기다릴거야. ” “ 그래. ” 강후는 아쉬운 표정으로 현조를 놓아주었다. 그냥 이대로 밖으로 나가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절제를 할 자신이 없었다. 현조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녀를 향한 갈망은 점점 더 강해졌다. 자꾸만 현조를 향해 뻗어가는 자신의 욕심을 애써 자제하는 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현조를 만나는게 아닌 이상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희와의 관계부터 깨끗이 정리를 해야했다. 준희와의 일만 잘 마무리되면 그때는 망설임없이 현조에게 다가서리라. 다시 bar안으로 들어섰을 때 상훈은 이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미남이 상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게 보였다. “ 오호... 의외인데. 상훈씨 피아노 전공했어? ” “ 아니. 전공은 아니고 고등학교때 까지 배웠었지. 왜 멋있냐? ” “ 어. 사람이 달라보이네. ” “ 젠장. 내가 연주할 걸. ” “ 너도 피아노 연주할 줄 알아? ” “ 별로 신통찮아. 어렸을 때 조금 배우다 말았어. 솔직히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곡도 없어. ”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상훈이 그들을 보면서 미소를 보냈다. 늘 양아치처럼 행동하던 상훈이 조금은 달라보여서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하긴 똑부러지는 미남이 선택한 남자이니 오죽할까. 처음엔 얼굴을 붉히며 시작된 관계가 지금은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네 사람 모두에게 올해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왠지 자꾸만 웃게 만드는 행복한 날로 기억될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화가 또 다시 진동을 하자 강후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무심히 액정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 이럴리가 없는데... ’ 강후는 못 믿겠다는 듯 다시 한번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 왜 그래? 안색이 안 좋다? ” 현조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묻자 강후는 재빨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리고는 까칠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아냐. 자동차 세일즈하는 동창 녀석인데, 나더러 자꾸 차를 바꾸라고 해서 귀찮아서 안 받는거야. ” “ 그래? ” 현조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듯 다시 상훈에게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강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상훈이 서너곡의 연주를 더하고 자리로 돌아오자 강후가 상훈을 보며 말했다. “ 미안한데 오늘 계획은 취소해야겠다. ” “ 그런게 어딨어? 밤새도록 놀자며? ” “ 갑자기 일이 생겼어. ” “ 그래? ” 강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는 것을 본 상훈은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헤어지는 걸 영 아쉬워하는 미남과 현조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온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현조가 몸을 떠는 것을 본 강후는 그녀를 바싹 끌어당겨 안고는 상훈에게 인사를 했다. “ 나중에 연락하자. 미남씨도 잘가요.” “ 그래. 우린 가볼께. ” “ 강후씨 현조 잘 데려다 주세요. ” 강후에게 인사를 끝내고 미남이 현조를 바라보았다. “ 너 아직 차 산거 아니지? 나 모레는 시간되는데 그때 같이 가보자. ” “ 알았어. 들어가. ” 미남이 현조를 향해 손을 흔들고 돌아서자 상훈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미남을 보쌈하듯이 폭 싸안았다. “ 우리 호빵 꽁꽁 얼어서 냉동호빵 되겠다. ” “ 그러게. 갑자기 추워지네. 빨리 가자. ” “ 오냐. 가자 호빵. ” 막 돌아서려던 상훈이 뭔가가 생각난 듯 갑자기 멈춰섰다. “ 참 잊을뻔했네. 강후야! 우리 12월 31일 여행갈까? ” “ 여행? ” “ 해돋이 보러 가자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데 네 명이 같이 새해 소원 빌면 좋잖냐. ” “ 그러던지. 나중에 스케쥴 잡아서 연락해라. ” “ 오케이. 죽이는 계획을 잡아서 폰 때리마. ” 벌써부터 여행 갈 생각에 잔뜩 들떠서 돌아서는 상훈을 보며 강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발 그때까지 별 일이 없었으면... 상훈의 차가 그들의 앞을 쌩하니 지나쳐 가자 강후는 현조를 안은 채 차로 걸어갔다. 현조는 아까부터 잔뜩 굳어있는 강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 . 무슨 안좋은 일 있는거 아냐? ” 강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냐 그런거. ” 짧게 대답을 하고 강후는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강후는 말이 없었다. 현조는 갑작스레 변해버린 그의 태도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딱히 기분나쁘다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가 그냥 김이 팍 새어버린 기분이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창 밖을 내다보는데 어느새 눈에 익은 아파트 상가들이 보였다. “ 다 왔다. ” “ 그러네. ” 강후가 시동을 끄며 말하자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 하자 강후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는 뭔가를 내밀었다. “ 이거. ” “ 뭐야 이게? ” “ 그냥 선물이야. 집에 가서 풀어봐. ” “ 여기서 풀어보면 안돼? ” “ 아니. 집에서 풀어 봐. ” “ 알았어. ” 현조는 리본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강후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 뭐야. 겨우 뽀뽀로 그치냐? ” “ 아직 선물이 뭔지 모르잖아. 손해나는 장사는 하는게 아니지. ” “ 후후후.... ” 강후는 차에서 내려 현조를 바라보았다. “ 그만 들어가. ” “ 응. 너부터 가라. ” “ 아냐. 너부터 들어가. ” 강후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자 현조는 웃으며 뒤돌아섰다. “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갈께. ” “ 그래. ” 현조가 가다말고 뒤돌아서 손을 흔들자 강후 역시 손을 흔들었다. 현조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울렸다. 강후는 착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 보았다. 벌써 세번째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벌써 돌아온 건가? ’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예정대로라면 준희는 아직 프랑스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끊임없이 그에게 걸려오던 전화번호는 준희의 서울집 번호였다. 그는 전화를 받아서 확인을 해볼까 하다 그냥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지금 당장은 준희와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준희에게 자신과 현조의 상황을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지 경계선을 정해 놓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은 나쁜 놈이 되겠지만 현조까지 도매가로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되도록 현조를 가해자로 만들지 않고 정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준희를 만날 수는 없었다. 워낙 경황이 없이 보내다 보니 아직 어머니에게도 확실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다. 준희가 돌아온게 사실이라면 지금부터 그는 혼란스럽고 짜증나는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결코 유쾌한 경험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이 현조를 얻기위한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그는 수 십번이고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는 현조의 집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잘 자 현조야. 난 이제부터 전쟁을 치뤄야할 것 같다. 잘 되길 빌어주라.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차에 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평상시였다면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 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막 내리는데 옆에 서 있던 빨간색 스포츠카에서도 사람이 내리는 것 같았다. “ 박강후씨. ”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차문을 잠그던 강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 오빠. 진짜 아는 척도 안할거야? ” 웃음기 가득한 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리자 강후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 오랜만이다. 정준희. ” 28편 끝. ==================================================================================== 29 강후는 자신을 향해 웃으며 다가오는 준희의 얼굴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이런 만남을 피하고 싶었는데, 그에겐 그런 여유조차도 허락이 되지 않았다. “ 오빠. 너무 반가워서 할 말을 잃은거야? ” 준희가 팔짱을 끼며 묻자 강후는 어색하게 준희의 손에서 털어냈다. “ 언제 들어왔어? ” “ 아까 오후에. ” “ 그래? ” “ 근데 오빠 표정이 왜 그래? 꼭 귀신 본 것 같은 표정이다? ” “ 아냐. ” “ 일단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나 계속 차에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 ” “ 집은 좀 그렇고 근처 카페로 가자. ” 강후의 말에 준희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집은 안돼? ” “ 뭐? ” “ 왜 집은 안되냐고, 나한테는 언제나 오빠 집 오픈이었잖아. ” “ 그냥. ” “ 이상하다 오빠. ” 영 의심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희를 향해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그나저나 오늘 도착했다면서 피곤하지도 않았냐? 오밤중에 찾아오게. ” “ 사실 내일 아침에 제주도 가야 하거든. 프랑스에서 나 가르쳐주시던 교수님이 제주도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같이 들어오셨어. 덕분에 나도 계획했던 것보다 일찍 들어오게 됐고. 통역겸 관광 가이드 해주기로 했거든. ” “ 음... 춥다.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자. ” 강후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준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만나면 최소한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강후는 꼭 빚쟁이를 만난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작년에 잠시 들어왔던 걸 빼면 꼬박 삼년만에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강후는 그녀를 보고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준희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강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 뭐해? 안오고. ” “ 응. 가고 있어. ” 준희는 미심쩍은 얼굴로 강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빌라 근처의 까페에 들어서자 강후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을 하고나서도 강후는 내내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 오빠. 혹시 나한테 뭐 기분나쁜거 있어? ” “ 뭐? ” “ 기분나쁜거 있냐고. 표정이 너무 이상하다. 반가워하기는 커녕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 “ 그런거 아니야. 내가 조금 피곤해서 그래. ” “ 그래? ” 하지만 준희는 강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내일 가면 언제 돌아오니? ” “ 응? 아. 한 열흘정도 있을거야. 세미나 일정이 일주일이고 그 이후엔 관광을 할 계획이거든. 한국에 처음 오시는 분이라서 꽤나 관심이 많으셔. ” “ 음... 그럼 오늘은 일찍 가서 쉬고 열흘 후에 보자. ” “ 벌써 돌아가라고? ” 준희가 뜨악해서 묻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내일 제주도 가야 한다며? 그리고 솔직히 나도 좀 피곤하거든. ” 강후의 말에 준희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 너무하네 진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말도 안 해주더니 이제는 그냥 가라고? ” “ 미안한데 내가 피곤해서 그래. 그만 일어나자. ” “ 오빠. ” “ 준희야. 내가 지금 진짜 피곤하거든.” “ 휴우- 알았어. ” 준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후는 준희가 따라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준희가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로 나오자 강후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빌라 주차장으로 돌아와 강후는 준희가 타고 온 차를 힐끔 쳐다보았다. “ 차 새로 뽑았어? ” “ 아니. 나 들어온다고 큰엄마가 사놓으셨더라. ” “ 효원이 어머니? ” “ 응. ” “ 그 분도 참 정성이네. ” 강후의 말끝에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현조에게는 온갖 패악을 부리면서 자기 조카딸에게는 더없이 좋은 큰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다는게 영 거슬렸다. “ 그만 가봐라. ” 강후가 준희를 보며 말하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 뭐야 오빠? 진짜 해도 너무하네. 날 그렇게 빨리 보내고 싶어? 혹시 집안에 여자라도 숨겨놨니? ” “ 말 함부로 하지 마. ” “ 그럼 왜 자꾸 보내려고 하는건데? 그리고 집에도 못 들어가게 하고. 오빠같으면 이상한 생각 들지 않겠어? ” “ 그만 하자. 너도 피곤해서 예민할테고 나 역시 피곤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 “ 자세한 얘기? 무슨 이야기? ” “ 그만하자고 했다. ” 강후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듯 인상을 쓰자 준희는 속으로 화를 삼켜야만 했다. “ 알았어. 일단 오늘은 그냥 갈께. 나중에 나 다시 돌아오면 그때 진지하게 이야기 하자. 오늘 오빠 태도 상당히 불쾌했어. ” “ .... ” 강후는 대답없이 준희의 눈을 피해버렸다. 준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나서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는 말했다. “ 잘 다녀오라는 말도 안할거야? ” “ 잘 갔다 와. ” 매정스럽기까지 한 짧고 무성의한 인삿말에 준희의 표정이 더 굳어져버렸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준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강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에게 짜증을 낼게 아니라 이런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자신에게 화를 냈어야 옳았다. 그는 이미 시작된 전쟁의 서막을 예감하고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조는 가방에서 강후가 준 선물을 꺼내들었다. 보랏빛 리본을 풀고 짙은 자줏빛이 도는 포장지를 벗겨내자, 고급스러운 벨벳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보석 종류인 모양이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붉은색 루비가 박힌 팔찌가 형광등 아래서 매혹적으로 빛을 발했다. 루비가 박힌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화이트골드인 너무 예쁜 팔찌였다. 납작한 연결 부위를 뒤집어 보자 ‘ KH ’라고 새겨져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카드도 들어있었다. [ 뭘 선물할까 한참 고민하다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놈을 발견하고는 두 번 생각 안하고 사버렸다. 현조야... 이런거 말로 하기 민망해서 이렇게 글로 적는다. 널 만난게 내가 28년간 살아오면서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 같다. 내년에도, 그리고 그 후년에도 아니 앞으로 영원히 너와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강후. ] 현조는 카드를 다시 접어서 가슴에 꼭 안았다. 그녀는 눈 앞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비싸보이는 팔찌보다 강후의 카드 한 장에 들어있는 그 마음이 더 고마웠다. 한참동안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중얼거렸다. “ 효상선배... 나 이제 행복해져도 될까? 그래도 나 용서해 줄거야? 나 이제 그만 선배 잊고 강후 사랑해도... 나 용서해 줄거야? ” 칠 년간 그녀를 얽어매고 있던 효상의 잔영을 향해 질문을 하는 현조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시간이 가는줄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던 현조는 휴대폰이 울리자 눈물을 쓰윽 닦아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나야. ] 나직한 강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 선물 고마워. 난 선물도 준비 못했는데... ” [ 전부터 너한테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꼭 이브라서 사 준것처럼 되어버렸다. ] “ 너무 예쁘더라. ” [ 팔찌가? ] “ 아니... 네가 쓴 카드가... ” [ 후후후... 그걸 노렸지. 막 감동 먹고 그랬냐? ] “ 어. ” [ 진짜? ] “ 음. ” 현조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자 강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같이 있고 싶은데... 지금은 내가 참을께. ] “ 음. ” [ 현조야. ] “ 응? ” [ 날 위해서 기도해줄래? ] “ 무슨 기도? ” [ 그냥... 다 잘되게 해 달라고. ] 어딘지 힘겨워 보이는 강후의 목소리에 현조는 아까 보았던 강후의 어두운 표정이 생각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 무슨 일 있어? 너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영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왜 그래? ” [ 아냐.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까... 그래서 그래. ] “ 정말 그것 때문에 그런거야? ” [ 응. ] 현조는 잠시동안 생각을 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 지금... 우리 집으로 올래? ” [ 어? ] “ 오라고...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 .... ] 이번엔 강후가 말이 없었다. “ 강후야. ” [ 진짜 그래도 돼? ] 너무 갑작스러운 초대에 강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응. 밤새 놀자고...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 [ 후후후... 알았어. 지금 갈께. 한 시간 정도 걸릴거야. 오다보니까 차가 많이 밀리더라. ] “ 조심해서 와. ” [ 그래. 이따보자. ] 전화를 끊고 현조는 혼자서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오밤중에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이다니... “ 뭐 어때.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 괜히 어색해서 스스로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리며 현조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강후를 기다렸다. 29편 끝. ================================================================================== 여러분...모두 외전으로 넘어가 주셔요. ^^ 외전 5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정말? ] 운전을 하던 상훈은 은근히 미남의 눈치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있었는데, 강후가 중간에 판을 깨는 바람에 그냥 집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 미남아. ” “ 응? ” “ 근데...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 “ 글치. ” “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냥 외박해버리자. ” “ 뭐? ” 이 놈이 무슨 수작을 벌이나 싶은지 미남이 동그란 눈을 갈지자(之)로 쫙 늘여서 그를 노려보았다. “ 뭔 수작이야? 누굴 꼬시려고? ” “ 야. 신성한 이 밤을 그냥 맹숭히 지내기에는 뭔가 좀 허전하지 않냐? ” “ 허전하긴... 하긴 좀 허전하긴 하지. ” 이랬다 저랬다 연신 말을 뒤집는 미남을 보자 상훈의 마음 속에서 늑대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꼬시면 그냥 넘어올 것 같았다. “ 어차피 너도 집에는 현조랑 같이 있는다고 했다며? ” “ 그렇긴 하지. ” “ 그러니까 이 황금같은 기회를 왜 그냥 넘기냐고. 합법적으로 외박을 할 수 있는 기회인데... ” “ 그런가? ”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것 같기는 한데 상훈이 자꾸 꼬시니 그런가 싶기도한지 미남이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내가 분위기 죽이는 곳을 알고 있거든. 어때 가볼래? ” 본격적으로 늑대가 작업을 시작하자 미남이 눈을 잔뜩 흘기며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 너... 딴짓 안할거지? ” “ 딴짓? 무슨 짓? ”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능청을 떠는 상훈을 노려보자 그제서야 상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무슨 불타는 사춘기도 아니고, 그거 자제 못하겠냐? ” “ 진짜? ” “ 그럼. ” 씩씩하게 대답을 하면서 상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남은 평상시에는 똑똑한것 같은데 가끔보면 어리숙하기 그지 없었다.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랑 밤을 보내는데 얌전히 있고 싶겠는가? 하지만 상훈은 그런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는 순진하게 웃었다. “ 알았어. 대신 분위기가 영 아니면 나 당장 돌아간다. ” “ 오케이. 그럼 우리의 고결한 밤을 위해 출발. ” 말로는 고결한 밤이라고 하고 속으로는 불타오르는 정열적인 밤을 외치며 상훈은 핸들을 꺾었다. 한 시간 뒤 상훈과 미남은 청평 근처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너무 멀리까지 온거 아냐? ” 차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컴컴한 도로를 보며 미남이 불안스럽게 말하자 상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별장이 나올거야. ” “ 별장? ” “ 어. 형이 소유하고 있는건데, 나도 가끔 와서 놀다 가. ” “ 부자니까 좋다. 별장도 있고. ” “ 내꺼 아니라니까. ” “ 어쨌든... ” 마지막 언덕길을 넘어서자 달빛에 비친 하얀 전원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저기야? ” “ 응. ” 차를 앞 마당에 대고 내려서자 싸늘한 겨울 공기가 온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 춥다. ” “ 그러게. 얼른 들어가자. ” 상훈은 미남의 어깨를 껴안고는 차키와 같이 달려있는 별장 열쇠를 찾아서는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비워두어서인지 싸늘한 냉기가 그들을 반겼다. “ 어우. 추워. 어떻게 안이 바깥보다 더 춥냐? ” “ 조금만 기다려. 난방부터 하자. ” 상훈이 불을 켜며 말했다. 미남은 패브릭으로 된 소파에 앉아서 상훈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걸 지켜보았다. 상훈이 무슨 마음으로 이 곳으로 온 건지 그녀 역시 속을 빤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며 내숭을 떨었다. 미남 역시 은근히 오늘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꽤나 진한 스킨쉽을 해왔지만 오늘은 기필코(?) 만리장성을 쌓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미남은 날씬하게 빠진 상훈의 몸을 음흉하게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거야. ” “ 어? 응. ” 혼자서 야시시한 상상을 하다 미남은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하지만 미남의 속을 알리 없는 상훈은 미남이 바짝 긴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하면 미남을 꼬셔서 이 밤을 불살라 볼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우리 와인 한잔 할래? ” “ 와인? ” “ 응. 형이 아끼는게 있거든. 어때? ” “ 좋아. ” 상훈은 평소 상열이 아끼고 아끼던 검붉은빛이 도는 와인병을 꺼내들고는 미남에게 다가왔다. “ 이게 그 유명한 샤또 페뜨리우스란다. ” “ 진짜? 나도 이거 마셔보고 싶었는데... ” 미남이 동그란 눈을 반짝거리며 와인을 바라보자 상훈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적어도 일주일 안에 같이 호텔방으로 기어들곤 했었다. 하지만 미남은 그렇게 막 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보면 영악하고 또 어찌보면 순진한 미남을 데리고 장난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상하게 미남과는 육체적인 관계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톡톡 튀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미남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자신도 옛날처럼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귀한 와인 한 병을 모두 비우고 나자 미남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상훈은 와인잔을 내려놓고는 미남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내려 바닐라향이 묻어나는 미남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몸을 밀착시키던 상훈과 미남은 갑작스럽게 들린 사람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누구야? 누구 오기로 했어? ” “ 아니. 이 시간에 누가 여길 와? ” “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 미남이 흐트러진 옷을 재빨리 수습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상열이 들어섰다. “ 어? ” “ 형... ” 상열과 상훈은 서로 마주보며 기가 막혀했다. “ 넌 언제 온거야? ” “ 그러는 형은? 다른데로 간다고 했잖아. ” “ 그게... 네 형수가 몸이 좀 안좋아서 그냥 여기로 온거야. 근데 누구? ” 상열이 얼굴이 발갛게 되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미남을 가리켰다. “ 아.. 강미남이라고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야. ” “ 그래? ” 상열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미남에게 다가왔다. “ 반갑습니다. 전 이놈 형입니다. ” “ 네? 아... 안녕하세요. 강미남입니다. ” “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 “ 하하하... 그런가요? ” 미남이 과장되게 웃으며 상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떡하던지 벗어나야 겠는데 상훈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자신의 형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 여기서 자고 갈거야? ” “ 그럼. 우린 이박 삼일 동안 있다 갈려고 준비 다 해서 왔는데... ” 조금 있으니 조카인 지문과 형수가 들이닥쳤다. 그들도 상훈이 이곳에 있자 놀란 얼굴로 인사를 했다. “ 삼촌... 여기서 뭐해? ” 어느새 변성기가 되어 걸걸해진 목소리를 내며 지문이 상훈과 미남을 쳐다보았다. 미남을 보던 지문의 눈이 휘둥그래해졌다. “ 어? 영양사 선생님이다. ” 지문의 말에 미남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상훈의 조카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민망한 순간에 마주칠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라고 돌면 어쩌나 싶은게 순간 눈 앞이 노랗게 변했다. 미남이 당황해하는 걸 보자 상훈은 지문을 노려보면서 엄포를 놓았다. “ 너... 여기서 영양사 선생님 봤다고 소문내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알았어? ” “ 에이 삼촌도. 나도 눈치가 있어. 설마 그런 소문을 낼까? ” 지문이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자 미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어쩌다보니 완전 가족 모임이 되어버렸다. 돌아가겠다는 미남을 상열과 형수가 설득해서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고나자 상훈은 진이 다 빠져버렸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은 한 시간뒤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동양화 공부에 심취해있었다. 불타는 밤을 보내겠다 다짐했던 상훈은 뒷자리에 물러앉아 미남이 광을 팔며 광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성적으로 동양화 48장과는 인연이 없는 상훈은 상열부부와 미남, 그리고 지문이까지 가세해서 밤 새는줄도 모르고 돈내기 고스톱을 치는 걸 보며 신세 한탄을 했다. “ 다들 잠은 안 잘거야? 왜 이래. 신성한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스톱이 웬말이냐고.” “ 시끄러. ” “ 닥쳐.” “ 조용히 해요 도련님. 지금 막 끝발이 오르는데. ” “ 삼촌 시끄러워요. ” 네 사람한테서 동시에 면박을 당한 상훈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 젠장... 나 돌아갈래. 서울로... ” 하지만 네 명의 동양화 중독증 환자는 그의 애절한 절규를 무시해버렸다. 잠시 후 상훈은 미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만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형수에게 피박을 씌우고는 좋아라 웃고 있던 미남의 살벌한 갈굼에 깨갱해버렸다. 상훈은 미남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어떤 놈이든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스톱 치는 놈들은 죄다 감옥에 처 넣어야돼. ” 하지만 돌아오는 건 고스톱에 미친 네 명의 외면과 담요에 온 몸을 내던지는 화투장의 비명소리뿐이었다. 고스톱의 역사는 그 다음날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상훈은 불쌍한 몰골로 담요를 둘둘 말고는 미남의 뒤에서 찌그러져 잠들어 있었다. 외전 끝. 30 [ 띵동 띵동 ] 초인종이 울리자 현조는 긴장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현관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그녀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강후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는 서 있었다. “ 왔어? ” “ 응. ” “ 근데 그거 뭐야? ” “ 아- 오다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왔어. ” 강후는 신발을 벗어놓고 들고 온 커다란 박스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뭐야 이게? ” “ 밤을 새려면 준비가 철저해야지. ” 그는 박스를 풀며 웃었다. 커다란 박스 안에는 최신형 DVD플레이어와 DVD 타이틀 몇장이 들어있었다. “ 이 시간에 이걸 파는데가 있어? ” “ 음. 좀 아는 집이야. ” 강후는 코트를 벗어놓고는 DVD플레이어를 꺼냈다. “ 지금 비디오 오래 된거지? ” “ 어. ” “ 그건 버리고 이거 써. 비디오 재생도 되니까. ” “ 비싸지 않아? ” “ 아냐. 아는 집이라서 싸게 샀어. ” 낡은 비디오를 빼서 DVD가 들어있던 박스에 집어넣고 그는 DVD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오색찬란한 케이블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끝났다. ” “ 마실 것 좀 줄까? ” “ 그냥 물 줘. ” “ 알았어. ” 현조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큰 머그컵에 따라 건네주자 그는 한 모금 마시고는 옆에 놓여있던 DVD 타이틀을 가리키며 물었다. “ 뭐 보고 싶은거 있어? ” “ 글쎄... 필라델피아 있어? ” “ 톰행크스 나오는거? ” “ 응.” “ 잠깐만.” 한참동안 DVD타이틀을 뒤적거리던 강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 그건 없다. 우리 집에는 있는데, 가지고 올걸. ” “ 아니면 밖에 나가서 빌려 가지고 올까? 요 앞 비디오 가게는 아직 문 열었을텐데. ” “ 그럴까? ” 두 사람은 두툼하게 옷을 챙겨입고는 나란히 집을 나섰다. 강후가 현조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코트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현조는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면서 강후의 곁에 바싹 붙어섰다.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는 강후에게서 풍기는 따스한 기운에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비디오 가게에 들어가서 새로나온 비디오를 훑어보고 DVD코너에 가서 필라델피아를 빌려서 나오자 잔뜩 흐려져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어? 비온다. ” “ 그러네. ” “ 기왕이면 눈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 현조가 아쉽다는 듯이 말을 하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얼른 들어가자. ” 강후가 코트를 쫙 펴서 현조를 바싹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강후를 보자 머리카락에 빗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 잠깐만. ” 현조가 손을 들어 대롱거리던 빗방울을 털어냈다. 별 의식없이 강후의 머리를 만지던 그녀의 손을 강후가 잡았다. “ 괜찮아. ” 긴장한 듯 굳어있는 강후의 음성에 현조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이 몹시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 이거 보고 또 뭐 볼까? ”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현조는 들고온 DVD를 가리키며 물었다. “ 글쎄. ” 강후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서 코트를 벗어두고는 소파에 앉았다. “ 먹을거 좀 가져올까? 맥주 마실래? ” “ 음. ” 강후가 DVD를 넣는 것을 보며 현조는 주방으로 가서 작은 찻상에 맥주를 꺼내놓았다. 밤새 놀아보자고 말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긴장감이 깊어졌다. 안주로 먹을 땅콩을 접시에 담는데 옷에 가려져 있던 팔찌가 흘러내렸다. “ 참. 강후야. ” “ 응? ” 줄곧 현조를 보고 있었던 듯 막 돌아서는데 강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 이거 고마워. ” 현조가 장난스럽게 팔을 흔들자 빨간색 루비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 마음에 들어? ” 강후가 웃으며 묻자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누가 골라준건데. ” 현조가 맥주와 땅콩이 올려져 있는 작은 찻상을 들고 오자 강후는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쳤다. “ 이리와. ” “ 응. ” 현조는 주춤거리며 강후의 옆에 앉았다. 현조가 자리를 잡고 앉자 강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맥주... 지금 마실래? ” 현조가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강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중에. 영화 보자. ” 강후는 한손으로는 현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영화가 시작되자 강후는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덕분에 현조 역시 반쯤은 눕다시피해서 강후의 품에 안겨있었다. 잠시 후 현조는 영화에 푹 빠져버린듯 말이 없었다. 강후는 현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현조에게서 풍기는 옅은 향수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강후의 자제력을 점점 더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그는 브라운관에서 시선을 떼서 현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길다란 속눈썹이 눈 밑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 길다. ” “ 응? ” 브라운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현조가 되물었다. “ 속눈썹. ” “ 아- 유전인가 봐. 엄마도 그렇고 내 동생도 속눈썹은 다 길어. ” 다시 영화에 빠져버린듯 현조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강후는 가슴 속에서 머리를 쳐드는 갈증을 잠재우려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아직 준희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는 자꾸만 현조를 좀 더 깊이 사랑하고 싶었다. 덕분에 영화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영화가 다 끝나자 현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다시봐도 이 영화는 너무 좋다. ” “ 그래? ” 자신의 음성이 자꾸만 가라앉는 듯하자 강후는 목을 가다듬었다. “ 강후야. ” “ 응? ” “ 고마워. ” 뜬금없이 현조가 고맙다는 말을 하자 강후는 무슨 말인가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가? ” “ 그냥 다...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것도 고맙고, 나 많이 아껴주는것도 고맙고, 또... ” “ 또? ” “ 응큼한 짓 안하고 있는 것도 고맙고. 후후후... ” “ 아예 못을 박는구나. 남은 억지로 참고 있구만. ” 현조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녀 역시 강후가 영화 중간 정도부터 자신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이제 영화도 끝났고, 뭐할까? ” “ 글쎄... ” 시계를 보니 벌써 두시가 지나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또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강후가 손을 들어서 현조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 내가 욕심부리면 안되는 거지? ” “ ... ” 현조는 대답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후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짙어져 있는 걸 보며 현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 ” 현조의 짧은 대답에 강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 그거..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라는거 알지? ” “ 후후후... 나한테 아니면 너한테? ” 현조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짓꿎게 묻자 강후가 씨익 웃었다. “ 너랑 나... 둘 다한테 해당되는 거지. ” “ 그래? ” “ 현조야... ” “ 응? ” “ 나중에... 네가 날 원망할 수도 있어. ” “ 왜? ” “ 그냥. ” 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장 손만 뻗으면 그는 현조를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제를 해야만 했다. 현조에 대한 갈망으로 미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그녀를 향해 뻗어가는 자신의 손을 막아야만 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목숨줄처럼 붙잡고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 나 많이 힘들어. 네 옆에서 성인군자 흉내내는거. ” “ 너답지 않게 망설이네. ” 현조가 놀리듯 말을 하자 강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 자꾸 자극하지 마라. 내 자제력이 지금 거의 바닥났거든. ” “ 내가 갑자기 요부가 된 기분인데. ” 현조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장난스럽게 콕콕 찌르자 강후가 그녀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 지현조. 그만해라. ” 하지만 현조는 대담무쌍하게 강후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 순간 강후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자제력이 심한 파열음을 내며 깨어져버렸다. 강후는 급하게 현조를 끌어당겨서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서로의 혀가 엉켜들고 그들을 감싸고 있던 긴장된 분위기는 뜨거운 열기만을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강후가 현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마지막 기회야. 지금 멈추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 현조는 열기로 붉게 상기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내가 널 원해. ” 현조의 허락이 떨어지자 강후는 다른 생각은 모두 접어버렸다. 그는 다시 현조를 끌어당겨 깊고 달콤한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거실을 가득채웠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두 사람을 점점 더 뜨거운 열기속으로 밀어넣었다. 강후의 입술이 현조의 목덜미로 흘러내려갔다. 현조는 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후가 입술을 떼며 나직하게 말했다. “ 침대로 가자. ” 그는 현조를 안아들고는 침실로 향했다. 강후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살짝 열려진 문틈으로 스며든 가느다란 빛을 통해 원초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강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현조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숨을 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지고, 펌프질하듯이 뛰는 심장때문에 숨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어. ” 탁해진 목소리로 말을 하고 강후는 급하게 현조의 티셔츠와 바지를 벗겨서 침대밑으로 던져버렸다. 시릴만큼 햐얀 속옷만을 입은 채 자신의 바라보고 있는 현조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 널 너무 원해… 처음 널 본 순간부터 이렇게 안고 싶었어. " 강후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이렇게 원하는 남자가 있다. 뭐가 두려울까… 현조는 그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한참동안 격렬하게 현조의 입술을 탐닉하던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속옷을 풀어낸 가슴을 천천히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현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하자 강후은 자신의 옷을 급하게 벗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현조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옷을 모두 벗어버린 강후는 현조가 입고 있던 마지막 속옷을 벗겨냈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강후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수줍게 솟아오른 가슴에서 한참동안 머물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려와 그녀의 고결한 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현조는 입 안에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억지로 삼키며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런 거였나…온 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뱃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용암처럼 솟아나서 온 몸을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 하아...강후야... ” 집요하게 속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강후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된 것처럼 강후 역시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그녀에게 입술을 겹쳐왔다. 현조는 가쁜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강후의 몸을 끌어안았다. 강후의 뜨거운 몸이 천천히 그녀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는 다시 한번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뱃속을 가득채우고 있던 뜨거운 뭔가가 펑하며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후는 긴장했던 현조의 몸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된듯 하자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색해하던 현조가 그를 따라 리듬을 타듯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후은 자신을 바짝 조여오는 그녀를 거칠게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곧 터져버릴 것처럼 숨가쁘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강후은 거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 미치겠다. 현조야…넌 정말 날 미치게 해. " 마침내 강후가 욕망으로 가득한 신음소리을 내지르며 그녀 위로 무너져 내리자 현조는 땀에 젖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두 개의 심장이 하나로 연결된것처럼 똑같이 숨가쁘게 뛰고 있었다. 강후가 그녀를 안은 채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완벽한 사랑을 나눈 뒤 느껴지는 만족감에 그는 아직도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미치광이 야수로 만들어 버린 현조의 입술을 아프게 깨물자 현조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 뭐야. ” “ 날 유혹한 벌이야. ” “ 킥킥킥... 그래서 후회하니? ” “ 후회하는 인간의 표정이 이렇겠냐? ” 강후가 얼굴을 들어 현조를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은 만족감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 현조야. ” “ 응? ” “ 사랑해. ” “ ... ” 한참동안 말이 없던 현조가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 나도... 너 사랑해. ” 그녀의 수줍은 고백에 강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내리던 비가 어느새 눈으로 변해 버린 그 해의 크리스마스 새벽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아름답게 각인되었다. 31 어깨를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시트를 끌어당기던 강후는 옆 자리가 비어있자 놀라서 급하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현조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어있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는 거실로 나왔다. 어디를 간건지 현조가 보이질 않았다. “ 현조야. ”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불안하게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주방과 베란다를 돌아보았지만 현조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작은 방의 문을 열자 현조가 뒤돌아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다. “ 현조야. ” “ 일어났어? ” 현조가 웃으며 그를 돌아보자 그제서야 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 놀랬잖아. 불러도 대답을 안해서... 그나저나 뭐하고 있는거야? ” “ 아- 뭣 좀 찾을게 있어서. ” 현조는 다시 작은 박스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낡은 노트들과 작은 액자들이 가득한 박스 안을 열심히 뒤지는 현조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보였다. “ 뭘 찾는데? ” 강후가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 어... 있어. 어디갔지? 분명히 여기서 본 것 같은데...아! 여기있다. ” 한참을 이것저것 들춰보던 현조가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상자를 꺼내들었다. “ 찾았다. ” “ 뭐야 이게? ” “ 아- 너 줄려고. ” “ 나? ” “ 응. 일단 나가자. 이 방 난방을 안했더니 영 썰렁하네. ” 현조는 가죽케이스를 손에 꼭 쥐고는 방을 나섰다. 소파에 앉아서 가죽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 현조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감돌았다. “ 그게 뭐야? ” 강후는 소파에 앉지 않고 현조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현조가 가죽으로 된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 이거 내가 열 살때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거야. 늘 목에 걸고 다녔었는데, 서울오면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넣어두고 있었어. 봐. 예쁘지? ” 검은 가죽끈에 금으로 된 특이한 펜던트가 걸려있었다. 어찌보면 그냥 길죽한 사각형인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쓰여져 있었다. “ 무슨 글자가 적힌 것 같은데.. ” 강후가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현조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 별 말 아니야. 그냥 ‘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게. 현조. ’라고 적혀있어. 내 동생도 뒤에 이름만 다른 똑같은 목걸이가 있고. 내가 열 살때가 우리 가족들한테는 제일 힘든 시기였어. 아버지 사업도 부도 위기였고, 그것때문에 부모님 사이도 안 좋았었고. 근데 그때 아버지가 5년동안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내놓으시면서 여행을 가자고 하시더라. 당장 집에 차압이 들어오게 생겼는데...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는 혹시라도 당신이 가족을 포기하게 될까봐 두려우셨던것 같아. 너무 힘이 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였을텐데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만은 꼭 지키고 싶으셨겠지. 어쨌든 열흘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준이하고 나한테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를 선물해주셨어. 어떤 경우에라도 가족의 존재를 잊지 말자고 하시면서. 그래서 그때부터 부적처럼 늘 갖고 다녔었지. 나한테는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거야.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 “ 근데 이걸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 “ 응. ” “ 너한테 소중한 물건이잖아. 근데 이거 나한테 줘도 돼? ” 강후의 말에 현조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 너한테도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그냥 돈으로 사서 주고 싶지는 않았어.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까 딱 이게 생각나더라. 너 줄께. 잘 간직해. ” 강후는 현조가 내미는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현조에게 단순한 장식품 이상의 의미였을 목걸이를 받아들자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자신을 향한 현조의 마음이 이만큼 깊어졌다는 생각에 그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 잘 간직할께. 그리고 절대 떼어놓지 않을께. ” “ 응. 그래주라. 나한테 의미가 깊었던 물건이었으니까 너도 소중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 “ 그럴께. ” 강후는 목걸이의 연결고리를 풀어서 목에다 걸었다. 강후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며 현조가 미소를 지었다. “ 잘 어울린다. 꼭 원래 네거였던 것처럼. ” “ 고맙다. ” 강후는 현조를 끌어당겨 감사의 의미를 담은 달콤한 키스를 했다. “ 참. 메리 크리스마스. ” 갑자기 현조가 입술을 떼며 그를 향해 말했다. “ 어? 아- 메리크리스마스. ” 서로 장난스럽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주고 받고 그들은 나란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 우리 아침 해먹자. ” “ 음. 내가 해줄까? ” 강후의 말에 현조가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 너 밥은 할줄 아냐? ” “ 글쎄... 뭐 물 붓고 하면 되는거 아냐? ” “ 아서라. 크리스마스 아침에 고행하고 싶은 생각없다. 그냥 앉아있어. 내가 맛있게 밥 해줄께. ” “ 그럼 설거지는 내가 해줄께.” “ 그러시던지. ” 현조가 바쁘게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강후는 식탁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고 맞는 아침이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축복처럼 여겨졌다. 비록 살얼음판 위에 지은 집처럼 불안스럽기는 해도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운 아침식사를 먹고나서 특별한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어디로 갈지 망설이던 현조가 강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 우리 시장가자. ” “ 시장? ” “ 어. 점심때 맛있는거 해먹으려면 장을 봐야지. 미남이 만큼은 안되지만 내가 음식솜씨가 좀 있거든. 크리스마스 분위기에는 안 맞지만 탕수육 해먹자. ” “ 그것도 집에서 만들 수 있어? ” “ 그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소스 만들기도 쉽고. ” “ 오호.. 실력발휘를 해 보시겠다? ” “ 영광인줄 알아. 아직 현준이한테도 한 번 안 해줬는데.. ” “ 동생이름이 현준이야? ” “ 응. ” “ 너랑 닮았어? ” “ 킥킥.. 아니. 걔는 나랑은 달라. 나보다 더 여리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좀 섬세한 면이 있지. ” “ 남매가 성격이 다르구나. ” “ 그렇지. 맨날 엄마가 그러시잖아. 둘이 성격이 뒤바뀌었다고. ” “ 후후후.. ” 신혼부부처럼 손을 맞잡고 시장에 들러서 돼지고기를 사고 슈퍼에 들러 소스에 넣을 양파와 당근을 사는데 강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강후가 휴대폰 배터리를 빼버렸다. “ 누군데 그래? ” “ 별거 아냐. 그냥 신경쓰이는 전화가 있어서. ” “ 그래? 그렇다고 꺼버리면 어쩌냐? 급한 전화오면 어쩔려고. ” “ 상관없어. 너랑 같이 있는데 다른 급한 일이 있을게 뭐 있어? ” 강후는 대형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어 카트에 넣었다. 요근래들어 가끔 강후에게서 알 수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딱히 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도 그의 불안한 마음이 전염되는 것처럼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하지만 강후가 굳이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것 같아서 현조는 자세히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양손에 먹을 걸 잔뜩 사들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현조가 들고 있던 봉지들을 내려놓고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 [ 현조야. 나다. ] “ 어. ” 현조는 뒤돌아서 식탁 위에다 봉지를 내려놓는 강후를 흘낏 쳐다보았다. “ 이제 돌아온거야? ” [ 응. 조금 전에 도착했어. 뭐하고 있었어? ] “ 그냥.. 그나저나 피곤하겠다. ” [ 조금. 내가 잠깐 들릴까? ] 효원의 말에 현조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게... 지금 친구가 와 있어. ” [ 친구? 미남이? ] “ 아냐. 너 모르는 친구. ” [ 그럼 안되겠네. 너 줄려고 선물 사왔는데. ] “ 다음에 줘. 친구랑 어딜 가기로 해서 그만 끊을께. ” [ 어. 알았어. 메리 크리스마스.] “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 전화기를 내려놓고 현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효원에게 강후와의 사이를 말하긴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알려야할지 막막했다. “ 누구야? ” 현조의 표정이 굳어진 걸 눈치 챈 강후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효원이. 지금 한국에 들어왔다고. ” “ 그래? ” 강후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 너랑 내 사이 말해야겠지? ” 현조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말할게. 넌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 “ 그래.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기가 좀 뭐하거든. ” “ 내가 알아서 할게. ” “ 응. 그나저나 배고프다. 얼른 준비해서 탕수육 해먹자. ” 현조가 앞치마를 두르고 탕수육 만들 준비를 하는 사이 강후는 베란다로 나가서 효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번의 신호가 가고 효원이 까칠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 무슨일이야? ] 여전히 그를 향해 불퉁한 말을 내뱉는 효원의 태도에 강후는 살짝 인상을 썼다. “ 저녁에 시간되면 잠깐 만나자. ” [ 뭐하러? ] “ 너하고 정리할게 있어. ” [ 정리? 무슨 정리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시간은 내볼게. ] “ 그럼 저녁때 시저에서 만나자. ” [ 그래. 나중에 가마. ] 전화를 끊고 강후는 현조를 돌아보았다. 양파를 썰고 있던 현조가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떳떳하게 현조와 만나고 싶었다. 준희도 귀국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첫번째 순서로 그는 효원을 만날 작정이었다. “ 강후야. 고기 좀 썰어줄래? ” “ 알았어. ” 두 사람은 중간중간 장난을 쳐가며 탕수육을 만들어서 배가 불러서 숨쉬기가 힘들때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 배가 너무 불러. ” 현조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강후 역시 미소를 지었다. “ 과식했다. 네 덕분에 살만 디룩디룩 찔 것같아. ” “ 맛있었지? ” “ 음. 나중에 결혼해서 굶고 살지는 않겠다. ” 결혼이라는 말에 현조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결혼? ” “ 응. 결혼. ” “ 너랑 내가? ” “ 응. 지현조랑 박강후가. ” 현조는 한참동안 뭔가를 생각하다 씨익 웃었다. “ 설마 그게 프로포즈는 아니지? ” “ 응? ” “ 그렇게 멋대가리 없는 걸 프로포즈라고 한거냐고? ” “ 아냐. 지금은 맛보기... 나중에 정식으로 프로포즈 할거야. 억 소리나게. ” 현조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그릇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 현조야. 나 그만 가봐야 되거든? ” “ 그럴래? 하긴 너 어제부터 줄곧 클럽에도 못 나가봤구나. 한참 피크일텐데. ” “ 괜찮아.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가는거야. 많이 늦지 않으면 다시 올께. ” “ 피곤하면 안 와도 돼. ” “ 내가 알아서 할께. ” 강후가 옷을 챙겨입자 현조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 가볼게. ” “ 그래. ” 현관으로 걸어가던 강후가 뒤돌아서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힐 정도로 기나긴 키스를 끝내고 강후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 사랑해 지현조. ” 현조는 대답 대신 그를 꼭 껴안았다. “ 간다. ” “ 응. ” 강후는 현관문을 나서면서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 이거... 정말 소중하게 간직할게. ” “ 음. ” 마침내 강후가 문을 닫고 가버리자 현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도 너 사랑해. ” 쑥스럽게 한 마디하고 현조는 붉어진 얼굴을 톡톡 두들기며 어지러운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강후가 시저에 도착하고 조금있자 재룡이 효원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강후는 굳어진 표정으로 효원을 만나기 위해 바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효원이 그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 오늘 도착했다고? ” “ 응.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나 독일 갔다온거? ” 효원이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 현조한테 들었어. ” “ 너희들 아직까지 만나? ” 믿을 수 없다는 듯 효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 당연한거 아냐? ” “ 어째서 그게 당연한거야? 넌 어차피 막 나가는 놈이니까 그렇다치고 현조는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거야? 너한테 약혼녀까지 있다는거 알면서도 그런다는게 말이 돼? ” “ 약혼녀 아니야. 그리고 설사 내가 약혼을 했다해도 그건 현조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현조 붙잡았어. 나 믿고 기다리라고. 내가 알아서 정리 할 거라고. ” 순간 효원이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강후에게 퍼부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강후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흐르는 물을 닦아냈다. “ 이 정도로 네 화가 풀리지는 않을텐데... ” “ 닥쳐. 너같은 새끼하고 마주 앉아있는 것도 역겨우니까. ” “ 그럼 가버리던지. ” 강후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티슈를 뽑아서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현조한테서 손 떼. ” 화를 억누르는 듯한 효원의 말에 강후는 고개를 저었다. “ 늦었어. 나 현조하고 못 헤어져. 아니 안 헤어져. 그럴 단계 이미 지났어. ” “ 무슨 소리야? ” “ 그럴 단계 지났다고... 못 알아듣냐? 나 어제 현조 집에 있었어. 너 만나러 오기 직전까지 거기 있다 온거야. ” 강후의 말에 효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 그래서... 갈 때까지 갔으니까 난 상관말고 빠져라? ” “ 네 표현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게 이해해도 무관하겠지. ” “ 준희 들어온거 알고 있지? ” “ 알아. 만났어. ” “ 준희한테도 이야기 했냐? ” “ 아직. 제주도 갔다오면 말할거다. ” “ 그 애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아? ” “ 그건 그 애와 내 문제야. 그리고 준희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내 결정은 변하지 않아. ” “ 너처럼 제멋대로에다 이기적인 놈이 현조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 그 자격은 현조가 주는거 아닌가? 너같은 제 3자가 나서서 자격운운하는거 웃기지 않냐? ” 효원은 강후를 노려보았다. 강후 역시 만만찮게 효원을 노려보았다. “ 만약 이 일로 현조가 또 다시 아파하게 되면 너 가만 안둬. ” “ 그럴 일 없어. ” “ 장담하지 마. 내가 보기엔 너희들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거 같아? 내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밝혀지게 되어있어. 너희들이 이 나라를 뜨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거라고. ” “ 그럼 어쩔 수 없지. 떠날 수 밖에. ” “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냐? 왜 이렇게 일을 힘들게 만들어. 분명 내가 독일가기 전에 현조 너랑 끝낼 생각이었어. 그때 놔 줬어야지. ” “ 그러고 싶지 않았다. 놔주고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고,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현조란 여자 갖고 싶었어. ” 강경하게 말하는 강후의 얼굴에서 현조를 향한 진한 애정과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눈 앞에 빤히 보이는 가시밭길로 현조를 끌고 들어가는 강후에 대한 원망이 점점 더 깊어졌지만 효원은 복받쳐오르는 감정을 애써 내리 눌렀다. 강후만 봐서는 당연히 반대를 해야 했지만 현조가 그를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의 사촌오빠로서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현조의 선택에 얼마간의 실력행사는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현조의 친구입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냥 강후와 잘 되길 빌어주고 싶었다. 어떤게 정말 현조를 위하는 건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한숨과 연기를 번갈아 가며 내뱉았다. 한참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던 효원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되도록... 빨리 정리해. 현조 눈치채기 전에 준희와의 일 깨끗히 정리해라. ” 효원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강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럼... 넌 우리 사이 인정하겠다는 거야? ” “ 인정하고 말고 할게 없잖아. 네 말대로 난 제 3자인데... 나 역시 현조의 불행에 일조를 한 사람 중 하나니까, 이쯤에서 한발 물러서겠다는 거야. 아직도 난 네가 현조를 잡아두는거 반대야. 하지만 현조가 널 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 담배를 비벼끄며 효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 그 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난 그걸 막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그 상대가 하필 너란게 참 화가 난다. 나한테는 준희 못지않게 현조도 소중한 사람이야. 그 두 사람을 놓고 네가 저울질을 했다는게 화가 나. ” “ 알아. 내가 나쁘다는 거. 죽일 놈이란 것도 아는데... 그래도 현조는 포기 못해. ” 효원은 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앞길이 완전히 가시밭길인데 그걸 가겠다는 강후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강후를 막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도 짜증스러웠다. “ 난 그냥 모른척 할거야. 네가 누구때문에 준희를 버리려고 하는지 난 모르는거다. 그러니까 빨리 정리해. 시간 끌면 끌수록 네가 짊어져야 할 죄의 무게도 점점 더 무거워질테니까. ” “ 알았다... 그리고 고맙다. ” 강후가 손을 내밀자 효원이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툭 쳤다. “ 재수없는 새끼... 끝까지 잘난 척은. ” “ 현조... 힘들게 하지 않을거야. ” “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 현조가 너 때문에 울게되면 내가 먼저 너 죽여버릴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알았어? ” “ 음. ” “ 난 그만 가볼게. 피곤하다. ” “ 그래. ” 효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강후도 따라서 일어섰다. 어쩌다 공범자가 되어버린 효원은 강후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bar를 나섰다. 32 효원이 돌아가고나자 강후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효원과의 지루한 신경전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덕분에 불필요한 시간낭비는 줄인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썩 유쾌한 것도 아니었다.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다는게 아니라 단지 관망하겠다는 말이었기에 전적으로 내 편이 되었다고 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첫 계단은 무난히 내디딘 셈이라고 자위하며 강후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내친 김에 어머니에게도 현조의 존재를 알려둘 생각이었다. [ 여보세요.] “ 나다. 어머니 들어오셨니? ” [ 형? 엄마 조금 전에 들어오셨어. ] “ 어머니 좀 바꿔라. ” [ 동생한테는 인사도 안하냐? ] “ 잘 지내는거 알고있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머니나 바꿔. ” [ 알았어. ]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장여사의 고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후냐? ] “ 네. 어머니. ” [ 요즘엔 아예 집에 발걸음을 안하는구나. 사업이 바쁜거니 아니면 딴데 정신이 빠져있는거니? ] 뭔가를 알고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여사의 말에 강후는 이미 어머니가 현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머니 알고 계시죠? ” [ 뭘 말이냐? ]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장여사의 행동에 강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제가 요즘 누구 만나는지 알고 계시죠? ” [ 내가 어떻게 알아? ] “ 어머니. ” 강후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자 장여사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투로 물었다. [ 걔 어디가 좋디? ] “ 다 좋아요. ” [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데리고 놀 작정이야? ] “ 그런거 아니예요. ” [ 그런게 아니면? ] “ 그것때문에 전화드린 거예요. 지금 찾아뵐려고 하는데 피곤하신거 아니죠? ” [ 괜찮아. 들렀다 가. ] “ 네. ”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후는 코트를 챙겨 입었다. 일단 어머니를 설득시키고 나면 일이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어머니가 그리 쉽게 승낙을 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현조보다는 준희쪽이 더 입맛에 맞는 며느리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어머니가 반대를 한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어머니를 설득해볼 작정이었다. 효원의 말마따나 오래 끌면 끌수록 여러사람에게 상처만 남기게 될 소모전이었다. 그리고 현조에게 비밀로 한 채 모든걸 처리해야 했기때문에 그는 마음이 바빠졌다. 한 시간 뒤 강후는 장여사와 마주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후가 옆에서 계속 알짱거리자 강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 인후 너는 들어가 있어. ” “ 무슨 일인데 그래? ” 인후는 밤 늦은 시간에 불쑥 장여사를 찾아온 형을 보며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 나중에 얘기해 줄테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어머니하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 “ 그렇게 해. 형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넌 들어가. ” 장여사까지 나서서 자신을 몰아내자 인후는 입을 비쭉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그래. 뭘 어떻게 하겠다고? ” “ 준희와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 “ 그 여자애와 정리를 하는게 아니라 준희하고 정리를 하겠다? ” “ 네. ” 장여사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내가 반대할거란거 알고 있지? ” “ 왜 반대를 하시는 겁니까? ” “ 준희보다 나은게 없는 애더구나. 학벌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고. ” “ 그게 다는 아니죠. ” “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레벨이 맞아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난 클럽에서 DJ나 하던 애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없다. ” “ 참 자세히도 조사하셨네요. ” “ 기본적인 건 알고 있다고 했잖니. ” “ 그래서 반대하시는 겁니까? ” “ 그래. ” 그걸로도 반대하는 이유는 충분하다는 듯 짧게 대답하는 장여사를 보며 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 어머니답지 않으시네요. ” “ 뭐가 말이냐? ” “ 현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시지도 않고 대뜸 반대를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 ” “ 내가 굳이 만날 필요가 있겠니?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인데... ” “ 아뇨. 어머니 며느리가 될 여잡니다. 한번 만나봐 주세요. ” “ 강후야. ” “ 설사 어머니가 반대하신다고 해도 저 현조와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되도록이면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싶지만,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 성인이예요. 그리고 어머니 도움없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있구요. 반대하지 마세요. 저 아시잖아요. 쉽게 결정하고 한때 객기로 이런 말할 만큼 생각없는 사람아니란 거. ” “ 그럼 내 말은 무시하고 네 멋대로 하겠다는 말이니? ” “ 제 결혼입니다. 어머니가 이래라 저래라 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애를 선택했고, 그 애가 절 선택했어요. 다른게 더 필요합니까? ” 장여사는 기가 막힌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제 여자라고 감싸고 도는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 도대체 그 애 어디가 그렇게 좋니? ” “ 다 좋아요. 웃는 것도 좋고, 화내는 것도 좋고, 그리고 그냥 숨쉬고 있는 것 자체도 좋아요. ” “ 팔불출이 따로 없구나. ” “ 후후... ” 장여사는 제 여자 생각에 바보처럼 배시시 웃고 있는 큰아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린다고 곧이 곧대로 말을 들을 놈도 아니고, 일단은 두고 볼 작정이었다. 어차피 맺어질 제 인연이라면 아무리 기를 쓰고 갈라놓는다고 해도 결국엔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아이이길래 오만하고 제 잘난 맛에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강후가 이렇게 목을 매는가 확인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언제 한번 나한테 데리고 와. 네 놈이 뭐에 콩깍지가 씌였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 “ 고맙습니다. 어머니. ” “ 찬성한다는 게 아니다. 어떤 물건이길래 네 놈이 넋을 빼놓고 있는건지 한번 보기나 하자는 거다. 괜히 좋아할 거 없어. ” “ 어쨌든요. ” “ 내가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구나. ” “ 네? ” “ 사연많은 애 데리고 살면 피곤해. 기껏 골랐다는 애가... 쯧쯧쯧 ” “ 어머니... 혹시 현조 사고 얘기도 알고 계신거예요? ” 강후가 의심어린 눈초리로 묻자 장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놈이 어찌나 풀썩거리고 돌아다니는지 김지배인이 정신이 없다더라. 시저에도 몇 번 데리고 왔었다면서? 네가 그 애 만나는거 알고나서 대충 알아봤다. ” “ 그것때문에 반대하시는 건 아니죠? ” “ 애미를 아주 속물 취급 하는구나. 그런거 아니야. 너한테 부족하다 생각을 하니까 반대를 하는거지, 그깟 과거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다. 지가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 “ 그럼 됐어요. 어머니도 만나보시면 왜 제가 목을 매는지 알게 되실 테니까요. ” “ 갈수록 팔푼이같은 짓만 하는구나. 그만 가봐. 오늘은 네 놈 잘생긴 얼굴이 괴물처럼 보인다. ” “ 나중에 현조 데리고 찾아뵐께요. ” “ 그러던지. ” “ 가보겠습니다. ” 장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 강후는 차에 올라 현조의 집으로 향했다. 고작 몇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는 현조의 무심한 얼굴이 많이 보고싶었다. “ 팔푼이가 되가는 건 확실한거 같네요. 어머니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강후는 그를 기다리고 있을 현조를 향해 달려갔다. ================================================================================== “ 싫다니까. ” “ 그러지 말고 현조야. 말 좀 들어. ” “ 아- 싫다니까.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된 말씨름이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강후는 엎드려 있는 현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다시 그녀를 꼬시기 시작했다. “ 내가 사 줄께. 응 현조야? ” “ 나도 돈 있어. ” “ 누가 뭐래? 그냥 내가 너한테 선물로 사주고 싶어서 그래. ” “ 너한테 선물 받았잖아. 자꾸 그러면 나 진짜 화낸다. ” “ 어휴- 고집불통. 하여튼. ” 끝내 현조의 고집을 꺾지 못한 강후가 그녀를 흘겨보고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벌거벗은 몸에 트렁크 팬티 하나만 걸친 그를 보는 현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강후의 목에 그녀가 준 목걸이가 걸려있는 것을 보자 마음 한켠이 따뜻해져 왔다. 한시도 떼어놓지 않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럴 모양이었다. “ 그래서 굳이 중고차를 사겠다고? ” “ 그래. ” “ 내가 사주는게 싫으면 대신 새 차로 사라. 중고차 찜찜해. 누가 타던 건줄 알고 그걸 사겠다는거야? 사고났던 차일수도 있고 뭔가 결함이 있어서 팔아버린 걸 수도 있잖아. ” “ 요즘은 상사에서 다 조사해서 팔아. 예전처럼 속이고 그러지 않는다니까. ” “ 내가 싫다잖아. ” “ 내 차 사는데 왜 니가 난리야? 내가 중고차를 타고 싶다는데. ” “ 휴우-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차종은 결정했어? ” “ 응. 투스카니로 살거야. ” “ 그거 스포츠카 종류 아니야? ” “ 난 그 차가 좋아. ” “ 고집불통 지현조. 진짜. ” “ 네가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거야. 나도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결정한 거야. 계속 그렇게 꼬치꼬치 간섭할거면 너 그냥 집에 가. 상사 가서도 이 꼬투리 저 꼬투리 잡을거면... ” “ 안 돼. 같이 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봐 줄게. ” 영 못마땅해하는 강후를 설득하는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돈에 구애를 받지 않는 강후야 새 차를 사라는 말을 쉽게 하겠지만 솔직히 그녀 입장에서는 중고차를 사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적금을 타서 3분의 2 이상을 엄마에게 보내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돈은 겨우 천만원 정도였다. 그걸로 새차를 사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돈때문에 중고차를 사겠다는 말을 하면 강후 성격에 더 난리를 칠 것 같아서 그녀 딴에는 머리를 굴려서 한 말인데 아니나 다를까 강후는 중고차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오전내내 TV를 보면서 빈둥거리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중고차 상사로 향했다. 쭉 늘어서 있는 중고차들을 보는 강후의 표정이 꼭 심술난 어린애같아 보여 현조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 웃지 마. ” “ 알았어. 근데 인상 좀 펴라. 응 강후야? ” “ 어이구.. 고집불통 지현조. ” 다시 한번 중고차들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강후를 끌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영업사원이 그들을 맞았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더니 그래도 강후는 이것저것 물어보며 꼼꼼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조는 할 일 없이 강후와 영업 사원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까다로운 강후의 요구사항에 그나마 통과가 된 차가 있다는 소리에 그들은 영업사원을 따라서 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영업사원이 검은색 투스카니를 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출시된지 1년정도 된 차인데, 주행거리도 적당하고, 차체도 아주 깨끗합니다. 주인이 급하게 팔게 되서 시세보다 많이 싸게 내놓은거라 구입하셔도 후회는 안하실겁니다. ” “ 사고나거나 그런 건 아니죠? ” “ 어휴 그럼요. 그런 차는 저희가 아예 취급을 안합니다. ” 웃으며 말하는 영업사원을 못 미덥게 바라보며 강후는 차문을 열고는 이것저것 살피기 시작했다. “ 수동보다 오토가 낫지 않아 현조야? ” “ 아니. 난 오토 싫어. ” “ 수동은 불편하잖아. ” “ 오토는 운전할 맛이 안 난다니까. ” 현조는 자신의 차가 될지도 모를 검은색 스포츠카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놈을 타고 속력을 낼 생각을 하자 가슴속에 기분좋은 긴장감이 확 퍼져나갔다. 한참동안 세심하게 차내부를 살펴보던 강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이 정도면 그나마 괜찮다. ” “ 그래? 그럼 이걸로 계약해야겠다. ”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서 현조는 영업사원이 내민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강후는 사인을 하는 현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퉁퉁거렸다. “ 중고차 태우기 싫은데... ” “ 냅둬 그냥. ” 강후가 또 태클을 걸까 싶어서 그녀는 후두닥 사인을 하고는 계약서를 영업사원에게 넘기면서 물었다. “ 그럼 내일 모레면 제가 인수 할 수 있는건가요? ” “ 네. 조수석에 에어백 장착하고 타이어 갈고, 전체적으로 점검을 받으시려면 그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 “ 그래요? 그럼 등록이나 다른 절차는 어떻게 하죠? ” “ 저희가 대행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 “ 그래요? ” 현조가 곰곰히 생각을 하는듯 하자 강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놔 둬. 재룡이 시켜서 하면 돼. ” “ 재룡씨가 귀찮잖아. ” “ 괜찮다니까. 그리고 차 수리도 그냥 재룡이한테 맡겨. 내 차 맡기는 카센터에 맡기면 되니까. ” “ 알았어. ” 그것까지 반대했다가는 강후가 더 화를 낼것 같아 현조는 나머지 일처리는 강후에게로 떠 넘겨 버렸다. 예상했던 금액보다 조금 싸게 구입을 한 탓에 여유자금이 조금 생겼다. 중고차 상사를 나서면서 현조가 기분좋은 어투로 말했다. “ 생각보다 싸게 샀네. ” “ 그래? ” “ 응. ” “ 내일 재룡이 보내서 차 수리맡기고 등록 다 할테니까 그렇게 알아. ” “ 어. ” “ 그리고 31일 해돋이 보러 가기로 한거 기억하고 있지? ” “ 그럼. 어젯밤에 미남이 전화와서 난리치는거 봤잖아. 여행가서 좋아죽겠다고. ” “ 그냥 우리끼리 가는게 낫지 않을까? ” “ 왜? 같이 가자. ” “ 그래도... ” “ 어차피 처음 말 꺼낸 것도 상훈씨잖아. 이제와서 우리끼리 간다고 그러면 화 낼걸? ” “ 그렇겠지? ” “ 그럼. ” “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이제 집으로 가자. ” “ 응. 그리고 오늘부터는 그냥 네 집으로 가. ” “ 왜? ” 강후가 불퉁해서 되묻자 현조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게 좀 그렇잖아. 아가씨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자주 들락거리는거... ” “ 뭐 어때? ” “ 그래도 좀 그렇지. ” “ 네가 좀 불편해지려나? ” “ 그런 것도 있고. ” “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 강후를 보며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강후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후를 내내 집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괜히 이웃사람들의 눈치도 보이는 것 같았다. 현조를 집에다 내려주고 강후는 네메시스로 향했다. 클럽으로 들어서자 영업 준비를 하고 있던 재룡이 그에게 다가왔다. “ 오셨습니까?" “ 응. 별일 없지? “ “ 네. ” “ 재룡이 너 내일 여기 가서 차 인도받아서 카센터에 좀 맡겨라. 등록도 좀 하고. ” 강후가 중고차 상사의 명함을 내밀자 재룡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 중고차 사셨습니까? ” “ 현조가 산거야. 에어백이고 뭐고 새로 교환 할 수 있는 건 죄다 다 최고급으로 바꾸고, 카오디오도 딴 걸로 바꿔. 세세하게 체크해서 고장 난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고치라고 해. 딴 놈이 타던 차 현조가 타는거 불쾌하니까 그런 티 안나게 아예 새 차처럼 만들어 놔. ” “ 네. ” 그 동안의 영업상태를 보고 받고 강후는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잠깐 들러 옷만 갈아입고 간 터라 집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며칠간 현조와 지냈을 뿐인데 이 큰 집에 덜렁 혼자 있다는게 새삼스레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는 샤워를 하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들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허스키한 현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 뭐 했어? ” [ TV보고 있었지. 넌? 집이야? ] “ 응. 오늘은 일찍 들어왔어. 안 심심해? ” [ 아니. ] “ 좋겠네. 난 심심한데. ” [ 그럼 자. ] “ 잠이 오겠냐? 네가 없는데. ” [ 후후후... ] 웃고 있을 현조의 얼굴이 연상이 되자 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 현조야. ” [ 응? ] “ 노래 하나만 불러줄래? ” [ 노래? ] “ 응. 네 노래 들으면 잠이 올것 같은데... ” [ 쑥스러운데. ] “ 뭐 어때? 나 혼자 듣는건데. ” [ 그래도... ] “ 하나만 불러줘. ” [ 알았어. 잘 들어. ] “ 음. ” 현조가 목을 가다듬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이별 노래인것 같은데 듣다보니 괜히 우울해 졌다. “ 현조야. ” [ 응? ] 조용히 노래를 듣던 강후가 불쑥 이름을 부르자 현조가 노래를 멈추었다. “ 나 안 보고 싶어? ” [ 무슨... 얼굴 본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 “ 난 너 보고 싶다. ” [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 그의 목소리에 묻어난 한숨소리를 감지한 현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아니. 그냥 네 목소리 들으니까 네 얼굴이 보고싶네. ” [ 좀 넘치네. 네 말 닭살스러워. ] “ 넌 너무 무드가 없어. ” [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얼른 자. 피곤하겠다. ] “ 그래야지. 너도 잘 자. ” [ 응. 잘 자. ] “ 그래. ”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후는 침실로 향했다. 시간이 갈수록 현조와 떨어져 있는게 버겁게 느껴졌다. 어서 빨리 준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현조를 온전히 자신의 곁에 묶어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후는 잠에 빠져들었다. ================================================================================== “ 어디야? ” [ 한 5분정도면 도착할거 같다. 내려와 있어. ] “ 알았다. ” 전화를 끊고 강후는 여행을 위해 간단하게 챙긴 가방을 들고는 집을 나섰다. 이른 새벽이라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강후가 막 빌라 입구를 나서는데 날렵하게 생긴 검은색 스포츠카가 그의 앞에 끼익하며 멈춰섰다. 그리고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 타. ” “ 난폭하게 운전하네. ” 강후의 말에 현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강후가 조수석에 타자 현조가 그를 보며 물었다. “ 도대체 이거 수리하는데 얼마나 든거야? ” “ 왜? ” “ 혹시 차값보다 튜닝비가 더 든거아냐? ” “ 그냥 좀 신경써서 봐달라고 했어. ” “ 좀이 아니던데... 차 외관빼고는 모조리 바꿔버린것 같더라. ” “ 그 정도는 아니야. ” “ 어쨌든 고맙다. 차가 꽤 잘나가던데, 원래 잘 나가는건지 아니면 손을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 ” “ 그래서 그렇게 요란하게 운전을 한거야? ” “ 이 정도야 뭐. ” 현조는 킥킥거리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 어디서 만나기로 했다고? ” “ 상훈이 집 근처에서. ” “ 오케이. 가자. ” 아직 밤의 여운이 가득한 도로를 내달리는 기분이 꽤나 상쾌했다. 강후는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는 운전을 하고 있는 현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 상훈이네랑 합류한 뒤에는 내가 운전할께. 넌 쉬어라. ” “ 괜찮은데... ” “ 고속도로 나가는거 오래간만이잖아. 운전 안한지 2년 넘었다면서. ” “ 그렇긴 하지. 뭐 마음대로 해. 난 상관없어. ” 20분쯤 더 달려 상훈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날씬하게 빠진 하얀색 자가용이 서 있는게 보였다. 현조와 강후가 차에서 내리자 상훈과 미남도 나란히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 뭐냐. 이 장난감같은 차는? ” 상훈이 현조의 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 현조 차야. 며칠 전에 샀다. ” “ 그래? 좀 좋은 걸 사주지.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 “ 내 말이... 사주겠다는데도 굳이 싫다잖아. ” “ 고집불통인거 몰랐냐? ” “ 그러니까. ” “ 어째 친구끼리 똑같이 성격이 그 모양인지... ” “ 미남씨는 또 왜? ” “ 그런게 있어. 내가 아주 크리스마스 날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 “ 무슨 일 있었어? ” “ 몰라. 고스톱에 미친 4명의 인간괴물들을 모조리 감옥에 처넣고 싶은 날이었다. ” 상훈이 현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미남을 힐끗 노려보았다. 미남은 현조의 차를 훑어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 너 이것도 개조한거야? ” “ 아니. 강후가 손을 좀 봤어. ” “ 이번에는 제발 좀 자중해서 운전해라. ” “ 그래볼까 생각중이다. ” “ 도무지 믿을수가 있어야지. ” 못 믿겠다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는 미남을 보고 현조가 웃음을 터트렸다. “ 예전에는 죽는거 신경 안썼으니까 그렇게 막 나간거고 지금은 아니야. ” 현조가 강후를 힐끗 쳐다보며 말하자 미남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찔렀다. “ 뭐야. 분위기가 요상한데... 너 솔직히 말해봐. 내가 모르는 사이 뭔 일 있었지? ” “ 일은 무슨. ” “ 아냐 아냐. 분명 뭔가 있어. ” “ 아이고 없어 그런거. 그나저나 차는 한 대로 가도 되지 않나? ” “ 그러게. 기름도 안 나오는 나라에서 두 대씩이나 움직일 필요가 있을래나? 차도 많이 밀릴것 같은데... ” 미남의 말에 현조는 상훈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후에게 다가갔다. “ 차 둘 다 가지고 갈거야? 그냥 한 대로 움직이는게 낫지 않을까? ” 그녀의 말에 상훈과 강후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 한 대로는 불편하지. 네 차도 어차피 테스트를 해봐야 하니까 고속도로 주행해봐야 하고 그렇다고 네 차에 모두 타기에는 좀 차가 작잖아. ” “ 그렇지. 그리고 중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 두 남자는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어서 현조와 미남은 두 남자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 자 그럼 출발해 볼까? ” “ 그러자. ” 상훈은 자신의 차 운전석에 타고 강후는 현조 차의 운전석에 올랐다. “ 나중에 휴게소에서 보자. ” 미남과 인사를 하고 현조가 차에 오르자 강후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33 “ 생각보다 차가 별로 없네. ” “ 그러게. ” 미남이 음료수를 건네며 말하자 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휴게소에 잠깐 들러 휴식을 취한 것을 제외하고 꼬박 세 시간동안 운전을 했더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새벽부터 서둘러서 그런지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 잠 오지? ” 상훈이 음료수를 마시며 묻자 미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 상훈씨도 잠 오는거 아냐? ” “ 나도 좀 그러네. ” “ 그나저나 현조네는 따라오고 있는거야? ” “ 그럴걸... 우리가 먼저 출발했으니까 뒤따라 오겠지. 아- 저기 오네. ” 상훈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현조의 차가 저 뒤쪽에서 따라오는게 보였다. 앞유리까지 온통 짙은 선팅을 해놔서 내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 뭔 놈의 선팅을 저렇게 진하게 했대. ” “ 까마귀잖냐. 컨셉을 맞춰야지. ” 상훈의 말에 미남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 내 친구지만 참... 그래도 생각보다 차들이 없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가? ” “ 차들도 별로 없고, 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 상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 “ 심심하지 않냐? ” [ 별로. ] “ 우리 간만에 내기나 할까? ” [ 무슨 내기? ] “ 다음 휴게소에 누가 빨리 도착하나 내기하자. 진 사람이 이번 여행경비 몽땅 책임지기. ” [ 좋아.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는거야? ] “ 오케이. 열심히 따라와 봐라. 쉽지는 않겠지만. ” [ 글쎄...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 “ 장난감 같은 차가지고 시합이 될려나? 내가 한 수 접어줄까? ” [ 됐어. 전화끊어. 돈 준비나 해라. ] “ 좋았어. ” 상훈이 전화를 끊고 나서 미남에게 말했다. “ 호빵. 이번 여행 공짜로 즐겨보자. ” “ 뭐야. 진짜 내기한거야? ” “ 그럼. 안전벨트 잘 매라. 간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훈이 기어변속을 하고는 속도를 높혔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현조의 차도 따라붙는게 보였다. “ 어쭈... 좀 하는데... 이래도 따라오나 보자. ” 상훈이 차선을 바꿔서 아슬아슬하게 앞 차를 추월했다. “ 야!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 미남이 기겁을 해서 문쪽에 달린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 괜찮아. 어차피 쟤들 못 따라와. 2000CC가 3500CC 하고 게임이 되냐? ” 기고만장해서 잘난 척을 하는데 순간 옆으로 현조의 차가 쌩하고 지나갔다. “ 혹시 상훈씨가 말한 그 2000CC차가 지금 바람처럼 우릴 앞질러 간 저 차 아니야? ” “ 이런 씨- 무리하는데, 박강후.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거지. ” 상훈의 얼굴에 승부욕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다시 상훈이 속도를 높여 현조의 차를 앞질러 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가다보니 어느새 다음 휴게소 5KM라는 표시가 보였다. “ 좋아. 이제 승부수를 띄워보자고. ” 미남이 미처 말릴새도 없이 상훈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현조의 차가 뒤로 쳐지는 것을 보며 상훈이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 이제 못 따라오겠지. ” “ 아닐걸? ” “ 뭐? ” 미남이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상훈이 옆을 힐끗 쳐다보자 어느새 따라붙었는지 현조의 차가 옆 차선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미처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검은색 스포츠카가 상훈의 차 앞으로 휙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옆 차선의 트럭을 아슬아슬하게 앞질러서 추월을 한 후 곡예같은 앞지르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멀찌감치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저거 미친놈 아니야? 박강후 운전 스타일이 언제 저렇게 망가졌어? ” 상훈이 기가막혀서 중얼거리자 미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강후씨가 운전하는거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인간중에 딱 저렇게 무식하게 운전하는 인간이 하나 있거든. 그 인간 병이 또 도졌나보다. 이젠 안 그럴거라더니... 나 참. ” “ 뭔 소리야? ” “ 강후씨가 아니라 현조가 운전하는거야. ” “ 엥? ” 미남이 부연설명을 하기도 전에 현조의 차가 속도를 낮춰 다시 상훈의 차 바로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조수석 쪽에서 강후의 팔이 튀어나오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워서 상훈의 약을 잔뜩 올리고는 휴게소 입구를 향해 쏙 들어가버렸다. “ 저거 뭐야... 지금 나 약 올린거 맞지? ” “ 보고도 모르냐. 쯧쯧쯧 ” “ 아 씨- 쪽팔려. 내가 여자한테 졌단말이야? 그것도 저런 후진 스포츠카한테? ” “ 어지간해서는 현조 못 당해. 이 년전까지 무슨 동호회인가에도 가입해 있던 애를 무슨 수로 당하냐? ” “ 그래도 차 성능이 있지. ” “ 내가 보기엔 성능이 문제가 아니라 운전솜씨의 차이인것 같다. 상훈씨 졌어. ” “ 으으윽... ” 상훈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현조의 차 옆에 주차를 했다. 그러자 강후가 조수석에서 내려 비실비실 웃으며 다가왔다. “ 돈은 넉넉하게 준비해왔지? ” 깐죽거리며 약을 올리는 강후를 노려보고 상훈은 운전석에서 내리는 현조를 향해 말했다. “ 무슨 여자가 운전을 그렇게 골때리게하냐? ” 현조는 대답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박강후. 너 오래 살려면 어지간하면 쟤한테 운전대 맡기지 마라. 몽달귀신되기 딱이더라. ” 툴툴거리는 상훈을 끌고 그들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 이건 사기다. 난 네가 운전하는줄 알았잖아. ” 상훈이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강후를 쳐다보았다. “ 아까 휴게소 들어갔다가 바꿨지. 현조가 고속도로에서 운전해 보고 싶다고 하길래. 뭐 상관있냐? 내가 운전한거나 현조가 운전한거나... 어차피 진건 마찬가지 아냐? ” “ 우씨- ” “ 그래도 그렇지, 네 차 값의 절반도 안되는 장난감같은 차를 상대로 그것도 못 이기냐? ” “ 그러게 말이예요. 운전 잘한다고 하더니 그거 다 뻥이지 싶어요. ” “ 내가 알기로는 그 차 최고 속도가 200이 넘지 아마? ” 내내 툴툴거리는 상훈을 세 명이 번갈아 가며 놀리자 상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 다시 해. 이번에는 절대 안져. ” “ 됐다. 남자가 쪼잔하게... ” 상처난 자존심에 소금까지 뿌리는 강후를 한껏 노려보았지만 강후는 손가락으로 현조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그의 살벌한 눈길을 피해버렸다. “ 나도 다음번에는 스포츠카로 바꿔야지. ” 끝내 미련을 못 버리는 상훈을 놀려가며 그들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경주톨게이트에 내리자 포항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국도로 50분 정도를 더 달리자 호미곶 해맞이 공원이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려 짭잘한 바다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 좋다. 바다는 오랜간만이네. ” “ 그러게. 호텔예약은 해놨다고 했지? ” “ 그래. 별 다섯개짜리 호텔은 아니지만 자기네 말로는 특급호텔이라더라. 뭐 가봐야 알겠지만. ” 상훈의 시큰둥한 대답에 강후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현조한테 진게 아직까지 불만인 모양이다. “ 그럼 일단 호텔가서 체크인하고 점심 먹으러 나오자. 호텔 레스토랑 음식은 다들 싫지? ” “ 여기까지 와서 무슨... 해물탕이나 회 먹으러 가자. ”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상훈이 예약해 놓았다는 호텔에 도착했다. 미남과 현조가 같은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상훈과 강후는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 같이 여행오는게 좋은 생각은 아니었어. ” “ 그렇지. 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모른 척하고 호빵 납치해서 튀어버릴 걸. ” “ 동감이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은 하루 묵고나서 다시 이야기를 해 보자고. ” “ 오케이. ” 그들은 현조와 미남이 들어간 방 바로 옆 방으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네 사람은 바닷가 근처의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회를 주문했다. 잠시 후 싱싱한 회가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현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회를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현조는 젓가락으로 회를 쿡쿡 찔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 왜 안 먹어? ”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묻자 미남이 대신 대답을 했다. “ 얘 회 잘 못 먹어요. 몰랐어요? ” “ 그래요? 그럼 말을 하지. 다른거 시켜줘? 해물탕이 되려나? ” “ 아냐. 그냥 매운탕 먹지 뭐. 원래 그거 주는거 아냐? ” “ 그래도 그거가지고 되냐? ” “ 괜찮아. 아줌마- 여기 공기밥하구요, 매운탕 주세요. ” 조금 있자 두꺼운 뚝배기에 보글거리는 매운탕이 현조 앞에 놓여졌다. 숟가락으로 매운탕 국물을 떠 먹으며 현조가 미소를 지었다. “ 맛있네. ” “ 괜찮아? 진짜 다른거 안 시켜도 돼? ” 내내 신경이 쓰이는 듯 자꾸만 묻는 강후를 보며 상훈이 기어이 한 소리를 했다. “ 야. 적당히 해라. 참 볼썽사나워서... ” “ 냅 둬. 보기 좋기만 하구만. ” 미남이 퉁퉁거리며 말하자 상훈이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 그래? 그럼 호빵. 아- 해봐. 이 오빠가 널 위해 준비했다. ” 상훈이 회를 초장에 꾹 찍어서 내밀자 미남이 헤헤거리며 받아먹었다. 주거니 받거니 두 접시나 되는 회를 다 먹고 그들은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이제 곧 해가 질 모양인지 바닷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두 몰려온 듯 각 지역의 번호판을 단 차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 엄청 복잡해지겠네. ” “ 그렇지. 해돋이 보러 많이들 올거야. ” “ 어떻게 할래? 그냥 호텔들어갔다 내일 아침에 나오는게 낫지 않을까? 괜히 복잡한데 돌아다녀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않겠냐? ” 상훈의 말에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물었다. “ 현조야 그렇게 할래? ” “ 응. 그러지 뭐. ” 다시 호텔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하고 상훈과 강후가 앞장 서서 걸어가자 미남과 현조는 조금 뒤처져서 걷기 시작했다. “ 보기 좋다. ” “ 응? ” “ 니들 보기 좋다고. 강후씨랑 너. ” “ 아... ” 현조가 피식 웃자 미남이 현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너 이렇게 편해 보이는거 7년만에 처음이야. 알지? ” “ 응. ” “ 강후씨한테 잘해라. 너 많이 아끼는것 같더라. ” “ 후후후... 그래야지. ” 상훈과 장난을 치면서 걸어가는 강후를 보며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좋아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 어느때보다 행복하게 느껴졌다. 현조가 미남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 참 행복하네. 그지? ” 현조의 말에 미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게. 점점 추워진다. 얼른 들어가자. ” “ 그래. ”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아이처럼 앞 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34 룸서비스로 시킨 저녁을 먹으며 강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긴 머리를 틀어올리고 목이 깊이 파인 셔츠를 입은 현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 내일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거야? ” 미남의 물음에 상훈이 강후를 바라보았다. “ 한 6시쯤 일어나면 되려나? ” “ 글쎄. 그 정도면 되지 않나? 일출시간이 7시 정도 아냐? ” “ 그럴걸? 그럼 밤새 뭐하고 노냐. 이제 겨우 여덟시인데. ” “ 우리 나이트클럽갈까? ” 미남이 불쑥 끼어들어 의견을 내놓자 상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럴까? 하긴 요근래에는 클럽에도 못 가봤네. 누구 덕분에. ” 상훈이 미남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 다들 피곤하지도 않아? ” 현조가 심드렁하게 묻자 상훈과 미남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절대 안 피곤해. ” “ 나도. ” “ 그럼 잠깐 내려갔다 오자. ” 강후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상훈과 미남이 잽싸게 옷을 챙겨입었다. “ 귀찮은데……. ”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밍그적거리는 현조를 보며 강후가 그녀의 코트를 건넸다. “ 오래 안 있을거야. 괜찮지? ” “ 알았어. ” 신나게 놀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있는 미남과 상훈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쩜 둘이 저렇게 꿍짝이 잘 맞는지……. 네 사람은 이제 막 영업을 개시한 클럽에 들어가서 스테이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업을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스테이지에는 젊은 남녀들이 꽤나 많이 들어차 있었다. “ 시설이 괜찮네. ” 내부를 둘러보며 자체 평가를 하는 강후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훈과 미남은 테이블에 놓여진 맥주를 마시며 음악에 따라 몸을 흔들고 있었다. 조금 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테이지로 나가버렸다. 테이블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강후가 현조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주무르며 물었다. “ 많이 피곤해? ” “ 아니. 별로. ” “ 조금만 있다 올라가자. ” “ 어. ” 미남이 스테이지에서 현조를 향해 손짓을 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온갖 야시시한 포즈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강후와 현조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 둘이 참 잘 어울려. ” “ 그러게. ” “ 현조야. ” “ 응? ” “ 고맙다. ” “ 뜬금없이 뭐가 고마워? ” “ 그냥.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 “ 실없기는……. ” 현조가 쑥스럽게 웃으며 강후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즐거운 척하고 있지만 강후는 생각이 많았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준희 역시 서울로 돌아와 있을 것이다. 준희와 정리를 하기 위해 거쳐야 할 수많은 난관들이 벌써부터 머리를 아프게 했다. 끝까지 현조에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준희 일이라면 두 손 걷어부치고 뛰어들 효원의 어머니도 그에게는 난해한 해결과제였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어? ” 시끄러운 음악소리때문에 현조가 목청을 한껏 높여서 말을 했다. “ 별거 아냐. ” 강후가 웃으며 말하자 현조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다시 스테이지로 시선을 옮겨버렸다. 시끄러운 음악이 차분한 블루스 음악으로 바뀌자 미남과 상훈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 재미없어? ” 상훈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시끄럽기만 하고 별로 재미도 없다. 솔직히. ” “ 그래? 그럼 올라가자. ” “ 벌써? ” 미남이 영 아쉬운듯 스테이지를 바라보았다. “ 올라가서 거기서 술마시며 놀지 뭐. ” “ 그러던지. ” 시끄러운 클럽에서 빠져나오자 그나마 욱씬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것 같았다. 네 사람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왔다. 미남과 현조가 묵게 될 방에 자리를 잡은 네 사람은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그 해의 마지막 날을 흘려보냈다. ================================================================================== 사이드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진동을 하자 현조는 잠에 취한 채 더듬거리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네. ” [ 자고 있었구나. 지금 좀 나올래? ] “ 응? 몇신데? ” [ 네 시 조금 넘었어. ] “ 벌써 일어난 거야? ” [ 음.] “ 알았어. 잠깐만. ” 현조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열 두시정도 되었을때 강후와 상훈이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고, 그 다음엔 미남과 한 시간 정도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고작 3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거울을 보니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현조는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미남을 힐끗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옷 따뜻하게 챙겨 입었어? ”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후가 현조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물었다. “ 응. 그나저나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해 뜰려면 멀었잖아. ” “ 아-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많이 피곤해? ” “ 아냐. 별로. ” “ 차 키 가지고 나왔어? ” “ 응. 어디 멀리 나가게? ” “ 바닷가 가자. ” “ 그럼 상훈씨랑 미남이는? ” “ 나중에 따라오라고 메모 남겨놨어. 일어나면 오겠지. ” “ 그래. ” 강후가 손을 잡아끌자 현조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호텔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바닷가에 도착하자 벌써부터 해돋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의 차가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었다. “ 다들 부지런하네. ” “ 그러게. 커피 마실래? ” “ 어. ” 강후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내밀자 현조는 뜨거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커피의 따뜻한 온기가 어느때보다도 더 반갑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진한 커피를 마시며 아직 어둠에 휩싸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 잠은 좀 잔거야? 아니면 아예 밤을 샌거야? ” “ 그냥 잠이 안 오더라구. 상훈이 녀석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 “ 그래? 피곤해서 어쩌냐? ” “ 괜찮아. 그보다 너 피곤한거 아냐? ” “ 난 좀 잤어. 괜찮아. ” 한참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시던 강후가 현조를 바라보았다. “ 현조야. ” “ 응? ” “ 만약에 나중에 힘든 일이 있어도 너 나 믿고 따라올 수 있지? ” “ .... ” 현조는 대답없이 강후를 바라보았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강후의 모습을 보자 괜히 기분이 우울해져버렸다. “ 너 무슨 문제있지? 요근래 너 계속 이상해. 가끔씩 멍해 있는거 같기도 하고. ” “ 아냐. 그냥…… 난 네가 불안하다.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릴 것 같아서 많이 불안해. ” “ 그런 말이 어딨어? 가긴 어딜 간다고. ” “ 그냥……그냥 그래. ” “ 걱정 하지마. 이유없이 떠나지는 않을거야. ” “ 어떤 경우에라도 나한테서 떠나지는 마라. 알았지? ” “ 후후후... 뭐야 박강후. 약한 모습 자꾸 보일래? 왜 그래 도대체? ” 강후는 대답없이 남은 커피를 마셨다. 자꾸만 가슴속에서 불안함이 치솟아 올랐다. 가까이 두기만 하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현조가 옆에 있어도 늘 불안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현조가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버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너 그 약혼녀랑 아직 못 끝낸거야? ” 조심스러운 현조의 말에 강후가 생각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아니. 끝냈어. 그건 걱정하지마. ” 현조를 안심시키기위해 하는 거짓말이었지만 그는 또 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현조를 상대로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거짓말만 늘어놓게 되었다. “ 나 너 안 떠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현조가 안심하라는 듯이 손을 들어 강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비누향이 묻어나는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현조를 끌어당겨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키스를 했다. 조금만 힘을 줘도 깨져버릴 유리세공품을 대하는 것처럼 그는 현조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기나긴 키스를 끝내고 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나 포기하면 안돼. 알았지? ” “ 응. 그런다고 했잖아. ” “ 잊지마. 지금 나한테 약속한거. 절대 잊지마. ” “ 알았어. ” 현조가 어린애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왜 이렇게 강후가 불안해 하는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강후의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다독여주고 싶었다. “ 우리 내일 돌아가는 거야? ” 현조가 강후의 품을 벗어나며 물었다. “ 아니. 오늘 갈거야. ” “ 그렇게 빨리? ” “ 응. 가다가 어디 좀 들릴 생각이거든. ” “ 어딜? ” “ 있어. 비밀. ” 뭔가 음모를 꾸미는 듯 강후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다섯시가 넘어서자 서서히 사람들이 바닷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조와 강후는 차 안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걸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동안 가족이야기며 친구들 이야기를하며 웃는데, 강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후가 액정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 상훈이네. 지금 일어났나보다. ” “ 그래? 얼른 오라고 해. ” 강후가 폴더를 열자 전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한 상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디야? ] “ 바닷가. 미남씨 데리고 나와라. ” [ 도대체 언제 나간거야? ] “ 조금 됐어. 얼른 와. ” [ 그래. ] 전화를 끊고 강후는 현조의 손을 잡았다. “ 너랑 같이 일년을 시작하네. ” “ 그러게.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박강후. ” “ 너도. ” 새삼스레 새해 인사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은 벗어두었던 두꺼운 코트를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 아휴. 꽤 춥네. ” 현조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말하자 강후가 그녀를 바싹 끌어당겨 안았다. 현조는 강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상훈과 미남이 도착하고 그들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붉은 태양을 맞았다. ================================================================================== 일출을 보고 온 뒤 그들은 호텔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객실로 돌아오자 마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 왜 벌써 돌아가자는 거야? ” “ 몰라. 다른 계획이 있다네. ” “ 그래? ” 두 남자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출도 구경했고, 왠지 올 한 해는 좋은 일만 생길 것같아 현조는 기분이 좋았다. 미남과 현조가 가방을 챙겨서 문을 나섰을 때 상훈과 강후는 이미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디로 갈거야? ” 현조의 물음에 강후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비밀. ” 주차장으로 내려와 상훈과 미남이 먼저 출발을 하고나자 강후가 현조를 보며 물었다. “ 어디로 갈래? ” “ 응? 계획이 있다며? ” 멍해져서 되묻는 그녀를 보며 강후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 계획이야 벌써 성공했지. 너랑 나 둘만 있는거. ” “ 뭐야 그럼. 따로 다니기로 한거야? ” “ 응. 상훈이랑 의견통일을 봤지. ” “ 참 대단한 계획이다. ” 현조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 일단 출발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어디로 갈건지. ” “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 어차피 이렇게 된거 현조도 강후와 둘만의 여행을 즐겨볼 작정이었다. 내내 서울에서만 데이트를 했으니 같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포항을 출발해 다시 경주로 들어와서 그들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느긋하게 경주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 여기서 하루 묵고 갈까? 생각보다 볼게 많네. ” “ 그러던지. 근데 예약을 안해서 방이 있으려나? ” “ 글쎄. 일단 방부터 알아보자. ” 시내 중심가에 들어서자 ○○호텔이라고 적힌 큰 건물이 눈에 띄였다. 다행히 빈 방이 있어 체크인을 하고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 어디 가볼까? ” “ 글쎄. 수학여행때 와보고 경주는 처음이라서. ” “ 나도 그렇다. 그냥 차타고 돌아다녀 보자.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까. ” 그들은 경주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구경을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 저녁은 여기 레스토랑에서 먹자. ” “ 음. ” 객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그들은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와인을 마시며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보다. 그저 마주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이런 기분때문에 모두들 사랑이라는 것에 목을 매는 모양이다. 와인잔을 내려놓는 현조의 손을 강후가 가만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현조야. ” “ 응? ” “ 사랑한다. ” “ 후후후... 나도. ”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는 현조를 보자 가슴이 아려왔다. 저 미소를 그대로 지켜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 거쳐야 할 난관이 너무나 많았다. 그걸 생각하자 그냥 속 편하게 마주보며 웃어줄 수가 없었다. “ 강후야. 전화 오나보다. ” 현조가 강후가 벗어둔 코트를 가리켰다. 휴대폰에서 불이 반짝이며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강후는 휴대폰을 꺼내서 액정을 확인했다. 처음보는 전화번호가 찍혀있어 받을까 그냥 모른 척 끊어버릴까 고민하다 혹시나 급한 전화일까 싶어 그는 폴더를 열었다. “ 네.박강후입니다. ” [ 오빠. 나 준희야. ] “ 어. 잠시만. ” 강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왜? ” “ 나 잠깐 전화 좀 받고올께. 잠깐이면 돼. 사업얘기라서. ” “ 그래? 알았어. ” 강후는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서 다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 말해. ” [ 오빠 어디야? 서울 아니지? ] “ 그건 알거 없고. 무슨 일이야? ” [ 나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중이야. 내일 오빠 만났으면 하는데. ] “ 내일은 안되고, 모레 만나자. 나 내일 저녁때는 되야 서울 도착할거야. ” [ 그래? 친구들이랑 여행이라도 간거야? ] “ 음. 모레 보자. ” [ 알았어. 약속시간하고 장소는 나중에 내가 정해서 연락할게.] “ 그래. ” 전화를 끊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와의 피곤한 전쟁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강후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레가 되면 그는 더이상 현조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칼로 잘라내듯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더 이상 현조를 속이면서 가책을 느끼지는 않아도 될터였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다 말고 강후는 멍하니 현조를 바라보았다. 와인을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심장에 와 박혔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퍼져나가면서 심장이 쿡쿡 쑤시듯이 아파왔다. 넋이 나간 사람마냥 그는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그를 찾는 듯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현조와 눈이 딱 마주쳤다. 현조는 멍청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후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억눌려있던 그의 심장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현조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심장이 점점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 멍하니 서서 뭐하고 있었어? ” 자리에 앉는 강후를 보며 현조가 물었다. “ 음…… 너 보고 있었어. 근데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더라고. 먹먹해지는게.”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냐. 그냥 잠시 그랬어. 널 보는 순간 심장이 딱 멈춰버린 것처럼 그런 기분이 들더라. ” “ 뭐야 그게. ” 현조가 난감하다는 듯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강후는 말없이 현조의 손을 잡아당겨 꼭 잡았다. 금세 어디로 사라져 버릴까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만 올라가자. ” “ 응? ” “ 올라가자고. ” “ 벌써? ” “ 어. ” 강후가 갑자기 서두르자 현조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객실로 들어서서 코트를 벗는 현조를 강후가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 강후야. ” “ 그냥 잠시만 이대로 있자. 네가 내 옆에 있다는거 확인하고 싶어. ” “ 너 오늘 진짜 이상해. ” “ 후후후... ”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웃음으로 가리고 그는 현조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장난치듯 살짝살짝 하얀 목을 깨물던 강후가 뭔가가 생각난 듯 갑자를 현조를 돌려세웠다. “ 나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쉬고 있어. ” “ 어딜? ” “ 뭐 좀 사가지고 올께. ” “ 뭘? ” “ 있어. 오래 안 걸려. 쉬고 있어. ” “ 어. ” 강후가 다시 코트를 입고 나가버리자 현조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그를 기다렸다. 금방 올거라던 강후는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현조는 하품을 하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 돌아오면 깨우겠지. ’ 그녀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강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조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는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살금살금 걸어서 현조에게로 다가갔다. 피곤했었는지 현조는 그가 돌아온지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강후는 옷을 벗어놓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가지고 온 쇼핑백에서 벨벳으로 된 묵직한 케이스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열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다이아몬드가 박힌 두 개의 반지가 영롱한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개의 반지를 꺼내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고 다른 한 개를 꺼내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강후는 자고있는 현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프로포즈할려고 했더니 벌써 잠들어 버렸네. 반지 끼워서 어디 도망 못가게 잡아둘려고 했는데……. ”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잠든 현조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 지현조 나랑 결혼하자. 너 행복하게 해줄게. ”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현조가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현조의 등을 쓸어내렸다. 지금이라도 현조를 깨워서 그가 얼마나 현조를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간절하게 그녀를 원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대신 현조가 편하게 잠들 수 있게 그녀의 곁에 몸을 누이고 현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샴푸냄새와 옅은 비누향을 위안삼아 오지않는 잠을 애써 청했다. ================================================================================== [ 따르릉- 따르릉- ] 욕실 청소를 하고 있던 현조는 전화가 울리자 들고 있던 청소솔을 내려놓고 쪼르르 달려가 급하게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 [ 나야. ] “ 어이- 친구. 서울이야? ” [ 그래. 조금 전에 도착했다. ] “ 난 낮에 도착했는데. 참 생일 축하한다. ” [ 고맙다. 흐흐흐... 그나저나 잘 놀다 왔어? ] “ 응. 너희는? ” [ 우리도 뭐 그럭저럭. ] 미남이 신이나서 상훈과의 일을 늘어놓는 걸 들으며 현조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물기 묻은 손을 닦으려던 현조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어딜 갔다 온다며 나갔던 강후가 그녀가 잠든 사이에 몰래 끼워준 것이었다. 반지를 선물하길래 프로포즈라도 할 줄 알았더니 그는 그냥 선물이라고만 말했다. 언제쯤 강후가 프로포즈를 해올까? [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 “ 응? ” [ 이런...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 “ 미안. 뭐라고 했는데? ” [ 내일 나 따라서 어디 좀 가자고. ] “ 어딜? ” [ 새로 생긴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 분위기가 죽이게 좋단다. 주인이 프랑스에서 정통 요리 배워서 들어왔다는데 다들 괜찮다고 하더라구. 같이 가보자. ] “ 알았어. 어디 있는거야? ” [ 압구정 쪽에 있는데, 레스토랑 이름이 <다비드> 야. 찾기 쉬울거야. 레스토랑 입구에서 만나자. ] “ 알았어. 몇 시에 만날래? ” [ 일곱시 쯤. 내가 예약해 놓을께. ] “ 오케이. 내일 보자. ” [ 그래. ] 전화를 끊고 나서 현조는 다시 한번 반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청소를 마저하기 위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로 걸어갔다. ================================================================================= “ 사장님 전화 왔습니다. ”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강후는 땀을 닦아내며 재룡이 내미는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 박강후 입니다. ” [ 나야 오빠. ] “ 그래. ” [ 내일 만나기로 한거 잊지 않았지? ] “ 안 잊었어. 어디서 만날래? ” [ 압구정에 < 다비드 > 라는 레스토랑이 있어. 거기서 만나자. ] “ 몇 시? ” [ 일곱시 삼십분쯤. ] “ 알았다. 내일 보자. ” 전화를 끊고 나서 강후는 다시 런닝머신을 작동시켰다. 잔인한 운명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모든 것이 잘될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35 “ 여기가 그렇게 괜찮아? ” “ 어. 생긴지 얼마 안됐는데, 주인여자가 르꼬르동블루에 유학갔다와서 차린거래. 나도 다른 영양사들한테서 소문만 듣다 오늘에서야 와본다. 인테리어랑 테이블 데코레이션이 예술이라고 소문이 파다하다네. ” 한껏 들뜬 미남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유니폼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현조와 미남은 자리에 앉아서도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 좋다. 분위기도 있고…….” “ 그렇지? 언제 강후씨랑 같이 와라. ” “ 그러게. ” 주문을 하고 애피타이저로 나온 스프를 먹는데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일품이었다. “ 음- 스프 맛있다. ” “ 그지그지? 오기 잘 했지? ” 미남이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마냥 신이 나서 떠들었다. 미소를 지으며 남은 스프를 먹는데 입구 쪽에 눈에 익은 사람들이 들어서는게 보였다. “ 어? ” “ 왜? ” 현조가 손가락으로 레스토랑 입구를 가리키자 미남이 그 쪽을 바라보았다. “ 정실장 아니니? 그리고 저 사람은 정실장 약혼녀고, 저 여자는 또 누구냐? 우씨- 이쁘네. ” “ 효원이 사촌여동생인가 보다. 귀국한다는 소리 전에 들었거든. ” “ 그래? 가족 모임인가 보네. ” “ 글쎄.” 효원 일행이 자신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현조는 다시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효원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게된게 다행스러웠다. 강후가 효원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는지도 확실치 않았고, 또 갑작스럽게 회사를 그만둔 터라 효원을 만나기가 영 껄끄러웠다. “ 저기 강후씨 아냐? ” 갑작스러운 미남의 말에 현조는 다시 입구쪽을 쳐다보았다. “ 여긴 무슨일로 왔지? ” “ 너 여기 온다고 말했어? ” “ 아니. ” 의아해하며 강후를 지켜보는데 강후가 효원네 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는게 보였다. “ 정실장 만나러 왔나보네. 근데 가족 모임같은데 끼여도 되나? ” 미남이 효원의 테이블 쪽을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강후가 모델처럼 생긴 여자 옆에 자리를 잡고앉자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며 웃는게 보였다. “ 분위기가 이상하네. ” 미남이 뭔가 석연찮은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 신경쓰지 마. 집안끼리 아는 사이잖아. 그래서 그런거겠지.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조 역시 불안한 눈빛으로 그 쪽 테이블을 힐끔거릴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주문했던 스테이크가 나왔지만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건성으로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미남이 자꾸만 자신의 눈치를 보는것 같아 현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냥 아는 사이라서 같이 저녁먹는 거겠지. 신경쓰지 마. ” “ 그렇겠지? ” “ 그래. ” 미남을 안심시키고 나서 물을 마시며 입가심을 하는데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현조씨? ”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자 경주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 아- 경주씨. 오랜만이예요. ” “ 그러게요. 회사 그만 뒀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 “ 그렇게 됐어요. ” “ 효원이 한참 동안 못봤죠? 잘됐다. 잠깐 나랑 같이 가요. ”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경주가 현조의 손을 잡고는 자신들의 테이블로 이끌었다. “ 아니. 저 경주씨…… 난 그냥……. ” 현조가 당황해서 손을 빼려고 하는데 경주가 큰 소리로 효원을 불렀다. 식사를 하고 있던 효원은 경주와 함께 자신들의 테이블로 다가오는 현조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강후 역시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효원아. 현조씨가 저 쪽에 있길래 내가 모시고 왔어. 반갑지? ” 경주가 자랑스럽게 떠벌리자 효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준희와 강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오랜만이다. ” 현조가 효원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 그래. 친구랑 온거야? ” “ 응. 미남이랑. ” “ 그럼 우리 나중에 연락하자. 미남이 기다리겠다. ” “ 어? 아- 그래. ” 효원이 이상스레 긴장을 하며 자신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 현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른 척 하고 그냥 가기가 뭐해서 강후에게 막 인사를 하려는데 경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현조씨. 이쪽은 효원이 사촌여동생 준희고, 이 사람은 준희 약혼자인 박강후씨. 잘 생겼지? ” “ 경주야. ” 효원이 다급하게 경주의 말을 막았지만 이미 현조는 경주의 말을 모두 들어버린 후였다. 따뜻하게 강후를 바라보던 현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 준희씨…… 약혼자? ” 현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효원을 쳐다보자 그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강후를 바라보았다. “ 안녕하세요. 효원오빠가 매일 친구자랑을 하길래 어떤 분인지 궁금했었는데, 와 멋있는 분이네요. 전 정준희예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준희가 현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조는 멍하니 준희의 손을 내려다 보다 손을 마주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준희의 손이 닿자 몸 속의 피가 그대로 굳어버리는것 같았다. “ 현조야. 그게... ” 효원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현조는 그를 바라보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 난 그만 가볼께……가족 모임인 것 같은데…… 내가 있으면 방해되잖아. 가볼께. ” “ 현조야. ” 충격으로 멍하니 서 있던 강후가 현조를 불러세웠지만 그녀는 그냥 뒤돌아서서 미남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와 버렸다. 누가 뒤통수를 쇠망치로 친 것처럼 머릿속이 둥둥 울렸다. 미남이 불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걸 보자 눈 앞이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강후에 대한 심한 배신감에 그녀는 자신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조가 불안스럽게 걸어오자 미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급하게 다가왔다. “ 현조야. ” “ 미남아. 나 좀 잡아줘. ” 현조가 미남에게 몸을 기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일이야? 현조야. 정신 좀 차려. ” 미남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자에 놓아두었던 가방과 코트를 집어드는 현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미남아 . 나가자. ” “ 현조야 괜찮아? ” 밀랍인형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현조를 보며 미남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현조는 계속 나가고 싶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 나 나가고 싶어. 미남아. ” “ 알았어. 나가자. ” 미남은 효원의 테이블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강후와 효원이 불안스레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나가자. ” 심한 충격을 받은 듯 현조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미남에게 몸을 기대왔다. 미남은 뭔지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현조를 부축해서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 강후는 레스토랑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준희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그는 현조가 준 목걸이가 행운의 부적이 되길 바라며 옷 속에 감추어져 있는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비록 현조와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목걸이를 볼때마다 현조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스토랑에 들어서 준희를 찾기위해 두리번거리던 그는 효원과 경주도 같이 자리를 한걸 보고는 인상이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그들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 오빠 왔어? ” 강후가 다가가자 준희와 경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왔냐? ” 효원이 떨떠름하게 강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 응. 근데 같이 만나기로 했던거야? ” “ 내가 같이 보자고 했어. 경주언니도 보고 싶고 해서. ” 준희가 강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앉아라. ” 강후가 준희의 옆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네 사람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는 그 간의 소식들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희와 경주가 열심히 수다를 떠는 것에 비해 강후와 효원은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한창 신이나서 이야기를 주도하던 경주가 화장실을 가는 듯 자리를 비우고 나자 효원과 강후는 서로를 외면한 채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했다. “ 두 사람 싸웠어? ” 둘의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준희가 효원과 강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 싸우기는... ” “ 아냐. ” 강후와 효원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때 경주가 큰 목소리로 효원을 불렀다. 무심코 경주를 바라보던 효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치자 강후는 효원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 효원아. 현조씨가 저 쪽에 있길래 내가 모시고 왔어. 반갑지? ” 효원과 현조가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며 강후는 절망적인 신음소리를 삼켰다. 제발 준희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런 강후의 바람은 경주의 말 한 마디에 완전히 깨어져버렸다. “ 현조씨. 이쪽은 효원이 사촌여동생 준희고, 이 사람은 준희 약혼자인 박강후씨. 잘 생겼지? ” 자신을 바라보는 현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며 강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충격으로 커졌던 눈이 점점 배신감으로 짙어지다 결국은 깊은 절망감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강후는 자신의 부주의를 저주했다. 이런 식으로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결코 이런 식으로 현조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다. 당황한 효원이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강후는 현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현조는 그의 절박한 눈길을 외면한 채 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희와 악수를 하는 현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난 그만 가볼께……가족 모임인 것 같은데…… 내가 있으면 방해되잖아. 가볼께. ” 현조가 돌아서자 강후는 이대로 보내서는 안될 것 같은 예감에 현조를 쫓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효원이 재빨리 강후의 손을 잡아세웠다. “ 강후야. 그냥 놔둬. 나중에 얘기해. ” “ 놔. ” “ 강후야. ” 강후가 효원의 손을 뿌리치려 하자 효원이 강후의 손을 더 꽉 움켜잡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지금 니가 현조 따라가면 현조만 더 곤란해져. 나중에 두 사람이 조용히 얘기해. 내가 나가볼께.” 미남이 이 쪽을 흘낏 쳐다보더니 현조를 부축해서 나가버렸다. 강후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린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하며 절망스럽게 현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36 효원은 레스토랑 앞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세 쫓아나온 것 같은데 현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리 경주에게 현조와 강후의 관계를 말해주지 못한게 이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효원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강후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누가 툭 치기만 해도 꼭 폭발할 것처럼 그의 얼굴은 굳어지다 못해 아예 얼어버린 듯했다. “ 효원아. 무슨 일이야? 현조씨 왜 그래? ” 경주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효원은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후가 까칠한 음성으로 말했다. “ 두 사람 자리 좀 피해줬으면 하는데. ” “ 강후야. ” “ 시간없어. ” 강후가 날카롭게 효원을 노려보았다. “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까 그 현조란 여자하고 강후오빠랑 무슨 관련이 있는거야? ” “ 그게 준희야.” 효원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해주려하자 강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준희는 나 따라오고 효원이는 나중에 보자. ” 강후가 성큼성큼 걸어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준희는 영문도 모른 채 효원과 경주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 핸드백을 챙겨들고 강후를 쫓아나갔다. “ 말 좀 해봐. 정말 강후씨하고 현조씨 뭔가 있는거야? ” 경주가 효원을 다그쳤다. “ 그래. 두 사람 서로 사랑하고 있어. ” “ 뭐? ” 효원의 말에 경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준희는 어떡하라고. ” “ ……. ” “ 넌 알고 있었어?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인거? ” “ 그래. ” “ 말도 안돼. 그럼 말렸어야지. 그리고 현조씨도 웃긴다. 어떻게 강후씨를……. ” “ 함부로 말하지 마. 현조 몰랐어. 강후가 준희하고 연관된 사람이란거 현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거다. ” “ 그게 말이 돼? 설사 몰랐다고 해도 효원이 네가 이야기 해 줬어야지. ” 효원은 흥분해서 얼굴까지 붉어진 경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 뭘 알려줘? 강후가 준희하고 결혼할 사이니까 니가 알아서 물러나라고? 두 사람 약혼 했었니? 아니면 강후가 준희한테 책임 질 행동이라도 했어? 아니잖아. 그리고 설사 그랬다고 해도 살다보면 생각이 바뀔수도 있는거야. 그런데 뭐라고 말을 해. ” “ 그게 아니잖아. 효상오빠 일도 그렇고. ” “ 너도 그러니? 너도 효상이 형때문에 현조가 평생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 “ 내 말은 ……. ” “ 그만두자.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야. 우리가 뭐라고 떠든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준희하고 강후의 문제야. 둘이서 알아서 결론내라고 할 수 밖에. ” “ 준희는 네 사촌동생이야.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있어? ” “ 현조는 나한테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야.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근데 어떻게 포기하라고 하니? 내 사촌동생이 목매고 있는 남자니까 너 물러서라. 그렇게 말해?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아닌가? ” 반쯤은 빈정거리 듯이 말하는 효원을 보며 경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고 해도 사촌동생의 일에 나몰라라하는 효원이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만 일어나자. ” 효원은 멍해져서 앉아있는 경주를 외면하고 옷을 챙겨들고 먼저 일어나 버렸다. 경주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방을 챙겨들고 그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섰다. ================================================================================= 레스토랑 근처의 까페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강후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라이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 때려치우고 현조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준희와의 일부터 정리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더 이상 눈치보면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다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준희는 잔뜩 굳어진 강후의 얼굴을 보며 왠지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 준희야. ” “ 말해. ” “ 미안하다. ” “ 뭐가? ” 준희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묻자 강후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 나 사랑하는 여자 있어. ” “ ……. ” “ 너하고 내 인연 여기에서 끝내야 할것같다. ” “ 혹시 그 상대가 아까 그 현조라는 여자야? ” “ …….” 이번에는 강후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기막혀. 진짜 어이가 없다. 나한테 이러면 안되는거 아냐? 어떻게 그만두자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내가 그랬지. 내가 유학 가 있는 동안 오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던 상관않겠다고. 대신 내가 돌아오면 깨끗하게 정리하라고. 근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하- ” “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 너한테 책임질 행동한거 없어. 네가 기막히고 억울한 생각드는거 알겠는데, 그렇다고 말 함부로 하지는 마. ” “ 내 말이 기분나빠? 그럼 내 기분은 어떨거 같애? 몇년동안 철석같이 오빠하나만 보고 산 내 기분은 어떨거 같냐고? 책임질 행동? 육체적인 관계를 안했다고 오빠가 책임질 행동 한 거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는것 같은데, 그럼 그 여자한테는 책임질 행동을 한 모양이지? 왜 임신이라도 시켰어? 아니면 그 여자가 바람둥이 박강후를 꼼짝못하게 할 만큼 테크닉이 좋은가? ” “ 닥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는데 현조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너한테 그런 험한 소리 들을 이유없어. 내가 좋아해. 내가 사랑해서 싫다는거 억지로 내 옆에 잡아뒀어. 그러니까 욕을 하려면 날 욕해. ” “ 참 눈물난다. 오래살고 볼일이네. 잘나신 박강후씨께서 욕 먹는 것도 감수하고 한 여자를 감싸는 것도 보고. 하! 기가 막혀서. ” “ 계속 빈정댈거면 그만 일어나자. 난 너한테 할 말 다했고 욕을 하던지 악다구니를 쓰던지 다 받아줄테니까 너랑 내 관계 오늘로 깨끗이 정리하자. ” 강후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준희는 강후에 대한 배신감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 이런 식으로 끝이라는 말만하면 깨끗이 정리가 될거라고 생각했어? 난 그렇게 못해. 도대체 그 여자 어디가 얼마나 잘나서 오빠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그래서 내가 납득이 가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볼께.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통보만 받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어. 나도 나 싫다는 남자한테 목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오빠 그 뻔뻔스러운 태도가 기분 나빠서 도저히 그냥은 못 물러나겠어. ” “ 현조 찾아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 “ 안돼? 내가 찾아가서 머리끄댕이라도 잡고 늘어질까봐 겁나? ” “ 정준희. ” “ 걱정 마. 그런 무식한 짓은 안해. 하지만 그 여자도 멀쩡한 남의 남자 가로챈 대가는 치뤄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공평하지. ” “ 비약하지 마. 누가 남의 남자고 누가 누굴 가로채. 네 화풀이 내가 다 받아준다고 했어. 이 자리에서 무릎이라고 꿇을까? 그러면 나 편하게 놔줄래? ” “ 미쳤구나? 무릎을 꿇어? 내 앞에서? 그 짓거리를 해서라도 그 여자한테 가고 싶어? 박강후. 여자한테 미쳐도 더럽게 미쳤다. 아주. ” “ 너하고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없다. 어쨌건 너한테 미안하고 내가 죽일 놈이다. 미안하다. ” 강후는 준희가 뭐라고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페를 빠져나가버렸다. 준희는 입술을 깨물며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넘겼다. 도대체 그 여자 어디가 좋아서 자신을 쓰레기 버리듯이 하는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 그 여자 뭐에 눈이 멀어서 강후가 이런 짓까지 하는지……. 그녀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자존심이 상해서 온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찾는데 시야가 흐려져서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휴대폰을 찾아들고는 효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 네. ] “ 오빠 나야. 지금 집이야? ” [ 집 앞이야. 지금 들어갈려고 하는 참이다. ] “ 알았어. 내가 지금 갈께. ” [ 밖에서 만나자. ] “ 아니. 집에서 봐. 금방 갈께.” 준희는 전화를 끊고 까페를 나섰다. ================================================================================== [ 쾅쾅쾅- ]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현조는 거실 바닥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 위에 또 하나의 꽁초를 쌓으며 그녀는 비실비실 웃었다. “ 젠장. 오랫만에 피웠더니 머리만 아프네. ” 그러면서 그녀는 또 다시 한 개피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 지현조. 문 열어. 안에 있는거 알아. 빨리 열어. ” 한 시간째 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강후를 떠올리며 현조는 또 다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어쩌냐 박강후. 너 꼴보기 싫은데…… 이번에는 정말 너 보기 싫은데. ”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들이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현조는 거실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집에 들어온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빌어먹을. 무슨 놈의 만화주제가가 슬프고 지랄이야. ”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또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닦아내는 것도 지쳐서 팔을 들어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 현조야. 문 좀 열어. 제발 내 말 좀 들어. ”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더니 강후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내내 밖에서 뭐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현조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아무리 귀를 막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해도 강후의 목소리는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머릿속을 제멋대로 휘저어 놓았다. “ 부탁이다. 제발 내 말이라도 들어줘. ” 강후도 지쳐버렸는지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거짓말한거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현조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얼굴 안 보여주는 건 상관없는데, 내 말은 들어. 알았지? ” 현조는 비실비실 일어나서 오디오를 켜고는 소리를 한껏 높였다. 허스키한 토니블랙스턴의 목소리가 강후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집어삼켜버렸다. 그녀는 다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불렀다. “ Unbreak my heart Say you'll love me again undo this hurt you caused when you walked out the door And…….” 바깥에까지 노래소리가 들렸는지 강후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포기하고 가버린 모양이다. 현조는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서 피워물고는 중얼거렸다. “ 나쁜 놈. 나쁜 박강후. ”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바깥에서 요란한 기계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 고맙습니다. ” 강후가 아파트경비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고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오디오를 끄고 거실등을 켰다. 갑자기 거실이 환하게 밝아지자 현조는 인상을 쓰며 부시시 몸을 일으켜 소파에 주저앉았다. “ 내 말 들으라고 했지? 꼭 이렇게 무식한 방법까지 써서 내가 들어와야 되냐? ” “ 가버리라고 했잖아. 난 너한테 들어오라고 한 적 없어. ” “ 너 이것밖에 안돼? 지현조 정말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이야? ” “ 그래. 난 이것밖에 안돼. 몰랐어? 나 원래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인간이야. ” 강후가 현조를 사납게 일으켜세웠다. “ 못난 짓 좀 그만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니고 언제까지 피해자인 척 그렇게 살래? ” 갑작스러운 강후의 말에 현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 무슨 소리야? ” “ 몰라서 물어? 너랑 효상이 형 사이에 있었던 일. 나 다 알고 있어. ” 현조가 매몰차게 강후의 손을 뿌리쳤다. “ 알면서…… 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접근했던거야? ” “ 그래. 다 알고 있었어. 근데 그게 뭐? ” “ 그럼 내가 왜 너랑 헤어져야 하는지도 잘 알겠네. ” “ 준희가 효상이 형 사촌동생이라서? 고작 그 이유때문에? ” “ 고작?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마. 넌 아무렇지도 않은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야. 내려놓고 싶어도, 아니 다 잊어버리려고 죽을 애를 써도 이 가슴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떼어내지도 못하는 그런 상처라고. 근데 고작? ” “ 그래서 평생 죄인처럼 살고 싶어? 네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사고 냈어? 아니면 니가 멀쩡히 살아있는 효상이 형 오토바이 태워서 차 밑에 집어넣은거야? ” “ 그래. 내가 죽였어. 나 때문에 죽은거라고. 내가 MT만 가지 않았아도, 아니 집에 가겠다고 기차역까지 태워달라는 소리만 안 했어도 효상선배 아직까지 살아 있었을 거야. 근데 나더러 그걸 잊으라고? 내 눈 앞에서 선배가 죽었는데, 피투성이가 되서 내 눈 앞에서 죽어버렸는데, 그걸 잊으라고? ” 현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다 결국엔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리고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나도 잊고 싶어. 잊고 싶어서, 빌어먹을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죽을 애를 썼다고. 이제 살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네가 또 날 죄인으로 만들잖아. 왜 하필 선배 사촌동생이야? 왜 하필……. ” 현조가 강후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치다 결국엔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가슴에 맺힌게 얼마나 많았는지 현조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목을 놓아 울었다. 강후는 아무말없이 현조를 꼭 끌어안았다. 심하게 몸을 떨며 우는 현조가 너무 불쌍해서, 너무 가엾어서 그는 위로의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어 현조야. 내 탓이다. ” 더 이상 울 힘도 없는지 현조가 힘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강후는 맥없이 늘어진 현조를 안고 속으로 일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자기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 그만 돌아가. 나 혼자 있고 싶어. ” 울어서 쉬어버린 목소리로 현조가 힘들게 웅얼거렸다. “ 같이 있자. 너 혼자 두고 못 가.” “ 그냥 가. 지친다 나도. 너때문에 지치고, 나 때문에 지치고, 빌어먹을 현실때문에 지친다.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 ” 현조가 강후의 품을 벗어나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왜 좀더 조심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만 더 깊어졌다. “ 내가 어떻게 해야되니 현조야.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돌아봐 줄거니. ” 멍하니 침실문을 바라보며 강후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그럼 알고 있었단 말이야? ” “ 그래. ” “ 하! 오늘 진짜 여러번 놀라네. 현조란 여자가 강후오빠 만나는거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날 속여왔다는 거야? 오빠 너무한거 아니야? 나 오빠 동생이야. 그런데 어쩜 그런 일을 속일 수가 있어? ” 화가나서 파르르 떨고있는 준희를 보며 효원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솔직히 말려볼려고 했어. 나라고 그런 마음 없었겠니? 하지만 사람 인연이란거 누가 뜯어말린다고 어떻게 되는거 아니잖아. 처음에 강후가 장난삼아 시작했던 거 알고 경고했었어. 하지만 나중엔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라. 사랑하게 됐다고. 근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말려? ” “ 자격이 왜 없어? 내 사촌오빠잖아. 말렸어야지. 이런 웃기는 상황이 되기 전에 오빠가 말렸어야지. ” “ 큰소리 내지 마라. 어머니 집에 계셔. ” “ 어차피 알게 될거잖아. 내가 강후오빠하고 헤어진거 알면 큰엄마가 뭐라고 할것 같아? 그것도 오빠 친구라는 그 여자하고 바람이 나서 강후오빠가 돌아버렸다고 하면 큰엄마가 가만 있을것 같아? ” “ 무슨 말이야? 강후가 뭘 어째? ” 문이 벌컥 열리고 김여사가 놀란 얼굴로 들어섰다. “ 무슨 소리야? 효원이 친구라니? ” “ 아니예요 어머니.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른 말 못해? ” 효원이 대답을 망설이자 준희가 대신 대답을 했다. “ 현조인지 뭔지하는 오빠 친구때문에 강후오빠가 나하고 헤어지겠대요. ” “ 준희야. ” “ 뭐? 누구? 현조? ” 김여사는 너무 놀라서 말조차 잇지 못했다. “ 효원아 네가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된거야? 현조가 여기서 왜 튀어나와? ” “ 그런거 아니예요. 강후가 준희하고 결혼 못하겠다고 한거 현조하고 상관없어요. 그냥 준희는 동생처럼 생각이 되서 결혼할 수 없다고 한거예요. ” “ 오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현조라는 여자가 없었으면 강후오빠가 그런 생각 했겠어? 결국 그 여자때문에 강후오빠가 그런 생각을 한거 아니야? ” “ 그만해. ” “ 둘 다 조용히 해. 그리고 준희부터 차근차근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된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 김여사가 노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말하자 준희는 반쯤은 울먹이며 오늘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며 강후와 나눈 대화를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김여사의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 나쁜 년 같으니라고. 내 아들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 “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러시는거 이제 질렸어요. 모든 책임 현조한테 다 떠넘기고 어머니 내내 원망만 늘어놓고 주위사람 힘들게 하는거 이젠 지쳤다구요. 어머니 그 피해의식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지 아세요? ” “ 효원아. ” 김여사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효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효원은 속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아버렸다. “ 현조가 뭘 잘못했어요? 현조가 형 죽으라고 떠다밀었어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세요? 왜 그렇게 어머니 생각밖에 안하시냐구요? 죽은 자식 끌어안고 산 사람 지치게 하는거 그게 더한 죄악이란거 모르세요?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 제발요. ” “ 이……이……매정한……허억. ” 김여사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져버렸다. “ 어머니. ” “ 큰엄마. ” ================================================================================== 효원은 응급실 앞에 놓인 의자에서 불안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했다. 화가 치민 나머지 어머니에게 너무 심한 말을 내뱉아버렸다. 준희가 눈이 벌게져서 응급실문을 열고 나왔다. “ 어떠셔? ” “ 몰라. 이제 오빠 속이 시원해? 그렇게 막말해서 큰엄마 심장마비까지 일으키게 하고나니까 속이 시원하니? ” “ ……. ” “ 참 대단한 우정이다. 얼마나 대단한 우정이면 모자지간에 이런 사단까지 나게 만들어? 그 여자 참 대단하네. ” “ 현조얘기가 왜 또 튀어나와? ” “ 모두다 그 여자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 “ 함부로 갖다 붙이지 마. 뭐가 현조 탓이야? 어머니 저러시는거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야. ” “ 오빠. 오빠야 말로 정신차려. 큰엄마인들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러시겠어? 자식 앞서 보낸게 얼마나 큰 상처인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오빠 이런 식으로 막말하지 못해. ” “ 어머니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 진작에 끊어버렸어야 할 인연 죽자고 물고 늘어진거 어머니야. 누구를 탓해? ” “ 그만해. 효원이 너 고작 어머님한테 그런 소리밖에 못하니? ” 언제 왔는지 경주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 어떻게 알고 왔어? ” “ 집에 전화했더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어머님 병원 실려갔다고 말하더라. ” “ 그만 가봐. 너까지 올거 없어. ” “ 정효원. 너 너무 과한거 아니니? 왜 현조씨 일이라면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건데? 효상오빠 그렇게 된거 물론 현조씨 잘못만은 아니지. 하지만 도의적인 책임이란 것도 있어. 만약 현조씨 만나지 않았다면 효상오빠 지금 잘 살고 있을거고, 어머님도 저렇게 약해지시지 않으셨을거야. 그런 생각은 안해봤니? ” “ 너까지 왜 이래? 너 그동안 그런 생각하면서 현조 대했던거야? 내 앞에서는 현조 불쌍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죄인대하듯 그렇게 위선적으로 대했던거야? ” “ 그래. 난 속물근성이 있어서 그렇게 밖에 못해. 그러는 넌 정말 순수한 우정으로만 현조씨 대한거야? 그런거 아니잖아. ” “ 그만해. ” “ 왜? 찔리니? 이제껏 마음속으로 지현조란 여자 품고 있으면서 위선떤거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위선자가 아니라 네가 정말 위선자야. 알아? ” [ 짝- ] “ 오빠. ” 준희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효원이 경주의 뺨을 올려붙였다. 경주는 뺨을 감싸쥐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효원을 바라보았다. “ 너…… 지금 나 때렸니? ” “ 미안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지…….” 효원이 손을 뻗어 잡으려하자 경주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경주는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지 않는지 계속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휙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 오빠 따라가봐. 얼른. ” 준희가 옆에서 재촉을 했지만 효원은 그 자리에서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 효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절망적인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 [ 띵동- 띵동- ] 초인종이 울리자 강후는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 누구세요? ” “ 저 미남이예요. ” “ 아- 네. ” 강후가 문을 열어주자 미남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걸어들어왔다. “ 현조는요? ” “ 방에 있어요. ” “ 괜찮아요? ” “ 모르겠어요. 아까 많이 울었는데……. ” “ 어휴- ” 미남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현조의 방문을 두드렸다. “ 현조야. 나 좀 들어가도 되니? ”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동안 현조의 허락을 기다리던 미남이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 자니? 현조야. 자는거야? ”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안에서 잠궈버린 듯 열리지가 않았다. 미남이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 언제 들어갔어요? ” “ 한 시간 쯤 전에요. ” “ 그럼 자나보네요. 강후씨는 언제 온거예요? 바로 우리 따라 온거예요? ” “ 아뇨. 마무리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뒤에 따라왔어요. ” “ 일단 앉죠. 앉아서 이야기해요. 강후씨한테 물어볼 것도 있구요, 또 강후씨가 나한테 물어볼 것도 있을거구요. ” 미남이 식탁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후는 현조의 방문을 다시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 강후씨. 정실장 사촌동생하고 어떤 사이예요? ” “ 현조한테 못 들으셨어요? ” “ 아뇨. 현조 성격 아시잖아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지 입으로 그런 말 내뱉을 애 아니예요. 안 그래도 내일쯤 제가 강후씨한테 연락해볼 생각이었어요. 근데 마침 여기서 만나네요. ” “ 후우- ” “ 혹시 그 사촌동생하고 특별한 사이였어요? ”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남을 보자 뭐라고 대꾸를 해야할지 난감했다. “ 그게……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던 사이였어요. ” “ 그럼 무슨 정혼자 뭐 그런거였어요? ” “ 비슷해요. ” “ 하! ” 미남이 기가막히다는 듯이 강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 그럼 현조는 뭐였어요? 그냥 잠시 데리고 놀다 떼어버릴 작정이었어요? ” “ 미남씨. 그런거 아니예요. ” “ 그 말을 믿으라구요? 진짜 어이가 없네. 결혼할 여자까지 있는 주제에 현조한테 그렇게 목을 맸어요? 박강후씨.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보네요. 그 정도로 생각없는 사람인줄은 몰랐는데. ” “ 내가 죄인이란거 알겠는데, 미남씨만이라도 내 입장을 좀 이해해줘요. ” “ 무슨 입장요? 내가 보기엔 박강후씨 변명하려는 걸로 밖에 안보여요. ” “ 현조 속일 생각없었어요. 효상이 형 사고때문에 현조가 힘들어하는거 알고 포기하려고도 했었는데, 도저히 놔줄 수가 없어서 지금 이 지경까지 온거예요. ” “ 그 사고얘기 어떻게 알았어요? 정실장이 이야기했어요? ” “ 네. ” “ 애초에 현조한테 말을 했어야죠. ” “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내가 준희하고 연관된 사람이란거 알면 뒷걸음칠거 뻔하니까.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어서,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볼 작정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들통나리라고는……. ” 강후가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남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현조가 정말 그걸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일단 돌아가세요. 제가 현조한테 잘 얘기해 볼께요. 하지만 쉽지 않을거예요. ” “ 부탁할께요 미남씨. ” “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내가 현조 입장이었대도 강후씨 용서하기 쉽지 않을거예요. ” “ 알아요. 그래서 미남씨한테 부탁하는거예요. ” “ 후우- ” 강후를 보내고 나서 미남은 다시 현조의 방문을 두드렸다. “ 너 안자는거 알아. 강후씨 갔으니까 나와. ” 조금있자 현조가 부시시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울었는지 눈이 퉁퉁부어있었다. “ 이리와. 밥도 안 먹었지? ” “ 밥 먹기 싫어. ” “ 싫어도 먹어. 사람이 배가 든든해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이리 와. ” 미남은 싫다는 현조를 억지로 끌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탁의자에 주저앉히고는 부지런히 저녁상을 차렸다. “ 그래도 밥은 있었네. 간단하게 찌개만 끓여서 먹자. ” “ 너도 밥 안 먹었어? ” “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너 이러고 죽을상하고 있는거 뻔히 아는데. 엄마는 하필 그때 호출을 해가지고. ” “ 잘 모셔다 드렸어? ” “ 내가 모셔다드렸나 어디? 택시기사가 모시고 갔지. ” 미남의 엄마가 외가집엘 가겠다며 갑자기 호출을 하는 바람에 현조와 미남은 레스토랑을 나와서 각자의 집으로 향했었다. 안 와도 된다고 했었는데,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 뭐하러 다시 와? 그냥 집에서 쉬지. ” “ 집으로 간들 편하게 쉴 수 있겠냐? 네가 이렇게 청승떨고 있는거 뻔히 아는데. ” “ 괜찮아. ” “ 괜찮기는…… 거울 좀 봐라. 니 꼴을 보고 그 소리해. 괜찮기는 개뿔이. ” 현조는 대답없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 뭐라…… 그래? ”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현조가 미남을 힐끗보며 물었다. “ 뭐라긴.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네 걱정하느라 말 못한거라고 하지. ” “ 다른 말은 없어? ” “ 무슨 말? 뭐 헤어지자 그런 말? ” “ 응. ” “ 아이구 화상아. 나도 화가나서 강후씨한테 막말을 좀 하긴했다만 네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니? 강후씨가 그깟 일로 너 포기할 걸로 보여? 이미 알고있으면서도 너 만난거래. 효상선배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너 보내기 싫어서 거짓말 했단다. ” “ 왜 눈치를 못챘을까? 왜 바보처럼…….” “ 작정하고 숨기는데 무슨 수로 알아채? ” “ 그만둬야겠지? 그게 맞겠지? ” 현조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묻자 미남이 손바닥으로 짝소리가 나게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 못난 짓 좀 그만해. 그만두긴 뭘 그만둬? 네가 강후씨 사랑하고 강후씨가 너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야? ” “ 효상선배 사촌동생이야. 몰라서 그래? ” “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빌어먹을 정효상 사촌동생이어서 안될거 있어? ” “ 미남아. ” “ 제발 부탁인데 이제 그만 좀 하자. 7년이야. 7년 동안 너 지지리 궁상떠는거 암말없이 지켜본 날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좀 하자. 응? 안될게 뭐가 있어? 둘이 자식새끼 낳고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갈라서는 시대야. 근데 고작 집안끼리 혼담이 오갔다고 파토 못 낼건 뭐 있어? 그리고 강후씨가 널 사랑한다잖아. 그 여자가 아니라 널 사랑한다잖아. ” “ 난 못해.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 “ 너 몰랐던거 아니잖아. 강후씨한테 여자있었던거 너 알고 있었잖아. ” “ 그때는 누구인줄 몰랐었잖아. ” “ 제발 그 놈의 과거얘기 좀 하지마. 이젠 나도 질린다. 계속 그렇게 죄인처럼 살거면 나한테 연락하지 마. 너 혼자 지지리 궁상떨다 죽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대신 밥은 처먹고 고민해. 나 간다. ” 미남이 밥공기를 현조 앞에 쾅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가방을 챙겨서 나가버렸다. 다시 혼자가 되자 또 눈물이 비질비질 흘러내렸다. “ 나쁜 년. 밥이라도 같이 먹어주지. ” 눈물을 닦아내며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넣는데 속에서 꺽꺽 울음이 터져나왔다. 현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울다울다 나중엔 목까지 쉬어서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자 그제서야 현조는 다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 먹자. 먹어야지. 먹고 죽은 듯이 자자. ” 현조는 볼이 미어터져라 밥을 밀어넣고는 우적우적 씹었다. 그리고 물을 한컵 들이키고 다시 밥을 밀어넣었다. 밥 한공기를 모두 먹어치우고 현조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는 눈을 감았다. 우는데 기력을 다 써버렸는지 그녀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시각 강후는 현조의 집을 올려다 보며 깊은 절망감으로 그 밤을 꼬박 새우고 있었다. 37 찬 새벽기운을 맞으며 강후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물었다. 차 안에서 밤을 지새웠더니 온 몸의 근육들이 단단하게 뭉쳐버린것 같았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현조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밤새 잠은 잘 잤는지, 혹시 울다 지쳐서 잠든 건 아닌지……. 강후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차에 올랐다. 현조에게도 그렇겠지만, 그에게도 어제는 지옥을 다녀온 것처럼 힘겨운 하루였다. 모든 신경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을것 같았다. 그는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집에 들어서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제대로 옷도 벗지 못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꿈인 것처럼 현조가 다시 자신을 향해 웃어주지 않을까하는 헛된 기대를 하며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 따르릉-따르릉-] 전화벨 소리에 강후는 부시시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지친 몸을 일으켜세워 거실로 걸어나갔다. 전화벨이 끈질기게 울려대고 있었다. “ 여보세요. ” [ ……. ] “ 여보세요? 현조니? ” [ …….] “ 현조야. 말해. ” [ 휴- 미안하네. 현조가 아니라서. ] 잔뜩 굳어진 준희의 음성이 들려오자 강후는 힘이 쫙 빠져버렸다. [ 듣고 있어? ] “ 무슨 일이야? ” [ 큰엄마 입원하셨어.] “ …….” [ 그 현조라는 여자. 효상선배 사고났을 때 그 여자라며. 알고 있었어? ] “ 용건이 뭐야? ” [ 오빠- ] “ 할 말 없으면 끊어. ” [ 진짜 너무한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여자때문에 날 차버려? 그리고 큰엄마 입원하셨다는데, 어떻게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아? 해도 너무…….” 강후는 더 듣지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꼬박 5시간을 죽은듯이 자버린 모양이다. 그는 다시 전화기를 들고 현조의 집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가 여러번 가는데도 현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받아라. 제발…… 나도 지친다 이제. ” 하지만 전화기에서는 무심한 신호음만 들릴뿐이었다. 강후는 들고있던 전화기를 사납게 집어던져버렸다. 이대로 현조에게 쳐들어가서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쥐어흔들어주고 싶었다. 그깟 과거가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그는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조가 필요이상으로 과거에 집착하는게 아닌가 하는 원망의 마음도 있었다. “ 미치겠네 진짜. ” 살면서 이렇게 막막해본 기억이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온통 모래뿐인 사막 한 가운데 내던져진 것처럼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그는 욕실로 가 샤워를 하고는 다시 외출준비를 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강후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현조의 머릿속에서 그 놈의 정효상이란 존재를 몰아내버릴거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 반쯤은 망가져버린 도어락을 바라보며 강후는 심호흡을 했다. 차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걸로 봐서 현조는 집에 있는것 같았다. 그는 신중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 띵동- 띵동- ] 안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까칠한 얼굴을 한 현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 왜 또 왔어? ” “ 몰라서 물어? 그럼 이대로 그냥 끝낼 참이었어? ” “ 너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 보기 싫어도 봐.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피해다니지 말고. ” “ 돌아가. ” 현조가 문을 닫아버리려하자 강후가 사납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현조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는 집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 이거 놔. 왜 이래? ” “ 지현조. 그만 좀 하자. 제발. ” 강후가 잡고 있던 현조의 손을 놓아버리고 잔뜩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 네가 바라는게 뭐야? 진짜 내가 가버렸으면 좋겠어? 너 잊어버리고 준희하고 결혼해 버릴까? 그걸 바래? ” “ …….” “ 왜 대답을 못해? 네가 바라는게 그거 아냐? 네 죄책감 덜어주려면 내가 그래줘야 하는거 아냐? 가슴속에 너 끌어안고 애정도 없는 준희하고 결혼해서 불행한 결혼생활하는 거,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그럼 네가 행복해지니? ” “ 몰라. 나도 몰라. ” “ 하! 몰라? 네 눈에 내가 뭘로 보이는거야? 너 좋다고 속도없이 웃고 있으니까 내가 자존심도 없는 인간으로 보여?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나한테 가라마라야? 네가 싫어지면 내가 알아서 떠나. 알아? 네가 꼴보기 싫어지면 붙잡고 늘어져도 내가 떠날거라고. ” “ 너 잘난거 아니까 그만 가라고. 잘난 것도 없으면서 골치만 썩이는 나같은 거, 그냥 잊어버리라고. 못 알아들어? ” “ 정효상이 그렇게 대단했어? 도대체 너한테 뭘 얼마나 잘해줘서 7년동안이나 그 자식한테서 벗어나질 못해? 죄책감? 웃기지 마. 너 죄책감이라는 명분내세워서 정효상이란 인간 끝내 마음속에 붙잡아 두고 싶어서 그러는거 아냐? ” “ 그런거 아니야.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보기엔 너 그 인간 잊기 싫어서 발악하는 걸로 밖에 안 보여. 도대체 정효상 그 놈이 뭔데 이렇게 목을 매는거야? 그 놈이 뭐가 얼마나 잘나서? 그래봤자 지 여자 앞길만 망쳐놓고 죽어버린 못난 놈이야. 지가 사랑하던 여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어놓고 지 혼자 속편하게 죽어버린 무책임하고 비겁한 새끼라고. 알아? ” [ 짝- ] 현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후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그러자 강후 역시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현조가 손자국이 벌겋게 난 얼굴을 감싸쥐며 강후를 노려보았다. “ 좀 솔직해져 봐. 지현조. 잊고 싶지않으면 차라리 잊고싶지 않다고 말해. 죄책감이니 뭐니 허울좋은 명분내세우지 말고. ” “ 그만해. ” “ 정신차려. 니가 아무리 애를 써도 죽어버린 정효상이 되살아나진 않아. 이미 땅 속에서 썩어문드러져 버렸다고. ” 현조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자 강후가 그녀의 손을 떼어내서 아플정도로 꽉 움켜잡았다. “ 듣기 싫어? 그래도 들어. 넌 비겁하게 과거를 들먹이면서 널 죽여가고 있어. 자학도 어느 정도여야 봐주지. 제발 좀 그 지긋지긋한 죄책감에서 좀 벗어나. 이제 그만 정효상한테서 벗어나라고. ” “ 내 집에서 나가. 꼴보기 싫어. 당장 나가. ” “ 못 나가. 네 머릿속에서 정효상 그 인간 몰아내기 전에는 절대 못 나가. ” “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내가 나가면 되니까. ” 현조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버리자 강후가 무서운 기세로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입는 현조의 팔을 강후가 사납게 끌어당겨서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 도망치지 마.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치면서 살래? ” “ 내버려 둬.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 ” “ 그렇게 못해. 네가 내 눈에 띄인 그날부터 넌 내 여자였어. 그리고 지금도 내 여자야. 그깟 정효상이 나하고 비교가 돼? 그 새끼가 너한테 해줄수 있는게 뭐가있어? ” “ 적어도 효상선배는 날 이런 식으로 막대하지는 않았어. 너처럼 미친 것처럼 날뛰지는 않았다고. ” “ 미쳐? 내가? 진짜 미친게 어떤건지 보여줘? ” 강후의 눈에 분노의 기운이 확 번졌다. 그가 난폭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가 달려있던 셔츠가 그의 거친 행동에 맥없이 풀어헤쳐졌다. “ 미쳤어? 왜 이래? ” 발길질을 하며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강후는 끄떡도 없이 그녀의 셔츠를 벗겨버렸다. 그리고 속옷까지 벗겨낸 후 그녀의 입술을 사납게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 으…읍…” 현조는 강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강후는 점점 더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거친 그의 키스에 입 안에 비릿하게 피맛이 느껴졌다. 현조는 미친듯이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강후를 때리기 시작했다. 강후는 그녀의 양손을 한 손으로 잡아누르고는 그녀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후크가 풀리고 지퍼가 내려가자 현조는 세차게 몸을 비틀었다. 이런 식으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으로 강후를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강후의 손에 바지까지 벗겨지고 나자 현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미쳐 날뛰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 강후야. 이러지 마. 너와의 추억을 이렇게 망가뜨리지는 마. 제발 강후야. ’ 강후는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조의 얼굴마저도 외면해버렸다. 그가 우악스럽게 현조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지금까지 강후와 나누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이 그 순간 산산조각나버렸다. 현조는 눈을 꼭 감은 채 이 끔찍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제발 이게 꿈이길, 지금 자신을 유린하고 있는 이 사람이 박강후가 아니길……. 의식이 희미해져갔다. 이 끔찍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게 꿈이길, 눈을 뜨면 아무일도 없었던 이틀 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강후와 함께했던 많은 추억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갔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도, 그와의 달콤했던 키스도, 그리고 가슴떨리던 바닷가에서의 기억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꼭 감은 현조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미친듯이 난폭하게 굴던 강후가 거짓말처럼 딱 굳어져버렸다. 그는 폭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행동을 묵묵히 참아내고 있는 현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현조가 자신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고 싶어하는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누군가 뒷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하며 돌아왔다. “ 제길…….”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전쟁을 치룬 듯 난장판이 된 방을 둘러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현조는 시트를 끌어당겨 벌거벗은 몸을 감쌌다. 강후가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하얀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강후가 다시 침대로 다가서자 현조가 움찔해서는 몸을 사렸다. “ 현조야. ”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강후가 그녀를 부르자 현조가 아직까지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 널 사랑하는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너란 여자 지켜주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줄 정말 몰랐다.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야. 젠장. 나도 할 만큼했어. 더 이상 네 앞에서 바보처럼 쩔쩔매기 싫어. 이젠 나도 지쳤어. 마음대로 해. 평생 정효상 망령 끌어안고 사는 너, 나도 싫어. 다른 놈때문에 평생 눈물이나 찔끔거리는 여자 사랑하는 거, 이젠 넌덜머리가 나. 둘 중 하나를 택해. 죽어버린 정효상 그 새끼를 택하든지, 아니면 네 눈 앞에 멀쩡히 살아있는 날 택하든지. 네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해. 네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받아들일게. 네가 정말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나와 헤어지는 거라면…… 나 너 보내준다. 그러니까 깊이 생각해. 네가 날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 “…….” 강후가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내내 자신을 외면하는 현조를 보자 모든게 다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현조를 과거에서 끌어낼 수 없을거라는 심한 좌절감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려던 강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미친 놈처럼 날뛰어서 미안하다. 간다. ” 강후는 현조에게 눈길조차 주지않고 나가버렸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쿵소리가 나며 닫혀버렸다. 현조는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온 몸의 신경들이 극심한 긴장감에 떨려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방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울컥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모든게 다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질질짜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짜증스러웠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과거의 기억도 짜증스러웠다. 그리고 떠나버린 강후를 쫓아가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기억을 모두 없애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20살때로 되돌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효상도 없고, 끔찍한 과거의 기억도 없는 그때로 되돌아가 강후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나도 싫어. 이런 내가 나도 정말 싫다고. ” 현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강후가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강후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로 돌아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까지 심장이 미친듯이 벌렁거렸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미친듯이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손의 감각이 없어질때쯤 되어서야 그는 광기어린 행동을 멈추었다. 현조에게 몹쓸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그치면 안되는 건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몰아붙이는게 아닌데.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게 되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던 현조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가슴을 억누르고 있는 패배감과 상실감이 점점 더 깊어졌다. 만약 현조가 이대로 자신을 포기해버리면 어떡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런 식으로 불안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면 내 안에 품고 있어도 언제가는 날아가 버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현조의 전부를 원했다. 다른 남자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약해빠진 지현조가 아니라, 당당하게 그를 요구할 수 있는 강하고 자신만만한 지현조를 원했다. “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은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 모양이다. 이젠 내가 기다릴거다. 내가 네게 다가갔듯이 이젠 니가 내게 다가오길…… 난 기다릴거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로서는 위험한 모험을 하는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현조가 그대로 포기를 해버린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야만 하리라. 하지만 그는 현조가 그리 쉽게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쌓았던 사랑이 고작 이 정도의 난관에 무릎을 꿇지는 않을거란 믿음 하나만 믿고 그는 현조에게 선택권을 넘겨버렸다. “ 지현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마라. 나 생각보다 참을성 없는 놈이다. ” 강후는 다시 현조에게 돌아가고픈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차를 출발시켰다. ================================================================================== 멍하니 앉아있던 현조는 힘없는 손을 들어 리모컨을 눌렀다. TV에서 무슨 오락프로그램을 하는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동안 멍하니 보고있는데 문득 이게 무슨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강후가 돌아간 후 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뭐하나 뾰족한 답은 떠오르지 않고 내내 강후의 화난 얼굴만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하면서도 끝내 전화를 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죄책감을 끌어안고 강후와 관계를 이어가는 건 분명 어리석은 짓이었다. 만약 과거의 기억과 강후중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녀는 망설임없이 강후를 택할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책감을 모조리 떨쳐내기가 쉽지않았다. 이젠 잊어버리자 수없이 되뇌어 봐도 그녀는 효상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검붉은 피로 뒤덮힌 효상의 얼굴과, 역하게 코를 자극하던 비릿한 피냄새가 7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 생생해서 끊임없이 그녀를 죄책감에 떨게 만들었다. 다시금 강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 널 잊을 수 있을까? 강후야…… 내가 널 잊을 수 있을까? ”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못견디게 강후가 보고싶었다.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강후의 얼굴이 보고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욕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차키와 지갑만 챙겨들고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 땡- ]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에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던 현조는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주의 얼굴을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 경주씨. ” “ 어디 가시는 길이었나 봐요. ”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주의 말투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현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저 만나러 오신거예요? ” “ 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현조는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 강후를 찾아가지 않으면 영영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부러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경주를 다시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30분만 시간 내줘요. ” “ 후우- 그렇게 하죠. 집으로 들어가실래요? ” “ 아뇨. 밖에서 이야기해요. 현조씨도 마침 나가던 길이었던 것 같은데. ” “ 그러죠. ”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로의 얼굴을 외면한 채 경주와 현조는 침묵을 지켰다. 엘리베이터가 막 1층에 도착하자 현조가 경주를 바라보았다. “ 아파트 상가에 작은 커피숖이 있어요. 그리로 가죠. ” “ 네.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두 사람은 커피숖으로 향했다.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현조는 경주의 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 어머님 입원하셨어요. ” “ 네? ” “ 효원이 어머니말이예요. 이틀전에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심장마비로. ” “ ……. ” “ 그렇게 된거 누구 탓인지 모르진 않죠? ” 경주의 말에 현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효원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까지 자신의 책임이 되어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 그게 왜 제 탓이예요? 제가 그 분께 무슨 충격받을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 “ 하! 몰라서 물어요? 어머님한테 준희는 친딸이나 진배없어요. 그런 준희가 현조씨때문에 결혼이 틀어져버렸어요. 그런데도 현조씨 탓이 아니라고 할건가요? ” “ …….” “ 거기다 효원이하고 내 관계도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모든게 다 현조씨때문에 벌어진 일이예요. ” “ 경주씨. 억지가 너무 심하신것 같네요. 그래요. 효원이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쓰러진것 같지는 내 탓이라고 쳐요. 하지만 효원이하고 경주씨 사이가 나빠진 것까지 내 탓으로 돌리는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들어요? ” “ 아뇨. 그 모든 원인이 현조씨에게 있으니까요. ” “ 무슨…… 소리예요? ” “ 정효원. 내 약혼자가 지현조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구요. ” “ 비약하지 말아요. 효원이와 난 그저 친구일 뿐이예요. 경주씨 모르지 않잖아요. ” “ 나도 그런줄 알았죠. 효원이와 현조씨 관계 그저 우정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죠. 근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양처럼 순하기만 하던 정효원이 날 때렸어요. 왜인줄 알아요? 지현조란 여자 가슴에 품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위선자라는 소리에 그 착한 정효원이 나한테 손찌검을 했다구요. 그런데도 현조씨 책임이 아니라는 소리가 나와요? ” “ 그건……. ” “ 현조씨는 아니라고 하겠죠. 하지만 효원이가 현조씨한테 집착하는거 알면서도 현조씨 그냥 묵인해 왔잖아요. 그래서 효원이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거구요. 아니라고 할 건가요? ” “ 그건 경주씨 생각이죠. 효원이가 날 어떻게 생각했건 그건 말 그대로 효원이 생각일 뿐이예요. 난 한번도 효원일 남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내가 왜 효원이의 감정까지 책임을 져야하죠?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해요. 제 3자인 나한테 와서 넋두리 늘어놓지 말구요. 이런 말도 안되는 트집 잡을거면 그만 일어나죠. ” 현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경주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거 받으세요. ” 경주가 핸드백에서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서 현조에게 내밀었다. “ 이게 뭐예요? ” “ 어머님 입원해 계신 병원이예요. ” “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죠? ” “ 어머님이 현조씨를 보고 싶어해요. ” “ ……. ” “ 꼭 한번 와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현조씨는 물론 가고싶지 않겠지만 어머님 저렇게 되신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낀다면 문병이라도 가는게 당연한거 아니겠어요? ” 말을 끝낸 경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현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현조씨 말대로 효원이와 내 관계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죠. 그러니 현조씨도 비겁하게 강후씨 뒤에 숨어있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요. 현조씨 원래 그렇게 비겁한 사람 아니었잖아요. 안 그래요? ” 말을 끝낸 경주가 매몰차게 뒤돌아서 가버렸다. 현조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경주가 전해준 메모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찾아가봐야 한다는 마음과 이대로 무시해 버리자는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한참동안이나 망설이던 현조는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는 커피숖을 나섰다. 한번쯤은 효원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7년동안이나 죄인처럼 살아온 자신의 처지도 제발 이해해 달라는 말을 하고싶었다. ‘ 나도 할만큼 했어. 자그마치 7년이야. 평생토록 죄인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이젠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안될거 없잖아.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 스스로를 옭아맸던 죄인이라는 멍에를 이제는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강후에게 다가가리라. 그녀는 결심을 굳히고는 차에 올랐다. ================================================================================= [ 절대안정 ] 이라고 적힌 푯말이 붙어있는 병실 앞에서 현조는 불안스럽게 서성거렸다. 도착한지 벌써 10여분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선뜻 노크를 하지 못했다. 다시금 효원어머니의 욕설과 싸늘한 냉대를 당할 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것에 주눅들고 싶지 않다는 오기로 그녀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 똑똑- ] 노크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 네. 들어오세요. ”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조는 주춤해서 뒤로 물러섰다.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억지로 끌어모았던 용기가 다시 연기처럼 사라져가는게 느껴졌다. “ 누구세요. 들어오…….” 현조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던 효원의 사촌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멍하게 현조를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에 엷은 조소가 스쳤다. “ 무슨 일이시죠? 여기 왜 온거예요? ” 싸늘한 어조로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현조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효원이 어머니를 뵈러왔는데요. ” “ 왜요? 댁이 큰엄마를 만날 이유가 있어요? 무슨 말로 또 충격을 주려구요? ” “ 누구니 준희야? ” 뒤에서 김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희가 고개를 돌렸다. “ 아니예요. 큰엄마. 신경쓰지 마세요. ”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준희를 보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 죄송하지만 좀 들어갈게요. ” 현조가 준희를 지나쳐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 무슨 짓이예요?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 화가 난 준희를 외면하고 현조는 김여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여사의 얼굴이 진한 원망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김여사는 곧 그런 표정들을 감춰버렸다. “ 미안하다. 바쁜 사람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나긋나긋해진 김여사의 태도에 현조는 잠시 멍해졌다. “ 편찮으시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 아냐. 네가 죄송할게 뭐있니? 그보다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 ” 김여사가 침대를 탁탁치며 말하자 현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여사에게 다가갔다. “ 앉아. 서 있지 말고. ” “ 네. ” 현조가 어색하게 김여사의 곁에 주저앉았다. “ 많이 말랐구나. 전보다 많이 야위었어. ” “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 “ 아직 젊은애가 혈색도 안 좋고. 회사도 그만뒀다면서? ” “ 네. ” “ 전에는 내가 미안했다. 너무 흥분해서 너한테 상처줄 말만 골라서 했구나. ” “ 큰엄마. 도대체 왜 그러세요? 왜 이 여자한테 그런 말을……. ” 준희가 발끈해서 대들자 김여사가 엄한 눈초리로 준희를 노려보았다. “ 무슨 말 버릇이야? 이 여자라니. 네 사촌오빠 친구야. 그럼 너한테는 언니뻘이 되는데, 어디 버릇없이 그런 말을 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 “ 큰 엄마.” “ 넌 그만 나가있어. 현조하고 조용하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나가. ” “ 싫어요. ” “ 말 들어. 고집피우지 말고. ” 김여사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준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현조를 한번 노려보고는 그대로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 미안하다. 어릴때 제 엄마 떠나보낸 아이라 불쌍해서 내가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나보다. 마음 상해하지 마라. ” “ 네.” 현조는 갑작스레 다정한 말을 건네는 김여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머리끄댕이를 잡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줄 알았는데 김여사는 내내 나긋나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 준희는 나한테는 딸이나 마찬가지야. 내가 효상이 떠나보내고…… 매일매일 죽기만 바라고 있을 때 겨우 중학생이던 준희가 내 옆에서 내내 날 위로해줬다. 그때 내가 얼마나 절망했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희는 알게다. 효원이 녀석은 아들이라서 무뚝뚝하기만 하고 남편이라고 있는 사람은 죽은 자식 못 떠나보내고 청승 떨고 있다고 외면하고…… 그 때 준희 혼자서 내 옆을 지켜줬었다. ” 김여사는 눈물을 간간이 찍어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 난 이제 아무 것도 바라는거 없다. 그저 효원이 경주랑 결혼해서 잘 살면 되고, 엄마도 없이 자란 우리 준희 좋은 짝 만나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거만 보면 내일 곧 죽어도 난 여한이 없는 사람이야. 우리 효상이…… 불쌍한 내 아들 곁으로 내일 당장 간대도 난 억울할거 없다. 그저 효원이하고 준희만 행복해진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주고 싶어. ” 김여사가 눈물을 흘리며 현조의 손을 부여잡았다. “ 현조야. 내 마지막 부탁이다. 지금껏 너한테 내가 몹쓸 짓도 많이하고, 네 눈에서 눈물 빼게 한 것도 다 아는데…… 이번 한번만 네가 양보해 주면 안되겠니? 나도 어지간하면 강후 그냥 보내주고 싶다만 준희 저게 도저히 강후 아니면 안되겠단다. 아무리 타이르고 말려도 강후 아니면 그냥 죽어버린단다. 근 10년 가까이 강후만 보고 산 아이야. 그런데 어떻게 포기하라고 하겠니…… 힘들겠지만 현조야. 네가 양보하면 안되겠니? 내가 이렇게 애원한다. 응? 현조야? ” 김여사의 애절한 목소리에 현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된다고, 나도 강후 포기 못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해야 하는데, 눈물을 글썽이는 김여사를 보자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왜 이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차라리 절 나쁜 년이라고 욕하고 때리세요. 그러면 저도 제 욕심채울 수 있잖아요. 나도 할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저더러 뭘 어쩌라구요? 어떻게 하라구요? ’ 현조는 고통스럽게 김여사를 바라보았다. 김여사의 눈에서 다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 현조야…… 제발 부탁이다. 네가 강후 놔줘. 아니면 강후 절대 준희한테 안 돌아와. 부탁한다 현조야. ” “ 저……저는…….” “ 내가 잘못했다. 너 7년동안이나 못살게 군거 정말 잘못했다. 현조야. 허…허억…….” 갑자기 김여사가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현조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 의사……의사 좀 ……. ” 하얗게 질린 얼굴로 김여사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현조가 급하게 문을 열고 간호사를 다급하게 불렀다. “ 여기요. 환자분이 이상해요. 여기요. ” 밖에서 기다리던 준희가 현조의 말에 급하게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 큰 엄마- 왜 이러세요? 큰 엄마- ” 곧이어 간호사들이 뛰어오고 잠시 후 의사가 들이닥쳤다. 김여사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흥분하시면 안된다고 경고했잖습니까? 보호자분 뭐하고 계셨어요? ” “ 죄송합니다. 위험하시건 아니죠? 우리 큰엄마 잘못되는거 아니죠? ” 준희는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것 같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혼란스러운 병실을 바라보던 현조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웠다. 7년전 효상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차키를 꽂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몇번의 헛수고를 한 후에야 비로서 차문을 열 수 있었다. 그녀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병원주차장을 벗어났다. ==================================================================================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준희는 김여사의 손을 움켜잡고는 털석 주저앉았다. “ 그 애 갔니? ” 좀 전까지 막 숨이 끊길것 같던 김여사가 눈을 뜨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 큰 엄마. 괜찮으세요? ” “ 그래. ” 김여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준희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김여사를 바라보았다. 김여사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빗어내리고는 구겨진 환자복을 매만졌다. “ 혹시…… 일부러 그러신거예요? ” “ 뭘 말이니? ” “ 일부러 발작일으키신 거냐구요? ” “ 그래. ” “ 왜요? ” “ 저도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설마 다 죽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애원을 하는데 외면하겠니? 그럼 사람도 아니지. 감히 누구를 넘봐? 효상이 그렇게 죽게 된게 누구 탓인데…… 어디 감히. ” 야멸차게 내뱉는 김여사를 보는 준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지금껏 보아오던 김여사는 그저 착하고 인자하기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김여사의 얼굴에는 독기에 가까운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어 준희는 김여사의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38 나이트클럽 입구가 보이는 구석진 골목에 차를 세우고 현조는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병원에서 나온 뒤 서너시간을 목적없이 무작정 돌아다녔다. 고막이 터질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미친듯이 거리를 질주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약해빠진 자신의 모습이 몹시 짜증스러웠다. 클럽 앞에 강후의 자가용이 서고 그가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늘 온화하게 풀어져있던 강후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있었다. 클럽 앞까지 인사를 나온 재룡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보자 가슴이 저려왔다. 저 모습을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강후의 미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까? 순간 강후가 뭐에 이끌리듯이 그녀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현조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강후는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차가 있는 걸 봤을텐데,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현조는 불안스럽게 손가락을 잡아비틀었다. 지금 내려서 그에게 다가가 버릴까? 아니면 그냥 모른척 돌아가야 하나? 현조가 막 차문을 열려고 할때 그가 휑하니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클럽으로 들어가버렸다. 강후의 외면에 가슴 한 켠이 무너져내렸다. 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다시 되돌리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처럼 가슴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동안 클럽입구를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강후를 만나고 싶은데, 가슴 한자락을 잡아끌고 있는 김여사의 파리한 모습에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현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냥 돌아서버렸다. 아직은 어떤 것도 결정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으로 서툰 결정을 내려서 두고두고 후회를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 현조는 온 집을 발칵 뒤집어 놓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안 닦아도 될 그릇들까지 모조리 꺼내서 윤이 반짝반짝나게 닦고, 베란다 유리창까지 모조리 닦아냈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지자 이불을 꺼내서 욕조에 넣고는 세재를 잔뜩 풀어서 발로 잘근잘근 밟았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이불을 밟아대자 가슴속에 시꺼멓게 자리잡고 있던 암울한 기운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불을 세탁기에 넣어놓고, 지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트에 가서 먹을 걸 잔뜩 사고나서 비디오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눈물을 진탕뺄 수 있는 비디오를 열개나 빌려서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에 먹을 걸 잔뜩 늘어놓고 비디오을 작동시켰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갔다온 걸 빼고 현조는 꼬박 하루를 비디오를 보는데 소비했다. 깜빡깜빡 잠이 들었다 다시 깨서 이미 다 돌아가버린 비디오를 꺼내고 다른 비디오를 넣었다. 그리고 별로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울었다. 그리고는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또 다시 다른 비디오를 끼워넣고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서너번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진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빌려온 비디오를 모두 보고나자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 여보세요. ] “ 미남아. ” [ 왜? ] 무뚝뚝하게 대꾸를 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 반가움에 울컥 목이 메어왔다. “ 보고싶다. ” [ 지랄. 보고싶긴 뭐가 보고싶어? 난 너 꼴보기 싫어. ] “ 빨리 와. ” [ 싫다니까. ] “ 보고 싶어. ” [ ……. ] 미남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불퉁한 미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밥은 처먹었어? ] “ 어. ” [ 많이 먹지. ] “ 많이 먹었어. 밥통째로 퍼먹었어. ” [ 잘했다. ] “ 올거지? ” [ 이씨- 안갈거야. ] “ 미남아! 나 너 많이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막 나. ” 주책맞은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수도꼭지를 틀어놔도 이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 또 울어? ] “ 어.” [ 등신.] “ 어.” [ 울지 마. ] “ 어…….”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만큼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 그만 울어. 갈께. ] “ 어. 빨리 와. ” [ 알았어. ] 전화기를 내려놓고 현조는 눈물을 쓰윽 닦아냈다. 눈물샘은 마르지도 않는지 자꾸만 물줄기를 뿜어댔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저 바닥 끝까지 추락해보리라. 그리고 다시 일어서야지. 미련이 남지 않게, 먼 훗날 되돌아 봤을 때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그녀는 어지럽혀진 방을 대충 치워내고 빌려왔던 비디오를 한 구석에 얌전하게 쌓아두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초인종이 울렸다. “ 누구세요? ” “ 문이나 열어. 무거워 죽겠구만. ” “ 응. ” 현관문을 열자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미남이 그녀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 뭐야 그건? ” “ 비디오 테잎. 비켜. 무거워 죽겠구만. ” “ 어. ” 길을 터주자 미남이 낑낑거리며 들고 온 쇼핑백을 거실바닥에 턱하니 내려놓았다. “ 무슨 테잎이야? ” “ 야한거. ” “ 어? ” “ 야한 비디오 테잎. 쪽팔리는거 감수하고 내가 학교 앞 비디오가게에서 제일 야한 놈으로 서른개 빌려왔다. 오늘부터 줄창 보자. ” “ 너 내일 출근 안해? ” “ 몰라. 내일 연차쓴다고 했는데, 안되면 짤리면 되는거지. ” “ 막나가네. ” “ 잔말말고 일루 와봐. ” 미남이 현조를 확 끌어당겨 두 손으로 얼굴을 잡더니 주물럭거렸다. “ 뭐하는거야? ” “ 팅팅 불어터진거 터트릴려고 그런다. 왜? ” “ 냅둬. ” “ 등신처럼 울고 지랄이야. ” “ 그러게. ” “ 저녁 먹었다고 했지? ” “ 어. ” “ 그럼 비디오나 보자. 그저 생각이 많을때는 야한 비디오 보는게 최고야. ” 미남이 쇼핑백에서 테잎을 꺼내 비디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옆에 가스런히 쌓아놓은 비디오를 쭉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찼다. “ 가뜩이나 우울한데 이런 비디오보면 나아지냐? ” “ 나아질 줄 알았지. ” “ 성질도 드러운게 머리도 나뻐. 짜증나. ” 미남이 틱틱대며 테잎을 비디오에 넣었다. 잠시 후 민망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자 현조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 왜 웃어? ” “ 안 쪽팔리디? 저거 빌려오는데? ” “ 씨- 왜 안 쪽팔려? 거기다 떼어먹을지도 모른다고 보증금도 걸라더라. 나중에 반납하면 돌려준다고. ” “ 그래서 주고 왔어? ” “ 그래. ” 현조는 미남의 통통한 볼을 쭈욱 늘렸다. 매일 상훈이 호빵이라고 놀려대더니 지금보니 정말 호빵처럼 동글동글하니 예뻤다. “ 이쁘네. 우리 호빵. ” “ 죽을려고 용을 써라. ” “ 뽀뽀해줄까? ” “ 살인나고 싶지? ” 미남이 쭉 늘려졌던 얼굴을 빼고는 현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옷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워버렸다. “ 너도 이리와. 이제부터 불후의 명작들을 감상해 보자. ” “ 음. ” 현조가 미남의 옆에 앉자 미남이 짧고 통통한 다리를 턱하니 현조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 발 냄새 나. ” “ 참아. 내가 며칠동안 너 때문에 속 끓인거에 비하면 이 정도 고문은 축복이야. ” “ 알았어. ” 툭탁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또 TV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현조가 킥킥거리며 웃자 미남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조용히 해. 영화 감상 중이잖아. ” “ 킥킥…….” “ 나 이거보고 상훈씨랑 실습해야 된단 말이야. ” “ 푸웃. 뭐? ” “ 하여튼 조용히 해. ” “ 어. ” 이상야릇한 신음소리가 난무하고 온통 벌거벗은 남녀의 모습이 가득한 삼류에로영화를 보자 미남의 말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걱정거리들이 어느정도는 잊혀지는 것 같았다. 미남의 강요로 정상적인(?)부분은 빨리감기로 넘기고 불타오르는 장면만 보다보니 밤이 깊어졌을 때는 이미 10편의 영화를 봐버린 후였다. 현조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 더 봐야 되니? ” “ 아니. 눈 앞에 허연 살덩이들이 춤을 춘다 아주.” “ 그럼 이제 끌까? ” “ 어. ” 현조가 하품을 하며 비디오를 끄자 미남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 살만해? ” “ 응? ” “ 살만 하냐고? 지지리 궁상떨면서 세상 걱정 다 떠메고 있는 것처럼 죽을 상을 하더니 이제 좀 살만하냐고. ” “ 후후- 글쎄. ” 현조가 얕게 한숨을 내쉬자 미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이제 그만해도 돼 현조야. 네가 강후씨 뺏는거 아니야. 강후씨가 너 좋다잖아. 그리고 너도 강후씨 사랑하잖아. 다른 년이 그런 짓 했으면 나쁜 년이라고 욕했겠지만, 너니까 괜찮아. 넌 그래도 돼. 지금까지 속죄하면서 살았으면 된거야. 효상선배도 더 이상 너 이렇게 망가지는거 바라지 않을거야. 이제 좀 이기적으로 살자 현조야. ” “ 휴우- ” “ 너 다시 강후씨 같은 사람 못 만나. 알지? ” “ 알아. ” “ 그럼 그냥 붙잡아. 뭘 망설이니? 그깟 욕 좀 얻어먹는거? 상관없잖아. 욕할 것도 없지만 욕하고 싶으면 그냥 하라고 해. 지들끼리 죽일년 살릴년 욕해봤자 다 쓸데없는거야. 지들이 네 인생 대신 살아준데? 그거 아니잖아. ” “ 나도 알아. 근데 왜 이렇게 떨쳐내기가 어렵니? 왜 이렇게 지워버리기가 어려운거야? ” “ 당연한거잖아. 자그마치 7년이야. 네 인생 4분의 1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잊혀지니?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마. 그냥 살다보면 잊혀지겠지. ” “ 이런 상태로는 강후 못 잡아. 내내 이렇게 질척거리면서 강후 잡는거 서로한테 못할 짓이야. ” 현조의 말에 미남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만 들어가서 자라 미남아. 난 조금있다 잘게.” “ 같이 의논해보자. ” “ 아니. 어차피 내 문제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야. 너하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을것 같다. ” “ 휴- ” “ 한숨 그만쉬고 자. 나때문에 너도 힘들었겠다. ” “ 이거 하나만 약속해 현조야. ” “ 응? ” “ 절대 죄책감때문에 강후씨 포기하지는 마. 알았지? ” “ 알았어. ” 미남은 못내 불안한 눈빛으로 현조를 보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현조는 주방으로 가서 진한 커피를 머그컵 가득 채웠다. 그리고 거실등을 꺼버리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미남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줄 알았는데,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이 답답함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녀는 지난 7년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 침대를 더듬거리던 미남은 옆자리가 비어있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 액정을 보니 벌써 새벽 5시였다. 그런데 현조는 아직까지 잠들지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남은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서 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컴컴한 거실 한 가운데 현조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현조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담뱃불의 빨간 빛만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피워댔는지 거실에 독한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다. 미남이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할때 현조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는게 보였다. 또 울고 있었나 보다. 얼마나 많이 울어야 눈물샘이 말라버리려는지…… 미남은 나가서 위로해주지도 못하고 그냥 선 채로 친구의 아픔을 지켜보았다. ‘ 어쩌니 현조야. 아파서 어쩌니……. ’ 한참동안 현조를 지켜보던 미남은 살며시 문을 닫았다. 나가서 네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아무도 현조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그저 현조가 더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기를 빌며 미남은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미남아. 미남아. ” “ 으응? ” 언제 다시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뜨니 방안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 몇 시야? ” “ 열시 조금 지났어. ” “ 그래? 넌 잠 좀 잤어? ” “ 조금. ” 하지만 현조는 한숨도 자지 못한 듯 눈이 움푹 꺼져있었다. “ 밥 해줄께. 밥 먹자. ” 미남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현조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 지금 외출해. 너 혼자서 먹어야되겠다. ” “ 외출?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 “ 누구 좀 만나러. ” “ 누구? ” “ 있어. 갔다와서 이야기 할께. ” “ 아침은 먹고 가.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안 먹고 어쩌려고 그래? ” “ 괜찮아. 다녀올께. ” 미남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현조는 옷장에서 두툼한 코트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 현조는 효원의 회사 앞에 차를 세우고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몇 번 신호가 가자 효원이 전화를 받았다. [ 정효원입니다. ] “ 나 현조야. ” [ 응. 괜찮아? ] “ 어. 지금 시간 좀 되니? ” [ 어디야? ] “ 회사 앞. ” [ 알았어. 지금 나갈께. ] 조금있자 효원이 회사를 빠져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현조가 크랙숀을 울리자 효원이 차로 걸어와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 차 샀어? ” “ 응. 타. 나가서 이야기하자. ” “ 그래. ” 차를 타고 가면서 효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괜찮지? ” “ …….” 현조는 대답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 현조야. ” “ 나중에 이야기 하자. ” 매정하게 자신의 말을 잘라버리는 현조의 얼굴에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조가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게 못내 불안해서 효원은 내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작은 까페 앞에 차를 세우고 현조가 먼저 차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많이 마른 현조를 보자 또 마음이 안좋았다. 효원은 굳어진 얼굴로 현조를 따라 까페 안으로 들어섰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자 현조가 까칠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 정효원.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 “ 말해. ” “ 너…… 나 사랑하냐? ” “ 뭐? ” 효원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자 현조가 싸늘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 너 나 사랑하냐고? ” “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말은 왜…….” “ 경주씨가 날 찾아왔더라. 네가 날 사랑해서 니들 둘 사이 엉망이 됐다고. 정말이니? ” “ 그런 거 아니야. 현조야. 경주가 오해한 거야. ” “ 그래? ” “ 강후하고 네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내가 흥분해서 경주한테 몹쓸 짓을 했어. 화가 나서 널 찾아갔을 거야. ” “ 하! 내가 동네북이니? 니들 눈에는 내가 화풀이 상대로 밖에 안보여? ” “ 현조야. ” 현조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 참 대단하다 니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지금까지 속죄하면서 산 것도 모자라서 이젠 니들 사랑싸움까지 내 탓으로 돌리니? ” “ 미안하다. ” “ 그만 둬. 너한테 그런 소리 듣자고 온거 아니야. 이 말 하려고 왔어. 이제 너희 집하고 내 악연…… 그만 끝내자. ” “ 무슨 소리야? ” 효원이 잔뜩 굳어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 말 그대로야. 나 이제 너희 집 식구들하고 얽히고 싶지 않아. 할만큼 했고, 더 이상 죄인처럼 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연락같은거 하지 마. ” “ 우린 친구야 현조야. ” “ 친구? 아니. 오늘 이후로 난 정효원이란 사람 머릿속에서 지워버릴거야. 할 수만 있다면 효상선배까지 다 잊어버리고 싶은데,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으니까 정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두 정리해버릴거야. ” “ ……. ” “ 그동안 고마웠다. 어쨌건 네가 나 많이 생각해준거 고맙게 생각해. 잘 살아라. 가볼께. ” 현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현조야. 이러지 말자.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 효원이 현조의 손을 잡자 그녀가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 아니.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했어. 끔찍해. 알아? 끔찍하다고. 너희 집 사람들 이젠 넌덜머리가 나. 날 죽일 년 취급하는 너희 어머니도 끔찍하고, 날 찾아와서 큰소리치는 네 약혼녀도 지겹고, 그리고 걱정하는 척하면서 날 옭아매고 있는 너한테도 질렸어. 그러니까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 살벌하게 효원을 노려보던 현조가 먼저 까페를 나서버렸다. 조금 있자 현조의 차가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떠나가는게 보였다. 효원은 멍하니 앉아서 현조가 내뱉은 말들을 꼽씹어 보았다. 결국 자신도 한 패가 되서 현조를 못살게 굴었다는 말이었다. “ 결국 나도 가해자란 소리네. ” 효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 병실 안에서 말소리가 두런두런 새어나왔다. 현조는 심호흡을 하고는 노크를 했다. “ 들어오세요. ” 현조가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김여사와 준희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또 무슨 일이예요? ” 준희가 그녀를 보며 물었지만, 현조는 김여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틀 전에는 곧 죽을것같던 김여사의 파리한 얼굴이 지금은 옅은 홍조를 띄며 혈색이 돌았다.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 나한테 말이니? ” “ 네. 그리고 준희씨라고 했죠?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피해주시겠어요? ” 현조가 준희를 보며 말하자, 준희가 김여사를 쳐다보았다. “ 괜찮아. 나가봐. ” “ 네. ” 준희가 못내 불안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준희가 나가자 현조가 김여사에게 다가섰다. “ 무슨 일로 날 다시 찾아온거니? ”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 무슨 말? ” 현조는 김여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난 7년간 그녀를 참 못살게 굴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환자복을 입고 있는걸 보니, 속에 있는 말을 다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강후…… 놔주겠습니다. ” “ 정말이니? ” 김여사가 못미더운 얼굴로 되물었다. “ 네. ” “ 고맙구나. 이렇게까지 해줘서. ” “ 아뇨.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 “ 뭐라고? ” 단호한 현조의 말에 김여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 아주머니 부탁때문에 강후 놔주는거 아니예요. ” “ 그럼? ” “ 제가 싫어요. 정효상과 관련된 모든게 다 싫어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서 놔주는겁니다. 제가 강후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강후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예요. 하지만…… 강후를 잡고 있으면 또 다시 그 기억에 치일것 같아서, 그래서 포기하는 겁니다. ” “ ……. ” “ 건강하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 “ 네 말 믿어도 되니? 강후 놔주겠다는 거 정말 믿어도 되는거야? 혹시 이렇게 안심시켜놓고, 나중에 뒤통수 치는거 아니니? ”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묻는 김여사를 보자 쓴물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 말씀 드렸잖아요. 정효상과 관련된 모든 걸 다 잊겠다구요. 그 속에 박강후도 포함되어 있어요. 안녕히 계세요. ” 현조가 문을 열고 나서자 준희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밖에까지 말소리가 들렸는지, 현조를 향한 음성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 정말 강후오빠하고 헤어질거예요? ” “ ……. ” 현조는 대답없이 준희를 바라보다 그냥 돌아서 버렸다. 지긋지긋한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게 다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병원을 빠져나오며 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나야. ] 강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또 다시 심장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 말해. 지현조. ] “ 만나자. ” [ 결정……했어? ] “ 응. ” [ 알았어.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 아니. 밖에서 보자. 저번에 만났던 <페가수스>에서 만나. 한 시간 후에. ” [ 이따 보자. ] “ 음. ” 전화를 끊고 현조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부터 눈 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이를 사려물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되삼켰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녀의 야윈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39 까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현조는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후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앞유리에 떨어진 눈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차문을 열어젖혔다. 건물 2층에 위치한 까페에 들어서서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 “ 아뇨. 나중에요. ” “ 네. ” 종업원이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자, 현조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흐려진 하늘 위로 가느다란 눈발이 휘날렸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녀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잠든 사이 이 반지를 끼워주며 미소지었을 강후를 생각하자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을 깜빡여봐도 희뿌옇게 흐려진 장막을 거둬버릴 수가 없었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자, 비로소 눈 앞으로 다가온 이별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 왜 이러니 지현조. 이러지 말자. ’ 벌써부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강후의 차가 건너편 도로에 서는게 보였다. 그리고 강후가 뒷좌석에서 내려 이쪽을 올려다 보았다. 전에 왔을 때 주차하기가 힘들다고 투덜거리더니 아예 재룡에게 운전을 시킨 모양이다. 강후의 옷차림을 보며 현조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색 폴로셔츠에 검은색 바지, 그리고 검은색 반코트까지…… 이제 강후까지 까마귀가 되버린 것 같았다. 강후를 보자 억지로 참아넘겼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는 다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게 눈물을 짜내며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조금 뒤 강후가 까페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창을 통해 현조를 이미 본듯 그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일찍 왔네. ” “ 어. ” 강후가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핼쓱해진 현조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차는? ” “ 주차장에. ” “ 뭐 시켰어? ” “ 아니. 오면 같이 시키려고. ” “ 추운데 따뜻한거 마시면서 기다리지 그랬어. ” “ 그냥. ” 아까 왔던 종업원이 다시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 주문 하시겠어요? ” “ 난 커피. 넌? ” “ 나도. ” “ 커피 두 잔 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종업원이 가고나자 현조는 강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며칠새 많이 까칠해진 얼굴을 보자 어렵게 결정한 마음이 또다시 흔들렸다. 자신을 몰랐다면 이런 마음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모양새도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아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데, 강후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현조야. 아팠어? ” “ 아니.” “ 근데 얼굴이 왜 그래? ” “ 얼굴이 왜? ” “ 많이 까칠해서. ” “ 괜찮아. ”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종업원이 커피잔 두 개를 내려놓고가자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그 날 …… 미안했다. ” 한참동안 망설이고 있는데 강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어. ” “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실수했다 내가. ” “ 응.” “ 너한테 상처주려고 그랬던거 아니야. 알지? ” “ 응.” “ 현조야. ” “ 응? ” “ 왜 그래? ” “ 어? ” “ 나하고 말하기 싫어? ” “ 아니…… 왜? ” “ 근데 왜 그렇게 무성의하게 대답을 해? ” “ 내가 그랬나? ” 강후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현조를 바라보았다. 처음 눈을 마주친 이후 그녀는 계속 그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 결정…… 내렸다고 했지? ” “ ……. ”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현조가 들고있던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이는 현조를 보자 입안이 바싹 말라버리는것 같았다. 강후는 물잔을 들어 남아있던 물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 강후야. ” “ 말해. ” “ 미안해. ” “ ……. ” 강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쿵쾅거리며 뛰던 심장이 일순간에 멈춰버리는것 같았다. “ 뭐가…… 미안해? ” “ 다. ” “ 다? ” “ 그래. 다 미안해. 나 때문에 마음고생한 것도 미안하고, 그동안 너 막대한 것도 미안하고, 더 잘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또……. ” “ 지현조. 지금 뭐하는 거야? ” 강후가 현조를 똑바로 쳐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 난 네 결정을 물었어. 근데 너 지금 뭐하자는거야? ” “ ……. ” 한참동안 그의 시선을 외면하던 현조가 마침내 눈을 들어 강후를 바라보았다. “ 그만두자. 강후야. ”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강후의 얼굴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 그만 두자고? 뭘 그만둬? 이런 얘기하는 걸 그만두자는 거야, 아니면 우리 관계를 끝장내자는거야? 똑바로 말해. ” “ 너한테는 정말 미안한데 강후야…… 나 더이상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 “ 그래서? ” “ 잊고 싶어. 효상선배와 관련된 모든 걸 다 잊고 싶어. ” “ 결국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는 거야? ” “ …….” “ 대답해. 나까지도 거기 포함시킨거야? ” “ 미안해. ” “ 하! ” 기가 막히다는 듯이 강후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 그래서 그만 두자고? ” “ 널 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는게 없어. 힘들겠지만 이게 최선인것 같다. ” “ 최선? 누굴 위한 최선? 너 그냥 탈탈털고 가버리면 남은 난 그냥 잘가라 하면서 손 흔들어 주면 되는건가? 우리 사이가 고작 그 정도였어? ” “ 할 말없어.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 “ 정말 미안하다면 끝내자는 말 그렇게 쉽게 내뱉으면 안되는거야. 알아? 누구맘대로 끝을 내? 그동안 나 혼자 좋아서 난리친거야? 그거 아니잖아. 근데 이제와서 조금 힘들다고 그냥 끝내자고? ” “ 다른 결론을 낼 수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쯤에서 너하고 내 관계 끝내는거야. ” “ 그렇게 못해. ” “ 강후야. ” “ 이런 식으로 무책임한 결론을 내라고 시간 준거 아니야. 최소한 네가 날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이런 식으로 쉽게 끝내자는 말을 하면 안되는거야. ” “ 그냥 잊자 강후야. 넌 날 잊고, 난 널 잊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모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거야. ” “ 넌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 화를 참고 있는 듯 강후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한참만에 강후가 딱딱하게 굳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 이 고비만 넘기면 다 잘될거야. 이러지 말자 현조야. 나 너 못 잊어. 그리고 너도 나 못 잊어. 쉽게 잊을 수 없다는거 너도 알잖아. ” “ 아니. 난 잊을거야. 그리고…… 너도 곧 잊을 수 있을거야. ” “ 잊어? 어떻게? 넌 7년 전 기억을 아직까지 끌어안고 살잖아. 그러면서 잊으라는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와? 난 그렇게 못해.” “ 이쯤에서 끝내자. 더 힘들어지기 전에. ” “ 싫어. ” “ 강후야. ” “ 이러지 마 지현조. 비겁하게 도망가지 마. 내가 해결할게. 네가 효원이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서 그러는거면 다시는 네 눈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줄게. 그래도 안되겠으면 차라리 외국으로 떠나자. 그럼 되잖아. 안보면 잊을 수 있을거야. 아니 잊혀질거야. 그러자 현조야. 응? ” “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강후야. 날 좀 이해해 줘. 내가 힘들어서 그래. 내가 안되겠어서. ” “ 현조야. ” “ 잊어 줘 제발. 그냥 애초에 몰랐던 사람인것처럼 그렇게 잊어줘. ” “ 안돼. 그렇게 못해. ” 단호한 강후의 말에 현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날 위해서 그렇게 해주면 안되니? 내가 힘들어 강후야. 힘들어서 미칠것 같아. 평생토록 감옥에 처박혀서 살아도 좋으니까 제발 이 진절머리나는 기억을 떨쳐버리고 싶어. 근데 널 보고 있으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아침에 눈 뜰때마다, 오늘도 또 살아있구나, 저녁에 잠들때마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뜨지 말았으면 하면서 스스로를 죽여가는 거. 이젠 못하겠어. 나도 좀 살자. 나도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 7년이야. 자그마치 7년이라고. 그걸로 충분하잖아. 너 때문에 남은 내 인생까지 모조리 망쳐버리고 싶지않아. ” “ 너만 생각을 바꾸면 돼. 못할거 없어. ” “ 쉽게 말하지 마.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어. ” “ 그래서 끝내 나하고 헤어지겠다고? ” “ 그게 최선이야. ” 타협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현조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냐? 네 죄책감. 그거 나하고 맞바꿀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거야? 내가 잊게 해준다잖아. 빌어먹을 그 죄책감이란거 내가 다 잊게 해준다잖아. ” 강후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아이처럼 떼를 쓰는 강후를 보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냥 모른 척 강후 뒤에 숨어서 모든걸 다 떠넘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를 끌어안고 남은 인생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현조가 냉정하게 말했다. “ 너하고 헤어져서 그 죄책감이란거 떨쳐버릴수만 있다면……난 그렇게 할거야. 너 때문에 내 남은 인생까지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 두자. ” “ 나하고 헤어지면 너 잘 살 수 있어? ” “ ……. ” “ 대답해. 나하고 헤어지면 네가 편해질 것 같아? ” “ 그래……그럴 것 같아. ” 현조의 대답에 강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밖에 안됐었구나.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존재. 그것밖에 안됐어. 그 말이지 지금? ” “ 그래. ” “ 그만둬. 네 거짓말 듣고 싶지 않아. 네가 날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도 너 안 잡아. 근데…… 너 거짓말하고 있는거잖아. 너 나 사랑했어,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그걸 아는데 어떻게 보내줘? 날 떠나면 잘 살 수 있다고? 웃기지 마. 그런 거짓말 나한테는 안 통해. 너 평생 나 못 잊어. ” “ 난 너 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잊어버려.” “ 그래. 어쩌면 넌 나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잔인하게 나 잘라내는거 보면 넌 잊을수도 있겠지. 근데…… 난 못 잊어. 아니 안 잊어. 너하고 헤어져도 평생토록 이 가슴속에 넣어두고서 너 보고 싶을때마다 내 마음대로 꺼내 볼거야. 넌 잊어버려. 난 그렇게 못하니까. 그것까지 강요하지는 마. ” “ 그럼 너만 더 힘들어져. ” “ 상관하지 마. 내가 힘들어지건 말건 넌 어차피 떠날거잖아. 안 그래? 내가 고통스럽건 말건 넌 네 뜻대로 할 거잖아. ” “ 네가 이러면 내가 어떻게 편하게 떠나니? ” “ 그럼 네 마음 편해지라고 웃으면서 그래 잘가라, 나 잊어버리고 다른 놈 만나서 평생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러면서 보내줘야 하냐? 그것까지는 못하겠다. 나 버리고 가는 여자한테 그런 말까지 해줄 정도로 난 오지랖 넓은 놈 못돼. ” 강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릿속은 온통 헤어지자는 현조의 목소리로 꽉 차 버렸다. 뭐라고 더 심한 말을 퍼부어주고 싶은데, 머릿속이 말그대로 텅 비어버려서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말을 듣자고 며칠동안 밤을 새우며 현조의 전화를 기다렸다는게 억울했다. 이런 식의 결말이 날줄 알았다면 현조에게 선택권따위를 넘기는 미련한 짓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터트리려 현조를 바라보는데 현조가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왜 그래? ” “ 미안. 나 잠시만. ” 현조가 급하게 화장실로 가버렸다.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강후는 불안한 마음에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들어서는데 안에서 흐느낌 소리가 새어나왔다. 조금 열려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자 현조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있는게 보였다. ‘ 잊을 수 있다며? 나 잊고 잘 살 수 있다며? 그래놓고 벌써부터 울면 어쩌자는거야 지현조. ’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데,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힘들어 하는 현조를 붙잡고 그냥 내 곁에 있으라고 속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쉽게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상처가 자신때문에 더한 고통이 되어 현조를 괴롭히고 있었다. 현조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그냥 붙잡아 두고 싶은데, 자꾸만 그녀를 편하게 놔주라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자신을 떠남으로해서 현조가 과거를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고 누군가 끝없이 속삭이는것 같았다. ‘ 지현조…… 날 왜 이렇게 힘들게 하니. 너 잃고 잘 살 자신없는데…… 그래도 너…… 보내줄 수 밖에 없겠다. 젠장. 너 우는거 보느니 차라리 내가 아픈게 낫겠다. 나 때문에 우는 너…… 더는 못 봐주겠다. ’ 강후는 울고 있는 현조를 놔두고 그냥 돌아서버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결국 보내주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했다. 잠시 후 현조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세수를 해서 눈물자국은 지워버렸지만, 붉어진 눈은 어쩔 수 없이 조금전 흘렸던 눈물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 울었어? ” “ 아니.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 “ ……. ” 강후는 현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현조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현조의 손으로 옮겨갔다. 커피잔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움켜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현조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새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 네가 나보다 더 힘들구나. 차라리 내 앞에서 울지. 바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 말고, 차라리 날 원망하지 그랬어? 너 이렇게 힘들게 만든 날 원망하지, 바보처럼 혼자서 울기나 하고……. ’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눈발이 휘날리는 회색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놔줘버리면 더 이상은 현조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잊을 수 있을까. 저 여자를 잊고 살 수 있을까. 잡고 싶은데, 그냥 옆에 주저앉히고 싶은데, 힘들어하는 현조를 보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현조의 눈물 한 방울이 커다란 해일이 되어 그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놔주는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마침내 강후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가…… 보내줄게. 근데 현조야. 잊지는 마라…… 나 잊지는 마.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려도 되는데, 가슴에서까지 지워버리지는 마. 널 사랑했던 나,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잊어버리면 내가 너무 억울할것 같거든. ” “ ……. ” “ 그리고 …… 건강해라. 아프지 말고, 담배 많이 피우지 말고, 과속하지 말고…… 술 많이 먹고 길바닥에 쓰러지지도 말고. 그리고 …… 울지 마. 알았지? ” “ 어……. ” 현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 울지 마…… 안 운다고 약속했잖아. ” “ 응. ” “ 바보처럼 울지 마. 더 이상 울지않으려고 나 떠나는 거잖아. 근데 또 울면 어떡하냐? ” “ 안 울어. ” 현조가 눈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참으려고 죽을애를 쓰는데도 한번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멈춰지지가 않았다. 강후는 현조를 향해 뻗어가는 손을 애써 다잡았다. 지금 잡아버리면 도저히 놔줄 수가 없을것 같아서 그는 울고 있는 현조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현조가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그만 가볼게. ” “ 그래. ” “ 잘 지내 강후야. ” “ 음. ” 돌아서는 현조의 손을 강후가 급하게 잡아챘다. 그리고 아플정도로 세게 움켜잡았다. 이제 놓아버리면 영영 다시 잡을 수 없는 손인데…… 가슴속에서 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강후가 잔뜩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 지현조. ” 그가 힘겹게 현조의 손을 놓아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조가 강후의 얼굴을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 고마워 강후야. ” 마침내 현조가 떠나버리고 나자 강후는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현조를 따라가지 않기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는 멀어지는 현조의 모습을 외면했다. ‘ 잘 살라는 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겠다. 나 없이 잘 사는 너, 그거 빌어줄 만큼 착한 놈 못되서…… 차마 행복하라는 말은 못해주겠다. ’ 눈 앞의 사물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눈물이 나려는 모양이다. 고작 여자하고 헤어졌다고, 박강후가 못난 놈처럼 비질비질 눈물을 짜내려는 모양이다. 그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으려 애꿎은 커피잔을 노려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강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분명 처음 이 까페에 들어섰을 때는 현조와 같이 이 곳을 나설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영영 놓쳐버렸다. 이 모든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한 상실감이 가슴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곳곳에 이별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가슴이 못견디게 아파왔다.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는 현조가 앉았던 자리를 다시한번 바라보고는 비틀거리며 까페를 빠져나왔다. ================================================================================== 신호를 기다리며 현조는 불안스럽게 핸들을 손으로 탁탁두드렸다. 이제 5분만 더 가면 집인데, 이 신호가 지나면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또 눈물이 차 올랐다. 그녀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억지스레 참고는 신호등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녹색불이 켜지자 그녀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는 휘청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걸려진 거울을 보자 웬 여자가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조는 여자의 얼굴을 외면해버렸다. 초인종을 누를 정신이 없어서 그냥 손으로 쾅쾅 두드렸더니 미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을 열었다. 미남의 얼굴을 보자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터지듯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미남을 안고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 현조야. 왜 이래? ” “ 미남아…… 나 죽을것 같아……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것 같아. ” 40 [ 나다. ] “ 네, 회장님. ” [ 그 놈 아직 그러고 있냐? ] “ 네. ” [ 휴우- ] 장여사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재룡은 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란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 정신 차리거든 집에 좀 왔다가라고 해. ] “ 알겠습니다. ” 재룡은 전화를 끊고 강후가 있는 룸으로 걸어갔다. 유리로 된 문을 통해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흐트러진 강후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만취해 있으면서도 강후는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벌써 석 달째 이런 정신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처음엔 며칠 이러다 말겠지하며 편하게 생각했는데, 나아지기는 커녕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서 이제는 사업이고 뭐고 다 작파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창 술만 퍼마셔댔다. “ 부장님. 사장님 친구분이 찾아오셨는데요. ” 걱정스럽게 안을 쳐다보고 있는데, 웨이터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 누구? ” “ 전에 자주 오셨던…….” “ 알았어. 사무실로 모셔라. ” “ 네. ” 웨이터를 보내고 재룡은 다시 한번 안쪽을 쳐다보고 사무실로 향했다. 조금 있으니 상훈이 건들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 오셨습니까? ” 재룡이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하자 상훈이 인사대신 그의 어깨를 툭툭쳐주고는 제집인 것처럼 소파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강후는? ” “ 룸에 계십니다. ” “ 아직까지 그 모양이야? ” “ 네. ” “ 미친 새끼. 이럴거면 보내지 말았어야지. 잘난 척하면서 보낼 때 알아봤다. ” “ 좀 말려보시면……. ” “ 냅 둬. 저러다 말겠지. 언제까지 저러고 있겠냐? 나 갈란다. 수고해라. 사장 잘못 만난 덕에 네가 고생한다. ” “ 벌써 가시게요? ” “ 있어봤자 미친놈 날뛰는거 밖에 더 봐? 차라리 안보고 말지. ” 상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누군가 나서서 강후를 잡아주면 좋겠는데, 다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냥 두고보는게 영 마뜩찮게 여겨졌다. 룸으로 가서 강후를 데리고 나와야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욕설과 함께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들끼리 또 싸움이 붙었나싶어 나가봤더니 언제 룸에서 나왔는지 강후가 여러명의 남자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한번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싸움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인데, 강후는 아예 작정을 한듯 무식하게 주먹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상훈까지 끼어들어서 완전히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잘 놀고 있던 손님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들기 시작하자 클럽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웨이터들이 싸움을 말리고 있었지만 강후는 아랑곳없이 남자들과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 사장님. ” 재룡이 급하게 뛰어가 남자들과 뒤엉켜있는 강후를 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재룡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러댔다. “ 사장님. 재룡입니다. 그만하십시오. ” 재룡이 다급하게 말을 하자 그제서야 강후는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힘없이 떨구었다. 강후와 싸우던 남자들이 다시 그에게 달려들자 재룡이 강후를 얼른 사무실쪽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뒤늦게 뛰어들어온 기도들에게 말했다. “ 이 사람들 데리고 나가. 그리고 치료비 줘서 보내. ” “ 네.” 웨이터들과 기도들이 강후와 싸우던 남자들을 끌고 가버리자 아직까지 남자들과 엉켜서 싸우고 있던 상훈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 씨발- 살다살다 별 짓을 다한다. 젊었을 때도 안하던 싸움질을 서른이 다되서 하고. ” 상훈이 주먹질을 당해 얼얼해진 뺨을 쓰다듬으며 강후를 노려보았다. “ 실컷 두들겨 맞으니까 속이 시원하냐? ” “ 어떤 새끼야. 덤벼 새끼야. ” 강후가 술에 취해서 흐리멍텅하게 풀어진 눈으로 상훈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 사장님. 그만 하십시오. 애들이 보고 있습니다. ” “ 이거 놔. ” 재룡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강후는 연신 헛주먹질을 해댔다. 상훈이 혀를 끌끌차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 재룡아. 그 새끼 죽지않을 정도로만 패줘라. 죽도록 두들겨 맞으면 정신차리지 않겠냐. ” “ 사장님. 정신 좀 차리세요. 사장님. ” 입술이 터졌는지 강후의 입주위로 피가 얼룩져있었다. 재룡이 닦아내려고 손수건을 갖다대자 강후가 사납게 그를 밀쳐버리고는 비틀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재룡이 따라들어가려하자 상훈이 그의 팔을 잡아세웠다. “ 넌 그냥 있어. 내가 들어가볼게. 그나저나 여기 정리 좀 해라. 새끼가 아주 클럽을 말아먹고 싶나? 싸울려면 딴데가서 싸우지 지네 집에서 지랄이야. ” 상훈이 툴툴거리며 강후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문을 열자 강후가 소파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석 달동안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많이 말라버린 얼굴을 보자 뭐라고 싫은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상훈이 티슈를 뽑아 강후의 얼굴에 묻어난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 새끼. 별 짓을 다해 아주. ” 귀찮은 듯이 손을 휘휘젓던 강후가 눈을 반쯤 뜨고는 상훈을 올려다보았다. “ 상훈이냐? ” “ 몰라서 묻냐? ” “ 언제 왔어? ” “ 미친 놈. 기껏 싸움하는거 옆에서 도와줬더니……. ” “ 킥킥킥…… 그랬나? ” 강후가 상훈의 손을 떨쳐내고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이제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냐? ” 한심스럽다는듯이 묻는 상훈의 말에 강후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 그러게. ” “ 이럴거면 차라리 보내지 말았어야지. 죽어라고 끌어안고 있었어야지. 이게 뭐냐? 병신처럼. ” 강후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씁쓸하게 내뱉았다. “ 보내고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옥같을지 몰랐다.” “ 아이구- 열부났다. 열부났어. ”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퀭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있는 강후를 보자 현조의 소식을 전해줄 수가 없었다. 듣고나면 더 난리를 칠게 뻔하니 차라리 숨기는게 나을 것같았다. “ 그만해라 강후야. 그 정도 했으면 됐어. ” “ 후우- ” 강후가 담배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상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건네주었다. 담배를 받아들고 강후는 한참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 담배들고 제사지내냐? ” “ 너도 이거 피우냐? ” “ 뭐? ” “ 너도 이 담배 피우냐고. 현조도 이거 피웠었는데. ” “ 미친 놈. 별걸 다 끌어다 붙인다. ” “ 그냥…… 담배를 보니까 생각이 나네. ” 한숨을 내쉬며 담배에 불을 붙이던 강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 미남씨…… 잘 지내? ” “ 왜? 남의 여자 잘 지내는건 알아서 뭐하게? ” “ 그냥. ” 강후가 뭘 묻고 싶어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 강후의 상태로 봐서는 현조의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 까마귀 소식…… 미남이도 몰라. 소식 딱 끊고 대구 갔잖냐. ” “ 그래? ” 혹시라도 현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않을까 기대를 하던 강후는 실망감으로 또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잘 지내고 있을거야. 걔가 좀 독하잖냐. 제 앞가림 잘 하고 있겠지. ” “ ……. ” “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정신차려. 이게 무슨 짓이야? 맨날 술 퍼마시면서 여자들 끼고 살면 뭐가 달라져? 그런다고 잊혀져? ” “ 잠시동안은 잊을 수 있으니까. ” “ 차라리…… 찾아가라. 그게 낫겠다. ” “ 안 돼. ” “ 왜? ” “ 힘들다잖아. 나때문에. ” “ 너하고 헤어지면 괜찮아질거래? ” “ 그렇대. ” “ 괜찮기는……괜찮은게 그러고 다니냐? ” 말을 해놓고 아차하는데 강후가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 뭐야? 너 현조 소식 알고 있지? ” “ 아냐. 몰라. ” 당황해서 딱 잡아떼는데 강후가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왔다. “ 빨리 말해. 현조한테 무슨 일 있어? ” “ 모른다고 했잖아. ” “ 너 알고 있어. 얼른 말해. 나 미치기 전에 빨리. ” 상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강후를 바라보았다. 말해주면 당장 현조에게 쫓아갈게 뻔한데 그러면 서로를 잊기위해 노력했던 지난 3개월의 시간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맺어지기 힘든 사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나치는게 나으리라. “ 윤상훈. 얼른 말해. ” “ 모른다고 글쎄. ” “ 야- ” “ 그렇게 알고싶으면 네가 직접 알아봐. 그 정도는 너도 할 수 있잖아. 제발 정신차려 박강후. 너 답지 않게 이게 무슨 짓이야? 이렇게 미친 놈처럼 살거면 차라리 옆에 잡아다 놓던가, 아니면 깨끗이 잊어버려. 사내새끼가 여자때문에 빌빌대는거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아냐? 다른 사람도 아닌 박강후가 여자 하나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되겠냐? 맨날 혼자서 잘난 척하더니 꼴 좋다. ” “ 진짜 말 안할거야? ” “ 몰라. 알아보고 싶으면 직접 알아봐. ” 상훈이 끝내 말을 안 할 태세이자 강후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 말 안해줄거면 그만 가봐. ” “ 강후야. ” “ 가. 나도 들어가서 자야겠다. ” 강후가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가버리자 상훈이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치며 중얼거렸다. “ 둘 다 멍청해가지고는…… 어이구 속터져. ” 그냥 현조의 소식을 알려줘버리고 싶은데 미남이 워낙 강경하게 반대를 하는터라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두 망가지는 걸 지켜보느니 차라리 다시 만나게 해주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모르겠다.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상훈은 클럽을 빠져나왔다. ================================================================================== “ 어제도 이 놈 술 퍼마셨냐? ” “ 네. ” 장여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양주병들을 훑어보았다. 집에 좀 들르라는 말에도 감감무소식이라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와봤더니 집꼴이 엉망이었다. 거기다 강후는 술을 먹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는지 소파에 반쯤 몸을 걸치고는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 얼음물 좀 가지고 와. ” “ 네? ” “ 얼음물. 못 알아 들어? 너도 술 취했니? 물에다 얼음 잔뜩 넣어서 한 바가지 들고 와. ” 화가 잔뜩 난 장여사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재룡이 얼른 주방으로 가서 큰 바가지에 물을 떠 가지고 왔다. 재룡이 들고온 바가지를 뺏어들고 장여사는 그대로 강후에게 차가운 물을 확 끼얹어버렸다. “ 으윽- 뭐야. ” 강후가 인상을 쓰며 몸을 뒤척였다. “ 박강후. 얼른 일어나. ” “ 누구야? ” 강후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장여사를 올려다 보았다. “ 이젠 애미도 못 알아보는구나. 얼른 못 일어나? ” “ 어머니.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강후가 물기 묻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 욕실가서 씻고 와. 술 취한 놈하고 말하고 싶은 생각없다. ” “ 네. ” 강후가 비틀거리며 욕실로 걸어가자 재룡이 바닥에 쏟아진 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장여사는 강후가 들어간 욕실을 쳐다보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속으로 삭혔다. 잠시 후 강후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오자 장여사가 그를 향해 말했다. “ 좀 들어와. ” 장여사가 침실로 향하자 강후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장여사를 따라들어갔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장여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 거기 좀 앉아. 이야기 좀 하자. ” “ 언제 오셨어요? ” “ 조금 전에 왔다. ” “ 뭐하러 오세요? 제가 나중에 들릴텐데. ” “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야? 내 아들이 고작 이것밖에 안됐니? ” “ 죄송합니다. ” “ 잘 해나갈거라며 큰 소리 떵떵치더니 결국엔 떨궈버렸더구나. ” “ ……. ” “ 어제 준희가 찾아왔더라. 너 준희도 안 만나준다면서? ” “ 제가 그 앨 왜 만나요? 만나고싶지 않아요. ” 강후가 불퉁하게 내뱉자 장여사가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 박강후. 너 자꾸 엄마 실망시킬래? 뭐든 딱부러지게 잘해내던 녀석이 왜 이렇게 된거야?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말을 해야지. 준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너 정신차릴 때만 기다리고 있는거 알아 몰라? ” “ 내버려두세요. 제가 알바 아니예요. ” “ 네가 모르면? 그럼 내가 다 큰 아들놈 뒤나 닦아주고 다니랴? 애초에 네가 벌인 일이야. 귀찮고 하기싫어도 네가 벌인 일 네가 알아서 정리해야지. ” “ ……. ” 강후가 대답하기 싫다는 듯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자 장여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준희 만나서 깨끗하게 정리하던지 아니면 다시 시작해. 어차피 떠난 애 다시 불러올 수도 없으니 준희랑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지. ” “ 그런 일없습니다. 준희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엮이고 싶지 않아요. ” “ 그럼 빨리 끝을 내. ” “ 제가 알아서 할겁니다. ” “ 알아서 한다는 놈이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어? ” “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정신차리겠습니다. ” “ 난 내 아들놈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는거 보기싫다. 계속 이렇게 정신 못차리고 나 실망하게 만들면 너 다시 안봐. 알겠니? ” “ 네. ” “ 이만 가보마. 네가 조금 더 기다려달라니 기다리기는 하겠다만, 이번 일로 너한테 진짜 실망했다. ” “ ……. ” 못마땅한 얼굴로 방을 나서던 장여사가 뭔가 생각이 난듯 갑자기 뒤돌아섰다. “ 그리고…… 그 애는 영영 보내기로 한거냐? ” “ ……. ” “ 보내기로 했으면 깨끗하게 보내주고, 영 안되겠으면 차라리 잡아와. 이렇게 미친 놈처럼 날뛰지 말고. ” “ ……. ” “ 사춘기 때도 안하던 짓을 지금하니, 원 참. 잘 키워놨는지 알았더니 헛똑똑이구나. 제 여자하나 간수 못하고. 쯧쯧…….” 장여사가 혀를 끌끌차며 나가버렸다. 강후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잊기가 어려운지……. 처음 한 달간은 이러다 잊혀지겠지하며 흘려보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잊혀지기는 커녕 점점 더 현조에 대한 기억이 뚜렷해졌다. 잊어버리려 노력하면 할수록 기억이란 놈은 더 큰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떨쳐버릴 수 없는 기억들때문에 이제는 지쳐버렸다. “ 지현조 잘 지내냐? 나 다 잊어버리고 잘 살고 있냐? ” 현조의 얼굴이 또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잡히지 않는 현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준희는 강후의 클럽 앞에서 안을 힐끔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석 달동안 어떤 식으로든지 강후와 만나려고 애를 써봤지만, 그는 끝내 그녀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럽으로 찾아오면 재룡이라는 남자가 앞을 막아섰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바로 끊어버렸다. 그렇다고 무작정 집 앞에서 기다리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러다 말겠지 하며 기다린게 꼬박 3개월이었다. 참다못해 장여사를 찾아갔더니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아예 참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아 자존심을 버려가며 찾아왔는데, 막상 들어갈려니 망설이게 되었다. 한참동안 그러고 있는데 재룡이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게 보였다. “ 저기요. ” 준희가 그를 부르자 재룡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또 오셨습니까? ” “ 네. 오빠 안에 있어요? ” “ 네. 계시기는 합니다만.” “ 그럼 제가 찾아왔다고 말 좀 전해주세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야겠다구요. ” “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 매번 그냥 돌려보낸게 미안했는지 재룡이 그녀를 클럽 안으로 안내했다. 화려한 조명이 번뜩이는 클럽으로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 잠시 룸으로 가 계십시오. 여기는 시끄러워서. ” “ 네. ” 재룡이 웨이터 하나를 불러 준희를 부탁하고 사무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는 웨이터를 따라 2층에 위치한 VIP룸으로 향했다. 오늘도 강후가 자신을 따돌린다면 더 이상 자신도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불안스럽게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강후가 들어섰다. 못 본 사이 강후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 오빠. ” “ ……. ” 강후는 준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바쁜데 찾아온거야? ” “ 조금. 무슨 일이야? ” “ 오빠하고 이야기를 해야할거 같아서. ” “ 무슨 얘기? ” “ 우리 얘기. ” “ 우리? ” 강후가 삐딱하게 웃으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리고 깊숙히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뱉았다. 연기속에서 강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해 봐. 무슨 얘긴지 들어나 보자. ” “ 우리 사이 아직 끝난거 아니잖아. ” “ ……. ” 강후는 별 다른 대답없이 준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오빠 그 여자하고 헤어졌다는 소리 들었어. 효원오빠한테서. ” “ 그래서? ” “ 그럼…… 이제 돌아와도 되잖아. ” “ 돌아가? 어딜? ” “ 오빠. ” “ 네가 뭔가 잘못 알고있는 모양인데, 너하고 내 사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 기억 안나? 석 달전에 너랑 내 사이 끝났어. 난 그때 이야기가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 “ 그때는 현조라는 여자때문에 그런거잖아. 이제 헤어졌으니까……. ” “ 정준희.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애가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싫다고 간 남자한테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훗- ” 자존심을 박박 긁는 강후의 태도에 준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나도 자존심 상해. 근데 그냥 끝내기엔 너무 아쉬워서……. ” “ 그래서 뭐 어쩌자고. 나하고 결혼할래? 그럴까?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남자 붙들고 사는거 괜찮으면 난 상관없어. 어차피 나야 이젠 다른 여자 가슴에 품을 생각없으니까 껍데기 뿐인 몸이라도 괜찮으면 결혼하자. 그럼 되니? ” 빈정거리며 말하는 강후를 보자 속에서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 왜 이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온거야. 끝내든 다시 시작하든 뭔가 깔끔한 결론을 내고 싶었어. 근데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 “ 그러게 왜 찾아와? 정효상하고 띠끌만큼이라도 관련된 인간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더 험한 꼴 당하고 싶지않으면 너도 이쯤에서 끝내. 나한테 미련같은거 남지도 않았겠지만, 혹시나 털끝만큼이라도 미련이 남아있었다면 오늘 이후로 아예 없애버려. 그게 네 신상에 이로울테니까. ” 매정하게 내뱉는 강후를 보며 준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오빠. 어쩌면 이렇게 매정해질 수 있니?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그동안 함께 보낸 정이란게 있잖아. 근데 어떻게 날 이렇게 모질게 대해? 애초에 잘못한 거 오빠잖아. 오빠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된거잖아. 그러면 나한테 미안해해야되는거 아니야? ” 격앙된 준희의 말에 강후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 나도 그만큼의 희생을 했어. 미안? 하- 뭐가 미안해? 넌 다른 사람 만나서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현조하고 나는……우리는……. ” 뭐라 더 말을 할 것 같던 강후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동안 숨을 고르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그만 가봐라. 그리고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 강후가 문쪽으로 걸어가자 준희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정말 이렇게 끝낼거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오빠. 나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내가 기다릴게. 오빠가 그 여자 잊을 때까지 내가 기다릴게. 응? ” 강후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준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라고해도 넌 안돼. 왜인지 알아? 네가 정효상 사촌동생이니까. 그 새끼가 네 사촌오빠였으니까. 그 새끼때문에 …… 내가 현조를 보내줘야 했으니까. 그래서 넌 안 돼. 그만 돌아가. ” 강후가 나가버리고 나자 준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자존심까지 내던져가며 매달려 봤지만 이미 강후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자리는 없어져버렸다. 단순히 없어진게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희망은 없어보였다. “ 끝났어. 이젠…… 정말 끝나버렸어. ” 눈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준희는 다급히 눈물을 닦아내고는 룸을 빠져나왔다. 41 “ 또 나가는 거니? ” “ 응. 먼저 자 엄마. 기다리지 말고. ” “ 밤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는거야? 몸도 안 좋다면서. ” “ 잠깐만 갔다 올거야. 신경 쓰지 마. ” 집을 나서며 현조는 옷깃을 단단하게 여몄다. 봄이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3월의 초입이라 그런지 밤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두툼한 겨울코트 대신 좀 얇은 옷을 입었더니 옷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가 몸을 잔뜩 움츠러들게했다. 집 앞에 세워두었던 차에 올라 히터를 켜자 그제서야 몸이 조금 풀리는것 같았다. 막 시동을 거는데 누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밖을 내다보니 현준이 인상을 쓰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반쯤 내리자 현준이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 왜? ” “ 또 어디가? ” “ 알아서 뭐하게? ” “ 또 미친 짓하러 가는거지? ” “ 아냐.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밤마다 그 짓하러 돌아다니는거 모를 줄 알아? ” “ 머리 치워. 가봐야 돼. ” “ 누나. 도대체 왜 이래? 그렇게 빨리 죽고 싶어? 그거 불법이야, 거기다 위험하기까지 하고. 사고나면 어쩔려고 그래? ” “ 사고 안나. ” “ 누나가 신이야? 어떻게 그렇게 장담을 하냐? 사고가 뭐 미리 예고하고 나는줄 알아? 순식간이야. 아차하는 순간에 차 뒤집어지고, 황천길 가는거야. ” “ 비키라고 했다. ” “ 안 돼. 오늘은 못 보내. ” “ 지현준. 말 안들어? ” 소리를 버럭 질러봤지만 현준은 아예 차키를 뽑아버렸다. “ 무슨 짓이야? ” “ 더 이상은 못봐주겠다. 도대체 무슨 일때문에 그러는거야? 이유를 알아야 해결을 하던지 말던지 할거아냐. ” “ 넌 몰라도 돼. 그리고 차 키 내놔. ” “ 안 돼. ” “ 지현준. ” “ 내려. 나하고 술 한 잔 하자. ” “ 싫어. ” “ 얼른 내려. ” 현준이 차문을 열어젖히고 현조를 끌어냈다. “ 이거 놔. ” “ 동네 창피하게 소리지르지 마. 엄마까지 불러내고 싶어? ” “ ……. ” “ 그냥 나하고 술 한 잔 하자고. 누나가 미친 짓하는 이유는 묻지 않을테니까, 그냥 술이나 한 잔 해. ” 더 다그치다가는 싸움이 나겠다싶은지 현준이 한 발 물러섰다. “ 오늘은 왠지 불안해서 그래. 그러니까 가지 마. 응? ” “ 휴우- ”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리는 현준을 보자 매정하게 떨치고 갈 수가 없었다. “ 알았어. 알았으니까 차키 줘. ” “ 정말 안 갈거지? ” 영 못 미더운지 현준이 재차 확인을 했다. “ 안 가. 그러니까 차키 줘. ” 현준이 그제서야 차키를 내밀었다. 키를 받아들고 시동을 걸어 내려졌던 창문을 올리고 난 후 차에서 내리자 현준이 슬며시 그녀의 팔짱을 꼈다. “ 왜 이래? ” “ 도망갈까 싶어서. ” “ 도망 안가니까 그만 떨어져. 다 큰 자식이 자꾸 들러붙고 그래. ” 틱틱거리며 팔을 떼어내려고하자 현준이 더 바싹 들러붙었다. “ 그냥 이렇게 가자. 누나. 따뜻하고 좋네.” “…….” 떼어내기도 귀찮아서 그냥 옆에 조롱조롱 매달고 가는데 현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누나.” “ 왜? ” “ 많이 힘들어? ” “ 뭐가? ” “ 그 남자…… 잊기 힘들어서 그러는거잖아. ” 현조가 갑자기 딱 멈추어섰다. “ 그 남자라니? ” 예민하게 반응하는 현조를 보며 현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나 알아. 전에 누나 포장마차에서 술취해서 뻗었을 때, 내가 업고 들어왔잖아. 그때 누나가 울면서 그랬잖아. 힘들어서 미치겠다고. ” 동생에게까지 추태를 보인 것 같아 현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 대구로 온 후 근 한 달간 매일 밤 술을 퍼마시며 지냈다. 그 맘때쯤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이 떡이되게 마시다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현준이 연락을 받고 자신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걸 알았다. 아마 그때 자기도 모르게 강후의 이야기를 흘려버린 모양이다. “ 그냥 모른척 해. 잊고 있어. 아니 벌써 잊었어. ” “ 잊은 사람이 이래? 술 마시는거 아니면 폭카족들하고 어울려서 돈내기 경주나 하고. 그러지 마 누나. ” “ …….” “ 엄마 모르시는 줄 알지? 다 알고 계셔. 아시는데도 누나 불편해 할까봐 모른 척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 “ 너 볼 면목이 없다. ”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포장마차 앞에 다다랐다. 손님이 별로 없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고갈비와 꼼장어,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현조는 멍한 눈으로 포장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포장마차에서 나는 이런 안주 냄새가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강후와 헤어진 후 모든게 그저 시들해졌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늘 한숨이 따라다녔다. 제대로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였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강후는 잘 지낼까? 혹시 나때문에 가슴아파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을 하루에도 수 십개씩 쏟아내며 현조는 강후를 잊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떨쳐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강후의 흔적을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강후의 미소가, 강후의 부드러운 손길이 점점 더 깊게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 잔 받아. ” 현준이 소주잔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어. ” “ 오늘은 내가 지켜줄테니까 누나 마시고 싶은만큼 마셔.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줄게. ” “ 고맙다. ” “ 대신…… 울지는 마. 알았지? 나 여자들 우는거 딱 질색이야. 달래줄 방법도 모르고,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울지는 마. ” [ 건강해라. 아프지 말고, 담배 많이 피우지 말고, 과속하지 말고…… 술 많이 먹고 길바닥에 쓰러지지도 말고. 그리고 …… 울지 마. 알았지? ] 현준의 목소리에 강후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 울지 말라니까.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물을 글썽이면 어쩌자는거야? ” 현준이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서 현조의 눈을 투박하게 쓱쓱 닦아냈다. “ 안 울어. 안 울거야. ” 현조는 소주병을 따서 앞에 놓인 잔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현준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 너도 마셔. ” 하지만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 오늘은 안 마실래. 그냥 누나 마시는거 보고 있을거야. ” “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술을 마셔?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조는 잔을 들어서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쓴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가슴이 또 저릿해졌다. “ 술 맛이 뭐 이래. ” 툴툴거리며 또 한 잔을 따르려는데 현준이 얼른 소주병을 낚아챘다. “ 내가 따라줄게. 여자 혼자 자작하는거 보기 안 좋아. ” 현준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현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는데 포장마차 주인이 안주를 내왔다. 빨갛게 양념된 고갈비를 먹으며 현조는 소리없는 한숨을 삼켰다. 언제쯤 잊을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아프기만 한걸까? “ 누나 그거 알아? 예전에 누나는 참 밝고 재밌는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누나가 웃는 걸 보면 슬퍼져. 웃고 있기는 한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 ” “ 글쎄…… 왜 그럴까. ” “ 억지로 웃지 마. 그냥 아프고 괴로우면 그냥 아프다고 말을 해. 괜찮다고만 하지말고. 내가 누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누나 아픈거 보듬어 줄수는 있어. 동생이라고 마냥 어리게만 보지말고 걱정거리 있으면 나한테 털어 놔. 응? ” “ 괜찮아. 이러다보면 나아지겠지. ” “ 그 사람하고 왜 헤어진거야? ” 조심스러운 현준의 말에 현조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 글쎄. 왜 헤어졌을까? 내가 왜 강후를 떠났을까? ” “ 그 남자 이름이 강후야? ” “ 어. 박강후. 이름이 웃기지? 얼마나 잘난 척하는 놈인지 아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건방지게 반말이나 해제끼고, 싫다는데도 자꾸 들러붙더니, 결국엔 날 이렇게 힘들게 한다. 나쁜 놈이야 아주. 빌어먹게 나쁜 놈이야. ” “ 그 놈이 누나가 싫대? 그래서 헤어진거야? ” “ 아니. ” “ 그럼 왜 헤어졌어? 이렇게 힘들어 할거면 뭐하러 헤어졌냐고? ” “ 겁이 나서. 강후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 “ 무슨 죄책감? ” “ 그런게 있어. ” “ 혹시 유부남이었어? ” 현준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 아냐. 그런 거. ” “ 근데 죄책감이 들게 뭐가 있어? ” “ ……. ” 현조는 다시 소주잔을 들었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도 귀찮고, 강후에 대한 얘기를 자꾸해서 어설프게 봉합해 두었던 상처를 헤집어 덧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 말하기 싫어?” “ 응.” “ 그럼 말하지 마. ” 현준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고통을 읽어버렸는지 더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동생을 앞에 두고 술을 퍼마시고 있자니 괜히 민망해졌다. “ 미안하다 동생아. 누나가 되서 맨날 못난 꼴만 보이고. ” “ 괜찮아. 남매사이에 그런거 따질 필요있나. ” 어른스럽게 대꾸를 하는 현준을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부지런히 술을 들이키는 현조를 한참동안 지켜보던 현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누나. 내 좌우명이 뭔지 알아? ” “ 응? ”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얼굴을 빤히 쳐다봤더니 현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 뭐 별건 아닌데, 그냥 들어줘. 내 좌우명이 뭐냐면‘가끔 죽음을 생각하자’야. ” “ 죽음? 너 언제부터 염세주의자가 됐냐? ” “ 염세주의자까지는 아니고, 누나도 알다시피 내가 군대가기 전에 좀 방황을 했었잖아. ” “ 후후- 때늦은 사춘기였지. ” 스물한살 무렵 갑자기 가출을 했었던 걸 생각해내고 미소를 짓자 현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그때는 세상 사는게 딱 지겨웠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내일 아침에 교통사고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 지금 이 시간을 너무 허망하게 흘려보내면 억울하지 않을까. 내가 헛되게 보내는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텐데, 복잡한 생각만 하면서 좌절해 있으면 죽을 때 얼마나 억울할까……. 막상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모든게 다 새롭게 보이는거야. 용서 못할 일도 없을 것 같고, 또 지레 겁먹고 주춤거릴 것도 없을 것 같더라구. ” 현준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 그러니까 누나도 복잡하게 살지 마. 무슨 이유때문에 그 사람이랑 헤어진건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당장 누나가 죽게된다고 생각을 해봐. 그리고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만약 그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오르면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그냥 다시 만나. 짧은 인생이잖아.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다 좋은 시절 다 간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 음. 알아 들었어. ” 현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준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 근데 그 머리는 진짜 안 어울린다. 누나. ” “ 뭐? ” “ 뭐하러 머리까지 잘라? 실연당한 여자 티내는 것도 아니고. ” “ 아- ” 현조가 짧게 커트한 머리를 어색하게 빗어넘겼다. “ 진짜 머리카락 자르면 기분이 나아져? ” “ 아니. 그냥. 뭔가 좀 변화를 주고 싶어서 잘랐지. ” “ 안 어울려. 다시는 그런 스타일 하지마라. 선머슴도 아니고 그게 뭐냐? ” “ 잔소리꾼. ” “ 골치덩어리.” “ 샌님.” “ 꼴통.” “ 킥킥킥…….” 현조가 웃으며 남은 소주를 마저 들이켰다. 눈 앞이 몽롱하니 서서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소주 1병이면 기분 좋게 취했는데, 요즘엔 두 병을 다 마셔도 겨우 정신이 알딸딸해질 정도였다. 강후와 헤어지고 늘어난거라고는 담배와, 술, 그리고 한숨뿐이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현준이 또 잔소리를 했다. “ 그리고 담배 좀 작작 피워대. 누나 옆에 가면 꼴초 냄새 나. ” “ 그래? ” “ 시집도 안간 처녀가 향수냄새도 아니고 담배 냄새만 풀풀 풍기면 되겠어? 적당히 피워. 아주 끊어버리라고는 말 못하겠고 조금씩 줄여. 몸에도 안 좋은거 뭐가 좋다고 그렇게 피워대고 그래? ” “ 알았어 그만 해. ” “ 내 잔소리 듣기 싫으면 누나가 알아서 자중해. ” “ 음. ” “ 그만 들어가자. 누나 두 병 혼자서 다 마셨으니까 오늘 할당량은 채운거야. 일어서. ” “ 벌써? 조금 더 있다가자. ” “ 안 돼. 나 들어가 봐야돼. 내일 일찍 약속있어. ” “ 그래? 알았다. ” 영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서는 현조를 바싹 끌어당겨 품에 꼭 안으며 현준이 중얼거렸다. “ 밥 좀 많이 먹어. 앙상한게 뼈밖에 안 남았네. ” “ 많이 먹고 있어. ” “ 얼른 들어가자. 춥다. ” 술기운 때문인지 쌀쌀한 밤공기가 그다지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준에게서 기분좋은 비누냄새가 났다. 강후에게서는 늘 니코스의 은은한 향이 풍겼었는데……. “ 현준아. 누나가 선물 하나 해줄까? ” “ 뜬금없이 무슨 선물? ” 현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 건너편에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화장품가게가 보이자 현조가 현준을 끌고 길을 건넜다. “ 어서오세요. ” 화장을 짙게 한 주인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았다. “ 남자향수 좀 볼려고 하는데요. ” “ 네. 어떤 걸 찾으세요? ” “ 니코스 있어요? ” “ 네. 잠시만요. ” 주인여자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여러개의 향수 중 뚜껑이 특이하게 생긴 향수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 남자향수치고 많이 독하지도 않고 잔향이 특히 더 좋아서 젊은 분들이 많이 찾는 제품이예요. 한 번 뿌려보세요. ” 여자가 내미는 향수병을 들고 손목에 살짝 뿌리자 강후에게서 풍기던 그 향이 현조의 코를 자극했다. 단지 같은 향을 맡았을 뿐인데, 마치 강후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 “ 현준아. 향 괜찮지? ” 손목을 현준의 코에 들이대자 현준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 글쎄. 뭐 괜찮은것 같네. ” 시큰둥한 현준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현조는 값을 치르고 향수병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화장품 가게를 나와 포장이 된 향수병을 현준에게 내밀었다. “ 이제부터 이거 뿌리고 다녀.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 “ 나 향수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남자가 무슨 향수는. ” “ 그래도 뿌려. 난 이 향이 좋아. 그러니까 무조건 뿌리고 다녀. 알았지? ” 막무가내로 뿌리고 다니라는 그녀의 말에 현준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원이면 그냥 뿌리고 다니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 현조는 손목을 다시 코끝에 가져다댔다. 향수의 잔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 강후야. 네 향이 난다. 내 손목에서 네 냄새가 나. ’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현조는 손목을 코에다 대고 있었다. 언젠가는 없어질 이 향처럼 강후에 대한 기억도 이렇게 사라져버리길 바라며 현조는 쓴 웃음을 지었다. ================================================================================== 몇 날 며칠 클럽에도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강후는 해가 지고 방안에 어둠이 깃들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현기증까지 났다. 넓은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말간 물이 들어있는 생수병 하나를 꺼내서 벌컥벌컥 들이키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것 같았다. 냉장고 안에 있는거라곤 생수병 몇 개와 도우미가 해두고 간 반찬들, 그리고 맥주캔들 뿐이었다.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반찬도 며칠안에 쓰레기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제대로 밥을 먹어본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 따르릉- 따르릉- ] 전화벨이 울렸다. 강후는 아직까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소파에 털석 주저앉았다. “ 여보세요. ” [ 아직 클럽에 안 나갔구나. ] “ 네. 어머니. ” [ 이제 정신 좀 차린거냐. ] “ 네. ” ‘ 네 ’라고 대답은 했지만 말하는 강후도, 듣고있는 장여사도 그렇지 못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 내일 재룡이 나한테 좀 보내라. ] “ 재룡이를요? 무슨 일로…….” [ 그건 알거 없고. 며칠 휴가준다 생각하고 보내. 내가 재룡이한테 시킬 일이 좀 있어.] “ 어머니 직원들 시키지 왜 재룡이를 시키려고 그러세요? ” [ 잔말말고 보내. 너한테 득이 되면 됐지, 손해나지는 않을거다. ] “ 알겠습니다. ” [ 밥 제대로 챙겨먹고 다녀. 전에 보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 “ 네. ” [ 그럼 끊는다. ] 전화기를 내려놓고 강후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또 다시 현조의 얼굴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강후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베개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버렸다. ================================================================================== [ 똑똑 ] 노크소리가 들리자 장여사는 보고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들었다. “ 들어와요. ” 문이 열리고 재룡이 장여사를 향해 깊숙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일찍 왔구나. 거기 앉아라. ” “ 네. ” 재룡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장여사가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류를 읽느라 뻑뻑해진 눈을 꾹꾹 눌렀다. “ 강후 아직도 그러고 있냐? ” “ 아닙니다. 이제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 장여사가 같잖다는 듯이 재룡을 보며 웃었다. “ 그렇게 감싸줄거 없어. 나도 다 알고 있으니까. 그 놈 아직도 그 모양이지? ” “ ……네. ” “ 언제쯤 나아질것 같니? ” “ 잘……모르겠습니다. ” “ 니 생각엔 저대로 놔둬도 될것 같냐? ” “ ……. ” 재룡이 대답없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장여사가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넌 그 애 본 적 있겠구나. ” “ 누구 말씀입니까? ” “ 내 아들놈 병신 만들어 놓은 애 말이다. 현조라나 뭐라나. ” “ 네.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 “ 요즘 어디있냐? ” “ 저도 잘……. ” “ 알아 봐. ” “ 네? ” “ 그 애 어디있는지 알아내서 나한테 데리고 와. ” “ 무슨 일로…….” 재룡이 궁금한 듯 물었지만 장여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이길래 잘난 자신의 아들을 반폐인을 만들어놨는지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얼마나 잘났기에 강후가 저렇게 정신을 못차리는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을 해볼 참이었다. “ 그냥 알아보기나 해. 어디 있는지, 뭐하고 있는지. 강후한테는 내가 너한테 일 시킨다고 했으니까 따로 보고할거 없다. ” “ 네. ” “ 되도록 빨리 알아 봐. ” “ 알겠습니다. ” 재룡이 나가고나자 장여사는 못마땅하게 혀를 끌끌차며 다시 서류를 집어들었다. 42 동대구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재룡은 다시 한번 현조의 집 주소를 확인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알아낸 주소에 그대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지현조라는 여자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서울에서 살던 집도 정리해 버렸고, 휴대폰 번호도 바꿔버려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장여사가 일을 맡긴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되도록 빨리 일을 마무리짓고 강후에게로 돌아가야 할것 같아 재룡은 마음이 바빠졌다. 요즘처럼 강후가 정신을 반쯤 빼놓고 있으면 영 불안했다. 대구는 낯설어서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차를 도로가에 대고 지나가던 40대 남자를 향해 물었다. “ 죄송하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 “ 네.” “ 달서구 이곡동이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 “ 이곡동요? 여기서 좀 먼데…….” “ 얼마나 걸릴까요? ” “ 한 50분 정도 걸리지 싶은데, 일단 대구역쪽으로 가서 거서 사람들한테 물어보이소. 거기서는 한 20분이면 가니까. 대구역은 이 길 따라 쭉 가서……. ” 한참동안 남자의 설명을 듣고 재룡은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 가다보니 대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30분 뒤 대구역 앞에서 또 길을 물어서 겨우 이곡동이라는 곳을 찾아냈다. 주택가 앞에 차를 세우고 재룡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오긴 했는데, 만나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무작정 강후어머니가 보잔다고 하면 따라나설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가는 장여사한테 체면이 안 설것 같고, 참으로 난감했다. 한참동안 고민을 하던 재룡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작은 슈퍼안으로 들어갔다. “ 실례합니다. ” “ 예. ” “ 여기가 이곡동 맞습니까? ”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멍청한 질문을 한다 싶은지 남자가 뚱하니 재룡을 올려다보았다. “ 맞는데요. ” “ 그럼 이 주소지가 어딘지 좀 봐주시겠습니까? ” 종이를 내밀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소를 쭉 훑어보았다. “ 여서 가깝네. 저 길 건너가가 와룡시장이란 데가 있는데 그 근처지 싶네요. ” “ 아- 네. ” “ 주소만 갖고는 찾기 힘들낀데, 전화번호 같은 건 없스예? ” “ 네. ” “ 그럼 일단 거 가서 물어보이소. ” “ 감사합니다. ” 투박한 사투리를 들으니 괜히 웃음이 났다. 차를 근처 유료주차장에 세워두고 재룡은 걸어서 길을 건넜다. 그리고 시장을 한참 헤매고 난 뒤에야 비로소 현조의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파란색 철제 대문을 보며 재룡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점심을 대충 떼워서인지 배가 출출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나서 현조를 만나볼 참이었다. 그는 다시 시장으로 들어가서 칼국수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했다. 식당을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빈 손으로 남의 집에 가기가 뭐해서 시장에서 과일바구니를 사들고는 씩씩하게 현조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 누구세요.” 안에서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얼핏 들었던 현조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그래도 집은 제대로 찾은 모양이다. “ 실례합니다. 저 지현조씨 계십니까? ” “ 전데, 누구세요? ” “ 잠시만 나와보시겠습니까? ” 조금있자 안에서 문이 열리고 짧은 커트머리를 한 현조가 얼굴을 쓱 내밀었다. “ 어? ” “ 안녕하셨습니까? 저 누군지 아시죠? ” “ 네. ” 현조가 난감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이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혹시…… 강후한테 무슨 일 있는 건…….” “ 아닙니다. 사장님은 잘 계시…… 아니 그건 아니고,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 “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거죠? ” “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고. ” 재룡이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내밀자 현조가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 뭐하러 이런 걸. ” “ 시간 오래 뺏지 않겠습니다. 사장님 어머님의 부탁을 받고 와서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 “ 누구요? 강후 어머니요? ” “ 네. ” “ 그 분이 왜? ” “ 자세한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하시는게…… 이렇게 길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서요. ” “ 아- 잠시만요. 이것 좀 갖다놓고 나올게요. ” 현조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재룡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현조를 설득할 말들을 정리했다. 어떻게 하면 같이 서울로 갈 수 있을지. 잠시 후 현조가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 갈만한 데라곤 커피전문점 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 네. 상관없습니다. ” 현조가 앞장을 서자 재룡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5분쯤 걸어가자 예쁜 나무간판이 걸린 커피전문점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커피전문점에 앉아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 그 분이 왜 절 찾으시는거죠? ” 한참만에 현조가 말을 꺼냈다. “ 사장님이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 “ 강후……가요? ” “ 네. 벌써 몇달째 일도 제대로 안 돌보시고, 술만 마시고 계십니다. 몸도 많이 상하셨구요. ” “ …….” “ 두 분이 왜 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게……. ” “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 현조가 딱 잘라서 거절을 하자 재룡은 난감해졌다. “ 회장님이 지현조씨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 “ 제가 그 분을 만나야 할 이유 없습니다. ” “ 사장님때문에 걱정이 많으십니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하시는 것 같은데. ” “ 그 일 때문에 오신거라면 헛수고하셨네요. 강후하고 저 이미 끝난 인연이예요. 그만 돌아가세요. ” 현조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잠깐만요. ” 재룡이 얼른 따라 일어섰다. “ 사장님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 잠시 멈칫하던 현조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제가 도와줄 수 없어요. 재룡씨라고 했었죠? 재룡씨가 강후 잘 다독여주세요. 조금 지나면 나아질거예요. ” 씁쓸한 미소와 함께 현조가 돌아섰다. “ 사장님 한번도 이런 일 겪어본 적 없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실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요. ” “ 죄송합니다. 그만 가볼께요. ” 재룡의 간청에도 현조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어떻게 찔러볼 틈도 없어보였다. ‘ 어쩐다. ’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고생하며 찾아온게 아까웠다. 재룡은 커피값을 치르고 차를 세워두었던 유료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숙소를 잡을까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현조의 집으로 향했다. 전화번호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차안에서 어떻게 하면 현조의 마음을 돌릴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파란 대문이 열리고 현조가 집을 나서는게 보였다. 차에 오르는 걸 보니 어디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다. 재룡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조심스럽게 현조를 미행했다. 일단 행동반경을 파악해놓으면 공략할 빈틈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현조는 복잡한 도로를 이리저리 유영하듯 운전을 했다. 검은색 스포츠카가 날렵하게 차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한참 달려 공장지대로 보이는 곳을 지났다. ‘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 여자 혼자서 가기에는 길이 너무 으슥해보였다. 그런데 현조는 그 길을 망설임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 넓은 8차선 도로에 여러대의 차가 서있는게 보이고 현조가 그 앞에 차를 세웠다. 담배를 입에 문 현조가 차에서 내려섰다. 미리 서있던 차에서 남자들이 내려서자 현조가 그들과 몇마디 대화를 주고받고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 곧이어 시동을 거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나오는 광란의 폭카족들인 것 같았다. 재룡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현조의 차가 쌩하고 출발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차들도 너나할것 없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재룡이 급히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이라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차들도 드물었다. 현조의 차 옆으로 요란하게 치장한 빨간색 스포츠카가 따라붙었다. 선두 자리를 놓고 두 대의 차가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다. 속도계를 보니 시속 150킬로 가까웠다. 저대로 가다 사고가 나면 아마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 같았다.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 후로 30분간 재룡은 바짝 긴장을 하고는 그들의 위험한 레이싱에 동참했다. 차가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자 재룡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이대로 황천으로 직행하는줄 알았다. 보통 성격은 아닐거라 짐작은 했지만 저렇게 과격한 성품을 가졌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강후가 이리저리 휘둘리는게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현조가 차에서 내려서는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차에 올랐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현조는 아까왔던 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강후도 문제지만 현조도 저런 식으로 놔뒀다가는 큰 사단이 날 것 같았다. 둘 다 고집불통에 미련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못 잊어서 몸살을 앓을거면 뭐하러 이별을 한건지. 현조가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재룡은 시내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온터라 예약도 하지 못했다. 빈 방이 없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예약이 취소된 방이 있어서 하루종일 피곤했던 몸을 편하게 누일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장여사에게 경과보고를 할까하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것 같아 포기해버렸다. 옷을 벗어두고 샤워를 하기위해 욕실로 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네. 윤재룡입니다. ” “ 나다. ” “ 네. 회장님. ” 장여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자 재룡이 바짝 긴장을 했다. 현조로부터 만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은 터라 뭐라고 보고를 해야할지 난감했다. “ 찾았니? ” “ 네. 그런데…….” “ 그런데 뭐? ” “ 만나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 “ 그래? 이유는? ” “ 이제 사장님과는 인연이 끊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 인연이 끊어졌다…… ” 장여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회장님? ” “ 아직 대구에 있는거냐? ” “ 네. ” “ 내일 아침에 내가 내려갈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 회장님이 직접 말이십니까? ” “ 그래. 만나기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없고, 급한 사람이 우물파야지 별수 있나.” “ 알겠습니다. 그럼 몇 시쯤에…….” “ 여기서 아침에 출발 할 테니까 열 두시쯤 도착할 것 같다. ” “ 그럼 제가 톨게이트에 나가 있겠습니다. ” “ 알았다. ” 전화를 끊고 재룡은 욕실로 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장여사가 직접 나섰으니,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없는 셈이다. 아무쪼록 장여사가 현조를 잘 설득해서 강후의 방황이 이쯤에서 끝나기를 바랄뿐이었다. ================================================================================== 다음 날 열 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재룡은 장여사의 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 “ 얼마나 가야 되는거야? ” “ 한 50분정도 걸립니다. ” “ 그 애 집에 있기는 한거니? ” “ 네. 아직 다른 곳에 취직을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 “ 으음. ” 장여사는 눈을 감고는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젠 차를 오래타는 것도 힘이 들었다. 이제 손주들 재롱보며 쉬어야 할 나이에 일도 놓치 못하고, 거기다 손주를 안겨줄 아들놈은 여자한테 차여서 곤죽이 되어있었다. “ 말년운이 없는게야. ” “ 네? ”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재룡이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 아니다. 나 눈 좀 붙일테니까 도착하면 깨워. ” “ 알겠습니다. ”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도착을 한건지 재룡이 조심스럽게 장여사를 깨웠다. “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 장여사는 피곤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파란 철제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정원이 있는 낡은 단독주택이 정감있어 보였다. “ 그 애 집이 여기야? ” “ 네. ” “ 아직 집에 있겠지? ” “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 “ 그래. ” 재룡이 차 문을 열고 나가자 장여사는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들고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꼼꼼이 살폈다. 어쩌면 평생 인연이 될지도 모를 아이를 만나는데 허술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룡이 초인종을 누르고 조금 있자 키가 훤칠한 여자하나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보통 남자들 정도로 큰 키, 거기다 파리한 인상까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장여사는 실소를 터트렸다. 강후가 넋을 놓고 있다길래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인줄 알았더니 눈 앞의 여자는 차라리 여장부에 가까워보였다. 자신과 어딘지 닮아보이는 모습에 괜히 미소가 그려졌다. 여자가 이쪽을 흘낏 쳐다보더니 재룡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한참동안 재룡과 입씨름을 벌이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장여사는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를 지워버리고 차에서 내려섰다. “ 안녕하세요. ” 여자가 깍듯이 인사를 해왔다. “ 내 아들놈 병신 만들어놓은 게 아가씨인가? ” “ 네? ” 인사도 받지 않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니 흠찟 놀라는 기색이다. “ 죄송합니다. ”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폼이 아직 강후를 완전히 잊지는 못한 모양이다. “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지. ” “ 무슨 말씀을…….” “ 그건 가보면 알고, 이 근처에 팔공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먼가? ” “ 아뇨. 그리 멀지 않습니다. ” “ 들어가서 준비하고 나와요. 기다릴테니까. ” 여자가 뭐라고 더 말을 할 듯 하다 장여사의 얼굴에 드러난 단호한 표정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주세요. 옷만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 “ 그러지.” 여자가 총총히 대문안으로 사라졌다. 당황할 법한데도 별반 그런 내색을 안하는걸 보니 소심한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어디 빠지지는 않겠고……. 장여사는 마음속으로 현조를 평가하고 있었다. 만나봐서 영 아니다 싶으면 강후를 다그쳐서 아예 미련을 버리게 만들 참이었는데, 조금 전 만난 아가씨는 어딘지 정이 갔다. 5분이 채 안되서 현조가 다시 대문을 나섰다. 검은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장여사의 차로 다가왔다. 재룡이 문을 열어주자 현조가 조심스럽게 장여사의 옆에 앉았다. “ 재룡이가 운전하고 이기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 “ 네. ” 기사가 내리고 나자 재룡이 대신 운전석에 올랐다. 아무리 데리고 있는 기사라해도 강후의 얘기를 함부로 내비치고 싶어하지 않은 장여사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팔공산까지 올라가는 동안 장여사와 현조는 별 말이 없었다. 현조가 간간히 재룡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차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제법 가파른 도로를 올라가다 보니 분위기 있어보이는 한정식 집이 나타났다. “ 아직 점심식사 전이시면 여기서 드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 허스키한 현조의 목소리에 장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하지. ” 재룡이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현조가 먼저 내려섰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종업원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자 장여사가 재룡을 향해 말했다. “ 우리 둘이 긴하게 할 말이 있으니까 넌 아랫층에서 식사해라. ” “ 네. ” 재룡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가자 장여사가 먼저 종업원이 안내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장여사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다 현조에게 내밀었다. “ 여긴 어떤게 유명하지? ” 현조가 메뉴판을 꼼꼼히 훑어보며 대답했다. “ 촌두부도 괜찮구요, 그리고 닭도리탕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래? 그럼 두 가지 다 시키지. 그리고 동동주도 한병 주고. ”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자 장여사가 현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어도 보면볼수록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 “ 지현조라고 합니다. ” 현조가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 몇 살인가? ” “ 스물 아홉됐습니다. ” “ 그래? 강후하고 동갑이구만. ” “ 네. ” “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시고? ” “ 아닙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 으음.” 이미 전에 뒷조사를 해서 알고있는 내용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장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직장은 다니고 있어? ” “ 아직. 곧 알아볼 생각입니다. ” “ 그렇군. 근데 우리 강후놈은 왜 그렇게 폐인으로 만들어 놨어? ” “……. ” 자분자분 대답을 잘 하더니 강후의 이름을 듣고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강후도 강후지만 눈 앞의 현조도 그다지 평온한 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 쯧쯧- 둘 다 미련해가지고는……. ’ “ 우리 아들놈하고 왜 헤어진건가? ” “ 네? 그건 말씀드리기가…….” “ 왜? 말하기 어려운 이유로 헤어진거야? ” “ ……. ” 현조가 또 다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 현조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지? 내 아들놈하고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남같지가 않구먼.” “ 아- 편하신대로 부르십시오.” “ 음. ” [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종업원들이 따뜻한 촌두부가 놓여진 큰 접시와 반찬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동동주가 든 도자기병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현조가 장여사에게 물었다. “ 술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 “ 왜? 먹고 주정이라도 부릴까봐? ” “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 현조가 어색하게 웃었다. 잔뜩 굳어있던 인상이 펴지면서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날카롭게 보이던 인상이 웃음하나에 완전히 달라보였다. “ 한 잔 따라봐. ” 장여사가 잔을 내밀자 현조가 잔이 찰랑찰랑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 현조도 한 잔 하지. ” 현조에게서 병을 받아들고 장여사가 현조의 잔에 술을 채웠다. “ 일단 먹고 이야기 하자. 배가 고프면 만사가 비관적으로 보여서 말이야. ” 동동주를 한 잔 마신 장여사가 촌두부를 집어들었다. 따끈따끈한 두부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현조가 간장이 든 종지를 슬쩍 장여사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동동주를 마셨다. 보아하니 그리 막되먹지는 않은 모양이다. 곧이어 닭도리탕까지 나와서 두 사람은 별 말없이 식사를 했다. 어느정도 시장기가 가시고 나자 장여사가 다시 말을 꺼냈다. “ 강후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 궁금해? ” “ 아뇨. 별로. ” 현조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 그 놈 반쯤 미쳐있어. 사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아예 술독에 빠져서 살아. 원인제공자가 누군지는 현조도 잘 알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 “ 죄송합니다. ” 현조가 들고있던 수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 남의 멀쩡한 아들놈을 반병신 만들어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 “ 네? ” “ 왜? 발뼘하려고? 그러면 쓰나? 앞날 창창하던 잘 나가던 내 자식놈. 제 운신하나도 못하게 병신 만들어놨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 “……. ” 현조는 아예 상 위에 코를 박고 있었다. “ 현조야 ” “ 네? ” 장여사가 딸을 부르듯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자 현조가 급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 무슨 이유때문에 헤어진 건지 나도 대충 알고 있는데, 어리석은 짓 한거다. ” “ …….” “ 과거가 뭐 그리 대단한거야? 사람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겪게 되고, 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한테 몹쓸 짓도 하게 돼. 어떻게 인생 살면서 늘 좋은 일만 하고, 즐겁게만 사나? 세상 사람들이 평생토록 살면서 죄하나 안 짓고 사는 것 같아? 다 캐고 들어가면 한 두가지 정도는 죄를 짓고 있어.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 죄값을 치르며 사냐하면 그것도 아니야. 죄라는건 말이지, 자기 의지로 남에게 몹쓸 짓을 한게 죄야. 나도 모르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에게 피해를 준 건 죄라고 할 것도 없어. 고의적으로 저지른게 아니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걸 평생 가슴속에 끌어안고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 “ 제 얘기…… 알고 계시는군요. ” 현조가 담담한 목소리로 묻자 장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현조한테는 미안한데, 전에 내 아들놈이랑 사귀고 있을때 사람을 시켜서 대충 조사를 했어. 뭐 세세한것 까지는 아니고 대충. ” “ 그럼 제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아실텐데요. ” “ 준희가 효상이 사촌동생이라서? 그건 이유가 안되지.” “ 네? ” “ 살면서 내 짝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만나는게 쉬운 일이 아니야. 강후하고 준희는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내가 심각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그 두 사람은 맺어질 인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때문에 그냥저냥 곁에 두고 살아도 별 무리는 없겠다 생각을 했겠지. 솔직히 나도 준희정도면 괜찮은 며느리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고. 강후가 현조랑 헤어지고 나서 두 사람이 다시 연결되길 바랬지만, 그 놈이 준희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니 나도 어쩔수 없는 일이지. 준희하고 강후 완전히 끝났어. 강후한테는 현조가 상처가 되버렸어. 그것도 지독한 상처. 그거 치료해줄수 있는 사람 현조밖에 없어.” “ 잘 해낼 자신이 없어요. 강후를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도 없구요. ” 조심스러운 현조의 말에 장여사가 혀를 끌끌찼다. “ 뭐하러 미래의 일까지 미리 당겨서 걱정을 해? 지금 당장 눈 앞에 드러난 문제도 해결 못하고 있으면서. 그건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문제야. 내 정도 나이가 되면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는 혜안이 생겨.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야. 지금 남들 눈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다 고민이 있고 걱정거리가 있어. 다들 쉽게쉽게 결혼해서 잘 사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거야. 현조는 죄책감때문에 강후하고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알고보면 지금 더 큰 죄를 짓고 있는거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그냥 묻어두는게 상책이야. 평생 자책하면서 산다고 과거를 되돌릴 수 있나? 그것도 아니잖아. 지금 현조가 잡아야 되는 건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야. 돌이킬 수 없는 과거때문에 미래를 망치는 건 미련하고도 어리석은 짓이야. ”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현조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 더 다그치자니 도를 넘어설 것 같아서 장여사는 이쯤에서 생각할 여유를 주기로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영민한 아이라면 결국은 강후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 초면에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군건지 모르겠지만, 내 아들놈이나 현조 둘 다 너무 바보같아서 내가 나선거야. 내가 여기온거 강후는 몰라.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애미된 마음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렇게 나선거야.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마. 알았지? ”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심려 끼쳐드려서. ” 현조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 그리고 내 아들놈 놓치기 아까운 킹카란거 현조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늦기 전에 다시 잡아. 나도 어지간하면 다른 여자 만나라고 하고 싶은데, 그 놈이 현조한테 너무 깊이 빠져들었는지 도무지 헤어나오질 못해.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서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면 좋겠다. ” “ 네. ” 두 사람은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먹고나서 식당을 나섰다. 재룡이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시 현조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장여사는 밖을 내다보며 현조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현조 역시 식당에서의 무거운 대화는 잠시 제쳐 두고 편안한 기분으로 장여사의 질문에 조곤조곤 대답을 했다. 집 앞에 차가 서자 현조가 장여사를 보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찾아오시게 만들어서. ” “ 어른이 보자고 하는데도 건방지게 안 보려고 한다기에 괘씸해서 만나면 혼을 내줄려고 했더니, 어쩌다 보니 잊어버렸네. ” “ 죄송합니다. ” 현조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 난 그만 가볼테니까 깊이 생각해봐. 이대로 강후하고 인연 끊어도 될지, 그래도 될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으면 현조가 먼저 강후한테 연락해. 알았지? ” “ 네.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 “ 그래. 다음에 또 볼 수 있지? ” 은근히 다시 만날 것을 강요하는 장여사를 보고 현조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 나중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제 생각이 정리되면요. ” “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 “ 네. ” 현조가 내려서자 장여사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자 장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현조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잡힐 듯 말듯한데 딱히 이거다라고 정의되진 못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뭔가가 스멀거리며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꺼져버린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42편 끝. 43 ( 완결편) “ 누나 전화왔어. 누나 ……. ” 현준이 부르는 소리에 현조는 이불속에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요 며칠 새로 들어간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휴일이 되자 몸이 천근만근 늘어졌다. “ 누구래? ” “ 누나 친구. 미남이라는 사람.” “ 아- ” 미남이라는 말에 현조는 아직도 몽롱한 정신을 수습해서 거실로 걸어나갔다. “ 여보세요.” “ 현조야- ”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미남때문에 현조는 전화기를 귀에서 멀찌감치 떼어냈다. “ 왜? ” “ 보고싶어. 우잉- ”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듯 콧소리를 내는 미남때문에 현조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 잘 지내고 있지? ” “ 응.” “ 근데 일요일 식전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너 자고 있을 시간 아냐? ” “ 킥킥킥. 그게 말이지…….” 미남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웃기만했다. “ 뭐야. 빨리 말해. ” “ 현조야. 나 약혼해. ” “ 응? ” “ 약혼한다고. 상훈씨랑. ” “ 그래? 잘됐다. 축하해. ” “ 고마워. ”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현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두 커플이 같은 시기에 사랑을 시작했는데, 한 커플은 사랑이 이루어지고, 나머지 한 커플은 이별해 버렸다. 또 다시 가슴이 저릿해졌다. 강후 어머니가 다녀간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확실한 마음의 정리를 하지 못했다. 쉽게 결정내서 툭툭 털어버리기엔 7년이란 시간이 너무 긴 여정이었다. 이젠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지는 4월의 따스한 날씨도 스산한 현조의 마음을 다독여주지는 못했다. 또 다시 침울해지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현조는 과장되게 들뜬 어조로 물었다. “ 근데 너무 갑작스럽다. 일주일 전 만해도 그런 소리 없었잖아. ” “ 아- 그게. 헤헤헤. ” “ 뭐야. 이 웃음은…… 솔직하게 털어놔봐. 너 혹시? ” “ 헤헤헤. 눈치챘냐? 그래 나 사고쳤다. ” “ 엥? 정말? 그럼……. ” “ 그래. 올 10월에 강미남 2세가 태어난다. ” “ 야- 강미남. ” 너무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지르자 미남이 전화기 너머에게 숨이 넘어갈 듯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너 진짜. ” 뭐라고 말도 더 못하고 기가 막혀하는데, 미남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약혼식때 올거지? ” “ 글쎄. 새로 회사 다닌지 얼마 안되서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 “ 무슨 소리야? 내 약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양가 어른들하고 제일 친한 친구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하기로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꼭 와야 돼. 알았지? ” “ ……. ” “ 너 안 오면 나 정말 삐진다. 꼭 와. 다음주 일요일 12시야. 꼭 와. 알았지? ” “ 음. 알았어. 근데 몸도 그런데 차라리 결혼식을 좀 빨리 당겨서 하지 그래? 배 불러오기 전에. ” “ 나도 그럴까 했는데, 우리 마님이 안된단다. 일생에 한번뿐인데, 약혼식도 하고 결혼식도 하자시네. 약혼하고 조금 있다 결혼식 할거야. 배 많이 불러오기 전에. ” “ 많이 힘들지 않겠어? 입덧은 없어? ” “ 별로. 참. 나 지금 약혼식때 입을 옷 가봉하러 가야되거든. 나중에 또 전화할게. ” “ 그래. 그리고 미남아. ” “ 응? ” “ 축하한다. ” “ 그래. 고맙다. 끊을게. ” 일요일 아침부터 메가톤급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도 멍해져 있는 현조를 현준이 툭툭쳤다. “ 누나? 왜 그래? 정신차려. ” “ 어? ” “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 ” “ 별거아냐. 미남이가 약혼을 한다네. ” “ 아- 그래? ”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주방에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시는 모양이다. 다 큰 딸은 늦잠을 자고 늙은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니 그것도 또 미안했다. “ 엄마. 뭐 좀 도와줄까? ” “ 아니. 됐어. 얼른 씻고 와서 밥이나 먹어. ” “ 어.”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다말고 현조는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았다. 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이 낯설었다. 몇 달사이 그녀의 얼굴은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생기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가슴은 사막처럼 퍼석퍼석해져서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살아있어도 산게 아니었다. 그저 눈만 껌뻑거리는 식물인간이 된 것처럼 내내 무기력한 상태가 이어졌다. 이런 상태를 오래 끌고가다가는 그녀 스스로가 견뎌내지 못하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해결방법은 딱 하나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은 강후에게 다가설 용기가 없었다. 아직은……. 그녀는 젖어있는 얼굴에 또 다시 찬물을 끼얹으며 갈등으로 가득한 두 눈을 감아버렸다. ==================================================================================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며 현조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 사개월만에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쫓기듯 서울을 떠났고, 되도록 이곳에서의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간의 노력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듯 낯익은 거리가 눈에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또 강후에게로 생각이 옮겨졌다. 현조는 한숨을 내쉬고는 오디오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에 약혼식을 시작한다고 했는데, 자칫하다가는 늦을 것 같았다. 교통사고때문에 고속도로에서 근 한시간 동안 발이 묶여있었던터라, 시간이 너무 촉박해져버렸다. 약혼식에 늦었다가는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텐데. 약혼식을 한다는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현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면 그곳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한 남자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 이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차라리 보지 않는게 낫다는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만 머리를 가득채웠다. 호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현조는 입고 온 옷에 구김이 가지는 않았는지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경사스러운 날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올 수는 없어서 며칠 고민을 하다 연한 아이보리색 치마정장을 샀다. 늘 짙은 무채색의 옷만 입다 가벼운 컬러의 옷을 입었더니 영 어색했다. 현조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을 보며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소연회장이 있는 36층에 내려서자 이미 약혼식을 보기위해 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단촐하게 할거라더니 그건 빈말인 모양이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같은데, 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미남을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저 끝에서 상훈이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여기. ” 여전히 날라리같은 미소를 지으며 상훈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 오호- 스타일 좋은데. ” “ 잘 지냈어요? ” “ 갑자기 웬 존대? ” “ 친구 신랑한테 반말짓거리하면 안되죠. ” “ 킥킥…… 그런가? 저 쪽으로 가면 미남이 있어. 무슨 애가 긴장도 안하고 지금 사진 찍느라고 난리다. 가서 좀 말려봐. 저러다 약혼식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서 뻗지싶다. ” “ 알았어요. 그리고 ” 현조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상훈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 아무리 요즘 혼수에 아기가 포함된다지만, 좀 심했다. ” “ 뭐 어차피 결혼할거……. 흠흠 ” “ 어쨌든 축하해요. ” “ 고마워. 참 강후……. ” 상훈이 강후 얘기를 막 꺼내려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덕분에 상훈은 현조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상훈의 입에서 나온 강후의 이름에 현조는 바짝 긴장을 했다. 혹시 이곳에 와 있는걸까?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강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미남이 있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만치 앞에서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있는 미남이 보였다. 2월 달쯤에 대구에 한번 왔다 간 이후로 두 달만에 얼굴을 보는것이다. 남들은 임신을 하면 까칠해진다는데, 미남은 어찌된게 피부가 탱글탱글하니 혈색이 좋아보였다. 잘 익은 홍시를 보는 기분이었다. 현조가 가까이 다가가자 미남의 엄마가 그녀를 먼저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 현조 왔구나. 잘 지냈어? ” “ 네. 잘 지내셨어요? 나 왔다. ”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하고 미남을 바라보자 미남이 현조를 와락 끌어안았다. “ 친구야- 보고 싶었다. ” “ 왜 이래. 화장품 묻어. ”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미남을 무뚝뚝하니 떼어내자 미남이 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 친구가 반가운 마음에 안아보겠다는데, 매정한 것. ” “ 그나저나 안 힘들어? 얼굴봐서는 뭐 힘든것같지는 않다만.” “ 그냥저냥 괜찮아. 내가 또 한 체력하잖냐. 어지간해서는 끄덕없어. 이리로 와봐. ” 미남이 현조를 약혼식장 한 구석으로 끌고갔다. “ 얼굴이 많이 까칠하다. 아직도 힘들어? ” 걱정스러운 미남의 말에 현조가 고개를 저었다. “ 이제 많이 나아졌어. 걱정 마. ” “ 그래? 그리고 혹시 강후씨 봤니? ” “ 여기…… 왔어? ” 갑자기 목이 탁 막혀왔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 아직 못봤구나. 아까 왔더라구. 그 쪽도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 ” “ 그래? ” 갑자기 약혼식장 안이 너무 덥게 느껴졌다. 그리 더위를 느낄만큼 푹푹 찌는 날씨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진땀이 났다. “ 현조야 괜찮아? ” 잔뜩 굳어진 현조의 얼굴을 보며 미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 응? 아- 괜찮아. 그나저나 이제 곧 식 시작하지 않나? ” “ 맞다. 그만 가봐야겠다. 이따 식 끝나고 다시 보자. 먼저 가기 없기다. 알았지? ” 다짐을 받는 미남에게 확답을 해주지 못했다. 식이 시작되면 아무도 몰래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강후를 다시 만나고 난 후 쉽게 돌아설 자신이 없었다. 곧이어 약혼식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있자 현조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불안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강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강후가 먼저 피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미남을 통해 자신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테니, 미리 자리를 피해버렸는지도. 약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현조는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미남을 보자 기쁘기도 하면서 또 서운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멀리 떨어져 살고있는데 이제 결혼까지 하면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지리라. 제일 친한 친구를 뺏긴 듯한 기분이 들어 자꾸 기분이 침울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찌를 듯이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을 보고 말았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귓가를 울리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윙윙거리기만 했고, 이 넓은 약혼식장에 자신과 강후만이 남은 것 같았다. 강후는 검은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 그의 목에 자신이 준 목걸이가 걸려있는 것을 본 현조의 눈빛이 한 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강후의 얼굴은 뭐라 딱 집어서 정의할 수 없게 다양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또 놀라기도 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주볼 수 밖에 없는……. 애써 정신을 수습한 현조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자 강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 ‘ 현조다. ’ 약혼식장 구석진 자리에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고 있는 현조에게 시선이 닿자 강후의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 현조가 많이 달라졌다. 길고 찰랑거리던 검은색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많이 야위었다. 잘 살거라더니, 고작 저 꼴을 하고 살려고 자신을 떠났던 모양이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자신의 아픈 눈길에도 현조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또 가슴이 아려왔다. 이대로 돌아서 버리면 적어도 현조의 가슴은 아프지 않을텐데, 자꾸만 미련을 게워내는 어리석은 마음에 끝내 돌아서지 못하고 결국은 현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현조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마치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야 할 사람인것처럼, 그렇게 현조가 인사를 건넨다. 겨우 5,6미터 밖에 안되는 거리인데,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을 돌려야하는데 도저히 현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 잘 지냈냐 지현조? ’ ‘ 응. 너는? ’ ‘ 나도…… 아니 잘 못 지냈어. ’ ‘ ……. ’ ‘ 나 보고 싶었니? ’ ‘ ……. ’ ‘ 난 너 많이 보고싶었다. 매일 밤 네 기억때문에 잠을 설치고, 아침마다 오늘은 혹시 네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그런 헛된 기대를 하면서 살고 있어. 넌 안 그러니? 나 완전히 잊고 살았어? ’ 현조가 그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뒤 약혼식이 끝나자 현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다가서서 목소리라도 들어야하는데, 야윈 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줘야하는데, 현조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걸 막고 있었다. 현조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섰다. 이대로 보내버리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망설이는 사이 현조가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서도 현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급하게 약혼식장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로 내달렸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니 현조의 검은색 스포츠카가 얌전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 아직 떠나진 않았구나.’ 긴장이 탁 풀어지면서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 현조는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뛰는 심장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미남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약혼식장으로 돌아가려니 강후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대구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성은 그냥 이 곳을 떠나라고 말을 하는데, 그동안 탄탄하게 쌓아두었다 생각했던 강후를 향한 마음이 잠깐의 만남으로 홍수를 만난 댐처럼 제멋대로 범람해버렸다. ‘ 그냥 떠나야 하는데……. ’ 서로를 위해서 그냥 돌아서야 하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 곳을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 한 번만 더 보자. 멀리에서라도 한 번만 더 보고 가자. ’ 그만두라는 이성의 권고를 무시하고 현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약혼식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후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 없다. ’ 쿵쿵뛰던 심장이 그냥 딱 멈춰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 조금 더 볼걸. 이렇게 빨리 가버릴줄 알았으면, 조금 더 많이 봐둘걸. ’ “ 현조야. ” 미남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현조는 눈을 깜빡여 두 눈에 고인 눈물을 애써 떨궈버렸다. “ 같이 나가자. ” “ 어딜? ” “ 이 거추장스러운 옷 벗어버리고 우리 못다한 회포나 풀어보자. ” “ 그냥 가도 돼? 어른들은? ” “ 양가 어른들끼리 하실 말씀이 있다고 우린 먼저 가라 그러시네. 너 시간되지? ” “ 아니…… 미안한데 미남아. 나 그냥 가봐야 될것 같아. ” “ 왜? 온지 얼마나 됐다고? ” “ 미안해. ” “ 너 강후씨 봤구나? ” 걱정스럽게 묻는 미남을 보며 현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음. 근데 얼굴이 많이 야위었더라. ” “ 에휴- 둘 다 사서 고생하느라 애쓴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 “ 그만 가볼게. 미안하다. ” “ 아니야. 미안하긴. 나중에 내가 상훈씨랑 대구에 놀러갈게. 조심해서 내려가. ” “ 알았어. 그리고 축하해. ” “ 그래. ” 아쉬워하는 미남을 뒤로하고 현조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시 혼자있게 되자 가슴이 저며왔다. 한 번 만 더 볼 수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조는 힘없이 자신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키를 꽂고 막 문을 여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세웠다. 흠짓 놀라 뒤돌아보니 강후가 생각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심장이 가쁜 줄달음질을 쳤다. “ 현조야. ” “ 어.” “ 잘 지냈어? ” “ 응. 넌? ” “ 나도 잘 지냈어. ” 슬쩍 미소를 짓는 강후의 얼굴에 고통이 짙은 잔영을 남기고 있었다. 잘 지냈다고 말은 했지만, 두 사람 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었는지 바싹 야위어버린 서로의 얼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강후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 안에 있는 현조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 강후야. ” “ 응? ” 강후는 여전히 현조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는 없었다. 또 다시 미련이 생길까봐 그는 내내 현조의 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얼굴 좀 보자. 강후야. ” 현조의 말에도 강후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 강후야. ” “ 아니. 네 얼굴 더 이상 안 보고싶다. 얼굴보면 너 그냥 못 보내줄 것 같아서. ” “ ……. ” 한참동안 그렇게 손만 조물락거리던 강후가 어렵게 입을 뗐다. “ 한번만…… 안아보자 현조야. ” “ 응? ” “ 더 욕심 안부릴게. 그냥 한번만 안아보자. ” “……. ” 현조가 대답이 없자 강후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옅은 향수냄새와 함께 쿵쿵뛰고 있는 강후의 심장박동이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졌다. 현조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강후를 마주안았다. 지난 몇 달간 이런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소원했는지. 강후는 더욱 더 힘을 줘 현조를 끌어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현조와 둘이서만 살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자꾸만 머리를 치켜들자 강후는 어렵게 현조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현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잘 살아. 알았지? " “……. ” “ 아프지 말고, 그리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너 많이 아껴주는 사람 만나서, 늘 웃고만 살아라. ” “ 강후야. ” “ 그만 가볼게. 만나서 반가웠다. ” “ 음.” 마지막으로 강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뒤돌아섰다. “ 강후야. ” 현조가 돌아서는 그를 잡아세웠다. 그리고 한참동안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 너도 ……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해라. ” 강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한테 여자는…… 네가 마지막이었어. 다른 여자 마음에 들여서 네 자리 뺏고 싶지 않아. 그만 가볼게. ” 그렇게 강후는 멀어졌다. 현조는 멀어지는 강후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이미 어둠이 내린 서울의 야경은 온통 반짝이는 불빛으로 화려한 모습을 뽐냈다. 현조는 한산한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몇 시간째 한 곳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대구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곳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후가 있는 서울을 떠나 대구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강후로 꽉 차 버렸다. 비워낸다고 죽을 애를 썼는데 잠시 마주친 강후의 얼굴때문에 물에 푹 절은 솜마냥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만 더 보자. 아니 얼굴은 보지 못해도 강후가 살고 있는 집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 기억때문에 앞으로 몇 년을 고통속에서 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수백번씩 찾아갔을 강후의 빌라를 향해 차를 몰았다. 화려한 빌라의 외관이 눈에 들어오자 현조는 구석진 자리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한참동안 강후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불이 켜진 걸로 봐서 아직 집 안에 있는 모양이다. 클럽에 나가봐야 할텐데. 강후 역시 그녀와의 만남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강후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한참 신호가 가고 강후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 여보세요. ] “ ……. ”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듯 그냥 ‘여보세요’ 라고 하는게 또 속이 상했다. 새로 만든 번호라 당연히 강후가 모르고 있을텐데, 현조는 무심한 강후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 여보세요. ] 조금 짜증이 섞인 듯한 강후의 음성에 현조가 목을 가다듬고 힘들게 한마디 했다. “ 나야. ” [ 현조니? ] 금세 목소리가 바뀐다. 짜증이 섞였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져버렸다. “ 응. 나야. ” [ 어디야? ] “ 여기? 음- 그냥 길 가. ” [ 길? 대구야? ] “ 아니…… 응. 대구야. 대구 한 복판이야. ” [ 피곤하겠다. ] “ 아니. 별로. 넌 어디야? ” [ 여기? 음- 클럽. 일하고 있어. 요즘 많이 바빠. ] “ 그래? ” 현조가 주차장에 세워진 강후의 차를 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삼켰다. [ 현조야. ] “ 응? ” [ ……. ] “ 불러놓고 왜 말을 안해? ” [ 보고싶다. ] “ ……. ” 이번엔 현조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 보고 싶어서…… 화가 난다. ] “ 강후야.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 ” [ 응? ] 현조는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남은 이성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미 강후를 향해 무서운 질주를 시작해버린 가슴은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 나…… 기다려줄 수 있니? ” [ 무슨…… 말이야? ] 혼란스러워하는 강후의 마음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다. 현조는 차에서 내려서서 강후의 빌라를 올려다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가까스로 막아두었던 허술한 방벽이 맥없이 붕괴되는 소리가 가슴 저 밑에서 들려왔다. “ 내가 내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될까? " “ ……. " “ 오래 걸릴지도 몰라.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그래도…… 너 나 기다려줄거니? ” “ ……. ” “ 강후야. 안 돼? ” [ 휴우- ] 대답대신 강후의 한숨소리만이 들렸다. 그게 거절의 의미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 돌아올거야? 나한테? ] “ 음. 그러고 싶어. ” [ 기다릴게.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게. ] “ ……. ” [ 돌아오기만 해. 네 마음 편해지면 그때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 미안해. 되도록 빨리…… 너한테로 돌아올게. ”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지루할 정도로 긴 침묵 끝에 강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사랑한다. 현조야. ] “ 나도…… 사랑해. ” 그리고 또 다시 침묵. 이래선 안되겠다 싶은지 강후가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 집에 가서 쉬어. 오늘 많이 피곤했잖아. ] “ 응. 너도 쉬어. ” [ 그래. ] 인삿말을 해놓고도 두 사람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한참동안 강후의 숨소리만 듣고 있던 현조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오래 안 걸릴거야. 곧 돌아올게. 너한테…… 박강후한테로 돌아올게. ” 인사를 마치고 현조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올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밝아진 얼굴로 서울을 빠져나갔다. ================================================================================== 6개월 후. 가을이 오는 듯 열어놓은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강후는 눈을 감고는 코끝을 스치는 바람냄새를 맡았다. 운전을 하던 재룡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 사장님. ” 하지만 강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여유로운 초가을 오후의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 끼익- ] “ 어……어…… ” 재룡의 어버버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차가 급하게 멈춰섰다. 강후는 오랜만의 여유를 망쳐버린 탓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 뭐야? ” “ 그게 저기……. ” 재룡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강후의 차 앞에 오만불손한 자태로 새까만 스포츠카가 떡하니 서 있었다. “ 혹시 그 분 차 아닙니까? ” 하지만 강후는 재룡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가슴이 미칠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앞 차에서 여자하나가 내려섰다. 온통 새까만 옷에 옅은 색의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당당한 걸음으로 강후의 차로 걸어왔다. 그리고 안을 힐끗 쳐다보더니 열려진 뒷 창문에 손을 턱하니 걸쳤다. 그리고 건들거리며 말을 했다. “ 저기 길 좀 물읍시다. ” 강후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 물어보시죠. ” “ 혹시 이 근처에 한 10개월 전에 여자한테 차여서 반병신이 된 남자가 있다는데, 혹시 아시는지? ” “ 글쎄. 그런 멍청한 놈은 찾아서 뭐에 쓸려고 그러십니까? ” 여자가 피식 웃었다. “ 누가 뭘 좀 물어봐달라고 해서요. ” “ 뭘 말입니까? ” 강후가 여자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여자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 혹시 애완용 까마귀 키워볼 생각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 “ 까마귀요? ” “ 네. 뭐 성격이 좀 지랄맞고, 또 가끔 술을 떡이 되게 퍼마시고, 운전을 좀 거칠게 하고, 또 담배를 좀 많이 피우는것 빼고는 하자가 없는 까마귀인데. ” “ 그 정도면 불량까마귀지 싶은데……. ” “ 그래요? 그럼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 놔야하나? ”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한쪽 눈을 치켜떴다. “ 그 까마귀를 맡기기에 적격인 사람이 있긴한데. ” “ 그래요? ” 여자가 관심이 있다는 듯 다시 강후를 내려다보았다. “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잡아다 귀신같이 길들이는 남자가 있다는데…… 이름이 박강후라던가? ” 강후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자를 끌어 안았다. 긴 기다림이 이제 끝난 모양이다. 강후가 긴 한숨과 함께 환영인사를 건넸다. “ 잘 돌아왔다. 지현조. ” 현조가 작은 목소리로 강후에게 말했다. “ 기다려 줘서 고마워. 박강후. ” 가을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울 길거리 한 복판에서 까마귀와 나르시스의 아름다운 재회가 이루어졌다. 43편 끝. ================================================================================== 에필로그 “ 많이 아파? ” “ 아니. 견딜만 해. ” “ 벌써 다섯시간째잖아. 너무 늦게 진행되는거 아냐? ” “ 이게 정상적인 속도야. 아까 간호사가 그랬잖아. 유난 좀 떨지 마. ” 강후는 병원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새벽녘에 서서히 진통이 오기 시작해서 이제 진통간격이 약 5분 정도로 짧아졌다. 본격적인 진통은 지금부터 시작일텐데, 강후는 벌써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 그만 좀 나가있어. 옆에 산모들 신경쓰이게 왜 자꾸 들락날락거려? ” 현조가 옆 침대에 누워있는 다른 산모들의 힐끔거리자 강후가 짜증을 냈다. “ 거봐. 그냥 가족분만하자니까. ” “ 너 이럴줄 알고 그랬지. 가족분만했어봐. 아마 지금 병실에서 난리났을거다. 좀 진득하게 있어. ” “ 어떻게 진득하니 기다리냐? 네가 아프다는데…….” “ 아- 견딜만 하다잖아. ” “ 거기 좀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 멀리서 다른 산모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던 간호사가 눈치를 줬다. “ 그만 나가. 나중에 좀 더 진행되면 그 때 들어와. 밥도 좀 먹고. ” “ 알았어. ” 강후는 못내 미련이 남은 얼굴로 분만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무로 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조는 아침을 먹으라고 했지만,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누구는 저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맘 편하게 밥이 넘어갈리가 없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는데 누군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쓱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장여사가 한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어머니. ” 장여사가 오니 그제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다. 혼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내내 발만 동동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 그래 기분이 어때? ” “ 현조가 힘들어하니까 맘이 안 좋네요. ” 강후가 또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분만대기실을 바라보았다. 또 들어가 볼까? “ 네 자식 낳느라 그런건데, 뭐가 맘이 안 좋아? 맘 편하게 먹고 기다려. ” “ 네. ” “ 현조는 어때? ” “ 자꾸 괜찮다고만 하네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으면서. ” “ 잠깐 들어갔다 올테니까 커피마시고 있어. ” 장여사가 분만대기실로 들어가버리자 강후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셨다. “ 강후씨.” 누가 이름을 불러 고개를 들어보니 미남이 이제 막 4살이 된 경호의 손을 잡고는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오셨어요? ” “ 네. 경호아빠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어요. 얼마나 진행됐어요? ” “ 진통간격이 이제 5분이라는데……” “ 그래요? 그럼 곧 낳겠네. 우리 경호 좀 봐주세요. 저 현조 좀 보고 올게요.” 미남이 경호를 강후에게 떠넘기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강후는 한숨을 내쉬며 경호를 내려다보았다. 영양사인 엄마덕에 심하게(?) 영양상태 좋은 신체와 날라리같은 제 아빠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아 벌써부터 눈웃음을 살살 치고있는 하얗고 포동포동한 얼굴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 사탕 사줘. ” 보자마자 사탕을 사달랜다. “ 나중에. 지금 삼촌이 정신이 없거든. 그러니까 나중에 사줄께. ” “ ……. ” 이 놈 금세 울음을 터트릴 태세다. 난감한 표정으로 경호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경호가 하늘높이 공중부양을 했다. “ 너 삼촌한테 사탕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지? 엄마 알면 혼난다. ” 상훈이 아들녀석을 목마를 태우며 말했다. 경호는 겁도 안 나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 왔냐? ” “ 그래. 네 꼴이 참 민망스럽다. 세수도 안했구나. ” 자다 그냥 병원으로 뛰어와서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있고, 양말도 신지 않은 강후를 보며 상훈이 혀를 끌끌찼다. “ 세수할 정신이 어디있냐? ” “ 그래도 폼생폼사 우리의 박강후가 이런 꼴로 자식과 첫만남을 하면 곤란하지. ” “ 그럴래나? ”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첫 대면인데, 좀 말끔한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을까? “ 그럼 화장실에서라도 씻고 올까? ” “ 화장실은 무슨. 요 앞에 목욕탕있더라. 거기 가서 씻고 와. 진통간격이 얼마라고? ” “ 5분. ” “ 그래? 그럼 아직 여유있어. 얼른 갔다 와. ” “ 그래도 될까? 혹시 그 사이에 낳는거 아냐? ” “ 아니라니까. 우리 경호 낳을 때 24시간 버틴거 몰라? 괜찮아. 갔다 와. ” 영 불안한 눈빛으로 분만대기실을 바라보던 강후가 비적비적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50분 뒤 강후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상훈이 뻘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뭐야? 네 표정이 왜 그래? ” “ 그게 있지……. ” 상훈이 옆에서 웃음을 삼키고 있는 미남의 옆구리를 팔로 쿡쿡 찔렀다. “ 그게 강후씨. 벌써 낳았거든요. ” “ 네? 아직 멀었다면서요? ” 강후가 기가 막힌 얼굴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 그게…… 네 마누라가 원래 한 터프하잖냐. 애 낳는거까지 그럴줄 몰랐지. 갑자기 진행이 막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낳아버리더라구. 우리도 지금 어리버리해서 있는거야. 너 가고 나서 한 20분있다가 분만실 들어간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기에 너한테 전화했더니 전화를 안 받잖아. 그래서 목욕탕에 전화했더니 너 없다고…….” “ 아씨- 가자마자 씻고 꽃집가서 나중에 병실로 꽃 배달 해달라고 주문하고 왔지. 미치겠네 진짜. ” 강후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상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상훈이 먼 산을 보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누군가 바짓가랑이에 조롱조롱 매달려서 밑을 내려봤더니 경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사탕 사줘. ” “ 으이구- 어디있어? 어머니는? ” “ 네 마누라는 아직 분만실에 있고 어머니는 신생아실로 가셨어. 너도 얼른 가봐. “ 상훈이 강후의 다리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경호를 떼어내며 그를 신생아실 쪽으로 밀었다. 강후는 인상을 팍팍쓰며 아래층에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갔다. 막 계단을 내려서니 아기자기한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커다란 통유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장여사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어머니. ” 그의 목소리에 장여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무라듯이 한소리를 했다. “ 어디갔다 온거야? 전화도 안 받고. ” “ 그렇게 됐어요. 어디…… 있어요? ” 강후가 안을 힐끔 쳐다보자 장여사가 한 곳을 가리켰다. “ 뭔지 안 물어봐? ” “ 참. 아들이예요? 딸이예요? ”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걸 물어보는 것도 잊고 있었다. “ 네가 정신이 없긴 없는 모양이다. 아들이야. 너 꼭 빼닮은 아들. ” 아들이라는 소리에 강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 상훈이 아들있다고 어찌나 유세를 했던지. 간호사가 하얀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강후의 눈 앞에 내밀었다. 빨간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거기다 눈도 안 뜨고 있는 아기를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 어머니. 원래 저렇게 생겼어요? ” “ 그럼. 갓 태어난 애기가 뭐 얼마나 예쁘겠냐. 한 달만 지나봐. 뽀얗게 이뻐질테니까. 너도 태어났을 때 저랬어. 사실 저 놈보다 더 못생겼었지만.” 아기가 입을 오물거리더니 인상을 썼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이 엄청 많았다. “ 머리카락이 길어요. 어머니. ” 강후가 신기한 듯이 장여사를 바라보았다. “ 그러네. 제 애미 닮아서 머리숱이 많은 모양이네. ” “ 그러게요. ”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저릿저릿해졌다. 저 놈이 내 아들이다. 박강후와 지현조의 발명품 1호.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 그만 올라가봐. 현조 나왔을거야. ” “ 네. ” 강후가 다시 한번 아기를 바라보고는 서둘러 윗층으로 올라갔다. “ 현조 나왔어? ” “ 응. 병실로 금방 들어갔어. 미남이가 같이 가 있어. ” “ 그래? ” 강후가 빠른걸음으로 특실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파리한 인상의 현조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왔어? 우리 애기 봤어? ” “ 어. 봤어. ” 가슴이 갑자기 탁 막혀왔다. 같이 있어줘야 했는데, 멍청하게. “ 미안. 탯줄도 못 잘라줬네. 미안해 현조야. ” “ 괜찮아. 그게 뭐 별건가. 그저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된거지. ” 여전히 무드라고는 없는 현조의 무뚝뚝한 대답에 강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결혼해서 장장 3년동안 현조는 변한게 없었다. 애교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거기다 어머니인 장여사와 어찌나 친한지, 가끔 보면 현조가 딸인것 같고, 강후가 사위인것 같았다.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가끔씩 강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둘이 속닥거리면서 킥킥거렸다. 아무래도 예전에 강후와 현조가 헤어졌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처음 현조를 장여사에게 데리고 갔을 때도 두 사람은 그가 모르는 뭔가를 공유한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뭔지 현조에게 물어봐도 그녀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너 닮았다고 그러시더라. 어머님이. ” “ 머리숱 많은 건 너 닮은것 같더라. 머리가 아주 새까매. ” “ 축하한다. 박강후. 드디어 애 아버지네. ” “ 그러게. 고생많았다. 현조야. ” 강후가 현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흠흠. 그럼 전 나가볼테니까 두 분 분위기 많이 잡으세요. ” 미남이 헛기침을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강후가 현조의 입술에 막 키스를 하려는데, 누군가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밑을 내려다보자 미남이 떨구고 간 상훈2세가 강후를 올려다 보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 사탕 사줘. ” 까마귀 vs 나르시스 끝.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전스폐셜이 있으니 그것까지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화령 올림. 외전 스페셜-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 [1] 해돋이 본 후 그들의 여행경로. “ 진짜 우리끼리 따로 다닐거야? ” “ 그래. 그만 좀 물어봐. ” “ 강후씨가 그러자고 했어? ” “ 그게 뭐가 중요해? 어쨌거나 우리 둘만 놀러다니게 된게 중요하지. ” 상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미남을 슬쩍 쳐다보았다. 포동포동하니 하얀 얼굴이 히터의 온기때문에 살짝 붉어진게 딱 먹기 알맞게 익은 홍시같았다. “ 홍시같다. ” “ 뭐? ” “ 너 말이야. 적당히 익은 홍시같다고. ” “ 진짜 갈수록 태산이네. 호빵도 모자라서 이젠 홍시? ” 화가 나서 불퉁거리는 미남을 달래고 꼬셔서 마침내 미리 예약해 두었던 설악산의 호텔로 향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나서 그들은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분위기를 잡았다. “ 여기 너무 좋다. ” 미남이 꿈을 꾸듯 몽롱한 시선으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 앗싸- 분위기 좋고. 고지가 저기다. 좀 더 분위기를 잡아놓고, 그냥 한 입에. ’ 상훈이 비실비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미남의 손을 잡았다. “ 미남아. 우리 그만 룸으로 갈까? ” “ 그럴까? ” 미남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을 한다. 어후. 귀여운 것. 룸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샤워를 하고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상훈이 물기 젖은 미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안 피곤해? ” 분명 늑대의 유혹멘트다. 그걸 눈치 챈 미남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 아니. 별로- ” 그러면서 미남이 작게 하품을 한다. 오호라- 분명 여우의 꼬리치기 아닌가? “ 우리 그만 잘까? ” “ 흠- 글쎄. ” 미남이 괜히 몸을 배배 꼬았다. ‘ 귀여운 것. 내숭까지. 음하하하- ’ 상훈이 살짝 붉어진 미남의 얼굴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갸냘픈(앗! 정정) 토실토실한 미남의 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찌나 말랑말랑한지……. 곧 이어 룸의 불이 꺼지고 하얀색 욕실 가운 두 개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 잠깐만 있어 봐. 상훈씨- ” “ 있기는 뭘 있어. 일루 와. 얼른. ” “ 상훈씨- ” “ 으음-.” 크리스마스 이브의 한을 모두 풀어버리려는 상훈과 미남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2] 경호의 탄생 비화. “ 아직 멀었어? ” “ 몰라. 아파 죽겠어. 어흑- 엄마. ” 땀을 흘리며 아파하는 미남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가뜩이나 작은 키에 배까지 불러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더니 이제서야 그 큰 짐을 내려놓으려 미남은 용을 쓰고 있었다. 상훈은 벌써 22시간째 옆에서 같은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같이 고생해야 한다며 밥도 못 먹게 하는 미남때문에 그는 눈 앞이 노래졌다. 가족분만을 고집하는 미남때문에 병실 안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 그냥 수술해 달라고 하자. 응? 미남아- ” “ 안돼. 기필코 자연분만 할거야. ” 아파서 죽을려고 하면서도 기어이 자연분만을 하겠다니 미남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기특해 보였다. 딴 여자들은 조금만 아파도 수술해달라고 난리를 친다는데, 우리의 호빵 미남은 역시 용감했다. 잠시 후 누가 노크를 했다. “ 들어오세요. ” 문이 열리고 현조가 강후와 손을 꼭 잡고는 들어섰다. 일주일 전 서울로 돌아온 현조는 그새 얼굴이 많이 좋아져있었다. 그리고 강후 역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모두 잊어버린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어때? 아직이야? ” 현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남을 바라보았다. “ 그러게. 진행이 좀 늦네. ” 미남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근 하루동안 먹지도 못하고 용을 써서인지 통통하던 미남의 얼굴이 좀 야윈 것 같기도 했다. “ 두 사람 보기 좋다. ” 그 와중에도 현조와 강후의 재회를 축하하는 말을 건네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은 있는 모양이다. 강후가 잡고 있던 현조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 언제쯤 태어날거래? ” 강후가 상훈을 보며 묻자 그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 몰라. 아직 멀었나봐. ” “ 그래? 너 밥은 먹었냐? ” “ 아니. ” 그러면서 은근히 미남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그만 먹으러 가면 안되겠냐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 그럼 나하고 같이 나가자. 현조더러 옆에 있으라고 하고. ” “ 그래도 될까? 미남아? ” 미남이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대신 금방 와. 알았지? 나 애기 낳는거 봐야돼. 알았지? ” 재차 다짐을 받는 미남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고 상훈과 강후는 병실을 나섰다. “ 좋냐? 자식아- ”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강후를 툭툭치며 묻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하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 “ 어쨌든 축하한다. 이제 결혼하는 것만 남았나? ” “ 일단 어머니한테 소개부터 시켜야지. 반대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게 순서니까. ” “ 그래야지. 어쨌든 이제 다 제자리를 찾은거네. ” “ 그러게. 그나저나 기분이 어때? 애 아버지 되는 기분. ” “ 글쎄. 말로 표현이 안되지. 너도 나중에 당해봐라.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 두 사람은 병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막 식당을 나서는데 강후가 그를 보며 말했다. “ 근데 네 꼴이 참 그렇다. 세수도 안했냐? ” “ 세수는 무슨. 내내 미남이한테 잡혀있느라 밥도 이제 한끼 먹는건데. ” “ 그래? 그럼 어디가서 한숨 자고 와. 내가 들어가서 너 잠깐 일이 있어 갔다고 해줄게. ” “ 그래도 될까? ” “ 그래. 아직 멀었다며? ” “ 그렇긴 한데. ” 영 불안해 하는 상훈을 떠다밀고 강후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 3시간 뒤 근처 사우나 안. > “ 저기요. 아까부터 전화 울리는 것 같던데. ” 잠깐 눈을 붙인다고 한게 너무 오래잔 모양이다. 눈을 부시시 떠서 휴대폰을 내려다보니 부재중 전화가 23건이나 와 있었다. “ 뭐야. 도대체 몇 시야? ”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자그마치 3시간이나 자버렸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미남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받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강후가 미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 야. 어쩌냐. 네 아들 벌써 태어나버렸다. 전화 좀 받지. ” “ 아씨- 뭐야. ”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병원으로 뛰어가는데 눈 앞이 깜깜해졌다. 앞으로 미남의 그 살벌한 핍박을 당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급하게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니나다를까 미남이 한껏 그를 노려보았다. “ 어디 갔다 왔어? ” “ 그게. 저 있지 미남아- ” 어쩔줄을 몰라하며 눈치를 보는데 옆에서 현조와 강후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 내 저것들을 그냥. ’ 이를 부드득 갈며 상훈은 훗날을 기약했다. [3] 강후의 아들 성하 탄생일 꽁지가 빠지게 병실로 뛰어가는 강후를 보며 상훈은 킥킥거렸다. “ 너도 좀 겪어봐라.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움하하하- ” 지난 3년간 미남에게 당한 엄청난 갈굼을 이제 강후도 겪게 될 것이다. 그간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이 날이 되기만을 기다렸었다. 드디어 복수를 한 것이다. “ 움하하하- ” 좋아서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데 미남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 “ 뭐가 그렇게 좋아? 경호아빠? ” “ 아니. 있어 그런게. 킥킥킥. ” 좋아서 몸을 배배 꼬면서 웃고 있는데 저쪽 특실의 문이 열리고 강후가 경호를 번쩍 들고 나왔다. “ 네 아들놈 좀 어떻게 해봐라. 나만 보면 사탕 사달랜다. ” “ 으흠. 근데 강후야. 괜찮아? ” “ 응? 뭐가? ” “ 네 마누라 바가지 안 긁어. 옆에 없었다고? ” “ 아니. 괜찮다고 하던데. 왜? ” “ 엥? 정말? 그러면 안되는데.” “ 뭔 소리야 도대체. 네 아들이나 데려가. ” 강후가 경호를 상훈에게 떠넘기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버렸다. “ 어? 이게 아닌데. ” 상훈이 영 찜찜한 얼굴로 병실문을 쳐다보자 미남이 혀를 끌끌찼다. “ 경호아빠. 일부러 그런거지? ” “ 어? ” “ 강후씨도 한 번 당해보라고 일부러 강후씨 목욕탕으로 떠다 민거지? ” 미남이 다 안다는 듯이 말을 하자 상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 에고. 참 정신연령 어리다. 어째 그러냐? ” 미남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상훈을 쳐다보고는 경호를 뺏어들었다. “ 엄마. 사탕 사 줘. ” 여전히 사탕타령을 하는 경호를 보며 미남이 말했다. “ 조금 있으면 네가 네 아빠보다 정신연령이 높아지겠다. 그러면 참 볼만하겠다. ” 미남이 경호를 안고 나가버리자 상훈이 또 다시 병실문을 바라보았다. “ 이맘때 쯤이면 쫓겨나야 되는데……. ” 하지만 상훈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병실 안에서는 웃음소리만이 터져나왔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