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 찌르는 유화물감 냄새에 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회색빛의 벽들. 그 안에 아무렇지 않게 이리저리 널려져 있는 이젤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들. 그리고 이젤 위에 얹어져있는 수없이 많은 그림들. 왠지 모르는 위화감에 유리는 찌푸렸던 미간을 피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여기, 김태연 작업실 맞아? “왔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리는 그 목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쪽에 있는 철제의자를 손으로 잡았다. 의자에 혹시 물감이 묻어있지 않는지 살펴보고서, 의자를 휙 돌려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하고선 잡아당겼다. 끼이익.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마찰음이 들린다. 그 위에 털썩 주저앉자 의자가 삐거덕 소리를 낸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최근에 자신이 찾아왔던 때와 아주 많이 달라져 있다. 지저분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지만, 꼴에 작업하는 곳이라고 해놓고서 물감 냄새 하나 나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코가 마비될 정도. 게다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그림들이라니. 그전엔 그림들 대신에 여자들이 널려 있었다, 이곳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쑤셔 넣은 은색의 라이터가 보인다. 라이터를 꺼내고, 담배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오려면 연락 좀 미리 하고 와라. 제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에 유리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고 연기를 훅, 내뱉었다. 회색빛의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다가 허공에서 순식간에 흩어진다. 터벅터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뭘 사들고 온 모양인지 걸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소리도 난다. 유리는 여전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다시 한 번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탁한 연기를 다시 한 번 깊게 빨아들였다. 왜인지 마음속이 시원해지는 느낌. “연락했잖아.” “야, 바로 앞에서 ‘지금 네 작업실 앞이다.’라고 말하는 게 미리 연락한 거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끝이 뭉툭한 하얀색 운동화의 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유리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한 손에는 무언가가 잔뜩 담긴 검은색 봉지를 들고, 하얀 얼굴은 땀에 젖어있다. 빨아들였던 연기를 훅, 하고 얼굴을 향해 내뱉었다. 그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다. “아, 진짜 씨ㅂ….” “…….” 욕을 채 내뱉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문다. 유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김태연, 욕 하고 싶으면 욕 해. 여긴 그 여자애 없잖아?” “…안 돼. 욕 안하기로 약속했어.”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한 쪽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걸을 때마다 바지에 봉지가 부딪혀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유리는 몸을 숙여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빈 커피 캔을 집어 들고, 안을 확인했다. 안에 갈색 액체가 조금 남아있는 걸 확인하고, 그 안에 피다 만 담배를 집어넣었다. 캔을 약간 흔들어 안에 들어있는 액체가 담배 끝을 적시는 걸 확인하고서 휙 캔을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캔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벽에 부딪혀 멈춘다. 그 모습을 보니 꼭 김태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김태연이 아니라 과거의 김태연. 유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김태연은 벽에 부딪혀서 멈추어버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다. 그 대신 지금처럼 확 변해버린 현재의 김태연이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태연은 그런 현재의 김태연을 있게 한 그 벽, 그러니까 과거의 김태연을 멈추게 해버렸던 그 벽의 이름은 놀랍게도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 그 것도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아직도 걔 만나냐? 대단하다, 대단해. 금방 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시선은 여전히 캔을 주시한 채, 유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언제였더라. 너무 놀라서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를 않는다. 항상 자신과 함께 이 여자 저 여자와 놀러 다니던 태연은 어느 순간부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더 이상 이런 생활 하지 않겠다고 유리에게 말했다. 자신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던 여성편력을 자랑하던 태연이 한 여자에게만 정착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다니. 유리는 그 말을 들었을 때에 애가 미쳤나 싶었다. - 너 미쳤어? 왜 이래. 술 마셨어? - 야, 난 진심이야. - 진심 좋아하네. - 진짜라니까? 나 이제 술도 안 마실 거야. 여자들도 안 만날 거고, 그리고. - 어이쿠야. 그래, 그리고 또 뭐? - 그림도 다시 그릴거야.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 얼굴이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유리는 마시던 콜라를 태연의 얼굴을 향해 뱉어버렸었다. 유리의 배출물에 얼굴을 확 찌푸리던 태연은, 금방 담배연기를 내뱉은 유리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욕을 하려다가 말고 입을 굳게 다물었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 여자와 이제 욕도 안하기로 약속했다나.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꽤나 오래 지났는데 지금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내뱉는 김태연이라니. 10년을 넘게 알아온 김태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서, 아직도 여전히 얼떨떨한 유리였다. 태연은 대답 없이 테이블 위에 봉지를 올려놓고 봉지 안을 뒤적거렸다. 이거나 마셔라. 그렇게 말하며 캔 커피 하나를 휙 유리쪽으로 던지자, 유리는 재빨리 손으로 캔을 잡아들었다. 손가락으로 캔 뚜껑을 따자, 경쾌한 소리가 귀에 울린다. 캔을 입에 대고 커피를 마시며 유리는 다시 한 번 여기저기에 널려져 있는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리는 김태연이라니. 고등학생 때에는 분명 그림을 그렸던 것 같긴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로 그림을 그리는 태연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태연이 그린 그림을 본 것도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 유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연의 그림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똑같은 얼굴의 여자 그림이 한 곳에 모아져 있다. 목 끝에 겨우 닿는 짧은 머리의, 웃는 게 매력적일 것 같은 여자. 유리는 캔 커피를 꿀꺽 목으로 넘기면서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유리의 뒷모습을 태연이 눈으로 쫓아간다. 그림 앞에 멈춰 서서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보던 유리는, 손가락으로 그림의 표면을 만지며 말했다. “이 여자야? 문제의 그,” “황미영. 맞아. 내 애인.” 애인이라는 어감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림만으로는 모르겠다만, 뭐, 예쁘긴 하네. 유리는 피식 웃으며 뒤돌아섰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의 얼굴이 보인다. “예쁘긴 하다만.” “…….” “재미는 있냐? 한 여자만 만나는데.” 유리의 물음에 태연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을 리가 없지. 김태연 네가, 한 여자에게 정착을 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게. 유리는 다시 한 번 몸을 돌려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매력적인 여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아무리 매력적 이여도 이 여자만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바꿔 말한다면 한 여자가, 온 세상의 여자들이 가지는 그 많은 매력을 전부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 사람은 단 한가지의 매력만을 가질 뿐. 단 걸 좋아한다고 항상 단 음식만 먹을 순 없는 것처럼, 한 여자가 좋다 해서 그 여자만을 만날 수는 없다는 게 유리의 신조였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고, 그리고 그런 여자들을 사랑해주지 않는 건 죄나 다름없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로지 단 한 여자만 사랑을 한다니. 그게 재밌을 리가 없다. “난 재밌어, 라고 말해도 넌 안 믿겠지.” “말이 되냐? 재밌을 리가 없잖아, 그런 거.” “…너 말이야.” “왜?” “네가 아직 사랑에 빠져보지 않아서 그래.” 사랑. 그 단어에 유리는 몸을 돌려 태연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사랑을 논하니? 이 권유리 앞에서? “야, 웃기지마. 나만큼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웃기는 건 내가 아니라 너네요. 네가 무슨 사랑을 안다고 그래?” “애가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럼 내가 이제껏 만나왔던 그 많은 여자들은 뭔데? 나 걔들 다 사랑해. 지금 당장 사랑하는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해도 데리고 올 수 있어. 왜, 연락할까? 어떤 애를 원해? 섹시한 애? 귀여운 애? 아, 분야 별로 말해줄까? 아나운서? 가수? 탤런트? 의사?” “권유리 진짜 답이 없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가지고 노는 거지. 사랑한단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되냐?” “아…. 재미없다.” 유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하는 중간에 시간이 붕 떠서 혼자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심해서 오랜만에 태연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사랑 타령이라니. 재밌어지려고 온 거였는데, 오히려 더 재미가 없어졌다.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재밌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유리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겠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유리의 모습이 익숙한 탓인지, 태연 역시 잘가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돌려 잡아당겼다.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그와 함께 삐걱 거리며 굳게 닫힌 문이 열린다. 습한 공기가 벌어진 틈을 통해 들어온다. “권유리.” “…….” “그런 생활 그만 청산해라. 너야말로 그게 재밌냐? 난 내 과거를 돌이켜보면 정말….” “야, 김태연.” 태연의 말허리를 뚝 잘라먹고, 유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의 표정이 보였다. 순해진 얼굴. 예전에는 저렇게 무뚝뚝한 표정을 보이면 건들면 죽여 버린다 라는 조폭포스를 풍겨오곤 했는데 지금은 그저 일반인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변했다. 자신의 친구, 김태연이 이렇게나 변해버렸다. 황미영인지 뭔지, 그 여자 '한 명' 때문에. 유리는 정말 그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어떻게,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그 좋은 걸 어떻게,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거지? 말도 안 되잖아, 그건. “몰라? 난 박애주의자야. 여러 명을 사랑하는 게 재밌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태연을 뒤에 두고, 유리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텅 빈 회색빛의 복도가 보인다. 그래, 난 사랑을 주지 않고선 못 사는 성격이니까. 너처럼 재미없게 살 순 없지. 그나저나, 오늘 누구 만나기로 했더라? * * * “자기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머리가 아파왔다. 기분도 나빠지고 있었다. 짜증도 샘솟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그래도 저 미모에 대놓고 어떻게 감히 욕을 내뱉을 수 있나 싶어 꾹 참기로 했다. 이 얼굴에 질려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라, 그 얼굴에 대놓고 욕은 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앞에 앉은 여자의 크고 맑은 눈동자의 끝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다. 너도 결국 이런 여자구나. 유리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그 여자의 눈물을 실컷 비웃었다. 그렇게 도도하게 자신의 마음까진 가지고 들려고 하지 말라며 말하던 게 누구였더라. 턱을 약간 쳐들고 여유 만만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던 여자. 허나 지금은 그만 만나자는 유리의 말에 결국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런 말은 좀 폐쇄적인 곳에서 할 걸 그랬나. 유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곱게 차려 입은, 그것도 제법 예쁘게 생긴 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이 여자에게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유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로 테이블을 탁탁 쳐댔다. 그만 좀 울어라, 제발. 쪽팔려 미치겠네. 왜 이럴까, 구질구질하게. 유리는 오랜만에 가지는 휴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화창한 주말인데 오늘은 왠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잠시 바람 쐬러 차를 끌고 나왔던 참이었다. 초여름 치고는 제법 더운 날씨라서, 거리에 나온 여자들의 옷들이 많이 짧아져 있었다. 지나다니는 여자들의 몸매를 보며 점수를 매기다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 들른 한 커피매장, 그리고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이 여자. 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 우연이네, 라고 웃으며 다가왔던 이 여자와의 만남은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집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뒤에서 차를 타고 슬슬 쫓아오고 있었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최근에 유리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아 안달이 난 상태였을 테고, 이 날씨 좋은 주말에 자신을 불러주지 않으니 혹시 딴 사람이라도 만나나 싶어 몰래 따라온 게 분명했다. 몰래 뒤따라 온 것만큼은 귀여우니까 봐주려고 했는데,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눈웃음을 치며 들어오는 꼴을 보니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자리에 앉혀놓고 대뜸 그만 만나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여자, 지금 몇 분째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럼 말해줘. 내가 고칠게.” 잔뜩 젖어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속으로 그 여자를 향해 말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물론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끝까지 젠틀한 모습을 유지시켜야 한다.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고,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건 유리의 철칙이기도 했다. 사랑은 하되,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항상 한결같은 모습으로, 항상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 지는 모습을 보여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기는 모습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 중간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 “사랑이 끝나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 시작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끝에도 이유가 없는 거지.” 일부러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그 표정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보통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수긍하기 마련이다. 이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헤어지자고 말하면, 상대방이 알아서 자기 멋대로 유리의 심리상태에 대해 결정짓고 이별을 받아들인다. 유리가 자신과의 사랑이 끝났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래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이별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돌아서서 상대방이 나가면, 유리는 그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이별이라는 건 그렇게 쉬운 일. 사랑이야 다시 하면 그만이니 허전한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 여자와의 이별도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리는,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그 미소 속에 감추어진 유리의 진정한 마음은 여자가 알리가 없다. 자, 이쯤 되면 돌아서야지? 이제 이런 신파극은 그만하자, 응? “……싫어.” 어? 뭐라고? 유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 보통 이정도면 여자들은 자신이 쿨한 척을 하기 위해 억지로 돌아서곤 하는데 이 여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유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 된 게 믿겨지지가 않아. 그래도 어쩌겠….” “나 자기랑 못 헤어져.” “…현주야.” “못 헤어지겠어. 나 자기 안 놓을 거야.” 야, 넌 자존심도 없냐? 목울대까지 치켜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이 여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건 쉬웠지만, 아무래도 이 여자의 감정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에는 실패한 듯싶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키스해달라고 조르던 그 붉은 입술은 핏기가 싹 가신지 오래였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왜 자신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자존심이 세던 여자가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라니. 유리는 그 모습이 심지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숨을 내쉬며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초여름의 햇살이 도로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햇빛에 눈이 아팠는지 눈을 잔뜩 찡그리며 지나가는, 핫팬츠를 입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 다리 잘 빠졌네. 다리 하나만으로 한 60점은 먹겠는데?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뒤로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테이블 위에 팔을 얹었다.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묵묵히 바라보는 눈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보인다. 유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나지막이 말했다. “현주야. 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 해서 우리 사랑이 다시 돌아오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다시라니. 우리 사랑 아직 끝난 거 아니라니까?” 유리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유리는 여자 쪽으로 숙였던 몸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지만 아까와는 달리 단호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쉽사리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아아, 결국 이 방법까지 써야 하나. 유리는 이 방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은데 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한방에 끝낼 수 있기야 하겠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유리는 흘끗 커피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시선은 자신들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 쪽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며 수근수근 대는 여자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바라보며 귓속말로 중얼중얼 거리던 여자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가 반사적으로 빙긋 웃었다. 그러자 그 여자가 황급히 시선을 회피한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속에서 왠지 빨개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웃음을 보고 빨개진 모습이 이상했을까.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기겁을 하며 그 여자를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한다. 귀엽네. 내 앞에 앉아있는 이 멍청한 여자와 얼른 끝냈으면 가서 번호라도 땄을 텐데. 유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지겨운 상황을 끝낼 수만 있다면야, 굳이 그 방법까진 안 쓸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현주야.” “…….” “미안해. 사실 나 다른 여자가 생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당황한 유리의 시선이 여자의 몸을 따라 위로 움직인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신파극은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돌아설 사이라면 깔끔하게 돌아서면 좋을 텐데, 정말 가끔 이런 여자들도 있다. 끝내고 싶지 않다는 둥, 자기 밖에 없다는 둥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꺼내며 매달리는 여자들이 있는데 유리는 그게 참 마음에 안 들었다. 분명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렇게 온갖 도도한 척, 쿨한 척 다 해놓고 마지막에는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건지. 감정의 뒤끝이 남는 이별은 무언가 찝찝해서 싫다. 그리고 그런 이별을 하고 난 그 날은 일진이 이상하게 좋지 않다. 그런 유리에게 태연은 벌 받아서 그래, 라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를 주는 건데 왜 그게 벌 받을 일이란 말인가. 오히려 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유리는 주섬주섬 청바지에 구겨 넣었던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대충 구겨 넣었더니 담뱃갑이 잔뜩 구겨져 있다. 헉, 설마? 황급히 안에 들어있는 담배를 확인했더니, 역시나 잔뜩 구부러진 담배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표정은, 이 여자를 만나고 나서 지은 슬픈 표정 중에 가장 진실한 표정이기도 했다. 거봐, 역시 재수가 없다니까 이런 날에는. 왠지 성질이 나서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는데, 그 순간 유리의 눈앞에 갈색의 액체가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게 눈에 보였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얼굴과 머리카락과, 그리고 얼마 전에 사서 오늘 처음 입은 셔츠 위로 뒤범벅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굴을 뒤덮는 뜨거운 느낌에 유리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다른 건 참아도 옷을 망치는 일은 참을 수 없다. 아까 커피를 받아오면서 대충 집어왔던 네모난 휴지를 황급히 집어 들어 옷에 묻은 것부터 닦아내며 소리쳤다. “야!! 너 미쳤어? 뜨거운 커피를 여기에 뿌리면 어떻게 해!!!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 짝.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갔다. 뺨이 얼얼했다.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아, 정말. 하나만 하지, 두개 다 하는 게 어디 있어? 유리는 얼얼한 뺨을 손으로 잡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울컥했는지, 여자가 한 마디 한다. “권유리. 너 그럴 줄 알았어.” “…….” “근데 무슨 이유가 없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런 말을 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 기가 찬 건 나야. 옷을 닦던 휴지를 쥐고 동글동글 말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데구르르 굴러가다 결국 바닥위에 떨어지는 휴지를 바라보던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애써 슬픈 표정을 지어가며 감정에 맞춰 주는 배려 따윈 필요 없겠지. 유리는 그제야 꾸미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할 말 다 했지? 그럼 난 이제 간다.” “권유리, 너….” “…이제 끝난 사인데 이름 부르지 말지? 아,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여자의 오른쪽 손이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리의 왼쪽 뺨을 향해 그 작고 하얀 손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유리는, 아까와는 달리 그 손목을 잽싸게 부여잡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얇은 손목. 유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당황한 표정의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비죽 거리는 웃음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이 멍청한 여자야. 이제 내가 너 봐줄 이유가 없잖아? 쥐고 있는 손목에 힘을 주었다. 아얏.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한번 때린 걸로 족하지 않나?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 “화창한 주말 오후에 구질구질하게 하지 말고, 너 정도 얼굴이면 지나가면 남자들이 침 질질 흘리면서 덤벼들잖아? 그 놈들 중 하나 낚아서 보내. 짜증나게 자꾸 이러지 말고. 왜 이래,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손목을 잡으며 아프다고 울상을 짓는 여자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고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대놓고 신파극을, 그것도 여자끼리 찍었으니 당연히 주목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유리는 나가자마자 바로 담배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이별을 한 것보다 담배 몇 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날린 게 더 억울했다. 유리의 어깨너머에서 큰 소리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얼굴에 철판 깔고 사는 유리 자신의 얼굴도 왠지 새빨개질 것만 같아서, 유리는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쪽팔리지도 않냐? 왜 울고 난리야, 어휴. 커피매장의 문을 열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날카로운 햇빛이 눈을 파고든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머리 위에 떠 있다. 이 좋은 날, 이별을 했다. 이별을 한 것 자체는 별 생각이 없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면 나올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얼굴을 붉히며 나도 사랑해 라고 말할, 순진한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이별은 아쉽지 않다. 다만 예상보다 길어진 이별 때문에 쓸데없이 바닥에 버려버린 시간과 얼떨결에 갈색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셔츠는 아까웠다. 도로에 잠깐 세어 놓았던 자신의 검은색 아우디A6로 다가가면서, 유리는 오늘 재수 없을 것 같으니 얼른 집에 들어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차 문에 열쇠를 꽂기 전에, 다시 한 번 흘끔 커피 매장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안에서 여자가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멀리서 흘끔흘끔 바라보는 한 남자도 눈에 보였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나서, 유리는 그제야 차 문을 열고 몸을 차안에 집어넣었다. 그것 봐봐.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를 준 거잖아?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꾸욱 밟았다. 거슬리는 느낌도 없이 부드럽게 차가 출발한다. 무슨 일이 더 터지기 전에 얼른 움직여야겠단 생각에 차선을 변경하려고 핸들을 잡고 옆으로 꺾는데, 문득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유리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주었다. 아, 진짜 내가 여자 잘못 봤네. 내가 왜 저런 애를 사겼지? * * * 얼마쯤 지났을까. 왠지 모르게 겁까지 먹은 상태에서 정신없이 운전을 한 상태라 몇 분이나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리는 백미러를 통해 흘끔 다시 한 번 뒤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쫓아오지 않는 듯싶었다. 이제 드디어 그 여자에게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독한거야? 이제껏 수없이 많은 이별을 했지만 이 정도로 섬뜩하게 매달린 여자는 없었다. 물론 헤어지고 난 후 유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아파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방도도 없는데다 이미 끝난 사이니 아파하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렇게 눈앞에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며 심지어 쫓아오기까지 하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가 아찔해 왔다. 그까짓 이별 하나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하다니. 유리는 핸들에서 한 쪽 손을 떼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다가, 문득 아까 담배가 잔뜩 구겨져서 그냥 테이블 위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젠장. 욕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차문에 붙어있는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렸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창이 내려간다. 에어컨 때문에 한껏 차가워진 실내 안에 달구어진 도로의 뜨거운 열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온다. 멍하니 도로의 끝 쪽을 바라보며 아까 자신을 식겁하게 했던 그 여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아찔할 정도로 농염한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였다. 숱하게 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여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않았다는데, 왜 유리를 향해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여자도 역시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왜 자신이 여자를 유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런 여자를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성격 이라고도 말했다. 그래서 대뜸 연락처를 물어보는 유리에게 자신의 마음까지는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던졌던 여자. 그래놓고서 만난 지 한 달 만에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유리는 나도 너 사랑해 라고 웃으며 말했다.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내뱉은 그 말을 들으며 수줍게 웃었었다, 그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렇게 사람 몇 명을 홀릴 정도로 야한 미소를 지어보어더니, 불과 한 달 만에 그런 수줍은 미소도 지어보일 줄 알게 되었다. 거기다 무려, 떠나려는 유리에게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 도도하던 여자가, 마음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고 하던 여자가, 정말 불과 한 달 만에. “재미없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재미가 없었다. 따분해지고 있었다. 이 여자뿐만 아니다. 지금 유리가 만나고 있는 여자들의 감정 패턴이 모두다 이 여자와 비슷했다. 처음엔 한껏 도도한 척 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슬슬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에게만 정착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어느 샌가부터 유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만나주지 않으면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투정부리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사랑한다고 해 달라고 매달린다. 지긋지긋한 패턴. 그 때쯤 되면 정말 재미가 없어진다. 무릇 여자는 길들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미 길들여져 있는 여자는 금방 질리게 된다. 그럼 그 때는 그 여자를 떠나야 한다. 이미 질려버린 유리의 옆에 있어봤자 그 여자에게도 좋을 건 하나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사랑을 하는 유리에게도 좋을 건 없으니 그저 미련 없이 돌아서버린다. 그 대신 그 자리는 금방 다른 여자가 꿰찬다. 물론 그 여자 역시 얼마 안가 동일한 패턴으로 변해가겠지만. 결국 오늘도 한 여자를 떠났다. 그럼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다시 찾아야 한다. 이번에는 조금 순진한 여자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랑 한 번 못 해본 그런 여자. 모든 게 유리가 처음인 그런 여자. 그런 여자는 길들이는 재미에, 왠지 아이 키우는 듯 한 재미까지 곁들여져서 더 재밌다.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점점 변해가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예전에 한번 그런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질 때 크게 한번 데인 이후로 줄곧 그런 여자는 피해왔는데, 오늘은 왠지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어느 여자든 끝이 다 비슷비슷해지고 있는 마당인데 굳이 피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그런 타입의 여자를 만나려면 항상 여자를 찾으러 다녔던 그런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을 가야 한다. 어디를 가야 하나. 깊게 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도로 끝을 향해 있던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약간 위쪽으로 옮겼는데, 머리 위에 있는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는 걸 포착했다. 유리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도를 높여가던 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춘다. 아슬아슬하게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세이프. 휴, 큰일 날 뻔 했네. 한숨을 내쉬며 핸들에서 손을 떼는데,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가 앞뒤로 흔들린다. 덕택에 안전벨트도 안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유리의 몸이 앞으로 급격하게 쏠리고, 핸들에 머리를 부딪쳤다. 엄청난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급하게 머리가 꺾여서 그런지 뒷목도 땡겼다. 뭐야?! 고개를 확 들어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차 뒤에 꼴아 박힌 작은 마티즈 한대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돌려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는 갈색머리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오늘 하루 일진이 좋지 않으려는 모양. 유리는 뒷목을 부여잡고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달구어진 도로 때문인지, 아니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뚜벅뚜벅 뒤쪽으로 걸어갔다. 몸을 숙이고 자신의 소중한 애마인 아우디의 뒤 범퍼 부분을 바라보았다. 부딪힌 차가 마티즈라 그런지 생각보단 멀쩡했지만, 그래도 약간 움푹 들어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반해 마티즈의 앞 범퍼 부분은 종잇장처럼 심하게 구겨져 있다. 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흉한 흉터가 남게 되다니. 흉한 걸로 치자면 마티즈 쪽이 더 심했지만, 유리의 눈에는 자신의 차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를 살펴보던 몸을 들어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 모습을 본 유리는 코웃음을 쳤다. 뭐야, 동정심 작전이라도 펼치겠다 이거야? 웃기시네. 나한테 그런 건 안 통해. 감히 내 애마에 흠집을 내놓고 나와 보지도 않아?!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계속 투명한 앞창을 통해 그 여자를 주시했다. 작은 마티즈만큼이나 작은 몸집의 여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 쪽 차문 바로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그 여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여자가 진짜? 다시 한 번 두들겼다. 이번엔 좀 세게, 신경질적으로 쾅쾅 두들겼더니 그제야 그 여자가 고개를 번쩍 쳐든다. 날카로운 얼굴의 옆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창문이 조용히 열린다. 여자는 여전히 유리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고, 핸들을 꽉 쥐고 있었다. 창이 다 내려가자, 유리는 여전히 뒷목을 잡은 채로 몸을 약간 숙이고 말했다. “저기요.” “…….” “여보세요.” “…….” 대답이 없다. 유리는 어이가 없어 결국 웃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당장 이 차문을 열고 나와 자신의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야 정상이다. 외제차를 뒤에서 박아놓고 (그것도 무려 마티즈가) 뻔뻔하게 앉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여자는,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오히려 유리의 말마저도 가볍게 씹어 먹고 있었다.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손목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바람 좀 잠깐 쐬고 들어와야지 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지 3시간이 지났다. 고작 3시간을 밖에 있었을 뿐인데, 급격하게 피로가 쏟아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냥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니, 내일부터는 오전과 오후, 저녁에는 일에 파묻혀 살다가 밤에는 여자들을 만나는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차피 일이야 쉬엄쉬엄 즐기면서 하면 되는 거고, 밤에 노는 거야 유리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니 평일이라고 해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다. 그에 반해, 정말 편히 쉬어야 할 오늘 같은 일요일 오후에 평일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진짜 병신 같은 하루구나. 유리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빨간색 마티즈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지금 가봐야 하니까, 일단 연락처 좀 주세요.” “…….” “이봐요, 아가씨.” “…….” “귓구멍 막혔어요?” “보시다시피, 잘 뚫려 있네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는 여자. 날카로운 눈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귓구멍 막혔냐고 신경질적으로 묻는 유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온갖 인상을 다 쓰며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기가 찼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이 이런 데서 쓰는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엉망 이였는데 접촉사고까지 났고, 거기에 더해 사고의 장본인은 뻔뻔하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자꾸 겹치다보니, 웬만하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결국 유리는 울컥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빈정대는 말투로 말했다. “지금 아가씨가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절 보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예요?” “아니, 그렇잖아요. 뒤에서 처박으면 거의 대부분 뒤쪽에서 책임지는 거 알죠?” “그 쪽이 먼저 급브레이크 거셨잖아요.” “저기요, 전 신호를 지킨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보아하니 별로 흠집 난 것 같지도 않네요. 오히려 제 차가 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럼, 마티즈랑 아우디랑 같니? “저 흠집 하나 고치는 걸로 아가씨 차 중고도 살 수 있을걸요. 마티즈가 무슨.”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유리가 말하자, 여자가 화가 났는지 문을 벌컥 열었다. 덕택에 문 바로 앞에 붙어있는 유리의 다리에 문이 퍽 하고 부딪혔다.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유리가 급하게 몸을 숙여 다리를 어루만지자 여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선 다시 차문을 쾅 닫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마저 찔끔 나왔다. 유리는 자신의 정강이 부분을 부여잡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 이딴 여자가 다 있어?! 다리를 부여잡으며 여자를 바라보는데, 문득 그 여자가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손을 뻗어 그 여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뭐하시는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유리는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누른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걸 확인하고, 핸드폰 슬라이드를 받아 마티즈 차 안으로 집어던졌다. 조수석 쪽 차문에 부딪힌 핸드폰은, 안전하게 조수석위로 착지했다. “연락처 알았으니 전 이만 가겠습니다. 이래봬도 바쁜 몸이거든요. 아가씨는 한가하신 몸인 것 같지만. 어쨌든, 제가 곧 연락드릴 테니 카센터에서 만나죠, 우리. 아, 그리고 진단서도 끊어올테니 긴장하고 있으세요.” “뭐 이딴….” 욕이라도 중얼거리는 걸까. 유리는 일부러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고, 훅 하고 손가락을 부는 흉내를 내더니 몸을 돌렸다.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그러게, 왜 나를 건드려?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다시 몸을 돌려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잔뜩 열이 받았는지 새빨개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최대한 젠틀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마티즈 앞부분 많이 찌그러졌네요. 쪽팔려서 어떻게 다니시려나. 뭐, 하긴 제가 걱정할 바는 아니군요.” 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두 손가락으로 귀를 꼭 틀어막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왠지 통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뜻 보아하니 얼굴이 꽤나 반반하게 생긴 모양이던데, 평소 같았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레 작업을 걸었겠지만 오늘은 작업을 걸 기분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저런 성격의 여자는 피곤해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가 뒤에서 박아놓고 사과 한번 하지도 못하는 뻔뻔한 성격의 여자라니. 게다가 흥분도 곧잘 하는 성격인 것 같은데, 그런 여자는 잘못 키웠다간 오히려 잔뜩 할퀴기만 할 뿐 길들이는 재미 따윈 없을게 분명하다. 고양이 같은 타입을 좋아하긴 하지만, 저런 식의 악독한 검은 고양이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다. 차 문 바로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마티즈에 앉아있는 문제의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유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리는 빙긋 웃었다. 다시 한 번 분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를 바라본다. 여자는 가끔 순한 맛도 있어야지. 당신 같은 여자를 누가 데리고 살려는지 모르겠지만 참 딱하다. 차 문을 잡고, 문을 열려는데 아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진다.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핸드폰을 꺼내었다. 화면 위에 김태연 이라는 글자가 떠 있다. 차에 시동을 걸며,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열어 귀에 대었다. “무슨 일이야?” - 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아, 정말 오늘 일진 왜 이래? Hissing 02 “응. 알았어, 자기야. 응. 걱정 마요. 이따 봐. 그림 잘 그리고 있어!”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수연은 어이가 없어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이 인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앞에서 입을 귀에까지 찢으며 좋아 죽는 미영을 바라보았다. 몸을 약간 앞으로 빼내고, 턱을 괴었다. 턱 바로 밑에 있는 손목 언저리에서 아까 뿌리고 나온 향수 냄새가 난다. 기분 좋은 향. 기분 좋은 날씨. 그리고 기분 좋아 보이는 자신의 친구. 미영은 통화를 끝내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옆 의자에 두었던 핸드백에 집어넣는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은색의 반지가 끼어져 있다. 싸구려 티가 나는 반지. 이 반지를 처음 받아들고 와서 수연에게 자랑하던 날, 수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런 싸구려 반지 받아서 좋을 게 뭐 있냐고 물었었다. 그 말에 미영은 네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발끈 했다. 황미영이라는 여자를 저렇게 사랑에 미치게 만들었던 문제의 그 김태연이라는 여자가, 난생 처음으로 육체노동을 해서 선물해 준 반지란다. 진짜 공사판에서 막노동이라도 한 모양. 언뜻 듣기론 집안에 돈도 많은 여자인 것 같던데 뭣 하러 고생해서 그런 싸구려 반지를 사주냐는 말에, 미영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거라고 말했었다. 단호한 그 표정에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 찢어지겠네.” 통화가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미영을 보다 못해 테이블 위에 있는 하얀색 머그잔을 들면서 한마디 했다. 핀잔을 주는 수연의 말에 민망했는지 애써 얼굴을 굳히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결국엔 이도저도 아닌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수연을 바라본다. 그런 미영의 표정을 바라보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한 한 커피매장.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참 많다. 손님의 70%는 커플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다. 마치, 금방 자신의 연인과 전화하던 미영이 지었던 그 표정처럼. 그리고 아마 얼마 후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수연 역시 저런 커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한 시간. 한 시간 후면 오늘 만나기로 한 남자가 온다. 그리고 그 남자 앞에서 수연은 여기에 앉아있는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그 남자와 대화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수연의 웃음은 꾸며낸 웃음일 테고, 지금 수연의 주위에 있는 커플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은 진심이라는 것.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머그잔의 끝 부분을 입에 대고, 잔을 기울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알싸한 아메리카노의 향이 입안에 가득 풍겨온다. “그렇게 좋아?” 반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미영을 바라보다, 수연이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미영의 검은 눈동자가 수연을 바라본다. 수연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물어보았다. 그렇게 좋냐고, 그 사람이. 그 말에 미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너무 좋아. 정말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 수연은 다시 한 번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반쯤 식어버린 커피. 이젠 맛도 없어졌다.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캐러멜 프락프치노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쪽쪽 빨고 있는 미영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 목 위의 살들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다. 저렇게 달기만 한 커피가 뭐가 좋다는 건지 먹고 싶다고 난리를 부려서 결국 억지로 이곳에 왔다. 사실 커피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작 먹어봐야 아메리카노 정도. 그리고 단지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이라면 굳이 커피매장에 오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래서 사실 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는데, 미영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여서 결국 끌려왔다. 맛있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먹고 있는 미영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자, 미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아래위로 흔든다. 짧은 머리가 목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저렇게 단 걸 어떻게 먹는 거야? 상상만 해도 단 맛이 입안에 저절로 풍겨 오는 것 같아서 수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과 오랜 친구 사이인 이 여자. 황미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수연과 오랜 친구 사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많은 점에서 수연과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커피 취향부터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의 취향도 다르다. 사람을 보는 눈도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수연은 자신이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극도로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에, 미영은 만인에게, 그러니까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에게마저도 항상 빙긋빙긋 웃으며 잘해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하나하나 열거하다보면 끝도 없을게 분명하다. 딱 하나,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을 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 수연아.” “사랑은 무슨. 그런 유치한 감정놀이에 휩쓸려 다닐 때는 지나지 않았니?” 사랑에 대한 태도였다. 오랜 친구 사이이면서도 사랑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이다. 그 때문에 자주 다툰 적이 있을 정도. 미영이 사랑예찬론자라면, 수연은 비관론자에 가까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부정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단지 집착과 욕심일 뿐이고, 그걸 그럴듯하게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한 것 뿐이라는 게 수연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까지는 미영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분명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미영의 말에 따르면 지금 미영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니까. 수연이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커플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둘이 똑같은 포즈로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싱글벙글 웃고 있다. 유치하긴. 정말, 뭐가 좋다는 거야? 그게? 쉬는 날이면 항상 둘이 만나야 하고, 자기 전에 의무적으로 전화를 해야 하고, 다른 사람 만날 때마다 일일이 보고 해야 하고, 돈은 돈대로 길바닥에 뿌리고 다니고, 시간은 시간대로 뿌리고 다니고. 그런 귀찮은 게 대체 왜 좋다는 거지? 수연은 태어나서 이제껏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나보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보기도 했고, 사랑한단 말을 해보기도 했다. 상대방이 남자인 적도 있었고, 여자인 적도 있었다. 단지 사랑을 하지 않았을 뿐. 미영의 말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꾸 보고 싶고, 자꾸 이야기 하고 싶고, 옆에 없으면 허전하고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던데 수연은 이제껏 누군가를 만나오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몇 번 사랑이라는 거창한 이름아래 사람을 만나보면서 느낀 건데, 연애라는 건 정말 사람을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쓸데없는 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보다 너를 사랑해,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역겹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애초에 자기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리고 뭘 그렇게 틈만 나면 보고 싶다는 둥, 만나자는 둥의 말을 지껄여대는 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연인사이라고 한들 서로만의 시간 정도는 가져야 할 텐데 잠시라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과거의 연인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헤어지자고 했는데, 오히려 상대방은 고작 그런 이유로 헤어지자는 거냐며 수연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정말 답이 없는 동물이다. 거기다 왜 그렇게 다들 간섭이 심한 건지. 심지어 취향이나 성격마저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으로 바꿔주길 바라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나보고 나서 수연은 결론을 내렸다. 사랑, 그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유치한 놀이 일뿐이라고. 그렇게 사랑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감정 하에 행복하다는 말을 지껄여대는 커플들을 비웃으며 지내온 지 벌써 4년. 이젠 혼자인 게 익숙해져서 누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수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미영을 바라보았다. 장문의 연설을 할 생각인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아, 또 시작하겠네. 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계속 실패해왔다면 이젠 포기할 만도 한데, 미영은 끝내 포기 하지 않고 항상 사랑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수연에게 주입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초창기에는 그런 미영에게 화도 내고, 가끔은 정말 간절히 부탁도 해보았는데 그래도 전혀 굴하지 않고 틈만 나면 사랑에 대한 긴 연설을 늘어놓는다. 너도 사랑을 해봐야 해.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살아갈 거야? 사랑을 하면 정말 세상이 달라진다니까? 이런 식의 말들. 이젠 그 레퍼토리까지 전부다 외워버렸다. “수연이 네가 아직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그래. 사랑을 해보면….” “야, 황미영.” 더는 못 참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엔 미영의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귀여운 얼굴이 시선 속에 들어온다. 수연은 그런 미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보게나 친구, 난 말일세. “세상에 무신론자가 있다면, 나는 아마 무애론자에 가까울 지도 몰라.” “수연아.” “몰라? 난 사랑 같은 거 안 믿어. 그런 유치한 감정 놀이 따위, 알게 뭐야.”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짓는 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그컵을 들어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는, 완전히 다 식어버렸다. 전혀 맛이 없었다. 마치, 수연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랑이라는 그 헛된 감정처럼. 사랑? 그게 대체 뭐야? 그게 그렇게 목을 매며 달려들 만큼 가치 있는 건가?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게 더 낫겠다. * * * 점점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하품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재빨리 입을 가렸다. 하지만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남자를 보니 나오려던 하품이 쏙 들어가서, 다시 손을 내렸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하품 작렬. 수연의 하품하는 모습을 보던 남자가 잠시 움찔거린다. 아, 뭐야. 여자가 하품하는 거 처음 봐? 하지만 차마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수연은 당황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어제 잠을 잘 못 잤더니 이런 실례를 했네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수연은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웠는지 입고 있는 셔츠의 소매를 동글동글 말아 걷어 올렸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수연은 자신의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뒤져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고이 접은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살짝 남자 쪽으로 조용히 밀었다. 좀 닦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쁘시네요. 상냥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수연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별 거지발싸개 같은 아부를…. 난 그냥 그 땀을 보니 나까지 더워지는 것 같아서 준 것 뿐이에요. 수연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아들어 앞머리를 손으로 들더니 이마를 닦는다. 하얀색 손수건이 땀에 물들어 회색빛으로 변한다. 수연은 그 손수건을 보며 남자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남자가 땀을 다 닦고 자신 쪽을 바라보자 다시 빙긋 웃었다. 너무 웃어댔더니 입 꼬리가 마비될 지경. 하지만 웃는 걸 멈출 수는 없다. 표정이라도 이렇게 하지를 않으면 자신을 이 자리에 억지로 앉힌 부모님에게 일종의 불효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부모님이 원하는 결과를 내진 못 할 테니, 최대한 친절하게라도 해야 한다. 빙긋 웃는 수연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 역시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마를 닦은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연 쪽으로 민다. 수연은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남자 쪽을 향해 보이도록 손을 피고선, 자신 쪽으로 미는 그 손을 막았다. “…그냥 가지세요.” “네?” “가지세요.” “아, 저기….” 당황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수연은 다시 억지로 입 꼬리를 말아 올려가며 웃었다. 당신 땀이 묻은 손수건을 나보고 어떻게 가지라는 거야? 아무 말 없이 웃는 수연과 손수건을 번갈아보던 남자는, 왜인지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것 같다.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수연은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만나지 않을 사람. 그리고 손수건 따위야 다시 사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아이들 가르치시려면 힘드시겠어요?” “아, 네. 뭐.” “요즘 애들은 무섭던데, 아이들 어떻게 다루세요?” 수연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며 남자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도 보람을 느끼니까요. 힘들어도 꾹 참고 해요.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이 천직이신가봐요. 저 같으면 못 견딜 텐데요. 아이들이 그만큼 예뻐요. 제가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아이들에게 많이 배우기도 해요. 수연의 대답이 흡족한 모양이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커피를 한잔 마셨다. 물론 대답의 99%는 거짓말이다.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가며 가르친다는 소리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대충 꾸며낸 말을 둘러댔을 뿐이다. 이런 류의 거짓말은 뻔뻔하게 잘 할 수 있다. 말이 소개팅이지, 부모님이 소개시켜준 거라 거의 맞선자리나 다름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만난 남자와의 대화 패턴은 매번 일정했다. 간단한 인사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가족관계에 대해 묻고, 서로에 대해 예의상 칭찬도 좀 해주고,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연애는 몇 번이나 해봤는지 등등. 단 한 번도 이 패턴을 어긋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 웬만한 거짓말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꾸며낼 수 있다. 특히 남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게 수연의 직업. 그러다보니 선생님이라는 일과 관련된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된다. 이렇게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둘러댈 때면, 수연은 여자의 직업으로는 선생님이 최고라는 말이 과언은 아닌 듯 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남자도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로 수연의 직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표면상으로는 아이들에 관한 질문을 하지만, 속으로는 선생님과 결혼하면 가정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테고 이래저래 편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남자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줄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성형외과 의사라고 했었나. 제법 돈은 잘 벌겠네. 수연은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남자의 자기자랑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물론 지금 이 남자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티는 내지 않기 위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가끔 웃음도 흘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잘 나가면 오늘도 별 탈 없이 고비를 넘길 수 있다. 기분 좋게 헤어지고,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자신과 성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대충 둘러대면 끝이다. 그래봤자 어차피 얼마 안가 또다시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겠지만, 그래도 그 전까지 공백 기간 동안은 편하게 있을 수가 있다. 수연은 얌전히 그 남자의 말을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젠 직업 이야기에서 자신의 사랑이야기로 훌쩍 넘어갔다. 과거의 사랑 때문에 너무 심하게 다쳐서 그 동안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나. 그렇게 말하며 순간적으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수연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모성애 자극 작전이야? 작업멘트를 날리려면 그럴듯한 걸로 해라, 좀. 어쩌면 저렇게 창의적이지 못할까, 쯧쯧.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네…. 많이 고생했죠. 많이 외롭기도 했고….” 오늘 처음 만난 여자에게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단 말이 거짓말 이였음을 반증한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정말 그렇게 아프고, 정말 그렇게 소중한 사랑 이였다면 딴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조차 없을 테니.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시원스러운 이목구비. 거기에 부모님과 아는 사이인 집안이라면 집도 꽤 부자. 직업도 훌륭하다. 사람의 성격은 더 만나봐야 아는 거니 지금 당장 이 남자의 성격을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일단 오늘 하는 걸로 봐서는 보통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딱히 나쁘지도 않고, 딱히 좋지도 않는 그런 성격. 전체적인 종합 점수를 매기자면 100점 만점에 80점 정도? 이 정도면 최근에 만난 남자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낫다. 하지만 그 중에서 낫다는 것뿐이지,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연애는 귀찮을 뿐이니. 드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남자의 핸드폰의 진동이 강하게 울린다.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내는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려온다. 민망했는지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잠시 만요, 라고 말하고 핸드폰을 집고 일어섰다. 뚜벅뚜벅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수연은 그제야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슬라이드를 열었다. 탁, 슬라이드가 올라가는 소리가 나고 하얀 화면 위에 미영의 문자가 떠 있다. - 미스 정. 어디야? 아직 그 남자랑 같이 있어? 그게 아니면 나랑 놀아줘요오~-_ㅜ 3시 12분에 온 문자. 핸드폰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화면위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3분. 11분 전에 온 문자구나. 수연은 화장실 쪽을 한번 힐끗 보다가 익숙한 손길로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 아직 있긴 한데, 곧 헤어질 거야. 미스 황, 당신 핑계대고. 한 10분 후 쯤에 전화해. 메세지전송이완료되었습니다, 라는 창이 뜨자마자 핸드폰을 다시 닫았다. 여전히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 근사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걸 귀찮아서 그냥 아까 미영과 줄곧 함께 있었던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비록 커피를 다시 시켜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그래도 그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런 매장은 카페라고 하기엔 너무 개방적 이여서, 마주 앉아있는 사람과 자연스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해준다. 그래서 좋았다. 약간 개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카페보다야 거리감을 가지게 해주는 이런 곳에서 만나는 게 적당하다. 수연은 아직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며 자신의 주위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흔하디흔한 커플들.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마주 앉아있는 남녀. 그 흔한 풍경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수연의 옆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여자 한명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그 맞은편의 여자는, 무어라고 해야 하나. 분명 슬픈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수연의 눈에는 꼭 그게 꾸며낸 표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어색한 게, 그다지 슬퍼 보이지 않는 표정. 하지만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이 날씨 좋은 오후에, 남녀커플들만 득실거리는 이곳에, 울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 앞에서 거짓 표정을 꾸며내고 있는 여자. 수연은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번 화장실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자신의 가방을 들고, 남자의 커피 잔과 자신의 커피 잔을 고동색의 쟁반 위에 올려놓은 다음 두 손으로 들고 슬쩍 옆자리로 옮겼다. 다행히 여자 둘은 그런 수연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싶다. 수연은 애써 태연한 척 자리에 앉고, 턱을 괴고 시선을 화장실 쪽으로 두었다. 시선만 화장실 쪽으로 두었을 뿐이지, 온 신경은 자신의 왼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 두 명의 대화에 집중시켜 놓았다. “나도 이렇게 된 게 믿겨지지가 않아. 그래도 어쩌겠….” “나 자기랑 못 헤어져.” “…현주야.” “못 헤어지겠어. 나 자기 안 놓을 거야.” 어라? “현주야. 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 해서 우리 사랑이 다시 돌아오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다시라니. 우리 사랑 아직 끝난 거 아니라니까?” 오호. 수연은 여자 둘의 대화를 듣고 빙긋 웃었다. 이거, 재밌는데?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이 여자 둘은 서로 사귀는 사이인 듯 했다. 레즈비언 커플. 그리 흔하지 않은 광경인데 이런 곳에서 뜻 밖에 만나게 되다니. 수연은 자신 쪽에 앉아있는 여자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꽤 비싸 보이는 하얀색 셔츠에 그 위에 검은 베스트를 걸쳐 입고, 밑에는 블랙 진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범한 코디인데, 원래 옷발이 잘 받는 스타일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셔츠가 비싼 셔츠라 그런 건지 꽤나 잘 어울렸다. 앉아있는 키를 보고 있으니 대충 165~168정도 되는 것 같았다. 여자가 그 정도면 그럭저럭 큰 편이지. 얼굴도 꽤나 반반하게 생겼다. 보통 이 정도의 페이스를 가진 여자에게는 예쁘다는 말을 하게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이미지는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 하지만 그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그리 썩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눈을 돌려 맞은편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늘하늘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옷에서부터 풍겨오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마치 서클 렌즈를 낀 것처럼 눈동자가 커다랗고 새까맣다. 하얀색 피부와 대조적인 그 눈동자의 색이 함께 어울려서 꽤나 예쁜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수연의 옆에 있는 여자가 이별을 고한 모양이고, 맞은편에 있는 여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나보다. 수연의 옆에 앉은 여자가 몸을 뒤로 기댄다. 그 순간에 잠깐 스쳐간, 기분 나빠 죽겠다는 표정이 수연의 눈에 포착되었다. 뒤로 몸을 기댄 여자는 자신들 쪽으로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주위를 바라본다. 그러다 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어떤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빙긋 웃음을 흘리는 여자를 보며, 수연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뭐야, 이 여자 지금 자기 애인이랑 헤어지는 마당에도 딴 여자한테 웃음 흘리고 있는 거야? 와, 이거 완전…. 수연은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큰 눈망울의 끝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저런 여자를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나요. 그러게, 애초에 사랑을 왜 하는 거야? 어차피 언젠가 끝날 거. “현주야.” “…….” “미안해. 사실 나 다른 여자가 생겼….” 딴 여자를 향해 웃음을 흘리던 여자가, 이내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수연은 그 여자의 몸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자마자 커피 잔 안에 있던 커피가 담배를 꺼내던, 수연의 옆에 있는 여자를 향해 쏟아진다. 보기 좋게 구겨진 시커먼 얼굴이 수연의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 온갖 인상을 다 구기던 여자는, 휴지를 집어 들어 얼굴이 아닌 자신의 셔츠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 그 여자의 반응을 보며, 수연은 피식 웃었다. 자기 옷부터 닦는 걸 보아하니, 겉멋만 잔뜩 든 여자네. “야!! 너 미쳤어? 뜨거운 커피를 여기에 뿌리면 어떻게 해!!!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여기에 쓰는 건가 싶다. 아, 이 사람은 여자니 방귀 뀐 년이 성낸다는 말이 맞겠다. 입 닥치고 가만히 받아들여도 모자랄 판에 비싼 셔츠에 커피를 엎질렀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의 뻔뻔함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기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 손을 번쩍 들어 싸대기를 날린다. 짝. 순식간에 그 시커먼 뺨에 내리 꽂아지는 하얀색 손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던 수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병원 개업하는 과정에 좀 트러블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 한참 재밌어지고 있었는데. 수연은 입맛을 쩝 다시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 의자를 꺼내 앉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무어라고 말을 하고 있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자세히 좀 듣고 싶은데 남자가 앞에서 자꾸 죄송하다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 개업과정의 트러블에 대해 자꾸 이야기 하는 바람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결국, 옆 자리 커플의 대화를 듣는 걸 포기하고, 핸드백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 10분 후 쯤에 전화하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이 남자와 함께 한 것도 이제 1시간이 조금 넘었다. 물론 이 남자야 저녁까지 함께 할 생각으로 나온 것이겠지만, 수연은 애초에 처음부터 한 시간만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척, 시선을 남자의 얼굴을 돌리고 손으로 더듬더듬 핸드백 안을 뒤져 핸드폰을 집었다. 잡자마자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다. 나이스 타이밍. 미스 황, 사랑해. 역시 넌 내 최고의 친구야. 핸드폰을 들고 빙긋 웃으며 양해를 구한 후, 일부러 남자가 보는 바로 앞에서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 나 착하지? “아아, 응. 웬일이야?” - 나 지금 학교야. 2반 선생님이 오후 동안만 대신 해달라고 해서 애들 자습 감독하러 왔는데 심심해. 여기로 와서 같이 감독하자. 어차피 6시면 끝나니까, 곧 끝날 테니 끝나고 나면 저녁도 같이 먹고. 아, 뭐야. 언제는 놀아달라더니…. 어휴. 그래, 이 남자와 같이 있느니 감독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수연은 흘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바보처럼 씨익 웃는다. 이 남자는 아무래도 수연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웃음을 보며, 수연은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향해 웃어주었다. 이제 곧 헤어질 테니, 미안한 마음에 지금이라도 서비스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진짜? 음. 정말 나 아니면 안 되겠어?” - 응응! 미스 정 아니면 안 돼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한다. 으이구, 귀여운 녀석.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친구인 자신에게도 이렇게 애교를 부려대는데, 그 김태연이라는 여자 앞에서는 오죽할까 싶다. 알았어, 그럼 어쩔 수 없지. 금방 갈게. 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불쌍하긴. 다음부턴 나 같은 여자 만나지 말고, 사랑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를 만나요. 당신은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여자는. 수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애써 지어내며, 남자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죠? 학교에 있는 친구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좀 오라고 하네요.” “네? 하지만 이제 만난 지 한 시간 밖에….” “죄송해요. 어휴, 어떻게 하겠어요.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해요. 이를 어쩌죠….”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런 수연의 행동에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테이블 위에 모아져 있는 손가락이 안절부절 못하며 펴졌다 구부려졌다 반복을 한다. 수연은 약간 시선을 내리 깐 채로, 비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면, 이 남자는 다른 남자가 그랬듯 그냥 보내주게 되겠지.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럼, 언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요? 전 수연 씨 다시 만났으면 하는데….”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의외로 순진한 면도 있나보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만약 수연이 다른 여자들처럼 사랑에 목을 매고, 연애에 목을 매고, 그리고 더 나아가, 결혼에 목을 매는 여자였더라면 거짓이 아니라 정말 실제로 미영이 일 때문에 자신을 불렀어도 이 남자와 함께 하는 길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일 뿐이고, 수연의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있어서 현실은 냉혹하다. 물론 이 남자는 현실이 냉혹하다는 것조차도 알리가 없겠지만. 수연은 예의상 짓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부모님을 통해 연락드릴게요. 그럼, 저 먼저 일어설게요.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에 봬요, 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수연이 그 말을 내뱉지 않은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남자 역시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아녜요, 저도 차 있어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저 늦을 것 같으니 얼른 가볼게요.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남자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린다. 수연은 그걸 못 본 척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자신보다 몇 미터 앞에 걸어가는 아까 그 여자의 등이 보였다.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수연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인다. 수연은 마찬가지로 웃으며 간단히 화답을 하고, 바로 옆 테이블에 있는 여자의 동향을 살폈다. 결국 헤어지기로 합의 본 건지, 고개를 숙이고 서럽게 펑펑 울고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이미 매장 밖에 나가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길가에 서 있는 잘빠진 검은색 차량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한 때 사랑했다던 연인이 울고 있는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는 건가 싶다. 수연은 다시 한 번, 사랑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저런 여자 같은 사람이 주는 사랑이라면, 더더욱. * * * 아, 정말 뭐야? 수연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꼭 스토커라도 된 것 같은 기분. 수연은 핸들을 꼭 잡고 앞에 가고 있는 검은색 아우디를 바라보았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제발 다른 길로 가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데, 아까부터 계속 저 검은색 아우디는 수연의 학교에 가는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다. 처음에 자주 가는 길로 가다가, 계속 저 차가 앞에 있길래 성가신 마음에 잘 다니지 않는 두 번째 길로 빠져들었는데, 거기서 또 저 문제의 아우디를 만났다. 그래서 다시 첫 번째 가던 길로 빠졌더니, 이번에도 역시 저 차가 어느 코너에서 불쑥 나타나 다시 한 번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며 왔다 갔다 했더니 시간은 시간대로 도로에 버리고 있었고, 미영은 미영대로 왜 안 오냐며 징징 대고 있었고, 수연은 수연대로 진이 다 빠져나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결국엔 포기. 혹시 싶어서 차선을 변경 해보기도 했으나, 어떻게 된 게 그 차선 변경마저도 저 차가 같이 하는 바람에 카페를 나온 지금부터 계속 수연의 마티즈 차량과 저 검은색 아우디는 앞뒤로 붙어서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수연은 핸들을 꼭 잡고 아우디의 뒷 범퍼를 바라보았다. 애써 신경을 안 쓰기로 했는데 그래도 자꾸 신경 쓰인다. 아까 그 카페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들과, 그 여자가 했던 행동들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싸가지가 없을까 싶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사귀는 동안 계속 같이 붙어 있었을 테니 정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일 텐데 원수래도 그렇게 대놓고 싸가지 없이 행동하진 않았을 테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놓고서도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하다니. 자신의 얼굴에 묻은 커피와, 자신이 상대방에게 준 상처보다 입고 있는 셔츠를 더 소중하게 여기던 여자. 독하다, 독해. 수연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신의 주위에 저런 여자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친구로라도 저런 여자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인 것 같은데, 그 나이에 외제차나 끌고 다니는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저런 류의 차량이야 20대 중후반이 아니면 언제 몰겠느냐마는,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분명 겉멋만 잔뜩 든 저 여자는 자신의 형편에도 맞지 않게 무리해서 샀으리라. 여자의 과소비 취향(물론 수연이 혼자 멋대로 단정해버린 것이지만)에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문득 조수석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들린다. 수연은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로 오른 손으로 조수석의 시트 위를 더듬거리다 핸드폰을 집었다. 전방을 주시하느라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야!!!!!! 받자마자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살짝 귀에서 뗐다. “뭐야?!” - 미스 정!!!!!! 왜 안와!!!!!!!!! 아, 황미영이구나. 분명 아까 10분 전에도 전화해서 잔소리를 잔뜩 늘어놨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또 전화해서 잔소리를 퍼부을 모양이다. 수연은 핸드폰의 스피커 볼륨을 줄이기 위해 핸드폰을 눈앞에 가져갔다. 핸드폰 화면과 앞 쪽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데, 문득 자신의 앞에 가고 있던 아우디가 급하게 속도를 줄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악, 뭐야?! 수연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닫고 브레이크를 힘껏 눌렀다. 아무리 세게 눌러봐야 어차피 멈추는 속도는 똑같을 텐데,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문 채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부어가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안 돼!!!!!!! 저거 비싼 차란 말이야!!!!!!!! 끼이익. 도로 위에 타이어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리고, 수연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결국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딪혀버렸다. 그 반동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핸들에 머리를 쾅 박아버렸다. 통증이 느껴졌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저 여자의 차를 들이 받다니. 그것도 무려 아우디A6. 굳이 내려서 보지 않아도 자신의 차 앞 범퍼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을 게 뻔하다. 그에 반해 아우디는 멀쩡한 편에 속하겠지만, 그래도 어딘가가 움푹 들어가긴 했을 게 분명하다. 아, 오늘 일진 왜 이래?! 핸들에서 이마를 떼지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패닉 상태. 수연은 재빨리 대충 예상되는 수리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까 살짝 보아온 저 여자의 성격 상 분명 다 뜯어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받아쳐먹을지도. 머리가 아파왔다. 월급의 반 이상을 적금에 쏟아 부어서 나머지 반만으로 생활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다시피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나? 사고가 나서 차 수리비를 메워야 되니 돈을 달라고 하면 엄마아빠야 망설임 없이 주시겠지만, 분명 차 뺏어갈텐데.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저 여자 차야?! 아, 정말 미치겠네. 한참을 머리를 굴려가며 이 상황에 대한 해결방법을 찾고 있는데, 문득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아, 그 여자가 왔구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한 성격한다는 소리를 듣곤 하지만, 이 여자도 만만치 않은 성격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싶다. 강하게 나가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강하게 나가는 게 오히려 안 좋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연의 성격상 이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무엇보다 사고를 낸 건 처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지도 잘 모른다. 보험회사에 전화하면 되나? 뭐라고 하면 되지? 아, 미치겠네.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에 차 밖에 서 있는 여자는 성질이 났는지 이젠 제법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수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계속 이렇게 피할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사고를 낸 건 자신이기에 사과는 해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이야기하다보면 잘 풀리게 되겠지. 수연은 일단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는 걸로 마음먹고, 창문을 내렸다. 소리도 없이 창문이 스르르 내려간다. “저기요.” “…….” “여보세요.” 아, 사과 해야 하는데. 정수연. 사과 해. 사과 하란 말이야. 잘못했다고 빌어,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는 사과를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입술이 자꾸 붙었다 떨어졌다 반복을 하는데 목소리는 튀어나오지 않고 있다. 아마 수연의 본능은 이 여자에게만큼은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수연은 차마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대답이 없는 수연의 모습에 여자가 한숨을 내쉰다.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지금 가봐야 하니까, 일단 연락처 좀 주세요.” “…….” “이봐요, 아가씨.” “…….” “귓구멍 막혔어요?” “보시다시피, 잘 뚫려 있네요.” 귓구멍 막혔어요? 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드디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온 말은 죄송합니다 가 아닌 보시다시피, 잘 뚫려 있네요 라는 말. 수연은 자신이 내뱉은 말임에도 엄청 당황을 해버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멋대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수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황당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시커먼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줄곧 옆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정면으로, 그것도 햇빛을 등지고 있는 것을 보니 얼굴이 더 시커멓게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성격도 더 싸가지 없게 보였다. 얼굴색과 사람의 성격은 전혀 관련이 없을 텐데, 왠지 이 여자의 시커먼 얼굴과 성격은 비례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수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여자의 몸이 살짝 움직인다. 여자의 어깨에 가려져 있던 햇빛이 갑자기 수연의 눈을 따갑게 찔러온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수연의 표정에 여자의 표정 역시 덩달아 구겨졌다. “지금 아가씨가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절 보실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예요?” 뭐야?! 난 햇빛 때문에 표정 찡그린 건데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리고 꼭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해야겠어? 기분 나쁘다는 티를 확확 내며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덩달아 수연마저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이 여자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마저도 나쁘게 만드는 마력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처음에 다짐했던 사과하겠다는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초면인데 저렇게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예의고 뭐고 다 집어 던져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만 성깔 있어요? 나도 성깔 있어. “아니, 그렇잖아요. 뒤에서 처박으면 거의 대부분 뒤쪽에서 책임지는 거 알죠?” “그 쪽이 먼저 급브레이크 거셨잖아요.” “저기요, 전 신호를 지킨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보아하니 별로 흠집 난 것 같지도 않네요. 오히려 제 차가 더….” 그 말을 하자마자 여자가 비웃음을 흘린다. 그 얼굴을 보니 싸대기를 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분명 속으로 보나마나 아우디와 마티즈가 같냐고 생각하고 있겠지. “저 흠집 하나 고치는 걸로 아가씨 차 중고도 살 수 있을걸요. 마티즈가 무슨.” 뚝.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이성이 끊기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래, 너 잘났다. 어디 한번 마티즈 문짝에 맞아봐라. 수연은 이를 악물고 차문을 벌컥 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정강이 부분에 차문의 끝이 부딪힌다. 악!!! 나지막한 소리를 내지르며 다리를 부여잡는 여자의 모습을 보자 수연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차문을 닫았다. 온갖 인상을 다 쓰며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걸 바라보던 수연은 아까 부딪히는 순간에 정신없이 옆으로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아버지에게라도 전화해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돈 많은 아버지고, 권력 있는 아버지니 알아서 다 해결해주리라. 저 여자가 무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전에 얼른 전화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재빨리 버튼을 누르는 데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쓰윽 빠져나간다. 허전해진 손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누르고 있는 그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뭐하시는 거예요?! 수연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그 여자는 이를 악문 채로 번호를 꾹꾹 누르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내 다시 열려진 창문을 통해 핸드폰을 툭 던졌다. 차문에 부딪힌 핸드폰이 조수석 시트위에 떨어진다. “연락처 알았으니 전 이만 가겠습니다. 이래봬도 바쁜 몸이거든요. 아가씨는 한가하신 몸인 것 같지만. 어쨌든, 제가 곧 연락드릴 테니 카센터에서 만나죠, 우리. 아, 그리고 진단서도 끊어 올 테니 긴장하고 있으세요.” “뭐 이딴….” 개싸가지가 다 있어?!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저 여자는 들리지도 않는 건지, 아니면 듣고 싶지도 않는 건지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더니 훅 한번 불고 뒤를 돌아 걸어간다. 삐쩍 마른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 불어온 뜨거운 바람에 검은색 베스트 끝자락과, 긴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이 장면을 다른 상황, 그리고 다른 여자로 교체해서 본다면 꽤 멋있는데?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욕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아까 좀 더 세게 열걸 그랬나. 아예 다리를 확 부러뜨려버리게. 몇 걸음 걸어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다. 분명 얼굴에 떠오른 건 미소였는데, 왠지 정강이를 한 번 더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나저나, 마티즈 앞부분 많이 찌그러졌네요. 쪽팔려서 어떻게 다니시려나. 뭐, 하긴 제가 걱정할 바는 아니군요.” 야!!!!!!!!!!!!!!!!!!!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연의 외침에도 이 여자는 여유 있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양 귀를 틀어막는다. 어이가 없었다.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뭐 저딴 년이 다 있어?! 완전 개싸가지 아냐?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수연은 자신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게 된 모든 욕을 다 쏟아 부었다. 자신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오로지 저 놈의 차를 반쯤 박살내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밖에 들지를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차문 앞에 선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흘끔 수연 쪽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는다. 그 웃음이 눈에 들어오니 이번엔 심장이 열 받아서 터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입을 찢어버려?! 와, 진짜 저건 도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생명체야?! 성질이 나서 핸들을 두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내리치자마자 마티즈가 아래위로 흔들리더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앞의 본넷트에서 회색 연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웬일인지 차가 아래로 푹 꺼진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차 사는 걸 극구 반대하셔서 자신의 월급으로 산지 얼마 되지도 않는 차인데, 시커먼 여자가 모는 시커먼 차에 한번 박아버렸더니 이렇게 맛이 가버렸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아우디는 서서히 출발을 하고 있었다. 뒷 범퍼가 약간 들어간 게 눈에 보였지만 그냥 지나가면서 한번 쓱 쳐다보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이다. 왠지 분한 느낌이 들어 시동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앞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를 보니 아무리 수연이라 해도 감히 시동을 걸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앞에 서 있던 차는 부드럽게 속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그 창문을 통해 시커먼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잘 가라는 듯 양 옆으로 흔드는 그 팔을 보며 수연은 생각했다. 야, 시커먼스. 너 언젠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죽여 버릴 거야. * * * “그러니까,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가슴을 툭툭 치면서 미영이 흥분한다. 수연은 금방 전에 자신이 들어갔던 수업의 반 아이들의 쪽지시험지를 채점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동조의 뜻을 비치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린 것이지만, 사실 미영이 무엇 때문에 흥분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아까부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긴 했는데, 수연은 아이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수연이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걸, 미영 역시 눈치를 챈 모양이다. 수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잡더니,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휙 돌린다. “야. 친구님이 말씀하시는 데 집중 좀 해라.” “…나 이거 하고 있잖아.” “시간도 많은데 나중에 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미영의 목소리에, 결국 수연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들고 있는 빨간색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미영의 얼굴이 조금은 펴진다. 수연은 의자를 빙글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미영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얼굴이 약간 빨개져 있다. 애가 이렇게 흥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이지? 잔뜩 흥분해 있는 얼굴을 보니 그제야 호기심이 발동했다. 뭔데? 처음부터 말해봐.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면…. 장장 10여분에 걸친 미영의 투정을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오늘이 태연과 사귀게 된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 태연과 같이 살고 있는 미영은 아침부터 오늘 무얼 할지 태연에게 물어보았는데, 태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되물었단다. 그 말에 심통이 나서 아침밥도 안 차려주고 나왔는데, 태연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게 화난 이유. 수연은 그 짧은 이야기를 10분이나 늘려서 말하는 미영의 말늘림스킬에 혀를 내둘렀다. “말이 안 되지 않아? 어떻게 사귄지 1년 되는 날을 잊어버릴 수 있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난리야. 까먹을 수도 있지.” “뭐?!?!?!” 아차. 수연은 순간 눈을 부릅뜨며 말하는 미영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글이글 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평소 순한 성격의 미영이 유독 거칠게 변하는 상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벌레. 학생들에게 벌레라는 단어를 사용조차 하지 못하게 할 만큼 벌레에 관해서는 냉철하게 군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랑에 관한 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연과 관련된 일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 한다. 조금이라도 미영의 생각에 동조해주지 않았다가는 엄청난 잔소리 어택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수연조차도 미영을 이길 수가 없다.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영의 눈치를 봤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던 모양인데, 수연이 자신의 생각에 전혀 동조를 해주지 않아 더욱더 열이 받은 상태인 듯싶다. 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만 더 생각하고 말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수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 덕택에 미영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잠시 수연을 놓아주었다. 수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누군지 몰라도 전화 건 사람 좀 예뻐해줘야겠단 생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머, 전화 왔네? 미안해, 잠시만.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수연을 보던 미영이 결국 피식 웃어버린다. 얼른 받아. 받고 나서 이야기 하자.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얀 화면위에 개싸가지 라는 글자가 떠 있다. 또 전화했어?! 수연은 기겁을 하며 핸드폰 슬라이드를 위로 올렸다가, 재빨리 다시 닫아버리고선 황급히 뒤에 있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 “뭐야? 누군데?” “아, 아니야.”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냥 스토커야, 스토커.” “스토커?” “어. 아, 그것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지? 내가 생각했을 땐 그 사람이 백번 잘못 한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돌릴 심산으로 이야기를 꺼내자, 미영이 강하게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린다. 거봐, 네가 생각하기도 그렇지? 내가 진짜 그 김태연을 잡아다가…. 다시 흥분해가면서 자신의 연인의 욕을 하는 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흘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배터리가 분리되어 처참히 버려진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미영 모르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이후로 딱 하루가 지났다. 맞다. 정말 딱 하루가 지났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고가 난건 바로 어제. 그런데 이 여자로부터 전화가 온 건 금방 전화가 정확히 61번째 전화다. 이쯤 되니 수연은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전화를 받지 않은 건 우연 이였다.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에 전화가 와서 못 받았던 것뿐인데, 30분 동안 샤워하고 나오는 동안 부재중 전화가 20통이나 와 있어서 화들짝 놀랬다. 고작 30분 만에 전화를 20통이나 해대다니. 그것도 분명 그 여자의 성격상 온갖 욕을 다 해가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정말,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지 잘 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는데 사고가 난지 24시간도 안 지난 지금, 61통이나 전화가 왔다. 그나마 문자는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지, 전화 61통에 문자까지 보냈다면 진짜 겁 먹어서 경찰에 신고했을 지도 모른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물론 다시 한 번 생각해도 그 사고는 수연 자신이 잘못한 일이기에, 아우디 수리비는 대줘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진짜로, 이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이 여자의 전화를 받으면 어제처럼 다시 한 번 이성이 끊길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여자는 정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 했으니까. “어휴. 진짜 어떻게 할까?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 나야말로 진짜 어떻게 하니. 아, 정말 그 개싸가지. 성격이 독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독할 줄은….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시 만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다시 한 번 생각해도 61이라는 숫자는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다. 수연은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난 어쩌면…정신병자의 차를 박은 걸지도 몰라. 아, 27년 외길을 걸어온 나의 인생. 이대로 이름도 모르는 정신병자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게 되는 걸까. “야, 너 또 내 말 안 듣고 있….” 약간 화난 듯 한 미영의 목소리에, 수연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아니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수연과 미영이 앉아있는 교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수연과 미영의 눈이 동시에 벌컥 열린 문 쪽으로 향한다. 빨간 색 옷을 입고, 빨간색 모자를 푹 눌러 쓴 작은 몸집의 여자와, 그 몸보다는 약간 더 기다란 몸집의 여자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들어온다. 양 손에는 얇고 커다란 상자가 몇 개 겹쳐져 있는 듯 한 모양새의, 커다란 빨간 주머니 같은 걸 들고 있었다. “피자 배달 왔습니다.” 기다란 몸의 여자가 큰 소리로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수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다. 저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수연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 애써 목소리를 더듬더듬 찾는 동안, 미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저기, 피자 시킨 적 없는데요?” “시키셨는데요. 황미영 씨 앞으로.” “네? 저 시킨 적 없…. 어? 잠깐. 목소리가….” “시키셨잖아요, 황미영 씨. 안 시켰어요?” 그렇게 말하며 작은 몸집의 여자가 푹 눌러쓰고 있는 모자를 벗어 던졌다. 예전에 한번 봤었던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태연아!! 라고 반갑게 외치는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당황한 수연의 상황 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연을 향해 다다닥 달려가는 미영의 작은 몸도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그렇게 가만 두지 않겠다 어쩐다 난리를 부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겨든다. 수연은 재빨리 고개를 휙휙 돌려 교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수업시간이라 교무실 안에 수연과 미영 의외에는 선생님이 한 명도 있지 않았다. “뭐야아아.” “흐흐흐흐. 우리 자기, 내가 우리 1주년 잊어버린 줄 알았지? 사실은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모른 척 한 거야!” “아, 진짜아? 난 전혀 몰랐지. 난 우리 자기가 정말 우리 1주년 잊어버린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어? 내가 다른 건 다 까먹어도 우리 사귄 날을 까먹을 리가 없잖아.” 놀고 있네, 진짜. 수연은 부둥켜안고 희희덕거리는 태연과 미영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옆으로 휙 돌리며 혀를 끌끌 찼다. 태연의 옆에서 어정쩡하게 말없이 서있는 키 큰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은 누구지? 진짜 피자 배달원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푹 눌러쓴 빨간 모자 아래로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 약간씩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그 입술을 바라보며 똑같이 움직여 보았다. 지…랄한다…? 음? 욕하는 건가? 그 빨간모자녀는, 그렇게 욕을 하는 듯 하더니 손으로 자신이 입고 있는 조끼의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린다. 주머니에서 나온 손에 담뱃갑이 들려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담뱃갑. …아? 수연의 머릿속에 빠르게 어제 카페에서 보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헤어지지 않겠다는 여자의 말에 어이 없어하며 담배를 꺼내던 여자. 그 여자의 시커먼 손에 들려 있던 담뱃갑. 약간 시뻘건 색의, 말보루라고 영어로 적혀 있던, 그 담뱃갑. 그 담배 이름이 아마 말보루 레드였지?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담뱃갑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담배피면 안 된다는 태연의 타박에 입맛을 쩝 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피부. 말보루 레드. 아무데서나 담배를 집어 드는 저 뻔뻔함. 아무렇지 않게 욕을 내뱉어대는 저 저주받은 입술. 설마.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수연아! 이리 와서 인사해. 태연이랑, 에 또…. 누구랬지?” “유리.” “어어, 그래. 유리래. 여기 있는 사람. 우리 때때 친구!” 미영의 손짓에 수연은 뚜벅뚜벅 걸어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왠지 모르게 빨간색 불이 머릿속에서 번쩍번쩍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에이, 설마. 설마. 아니야. 진짜 아닐 거야.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중얼 거리며 걸어가다, 미영의 옆에 멈춰 섰다. “유리 씨, 인사하세요. 여기 제 친구 수연이에요.” 순진하게 웃으며 말하는 미영의 목소리에, 그제야 그 여자가 고개를 쳐들고 수연 쪽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여자가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을 보니 절망적인 느낌이 듬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어제 느꼈던 그 열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오호라.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아…짜증나…. 그 개싸가지 맞잖아….” “…뭐요? 개싸가지?!” 아아, 정말. 하느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Hissing 03 인연. 혹은 운명. 그 두 글자가 가지고 있는 뜻은 참 미묘하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름답고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정말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유리는 항상 그게 궁금했다. 대체 인연이 무엇이고, 운명이 무엇인지. 수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왔고, 많은 사랑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다니지만 정작 누군가가 운명적인 사랑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유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 자체이지 그 사랑이 운명의 사랑인지, 아니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만나고 있는 여자가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짜증부터 먼저 치솟아 오른다. 대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어서. 하지만 절대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럴 듯한 거짓말을 둘러댄다. 가령, 이렇게. “난 그런 거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 “내가 너 없이는 못 산다는 거야.” 빙긋 웃으며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유리를 바라보는 하얀 얼굴이 붉게 변한다. 아, 뭐야 갑자기 그런 말 하면 어떻게 해. 그렇게 말하며 하얀 침대 시트를 코 바로 밑에까지 끌어올린다. 평소엔 그렇게 도도하게 굴면서 이렇게 침대 위에서, 유리가 이런 류의 말을 뱉어내면 금세 소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리고 유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아이 같은 모습을, 오로지 유리 자신만이 볼 수 있으니까. 하얀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붉은 기의 농도가 더 짙어졌다. 유리는 침대에서 몸을 살짝 일으키고, 침대 옆쪽으로 몸을 잠깐 숙였다. 침대 밑에 손을 집어놓고 더듬더듬 거리던 유리는, 무언가가 손에 잡히자 이내 씨익 웃으며 꺼내었다. 그리고 불쑥,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여자에게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유리의 손에 들린 걸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장미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어제 인터뷰 영상 보니까 장미 받고 싶다고 했잖아, 너. 그래서 사온 거야.” 손에 들린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받아들며 여자가 다시 웃는다. 고마워, 자기야. 그렇게 말하고서 유리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하는 여자를 침대에 남겨놓고, 몸을 일으켰다. 에어컨을 잔뜩 틀어놨더니 실내가 잔뜩 차가워져 있다. 시트를 걷어내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순간 몸을 부들 떨던 유리는,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끈 다음 바닥에 던져놓았던 셔츠를 들어 대충 어깨위에 걸쳤다. “일어나서 씻어.”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조르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유리는 답을 하지 않고, 부엌 쪽에 있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윙 거리는 낮은 기계음 소리가 들려온다. 냉장고 문을 열고, 한 쪽에 모아져 있는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다. 맥주 캔의 뚜껑을 따면서,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결 좋은 긴 검은 생머리가 하얀색 시트위에 헝클어져 있다. 대한민국의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꿈꾸고 있을 장면이 유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이 여자를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할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여자.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가, 유리 자신의 집 안에서, 유리의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오늘 밤 자고 가겠다며 조르고 있었다. 그녀의 팬인 남자들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미칠 지경이겠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입장이고 유리는 그리 내키지 않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꿀꺽 삼키자 시원한 액체가 온 몸을 타고 도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냥 오늘 하루만…. 안 돼?” 서글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갑자기 왜 이래? 유리는 맥주 캔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고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침대의 끝 쪽에 가만히 걸터앉자, 반동으로 침대가 아주 조금 흔들린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얀 팔이 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어깨 위에 턱을 올리는 여자의 손을 한 손으로 꼭 잡고, 다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맥주 향과,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의 향.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입 꼬리를 올려가며 빙긋 웃었다. “안 돼? 나 자고 가고 싶어. 자기 집에서.” “누가 내 집에서 자고 가는 거 싫어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흔적이 남아서.” “…그래서 더 자고 가고 싶어.” 응? 자고 가게 해주면 안 돼? 어리광을 부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유리는 문득 이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꽤나 큰 규모의 패션쇼가 열렸던 날, 귀찮다는 유리를 자기 혼자 가기 싫다며 태연이 억지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래도 유명 디자이너들의 합동 패션쇼이니 네가 좋아하는 쭉쭉빵빵녀들도 많이 올 거야 라는 태연의 말도 그다지 유혹적으로 다가오진 않아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바쁜 태연을 버려두고 행사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고, 시끄러운 곳도 질색이라 그 흔한 클럽도 가본 적이 없는 유리에게 사회에서 꽤나 힘 좀 쓴다는 사람들과 연예인들 등등이 모여서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곳은 견디기 힘든 곳이였다. 그래서 행사장 근처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없는 그 자리에 서서 담배를 몇 개나 피워댔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뱉는 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도 주실래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때 유리의 눈앞에 있던 사람은, 그 때 한참 주가를 올리던 (물론 지금도 여전하지만) 이 여자가 서 있었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먹혀드는 게 신기한 청순가련형 이미지의 대표 주자였던 김희진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유리에게 담배를 달라고 말하고선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 이였다면 자신의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온갖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유리는 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술 한 잔 못 마신다더니 담배도 펴대는 여자였어? 그런 유리의 반응이 여자는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아마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당황한 듯도 싶었다. 지금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유리의 그 무뚝뚝한 반응이 이 여자의 마음을 흔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리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을 바닥에 버리고 신발로 꾹 짓누르고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며 말했었다. - 이게 마지막이네요. 미안합니다. - 괜찮아요. - 네? - 손에 들고 있는 그거라도 주세요. 이 여자 웃기는 여자네.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여자는, 유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유리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져 있던 담배를 꺼내 자신의 입에 물었다. 어이없어 하며 바라보던 유리를 향해 그 여자가 흘리던 웃음은, 유리의 시선을 통째로 잡고 흔들어 놓았다. 그 웃음 위로 보이던 회색빛의 담배연기와, 그 담배연기 사이로 보이던 회색빛의 하늘.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만난 게 정확히 3년 전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중간에 수 없이 많은 여자가 그녀와 함께 유리를 공유했지만, 그녀만큼 유리를 오랫동안 잡고 있는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사실은 이 여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역시 그녀의 옆에 있는 수많은 남자들과 함께 그녀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유리만큼 그녀를 오랫동안 잡고 있는 남자는 없었다. 그 사실 역시, 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유리는 자신의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에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수 없이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 중에 진심이 들어있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은 아마 이 여자에게 했을지도 몰라.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고 정말 진심이 담긴 말이 있긴 했었는지는 유리 자신 역시 모른다. 아무 대답 없이 다시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는 유리의 모습이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지 희진은 고마워, 라고 말하며 살짝 유리의 목에 키스를 하고서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하얀 몸을 따라 시트가 질질 따라가다가, 바닥에 뚝 떨어진다. 칼로 깎은 듯 한 부드러운 몸의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틀어 올리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저런 몸매니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쫓아다니지. 반쯤 비워 진 맥주 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열린 화장실의 문틈 사이로 샤워기의 물을 트는 소리가 들린다. 자기도 들어올래? 아니, 됐어. 혼자 즐기세요. 입안에 머금은 맥주 향이 벌써 질려버렸는지 더 이상 향기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싱크대 개수대에 맥주를 콸콸콸 부어 버린 유리는, 맥주 캔을 손으로 구기고 몸을 숙여 싱크대 밑 수납장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빈 캔을 집어넣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캔이 부드럽게 검은색 쓰레기통 안에 들어간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이라 얼마 걷지 않아도 금방 침대까지 닿는다. 살기 편한 아파트를 얻어주겠다는 부모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얻은 오피스텔. 방이 하나뿐이고 크기가 작아서(작다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크기를 말하는 거지만) 청소하기도 편하다. 어차피 청소야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 해주지만, 그래도 가끔 답답할 때면 유리 스스로가 청소할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 만나는 여자가 싫다고 거절해도 굳이 들어와 청소해줄 때도 있다. 그래서 방이 너무 넓으면 곤란하다. 어차피 집이야 대충 있을 것만 있으면 다 아닌가. 차라리 그 돈으로 더 비싼 차를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유리였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맞은편에 있는 TV라도 볼까 싶어 리모컨을 들었는데, 한 쪽에서 익숙한 벨소리가 흘러나온다. 들었던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고 벨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 쪽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검은 베스트를 들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들었다. 몇 시간 전에 자신이 전화 해 놓았던 곳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떠 있다. 유리는 재빨리 슬라이드를 열었다. “여보세요.” - 권유리 고객님? “네, 맞습니다만.” - 고진모터스 서비스 센터입니다. 유리는 빙긋 웃었다. 아까 전에 아우디 수리를 맡겨놓았던 곳에서의 전화. 일요일 날은 곧바로 처리해드릴 수가 없고, 어차피 굴러가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월요일 날 다시 오시는 건 어떻겠냐며 곤란한 표정을 짓던 점원의 앞에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온갖 욕을 다 해줬더니 단 3시간 만에 일 처리를 해준 듯싶다. 전화 상대방의 목소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걸 보아 아마 사장에게 단단히 깨진 모양인데, 그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리가 웃는 동안, 전화 상대방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많은 설명들은 가볍게 한 귀로 흘려버린 유리는 한참 설명을 들어주는 척 하다가 그래서 중요한 가격이 얼마냐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 아, 가격은 일단 저희가 고객님의 부담이 가장 적게 드는 방향으로…. 가격이 적게 드는 방향? 아니지. 그러면 곤란하지. 그 여자에게 최대한 뜯어 먹어야 하지 않겠어? 감히 내 다리까지 마티즈 문짝 따위로 찍어버린 여자인데. “저기요.” - 네? “저 배려해주실 필요 없으니까요. 그냥 가격이 가장 많이 드는 방향으로 견적 다시 뽑아서 연락하세요.” - 네? “아, 그리고 보니까 도색도 좀 벗겨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도색 전체 한번 다 하죠? 검은색도 슬슬 질리는데, 은색이라든가. 뭐, 알아서 해주세요.” - 그러면 가격이…. “가격 상관 하지 말고 그냥 최대한 비싼 방향으로 해주세요. 견적표 나오면 다시 연락하시구요. 그럼, 전 바빠서 끊겠습니다.” 당황해하는 점원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얀색 화면 위에 숫자들의 나열들이 깜빡깜빡 거린다. 그래. 싸게는 안 되지. 두고 봐.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 주지. 갑자기 정강이 쪽이 욱씬욱씬 아파오는 것 같다. 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시 한 번, 어제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당돌한 여자가 생각이 났다. 옅은 갈색 머리에, 작은 몸집의 여자. 핸들을 꼭 잡고 있던 그 손은 하얗고 가늘다 못해 세게 잡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치켜뜨던 눈을 조금 더 순한 눈으로 자체 필터링해서 떠올린다면 꽤나 봐줄만한 외모의 여자였다. 여자 몸매 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유리라, 그 짧은 와중에 그 여자의 몸매까지 훑어봤었다. 수준급의 외모에, 수준급의 몸매. 만약 그런 상황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그렇게 독기를 뿜어내지 않고 웃으며 유리 앞에 서 있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작업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접촉사고를 일부러 유리가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만약은 어디까지나 만약 일뿐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만약이라는 그럴 듯한 가정을 다는 걸 싫어하는 유리에게 있어서, 현실에서 만난 그 여자는 정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입의 여자였다. 유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이 아무리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잔뜩 날을 세운 고양이 같은 성격의 여자들이였다고 해도, 도도한 성격과 말 그대로 그저 더럽기만 한 성격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유리는 자신과 기 싸움을 했던 그 여자는 도도한 게 아니라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임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있는 차를 뒤에서 박아놓고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버럭버럭 대드는 모습이라니. 얼굴 자체가 그리 순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얼굴이긴 했지만, 그 행동과 말들에는 독기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어쩌면 여자가 그럴 수가 있나 싶다. 아무리 독한 여자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 어딘 가에 순한 면은 있기 마련인데 그 여자는 순한 면이라고는 아무리 찾아봐도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독한 여자. 그 정도로 강한 인상이 남은 여자. 덕택에 그 여자와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줄곧 머릿속에서 그 여자가 떠나지를 않는다. 제발 떠나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 정신없이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머리까지 아파온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으면 말도 안 해. 오히려 기분만 나빠지는 데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짜증나게. 유리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가, 문득 이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다시 견적을 내어달라고 말을 하긴 했더라도 일 처리한 시간을 보면 새로운 견적도 얼마 안 가 나올게 분명했다. 차를 맡겨놓자마자 바로 같은 기종으로 렌트해 왔지만 아무리 같은 종의 차라도 자신의 차가 운전하기 가장 편한 법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그 여자를 만나 돈을 받아내고, 최대한 빨리 그 여자를 만나기 전의 상태로 차를 돌려놓아야 한다. 진단서도 진짜 끊어놓을까 했으나 고작 마티즈 따위나 몰고 다니는 여자에게 아우디 수리비마저도 벅찰 것 같아서 그건 자신이 참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 독한 여자를 빨리 자신의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 저주받은 만남의 기억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 유리는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통화목록을 뒤졌다. 아까 억지로 따낸 번호를 발견하고서, 망설임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기계음이 들린다. 그 흔한 컬러링도 없다. 하여튼, 여러 가지 면에서 독한 여자네. 남들 다 하는 거 하지도 않는 것 봐. 기계음이 꽤나 길게 간다. 이쯤 되면 받을 법도 한데 받지를 않는다. 그리고 뚝. 기계음이 끊기고, 드디어 받았구나 싶어 입을 열려는 찰나 많이 들어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갑니다. …통화료가 별도로 부과…. 제대로 다 듣지도 않고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닫았다. 뭐, 못 들을 수도 있지. 한 번 더 해볼까. 다시 한 번 통화버튼을 눌렀다. 또 다시 기계음이 한참 들리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멘트가 들린다. 어라? 왜 안 받지? 한 번 더 해볼까? 그래서 한 통 더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유리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이 여자가 자신의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그러고도 남지, 그래. 그럴지도 몰라. 와, 진짜 그런 거야 혹시?!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래도 여전히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자 이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놀려 통화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이어진 통화시도. 5통 째까지는 아우디 수리비를 뜯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10통 째에는 아우디 수리비 값에 대한 생각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15통 째에는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마지막 20통 째. 이젠 아우디 수리비 따윈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이 여자가 전화 받는 걸 들어야만 겠다는 오기만 있을 뿐. “이런 썅!!!! 이 여자가 진짜 겁도 없나?!” 20통째도 무참히 씹혀버리자,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바닥에 냅다 집어 던져 버렸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핸드폰이 떨어지고, 충격에 의해 배터리와 본체가 분리된다. 씩씩 거리는 거침 숨이 입 밖에서 튀어나온다. 뒷목이 뻐근했다. 왜인지 엄청나게 열이 받았다. 화날 일이긴 해도 이 정도로 반응할 일은 분명히 아닌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여자는 전생에 자신과 무슨 원수라도 진 것 같았다. 갑자기 들려온 둔탁한 소리에 놀랐을까.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자가 샤워 타월을 몸에 두르다가 놀란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씩씩 거리며 바닥에 뒹굴어져 있는 핸드폰을 째려보는 유리와, 배터리가 분리된 채 처참히 버려져 있는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던 희진은, 빙긋 웃으며 유리에게 다가갔다. 흥분으로 잔뜩 일그러진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콧날을 바라보던 희진은 부드럽게 양 손으로 유리의 볼을 쥐고 자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유리의 미간 사이가 구겨져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떤 여자가 당신 괴롭혀?”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상관할 일이 아니긴. 권유리가 나 말고 딴 여자 때문에 잔뜩 흥분해 있는데, 상관 안하게 됐어?” 빙긋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대답 없이 여전히 얼굴을 구기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던 여자는, 양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이번엔 유리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움직임에 몸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타월이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슬슬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의 살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포착한 희진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했다. “뭐,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 “더 이상 그 여자 생각하지 마. 지금부터 권유리는 온전히 내 거니까.” 머릿속이 아찔해져 온다. 흥분했던 마음이 이젠 다른 의미에서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너라는 여자는 참, 아, 날 너무 잘 알아. 유리는 입에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여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얇은 허리가 팔 하나에 거뜬히 들어온다.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밀착시켜온다. 그와 동시에 겨우 걸쳐져 있던 타월이 툭 떨어졌다. 젖은 몸이 옷에 닿아 옷이 젖어가는 데도, 유리는 별반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했다.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귓가에 입을 대어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지금 열 받아서, 꽤 거칠 텐데 괜찮겠어?”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소리가 뛰고 있는 유리의 심장을 강하게 부여잡는다. 몸 속 어딘가에서 욕망이 머리를 빼꼼히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던 바네요, 권유리 씨.” 농염한 목소리. 웃고 있는 자신의 연인. 사늘한 방 안과, 뜨거운 몸. 유리는 비죽 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팔에 힘을 주어 침대 쪽으로 여자의 몸을 돌리고 침대위에 눕혔다.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자신을 쳐다보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당분간 그 독한 여자는 잊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 * * 덥다. 더워. 너무 더워. 미쳐버릴 것 같아. 유리는 속으로 끊임없이 주문처럼 덥다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캡모자의 챙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꾸욱 눌러썼다. 얼굴에 열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굳이 거울을 통해 확인 하지 않아도 이미 새빨개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은 자신의 무게를 결국 견디지 못했는지 스멀스멀 턱 선을 타고 움직이다가, 결국엔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손등으로 턱에 고여 있는 땀방울들을 훔치고 싶었지만 양 손에 가득 든 짐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거지같네. 이 더운 날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바닥을 바라보며 욕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발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작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원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싫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유리에게, 10년 우정까지 들먹이며 매달리는 태연의 부탁(이라고 태연은 말했지만 듣는 유리 입장에선 협박에 가까웠다.)을 결국 거절하지 못해서 이렇게 끌려오게 되었다. 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뻘건,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촌스럽게 시뻘건 작업복 같은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빨간색 모자까지 썼다. 그리고 양 손엔 피자가 든 박스를 몇 개씩 들고 있었다. 유리는 아까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간 그 모습에 스스로가 충격 먹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 야, 이거 꼭 해야겠어? - 어. - 그러지 말고,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호텔 같은데 가서…. - 미영이가 그런 거 싫어해. - 아씨. 그럼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걸로 생각하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 그럼, 그 많은 피자를 나 혼자 운반해? 무슨 수로? 교무실 선생님들 전부 다 챙겨드려야 할 것 아냐. - 그건 네 사정이고. 난 안해. 나보고 이 시뻘건 색 조끼를 어떻게 입으라는 거야? 가오도 안 나게…. - …얼마 전에 만난 여자, 희진 씨는 알고 있니? - 걔 내가 다른 여자 가끔 만나고 다니는 것 알아. 희진이 걔도 남자들 만나고 다닌다고 했잖아. 뭐, 시도는 좋았어, 친구. - 아니. 그 것 말고. 너 얼마 전에 그 여자한테 250만원어치 백 사준 거 희진 씨가 아냐고. 만나는 건 뭐라 안 해도 과도한 애정표현은 용납 안 하지 않나? - ……. - 그러고 보니 너 희진 씨한테 해줬던 선물 중에 가장 비싼 게 200만 원짜리였나? 와…50만원이나 차이 나네? 희진 씨 화나면 좀 무섭지 않아? 성깔 장난 아니라며. 네가 유일하게 못 이기는 여자가 그 분이라며? 그나저나… 그 분 전화번호가 몇 번이더라?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네…. - 김태연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비죽 웃으며 진작 그랬어야지 라고 말하던 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 작은 몸의 멱살을 부여잡고 넌 사랑 앞에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걸 얼마나 애써 참아냈던가. 지금 생각해도 그걸 참아낸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피자가게 한 구석에서 그렇게 한 30분간 티격대격 하다 결국엔 김희진이라는 카드를 꺼낸 김태연에게 항복하고, 이 후덥지근한 월요일, 아프다는 핑계로 회사까지 빼먹고 졸지에 피자배달원이 되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고 살아왔던 인생. 그깟 10년 우정이 뭐라고 하루 만에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싸구려 옷을 몸에 걸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의 커플의 1주년 기념 깜짝 이벤트 때문에 입게 되어 버렸다니. 심지어 희진과의 기념일도 단 한 번도 챙겨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 싸구려 옷을 입었다는 것도 수치스러웠지만 입게 된 계기도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옷도 옷이고, 양 손에 들린 피자의 무게도 제법 무거웠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을 지경. 짜증이 머리끝까지 샘솟아 오르고 있었다. 유리는 앞에서 묵묵히 피자를 들고 걸어가는 태연의 등 뒤에 대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씨발. 야, 대체 학교는 어디에 있는 거야? 뭔 놈의 학교가 이렇게 높은 산에 위치해있는 건데?” “거의 다 왔어. 고개 쳐들면 건물 보이잖아. 야, 너 그리고 미영이 앞에서 욕하지 마. 황미영 누가 욕하는 거 싫어해.” 이젠 말도 눈치봐가면서 해야 하는구먼.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삐죽 내민 채로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태연의 말대로 얼마 남지 않은 곳에 학교 본관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하얀색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고, 그렇다고 노란색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말 그대로 누리끼끼한 색의 건물. 그 건물위에 달려 있는 태극기가 왠지 처량하게 보였다. 바람도 불지 않아 축 쳐져 있는 태극기를 바라보던 유리는, 문득 저 안에 들어가면 시원할 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6월 중순을 지나 6월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이 시점. 말이 장마지만 비가 잠깐 온 것 빼고는 날씨는 완전 한 여름 날씨다. 이만큼 더울 정도면 학교에서는 에어컨을 틀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온갖 신경질을 다 내며 올라오느라 정신적인 소모도 많다보니 정말 절실하게 담배도 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손에 들린 피자를 해치우지 않은 이상 담배를 필 수도 없다. 그래서 유리는, 어떻게 해서든 저 건물 안에 일단 빨리 들어가고 봐야겠다란 결정을 내렸다. 유리는 피자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꼭 쥐고 발걸음을 빨리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태연의 작은 몸도 금세 제쳐버리고, 거의 뛰다시피 재빨리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건물 본관 안으로 쏙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유리를 맞는다. 그제야 숨이 트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는 자신의 양 손에 들고 있던 피자들을 일단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폐부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만족스러웠다.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려 아까 아무렇게나 쑤셔놓았던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땀을 많이 흘려서 손수건이 금세 흥건히 젖어든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말도 없이 빨리 가는 거야? 유리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이 툴툴대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터질 것 같을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끄럽게 욕을 해대가며 올라가던 유리와 달리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앞서 걸어갔었던 터라 그다지 힘들지 않나보다 했는데, 태연 역시 유리 못지않게 힘들어 했던 모양이다. 온 얼굴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을 닦던 손수건을 태연 쪽을 향해 내밀었다. 닦아라. 지금 네 땀 닦은 걸로 내 얼굴 닦으라는 거야? 내 피부에 저주 내릴 일 있어? 이게…기껏 생각해줬더니?! 울컥 한 마음에 유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모습에 움찔한 태연은 결국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받았다.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살짝 들고 이마에 묻은 땀방울을 닦는 태연의 모습을 바라보다, 유리는 문득 자신의 조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엄지로 슬라이드를 살짝 밀었더니 부드럽게 슬라이드가 올라간다. 밝게 켜진 화면에는 예상대로 아무것도 떠 있지 않다. 그걸 보자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건방지게…결국 끝까지 씹겠다 이거지? 희진이 새벽에 일찍 촬영장을 가야한대서 유리 역시 덩달아 일찍 일어났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거울 앞에서 바지를 벗었던 그 순간에, 유리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퍼랬다. 정말, 정말 시퍼랬다. 정강이 한 쪽이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어제는 전혀 몰랐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시퍼렇게 변한 걸 보니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그 걸 보고 놀란 건 희진 역시 마찬가지. 다만 반응은 유리와 너무 달랐다. 너무 놀라서 온 신경이 굳어버렸던 유리와 달리 배를 잡고 까르르 웃어대는 희진에게 차마 화를 내진 못하고 유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계속 웃어대는 희진의 옷을 억지로 입혀 촬영장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리고 태연을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멈추지 않고 계속 전화를 해댔다. 하도 쉬지 않고 전화를 해서 몇 통을 전화했는지는 유리 자신조차 몰랐다. 사실 세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 상대방 여자의 뻔뻔함에 결국 유리는 혀를 내둘러버렸다. 차라리 전원을 꺼놓기라도 하면 전화를 하지도 않을 텐데, 전원은 끝까지 끄지도 않으면서 그 많은 전화를 받지 않는 근성. 그 근성 하나는 칭찬해 줄만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자라도 한 통 찔러 놓을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연락도 없다.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은데다 그래도 여자한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서 경찰에 연락하는 일 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연락을 받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하는 수밖에 없다. 유리는 화면을 계속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그 여자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단축번호를 눌렀다. 2번을 한번 누르고, 8번을 길게 누르자 독한 년 이라는 글자가 화면위에서 깜박 거린다. 하도 많이 전화를 해대서 일부러 전화번호까지 단축번호 지정을 해 놓았다. 원래는 18번으로 해놓고 싶었지만, 18번은 태연 이였기에 아쉽게도 28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익숙한 기계음이 들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음성사서함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리는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핸드폰을 탁 닫아버렸다. 그런 유리의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태연의 눈빛이 느껴졌다. 이 여자가…. 그래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누구야?” 땀을 닦던 손수건을 유리의 조끼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으면서 태연이 말했다. 유리는 반대쪽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피자들을 양손으로 다시 들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 어제 접촉사고 났댔잖아.” “어.” “그 접촉사고 낸 여자.” “아? 네가 독한 여자라고 했던 그?” “어. 아무래도 오늘 경찰에 신고 해야겠다.” “뭐? 귀찮아서 안 한다며?” “마음이 바꼈어.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앞에 무릎 꿇고 울고불고 난리 부리는 걸 꼭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뭐? 그게 뭐야? 너 변태야? 그렇게 말하는 태연의 외침을 무시하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정강이 쪽이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다. 건물에 들어오면서 조금 가라앉았던 짜증이 다시 샘솟는다. 정말 이 여자는 유리에게 이틀 만에 새로운 경험을 몇 번이나 시켜주고 있었다. 난생 처음 교통사고도 당해봤고, 난생 처음 부모님이 아닌 타인에게 맞아보기도 했다. 다리에 시퍼렇게 멍까지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단순한 분노를 넘어 증오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보호받아야 할 마땅한 존재라는 교육을 받아온 터라 이제껏 여자에게 크게 화를 내 본적이 없었다. 당연히 여자를 때려 본 적은 더더욱 없고, 여자에게 욕을 해본 적도 없고(물론 태연은 예외다. 유리에게 있어서 태연은 여자가 아니니까.) 웬만해서는 아무리 자신을 열 받게 한들 그 상대방이 여자라면 목소리 크게 내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하지만 정말, 지금 당장 이 여자를 보면 유리는 그 여자의 싸대기라도 한대 갈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교무실이네, 여기가.” 이를 악물고 걸어갔더니 뒤따라오던 태연이 말한다. 그제야 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어 문에 붙어있는 팻말을 바라보았다. 녹색팻말에 하얀색으로 교무실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게. 드디어 다 왔군.” “네가 먼저 들어가서 피자 왔습니다 라고 말해라.” “꼭 그렇게 쪽팔리게 말을 해야 해?” “……희진 씨 전화번호가….” “알았어, 알았다고. 치사한 자식.”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눈앞에 굳게 닫힌 갈색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도 쪽팔린데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피자 배달 왔다는 둥의 말을 지껄여야 한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못 해먹겠다고 던져놓고 가고 싶었지만, 칼자루는 태연이 쥐고 있다. 유리는 문손잡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비록 전혀 멋있지 못하고 오히려 쪽팔리기만 한 일이지만 김희진한테 욕 듣는 것보단 낫지. 걘 나도 무서워. 무슨 일 저지를지도 모르는데…. 그래, 눈 딱 한번 감고하자. 어차피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인데 뭘. 유리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벌컥 열고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재빨리 교무실 안에 있는 인원부터 파악했다. 다행히 수업시간에 맞춰온 탓에 텅텅 비어 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자 두 명이 앉아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빨간색 캡모자의 챙을 잡아 푹 눌러쓰며 말했다. “피자 배달 왔습니다.” 나지막한 자신의 목소리가 교무실 안에 가득 울린다. 그걸 듣고 있으니 왠지 민망해져서 유리는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샌가 옆에 들어온 태연이 빙긋빙긋 웃으며 조그맣게 잘했어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수치스러워졌다. 이런 일을 한 것조차도 수치스러운데 태연에게 잘했다는 인정까지 받다니. 정말 수치스러웠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저기, 피자 시킨 적 없는데요?” “시키셨는데요. 황미영 씨 앞으로.” “네? 저 시킨 적 없…. 어? 잠깐. 목소리가….” “시키셨잖아요, 황미영 씨. 안 시켰어요?” 어리둥절한 목소리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몇 번 뒤섞이고, 태연이 씨익 웃으며 캡모자를 벗겨내자 태연아!! 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려오는 잰 발자국 소리들. 얼마 안가 태연의 품에 폭 안겨드는 미영의 몸이 보였다. 태연보다 미영의 키가 미묘하게 큰 듯 한데 용케도 폭 안겨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유리는 혀를 찼다. “뭐야아아.” “흐흐흐흐. 우리 자기, 내가 우리 1주년 잊어버린 줄 알았지? 사실은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모른 척 한 거야!” “아, 진짜아? 난 전혀 몰랐지. 난 우리 자기가 정말 우리 1주년 잊어버린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어? 내가 다른 건 다 까먹어도 우리 사귄 날을 까먹을 리가 없잖아.” 지랄한다. 유리는 그렇게 욕을 내뱉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태연의 얼굴을 보니 왠지 속마저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이제껏 보았던 태연의 웃음은 온통 사악함이 가득한 웃음 뿐이었는데, 지금 미영을 바라보고 있는 태연의 미소는 말 그대로 온화함 그 자체였다. 저렇게 웃던 태연을 본 적이 있었던가 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사랑을 하면 변하는 거라고 주구장창 태연이 주장했었는데,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태연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미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다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담배가 간절히 피고 싶어졌다. 유리는 조끼의 주머니 윗부분을 손으로 더듬었다. 네모난 상자가 만져지자,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담뱃갑을 꺼내었다. 야, 학교 내 법적으로 금연인거 몰라? 뭐? 언제부터 그런 거야? 언제부터 그랬던 게 무슨 상관이야. 담배 피지 마. 미영이 담배 냄새 싫어해. 거 참. 태연의 타박에 결국 담배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미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타박 안 해도 되는데…. 아니야, 우리 애기 담배 냄새 싫어하는 데 피게 할 순 없잖아?! 히히, 역시 우리 자기가 좀 짱이야. 유리에게 들리지 않게 일부러 조그맣게 말하는 듯 한데, 귀가 밝은 유리의 귀에는 단 한글자도 빠지지 않고 박혀 들어왔다. 정말 담배가 간절히 피고 싶어졌다. 피자 주고 밖에 나가자마자 얼른 담배부터 꺼내야 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수연아! 이리 와서 인사해. 태연이랑, 에 또…. 누구랬지?” “유리.” “어어, 그래. 유리래. 여기 있는 사람. 우리 때때 친구!” 귀여운 목소리로 한 쪽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는 미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때 그림으로 보았을 때에, 그림만으로는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림보다 훨씬 더 예쁜 듯 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건 둘째 치고, 웃을 때 휘어지는 저 눈웃음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눈웃음에 홀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듯싶다. 그 중의 한명이 자신의 친구인 태연.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저 여자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선언을 했던 태연의 말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이면 다른 여자들보다는 몇 달 더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영의 손짓에 다가오는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살짝 숙인 시선 속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발목의 부드러운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니 다리라인이 굉장히 예쁜 것 같았다. 유리는 금방까지 들었던 메스꺼운 기분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이 정도 수준이면 아마 친구도 어느 정도 레벨은 될 테고. 거기다 선생님이라. 그래, 선생님을 한 번도 사겨본 적 없는데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지. 안 그래도 어제부로 한 명이 비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꼬셔봐야겠구나. 내가 오늘 이렇게까지 고생했는데, 그 정도 상을 받을 자격은 있지. “유리 씨, 인사하세요. 여기 제 친구 수연이에요.” 미영의 말에 유리는, 애써 만들어낸,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캡모자의 챙 아래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리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온화한 표정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비죽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턱을 약간 치켜뜨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보인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끊임없이 귀찮을 정도로 유리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여자. 유리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던 그 여자. 그 문제의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유리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호라.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아…짜증나…. 그 개싸가지 맞잖아….” “…뭐요? 개싸가지?!” 뭐야?! 만나자마자 개싸가지라고?!?! 이 여자가 진짜? * * * 냉랭한 분위기가 좁은 사각형의 공간 안에 가득하다. 태연과 미영은 테이블 한 쪽에 딱 붙어 앉은 채로, 자신의 눈앞에서 마주 앉아 서로를 째려보고 있는 유리와 수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연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팔짱을 끼고 유리를 노려보고 있었고, 유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힘을 쭉 뺀 채로 계속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태연은 당최 이게 어떤 상황인지 정리가 안 되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개싸가지가 어쩌고저쩌고 불꽃을 튀어대더니 지금껏 이 모양 이 꼴이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데다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서 선생님들이 하나둘 씩 교무실로 들어오시는 바람에 재빨리 피자를 다 나눠드리고, 비어있다는 상담실로 들어와 네 명이 이렇게 앉아있다. 좁디좁은 곳에 있으니 그 냉랭한 분위기가 더욱더 진해지는 것 같았다. 태연이 유리의 눈치를 보듯이 미영 역시 수연의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지. 미영은 흘끔흘끔 수연을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태연의 티셔츠 자락을 살짝 잡았다. 그런 미영의 손길에 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미영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문자보내기 메뉴로 들어가 테이블 밑에 핸드폰을 두고 자판을 눌러댔다. - 대체 쟤들 왜 저래? 왜 그러는 지 알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태연이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영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닫았다. 테이블 위에 아까 자신들이 챙겨왔던 피자 한판이 놓여 있다. 아침에 1주년을 잊어버린 듯이 말하는 태연의 모습에 심통이 나서 아침밥도 안 챙겨먹고 온 상태라 배도 고픈데, 앞에 그렇게 좋아하는 피자를 두고서도 몇 분 째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이봐요.” 긴 침묵을 깨뜨린 건 유리였다. 유리는 뒤로 기대었던 몸을 살짝 앞으로 기대고,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서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탁탁 치며 말했다. 수연은 여전히 대답 없이 유리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귀가 잘 뚫려있네 어쩌네 라고 하면서, 전화 받을 귀는 뚫려있지 않나봐요?” “어머, 그 전화가 당신 전화였나요? 전 웬 싸이코가 전화한 줄 알았어요. 61통이나 전화했길래.” 이 여자 봐라? 알면서도 모른 척 해? 유리는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며 빙긋 웃었다. 너무 억지로 웃었더니 입 꼬리가 마비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났다.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았던 여자. 어떻게 된 게 기가 막히게도 이 여자가 자신의 친구인 태연의 연인, 황미영의 절친한 친구 사이란다. 사실 이 여자에 대해서 태연에 대해 어렴풋이 몇 번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미영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라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나. 그 말을 들었던 유리는 코웃음을 쳤었다. 그 여자가 많이 찌질한가 보네, 라고. 그때 태연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했다. 자신이 만났던 그 여자는 조금 성격이 까칠 하긴 하지만 나긋나긋한 면도 있고, 게다가 얼굴도 상당히 예뻐서 같이 앉아 있는 내내 끊임없이 남자들의 시선이 쫓아다녔었다나. 그런데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 때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유리는 자신을 째려보는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얼굴이 아무리 예뻐 봤자 뭐해?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인데. 얼굴로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지. “아…. 그럼 유리 씨가 혹시 그 스토커?” “뭐예요? 나 스토커라고 했어요?!” “어? 그럼 수연 씨가 그 독한 여….” “독한 여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유리 역시 어이가 없었다. 스토커라니. 나를 스토커라고 표현했어? 감히? 와, 내가 미쳤니? 돈 주고 따라 다녀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따라 다녀 줄까 말까구만. 이 여자가 진짜. “그럼, 독한 여자보고 독한 여자라고 하지 뭐라 그래요?” “…나보단 그 쪽이 더 독한 것 같은데요. 세상에, 24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61통이나 전화했어.” “그 쪽이 내 아우디를 박아놓고 전화를 안 받으니까 그렇잖아요.” “전화를 받게끔 했어야죠. 그렇게 전화해대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받아요? 뭐 정신병자도 아니고.” “뭐야?! 정신병자?!?!?!?!?” 테이블을 두 손으로 쾅 내리치며 유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에 미영이 눈을 깜빡이며 몸을 움찔거리자, 태연이 어깨를 손으로 끌어안고 등을 쓸어 넘겨준다. 유리의 몸을 따라 앞에 있는 수연의 눈이 움직인다.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다. 상황이 바껴도 단단히 바꼈다. 정말 원래대로라면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게 맞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빈다면 이제껏 건방지게 굴었던 걸 다 용서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유리의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빌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거기에 스토커 취급을 받고,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은 마당에 더 이상 용서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를 반드시 감빵에 집어넣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유리에게, 수연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Hey, blockhead.” “뭐?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봐요, 혀 안 풀어요?!” “Could you please shut that fucken mouth?” 이 여자가 지금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뭐? 닫아달라고?! 워낙 빠르게 내뱉은 말이라 유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유리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진다. “뭐라는 거야, 진짜.” “주둥아리 좀 닥쳐주래요.” 그걸 또 해석하는 이 여자는 또 뭐야? 유리가 고개를 홱 돌려 미영을 째려보자 태연의 작은 몸이 움찔거린다. 미영을 건들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선, 자신의 옆에 앉은 미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확 끌어당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휴, 저걸 진짜. 두 손을 주먹을 꼭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근데 당신. 태연 씨랑 친구죠?” “그래서요.” “그럼, 나보다 한살 어린 거 아닌가?” 그 말에 유리의 얼굴이 굳어갔다. 태연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 한번 지나가는 식으로 미영이 자신보다 한살 연상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여자의 나이 따위 제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흘려 들어 버렸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살 차이 가지고 진짜 재는고만. “좋겠네요. 한살 더 잡수셔서.” “….” “한살 더 먹었으면 언니답게 행동을 하시던가요. 하긴, 얼굴을 보아하니 저보다 더 나이 있어 보일 것 같….” 수연의 눈썹 한 쪽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피자 상자 밑에 두 손을 쓱 집어넣었다. 말을 이어가던 유리가 그런 수연의 손길을 흘끔 바라보던 그 순간, 수연이 빙긋 웃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런 수연을 바라보았는데, 수연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지더니 그 위에 얹어져있던 피자 상자도 번쩍 하늘 위로 붕 뜬다. 상자의 뚜껑이 열려 그 안에 들어 있던 피자 조각들이 상자에서 뛰쳐나오는 게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유리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유리쪽을 향해 날아오던 피자조각들은, 정확히 서 있는 유리 티셔츠의 배 쪽에 부딪혔다. 악!!!! 유리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피자 토핑들로 범벅이 된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이 거 오늘 빤 건데!!! 악, 미치겠네 진짜? 아까 들어오자마자 덥다는 핑계로 조끼를 벗어놨는데 이 여자가 있다는 걸 깜빡 한 게 후회가 되었다. 미간을 확 찌푸리며 유리가 온갖 호들갑을 떨자, 미영이 급하게 일어서며 상담실 한 쪽 구석에 있는 휴지를 찾아와 태연에게 건네었다. 휴지를 받아든 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급하게 유리 티셔츠 위의 이물질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태연의 빠른 손길을 지켜보는 수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를 보니 다시 정강이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진짜 보통이 아니구나. 정강이에 이어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야, 됐으니까 그만 닦아. 어? 어어.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태연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리도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 독할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자신들이 만난 상황이 상황이라고 해도, 반응이 이 정도로 나오는 건 정말 문제가 있는 거다. 유리는 왠지 온 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의자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떠오른다. “이봐요.” “왜요?” “당신…. 이제껏 사랑 한번 못해봤다면서요?” “…황미영 너….” 힉. 이상한 소리가 미영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태연이 황급히 미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부터 계속 유리를 옭아 메던 시선이 이젠 미영을 향해 있다. 그 크고 검은 눈동자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태연이가 예쁘다고 해서 예쁜 사람이 왜 사랑을 못해봤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알만하네.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사랑을 해요?” “그 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요?” “훗. 난 당신하고 달라요. 지금 당장 연락하면 나올 사람 많습니다?” “…그 사람들 눈은 어떻게 됐나 보네요. 아니면, 돈으로 샀나?” 여전히 독기는 풀지 않고 말하는 수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제 밤에도 잠깐 생각했었지만, 태연의 말대로 예쁜 얼굴이긴 했다. 이 정도 얼굴이면 밖에 나가서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남자 애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 그놈의 성격 때문에 사랑 못해 본 게 확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여자는 여자지. 이 여자도 내 손에 걸리면 야들야들 하게 변할 걸? 당신 같은 여자는 별거 아니야. 뭘 이렇게 도도하게 굴어? “당신이 내 진가를 몰라서 그러는데…. 내 손에 걸리면 당신은 한 달 거리도 안 돼요.” “뭐라고요? 와, 이거 성추행인데?” “당신 같은 여자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고요. 혼자 잘난 척, 혼자 도도한 척 척척척 다 해놓고 결국엔 마지막에 자기 버리지 말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꼴 진짜 많이 봤어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어쩌라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까불지 마시라고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여자는….” “그런 개 같은 자만심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제 얼굴이요.” “풉.” “…….” …비웃어? 지금 비웃은거지? 짧고 강렬한 그 웃음소리에 유리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태연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유리가 휙 돌아보자, 태연이 입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다. 권유리 한방 먹었네.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짜증나. 고개를 다시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정말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킥킥 대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너무 열 받아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연애의 재미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작업을 걸어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인생이다. 아무리 싫다고 정색을 하는 여자들도 결국 마지막엔 버리지 말라며 울며불며 매달렸었다. 외모도 어디 나가서 빠진다는 생각 해 본 적도 없고, 운동도 꾸준히 해 와서 적당히 보기 좋게 몸매와 근육도 잡혀있다. 키도 여자치곤 큰 편이고, 곧 죽어도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인생이라 옷 입는 스타일이 좋다는 소리도 끊임없이 들어오며 살아왔다. 거기다 집안에 돈이 차고 넘치도록 많은 바람에 평생 일 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될 정도. 관심 있는 여자에겐 베푸는 걸 아끼지 않는 데다, 매너 좋다는 소리도 수 없이 많이 들어왔다. 단 한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여자는 물론 남자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으로 비웃음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것도 자신의 아우디를 박아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있어야할 여자가 입까지 틀어막아가며 비웃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는 수치감이 온 몸을 휩쓸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오기가 다시 한 번 꿈틀 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 도도함이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 유리는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갑자기 유리가 웃자, 수연이 웃던 걸 멈추고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유리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며 입을 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렇게 못 믿겠으면 한번 겪어보시죠?” “미쳤어요? 얼굴 보고 있는 것도 끔찍한데 겪어보긴 뭘 겪어요.” “한번 해보자구요.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뭘 해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린다. 유리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운 모양. 유리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였다. 고개를 약간 숙이니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그 여자의 손이 보였다. 어제는 이 손으로 핸들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부여잡고 있는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 유리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수연의 몸이 살짝 움찔거린다. 살짝 아래로 내리 깔았던 시선을 들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쪽이 절 사랑하게 되나 안 되나, 한번 보자구요.” 뭐?! 태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야, 너 미쳤어!?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미영이 친구인 이 사람만큼은 안…! 어이가 없는 듯 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태연에게 수연이 자리에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수연의 손짓에 태연이 입을 굳게 다물고 얌전히 자리에 앉는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표정을 보며 유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거봐라. 벌써 반쯤 넘어왔네. “내가 뭣 하러 그 쪽이랑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요?” “저도 쓸데없이 그 쪽에게 시간 쏟아 붓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그 쪽이 자꾸 제 자존심을 건들이니…. 그럼 이렇게 하죠. 한 달 안에 안 넘어오면 아우디 수리비 값 안주셔도 돼요.” “…그럼 제가 기를 쓰고 안 넘어가려고 더욱더 발버둥 칠 텐데…무슨 배짱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전 제 자신을 믿으니까요.”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뭐, 그건 한 달 후에 알게 되겠죠. 어때요?” 테이블 쪽으로 약간 기울였던 수연의 몸이 의자 뒤로 기대어진다. 유리는 빙긋 웃으며 그런 수연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을 탁탁 두들기며 그런 유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본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속으로 이것저것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산할 것 없잖아? 어차피 당신은 한 달 후에 아우디 수리비 고스란히 주게 될 텐데. 아주 잠깐 깊게 고민을 하던 수연이 문득 자신의 옆쪽에 앉아있는 미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 라는 입모양을 만들어 낸다. 미영아. 응? 가서 종이하고 펜 좀 가져와. 에? 어디다 쓸려고? 가져오라면 가져와. 아, 응.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미영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캐비닛을 열더니 그 안에 든 문서 상자에서 이면지 한 장을 꺼내고, 문서상자 옆에 있는 펜 꽂이에서 펜을 하나 꺼내 들고 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수연 쪽으로 슬쩍 밀자, 수연이 그 종이를 검지로 잡고 테이블 한 가운데 쪽으로 스윽 민다. “각서 써요.” “…….”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한 달 후에 딴 말 하면 곤란하니까요.” “아아. 뭐, 그렇게 하도록 하죠. 어차피 결과야 정해져 있겠지만.” 부드럽게 웃으며 유리가 능숙하게 하얀 종이 위에 말끔하게 글을 적어간다. 사각사각. 종이 위에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그다지 엄숙한 분위기가 어울릴 장면도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방 안에 엄숙하고 진지한 공기가 잔뜩 깔린다. 아까 피 튀기며 말다툼을 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적어가던 유리는, 마지막에 자신의 사인을 하고, 종이를 빙글 돌려 수연 쪽으로 내밀었다. 그 쪽도 사인하세요. 한 달 후에 딴 말 하면 곤란하니까요. 수연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웃는 유리를 보던 수연이 피식 웃으며 유리가 건네주는 펜을 잡는다. 능숙하게 펜을 굴려 사인을 한다. 사인을 다 하고나서, 이번엔 수연이 손가락으로 종이를 빙글 돌려 태연과 미영 쪽으로 스윽 밀었다. “너희들도 사인해.” “에? 우리가 왜?” “증인들도 있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얼른 사인 안 해?!” 수연과 유리가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태연과 미영이 몸을 움찔 거리더니 재빨리 고개를 숙여 종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사각사각 거리며 먼저 사인을 하는 미영의 모습을 보다가, 유리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마주 앉아있던 여자도 유리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유리가 빙긋 웃는다. 수연 역시 빙긋 웃는다. 유리가 마음을 먹고 덤벼들어서 유리와 사랑에 빠지지 않은 여자는 없었다. 그러니 이 여자도 어차피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사랑이라는 게 계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감정이지만 이 여자와는 억지로라도 사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과, 공장에 쳐 박혀 있는 자신의 불쌍한 애마를 위해서라도. Hissing 04 첫 번째 규칙. - 일단 말부터 놓읍시다. - 싫은데요? 연장자인 제가 손해잖아요. - 놓기 싫으면 놓지 마. 난 놓을 테니. - 참내. 두 번째 규칙. - 내가 부르면 즉각 튀어나온다. - 뭐? 내가 왜 니가 부르면 튀어나와야 하는데?! - 야. 그럼 넘어 오게 하라고 하면서 나랑 만나지도 않을 셈이야? 뭐 건덕지가 있어야지 넘어오게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 그건 당신 사정이구요. 너 그리고 말끝마다 야야 거릴래? 나보다 한 살 어린 게 어디서 감히? - 페어플레이 하자고, 페어플레이. 그리고, 나이 한살 더 쳐먹은게 자랑이야? 늙어서 좋겠다? - 말하는 꼬라지 봐라. 아, 진짜 짜증나. 세 번째 규칙. - 과도한 스킨십 금지. - 허이고. 내가 미쳤다고 당신한테 스킨십을 하겠어? - 너는 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 나중에 해 달라고 빌지나 마시지요. 줘도 안 먹어. - 먹긴 뭘 먹어? 그 놈의 아우디 역시 산산조각 내버렸어야 했어. 저 놈의 입도 같이. 네 번째 규칙. - 사생활에 대한 간섭 금지. - 당신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아. -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여자들이 다 똑같이 이래저래 간섭을 하더라고. 당신도 그럴까봐서. - 걱정 마. 난 그렇게 한가로운 여자는 아니니. - 한가로운 여자 같은데? 딱 봐도 ‘나 한가해요.’라고 써진 얼굴이잖아. - 이걸 죽여 말어?! 마지막 규칙. - 정확히 한 달 째에 상황 종료. 자신이 한 말 꼭 지키기. - OK. - 말만 그러는 거 아니지? 수리비 달라고 하기만 해 봐라. 이 각서 공증까지 해야 하나. - 그러는 그 쪽이야 말로 한 달 후에, 권유리님 아우디 차 아예 사줄 테니 제발 계속 만나주세요 라며 매달리지 마. 난 그런 여자 딱 질색이야. -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꿈도 야무지셔. 수연은 자신의 종이 앞에 써져 있는 글자들을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충대충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종이 밑 부분에 박혀있는 자신의 사인과, 유리의 사인, 그리고 미영과 태연의 사인을 바라보았다. 원본은 미영에게 있고, 자신과 유리는 그 복사본을 한 장씩 가져갔다. 법적인 효력이 있어야 하니 공증까지 하자는 걸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미영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그건 하지 않기로 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어루만졌다. 머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 같기도 한데, 몇 시간째 쐬고 있는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 전의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수연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미영은 호들갑을 떨며 둘 사이가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얼마 못가 수연에게 응징을 당해 더 이상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여전히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금방도 능글맞게 웃으며 유리 씨한테 연락오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수연이 대답도 하기 전에 미영의 반 반장이 청소 다 끝났으니 종례를 해달라고 찾아오는 바람에 부리나케 교무실을 뛰쳐나갔다. 운명이라, 운명. 수연은 미영이 강조했던 그 단어를 조그맣게 중얼거려보았다. 아무리 중얼거려도 낯설다. 서걱서걱, 입 안에서 어색하게 감도는 단어. 확실히 기가 막힌 인연인 건 맞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악연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낸 접촉사고의 상대방이 알고 보니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미영의 연인의 친구. 미영에게 어렴풋이 들은 기억도 있다. 태연이 예전에 반항기가 넘쳐흘렀을 때(라고 미영이 표현했다. 말만 멋들어지게 반항기라고 한 것뿐이지 말 그대로 날라리였을 때를 말한다.) 잘 어울려 다녔던 친구라던데, 지금도 여전히 하는 짓이 비슷하다고 했었나. 그 많은 여자들을 만나면서도 이름 한번 헷갈리지도 않고, 걸려본 적도 없단다. 유일하게 한 명만이 유리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걸 알면서도 그냥 만나주고 있다고 했다. 그 여자 완전 쓰레기네 라고 말하는 수연에게 그래도 태연의 친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정색하던 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 길래 그러고 다니나 싶어 궁금하긴 했었는데 그 여자를 이런 식으로 만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만나고 나니 수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다른 여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영의 말을 들어보면 그 여자가 한번 마음먹고 건드려서 안 넘어온 여자가 없었다는데, 안하무인격으로 사람을 대하는 여자가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는 걸까. 끌고 다니는 차나 입고 다니는 옷들이나, 소문난 재벌 집 자제인 태연과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려 놀러 다녔다는 것 등등을 보면 돈이 많은 것 같던데, 단순히 돈 때문에 여자들이 그렇게 쫓아다니는 건가 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해도 참는 데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입을 열 때마다 욕에, 골초에,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게다가 이제껏 살아온 인생이 궁금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하늘을 치솟는 그 막돼먹은 자존심까지. 얼굴이 아무리 반반하고 돈이 많다 해도 용납할 수 없는 건 용납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그런 여자와 운명이라니. 그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수연이었다. “내가 그런 여자랑 운명이라고? 차라리 평생 혼자 사는 게 더 낫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책상 위에 집어던졌다. 하늘하늘 거리며 책상으로 떨어지는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한 달 만에 자신에게 넘어오게 할 수 있다며 빙긋 웃던 그 시커먼 얼굴이 생각났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 걸까. 살아오면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왔지만 그런 식으로 당당하게 자신에게 빠져들게 만들겠다고 예고까지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아우디 수리비까지 걸어 놨다.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조종 가능한 것도 아닐 텐데 너무 당당히 말해서 수연은 순간적으로 이 여자가 더위 먹었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 날 피자를 들고 올라오느라 더위를 먹었거나, 아니면 원래 미친 여자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리도 없고, 설사 그런 생각을 속으로 했다 해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할 테니. 어쨌든 덕택에 수연은 아우디 수리비를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앞으로 한 달간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아야 하긴 하지만 그 큰돈을 한꺼번에 그 여자에게 쏟는 것보단 더 낫다. 그 여자라면 고쳐도 되지 않을 부분마저 고치려고 덤벼들 게 분명하다. 억울하게 내지 않아도 될 비용까지 내는 것보단, 한 달 동안 눈 딱 감고 마주하면 그만이다. 저 쪽에서는 한 달 안에 자신이 넘어올 거라 장담하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제껏 한 번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데 단 한 달 만에 사랑에 빠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 여자와는. 책상위에 있는 종이를 흘끔 바라보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종례를 끝낸 미영이 올 시간이다. 오늘은 둘 다 야자감독이 아니라 같이 퇴근할 수 있다. 차가 없으니 미영에게 태워달라고 해야 한다. 마티즈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 기회에 폐차시켜버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가 아우디 수리비를 대주는 대신에 그 차 폐차시켜버리라고 엄명을 내리셔서 사고가 난 그 날 바로 폐차를 시켜버렸는데, 수연은 섣불리 부모님께 말을 했던 걸 후회했다. 이런 내기를 하게 될 줄 알았으면 부모님께 아우디 수리비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수연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내기에 이길 확률은 100%. 따라서 아우디 수리비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아깝다. 그냥 고쳐서 쓰면 됐을 텐데. 하여튼 그 인간 하는 짓은 다 마음에 안 들어. 타이밍도 왜 그렇게 거지야? 쯧쯧. 괜히 애꿎은 유리 탓을 하고 있는데, 문득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의 몸체가 부들부들 떨린다. 요란한 진동소리가 들리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동료 선생이 흘끔 바라본다. 수연은 빙긋 웃으며 재빨리 핸드폰을 들었다. 집에서 온 전화.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어, 엄마. 왜? 나 곧 집에 들어가.” - 집에 들어오다니? 너 무슨 소리야? 잊어먹었어? “어? 뭘?” - 어휴. 너 그럴 줄 알았다. 전화하길 잘했네. 넌 어떻게 된 애가 나이도 어린 게 그렇게 뭘 자꾸 까먹니? 그것도 아침에 이야기 한 거를. 타박하는 어머니의 말에 수연은 눈동자를 천장 쪽으로 돌리며 아침에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냈다. 분명 무언가 대화를 나누긴 한 것 같은데, 잠에 취해 대충 흘려듣고 말았더니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수연은 애써 더듬더듬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되살려내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해서… 내가 안 먹겠다고 그러고… 그리고 그 다음 아우디 수리비 어떻게 됐냐고 물었었지. 그래서 내가 필요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에, 또 그리고 셔츠 뒤집어 입었다고 등짝 좀 맞다가… 주스라도 좀 마시고 나가야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또…. 아, 근데 엄마가 오이를 간 주스를 줘서 먹다가 토했… 그리고 또 욕 쳐들었지. 아씨, 우리 엄마는 왜 아침부터 욕을 그렇게 써대는 거야. 에, 그리고 또 음…. 정말 생각 안 나는데? “음…. 미안해, 엄마. 잠결에 들은 거라 기억이 안 나나봐. 뭔데?” - 저번에 말했던 그 사람 있잖니. 김지헌 대법관님 첫째 아…. “어머, 엄마. 나 지금 교감선생님이 불러. 이만 끊을게.”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리려고 손가락을 놀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자가 온다. - 너 이럴 줄 알고 문자 미리 써놨다. 7시까지 ‘55도 와인앤다인’에서 보자고 하시더라. 저번처럼 중간에 나오지 마. 우리 엄마는 날 너무 잘 아는구나. 하긴, 그러니까 우리 엄마지. 수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다시 닫았다. 일요일 날 그런 식으로 맞선 자리를 파토 내버렸으니 얼마 안가 곧 새로운 자리가 잡힐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또 잡힐 줄은 몰랐다. 수연은 어깨가 축 쳐진 채로 주섬주섬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핸드백에 집어넣고, 너무 높은 굽을 신고 수업을 할 순 없어서 벗어두었던 하이힐을 다시 신고, 책상위에 널려져 있던 책을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각서. 수연은 각서를 손가락으로 들어 한참을 째려보다가, 서랍을 드르륵 열고 서랍 안에 집어던져 놓았다. 서랍 손잡이를 잡은 채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수연은 다시 종이를 다시 집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서류들의 맨 밑에 집어넣었다. 각서만 보면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던 그 시커먼 얼굴이 생각나서 서랍 열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던 참이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맨 밑바닥에 집어넣으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스 정! 퇴근합시다!” 어느새 종례를 다 하고, 언제 또 준비를 다 했는지 활기찬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유난히 방긋방긋 웃고 있는 동그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오늘 또 데이트하는구만. 수연은 자신의 머리를 짧게 스쳐지나가는 그 생각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책상에 집어넣으며 심드렁하게 물어보았다. “오늘 또 데이트?” “아니, 밖에 나가는 건 아니고. 오늘 때때가 저녁밥 만들어준다고 일찍 오랬어. 히히.” 핸드백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놈의 때때. 어디를 가도 때때. 뭘 먹어도 때때. 입만 열면 때때.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 받을 때도 때때. 심지어 수업 중간에 예문 만들 때도 때때 is 어쩌고 하는 바람에 아이들도 미영의 연인의 별명이 때때라는 걸 안다. 얼마 전에 간 수련회에서는 마지막 날 밤무대에서 억지로 사회자에게 떠밀려 노래 불렀을 때에도 태요니 태요니 태태태탯태요니 이딴 식으로 부르는 바람에 같이 부르던 수연이 마이크를 집어던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수연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때때. 저기도 때때. 입만 열면 때때. 제발 그만… 이름 놔두고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런 수연의 표정에 이제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미영은, 그저 본척만척 하며 몸을 휙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굽이 낮은 구두의 뒷부분이 보인다. 굽이 높은 걸 선호하는 수연 못지않게 높은 것만 신고 다니던 미영이 어느 순간부터는 낮은 굽의 구두만 신고 다닌다. 그것도 학교에 와야 해서 억지로 신어야 하다 보니 신는 거지, 평소에 만날 때는 웬만하면 거의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있다. 황미영이 운동화라니. 대학시절부터 여자 스타일의 완성은 무조건 하이힐! 이라고 소리를 치던 미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마 이것도, 태연을 만나고 나면서부터 생긴 변화 중 하나. 그리고 여전히 수연은 그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껏 알아왔던 자신과 전혀 다른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열렬하게 사랑한대도 그 사람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길어봐야 몇 년 밖에 되지를 않는다. 어차피 얼마안가 식어버릴 사랑. 끝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곧 끝나버릴 그 사랑에 이제껏 지켜왔던 자신의 모습을 바꿔야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수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혀를 끌끌 찼다.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그나저나, 그럼 나 오늘 못 태워주겠네?” “왜? 니네 집하고 우리 집하고 별로 안 멀잖아. 잠시 들렸다 가면 되는데, 뭘.” “난 오늘 청담동 가야해.” “에? 왜? 아…혹시 또?” 대답대신 수연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미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짧은 머리가 목 언저리에서 출렁거린다. 그럴 때마다 샴푸냄새가 수연의 코끝을 자극했다. 미영은 태연을 만나면서 샴푸마저 바꿨다. 샴푸도 같은 걸 쓰고 싶다나. 샴푸뿐만 아니다. 샤워코롱도 같은 것, 핸드폰도 같은 것, 핸드폰 줄도 같은 것, 핸드폰 번호도 끝 번호 4자리는 똑같고, 몰고 다니는 차도 같은 것, 심지어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비밀번호까지 같은걸 쓴다. 미영이 작년에 전산실에 배정을 받았을 때에 아이들 성적 관리하는 프로그램의 비밀번호까지 태연과 같은 걸 써서 수연이 식겁한 적도 있었다. 그런 걸 같이 쓰면 어떻게 하냐고 황당해하는 수연에게 그게 뭐 어때서? 라며 눈을 껌뻑껌뻑 거리던 자신의 친구.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수연이 이 커플은 답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게.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뭘?” “포기하라고. 부모님 뜻에 거스르는 것. 그냥 이 기회에 한번 제대로 봐봐.” “뭐?” “아니, 그렇잖아. 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애인도 없고….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맞선만 하고 다닐 건데?” “아, 또 잔소리. 미스 황. 난 그런 잔소리는 부모님께 듣는 걸로도 족해요.” “잔소리라 생각하니까 더 듣기 싫은 거야. 그러지 말고 수연아….” “에베베베베베베베베. 안 들려. 안 들려.” 미영이 제법 진지한 투로 다시 장문의 연설을 늘어놓으려는 태도를 취하자, 수연은 재빨리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앞서가던 미영의 옆을 지나 성큼성큼 학교 본관 건물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선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하늘에선 6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따가운 햇볕이 수연의 작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수연은 귀를 틀어막았던 손을 떼 이마 위에 대고 햇빛을 가로 막았다. 그런데도 눈을 찔러오는 햇빛 때문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진다. 앞서가던 수연을 종종 걸음으로 미영이 쫓아온다.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린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이 소리가 좋다. 남자들은 이 또각 거리는 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수연은 이 리듬감 있는 소리가 좋아서 하이힐을 항상 즐겨 신고는 했다. 게다가 일단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지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운동화보다는 이런 하이힐이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뾰족하게 튀어나온 하이힐의 코 부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맞선에서 만났던 한 싸이코가 생각났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겉모습 보고 흠칫 했었는데, 계속 흘끔흘끔 테이블 아래쪽을 바라보길래 처음에는 밑에 뭐라도 떨어졌나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도 덩달아 바닥을 쳐다봤었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밑에 뭐 떨어졌어요? 라고 물었었는데, 그때 그 남자가 그랬었다. 하이힐 신은 모습이 매력적이시네요. 밟히면 아플까요?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전화해서 고래고래 고함도 쳐봤었다. 처음엔 신중히 맞선 상대를 골라주시던 부모님이, 수연이 몇 번이고 계속 퇴짜를 놓자 그냥 맞선 제의가 오는 족족 그대로 나가게 했던 바람에 결국엔 그런 남자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생각이 나자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분명 더운 날씨인데 왠지 모르게 한기까지 느껴져서, 수연은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팔을 손으로 쓰윽 쓰다듬었다. 수연이 과거의 그 남자를 떠올리며 때 아닌 한기를 느끼고 있는 사이, 미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에 든 핸드백을 빙글빙글 돌리고 경쾌하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니 왠지 심통이 났다. 수연이 또 다시 답답한 맞선자리에 앉아서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에 미영은 자신의 연인과 싱글벙글 웃으며 시간을 보내리라. '연인'과 함께 한다는 사실은 부럽진 않지만, 어쨌든 진짜 웃으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부러웠다. 수연은 괜히 성질이 나서 미영의 머리끝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어느새 약간 앞서 나가던 미영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비명을 지른다. 아야얏! 너 왜 그래? 그냥. 에씨! 툴툴 거리며 입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는다. 하얀색 볼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으로 볼을 푹 찔렀더니, 풉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다문 붉은 입술에서 바람이 새어나오고 볼이 푹 들어간다. 손가락을 너무 세게 찔렀는지 미영이 아프다며 울상을 짓고 볼을 매만졌다. “정수연 이 악마. 넌 나 괴롭히는 재미로 살…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미영이 문득 앞을 바라보더니 이상한 감탄사를 자아낸다. 그 소리에 수연 역시 미영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언덕 저 밑, 교문 근처에 웬 남자가 한명이 서 있다. 웬 남자? 미영이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수연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여학교라 남자가 찾아올 일은 거의 없다. 더군다나 이 시간에는 더더욱.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키. 작은 몸집.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의 시퍼런 색 청바지에 몸에 안 맞게 엄청 큰 하얀색 셔츠 하나.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굉장히 움츠려들어 있는 몸. 순간 수연의 온몸을 또 다시 이름 모를 한기가 감싸 돈다. 불길한 예감. 수연은 가던 길을 멈추고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수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앞서 내려가던 미영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보다 높은 지대에 있는 수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뭐야? 왜 그래?” “저, 저 남자. 왠지 불길해.” “응? 저 남자가 뭘 어쨌다고…어? 이 쪽 본다.” 미영의 말대로 교문에 서 있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지점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씨익 웃는 것 같다. 그 웃는 얼굴을 보자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천천히 올라온다. 많이 보았던 얼굴. 그 문제의 하이힐남이였다. 하이힐에 이상한 페티쉬를 가지고 있던 그 남자. 그 남자가 웬일인지 저 쪽 밑에서 웃으며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가 산에 위치해 있어서 이 학교를 나가려면 저 교문을 통과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수연은 그 남자를 가늘게 째려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와……나 이번 주에 뭐 있나? 부적이라도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일단 약속은 늦으면 안 되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굳어버린 수연의 표정을 흘끔 바라보던 미영도, 수연이 발걸음을 옮기자 아무 말 없이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마다, 경사도가 조금씩 낮아질 때마다, 교문이 가까워질 때마다 교문 앞에 서 있는 그 남자의 얼굴도 점점 커진다. 그 남자를 바라볼 때마다 수연은 은근히 하이힐이 자꾸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젠 교문 앞에 거의 다 왔다. 그 남자와의 거리도 몇 m 채 남지 않았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저 얼굴을 보며 수연은 생각했다. 또 하이힐 운운하기만 해 봐라. 진짜 밟아 줘 버릴 테다. “어머……. 누구시더라?” 수연이 어색하게 입을 가리며 웃자 그 남자가 빙긋 웃는다. 남자가 웃자 그걸 보는 수연의 눈썹 한쪽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리고, 남자의 웃음을 보고 기분이 안 좋아지긴 미영 역시 매한가지인지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남자의 눈이 아래위로 움직인다. 마치 자신의 몸을 훑는 듯 한 시선에 수연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머리끝에서부터 뚝 떨어지던 시선은 결국 다시 한 번 발끝에서 멈춘다. 그리고 씨익 다시 한 번 웃음. 저걸 그냥?! 수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움찔거리자 옆에 있던 미영이 그런 수연의 손목을 억지로 잡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야, 저 남자가 그 하이힐남이지? 너 저번에 사진 보여주면서 이야기 했었잖아. 어우, 실제로 보니 정말 짜증난다. 정말 질린다는 듯이 말하는 미영의 말에 수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을 바라보던 남자가 이번엔 미영을 바라본다. 역시 마찬가지로 머리끝에서부터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선에 미영이 몸을 움찔거리자, 수연이 옆으로 살짝 움직여 미영의 몸을 막아섰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아, 수연 씨 만나려고 왔죠. 그 동안 연락이 없으시길래.” 뻔뻔스럽게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며 수연은 속으로 숫자를 세어갔다. 이 남자와 맞선을 한 날은 정확히 15일 전이다. 보통은 15일 동안 연락이 없었으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지 않나. 거기다 그 전에는 연락 한번 없다가 갑작스럽게 연락 한 통 없이 자신의 직장인 학교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도 어이가 없었다. 흘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이 시간이면 퇴근 시간이라 차도 막히니 지하철을 탈게 아니라면 지금 얼른 출발해야한다. 수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 남자를 어떻게 떨궈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전에 일단 자신의 연인과의 저녁식사를 기대하고 있던 미영부터 먼저 보내야겠단 생각이 들어, 수연은 자신의 뒤에 있는 미영에게 말했다. “넌 일단 먼저 가.” “에? 그럼 너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가 있어. 내일 보자. 애인과 즐겁게 보내고.” “그래도….” “미스 황. 가라면 얼른 가세요.” 단호하게 말하는 수연의 말에 미영은 슬쩍 수연과 수연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가는 미영의 뒷모습을 다시 훑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몸을 훑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친구 몸까지. 어찌하여 요새 만나는 인간마다 이 모양 이 꼴인 건지. 수연은 순간 자신의 신세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싸가지 없는 그 여자 때문에 고생했는데 오늘은 웬 변태남까지 상대해야 한다. 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윗부분이 뜨끈뜨끈해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제가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안돼요. 저 그동안 수연 씨 기다렸다구요. 더 기다릴 순 없어요.” 어휴.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이를 악물고 빙긋 웃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까. 그래도 부모님과 안면이 있는 집안의 자식이라서 대놓고 험하게 다룰 수도 없다. 자신의 딸이 그런 수모를 당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온갖 욕을 다 퍼부었지만 정작 그 집안에는 별 말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 정말 어떻게 해야 해. 맞선 자리에도 늦으면 안 되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턱 언저리를 만졌다. 그리고 멍하니 남자의 어깨 너머에 있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이 도로를 지나 지금쯤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에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멍하니 도로 쪽을 바라보는데 문득,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차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차를 바라보았다. 아우디A6. 얼마 전까지 자신의 속을 썩어문드러지게 만들었던 그 차. 다만 그 때 그 차는 검은색 이였고, 지금 수연의 눈에 들어오는 차는 잘빠진 은색이었다. 세차를 금방 하고 온 모양인지 뉘엿뉘엿 넘어가는 붉은 햇빛에 반사되어 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연은 그 차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때 본 검은색 차는 주인을 닮아 참 지랄 맞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잘 빠지긴 했네 라는 생각을 했다. 차가 점점 수연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유유히 수연과 그 남자의 옆을 통과해서 교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듯 하더니 갑자기 급하게 멈춘다. 고막을 찢는 듯 한 그 소리에 수연이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남자 역시 놀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색 아우디 차량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멈춰선 아우디는 언제 그렇게 멈춰 섰냐는 듯 금세 조용해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은색 바지를 입은 기다란 발이 쑥 튀어나온다. 그 발끝을 보니 수연은 왠지 기분이 나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지? 이상하네. 이 남자 탓인가…. “여어. 정 선생, 오랜만이구만?” ……. “오, 표정 좋은데? 날 그렇게 반겨주다니…고마워. 근데 그렇게 너무 찌푸리지 마. 주름살 생긴다? 이제 주름살 걱정할 나이잖아요. 정수연 씨.” 저 놈의 주둥이라는 여전하네. 수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코웃음을 한번 쳤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이 보였다. 권유리. 이름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요 며칠간 미영의 입 밖에서 한두 번씩 튀어나올 때마다, 그 저주받은 이름을 다시 한 번 말하면 입 꿰매버릴테다 라고 미영에게 윽박지르게 만들었던 그 이름. 그 여자가 앞에 서 있다. 수연은 그제야 왜 자기가 차 밖으로 튀어나온 다리만 보고서도 기분이 확 나빠졌는지 이해가 갔다. 그 날 이후로 이틀만이다. 그 동안 유리에게 연락은 단 한통도 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연락하겠다고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돌아가고서 어제는 연락이 없어 속으로 은근히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 드디어 올게 왔다. 수연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유리의 뒤에 있는 아우디를 바라보았다. 차 렌트했다더니, 그 차가 저 차 인건가 싶다. 렌트마저도 끝까지 아우디를 고집하는 그 똥고집에 수연은 혀를 끌끌 찼다. 어째서 저 나이 먹도록 철이 덜 들어서 겉멋만 잔뜩 든 건지, 머리 뚜껑을 열고 뇌구조를 한번 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새 수연과 그 남자의 앞에까지 선 유리는 씨익 웃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3일 만에 보는 거지만, 여전히 저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여자들은 저 미소를 보고 반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건 그 여자들 사정일 뿐.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유리가 수연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수연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흠칫 거리더니 보기 흉할 정도로 얼굴을 구긴다. 아까 남자가 수연을 향해 그랬던 것처럼 그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옮겨가며 아래위로 훑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얼굴을 구겼다. 아마 유리 자신이 보기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저 남자의 패션 센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얼굴을 구기는 유리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그 얼굴을 보니 수연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수연의 머릿속에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만한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떠올랐다. 수연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재빨리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유리의 팔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밀착되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수연은 억지로 빙긋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자기. 왜 이제야 왔어. 나 많이 기다렸잖아.” “…자기?” “자, 자기요?” 어이없는 듯 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금방이라도 울 듯 한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수연은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한번 빙긋 웃다가, 다시 살짝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더 위에 있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디 갈 거야? 나 오늘 기대 많이 했는데. 근데 나 안 보고 싶었어?” “젠장, 닭살 돋아. 이 여자가 미쳤…” 한 쪽 손을 살짝 등 뒤로 돌려 유리의 등살을 꼬집었다. 시커먼 얼굴이 종잇장처럼 순식간에 구겨지고, 무언가 말을 하려던 유리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누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수연은 안면이 마비될 것 같은 걸 억지로 꾹꾹 참아내며 유리를 바라보다, 이번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지 못하겠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입 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심하게 동요한 듯 검은색 눈동자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죄송해요. 제가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저 사실 여자 만나요. 그리고 이 여자가 제 애인.” “누구 마음대로 내가 당신 애…” 다시 한 번 등살을 세게 꼬집었다. 그리 살이 많지 않은 체형이라 살이 얇게 잡힌다. 두껍게 잡히는 것보다 얇게 잡히는 게 더 아플 터. 유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는 여전히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그래서 연락 안한 거예요. 상처받으실까봐서요.” “그, 그럼 맞선은 왜 나오신 거예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릴 순 없으니까요.” “그, 그런….” “어쨌든…정말 미안해요. 오늘 약속 있다는 것도 이 사람 만나는 것이였어요. 오늘이 1주년이거든요.” “지랄한다, 지랄해.” 유리가 고개를 돌리고 욕을 중얼거렸다. 유리의 그 말에 남자가 겁을 먹었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어쨌든…상황이 이렇게 됐어요. 이제 돌아가세요. 아, 그리고 이 일 부모님께 말씀하진 마세요. 그 정도 분별력은 있으시죠? 있으실 거라 믿어요. 이렇게 멋있으신 분이 그 정도 판단력은 있으시겠죠.” 유리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저 인간이 멋있다고?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수연은 고개를 휙 돌려 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입닥쳐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유리가 입을 꾹 다문다. 남자가 고개를 푹 떨군다. 안 그래도 쳐져 있던 어깨가 아예 땅에 닿을 듯이 더 축 쳐졌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숙이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발을 한 번 더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유리의 뒤쪽에 가서 섰다. 남자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 유리가 갑갑했는지 가슴을 툭툭 치며 한마디 한다. “남자새끼가 쪼잔하게…. 어휴. 어쨌든 더 할 말 없지? 이 여자 데리고 간다?” 나이스. 잘했어. 웬일이야? 심드렁하게 말하던 유리는 남자가 채 대답도 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는 수연의 손목을 잡고 수연을 끌고 갔다. 놓지 않고 끌려올 정도로 꼭 잡으면서도 아프지 않게 힘의 강약을 조절해 손목을 잡는다. 얼마나 여자 손목을 많이 쥐었으면 이렇게 알아서 적당히 쥐는 걸까. 수연의 손목을 잡은 채로 성큼성큼 차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유리는 조수석 문을 열고 거의 던지다 시피 수연을 안에 집어놓고선, 차 앞쪽으로 빙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내동댕이쳐진 덕분에 엉덩이가 살짝 아파 와서, 수연은 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는 유리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누가 날 그렇게 함부로 던져 넣으래??” “시끄러워. 어쨌든 저 남자한테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던 거 아냐? 꼴을 보아하니 정상은 아닌 것 같더만.” “아니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어. 차 출발한다. 안전벨트 매든 말든 그건 마음대로 하고.” “…매너라곤 눈곱만큼도 없구나. 보통 안전벨트는 매주는 게 바람둥이의 철칙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당신한테는 별로 매주고 싶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네요.” 지지 않고 말하는 수연의 얼굴을 보던 유리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고 팔은 조수석의 시트위에 올려놓고서 후진을 시작했다. 차가 뒤로 움직이자 멍하니 차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운전석 쪽 창에 잠깐 나타났다가 점점 멀어져 간다. 수연은 그런 그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좀 심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는 곳에 다다르자, 유리는 차를 멈추고 핸들을 왼 쪽으로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차체가 왼 쪽으로 돌아가고, 이제 그 남자의 얼굴도 완전히 시야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천천히 출발하던 차는 이내 속도를 높여간다. 수연은 몸을 약간 옆으로 돌려 회색빛의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매었다. 까끌까끌한 벨트의 표면 감촉이 느껴졌다. 별달리 쿨럭이는 것도 없이 속도 계기판의 바늘이 금세 올라가는 걸 보면서, 확실히 외제차는 다르긴 다르구나 란 생각도 해보았다. 자신의 옆에서 핸들을 잡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3일 동안 연락이 없다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권유리.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래도 오늘 유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에게 붙잡혀서 계속 쩔쩔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래. 고맙다고 해야지. 난 이 인간과 다르게 예의를 아는 인간이니까. 수연은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입을 다물었다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래도 역시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래도 머리는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몸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수연은 그냥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몸이 거부하는 걸 굳이 해서 무엇하랴. 그런 수연의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운전을 하던 유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 꼬리를 한 쪽으로 말아 올리며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훗.” “왜 웃어? 기분 나쁘게.” “아니, 뭐. 연기 한 번 잘 하더라? 자기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 보니.” “남 이사.”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날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연이 손을 들어 유리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악!!! 나지막한 비명이 입술에서 툭 튀어나오고, 그와 함께 핸들이 순식간에 옆으로 확 꺾였다. 차체가 옆으로 기울여지면서 중앙선을 금세 침범해 버렸다. 유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다시 재빨리 핸들을 돌려 본래의 차선으로 돌아왔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미쳤어?! 사고 나면 어쩌려고? 이 여자가 겁도 없나.” “난 안전벨트 맸으니 상관없어. 죽으면 네가 죽겠지.” “와, 진짜. 역시 독한 여자라니까.” 흥.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수와 건물들, 그리고 인도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자신이 타던 마티즈와는 승차감이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역시 비싼 차는 비싼 값을 한다. 돈만 많다면 성능 면에서 뛰어난 외체자를 고를 만도 하다. 그러니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 해서 항상 그 사람이 한심스럽게 보이는 건 아니다. 다만 수연의 옆에 앉은 유리처럼 단순히 겉멋만 잔뜩 들어서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심스러울 뿐. 심지어 잠시 렌트할 차마저도 외제차로 빌리다니. “렌트도 아우디로 했어? 하여튼,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이거 렌트한 거 아닌데? 내 차야.” “어?”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투로 말하는 유리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빨간불에 걸려 잠시 차는 멈춘 상태. 핸들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펴며 시트에 몸을 깊숙이 넣는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 내 차 맞아.” “그건 검은색 이였잖아.” “수리 맡기는 김에 도색까지 맡겼어. 그리고 오늘 찾아온 거고.” “뭐??” “도색했다고. 검은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거 비싸지 않아?” “비싸기야 하지.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한 달 후에 당신이 낼 거.” 수연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검은색 피부에, 눈부시도록 하얀 이. 흑백조화가 미묘한 그 얼굴을 바라보며 수연은 다시 한 번 콧방귀를 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것 봐. 최대한 비싸게 돈 뜯어먹으려고 작정할거라니까, 이 인간은. 뭐 어때. 한 달 후에 어디 피눈물 흘려봐라. “마티즈 폐차시켰다며?” 신호가 녹색불로 바꼈다. 다시 핸들을 손에 쥐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유리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수연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미영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황미영. 가만 두지 않겠어. 아주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녀라?! 어? “탁월한 선택이네. 마티즈 따위, 고쳐서 가져갈 바엔 그냥 새 차 사는 게 낫지.” “너 말끝마다 따위라고 할래?” “마티즈 따위를 따위라고 하지 그럼 마티즈님이라고 하리?” “어휴, 말을 말자, 말을 말어.” “뭐 어쨌든. 당분간은 퇴근 때마다 집에까지 데려다 줄게.” “필요 없어. 니 얼굴 보고 싶지도 않아.” “…내가 말했지? 페어플레이 하자고. 만나기는 해야 할 거 아냐. 게다가 그래도 나름대로 내가 한 달 동안 작업 걸 여잔데 집에 혼자 가게 할 순 없지. 그 기회에 데이트도 하면 되고.” “데이트란 말 하지 마. 소름 돋아.” “…….” 유리가 입을 굳게 다물고 앞을 바라본다. 수연도 마찬가지로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차들이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제 앞으로 퇴근 때마다 이 얼굴을 봐야 한다. 집에 가는 길이 불편하지 않아도 되고, 미영의 차에 얻어 타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긴 한데 한 달 동안 이렇게 끊임없이 유리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이런 말다툼을 퇴근 때마다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태워주겠다는 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유리가 기름 값이라도 더 내게 하는 것도 나름 괜찮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단 몸이 편하니. 묘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 흔한 라디오도 틀지도 않고, 그렇다고 음악도 틀지 않다 보니 차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서늘한데 유리가 타자마자 틀어놓았던 에어컨 바람 때문에 왠지 더 냉랭한 기분이 돌았다. 그렇다고 딱히 이 분위기를 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수연은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잔뜩 준채로 전방만을 주시 했다. 바로 앞에 있는 신호가 다시 빨간 불로 바뀐다. 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점점 줄어간다. 핸들에서 손을 뗀 유리가 흘끔 수연을 바라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갈까?” “뭐?” “어디로 가냐고. 너 이제 퇴근한 거 아니야?” “나 약속 있어.” “에? 무슨 약속?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괜히 왔잖아. 벌써부터 규칙 어기는 거야? 내가 부르면 즉각 튀어오라고 했잖아. 이러면 곤란한데….” “와, 너 어이없다. 말도 안하고 온 게 누군데 그래?” “내가 연락 안했어? 분명 했는데?” “안 왔어.” “문자했잖아.” “안 왔다니까?” “난 했다고. 확인해보던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끌어안고 있던 핸드백을 열었다. 핸드백 안에 손을 집어넣고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손끝에 딱딱하고 네모난 물체가 닿자 재빨리 손으로 쥐고 꺼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슬라이드를 살짝 밀자, 화면에 하얀색 편지 모양의 그림이 떠 있다. 뭐야? 진짜 했어? 손가락을 놀려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받은 문자 1/78 이라고 되어있는 걸 보고, 미확인 문자로 되어 있는 문자를 확인했다. - 나 곧 니네 학교 도착한다. 퇴근시간이지? 나와 있어. 문자 밑에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유리가 교문에 도착하기 약 5분 전에 보낸 문자. 어이가 없었다. 거의 다 와놓고서 연락을 한 게 무슨 연락을 한 거라는 건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다시 닫았다. 봤지? 난 연락했다? 당당한 목소리가 수연의 귀에 꽂혀 들어온다. 벌써 노망이 든 거야? 연락 했는데 왜 연락 안했다고 그래. 치매 예방에는 고스톱이 참 좋다고 하던데. 고스톱도 좀 치고 그래봐.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유리의 말이 귓가를 간지럽히면서 들어온다. 그리고 그 말이 빙글빙글 돌아, 심장을 자극하고, 더불어 수연의 두개골 안에 있는 뇌마저도 자극하는 기분이 들었다. 두근두근. 심하게 뛰어대는 심장과, 지끈지끈 터질듯이 아파오는 머리. 1년에 한두 번 두통을 겪을까 말까 할 정도로 두통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유리를 만난 지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고 두통을 겪고 있다. 어쩌면 노이로제에 걸린 걸지도 모르겠다. 분명 에어컨을 틀어서 차 실내의 공기가 차가운 데도 불구하고, 수연은 꼭 자신의 주위만 공기가 확확 더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사이드 미러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다. 내 차 뒤 범퍼 박는 걸로도 부족해서 사이드 미러도 깨먹을 생각이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다간 깨지겠다. 사이드 미러 값까지 내려면 선생님 봉급으론 힘들 텐데?! 다시 한 번 유리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뚝.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수연은 차에 달린 손잡이를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차 세워.” “뭐?” “차 세우라고. 이 재수 없는 자식아.” “…뭐야?” “세워!! 얼른 안 세워?! 또 꼬집히기 전에 얼른 세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리는, 이내 얼굴을 굳히더니 차의 핸들을 급하게 옆으로 꺾기 시작했다. 끼이익. 거친 소리와 함께 앞을 향해 잘 달리던 차가 옆으로 급하게 몸체를 꺾는다. 유리가 브레이크를 꾹 밟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인도 바로 옆에 아우디가 멈춰서고, 그 반동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수연의 작은 몸이 앞뒤로 잠깐 흔들렸다. “자, 말 한대로 차 세웠어.” 신경질적인 수연의 태도에 자신 역시 짜증이 났는지 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연은 그런 유리의 얼굴을 한번 쓱 째려보고, 성급하게 안전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풀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잘 안 풀어져서 손이 허탕만 친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가 손을 뻗어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열이 더 올랐다. 오르고 오르다 못해 머리 위를 마치 뚫고 갈 듯 한 기분. 핸드백을 손으로 잡고 문을 벌컥 열어 몸을 빼냈다. 몸을 완전히 빼내고 차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닫기 전에 아주 잠깐 시선 속에 스쳐지나갔던 유리의 얼굴은 오만상을 다 찌푸린 채였다. 문을 닫고 뒤를 돌아 걸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하게 출발한다. 은색의 차 뒤를 따라 기다란 스키드 마크가 도로 위에 그려져 있다. 세우라고 한다고 진짜 세워?! 어휴, 진짜 저걸 그냥.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권유리. 수연은 손목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30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주위를 둘러보아도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에 선 수연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왜 그 인간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고맙기는 개뿔. 차라리 그 남자한테 붙잡혀 있던 게 훨씬 나을 뻔 했잖아. 맞선도 늦을 게 뻔하고. 어휴, 여튼 저 인간을 만나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 * * * “아버지의 일을 뒤따른다는 건, 뭐라 해야 하나요.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한데 한편으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걸어 온 길을 걸어가면서, 그리고 아버지가 해내셨던 걸 하나둘씩 저도 해내가면서 느끼는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 못하죠.” 양갈비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고 있는 수연을 향해 웃으며 그 남자가 말한다. 그 웃음에 수연 역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 가득 물고 있는 양갈비의 맛이 꽤나 괜찮다. 미영과 자주 오던 곳이고,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일단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당연히 지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수연에게, 이 남자는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자리에 앉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전채 요리와 와인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좀 늦으신 것 같아서 미리 주문을 해 놓았다며 웃던 남자. 그리고 나온 메뉴들과 와인이 자신과 미영이 올 때마다 항상 시켰던 메뉴와 똑같아서 살짝 놀라기도 했다. 와인이 든 잔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고 한 모금 마셨다. 묘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풍겨온다. 그 향을 맡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수연 씨는,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네.”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똑똑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렸을 때야 저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었죠. 그런데 커가면서 점점 흥미를 잃게 되더라구요.” “아이들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와인 한 모금을 다시 마시며 빙긋 웃었다.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여전히 거짓말이다. 좋아하기 보단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깝다. 사실 선생님이 되겠다고 한 것도 선생님의 길에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달리 하고 싶었던 것도 없던 수연에게 부모님이 그럼 사범대라도 가라 라고 해서 사범대를 간 것뿐이고, 사범대를 가다보니 자연스레 임용고시를 준비하게 된 것 뿐이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부모님이 교대를 가라고 하셨던 걸, 그나마 머리 큰 애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우겨서 사범대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는데다, 이 남자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 그렇게 둘러댔다. 남자는 딴에는 젠틀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인지 시종일관 목소리도 나긋나긋, 그리고 단어도 애써 선택해가며 조심스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고맙긴 했지만, 그래도 지루하기는 매 한가지. 수연은 자신을 바라보며 나긋하게 웃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 남자는 수연이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을게 분명하다. 이렇게 자신에게 아무리 잘 해줘봤자 수연에게 이 남자가 받아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차라리 이 시간에 다른 여자와 대화를 하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일 텐데, 이 남자는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대충 대꾸를 해주며 눈을 돌려 실내 안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실내. 적당히 어두우면서도, 상당히 캐주얼한 분위기라 부담스럽지도 않다. 와인도 그다지 비싼 편은 아니고 적당한 가격이라 미영과 자주 찾던 곳이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미영이 유일하게 마시는 알코올음료가 고작해야 와인인데, 그런 미영을 배려한 태연이 첫 데이트 때 데리고 온 곳이라고 했다. 첫 데이트 때 태연이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말을 했었는지 수줍게 웃으며 자랑하던 미영의 얼굴이 생각났다. 가만히 보면 미영의 연인인 태연이라는 사람은 확실히 미영에게 지극정성이다. 아무리 이제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는 커플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1년이면 어떻게 보면 꽤나 긴 시간인데 처음 사귄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 했다. 아침에 미영이 입맛이 없다고 아침식사를 건너뛰고 오면 점심 때 직접 도시락도 싸들고 온다. 지금은 미영이 차를 산 후라 오지는 않지만 그 전에는 퇴근시간마다 꼬박꼬박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왔었다. 그 전에는 미영을 통해 어렴풋이 듣기만 해서 잘해주긴 하나보네 라는 생각 정도로 그쳤었는데, 미영이 하도 졸라서 셋이서 같이 만났을 때에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든 걸 미영을 챙겨주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가령, 식당에 가면 수저나 젓가락을 챙겨주는 거라든가, 길을 걸어갈 때면 꼭 자신이 차도쪽에 서는 것이라든가, 짧은 치마를 입고 왔던 미영이 계단을 올라갈 때면 그 뒤에 꼭 달라붙어 다닌다던가, 자리에 앉을 때마다 겉 옷을 벗어 다리를 덮어주는 것이라든가 여러가지들. 대 놓고 챙겨줄게! 라고 마음 먹고 챙기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신 조차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배려해주는 그 행동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아, 황미영 좋은 사람 만나는 구나 라는 생각에. 그에 반해 그런 태연의 절친한 친구라던 유리라는 작자는 대체 뭔가 싶다. 그 길 한복판에서 세우라고 한다고 진짜 세우지 않나. 안전벨트 풀리지 않고 끙끙대자 손수 풀어주기까지 했다. 이름도 모르는 길 한복판에 버려두고 가면서 한번 붙잡지도 않았다. 태연은 와인 빼고는 술을 못 마시는 미영을 배려해서 이곳에 데려왔다고 했는데, 아마 유리라면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한다면 더더욱 억지로 독한 양주를 입에 들이부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술에 약까지 탈지도 모른다. 유리 생각을 하니 이 남자를 만나며 조금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나빠지는 것 같았다. 수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마음 정화라도 해야 할까 싶어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연애를 할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꽤나 잘생긴 얼굴이라 눈의 정화 정도는 된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다. 수연 역시 웃으며 다시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어깨선에 딱 맞게 피트 되어 보기 좋게 떨어지는 정장을 바라보았다. 제법 스타일도 좋다. 딱 부러진 어깨를 바라보다 문득 어깨 저 너머에 한 테이블로 시선을 가져갔다. 왠지 낯익은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하 거리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여자. 웃을 때마다 어깨를 약간 넘어선 검은 머리가 흔들거린다.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데 얼굴이 굳어버려서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왜 그러세요?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앞 쪽을 바라보며 웃던 그 여자의 얼굴이 수연 쪽을 향해 돌아갔다. 키득키득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싸하게 변해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씨익 웃는다. 글라스를 들고 있던 손가락에 수연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저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뭐야?????? 왜 가는 곳마다 있어?? 대체 왜?!?!?!?!?!?!?!?!?! “무슨 일 있으신가요? 표정이….” “네? 아, 아녜요. 아무 일도 없어요, 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억지로 웃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뒤쪽을 돌아보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수연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의 얼굴을 유리에게 보여줄 순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황급히 남자의 앞에 있는, 붉은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투명한 글라스가 넘어지고, 붉은 와인이 테이블보를 따라 뚝뚝, 남자의 바지 쪽으로 떨어진다. 남자가 의자를 황급히 뒤로 빼내고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머. 죄송해요. 어떻게 하죠?” 수연이 당황한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남자가 웃으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수연의 테이블 쪽으로 쏟아졌다. 저 쪽에서 유리 역시 물끄러미 수연 쪽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 한 가득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재밌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아져있던 티슈로 대충 바지를 닦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화장실에라도 다녀오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닙니다. 일단 가서 대충 물이라도 묻혀봐야겠네요. 잠시 실례할게요. 고개를 슬쩍 숙이고 남자가 뒤를 돌아 화장실 쪽으로 간다. 앞을 가로막던 남자가 사라지자 앞 쪽의 시야가 탁 트였다. 유리가 앉아있는 테이블도 정면에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수연이 이곳을 알게 된 계기는 미영때문이였고, 미영은 태연 때문에 이곳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태연이 자주 찾아오던 곳이라면 당연히 유리도 자주 찾아온 곳일 터. 수연은 이 장소를 만남의 장소로 택한 남자의 센스와, 다른 곳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유리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남자였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그냥 친구사이인 듯싶었다. 유리는 여전히 수연의 테이블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덕택에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피식 웃던 유리는, 자신의 옆에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앞에 앉은 남자에게 무슨 말을 건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의 끝 부분을 정리하면서 수연이 앉은 쪽으로 걸어온다. 시선을 회피할까 싶었으나 그럼 왠지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유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눈에 힘을 준채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테이블 앞에 멈춰서, 아까 남자가 앉았던 의자를 뒤로 빼고 그 자리에 털썩 앉는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서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약속이 있다더니 저 남자?” “…….” “이번에도 맞선? 듣자하니 맞선을 그렇게 많이 본다면서?” 와, 진짜 황미영. 넌 대체 말 안한 게 뭐야? 미영의 이름을 생각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건 이게 두 번째. 수연은 이제 다시는 자신의 곤란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절대 미영에게 말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앞에서 여유만만하게 유리는 웃고 있는데 자신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 그것도 왠지 지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수연 역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맞선을 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야 있지. 앞으로 한 달 안에 내 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니.” “와, 네 입에서 내 여자란 단어가 나오니까 울컥울컥한 게 기분이 참 좋네?” “뭘 그렇게 낯 뜨거운 애정표현을…. 나 좋아하는 거 아니까 그런 표현은 공공장소에서 좀 자제해줘.” 주먹을 꼭 쥐고 조그맣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래도 이 사람 많은 데서 큰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소심하게 퉁 한번 쳤는데, 그게 웃겼는지 유리가 풉, 웃는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테이블 쪽으로 앞으로 기대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재미없지?” “뭐가?” “지금 이 자리. 그리고 저 남자.” “…아니.” “뻥치시네. 아까 보니까 지루해 죽겠다던 표정이더만.” “내가 언제?” “나랑 눈 마주치기 바로 직전에.” “그,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유리의 말이 맞았다. 맞선 자리는 항상 지루하다. 오늘 이 남자의 상태가 꽤나 양호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루하긴 매 한가지다. 애초에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는 자리인데 재밌을 리가 없다. 즐기려고 온 것도 아니고, 즐길 수도 없는 자리에서, 흥미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어가며 몇 시간을 때워야 하는데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는 일. 그걸 잠시 동안 그 스쳐가는 사이에도 캐치해 낸 유리의 날카로움에 수연은 속으로 뜨끔했다. 하지만 유리가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버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더군다나 저렇게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더더욱 그랬다.)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유리는 그런 수연의 모습이 긍정을 의미하는 걸로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수연의 앞에 있는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재미없으면 그만 가자고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 못하니까 이러고 있… 아, 아니. 재미없는 거 아니야. 재밌어. 얼마나 재밌는데, 저 남자가.” 하하. 유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호탕하게 웃는다. 이제 완전히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게 분명하다. 왠지 이 여자 앞에서 발가벗긴 듯 한 느낌이 들어서 수연의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유리 앞에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자신의 모습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이 더 빨개진다. 수연의 얼굴에 감도는 붉은 기의 농도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유리의 웃음소리도 점점 커진다. “그만 웃어라.” “큭큭큭.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만 웃으라고 했지?” “어휴, 무서워라. 큭큭큭.” “흐지 말랬지…. 그 입 다물어. 찢어버리기 전에.” “아가씨 입에서 그런 거친 말이 나오면 안 되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 즐겁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탁탁 두들기는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리듬감 있게 귀에 들려온다. 테이블을 두들기는 그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늘다. 이 여자의 손가락은 왠지 두껍다 못해 장작처럼 생길 것 같았는데 손가락이 의외로 쭉 뻗은 모양새가 봐줄만 했다. 고개를 돌려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바지 쪽을 손으로 툭툭 털며 나오는 아까 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수연은 이제 얼른 돌아가라는 말을 할 생각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 역시 화장실 쪽에서 나오는 남자를 발견한 모양이다. 멍하니 화장실 쪽을 바라보다, 수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테이블을 툭툭 치던 손가락의 움직임은 멈췄다. “빠져나올 용기가 없다면, 내가 빠져나가게 해줄게.” “뭐?” “내가 도와주겠다고.” “나 재미없는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설사 진짜 재미없다고 해도 너한테 그런 도움 받고 싶지 않아.” “됐고. 기대하고 있어.”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 “어? 그 사이에 누구 한 분이 더 오셨네요. 수연 씨 친구 분이신가요?” 괜히 심통난 목소리로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하는 순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어느 샌가 테이블 바로 옆에 다가와 있는 남자. 그 남자를 보던 유리가 갑자기 얼굴을 확 굳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의자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급하게 뒤로 밀린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은 찰나, 험악한 표정을 짓던 유리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뺨을 갈겼다. 짝. 엄청난 소리가 수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능글맞게 웃던 이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말 잡아먹을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네, 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구, 나한테!!” “무, 무슨 소리신지?” 유리에게 맞은 뺨을 손으로 쥔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수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대체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수연은 동그랗게 떴던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눈이 제법 진지하다. 은근히 눈에 핏발까지 서 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고 있더니, 이젠 정말 분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역시 성격이 뻔뻔한 성격이니 연기도 잘하는 구나. 수연은 왠지 비죽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남자와 유리를 바라보았다. 남자를 바라보던 유리는, 시선은 여전히 돌리지 않은 채로 손가락으로 수연을 가리켰다.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수연이 있는 곳까지 들려온다. “이 여자는 누구야?” “아니, 그러는 그 쪽이야 말로 누구….” “어라? 이것 봐? 이제 나 모른 척 하는 거야?” “저기요. 전 정말….” “하아. 뱃속에 있는 이 아이는 어쩌고 당신 지금…흑.” …역시 넌 사악하구나. 수연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그러는 사이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쥐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남자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뺨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고, 유리의 어깨 위 허공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크흑.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연약한 여자가 우는 소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울음소리지만, 어쨌든 여자가 울고 있으니 남자는 정말 당황한 듯싶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다. 갑자기 일어난 소동을 지켜보던 주위 테이블의 사람들이 저마다 남자를 가리키며 쑥덕쑥덕 거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당황하던 남자는, 이내 테이블에 앉아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 수연 씨. 전 정말 이 상황이….” “이 여자 이름이 수연이야?”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있던 유리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새빨개진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한다. 가시 돋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자의 얼굴이 더욱더 새빨개진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과, 짧은 머리 사이에 보이는 귓볼마저 빨개져있다. 유리의 눈은 이미 촉촉이 젖어있는 상태였다. 아마 아까 고개를 숙였을 때 침이라도 재빨리 묻힌 모양이다. “이 여자 이름이 수연이냐고!!!!!” “아니, 저기….” “그래서 애기 이름도 수연이라고 짓자고 한 거야? 응? 당신 정말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자고 나를 꼬실 때는 언제고…임신하자마자 날 버리다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구!!” 그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짓는 와중에도 유리는 흘끔흘끔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마 얼른 맞장구라도 쳐달라는 사인인 듯싶다. 수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얼굴은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았다. 옆 의자에 두었던 핸드백을 들고, 냅킨을 접어 테이블 위에 고이 올려놓은 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다급히 수연의 손을 부여잡았다. 수연은 그런 남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남자 역시 어색하게 씨익 웃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정말 당황하긴 했구나. 어휴, 미안해서 어쩌나. 저 여자가 좀 싸이코예요. 나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원망하려면 저 여자의 싸이코적인 성격을 원망하세요. 그 대신 제가 얼굴이라도 식혀드릴게요. 수연은 테이블 위에 들었던 물 컵을 들고, 그 남자를 향해 물을 휙 뿌렸다. 투명한 물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 남자의 얼굴 위에 쏟아진다. 물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최대한 싸늘한 눈초리로 남자를 째려보며 말했다. “저질이군요. 다시는 만나지 않길 바래요.” “수, 수연 씨!! 잠시 만요, 제 이야기 좀!!” 간절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간절하고 애절한 외침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수연은 머리를 뒤로 휙 넘기고, 고개를 쳐들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남자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그 남자의 앞에 서 있는 유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 짧은 순간 유리가 씨익 웃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실내 안을 가로질러 간다.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최대한 쿨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 많은 시선들이 무지하게 쪽팔리게 느껴졌음에도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해가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천장에 달려있는 은은한 조명이 수연의 얼굴을 비춘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당황한 웨이터들이, 그래도 자신의 본분을 끝까지 지키려는 모양인지 문을 열고 나가는 수연에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한다. 수연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 웨이터에게 가볍게 목례까지 한 후 문을 열고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밤은 여전히 시원한 편이다. 팔을 들어 기지개를 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없는 새까만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깊게 숨을 들이켰더니, 실내와는 달리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폐부까지 깊숙이 들어온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20분. 그래도 이 남자와는 2시간 정도는 함께 있었다. 보통은 한 시간이면 끝나니 이번엔 꽤나 오래 있던 편이 된다. 물론 그만큼 그 끝이 남들과 다르게 필요 이상으로 화려했지만. 거기다 저 남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수연이 황당한 일을 겪은 셈이 되니 부모님에게도 잔소리 듣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제법 재밌는 상황이기도 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런 쌩쑈는 제법 다이나믹한 구경거리였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연기를 해대던 유리의 얼굴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건지. 역시 성격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워낙 뻔뻔하게, 낯짝에 철판을 깔고 사는 인생이니 그런 연기도 잘 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대던 그 까만 얼굴. 수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킥킥. 작은 웃음소리가 사람이 별로 없는 도로에 울려 퍼진다. “어때? 내 연기?” 쿡쿡 웃고 있는 수연의 어깨 위로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수연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왔는지 유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 모습이 생각나서 다시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풉. 뭐야, 왜 웃어? 후훗. 왜 웃냐니까? 킥킥. 이 여자가 미쳤나, 그만 웃어. 신경질적으로 말하던 유리 역시 결국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는다. “이보세요, 아가씨. 그만 웃어. 그 남자 곧 나올 텐데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아, 맞다.” “시간도 늦었고, 데이트하긴 늦었으니 데려다줄게.” “…그래.” “오,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네?” “뭐…. 오늘은 너한테 신세졌으니까.” 피식. 유리가 다시 한 번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하늘로 휙휙 던지며 앞서 걸어간다. 익숙한 차가 인도 바로 옆에 세워져있다. 여기에 주차해두는 건 일종의 불법주차인 셈인데,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앞서 가는 유리의 뒤를 쫓아갔다. 인도에 세워져있는 가로등 때문에 유리의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그 그림자의 끝을 밟으며 걸어갔다. 아, 그런데 아까 그 남자 분은 어쩌고? 괜찮아. 어차피 그 놈이야 내가 없는 게 더 편하니까. 에? 여자 꼬시는 데 내가 있는 것보다야 내가 사라져주는 게 더 낫잖아? 아아. 노는 부류가 다 거기서 거기구나. 부류라니?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어느새 차까지 다가간 유리가 조수석 문을 잡고 열어준다. 레이디 퍼스트. 넌 레이디 아니야? …그냥 군말 없이 타면 뭐가 덧나? 툴툴대는 유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차 안에 몸을 집어넣자 유리가 가볍게 문을 민다.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얼마안가 유리도 차 앞으로 빙 돌아 와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아까 탔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차 안에서 묘한 향기가 난다. 수연은 코끝을 손가락으로 쓰윽 문지르며 이 향이 무슨 향인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차에 탄 유리는 키를 꽂고 시동을 걸다, 문득 손뼉을 마주치더니 몸을 뒤로 빼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앞을 본채로 팔을 쓱 옆으로 뻗어 수연의 앞에 내민다. “이게 뭐야?” “너 줄려고 산 거. 아까 그렇게 내리게 한 게 미안하더라고. 오늘 집 앞에라도 가서 줄려고 했어. 나는 매너가 좋은 여자니까. 이렇게 만났으니 다행이네. 귀찮게 집 앞에서 투닥거리지 않아도 되고.” 물끄러미 고개를 숙여 유리의 시커먼 팔이 들고 있는 걸 바라보았다. 하얀 장미 꽃다발. 티 하나 없이 하얀 그 색이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안 받아? 팔 떨어지겠네.” “…대체 왜 꽃을 선물로 주는 거야? 비싸기만 하고 아무 필요도 없는 걸.” “너 여자 맞니? 여자들은 원래 이런 걸 좋아하잖아.” “난 안 좋아해. 모든 여자가 다 네가 만난 여자들과 같다는 생각은 버려.” “줘도 잔소리야. 꽃 싫으면 집에 가서 버리면 되잖아. 어쨌든 받아.” 수연의 무릎 위에 꽃다발을 툭 던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으로 핸들을 잡고, 앞을 바라보더니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는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연은 입을 다물고 차를 출발시키는 유리를 바라보다, 자신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꽃다발을 살짝 쥐었다. 차 안에서 났던 이름 모를 향의 주인공이 아마 이 꽃다발. 기분 좋은 향이 가득 났다. 마음 같아서는 꽃에 얼굴을 묻고 향을 듬뿍 맡고 싶었지만, 유리 앞에서는 그러기 싫어서 그냥 참기로 했다. 차가 점점 속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양 옆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차창을 통해 들어와 하얀색 장미꽃잎에 잘게 부서진다. 그 장미꽃을 바라보며, 수연은 유리 모르게 빙긋 웃었다. 세심한 면도 있구나. 권유리는. 이런 면도 있네, 의외로. 오늘 하루는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수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비록, 재수 없는 권유리를 마주쳤을지라도. * * *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잔뜩 피곤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수연이 말했다. 몸을 약간 숙여 하이힐을 벗고, 최대한 피곤한 표정을 지어내며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이제 곧 있으면 부모님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을 차례. 해야 할 말은 이미 정해져있다. 그 실내에서 벌어진 일을, 마치 상처받은 듯 한 얼굴로 이야기하면 아마 부모님은 무슨 그런 놈이 다 있냐며 위로를 해줄 것이다. 그럼 이번 맞선은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지게 된다. 유리가 온갖 쌩쇼를 해준 덕택에 이번은 그다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흡족한 기분에 얼굴에 떠오르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은 수연은 고개를 들고, 장미 꽃다발을 든 손에 힘을 주며 거실을 바라보았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온다. “엄마, 오늘 글쎄 그 남자가….” “정수연.” “으응?” “이미 다 들었다.” “에? 뭘?”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정말 화가 났는지 어머니의 말끝이 살짝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다. 수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거실 한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꼰 채로 앉아계신다. 거실 안에 냉랭한 기운이 가득 감돌고 있다. 어머니의 옆에 서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내가 예상했던 분위기는 이런 분위기가 아닌데? “엄마,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는 건 오히려 나….” “너, 맞선 자리가 싫어서 니 친구 시켜서 일부러 거짓말 하게 만들었다며?” “어????” “그 남자네 집에서 전화해서 완전 노발대발 하시는데. 어휴, 엄마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 넌 어쩌면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할 수 있니?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잖아. 굳이 그런 방법까지 썼어야 했어?” “무슨 소리야, 엄마.” “그 친구가 김지헌 대법관님 큰 아드님에게 다 말했다고 하더라. 네가 하도 부탁해서 그런 짓 했다고, 죄송하다고. 어휴, 넌 정말. 내 배 아파서 낳은 딸 맞니? 어쩌면 그렇게 경솔하고, 예의 없는 짓을 생각할 수 있는 거야? 응?” 잔뜩 화가 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수연이, 너 이리 와서 앉아라. 목소리 톤의 변화 하나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저런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였더라. 아마 고 3때 술 마시다가 잔뜩 취한 채로 새벽에 들어온 이후로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금 당장 이 장미꽃잎을 다 뜯어낸 다음 그 시커먼 얼굴에 쏟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수연은, 이를 악물고 아버지가 앉아계시는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궈언유우리이. 그래, 이 개싸가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니가 감히 나를 물 멕여? 두고 보자. Hissing 05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유리는 자신의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희진을 바라보며, 초등학생 시절에 읽었던 그 구절을 생각해냈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들을 대충 읽어 내려가던 초등학생 권유리에게, 문득 눈에 꽂혀버린 그 구절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 때 이후로 일종의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구절. 어린 나이의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모자라서 그 짧은 문장 하나를 좌우명으로 하게끔 만들어버린 셰익스피어는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당연한,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꺼내기 전에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그 진리. 비록 셰익스피어가 진짜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잡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긴 했지만, 사실 셰익스피어가 진짜 지어낸 말이든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어낸 말이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영어교사인 자신의 연인이 내준 숙제라며 영문판 맥베드를 읽어 나가다가, 김태연이 미쳤다며 중얼거리는 유리에게 셰익스피어가 진짜 셰익스피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 유리 네가 품고 있는 그 이상한 좌우명의 신뢰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런 태연에게 유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무슨 상관이야. 누가 썼든 진리는 진리인거야.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지나가는 똥개가 말한 거래도 내 좌우명이 되었을 걸? 진짜 멋지잖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명대사 중의 명대사다. 유리는 이 몇 개 안되는 단어 하나에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가 담겨있다고 굳게 믿는다. 여자는 약하고, 약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약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 그렇기에 여자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 그건 일종의 사명과도 같은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만나는 여자마다 항상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었다. 그러다 여자가 너무 욕심이 과하다 싶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망설이지 않고 놓아준다. 그런 여자에게는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어울린다는 생각에. 유리가 그럴 때마다 태연은 그냥 질렸다고 말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며 잔소리를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예정인 유리의 앞에 그동안 꿋꿋이 지켜왔던 인생관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예상외의 변수가 나타났다. 그것도 새빨간 싸구려 마티즈 하나를 끌고. 자신의 몸집만큼 작은 차를 끌고 다니는 그 여자는 (유리가 보기에) 딱 그 차 크기만한 소갈머리에, 그 차 가격만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여자란 못생겼든 예쁘든 뚱뚱하든 날씬하든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는데, 그런 유리의 생각을 최초로 180도 엎어버린 여자. 그 여자 앞에만 서면 눈에 힘이 들어가고, 온 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뇌가 팔딱팔딱 뛰어댄다. 정말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가 하면 그저 기분이 나쁘기만 하고 넘어갈 대사들도, 이상하게 그 여자가 툭 던져대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얼마 전에도 자신의 차 안에서 차 세우라고 난리를 쳐대는 그 여자를 보니 울컥 화가 났었다. 그런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예전에 유리가 다른 여자와 있느라 희진의 전화를 못 받았던 때에, 화가 난 희진이 어떻게 알고 유리가 있는 곳까지 쫓아와서 여자 뺨을 갈기고, 억지로 뜯어말린 유리가 희진을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그런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었다. 그 때에는 차 세우라는 희진의 화난 목소리에도 끝까지 묵묵히 운전을 하고 갔었다. 어떻게 길 한가운데에 여자 혼자 내리게 하냐면서. 하지만, 그 때 수연이 차 세우라고 했을 때에는 괜히 성질이 나서 정말 차를 세워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 내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어이없었던가. 세우라고 한다고 진짜 세워버린 자신의 모습도 그 쪽에선 어이없기는 매 한가지겠지만, 어쨌든 유리는 수연의 그런 모습을 보며 정말 이 여자는 어쩔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달 안에 넘어오게 했다는 말을 지껄이긴 했으니 마음이라도 풀어주려고 하얀색 장미꽃까지 가져다 바쳤다. 다만 그 여자에게 쓸데없이 장미 꽃다발을 안겨준 게 아깝고 분해서, 수연이 돌아서서 가게를 나간 다음에 어이없어 하는 남자에게 대뜸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척을 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실 수연이가 시킨 거라고, 정말 전 이렇게 하기 싫었다고 그렇게 빌었었다. 잔뜩 화가 났는지 씩씩 거리며 돌아서는 그 남자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 보나마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청 깨졌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어차피 한 달이 되기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고, 저번에 마티즈 문짝에 맞아서 멍이 들었던 게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으니 작업은 잠시 미루더라도 그 정도 복수는 해줘야 했다. “…자기…?” 그 날 수연이 호되게 당할 걸 생각하며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희진이 눈을 천천히 뜨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유리는 그 말에 침대에 걸터앉았던 몸을 살짝 돌려,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희진의 앞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다시 눈을 감고 빙긋 웃는다. 개념 상실한 인간들이 많기로 소문난 연예계 바닥에서도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한 여자. 그래도 유리 앞에서는 정말 천상 여자다. 유리가 다른 여자에게 필요이상으로 애정표현을 할 때만 제외하고. 그럴 때면 유리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워지지만, 어쨌든 그 의외에는 애교도 많고 나긋나긋한 태도를 유지한다. 말 그대로 여자. 그리고 정말 그건 유리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다. 유리 못지않게 희진 역시 많은 남자를 만나고 다니지만, 그 남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유리는 새삼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가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남들 눈에야 어떻게 보이는지 알 바는 아니고, 어쨌든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구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더군다나 며칠 전에 자신의 차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그 여자보다는 훨씬, 정말 훨씬 더 여성스럽다. 수연과 희진을 비교해보고, 순간 벅찬 감동을 느낀 유리는 웃고 있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 웃지 마, 확 잡아먹고 싶어지잖아. 그러자 시트로 얼굴 끝까지 가리면서 웃는다. “권유리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느끼해? 아침부터.” “…그냥. 어떤 여자랑 널 비교해보니까 네가 엄청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원래 사랑스러웠지만.” “누구? 어떤 여잔데?” “그 마티즈 여자 있잖아.” “아…. 내기했다던 그 여자?” 얼굴을 덮던 시트를 코 아래까지 내리며 웅얼웅얼 말한다. 말 할 때마다 하얀색 시트가 입에 붙었다 떨어지는 걸 반복한다. 유리는 손가락 끝으로 시트를 턱 부분까지 잡아 내리고, 이번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희진이 다시 웃는다. “그 여자 아우디 수리비 미리 준비해야겠다.” “응?” “그렇잖아. 자기한테 안 넘어갈 여자가 어디 있어? 나도 넘어갔는데.” 이제야 몸을 스르르 일으키고선,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채로 앉아있는 유리의 등에 볼은 댄 채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응. 나도 넘어갔잖아. 여자라고는 사겨본 적도 없는, 웬만한 톱스타 남자들도 거들떠도 안 보던 내가. 손을 들어 유리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등에 볼을 부비면서 투정부리듯이 말하는 희진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오전에 스케줄이 비었다면서 새벽에 불쑥 찾아왔었다.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로 파고드는 그 몸에서 남자향수 냄새가 났지만 유리는 그저 모른 척 하고 웃을 뿐이었다. 질투라는 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한다. 자신 역시 희진 못지않게 여자들을 만나며 돌아다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결국엔 희진이 자신의 품에 안겨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면, 그 이전에 되도록이면 많은 사랑을 해보고 많은 사랑을 받겠다는 데 굳이 막을 필요가 뭐 있나. 질투라는 감정은 사랑을 갉아먹는 좀벌레일뿐이다. 멀쩡한 연인사이도 틀어지게 만들어버리니. 그래서 희진에게 별 생각 없이 수연과의 내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유리와는 달리 질투심이 많은 여자지만, 그래도 웬일인지 이번만은 별 코멘트를 달지 않았다. 어쩌면 유리가 정말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해서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을 런지도 모른다. “근데, 자기…그 여자 꼬신다고 하다가 그 여자랑 눈 맞는 건 아니지?” “뭐?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내가 그런 여자랑…. 차라리 나 그냥 평생 혼자 살고 말래.” “…진짜 싫어하는구나. 권유리가 혼자 살 결심까지.” “어. 진짜 싫어. 정말 싫어. 생각도 하기 싫어. 말조차도 꺼내지 마.” “후훗. 알았어요, 우리 애기. 그만 짜증내요- 착하지?” 엉덩이 쪽을 토닥토닥 거리며 말하는 희진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시하던 유리는 결국 피식 웃었다. 유리의 웃음소리를 듣던 희진은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쭉 뻗은 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 데뷔했을 때의 컨셉이 청순가련이라 그 때에는 짧은 치마나 핫팬츠는 절대 입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슬슬 길이가 짧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슬슬 다른 사람들이 이 여자 다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아가는 게 유리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전에는 나만 봤었는데…. 하긴, 아름다운 걸 나 혼자 보는 것도 어떻게 보면 죄지. 입맛을 쩝 다시는 유리를 한번 돌아보던 희진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 문득 거실에 붙어있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시큰둥하니 한마디 툭 던졌다. “자기. 출근 안 해? 출근시간 지났는데.” “응? 무슨 소리야. 아직 시간 남았는데?” “지금 9시 30분인데?” “아니야, 내 손목시계는 7시 2…. 아?” “그거 약 떨어졌었다며?” “…이런 젠장.” 죽었다. 아, 또 최 팀장이 엄청 갈궈대겠네. 미치겠다. 유리는 허겁지겁 자신의 정장 마이를 손으로 집어 들고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쉬다가 가. 갈 때 연락하고, 알았지? 자기야, 키스도 안 해주고 갈 거야? 다음에 한꺼번에 해줄게! 미안! 10분에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해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아침부터 수연의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 덕택에 다시 지각. 유리는 정작 자신이 잘못 했다는 건 생각조차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수연에 대해 악담을 퍼부으며 집을 나섰다. * * * “권유리 씨. 자꾸 이러실 거예요? 이번 달 들어서 대체 몇 번이나 지각을 하셨는지 아세요? 그러면서 퇴근시간은 왜 딱 맞춰서 퇴근 하나 몰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정말 시말서라도 쓰게 될 줄 아세요. 권유리 씨 하나 때문에 팀원 전체 일이 자꾸 늦어지잖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게요.” “어쨌든 오늘 집에 일찍 못 들어갈 줄 아세요. 그 동안 밀려놓은 일은 다 처리하고 가시라구요. 아셨죠?” “네.” 검은색 서류철을 신경질적으로 유리의 책상위에 던진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주위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저마다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리는 직각으로 숙인 채로, 얼굴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서 있었다. 물론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자신의 앞에 있는 팀장은 모르고 있을 테니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앞에서 대놓고 이런 표정을 지었다간 지금 듣고 있는 설교가 몇 분이나 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유리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자, 팀장은 콧방귀를 한번 뀌더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유리는 계속 허리를 굽힌 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바닥을 두들기는 하이힐의 굽 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그때서야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힘차게 고개를 든 탓에 흘러내려왔던 검은색 머리들이 뺨에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저 멀리서 걸어가는 그 길쭉한 몸을 바라보며,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뜯어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다, 문득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부장이 어색한 표정을 지어내며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킨다. 부장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휴게실과 이어지는 출입구. 아아, 휴게실로 오라는 소린가? 유리는 흘끗 자신의 정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던 최 팀장 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일을 하고 있는지 파티션 사이로 검은 머리만 살짝 보일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다 뜯어내고,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고 유리 역시 걸어 들어갔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신도 담배를 피우는 입장이지만, 휴게실 내에 있는 묵은 담배냄새만큼은 참기 힘들다. 코를 살짝 찡그리며 들어오던 유리에게 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궈, 권유리 씨. 최 팀장일은 제가 사과를….” “…….” “미안합…아, 아니지. 죄송합니다. 최 팀장 저게 사람 볼 줄을 몰라서 큰일이에요.” “…….” “제가 따끔하게 혼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서 누런색의 두피가 눈앞에 왔다 갔다 거린다.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젊었을 때에는 머리가 풍성했을지도 모른다. 기어오르는 부하 직원과 위에서 눌러대는 상사의 중간에 끼여서 마음고생을 20년 가까이 하다가, 겨우 부장이 되어 눈칫밥을 덜 먹어도 될 짬밥이 되었는데도 이젠 자신의 딸만한 여자에게 굽신거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최 팀장의 말이 전부 맞는 거고, 유리 자신은 들을만한 말을 들은 것뿐인데 그것 하나로 이렇게 마음 조려하며 빌고 있다니. 속으로 얼마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까. 유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 남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워서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부장을 돌려보냈다.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는 그 순간에도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부장에게 어색하게 웃어주고, 온 김에 담배라도 펴 볼까 싶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었다. 담뱃갑을 쥐고 아래위로 살짝 흔들었다. 불쑥 튀어나온 담배를 손가락으로 잡고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번 깊게 빨아들인 다음, 휴게실 한 쪽 벽면에 붙어 있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연기를 내뱉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맞은 편 건물이 보인다. 오전 햇살이 건물 창문에 부딪혀 눈가를 간지럽혔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 걱정 할 여유조차 없이 이 회사에 바로 꽂혀졌다. 꽂혀지는 건 별로 어렵진 않았다. 유리 가족이 하는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이고, 이곳의 이사는 유리의 오빠가 맡고 있으니 유리 한명 집어넣는 거야 쉬운 일이었다. 다만 유학까지 다녀온 똑똑하고 얌전한 오빠와는 달리, 심지어 학부 졸업마저도 간신히 했던 유리를 바로 요직에 앉힐 수 없다는 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남들과 같은 선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일이 손에 익숙해질 때까지 일선에서 배워오라고 말씀 하시며 꽂아주신 게 이 부서. 원래는 모두에게 비밀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처음 회식자리에서 자꾸 자신에게 술 좀 따르라 어쩌라 라는 망발을 퍼붓는 부장의 모습에 화가 나서 홧김에 살짝 부장에게만 말했다. 그 뒤로는 무슨 일만 있으면 이렇게 유리에게 와서 굽신거린다. 남의 밑에서 일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지라 명령에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그래도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과 상사에게 억지로 웃으며 존댓말을 쓰는 건 익숙해졌는데, 아직까지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짓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특히 목소리 우렁차고 잘 먹어대는 그 최 팀장에게만큼은, 더더욱. 나이는 동갑인데 미국에서 잘난 학위를 따오시는 바람에 젊은 것 치고는 팀장이라는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 떽떽 거리는 게 하도 짜증이 나서 오빠에게 그 인간 잘라버리라고 말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잘릴 뻔 했다. 스카웃 해오는 데 엄청 힘들었다나. 그래서 그런지 태도가 (유리의 눈에는)기고만장하다. 지각 한 번 했다고 그 사람 많은데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꼴이라니. 누가 자기 목소리 크다는 거 모를까봐 그렇게 하는 건지. 한 때 그 큰 키와 쭉 빠진 몸매에 혹 해서 꼬셔볼까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짜증이 날 정도다. 어떻게 된 게 요즘 부쩍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는 여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왜 그러는 걸까 싶다. 유리는, 거의 다 핀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빨면서 어디 용한 점집이라도 가서 부적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걔 사귀는 사람 없을 걸?” “아니야, 진짜야. 내가 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담배를 창틀에 대충 문대서 불씨를 꺼버리고, 휴지통에 집어넣고 있는데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두 명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며 휴게실 안에 들어온다. 유리는 가기 전에 커피라도 뽑아 가야겠다란 생각에 들어오는 남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커피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100원짜리 동전을 두개 꺼내 자판기의 동전투입구에 집어넣는다. 하나 집어넣을 때마다 탈칵 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기계에서 들려온다. 밀크커피 버튼을 누르고 팔짱을 낀 채로 기계를 바라보았다. 빨간색 불이 들어오고, 종이컵 하나가 내려온다. “네 눈이 삔거 아니야?” “진짜야. 진짜라고. 김희진이랑 박동건이랑 W호텔에 들어가는 거 똑똑히 봤다니까?” 김희진? 익숙한 그 이름에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빨간색 불이 꺼졌다. 고개를 숙여 종이컵을 꺼내었다. 꺼낸 종이컵 위로 하얀색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남자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겨 태연한 척 하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동전을 꺼냈다. 박동건이라. 누구더라? 유리는 동전 두개를 더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많이 들어 본 이름인 것과, 남자들이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그 남자도 연예인인 것 같은데 TV를 잘 보지 않는 유리로서는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그 스캔들이 사실이야? 둘이 사귄다는.” “그런가봐. 짜증나. 나의 여신님을 그 느끼하게 생겨먹은 놈이….” 아, 그 느끼한 놈? 유리는 남자가 스캔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각종 연예신문의 1면을 강타했던 그 스캔들. 서로가 서로에게 요즘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고 말하는데, 그 남자는 전혀 듣지도 못했던 남자라 스캔들 기사를 보고 어리둥절했었다. 유리 못지 않게 자신의 스캔들 기사에 어이없어 하던 희진은, 그 남자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 자꾸 느끼하게 작업을 걸어대는데 그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한번 자줘야겠다고. 그래도 나름 이름 있는 탤런트인데 하는 짓이 워낙 변태 같아서 싫다고 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릴지를 모른다고 했었나. 저 남자와 어제 밤에 들어갔다는 걸 봤다면 희진의 몸에서 나던 그 남자 향수 냄새는 그 남자의 것인가 보다. 유리는 다시 빨간 불이 꺼지는 걸 발견하고 고개를 숙여 종이컵을 꺼내었다. 양 손에 종이컵을 들고,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쪽 구석에 단 둘이 앉아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다는 여성들의 전용물이라고들 하지만, 남자들의 수다도 만만치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여자들의 수다에 등장하는 타인은 주로 같은 동성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반면 남자들의 수다에 등장하는 타인은 주로 이성이 등장한다는 것. 그것도 엄청난 음담패설과 함께. 유리는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내내 저 남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희진에 관한 성적 농담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감히 주둥아리를 놀려대는 거냐고 들고 있는 커피를 쏟아버리고 싶지만, 말썽 피웠다간 카드를 다 잘라 버릴 거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서 참기로 했다. 불투명한 유리문 앞에 서서, 오른 발을 들어 문을 살짝 밀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그나저나, 부럽다.” “뭐가?” “김희진이랑 해봤을 거 아냐. 그 놈.” “그랬겠지. 이야기 하려고 호텔 들어간 거 아니니.” “진짜 부럽다. 나도 제발 한번만…. 김희진이랑 사귀면 완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 같아.” “너 니 여자 친구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 여자가 나랑 사귄다, 이 수컷들아. 부럽냐? 입가에서 비죽 웃음이 흘러나온다. 괜히 우쭐한 기분에 허리를 펴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이 신나게 입방아를 찍어댔던 그 여자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유리라는 걸 저 남자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싶다. 연예인을 사귀면 이런 점이 좋다. 왜인지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해지는 그 느낌. 특히 상대방의 팬이라는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때면, 괜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맛에 연예인을 사귀는 건지도 모른다. 연예인을 옆에 끼고 다닌다는 건 일반인들은 쉽사리 타 보지도 못하는, 예를 들자면 람보르기니 같은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러움과 질투심이 가득 담긴 시선. 누군가는 그 시선이 싫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만, 유리는 오히려 그런 시선을 즐기는 쪽이었다. 희진과의 처음 시작도 그런 시선을 즐기는 게 좋아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기껏해야 길어야 한두 달 갈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을 떠보니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희진이라는 여자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년 단위로 연애를 하게 되다니. 희진을 만나기 전에는 상상조차도 못했던 일이다. 문득 유리는 자신의 집에 혼자 있을 희진이 생각났다. 아까 나오기 전에 갈 때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혼자 있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이라 집에 혼자 있으면서 온갖 짜증을 다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까 아침에 정신없이 나오느라 제대로 인사도 못했으니, 전화라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자리에까지 다 온 유리는, 양 손에 들고 있는 커피 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일 하는 척 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아까 최 팀장이 던져놓고 간 서류철을 손가락으로 잡아 표지를 옆으로 넘겼다. 검은색 글씨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시선은 서류 위에 둔 채로 책상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잡았다. 잡자마자 갑자기 핸드폰에서 진동이 심하게 울린다. 놀란 유리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재빨리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독한년 이라는 글자가 떠 있다. 보자마자 머리가 심하게 아파온다. 그래도 씹을 수는 없어서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왜? 금세 내가 보고 싶었어? 피곤하다, 피곤해. 아, 인기 많은 내가 죄인이지.” - 너 그것도 병이야. 내가 아는 오빠가 정신병원 하는데 소개시켜줄까? “뭐???” - 시끄러워. 어디서 소리를 질러?! 목소리 듣기 싫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어. “뭔데?” - 이따가 데리러 오지 마. “왜? 또 맞선? 그럼 내가 더 필요하지 않아? 가서 연기 좀….” - 너…!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입을 다문다.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성난 숨소리에 유리는 피식 웃었다. 정말 단단히 혼을 난 모양이다. 안 그래도 오늘은 최 팀장이 늦게까지 남아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서 데리러 가기 곤란할 것 같았는데 먼저 수연 쪽에서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하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 …어쨌든 데리러 오지 마. “뭐, 원하신다면.” - ……. “더 할 말 있으신가요?” - 없어. “그럼 끊을….” 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독한년이라는 글자가 깜빡 깜빡거린다. 예의를 밥에 말아먹고 온 여자 같으니. 독한년 글자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핸드폰 화면에 들어오던 조명이 뚝 꺼진다. 유리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화통화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전에 아우디를 박아놓고 연락을 쌩 까는 바람에 61통이나 전화를 해댔을 때에는 그렇게 받지도 않더니 결국 그 비싼 목소리 한번 들려주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특유의 사람을 무시하는 듯 한 그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까닥까닥 거리며 전화했을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까탈스럽고 자신을 벌레 취급하는 듯 한 그 말투는 여전했지만, 확실히 기계선을 통해서 걸러져서 그런지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들렸다. 교무실 안에서 전화한 건지 주위는 조용했고, 이 여자 역시 주위를 신경 쓰는 듯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그 목소리의 뒤끝이 묘했다. 안 그래도 가는 목소리의 그 뒤 끝은 살짝 흐려지면서 묘한 여운을 남겨 놓았다.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묘한 뒤끝의 느낌을 애써 생각해냈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그 목소리를 무어라고 딱 꼬집어서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가 마땅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를 미간에 가져다 대고 꾹꾹 누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뭐였더라. 이거에 맞는 단어가 있는데. 손에 턱을 괴고 그 목소리에 맞는 단어들을 애써 골라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정리 해 나갔다. 돼지 멱따는 소리 같다? 아니야. 닭 목 비트는 소리? 아니야, 이것도 아닌데. 접시 깨지는 소리 같다?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RPG게임에서 몬스터 때려잡을 때 나는 소리? 음.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 뭐지? 왜 안 떠오르지? 답답하게 시리. ……아! 한참을 고민하던 유리는,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단어에 손가락을 튕겼다. 애기 같다? 그래. 이거야. 애기 같다. 애기 같…. 음? ……. …내가 지금 이 여자 목소리를 애기 같다고 표현하고 싶은 건가? ……. …그러니까, 귀엽다고? 이 여자 목소리가? ……. 유리는 자신이 금방 생각해낸 그 단어가 믿기지 못한 듯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 표독스러운 여자의 목소리를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아무리 자기 자신이 생각해낸 것이라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내가 미쳤나. 아무리 잠깐이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 여자 목소리가 굉장히 오염 된 목소리라서 그래. 그래서 내 뇌까지 썩어 들어 간 거야. 내 사고 회로가 멈춘 거야.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금방 자신의 귓속에 울려 퍼진 그 목소리를 손가락으로 휘저어내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한참을 그렇게 귀를 후벼 파는데,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드르륵 울렸다. 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엄지손가락으로 슬라이드를 슬쩍 밀었다. 문자가 와 있다. - 너 귀 후벼 파고 있는 거 아니지? 설마 그렇게 유치한 짓은 하진 않겠지. 헉. 유리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탄식에 스스로 놀래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는지 모두들 파티션 속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한년이라고 저장해놓은 건 참 잘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어만큼 이 여자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도 없다. …이 여자 뭐야? 마녀야? 신기까지 있어? 이런 여자 목소리를 애기 같다 생각하다니. 핸드폰이 이상한 거야. 오늘 당장 바꿔야겠다. * * * 하아. 유리는 창가에 기대어 어느새 새까맣게 변해버린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건너편에 있는 건물의 창에는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건물 밑 인도 양 옆에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도 하나둘 씩 켜지기 시작했고, 도로 위를 달려가는 자동차들도 저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씽씽 잘만 지나간다. 권유리 씨, 수고 많네요. 최 팀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자판기에서 꺼낸 커피를 뽑아들고 한마디 던진다. 아, 네 뭐. 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어내며 최 팀장의 말에 응수를 했다. 피식 웃는 얼굴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그럼, 더 수고해요. 불투명한 유리문 사이로 사라지는 그 긴 몸뚱아리를 보며 유리는 다시 빙긋 웃었다. 안면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 같아서, 최 팀장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사지 했다. 하아.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며 밖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두워진 실외. 길고 긴 낮이 지나고, 드디어 밤이 찾아왔다.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들은 밤만 되면 유난히 개방적이 된다. 해가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은 이 시간에, 몸도, 마음도 모두 활짝 열어놓고 누군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낮에는 몸을 그렇게 사리다가도, 밤이 되고 어둠이 깔리면 대담해진다. 따라서 그만큼 작업을 거는 것도 쉬워지고, 누군가와 엮이는 것도 쉬워진다. 그래서 유리는 밤을 좋아했다. 여자들이 모든 걸 열어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기가 막힌 마법의 시간. 그 시간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유리는 멍하니 건물 밑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커먼 머리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서글픈 기분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껏 누군가와 이별하면서도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오늘은 쏟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우울하고, 우울하고, 또 서글펐다. 단지, 이 시간에 놀지 못하고 회사에 틀어박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자주 가는 바에 앉아서 어느 이름 모를 여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어야 한다. 유리가 그렇게 인사를 하면, 그 이름 모를 어떤 여자는 웃으며 반겨 줄 테고, 간단한 통성명부터 하게 될 것이다. 통성명을 하게 되면 나이를 묻고, 나이를 물으면 이것저것 대화를 하며 서로에 대한 탐색전을 시작. 그리고 이 탐색전은 백이면 백 유리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이야기가 조금 통한다 싶으면 그 때쯤 유리는 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계산한다. 개방적이고 노는 걸 즐겨하는 여자라면 더 긴 말 할 것도 없이 호텔로 직행하면 되는 거고, 그런 게 아니라 여자를 처음 만나본 여자라든가, 혹은 그 바에 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 될 정도로 순진한 여자라면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한 다음 집에 데려다 주면 된다. 물론 연락처는 반드시 주고받아야 할 테고. 정말 원래대로라면 그 즐겁고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어야할 시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붉은 기가 감도는 조명 대신 하얀 조명 아래에서, 몸매가 보기 좋은 예쁜 여자들 대신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최 팀장과,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대신에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할 용어들을 써가며 유식한 척, 다 알고 있는 척 무게를 잡고 있다. 유리는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정장의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내었다. 담뱃갑을 탈탈 아래위로 턴 다음, 손가락으로 담뱃갑 윗부분을 잡았다. 쥐어져야할 담배는 잡히지 않고, 허공에서 허탕만 쳤다. 손가락이 민망해졌음을 알고 그제야 바깥에 두고 있던 시선을 떼고 담뱃갑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어보아도 나와야할 하얗고 기다란 담배는 나오지 않는다.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담뱃갑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이젠 담배까지 떨어졌어. 씨발.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다. 아침부터 최 팀장에게 깨지고, 수연의 전화를 받고 별 이상한 생각을 하지를 않나, 생전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야근도 했다. 아직 검토해야할 서류는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너무 성질이 나서 오빠에게 꺼내달라고 전화라도 찔러볼까 생각했는데 평소 자신의 오빠의 성격을 미루어보아 그런 짓을 했다간 아예 내일까지 집에 못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할 것 같아 애써 꾹꾹 참아냈다. 그런데 이젠 담배까지 떨어져버렸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담배가 떨어진 건 참을 수 없다. 담배도 없이 어떻게 이 상황을 버티란 말인가. 말이 안 되는 소리.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유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유리는 천장에 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휘날리는 앞머리를 쓱 정리를 한 후,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을 꺼냈다. 커피 자판기 바로 옆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에 돈을 집어놓고, 한참을 눈을 굴리며 이것저것 바라보다가 포카리 스웨트가 세워져 있는 곳의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란색 캔이 굴러 떨어진다. 몸을 숙여 캔을 집어 들고 캔 겉면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물방울들을 손으로 훔쳤다. 축축한 느낌이 든다. 물방울을 훔친 손을 이마에 문질렀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이마에 꽤 많은 물방울들이 맺혀졌다. 밖이 어둡고 안이 밝은 것을 이용해, 창문을 통해 자신의 이마를 확인했다. 제법 땀 같아 보였다. 유리는 비죽 웃음을 흘리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몇 차례 때리고 비볐다. 볼이 새빨개졌다. 손에 쥐고 있는 포카리 스웨트를 따지도 않은 채 한 쪽에 세워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낮은 포물선을 그려가던 파란색 캔은 정확히 쓰레기통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셔츠의 맨 윗 단추 몇 개를 풀어 헤친 후, 아까부터 자꾸 거슬려서 묶어버렸던 머리도 풀어 헤쳤다. 창문을 통해 다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초췌한 꼴이 영락없이 병자다. 이 정도면 준비 끝. 아무리 악랄하고 눈치 빠른 최 팀장이라도 이런 꼴에, 최대한 죽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연기를 해대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아. 흠흠.” 아픈 사람에게 빠질 수 없는 쇳소리가 섞여 들어간 기운 없는 목소리. 유리는 그 목소리를 자아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목소리 튜닝은 하고 가야지, 안 그러면 그 인간은 의심할거야. 목을 손으로 부여잡고 몇 번을 헛기침을 하자 만족할 만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유리는 온 몸에 힘을 최대한 빼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투명한 유리 저 너머에서 최 팀장은 이제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 먼저 퇴근을 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다. 유리문의 회색 손잡이를 잡았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최 팀장 앞에서 읊을 대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티, 팀장님. 저 갑자기 배가, 헉헉. 너무 아파서, 헉, 말인데요. 오늘은 이만, 큭. 이만 퇴근 하면 안 될…까요? 배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대사를 읊던 유리는, 대사를 다 읊자 다시 몸을 피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역시 나는 못하는 게 없어. 어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고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을까. 나의 꽃사슴들아. 기다려, 이 오빠가 간다. 바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을 그 누군가를 상상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던 손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아. 뭐야? 이 중요한 순간에.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김퉤. 화면에 뜬 그 두 글자를 본 유리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고서, 전화를 받았다. “뭡니까. 김태연 씨.” - 헥. 야. 너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그리고 거의 죽어가는 듯 한 목소리. 유리는 순간 놀래서 약간 웅크리고 있던 몸을 꼿꼿이 세우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너 안 바…쁘지? “어? 어어.” - …나 여기 너네 회사…. 헉헉. “뭐야.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숨 좀 고르고 말해.” - 너네 회사 앞…인데. 지금 올 수 있어? 최대한 빨리. “나 안 그래도 지금 회사야. 무슨 일인데?” - 무, 묻지 말고. 제발. 유리야…나 좀 살려줘어. “뭐?! 야, 너 무슨 소…. 여, 여보세요? 야. 여보세요? 태연아, 김태연!!” 살려달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남긴 채 끊어진 전화. 유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봤다. 숨조차 고르지 못하던 목소리.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짓눌려져 있는 그 목소리는, 잔뜩 떨려 있기까지 했다. 거의 10년 가까이 알아온 친구 사이지만, 태연에게 이런 식의 전화를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이마에서 정말 식은땀이 났다. 아무리 서로 온갖 욕을 해대기만 할 뿐 좋은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사이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다. 10년이나 알아온 친구이니 서로 비밀도 없다. 소중하다는 소리는 낯간지러워서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베스트 프렌드라는 소리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친구 사이. 가족끼리도 친한 사이라서 심지어 둘 중에 한명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결혼할 뻔 한 사이기도 하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 피보다 더 진할지도 모르는 우정을 나누던 사이인 아이. 그 아이가 갑자기 이런 식의 전화를 해댔다. 이젠 정말, 이 사무실을 빠져나가야 할 절실한 이유가 생겨버렸다. 유리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문을 벌컥 열었다. 파티션 사이에 우뚝 선 기다란 몸이 보였다. 유리는 성큼성큼 최 팀장을 향해 걸어갔다.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던 최 팀장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에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긴 목에 걸려 있는 파란색 줄에 달린 명찰에는 최수영 팀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유리는 이를 악물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항상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유리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어낸다. “최 팀장님.” “…왜요. 권유리 씨.” “저 지금 당장 퇴근해야겠습니다.” “제가 드린 일은 다 하셨나요?” “최 팀장님.” “아, 왜요?” “저 사실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레둘레 쳐다보던 유리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선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냈다. 명함 지갑 속에 감춰 놓았던 가족사진을 꺼내었다. 부모님이 손을 잡고 끌고 가 억지로 찍은 가족사진. 애초에 그런 화목하고 낯간지러운 분위기는 자신과 맞지 않아서 끝까지 찍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우디 폐차 시켜버리겠다는 아버지의 으름장에 억지로 찍게 된 가족사진이다. 덕택에 부모님과 자신의 오빠는 환하게 잘 웃고 있는데 유리만 유독 똥 씹은 표정으로 나와서, 절대 지갑에 넣고 다니지 못했다. 혹시라도 만나는 여자가 지갑을 구경하다가 그 사진을 발견하면 쪽팔릴 것 같아서 넣고 다니지 않았다. 다만 가끔 갑작스럽게 지갑을 확인하는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명함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만 지갑에 껴놓고는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남에게 사진을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이게 뭔데요? 눈을 가늘게 뜨며 사진을 바라보던 최 팀장이 말한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사진 속의 인물들을 확인하는 듯 했다. 유리는 그런 최 팀장을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당신이 지금까지 누구 괴롭혔는지 알겠지? 내가 이 그룹 회장 손녀야. 손녀라구. 자, 이제 그 부장처럼 굽신거려야지? “…이게 뭐 어떻다고요?” 어라? 이게 아닌데? “이게 뭐가 어떻다구요. 권유리 씨가 회장님 손녀인 거 저 알고 있었는데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유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미 알고 있었다니. 그럼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유리를 구박했단 소리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간 부은 짓을 하지 않을 터. 하지만 유리의 앞에 서 있는 이 여자는 보통사람이 아닌 듯싶다. 사진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이 민망해지자 유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주섬주섬 다시 사진을 집어넣었다. 분위기가 묘하다.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정리하는 그 얼굴을 바라보던 유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저 회장 손녀라니까요?” “그런데요?” “…최 팀장님. 팀장님이 저에게 이렇게 대하시면 안 될….” “권유리 씨.” 한심하다는 듯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그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왠지 감당하기 힘든 포스가 이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본다. 유리를 동정하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다. “권유리 씨가 회장님 손녀인건 이사님께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오빠가요?” “네. 그리고, 유리 씨가 회장님 손녀이더라도 어쨌든 지금은 제 부하 아닌가요?” “…….” “전 팀장으로서 제 아래 있는 분들을 이끌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임무가 있어요. 그 임무에 따라오지 못하는 부하들은 제가 기꺼이 가르쳐야 하구요. 유리 씨는 회장님 손녀이기 전에 제 부하예요.” “…….”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회장님 손녀인 걸 숨기고 회사 다니는 걸로 봐서 사람 됨됨이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권력을 남용하려 하다니…실망이네요. 벌로 오늘 12시까지 퇴근 하지 마세요. 혹시 도망갈 수도 있으니 저도 같이 있을게요.” 혹 떼려다 혹 붙였다. 그 속담이 바로 이런 때에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유리는 순간 기가 팍 꺾여버렸다. 거기다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조차도 할 수가 없다. 최 팀장은 다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파티션 사이로 보이는 책상 위는 거의 다 정리가 된 상태. 유리는 손에 쥔 핸드폰을 더 세게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빌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다 할게요 라는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찌 됐건 지금 자신의 친구가 회사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서로 제발 떨어지자며 질린 듯 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이지만 친구는 친구. 그 친구가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거절할 수 없다. 딱 세 번. 평생에 딱 세 번만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자는 결심을 어렸을 때에 했었다. 그리고 그 중 한번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유리는 이를 악물고 최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문득 책상 위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의 심플한 액자. 그리고 그 안에 꽂혀 있는,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여자의 사진. 어디서 많이 봤던 여자다. 얼마 전에 희진이 자신의 동료 탤런트라며 소개해줬던 그 여자. “이순규?” “……네?” “팀장님. 혹시 이순규 좋아하세요?” “뭐, 뭐, 뭐라구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이 책상위에 푸드득 떨어진다. 팀장의 안면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뻗어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액자를 덮는다. 귓볼까지 새빨개진 얼굴. 쯧쯧. 유리는 혀를 찼다. 하긴, 이 나이에 여자 연예인 좋아한다는 걸 들키면 부끄러울 만도 하지. “무, 무슨 소리예요. 이건 그냥….” “저 이순규 알아요.” “…네?” “저 그 여자 안다구요. 저 그 사람이랑 술도 마셔봤어요.” “진짜요?” “네. 사인 받아드려요? 사인 받아드릴 수 있는데. 아니, 아예 전화번호도 알려드릴 수 있어요.” “…….” “대신, 저 지금 퇴근할 수 있게 해주세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몇 번이나 침을 꿀꺽 삼켜대고 있었다. 목이 타는 모양. 유리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여자가 고작 연예인 한명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회장 손녀라는 권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이 연예인 전화 번호 하나에 저렇게 순식간에 흔들리다니. 유리는 왠지, 자신의 집안이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그럼. 지금 퇴근하세요.” “감사합니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요. 꼭 이순규 씨 전화번호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아, 저, 그. 유리 씨가 피곤해보여서. 음. 그래서 그런 거예요. 오해마세요.” “네. 뭐, 그렇게 생각하도록 할게요. 그럼, 전화번호는 내일 알려드리면 되죠? 일단 본인의 의사는 물어봐야 하니.” “…그, 그래요.” 어색하게 웃는 그 얼굴을 뒤에 둔 채로 사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해방이다. 유리는 홀가분한 기분에 빙긋 웃었다. 팀장님, 책상 정리는 저 대신 해주실래요? 제가 급히 나가봐야 해서요. 아, 네. 그러죠. 감사드립니다, 팀장님. 아, 저기요. 네? 근데, 그…. 뭔데요? 비밀로 해주세요, 이순규 씨 건은. 아아, 그러죠. * * * “…….” “2차, 2차 가자니끄아.” 김태연 죽여 버리겠어. 네가 감히 날 낚아? 너 이 새끼, 10년 우정은 어디다가 팔아먹어 버린 거야?? “…….” “야 임뫄 지금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2차 가자고오. 2차. 2차!!”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힘을 주어서 그런지 손바닥이 아파올 지경이다. 역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신도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알코올냄새가 코를 찌르도록 마셔본 적은 없고, 이렇게 마신 걸 본적도 없다. 힐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미 한번 게워내고 온 건지 머리카락의 끝에 허연 게 들러붙어 있고, 눈은 다 풀려서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다. 얼굴과 목 부분은 전부다 새빨개져 있다. 아마 단정하게 묶고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갈색 머리들은, 마치 영화에서 꽃 달고 나오는 언니들처럼 여기저기 다 엉켜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마치 못 볼 걸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홱 돌려 정면을 주시했다. 도로 위에 차는 별로 없다. 막힘없이 술술 뚫려있는 도로 위를 바라보며, 유리는 몇 분전의 상황을 다시 곱씹었다. - 그래서. 너, 이딴 거 시키려고 그렇게 간절한 목소리로 날 찾은 거야? 태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승강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그 많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제발 다치거나 그런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졸이며 뛰어나간 유리의 눈에 펼쳐진 장면은 정말 가관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태연이, 양 쪽에 축 쳐진 몸뚱아리를 두개 끌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두 짐짝을 들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하얀 얼굴과 옷은 전부다 땀에 젖어 있었고, 무려 세 개의 몸을 한꺼번에 지탱하고 있는 다리는 힘에 겨웠는지 눈에 띌 정도로 양 옆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태연이 그렇게 자신을 애타게 찾은 건, 태연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상황 때문이었다. - 야, 나 도저히 못하겠어. 네가 수연 씨 처리해. - 뭐? 내가 왜??? - 그럼 나 혼자 이 두 명을 끌고 가란 말이야? 제발 나 살려줘. 미쳐버릴 것 같아. - 네가 처음부터 들고 온 짐짝이면 니가 끝까지 들고 가야지. - 넌 이제 사람도 짐짝으로 보이니? - 아, 됐고. 니가 처리해. 귀찮게 시리. - 난 아직 잊지 않고 있어. 그 백. 희진 씨는 요즘 잘 지내셔? - ……. 그 때 사달라고 징징거릴 때 절대 사주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그 여자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난다. 그 백을 사 준지 얼마 안가서 헤어져버렸으니 기억 속에 남을 리가 없다. 지금 만나는 여자들에게만 충실히 하자는 주의라서 과거 속에 묻혀버린 여자들의 기억은 되도록이면 빨리 지워버린다. 그런데 기억도 안 나는 그 여자 때문에 매일 태연에게 휘둘리고 있다니. 정말 조만간, 그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여자에게 준 백보다 더 비싼 선물을 희진의 품에 안겨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절실히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마 태연은 평생 우려먹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된 탓에 유리는 본의 아니게 술 취한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거기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정수연이라는 이 여자를.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저 여자의 몸을 질질질 끌고 가 트렁크에 구겨 넣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할 만큼 성격이 못되진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 와중에 가벼운 트러블은 있었다. 자기를 어디에 가두는 거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걸, 그 입을 손으로 억지로 틀어막고 마치 납치라도 하듯이 차안에 머리를 눌러 구겨 넣었다. 집 주소는 태연이 대충 알려주었다. 사실 집 주소를 듣고 처음에 당황하기도 했다. 마티즈를 끌고 다녀서 그냥 평범한 서민인 줄 알았더니 태연이 알려준 집 주소는 유리의 본가와 같은 동네였다.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여자가 왜 마티즈를 끌고 다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리가 아우디를 끌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집안 어르신들은 검소하다고 칭찬해주기까지 하는데 이 여자는 무려 마티즈를 끌고 다니고 있다. 어쩌면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입주 가정부의 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앞뒤가 들어맞는다. 정말,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동네 주민이 마티즈를 끌고 다닐 리는 없다. 유리가 멋대로 수연의 집안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이, 옆에서 축 쳐진 채로 앉아있던 수연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눈을 번쩍 떴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유리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잔뜩 풀린 눈동자로 전방을 주시한다. 어이고, 진짜 여자가 겁도 없어. 대체 어떻게 마셨길래 저렇게 취한 거야? “뭐야. 왜 그래? 답답해? 창문이라도 열어줘?”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훅.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는다. 꼭 햄스터 같이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유리는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선, 창문을 내렸다. 부드럽게 창문이 내려가고, 인공적인 에어컨 바람 대신 시원한 자연바람이 차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달리는 차의 창문에 부딪히던 바람이, 이제는 차 안으로 들어와 수연의 머리카락을 잔뜩 흩트려놓고 있었다. 유리는 열린 창 바깥으로 팔을 길게 빼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으며 흘끔 수연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은 잔뜩 풀려 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지 몸이 살짝 양 옆으로 기우뚱 거리고 있었다. 워낙 평소에 독한 여자라 술주정도 굉장히 독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까 차에 집어넣을 때 약간 난리 부린 것 빼고는 의외로 얌전하다. 게다가 잔뜩 발개진 얼굴로 아까부터 뭐라고 자꾸 웅얼웅얼 거리는 데 그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엽다니. 저 여자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에 두 번이나. 유리는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로 양 옆에 쭉 늘어진 가로등의 붉은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이쯤이지? 도로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다. 같은 동네라고 해도 유리가 살고 있는 곳과 수연이 살고 있는 곳은 서로 양 끝에 있어서 들어가는 길의 방향이 전혀 다르다. 유리는 차의 속도를 늦춘 다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양 옆으로 쭉 늘어진 커다란 주택을 두리번거리며 태연이 설명해준 수연의 집 외관과 비슷한 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야.” 볼에 바람을 집어넣은 채로 혼자서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이던 수연이, 바람을 푸풉 하고 빼내며 말했다. 너네 집 근처. 유리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한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데다, 워낙 집들이 크다보니 차 안에서 보기엔 한계가 있다.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 세야.” “뭐래.” “차 세여. 당즈앙.” “됐네요. 나중에 또 무슨 소리 들으라고.” “차 세여. 세유라고 했잖야.” 혀가 잔뜩 꼬였는지 발음도 엉망이다. 자신은 나름대로 화를 낸다고 내는 것 같은데 발음이 자꾸 뭉개지니 그저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유리는 수연의 말에 그저 비죽거리며 웃기만 할 뿐 차는 세우지 않았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심통이 난 걸까. 다시 입에 잔뜩 바람을 불어넣고 씩씩 거리던 수연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열려진 창밖으로 몸을 빼냈다. 저 여자 또 왜 그래?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안 세울 거야. 집 앞에 도착하기 전에는.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내가 차를 세…. “꺄악!!!!!! 살려주세요!!!!! 변타갸 저 납치해….” “악!! 알았어. 알았다고!! 세울게. 세우면 될 거 아냐!” 술에 잔뜩 취했으면서도 목소리의 성량은 멀쩡하다. 유리는 이 조용한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급하게 차를 세웠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가던 게 아니라 별 무리 없이 차가 금방 멈춘다. 차가 멈추자마자 수연은 급하게 차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비틀거리는 모양이 꽤나 아슬아슬하다. 선생님이란 작자가 왜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덕택에 치마의 뒷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유리는, 이내 세차게 자신의 뺨을 몇 번 두들긴 다음 급하게 시동을 끄고 차에서 뛰쳐나왔다. 수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고 중얼중얼 거린다. 아씨, 발 아파. 아마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다. 유리는 황급히 수연의 옆쪽으로 가서 비틀 거리는 수연의 팔을 잡았다. 그런 유리의 팔을 뿌리친 수연은, 발 아프다고 계속 중얼 거리더니 신고 있던 하이힐을 휙휙 벗어던졌다. 도로 위로 하이힐이 굴러간다. “여기가 니네 집 안 방이야? 왜 신발을 벗고 지랄이야.” “…히히.” “어쭈? 웃어??” “가서 주어와.” “……뭐?” “주어와아아아아아.”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 수연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려댄다. 이 동네는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큰 소리 한번 나지 않는 조용한 동네이다. 다른 동네에 가면 흔히 있는 취객들도 이곳엔 전혀 없다. 그런 동네에서 이런 식으로 여자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면 분명 한 두 명씩은 나와서 볼게 뻔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시선들과 손가락질은 수연이 아닌 유리가 감내해야 한다. 유리는 자신의 연인도 아닌 이런 여자 때문에 그런 쪽팔림을 당하긴 싫었다. 그래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수연의 말대로 쪼르르 달려가서 하이힐을 덥석 집어왔다. “자. 여기. 주워 왔어.” “히히. 잘해어." 배실배실 웃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간지럽힌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거 완전 개 취급이잖아?!?! 하지만 술 취한 여자에게 욕을 할 순 없는 노릇. 어차피 욕해 봤자 기억도 못할 거, 괜히 입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유리는 목울대까지 치고 올라오는 욕을 꾹꾹 참아가며 히히 웃고 있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됐지? 다시 차 타자. 집에 데려다 줄게.” “…….” “얼른 타자. 응? 나 지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아.” “업어.” “…어?” “업어줘. 업어달란 말이야.” “뭐야? 이 여자가 미쳤나. 내가 왜 너를 업어?! 안 돼. 그것만큼은 할 수 없어. 개 취급으로도 부족해?!” 이건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유리는 잡고 있는 수연의 팔을 확 집어 던지며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수연이 몸을 움찔 거리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그 표정을 바라본 유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꼭 그런 표정 같았다. 밥을 달라고 애원하는 강아지 같은, 그런 표정. 그런 표정으로 바라봐도 그건 안 돼. 내가 미쳤어? 내 등은 아무한테도 허락한 적 없다고. 근데 내가 당신한테…말도 안 되지. 절대 안 돼. 유리는 애써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수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한참을 마주치고 있었더니 왠지 눈가가 쓰라려 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리는 다시 한 번 수연을 차에 태우기 위해 축 쳐져 있는 수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자마자 수연이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휩쓸고 올라온다. 유리는 슬며시 잡고 있던 수연의 손목을 놓고, 수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작은 몸. 꼭 쥔 주먹. 그리고 거칠어진 숨소리. 꼭, 울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동을 걸고 있는 것 같은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저, 저기. 혹시 우….” 업어주지 않는다고 우는 건 또 뭐야?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수연을 바라보는데, 유리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거침없이 하얀색 셔츠의 단추가 풀리기 시작한다. 살짝 풀린 단추 사이로 곧게 자리 잡은 쇄골 뼈가 보이더니, 단추가 하나 둘 씩 풀리면서 보이는 살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놀래서 침을 꿀꺽 삼키며 지켜보던 유리는, 셔츠가 풀리다가 하얀색 속옷까지 보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어진 셔츠를 억지로 당겨 닫으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야! 너 미쳤어? 지금 어디서 옷을 벗고 지랄이야!!” “놔.” “야!!!! 왜 이래, 너 진짜?!” “안 놔?” 유리가 강하게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수연은, 다시 한 번 볼에 바람을 가득 불어 넣더니 이번엔 입고 있는 치마의 후크를 풀기 시작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려가는 소름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한 손으로 셔츠를 부여잡고, 한 손으로는 수연이 내리려고 하는 치마를 억지로 잡고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알았어. 업어주면 되잖아! 업어주면 될 거 아니야. 그러니 제발 벗지 마.” “히히. 진자에 그럴거이지 이 뱌뵤.” 뱌뵤가 아니라 바보야. 이 독한 여자야. 유리는 황급히 수연의 셔츠를 잠그고, 치마의 후크까지 억지로 잠근 다음 등을 돌려 수연의 앞에 주저앉았다. 수연의 팔이 목에 감겨오고, 따뜻한 느낌이 등에 닿았다. 수연이 바닥에 던져 놓은 핸드백을 손목에 끼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하이힐을 다시 든 다음,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각보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등에 업힌 몸을 한번 위로 튕겨서 좋게 자세를 잡은 다음 하나둘씩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그렇듯이, 골목은 조용했다. 길 양 옆에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만이 유일한 빛. 유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한걸음씩 옮겨갔다. 누군가를 등에 업은 건 태어나서 처음. 물론 이렇게 술에 잔뜩 취한 여자를 보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떻게 여자가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는 건지. 거기에 이렇게 취했는데도 데려다주는 사람도 없다. 오죽했으면 태연이 두 명을 억지로 데리고 왔을까. 선생님들 회식자리에선 원래 이렇게 술을 마시지는 않을 텐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많이 마셨나 싶다. 여자가 이렇게 마실 동안 동료 남자 선생님들은 뭐 했을까. 왠지 괘씸한 생각마저 들었다. 유리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 그만 마시게 했으리라. 등에 업힌 게 마음에 들었는지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얼굴과 얼굴 사이가 그리 멀지 않아서, 웃을 때마다 작은 숨결이 귓볼을 간지럽힌다. 웬일인지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유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알코올 냄새 사이에 묘한 향수냄새까지 섞여서 후각을 자극한다. 알코올 냄새 하나로 취해버린 걸까. 자꾸 얼굴이 빨개져서 마음이 영 불편했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수연이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떼고서, 손으로 유리의 오른 쪽 머리를 잡고 쭉 잡아당겼다. 두피를 자극하는 통증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확 찡그리며 성질을 냈다. “악!! 아퍼. 아프다고!!” “…우리 집 겨갸 아니아.” “뭐??” “오른쪽. 오른쪽. 오른쪼오오옥.” “이런 썅. 오른쪽이라고 말을 하면 되지 왜 머리를 잡아당겨?!” “내 자동차니까. 히히.” “어휴,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말어.” 자꾸 흘러내리는 몸을 다시 한 번 튕긴 다음, 오른 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제법 어둑어둑한 골목이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골목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길을 걸어갔다. 자신의 집과 아예 반대쪽에 있는 곳이라 이곳까지 걸어와 본 적은 없다. 마치 전혀 다른 동네에 온 것 같은 기분. 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고 해도 여름은 여름. 그냥 걸어가도 더운데 여자 한명을 업고 가려고 했더니 더 더웠다. 살과 살이 맞닿은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고,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처음엔 그저 맺혀있기만 하던 땀이, 시간이 좀 지나니 점점 얼굴선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대체 집이 어디야??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고 양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태연이 설명한 외관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얼굴선을 따라 흐르던 땀은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결국엔 땅으로 뚝 떨어졌다. 이게 정말 무슨 고생인가 싶다. 자신의 여자 술주정을 받아주는 것도 해줄까 말까 인데, 자신의 여자도 아닌 여자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있다니. 내일 이 여자가 술 깨면 톡톡히 받아내고 말리라. “더어?” “……너 같으면 안 덥겠냐.” “나 많이 무겨워?” “어. 더럽게 무거워.” “흐응.” 사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가볍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어서 무겁다고 했을 뿐. 유리의 대답에 이상한 콧소리를 내던 수연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깔렸다. 유리는 이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항상 으르렁 대며 싸우던 사이라 이런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있자니 무언가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소름도 돋는 것 같고. 온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얌전한 정수연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너 말이야.” 웬일로 처음으로 발음이 뭉개지지 않았다. 꽤나 또렷한 그 목소리에 유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왜, 라고 짧게 반문했다. 한 동안 말이 없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이 묘한 분위기. 아, 뭐야? 우리가 이런 사이는 아니잖아? “뭔데, 빨리 말해. 짜증나게 뜸 들이지 말고.” “생각보다 등이 아늑하네.” “…….” 무슨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입에 부딪힌다. 유리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로 꿀꺽 집어삼켜버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 쪽에 뭐가 자꾸 움직이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유리는 괜히 민망한 느낌이 들어 헛기침을 했다. 수연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없는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이런 밤하늘을 바라본 적도 꽤 오래인 것 같다. 어렸을 때에는 밤하늘을 보는 걸 제법 좋아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보지 않게 되었다. 항상 밤만 되면 여자들과 낄낄대며 놀러 다니느라 이렇게 한가롭게(는 아니지만.) 밤거리를 걸어본 적은 없다. 어렸을 때에는 그래도 별이 좀 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몇 년동안 별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 유리는 문득, 왜 그 동안 밤하늘을 보지 않았던 걸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 좋아했었는데. 어떤 때에는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집의 정원에 앉아서 멍하니 별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아버지가 나와서 웃으며 별자리에 대해 설명도 해주곤 했다. 그랬었는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별을 보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쓸데없이 감상에 젖다니. 웃기네. 그나마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유리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황급히 그 기억들을 머릿속에 지워버렸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 굳이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하긴. 그래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유리는 빙긋 웃었다. 이런 식으로 가끔 생각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와, 이 여자 때문에 이런 시간도 가져보네. 앗. 여기 아니냐야, 왼쪼, 왼쪼옥. 악!! 야!! 말로 하랬지? 왜 또 머리카락 잡아 뜯어?! 어라? 이거 핸드 아니야? 핸들 아니거든? 브레이크는…이러케 하먄 되나? 켁켁. 야. 내 모, 모, 목. 목 조르지…켁. 정수연, 날 죽일셈이야?! 히히히. * * * 유레카! 드디어 찾았다! 유리는 하마터면 손을 번쩍 들고 만세삼창을 할 뻔했다. 감격의 눈물까지 쏟아질 것 같다. 지난 30분 가량은 정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감상에 젖어있었던 것도 잠시고, 유리의 머리가 핸들이라느니 어쩐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오른쪽 머리와 왼쪽 머리를 번갈아 잡아당기는 바람에 두피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거기에 속도를 늦춰야 된다며 목을 조르지를 않나, 빨리 안 간다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야 된다고 자꾸 발끝으로 몸을 차는 바람에 몇 번이나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참아가며 걸어오다 결국은 태연이 언급했던 외관과 똑같은 수연의 집을 찾아냈다. 온 몸은 이미 땀에 젖어버린 후. 얼른 수연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갑작스럽게 업어달라고 옷 벗고 난리치는 수연 때문에 차문도 잠가놓지 않고 왔다. 유리는 자신의 등에 업힌 수연을 서둘러 내려놓기 위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야, 다 왔어. 이제 내려.” “…앵? 뭐라고?” “집에 다 왔다고. 얼른 내려.” “지…집이야?” “어. 아 얼른 안내려?! 더럽게 무겁고만.” 유리가 투덜투덜 거리자, 등에 얼굴을 묻고 있던 수연이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유리와 자신이 서 있는 곳 앞에 있는 커다란 집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집이라는 걸 확인한 모양인지 몸을 살짝 일으키고 주름이 잡힌 셔츠의 목 언저리를 손으로 정리한다. 읏차, 라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유리의 등에서 뛰어내려왔다. 갑자기 휑해진 등의 감촉에 유리는 비틀거릴 수연을 잡아줄 생각으로 서둘러 수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진짜 다 왔네?” “…….” 유리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똑바로 서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분위기가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수연을 부축할 생각으로 뻗었던 팔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도 멀쩡하게 두 다리로 꼿꼿이 서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완전히 풀려서 제대로 뜨지 못했던 눈은 평소처럼 부릅뜨고 있었고, 심지어 생기까지 감돌고 있다.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를 흘끔 보던 수연은, 피식 웃으며 유리의 손에 들린 하이힐과 핸드백을 뺏은 다음, 하이힐을 양 발에 신었다. 뭐야? 왜 이렇게 멀쩡해?! 상황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까 자신의 등에 업힌 정수연은, 분명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저렇게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저렇게 멀쩡한 목소리로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유리의 표정이 웃겼는지 수연이 키득키득 입을 가리며 웃더니, 팔을 들어 잔뜩 젖어 있는 유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수고 했어.” “…뭐야. 너 왜 이렇게 멀쩡해?” “응?” “너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너, 혹시….” “왜 멀쩡하냐니? 안 취했으니까 멀쩡하지.” “…….” ……뭐…라고? “수고했어 권기사. 자, 여기 택시비.” “…….” 당당하게 웃으며 자신의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시퍼런 만 원짜리 세장을 꺼낸다. 그리고 유리의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바지를 툭툭 두들긴 다음 씨익 웃었다. 그제야 상황파악 완료. 아. 난 낚인 거야. “그럼, 내일 봐. 권 기사.” 여유롭게 웃으며 돌아서는 여자.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저 여자. 유리는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지난 2시간 가량의 사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동안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 졌다. 난 오늘 깨끗하게 졌어. 아, 근데. 그럼 아까 그 말은 뭐지? 등이 아늑하다고 했던 건…그건 꽤 멀쩡한 목소리였는데…. 아씨, 내가 알게 뭐야. 저 여자가 무슨 뜻으로 말을 한 건지. 어쨌든 낚였다는 건 변함이 없는데. 아…짜증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없이 서글픈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는 문득, 아무 것도 몰랐던 그 순수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오래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저 정수연이라는 여자를 만나기 전의 날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Hissing 06 -…너 말이야. 내가 미쳤지. - 뭔데, 빨리 말해. 짜증나게 뜸 들이지 말고. - 생각보다 등이 아늑하네.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인간은 또 아무 말도 안한 거야? 수연은 멍하니 자신의 앞에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물이 턱에 맺혀 있다가 뚝뚝 바닥에 떨어진다. 물을 잔뜩 머금은 앞머리가 이마에 어지럽게 붙어있다. 물이 쏟아지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퀭한 눈이 보인다. 고작 어제 그거 좀 마셨다고 벌써 눈이 퀭해졌다. 수연은 이게 다 나이 탓이야 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어린 객기로 사발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을 때에도 멀쩡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밤새 몇 년은 더 늙어진 것 같다. 게다가 왜 이렇게 속은 부글부글 끓는 건지. 분명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속이 안 좋아서 아침도 굶고 왔다. 손가락으로 볼을 잡고 양 옆으로 쭈욱 길게 늘어뜨렸다. - 생각보다 등이 아늑하네. 어제 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시 들려온다. 수연은 기겁을 하며 다시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은색 관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손으로 받고나서 얼굴에 묻혔다. 벌써 이게 몇 번 째인지. 화장도 다시 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계속 세수를 해대는 건, 어제 수연 자신이 유리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취하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 알딸딸 했을 뿐이다. 적당히 마셔서 기분이 좋은 정도였을 뿐 그렇게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짓을 할 만큼 취하지는 않았는데, 유리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취한 척을 했을 뿐이다. 술주정의 롤모델은 자신의 친구인 황미영.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소주 몇 잔 마시고 취해버린 미영을 집에까지 데려가는 내내 자신이 겪었던 일을 그대로 행했을 뿐이다. 술을 즐겨 마시고, 술이 센 편이라 주량이 많다보니 그렇게 취한 적은 없어서 덕택에 항상 미영의 뒷바라지만 했었다. 연인이라는 사람도 그런 미영의 술주정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회식 날만 되면 연락이 안 되서 항상 뒤처리는 수연의 몫이었다. 그래서 기왕 복수하는 김에 유리뿐만 아니라 그 동안 뒤처리를 전부 자기에게 떠맡긴 태연에게도 해야겠다 싶어서 처음부터 태연이 온 그 순간부터 아예 취한 척을 했다. 유리를 확실히 골탕 먹이려면 친구인 태연도 속일 필요가 있기도 했고. 그 작은 몸으로 여자 두 명이나(그것도 자기보다 키가 큰)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완벽한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다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국 골탕 먹일 수 있었다. 그건 좋았다. 권 기사라고 부르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 허탈한 표정은 꽤 볼만 했다. 문제는, 그 날 유리에게 업혀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그 말. 그 말이 문제였다. - 생각보다 등이 아늑하네. 왜 그 말을 했는지 수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는데, 더욱 당황스러운 건 그 말을 들은 유리의 반응이었다. 자신을 업고 가느라 계속 숨을 거칠게 쉬던 여자가, 그 말을 듣더니 순간적으로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묵묵부답. 몸을 받들고 있던 팔도 살짝 움찔거렸던 것 같다. 차라리 욕이라도 그 순간에 내뱉었으면 덜 신경 쓰였을 텐데, 그런 이상한 반응까지 보이니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자신을 데려다주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괜찮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건지도. 그리고 실제로도, 정말 의외로 자신과 맞닿아있는 그 등이 굉장히 편안했다. 마른 체형이고 살도 별로 없어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아늑했다. 순간적으로 졸음이 쏟아져 올만큼. 눈꺼풀을 강하게 짓누르는 그 졸음에 반쯤 넘어간 상태에서 그런 말을 했고, 그 말을 하자마자 잠이 확 깼다. 그리고 묘한 침묵. 그 침묵이 온 몸을 감싸 돌아서 왠지 긴장마저 되었다. 온 몸을 억누르는 긴장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일부러 유리의 왼쪽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다시 술주정을 했다. 투덜투덜 대며 욕을 하는 그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긴장감이 풀려서 마음을 놓았는데, 긴장감만 풀렸을 뿐 묘한 느낌은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 됐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씻지도 않고 바로 잠을 청했는데, 자고 일어나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 한번만 더 그 지랄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일어나자 본 문자에는 분명 이렇게 써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아침부터 욕이냐며 따졌겠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걸 본 그 순간에도 분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 그만큼 고생했으니 이런 말 할 법도 하지, 라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때부터 두통이 가시지를 않고, 밤에 유리에게 한 그 말이 자꾸 환청처럼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수업 중간에 아이들 자습 시켜 놓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어제 먹은 술의 취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건가 싶어 몇 번이나 세수를 해댔는데도 똑같다. 수연은 이제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어제 먹은 술에 뭐 이상한 거라도 타져 있나? 왜 이래, 정말.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도꼭지를 잠갔다. 세차게 떨어지던 물이 뚝 끊긴다. 이제 몇 분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이다. 아마 금방 자습을 시켜놓고 나온 교실의 몇몇 아이들은 수연이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줬어도 이미 급식실로 몰래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스윽 닦았다. 화장은 거의 다 지워져서 다시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교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영과 점심은 같이 먹고 난 다음에 해야 할 듯싶었다. 물기를 다 닦은 손수건을 고이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고, 거울을 향해 바라보던 몸을 돌려 화장실로 나오려는데 문득 수연의 눈에 화장실 한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눈이 휘둥그레진 수연은 멍하니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를 바라보았다. 수연이 있는 곳은 여선생님 전용 화장실. 그리고 수연이 알기론 이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선생님은 없다. 있다 하더라도 학교 내에서 피는 간 부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저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연기의 주인은 선생님, 즉 어른이 아니다. 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칸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어디서 담배를 피는 거야?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너 잘 걸렸다. 양 소매를 걷어붙이고 노크를 했다. 저 안 쪽에선 대답대신 심하게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위로 피어오르던 담배연기가 뚝 끊겼다. 수연은 다시 힘을 주어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다. 이번엔 노크가 아니라 주먹으로 문을 쾅쾅 내리쳤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를 외쳤다. 야!! 너 빨리 안 나와?! 그제야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나자마자 수연은 발로 문을 쾅 찼다. 갈색 문이 빠르게 뒤로 젖혀진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코를 찔러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벽에 붙은 채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 언저리까지 닿는 긴 검은 생머리. 두개 정도 풀려있는 셔츠 단추. 왜인지 자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는 작은 손. 그리고, 정말 이게 교복치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짧은 치마. 고개를 쓱 내려 변기통을 바라보았다. 변기통 위에 둥둥 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담배꽁초들. 수연이 그걸 바라보자 황급히 발을 들어 물을 재빨리 내려버린다. 강한 수압의 물이 순식간에 담배꽁초를 끌어안고 내려간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슴 언저리에 붙은 명찰을 확인했다. 서주현. 수연은 이름을 확인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 년이 또?! “서어주우혀어어어어언. 내가 듬배 프즈말랬지.” “…어, 언니.” 언니라고 말하며 씨익 웃는다. 수연은 그 웃음에 자신도 덩달아 빙긋 웃었다. 수연이 웃자 주현이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히히. 그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자마자 수연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순식간에 싸해지는 수연의 얼굴. 그 얼굴을 보니 주현의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수연은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노려보았다. 서주현. 자신의 고종사촌동생.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동생이라 어렸을 때부터 똥기저귀는 수연이 직접 갈아가며 키워왔다. 수연의 어머니와 주현의 어머니가 유난히 친해서 수연과 주현도 거의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며 자라왔는데 수연이 임용고사를 준비한다고 잠시 주현에게 소홀해진 사이 주현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던 애가 어느 날 보니 깻잎머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지나가던 애가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몇 번 두들겨 패서 경찰서에 잡혀 있는 걸 수연이 귀를 잡고 끌고 나온 적도 있었다. 하도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결국 주현의 부모님이 보다 못해 수연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시킨 것. 그래도 나름 이 바닥에선 명문고로 통하는 곳이라 주현이를 전학시키기 위해 주현의 부모님이 엄청난 공을 들였다. 원래는 수연의 반에 넣으려는 걸, 수연이 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게 되는 바람에 꿩 대신 닭이라고 미영의 반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수연의 집안도 그렇고, 주현의 집안도 그렇고 대대로 법관이 나는 나름 명문집안이라 그 자식들도 큰 말썽 없이 잘 나갔는데, 유일하게 속 썩히고 있는 아이가 눈앞에 있는 이 아이다. 수연은 어째서 자신의 집안에 이런 말썽꾸러기가 태어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도 겁도 없이 교실에서 동네 노는 언니들과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 다음날 소주병 끌어안고 자고 있는 게 발각되어 학교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그 날 하루 종일 교실에 밴 술 냄새를 빼느라 진땀을 흘리던 미영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때 미영은 수연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 집안사람들은 왜 이렇게 술만 보면 환장해?! 그래도 과거에 공부를 잘 하던 아이여서 기본이 있던 탓인지 신기하게 성적은 잘 나온다. 그래서 더더욱 선생님들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한다.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수연 뿐. 수연은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수연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침을 꿀꺽 삼킨다. 초딩이 생물체라면 중딩은 몬스터. 그리고 고딩은 몬스터에서 진화한 이미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 고로 말을 안 들으면 패야한다. 그게 수연의 교육에 대한 신조였다. 그리고 언젠가 교생실습을 나온 교생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도 있다. - 애들 팰 때에는 말이에요. 무조건 한 방에 끝내야 해요. 약하게 여러 번 때리는 것보다 강하게 한 방. 애들은 아픈 건 기억 안하고 몇 대 맞은 것만 기억하거든요. 그러니 무조건 한방에 가도록 때려야 해요. 아셨죠? - 전 아이들은 때리지 않을 거예요.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잖아요. - 님. - 네? - 선생님이 된 후 1년 안에 그 생각이 바뀐다 에 걸게요. 미영아, 넌 어때? - 난 6개월. 물론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아이들을 때리지는 않는다. 처음엔 잘 알아듣게 부드럽게 타이르고, 그렇게 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최후의 방법으로 매를 들 뿐. 말을 듣지 않으면 몸으로 체감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수연이 다니는 학교는 아이들이 착하고 순해서 대부분 말로 타이르면 그 선에서 끝난다. 다만 아주 가끔 말로도 안 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주현이다. 그리고, 매에 대한 수연의 신조는, 그 대상이 자신의 사촌동생인 주현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안 그래도 언니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데 말이야.” “으, 응?” “너 오늘 잘 걸렸다. 이리와. 네가 금방 피다버린 담배마냥 네 생명의 불씨를 반쯤 꺼줄게.” “어, 언니. 잠시만, 내 말 좀. 악!” 버둥거리는 주현의 귀를 비틀어 잡고 좁은 칸 안에서 끌고 나왔다. 비틀 비틀거리며 끌려 나온 주현이 아픈지 얼굴을 찌푸리며 비명을 지른다. 도대체 이게 몇 번 째인지. 암세포에 의해 처참하게 뭉개진 폐 사진을 아예 앞에 들이밀며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끊어버리기엔 자기가 너무 담배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나.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쉽게 이별을 할 수 있어? 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아이의 정강이를 걷어차기까지 했었는데도 여전히 끊지 않는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 담배 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끊었나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여자 선생님 전용 화장실에 와서 폈나보다. 수연은 주로 교무실이 있는 1층 화장실을 이용하니 2층에 있는 이 화장실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일부러 2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폈나본데, 그 사실이 더 용납할 수 없었다.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서 피다니. 가만 두지 않겠어. 귀를 잡힌 채로 끌려오는 주현이 수연의 손을 부여잡고 언니 어쩌고저쩌고 기나긴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 목소리가 꽤나 듣기가 싫다. 귀를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어 나지막이 말했다. “학교에서 언니라고 부르지 말랬지?!” “서, 선생님!!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아니면 그 눈에 가득 품은 살기라도 어떻게….”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따라와. 아직 수업 안 끝났다?” “악!! 진짜 잘못했어. 언니, 내가 지금 담배 전부 버릴까? 나 정말 끊을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은 담뱃갑을 꺼내들고서 울상을 짓는다. 수연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런 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한참 위인 탓에, 귀를 잡혀서 몸을 숙이고 있는데도 얼굴이 수연보다 위에 가 있다. 주현의 손에 들린 담뱃갑을 바라보았다. 시뻘건 색의 담뱃갑이 눈에 들어온다. 익숙한 담뱃갑. 말보르 레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주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높이에 서 있던 그 시커먼 얼굴이 다시 생각나버렸다. 그 특유의 사람 깔보는 듯 한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입에 무는 모습이 상상되어버렸다. 재수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 없어. 내가 그런 인간의 등을 아늑하다고 표현하다니. 내가 미친 거지. 얘는 왜 하필이면 그 싸이코랑 똑같은 걸 피는 거야? 더 두들겨 패야겠는데. “…이게 맛있냐?” “으, 응?” “이게 맛있냐고. 왜 다들 이것만 펴대는 거야?!” “아니 그것보단. 이게 독하잖아.” “독하다고?” “응. 그래서 한번 이걸 피면 다른 걸 필 수가 없….” “잘 한다. 고딩 주제에 아주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아예 그걸로 논문 한번 쓰지?” “…….” “여튼, 너 그거 피니까 그 벌로 10대 더 추가.” “뭐??????? 아니 왜?!?!” “시끄러워. 내 마음이야. 따라와.” 울상을 짓는 주현의 손에서 담뱃갑을 재빨리 빼오고, 다시 뒤를 돌아 화장실로 걸어 나왔다. 화장실 바닥을 가득 메운 하얀 타일 대신 갈색의 나무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엔 그 갈색 나무 바닥 위에 시커먼 얼굴이 떠오른다. 힉. 수연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 시커먼 얼굴이 사라진 후. 수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어제 술에 정말 이상한 게 타져있을지도 모른다. 구청에 신고라도 해야겠어. 수연은 그렇게 다짐하고 주현의 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악. 차마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린다. 수연은 그 소리에 더욱더 귀를 잡아 비틀었다. 네가 그 싸이코랑 똑같은 담배를 펴대니까 더 생각나는 거잖아. 물론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험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갈 뿐. 계단 하나하나를 꾹꾹 힘을 주어 밟아가면서 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그 시커먼 얼굴과, 그 등짝과, 그리고 등이 아늑하다고 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는다. 떠올려봐야 그리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떠오르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아늑하네, 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이상하게 심장이 뛰어댄다. 아무래도 정말 열이 받아서 그런 거야, 라고 쉽게 단정 지었다. 그 이상 오랫동안 생각도 하기 싫다. 아니, 그걸 애써 오랫동안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닌가 싶다. 유리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주현의 귀를 부여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꾹꾹 눌러 참는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어느새 1층까지 다 내려온 수연은, 교무실만큼은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주현을 억지로 끌고 교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는 모양인지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한다. 수연의 손에 잡힌 주현을 보며 쯧쯧 혀를 차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지나간다. 서주현. 또 말썽 피웠구나? 쯧쯧. 제발 말썽 좀 그만 피워라. 선생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니…꺄악! 볼멘소리로 말하는 주현의 뒤통수를 수연이 냅다 후려갈겼다. “이게 어디서 선생님한테…. 너 어디 가서 그러지 마. 못 배웠다는 소리 들어. 우리 집안 이름에 자꾸 먹칠할 셈이야?” “…….” 억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현의 귀를 잡고 다시 끌고 갔다. 주현은 오늘따라 유난히 흥분하는 수연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전에 걸렸을 때에도 이 정도로 흥분하지는 않았었는데, 오늘따라 굉장히 오버하는 수연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애꿎은 유리 때문에 자신이 더욱더 당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끌려가던 주현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 끝에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다. 자신보다 한참은 아래에 머리가 있을 것 같은 몸집의 여자. 손에 웬 종이백 하나를 들고 들어와서는, 여기저기 둘레둘레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저기, 언니.” “어허. 언니라고 부르지 말랬지? 5대 더 추가.” “…선생님. 저기.” “아, 왜?!?!?” “저기, 웬 외부인이….” 주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복도 끝 쪽을 가리킨다. 수연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갔다. 시선의 끝에 익숙한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주위를 둘레둘레 쳐다보던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저 하얀 얼굴이 빙긋 웃는다. 그리고 그 하얀 얼굴 위에 다시 시커먼 얼굴이 겹쳐보였다. 아무래도 수연의 머릿속에 그 둘은 패키지인 모양이다. “수연 씨, 안녕하세요.”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번쩍 들어 양 옆으로 흔든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서 있는 포즈도 참 우스꽝스럽다. 아직까지 어제 밤의 후유증이 남아있나 보다. 그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수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 그 개싸이코는, 괜찮으려나. 걔는 날 업기까지 했는데. * * *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수연은 목울대까지 치켜 오르려는 욕을 애써 꾹꾹 참았다.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지기 위해 몸을 살짝 뒤로 기대었다. 오래된 철제 의자가 삐거덕거린다.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여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미영은 어제의 숙취 때문에 얼굴이 잔뜩 핼쑥해져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수연아, 나 수업 못가겠어 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친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수업에 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랬던 미영 이였는데, 지금 수연의 앞에 있는 미영의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돌고 있다. 수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까 태연이 종이 백에서 꺼낸 것 중에 하나인 생수병을 들고 뚜껑을 딴 후 입에 대었다. 건물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꺼내 온 것인지, 목으로 넘어가는 물이 제법 시원했다. “우와, 이거 정말 우리 자기가 싼 거야?” “응. 너 오늘 아침 밥도 안 먹고 갔잖아. 그래서 내가 집에서 오전 내내 만든 거야. 속에 부담 없는 걸로.” “히히. 역시 자기가 짱이야. 상으로 뽀뽀.” 쾅.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태연과 미영이 몸을 움찔거리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 난 그냥 생수병을 좀 놓은 것뿐이야. 하던 거 마저 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수연의 표정에, 미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흥.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 어색하게 웃는 태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연 씨도 드세요. 수연 씨 몫도 쌌어요.” “아니요. 됐어요. 저 속이 안 좋아서요.” “아…. 그래요 그럼.” …와. 그런 건 세 번은 권유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자존심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수연은 애써 덤덤한 척 도도한 표정으로 태연과 미영을 바라보았다.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그 위에 반찬을 얹어서 미영에게 먹여주는 태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괜히 짜증이 나서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 백을 바라보았다. 태연의 손에 들린 저 종이 백 안에는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3층 찬합으로. 정말 지극정성이다. 혀를 내두를 정도. 대체 미영이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싶다. 물론 친구인 자신이 봐도 봐줄만한 외모이고, 애교도 많고, 착하고, 바람 필 성격도 아니고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 해 보면 좋아할 만한 아이인건 확실하지만, 저렇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가며 좋아할 만한 아이인가 싶다. 그렇게 간이며 쓸개며 다 빼다 줄 정도로 환장하게 만드는 그게, 미영의 말에 의하면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런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수연으로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수연은 물끄러미 관찰자의 입장에서 태연과 미영을 바라보았다. 밥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며 가져온 컵에 물까지 따라주는 태연과, 그런 태연을 보며 빙긋 웃는 미영. 저런 게 사랑인가? 저게 연애야? 저렇게 빙구 같이 웃는 게? 저렇게 병신 같이 다 가져다 바쳐 주는 게? 다시 생각을 돌려 이번엔 유리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 이 공간에서, 자신에게 피자토핑 세례를 받았던 유리가 하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사랑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러 여자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있단다. 그렇다면 유리는 지금 태연이 미영에게 하고 있는 짓거리(혹은 미영이 태연에게 하고 있는 짓)를 한꺼번에, 여러 명의 여자에게 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지금 유리는 자신을 그 여러 명의 여자 중에 한명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권유리에게 사랑받는 여자. 그리고 권유리를 사랑하는 여자. 권유리에게 사랑받는 정수연. 그리고 권유리를 사랑하는 정수연. 우와……. 기분 완전 더러워서 미칠 것 같아…….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다. 인상을 확 찌푸리며 가슴을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응어리진 것 마냥 답답하다. 만약 유리의 말대로 된다면, 수연은 아우디 수리비를 물어줘야 한다. 유리가 도색까지 해버리는 바람에 분명 그 비용은 엄청나게 불어났을 테다. 하지만 이미 아우디 수리비는 부모님이 내주기로 결정을 했으니 사실 비용이 많이 드는 건 상관이 없다. 물론 너무 많이 나오면 그만큼 잔소리를 듣긴 하겠지만, 그건 좀 참으면 되는 일. 정 안되면 미영의 집에 잠시 동안 들어가 살아도 된다. 잠만 잘 거라고 하면 미영이 거부는 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 걱정되는 건 아우디 수리비 값이 아니다. 정말 걱정되는 건, 만약 유리의 말대로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그러니까, 수연이 유리를 사랑하게 되어버린다면, 결국 권유리라는 여자는 정수연의 첫사랑이 되어버린다. 첫사랑. 풋풋하고 아름답고 상큼해야할 첫사랑의 상대방이, 권유리가 되어버린다. “웁.” “수연아, 왜 그래? 속 안좋아?” “나, 무, 무, 물 좀.” “어어. 여기.” 끝내 헛구역질이 나와 버렸다. 미영이 내어준 컵을 뺏어들어 황급히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정확히 말하면 삼킨 게 아니라 들이부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그렇게 벌컥벌컥 컵 안에 있는 냉수를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미영과 태연의 시선이 느껴진다. 컵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물을 훔쳐냈다. 첫사랑. 첫사랑이 권유리가 된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사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이 와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자신과 유리만 살아남게 되어, 신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너희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인간들을 다시 번식시켜라 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절대 권유리라는 여자와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만약 무인도에 유리와 단 둘이 떨어진다면, 아마 수연과 유리는 미친 듯이 서로 싸우다가 무인도의 끝과 끝에 떨어져서 씩씩 거리게 있을게 뻔하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첫사랑이라니. 그 자리를 유리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 내기에 이겨야 할 확고한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아니, 애초에 아우디 수리비 보다 이 이유가 훨씬 더 간절한 이유다. 수연은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그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으리. 아늑한 등짝 따위… 기억에서 지워버려야지. “아, 맞다. 수연 씨 잠시 만요.” “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을 하는데, 태연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며 종이 백에 다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쑥 무언가를 꺼내더니 주먹 쥐고 있는 수연의 손을 펴서 그 손안에 쥐어주었다. 손에 잡힌 감촉이 매끄럽다. 수연은 손을 피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사진의 정면에 웬 아저씨 사진이 떡하니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커다란 글씨로 여명808이라고 적혀있다. 이게 뭐야? 고개를 들어 태연을 바라보았다. 미영에게 줄 밥을 숟가락으로 푸면서, 태연이 재밌다는 듯 한 말투로 말했다. “유리가 전해주래요. 그거.” “그 개싸가지가요?” “네. 그거 술 마시고 난 다음에 속 안 좋을 때 먹으면 꽤 좋아요. 밥도 못 드실 정도면…드시는 게 좋겠네요. 캔은 작아도 나름대로 비싸요. 5000원.” 분명 금방까지 절대 권유리에게 넘어가지 않겠다며 다짐한 수연의 손에 태연이 버젓이 쥐어준 음료수. 다짐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얼굴에 힘이 살짝 풀려나간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한 그 등짝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캔을 바라보았다. 캔에 박혀있는 웬 남자의 얼굴이 흐릿흐릿 해지더니, 씩 웃고 있는 유리의 얼굴이 그 자리에 들어와 박힌다. 헉. 또 나타났어. 수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캔 뚜껑을 따서 재빨리 음료수를 마셨다. 역한 맛이 입안에 가득 감돈다.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순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꿀꺽 삼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 자기 아. 응. 아-. 미영의 입 안에 쏙 들어가는 숟가락을 바라보며 수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확실히 10년 넘은 친구라면서 태연과 유리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물론 그 전에는 태연도 유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간 것 같지만 어쨌든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다만 굳이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자면, 정말 억지로 바늘구멍만큼의 공통점이라도 찾자면, 그래도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정말, 아주 잠깐. 그러니까, “어? 수연아, 잠깐만.” “왜?” “캔 밑에 유통기한….” “응?” “…일주일 전까지네?” 여명의 유통기한이 일주일 전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태연씨.” “…네.” “그 개싸이코한테요. 이거 너무 잘 마셨다고 전해주세요.” “…그, 그래요.”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잘 마셨다고. 꼬옥 전해주세요. 아셨죠?” “…….” * * * 수연은 울상을 짓고 있는 미영을 바라보았다. 잔뜩 침울한 표정으로 핸들을 꼭 잡고 정수연 나빠 라고 몇 번을 중얼거리고 있다. 수연은 그 말을 애써 못 들은 척 하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자꾸 볼을 간지럽힌다.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긁으며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를 살짝 넘은 시간. 시간을 확인하고 품에 안고 있는 핸드백을 열어 핸드폰을 손에 쥐어보았다. 1시간 전에 계속 몸을 부들부들 떨던 핸드폰은 이제 잠잠해졌다. 너무 부들부들 떨어 대는 바람에 잔뜩 뜨거워져서 좀 식혀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아 잠시 꺼놓았더니 본체가 식어 있다. 핸드폰을 꺼내 전원버튼을 길게 눌렀다. 가벼운 진동과 함께 전원이 들어온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화면에 뜨는 문자 한통. 정수연, 네가 감히 나를 바람 맞혀?! 화면 위에 뜬 글자를 보고 피식 한번 웃어주고, 이번엔 최근 통화 목록 메뉴로 넘어갔다. 부재 중 통화 탭으로 가자마자 뜬 화면에는 개싸가지란 글자만 가득하다. 그래도 오늘은 61통이나 전화하지 않았다. 그 절반인 30통. 30통 밖에 전화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좀 그런가. “유리 씨야?” “어.” “화났지?” “좀 그런 듯?”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수연의 말에 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살짝 움직이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닫힌 입술이 앞으로 약 0.5센티 가량 나왔다. 수연은 그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 두개로 입술을 잡아당겼다. 눈썹이 자연스럽게 팔 자를 그려나간다.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이 제법 귀엽게 느껴져서, 킥킥 웃으며 손가락을 뗐다. 손가락으로 차 안 에어컨을 끈 다음, 문에 붙은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렸다. 스르르 잘만 내려간다. 창문이 내려가는 게 뻑뻑하다고 며칠 전에 투덜투덜 거리더니 결국 수리를 맡겼나보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에 눈을 감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아가. 삐졌군요?” “…흥.” “미안. 오늘 이 언니가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말이야. 꼭 술을 마셔야겠거든. 때때인지 뭐시긴지는 집에 가도 볼 수 있잖아?” “그래도…. 오늘 둘이 같이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래서. 너 지금 너의 베스트 프렌드가 기분이 꿀꿀해 죽겠다는데 같이 술도 못 마셔주겠다 이거야? 고작 애인이랑 약속 때문에? 그래서 7년 친구를 버리겠다 이거지? 그런 거야? 지금 너 그런 거니?” 감았던 눈을 뜨고 가늘게 미영을 째려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따가운 수연의 시선이 미영의 한 쪽 볼을 간지럽힌다. 낮게 깔린 그 목소리에 겁을 먹었는지 입가가 살짝 부들부들 떨린다. 그래도 끝내 대답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표현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엄한 표정을 지어내는데, 그 표정이 묘하게 어울리지 않아 살짝 웃기기까지 했다. 그래도 미영이 저런 표정까지 짓는 걸 보니 정말 단단히 삐지긴 한 것 같다. 태연과의 선약이 있다는 걸 수연이 억지로 잡아끌고 왔다. 우정이 중요하니, 사랑이 중요하니 라고 묻는 수연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걸 약점으로 잡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여자 우정이 가볍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그런 여성차별적인 말 하지 말라고 발끈하던 황미영이 이제 사랑 때문에 우정도 버리는 구나, 그래, 그런 거야. 나는 짜게 식어야지 뭐. 애인 없는 내가 죄지. 어휴, 어디 가서 혼자 소주 병나발이나 불고 있어야겠다. 그래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겠지? 콱 소주잔에 코 박고 죽어버릴지도 몰라 등등 온갖 말을 퍼부어대는 수연을 당해낼 재간이 미영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미영의 차를 타고 둘이서 잘 찾던 술집으로 가는 중이다. 유리에게는 일부러 오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점심시간 때 유통기한이 지난 여명을 먹고 난 후 2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나마 그 때 수업이 없어서 다행이지 수업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한 페이지 나갈 때마다 화장실로 뛰어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선생님의 위엄은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끔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긴 해도, 나름 인기 많은 교사다. 순하다 못해 매일 배실배실 웃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잘 해주는 미영과는 달리, 수연은 아이들에게 절대 친절하게 구는 성격은 아닌데 오히려 그게 아이들의 눈에는 매력으로 보이는 것 같다.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물정을 모르는 그 어린 아이들은 수연의 그런 모습에 정수연 선생님은 까칠한 게 매력이라며 좋아한다.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한 페이지 나갈 때마다 화장실로 뛰쳐나가면, 그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수업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2시간 동안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고 양호실 침대에 한 30분 동안 약 먹고 얌전히 누워있었더니 그래도 금세 괜찮아졌다. 몸이 아플 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좀 나아지니 머릿속이 깨끗해지며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냉정해지자마자 수연이 생각한 건 이 년을 어떻게 골탕 먹여야 할까. 나름대로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귀하게 자라온 몸인 자신에게 감히 유통기한 지난 걸 먹이다니,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로 불러놓고 24시간동안 감금을 해버릴까. 아니면 정문에 몰래 숨어 있다가 학교로 잠깐 올라오라고 하고, 차에서 나온 사이에 뻑치기라도 하고 도망가 버릴까. 집나간 개를 찾습니다 라고 적힌 포스터를 만들어서 거기에 그 여자 사진을 박아놓고, 동네에 여기저기 붙여놓고 다닐까 등등 별별 생각을 다 했었다. 그런데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골탕 먹이기엔 오늘 몸 상태도 별로고, 거기다 얼굴을 보기조차도 싫어서 오늘은 그냥 가볍게 바람맞히는 걸로 끝내기로 했다. 후속편은 그 후에. 다만 그 정도로 밖에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개운치 못하고, 하루 종일 유리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한 탓에(아침부터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으니) 기분도 안 좋은 지라 술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울상을 짓는 미영을 데리고 가는 건데, 잔뜩 풀이 죽어있는 얼굴을 보니 솔직히 미안하기도 했다. 언제 한 번 핑크색 키티 시계라도 사줘야겠다. 태연이라는 사람과 같이 쌍으로 사주면 진짜 좋아하겠지. “다 왔어. 내려.” 수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차는 어두컴컴한 주차장에 들어와 있다. 시동을 끄고 차 키를 뽑는 미영의 모습에 수연 역시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었다.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느낀 바람들은 굉장히 시원했는데, 이렇게 문을 열고 나오니 반기는 것은 습기가 가득한 후덥지근한 공기. 그 느낌이 좋지 않아 수연은 내리자마자 욕을 지껄였다. 수연의 욕에 미영이 얼굴을 찌푸린다. 아아, 그러고 보니 얘 누가 욕하는 거 진짜 싫어하지. 그래서 유리 못지않게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태연도 이젠 아예 욕을 안 하고 산다고 했었던가. 정말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방에게 일일이 다 맞춰야할 필요가 있나. 어느새 미영은 앞서 가고 있다. 주차장 문턱을 넘어 술집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항상 옆에서 나란히 걸어서 그런지 이렇게 보는 뒷모습이 꽤 신선하다. 가만히 보니 키도 조금 큰 것 같다. 대체 쟤는 왜 아직까지 크는 거야? 예전에는 자신과 키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지금 서보면 왠지 미영이 미묘하게 더 클지도 모르겠다.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갑자기 분한 기분이 든다.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처음엔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술집 문 앞에서 따라잡았다. 7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거리는 밝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 저 너머로 보이는 실내가 오히려 더 어두울 정도. 조명이 거의 없는데다 테이블마다 입구에 얇은 커튼이 있어서 어쩐지 음습한 기분이 드는 곳. 수연은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다. 개방적인 술집보다야 이렇게 적당히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 술집이 좋다. 아니, 비단 술집만은 아니다. 카페도 개방적인 곳보단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그리고 조금 어두운 분위기의 곳이 좋다. 요즘은 정말 어디를 가든 각 좌석마다 뻥뻥 뚫려 있어 필요이상으로 개방적이다. 그런 공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맞선 자리와 같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하는 사이인 사람과의 만남을 제외하고, 친한 사람들과의 자리는 어디를 가든 항상 이런 분위기와 비슷한 곳에서 만난다. “몇 분이신가요?” 수연과 미영이 들어오자 한 쪽에서 서 있던 종업원이 재빨리 들어와 말을 건다. 수연이 빙긋 웃으며 두 명이요, 라고 가볍게 말하는데, 그 종업원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종업원이 수연의 어깨 너머의 누군가를 발견하고 몇 분이시냐고 묻는다. 그 소리에 수연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 이번엔 아예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그 얼굴을 마주했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수연은 자신도 질세라 인상을 확 구겼다. 그리고 들려오는 낯간지러운 미영의 목소리.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하하. 그러게, 이거 참 우연이네.” 필요이상으로 음정이 높게 치솟아 있고, 마치 국어책을 읽는 듯이 딱딱해진 미영의 말투. 그리고 80년대 영화에서나 나오는 더빙용 웃음소리를 내며, 아주 어색하게 팔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미영의 연인. 저건 연기야. 수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홱 돌려 미영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건 유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김태연 너, 라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태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딱 달라붙어 있는 태연과 미영은 어색하게 다시 한 번 씨익 웃는다. 수연은 그 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팔짱을 낀 채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수연이 돌아보자마자 유리 역시 고개를 돌려 눈을 내리깔아 수연을 바라본다. 다시 시선이 부딪혔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커멓게 보이네. 이 싸이코와 나는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저 시커먼스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정녕? “일행이신가요?” “네.” “네.” “아니요.” “아니요.” 종업원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똑같은 질문에, 두 명은 긍정의 대답을, 두 명은 부정의 대답을 했다. 수연과 유리는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 둘의 사이에 있는 종업원은 수연과 유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딱 달라붙어 있는 미영과 태연이 좀 더 말이 통할 것 같아 그 둘을 향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정말 일행이신가요?” “아니….” “네!!!!!!” 수연과 유리가 다시 한 번 동시에 입을 열자마자 태연이 버럭 소리를 질러 선수를 쳤다. 유리가 그 소리에 이를 부득부득 간다. 이를 가는 소리가 마주 서 있는 수연에게 들릴 정도. “아, 그럼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에. 때때야, 가자.” 미영이 싱글벙글 말하며 태연의 손을 덥석 잡고, 앞서 나가는 종업원의 뒤를 따라 가기 위해 오른쪽 발을 들었다. 그 순간을 포착한 수연이 손을 들어 미영의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여전히 시선은 유리를 향해 있는 수연에게 잡힌 미영은 놀란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마주 서 있는 유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어디 가. 어쩔 수 없이 넷이 합석하더라도 넌 내 옆에 앉아야지.” “뭐? 아니, 수연아.” “김태연 너도 어딜 가는 거야? 너 내 옆에 앉아야지.” “…….” 그렇게 말하며 유리가 턱을 치켜들었다. 덕택에 수연을 내려 보는 시선의 각도가 더 높아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분한 기분이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미영의 뒷덜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나랑 때때랑 같이 앉고 너랑 유리 씨가 같이 앉….” “싫어.” “나도 당신 옆 자리에 앉는 거 싫거든요? 태연아, 가자.” “아니, 저기….” 당황해하는 태연의 손을 덥석 쥐고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종업원은 이미 한 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서서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걸어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수연은, 그에 질세라 유리에게 태연을 뺏겨버린 미영의 손목을 덥석 잡고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수연이 옆에까지 따라서자 유리가 흘끔 옆을 쳐다보더니, 발걸음을 빨리 한다. 어쭈? 내가 먼저 갈 거야. 속도를 높이고, 유리의 배를 팔로 막아서 뒤로 슬쩍 민 다음 재빨리 먼저 걸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씨발. 유리가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여튼, 저 놈의 입은 열기만 하면 욕이야. 정수연 너도 욕하잖아. 황미영, 넌 조용히 해. ……. 투덜투덜 거리며 유리가 앉자 그 뒤를 이어 태연이 앉았다. 옆에 앉게 되는 것만큼은 피하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마주앉게 되었다. 마주 보이는 얼굴이 수연의 얼굴인 게 못마땅했는지, 마치 의자에 용수철이 있는 것 마냥 앉자마자 일어서던 유리는, 종업원이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입맛을 쩝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수연은 기분이 나빠졌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툭툭 리듬감 있게 테이블을 친다. 아마 저게 버릇인 것 같다. 시선을 내리깔고 태연이 펼치고 있는 메뉴판을 바라본다. 메뉴판 위에 펼쳐져 있는 안주들을 흘끗 바라보던 유리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내뱉듯이 툭 말했다. “아아. 메뉴판 위에 있는 안주들이 꼭 누구처럼 맛이 독하게 생겼네.” “그래도 개새끼 보단 낫지.” “…….” 턱을 괴던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꼭 쥔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빙긋 웃길래, 수연 역시 그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종업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넷의 동향을 살폈다. 분명 일행이라고 했는데, 마치 넷 사이에 담이라도 쌓아져 있는 것 같았다. 안쪽에 앉은 여자 둘은 서로 잡아먹을 것 같은 살기를 내뿜고 있고, 바깥쪽에 앉은 여자 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다정하게 안주 뭐 고를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오면서 이런 손님을 맞은 적이 있었던가. 왠지 정신이 피곤해 옴을 느끼던 종업원은, 결정 되면 벨을 누르시라는 말과 함께 서둘러 사라져버렸다. “수연아, 너 뭐 먹을래?” “아무거나. 개새끼만 아니면 돼.” “유리야 너는?” “아. 나도 아무거나. 독한 것만 아니면 돼.” “…그냥 우리가 알아서 시킬게.”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던 유리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친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날씨가 더운 탓일까. 오늘은 달랑 하얀색 나시 하나만 입고 있다. 무슨 노출증 환자도 아니고 훌렁훌렁 벗어젖히고 다니는 건지. 수연은 팔짱을 끼고 혀를 쯧쯧 찼다. 열심히 안주를 고르고 있는 태연과 미영을 바라보던 유리가 고개를 슥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시 하나만 입고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더운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굉장히 땀을 많이 흘린 것 같던데, 더위를 많이 타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살짝 내리고 팔을 바라보았다. 정말 살이 하나도 없이 얇은 팔뚝인데, 자세히 보니 은근히 잔근육도 좀 있는 것 같았다. 운동을 좋아하는 유리 때문에 요즘 태연이 스쿼시도 배우고 있다고 미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게 문득 생각났다. 그래서 근육이 붙은 건가. 근육이 너무 많이 붙어있는 건 질색이지만 적당히 붙은 건 좋아한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멍하니 그 시커먼 팔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유리도 여자인 건 분명하니, 어제 자신을 업을 때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별 무리 없이 잘만 번쩍번쩍 들었었다. 그게 다 근육 탓인 건가 싶다. - 생각보다 등이 아늑하네. 악. 또 생각났어!!! 다시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 목소리. 때마침 유리가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클로즈업이 되서 눈에 박혀 들어왔다. 어제도 저렇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비 맞은 것처럼 온 몸이 땀에 젖었는데도 꿋꿋이 술주정을 다 받아주며 업고 갔었다. 그 등에 업혀가면서 심지어 잠까지 들 뻔했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 권유리라는 여자의 등에 업혀가면서, 정말 잠까지 들 뻔했다. 정말,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뭘 그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봐?”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리가 말하자마자, 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마치 불에 달구어진 것처럼 뺨이 화끈화끈 거린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던 유리가 비죽 거리며 웃는다. “왜? 내가 멋있어서 그래?” “…지, 지랄한다.” “어라? 욕 하는데 왜 떨어? 어? 정말 수상한데?!” “닥쳐.” “오호. 이것 봐라? 볼도 뜨뜻한데?” 몸을 약간 일으켜 수연의 볼을 감싸 쥐었다. 어딜 손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강하게 뿌리쳤는데, 그게 왠지 더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유리가 느끼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후였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득해져 오는데, 당최 왜 이런 느낌이 드는 지 알 수가 없다. 열 받아서 그래. 수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 그래, 열 받아서 그런 거야. 저 인간이 자꾸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열 받아서. “수연아. 술은 뭐 시킬까? 너 과일 소주 좋아하니까 그냥 과일 소주 시킬까?” “어.” “…애들도 아니고, 과일 소주는 무슨.” 풉. 비웃는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뜨거웠던 볼이 순식간에 쏴아 식혀졌다. 마치 냉수로 세수한 것처럼. 그리고 다시 얼굴의 혈색이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외쳐대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윙윙거리는 것 같다. 재수 없어, 라는 간절한 그 소리가. “술 잘 마시는 게 자랑인가 봐?” “아니 뭐. 자랑은 아니더라도, 못 마시는 것보단 낫잖아? 적어도 너보단 잘 마실걸?”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뻔하지.” “너, 그 소리 후회 안하지?” “후회할 게 뭐 있나요?” “미영아.”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유리를 가만히 째려보며 미영을 찾았다. 유리와 미영이 다투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듯, 무슨 소리를 하던 신경도 쓰지 않고 태연과 술을 고르고 있던 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왜?” “이슬이로 10병 시켜.” “…어?” “종업원한테 이슬이 10병 데리고 오라고 하라고.” “님. 진심?” “어.” “유리 씨, 정말로요?” “콜.” 버틸 수 있겠어? 권유리 너 같은 풋내기가. 나 이래 뵈도 대학시절부터 꽤 유명했어. 이봐요, 아가씨.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얼른 종업원이나 불러요. * * * “으악. 진짜 더럽게 무거워.” 태연은 침대 위에 유리를 던져 놓으며 한숨과 함께 투덜투덜 거렸다. 침대위에 던져진 유리의 몸 때문에 침대가 아래위로 흔들린다. 그 뒤를 따라온 미영은,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수연의 어깨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질질질 끌어 침대까지 낑낑대며 걸어왔다. 미영에게 수연을 받아든 태연이 억지로 침대 위에 수연의 몸을 눕혔다. 수연이 옆에 누워 침대가 다시 아래위로 흔들리자, 그 옆에 누워있던 유리가 미간을 확 찌푸리고 몸을 뒤척거리더니 떡하니 수연의 몸 위에 팔과 다리를 얹어놓았다. 태연은 무릎에 손을 짚고 잠시 몸을 숙인 채로 숨을 고르다가, 이내 몸을 들어 침대 위에 뻗어 있는 두 몸뚱아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으르렁 대며 싸워대던 두 사람이 나란히 뻗어있는 꼴이 참 가관이다. 우리 자기, 허리 아프지? 미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태연의 허리를 툭툭 두들겼다. 소주 10병을 시킬 때부터 말렸어야 했다. 사실 태연이 알고 있는 유리는, 주량이 센 편이긴 하지만 오늘처럼 무식하게 술을 들이부어 가며 마시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원래 술이란 건 빨리 먹을수록, 빈 속에 먹을수록, 그리고 몸 상태가 안 좋을수록 더 취하는 법. 어제 수연을 데려다 주느라 고생한 탓인지 오늘 아침에 몸살 기운이 들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단다. 그래서 하루 종일 누워있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회사에 결근까지 했다. 오늘 수연은 자신이 데려다 줄 테니 쉬라고 말했는데, 그 독한 년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억지로 학교로 가겠다는 걸, 혼자 보내기 좀 그래서 같이 갔었다. 어차피 미영을 만나기로 해서 태연도 학교로 가야 했으니까. 그런데 웬 걸. 아무리 기다려도 나와야 할 수연이 나오지 않아서 씩씩 거리며 전화를 하고 있는 유리 몰래 미영에게 전화 해 봤더니 수연은 이미 미영을 데리고 튀어버린 지 오래. 어, 아빠, 나 수연이랑 있어. 그렇게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하는 미영의 말에 상황을 재빨리 눈치 챈 태연은, 어디로 가냐고 물어서 결국 술집에서 다시 재회했다. 아픈 유리를 끌고 가는 게 좀 미안했지만, 그래도 미영이 보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집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데이트 하며 보는 건 엄연히 다르니까. 근데 웃긴 건, 술집에 오기까지는 다 죽어가던 유리가, 수연을 만나자 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기가 쌩쌩해졌다는 것이다. 분명 그 전까지는 식은땀도 줄줄 흘려대며 운전도 못하겠다고 자신이 그렇게 아끼는 아우디를 태연의 손에 맡기기까지 했는데, 술집에서 수연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흥미롭기도 해서 그냥 냅뒀더니, 몸도 안 좋다는 게 급기야 소주 5병을 그대로 까서 마셨다. 누가 이기나 보자고 으르렁 대던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테이블 위에 코를 박고 정신을 잃었다. 뻗어 있는 두 몸뚱아리를 놓고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고민하다가, 미영이 술 취한 수연을 이대로 집에 데려다 줬다간 엄하신 수연의 부모님이 수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외박을 하는게 낫다고 해서 결국에는 유리 집에 끌고 왔다. 태연은 눈을 돌려 미영을 바라보았다. 태연이 전화로 어디 있느냐고 묻자, 옆에 앉은 수연 때문에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아빠 보고싶어, 라고 징징대며 말하던 자신의 연인. 아마 그것 때문에 수연에게 단단히 삐진 모양인지 보통 때라면 술을 들이 붓는 수연을 말렸을 텐데 오늘은 말리지도 않았다. 태연이 수연의 앞에만 서면 쌩쌩해지는 유리의 모습이 흥미로워서 유리가 술 마시는 걸 말리지 않았다면, 미영은 수연에게 단단히 삐져서 수연이 무리하는 걸 말리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나름대로 복수한 걸지도 모른다. 평소에 친구인 수연에게 콱 잡혀 사는 아이가 복수라고 한 게 그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귀여웠다. 물끄러미 수연을 바라보고 있는 미영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정수연 너 미워 라고 중얼거린다. 우리 애기는,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걸로 밖에 복수 못하는 거야. 어휴, 귀여워라. 나보다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귀엽나 몰라. 얼른 집에 가서 사랑해줘야지. “자, 그럼 우리 이제 집에 갈까? 얘들이랑 있느라 오붓하게 못 있었으니 얼른 가서….” “…잠시만.” “어? 왜?” 미영이 팔짱을 끼고 수연과 유리의 몸을 바라본다. 꿈속에서도 수연과 싸우고 있는 건지 어쩐 건지 독한 여자야, 시끄러워 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유리와, 저 싸이코 또 만났어, 라고 중얼 거리고 있는 수연. 그 둘을 바라보던 미영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익 웃는다. 그 웃음에 태연은 순간 움찔거렸다. 잘 못 본 건가? 순간 우리 애기가 사악해 보였어. “때때- 잠시 나가 있을래?” “응?” “잠시 나가 있어.” “에? 왜?” “내가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응?” “나가 있어. 나 금방 나갈게요, 여보.” “뭐 설명이라도 해줘야….” “나가 있으라면 나가 있어.” 여보, 라고 귀엽게 말하던 아이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무서운 목소리로 말한다. 태연은 결국 세차게 아래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영이 얼른 나가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내달려 하얀 운동화에 발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운동화 뒤쪽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태연의 귀에, 정수연 두고 보자 라고 중얼거리는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손잡이를 잡으며 태연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왜 저렇게 사악하게 들리지? Hissing 07 어둡다. 온통 어두컴컴하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사각형의 공간. 그 안에 유리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다. 사실 만나는 여자들에게는 폼이 나지 않아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공포영화 같은 건 절대 못 본다. 무서워서. 겁이 많은 성격이다. 사람이나 동물에 대해선 그다지 겁이 없는데 귀신이라든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겁이 많다. 어렸을 때 전설의 고향을 보다가 너무 놀라서 바지에 실수를 한 이후로는 공포물은 드라마든, 만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보지 않고 살아왔다. 어둠이 싫어서 집에서 혼자 잘 때면 새시를 가린 커튼을 다 걷어놓고 잔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살아서 가로등의 불빛이 아주 어렴풋이 들어오니까. 그만큼 어둠을 싫어하는데 지금은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 더듬더듬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근데 만져지는 벽의 느낌이 어째 이상하다. 딱딱해야할 벽이 물컹물컹 푹푹 들어가는 게, 왠지 기분이 묘한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뭐지? 유리는 손에 만져지는 그 감촉을 느끼며 계속 더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벽을 손으로 더듬고 있는데, 작은 공간 한 쪽에 빛이 조그맣게 새어나온다. 아, 빛이다. 벽에서 손을 떼고 빛이 새어나오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강렬해지는 빛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곳을 바라보는데, 빛 저 너머에 누가 서 있다.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작은 인영 하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인영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인영의 바로 앞에 서 서 그 인영을 꼭 끌어안고 와, 반가워요! 저 혼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라고 한마디 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들어오는 작은 얼굴. 그 얼굴에 달린 붉은 입술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뱉어낸다. - 야, 개싸가지. 너 지금 누굴 끌어안는 거야? 내가 그렇게 좋냐? 응? “헉.” 침대 시트를 손에 꼭 쥔 채로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금방 눈앞에 있던 그 여자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유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실제로 앞에 있는 게 아니어서. 볼 옆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등으로 쓱 훔쳐보니 땀이다. 몸을 슬쩍 들어 올려 손을 등 뒤로 가져가보았다. 등도 온통 축축하다. 귀신에게 쫓기는 꿈도, 몬스터에게 잡아먹힐 뻔 한 꿈도, 그동안 자신이 차 버렸던 여자들에게 쫓기는 꿈도 아닌데 온 몸이 식은땀 범벅이다. 그냥 한 번 끌어안은 것뿐인데 그 정도로 이렇게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일어나다니. 유리는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금방 깨서 눈이 잘 떠지지가 않는다. 머리도 깨질 듯이 아프고 온 몸에 힘도 하나도 없다. 끙.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온 몸에서 나는 알콜 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걸까. 그리고 언제쯤 뻗은 걸까. 유리는 손으로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대작 한번 해 보자고 덤벼드는 수연의 모습이 괘씸해서 몸이 좋지도 않은데 소주를 마셔댔다. 마신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위장 속에 들이부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쉬지도 않고 마셨다. 각각 다섯 병씩 옆에 세워놓고, 계속 서로를 째려보면서, 모든 잔을 꺾지도 않고 원샷으로 마셔댔는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확 끊겼다. 누가 이겼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무사히 집에 들어온 걸 보면 아무래도 자신이 이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는 회심의 미소를 씨익 지었다. 거봐, 그러니까 겁도 없이 나한테 덤벼들어? 목운동을 양 옆으로 이리저리 하는데 문득 침대 저 끝, 시트 밖으로 발 네 개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등을 돌린 채로 자고 있는 여자가 눈에 보인다. 아, 희진이 왔구나. 언제 왔지? 시트 위로 보이는 작고 하얀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살 만졌다.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그 부드러움에, 유리는 씨익 웃고 어깨 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어깨가 살짝 움찔거린다. 손으로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 아침에 보았을 때에는 검은색 머리였는데 오늘은 보니 짙은 갈색 머리다. 연예인이라 머리스타일이 자주 바뀌니, 아마도 어제 염색이라도 했나보지 라고 생각한 유리는 희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시트를 들었다. 침대 밖으로 발을 빼내고 땅에 딛자마자, 짜릿한 기분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온 몸을 휩쓴다. 윽. 두개골 쪽 맥박이 미친 듯이 두근두근 뛰어댄다. 그 사이에 심장이 뇌 쪽으로 올라갔나 싶을 정도. 입이 텁텁해서 침을 한번 꿀꺽 삼켰더니 이번엔 목이 찢어질듯이 아프다. “엄마……나 무, 물 좀.”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서 있는 유리의 귀에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니, 잠에서 깼는지 몸 위에 덮어져 있는 시트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엄마라니, 잠이 덜 깼구나. 유리는 그 목소리에 피식 웃고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머리가 심하게 울리고, 속도 메스꺼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필요이상으로 무리한 듯싶다. 굳이 그렇게까지 발끈할 필요도 없었고, 몸이 좋지 않았으니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보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흥분해버렸다. 왜 그 여자 앞에서만 서면 냉정함을 잃게 되고, 사고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지는지 정말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 여자 덕택에 지금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다. 정말 그 여자 만난 이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유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주황색의 조명이 가득 찬 냉장고 안은 거의 텅텅 비어있다. 벽 쪽에 있는 생수병 하나를 꺼내고,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컵 안에 냉수를 따랐다. 일단 자신부터 한 모금 마신 유리는, 다시 한 번 컵에 냉수를 채우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다가 이번엔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잠이 아직 덜 깬 탓인지 일어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인지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유리는 침대의 끝에 걸터앉고 몸을 살짝 뒤로 돌려 다시 한 번 그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릿결이 스르륵 잘만 빠져나간다. 아, 근데 염색해서 그런가? 머릿결이 좀 느낌이 다르네. “물 가져왔어.” “…….” 앉은 채로 뒤돌았더니 자세가 불편해서, 정면을 바라보며 팔만 뒤로 뻗은 채로 컵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지 침대가 조금 흔들거린다. 손에서 스르르 컵이 빠져나간다. 꿀꺽. 물을 마시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목이 꽤 탔는지 제법 벌컥벌컥 마신다. 꺼억. 거기에 트림까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김희진이 저런 소리도 내? 몇 년간을 연애 해 오면서 자신의 앞에서는 트림을 한 번도 해본적도 없고 심지어 화장실도 유리가 보는 데선 가지 않았던 여자라서, 유리는 금방 자신의 귀에 들린 그 소리가 믿기지가 않았다. 요즘 한창 새벽에도 드라마 촬영하느라 많이 힘든 것 같던데, 그래서 순간적으로 몸이 풀어졌던 걸까. 유리는 몸을 다시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그 작은 몸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자기, 요즘 많이 힘들어? 왜 갑자기 트림을….” 음? 유리는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째 안을 때의 느낌이 예전과 미묘하게 다르다. 거기다 웬일인지 유리가 안자마자 눈에 띌 정도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듯 숨도 안 쉬는 것 같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품에 안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신영화에 나오는 귀신들이나 지을 법한, 엄청나게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유리 역시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맞닿은 몸 사이로 하얀 침대 시트가 스르르 밑으로 자꾸 떨어진다. 그 시트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시트가 내려갈 때마다 보이는 건, 하얀 살결이다. 정말, 하얀 살결뿐. 천조가리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는 것 같다.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시트가 떨어져가는 걸 볼 때마다, 유리는 마치 자신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치 석고상처럼 잔뜩 굳은 얼굴이, 서서히 밑으로 떨어진다. 시트는 여전히 천천히 몸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동태를 살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살짝 시트 끝을 잡고 들어올린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입을 굳게 다물고 시트를 끌어안는다. 품에 안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슬슬 그 몸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푸르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너….” 몸을 다 일으키고, 오른쪽 발을 드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유리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시트를 품에 꼭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야, 오해하지 마. 난 아무 기억이 없…. 컥." 아까 손에 쥐어주었던 컵이 날아와 배에 정확히 꽂힌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컵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이번엔 커다란 베개가 날아와서 얼굴을 강타했다. 유리는 뒷걸음질을 쳤다. 온갖 물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은색의 자명종 시계도, 그 옆에 굴러다니던 핸드폰도, 심지어 자명종 옆에 놓여 있는 스탠드도. 주위에 있는 작은 물건들이 온통 날아오자 유리는 황급히 이리저리 그 물건들 사이로 피해 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야! 미쳤어?! 던지려면 니 껄 던져! 내 껄 던지지 말고!” “이 새끼가 그래도! 야!!!!! 너 어제 뭔 짓 한 거야?!” “진짜 아무 기억도 없다니까?! 악. 아퍼! 아프다고!” 침대 위에 앉아서 뻗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물건들은 다 집어던지자, 이번엔 침대시트를 몸에 두르고 몸을 벌떡 일으킨다. 뭐 던질 거 없나 찾는 모양인지 주위를 둘러보던 수연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옷을 발견했다. 몸을 숙여 자신의 브래지어를 손가락으로 들었다.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검은색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 있다. 브래지어를 바닥에 휙 던져놓고 성큼성큼 걸어 침대 맞은편에 있는 수납장 쪽으로 다가간다. 문을 벌컥 열고 그 안에 있는 각종 물건들을 다 꺼내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유리는 날아오는 물건들을 손으로 쳐내거나, 이리저리 잘만 피해 다녔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받았는지 이젠 제법 큰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아 진짜!!!! 난 기억 안 난다고!!!!!” “그럼 내가 왜 벗고 있는 건데?!? 속옷도 안 입고 있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거기다 자기는 다 챙겨 입고 자 놓고 나는 이렇게 벗겨놔?!” “진짜 기억 안 난다니까!!” “닥쳐!” “아, 씨발. 진짜 기억이라도 나면 억울하지도 않지.”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어? 야! 그거 비싼 거야!!!!” “시끄러워. 오늘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알았어?!” 손에 집히는 대로 이리저리 던져대는 통에 유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부딪혀서 산산 조각이 나는 각종 전자기기들과 술병들, 잔들 등등을 보니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게 다 얼마짜린데…. 급기야 꽁꽁 숨겨놓았던 발렌타인 30년산을 손으로 쥐고 자신을 향해 겨냥하는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머리가 아찔해 옴을 느꼈다. 제발 그 것만은! 이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시트를 잡는 걸 잊어버린 수연의 몸에서 시트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헐. 눈앞에 펼쳐진 적나라한 나신에 유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짧은 찰나에 모든 게 선명하게 사진처럼 정확히 찍혀 들어왔다. 발렌타인 병을 집어던지려던 수연은, 순식간에 탁 풀려버린 유리의 눈빛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더듬더듬, 유리가 입을 연다. “ㅇ, 야. 치, 침대시트가….” “꺅! 난 몰라. 이 변태새끼야!! 눈 안돌려?!” 얼른 눈 돌려, 눈 돌리라고! 어딜 보는 거야 지금!!! 아 쫌! 그만 던져!!!!! 내가 보는 게 싫으면 니가 가리면 될 거 아냐!!! 눈에 보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오, 그래? 그럼 그 눈깔 내가 파버리겠어. …자, 잠깐. ㅇ, 야. 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칼이야! 알고 있어. ……힉. * * *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유리는 턱 한쪽에 휴지를 댄 채로 앞에 휘적휘적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수연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턱에 잡고 있던 휴지를 살짝 떼고 바라보았다. 아직도 피가 나오고 있는 건지 하얀 휴지에 금방 묻은 듯 한 피가 묻어있다. 아씨.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앞서 가던 수연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하하. 유리는 재빨리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싸늘하게 쳐다보는 저 눈초리. 유리가 씨익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때릴 듯이 손을 번쩍 든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팔로 머리를 가렸다. “어휴, 관두자. 관둬.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프지.” “…….” 그렇게 말하며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간다. 한 쪽에 주차되어 있는 유리의 아우디를 발견하고서 익숙하게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다시 한 번 턱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이 상처에 스치자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자라오면서 아버지에게 숱하게 맞으며 자라왔지만 오늘처럼 무식하게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건으로 간접폭행 당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리저리 잘 피해 다녀서 사실 맞은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쇼크는 어마어마했다. 턱에 난 상처는, 여기저기 도망 다니던 유리가 자기 혼자 넘어지면서 다친 것뿐이다. 큰 소리를 내며 혼자 넘어지고서 피를 줄줄 흘리는 그 모습에 놀란 수연이 잠시 멈칫거린 사이에 기회를 틈타 화장실로 도망쳤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근 채로 한 시간 동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 수연은 대체 뭔 짓을 한 거냐고 소리를 지르고, 유리는 절대 기억나지 않는다고, 자기가 미쳤냐고 소리를 지르고. 별 영양가도 없는 말다툼을 지속하다가 수연도, 유리도 모두 지쳐버린 후에야 겨우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너덜너덜 해진 거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는 유리를 끌고 나온 건 수연이었다. 자기가 일단 갈 곳이 있는데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나. 평소 같았으면 내가 운전기사냐고 화를 내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조용히 따라 나왔다. 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오는 내내 수연의 눈치를 보며 와야만 했다. 유리가 조금만 어깨를 펴도 째려보는 바람에 어깨 한번 당당히 펴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도대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걸까. 정말 억울했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소연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물론 수연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술에 취해 정신이 끊겼는데, 일어나 보니 다른 사람 집에서 그것도 온통 발가벗고 누워있었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그런데 유리는 정말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술집에서의 기억이 마지막. 그 뒤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심지어 어떻게 집에 왔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데, 그 뒤에 집에서 수연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정말…사고 쳤나? 저 앞에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라고 해도, 그런 실수를 할 만큼 망나니는 아니다. 할 땐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합의 하에. 그리고 상대방 여자를 위해서라도 맨 정신인 상태에서 해야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취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안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연을 그렇게 했을 리가. 정말 뇌를 밖에 꺼내놓고 다니지 않은 이상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 유리는 어느새 자신의 차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무섭게 째려보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저 여자는 벗고 있었을까. 그것도 자신의 침대에서, 자신의 옆에 누워서. 역시, 한 걸까? 안 그러면 벗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야. 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그럼 왜 정말 벗고 있는 거지? 뭐 술버릇이 옷 벗고 그러는 건가? 그렇다고 속옷까지 다 벗어? …아…. 정말 모르겠다. 내 인생 어쩌지 이제…. “내놔.” 골똘히 고민하며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수연이 대뜸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말에 생각을 거둔 유리는, 자신의 앞에 쑥 내놓은 손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뭘?” “차 키.” “뭐?” “내놓으라고. 내가 운전할 테니까.” “싫어. 미쳤어? 내 차를 너한테 왜 맡겨?” “뭘 잘했다고 눈 부릅뜨고 덤벼들어? 아직 덜 맞았구나?” “…….” 깊게 한숨을 내쉬며 수연의 손에 차키를 쥐어주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줬어야지.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차 앞을 빙글 돌아 운전석에 앉는다. 익숙하게 자리에 앉고 차키를 꽂는 모습을 보며, 유리 역시 조수석에 앉았다. 항상 운전석에만 앉다가 조수석에 앉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벨트 매.” “갑갑해서 싫어.” “안 매면 후회할 텐데?” “…후회는 무슨. 그냥 얼른 가자. 머리 아프다, 머리 아퍼.” 신경질적으로 유리가 말하자 수연은 그저 입을 굳게 다물기만 했다. 아무 말 없이 전방을 주시하는 수연을 한번 바라보고, 그동안 수연과 한판 하느라 잔뜩 긴장해진 몸에 힘을 풀었다. 정신없이 피해 다니느라 전혀 모르고 있던 속쓰림도 갑자기 심해졌다. 마치 누가 안쪽에서 위를 쥐어짜는 것 같은 느낌. 어제 그렇게 술을 들이붓고 일어나자마자 그 난리를 부렸으니 위가 스트레스를 받아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듯싶다. 배의 위쪽에 손을 얹고 얼굴을 구기는데, 갑자기 차가 급출발하는 바람에 유리의 몸이 앞으로 급격히 쏠렸다. 차의 앞부분에 이마를 한번 심하게 부딪힌 유리가 고개를 번쩍 들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차체가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몸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운전마저도 그렇게 급하게 하니 죽을 것 같았다. “천천히 해, 쫌!!” “…그러니까 안전벨트 매라고 했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수연의 몸에는 회색 안전벨트가 단단히 매어져 있다. 유리는 투덜투덜 거리며 안전벨트를 손에 잡았지만, 또 다시 차체가 급하게 오른쪽으로 꺾이는 바람에 잡고 있던 안전벨트를 놓쳤다.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렸는데, 핸들을 잡고 있는 수연의 얼굴이 꽤나 비장하다. 이를 악물고 꾸욱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엄청난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이번엔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유리는 또 다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차 문에 있는 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애초에 신호 따위는 다 무시할 생각 이였는지, 빨간불이여도 속도를 늦출 생각도 하지 않고 휙휙 지나간다. 앞에 있는 차가 속도가 조금 느리다 싶으면 중앙선을 침범하기까지 하면서 앞질러 간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턱에 난 상처가 욱씬욱씬 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를 가길래 이렇게 흥분한 채로 운전하는 건지. 유리는 곁눈질로 수연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 “아니…. 급한 게 아니면 조금만 천천히 가는 게 어때?” “…어디 가는지 궁금해?” “어.” “경찰서.” 뭐?! 유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유리의 시선에 수연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가, 다시 얼굴을 굳힌다. 전방을 향해 있던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서 바라보았다. 운전하고 있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아무래도 금방 내뱉은 말은 장난이 아닌 것 같다. “경찰서는 왜?” “왜긴 왜야. 너 깜빵에 쳐 넣으려고.” “?!?!” “그걸 뭐라고 하더라. 데이트 강간?” 기가 막혀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연이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이 여자는 미쳤어. 유리는 재빨리 몸을 앞으로 숙이고 핸들을 부여잡고 돌렸다. 차체가 중앙선을 넘어 급하게 유턴을 하려다가, 수연이 이를 악물고 핸들을 되돌리자 다시 원래 방향 쪽으로 틀어진다. “핸들 안 놔?” “안 놔. 아니, 못 놔.” “놔.” “안 놔.” “놓으라고.” “안 놓는다고. 얼른 방향 틀어.” 이게 죽을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수연은 이를 악물고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밟았다. 안 그래도 빨리 달리던 차가 더 속도를 높인다. 덕택에 몸이 다시 요동을 쳤지만, 유리는 균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핸들을 또 옆으로 꺾었다. 차체가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기분 나쁜 마찰음이 도로에 가득 울렸다. 그에 질세라 이번에도 역시 수연이 핸들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 전까지는 잘 버티던 유리가 이번에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어 핸들을 놓쳐버렸다. 마치 누가 힘을 주어 밀쳐버린 것처럼 몸을 기우뚱거리던 유리의 뒤통수가 차창에 부딪혔다. 아씨, 아퍼…. 얼굴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런 유리를 보며 수연이 비웃는다. 억울해. 정말 억울해. 난 정말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난 진짜 기억도 안 난다니까?” “비루한 변명 따위 더 이상 듣기도 싫어.” “진짜 안 난다고!!!” “어쩌라고. 그래서, 내가 네 집에서, 네 침대에서 벗고 있었다는 사실이 달라지니? 네가 기억이 안 난다고? 네가 한 짓은 네가 책임져야지.” “아 진짜!!!!!”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들기고 발을 동동동 구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정말 환장하겠다. 아마 수연은 유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유리는 그게 정말 더 억울했다. 정말 수연의 생각대로 실제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유리가 그걸 온전히 다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수모를 받는 거라면 차라리 덜 억울할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조차도 모르는데 대체 뭘 책임지라는 건지. 너무 성질이 나서 눈물까지 찔끔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수능 끝나고 잠깐 만났던 여자애가 아버지와 사진을 찍고 있는 유리의 뺨을 냅다 갈기는 바람에, 그 날 밤에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아서 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짜본 적이 없는데, 정말 화가 너무 나서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가기 시작한다. “썅!!! 너 때문에 눈물까지 나잖아!!!!” 양 손으로 볼을 마구 때리면서 소리를 쳤다. 그 말에 수연이 흘끔 곁눈질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수연이 바라보든 말든, 손등으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고작 이런 걸로 6년 만에 눈물을 흘리다니. 울게 된 이유도 가지가지다. 한 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니, 마치 봇물 터지듯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의 소중한 아우디에 이미 한번 상처를 입혀놓고 61번이나 전화를 해댔는데도 받지도 않아서 성질나게 하지를 않나, 입만 열면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한 살 더 많은 거 가지고 틈만 나면 트집 잡고, 개새끼라느니 개싸가지라느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심지어 술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술 취한 척하면서 길가에서 옷을 벗으려고 하지를 않나, 신발 주워오라고 하지를 않나, 업어달라고 하지를 않나. 그 갖은 수모도 꾹꾹 참아가며 기껏 데리러 갔더니 말도 안하고 튀어버리고. 거기다 오늘은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다 부셔 놨다. 그 집에서 그나마 가장 온전히 살아남은 건 유리 자신뿐. 이 모든 게 불과 6일 만에 일어났다. 그런데 꼭 몇 달 동안 중노동을 한 기분이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한 달을 버틸까. 한 달 안에 넘어오게 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 했으니 그걸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다. 유리는 그 날 수연의 앞에서 그런 내기를 제안했던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폼생폼사를 인생의 목표로 살아온 외길인생 26년. 심지어 기저귀도 슬림형이 아니라 두꺼운 거 차면 울고불고 난리였다던데, 이 여자 앞에선 이제 폼을 잡을 기력도 없다. 결국 유리는 차문 손잡이를 꼭 잡은 채로 꺽꺽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야. 끅. 내가, 진짜. 흐끅. 기억이라도 나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큭. 않아. 이, 흑. 독한 여자야.” “…….” “흐끅. 내가 전생에, 흡.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 같은 여자랑, 크흑. ” “…….” 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쥐고서, 꺽꺽 거렸다. 숨넘어가는 듯 한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그 와중에 벌려진 손가락 틈 사이로 살짝 살짝 수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던 차의 속도가 점점 떨어진다. 수연은 전방과 유리를 번갈아보면서 계속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경찰서로 가겠다는 수연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일지도 모른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경찰서에 이런 일로 갔었다는 걸 아버지가 아시면 끝장이다. 유리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때 들킨 지 오래고, 아버지도 그 점에 대해선 터치를 하지 않으신다. 이해를 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포기한 것. 1년이 넘는 아버지와의 피 터지는 사투 끝에 얻어낸 승리 아닌 승리. 실컷 놀되 눈에 거슬리는 짓만 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였었다. 그런데 이건 분명 아버지의 눈에 거슬리는 짓. 단순히 여자를 만나는 것도 그리 좋게 보시지 않는데 여자와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얽혔다는 걸 알면 진짜 끝장이다. 게다가 재벌회장 손녀가 이런 일로 경찰서까지 갔다는 소리가 매스컴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때엔 사건이 더 복잡해진다. 결코 그 꼴까지 당할 수는 없다. 유리는 수연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우는 소리를 더욱더 높였다. 으허허허헝. 그냥 콱 죽어버릴 거야. ……. 묵묵히 운전을 하던 수연이, 결국 핸들을 오른쪽으로 빙글 돌린다. 차가 부드럽게 유턴을 했다. 경찰서는 더 이상 가지 않을런가 보다. 유리는 울음소리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수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잘 가던 차가 속도를 급격하게 늦추더니, 갑자기 뚝 멈춘다. 유리는 그때까지 여전히 얼굴을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 오래 숙이고 있었더니 목이 뻐근해서 미칠 것 같은데, 왠지 고개를 들어서 수연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 숙이고 있었다. “안 우는 거 아니까 연기 그만하고 고개 들어.” “아, 그래.” 심드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약간 몸을 숙인 채로,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넓은 실외 주차장. 꽤 넓은데 차가 제법 빽빽이 들어차 있다. 일단 경찰차가 보이지를 않는 걸 보니 확실히 경찰서는 아니다. 유리는 눈을 재빨리 굴려 경찰차가 없음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내려.” “응?” “내리라고. 그리고 따라와, 아무 말 하지 말고. 차 키는 나한테 있으니 허튼 짓도 하지 마. 여차하면 니 차 끌고 건물로 돌진 해 버릴 거야. 그러면 수리도 못하겠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뇌뚜껑을 한번 열어보고 싶어, 당신.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고 빙긋 웃은 유리는 수연의 말 대로 차에서 내렸다. 머리 위에 정말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있다. 유리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살아서 이 푸른 하늘을 보게 되니 마음이 벅차오른다. 정말 아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땅위에 서니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마저 든다. “…뭐하니?” 한심하다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하늘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렸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작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동정하는 듯 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리는 짐짓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냥 하늘이 예쁘길래. …놀고 있네. 따라오기나 해. 앞서 걸어가는 수연의 뒤를 따라가면서, 유리는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는 꽤나 많은데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는 어디인걸까. 수연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하얗고 커다란 건물이 서 있다. 그리고 그 건물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는데,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건물 앞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을 구경하자 수연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다시 말해두겠는데.” “응?” “허튼 짓 하지 마. 차 키는 나한테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뒤돌아서 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가락을 조물조물 움직이더니 깍지를 끼고, 팔과 몸 사이에 유리의 팔을 끼어 넣고선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붙들고 있는 손에 제법 힘을 줘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수연의 행동에 유리는 엉거주춤 수연을 따라갔다. 수연의 보폭에 걸음을 맞춰가며 이리저리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정말 삭막하다. 이상하네. 대체 여기가 어디야? 건물 앞에 거의 다다라서, 유리는 아까 주차장에서 바라보았던 그 사람들을 가까이 볼 수 있게 되었다. 표정이 어딘가가 탁 풀려 있는 게 꼭 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 수연에게 잡혀 건물 안 쪽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스쳐지나가는 그 사람들의 옷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옷에, 시퍼런 색 글씨로 적힌 글자. 태양정신병원. 정신병원. 음. 정신병원이구나. 음? 정신병…원?! 유리는 발끝에 힘을 주고 가던 발걸음을 멈췄으나, 이미 수연에게 팔을 붙들려서 몸은 계속 앞으로 쏠렸다. 그대로 계속 힘을 주고 있으면 넘어질 것 같아서 결국 비틀비틀 거리며 다시 따라갔다. 앞서 나가는 수연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 여긴 왜 온 거야?!” “…너 정신 감정 좀 시키려고.” “뭐?!??!?” “걱정 마. 여기 내가 아는 오빠가 의사로 있어. 돈은 안 받을 거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로비 프런트 쪽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 한 명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쪽으로 걸어온다. 도망가야 해. 그 남자가 가까워지는 것을 본 유리는 수연에게 붙들려 있는 팔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수연이 힘이 센 건지, 아니면 아까 도망 다니느라 유리가 힘을 다 뺀 건지 수연에게 붙들린 팔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럴수록 유리의 팔을 끼고 있는 수연의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갈 뿐이었다. “수연아, 여긴 웬일이야?” “아, 오빠. 나 부탁 좀…. 어? 잠깐만.”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마자 수연의 주머니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쪽 팔은 유리의 팔을 붙들고 있느라 쓰지 못한 탓에, 수연은 어쩔 수 없이 차키를 쥐고 있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었다. 화면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 표정에 유리는 슬쩍 고개를 들어 수연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 있다. 한 쪽 팔은 이미 유리의 팔을 붙들고 있고, 그 반대쪽 손으로는 유리의 차키까지 들고 있는 터라 슬라이드를 열기가 여의치 않았는지, 아주 잠깐 고민을 하더니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같은 손이 쥐고 있는 차키를 의사에게 건넸다. “오빠, 이거 잠깐 오빠가 들고 있어. 나 전화 좀 받ㄱ….” “아, 그래.” 지금이야. 튀자. 유리는 재빨리 수연의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차키를 낚아챘다. 번개와 같은 유리의 행동에 놀란 수연의 팔에 힘이 잠깐 빠지자, 그 때를 틈타 팔도 휙 빼버렸다. 아까까지는 아무리 힘을 써도 빠지지 않던 팔이 이번에는 잘만 빠진다. 팔이 빠진 걸 확인하자마자 뒤를 돌아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미친 듯이 뛰었다. 악에 바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미안! 다음에 봐! 안녕.” 슬쩍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었다. 너무 화가 나서 잡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모양인지 벙찐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는 얼굴이 그 잠깐 사이에 뇌리에 깊이 박혔다. “너 잡히면 뒈진다!!!!!!!!!!!!!!!!!!!!!” 죽는다나 뒤진다도 아니야. 뒈진다래. 진짜 잡히면 아작 나겠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무서워?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달리고 있는 유리의 얼굴을 자극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 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두근 뛰어댄다. 뒤를 확인할 여유도 없이 무작정 앞만 보며 달렸다. 너무 빨리 뛰어간 바람에 차 앞에서 제대로 멈추지를 못해서, 본넷트에 손을 짚으며 급하게 멈췄다. 앞 범퍼에 정강이를 한번 찍혀서 찌릿한 감정이 느껴졌다. 아파아아아아아아앗!!!! 재빨리 몸을 숙여 정강이를 손으로 몇 번 문지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수연에게서 뺏어온 차키로 차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시동을 걸고, 고개를 숙여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쫓아올 생각은 없었던 건지 다행히 건물입구 쪽에는 수연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노릇이라, 유리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정문 사이를 빠져나와, 도로에 들어서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유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오른손을 핸들에서 떼고 허공에서 탈탈 털었다. 손목이 뻐근하다. 아까부터 계속 힘을 주고 있었던 탓인지 온 몸의 근육이 아프다고 꿈틀대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건물이 서서히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서, 유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 백미러를 통해 흘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일어나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나왔고, 거기에 아까 울기까지 해서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유리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금방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던 그 여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문제의 그 여자, 그러니까 정수연이라는 여자는 단단히 믿고 있었다. 어제 밤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사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정말로, 유리는 자신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거라 굳게 믿는다. 어떤 연유로 그 여자가 옷을 벗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자신이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닌다고 해도 술 마시고 누굴 덮칠 만큼 뻔뻔한 성격은 아니다. 더군다나 다른 여자도 아니고 정수연. 술에 떡이 되서 개가 되는 한이 되어도 절대 그 여자와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전방에 서 있는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차를 부드럽게 멈추며 유리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분명히 그 여자가 술김에 벗어던졌던 걸 거야. 아니, 그것보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어떻게 온 거지? 누가 문을 따 준거야? 내가? 정말 뭐야. 완전 미스터리네…. ……. 뭐, 설마 김태연이나 그 김태연의 애긴가 뭔가 그 여자 둘이서 짜서 하지는 않았을 테고. 음…. 그래, 그러진 않았겠지. 그래도 친구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아, 뭐지, 진짜?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어제 술을 마셨던 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남아있을 기억의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는데, 문득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몸매 좋은 한 여자가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잠시 기억을 찾는 작업을 멈추고 멍하니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우와, 라인이 장난 아니네. 몇 살 이려나? 아, 그래도 정수연 보다는 덜 하네. 그 여자가 몸매는 확실히 좋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쳐다보는 유리의 시선을 느꼈을까. 차 앞을 쓱 스쳐지나가던 여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 낯선 얼굴이 한 순간 흐릿해지더니 익숙한 얼굴로 변한다. 아까 자신에게 잡히면 뒈진다고 말했던 그 여자의 얼굴. 헉. 유리는 서둘러 고개를 양 옆으로 설레설레 흔든 다음 다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안도감이 느껴져서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돌렸는데, 이번엔 저 쪽에서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이 또 다시 아까 그 험상궂은 얼굴로 보였다. 시선을 휙 돌려 다른 여자를 바라보았는데도 여전히 마찬가지. 아직 술이 덜 깼나보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대도, 심지어 몸은 남자 몸인데 얼굴은 전부 그 성깔 있는 얼굴. 고개를 세차게 양 옆으로 흔들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는데, 앞에 서 있는 여자의 형체는, 그냥 정수연도 아니고 아까 자신의 집에서, 침대 시트를 순간 놓쳐버려 당황해하던 그 정수연이였다. 펑. 어디선가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황급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수많은 정수연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난 후에, 유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두근 뛰어대고 있었다. 몸이 그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몇 분 전이지만 아직까지 정신은 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스치듯이 보았던 그 나신의 여자가,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뛰어다녀서 정신이 아찔하다 못해 운전이 안 될 지경.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강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는데도 얼굴의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이를 악물고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가 아프다. 아까까지는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여자 몸이야 이제껏 많이 봐왔고, 그 정도의 몸매를 가진 여자들도 많이 만나왔는데도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이래? 풋내기도 아니고. 와, 권유리 너 더위 먹었구나? 그래. 더위 먹은 거야. 이상한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나름대로 유리가 합리화 하는 동안,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화면을 바라보니 아버지의 전화였다. 순간적으로 수연의 전화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전화를 하다니 왠지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안 받았다간 또 무슨 욕을 들을지 몰라서, 유리는 입맛을 쩝 다시며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왜요?” - 싸가지 없는 시끼. 애비가 전화 받을 때 그렇게 말 하지 말라고 했지? 걸걸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욕을 내뱉는 자신의 아버지. 수연이 못미더워하며 말하던 ‘입만 열면 욕을 내뱉는 거지같은 성격’은, 아무래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욕 좀 그만하세요, 정말. 제 친구 아버지 중에 아버지만큼 욕 쓰는 아버지도 없어요. 좀 근엄해지시면 안 돼요?” - 시끄러워. 네가 욕을 하게 만들잖아. 아니 친구 놈들은 아들놈이 속을 썩인다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 된 게 반대야. 너 대체 어디서 뭔 짓하고 다니는 거야? 이번 달 카드 값이 장난 아니던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돈이란 건 있다가도 없는 거라고, 있을 때 아껴 써야 한다고. 우리 회사도 언제 망할지 모르는 거야. 애비랑 니 오빠는 소주나 먹으러 다닐 때 너는 어디서 양주나 쳐 먹고 지랄을…. 가만, 너 또 가시나들 뭐 사주고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용건 없으면 끊을게요.” - …성질머리하고는. 누굴 닮아서 이러나 몰라. 너희 어머니는 네 나이 때 안 그랬어. 얼마나 곱고 여자다웠는데. 아니 대체 왜 그 예쁜 여자한테서 이런 딸이…. “아버지. 저 끊습니다.” - 저녁 7시. “네?” - 저녁 7시에 저번에 김 의원님 만났던 그 레스토랑으로 와. “또 왜요오….” - 오라면 와. 10분 늦을 때마다 카드 한도 100만원씩 깎는다. “정각에 도착하겠습니다.” - 오냐. 네, 그럼 이따 봬요, 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전화가 뚝 끊겼다. 유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신호가 다시 바뀌는 걸 보고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져놓았다. 핸드폰이 차문에 한번 튕겼다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신호가 금방 바꼈으니 괜찮겠지 싶어 얼른 몸을 숙이고 손을 뻗었다. 손으로 바닥을 더듬더듬 거리다 이내 핸드폰을 손에 쥔 유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으키자마자 앞에 또 여자 한 명이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지나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또다시 그 여자의 몸이 흐릿해지다가 다시 떡하니 아까 보았던 그 날씬하고 선이 곱던 몸으로 변해버렸다. 유리는 질겁했다. 가슴이 또 뛰기 시작한다. 아직 신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차를 출발해버렸다. 아버지와 통화하느라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저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첫 키스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입술을 부딪치기만 했던 그 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고, 머릿속이 아늑해지던 그 기분. 시원한 밤이었는데도 이마에도, 등에도 땀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어내었던 그 어린 날. 처음이라는 게 이래서 달콤한 거라고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던 그 때와 기분이 엇비슷하다. 여자 몸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유리는 다소 차분해진 마음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1) 전제1 : 가슴이 뛰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서워서 뛴다거나, 너무 심하게 운동을 해서 뛴다거나, 화가 나서 뛴다거나 등등. 그 많은 상황 중에 지금 가슴이 뛰는 현상의 이유를 애써 골라본다면, 이건 무서워서 뛰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해서 뛰는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자신이 희진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던 두근거림과 가깝다. 2) 전제2 : 희진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분명 그 여자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그런 두근거림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느끼는 두근거림이다. 3) 전제1+전제2 = 결론 : ……?!?!?!?!?!?!?!?!?!? 급하게 핸들을 돌려 차를 갓길에 세웠다. 말도 안 돼.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마티즈 한 대가 빠르게 옆을 스쳐지나간다. 마티즈. 마티즈 하니까 또 수연이 생각났다. 고개를 휙 돌려 인도를 바라보았다. 여자 한 명이 걸어 지나가는데, 그 뒷모습이 꼭 정수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마티즈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면서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온갖 잡생각이 머리에서 둥둥 떠다녔다. 무슨 생각인지 자신조차 모를 정도로 복잡 미묘한 그 생각들이 머릿속에 터질듯이 가득 들어차버렸다. 심장은 계속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생각들을 풀어나가면 풀어나갈수록 그 끝에 있는 글자는 오로지 정수연. 손으로 주먹을 쥐고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고작 몸 한번 봤다고 이러다니, 권유리 너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니. 한심하다, 한심해. 그 여자에게 머릿속을 내준 것보단, 머릿속을 내주게 된 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으르렁 거리던 여자의 몸에 끌렸다는 건 어떻게 보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 그런 예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려고 했는데도 떨쳐지지가 않는다. 그 고운 몸매의 선과, 하얀 살결과, 그리고 당황해서 살짝 붉어졌던 그 얼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유리는 문득 운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라도 격렬하게 움직이면 그나마 잡생각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유리는 얼른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열어 태연에게 연락을 했다. 스쿼시라도 같이 치자고 할 생각이다. 수연을 생각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리고 그 생각을 억지로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꾸 이상하고 묘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사랑해라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되는 태연의 컬러링을 들으면서, 유리는 초조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유리의 심장도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 * * 젠장, 지각. 유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뛰쳐나온 종업원에게 퉁명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성함을 대고, 안내해주는 걸 뒤따라갔다. 한 쪽에 길게 늘어진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다리가 찌릿찌릿 아파온다. 엉거주춤 이상한 포즈로 올라가는 유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앞에 가는 종업원이 자꾸 흘끔흘끔 유리를 바라보았다. 뭘 봐요? 날카롭게 이야기 하자 종업원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헉…. 이제 그만하…헉. 넌 속도 안 쓰리냐? 뭘 이렇게…. - 안 돼. 한 판 더해. - 야…. 지금 우리 이거 2시간 ㅉ…. 코트 이렇게 오래 쓰면 뒷사람한테 눈치 보이잖아. - 뭐 어때. 돈 주고 내가 하겠다는데. 야, 일어나. 얼른 일어나라고. - 안 해… 못하겠어. 너 혼자 해…. 날 죽이려는 거야?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며 코트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김태연. 뻗어있는 그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결국 한 시간을 더 했다. 그러니까 3시간. 스쿼시 하기 전에 몸 풀려고 30분 동안 헬스 했던 걸 고려해본다면 자그마치 3시간 반이나 미친 듯이 운동만 했다. 벽에 튕겨져 나오는 공을 따라다니면서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그 장면들을 지워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엔 한 시간이면 되겠지 싶었던 게, 30분만 더 해야겠다 를 몇 번 반복하다보니 그러다가 결국 세 시간 연속으로 했다. 태연이 거의 탈수 직전까지 가서 마지막 30분 전에 픽 쓰러져버린 후에는, 혼자서 30분 동안 계속 쳤다. 운동하면서 흘린 땀이 턱에 난 상처를 건드려서 계속 쓰라려왔다. 쓰라릴 때마다 자꾸 수연이 생각났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운동을 하고, 그럼 또 수연이 생각나고. 그 악순환이 반복되어 정신없이 치다보니 어느새 3시간. 도저히 서있지도 못하겠다는 태연을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와서 결국 약속시간에 늦어버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가며 계단을 다 올라가서, 한 쪽에 마련된 vip 룸 앞에 겨우 섰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한번 내쉬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도 정리하고 목을 양 옆으로 움직이며 근육을 풀었다. 평소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국이 최고라며 소리치시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놓고 무작정 이 비싼 레스토랑에 오라고 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뿐이다. 일종의 접대라고 해야 하나. 물론 가족끼리의 식사라는 그럴듯한 겉모양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 눈에는 그저 친목도모의 의미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오늘 부른 레스토랑은 정치인과의 식사를 할 때 이용하는 레스토랑. 각 레스토랑마다 상대방의 직업이 정해져 있다. 굳이 누구를 만날 테니 알아서 잘 준비 해 와라, 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레스토랑 이름만 대면 어떤 식으로 준비를 해야 할 지 눈치를 챌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일에 뛰어든 유리의 오빠가 이런 자리에 나와야 하지만 강직한 성격 때문에 유들유들하게 분위기를 이끌어나가지를 못해서, 항상 이런 자리는 유리가 도맡아 해왔다. 사업을 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인맥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오며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자리는 많이 끌려 다녔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지는 몸에 이미 배어있어 그다지 긴장되지는 않는다. 다만 아까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혹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할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유리는 안쪽에서 들리지 않게 한 번 헛기침을 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무언가가 떨어지는 듯 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유리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밑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줍고 있는 작은 머리가 보였다. 익숙한 옅은 갈색머리. 아침에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빠져나가던 그 결 좋은 머리카락들. 다시 가슴이 뛰었다. 유리는 한쪽 손을 왼쪽 가슴위에 얹고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또 뛰어. 짜증나게. 넌 지치지도 않냐? 왜 뛰어대, 자꾸. “어서 오거라. 정 의원님. 이 아이가 제가 아까 말씀드린 제 딸내미입니다.” “아, 이 분이 그 유리양이군요. 반갑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중년의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제법 있는 남자의 손인데도 살결이 부드럽다. 저 여자 손도 부드러우려나. 문득 그렇게 생각한 유리였다. “유리 양. 여기는 제 딸 수연이라고 합니다. 유리 양과 비슷한 또래겠군요.” “…제가 더 어린 것 같은데요.” 빙긋 웃으며 말하자 나이프를 잡고 있는 수연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 같다. 잡히면 뒈진다. 아마 그렇게 말했었나. 하지만 이 자리에서 크게 소리 내지는 못하겠지. 유리는 빙긋 웃으며 비어 있는 수연의 맞은 편 자리 쪽으로 다가갔다. 의자를 손으로 잡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유리라고 합니다.” “아, 네. 전 정수연이라고 해요.” 웃으며 말하는 수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유리 양은, 그럼 몇 살이신가요? 올해로 스물여섯 입니다. 아, 그럼 우리 수연이보다 한 살 어리시군요. 네, 저보다 언니시네요, 역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둘이 친하게 지내보는 건 어떤가요?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엄한 아버지라고 하시더니, 확실히 얼굴이 굉장히 강건하게 생겼다. 친하게 지내보는 게 어떻냐는 수연의 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빙긋 웃자, 수연의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유리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시국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는 아버지들끼리의 대화를 배경음악 삼아서, 유리는 뚫어져라 수연을 바라보았다.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리는 그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자신도 정장으로 갈아입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몸에 딱 맞게 피트 된 정장이 잘 어울렸다. 머리를 틀어 올렸는데, 귓볼에서부터 떨어지는 목선의 그 곡선이 꽤나 아름다웠다. 아까 눈을 부릅뜨며 온갖 물건을 다 던져댔던 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정장 차림의 수연은 예전에 학교에 데리러 가면서 본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그 때와 지금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리의 시선을 느꼈던 건지, 고개를 약간 돌려 아버지들을 바라보던 수연이 이번엔 유리를 쳐다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낸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많이 마신 건 수연 역시 마찬가지이고, 일어나자마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그 난리법석을 떤 것도 마찬가지니 피곤할 법도 하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제법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에 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수연 역시 뚫어져라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종업원이 들어오고, 에피타이져와 스프를 셋팅 해 준다. 그 와중에도 수연과 유리는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유리는 그제야 처음으로 수연의 얼굴을, 그러니까 그 이목구비들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곳에서,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진 상태에서 얼굴을 바라보니 확실히 예쁘긴 예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보면 이런 여자를 만나는 것도 흔하지 않다. 스프를 떠먹기 위해 스푼을 들던 유리는, 고개를 숙여 스프를 뜨면서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다. “수연 씨는, 예쁘시네요. 생각보다는.” “…….” 수연은 대답이 없고, 입에 가득 찬 스프의 향은 제법 달콤했다. 다시 한 스푼 뜨기 위해 접시에 스푼을 가져다 대는데, 갑자기 손이 약간씩 떨려왔다. 아무래도 아까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한 탓인 듯싶다.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던 스푼이 그릇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낸다. 아버지들이 눈치 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스푼을 내려놓고 손을 무릎위에 얹었다. “왜 그래요?” 이번엔 수연이 고개를 숙이고 스푼을 떠먹으며 지나가듯이 툭 말했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했나 봐요. 금방 운동하고 왔거든요.”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어요. 힘을 쓸 데가 없나보죠?” “…그게 아니구요. 자꾸 당신이 생각나서 어쩔 수 없….” 스푼을 떠먹던 수연이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한 거야. 유리는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아버지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시느라 자신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 같다. 중간에 말을 끊고 입을 다문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걸 곧 깨달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던 유리는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옆쪽에 앉은 아버지들을 바라보며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아하하. 그나저나, 아버지. 그 전부터 정 의원님 만나면 물어보실 거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음? 무슨 소리…. 아. 맞다. 그랬었구나. 저기, 정 의원님.” 꽤나 어설프게 말했는데도 아버지는 다행히 유리가 원하던 대로 유리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덕택에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수연이 유리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유리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혹시 주위에 참한 아가씨 없나요?” “네?” “우리 아들내미 있잖습니까.” “아, 그 착실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네. 그 놈이 제 아들이지만 똑똑하고, 딱 부러지고, 건실해서 참 좋은데.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여자가 없단 말이죠. 이제 그 녀석 장가도 가야 할 텐데, 만나고 있는 여자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 하는데 바쁘다고 만날 시간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는데, 그 녀석을 부려먹는 상사의 입장으로서는 좋긴 합니다만, 애비의 입장으로서는 그다지 좋지는 않네요.” “오, 바람직한 청년이네요. 아, 그럼 제 딸아이는 어떻습니까?” 꿀꺽. 아버지들의 대화를 들으며 물을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유리는 수연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급하게 물을 삼켰다. 너무 급하게 삼켰더니 물이 넘어가는 느낌이 썩 좋지가 않아 얼굴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입가에 살짝 흘린 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흘끔 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의 말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수연은 이내 빙긋 웃으며 아버지 왜 그러세요,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목소리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야? 목소리를 왜 저렇게 간드러지게 깔아? “왜, 어때? 그러고 보니 나이 차이도 괜찮네. 수연이 너도 시집갈 때 되지 않았니. 아, 정말 그러네요. 다른 집안 알아보기 전에 먼저 권 회장님 댁부터 알아볼걸 그랬군요. 안 그래도 요즘 이 아이도 만나는 남자가 없다고 해서 여러 집안을 알아보는 중이였거든요.” 하긴, 맞선을 진짜 많이 하긴 하더만. 근데 뭐, 고작 27살 먹은 여자 가지고 무슨 맞선을 그렇게…. 꽉 막힌 아저씨네. “하하. 그런가요? 수연 양처럼 예쁘고 참한 분이시라면 저야 대 환영이죠. 아, 정말 이 참에 자리 한번 마련해 볼까요?” 아버지. 우리 오라버니가 훨씬 아까워요. 감히 그 잘나신 분을 저런 여자에게…. 말도 안 되지. “호호. 왜 그러세요, 두 분 다. 제가 어떻게 감히….” 목소리 봐라. 놀고 있네. 아깐 뒈진다 어쩐다 라고 소리를 빽 질러대더니 지금은 아주. 아, 못 들어주겠다. 은근슬쩍 열이 받은 유리가 속으로 괜스레 트집을 잡고 있을 때에 에피타이저 그릇들을 치우기 위해 종업원이 정중히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유리는, 종업원이 들어오자마자 아주 큰소리로 컵을 들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 “여기 냉수 좀 떠다주실래요.” “아, 네.” “컵으로 말고. 아예 주전자 채로 가져다주세요. 여기 냉수 먹고 속 차려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요.” 고개를 획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수연을 보았다.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져 있다. 당황한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리시는 동안, 유리는 잔뜩 구겨진 수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흘리자마자 날카로운 느낌이 테이블 밑의 정강이 쪽에 느껴졌다. 윽. 차마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리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흥. 콧방귀를 뀌며 팔을 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신은 하이힐은 끝이 정말 뾰족한가보다. 정강이 쪽에 느껴지는 아픔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 종업원이 정말 주전자 채로 냉수를 가져온 건 얼마 후였다. 수연의 앞에 놓인 물 컵에 냉수를 가득가득 따라주며 더운데 냉수나 많이 드세요, 라고 유리가 말하고, 수연이 그쪽이나 많이 드시죠 라고 말하는 동안 아버지들은 서로 진땀을 흘려가며 너털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메인 요리가 나왔다. 우와, 고기 좀 질기네요. 누구처럼. 진짜 안 잘라져. 그래도 시커멓게 탄 것보단 낫잖아요. 전 질긴 게 더 싫어요. 어머, 전 탄 게 더 싫던데. 탄 거 많이 먹으면 암에 걸리는 거 아세요? 나이프를 손에 꼭 쥔 채로 빙긋 웃으며 잔뜩 날이 선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 당황하시던 아버지들은, 이내 자신들만의 대화에 빠져있는 상태. 유리는 식사를 하는 내내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오늘 일어나서 이게 첫 끼 식사. 첫 끼 식사를 양식으로 하려니 속이 그걸 제대로 받아줄리가 없다. 거기다 끊임없이 수연과 투닥거리며 먹다 보니 속이 더 안 좋았다. 결국 마지막 두 점을 남기고, 역한 게 위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유리는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며 무어라고 투덜거리던 수연이,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기. 잠시 화장실 좀….” 아버지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룸에서 뛰쳐나왔다. 밖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화장실이 어딨냐고 물어본 다음 거의 뛰다시피 화장실로 향했다. 비싼 레스토랑답게 화장실도 고풍스럽다. 바흐의 음악이 나오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칸 하나에 들어가서 문을 잠근 다음 변기를 붙잡고 금방 먹었던 걸 도로 다 끄집어내어 확인했다. 화장실 안에 울려 퍼지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던 유리는, 결국 다 토해내고 위산마저도 몇 번 토해내고 난 다음에야 구역질을 멈출 수 있었다. 으아, 이 비싼 걸 다 토해냈어. 변기의 물을 내리고, 변기뚜껑을 닫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번 그렇게 토하고 나니 온 몸이 피곤해졌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하얀색 천장을 바라보며 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토했더니 위산 때문인지 식도가 아프고, 코도 시큼거린다. 손가락으로 코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역한 냄새가 입안에 가득했다. 오늘 하루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정말 힘들었다. 그 정신병원에서 벗어난 그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수연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 탓에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았다. 오래된 연인인 희진에게조차도 그렇게 오랫동안 머릿속을 내어준 적은 없었다. 희진을 처음 안고 난 그 다음 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서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수연의 잔상은, 너무 또렷하다 못해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또렷한 모습으로 하루 종일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데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먼저 일찍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 “권유리. 죽었어?” 집에 먼저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그 순간, 오늘 하루 동안 정신적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그 문제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대답 없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자, 답답했는지 문을 똑똑 노크한다. “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죽었어? 죽었냐구.” “…안 죽었어.” “그럼 문 열어.” “왜, 왜?” “왜 떨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열어봐.”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탁 풀었다. 풀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이 스르르 열린다. 무뚝뚝한 표정의 수연이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왠지 마주칠 수가 없어서, 유리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애써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뭐야…. 또 뭐 놀리려고 온 건데?” “…….” 한 쪽 구석에 있는 파란색 휴지통이 보인다. 수연은 대답이 없다. 그 대신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가를 살짝 간지럽히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유리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멍하니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쓰레기통 안은 텅 비어있다. 수연이 손을 뻗어 유리의 턱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유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내려앉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유리의 얼굴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게 한 수연은, 이번엔 유리의 턱을 들어 각도를 옆으로 조금 돌렸다. 수연의 눈에 아직도 새빨갛게 부어올라와 있는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약 안 발랐구나. 아까 보니 그런 것 같더라니. 하여튼 멍청하다니까.” “…….” 유리는 눈을 굴려 수연의 반대쪽 손이 들고 있는 걸 바라보았다. 살색 대일밴드와 후시딘 약. 유리가 그걸 바라보자마자 후시딘 약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에 하얀 약을 짜낸 다음 턱 쪽에 난 상처에 슬슬 약을 바른다.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내자, 수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엄살도 심하시네. 그렇게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너 사실 겁도 많지?” “아,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들 하지.” “아니라고.” “풉. 발끈하는 거 봐. 역시 어리다니까. 한 살 차이가 이렇게 큰 거야.”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떼고 이번엔 대일밴드를 뜯는다. 유리는 그런 수연의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런 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걸까. “미영이가 말이야.” “…….” “걔가 여기저기 잘 넘어져. 그래서 상처가 잘 나거든. 하도 그러니까 내가 아예 약이랑 대일밴드도 핸드백에 넣어 가지고 다녀. 그걸 너한테 쓰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 생각이 읽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걸지도 모른다. 수연이 몸을 살짝 숙이고 다 뜯은 대일밴드를 조심스레 살살 붙인다. 손가락 끝이 스칠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얼굴 전체를 감쌌다. 아파서 찌릿찌릿한 게 아니라, 무언가 이상한, 미묘한 느낌의 찌릿함. “하여튼 말이야.” “…….” “내 주위는 왜 이렇게 다 멍청한가 몰라. 아니, 지 혼자 픽 넘어져서 피나 철철 흘리고 있고. 그랬으면서 약도 안 발랐어? 이런 건 그때그때 발라줘야지. 그래야 흉이 안 져. 멍청아.” “…….” “자, 다 됐다.” 빙긋 웃으며 턱을 손으로 툭툭 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유리는 그 몸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수연은 대일밴드를 뜯고 남은 것들을 손바닥으로 비벼 동그랗게 뭉친 다음 한 쪽 구석에 있는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 맞춰서 심장이 뛴다. 두근두근두근. 유리는 멍하니 왼쪽 가슴위에 손을 얹고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심장박동이 손가락 끝에서 미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 먼저 들어간다.” “…….” “아, 맞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유리에게 등을 돌리던 수연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몸을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심장 쪽이 살살 간지럽다. “…너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 “…응?”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장담할 수 있냐고.”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를 내려다본다. 손가락 끝으로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빛을 마주보며, 유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 짧은 순간에 수연이 다양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하고, 다시 가늘게 뜨기도 하고. 그리고 정말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며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그 때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때마다 유리도 얼굴이 보기좋게 확 달아오르는, 그 장면을. 정수연이 시트를 떨어뜨렸던, 그 때. 새빨개지는 수연의 얼굴을 보는 유리는 왠지 자신의 얼굴도 화끈화끈 해지는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씨, 정강이 아파. 저번에는 마티즈 문짝으로 까더니. 내 정강이가 그렇게 싫어? 괜히 이렇게 말하면서. 그 목소리에 수연은, 이내 얼굴에 가득찬 붉은기를 거두고,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믿어줄게.” “…….” “사실 나도 기억이 안 나고. 그리고 그렇게 강력하게 부인하는 네 눈빛이 사실 제법 진지해 보이기도 했거든. 그런 눈빛은 거짓말을 할 눈빛은 아닌 것 같으니까. 음. 그냥 믿어줄게. 대신.” “…….” “어디 가서 내 몸 봤다는 소리 하기만 해 봐…. 그 땐 진짜 경찰서 끌고 갈 거야. 알았어?” 고개를 아래위로 세차게 끄덕거렸다. 유리의 그 행동이 그리 썩 싫지만은 않았는지 수연이 다시 킥킥 거리며 웃었다. 나 먼저 갈게. 넌 좀 더 있다가 들어와. 그렇게 말하며 가뿐히 돌아서서는, 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유리는 멍하니 수연이 서 있던 그 곳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서 있다간 자리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남아있다. 끝내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하이힐 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면서, 손가락을 들어 대일밴드 쪽을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에서 수연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다. 슬슬 간지러워지고 있다. 자신의 손이 닿아있는 턱의 상처도 간지럽고, 그리고 왼쪽 가슴 안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도. 그 간지러움이 왠지 못 견딜 정도여서, 유리는 결국 빙긋 웃어버렸다. Hissing 08 - 고마워. 수연은 멍하니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아무리 몇 번을 다시 봐도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고마워. 고마워 라고 했다. 그 자존심 강하고 드세던 아이가,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물론 입으로 그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야 온 문자였지만 어쨌든 고맙다고 했다. 권유리가, 정수연에게. 핸드폰을 하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더니 기계가 잔뜩 뜨거워져 있다. 그걸 들고 있는 손마저도 뜨거워져서 핸드폰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턱을 괸 채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켜놓고 한 동안 손대지 않았더니 화면의 조명이 차차 어두워진다. 고마워 라는 글자가 점점 사라져가는 걸 바라보면서 수연은 눈을 깜빡 거렸다. “수연아아아….” “…….” 미영이 턱을 괴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수연의 옆에 의자를 드르륵 끌고 와서는, 턱을 괴고 있는 팔을 슬며시 잡고 투정부리듯이 말한다. 핸드폰 화면은 완전히 점멸했다. 수연은 손가락으로 꾹 핸드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고마워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에 떠 있는 개싸가지라는 글자와 유리의 번호. 고마워, 라는 글자와 개싸가지라는 글자가 한 화면에 뜨는 날도 있다니. “수연아….” “…….” 여전히 수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고, 미영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손가락으로 툭툭 핸드폰 화면을 쳤다. 탁탁 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교무실에 울린다. 톡톡톡. 다시 핸드폰 화면의 조명이 사그라진다. “…나랑 말도 안할 거야? 응?” “아, 진짜 시끄럽네.” 화면의 조명은 완전히 꺼졌다. 수연은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내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미영이 살짝 움찔거린다.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수연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런 수연의 팔을 붙잡고 있는 미영의 손에 은근슬쩍 힘이 들어간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수연아아아아아아아. 화 풀어? 응? 응? 응응응?”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수연의 얼굴 밑에 불쑥 얼굴을 집어넣고, 수연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으며 말한다. 눈이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눈의 끝에 어떻게든 수연의 화를 풀기위한 미영의 눈물겨운 노력이 묻어나온다. 수연은 그런 미영의 얼굴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영 자신도 모르게 자꾸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는 것 같은데 그걸 억지로 다시 웃다보니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유리가 도망가 버린 이후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쫓아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놓쳐버리고,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온 수연은 다시 쫓아가서 진짜 죽여버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죽이지 못한다면 반병신이라도 만들어야겠다며. 하지만 이미 차를 타고 토껴버린지 오래였고,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유리가 혹시나 태연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싶어 그 길로 택시를 타고 태연과 미영의 집으로 향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거라 현관문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서서 전화를 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졸지에 열린 회색문과 벽 사이에 몸이 낀 수연이 미영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을 미려는데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쨌든 유리 씨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짐짓 엄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수연은 미영을 부르려던 입을 무의식적으로 다물고 숨을 죽였다. 태연이 그거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라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미영의 목소리. - 나도 그때는 술도 조금 들어간 상태였고, 화가 좀 난 상태여서 그런 짓 하긴 했는데…. 유리 씨한테 말하면 그거 수연이한테도 들어갈 거 아냐.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정수연이 얼마나 무서운데…. - 근데 있잖아. 분명 유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두들겨 맞았을 거야. 금방 목소리 들으니까 애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까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말을 하는 게…. - 안 돼. 어차피 유리 씨는 맞고 난 후잖아. 그리고 나오라고 하는 거 보니까 죽을 만큼은 안 맞았나보네, 뭐. 이미 말해봤자 맞았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어. 거기에 더해서 나까지 수연이한테 맞는 꼴 보고 싶어? - …그건 안 되지. 우리 자기가 맞으면 나도 아파. - 거 봐. 절대 말하지 마. 내가 벗겨놓고 왔다는 거 정수연이 알면 나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 - 어휴…. 어쩔 수 없지 뭐. 알았어. 그럼 나 다녀올게. - 응! 열심히 하고 와!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황미영…네 이년…. 분노가 폭발했다. 정말 말 그대로 분노 폭발. 수연은 주먹을 꼭 쥐고 이를 악문 채로 태연이 승강기에 올라타기까지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자꾸 뒤돌아보며 보고 싶을 거야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던 태연이 승강기에 타는 걸 보고 미영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문의 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었다. 언제부터 있었냐며 당황하던 그 하얗고 동글동글한 얼굴. 그 길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미영을 밀치고 집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밀려오는 허탈감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너무 화가 나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 뒤로 미영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제 집에 돌아가는 내내 미영에게 전화가 몇 번 왔지만 전부 받지 않았고, 정말 죽을죄를 졌다고 문자가 몇 통이나 왔는데도 끝까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권유리만한 근성은 없었는지 전화를 60통 넘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락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오늘 아침에도 학교 올라가는 길에 멀리서 앞장서서 가는 수연을 발견하고선, 그 언덕길을, 구두를 신고 헐레벌떡 뛰어와 수연의 팔에 팔짱을 끼고, 온갖 아양을 다 떨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수연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영은 끊임없이 수연아-라고 애타게 부르며 아양을 떨고, 수연은 그런 미영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사실 수연이 줄곧 양호실이나 여교사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는 바람에 잘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제 퇴근 시간.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눈을 부릅뜨며 말하던 권유리. 처음엔 그렇게 당당해하던 아이가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수연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나자 결국엔 나중에 겁에 질려서 차에서 질질 짜기까지 했고, 몸을 잔뜩 움츠리며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입은 살아서 끊임없이 욕을 뱉어냈지만, 어쨌든 겁을 먹긴 먹은 듯 했다. 자신은 절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며 설명하던 그 눈동자가 제법 진지해보여서, 살짝 믿어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유리가 절대 그것만은 던지지 말라고 부탁했던 발렌타인 30년산도 집어던져버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그 양주를 보면서 서러운 표정을 짓던 그 얼굴. 그런데, 정말 유리의 말이 맞았다. 그 날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전부 미영이 꾸며낸 짓. 바꿔 말하자면, 결국 유리는 아무 죄도 없이 수연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 된다. 어제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미영에게는 태연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라고 했다. 만약 이 모든 진실을 유리가 알게 된다면, 그 여자는 분명 목을 뻣뻣하게 쳐들고 눈을 부릅뜨며 그러게 내가 뭐랬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게 분명하다. 죄 없이 그런 수모를 당한 건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난리를 다 쳐놨는데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하루 종일 계속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사실을 밝히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속죄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에게 끌려 나간 식사 자리. 원래는 부부동반 모임이었는데, 상대방 쪽 부인이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꿩 대신 닭이라고 자식들이라도 데리고 만나자고 한 모양이었다. 국회의원인 아버지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자주 써먹는 가족동반만찬에 억지로 끌려가서, 멍하니 유리 생각을 했다. 정말 믿어달라고 말하던 그 얼굴.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말할 때마다 검은 눈썹의 끝이 살짝살짝 꿈틀거렸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눈도 마주치지 못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며 시선을 회피할 뿐이다. 하지만 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 검고 짙은 눈동자는 망설임도 없이 수연을 한가득 담아놓고 있었다. 수연이 집어던진 물건을 피해 다니면서도 똑바로 수연을 바라보며 정말 아니라고 맹세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 얼굴은 정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서도 거짓말이라고 단정 지었다니. 수연은 새삼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물론, 그 상황, 그리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위에 여자가 많은 권유리가 당사자였으니 수연이 그런 오해를 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간절히 아니라고 했을 때에는, 그것도 개폼만 잔뜩 잡던 여자가 자신의 옆에서 꺽꺽 거리며 울기까지 할 정도였다면 한 번쯤은 믿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죄도 없이 정신병원까지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 유리가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그 때에 유리가 그 자리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인사를 하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나이프까지 떨어뜨렸다. 부잣집 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알아주는 재벌 집 자식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이런 자리에서 만나다니. 그래도 놀랬다는 걸 티를 낼 수는 없어서 덤덤한 척 해야 했다. 룸 안에 들어온 유리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한 끼에 일 인당 몇 십만 원은 하는 이런 곳에 오면서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만 달랑 입고 온 그 대담함은 칭찬해 줄 만 했지만, 태연과 만나서 쓸데없이 무리를 한 모양인지 부들부들 다리를 떨면서도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 불쌍하게 보이기도 했다. 얼굴에 피곤함은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고, 스푼 하나도 제대로 못 들고 덜덜덜 떠는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거기에 유리의 턱에 난 상처, 그 상처가 밥을 먹는 내내 거슬렸다. 자기 혼자 바보처럼 픽 쓰러져서 다친 상처지만, 어쨌든 수연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물건들을 던지지만 않았다면 저런 상처는 나지 않아도 되었을 터. 약도 바르지 않았는지 아직도 부어올라있는 상처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 결국엔 중간에 화장실로 뛰쳐나간 유리의 뒤를 쫓아가 약까지 발라줬다. 약을 발라주는 내내 유난히 얌전히 앉아있는 그 모습이 낯설었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은근슬쩍 회피하는 게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짐짓 퉁명스러운 척 하며 틱틱거리며 말했지만, 유리 자신도 스스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은 그 샐쭉한 표정에 킥킥 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싶었던 게, 입을 살짝 내밀고 시선을 내리 깔고 있는데 영락없이 꼬마아이 같았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대인배인 척 용서해주겠다는 말도 했다. 사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었지만. 돌아서서 화장실을 나오면서,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게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둘 사이에 돌던 그 묘한 분위기. 그 분위기에서 유리가 고맙다는 말마저 했었다면, 정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이어진 식사는 어색했다. 아버지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대화를 하셨지만, 어쩌다 한 번씩 눈이 마주치면 이상하게 유리가 시선을 확 피하는 바람에 말 한마디 못하고 묵묵히 식사만 하고 왔다. 그러고 나서 자기 전에 온 문자. 고맙다는 그 문자를 보고나서 잠을 자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새벽 4시 반. 그 뒤로 아주 잠깐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출근. 그래서 수업도 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비면 양호실이나 여교사 휴게실에 가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지내다보니 미영의 입장에선 수연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작정을 하고 매달리고 있는 중. 처음 20분간은 싱글 싱글 웃으면서 여유 있게 애교를 부리더니, 그 다음 20분간은 표정이 울상이다. 수연은 완전히 일그러진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하면 정말 울지도 모른다. 교무실의 선생님들은 하나둘씩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수연은 아까 챙겨놓고 책상위에 올려놓은 핸드백과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말 없이 일어서는 수연의 행동에, 미영이 히잉, 이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뭐해? 퇴근 안 할 거야?” 수연이 퉁명스럽게 말 하자 미영이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들고 수연을 바라본다. “집에 가야지.” “…화 푼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내가 계속 이렇게 있는다고 그 개싸가지 옆에 내가 발가벗고 있었다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미안해.” “됐네요. 나중에 술이나 거하게 쏴. 그때엔 때때인지 뭐시긴지 데리고 오지 말고. 알았어?!” “히히. 응! 그럼 미스 정, 앞장서시지요.” 실실 웃으며 수연의 등을 떠미는 손길에 수연도 빙긋 웃었다. 아직 교무실에 남아있는 선생님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서는데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누구야?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묻는 미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유리에게 메시지가 와 있다. 미영이 수연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며 핸드폰을 바라본다. - 도착. 오늘은 안 튈 거지? “오늘도 데리러 온 거야? 유리 씨 자상하네.” “자상하긴, 개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수연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백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런 수연의 얼굴을 미영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주보이는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이 가득 차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발 화 풀어달라며 울상을 짓더니 금세 또 얼굴이 잔뜩 펴져서는 수연을 놀릴 태세다. 수연은 짐짓 고개를 휙 돌리고 턱을 약간 든 채로 발에 힘을 주어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건물을 나서자 한낮보다 한껏 느슨해진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언덕길 밑의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은색의 차와, 그 차에 기댄 채로 서 있는 기다란 몸 하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X자로 꼰 채로 서 있다. 시간은 6시가 넘었는데 여름인지라 아직도 하늘은 밝다. 그 밝은 하늘 아래에 유리가 서 있다. 수연은 문득 유리의 턱에 붙어있을 그 대일밴드를 생각했다. 어제 자신이 붙여준 것이지만, 왠지 오늘 그걸 다시 보면 어색한 느낌이 들 것 같다. “길다….” 수연의 시선을 좇아 유리를 바라보던 미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 소리에 수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길다. 여자치고는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니다. 물론 요즘은 어린 애들도 워낙 키가 커서, 그런 아이들에 비하면 유리는 그저 보통일뿐이지만, 확실히 수연과 유리의 또래 중에는 저 정도 키면 큰 편에 속한다. 길게 쭉쭉 뻗은 팔다리와 군살이 없는 몸매라서 어느 옷을 입든 잘 어울린다. 워낙 입고 다니는 옷이 온통 비싼 옷뿐이라 옷 덕도 보고 있지만,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그걸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확실히 스타일은 좋은 것 같다. “유리 씨 기럭지는 진짜 좋은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너랑 서면 딱 좋지 않아? 키 차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발뒤꿈치를 들고, 수연의 머리 위 허공에서 손을 왔다갔다 거린다. 고개를 들어 미영의 손을 바라보았다. 옆에 딱 붙어서 걸어 다닌 적도 없고, 설사 옆에 있다고 해도 그 얼굴을 쳐다보려고 하지를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미영의 손이 있는 그 정도에 유리의 얼굴이 있을 것 같긴 하다.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영이 다시 씨익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다. “바람직한 키 차이네. 둘이 같이 붙어 다니면 보기 좋겠다.” “허튼 소리 하지 마.” “왜? 솔직히 너랑 유리 씨 진짜 잘 어울려. 키 차이도 그렇고, 얼굴이나 뭐, 이런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성격ㄷ….” 미영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슬금슬금 수연의 눈치를 보았다. 수연은 미영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의아한 눈길로 굳게 다문 입술을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내가 그 개싸가지랑 뭐가 잘 어울린다는 거야?! 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을 텐데 오늘은 왠지 반응조차 없다. 권유리 걔 이상해. 미영은 문득 어제 거의 반쯤 실신이 되서 돌아온 태연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서 하던 말을 떠올렸다. - 걔 이상해, 진짜 이상해. - 뭐가? - 오늘 3시간이나 스쿼시 했어. 원래 운동 좋아하는 애이긴 한데 그렇게 무리를 하진 않거든? 근데 진짜 말도 거의 안 하고 계속 공만 쳐대는 데 무섭기까지 하더라.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도, 그 여자가 내 집안의 모든 걸 망가뜨렸어, 라고 말하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안 해. - 그래? - 응. 자기, 혹시 수연 씨한테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아주는 미영에게 태연이 물었지만, 미영은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제 태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 이상행동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학교를 와서 수연의 화를 풀어줄 요량으로 수연을 마주 칠 때마다 끊임없이 애교를 부리며 옆에 들러붙었을 때 간간히 보이는 수연의 행동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인지 교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졸고 있고, 오래된 교무실 창문의 창틀이 떨어지는 바람에 유리창이 깨졌을 때에도, 유리가 깨졌다는 교감선생님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멍하니 깨진 유리를 바라보기도 했다. 거기에 아까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이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도 전부 무참히 씹고 멍하니 핸드폰만 계속 바라봤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수연의 얼굴은, 무표정이긴 한데 완전히 감정이 배제된 무표정은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얼굴에 잔뜩 서려 있었고, 심지어 아주 미묘하게 웃기도 한 것 같은데 수연은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해. 미영은 점점 가까워지는 유리의 인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진짜 이상해. 정수연이 왜 그러지? 어느새 유리의 차 뒷범퍼까지 왔다. 둘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리가 고개를 들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며 왔네? 라고 짧게 말했다.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 미영은 빙긋 웃으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리 씨. 몸은 괜찮으세요? 네, 뭐. “오늘은 일찍 왔네.” “어? 어.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 “그래.” 수연의 목소리가 왠지 힘이 없게 들린다면 그건 착각일까.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연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유리쪽을 바라보고 있다. 미영은 가만히 수연의 시선이 향한 곳을 쫓아갔다.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유리의 얼굴이 아니라 그 바로 옆, 그러니까 유리의 어깨 너머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정수연이. 살짝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딘가 묘하게 시선이 미영 자신과의 시선과 어긋나 있다. 아무래도 미영과 수연의 얼굴 가운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 오호. 미영은 빙긋 웃으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거, 뭔가 입질이 오는데? “미영 씨도 데려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저는 차가 있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유리 씨, 다음에 언제 기회 되면 또 봬요. 수연아, 내일 보자.” “응. 그래. 잘 가.” 미영이 인사를 하자 그때서야 유리가 차에 기대었던 몸을 움직여 조수석 문을 잡고 열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얼른 타라는 듯 수연과 조수석을 번갈아 본다. 갈게, 라고 걸음을 옮기는 수연의 손을 미영이 덥석 잡았다. 몸을 살짝 돌려 미영의 얼굴을 바라보자, 미영이 빙긋 웃더니 수연의 귀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유리를 한번 바라보던 미영은, 조그맣게 수연의 귀에 대고 말했다. “미스 정. 알고 있지? 진도는 빼라고 있는 거야….” “뭐?!” “후훗. 그럼 나 정말 간다. 유리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손을 흔들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미영의 뒷모습을 수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도는 빼라고 있는 거야. 분명 미영은 그렇게 말했다. 뜬금없이 진도 이야기는 왜 하고 지랄이야. 수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며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뭐해? 안 타?” 퉁명스러운 말투. 하지만 예전처럼 목소리의 끝이 지나치게 올라가 있진 않다. 어딘가 묘하게 달라진 유리의 목소리에 수연은 멀어져가는 미영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진도는 빼라고 있는 거야. 환청처럼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유리의 얼굴. 장난기 가득했던 미영의 목소리. 그 두 가지가 각각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자,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수연은 황급히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유리가 열어준 조수석 문을 살짝 잡으며 차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타자마자 익숙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익숙한 향. 유리를 처음 만난 지는 8일이 지났고, 유리와 그 터무니없는 내기를 시작한 건 오늘이 정확히 일주일 째. 그 짧은 순간에 유리의 차에서 나는 향이 익숙해져버렸다. 얼마 타 보지도 않았는데도. 코끝을 살짝 매만지는 동안 유리가 차 앞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유리가 팔을 뻗어 차 문을 닫자,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얼굴에 달아오른 열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 보이는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다. 티 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얼굴이 자꾸 붉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모습을 유리에게 들킬 수는 없다. 그럼 이 여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기에게 반했냐고 물어볼 테니,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유리는 안전벨트를 매주진 않는다. 원래 여자들에겐 그렇게 해준다면서 유독 자신에게만 그러지 않는 이유가 뭔지, 오늘따라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그 전에는 오히려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오늘은 궁금하다. 수연은 갑자기 떠오른 그 의문이 그저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애써 합리화 시킨 다음 직접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안전벨트를 왼쪽으로 잡아당기는데, 옆에 있던 유리가 물끄러미 수연의 그런 행동을 바라보다가 살짝 몸을 돌려 안전벨트를 덥석 잡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수연이 잡고 있는 안전벨트를 잡아당긴다. 그 손길에 수연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출발한다.” “응.” 안전벨트를 다 매고, 수연 쪽을 향해 있던 몸을 돌려 시동을 걸며 유리가 말했다. 오늘은 유난히 대화가 짧다. 원래는 지금쯤이면 이미 둘 사이에 현란한 언어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수연도 그렇고 유리도 그렇고 군더더기를 모두 빼 버리고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있었다. 차가 부드럽게 교문 사이를 빠져나가자, 수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돌려 턱 쪽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이 붙여준 대일밴드가 눈에 들어온다. 끝이 살짝 떨어져 있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대일밴드의 끝을 살짝 눌러 다시 볼에 붙였다. 유리의 눈이 아주 잠깐 커졌다가 다시 평소의 크기로 돌아오는 게 수연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에, 수연은 황급히 손을 떼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후끈후끈 더 달아오른다. “…더워?” “어, 어?” “…얼굴이 빨개져 있어서. 에어컨 틀까?” “아, 응. 좀 덥네.” 사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일부러 덥다고 말하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에어컨을 틀었다. 차가운 바람이 차안에 가득 찬다.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에 팔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수연은 재빨리 팔짱을 끼는 척 하며 팔을 가렸다. 차는 제법 속도를 높여갔다. 바깥풍경이 스쳐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걸 느끼면서, 수연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까 차에 타면서 본 오늘의 권유리는 웬일로 정장차림이다. 보아하니 구두도 신은 모양이다. 구두는 불편해서 싫다고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 것 같던데, 어디를 가길래 이렇게 쫙 빼입고 온 걸까. 직장에서 바로 온 것이라고 해도, 일이 끝나면 항상 회사 휴게실이나 화장실에서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퇴근한다고 들었으니 굳이 정장을 입고 온 걸 보면 무슨 약속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언제는 뭐 저녁에 데이트를 해야 하니 데리러 오겠다고 해놓고서, 결국 데이트 따윈 오늘도 못 해보는구나. 문득 수연의 머릿속에 강한 여운 남기며 스쳐지나가는 생각. 그 생각의 끝에서야 겨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자각하게 된 수연은 기겁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힘을 주어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멈췄다. 자신의 얼굴만한 동화책을 한 팔에 낑낑대며 들고, 다른 쪽 손은 엄마에게 잡힌 채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차 앞을 스쳐지나가는 아이와, 그 아이를 보며 웃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백미러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때 마침 유리 역시 백미러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백미러를 통해 시선이 마주쳤다. 유리가 황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민망해졌다. 너무 민망한 나머지 수연은 결국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도, 동화 좋아해?” …아…. 뭐야. 왜 이딴 말이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난데없이 웬 동화. 아까 아이가 들고 있었던 동화책 탓인지도 모른다. 수연은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걸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유리 역시 어이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연을 바라보았다가, 신호가 바뀌자 차를 출발시키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수연은 더 부끄러워졌다. 그 웃음을 끝으로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할 생각은 없는 걸까, 아니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생각하는 걸까.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연 역시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둘 사이에 머리를 빠끔히 내밀고 있다. 수연은 정말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리와 자신 사이에는 이런 분위기가 흘러서는 안 된다. 탐탁치가 않다. 마치 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유리와 자신은 끊임없이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고 빈정대거나, 욕을 하거나, 상대방을 낮추고 스스로는 높여가며 말다툼을 해야 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각 관계마다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고, 어울리는 상황이 있다. 유리와는 이런 분위기보다는, 서로 기분 나빠하며 성질내는 분위기가 맞는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숨 막힐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이 분위기를 없애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결국 수연은 일부러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일부러’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유리와 말이 섞이기만 하면 자연스레 비꼬는 말투로 말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꾸며내기까지 하고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스로의 변화를 수연은 눈치 채지 못했다. “하긴, 권유리 너는 어렸을 때부터 동심 같은 건 안 키웠겠지. 유치원 때도 여자 꼬시고 다닌 거 아냐? 아니야, 아예 태어나던 그 순간에도 산부인과 간호사한테 눈웃음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넌 말을 해도 왜 그렇게 말을 해?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알고 싶어? 알아봤자 좋을 건 없을 텐데? 알고 싶다면 말 해줄 수 있….” “됐어. 뻔하겠지. 됐네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흥.” 콧방귀를 뀌었다. 유리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린다. 수연의 말에 빈정이 상한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유리의 모습을 보자 수연은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래, 너와 나는 이래야지. 진짜 금방 전의 분위기는 대체 뭐였던 걸까, 사람 숨 막히게. “뭐, 어쨌든 동화 안 좋아하긴 해.” “그래. 너한테 그런 순수한 동화 같은 건 안 어울리긴 하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자기는 동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봐? 하긴, 착각은 자유니까.” “왜 이러셔. 내가 동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것도 애들 잡아먹는 마녀나 나오는 헨젤과 그레텔 같은 게 아니라 백설 공주 같은 우아한 걸 좋아했다고.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이나 꼬시고 다녔을 너랑은 격이 달라.” “어이쿠. 그러세요? 하찮은 저랑 격이 달라서 좋으시겠어요?” “어, 그래. 좋다, 좋아. 아주 미친 듯이 좋아. 아, 진짜 말투 재수 없어.” “내가 말했지? 나 좋아하는 거 아니까 표현은 좀 자제하라고.” “……어제 진짜 죽여 버릴걸 그랬어.” 유리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요동을 친다. 이를 꾹 악물었는지 볼살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을 이렇게 투닥거리다보니 왠지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제야 무언가 만족스러워진 수연은 이상하게 아까부터 온 몸에 감돌던 긴장을 풀었다. 아까부터 벌게져 있던 얼굴도 가라앉았다. 여유를 조금 되찾은 수연은, 슬쩍 다리를 꼬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근데, 동화는 왜 싫어해? 어렸을 때에는 대부분 다 동화 좋아하지 않나.”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빙글 돌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과, 그 손에 이어지는 손목의 선이 꽤나 괜찮게 보였다. 차체가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전부 꺾이자, 다시 핸들을 푼다. 저 멀리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정말 유리가 그렇게 강조하던 데이트를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이제 7일이 지났으니 앞으로 3주가 남았다. 그 3주 동안 어떻게 수연을 꼬시겠다는 건지. 지난 7일간은 작업이고 뭐고 둘이 끊임없이 서로 물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본격적인 시작은 오늘부터. 다만 3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작업을 걸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오늘 하루도 공치게 생겼다. 멍청하긴. 오늘은 시간 좀 있어서 처음으로 놀아주려고 했는데…. 아니, 뭐. 내가 얘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너무 내기에 쉽게 이기는 것도 재미가 없으니까. 한두 번쯤은 놀아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근데 뭐야. 내가 기껏 선심 좀 쓸려고 했더니 이 인간은…. 쯧쯧. 그러니까 넌 안 돼.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100m 남짓 되는 거리에까지 오자 묵묵히 운전을 하던 유리가 그제야 아까 수연이 물었던 질문에 대답을 한다. “그런 동화들은 너무 왕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잖아.” “하긴, 그렇기야 하지.” “백설 공주도 그래.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애가 그냥 마지막에 나타나서 별 힘도 안 들이고 키스 한 번으로 공주와 결혼. 그게 말이 되냐? 키스 한 번으로 여자를 데리고 가는 놈이나, 키스 한 번으로 같이 동거 동락했던 난쟁이들 버리고 간 여자나.” “흐음. 그래도 그 키스로 죽었다 살아난 거잖아. 어떻게 보면 생명의 은인인데 뭐.” “생명의 은인? 야, 애초에 진짜 생명의 은인이 누군데.” 골목의 입구에서, 다시 한 번 핸들을 꺾는다. 한심하다는 듯 한 목소리에 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고작 동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너무 진중한 그 얼굴이 제법 귀엽게 느껴져서 수연은 유리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수연의 웃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진짜 생명의 은인은 왕자가 아니야. 그 전에 나왔던 사냥꾼이지.” “어? 어째서?” “…내참. 생각해 봐. 그 사냥꾼한테 백설 공주 죽이라고 명령한 여자가 누구야? 왕비잖아. 그 나라의 권력실세인. 그런데 그 여자 말을 어긴 거잖아, 그 사냥꾼은. 그럼 그 표독한 왕비가 가만 놔뒀겠어? 그 사람은 자기 목숨 내놓고 백설 공주 살려준 거야. 자기 목숨이랑 백설 공주 목숨이랑 교환한 거라고.” “…….” “따지고 보면 거기서 백설 공주를 가장 사랑한 사람은 사냥꾼일지도 모르지. 자기 목숨 걸고 백설 공주를 살려줬으니. 난쟁이나, 왕자는 자기 목숨을 걸진 않았잖아. 그런데 정작 사냥꾼은 얼마 나오지도 않고, 그걸 읽는 아이들 기억 속에도 크게 남아 있지도 않고. 제일 불쌍한 게 사냥꾼이야, 진짜로.”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거구나. 예상외의 대답에 수연은 할 말을 잃었다. 골목에 들어선 차는 익숙하게 수연의 집을 찾아냈다. 딱 한번 온 것뿐인데 길을 다 기억하고 있는 세심함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금방 집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집이 점점 커지는 걸 바라보면서, 수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유리에게 질문을 했다. “저기, 너 오늘 약속 있어?” “어? 왜?” “아니. 항상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던 네가 정장을 입고 오니까, 궁금해서.” “아.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낸 핸드폰 런칭파티 하거든. 거기 참석 해야 해서.” “그럼 일하러 가는 거구나….” “아니 뭐, 일하러 가는 건 아니고. 오빠가 이사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낸 모델이라 축하도 해줄 겸, 겸사겸사….” 차가 멈췄다. 이제 수연은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면 되고, 유리는 런칭파티인지 뭔지 거기에 가면 된다. 집에 들어가서도 밤늦게까지 서로 문자나 전화를 하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니, 오늘의 유리와 수연의 인연은 이걸로 끝. 기어를 P에 맞춰놓는 유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로 이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그런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수연은 그 기분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유리가 안전벨트를 풀어주려는 모양인지 살짝 몸을 돌려 수연을 한번 흘끔 바라보고선 손을 뻗는다. 유리의 그런 행동에, 수연이 다급히 말을 했다. “그, 그럼 연예인도 와?” “에?” “연예인도 오냐고. 거기에.” “어, 뭐. 이번에 모델이 이효리라고 했으니까 이효리도 올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눈을 반짝였다. 사실 머리보다 입이 먼저 반응한 거라 말을 하는 도중에도 자신이 왜 일부러 유리를 붙잡고 있는 듯 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데, 이효리라는 그 이름을 들으니 옳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갈래.” “뭐?” “나도 갈래. 나 이효리님 짱팬이야. 갈 거야. 가고 싶어. 내 눈으로 그 사람 꼭 보고 싶어.” “이봐요, 아가씨. 거기가 무슨 동네 아줌마들 모이는 술 모임도 아니고….” “왜, 나는 가면 안 돼?! 나 데리고 가기 싫으니?! 너 회장 손녀잖아. 나 하나쯤은 데리고 갈 수 있는 거 아냐?! 그리고 너, 이효리님 부를 때는 뒤에다 님자 붙여. 어디서 감히 존함 석자를 함부로 불러대고 난리야?!”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말하자 유리가 입을 굳게 다물며 볼을 긁적거린다.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 해 보이던 유리는 결국 입맛을 쩝 다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전벨트를 풀려고 수연 쪽을 향해 있던 몸을 다시 돌리고 기어를 바꾸는 모습을 보며 수연은 빙긋 웃었다. 집 앞에 멈추었던 차가 다시 부드럽게 출발한다. 멀어져 가는 집을 바라보며 수연은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결코, 정말 결코, 백설 공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유리가 다르게 보여서, 그런 유리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정말 그저 오로지 이효리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희진이도 올 텐데…. 아마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은 유리가 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수연은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늦을 것 같다는 말 정도는 해야지 밤늦게까지 기다리지는 않으실 테니. * * * 시간은 상대적이다.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즐거운 상황, 혹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는 1시간도 1분처럼 느껴지고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1분도 1시간처럼 느껴지는 게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흐름의 속도는 다양해진다. 수연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시간의 흐름은 각기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수연 씨는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이 남자에게는 (어쩌면) 3분. “아니, 뭐. 저는 그다지….” 그리고 수연에게는 3시간. “왜요? 머리도 식힐 겸 해외로 돌아다니는 것도 참 좋잖아요.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제가 같이 가 드릴 수도 있는데.” 객관적인 시간은 30분. 3분, 혹은 3시간, 혹은 30분. 짧거나, 혹은 긴 그 시간동안 지금 수연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의 유럽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막 끝내었다.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유럽의 문화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힘든 길을 택했다나. 그래놓고 오페라 봤던 이야기, 그 지역의 명사들만 찾는다는 레스토랑 가서 식사했던 이야기 등등을 늘어놓는 꼴이 가관이다. 이 남자에게는 1박에 한화로 50만 원 이상을 내야하는 호텔에 묵어가며 돌아다닌 게 힘든 여행인가보다. 돈 지랄한 거 자랑하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효리 보겠다고 따라왔지만, 결국 이효리는 보지 못했다. 유리가 런칭파티가 열리는 이곳을 잘 몰라서 빙빙 도는 사이, 이효리는 이미 왔다가 사라진 뒤였다. 파티 장에 들어오자마자 까치발까지 하며 사람들 사이를 둘러보았지만 원하던 이효리는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표정을 짓는 수연에게 미안했는지 유리는 수연의 에스코트를 아주 잘 해주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수연을 인사시키는 걸 잊지 않고, 음식도 손수 대령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곳에 들어선지 딱 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 그 때까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유리만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데, 그런 걸 부담스러워 하지도 않고 잘 받아준다. 몸에 배어버린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활발한 말투. 수연이 그렇게 하찮게 보던 여자지만 확실히 사교계에서는 알아주는 모양이다. 게다가 뭐가 그렇게 아는 여자들도 많은지. 만나는 여자마다 오랜만이야, 호호 거리며 유리에게 들러붙는데 옆에 있는 수연은 보이지도 않는 것 같다. 처음엔 에스코트도 잘 해주던 유리가 1시간이 지나니 끊임없이 몰려드는 여자들의 홍수 속에서 바보 같이 으헝헝 거리며 웃는 꼴을 뵈기가 싫어서 혼자 놀겠다며 유리 옆에서 빠져나왔다. 혹시나 잡을 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나 혹시나였을 뿐, 그럼 그렇게 하라며 웃던 권유리의 그 시커먼 얼굴은 정말 심각하게 폭행 충동을 일으켰다. 수연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파티장 한 곳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자 두 명에게 둘러 쌓여 희희덕 거리고 있는 유리가 보인다. 유리는 저렇게 웃고 떠들고, 수연은 혼자 있는 그 사이에 웬 파리 한마리가 꼬인 상황. 마음 같아서는 당신에게 관심 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정식으로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인지라 말썽을 피우고 싶지 않아 꾹 참았더니, 이 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더니 이제는 여행도 같이 가줄 수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작업멘트를 날려대고, 처음엔 흘끔흘끔 바라보던 그 시선도 이젠 대놓고 몸을 훑어대고 있었다. 몸을 훑는 그 시선에 기분이 나빠지고 있는데, 저 쪽에 있던 유리가 킥킥 거리며 웃다가 문득 이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기가 싫은 수연은 서둘러 시선을 돌려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수연이 와인을 마시자 앞에 있는 남자도 따라서 자신의 손에 들린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와인 잔에 입을 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자, 유리로 된 잔 너머로 빙긋 눈웃음을 짓는다. 그 눈웃음을 보자마자 갑자기 사레가 걸렸다. 수연은 얼굴을 확 찌푸리고 입을 막고 켁켁 거렸다. 놀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수연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 손끝에서 무슨 지렁이라도 기어 나오는 건지, 손이 닿자마자 온 몸에 슬금슬금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수연 씨,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 으니까 손 좀 치워주실래요, 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몸을 숙이고 입을 틀어막은 수연의 손목을 누군가가 덥석 잡는다. 고개를 휙 올려 손목을 잡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자들과 킥킥 거리고 있던 유리가 자신의 눈앞에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다. 수연은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한 건 수연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그 남자도 마찬가지인지, 얹었던 손을 황급히 떼고 어색하게 웃으며 유리에게 인사를 한다. “아, 유리야 오랜만….” “네. 그러네요.” 놀랍도록 싸늘한 말투. 수연은 흘끔 유리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를 쳐다보는 눈빛이 꽤나 날카롭다.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치고는 남자를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유리의 손에 몸이 이끌린 수연이 살짝 비틀 거리며 유리의 옆에 섰다. 애써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그에 반해 잔뜩 굳어 있는 유리의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이 여자는 저와 같이 온 여자입니다. 혹시 무슨 용건이라도?”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말씀은 다 나누셨나요?” “어? 어어.” “그럼,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연의 손목을 잡은 채로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곳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구두 신은 발이 아프다고 그렇게 칭얼대더니 발에 꾹꾹 힘을 주어가며 앞으로 걸어 나간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질질질 끌려가며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수연과 유리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다시 고개를 돌려 약간 앞에서 묵묵히 자신을 끌고 가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옆모습이 보인다. 수연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유리의 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힘을 꽉 주고 있는 탓인지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있다. 잡고 있는 손목에 따뜻한 기분이 든다. 꼭 그 부분만 열에 달군 것처럼 후끈후끈 거리는 것 같아서, 살짝 주먹을 쥐었다. 화가 난 것 같다. 그런데, 왜? 왜 화가 났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여자들과 웃으며 떠들던 아이가 자신과 이 남자가 같이 서 있는 걸 보고나서 갑자기 화를 내고 있다. 수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낯설다. 분명 화가 난 건 맞는데, 정말 왜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앞서 나가는 유리의 구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저 남자랑 있어서, 화난 건가. 그런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얘가 왜 화를 내. 화를 낼 이유가 없지. ……. ……그래도 혹시? 수연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뭐, 진짜 그런 거라면, 귀여운 면도 있네. 이 개싸가지. 파티장의 한쪽 구석에 이르러서야 유리는 잡고 있던 수연의 손목을 놓았다. 아프잖아. 그렇게 중얼 거리며 손목을 잡았더니 유리가 퉁명스럽게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수연은 손으로 손목을 슥슥 문지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났어?” “어?” “화났냐구. 표정이 왜 그래?” “아, 응. 조금.”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그 목소리에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달아올랐다. 재빨리 고개를 숙여 애꿎은 손목 위의 피부만 자꾸 문질렀다. 손가락 끝이 스칠 때마다 손목에서 바삐 뛰고 있는 맥박이 느껴진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묻고 난 후에 튀어나올 유리의 대답 때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대답을 할까. 그리고 그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그리고 만약 자신이 예상하는 대답이 나오면 그 대답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등등. 온갖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얽혀 있다. 말이 없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는 고개를 돌리고 파티장 한 가운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저 놈이 예전에 내 애인한테 작업 걸었었거든. 저 놈 완전 개망나니야. 아, 다시 보니 옛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울컥…. 악! 뭐야?!” “…내 손목을 꽉 잡은 벌.” 그럼 그렇지. 갑자기 김이 팍 샌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앞에 서 있는 유리의 정강이를 걷어 차 버렸다. 각도 조준을 잘 못해서 하이힐의 굽이 정강이에 찍혔다. 유리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몸을 굽히고 다리를 어루만진다. 대체 몇 번째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다리를 어루만지던 손을 들어 이번엔 뒤통수를 부여잡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이건 나의 이효리님이 있다고 구라친 벌.” “왔다 간 건 맞잖아. 언제 내가 구라를 쳤….” “이게 또 어디서 언니 앞에서 눈을 부릅떠?!” 손을 들며 소리를 지르자 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아무래도 어제 두들겨 맞은 그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나보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그 모습을 보니 급격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어쨌든 그런 수모를 당할 이유도 없이 당한 것이니) 자신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라는 게 왠지 분해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째려봤다. 와…진짜 한살 차이 가지고 재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아니야.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투덜투덜 거리며 입을 삐죽 내민다. 또 꼬마 아이 같은 표정. 그 표정을 보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입 꼬리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는데, 수연은 정말 억지로라도 그 입 꼬리를 손으로 잡고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확실히 어제부터 좀 이상한 것 같다. 화장실에서 대일밴드를 붙여주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꾸 웃음이 실실 나오는데다 별 이상한 생각도 들고, 백설 공주의 사냥꾼이 어쩌고저쩌고 운운하는 유리의 모습도,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아주 잠깐 멋있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수연의 옆에 서서 여전히 무슨 말인가를 작게 중얼거리며 투덜투덜 거리고 있는 권유리. 그리고 그런 권유리를 대하는 정수연의 태도는, 수연 스스로가 생각해도 하루 만에 많은 게 변해버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샐쭉한 그 표정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어제 아침에, 시트가 내려간 후에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침을 꿀꺽 삼키던 그 멍한 표정. 탁 풀려버린 눈동자를 보는 순간에 수연은 자신의 정신마저 탁 풀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표정이 순간적으로 귀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보처럼 멍해진 표정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수연에겐 엄청난 쇼크였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자꾸 그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아 괴로워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옆에 있는 유리에게 더 화를 냈었다. 그러는 자신의 모습이 꼭,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남자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정도.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대체 이게 무슨 느낌일까. 싸우면서 키운 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만난 지 7일 동안 아무리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났다고 해도 그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감정이 급격하게 변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뵈기 싫던 여자가 어떻게 귀엽게 보일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여자를 보며 어떻게 멋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걸까. “어? 자기?”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어느새 유리의 옆에 팔짱을 낀 채로 딱 달라붙은 여자가 시야 속에 들어온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 유리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수연은 탄식을 내지었다. 김희진이네?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탤런트. 중년 남성이 대다수인 교무실에서조차도 끊임없이 찬양을 받던 그 여자. 남자 선생님들이 하도 난리 길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수연 역시 그 여자가 나온다는 드라마를 한번 찾아보기까지 했다. 스토리가 재밌어서 그 뒤로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는데,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유리의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다. 수연은 희진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재빨리 그 여자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탤런트는 다르구나. 예쁘네, 엄청. 아, 근데 개싸가지는 연예인도 아는구나. “아, 왔구나. 언제 온 거야?” “나? 금방. 촬영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오자마자 자기 찾았는데 여기 있었구나.” 자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 여자가 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말끝에 콧소리도 살짝 들어간 게, 아무래도 이 여자는 지금 유리한테 애교를 떨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유리가, 정말 부드러운, 그러니까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희진의 앞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는 듯 한 그 손길에 희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둘 사이에 풍겨오는 분위기가 왠지 낯이 익은 수연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생각했다. 저런 상황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그리고 자주 봤던 상황. 아, 그래. 기억의 창고를 마구 휘저어대던 수연은 기억의 끝에 서 있는 작은 두 얼굴을 생각해내고 박수를 쳤다. 황미영과 황미영의 때때. 그 두 사람이 자주 만들어내던 분위기. 바로 그 분위기였다. 어? 그럼? 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리와 희진을 바라보았다. 희진이 유리의 귀에 무슨 말을 속삭이자,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뭐야, 그럼. 김희진이랑 개싸가지랑 사겨? “근데, 이 여자는 누구?” “아, 맞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희진이 수연 쪽을 바라보고 유리에게 묻는다. 이 여자라는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진아. 이쪽은 정수연. 오늘 내가 데리고 온 여자. 이쪽은 김희진. 알고 있지? 희진이가 누군지는.” 유리가 데리고 온 여자라는 말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던 희진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유리는 그 여자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여자를 마주보고 있는 수연은 그 작은 변화를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이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왜 불쾌한 표정을 짓는 걸까, 라고 수연이 짧게 생각하는 동안 희진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김희진이라고 해요. 유리 씨가 다른 여자를 이런 곳에 데리고 오는 일도 있네요? 나 이외에는 한 번도 안 그랬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정수연이라고 해요. 그런가요? 전 전혀 몰랐어요.” 손을 맞잡자 여자가 힘을 꽉 주며 빙긋 웃었다. 기싸움이라도 하자는 건지. 괜히 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 같이 빙긋 웃으며 손을 꽉 쥐었다. 두 여자가 손을 잡은 채로 서로 놓지 않고 웃고만 있자 그 가운데 서 있는 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 힘을 주어서 맞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결국 보다 못한 유리가 손 안 놓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희진이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손이 저릿저릿 해서, 등 뒤로 살짝 돌려 마사지를 했다. 그건 희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희진도 손을 뒤로 돌린 채로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여전히 수연을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고 있고, 수연 역시 마찬가지. 마주친 시선에서 불꽃이라도 일 것 같다. 두 여자가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동안,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유리에게 뛰어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했다. “아가씨. 이사님과 사장님이 찾으십니다. 소개해 드릴 분이 있다고….” “그래요?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어. 나 금방 올게.” “알았어. 얼른 와, 자기.” “빨리 안 오면 죽여 버린다, 너.” 빙긋 웃으며 나긋하게 말하는 희진과, 그런 희진의 말에 괜히 열 받은 수연의 단호한 말투. 어느 쪽에 대답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것 같던 유리는 결국 고개만 살짝 끄덕거리고 안내하는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수연과 희진은 동시에 멀어져 가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중년 남성 둘과, 젊은 남자 한 명에게 다가간 유리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키스 잘하죠?” “네?” 저 쪽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의 옆에 서서 빙긋 웃고 있는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희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희진과 같이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은, 뜬금없는 희진의 말에 유리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희진을 보았다. 유리를 바라보는 눈이 그윽하다.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란 게 이런 걸까. 희진이 이런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유리도 이런 눈빛으로 희진을 바라볼 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자기 말이에요. 키스 잘하지 않나요? 아, 유리 씨랑 나랑 사귄다는 건 알고 있죠? 몰랐더라도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우리 자기. 저 붉은 입술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 단어에 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소개해주는 중년의 남성과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유리가 어떤 말을 하자, 상대방이 껄껄껄 거리며 웃는다. 수연이 아무 대답이 없자, 희진은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나지막이 울린다. 이 여자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키스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의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다. 애초에 키스는 커녕 손도 안 잡아본 사이니. 물론 업히는 거야 했지만, 그것도 억지로 한 것 뿐. 그에 반해 이 여자는 수연의 생각대로 유리의 연인이 맞았다. 그리고 연인이라면 당연히 스킨쉽도 해봤을 터. “키스 안 해봤어요?” “…….” “안 해봤구나. 의외네요? 천하의 권유리가 아직 키스도 안했다니.” “…….” “둘이 알게 된지 지금 8일째 아닌가요? 내기한 지는 일주일째고. 그럼 키스 정도는 이미 했어야 정상인데?” “…….” 유리와 수연이 알게 된 날짜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유리가 이 여자에게 자신과의 일을 전부 다 밝힌 모양이다. 한 달 안에 꼬시겠다고 신신당부했던 사실마저도 숨기지 않고 말했을까. 보통 연인이라는 사람에게는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을 텐데. “한 달 안에 꼭 넘어오게 하겠다고 이를 갈던데, 아직까지 키스를 안했다니…. 진짜 의외네요. 우리 자기는 관계 진전에 스킨쉽만큼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 “…그만큼 매력이 없나….”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이건 분명 수연이 들으라고 고의적으로 한 말.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유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태평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 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여자. 유리가 한 번 웃으면 같이 따라서 빙긋 웃고, 유리가 얼굴을 찌푸리면 같이 따라서 얼굴을 찌푸린다. 얼굴위에 떠오르는 그 표정들이 전부 유리와 닮아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닮게 돼, 라고 말하던 미영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갑자기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저 인간이 저와 있었던 일을 일일이 다 말하나봐요? 그 내기까지도 다 말했어요?” “네. 우리는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니까요.” “연인사이라면서요. 연인한테 다른 여자 꼬시겠다는 말도 그냥 해요?”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숨기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이제야 희진이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본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한 표정. 그 표정을 보니 수연은 정말 말문이 막혔다. 유리는 정말 이 여자에게 자신에 대해 모든 걸 다 말한 모양이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내기를 했는지도 전부 다. 한 달 안에 다른 여자를 꼬시겠다는 말을 자신의 연인에게 당당히 말하는 유리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 여자가 이상한 걸까. 혹은 둘 다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유리가 그렇게 대놓고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자신의 연인인 희진에게 말했다는 것은, 수연의 일에 관한한 유리가 희진의 눈치를 볼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라는 것. 즉, 애초에 유리는 수연을 말 그대로 내기의 상대방으로 보았을 뿐이지, 정말 단 1%도 수연을 내기의 상대방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자신의 연인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는 걸 알기에 희진 역시 그 이상한 내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쐐기를 박는 희진의 말이 들려왔다. “어차피, 권유리가 사랑하는 여자는 김희진이잖아요. 수연 씨는, 한 달 후면 그저 스쳐지나간 여자 중 한명이 될 뿐이니, 유리 씨가 저한테 굳이 숨길 필요는 없죠.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하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수연은 얼굴을 굳혔다. 수연의 표정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희진이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귀를 후벼 파고 들어와 뇌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더 있다간 이 여자 칠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주먹을 꼭 쥐고, 애써 입 꼬리를 올려가며 억지 미소를 지어냈다. “저 먼저 가볼게요. 유리한테는 먼저 갔다고 전해주실래요?” “왜요, 벌써 가시게요?” “네, 피곤하네요.” “그러시다면야.”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또 다시 웃는다. 분하게도 그런 표정을 짓는 저 얼굴은, 여자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 누구나 다 반할 얼굴. 이런 여자가 사랑한다는데 거부할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다. 설사 그게 한 사람에게 정착하기 싫어하는 천하의 권유리라도. 이 여자가 다른 여자들 그만 만나, 라고 말한다면 유리는 정말 주위의 여자들을 다 정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 여자 중에 자신이 포함될 것이다. 아우디 수리비 따위 안 줘도 되니 내기는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애초에 유리에게 있어서 자신은, 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달 동안 마주쳐야할 여자 일뿐이니까. 애써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수연의 인사에 희진 역시 고개를 숙인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몸을 돌리려는데, 문득 희진이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은근히 긴장했는데, 긴장할 건덕지도 없잖아?” 이번에도 역시 아까처럼 혼잣말 같이 말했지만, 혼잣말은 아니다. 수연이 들을 걸 알고 일부러 말했다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말 분한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 만난 여자에게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것이며, 왜 이런 취급을 당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느낌이 드는 건지. 이효리 보러 와서 결국 이효리는 못 보고 기분만 잔뜩 망가졌다. 돌아서서 한 마디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럴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몸을 마저 돌렸다. 몸을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 유리가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게 시야 속에 잠깐 들어왔다 사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그 얼굴의 잔상이 눈에 남아있었지만, 애써 그 잔상을 지워 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 정수연!” 다급하게 수연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은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했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급하게 걸어오는 모양인지 소리가 들려오는 주기가 짧다. 그 발자국 소리가 어느 정도 커지자, 그 소리 사이로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간다. 수연 씨 피곤해서 간데. 어? 뭐라고? 피곤하다던데? 많이 피곤한가 봐. 아, 그럼 나 쟤 데려다주고 올…. 괜찮데. 집에서 데리러 왔데. 집에서? 음, 그래도 인사는 해야…. 자기, 그냥 내버려둬. 아니, 그래도…. 냅두라니까?! …으, 응…. 아니, 왜 다들 오늘따라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권유리, 이 병신 같으니. * * * 드르륵.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또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떤다. 침대 시트를 머리끝까지 올려서 덮은 다음 그 안에서 웅크리고 누워있던 수연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또 왔어. 이제 70번 째 돌파. 신기록이네. 장하다, 장해. 어휴.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게 틀어막았는데도 손가락 틈새 사이로 소리가 파고드는 건지, 아니면 그냥 환청이 들려오는 걸 자신이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 진동소리가 귓가에 울려온다. 대체 몇 분 째인지. 저 진동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 더운 날에 침대 시트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있는데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진동이 울리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 모양인지 진동소리가 뚝 끊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부들부들 떠는 핸드폰. 결국 수연은 웅크리고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 덕택에 침대시트가 머리끝에서부터 스르르 몸을 타고 떨어진다.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다. 아직 채 떨어지지 않는 시트를 발로 차서 걷어버리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개싸가지. 화면 위에 떠 있는 그 네 글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과거 61통이나 전화해 댄 전적이 있으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갈지는 몰랐다. 결국 오늘은 70통을 넘었다. 대체 뭐하는 인간일까, 이 인간은.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하는 것도 웬만한 끈기가 없다면 못 할 텐데, 정말 끈기 하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도 진동이 울려 대서 그런지 핸드폰은 뜨거워져 있다. 여전히 손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수연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를 해대는 유리도 어이가 없지만, 받기 싫으면 그냥 핸드폰 꺼놓으면 될 걸 굳이 꺼놓지 않고 있는 자신도 어이가 없다. 차라리 꺼놓기라도 하면 유리도 그냥 포기할 텐데, 끈질기게 전화를 한다며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굳이 꺼놓지 않는 걸 보면, 자신에게 전화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유리의 근성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전화하는 게 정말 짜증나기도 하는데, 계속 전화해주는 유리의 모습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수연은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엔 이번엔 전화를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왜 그런 알 수없는 감정이 드는 건지는, 일단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 …너 지금 나 시험하냐? “뭐?” - 받기 싫으면 꺼놓기라도 하던가. 계속 켜놓으니까 자꾸 전화하게 되잖아. “내가 왜 너 때문에 핸드폰을 꺼야 하는데? 너 말고도 연락 올 사람 있거든?” -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네 집 근처야. 나와. “…뭐?” - 너네 집 근처라고. 너 지금 한 시간 만에 전화 받은 거 알지? 나 한 시간 전부터 여기에 있었어. 지금 당장 튀어나와. 집 앞에 오랫동안 세워놓으면 좀 그럴 것 같아서 밑으로 조금 내려왔어. 그렇게 안 머니까 얼른 나와. “야, 이 밤중에 갑자기….” 말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수연은 핸드폰을 침대위에 던져놓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어 몸을 밖으로 쭉 내밀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헤드라이트는 끈 채로 서 있는 은색 차가 보인다. 어둠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어렴풋이 보이는 그 차체를 보며 수연은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저 멍청이. 생각은 그렇게 해도 1시간이나 기다렸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수연은 서둘러 화장대에 붙은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고선 방을 나왔다. 이 밤중에 어디 가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이나 다녀오겠다고 대충 둘러대고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현관문 앞에서 바라본 정원은, 오늘따라 굉장히 넓어보였다. 대충 구겨 신고 나온 운동화에 발을 좋게 집어넣고, 길게 이어진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와, 정원을 가로질러 있는 돌들을 즈려밟으면서 대문까지 뛰어가고, 대문을 열고 나왔을 때에는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수연이 대문을 열고 나온 걸 본 모양인지 헤드라이브 불빛이 한번 깜빡 거린다. 숨을 다 고른 수연은 얼굴에 살짝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다시 한 번 앞머리를 재정돈 한 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천천히 걸어갔다. 대문까지는 실컷 뛰어왔지만, 대문에서부터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싶지 않았던 터라 일부러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멀리 떨어진 차에서 클랙션이 두 번 울렸다. 신경질적으로 클랙션을 눌렀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제야 발걸음을 조금 빨리 옮겨서 차 까지 다가간 수연이 조수석 쪽 문 앞에 서자 차창이 스르륵 열린다. 몸을 살짝 숙이고 차 안에 타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내가 뭐 너네 집 애완견이야? 오라고 하면 오게?” “이미 와 놓고 또 딴 소리 하긴. 차 타.” “이 밤중에 너랑 폐쇄된 공간에 있다가 무슨 짓 당하라고 나보고 차를 타래?” “밖은 덥잖아. 차 안은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고. 너 땀도 많이 흘린다며? 미영 씨한테 들었어. 잔말 말고 타. 얼마 안 걸리니까.” 몸을 옆으로 길게 빼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살짝 열린 그 문을 당겨서 차 안에 몸을 집어넣은 수연은, 차 문을 닫으면서 흘끔 사이드 미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왜 이 밤중에 나오라고 하는 거야, 진짜. 그래도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괜히 심통이 나서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수연을 보지도 않은 채로, 핸들을 잡고 앞만을 주시하고 있는 유리가 입을 열었다. “아까 희진이가 무슨 말 했지?” “어?” 대뜸 묻는 그 말에, 사이드 미러를 보던 수연이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턱에 붙어있는 대일밴드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엔 무뚝뚝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까 희진을 바라보며 지었던 그 부드러운 미소가 생각났다. 희진에게는 그렇게 웃어주면서, 왜 자신과 있을 때에는 저런 표정만 짓는 걸까.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이 눈에 들어온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별로 없다. 이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는 하는 말이 희진과 관련된 이야기. 갑자기 잠이 쏟아져 오는 듯 한 기분도 들었다. “별 말 안했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 한 거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 “응.” “진짜지?” “정말이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 말끝을 흐리는 유리의 목소리에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 것 때문에 온 모양이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도 없고,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기를 바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김희진이라는 여자와 관련된 이유가 아니면 더 나았을 텐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얹어져 있는 손을 모아 손가락 끝을 마주한 채로 빙빙 돌렸다. 아까 퇴근 하고 나서 차에 탔을 때 둘 사이에 깔렸던, 그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유리가 입맛을 다신다. “…그게, 희진이가 조금 질투심이 심해. 너도 눈치는 챘겠지만 걔랑 나랑 사귀…는데 말이야.” “그 여자가 말했어.” “아, 그래? 아니, 어쨌든 희진이 말대로 내가 그런 자리에 걔 말고 다른 여자 데리고 간 건 네가 처음이거든. 그래서 혹시 무슨 심한 소리라도 했나 싶어서…. 걔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 게다가 네가 그렇게 갑자기 자리뜨기도 했고.” “…….” “그래서 부른 거야. 혹시 희진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려고. 그래도 별일 없었다니까 다행이네. 난 정말 네가 갑자기 가버려서, 혹시 희진이가 너한테 무슨 짓 했을까봐….” “…키스.” 연인의 잘못은 자신이 대신 사과하겠다는 건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구구절절 읊는 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연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수연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 두 단어에 유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연에게까지 느껴질 정도. “뭐라고?” “너랑 키스해봤냐고 물어봤어, 그 여자가.” “…….” 당황했는지 핸들을 꼭 쥔 채로 혀로 살짝 아랫입술을 적신다. 수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빙빙 돌리고 있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어제 유리와 한바탕 하느라 손톱이 다 부러져서, 며칠 전에 미영과 함께 받은 네일아트도 엉망이 되었다. 언제 또 한 번 받으러 가야겠네. 손톱도 다시 기르고. 그렇게 생각하며, 빙글빙글 돌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다시 무릎 위에 얌전히 손을 놓았다. 아까 보았던 희진의 손톱은 예쁘게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예인이니, 손톱 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을게 분명하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대답 할 가치도 없어서 대답 안했어.” “…….” “너 키스 잘한다고 칭찬 하던데? 그런 걸 나한테 왜 말하는 거야, 대체.” “…….” “하긴 키스야 했지. 차끼리. 뒷범퍼와 앞범퍼가 너무 열렬하게 키스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 아냐. 지금도 그 생각하면 아찔해 오는데 권유리랑 키스라니, 무슨 그런…. 아니, 그것보다 그 여자는 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대뜸 키스가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아, 하긴 권유리랑 사귀는 데 그다지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진 않겠지.” 주절주절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뱉어내면서, 무릎 위에 놓아져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손가락을 쫙 펴보았다. 그래도 그 여자보다는 내가 손가락이 좀 더 가늘구나. 손톱이 부러져서 그렇지, 네일아트 다시 받으면 그 여자 손보단 더 나을 거야. 아, 이거 언제 다 기르지. 머리는 야한 생각하면 빨리 자란다던데, 손톱은 무슨 생각을 해야지 빨리 기르려나. 내일 황미영한테 물어볼까. 걔는 의외로 쓸데없는 지식은 많으니까. 아니야. 그 때땐지 뭐시긴지가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노는 바람에 자기도 새벽까지 잠을 안 잔다고 했었으니까, 지금 안자고 있겠구나. 이따 들어가면 당장에 전화해서 물어봐야지. “횡설수설 하긴. 너 설마 궁금한 거야? 나랑 하는 키스가 어떤지. 그런 생각 드는 거 일부러 감추려고 말 늘어놓는 거지? 나 좋아하는 거 너무 티내지 말라니까.” “……으응…. 앗, ㅁ,뭐?!” “…….” 김희진의 손톱 -> 부러진 자신의 손톱 -> 네일아트 -> 손톱을 빨리 기르는 방법 -> 황미영 -> 황미영's 때때의 올빼미 성향 -> 황미영에게 전화해야지 라는 생각을 수연이 늘어놓는 동안 유리가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고,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해버린 수연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였다. 으아.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금방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재빨리 주워 담고 싶지만 이미 그 말은 유리의 귀에 들어간 지 오래다. 수연의 대답이 의외인 건 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분명 수연이 떽떽 거리며 무슨 말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응 이라는 긍정의 대답을 하자 적지 않게 당황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당황했으면서도 달리 웃지도 않고,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도 수연이 보기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깜빡 거리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이 비춰져 보이는 걸 보면서, 수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 말한 거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튀어나오지를 않는다. 한참을 수연을 바라보던 유리가 핸들을 잡고 있던 손으로 수연의 손목을 잡고서 수연의 몸을 살짝 잡아당겼다. 저항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래서, 몸이 옆으로 살짝 틀어졌다. 수연의 몸이 어느 정도 옆으로 틀어지자, 유리가 이번엔 수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심장 박동수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마치 시동 걸 준비를 하고 있는 오토바이처럼, 조금씩 꿈틀거리는 심장과, 무슨 생각인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유리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이 가까워지자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무릎위에 있는 주먹을 꼭 쥐었다. 첫 키스는 아니다. 게다가 아직 키스하기도 전. 그런데 첫 키스하고 있었던 때보다 심장이 더 뛰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싫어서 그런 건지, 좋아서 그런 건지, 수연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읽지를 못하고 있었다. 감고 있는 눈에 힘을 더 주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볼을 간지럽히고 있다. 유리의 숨결이 입술에 머문다. 유리와 자신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귓가에 울렸을 때에, 수연은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앞에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보이고, 입술은 거의 맞닿기 직전. 갑자기 왠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수연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맞닿아야할 입술이 닿지 않고, 볼을 쥐고 있었던 손이 허전해지자 유리가 눈을 뜨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잠깐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런 유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유리가 수연 쪽을 향해있던 몸을 다시 앞 쪽으로 돌렸다. 수연의 볼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 샌가 핸들에 가 있다. 핸들을 꼭 잡고 있는 그 손을 바라보던 수연은,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뜨거운 여름밤의 공기가 기어들어온다. “하, 할 말 다했지? 나 그럼 갈게. 나중에 봐.” “…….” 아무런 대답이 없다.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치고 있다. 탁탁 거리는 마찰음이 귀에 울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꾸 귀가 간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얼른 차 문을 닫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리의 차는 출발하지 않고 있다. 고개를 숙였다.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번쩍 켜졌다. 어두운 골목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 빛에 기다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그림자를 바라보며, 수연은 어렸을 때 줄곧 읽어왔던 그 동화의 내용을 곱씹었다. 백설 공주는, 키스 한 번에 다시 살아나서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을 했다. 그 부분을 읽어주던 어머니는 키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연에게, 사랑에 빠지기 위한 마법의 일종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였었다. 사랑에 빠지기 위한 마법. 수연은 조그맣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집 앞까지 걸어가는 내내 헤드라이트는 수연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덕택에 어두운 골목을 걸어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집에 들어가서 2층 자신의 방에 올라가 수연이 불을 켜고 창문을 열었을 때에서야, 유리의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랑을 믿지 못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부정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만약에 사랑이 있다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그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말 있다는 가정 하에 생각을 해본다면, 어머니가 어렸을 때 말하던 사랑에 빠지기 위한 마법이라는 것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전제 하에서 아까 그 상황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유리와의 키스는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갔다. 그럼 키스와 함께 딸려오는 그 마법이라는 건, 이미 일어난 걸까,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갔을까. 그건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지도. Hissing 09 알싸한 향기. 촉촉하다 못해 이젠 축축해진 입술. 정신없이 헤집고 다니는 작은 혀. 그리고 급기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여자. 참다못한 희진이 결국 유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쳤지만 유리는 그럴수록 더욱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거칠게 비벼대는 유리의 입술이 아주 잠깐 떨어진 사이에, 희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없이 달려들던 유리의 몸에 제동이 걸렸다. 새빨개진 입술이 보인다. 너무 부벼대서 새빨개진 입술. 희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한마디 했다. “자기.” “…….” “자기가 키스 잘 하는 건 인정하지만.”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오늘 출근 안할 거야?” 툴툴 대는 그 말에 유리는 슬그머니 입맛을 쩝 다셨다. 흘끔 고개를 들어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이제 곧 출발해야 한다. 권유리 씨, 오늘도 지각입니까? 라고 눈을 부릅뜨며 차갑게 말할 최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순규 떡밥으로 며칠간은 지각해도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슬슬 다시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유리는 시계를 바라보던 얼굴을 거두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 아퍼, 라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 하얗고 가는 손가락. 어찌나 비벼댔는지 입술이 살짝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오동토동 해진 그 작은 입술을 바라보자, 환영처럼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희진아.” “어?” “한번만 더 하면 안 될까?” “……미쳤어? 왜 그래, 진짜. 지금 일어나서 한 시간 반 동안 이랬던 거 몰라?!” 더는 하고 싶어도 못해, 라고 툴툴 거리더니 자신의 허리에 두른 유리의 팔을 떼어내고선 씻겠다며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기다란 인영의 흔적을 찾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유리는, 한 시간 반전에 방바닥에 버려두었던 자신의 정장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집어 들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텅 비어버린 거실. 정수연이라는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 흔적들을 치우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물론 유리가 직접 움직여서 치우지는 않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에게 부탁드렸는데, 그 아주머니가 하루 종일 그걸 치우고 나서 그 다음날 아프다고 결근까지 해버리셔서 미안한 마음에 특별 보너스도 더 드렸다. 쓸 만 한 건 버리지 말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건 과감히 버려주세요, 라고 부탁을 했더니 집 안에 있는 대부분의 소형 전자기기들은 없어진지 오래. 각종 양주들로 가득 찼던 수납장도 텅텅 비어있고, 심지어 두개 있는 수납장 중 하나는 문짝에 달려 있는 유리가 와장창 깨져버리고 문이 약간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결국 버려야만 했다. 그나마 키가 작은 수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들(벽시계나 아버지가 억지로 붙여놓은 가족사진 액자라든가)과 부피가 큰 평면TV같은 것들은 멀쩡해서 다행이다. 갑자기 휑해진 집안의 꼴을 보고 놀란 희진에게 앞으로 심플하게 좀 살아보려고, 라고 대충 거짓말로 둘러댄 것 까지는 좋았는데 휑해진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면 자꾸 그 나신이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요즘 심장에 자꾸 무리가 가고 있다. 시선을 분산시킬 물건들이 없으니 그런 생각이 더 자주 나는 걸까. 회사 다녀올게, 씻고 나갈 때 문자하고.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는 화장실의 문 앞에 서서 말하자 안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할 말이 생각나 다시 몸을 돌렸다. 굳게 닫힌 하얀색 문 앞에 서서 괜히 입술을 한번 손가락으로 매만져보았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다. 한 시간 반. 정말 그렇게 했나.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시면서, 유리는 나지막이 화장실 문 앞에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응? 뭐라고? 물줄기 소리에 가려졌는지 희진이 안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뒤를 돌아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미안해. 일단 미안하다는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는데, 사실 유리조차도 자신이 희진에게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쇼핑백에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에 달려있는 도어락의 open 버튼을 살짝 누르자 약한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린다. 8층에 멈춰져 있는 승강기를 바라보다가, 그냥 걸어 내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난 대체, 뭘 미안해하는 걸까. 미안하다는 사과는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돌아서는 그 순간에, 미안해 라는 말은 하고 가야지 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안하다고 사과할 일이 무언가 싶다. 1시간 30분 동안 희진을 배려해주지도 않고 키스를 퍼부어서? 사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연인 사이에 키스 정도야 오래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정도로 굳이 샤워하고 있는 여자에게 진지하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일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역시…. 그렇게 중얼거리던 유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 것 밖에 없다. 계단을 다 내려와 오피스텔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삑,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린다. 차 안에 몸을 집어넣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의 그 날 밤부터 차창을 완전히 닫은 채로 차를 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수연과 키스를 할 뻔 했던 그날 밤부터. 머리가 갑자기 아파오는 것 같아서, 시동을 걸려던 손을 멈추고 운전석 시트에 깊게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맥박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검은 시야 속에 입을 삐죽거리던 희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인. 애인. 자기. 여보. 예쁜아. 우리 귀염둥이 등등. 희진을 부르는 호칭이야 많다. 그 모든 호칭의 공통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쓰는 호칭이라는 것. 희진 이외의 여자들에게는 단 한 번도 이런 류의 단어를 쓴 적은 없다. 그건 유리의 철칙이었다. 아무리 상대방 여자가 불러달라고 애를 쓰고 매달려도 절대 그런 호칭은 쓰지 않는다. 물론 희진 이외의 다른 여자들도 사랑하긴 마찬가지지만, 그 사랑과 희진에 대한 사랑은 엄연히 다른 종류의 사랑. 그래서 그런 호칭은 오로지 희진에게만 바치고 싶었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 연인. 그런데 그 여자와 불손한 의도로 키스를 해버렸다. 미안해. 희진에게 그렇게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건, 아무래도 희진과 그렇게 긴 키스를 하게 했던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한 일종의 고해성사였을지도 모른다. 희진과 키스를 하면 조금이라도 떨쳐버릴 줄 알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억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끈덕지게 달라붙은, 그 뜨거웠던 여름밤의 기억을.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날도 덥고, 습기도 많아서 불쾌지수가 높은 날. 여름은 여름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밤. 런칭 파티 장에서 갑자기 뛰쳐나간 수연이 은근히 신경 쓰여서 그 날 계속 그 자리에 완전히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정수연이 김희진과 단 둘이 있다가 갑자기 행사장을 떠났다. 그럼 굳이 안 봐도 비디오다. 분명 희진이 무슨 소리를 했을 테고, 성격이 불같은 수연은 한 대 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기 위해서라도 행사장을 빠져 나갔을 게다. 희진이 무슨 소리를 했었는지 그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수연이 찍소리도 못하고 행사장을 빠져나갔던 걸까. 한참을 그렇게 행사장 내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그 여자 신경 쓰면서 이 좋은 자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안 그래도 그 전에 별로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냈던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수연이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화가 났다. 수연에게 말한 것처럼 그 남자가 과거 희진에게 찝쩍댄 전력이 있는 남자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때에도 대놓고 그 남자에게 신경질적으로 굴지는 않았었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도 않았고, 냉정하게 대처를 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연인에게 추파를 던졌던 때에는 그렇게 굴었으면서, 왜 정수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열이 받았던 걸까. 희진이 옆에서 끊임없이 무슨 말을 걸어도 그 말이 귀에 들려오지도 않고, 자꾸 그 의문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결국 견디다 못해서 수연을 찾아갔다. 얼굴을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둘은 키스를 할 뻔 했다. 말 그대로 할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수연이 피하는 바람에 하지 못했지만. 밤인데도 공기가 아직 채 식지 않았던 그 더운 여름날의 밤. 폐쇄된 차 안. 시원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에어컨 바람. 그리고 옆에 앉아서 그날따라 굉장히 웅얼웅얼 거리며 말을 하던 정수연. 그 모든 게 섞여서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끊임없이 오마이갓지쟈쓰지금내가뭐하는거야스탑멈춰멈추라고이병신같은몸뚱아리야 라고 외쳐대고 있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그 여자의 속눈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연의 숨결이 입술에 닿았을 때에는, 유리에게는 정말 분한 이야기지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연이 황급히 고개를 뒤로 빼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키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해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도 더듬거리며 황급히 차에서 나가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아주 잠깐 아쉬움도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뒤로 며칠간의 둘 사이는 지지부진했다. 여전히 유리는 수연을 데려다주러 꼬박꼬박 갔지만 그게 전부. 예전처럼 가끔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그 것조차도 횟수가 줄어들었다. 수연을 데려다주는 그 짧은 시간동안 둘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 공기가 답답해서 버릇처럼 차창을 열고 다녔더니, 이젠 정말 그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한 달 동안 넘어오게 하겠다고 했으니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데이트도 못 하고, 쓸데없이 느껴지는 알 수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정수연꼬시기마스터플랜 정도는 다 짜놓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걸 짜놓을 정신적인 여유조차 없을 정도다. 자꾸 그 축축한 여름밤이 생각났다. 공기가 축축하고, 유리 자신의 심장도 왠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것 같던 그날 밤. 살며시 눈을 떴다. 이젠 정말 얼른 회사로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이다. 꽂아놓았던 키를 돌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부여잡았다. 그러다 문득, 정수연은 출근 했으려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집에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청담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데려다 주었다. 어제도 맞선 자리가 있었던 모양. 참 너도 인생 피곤하겠다, 라고 말하는 유리의 말에 시큰둥하게 이젠 익숙해져서 별 생각이 없다고 말하던 여자. 그 때 자신이 한 번 사고를 친 이후로는 부모님의 닦달이 더 심해지신 것 같던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핸들을 잡은 채로 한참을 멀뚱멀뚱 앞을 바라보던 유리는, 결국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손가락을 놀려 문자를 꾹꾹 쓰기 시작했다. - 출근했어? 설마 어제 밤에 그 남자랑 눈 맞아서 지금 호텔에 있는 건 아니 여기까지 쓰다가, 출근했어? 다음 문장은 다시 지워버렸다. 아침부터 욕은 듣기 싫으니까. - 출근했어? 오늘도 뭐 노출증 걸린 사람마냥 짧은 치마 입 다시 쓰다가 지워버렸다. 왜 적는 말마다 이런 말밖에 튀어나오지 않는 걸까. 유리는 새삼 자신의 거친 언어구사능력을 한탄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문자를 써내려갔다. - 출근했어? 이따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 “썅. 안 보내. 무슨 놈의 문자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들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흥분해서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자꾸 심장이 뛰어대는 게 영 거슬렸다. 유리는 괜히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욕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욕의 홍수들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는 유리의 귀에 갑자기 익숙한 메세지 수신음이 들린다. 그 소리에 유리는 욕을 뱉어냈던 입을 멈추고, 차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색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조명이 들어와 있고, 편지 모양이 떠 있다. 진동으로 안 바꿔놨네. 그 생각을 하며 몸을 살짝 숙여 핸드폰을 집었다. 메세지함으로 들어가 보니 눈가를 간지럽히는 세 글자. 독한년. 유리는 순간 움찔거리다가 메세지를 열었다. - 출근했니 난 일 잘하는 사람이 좋으니까 넌 일 열심히 하지 말고 사고도 치고 상사한테 깨져가면서 해. 하여튼 여자가 애교도 없고… 이모티콘 같은 거 좀 붙여서 보내면 좀 좋아?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입가에 머무는 미소는 가릴 수가 없는 듯, 슬그머니 입 꼬리가 올라간다. 백미러를 통해 자신이 웃고 있는 걸 확인하고 황급히 얼굴을 굳힌 유리는 일부러 얼굴을 확 찡그렸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무슨 생각인지 핸드폰의 자판을 꾹꾹 눌렀다. 무언가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열심히 누르던 유리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오늘 하루는 미친 듯이 일 좀 해주지.” 그렇게 웃는 유리의 눈동자에 수연의 번호가 비춰 보인다. 그리고, 독한년이란 글자 대신 적혀 있는 정수연이라는 글자도. * * * 탁.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두꺼운 서류뭉치를 수영의 책상위에 집어던졌다.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서류가 자신의 눈앞에 떨어지자, 유리가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수영이 그제야 유리를 바라본다. 능글맞게 웃는 유리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던 수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유리가 금방 던져놓은 서류뭉치들을 바라보았다. 2008년 하반기 마케팅 플렌 제안서. 그렇게 적힌 글씨를 본 수영은 쓰고 있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스윽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돼. 아마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까. 유리는 그 소리에 피식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수영이 손가락을 들어 표지를 들춰보았다. 안에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은 건지 확인하려던 것 같은데, 안에 보기 좋게 편집되어 있는 각종 그래프들, 표들 등등을 훑어보고선 다시 표지를 덮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는 듯 한 목소리로 서류위에 손을 얹고 말한다. “이거 진짜 권유리 씨가 작성한 거 맞아요? 혹시 뭐 또 대리 작성 같은 거 한 거 아니죠?” “왜 이러세요, 팀장님. 그거 제가 작성한 거 맞습니다.” “……어디 아파요?” “네?” “어디 아프냐구요.” 유리가 그 말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자 수영이 살짝 몸을 일으켜 유리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상하네.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의자에 다시 앉는다.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난다. 유리는 이런 수영의 반응에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약간 돌리고 수영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은 수영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팀장을 맡은 이후로 권유리 씨가 이렇게 일 처리를 빨리 한 적은 처음이네요.” “…….” “게다가 오늘은 지각도 안 하고. 물론 절대 빨리 올 생각은 없는지 정확히 정각에 도착하긴 했지만.” “…….” 눈썹이 꿈틀꿈틀 거렸다.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 오랜만에 일 좀 제대로 끝마쳐서 해줬는데 칭찬은 못 해줄망정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니 기가 찼다. 유리가 자기가 회장손녀라는 걸 고백 아닌 고백을 해버린 이후에 유리를 대하는 태도가 더 쌀쌀맞아 졌다. 그래도 요 며칠사이에는 이순규 떡밥 때문에 애써 억누르는 것 같더니만 확실히 약발이 다 떨어지긴 한 것 같다. 손가락으로 서류표지를 다시 들춰보는 수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리는 이를 갈았다. 최 팀장… 내가 윗선으로 올라가기만 해 봐…. 넌 바로 모가지야. 퇴근하세요, 그럼. 심드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유리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알겠다고 대답을 한 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수영의 책상 한 쪽에 얌전히 놓아져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 두개와, 커다란 검은색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냥 스쳐지나가려다가 자꾸 그 종이가 자신의 뒷덜미를 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파티션 위에 팔을 올린 후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 노란색의 고양이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는 검은색 종이를 바라보며 유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이거….” 캣츠 공연 팜플렛과, 그 티켓. 번뜩이는 고양이 눈을 바라보며 유리는 순간 수연을 떠올렸다. 항상 그 전부터 수연을 볼 때마다 무슨 동물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 가만히 보니 영락없이 고양이를 닮았다. 뚫어져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 노란색 고양이의 눈은, 꼭 그 날의 정수연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처음 만난 날, 마티즈 안에서 노려보던 그 눈. 그리고 그 눈을 떠올리자마자 유리는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 날짜. 시간도 마침 적당하다. 아까 오늘도 팀장에게 붙잡혀 야근을 하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던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 말해놓고, 오늘 갑자기 오늘은 야근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나. 그렇다면, 오늘 이 티켓을 쓸 일은 없는 건가.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그래, 뭐. 이제 데이트 정도는 할 때가 되긴 되었지. 오늘은 제대로 한 번 꼬셔볼까나. 그전에 일단, 이 인간에게 어떻게 표 좀 달라고 살살 꼬드기지? 유리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금방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유리가 놓고 간 서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수영이 유리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눈앞에 놓여 있는 오늘자 뮤지컬 캣츠 오리지널 내한팀 공연 티켓 두 장. 얼마 전에 우연히 지인을 통해 얻은 티켓이다. 그것도 무려 VIP. 사실 유리를 통해 얻은 번호로 알게 된 순규와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분명 같이 가겠다 그래놓고 어제 갑자기 일이 생겨 못가겠다고 튕겨버리는 바람에 오늘 저녁 자신이 짜놓은 모든 계획들이 허망하게 날아갔다. 정말 이순규 꼬시기 힘드네, 어제 밤새 잠도 못자고 온통 그 말만 중얼거렸었다. 그 동안 자존심 다 굽혀가며 문자며 전화며 다 해댔는데 그래도 넘어올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쉽게 넘어올 리는 없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다.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 오늘도 아침에 보낸 문자에 지금까지 답장도 없었다. 덕택에 웬일로 일을 잘 해결한 유리에게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줘야 하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자신도 모르게 가시 돋친 소리까지 했다.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좌우명인데 오늘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일에까지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지금 자신의 옆에서 티켓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권유리. 은근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수영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캣츠 뮤지컬 공연 티켓이네요?” “네, 뭐.” 티켓을 손가락으로 들고 눈앞에 바짝 가져가더니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듯, 흘끔흘끔 수영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다. 수영은 그런 유리를 애써 못 본 체 하며 유리가 가져온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유리치고는 굉장히 빨리 해 와서 대충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나 꼼꼼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잘 작성했다. 매일 농땡이 칠 궁리만 해서 저 인간이 회사 윗선에 올라가는 날에는 이 회사가 망할 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마저 했는데, 그래도 시키면 의외로 멀쩡히 잘 할지도 모르겠다. 문득 자신이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유리의 오빠, 그러니까 회사의 이사라는 사람이 직접 자신을 불러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길이 덜 든 망아지는 길들여 줄 사람이 필요하죠. 단단히 길들여주세요.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정신 좀 차리게 해주세요. 그래도 어떻게 동생 분께 그렇게 대할 수 있냐는 수영의 반문에,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셔도 괜찮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그 일 이후로 일부러 유리에겐 강하게 나갔다. 회장손녀라는 걸 떡하니 드러냈을 때에도 사실 속으로는 나 이러다가 말년에 빌빌 거리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강하게 온 몸을 엄습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짐짓 화를 냈었다. 그래도 그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 팀장만큼은 건드리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한 모양인지 고분고분 말은 잘 듣고 있었다. 여전히 우연히 자신을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욕을 하지만. 유리는 그게 안 들릴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눈치 빠른 수영은 이미 다 눈치 챈 지 오래였다. 금방도 자신에게 악담을 좀 퍼부었던 것 같은데, 오늘 공연티켓이라 인터넷에 올려 팔지도 못하고, 공짜로 받은 거라 미련도 없으니 그냥 버릴 생각이었다 해도 악담을 퍼부었던 게 괘씸해서라도 이 티켓은 쉽사리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거…오늘 보러 가실 건가요? 듣자하니 오늘 야근 하신다던데….” “아니요. 그냥 버릴려구요.” “와, 잘됐네요. 그럼 이거 저한테 주….” “싫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수영의 말에 유리가 움찔거렸다. 유리는 굳게 다문 수영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당황한 걸 알았는지 입 꼬리 하나가 미세하게 위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굽히고 들어가야 할 상황. 게다가 이 사람은 자신의 상사다. 이 여자에게는 회장손녀라는 권력도 통하지 않는다. 유리는 파티션에 올려두었던 팔을 내리고, 슬그머니 주먹을 꼭 쥐었다. 얼굴은 빙긋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버리실 거라면… 그냥 저 주시는 게….” “전 그거 버리려고 마음먹었어요. 버리려고 마음먹은 걸 어떻게 감히 회장님 손녀분께 드리….” 큰 소리로 말하는 수영의 입을 유리가 황급히 틀어막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퇴근 시간이라 사무실 내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서 아무도 수영의 말을 듣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등에서 흐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앞으로 2년. 2년간 감쪽같이 속여야 한다. 입사한지 햇수로 3년. 그동안 잘 속여 왔는데 반 쯤 남겨놓고 이제 와서 들킬 수는 없다. 고개를 획획 돌리며 아무도 듣지 않았음을 확인한 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수영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수영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손을 뗐다. 너무 급하게 틀어막은 바람에 손바닥에 수영의 침도 살짝 고여 있다. 유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급한 김에 파티션에 손을 문대었다. 수영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진다. 수영이 책상 밑에 있는 발로 툭툭 쳐 무언가를 밖으로 꺼낸다. 파티션에 손을 문대던 유리는 수영의 발에 차여서 밖으로 튀어나온 파란색의 작은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시선이 쓰레기통에 머물자마자 수영이 가차 없는 손길로 티켓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그 순간, 유리가 황급히 그 손목을 덥석 부여잡았다. “팀장님.” “왜요?” “…순규 씨랑은 잘 지내세요?” “…….” 유리의 물음에 순간 수영의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렸다. 며칠 전에 회사 구내식당에 작은 사고가 생겨 오늘 점심은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약간 더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유리는 금세 포착해내었다. 이내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유리는 능글맞게 웃으며 나지막이 수영에게 말했다. “저…이순규 꼬시는 법도 알아요.” “…….” “그 사람 취향이라고 해야 하나?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 지 다 아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 그 사람하고 꽤 절친 이거든요. 그러니까, TV 에서 말하는 그런 것들 말구요, 진짜로 좋아하는 거.” “…….” “…알려드릴까요?” 수영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눈에 띄게 흔들렸다. 훗. 유리는 여유 만만한 미소를 흘리며 슬그머니 수영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티켓을 쥔 채 허공 위에 붕 뜬 손가락의 모양이 처량하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듯 보이던 수영은, 결국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티켓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마자 유리는 재빨리 책상 위에 있는 티켓 두 장을 낚아채었다. 수영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더니 괜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려드릴게요. 제목은, 연예인 활용 마케팅 제안서 정도로 하면 되나요?” 티켓 두 장을 손에 쥐고 웃으며 말했더니, 수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가만히 보니 얼굴이 약간 빨개져 있다. 바늘은커녕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여자가 연예인 때문에 저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유리는 새삼 다시 보이는 수영에게, 퇴근 하겠다는 인사를 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온갖 서류들로 어수선해진 책상. 퇴근하기 전에 일단 이것부터 대충 정리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티켓을 책상 한 구석에 올려놓은 다음 눈에 보이는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하는 손길 하나하나에 뿌듯함이 묻어나온다. 이 책상 위에 오늘 하루 동안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아침에 수연의 문자를 받고 나서 유리가 중얼거렸던 것처럼 오늘 하루는 정말 일만 했다. 중간 중간에 문득 떠오르는 그 여름날 밤의 기억 때문에 문서 작성을 하다가 스스로 놀라서 오타를 내거나 휴게실에서 뽑아온 커피를 엎어버린 것 빼고는 별다른 사고도 치지 않았다. 입사한지 햇수로 3년. 정확히는 2년 반이 지났지만 그 동안 이런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 유리는 근면해진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낯설어 하면서도, 왠지 보람찬 느낌도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일을 열심히 하게 된 건 아마 아침에 수연이 보낸 문자 때문. 책상 위를 다 정리하고, 책상 밑에 넣어두었던, 오늘 아침 입고 온 옷들이 들어있는 종이 백과 서류가방을 챙겨들면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티켓 두 장을 바라보았다. 이건, 오늘 하루 일을 잘하게 해준 수연의 문자에 대한 보답이다. 한두 번쯤은 이런 식으로 보답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유리는 티켓을 집어 들었다. 책상 밑 구석에 밀어 넣어 두었던 운동화를 꺼내 들어 구두와 바꿔 신고, 구두는 다시 책상 밑에 집어넣은 다음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가로질러 나왔다. 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 먼저 퇴근하겠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유리의 인사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무실 내의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퇴근할 때 마다 이런 인사정도는 해줘야겠단 생각도 했다. 은연중에 어차피 몇 년 후면 내 밑에서 일할 사람들, 내 얼굴조차 제대로 못 쳐다볼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안하무인격으로 사무실 사람들을 대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 어쨌든 지금은 이 사무실에서 말단 축에 속하는 직원인데 그렇게 했으면 안 될 일이었다. 오늘 하루 처음으로 바르게 생활해서 그런지 몰라도 왠지 그 동안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감도 살짝 들었다. 와, 뭐야. 나 오늘 왜 이러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뭐 어떠랴. 하루쯤은 이런 식으로 바른 생각을 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사무실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 복도를 걸어가다가, 승강기 앞을 지나 복도 끝 쪽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칸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항상 그랬듯이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컸을 때부터 이런 저런 행사에 자주 끌려 다니는 바람에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답답한 옷에는 익숙해 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회사 건물 안에 들어와 이 화장실에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나면 다시 평소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유리의 이런 버릇에 대해 태연은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유리 역시 하지 못했다. 그냥 싫었다. 이런 격식 차린 옷을 입는 것은. 너무 어렸을 때부터 입었던 거라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옷을 입으면 제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항상 얌전하게 앉아있어야만 해서 어렸을 때부터 싫어했었다. 그게 몸에 배었을지도. 편안한 바지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복장으로 갈아입은 유리는, 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종이 백 안 정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28번 버튼을 누른 다음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화장실 거울을 향해 살짝 몸을 기울이고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다듬었다. 귀에 익숙한 기계음이 들린다. 여전히 컬러링 없는 단조로운 그 신호음을 들으면서, 유리는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한참을 신호음이 가다가, 이쯤 되면 음성사서함 넘어가겠네 라는 생각에 유리가 슬라이드를 닫으려는 그 순간, 신호음이 뚝 끊기고 귀찮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뭐해?”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조용한 침묵을 뚫고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무실 아닌가? 유리가 갸우뚱 거리자, 수화기 저 너머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주무셨어요? 아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유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교무실 아니야?” - 교무실이야. “아닌 것 같은데? 교무실에서 잠도 자?” - ……. “이야, 팔자 좋네. 선생님이란 직업은 의외로 한가하구나? 아닌데. 요즘은 선생님들도 고생이 많다던데…. 정수연 그럼 농땡이 중?!” - 시끄러워. 그냥 시간이 좀 나서 잠시 휴게실 온 것뿐이야. 아, 뭐야. 벌써 퇴근시간이네…. 대체 얼마나 잔 ㄱ….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는지 말소리가 뚝 끊겼다. 한참의 정적 후에 들려오는 볼멘 목소리. - 잔 거 아니야. 난 너랑 달리 일 열심히 한단 말이야. “누가 물어봤어?” - ……. 왠지 입을 앞으로 삐죽거리며 말 하고 있을 그 얼굴이 떠올랐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은 앞으로 쭈욱. 그 모습을 상상하며, 유리는 화장실 거울을 향해 기울이고 있던 몸을 펴고 반대쪽으로 돌린 다음 세면대에 살짝 기대었다. 고개를 숙이니 하얀색 운동화의 코부분이 보였다. 발끝을 가지런히 모아서 八자 모양으로 만든 다음,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나 지금 너 데리러 갈 건데 말이야, 너 오늘 뭐해?” - 오늘? 왜? “그냥. 안 바쁘지? 안 바쁘겠지.” - …바뻐. 나 약속 있어. “거짓말 하지 마. 무슨 약속인데?” - ……. 또 다시 대답이 없다. 대답 없는 모습에 유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는지 수연이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다. 평소대로라면 여자가 입도 험하다며 뭐라 했겠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욕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어쨌든, 이따 뭐라도 좀 보러 가자.” - 뭘? “그냥, 뭐. 이것저것.” - 뭔데? “그냥 뭣 좀 보자고.” - 뭔지 말해야 갈 거 아냐. 내가 뭘 믿고 널 따라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니?” - 응. “이래 뵈도 난 미식가야.” - 또 성추행. “……이따 봐. 여튼.” - 뭐냐니까? “아, 진짜. 그냥 뭐 보자고 하면 조용히 알았다고 하면 따라와 주면 덧나?!” - 응, 덧나. “끊어.” 유리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뚝 끊는다. 갑자기 끊겨버린 통화에 유리는 입맛을 쩝 다시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세면대 쪽으로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 부분에 살짝 물이 묻어있어서 손으로 탈탈 턴 다음 손에 들고 있는 종이 백을 두 손으로 열어서 거기 안에 들어가 있는 티켓 두 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수영의 책상위에 놓아져 있던 그 검은색 팜플렛을 떠올렸다. 노란색 고양이 눈. 진짜 정수연 눈 같아, 라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한번 웃었다. 종이 백과 서류가방까지 한 손에 든 다음, 종이 백 안에 핸드폰을 대충 집어 던져 넣고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티셔츠 한 쪽이 구겨 올라가서 손으로 잡아당기고 화장실을 나왔다. 핸드폰을 들고 이 인간 뭐야? 라고 툴툴 거리고 있을 그 작은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유리의 눈에 보이는 정수연이란 여자의 표정은, 다양한 듯 하면서도 패턴이 다 비슷비슷하다. 그 패턴이라는 것도 금세 읽혀버리는 쉬운 패턴이라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젠 말투만 들어도 자연스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떠오른다. 그 때의 감정과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한 그 표정. 자신은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표정에 솔직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당장 자신의 연인인 희진도, 말이나 행동은 그렇게 직설적이면서 표정 자체에서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연기자라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애써 표정을 거짓으로 꾸며내며 살아가기에 그런 희진이 나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게 사회라는 곳이니. 그래도 가끔 그렇게 욕을 하며 끔찍이 싫어하던 사람 앞에서도 필요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웃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때도 있다. 그에 반해 정수연이라는 여자의 표정은 정말 솔직하다. 저렇게 솔직한 표정을 지어대는데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면서 맞선 자리는 참 잘 참아내는 것 같은데 그건 또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솔직한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는 남자가 병신인지, 아니면 수연이 유독 자신의 앞에서만 솔직한 표정을 지어내는 건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요즘 유리가 만나는 여자는 단 두 명뿐이다. 그 두 명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딱 두 명만 만나는 데 그 둘의 스타일이 이렇게나 다르다. 감정을 감추는 것에 익숙한 여자와, 감정을 감추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여자. 어느 쪽이 더 좋냐고 물어본다면, 유리는 아무래도 역시 후자가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골려 먹는 재미가 있으니까, 라는 그럴듯한 합리화를 하면서. 손에 들린 종이 백의 손잡이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진다. 음?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종이백 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열었다. - 깜빡 잊고 안 물어봤는데…. 사고는 많이 쳤어? 상사한테는 많이 깨졌지? 이따 봐. 분명히 몇 번이고 쓰고 지웠을 그 글자들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웃었다. 희진과 수연이 다른 점은 또 있다.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희진은 그에 반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것에는 솔직하다. 하지만, 표정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정수연이라는 여자는 말이나 행동은 솔직하지 못하다. 그냥 솔직하게 일은 잘 했냐고 물어보는 게 어때, 라고 답문자를 보낼까 했으나 그냥 관두기로 했다. 유리의 능글맞은 물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 얼굴은, 아무래도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뭐가 그렇게 웃겨?” 화면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유리는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가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을 앞으로 빼내 유리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려고 하자, 유리는 황급히 핸드폰을 닫고 주머니 속에 대충 집어넣었다. 약간 달라붙는 바지라 핸드폰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계속 허탕만 치던 유리는 결국 들고 있던 쇼핑백에 핸드폰을 넣어두고 허허허 웃었다. 그런 유리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 여자의 앞에 있는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마침 유리가 있는 층에 있던 승강기의 문이 곧바로 열리고, 유리가 그 안에 타자 여자 역시 따라 탔다. 1층을 누른 채로 벽에 기댄 유리의 옆에 슬금슬금 다가와서 팔에 얼굴을 기댄다. “웬일이야? 회사까지 다 오고. 언제는 오라고 해도 절대 안 오더니.” 자신의 팔에 얼굴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는 여자에게 유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말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몸을 다시 꼿꼿이 세우고 샐쭉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질책하는 듯 한 그 시선에 뜨끔한 유리는 빙긋 웃었다. “꼭 안 반가워하는 것 같네?” “에이, 그럴 리가…. 그냥 놀래서 그래, 놀래서.” 놀래서, 라는 세 글자에 힘을 꼬박꼬박 주어가며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제야 질책하는 그 시선을 거두고 여자가 빙긋 웃는다. 웃는 모습을 보자 느껴지는 안도감에 유리는 여자 모르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오라고 해도 오지 않던 여자가, 웬일로 갑자기 찾아왔을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은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던 여자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승강기 안의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계기판에 떠오르는 숫자를 읽으면서, 유리는 요 며칠간의 여자의 행동에 대해 곱씹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 여자는, 그러니까, 자신의 연인인 희진이라는 여자는 행동이 조금 이상해졌다. 전에 하도 조르길래 자신의 집에서 한 번 재워주고 난 다음부터는, 촬영이 있어서 밤을 새는 게 아니고선 거의 매일같이 유리의 집에 와서 잠을 자곤 했다. 이미 한 번 재워주고 난 다음이라 이젠 유리조차도 달리 막을 수가 없는데다, 아침에 일어나서 희진을 보는 게 그리 썩 나쁘지 않고 어차피 잠만 자고 바로 집에서 나가는 지라 별 터치를 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무래도 좀 꺼림칙하다. 아침에 희진이 있다간 날에 저녁에 돌아와보면 집에 있는 물건들의 배치가 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몇 번 한 적 있다. 오늘도 아침에 나갈 때 문자하고 나가라고 했는데, 문자가 오지 않았던걸 보니 아무래도 그냥 집에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리라서 하루 종일 희진이 집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더 나아가서 가만히 보면 희진 자신의 집보다 오히려 유리의 집에 더 많이 들락날락 거리는 것 같은데, 유리는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라며 부정하는 중이다. 게다가 유난히 날카로워졌다. 특히 수연의 일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 날 그 런칭 파티 장에서 대체 둘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날 이후로 굉장히 날카로워졌다. 버릇처럼 수연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표정이 급격하게 굳으면서 쌀쌀 맞게 대꾸를 하는데, 그 표정이 무서워서 하루는 수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니 왜 그 여자 이야기 오늘은 하지 않는 거냐며 정색. 유리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야기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애초에 처음에 사귀기 시작했을 때 희진이 내건 조건이 그거였다. 서로를 사랑하되 상대방의 다른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말기. 사귈 때부터 그런 조건을 내걸고 사귀자는 여자는 흔치 않았었고, 그런 점에 끌렸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사귀는 동안 아주 잘 지켜졌다. 물론 가끔, 유리가 필요이상으로 관심을 가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희진이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이 있긴 있었지만 그건 그냥 애교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 어쨌든 그렇게 잘 지켜왔던 약속인데, 요즘 들어 희진이 하는 행동은 그 약속과 정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한 낌새가 느껴졌다. 이건 마치 예전에 희진이 부렸던 그 히스테리들의 전개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턱을 스윽 만지며 생각했다. 에이, 그래도 얘가 그렇게 될 만한 건덕지는 요즘은 없는데….내가 정수연 말고 다른 여자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정수연이야 얘도 알고 있고…. 그냥 내가 착각한 거겠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발걸음을 옮기는 유리의 팔에 팔짱을 끼는 희진이, 문득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물었다. “자기, 오늘 밤 시간 돼? 나 오늘 오랜만에 스케쥴도 비었는데 외식이라도 하자.”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곤란한 표정으로,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유리의 얼굴을 희진이 바라본다. 가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고 자신의 앞에 서는 여자의 얼굴을, 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유리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자, 희진 역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1층 로비로 쏟아져 들어오는 붉은 노을빛이 희진의 어깨위에 부서졌다. “왜? 누구 만나? 나 곧 지방으로 촬영 가. 그래서 며칠 못 볼 텐데, 오늘 외식하면 안 돼?” “정수연 데려다 주러 가야지. 그리고 해외로케 갈 때에도 별 탈 없었잖아. 고작 지방 촬영가지고 무슨.” “누구?” “수연이.” 수연이, 라고 말하고 유리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흘끔 희진을 바라보니, 희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는 입 꼬리가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건, 오랜 연인 사이인 유리만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다. 유리는 애써 눈웃음을 보이며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앞에 서 있는 희진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리고 종이 백의 손잡이 부분을 손목에 걸친 다음, 손으로 희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달래듯이 말했다. 희진아, 외식은 다음에 할 수 있잖아? 오늘은 안 돼. 다음에 같이 하자, 응? 그때 내가 맛있는 거 사줄…. “자기야.” “응?” “자기 혹시, 그 여자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뭐?!” 부드럽게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다가, 희진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유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두근 뛴다. 왜 뛰어대는 걸까. 뛰어댈 이유도 없는데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더듬더듬 옛 기억들 따라 올라가며 이 두근거림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어렸을 때 엄마 몰래 케이크 꺼내 먹고선 혹시라도 엄마가 그 사실을 알까봐 눈치를 봤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마치 그때처럼, 그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가슴이 뛰고 있다. 그 어정쩡한 느낌을 애써 지워내려고, 유리는 일부러 버럭 큰 소리를 내질렀다. “야!!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미쳤다고 그런 여자랑?!” “어머, 왜 흥분해? 흥분하니까 더 수상한데?” “아니,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난 그 여자한테 아우디 수리비 받으려고 이런 거라고.” “흐응….” 얼굴까지 새빨개지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유리의 표정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희진은 문득 자신의 앞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유리의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커다란 종이 백을 바라보았다. 대충 접혀진 정장을 보던 희진은 이것 봐, 또 이렇게 대충 넣어놨어 라고 중얼거리며 유리의 손목에서 종이 백을 빼내었다. 유리가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종이 백을 뺏어든 희진은 정장 같은 건 좀 제대로 접어서라도 넣어놔, 라고 투덜거리며 종이 백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문득 안에 있는 캣츠 티켓이 생각난 유리가 재빨리 희진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희진은 정장 사이에 껴들어가 있던 티켓 두 장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바라보고 있다. 아, 씨발. 망했다. 쟤 안 그래도 저거 보고 싶다고 했던 건데…. 유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다가, 이게 뭐냐는 희진의 물음에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아…그거 캣ㅊ….” “어? 오늘 거네?” “아, 으응.” “…이거 설마, 그 여자랑 보려고 하는 거 아니지?”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희진의 말에 유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문하는 듯 한 그 눈초리가 온 몸에 식은땀이 나게 만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서 유리는 결국 시선을 약간 돌려 희진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리의 시선회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희진이 유리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무섭게 째려보는 눈이 보인다. 유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 그 여자랑 보러 가는 거야? 내가 이거 티켓오픈 할 때부터 보고 싶다고 했는데?!” “…희, 희진아. 그게….” “선택지는 두 개 밖에 없어. 응, 아니. 이것 두개. 자, 빨리 말해. 잘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잘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데 정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유리는 아주 짧은 순간 고민을 했다. 김희진과 정수연.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의 고민을 해결하도록 한 것은, 정수연 그 기집애를 내가 당장…이라고 중얼거리는 희진의 말 한마디였다. 유리가 들을 걸 알고 한 말인지, 아니면 듣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애초에 유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자기랑 보려고 구한 거지. 에이, 놀래켜 주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 하하.” 빌어먹을. 내가 들어도 너무 어색하잖아. 국어책 읽는 듯 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유리는 자신의 하찮은 연기실력을 한탄했다. 대꾸도 없는 희진을 두고 서류가방을 다시 든 채로 뻣뻣하게 손을 앞뒤로 휘휘 저어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몇 발자국 앞서나가다가 휙 몸을 돌려, 아직도 그 자리에서 쇼핑백을 든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희진을 향해 애써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 그럼. 나 일단 걔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자기는 집에라도 가 있….” “나도 갈래.” 뭐?! 유리는 입을 쩍 벌리고 희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유리를 눈을 가늘게 뜨며 째려보던 희진은 다시 빙긋 웃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이 여자의 이런 웃음을 볼 때마다 남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유리는 순간적으로 울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리는 흘끔 고개를 돌려 로비 안 어느 구석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로비 안의 남자들은 저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희진을 바라보고 있다. 몇 몇 남자들의 손가락질을 보던 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로비를 빙 둘러보았다. 로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희진과 자신에게 있다. 그 언젠가 자신이 휴게실에 있을 때 희진에 대해 성적농담을 하며 낄낄 대던 그 남자 두 명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희진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 외에도 몇 명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맞다. 여기 회사지. 유리는 서둘러 희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손목을 부여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급하게 회전문을 비집고 열고 나오자 붉게 타오르는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회사 전용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눈가를 아프게 찔러대는 햇살 탓인지, 아니면 낮 동안 한껏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뜨거운 기운 때문인지, 갑자기 짜증이 났다. 지금 자신의 손에 잡혀 끌려오는 김희진이라는 여자가 찾아오지도 않는 회사를 갑자기 찾아와서는, 오늘 저녁의 계획을 전부 다 망가뜨렸다. 캣츠는 어쨌든 정수연이라는 여자와 보러 가기로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고, 수연에게 전화까지 한 이 상태에서 갑자기 희진이 나타난 바람에 결국 수연에게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소리를 하게 생겼다. 약속을 함부로 깨뜨리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수연이라는 것 때문에 왠지 더 성질이 났다. 그래도 나름대로 오늘이 제대로 된 첫 데이트인데, 그게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에. 유리의 손목에 잡혀 끌려오면서도 계속 무언가 투덜투덜 대는 희진의 목소리가 결국 듣기 싫다는 생각마저 들자, 유리는 애써 그 감정을 꾹꾹 눌러내며 힘겹게 말했다. “희진아. 일단 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정수연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싫어. 나도 갈래.” “수연이 데려다 주러 가야 된다고 했잖아.” “…왜 자꾸 아까부터 수연이, 수연이 그래? 자기 원래 그 여자 이름도 안 불렀잖아. 독한년이 어쩌고저쩌고 그랬으면서, 왜 자꾸 이름을 부르냐구.” 날카로운 희진의 말에 유리는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 전에 희진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항상 그 독한 여자, 혹은 성질났을 땐 독한년 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게 했었는데 아까부터 계속 그 말 대신 수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정수연, 혹은 수연이.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그 호칭의 변화에 대해 유리가 당황스러워 하는 사이, 유리의 손에서 손목을 억지로 빼낸 희진이 유리의 앞에 잰 걸음으로 다가와 서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한테 관심 없다며, 자기가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아니야?” “어.” “그럼 이렇게 해.” “뭘?” “나랑 같이 그 여자 데려다 주러 가.” “뭐?” “나랑 같이 그 여자 데려다 주러 가자고. 그리고 그 여자 태워서 그 여자 집까지 데려다 준 다음, 나랑 자기는 캣츠 보러 가면 되잖아. 어차피 그 여자한테 관심도 없다며, 자기. 그럼 그렇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니야? 어차피 그 여자는 내 존재도 알고 있으니 하루 정도 마주 친다고 해서 그 내긴지 뭔지에 영향이 갈 것도 아니고.” “…….” 유리는 물끄러미 희진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하얀 얼굴. 요즘 드라마 촬영 때문에 며칠 고생 좀 하더니 그새 야위었다. 피곤함이 잔뜩 쌓여 있어서 그런지 눈조차 충혈 되어 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이 받아 힘든 여자가 자신 때문에 더 스트레스 받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얗다 못해 제법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그 얼굴을 보며, 유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연인이란 이름으로 옆에 있는 사람은 정수연이 아니라 김희진이다. 더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정수연이 아닌 김희진, 더 먼저 생각해야할 사람도 정수연이 아닌 김희진, 하루 종일 생각해야 할 사람도 정수연이 아닌 김희진이다. “…그렇게 해, 그럼.” 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희진이 빙긋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은, 오늘 희진이 자신을 향해 지었던 웃음과 다르게 정말 진실 된 웃음이었다. 유리는 그제야 오늘 희진을 만난 이후로 희진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진실 된 웃음을 보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희진이 줄곧 웃음 아닌 웃음을 지었다는 걸 평소와는 달리 지금에서야 눈치를 챘다는 것도, 유리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 * * “이건 또 뭐야….” 평소와 같이 조수석 문 앞쪽으로 다가왔던 수연이, 살짝 내린 차창 사이로 보인 얼굴을 보며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정말 오늘 여러 번 땀 흘리는구나.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수석 문 대신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수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런 유리를 바라보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쥔 주먹을 바라본 유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리자 수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열려진 문 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수연 씨, 오랜만이네요. 그 때 이후로 처음이죠?” “네, 뭐.” “어머, 쌀쌀맞아라. 여자가 조금 사근사근한 맛도 있어야죠. 무슨 화난 일 있었어요?” “제가 희진 씨한테 그걸 말할 이유는 없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말 울고 싶다…. 유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 뒤를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냉랭한 분위기가 차 안에 가득 감돈다. 차 문을 닫고 싶지 않을 정도. 유리는 애써 빙긋 웃으며 열려있는 차문을 잡아당겼다. 탁. 차 안이 완전히 폐쇄되어버렸다. 핸들을 꼭 잡고 흘끔 백미러를 통해 수연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로 앉아있는 수연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 얼른 출발해야지.” 희진이 손으로 유리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간드러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천천히 스쳐지나가는 바깥 풍경.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빙긋 웃고 있는 김희진과,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정수연. 그리고 그 사이에 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유리. 차 안 공기가 너무 답답하다 못해 목을 죄여오는 것 같아서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요 며칠간 그랬듯이 버릇처럼 차창을 열었다.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머리가 흐트러지자 희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창문 다시 올리면 안 돼? 바람 싫어. 더우면 에어컨 틀자.” “아, 그, 그래.” 당황한 유리가 다시 버튼을 눌러 창문을 위로 올렸다. “난 에어컨 바람보다 자연 바람이 더 좋아. 그냥 내려.” “그, 그래.” 여전히 옆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수연의 목소리에, 또 다시 당황한 유리가 다시 버튼을 눌렀다. 창문이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자기. 창문 올리라니까.” “어?” “그냥 올려.” “귓구멍 막혔어? 내리라고.” “자기, 그냥 올려. 에어컨 놔둬서 뭐해?”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고…. 유리는 울상을 지었다. 백미러를 통해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수연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수연이 눈을 부릅뜨며 손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더니 옆쪽으로 스윽 그었다. 히익. 열어야 하는 건가?! 놀란 유리가 손가락을 버튼 쪽으로 가져가자, 유리의 팔을 잡고 있던 희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었다. 아퍼……역시 내리는 게…. “수연 씨. 그냥 에어컨 바람이 더 시원하지 않아요? 창문 열어놓으면 머리 흐트러지잖아요. 하긴, 수연 씨는 그런 거 신경 안 쓰게 생기긴 했네요.” “전 그렇게 인공적인 건 싫어해서요. 뭐, 희진 씨는 인공적인 바람이 좋은가 봐요? 자기 자신이 인공적인 사람이라 그런가…. 많이도 뜯어고쳤다더만….” “뭐예요?!” “왜요, 틀린 말 했어요?” “…그냥 반쯤 열어놓을게. 그럼 됐지?” 유리가 한숨과 함께 말하자 희진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희진의 모습을 보며 수연이 입 꼬리를 올리며 비웃는다. 유리는 그런 둘 사이에 껴서 정말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반쯤 열린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땀이 흐르고 있는 이마를 차갑게 식혀주고 있다. 옆에 앉은 희진은 자꾸 흐트러지는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고, 수연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두 여자에게 들리지 않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신호등에 주황색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차체의 속도가 느려짐을 느꼈는지 한번 흘끔 앞을 보고 신호등을 바라보던 수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무슨 변명이라도 할 생각으로 유리가 입을 열자, 재빨리 희진이 치고 들어왔다. “수연 씨 데려다주고 저희 데이트 하기로 했어요.” “난 권유리한테 말한 건데 웬 지방방송이 자꾸 들리네, 환청인가.” 그렇게 말하며 수연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유리는 핸들을 꼭 쥐고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제발 빨리 바껴라, 제발. 왜 안 바뀌니. “수연 씨 데려다주고 나서 캣츠 보러 가기로 했어요. 제가 티켓오픈때부터 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우리 자기가 절 위해 VIP티켓까지 구해왔더라구요. 수연 씨 캣츠 보셨어요? 아, 캣츠가 무슨 뮤지컬인지는 아시죠?” “아아, 그 고양이 떼 나오는 거요? 유감이지만 전 고양이에는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고양이 탈 쓴 사람도 싫어요. 고양이 중에 특히 시커먼 고양이가 싫더라구요. 그냥 전 시커먼 건 다 싫어한 것 같아요. 왜 다들 하나같이 그렇게 눈치도 없고 그러는 건지, 내참.” “어머, 저는 까만 고양이 좋던데요? 도도하잖아요. 수연 씨와 저는 취향이 전혀 다른가 봐요. 이렇게 멋있는 우리 자기도 수연 씨는 싫어하고….” “멋있긴 개뿔이. 희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눈 참 낮네요?” “이런 사람을 못 알아보는 수연 씨 눈이 이상한 거죠.” 왜 죄 없는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신호가 바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유리는 냅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급하게 속도를 높였는데도 거리낌도 없이 참 잘도 출발한다. 유리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운전하는 동안, 수연과 희진은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였다. 칼만 서로 손에 안 쥐고 있을 뿐이지, 정말 전장도 방불케 하는 그 신경전 속에서 유리는 속으로 몇 번이나 죽을 것 같아,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여자가 독기를 품으면 정말 이렇게 무섭구나. 아니, 근데 왜 독기를 품는 거야. 김희진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수연 쟤는 대체 왜 저러냐고….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운전하는 내내 유리는 틈만 나면 백미러를 통해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 때마다 자꾸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핸들을 너무 꽉 쥐고 있었더니 손이 땀으로 흠뻑 젖기까지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신과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는 희진의 말을 들은 수연이 그 이후로 오늘 뭐 보러 가자고 하지 않았냐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 말을 했다간 희진이 그 캣츠 티켓이 자신이 아닌 수연과 같이 보려고 했었다는 걸 눈치 챌 테고, 그렇게 되면 유리는 몹시 곤란해진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정말 여기서 칼부림이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새삼 따지지 않은 수연에게 고마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더 수연에게 미안해졌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불편할지는, 굳이 수연의 입장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가는 내내 그치지 않는 신경전에 유리가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참다못한 수연의 손이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걸 목격, 더 이상 지체했다간 정말 일 나겠다 란 생각이 들 때쯤에는 다행히 수연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마워.” “아, 으응.” 심드렁하게 말하던 수연이 옆에 내려놓은 핸드백을 손으로 잡는다. 그런 수연의 움직임을 희진이 백미러를 통해 찬찬히 뜯어보았다. 핸드백을 잡은 수연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약간 일으켜 세웠다. 그 움직임에 잠깐 핸드백이 기울어지고, 핸드백이 마침 열려 있었던 모양인지 열린 틈 사이로 핸드폰 하나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수연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한 듯 문을 활짝 열고 바깥으로 몸을 완전히 빼내었고, 수연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희진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수연이 차문을 잡고 중얼거리듯이 한마디 한다. “데이트 잘하고.” “어, 어.” “수연 씨, 잘가요.” “네. 데이트 잘 하세요.” 쾅. 세게 문을 닫았다. 일단 한명은 사라졌다. 유리는 그제야 몸에 힘을 쫙 패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그 신경전 속에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다. 차 안에 미묘하게 남아있는 수연의 향수냄새에 유리는 입맛을 쩝 다셨다. 다시 차를 출발시킬 생각으로 사이드 미러를 통해 뒤쪽을 확인하는데, 문득 희진이 나지막이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항상 자기라는 호칭을 사용하다가, 갑자기 유리 씨 라고 이름을 부르는 희진의 목소리에 유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옆쪽을 바라보자, 희진이 유리의 목에 팔을 걸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몸이 기울어지고, 부드러운 입술이 유리의 입술 위에 닿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희진과 수연 사이의 신경전 속에서 고생하는 자신의 모습이 불쌍해서 위로라도 해주려고 하는 건가 싶어서, 유리가 부드럽게 그 작은 혀를 받아들이려는 그 순간, 뒷좌석 차문이 벌컥 열렸다. “미안, 나 핸드폰 두고 왔….”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런 유리의 눈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도 순간적으로 크게 변했다. 당황한 유리가 손을 뻗어 희진의 몸을 밀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희진은 더욱더 목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유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걸 바라보는 수연이 살짝 묘한 표정을 지어내었다. 그리고 그 표정에 유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그 표정은 곧 사라져버리고, 수연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고개를 숙여 차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줍는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느릿 유리의 시선 속을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1분이 꼭 한 시간 같다. 그 와중에도 얽혀있는 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유리를 바라보던 수연은, 심드렁한 말 한마디 던져놓고 차문을 닫았다. “하던 거 계속 해.”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유리는, 희진을 만나고 난 후 처음으로 희진과의 키스가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 * * 캣츠는 재밌었다. 인터미션 때 객석에 내려온 고양이 한 마리가 유리가 옆에 내려놓은 종이 백을 들고 튀는 바람에 저 고양이 새끼 조져버리겠다고 난리쳤던 걸 빼고는 괜찮았던 공연이었다. 돌아 나오면서 팜플렛 하나를 집어왔다. 팜플렛도 돈 내고 사는 거라는 걸 알았으면 최 팀장에게 그것도 뺏어올걸 이라는 후회를 하면서도 굳이 그걸 돈 주고 사왔던 건, 자꾸 그 고양이 눈을 볼 때마다 수연이 생각나서였다. 눈을 번뜩이며 야, 개싸가지 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결국 사왔던 건데, 유리는 지금 그걸 사온 걸 후회하고 있다.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씻고 침대 위에 누워서 잠은 안자고 끊임없이 그 팜플렛만 보고 있어서. 끄응. 유리는 들고 있던 팜플렛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얼굴 위에 덮은 검은색 팜플렛이 살짝 들렸다가 다시 내려온다. 흐읍. 입을 살짝 열고 공기를 빨아들이자 이번엔 종이가 입술에 달라붙는다. 그 상태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자 얼굴에 붙은 팜플렛이 시트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팜플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노란색 고양이 눈. 그리고 번뜩이던 정수연의 그 눈동자. 으악. 유리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있는 대로 휘저었다. 키스했다. 정수연 앞에서, 김희진이랑. 며칠 전에 키스할 뻔 했던 그 여자 앞에서, 김희진이랑. 며칠 전에 키스할 뻔 했던 그 장소에서, 그 때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와. 그것도 그 와중에 눈까지 마주쳐버렸다. 정말 타이밍 병신이네. 유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굽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수연은 왜 바보같이 핸드폰을 두고 내렸던 걸까. 그리고 희진은 왜 하필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키스를 했던 걸까. 왜, 정말 왜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걸까. 따로따로 일어났어도 되었을 텐데. 자신과 희진을 바라보던 커다란 그 눈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스쳐지나갔던 그 묘한 표정도 다시금 유리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힘이 탁 풀려버렸던 그 표정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을 바라보는 유리마저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슬아슬한 시선과, 굳게 다물었던 그 붉은 입술과, 끝이 약간 쳐져있던 짙은 눈썹.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의미로 바라보았던 걸까. 숱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답을 알 수가 없으니 정리를 할 수 없을 수밖에.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희진을 억지로 집 앞에 데려다 놓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을 강하게 짓누르는 그 질문들을 견뎌낼 수가 없어서 침대 위에서 멍하니 팜플렛만 보고 있었다. 정수연정수연정수연. 수도 없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수연과 헤어지고 난 후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의미 없이 수연의 이름만 반복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답을 모르는 질문들을 생각하고 있는 건 괴로운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유난히 좋아했던 건, 수학만큼은 항상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있어서 였다. 답이 단 하나이기에 그만큼 답도 명쾌하게 내릴 수 있고, 답이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도 금방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복잡하게 생각해야 답을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끔찍이 싫어했다. 그래서 이제껏 살아오면서 부딪힌 수많은 삶의 질문들 중, 복잡한 질문들은 일부러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오로지 단순한 것만. 오로지 풀기 쉬운 것만. 그렇게 쉽게 살아오다보니 결국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살아온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요즘은 부쩍 그렇게 살아온 걸 후회하고 있다. 음식도 이미 먹어봤던 사람이 그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문제들 역시 피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혀가며 풀어왔던 사람들이 잘 풀 테니. 이제껏 복잡한 문제들을 직면하지도 않고 살아왔고, 심지어 사랑마저도 쉽게 쉽게 해왔던 유리로서는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요즘의 정수연이라는 여자는. 유리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결국 몸을 다시 펴고 베개 옆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28번을 누르려다가, 전화번호부로 들어가 직접 정수연이란 이름을 찾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단축번호, 이것도 다른 걸로 바꿔야지. 이번에는 신호음이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몇 번 울리자마자 뚝 신호음이 끊기고, 그리고 갑작스러운 침묵이 유리를 맞았다. 유리는 한참이나 말없이 수화기를 붙잡고 있다가, 잔뜩 말라있는 입을 열었다. 입안이 말라 있는 탓에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목구멍이 따가워진다. “자?” - 아니. “…….” 단조로운 말투. 하지만 어딘가 힘이 없는 그 말투에 유리는 순간, 설마 아까 일 때문에 기운이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 - 뭔데? “아니, 음. 그냥…. 잘 자라고.” - 뭐야. 그런 건 그냥 문자로나 할 것이지 왜 전화로 해? “하여튼…. 좀 싹싹하게 굴면 안되냐?” - ……. 이쯤 되면 받아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저 쪽에선 말이 없다. 목이 탄다. 유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 쪽에 있는 냉장고로 향했다. 발걸음을 한 번씩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딱딱한 방바닥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름의 밤은 축축하다.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방 안에서, 유독 자신만 바짝 말라 있다는 생각에 유리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어쨌든 난 아우디 수리비는 받아야 하니까.” - ……. “데이트는 하자.” - 그래놓고 오늘처럼…. “안 그래. 오늘은 정말 나도 예상 못했던 거였어.” - …….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일찍 끝나지?” - 어. “그럼 내일 평소처럼 데리고 갈 테니 끝나고 봐.” - 그래. “…….” 냉장고 문을 열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수연의 숨소리도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숨소리에 유리는 급하게 냉장고 안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차갑다. - 더 할 말 없으면 끊어. “아, 저기.” - 왜? 생수병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핸드폰을 든 손을 바꿔 들고 꼭 쥐었다. 금방 든 생수병 때문에 손이 차가웠었는데, 금세 다시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핸드폰이 뜨거워서는 아니다. “…미, 미….” - 뭐? 빨리 말 해. 나 좀 자게. “…미, 미…. 미안해.” - ……. “그게, 음. 그러니까. 아까, 그 차안에서….” - 미안할 게 뭐 있어. 연인끼리 키스 한 거. “아, 그, 그런가. 그래도 네가 놀랬을 까봐……서.” - 내가 뭐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렇네.” - 그럼 끊는다. “으, 응.” - ……. “그래, 그럼 내일 봐.” 어렵사리 꺼낸 미안하다는 말과, 그리고 너무 덤덤한 대답. 그 대답을 듣고 나자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어, 유리는 식탁의자를 살짝 빼고 거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이제 곧 끊기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떼려는데 조용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저기. “어?” - …잘 자. 들고 있던 생수병이 뚝 떨어져 방바닥을 굴러간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작은 생수병을 바라보며, 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너도 잘 자.” 통화는 끊겼다. 유리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생수병을 바라보았다. 데굴데굴 구르던 생수병은 벽에 부딪혀 멈춰있다. 마치 데자뷰처럼, 자연스레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태연의 화실에서 바라보았던 그 장면. 그 때엔 생수병 대신 빈 캔이었고, 유리는 그 빈 캔을 바라보며, 자신과 함께 했던 그 태연이 아니라, 미영과 함께 하고 있는 태연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유리는 그 생수병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유리 자신을 생각했다. 그 때 그 빈 캔을 바라보며 태연을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은 비슷한 감정으로 그 생수병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 그 많고 많은 복잡한 질문들,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그것들이 일순간 풀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다시 그 복잡한 실타래들을 단단히 동여맸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생수병 겉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그 병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리는, 뚜껑을 열고 싱크대 개수대에 그 찬물들을 다 부어버렸다. 콸콸콸 쏟아지는 그 물들을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 실타래들이 이렇게 쉽게 풀어질 리는 없잖아. …풀어져서도 안 되고. Hissing 10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수연이 자신의 몸만 한 장난감 바이올린을 사달라며 한 여름에 원피스 차림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대(大)자로 뻗어서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결국 포기한 어머니가 장난감 바이올린을 사줬었다. 바이올린을 사들고 집에 돌아온 수연은, 마침 옆집 동수에게 이걸 자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수는 유치원 시절 때부터 같이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였는데, 며칠 전에 이사 온 수빈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가 얼마 전에 산 주주2층집을 자랑하며 보여줬더니 그 아이 집이 돈이 많은 것 같다며 요즘 그 여자애만 졸졸졸 쫓아다니는 게 뵈기 싫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장난감 바이올린을 보여주며, 이거 주주2층집보다 더 비싼 거야 라고 자랑할 생각이었다. 마침 놀이터에서 동수와 수빈이 같이 놀고 있는 걸 발견한 수연은, 원피스가 더러워졌으니 그것부터 갈아입고 나가라는 어머니의 외침을 무시하고 바이올린을 품에 꼭 안은 채로 놀이터로 뛰어갔다. 하지만 얼마 안가 어린 수연은, 정말 처절한 패배감을 느껴야했다. 자랑스럽게 장난감 바이올린을 동수에게 보여주자마자, 그 눈치도 없는 남자아이가 그걸 받아들고 쪼르르 달려가 수빈이에게 보여주며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걸 사주겠다고 작업멘트를 날리는 게 아닌가. 헤헤 거리며 웃고 있는 흙 묻은 그 작은 얼굴을 보며 패배감에 몸부림 친 수연은 결국 일을 내버렸다. 쪼르르 달려가 동수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뺏어서, 그 바이올린으로 동수의 머리를 내려쳐버린 것.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 팔팔 달아 올라있던 모래. 머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는 동수. 그 옆에서 덩달아 울고 있던 수빈이. 활처럼 휘어져 있는 바이올린을 들고 이를 악물던 수연. 그 날, 수연은 정말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에어컨 하나 없던 좁은 아파트에서 살던 그 시절.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수연을 매우 치셨다. 그렇게 두들겨 맞은 다음에는 동수네 집에 가 머리를 조아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아야만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안가 동수는 이사를 갔다. 수연은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어머니에게 두들겨 맞았던 엉덩이가 욱신욱신 아파온다. 그리고 지금, 수연은 엉덩이 쪽이 매우, 무척이나 욱신욱신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내진 못하고 있다. 그 욱신거림의 근원, 그러니까, 새삼스레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 장본인이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있으니. “속 안 좋아?” 욱신거리는 느낌 때문에 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운전을 하고 있던 유리가 나지막이 묻는다. 수연은 대답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던 유리는, 버튼을 눌러 반쯤 열려있던 차창을 완전히 열어놓았다. 새삼스러운 그 배려에 수연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쓸데없는 배려는 참 잘하네, 대놓고 입술을 부벼댈 때는 언제고. 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이올린을 들고 신나게 뛰어가던 그 작은 뒷모습과, 자신의 눈앞에서 희진과 키스를 하던 권유리의 그 시커먼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은 엇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동수의 경우에는 뒷모습만 봐서 그 표정을 볼 수 없어 덜 열 받았지만, 유리 같은 경우는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바람에 표정까지 다 읽혔다는 점이다. 키스를 하면 키스를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지. 단지 키스만 했다면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자신을 보며 당황해하던 그 표정, 흔들리던 눈빛, 오로지 그 표정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수연이 평소에 보아온 유리라면 남에게 키스하는 걸 들켰다고 당황해 할 성격은 아니다. 거기다 둘 사이가 연인 사이라는 걸 알고 있는 수연이라면, 수연에게 들켰다 해서 당황해 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리는 수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몹시 당황했고, 심지어 희진을 밀쳐내려고 했다. 물론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권유리가 그런 반응을 보이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바보 같은 생각도 드는 건 사실이다. 혹시, 권유리가 희진과 키스하는 장면을, 다른 사람도 아닌 수연 자신에게 보였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당황한 건 아닐까, 라는 그런 생각.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다른 사람도 아닌 수연에게만큼은 그 여자랑 키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었던 게 아닐까, 라는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 자신이 그런 유치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해선 이제 어이없어할 기력도 없었다. 요 근래에는 부쩍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제는 오히려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런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지. 거기에 왜 그렇게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밤에 전화까지 했는지. 정작 유리는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이 적당히 섞인 그 목소리의 끝은 살짝 떨려 있었다. 건조한 듯 하면서도 떨려오는 그 목소리에 수연의 심장마저도 떨렸다. 그 묘한 분위기에 수연의 감정마저도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엔 물어볼 뻔 했다. 왜 그렇게 당황해하는 건지, 목소리는 왜 그렇게 떨리는 건지, 그리고, 이 밤중에 전화해서 왜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지. 하지만 끝내 물어보지는 못하고 그저 잘 자라는 말 밖에 하지를 못했다. 그 후에 들려올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웠다. - …좋아하는 거 아니야? - 응? -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 - 아, 그, 그래? - 응. 그러니까 네 친구가 그렇다는 거잖아? 그 사람의 애인이라는 여자만 보면 괜히 성질나고, 괜히 틱틱대고. 그리고 밤에 전화하고 나서 한숨도 못자고, 심장도 살짝 떨려오는 것 같고, 하루 종일 불쑥불쑥 그 사람 생각나고, 문자 한 번 보낼 때마다 수십 번이고 고쳤다가 써가면서 보내고, 그렇다는 거잖아? - 으응. - 그럼 좋아하는 거지. 아니, 왜 그런 것도 눈치 못 챈데? 그 사람 바보야? -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좀….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 - 갑작스러워서? - 그, 그런 걸지도? - 사랑이라는 게 원래 갑작스러운 거야. 그 사람도 참…. 자기감정에 충실하라 그래. 그나저나, 수연아. - 응? - 너 왜 그렇게 땀 흘려? 더워? - …아, 아니야. 이건 불과 몇 시간 전에 교무실에서 미영과 나눈 대화. 오늘 방학식을 하고 본격적인 보충학습이 시작되기 전 며칠간은 쉰다. 그 쉬는 동안 태연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온천휴양지에 다녀오자는 제의를 하는 미영의 말에 알았다고 맞장구를 쳐주다가 우연히 꺼낸 그 대화를 나누는 동안 땀을 거의 한바가지나 쏟아댔다. 그 추운 교무실 안에서 땀을 주르륵 흘리니 미영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다정스레 묻기까지 했다. 그런 미영에게 아픈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여름방학 보충수업 시간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커서가 깜빡거리는 화면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결국 퇴근시간에 제대로 퇴근도 하지 못하고 30분이나 후에 퇴근해야했다. 퇴근시간보다 10분 더 일찍 와 있던 유리는 결국 40분이나 기다리고 있던 셈. 오늘 첫 출발도 끝도 없는 말다툼으로 시작하겠구나, 라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갔는데 의외로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라고 묻길래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했더니 고생했네 라고 대답한 게 전부. 무뚝뚝한 말투 속에 살짝 묻어있는 다정함이 믿기지가 않아서 수연도 별 말은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차마 자신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못하고, 내 친구가 그런다더라- 라는 식으로 시작한 미영과의 대화는 결국 당황스러운 결말로 끝을 맺었다. 연애지상주의자인 미영에게 이야기 해 봤자 어차피 결말은 뻔 할 거라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듣고 나니 쇼크였다. 좋아한다. 좋아한다라. 그 의미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미영의 말에 의하면 수연이 유리를 좋아한다는 게 되어버리는데, 수연이 알고 있는 좋아한다의 통상적인 의미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말과 권유리는 그런 식으로 연결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저렇게 껄렁껄렁한 스타일은 전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이상형이라는 걸 굳이 만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맞선 봤던 남자들 중에 호감이 갔던 남자들의 스타일을 살펴보자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었다. 착실하고, 모범생 타입에, 무언가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보통 그런 타입에 끌렸지, 유리처럼 딱 봐도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집안 잘 만나서 설렁설렁 놀고먹으며 살아가는 한량 타입에겐 전혀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가 처음에 자신을 한 달 만에 넘어오게 하겠다 어쩐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일 때에도 코웃음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권유리라는 여자가 전혀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한 달은커녕 2주일 만에 친구에게 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라는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들어버렸다. 물론 그 발언을 한 주인공은 자신이 말한 사람이 수연인 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 객관적일 수 있었던 거고, 그렇기에 그 말을 들은 수연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그 와중에 사랑하는 거야, 라는 말은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걸 해보지도 않았고, 유치한 감정놀이로 치부하고 비웃었던 수연이 사랑에 빠졌다는, 그것도 그 상대방이 유리라는 소리를 들으면 단순한 정신적 충격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리는 주말 오후라 그런지 차가 막힌다며 중얼거리고 있다. 살짝 살짝 열리는 그 입술을 바라보는 순간, 두 개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그 밤에 자신의 입술에 닿을 뻔 했던 그 입술과, 어제 자신이 보는 앞에서 희진의 입술과 맞닿아있던 그 입술. 수연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한 입술을 매만지면서 문득, 만약 그 날 밤에 정말로 키스를 했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권유리와의 키스. 정말 어떤 느낌일까. 김희진이라는 여자는 분명히 알고 있을 느낌. 하지만 정수연은 모르는 그 느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핸들을 부여잡고 있는 유리가 툭 내뱉듯이 말한다. 그 목소리에 괜히 화들짝 놀란 수연은 입술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치고 있는 유리는, 오늘은 루즈한 롱티셔츠에 블랙 진을 입고 있다. 살짝 보이는 쇄골에 눈이 가서 수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냥…아무데나.” “…흐음.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 나 오늘 아무 것도 안 먹어서 배고파.” 실실 웃으며 수연을 바라본다. 아이 같은 그 환한 웃음에 괜히 틱틱거렸다. 운전이나 해. 운전 중에 어딜 봐? 누굴 죽일 작정이야? 아, 뭐… 누군 보고 싶어서 본 줄 아나, 무의식적으로 본거야. 무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를 왜 봐? 내가 그렇게 좋니? …아, 진짜. 투덜투덜 대며 앞을 바라본다. 차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유리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리는데,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찔러대는 게 불편한지 눈을 찡긋거린다. 수연은 슬그머니 손을 들어 흐트러진 유리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손가락 끝에서 머릿결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손길에 유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수연이 손가락을 치우자, 유리가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운전에 방해되는 것 같길래….” “그래.” 수연이 작게 중얼거리자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입 꼬리를 위로 부드럽게 올리는 웃음. 어디선가 많이 봤던 웃음인데, 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생각해보니 며칠 전 런칭파티장에서, 유리가 희진을 향해 보여주었던 그 미소와 닮았다. 왜 자신에겐 저렇게 웃어주지 않는 거지, 라고 생각했던 그 웃음.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주는 웃음이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 저 웃음을 바라보았을 때에도 생각한 거지만, 유리가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왜 몰랐던 걸까. “으아, 진짜 배고프다. 꼬르륵 소리나.” 배를 퉁퉁 치면서 말하길래,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피식 웃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여름날의 햇살이 들어온다. 뭘 먹을까나, 라고 흥얼흥얼 거리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햇살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유리의 말이 생각나서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근데,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무 것도 안 먹었어? 너 아침밥도 안 먹고 다니니?” “응? 아… 뭐 먹을 수가 있어야지.” “왜?” “네가 다 부셔놨잖아. 밥통도 부셔놓고…. 전자렌지도 망가져 있더라. 내가 평소에 밥을 직접 해먹고 이런 스타일도 아니고…. 그래도 전자렌지 있을 때에는 대충 때웠는데, 그 것마저 망가졌으니…먹을 수 있는 게 없는 걸.” “…….”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하면 미안한 마음이 덜 할 텐데,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더 미안해졌다. 그날 아침에 너무 정신없이 이것저것 던져대는 통에 몰랐는데 그 와중에 전기밥솥도, 전자렌지도 다 망가진 모양이다. 수연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그게 며칠 전 일인지 세어보았다. 1, 2, 3…. 아, 그러고 보니 저번 주 일요일 이였지? 지금이 토요일이니까 6일이네. 그럼 6일 동안…아침밥도 안 먹고 다닌 거야? “희진 씨가 안 챙겨줬어?” “누구?” “희진 씨가 안 챙겨줬냐구. 그래도 명색이 애인인데….” “걔가 밥 같은 거 하게 생겼어? 차라리 사주겠다 그럴걸, 걔는.” “너 집안일 도와주는 아주머니 계시다며?” “그 아줌마는 그냥 청소 정도만 도와주셔. 밥 같은 건 안 해주시고.” “그럼, 너 그날 이후로 6일 동안 아침밥도 안 먹었어?” “응. 뭐, 가끔은 저녁밥도.”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좀 봐. 너무 덤덤하게 말하는 유리의 태도가 못마땅한 수연이었다. 6일 동안 한 끼, 혹은 두 끼로 버텨왔단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울컥한 기분도 든다. 그래서 저렇게 마른건가 싶기도 하고, 한국 사람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건데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지 않은 게 뭐가 자랑이라고 저렇게 덤덤하게 말하는 건지. 괜히 화가 나서 손가락을 들어 유리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게 뭐야. 넌 손이 없니, 밥이 없니? 누가 안 해주면 못 먹어? 그리고 밥솥이나 전자렌지는 사면 될 거 아냐. 돈도 많은 애가 왜 그런 건 안 사는데?” “악!! 아퍼어어엇! 왜 갑자기 성질이야?!” 정말 아팠는지 눈가에 눈물도 살짝 고여 있다. 너무 아파하는 것 같길래 손가락을 떼고 손바닥으로 꼬집었던 곳을 유리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재빨리 쓰다듬은 다음 다시 손을 뗐다. 요즘 여자들은 왜 이렇게 자꾸 성질을 내는 거야, 라며 투덜거리는 유리를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많이 배고파?” “응.” “그럼 계속 배고파하고, 이 근처에 가까운 백화점 있으면 거기로 가.” “에?” “백화점 가자고.” “거긴 왜?” “가자고 하면 갈 것이지 뭐가 말이 이렇게 많아?!” 이것 봐, 또 성질내.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가까운 백화점이 어디 있더라 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수연은 또다시 슬그머니 웃었다. 가만히 보면 귀여운 면도 있다. 쉽게 발끈하면서도 또 그만큼 금세 식는다. 가끔은 얼굴을 굳히며 근엄한 척도 하는데 수연이 손만 번쩍 들면 바로 눈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며 바보처럼 웃어대기도 한다. 온갖 개폼은 다 잡아대다가도 풀어질 때는 또 한 없이 풀어진다.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다가도 또 금세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정말 초등학생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생각이 조금 단순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본인이야 복잡한 척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드문드문 매너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차문을 항상 열어주는 것도 그렇고, 정말 골초인 것 같은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수연을 생각해서인지 그 때 교무실에서 피자배달원 복장을 입고 만났을 때 빼고는 유리가 담뱃갑을 손에 쥐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별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수연의 표정변화를 항상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도 그렇다. 표정이 변할 때마다 그 때 그 때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것도, 그런 게 몸에 배지 않는 이상은 힘들다. 연하를 사귀면 그런 점이 좋아. 환청처럼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애 키우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좀 그런 기분 들어. - 그래봐야 한 살 차이면서. - 그래도 한 살 차이가 꽤 큰 거야. 1년이면 밥이 몇 그릇인데? 거기다 때때는 그 동안 좀 철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도 철이 좀 덜 들었어. 그러면서 자기가 나 지켜줘야 한다느니 뭐 그런 소리 하면서 결연한 표정을 짓는데, 진짜 귀엽다니까. - 근데 너 맞장구는 쳐 주잖아. - 응. 안 그러면 삐지거든. 나이와 사랑은 비례하는 게 아니라면서. 저번에 싸울 때 내가 나보다 어린 게 어쩌고저쩌고 했다가 한 달 내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만 만나면 계속 투덜거렸어. 나이 많은 사람 만나니까 좋아? 좋겠다? 응응? 이러면서 툴툴 대는데 귀엽기도 하면서도, 얄밉기도 하고…. 아니 뭐, 여튼 그래. 연하는 귀여워. 너도 한 번 연하 만나봐. - 난 날 정신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아. 연하는 그런 면에서는 꽝이잖니. - 연하라고 그런 거 못하라는 법은 없잖아. 그리고 가끔 그렇게 귀여운 행동하다가도, 아주 가끔 멋있게 보일 때도 있어. 그게 좋더라. 한 없이 어린 아이 같다가도, 문득 보여주는 그런 행동들이. 그런 건 가끔 보여줘야 더 멋있는 법이잖아. 백화점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는 유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살짝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열어 어제 밤에 유리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통화를 뚝 끊고 나서 유리가 보냈던 문자. 어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던 건, 아마 이 문자 탓이 아닐까 싶었다. - 바짝 말랐어, 너 때문에. 어떤 의미로 이런 문자를 보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의미는 오로지 유리만이 알고 있겠지만, 굳이 의미를 묻고 싶진 않았다. 그저 나름대로 합리화만 했을 뿐이다. 권유리는, 한 달 안에 자기를 꼬셔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아껴하는 아우디 수리비를 받아야 하니. 그래서 이런 문자를 보냈을 뿐, 절대 진심이 담긴 문자는 아니라고. 정말 별 의미 없는 문자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가 을지로니까, 롯데 본점 가면 되나…. 유리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엄지로 점점 점멸해가는 핸드폰의 화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닿아있는 권유리,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어제 밤에 침대에 엎드려서 장고 끝에 바꿔놓은 이름. 흘끔 곁눈질로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건조한 모양인지 혀로 아랫입술을 적신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들어 와 있던 조명은 이미 꺼진지 오래다. 엄지로 다시 화면을 매만졌다. 권유리, 권유리, 권유리. 그래. 이름이 있는데 개싸가지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 * * 주말이라 그런지 백화점 안은 사람이 많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굉장한 소음을 만들고 있었는데, 유리는 그게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 많은 곳에 자기를 대체 왜 데려온 거냐는 듯 한 표정으로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유리의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끌고 온 수연은, 층별 안내도가 있는 곳 앞에서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갑작스럽게 손목이 잡힌 유리가 어정쩡한 톤의 목소리로 수연에게 묻는다. “백화점은 왜 온 거야?” “…뭣 좀 사려고.” “고작 너 뭐 사려고 나 배고파 죽겠다는데 여기부터 들린 거야?” “어. 싫어?” “됐다, 됐어. 이미 끌려온 마당에 무슨. 기다려.” 그렇게 말하더니 손목을 비틀어 수연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아 꺼내길래, 수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뭐해?” “전화.” “전화? 어디로?” “쇼핑할거라며? 귀찮게 걸어 다니면서 쇼핑할 거야? 이 사람 많은 곳을? 전화 한 방이면 룸 안에서 편하게 고를 수 이ㅆ…. 악, 뭐야?!” 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연이 손가락으로 유리의 볼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아프다며 울상을 짓고 있는 유리의 손에서 핸드폰을 재빨리 뺏고, 자신의 핸드백 속에 쏙 집어넣었다. 황당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는 유리에게 수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쇼핑은 걸어 다니면서 하는 게 제 맛인 거야. 편하게 앉아서 서비스 해 주는 음료수 마셔가면서, 팜플렛 보며 고르거나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신상품 중에 그냥 대충 고르는 게 쇼핑이니?” “그럼 진짜 걸어 다니면서 하자고? 이 사람 많은 데를? 안 해. 싫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유리의 표정이 꽤나 귀엽다. 순간적으로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라고 말할 뻔 했던 수연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으로 유리의 이마를 콩 찍었다. 얼굴을 살짝 찡그린다. 아, 뭐야. 진짜 꼭 애 달래는 것 같아.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그쳤다. “이런 것도 한두 번쯤 해보며 살아야지. 넌 대체 그 동안 어떻게 산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무슨 지가 공주인 줄 아나….” “…….” 결국 대꾸도 하지 못하는 유리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손에 잡히는 손목이 꽤나 얇게 느껴진다. 정말 삐쩍 말랐구나, 권유리는. 안 그래도 마른 여자가 6일 동안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다는 생각이 드니 또다시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것도 오로지 온전히 자신 때문이 아닌가. 구박을 받을만한 이유도 없는데 그 난리를 겪고, 거기에 밥도 못 챙겨먹고 다녔다. 그래서 수연은,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부셔놓았다는 전자렌지와 밥솥을 사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백화점에 끌고 온 것. 손목을 잡힌 채로 질질질 끌려오던 유리가 무슨 생각인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갑자기 발끝에 힘을 주며 멈춘다. 잘만 끌려오던 몸이 멈추자 수연은 발을 에스컬레이터의 검은 계단위에 올리려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얼굴이 보인다. 제법 진지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눈을 몇 번 껌뻑껌뻑 거리더니, 갑자기 씨익 웃기 시작한다. 그 웃음에 수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꿈틀꿈틀, 수연의 손에 잡힌 손목이 은근슬쩍 움직이더니 곧 손아귀에서 쑥 빠져나갔다. 갑자기 허전해진 손의 감촉에 수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유리가 이번엔 그 손을 덥석 잡고 손에 깍지를 끼었다. 얽힌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확확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서, 수연은 괜히 고개를 올려 에스컬레이터 위 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느 샌가 옆에 다가온 유리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수연의 몸을 자신의 옆으로 확 끌어당겼다. 유리의 팔에 수연의 팔이 닿았다. “그럼 손이라도 잡고 가. 손목은 쉽게 놓치니까. 이 사람 많은데서 잃어버리면 큰일이잖아.” “니가 애니?” “금방까지 애 취급 다 해놓고 뭘. 너 표정 보면 난 다 알아. 애 달래는 것 같다고 생각했잖아. 아니야?” “내, 내가 뭘?!” 버럭 하는 모습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을 때에는 이미 유리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수연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자신이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서서히 올라가는 유리의 몸을 따라 수연 역시 유리 바로 옆에 올라탔다. 유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난 백화점에서 이렇게 쇼핑하는 거 처음이야. 항상 룸에서 쇼핑했거든. …재수 없어. 왜? 내 주위 친구들은 다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 많은 곳에 있는 걸 싫어한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유리의 손을 잡고 8층에까지 왔다. 온갖 가정용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층에 내려 수연이 이끄는 곳으로 말없이 따라오던 유리는, 전자렌지 파는 곳이 어디 있으려나, 라고 중얼거리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수연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결혼해?” 뜬금없는 말에 수연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옆에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문득 얼마 전에 미영이 유리의 키가 이정도 되지 않냐며 손으로 허공을 휘휘 내저었던 게 생각났다. 확실히 미영의 말대로 정확히 그 지점에 유리의 얼굴이 있다. 건방지게 나보다 키도 커. 괜스레 울컥한 마음이 들어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슬쩍 밀었다. 얼굴이 뒤로 밀린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면서 유리가 울상을 짓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니, 뜬금없이 어울리지도 않게 가정용품 있는 곳에 오길래. 맞선 봤던 남자 중 한 명이랑 결국 그렇게 됐나 해서.” “내가 미쳤니?! 맞선 본 남자들 중에 마음에 든 남자들도 없었거든?” “…다행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유리의 말에 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놀라긴 유리도 마찬가지였는지 이마를 가리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재빨리 다시 내리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손이 맞닿고 있는 부분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다행이라니.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란 소린가. 아니면 맞선 본 남자들 중에 마음에 든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란 소리? 어느 쪽이든 권유리가 다행이라고 할 만한 이유는 아니다. 유리와 자신의 사이는 어디까지나 내기라는 계약에 의해 얽매여 있는 관계일 뿐이니까. 어쩌면 그냥 별 생각 없이 말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대는 심장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수연은 이상하게 뛰어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지워버리기 위해, 애써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어내며 반문했다. “그게 왜 다행이야?” “으, 음. 그게. 음. 아, 그래. 너랑 결혼할 그 남자에게 다행이란 말이야. 절대 내가 다행이란 소리가 아니라, 그 남자가. 하마터면 남은 인생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ㅃ…. 아악!” 지옥의 나락이 어쩌고저쩌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여대는 유리의 정강이를 또다시 걷어찼다. 이제 이게 몇 번째더라. 숫자를 세기도 귀찮을 만큼 꽤 많이 깐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유리의 반응은 매 번 똑같다. 몸을 숙이고 다리 쪽을 부여잡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며 수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만 부여잡고 따라오지? 또 한 번 까이기 전에. 그렇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려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황급히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쪽에 전자렌지 등이 진열되어 있는 매장을 발견하곤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진짜 뭐 살려고?” “전자렌지랑 전기밥솥.” “어?” “집에 그런 것 정도는 있어야지.” “…밥솥은 필요 없어.” “왜?” “그건 희진이가 사준 댔거든. 뭐 밥은 못해주니 밥솥만큼은 자기가 사준 댔던가.” 또 김희진. 수연은 샐쭉한 표정을 지어냈다. 매장 직원이 달려와서 찾으시는 게 있냐고 물어본다. 신경을 건드린 건 유린데 괜히 직원에게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더니 직원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수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어느새 흥미로운 눈빛으로 매장 안에 있는 전자렌지들 앞에 서서 그것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수연은 저 쪽에 있는 다른 손님에게 가 있는 직원의 등 뒤에 대고 조용히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한 후 유리의 옆에 다가갔다. 심각한 표정으로 전자렌지를 열어보며 안을 둘러보고 있다. 김희진. 툭하면 김희진이래. 심통이 나서 고개를 숙이고 전자렌지 안을 보고 있는 유리의 뒤통수를 쳤다. 이젠 맞는 것도 습관이 된 탓인지 아프다고 울상을 짓지도 않는다. 그저 손으로 스윽 한번 머리를 만지더니 고개를 들고 손으로 전자렌지의 윗부분을 퉁퉁 치면서 말한다. “이거 살래.” “네가 보면 뭘 아니? 왜 이걸 사자는 거야?” “그냥. 이게 마음에 들어. 검은색.” “…뭐야.” 다른 것 좀 둘러보고 사. 싫어, 이거 살래. 이게 마음에 들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아무래도 고집을 쉽게 꺾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러 군데 둘러보며 사고 싶었는데, 들어오자마자 사가게 생겼다. 수연은 흘끔 전자렌지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심 다른 커플들처럼 쇼핑을 같이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옆에 서 있는 이 여자와. 그래도 가지고 싶다는 걸 사야지, 라는 생각에 한 쪽에 서 있는 직원을 불러 계산을 하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유리가 자신의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낸다. 그런 유리의 손을 손으로 살며시 덮으면서 수연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자 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니가 왜 나한테 이런 걸 사줘?”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내가 살래.” “내가 계산한다니까?” “내가 살게.” “내가 계산해.” “내가 산다고.” 눈을 부릅뜨며 서로 사겠다고 난리를 부리자 가운데에 낀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결단코 자기가 사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유리는 진심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자신이 사겠다는 수연의 마음도 진심이다. 자신이 망가뜨린 것이니 자신이 사야겠다는 마음도 들고, 거기다 밥솥은 희진이 사기로 했다는 말에 더욱더 자신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꼭 이것만큼은 내가 계산해야겠다고 말했는데, 유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꾸 자기가 계산 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서로 양보도 하지 않는 그 끊임없는 줄다리기가 10분가량 지속되었다. 유리가 건네주던 카드를 받으려고 서 있던 직원은 결정되면 말씀해달라고 하고 다른 손님에게 가버린 지 오래. 계속 투닥투닥 같은 말만 지속하다보니 유리도 그렇고, 수연도 그렇고 지쳐버려서 내가 살게, 내가 계산할게, 라고 말하지도 않고 ‘내가’ 라는 두 글자만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지쳐버린 유리가 한숨을 내쉬며, 수연의 어깨위에 손을 얹더니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해.” “뭐?” “내 집안의 물건을 부순 게 그렇게 미안하다면.” “응.” “오늘 우리 집에 가서 네가 나한테 밥을 해주는 거야.” “…뭐?” “그리고 그 밥값으로 내가 이 전자렌지를 계산하는 거지.” “대체 무슨 밥을 얻어먹으려고 전자렌지랑 밥을 바꿔?” “아, 그냥 그렇게 해. 피곤하게 자꾸 토를 달아…. 그리고 우리 이러고 있는 거 무지 쪽팔리지 않니? 주위를 둘러봐. 사람들이 다 우리만 쳐다보고 있잖아.” 유리의 말에 그제야 수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매장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매장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수연과 유리를 바라보며 쑥덕쑥덕 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들을 이제껏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금세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수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유리가 빙긋 웃으며 기다려, 라고 말하며 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일단 계산은 유리가 하기로 결정했는데, 계산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유리가 내민 카드를 본 직원이 정색을 하며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는 바람에 급하게 뛰어내려 온 매니저와 또 한바탕 씨름을 했다. 편하게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고 끌고 가려는 매니저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럴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유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수연은 새삼스레 권유리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긴 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이제껏 하찮게 대하느라 잊고 있었던 사실. 국내의 몇 안 되는 대기업 회장의 손녀딸. 그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 거기에 더해 비록 (수연의 시각에 의하면) 덜 떨어지긴 했지만 외모도 제법 괜찮다. 입만 열면 욕을 내뱉는 걸 빼놓고선 매너도 괜찮은 것 같다. 확실히 굳이 유리가 이 여자 저 여자 찾아다니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주위 여자들이 알아서 덤벼들 것 같은 배경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를 이제껏 개싸가지라고 욕하면서 매일 정강이를 까대고, 여기저기 꼬집고, 뒤통수도 후려치고 다녔으니, 유리 입장에선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싶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변함없는 태도로 대하는 권유리. 문득, 희진이 밥을 해주게 생겼냐고 말하던 유리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확실히 김희진이라는 여자는 아무리 연인이여도 살갑게 밥 한 번 직접 해주는 타입의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수연은 몇 번이고 폴더식 인사를 하는 매니저에게 계속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밥이야 한 번 정도 해주고 말지.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거…. 그러고 보니, 누구한테 밥 해주려고 마음먹은 건 아버지 빼곤 처음이구나. 굳이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매니저의 호의를 뿌리치고 수연 쪽으로 다가온 유리가 많이 기다렸냐며 빙긋 웃는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준 탓에 실내는 시원한데, 매니저와 이야기하느라 진땀을 흘린 모양인지 땀방울 하나가 유리의 턱 선을 타고 주룩 흐른다. 수연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턱 선을 타고 흐르고 있는 그 땀을 닦아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으헝헝 거리며 웃는 유리의 등을 찰싹 때리고 앞서 걸어갔다. 렌지는 집에까지 배달해주기로 한 것 같다. 유리가 입을 동그랗게 말고 휘파람을 작게 휘휘 부른다. 알 수 없는 그 멜로디를 들으며 걸어가던 수연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으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유리에게 물었다. “너 뭐 먹고 싶은데?” “응?” “밥 해달라며. 먹고 싶은 거 있음 읊어봐.” “…난 뭐, 그다지. 너 뭐 잘하는데?” “나?” “응.” “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이 무슨 음식을 잘하는 지 생각해보았다. 가정적인 어머니와, 외식보다는 집 밥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택에 집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웬만한 음식은 다 할 줄 안다. 문제는 맛이지만. 딸은 어머니의 손맛을 닮아간다는데 이상하게 요리를 잘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도 음식을 그렇게 썩 맛있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고, 그냥 그럭저럭 맛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긴 한데 딱 봐도 먹는 음식마저도 비싼 것만 즐겨 먹게 생긴 이 여자의 입에 맞을 정도면 꽤나 맛있어야 할 것 같다. 수연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자신이 그래도 제법 잘한다고 생각하는 음식의 종류들을 읊었다. “아, 그러니까…. 음. 김치찌개, 부대찌개,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스파게티, 오징어덮밥, 제육덮밥, 알밥, 두루치기, 순두부찌개, 에, 또 그리고….” “그럼 난 오므라이스.” “…뭐 이 병신아?” 기껏 읊었더니 말하지도 않는 오므라이스를 대답하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휙 돌려 욕을 내뱉었다. 갑작스러운 욕 세례에 유리가 당황했는지 흠칫 놀라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가로막으며 방어하는 시늉을 한다.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오므라이스, 오므라이스. 그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에스컬레이터의 난간을 부여잡았다. 하필이면 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음식을 해달라고 하는 건지. 어쨌든 먹고 싶은 걸 해주겠다 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 일단 밥을 계란으로 싸는 것 까지는 아는데 그 안에 그냥 밥 넣고 케첩만 뿌려서 만드는 건 아닐 테니, 나름대로 레시피는 있기 마련일 텐데 오므라이스를 잘 먹지 않아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너 집에 재료 같은 건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냐.” “…그럼 일단 지하 식품코너부터 가자.” “그러든가.” 일단 식품코너부터 가면 무언가 해답이 보이겠지, 라는 생각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 식품매장까지 갔다. 에스컬레이터에 내린 유리와 수연을 반기는 건 수많은 음식들과, 서로 팔짱을 낀 채로 장을 보고 있는 부부들, 아줌마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직원들의 요란한 방송 소리도 지하매장 안에 가득 들어차 있다. 확실히 위층 매장들보다 훨씬 시끄러운 지하 식품매장에 서서 수연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유리가 수연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왜?”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 응.” “고르고 있어. 여기서 멀리 벗어나진 말고. 찾기 힘드니까.”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유리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수연은 유리가 없는 사이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오므라이스는 어떻게 만드는지 여쭈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리가 오기 전에 얼른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에 재빨리 핸드백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사각형의 물체가 잡히길래 빙긋 웃으며 꺼내들었다.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려는 순간, 수연은 자신의 손에 잡힌 핸드폰이 자신의 것이 아닌 유리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내 핸드백에 집어넣었었지. 자신의 것보다 약간 더 작은, 그리고 최신형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 작은 기계 안에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정작 수연 자신도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유리의 번호를 개싸가지라고 저장해놨으니, 유리라면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게 뻔하다. 수연은 손가락으로 꾹꾹 자신의 번호를 눌렀다. 만날 말끝마다 독하네 어쩌네 라고 하더니, 독한년이라고 저장 돼 있기만 해봐. 오이가 가득 들어간 오므라이스를 먹게 해줄 테다. “…….” 순간적으로 눈에 가득 품었던 독기가,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를 바라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그 대신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려간다. 정수연. 분명 그렇게 적혀 있다. 그 외에 뭐 특별한 이모티콘이라든가, 아이콘 같은 게 붙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름이 적혀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던 수연은, 고개를 들어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직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숙여 이번엔 조심스레 전화번호부 메뉴에서 단축번호를 확인하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1번 단축번호에는 떡하니 유리의 번호가 적혀져 있다. 권유리 답네. 어이없어 피식 웃으며 단축번호를 쭉 확인하다가, 김희진 이라는 이름이 있는 곳에 멈추었다. 단축번호 7번. 당연히 1번에 있거나, 혹은 그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7번에 있다. 전화번호를 저장한다 해서 굳이 단축번호를 지정할 필요도 없으니 몇 개의 번호는 빼고 단축번호를 지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단축번호를 쭉 훑어보다가 18번에 태연의 번호가 있는 걸 보고 풉, 웃기도 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몇 개의 단축번호를 쭉 훑어보니 아직 수연의 번호는 단축번호를 지정해놓지 않은 것 같다. 음. 수연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번호가 적힌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또 화장실 쪽을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유리의 몸이 아직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서둘러 손가락으로 버튼을 꾹꾹 눌렀다. 다 누르고 확인 창이 뜨는 걸 보며, 빙긋 웃었다. 1번은 좀 미안하고, 2, 3, 4, 5번은 가족 전화인 것 같으니 나는 6번. 어쨌든 그 여자 앞에만 있으면 돼.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귀에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수연은 오므라이스면 일단 계란부터 사야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계란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 * * * “잘 먹었습니다.” 호쾌하게 수저를 내려놓으며 유리가 말했다. 이미 다 먹은 수연이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멍하니 베란다 쪽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유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몸을 벌떡 일으킨 유리는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겨서 싱크대 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저리가. 훠이훠이.” 이상한 효과음을 내며 손사래를 치길래, 수연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 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배고프다고 하도 난리를 치길래 밥을 꾹꾹 눌러서 해줬는데 그것도 깔끔하게 다 비웠다. 맛있냐고 물어도 더럽게 맛없어 라고 퉁명스럽게 말해서 숟가락으로 이마를 얻어맞기도 했는데 결국 그 많은 밥을 뚝딱 해치웠다. 그래도 먹을 만했던 모양이네, 다 먹은 걸 보니. 텅 비어있는 접시를 보며 슬그머니 웃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리의 얼굴을 보고서 황급히 그 미소를 거두었다. 둘이서 먹는 거라 별달리 꺼낼 것도 없어서 유리가 몇 번 왔다 갔다 했더니 식탁 위가 금세 깨끗해지고 있었다. 수연은 아까 백화점 반찬코너에서 사왔던 반찬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유리의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침대가 있는 거실 쪽으로 걸어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건데, 백화점에서 장보고, 돌아와서 음식 만들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결국 저녁밥이 되어버렸다. 하루에 한 끼, 혹은 두 끼만 먹는다는 유리의 말이 속상해서 백화점에 데리고 갔던 건데, 결국 오늘도 유리는 한 끼만 먹게 되어버렸다. 물론 그건 수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입안이 간질간질하다 싶더니 이내 하품이 나와서, 손으로 입을 막고 길게 하품을 했다. 어제 유리 문자 때문에 잠도 거의 못 잤는데 오늘 하루 종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더니 온 몸이 뻐근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살짝 훔치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어깨가 잔뜩 뭉쳐있는 게 손끝에서 느껴졌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꾹꾹 어깨를 주무르는데, 문득 그런 수연의 손을 치우고 무언가가 수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부여잡았다. 허공에 붕 뜬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수연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적당한 힘을 주며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하는 유리의 손길에, 수연은 애써 퉁명스럽게 말하며 어깨를 비틀어 유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웬 아부는.” “왜, 밥도 해주신 분께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빙글 몸을 돌려 말하는 수연의 몸을 다시 반대쪽으로 휙 돌리더니 또 어깨를 잡고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수연은 결국 그런 유리의 손길에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손길이 제법이다. 점점 시원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수연이 온 몸에 감돌았던 긴장을 풀며 턱을 약간 쳐들었다. 수연의 눈에 벽에 붙어있는 거실의 벽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6시 50분. 음, 6시 50분이네. 에? 6시 50분?! 수연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그래도 여전히 시계바늘은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점심밥이 아니라 저녁밥을 먹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5시쯤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7시다. 수연은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유리의 손에서 다시 한 번 빠져나와, 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유리의 침대 위에 던져놓았던 자신의 핸드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핸드백을 잡지는 못했다. 수연의 손목을 유리가 덥석 잡는 바람에. “벌써 가려고?” “벌써라니. 야, 지금 7시야.” “그래도 후식으로 맥주라도 마시고 가.” “뭐?” “밥을 해줬으니 보답으로 이 정도는 대접해야지. 원래대로라면 양주나 와인을 줬겠지만, 어떤 여자가 다 깨부숴서 말이지. 생존해 있는 건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뿐이네.” 씨익 웃으며 은근히 그 날의 일을 끄집어내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를 째려보았다. 여유 만만한 웃음을 흘리던 유리가, 그럼 기다려, 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냉장고 쪽으로 향한다. 수연은 결국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휘파람을 부르며 냉장고 안을 바라보는 유리를 바라보다, 몸을 슥 돌려 거실 안을 구경했다. 확실히 무언가 텅 비어있는 것 같다. 그 전에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관찰해 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무언가 더 많이 들어차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다. 내가 좀 심하긴 했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스프링이 아래위로 흔들린다. 손으로 스윽 시트를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가득 느껴졌다. 느낌 좋네, 그 땐 몰랐는데. 말 그대로 새하얀 시트를 보자 권유리와 김희진은 이거 사이좋게 덮고 자겠구나 라는 유치한 생각이 또 들었다. 정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 건지. 그런 몹쓸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주먹으로 콩콩 머리를 쥐어박았는데, 갑자기 그런 수연의 볼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봤더니 유리가 맥주가 담겨있는 컵 두개를 들고 웃고 서 있다. 놀랬잖아. 미안. 부드럽게 웃으며 수연의 눈앞에 컵을 내밀며 말한다. “아가씨, 호가든 좋아해요?” “아, 호가든? 나 이거 좋아해.” “호가든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지. 자.” “…….” 이거 수입물량이 다 되서 다시 들어오기 전 까지는 요즘 맥주 바에서 구하기 힘들어. 지금 실컷 먹어둬. 그렇게 말하며 웃는 유리의 손에서 컵을 받았다. 살짝 컵을 흔들자 스멀스멀 하얀 거품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유리가 수연의 몸 앞을 돌아 걸어가더니 수연의 다리에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의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베란다를 마주 한 채로 앉아있는 유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연 역시 침대에서 내려와 그 옆자리에 앉았다. 등 뒤에 느껴지는 가구의 딱딱한 감촉에 수연이 살짝 얼굴을 찡그리자, 유리가 몸을 돌려 침대에서 베개를 들어 수연에게 내밀었다. “이거 써.” “어?” “이거 쓰라고.” “응?” 수연이 못 알아듣자 유리가 결국 손으로 수연의 등을 받치고 살짝 밀어 수연의 몸과 침대 사이에 베개를 끼어 넣었다. 푹푹 들어가는 베개의 감촉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맹세코 베개의 느낌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지, 그 다음에 퉁명스럽게 유리가 한 말 때문은 아니다. “그거 내 베개야. 김희진 베개가 아니라.” 라고 말했던, 유리의 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건 전혀, 정말 전혀 아니다. 수연은 살며시 웃으며 잔에 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꿀꺽 한 모금 들이키니 부드럽게 넘어간다. 다른 맥주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넘김 때문에 즐겨 먹곤 했던 맥주였다. 유리의 말대로 요즘 수입물량이 다 되서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는 구하기 어려워 마시지 못한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 유리 덕택에 마시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것도, 얼마 전에 그렇게 죽이네 마네 난리를 쳤던 그 유리의 집 안에서. 알코올이 들어가니 심장이 적당한 속도로 뛰기 시작하고, 얼굴도 적당한 온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멍하니 맞은편에 있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떨어져서 저녁 7시쯤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바깥은 밝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이 유리의 방안에까지 들어와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저렇게 타오르는 햇빛도 곧 있으면 어둠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있었네. 흘끔 곁눈질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 역시 멍하니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에 가득 담긴 붉은색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박동이 다시 조금씩 빨라진다. 왼쪽 가슴위에 손을 얹었다. 수줍게 뛰고 있는 심장의 떨림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좋아하는 거야, 라고 말하던 미영의 표정이 생각났다. 수연은 눈에 힘을 풀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정말로…. “너 혈액형이 뭐야?” “…어, 어?” 갑작스러운 유리의 물음에 수연이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냐며 어깨를 으쓱거리던 유리가 다시 또박또박 발음해 가며 혈액형에 대해 물었다. 뜬금없이 갑자기 왜 그런걸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수연이었다. “B형.”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너 그거 무슨 의미니?” “그럼, 좋아하는 색은?” “왜 갑자기 이런 거 물어봐?” “너 좀 알아갈려고.” “어?” “우리 만난 지 이제 2주짼데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이 정도는 알아야지. 그래야 너 꼬시기도 쉽고….” 맥주가 들어있는 잔을 빙글 돌리면서 유리가 조용히 이야기 했다. 그 말에 수연은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내기. 그래, 우린 내기 했었지. 교무실 안에 있는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그 종이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정말 2주가 지났다. 이제 남은 기간은 2주. 유리의 입장에서는 서두르고 싶을 테다. 수연의 마음의 변화야 유리는 모를 테니까. 수연 자신도 아직도 확신이 안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유리가 그런 걸 알리가 없다. 수연은 묵묵히 자신의 잔 안에 들어있는 황금색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좀 더 꼬시기 쉽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라는 유리의 말이 귓가에서 윙윙 맴돈다. 좀 더 꼬시기 쉽게 하기 위해서, 즉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 자꾸 아쉬워하는 스스로의 감정에 수연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길 바랐던 걸까. 그런 건가. 그럼 난…. “그리고.” “…….” “제법 궁금하기도 해서. 정수연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조용히 말하더니,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수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겁하긴. 아, 권유리 비겁해. 왜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 말 없는 수연을 바라보던 유리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뺨을 무릎에 댄 채로 수연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수연의 옆얼굴을 살짝 간지럽힌다. 손가락으로 뺨을 긁고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이젠 정말 밤이 찾아오려는 걸까.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유리에게 결국 마지못해 대답을 해주었다. 좋아하는 색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는 연예인(이 부분에서 또 다시 유리가 이효리라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타박도 해주었다. 왜 님자를 붙이지 않는 거냐며.), 좋아하는 음식 같은 자잘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족관계, 대학은 어디를 나왔는지, 발 사이즈는 얼마나 되는지, 대체 왜 꽃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시시때때로 치고 나오는 욕은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무슨 배짱으로 선생님이 되려고 했던 건지 등등 건방진 유리의 질문에 가끔 욕도 해주고 때리기도 하면서 그래도 대답을 해줄 건 다 해주었다. 왜 때리는 거냐며 울상을 짓는 유리의 모습에 슬그머니 웃기도 하고, 수연 역시 유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밤. 제법 어두컴컴해져서 이제 불을 켜지 않고서는 유리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도 힘들어졌는데, 유리도 그렇고 수연도 그렇고 누구하나 먼저 불을 켜야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둠이라는 건 참 신기해. 수연은 어느새 다 비워져버린 잔을 옆에 내려두고 무릎을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아까 붉은 기가 가득 감돌던 방안에서 유리와 수연은, 묘한 분위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와 같은 말투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붉은 기가 점점 가셔지기 시작하면서, 둘은 서서히 말이 없어졌다. 그게 적당히 들어간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씩 방안에 스며든 어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지는 그 침묵의 공기 속에서 수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니 청각과 후각의 감각이 더욱더 되살아났다. 수연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소리도 들리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유리의 고른 숨소리도 들린다. 이젠 제법 옅어진, 수연의 향수의 향도 느껴지고, 아까 마신 맥주의 향도 느껴지고, 그리고 이 방안에 가득한 유리 특유의 향도 느껴졌다. 그 모든 것들이 적당히 아우러져서 수연의 온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로 가장 마지막에 한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 대해 물어봤었구나. 유리가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물어보았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고, 그것도 현재 여당의 실세를 잡고 있으신 분이라면 집안에 재산도 어느 정도 될 텐데 그런 집안의 자식이 아닌 것처럼 하고 다니는 이유가 뭐냐고. “우리 아버지, 원래는 판사셨어.” “…….” 감았던 눈을 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참 전에야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을 왜 이제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인지 유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손에 들린 잔도 이미 비워져 버린 지 오래다. “그것도 꽤 청렴결백한. 판사라 봐야 공무원이니까…. 아, 그래도 물론 다른 공무원들보다야 대우가 낫긴 했지만. 그래도 공무원이니 수입도 정해져 있고, 아버지가 워낙 강직하셔서 주위에서 선물이나 이런 거 들어오는 꼴도 못 보고 그러시다보니 나 어렸을 때는 못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잘 사는 편도 아니었어. 물론 우리 친가 쪽이 다 잘 사셔서 나라에서 월급 받아먹고 사는 신세라도 잘 살 수 있긴 했었겠지만, 사실 아버지랑 어머니 결혼이 친가 쪽에서 반대하는 결혼 이였거든. 그래서 그때엔 아버지가 어머니랑 결혼하겠다고 본가 쪽과 연락도 다 끊은 상태여서…본가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고.” “…….” “그런데 철없던 나는 그런 아버지 태도가 못마땅했지. 가끔 유들유들하게 적당히 살아가는 것도 좋은데, 너무 고지식하게 선을 그어가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볼멘소리도 몇 번 했었어. 판사면 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지 않냐고. 우리도 좀 아빠 친구들처럼 떵떵거리며 살면 안 되냐고. 그럼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었어. 명예와 권력은 다 필요 없는 거다. 돈도 더더욱 필요 없는 거다. 사람이 믿고 살아야할 건 그런 것들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니 그런 실체도 없는 것들을 쫓아다니며 살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 “그런데 그런 아버지도, 나이가 먹고 그러다보니까 결국 조금은 변하시긴 하더라. 어느 순간 정치를 하겠다고 하시더니, 그 때부터 조금 변하셨어. 그러게 내가 그렇게 정치만큼은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큰 집에서 살고, 돈도 제법 많아지고, 여유가 많이 생기기야 했지. 그런 아버지가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뭐 어때. 난 그래도 믿어. 언젠가 아버지도 예전처럼 다시, 강직한 그런 분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 “어쨌든 그렇게 집 안에 여유가 생겨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 온 게 있던 터라 너처럼 그렇게 흥청망청 쓰면서 못 살겠어. 너는 마티즈 따위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면서 비웃었지만, 그래도 그거 내가 번 돈으로 처음으로 산 차야. 나한텐 꽤 의미 있던 거라구.” “…….” “네가 아까 이상형에 대해서 물어봤었지?” 묵묵히 듣고 있던 유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젠 어둠이 제법 짙어져서, 가까이 있는 유리의 얼굴 표정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무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 이상형은 우리 아버지야.” “…응?” “우리 아버지. 지금의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과거에 날 보며 사람이 진정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그 아버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즐기면서, 무엇 하나 쉽게 보지 않고 열심히, 진중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아. 그러니 권유리 너 말이야.” “…….” “조금은 진중하게 살아봐. 정말 나를 남은 2주 동안 꼬시려면.” 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수연은 왜 대답하지 않느냐는 재촉을 하진 않았다. 끌어안은 무릎을 더욱더 깊숙이 끌어안고,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밤이 찾아왔다. 이 넓은 세상에. 맞은 편 건물은 이제 다들 불을 켜기 시작한 모양인지 창문마다 하얗게 빛을 내고 있다. 아마 유리의 오피스텔 건물 외벽에 달라붙어있는 창문들도 저마다 하얀 빛을 내고 있을게다. 수연은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떠 있지 않는 밤하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도심의 불빛들. 그리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유리의 조용한 목소리. “나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응?” “…너 말이야.” “응.” “왜 사랑을 안 해?” 뜬금없는 질문에 수연은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 분명 아까까지는 어둠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왜인지 또렷이 보였다. 무언가 풀려있는 듯 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웃고 있지는 않는데 마치 웃고 있는 듯 한 그런 표정.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수연 역시 무언가 한 없이 풀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빛의 향연들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사랑이라. 글쎄, 나는 왜 사랑을 하지 않는 걸까. 돌이켜보면 사랑에 대해 그렇게 나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하게 데였다거나 그런 적도 없다. 몇 번 연애를 해오면서 아주 끔찍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었고, 이별이 유난히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달리 사랑을 멀리할 이유조차 없는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그 감정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왔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이렇게 된다고들 하고, 저렇게도 된다고들 한다고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데 정작 수연은 그런 걸 겪어보지 않았다. 미영의 말처럼 겪어보지도 않은 감정이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울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애타게 원한 적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이 들려주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몸에 배어버린 모양이다. 내 시간을 모두 버릴 만큼 사랑한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의 모든 시간을 공유하려는 상대방의 행동이 마음에 안들 수밖에 없는 거고,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느낌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을 하는 상대방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다보니 결국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믿지 않게 되어버렸다. 본인이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실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으로 억지로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하던 감정에, 자신 스스로가 빠져드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겪기 싫으니까. 게다가 이젠 혼자인 게 익숙해져버렸다. 새삼스레 자신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싫다. 이제껏 내어준 적도 없었지만. “뭐가 그렇게 무서워?” “어?” 대답이 없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가 질책하는 듯 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황한 수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거 아니야, 사랑이라는 건.” “내가 언제 무섭댔니.”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 안 믿어? 뭐 네 마음을 내어주면 지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라니까, 그런 거.” 강한 어투로 부정을 하자 유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시선과 마주치던 시선은, 어느 샌가 코에 가 있고, 그리고 어느 샌가는 입술에 가 있다. 자신의 이목구비를 다정하게 훑는 그 시선에 수연의 심장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게 뭐야?” 다시 던져지는 뜬금없는 질문. 오늘 권유리는 참, 뜬금없는 질문 잘 던지네.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 “응. 맞아.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혜, 그게 이성이야.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성이라는 걸 정말, 무슨 보물 여기듯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잖아. 툭하면 이성을 잃지 마라, 이성을 찾아라, 이런 말들을 지껄이면서.” “…….” “그런데 사람들이 유일하게 그런 이성을 뒤로 내팽개쳐도 된다고 인정하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야.” “…….” “진짜 유일한 거야.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건, 그거 하나 뿐.” “…….” “그러니까 사랑을 너무 무시하지 마. 사랑이라는 거, 해 보는 것도 괜찮아.” “…….” “가끔은 이성 따위는 버리며 살아가는 것도 좋다구. 가끔은 그렇게 살아줘야지, 사람은.” 가슴이 두근두근 또 뛰어댄다. 정말 오늘 하루 종일 마라톤이라도 한 것 마냥 계속 뛰어대는 심장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다. 또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조용히 얹었다. 그런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가, 슬그머니 수연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팔과 팔이 맞닿자 수연의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유리가 빙긋 웃으며 가슴 위에 얹어져 있는 수연의 손을 치우더니, 대신 자신의 손을 얹는다. 수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더욱더 심하게 뛴다. 유리의 손끝에 이 심장의 박동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을 하니 미칠 듯이 부끄러워졌다. 가만히 손을 얹고 있던 유리가, 물끄러미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가져다 댄다. 손끝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힘차게 뛰고 있는 유리의 심장박동도 손끝에서 느껴진다. 그 미묘한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 타고 들어와, 온 몸을 돌고 돌다가 수연의 심장에 부딪힌다. 그러면 더 힘차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뛰어대는 그 심장의 박동에, 수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유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뛰고 있어. 너만 뛰는 거 아니야.” 와, 미치겠다…. 얘 오늘 따라 왜 이래…? 얼굴이 꼭 터질 것 같다. 어두워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빨개진 게 잘 보이지 않을 테니. 수연의 손을 잡고 있는 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을 잡고 살짝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엉거주춤 몸이 끌려가려고 하자, 수연은 황급히 유리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낸 다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수연의 행동에 수연이 옆에 두었던 빈 잔이 쓰러져서 데굴데굴 굴러간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이 굴러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가, 조용히 얼굴을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 검은색 눈동자가 심장 속을 파고들어 온다. 다시 한 번, 어둠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어둠 속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강하게 심장을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유리의 심장위에 얹어져 있었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쉬움에 떠는 건지, 두려움에 떠는 건지. 부들부들 떨려오는 그 손가락을 유리에게 들키기 싫어서, 애써 주먹을 꼭 쥐었는데도 계속 떨린다. 너무 떨리다 못해 뒷목마저 뻐근하다는 느낌이 들자, 수연은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여기 나한테 안 좋은 수맥이 흐르나 봐. 왜 여기에 올 때마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거지? “사, 사람이 심장이 뛰어야 정상이지….” “…그런 의미로 말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작게 한숨을 내쉬며 유리가 말한다. 그 한숨소리에 다리에 힘이 쫙 풀려서, 수연은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놀란 유리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수연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하자, 수연은 얼른 침대 위에 자신이 던져 놓았었던 핸드백을 들면서 몸을 뒤로 확 뺐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기다란 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숙인 다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만 갈께. 시간 늦었네.” “…….” “안 데려다 줘도 돼.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 대답은 들리지도 않았고, 사실 대답을 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답을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떤 말이든 간에 유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았다.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있는 유리의 몸을 뒤로 한 채 서둘러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원룸형 오피스텔이라 그리 넓지도 않는데 침대에서부터 현관까지의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잰 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가는 수연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연아.” 수연아. 낮게 깔린 그 음성에 현관문 앞에서 구두를 신으려던 수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가 아찔해 오는 것 같아서 벽에 손을 짚고 억지로 몸을 지탱했다. 이를 악물었다. 이건 다, 술 탓이야. 그래. 술 때문이야. 술과 밤의 기운 때문이야. 밤만 되면 기분이 좀 묘해지잖아. 그래, 그 탓이야. 그래서 난 지금 환청을 들은 거야. 수연아, 라니. 권유리가, 그 개싸가지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럴 리가 없…. “나, 희진이랑 헤어질까?” 벽에 짚고 있는 손에 힘을 더욱더 주었다. 애써 기르고 있는 손톱이 다시 툭, 부러졌다. 꽤나 깊게 부러져서 아픈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통증보다는 금방 유리가 한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유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차마 뒤는 돌아보지 못하고, 조용히 반문했다. “…왜?” “그냥. 이젠 헤어질 때도 됐고…. …별 뜻 없어. 그냥. 그래, 그냥. 이제 좀 질린 것 같기도 하고….”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지 뭐. 굳이 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잖아.” “…그런가.” “응.” “그러고 보니 그러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수연은 구두를 신었다. 발에 딱 들어가는 검은색 구두의 코 부분을 바라보면서, 수연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유리의 말대로, 그냥 웃음이 나왔다. “헤어질게.” “…나한테 말 할 필요는 없….” “그래, 너한테 말 할 필요는 없지. 이건 그냥 말한 거야. 그냥.” 그냥, 이라고 묘하게 말끝을 흘리며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현관문에 달려있는 도어락의 open 버튼을 서둘러 눌렀다. “조심히 가.” “…….” “그냥, 어두우니까.” “…….” “아, 그리고 말이야.” “…….” “이것도 그냥 말하는 건데, 혹시 집에 들어가는 길이 어두워서 무서우면 전화해. 그냥 말한 거야, 그냥. 별 의미는 없어.” 다정하게 말하는 목소리. 어딘가에 웃음도 섞여 있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고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왔다. 에어컨 때문에 차가워진 실내에 있다가, 갑자기 복도로 도망치다시피 나오니 식어버린 온 몸을 여름밤의 후끈한 열기가 감싸 안는다. 그래도 그 후끈한 열기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몸은 차갑게 식어있더라도 심장만큼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 탓이리라.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회색 문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다. 두근두근. 조심히 가, 라고 말했던 그 목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심장 쪽을 살짝 긁었다. 아무리 긁어대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사라지지가 않는다. 수연은 텅 빈 복도에서, 울상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나 진짜 얘 좋아하나 봐. 미쳤어. ……. ……. …수리비 어떻게 해……. Hissing 11 분위기. 여자는 유독 분위기에 약하다. 그리고 그건 유리도 마찬가지. 자신이 분위기에 약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그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이 정도로 약할 줄을 몰랐을 뿐. 유리는 지금 분위기라는 게 사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걸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저기.” 나는 어째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핸들을 꽉 잡았다. 정말 어째서, 그런 말을 갑작스럽게 했던 걸까. 알코올에 취해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알코올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기엔 자신은 고작 맥주를 좀 마셨을 뿐이다. 그 것도 딱 한 잔 분량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간에 기별도 안 갈 수준. “…저기…요.” 게다가 그런 말은 아무리 알코올 기운에 취했다고 해도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알코올 탓이 아니라면, 밤의 기운 때문 이였을까. 밤이 되면 사람의 감정선은 굴곡이 심해지니까, 어쩌면 정말 밤이라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역시 그런 말은 함부로 할 말이 아니었다. “유리야….” “유리 씨…?”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온다. 왜 그랬을까. 정말 왜 그랬던 걸까. 왜, 정말 왜? 알코올 기운 탓도, 밤의 기운 탓도 아니었다면 남은 이유는 딱 하나 밖에 없다. 정수연. 유리는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아, 나 희진이랑 헤어질까? 사실 그런 말을 하려고 수연을 부른 건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을 보니 왠지 이름을 부르고 싶었고, 그래서 이름을 불렀는데, 자신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조금 떨어져 있는 유리의 눈에 보일정도로 경직이 되어버리는 그 뒷모습에 결국 그렇게 말해버렸다. 수연을 꼬시기 위해 거짓으로 자아낸 입에 발린 아부도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유리 스스로도 예상을 하지 못한 상황 이였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에 그렇게 말해놓고도 스스로가 당황하지도 않았었다. 자연스럽게, 정말 마치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것처럼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수연에게 말 했던 것처럼, 말 그대로 ‘그냥’ 그런 말이 나왔던 건데, 계산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의 무게감을 더 하게 만들었다. 알코올 기운도, 밤의 기운 탓도 아닌 오로지 정수연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냥,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그 여자 때문에. 사랑에 대해 말하는 유리의 모습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던 모습에 순간적으로 욕망을 느껴서 확 끌어당기는 자신의 손을 황급히 피하던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옆에 앉아 두근거려하던, 그래서 자신의 심장마저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여자 때문에. 말을 내뱉긴 했으니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결국 희진과 헤어져야 한다는 소린데, 이제껏 잘 사겨왔고 헤어지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 헤어질 명분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걸 보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정말 희진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한 적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는 헤어져야겠다고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오로지, 정말 오로지 그날 밤에 한 말 때문에 희진과 헤어지겠다고 마음을 먹기엔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 이별이라는 것 자체는 어렵지가 않다. 하지만 그 이별이 김희진과의 이별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래도 몇 년간 자신의 옆을 지켜왔던 연인인데 쉽사리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고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생각 없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 때문에 이별을 해야 한다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래 그냥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지, 라고 단정을 짓고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갈까도 생각을 했는데,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유리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 때 했던 말은 그냥 나도 모르게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헤어질까 라는 자신의 물음에 돌아보지도 않고 경직되어 있던 그 작은 뒷모습이 생각나서 마음이 이상했다. 탁. 갑자기 묵직한 통증이 뒤통수에서 느껴져서, 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옆을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돌려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연과 미영의 얼굴이 보였다. 오른손을 뒤로 돌려 금방 수연이 때린 머리 부분을 매만지자, 수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대체 뭐하니? 미영이랑 태연 씨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고…. 안 내릴 작정이야?”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네 생각.” “…….” 눈앞에 있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야. 유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금방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했지만, 이미 그 말은 수연의 귀에는 물론 태연과 미영의 귀에마저도 들어갔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태연은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리와 수연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한 번 터진 입은 막아지지 않고 있다. 작업멘트 정도야 원래 눈 한번 깜빡 거리지 않고 잘 하는데, 수연에게는 이상하게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달콤한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긴 했다. 만나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번 버릇이 들이고 나니 마음 놓고 그런 류의 말을 해주려고 해본 적도 없었고, 아마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더라도 나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온 몸에 닭살이 오돌토돌 돋을 것 같은 멘트와 행동을 남발했다. 그렇게 한번 입이 트이고, 그런 행동을 한 번 하고 나니 입만 열면 그런 식으로 밖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희진과 헤어지겠다는 말을 왜 했는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면서도 그 와중에 낯 뜨거운 말을 술술 내뱉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저 작은 얼굴이 빨개진 걸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 그리고 그런 얼굴을 볼 때마다 유리는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유리의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 때 아닌 정적이 찾아왔다. 유리는 흘끔 뒤에 앉은 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 낯 뜨거운 말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표정이 좋지가 않다. - 야. - 왜? - 미영이가 하도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너도 데려가는 데 말이야. - 어. - 수연 씨한테 작작해라. - 뭘? - 작작하라고. 작업 좀. 니 차 수리비고 뭐고 그런 건 내 알바가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영이 친군데 내 앞에서 뻔 한 멘트 날려가며 꼬시려고 하지 마. 우리 미영이야 꺅꺅 거리면서 둘이 잘돼야 된다고 좋아하지만, 네가 하고 다니던 짓 뻔히 알고 있는 나는 영 마음에 안 들어. - 내가 뭘 어쨌다고…. - …적당히 해. 알았어? 너는 어떻게 된 게 니 친구보다, 니 애인 친구를 더 걱정 하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다그치는 태연의 표정에 꿀꺽 삼켰다. 출발하기 전에 분명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고 끊임없이 그런 말들을 던져댔으니 못마땅할 만도 하다.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던 태연이 흘끔 백미러를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유리가 빙긋 웃자 태연이 코웃음을 치며 차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차 안에 들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옆에 앉은 미영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다. “트렁크 열어. 짐 빼게.” 자신을 따라 차에서 내리는 미영의 손을 잡아주며 태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트렁크를 열었다. 탈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차 뒤쪽으로 가 짐들을 빼내는 태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채로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또 다시 둘만이 차 안에 앉아 있게 되었다. 백미러를 통해 뒤쪽에 서서 짐을 빼고 있는 태연과 미영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짐을 빼내는 태연과 태연이 꺼내는 짐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는 미영. 저 닭살 커플의 여름휴가에 유리와 수연이 끼게 된 건 미영 탓이었다. 유리가 태연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집안에서 얼마 전에 연 온천 휴양지에 가서 놀고 오자는 태연의 제안에, 미영이 수연이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했었단다. 그래서 그럼 수연 씨도 데리고 가자, 라고 태연이 말하니 미영은 한술 더 떠서 기왕이면 짝을 맞춰서 가는 게 어떻겠냐며 유리도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이다. 태연의 입장에서는 영어교과목 교사라 보충학습 때문에 방학 때도 제대로 시간을 뺄 수 없는 미영과 겨우 시간을 맞춰 간 여행이니 단 둘이 가고 싶었을 테고, 더군다나 유리와 수연이 붙어 있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터라 그런 미영의 부탁이 매우 곤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휴가고 뭐고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미영의 모습에 결국 어제 밤에 유리에게 연락을 했었다. 태연의 제안에 탐탁지 않았던 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얻은 휴가인데 태연의 얼굴을 보면서 지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그 토요일 저녁 이후로 만난 적이 없던 수연을 만날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태연이 앞뒤 잘라먹고 무조건 내일 아침 몇 시에 짐 챙겨서 나와, 라고 말만 한 탓에 단번에 거절했다. 거절하면 후회할 텐데, 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태연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수연에게 전화를 했는데, 수연이 내일 약속이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시간이 붕 떠버렸고 희진은 지방 촬영 간다고 내려가서 연락도 안 되고, 희진과 수연 사이에서 정신없어 하는 동안 다른 여자들은 만나보지도 않아서 연락할 사람도 없고, 그러다보니 휴가를 집에 틀어박혀 혼자 보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결국 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아까와는 달리 고자세로 나오는 태연이 아니꼬웠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운전기사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아침에 약속장소로 나왔더니 웬걸, 약속이 있다던 수연도 거기에 나와 있던 것이다. 유리가 오기로 한 건 수연 역시 몰랐던 모양이었다. 유리가 다가온 걸 보고 수연이 옆에 있던 미영의 볼을 사정없이 꼬집었었으니까. 어쨌든 그 덕택에 네 명이서 커플데이트 아닌 커플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미영은 오는 내내 커플 데이트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를 했지만, 수연은 그럴 때마다 커플은 너네만 커플이지 왜 나와 이 인간이 커플이냐고 끊임없이 반박을 했다. 그럴 때마다 태연과 유리는 그저 입을 다물고 둘의 말다툼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는 이 인간하고 내가 왜 커플이냐고 눈을 부릅뜨던 수연의 얼굴과, 지금 자신의 옆에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수연의 얼굴을 비교했다. 미영에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 닭살수위가 높은 농담만 하면 금세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워낙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여자라 커플이 아니라고 무섭게 쐐기를 박던 얼굴이든, 지금처럼 빨개져 있는 얼굴이든 모두 진심일 것 같다. 유리와 엮이는 걸 싫어하는 것도 진심일 테고, 한편으로는 유리의 말에 가슴이 떨려하는 것도 진심일 테다. 그리고 수연이 그렇다는 것을 이미 꿰뚫어버린 유리였다. 유리는 물끄러미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수연, 너도 혼란스러워? 나처럼? 우리 왜 이러냐, 정말. “내 생각은 무슨.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내려. 주차 해놓고 10분 동안 내리지도 않고 이게 뭐야. 나 먼저 내린다.” 처음 시작은 굉장히 작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는데, 뒤로 갈수록 성량이 더욱 커지고 날카로워졌다. 목소리 톤의 변화에 유리는 슬그머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의 웃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려 차에서 내린다. 일부러 차문을 세게 닫아버리는 바람에 차체가 약간 흔들렸다. 백미러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태연과 미영이 같이 찍은 사진도 그와 함께 흔들린다. 흔들리는 사진을 바라보다가, 왠지 심통이 나서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 쳐서 뒤쪽으로 돌려버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진을 두고 유리 역시 차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날카로운 햇살이 얼굴을 찌른다. 차 문을 닫으면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폐부에 가득 차오르는 공기가 꽤 맑다. 얼른 와서 짐 좀 들라는 태연의 구박에 서둘러 뒤쪽으로 가 태연의 주머니에 차키를 집어넣고, 미영이 들려고 낑낑 대고 있는 아이스박스를 대신 뺏어 들었다. 아, 그거 무거울 텐데요.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미영 씨는 그냥 계세요. 아니, 진짜 무거울 텐데…. 괜찮다니까요. 같이 들겠다는 미영의 손길을 뿌리치고 아이스박스의 손잡이를 잡고 번쩍 들었다. 가벼울 거라 예상하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무겁다. 팔이 빠질 것 같은 느낌에 휘청거리며 다시 아이스박스를 땅에 내려놓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수연이 혀를 쯧쯧 찬다. “그러게 폼을 왜 잡니, 남의 여자한테.” “누가 폼을 잡았다 그래?” “야. 너도 여자야. 인정할 건 인정해. 그게 어디 여자 혼자서 들 수 있는 무게야?” “…그래. 좀 무겁긴 하네.” 중얼거리는 유리의 말에 수연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손 위로 보이는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웃는 게 예쁘구나. 한 순간 멍하니 그 웃음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리의 눈빛에 웃음을 슬금슬금 거두던 수연의 얼굴이 또 빨개진다. 흠흠. 보다 못한 태연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밑에 놓여 있는 아이스박스의 손잡이를 잡았다. “같이 들고 가.” “아아, 그래.” 끙. 신음소리를 내며 같이 들어올렸다. 확실히 혼자 든 것보다는 훨씬 낫다. 허리를 다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발자국 옮기며 유리가 툴툴 거렸다. 대체 뭘 넣었기에 이렇게 무거워? 술이나, 뭐 이런 것들? 그런 건 여기서 사면 될 거 아냐. 뭣 하러 여기까지 들고 오냐고. 안에 얼음이 들어있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툴툴 대? 술이나 이런 거 한꺼번에 넣을 데가 없어서 여기에 넣어 온 거야. 그리고 여기서 사면 더 비싸다고 그러잖니, 우리 마누라님이. 야, 여기가 니네 집안에서 하는 건데 비싸고말고 무슨 상관이야? 다 공짜 아냐? 왜 이러셔. 난 오늘 일반 손님으로 예약했어. 나 여기 오는 거 아무도 몰라. 권력은 뒀다가 어디다 쓴데….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네, 친구여. 권력은 한낱 물거품과 같은 것. …더위 먹었냐? 뭔 소리 하는 거야. 티격태격 거리며 걸어가는 유리와 태연의 뒤를 수연과 미영이 남은 짐을 들고 따라간다. 쟤들은 왜 저렇게 만날 싸울까, 지겹지도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미영의 목소리 뒤로 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리는 흘끔 고개를 돌려 뒤에서 걸어오는 미영과 수연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재밌게 이야기 하는지 미영이 귀에 대고 속닥속닥 거리자 수연이 태연과 유리의 등짝을 번갈아 보다가 키득키득 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이 왠지 기분이 나빠서,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여름햇살의 아래에 우뚝 솟은 하얀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개장한 지 얼마 안됐다고 하던데, 확실히 건물의 외벽이 깔끔하니 보기가 좋았다. 레저, 스포츠, 휴양지 등 헬스 비지니스계에서 국내 최고를 달리고 있는 회사가 태연의 회사다. 그래서 그 덕택에 유리는 거의 돈도 들이지 않고 각종 휴양지에서 태연과 함께 여기저기 잘만 놀러 다녔었는데, 태연이 미영을 만난 이후부터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일단 둘이 같이 놀러 간다면 항상 여자들과 함께였으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렇게 순수한 의도로 얘랑 휴가 온 건 이게 처음이구나. 유리는 자신의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스박스를 들고 가는 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알아온 친구, 그것도 베스트 프렌드라고 자부하던 친구임에도 이런 순수한 휴가를 온 적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래도 나름 친구인데 그 동안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같이 지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럽게 여겨지는 순간이다. 뒤따라오는 수연과 미영은 여전히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옆에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는 태연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유리는, 문득 이런 식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즐거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다음 겨울 휴가 때에도 이렇게 지내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리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유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작게 중얼거렸다. “겨울….” “뭐?” “…아니야.” 더운데다가 힘들어서 그런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태연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입구에는 거의 다 와간다. 겨울. 유리는 속으로 조그맣게 그 단어를 다시 중얼거렸다. 금방, 겨울에도 이런 식으로 휴가 때 놀러오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던가. 건물의 입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투명한 유리문 앞에 서서,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뒤쳐진 미영과 수연이 눈에 들어왔다. 미영이 빙긋 웃으며 태연과 유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그런 미영을 따라 수연도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다. 작은 입을 조그맣게 움직이며, 수고했어, 라고 말을 한다. 그 입모양을 바라보며 유리 역시 피식 웃었다. 한 달간의 내기. 여름이면 끝날 인연. 하지만 자연스레 겨울에도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쯤 되면 넷이서 휴가를 오는 일은 하지 못할 텐데, 그런데도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니.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희진의 얼굴이 생각났다. 지방촬영 가기 전날 집에 와 품에 안겨 자면서 바람 피지 말고 있으라며 묘한 웃음을 흘리던 여자. 유리는 애써 그 때 그 희진의 웃음과, 희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앞에서는 수연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다. 유리의 얼굴에 묻은 땀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 찾는다. 아마도 손수건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가방을 뒤적거리는 그 작은 몸을 바라보며, 유리는 속으로 다짐했다. 어차피 곧 끝날 인연. 나는 그저, 수리비를 받으려고 이 여자와 시작한 거야. 그래, 그런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겨울에도 함께 할 리가 없잖아. 나도 참,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땀 많이 흘렸네. 수고했….” “징그럽게 왜 이래…. 더위 먹었어? 오늘 더위 먹은 사람 참 많네.” 역시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드는 수연의 손에 유리는 황급히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을 하며 몸을 돌렸다. 무안해진 손 때문인지, 수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찰싹, 태연이 유리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 권유리 진짜 싸가지 없어. 칭찬 고맙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태연을 못 본 척 하고 몸을 숙여 다시 아이스박스의 손잡이를 잡았다. 등 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한숨이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꿀꺽 삼켰다. “어? 희진…씨?” 당황한 듯 한 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유리는, 고개만 들어 자신의 옆에 서서 건물 안을 가리키고 있는 태연을 보았다가, 태연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선의 끝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와 같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희진이 보였다. 유리는 아이스박스의 손잡이를 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한 번 크게 떠 보았다. 자신의 시선 속에 있는 여자는 김희진이 맞다. 그리고, 그 옆에 희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남자는 얼마 전에 희진과 스캔들 났었던, 회사 휴게실 안에서 동료들이 이야기 했던 그 문제의 남자다. 유리는 희진의 어깨에 둘러져 있는 그 남자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피식 웃었다. 뭘 또 여기서 만나냐. 지방 촬영 간다더니, 거짓말이였구만. 태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희진이 남자와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이 쪽을 바라보았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경직된 얼굴로 유리 일행을 바라보던 희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나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로비에 가득 울린다. 가까이 다가오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는 유리의 얼굴이 묘하게 웃음을 띄어간다. 어느새 유리의 뒤쪽에 선 수연은 무표정으로 유리의 어깨너머로 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만나네?” 앞에 다가온 희진에게 유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런 유리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희진은, 유리의 뒤에 서 있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를 보며 빙긋 웃는다. “응. 여기서 만나네. 신기하게.” “지방 촬영 간다더니…. 여기서 촬영?” “…뭐. 어떻게 보면?” “그래. 그럼, 촬영 잘 해. 보시다시피 나는 일행이 있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유리가 말하자 희진이 손을 들어 유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유리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로비 한 쪽에서는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화 안내네?” “…화낼 게 뭐 있어.” “나 자기한테 거짓말 한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바람피다 들킨 거?”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내가 화낼 이유가 없….” “…정말이야?” “응.” “뒤에 있는 여자 때문이 아니라?” 턱으로 뒤에 서 있는 수연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웃는다. 뒤에 있는 여자, 란 말에 팔짱을 끼고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던 수연이 고개를 돌려 희진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유리의 등 뒤에 서 있는지라 유리는 수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예상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는 희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숙여 아이스박스를 잡았다. 그러자 옆에 서서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보던 태연이 황급히 몸을 숙여 아이스박스의 다른 쪽 손잡이를 잡는다. 하나, 둘, 셋. 작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구령과 함께 아이스박스를 들어올렸다. 팔에 묵직한 기분이 든다. 왠지 그 사이에 조금 더 무거워 진 것 같다. 팔의 근육이 아프게 당겨오는 걸 느끼면서, 유리는 희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맞아. 지금은 정수연이 내 일행이니까.” 앞에 있는 연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유리는 로비 한 쪽에 서 있는 남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희진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희진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로비의 프런트에까지 걸어갔다. 태연이 체크인을 하는 사이 아이스박스를 잠깐 내려놓고 옆에 섰다. 여전히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희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먹을 꼭 쥐고 있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서 있던 남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는 못하겠는지, 아니면 희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모양인지 저 쪽에서 잰 걸음으로 희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유리는 묵묵히 그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너무나도 편안하게 뛰고 있다. 전혀 빨라지지도 않고, 평소와 같은 속도로. 정말 화도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별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연인이,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했다. 그것도, 유리가 언제 휴가를 받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유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택했다. 그런데 정말 화도 나지 않고, 성질도 나지 않고, 심지어 배신당했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 희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시선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수연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이 아직도 손에 쥐어져 있다. “수연아.” “응?” “나 더워.” “…….” 수연은 빙긋 웃으며 다른 쪽 손으로 유리의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손길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꾹꾹, 손수건을 누르며 땀을 닦아준다. “괜찮아?” 부드럽게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왼쪽 가슴 위에 얹어놓은 손끝에 미세한 박동이 느껴진다. 서서히 속도를 높여가는 그 박동을 느끼면서, 유리는 웃었다. “응.” * * * “후회 안 하지?” “너야말로.” “좋아.” “지금부터 숫자 세는 거다.” “콜.” “하나.” “둘.” “셋!” 태연의 마지막 구령과 함께 몸을 완전히 물속에 집어넣었다. 집어넣자마자 피부가 데일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뜨거운 물이 온 몸을 휘감는다. 유리는 이를 악물고 몸이 솟구쳐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옆에 앉아있는 태연을 흘끔 바라보았다. 태연 역시 뜨겁긴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유리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이를 악물고 참고 있다. 태연의 볼 위의 살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꼭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써야 하는 거니?” 뒤 따라 온천물 속으로 들어온 수연이 물결에 살짝 풀어진 샤워타올을 다시 단단하게 동여매며 나지막이 말했다. 수연의 뒤를 따라온 미영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연을 바라보며 자기, 괜찮겠어? 라고 물었다. 그 말에 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핫나잇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수연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뀐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맺혔다. 유리는 턱을 따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얼굴도 이미 땀범벅이 된지 오래.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약간 고개를 숙여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물만 바라보고 있다. “야, 꼬꼬마.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꼬꼬마들은 참을성이 참 없던데. 이건 보나마나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인내심 없기로 소문난 권유리가 하는 말 치곤 참 어이가 없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지금 얼른 포기하라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그거야 둘이 비슷비슷 할 때 이야기고.” 태연의 하얀 얼굴이 번들번들해져 간다. 그래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억지웃음을 짓는 작은 얼굴을 보며, 유리도 애써 빙긋 웃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물에서 나온 열기가 얼굴을 휘감는다. 후끈후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고개를 돌려 자신들과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앉아있는 수연과 미영을 바라보았다. 미영의 반의 어떤 학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수연은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몸을 휘감고 있는 하얀색 타올 위로 쇄골이 보이고, 목선에 이어지는 어깨선도 눈에 들어왔다. 목에서 뚝 떨어지는 곡선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유리는 멍하니 밝은 햇빛 속에 있는 수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깨 위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물방울들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일 쳐어다아브아…?”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더니 태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유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손가락으로 땀이 흐르고 있는 태연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금세 뒤로 꺾인다. “걱정 마셔. 네 애인 쳐다본 거 아니니까.” “미영이 쳐다본 것도 문제고, 수연 씨 쳐다본 것도 문제야.” “내 눈 가지고 내가 보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나는 내 애인과 내 애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악의 손길로부터 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내가 악의 손길 이라는 거야?” “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태연의 말에 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욕이 튀어나오려는 모양인지 입가가 근질근질하다. 꿈틀꿈틀 거리는 입 꼬리를 바라보던 태연은, 물속에 잠겨 있던 손을 꺼내들어 유리의 두 볼을 쥐고 고개를 못 돌리게 할 심산으로 힘을 꽉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 뜨거운데 물속에 있던 손으로 잡으니 더 뜨겁다. “게다가 지금 네 상대방은 나 아니야? 우리 내기 한 거 있잖아. 그거 얼른 결판 지어야지.” “이 꼬꼬마가….” 손가락을 퉁 튕겨서 여유 있게 웃고 있는 태연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작은 물방울이 튀어서 태연의 얼굴에 묻는다. 유리의 얼굴을 쥐고 있던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부비는 태연을 보며, 유리는 몇 분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유리와 태연, 둘 사이에 아주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태연이 방을 두 개 예약했는데, 누가 같은 방을 쓸 것인가에 대해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태연은 자신들이 한방을 쓰고 수연과 유리가 한 방을 쓰기를 원했고, 유리는 수연은 미영과, 유리는 태연과 같은 방을 쓰기를 원했다. 태연은 자신이 돈을 내고 예약을 한 것이니 자신들에게 양보를 하라 했고, 유리는 언제는 적당히 작업 걸라고 하더니 왜 이제 와서 같은 방을 쓰라고 그러는 거냐고 정색을 했다.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방 앞에서 짐을 놓고 투닥투닥 거리다 결국 직원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요청까지 받고 나서, 유리와 태연은 내기를 하기로 했다. 일단 내기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정작 중요한 내기를 뭐로 할지에 대해서 또 다시 몇 분간 실랑이를 했다. 무조건 술로 하자는 유리와, 미영이가 술 많이 마시는 거 싫어해서 안 되니 커플게임 같은 걸로 결정하자는 태연의 말다툼은 미영과 수연이 보기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티격태격 하는 둘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미영이, 결정 할 때까지 자신과 수연은 온천에라도 들어가 있겠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유리가 생각해 낸 게 바로 온천물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 룰은 간단했다. 동시에 입수한 다음, 못 버티고 먼저 나가는 쪽이 지는 것. 내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많은 스파 중에서 일본의 노천온천을 모델로 한 이 스파를 선택했다. 일단 심판을 맡기로 한 수연과 미영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했으니, 발가벗고 들어가는 스파는 갈 수 없어서 샤워타올을 몸에 두르고 들어갈 수 있는 이 스파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태연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수연과 이야기를 하던 미영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유리와 태연이 있는 쪽으로 왔다. 미영이 움직일 때마다 물의 표면에 묘한 파동이 일어난다. 물 위에 일어나는 파동이 자신의 몸에 부딪히자 유리는 자리를 약간 옮겨 미영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유리와 태연 사이에 벌어진 틈에 자리를 잡은 미영은 머리에 두르고 있던 타올을 풀어 손에 둘둘 감은 다음, 태연의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었다. 목 끝까지 닿는 짧고 젖은 머리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유리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태연은 미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우리 애기는 안 뜨거워?” “으응. 그나저나, 자기. 버틸 수 있겠어? 그냥 나랑 수연이랑 같은 방 쓸….” “안 돼!! 어떻게 같이 온 건데 방이라도 자기랑 같이 써야지.” “근데, 유리 씨랑 수연이랑 같이 쓰는 것도 좀 그렇잖아.” “뭐, 이미 같은 침대를 쓴 사이….” 미영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타올을 쥔 손으로 태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얀 손가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김태연, 저거 또 말실수하네. 유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대각선 쪽에 앉아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태연의 말을 들었는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옮겨질 때마다 미영의 몸이 작게 움찔움찔 거린다. 미영의 하얀 손 위로 보이는 태연의 눈가도 살짝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런 미영과 태연을 바라보던 유리는 혀를 쯧쯧 차다가, 약간 떨어져 앉아있는 수연을 향해 손짓을 했다. “거기 혼자 있지 말고 여기로 와.” 수면 위를 검지로 쿡쿡 찌르며 말하자 수연이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이쪽으로 슬슬 몸을 움직인다. 아까 미영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결의 표면위로 동그란 파동이 일어난다. 수연의 몸 쪽에서 일어난 물결이 커다란 원을 그려가며 다가오다,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걸 바라보았다. 몸에 부딪히며 살짝 일렁거리는 뜨거운 물이, 꼭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피부 밑으로 들어와서, 혈관을 타고, 빙빙 돌다가 심장에 부딪히는 모양인지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진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 뭐야. 이런 것 가지고…. 뇌가 익었나…. “더워?” “어?” “너 얼굴 빨개.” “아, 으응.” 어느새 옆에 다가와서 앉은 수연이 말했다. 유리는 옆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고개를 돌렸는데 하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고 있는 미영과 태연이 보인다. 자기, 뜨거우면 그냥 나가. 알았지? 아니야. 우리 애기와의 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풉, 귀엽기는. 우리 애기가 더 귀여워요. 아니야, 자기가 더 귀여워. 애기가 더 귀엽다니까? 아, 정말. 니들 때문에 더 덥다, 더 더워. 신경질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에는 수연이 있고, 왼쪽에는 안 그래도 뜨거운 온천물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는 커플 둘이 있다. 결국 유리는 앞만을 바라보기로 결정하고, 뚫어져라 앞 쪽만을 바라보았다. 물에서 올라온 열기가 얼굴을 달구고 있다. 옆에 앉아있는 수연은 돌 벽에 등을 기대고 몸에 힘을 쭉 빼고 앉아있다. 흘끔 곁눈질로 수연이 앉아있는 곳의 물을 바라보았다. 수면 아래로 희미하게 잘 뻗은 다리가 보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 속에 들어가 따끔거렸다. 유리는 손바닥으로 눈을 세게 비볐다. 다 비빈다음 눈을 한두 번 정도 깜빡거리고 다시 눈을 떴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수연이 다리 하나를 들어 꼬기 시작했다. 샤워타올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헉. 무언가가 두 손으로 목을 갑자기 확 쥔 것처럼 숨이 탁 막혀 들어왔다. 유리는 황급히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앞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에 너무 힘을 주었더니 눈이 아프다. 그래서 눈을 한번 꼭 감았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황급히 눈을 떠보니, 수연이 아까 로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금방 미영이 태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리에 두르고 있던 타올을 벗겨서 유리의 이마에 흐른 물방울들을 닦아주고 있었다. 잔뜩 젖은 채로 어깨 위에 흐트러져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니 갑자기 아찔한 기분이 든다. 또 갈증이 나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유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의 땀을 다 닦은 수연이 목에 타올을 두르더니 다시 돌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에서 나온 열기 탓인 거야, 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아찔한 기분에 유리는 가슴 속이 답답해져왔다. 지금 이 곳 어딘가에서 자신의 연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여자, 그것도 수연이 이마에 묻은 땀 한번 닦아주었다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그런 자신의 모습이 영 께름칙하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심심했는지 수연은 손가락으로 물을 살짝 퉁퉁 튕기고 있었다. 손가락 끝 사이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튕겨져 나가는 것을 보며 유리는, 며칠 전에 자신이 수연에게 했던 그 말과, 아까 로비에서 희진을 마주쳤을 때 희진에게 했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로비에서도 그렇고, 며칠 전에 자신의 집에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정수연이라는 여자와 가까이 있으면 김희진이라는 여자를 자꾸 버려두는 것 같다. 그러니까, 머리와, 마음속에서. 대신 그 빈자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여자가 차지한다. 하지만 그 사실과, 희진과 헤어지는 일은 전혀 별개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희진이라는 여자를 버려두는 시간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연이 옆에 있을 때에만 해당하는 일. 그 미소를 보고, 그 목소리를 듣고, 그 숨결을 느끼고 있을 동안에만 해당하는 일일뿐이니 그런 점으로는 여전히 희진과 헤어질 명분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정도로는, 몇 년을 함께한 연인을 버릴 수는 없다. 몇 년 동안 연인이란 이름으로 함께 한 여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 “응?” “눈에 힘이 풀려있어. 아까는 이렇게 부릅뜨고 있더니.”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그 모습에, 유리는 손가락으로 수연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면서 말했다. “그냥 더워서 멍하니 있게 되네.” “아…. 난 뭐 희진 씨 생각하는 줄 알았지.” “어?” “희진 씨 말이야. 아까 좀, 분위기 그랬잖아.” “아….” “근데 그 여자도 좀 웃기네. 다른 남자랑 있으면서 뭘 잘 했다고 성ㅈ….” “내 일이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이마에 어지럽게 들러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씩 떼다가, 유리는 무심결에 그렇게 툭 말했다. 갑자기 내뱉은 말 치고는 목소리도 너무 험악해서,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란 유리가 머리카락을 떼던 손가락을 멈추고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연이 손을 들어 유리의 손을 잡고 밑으로 내렸다. 힘이 쭉 빠진 유리의 손이 물속에 잠겨 들어간다. “하긴 그래.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빙긋 웃으며 수연이 말한다. 살짝 끝이 떨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귓가에서 뚝 떨어진다. 유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뜨겁다. 얼굴도 뜨겁고, 몸도 뜨겁고, 눈도 뜨겁고, 입술도 뜨겁고, 심장도 뜨겁다. 그 말을 끝으로 유리는 더 이상 수연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온 몸을 뒤덮고 있는 열기가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알 수가 없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나간 지 오래인 걸 보니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긴 하다. 수연과 미영은 이미 견디기 힘들다며 물에서 나간 지 오래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둘이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서 유리와 태연의 미련하기까지 한 싸움을 멍하니 관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기적으로 우리 자기 화이팅! 이라고 활기차게 말하던 미영도 시간이 지날수록 응원조차 하지 않았고, 유리와 그 대화 끝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수연 역시 입을 굳게 다물고 태연과 유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유리는 이를 악물고 태연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빨개진 태연의 눈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유리는 태연의 몸 바로 앞에 있는 수면을 손으로 철썩 쳤다. 물방울이 얼굴에 튀었는데도 초점이 잔뜩 흐린 눈은 그대로다. “야…. 얼른 나가.” “니가 나가….” “…네가 더 힘들어 보이는데…. 네가 나가지 그래? 그냥 오늘 나랑 같이 자자구….” “싫어….” “제발 나가줘.” “싫대두우…….” “10년 친구인 나와 같은 방을 그렇게 쓰기 싫어?” 힘이 들어서 느릿느릿, 천천히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유리의 말에 태연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앞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리는 남아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지루한 모양인지 수연은 다리를 품에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미영은 등 뒤쪽에 손을 짚고 몸을 뒤로 기대고 있다. 아예 이쪽이 관심 밖의 대상이 된 지는 오래인 듯. 유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참기가 힘들다. 이젠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태연과 같은 방을 쓸 바에야 수연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기는 지금도 유효하고, 아직도 여전히 수연과 자신의 관계는 지지부진. 그리고 밤은 길다. 거기다 도심을 떠나 찾은 이곳에서라면, 그 긴 밤을 이용해서 관계를 조금 진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럼 정수연과 방을 같이 쓰겠다는 말을 죽어도 먼저 하기가 힘들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그렇게 나와도 수연이 옆에서 그냥 양보해주자, 라는 말이라도 했다면 이런 바보 같은 내기는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수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태연과 유리의 말다툼을 구경만 했을 뿐이었다. 이미 한 번 정수연과 같은 방은 쓸 수 없다고 우긴 상태라서 말다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말을 취소도 할 수 없었고, 결국엔 얼떨결에 이런 내기까지 해버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결연한 의지로 시작한 내기도 아니었으니 사실 지금까지 참은 것도 대견한 일일지도 모른다. 슬쩍 물속에 잠겨있는 팔을 들어보았다. 팔이 온통 빨갛게 달구어져 있다. 잘 익은 자신의 팔을 보던 유리는, 결국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이 정도 했으면 되겠지. 그만 나가야겠다. 이러다 죽겠네. 유리는 이를 악물고 등 뒤에 있는 돌 벽에 손을 짚었다. “됐다, 됐어. 나 그냥….” “아악!! 더 이상 못 참겠어!! 그 놈의 핫나잇 때문에 핫바디 되버리겠네! 애기야, 미안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태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놀란 유리가 멀뚱멀뚱 바라보는 걸 알지도 못하는지, 태연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서둘러 발을 돌 벽의 가장자리 턱에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물속에서 빠져나가는 태연의 다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유리 역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앞의 시야가 온통 흐릿흐릿 하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그래도 여전히 흐릿한 시야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다. 어라? 왜 안보이지? 수증기 때문인가? 시야가 흐린 것뿐만 아니라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듯 한 느낌도 들었다. 몸이 휘청, 잠시 균형을 잃는 것 같은 그 순간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유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놀래서 몸을 돌렸더니, 흐릿한 시야 속에 샤워타올이 다 벗겨진 채로 쓰러져 있는 작은 몸과, 그 옆에서 입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미영의 얼굴이 보였다. 아, 뭐야? 김태연 저거 쓰러졌네. 하여튼 꼬꼬마, 몸도 약…어……어? “야, 권유리?” “……어, 어라?” “너 왜 그….” 놀라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연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곧 시야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고장 난 TV처럼, 순식간에 뚝. * * * 눈가를 간지럽히는 조명에 스르르 눈을 떴을 때에, 유리는 자신의 몸이 침대위에 고이 눕혀져 있는 걸 발견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 노천온천에 있을 때에 밖은 밝았는데, 테라스 저 너머에 보이는 하늘은 온통 까맣기만 하다. 얼마동안 누워있었던 걸까.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있는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길고 가는 시계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간을 확인한 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후 8시 30분. 1박 2일 예정으로 온 휴가에서 이렇게 하루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다니. 피부에 바로 느껴지는 침대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에 슬쩍 손가락으로 시트를 들어보고 아래를 확인했다. 아까 몸에 두르고 있던 샤워타올은 그대로 둘러져 있고, 샤워타올 아래로 기다랗게 뻗은 자신의 다리가 보인다. “일어났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리는 서둘러 시트를 다시 내리고,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채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억지로 입을 움직여 말을 했다. 한 동안 입을 움직이지 않았던 탓인지 목이 컬컬하다. “야…. 어떻게 됐…. 흠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고르는 동안, 수연이 침대 쪽으로 걸어오더니 침대의 중간부분에 털썩 주저앉는다. “어떻게 되긴. 결국 너랑 나랑 방 같이 쓰게 됐지.” “에? 뭐? 그거 내가 이긴….” “태연 씨가 쓰러지고, 그 다음에 너도 쓰러졌잖아. 그런데 황미영이 때때가 쓰러졌다고 울고불고 쌩난리를 치는데 도저히 진정도 안 되고, 한 번 기절한 거 가지고 무슨 지금 당장이라도 관을 짤 것 같은 분위기로 질질 짜대는 애 꼴을 보기가 싫어서 한 방에 집어넣어버렸어.” 몇 시간 전의 상황이 보지도 않았는데 마치 비디오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평소에 태연과 미영의 행태를 보아오건데 아마 쓰러진 태연을 붙잡고 미영은 정말 별 난리를 쳤을 게다. 그리고 그 옆에서, 수연은 오만 짜증은 다 부리며 쪽팔리니 제발 그만 하라는 소리를 하고 서 있었을 테고, 스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을 구경하듯 자신들을 바라보았을 지도 모른다. 태연아, 라고 울고불고 서 있었을 미영과, 그 옆에서 짜증을 부리고 있을 수연의 표정을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와서, 유리는 슬그머니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런 유리의 웃음에 수연이 손가락으로 볼을 사정없이 꼬집는다. “웃음이 나와? 나오냐구. 너 운동도 많이 하고 다닌다면서 왜 그렇게 체력이 약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종업원이 여기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거, 타올 하나 걸친 여자애를 어떻게 남자 등에 업히게 하냐고 난리 부리다가 억지로 너 업고 왔단 말이야.” “아야야, 미안해. 미안.” “뜨거우면 그냥 나오면 될 거 가지고 왜 그렇게 똥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거야, 대체. 나랑 같은 방 쓰는 게 그렇게 싫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아, 아퍼. 나 환자야, 그만 꼬집어.”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수연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흘리고선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아, 아파 죽겠네. 손바닥으로 수연이 꼬집었던 볼을 살살 문지르며 툴툴댔다. 삐죽삐죽 입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걸 보며 왜인지 빙긋 웃던 수연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서 유리의 앞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옷이나 얼른 입으시죠. 지금 태연 씨랑 미영이 온댔어.” “에? 왜?” “술 마시자던데. 옷 입어, 얼른. 차마 내가 입힐 수는 없어서 그대로 던져놨으니. 술은 옆방에 잔뜩 있으니 가서 들고 올게.” 자리를 피해줄 모양인지 그렇게 말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손에 의해 열려진 현관문이 완전히 닫힌 걸 눈으로 확인하고, 침대 시트에서 발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에 일순 몸을 떨었다가, 한 쪽에 고이 접혀 있는 옷 쪽으로 갔다. 아까 온천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두었던, 분명 사물함에 넣었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게 구겨 넣었던 옷인 것 같은데, 말끔하게 개어져 있는 걸 보니 수연이 꺼내 와서 개어놓은 것 같다. 여기까지 유리를 업고 오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나 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옷을 저렇게 곱게 개어놓은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세심한 여자일 줄은, 정말 처음 만났을 때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유리는 개어져 있는 옷 앞에 서서 한참을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한 쪽에 세워져 있는 가방에서 다른 옷을 꺼냈다. 왠지 저 모양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곱게 접혀진 채로 집에까지 들고 갈 생각이다. 옷을 다 갈아입고,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컴컴해진 밤하늘만 바라보다보니 수연과 태연, 그리고 미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셋 다 양 손에 가득 무언가 짐을 들고 오는 걸 보며, 술 먹다 죽자는 거냐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태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현관 쪽으로 가서 수연이 들고 있는 봉지를 뺏어 들고, 방 한가운데 쪽으로 걸어갔다. 미영이 짐은 왜 안 들어주냐며 툴툴 대는 태연의 목소리는 깡그리 무시한 채로, 바닥에 앉아 봉지에 있는 걸 하나 둘 씩 꺼내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사들고 온 안주들과 술을 잔뜩 진열 해 놓고 서로의 잔을 채워가며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쓰러져 버린 것 치고는 태연도, 유리도 모두 체력을 빨리 회복한 바람에 사다놓은 술병들은 빨리 비워지기 시작했다. 열어 놓은 테라스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확실히 도심이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잠깐 틀었던 TV에서는 열대야 때문에 잠 못 이르는 밤이 지속되고 있다는 멘트가 나오고 있었지만 이곳의 여름밤은 시원했다. 바람에 타고 오는 상쾌한 숲의 내음도 좋았다. 그 속에 적당히 알코올 향도 섞여 들어가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 찰나, 이 리조트 건물을 건설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장소를 고르고 다녔던 이야기를 하던 태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마시기는 심심하니까 게임이나 한 번 할까?” 무슨 게임이요?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보았다. 인원이라 해봐야 달랑 네 명밖에 없는데 무슨 게임을 한단 말인지, 유리 역시 궁금해서 수연의 시선을 따라 태연을 바라보았다. 일단 자신이 게임을 하자고 제안을 하긴 했는데, 자신도 막상 떠오르는 게임이 없는 모양인지 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거린다. 일순 넷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뜨린 건, 자칭 타칭 이효리빠 탑시드라는 수연이었다. “그, 우리 그 게임 하자. 사랑해 게임.” “…그건 또 뭔 게임이래.” 유리가 무심결에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수연이 패밀리가 떴다 라는 프로그램을 모르냐며, 마치 괴물을 보는 듯 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와, 어떻게 그것도 몰라? 우리 이효리님이 나오는 건데? 그 놈의 이효리님…. 작작해라, 진짜. …그 놈의? ……. 매섭게 노려보는 그 모습이 무서워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이효리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부릅뜨고 덤벼드는 모습이, 흡사 어렸을 때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같다. 괜히 술잔에 든 술을 노려보다가 입안에 털어 넣는 유리를 바라보던 수연이 게임의 룰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양 옆에 앉은 사람 중에 한명에게,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것. 고백을 받은 사람은 그 고백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절하면 된다. 고백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이 다시 양 옆의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백을 하면 되는 거고, 만약 거절하게 되면 거절당한 사람은 다시 양 옆의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한다. 금방 고백했던 사람에게(그러니까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사람에게) 해도 되고, 혹은 그 사람 말고 반대쪽 사람에게 해도 되고.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절대 웃으면 안되는 게 이 게임의 포인트고, 다만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실컷 비웃을 수가 있다. 수연의 게임설명을 들은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게임을 먼저 하자고 한 태연이 네가 먼저 해라, 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리는, 그 말을 한 지 1분도 되지 않아서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가슴 속 깊이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기야,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여보.” “으응?” “우리 여보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 “애기야아아아아아.” “왜요오오오오오오.” “알지? 사랑해.” “응!” “지랄한다, 지랄해.” 나지막한 유리의 욕에도 고백 퍼레이드는 끊이지 않는다. 자리배치가 미영-태연-유리-수연 이런 식으로 돼 있는 바람에 단 둘이 붙어 앉은 태연이 끊임없이 미영에게 사랑한다 고백하고, 그걸 미영이 받아들이고, 미영은 수연에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태연에게만 고백하는 바람에 졸지에 유리와 수연은 낯 뜨거운 고백 장면을 몇 분간이나 감상해야 했다. 보기 힘든 그 장면에 수연은 유리의 옆에서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없이 앉아있다. 한참 그걸 감상하다 이대로 밤을 지새우겠다는 생각이 든 유리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수연을 흘끔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야!! 김태연. 됐어. 하지 마. 하지마라고. 내가 하겠어. 너네 둘이서 게임하냐? 내가 할 거야.” 술잔을 쥐고 말하는 유리의 말에 태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너 그러면 술 왕창 마실 텐데? 라고 말한다. 그런 태연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로, 잔에 든 술을 다 털어놓고 바닥에 내려놓은 유리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서 권유리 줄 벌주는 내가 만들어야지, 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태연의 한 쪽 어깨를 덥석 잡았다. 태연이 물끄러미 유리를 올려다본다. 그런 태연의 어깨 너머로 둘이 마주 하고 있는 것조차도 웃긴 모양인지 미영이 킥킥 거리며 웃고 있다. “마이 베스트 프렌드, 태연아.” “…….” “사랑….” “꺼져.” “야, 나 말 다 하지도 않았거든?” “됐어. 꺼져.”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태연의 말에 머리가 아찔해 온다. 결연한 표정을 보니 아무리 몇 번이고 말을 해도 돌아올 소리는 꺼져,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웃겨 죽겠다며 배를 부여잡고 킥킥 거리는 미영을 보니 문득,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김태연. 냉정한 자신의 친구에게 돌아올 말은 아무래도 꺼져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에 앉은 사람은 정수연. 이 여자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성격을 보면 꺼져를 남발할 것 같기도 한데, 또 요즘은 묘하게 자신에게 나긋나긋한 게, 어쩌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해보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그거다. 수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문제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수도 없이 많이 하고 살아왔고, 그런 것 정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쉽게 뱉어낼 수 있는 말인데, 그 대상이 수연이라니. 왠지 불안한 느낌이 목구멍 근처에서 살살 기어오른다. 이거 좀, 불안한데…. 유리는 태연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떼고 몸을 반대쪽으로 약간 돌렸다. 바뀌어가는 시야 속에 그만 웃으라며 옆에 앉은 미영의 볼을 꼬집고 있는 수연이 보인다. 아야야, 신음소리를 내던 미영이 먼저 수연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발견하고 수연의 무릎을 손으로 탁탁 쳤다. 그제야 수연이 미영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웃으면 안되는 게 룰이기에, 잠시 눈이 마주쳤던 수연이 시선을 약간 내리깔고 입운동을 한다. 아래위좌우로 입을 움직이던 수연은, 표정을 재정비하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올곧은 시선에 가슴 속 어느 한 쪽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화장 하나 하지 않은 수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앉아 있다 보니 마주하고 있는 작은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은 착각도 일어났다. 문득 끊임없이 유리의 감정선을 괴롭히던 그 기억들이 툭 튀어나왔다. 여름날 밤, 키스 이야기를 하며 오물조물 움직이던 입술과, 희진과의 키스를 보고 지어냈던 그 묘한 표정과,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한 말에 두근거렸던 그 작은 심장 고동들과, 그 심장 고동을 느끼고 함께 뛰었던 유리 자신의 심장 고동까지, 전부 다. 그리고 더 해서, 아까 덥다고 말한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천천히 닦아주던 그 손길까지. 두근두근, 심장이 휘청거린다. “얼른 해. 안 할 거야?” 아무 말 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연이 옆에서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을 일부러 느끼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런 자신의 입모양을 지긋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 사….” 수연이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사, 음…. 그러니까, 사….”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뜬다. “아, 그러니까 말이지. 음. 그러니까, 사, 사….” 또 다시 한 번 더. 수연이 눈을 세 번째 깜빡 거리자, 유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과 미영의 눈빛이 점점 의아한 눈빛으로 돌변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유리는 입맛을 쩝 다시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세글자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수연의 눈 깜빡이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사랑해. 유리는 속으로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조그맣게 움직인다. 빨리 해.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오물조물 움직이는 그 작은 입술을 보자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오른다. 결국 유리는 억지웃음을 지어내 버렸다. “으하하하하하…하….” “…….” 지어낸 웃음인 거 다 티나잖아…망할. 쓸데없이 크고 우렁차기만 했지, 톤은 일정한 그 웃음소리를 들은 태연이 묵묵히 유리의 잔에 맥주를 먼저 따른 다음, 다시 소주를 따랐다. 노란색 액체 속에 섞여 들어가는 투명한 액체를 보며 유리는 울상을 지었다. 마셔. 잔을 손으로 스윽 밀며 간결하게 말하는 태연을 한번 바라보다가, 입안에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알코올 냄새가 코를 확 찌른다. 너무 급하게 마셔서 입가에 살짝 묻은 액체를 손등으로 한 번 훔치고, 두 손을 들어 수연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수연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첫 글자부터 시작하자. “사.” 그 다음. “랑” 마지막 한 글 자. “ㅎ……ㅎ….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미치겠네 진짜!!!!!” 아, 왜?! 왜 안 나오는 거야! 왜! 왜왜왜왜왜왜!!! 머리카락 안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머리를 헤집었다. 태연은 역시 묵묵히 유리의 잔에 맥주를 따르고 있다. 유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잔 안에 떨어지는 노란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망설임 없이 소주도 마저 따르는 태연의 모습을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를 않는다. 자, 마셔. 빙긋 웃으며 잔을 손으로 미는 걸, 다시 덥석 쥐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입가에 흐르는 액체를 손등으로 훔치고 흘끔 수연을 바라보았다. 낄낄 웃는 태연과 미영과는 달리 수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유리가 내려놓은 잔을 바라보고 있다. 실망한 표정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유리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망할 리가 없잖아, 뭐 게임가지고 무슨. 손가락으로 잔의 입구를 빙빙 돌리며 앉아있는 수연과, 그런 수연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유리 사이에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챈 모양인지 미영이 손바닥을 마주 치며 그냥 게임 하지 말고 이야기나 하면서 마시자고 재빨리 화제전환을 했다. 미영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맥주 페트병을 들고 잔 안에 술을 가득 따랐다. 활기찬 미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린다. 수연아, 너도 잔 비었네? 한 잔 해야지. 으응. 너 표정이 왜 그래애, 벌써 술 취했어? 내 표정이 어떻다고? 그냥 뭔가…. 음, 에잇 모르겠다. 어쨌든 제가 따라드릴게요, 정 선생니임. 권유리, 넌 왜 자작해? 내놔, 내가 따라줄게. 아아, 그래. 너는 표정이 또 왜 그러냐? 에? 내 표정이 어때서? …좀…. 으음. 어쨌든 자, 다음부턴 자작하지 마. ……. 잔 안에 가득 찬 술을 한 모금 꿀꺽 마시면서, 흘끔 옆을 바라보았다. 수연 역시 술을 마시며 유리를 바라보았단 모양인지 예기치도 못하게 또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수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유리는 괜히 손을 들어 자신의 귓볼을 매만졌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아니,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운 건가. 사랑해. 잔을 내려놓으며 작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잘 나오는 말인데, 왜 떨어지지 않았던 걸까. 미영이 옆에서 무슨 말을 꺼내는 걸 수연이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듣고 있다. 미영을 바라보는 그 옆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다시 한 번, 그 세글자를 중얼거렸다. 사랑…. ……. 역시 안 되네. 타는 듯 한 갈증이 목구멍에서 느껴진다. 잔 안에 남아있는 술을 재빨리 꿀꺽 집어삼켰다. 그래도 목이 타는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자꾸 목구멍 근처에서 맴도는 모양이다. 미영의 말을 듣고 있던 수연이,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 유리를 바라보았다. 덕택에 또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유리가 시선을 회피했다. 자작을 하지 말라고 했던 태연의 말은 금세 잊어버리고 잔 안에 맥주를 가득 따르고 또 꿀꺽 한 번에 마셔버렸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또 술을 가득 따랐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태연을 무시한 채로, 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밤. 또 다시 정수연. 또 다시 느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 진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찌르는 걸 느끼면서, 유리는 정말 정수연하고는 밤에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 * 술자리는 새벽 2시에, 태연이 픽 쓰러지는 걸로 막을 내렸다. 미영이 술 마시는 걸 싫어해서 미영과 둘이 간단히 목을 축일 생각으로 술집을 가는 것 이외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주량이 많이 약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남들보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한참 둘이 같이 다닐 때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쓰러진 게 신기할 따름이다. 태연은 말 그대로 픽, 쓰러졌고 수연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말이 없어지더니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거짓으로 술주정을 꾸며내는 걸 보고서, 저런 건 경험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다행히 실제로 그런 술주정을 가지고 있진 않나보다. 스르르 잠이 든 수연의 몸을 들어 침대에 눕혀주고, 뒤척이는 작은 몸 위에 시트 이불을 덮어주고 나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 그나마 이 중에서 제일 멀쩡한 미영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잠시 몸이 휘청거려 침대에 손을 짚고 선 다음,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미영을 도와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즐기려고 온 휴가니 먹고 죽을 만큼 마시고 싶진 않아서 그저 적당히 즐겼을 뿐이다. 덕택에 사온 것의 절반도 먹지 못해서, 다시 저걸 들고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그냥 속 편하게 버리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알뜰한 미영이 그걸 보고 그냥 넘어갈 리는 없을 테니 내일도 그 큰 아이스박스에 저걸 넣어두고 다시 가야 한다. 그러게 왜 저렇게 많이 사온 거야. 작게 투덜거리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미영이 입을 열었다. “유리 씨의 간을 만족시키려면 이 정돈 사가야 한다고 태연이가 그러던데요?” 술병들을 봉지에 담으며 말하는 미영의 말에 유리는 피식 웃었다. 지가 먹고 싶어서 제 핑계 댄 거예요. 아, 그런가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유리의 목소리에 미영이 부드럽게 말하며 웃는다. 왠지 그 웃음을 바라보니, 확실히 연상은 연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1년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 1년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애교가 많은 성격이라 태연이 애기야, 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마냥 어리게 행동하면서도 뒤에서 챙길 건 다 챙겨주고, 태연이 실수라도 하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설교도 하는 것 같다. 1년 연상,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좀 더 어른스럽다. 그래서 유리는, 태연이 누군가에게 정착을 하기로 마음먹기로 결정한 사람이 미영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깐 해본 적이 있다. 태연이 무슨 일을 하던 옆에서 힘이 되어주면서도, 잘못을 할 때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마냥 좋게 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냉정하게 잘못한 건 잘못 한 것, 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끼리끼리 논다고, 친구들은 다 비슷한 성격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수연도 그런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런 성격인 것 같다. 다만 미영이 좀 더 부드럽게, 그리고 수연이 좀 더 거칠게 표현을 할 뿐이지, 똑같이 1년 연상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수연도 미영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미영이 그러하듯, 수연도 연하를 사귀게 되면 그렇게 아이 다루듯 잘 사귈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자신이, 수연과 사귀게 된다면, 미영이 태연에게 하는 것처럼 수연이 자신에게 그렇게 할까. 삐뚤어져 가는 유리를 옆에서 단단히 붙들어 매 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 일을, 미영이 했던 것처럼 수연 역시 할 수 있을까. 술을 마시니 별별 생각이 다 드네. 유리는 흘끔 침대위에 누워있는 수연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을 덮고 있는 시트가 일정하게 아래위로 움직인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작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얼른 마저 치워야지 라는 생각으로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영이 익숙한 손길로 재빨리 치우는 바람에 유리는 그다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방 정리가 다 끝났다. 남아있는 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태연의 작은 몸 뿐. 부축하는 건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고 말하니 미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쓰레기를 밖에 내다버리고 오겠다고 몸을 일으켰다. 그냥 내버려두면 여기서 알아서 치울 텐데요? 에이, 그래도 우리가 먹은 건 우리가 치워야죠. 아, 그럼 제가 같이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취해서 뻗어있는 사람 둘만 방에 남겨둘 순 없으니까요. 빈 병이라 그렇게 무겁지도 않으니 저 혼자 다녀올게요. 웃으며 말하는 그 말에 왠지 거부를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입맛을 다시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영이 빈 병이 가득 든 커다란 봉지를 들고 나가고, 이 넓은 방 안에 깨어있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유리는 문득 담배가 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지라 오늘 하루 종일 담배를 피지도 못했다. 잊고 있었던 그 매캐한 맛이 한 번 떠오르자 더할 나위 없이 견디기 힘들어져서, 가방에서 서둘러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미영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놔두고 간 콜라 캔 하나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새벽의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테라스 밑으로는 산책하러 나온 모양인지 몇몇 커플이 서로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저 커플들 중에 희진과 그 남자도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 안에서 빠져나온 회색 담배연기가 하늘로 스멀스멀 올라가다가 곧 사라진다. 알싸한 향이 입안에 가득 맴돌고, 그 향이 알코올 냄새와 적당히 섞이자 왠지 기분이 붕 뜬 느낌이 든다. 난간에 팔을 기대고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과는 달리 굉장히 별이 많이 떠 있다. 그 날, 거짓 술주정을 부리는 수연을 등에 업고 바라봤던 하늘에는 별이 하나도 없었는데, 등 뒤에서 수연이 진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지금은 무수히 많은 별들이 하늘에 떠 있다.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신발을 주워오라고 시키지를 않나, 업어달라며 온갖 투정을 부리며 옷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유리가 자동차라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운전을 한다고 난리를 부리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걸 알았을 때 들었던 그 허탈감이란. 등에 찰싹 붙어서 칭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생각이 나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 때에는 뭐 저딴 여자가 다 있느냐며 온갖 성질을 다 내고, 문자로 실컷 분풀이를 했는데 그것도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냥 웃음이 나오는 추억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추억. 추억이라. 유리는 웃음의 끝에 밀려오는 그 추억이라는 단어에 대해 곱씹으며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유리의 기준에서 과거를 지칭하는 기억과 추억이라는 말은 엄연히 다른 의미이다. 기억이 그저 별 의미 없는, 그저 그런 ‘과거의 한 단면’일 뿐이라면, 추억은 그와 달리 언제나 꺼내봐도 기분이 좋은, 조금은 색다른 의미를 가진 이야기를 의미한다. 누군가와의 과거를 그저 기억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사람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일 뿐이고, 그걸 추억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언가 남다른 의미로 유리에게 다가온 사람이다. 그런데 자연스레 수연과의 과거를 추억이라고 지칭하는 자신의 모습에, 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희진과의 과거도 추억이라고 쉽게 정의 지을 수 있을까. 기억이라고도 정의내린 적은 없지만, 딱히 추억이라고도 정의내린 적은 없다. 물론 과거가 될 거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없기도 하다. 새삼스레 희진과의 과거를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많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유리 씨 골초라고 들었는데….오늘 저랑 수연이 때문에 많이 참으셨죠? 고마워요.” 갑자기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유리는 움찔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미영이 난간에 팔을 올린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유리가 황급히 불을 끄려고 허둥지둥 움직이자 미영이 웃으며 마저 피셔도 된다고 말한다. 그래도 예의가 아니란 걸 알기에, 유리는 콜라 캔 안에 서둘러 피다 만 담배를 집어넣은 다음 캔을 빙글빙글 돌려 안에 있는 액체로 담뱃불을 꺼버렸다.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캔을 손에 쥔 채로 미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덜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취기가 오르긴 한 모양인지,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잘생긴 눈썹과, 맑은 눈망울과, 그리고 그 밑에 이어지는 콧등과, 붉은 입술. 고운 옆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예쁘구나, 김태연의 여자는. 빠질 만도 하네. 친구의 여자에게 예쁘다는 둥의 작업멘트를 날릴 만큼의 뻔뻔한 여자는 아니어서, 유리는 입 안까지 솟아오르는 말을 꿀꺽 집어 삼키고 말없이 미영이 바라보고 있는 검은색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총총히 박힌 별들을 하나 둘 셋 속으로 세가며, 수연과 함께 하기 시작한 날들도 하나둘 씩 세보기 시작했다. 별 하나에 하루 씩, 하나 둘 대입해가며 세다 보니 세어본 별보다 남아있는 별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아마도, 평생 동안 저 별들을 다 세어보진 못할 게다. 이제 둘 사이에 남은 기간은, 2주일도 채 안되니. 대충 훑어보아도 남아있는 별들의 개수는 14개보다 훨씬 더 많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 빙긋 웃음을 지어냈다. 뒤에서 잠들어 있는 수연의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들려올 리가 없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등 뒤쪽이 살살 간지럽다. 어떤 표정으로 자고 있을지, 그리고 그 숨에선 어떤 달콤한 향이 날지,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등 뒤쪽에서 느껴지던 간지러움이 슬슬 온 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별을 바라보는 게 더 이상 힘들어서, 얼굴을 감싸는 새벽공기가 차갑다는 핑계로 방 안에 얼른 들어갈 생각이다. 그래서 바깥쪽으로 등을 돌리고, 미영을 향해 말하려는 순간, 밤하늘을 바라보던 미영의 작은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뭐 물어봐도 되요?” “네?” “…아까요.” “네.” “왜 못했어요?” “네?” “왜 못했냐구요, 사랑한다는 말. 잘 하시잖아요, 유리 씨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이번엔 유리를 바라본다. 그 웃음에 심장이 뜨끔거린다. 예상치 못한 미영의 질문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보았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한번 몸을 뒤집는 태연과, 침대 위에 고이 누워있는 수연의 작은 몸이 눈에 들어온다. 답을 기다리고 있는 미영에게 답을 해줄 수는 없다. 자신조차도 모르는 그 이유를 어찌 남에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렇지 않게 잘만 내뱉던 그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오질 않아 고생했던 건 유리 자신이었다. 사랑해, 라는 그 세 글자가 그렇게 하기 어려운 말 이였던가.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리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박애주의자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수도 없이 많이 내뱉고 다녔다. 희진에게는 물론이고, 희진 이외에 만났던 여자들에게도 모두. 그런데 고작 그 세 글자를, 그것도 단지 게임 때문에 하는 말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태연이 직접 만들어준 벌주를 2잔이나 연거푸 들이켜야 했었는데, 미영이 게임 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뒤로 몇 잔이고 계속 마셨을지도 모른다. 목구멍까지 기어오른 말이, 끝끝내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자꾸 입안에서 맴도는 바람에 입안이 답답해서 혼나는 줄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왜 못했느냐는 질문은, 그 누구보다 유리 자신이 유리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 왜 하지 못했던 걸까, 대체 왜? 말이 없는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영이 유리를 따라 바깥을 향해 등을 돌리고, 난간에 팔을 올려놓아 기댄 다음 쓰러져 있는 태연의 몸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요.” “네?” “태연이가 처음으로 저한테 고백했을 때요.” “아, 네.” “그 때, 김태연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 “부들부들 떨면서 이야기 했어요. 정작 자신은 떠는 것조차도 모르는 것 같은데, 정말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그래서 제가 떠는 거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안 떤대요. 이런 거 많이 해봐서 안 떤대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었어요.” “…….” “고백했을 때에만 그런 줄 아세요? 사귀고 나서 보고 싶다는 말을 처음 했을 때에도 그랬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했을 때에도. 그 동안 수도 없이 그런 말을 해왔다면서 정작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때에는 그렇게 부들부들 떨더라구요.” “…….” “얼마 전에 태연이가 그랬어요.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말이라서 그렇게 떨었던 것 같다고. 무지 부끄러워하더라구요. 그렇게 떨면서 고백했다는 게 부끄러운가 봐요.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 때 이야기하며 제가 놀리면 얼굴이 새빨개져요.” “…….” “그런데 그 바보는 몰라요.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떨고 있다는 걸.” “…….”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 있는 나 역시 설레여 한다는 걸.” “…….” “시간이 오래 지나도 똑같아요. 김태연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떨고,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여전히 설레요. 왜 그런지 아세요?” 태연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이번엔 유리를 바라본다.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부드럽게 휘어진 그 눈을 바라 볼 수가 없어서 유리는 시선을 회피했다. 회피한 시선의 끝에는, 하필이면 수연의 작은 몸이 있다. 언제 몸을 돌렸는지 이쪽을 향해 자고 있는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진심이 담긴 말이라서 그래요.” 진심이 담긴 말. 유리는 그 말을 따라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 누워있는 수연이 꼼지락 거리고 있다. 어깨까지 덮고 있는 침대시트가 갑갑한 모양인지 발로 시트를 걷어차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입가에 자꾸 웃음이 걸린다. 그런 유리의 웃음에, 미영도 작게 따라 웃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떤다고 해도, 부끄러워한다고 해도, 한번쯤은 자신의 진심을 말하는 것도 좋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건 좋지 않은 거잖아요. 부끄럽다거나, 혹은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진심을 말하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도 좋은 것 같아요. 설사,” “…….” “상대방 역시 진심을 말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아아, 역시, 김태연이 빠질 만도 하네. 웃으며 말하는 미영의 말에 유리 역시 빙긋 웃었다. 진심이 담긴 말이라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했던 걸까. 태연이 미영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말을 꺼냈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 말에 진심이 섞여 있어서 말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마도 미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감정이 섞여 들어간 말이라 그만큼 그 말이 무게감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쉽사리 내뱉지 못했던 것이라고. 유리조차도 답을 찾지 못했던 그 질문에 대해 미영이 명쾌하게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해답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건 그 답을 인정하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유리는 물끄러미 자고 있는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작은 얼굴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런 묘한 감정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감정이 생겨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감정을 쉽사리 인정하라는 주문은 더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신과 수연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너무나도 명확하게, 정 반대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설사 이 감정을 유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그리고 혹시라도 수연이 유리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전혀 다른 사랑론을 가지고 있는 둘이 만나서 무슨 사랑을 할 수 있겠나 싶다. 사랑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짧다, 라는 시각을 가진 자신과 그런 것 자체를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수연이 만나서 나누는 사랑은 보나마나 삐거덕 거릴 게 뻔하다. 처음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으니, 끝도 만만치 않을게 뻔한데, 김희진이라는 안정적인 관계를(타인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깨뜨리고 그런 불안한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와 -가 합쳐지면.” “…?” “그러면 0이 되는 거잖아요. 아무 것도 없는.” “…….” “그건 싫어요, 저는.” 조용한 정적이 흐른다. 유리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난간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고, 수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시트를 다시 덮어줄 생각으로 말없이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틀을 잡고 방바닥으로 오른발을 옮기는 그 순간에, 조용한(하지만 왠지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0은.” “…….”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숫자기도 하잖아요. 앞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을 해보세요, 유리 씨. 유리의 옆을 스쳐 지나가 누워있는 태연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유리는 멍하니 미영을 바라보았다. 부축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금방 미영이 한 말 때문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살짝 휘청거리며 일어서던 미영이 이내 다시 균형을 잡고, 태연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른 다음 부드럽게 태연에게 방에 돌아가자고 속삭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지 미영의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뜬 태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유리가 부축하는 걸 도와줄 필요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에만 휘청거렸지, 제법 잘 부축하고 가는 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영이 현관문을 스르르 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리가 다급하게 미영을 불러 세웠다. “저기, 미영 씨.” 발목을 잡는 유리의 말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미영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태연의 뒷모습이 보인다. 태연을 부축하고 있는 저 손길을 보고 있자니, 이젠 정말 인정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예전부터 몇 번 생각했던 말을 이젠 해줄 때도 된 것 같다. 그래서 유리는, 만날 때마다 아직도 헤어지지 않았냐며, 도대체 그게 뭐가 재밌느냐며 툴툴댔던 그 입으로, 조용히 웃으며 말을 했다. “전부터 가끔 생각했던 건데요.” “…….” “태연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미영 씨라 다행이네요. 정말, 진심으로요.” 미영은 한 동안 대답이 없다가, 열린 문틈 사이로 나갔다.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연이 자고 있다는 걸 배려한 모양인지,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닫힌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한 후, 몸을 돌려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침대시트가 이제는 완전히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잠버릇도 요란하네. 바닥에 떨어진 시트를 손가락으로 잡은 후, 조심스레 수연의 몸 위에 덮어주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테라스로 향해 있던 몸은, 이제 현관문 쪽, 그러니까 유리가 앉은 쪽으로 돌려져 있다. 술을 마시고 잔거라 그런지 유난히 뒤척거리는 것 같다. 다시 발로 시트를 걷어차는 걸 꿋꿋이 덮어준 다음, 침대 위에 턱을 올리고 멍하니 눈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머리가 자연스레 흘러내려 옆으로 누운 얼굴의 뺨을 반쯤 가렸다. 간지러울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슬슬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줄 때마다 손끝에 스치는 그 작은 숨결에 가슴이 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두근두근. 이제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어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그렇게 뛰어댄다. 사고의 전환을 해보세요, 유리 씨. 그렇게 말하던 미영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며칠 전에 자신이 수연에게 내뱉듯이 말했던, 문제의 그 말도 생각났다. 희진과 헤어지겠다던, 약속이 아니었지만, 약속과 다름없었던 그 말. 그 말을 듣고서 경직되어버렸던 그 작은 몸. 그리고 오늘, 우연으로 마주친 희진을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던 자신과, 그런 자신의 이마에 흘린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여자. “사고의 전환이라.” 한없이 붉은 입술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다. 머리카락을 넘기던 손으로 부드럽게 수연의 뺨을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정말, 너무 따뜻해서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은, 그런 체온이. “권…유리…. 이 개싸가지…….” 그렇게 말하면서 넌 왜 웃니. 꿈속에서도 자신을 본 모양인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떠오른다. 그 모습에, 유리는 슬쩍 몸을 일으키고 반쯤 열려있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입술을 대었다가, 금세 떼어버리고서는, 자신의 입술이 잠깐 닿았다 사라진 그 작은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래, 사고의 전환. 한번쯤은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수리비는…조금 생각을 해봐야…. Hissing 12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류의 악몽은 아니지만, 어쨌든 수연은 그 꿈이 악몽이라고 단정 짓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악몽은 악몽이다. 처음 그 꿈을 꾸기 시작한 날은 미영과 태연, 그리고 유리와 같이 태연의 집안에서 하는 온천 휴양지에 가서 보낸 날이었다. 꿈속에서 수연과 유리는 입을 맞추었다. 그 날 휴양지에서 보낸 꿈에서는 유리가 먼저 들이댔었지만, 그 다음 날 꾼 꿈에서는 수연 스스로가 먼저 유리에게 들이댔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에는 이번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부둥켜안고 입술을 부벼댔는데, 너무 놀라서 잠이 그렇게 많은 성격임에도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냥 꿈으로만 끝나면 다행일 텐데, 꿈속에서 느낀 그 입술의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심지어 그 인간이 집에 몰래 침입이라도 해서 키스 하고 도망갔나 라는 이상한 생각마저도 해봤다.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나서 그런 걸까, 라고 하기엔 꿈이 너무나도 변태적이라는 생각에 자다 일어나서 머리도 몇 번이나 쥐어 뜯어봤다. 그러다 급기야 오늘 새벽에는 키스로 끝나는 게 아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는 놀래서 눈을 뜬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무서워서 눈을 떠버렸다. 그 손길이나 몸짓 하나하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꿈속에서 유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 설레어 하는 자신의 모습이 무섭고, 믿어지지가 않아서 얼른 일어나버렸다. 일어나서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로 멍하니 있었다. 꿈속에서도 심장은 요동을 쳤고, 일어난 후에도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점점 푸르게 변하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잔뜩 흐트러진 머릿속을 정리하던 찰나, 휴가를 다녀온 후 이틀 동안 그러했듯이 오늘 아침에도 유리에게 문자가 왔다. 달리 특별할 건 없는 문자였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고 있어, 오늘이 마지막으로 쉬는 날이라며, 그럼 이따 밤에 볼까? 근데 너 나한테 얼마나 넘어왔어? 수리비 견적리스트 책상에 아직도 있는데, 맛보기로 보여줘? 라는 내용의 문자. 내용이 길어서 mms로 온 그 문자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꾹꾹 눌러서 보냈을 정성이 갸륵해서 마지막 두 문장에 대한 반박은 하지 않았다. 평소에 하는 행동이나 미영을 통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제대로 출근한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던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도 그제부터는 출근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회사에 간단다. 물론 유리 자신이 한 말이라 그게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법 진지하게, 아주 뿌듯한 얼굴과 결연하고 초롱초롱한 눈빛 - 마치 칭찬해 달라고 꼬리를 흔들며 쳐다보는 강아지 눈빛 같은, 그런 류의 - 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으니 거짓말일 것 같진 않다. 그 말을 들은 게 어제였는데, 어제 같이 심야영화라도 보자 해서 밤에 만났었다. 만나자마자 대뜸 나 30분 일찍 출근하고 있어! 라고 당차게 말하기에 그러냐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었는데, 한동안 아무 말 없다가, 나 30분 일찍 출근 했다니까? 라고 되묻는 그 얼굴이 순간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웃으며 칭찬해줬더니 애 취급하지 말라며 버럭. 그러면서도 실실 쪼개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 아이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밥을 먹고, 더워 죽겠다는 유리의 손을 잡고 근처 공원에서 산책도 잠깐 했다. 그리고 집에 귀가. 집 앞에까지 데려다주고서 수연이 집에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출발하지 않고 있다가, 2층의 방에 올라가 불을 켜고 창문을 열자 그때서야 출발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해 본 데이트다운 데이트에 만족감을 느꼈었다. 그때 느꼈던 만족감 때문에 밤에 그런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던 걸까. 복잡한 심정에 유리가 보낸 문자만 괜히 몇 번이고 열어보면서 오전을 보냈다. 그 뒤로도 몇 통 정도의 문자는 계속 왔다. 일을 방해하긴 싫어서 일부러 답장은 보내지 않았던 건데 유리 입장에서는 또 수연이 튕긴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작작 좀 튕겨라, 라는 문자가 가장 최근에 온 문잔데 그냥 그렇게 오해하게 놔두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해서 그 문자에도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연이 유리를 좋아한다는 걸 유리는 모르는 듯 했다. 일단 수연 스스로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 면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유리 자체가 더럽게 눈치가 없는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원체 모든 게 곧이곧대로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성격이라 유리와 수연이 같이 있는 걸 본 눈치 빠른 미영은 모든 걸 다 눈치 채버렸다. 유리와 태연이 - 수연이 보기에는 - 한심하기 그지없는 내기 때문에 끙끙 거리며 온천탕 안에 들어가 2시간 째 나오지 않고 있었을 때에, 지루해 하며 앉아있는 수연에게 미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었다. - 유리 씨는 알아? - 뭘? - 니가 좋아한다는 거. - 뭐????? - 니가 좋아하는 거, 유리 씨는 아냐고. - 애, 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미쳤어?! 왜 쟤를?! -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이것 봐. 너 지금도 내 눈 똑바로 못 쳐다보고 있잖아. - 그, 그건…! - 본인이 이렇게 부인하는 걸 보니 유리 씨는 아직 모르겠구나. 흐응. 그렇군. - ……. - 이야, 유리 씨 능력 좋네. 지금 2주 좀 지났나? 그 짧은 기간에 그 콧대 높은 정수연을…. 역시 우리 때때 친구는….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작업을 했길래 네가 넘어가? - 아니라니까!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눈빛부터가 달라졌는데. 그 전에는 개싸가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지금은 유리야, 라고 이름도 부르고. 목소리 톤도 더 나긋나긋 해지고. 심지어 땀도 닦아주고. 딱 봐도 변한 게 눈에 보이는데 아니라고 발뺌 하긴. 말해봐. 어떻게 했어? 유리 씨가 어떻게 했길래 그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미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밀어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사실 달리 대답할 말도 없었다. 유리가 특별히 수연에게 작업을 걸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잘 해준다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그저 매일 퇴근할 때마다 데리고 온 게 다였는데,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서로 말다툼만 했지 핑크빛 데이트를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되어버렸다니. 애초에 유리가 말했던 한 달보다도 더 짧은 기간.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는데,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에 익숙지가 않은 수연의 노력은, 연애박사인 미영의 눈에는 금세 간파를 당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미영이 더 이상 캐묻지 않아 수연이 곤란해 하는 일은 없었지만, 유리와 눈만 마주쳐도 미영이 옆에서 유리와 태연 몰래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는 통에 밤에 술을 마실 때에도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 그래, 계속 튕겨라. 나는 계속 문자 보낼 테니. 어제 만난 시간에 집 앞으로 나와. 데리러 갈 테니까. 얘는 왜 이렇게 제멋대로일까. 내가 약속 있으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대체. 핸드폰에 금방 들어온 문자를 보며 수연이 샐쭉한 표정을 지어내며 생각을 하는 찰나,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다시 울린다. - 선약 있어도 깨. 천상천하유아독존. 뭐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본인의 사생활은 존중 받고 싶어 하면서 남의 사생활은 생각하지도 않는 인간.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사는 여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져버린 여자. 수연은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전화조차도 받지 못할 정도로 싫어했다. 심지어 정신병자가 아닐까 라는 고민도 했었고, 미영에게는 스토커라는 식으로 표현까지 했다. 그런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니. 그 때에는 권유리라는 여자의 존재 자체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이제는 이런 문자를 받고서도 설레어 하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가슴 속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 수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간 사이에 저절로 주름이 잡힌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수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숙였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차에 달린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와 앞머리를 흩트려 놓는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수연은 들었던 고개를 살짝 꺾어 오른쪽으로 돌렸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는 아이의 몸이 보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머리카락 틈 사이사이로 수연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으리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편두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 또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아 힘든데, 왜 너까지 그러니 라고 성질을 내며 쥐어박고 싶지만, 이미 아까 그 삭막한 공간에서 끌고 오면서 수도 없이 많이 때렸기에 - 뒤통수를 친다던가 볼을 꼬집는다든가 등짝을 후려친다든가 등등 - 더 이상 때리지는 않기로 했다. 수연은 엄지로 주름이 잡힌 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서주현.” “…….” 대답이 없는 아이의 모습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마지막 휴가. 이 날이 지나면 내일부턴 보충수업이 이어진다. 담임이 아니더라도 담당과목이 영어인 탓에 출근은 매일 해야 한다. 거기에 이번 보충 수업에는 고 3들 수업마저도 덜컥 맡아 버렸다. 원래 고3을 담당하던 영어선생님 중 한 분이 연수를 가시는 바람에 수연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오전은 그 말도 안 되는 꿈 때문에 멍하니 있느라 다 날려버렸으니 오후에는 좀 느긋하게 수업 준비 좀 하다가, 유리 만날 준비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서 받았더니 경찰서. 맡고 있는 반이 없어서 학생들 일 때문에 연락이 올 일은 없고, 가족 중에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놀란 마음으로 수화기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스레 들었더니, 주현이 자주 놀러 다니는 애들과 대낮부터 공원에서 술 마시다가 걸린 모양이었다. 차근차근 설명하는 수화기 너머의 경찰에게 주현을 바꿔 달라 해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고모부나 고모에게 전화를 하지 왜 나에게 전화를 했냐고 물었더니, 아빠한테 맞아 죽기 싫어서 그랬다고 간절하게 부탁하길래 결국 아버지 차를 끌고 부랴부랴 나와 경찰에게 인계를 받고 돌아가는 길이다. 들어오자마자 주현의 귀를 부여잡고 사정없이 잔소리를 퍼부어대며 등짝을 후려치는 수연의 모습에 놀란 경찰이 오히려 수연을 뜯어 말리기까지 하는 해프닝을 한 번 겪고 나서야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경찰서에서 걸어 나온 때부터 지금까지 주현은 수연의 눈치를 보느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야.” “으, 응?” 수연이 나지막하게 다시 한 번 부르자 그제야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고 수연을 바라본다. 화가 자꾸 치밀어 오른다. 어렸을 때에는 너무 순하고 착해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라는 걱정마저 했던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던 아이고, 어른의 말이라면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잘 듣던 아이였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에게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아이였는데, 그런 아이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변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한번 엇나가기 시작한 아이는 끝도 없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담배나 술은 기본이고, 학교 수업도 잘 들어오지 않고, 언제 한 번은 학원을 다니겠다고 돈을 받아가서는 그걸 곧이곧대로 아이들과 노는 데 다 써버려서 고모부에게 한 달 동안 외출금지를 당한 적도 있었다. 결국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 시키겠다는 걸 고모부의 힘으로 겨우 퇴학만은 면하고 전학을 하게 된 것인데, 새로운 학교에서는 열심히 살겠다고 그래놓고서 또 사고 쳤다. 아이를 데리러 파출서나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오는 일은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엇나가버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건 여전히 익숙지가 않다. “너 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래?” “…….” “왜 이래, 진짜. 이제 하다하다 못해서 대낮부터 술을 마셔? 너 왜 그러니? 대체 왜 그래? 뭐가 불만이야? 어?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 내가 언제까지 널 데리러 이렇게 왔다 갔다 해야 해? 어?” “…소리 지르지 마. 잘못했어….” “잘못했다는 말도 대체 몇 번을 듣는 거야. 너 진짜 제정신이니? 응?” “…….” “다른 건 다 좋으니까 제발 경찰서 좀 오게 하지 마. 정말 왜 그래, 속상하게.” 수연을 똑바로 바라보던 주현은, 수연이 다그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손가락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수연을 잘 따르던 아이라서, 자신의 부모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면서도 수연의 말은 그래도 그나마 잘 듣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아이를 혼내는 일은 수연의 몫이 되어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차 안에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계속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었으니 주현도 속상할 만도 했다. 수연은 묵묵히 주현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톱을 바라보았다. 손톱을 잔뜩 물어뜯었는지 많이 짧아져 있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은 애정결핍의 증상이라던데, 뭉툭해진 손톱을 보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의 몸에서 나는 알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까는 이 냄새를 맡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볼을 사정없이 꼬집으며 온갖 화를 다 냈는데, 이젠 이 향이 제법 씁쓸하게 느껴진다. 잘 지내던 아이가 어긋나는 것에는 결국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유의 상당수는 대부분 어른의 잘못이다. 수연이 생각하기에 주현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아이를 너무 옥죄였던 고모부 내외의 교육열과 지나친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서주현.” “…….” “고개 들어 봐.” 맑은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어리고 어린 아이인데, 왜 자꾸 그렇게 엇나가는 걸까. 속상한 마음에 수연은 엄지로 아이의 눈가를 스윽 문질렀다. 그제야 잔뜩 굳어있던 아이의 몸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아서, 수연은 손을 떼고 주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일은.” “응.” “고모랑 고모부한테는 비밀로 할게.” “…….”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아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그 모습에 수연 역시 빙긋 웃으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살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아야, 아프잖아. 금세 기분이 펴져서는 툴툴 거리는 목소리에 수연은 아프긴 하냐, 라고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밥은 먹었어? 설마 빈속에 술 마셨니?” “아니. 밥은 먹었지. 그래야 좀 덜 취하잖아.” “하여튼…. 아는 건 많아서는. 쯧쯧. 너 지금 술 냄새 나니까 집에 바로 가지 말고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이모랑 이모부 있는 거 아냐?” “부부동반 골프모임 가셨어. 밤에나 들어오실 테니까 같이 들어가. 언니 저녁에 약속 있으니까 집에 혼자 있다가 술 냄새 빠지면 바로 집에 가고.” “약속? 데이트?” 데이트?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보는 주현의 말에 수연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포착한 모양인지, 약간 충혈 되어 빨개진 눈이 가늘어진다.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은 이미 쏙 들어간 지 오래. 히히, 거리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수연은 재빨리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시동을 걸었다.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차에 시동이 걸린다. “데이트 맞구나? 데이트 해?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 “……아니야, 그런 거.” “에이, 맞구만 뭘.” “아니라니까?” “맞네, 맞구나. 누구야? 우와, 언니가 데이트도 해?” “아, 글쎄…아니래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낸다. 수연은 자신이 그렇게 강하게 반발을 하면 할수록 그게 오히려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의 입으로 - 설사 유리가 아닌 타인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 데이트라고 인정하긴 죽기보다 싫었다. 유리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그 순간에 이미 자존심을 바닥에 내리쳐버린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바닥에 버려진 자존심이라도 끝내 놓치기는 싫은 것 같다. 대답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발끝으로 꾸욱 눌렀다. 천천히 차가 움직이고, 경찰서 정문 쪽을 바라보며 핸들을 돌리려는 찰나,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진동이 다시 울린다. 주차장의 하얀 선에 반쯤 걸쳐져 있는 차를 멈춘 다음,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열었다. 하얀 화면 위에 떠있는 편지 모양의 그림과, 그 밑에 다시 적혀있는, 그러니까 오늘 하루 종일 질리도록 봐온 권유리라는 세 글자. 그리고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웃음. 그걸 주현이 본 모양인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내밀어서 소리 내어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를 읽었다. “…곧 보겠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네 얼굴이 아른거려. 나 더위 먹었나?” “…….” “……이거 웬 80년대 영화에서나 나올 듯 한 작업멘트?” “……” 비죽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오자, 수연은 마치 주현이 자신을 비웃는 듯 한 착각마저 들었다. 서둘러 핸드폰을 닫고 주머니에 넣은 다음 차를 출발시키는데 그런 수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주현의 시선 때문에 온 몸과 얼굴이 화끈화끈 거린다. 얘는 하필이면, 왜 이 타이밍에 이런 문자를 보내는 거야…. 바지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의 묵직한 무게감이 자꾸 신경 쓰인다. 정문 사이를 빠져나가고 도로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멈춘 사이, 눈앞에 자꾸 그 검은색 글자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서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옆에서 몰래 본 주현 덕택에 문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닫아버렸더니 자꾸 주머니 쪽에 핸드폰이 닿는 부분의 살들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전방을 바라보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차에 달려있는 디지털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0분. 유리가 퇴근을 하고 집에까지 온다면 대략 6시 30분이나 7시쯤이 된다. 그럼 주현을 빨리 집에 데려다주고, 화장을 하고 준비를 할 여유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찍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조급한 마음이 들어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자꾸 들어간다. 주현은 옆에서 끊임없이 권유리가 누구냐며 꼬치꼬치 캐묻는데, 그 질문공세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도 들었다. 금방 전까지는 하도 타박을 들어서 눈물까지도 글썽이던 아이가 금세 기가 살아서는 놀리듯이 자꾸 말을 하는데, 차를 중간에 멈춰놓고 다시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자꾸 일어나고 있었다. “말해 봐. 누구야? 누구냐구. 대체 누구길래 언니가 데이트도 해? 천하의 정수연이? 아니 그것보다, 언니 언제부터 여자 다시 만났어? 대학생 때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이후론 다신 여자 안 만난다고 했잖아.” “쪼끄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와, 나도 알 거 다 아는 나입니다? 무시하지 말라구요.” “그래, 너 잘났다. 다 커서 좋겠네?” “언니이이이이이이이. 누군데? 응? 누구야아? 나 말해주면 안 돼? 나 진짜 궁금…. 꺄악.” 귓전을 때리는 장난기 가득한 소리가 듣기가 싫어서, 옆 차선에 차가 없는 걸 확인하곤 급하게 핸들을 꺾어 옆 차선에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 차선으로 돌아왔다.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주현의 몸이 요동을 친다. “조용히 해. 정 그렇게 듣고 싶다면 차 갓길에 대놓고 얼굴을 마주보며 아주 친절하게 설명 해 줄게. 원하면 말해.” “…….” - 일부러 - 빙긋 웃으며 말을 했더니 주현이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입을 꾹 다문다.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앞을 바라보던 아이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맨다. 기다란 상체를 가로질러 매어져 있는 회색의 긴 줄을 흘끔 바라보다가,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았다. 주현은 말이 없었다. 수연 역시 말이 없었다. 주현은 아마도 겁을 먹은 상태여서 그런 듯싶고, 수연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신경이 쓰여서였다. 유리에게 받은 문자는 보통 3번 이상씩은 뚫어져라 쳐다보며 몇 번이고 곱씹었는데, 이번에 온 문자는 자신의 옆에 겁을 잔뜩 먹은 채로 앉아있는 사촌 동생 덕택에 한번, 그것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고 대충 훑어본 채로 닫아버린 탓이리라. 하아. 이젠 문자 제대로 못 봤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까지 왔어……. 짜증나…. 수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몇 번이고 생각하는 거지만, 차라리 유리가 본격적인 작업이라도 걸어서 이렇게 된 거라면 덜 억울할 텐데, 유리가 뭐 하지도 않았는데도 이 짧은 기간 안에 이 정도로 넘어가버린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미 스스로도 인정을 해버릴 만큼 명확해진 감정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 아무리 미영이 눈치가 빠르다고 한들, 어쨌든 티가 나긴 났으니 미영도 눈치를 챈 일일 테고, 감정이라는 게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얼마 안가 유리도 눈치를 챌 게 뻔하다. 수연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수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에 유리가 취할 태도는 불 보듯 뻔 하기 때문이다. 나오기 전에 달력을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내기를 한지 3주일 하고도 1일이 지나갔다. 이제 남은기간은 8일. 8일 안에 승부가 결정된다. 그 8일만 잘 참으면 좋아한다는 걸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8일 이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을 해본 적도 없고, 사실 하고 싶지도 않다. 내기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일이고, 일단 지금은 좋아한다는 티를 절대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리비도 수리비지만, 왠지 유리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다분하다. 사실 이미 져버린 지 오래지만 유리 스스로가 자신이 이 내기에서, 말도 안 되는 이 줄다리기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아는 건 정말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수연은 어느 정도의 안도감도 느끼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기고 지는 것 따위도 상관하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거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경찰서였던지라 집에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평일이고, 차가 막히는 도로를 타고 온 게 아닌지라 예상보다 15분가량 일찍 도착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조금 서두르면 애 저녁밥도 해주고 출발해도 되겠네 라는 생각을 하며 집 쪽으로 차를 슬금슬금 움직였다. 아무런 말없이 차 안에 앉아있었던 게 심심한 모양인지 하품을 하던 주현이,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왜?” “언니 집 앞에 모르는 차가 서 있는데? 누구 오기로 했어?” “어? 아닌…. 헛.” 주현의 말에 고개를 약간 앞쪽으로 내밀고 전방을 바라보던 수연은, 자신의 집 앞 쪽에 대어져 있는 차의 뒤꽁무니와, 그 차에 기대서 핸드폰을 꺼내고 있는 기다란 몸을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게 차를 급하게 멈추고서 탄식을 내뱉었다가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아는 사람이야? 어? 아는 사람이냐구. 아니, 그게 아니라…. 수연이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타이밍도 좋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기계가 부들부들 떠는 소리를 들은 주현이, 수연의 바지 주머니를 한번 바라보고, 그리고 다시 차에 기대어 서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오른다. “아는 사람이네? 혹시 그 사람이 아까 그 80년대 영화?” “아니야.” “맞네. 얼굴 빨개진 거 보니까.” “아니라니까?” “후훗.” 속삭이는 듯 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재빨리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익숙한 손길로 풀고, 문을 벌컥 열고 몸을 빼낸다. 야, 너 어디가! 빠져나가는 손목을 급하게 잡았지만 주현은 수연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유리쪽으로 다가갔다. 주현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수연의 방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하던 유리가 문득 고개를 돌려 주현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재빨리 시동을 끄고 차문을 벌컥 열어 주현의 뒤를 쫓아갔다. 주현을 바라보던 유리의 시선이 수연을 향한다. 제법 가까운 거리여서 유리의 표정변화가 눈에 금세 들어온다.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현과 수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씨익 웃는 그 얼굴을 바라보던 주현의 얼굴에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유리의 앞에까지 다가간 주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당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그 모습에 수연은 심장이 나가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짓궂은 아이가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는 일이다. 거기다 금방까지 자신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했던 아이니 더 짓궂게 반응할 수도 있다. 주현이 갑자기 대뜸 인사를 하자, 수연을 바라보며 웃던 유리가 몸을 움찔 거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현을 바라보았다. “어, 그래. 안녕. 근데 너 누구…?” “아, 저 수연 언니 사촌동….” “권유리. 너 이 시간에 뭐해???” 주현의 말허리를 뚝 잘라먹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유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여자를 한참이나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한번 갸우뚱 거리다가, 무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회사 조퇴했어. 너 보고 싶어서.” “오.” “…….” 아니, 너는 왜 안 쓰던 말을 갑자기 지금에 와서!!! 옆에 서 있는 아이의 눈에 생기가 가득 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얜 누구야? 아는 애? 당황해하는 수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주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아, 얘는 그냥 무시해도 ㄷ….” “저 수연언니 사촌동생이에요! 언니 이름이 혹시 권유리?” “사촌 동생? 그렇구나. 별로 안 닮았네…. 내가 권유리 맞긴 맞는데…. 날 알아?” “서주현. 너 집에 얼른 들어….” “와, 언니가 오늘 수연 언니랑 데이트 하는 그…. 읍.” 손으로 주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마에서도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정쩡하게 내버려두고 온 아버지의 차는 기억에서 지워버린지 오래고, 오로지 이 아이를 얼른 집에 들여보내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주현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수연의 손을 억지로 떼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힘이 잔뜩 들어간 수연의 손을 떼는 게 여의치 않은 모양인지 울상을 짓다가 결국 이로 수연의 손가락 하나를 깨물었다. 앗! 수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자, 주현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언니 뵙고 싶었어요! 수연 언니가 다른 사람하고 데이트도 하다니…. 어떻게 꼬신거에요? 아, 근데 그럼 난 뭐라고 불러야 하지? 형부? 아니야, 남자가 아니니까 형부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뭐라고 해야 하지?” “서주현, 너 얼른 집에 안 들어가?!”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수연언니 성격에 먼저 했을 리는 없고…. 언니가 했어요?” “야!!” “진도는 어디까지? 수연 언니가 좀 숙맥이라 별로 못 나갔을 것 같기도 한데…. 언니가 이해해요. 수연 언니가 이제껏 제대로 사람을 사귀어 본 적이 없…. 꺅!” 키가 큰 탓에 한 번에 때릴 수는 없어서, 까치발을 딛고 서서 주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단발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아주 잠시 주현의 입이 닫힌 찰나, 아이의 손목을 재빨리 쥐고 황급히 대문 쪽으로 다가갔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들려오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어딜 가느냐는 유리의 물음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열려 있는 대문을 빠르게 지나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질질질 끌려오는 아이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유리를 향해 끊임없이 수많은 질문 공세를 던지는데, 그런 주현의 모습이 웃긴 모양인지 뒤쪽에서 유리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걸 듣는 수연의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 없이 지나다니는 정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계속 배를 잡고 웃어대던 유리가, 열려있는 대문 틈 사이로 예쁘게 하고 나와! 라고 외치는 걸 듣고 난 후에야 겨우 집의 현관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문을 벌컥 열어 그 안에 자신보다 훨씬 기다랗고 마른 몸을 재빨리 던져 놓고 수연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쾅 닫았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서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얼굴에 달아오른 열은 아직 식지도 않았다. “와, 얼굴 빨개진 것 봐.” “시끄러워.” “이제 준비 해야지? 나름대로 데이트인데 화장도 하고 옷도 좀 예쁘게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주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경찰서에 가는 일이고, 얼마 안 걸릴 거라 예상해서 화장도 하지 않고 옷도 그냥 대충 면바지에 티 하나만 걸치고 나갔던 건데, 예상보다 유리가 훨씬 빨리 오는 바람에 지금 얼른 준비를 해야 한다. 이건 데이트라서 그런 게 아니야. 그래도 나름 번화가로 나갈 텐데, 거기서 초췌한 꼴로 돌아다닐 수 있을 순 없으니 그런 거야. 그래, 절대로, 데이트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권유리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럼, 그런 거 아니고말고. 수연은 주현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운동화를 벗은 다음 종종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디며 올라가는 수연의 등 뒤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니. 저번에 우리 같이 식사할 때 입고 온 옷 적당히 파인 게 섹시하고 예쁘더라. 그거 입고 가. 진도는 빼야할 거 아냐. 향수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너무 진하게 뿌리지 말고, 연하게 뿌려, 연하게.” 쪼끄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계단을 올라가던 몸을 휙 돌려 거실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를 흘겨보았다. 씨익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쟤가 말하는 옷이 뭐지? * * * “아, 고등학생?” “어.” “그래, 어쩐지 어린 것 같더라.” 주현이 고등학생이라는 말에 자동차 키를 휙휙 던졌다 받는 걸 반복하며 유리가 대답했다. 길은 좁은데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유리와 수연 사이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끼어서 지나다닌다. 마땅히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근처 창경궁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유리가 좋아하는 피자집을 찾아가는 길인데, 그 와중에 대화가 끊긴 일도 없었고 별 어색한 것도 없이 잘 왔어도 둘 사이의 간격은 전혀 좁아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뚝 떨어져서 걷고 있는 건 아니지만 손을 잡는다거나 팔짱을 끼지도 않고 있어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로 걸어왔다. 연극이라도 한 편 보라며 끈덕지게 달라붙은 어린 아이에게 미안해요, 라고 웃는 유리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근데.” “응?” 커브를 돌아 사람이 조금 적어진 길에 들어서면서, 수연은 입을 열었다. 수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약간 떨어져 있던 유리가 수연의 옆에 바싹 붙는다. 옷깃이 살짝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심장이 휘청거렸다.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이젠 별거 아닌 것에도 몇 번이고 심장이 휘청거린다. 안전벨트를 매어주던 그 손길에도, 오늘 하루는 잘 보냈냐고 묻던 그 목소리에도, 급하게 하느라 화장이 제대로 안 먹었다고 말하는 수연의 말에, 화장 안 해도 예쁘던데 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에도 몇 번이고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옷깃만 스쳐도 두근거리고 있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나봐?” “응?” “예정보다 일찍 왔잖아. 일이 빨리 끝났나 싶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응?” 붉은색 벽돌을 초록색의 넝쿨들이 휘감고 있는, 생각보다는 아담한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다. 투명한 자동 유리문이 유리와 수연이 앞에 서자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린다. 종업원이 웃으며 다가오자, 유리가 빙긋 웃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 빨리 보고 싶어서 조퇴한 거야. 진짜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두 명이요, 라고 말하는 말투나, 보고 싶어서 조퇴한 거라고 말하는 말투나 전혀 톤의 변화도 없이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수연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진심 같지 않아 보인다는 걸 유리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말은 조금은 더, 좀 진지하게 해주면 좋잖아. 멍청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하는 그런 말을 듣다보면, 수연은 유리와 자신의 사이가 애초에 일종의 계약연애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라면 저렇게 툭툭 내뱉듯이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여자 저 여자 많이 만나고 다니면서, 사랑한다는 말이나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에는 도가 터 있을게 분명하다. 유리에게 있어서 그런 말은 마치 밥을 먹었냐는 일상적인 대화와 별 반 의미가 다를 게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들어도 썩 반갑지는 않다. 그런 식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유리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을 꼬시기 위해, 그러니까 내기에 이기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설레어 하는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종업원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고, 익숙하게 메뉴판을 바라보며 주문을 하는 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직장에서 바로 달려온 거라 오늘은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귀찮은 모양인지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잡고 귀 뒤로 넘긴다. 귓볼에 달려있는 은색의 귀걸이가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깎아내린 듯 한 이마의 선과, 그 이마에 연결되어 있는 높은 콧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종업원이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무슨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뚫어져라 본 건 이게 아마 처음인데, 생각보다 제법 진지하게 경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진지하네. 평소에 나한테도 그렇게 진지하게 해보지. 수연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래. 난 항상 너한테도 진지해.” 수연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메뉴판을 바라보며 유리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말에 놀란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종업원과 이야기 하느라 못 들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용케도 그걸 알아듣고 대답을 한 유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얘 앞에서는 혼잣말도 제대로 못 하겠네. 가만히 생각해보면 줄곧 그래왔다. 유리는, 수연이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도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다 듣고 일일이 다 대꾸를 한다. 그런 건 웬만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일 텐데 지나가듯이 흘린 말에도 대꾸를 했던 걸 보면, 그래도 계속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모른다. “덥지는 않아?”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사라지고 나서, 그제야 수연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한다. 정작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응.” “그럼 다행이고. 대학로는 오랜만에 오는데, 여긴 여전히 사람 많구나.” “대학로 자주 왔어?” “응. 연극 보는 거 좋아하거든.” “아, 여자들이랑?” “아니. 혼자서.” 혼자서 연극도 봐? 그런 건 혼자 보는 게 더 편해.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거든. 의외네. 의외야? 응. 네가 그런 문화생활을 즐길 거라고는 생각도…. 왜 이러세요, 아가씨. 이래 뵈도 나 책보는 것도 좋아해. 의외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 댄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피고 환하게 웃더니, 하긴 내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지, 라고 호쾌하게 말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지 시원스럽게 잘 웃는다. 오늘은 날이 조금 덜 더워서 그런 걸까. 유난히 말도 많고, 유난히 웃음도 많은 유리를 보고 있자니 수연의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가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튕겨나간다. 수연은 그저 멍하니 턱을 괸 채로, 자신의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어제 본 얼굴인데, 며칠 만에 본 것처럼 새롭다. 따지고 보면 방학하기 전에는 거의 매일 저녁마다 봐오던 얼굴인데 그 때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여자는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말 중간 중간에 가벼운 농담을 던질 줄도 알고,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서 화법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나가기도 한다. 저런 건 몸에 배어야 할 텐데, 이 정도로 유창하게 말을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나왔던 걸까. 수연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기울이고, 턱에 괴었던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선 골똘히 생각했다. 저 인간한테는, 내가 몇 번째 여자일까. 적어도 두 자릿수는 될 것 같은데. 음…. 왠지 기분 나쁘네. “그래서 내가 말이야…. 어?” “왜?”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하던 유리가 어느 한 쪽 테이블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표정 변화에, 수연은 고개를 제대로 들고 유리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있는 테이블에 여자 두 명이 앉아있다. 수연은 얼굴을 자신들 테이블 쪽으로 향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유리와 마찬가지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저거 미영 씨 아냐?” “그, 그러게. 아, 근데 미영이 오늘… 서울에 없을 텐데?!” “……그러니까. 어?!?! 그 앞에 있는 사람 김태연하고도 닮았는데?” 수연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여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정말 닮았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여자는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태연과 얼굴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앞에 앉아있는 여자 역시 미영과 똑같이 생겼는데, 어제 미영이 태연과 함께 펜션을 잡아서 놀다가 오늘 밤 늦게 서울에 올 거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영락없이 태연과 미영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피자가 잘 잘리지 않는 모양인지 입을 앞으로 내밀고 여자가 툴툴 거리자, 맞은편에 있는 여자가 접시를 끌어다가 잘라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리가 놀랍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야, 완전 똑같이 생겼다. 도플갱어 수준인데?” “그러게. 그래도 확실히 황미영네 커플은 아니네. 피자 잘라주는 거 그대로 두는 거 보니까. 걔네들이였으면 서로 자기가 잘라주겠다고 투닥 거렸을 거야.” “맞아, 그랬겠지.” “매너 좋구나. 멋있네, 피자도 잘라주고.” “부러워?” “응?” “부럽냐고, 저렇게 잘라주는 거.” “뭐, 부럽다기 보단…. 음. 부러운가?” 부러운가? 라고 말을 하니 유리의 표정이 갑자기 급격하게 굳는다. 그런 유리의 표정 변화에 속으로 슬며시 웃었다. “음, 게다가 얼굴도 예쁜 것 같네. 하긴 태연 씨와 닮았다면…. 예쁘겠지. 태연 씨가 좀 오밀조밀하게 예쁘게 생겼잖아. 어떻게 보면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 “그리고 미영이한테 하는 거 보면…. 그런 사람 또 어딨나 싶어. 저 사람도 저 앞에 있는 여자한테 그렇게 잘해주려나. 지금 하고 있는 거 보니 태연 씨가 미영이에게 하듯 잘 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 “아, 그러고 보니 부러운 가봐. 그래, 부럽다. 나도 저런 사람 만나봤으면 좋겠네. 그럼 진짜 좋을 것 같은데….” 유리의 눈썹 한 쪽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주문했던 피자가 나왔다. 종업원이 동그란 판을 내려놓자마자, 유리가 재빨리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판 위에 있는 피자를 자르기 시작한다. 수연은 자신의 몫을 자르기 위해 나이프를 들었다가 그런 유리의 행동에 손을 멈추었다. “내가 자를게.” “됐어. 내가 할게.” “내가 할 거야.” 딱 봐도 그리 잘 잘라지지도 않는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에 잔뜩 힘을 줘가며 낑낑대고 자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승부욕만 강해서는, 하여튼. “아, 더럽게 안 잘라지네.” “됐어. 안 잘라지면 내가 자를게.” “아니야. 내가 할 거야. 내가 하고 말겠어. 이깟 피자 따위에 굴복할 수는 없지.” “…….”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너무 들어간 모양인지, 손가락 끝만 하얗게 변해 있다. 잘 안 잘라져서 자꾸 헛손질만 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수연은 부드럽게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을 잡았다. 유리의 손이 뻣뻣하게 굳는 게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다. 그 모습이 순간 귀엽게 느껴져서, 수연은 빙긋 웃으며 이번엔 다른 손으로 유리의 앞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트려 놓았다. “자, 우리 아가 착하지? 내가 할 테니 그만 해.” “…지금 누구를 애 취급 하는 거야.” “애 맞잖아. 다른 사람 멋있다 했다고 금세 삐져서는.” “하, 이 여자 웃기네? 누가 삐졌다고?” 발끈하며 말을 하는데, 목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결국엔 온 얼굴을 덮기 시작했다. 아씨. 자신의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유리가 툴툴 대더니, 수연의 손을 뿌리치고 피자를 자르기 시작했다. 난도질당하고 있는 피자를 바라보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권유리.” “왜?” “저 사람보다 네가 더 멋있어. 저런 거 안 해줘도.” “…….” “그러니까 줘. 내가 자를 테니까. 피자 난도질 하지 말고.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면 못 써.” 손가락에 힘이 스르르 풀리는 모양인지, 하얗게 되어있던 손가락 끝이 점점 다시 붉어진다. 수연은 재빨리 유리의 손에서 나이프를 낚아채고, 그 나이프로 피자를 자르기 시작했다. 잔뜩 힘만 주었지 별 기술도 없이 마구 난도질 하던 유리와 달리, 수연은 힘을 그렇게 주지 않고도 부드럽게 잘 잘라내기 시작했다. 접시에 가져가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서 흘끔 바라본 유리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는데, 더 이상 놀렸다간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 수연은 그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목이 타는 모양인지 앞에 있는 컵을 쥐고 연신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가끔은 아까 그 문제의 테이블을 흘끔흘끔 바라보는데 그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 담겨 있어서 수연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아, 뭐. 왜 웃어?” “그냥. 킥킥.” “웃지 마.” “왜?” “그냥. 괜히 화 나. 웃지 마.” “어휴, 우리 아가 화났어요?” “아, 좀. 애 취급 하지 말라니까?” “삐졌구나?” “아씨. 아, 물도 떨어졌어. 저기요. 저기요!!” 지나가는 종업원을 큰 소리로 부르며 냉수를 달라고 요청 하고 있는 유리 때문에 한참을 웃다가, 잘라진 피자의 한 조각을 유리의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도 얼굴의 붉은 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종업원이 가져다 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는 유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연은, 권유리와의 데이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즐거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부르다.” “응.” 고작 한 판 따위에 얼마나 배부르겠나 싶었는데, 생각보단 양이 많았던 모양인지 다 먹지도 못하고 나왔다. 전자렌지도 샀으니 키핑 했다가 들고 가서 아침밥 대용으로 먹으라고 싸가기 싫다는 유리에게 억지로 남은 피자를 싸서 쥐어주고서 가게를 나왔다. 사실 더 있어도 상관은 없는데, 유리가 내일 출근 하는 날이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고 - 수연의 입장에서는 - 전혀 쓸데없는 배려를 해준 덕택에 사람 많은 번화가에서 빠져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창경궁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단지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서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번화가 바로 옆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인도 위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주차장까지 걸어왔다가, 배부르니 조금만 더 걷지 않겠냐는 유리의 제안에 둘은 주차장을 지나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였다. 도로 쪽에 세워진 울창한 가로수의 잎 사이로, 가로등의 빛이 뚫고 와 인도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몇 대의 차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인도 위를 지나가는 사람의 수는 여전히 거의 없다.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의 대화는 뚝 끊겨 있다. 차가 지나갈 때 내는 굉음 이외에는, 달리 소음이 날만한 공간도 아니어서 묘한 정적과 뜻 모를 긴장감이 둘 사이에 맴돈다. 수연은 고개를 묵묵히 숙이고 걸어가다가, 손을 뻗어 돌담벽을 만졌다. 까칠까칠한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다. 검지로 돌담벽 위에 보이지 않는 손을 그어가며 앞으로 걸어가던 수연은 조용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되물었다. “너 예전에 동감이라는 영화 봤어?” “응?” “동감 말이야, 동감.” “아, 유지태랑 김하늘 나왔던 거?” “응.” “봤어.” “거기서 보면, 유지태랑 김하늘이, 이렇게 둘이 서로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손으로 돌담벽을 주욱 긋잖아.” “응.” “나 그거 해보고 싶었어. 이렇게.” 턱으로 자신의 손을 한번 가리키고,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약간 위쪽에 있는 얼굴은, 수연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보며 수연 역시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 웃음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어떤 종류의 웃음이든 무조건 비웃음으로밖에 안보였는데, 유리가 변한건지 아니면 그 웃음을 바라보는 수연이 변한 건지, 그 언젠가 유리가 수연의 앞에서 희진에게 보여주었던 그 미소를, 요즘은 수연이 자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을 유리가 보여줄 때마다 수연은 기대를 하고는 했다. 아니, 기대라기 보단 바램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저 웃음은, 내기 때문에 짓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유리가 진심으로 짓는 웃음이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램. “…너 핸드백에 손수건 있지?” “응?” “있지?” “응.” “그거 꺼내줘 봐.” 수연을 바라보며 웃던 유리가 무슨 생각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말에 수연은, 돌담벽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 들고 있던 핸드백을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내 유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손수건을 받아든 유리는, 아까 돌담벽에 대었던 수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약간은 검게 물들여져 있는 가는 손가락이 보인다. 아, 뭐 묻었네? 수연의 작은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유리가 손수건으로 검지 부분을 부드럽게 닦기 시작했다. “뭐해?” “닦아주잖아.” “…….” “영화와 현실은 달라. 아마 그 영화에서도, 유지태도 그렇고 김하늘도 그렇고 손이 잔뜩 더러워졌을걸?” 제법 진지하게 말을 하던 유리의 손길이 익숙하다. 그 익숙한 손길을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에게도 다 해줬겠지, 라는 생각에. 어느새 다 닦은 모양인지 수연의 손을 약간 위로 들어 불빛 아래 좀 더 자세히 비춰보던 유리는, 손수건을 고이 접은 다음 열려있는 수연의 핸드백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 “그런 현실이 더 낭만적일 때도 있지.” “…….” “영화에서는, 이렇게 손을 닦아주진 않았잖아.” “아….”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던 유리는, 옆에 서 있는 수연의 손을 덥석 잡고 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낀 다음, 그걸 들어 올려 수연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렇게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고.” 하, 정말. 얘는 대체 이런 거 어디서 공부해 오나? 참내,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기분은 좋네.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은 막을 수가 없다. 떨려오는 심장도 막을 수가 없다.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깊어져가는 감정도 막을 수는 없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떨려오는 심장을 부인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이젠 수리비 따위 걱정 해 봤자 뭐하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맞잡고 있는 손에 땀이 조금씩 스며든다. 그래도 놓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수연은 살며시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유리 역시,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동시에 꼭 맞잡은 손에, 둘은 서로 바라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너 손 따뜻하네.” “내 손?” “응.” “내 등만큼?” “응?” “내 등이 아늑하다며.” “풉. 그래, 네 등만큼.” 장난스럽게 말하는 유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수연이 말하자, 그 대답이 흡족한 모양인지 맞잡은 두 손을 앞뒤로 힘차게 흔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밝은 달하나 두둥실 떠 있다. 달 위로 흘러가는 회색빛의 구름을 바라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창경궁의 정문까지 걸어왔다. 갑자기 넓어진 길과, 그 안쪽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옛궁궐의 정문을 바라보던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늦은 저녁이라 입장시간은 이미 지났는지 붉은색의 문은 굳건히 닫혀있다. 유리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질질질 정문 앞 쪽으로 끌고 간 수연은 옆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읽고서,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홍화문, 이라며 정문에 달린 현판을 읽고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여기 예전에 대비들을 모셨던 궁궐이래.” “그래? 그건 몰랐네.” “응. 지도 보니까 굉장히 넓은 것 같아.” “응. 꽤 넓어.” “와 봤어?” “어, 예전에 연극 보러 왔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혼자 와 봤어.” “예뻐?” “응. 예쁘지. 그래도 대비가 살던 곳이라면 잘 꾸며놨을 거 아냐.” “나도 가보고 싶다.” “지금은 관람 안 될 텐데.” “응….”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괜히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수연을 흘끔 바라보던 유리는, 굳건히 닫힌 문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같이 오면 되지.” “다음에?” “응. 근데 좀 넓어서 여름에 다 돌기엔 좀 더울 테고.” “…….” “가을이면 단풍도 들어서 더 예쁠 테니 선선한 가을에 다시 같이 오…. 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인지 유리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낸다. 그렇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연은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손에 배인 땀 때문에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수연을 차마 잡지는 못하겠던 모양인지, 유리는 그저 말없이 수연의 뒤를 황급히 뒤쫓아 올 뿐이었다. 여름이 끝나면 그와 함께 끝날 사이니, 가을에 다시 오자는 말은 공허한 약속 밖에 되지 않는다. 아니,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조차 뭐 있겠는가. 이제 8일이면 끝날 사인데, 여름이 끝나기까지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전혀 올 것 같지 않았던 한 달이 이제 곧 끝나간다. 약 3주 전에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저 인간과 같이 지내냐며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 달의 끝을 간절히 기다렸다. 이제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그 끝이 다가오는데, 왜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걸까. 수연은 자신의 구두 코 부분을 바라보며 뒷짐을 진 채로 한걸음 한걸음 옮겼다. 회색빛의 인도위에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 비스듬히 겹쳐서,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오고 있는 유리의 기다란 그림자도 겹쳐져 있다. 가을이 되면 이 그림자를 볼 일도 없다. 가을이 되면, 이렇게 함께 있을 일도 없다. 한 달 전에 전혀 모르던 사이였던 것처럼, 이제 곧 있으면 유리와 수연은 전혀 모르는 사이가 된다. 내기의 승자가 누가 됐든 간에, 어쨌든 그 관계를 청산하고 나면 유리도, 수연도, 서로가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제는 매일 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을 듣지 않아도 되고, 성가시게 문자를 대체 왜 이렇게 많이 보내냐는 투덜거림도 하지 않아도 된다. 퇴근하고 기분 좋은 때에 유리와 만나서 티격태격 하지 않아도 되고, 괜히 밤마다 유리가 보냈던 문자를 부여잡고 신경 쓰여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이제, 시원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오히려 슬픈 기분마저 든다. “수연아.” 뒤따라오던 유리가 조용히 수연을 불렀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섰다. 뒷짐을 지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손가락 끝이 닿아있는 손목의 맥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 좀 봐봐.” “…….” “아, 아니다. 그냥 보지 말고 있어.” “…….” “우리말이야.” “…….” “그러니까, 우리….”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손목을 잡고 있는 유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 떨림이 피부 속에 스며들어 수연의 심장마저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 내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쭈욱 빠지는 느낌이 들어, 수연은 뒷짐을 쥐던 손에 힘을 풀고 스르르 내렸다. 유리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슬라이드를 열었다 다시 닫으려고 하다가,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단 생각을 한 모양인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어깨 너머로 약간 기운이 없는 듯 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네, 효연 씨. 저기, 급한 일 아니면 제가 다음번에…. …희진이가요?” 희진이라는 말에 수연은 힘없이 내려뜨린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문제의 그 여자. 매 번 등장할 때마다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지만, 오늘은 단지 이름 하나만 등장했을 뿐인데 분노를 넘어서 이제는 알 수 없는 패배감까지 느끼게 만들고 있다. 온 몸을 휩쓸다 못해 머리까지 아파오게 만드는 그 패배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쟤는, 헤어진다 해놓고 대체…. 권유리 이 바보. “지금은 좀 곤란…. …꼭이요? …아, 그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아, 네. 음, 한 한 시간 정도? …그 정도는 기다리라고 해요. 아니요. 아, 정말. 저 지금 일 있다고 해 주세요. 옆에 지금 있어요? 바꿔 보세요. 제가 말할게요. 네? 아니, 대체 왜 그런데요?” 조금 짜증이 뒤섞인 말투로 유리가 가슴을 툭툭 치며 말한다. 통화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지만, 대충 들어보면 희진이 유리를 급하게 찾는 모양이었다. 수연은 뒤를 돌아 등을 돌린 채로 손으로 미간을 어루만지며 통화를 하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도 거부를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수연을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오라고 우겨대는 희진의 부탁도 거부할 수 없는 탓에 곤란해 하고 있는 유리의 표정을 바라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수연이 쳐다보는 게 느껴진 모양인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던 유리가 흘끔 수연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런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사귀던 연인 사이, 그리고 지금도 잘 사귀고 있는 사이. 자신이 끼면서 조금씩 틀어지고 있는 연인 관계. 아마 지금 수연과 있지 않았더라면, 유리는 저런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이 희진이 부르면 당장에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유리와 함께 하느라 잊고 있었다. 관계에 끼여 든 건, 희진이 아니라, 수연 자신이라는 것을. 분노를 느껴야 하는 사람은 수연이 아니라 희진이다. “유리야.” “잠시 만요. 왜?” “나 갈게.” “어?” “나 갈게. 희진 씨가 찾는 모양인데 얼른 가 봐.”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택시타고 가면 돼. 아, 마침 저기 오네.” “수연아.” “갈게. 얼른 가 봐.” “잠깐만!” 귀에 대었던 핸드폰을 떼고 급하게 유리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수연이 재빨리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긴 탓에 허공만 잡힐 뿐이었다. 다급하게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유리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유리는 냉큼 핸드폰을 닫아버리고, 택시의 뒷문 손잡이를 잡는 수연의 손목을 잡고 몸을 돌렸다. 당황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는 유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데려다 줄게. 밤에 여자 혼자 택시를 왜 타?” “그냥 간다니까.” “데려다 줄게. 그거 놔.” 몸을 돌리고 수연의 손목을 잡은 채로 앞으로 걸어간다. 덕택에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이 길게 당겨졌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제법 세서 손목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뒤돌아섰던 그 순간에 잠깐 보였던 유리의 얼굴은,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연은 팔을 아래위로 강하게 흔들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유리의 손을 뿌리쳤다. 아려오는 손목을 다른 쪽 손으로 부여잡은 후에, 원망이 가득한 눈길로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권유리.” “…….” “가서 니 애인 챙겨. 내가 비켜주겠다는데 왜이래?” “너 흥분했어. 왜 그래?” 유리가 다시 손을 뻗자, 수연은 황급히 손을 뒤로 돌려버렸다. 허공에 무안하게 떠 있는 자신의 손에 유리가 멍하니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왠지 견디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린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머리로 얼굴이 가려지면 유리가 자신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 스스로의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게다. “니 애인 챙겨.” “……알았으니까, 일단 데려다 줄….” “그리고 그만해.” “…뭐?” “그만하라고. 어차피 네 애인한테 갈 거면서 나한테 왜 친절하게 굴어? 데려다 줄 필요가 뭐 있어? 어차피 갈 거면 빨리 가는 게 낫잖아.” “…….” “나 따위 데려다 줄 필요가 뭐 있니? 어차피 나는, 내기 때문에 억지로 만나는 건데.” “너…!.” 안 타실 거예요? 무슨 말을 하려던 유리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문 사이, 뒤에서 택시 기사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유리는 이제 말릴 생각조차 못하는 모양인지 그런 수연을 더 이상 잡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들고 있던 핸드백을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차 안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축 쳐진 팔의 끝에 꼭 쥔 주먹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 천천히 출발하고, 홀로 남겨져 있는 유리의 기다란 몸도 점점 멀어져 간다. 눈가의 끝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원래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걸까.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에, 수연은 몸을 뒤로 깊숙이 기대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어던진 핸드백에서 아까 유리가 수연의 손을 닦아주던 손수건의 끝이 빠져나와 있다. 수연은 그 손수건을 집어 두 손에 꼭 쥐었다. 아직도 유리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슴이 아프게 뛰어댄다. 유치한 질투 따위에 이성을 잃고 무작정 화만 잔뜩 내버리고 와버렸다. 급격하게 화를 내버리고 돌아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수연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손수건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이 손수건으로 정성스레 손을 닦아주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바보 같애. 정말 바보 같아. 이 와중에도, 난 왜 네가 또 보고 싶니. * * * “감사합니다.” 차 안에 앉아있는 택시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문을 닫았다.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비내음이 물씬 담겨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내일쯤엔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수연은 택시 안에서 계속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다시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서, 핸드백 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지만 유리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길로 곧바로 희진에게 달려갔던 걸까. 어쩌면 그래서 연락을 못했던 것 일수도 있다. 두 손으로 핸드백을 잡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한 걸음씩 옮겨갔다. 저녁 9시만 지나면 조용해지는 수연의 동네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 하나 없이 그저 침묵만 감돌뿐이다. 골목이라고 칭하기에도 무안할 정도로 넓은 길 양 쪽으로 가로등이 서 있고, 그 가로등에 범죄 방지용 CCTV가 붙어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그 와중에도 수연은, 그래도 지금이라도 유리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몇 번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확인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자도, 전화 한통도 없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기진맥진해 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긴. 수연은 핸드폰을 다시 핸드백 안에 집어넣으면서 생각했다. 하긴, 연락 와도 또 뭐라고 해. 내가 그렇게 온갖 성질은 다 내고 와버렸는데….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식사까지 잘 하고 즐겁게 대화 나누던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버럭 화를 내버리고, 네 애인이나 챙기라는 둥의 말을 내뱉고 사라져버렸으니, 남겨진 유리는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싶다. 사실 그렇게 흥분할 일도 아니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수연에겐 흥분할 자격조차 없는 일이었다. 유리와 수연이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사실 친구보다 더 못하는 사이일 수도 있는 노릇인데, 유리가 애인에게 가든 말든 수연이 상관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유리 입장에서는. 좋아한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 버렸으니 유리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인간이더라도 수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유리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수연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바보 같고 멍청하고 유치한 짓을 했던 걸까. 누가 봐도 그건 정말, 영락없이 질투에 나온 행동이니 유리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지금쯤 신나하면서 그놈의 아우디 견적리스트 보고 있겠지, 권유리 너라면.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인가. 유리와 내기를 한 그 날 부모님께 아우디 수리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큰소리 뻥뻥 쳐놨는데 이제 와서 또 준비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도 걱정이다. 그래도 수리비 대준다고 하셨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니 큰 문제는 아닌데, 그렇게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난 다음도 걱정이다. 분명 당분간은 그 수리비를 꼬투리 삼아 수많은 맞선 폭탄을 던져주실텐데 그걸 또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수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안 유리가 취할 태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태어나서 누굴 먼저 좋아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유치한 질투심 때문에 그 마음을 들켜버린- 혹은 들킬 위험에 처한- 적도 이번이 처음이니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 지 전혀 알지 못한다. 미영이에게 물어봐야 하나, 라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 나이 먹도록 감정 정리 하나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물어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싫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씻고 나서 생각해 보자.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집 앞에 거의 다다랐다. 대문 앞에 있는 작은 계단에 올라서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런 수연의 몸짓을 붙잡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정수연 씨.” 목소리를 듣자마자 뒷목이 뻐근해 온다. 수연은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을 다시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 익숙한 작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허탈한 웃음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맞네요. 제대로 찾아왔네. 생각보다 늦게 왔네요? 좀 더 일찍 올 거라 생각했는데.”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을 보니 난데없는 폭행 충동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 김희진 씨네요. 수연이 그렇게 말하자 희진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분명 아까 유리를 부른 건 이 여자인 것 같은데 유리는 어디에 두고 이 시간에, 그것도 자신의 집 앞에 와 있는 것일까. 수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라고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와 두 번째 재회 날에 유리가 희진을 태운 채로 자신을 데려다 주었던 게 생각났다. 아, 그래서 알았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다 결국 자신의 눈앞에서 키스를 하던 유리와 희진의 영상마저도 떠올려버렸다.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희진의 입술에 머문다. 그리고 그 시선을 눈치 챈 모양인지, 작고 붉은 입술의 끝이 곡선을 그려가며 올라간다. “여긴 무슨 일이신가요?” “수연 씨 보려구요.” 담담한 어투로 말하는 여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독기를 품고 왔구나. 눈빛에 서려 있는 날카로움에 수연은 빙긋 웃어보였다. 이 여자와 자신 사이에 있는 공통점은 단 하나밖에 없다. “유리 때문에 왔나요?” “…….” “하긴, 희진 씨와 제 사이에 공통점은 하나 밖에 없으니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군요.” “우리 자기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이 여자는 뭔 말끝마다 우리 자기래? 유난히 자기란 말에 악센트를 강하게 주며 말하는 여자의 태도가 못마땅해서, 수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나 때문에 온 거예요.” “네?” “나 때문에 온 거라구요. 제 자신을 위해서.” 이건 또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빙빙 돌리지 말고. 희진은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려는 모양인지 애써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쪽에서 흥분을 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먼저 흥분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수연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생각들을 억지로 꾹꾹 눌렀다. “무슨 말 하시는 건지 전 전혀 모르겠네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절 위해서 온 거예요. 전 내 것을 누구한테 뺏기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요. 당신이 유리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 사람 때문에 온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연인인 저 때문에 온 거예요. 남에게 나의 것을 뺏기는 걸 못견뎌하는 내 자신을 위해서.” 핸드백에서 진동이 울려대기 시작한다. 손을 간지럽히는 그 떨림에 수연은 슬쩍 핸드백을 열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의 화면을 확인했다. 권유리.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수연은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정말 타이밍 거지구나, 너. 아니면, 알고서 전화한 건가? 슬라이드를 올렸다가 다시 재빨리 닫아버리고, 핸드백 안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희진을 바라보았다. 수연보다 키가 큰 여자가 하이힐 까지 신고 있으니 수연이 한 계단 높게 올라가 있는데도 시선의 높낮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왠지 분한 기분이 들어서, 수연은 희진 몰래 한 계단을 더 올라갔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시선의 각도가 조금 더 커지자, 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희진 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 전혀 모르겠네요.” “모르는 척 하는 거겠죠.” “뭐, 그럴 수도.”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자 희진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은 잃지 않고 있는 얼굴을 보며 수연은 결심했다. 그래, 안 그래도 너 때문에 오늘 기분 잡쳤는데 여기서 끝장을 보자. 너 스스로 자폭하겠다고 왔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지. “오늘도 유리 씨랑 데이트 했죠?” “데이트라 표현하기엔 좀 그렇지만. 어쨌든 보긴 봤네요.” “미안해요. 내가 중간에 산통 깨 버려서. 그래도 아직 저한테는 다행인건가요. 수연 씨가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유리 씨가 제 연락 받고 수연 씨를 보냈다는 소리가 되는 거니.” “내가 먼저 왔어요. 연인 사이 방해할 수 없어서. 권유리가 데려다 주겠다고 귀찮게 난리치는 거, 제가 억지로 뿌리치고 오느라 혼났네요.” 희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억지로 지어낸 게 분명한 그 미소가 사라진 표독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게 더 마음이 편해졌다. 수연 역시 얼굴에서 미소를 거둬내며, 자신을 노려보는 희진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야. 어디서 나를 말로 이겨 먹으려고 그러니. “데이트는 잘 했어요?” “그냥, 그럭저럭.” “키스는 했어요?” 너 변태니. 왜 볼 때마다 계속 키스를 걸고 넘어져. “표정 보니 아직 안했나 봐요? 흐응. 정말 매력이 없나.” “…….” “안타깝네요. 우리 자기는 키스 참 잘하는데. 그런 재미를 알지 못해서 어째요.” 꿈속에서는 했어, 라는 말은 할 수 없는 노릇. 비겁하게 스킨쉽 가지고 우위를 점하려는 희진의 태도가 못마땅한 수연이었다. 희진은 이젠 잡아먹을 듯 한 기세로 수연을 노려보고 있다. 수연은 이를 꼭 악문 채로 말을 이어갔다. 이 사이사이로 새어나오는 말들이 수연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너무나도 차갑다. “표정 무섭네요? 꼭 때릴 것 같이.” “그러는 수연 씨야 말로 만만치 않네요. 아, 전 연예인이라 얼굴에 생채기 같은 거 나면 안 되는데. 손찌검은 사양할게요.” “왜요. 상처 같은 거 남아도 돈 주고 고치면 되잖아요? 멀쩡한 눈코입도 뜯어 고쳤는데 상처 따위야 뭐.” “…….” 작은 손으로 주먹을 꼭 쥔다. 이를 악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제법 재밌게 느껴졌다. 핸드백에서 다시 진동이 느껴진다. 보나마나 권유리겠지. 평소 유리가 해온 행동을 보면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할 테니 이 여자와의 용건은 얼른 끝내야겠다 란 생각을 한 수연은, 질질 끌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끝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전 피곤해서요. 더 할 말 없으시면 이제 그만 들어갈게요.” “유리 씨 그만 만나요.” “그건 희진 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죠.” “내기 때문에 만난 사이 아닌가요? 집안을 듣자하니 그 정도 수리비는 껌값 정도 일 것 같던데. 굳이 질질 끌 필요 뭐 있어요? 수리비 아까워요? 아까우면 내가 줄게요.” “김희진 씨.” “아니면, 지금 당장 못 끝낼 이유라도 있나요?” 날카롭게 물어보는 질문에 수연은 순간 할 말이 없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요란하게 울려대던 핸드폰의 진동은 다시 뚝 끊겼다. 수연이 대답을 하지 않자 희진은 비죽거리는 웃음을 한 번 흘리더니, 다시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아, 대답하지 않는 거 보니 그런가 보네.” “…….” “우리 유리 씨 좋아해요?” ‘우리’라는 말에 강한 악센트를 주어가며 희진이 묻는다. 그래, 너네 권유리. 네 권유리. 니 애인 권유리. 그 인간을 내가 좋아한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어쩔 거야, 네가. 입안에 부딪혀서 떨어지는 수많은 말들을 수연은 애써 꾹꾹 집어 삼켰다. 여기에서 흥분하면 지는 거야. 절대 흥분할 순 없지. 침묵은 긍정의 의미. 희진은 그렇게 멋대로 정의를 내려버리고선, 잔뜩 굳어있는 수연의 얼굴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 꼬리를 한 쪽으로 올렸다. 그 모습에, 수연은 욕을 집어 삼키듯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다음, 목소리를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이봐요, 김희진 씨.” “왜요, 정수연 씨.” “그래요. 저 그 인간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 “희진 씨는,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뭐라구요?” “이렇게 나한테 찾아온 거 권유리는 모르죠? 보아하니 권유리는 다른 사람 시켜서 불러 놓고 여기로 온 것 같은데, 권유리 모르죠? 그죠?” “…….” “몇 년 된 연인이라면서요. 전 이제 권유리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 “말 해봐요. 그렇게 자신이 없냐구요. 그래서 날 이렇게 찾아온 건가요?” 하얀 얼굴이 종잇장처럼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며, 수연은 얼마 전에 드라마에서 희진이 짓던 그 선한 웃음을 생각해냈다. 그 곳에서 희진은 정말 착하디착한, 그러니까 저런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라는 생각을 할 만큼 순정파에, 눈물이 많지만 그만큼 웃음이 많고 밝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가난하지만 성격은 밝은, 그리고 재벌집 아들의 사랑을 받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 그 재능을 이용해 스스로 성공하는 자수성가 타입의 그런 여주인공.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그 여자는 저런 표정을 지을 줄 모르겠지만, 그 여자를 연기하는 김희진이라는 여자는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 현실과 드라마의 괴리에, 수연은 쓴 웃음을 지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김희진 씨.” “…….” “그 개싸가지, 워낙 성격이 더럽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다루기 힘든 인간이잖아요. 그런 인간 다루려면 그에 견줄 만한 여자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그런데 제 생각엔,” “…….” “김희진 씨는 그런 여자가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뒤에서 비겁하게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을 저지르는 거보니. 그런 역만 맡아서 그런 건가요?” “…그러는 정수연 씨야 말로, 본인이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나보죠?” 분노를 억지로 꾹꾹 눌러 담는 목소리로 희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치고 들어와야지. 수연은 빙긋 웃었다. 뜻 모르는 그 웃음에 희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급격하게 굳어간다. 표정에 드러나는 그 감정변화에, 수연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적어도, 김희진 씨보다는요.” 그래, 내가 너 따위 여자에게 질 수야 없지. 솔직히 조금 자존심 상했던 건 사실인데, 이젠 지고 싶지 않아. 고마워. 당신 덕택에 이런 결심까지 하게 됐네? 어금니를 꽉 깨문 모양인지 희진의 하얀 볼 살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럼, 할 말 끝난 것 같으니 전 이만 들어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서서,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또 다시 핸드백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으로 핸드백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조명이 들어온 핸드폰 화면에는, 역시 예상대로 권유리라는 글자가 떠있다. “야.” 어쭈, 이게 아예 반말을? 날카롭게 들려오는 희진의 외침에 수연은 돌렸던 몸을 다시 돌려 희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문했다. “왜?” “착각하지 마. 유리 씨가 너한테 좀 잘해준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착각하는 건 당신이지.” “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비어있는 다른 쪽 손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기계에서 누구시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주머니, 저 수연이에요. 얼마 안가 대문이 열리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고, 수연은 핸드폰을 쥔 손으로 대문을 살짝 밀어 연 다음, 자신보다 약간 아래쪽에 있는 희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이 여기를 찾아온 그 순간부터, 나한테 진 거야.” 엄지로 슬라이드를 밀어 핸드폰을 열었다.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작은 몸이 보인다. 수연은, 몸을 돌려 열려진 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유리야. 왜?” Hissing 13 “유리 씨, 미안해요.” “아니요. 됐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는 효연의 말에 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희진이가 억지 부린 거라면 효연 씨도 어쩔 수 없었겠죠. 괜찮습니다. 계속 미안하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여자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을 하고 난 후 겨우 돌려보냈다. 효연이 나가고 난 다음 유리는 낯선 - 하지만 낯설지 않아야 할 - 공간에 서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수연과 함께 있었고,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연과 함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수연은 몇 분전에 불같이 화를 내며 택시 타고 가버렸고 뒤쫓아 가지도 못한 자신은 결국 혼자 쓸쓸히 차를 끌고 희진이 사는 오피스텔까지 왔다. 기껏 차를 끌고 왔더니 당연히 맞이해야 할 희진은 온데간데없고, 희진이 부탁했다며 자신을 불러낸 효연만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유리를 맞이할 뿐이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래요, 꼭 오라던데요. 정말 중요한 일이고, 꼭 해야 할 말이라고. 기계음이 적당히 섞여 있던 효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울린다. 중요한 일, 꼭 해야 할 말. 그렇게 강조를 할 정도의 일이라면 직접 연락을 할 것이지 애초에 왜 매니저를 시켰는지도 의문인데다가 기껏 불러놓고 집에 있지도 않으니 괘씸하다. 유리는 방안을 가로질러 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으로 슥 붉은색의 시트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직접 골라줬던 시트였는데, 정작 자신이 이 시트에 피부를 스치며 자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방안을 죽 둘러보았다. 좋게 말하면 심플, 나쁘게 말하면 단조로운 방 안.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심플해 보여도 자세히 둘러보면 의외로 잡다한 물건들이 많이 있는, 수연이 다 박살내기 전의 유리의 집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방, 그래서 혼자 자기 싫다고 했었나. 복층형의 집에서 살고 싶다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복층형의 오피스텔을 구했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검은색의 계단 끝에는 액세서리들과 작은 소품들이 가득한 수납장이 즐비해있다. 한 쪽 벽면에 붙어있는 커다란 벽면 TV의 위쪽을 검지로 스윽 문질러 봤다. 먼지 하나 들러붙어 있지 않다. 아무리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여자라고 해도 더러운 건 정말 못 참는 성격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뭐 볼 것도 없네. 너무나도 단조로운 집안이라 더운 여름밤인데도 이름 모를 오한까지 느껴진다. 손으로 팔을 슥 매만지고서, 다시 침대에 걸터앉고, 그리고 이내 몸을 뒤로 눕혔다. 스프링이 아래위로 약간씩 흔들린다.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말이라는 게 뭘까. 유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한 번 깜빡 거리며 생각했다. 중요한 말. 사귀는 내내 희진이 꼭 중요한 말을 할 테니 자신을 보러 오라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라 이렇게 뜸을 들인 적도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길래, 이 시간에 만나자는 거야? 그것도 집으로 오라고 하다니, 별 일이네. 어차피 잘 됐네. 이 기회에 나도 말을 하지 뭐. 휴가를 다녀온 다음부터 결심했다, 희진과 헤어지기로. 사랑하던 연인이 헤어지는 것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단지 그 이유 각자가 맡는 역할의 정도가 조금씩 달라질 뿐.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연애를 했으니 헤어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다만 그 원인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을 뿐이고, 그것들 자체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휴양지에서 희진을 만났을 때에, 그것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기간이 꽤 지났으니 이제 봐도 설레지 않는 단계에 온건 이미 예전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사실 그 정도면 오래 사귀기도 했고 더 이상 만나봐야 설레지도 않는데 굳이 만남을 이어갈 이유조차 없는데다, 이 정도 되면 정 때문에 사귄다고 하는데 휴양지에서 맞닥뜨렸을 때의 자신의 감정을 생각한다면 정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보는 것조차도 끔찍이 싫다거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마냥 좋은 것도 아닌데 계속 사귈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물론 이런 부차적인 이유 이외에도 정수연이라는 크나큰 원인도 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수연이 없었다면 앞에 늘어놓은 구차한 변명들이 성립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런 것들을 별 거 아닌 걸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정수연 때문에 그것들이 굉장히 크게, 눈에 띄었던 것이고, 그래서 결국 이별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서 정수연 그 여자와 사랑하고 싶다, 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은 아니다. 그냥 만나보고 싶을 뿐. 내기라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 여자 자체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왠지 희진과는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은 오늘 저녁에, 창경궁 앞에서 자신을 보던 그 눈을 바라보며 더 확실해졌다. 유리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그 질투심을 본인이 모를 리는 없고 질투심이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건 요즘은 초등학생들조차 아는 사이이니, 그래 어쩌면 너도…, 라는 생각을 했었다. 상대방의 감정이 나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감정의 진행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일종의 기폭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수연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이유도 없고, 지체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희진과의 이별 장면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사랑해야지, 라는 유치한 생각 때문에는 아니었고 그저 희진과의 이별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았을 뿐인데, 오늘만큼은 정말 명확히 그 이별이 와 닿고 있다. 머리로든, 마음으로든. 천장을 향해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돌렸다. 차고 있던 귀걸이 때문에 귓볼 부분이 아프다. 아씨. 따끔거리는 아픔에 투덜거리던 유리는 손가락으로 귀걸이를 빼고 대충 정장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다 문득 주머니에 잡히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꺼내었다. 아까부터 계속 연락을 해볼까 했는데 왠지 내키지 않아 차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혼자 택시를 타고 보냈던 게 걱정돼서, 멀어져가는 택시를 보다 황급히 차량번호도 핸드폰 메모에 따로 저장까지 해놨는데, 결국 번호를 적은 문자를 보내주지 못했다. 집에 조심히 들어 갔으려나. 이로 아랫입술의 껍질을 살짝 물어뜯으며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해볼까, 말까. 할까? 걱정되는데. 아니야, 그냥 하지 마? 그렇게 화냈는데 지금 하면 욕만 들을 테니. 음…. 아니다. 그래, 욕을 들어도 일단 들어갔는지 확인은 해야…. 그러니까, 정수연 단축번호가 28번…. 어? 단축번호가 먹히지 않는다. 살짝 당황한 유리는, 전화번호부 메뉴에 들어가 정수연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뜨는 단축번호. 6번. 어? 내가 언제 바꿨었나? 아닌데, 바꾼 적이 없는데…. …혹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유리의 머릿속에, 자신 몰래 핸드폰을 꺼내들어 단축번호를 바꾸었을 그 작고 진지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 뭐야. 맞물린 이 사이사이로 바람이 새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기왕 욕심 부릴 거면 더 앞 번호로 해놓던가, 소심하게 6번으로 해놓기는. ……. 귀여운 짓 했으니까 상 줄게. 유리는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로, 손가락을 놀려 단축 번호를 바꿔놓았다. 슬라이드를 한 번 닫았다가, 다시 엄지로 올린 다음 1번을 길게 눌렀다. 당연히 한 번에 받지는 않겠지, 이 여자는. 일부러 핸드폰을 귀에 대지 않은 채 눈앞에 대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리는, 역시 예상대로 신호가 뚝 끊겨 버리자 익숙하게 다시 1번 버튼을 길게 눌렀다. 그리고 또 다시 뚝 끊기는 신호음. 이번에는 받어라…. 또 1번을 눌렀다. 그리고 이번엔, 수연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 어, 유리야. 왜? “목소리가 기운차네.” - ……그런 일이 좀 있어서. 날카로운 쇠 마찰음이 수화기를 통해 들린다. 대문을 닫은 걸까. 덜컥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용한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활기차게 받던 처음의 목소리와는 달리 수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땅바닥을 꾹꾹 밟는 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일단 잘 들어갔냐는 말부터 해야 하나. 그래도 전화 받았을 때 목소리를 들어보니 집에 들어가는 길에 화가 풀린 것 같다. 받자마자 욕을 하거나 아니면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으니. “잘 들어갔어?” - 아니. “…….” 예상치 못한 답변에 유리는 당황했다. 이런 말에 보통은 잘 들어갔다고 대꾸하지 않나. 망설이지도 않고 아니, 라고 대답하는 수연의 말에 뒷이야기를 어떻게 이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아서, 유리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거리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뭐야, 풀린 거 아니네? 눈치 볼 일은 없는데 왠지 냉랭한 그 대답에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된다. - 야. 이를 악물고 말을 하는 모양인지 발음이 약간 뭉개져 있다. 그 소리에 유리는 긁적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벽면에 붙어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9시 20분. 여기서 희진을 기다린 지 거의 30분이 되어간다. 이 여자는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응?” - 너… 그 여자랑 언제 헤어질 거야? “응?” - 언제 헤어질 거냐고, 그 여자랑. 오늘.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이 꾹 다물고 있는 이 사이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부딪혀서 떨어진다. 그 대신 유리는 수화기를 귀에 바싹 붙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빙빙 돌려 말을 했다. 그게, 그러니까-. 무섭도록 차가워진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고, 그 소리에 식은땀이 절로 난다. 여름인데 왜 이렇게 춥냐, 진짜. - 잡다한 단어들 가져다 붙이지 말고, 중요한 것만 말해. 언제 헤어질 건지. “너 왜 그래, 아까부….” - 날짜 정하기 힘들면 내가 정해줘? “정수연.” - …하,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짜…. “…….” - 니 목소리 듣기 싫어. 끊어. 나야말로 내가 지금 뭘 하는지 모르겠다. 깜빡 거리고 있는 정수연이라는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침대 헤드에 부딪힌 모양인지 둔탁한 소리가 난다. 또 다시 오한이 든다. 육체엔 이름 모를 한기가 드는데 머리는 여전히 뜨겁다.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명치끝에서 갈증이 느껴지지만, 정말 몸이 바싹 마른 탓에 갈증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물을 찾는 대신에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침대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을 핸드폰을 버려둔 채로,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아, 정말 정수연.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며 조용히 이름을 내뱉었다. 이 여자에게 쩔쩔 매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먼저 그렇게 반응을 해버리니 어쩌겠는가. 희진을 만나기로 한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달려가서 화를 풀어 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희진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짜증이 머리를 빠끔히 내밀기 시작했다. 화살의 끝은 괜히 자신의 연인에게 돌려진다. 왜 불러놓고 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나랑 장난해? 골반 쪽에 손을 올려놓고 삐딱하게 섰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힐 무언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비어버린 거실에는 마땅히 볼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 한쪽에 딸린 작은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과는 다른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문이 붙어있는 벽면과, 그 맞은편에 창문이 붙어 있는 벽면을 제외하곤 유리의 양 옆에 있는 벽면에 검은색의 책장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안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희진은 의외로 책을 좋아한다. 배우는 여러 가지 인생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런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책이라서 의식적으로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희진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희진이 하는 인터뷰의 70% 정도는 전부 거짓말인데 책에 관한 그 이야기만큼은 진실이다. 수연에게 말했던 것처럼 책 읽기를 좋아하는 건 유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유리보다 더 책을 많이 읽는 여자니까. 유리는 턱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다지 끌리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책을 찾던 유리는 결국 포기하고, 창문 바로 밑에 마련되어 있는 투명한 오피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의자에 앉은 다음, 책상 위에 얹어져 있는 작은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윙, 낮은 기계음이 들린다. 왼손으로는 얼굴을 받치고, 오른쪽 검지로 책상을 툭툭 쳤다. 천천히 10번 정도 책상을 치고 나자 컴퓨터의 부팅이 완료된다. 뭐 볼만한 게 있나 싶어서 컴퓨터를 켜긴 했는데, 바탕화면에는 오로지 기본적인 아이콘만 떠 있을 뿐이다. 온통 게임 아이콘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자신의 컴퓨터 바탕화면과는 매우 다른 모습에 유리는 혀를 끌끌 찼다. 정말 인생 심심하게 사는구만. 게임 하나 정도는 깔고 살아야지. 인터넷 창을 켜놓고 익숙한 주소를 쳤다.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후, 구석에 작게 있는 게임다운로드 버튼을 클릭했다. 원체 속도가 빠른 인터넷 서비스를 쓰는 모양인지 다운로드에서부터 설치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은 어디서 놀아볼까. 4-4-4? 그래, 기분도 거지같은데 4-4-4 로 가야겠다. 서버 선택이 끝난 후, 대기실에 들어가 화면에 즐비한 방제들을 바라보는데 수 없이 많은 초대 창들이 화면에 뜬다. 미간 사이에 저절로 주름이 잡힌다. 여전히 시건방진 태도로 앉아서 마우스 버튼을 툭툭 클릭하며 초대들을 거부하던 유리는, 문득 한 초대 창에 떠 있는 익숙한 아이디를 보고 손으로 받치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에 힘을 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묭묭사랑해. ……김태연, 내가 그렇게 아이디 새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그래도 다른 사람과 하는 것보단 태연과 하는 게 낫겠지 싶어 초대를 수락했다. 화면이 바뀌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아이디를 훑어봤다. Red Team 란에 있는 ‘묭묭사랑해’와 ‘때때사랑해’. 묭묭사랑해는 태연의 아이디, 때때사랑해는 미영의 아이디다. 그 전에 셋이서 몇 번 같이 해봐서 알고 있다. Red Team의 명단을 확인하고 눈을 돌려 Blue Team의 명단을 보던 유리는 순간 흠칫했다. hyorish0418. 효리쉬? 화면 밑에 조그맣게 달린 채팅창에 글들이 떠오른다. [hyorish0418] 권간지? 아이디 참 ???스럽네. [hyorish0418] 어? 왜 물음표가? [때때사랑해] 네가 욕해서 그래. 그거 필터링 되는 거임. 욕 쓰면 물음표로 떠 [권간지] ........ [묭묭사랑해] 권유리 니 아이디 진짜 낯 뜨겁다. 바꿀 생각 없냐? 진짜? 좀 바꿔. 볼 때마다 진짜.... [권간지] 묭묭사랑해님, 당신에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권간지] 근데 저 효리쉬..................누구? ..혹시? 혀로 살짝 아랫입술을 적셨다. 또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툭툭 치며 그 다음 떠오를 말을 기다렸다. 때때사랑해 : 수연이에요. 우리들 이제 금방 집에 들어왔는데..얘가 기분 안 좋다고 스트레스 풀 만한 게임 추천해달라고 해서..서든이나 하자고 해서 온 거예요. 한명이 부족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타이밍 딱 좋게 유리 씨가 들어오시더라구요 아, 역시. 유리는 왠지 허탈한 마음에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뜨렸다. 얘는 여기서도 이효리 찾네. 이효리가 그렇게 좋나? …아 그리고 아이디 포스에서 왠지 내가 밀리는 듯 한 기분도…. 분하다. 손가락을 자판 위에 대고 잠시 모니터를 노려보던 유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권간지] 넌 여기서도 이효리 찾냐 [hyorish0418] 이효리 님이라고 몇 번 말하니?^^ 나 기분 안좋으니까 말 좀 생각하고 해라 [권간지] 아 네 그래요? 뭐 때문에 기분이 안좋으실까나 ^^ 내가 친히 잘 들어갔냐는 전화까지 해드렸는데. [hyorish0418] 그래요. 눈물겹도록 고맙네요. 애인 만나느라 바쁘신 몸이 전화까지 해주셔서.^^ 그렇게 전화를 뚝 끊어 버려놓고 한가롭게 게임이나 하려고 했다 이거지? 모니터에 떠오르는 갈매기 표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그 여자와 언제 헤어질 거냐고 채근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수화기를 든 채로 지었을 그 표정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지금의 표정은 아마 서로 비슷할 게다. 아까 수화기를 든 채로 지었던 유리의 표정과, 지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 자신의 표정이 비슷한 것처럼. 그리고 그런 유리와 수연의 표정도 서로 비슷할 지도 모른다. 이유는 서로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쨌든 서로 똑같은 감정의 끝에 서 있으니. [권간지] ..나 얘랑 팀 안 해 야 김태연 너 이쪽으로 와 [묭묭사랑해] 싫어 [권간지] 야 -_- [묭묭사랑해] 나보고 우리 애기한테 총 들이대라고? [때때사랑해] 자기야 난 괜찮아 [묭묭사랑해] 내가 안 괜찮아 어떻게 우리 애기한테 총을 들이대라는 거임? 그것도 지금 바로 옆에서 하고 있는데. [때때사랑해] 어쩔 수 없지 뭐. 수연이가 이번에 처음 하는 거고, 내가 자기보다 계급이 높으니까 내가 수연이 데리고 할게. [묭묭사랑해] ...그래도 난 자기 쏠 수 없어. 그렇다고 자기 친구인 수연 씨를 쏠 수도....이게 웬 운명의 장난.. [hyorish0418] 하 정말 ????... 그냥 ???? 권유리 너 왜 쓸데없이 ??? 너 때문에 지금 이런 ????????.. [hyorish0418] 아 왜 자꾸 물음표가!!!!!!!!!! [hyorish0418] ???? [때때사랑해] 수연아..욕 그만해......calm down [권간지]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다 그냥 이대로 하자 여자가 입도 험하지만 손가락도 험하구나. 기분이 안 좋아서 더 그런가 봐.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고 발을 동동 구를 모습을 생각하니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게임화면으로 바뀌는 동안 잠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의 침대에서 핸드폰을 들고 돌아왔다. 권총을 들고 있는 손이 화면에 뜨고, 유리는 재빨리 슬라이드를 열어 희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하라는, 기왕 기다리는 거 얼마 기다리든 상관없으니 천천히 오라는 - 얼마 후에 희진에게 들려줄 말에 비해서는 제법 다정한 - 문자를 적어 전송한 다음 다시 게임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수연은 나가자마자 죽은 모양인지 레드 팀의 킬 수가 하나 늘어나 있다. 유리는 채팅모드를 팀채팅 모드로 바꾼 다음 손가락을 움직여 타자를 쳤다. [팀원에게] 야...너 키는 알고 하는 거야? [hyorish0418] 어 [팀원에게] 근데 왜 벌써 죽어? [hyorish0418] 황미영 저 ??이.. [hyorish0418] 또 물음표.... [팀원에게] 욕을 그만 하면 될 거 아냐 [hyorish0418] 아 하여튼 쟤가 나가자마자 내 머리통을 날려버렸어 머리통. 섬뜩한 그 단어에 유리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권총에서 주무기로 바꾼 다음 창고에서 나갔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양인지 화면 안에 쌓여있는 컨테이너들 사이 어느 곳에서도 미영과 태연의 캐릭터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여기저기 들이대고 보는 스타일로 게임을 하는지라, 유리는 시야를 여기저기로 바꾸면서 뛰기 시작했다. 유리 뒤를 따라 나온 수연은 유리와는 다르게 천천히 걸어가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다. 컨테이너의 구석에 캐릭터를 숨긴 유리는 다시 자판위에 손가락을 대고 글을 쳤다. [팀원에게] 너 왜 아까 그렇게 화낸 거야? [hyorish0418] 몰라 [팀원에게] 왜 그런 거냐니까? [hyorish0418] 모른다고 [팀원에게] ...정말 몰라? [hyorish0418] 모른다니까???? [팀원에게] 질투한 게 아니라? [hyorish0418] -_- 격렬한 총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에서 총질을 서로 하고 있는 모양인데, 유리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화면의 왼쪽에 미영이 수연을 죽인 걸 알리는 게임 상의 멘트가 뜬다. 시뻘건 글씨로 [Head shot] 이라고 적힌 글을 보며 유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게임을 먼저 시작한 건 유리와 태연이었는데, 태연 때문에 뒤늦게 시작했던 미영의 계급이 태연과 유리보다 훨씬 높다.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게임을 어떻게 하느냐며 진저리를 쳤던 태연의 연인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쏘는 족족 헤드샷을 맞추는 바람에 유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다. 태연의 말에 따르면 세컨 아이디도 가지고 있다던데, 그 아이디로 클랜까지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귀엽게 웃는 그 얼굴로, 아싸 헤드샷! 이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hyorish0418] 호아미염ㅇ 얘 또 ㄴ아ㅣ럼ㄴ이ㅏ럼ㅇ니ㅏ러 [hyorish0418] 네가 말 걸어서 답하느라 또 죽었잖아 이 ????아 [팀원에게] 욕 그만해 내가 복수해줄게 하지만 그런 미영 씨보다 얘가 더 무서워. 시야를 여기저기 돌리며 뛰어다녀도 미영과 태연의 캐릭터는 보이지 않는다.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리고, 놀란 유리가 마우스를 돌려 시야를 급하게 바꿨다. 저 쪽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 태연의 몸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왼쪽 버튼을 클릭해서 사격을 가하는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상 유리 캐릭터의 머리가 사라졌다. [때때사랑해] 자기! 괜찮아? [묭묭사랑해] 응응 고마워 역시 우리 자기 최고야 이번에도 미영이 유리의 캐릭터를 죽인 모양이다. 그런 말은 팀채팅으로 해. 전체채팅으로 하지 말고. 유리는 화면에 뜨는 글자들을 노려보며 전적 창을 뜨게 하는 Tab키를 눌렀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미영이 3 킬이나 했다. 그것도 세 번 전부다 헤드샷. 유리가 죽은 걸 안 모양인지 팀채팅으로 수연이 말을 걸어온다. [hyorish0418] ㅉㅉ 복수해준다더니 말 끝나자마자 머리통 날라갔네 [팀원에게] 네가 대답 안 해서 그래 [hyorish0418] 뭘? [팀원에게] 질투 한 거냐고 물었잖아 내가 [hyorish0418] 아 뭐래 짧지만 매번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리스폰 시간이 끝난 후, 유리는 자신의 캐릭터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연의 캐릭터가 있는 걸 발견했다. 방탄복을 입고 있는 캐릭터가 다시 뛰어서 창고의 열린 문 틈 사이로 사라졌다. 꼭 아까 금세 사라졌던 그 뒷모습처럼, 금세 사라져버린 수연의 캐릭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꼭 쥐고 있던 손은 몇 분 사이에 금세 사라져버렸었다. 창경궁에 들어가 보고 싶다며 시무룩해 있던 그 표정도, 금세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왜인지 잔뜩 화가 나 있는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 했다. 질투. 자신의 앞에 있던 여자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버리고, 갑작스럽게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갑작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던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이 질투라는 감정에서 나온 행동일 텐데,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질투했다는 말은 하기 싫은 모양인지 질투하느냐는 유리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화면에 떠 있는, 질투한 거냐는 물음을 보며 그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버릇처럼 수연의 표정과 행동을 상상하게 되어버렸다. 아마 이번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은 새빨개져 있겠지만. 그런 모습이 상상이 되자, 유리의 얼굴에 또 웃음이 떠오른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에서 요란한 문자알림소리가 들린다. 15분 후 쯤에 도착한다는 희진의 문자가 와 있다. 문자를 확인한 유리는, 수연의 캐릭터가 금방까지 서 있던 게임화면을 뚫어져라 보다가 조심스레 글을 쳤다. [팀원에게] 정수연 [hyorish0418] 아 뭐? [hyorish0418] ㅁㄴ아ㅣ러미ㅏㄴ어라ㅣㅁㄴ어리ㅏㅁㄴㅇ러 ㅣㅏ 아 진짜 말하느라 또 죽었잖아!! 너 때문에!! [팀원에게] 나도 아까 죽었거든요? [hyorish0418] 어디서 큰 소리를...하, 정말. 이거 같은 팀원은 쏴 죽일 수 없어?!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머릿속으로 수연의 표정과 행동을 상상하다보니 상상보다 실제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과 약 1시간 30분 전에 자신의 옆에서 다양한 표정변화를 보여줬던 그 여자를,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상상속의 여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있는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15분 후면 자신의 연인을 보게 될 텐데도 그 연인의 모습보다 수연의 모습이 더. 그리고 그런 감정은 자판을 누르고 있는 유리의 손가락 끝에서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팀원에게] ...너 나 안보고싶니 [팀원에게] 난 보고 싶은데 [팀원에게] ........... [hyorish0418] 오늘 봐놓고 뭔 소리 하는 거야 [팀원에게] 아니, 그냥 난 보고싶은데 넌 안보고 싶나 해서 [hyorish0418] 분위기 참 좋네 내 머리통은 날라가고 피튀기는 소리가 가득한데 거기서 보고 싶다는 말이나 하고 [팀원에게] 안보고 싶으면 됐어 리스폰 된 수연의 캐릭터가 다시 창고 안에 나타난다. 철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총을 권총에서 주무기로 바꾸던 수연의 캐릭터는 그 자리에 한동안 멈춰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유리는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게임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리스폰 지역인 창고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유리와 수연의 모습이 갑갑했는지, 화면 위에서는 태연과 미영이 얼른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묭묭사랑해] 야 니네 왜 집에서 안 나와?! [때때사랑해] 좀 나와봐요 안 그럼 집까지 쳐들어 갈거예요? [hyorish0418] 보고 싶어 됐니 [hyorish0418] 그런 의미에서 제발 저 때때야사랑핸지 뭐시긴지 좀 죽여버려 기왕이면 머리통 날려서 죽여버리라구 알았어? 보고 싶어, 라는 말만 하기엔 쑥스러웠는지 괜히 미영을 걸고넘어지는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텅 빈 희진의 방안에 가득 울린다. 이 방안에서 희진은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웃어 봤을까. 집 자체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 여자니 그런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집 주인이자, 자신의 연인인 희진조차도 얼마 웃어보지 않았을 그 공간에서, 유리는 몇 초간 쉬지도 않고 큰 소리로 웃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솔직히 하지 못한 수연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수연에게 보고 싶다 라는 말을 먼저 한 자신의 모습이 웃겨서.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수연의 대답에, 바쁘게 뛰고 있는 심장이 자꾸 피부를 간지럽혀서. 한참을 그렇게 웃던 유리는 들고 있던 권총을 주무기로 바꿨다. 무기를 교체할 때 나는 철컥거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요란한 총소리가 한참 들리다가 뚝 끊긴다. [hyorish0418] 앗싸 황미영 잡았다!!! 캐릭터를 움직여 창고를 나갔다. 저 쪽에서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수연의 캐릭터가 보인다. 엉거주춤한 포즈로 걷고 있는 모습조차도 - 그것도 심지어 수연 본인이 아니라 그저 캐릭터일 뿐인데도 -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는 또 킥킥 거리며 웃었다. 희진이 오기까지 이제 10분가량이 남았다. 팀채팅모드에서 전체채팅모드로 바꿨다. [권간지] 나 이번 판만 하고 나간다 [묭묭사랑해] 엥? 벌써? [권간지] 응 [때때사랑해] 좀만 더 하고 가시지 그래요 [권간지] 일이 있어서요. 정수연 너 이게 첫 판이지? [hyorish0418] 어 [권간지] 그럼 이겨야지, 첫판은. 저 닭들 머리 좀 신나게 날려보자 [hyorish0418] 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묭묭사랑해] 허.............이 분위기 뭐야... [때때사랑해] ....................커플대항전으로 가는 건가여 그럼 질수 없지 [권간지] 커플대항전 ㅋㅋㅋㅋㅋㅋ 뭐..어쨌든 특히 김태연 너 머리 조심해 [묭묭사랑해] ............ [hyorish0418] 황미영 너도. 너한테 날아간 내 머리가 몇 개야 대체?^^ [때때사랑해] 아 뭐...-_- * * * 방안은 냉랭하다. 몇 분 전에 들어온 희진은 들어오자마자 덥다고 투덜거리더니 에어컨을 틀었다. 기계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에 머리가 아파 와서, 에어컨 대신 베란다 샤시를 열어놓는 게 어떻겠냐고 되물었지만 희진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생수병을 꺼내 컵을 찾는 듯 잠시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컵 찾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겠는지 이내 그 커다란 생수병을 기울인다. 그 모습에 유리는 손가락으로 싱크대 위에 얹어져 있는 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에 컵 있잖아.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듣지 못하는 척 하는 건지 결국 그대로 생수병을 마저 기울인다. 투명한 물이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작은 입 안에 들어간다. 물방울 하나 밖으로 튕기지도 않고 잘만 들어가는 모습에 유리는 입맛을 쩝 다셨다. 왜 이렇게 늦었어? 당장에 오지 않으면 세상 무너질 것 같이 급하게 부르더니. 화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투정 부리는 것도 아닌, 일상의 말을 건네는 톤과 별 다를 바 없는 유리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희진은 대답이 없다. 공기가 너무 차갑다. 유리는 몸을 움츠리고 손으로 자신의 팔을 스윽 쓰다듬었다. 발도 차갑다. 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갈색 스타킹으로 감싸져 있는 자신의 발이 왜인지 무척이나 처량해 보인다. 추운 곳에 있으니 괜스레 잠도 쏟아지는 것 같다. 자꾸 아래로 당겨지는 눈꺼풀이 제법 괴롭다. 자, 이제 무어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잠을 깰 심산으로 유리는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뜨면서 생각했다. 기다렸던 희진은 왔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무척 짜증이 났는데, 예기치 못한 서든 한판을 하면서 기분이 조금 풀어진 탓인지 희진이 처음 이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에 유리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유리가 화를 내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듯 한 희진 역시 굳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왔네? 응, 왔어. 그게 둘 사이에 나눈 대화의 전부이다. 그 뒤로는 대화가 아닌 그저 일방적인 유리의 말만 있을 뿐. 희진이 집에 들어온 지 5분가량이 지났는데 둘이 나눈 대화가 저것뿐이다. 아무리 희진의 원래 성격이 말이 그렇게 많지 않은 성격의 여자라고 해도 항상 자신 앞에서는 재잘재잘 잘만 말했던 걸 생각해본다면, 중요한 말이라며 자신을 부른 희진의 현재 기분은 그리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말이라는 것도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은 아니라는 뜻이 되나. 희진을 위해 준비한 유리의 말도 사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결국 둘 다 서로에게 듣기 안 좋은 말을 준비한 셈이 되는 건데, 이런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유리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핏 보면 둘 다 서로에게 듣기 좋은 말을 준비한 것보다야 나쁜 상황이겠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니까. 탁, 냉장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늘어지는 하품이 입안에서 터져 나오려고 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억지로 하품은 참아냈지만, 입 밖이 아닌 입 안에서 터져버린 하품은 끝내 유리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게 만들었다. 갈증에 물을 급하게 찾던 여자의 몸은 이제 충분한 수분을 섭취했다. 남은 건 이쪽으로 걸어와서 그 중요한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유리에게 알려주는 일 뿐이다. 유리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발을 꼼지락 거렸다. 일단 저 여자의 말부터 먼저 경청해주자. 유리는 그렇게 결심했다. 희진이 무슨 말을 꺼내는지에 맞춰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놨다. 예상대로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라면 그 말에 대꾸하며 싸우는 척 하다가 헤어지자고 자연스레 말을 꺼내면 되고, 만약 예상과는 달리 좋은 말이라면 -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때엔 굉장히 미안하고 슬픈 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하면 되는 일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희진이 꺼내기로 한 그 ‘중요한 말’이 이별을 고하는 말인 경우. 그 경우라면 굳이 신파극을 찍을 필요는 없어진다. 하긴,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희진의 평소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이 자리에서 신파극을 찍을 확률은 극히 저조하다. 어쨌든 어느 쪽이든 희진과의 이별은 의외로 굉장히 쉬울지도 모른다. 길고 긴 연애. 희진과의 사랑은 의외로 다소 질척거리긴 했지만 그 끝은 단순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사선으로 아래를 향한 유리의 시선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발이 보인다. 발톱에 칠해져 있는 붉은색 패티큐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조금은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유리 씨.” 희진이 손을 들어 유리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입 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만지고 있는 희진의 손 위에 겹쳤다. 싸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희진의 손은 유난히 차갑다. 유리도 희진을 따라 웃었다. “당신, 나한테 할 말 있지?” 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매만지며 희진이 말한다. 그 말에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는 입 꼬리가 뻣뻣하게 굳는다. 입 꼬리를 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기엔 올라가있는 입 꼬리가 어색하다. 유리는 어정쩡한 웃음을 지어내며 자신의 볼을 쥐고 있는 희진의 손을 잡고 내린다. “일단 너부터 말해야지. 네가 날 불렀으니.” 최대한 덤덤하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맞이하기를. 유리는 속으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제껏 다른 여자들과 맞이한 이별들도 거의 대부분은 그랬으니, 희진과의 이별도 그렇게 되기를. 오래 사귄 연인이고,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던 여자였으니 그만큼 더더욱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했으면 한다. 지저분한 감정의 찌꺼기 때문에 함께한 순간들마저도 지저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먼저 하고 싶은 말 있을 텐데? 안 그래?” “…….” “날 바보로 아나봐?” “…….” 목소리의 끝이 살짝 날카로워진다. 이제 더 이상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제야 유리는 억지로 주었던 힘을 풀고 입 꼬리를 내렸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도 점점 굳어져간다. 차갑다. 공기도 차갑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도 차갑고,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고서도 놀랍도록 차분히 뛰고 있는 심장도 차갑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교류가 미묘하게 얽혀갈수록 머릿속은 점점 차분해져 간다. “권유리.” “…….” “너도 여자니까 알 거 아냐.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렇지.” 희진의 얼굴에서 비죽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끝이 보이는 구나, 끝이. 입가에 맺힌 희진의 웃음이 꽤나 씁쓸한 맛이다. 매번 이별을 맞이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그 씁쓸함이 오늘도 여전히 느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별 앞에서 격정적으로 변한다던데, 유리는 단 한 번도 이별 앞에서 그런 식의 감정의 폭발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이별의 이유가 상대 쪽에 있든, 혹은 유리 자신에게 있든, 이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차분해지고 심장은 부드럽게 제 속도를 유지한다. 감정을 겉으로 강하게 표출하며 다가온 현실을 부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기왕 맞닥뜨려야할 현실이라면 조금은 더 냉정하게, 그리고 덤덤하게 맞아들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네가 알고 있다면야 내가 더 미안해 할 필요는 없….” “헤어져.” “…어?” “우리 그만 만나자고.” 아, 그건 내가 하려던 말인데?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진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는 희진의 얼굴에는 여전히 비소가 걸려있다. 유리 역시 결국 허탈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확실히 보통 여자는 아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니 이제껏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을 붙들고 있었으리라. 희진이 손을 들어 유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검은색 머릿결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순간 부드럽게 변했다가, 다시 이내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고, 열린 입술 사이사이로 붉은 혀가 간간히 보인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 정신 팔려 있는 게 한두 번은 아니라지만,” “…….” “머리만 내어준 게 아니라 마음까지 내어줬다면 더 이상 나랑 만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 “헤어지자는 말을 누가 먼저 하느냐는 애초에 의미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통보 당하는 건 자존심 상한 일이니 내가 먼저 말하는 거야. 우리가 정말 오래 사귀긴 했나봐, 생각보단 말하는 게 힘들진 않네.” 이별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희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 당했던 그 많은 여자들도, 그런 유리를 보며 이런 느낌을 가졌을까. 앞머리를 쓰다듬던 희진의 손은 이제 유리의 머리 끝자락에 가있다.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희진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친 다음, 침대의 끝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여 옷매무새를 손으로 대충 가다듬는 유리의 몸짓을 희진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이별을 하기는 했다. 그것도 생각보다 오히려 손쉽게. 희진의 말대로 정말 오래 사귀긴 한 모양이다. 남들은 오래 사귀면 그만큼 더 헤어지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다. 덤덤한 유리의 몸짓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희진이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어 먼지를 가볍게 툭툭 털며 말한다. “대신에, 헤어지는 건 헤어지는 거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유리는 약간 아래로 내리깔았던 고개를 들고 희진을 바라보았다. 귀걸이 왜 빼놨어? 한 쪽만 차니까 이상하잖아. 어디 있어? 또 주머니에 대충 넣어놨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의 바지 정장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고, 아까 넣어두었던 귀걸이를 꺼내 허전한 귓볼에 다시 귀걸이를 달아준다. 일련의 그 행동에 당황할 여유조차 없던 유리가 가만히 있는 동안, 귀걸이를 다느라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희진이 말한다. “얼마 전에 나 정기검진 받았잖아.” “그랬지.” “그 때 위내시경 하면서 조직검사까지 한 모양인데, 그게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었거든.” “…그래?” “어. 근데 의사가 혹시 모르니까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서 내시경을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했어. 내가 애도 아니고 그 정도야 나 혼자 갈 수 있긴 하지만, 효연이가 그래도 거기 과장이 당신이랑 아는 사인데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냐 하더라구.” “아아.” “생각해보니 효연이 말도 맞아. 그 병원 추천해 준 것도 당신이고, 사실 매년 정기검진 때마다 같이 가줬었잖아. 이번엔 같이 못 가줬지만.” “그래서 너한테 미안해했었지.” “응. 그 미안한 거, 이번에 사죄도 할 겸 같이 가 줘. 그 전까지는 헤어진 거 아니야. 그 정도 부탁은 들어 줄 수 있지? 그래도 몇 년 사귄 사인데. 다 됐다, 예쁘네.” 귀에서 손가락을 떼며 희진이 빙긋 웃는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금방 희진이 달아준 귀걸이를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꼭 잡고 있었을 텐데도 체온 하나 묻어나오지 않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을 기다리듯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젠데?” “모레.” “금요일이네?” “응.” “…그래, 회사 조퇴하고 같이 가줄게.”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유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볼에 작은 입맞춤을 했다. 달짝지근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손은 차가운데 입술은 따뜻하다. 여자의 온기가 닿았다 떨어진 곳을 손으로 매만지며 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희진이 자신이 한 말을 상기시키듯 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레까지는 내 연인인 거 맞지? 거의 이름만 연인이겠지만.” “뭐, 이틀 더 붙어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그래.” “…남들이 우릴 얼마나 신기해할까?” “사귀는 내내 그랬는데, 지금이라고 별반 다를 게 뭐 있겠어.” 내뱉듯이 말하는 유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정말 이 상황이 웃겨서 그런 건지, 희진이 입을 가리고 조그맣게 쿡쿡 웃는다. 너 또 촬영 스케쥴 있다며? 응, 어떻게 알았어? 효연 씨가 말해줬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 말아달라고. 같이 나가. 촬영장까지 데려다 줄 테니.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며 유리가 말했다. 옷 갈아입을 거야? 그럴 거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고. 신발장에 넣어두었던 구두를 꺼내고, 그 구두를 신으며 말하던 유리의 허리를 희진의 다시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허리에 두른 손에 깍지를 끼고, 등에 얼굴을 묻고서 조용히 말하는 희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매너 좋네. 권유리는.” “…….” “심지어 끝이 정해져 있는 순간마저도.” 목소리가 살짝 떨려온다. 깍지 끼고 있는 손끝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래도 뒷모습만큼은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잘 버텨오던 희진의 감정이 정말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아 유리는 얼굴을 굳혔다. 칭찬이 칭찬으로 들리지도 않네. 허리에 두른 손을 부드럽게 푼 다음, 밑에서 기다릴게, 라는 말을 남겨두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일부러 얼굴은 바라보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복도의 천장에 달려있는 전구의 불이 깜빡 거린다. 전구 나갔네. 관리실에 말해둬야겠다. 스산한 바람이 어디선가에서 불어오는데 어디서 불어오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3년 동안 희진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리고 오늘, 그 길고 긴 연애를 끝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팽배한 여름의 어느 날 밤에, 건조하다 못해 바짝 마른 이별을 했다. 유리는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 * *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래, 아버지께 안부 전해드리고.” “네.” 병원 정문까지 마중 나온, 살집이 조금 있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의 등에 손을 얹고 발걸음을 옮겼다. 몸에서 밴 약품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코끝을 살짝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유리가 미리 잘 말해놓은 덕택에 기다리는 것도 없이 일찍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검사를 받고난 후라 몹시 피곤한 모양인지 희진의 얼굴이 살짝 구겨져 있다. 희진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흘끔흘끔 희진과 유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유리는 괜히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여기서 기다릴래? 내가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사람 많은 곳에 혼자 있기 싫어.” “그래, 그럼 같이 가.” 대답을 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 버릇처럼 기침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유리는 재빨리 가볍게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탁한 기침을 몇 번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안에서 희진을 기다리며 에어컨 바람에 부들부들 떨었던 탓인지 몸이 자꾸 움츠러든다. 그래도 더운 열기로 가득한 바깥으로 나오니 그나마 조금은 낫다. 기침소리에 희진이 제법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젠 더 이상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스케쥴 더 없어?” “응.” “다행이네.” “그러게.” 냉랭한 대답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만난 이후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날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다. 대화가 몇 마디 이상 이어지지를 않는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고려한다면 예전과 같이 대화가 잘 이어지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만, 그래도 기왕 오늘까지 얼굴을 보기로 한 사이였으면 진짜 연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화가 이루어지긴 해야 할 텐데 아무리 유리가 말을 걸어도 저렇게 냉랭하게 대답을 해버리니 대화가 이어질 리가 없다. 한숨을 내뱉은 유리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마른 기침이 또 튀어 나온다. 이번엔 제법 기침이 크게 나와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게 에어컨을 왜 틀어놓고 잔거야.” 시큰둥한 목소리로 희진이 작게 중얼거린다. 희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유리는 몇 번이고 기침을 토해냈다. 이러다가 안에 있는 내장까지 다 토해내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픈 기침을 쉬지 않고 토해내다 겨우 멈추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침을 연속으로 몇 번을 했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리다니. 유리는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에어컨을 틀어놓고 자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범한 자신을 탓하면서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차키를 제대로 꽂지 못하고 몇 번이나 허탕을 쳤다. 하, 이거 참. 결국 몇 번이나 허탕을 치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희진의 얼굴이 민망해서 리모컨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자 희진이 묘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다 조수석 안으로 몸을 집어넣는다. 어제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동창들과 술을 진탕 마셨다. 물론 그 중에는 태연도 껴 있었는데, 미영과의 약속 때문에 술을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던 태연과는 달리 유리는 동창들이 주는 술을 거부하지도 않고 잘만 마셔댔다. 주말에 만난 게 아니라 평일에 갑작스레 조성한 술자리였고, 다들 저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해서 술자리는 일찍 파토 났는데, 끝나기 전에 이미 필름이 끊겨버렸던 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에어컨이 언제부터 틀어져 있었는지 몰라도 방안은 마치 냉동 창고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아, 춥다. 여름인데 왜 이렇게 추워. 으슬으슬 떨며 떨어져 있는 침대 시트를 집어 들어 덮었는데, 잠과 술에 반쯤 취해있던 유리로서는 에어컨이 돌아가서 추운 거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덕택에 몸살감기에 걸려버렸다. 거기에 숙취까지 겹쳐버리니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인데, 희진과의 약속을 깰 순 없어서 회사 조퇴하고 이곳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조퇴하는 건 쉬웠다. 아프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아프기도 했으니까. 희진 역시 온 몸에 힘이 빠진 모양인지 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눈을 감고 앉아있다. 안전벨트는 매야지. 작게 말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아 유리는 직접 희진의 몸에 사선으로 안전벨트를 매어준 다음, 자신도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희진을 위해 손가락을 뻗어 에어컨을 켜려고 하는 유리의 손을 희진의 목소리가 잡는다. “감기 걸렸잖아. 창문 열면 되니 냅둬.” “아, 고마….” “걱정해서 하는 거 아니야. 에어컨 틀만큼 덥지도 않아.”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핸들을 천천히 돌려 병원의 정문을 빠져나오면서, 유리는 흘끔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유리에게 쏟아져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작 내시경 검사 하나만 받는 것이라고 해도, 이 바로 전에도 잠을 2시간 밖에 못 자며 촬영을 하다가 온 것이라고 했으니 피곤할 법도 하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잔뜩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데도 개의치 않는 걸 보면 정말 피곤한 것 같다. “그러게 수면내시경 하라니까….” “그거 하고 나면 몽롱해서 싫어.” “그래도 덜 피곤할 거 아냐.” “이미 끝난 건데 뭘. 그리고 새삼스레 내 걱정은 왜 해? 정말 내 걱정을 한다면 이런,” “…….”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희진의 눈 끝이 살짝 쳐진다.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유리는 운전석의 창문도 내렸다. 바람이 둘 사이에 내려앉은 묘한 침묵을 품안에 가득 안고 스쳐 지나가길 바라면서. “곧바로 너네 집에 데려다 주면 되지?” “아니, 유리 씨 집에 들렀다 가.” “어? 왜?” “예전에 유리 씨 집에 시나리오 들어온 거 놔두고 간 적 있어.” “어?” “그 땐 할 마음도 없고, 좀 쉬고 싶어서 거절하려고 했던 건데…. 그냥 바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한 번 고려해 보려고.” “아, 그래.” “침대 옆 협탁에 놔뒀을 거야. 난 들어가지 않을 테니 유리 씨가 가지고 나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희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는 바라보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유리 역시 더 이상 곁눈질로 희진을 바라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차량이 많은 시간대가 아니라 그다지 멈추는 일 없이 차는 잘만 달려간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가며 운전을 하는 유리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고 또 얽힌다. 희진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이제 이 여자와의 인연은 끝.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3년의 시간은 완전히 끝이 나버린다. 덤덤하게 끝나길 바랬고, 실제로 덤덤하게 끝이 나고 있는 중이고, 슬픈 기분도, 아쉽다는 기분도 드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머릿속은 이유도 없이 복잡하다. 왜 복잡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내용의 생각이 그렇게 어지럽게 머릿속에 늘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복잡하다. 말 그대로, 그냥. 이별이란 게 이렇구나.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쪽을 슥슥 매만지며 생각했다. 원해서 한 이별이고, 질척거리지 않는 이별이라고 해도 어쨌든 이별은 이별인 모양이다. 하긴, 3년을 사겼는데 이런 복잡한 기분도 안 들면 안 되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힌다. 백미러를 통해 본 자신의 표정이 제법 심각하다. 유리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요즘 최 팀장, 이순규랑 잘 되가는 것 같던데…나한테 뭐 한턱 안 쏘나? 언제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 그리고…. 이번에 우리 부서로 옮겨 온 그 신입, 일은 잘 하고 있으려나. 걔가 망치면 나도 욕 듣는데. 아니 것보다, 내가 왜 걔 관리를 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내가 입사한지 꽤 됐다 해도 요즘에서야 일을 좀 하기 시작해서 나도 일 서툰데…. 하…. 거기다 얘가 왜 그렇게 고지식해. 신입이라면 귀여운 맛도 있어야 하지. 정수연처럼. ……. 나도 답이 없네. 아무런 연관도 없이 제멋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생각의 끝에 또다시 버릇처럼 떠오르는 정수연이라는 이름에 유리는 눈에 힘을 주고 한번 깜빡 거렸다. - 그 여자랑 언제 헤어질 거야? 화난 목소리로 말하던 수연은, 유리가 희진과 헤어지기로 약속했다는 걸 아직은 모르고 있다. 완전히 헤어지고 난 후에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충수업 기간인지라, 정확히 유리의 점심시간 중간에 수연이 퇴근 하는 바람에 유리는 요즘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물론 수연에게는 점심시간을 좀 더 길게, 여유 있게 말한 탓에 수연은 유리가 밥도 거의 굶어가며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어제도 유리는 샌드위치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수연을 데려다 줬었는데 그 때 수연이 넌지시 물어보긴 했었다. 김희진 씨는 잘 지내? 아무렇지 않은 듯, 별 관심 없는 투로 말하는 그 목소리에 유리는 웃으며 응, 잘 지내 라고 대답했었는데 그 말에 묘하게 일그러지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렇게 티 나게 질투를 하면서도 끝까지 관심 없는 태도를 일관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이제 희진과 헤어졌으니 앞으로 그런 표정을 볼 일은 없을 듯 해서 그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이젠 그런 표정 대신 다른 표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진과도 헤어지고 난 후에는 제대로 만나 볼 예정이니까, 그 여자를. 익숙한 골목길에 접어들고, 얼마 안가 유리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어차피 집에 들렀다가 금방 나올 거라 대충 건물 입구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가지고 나올 테니. 고개를 끄덕거리는 여자를 차 안에 두고 걸어 나왔다. 오후의 햇빛은 병원에서 막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뜨겁다 못해 따갑다. 손으로 이마를 가려 눈가를 찔러대는 햇빛을 가리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승강기를 탈까 그랬으나, 하필이면 2층에서 위로 올라가는 중이라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계단을 이용했다. 내뱉는 숨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온다. 병신같이 약은 왜 안 먹고 있냐고 투덜대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오전에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고, 그저 점심시간의 잠깐의 통화 - 오늘 몸이 안 좋아 데리러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 에서, 여보세요 라는 말만 듣고서도 아프다는 걸 금세 알아차린 수연은 그 짧은 통화시간 내내 끊임없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저 귀찮아서 안 먹었을 뿐인데, 하도 으름장을 놓길래 결국 희진을 만나기 전 약국에 들러서 가벼운 몸살감기약을 사놓기는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건강식품을 달고 살았던 몸이라 크게 아픈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한약이나 즙 같은 게 아닌, 이렇게 생긴 알약을 먹는 것에는 이상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일단 사놓고 먹지는 않았는데, 약 안 사먹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수연의 목소리가 자꾸 생각이 나서 집에 들어가면 먹고 나오는 게 나을 것 같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연 다음, 집 안에 들어갔다. 아침에 정신없이 출근하던 그 흔적이 여전히 방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 못해 몇 분만 더 잔다는 게 30분이나 더 자버려서 결국 오늘은 간만에 지각을 해버렸다. 웬일로 지각을 하느냐고 묻던 최 팀장은,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을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에는 웬일로 정각에 출근했느냐고 물었었는데, 이젠 웬일로 지각을 하느냐고 묻고 있다. 그만큼 유리가 요 근래 놀랍도록 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말인데, 갑작스러운 그런 유리의 변화를 최 팀장은 놀라워하면서도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요즘 유리를 부를 때는 제법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부르고, 오늘은 아파서 조퇴하겠다는 유리를 오히려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퇴하는데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전 같았으면 아무리 아픈 기색이 역력해도 그 인간은 조퇴를 왜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역시 사람은 성실해야 하는 건가. 침대의 옆에 놓여있는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희진이 말한 대로 안에 두꺼운 종이가 놓여있다. 내참, 이렇게 중요한 걸 왜 놔두고 다니는 거야? 그것도 일주일도 넘게. 아무리 할 마음이 없었다고 해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네. 투덜거리며 종이를 잡은 후 방 한 쪽으로 가로질러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종이뭉치를 올려놓은 후, 주머니를 뒤적거려 아까 사 온 약을 꺼냈다. 약 한 알을 입에 집어넣고, 냉장고에서 꺼낸 작은 생수병을 기울여 물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원래 약은 밥 먹고 먹는 거라지만.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 안에 집어넣으며 유리는 생각했다. 일단 먹긴 먹었으니 잔소리는 안 들어도 되겠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뭉치들을 집으려다가 문득 수연이 생각났다. 점심시간 때 통화했을 때에 오늘은 별다른 약속이 없어서 집에 들어가서 책이나 읽겠다고 했었는데, 그 때 잠깐 전화한 것 이후로는 연락을 해보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희진과의 만남이 더 길어지지 않을 것 같으니 희진을 데려다 주고 나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라는 그럴듯한 생각도 들어서 유리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아, 맞다. 차 안에 두고 왔구나. 그럼 희진이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길에 전화 해야겠네. 종이뭉치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엔 승강기가 운 좋게도 바로 위층에 멈춰있어서, 유리는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승강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계기판을 바라보며 유리는 양 옆으로 목운동을 했다. 기왕 오늘 만나기로 결정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은 만나면 희진과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기 따위는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말도. 유리 자신도 그렇고, 수연도 그렇고 그렇게 확연히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까지 와버렸는데 굳이 시간을 질질 필요도 없고, 복잡한 줄다리기 따위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디를 가야 하나. 그래도 분위기 좋은 곳은 데려 가야겠지? 이야, 데이트 장소도 신경 써서 생각해보는 건 되게 오랜만이네. 그나저나 정수연, 내가 그렇게 말하면 무슨 표정 지을까. 그 자존심 세면서도 부끄러움 많이 타는 여자는, 분명 한 번에 그러자고 대답은 하지 않겠지. 얼굴은 새빨개져서는, 무슨 헛소리냐고 버럭 할지도? 입가에 실실 떠오르는 웃음에 괜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손가락으로 볼도 꼬집어보면서 승강기에서 나왔다. 앞에 있는 유리문을 통과해오는 붉은 햇빛에 살짝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한 쪽 머리를 손가락으로 귀 뒤로 넘기면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놓은 차 쪽으로 걸어가며, 유리는 상상속의 수연의 표정 때문에 한껏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렸……어라?” 붉은 빛에 반짝이는 은색의 차체.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의 핸드폰을 든 채로 서 있는 김희진. 그 것까지는 좋다. 아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니. 다만 유리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의 차와, 김희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대체 왜, “너 지금 말 다했어?!” 집에 있어야할 정수연이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채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지를. ……이건 또 무슨…왜 쟤 둘이…. 정말 김희진 쟤랑 같이 있으면 내 인생도 드라마가 되는구나. 아이구야, 내 팔자야. Hissing 14 그러니까 때때가 말이야. 얼굴에 잔뜩 떠오르는 웃음 때문에 뭉개진 발음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미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린다. 어제 밤에 술자리가 있다 해서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말했더니 정말로 술 많이 마시지도 않고 일찍 들어와서 칭찬해줬다는, 그 짧은 말을 10분이나 길게 늘어뜨리며 말하는 미영의 말늘림스킬에 감탄을 할 기력조차 없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커피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수연은 턱을 괸 채로 앞에 놓인 하얀색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막 들고 왔을 때에 뜨거운 김이 올라오던 갈색 액체는 이제 다 식어버린 후다. 옆에 있는 연갈색의 의자 위에 올려둔 핸드백 안에는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고이 잠들어 있다. 핸드백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 아파서 조퇴하려고. 미안해, 데려다 주지 못해서. 미안할 게 뭐 있어. 아픈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이 말을 조금 더 다정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기운이 없는 목소리에 왠지 울컥해서 결국 약은 왜 안 먹고 있냐며 화만 잔뜩 내버렸다. 알았어, 약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작게 웅얼웅얼 거리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감기라더니 약간 코맹맹이 소리도 나고 가끔 목소리가 중간에 하이톤으로 삑 올라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기도 했다. “우리 때때 정말 착하지 않아?” “그래.” “말도 잘 듣고.” “그렇네.” “…….” 시큰둥하게 말하면서 잔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수연의 태도가 못마땅한 모양인지 입을 한 번 샐쭉거리던 미영은, 수연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떼지 않고 아이스 캬라멜 라떼를 빨대로 주욱 빨아들였다. 액체가 빨대로 빨려 올라가는 소리가 수연의 귓가를 자극한다. 그래도 여전히 멍한 그 시선에, 미영은 빨대로 밑바닥에 깔린 캬라멜 시럽을 휘저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연아.” “응?” “걱정되면 가 봐.” 멍하니 턱을 괸 채로 대답하던 수연은, 미영의 마지막 말에 몸을 움찔거리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미영의 눈매가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진다. 수연은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앞에 놓인 머그컵을 입에 가져다 대고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그 안에 든 액체를 마시지는 않았다. 입술만 살짝 적시고, 다시 컵을 내려놓는 수연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걱정되긴, 뭐가.” “유리 씨 말이야. 너 그 사람 지금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걔 걱정을 왜 해?” “좀 솔직해 져라. 걱정된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왜 아닌 척 해?” 영화 보는 내내 계속 안절부절 못하는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또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댄다. 정말 눈치 빠른 아이. 수연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미영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미영이 눈치가 정말 빠른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눈에 띌 정도로 티를 내는 건지. 어느 쪽이든 간에 수연이 유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도, 미영이 눈치 챌 만큼 꽤나 많이. 운동도 많이 한다고 하고, 언뜻 봐도 전혀 병약하게 생긴 스타일은 아니라 꽤 건강한 편인 것 같은데 그런 여자가 아프다고 하니 더 마음에 걸렸다. 수화기 너머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문자 보내는 것도 걸렀나.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낸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문자를 보내던 유리라서, 오늘 아침에도 버릇처럼 유리의 문자가 있겠거니 란 생각에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새로 온 문자가 없는 걸 보고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 전날 밤에 술자리에 있다고 전화 한 걸 마지막으로 계속 연락이 없던 거라 신경이 쓰였는데, 점심시간에 온 전화에서 여보세요 라는 그 짧은 말을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리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끝에 항상 웃음기가 서려 있었던 그 목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기운이 확 빠져 있는 게, 수연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김이 다 빠진 콜라를 생각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 “응. 그것도 아주 많이. 정말 많이. 미친 듯이 많이. 정말 엄청 많이.” “…….” 고개를 아래위로 강하게 끄덕이며 말하는 미영이 얄미워서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었다. 아야, 아프잖아. 약간 빨개진 볼을 손으로 슥슥 매만지며 미영이 울상을 짓는다. 팔(八)자로 휘어지는 짙은 눈썹을 바라보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런가. 그렇게 걱정 많이 했나? 티 날 정도로? “걱정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응?”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걱정되지.” “…….” 휴가를 다녀온 이후로 미영은 아예 수연이 유리를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을 한 듯 했다. 그 확신은, 미영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반박 한번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물고 마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나서 더 확실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전 같았으면 유리 이름만 들어도 소름 돋는다며 질겁을 하던 수연이, 자신과 유리를 엮는 미영의 발언을 듣고서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까. 수연은 이제 미영의 앞에서 유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애초에 스스로도 유리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버렸는데 굳이 친구인 미영에게 감출 필요도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해서 미영이 꺼내지도 않은 걸 수연이 앞장서서 유리에 대한 감정을 티내는 일은 여전히 하지 않고 있다. 미영이 항상 태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수연이 유리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도 없었다. 미영은 수연의 그런 수동적인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수연이 자신이 하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만족감을 느낌과 동시에 은근한 기대감도 가졌다. 수연과 같이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고, 같이 상대방의 욕도 하면서, 그러면서 은근히 서로에게 염장질을 해대는, 그런 걸 드디어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사실 그 전부터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인 수연과 그런 교류(?)도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는데, 수연이 계속 연애를 하지 않는 바람에 할 수 없어서 아쉬웠었다. 연애 좀 해보라고 수연에게 닦달을 했던 건, 어쩌면 한번쯤은 수연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가장 큰 이유는 수연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미영은 묵묵히 머그컵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연의 얼굴을 조심스레 쳐다봤다. 하늘이 너무 맑아서 그냥 들어가기 아쉬우니 오랜만에 둘이 데이트나 하자고 미영이 수연을 이끌고 나갔을 때부터, 수연은 계속 집중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점심을 먹을 때에도 그렇고,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그렇고,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카페에 앉아있는 지금도 그렇고. 유리가 아프다는 건 아까 수연이 유리와의 통화를 끊자마자 조용히 중얼거리듯이 미영에게 말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치 혼이 나간 듯이 권유리 아프데, 라고 중얼거리던 수연의 모습은 수연을 대학생 때부터 알아온 미영에게조차도 무척이나 생소했다. 그 뒤로 계속 이런 상태. 미영이 보기엔 딱 봐도 유리가 걱정돼서 저러는 건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 나이 먹도록 넌 대체 뭐 했니, 우리 반 애들도 너보단 더 연애 잘하겠다. 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걱정 되면 가 봐.”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걱정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오히려 걱정 안하는 게 이상한 거라구.” “…….”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 거잖아. 난 때때가 아프면 잠도 제대로 못자는 걸.” 하긴, 그렇지?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건. 미영의 위로인지 조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말에 수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프다는 이유로 이렇게 안절부절 하는 자신의 모습은, 미영이 생소한 것처럼 수연 역시 생소했다. 그래서 사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전에 수업이 있을 때에는 연락이 되질 않아 일이 잡히지 않았고, 퇴근을 하고 나서 미영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아프다는 유리의 말 때문에 계속 무언가 겉도는 느낌이다. 그 기운 없는 목소리가 귀 언저리에 착 달라붙어 있는데 떼어내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몇 번이나 후벼 파도 매번 허탕이다. 그 바보 같은 여자는 아프다면 서도 그 와중에 밥은 먹었는지, 수업은 잘 했는지를 묻고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미안하다는 투로 말하던 그 목소리는 오히려 수연의 화를 돋구었다. 이 병신아, 약도 아직까지 안 먹고 뭐하는 건데? 에어컨은 대체 왜 틀어놓고 자? 너 바보야? 바보니? 왜 술은 그렇게 많이 마신 건데?!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줄 망정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기 까지 하다니.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그 와중에도 결국 바보같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욕해도 나 걱정하는 거 다 알아, 라고 말했었나. 어쩜 그렇게 능글맞게 그런 말을 잘 내뱉어대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에 당황한 수연은 약이나 얼른 먹어, 라고 말한 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휴가 때부터 부쩍 능글맞아졌다. 권유리라는 여자가 원래 그런 류의 멘트를 잘 뱉어낸다는 건 알았지만, 목소리 톤 하나 변하지 않고,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능글맞게 말하다보면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찡그릴 수도 없어서 그 중간 어느 쯤엔가 있을 표정을 수연이 지으면, 또 그 표정을 보면서 깔깔깔 웃는다. 와, 정수연 표정 봐. 내가 그렇게 좋아? 응? 그렇게 말하면 당황한 수연의 얼굴은 또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걸 보면서 유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다. 단지 전화통화만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 패턴은 똑같다. 유리가 아무렇지 않은 톤으로 무슨 말을 내뱉으면 당황한 수연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수화기 너머의 침묵의 낌새를 눈치 챈 유리는 얼굴 또 빨개져 있겠네- 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유리가 그럴 때마다 수연은 그만 웃으라고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내뱉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왠지 편안한 기분도 들기도 한다. 확실히 예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웃음소리도 좀 더 부드러워졌고 정수연 혹은 수연아, 라고 이름을 부를 때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도 한다. 혹시라도, 유리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게 아닐까, 라는. 그렇게 생각을 한번 하고 나니 유리의 일상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출근 시간이 언제인지, 점심시간은 언제인지, 퇴근시간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고, 유리의 직장 동료들의 이름도 몇몇은 외우기도 했다. 가끔은 수업 중간 중간에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게 해 놓고 유리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일 하고 있으면 답장 안보내도 된다고 굳이 말했는데도 꼬박꼬박 답장을 하는 유리의 다정함에 웃기도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미영이 태연을 통해 들었다는 유리의 과거 이야기에도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핸드폰을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고, 자기 전에 유리에게 문자를 보내고 자는 습관도 생겼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자신의 일상 속에 스며드는 권유리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삶 속에 타인을 끌어들인다는 것.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해보고 싶지도 않았던 일이라 아직도 영 어색하지만 생각보단 그렇게 나쁜 일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법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권유리가, 그러니까 요 며칠 동안 정수연의 삶 속에 깊게 파고들은 권유리가 아프다는데 수연이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걱정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게 익숙지 못한 수연의 입장에선 걱정하는 걸 티내는 게 왠지 조심스러워서 유리에게 문자 한통, 전화 한통도 하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조퇴하고 집에 갔을 시간이다. 점심시간 때 조퇴한다고 했으니 밥도 제대로 안 먹었을 테고, 그렇다고 유리가 집에 들어가서 밥을 본인이 직접 해먹었을 리도 없다. 약을 빈속에 먹는 게 더 안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수연이 우연히 바라본 다 식어버린 커피 위에 비춰진 자신의 표정이 제법 우습다. “걔 밥도 안 먹었을 테고.” “…….” “밥을 안 먹었으니 약도 먹었을 리가 없고.” “…….” “아무래도 가는 게… 나을까?”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아니, 뭐….”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미 정한 것 같은데 뭐 하러 나한테 물어봐? 쓸데없이. 가자, 데려다 줄게. 유리 씨 집은 아니까.”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영의 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난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시지도 않을 거잖아, 그거. 턱으로 잔을 가리키며 시큰둥하게 말하고 자리를 정리하는 미영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핸드백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영이 잡고 있는 갈색 쟁반 위에 자신의 머그컵을 올려놓자 읏차 라는 이상한 기합소리를 내며 미영이 쟁반을 든다. 쟁반에 있는 머그컵이 흔들거려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고, 뒤 돌아서는 미영의 어깨너머로는 수연의 샐쭉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가라고 해서 가는 거야.” “응?” “아니, 그냥.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네가 가라고 해서 가는 거라구. 네가 바람 넣어서.” “네네, 알았어요. 정수연 선생님.” “진짜야. 진짜 네가 바람 넣어서 가는 거다?” “그래, 그래.” “…….” “…….” “진짜로오-.” “알았다고. 그만해.” * * * 결국 와버렸네. 수연은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우뚝 서 있는 회색 건물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을 데려다 준 미영의 차는 아스팔트를 긁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진지 오래다. 차 안에 앉아있느라 살짝 구겨진 치마의 뒷부분을 손으로 탁탁 턴 다음 흐트러진 앞머리도 손가락으로 정리했다. 일단 오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고민이어서 차 안에서도 몇 번이고 그냥 자신의 집으로 차를 돌려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미영이 한심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집에서도 계속 걱정할 거면 찾아가서 약도 먹는 거 보고 오는 게 널 위해서 나, 라고 해서 복잡하게 얽힌 수연의 고민을 단박에 풀어주었다. 그래서 결국 오긴 왔는데, 오고 나서도 고민이다. 집에 들어갈 때 미리 전화를 하고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전화하지 말고 멋대로 집에 찾아갈 것인가. 만약 전화를 한다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너 아프다길래 걱정 돼서 왔어, 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그냥 우연히 여기 근처 지나갔는데 너 생각났다는 식상한 멘트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유리의 집은 수연의 집과는 정 반대쪽이고 수연의 학교와도 그다지 가깝지 않은데다가, 그렇다고 놀 곳이 많은 번화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연이 이 근처를 그냥 지나갈 일은 전혀 없다는 걸 유리가 모를 리가 없다. 거기다 현재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종이백 안에는 죽 집에서 사온 죽과, 약국에서 사온 약까지 있다. 그리고, 더불어 담배도. 사실 담배까지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약국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는데, 금방 커피를 마시고 온 주제에 미영이 목이 마르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편의점에 들렀었다. 작은 생수병을 사들고 계산대로 가는 미영에게 죽 식기 전에 가야 하니 빨리 빨리 좀 움직이라는 잔소리 몇 번 했다가 문득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어깨 너머에 즐비한 담배를 보았다. 유리가 피던 담배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언젠가 주현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저게 독하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래서 다른 건 못 핀다고…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생수병을 집어 들고 나가는 미영의 손목을 붙잡고 점원에게 물어봤다. - 저거 있잖아요. - 네? - 제가 가리키는 거요. - 아, 네. - 저거보다 덜 독한 담배 있어요? - 많죠. - 음, 그러니까. 정말 순한 걸로 하나 주세요. - 순한 거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데요? 원래 말보루 레드 피셨어요? - 아니, 제가 폈던 건 아니구요…. 여튼요. 그것보다 더 순한 걸로 하나 주세요. - 그렇게 말씀 하시면…. - 아무거나 줘요, 빨리 가야 하니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점원을 닦달해서 결국 사온 담배. 태어나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담배를 살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담배를 피우는 타인을 위해서 살줄은. 적어도 아픈 와중에는 조금이라도 순한 담배를 피었으면 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샀다. 주위에 담배 피는 남자 선생님들의 대화를 몇 번 주워들은 탓에 피던 담배가 아닌 다른 종류의 담배를 피우는 게 은근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에 쥐어주고 잔소리 몇 번 하면 억지로라도 그걸 필지도 모른다. 기존에 있던 그 말보루 레드인지 뭔지 하는 담배도 뺏어버리면 될 테고. 물론 그래봐야 성인이니 자기가 알아서 살 수도 있는 일. 그래도 자신의 성의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그런 짓까진 하지 않을 꺼라 생각된다. 마음 같아서는 담배를 끊으라고 하고 싶지만, 수연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런 소리를 할 주제는 안 되는 것 같으니 일단 순한 담배라도 피게 해야겠다. 어쨌든 그렇게 죽과, 약과, 심지어 몸을 생각해서 담배까지 사다들고 왔으니 이제 집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정말 집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정말, 정말 집에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아씨…. 뭐 이러니….” 집 앞까지 찾아와놓고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러워서 기껏 손가락으로 정리해놓은 앞머리를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손목에 안경이 걸려 안경이 삐뚤어졌다. 손가락으로 안경을 제대로 한번 추켜올리고 자리를 잡게 한 수연은, 자신이 지금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절망했다. 어제 밤에 술자리가 있다는 유리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그 후로 연락이 뚝 끊기는 바람에 신경 쓰여 잠을 설쳤더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이 따가웠다. 그래서 렌즈도 착용하지 않고 일부러 안경을 썼던 것. 유리가 데리러 오기 전에 렌즈로 바꿔 낄 요량이었는데, 유리가 데리러 오지 않아서 굳이 바꿀 필요를 못 느끼고 계속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 매장 화장실에서 렌즈로 바꿔 끼지 않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수연은 또 한숨을 내뱉었다. 핸드백 속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내었다. 오후의 햇빛에 손안에 든 작은 기계가 반짝인다. 액정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살짝 눈을 가늘게 뜬 수연은 고개를 들어 유리가 살고 있는 층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집에 쳐들어 가. 차에서 내리기 전 미영은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전화라도 한 통 해놓고 가는 게 낫지 않느냐는 수연의 중얼거림에 그 하얀 얼굴은 강하게 양 옆으로 내저어졌다. 아니야, 놀랜 만큼 감동도 배가 되는 법. 그냥 집에 쳐들어 가. 전화 미리 하지 말고. 고개를 너무 꺾고 있었더니 뒷목이 아파온다. 수연은 손으로 목 뒤쪽을 주무르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미영은 전화를 하지 말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전화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갈 사이는 아직은 아닌 것 같고, 유리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그렇게 찾아간다 해서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태연이야 워낙 미영이라면 끔찍이 생각하고, 미영의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내 본적도 없는, 그리고 상스러운 말 한마디 해 본적 없는 사람이니까 미영이 그런 식으로 찾아가면 오히려 좋아하겠지만 권유리는 보자마자 왜 연락 안하고 왔냐고 욕부터 할지도 모른다. 미영은 지금 수연의 상황에 자신과 태연을 대입해놓고서 그런 조언을 했겠지만 태연과 유리의 성격도 다른데 그런 조언이 100% 옳은 조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 수연은 결국 일단 전화를 먼저 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집 앞에 있지만 30분 후 쯤에나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하고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도 그 목소리를 들으면 무슨 말이든 튀어나오겠지, 라는 심정으로 유리에게 전화를 걸며 오피스텔의 정문을 지나갔다. 어? 핸드폰을 귀에 대고 걸어가던 수연은, 문득 오피스텔 건물 바로 앞에 약간 사선으로 대충 세워진 차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굳이 번호판을 보고 확인하지 않아도 왠지 풍겨오는 이미지가 딱 권유리의 차다. 걔는 왜 차를 주차장에 주차 안 시키고 저렇게…. 아파서 정신이 없나. 그래도 차를 보니 왠지 안심도 된다. 집에까지 찾아 왔는데 혹시나 집에 없으면 어쩌나, 라는 생각도 든 건 사실 이였으니까. 신호음은 꽤 길게 가는데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차의 뒷범퍼 부분까지 걸어온 수연은, 손으로 차체를 슬쩍 쓰다듬으며 오피스텔의 유리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이 쯤 되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것 같아 핸드폰을 귀에서 떼려는 순간 신호음이 뚝 끊긴다. - 여보세요. …어? 무슨 말인가가 튀어나오려다가 멈춰 섰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리가 아니다. 수연은 당황한 마음에 혹시 잘못 걸었나 싶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볼까 했지만, 유리의 번호를 직접 누른 게 아니라 단축번호를 눌러서 전화했다는 걸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여보세요? “아, 저기.” - 전화하셨으면 말을 해야지. 정수연 씨. 정수연 씨. 꿈속에서 들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하이킥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수연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순간이다. 수연이 달리 대답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핸드폰만 부셔버릴 듯이 꼭 쥐고 있는 사이, 유리의 차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린다. 문 바깥으로 빠져나온 매끈한 다리를 본 수연은 반사적으로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스르르 내렸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유리가 처음으로 수연의 학교로 수연을 보러 왔을 때에 매끈하게 잘 빠진 저 차에서 - 그때는 운전석 이였지만 - 문이 스르르 열리고 기다란 다리만이 빠져나온 걸 보고 수연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다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심정을 다시 한 번 겪고 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다리. 매끈하게 잘 빠진, 정말 군더더기 없는 각선미를 지니고 있는 다리인데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그리고 이내 그 다리에 이어 여린 몸 하나가 스르르 차에서 빠져나온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고, 차 안에서 빠져나오느라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사이에 언뜻 보이는 하얀 얼굴은 비소를 가득 머금고 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쓱 뒤로 넘기는 여자를 확인한 수연은 슬라이드를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탁, 하는 소리가 울린다. 앞에 서 있는 여자 역시 웃으며 유리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닫는다. “또 만났네?” 안 그래도 수연보다 키 큰 여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엄청 높은 굽을 신고 있다. 저번에 집 앞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올라갈 계단도 없다. 여자의 어깨 너머에 떠 있는 햇빛은 아프게 수연의 눈가를 찔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햇빛을 피한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려버리면, 왠지 이 여자가 수연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어이없는 착각을 할까봐 피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따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여자는 이제 아예 대놓고 반말이네? “그러게. 근데 너는 왜 보자마자 반말이니? 잘 모르는 사이에선 존댓말을 쓰는 게 예의라는 거 학교에서 안 배웠나봐?” “난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아역배우였잖아, 내가.” 여유 있게 웃는 여자의 낯빛이 그다지 좋지가 않다. 억지로 웃고 있긴 한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게 눈에 보인다. 수연은 재빨리 여자의 머리끝에서 다리까지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그래도 본인은 대충 걸쳐 입고 나온 것 같은데 몸매가 좋아서 그런 건지, 원래부터 옷발이 잘 받는 여자라 그런 건지, 아니면 얼굴이 예뻐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옷 스타일이 좋다. 하긴. 수연은 괜히 드는 분한 느낌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애써 생각했다. 연예인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너무나도 자연스레 조수석에 꿰차고 앉아있었을 여자의 모습이 밉고 분하다. 거기다 아파서 자신을 데려다주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권유리가 아니었던가. 아파서 데리러 오지도 못하겠다고, 회사 일도 하지 못해 조퇴하겠다던 여자가 그래도 자신의 연인을 만날 기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주차도 제대로 해놓지 않았고, 희진이 조수석에 앉아있었던 걸 고려해 본다면 여기에 주차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소린데 퇴근시간이 아닌 지금 이 시간에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조퇴하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듯 하고, 그렇다면 결국 점심시간에 조퇴를 하고 난 다음 -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이던, 아니면 금방 만났던 것이든 - 희진과 함께 했단 소리가 된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조차도 믿고 싶지가 않지만, 거짓말을 해놓고 희진을 만났다는 것도 믿고 싶지가 않다. 순식간에 바보가 된 느낌이다. 이제껏 대체 누구를,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걱정했단 말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안쓰러워 걱정을 했는데, 어쩌면 그 안쓰러운 목소리도 꾸며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 “표정이 웃기네. 꼭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종이백을 잡고 있는 손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온 몸을 타고 도는 분한 느낌은 결국 꼭 쥔 주먹으로 대변하고 있다. 수연이 희진의 온몸을 훑었던 것처럼, 희진 역시 느릿느릿 수연의 온몸을 훑는다. 천천히 움직이던 시선은 수연이 들고 있는 종이백에 멈춘다. 종이백 밖에 있는 죽집의 상호 명을 보고선 실소를 터뜨린다. 죽을 들어서 그 여자의 얼굴에 쏟아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하얀 죽에 뒤범벅되어 잔뜩 구겨질 그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권유리 줄 죽만 아니었으면, 어휴, 저걸 그냥. “사람 무시하는 말투는 여전하네. 존댓말을 쓰나, 반말을 하나.” “원래 항상 이런 건 아니야.” “뭐?” “사람을 골라서 말하는 것 뿐.” “그래서 나는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말해도 되는 사람이라 이건가? 내가 아마 너보다 나이도 많을 텐데?” “뭐, 그렇지.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내 애인 뺏어간 여자한테, 내가 예의 차릴 필요가 있나?” 내가 언제 네 애인을 뺏어갔다는 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은 꾹 삼켜버렸다. 오늘은 왜인지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좀 더 날이 서 있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턱을 약간 쳐든 채로 수연을 노려보고 있다. 평소보다 옅은 화장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벌건 대낮인데, 대체 뭘 했길래 저렇게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심지어 이상한 생각마저 들어버릴 것 같아서 수연은 살짝 차체에 손을 짚고 몸을 기대었다. 시동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차체의 느낌에 수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시동이 꺼지지 않았다는 걸 왜 아까 걸어오면서 알지 못했던 걸까. 이 차 안에 이 여자가 앉아 있었다는 걸 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유리 씨 아픈 건 또 어떻게 알았구나” “…….” “죽 같은 거 사올 필요는 없는데. 내가 사서 먹이려고 했었거든.” “…….” “그래도 이왕 사온 거니 내가 사줄 필요는 없겠네.” 삐딱하게 선 자세로 말하는 여자의 고압적인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왜, 오늘따라 유난히 자신은 저 여자의 고압적인 태도 앞에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하는 걸까. 이유도 없이 드는 주눅감에 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맨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익숙지 못한 자리, 하지만 김희진이라는 여자에게는 익숙한 그 자리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유리의 웃음을 차지했던 그 모습 때문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났던 자리는 유리의 차 안. 그 때에 둘 사이에 팽배했던 줄다리기는, 결국 수연이 유리와 그녀가 키스하는 모습을 본 것으로 막을 내렸다. 유리에게 그녀와 헤어지겠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만났던 세 번째 만남에서는, 가볍게 그 날카로운 눈매를 제압해버렸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2:1, 뒤쳐진 상황에서 기왕이면 이번에 이겨보고 싶은데 왠지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다. 두 여자가 팽배하게 잡고 있는 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유리가 거짓말을 한 사람은 수연이고, 그 거짓말을 핑계로 만난 건 희진이니 결과는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희진을 처음 맞닥뜨렸던 그 순간부터 분한 감정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권유리가, 거짓말을 하고 김희진을 만났으니까. “근데 이거 꼭 내가 오전에 찍고 온 씬이랑 비슷하다.” 흥미롭다는 듯이 킥킥 웃으며 희진이 말한다. 그 웃음소리가 심장을 쿡쿡 찔러댄다. 유리의 웃음소리는 부드럽게 심장을 간지럽히는데, 이 여자의 웃음소리는 정말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장을 난도질 한다. 입을 다물고 있는 수연을 보던 희진이 오피스텔의 투명한 유리문을 쳐다본다. 굳게 닫혀 있는 유리문 저 멀리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승강기의 계기판이 희진의 눈에 보였다. “거기서 우리 엄마가,” “…….” “아시다시피 아빠의 숨겨진 애인이잖아? 아, 내가 나온 드라마 안 보나? 그냥 쉽게 말해서 첩 같은 건데 말이야.” “…….” “그러니까 난 첩실의 자식? 그 정도인데.” “…….” “거기서 아빠가, 아, 난 그 사람이 내 아빠인 줄은 모르고 그저 엄마가 예전에 일했던 집의 사장님으로만 알고 있지만. 여튼 아빠가 아픈 걸로 나오거든.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사모님 몰래 죽을 쒀. 그리고 직접 전해주기 좀 그러니까 나한테 가져다 달라고 하거든.” “…….” “근데 병실에 딱 들어가 보니까, 없을 줄 알았던 사모님이 있는 거야. 거기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엄마가 끓인 거라고 죽을 사모님께 내밀지. 그때 사모님이,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그걸 받아들어.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어머님께 전해드리렴, 라고 말하면서.” 희진이 나온 드라마는 수연 역시 보고 있기에 그녀가 말하는 배역들 간의 관계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 방영도 되지 않은, 오늘 찍은 씬에 대한 설명을 들을수록 모멸감이 들고 있었다. 희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는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수연은 이미 다 알아차려버렸다. “꼭 그거랑 비슷하잖아. 사모님과, 우리 엄마. 그리고, 나와 너. 나는 권유리의 애인이고, 넌 굳이 말하자면 첩….” “너 지금 말 다했어?!”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스스로도 놀란 수연은 목을 움켜쥐고 가만히 희진을 노려보았다. 잡힌 목 안에서 맥박이 힘차게 뛰고 있다. 손목 부근에 대롱대롱 매달린 종이백의 모서리 부분이 몸을 찌른다. 화난다. 정말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수연의 분노에 가득찬 외침이 주위에 울리고, 희진의 표정이 갑자기 급격하게 굳는다. “…너 여기서 뭐해?” 그리고 들려오는 낮은 음성. 쇳소리가 조금은 섞여 있는 그 목소리에 수연은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떨구고 고개를 돌렸다. 낯빛이 그다지 좋지 않은 유리가 서 있다. 한 손에는 웬 종이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차키를 쥐고 수연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유리의 등 뒤에 있는 자동 유리문이 스르르 닫힌다. “여기서 뭐…. 아니 그것보다, 너네 뭐하고 있었던 거야? 왜 소리를 질러?” 상황을 정리하려고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유리가 묻는다. 희진에게 답을 바라는 듯 희진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썹 한 쪽이 씰룩거린다. 수연은 희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어디 한 번 보자. 너 설마 치사하게…. “난 별 말 안했어. 그냥 수연 씨가….” “……별 말 안했다고? 야, 네가!” “…반말 그만해요. 왜 자꾸 반말을 해요? 수연 씨랑 제가 그런 사이였던가요?” 허허. 수연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수연을 바라본다. “반말을 네가 먼저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나한테 덤탱이를 씌워?” “내가 언제 반말했다고 그래요?” “와, 진짜. 와, 정말.”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요. 여기 유리 씨 집 앞이잖아요.” “그래. 목소리 좀 낮춰, 수연아.” 곤란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유리가 수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어깨에 닿은 손에 희진의 시선이 머문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그 표정을 보며 수연은 이 상황에서의 이런 유리의 손짓에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온갖 상황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인다. 이런 식의 삼자대면이 벌써 두 번째다. 살아오면서 이런 머리 아픈 상황, 그리고 감정들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뒤엉킨 상황을 맞이한 것도 두 번째다. 결국, 이게 다 권유리 때문. 정말 권유리 넌 별별 일을 다 겪어보게 해주는 구나. 어떤 의미에서 신기하다, 너는 진짜. “권유리.” “왜?” “네가 나오기 전에 상황을 네가 봤어야 해. 내가 괜히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야.” “뭐?” “네 애인한테 한 번 물어봐. 나한테 금방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희진아, 너 얘한테 무슨 소리 했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희진에게 묻는다. 무슨 소리 한 건데? 응? 추궁하는 것치고는 꽤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기다 제법 옅은 미소까지 띄우며 말한다. 그래도 애인이라고 함부로 말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저 여자는 저런 권유리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바라보며 살아왔을까.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고 관대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유리를 수연이 본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별 말 안했어. 자기 지금 내 몸 상태 알잖아. 그 상태에서 내가 무슨….” “별 말 안했다는데?” 이봐요, 나도 귓구멍 있거든요? 굳이 확인해 줄 필요는 없어. “별 말을 안 하기는 무슨. 첩이 어쩌고저쩌고 네가 그랬잖아.” “…제가 언제요? 전 그냥 오늘 찍은 씬에 대해 이야기 한 것뿐이라고요. 아니 그것보다, 왜 자꾸 반말해요?” “와, 진짜. 어이가 없네요, 김희진 씨.” “어이가 없는 건 전데요? 정수연 씨.” 허리에 손을 올리고 옆으로 시선을 한번 돌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희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운데에 선 유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반복을 한다. 이번엔 유리를 째려보았다. 움찔거리며 수연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검은색 눈동자에 깊게 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오늘따라 거북스럽다. 한동안 수연의 시선을 받아들이던 유리는, 결국 감내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살짝 시선을 튼다. 어색하게 씨익 웃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말한다. “있잖아. 나 일단 희진이 데려다 주고 올 테니까….” “뭐?” “……아니, 그러니까. 얘 오늘 몸이 안 좋거든. 그래서 일단 데려다 주고 올 테니….” “그럼 난 어디 있으라고?!” “내 집에….” “자기 집에 저 여자가 왜 들어가?” “…그렇다고 밖에 세워둘 순 없잖아.” “그래도 왜 유리 씨 집에 저 여자를 들이냐구.” “내가 들어가는 게 싫으면 희진 씨 혼자 집에 들어가면 되겠네요.” “금방 유리 씨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혼자 갈 순 없네요.” “그럼 어쩌라구요. 내가 쟤 집에 들어가는 것도 싫다, 그렇다고 혼자 집에 가기는 싫다, 유리 몸이 두개예요?” “그냥 수연 씨가 집에 가시면 되겠네요. 저와 달리 몸도 멀쩡할 테고.” “아니, 내가 왜요?!” “아, 진짜. 둘 다 그만해!” 결국 견디지 못한 모양인지 유리가 씩씩 거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제야 두 여자의 입이 굳게 닫힌다. 그래도 여전히 팽배한 시선 속에서 유리는 표정을 굳혔다. 아우, 정말.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간다. 이 와중에도 그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자신이 짜증난 수연은, 괜히 화살을 희진에게 돌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김희진 씨.” “왜요?” “야, 정수연. 그만해. 희진아 너도 제발 그만 해라.” “김희진 씨 아까 저보고 첩이 어쩌고저쩌고 그랬죠?”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건데요? 전 그냥 제가 찍고 온 씬을 말했을 뿐….” “근데 그거 아세요?” “뭘요?” “권유리가요.” “…?” 유리의 표정이 굳는다. 수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직감적으로 안 것 같다. 말하지 말라는 듯이 눈을 부릅뜨는 제스쳐를 취하는 유리를 무시하고, 수연은 빙긋 웃었다. “김희진 씨, 당신하고 헤어지겠다고 나한테 말했어요. 모르시죠?” 희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유리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내가 조금 심했나, 란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아까 첩 발언에 비하면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금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러니까, 희진 씨가 든 예를 들자면 이런 거네요? 남편이, 첩에게, 자신의 부인과 이혼하겠다고 말….” “야, 정수연.” 유리가 재빨리 수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갑작스럽게 낚아챈 덕택에 수연의 몸이 사선으로 약간 틀어진다. 꼭 쥔 손아귀의 힘 때문에 손목이 아파온다. 손목을 빼려고 흔들었는데도, 유리는 손목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힘을 주고 확 끌어당긴다. 힘에 이끌려 유리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비틀거리며 겨우 균형을 잡고 서자, 유리가 다시 힘을 주어 유리문 쪽으로 수연의 몸을 밀어붙인다. 엇나가는 구둣굽 소리가 울린다. 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축 쳐진 어깨가 균형을 잃어 흔들리는 수연의 시선 속에 보인다. 곱게 다듬어진 눈썹이 八자를 그리고 있다. 묘한 느낌이 든다. 역시 그 말 까지는 좀 심했나 싶기도 하고. 희진을 바라보는 시야 속에 유리의 기다란 몸이 불쑥 끼어들었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수연의 어깨위에 손을 올린 유리는 얼굴을 수연에게 가까이 들이댄 후 애써 화를 참는 듯 한 목소리로, 그리고 희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말했다. “너 지금 흥분했어, 알아?” “…….” 이를 악문 모양인지 발음이 약간 샌다. 어깨를 꾹 누르고 있는 손만큼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차가운 시선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쟤 진짜로 몸 안 좋아.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너 집에 들어가 있어. 가서 열 좀 식히고 있으라구. ” “…….” “너 저번에 왔을 때 내가 누른 비밀번호 봤지? 그거 기억나?” 대답 없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제야 어깨를 누르고 있던 손을 뗀다.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는 수연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희진아, 차에 타. 집에 데려다줄게. 멍하니 서 있는 여자의 등에 손을 얹고, 차 문을 열며 부드럽게 말한다. 얼굴은 웃고 있지 않고 있다. 멍한 표정의 여자는 유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열린 차 문틈 사이로 비틀거리며 몸을 집어넣었다. 스치는 시선 속에 보이던 그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이다. 희진이 차 안에 완전히 몸을 밀어 넣고 나자 유리가 조심스레 차문을 닫는다. 차체를 잡은 채로 한번 수연을 돌아본다.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우리.” 우리, 라는 단어가 이렇게 차갑게 느껴졌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유리가 이제껏 흥분을 한 모습은 여러 번 봐왔지만, 그 때의 흥분과 지금의 흥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혀 다르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눈 하나 껌뻑거리지도 않고 천천히, 그리고 매우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수연은 이렇다 할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와 희진을 태운 차는 금세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가 부착된 자동유리문이 열리고, 짧은 복도를 지나 승강기에 올라타고, 익숙한 층에 내리고, 예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리고 텅 빈 방안에 들어오기까지. 그 모든 일련의 행동을 하는 동안 수연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기계적으로 걷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기계적으로, 주저 앉아버렸다. 요동치던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번엔 머릿속의 생각들이 요동을 치고 있다.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침대 시트가 제멋대로 바닥에 흘러 내려와 있는 방안을 보며 뺨을 슥 어루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피부가 꼭 남의 피부같이 낯설다. 손끝으로 툭툭 볼을 건드렸다. 건드리는 느낌이 나는 걸 보면 확실히 자신의 뺨인 건 맞는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지.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잠시 놓고 있었던 종이백을 다시 들어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테이블 위에 종이백을 얹어놓고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질투는 무섭다. 본인이 여자지만, 수연은 정말 그 사실을 절감했다. 차라리 다른 말이나 다른 행동으로 엿 먹이면 엿 먹였지, 그런 말까지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희진이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내뱉었더라도 차라리 뺨을 치거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아니면 정강이를 까거나, 그것도 아니면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던가 했어야지 그런 식의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단 한마디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승리를 해도 승리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괴감만 잔뜩 들 뿐. 정수연, 너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첩이라느니 어쩌니 그런 말을 내뱉는 여자의 모습에 화나서, 그리고 그 여자가 빗댄 그 상황이 지금 상황과 비슷하다는 그 여자의 설명이 그럴듯해 보여서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던 말. 당황하다 못해 몹시 화가 나버린 권유리. 그리고 정말, 상처받은 표정으로 서 있던 여자.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은 어땠을까. 상처받은 얼굴을 보며,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그 여자를 보며 통쾌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그러게 왜 함부로 덤벼들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결국 수연 스스로가 희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정말 다를 게 뭐 있어? 그 여자랑, 내가. 질투라는 감정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감정은 결코 옳은 감정이 아니다. 설사 그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똑같이 그런 식으로 되갚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누구였든 간에 이성이 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런 질척거리는, 그러니까 꼭 희진이 나오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스스로 연출해 낸 자신이 기가 막히다. 정작 그런 말을 내뱉고, 눈에 가득 독기를 품었던 수연 스스로도 이렇게 기가 막힌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유리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질책하듯이 바라보던 그 눈빛이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다시금 떠오르는 그 표정과 그 목소리가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유리가 들어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문제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또 그렇게 하기엔 자신이 희진에게 당한 게 억울하기도 하다. 분명 희진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실수였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해서 유리에게 네 여자에게 상처 줘서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유리에게 따질 일도 있다. 아프다고 말한 게 정말 거짓말 이였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만약 그게 거짓말이 맞다면 애인을 만나고 싶었으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왜 굳이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따져야 한다. 설사 아픈 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럼 아파서 조퇴까지 해놓고서 왜 희진을 만난 건지도 묻고 싶다. 어쨌든 어느 쪽이든 유리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게 될 테고, 그런 말을 하다보면 내가 잘못했다느니 미안하다느니 라는 등의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될 것 같진 않다. 골치 아퍼. 수연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쪽을 꾹꾹 지압하며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시선이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백에 꽂힌다. 죽은 이미 다 식어버렸겠네. 이번엔 또 금세 분한 느낌이 든다. 금방까지는 희진에게 한 말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는데, 이번엔 전혀 다른 의미로의 자괴감도 든다. 나는 대체 뭣 때문에, 생전 사보지도 않던 죽까지 사서 여기까지 온 거지? 정말 왜? 유리가 아픈 것이든 아니면 아프지 않았는데 거짓말을 한 것이든, 유리 생각 때문에 걱정을 했던 시간이 없던 걸로 되지는 않는다. 걱정돼서 끙끙대는 동안 유리는 희진과 함께 있었다. 아파서 연락을 못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픈 게 아니라 희진과 있느라 연락을 못한 것 같다. 수연은 종이백에서 포장된 죽을 꺼냈다. 예상대로 거의 다 식은 모양인지 포장용기를 손으로 만져도 그다지 뜨겁지도 않다. 미지근한 온도의 포장용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째려봤다. 그래, 난 너 생각해서 죽 사는 동안 너는…. 포장용기를 다시 손에 들고 싱크대 쪽으로 다가갔다. 음식물 찌꺼기 하나 남아있지 않은 개수대 통을 보고 들고 있는 표장용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냥 버려?! 입맛이 까다로울 것 같아서 일부러 제일 비싼 전복죽을 사왔다. 거기다 약까지. 그리고 담배도 덤으로. 자존심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순간이다. 살면서 이렇게 무참히 자존심이 짓밟힌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상대방은 자신이 수연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다 못해 거기에 침까지 뱉고 있다는 걸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 그런데 그 억울함이, 제법 슬프게까지 느껴지는 건, …그래도 진짜 아픈 걸 수도 있으니까, 버리는 건 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결국 다시 죽의 포장용기를 테이블 위에 고이 올려놓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권유리. 수연은 그 여자 앞에만 서면, 자신도 모르는 스스로의 성격을 발견하곤 한다. 사람의 성격이라는 건 일관적이기 마련인데, 유독 그 시커먼 얼굴의 여자 앞에만 서면 성격이 전혀 일관되지가 않는다. 그 전부터 욕을 아예 안 썼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자주 쓰는 편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나이를 먹으면서 거의 안 쓰게 되었는데 유독 유리 앞에서는 병신, 멍청이, 지랄, 등의 욕은 그냥 일상 언어로 사용하게 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금방 흥분도 하고,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도 그냥 툭툭 튀어나온다. 그렇게 거친 성격이 나오다가도 또 금세 조신해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본인 스스로가 듣기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금세 열 받아서 욕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대고. 정말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천상 여자다운 성격에서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거친 성격까지, 온탕과 냉탕을 하루에도 수 없이 넘나드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권유리 앞에서만. 지금도 그렇지 않는가. 희진 앞에서 눈을 부릅뜨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가 유리의 화난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고, 집에 와서 희진에게 미안한 생각도 가졌다가 또 금세 열 받아서 죽 버릴 생각을 하고, 결국엔 혹시나 정말 아픈 것일 수도 있다며 버리지 못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종잡을 수 없는 심리상태에, 종잡을 수 없는 감정까지. 어떤 게 본인의 진짜 성격이고, 진실한 감정인지 조차도 헷갈린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방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트를 침대 위에 대충 휙 던져 놓고, 침대의 끝 부분에 걸터앉았다. 좋은 스프링을 쓰는 탓인지 몸에 힘을 탁 풀어버리고 털썩 주저앉았는데도 그리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 침대에 누워본 건 딱 한 번. 더군다나 그때는 경황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벽면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 시계는 수연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다행히 던져지는 아픔을 겪지는 않았다. 다만, 수연이 던진 무언가에 맞은 모양인지 시계의 모서리 한 쪽 부분이 미세하게 떨어져 나가있다. 억울한 표정으로 정말 아무 짓도 안했다는, 물건을 던지려면 네 물건을 던질 것이지 왜 내걸 던지냐는 말을 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권유리 정말 잘 피했지. 운동을 많이 한다더니 그게 거짓말은 아닌가봐. 그렇게 잘 피하는 걸 보니까. 정말 그때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살인충동까지 느꼈었다. 이제껏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해 본 스킨쉽이래봐야 키스가 전부고 그 키스라는 것도 얼마 해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첫 경험을 그 여자와, 그것도 기억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했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일 수밖에. 잠이 많은 성격이라 항상 아침에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에서 1시간 정도 보내곤 하는데, 그때엔 정말 일어나자마자 잠이 확 깼더랬다. 여기저기서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잡다한 물건들 사이를 재빨리 피해 다니던 그 여자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물론 그 여자의 얼굴에 비춰 보이는 자신의 표정 역시 가관 이였으리라. 풉.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던 그 얼굴을 생각하며 수연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더 웃긴 건 그 일을 계기로 수연이 점점 유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아이처럼 툴툴 대던 여자의 얼굴에 대일밴드를 붙여주던 그 순간부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짓 술주정을 부리는 자신을 길바닥에 버리지도 않고 끝까지 등에 업어서 데려다주던 그 순간부터. 그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고, 감정이 전개되는 그 과정 하나하나도 심상치가 않다. 언젠가 읽어본 한 일본 여류작가의 소설에서 남자 아이가 여주인공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연인 사이가 되는 건, 남자든 여자든 이때다 싶을 때 페로몬을 상대방에게 쏴 대서 그런 것이라고. 파바방, 페로몬을 쏴 대서. 굳이 남자와 여자만이 연인 사이가 되라는 법은 없으니 남녀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본다면, 유리와 자신의 사이에서는 과연 누가 먼저 페로몬을 쏜 걸까. 그리고 그 페로몬에 먼저 이끌린 사람은 누구일는지. 스스로의 감정을 생각해 본다면 페로몬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인 듯하다. 그리고 그 페로몬이라는 것도 조준해서 쏴야 하는 것이라는 걸 고려해 본다면, 권유리라는 여자는 아무래도 조준을 잘못한 듯싶다. 쏴댈 거면 자기 애인에게 쏴대지 나한테 쏴댈 건 또 뭐람. 아니면 페로몬의 양 조절을 잘못했거나. 어느 쪽이든, 정수연이 권유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시간은 꽤 지났다. 희진이 사는 곳과 유리의 오피스텔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한 번도 집 안에 가본적은 없지만 입구까지는 걸어서 가본 적이 있다고 했었다. - 걸어서 40분 정도면 가. - 그럼 왔다갔다 80분인데 그걸 걸어서 간 거야? 발도 안 아프든? - 그냥 걷기 운동이나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마땅히 기억나는 코스가 없어서 그냥 우리 집에서 걔 집에까지를 코스로 해서 걸었지. 걸어서 40분 정도 거리면 차로는 얼마 안 걸릴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이 묘하게 퇴근시간과 엇비슷하게 걸려서 조금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현재 유리의 심리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분명 속도를 있는 대로 밟을 수도 있는 일. 곧 유리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싹 가신다. 살짝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하얀색 시트에 보기 좋게 주름이 잡힌다. 유리가 오기 전에 미리 할 말을 결정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보자마자 또 말이 막 튀어나올 테니.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해? 아니야, 처음부터 미안하다고 말 하면 좀 그렇고 일단 아픈 거 맞냐는 것부터 물어볼까? 아니면 희진 씨는 잘 데려다 주고 왔냐고? 음, 권유리 걔는 내가 비꼬는 줄 알 거야. 희진 씨한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헐…. 아니지, 이 말만큼은 절대 못해. 안 해. 죽어도 안 해. ……해야 하나?…. 아니 뭐, 그건 나중에 그냥 마지막에 살짝 지나가듯이 말하기로 하고. 음…. 나 열 식혔으니 이제 이야기 해보자, 라고 하면 되나. 죽 사왔으니 일단 그것부터 먹고 말해? 아니, 그 전에 아픈 거 맞냐고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아, 정말. 정수연, 너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야. 근데 왜 말 하나 제대로 떠올리지를 못하는 거야… 미치겠네. 혼자서 중얼중얼 유리에게 할 말을 생각하던 수연의 귀에 이상한 기계음이 들린다. 그 기계음이 도어락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라는 걸 수연이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 나 아직 할 말도 못 정했는데 벌써부터 오면…. 기다란 다리가 쑥, 벌려진 문틈 사이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다리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 수연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프다더니, 기사 노릇 할 기운은 있었나 봐?” 이게 아닌데…. 정수연. 넌 이 입 때문에 언젠가 인생 망할 거야. 자신도 모르게 악문 이 사이로 빠져나온 차가운 말들이 아프게 귓가에 부딪힌다. 구두를 벗는 소리가 나고, 거실 바닥에 발을 옮기는 소리도 난다. 옷을 벗는 듯 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수연의 눈앞에 검은색 정장 마이가 휙 스쳐지나간다. 바닥에 처량하게 떨어져 있는 정장 마이를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입이 열리고, 잔뜩 화난 듯 한 목소리가 울린다. “너 얘가 왜 그래?” “내가 뭘?” “말을 좀 좋게 하면 뭐가 덧나? 희진이한테 왜 그렇게 말해? 거기다 들어오자마자 왜 또 그렇게 시비 거는 말투로 말해? 내가 열 좀 식히고 있으랬잖아.” 이것 봐. 또 그 여자 편드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수연 역시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요 근래 들었던, 유리의 마음이 조금 열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착각 이였다는 걸 똑똑히 깨닫는 순간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유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리보다 스스로가 더 작아 보인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오자마자 그 여자 편 들어? 그 여자랑 헤어진다고 안 했어? 내가 뭐 잘못 말했니?” “그래도 그런 걸 당사자 앞에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예의? 내가 왜 그 여자한테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그 여자가 내 앞에서 몰상식하게 구는데도?” “희진이가 언제 너한테 몰상식하게 굴었는데?”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눈매. 하지만 놀랍도록 착 가라앉은 목소리. 반면에 그런 유리를 바라보는 수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에 눈이 점점 힘이 풀려가고, 목소리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좋게 이야기 해볼 작정으로 유리가 들어오기 전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채 끝맺기도 전에 유리가 들어와서 결국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어버렸고, 그 말을 듣고서 기다렸다는 듯 희진의 편을 듣는 유리의 모습을 보니 유리가 들어오기 전, 텅 빈 방안에서 수도 없이 중얼거렸던 그 말들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관두자, 관둬. 더 이상 말해봐야 뭐 알아 들을 리가 있니, 네가.” “야.” “애초에 너한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아프다고 거짓말도 뻔뻔히 하는 애한테 내가 무슨.” “나 진짜 아프거든?” “그러세요? 아픈 것 치곤 너무 멀쩡한 거 아니야?” “진짜 아프다고.”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겠지. 그렇게 예뻐라하는 애인에게 내가 온갖 말을 다 퍼부었으니. 성격 더러운 권유리가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 그렇게 헤어지겠다고 사탕발림으로 말 할 땐 언제고, 왜 안 헤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헤어지고 말고는 내가 선택하는 거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잖아.” “그래,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근데 너 그거 아니? 네가 그렇게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 게 이게 두 번째라는 걸.” 그리고 그것도 알아?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네가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며 내 상황을 각인시킬 때마다 정말 짜증날 정도로 화가 난다는 거. 심장의 고동이 미친 듯이 빨라지고 있다. 뒷목도 뻐근해 오는 것 같고, 힘없이 떨군 손은 자꾸 부들부들 떨린다. 유리는 표정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수연을 내려다보고 있다. 꾹 다문 입술이 밉다. 수연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데, 유리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감정의 온도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수연은 더욱더 자신의 못난 착각을 후회하고 있다.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 나한테 애초에 왜 헤어지겠다는 말을 했던 건데?” “…….” “아, 내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네가 그런 말 하면, 내가 혹해서 넘어갈까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그런 의도가 아니면 헤어지겠다고 해놓고 왜 안 헤어지는데? 못 헤어지겠어?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해줬잖아? 김희진 씨, 권유리가 당신하고 헤어지겠다고 나한테 말했어요, 라고.” 수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너…!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굳게 다물고, 시선을 잠시 현관 쪽으로 돌렸다. 속으로 열을 일부러 삭히려는 모양인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현관문을 노려본다. 한참을 그렇게 뚫어져라 현관문을 쳐다보던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고압적인 시선에 순간 겁이 났지만, 수연은 티 하나 내지 않고 그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발음이 또렷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선을 넘은 거야, 그거.” “뭐?” “우리 처음 시작할 때 말했잖아.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자고. 잊었어? 네가 아까 희진이한테 한 짓은, 그 선을 넘은 거라고. 내 일이야. 내 사생활이야. 내 연인이라고. 네가 그렇게 함부로 깎아 내릴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함부로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고.” 기가 막혀온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아무래도 유리의 눈에 악역은 언제까지나 수연 뿐인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유리의 연인은 수연이 아닌 희진이고, 그런 희진을 수연이 유리가 보는 앞에서 말로 짓눌러버렸으니. 희진을 데려다 주는 차안에서 희진이 얼마나 억울해 했을까. 얼마나 분해했을까. 얼마나 슬퍼했을까. 그리고 그런 희진의 옆에서 권유리는 얼마나 미안해했을까. 어쩌면 희진을 달래주는 내내 수연에게 질렸을지도 모른다. 혀를 내두르며 그 여자, 정말 장난 아니야 라고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수연아, 라고 불러주던 그 입술로 수도 없이 많은 비난을 했을는지도. 그런 유리와 달리 수연은 그 와중에도 유리와의 일을 생각하고, 유리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버려질 자존심도 없는 것 같다. 수연이 대답이 없자 기세를 탄 유리가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며 말을 이어간다. “말 좀 조심히 해.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봐 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지금 누가 누구보고 생각하고 말하라는 거야? “생각 좀 해야 하는 건 너야.” “뭐?” “생각 좀 해보라고. 내가 왜, 그 시간에 네 집 앞에 있었는지. 내가 왜, 그 여자에게 분에 못 이겨 그런 소리까지 퍼부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자존심 다 짓밟혀가면서까지 네 앞에 지금 서 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유리의 앞에 더 이상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다. 대화를 이어가봐야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 같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일도 없을 테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저 인간 머릿속엔 그 여자 밖에 없을 텐데. 사과를 해서 좋게 끝내봐야 뭐해. 몸을 돌려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현관문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핸드백을 잡고, 재빨리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수연의 행동을 한동안 넋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리가 그 좁은 거리를 뛰다시피 와서 구두를 신고 있는 수연의 손목을 잡고 몸을 돌린다. 얘는 왜 툭하면 손목을 잡고 지랄이야, 드라마는 많이 봐가지고, 진짜. 미간에 주름을 가득 잡은 채로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쳤다. “가지 마. 나 할 말 안 끝났어.” “난 다 끝났어.” “정수연. 넌 얘가 왜 이렇게 제 멋대로야?” “너나 나나, 별 반 다를 거 없지 않아?” “…아, 정말!!”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발을 한번 쿵 굴려대더니 골반에 손을 얹고 씩씩 거린다. 그 모습이 꼭 분을 이기지 못하는 초등학생 같다. 전 같았으면 그 모습에 귀엽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 꼴사납다. 나이는 대체 어디로 먹었길래 아직도 저런 제스쳐를 취하는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야, 권유리.” “…….” “너 나 같은 여자 처음이지?” “…….” “말도 더럽게 안 듣고, 툭하면 욕하고, 툭하면 두들겨 패고, 비싼 선물 해줄라 치면 돈지랄 하는 거냐고 비웃고, 그럴싸한 아부를 해대도 넘어가기는커녕 코웃음만 치고, 성격 드세고, 떽떽거리고.” “…….” “이제껏 만난 여자들이랑 다르지? 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지?” “…….” “그럼 결론은 하나네.” “…….” “네가 좋아하는 타입을 만나. 나 같은 타입의 여자는 만나지 말고.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착하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그런 여자 만나라고. 그깟 내기 따위 무슨 상관이야? 돈 그냥 줄게.” “너 말 끝마다 내기, 내기 할래?”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나 내기 때문에 만나는 거잖아? 만나기 싫은데 억지로 만나는 거잖아? 그거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내가 그냥 돈 줄 테니까,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라니까? 네 애인이랑 희희덕거리던가, 아니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들이랑 희희덕 거리던가 하면 될 거 아냐.” 그래, 네가 좋아하는 여자들이랑, 네가 그렇게 예뻐하다 못해 좋아 죽으려고 하는 그 김희진인가 뭔가 그 여자랑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를 악물고 유리를 노려보았다. 팽배한 시선의 줄다리기 속에서, 긴장의 끈을 먼저 놓아버린 건 유리였다. 어이없다는 듯 비소를 한번 흘리고, 고개를 한번 바닥을 향해 툭 떨구던 시커먼 얼굴의 여자는,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살짝 벌려진 붉은 입술 사이에 부숴질듯이 꾹 악물고 있는 하얀 이가 보인다. 그 이 사이사이로 유리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온다. “어- 그래. 좋아. 그렇게 할게.” “…….” “잘 됐네. 좋아. 그렇게 할게. 그렇게 하면 되잖아. 너 말고 딴 여자 만나면 되겠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못할 줄 알아?! 뭐 여자가 너 하나냐? 깔리고 깔린 게 여자야. 거기다 남자도 있고. 사귈 사람 많다?! 네 말대로 할게. 그렇게 한다고. 됐어? 됐냐고오.” “…하, 정말 병신 같으니.” 짜증나. 내가 쟤를 대체 왜 좋아한 거야? 마음 같아서는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한번 그렇게 걷어차기 시작하면 정말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술을 한번 씰룩거렸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쾅, 거칠게 문을 닫고 쿵쾅쿵쾅 복도를 꾹꾹 짓밟으면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서, 승강기 쪽에 다다랐을 때 걸음을 멈추고 뒤를 확 돌아봤다. 닫힌 현관문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와, 나와 보지도 않아?! 승강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몇 번을 눌렀다가 내려오는 데 한참이 걸릴 것 같아서 결국 계단으로 내려갔다. 너무 꾹꾹 바닥을 눌러댔더니 발바닥마저 아프다. 소리도 없이 저절로 열리는 유리문도 오늘따라 괜히 마음에 안 들어서,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스르르 닫히는 유리문을 한 번 걷어찼다. 그걸 또 감지한 모양인지 반쯤 닫혔다가 다시 열리는 유리문을 뒤로 한 채로 오피스텔의 정문을 빠져나왔다. 정문 바로 앞에 서서,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유리의 방 쪽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이 조금씩 어둑어둑 해져서 그런 건지, 나올 때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불도 켜져 있다. 저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있을 그 기다란 몸을 생각하니 더 열이 받는다. “권유리, 이……하, 너무 열 받아서 뭐라고 표현도 못하겠네.” 신경질적으로 앞에 놓여있는, 자동차 바퀴 때문에 다 찌그러진 콜라 캔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캔이 검회색의 아스팔트 위를 굴러간다. 애꿎은 캔을 한 번 더 찰 생각으로 캔이 굴러가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불규칙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있는 터라 캔은 얼마 굴러가지도 않고 금세 멈추었다. 오른 쪽 발을 뒤로 들고 다시 한 번 걷어차려는 수연의 눈에, 콜라 캔 바로 옆에 떨어진 명함 크기의 작은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자 사진이 있고 그 사진 위에는 080으로 시작하는 폰팅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리고 더불어 적혀 있는 낯 뜨거운 멘트. 수연은 고개를 돌려 땅바닥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그와 비슷한 내용의 종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쭈그리고 앉아서 캔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앞뒤를 돌려가며 그 종이를 바라보던 수연은, 이내 얼굴 가득 회심의 미소를 띠고서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쥔 종이의 여자를 한번 바라본 후, 고개를 들어 유리의 집을 바라보았다. 권유리. 네가 내 자존심을 짓밟아놓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두고 봐. 나 이래 뵈도 뒤끝 있는 여자야. Hissing 15 눈이 뻑뻑하다. 얼굴은 마치 기름을 몇 겹 둘러싼 듯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몇 번이고 세수를 했는데 그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핸드폰에 맞춰놓은 알람을 3번은 꺼버리고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일어나보니 오전 10시. 새벽까지 잠 못 자고 뒤척이다가 마지막에 확인한 시간이 오전 4시였으니, 그래도 대략 6시간 정도는 잤다. 평소에 자는 만큼은 잤는데 왜 이렇게 몸이 찌뿌드드한 건지. 결국엔 견디다 못해서 태연에게 전화해 몸이라도 풀 겸 스쿼시나 치자고 했더니 오늘은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단다. 그 놈의 작업, 좀 미뤄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는데도 한사코 오늘 하기로 한 일은 오늘 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결국 허탕만 쳤다. 그래, 10년 우정이 이것밖에 안 된다 이거지 라는 투정을 부렸다가 애처럼 유치하게 굴지 말라는 핀잔만 들었다. 요즘은 왠지 여기저기서 애 같다는 핀잔을 많이 듣는 것 같다. 태연에게도 그렇고, 가끔 미영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정수연 그 여자가 특히 나한테 많이 그러지.” 유리는 컵 안에 든 냉수를 꿀꺽 마시고 난 후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의 느낌이 차갑다 못해 시리다. 미간에 살짝 잡힌 주름을 애써 펴내며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뒷목이 뻐근해온다.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종국엔 이상한 포즈로 잠을 자서 그런지 온 몸이 쑤셔오기까지 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다리에 쥐가 잔뜩 나 있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몸살 기운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몸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집안에서 요양하며 틀어박혀 있기엔 기분이 너무 엉망이다. 그래서 태연을 불렀던 건데 단 칼에 차였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를 불러볼까 하고 핸드폰 전화번호 명단을 죽 훑어봤지만 달리 내키는 사람은 없었다. 수연을 만나는 동안 그 여자와 희진을 번갈아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다 소진되는 느낌이라 다른 여자를 만나보지도 않았고, 유리의 입장에서 주말 오전 일찍부터 나오라고 할 정도로 친한 친구들은 얼마 있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연 이외의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꺼내놨던 생수병을 다시 넣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을 집어넣던 손길이 냉장고 한 구석에 고이 자리 잡고 있는 그릇모양의 포장용기를 보고나서 멈춘다. 테이블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저걸 발견하자마자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안의 내용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프다는 말을 듣고 수연이 사온 것이리라. 그 정성은 갸륵했지만, 저걸 발견했던 그 때 당시에는 화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여서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었다. 유리는 생수병을 마저 집어넣어 허전해진 손으로 포장용기를 집어 들었다. 어제 집어넣었을 때에는 약간 미지근한 상태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차가워졌다. 테이블 위에 있는 수저통에서 수저 하나를 집어 들고, 의자를 뒤로 살짝 빼내어 앉았다. 수저를 잡은 채로 뚫어져라 포장 용기를 쳐다보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포장을 뜯었다. 이미 잔뜩 차가워지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하얀 죽이 눈에 보인다. 렌지에 돌려 먹는 게 더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수고까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수저 한 가득 죽을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집어 삼킨 것 같은 차가움이 입 안에 가득 맴돈다. 이와 혀를 억지로 움직여 가며 씹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확히 세 번만 씹은 채로 꿀꺽 삼켰다. 몇 번 음미하지도 않았고, 이미 잔뜩 차가워진지 오래라 무슨 맛인지 알 턱이 없다. 그래도 유리는 죽 덩어리가 식도로 넘어가자마자 다시 기계적으로 숟가락에 죽을 꾹꾹 눌러 담았다. 입 안에 집어넣은 죽의 양은 아까보다 좀 더 많았고, 그만큼 더 차갑고, 그만큼 더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몇 번 씹다가 그대로 꿀꺽 집어 삼켜버린 유리는 숟가락을 테이블에 놓고 몸을 일으켰다. 더럽게 맛없네. 티슈 몇 장을 뽑아서 입을 닦고, 손으로 동그랗게 말아 바닥에 집어던졌다. 한쪽이 움푹 들어간 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바보 같은 여자가…속도 없나? 진짜. 나 같았으면 버렸겠다, 이딴 거. 자존심 세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스스로도 자존심이 세고, 어제 자신의 앞에서 독설을 내뿜던 여자도 자존심이 세다. 물론 그 여자에게 강한 한 방을 먹은 희진 역시 자존심이 세긴 매 한가지라 유리는 어제 서로 다른 이유로 한풀 꺾어진 여자의 자존심들을 보아야만 했다. 희진을 달래는 건 의외로 어렵진 않았다. 우는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 여자가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문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별개로 하더라도, 이미 헤어지기로 한 이상 헤어졌다는 사실을 미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돌이킬 수는 없었고 희진 역시 그런 이유로 유리를 붙잡고 싶진 않아 했다.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이별을 해서, 어떤 의미로는 평생 못 잊을 것 같다는 희진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차 안에서 애써 눈물을 참아내던 희진은 집 앞에서는 끝내 당당한 표정을 지어내며 나는 잘 살 테니 당신은 잘 살지 마, 특히 그 여자와는- 라는 말을 내뱉고서 돌아섰다. 결국 마지막에 허탈한 웃음을 지은 것은, 희진이 아닌 유리였다. 문제는 김희진이 아니라 정수연이었다. 냉철하게 사고할 줄 알았던, 감정을 믿지 못한다는 그 여자는 어제 철저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유리에게 보여줬다. 독설을 내뱉는 모습이나 다른 여자 만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화가 난 유리의 눈에는 그저 얄밉게 보였었다지만, 화가 다소 가라앉은 새벽에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게 떠오른 그 표정들은 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왜 그때는 알지 못했던 걸까. 극한으로 치닫던 감정은 유리의 귀와 눈을 가려버렸다. 모르는 척 한 것보단 아예 몰랐다는 것 자체가 더 큰 문제였다. 바로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이 짓밟혀가는 걸 똑똑히 보고 있던 여자를 배려해주었어야 했다. 희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수연에게도.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이 모든 상황이 자신만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연과 희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아무리 화가 났었더라도 수연이 희진에게 그런 말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애인을 빼앗긴 여자에게 네 애인이 너랑 헤어지겠다고 나한테 그랬어, 라는 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릴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건 정말 100% 수연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첫 단추는 수연이 잘못 꿰었다. 그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유리의 잘못이지만. 인간관계의 트러블이 항상 어느 한쪽만의 잘못만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상당수는 트러블의 당사자들 모두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결국 원인은 둘 다에게 있기 마련인데 자신과 수연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 둘의 잘못에 의해 얼떨결에 시작도 해보지도 못한 연애가 끝나버렸다. 연애 자체가 실재하지도 않았으니 이별이란 말도 우습다. 그래도 둘 다 서로 홧김에 한 말이니 풀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자신의 생각이 오산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새벽 1시에 온, 그러니까 새벽까지 잠을 설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 된 그 문제의 문자 때문이었다. - 계좌 번호랑 금액 문자로 보내 보내 줄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수연의 화가 좀 가라앉으면, 수연을 불러놓고 차근차근 이건 내가 잘못했지만 저건 네가 잘못한 것 같다, 피차 잘못했으니 서로 좋게 사과하고 없던 일로 하자 라고 말하려고 했던 유리의 계획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유리 역시 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버렸다. 어차피 약속된 1달도 토요일인 오늘이 지나고,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지나면 끝이다. 그 날 이후론 만날 일도 없다. 1달 안에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던 유리의 호언장담은 반쯤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연이 질투를 하는 일이나 유리가 아프다고 죽을 싸들고 오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크게 싸우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이러니한 건, 1달 전에 유리가 원하던 결과 때문에 1달 후의 유리가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어제 수연과 싸우지 않았더라면 유리는 수연에게 내기는 없던 일로 하고 한 번 만나보자는 말을 했을 테고 반전이 있지 않은 이상 수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게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다 식어버린 맛도 없는 죽을 먹으며 욕지기를 내뱉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왠지 처량해 보이는 죽을 바라보다가, 포장용기를 손으로 잡고 싱크대 개수대 쪽으로 갔다. 포장용기를 뒤집어 아래위로 흔들었더니 덩어리가 된 죽이 철퍽 소리를 내며 싱크대에 떨어진다. 물을 틀어 뭉쳐있는 밥알들을 떨어뜨렸다. 쏴아,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물이 떨어지고, 물의 수압에 뭉쳐있던 밥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싱크대에 손을 짚고 개수대 쪽으로 떨어져가는 하얀 죽들을 바라보았다. - 야, 권유리. - 너 나 같은 여자 처음이지? - 말도 더럽게 안 듣고, 툭하면 욕하고, 툭하면 두들겨 패고, 비싼 선물 해줄라 치면 돈지랄 하는 거냐고 비웃고, 그럴싸한 아부를 해대도 넘어가기는커녕 코웃음만 치고, 성격 드세고, 떽떽거리고. - 이제껏 만난 여자들이랑 다르지? 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지? - 그럼 결론은 하나네. - 네가 좋아하는 타입을 만나. 나 같은 타입의 여자는 만나지 말고.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착하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그런 여자 만나라고. 그깟 내기 따위 무슨 상관이야? 돈 그냥 줄게. -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나 내기 때문에 만나는 거잖아? 만나기 싫은데 억지로 만나는 거잖아? 그거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내가 그냥 돈 줄 테니까,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라니까? 네 애인이랑 희희덕 거리던가, 아니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들이랑 희희덕 거리던가 하면 될 거 아냐. 악에 바친 말을 하나하나 내뱉었던 그 여자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나 알면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져 가는 유리의 표정을 바라보고서도 그런 말을 멈추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거기다 정말 유리가 자신에게 그렇게 대하는 게 아직까지도 단순히 내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눈치가 없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겠다는 말을 할 정도인데 이미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안 맞아. 유리는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 싱크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 맞아, 너랑 나는. 안 맞는 거야. 이건 달리 설명할 것도 없어. 그냥 우리는 안 될 사이인 거야. 합리화 시킬 수도 없어. 몇 시간만 참았으면 될 일이였는데, 너와 내가 망쳐버렸잖아. 달리 변명할 것도 없어. 우리는 그냥 안 될 사이야. 나는 포기가 빨라, 너도 포기가 빠르겠지. 복잡한 연애 따윈 하고 싶지도 않고.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사랑에 있어서든, 일에 있어서든, 우정에 있어서든, 어떤 면에서든 간에. 유리와 수연은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손에 이미 들어와 제대로 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쥐는 타이밍을 알지 못해 그대로 놓쳐버렸다. 쥐어보기도 전에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을 다시 주워봐야 무엇하랴. 태연과 전화통화를 끝내고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전화번호들을 다시 한 번 훑어봐도 내키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한참을 훑어보다가 다시 슬라이드를 닫은 유리는, 구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고 대충 눈에 보이는 데로 집어 들어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것저것 대어보면서 코디를 했겠지만, 오늘은 그러는 것도 귀찮다. 일단 나가보면 누군가를 만나게 되겠지. 무턱대고 그런 생각으로 나가는 것이라서 별로 꾸미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골방을 나와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다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백을 발견했다. 종이백 표면에 있는 죽집의 상호 명을 보아하니 아마 수연이 저 종이백에 죽을 담아온 모양이다. 어제 수연이 나가고 난 다음에 테이블 위에 있는 죽에만 신경을 쓰느라 미처 종이백은 확인하지 못했다. 어차피 봐봐야 안에 아무 것도 안 들어 있겠지. 나중에 확인해 보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은 한 여름.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공기가 선선한 것 같다.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할까. 그 동안 만남을 이어오는 걸 관두었더니 이런 날에는 어디를 가야 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냥 감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는데. 유리는 입맛을 쩝 다시며 계단을 내려갔다. 몸이 무거워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끝에 꽤 무게가 실린다. 약은 어제 오후쯤에 수연 때문에 집에서 억지로 하나 삼킨 게 전부다. 그 것도 그 후에 일어난 해프닝 때문에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소화가 다 되어버린 것 같다. 계단을 다 내려와 센서가 부착된 유리문 앞에 서자 유리문이 자동으로 슥 열린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이거 여름 맞나? 유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적당히 맑다. 푸른 하늘의 중간에 두둥실 떠 있는 햇빛은 여전히 강렬한데 이상하게 선선한 여름의 날씨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정수연은 땀 많이 흘리니까 걔한텐 다행……. ……. 그만 생각하자. 당연하듯이 떠오르는 수연 생각에 유리는 괜히 해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네가 뜨겁게 안 해놓으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잖아. 이렇게 할 거면 때려치워라, 인마. 투덜투덜 대며 몸을 돌려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일단 차에 타면 무언가 더 생각날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든 확실한 건, 이제부터 더 이상 자신의 차를 끌고 수연을 만나러 갈 일은 없다는 것이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둘 중 어떤 감정이라도 들어야 할 텐데 유리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 이젠 정수연 데리러 갈 일 없는 거지 라는 생각 이외에는, 전혀.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초점을 흐리며 길을 걸어가던 유리는 차의 뒷범퍼에 거의 다다를 때 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차를 바라보았다. “억.” 저절로 억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유리는 잰 걸음으로 차의 옆면을 지나가며 자신이 본 상황을 다시 한 번 눈에 각인을 시켰다. 한쪽 면만 봤지만 아무래도 저쪽 면도 이 면과 상태가 똑같은 것 같다. 본넷트 앞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몇 번을 감았다 떠도 그대로다. 이건 꿈이야.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난다. 유리는 이마에 손을 짚고 잠시 비틀 거리다가, 본넷트에 손을 짚고 간신히 버텨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딴 장난을?! 기가 막혀서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매끈하게 잘 빠진, 그리고 햇빛이 반사되어 우아하게 반짝여야 할 은색의 차체 위에는 낯 뜨거운 포즈로 있는 여자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손가락으로 그 중 하나를 잡아서 뜯어보려고 했는데 대체 뭐로 붙였는지 말끔하게 떼어지지 않고 허옇게 자국이 남아있다.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별로 들어가 있지도 않은데, 아예 잔뜩 풀려버려서 후들후들 떨린다. 본넷트에 손을 짚고 있지만 않았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이, 이걸 도대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신의 차에 이런 크나큰 상처를 남겨놓다니. 차에 다닥다닥 달라붙어있는 여자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유리 자신의 심장에도 저 여자들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난다. 유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차체를 더듬어가며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손가락 끝에서 자꾸 거치적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뒷목이 뻐근해 오고 있었다. 대체 어떤 년인지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내가 그놈의 손가락을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운전선 문 쪽까지 걸어온 유리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다가 문득 운전석 창문에 빨간색 립스틱 - 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 로 적힌 글씨를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글씨를 천천히 읽는 유리의 손에서 차키가 툭 떨어진다. 뒤통수 전체가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한 손으로는 뒷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차체를 짚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검회색의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차키가 눈에 들어온다. 금방 본 빨간색 글씨들이 그 검회색 아스팔트에 천천히 떠오른다. - 어때? 네가 좋아하는 여자들^^ 모셔오느라 좀 고생했어. 잘 먹고 잘 살아라. “저엉…수우……여언…너 진짜….” * * *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 무릎 위로 한 뼘 올라온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긋 웃으며 유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유리는 입에 가득 머금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옷을 입고 회사까지 오다니, 간도 부었네. 그렇게 생각하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자가 빙긋 웃는다. 눈길을 한 번 주고, 말도 한 번 섞고, 미소도 한 번 보여주고. 그리고 뒤를 돌아 커피 자판기 쪽으로 향한다. 힐의 날카로운 굽이 바닥을 지그시 밟는다. 발목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올라가는 선이 곱다. 이렇게 회사에서 다시 만나니 확실히 어제 봤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회사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 나도 감이 많이 떨어졌나 봐. 창문 밖으로 담뱃재를 떨구며 생각했다. 자판기 앞에 선 여자는 고개를 숙여 금방 나온 커피를 꺼내고 있었다.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어제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이 좋은 점심시간에 휴게실까지 와서 커피를 뽑아 먹을 리는 없을 터. 자신의 뒤를 따라온 여자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속마음이 다 보이는 거짓 몸짓을 꾸며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웃겨 유리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에서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래서, 네가 그렇게 수연 씨한테 악랄하게 굴어서 얻은 게 뭔데? “평화?” - ……. “마음의 안식.” - ……. “조용함?” - ……. “그리고 상처만 남은 내 아우디.” - 야, 넌 말이야. “응?” - 내 친구지만 개…가 아니라. 엄청 나쁜 여자구나. “오야. 칭찬 고맙다.” 다 펴버린 담배를 창틀에 문대서 꺼버리고, 쓰레기통에 대충 집어던졌다. 담뱃재로 시커멓게 변한 창틀을 보며 아버지께 문득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러게 누가 휴게실을 금연구역으로 해 놓으래? 참내. 나 같은 흡연자가 설 땅은 갈수록 좁아지는구나. 여자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든 채로 웃으며 유리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리도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 주말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거야? “주말 내내는 아니고, 일요일 밤에는 나가 놀았지만.” - 차는? “맡겨놨어, 고진에다가. 혀를 내두르더만. 초강력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 같다고. 어이가 없어.” - 거참. 수연씨도 얼마나 맺힌 게 많았으면 그렇게까지…. “이봐요. 나도 당한 게 많거든요?” - 네가 당해봐야 얼마나 당했다고 그래? “허, 아무도 내 편은 없군.” 기가 막히듯이 말하는 유리의 옆에 여자가 선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회사에서 뿌리는 향수와, 놀러갈 때 뿌리는 향수가 다른가 보다. 어제 뿌린 향이 조금은 묘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향이라면 지금 향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상큼한 향이다. 풋풋한 스무 살들이나 뿌리고 다닐 그런 향수. 유리는 전혀 다른 여자의 향을 맡으며 속으로 여자의 내숭을 비웃었다. 향수를 다른 걸 뿌린다고 성격이 가려지나, 놀기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만. - 어쨌든, 오늘 밤에 볼 거야? “아니.” - …그래도 오랜만에 애들 보는 건데, “됐어. 재미도 없고.” - 야, 애들이 너 꼭 데리고 오라고 했단 말이야. “왜, 또 거기 가서 날 앉혀놓고 무슨 설교를 늘어놓을 작정이신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너네들이 딱 그 꼴이야.” - ……우리들은 다 널 생각해서, “됐어, 그런 것. 정말 날 생각한다면 그냥 내버려 둬라. 난 바빠서 끊는다, 이만.” - 권유…! 다급하게 유리의 이름을 부르는 태연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핸드폰 액정의 불빛이 서서히 점멸해간다. 옆에 앉은 여자는 예상대로 커피는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유리는 여자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빼들었다. 쑥 잘만 빠져나온다. 말도 없이 빼갔으니 보통 이런 때면 이 인간 뭐냐는 식으로 쳐다봐야 정상이겠지만, 이 여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유리는 여전히 뜨거운 갈색 액체를 한 모금 꿀꺽 마신 후 말했다. “우리 회사 다녔어요?” “네.” “왜 말 안했어요?” “그냥요.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더라구요.” “아아.”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는 뜨거운 커피는 묘한 맛을 입 안에 남겨놓고 사라졌다. 이 안에 설탕은 몇 스푼이나 들어갔을까. 프림은 또 얼마나 들어갔을까. 하루에도 수 잔씩은 뽑아 먹는데 정작 이 커피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 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입 안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다 똑같으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앞에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이 여자가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서 사는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만났다는 사실이 그 여자의 과거나 배경이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저 부르기 쉽게 이름 정도만 물어봤을 뿐. 그래서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안 놀랬어요?” “뭘요?” “같은 회산 줄 몰랐잖아요, 저. 금방 보고 안 놀랬냐구요.” 굳이 놀랄 이유는 없다. 그렇게 큰 의미가 있던 만남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대화를 몇 번 했던 게 전부다. 여자는 그 이상의 진전을 원하는 듯 했지만 유리가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예의상 전화번호는 주고받았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 원래대로라면 가는 길에 다정하게 안부 문자를 보내줬겠지만 그것도 하지 않았다. 관심이 가지 않고, 내키지 않아서 그랬던 건데 이 여자는 유리가 한번 쯤 튕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그 유치한 착각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결국, “그다지 깊게 신경 썼던 만남은 아니라서요.” 심드렁한 말투로 그렇게 말해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예의상 다른 말로 둘러댔겠지만 입에 발린 선의의 거짓말은 왜인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유리의 모습이 이 여자를 더 자극한 것 같다. 여자는 처음엔 당황한 듯 했지만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그럴 것 같았어요. 유리 씨라면.” 그제야 유리는 어제 밤에 이 여자의 이름을 듣고 자신이 왜 갸우뚱 거렸는지 알아냈다. 남자들의 입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거리던 이 여자의 이름을 언젠가 한번 가볍게 흘려들은 적이 있었다. 하도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전혀 다른 부서에 있는, 그리고 층도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이 여자를 보려고 일부러 구경 가는 동기 남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회사 내에선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사고에는 감정으로 인한 잡다한 사고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었는데, 그 문제의 그 여자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 건물 내에서 칭찬이 자자한 미모를 가진 여자가 자신과 비슷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그리고 그 여자가 어제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남자들이 탐낼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자와의 만남을 별 것 아닌 만남으로 치부해버렸던 사실이 놀랍다 못해 어색할 지경이다. 유리는 그럴 것 같았다며 웃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커피가 남기고 간 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하고, 잘 빠진 여자의 다리가 시각을 자극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남은 건 촉각인가. 촉각이라, 촉각. 유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사실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회사 내에서 미모로 손에 꼽히는 여자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유혹해대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는 걸까. 유리는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털어놓고 쓰레기통에 빈 종이컵을 던져 넣었다. “퇴근하고 여기서 한 블럭 떨어진 편의점 앞에서 만나죠.”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작게 중얼거리던 여자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걸어 나간다. 솔직하구나, 저 여자는. 유리는 약간씩 펄럭이는 치마의 끝자락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솔직한 여자가 편하다. 감정을 숨기는 여자는 골치 아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일이 다 알아채줘야 하고, 알아차려도 알고 있다는 건 표시를 내지 않고 자연스레 그 것에 맞춰주기도 해야 하고. 유리는 창틀에 세워놓았던 담뱃갑을 다시 들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의 끝에서 회색빛의 담배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입안에 가득 머금은 연기를 내뱉었다. 차츰 옅어지는 회색빛의 연기를 바라보는 유리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진다. …좀 더 솔직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맑은 하늘에 회색 연기는 묻혀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연기들이 있었던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썹이 아래로 휘어진다. 솔직했었더라면…. …그런데 대체 누가, 그리고 뭘 솔직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선배님. 여긴 금연구역이에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귓가에 덤덤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유리가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손가락에서 딱 한번만 빤 담배가 스르르 빠져나가고, 창틀에 꾹꾹 눌러져 생명을 마감하고선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젠장. 저거 돗댄데. 유리는 곡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속에 빨려 들어가는 담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리의 시선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점심시간 거의 끝났어요, 안 들어가실 거예요? 라고 웃으며 말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으랴, 라는 속담이 있지만 유리는 뱉을 수 있다.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을 향해 소리를 빽 지른다. “야, 인마.” “왜요?” “네가 금방 던진 담배가 나한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 아냐고.” 그런 거 내가 알게 뭐예요, 라고 적힌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날이 잔뜩 선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아직 대학생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신입사원. 그래서 그런가. 참 겁도 없는 것 같다. 야, 임꼬마. 유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담배가 장렬하게 전사한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거 돗대란 말이야. 돗대라고, 돗대. 부모님께도 드리지 않는다는, 그 돗대.” “돗대가 뭔가요?” 돗대도 모르냐? 입술을 씰룩거리며 묻자 여자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인다.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니다. 대체 얘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야? 유리는 빈 담뱃갑을 손으로 꼭 쥐어 구기고선, 불쌍한 담배 한 개비가 생을 마감하고 누워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던졌더니 쓰레기통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튕겨 나가 유리의 발 앞에 멈춘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빈 담뱃갑을 주어들고 쓰레기통 앞까지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는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저 고지식한 인간 같으니. 혀 차는 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인지 쓰레기통에 담뱃갑을 버린 여자는 뒤를 돌아 유리를 보며 딱딱한 어조로 말한다. “최 팀장님이 찾으세요.” “뭐? 야, 아직 점심시간까지 10분이나 남았어.” “급하신 일인 것 같던데요.” “…그냥 대충 둘러대. 나 안 보인다고.” “이미 말했는걸요? 선배님 휴게실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 봤다고.” 야 이 답답아! 그런 건 봐도 못 본 척 해야지! 네 직속 상사는 나야, 최 팀장이 아니라.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본 걸 왜 못 본 척 해요? 그리고 선배님 상사는 최 팀장님이시잖아요. 그럼 선배님도 최 팀장님에게 잘 보여야 하실 테고. 그런 최 팀장님이 선배님의 소재를 묻길래 답한 것뿐인데, 그게 잘못된 건가요? 유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 내가 너에게 뭘 바라겠냐. 유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을 출입문 쪽으로 빙글 돌렸다. 그래. 가자, 가. 갑시다, 임윤아 씨. 그깟 10분 더 봉사해 주고 말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마른 몸을 앞으로 밀었다.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약간 몸이 기울어졌던 여자는 이내 몸을 다시 꼿꼿이 세우더니 제가 혼자 걸어갈 수 있으니 놔 주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유리는 그 말에 어깨에 댔던 손을 뗐다. 여자의 손에 의해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장신의 최 팀장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얼른 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앞에 가던 여자는 금세 잽싸게 다다닥 뛰어서 최 팀장 옆으로 간다. 너는 왜 안 오냐?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최 팀장에게 억지로 한 번 웃어주고 유리는 발걸음을 떼었다. 유리문이 닫히면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이 몸을 떤다. - 커피는 잘 마셨어요?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들었네. 저녁엔 들을 수 있겠죠? 권유리 씨, 라고 부르는 최 팀장의 목소리에 유리는 황급히 서둘러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원하는 이름이 떠 있지 않아서 은근슬쩍 드는 서운한 느낌은 억누를 수가 없다. 답장 정도는 보낼 줄 알았는데 끝끝내 보내지는 않는다. 하긴, 계좌번호와 수리비만 달랑 적힌 문자에 무슨 답장을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욕이라도 보낼 줄 알았다, 정수연이라면.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바지 주머니에 온갖 신경세포들이 다 몰리는 것 같다. 자신이 작성해서 제출한 보고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최 팀장의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욕 문자가 오면 같이 욕 문자를 보낼 예정 이였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아쉬운 거라고, 그렇게 애써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그 합리화가 더 마음을 쓰리게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 * * 여자와 함께 간 곳은 레스토랑도 겸하는 와인 바였다. 오랜만에 찾은 그 곳의 직원은 유리에게 그 동안 왜 안 왔냐고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했고, 반면에 유리와 함께 간 그 여자에겐 아팠던 건 괜찮냐고 물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레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웃는 여자의 앞에 걸어 나가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화려한 색으로 페인팅 돼 있는 의자도, 세팅이 끝난 깔끔한 연갈색의 테이블도, 푸르스름한 조명도, 그리고 웃으며 하늘색의 메뉴판과 와인리스트를 가지고 오는 직원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짧은 기간 내에 변하길 바란다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가져온 메뉴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유리 씨는 어떤 와인 좋아하세요? 저요? 네. 유리 씨가 좋아하시는 걸로 마시죠. 하지만 저도 딱히 즐겨 먹는 건 없는데요, 와인을 좋아하진 않아서. 유리의 말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직원과 이야기하는 걸 보면 단골인 것 같은데, 와인 바의 단골인 사람이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게 이상한가 보다. 유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여자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냥 분위기가 좋은데다 사장이랑도 아는 사이라서 왔을 뿐이에요. 레스토랑도 겸해서 와인 하나만 마실 일도 없잖아요. 주위 친구들도 다 여기 좋아하고. 그 때마다 저도 추천만 받는지라.” 달리 끌리는 것도 없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하고 싶지도 않다. 유리는 메뉴판을 덮었다. 저 멀리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종업원은 유리가 메뉴판을 덮자마자 잰 걸음으로 가까이 와 무엇을 주문하실 거냐고 묻는다. 유리는 메뉴판을 종업원의 손에 쥐어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코스 메뉴로 주세요. 푸아그라랑 양갈비로요. 일단 목 좀 축이게 드라이 와인 하나 가져다 주시구요. 그, 뭐지. 오레무스였나? 아, 그냥 아무거나 가져다주세요. 와인을 알아야지 뭘 시키든 말든.”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고선, 스스로도 놀래서 흘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은근히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하고 있는데, 여자는 유리의 말투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 신경을 쓰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애꿎은 유리의 짜증의 희생양이 된 종업원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유리는 언제 그렇게 짜증냈냐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맞은편의 여자에게 물었다. 푸아그라 싫어하진 않으시죠? 싫어하면 해산물로 바꿀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조근조근 말하는 여자의 말에 유리는 알아들었냐는 듯 종업원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묘하게 순간 일그러졌다가, 유리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걸 알자 다시 재빨리 얼굴을 편다. 극과 극을 오고가는 유리의 말투와 표정에 혀를 내둘렀을 종업원에게 뭐해요? 주문했잖아요, 라고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제야 허둥지둥 주문을 확인하고 사라진 종업원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뒤로 살짝 몸을 기대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는 등을 적당히 받치고 있다. “그래도 자주 왔으면 기억나는 와인은 있지 않아요?” 여자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계단 옆의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와인셀러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가득찬 와인들. 오늘은 용케도 사장이 있는지, 유리쪽을 향해 등을 돌린 채로 와인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의 뒷모습이 보인다. 오늘도 핑크색 넥타이를 차고 있으려나. 사장이 건축을 공부했던 사람이라 내부 인테리어가 좋다. 약간 어두침침한 조명도 좋고, 인테리어도 좋고, 와인 바치곤 캐주얼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왔지 와인을 마시러 온 것은 아니었다. “전 제가 관심 가지지 않는 건 머릿속에서 바로 지워버리는 타입이라.” “그래요, 알고 있어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대답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는 걸 물어보는 이유는 뭐야. 아니, 그것보다 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까부터 안다느니, 나라면 그럴 것 같았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괜히 별게 일일이 다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인다. 정작 당사자인 유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앞에 두고 감정의 변화가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하게 자꾸 짜증이 나네, 라는 생각만 계속 할 뿐. 앞에 놓인 투명한 유리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서 몸 안을 적신다. 조금은 냉정하게 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찌됐건 낯선 사람 앞에서 이유도 없이 계속 짜증을 내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죠?” “뭐….” 굳이 궁금하진 않아요, 라는 말을 하려는데 전채요리와 드라이 와인이 나온다. 오레무스. 내 기억이 맞았네. 와인 병에 붙은 라벨을 확인하고, 오픈한 후 여자의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전 그 전부터 유리 씨한테 관심 있었거든요.” “그래요?” “네. 자주 마주치기도 했었잖아요. 유리 씨 팀에서 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몇 번. 그래서 사실 어제 만났을 때도 유리 씨 처음보고 알아차렸어요. 유리 씨는 절 못 알아보셨지만.” “미안해요.” “아니요, 유리 씨가 미안해하실 건 없죠. 제가 그만큼 매력이 없었다는 뜻이니까.” 황금색과 엇비슷한 색의 액체가 든 잔을 들며 여자가 말한다. 본인에게는 꽤나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그만큼 당당하다는 뜻도 된다. 정말 본인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저렇게 웃으면서, 그리고 여유 있게 말할 수 있진 않다. 뒤이어 여자는 아주 잠깐의 투정을 했다. 솔직히 처음엔 당연히 알아봤으리라 생각했다나. 정말 모른다는 표정으로 이름을 물어보는 유리의 태도에 허탈했었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큼 어필하지 못했던 자신의 탓이라고 합리화시켰다고. 유리는 그런 여자의 투정에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제가 원래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라는 그럴 듯한 변명을 하면서. 그런 변명이 먹혀든 건지, 아니면 변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괜찮다며 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푸아그라가 나왔다. 갈색의 소스가 묻은 작은 요리를 다시 작게 칼질을 해 몇 등분으로 나누는 동안 여자는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말이 많다. 수다는 여성의 전용물, 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는 순간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유리조차도 말이 굉장히 많은 편이지만 오늘은 그다지 입을 놀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제법 조리 있게, 꽤나 많은 단어들을 쏟아 붓고 있는 여자는 흥분하면 이리저리 횡설수설 하던 수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목소리가 조금 더 이것보다 사근사근하지만 말은 이만큼 조리 있게 하지는 못한다. 꽤 교양 있는 단어만 골라 쓰려고 애쓰는 여자와는 달리 수연은 생각나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죽죽 내뱉는 타입이었다. 수연의 변명에 의하면 유독 유리 앞에서만 그렇게 된다던데, 그건 사실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논외. 거기다 무엇보다, 이 여자만큼 말이 많지는 않았다. 유리와 수연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지 않는 이상, 보통은 떠드는 쪽은 유리였고, 수연은 주로 경청하는 쪽에 속했다. 한 달 동안 그 역할 분배에 익숙한 탓인지 유리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처음엔 그 흐름을 잘 따라갔는데, 아주 잠깐 집중하지 못하는 동안 유리는 말의 흐름을 놓쳐버렸다. 그래서 결국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듣는 척을 하는 상황에까지 와버렸다. 무슨 내용인지 알 턱이 없으니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지루해지고 있다. 좋아하던 푸아그라도 오늘은 무슨 맛인지 맛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때마침 울린 여자의 핸드폰이 구세주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루해하던 유리는, 통화하고 있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실내를 죽 둘러보았다. 사장과 눈인사를 한번 나누고, 벽면의 셀러를 한번 구경했다가, 옆 자리에 앉은 커플들도 한 번 구경하고, 그리고 눈을 빙빙 돌려 이제 막 계단에서 내려오는 여자의 다리도 한 번 감상했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빙빙 돌던 유리의 시선은 종국엔 가운데에 위치한 ㄷ자 형의 바에 정착했다. 바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한번 바라보던 유리는 문득 낯익은 여자의 옆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의 귀에는 조명에 반짝이는 은색 귀걸이가 달려있다. 귀에서부터 떨어지는 목선과, 그 목선에 이어진 어깨선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고 옆에 앉은 남자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도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종업원이 메인요리인 양고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맞선. 여전하고만. 저 여자는. 멀쩡하게 잘 사네. 통화를 다 끝낸 유리의 파트너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흘끗 수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구나, 너. 과거에도 이랬었다. 그 때에도 수연은 이곳에서 남자와 맞선을 보고 있었고, 유리는 여기에서 좀 더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수연을 모른 척 하지 않고 다가갔던 것은 남자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가 제법 따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에서, 나 지루해 죽겠어요 라는 눈으로 억지웃음을 지어내는 데 왜 몰라보는 걸까 라는 생각에 아는 척을 했었다. 그 때처럼 수연은 여전히 남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지만, 여전히 지루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전의 그 남자처럼 수연이 지루해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유리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웃고 있는 수연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네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수연의 눈이 일순 커진다. 이별다운 이별도 아니었고, 사랑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으니 둘 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다. 아파야 할 일도 없고 슬퍼해야 할 일도 없다.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 된다. 권유리는 정수연을 만나기 전으로, 정수연은 권유리를 만나기 전으로. 그래서 이별했다고, 사랑이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다고 술을 마시며 울지도 않았고 밥을 거르고 끙끙 거리는 미련한 짓도 하지 않았다. 불과 이틀 사이에 야위었다거나, 표정이 퀭해졌다거나, 몰골이 말이 아니게 변했다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수연 역시 마찬가지. 저 멀리에서 유리를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혈색도 참 좋고, 야윈 것도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아름다워 진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어날 정도로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저 여자의 눈에 비춰 보이는 유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짜증나. 넌 무슨 생각으로 더 예뻐진 거야? 그러니까, 애초에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건 당연한 건데 - 정작 유리 자신도 멀쩡하게 있으니까. - 이상하게 유리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리쪽을 향해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던지는 미소 하나하나가, 비록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고 해도 자신을 향한 미소가 아니라는 사실에 괜히 열 받는다. 저 미소를 눈앞에서 봤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곁눈질로 흘끔흘끔 훔쳐보고 있다. 유리를 바라보던 수연이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남자를 바라본다. 의도적인 시선 회피에 울컥해서 다리가 멋대로 움찔거린다. 눈앞에 놓인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억지로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했지만 그래도 시선은 자꾸 수연을 향한다. 재미없어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왜 참고 있는 건지. 당장 뛰어가서 손을 잡고 끌고 내려오고 싶지만 이제 그럴 순 없다. 남자의 뺨을 갈기며 임신이 어쩌고저쩌고 소리 지르는 연기도 다시 할 순 없다. 만약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상황이 허락이 된다면, 이번에는 그 남자에게 정수연이 시킨 짓이라는 말을 하며 골탕 먹이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유리는 칼로 좋게 썬 양고기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지난 한 달간은 정말 권유리수난시대 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날들이었다. 산 지 2달도 되지 않았던 아우디는 그 여자의 마티즈 때문에 흠집이 생겼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가 취했다해서 억지로 집에까지 데려다줬더니 신발을 주워오라며 개 취급을 하질 않나, 업어주지 않겠다는 유리의 말에 옷을 벗어 던지려는 추태까지 부렸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다 거짓말.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게 억울해서 결국 가벼운 몸살까지 걸렸었는데, 그 와중에도 약속 지키겠다고 굳이 데리러 갔더니 바람을 맞히고, 대작 좀 한번 해보자고 덤벼드는 여자와 대작 한 번 했다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그 다음날 아침에는 집 안에서 살해당할 뻔 했다. 지금도 눈깔을 파버리겠다며 칼을 들고 덤벼드는 수연의 희번뜩한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기억도 안 나는 일 가지고 데이트 강간이네 어쩌네 하면서 경찰서에도 갈 뻔했고, 겨우 무마시킨 경찰서 건은 정신병원으로 이어져서 벌건 대낮에 눈썹이 휘날리도록 도망가는 일도 했었다. 희진과 수연의 이해할 수 없는 신경전에 숨 막힐 뻔 했던 적도 있었고, 그 여자와 방을 같이 안 쓰겠다고 내기 한 번 했다가 온 몸에 화상을 입을 뻔 하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꼭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만나는 내내 병신아 등등의 욕은 그저 애칭처럼 들어왔고 애 취급당한 적도 한두 번도 아니고, 정강이가 까인 적도,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적도, 그 작은 손으로 등짝을 후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한 달간 정말 당하기도 된통 당했다.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라 주위에서 웬만하면 유리의 성격을 건드리는 짓은 하지 않는데, 정수연이라는 여자는 한 달 내내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그런 짓을 했다. 이상하게 이렇다 할 반박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저 당하기만 했던 그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이제야 겨우 탈피했다. 더 이상 뒤통수를 맞을 일도, 술주정을 받아줄 일도, 정강이를 까일 일도 없다. 그 작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욕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러니 홀가분하다. 홀가분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홀가분하다. 홀가분해야…하니까. 시선을 돌리던 수연이 다시 흘끗 유리를 바라본다. 덕택에 다시 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유리가 자신을 아직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 놀랬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재빨리 시선을 회피한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씨발, 홀가분하긴 개뿔이. 난 왜 짜증나게 자꾸 쟤를 쳐다보고 지랄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할 참이다. 시선이 또다시 마주치니 저 여자 입에서 나오는 병신아, 라는 말이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정말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몸짓에 놀란 여자에게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재빨리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발끝에 힘을 주고 꾹꾹 걸을 때마다 그 발목을 잡는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고 나서 별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통해 얼굴을 확인했다. 조명 아래 비춰 보이는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제껏 줄곧 이런 표정으로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며 수도꼭지를 틀려고 손을 뻗는 찰나, 핸드폰이 울려 대서 전화를 받았다. - 선배, 어디세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화면 위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임윤아라고 적힌 글자를 바라보며 유리는 또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 좀 받을 걸, 라는 후회를 지금 해봤자 이미 늦은 후. 몸을 돌려 세면대에 살짝 몸을 기대고, 한 쪽 손으로 세면대의 끝 부분을 잡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 왜라뇨!! 지금 최 팀장님이 선배님 찾고 난리가 아녜요. 저녁을 뭘 그렇게 늦게 먹어요? 빨리빨리 먹…. “나 오늘 안 들어 갈 거야.” - 네? “회사 이제 안 갈 거라고. 나 퇴근했어. 퇴근이 6신데 대체 왜 또 날 찾고 난리야?” - 오늘 야근해야 한다고 아까 최 팀장님이 말씀 하셨었잖아요. “시끄러워. 난 안가. 야근 따위는 무슨. ” - 선배니임! “됐고. 그냥 최 팀장은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내일 보자.” 수화기 저 너머에서 권유리 씨면 좀 바꿔봐요, 라는 최 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유리는 재빨리 슬라이드를 닫아버렸다. 자신이 돌봐야할 신입사원은 이제 땀을 뻘뻘 흘리며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는 최 팀장에게 유리를 위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유리는 핸드폰을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은색의 관 입구에서 투명한 물줄기들이 세차게 떨어진다. 세면대의 끝에 손을 짚고 몸을 약간 숙인 채로 멍하니 물줄기들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오전에 버려버린 그 죽덩어리들이 생각났다. 밖에서, 남자의 옆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그 여자는 자신의 수고가 그런 식으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껏 생각해서 죽을 사다준 날에 자신에게 모욕을 준 것도 모자라서 그 죽마저 딱 두 숟갈만 퍼먹고 버렸다는 걸 알게 되면, 그렇다면, 꽤나 슬픈 표정을 지어줄까. 왜 그랬냐는 듯 질책하는 표정으로 바라볼까. 아니, 꼭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금요일 날 그렇게 헤어진 후에 그 여자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았을까. 홀가분하다고 웃었을까. 그 인간 보기 싫었는데 잘됐네, 라고 생각했을까. 결국 내게 된 수리비를 아까워하며 주말을 보냈을까. 그것도 아니면, 유리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썹의 끝이 쳐져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꽤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너도 이렇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까. 손으로 얼굴을 스윽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살결이 까칠까칠하다. 잠을 못 잔건 아니지만 깊게 잠들지는 못했고 계속 악몽만 꿨다. 삼시 세끼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긴 했지만 그리 많이 먹지도 않았고, 챙겨 먹은 것도 빵이나 라면이나 김밥 정도였다. 그나마 오늘 점심 때 회사 구내식당에서 먹은 밥이 정말 밥다운 밥이었다. 태연과 일요일에 스쿼시를 치러 가기도 했지만 1시간 내내 계속 공을 제대로 쳐내지 못해 공만 죽도록 맞다 왔다. 수연을 만나기 전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요일 밤에 어디 낚을 사람 없나 싶어 자주 가던 바도 갔지만, 그 곳에서 지금 현재 자신과 함께 이곳에 온 여자와 잠깐 대화를 나눈 것 빼고는 이렇다 할 수확도 없었다. 어제따라 유난히 자주 가던 바의 물이 좋지 않아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엮여볼려고 굳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회사에서도 미모로 유명한 여자를 눈앞에서 그대로 놓아버렸겠지 싶다. 제 때 제출하라던 보고서도 토요일에 집에 있는 동안 작성해서 시간에 맞춰 냈지만 오류 투성이였고, 그 덕택에 야근을 해서라도 오류난 거 고치라는 최 팀장의 노한 목소리도 들어야 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수연과 그렇게 되고 나서 잘 지내지 못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다만 그 내용이 형편없을 뿐이다. 이상하게 자꾸 짜증이 나는 것도, 아름다운 여자를 앞에 두고 집중 하지 못하고 자꾸 딴 생각하는 것도, 그런 형편없는 일상의 연장선이다. 하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 유리는 애써 이게 정수연 탓은 아니야, 라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여자 덕택에 이런 식으로 생활할리는 없다. 그것도 제대로 사랑한 적도 없는 여자 때문에 그럴 리는 절대 없다. 없어야만 한다. 유리는 볼살을 자신의 손으로 툭툭 치며 주문 걸듯이 중얼 거렸다. 나는 그냥 무기력할 뿐이야. 날도 덥고, 최 팀장은 구박하고, 신입이라는 애는 전화해서 잔소리나 해대고. 이것저것 겹쳐서 그냥 무기력해진 것 뿐. 그래, 그런 것뿐이야. 왠지 축 쳐진 기분의 끝에서, 유리는 결국 세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세면대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꼭 쥔 채로 화장실에서 다시 나왔다. 화장실 입구 저 너머에 앉아있는 수연의 옆얼굴이 보인다. 한 순간 시선을 뺏겨버린 유리가 주춤하는 사이, 문득 누군가가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말을 걸었다. “오, 권유리! 오랜만이네?” 움찔 놀라며 시선의 방향을 바꾸었다. 자신보다 약간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유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의 남자. 박성훈? 입을 오물거리며 그 이름을 말하자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근육이 적당히 잡혀있는, 덩치가 좀 있는 남자가 입고 있는 정장의 맵시가 낯익다. 유리는 흘끔 곁눈질로 수연이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고, 화장실 벽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수연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 같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짙은 눈썹.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와 크고 우뚝 솟은 코.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 남자는, 과거에 종종 함께 어울렸던 무리 중 한명이었다. 이 남자도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서 어린 날들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다만 노는 게 너무 지저분해서 어느 순간부턴 유리와 태연이 일부러 멀리했던 남자다. 놀기 좋아하는 건 유리나 태연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남자처럼 지저분하게 놀지는 않았다. 그 언젠가, 클럽에서 놀며 마약을 하는 건 기본이고 각종 최음제도 종류별로, 효과별로 꿰뚫고 있는 이 남자와 자신들은 격이 다르다며 태연과 이야기했던 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근 1년 반 만이다. 이 남자를 다시 만나는 건.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지 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는 남자가 오랜만에 만났다고 웃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더군다나, 아무래도 이 남자가 수연의 맞선 상대인 것 같다. “너 뭐야. 네가 왜 여깄어?”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유리의 모습에 남자는 그 표정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며 킥킥 웃어댄다. 원래대로라면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쳤겠지만, 유리는 수연의 맞선상대가 이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야 했다. 남자가 입고 있는 정장이 아까 수연을 바라보면서 입고 있는 정장과 같고 그리고 때마침 이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금, 수연의 옆자리가 잠시 비워져 있지만 혹시나 아닐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너 여기 웬 일이냐?” “소개팅. 아, 부모님이 주선해 준 자리니까 맞선?” 망할. 유리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음을 남자의 입에서 확인하고 욕을 지껄였다. 유리의 입에서 자연스레 튀어나온 욕에도 이 남자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겠지. 네 놈이 평소에 쓰고 다니는 말이니. 곁눈질로 다시 수연을 바라보았다. 입을 가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품새가 하품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수연의 부모님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놈과 맞선 자리를 주선해 주신거야. 그냥 집안만 보고? 외모보고? 번듯한 직장 따위도 없는 놈인데, 대체 왜? “너 맞선 같은 것도 보냐? 이제? 한물갔구만.” “나도 결혼은 해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 수는 없는 거고. 우리 아버지가 결혼 안하면 유산 한 푼도 안주겠다는데 어쩌겠니. 게다가 성병 때문에 병원 들락날락 거리는 것도 좀 지겹고.” “…지랄한다.”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저 오랜만에 듣는 이 재수 없고 느끼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그런 것이라고, 유리는 또 다시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 시켰다. 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 자리에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 유리는 그럼 난 간다, 라는 말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유리의 손목을 남자가 다급하게 잡는다. 남자의 손이 닿은 손목 언저리가 이제 썩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마주친 김에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너네 외삼촌이 하는 호텔 있잖냐.” “어.” “그거 요즘도 스위트룸은 예약 한달 후 까지 밀려있고 그러냐?” “몰라.” “지금 가면 월요일이니까 있겠지?” “왜?” “왜긴 왜야, 뻔 하잖아.” 뻔 하잖아, 라고 하며 자신의 손을 마주 잡더니 꼭 쥐고 마찰을 시키며 공기 새는 소리를 낸다. 과거에 여자들의 몸을 보며, 저 여자와 한번 하고 싶다고 낄낄 댈 때마다 보였던 그 손짓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아주 잠깐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은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변태 새끼. 치사하게 또 뭐 탔니?” 그랬으면 그 손가락을 잘라버릴 테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굳이 그런 거 타지 않아도….” 그런 약에 의존할 나이는 지났지, 이젠. 능글맞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듣기 싫어 몸을 돌려 화장실을 걸어 나왔다. 정수연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라고 생각하냐? 너랑은 격이 틀려,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꾹꾹 눌렀더니 그 말들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난리가 아니다. 유리는 마침 앞에 지나가는 종업원의 쟁반 위에 있는 컵을 냅다 뺏어들고 꿀꺽 다 마셔버렸다. 당황하는 종업원에게 다시 빈 잔을 돌려주고 잠그고 있던 정장 마이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발걸음을 옮겼다. 또 시선이 느껴진다. 유리는 여전히 시선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파트너가 있는 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웃으며 바라보는 여자의 맞은편에 앉는 대신에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여자의 바로 옆에 섰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여자의 앞에서, 애써 웃는 얼굴을 보여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기분도 별로고, 이만하면 배도 좀 채워진 것 같은데,” “네?” “우리 집에 갈래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가 자신의 옆 자리 의자에 올려놓은 핸드백을 대신 들어주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듯 한 여자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좋아요, 라고 말하며 일어선다. 다 먹지도 않은 양고기를 놔둔 채로 일어나는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갔다. 이번에도 여전히 발목을 잡는 시선이 느껴진다. 제법 그 시선이 따갑게 뒤통수에 꽂혀서, 유리는 흘끔 뒤를 돌아 자신을 따라다니는 시선을 확인했다. 유리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회피하는 수연의 얼굴이 보인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는 옆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가, 다시 몸을 돌려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귀 언저리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네가 어떤 놈이랑 자든 말든. 한 손에 들고 있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대 위에 휙 던져놓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알게 뭐야. Hissing 16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늘게 된 건 인내심이다. 인내심. 사실 수연은 그 전에는 인내심이 극도로 없는 성격에 속했다. 청소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이라든가, 맑은 날에 교정을 거닐며 학생들과 웃으며 잘 지내는 모습 따위를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접한 교사생활은 상상이상으로 참혹했다. 선생님이라 부르지도 않고 뒤에서 정수연이 어쩌고저쩌고 숙덕숙덕 댄다던가, 교탁에 서면 뻔히 보이는데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교과서 밑에 만화책을 숨겨놓고 킥킥 댄다던가, 책상 밑에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낸다던가 등등. 보이는 족족, 느끼는 족족 두들겨 팼다면 아마 지금쯤 수연은 이미 매스컴을 몇 번 탔을지도 모른다. 폭력교사로 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도 몇 번 되었을지도. 애들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힘든데 행정업무는 뭐가 그렇게 많은지. 아이들을 가르치러 학교로 왔는지, 사무 처리 하러 학교를 왔는지 모를 정도로 쏟아지는 업무들과 조금만 잘못해도 끊임없이 쪼아대는 교장, 교감까지. 하루에도 수번 씩 이 정도 참아 온 게 아까워서라도 참고 가자, 라고 중얼거리던 것도 몇 달. 어느 정도 짬밥이 생기니 그 정도의 업무 스트레스는 넘길 정도의 인내심이 생겼다. 그리고 덕택에 덩달아 인간관계의 다양한 사건 사고들도 웬만하면 참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수연은 오늘, 자신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제껏 인내심이 늘었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화면에 떠있는 어지러운 숫자의 조합들.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결국 정말로 계좌번호와 금액을 적어서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받고난 후의 수연의 표정은 다양했다. 처음에 떠오른 권유리, 라는 글자에 얼굴에 금세 떠오르는 화색을 애써 지우려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나열되어 있는 숫자의 조합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 숫자가 정말 계좌번호라는 걸 알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가, 계좌번호의 끝에 있는 공이 수없이 많이 붙어있는 금액을 보고 종국엔 자신이 교무실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욕을 내뱉었다. 왜 욕을 해, 교감 선생님이 들으시면 어쩌려구! 기겁을 하며 옆 자리에 앉은 미영이 옆구리를 찔러대지만 않았더라면 그 뒤로도 아마 수도 없이 많은 쌍시옷 단어들을 내뱉었을 게다. 수업시간이라 교무실은 한산하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수연이 좋아하는 점심시간. 밥을 먹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유롭게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 좋아한다. 오늘은 미영의 옆 반 담임의 부탁으로 오후 자습감독을 맡게 된 바람에 방학 보충학습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금요일부터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해 오늘은 밥도 먹지 않고 여교사 휴게실에서 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금방 받은 문자 때문에 그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핸드폰을 닫았다. 뜨끈해진 본체를 책상위에 던져놓은 후 볼을 책상에 대고 엎드렸다. 옆으로 돌아간 세상 속에 검은색 슬라이드 폰이 눈에 보인다. 손가락으로 툭툭 화면을 건드렸다. 오늘로서 정확히 한 달 째. 한 달 전 이 시간 즈음에 유리가 태연과 함께 교무실을 찾아왔다. 빨간색 피자 배달원 복장을 입고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태연에게 타박을 당하던 그 여자는, 이래저래 여러 번 만나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다정하고, 귀여웠었다. 금세 흥분해 버리는 성격도 그렇고,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은 문자나 말들을 뱉어냈던 것도 그렇고. 예전 같았으면 TV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의 말들을, 그 여자가 내뱉으면 이상하게 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즈음에는 심지어 좋아하고 있었다. 권유리가 첫사랑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헛구역질을 했던 정수연 이였는데, 결국 그 짧은 기간 내에 일종의 첫사랑이 되어버렸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찾아온 첫사랑이라니. 그것도 이제껏 누군가와 사겨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래도 과거 연인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는데도 이제야 첫사랑이 생겼다. 유치한 감정 놀이가 재밌냐며 미영에게 무어라할 입장이 아니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고 다소 비정상적으로 찾아온 첫사랑이여도 첫사랑은 첫사랑인 모양인지 결국 이어지지 않았다. 사랑에 관한 모든 속설을 믿지 않는 수연이지만 왠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 속설은 믿고 싶어서, 일요일 오후에 멍하니 희진이 나온 드라마 재방송을 보다가 그 속설만큼은 믿기로 결심했다. 일종의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렇게 된 게 자신과 유리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맞게 잘 진전되던 감정들이 제대로 싹 틔우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은 그 감정들을 키워오던 자신들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수연은 핸드폰의 화면을 두들기던 손가락을 멈추고 지그시 액정을 누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수연의 중얼거림을 얼핏 들은 미영이 몸을 일으키며 되묻는다. 볼에 닿은 책상이 너무나 차가워서 안에 있는 이까지 시리다. 뭐라 했어? 나한테 뭐라 한 거 아니야? 고개를 들고 자세를 고쳐 앉은 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토요일 저녁에 보았던 연예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한 의류화보 촬영장에서, 맵시 좋은 옷을 입고 앉아있었던 여자는 인터뷰어에게 그렇게 말했다. - 조만간 짧은 머리도 해보고 싶어요. 짧은 단발머리. 누가 긴 머리도 좋지만 요즘은 짧은 머리도 좋다고 했었거든요. 화사한 눈웃음을 보이며 말하던 여자에게 인터뷰어는 혹시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냐고 짓궂게 물었다. 에이, 그런 걸 왜 물어봐요. 비밀이에요, 비밀. 나지막하게 웃던 여자는 같은 여자가 봐도 귀여웠다. 희진 씨는 단발도 잘 어울릴 거예요, 예쁘시잖아요. 아, 정말요? 칭찬 감사합니다. TV에서 흘러나오던 맑은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토요일의 밤,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의 웃음을 TV를 통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리도 있을지도 모른다. 김희진이 지칭하는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끝내 방송에 나오지 않았지만 수연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머리가 좋나. 그런 소리는 나한테 한 번도 안했는데. 머리를 단 한 번도 짧게 잘라보지 않았다는 수연의 말에 짧은 것보단 머리가 긴 게 더 예쁠 것 같아, 라고 말하던 여자였다.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미영은 몇 번이고 정말 밥을 먹지 않을 거냐고 물어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이 시간에 유리 씨는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라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영이 교무실에서 빠져나간 후에서야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서 걸어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이면 직장에 있는 걸 알 테니 연락을 할 사람은 없다. 사실 최근에야 학교에 와서도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는 버릇이 든 것이지 그 전에는 핸드폰은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고 다녔고, 심지어 연락 올 곳도 없는데 괜히 배터리만 닳게 하는 건 싫어서 아예 꺼놓은 적도 있었다. 최근에 핸드폰을 쥐고 다녔던 버릇이 생긴 건 일하는 중간 중간에 문자를 보내던 유리 때문이었다. 유리가 문자를 자주 보내기 전에는 유리가 언제 또 연락했는데 못 받으면, 그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꼭 쥐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 유리에게 그런 식으로 불쑥 연락 올 일은 없다. 수리비는 주기로 합의했고, 계좌번호까지 알아냈으니 돈을 보내고 난 다음 보냈다는 문자를 수연이 먼저 하고 나면 유리와 수연 사이에 이어져있던 줄은 완전히 끊어진다. 미영에게는 이미 아까 여교사 휴게실에서 잠 좀 자고 있을 테니 자습 시작 종 치면 알려달라고 이야기를 해놔서 핸드폰을 두고 가도 별 일은 없을 것이다. 수연은 다시 몸을 돌리고 발을 뗐다. 한 번, 두 번. 아, 근데 그 인간이 혹시 계좌번호를 잘못 알려줬다거나 그래서 다시 연락하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럴싸한 핑계. 수연은 결국 딱 두 번 발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몸을 돌리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멍청한 권유리. 금요일 날 낑낑대며 유리의 차에 폰팅 종이들을 도배하고 돌아온 후로 수연은 자신의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서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화는 유리에게 내고 있었고,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유리의 이름이었지만 결국 그 모든 화는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왜 그 여자의 앞에만 서면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건지. 흐트러진 기분 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그 말을 들은 유리의 표정은 정말 엉망이었다. 심지어 아우디를 뒤에서 박아버렸던 그 날에도 그런 엉망인 표정을 짓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던 여자는, 다른 여자 만나라는 수연의 말에 결국 냉정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조차도 던져버리고 수연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던 그 싸늘한 눈초리가 기억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침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모든 것을 원망했다. 자신을 자극했던 희진을 원망하고, 자극한다고 또 넘어가서 상처 주는 말을 퍼부었던 자신을 원망하고, 그런 빌어먹을 상황을 만들어 낸 하늘을 원망하고, 연애도 많이 해봤다면서, 여자 마음을 잘 꿰뚫어본다면서 정작 수연의 마음은 꿰뚫어보지 못하는 유리의 아둔함과 눈치 없음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만 잔뜩 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인 토요일 날 일어나 버릇처럼 핸드폰을 쥐었다가 유리의 부재를 실감하고, 딱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 억지로 출근했다가 미영의 차를 타고 퇴근하며 또 유리의 부재를 몸소 느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도 하루 종일 핸드폰을 꼭 쥐고 생활하는 자신의 모습에 몇 번이고 유리의 부재를 실감한 수연은 결국에는 자신이 꽤나 많이 권유리를 좋아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 사실을 이미 깨달았을 때에는 사과할 타이밍도 놓쳐버린 것 같았다. 수연은 그래서 그 사실을 인정한 일요일에는 자신이 진작 사과하지 못했던 걸 죽도록 후회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먼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엔 죽어도 싫었다. 게다가 유리가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하다는 - 그래도 자신의 목숨보다, 라는 말은 하지 않은 걸 보면서 그래, 넌 너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인간이지 라고 생각했었다. - 아우디에 수연이 그런 짓을 하고 와버렸으니 사과해봤자 곱게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금요일 날 밤이 지난 토요일의 새벽, 머리가 좀 식고 나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열었던 걸, 처음 마음과 다르게 계좌번호를 보내라는 문자를 보내버렸다. 수연은 솔직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이 미친 듯이 싫었다. 물론, 정말 계좌번호와 금액만 달랑 적어서 보낸 유리도 짜증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점심시간이고, 자습 감독을 하지 않는 선생님들은 다 퇴근한 후라 여교사 휴게실은 텅 비어있다. 수연은 한 쪽에 마련된 2층 침대 중 밑 칸에 눕고 얇은 시트를 몸 위에 덮었다. 손가락으로 시트 끝을 잡고, 턱 바로 밑에 끌어당긴 후 벽에 달라붙고 나니 몸이 편한 탓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여 핸드폰을 눈 바로 앞에서 열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화면이 원망스럽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권유리도 원망스럽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정수연도 원망스럽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마음도 원망스럽다. 그게 가장 원망스러운 것 같다. 들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이 변한다. 예상치 못한 진동에 움찔한 수연은, 한순간 기대감을 가진 표정을 짓다가 화면위에 뜬 집 전화번호를 보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에 집에서 전화가 오는 것이라면 굳이 받지 않아도 뻔히 아는 내용이다. 오늘 아침에 부모님과 계약 아닌 계약을 했다. 아우디 수리비를 부모님이 대신 대주는 대신에, 부모님이 원하는 맞선 자리에 당분간 얌전히 나가서 그 사람과 최소 4시간은 함께 하기를. 보통 약속이 7시에 잡히는데 4시간이나 함께 하라는 거면 밤 11시까지 같이 있으라는 건데, 어떻게 딸내미보고 그 시간까지 남자와 같이 있으라는 소리를 하냐는 미약한 수연의 반항은, 그 수리빈지 뭔지 네가 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에 단칼에 제압당했다. 안심해도 될 만한 집안의 자제들과 연결시켜주는 건데 걱정할 게 뭐가 있냐는, 오히려 수연이 네가 사고 칠까봐 더 걱정된다는 어머니의 말도 큰 몫을 했다. 아침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왔는데 그 사이 벌써 맞선 상대방을 정한 모양이다. 수연은 언제 한 번 부모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서랍이라도 뒤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남자들 명단이라도 있는지 찾아보게. 찾게 되면 깡그리 불태워 버리고 말리라. “어, 엄마.” - 어디니? 점심시간이지? “응. 여교사 휴게실이야.” - 밥은 먹었고? “엄마,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말해.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데?” 계집애가 성미는 왜 그렇게 급한지 몰라, 라고 작게 읊조리던 어머니는 재촉하는 수연의 말에 결국 약속장소와 시간을 말했다. 저녁 7시, 장소는 예전에 유리를 만났던 문제의 그 와인바. 어머니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수연은 왜 이 상황에서, 또 권유리와 연관되어 있는 장소에 가야하는지 알 수 없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점멸하는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보다가 얼굴 바로 옆에 고이 놓고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라도 진동이 울리면 금세 잠에 깨서 받을 수 있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유리 씨는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미영이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 말이 떠오른다. 수연이 잠을 억지로 청하고 있는 이 시간, 그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싶다. 그렇게 아끼던 연인에게 오전은 잘 보냈냐고 다정스럽게 묻고 있을까, 며칠 전부터 자신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루의 절반을 나 없이 어떻게 지냈냐며 장난기 가득하게 묻던 그 목소리는 교무실 창문에서 보이는 커다란 나무의 푸른 잎들처럼 맑고 푸르렀다. 유리가 그렇게 물어보면, 수연은 퉁명스럽게 대체 왜 그렇게 느끼한 말을 해대는 거냐고 말했고 , 그러면 유리는 내 생각나서 잘 못 지냈다는 소리로 받아들일게- 라고 말하며 웃었다.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밥을 해결하는 그 여자는 밥을 먹고 나서의 행동패턴이 항상 일정했다. 요즘 졸졸 쫓아다닌다는 신입과 밥을 같이 먹고, 그 신입이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면 유리는 옆에서 잔소리 좀 퍼붓다가 한쪽에 딸린 사무실에 가서 담배를 한대 피고, 커피를 뽑아서 마신단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방학기간이라 일찍 끝나는 수연을 데리러 오는데, 보통 전화는 그때에 한다. 차창을 열고 달리는지라 조근조근 웃으며 말하는 유리의 목소리에는 항상 바람소리가 섞여 있었다.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놓은 여교사 휴게실의 창문을 통해 한 여름의 바람이 들어온다. 여름의 바람과, 여름의 바람소리가 섞여 있던 유리의 목소리. 심장이 약간 거슬릴 정도로 조금은 강하게 뛰어댄다. 몸을 벌떡 일으키고 창문을 닫은 후 에어컨을 틀었다. 이젠 바람소리가 아니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나는데도 여전히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있다. 수연은 시트의 끝을 잡고 있던 손을 왼쪽 가슴위에 얹고 심호흡을 했다. 목소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권유리는 정수연의 첫사랑이 맞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늦게 찾아온 첫사랑. 그 첫사랑이 하필이면 권유리라니. 거기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말 신이라도 있다면 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두고 장난질을 해대는 거냐고 따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연은 눈을 감았다. * * * 결국 못 잤어……. 하아…. 나에게서 잠을 뺏어가다니…….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다시 찾아온 와인 바는 변한 게 전혀 없었다. 남자가 센스도 없이 예약을 해놓지 않는 바람에, 일반 테이블 자리에는 앉지 못하고 결국 가운데 쪽에 위치한 ㄷ자 형의 바에 앉아야만 했다. 맞은편에 낯선 사람이 앉아있는 스툴에 앉아 코스 요리를 먹으려니 영 품새가 이상하다. 앞에 있는 남자는 다행히 말솜씨는 제법 있어서 간간히 웃음을 흘리게 만들어주긴 했다. 다소 느끼하게 말을 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법 잘생겼고, 입고 있는 정장이나 손목에 차고 있는 은색의 시계는 일반인들이라면 엄두도 못 낼 것들이다. 푸르스름한 조명의 끝에 서있는 바텐더의 웃는 모습은 예뻤고, 바 안에 울리는 재즈음악은 들어줄만 했으며, 투명한 잔에 담긴 와인의 은은한 향은 후각을 자극했다. 몇 몇 여자들은 부러워할 정도로 완벽한 상황이다. 하지만 정작 그 상황의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수연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마치 딴 세계 같다.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유머감각은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도 못해서 몇 번 웃음을 흘려준 것 빼고는 귀담아 듣지도 않고 있다. 자리가 지루하기는 매한가지다, 그 전에 만난 남자들이나 지금 이 남자나.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날의 언젠가 여자를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곤 그 여자가 자신의 첫 키스를 뺏어갔다는 것과, 그리고 그 여자와의 사랑은 굉장히 지루했다는 것. 처음엔 단순히 여자와 여자간의 사랑이기에 지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그 뒤로 만난 남자들과의 만남도 모두 지루했으니 그건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결정지었다. 사랑에 흥미를 못 느끼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유리를 만나고 좋아하게 되면서 그 몹쓸 버릇이 조금은 고쳐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실 오늘 맞선 자리에 나오면서도 별 일이 없다면 이 남자와는 몇 번 더 만나야겠다란 마음도 먹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 여전히 자신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알았다. 흥미가 있었던 건, 스스로가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이 권유리이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더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권유리와 관련된 장소니까, 이곳은. 재수 없게 진짜 왜 또 여기야. 미간사이에 저절로 잡히는 주름을 억지로 펴내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을 줬더니, 이 남자는 어디 피곤하시느냐고 묻는다. 그런 거 아니에요, 라고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메인 요리로 나온 양고기는 질기지 않아 먹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이곳의 양고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자는 친절하게 수연 몫의 양고기도 자신이 가져가서 직접 잘라주기도 했다. 능숙하게 잘라주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수연은 권유리라면 또 바보처럼 헛손질을 했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유리의 기억을 쫓아낼 방도는 없는 것 같다. 수연은 억지로 유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조차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기억하지도 말아야지, 라고 억지로 자신을 다잡는 것도 구차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이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별 아닌 이별을 맞이한 이 상황을 생각보단 잘 견뎌내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은근히 실감이 나는 것 같지도 않다. 지금 당장이라도 유리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고 건방진 태도로 맞선 자리가 재밌냐고 물어볼 것 만 같다. 어차피 처음부터 시작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서 ‘끝’이라는 단어가 그리 와 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수연에게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던 여자였다. 두들겨 맞기도 엄청 두들겨 맞았고, 욕이란 욕도 다 들었다. 수연은 그렇게 성격이 악독한 여자는 아니다. 말을 좀 차갑게 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일단 ‘내 울타리’안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세심하게 잘 챙겨주는 성격이다. 미영이 태연과 사귀기 전에는 미영의 뒤치다꺼리도 수연이 다 했다. 그 나이 먹도록 툭하면 넘어지는 미영을 위해 핸드백에 대일밴드와 약까지 챙겨 다니지 않았는가. 미영이 아파서 학교 급식 실에서 밥을 먹지 못했던 어느 날에는 굳이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 죽을 사와서 억지로 먹이기까지도 했었다. 지금이야 태연이 미영을 워낙 꼼꼼하게 챙겨주는 탓에 달리 손을 쓸 곳도 없어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지, 예전에는 동료 선생님들 사이에 엄마와 딸 사이 같다는 놀림도 받곤 했었다. 그런 성격인데, 이상하게 유독 유리에게만은 그러질 못했다. 시작이 시작인만큼 그런 걸 챙겨줄 사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라서, 요즘은 부쩍 유리에게도 나긋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도 전에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유독 그렇게 못되게 군 게 미안한 것도 미안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유리의 기억 속에 정수연이란 여자가 그런 식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수연 스스로가 자신의 이미지가 그런 쪽으로 굳혀지는 걸 걱정할 정도로, 정말 크게 당하고 살았으면서도 끝까지 능글맞던 태도를 버리지 않았던 권유리. 정말 근성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그런 여자가 어째서 그 날은 있던 근성도 전부 다 팽개쳐버리고 화를 내버렸던 걸까. 역시 자신의 연인과 관계된 일이라 더 그랬던 건가 싶다. 다른 건 다 참았으면서, 그것보다 더 심한 것도 참았던 주제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버럭 했던 그 여자가 조금은 밉다. 이제껏 잘 참아온 거, 좀만 더 참았으면 오죽 좋아? 그럼 난 지금쯤, 이 남자와 있지 않았을 텐데. “수연 씨는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세요?” 작게 썬 양고기가 담긴 접시를 수연의 앞에 내어놓으며 남자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라고 살며시 웃자 남자는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라고 말하며 빙긋 웃는다. 말하는 모양새가 꼭 권유리스럽네. 포크로 고기 조각을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으면서 남자의 질문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어떤 타입의 ‘남자’가 좋은지에 대해선 생각해 본적은 없다. 어떤 타입의 ‘사람’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해봤지만. 수연은 불현듯 유리의 집에서 유리에게 이야기 했던 자신의 이상형이 생각났다. 그때에도 수연은, 남자가 아닌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했었다. 남자의 질문과 자신이 유리에게 이야기했던 것의 초점 자체가 서로 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유리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수연은 유리에게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이 남자에게 읊어주고 싶진 않아서 대충 말을 둘러댔다.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에이, 그래도 한두 번은 생각해봤을 거 아니에요.”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대도 그러네. 수연은 빙긋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의 부리부리한 눈빛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잘 웃는 사람인 것 같다. 수연을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주 웃는 사람을 좋아하는지라 남자의 이런 점은 합격이다. 합격이라 해서 연애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아무리 둘러대도 계속 파고들어 질문을 할 것 같다. 수연은 남자 몰래 옅은 한숨을 내쉬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매너 좋은 사람이요.” “그건 뭐, 여자 분들이 다 좋아하지 않나요?” “적당히 싸가지 없으면서 매너 좋은 사람이요.” “그래요?”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는 것도 좋아요.” “흐음.” “그런 거 있잖아요, 아침마다 출근하기 전에 확인할 수 있도록 문자를 보내주….” 양고기 한 조각을 포크로 찌르던 수연의 손길이 멈추고, 벌렸던 입도 그대로 멈추었다. 아주 잠깐, 마치 몇 분과 같은 몇 초의 시간동안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던 수연은 이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빙긋 웃었다. 갑자기 뚝 끊긴 수연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침 비어있는 옆자리에 두었던 핸드백 쪽으로 신경들이 쏠리는 것 같다. 문자, 맞아. 문자. 권유리는 문자도 다정했었지. 지금 핸드백 안에 있는 핸드폰 안에는 유리가 보낸 문자들이 고이 저장되어 있다. 받고 나서 영구보관함에 따로 저장해 놓은 것도 있고 지우지 않아서 일반 수신 메세지 함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도 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웃기만 했다. 수연의 말을 기다리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쾌활하게 자신은 그렇게 세심한 남자는 아니지만 수연 씨라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 라며 정중하게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귓가에서 서걱서걱 거린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버릇처럼 튀어나와버리는 유리의 흔적을 확인하는 일은 수연에게 있어서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딱히 크게 마음이 아프다거나, 죽을 만큼 힘들다거나 그러지도 않는데 이런 식으로 오늘 하루 종일 간간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일을 경험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실패한 짝사랑에 죽도록 힘겨워 하면서 술이나 마시며 울기라도 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 정도로 슬프지나 아프지도 않다. 그냥 그저 미묘하게, 정말 미묘하게 심장의 움직임이 조금 거슬릴 뿐이다. 그게 더 싫다. 속 시원하게 긁고 싶어도 어디가 가려운지도 모른다. 울 마음은 들지 않는데 어딘가가 답답하다.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무언가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남자는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언뜻 들어도 수연의 첫 인상을 억지로 이상형에 짜 맞춘 듯 한 남자의 배려아닌 배려에 집중하는 척 하며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 쪽으로 몸을 틀고 있는 남자의 어깨 저 너머의 어느 한 곳에 있는 테이블에 시선이 닿는다.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의 주인공의 얼굴을 확인한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은 무뚝뚝한 표정을 보니 놀랍기도 하면서도 왠지 또 서글픈 느낌이 든다. 화를 내든, 놀라든, 반가워하든, 어느 감정이라도 담겨 있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면 차라리 웃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정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그걸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게다가, 그 얼굴의 앞에 자신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이름 모르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도 버겁다. 그래서 수연은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다.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하나둘씩 접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돌아선 이후로 고작 세 번의 밤이 지났을 뿐이다. 고작 세 번의 밤이 지나고 나서 유리는 자신과의 기억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하고 있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왠지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날 것 같다. 아마도 그건 질투일 테고, 수연은 또 다시 질투 때문에 유리 앞에서 유치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리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쪽을 쳐다보진 않았다,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수연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금방 본 유리의 얼굴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웃음도 한번 지어보았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움직이고 있는 입술도 바라보고 또 웃음도 한번 흘리고. 사랑은 잔인하다. 사랑까지 발전하지 못한 감정이라도 잔인하긴 매한가지다. 보기 싫어, 보고 싶지 않아. 속으로 그렇게 몇 번이나 중얼거렸지만 사랑도 아닌 그 애매한 감정 때문에 다시 시선은 결국 유리쪽을 향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또다시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여전히 얼굴엔 감정 하나 담겨져 있지 않다. 보기 싫어.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 짜증나잖아. 다시 시선을 회피했다. 남자가 하는 말은 이제 무슨 말인지조차도 모르겠다. 온 몸의 신경이 엉망진창으로 얽혔다. 옆으로 언뜻 보이는 시야 속에 유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들어온다. 수연은 다시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는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검은색 머리를 흩날리며 지나가는 여자의 모습은 낯설다. 이렇게 멀리에서 - 희진이 아닌 -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화장실 속으로 유리가 몸을 감춘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에 앉은 남자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수연은 남자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로 화장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유리의 잔상이 입구 쪽에 남아있는 것 같다. 남자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걸 바라보다, 유리가 앉아있던 테이블 쪽을 보았다. 유리 없이 혼자 남겨진 유리의 동행자가 와인 잔에 손을 내밀어 잡는다. 살짝 흘러내린 회색 정장의 옷소매의 끝 부분에는 은색의 팔찌가 차져 있고, 유리잔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예쁘다. 유리가 만날 정도의 여자라면 외모도 수준급일 것이다. 원래는 본인이 와인을 준비해 오면 안 되는데, 남자가 안면이 있는 이 집 사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자신이 직접 공수해 왔다고 자랑하던 와인은 벌써 세병 째 거의 다 비워진지 오래다. 목도 마르고 왠지 가슴이 답답한데다 내숭을 떨 필요성도 없었고, 남자가 잔이 비워지는 즉시 따라주는 걸 사양도 하지 않고 마셨더니 벌써 이만큼이나 마셨다. 양고기는 조금 남았다. 하지만 더 고기를 입 속에 억지로 집어넣을 생각은 없다. 그저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 남자가 썩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수연이 웃으며 장소를 옮기자 그러면 그 남자는 좋다고 따라올 것이다. 장소는 어느 곳이든 상관없다. 이곳만 아니면 된다. 권유리와의 기억이 얽혀있는 이 곳. 권유리가 있는 이 곳. 권유리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이 곳. 권유리가 정수연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봤던 이곳만 아니라면, 그냥 이 곳만 아니면 그만이다. 남자가 오면 장소를 옮기자고 해야겠다, 라고 마음을 먹으며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지금 따르고 있는 잔이 마지막 잔인 모양인지 액체가 그리던 곡선은 이내 뚝 끊기고 병의 입구에 황금색의 액체가 몽울져있다. 병을 더 기울여 끝내 잔 속에 마지막 한 방울을 떨구어냈다. 계좌번호와 금액이 적힌 문자를 받았고, 부모님은 수연의 통장으로 수리비를 넣어주셨다. 이제 돈만 넘기면 끝이다. 하지만 아직 넘기지는 않았다. 혹시, 정말 혹시, 유리에게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권유리는 이미 다른 여자와 저렇게 보란 듯이 앉아있고, 정수연은 이미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고 있다. 권유리와 정수연이 다시 이어질 일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어차피 둘 사이에 이어진 줄은 언제라도 쉽게 끊어질만한 줄이었다. 오히려 한 달을 버텨낸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엇나갔던 사이인데 끝이라고 좋을 리가 있나. 와인을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까지 연달아 마셨을 때에 유리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어지럽다. 시야가 이상하게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다. 탁 풀려버린 몸에 왠지 힘이 들어가지도 않아, 수연은 턱을 괸 채로 멍하니 걸어가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표정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이 심상치가 않다. 지나가던 종업원의 쟁반에서 제멋대로 물 컵을 뺏어들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답답한 모양인지 입고 있는 정장마이의 단추도 풀어헤친다. 넌,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니. 수연은 와인 잔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든 거니. 아니면 내가 아직도 그깟 돈 따위 보내주지 못해서 마음에 안 든 거니. 화장실이 더러웠어? 저 여자가 왜 빨리 안 오냐고 재촉해? 아니면 네 애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네 애인이 다른 여자랑 있다고 뭐라 하든? 그것도 아니면…. 날 마주쳐서 싫은 거야?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물을 수는 없다. 매너도 좋은 권유리는 수연이 보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여자의 핸드백을 손수 들어주면서 앞장서서 걸어 나간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다 먹지도 않은 양고기가 남아있다.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지만 수연은 그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요리를 채 먹기도 전에 나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도, 수연과 그렇게 눈이 마주친 후에 나가는 것이라면, 더 생각할 이유도 없다.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유리의 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쇳소리가 조금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수연의 시선을 붙잡고 있던 유리가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앞 쪽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유리가 보고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권유리는 수연이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자의 핸드백까지 들어주며 에스코트를 했고, 정수연은 유리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앞에 앉은 남자에게 미소를 흘리고 있다. 아, 이젠 좀 눈물 날 것 같아. 몸에 긴장이 확 풀린다. 수연은 이를 악물고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바꿔볼 심산으로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하세요? 나지막하게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다. 마치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처럼. 눈가를 문지르던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더 이상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뿌옇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상하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치 칼로 뒤통수를 누군가가 찌르는 것과 같은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수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관자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싼 후 나지막이 말했다. “피곤한 건 아닌데요….” “네.” “아, 근데 머리가 좀 아프네요.” “그래요?” “네, 저 원래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닌데…. 와인이 좀 독…한가요?” 시야가 흐물흐물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가게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계산을 다 끝낸 유리가 성큼성큼 검은색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그 뒤를 여자가 웃으며 따라가고 있다. 여자가 입을 움직여 무언가를 이야기 하자, 앞서 가던 유리가 걸음을 멈추고 여자를 돌아보며 손을 내민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꺄르르 웃던 여자가 덥석 유리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두 손에 시선이 쏠린다. 어지러워…. 눈에 힘이 점점 풀려서, 유리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수연 씨, 괜찮으세요?” “……권….” “수연 씨?” 권유리, 그 여자랑 어디를 가는 거야…대체. 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여자를 만나냐. 거기다 손 까지 잡…. 수연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몇 마디를 더 중얼중얼 거리다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Hissing 17 (完)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유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신뢰감을 주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다, 책임감을 가져라, 언행일치라는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다녀라, 등등. 어느 그룹이든 그 그룹의 우두머리 격을 맡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게 할아버지의 철칙이고 좌우명인지라 마치 최면이라도 당하듯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듣고 살아왔다. 자신이 내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처음 회사에 입사한 후 며칠 후에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말하는 유리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말하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시켜 유리의 모든 카드를 막아버림과 동시에 통장에 있는 돈도 싹 빼버렸다. 오피스텔 월세도 못 내고 전기세 등등 각종 생활요금도 못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항복한 유리는 그 날 이후로는 적어도 자신이 한 말은 지키고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했던 말을 잘 지키기보다는 아예 말 자체를 함부로 내뱉지 않게 되었는데, 최근 들어서 자기가 말을 함부로 해놓고 몹시 곤란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중에 한 번은 역시 수연에게 희진과 헤어지겠다고 한 것이고 - 결국 그 말대로 헤어지긴 했지만. - 그 중에 한 번은, 이 여자를 집에 데리고 온 것이다. “…잠깐만요.”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얼굴을 묻었던 유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미안하다는 듯 작게 말했다. 여자의 얼굴이 이젠 일그러진다. 그 전에는 여유 있게 웃으며 쑥스러워 하는 거냐며 장난도 쳤었는데, 슬슬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이게 세 번째다, 잘 나가다가 중간에 딱 끊어버린 것은. 대체 뭐가 문제야. 여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이야기를 지금 했다간 싸대기라도 맞을 것 같다.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찔하게 유혹을 해오는 여자의 모습은 제법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섹시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했던 키스는 거친 만큼 달콤했고, 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수도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지 향기롭단 생각도 들었다. 환경이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오늘은 청소도 해놓으셨고, 그 덕택에 집안은 굉장히 깨끗했다. 심지어 왠지 기분 좋은 향기까지 나는 것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오면서 가장 신경 썼던 침대 스프링은 여전히 좋고, 세탁한 지 얼마 안 되는 시트의 감촉도 부드럽다. 이 여자가 여기까지 따라와놓고 못하겠다고 뒤로 뺄 성격의 여자도 아니고 유리가 숙맥인 것도 아니고 모든 상황이 다 알맞게 잘 돌아가고 있는데, 문제는 그거다. 정수연이 걱정돼서 미치겠다는 것. 유리는 여자를 향해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아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첫 번째에는 괜히 머리카락 핑계를 댔다. 흘러내리는 게 귀찮으니 머리 좀 묶어야겠다고. 이 기회에 커트로 확 잘라 버릴까요? 커피프린스에 나왔던 고은찬처럼. 그렇게 농담도 했다. 두 번째에는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 것 같다는 조금 어이없는 핑계를 댔다. 물론 그 때에도, 내 귀가 이상해졌나봐요 라고 대충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젠 무슨 핑계를 대야할까. “담배 좀 피고 올게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유리를 바라보던 여자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유리는 그 웃음소리를 애써 듣지 않는 척 하며 담배를 찾으려고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들고 왔던 핸드백도 한 번 열어보고, 벗어던진 정장 마이의 주머니도 한 번 찾아보던 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점심시간 때 마지막 담배를 윤아에게 뺏겼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타이밍 거지네. 유리는 나지막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대충 둘러댄 핑계긴 하지만 담배를 찾으면서 정말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코틴이 절실해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망할 잡생각들은 담배를 피우면 좀 없어질지도 모른다. 생각을 지우는데 가장 좋은 건 술이겠지만, 그래도 여자를 앞에 두고 혼자 술을 마실 만큼 뻔뻔하지는 않다. 유리는 혹시 자신이 어딘가에 쟁여놓은 담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 안의 서랍장을 마구 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짜증이 난 모양인지 다시 침대에 눕고, 침대 시트를 턱 바로 밑에까지 끌어올린 후 베란다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있다. 얇은 시트 위에 그대로 드러난 여자의 몸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자는 생각에 냉수라도 마시려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잡고 생수병을 꺼내던 유리는 테이블 위에 아침과 같이 그대로 놓여 있는 종이백을 발견했다. 아줌마가 이건 안 치웠네. 치우려면 다 치우지. 생수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종이백을 치울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두 손으로 종이백을 잡은 후 반으로 접던 유리의 손끝에 무언가가 만져진다. 유리는 종이백을 접던 손길을 멈추고 반으로 접은 종이백을 다시 편 다음 안을 확인했다. 어? 이게 뭐야. 안에 있는 내용물을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하나는 종합감기약. 유리가 금요일 날 희진을 만나기 전에 샀던 약과 똑같은 약이 포장도 뜯어져 있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담배. 하얀색 담뱃갑 위에 작고 노란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기까지 했다. 유리는 감기약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담뱃갑에서 종이를 떼어내 적혀있는 글을 확인했다. - 아픈데 독한 거 피우지 말고 이거 펴. 참내. 별걸 다 신경 쓰네. 고개를 숙이고 이 작은 종이에 꼼꼼히 글씨를 적고 있었을 수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담배도 없는데 이거라도 피우지 뭐. 꺼내놨던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고, 베란다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서랍에서 라이터를 꺼내는 동안 여자가 이번엔 몸을 돌려 현관문 쪽을 향해 눕는다. 짜증이 날 법도 하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여자의 몸짓에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베란다 새시를 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공기를 한번 깊게 들여 마시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다. 대체 3일 동안 뭘 했길래 그 사이에 그렇게 예뻐진 거지? 쥐고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며 생각했다. 푸르스름한 조명 탓이었는지, 아니면 가까이가 아닌 멀리서 봐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이라서 그런 건지. 확실히 금방 보았던 수연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외모에, 직업은 선생님이고, 아버지는 대법관 출신의 국회의원. 맞선이 끊이지 않고 들어올 법도 하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봐왔던 정수연, 매일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았던 정수연, 자신의 앞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기도 했던 정수연, 그 중에서도 유독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웃음이 예뻤던 여자. 그런 여자가 권유리 앞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실히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거기다 박성훈이라니, 왜 하필 그놈일까. 입에 물린 담배에서 담배만의 특유의 향이 난다. 필터 끝을 살짝 이로 깨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에 어울렸던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튀는 놈이었다. 단순한 여성편력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를 많이 만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노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지저분하게 노는 남자라 저 놈이랑 더 이상 놀지 못하겠다고 연락도 끊은 사이였는데, 그 남자를 1년 반 만에 우연히 만났다. 그것도 수연과의 맞선 상대방으로. 남자와 대면하고, 그 남자가 수연의 맞선 상대방을 안 다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홧김에 자신의 동행자를 데리고 가게를 뛰쳐나오긴 했지만 입구를 나서는 그 순간부터 온갖 걱정들이 다 들기 시작했다. 과거에 알았던 남자의 행태를 생각해보자면, 정말 약이라도 탔을지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새에 그 약을 마신 수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고, 그 기회를 그 남자가 놓칠 리가 없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향이 입 안에 가득 들어온다. 입안에 머금은 연기를 검은 밤하늘을 향해 내뱉었다. 평소에 피던 담배보다 훨씬 순한 담배라 무슨 맛인지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 아픈데 독한 거 피우지 말고 이거 펴. 작은 종이에 글씨를 적어 내려갔던 그 순간에 수연은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표정에 솔직히 드러나는 여자라, 입으로는 끝없이 툴툴 거리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는 여자면서, 왜 행동이나 말은 솔직하지 못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리고 유리는, 차에 여자를 태우고 오면서 스스로가 그런 의문을 가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솔직하지 못한 건 자신도 매한가지였으니까. 다른 여자 만나라고 수연이 소리를 질렀을 때에 덩달아 화가 났던 건 수연이 그런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가 결국은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들었던 자신에게 화가 나서였다는 것도 몇 분 전에야 깨달았다. 아직도 내기 때문에 자신을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가지게끔 만들어서.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단순히 수연의 말과 행동에 열이 받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하지 못한 것에 더해서 아둔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조차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지 않으면서 수연의 생각과 감정은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득의양양하게 굴었으니,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하얀 담배의 끝에 달린 회색빛의 담뱃재를 허공에 털었다. 천천히 흩어져가는 담뱃재를 바라보던 유리는 다시 연기를 빨아들였다. 정말 맛이 없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맛도 없는 담배라 몸속에 기별도 안 갔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속은 쓰리다. 심장이 조금씩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던, 조명 아래에 웃던 그 얼굴이 점점 흐릿해진다. 귀에 달려있던 은색 귀걸이는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귀걸이를 차고 있던 그 여자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지만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오늘이 아니라, 그 전에 보았던 정수연의 미소는 어땠었나. 분명 자신을 향해 웃고 있던 그 얼굴은 생각이 나지만, 왜 웃었는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유리의 어떤 말과 어떤 행동 때문에 웃었는지. 그리고 그때가 언제였는지. 어디서 그렇게 웃었던 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입을 가리고 있던 작은 손과 그 손 위에 보이던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딱 그 얼굴만 기억난다. 그 웃음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미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기에,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다시 그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탓이리라.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미소가 아까와는 달리 정말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는 것이다. “아씨….” 담배를 베란다 창문틀에 비벼 꺼버렸다. 야, 정수연. “더럽게 맛없잖아, 이거. 게다가,” 손가락 사이에서 힘없이 담배가 떨어진다. 허공을 천천히 유영하던 담배는 얼마 안 가 아스팔트 위에 뚝 떨어졌다. “더럽게 신경 쓰여, 너-. 진짜.”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유리가 들어오는 걸 알았는지 누워있는 여자의 몸이 살짝 움찔거린다. 유리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 앞에서 멈춰 섰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현관문까지 갔다. 구두에 발을 집어넣으려다가, 아무래도 운동화가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는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놀란 여자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유리쪽을 바라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운동화의 끈까지 단단히 동여맨 유리는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도어 락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짧은 멜로디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자 뒤를 돌아 침대 위에 황당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여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분명 당신은 똑똑하고, 욕도 하지 않고,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하고, 거기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지만, “미안해요. 저 아까 그 가게에 깜빡 두고 온 게 있어서, 찾으러 갈게요.” “…뭐라구요?”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세요. 어차피 문은 닫기만 하면 저절로 잠가지니까요.” “권유리 씨.” “미안합니다. 꼭 찾으러 가야 하는 거라 서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게 만들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지. * * * 제발 전화 좀 받아라. 유리는 주문을 외우듯이 몇 번이고 그 말만 중얼거리고 있다. 그런 유리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은 이번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급하게 집을 나오자마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그 가게를 다시 간다고 갔는데, 이미 수연과 성훈은 자리를 뜬지 오래란다. 안면이 있는 사장을 붙잡고 박성훈 그 자식 어디에 간다는 말 혹시 했냐고 물어봤는데 사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저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 한 여자를 부축하고 나갔다는 말만 반복할 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가게를 뛰쳐나와 차에 올라타서 수연에게 전화를 했다.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못 받는 건지. 몇 번이고 전화를 해도 신호음만 길게 갈 뿐 결국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린다. 이름 모르는 여자의 멘트소리가 들리자마자 전화를 뚝 끊어버린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박성훈, 박성훈. 1년 반 전에 연락을 끊어버린 사이라 전화번호가 지금까지 남겨져 있는지조차 모른다. 평소에 전화번호부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남아있을지도 몰라, 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찾던 유리는 박성훈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래되었으니 전화번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수연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이 번호 밖에 없다. 유리는 숨죽이며 통화연결음을 들었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굉장히 외설적인 가사로 쓰여졌을 것 같은 요란한 외국 힙합가수의 랩이 얼마 안가 뚝 끊긴다. 유리는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 누구야? 하, 다행이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여전히 싸가지 없는 말투. 성훈과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때에도 성훈의 목소리를 듣고 이렇게 안도감이 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유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아, 나 유린데.” - 누구? “권유리.” - 권유리? 이 새끼, 내 번호 지웠구나? 참 착한 놈이로세. 괜히 울컥 욕이 치밀어 오르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유리는 수화기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을 작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댔다. 불안하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할 뿐이다. 옆에 있을 수연의 목소리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수화기 저 너머의 소리에 불안해진 유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너 어디냐?” - 왜? “아니, 그냥. 아까 나갔다 다시 뭐 찾으러 가게 가봤는데 네가 없길래.” - 아, 나왔어. “…그래? 어딘데? 혹시, 그… 맞선 보는 여자랑 같이?” - 같이 있긴 한데…너 이상하다? 왜 그러냐?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씨발, 내가 지금 그걸 말하면 되겠니? 유리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얼굴에 열이 확확 달아오른다. 그 전까지는 그래도 제법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이라는 게 훨훨 날아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더군다나 수연과 같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물론 당연히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자의 입에서 직접 확인을 하니 짜증이 마구 샘솟는다. 유리가 대답이 없자 남자도 말이 없다. 아마 저 쪽에서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너랑 도저히 못 놀겠다, 라고 껌을 씹어대며 말하고 연락을 뚝 끊어버렸던 여자가 1년 반 만에 전화해서 횡설수설 하고 있으니 아마 그 남자도 속으로 이 년 뭐하는 년이야, 라고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는 남자의 의심을 조금 덜어줄 요량으로 대충 말을 둘러댔다. “아, 그게 네가 아까 그 우리 외삼촌 호텔 이야기 한 게 생각나서. 아까 외삼촌이랑 우연히 통화했는데, 요즘은 좀 불경기라 잘 안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지금 가면 스위트룸 잡을 수 있을….” - 아아. 낄낄낄 거리는 웃음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온다. 쳐웃지마,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꾹꾹 집어삼켰다. - 고맙기야 한데, 별 쓸데없는 수고네. “어?” - 이미 잡았어. 네 말대로 불경기라 그런지 잡을 수 있기야 하더라. 예전에는 예약 안하면 못 잡더니…. “…….” - 나 때문에 친히 외삼촌께 전화 드린 거야? 이야, 이거 영광인데? “…….” - 아, 그럼 기왕이면 외삼촌한테 룸서비스 좀 잘 해달….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을 닫고 조수석으로 휙 던져버렸다. 꽂아져있던 키를 돌려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를 긁던 차는 이내 앞으로 불쑥 튀어나간다. 렌트 차라 승차감이 익숙하지 않아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핸들을 급하게 꺾어 도로로 진입한 유리는, 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차가 지나간 도로 위에 남겨진 스키드 마크를 확인했다. 외삼촌이 운영하는 호텔은 이곳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하지만 그 30분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속도로, 신호를 지켜가며 달렸을 때 말을 하는 것이고 애초에 도로교통법이라는 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깡그리 무시한 채로, 골목길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다보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도 있다. 성훈이 한 말과 수화기 저 너머의 소름끼치는 침묵을 고려해 본다면 이미 방 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훈이 전화를 받았다는 것은 아직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들어간 지 얼마 안됐다는 말도 된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시간이다. 유리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차의 속도가 점점 높아져 간다. 급하게 차선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했더니 여기저기서 빵빵 거리며 난리가 아니다.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핸들에 손을 떼고 싶진 않았다. 핸들을 꼭 쥔 손바닥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병신 권유리. 넌 병신이야. 그냥 그 때 붙잡고 나왔으면 됐잖아. 뭐 하러 화난다고 그냥 나와가지고! 후회는 해봤자 늦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고, 물을 엎질렀다면 닦기라도 해야 한다. 이미 바닥이 흥건히 다 젖어버리기 전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앞을 보며 운전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운전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이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차창을 열어놨지만 답답함은 쉬이 뚫리지 않는다. 호텔에 도착해서 수연이 안전한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런 답답함과 긴장감은 최고조로 달할 것 같다. 신호란 신호는 다 어기고, 사고만 겨우 피할 정도로 거칠게 운전을 한 탓에 호텔에는 금방 도착했다. 입구 쪽에 차를 급하게 세우자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이쪽으로 뛰어온다. 어서 오세…. 직원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손에 열쇠를 쥐어주고 주차 알아서 하라고 말한 후 쏜살같이 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 회전문에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서 바로 옆에 있는 유리문을 손으로 밀고 들어갔다. 깔끔한 로비 안에는 사람들이 몇몇 들어서 있다. 유리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한 쪽에 있는 프런트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프런트에 서 있는 남자가 달려오는 유리를 보고 목례를 한다. 유리는 그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그 남자의 멱살을 대뜸 부여잡고 황급히 말했다. “아까 여기 떡실신 돼 있는 여자 한명이랑 더럽게 능글맞게 생긴 남자 한명 왔죠?” “네?” “왔잖아요. 왔죠? 스위트룸 잡았을 텐데?!” “손님. 일단 이것부터 놓고….” “왔어요, 안 왔어요? 그것부터 빨리 말해.” “와, 왔습니다만….” “내놔요.” “네?” “카드키 내놓으라고요.” “…네??” “그 놈이 잡은 방 스페어키 있을 거 아니에요!!! 카드키 내놔요! 얼른! 빨리! 안 그러면 여기서 죽을 줄 알아!!”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끝에 삑사리까지 난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직원의 눈에 황당함이 가득하다.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있는 빠른 말들을 제대로 다 이해도 하지 못한 직원은 멱살이 잡힌 채로 멀뚱멀뚱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그런 직원의 태도가 답답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씩씩 거리다가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지배인 좀 데리고 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로비 안에 가득 울리는 그 소리에 사람들이 흘끔흘끔 유리를 쳐다보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리자 직원은 더 당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배인을 부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유리의 모습에 겁을 먹은 직원은 황급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리는 프런트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로 숨을 골랐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간에 로비에 시간을 이렇게 뿌려대고 있다니. 이놈의 호텔은 직원 교육은 왜 다 이딴 식이야? 빨리 빨리 처리를 해야지. 외삼촌 오면 저 놈부터 자르라고 해야겠다. 자신의 염치없고 무례한 행동 따위는 생각할 정신도 없는 유리였다. “손님, 절 찾으….” 여기까지 오면서 직원에게 상황설명을 들은 지배인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유리에게 다가왔다가 발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숙이고 씩씩 거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이 호텔 운영자의 조카다. 과거에 종종 이 호텔을 이용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외삼촌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조카는 보기 드문데, 눈앞에 있는 이 여자와 자신의 상사는 스스럼없이 잘 지내다 못해 유리가 반말을 틱틱 하며 농담도 주고받는 모습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던지라 잊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 번 얼굴을 잊어버리고 일반 손님과 같은 취급을 한 탓에 금방 직원이 툴툴 거렸던 것처럼 멱살을 잡혀본 적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사과를 받기야 했다. 술에 취한 상태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고. 지배인이 다가온 걸 안 모양인지 유리가 고개를 번쩍 들고 지배인을 째려보았다. 얼굴이 벌게져 있다. 씩씩 거리고 있는 모양새와 후들후들 떨리는 팔다리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그때처럼 이 여자가 술에 좀 취한 것 같다고 지배인은 생각했다. “아가씨, 오랜만이시네요.” “내놔요.” “네?” “오면서 상황 설명 다 들었을 거 아니에요. 스페어키 주라구요.” 그렇게 말하며 지배인의 옆에 서 있는 직원을 쳐다본다. 직원이 놀랬는지 몸을 흠칫 거리고 반사적으로 손으로 자신의 목 주위를 쓰다듬는다. 지배인은 그런 직원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봤다가,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사장의 조카라고 하더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호텔은 손님의 사생활 보호에 힘을 쏟아야 한다. 더군다나 스위트룸을 이용할 정도의 손님이라면 더더욱. 이 바닥은 소문이 빠르다. 입소문 하나로 망하는 곳은 수도 없이 많이 봤다. 그래서 지배인은, 절대 그것만은 넘겨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10초 안에 안 주면,” “아가씨.” “당신 외삼촌 비서랑 놀아난 거 외삼촌한테 다 불어버릴 거야.” “…김지훈 씨. 뭐합니까? 얼른 아가씨가 원하는 스페어키를 드리세요.” 내 주위는 어째서 다 이 모양 이 꼴일까. 결국 원하던 스페어 키를 얻긴 얻었지만 왠지 입안에 감도는 씁쓸한 맛에 입맛을 쩝 다셨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주섬주섬 스페어 키를 드는 직원의 손에서 카드키를 낚아채고 호수를 들은 유리는 로비를 가로질러 뛰었다. 승강기 앞에 멈춰서 고개를 올려 계기판을 바라봤는데 하필이면 2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다. 유리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한쪽에 마련된 비상계단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뛰어갔다. 성큼성큼 두 계단 씩 한참을 뛰어올라가던 유리는 문득 스위트룸은 이 건물의 가장 위층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뭐…. …거기까지 어떻게 뛰어 가…. 5층 정도까지 뛰어올라갔다가 이내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시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왔다. 붉은색 카펫이 깔려진 곳을 잰걸음으로 걸어가서 - 너무 기력을 뺐더니 뛸 수가 없었다. 유리는 운동량을 늘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 승강기 쪽으로 갔다. 한 번만 눌러도 될 걸 괜히 급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승강기가 올 때까지 버튼을 계속 쿡쿡쿡 눌러대던 유리는,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에는 딱 봐도 불륜 커플인 듯 한 커플이 타고 있다. 승강기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유리가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뚝 떨어지는 불륜 커플을 흘끔 한번 쳐다보다가 팔짱을 낀 채로 승강기의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뒤통수가 간지럽다. 오늘따라 유난히 속도도 느리구먼.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리듬감 있게 쳤다. 중간에 층이 멈춘다. 아무래도 불륜커플이 내리려나 보다. 유리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데 괜히 남자가 유리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여자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승강기에서 내린다. 내리자마자 다시 닫기 버튼을 5번이나 연속으로 눌러대고, 팔짱을 낀 채로 또 계기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툭툭툭.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쳤다. 하나, 둘, 셋, 넷 …… 그리고 스물. 정확히 스무 번 팔을 치자 맨 꼭대기 층에 다다른다. 작은 기계음과 함께 승강기 문이 열리자 유리는 또 뛰었다. 밑에서 직원이 알려준 룸을 찾아낸 후 그 앞에서 겨우 멈춰 섰다. 몸을 숙이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서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계속 온 몸에 긴장을 한 채로 있었더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분명 아까부터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을 텐데, 정신이 없다보니 그때엔 전혀 알지도 못했다. 머릿속의 맥박도 뛰고 있는 게 느껴져서 아플 지경이다. 가쁜 숨에 쇳소리가 섞여 나오기 시작한다. 기침을 하고 싶은데 기침소리를 내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아주 소심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콜록 콜록 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유리는, 얼른 숨을 대충 고르고 안에 있는 수연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숨이 조금 진정되어 허리를 빳빳이 펴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꼭 쥐고 있던 카드키에는 유리의 손에서 나온 땀이 묻어있다. 카드키에 묻은 땀을 옷에 스윽 닦다보니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여기까지 온 건 좋다. 들어가서 박성훈이라는 남자를 내쫓거나 혹은 수연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좋다. 다 좋은데,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연이 걱정되고 자꾸 신경 쓰여서 무작정 이곳까지 쫓아왔다. 그렇다면 뒷일은? 박성훈이라는 기생충을 해치우고 난 다음에 뒷일은 어찌해야할 것인가. 이미 그렇게 서로 악을 쓰며 싸우고 난 뒤고, 돈 보내라고 계좌번호까지 찍어서 문자까지 보낸 사이니 따지고 보면 수연이 어떤 남자랑 무슨 짓을 하던 유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억지로 화를 억누르며 가게를 뛰쳐나온 건 유리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을 해 놓고선 여기까지 왜 쫓아왔냐고 물어보면, 거기에다 대고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게다가 만약 정말 재수 없게 수연이 성훈을 마음에 들어 하기라도 한다면? “으….” 유리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의문에 이마에 손을 짚고 신음소리를 냈다. 여기까지 달려온 이상 답은 어차피 하나다. 그 답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문제일 뿐.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를 해야 하나. 사과를 한다면 어떤 말로 먼저 입을 열어야 하나. 사과를 하고 난 다음 또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하나. 돈은 왜 안 보냈냐는 장난으로 먼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시작하면 좋을까나, 라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그랬다간 왠지 욕만 미친 듯이 들을 것 같다. 유리는 안절부절 못하며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수연아, 미안해. 이렇게 시작할까? 아니야, 대뜸 그러면 좀 그럴 것 같은데. 개놈시끼로부터 내가 구해줬는데! 나한테 고맙다고 말해!!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 라고 배짱 한번 튕길까. 그랬다간 욕만 죽어라 듣겠지. 아니, 것보다 진짜 정수연이 박성훈 마음에 들었던 거면 어떻게 해? 그래서 일부러 술에 취한 척 쓰러진 거면? …아니야, 그래도 생각 있는 애가 그런 놈에게 넘어갔을 리가……. 또 모르지…. “아, 몰라!” 일단 쳐들어가고 보자. 욕을 쳐듣든 맞든 혹은 고맙다는 말을 듣든 일단 들어가 보고 결정하자고. 유리는 결국 수연에게 할 그럴듯한 말들을 미리 생각하고 들어가는 걸 포기하고 일을 저지르고 보기로 결정했다. 후읍. 카드키를 꽂기 전에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성을 잃고 덤벼들 게 확실하니, 유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동선을 미리 계획해놓기로 했다. 상대는 남자. 미리 계획을 짜 놓고 가는 게 더 유리하다. 멋있게 등장했는데 완력에 밀려 죽도록 두들겨 맞기만 하면 안 가느니만 못하잖은가. 손에 들고 있는 카드키를 만지작거리며 침착하게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STEP 1. 문을 열고 들어간다. STEP 2.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로 룸 안에 기어들어간다. 신발 벗는 소리도 내면 안 되니 그냥 신발도 신고 들어가자. STEP 3. 일단 정수연과 박성훈을 떼어놓는다. STEP 4. 완력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그곳을(?) 걷어 차 버리자. STEP 5-1. 정수연의 옷이 벗겨진 경우 - 침대시트로 재빨리 몸을 가리고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집어 던져 입게 한 후, 아파서 정신없는 박성훈은 몇 대 때려놓는다. STEP 5-2. 다행히 정수연의 옷이 벗겨지지 않았고 박성훈이 아직 건드리기 전. - 아파서 정신없는 박성훈을 몇 대 때려 놓는다. STEP 5-3. 옷이 벗겨지지 않았는데 박성훈이 건드리고 있다면 - 아파서 정신없는 박성훈을 몇 대 때려 놓는다. …아, 이건 쓸데없이 신사적이네. 너무 이성적이잖아. 저 놈에겐 이렇게 신사적이고 이성적인 건 어울리지 않아. 아무리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인간 대접까지 할 필요는 없지. 유리는 고개를 양 옆으로 휘휘 내저으며 계획을 정정했다. STEP 1. 문을 열고 들어간다. STEP 2. 아무리 운동 많이 한 나라도 완력으로 남자를 이기긴 어려우니 일단 들어가자마자 힘 제대로 못 쓰게 거기(?)부터 걷어 차버리자. STEP 3. 쓰러진 놈을 두들겨 팬다. STEP 4. 미친 듯이 두들겨 팬다. STEP 5.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팬다. 그래, 저 놈에겐 이런 계획이 어울리지. 이 자식아. 네가 감히 겁도 없이 정수연을?! 너 오늘 진짜 죽는 줄 알아라. 계획을 다 짜놓은 유리는 심호흡을 한 번 더 한 후 카드키를 꽂았다. 띠릭, 거리는 작은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난다. 기왕이면 소리도 없이 덮쳐야 승산이 있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참 우렁차기도 하다. 이 정도면 안에서 이미 들었을 것 같다. 어쩌면 무슨 소린가 싶어 이쪽으로 나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용히 들어갈 필요는 없겠네. 은색의 문손잡이를 쥔 채로 한 번 더 심호흡. 후후 하하. 이건 심호흡이 아니라 거의 복식호흡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박성훈 이 개새…!” “똑바로 안 들어?!” “끼…….” ……. “어쭈? 내가 직각으로 들지 말랬지? 똑바로 들라고, 똑바로. 이렇게.” ……. “진짜 이젠 별게 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쯧쯧. 말세야, 말세.” 뭐야, 이건. “도대체 학교를 다니긴 했니 너?! 누가 이렇게 가르쳤어? 어? 쪼끄만 게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 어디 누나한테?! 이걸 그냥 확!!” “…저기….” “뭘 먹인 거야? 엉? 나한테 뭘 먹였어?”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디서 발뺌을…. 똑바로 말 못해, 이 새끼야?!” 유리는 차마 들어오면서 내지르던 고함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룸 안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신고 있었던 하이힐 굽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쳐대며 말하고 있는 여자와, 그 앞에 팬티 바람으로 무릎 꿇고 앉아서 손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허허허. 이건 대체 뭐?! 내가 지금 꿈꾸나? 혹시나 싶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꼬집기도 해보고, 손으로 눈을 몇 번이고 비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대로다. 이게 아닌데…. 원래대로라면 이런 광경이 펼쳐져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박성훈과 수연이 붙어있는 채였어야 하고, 유리는 거기에 멋있게 뛰어 들어가서 수연을 저 동물의 손아귀로부터 구해줬어야 한다. 하지만 달리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유리는 몹시 당황했다. 별 일 없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면서도, 은근한 허탈감이 들기도 한다. 수연 앞에서 영웅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으니. 유리가 안도감과 허탈감이라는 전혀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무릎 꿇고 손들고 서 있던 남자가 유리쪽을 바라보더니 어? 라며 탄식을 내뱉는다. 그 탄식에 침대에 앉아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유리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키를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어색하게 던져진 유리의 미소를 받은 수연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앞에 앉은 남자가 스르르 팔을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자, 그걸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안 수연이 고개를 휙 돌려 남자를 째려본다. 기겁을 하며 다시 팔을 똑바로 펴는 남자를 동정하는 마음까지 생겨나려 하고 있다. 흠흠. 유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문을 조용히 닫았다.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후 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슬리퍼의 바닥이 방에 질질 끌리며 슥슥 거리는 소리를 낸다. 유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 텐데도 수연은 여전히 하이힐을 손에 꼭 쥔 채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항상 차분히 가라앉았던 결 좋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온 채로 엉망진창이고, 다림질이 잘 되어있어서 날이 세워져 있던 하얀 셔츠는 구겨져 있다. 입고 있는 짙은 와인색의 치마는 수연이 대충 앉았던 탓인지 허벅지의 반 정도까지 제멋대로 올라가 있다. 유리는 침대 시트를 끌어당겨 수연의 허벅지를 대충 덮어주고, 수연의 옆에 털썩 앉았다. 하이힐을 잡고 있는 수연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 같은데, 표정은 짐짓 평온한 척 하는 게 눈에 다 보인다. 하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하이힐을 세게 잡아 수연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유리 역시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은 느낌에 숨조차 쉬기 불편하니까. 공기가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또다시 거칠게 뜀박질을 시작한다. 옆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유리는 그 동안 자신의 몸과 머리가 수연을 그리워했다는 걸 알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아주 은근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성훈의 얼굴이 보인다. 유리는 몸 뒤쪽에 손을 짚고, 살짝 몸을 뒤로 기댄 다음 마치 혼잣말처럼 - 라지만 수연이 듣게 - 말했다. “빈 방인 줄 알고 왔는데…. 절대 정수연 찾아온 거 아닌데…. 정수연이 있네, 뭔 일이여 이게….” 그 말을 들은 성훈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수연이 눈을 부릅뜬다. 몸을 일으키려던 남자가 다시 곱게 자세를 잡고 들고 있는 팔에 힘을 준다. 수연은 유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이힐의 굽으로 남자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야, 솔직히 말해. 말이 돼? 내가 이래 뵈도 주당이란 소리 듣고 사는데 고작 와인 때문에 정신을 잃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 소주보다 도수도 훨씬 약한데. 뭐 탔지? 뭐 탄 거 맞지?” “진짜 아니라니까요!! 악!” “야, 눈 내리 깔아.” 아니라고 고개를 쳐들고 소리 지르는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수연 이였지만, 눈을 내리깔라고 말한 건 유리였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통증과 심장을 후벼 파는 차가운 말. 한꺼번에 두 번의 공격을 받은 남자는 다시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리는 흘끔 자신의 옆에 앉은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흘끔 스킬을 쓰는 건 수연역시 마찬가지. 덕택에 둘은 곁눈질하다가 서로 시선이 마주쳐버렸다. 놀란 수연이 괜히 앞에 앉은 남자의 볼을 하이힐의 굽으로 쿡쿡 찌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빨개진 귓불이 보였다. 유리는 슬그머니 웃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내가 왜 정신을 잃어?!” “아씨! 그거 포트와인이에요. 포트와인 몰라요?!” “내가 그딴 거 알게 뭐야.” “강화 와인 중 하나잖아요. 와인이 원래 도수가 엄청 약하긴 하지만 그건 일부러 도수 높인 거라구요. 소주랑 거의 비슷해요. 그런데 그걸 혼자서 거의 세병 다 마셨잖아요!!! 안 쓰러지고 배겨요?! 거기다 금요일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면서요. 컨디션도 거지에 소주랑 도수 같은 걸 그렇게 마셨으니 당연히 취해서 정신 잃죠!!!” “내, 내가 언제 잠을 제대로 못 잤데?” 잠을 못 잤다는 말에 수연이 당황하며 유리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괜히 남자에게 화를 낸다. 아, 금요일부터 잠을 못 잤구나. 와, 나랑 싸우고 나서 잠을 못 잔거야? 분위기가 험악한 탓에 애써 표정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얼굴에 떠오르는 능글맞음은 지울 수가 없다. 수연은 이젠 귓볼뿐만 아니라 목 부분도 빨개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얼굴도 빨개질 것 같다. “아 그랬잖아요!! 진짜!!!! 정신 못 차리시길래 여기 데리고 온 거라구요!! 뺨 때려도 일어나지도 않더만 여기 와서 정신을 차릴 건 또 뭐냐구요. 정신 차릴 거면 좀 일찍 차리던가요! 잠 못 잤다고 하더니, 취한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존 거 아니에요?!” “허, 이게 그래도 계속 눈 부릅뜨고 대드네? 야, 그럼 너 왜 팬티 바람이야? 내가 정신 못 차려서 데려다 준 거라면, 왜 오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지랄이냐고. 그리고 너 우리 집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잖아?! 근데 왜 호텔로 데리고 와? 게다가 모텔이나 이런 데도 아니고 웬 스위트룸? 넌 돈이 남아도니?” “……그건.” “뭔데?” “…….” “이것 봐.” “……그게…. 솔직히 말해서요. 아니, 여자가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그걸 그냥 넘어갈 남자가….” “그래서.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너, 거기 한 번 더 차여볼래? 두 번 차였으니 세 번 채우는 거 어때?” “아,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아니구요!!” 황급히 말하며 들었던 팔로 재빨리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남자의 태도에 유리는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 댔더니 앞에 앉은 남자의 표정이 가관이다. 유리의 웃음소리에 옆에 있던 수연의 어깨가 들썩인다. 유리는 황급히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멈추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나가.” “……?” “나가라고. 나 이 여자랑 할 말 있으니까.” “…….” 유리의 말에 남자가 흘끔 수연을 올려다본다. 수연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우물쭈물 거리는 남자에게 얼른 안 나가면 이 여자가 또 때릴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자 그제야 슬금슬금 몸을 일으킨다. 몸을 다 일으킬 때까지 수연이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지금이 정말 기회라고 생각한 듯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들어 주워 입기 시작했다. 유리는 잘 잡힌 근육덩어리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야, 밖에 나가서 입어. …뭐? 밖에 나가서 입으라고. 아니, 그건 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남자가 기겁을 하더니 결국 옷을 든 채로 현관 쪽으로 내달렸다. 급하게 신발을 신고 팬티 바람으로 문을 열고 남자가 나가자 방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뜨겁게 뛰어대던 심장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오히려 남자가 나가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정리가 다 되자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이러다가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유리는 무릎 위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곁눈질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하이힐은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깔고 있다. 남자를 향해 기세 좋게 고함을 지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유리는 흘끔흘끔 수연을 바라보다 또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가 겁도 없이 남자 앞에서 술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말이야….” “…….” “겁도 없어, 진짜. 선생이란 작자가 생활이 바르지가 못해.” “와인도 술이니?” “와인도 알코올 음료거든요? 정 선생님.” 그제야 입을 여는 수연의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려 있다. 3일 만에 만났는데 또 시비야, 멍청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수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더 반박할 줄 알고 기대했던 유리는 수연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그 뒤에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거기다 멍청이라니. 수연이 유리를 부를 때 사용하던 개싸가지라든가, 개새끼라든가, 병신 등과 같은 각종 호칭보다 왠지 낯간지러운 표현이다. 유리야, 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보다 더 강하게 여운을 남기는 멍청이란 단어와, 그 단어를 듣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괜히 쑥스럽다. 분명 3일 전에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는데 갑자기 서로 내외하려고 하니 온 몸이 근질거린다. 손바닥에 또 땀이 난다. 오늘 여러 번 땀나네. 그렇게 생각하며 바지에 슥슥 손을 문질렀다. 유리의 그런 손길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수연이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왜 왔어?” “…그냥.” “어떻게 알고 온 건데?” “…그냥.” “넌 그냥이란 말 밖에 몰라?” “…….” 그러게, 난 그냥이란 말 밖에 모르나. 역시 들어오기 전에 좀 생각하고 올 걸 그랬어. 늦게 들어와도 됐었을 텐데. 수연이 허리가 좀 아팠던 모양인지 약간 굽혀 있는 등을 곧추세운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유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수연의 다리를 가리고 있던 시트가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살 위를 시트가 스치는 소리에 얼떨결에 수연의 허벅지 쪽을 바라보던 유리는,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가는 시트의 끝에 살짝살짝 보이는 살결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시여. 미치겄네. 얘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유리는 황급히 내려가는 시트를 잡았다. 그리고 아예 수연의 허리에 시트를 칭칭 동여맸다. 이 상황에서 이런 건 그다지 옳지 못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손길에 수연이 인상을 확 찌푸린다. “…….” “…….” 허리에 시트를 감는 유리의 돌발행동 덕택에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 안에 냉랭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 문득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에어컨도 켜져 있는 상태. 이렇게 조용하니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소리가 들렸을 법도 한데 미처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귓속에서 쿵쾅쿵쾅 대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놈의 침묵이 이렇게 낯 간지러운 건지, 유리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고백컨대 첫 경험을 했던 그 순간에도 상대방과의 사이에 이렇게 어색하고 쑥스럽고 어딘가가 근질근질한 침묵은 없었다. 끙. 유리는 얕은 신음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다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이번엔 수연이 몸을 움찔거렸다. 손가락으로 툭툭 팔을 치며 고민에 빠졌다. 이 여자와 할 말이 있으니 나가라고 남자를 내쫓은 건 유리 자신이라 아무래도 먼저 그 말을 꺼내야 할 것 같다. 그 말. 유리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미, 미, 미…. 하아.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이 끝까지 안에서 나오는 걸 거부하며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까진 자존심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미 여자를 집에 혼자 두고 뛰쳐나왔던 순간에 다 버려버린 줄 알았던 그 놈의 자존심. 유리는 성질이 났다. 대체 그딴 게 뭐 길래 두뇌의 명령조차 몸이 거부를 하고 있는 건지.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맞은편의 하얀색 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존심 때문에 결국 이 상황까지 왔다. 자존심을 세우지만 않았더라면 애초에 처음부터 그렇게 싸우지도 않았을 테고, 조금만 더 배려심을 가졌더라면 수연이 그렇게 악에 바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진 않았을 게다. 아직 3일 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정신을 덜 차렸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금까지도 붙잡고 있는 걸 보면.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 좋아하는 잠을 잘 못 잤다는 수연과는 달리 유리는 제법 잠도 잘 잤고 - 물론 끝없는 악몽에 시달려야 하긴 했지만 - 밥도 잘 챙겨 먹었고 거기다 여자까지 만나지 않았던가. 유리는 팔짱을 풀고 버럭 욕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물론 수연은 그걸 본인에게 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에이 씨발.” “어디서 욕을 하고 지랄이야.” 아니나 다를까. 유리가 욕을 하자마자 수연이 가늘게 눈을 뜨며 살벌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순간 침을 한번 꿀꺽 삼킨 유리는 다리 한 쪽을 침대위에 얹은 후, 몸을 아예 수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손으로 덥석 수연의 양 어깨를 잡은 채로 몸을 돌렸다. 뭐, 뭐야? 당황한 수연이 유리의 손을 떼려고 하자 유리가 더욱더 어깨를 꽉 잡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뭐?” “내가 잘못했다고.” “…….” “너도 잘못했다고 해, 얼른.” “…….” “얼른!!!” “그래, 나도 잘못했어. 미안.” 너무나도 쉽게 사과의 말을 내뱉는 바람에 또 할 말을 잃었다. 수연이 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유리의 머릿속에 예전에 언젠가 보았던 한 바나나 광고의 CM 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언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 하, 이건 슬픈 눈도 아니잖아. 왜 갑자기 그 노래가 떠오르는 거지. 이젠 별 생각이 다 든다. 미쳐가고 있는 건가. 유리는 순간 아주 심각하게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해 걱정을 했다. “…….” “……사과하라며?.” “…어, 그래.” “…….”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내리고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렸다. 유리가 몸을 앞으로 돌리자 유리의 손에 의해 몸이 틀어졌던 수연 역시 스윽 몸을 앞으로 돌렸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리와 수연이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 침묵은 대체 언제쯤 완전히 사라질까. 3일이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긴 시간이긴 한 모양이다. 고작 3일 만에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가 묘하게 바뀌어버렸다. 답답한 공기에 유리가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아 뭐, 좀 말 좀 해봐?! 너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잖아?” “너야말로 무슨 말 좀 해보지? 그렇게 능글맞게 잘 하더만.” 그렇게 말하고 또 뚝. 오늘 대화 여러 번 끊기네.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으로 얼굴을 한번 스윽 문질렀다. 피부가 까칠하다. 잘못했다고 사과는 했다. 그리고 자신도 잘못했다는 말도 들었다, 비록 억지로 들었긴 했지만.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다음 단계. 그런데, 다음 단계가 뭐지? 유리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서 뛰쳐나온 그 순간부터, 며칠 전에 있던 일에 대한 사과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집을 뛰쳐나온 것은 아니다. 본래의 목적은 결국 그 일에 대한 사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본래는 3일 전에 하려고 했던 말. 3일 전보다 더 오래 전 부터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 그 말을 하려고 왔는데, 예상대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진심이 담긴 말, 을 강조하며 말했던 미영이 생각났다. 태연이 미영에게 고백을 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입 안이 말라 와서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이제야 친구의 입장이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있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바지 옷자락을 슬쩍 꼬집었다. “…졌어.” “뭐?” “김희진이랑 헤어졌다고.” “…….” “사실 그날, 마지막 이였어. 그 날 헤어지려고 했었는데…. 별 거지같은 상황이….” “…….” “헤어졌다고.” “그래.” “헤어졌다니까?” “알았다고. 나 귓구멍 안 막혔거든?” “…….” “…….” “……하, 정말.” “…….” “…미치겠네.” 왜 이러냐, 권유리. 그냥 말해. 말 하란 말이야.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한편으론 말도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과도할 정도의 온갖 느끼한 말은 죄다 다 뱉어낼 땐 언제고 고작 그 몇 마디 안 되는 말을 하지 못해 이렇게 빙빙 돌려대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 꼴볼견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에 웬 순정드라마를 찍고 있나 싶기도 하고. 유리가 못난 자신을 탓하고 있는 동안, 묵묵히 있던 수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헤어진 거야?” “뭐?” “김희진이랑 왜 헤어진 거냐고 물었어.” “그걸 꼭 말해야 알아?” “어.” 아씨. 너 때문에 헤어졌어, 라는 말을 지금 나보고 하라는 거야? 유리의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힌다. 입안이 바짝바짝 또 마른다. 입안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말라가는 느낌이 든다. 수분이 필요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물 마시러 일어설 수도 없겠지. 뒷목이 조금 뻐근한 것 같아서 손으로 목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에 눈을 살짝 치켜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는 유리의 모습이 갑갑했던 건지, 아니면 이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모양인지 갑자기 수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목을 주물럭거렸던 손길을 멈췄다. 유리는 수연의 몸을 시선으로 죽 훑어가다가 종국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입술이 살짝 움직인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아마도 욕인 것 같다-라고 유리는 생각했다. 자신이 몸을 일으켰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는 유리의 태도에,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수연은 주위를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한 쪽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핸드백을 발견하고 그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유리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놀란 유리가 몸을 벌떡 일으켜 앞서 나가는 수연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어, 어, 어디가?” “집.”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아예 할 말이 없는 거 아니고?” “아니야.” “아, 됐어. 시간 질질 끄는 것도 짜증나고. 집에 가서 얼른 돈도 부쳐줄게.” 손을 앞뒤로 흔들어 유리의 손을 쉽게 뿌리친 수연이 한번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간다. 바닥을 꾹꾹 눌러 밟는 저 작은 발이 마치 자신의 머리를 지근지근 밟고 있는 듯 한 착각도 든다. 안 돼. 내가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엄청 뛰어왔단 말이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 아, 빌어먹을. “그래!! 너 때문에 헤어졌어. 너 때문에 헤어졌다고.” 주먹을 꼭 쥐어 몸 옆에 바싹 붙이고, 눈을 질끈 감은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닥 거리던 발걸음 소리가 뚝 멈춘다. 끝내 터지지 않을 것 같던 말들이 결국 터져 나왔다. 유리는 될 대로 되라 란 생각으로 생각이 나는 대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정수연 너 때문에, 진짜 너 때문에 헤어졌어!!! 됐어?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어?” “…….” “그래! 썅, 기왕 밝히는 거 다 밝히자. 아까 팬티 바람으로 네 앞에서 손들고 있던 그놈 나랑 아는 놈이거든? 근데 그 놈 질이 엄청 나빠. 그런 놈이랑 네가 맞선을 본다는데. 아니 내가, 정말 신경 안 쓸려고 했거든? 근데 자꾸 그 놈이랑 앉아있던 네가 생각나서…! 악!! 그래!! 너 걱정돼서 왔어!! 네가 너무 걱정돼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 뛰어왔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다…!” “…….” “아니, 근데 너 대체 뭐하는 여자야? 오랜만에 멋있는 척 좀 할려고 했더니 들어와 보니까 게임 셋. 참내, 내가 독한 여잔 거 알았지만 이 정도로 독한 여자일 줄은 몰랐네. 나도 참…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 에이, 씨발. 드디어 말했다. 하, 정말.” “…….” “여튼! 알아들었어? 내가 너 좋아해. 정수연, 내가 너 좋아한다고. 그래서 김희진이랑도 헤어진 거고, 그래서 너 구하러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내기 따윈 애초에 상관도 없었다고. 내가 꼭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는 거야?! 너도 눈치 챘을 거 아냐. 솔직히 말해 봐. 눈치 챘지? 챘지?! 챘는데 나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진짜 그 동안 얼마나…!” “…풉.” 결국 터졌다. 유리가 마치 이제 막 말문이 터진 영아처럼 정신없이 말을 횡설수설 내뱉자, 수연은 끝끝내 눌러 참았던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유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작은 얼굴은 정말 참기 힘들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웃음을 참고 있다. 그런데도 입술 사이에서 계속 새어나오는 웃음소리가 유리의 머리를 띵하게 만든다. 얼굴에 열이 확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더니 너무 뜨거워서 피부가 녹을 지경이다. “…허…. 너 지금 웃….” “킥킥.” 꺄르르 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배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리의 손목을 잡은 채로 몸을 숙여가며 킥킥 웃어댄다. 얼굴의 표면온도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아씨, 뭐야. 유리는 수연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웃지 마. 웃지 마란 말이야. 웃지 마, 정수연 웃지 마!” “야, 웃긴데 어떻게 안 웃어? 어머, 얼굴 빨개진 거 봐.” “아 쫌! 웃지 마!!” 쪽팔려, 그만 웃어. 제발, 그만 웃어줘 수연아.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수연은 웃음을 그칠 줄을 모른다. 내가 웃는 게 싫으면 네가 말을 그만해. 네가 자꾸 말하니까 웃기잖아. 잔뜩 웃으면서 말하느라 발음도 뭉개진 주제에 그래도 제법 명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수연의 목소리가 그 와중에도 듣기 좋아서, 유리의 얼굴이 더욱더 빨개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수연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야 겨우 웃음을 그쳤다. 손가락으로 눈가에 묻은 눈물을 훔치며 그래도 남아있는 웃음의 여운에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는 수연의 표정을 보며 유리가 분하다는 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걱정돼서 왔더니 진짜. 실컷 비웃음이나 당하고. 아, 정말.” 그 중얼거림에 수연이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수연이 짓는 그 미소를 보고 유리도 결국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확실히 이 미소가 가장 예쁘다. 다른 사람을 보며 짓는 미소보다,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미소가 가장 아름답다. 수연이 유리의 손을 잡은 채로 유리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터덜터덜 끌려가던 유리의 눈앞에, 수연이 침대에 먼저 걸터앉더니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여기서 앉으면 내가 진짜 지는 거야. 한 번 튕기자. 머리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앉은 후였다. 이 하찮은 몸뚱아리 같으니. 진짜 줏대도 없네. 그리고, 유리가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연이 스르르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달콤한 향취가 머리를 아찔하게 만든다. ……그래도 잘했어. 불과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몸을 하찮다느니 어쩐다느니 폄하했다가 금세 다시 칭찬을 하던 유리는, 이미 스스로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수연이 손을 움직여 어정쩡하게 침대를 짚고 있는 유리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주먹을 살짝 쥐고 있는 유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피며 말했다. “네가 큰마음 먹고 이야기 해줬으니까,” “어?” “나도 큰마음 먹고 하나 이야기 해줄게.” “…….” “보고 싶었어, 너.” “…….” “이상하지? 우린 항상 만나면 욕하고, 서로 싸우고, 헐뜯느라 정신도 없는 사이잖아. 첫 시작도 싸움으로 시작해서, 마지막도 싸움으로 끝났고.” “…….” “근데 보고 싶었어. 심심하기도 하고. 매일 날 보며 핏대를 세우던 네 얼굴이 안 보이니까.” “…….” “보고 싶었어.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 “그래서 말인데, 유리야.” 그렇게 말하더니 수연이 조금 불안한 듯 자신이 직접 다 펴놓은 유리의 손가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손톱 끝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엄지로 유리의 검지 끝을 살살 문질러 보기도 하고, 손을 잡고 빙글 돌려 손등 위를 한번 보기도 하고. 말없이 계속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는 수연의 손길에 유리는 슬며시 웃었다. 수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그 말이 대체 어떤 말이길래 이렇게 말을 끝내지 못하고 애꿎은 손만 만지고 있는 건지는 그 손길 하나하나에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이제 우리” “사귀는 거야.” 수연이 겨우 말을 이어나가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유리의 그 말에 수연이 놀랬는지 어깨에 기대던 얼굴을 들고 유리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깊게 박혀 들어가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반가웠다. 그 동안 이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화장실 거울에 비춰지는 얼굴도 아니고, 차 안의 백미러나 사이드 미러를 확인할 때 보던 얼굴도 아닌, 바로 이 눈동자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한 달. 한 달 동안 옆에 붙어 있었던 여자가 이렇게 따뜻한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도 채 못 되었을 때 이미 알아버렸지만, 이제야 겨우 그 마음을 전달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달 전에 피자를 뒤집어 쓴 채로 각서를 썼던 그 손으로 지금은 여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인생사새옹지마. 사랑하는 아우디가 두 번이나 크나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 덕택에 여자를 손에 넣었다. “어?” “사귀는 거라고.” “…….” “그 말하려고 했던 거 아냐?” “맞아.” “그래, 그러니까 사귀는 거야. 지금부터.” “…우리 조금 웃기다.” “응?”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잖아, 한 달 전에는.” “아, 그렇지.” “…내가 그 개싸가지를 좋아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쑥스럽게 빙긋 웃는다. 와, 정수연이 이렇게 웃기도 하네? 유리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수연이 자신의 볼을 감싸 쥐고 있는 유리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와, 권유리가 이렇게 웃기도 하네? 하지만 난 그 전부터 생각했는걸, 정수연 저렇게도 웃는구나, 라고. 어? 나도 그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뭐야, 근데 왜 말 안했어? 그러는 너야 말로 왜 말 안했는데? 그냥 자존심 상해서. 나도 그랬어. 뭐야, 그게. 그러게, 우리 뭐니. 온 몸에 긴장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수연의 볼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떼고 양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읏차. 요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펴던 유리가 그대로 몸을 뒤로 기울여 털썩 침대 위에 누웠다. 앉아있는 작은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치마에서 살짝 삐져나온 셔츠가 귀엽다. 뒷모습이 이렇게 사랑스러웠구나. 와, 나 벌써 팔불출 됐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입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간다. 왠지 굉장히 쑥스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이상한 자신의 모습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래저래 여러 가지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단 하나, 지금 이 감정이 그리 썩 기분 나쁜 감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연이 살짝 몸을 뒤로 돌리고, 이제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 근데 아우디 수리비는?” “수리비?” “응. 뭐, 그래도 그거 내가 주기로 했으니까 일단 주기야 줄게.” “안 줘도 돼.” “응?” “대신에,” “……?”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앉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연의 두 볼을 다시 감싸 쥐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여러 번 깜빡 거리는 얼굴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래.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유리는 생각했다. 알게 된지 오늘이 한 달 짼데 가장 중요한 걸 안했잖아. 작은 얼굴을 살짝 앞으로 끌어당기고,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놀래서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보인다. 천천히 다가가다가, 숨결이 닿는 그 곳에 잠깐 멈춰 서서 시선을 한번 마주치고, 스르르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걸로 대신 할게.” 야. 응? 너 지금 손이 어디 가 있는 거니? …어, 어머나. 난 몰랐네? …….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떼. 응? 떼라고. 아니, 그게. 안 떼? 수연아, 내 말 좀 들어봐.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호텔이야 호텔. 거기다 우리 사귀기로 했잖아? 이 야심한 밤에, 사귀는 사람 둘이 침대에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는데, 나의 이런 손길은 아주 극히 자연스러운…. 떼라고. 어우야…. 안 떼? 손목 잘라버리기 전에 떼. ……. * * * 계절은 몇 번을 돌고 돌았다. 올해에도 찾아온 무더운 여름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뜨겁게 타오르다 결국 여유롭게 찾아온 가을에 자리를 내주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매도 길어졌고 환절기 감기에 걸린 듯 기침을 콜록 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주현 역시 마찬가지로 어제 여름옷의 정리를 다 끝내고, 오늘 처음으로 가을 옷을 꺼내어 입었다. 스무 살. 한참 좋을 나이에 찾아온 올해의 가을은 유난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열어놓은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가을바람, 도로의 저 끝,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시리도록 푸르고 높은 하늘,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등, 주위의 모든 것들이 전부다 이제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다만, 지금 현재 자신의 옆과 뒤에 앉아서 한 겨울을 방불케 하는 냉기를 뿜어대고 있는 두 여자만 빼고. 아까부터 계속 차 안에는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가 가득하다. 주현은 그 것 때문에 지금 자꾸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꾹 눌러 참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욕을 하게 되면 무사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입을 꾹 다물고 참아 온 게 벌써 어언 30분. 자신의 옆 자리에 앉은 사촌언니는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왜 도로에 나와 있는지 그 이유조차 잊어버린 듯 했다. 뒤쪽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던 핸드폰 벨소리는 뚝 끊겼다. 주현은 흘끔 백미러를 통해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과거 담임선생님의 얼굴도 확인했다. 사촌언니와 가장 절친한 친구 사이라 담임선생님이 되기 전 부터 언니 동생 하던 사이였으니, 졸업하고 난 지금도 종종 얼굴을 보곤 하는데, 사실 오늘 만나게 된 건 의도한 게 아니었다. 주현은 몇 분 전에 자신의 차에 올라타던 미영의 험상궂은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때보단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역시 무서운 건 매한가지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온 몸에 한기가 으슬으슬 든다. 주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스무 살이 되어 주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님이 주신 재수학원 등록비로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중에 주현이 기능시험까지 합격하고 난 다음에야 재수학원에 가 있어야할 주현이 운전면허 학원에 가 있다는 걸 아시게 되셨다. 이미 포기한 모양인지, 아니면 스무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철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주현의 모습에 기가 막히셨던 건지 이상하게 혼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차라는 건 잘못타면 흉기도 될 수 있으니 기왕 배우는 거면 확실히 배우라는 말만 하실 뿐. 기능시험은 물론이고 주행시험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운전면허증을 손에 쥔 후 오늘 처음으로 시내 주행을 나왔다. 첫 시내 주행은 운전유경험자가 따라다녀야 한다는 부모님의 엄명에 의해 수연이 보호자로 따라붙었다. 그래서 오늘 부모님의 허락 하에 부모님의 차를 끌고 나가려고 아침에 나오던 주현에게 수연이, 차 끌고 오지 말고 그냥 집으로 오라는 말만 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화기 저 너머의 수연의 목소리가 왠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여서 결국 집안의 전용기사에게 부탁해 수연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까지 갔다. 수연은 주현을 보자마자 갑자기 처음 보는 차키를 덜컥 손에 쥐어주고 주차장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보이던 아우디 A6. 이거 언니 차 아니잖아, 유리 언니 차 아냐? 이거 허락 맡은 거야? 어리둥절해 하는 주현을 억지로 운전석에 밀어 넣고 수연이 조수석에 올라타려는 순간,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입술이 앞으로 쭉 나온 미영이 뒷좌석에 서둘러 탔다. 언니는 왜 타? 주현이 그렇게 물었는데 미영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에 탄 후로 수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내주행을 도와주러 나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입 하나 뻥끗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미영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말이 많은 사람이라서, 처음에 미영이 차에 올라탔을 때에는 안 그래도 첫 시내주행이라 집중도 안 되고 어버버 거릴 텐데 저 언니도 같이 있으면 더 심하겠다,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미영은 차에 올라타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말 없는 황미영을 본 건 학교 다닐 때 시험 감독으로 들어 온 모습을 본 이후로 처음이다. 입을 굳게 다문 두 여자 대신에, 그 여자들이 들고 있던 핸드백 안의 핸드폰은 차에 타자마자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첫 시작은 미영의 핸드폰 이였다. 처음엔 그저 잘못 걸려온 전화라서 안 받나 싶었다. 그리고 미영의 핸드폰이 뚝 끊기자마자 이번엔 수연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수연 역시 왜인지 받지 않았다. 이상한 우연에 주현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순간, 미영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미영은 받지 않았고, 벨소리가 끊기자마자 수연의 핸드폰에도 요란하게 벨이 울려댔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전화가 울리는 걸 몇 번 경험한 주현은 그제야 이 두 사람이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주현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다. 그 말에 한동안 뜸을 들이던 수연이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제 밤에 유리와 태연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로 했단다. 과거에 놀던 사람들과 과거를 추억할 겸 함께 마시기로 했다던데, 수연의 말에 따르면 그 과거에 놀던 사람들은 태연과 유리가 과거에 ‘추잡한 짓’- 라고 수연은 표현했다. - 을 하고 다녔을 때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이라던데, 그 중에는 유리와 태연이 과거에 아주 잠깐 만났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고. 그래도 본인들이 지금은 정말 친구사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데다가, 헤어진 사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니 파토내기 싫어서 다녀오라고 허락을 했단다. 대신 외박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도 하고. 하지만 일찍 들어오겠다고 능글맞게 웃으며 집을 나섰던 유리와 태연이 12시가 넘어 새벽이 될 때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화를 해도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성질난 미영이 유리와 수연이 함께 살고 있는 오피스텔까지 와서 둘이 같이 소파에 앉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렸는데 결국 둘은 외박.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유리를 본 수연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미영을 데리고 집을 나와서 주현을 만난 것이다. 그럼, 이 아우디도 유리언니한테 말도 안하고 끌고 온 거야? 어. 아니, 그래도 언니 차도 아닌데…. 걔 껀 내 꺼야. 가져와도 돼. 그럼 언니 꺼는? 내 껀 내 꺼지. 명쾌하고 단호한 수연의 말에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요란하게 울려대던 핸드폰은 또 뚝 끊겼다. 하지만 주현은 이게 절대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번엔 유리 언니 타임이네. 주현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자동으로 수연의 핸드백에서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귓가를 때리는 이효리의 노랫소리에 주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버렸다. “아, 쫌!! 그것 좀 받아. 그 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운전을 못하겠잖아! 나 초보야, 초보라구. 이러다 사고 나면 언니들도 다쳐, 몰라?!” 주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수연이 결국 핸드백을 뒤져 핸드폰을 꺼낸다. 화면 위에 뜬 우리자기♡ - 이 건 유리가 직접 바꾼 것이다. - 라는 글씨를 노려보던 수연이 이내 전화를 받는다. 다급한 유리의 목소리가 옆에 앉아있는 주현에게까지 들린다. “뭐?!” -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수연아, 그러니까 한번만…. 저기 수연 씨, 미영이 좀 바꿔…. 야! 네 핸드폰으로 네가 전화해, 옆에서 끼어들지 말고! 얘가 안 받는 걸 어떻게 해?! 그건 너 알아서 할 일이고. 아, 여튼 수연아…. 내가 죽을죄를 졌어. 아니, 진짜로 내가 외박하고 싶어서 외박한 게 아니라…. 아니야. 변명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그냥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일단 집으로 와. 집에서 이야기 하자. 응? 수연아아아아아아아아. “아, 시끄러워. 어디서 자꾸 개가 짖나…….” - 수연아. 수연님. 수연 씨? 정수연. 여보. 자기야. 아아악! 제발, 제발…. 내가 다 잘못했…. 무심한 표정으로 수연이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닫았다. 처절한 유리의 비명도 그와 함께 뚝 끊겨졌다. 주현은 울상을 지으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을 유리의 표정을 상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에는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 말을 수연에게 들은 게 아니라 자신과 어울려 놀던 언니와 오빠들을 통해 들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사람, 이야기를 하다가 유리 이야기가 나와서 아, 그 사람 아는 사람하고 사겨, 라고 말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소문이 진짜냐고 물었었다. 하도 화려하게 놀던 사람이라 그런 소문이 나돌아도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나. 물론 소문이라는 게 과장된 면도 있으니, 그 사람들 입에서 나온 유리는 좀 많이 터무니없긴 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남의 입을 통해 들을 정도면 꽤나 과거가 화려했던 모양인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쯧쯧,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주현은 혀를 끌끌 차다가 다시 들려오는 벨 소리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당연히 미영의 핸드폰이 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수연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 아무래도 수연이 한 번 받았던 탓에 이쪽으로 거는 게 더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수연은, 이번에는 핸드폰을 꺼내 아예 배터리를 뚝 빼버렸다. 주현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화 풀어주지 그래?” “안 돼.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이번엔 확실히 고쳐버리고 말겠어.” “아…유리 언니 불쌍해.” “뭐야?!” 손을 번쩍 들며 수연이 말을 하자 주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운전이나 해.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지 말고. 쪼끄만 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뒤에 앉아있던 미영이 빠르게 주현의 이름을 불렀다. 야, 서주현! 빨간 불이잖아!! 그 말에 놀란 주현이 고개를 황급히 돌려 앞 쪽에 있는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빨간불이다. 주현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하게 속도를 줄여나간다. 안 돼!! 처음부터 사고 낼 순 없다!! 발끝에 온갖 힘을 다 주며 눌렀더니 겨우 정지선 앞에 멈춰 섰다. 으아, 살았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난다. 옆에 앉아있던 수연 역시 놀랐는지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잡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번쩍 들고 주현을 향해 소리쳤다. 야, 너 운전 똑바로…! 꺄악. 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둔탁한 충격이 가해졌다. 수연의 손을 피하기 위해 눈치를 보던 주현은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 핸들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했다. 뒤에 앉아있던 미영 역시 조수석에 얼굴을 부딪치고 아프다고 궁시렁 댄다. 아씨, 뭐야?!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 이마를 손으로 막은 후 백미러를 통해 뒤차를 바라보았다. 짙은 파란색의 sm3 차의 앞범퍼와 아우디의 뒷범퍼가 사이좋게 맞닿아 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자도 핸들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인지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서서히 고개를 드는 얼굴이 보인다. 백미러를 통해 그 여자의 얼굴을 보는 주현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거 권유리 찬데.” “…….” “잘 됐네.” …아무리 내 사촌언니지만 무서워. 잘됐다고 중얼거리는 수연을 내버려두고, 안전벨트를 푼 후 밖으로 나왔다. 뒷목을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운전사라면 남녀불문하고 차 사고만 나면 뒷목을 잡고 나오는 게 필수라지 않는가. 게다가 한번쯤은 이런 것도 해보고 싶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따사롭다. 선선한 바람이 주현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차가 얼마나 손상이 되었는지부터 확인해야하지만, 주현은 아우디의 뒷범퍼는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 뒤에 있는 차의 운전석 쪽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갈 때마다 자신의 몸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이 느껴진다. 주현은 일부러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운전석에 가까이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창이 스르르 열린다. 주현은 차 지붕에 손을 짚고 살짝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길이의 머리에, 날이 바짝 서 있는 정장과 셔츠를 입고 있는 여자가 안에 앉아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너무나도 하얗다 못해 이게 사람의 피부인가 싶을 정도로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여자. 주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른다. 예쁘네?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 쪽이 급정거를 하셨다고 해도 차간거리를 제가 지켰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제 불찰이네요.”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며 주현을 올려다본다. 죄송합니다, 란 말을 빼놓고 뒤에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목소리도 제법 들을 만하다. 주현이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자 여자는 조수석에 올려둔 핸드백에 손을 뻗어 뒤적거리다가 이내 불쑥 무언가를 꺼낸다. 손에 쥐어진 작은 명함 크기의 지갑. 여자는 그 지갑을 열어 자신의 명함인 듯 한 하얀색 종이를 꺼내어 주현에게 내밀었다. 손가락 두개 사이에 껴져 있는 종이를 받아들어 그 위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었다. 회사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회사인 것 같더니 유리가 다니는 회사에, 부서까지 유리와 똑같다. 그리고 그 밑에 적혀 있는 임윤아 라는 세 글자. 임윤아. 아, 이름이 임윤아구나? 주현은 명함을 받아들고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차 쪽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눈에 들어온다. 주현은 문득 오래 전에 유리, 수연과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말 많고 탈 많던 길고 긴 연애 스토리의 첫 시작. 수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주현은 다시 고개를 숙여 운전석 안쪽을 바라보았다. 꺼내었던 명함지갑을 다시 핸드백에 넣고 있는 여자를 불렀다. “저기요.” “그 쪽으로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제가 보험회사에 연락 해 놓겠습니다.” “저기요오.” “그럼 그 쪽과 일을 처리 하시면 될 겁니다.” “저기요오오오오.”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자신의 할 말만 재빨리 하던 여자가 그제야 주현의 말에 집중을 하고 주현을 올려다본다. 깜빡 거리고 있는 눈꺼풀에 가녀리게 달려 있는 속눈썹이 참 길고 예쁘다. 그러고 보니 유리에게 들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 친한 후배가 있는데, 걔가 얼굴은 반반한데 앞뒤 꽉 막혀서 재미가 없다고. 연애라도 하면 사람이 좀 유들유들 해질 것 같은데, 혹시 주위에 소개시켜줄 만한 남자 없었냐고 했던, 그 사람. 그 때 그 사람의 이름은 들어보진 않았지만 주현은 직감적으로 그 여자가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유리에게 그 말을 듣고 주위에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 물색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다시 생각을 고쳐먹기로 결정했다. 꽃다운 스무 살. 한참 좋은 나이라 연애를 하고 싶은데 끌리는 남자도, 여자도 없어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솔로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니, 마침 시기도 딱 적당하고 좋다. 가을은 연애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 “이런 사고 한두 번씩 나면 보험비만 늘잖아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저의 잘못이니 어쩔 수 없….” “그냥 보험처리 하지 말구요.” “네?” 이렇게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자를 남자에겐 주긴 아깝다. “저랑 내기 한 번 하실래요?”